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 아뉴람브 성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 자라서 어른이 된다. -어느 보육원장의 입버릇」
그 시각, 오드리는 네이기스가 가출해서 헨젤가로 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하델과 함께 헨젤가 소유의 성에 와 있었다.
브란젤에서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 반나절 거리에 있는 아뉴람브 성은 아주 오래전 헨젤 백작이 아픈 밀리나를 위해 요양 목적으로 구입한 작은 성이었다. 바닷가 언덕에 있어 전망이 아주 좋고 바람이 시원했다. 비록 밀리나가 그 소금기 묻은 바람을 질색하는 바람에 외면당한 성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된 일인지 헨젤 백작은 쓸모를 다하지 못한 성을 도로 팔아버리지 않았다. 따로 휴가 내서 시간을 보내러 오는 것도 아니면서 꼬박꼬박 사람을 써서 성을 보수하고 관리했다. 오드리는 그게 하도 의아한 나머지 헨젤 백작이 아뉴람브 성에 정부라도 숨겨둔 건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다. 조금 캐보다가 생필품이 들어가는 게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되고 그만뒀지만 말이다.
오드리가 국왕의 장례식마저 불참하고 그런 성에 하델과 함께 와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하델이 이 성에 밀리나의 유언장 원본이 있을 거라고 장담했기 때문이었다. 아예 없다면 몰라도 있다면 반드시 여기일 거라나. 도대체 어디서 온 확신인지는 몰라도 지난 생일에 선물받은 망아지까지 걸고 말하는데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인기척 없이 썰렁한 복도를 걸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복도를 얼마나 휘젓고 다니는지 저절로 몸이 떨렸다.
“으, 추워.”
“누나가 추위를 타기는 해요? 아까 말 몰 때 보니까 찬바람이 불든 말든 아주 쌩쌩하던데.”
“그거야 몸을 움직이니까 그런 거지, 난 본래 추위 많이 타. 만탈락에서 자랐잖니. 그보다 넌 기사 훈련도 받은 애가 왜 그렇게 체력이 약해? 요새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니? 일이 많아도 잠깐씩은 일어나 움직이고 그래. 그래야 건강하지.”
하델은 반박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체력 문제가 도마에 오르자 그냥 말을 않기로 했다. 승마술이 부족해 자꾸 뒤처지는 하델을 무섭게 독촉하던 오드리는 환절기에 드러누워 앓으며 여러 사람 걱정시키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 성 어디에 있는 줄은 알아? 무턱대고 돌아다니기엔 너무 넓은데.”
“여기도 서재가 있어요. 가문의 도서관을 만드는 동시에 가문의 중요 서류를 보관할 목적으로 조성된 거예요. ……정말 누나의 말대로 아버지가 어머니의 유언장을 조작했다면 원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보나마나 헛수고일 테지만.”
“오스미다 왕비전하, 타우레드 후작부인, 데멘사 아노말리아. 이 세 사람이 전부 공통된 거짓말을 했다면 헛수고일 수도 있겠지.”
“다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하델이 고집스럽게 헨젤 백작을 비호했다. 헨젤 백작의 침실에서 찾아낸 낡은 일기를 바탕으로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그에 대한 믿음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드리를 부추겨 아뉴람브 성까지 온 건 그 믿음 때문이었다. 당연히 오드리가 틀렸을 것이고, 그럼 헨젤 백작에 대한 적개심도 랄리우스 후작위에 대한 욕심도 죄 근거를 잃게 될 테니 그 증거를 눈에 보여줘야겠다는 믿음.
“지도에 따르면……. 이쪽이네요. 서쪽 탑.”
그 서쪽 탑은 보안이 아주 엄중했다. 오드리는 몇 겹이나 되는 잠금장치를 후계자의 인장을 이용해 손쉽게 풀어내는 하델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자신 혼자 왔더라면 문 앞에서 용만 쓰다가 울며 돌아섰을 게 뻔했다.
“누나, 그렇게 휘파람 불지 마요. 되게 양아치 같단 말예요.”
“어머, 진짜 양아치는 한 번도 본 적 없을 녀석이 잔소리는. ……와우. 타우레드 후작가의 도서관 못지않은데?”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바닷가에 있는 성이라니 도서 보관에는 최악의 조건이건만, 마법 도구에 쏟아 부은 돈은 그 악조건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들었다.
탑 전체가 종이 보관에 완벽하게 적합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창문이 없음에도 어둡지 않았고, 공기 순환이 잘 되는지 퀴퀴한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오래된 종이와 잉크 냄새만이 먼지와 함께 평화로이 떠돌 뿐이었다.
“양이 엄청나네.”
오드리는 탑 벽면을 타고 오르는 책장을 살펴보다 그만 질리고 말았다. 목을 확 꺾어야 까마득하게 보이는 탑 꼭대기까지 책장이 채워져 있는 듯했다. 뭔가 정리하는 규칙이라도 있는지 곳곳이 비어 있긴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책장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계단이 없었다. 책장 중간 중간에 난간이 딸린 통로는 보이는데 그리로 올라갈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수로 위로 올라간단 말인가, 난감해지려는 찰나, 낯익은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탑 가운데 빈 공간에 오드리가 광장 시계탑에서 위로 올라갈 때 썼던 승강기와 매우 비슷한 물건이 설치돼 있었다.
“이거 뭔지 알겠어……. 승강기야. 이걸 타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모양인데?”
“승강기요?”
“시계탑에 설치돼 있는 거야. 1층에서 꼭대기까지 한 번에 올라가게 해주지. 성능은 끝내주지만 기분은 아주 별로야…….”
속이 메슥거리는 승차감을 떠올린 오드리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수확제에서 괴물에게 쫓기는 오드리를 버려두고 카프러스에게 업혀갈 때의 일이 떠오른 하델도 마찬가지였다.
“꼭 이걸 써야겠어요?”
“우리 등에 날개라도 달렸다면 모를까, 올라갈 재주가 없잖니. 그보다 이거 좀 신기하게 생겼는걸? 시계탑에 있는 것보단 발전된 형태 같아. 중간에 멈출 수 있는 장치가 있어. 그렇다는 건…….”
“이 책장들의 분류 기준을 알아내야 한다는 거네요.”
남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까마득한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헨젤 백작이 언제부터 여기에 서류를 옮겨놓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보고 달려들 만한 게 못 된다는 건 확실했다.
“누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죠. 설마 이런 도서관을 만들면서 서지 정보를 머릿속에만 넣어뒀을 리가 없어요. 그거 찾으면 다시 와요.”
“하델, 아버님이 언제쯤 돌아오실까? 국왕전하의 장례식이 민간에 공개되는 거야 오늘 하루뿐이지만 정식 절차는 아직 더 남았잖아. 적어도 모레까지는 안 오시겠지?”
“다음에 다시 오자니까요.”
“아니, 오늘 해야 돼. 생각해 보렴, 아버님은 네 일을 봐주기 시작한 후론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집에 돌아오시잖니. 아버님이 이렇게 길게 집을 비울 날이 또 있을 것 같아? 무조건 오늘이어야 돼. 돌아갈 시간도 생각해야지.”
하델은 오드리의 말을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버지를 의심해서 저지르는 일이니만큼 할 수 있을 때 해내지 못하면 다시는 시도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설령 시도한다고 해도 오늘처럼 쉽진 않을 테고 말이다.
남매는 이를 악물고 하나하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분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그나마 편했지만, 가끔 함정처럼 등장하는 서류들이 있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으흥……. 고모님이 그웬가에서 그렇게 큰소리치며 지내실 수 있는 이유가 다 있었어. 결혼 초엔 매년 지원금을 보냈었구나? 세상에, 이게 다 얼마람…….”
“본가의 사람이 남부 대평원에 못 간 지가 상당하네요. 이러면 영지 관리에 문제가 생길 텐데 왜 이렇게 두셨지?”
“오호라, 왕비전하만 사랑하기로 유명했던 국왕전하께서 사실은 정부를 두셨었네. 그리로 빠져나가는 돈도 아버님의 관리하에 있었어.”
“그래도 사생아는 없었나 봐요. 그런 명목으로 나간 돈은 없네요.”
“하델, 이거 보렴. 지금 중앙은행의 은행장이 저지른 부정 목록이야. 턱 밑에 이걸 들이밀면 은행장의 얼굴이 아주 볼만하겠는데?”
“그쪽은 은행장이에요? 이쪽은 군사 쪽에 발 담근 가문들이에요. 전리품 빼돌리기, 군자금 횡령, 전공 속이기……. 범위도 다양하네요. 이런 짓을 하고도 어떻게 칼 안 맞고 살았지?”
왕국 내 돈의 흐름을 거의 다 들여다볼 수 있는 헨젤 백작이 그를 바탕으로 긁어모은 정보의 종류와 양은 상상 이상이었다. 어떤 정쟁에도 끼지 않고 그저 조용히 돈 관리만 하는 사람이 이만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걸 누가 짐작이나 할까.
‘이래서야 아버님이 뭔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못 할 일이 없겠어…….’
오드리는 서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거미줄보다 촘촘하게 뻗은 정보망이 새삼 두렵게 느껴졌다. 타우레드와 국왕의 비호가 아니었다면 로렐라이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따위는 진작 들켰을 게 분명했다.
섬뜩한 기분을 안고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먼저 올라가지 말라며 하델이 투덜거렸지만 무시했다. 별것 없었다. 가문의 토지에 대한 서류가 연도별로 정리돼 있을 뿐이었다. 그 다음으로 올라갔다. 내전 기간 동안 오갔던 편지와 명령서들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올라갔다. 오드리도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책들이었다. 무심히 넘어가려다 한 권을 뽑아 펼쳤다.
“무슨 책인데 열어봐요?”
“『셰비언 성벽, 그 황홀한 아침 산책』.”
“아, 그 유명하고 지루한 책……. 그림만 멋지지 나머진 영 별로였어요.”
하델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는 오드리가 책장을 넘기는 동안 빠르게 위로, 위로 올라갔다. 책에 실린 삽화에 눈을 빼앗겼던 오드리는 하델이 무려 세 층이나 위로 올라간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깜짝 놀라 책장을 닫으려는데, 마지막 장 종이의 감촉이 뭔가 이상했다. 셰비언 성벽의 지도가 접혀서 실려 있을 테니 두꺼운 건 당연한데도 이상하게 거슬렸다.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마지막 장의 지도를 펼쳤다. 대륙 동쪽 바다와 셰비언 산맥의 원시림까지 이어진 셰비언 성벽의 지리가 한눈에 보였다.
오드리는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하곤 실눈을 뜨고 지도를 살폈다. 그러자 미묘하게 마법등의 빛이 거슬리는 부분이 보였다. 그 부근을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종이가 부슬부슬 일어나 손에 잡혔다. 살짝 잡아당겼다. 약간의 저항감은 있지만 매끄럽게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누나!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예요! 오늘 내로 끝내자던 게 누군데!”
“아, 미안! 바로 올라갈게!”
오드리는 허겁지겁 지도를 접었다. 하지만 그대로 책을 덮지는 않고, 지도를 북 찢어 옷 안쪽에 숨긴 뒤에야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지도는 꽤 두꺼웠지만 날이 추워 겹겹이 챙겨 입은 탓에 겉으로는 별 표시가 나지 않았다. 어쩐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나가 애예요? 그림책을 좋아하게?”
“저건 훌륭한 지리서이자 기행문이야. 그림책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니?”
“기행문이 재미없기도 힘든데 저건 수면제 대용으로 써도 돼요. 채 다섯 장 넘기기도 전에 잠이 와. 솔직히 훌륭한 지리서라는 것도 백 년 전 얘기인데 꾸역꾸역 재판되는 이유가 다 그림 때문이잖아요. 그럼 그림책이죠.”
“으이구……. 말은 잘해.”
“헨젤이잖아요. 검을 못 쓰면 말이라도 잘해야죠.”
말이라도 잘해야 한다. 하델이 반강제로 검을 놓은 뒤 익숙하게 입에 담는 자조였다. 진득하게 의자에 앉아 서류와 책을 들여다보는 일은 하델의 성질에 영 맞지 않았지만, 지루함에 몸부림치며 일을 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만은 좋았다.
하델은 오드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키, 평범한 체격, 작은 손……. 어느 것 하나 특출한 조건이 아닌데 오드리는 자신보다 훨씬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았다. 승마가 서툰 자신을 반 억지로 추슬러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대단했다. 아무리 이디케와 카프러스가 도와줬다지만 오드리의 뛰어난 승마술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었다.
‘내가 누나의 절반만이라도 됐으면…… 검을 놓지 않았을 텐데.’
스스로 포기한 길이지만 미련은 남았다. 자신의 조건이 오드리의 절반만 됐어도 어떻게든 버텨보지 않았을까 하는 무의미한 가정이 하델을 괴롭혔다. 오드리는 알지도 못할 것이고, 알리고 싶지도 않은 괴로움이었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하델의 시선을 못 느낄 리 없는데, 오드리는 돌아보지도 않고 책장을 휘저었다. 하델과 비슷한 두께의 팔은 하델이 드는 양의 두 배는 될 법한 책을 가뿐히 들어 날랐다.
“그러게, 정말 그래야 하는데 아직은 부족하더구나. 하델, 잘 들어. 평정심은 검을 휘두를 때만 필요한 게 아냐. 생각할 때, 말할 때, 행동할 때 전부 필요하지. 감정에 사로잡히지 마. ……이런, 이건 내가 꺼내기엔 좀 우스운 말 같기도 하고? 됐다, 잊어버려.”
“무슨…… 말이에요?”
“너나 나나 아직 멀었단 소리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이냐고요!”
하델이 오드리의 손목을 잡아챘다. 나름 강하게 잡은 것인데도 오드리는 손쉽게 하델을 떨쳐 내고 뒤로 물러섰다. 그늘진 초록색 눈동자에서 기이한 냉기가 흘렀다. 하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하델, 지금 내게 손을 댔니?”
“손목 좀 잡은 거 가지고 무슨……,”
“나한테도 이러면, 고용인들에게는 더하겠구나? 손찌검하기가 아주 쉽겠어.”
“……알았다. 지금 내가 다이앤 때렸다고 기분 나빠서 이러는 거죠? 한참 전 일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구질구질하게 굴다니 정말 누나도 나도 멀긴 멀었네요. 집사 할아범이 잘 처리했을 텐데, 어떻게 알았어요? 다이앤이 고자질이라도 했어요? 도련님이 절 때렸어요, 하고?”
오드리는 눈을 감고 불쑥 치미는 화를 삭였다. 그녀가 다이앤의 상황을 알게 된 건 신년제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꼭 다이앤에게 병문안을 가야겠다는 오드리의 고집을 끝내 말리지 못한 이디케가 결국 사실을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자신을 속이려 들었던 고용인들에게 몹시 분노했고, 릴리와 이디케, 그에 더해 집사까지 모두 감봉 삼개월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따로 하델을 나무라지는 못했다. 주인이 되어 고용인에게 손찌검을 한 게 칭찬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흉이 되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약간의 거슬림 따위는 조용히 참고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부지불식간에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아직 멀었다. 한숨이 났다.
“내가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헨젤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다 알 수 있어.”
“그럼 다이앤이 감기약이나 염색약뿐만이 아니라 독을 만든다는 것도 알겠네요?”
“정원사는 제초제가, 창고지기는 쥐약이 필요하고, 저택 내부를 관리하는 고용인들은 좀약과 곰팡이약을 좋아해. 이것들 전부가 독약이고 다이앤이 잘 만드는 것들이지. 그런 건 왜 묻지? 다이앤이 앙심을 품고 네게 독을 쓸까 걱정이라도 돼? 걱정마라, 다이앤은 내 명령이 아니면 사람을 죽일 만큼 센 독은 안 만들어.”
“아하, 알신다를 죽일 땐 누나 명령이 있었고요?”
하델이 오드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오드리가 알신다를 싫어했던 건 알겠지만 그녀를 꼭 죽여야 할 정도로 싫었던 거냐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난 알신다가 괴물에게 죽었다고 보고받았다. 릴리에게 장례식을 잘 치러주라고 했는데, 설마 릴리가 소홀하게 처리하기라도 했어?”
“누나가 장례식을 지시했다고요? 왜요?”
“그야 네가 아끼던 사람이니까. 알신다는 고향의 가족과는 사이가 나쁘다고 네 입으로 말했었잖니. 헨젤가에 헌신하다 가족과 멀어졌는데 장례가 초라하면 두고두고 네 마음에 짐으로 남을 것 같았지.”
오드리의 말은 몹시 그럴듯하게 들렸다. 얼마나 그럴듯했냐면, 의심에 의심을 쌓아 확신을 만들었던 하델이 순간 혹할 정도는 됐다. 이를 악무는 하델 앞에 오드리가 팔짱을 끼고 섰다.
“하델, 내가 다이앤을 시켜서 알신다를 죽였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뭐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근거가 있을 거 아냐. 말해 봐.”
“……누나가 오로지 나를 위해 알신다의 장례를 챙겼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
“왜?”
“정말 나를 위했다면 죽기 전에, 알신다가 살아 있을 때 챙겼을 테니까요.”
“그게 다니?”
오드리의 태도는 권태로웠다. 하델의 안쪽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아왔던 말들이 죄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확제 때, 누나는 알신다에게 독 넣은 과자를 보냈어요. 그것도 알신다가 좋아하는 제과점에서 그때만 특별히 판매하는 무화과 과자 세트였죠.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거나 나눠줄 일이 없도록.”
“수확제 때 아랫사람에게 과자를 돌리는 건 오래된 풍습이야. 매년 하던 일을 했다가 별 의심을 다 받는구나.”
“알신다는 누나가 화해하자고 하는 줄 알았을 거예요. 내가 가문을 나가서도 백작님께 따로 일을 받을 정도로 신뢰받는 고용인인 걸 아가씨가 이제야 아셨구나, 역시 헨젤가엔 내가 있어야 돼, 뭐 이랬겠죠. 수확제가 끝나고 나면 다시 헨젤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어리석다. 너무 어리석어 기가 막힐 정도다. 하델은 알신다의 사고를 헤아려 보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나가 자신과 화해 따위를 할 사람이 아닌 것도 모르고.”
“하델, 내 평가가 좀 많이 박하구나?”
“사실이잖아요! 누난 누나의 선 안쪽에 있는 사람에게만 다정하고 관용적이에요. 알신다가 그 선 안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었으면 애초 그렇게 비참하게 해고당하지도 않았어요. 누나가 알신다에게 과자 따위를 보낼 이유가 없다고요!”
오드리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혹시 뭔가 실수한 거라도 있나 싶어 열심히 들었더니만, 그냥 의심이었다. 증거가 없다면 걱정할 것도 없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마음대로 해. 내가 알신다를 싫어했던 건 사실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네겐 거짓말처럼 들리겠지.”
“…….”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선 안 돼. 그건 헨젤다운 일이 아니야. 앞으론 감정을 잘 다스리도록 해.”
“……네, 알아들었어요. 감정을 잘 다스려서 다이앤을 때리지 말라는 거죠? 그러죠 뭐. 다이앤이 전처럼 거슬리는 짓만 안 하면 제가 그럴 일도 없어요.”
하델의 대답이 무척 삐딱했다. 오드리는 두통이 도지는 것만 같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다이앤의 과거를 나불나불 떠들어댈 수도 없고, 참 곤란했다.
“하델, 고용인도 사람이다. 앙심을 품으면 뭔 짓을 할지 몰라. 사람 무서운 줄 알아야지.”
“그거야말로 누나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브란젤을 떠나 여기 오기까지, 그리고 도착해서 책장을 뒤지는 내내 억지로라도 종알종알 떠들어대던 입들이 닫혔다. 차갑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소리와 승강기 움직이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어깨를 짓누르는 침묵을 먼저 깨뜨린 쪽은 오드리였다. 책장 안쪽에 숨겨진 공간을 발견한 오드리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배어나왔다.
“하델……. 이리 와 봐.”
“뭐 찾아냈어요?”
“찾아냈고말고. 여기 보안마법도구가 딸려 있는데, 후계자 인장으로 열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구멍이 있어.”
“잠깐만요……. 어라?”
이제까지 마주친 보안장치는 대부분 후계자 인장만으로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델은 마력을 불어넣기도 하고 이런저런 짓들을 해 보았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보안장치는 여전히 견고했다.
“누나, 이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
“아니, 이게 맞아. 하델, 손가락에 상처 조금 나는 정도는 괜찮지?”
오드리가 옷깃에 달고 있던 브로치를 떼어내며 살벌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코앞에 두자 도저히 싫다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하델은 어어, 하는 사이 손가락을 푹 찔리고 말았다.
“악! 아프잖아요!”
“피 한 두 방울 흘리는 거 가지고 말이 많아,”
“와, 본인 손 아니라고 막말하는 거 봐!”
하델이 반발하든 말든, 오드리는 하델의 손가락에서 짜낸 피를 공간 테두리에 꼼꼼하게 발랐다. 피는 순식간에 스며들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곧 달칵 소리를 내며 비밀공간의 문이 열렸다.
“오……. 어떻게 알았어요?”
“이건 예전에 에드와 상단에서 내놓았던 보안마법도구야. 특정 물품이 갖춰진 상태에서 지정한 상대의 피와 마력에 반응해. 지정 상대가 그 자리에 없어도 피 몇 방울만 있으면 지정 가능하다는 게 특징이지. 분해해서 원리를 알아내려고 했었는데 실패했어. 워커는 그쪽 계통에는 영 재주가 없거든. 셰비언에게 물어보면 알려나 모르겠다.”
“로렐라이를 괜히 갖고 있는 건 아닌가 보네요……. 나도 그쪽을 공부해야 하나.”
“그럴 필요 없단다, 하델. 로렐라이는 내 거야. 넌 비레직 영지 관련 일이나 열심히 공부하렴.”
“누나야말로 이제 그만 정신 차리는 게 좋아요. 언제까지 그렇게 멋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탈락도 랄리우스도 모두 내 거예요. 잠깐 맡겨진 걸 가지고 본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건 나중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에요.”
“흥, 그런 말은 이 유언장을 개봉해 보고 나서 하는 게 좋을 거야.”
기세 좋게 말했으면서도 도르르 말린 유언장을 든 오드리의 손은 긴장으로 바르르 떨렸다. 마법으로 봉인됐고 나중에 마법이 사라지더라도 특별한 무늬가 남도록 제작된 유언장 전용 종이를 앞에 두자 등에서 땀이 났다. 옷자락에 손을 문질러 땀을 닦느라 시간을 끌고 있으려니 기다리다 못한 하델이 옆구리를 찔렀다.
“누나가 못 열겠으면 내가 열 거예요.”
“잠깐 긴장했을 뿐이야.”
시간이 시간인지라 개봉을 막던 마법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드리는 조심스레 종이를 펼쳤다. 잉크가 변질되지 않도록 특수처리 된 종이는 세월을 비껴간 듯 매끄럽고 생생했다. 글씨를 알아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만탈락의 소유권은 오드리 헨젤에게 남긴다.”
하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오드리가 방금 읽은 구절을 찾아 목을 쭉 빼고 유언장을 훑는 동안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말도 안 돼, 만탈락이 어머니의 개인 재산도 아닌데 어떻게 그걸 누나에게 멋대로 남겨요?”
“아니, 만탈락은 어머니의 개인 재산 맞아. 돌아가면 곧바로 부모님의 결혼계약서부터 보여줄 테니 그때 지참금 목록을 잘 확인해 봐. 거기 만탈락이 있는지 없는지 네 눈으로 확인해 보라고.”
“그런…….”
“랄리우스 후작위 건도 여기 있네. 랄리우스 후작위는 만탈락을 소유한 오드리 헨젤에게 남긴다. 이런, 이래서 성인이 되면 만탈락을 가문에 돌려주라고 그리 강조했던 거군. 만탈락을 갖지 못한 오드리 헨젤은 작위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까……. 아버님도 은근히 소심하시지, 이왕 고칠 거면 다 고치지 왜 일부만 건드리셨던 걸까? 결혼계약서를 미처 손대지 못해서 그러셨나?”
“말도 안 돼……. 이런 구절은 없었어……! 어떻게, 어떻게 아버지가……! 감히 유언장을 수정할 생각을……!”
오드리는 희희낙락 유언장을 챙겼지만 하델의 충격은 엄청났다. 그동안 헨젤 백작을 믿고 따랐던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유언장을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글씨는 철자 하나 번지거나 빠진 곳 없이 정갈했고 진품 유언장임을 증명하는 인장은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없애 버릴까? 이것만 없으면, 만탈락도 랄리우스도 다 내 거…….’
하델은 불현듯 오드리 몰래 유언장을 태우는 자신을 상상하고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유언장을 수정한 아버지를 비난하자마자 그 이상을 떠올린 자신이 섬뜩했다.
“하델, 만탈락과 랄리우스가 네 것이라는 말은 이제 취소해야지?”
“…….”
“그렇다고 로렐라이라도 가져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꿈에도 하지 말렴. 네가 끼어들 여지는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으니까.”
하늘에 닿을 듯 기분이 좋아진 오드리는 하델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약을 올렸지만, 하델은 정말 넋이 나간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의아해진 오드리가 눈앞에 대고 손을 휙휙 저어보아도 눈동자가 미동이 없다.
“하델, 괜찮니? 얘, 하델? 이제 돌아가야 돼. 하델? 나 참…….”
이 도서관에는 창문이 없었다. 오드리는 회중시계를 확인해 보고 그만 혀를 찼다. 여름이라면 모를까, 이 계절이면 벌써 한참 전에 땅거미가 졌을 테고 지금은 달이 빛날 시간이었다. 지금부터 밤새 말을 달려야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브란젤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안 그래도 승마에 미숙한 하델의 상태가 이래서야 어림도 없었다.
‘그래, 어차피 아버지는 내일까지 집에 없을 테니까……. 하루쯤은 쉬어가도 되겠지.’
도서관 역할을 하는 서쪽 탑 외엔 그냥 방치되다시피 한 성이지만 그렇다고 하룻밤 머무는 게 영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산처럼 쌓인 먼지를 견뎌야 하는 게 좀 고역일 뿐이지.
성 바깥에서 말고삐를 붙들고 오매불망 두 사람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이디케와 카프러스에겐 청천벽력 같은 결정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비어 있는 성에 멋대로 묵으면 화를 입는다는 미신을 들먹이며 반발했지만, 손님도 아니고 주인의 가족인데 무슨 해를 입겠느냐고 배짱을 튕기는 오드리를 당해낼 순 없었다.
“어휴……. 그래요,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베텔 경, 저는 잠자리로 쓸 만한 방을 정리할 테니까, 경은 성에 뭐 저장된 곡물이라도 있나 확인 좀 해주세요. 제가 사람 먹을 건 챙겨 왔지만 말 먹일 것까진 챙겨 오질 않아서요.”
“그러죠. 그래도 락시 양이 조금이라도 먹을 걸 챙겨 와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꼼짝없이 굶었을 테니……. 락시 양, 이 성 주변에 마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알았으면 사람 입에 넣을 것만 챙겼겠어요? 말안장에 주렁주렁 먹이도 달고 물도 달고 그러고 왔겠죠. 아까 먹은 도시락은 릴리가 챙겨준 거예요.”
“하녀장이? 꼼꼼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준비성도 철저한 사람일 줄은 몰랐습니다.”
“릴리는 굶는 걸 혐오하거든요.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이디케와 카프러스가 발을 동동 구르며 잠 잘 준비를 하는 동안, 오드리는 하델을 옆에 끼고 상태를 살폈다. 대강 먼지만 치워낸 침대에 누운 하델은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로 눈을 굳게 감고 잠에 빠진 상태였다. 인형처럼 앉아만 있다가 픽 쓰러져서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던 때에 비하면 확실히 잠든 게 확인되는 지금은 그나마 나았다.
“이 멍청아……. 헨젤은 뱀이야. 정도껏 믿었어야지.”
오드리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없는 동안 헨젤 백작은 하델에게 어떤 아버지였는가. 하델의 태도를 보아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어른이자 본보기이며 아버지였을 성싶은데, 그게 어떤 모습인지 도무지 상상이 안 갔다.
한숨만 푹푹 내쉬다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하델 옆에 누웠다.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얄밉게 입을 놀리지 않는 하델은 나름 귀엽고 안쓰러웠다.
‘그러고 보면 아버님도 의외로 어리석은 선택을 했어. 날 옆에 두고 살피면서 하델처럼 당신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게 했으면 일이 훨씬 쉬웠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질 않고 날 쫓아낸 걸까?’
이런저런 이유들을 생각해 봤지만 하나같이 뭔가 모자랐다. 오드리는 마구 엉킨 실타래 풀기를 숙제로 받은 아이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다 크게 하품했다. 종일 말을 달리고 서쪽 탑 도서관을 수색하며 체력을 쓴 데다 감정소비까지 심했던 하루였다. 피곤했다. 그녀는 병든 닭처럼 고개를 끄덕대다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