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 두 마리 용과 브란젤의 벨트람
「“전하, 국가는 어떤 때에도 책임을 잊지 않는 이들이 모여 지탱하는 것입니다.”」
별과 달이 빛나는 하늘을 도화지 삼아 적금색 마법진이 제 모습을 갖춰갔다. 브란젤 상공 전체를 덮을 듯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브란젤 전체가 화산지대에 들어간 것처럼 유황 냄새가 진동했다. 알 수 없는 것은 공포를 불렀고, 깨어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잠들었던 사람들까지 죄다 뛰쳐나와 하늘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셰비언은 지금 오드리가 브란젤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자신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아르젠 남작! 저게 뭔가? 자네가 준비했다는 괴물 잡는 마법진인가?”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샤를레아의 마력이 자꾸 셰비언을 쿡쿡 찌르며 자극했다.
그 모습으로 얼마나 할 수 있겠어? 얼마나 나를 대비했니? 네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나를 막을 수 있나 한번 볼까? 당장 나와, 싸워보게!
도발에 응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피가 끓었다. 이제는 다 아물었을 왼쪽 옆구리의 상처가 불타는 듯 뜨겁게 달아오르고 일부러 닫아두었던 감각들이 죄다 깨어나 적의 출현을 기뻐하며 날뛰었다.
“대답 좀 하게! 이렇게 큰 걸 준비했으면 미리 나와 상의를 했어야지! 하필 국왕전하의 장례식 날에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얼마나 곤란해질지 모르는 건가!”
평소라면 그냥 듣고 흘려버렸을 멍청한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인간의 거죽 아래에 숨겨두었던 비늘이 죄다 곤두서서 제멋대로 부딪치는 것만 같았다.
“멍청하기는……. 다나가 미친 이유를 알 것도 같아. 당신 같은 자가 제일 꼭대기에 있는 조직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버티기 힘들었겠지.”
“무, 무슨…….”
왕궁마법사장은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모욕에 헐떡이면서도 차마 반발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엔 지금 셰비언의 꼴이 지나치게 기이했다. 하얗게 변색돼 세로로 길쭉해진 동공과 목덜미를 덮은 흰 비늘이 너무 선명했다.
“괴, 괴물……! 아르젠 남작이 괴물이 되다니……! 아아, 벤이시여!”
“괴물 좋아하시네. 방해되는 놈은 꺼져!”
셰비언은 그대로 왕궁마법연구소를 뛰쳐나와 시계탑으로 향했다. 그가 샤를레아를 기다리며 만들었던 모든 그물의 핵이 그 자리에 있었다.
중앙광장 끄트머리에 자리한 시계탑은 왕궁의 탑을 제외하면 브란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 꼭대기에 오르면 브란젤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셰비언이 시계탑을 그물의 핵으로 삼은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피올은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셰비언의 뒷모습에 그만 혀를 찼다. 본래 그는 오늘 비번이었다. 집에 가는 대신 치안대 사무실의 삐걱대는 침대에 드러누워 단잠을 자던 그는 코를 자극하는 유황 냄새를 맡고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시계탑으로 올라온 참이었다.
“여기로 올 줄 알았지. 도대체 어떻게 올라온 거야? 그것도 이렇게 빨리?”
“말했잖아, 나는 용이라고.”
“들을 때마다 거짓말 참 못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어째 진짜 같기도 하다…….”
셰비언의 발 아래로 화려하게 떠오르는 마법진보다 그의 목덜미에 돋아난 흰 비늘이 더 시선을 잡아끌었다. 피올은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디디면서 허리춤의 검자루를 매만졌다. 이대로 뽑아도 괜찮을지 가늠이 어려웠다.
“피올, 지금 치안대는 뭘 하고 있지?”
“글쎄? 난 오늘 비번이라서 잘 모르겠네. 평소처럼 왕궁마법사랑 같이 괴물 잡고 있겠지 뭐.”
“그나마 다행이군. 너도 당장 내려가서 괴물 잡을 준비해. 이제 브란젤 전체가 뒤집힐 거야. 하늘에 있는 저 마법진, 내가 최대한 막아보긴 하겠지만……. 막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잖아? 당연히 구멍이 날 거야.”
셰비언의 어조에선 어쩐지 즐거워하는 기색마저 느껴졌다. 피올은 피부를 찌르는 투기와 살기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셰비언이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자신의 기세를 방출하고 있는데 이제까지 몰랐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검자루에 얹은 손에서 땀이 솟았다.
“저 마법진이 대체 뭔데?”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마법진.”
“뭐?”
“안 가?”
셰비언이 휙 고개를 돌려 피올을 바라보았다. 피올은 희고 길쭉하게 변한 동공을 정면에서 마주하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산트렘 지역의 산에서 서식하는 큰 회색 곰과 마주쳤을 때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압박감이 그를 마구 눌러댔다.
“너, 너…….”
“이제부터 변하는 괴물들은 공격성이 아주 높을 가능성이 있어.”
피올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오드리를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던 괴물들을 두고 ‘얌전하다’고 평했던 셰비언이 공격성이 높다고 할 정도면, 그게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초조한 마음으로 내려다본 브란젤은 잠에서 깨어난 티가 확연했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치안대는 도시를 지켜야지.”
“……젠장. 지금은 일단 그냥 가지만, 나중에라도 제대로 설명해!”
“승진해서 보고서 받아보든지.”
“아오, 재수 없는 자식!”
피올이 욕을 하며 내려가든 말든 셰비언의 관심은 다시 하늘의 마법진으로 옮겨갔다. 샤를레아가 어찌나 정성들여 만들었는지, 마법진은 어이없을 정도로 세심했다.
인간의 몸에 흐르는 수십 종의 마력 중에서 폭력적으로 날뛰기 쉬운 종류의 마력을 골라내 증폭시키는 것도 그렇고, 괴물들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도록 명령을 입력한 것도 그렇고, 마법망이 쉽게 안정되지 않도록 방해공작을 심어둔 것도 그렇고……. 하여간 브란젤의 인간들을 싸그리 죽여 버리겠다는 악의로 가득한 마법진이었다.
“애썼네. 그래봤자 마법의 주인은 나야. 어딜 마법으로 덤벼?”
셰비언이 히죽 웃고 발을 굴렀다. 그의 발아래에서부터 금빛 마법진이 화려하게 떠올라 시계탑을 감싸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건 마지 뜨거운 햇살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같았는데, 그 마법진은 땅바닥에 닿자마자 놀라운 속도로 브란젤 전체로 번졌다.
하늘의 마법진이 삼분의 이쯤 그려졌을 때, 땅의 마법진은 이미 제 형태를 거의 갖춘 상태였다. 오드리를 만나러 가지도 못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만든 마법진이 발목 높이 정도로 떠올라 빛을 뿜어냈다. 사람들은 마법진이 제 몸을 통과해 지나가는 걸 소름끼쳐 하며 허겁지겁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떠오른 마법진 곳곳에서 꽃이 피어나더니, 활짝 피어 드러난 심지에서 빛이 솟아올라 하늘의 마법진을 흩뜨렸다. 맑던 하늘에 순식간에 무거운 구름이 몰려들었다. 우르릉, 콰르릉, 심상치 않은 소리가 브란젤의 하늘을 메웠다. 마법망이 일반인도 볼 수 있을 만큼 가시화됐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가운데 구름 사이로 마른번개가 번쩍거렸다.
왕궁마법사들은 거의 넋이 나간 채로 두 마법진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마법사인 그들의 눈에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진 마법진 둘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세상이 둘로 나눠져 부딪치며 찌그러지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누가 이따위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한쪽은 아르젠 남작이겠지? 근 한 달 내내 브란젤 곳곳에 이상한 걸 설치하고 다녔잖아.”
“그렇겠지. 빌어먹을, 아르젠 남작 진짜 사람 맞아? 아무리 옛 마법에 통달했대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이런 마법을 써? 사람이 이런 마법을 쓰고 멀쩡하다는 게 말이 돼?”
“난 이제 아르젠 남작이 실은 인간이 아니라 용이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그렇잖아, 우리 중에 아르젠 남작이 마법 쓰고 지치는 거 본 적 있는 사람 있어?”
“그러고 보니…….”
“아, 시끄러워! 이 상황에 그런 얘기들이 나와? 닥치고 스와디랑 아이샤부터 나오라고 그래! 걔들은 뭐 따로 들은 얘기 있을 거 아냐!”
멍하니 입을 벌리고 하늘을 보던 아이샤가 대뜸 끌려나온 제 이름에 질색하며 변명했다.
“나는 왜? 따로 들은 거 없어! 괴물 나오면 열심히 잡으라는 말밖에 못 들었다고!”
“그게 말이 돼? 그동안 따라다니면서 뭐 했어?”
“뭐 했긴, 마력 넣으라는 데다 마력 넣고 기억하라는 데 기억했지! 괴물이 그쪽에서 주로 나올 거라고……. 아, 제기랄! 치안대는 뭐 해? 치안대! 치안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왕궁마법사들 앞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치안대원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 치안대에서 보유하는 말을 끌어내 타고 온 몇몇 치안대원들이 스와디와 아이샤를 찾았다. 두 사람은 그동안 괴물 소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왔었다.
그 둘 어딨어? 몰라, 안 보여!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주변을 두리번대던 왕궁마법사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아이샤를 찾아내 치안대원 앞에 들이밀었다. 제 머리보다 높은 곳에 있는 말과 눈이 마주친 아이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허옇게 질렸다.
“설마 내가 이거 타기라도 해야 돼요? 그냥 어디로 가는지만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네?”
“어허,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자, 타요!”
체이서는 뻣뻣하게 굳은 아이샤를 쑥 끌어올려 제 앞에 태웠다.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기겁한 아이샤가 말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가 체이서에게 잡혀 강제로 허리를 세웠다.
“나, 나는 말 못 타요! 어억! 으아악!”
“뒤에서 잡아줄 테니까 걱정 말고 기대기나 해요. 정 불안하면 안장이라도 콱 붙들고 있든가. 어디로 가야 돼요?”
“이, 일단 호가르 거리요! 거기서 제일 큰 오 층짜리 건물 뒷골목……! 아아악!”
“혀 깨물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요!”
체이서는 아이샤가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박차를 가해 내달렸다. 아이샤의 비명 소리가 별똥별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스와디도 곧 같은 신세가 됐지만 그래도 그녀는 말을 탈 줄 알아서 비명은 안 질렀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빠지고 나자 남은 왕궁마법사들도 어서 나서서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이제껏 함께 손발을 맞춰 일했던 익숙한 치안대원과 짝을 이뤄 브란젤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쾅! 구름 사이에서 번쩍이기만 하던 번개가 엄청난 소리와 함께 어느 건물 지붕에 내리꽂혔다. 피뢰침이 있어 불은 안 났지만 그 일대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름끼친다며 닿기를 싫어하던 마법진도 개의치 않은 도망이었다. 그러나 그 도망이 별 의미는 없었던 것이, 번개는 몇몇 사람들의 등을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바닥을 까맣게 태우다 기어이 그들을 숯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아아, 아아아……!”
“아르젠 남작이 미쳤나 봐!”
“아냐, 저걸 봐! 괴물이다!”
검게 그을린 시신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벌겋고 흐물대는 피부를 가진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 없는 둥그런 머리통에, 얼굴엔 퀭한 구멍 두 개. 다리는 둘이었지만 팔은 네 개에 손가락은 세 개였다. 비슷한 생물은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 기괴한 몰골이었다.
사람들은 다리가 부실한 듯 자꾸 휘청대며 넘어지는 괴물에게서 도무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나친 공포가 몸을 꽁꽁 묶어버리기라도 한 듯, 괴물이 자신들을 향해 기어오는 걸 뻔히 보면서도 벌벌 떨기만 했다.
바로 그때 스와디, 그리고 그녀와 짝을 이룬 유렌이 도착했다. 유렌은 괴물을 보자마자 바로 목을 쳐서 떨어뜨렸고, 스와디는 마법망 안정화 작업에 들어갔다.
한데 유렌이 괴물의 시신을 대강 수습할 때까지도 마법망은 안정되지 않았다. 스와디는 초조하게 같은 작업을 반복했지만, 영 성과가 없었다. 아예 마법망 가시화 단계에서부터 방해가 있는지 눈에 보이는 마법망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그녀의 초조함은 유렌에게도 전해졌다.
“스와디 씨, 뭔가 문제 있어요? 평소 같지가 않은데?”
“마법망 안정화가 안 돼요……. 뭐랄까, 그러니까…… 밀가루 속에 고운 모래가 섞여 있어서 평평하게 펴지지가 않는 느낌이에요. 아 정말, 어떡해……!”
“그럼 대피부터 시켜야겠네요. 이 지역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전에 설치한 대피소로 보내도 되겠어요?”
“아뇨, 마법망이 안정된 지역으로 가야 되는데 거기 상태가 어떨지 가늠이 안 돼요. 여기도 예전에는 멀쩡했다고요. 근데 지금 멀쩡한 곳이 있긴 하려나 몰라.”
스와디는 눈에 고인 눈물을 쓱 문질러 닦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마법진은 그새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그만큼 땅의 마법진과의 충돌도 격렬했다. 서로 뒤엉킨 마력이 얼마나 지독하게 힘겨루기를 하는지, 눈앞의 사물들이 팔레트에 뒤섞인 물감처럼 형체를 잃고 뭉그러져 보였다.
그나마 뚜렷하게 보이는 건 땅의 마법진에서 피어난 꽃이 쏘아 올리는 빛줄기였다. 그것만은 눈부시도록 선명하고 똑바른 직선이었다. 그거라도 있어서 멀미하지 않고 멀쩡히 발을 딛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취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렸을 테다.
“유렌 씨……. 저 빛 보이세요? 제 눈에만 직선인 거 아니죠?”
“누가 봐도 직선일걸요. 스와디 씨, 지금 눈 잘 안 보여요? 뭐 들어가기라도 했어요? 물이라도 떠다 줄까요?”
“아뇨, 괜찮아요. 이건 내가 마법사라 그런 거예요. 지금 브란젤에 있는 마법사들은 죄다 반장님일걸요.”
마법사가 아닌 유렌은 재빨리 이해를 포기했다. 그는 형식적으로 읊던 걱정마저 집어치우고 빨리 사람들을 대피시킬 만한 장소를 대라고 채근했고, 스와디는 뜨고 있어봐야 소용도 없는 눈을 아예 감아버린 채 빛줄기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 빛줄기 주변으로 보내세요.”
“확실한 거죠?”
“이런 상황에 확신이 어딨어요? 그나마 가능성이 높으니까 가라는 거지.”
“아니, 그게 말이 돼요?”
무책임한 말에 유렌이 울컥 화를 내려는 찰나, 발목 높이에서 빛나던 마법진이 불쑥 고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무릎, 가슴을 지나쳐 머리 위로 올라서더니 어지간한 건물 2층 높이까지 올라간다. 동시에 유렌은 지독한 구토감과 어지럼증을 느끼고 입을 틀어막았다.
스와디도 사정은 비슷했다. 마력이 요동치는 느낌에 놀라 눈을 떴던 그녀는 아까보다 더 엉망이 된 시야에 순간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을 더듬어 땅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했는데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와중에도 빛줄기만은 확실한 직선이었다.
“……빨리, 빨리 가라고 해요. 어딜 가도 여기보단 나아요!”
“젠장! 이봐요들! 방금 들었죠! 저 빛줄기 주변으로 대피하랍니다!”
여기저기에서 신음이 울렸다.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이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부축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또 번개가 쳤고, 일어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네 발로 기던 누군가가 숯덩이가 됐다. 그 시신에서 괴물이 또 머리를 내밀었지만 사람들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그저 유렌의 손에 목이 떨어져 나가는 괴물을 애써 외면하며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오래된 주택가이니만큼 죽은 사람의 이웃도 있고 가족도 있을 테지만, 절절 끓는 슬픔과 애도를 표시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브란젤 곳곳에 번개가 떨어지고 있었다.
빛줄기는 끊임없이 하늘의 마법진을 조각냈고, 하늘의 마법진은 어떻게든 부스러지고 흩어진 부분을 복구하며 완성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부서진 마법진 조각이 잘게 잘린 금종이 같은 형체를 가지고 팔랑팔랑 땅으로 떨어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눈송이 같았다.
스와디는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저녁나절에 먹은 부실한 식사를 시원하게 게워내고 있는 대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불어난 마력 아래에서 잠잠히 흐르던 낯선 마력, 무서워서 감히 건드리지도 못했던 불 같은 마력까지도 전부 깨워 토해냈다.
그녀의 주변에서 마법망이 가시화되며 화려한 그물망이 펼쳐졌다. 일대의 마법망이 단번에 안정되어 시야가 조금이나마 깨끗해졌다. 하지만 이건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이 상태가 계속되게 하려면 마력이 더 있어야 했다. 겁나는 걸 무시하고 낯선 마력에 다시 손을 댔다.
불 같은 마력은 이제까지 건드리기 무서워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그녀의 말을 잘 들었다. 대량의 마력을 전신에서 마음껏 운용하는 감각이 아주 짜릿했다. 몸뚱이는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넓고 또렷했다. 주변 사람들이 경이와 찬탄을 담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상황이 심각한 걸 아는데도 쾌감과 즐거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 멀리, 제각각 마법진의 중심에 서서 서로를 죽일 듯 마법진으로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은 스와디도 잘 아는 셰비언이었고, 한 명은 새빨간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낯선 미녀였다. 조금 더 자세히 보려는 그때, 서로만 노려보던 둘이 갑자기 스와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와디를 알아본 샤를레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무익한 힘겨루기를 집어치우고 곧바로 땅에 뛰어내렸다. 셰비언이 곧바로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고 머뭇댄 짧은 사이, 그녀는 스와디의 코앞에 서 있었다.
샤를레아가 소맷자락이 때타고 너덜너덜한 왕궁마법사의 로브를 입은 스와디를 발끝부터 쭈욱 훑었다.
스와디는 우리에 갇힌 짐승 보듯 하는 시선에 모멸감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동시에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기고 싶은 충동이 마구 솟아오르는 통에 당혹했다. 혹시 나만 이런 건가 싶어 주변을 살펴보니, 주변 사람들은 심리상태를 따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의 머리와 어깨를 누르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바닥에 처박힌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유렌이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긴 한데, 영 보람이 없다. 가까스로 상체를 들어 올렸다가도 곧장 도로 처박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점점 땀투성이, 먼지투성이가 되어갈 뿐이었다.
스와디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욕을 꿀꺽 삼켰다. 주변의 상태도 상태였지만 야생 짐승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마주보니 도저히 막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 당신은 누군데…….”
“너로구나? 다나의 마력을 빼앗은 애가.”
스와디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고대의 마법사들이 이종족을 직접 살해한 이유가 뭐였겠는가? 그래야만 그들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 마법사가 다른 마법사를 살해함으로써 상대의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건 이젠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오래된 비밀이었다.
스와디는 다나를 죽이고 난 뒤 갑작스럽게 늘어난 자신의 마력에 놀라 허우적대며 옛 자료를 뒤지다 그 사실을 알아냈다. 알고도 차마 다른 사람에겐 말할 수 없어 조용히 간직하고 있었다. 한데 샤를레아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말을 꺼내니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혈액이 몸을 도는 속도가 두 배는 빨라진 듯 몸이 더워졌다.
샤를레아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스와디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전신을 죄어오는 압박감은 더해지면 더해졌지 줄어들지 않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녀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변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빼앗은 마력이지만 정당하게 썼어요. 다나처럼 괴물이나 만드는 데 쓰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고요. 다나 같은 사회부적응자한테 이런 마력이 있다는 건 정신 나간 미친놈에게 칼을 쥐어준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요? 왕궁마법사의 이미지 개선은 죽은 다나가 아니라 산 제가 다 했어요! 나야말로 세상에 도움 되는 사람이야!”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면에서는 확실히 다나보다는 스와디가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고, 인간과 왕궁마법사 따위엔 관심이 없는 샤를레아에게 스와디의 변명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샤를레아는 성큼성큼 스와디에게 다가가 그녀의 목을 덥석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스와디는 거짓말처럼 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발끝이 가까스로 땅에 닿긴 했지만 숨이 막히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본래 피는 피로 갚는 거야.”
샤를레아가 스와디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목을 꺾어버리고도 남을 테지만, 일부러 적당히 힘을 주었다 뺐다 하며 고통을 늘렸다. 컥컥대며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버둥대는 스와디를 보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력이 늘어났을 땐 좋았겠지. 감각이 예민해지고 아픈 곳도 없어지고, 마법 쓰기도 예전보다 훨씬 쉬워졌을 거야.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니까 행복했어?”
“허억, 컥, 컥…….”
“훔쳐서 얻은 것은 언젠가 잃어버리기 마련이야.”
스와디의 저항이 점점 줄어들었다. 샤를레아가 마지막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려는 순간, 금빛 마력이 스와디를 감싸고 샤를레아의 손을 밀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스와디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놀란 샤를레아가 다시 손을 뻗었지만, 보이지 않는 막이 스와디를 지키고 있어 다시 잡을 수가 없었다. 몇 번 더 시도하던 샤를레아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
“셰비언!”
“그렇게 안 불러도 내 이름 알아.”
셰비언이 여유롭게 땅에 내려섰다. 스와디가 그의 뒤로 엉금엉금 기어 숨으니, 셰비언이 팔을 펴서 그녀를 감춰주었다. 그 꼴을 본 샤를레아의 얼굴에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분노만 남았다.
“저 빌어먹을 마법사가 다나를 죽였어. 다나를 죽이고 그 애의 마력을 빼앗았다고!”
샤를레아가 주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질렀다. 셰비언은 기지개를 켜는 척까지 하며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알아.”
“안다고?”
“아니까 미리 방어막을 둘러놨지. 나도 눈이 있고 머리가 있는데 설마 몰랐겠어? 게다가 이 마법사는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좋아해서 여기저기에 자신을 많이 노출했거든. 모를 수가 없었지.”
“알면서, 다 알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심지어 방어막을 둘러놔?”
샤를레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알면서도 셰비언이 자신을 막아섰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듯 했다. 눈알의 핏줄이 툭툭 터져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알면 내놔. 복수는 내 권리야!”
“하늘을 봐라. 내가 주게 생겼나.”
하늘에서는 두 마법진이 아직도 서로 엉겨 붙어 치열하게 힘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샤를레아도 셰비언도 자리를 비운 상태라 어느 쪽이 더 유리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마법진 조각이 바람에 실려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이 마법사를 네게 주면, 넌 바로 목을 꺾고 네가 다나에게 주었던 마력을 도로 찾아가겠지. 내가 미쳤어? 적에게 좋은 일을 해주게?”
“적? 내가 네 적이라고? 왜? 이깟 인간들이 뭐라고, 인간의 도시 하나쯤 날리는 게 뭐라고 우리가 적이 돼? 셰비언, 너와 난 둘밖에 남지 않은 동족이야!”
“맞아, 우린 둘밖에 안 남은 동족이지. 근데 그래서 뭐? 동족이라고 무조건 편들 거였으면 전쟁은 왜 했대? 내 옆구리 반으로 가른 게 누군데 새삼 동족을 찾고 있어?”
셰비언은 얄밉게 이죽거리며 샤를레아의 약을 올렸다. 그는 다나를 잃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샤를레아를 믿을 수 없었고, 그랬기에 그녀에게 마력을 돌려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심장이 반쪽밖에 없는 주제에 마력까지 덜어내 약해진 지금이야말로 그녀의 목을 물어뜯기에 딱 좋은 때였다.
“샤를레아, 네 심장 반쪽을 가져간 게 나라는 걸 벌써 잊었어?”
“……잊지 않았지. 그래, 이렇게 된 거 부족한 반쪽은 네 걸로 채워볼까?”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샤를레아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그녀의 주변에서 마법망이 와르르 들끓으며 일대에 유황 냄새가 진하게 퍼졌다. 인간의 모습 위로 붉은 형체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그대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심산인 것이다.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찬 브란젤에서 본체로 깽판을 치기 시작하면 도시가 폐허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셰비언은 정말 인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샤를레아의 태도에 감탄사를 뱉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다나와 어울렸으면서 예전과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와, 그 더러운 성질머리는 여전하네. 하긴, 변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지.”
셰비언이야 오드리 때문에 인간과 최대한 시간감각을 맞추고 있다지만, 샤를레아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다나를 잃은 후로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시간은 거의 멈춰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쨌거나 셰비언은 샤를레아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었으니만큼 그녀가 본체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할 것도 짐작했다. 마침 오드리가 브란젤을 비웠겠다 마음에 걸리는 게 없어 거칠 것도 없으니, 그는 여러 선택지 중에서 가장 효율이 높은 걸 골랐다.
샤를레아가 절반쯤 몸을 바꿨을 때, 하늘에 떠 있던 셰비언의 마법진이 바닥으로 떨어져 샤를레아에게 달라붙었다. 금빛 마법진은 그대로 거대한 그물이 되어 그녀를 꽁꽁 옭아매기 시작했다. 샤를레아가 성질을 내며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댈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렸다.
“이 빌어먹을 것!”
“오랜만에 당하니까 반갑지 않아?”
“닥쳐!”
짜증스럽게 몸을 털어댈수록 마법진은 더 집요해졌다. 심지어 스스로 몸집을 줄여가며 샤를레아의 몸뚱이를 파고들기까지 했다. 결국 샤를레아는 본체로 돌아가길 포기하고 인간의 모습을 다시 취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진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지만, 마치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처럼 2층 건물 높이에서 멈춰 서서 계속 빛을 뿜어냈다.
그 짧은 새에 전신을 땀으로 흠뻑 적신 샤를레아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심장이 반쪽밖에 없는 데다 마력이 부족한데, 본체로 돌아가려다 실패한 여파가 너무 커서 몸이 덜덜 떨렸다. 마법진 그물 따위 찢어버리고 날아오를 셈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게 분해 미칠 것 같았다.
“아주 징그럽게 개량했네.”
“그럼 당연히 개량해야지. 발전이 없으면 쓰나. 어쨌거나 이젠 내 차례야.”
셰비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름드리나무도 단번에 꺾어버릴 듯 흉흉한 기세의 벼락이 샤를레아를 후려갈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샤를레아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연달아 떨어지는 벼락을 고스란히 맞았다. 그녀의 무릎이 꺾이는 순간, 주변의 사람들은 어깨를 눌러대던 압박감에서 벗어나 개미새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질러대는 비명이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워 울렸다.
셰비언은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 벼락을 때리며 샤를레아를 살폈다. 아무리 예전 같지 않다지만 고작 벼락 따위에 샤를레아가 죽을 리 없었다. 하물며 그녀는 화산섬을 영지로 삼고 용암을 바닥에 깔고 자는 화룡이었다.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자꾸 뒤에서 부스럭대는 기척이 거슬렸다.
“스와디 씨, 계속 내 뒤에 숨어 있을 거예요?”
“네? 네?”
“들어서 짐작했겠지만, 당신이 샤를레아의 손에 죽으면 일이 아주 골치 아파져요. 빨리 도망치든지 아니면 인생에 크게 미련 갖지 말고 자살하길 추천해요. 둘 다 어렵다면 내가 죽여줄까요?”
점심 메뉴로 뭐가 좋은가요? 생선? 아니면 고기? 딱 그런 질문을 하는 것처럼 평이한 어조가 스와디에게는 지독한 공포로 다가왔다. 일어나 도망치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영 말을 듣지 않으니, 그녀는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났다. 터무니없이 느린 속도였다.
“그렇게 느려서야 도망치는 의미가 없을 텐데요.”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꼭…… 꼭…….”
“스와디 씨, 평소 왕궁마법사는 왕국을 위해 헌신할 의무가 있다고 했었죠? 일반적으로 헌신이라는 말에는 목숨도 들어가는 걸로 아는데…….”
셰비언이 슥 뒤를 돌아보았다. 희고 길쭉하게 변한 동공을 확인한 스와디가 벌벌 떨며 딸꾹질을 시작했다. 오줌이 새어나와 옷을 더럽혔지만 그녀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셰비언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유렌이 나타나 스와디를 덥석 어깨에 올렸다.
“아르젠 남작님, 스와디 씨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쓸모 있는 마법사라서요!”
“지키지 못하면 죽여야 해요. 할 수 있겠어요?”
“해야죠. 제 검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남작님이야말로 이쪽에 이렇게 신경을 쏟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늘의 마법진이 저렇게 완성되어 가는데?”
셰비언이 흘끗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유렌의 말대로였다. 조금 전까지 셰비언의 마법진과 뒤엉켜 힘겨루기를 하던 샤를레아의 마법진은 방해가 사라지자 빠른 속도로 제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꽃이 쏘아 올리는 빛줄기가 남아 있긴 해도 지극히 연약했다. 누가 봐도 불안할 만한 모습이었으나 셰비언은 그저 태평했다.
“곧 깨뜨릴 거니까 그건 걱정 말아요. 하지만 그때까지 괴물이 계속 나타나긴 하겠네요.”
“괴물이 나타난다고요?”
“내 상대는 저쪽에 있고, 난 지금 괴물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신경 쓰지 못해요. 무슨 뜻인지 알죠?”
“뭐, 본래 자기가 누울 자리 정도는 자기가 청소해야 하는 법이죠. 남작님, 그럼 저는 이만 바빠서.”
유렌은 축 늘어진 스와디를 한 번 추어올리곤 재빨리 돌아섰다. 이젠 거의 빛기둥처럼 보이는 벼락 속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샤를레아의 그림자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타고 왔던 말은 한참 전에 도망쳐 버렸기에, 그는 스와디를 업고 제 발로 달려야 했다. 하지만 흥분상태에 놓인 심장이 미친 듯이 피를 돌리는지 스와디의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텅 빈 골목길을 마구 뛰는 와중 등 뒤에서 굉음이 울리더니만 하늘이 번쩍거렸다. 밤인지 낮인지 모르도록 주변이 일시에 환해졌다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본능에 가까운 공포가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사라졌다.
‘빌어먹을, 신화시대 끝난 지가 언젠데 이 난리야!’
그는 이 흥분상태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빌었다. 제발 셰비언과 샤를레아에게서 한 걸음이라도 더 멀어졌을 때, 누군가 안심할 만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때 쓰러질 수 있기를.
* * *
브란젤의 하늘을 죄다 덮고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마법진은 멀리서도 아주 잘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몇 번이고 떨어지는 벼락도 마찬가지였다. 태풍이 왔어야 할 계절에는 그저 조용하더니 지금은 브란젤 상공에 신들이 모여 싸우는 것만 같았다.
오드리는 잠든 하델을 천천히, 하지만 끈질기게 깨웠다. 하델은 몸을 흔드는 손길이 싫어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지만 결국엔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누나?”
“정말 잘 자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어.”
부스스 눈을 비비던 하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조금 전에 깨어났을 때는 더 자라더니 갑자기 왜 깨우느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투정이 쑥 들어갔다. 오드리가 당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몸에 꼭 맞는 승마복을 입고 있었다.
“이 시간에 집에 가려고요?”
“하델, 잠깐 내려와.”
하델은 영문도 모르고 오드리의 손에 끌려 창문 앞에 섰다. 창문을 열자마자 저 멀리서 우르릉 울리는 천둥소리가 방으로 밀려들었다. 번개가 번쩍이는 하늘을 확인한 하델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저 번개, 아르젠 남작이죠? 브란젤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설마 또 괴물일까요?”
“아마 그렇겠지. 하델, 이디케를 두고 갈 테니 넌 저 하늘이 잠잠해지면 그때 브란젤로 와.”
“누나는요?”
“난 지금 가야지.”
하델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진이 맴돌고 벼락이 떨어지는 브란젤은 언뜻 봐도 매우 위험했다. 이런 때에 브란젤 밖에 있음을 감사히 여겨야 할 일이었다.
“미쳤어요? 목숨 아까운 줄 몰라요? 저번에 괴물이 누나만 따라다녔던 거 벌써 잊어버렸어요?”
“으음……. 미치지도 않았고 잊어버리진 않았는데, 셰비언이 이젠 괴물이 따라오지 않을 거라고 했어. 그거면 되지 않을까?”
태평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알신다의 죽음 이후 오드리를 예전처럼 대할 수도 없고 그녀가 나름 응분의 대가를 치르기를 바란 것도 맞는데, 그렇다고 죽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안 돼요. 수확제 때 기억 안 나요? 괴물이 쫓아오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전부 무사했던 건 아니잖아요.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저길 가요?”
“괜찮을 거야. 그런 느낌이 들어.”
“느낌은 무슨 얼어 죽을…….”
“하델, 잔소리라면 아까 이디케와 베텔 경에게 실컷 들었어. 너에게까지 듣고 싶진 않구나. 내가 굳이 널 깨운 건 상황 설명 정도는 해주고 가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그런 거야. 그리고 혹시 모르지만 어쩌면 내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인사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거 같더라고.”
아무리 말이라도 그렇지,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닮은 얼굴로 죽는다는 말을 하다니. 하델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지막 인사 따위 달갑지 않으니까 가지 말라면 가지 마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제일이에요.”
“하델, 내가 없으면 랄리우스 후작위도 만탈락도 다 네 거야.”
“그래서요?”
하델이 한쪽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랄리우스 후작위, 만탈락, 좋죠. 명예로운 작위와 부유한 도시라니, 어떻게 싫겠어요? 하지만 제 것도 아닌 걸 받고 싶진 않아요. 그것도 피붙이가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거라면 더더욱 싫어요. 어머니가 누나에게 주고 싶었던 거라면 그대로 하는 게 맞아요. 명예를 아는 귀족이라면 그래야죠.”
하델의 어조는 아주 단호했다. 표정도 신념으로 빛나긴 마찬가지였다.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으려다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순진하네. 정직함은 그저 미덕일 뿐인데 그걸 명예로 알다니.’
오드리와 하델은 피를 나눈 남매인 동시에 부모의 유산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였다. 한쪽이 없으면 남은 쪽은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었다. 작위, 막대한 재산, 선조들이 쌓아온 명예, 이 모든 것들을. 그것들을 가질 수 있는데 과정에 약간의 더러움이 있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가진 자에게 훨씬 관대하고 친절한 게 세상인데.
오드리는 원칙을 말하는 하델을 내심 비웃다가 갑자기 입안이 씁쓸해지고 말았다. 열셋이 어린 나이라지만 열여덟도 어리긴 마찬가지였다. 고작 다섯 살 차이가 날 뿐인데 이렇게까지 다른 이유가 대체 뭘까. 매번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던 이디케를 생각하자 가슴께가 답답해졌다. 그녀는 짐짓 명랑한 웃음을 짓고 하델의 이마를 콕 찍었다.
“어제 도서관에서 유언장 확인하고 픽 쓰러진 게 누구였더라? 만탈락과 랄리우스 후작위가 네 몫이 아니었다는 게 그만한 충격이었나 싶어서 내가 다 놀랄 정도였는데.”
“그런 것 때문에 충격 받은 거 아니에요.”
하델이 오드리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 냈다. 아직 애티가 남은 얼굴에 뭐라 말하기 힘든 혐오가 진하게 떠올랐다.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진지하게 작성했을 게 분명한 유언장을 그따위로 왜곡한 아버지의 행동이 충격적이었던 거죠. 난 아버지를 정말 존경하고 사랑했어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었단 말이에요. 고결한 귀족이며 다정한 아버지……. 그런데 그따위 짓을 했다니요. 부끄럽지만 믿기 싫었어요.”
“고작 열 살 나이에 집에서 쫓겨난 누나가 있는데도 아버님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겼다니, 그거 놀라운걸. 고결한 귀족은 그렇다 쳐도 보통 다정한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나이 어린 자식을 멀리 보내지 않아.”
“……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땐 이미 만탈락이 부유했으니까요. 누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유롭게 풀어준 거라고요.”
“그거 참 놀라울 정도로 제멋대로인 착각이구나. 아버지가 이상하게 날 미워한다고 네 입으로 말했던 건 그냥 그런 입발림이었나 보지?”
오드리의 빈정거림은 퍽 효과가 있었다. 하델은 얼굴을 붉히고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방향이 하필이면 창문 쪽이었기 때문에, 번쩍거리는 브란젤의 하늘을 정면으로 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한쪽 눈을 감고 아버지를 보고 있었던 거죠. 이해되지 않는 건 뒤로 미뤄 버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어렸어요.”
“지금은 안 어리고?”
“어리죠. 그러니까 누난 이 어린애를 남겨두고 가지 말아요. 만약 저 소동 속에서 아버지도 누나도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지니까. 비레직만으로도 벅찬데 남부 대평원에 만탈락까지……. 난 감당 못해요.”
“아버진 왕궁에 계실 테니 네가 걱정하는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왕궁은 브란젤에서 마법망이 가장 안정적인 장소 중 하나야. 엉뚱한 상상으로 미리 자신을 괴롭히지 마.”
오드리의 충고는 몹시 다정하게 들렸다. 더불어 약간 차가운 손이 살짝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하니, 사이가 틀어진 이후 이런 적은 처음이라 하델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하나 그녀가 왜 그러는 건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오드리가 강제로 하델의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누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미리 준비하는 건 현명한 일이지만, 그에 사로잡히지는 마. 아버지도 나도 괜찮을 거다. 넌 네 몸이나 잘 챙겨.”
“도대체 왜 그렇게 브란젤에 가려고 하는 거예요? 누나가 괴물 나오는 브란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다고? 아버지 때문은 아닐 테고……. 설마 아르젠 남작 때문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죠?”
하델이 한껏 빈정대며 셰비언을 언급했지만 오드리는 그저 웃었다. 우스운 얘기였지만 하델의 말이 맞았다.
오드리는 첫 번째 벼락이 떨어지기 조금 전에 잠에서 깼다. 엄습하는 불안과 짜증, 초조함 속에서 연신 방을 서성댔다. 그러다 안 될 걸 알면서도 셰비언과의 연결을 시도했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맛봤다.
전에는 닫힌 문 앞에서 서성대다가 그냥 돌아온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튕겨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더불어 불구덩이에 발을 담갔던 것처럼 발이 화끈거리고 온몸을 큰 바늘로 쑤셔대는 듯한 통증도 있었다.
거리가 지나치게 멀어지면 연결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듣긴 했지만 이런 증상까지 들어보지는 못했던지라 몹시 당황스러워하던 와중, 첫 번째 벼락이 떨어지고 뒤늦은 천둥소리가 귀를 때렸다.
몸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뒤엉켜 싸워대는 마법진, 연신 떨어지는 벼락, 귓전을 찢는 천둥소리……. 셰비언이 누구와 싸우는지도 짐작되고, 가봐야 별 소용없는 데다 짐만 될 거라는 것도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벼락이 한 번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쿵쾅거렸다.
“바보짓인 건 나도 알아.”
“아르젠 남작은 누나가 지금 브란젤에 없다는 걸 아주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겼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런데 그래서 뭐?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고, 그러니 당장 브란젤로 가 봐야겠어. 어차피 도착할 무렵엔 해가 뜰 텐데 그때까지는 뭔가 일이 결판나지 않겠니?”
“그럼 아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왜……. 아니다, 그냥 나도 갈래요. 누나 말대로라면 걱정할 건 하나도 없는 거잖아요?”
하델은 곧바로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어차피 거의 외출복과 다름없는 상태로 잠들었기 때문에 겉옷을 입고 목도리와 모자 등만 챙기면 바로 나가도 됐다. 그러나 하델이 조끼에 팔을 꿰고 단추를 잠그기도 전에 오드리가 그를 제 앞으로 훅 끌어당겼다. 버티려고 애쓴 보람도 없이 쑥 끌려온 하델이 어이없어 하며 미간을 좁혔다.
“누난 대체 뭘 먹고 이렇게 힘이 세요? 나도 만탈락에서 지내면 힘이 세질까요?”
“내 힘은 타고난 거야. 그보다 내가 데려가준다고도 안 했는데 대뜸 옷부터 입다니, 누가 내 동생 아니랄까 봐 대책 없는 행동력까지도 나랑 비슷하면 어떡해?”
“누난 누나 마음대로 할 거라면서요. 나도 내 맘대로 할 거예요.”
오드리는 자신이 고집을 부릴 때마다 한숨을 토하며 가슴을 치던 락시 부인과 이디케의 심정을 이해하고 말았다.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 게 아주 얄미웠다. 하델의 정수리 위로 오드리의 한숨이 쏟아졌다.
“너는 여기서 따로 할 일이 있어.”
“그게 뭔데요? 누나 걱정? 아버지 걱정? 그놈의 가문 타령 할 거면 말 꺼내지도 마요. 나 혼자 안전한 곳에 남아서 속만 태우는 경험은 한 번이면 되거든요?”
하델이 제 하고 싶은 말을 줄줄이 꺼내놓는 가운데 오드리가 허리춤에 매달아놓았던 작은 가방에서 한 뼘이 될까 말까 한 사이즈의 원통을 꺼냈다. 그건 로렐라이 특제 보관함으로, 피를 흘려 넣어 열 수 있는 사람을 지정하는 제품이었다. 에드와 상단에서 내놓은 제품을 복제하려다 실패한 물건이긴 해도 오드리는 나름 유용하게 써왔다.
오드리는 하델의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려 넣으려고 했지만, 대번에 상황을 눈치챈 하델이 후다닥 물러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델이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하게 오드리를 노려보았다.
“그거 뭔데 피가 필요해요?”
“하델, 내 미래를 너한테 맡길게. 내가 브란젤에서 죽으면 이걸 곧바로 왕비 전하께 가져가. 어머니의 유언장이 들었어.”
“싫어요, 내가 그런 걸 왜 해요? 누나가 살아서 직접 해요.”
“만약을 대비하는 거야. 시체가 갖고 있던 물건만큼 몰래 처리하기 쉬운 게 없고 조작하기 쉬운 게 없어. 안 그래도 파격적인 유언장인데 산 사람이 입을 떼야지. 넌 이해당사자니까 의도를 의심받을 일도 없고.”
“웃기지 마요. 내가 아무리 세상물정을 몰라도 그렇지, 그런 말에 냅다 넘어갈 것 같아요? 본인이 살아 있는 것만큼 강한 주장은 없어요. 죽은 자의 메시지는 허망할 뿐이에요. 근 십 년이 지나서야 빛을 볼까 말까 한 그 유언장처럼 말이죠.”
하델은 거침없이 오드리를 협박했다. 이걸 맡기고 떠나면 바로 바다에 던져 버릴 거다, 혹시 잘 보관하더라도 누나에겐 절대 주지 않겠다, 왕비 전하는 이런 게 있다는 것도 모르게 될 거다, 누나가 죽기라도 하면 말할 것도 없이 바로 폐기처분할 거다, 나한테 그걸 맡기는 건 정말 멍청한 결정이다…….
오드리는 잘 익은 토마토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하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제 눈에 눈물이 고인 것도 모르고 빽빽거리는 게 몹시 귀여웠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같이 자라지도 않았고, 쌓인 추억도 정도 얄팍하고, 때때로 질투하고 미워하고 어느 날은 원망하기까지 한 동생에게 막연히 믿음이 간다는 게 말이다.
“나도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결정을 했다는 건 알아. 브란젤로 가는 바보짓이랑은 또 다른 방향의 멍청함이지. 맞아, 정말 그래……. 하지만 넌 아버지랑은 다르니까, 믿어볼까 해.”
“누나……. 제정신이에요? 뭘 보고 날 믿어요? 내가 아버지 설득에 홀딱 넘어가면 어쩌려고? 누나가 살아서 돌아와도 안 돌려주는 수가 있어요. 유언장은 누나가 갖고 제발 저기 가지 마요.”
“네 이득과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한 네 고결함을 믿어. 난 너만치 고결하지 않고 정직하지 않으며 선하지도 않지만, 때때로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사람들이 역사를 바꾸는 건 알거든.”
“평이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내가 그 유언장 읽자마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아요? 확 없애 버리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을 한 내가 너무 끔찍하고 더러워서 지금도 토할 것 같은데, 나한테 그걸 맡긴다고요?”
“그 정도로 자기반성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충분해. 만탈락과 랄리우스 후작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이득에도 제 피붙이 죽이는 것쯤은 우습지도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새삼 읊어줄까? 비슷한 예시를 원한다면 수십 개도 댈 수 있어. 네가 그런 사람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도 좋다면 계속 거절해.”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안 가고 안 맡기는 게 제일 좋아요. 그 선택지는 있어요?”
“있겠니?”
“아, 정말이지 이 고집불통…….”
미간을 좁히고 한참 생각하던 하델이 굉장히 싫은 표정을 짓고 손을 내밀었다. 오드리는 웃는 낯으로 그 작은 손에 밀리나의 유언장을 맡겼다. 사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어떤 결과가 오든 이 순간의 결정을 후회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오드리의 말, 윈디는 자다 말고 한밤중에 끌려 나왔음에도 아주 팔팔했다. 어제 한참 뛴 것쯤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오드리에게 얼른 타라 몸을 들이미는 걸 본 카프러스가 어이없어 할 정도였다.
“저렇게 뛰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 아가씨가 안 계신 동안을 어떻게 견뎠나 모르겠습니다.”
“그게 우리 윈디의 특별함이죠. 베텔 경, 윈디 탐내지 말아요.”
“제가 고삐 잡는 것도 싫어하는 녀석을 탐내서 뭐 합니까? 저도 저 좋다는 말이 좋습니다.”
오드리가 깔깔 웃으며 안장에 올랐다. 그녀는 푸르죽죽한 안색을 한 하델에겐 인사 한 마디 없이 브란젤을 향해 내달렸다. 카프러스가 다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멀어져 가는 둘을 보던 하델이 소리 내어 투덜거렸다.
“자긴 이성적인 사람이라더니, 순 거짓부렁…….”
“동감이에요. 아가씨는 중요한 순간에 감정적이 된다니까요.”
유의미한 무력이 없고 카프러스보다 말도 못 탄다는 이유로 남겨진 이디케가 하델의 옆에서 부드득 이를 갈았다. 무려 용씩이나 되는 셰비언이 연인 한 명 못 지킬 것 같진 않지만, 오랜만에 말리지 못할 똥고집을 겪고 나니 화딱지가 나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백 날 천 날 이성을 강조하면 뭐 해요, 딱 한 번으로 이제껏 해온 걸 다 말아먹는데! 내가 진짜 우리 아가씨만 아니면…….”
“이디케, 말 끌고 나와. 우리도 바빠.”
“네? 설마 따라가시게요?”
“아니. 누나는 자기가 죽을 때를 대비했지만 난 살 때를 대비하려고. 유언장을 써먹을 때까지는 누나와 내가 이 성만 콕 집어 들렀다는 걸 아버지가 알면 안 되잖아? 변명거리를 만들어야지.”
이디케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하델이 인상을 쓰고 이디케를 채근했다.
“설명 다 해줬는데 왜 아직도 가만 서 있어? 빨리 말을 내와. 날이 밝기 전까지 최대한 비레직 영지 가까이에 가야 해. 가다가 중간에 돌아왔다는 흔적을 남기려면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해.”
하델은 멀리 브란젤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세며 크게 심호흡했다. 겨우 하룻밤 만에 세상이 바뀐 것처럼 모든 게 낯설었다.
* * *
연신 떨어지던 벼락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수십 갈래로 나뉘어 하늘을 찢어발겼다. 번쩍번쩍 빛을 내던 하늘의 마법진 귀퉁이가 수십 조각으로 쪼개져 땅으로 떨어졌다. 아까까지 눈송이처럼 흩날리던 금빛 조각은 이제 개선식 행사에서 뿌리는 종잇조각 정도의 크기가 되어 팔랑거렸다.
빛줄기 근처로 피하라고 누가 말하고 다닌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빛줄기 근처에서 본능적인 안정감을 느끼는 듯했다. 마력의 충돌 때문에 앞을 보는 데에 곤란을 겪던 왕궁마법사들도 빛줄기 근처에서는 나름 깨끗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데다 마법망 안정화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잘됐기에 그 근처에서 계속 머무르며 사람들을 추슬렀다.
시간이 지나며 하늘의 마법진이 형태를 잃어갈수록 땅에서 솟아오르는 빛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진해졌다. 가끔은 없던 빛줄기가 새로이 생겨나기도 했다. 왕궁의 온실에서 솟아오른 빛줄기가 그랬고, 헨젤가 정원에 솟아오른 빛줄기가 그랬다.
일자리를 포기하고서라도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헨젤가의 고용인들은 정원에서 빛줄기가 솟구치자 적잖이 안심했다. 그들은 두꺼운 겉옷을 걸치고 빛줄기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아가씨가 아르젠 남작과 연인이라서, 그래서 이렇게 특별대우 해주는 거 맞지?”
“모르지 뭐. 그래도 그 이유가 없진 않을걸.”
“세상에, 내가 우리 아가씨 연애하는 덕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누가 아니래. 그런 아가씨를 어떻게 모시느냐고 놀림이나 당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진짜 감격스럽다. 지금쯤 이 빛줄기 보면서 다들 부러워서 죽으려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다음에 만나면 나도 드디어 자랑이란 걸 해 볼 수 있겠어. 만날 자랑 들어주기만 해서 짜증났었는데. 우리 아가씨가 일처리는 깔끔하시지만 그걸 자랑하기는…… 솔직히 좀 그렇잖아.”
“맞아, 맞아.”
속닥속닥 떠들어대는 말이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들었지만, 집사도 릴리도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그런 말이라도 해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면 그게 나았다.
그러나 고용인들 사이에 끼어 떠들어댈 수 없어 구석에 오도카니 혼자 앉은 네이기스가 불안을 해소할 방법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왕립은행의 열쇠를 부적처럼 손에 쥐고 자신을 다스렸지만, 천둥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네이기스가 천둥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이렇게 심장을 졸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치안대원으로서 저 번개 속을 헤집고 돌아다닐 피올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거야 듣고 보아 잘 알고 있지만, 그거야 일반적인 상황에서나 통할 얘기다. 지금은 마치 신화 속의 한 장면이 현실로 나타난 것만 같은 때이지 않은가.
쿠르릉…….
또 하늘이 번쩍이더니 천둥이 울렸다. 마음 졸이고 걱정밖에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눈가가 습해졌다. 이런다고 그가 알아주지도 않겠지만, 굳이 알아주길 바라고 짝사랑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불현듯 거센 충동이 밀려왔다.
‘가볼까?’
갈까, 직접 가서 그의 무사함을 확인하면 이 가슴의 통증과 불안이 조금은 나아질까. 빛줄기가 비추는 정원은 단정하고 소곤소곤 말을 나누는 고용인들은 평화로운데 네이기스의 속은 끓는 물처럼 제멋대로 요동쳤다.
꿀꺽 목을 넘어가는 침이 불에 달군 쇠구슬처럼 괴로운 순간, 큰 머그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온 다이앤이 혼자 있는 네이기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가씨, 우유라도 한잔하실래요?”
“……고마워.”
네이기스는 다이앤에게서 뜨거운 김이 오르는 우유가 담긴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설탕과는 다른 단맛과 낯선 향기가 입과 코를 가득 메우다가 아련히 사라졌다.
“아가씨, 어때요? 맛있죠?”
“으음……. 특이한 맛이야. 달긴 단데 향이……. 응, 맛있네. 뭘 탔어?”
“남부 지역 특산 꿀이에요.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좀 좋아질까 해서 타드렸는데……. 영 효과가 없나 봐요. 아가씨 표정이 여전하네요.”
네이기스는 어떻게든 입가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좀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녀는 무의미한 노력을 그만두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다이앤이 제 몫의 잔을 들고 네이기스의 옆에 앉아 우유를 홀짝거렸다.
본래 네이기스를 챙기던 건 릴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하늘에 마법진이 나타나고 벼락이 떨어지며 천둥이 울리는 상황이 오자 하녀장의 역할에 좀 더 집중해야 했고, 결국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다이앤이 네이기스를 떠맡게 되었다.
다이앤은 네이기스를 퍽 세심하게 챙겼다. 말동무를 해주는 건 물론이고 방에서 나올 엄두를 못 내는 네이기스를 달래 정원에 데리고 나오고 따뜻한 겉옷을 챙겨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앤에게 네이기스는 오드리가 아끼는 사촌 동생인 동시에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멋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 다이앤의 방엔 네이기스의 초기작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아가씨, 다음 작품은 뭘 할지 정하셨어요?”
“마릴린 구스토와 협업을 할 거야. ……뭐, 내 답이 워낙 늦어서 그쪽의 마음이 아직 안 변했어야 가능한 얘기지만은.”
“오, 마릴린 구스토면 유명한 동화작가잖아요. 역시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가씨 그림에 반하는 게 당연하다니까요. 마릴린 구스토의 마음이 변했을 리 없으니 저는 편하게 책 나올 날만 기다리면 되겠네요.”
다이앤이 지칭한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은 피올이 아닐 텐데, 네이기스는 곧바로 피올을 떠올렸다. 그녀의 그림을 처음으로 알아보고 앞날을 응원해 준 사람. 등 떠밀려서 한 응원이라도 그의 응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한때는 집에 돌아가라는 요구로 그림을 접게 만들었던 그를 무던히도 원망했었지만, 지금 떠오르는 건 그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스케치북을 불 속에서 꺼내다 주었던 순간뿐이었다.
불에 그을려 꼬불꼬불해졌던 머리칼, 뺨에 말라붙어 검댕처럼 보였던 핏자국, 건져 온 게 이것뿐이라 미안하다던 목소리. 피 흘리는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는 듯 웃던 얼굴.
바로 그때, 네이기스의 코앞에 벼락이 떨어졌다. 그녀는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란 흰 빛이 불룩 솟은 정원석을 후려갈기고 사라지는 걸 신기하게 바라보았다가, 귓전을 때리는 천둥소리를 듣고서야 그게 번개였다는 걸 깨달았다. 기겁한 다이앤이 네이기스를 뒤로 잡아당겼다.
“세상에, 큰 일 날 뻔했네! 아가씨, 이리 오세요. 이런, 놀라셨나 보다. 떨고 계시잖아요.”
“나…… 방금 죽을 뻔했던 건가?”
“아르젠 남작이 실수할 때가 다 있네요.”
네이기스는 고작해야 한 발자국 거리에 남은 검은 자국을 멍하니 들여다보다 고개를 돌려 광장 방향을 바라보았다. 번개 한 줄기가 또 하늘을 찢었다. 그 순간, 몸의 떨림이 싹 가라앉고 온갖 생각으로 어지럽던 머릿속이 단숨에 명료해졌다.
“……역시 가봐야겠어.”
“네? 그웬가로 가시게요? 이 시간에, 그것도 이런 상황에요? 안 돼요, 아가씨.”
“거기 말고.”
“너무 걱정 마세요, 다들 무사히 잘 계실……. 그웬가가 아니면 어딜 가시려고요? 아가씨!”
네이기스가 벌떡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정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다이앤이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가느다란 몸에서 무슨 힘이 그리 솟아나는지, 도대체 당할 수가 없다. 그녀는 질질 끌려가며 애원했다.
“아가씨, 안 돼요! 위험하다고요!”
“어차피 이 안도 위험해. 그럼 보고 싶은 걸 보아야겠어.”
“안 돼요! 릴리! 릴…… 읍! 으읍!”
“조용히 해.”
다급히 릴리를 부르던 다이앤은 입을 틀어 막힌 채로 읍읍 신음소리를 흘렸다. 밀어낼 수도 때릴 수도 없는 처지에 속으로만 마구 한탄하는 와중, 네이기스가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새카만 밤을 품고 긴 속눈썹을 지붕삼은 연두색 눈동자는 깊은 그림자 때문에 마치 오드리의 초록색 눈동자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 안에 담긴 고집까지도 똑같았다.
“난 가야 해. 지금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야. 다이앤, 이 일로 어떤 결과가 오든 네게 책임을 묻진 않을 테니 조용히 해. 명령이다.”
명령이다, 단호하게 끝나는 어미에 담긴 의지가 아주 확고했다. 네이기스는 다이앤이 온순해진 걸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레 손을 뗐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다른 곳으로 샌 거야. 넌 모르는 일이야. 알겠지?”
“…….”
“미안해, 다이앤.”
네이기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사과하고 돌아서는 걸, 다이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장담도 받았겠다, 딱 한 번만 눈 질끈 감으면 그만인데 무언가가 속에서 꿈틀거렸다. 저 흰 양 같은 아가씨를 이대로 내보내도 되는 건가?
“……아가씨! 잠깐만요!”
“다이앤? 왜? 장담만으론 부족하니?”
“그게 아니라…….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정말 잠깐이면 돼요.”
다이앤은 네이기스를 잡아 붙들어놓고 후다닥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황급히 제 방을 뒤져 새하얀 케이프 코트를 꺼내왔다. 그건 작년에 셰비언이 오드리에게 주었던 천으로 만든 코트였다. 오드리는 천을 창고에 처박은 뒤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오드리에게 그 천으로 만든 옷을 꼭 입히고 싶었던 다이앤은 둘이 사이가 좋아지자마자 곧바로 코트를 짓기 시작해서 최근에야 완성했다.
아직은 오드리도 모르는 옷이건만, 다이앤은 그 코트를 네이기스에게 냅다 둘러 입혔다. 서둘러 단추를 잠그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건 본래 우리 아가씨 드리려고 만든 건데……. 아가씨께 잠시만 빌려드릴게요. 나중에 꼭 돌려주셔야 돼요. 혹시라도 잃어버리면 저 정말 큰일 나요.”
“……응, 따뜻하네. 고마워.”
마땅히 오드리에게 주어야 할 옷을 왜 자신에게 입히는 건지, 혹시 무슨 속셈이 있는 건 아닌지 물을 법도 한데 네이기스는 아무 말 않고 고맙게 받았다. 의심 한 자락 없는 미소가 다이앤의 양심을 쿡 찔렀다.
‘양심? 나한테 양심이 있었어?’
다이앤은 몹시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이려 시도했을 때도, 오드리의 명령으로 사람을 죽일 독을 만들었을 때도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낀 적이 없었다. 한데 의심 없는 미소와 순수한 감사 인사가 대체 뭐라고 바늘이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반면 네이기스는 다이앤이 한번 잡아준 덕에 약간 이성이 돌아온 상태였다. 그녀는 그대로 뛰쳐나가는 대신 마구간에 들러 말 한 마리를 끌어냈다. 브란젤은 발로 뛰어 사람 한 명 찾아내기엔 지나치게 넓은 도시였다.
그렇게 말을 타고 헨젤가의 후문을 나설 때만 해도, 네이기스는 금방 피올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피한 사람들은 빛줄기 주변에 모여 있을 테고, 그들 사이의 질서 유지는 치안대의 몫이니 하나하나 확인해 보면 될 거라고.
그러나 그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다. 혼란스러운 브란젤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아는 얼굴은 믿기 싫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빛줄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도 맞고 치안대원들이 질서 유지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것도 맞는데, 피올이 맡은 일은 질서 유지가 아니라고 말이다.
“치안대원이 질서 유지를 안 하면 뭘 해요?”
“뭐 하긴요, 괴물 잡죠. 그 칼솜씨를 그런 데 써먹지 어디다 써먹는답니까? 레이디 그웬, 피올 녀석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리 오시죠. 상황이 좀 진정될 때까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나는…….”
“마침 여기 있는 마법사 실력도 좋습니다. 아무래도 그 유명한 스와디가 있으니까요.”
유렌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스와디가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마법망 안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화려한 금빛 그물이 사람들의 시선을 죄다 빼앗아 사로잡고 감탄사를 불렀다. 덩달아 잠시 고개를 돌렸던 유렌은 말머리를 돌리는 네이기스를 확인하고 사색이 됐다.
“레이디 그웬! 돌아오시죠! 레이디 그웬! 아, 젠장! 저러다 죽기라도 하면 난 어쩌라고!”
네이기스는 자신을 붙드는 목소리를 외면하고 브란젤 안으로 파고들었다. 안전한 곳에 주저앉아 기다릴 거면 애초 헨젤가를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로등이 툭툭 꺼진 어두운 거리가 순식간에 그녀를 삼켜 버렸다.
샤를레아와 셰비언이 격렬하게 부딪치면서 브란젤의 마법망은 크게 손상됐다. 온도조절마법도구와 보안마법도구 등 예민하고 섬세한 마법도구들이 연달아 고장을 일으켰다. 게다가 어지간한 불안정에도 잘 버티는 마법등까지 픽픽 꺼지기 시작하면서 브란젤의 거리 곳곳이 어둠에 휩싸였다.
네이기스는 가로등이 망가진 어두컴컴한 거리를 조심스럽게 내달렸다. 도시를 감싼 마법진이 주기적으로 빛을 번쩍이는 덕분에 가로등이 없어도 나름 시야 확보가 용이했다. 거리는 시장바닥처럼 시끄럽진 않아도 깊은 밤처럼 조용하지도 않았다. 내도록 집에 숨어 있다가 마법도구가 망가지고 나서야 빛줄기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는 탓이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기름램프에서 흘러나온 누런 빛이 주변을 밝혔다.
그렇게 늦게 피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나이 많은 노인이었고, 가끔은 거동이 어려운 환자와 그 보호자도 있었다. 그들 대다수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족영애인 네이기스를 피해 물러났지만, 목소리를 돋워 도움을 청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 명이라도 더 도와줬을 네이기스이지만, 지금 그녀의 시야는 피올 한 명으로 좁혀진 상태였다.
네이기스는 피올을 찾아 도시의 외곽으로 나아갔다. 본 적 없는 낯선 거리, 가로등 꺼진 골목의 어두운 그림자, 어느 순간부터 하늘에 몰려들기 시작한 먹구름, 늘 네이기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것들 중 어느 것도 그녀를 돌려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마음대로만 흘러가던가? 멀쩡하던 대로가 대엿 개나 되는 골목길로 바뀌고 추레하고 낡은 데다 불까지 꺼진 건물들이 주변에 빼곡해졌을 때, 네이기스는 자신이 길을 잃어버렸다는 걸 인지했다. 텅 비어 조용한 거리엔 말발굽 소리와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 그리고 네이기스 본인의 숨소리뿐이었다. 으레 한두 명은 있을 법한 피난민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덜컥 차오르는 불안감에 말머리를 돌렸지만, 똑같이 입을 벌리고 있는 골목길 중 어느 쪽에서 달려왔던 건지 구분이 안 갔다.
허둥지둥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이곳이 수확제 때 버려진 빈민가 중 한 구역이라는 걸 깨달았다. 골목 구석에 깨지고 버려진 집기가 나뒹구는 걸 보자 뒷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면서도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괴물이 나온다던 곳이 이 근처일까?’
괴물이 있는 곳에 피올이 있을 것이다. 혹 그를 만나기 전에 괴물과 마주치더라도 말이 있으니 도망에는 문제없다. 네이기스는 든든하기 짝이 없는 말의 목을 다정히 두드리고는 본격적으로 빈민가를 돌았다. 수시로 번쩍대는 마법진이 수색을 위한 조명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빈민가 중에서도 사람이 돌아온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다던데, 아무래도 여긴 사람 없이 비어 있던 곳인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사건 초기에 죄다 도망가서 괴물로 변할 사람이 없었거나.
내심 실망을 안고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려던 네이기스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덜컥 멈춰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시선이 묘하게 끈적거리면서도 뜨뜻미지근한 게,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음?”
눈이 마주쳤다. 분명 아무도 없는 골목인데, 이상하게 눈이 마주쳤다는 확신이 들었다. 네이기스는 말고삐를 단단히 쥐고 천천히 골목을 향해 다가갔다.
길바닥에 구르는 날짜 지난 신문지, 깨진 유리창에서 떨어진 유리조각,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망가진 풍등……. 어딘가에서 수도가 새기라도 하는지 가까이 갈수록 곰팡이 냄새가 풀풀 나고, 좁은 골목 어귀에 찰박찰박하게 고인 물엔 쥐 한 마리가 죽어 나자빠진 채다. 어느 모로 보나 버려진 지역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골목 안쪽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쿵쾅거리는 심장을 안고 골목 안쪽을 살피던 네이기스는 찝찝한 기분을 툭툭 털어내고 돌아섰다. 아무래도 우울한 분위기의 골목을 계속 헤매다 보니 조금 예민해진 모양이라고 자신을 달래가면서.
바로 그때, 그녀의 바로 뒤에 벼락이 떨어졌다. 주변이 일시에 환해졌다 어두워지고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폭음이 귀를 찢었다. 히이이잉! 깜짝 놀란 말이 앞다리를 허공에 휘저으며 날뛰었다.
“아, 안 돼! 아악!”
안타깝게도, 네이기스의 승마 실력은 그리 특출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고삐를 움켜쥐고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다리를 모으고 옆으로 타고 있으니만큼 별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몸이 붕 뜬다 싶은 다음 순간, 그녀는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거치적거리는 짐을 떨쳐 낸 말은 제멋대로 달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돌아와! 네이기스는 목이 터져라 말을 불렀지만, 잘 손질된 편자가 돌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녀가 주저앉은 골목은 곧 적막한 고요에 휩싸였다.
네이기스는 주춤주춤 일어섰다. 어깨와 등이 끔찍하게 아프긴 해도 허리나 다리를 다치진 않았는지 서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말에서 떨어지고도 부러진 곳 하나 없이 타박상으로 끝나다니, 올해 쓸 행운을 모조리 끌어다 썼는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몸이 무사한 건 무사한 것이고, 도주의 수단을 잃고 나자 주변의 풍경이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아까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텅 빈 건물은 괴물이 숨은 둥지 같았고, 신문지 구르는 소리는 괴물의 숨소리 같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숨이 턱 막혔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그림자야. 여긴 텅 빈 지역이란 말이야.’
이를 악물고 자신을 타일렀다. 아까는 괴물이 없어서 아쉽다 생각했는데, 이젠 기댈 게 그것뿐인 상황이 됐다. 긴장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땀을 닦으며 말이 사라진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잘 훈련된 말이 빨리 정신을 차렸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전과 똑같이 뜨뜻미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지독한 고기 탄내가 코를 습격했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발이 바닥에 철썩 달라붙었다. 신발 바닥에 접착제라도 발린 것처럼 발이 떨어지질 않으니, 네이기스는 그 자리에 선 채 주춤주춤 뒤를 돌아보았다. 제발 이번에도 텅 빈 골목길이 보이길 빌면서.
하지만 셰비언의 번개는 정확히 목표를 맞췄다. 조금 전까지 아무 것도 없는 듯 텅 비어 있던 골목길엔 번개에 타들어가 까맣게 구워진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누워 있었다. 타서 오그라든 몸뚱이는 네이기스의 키를 훌쩍 넘을 듯 길쭉하고 골목을 모두 메울 듯 넓적했다. 검게 타서 쩍 벌어진 겉가죽 아래로 분홍색 살점이 번들거렸다.
“우욱…….”
네이기스는 귀족영애 체면도 상관 않고 한바탕 토악질을 했다. 그리고 힘이 빠져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오로지 저 괴물의 시신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같은 건 하얗게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조금씩 괴물에게서 멀어질수록 네이기스의 다리에도 힘이 돌아왔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뛰었다. 뛰면 뛸수록 코를 자극하던 탄내가 조금씩 옅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숨이 턱까지 닿도록 뛴 끝에 네이기스는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 그것도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피올이었다. 말을 탄 데다 가로등의 빛을 등에 지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그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절로 마음이 놓이면서 그만 다리가 풀렸다.
셰비언의 벼락이 떨어진 자리를 향해 서둘러 달려가던 피올은 생각지도 못한 네이기스의 출현에 지극히 당황했다. 괴물 수십 마리를 잡으면서도 태연하던 신색이 거짓말처럼 흐트러졌다. 그는 대번에 말에서 뛰어내려 네이기스를 부축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달리 밤바람에 차갑게 식은 뺨을 인지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레이디 그웬? 몸이 왜 이렇게 차갑…….”
“보티안 씨! 무사하셨네요……!”
“저야 당연히 무사하죠! 산트렘의 기사라는 신분은 뭐 도박이라도 해서 땄던 건줄 아십니까? 아가씨야말로 그웬가에 계셔야 할 분이 이런 곳엔 왜 계신 겁니까? 대체 얼마나 밖에 있었기에 몸이 이렇게 차가워요?”
“가출했어요.”
“예에?”
“이젠 집에 안 돌아가요. 제 입으로 한 약속도 못 지킨다고 비난하더라도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 집에 계속 있다간 숨 막혀 죽어버릴 것 같단 말예요.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느니 가출이 차라리 낫지 않겠어요? 그리고…….”
“잠깐, 잠깐만요.”
네이기스가 다다다 말을 쏟아냈지만, 피올은 그녀의 말을 집중해서 들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달려온 방향에서 괴물의 기척이 줄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는 단독으로 행동하는 놈들뿐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어째 이번엔 숫자가 꽤 될 것 같았다. 그는 네이기스를 움푹 팬 벽 구석에 옮겨다 놓고는 자신이 됐다고 할 때까지 눈을 감고 있을 것을 부탁했다.
“레이디께서 보기 좋을 풍경은 아닐 겁니다. 되도록 귀도 막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겁먹어 움츠린 어깨가 피올의 짐이 됐다. 마음 같아선 타고 온 말을 주고 이대로 빠져나가라 하고 싶지만, 치안대의 말은 하나같이 성격이 사나워 귀족영애에게 고삐를 맡길 수가 없었다. 물론 오드리라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그건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되도록 빨리 끝내겠습니다.”
말로는 자신만만했는데, 괴물은 많이도 나왔다. 텅 비다시피 하던 이 거리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다섯 마리 이상을 잡으면서는 피를 크게 보지 않으려던 노력을 그냥 포기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몸놀림이 빠르거나 특별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특징을 가진 놈이 없다는 것이다.
검이 살을 가르고 뼈를 치는 소음과 죽어가는 괴물의 단말마, 거친 숨소리, 이리저리 날뛰는 말발굽 소리가 골목을 메웠다. 시간이 갈수록 피올의 망토는 피로 흠뻑 젖었고 검은 이가 나갔다. 피올은 마지막으로 이를 딱딱대며 달려들던 놈의 머리를 친 뒤 감각을 곤두세웠다. 네이기스가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는 기척 말곤 느껴지는 게 없었다.
“……다 잡았나?”
“보티안 씨……. 저, 저기…….”
“봤습니다. 눈 감고 계시라니까요.”
셰비언의 번개를 맞은 게 분명한 고깃덩이가 바닥을 기어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검게 타들어간 살이 벌어진 사이로 드러난 분홍색 살점에서 투명한 체액이 줄줄 흘렀다. 끔찍한 꼴이었지만 피올은 이미 실컷 봐서 익숙해진 상태였다.
피올은 네이기스가 보고 있다는 것도 잠깐 잊고 지긋지긋한 괴물의 목을 쳤다. 새빨간 피가 피올의 뺨까지 튀었다. 억누른 비명 소리를 듣고서야 피에 절었던 정신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그제야 제 몰골이 어떨지 생각하고 서둘러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피 묻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닦아대는 꼴을 보다 못한 네이기스가 손수건을 건네니, 피올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벌겋게 물들었다.
“그…… 못 볼 꼴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레이디 그웬,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티안 씨, 다친 곳은…….”
“멀쩡합니다. 그보다 이제 그만 댁으로 돌아가시죠. 조금 전에 보셨듯이 여긴 연약한 귀족영애가 있을 곳이 못 됩니다.”
“가출했다니까요. 집에는 안 가요.”
“어린애 같은 떼는 그만 쓰시고요. 부모님께서 얼마나 걱정하고 계시겠습니까? 자, 말에 태워드리겠습니다. 송구하게도 코트에 피가 묻을지도 모르겠지만 부디 이해해 주시길.”
네이기스가 피올이 내민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된 데다 끔찍한 광경을 정면에서 본 충격으로 몸을 떨면서도 집으로 가는 것만은 싫다는 고집이 아주 대단했다.
“집에는 다신 안 들어가요. 내 손이 잘리거나 눈이 멀더라도 안 가!”
“레이디 그웬, 분명 저와 약속하셨…….”
“안 지켜요! 못 지켜요! 보티안 씨, 국왕전하의 장례식에 이어 제 장례식까지 보고 싶으시다면 절 그웬가에 데려다놓으세요. 보티안 씨가 정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발코니에서 뛰어내릴 거니까!”
완강한 거부에 피올의 어깨가 축 처졌다. 차라리 괴물을 잡는 게 낫지, 고집 피우는 네이기스를 상대하는 건 너무 힘들었다.
“대체 부모님과 형제가 있는 집이 왜 그렇게 싫은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보티안 씨는 왜 부모님과 형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치안대원을 하고 계시나요? 아무리 중간에 그만두었다 한들 산트렘 기사단 경력이 그리 수치스러운 건 아니었을 텐데요!”
“그건…….”
“저는 화가로 살 거예요. 집에 갇혀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살고 싶진 않아요.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에요. 설령 배곯아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요.”
피올은 네이기스의 말에 완전히 공감해 버린 자신을 깨닫고 몹시 당혹했다. 비록 동기는 다르지만 역시 집에 돌아가길 거부한 입장이다 보니 집에 갇혀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는 네이기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게다가 네이기스는 화가로 살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니만큼 끊임없이 도망치는 삶을 살아온 자신보다 훨씬 나았다. 집으로 돌아가긴 싫으면서 편하게 지냈던 시절은 그리워 이리저리 승진할 거리를 찾아 헤매고 투자할 곳을 찾아보는 자신에 비하면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감은 공감이고, 이렇게 괴물의 시체와 피가 널브러진 곳에 네이기스를 둘 수는 없었다. 피올 자신은 계속 괴물을 따라 이동할 건데 계속 네이기스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머물 곳 정도는 생각하고 집을 나오신 거겠죠? 거기가 어딘지 알려주시면 바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지, 지금은 헨젤가에 머물고 있어요.”
머물 곳을 생각하기는커녕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뛰쳐나오기부터 한 네이기스는 부끄러움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더불어 피올의 얼굴도 함께 붉어졌다.
“헨젤가의 고용인들은 손님을 제대로 접대할 줄 모르는 겁니까? 이런 때에 귀족영애가 바깥을 돌아다니도록 방치하다니! 이거, 레이디 헨젤에게 나중에 한 소리 해야겠습니다.”
“아니에요! 내가 몰래 나온 거예요! 헨젤가의 정원에 벼락이 떨어져서 다들 당황한 틈에 몰래 나왔어요!”
“레이디 기준에서나 몰래인 거지, 고용인들 중 한 명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냥 모른 체 한 거죠. 헨젤가의 고용인 관리가 엉망이군요.”
붙들고 말리는 다이앤을 떼어놓고 왔던 네이기스는 차마 사실을 밝히지는 못하고 안절부절 피올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네이기스가 일부러 고용인을 떼어놓고 나왔을 거라곤 상상도 못한 피올은 존재하지도 않는 네이기스의 몫까지 전부 합해서 분노했다.
헨젤가의 고용인이면 네이기스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더 건성이었던 게 아닌가, 배경이 될 수 있는 본가에서 내쳐진 게 분명하니 그랬던 거다, 이래서야 앞으로 네이기스가 대 화백이 되더라도 여성 화가라고 우습게 볼 게 뻔하다, 이런 일이 헨젤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우습게보고 낮잡아 볼 것이다…….
피올이 분노의 끝에 내린 결론은 ‘네이기스에겐 배경이 될 수 있는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네이기스는 오드리와는 다르게 연약한 귀족영애니까. 그럼 그녀의 보호자는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는 순진하게 반짝이는 연둣빛 눈동자를 바라보다 불쑥 말을 꺼냈다.
“레이디 그웬, 제가 레이디의 보호자가 되어도 되겠습니까?”
“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네이기스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 가슴을 꾹 눌렀다. 자신을 뚫어지게 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피올이 갑자기 제 손을 쥐고 하는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좋다고 쫓아다니는 자신을 매번 밀어내고 피해 다니던 사람이 바로 피올이었는데 말이다.
“그 말씀은, 마치 제게 청혼이라도 하는 것 같은걸요. 혹시 제가 혼자서 착각하는 건가요?”
피올은 조금은 지친 듯, 어쩌면 한숨 쉬듯 웃었다. 조금 전까지 창백하던 얼굴 전체에 화악 발그레한 홍조가 올라온 네이기스가 너무 예뻐 보였다. 하긴, 언제는 그녀가 예쁘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는 스케치북을 구할 수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 정도야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겨우 몇 달 전이었다.
“저는 가진 게 없는 놈입니다. 재산이라곤 치안대원 월급 정도고, 잘하는 건 검 휘두르는 재주뿐이죠. 그래도 산트렘 기사단 출신인 데다 귀족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치안대원이니 재산은 없어도 명예는 있는 셈입니다. 아가씨의 곁에 서서 아가씨를 지키는 데에 이 명예를 쓰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이기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앞이 흐려졌다. 그녀는 정신없이 눈물을 닦아내고 어떻게든 피올을 깨끗하게 보려고 노력했다. 피올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제게 청혼하는 이 순간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만약 저를 받아주신다면, 조만간 레이디께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당당히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때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어어……. 막다른 상황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 안 된다고, 다들 그랬는데…….”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사실 받아주시는 게 더 이상한 처지긴 하죠.”
피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네이기스는 멀어지려는 그의 손을 자신도 모르게 확 낚아채 쥐었다. 저항 없이 얌전히 제게 잡힌 손이 가볍게 떨리는 걸 인식하자 안 그래도 분홍빛이었던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보티안 씨. 당신이 내게 날개를 줬어요. 컴컴한 길을 걸어갈 용기를 줬어요. 오드리 언니와 타우레드 영애가 그토록 떠밀고 이끌어도 무서워 겁내던 날 자유롭게 했어요. 분명 역사에 남을 화가가 될 거라던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용기가 됐는지, 보티안 씨는 상상도 못할걸요.”
“그럼…….”
“좋아요. 결혼해요.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제 곁에 있어주세요. 보티안 씨가 절 지켜주신다면 전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거예요.”
낭만적인 음악도, 향긋한 꽃다발도,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도 없다. 주변엔 목 잘린 괴물의 시체들이 널브러졌고 하늘은 회색 구름으로 뚜껑이라도 덮인 듯한 데다 그나마 빛을 비춰주던 가로등은 픽 나갈 것처럼 깜빡거리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최악의 청혼이라 하겠지만 네이기스에겐 아니었다. 늘 바라보며 애타하기만 했던 사람이 드디어 손에 잡힌 순간인 것이다. 제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멀어지는 그의 입술을 느꼈을 때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무서울 정도였다.
“저, 제가 말을 제대로 하긴 했나요? 혀가 꼬이진 않았어요?”
“아주 제대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게 굳으셨어요? 벌써부터 후회되시는 거예요?”
“아뇨, 그게 아니라……. 솔직히 받아주실 거라는 기대는 별로 안 했던 탓에……. 음……. 긴장을 풀면 너무 웃긴 표정이 나올 것 같아서…….”
말을 더듬대는 피올이라니. 네이기스가 저절로 놀리고 싶어질 만큼 재미난 구경이었다. 피올은 고개를 쭉 빼고 얼굴을 관찰하려는 네이기스를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견디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돌아가셔야죠.”
“아, 그렇지 참. 보티안 씨를 보고 싶어서 멋대로 나왔던 거라서, 시간 가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피올은 손바닥에 한숨을 뱉었다가 다시 삼켰다. 일단 물꼬를 트고 나자 그동안 단단히 막아뒀던 마음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감당이 안 됐다. 네이기스가 조잘조잘 꺼내놓는 말들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아, 그런데 보티안 씨. 제게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됐을 때, 라는 건 대체 어느 때를 말하는 거예요?”
“그야 제가 아가씨께 어울리는 신분과 재산을 갖추었을 때……. 그때가 적당한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네이기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꽃다발 하나 사서 하티의 신전으로 뛰어가고 싶은데, 피올이 말하는 그 적당한 때는 너무 모호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조금 전의 감동이 흐려질 정도였다.
“적당한 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바로 그때, 누군가 배배 꼬인 말투로 빈정거렸다. 네이기스는 제 속내를 그대로 읽어낸 듯한 말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딸꾹질을 시작했다. 분명 브란젤을 비웠다던 오드리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도 말을 타고 있으면서 주인 없는 다른 말의 고삐도 함께 쥐고 있는 상태였다.
말에서 휙 뛰어내린 오드리가 너무 당황해서 말을 잊은 네이기스의 손에 자신이 끌고 온 말의 고삐를 쥐어주었다. 그 말은 아까 네이기스가 헨젤가에서 끌고 나왔던 말이었다. 딱 봐도 가문의 말인데 혼자 빈 거리를 내달리고 있는 걸 수상하게 여긴 오드리가 말을 진정시키고 탑승자를 찾아온 것이다. 그랬다가 무려 피올이 네이기스에게 청혼하는 장면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오드리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피올을 쭉 훑었다. 괴물의 피와 살점으로 범벅된 꼴이 영 마음에 안 들지만 치안대원이니 그건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조금 전의 발언이 엄청나게 거슬렸다.
“보티안 씨, 제정신이에요? 당신이 신분과 재산을 갖추었을 때가 대체 언제 올 줄 알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어서 청혼을 해요? 네이기스는 아직 어린데 그런 식으로 옆에 붙들어놓으면 안 되죠. 아, 혹시 본가로 돌아가려고? 그래요, 그럼 가능하긴 하겠네요. 카즈네 공작이 몹시 아쉽겠어요, 과거 따위 지우겠다고 맹세해서 직접 이름까지 지어준 치안대원이 이제와 본가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본가로는 안 갑니다. 아니 그보다 대체 어디서부터 들은 겁니까? 무슨 도둑놈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기척을 죽이고 몰래몰래 숨어서……. 아하, 그러고 보니 차림이 딱 도둑질에 어울리긴 합니다. 그것도 삼류 도둑.”
네이기스가 피올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피올은 나불나불 잘도 떠들었다. 그만큼 오드리의 차림은 엉망이었다. 깔끔하게 땋아 올렸던 머리칼은 죄다 풀려 산발이고, 손톱만큼 자고 밤새 말을 달려온지라 눈 밑에 푸르스름한 그늘이 확연한 데다 이마엔 땀자국까지 있었다. 몸에 딱 붙는 승마복도 먼지와 땀에 젖어 얼룩덜룩했다. 어딜 봐도 귀족영애의 자태는 아니었다.
서로 한 차례씩 빈정거림을 주고받은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네이기스가 불쑥 끼어들어 오드리의 손을 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오드리 언니, 브란젤을 비웠다더니 돌아온 거예요? 운 좋게 위험을 피했는데 왜 돌아왔어요? 위험하잖아요!”
“나도 네이기스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아요. 그웬가에 있어야 할 네이기스가 왜 헨젤의 말을 타고 이런 곳에 있는지도 듣고 싶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되먹지 못한 청혼을 받아들였는지도 궁금하고요. 그치만 무엇보다 이 코트……. 이거, 다이앤이 입혀준 거죠?”
작년에 셰비언이 준 천을 창고에 처박고 꺼내보지 않았던 오드리지만, 생크림처럼 하얗고 얇고 보드라운 데다 코트를 만들어도 좋을 만큼 보온성이 좋은 천이 또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 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세 사람 중 브란젤에 남아 있던 사람은 다이앤 한 명뿐이고 말이다.
과연 네이기스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요? 다이앤이 오드리 언니에게 입혀주려고 만들었다가 제게 잠깐 빌려준 거예요. 다이앤이 말하는 걸로 봐선 아직 오드리 언니에겐 보여주지 않은 것 같았는데요!”
“벗어요.”
“네? 네?”
오드리는 더 말하지 않고 네이기스에게서 코트를 벗겨냈다. 영문 모르는 네이기스가 당황할수록 피올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졌지만 길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네이기스를 재촉해 말에 태우고 고삐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자, 이만 돌아가요. 혼자 타고 갈 수 있죠?”
“네에? 오드리 언니, 저 길 잃었어요. 여기서 어떻게 돌아가요?”
“이 길을 따라 직진하면 금방 대로로 나갈 수 있어요. 그 다음부터는 혼자서도 갈 수 있을 테니 당장 가요.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머뭇대지 말고요. 보티안 씨, 괜찮죠? 이젠 말도 있으니까 굳이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도 귀족영애를 어떻게 혼자 보냅니까? 제가 같이 가야…….”
“보티안 씨. 이 말에 앉은 게 네이기스가 아니라 나였어도 이렇게 같이 가야겠다고 할 거 아니잖아요. 그렇죠?”
피올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도 반박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네이기스와 오드리를 같은 묶음으로 엮기에는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좀 그랬다.
피올도 조용히 시켰겠다, 오드리는 서둘러 네이기스를 보냈다. 네이기스는 달리는 중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피올과 오드리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질 않자 결국 포기하고 속도를 올렸다.
“그 옷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피올은 네이기스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오드리가 벗겨낸 코트를 턱짓하며 물었다. 오드리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코트를 훅 둘러 걸쳤다. 새하얀 코트는 의외로 오드리의 가무잡잡한 피부에 아주 잘 어울렸다.
“이건 셰비언이 내게 준 옷감으로 지은 거예요.”
“아가씨는 연인이 준 옷감으로 만든 옷을 사촌 동생이 잠깐 빌려 입었다고 그렇게 화낼 사람이 아니니까 묻는 겁니다.”
“나 참……. 네이기스와 함께 있더니 생각도 그쪽으로만 돌아가요? 나는 이 천인지 가죽인지 모를 옷감을 셰비언에게서 받았고, 로렐라이의 정보력을 다 동원해서도 옷감 출처를 캐내는 데 실패했어요. 뭔가 떠오르는 거 없어요?”
피올은 오드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마침 하늘에 펼쳐진 마법진 중앙 즈음에서 빛 덩어리 둘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브란젤 곳곳에 벼락이 떨어지고 천둥이 우르릉 울리더니, 조각난 마법진 잔해가 오래되어 벗겨지는 금박처럼 지저분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일반인의 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시화된 마법망이 구름 낀 하늘을 불쑥 채웠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본래대로라면 슬슬 동쪽 하늘이 밝아져야 할 시간인데 햇빛은 보이지도 않고 사방이 어둡기만 했다. 그냥 구름이 짙어서 어두컴컴한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됐다, 난 모르겠다.’
피올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에게는 너무 크고 버거운 상황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대신 눈앞의 현상에 집중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상식을 상당히 깨부숴야만 해서 머리가 아팠다.
“설마 그 코트의 옷감이 괴물을 끌어들이고 있단 겁니까?”
“하늘을 날 수 없는 괴물은 땅에 남겨진 조각이라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진작 처리를 맡겼어야 했는데……. 솔직히 나도 이런 게 있었다는 걸 까먹고 있었던지라.”
“그거 참 매정한 연인이군요. 기껏 선물한 걸 새카맣게 잊어버렸다니요.”
“괜찮아요. 셰비언은 내가 이 옷을 홀라당 태워 버린다고 해도 그냥 웃어넘길 테니까. 어쨌건 말 좀 해 봐요. 괴물을 한 곳에 모으는 쪽과 뿔뿔이 흩어진 쪽, 어느 쪽이 상대하기 더 쉬운가요? 아니, 어느 쪽이 더 피해가 적을까요?”
“그야 당연히 모아두는 쪽이 낫죠. 군대 출동한 지가 언젠데 죄다 흩어져서 수색하느라 효율이 떨어져서 난린데. 모아서 조직적으로 상대하면 훨씬 깔끔하고 피해도 적……. 그러려면 미끼가 필요하군요. 코트 이리 주시죠. 제가 끌어 모으겠습니다. 아가씨는 이만 돌아가세요.”
“아뇨. 내가 해야 해요. 내가 해야 느려터진 괴물들을 더 빨리, 확실하게 모을 수 있어요.”
피올은 황당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오드리가 아무리 말을 잘 타고 힘이 세다 한들 검술 한 조각 배운 적도 없는 귀족 영애였다. 그런 사람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는 건 치안대원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절대 안 됩니다. 코트 이리 내놓으시죠.”
“셰비언이 그러는데, 마력에도 종류가 있대요. 내 마력은 그의 마력과 계통이 같아서 언뜻 보면 거의 구분하기 힘들 정도라는군요. 괴물은 분명히 내 마력에 반응할 거예요. 보티안 씨, 수확제 때 기억나죠? 이 코트보다 훨씬 확실하게 유인할 수 있을걸요. 같이 있으면 더 좋고.”
“어쨌거나 안 됩니다. 계속 우기시면 힘으로라도 빼앗을 겁니다. 확 기절시켜서 헨젤가에 모셔다 드릴 수도 있고요. 부디 제가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해주시면 좋겠군요.”
오드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말을 꺼낼 때부터 슬슬 뒤로 물러나던 그녀는 어느새 윈디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윈디가 피올을 향해 위협적으로 투레질하며 발을 구르는 틈을 타 윈디의 등에 올라탔다. 반질반질 윤나는 검은 털 위에 하얀 코트자락이 천사의 날개처럼 늘어졌다.
오드리는 오른손으로는 고삐를 꽉 쥐고, 왼손은 허공에 들어올렸다. 장갑을 벗어 던진 맨손가락 끝에서 쭉 뽑아 올린 마력이 금빛 실처럼 흘러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셰비언이 만들어낸 마법진과 똑같은 색이었다. 피올의 낯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몰이사냥을 하려면 사냥개는 바지런히 뛰어야겠죠. 어디로 몰까요?”
“제기랄……. 아가씨, 바로 중앙광장으로 가시죠. 거기에 지휘부가 있습니다.”
“오, 중앙광장. 알겠어요. 그럼 브란젤 외곽부터 소용돌이처럼 돌아서 가면 되겠군요.”
“돌아요? 뭘 돌아요? 바로 가시라니까요! 아 진짜!”
“윈디, 아직 더 뛸 수 있지?”
어지간한 군마보다 커다란 덩치의 흑마는 주인의 질문에 걱정 말라는 듯 콧김을 뿜었다. 꽉 짜인 근육이 꿈틀거리고 말발굽이 돌바닥을 박찼다. 아뉴람브 성에서 여기까지 몇 시간을 달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활기였다.
피올은 황급히 말을 몰아 오드리의 옆에 딱 붙었다. 이미 벌어진 일, 호위라도 해야 했다. 주머니 구석에 처박아뒀던 호루라기를 꺼내 규칙에 맞춰 불고 오드리를 살폈다. 마력을 줄줄 흘리며 달리는 것치고 그녀는 퍽 쌩쌩해 보였다.
“마력량이 좀 되시나 봅니다?”
빈정거림이 가득 담긴 말이라, 오드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냥 내달렸다. 그녀가 달리는 궤적을 따라 괴물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는 걸 확인한 피올의 안색만 시퍼레졌을 뿐이었다.
그 괴물 대부분은 윈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졌지만, 일부 네 발 짐승의 형태를 한 괴물들은 기어이 옆까지 따라왔다가 피올의 검에 목이 달아났다. 검고 붉은 피가 흥건하게 길바닥을 적셨다.
따라붙는 괴물의 숫자가 자꾸 늘어나는데도 오드리는 아까 장담했던 그대로 움직였다. 마차가 주로 다니는 길을 따라 브란젤 외곽에서부터 안쪽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달렸다. 피올은 틈이 생길 때마다 오드리의 진로를 바꾸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하늘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번개와 유황불을 피해 달리던 피올이 이를 갈며 오드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희생정신 같은 건 있지도 않은 분이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합니까!”
피올의 지적은 퍽 정확했다. 오드리에게 딱히 희생정신 같은 건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자기 자신인 사람이 희생정신 같은 걸 갖고 있을 리가 없잖은가. 오드리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책임감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처음 괴물이 생겨난 이유가 셰비언의 과실이더라도, 이 사태를 부른 건 다나를 살해한 누군가와 그를 감싼 왕궁마법사들이라는 것. 아무리 인간을 싫어하는 샤를레아라도 다나가 살아 있었더라면 이런 짓까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이런 상황에 죄책감이나 책임감 따위를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게 맞았다.
하지만 막상 브란젤에 진입해서 셰비언을 찾아 헤매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한 거리가 눈에 밟혔다. 곳곳에 널브러진 괴물 시체와 공포에 질려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곳곳이 부서져 잔해로 나뒹구는 역사 깊은 건물의 파편,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괴물에게 뜯어 먹힌 시신들,
브란젤은 만탈락이 아니고,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책임 있는 자들이 능히 일을 수습할 걸 알고 있음에도 가슴 한쪽이 꾹 눌린 것처럼 아팠다. 이대로 도시의 상황을 외면하고 제 볼일만 봤다간 이 광경이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순간을 회피하면 평생 악몽에 시달리게 될 거라고.
그래서 그녀는 괴물을 만들어낸 최초의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 건강한 이유는 아니지만 세상 모든 일이 선의에서 출발하는 건 아니잖은가.
하여간 사정을 알 리 없는 피올의 눈에 오드리의 이런 행동이 이상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불평했다.
“아, 진짜 미친 거 아닙니까? 아가씨 뱃속에 간이 있긴 해요? 이 괴물들이 안 무섭습니까?”
“윈디가 이렇게 멀쩡하고, 산트렘 기사단 출신의 치안대원이 옆을 지켜주는데 뭐가 무섭죠?”
“쓸데없이 말은 잘하셔……!”
피올이 미처 잡지 못한 작은 괴물이 오드리의 머리칼에 철썩 달라붙었다. 오드리는 머리칼을 잡아 뜯듯이 털어 괴물을 떨쳐 냈다. 정말 잠깐이었는데 그새 긁히기라도 했는지 목덜미가 화끈해졌고, 안 그래도 산발이었던 머리칼이 아예 사자갈기처럼 흐트러졌다.
“아가씨!”
“왜요!”
“아가씨 옆에 딱 붙어 다니던 그 기사는 어디서 뭐 합니까?”
“베텔 경은 말 바꾸러 갔어요! 말이 너무 지쳐서!”
피올은 콧김을 뿜으며 질주하는 윈디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사가 타는 말이 지쳐서 나가떨어지는데 저리 멀쩡하게 달리는 말이라니. 더불어 그 말과 호흡을 딱 맞춰 달리는 오드리도 징그럽긴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마법사들도 마력 소비가 커지면 두통과 체력 저하를 호소하는데, 마법사가 아니라서 크게 마력 쓸 일도 없었을 사람이 마력을 줄줄 흘리면서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지 모를 일이었다.
빈민가, 유흥가, 새벽시장, 공원, 고급 상점가……. 따라붙는 괴물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함께 말을 달리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브란젤 곳곳에 흩어져서 괴물을 잡던 치안대원들과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오드리의 곁에, 뒤에 자리 잡았다. 자연스럽게 피올의 부담은 퍽 줄어들었다.
“아가씨! 진짜 아까 말씀하셨던 그대로 가실 겁니까?”
“네!”
“아 이런 고집불통……! 저는 빠집니다!”
피올이 새로 합류한 사람들의 양보를 받으며 행렬에서 벗어났다. 일부 사람들도 그와 함께 빠졌지만, 그렇다고 오드리의 행보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급 상점가와 고급 주택이 밀집된 거리를 지나 귀족 저택이 몰린 거리를 내달렸다.
빛줄기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 기괴한 행렬을 놀라워하며 바라보았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괴물들은 빛줄기 주변에 모인 인간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괴물들의 목표는 오드리가 흩뿌리는 금빛 마력, 딱 그것뿐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빛줄기 몇 개를 그냥 지나친 행렬은 평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오래된 주택가로 진입했다. 광장 근처에 조성된 주택가다 보니 빛줄기가 가까워 나가지 않고 집 안에 버티고 있는 인원이 꽤 되는 곳이었다.
브란젤 곳곳에 벼락이 떨어지며 연신 천둥이 울리는 가운데 돌바닥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주택가를 뒤흔들었다. 부모님이 시킨 대로 숨을 죽이고 제 방에 숨어 있던 소녀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창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마침 행렬이 그 창문 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소녀의 시선은 행렬의 선두에 선 덩치 큰 흑마에 꽂혔다. 다른 말보다 확연히 큰 흑마에 올라탄 기수는 당연히 오드리였다. 망토처럼 펄럭이는 흰 코트 위로 사자갈기처럼 흐트러진 초록색 머리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인상적이어서, 주변을 감싼 다른 말과 기수들은 물론이고 괴물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드리는 순식간에 창문 아래를 지나쳐 갔지만, 소녀는 그녀에게서 가느다란 금빛 실 같은 게 흘러나오는 걸 분명히 보았다. 좀 더 제대로 보고 싶어 몸을 반쯤 창문 밖으로 내밀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홀린 듯 눈으로 좇았다. 갑자기 소음이 커진 것에 놀라 방에 들어왔던 소녀의 어머니가 황급히 소녀를 잡아당기고 창문을 닫았다.
“밖에 보지 말랬지!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래!”
“하지만 엄마, 전쟁의 여신님이 왔는걸. 엄마가 전쟁의 신 벨트람은 흑마를 타고 하얀 망토를 두른 검은 머리의 여신이랬잖아.”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근데 이상하다, 왜 흰 새가 없지? 벨트람은 꼭 흰 새를 데리고 다닌댔는데. 아, 머리색도 검은색이 아니었어…….”
소녀의 어머니는 유리창 너머로 바깥을 흘끗 내다보았다가 얼른 커튼을 쳤다. 가로등이 점점이 켜진 거리는 어디론가 떼를 지어 달리는 괴물로 가득 차 언뜻 보기에도 무시무시했다.
“네가 헛것을 본 거야.”
소녀는 그럴 리 없다며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소녀의 어머니는 딸의 투정을 무시했다. 이맘때의 아이들이 머릿속의 상상을 진짜처럼 말하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주택가에서 오드리를 본 건 그 소녀만이 아니었다. 집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말을 달리는 오드리를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오드리를 보고 신화 속에서 흑마를 타고 흰 망토를 휘날리는 전쟁의 신 벨트람을 떠올렸고, 그중 삼분의 이는 머리칼을 초록색으로 염색한 기행으로 유명한 헨젤 영애를 떠올렸으며, 또 그중 절반은 헨젤가의 직계들이 대대로 흑발이었던 것까지도 떠올렸다.
오드리 헨젤이란 이름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기엔 그 정도면 충분했다.
* * *
몇 시간째 이어지는 격렬한 다툼의 와중에도 주변을 살필 정도의 짬은 났다. 셰비언은 잠시 숨을 돌리는 와중 브란젤을 포함한 그 일대 전부가 아직도 어둠에 잠긴 걸 확인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경계 삼아 그 바깥은 어슴푸레하게나마 햇살이 비치고 있는데, 안쪽은 여전히 밤이었다.
“미쳤군. 심장이 반쪽밖에 없는 주제에 이런 고위험 마법을 써? 인간이 싫어 죽겠다면서, 브란젤의 인간들과 함께 죽을 작정이었나 보지?”
“안 죽으면 그만이지.”
“신기하긴 해. 분명 다 빼앗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마법을 갖고 있었다는 게. 설마 그 몸뚱이를 잘라 제물로 쓰기라도 했나?”
“흥, 용은 마법의 종족이야. 마법의 주인이니 뭐니 해도 타고난 본질까지 바꾸진 못해!”
코웃음을 친 샤를레아가 다시 덤벼들었다. 그새 숨을 다 돌린 셰비언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샤를레아의 검은 셰비언의 목을, 셰비언의 창은 샤를레아의 심장을 노렸다.
둘이 부딪친 지점에서 하얀 빛이 번쩍이고 뻘건 피도 함께 흘렀다. 셰비언은 뺨에 상처가 났고, 샤를레아는 셰비언의 창에 어깨가 꿰뚫렸다. 샤를레아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어느 쪽이 더 손해인지는 명확한데도 셰비언은 영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고, 샤를레아는 검자루를 다잡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확실히 넌 육탄전에 약해. 내 컨디션이 이렇게 엉망인데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하다니.”
“뭐 어때, 내 전공은 마법이라고.”
“글쎄? 아까 인간들에게 내 마법진 따위는 금방 깨버릴 거라고 장담하더니, 벌써 몇 시간째야? 내가 올 줄 알고 준비한 거치곤 너무 부실한 거 아냐? 이런 거에게 심장을 뜯겼다니, 이거 자존심 상하는데?”
샤를레아의 팔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 떨어졌다. 셰비언은 그 핏방울을 황급히 받아내 땅으로 떨어지지 않게 막았다. 겨우 비늘 따위가 근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괴물이 되는 인간이 있는데, 피가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렇게 쓸데없는 동정을 발휘하니까 그렇지!”
샤를레아는 그런 셰비언을 비웃으며 덤벼들었다. 어깨가 꿰뚫린 통증쯤이야 심장이 뜯길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셰비언이 샤를레아의 피를 수습하느라 정신을 판 잠깐 사이 그녀의 어깨는 처음보다 확연히 아물어 있었고 상대는 아직 준비가 덜 됐다.
희게 변한 동공, 느슨하게 땋아 늘어뜨린 은발, 은빛 비늘이 도도독 올라온 목덜미가 마치 확대라도 한 것처럼 크게 보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검을 찔러 넣었다.
쾅! 분명 꿰뚫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만큼 완벽한 기회였는데 셰비언이 펼쳐 낸 보호막이 그녀의 검을 막고 불꽃을 튀겼다. 동시에 고압의 전류가 샤를레아의 몸을 마비시켰고, 손바닥만 한 마법진 서너 개가 허공에서 성생돼 샤를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윽!”
썩둑 잘려나간 새빨간 머리칼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샤를레아는 쫙 벌어져 피를 줄줄 흘리는 목의 상처를 손으로 눌러 막고 한참 뒤로 물러났다. 어찌 피해내긴 했지만 이번엔 좀 위험했다. 이제까지 야금야금 흘린 피의 양도 만만치 않은데 갑자기 대량의 피를 쏟아내니 머리가 어찔해졌다.
잠깐이라도 쉬면 좋아질 테지만 셰비언이 곧장 따라붙었다. 샤를레아를 밀어붙이는 셰비언의 주변에서 마법진 수십 개가 떠올라 일부는 샤를레아를 공격했고, 일부는 그녀의 발아래에 자리 잡았다. 발밑에 모여든 마법진은 샤를레아의 피를 탐욕스럽게 받아 마시며 저들끼리 엉켜 덩치를 늘렸다.
샤를레아는 몇 걸음을 더 뒤로 물러나면서도 셰비언의 창을 막아냈고, 연신 날아드는 마법진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되받아쳤다. 그러다 약간이나마 어지러움이 가셔 반격을 하려는데, 발아래를 졸졸 따라다니던 마법진이 불쑥 샤를레아의 발목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거슬렸다. 생각 없이 발을 굴러 털어내려던 그녀는 마법진이 피부에 파고들어 피를 빨기 시작하자 기겁했다.
“뭐야, 이거!”
“쓸데없는 동정이라며? 맞는 말이야, 인간들의 도시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샤를레아는 다급히 비늘을 꺼냈다. 마력 소비가 심해 목과 심장 등 중요 부분만 가리고 있던 비늘이 다리와 발에도 와드드 돋아났다. 하지만 마법진은 손쉽게 비늘을 뚫고 들어가 피를 뽑아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믿고 있던 비늘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베푸는 동정을 보고 네가 방심한다면 그 정도 동정이 뭐가 아깝겠어? 이건 네 피로 만든 거니 비늘 따위는 도움이 안 돼.”
셰비언의 손짓을 따라 멋대로 엉켜 피만 빨아대던 마법진이 샤를레아를 중심으로 재배치되어 그녀를 구속했다. 셰비언 특유의 금빛이 아니라 샤를레아의 색에 가까운 붉은색으로 빛나는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이 점점 커질수록 피를 빨리는 샤를레아의 안색도 함께 창백해졌다.
“이, 빌어먹을 놈이……. 허억.”
“마법의 종족이니 뭐니 해도 결국엔 생물이야. 회복 안 되는 상처가 늘면 죽는 거지. 하여간 넌 옛날부터 조금만 유리해지면 방심하는 게 약점이라니까. 다 이겼다고 생각했지?”
결국 버티지 못한 샤를레아가 마법진 위에 주저앉았다. 접촉면이 늘어나자 마법진이 피를 빠는 기세도 더 강해졌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텅 빈 허공을 메웠다.
“흡혈귀도 아니면서, 허억, 이따위 마법을 만들고……!”
“난 마법의 주인이야. 몸으로 싸우는 건 네 방식이지. 내가 굳이 그에 맞춰줄 필요라도?”
셰비언은 차갑게 비웃으며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고통이 심할 텐데도 계속 눈빛이 살아 있는 걸 보니 곁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피 없이 살 수 있는 생물은 없으니,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다.
대신 그는 제 머리 위에서 여전히 힘겨루기를 하는 마법진에 시선을 주었다. 두 개의 마법진은 서로를 부수고 다시 그려지기를 반복하면서 브란젤 전체에 금박 눈을 뿌려대고 있었다.
샤를레아가 직접 마법을 쓸 수 없어 마법진에 의존한 걸 감안하더라도 정말 잘 만든 마법진이었다. 이전에 브란젤 곳곳에서 괴물이 나왔던 게 이 마법진에게 힘을 보태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샤를레아가 여기에 들인 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셰비언이 없는 동안에도 괴물 출몰 위치를 착실하게 기록해 온 왕궁마법사들이 아니었다면 이만한 대응을 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나중에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어.’
아무리 마법의 주인이라도 경험의 차이는 무시할 수가 없고, 샤를레아는 셰비언보다 대엿 배는 더 살았다. 더불어 종족 간의 힘겨루기가 가장 치열하던 시기에 전장에 서서 승리한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셰비언이 샤를레아의 마법진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동안, 샤를레아는 이를 악물고 제 피를 빨아먹는 마법진을 살폈다. 퍽 단순한 마법진인데 하필 재료가 자신의 피인 데다 자꾸 머리가 멍해져서 분석이 어려웠다. 그냥 아프기만 한 거면 참을 수 있을 텐데, 이건 고통이 아니었다.
“커헉…….”
속에서 무언가가 치받아 오르더니 끈적끈적한 검은 피가 쏟아졌다. 반쪽밖에 없는 심장으로 너무 무리를 했다. 기어이 팔이 꺾여 마법진에 개처럼 엎드리고 말았다. 마구 헝클어져 시야를 가린 붉은 머리칼 사이로 낮과 밤을 가르던 뚜렷한 경계가 서서히 흐려지는 게 보였다. 마법이 풀리고 있는 것이다.
‘빼앗은 마력이지만 정당하게 썼어요. 나야말로 세상에 도움 되는 사람이야!’
다나를 죽여서 마력을 빼앗고, 빼앗은 마력으로 명예와 만족을 얻어놓고, 대가를 치를 때가 되자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소리 지르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불을 삼킨 듯한 분노가 다시 타올랐다. 마력을 도로 회수할 수 없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낸 즉시 죽였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제라도 죽일까?’
마력 회수를 포기하는 선택지가 퍽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마력도 무사히 회수하고 복수도 하는 쪽이 가장 좋지만, 둘 다 할 수 없다면 하나라도 이루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그 치안대원이 쓸모 많은 마법사를 죽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샤를레아는 펄떡펄떡 경련을 일으키는 몸을 수습하며 셰비언을 살폈다. 셰비언은 샤를레아의 마법진을 차근차근 부수면서 머릿속에 집어넣느라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애써서 만들어낸 마법진이 제 역할을 못하고 셰비언의 자산이 되는 건 아쉽지만, 그걸 미끼로 복수를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은 쓰임일 것이다.
붉게 빛나는 마법진 사이로 브란젤의 풍경을 살폈다. 인간의 도시 따윈 아무 의미도 없다던 셰비언이 어찌나 세심하게 보살폈는지, 벼락을 그렇게 때려놓고도 불난 곳 하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마법사인 이상 분명 마법망 가시화를 시도했을 테니, 용의 마력이 흔적을 남겼으리라. 시야가 자꾸 깜빡대긴 하지만 그 흔적만 찾아내 쫓으면 될 터였다.
그런데 브란젤 곳곳을 돌아다녀야 할 괴물들이 이상하게 중앙광장에만 와글와글했다. 용의 마력이 남긴 흔적도 지나치게 많았다. 가느다란 실 형태의 마력이 브란젤 구석구석에서 빛나는 게 보였다. 그 틈에서 인간 한 명을 찾아내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샤를레아의 집념은 그 일을 기어이 해냈다.
탈진해 쓰러진 왕궁마법사들 틈에 끼어 눈치를 살피는 스와디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천천히 느려지던 심장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때 누군가가 스와디를 무리 밖으로 끌어내 칼 찬 사람들 앞에 세웠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정도는 됐다.
“……안 돼.”
또 눈앞에서 원수를 빼앗기는가? 증폭된 분노가 샤를레아를 집어삼켰다. 깜빡대는 시야도, 경련을 일으키는 몸뚱이도,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던 마법진에 대한 미련까지도 모조리 잊혀졌다. 셰비언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살피던 것 따위는 집어치웠다. 인간의 형태 위에 붉은 용의 형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샤를레아의 피를 빨던 마법진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스러졌다. 갑자기 증폭한 존재감에 놀란 셰비언이 고개를 돌렸을 때, 샤를레아는 본신의 형태가 거의 다 드러난 상태였다. 본신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걸어놓은 제약이 몇 개나 되는데 그걸 죄다 밀어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은가 보지?”
셰비언은 부스러진 마법진 조각을 긁어모아 샤를레아의 목에 채우고 힘껏 당겼다. 목줄 잡힌 개처럼 휘청대며 끌려오던 샤를레아가 꾸역꾸역 자세를 잡고 버텼다. 마법진이 목을 파고드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눈이 어느 한 곳에 붙박여 있으니, 셰비언의 시선도 자연히 그리로 향했다.
‘……아가씨?’
샤를레아의 눈에는 스와디만 보였겠지만, 셰비언의 눈에는 오드리만 보였다. 땅을 밟고 선 그녀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쭉 돋아났다.
샤를레아가 입을 쩍 벌렸다. 셰비언에게 당하느라 형태만 남아 있던 적금색 마법진이 와그작와그작 구겨져 그녀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가슴이 한껏 부풀고 벌린 입 주변에서 붉은 마력이 일렁거렸다.
오드리가 괴물을 이끌고 광장에 진입했을 때, 광장엔 치안대와 군이 그 짧은 사이에 대형을 꾸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괴물들이 충분히 광장 안쪽으로 들어오길 기다려 입구를 틀어막았고, 이후엔 일방적인 도살이 이어졌다. 그동안 고생한 울분을 풀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손속들이 거칠었다.
수확제 이후로 개량을 거듭한 대포도 이번엔 훨씬 도움이 됐다. 얼굴이 퍼레진 왕궁마법사들이 대포를 쏠 때마다 천둥소리가 광장을 가르고 괴물을 찢어발겼다. 아직 대포가 익숙하지 않은 지상병력과 다툼이 좀 있긴 했지만, 괴물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민간인인 오드리는 제일 먼저 안쪽으로 분리돼 보호받았다. 어떻게 알고 와 있었는지 광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프러스가 군의관이 달려와 오드리의 목덜미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는 걸 꼼꼼히 지켜보았다. 카프러스가 말을 바꿔오는 짧은 사이를 못 참고 일을 쳤던 오드리는 찔리는 마음에 괜히 그의 눈치를 보았다.
“크흠, 흠, 흠. 음……. 경, 잔소리 안 해요?”
“제가 무슨 말을 한들 그게 아가씨의 귀에 들어가기나 하겠습니까.”
어째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무섭다. 카프러스는 오드리가 변명거리를 찾는 동안 그녀의 손에 감긴 붕대를 다시 고쳐 감았다. 군의관의 숫자는 적은데 부상자는 많으니, 말고삐에 쓸린 손바닥처럼 가벼운 상처엔 성의가 부족해도 탓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다음엔 저를 떼놓고 가지 않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저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데 아가씨는 이리 상처가 많으시니, 이래서야 제가 아가씨의 기사라고 자칭하는 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망나니인 탓인걸요.”
“제가 융통성이 없어 주인의 상처를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이 잘 안 됩니다. 아가씨, 그리 쉽게 여기지 마십시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납게 날뛰는 괴물을 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위기감이 들지 않았기는 했지만, 위험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붕대를 둘둘 감아놓은 목이 그를 증명했다. 오드리는 차마 더 말을 보태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하셨는지, 감히 여쭙지 않겠습니다. 그저 다음엔 저를 빼놓지 않겠다고 약속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런 약속이야 당연히 할 수 있죠.”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는 일이 가장 좋겠지만 말입니다. 도대체 아가씨는 어디서 그런 담력을 키워온 겁니까?”
“음…….”
“그러게 말이야. 오드리 네 간이 엄청 큰 거야 예전에 사업하는 걸 보면서 알았지만 그게 이런 상황에서도 해당되는 건지는 몰랐다니까.”
은근슬쩍 라비린이 끼어들었다. 오드리가 오기 전까지 괴물과 어지간히 싸운 듯, 그의 차림도 괴물의 피와 살점으로 엉망이었다. 피올이라면 모를까, 라비린을 만날 줄은 몰랐던 오드리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최악이었던 헤어짐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벨키스 경, 우리가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나눌 만한 사이였던가요?”
“비록 약혼은 깨졌어도 우리가 친구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 아니었어?”
“친구는 무슨…….”
오드리의 입매가 비틀렸다. 금방이라도 독설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카프러스가 잽싸게 라비린과 오드리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괴물을 이끌고 온다는 사실을 전한 건 보티안 씨지만, 못 믿는 사람들을 설득한 건 벨키스 경입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체계적인 대응은 없었을 겁니다.”
“내가 원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도움을 받았으니 저런 말에 반응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설마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알아두시라는 거죠.”
그 말이 그 말이지. 오드리는 온 얼굴로 억울함을 표현하면서도 혀끝까지 올라왔던 독설을 씹어 삼켰다.
“벨키스 경이 날 아직도 친구라고 생각한다니, 저도 딱 그렇게 대응해 드리죠. 라비린, 네가 여기 왜 있어?”
“아버지께서 장례 중에 뛰어나오셨는데 아들인 내가 어떻게 빠져? 게다가 난 경험자잖아. 너도 마찬가지고.”
라비린은 오드리가 단어마다 가득 눌러 담은 아니꼬움 같은 건 귓등으로 흘렸다. 어쩌다 마주치면 곧장 뺨을 맞거나 구두에 정강이쯤은 걷어 채일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한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아는 거 있어? 아무리 봐도 아르젠 남작이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알고 대비한 느낌이 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서 브란젤 전체를 감싼 마법진도 그렇고, 미리 왕궁마법사들을 동원해서 도시 곳곳에 마력을 저장해 뒀다는 것도 그렇고.”
“그거야 셰비언 본인에게 물어야지 왜 나한테 물어?”
라비린은 제 손으로 끊어낸 관계의 무게를 새삼 실감했다. 오드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 담은 셰비언이란 이름을 듣고도 불쾌함을 표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나 괴로울 일인가. 그는 입술 안쪽 연한 살을 짓씹으면서도 웃는 낯을 유지해야 했다.
“아르젠 남작이 상대하는 저자의 얼굴과 이름을 아는 자가 있었어. 샤를레아라던가? 로렐라이에서 잠깐 일했던 경호원이라던데, 알고 있지? 말브레 극장 사건이 터진 후에 나랍 출신 용병을 고용했는데 네 확인이 없었을 리 없어.”
“내가 로렐라이의 투자자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내부사정을 전부 다 알지는 못…….”
로렐라이고 샤를레아고 나는 모른다, 태연히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하던 오드리는 갑자기 얼굴을 쑥 들이민 라비린 때문에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라비린은 물러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옷깃이 스칠 듯 가까워졌다.
“베텔 경!”
그러나 내내 아닌 척 그들을 보고 있던 카프러스는 오드리를 감싸기는커녕 두 사람을 몸으로 가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게 했다. 그 나름대로의 배려였건만, 오드리는 카프러스에게 살짝 배신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아니, 누가 남들 시선 가려달랬나?
“나 없는 사이 두 사람이 뭐 깊은 대화라도 나눴어? 뭐 이리 죽이 착착 맞아?”
“네가 로렐라이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말은 여기서 하면 안 돼. 지금 이 자리에 고위직 인사가 몇 명이나 있는 줄 알아?”
“…….”
“차라리 대놓고 당당하게 굴어. 재산도 옮겼겠다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괴물을 끌어모으는 대담한 짓까지 해놓고 계속 숨기려 해 봤자 네 앞날에 도움이 안 돼.”
오드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아릿한 통증이 올라오는 바람에 그대로 풀었다. 대신 단단한 부츠 앞코로 라비린의 정강이를 확 걷어찼다. 제대로 얻어맞은 라비린이 윽,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하여간 재수 없어.”
“으……. 넌 보통 여자들이랑은 힘이 다르다고……. 적당히 조절해서 차면 안 되는 거였어?”
“아프라고 때렸는데 그럼 아파야지. 내가 무슨 안마라도 해준 줄 알아?”
오드리의 대답이 아주 야무졌다. 라비린은 찔끔 난 눈물을 닦으며 비틀비틀 일어서서 주변을 살폈다. 겨우 여자에게 맞아 주저앉았다고 자신을 놀리는 놈이 있다면, 딱 두 배의 고통을 맛보여줄 셈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샤를레아는 아마 다나 트왈릿의 살인범을 찾고 있을 거야. 복수를 위해서겠지. 브란젤을 뒤집어엎은 거야 뭐……. 분풀이가 아닐까? 셰비언이 말하길, 샤를레아의 성질머리는 예전부터 유명했다고 하니까.”
“둘이 무슨 관계인데 예전 얘기가 나와?”
“친척이래. ……음, 그러니까 아주아주 먼……? 따지자면 나와 살론 왕족 사이의 혈연 정도로 먼?”
라비린은 머릿속에서 헨젤과 랄리우스의 가계도를 쫙 펼쳐 봤다가 그만 황당해졌다. 둘 다 멜브란트에서 알아주는 귀족가문인데 어떻게 된 게 살론 출신의 귀족과는 인연이 없었다.
“뭐야, 그게.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는데 그게 친척이라고?”
“그렇대.”
“그런 황당한 얘길 네가 덮어놓고 믿었다니 그런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냐, 됐다. 알았어. 고마워.”
오드리는 허둥지둥 어디론가 사라지는 라비린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카프러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샤를레아의 이름을 꺼낸 사람이 누구예요?”
“유렌입니다. 아르젠 남작과 샤를레아가 서로 다투는 걸 봤다더군요. 샤를레아가 하늘에서 내려와 왕궁마법사 스와디를 목 졸라 죽이려고 들었고, 그걸 아르젠 남작이 막았다고요.”
“하아? 더 자세히 말해 보세요.”
“워낙 단순하게만 들어서 더 자세히 말할 게 없군요. 아무튼 그 과정에서 스와디가 자신의 살인 혐의를 인정했답니다. 다나보다는 자신이 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라고 그랬다던가, 어쨌다던가……. 그걸 들은 사람이 한 명이 아닌 데다 누구인지 특정도 힘들답니다. 다나 트왈릿도 스와디도 대중들에겐 영웅적인 희생과 헌신을 한 왕궁마법사들로 인식이 박혀 있으니 참 곤란하게 됐습니다.”
“어쩐지, 솔직하게 얘기하라니 라비린답지 않은 말이다 했지……. 경이 라비린을 막지 않은 것도 그렇고. 교차검증이었군요. 그래도 그렇지, 눈치 좀 주시지.”
“그……. 죄송합니다. 말하지 말라고 주변에서 하도 당부를 해서 그랬습니다.”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마세요. 그게 원칙이긴 하죠. 내가 경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도 모르는 새 꽁하니 맺혔던 응어리가 사르르 풀렸다. 오드리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한쪽에서는 괴물을 잡느라 피가 튀기고 다른 쪽에서는 대포 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 고인 물처럼 조용한 곳이 있었다. 지휘부였다.
‘카즈네 공작도, 타우레드 후작도 저기 있겠군. 왕궁마법사장도 있을 테고…….’
스스로 미끼가 되어 브란젤 전체에 흩어져 있던 괴물을 끌고 온 건 오드리의 공인데, 귀족영애에게 어울릴 만한 보호와 보살핌을 베풀 뿐 누구도 치하하러 나오지 않았다. 딱히 대접을 바란 적은 없어도 어딘지 입이 씁쓸해지는 상황이긴 했다.
계속 쳐다보고 있다간 버럭 짜증을 내버릴 것만 같아 오드리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탈진한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마법을 쓰는 건 마법사의 수명과 건강을 갉아먹는 일이라, 한밤부터 계속 마법망 안정화 작업을 하던 마법사들 대부분이 탈진하고 말았다. 지금 퍽 괜찮은 전공을 올리는 대포는 마법사들 중 일찍부터 쉬어서 조금이나마 몸을 회복한 자들과 남들보다 많은 마력을 가진 자들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었다.
한데, 새카맣게 죽었거나 허옇게 얼굴이 뜬 마법사들 사이에 유독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몸을 공처럼 둥그렇게 말고 앉아서 자꾸 손톱을 물어뜯는 사람. 혼자 있었더라면 많이 놀랐나 보다, 했을 텐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덜렁 끼어 있으니 몹시 이질감이 들었다.
콰앙! 괴물 무리 가운데에 벼락이 떨어졌다. 사방이 하얗게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졌고, 마법사는 잠시잠깐 들었던 고개를 도로 아래로 처박았다. 하지만 신문에서 수도 없이 본 얼굴을 헷갈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목덜미와 턱에 걸쳐 시커먼 멍까지 달고 있다면 더더욱.
“베텔 경. 저기 저 사람이 혹시 그 스와디예요? 왜 저러고 있는 거죠?”
“아, 네. 다른 마법사에 비하면 아직 체력이 있는 편이긴 한데, 만약 그녀 스스로 살인을 인정한 게 사실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대포를 맡길 수는 없다면서 계속 저렇게 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법사래도 그렇지, 살인을 인정했다는 말이 도는데 저렇게 사람들 틈에 두다니……. 아무래도 위에선 처벌할 의지가 없는가 보죠? 이상하네요.”
“죽이는 것보다는 강제 노역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근래에 보기 드문 마법사가 아닙니까. 그동안 아주 성실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소문은 막을 수 없고 누군가 원망을 받아낼 사람이 필요해질 거예요. 스와디가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해도 뒷배 같은 건 전혀 없는 인물인 데다 이 큰 사건의 원흉인데 무사할 거란 기대는 별로 안 드네요. 정말이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오드리는 스와디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대던 지면들을 떠올렸다. 그저 그런 시골 출신의 마법사, 제대로 된 스승을 구할 수 없어 제 가능성을 펼치지 못했던 비운의 실력자. 수확제 괴물 사태 이후 아르젠 남작의 지도를 받아 급격한 발전을 이뤘고, 이후 왕궁마법사를 그만둘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실력을 오로지 브란젤을 위해 쓰는 고결한 성품의 마법사. 기사 속의 스와디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스와디가 다나를 죽였다. 왜지? 왜 죽었지? 정말 오로지 분노 때문에 그만한 실력의 마법사가 그런 짓을 했……. 아니, 잠깐만. 스와디가 부족한 것 없는 완전한 마법사가 된 건 수확제 괴물 사태 이후잖아.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변한 거지? 용의 마력을 가졌고 셰비언에게 도움을 받은 나조차 그리 급격히 마력이 늘어났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생각이 마구 꼬였다. 셰비언이 스와디를 가르친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스와디의 급격한 실력 향상을 설명할 수 없고, 갑자기 늘어난 마력을 설명할 방도는 더더욱 없는 탓이었다. 그렇게 계속 고개를 갸웃대던 오드리에게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고대의 인간 마법사는 왜 굳이 빈사상태의 이종족을 찾아다니며 죽였던 걸까……. 그야 당연히 그런 짓을 해서 얻는 이득이 있었으니까 그랬겠지? 예컨대, 마력이 늘어난다든가, 마법적 재능을 키울 수 있다든가…….”
오드리는 작게 중얼거린 것이지만, 극심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던 스와디는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후드를 더 깊게 눌러쓰고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탈진한 왕궁마법사들 속에 자신이 완전히 파묻혀 보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때, 목 놓아 하늘만 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계속해서 충돌하며 번쩍대던 빛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핏빛으로 붉은 마법진이 새로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셰비언이 샤를레아를 잡겠다고 그녀의 피를 써서 만들어낸 비장의 마법진이었지만, 셰비언의 색은 금색이고 적의 색은 붉은색이라고 머릿속에 넣어두고 하늘을 보던 사람들에게 그 붉은 마법진이 얼마나 불길해 보였겠는가.
그렇게 넋을 빼놓고 하늘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유렌이 있었다. 유렌은 스와디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알차게 써먹다가 느지막이 광장에 데려와 던져 놓은 장본인이었다. 그는 하늘과 스와디를 번갈아 쳐다보며 검자루를 만지작댔다. 되도록 스와디를 지키되, 지킬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이라던 셰비언의 당부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죽여야 하나?’
붉은 마법진은 점점 색이 진해지고 범위도 커졌다. 하지만 덮어놓고 두려워하기엔 처음 하늘에 나타났던 마법진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장자리의 형태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무너지는 게 보였다.
자칫하면 근래에 보기 드물게 유능하고 일에 열정적인 왕궁마법사를 의미 없이 잃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온순하게 구는 피의자를 재판장에 세우지도 않고 자의적으로 처리했다는 비난도 피할 수 없을 테고 말이다.
유렌의 고민은 곧 해결되었다. 타우레드 후작과 카즈네 공작이 직접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스와디를 앞에 대령하라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유렌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스와디를 마법사 무리에서 끌어냈다.
스와디는 비명을 지르며 반항했지만, 전형적인 마법사와 현직 치안대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육체적 힘의 차이라는 게 있었다. 스와디는 곧 고위귀족들 앞에 내팽개쳐져 덜덜 떠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카프러스가 수염이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턱을 쓸며 흥미롭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어라……. 그러게요. 아가씨 말씀대로 될 것도 같습니다. 카즈네 공작님 정도면 재판장에 가지 않아도 즉석에서 판결이 가능할 정도의 고위귀족이 아닙니까? 일단 선왕 전하의 동생이시고, 동시에 치안대의 수장이시고.”
“나 참. 경은 하늘보다 그쪽이 더 흥미로워요?”
“어쩌겠습니까. 제게 저 하늘의 일은 거의 신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아서 말이죠.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저게 영 현실감이 안 납니다. 연극 무대 위에 어색하게 올라앉아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가요.”
오드리는 피식 웃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마법진이 자꾸 커지고 선명해지는 걸 보면서도 그녀는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셰비언이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할 거라는 기이한 확신이 오드리를 지탱했다.
붉은 마법진이 산산이 깨지고 그 가운데에서 붉은 용이 머리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오드리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한 듯 아름다운 뿔이 돋아난 머리, 길고 우아한 목, 흉터가 많기는 해도 루비를 깎아 세공한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비늘…….
어린아이가 주로 보는 동화책, 혹은 신화와 전설을 기록한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법한 짐승의 명확한 실체를 보는 건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 짐승이 자신이 서 있는 도시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다면 더더욱.
광장 전체가 소름끼치는 침묵에 잠겼다. 괴물을 잡는 군인과 치안대원들이 내뱉는 욕설도, 빛줄기 주변에 모여앉아 울며불며 온갖 신의 이름을 불러대던 사람들의 기도도, 포악하게 날뛰는 괴물들이 악쓰던 소리까지도 전부 사라졌다.
멍하니 샤를레아의 덩치를 가늠하며 저 정도면 헨젤 백작가 저택 본관보다 크겠구나,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던 오드리는 그 이상한 침묵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놀라 주변을 휙 둘러보았더니, 사람들은 물론이고 괴물까지도 무언가에 짓눌린 표정을 짓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베텔 경? 경!”
“허억…….”
다급히 가까이에 있는 카프러스를 흔들어보았지만 그 역시 정상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숨 쉬는 것도 괴로워하는 데다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오드리는 혼자 멀쩡한 자신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쿵쿵 뛰는 심장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 모든 게 저 붉은 용 때문일 거라는 추측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오드리의 시선은 자연히 스와디에게로 향했다.
스와디는 오드리에게는 못 미쳐도 꽤 잘 움직이고 있었다. 이 자리만 떠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듯, 힘겨워하면서도 한 걸음씩 발을 떼어 도망치는 중이었다. 탈진해 쓰러져 있던 어느 왕궁마법사가 팔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지만, 그 손은 스와디가 가볍게 옷을 터는 것만으로도 떨어져 나갔다.
오드리는 단숨에 달려가 스와디를 꽉 붙들었다. 자신보다 훨씬 자유롭게 움직이는 오드리를 보고 스와디가 놀라 숨을 삼켰다. 스와디가 세차게 몸을 흔들었지만, 오드리는 라비린도 인정할 만큼 힘이 셌다. 그렇게 스와디를 잡은 오드리가 스와디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할 아주 작은 소리였다.
“스와디 씨, 이렇게 혼자서만 덜렁 몸을 빼면 안 되죠.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초록색 머리칼……. 헨젤 영애? 하지만 옷이…….”
“네에, 내가 바로 그 헨젤가의 망나니 오드리 헨젤이랍니다.”
오드리는 스와디를 강제로 돌려세우고 하늘을 보게 했다. 마침 붉은 용의 목에 가느다란 금빛 줄이 걸렸다. 용의 덩치에 비하면 실 올 정도의 굵기에 불과했지만, 용은 날개를 퍼덕이며 질질 끌려갔다.
“감히 용이 아끼는 인간을 죽여놓고 복수가 없을 거라 여겼어요?”
“흐윽……. 내, 내가 알았으면, 알았으면 그랬을 리가 없잖…….”
“설령 용이 아니라도 가족이 복수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생각했어야죠.”
다나에게 가족 따위는 없었다, 변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스와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질질 끌려가던 용이 꾸역꾸역 네 발로 버티고 서서 자신을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먼데, 찌르는 듯한 시선이 똑바로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것이 된 줄 알았던 다나의 마력이 속에서 마구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굽히고 입을 틀어막았다. 눈가가 습해졌다.
“하여간 진짜 간덩이가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따로 있는데, 다들 나만 가지고 뭐라고들 한다니까.”
오드리는 스와디를 당겨 제 뒤로 숨기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야 샤를레아에게 스와디를 던져 주고 끝내고 싶긴 하지만, 누군가는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했고 쏟아지는 원망을 받아내야 했다. 어제까지 평범한 인간이었다가 오늘은 괴물이 되어 죽은 자들을 위해서라도 스와디를 그냥 죽게 할 순 없었고, 아끼던 사람 한 명의 복수를 하겠다고 도시 하나를 말아먹으려 드는 샤를레아를 믿을 수도 없었다.
‘셰비언.’
그 순간, 오드리는 셰비언과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존재를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민망해졌다.
네 발로 버티고 선 붉은 용이 입을 쩍 벌렸다. 조금씩 사라져 가던 첫 번째 마법진이 와그작와그작 구겨져 그 입속으로 사라졌다. 곧 붉은 용의 입 주변에 붉은 안개 같은 마력이 넘실대는 게 보였다.
오드리의 등에 소름이 쭉 돋고 위험을 감지한 본능이 마구 경고등을 울려댔다. 그녀는 아직도 도망갈 희망을 못 버리고 꿈지럭대는 스와디의 멱살을 움켜쥐고 일으켜 세웠다.
“저게 뭐지?”
“몰라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니, 마법사 주제에 아는 게 뭐야?”
오드리는 마법사에 대한 편견을 대놓고 전시하고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짧은 사이 하늘엔 용이 두 마리로 늘어 있었다. 새로 나타난 용은 눈처럼 새하얀 색으로, 붉은 용보다 덩치가 조금 작았지만 호전적이긴 더했다. 어느 정도 형체를 갖추자마자 대뜸 붉은 용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붉은 용이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쳤다. 용의 입가에 몰려 있던 안개가 죄 흩어졌다.
묵직하게 하늘을 채우고 있던 구름 이곳저곳에서 번개가 번쩍거렸고, 귀청을 찢는 천둥이 몇 겹이나 겹쳐서 울렸다. 찢어진 구름 사이로 별 박힌 하늘이 언뜻 맨얼굴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오드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여기만 아직도 밤이야. 아주 징그럽네.”
“아가씨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와요?”
“못 나올 건 또 뭔데?”
붉고 흰 용 두 마리가 서로 날개를 잡아 뜯고 발톱을 휘두르며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고 이빨을 박아 넣었다. 격렬하게 싸우는 두 용이 휘둘러 대는 꼬리에 연달아 맞은 금빛 마법진이 기어이 부서져 땅으로 쏟아졌다. 브란젤 곳곳에서 빛줄기가 툭툭 끊겨 사라졌다.
아까부터 광장을 지배하던 침묵이 깨졌다. 누군가는 정상으로 돌아온 제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감격스러워했고, 누군가는 사라진 빛줄기 자리를 더듬으며 절망했으며, 누군가는 평생 다시 볼 수 있을까 의심되는 구경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라비린과 카프러스는 오드리에게 가장 먼저 달려왔다.
“오드리, 당장 헨젤가로…… 아니, 왕궁으로 가. 스와디는 내가 맡지.”
라비린의 말은 오드리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오드리는 스와디의 멱살을 쥔 채로 윈디를 소리쳐 불렀다. 주인에게 충직한 말은 단번에 부름에 응답했다. 오드리는 스와디를 사납게 을러 윈디에게 올라타게 하고 자신도 탔다. 시야가 높아지니 주변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괴물을 유인하던 마력이 거의 다 떨어진 건지, 아니면 용들의 존재감에 거하게 눌린 탓인지 슬슬 도망치고 싶어 하는 괴물들이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들을 상대하는 군인과 치안대원들도 전부 회복된 게 아닌 듯, 눈앞에서 뒷걸음질하는 괴물에게 헛손질을 하는 자들이 꽤 됐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그냥 뒀다간 기껏 모아온 괴물들이 브란젤 곳곳으로 도로 퍼져 나갈 판이다. 남은 마력량을 대충 가늠한 오드리는 이제껏 뿌리고 다닌 마력 정도는 한 번 더 뽑아내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라비린, 시계탑 문 좀 열어줘.”
왕궁으로 가란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만 기껏 한다는 소리가 시계탑 문 열라는 거다. 라비린은 타우레드 영주성에선 위험 앞에 함부로 나서지 않고 얌전하던 오드리가 연달아 저지르는 무모한 짓에 거의 이를 갈다시피 했다.
“미쳤어? 헛소리 말고 스와디부터 내려놔. 중죄인을 어디 네 맘대로 빼가려고 들어?”
“중죄인? 누가 중죄인인데? 난 저어기 탈진한 마법사들 사이에 있던 스와디 씨가 이제 좀 회복한 것 같아서 도움을 좀 받아볼까 하는 건데?”
“야!”
“정말 중죄인으로 다룰 거였으면 최소한 수갑이라도 채웠어야지. 셰비언이 만들어서 치안대에 보급한 구속마법도구 종류가 못해도 서너 개는 되는데 스와디 씨는 이렇게 자유롭잖아. 안 그래?”
라비린은 당장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부들부들 떨었다. 극구 안전한 왕궁으로 가길 권하는 자신의 속내를 짐작하고도 남을 사람이 이렇게 구는 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오드리, 내가 정말 스와디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아? 여기 보는 눈이 몇이나 되는 줄 알고 그렇게 멋대로 굴어? 그게 너한테 도움이 될 줄 알…….”
“그런 거 따졌으면 괴물 안 몰아왔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런 위험한 짓을 내가 왜 해?”
“이런 주제넘은 짓 자꾸 해 봐야 너한테 도움 될 거 없다니까! 여긴 군과 치안대에 맡기고 넌 좀 빠져!”
“주제는 내가 아니라 네가 넘었지, 라비린. 네가 아직도 내 약혼자인 줄 알아? 어디다 대고 이래라 저래라야?”
“설마 내가 그때 진짜 원해서 널 보냈다고 생각해? 나는, 정말……. 그런데 넌……! 제기랄! 염병할!”
“꺼낸 말도 다 못 끝내는 찌질한 새끼 같으니……. 왜 노려봐?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그럼 그 하던 말 마저 끝내보시든가.”
오드리의 입에서 기어이 막말이 나왔다. 말 위의 여자와 말 아래 남자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쩌다보니 중간에 낀 스와디는 제대로 숨도 못 쉬고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몸을 웅크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뛰어내리고 싶은데, 허리를 휘어잡고 있는 오드리의 팔 힘이 보통이 아닌 데다 윈디의 체구가 워낙 커서 엄두가 안 났다.
‘뭐야, 이 둘 파혼한 거 아니었어? 왜 사랑싸움을 이런 데서 하는 건데…….’
바로 그때, 스와디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언제 사라진지 모르게 사라졌던 카프러스가 피올을 찾아 데려온 것이다. 피올은 찢어져 피가 흥건한 이마를 붕대로 대충 누르고 있었는데, 고집스레 고삐를 쥔 오드리를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혀를 찼다.
“아가씨, 그렇게 마력을 뽑아놓고 아직도 뽑을 마력이 더 남았어요?”
“말했잖아요, 난 웬만한 마법사들 못지않게 마력이 많다고.”
“탈진해서 쓰러지면 버리고 뛸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요. 보티안 씨야말로 그 이마 상처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괜찮겠어요? 설마 말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죠?”
“기절하는 한이 있어도 안 떨어질 겁니다.”
“그거 믿음직하네요. 보티안 씨가 거기서 더 다치면 내가 네이기스에게 원망을 들을 테니 몸조심하세요. 참, 라비린! 저기서 날 노려보고 계신 후작님께 좀 전해줘. 괴물을 시계탑 아래로 몰이할 테니 병사들 정비 다시 하시라고.”
오드리가 고삐를 다잡고 자세를 추슬렀다. 카프러스는 단단히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말 위에 올랐고, 피올 역시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경비대의 말 중 멀쩡해 보이는 놈을 골라 탔다.
“미친……. 됐어, 나도 간다.”
이번엔 오드리가 놀랄 차례였다. 라비린은 품에서 종지쪽지와 만년필을 꺼내 몇 마디 글을 써서 근처 병사에게 건네곤 그의 말을 빼앗아 탔다. 워낙 덩치가 큰 사람이라, 평범한 체구였던 말이 갑자기 왜소해 보였다.
“시계탑까지 가려면 괴물밭을 뚫고 가야 해. 평소 실력 반의반도 못 낼 부상자와 그저 그런 기사 한 명만 대동하고 거길 어떻게 들어가겠다는 거야? 어차피 할 거면 위험요소를 조금이라도 줄여야지.”
카프러스와 피올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상황이 급해 참고 있을 뿐, 눈곱만큼의 여유라도 있었으면 장갑을 던졌을 거란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참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카프러스와 피올의 속내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대변자가 되어 톡 쏘아붙였다.
“와, 라비린 너……. 말본새 정말 재수 없다. 너는 뭐 얼마나 대단한 기사라고 이래?”
“시끄러워. 출발 안 해? 저기 타우레드 후작께서 달려오고 계신데?”
“이런, 바로 가야겠네. 스와디 씨, 토하지 말고 잘 참아봐요.”
오드리 일행은 엉성하게나마 자리를 잡고 형태를 갖추었다. 제일 앞은 피올이 섰고, 가운데에는 스와디를 붙든 오드리가, 그 옆에는 카프러스가 자리 잡았고 마지막은 라비린의 차지였다.
그들은 아직까지 괴물을 잡는 군과 치안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넓은 반원을 그리며 시계탑을 향해 내달렸다. 넓게 펼쳐진 흰색 케이프 코트의 뒤를 따라 맑고 영롱한 금빛 마력이 동전처럼 떨어져 흩어지니, 도망치려던 괴물들이 마력에 홀려 고개를 돌렸다.
“염병! 아까보다 더 지독해!”
“보티안 씨! 투덜대지 말고 가요! 시계탑으로 직진!”
“예에, 예에! 갑니다, 가요! 빌어먹을 놈의 시계탑! 진로는 제가 알아서 잡습니다!”
오드리는 시계탑으로 직진을 외쳤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피올은 그렇게까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그는 큰 원을 그리며 길을 열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군인들과 치안대원들이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었다. 말이 피와 살점으로 다져진 길을 내달리는 중, 다른 사람이 불쑥 끼어들어 피올과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피올, 이 개 같은 새끼! 파트너를 버리고 가?”
“유렌? 네가 왜 와?”
“부상자는 닥쳐! 아가씨, 저도 갑니다!”
오드리는 갑자기 왜 유렌이 끼어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칼 든 사람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유렌이 끼어드는 걸 용인했고, 그는 금세 피올을 밀어내고 선두를 차지했다.
“우욱…….”
“토하지 마요, 스와디 씨. 윈디 갈기에 토하면 당신 머리카락을 죄다 잡아 뜯어버릴 거예요.”
스와디는 오드리의 침착함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잘한 다툼이 끊이지 않는 국경 지대에서 살다 온 것도 아니고, 살인과 폭력이 일상인 뒷골목 출신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런 광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넘길 수 있는가? 만탈락은 부유하고 안정된 도시라고 들었는데, 설마 그게 다 헛소문이었던 건가?
육지에서 서로 칼을 뽑아들고 싸우는 시대는 점차 저물고 있다는 게 이 시기를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감상이었다. 전장의 무대는 육지에서 바다로 바뀌었다. 높은 파도와 바람을 극복하기에 검과 창은 부실한 무기였다. 타우레드 후작이 괜히 공격용 마법도구에 집착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시대에서 안정적인 평화를 구가하는 멜브란트의 내륙지방에서 태어나 자란 귀족영애가 이 참상을 어떻게 저리 쉽게 견디는가.
그 의문은 오드리의 손에 멱살을 잡혀 시계탑 꼭대기에 올라가고서도 풀리지 않았다. 뻥 뚫린 시계탑 꼭대기로 짙은 피비린내를 품은 바람이 마구 몰아치는데,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오드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귀족은 다 저런가? 아닌데, 내가 본 귀족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그야 당연히 저 아가씨가 특이한 거죠. 보통 사람이라면 괴물이 자신의 마력을 탐내 쫓아온다는 걸 알면 잽싸게 멀리멀리 도망가지, 유인해서 군인들 앞에 데려다놔야겠다는 생각은 안 한단 말입니다. 명령을 받아서 해도 기분 더러울 판에, 스스로 나서는데 그게 제정신이에요? 아, 씁……. 아파 죽겠네.”
그냥 흘린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피올이었다. 스와디는 자신이 고위 귀족을 앞에 두고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라비린과 오드리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올이 그 타우레드 후작가 출신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마저도 못했겠지만.
“들리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요?”
“면전에서 말해도 신경 안 쓸 사람들이에요. 조금 웃고 말겠지.”
“…….”
“저들에게 일개 왕궁마법사가 떠드는 말쯤이야 파리가 윙윙대는 것과 다를 바 없죠. 파리 따위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서야 귀족이겠어요? 그 파리가 확성기에 대고 고래고래 욕을 해대면 또 몰라.”
스와디는 울컥 자신은 파리가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어제까지의 자신은 파리가 아니었을 테지만 지금은 파리가 맞았다. 다나 트왈릿을 죽이고 그녀에게서 빼앗은 마력으로 명예를 얻었던 게 공개적으로 까발려진 지금, 스와디의 앞날은 짙은 안개에 뒤덮인 듯 뿌옇기만 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 오드리가 자신을 왜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하긴 멀쩡히 인간 노릇을 하던 애인이 갑자기 용이 돼서 쌈박질을 하고 있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깡다구인데 새삼 괴물 따위에 겁먹고 놀라는 것도 우습긴 하죠. 난 아직도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데.”
계속 아래쪽 상황을 내려다보던 오드리가 제 손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어버리고 맨 손바닥을 시계탑 바닥에 가져다 댔다. 카프러스는 그랬다간 상처가 덧날 거라며 질색을 했지만, 스와디는 마구 솟아오르는 호기심에 숨도 못 쉬고 오드리를 지켜보았다.
“헨젤 영애가 로렐라이의 주인이라는 소문은 그냥 헛소문인가 보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요?”
“마법은 마법사의 수명과 건강을 깎죠. 하지만 그냥 마력을 펑펑 꺼내 쓰는 것보단 덜 깎아요. 로렐라이는 마법사를 체계적으로 대우하고 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데, 그런 상단의 주인이면 그 기본적인 걸 모를 리 없잖……아……요…….”
스와디의 말끝이 흐려졌다. 이제까지 오드리가 광장에 풀어놓은 마력만 해도 엄청난 양이었는데, 지금 오드리가 꺼내는 마력의 양은 그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오드리를 중심으로 금빛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퍼져 나갔다. 스와디는 비명을 지르며 오드리에게 달려들었지만, 카프러스에게 단번에 막히고 말았다.
“안 돼! 그러다 죽어요!”
“아가씨, 이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래, 오드리. 적당히 해. 너한테 이렇게까지 할 의무는 없잖아.”
오드리는 들은 척도 않고 마력을 때려 부었다. 아까 광장에서 꽤 절약한 덕에 아직은 괜찮았다.
그녀가 붓는 마력의 양이 계속 축적되자 시계탑 꼭대기 전체가 금빛으로 일렁거렸다. 저절로 눈길을 끌면서도 눈부시지 않은 이상한 빛이었다. 괴물들은 불에 홀린 나방처럼 시계탑 아래로 몰려들어 매끈한 벽을 벅벅 긁어댔다. 군인들과 치안대원들은 그들의 뒤에서 손쉽게 목을 베어 괴물의 숫자를 줄였다. 정말이지 훌륭한 미끼였다.
시간이 지나며 오드리의 이마에서 땀이 굴러 떨어지고 한결 버겁게 내쉬는 숨이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그를 지켜보는 카프러스와 라비린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그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오드리를 끌어내려 하는 순간, 셰비언이 만들어 시계탑에 새겼던 마법진이 오드리의 마력에 반응했다.
셰비언이 최초로 마법진을 발동했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금빛으로 빛나는 마법진이 시계탑 꼭대기를 채우고 남아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록 마력의 양이 적어 범위는 그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광장을 채우고 그 주변 곳곳에 빛줄기가 다시 솟아오를 정도는 됐다.
사실, 셰비언이 만들었던 마법진은 파괴된 게 아니었다. 그가 용의 본신으로 돌아가 샤를레아와 본격적으로 몸싸움을 시작하면서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게 되자 잠시 작동을 멈췄던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 정순한 용의 마력이 충분할 만큼 흘러들어 가자 기꺼이 반응한 것이다.
어쨌거나 오드리로서는 한숨 돌린 셈이었다. 오드리가 휘청대며 일어나 피올에게 손짓하니, 피올이 냉큼 스와디를 데려다 그녀의 앞에 무릎 꿇렸다.
“스와디 씨, 이제 당신에게 기회를 주죠.”
“네? 네? 무, 무슨 기회요?”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기회.”
오드리의 목소리는 몹시 단조로웠다. 그녀는 입에 고인 피를 탁 뱉어내곤 스와디의 어깨를 눌러 강제로 마법진에 손을 대게 만들었다.
“난 셰비언이 거짓말을 하게 할 생각 같은 건 없어요. 그러니 그는 솔직하게 말할 테죠, 이 사태의 원인은 바로 당신이라고. 그럼 절대 편하게 죽진 못할걸요.”
“아, 아냐……. 애초 괴물을 만든 건……!”
“이 괴물을 처음 만든 건 다나 트왈릿이라고 말하고 싶은가요? 어쩌죠, 그녀는 한참 전에 죽어서 이젠 명예로운 이름만 남았고 조작에 협조한 사람들은 저 높은 곳에 수두룩한데. 당신은 그녀를 질투해서 죽인 뒤 빼앗은 마력으로 그녀가 가졌어야 할 자리를 빼앗은 미친 마법사가 될 거예요.”
“난 브란젤에 필요한 사람이에요! 그런 꼴은 당하지 않아요!”
“오늘 이후론 필요하지 않아요. 도시 복구요? 당신이 아니어도 할 수 있어요. 셰비언이 나서준다면 두 팔을 들고 환영할 사람들이 널렸어요. 괴물도 없는데 그 정도 품 들이는 거야 우습죠.”
“…….”
“선택해요. 목숨을 바쳐 브란젤을 구한 영웅적인 마법사가 될 건지, 아니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도시 복구에 소모되다가 형틀에 매달려 썩은 토마토를 맞는 신세가 될 건지.”
“시, 싫다면요……? 전 살고 싶어요!”
“인간의 신체 구성에서 피와 뼈는 마력을 가장 많이 품은 요소예요. 스와디 씨, 이 자리에 칼 찬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세어봐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오드리가 스와디를 놓고 일어서서 뒤로 물러났다. 스와디는 멍하니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황불을 등 뒤에 두고 선 그녀의 머리칼은 언뜻 검은색으로도 보였고, 그 아수라장을 헤치고 나오는 와중에도 케이프 코트는 피 한 방울 없이 깨끗한 흰색이었다.
“내, 내가 여기서 주, 죽으면…….”
“만탈락과 로렐라이의 주인으로서 오드리 헨젤이 약속하죠. 스와디 씨의 이름은 명예롭게 역사에 남을 거예요.”
스와디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스스로 마법진에 손을 짚었다.
잠시 잊고 있던 마법진이 다시 구동됐다.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셰비언은 온몸의 비늘이 다 곤두서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인간이 용의 마법진을 쓰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마력이 들어가는지, 계산은커녕 짐작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모든 걸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우습게도 샤를레아 역시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조금 전에 확인한 용의 마력 소유자는 오드리가 아니라 스와디였으니까. 사라졌던 이성이 단번에 돌아와 샤를레아를 후려쳤다. 스와디의 마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모르는 샤를레아는 범위를 넓혀가며 빛줄기를 올리는 마법진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악!”
위쪽에서 덤벼든 셰비언이 그녀의 등에 발톱을 틀어박고 커다란 구멍을 냈다. 핏줄기가 솟아올라 흰 비늘을 더럽혔다. 그러나 당연히 몸을 뒤집고 반격해야 할 샤를레아는 도리어 목을 길게 빼고 추락하다시피 시계탑을 향해 날았다. 상처가 길게 찢어져 등이 거의 갈라지는 큰 부상을 입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스와디는 붉은 용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걸 들었다. 마력을 하도 많이 쏟아서 눈앞이 깜빡거리는 와중에도 곧 죽겠구나 싶은 예감이 들었다. 마력 고갈로 죽든, 용에게 살해당하든 아무튼 죽겠구나. 이번엔 피할 수 없겠다. 유렌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스와디를 데리고 도망칠 수 없겠다고.
“스와디가 용에게 죽게 두면 안 돼!”
유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이 어느 용? 하고 물어볼 틈도 없이, 시야 전체가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 찼다. 그는 지체 없이 검을 뽑았다.
샤를레아는 분명 방어진이 가득할 시계탑을 부수려는 무익한 시도는 아예 할 생각도 않고 단숨에 인간의 모습으로 몸을 바꿨다. 왼쪽 어깨가 너덜거리고 오른 다리는 반쯤 갈라졌으며 등은 척추뼈가 허옇게 드러난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검을 쥔 손에는 확실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복수의 쾌감이고 나발이고, 스와디에게 있는 방어막을 뚫으려면 웬만한 힘으로는 안 된다. 이를 악물고 내지른 그녀의 검이 단번에 스와디의 심장을 꿰뚫었다. 조금 전까지 펄떡거리며 온몸에 피를 돌리던 심장이 검을 물고 부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원수를 갚았다는 기쁨도 잠시. 마력이 넘어오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샤를레아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에 제 눈을 의심했다. 그녀의 검은 스와디의 가슴뼈를 가르고 심장을 꿰뚫었는데, 검자루까지 틀어박힌 가슴에 다른 검의 끝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목도 마찬가지였다.
스와디의 등을 찔러 심장을 꿰뚫은 자는 유렌, 목을 찌른 자는 카프러스. 그들이 먼저 스와디의 숨통을 끊었기에 샤를레아의 검도 방어막의 방해 없이 스와디의 심장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스와디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커헉!”
허공을 날아온 셰비언의 창이 샤를레아의 등을 뚫고 시계탑 바닥에 꽂혔다. 샤를레아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쓰러져 바닥을 기면서도 샤를레아는 유렌과 카프러스의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했다. 유렌과 카프러스는 물론이고 피올과 라비린까지, 그들은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무언가 끔찍하게 무거운 것이 어깨를 내리누르고 다리를 옭아매 붙드는 것만 같았다.
“네가, 네까짓 것들이, 감히, 내 원수를 가로채? 이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악을 쓰는 입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스와디가 가까이에 선 카프러스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손톱 끝이 갈고리처럼 변하면서 손등에 붉은 비늘이 다다닥 돋아났다.
“베텔 경!”
용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오드리가 카프러스를 잡아당겼다. 목표를 잃은 손톱이 돌바닥을 긁어대며 깊은 흠집을 냈다. 끼리리릭! 끔찍하게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푸른 눈이 희번덕거리며 오드리를 쏘아보았다.
“반쪽짜리? 반쪽짜리도 여기 있었어? 너도 저놈들과 한패였어? 이 빌어먹을……! 아악!”
“샤를레아, 패배자 주제에 혓바닥이 너무 길어.”
“아으으으윽!”
인간의 모습을 한 셰비언이 시계탑 꼭대기에 사뿐히 나타났다. 셰비언은 아무렇지 않게 창을 휘저으며 상처를 헤집었고, 샤를레아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용의 모습이면 그나마 나을 것을, 인간의 육신은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기절조차 허락하지 않는 고통에 눈의 핏줄이 툭툭 터져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눈뜨고 보기 힘든 처참한 모습이었지만, 셰비언은 샤를레아의 꼴이 보기 좋다는 듯 기분 좋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 샤를레아와 뒤엉켜 몸싸움을 했던 셰비언은 그다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 한쪽 눈은 거의 뜨질 못했고, 왼쪽 어깨는 하도 물어뜯긴 나머지 너덜너덜해서 팔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도 멀쩡하지 않아 그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 몸이 반쯤 기울어진 채였다. 그 외에도 자잘한 상처가 셀 수 없이 많았고, 아름답게 출렁거리던 은발은 쥐에 파 먹힌 것처럼 군데군데 잡아 뜯겨 영 볼품이 없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옷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더러 인간에게 지나치게 물든 거 아니냐고 나무라더니, 너야말로 엉망진창이야. 그 샤를레아가 고작 인간 한 명의 복수를 위해 이렇게까지 망가지기를 자처하는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러게, 마법의 주인이 하나뿐인 동족이 아니라 인간의 편을 드는 날이 올 줄은 누가 알았겠어?”
창에 꿰여 파닥대는 샤를레아에게서 독기가 줄줄 흘렀다. 하늘을 휘저으며 유황불을 떨어뜨리던 위엄은 다 사라지고 없어도 악은 그대로였다. 그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움직일 수 있게 된 사람들 모두가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멍청한 셰비언, 너는 동족이 아니라 인간의 편을 든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다. 잠깐 스치는 인연에 눈이 멀어서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후회하게 될 거야! 잠깐이면 모를까, 용은 인간과 어울려 살 수 없어! 평생을 고독 속에 지내라! 별자리가 변하고 산맥이 바스러지는 시간을 홀로 외롭게!”
“우습기는. 그런 끝쯤이야 동족들을 두고 잠드는 순간부터 각오했던 것 아닌가? 새삼 그런 걸 저주라고 하고 있어? 하여간 넌 생각이 너무 없어.”
샤를레아의 악다구니는 들은 체 만 체, 셰비언이 허공에 창 몇 개를 더 만들어냈다.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창이 샤를레아를 조준했다. 새로운 고통을 예감하고 이를 악문 샤를레아의 등에 붉은 비늘이 돋아났다. 셰비언이 그런 그녀를 조롱했다.
“마법의 주인이고 뭐고, 마음만 먹으면 당장 내 목 따위는 쉽게 꺾어버릴 수 있다던 화룡 샤를레아! 이번이 벌써 두 번째 패배로군? 그렇게 엎드려 숨죽이고 있으니 기분이 어때?”
“이 튀겨먹어도 모자랄 자식……!”
샤를레아가 욕을 뱉었고, 셰비언이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피가 입 밖으로 튀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상이 심한 탓이었다. 마법진을 끼고 싸우던 걸 그만두고 직접적인 몸싸움을 벌인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경험과 기술이 상대적으로 모자란 셰비언은 상당한 손해를 입었다. 셰비언도 샤를레아도 알고 있었다.
“마법진만 아니었어도 너는 내 손에 죽었어!”
“싸움의 결과에 만약 따위는 없다고 주절거리던 게 누군데 그런 말을 할까? 응?”
희고 길쭉하게 변한 동공은 물론이고,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를 입고도 몹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둘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보지 마.”
라비린이 오드리의 눈을 가렸다. 오드리가 괴물이 조각나는 끔찍한 모습을 정면으로 보고도 잘 버티는 통에 잠시 잊어버렸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가 그런 풍경에 익숙할 리가 없었다. 기사도 아니고 전장 근처에서 자란 것도 아닌데.
“저런 거 굳이 볼 필요 없어.”
당장은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흥분이 가라앉고 모든 일이 지나간 뒤 침대에 누웠을 때, 같은 풍경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면 그땐 어쩌나. 처음 전장에 나갔던 날, 라비린은 그날 먹은 식사를 모조리 게워냈고 사흘을 꼬박 앓았다. 사람을 죽였을 땐 더 심했다. 그런 고통을 오드리가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
“안 봐도 돼.”
“쓸데없는 참견이야.”
오드리가 라비린의 손을 잡아 내리려 했지만, 라비린은 고집스럽게 버텼다. 온몸에 비늘이 돋은 통에 새빨간 머리칼과 그럭저럭 멀쩡한 얼굴만 아니면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도 하기 힘든 샤를레아도, 그녀의 등을 헤집으며 즐거워하는 셰비언도 끔찍한 풍경이긴 마찬가지였다.
“현명한 개입이라고 해줘. 안 볼 수 있는 건 안 보는 게 좋아.”
“닥쳐, 네가 뭔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야?”
“음……. 친구의 배려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넌 친구인지 아닌지도 아직 애매하지만 저기 있는 사람은 내 애인이거든? 잔인한 말로 걷어찰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난리야? 치워!”
“여전히 말하는 데 거침이 없구나, 넌…….”
오드리는 기어이 라비린의 손을 치워내고 시야를 틔웠다. 시계탑 꼭대기는 여전히 피투성이였고 하늘은 여전히 시커멨다. 샤를레아가 흘리는 피가 마법진에 계속 마력을 공급해 주는 덕에, 광장에 그쳤던 마법진이 점점 범위를 넓혀가는 게 눈에 보였다. 꺼졌던 빛줄기가 다시 솟아나 브란젤 곳곳에 빛을 비췄다.
그리고 셰비언. 라비린조차 살짝 겁을 먹을 정도로 잔인하게 샤를레아를 유린하던 그가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오드리를 보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 넘치던 광적인 승리의 기쁨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았고, 하얗게 변했던 동공도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오드리의 안색을 살피는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아가씨, 목이…….”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셰비언이 입은 상처야말로 어마어마한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갈라진 등에 꽂힌 창만 아니면 샤를레아보다 셰비언의 상처가 더 컸다.
“내 걱정은 마무리까지 다 한 다음에 해. 내가 보는 게 싫으면 뒤돌아서 있을까?”
그것 참 친절하게도 오드리가 뒤로 돌아섰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친절을 받고서도 좀 전처럼 돌아가지 못했다. 샤를레아의 비명과 주변을 채운 피 냄새가 오드리에게 얼마나 자극적일지에 대해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여기가 인간으로 가득 찬 도시, 브란젤이라는 것도.
‘자리를 옮길까?’
오드리가 있는 시계탑 꼭대기 말고, 그녀가 있는 브란젤 말고. 하지만 샤를레아가 아무리 약해진 상태라 한들 그녀를 산 채로 끌고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엔 위험이 따랐다. 그렇다고 여기서 샤를레아의 숨통을 끊었다간 시체가 그 즉시 본체로 돌아가 버릴 텐데, 오드리야 어찌어찌 자신이 보호한다 해도 이 부근의 인간들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셰비언은 고민에 빠졌다.
“……흠.”
“킥……. 왜, 갑자기 인간들 걱정이 돼? 내 시체가 인간들을 깔아뭉개기라도 할까 봐? 하긴, 넌 번개를 그렇게 쓰면서도 도시에 불이 안 나게 세심하게도 배려했었지. 인간의 도시 따위 아무 의미 없다더니 거짓말도 잘해. 인간들은 그런 배려를 이해하지도 못할 텐데! 등신새끼! 하하하! 하하하하!”
고통에 익숙해지기라도 했는지, 샤를레아가 얄밉게도 주둥이를 놀렸다. 셰비언은 당장 그녀의 목을 분질러 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아냈다. 대신 아까부터 공중에 띄워놓고 막상 쓰지는 않았던 창으로 샤를레아의 사지를 꿰어버렸다. 비늘을 부수고 박힌 창에서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그대로 그녀의 팔다리를 얼렸다.
“아으으……. 으으윽…….”
“그렇게 고통이 좋다면야 얼마든지 아프게 해주지.”
“아아악!”
새로 꽂은 창들 사이로 새로운 마법진이 그려졌다. 평면이었던 마법진이 불쑥 솟아올라 입체적인 모양을 그리더니, 마치 커다란 새장처럼 샤를레아를 감쌌다. 그 안에 갇힌 샤를레아의 입술이 순식간에 시퍼레졌다. 살얼음 낀 속눈썹이 힘없이 팔랑거렸다.
셰비언은 마지막으로 샤를레아의 등을 관통하고 있는 창을 쥐었다. 통째로 얼려서 옮기려면 이 창을 뽑아야 했다. 그가 신중을 기해 조금씩 창을 뽑아낼 때마다 신경을 태우는 고통이 샤를레아를 덮쳤고, 그녀는 그때마다 부들부들 떨며 펄떡거렸다.
“죽여…… 죽여 버릴 거야…….”
“하여간 입은 살아서.”
창이 완전히 뽑혔다. 셰비언은 마법진으로 만들어진 새장 안에 늘어진 샤를레아를 쿡쿡 찔러보다가 움직임이 없자 창을 가볍게 휘둘러 묻었던 피를 떨쳐 냈다. 돌바닥 위에 시뻘건 핏방울이 새로 떨어졌다. 툭, 툭, 투두둑…….
“음……?”
가장 먼저 이상을 발견한 건 피올이었다. 그는 창에서 떨어진 샤를레아의 피가 기묘하게 움직이는 걸 포착하자마자 검을 뽑아 오드리의 앞을 막아섰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쐐액! 채찍처럼 휘둘러진 피가 피올의 검에 막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하지만 피올의 검도 그걸로 수명을 다했다. 피올은 반으로 부러진 검을 내던지고 유렌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라비린이 놀란 오드리를 뒤로 밀쳐 냈고, 카프러스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이 미친년이!”
“오드리, 물러나!”
“아직도 힘이 남았어?”
시퍼렇게 질려 얼어붙기 직전이었던 샤를레아의 전신에 불이 붙어 있었다. 새장 같은 마법진 안이 온통 시뻘겠다. 곧 인간의 형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법진 안에 꾸깃꾸깃하게 몸을 구긴 용의 본체가 드러났다. 샤를레아가 자신에게 박힌 창은 죄다 태워 없애고 본체로 돌아가려고 시도 중인 것이다.
경악한 셰비언이 마법진을 겹겹이 겹쳐 새장을 강화했지만 소용없었다. 마법진이 툭툭 벌어지고 깨지며 용의 본체가 좁은 공간을 비집고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찢긴 날개, 비늘이 죄다 벗겨진 꼬리……. 상태가 안 좋더라도 용은 용이었다. 짙푸른 눈동자가 흰 동공을 번뜩이며 오드리를 감싼 이들을 노려보았다. 급격히 높아진 존재감에 오드리를 제외한 인간들 모두가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셰비언이 다급히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동공은 아직 검은색이었지만, 목덜미와 손등엔 흰 비늘이 빼곡했다. 그가 바닥에 뿜어낸 차가운 마력이 샤를레아의 열기를 뒤로 밀어냈다.
“아가씨, 더 뒤로 물러나요!”
이 좁은 공간에서 용 두 마리가 엉켜 싸울 수는 없다. 셰비언은 전력을 다해 샤를레아를 밀어냈지만, 한쪽은 본체고 한쪽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둘 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힘의 우위는 명백했다.
“저놈의 몸뚱이는 예나 지금이나 더럽게 단단해서……!”
눈앞에 닥친 위급함이 명백하건만, 셰비언의 신경은 온통 뒤쪽의 오드리에게로 쏠렸다. 샤를레아의 시선이 자꾸 자신의 어깨 너머로 넘어가는 걸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대치 상태를 유지하는 걸 빤히 보던 샤를레아가 갑자기 눈을 휘며 웃었다.
“넌 예나 지금이나 지키는 싸움을 못해.”
“이……!”
아슬아슬하게 샤를레아를 구속하고 있던 마법진이 기어이 쪼개졌다. 마법진 안에 갇혀 있던 샤를레아의 본체가 폭발적으로 부피를 키우며 사방으로 열기를 뿜어냈다. 셰비언이 기껏 보호마법을 걸어놓은 시계탑 전체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삐걱거렸다.
셰비언은 완전히 마법진에서 벗어난 샤를레아가 자신을 비웃으며 시계탑을 벗어나는 걸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오드리를 노리고 쏟아낸 열기를 막아야만 했고, 동시에 시계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마법진을 강화해야만 했으니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거라면, 아까 창과 발톱으로 헤집어놓은 상처들이 그대로라는 것이다. 샤를레아가 퍼덕거리는 날개 사이로 깊이 헤집어진 상처가 뚜렷했다. 그녀는 똑바로 날지 못해 계속 휘청거렸다. 그러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게 몹시 용해 보일 지경이었다.
“허억…….”
“와……. 안 죽고 용케 살았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이 빌어먹을 놈의 검. 치안대 검 품질이 왜 이 모양이야? 하마터면 검날이 나한테 튀어서 뒈질 뻔했잖아.”
“야, 괴물을 그렇게 잡고 용의 공격까지 막았으면 무진장 훌륭하지! 보급품한테 뭘 바래?”
“끝난 건가?”
“모르죠. 죽이질 못했으니…….”
압박감에서 겨우 벗어난 사람들이 제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말을 마구 쏟아내면서도 좀처럼 셰비언에게 시선을 주지는 못했다. 셰비언이 그들을 지켜주었다는 걸 알면서도 속 편히 감사 인사를 하기엔 본능적인 거부감이 가시지 않았다.
호감을 저절로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외모도 이번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셰비언은 피투성이였고,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라비린을 비롯해 검을 잡은 자들은 몸으로 겪어 알고 있는 부상의 심각성과 셰비언의 상태를 무의식중에 비교하고 괴리감을 느꼈다. 당장 바닥에 드러누워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야 하는 사람이 멀쩡히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이질감이 밀려들었다.
오로지 오드리 혼자만이 서슴없이 셰비언에게 다가가 그의 상처를 돌보려 했다. 그녀는 용의 마력을 가졌기에 용의 존재감에 눌리지 않았고, 큰 부상을 입은 환자를 겪어본 적이 없어 셰비언의 상태에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저 그가 다친 게 신경 쓰일 뿐이었다.
“몸으로는 안 싸울 거라며 왜 이렇게까지 했어?”
“그야 그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 아니, 그보다 아가씨는 왜 여기 와 있어요? 오늘은 브란젤에 없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야 그대를 보러 왔지.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벼락이 마구 떨어지는데 어떻게 멀리서 보고만 있어? 가까이에 있고 싶었지……. 그러고 보니 내가 짐이 됐군. 미안해. 날 지키느라 샤를레아를 쫓아가지도 못하고…….”
오드리가 보기 드물게 풀이 죽었다. 셰비언은 짧게 웃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입술연지처럼 입술을 적셨던 피가 그녀의 뺨에 자국을 남겼다.
“괜찮아요. 승부야 뭐 다음에 또 내면 되죠. 당분간 샤를레아는 자기 둥지에 처박혀 꼼짝도 못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대는? 그대의 부상도 심각하잖아. 얼른 의사에게 보여야…… 아니, 그대는 용인데 인간 의사가 소용이 있긴 한가?”
“당연히 소용없죠. 제 상처는 제가 치료해요. 마력이 좀 차면 바로 치료할 테니 걱정 마세요.”
“아프진 않아? 아파 보여. 혹시 인간의 약이 들으면 진통제라도 좀 가져다줄까?”
“글쎄요……. 사실 인간의 약은 써본 일이 없어서요. 이 기회에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보다 아가씨는 웬 상처예요? 속상하게. 저기 줄줄이 붙어 온 칼잡이들은 아가씨가 이런 상처를 입는 동안 뭘 했대요?”
오드리가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그녀가 입은 상처라고는 홀라당 까진 손바닥과 목덜미에 달라붙은 괴물에게 물린 상처 정도가 전부였다. 목에서 생각 외로 피가 많이 흐르긴 했지만 케이프 코트가 피와 오물을 죄다 튕겨낸 덕에 차림도 나름 깔끔했다. 그런데 언뜻 봐도 중환자인 셰비언이 오드리를 걱정하다니.
“나야말로 이 정도는 약 바르고 며칠 쉬면 나아.”
“아녜요. 마력을 많이 쓰셨잖아요. 회복력이 현저히 떨어졌을 거라고요.”
“아, 그렇지. 마력은 생명력과 관련 있다고 그랬었지…….”
“그걸 뻔히 아는 분이 마력을 그렇게 잔뜩 꺼내 써요? 마법진이 구동됐을 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가씨는 상상도 못할걸요.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글쎄? 아마 팔 할이 책임감이고 나머진 동정심, 혹은 짜증…… 어?”
셰비언의 잔소리에 웃으며 답하려던 오드리가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와 마주보고 서 있던 셰비언은 물론이고 흘끔흘끔 시선을 주던 카프러스와 라비린까지 벌떡 일어나 오드리에게 달려왔다.
“오드리?”
“아가씨!”
셰비언이 다급하게 마력을 부었다. 그러자 앉은 채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오드리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초록색 눈동자에 빛이 돌아온 걸 확인한 셰비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말하는 것도 힘드시네요. 일단 돌아가서 쉬시는 게 좋겠어요.”
“응……. 그래, 그게 좋겠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은 하고 가야지. 베텔 경, 스와디 씨의 시신을 좀 수습해 주세요.”
스와디는 마력을 붓던 그 자리에 쓰러진 그대로였다. 오드리는 크게 뜨고 있는 스와디의 눈을 억지로 감기고 승마복 주머니에 들었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목에 묶었다.
“고생했어요, 스와디 씨. 거기 라비린, 그리고 경들, 와서 스와디 씨한테 고맙다고 해요.”
스와디의 죄목을, 그리고 그녀 스스로 마력을 쏟아내 마법진을 복구하던 풍경을 알고 있는 남자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다들 자신이 지니던 물건들 중 일부를 꺼내 스와디의 손에 쥐어주었다. 동전, 브로치, 소맷부리 단추……. 나름의 감사 표현이었다.
“셰비언, 저 하늘은 언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지?”
“이젠 방해도 없으니……. 내버려 두면 지금 펼쳐진 마법진이 알아서 밤을 몰아낼 거예요. 물론 아가씨께서 원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햇살을 쬐게 해드리겠지만요.”
셰비언이 의욕적으로 말하며 웃었다. 본래 오드리는 그에게 어떤 일도 시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 짧은 새 이마에 났던 상처가 사라져 자국도 남지 않은 걸 보고 나자 조금은 마음이 놓이고 욕심이 생겼다.
“그럼……. 조금만 도와줄 수 있어? 실은 내가 스와디 씨와 약속한 게 있어서.”
“뭘요?”
오드리가 셰비언의 귀에 속닥속닥 말을 건넸다. 셰비언은 그런 건 라비린에게 맡기고 오드리는 그만 쉬어야 한다고 입을 삐죽댔지만 오드리의 고집을 이기진 못했다.
“그래요……. 그럼 이왕 할 거 확실하게 하죠. 아주 신성해 보이는 연출을 해드릴게요.”
“뭐? 아냐, 그냥 우리가 탑에서 나갈 때 맞춰서 하늘을 밝혀주는 정도면 충분……. 셰비언? 듣고 있어?”
셰비언이 오드리의 말을 뒷등으로 흘리고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브란젤 곳곳에서 빛줄기를 쏘아 올리던 꽃들이 일제히 봉우리를 닫았다. 가로등이 거의 다 나간 브란젤이 일제히 암흑에 잠겼다. 그 다음엔 하늘을 채웠던 먹구름에 동그란 구멍이 생기더니 그리로 아침 햇살이 툭, 떨어졌다. 그 햇살을 받는 건 당연히 시계탑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시계탑으로 몰려들었다.
“호오. 이런 것도 되는 거였어?”
만탈락의 어린 주인으로서 온갖 이벤트와 선전에 익숙한 오드리는 산발이 된 머리칼을 정리하고 케이프 코트의 주름을 펴는 등 의관을 정제하곤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카프러스는 얼른 오드리의 뒤에 서고서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댔고, 피올과 유렌은 숨을 곳 하나 없는 시계탑 꼭대기의 구조를 원망했다. 그리고 라비린은 진지한 후회를 시작했다.
“……내일쯤 되면 브란젤 전체에 소문이 돌 거야. 내가 오드리 너에게 차여놓고도 미련을 못 버리고 주변을 맴돈다고들 하겠지. 미친, 내가 왜 따라왔지? 후회스럽다…….”
“잡소리는 됐고 너는 스와디 씨 시신이나 안고 있어.”
“내가?”
“그럼 나나 셰비언이 안고 있을까? 치안대원들에게 맡기면 넌 진짜 꿔다놓은 보릿자루 되는 거야.”
라비린은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스와디의 시신을 챙겼다. 이런다고 전 약혼녀에게 미련이 남아 주변을 뱅뱅 도는 놈이라는 평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역할이 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자, 이제 갈 거예요. 몸이 뜨겠지만 당황하지 말고.”
“아르젠 남작님, 뭘 어떻게 할 건지 저는 전혀 모르겠는데, 제발 발 디딜 거라도 좀 주면 안 될까요? 그냥 뜨면 놀라서 뒤집어질 것 같은데요.”
“아하, 그건 좀 꼴사납겠네요.”
만사 포기한 유렌의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일행은 보이지 않는 발판을 딛고 선 채로 시계탑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들의 하강에 맞춰서 하늘에서 빛이 떨어지는 범위도 조금씩 넓어졌다. 유렌은 오로지 추태를 보이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보이지 않는 발판과 기묘한 부유감을 견뎌냈다. 대단한 의지였다.
오드리 일행이 마침내 땅에 발을 디뎠을 때, 그 자리엔 타우레드 후작과 카즈네 공작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그들의 머리 위로 아침 햇살이 따사롭게 떨어졌다.
“아르젠 남작,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주겠소?”
“나중에 보고서 올릴 테니 그때 읽으세요.”
“허허, 거 참…….”
세비언이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챈 사람들의 시선이 스와디의 시신을 안고 있는 라비린에게로 모였다. 하지만 라비린은 슬쩍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는 걸로 사람들의 주의를 오드리에게로 양보했다. 지독히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카즈네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레이디 헨젤……. 지난밤의 활약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오. 마법사들에게 들으니, 마력을 그렇게 쓰는 건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더군. 레이디의 놀라운 희생정신 덕분에 많은 희생을 막았소이다. 하지만…….”
카즈네 공작의 시선이 스와디에게로 향했다. 카프러스가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고 라비린이 공주님이라도 안듯 귀하게 안고 있었지만, 생기 한 점 없는 얼굴은 언뜻 봐도 시신의 얼굴이었다.
“어째서 죄인을 빼간 건지, 그리고 그 죄인이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지에 대해선 따로 설명을 들어야겠소. 아무리 죄인이라도 귀한 왕궁마법사가 아니오? 귀하게 쓰여야 할 인력이 저리된 것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군.”
“제게 감사를 표하시고는 숨 한 번 돌릴 틈도 없이 추궁부터 하시는군요.”
“레이디도 내게 예의를 표하지 않는데, 내가 뭐 얼마나 예의를 갖춰야 하는지 모르겠소.”
오드리의 곁에 선 셰비언의 정체가 용이라는 걸 뻔히 짐작하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니 카즈네 공작도 참 강심장이었다. 오드리는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비통함과 슬픔이 절절히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렇군요. 너그러우신 공작님, 생전 처음 보는 낯설고 끔찍한 풍경을 견디느라 심력을 크게 소모한 저를 가엽게 여겨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때로는 알면서도 넘어가 줘야 하는 순간이 있다. 카즈네 공작은 떨떠름하게 오드리를 용서했다.
“스와디 씨는 멈췄던 마법진을 구동하는 일에 저와 함께 마력을 쏟았습니다. 비록 저는 일찍 나가떨어졌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붉은 용에게 살해당하는 순간까지 마력을 붓고 브란젤에 빛의 꽃을 피웠죠. 저는 스와디 씨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그녀는 마지막까지 훌륭한 왕궁마법사였습니다.”
“…….”
“왜 굳이 스와디 씨가 필요했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녀와 제가 가진 마력의 계통이 여기 있는 아르젠 남작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괴물이 미치도록 갖고 싶어 하는 마력이고, 아르젠 남작의 마법진을 구동할 수 있는 마력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력은 소용이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마법사도 아닌 헨젤 영애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이오?”
“공작님. 그건 제가 나중에 따로 찾아뵙고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실은…… 제가, 지금…… 몹시, 몹시 피로하여…….”
띄엄띄엄 힘겹게 말을 잇는 오드리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그녀는 끝내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가느다란 목이 툭 떨어졌다.
“레이디 헨젤!”
“아가씨!”
셰비언이 황망하게 오드리를 챙겨 안는 사이, 뒤쪽에 서 있던 피올이 재빨리 시계탑 1층에 매어놓았던 윈디를 끌어내 데리고 왔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안은 채 윈디의 등에 올랐다. 사나운 말 윈디는 제 주인의 상태를 아는 듯 아주 얌전하게 굴었다.
막 윈디의 옆구리를 걷어차려다 멈춘 셰비언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카즈네 공작에게 서늘한 시선을 건넸다. 그의 동공은 어느새 하얗고 뾰족하게 변한 상태였다.
“인간들은 목숨 걸고 자신들을 지킨 은인을 이렇게 대하는군. 그게 인간의 예의라면, 나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게 아닐세, 아르젠 남작. 헨젤 영애가 하도 멀쩡해 보여서……. 이럴 줄은 몰랐다네. 내 말을 마저 들어보게나.”
“아니. 당신은 왕궁마법사들에게서 충분히 말을 들었어. 모르는 게 아니야, 관심이 없었던 거지. 이봐, 공작. 당신이 짐작하다시피 나는 용이고, 내게는 인간의 도시도 목숨도 아무 의미가 없어. 오로지 내 아가씨가 지키고 싶어 했기에 지켰고 살리고 싶어 했기에 살렸다. 잘 알아둬.”
셰비언은 그 말을 끝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새카만 흑마가 핏덩이를 짓밟으며 바람처럼 내달려 멀어졌다. 카즈네 공작은 불현듯 엄습한 오한에 몸을 떨었다. 자신이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