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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 셰비언의 둥지 (35/62)

chapter 32. 셰비언의 둥지

「신화시대의 끝은 언제인가? 학계는 구체적인 시점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나, 이종족이 역사에서 퇴장한 시기가 신화시대의 끝이라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한다.」

얼음이 아무리 두껍게 얼었더라도 어느 정도의 투명감은 있기 마련이건만, 둥그런 돔 천장을 이루고 있는 얼음은 물감을 뿌려 굳힌 듯 희었다. 제각각 농담이 다른 흰색을 띤 얼음들이 제멋대로 겹쳐져 색을 더하고 뺀 광경은 마치 조각가가 공들여 조형한 조각품 같았다. 흰 얼음들 사이로 파고든 빛이 가느다란 실처럼 떨어져 천장 아래의 공동 내부를 비췄다.

브란젤의 웬만한 귀족 저택은 통째로 집어넣고도 남을 만큼 큰 공동 안에는 거대한 몸집의 용이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길쭉한 목과 등을 덮은 비늘은 공동의 얼음만큼이나 희었다. 셰비언이었다.

셰비언의 비늘은 불순물 없는 흰색이지만, 그의 뒷머리와 목에 난 갈기털은 은을 뽑아 만든 듯한 은색이었다. 오드리는 흰 케이프 코트를 뒤집어쓰고 그 멋진 은빛 갈기털 속에 파묻혀 잠든 상태였다. 눈이 멀도록 희고 흰 공간 가운데에서 초록색 머리칼과 가무잡잡한 피부색이 확 도드라졌다.

얇은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짙고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번쩍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오드리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헉! 헉! 허억, 흐으…….”

오드리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악몽이라도 꾼 듯, 이마와 목이 땀투성이다. 발작적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흰 비늘에 찰싹 달라붙어 아주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호흡을 온몸으로 느끼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은 그냥 꿈이었다.

“음……. 아직도 분홍색이네.”

셰비언의 상처 부위를 덮은 비늘은 선명한 흰색이 아니라 반투명한 흰색이고, 그 아래로 불그스름한 색이 비쳤다. 비늘이 뜯어지고 깨져 엉망진창이었던 예전에 비하면 훨씬 낫긴 해도, 꾹 누르면 비늘 사이로 핏물이 배어나올 것만 같았다.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회복력을 자랑하는 셰비언이지만, 아무래도 같은 용에게 당한 상처는 경우가 다른 모양이었다. 이렇게 둥지에 틀어박혀 쿨쿨 잠을 자는데도 좀처럼 낫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사정이야 어쨌거나, 곤하게 자는 숨소리가 공동을 울리는 걸 듣고 있으니 또 스르르 잠이 쏟아졌다. 오드리는 갈기털 위에 떨어진 케이프 코트를 주워 주섬주섬 덮고 다시 셰비언의 품에 푹 쓰러졌다. 비늘로 덮인 몸이니만큼 딱딱해야 할 텐데, 셰비언이 오드리를 위해 내준 부분은 체온 따뜻한 털 짐승 부럽지 않게 아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오드리는 금세 다시 단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레이디 헨젤! 레이디 헨젤! 오드리 헨젤 아가씨!”

귀가 찢어져라 이름을 불러대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정말 잠들었을 것이다.

“밥은 먹고 자야죠!”

“……아, 정말이지.”

잠 속에서 억지로 끌려나온 오드리는 조금 짜증을 내며 눈을 떴다. 하지만 아이샤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자 나던 짜증도 푸시시 가라앉고 말았다. 만족감으로 가득 차 반짝반짝 빛나는 일상을 보내는 저 사람에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한참 전에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셰비언이 상처 치료를 위해 잠들어 있는 이 장소는 그의 둥지였다. 당연히 셰비언 성벽 안쪽에 마련된 곳이었고, 마력이 대단히 풍부하면서 마법망이 아주 안정된 장소였다.

셰비언은 자신의 치료는 물론이고 오드리의 마력 고갈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까지 여기에 데려다놓았다. 아이샤는 셰비언 성벽의 마력 밀집도를 견딜 수 있다는 이유로 오드리의 시중을 위해 딸려온 덤이었다. 귀한 마법사를 고작 시중인으로 쓴다하니 반발이 심했지만, 정작 본인은 이곳 생활에 대단히 만족했다.

아이샤의 표현으로는 이제까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안락함이 구현된 공간이란다. 마법사로서 천형처럼 여기고 살았던 두통과 갈증, 만성피로와 근육 통증 등이 전혀 없는 곳이라고. 마법을 쓰는 즉시 마력이 차오르는 느낌을 만끽하다 보면 돌아갈 날이 두려워질 지경이라나.

마법사가 아닌 오드리는 영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그저 브란젤에 있을 때엔 좀처럼 낫는 듯 나아지지 않던 건강이 급격히 회복되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긴 했다.

오드리는 마력 고갈이 그렇게 건강을 해치는 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법진에 마력을 때려 부을 때는 이만큼 남겼으면 괜찮을 거라고 여겼었는데, 그게 참 안이한 생각이었다는 걸 쓰러지고 나서야 알았다.

꼭 하델을 낳은 후의 밀리나처럼 온몸이 버석버석하게 말라갔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힘이 약해지고, 뭔가를 넘기는 것조차 힘들어 먹는 족족 토해내며 종일 침대에 파묻혀 지냈다. 잠도 어마어마하게 늘어서, 하루에 대여섯 시간 깨어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상태로 브란젤에서 닷새를 보냈다.

그 닷새 동안 오드리와 셰비언 사이에선 여태 없던 눈치싸움이 아주 치열했다. 서로의 몸 상태를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부상을 이용해 상대를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려는 시도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인간의 예의는 집어치우겠다던 셰비언이 대충 휘갈긴 보고서라도 올리고 담수저장고와 정화마법장치를 고친 일이나, 죽을 땐 죽더라도 지금 브란젤의 상황을 놓칠 수 없다며 버티던 오드리가 로렐라이와 가문의 살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셰비언의 둥지에 와 있는 게 그 눈치싸움의 결과물이었다.

어쨌건 덕분에 브란젤은 수도가 완전히 끊기는 최악의 상황을 피했고, 오드리는 마력이 풍부한 곳에서 요양하게 됐다. 셰비언의 둥지는 오드리의 마력 고갈을 빠른 속도로 회복시켰다. 무려 마법사를 시중인으로 끼고 지내는 요양 생활이 편안한가 하면 별로 그렇진 않았지만.

오드리는 아이샤가 차려놓은 식탁 앞에 앉아 쏟아지려는 한숨을 삼켰다. 소금에 절인 청어, 작게 조각낸 말린 육포, 뭐가 들었는지 생각하고 싶진 않은데 비린내가 물씬 나는 수프와 그 수프에 적셔 불려 먹어야 하는 마른 빵. 맛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뱃속에 넣어서 연료만 되면 되는 수준의 식사였다.

헨젤 백작에게서 냉대를 받았다지만 오드리는 기본적으로 넉넉한 고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귀족 영애였다. 같은 음식을 매일 먹는 것도 물리는데 메뉴까지 이 모양이니 식사가 즐거울 리가 없었다. 같은 메뉴로 고정된 지 벌써 몇 끼나 된 것 같은데 갈수록 성의도 없어졌다. 수프를 한 숟가락 뜨자 채 걸러지지 않은 생선비늘이 허옇게 번쩍거렸다.

오드리는 결국 스푼을 내려놓았지만, 아이샤는 오드리가 손을 뗀 것도 모르고 계속 수프 그릇에 코를 박고 있었다. 보기 좋게 혈색 오른 뺨이 쉴 새 없이 우물거렸다.

“아이샤 씨……. 맛있어요? 먹을 만해요?”

“네? 네! 저 요새 너무 밥맛이 좋아서 큰일이에요. 뭘 먹어도 소화가 정말정말 잘 돼요. 위가 꼬이지도 않구요, 복통도 줄었구요……. 이렇게 잘 먹다가 돼지가 될 것 같아요.”

“……입가에 비늘 묻었어요.”

아이샤가 입가에 묻은 비늘을 냉큼 입에 집어넣고 씹었다.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오드리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혹시 서민 요리에서는 물고기의 비늘도 먹는 것으로 취급되나? 내 견문이 부족한가?

“물고기 비늘을 먹어요?”

“네? 아, 놀라셨구나. 저도 예전엔 안 먹었는데, 여기서 어쩌다 먹어보니 맛있더라고요. 레이디도 드세요. 씹을수록 고소해요. 제가 일부러 넣어드렸어요!”

이게 시중드는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면 차라리 대응이 쉬울 텐데, 오독오독 비늘을 씹으며 행복해하는 얼굴은 어이없을 정도로 진심이었다. 이거야 원, 네이기스 때와는 조금 다른 유형으로 대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아이샤는 마법사지 하녀가 아니니 밥투정을 해서는 안 된다던 오드리의 내적 다짐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이샤 씨, 생각은 고마워요.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보편적인 입맛을 가진 사람이라서, 비늘 같은 특이한 식재료는 도저히 입에 못 넣겠어요. 앞으로는 내가 먹을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굳이 내 몫의 식사는 챙기지 마세요.”

“네에? 레이디가 직접요? 에이, 평생 물 한 번 끓여보신 적 없을 분께서 무슨 말씀이세요?”

“이 음식 재료들 전부 헨젤가에서 챙긴 거잖아요? 그렇죠?”

“어……. 전부는 아니죠. 절반은 왕궁마법사 쪽에서 챙겨준 거니까…….”

“절반은 헨젤에서 받은 거군요. 그럼 문제없어요.”

말을 마친 오드리가 벌떡 일어나 그대로 임시 식량 창고를 향해 걷기 시작하니, 아이샤는 몹시 당황해서 먹던 수프를 내던지고 오드리의 뒤를 쫓았다.

“레이디 헨젤! 그렇게 막 걸으시면 안 돼요! 근육이 놀란단 말예요! 계속 누워 계셨잖아요!”

“괜찮아요, 내 몸은 내가 알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마력 고갈에 대해서는 제가 레이디보다 훨씬 잘 알아요!”

“마력 고갈이야 아이샤 씨가 잘 알겠지만, 근육에 대해서라면 내 쪽이 더 나아요. 내 승마 실력이 하늘에서 뿅 떨어진 건 줄 알아요? 이제 움직여도 될 만하다 싶으니까 움직이는 거예요.”

“으……!”

말에 강제로 태워져 여기저기 실려 다니며 죽을 고생을 했던 아이샤로서는 반박하기 힘든 말이었다. 오드리는 아이샤의 꿍얼거림은 들은 체 만 체 임시 식량 창고의 문을 열었다.

셰비언이 세심하게 마법을 걸어 만들어준 식량 창고엔 헨젤가와 왕궁마법사측 양쪽에서 바리바리 싸 보낸 음식과 조리도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포장된 상태 그대로인 게 태반이었는데, 딱 보니 최소 한도로 조리할 수 있는 저장 음식 위주로 포장을 풀었다.

아이샤는 하녀가 아니라 마법사다. 오드리는 새삼 그 사실을 되새겼다. 평민 소녀가 마법사의 제자가 되어 왕궁마법사가 될 정도로 실력을 쌓으려면 그 배움의 시간만큼 다른 것들을 희생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아이샤는 그게 가사능력인 것이다.

“마력은 생명력이라죠? 그러니 질 좋은 음식을 잘 먹어야죠. 뭐, 마력 고갈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환자는 잘 먹어야 하는 법이고요.”

“그……. 비늘이 그렇게 싫으셨어요? 아니, 저도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요, 이상하게 너무 맛있어서 그랬죠. 다음에는 저만 먹고 레이디께는 안 권할 테니까 이러지 마세요!”

아이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드리는 능숙하게 헨젤가 문장이 찍힌 포장을 풀어보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마법사의 가사능력을 믿지 않은 이디케가 음식을 거의 완성된 상태로 꽁꽁 얼려 보냈다. 이대로 냄비에 던져 넣고 끓이면 멀쩡한 음식이 될 게 분명했다.

“아이샤 씨, 저기 조리도구 포장을 풀고 큰 냄비를 꺼내오세요. 불 없이도 조리가 가능한 마법도구일 거예요.”

아이샤는 홀린 듯 오드리의 심부름을 했다. 조리용 마법도구라니, 평생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었다. 오드리가 시킨 대로 마력을 약간 불어넣자 냄비가 따뜻하게 달아올랐고, 꽁꽁 언 벽돌 같던 스튜는 그 안에서 사르르 녹아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한 그릇 떠줄까요? 아니면, 계속 비늘 수프를 드실 거예요?”

“이 냄비에 제가 마력 넣었잖아요! 떠주세요!”

아이샤가 당당하게 제 몫을 주장했다. 마력 사용 금지 상태인 오드리가 기꺼이 아이샤의 몫을 떠주었다. 반지르르 윤기 나는 고기가 든 스튜가 큰 그릇 안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렸다. 푹 떠서 입에 넣자 소금과 후추로 간 된 고기가 혓바닥 위에서 풀어지며 진한 풍미를 뽐냈다.

“맛있다…….”

“그쵸? 역시 비늘 따위 보다는 이런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게 좋죠. 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얼마 만에 먹는 거람.”

오드리는 날짜를 세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종일 자다가 잠깐 깨어 식사하고, 또 자다가 일어나 몸을 조금 움직이다 다시 잠드는 나날의 연속이다 보니 날짜 감각은 무슨, 시간 감각마저 희미했다. 매일 깨는 게 아니다 보니 더욱 그랬다.

“아이샤 씨, 우리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는지 알아요?”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 달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요?”

“……끅. 한 달? 일주일, 열흘이 아니라 한 달이라고요?”

입에 넣었던 고깃덩이가 갑자기 목을 콱 틀어막았다. 오드리는 꼴사납게 컥컥거릴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제발 거짓이길 바라며 아이샤를 바라보았지만, 아이샤는 조금 전과 똑같이 멀뚱멀뚱한 얼굴 그대로였다.

오드리는 멍하니 한 달 사이에 브란젤에 일어났을 일들을 헤아렸다. 일단 국왕의 장례식은 끝났을 것이다. 장례 절차를 전부 지켰든 일부 생략했든 한 달이면 매장이 끝나고 애도기간마저 전부 지났을 시간이었다.

괴물을 잡고 추가 피해를 막다가 죽은 군인과 치안대원의 합동 장례식도 끝났을 것이다. 한 달이면 시신을 수습하고 가족에게 돌려보내기에 충분하니까. 시민들의 희생도 상당했으니, 브란젤 전체가 우중충한 검은색으로 물들어 분위기가 아주 칙칙했으리라.

데뷔탕트 무도회는 취소됐을 것이고 봄무도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교계 전부가 얼어붙었을 테다. 갑자기 대목이 사라진 상인들이 침통한 매출 내역서를 붙들고 울고 있겠지.

그러나 짐작 가는 건 그게 전부였다. 일단 대관식 일정부터 안개 속이었다. 의식은 간단하게 치르고 빨리 왕좌를 채워 일사분란하게 피해를 복구하고 있을지, 아니면 당장은 좀 혼란스럽더라도 브란젤의 피해가 어느 정도 수습된 뒤에 화려하게 치르기로 대관식을 미루었을지.

시민들의 원망을 받아줬어야 할 스와디가 브란젤을 위해 희생하고 죽어버렸는데 그건 어떻게 처리했을지, 어떤 방식으로든 스와디의 명예를 지켜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게 과연 받아들여졌을지, 왕궁마법사들 태반이 자리보전을 하고 누운 상황에서 브란젤 복구는 누구의 몫이 되었는지.

무엇보다, 하델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짐작이 안 갔다. 하델은 브란젤 하늘의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도 다음 날이 되어서야 브란젤로 돌아왔다. 그는 오드리가 살아 있는 걸 보고 몹시 안심했다가, 나중에 그녀가 저지른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 세상에 누나가 무슨 영웅인 줄 아느냐며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밀리나의 유언장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오드리에게 돌려주지도 않고, 오스미다 왕비에게 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헨젤 백작에게 넘기지도 않았다. 아예 아뉴람브 성에 갔던 일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흔적을 꾸며내서 돌아오는 걸로 오드리를 감쌌지만 그게 끝이었다.

‘내가 깨어 있을 땐 문병도 안 왔지.’

잠결에 침대 머리맡에서 투덜거리는 하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저택을 떠나는 날까지 끝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분명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게 맞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랄리우스 후작위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이제와 독립을 포기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레이디, 너무 걱정 마세요.”

스스로의 마음을 되짚어보느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드리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아이샤가 갑자기 오드리를 위로했다.

“아무리 마법사가 약하다지만 한 달이면 일어나고도 남아요. 셰비언님이 수도를 고쳐 주셨으니 당장 급한 건 가로등 정도인데……. 그 정도야 뭐, 이젠 괴물도 없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금방 끝낼걸요.”

셰비언이 대충 휘갈겨 낸 보고서 속에는 브란젤 전체의 마법망을 일정 이상으로 안정화시키기만 하면 더 이상의 추가 괴물은 없을 거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다른 왕궁마법사들에 비해 마력량이 많고, 그래서 몸도 더 튼튼한 아이샤는 탈진한 동료들을 대신해 브란젤 전체를 돌아다니며 마법망 안정화에 용을 써야만 했다. 채 반의 반도 끝내지 못하고 셰비언에게 끌려왔지만 그녀는 퍽 낙관적이었다.

“브란젤 전체의 마법망을 안정화시켜야 하는 숙제를 남겨둔 채로 오긴 했지만 수확제 때에 비하면 다들 수준이 엄청나게 올랐어요. 하긴 그런 걸 봤는데 계속 제자리면 그게 더 말이 안 되긴 하죠……. 아무튼 마음먹고 모여서 하면 순식간에 끝낼걸요. 어쩌면 지금쯤 마법망 안정화가 아니라 가로등까지 다 끝내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용의 둥지에서 회복하는 내가 이만큼 움직이기까지 한 달이 걸렸는데, 아무리 나보다 상태가 낫다지만 그새 일까지 했을 거라고요? 그거 너무 혹사시키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야 몸이 남아나겠어요?”

“저희가 뭐 힘이 있나요? 하라면 하는 거지.”

아이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왕궁마법사들 대부분은 어떻게든 마법사로 먹고살 곳을 찾다 찾다 못 찾고 고생밖에 남은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왕궁마법사가 된 사람들이었다. 왕실에서 웬만큼 폭력적인 요구를 하더라도 목숨이 경각이 달리는 게 아닌 이상 거절은 꿈도 못 꿨다.

“만약 왕궁마법사들이 정 못하겠다고 하면 민간마법사라도 동원해서 하겠죠. 브란젤은 수도잖아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어쩌면 지금쯤 브란젤은 예전보다 더 활기찰지도 몰라요.”

오드리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딱히 브란젤에 애착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도시 재건 및 복구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싶어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샤가 모처럼 진지하게 말하는 걸 중간에 끊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세요, 건물이 무너지고 길이 끊겼는데 일거리가 좀 많겠어요? 사람들이 와글와글하게 몰려들었을걸요. 인간도 결국엔 동물이라, 배부르면 기분이 좋아지고 앞날에 대해 희망찬 생각만 하게 되기 마련이에요. 죽은 사람들 때문에 한동안 우울하기야 하겠지만 한 달이면 그것도 흐려질 만한 시간이죠.”

“마법사들은 다 그렇게 말하나요?”

“네? 뭘요?”

“인간도 결국엔 동물이라고요.”

“으음…….”

아이샤가 슬그머니 오드리의 시선을 피했다. 종족전쟁에서 승리하고 대륙의 유일한 패자가 된 후, 인간은 가장 완전한 종족이며 세계의 지배자로서 적합한 종족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혔다. 누구도 감히 인간을 동물 따위와 비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어디서 또 들으셨어요?”

“셰비언이 예전에 그런 말을 했었죠. 그땐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놀라워서 차마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 말을 아이샤 씨에게 또 듣네요.”

“아아……. 셰비언님 정도면 그런 말을 해도 되죠. 정말로 인간이 아니라 용이시니까.”

용을 언급하는 아이샤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는 경외의 기색이 어렸다. 그녀는 셰비언과 샤를레아가 다툼을 벌이던 날의 하늘을 경험한 마법사였다. 마법진의 다양한 활용을 눈으로 확인한 후, 그녀의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인어의 마력을 자각하고 마력량을 늘렸을 때랑은 다른 방향의 발전이었다.

오드리는 셰비언이 잠든 방향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자신은 마법사가 아니라 아이샤와 같은 풍경을 볼 수는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도 존재감이 느껴지긴 했다. 서늘하고, 차갑고……. 그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피부에 닿아왔다.

“그렇죠, 셰비언은 용이니까 그런 말을 해도 이해할 수 있죠. 아예 종족 자체가 다른데 뭘. 하지만 인간 마법사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어요. 마녀로 몰리는 게 두렵지 않나요?”

아이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녀는 자꾸 떨리는 손을 어찌할 바 모르다가 그만 스푼을 내려놓고 말았다. 테이블 아래에서 맞잡은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났다.

“셰비언에게서 그 말을 들은 후, 마법사(史)를 통독했어요. 재밌더라고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계파 싸움이 아주 치열했더군요. 싸움에 패배한 쪽을 악마 숭배자로 몰아서 사냥함으로써 상대 계파를 아예 끊어버리다니……. 엄청나던데요. 여자 마법사가 그렇게 많은데 마녀라는 말이 왜 튀어나왔는지 처음 알았어요.”

“다…… 다 지난 얘기예요. 이제 계파 같은 걸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그야 그렇겠죠. 반대파를 다 잡아 죽였는데 뭘 새삼 따지고 있겠어요. 전부 같은 계파인데.”

오드리의 지적은 정확했다. 아이샤가 다른 마법사들 사이에 쉽게 섞여든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다른 계파의 마법사가 아직도 남아 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마법사가 다들 기피하는 나랍 혼혈 평민 여자애를 제자로 삼을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않고.

“그렇게 떨지 마세요. 내가 그걸 사방팔방에 떠들고 다닐 일은 없을 테니까. 입조심 하시라고 굳이 지적해 봤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잖아요.”

아이샤는 오드리의 말을 쉽게 믿지 않고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마법사들 사이에서 계파가 유명무실해졌다고 해도 트집을 잡으려면 못 잡을 것도 없는 게 계파 문제였다. 돌아가서 받을 질시를 생각하면 작은 흠도 두렵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그 말씀을 제가 어떻게 믿죠?”

“셰비언이 저한테 그 말을 했던 건 작년 이맘때에요. 그가 용인 걸 몰랐을 때도 어디 가서 떠들어본 적이 없는데 새삼 그럴 리 없잖아요. 아이샤 씨, 혹시 나중에 또 같은 실수를 하거든 셰비언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라고 하세요. 제가 증인이 되어드릴게요.”

“…….”

“제가 그렇게 말하는데 설마 셰비언이 아니라고 하겠어요?”

방긋 웃는 눈매가 예쁜 호선을 그렸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아이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아이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곤 다시 스푼을 집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꿀맛이던 스튜가 지금은 그냥 기름기 많은 고깃국물로만 느껴져 넘어가질 않았다.

“셰비언님의 고삐를 레이디께서 쥐고 계신데 제가 믿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어요. 믿을게요.”

“으음, 고삐, 고삐라……. 셰비언이 말도 아닌데 그렇게 비유하는 건 좀…….”

“그럼 아니에요? 말 한 마디로 셰비언님을 이리저리 쥐고 흔드는데? 보고서 따위 안 쓸 거라고 사자를 집어던졌던 분이, 아가씨가 나서자마자 대강이라도 형식 갖춰 보고서를 썼잖아요. 가로등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수도는 고쳐 준 것도 물이 안 나와서 레이디께서 불편해한다는 이유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오드리는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서늘하고 차가우면서도 자신에게만 다정하고 따뜻하게 구는 셰비언을 보며 기묘한 만족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셰비언의 연인이라는 자리는 달콤했다. 그가 아낌없이 표현하는 사랑도 당연히 좋았지만, 그 사랑을 바라보는 타인들의 태도 변화가 참으로 극적이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오드리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아무리 하델이 감쌌다지만 그 헨젤 백작조차 추궁을 삼갔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겨우 며칠이었고 외부인과 얼굴을 맞댄 것도 몇 번에 불과했지만, 권력지향적인 성향을 가진 오드리는 그 변화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전보다 발언력과 영향력이 커졌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변한 이유가 셰비언의 본모습과 마법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착각에 빠질 뻔한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스스로를 계속 경계하는데도 그랬다.

하나 아이샤가 그런 오드리의 고충을 알 리 없다. 그녀는 짜증으로 미간을 좁힌 채 오드리의 그릇에 스튜를 추가했다.

“레이디께서 브란젤로 돌아가면 달라붙어서 정보 달라고 할 사람이 한 수레는 될걸요. 레이디와 친해져서 셰비언님을 어떻게 원하는 대로 움직여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잔뜩 나올 테고요. 레이디는 영리하고 대범한 분이니까 그 사람들을 찹찹 요리해서 입맛대로 쪄 드시든 구워 드시든 하세요.”

“……단지 셰비언 때문, 그것뿐일까요? 다른 건…….”

“네?”

“아니,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어요. 그래요, 셰비언을 보고 다가올 사람들을 구워삶아 내 편으로 만들려면 아주 피곤할 테니 하루라도 빨리 건강해져야겠네요. 아이샤 씨, 한 국자 더 떠줘요.”

아이샤가 뭔가 찝찝해하는 표정으로 스튜를 떠줬다. 오드리는 쪼그라든 위장에 열심히 스튜를 퍼 넣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것도 아닌 일에 뭔가가 따라올 걸 멋대로 기대했다가 실망하느니, 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쪽이 현명했다. 그게 맞았다.

아이샤는 비장한 표정으로 스튜를 퍼먹는 오드리를 보면서 괜히 마음이 불편해 입을 삐죽거렸다. 자그마한 손, 좁은 어깨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대화도 거의 안 나눠본 사이에 뭐 얼마나 친하다고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레이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열여덟이에요. 왜요?”

“……으으.”

열여덟 살. 아이샤가 스승에게서 독립은커녕 머리를 맞아가며 한창 배우던 나이였다. 괴로운 신음을 흘리던 그녀는 결국 오드리에게서 스튜 그릇을 빼앗았다.

“이렇게 기름진 걸 그렇게 갑자기 많이 넣으면 탈나요.”

“괜찮아요. 난 튼튼하고, 힘도 세요.”

“레이디께서 힘이 세신 건 아는데요, 그거랑 장이 튼튼한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요. 레이디가 며칠 만에 깨어난 건지는 알아요?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잠만 잤는데 이런 기름기 많은 음식을 갑자기 넣는다니, 절대 안 돼요.”

아이샤가 남은 스튜를 냄비에 부어버리고 뚜껑을 닫았다. 눈뜨고 스튜 그릇을 홀랑 빼앗긴 오드리는 스푼을 쥔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 하도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열여덟이면 열여덟답게 지내요. 그렇게 상황을 재고, 따지고, 사람의 약점을 잡아 제 편으로 만들 방법 같은 건 고민하지 말라고요. 세상에, 내가 열여덟 살일 때는 빌어먹을 스승님 골탕 먹일 계획 짜는 게 세상에서 제일 큰일이었는데 레이디는 그 쪼끄만 머리통 안에 무슨 생각들을 넣고 사는 거예요?”

졸지에 생각 많은 어린애 취급을 받은 오드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더듬거리며 글을 읽기 시작했던 세 살 이후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열여덟이면 약혼은 물론이고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예요. 열여섯만 되어도 혼처 얘기가 오가는데!”

“몰라요, 몰라. 그거야 귀족님들 얘기죠. 저는 평민 마법사라서요, 열여덟이면 아직 한창 배울 게 남은 꼬맹이란 생각만 든단 말예요. 게다가 레이디는 혼자선 옷도 잘 못 입고, 식사도 목욕도 다 시중들어 주는 손이 필요한 분이시잖아요? 여덟 살 어린애처럼 말이죠.”

“아이샤 씨, 말이 심하네요.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정도를 알아야죠. 왕궁마법사면 귀족과 부대낀 경험도 많을 텐데 왜 이러는 거예요?”

“그러게요, 내가 왜 이러지. 레이디는 내 동생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잖아요. 레이디, 뭐 짐작 가는 거 없어요?”

도리어 아이샤가 되물으니, 오드리는 그야말로 환장할 기분이 되어 입만 뻐끔거렸다. 이리되니 격식을 차린답시고 꼬박꼬박 레이디라고 불러주는 게 오히려 기분 나쁠 지경이었다.

“쉬러 오신 거잖아요? 그럼 편안하게 즐기세요. 그래야 빨리 낫죠. 골치 아픈 일은 나중으로 미뤄요. 어차피 여기서 백 번쯤 고민한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요.”

“나는 그렇게 여유로운 사람이 못돼요. 그럴 만한 상황도 못되고.”

“정말로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여유를 가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건 아니고요?”

아이샤는 오드리의 손에서 남은 스푼을 빼앗아 세척 통에 던져 넣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미뤄둔 설거지 거리로 가득 찬 통이 멋대로 물을 뒤집어가며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고요한 둥지 안에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락 달그락 요란하게 울렸다.

오드리는 순간 아이샤의 말에 동의할 뻔한 자신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선 이상하리만치 쉽게 긴장이 풀렸다.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과 초조함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아득했다.

“레이디, 사람은 때때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할 때가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기만 하라는 아이샤의 말은 지독할 정도로 듣기 좋았다. 순식간에 마음이 물렁해졌다. 예전엔 어떻게 하루 종일 서류에 파묻혀 살았는지 새삼 신기해졌다.

“아무리 질긴 쇠라도 식히지 않고 계속 두드리기만 하면 못 써먹는 물건이 돼요. 쉴 땐 쉬어줘야죠. 레이디, 무려 용을 등에 업으셨는데 뭘 그리 두려워하시나요?”

하지만 그녀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꺼끌꺼끌한 천이 목덜미를 스치는 듯,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듯 무언가 불편했다. 오드리가 제 불쾌감을 면밀히 관찰하기도 전에 아이샤가 그녀에게 케이프 코트를 둘러 입혔다.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셨으면, 머리를 비우고 주변 구경이나 좀 하다 오세요. 용의 둥지에 왔는데 내내 잠만 자다가 가면 아쉽잖아요.”

“그 말엔 나도 동의해요.”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드리도 아이샤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창백한 셰비언이 그들이 식당으로 쓰고 있는 구역의 입구에 서 있었다. 품이 넉넉하고 긴 흰 천을 몸에 두른 인간의 모습이었다.

“아가씨가 모처럼 제 집에 오셨는데 구경 한 번 않고 가신다면 제가 너무 서운할 거예요.”

“셰비언!”

오드리는 날듯이 셰비언에게 달려가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내내 본체 상태로 잠만 자는 걸 보다가 이렇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말까지 하는 걸 보니 어쩐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서늘한 체온이 너무 반가워 하얗게 번뜩이는 동공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제 괜찮아? 인간의 모습으로 있어도 돼? 무리하는 건 아냐?”

“저는 괜찮아요. 아가씨야말로 괜찮…… 으음, 괜찮아 보이네요. 아직 다 회복된 건 아니지만.”

“난 멀쩡해.”

“아뇨, 조금 더 쉬어야 돼요. 하지만 마력이 상한 거지 몸이 상한 건 아니니까……. 우리 산책 갈까요?”

“무슨 소리야? 난 괜찮을지 몰라도 넌 몸이 상했잖아. 아까 비늘 아래로 분홍색 비치는 거 다 봤어. 아직 덜 아물었지?”

오드리는 셰비언의 옷자락 안에 손을 넣어 그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서늘하고 매끄러운 비늘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크게 상처 입고 다 아물지 않은 부분이 여전히 비늘로 덮여 있는 것이다. 슬쩍 누르자 셰비언이 미간을 찌푸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윽…….”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산책은 무슨……. 가서 쉬어, 나도 갈게.”

“저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환자를 끌고 다니는 취미는 없어. 아, 혹시 배고파? 뭐라도 먹겠어?”

오드리가 좀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식탁을 가리켰다. 셰비언은 부루퉁한 얼굴로 냄비 속 스튜를 젓는 아이샤를 보고 피식 웃었다.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잔뜩 찌푸린 미간이 우스웠다. 그는 오드리를 번쩍 들어 올려 팔에 앉히고 그녀의 뺨에 입 맞췄다.

“허기는 제가 알아서 채울 테니 아가씨는 저와 놀아주세요. 저한테는 그게 약이니까.”

조금 전까지는 유령처럼 창백하더니, 사르르 미소 짓는 눈매는 봄의 꽃잎을 물들인 양 분홍빛이다. 그 얼굴을 정면에서 본 오드리의 뺨과 귀도 사과처럼 발갛게 익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손을 꼼지락대다 그냥 셰비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서는 서늘한 얼음 냄새가 났다. 용일 때나, 인간일 때나.

아이샤는 한 달 내내 돌아다녔어도 둥지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는데, 셰비언이 오드리를 안고 몇 걸음 걷자마자 그들은 새하얀 눈이 깔린 평원 위였다. 흰 눈밭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폭력적으로 반사했다.

“으…….”

“눈뜨지 마세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마법을 걸어준 다음에야 가까스로 눈을 뜰 수 있었다. 예전에 셰비언의 공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풍경이 어쩐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눈밭에 발을 디뎌보자 그때와는 다르게 발이 종아리까지 푹 들어갔다. 당황한 나머지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앗, 차거!”

“아가씨, 제 손 잡으…….”

셰비언이 황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드레스가 아니라 넉넉한 바지를 입은 오드리는 벌써 일어나 옷에 묻은 눈을 터는 중이었다. 셰비언은 갈 곳 잃은 손을 민망해하기는커녕 그새 흐트러진 오드리의 코트를 여며주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바지가 좋네요. 아가씨는 여전히 눈에 약하시니까, 앞으로 여기 올 땐 꼭 바지 입고 오세요. 저번 같은 드레스는 움직임에 제한이 너무 심해요.”

“……이거 원, 놀림 받는 게 억울해서라도 눈에 익숙해져야겠어.”

“네? 놀리는 거 아닌데요. 제가 왜 아가씨를 놀려요?”

분명 셰비언은 아무 생각도 없이 한 말일 텐데, 그걸 알면서도 오드리의 뺨에 확 열이 올랐다. 오드리는 눈을 한 움큼 집어 얼굴에 문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대신 서늘한 손으로 연신 뺨을 문지르며 말을 돌렸다.

“셰비언, 이 코트 옷감은 대체 정체가 뭐지?”

“음? 그런 건 왜 갑자기 궁금해하시는 거죠?”

“이 얄팍한 코트 한 벌 걸쳤다고 셰비언 성벽이 춥질 않아. 저번엔 달달 떨었던 것 같은데.”

“으으음…….”

셰비언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오드리는 그의 뺨을 쭉쭉 잡아당기며 대답을 재촉했다.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가죽? 네 가죽이라고? 내가 그동안 네 살가죽을 걸치고 돌아다녔다고?”

“……그렇게까지 경악하시면 제가 좀 서운한데요……. 따뜻하고 가볍고 좋잖아요? 잘 입으셨으면서 새삼. 아가씨는 제 비늘도 삼킨 전적이 있잖아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비늘과 가죽은 느낌이 전혀 다르잖아.”

“제 입장에선 그게 그거인데요? 한 번 구멍이 나면 다시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확실히 회복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오드리는 옷감을 창고에 처박은 채 잊어버렸던, 그리고 옷감을 홀라당 태우더라도 셰비언은 상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몹시 반성했다. 본인은 아무 생각 없더라도 자신은 그러면 안 됐다.

“어차피 도로 제 몸에 갖다 붙일 수도 없는 건데 신경 쓰지 말고 입으세요. 아가씨께서 잘 입어주시면 저는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잘 입을게.”

“네, 그거면 됐어요.”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 얼굴에서 생기가 넘쳤다. 조금 전의 그 파리한 모습은 다 조작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오드리는 자연스레 셰비언의 목덜미를 확인했다. 은빛 비늘 아래에서는 여전히 불그스름한 핏기가 비치고 있었다. 혹시 무리하는 건 아닌가, 걱정되는 게 당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셰비언은 오드리의 걱정 섞인 눈빛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그랬듯, 당연히 잡아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손길이었다. 오드리가 머뭇대며 제 손을 셰비언의 손 위에 겹치자,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땋지도 않고 풀어놓은 은발이 와르르 쏟아져 오드리의 손을 간지럽혔다.

“어때요, 이젠 꽤 잘 어울리죠?”

“응, 아주 우아해. 전에도 흠잡을 곳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보다 더 완벽해졌네.”

셰비언이 웃었다. 마음만 먹으면 인간 사회의 모든 규칙을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용이, 고작 인사 잘했다는 칭찬 한 마디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열심히 연습했다며, 셰비언이 그동안의 고생을 자랑했다. 오드리는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부으면서도 자꾸 빨라지는 심장 고동이 신경 쓰여 정신이 없었다. 달음박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셰비언의 귀에는 고스란히 들릴 테니까. 심장 뛰는 소리를 감출 수 없다면 따끈따끈하게 붉어진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은데, 차림이 차림이다 보니 부채는커녕 가릴 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화장이라도 할걸. 근데 내가 화장품 챙겨오긴 했나?’

이디케는 몰라도 다이앤은 분명 화장품을 짐 속에 넣어줬을 텐데, 아이샤는 여성적인 치장에는 영 관심이 없는 마법사였다. 화장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아이샤 덕분에 오드리는 셰비언의 둥지에 와서 얼굴에 뭔가를 발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차피 셰비언도 자신도 계속 잠만 자는 거, 그에 딱히 불만을 가진 적은 없지만 이 순간에는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사실 화장을 해 봤자 귀가 새빨개서 금방 들켰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도 않았다.

오드리의 짐작대로, 셰비언은 세차게 뛰는 오드리의 심장 소리를 음악처럼 즐겁게 들었다. 바랐던 칭찬보다 더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는 오드리를 덥석 안고 또 자리를 옮겼다. 다 똑같은 평지 같은 곳에서 절벽의 끄트머리로. 절벽 아래에 무성한 숲과 그 사이를 흘러가는 강의 풍경이 환상적으로 펼쳐졌다.

“노을을 보러 온 건가?”

“사실 이 셰비언 절벽에서 볼만한 건 노을뿐이거든요.”

오드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셰비언의 가슴에 편하게 등을 기댔다. 절벽 아래의 풍경은 여전히 멋있었지만, 그에 눈길이 가지는 않았다. 지금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얼굴을 정면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만족한 상태였다.

“산책 하자더니.”

“돌아갈 때 하면 되죠, 뭐. 아니면 둥지 안에서 해도 되고.”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하지만 오드리도 셰비언도 굳이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둘은 그냥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좀처럼 변하지 않는 풍경을 구경했다.

오드리는 뛰는지 안 뛰는지 모를 정도로 느리게 뛰는 셰비언의 심장 소리를 셌고, 셰비언은 곱실거리는 오드리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질하다 종종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이 지루하기는커녕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느리긴 해도 규칙적인 심장 박동 수를 세고 있어서일까, 오드리는 세비언의 품에 완전히 안겨 있으면서도 점점 차분해졌다. 등과 팔에서 전해지는 셰비언의 체온이 여전히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보다 자꾸 잠이 쏟아졌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눈꺼풀이라더니 그 말이 참말이었다.

“아가씨, 자면 안 돼요. 금방 노을 질 거란 말예요.”

“안 자…….”

셰비언은 슬그머니 웃음을 참았다. 그 짧은 대답을 하는 사이 또 고개가 뚝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는 걸, 본인은 영 모르는 눈치라서. 오드리가 눈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대체 왜 이렇게 잠이 오지? 그대와 붙어 있기만 하면 잠이 와.”

“몸이 회복하느라 그런 거예요. 회복 이외의 곳에 쓰는 에너지를 줄이려는 거죠. 하지만 아가씨는 인간이니 이렇게 종종 일어나 돌아다녀 주는 걸 잊으면 안 돼요. 근육을 계속 방치했다간 윈디를 탈 수 없게 될걸요.”

“그거 참 무서운 협박이네…….”

오드리는 꾸역꾸역 자세를 고쳤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하늘이 붉은빛과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푸른 옷감에 수채화 물감이 번지듯 하늘 전체로 퍼져 나가는 색이 황홀했다. 숲의 나무에 덮인 눈에도 노을이 물들어 마치 불이 난 것만 같았다.

문득, 불길처럼 붉은 머리칼을 하나로 올려 묶고 다니던 샤를레아가 떠올랐다. 마주친 건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어도, 그 강렬한 인상은 쉽게 잊힐 만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마지막 만남이 오죽 인상적이었어야지.

“셰비언,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 용이 다른 종족으로 모습을 바꿀 때 얼굴이나 몸을 막……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고 그런가?”

“무슨 말씀이세요?”

“용의 모습이 본체라고 하면, 이렇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일종의 변신에 가깝잖아. 그럼 마음대로 조형도 할 수 있나 싶어서.”

“그게 되면 이 지긋지긋한 은발부터 어떻게 했겠죠. 새하얀 건 주변 풍경만으로도 충분해요. 아가씨가 제 머리칼을 맘에 들어 하시지만 않았어도 그 염색약인가 뭔가 하는 걸로 확 물들여 버렸을 거예요.”

셰비언이 제 머리칼을 쥐고 흔들며 투덜거렸다. 노을빛을 머금고 불그스름한 금빛으로 빛나는 은발은 오드리의 눈에는 대단히 아름다웠는데, 정작 셰비언 본인은 색도 뭣도 없이 흐리멍덩해서 영 마음에 안 든다 하니 의외였다. 남들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색인데 말이다.

“제가 용이 아닌 어떤 종족의 모습을 취하든 간에 기본은 안 바뀌어요. 얼굴도 몸도 다 제 것이죠. 그거 아세요? 제가 인어의 모습을 하면요, 색이 쭉 빠져 마냥 허옇기만 한 물고기 꼴이 된다는 거? 꼭 찜통에 찐 잉어 같아져요. 물고기 꼬리 부분이 은색이라 더 그렇더라고요.”

오드리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정말 노력했다……. 하지만 하반신에 물고기 꼬리를 단 손바닥만 한 셰비언이 파닥파닥 허공을 헤엄치기 시작하자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풋! 하하하하! 하하! 뭐야, 이게!”

“정말 딱 생선찜 같지 않나요? 제가 이래서 인어의 모습을 싫어해요.”

“하하, 하하하……. 지금 돋은 비늘은 은색이잖아. 무슨 차이야?”

“저도 잘 몰라요. 용일 땐 흰색인데 다른 종족으로 변하기만 하면 은색 비늘이 돋더라고요. 그래도 조인족일 때랑 인간일 땐 좀 봐줄 만한데, 나머지는 좀…….”

흰 꼬리로 파닥파닥 헤엄치는 인어 셰비언 옆에 흰 날개를 파닥거리는 조인족 셰비언이 나타났다. 똑같이 하얀색인데 한쪽은 소금만 뿌려 찐 생선 같고 한쪽은 장인이 정성들여 만든 조각품 같다. 오드리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미지 차이에 거의 눈물을 흘릴 듯 웃었다. 셰비언이 입을 삐죽였다.

“아가씨, 재미있어요?”

“응, 재밌어. 노을도 좋지만 지금은 이 작은 셰비언들이 더 귀엽네. 인어와 조인족 말고 다른 종족의 모습은 없어?”

셰비언이 한숨을 쉬며 여러 종족 버전의 자신을 만들어냈다. 조그마한 셰비언들이 오드리 앞에 모여서 와글와글 떠들어댔다. 소리가 나는 건 아닌데 자기들끼리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싸우고, 놀고, 뒹굴고, 자고…….

오드리는 작은 셰비언들에게 정신을 홀딱 빼앗겼다. 새로운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작은 셰비언들을 관찰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종족들의 외양들이 신기했다. 그녀는 웬만한 귀족 남자들 못지않은 교육을 받았지만, 신화시대에 대한 지식은 일반적인 교육 범위 안에 없었다. 신화시대 연구는 소수의 학자들이나 파고드는 분야였다.

“그렇게 신기하세요?”

“신기하지 그럼. 와, 분명 나름의 사회와 문명을 이뤘던 종족들인 거지? 대부분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을 거라는 건 정말 내 편견이었네. 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다양해.”

“……혹시 다른 종족에게 거부감이 든다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눈앞에서 용 둘이 몸싸움 하는 것도 봤는데 거부감은 무슨……. 셰비언? 왜 그래?”

셰비언이 고개를 돌려 오드리의 시선을 피했다. 본래부터 흰 피부였지만, 꾹 다문 입가 근처가 유독 희게 질려 있었다. 어딘지 겁을 먹은 것만 같았다. 오드리에게 거센 추궁을 받은 그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 용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왜? 충분히 아름답고 우아했는데. 종족이 다르다는 걸 너무 확실하게 깨달아 버리긴 했지만 말이야.”

“그게 싫었어요. 계속 인간의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었다고요.”

셰비언은 오드리에게 자신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는 걸 실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용의 본신이 부끄럽거나 창피한 건 아니지만, 행여 오드리가 이종족에 대해 거부감과 불쾌함을 느끼고 멀어지면 그땐 어쩔 것인가? 아무리 마력의 계통이 같다고 해도 타고난 종족이 다르니 본능적인 혐오감이 함께 따라올 텐데.

어차피 자신은 오드리보다 훨씬 오래 살 것이니, 함께하는 시간 내내 그녀에게 인간의 모습만 보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의식 분리라는 좋은 수단을 갖고서도 정체를 의심하는 오드리에게 본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앞뒤 못 가리는 샤를레아가 눈이 뒤집혀 브란젤에 화염 브레스를 쏟아내려 하지만 않았어도, 하다못해 그 아래에 오드리가 있지만 않았어도, 셰비언은 끝까지 인간의 모습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날, 오드리 앞에서 용의 모습을 보인 것과 꼭꼭 숨겨왔던 잔인성을 드러낸 것 모두 그가 원했던 바는 아니었다. 그저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을 뿐.

“아름답고 우아했다? 설마요, 아가씨가 마법사도 아닌데 그럴 리가 있나요. 아가씨, 용의 본신을 보고 느낀 거부감을 애써 감추지 않으셔도 돼요. 서로 다른 종족으로서 그건 당연한 거니까요.”

“…….”

“하지만 앞으로는 계속 인간의 모습만 하고 있을 테니, 조금은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제 인간형 모습은 퍽 매력적으로 보이잖아요? 그렇죠?”

노을에 물든 긴 은빛 속눈썹이 우아하게 팔랑거렸다. 창백하던 뺨에도 노을이 비쳐 적당히 불그스름한 생기가 돌았다. 봄 한 철 보이다가 금세 사라지는 나비처럼 아련한 분위기였다.

오드리는 열심히 꾸민 자신보다 열 배는 더 예뻐 보이는 남자의 뺨을 심술궂게 잡아당겼다.

“거부감 같은 거 없었는데?”

“……네?”

“거북스럽지 않았다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느껴졌다는 거, 거짓말 아니고 빈말도 아니야. 샤를레아의 본신에서도 강인한 아름다움을 느꼈는데 네게 우아함을 못 느낄 이유가 대체 뭐가 있겠어? 내가 마법사는 아니어도 마력량이 엄청 많으니, 그대와 마력의 계통이 같은 영향을 받았나 보지. 이제 나는 그대가 용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어.”

오드리는 다정하게 웃고 있는데, 정작 그 웃음을 보는 셰비언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셰비언은 자꾸 뺨을 만지작대는 오드리의 손을 잡아 쥐고 자꾸만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을 꺼내면 그게 현실이 되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아가씨……. 그날 무섭지 않았다고 하셨죠.”

“응? 그날?”

“땅에선 괴물이 날뛰고 하늘에선 마법진이 조각나 떨어지는데도 하나도 안 무서우셨다면서요. 사방에서 피와 살점이 튀어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으셨다고요. 정말 그랬나요? 지금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으세요?”

“아, 그날. 그랬지.”

왜 갑자기 그날의 일을 끄집어내는지는 몰라도, 오드리는 순순히 대화에 응해 그날을 떠올렸다. 주체할 수 없는 끌림에 이끌려 위험을 알면서도 제 발로 브란젤 안에 들어와 놓고, 정작 들어와서는 그 끌림보다 한 톨의 책임을 우선시했던 날.

자신을 미끼로 삼아 괴물을 이끌고 달리면서도 두렵지 않았고, 코앞에서 피와 살점이 튀어도 섬뜩하거나 구역질이 나지도 않았다. 흘러나가는 마력만큼 밀려오는 탈력감과 어지럼증조차 아침이 되어 해가 뜨고 밤이 되어 달이 뜨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왜, 그대도 내게 이상하다고 하려고? 하긴 내가 전쟁터를 경험한 사람인 것도 아닌데 코앞에서 그렇게 시체가 잔뜩 생기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하면 이상하긴 하겠지……. 하지만 정말 괜찮았던 걸 어쩌겠어.”

“…….”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날을 떠올려도 단지 그랬었지, 하는 건조한 감상만 들어.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셰비언이 오드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았다. 그 행동이 오드리에게 불안감을 불러 일으켰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품을 즐기지도 못하고 어깨를 쿵쿵 때려가며 밀어냈다. 하지만 셰비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이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질질 끌지 말고 바로 말해. 그대가 이러면 괜히 불안해져.”

“아뇨, 아뇨……. 그냥, 짐작했던 것보다 마력의 영향이 컸구나 싶어서요. 용의 마력이면 마력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마력이에요. 비율과 순도가 조금 높아진다고 뭐가 달라지겠냐고 생각했었고, 실제로도 별 이상 없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육체가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에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어요.”

“……마력의 영향?”

셰비언의 불안은 오드리에게로 고스란히 번졌다. 오드리의 외가인 랄리우스의 사람들은 대대로 단명했다. 아이를 낳는 여자들의 수명은 특히 짧았다. 그게 용의 마력을 지나치게 많이 품고 태어나 마력 균형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라는 걸, 지금은 안다. 셰비언의 도움을 받은 후 환절기를 앓지 않고 넘어가게 된 오드리지만, 마력 얘기가 나오자 신경이 곤두섰다.

“이 빌어먹을 마력에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건데? 심리적인 부분은 왜 튀어나와? 난 멀쩡해!”

서늘한 손이 진정하라는 듯 오드리의 등을 토닥였다. 비록 역효과가 났지만.

“달랠 생각 말고 제대로 설명해!”

“글쎄요, 마력의 영향은 워낙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나서,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아이샤 씨를 예로 들면, 그녀가 내 둥지에서 무사히 잘 지내는 건 그녀의 마력이 인어의 마력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비록 이곳엔 강도 바다도 없지만 넘쳐나는 눈과 얼음이 그녀의 마력에 보탬이 되거든요. 하지만 어떤 인간이 물고기 비늘 따위를 맛있다고 씹어 먹나요? 진짜 인어라면 또 몰라.”

“그 괴상한 입맛이 마력의 영향이란 건가?”

“그래요. 그거 말곤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인어의 마력이 총 마력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 아이샤 씨의 입맛이 그렇게 변했는데, 일반적인 마법사를 훨씬 상회하도록 마력이 많은 데다 용의 마력 순도가 높은 아가씨는 어떻죠? 뭐가 변했나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 멀쩡하다고 했잖아. 신체적인 것만 말하는 게 아냐, 정신적으로도 멀쩡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에 아무 문제도 없어. 설마 용을 보고 아름답다 감탄한 게 그리 문제될 일이야?”

“네, 엄청나게 문제예요. 종족의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는 거니까요. 아무리 마력이 용이라도 아가씨는 인간이잖아요.”

이종족과 어울려 살아본 적 없는 오드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차피 이 땅에는 사는 건 인간뿐이야! 반사적으로 반박이 튀어나왔지만 셰비언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죠. 아가씨는 피와 살점이 튀는 걸 보고도 무감각하고, 시체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어요. 인간이라면……. 아무리 생김새가 괴물이라도 피가 도랑이 되어 흐를 정도로 시체가 쌓이면 조금은 거북스러워해야 정상 아닌가요?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기사나 군인도 아가씨처럼 태연하진 않을 거예요.”

셰비언에게서 정상의 기준을 지적받은 오드리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대체 누가 누구더러 정상을 운운하느냔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럼 그게 용의 감각이란 거로군? 시체도 피도 두렵거나 거북스럽지 않고 잔인한 장면도 무덤덤하게 보는 것이?”

“그야 용은 본질적으로 포식자니까요. 용이 타 종족의 피와 시체를 탐하는 건 자연스러운 본능에 가까워요. 그 날것의 장면이 오히려 식욕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죠. 하지만 아가씨는 인간이잖아요……. 인간들 틈에 끼어 살아야 하는 분이 용과 같은 감각을 갖고 있으면 안 돼요. 관에 들어간 시신과 식탁에 올라온 소시지가 똑같아 보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하면 이해가 되세요?”

오드리는 장례 중인 시신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자신을 상상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 그렇게 감각이 변질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다른 부분은 정상일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는가.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놈의 마력은 인생에서 도움 되는 게 없어…….”

오드리는 마력 문제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랄리우스 가문의 몰락까지 갈 것도 없이, 환절기마다 앓아눕던 것만 떠올려도 치가 떨렸다. 이 말썽 많은 마력이 쓸모 있게 느껴진 건 브란젤에서 괴물을 끌어 모았을 때 뿐이었다.

“해결책은 있어?”

“……제가 옆에 없으면 돼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가씨의 옆에 제가 있으면 마력의 영향이 점점 더 심해질 거예요. 속도도 빠르겠죠.”

셰비언이 오드리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서늘한 입술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오드리는 그가 할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가씨는 이제 브란젤로 돌아가세요. 가서, 인간의 삶을 사세요.”

“그대는?”

“마법의 주인답게 절벽을 지켜야죠. 여긴 본래 나의 영지라고, 멜브란트 왕실에 얘길 해두어야겠네요.”

“샤를레아가 그때 그 시계탑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복수를 공언했어.”

“이런……. 도움 안 되는 동족 같으니라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기 전에 잡으러 가야겠네요. 걱정 마세요, 아가씨. 반드시 죽여서 후환이 없도록 할 테니.”

아까 입술을 바르르 떨던 셰비언은 어디로 갔는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매끄럽기 그지없다. 잠깐 사이에 영혼이 바뀐 것처럼 낯설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뭉글뭉글한 감정이 오드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셰비언이 없는 삶…….’

오드리는 셰비언의 종족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난 후로 그의 부재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용은 오래 사는 종족이고 감정 또한 느리게 식으니, 당연히 자신이 먼저 그의 곁을 떠날 거라고만 여겼다. 사랑이 식는 것도 죽음에 이르는 것도 자신이 먼저일 테니 셰비언이 자신의 곁을 떠나가는 걸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안심했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셰비언 없이 지낼 날들을 상상하자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이제껏 오드리에게 그토록 강력한 동기가 되어주었던 목표들이 한순간에 빛을 잃고 회색이 되었다. 그것들을 위해 인생을 소비하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오드리는 죄 없는 입술을 공연히 잡아 뜯다 도로 몸을 돌려 노을을 바라보고 앉았다. 느긋하게 펄떡이는 셰비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빨갛게 가라앉는 해를 주시했다. 하늘과 숲을 다 불태워 버릴 듯 벌겋던 노을의 영역이 상당히 줄어 있었다. 여전히 눈을 현혹하는 황홀한 경치였다.

“……나, 계속 여기서 살까?”

“네?”

“이곳도 지내기에 그리 나쁘지 않아. 그대의 상처가 나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지만 않으면 내 감정적인 면이 어떻게 변하든 별 문제가 없는 거잖아.”

셰비언은 너무 놀라 잠시 말을 잊었다. 어떤 순간에도 제 삶을 포기하는 법이 없던 오드리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질 않았다.

“샤를레아를 잡으러 가는 것도 같이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내가 방해가 되겠지. 저번에도 내가 신경 쓰여서 마지막 마무리를 못 한 거잖아. 그렇지?”

“그 이유도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죽은 용의 시체가 왕국의 수도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너무 뻔해서 그랬던 게 더 크죠. 진작 고려했어야 하는데 샤를레아를 잡을 방법에 골몰하느라 그쪽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 잠깐만요, 아가씨. 진짜 여기 눌러 앉아 사실 생각이세요?”

“왜, 안 돼? 그대가 하도 꼼꼼하게 마법을 걸어놔서 지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데. 물론 나 혼자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긴 하지만……. 그거야 닥쳐서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고. 설마, 나 하나 먹여 살리는 게 힘들어서 안 된다고 하진 않겠지?”

셰비언의 성벽에서 나는 모든 보석은 그대의 것이라며? 인간들이 개발하지 않은 광맥도 잔뜩 알고 있을 거 아냐.

오드리가 장난스럽게 사족을 붙였지만, 셰비언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는 안 그래도 차가운 체온이 더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직 노을이 남아 있는데 벌써 밤이 찾아온 것처럼 눈앞이 까맸다.

“……안 돼요.”

“왜?”

“아가씨의 인생에서 사랑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가 될 순 없잖아요.”

그리 멀지도 않은 지난날, 셰비언은 오드리를 잘 아는 사람들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오드리라면, 설령 사랑에 홀려 잠깐 중심을 놓치더라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올 게 분명하다고. 그만큼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라고.

“후회할 거예요.”

“아니. 난 일단 놓아버린 것엔 미련두지 않아.”

“아가씨 말고, 제가요.”

“네가? 왜?”

셰비언은 오드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뒷목에 이마를 박았다. 따끈따끈한 체온, 쿵쿵 뛰는 심장 소리……. 먹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입이 달았다.

“아가씨의 인생에 끼어들어 궤도를 틀어버린 걸 후회할 거예요.”

“결정은 내가 하는 거야.”

“네, 알아요. 하지만 후회할 거예요. 하루하루 아가씨의 눈치를 보면서 혹시 미련이 남은 건 아닐까 고민할 거고, 아가씨가 고작 저 때문에 놓아버린 것들이 아까워 슬퍼하겠죠. 그런 시간들이 쌓이는 건 싫어요.”

“…….”

“가세요, 아가씨. 꿈꾸었던 길을 걷고, 본래 그 손에 잡으려 했던 걸 잡아요. 운명 같은 사랑 따위는 잊어버리세요. 아가씨를 구속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침묵 속에서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밤은 놀랍도록 빠르게 다가왔다. 사위를 덮은 어둠 속에서 푹신하게 쌓인 눈이 하얗게 빛났다. 누군가 짙은 남색 비단에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 하늘엔 별이 빼곡했다.

그 비단 위로 새벽 여신의 옷자락이 화악 펼쳐졌다. 여신의 걸음을 따라 하늘하늘 반투명한 초록빛 베일이 일렁거리며 하늘을 물들였다. 눈 쌓인 평원과 절벽 전부가 여신의 옷자락 아래에 있었다.

“……장관이네. 이게 새벽 여신 오로라의 옷자락이구나…….”

내내 말이 없던 오드리가 숨김없이 감탄했다. 오드리가 이 광경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던 셰비언은 아주 뿌듯해했다. 공간에서 기억을 재현할 때도 일부러 노을만 보여줬던 보람이 있었다.

“매일 볼 수 있는 게 아닌데, 어쩐지 오늘은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다시 보고 싶어지면 어쩌지?”

“하늘은 넓으니, 여기가 아니더라도 볼 수 있어요. 셰비언 성벽에 기대 사는 마을에서 보시면 되죠.”

빈말로라도 다시 와서 보면 된다는 말이 없다. 이곳에서 살겠다는 말을 쉽게 꺼낸 게 아니었던 오드리에겐 몹시 화나는 대답이었다. 오드리는 옷자락에 묻은 눈을 탁탁 털고 벌떡 일어났다.

“셰비언, 그대의 말이 맞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야. 알량한 감상으로 여기 남아봤자, 후회하는 그대를 볼 때마다 나도 함께 후회하게 되겠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

셰비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오드리의 눈빛이 전에 없이 형형했다. 전장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니 같이 가자. 난 욕심쟁이라, 사랑도 일도 전부 다 가져야겠어.”

“그건 안 돼요. 제가 계속 아가씨의 옆에 있으면…….”

“어차피 난 예전부터 동정심은커녕 양심도 부족한 편이었어. 마력의 영향이니 뭐니 해도, 생각해 보면 이전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물론, 내가 그냥 둬도 된다고 해도 그대의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 거기까진 어쩔 수 없다고 하겠어. 하지만 셰비언, 그대는 마법의 주인이라며? 해결책을 찾아. 할 수 있지?”

오드리가 손을 내밀었다. 체구에 맞게 작고 햇볕에 태워 가무잡잡한 손이었다. 셰비언이 홀린 듯 그 손을 잡으려다 말고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오드리보다 훌쩍 큰 몸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제가 이 손을 잡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은 해 보셨어요?”

“그대가 옆에 있어야 내가 길을 잃지 않을 것 같아. 내가 고되어 잠깐 흔들리더라도, 그대는 틀림없이 내 등을 떠밀어주겠지. 셰비언, 내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그대가 필요해.”

“그건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고요. 제가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요? 저만 아껴주는 아가씨가 좋아서 입 발린 소리를 하며 아가씨를 속이면요?”

얼어붙은 강 같은 옅은 푸른 눈동자에서 열기가 자글자글 피어올랐다. 오드리는 씩 웃으며 셰비언의 손을 툭 쳤다.

“인생에 모험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

“나중에 용 따위를 옆에 두는 게 아니었다고 하지만 마세요.”

“킥, 그대야말로 내 옆이 고단하다며 도망칠 궁리 따위 하면 안 돼.”

셰비언은 오드리의 반짝거리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늘에 펼쳐진 오로라보다 더 진하고 맑은 초록색이었다. 백색의 세상에서 살던 그를 한순간에 빨아들였던 활기와 생명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쩐지 목이 메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오드리를 확 끌어안았다.

“그럴 일 없어요.”

봄을 품에 안은 듯, 떠나려는 여름을 잡아챈 듯 뿌듯한 기쁨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아,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아가씨 옆에 있어도 좋다고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나중엔 어떡하죠?”

“나중?”

“무정한 시간이 아가씨를 제 곁에서 데려간 다음에……. 그 다음엔 어떡하죠? 벌써 무서워져요.”

오드리가 까르르 웃으며 셰비언의 등을 끌어안았다.

“어쩌지, 나는 그게 좋은데. 당연히 내가 그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거란 게 좋아. 적어도 나는 죽을 때까지 그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잖아?”

“음……. 그래요, 적어도 제가 먼저 죽고 아가씨 혼자 남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긴 하죠. 그래도…….”

오드리가 셰비언의 말에 담긴 서운함을 알아채고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혼자 남을 셰비언에게 해줄 말은 한참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때가 되면, 그냥 잊어버려.”

“잊으라고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야. 너무 오래 기억하지도 말고, 계속 추억을 간직하려고 하지도 마. 그러다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면 나에게 했듯이 똑같이 사랑해. 그래도 돼, 대신 나보다 더 사랑하지만 마.”

“……아가씨, 너무 냉정한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잖아, 수명이 다른걸. 없는 사람의 그림자만 쫓으면서 사는 건 사는 게 아냐.”

오드리는 몹시 담담하게 말했지만, 셰비언은 그녀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말을 아예 듣지 못한 척, 대답하지 않고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봄은 슬프도록 짧지만 그는 다시 오지 않을 봄에 대한 기억으로 나머지 계절을 살아낼 작정이었으니까.

* * *

악몽 같은 밤으로부터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브란젤은 괴물이 출몰하고 두 마리 용이 하늘에서 싸우는 전대미문의 일을 겪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상처를 봉합하고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째는 왕실이 괴물 사태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흉년을 맞아 굶주리던 사람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대거 브란젤로 몰려왔다는 것이며, 셋째는 평년이라면 고스란히 짐덩이가 됐을 그 사람들이 올해는 브란젤에서 꼭 필요한 인력이 되어 큰 혼란 없이 도시 생태계 내로 흡수됐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일단은 그랬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계획이라도 해두었던 것처럼 모든 게 차곡차곡 맞아떨어졌다. 귀족들이 본의는 아니어도 평년처럼 영지나 시골에 처박히지 않고 브란젤에 남아 있었다는 게 사람들을 유인하는 요소가 된 것처럼 말이다.

비어 있던 주거지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고 일손이 모자랐던 일자리엔 인력이 공급됐다. 일당을 받은 이들이 밑바닥 소비층이 되어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장례와 추모를 위해 입었던 검은 옷을 슬슬 벗는 시기이기도 해서, 우중충하던 거리 분위기도 한결 밝아졌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괴물이 나타났던 밤을 입에 담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앞날에 대한 이야기 역시 삼갔다. 대신 왕실의 소식에 관심을 쏟았다. 왕좌가 빈 지도 두 달이나 됐는데 우리 왕자전하께서는 언제 대관식을 올리실까, 타우레드 영애와 결혼을 하는 건 그분이 왕이 되고 난 후일까, 아니면 그 전일까. 뭐 이런 잡담들이 곳곳에서 오갔다.

왕실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국정을 운영하는 권한 대부분이 중앙으로 집중된 지가 수십 년인데, 가장 중요한 국왕의 자리가 두 달이나 비어 있는 상황이었다. 브란젤로 몰려온 왕실의 웃어른들은 틈만 나면 가스트로를 달달 볶아댔다.

빨리 왕위에 올라라, 그게 안 될 상황이면 결혼이라도 해라. 왕국민들에게 어서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빌어먹을 노친네들!”

가스트로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장갑을 벗어 내던졌다. 일이 많아서 하루에 서너 시간도 제대로 못 자는데 쓸데없는 말을 듣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돌아왔더니 평소보다 짜증이 두 배로 났다.

즉위 초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대관식과 결혼식을 치르는 게 좋다는 걸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사정이 있어서 못하는 걸 두고 못났네, 어리석네, 어려서 뭘 모르네 해대는 걸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속에서 천불이 난다. 귀족의 목은 숱하게 떨어뜨렸던 선왕이 왜 무능력한 왕족들은 곱게 살려뒀는지 이해가 안 갔다.

“지위만 있고 책임은 없는 작자들이 말은 많아서!”

빚쟁이들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 브란젤에서 용 두 마리가 몸싸움을 벌였다. 거기에 더해 괴물 수십 마리가 튀어나왔고, 왕궁마법사 태반이 탈진했으며, 군인과 치안대원 중에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천만다행으로 불은 나지 않았지만 마법에 기반한 도시의 시설 상당 부분이 훼손됐다.

그 결과로 가스트로는 갑작스럽게 대형 재난 복구에 준하는 돈을 지출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오스미다 왕비에게 지원을 받아 빚 일부를 정산하고 라디아타의 지참금으로 대관식을 비롯한 예식 비용을 치르려던 초반 계획은 가차 없이 틀어졌다. 그는 예상보다 많은 빚을 갚아야 했고, 본래 잡아두었던 예식 비용까지 끌어다 브란젤 복구에 써야 했다.

돈을 쥔 자의 발언권이 높아지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이전에 요청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융통하게 된 가스트로는 오스미다와 타우레드 후작가의 압력에 직면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오스미다는 국정 운영을 위해 열리는 회의에 일테니아 후작으로서 다시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고, 타우레드 후작가는 몹시 기세등등해져 라디아타의 결혼 계약서를 수정하길 원했다. 지금까지는 일단 도시 기능을 복구하는 쪽이 우선이라고 우기며 대관식마저 미루는 걸로 버텨왔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였다.

셰비언과 오드리가 곧 브란젤로 돌아오겠다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셰비언 성벽에서 기차를 타고 날아온 급행 우편을 받았을 때 가스트로가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 분명했다.

“전하,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한숨 돌리는 시간조차 사치라는 듯, 문 밖에서 가스트로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스트로는 시커멓게 죽어버린 눈가를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전하, 곧 회의가 있사오니…….”

“그만 재촉해도 된다! 바로 나갈 테니!”

가스트로는 좀 전에 던져 버렸던 장갑을 도로 주워 끼고 홀로 마음을 다잡았다. 대관식은 아직이어도 그는 이 나라의 왕이었다.

* * *

셰비언과 오드리는 귀환 수단으로 기차를 택했다. 기차를 좋아하는 셰비언의 취향과 브란젤에는 조금이라도 늦게 돌아가고 싶은 아이샤의 바람을 모두 충족하는 결정이었다. 기차를 타고도 느린 이유는 간단했다. 셰비언 성벽과 브란젤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노선이 없었다.

용 모습의 셰비언 등에 올라타 브란젤로 돌아가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 기차에 동의했던 오드리는 그 느릿느릿한 일정에 한숨을 내쉬었지마는, 셰비언과 아이샤는 기차 여행에 대단히 만족했다. 화물운송 위주의 노선이다 보니 여객 객실의 편의가 몹시 부족했음에도 새로운 풍물을 보는 것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특히 셰비언이 심했다. 그는 환승을 위해 역에 내릴 때마다 온갖 물건을 사다 오드리에게 안겼다. 대부분 그리 유용하지도 않고 품질이 뛰어난 것도 아니지만 아름답기는 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달걀만 한 유백색 옥을 사왔을 땐, 선물 공세에 질려 내내 심드렁하던 오드리도 놀랐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샀어? 여기서 나는 보석도 아닌데. 옥은 거의 수입품이야.”

“왜 안 나와요? 셰비언 절벽에선 백 가지가 넘는 보석이 나는데, 그중엔 옥도 있어요. 양이 적어서 그렇지. 보니까 워낙 산출량이 적어서 이 주변에서만 소비되고 끝나나 봐요.”

“이런 상등품의 옥이 지역 소비로 끝난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

목소리를 높이던 오드리는 셰비언이 영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따지는 멍청이가 된 기분을 만끽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광맥이 널린 절벽의 주인이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고마워, 잘 받았어. 무늬도 색도 아주 예쁘네. 그런데 옥은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지……. 다이앤에게 물어보면 잘 알려나?”

다이앤은 희귀한 약초와 독초 수집하기를 즐기지만, 보석에도 아주 관심이 많았다. 오드리가 옥을 쓴 적은 없어도 다이앤이라면 옥의 관리법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정말 이 지역에서 옥이 나는지 안 나는지에 대해서도.

오드리가 다이앤에게 그걸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데, 정작 셰비언은 오드리가 옥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으니 그게 불만이었다.

“아가씨, 그 옥으로 뭘 하면 좋을 것 같으세요?”

“응? 글쎄? 사실 옥은 써본 적이 없어서. 예쁜 상자에 넣어서 책상에 장식할까?”

“그러라고 선물한 게 아닌데……. 아가씨, 머리장식을 만드는 건 어때요?”

“머리에 달걀만 한 옥을 붙이고 다니라고? 그건 좀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에이, 설마 이 옥을 그냥 달고 다니라고 한 말이겠어요? 이리 줘보세요.”

셰비언이 오드리에게서 자연스럽게 옥을 넘겨받았다. 그는 마치 관객 앞에 선 마술사처럼 옥 위에서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대다 후우,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곤 뭔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물었다.

“아가씨, 다알리아 좋아하세요?”

꽃에 대해 딱히 호불호가 없는 오드리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알리아는 로렐리아 상단의 상징인 용과 꽃 중에서 꽃의 도안으로 쓰이는 꽃이었다. 도안가에게 다수의 꽃잎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형태의 꽃이면 좋겠다고 했더니 대뜸 다알리아를 넣어왔던 걸 그대로 수용한 결과였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셰비언이 무척 자신만만하고 뿌듯한 얼굴로 기뻐했다.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자, 보세요.”

옥이 파르르 흔들렸다. 동그랗게 마감된 옥의 끄트머리가 움찔거렸다. 오드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유백색 얇은 꽃잎이 사르르 펼쳐졌다. 한 잎, 또 한 잎……. 작은 꽃잎 수십 장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화려하게 벌어졌다. 매끈한 달걀 같던 모양이 사실은 굳게 닫힌 꽃봉오리였다는 것처럼 말이다.

오드리는 조심조심 다알리아의 꽃잎을 만져 보았다. 눈으로 보기에는 진짜 꽃잎과 다를 바가 없는데 손에 전해지는 질감은 적당히 차갑고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했다. 어찌나 얇게 세공했는지 꽃잎 가장자리엔 뒤쪽의 색이 살짝 비치기까지 했다.

“세상에……. 이걸 그대가 만든 거라고?”

“오래 살아서 좋은 건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거죠.”

셰비언이 숨을 한 번 더 불어넣자 유백색 다알리아에 옅은 노란색 물이 들었다. 옥의 두께감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 색상 때문인지, 가운데는 몹시 짙은 노랑인데 바깥은 투명감이 넘쳤다. 오드리는 새삼 셰비언의 감각에 감동했다. 그 감각을 가지고 매일 마법사 로브 따위나 입고 다녔다는 게 좀 놀랍긴 하지만.

셰비언이 오드리의 머리를 묶은 리본 위에 완성한 다알리아를 얹었다. 오드리도 아이샤도 머리 다듬는 재주가 없어 적당히 반묶음만 하고 풀어놓은 상태였는데, 고동색 리본 위에 어린 아이 주먹만 한 꽃 한 송이가 올라가자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굉장히 화려해졌다.

“마음껏 움직이셔도 돼요.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드리가 머리를 휙휙 돌렸다. 그리곤 머리핀이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느끼고 신기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떨어지면 박살날 게 틀림없는 장신구인데 겁도 없다.

“그새 마법이라도 걸었나?”

“그 정도도 못해서야 어디 마법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추위와 더위에 영향 받지 않는 마법도 걸려 있죠.”

“오…….”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머리핀을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그 지독한 더위와 추위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 있다니 마법이란 얼마나 좋은가. 마법도구에 갇히지 않은 마법은 지극히 자유로웠다.

“이거 조금 전에 사온 거 아니지?”

“크흠! 흠, 흠……. 그럴 리가요. 제가 조금 전에 사서 아가씨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마법을 걸고…….”

“셰비언, 지금 나는 몹시 기분이 좋아. 그게 어느 정도냐면, 그대의 허술한 거짓말을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 있을 정도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실은 그거 아가씨의 생일 선물로 마련했던 거예요. 한데 어쩌다 보니 계속 전할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이제와 생일 선물이라고 드리기가 민망했어요.”

“어머나…….”

오드리는 통제 불가능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슬쩍 가렸다. 그때 셰비언은 샤를레아를 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텐데 대체 언제 이런 걸 준비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쯤은 그 수고를 자랑해도 좋을 텐데, 붉어진 얼굴로 마냥 민망해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심장께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충동적으로 셰비언의 입술을 훔쳤다. 분명 살짝 닿기만 하고 떨어질 생각이었는데, 그가 확 어깨와 허리를 끌어안아 오는 바람에 아예 움직일 수가 없게 됐다. 약간 서늘한 체온을 느끼자마자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가운데 뺨과 귀가 화끈 달아올랐다.

“늦긴 했어도 제 선물이 마음에 드신 거죠?”

“그게…….”

“이왕 상을 주실 거면 확실하게 주세요.”

인간의 모습을 한 용은 인간에게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제 용모를 십분 활용했다. 아름다운 눈매 가득 눈웃음을 짓고 어린아이가 투정부리듯 상을 졸랐다. 오드리가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한숨을 내쉬는 게 너무 사랑스러워 자꾸 웃음이 났다.

기다림은 짧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마음껏 핥고 맛보며 작은 몸을 애타게 끌어안았다. 숨을 쉬고 오드리의 체향을 맡을 때마다 머리가 어지럽도록 달콤한 향기가 입과 코에 가득히 들어차 안고 있는 게 사람인지 꽃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이제까지 몇 번이고 끌어안았고 몇 번이고 입을 맞췄는데, 어째서 매번 안을 때마다 새롭고 입을 맞출 때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건지. 오드리를 만나고 나선 이전의 자신은 송두리째 사라진 것처럼 발이 땅에 닿질 않는다.

신나게 도시 구경을 하다 온 아이샤는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서로에게 몰입하는 연인을 발견하고 몹시 좌절했다. 남들 시선 있는 곳에서는 저러지 않겠지 싶어 일부러 공공장소를 약속장소로 골랐는데, 그게 참 헛된 꿈이었다는 걸 이렇게 확인하게 되다니.

“저 인간들이 또……. 광장에서 뭐 하는 짓이야!”

엄밀히 말하면 인간 하나에 용 하나지만, 아무래도 겉모습이 인간이니 계속 인간으로 여기게 된다. 하여간 인간은 시각에 지배되는 동물이었다. 아이샤는 저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제 그만 기차에 타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몹시 슬퍼졌다.

소도시라지만 무려 기차역이 있는 도시였다. 오드리도 셰비언도 신문에 숱하게 얼굴과 이름이 오르내린 전적이 있는 인물들이다 보니 주변 행인들 중에도 그들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 많았다.

괴물도 용도 먼 나라 얘기처럼 낯선 사람들이니만큼 한두 명은 가까이 와서 두려움 없이 말을 걸어볼 법도 한데, 아무도 그들 근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있어 그 선을 넘으면 재앙이라도 입을 것처럼 두려워하는 기색마저 있었다. 공공연한 애정행각에 흘끗 시선을 주었던 사람들마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이샤는 그들의 심정을 백분 이해했다. 마법사인 그녀의 눈에는 셰비언이 은근히 퍼뜨려 놓은 마력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들에게 연인관계 과시하라고 그렇게 열심히 가르친 게 아닌데…….’

지난 한 달간, 셰비언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아이샤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아이샤는 그에게 인간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온갖 종류의 규칙에 대해 가르쳤다. 연인, 약혼, 결혼, 불륜, 결투, 이혼, 가족…….

셰비언은 아이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진지하게 수업에 임했는데, 도대체 예전엔 어떻게 인간 흉내를 내며 인간 사회에 섞여 살았는지 의문스럽도록 아는 게 없었다. 알아도 어렴풋이, 수박 겉핥기 수준이었다.

아이샤는 셰비언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연구 중심이 아니라 실전 중심의 인간이라는 걸 처절하게 깨달았다.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입이 아플 규칙 중에서 결혼 제도를 셰비언에게 납득시키는 일이 특히 고역이었다. 셰비언이 인간의 사랑을 이해해 보겠답시고 로맨스 소설을 많이 읽었던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인간의 결혼 제도와 사랑이란 감정 사이에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가? 관계가 있다면 둘 중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가? 관계가 없다면 왜 둘은 한 쌍의 날개처럼 반드시 엮여서 언급되는가? 정략결혼은 어차피 사랑 없는 결혼인데 왜 배우자가 타인을 사랑하는 게 문제가 되는가? 배우자를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관행은 어떤 배경에서 생겨났는가? 아이의 출산은 오롯이 여성의 일인데 왜 성은 아버지를 따르는 게 일반적인가?

이전에 오드리에게 자연스럽게 불륜을 제안했다가 단숨에 일축당한 셰비언의 호기심과 질문은 끝이 없었다. 아이샤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부족한 인문학적 지식을 총동원했지만 역시 모자랐다. 꾸역꾸역 결혼의 생산적 가치와 사회학적 필요 등등을 늘어놓다가 되레 반박당한 일도 있었다. 나름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를 꿈꾸었던 입장에서 새삼 결혼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 아이샤는 결혼 제도가 인간사회에서 나름 충분한 필요성을 가지고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셰비언에게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 인간을 겁먹게 만드는 경계를 긋고 연인의 권리를 사방에 광고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셰비언은 사실 결혼에 대해 납득한 척만 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때로 타인의 배우자를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얘길 괜히 했다.

‘어휴, 아가씨는 사정 뻔히 알면서 도와주지도 않고, 말리지도 않고. 시선이 쏟아질 걸 뻔히 알면서 매번 셰비언님에게 장단이나 맞춰주고……. 지금 보니까 오히려 즐기는 거 같잖아? 정말이지, 둘이 똑같다니까!’

아이샤의 불만은 엉뚱하게도 오드리에게 튀었다. 죽어도 경계선 안에 들어가기 싫은 탓에 온갖 핑계를 다 대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속으로 구시렁대다가, 기차 시간이 가까워지자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발을 질질 끌며 경계선을 넘었다. 가까워진 인기척을 느낀 오드리가 셰비언을 밀어냄과 동시에 적대적인 마력이 뾰족하게 아이샤의 살갗을 찔러댔다.

“아가씨, 이제 기차에 타셔야 돼요. 여기서 타면 바로 브란젤까지 직통이에요.”

셰비언의 표정이 확 굳었다. 아이샤는 주변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건 오드리가 셰비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씻은 듯 사라졌다.

‘기가 막힐 노릇이야. 아주 손에 쥐고 굴리는데?’

보아하니, 앞으로 용의 힘을 빌리고 싶은 사람들은 정말 오드리 앞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듯했다. 정작 본인은 그게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지만, 아이샤는 오드리의 평범하지 않은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걸 한참 전에 포기한 상태였다. 포기하면 편했다.

“브란젤이 정말 코앞이네…….”

“거리 생각하면 코앞까진 아니죠. 그냥 직통이라 더는 환승을 안 해도 된다는 거지.”

“그래도 기분이 그렇잖아요.”

“실질 거리가 한참 남았는데 그런 기분이 든다니 저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제 기분도 아니고 아가씨 기분 가지고 제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참, 이거 받으세요. 여기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최신 신문이에요.”

아이샤가 좀 전에 사온 신문을 내밀었다. 최신 신문치곤 약간 누렇고 헤진 종이의 1면에는 오드리와 셰비언의 초상화가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용 남작과 그의 연인, 브란젤로 귀환 예정!>

오드리는 날짜를 확인했다. 2주 전에 나온 신문이었다. 시기로 봐서는 셰비언이 브란젤에 돌아갈 일정을 알리자마자 나온 게 분명한데, 그들이 어떤 수단을 쓸 건지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용이 브란젤에서 날아오르는 장관을 놓쳤던 사람들에게 용이 다시 브란젤로 내려앉을 때는 어디에 가야 멋진 구경을 할 수 있는지 팁을 주는 기사 따위나 쓰고 있는 걸 보니. 그래도 순 쓰레기 같은 기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름으로 보는 셰비언 성벽과 셰비언 아르젠 남작의 연관성, 북쪽지방의 오래된 민담 속에 등장하는 용의 존재, 신화시대의 재림 가능성…….’

자질구레한 부분은 휙휙 건너뛰고 핵심만 읽는 동안 오드리의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셰비언 성벽에서 멀어져 브란젤이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술렁거리던 마음에 확 불이 붙었다.

색을 잃고 흐릿해졌던 목표들이 다시 반짝거렸고, 느슨해졌던 신경도 팽팽하게 당겨졌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로렐라이와 데멘사를 잊다시피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셰비언의 둥지에서 어린아이처럼 평온하게 뒹굴거렸던 일상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되짚어보면 그곳에서만큼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던 어린 시절까지 포함해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용의 마력을 갖고 용의 둥지에 머물렀던 게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게 아닐까 싶었다.

‘제 얼굴에 묻은 때는 안 보인다더니.’

멀리서 보면 그 평화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웠는지 이렇게 명확한데, 정작 그 평온 속에서는 어떤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푹신한 솜털 이불에 감싸인 듯 하루하루가 안락하기만 했다. 미래에 대한 고민 같은 건 너무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속 셰비언 성벽에 머물겠다는 소릴 하면서도 자신이 명백하게 제정신이며 이성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일과 사랑, 모두를 갖겠다고 단언한 이후에도 오드리는 완전히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셰비언이 끊임없이 등을 떠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미약한 등불이라도 켜주지 않았더라면 끝내 주저앉고 말았을 스스로가 눈에 보였다. 아찔했다.

“셰비언.”

“네?”

“내 등을 떠밀어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셰비언이 자신의 둥지에 들인 인간은 오드리와 아이샤뿐이었다. 그나마 아이샤는 일정한 범위 안쪽으로는 들어오지도 못했다. 그러니 셰비언이 오드리의 심리 변화 같은 건 짐작도 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과연 그는 오드리의 뜬금없는 감사 표시에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오드리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셰비언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췄다. 분명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 옆에 붙들어놓기보다는 원하는 바를 위해 나아가라고 밀어줬던 그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욕심 많은 자신은 빈말로라도 하지 못할 말이었다.

“한 것도 없는데 상을 받으니까 어쩐지 불안한데요.”

“그 점이 마음에 드는 거야. 내게 중요한 걸 그대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보다 우선해 준다는 거.”

오드리는 셰비언의 목덜미를 슬쩍 매만졌다. 아직 완벽하게 낫지 않아 비늘로 덮인 곳이었다. 상처 회복을 위해서는 둥지에 좀 더 있어야 하는 것을, 셰비언이 계속 여기에 있다간 오드리가 입을 타격이 너무 클 것 같다며 귀환을 서둘렀다. 떠날 당시에는 그게 못내 속상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의 마음씀씀이가 더 크게 다가왔다. 둥지에서 평화로웠던 게 어디 자신 혼자이기만 했겠는가.

“난 이기적이라 어떤 순간에도 나 자신이 가장 먼저가 되겠지만……. 그래도 노력할게. 받은 것보다 더 돌려줄 수 있게.”

“아가씨는 지금도 제게 충분히 돌려주고 계세요.”

오드리가 웃었다. 셰비언은 계절에 맞게 따뜻해진 햇살이 그녀의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려 빛나는 걸 눈부시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이샤가 소름 돋는다며 팔을 문질러 대는 것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아가씨, 아까 역에 있는 우편국에 데멘사 지점이 있는 걸 봤어요. 거기 가보실래요?”

“데멘사 지점이 이런 곳까지 나와 있다고?”

오드리의 눈이 반짝거렸다. 데멘사의 전보는 오드리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떠나오면서도 혹시 라비린이 어깃장을 놓을까 걱정했던 만큼, 이런 소도시에 데멘사 지점이 있다는 건 오드리의 기분을 붕 띄우기에 충분했다.

“들렀다 가자!”

“안 돼요, 아가씨! 표 다 끊어놨는데! 이제 타야 된다니까요!”

“취소하면 되잖아요?”

“출발 직전에 취소하면 수수료가 엄청 나온단 말예요.”

“그깟 수수료 물면 되지, 뭘…….”

기껏 끊어놓은 표가 휴지조각이 되게 생긴 아이샤가 기겁을 했지만, 오드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디케에게 모든 일을 위임해 두었으니 돌아가는 대로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받아볼 게 분명하긴 해도, 그 전에 소도시의 데멘사 지점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오드리가 활짝 웃는 얼굴로 냉큼 셰비언의 팔짱을 꼈다.

“왜 나는 못 봤을까?”

“제가 아가씨의 시선을 다 빼앗아 버려서 그랬던 거 아닐까요?”

“와우, 그거 굉장히 자신감 넘치고 근거 있는 발언이야. 좋다.”

정말이지 부자들이란 푼돈 아까운 줄을 모른다. 아이샤는 기차표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둘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그만 터덜터덜 티켓 창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아하니 내일은 되어야 출발할 기세였다.

<8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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