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욕망
「“어떻게든 낙타를 한 마리 구해서 갈걸 그랬어.” - 겁 없이 사막에 놀러갔다가 죽을 뻔했던 어린 시절의 오드리」
오스미다 왕비는 제 앞에 얌전히 앉은 오드리를 낱낱이 뜯어보았다.
키는 좀 작아도 이목구비가 나름 괜찮게 생겼다는 건 인정한다. 눈매가 깊고 그윽하니 힘이 있어서 눈을 내리깔면 감춘 눈빛이 궁금해졌고, 곧게 뜨고 있을 때는 총명하게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사람을 빨아들였다.
바닥을 달리는 평판과 헨젤 백작의 냉대만 아니었으면, 머리색과 피부색이 아무리 낯설다해도 그 매력에 넘어갔을 남자가 한 수레는 나왔을 테다. 어쩌면 한때 밀리나가 그랬듯 추종자를 줄줄이 거느리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멜브란트의 괜찮은 신랑감을 죄다 채갈 만한 얼굴은 아닌데…….”
“전하, 속마음이 밖으로 샜어요.”
“암만 생각해도 너무 신기해서 그랬다네. 벨키스 경과의 요란한 연애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을 리도 없는데 벌써 새 남자라니.”
오스미다 왕비의 시선이 응접실 문을 향했다. 그 너머에는 이 아침부터 오드리를 에스코트해서 온 셰비언이 홀로 오드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젠 남작은 헨젤 양의 연애사를 모르는가?”
“그럴 리가 있나요. 전보를 만들 때부터 함께 자주 만났는데요. 둘이 예전부터 앙숙이라 마주치면 제가 아주 피곤해지곤 했어요.”
“으음……. 그럼, 재산에 대해서도 아는가?”
“제가 만탈락의 주인으로서 수입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브란젤에 있던가요.”
“내가 말하는 건 만탈락이 아니라 로렐라이라네. 헨젤 양이 로렐라이의 주인이잖나. 최근에는 갑자기 로렐라이의 핵심 자산 거의 대부분을 헨젤 양 앞으로 돌리기까지 했고. 파혼도 했겠다, 더는 벨키스 경의 뒤에 숨어 있기 힘들어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왜, 아르젠 남작이 방패막이 노릇은 싫다고 했나?”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로렐라이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던 오스미다가 갑자기 로렐라이의 주인을 거론했다. 오드리는 그 저의가 짐작되지 않아 온몸의 신경을 죄다 곤두세우고 오스미다를 바라보았다. 오스미다는 편안해 보였다.
“셰비언은 제 부탁을 거절하지 않겠지만, 제가 내키지 않아서요. 남의 이름 뒤에 숨어봐야 위험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걸 배웠거든요.”
“이전과는 자세가 조금 바뀌었군.”
“힘든 일을 겪었으니 변해야지요.”
파혼을 입에 담는 오드리는 담담해 보였다. 오스미다는 브란젤로 돌아오자마자 제게 찾아와 파혼 사실을 고하던 오드리를 떠올렸다. 그때 오스미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고서도 오드리를 크게 야단치지 못하고 잔소리만 조금 퍼붓고 말았다. 그만큼 오드리의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한데 그날로부터 얼마나 지났다고 저렇게 차분해져서 왔는지……. 정말이지 경이로운 회복력이었다.
“예전에 요란하게 연애했던 걸 알고, 헨젤 양의 재산에서 동전 한 푼 떨어지지 않을 것도 알고……. 그래도 상관없다고 하는 건가? 헨젤 양의 마음이면 된다고? 그런 신기한 남자가 정말 있어?”
“네. 저도 믿기지는 않지만요.”
“하긴, 벨키스 경은 몰라도 아르젠 남작은 마법사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마법사의 속내를 뉘가 알아 짚어낼까……. 한데 헨젤 양은 마법사도 아닌데 내가 그 속을 알 수가 없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억지를 쓰며 날 찾아온 이유가 대체 뭔가? 또 약혼 축사 부탁을 하러 온 거라면 거절일세.”
오스미다가 직접 약혼의 증인이 되어주었던 만큼 파혼의 충격은 그녀에게까지 미쳤다. 앞에서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어도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본격적인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더 확실하게 체감하게 될 것이다.
오드리는 질색하는 오스미다의 태도에 조금 민망해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어린 커플의 탄생을 축하해 줬는데 끝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전하, 실은 제가 아버님과 내기를 했어요.”
“내기?”
“제가 아기 손님 열 명을 받으면 로렐라이의 일을 눈감아주고 뒤에서 받쳐 주시기로 했죠. 제가 지면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집에 인형처럼 앉아 있기로 했고요. 만탈락의 일은 물론이고 사교, 손님 접대 모두 금지이니, 혹시라도 지게 되면 오늘이 아니면 전하를 뵐 날이 없겠더군요. 그래서…….”
“헨젤 양, 그런 내기를 하다니 제정신인가? 만탈락에서야 열 명이 쉬웠겠지만, 브란젤은 얘기가 다르다네. 영지가 따로 없어 브란젤에만 머무는 귀족이 대체 몇이나 되는지 알고 있는가? 게다가 올해는 영지가 있어도 가지 못한 귀족들이 잔뜩 있어. 이런 상황에서 헨젤 양에게 열 명?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는 소문이 있어도 모자랄 판에 요즘에는……! 아니, 헨젤 백작은 딸을 인형처럼 집에다 장식하고 싶었으면서 데뷔탕트는 왜 시켰던 건지 모르겠군!”
오스미다가 오드리의 말을 덜렁 잘라먹고 화를 냈다. 나이를 먹으면서 온화해졌다지만 기본적으로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오드리가 어깨를 움츠리거나 말거나 오드리와 헨젤 백작을 고루고루 씹어대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녀가 갑자기 미간을 좁혔다.
“잠깐, 잠깐. 그보다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는데……. 그래, 헨젤 백작이 로렐라이의 일을 눈감아주기로 했다고? 헨젤 백작이 로렐라이를 왜 눈감아주는가? 설마 헨젤 양이 로렐라이의 주인이라는 걸 헨젤 백작이 알고 있었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었던 건가?”
“…….”
“맙소사! 과연 레이디 랄리우스의 딸이로군. 아니, 그보다 한술 더 떠. 닮을 거면 이목구비만 닮을 것이지 어떻게 성질머리를 똑같이 닮나?”
한탄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오스미다는 퍽 유쾌해 보였다. 그녀가 경박하게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며 웃었다.
“좋아, 재미있어. 오랜만에 아주 즐거워. 미성년자의 재산관리는 부모의 몫이니, 헨젤 양이 이겨야 로렐라이와 데멘사가 무사하고 더불어 내 투자금도 무사하겠군. 내가 뭘 해주면 되겠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든 부탁인 건 압니다만, 전하께서 신년사를 하실 때 제가 곁에서 시중을 들어도 될까요?”
“시중? 시중은 핑계고 사실은 내가 온갖 소문에도 불구하고 헨젤 양을 아낀다는 걸 알리고 싶다는 거겠지. 그 초록색 머리칼을 못 알아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앞으로 몇 시간 뒤 정오가 되면 오스미다 왕비는 국왕과 함께 왕궁의 가장 높은 테라스에 나가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신년 축하 인사를 해야 했다. 한 해의 첫 행사이기에 준비하는 인원들 모두 긴장감이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오드리의 알현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대단한 호의였다.
오스미다는 오드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깔고 얌전을 떠는 모습은 여기 처음 올 때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 느껴지는 인상은 전혀 달랐다.
“나 참……. 어떻게 된 게 이런 점까지 레이디 랄리우스를 닮았나. 헨젤 양, 내가 들어줄 거라고 확신하고 아르젠 남작과 함께 온 게지?”
“제가 뭐라고 전하의 마음을 확신하겠어요.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온 것뿐이에요.”
“아르젠 남작은 오후 내내 헨젤 양과 함께 있을 테지. 설마 남작이 아기 손님에게 축복도 내려주는 겐가?”
“절차를 잘 모르겠다기에 가르쳐 주기는 했지요.”
“세상에, 멀쩡한 귀족 남자가 아기 손님에게 축복을 내린다……. 말만 들어도 재미있군.”
유쾌하다, 재미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오스미다는 쉽게 답을 해주지 않았다. 애초 많은 시간을 허락받은 게 아니었던 오드리는 점점 초조해졌다. 오스미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이 안 됐다.
“헨젤 양이 정말 헨젤 백작의 눈을 피해 로렐라이를 그만큼 키워낸 사람이라면 이겼을 경우만 생각해서 냉큼 내기에 덤볐을 리가 없지. 분명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을 거라고 믿네. 이뤄질지 불확실한 내 협조 같은 건 만일에 대비한 대책에 불과하겠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어떻게든 할 수는 있는……. 그렇지 않은가?”
“……저도 그럴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만, 생각보다 제 아버님의 수완이 좋았습니다. 아니, 제가 모자랐던 거죠.”
릴리는 평소 빈민들을 두고 빵 한 덩이에 양심을 팔 작자들이라고 생각해 왔고, 이번에 그들은 그녀의 편견을 확실히 충족했다. 오드리의 재촉에 못 이겨 빈민가에 갔더니만, 한 곳도 빠짐없이 가재도구 하나 없이 텅 빈 집이었다. 기가 막혀서 웃음밖에 안 나왔다.
마녀에게 아기의 축복을 받는 것도, 그렇다고 돈을 갚는 것도 여의치 않으니 도망갔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봐야 빈민이니 아주 멀리 가진 못했을 거고, 주변을 뒤지면 결국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도.
그러나 사실은 릴리의 추측과는 전혀 달랐다. 주변을 털다시피 하며 확인했더니, 그 집들은 예전부터 비어 있던 집이라고 했다. 아무리 잘 곳이 급한 빈민이라도 괴물이 나왔던 구역에서 아이를 기르는 건 싫어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럼 여기 살던 사람들은?’
‘아……. 그 사람들이요? 글쎄요? 갑자기 와서 한 달쯤 살더니 이사도 갑자기 하더라고요. 어디로 갔는지 알 게 뭐예요,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럼 이 넓은 거리에서 아기를 기르는 집이 한 집도 없단 말이야? 그게 말이 돼?’
‘에이, 그건 아니죠. 하지만 거의 대부분 떠나긴 했어요. 왕실에서 두 살이 안 된 아기를 기르는 집에는 따로 정착금을 줬거든요. 살 곳도 마련해 주고, 생활비도 지원해 주고……. 아아, 부러워라.’
왕실에서 나온 정착금. 그 돈이 대체 누구의 손을 거쳤겠는가. 릴리는 자신이 헨젤 백작의 손바닥 위에서 광대춤을 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당장 오드리의 자선에 기대야 할 만큼 다급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그런 내기를 제안한 것이다.
‘이디케 말이 맞아. 내가 그분을 몰랐어.’
그래도 희망은 남아 있었으니,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는 몇몇 사람들이었다. 릴리는 기어이 찾아낸 두 명의 여자들을 반은 협박하고 반은 애원한 끝에 오드리에게 데려올 수 있었다.
릴리의 거듭된 추궁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들은 오드리에게서 은반지를 받고 나서야 사실을 털어놓았다. 어지간히 밑바닥에 떨어진 게 아니면 둥지 틀지 않는 거리에 갑자기 아기를 안고 나타난 사람들과, 정착금을 받고도 떠나기를 거부한 이들에게 주어진 달콤한 제안들에 대해서.
오드리는 그들 뒤에 누가 있는지 금세 깨달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내기에 초조해졌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니 안개가 걷힌 듯 앞뒤가 명확하게 보였다.
저택 안에 있는 고용인 전부가 오드리의 수족이라는 건 저택 밖에 있는 고용인에 대한 감시의 눈길이 확연히 느슨해졌다는 뜻도 됐다. 평소에는 릴리를 비롯해 오드리의 손아귀에 들어온 하녀들에게 촘촘히 감시당하던 집사는 저택 밖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헨젤 백작은 그 점을 노렸다.
릴리가 매수한 부모들은 헨젤 백작이 집사를 통해 심어놓은 사람들이었다. 혹시 오드리가 빈민이라도 상관치 않고 사람을 찾을 걸 대비한 가짜들. 어린 자식을 데리고 빈민가에서 한 달을 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헨젤 백작의 충실한 수족들.
“……이젠 그들이 차용증에 적어 넣은 인적사항이 진짜인지도 알 수가 없어요. 공증인이라고 서명을 했던 변호사가 증발됐거든요. 자의로 도망친 건지, 실종된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죠.”
사정을 설명하는 오드리는 실의에 빠졌다기보다는 의욕과 분노에 불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스미다는 그 얼굴에서 밀리나를 보았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던 여자. 그나마 가끔 웃는 얼굴이 남을 비웃는 듯 싸늘하다는 걸 본인도 잘 알면서, 그러면서도 별로 고칠 생각을 않던 여자. 오래된 아쉬움이 새삼 끌려 올라왔다.
“헨젤 백작도 딸을 상대로 어지간해. 봐줄 생각이 전혀 없군. 헨젤 양, 그 상황에서 내 도움만 있으면 판을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은 있는 건가?”
“아르젠 남작의 명성이면 제 악명 정도는 귀에 들리지도 않을 사람들이 많더군요. 약혼 축사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제가 그와 교제하는 걸 왕비전하께서 너그럽게 보아 넘겨주시는 정도면 충분해요.”
“하긴…… 그래……. 괴물 사태가 좀 오래됐지. 이제 끝낼 때가 됐어. 그 정도면 헨젤 양의 악명을 가릴 만도 해.”
오스미다의 시선이 오드리를 꿰뚫었다. 오드리는 큰 칼이 제 가슴을 헤집는 듯한 느낌에 침을 삼키며 등을 꼿꼿하게 폈다. 피 끓는 젊은 시절에는 귀족원의 테이블을 걷어찬 전적도 있다는 여걸이 세월의 무게를 담아 보내는 시선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시중들게 해주는 게 뭐 별일이라고. 아니, 그 이상도 해줄 수 있지. 아예 신년사를 하는 내 바로 뒤에 서는 건 어떤가? 시중드는 것보다도 훨씬 나은 효과가 나올걸세.”
오드리는 당황했다. 그 자리는 왕자의 약혼녀쯤은 되어야 설 수 있는 자리였다. 그녀가 거기 서기라도 했다간 가스트로 왕자와 라디아타까지 얽힌 대단한 스캔들이 터진다.
“제가 미욱하여…… 전하께서 제게 무얼 바라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스미다가 손짓하자 시녀가 담배를 채운 긴 파이프에 불을 붙여 올렸다. 그녀는 깊게 숨을 빨아들였다가 회색 연기를 퐁퐁 뱉어냈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건 처음 본 오드리가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오스미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헨젤 양이 내 밑으로 와줬으면 좋겠군.”
“저는 이미 왕비 전하의 사람입니다.”
“오스미다 왕비의 사람은 이미 넘치게 많아. 나는 그대가 일테니아 후작의 사람이 되어주길 바란다네.”
오스미다 왕비. 사교계에 거의 나서지 않는 그녀의 정식 이름은 오스미다 일테니아 하루마키스. 멜브란트 왕국 유일이자 최초의 여성 후작이었다.
* * *
국왕 부부의 신년 인사를 앞두고 왕궁 앞의 광장은 사람으로 가득 차 소란했다. 괴물에 대한 공포가 아무리 강해도 국왕부부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는 사람들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신년제의 메인이벤트가 아닌가. 아니, 어쩌면 국왕부부를 비롯해 유수의 귀족들이 아직 브란젤에 남아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불안을 잊으려는 건지도 몰랐다.
페리는 노천카페의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다. 웃는 얼굴의 가면 아래 불안이 끓어올라 달그락댔다. 무언가 계기만 있으면 얇은 가면 따위 금세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차라리 떠날 것이지…….”
브란젤과 왕국 내 타 지방을 연결하는 기차가 하루에도 몇 십 대나 운행되는데 왜 계속 브란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걸까. 기껏 일궈온 삶의 터전을 쉽게 옮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괜한 불평을 해 본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찻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잠시 멈췄던 손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싸구려 스케치북에 광장을 채운 사람들의 얼굴이 대략적으로나마 담기기 시작했다. 전형성은 삭제하고 개성은 강조한 독특한 스케치였다.
종이가 한 장 두 장 넘어가다 세 장이 되었을 때, 마법사 로브를 입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이 페리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손이 몹시 희고 고왔다.
“전 합석 싫어해요. 그냥 가주세요.”
“페리, 저예요. 네이기스요.”
고개도 들지 않고 스케치에만 집중하고 있던 페리가 그제야 네이기스가 후드 아래로 살짝 드러낸 얼굴을 확인했다. 쥐고 있던 목탄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세상에. 그웬 양, 꼴이 그게 뭐예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나올 수가 없어서요……. 페리가 계속 방문 요청을 했다는데 전 전혀 몰랐어요. 미안해요.”
네이기스는 누가 알아볼세라 후드를 더 깊게 눌러쓴 채로 사과의 말만 웅얼거렸다. 페리의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구르는 목탄을 도로 집어 들었다.
“미안해할 거 없어요. 안 그래도 사정이 어떤지 대충 짐작은 했으니까. 그웬 공자에게 오늘 이 시간에 여기 있으라는 말을 듣고도 설마 했었는데, 하마터면 못 만날 뻔했네요.”
“설마 하면서도 나왔잖아요. 정말 기뻐요.”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도 환한 미소가 상상이 갔다. 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묻은 목탄가루를 닦아냈다. 방문 요청을 거절당할 때마다 쌓인 울화가 깊은데도 도무지 네이기스에게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내 설마 따위야 엄한 부모님께 들키면 난리가 날 걸 알면서도 마법사 로브까지 구해서 입고 온 정성에 어디 비할 수 있겠어요? 그웬 양, 그보다 오늘은 아기 손님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있어도 돼요?”
“아……. 그래서 오래 못 있어요……. 금방 가야 해요. 내가 너무 늦으면 내 대역을 하는 하녀가 혼쭐이 날 거예요.”
“역시 그런가요. 아쉽네요, 같이 국왕부부의 신년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걸. 춥지 않아요?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할래요?”
“아, 아뇨. 괜찮아요. 그나저나 페리, 꼭 얘기해 줄 게 있어요. 앞으로는 그웬가에 방문 요청 넣지 마세요. 계속 그러다간 어머니가…….”
“그웬 부인께서 제 밥줄을 끊으러 다니신다고요. 알아요, 저도 소식통 정도는 있어요.”
네이기스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페리는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웃었다. 예전에 비해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그녀의 웃음에서는 푸근함보다는 좀 날카로운 느낌이 났다.
“안 그래도 초상화 일에서 슬슬 손을 떼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난 본래 인물화로 타우레드 영애의 후원을 받았던 건데 최근엔 인물화를 거의 안 그렸죠. 돈 버느라 바빴지. 인물화를 그려야지 결심을 해놓고도 초상화 의뢰가 들어오면 눈이 돌아갔었으니, 오히려 좋은 기회예요.”
“그래도요……. 미안해요.”
“미안해할 거 없어요. 그웬 부인의 눈이 참 날카롭네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웬 양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으면 뭐라도 떨어지는 게 있을까 싶어 얼쩡거렸던 거거든요.”
“네?”
“세상에, 전혀 몰랐어요? 순진하기도 하지. 지금 그웬 백작은 전혀 아니지만, 다음 대 그웬 백작이 될 에이쉬 그웬은 예술가들과 친하게 지내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런 사람의 동생인 그웬 양과 친하게 지내면 분명 내게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릎에 올려두었던 네이기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페리가 네이기스의 들썩이는 어깨를 빤히 보다 그만 픽 웃었다.
“그웬 양은 너무 순진해요. 앞으로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이렇게 순진할까……. 주변에서 걱정 안 해요?”
“서, 설마 날 노, 놀린 거예요?”
“그럴 리가요? 사실이에요. 전부가 아닐 뿐이지. 정말 이득만 따졌으면 미움 살 걸 뻔히 알면서 계속 방문 요청을 넣었겠어요?”
“그럼 왜 그런 말을 해요……. 좋은 말만 할 수도 있잖아요.”
“내가 못돼먹어서 그래요. 질투가 나서. 됐어요, 계속 말해 봤자 나만 쓰레기 되지. 자, 받아요. 이거 주려고 계속 방문 요청 했었어요.”
네이기스는 눈에 고인 눈물을 재빨리 훔치고 페리가 주는 편지를 받았다. 페리가 얼마나 소중하게 보관했는지, 귀퉁이가 조금 낡은 것 말고는 깨끗했다.
<네이기스 그웬 영애께, 마릴린 구스토 드림.>
봉투의 이름을 본 네이기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릴린 구스토라면 유명한 동화작가였다. 매년 새 동화 시리즈를 내는데 그때마다 책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였다. 이름만 알지 친분은 전혀 없는 사람이 무슨 편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이기스 그웬 양에게 새 동화책에 들어갈 삽화를 부탁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드립니다……? 세상에, 맙소사!”
네이기스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반쯤 일어섰다가 주변의 눈치를 보고 주섬주섬 도로 앉았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리는 나머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마릴린 구스토가 제 그림을 어떻게 알고 이,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요?”
“전시회에 나갔잖아요. 전시회 기간 내내 신문에서 화제였는데 볼 수도 있죠.”
“그것도 왜 페리에게…….”
“그웬 백작저로 편지를 보내봐야 본인에게까지 전달이 안 될 게 분명해 보이는데 후원자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절 택한 거예요. 그 정도 계산은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이만큼 성공한 거고. 그웬 양, 어쩔 거예요? 할 거죠?”
“…….”
“뭘 망설여요? 아, 혹시 동화 삽화라 화풍 변화가 심할까 봐? 너무 걱정 말아요. 마릴린 구스토는 동화작가예요. 화가와 협업하는 데 아주 이골이 난 사람이니까 그웬 양의 그림을 적절하게 잘 이용할 거예요.”
네이기스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이건 ‘화가 네이기스’에게 들어온 첫 번째 의뢰였다. 당장이라도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이 반, 그동안 쉰 기간이 있어 얼마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반…….
‘아, 그러고 보니 나 화구도 없고 그림 그릴 곳도 없지.’
편지를 쥐고 있는 손은 매끄럽고 뽀얬다. 화가의 손이 아니었다. 의뢰를 받더라도 수행할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순간, 머리가 텅 비고 숨이 막혔다.
대답은 못 하고 덜덜 떨기만 하는 네이기스를 빤히 보던 페리가 한숨을 푹 내쉬고 일어섰다.
“내 볼일은 끝났어요. 긍정이든 부정이든 대답은 그웬 양이 알아서 주세요. 주소 있으니까 편지를 하든지, 아니면 지금처럼 변장을 하고서라도 직접 가든지…….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자, 잠깐만요!”
네이기스가 페리의 스케치북을 콱 눌러 그녀를 붙들었다.
“페리, 작업실로 갈 거죠? 나도 거기 갈게요. 같이 가요. 나, 난 집에선 그림 못 그려요. 타우레드 영애가 돌아오면 내 작업실을 꾸려달라고 할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페리의 작업실 구석에 신세 좀 지면 안 될까요? 뻔뻔한 건 알지만, 제발……!”
“아기 손님 맞으러 가야 한다면서요. 시간 돼요?”
“……아.”
후드에 가려진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스케치북을 누르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페리는 유유히 스케치북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내 작업실은 동화 삽화 작업에 전혀 도움이 안 될걸요. 소문 들었죠? 화가 페리가 미쳐서 괴물만 그리고 있다는 거. 그거 진짜거든요. 내가 미치진 않았지만 요새 괴물만 그린다는 건 사실이라.”
“이, 인물화 그린다면서요.”
“사람이 변해서 괴물이 되는 건데 그것도 인물화라면 인물화죠.”
“그런 걸 왜 그려요?”
서 있는 페리를 올려다보느라 네이기스의 후드가 반쯤 벗겨졌다. 잘 말아서 예쁘게 늘어뜨린 적갈색 머리칼이 후드 밖으로 빠져나왔다. 페리가 혀를 쯧쯧 차고 머리카락을 정돈해 밖에 보이지 않게 했다. 후드도 다시 푹 눌러 씌웠다.
“그날 난 강도가 아니라 괴물을 봤어요. 하지만 내가 본 건 강도 따위가 아니라 괴물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죠. 내가 공포에 질려서 엉뚱한 상상을 한 거라고요.”
그날이 무슨 날인지, 네이기스도 잘 알았다. 그녀가 피올을 만나러 나갔다가 괴물을 만난 날이고 헤이라의 약혼자가 괴물이 되어 저택의 화가와 고용인들을 살해한 날이다. 화가의 저택에 불이 나고 피올이 불 속에서 네이기스의 스케치북을 꺼내다 준 날이며 야심만만한 가출이 끝장난 날이었다.
“괴물이 있다는 건 이제 다들 알아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잊혀질 테죠. 이 난리통에도 그 많은 신문 중에서 괴물 그림을 싣는 곳이 한 곳도 없다는 걸 생각해 봐요. 기껏해야 아르젠 남작 얼굴이나 실으면 모를까……. 난 그 꼴 못 봐요.”
“기록화의 의미로 그리는 거예요?”
“글쎄요? 그런 걸 기록화라고 하나요? 잘 모르겠네요. 난 무식하고, 세속적이고, 제멋대로인 인간이라서 날 거짓말쟁이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한 사람들을 못 견디겠어요. 난 내가 본 걸 그릴 거예요. 그리고 또 그려서, 아무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게 할 거예요.”
“……타우레드 영애는 곧 왕자비가 될 거예요. 그런 식으로 굴면 그녀가 곤란해질걸요. 후원이 끊기면 어쩌려고요.”
“어머, 그웬 양이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건 몰랐어요. 순진한 게 아니라 순수한 거였나요? 세상에 순진한 사람은 넘쳐나도 순수한 사람은 보기 드문데 제가 그 행운을 여기서 겪네요. 조심해요, 나처럼 세속적인 인간은 순수한 사람을 보면 괜히 상처주고 싶어지니까.”
스스로를 세속적인 인간이라고 단언한 페리가 네이기스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타우레드 영애를 좀 믿어봐요. 입장이 좀 곤란해졌다고 후원을 그만둘 사람이었으면 여성 화가만 골라서 후원하는 괴짜 짓은 안 했을걸요. 그리고 후원 끊기면 어때요?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있겠다, 어떻게든 살겠죠.”
“페리…….”
“그웬 양, 하고 싶은 걸 해요. 당신은 그림을 그려야 사는 사람이야.”
먼지 낀 야외 테이블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페리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자신을 챙기기도 바쁜 화가는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돌아섰다.
* * *
후작 작위만 가졌지 정작 그 작위로 한 게 없다며 자조하는 오스미다는 몰랐겠지만, 오드리가 작위를 가지는 꿈을 꾸기 시작한 데에는 일테니아 후작의 역할이 아주 지대했다. 별명 따위가 아니라 진짜 작위를 가진 여성 귀족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어린 오드리가 그려낼 수 있는 미래의 범위는 크게 넓어질 수 있었다.
나도 그녀처럼 작위를 가져야지. 그리고 국왕의 정전에 오를 자격을 얻어 아버지와 정면으로 마주서야지.
일테니아 후작이 있었기에 꿀 수 있었던 꿈이었다. 자라면서 오스미다 왕비가 후작으로서의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일테니아 후작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가 변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드리는 눈이 부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눈꺼풀을 꾹 눌렀다. 언젠가는 자신도 저렇게 될 거라고 믿고 달린 목표이면서 그 이상으로 해내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해주던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설령 헨젤 양이 랄리우스 후작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 편에 서야 하네.”
“……저를 한편으로 만들어서 무얼 하시려고요?”
“글쎄? 미리부터 걱정 말게, 젊을 때는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았지만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많이 소박해졌다네. 일단…… 귀족 상속법 개정부터 추진해 볼까?”
오드리는 아연함에 잠시 숨을 멈췄다. 오스미다가 오후에 차 한잔하자는 것처럼 가볍게 꺼낸 귀족 상속법 개정은 젊은 시절의 그녀가 진지하게 추진하다가 반대파의 극심한 반발에 끝내 무산된 전적이 있었다.
“그…… 후계자 지정에 있어 성별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 내용 말씀이신가요?”
“오래된 얘긴데 알고 있군. 하긴, 헨젤 양이라면 알고 있을 법도 하지. 하지만 그건 젊을 때나 하고 싶었던 거고, 지금은 좀 달라. 더 듣고 싶다면 내 편에 서겠다고 약속하게.”
회색 연기가 오스미다의 얼굴을 가렸다.
“지금 당장 급하다고 해서 무슨 일을 하게 될 줄도 모른 채 냉큼 약속부터 할 순 없어요.”
“허세는 적당히 하게나. 내 도움 없이 헨젤 양은 내기에 이길 수 없어.”
“…….”
“잘 생각해 보게. 랄리우스 후작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 편에 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혹 랄리우스 후작이 못 되더라도 다른 작위는 받게 해줄 수 있다…….”
“잘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은 왜 하는 겐가? 귀여워 보이려고?”
결국 오드리는 오스미다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받아드는 잔에 독이 들었다고 해도 당장의 위기는 넘겨야 했다. 걱정은 그 다음에 할 일이었다.
오스미다는 그 대가로 오드리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도록 해주었고, 오드리는 바라던 대로 왕비의 곁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대중에게 노출시켰다. 더불어 저택으로 돌아갈 때는 뚜껑 없는 마차에 셰비언과 나란히 앉아 타고 돌아왔다.
그러고도 혹시 사람들이 몰라볼까 하여 대문가에 미리 준비해 둔 짚 인형에 셰비언이 몇 번 벼락을 때리기까지 했다. 아기를 안고 축복을 받으러 가던 사람들은 불타는 짚 인형을 보고 한동안 망설이다 결국 헨젤가로 발길을 돌렸다.
오드리가 미리 준비했던 스무 개 남짓한 은반지는 금세 동이 났다. 그러자 부모들은 셰비언이 직접 축복해 주기를 바랐다. 불가능한 소원이었다. 셰비언은 몹시 곤란해했고, 목적을 이룬 오드리는 그가 뒤로 빠지는 걸 너그럽게 용인했다.
“나 혼자서 축복하는 거라도 괜찮은 자는 남고, 아닌 자들은 돌아가도록. 오늘 귀족가의 문들은 활짝 열려 있다네.”
셰비언의 축복도, 은반지도 없다는 걸 알자 태반은 걸음을 돌렸지만 일부는 남았다. 셰비언은 좀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오드리는 아기 손님 몇이 남은 것만으로도 몹시 놀랐다.
“아름답고 정숙하며 평판이 좋은 귀부인과 귀족영애가 수두룩하게 많은데, 왜 하필 나한테 축복을 받으려 든담?”
“이유가 궁금하면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뒷모습에 대고 물어보면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데요.”
“아니. 스스로 체면을 깎을 정도로 궁금하진 않아. 보나마나 남편이 로렐라이에서 일한다든가 아니면 친척이 만탈락에 산다든가 하겠지.”
“인간의 체면은 참 다양한 방법으로 쑥쑥 잘 깎이는군요……. 무슨 생크림도 아니고.”
“뭐?”
“별말 안 했어요. 아가씨, 오늘 제가 아가씨께 도움이 되긴 했나요?”
셰비언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말을 돌렸다. 오드리는 어이없어 하다가 그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가 없었으면 집에 처박힌 인형 신세가 될 뻔했는데, 이젠 헨젤 백작에게 뒷수습을 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지금쯤 왕궁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대로 짜증내고 있을 헨젤 백작을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났다.
“당연히 도움이 됐지. 고마워, 셰비언. 덕분에 집에 갇히는 사태는 피했어.”
“오……. 왠지 표지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게 아가씨께 도움이 됐다니 나쁘진 않네요. 일은 끝난 건가요?”
“그래. 이젠 가봐도 좋아. 왕궁마법사들과 치안대가 이를 득득 갈며 기다리고 있을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요……. 그렇게 산뜻하게 얘기하시니 왠지 서럽네요. 아가씨, 다음에 또 제가 쓸모가 있거든 불러주세요.”
“쓸모없어도 부르면 더 좋고?”
“당연하죠.”
긴 은빛 속눈썹이 사르르 접혔다. 오드리는 숨이 멎도록 아름다운 얼굴을 빤히 보다 문득 손을 뻗어 셰비언을 끌어당겼고,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가 놀라 뱉은 숨에선 차가운 겨울의 향기가 났다. 오드리는 짓궂은 미소를 짓고 셰비언의 뺨을 꼬집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러게요. 놀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죠……?”
“좋은가 보지.”
“왕궁마법사들에게 오늘은 갈 거라고 얘기해 뒀는데 괜히 말했나 봐요. 하루 이틀은 더 늦을 수도 있다고 할걸.”
“아니, 그랬다간 죄다 나한테 달려와서 아르젠 남작이 일 좀 하게 설득 좀 해달라고 매달릴 거야. 그런 귀찮은 사태는 피하고 싶군. 내게 괴물 사태를 해결하는 것쯤은 별일도 아니라고 했었지? 그대가 말한 대로 기대하고 있을 테니 빨리 가서 일해.”
빨리 가라고 하면서도 오드리의 손은 여전히 셰비언의 목덜미에 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키스할 것처럼 셰비언을 당기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는 완전히 끝내면 안 돼.”
“저보고 자신은 선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시더니……. 그 말 그대로 실천할 셈이세요? 시간을 끌면 끌수록 사람이 많이 죽어요.”
“그래, 말했듯이 나는 그리 선한 사람이 아냐. 사람 목숨이든 뭐든 이용할 건 전부 이용할 거고, 이제까지도 그렇게 해왔어. 왜?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 안 될 것 같으면 얼른 말해.”
셰비언은 짧게 웃고 오드리와 이마를 마주 댔다. 평온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불안하게 펄떡거리는 오드리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게 몹시 즐거웠다.
“싫어졌을 리가 있나요.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될 거예요. 하지만 기억해 두세요. 일부러 일을 늦춰 진행하는 건 후다닥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정교한 작업이에요. 중간에 방해가 들어오면 일이 몇 배는 더 커질 수 있어요.”
“방해? 그대가 마법의 주인인데, 누가 그대를 방해할 수 있지?”
“이 두 번째 괴물 사태의 원흉이 바로 제 동족이에요. 인간 따위 다 죽어버리라는 듯 아주 징그럽게 일을 해놔서요. 제가 질질 끌고 있는 걸 얼마나 봐줄지는 모르겠네요.”
“샤를레아…….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나갔었지. 셰비언, 내가 나중에 그대에게 들을 말이 많겠어.”
“일단은 일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도해 주세요. 그게 포모스든 벨트람이든 누군가의 가호가 있어야 하는 것만은 확실하니까요.”
셰비언은 말을 마치자마자 오드리의 입술을 가볍게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디케가 경악에 찬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알 바 아니었다.
“제 하늘은 아가씨께 늘 열려 있으니, 언제든 찾아오세요.”
“……그러지.”
자박자박 걸어 사라지는 셰비언의 등을 보면서 오드리는 고민에 빠졌다. 헨젤 백작이 조금 더 바쁘기를,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 여유를 잃기를 바라고 한 부탁이었는데 어쩐지 불안이 몰려왔다.
“혹시 내가 실수한 걸까…….”
“그럼요. 실수하셨죠. 왜 하필 저 이상한 마법사예요?”
오드리와 셰비언의 밀착 애정행각을 눈앞에서 보면서 잠자코 있어야 했던 이디케가 거의 이를 갈며 물었다. 그녀는 아직 라비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였다. 비록 오드리 몰래 헨젤 백작과 손을 잡았다고 해도 분명 오드리에겐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거고, 그만한 조건은 다신 안 나올 거라나. 오드리에겐 털끝도 안 먹힐 말이었다.
“그 이상한 마법사 덕분에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는 걸 생각해야지. 확보했던 인원이 죄다 증발해서 기겁했던 건 벌써 잊었어?”
“……아뇨.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마법사라고요. 가진 거라곤 작위밖에 없고, 자기가 용이라고 떠들어대는 미치광이에, 오래 살지도 못할 마법사요.”
“뭐 어때? 내가 필요한 게 바로 그 작위인데. 그리고 셰비언은 작위 말고 얼굴과 명성, 실력을 가졌으니 그것도 추가해. 용이라는 건 이제 그만 믿어줄 때도 됐어. 그만한 실력이면 용이 아니라 용 할아버지라고 해도 믿어줘야지.”
“그가 용이라는 걸 정말 진심으로 믿어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진심이야.”
오드리는 이디케를 데리고 셰비언의 공간 속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올까 생각했다. 직접 셰비언 성벽 위의 풍광을 경험하고 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디케인데, 친자매와 다름없는 그녀인데도 그 풍경은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었다.
“……이디케, 언젠가는 너도 날 이해할 날이 올 거야.”
“네, 저도 납득이 아니라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라요.”
“다 툴툴거렸으면 왕궁에 갈 준비나 좀 해줘.”
“왕궁이요? 왕궁은 왜요?”
“내기에서 이겼잖아. 내가 직접 소식을 가져가겠다고 말씀드렸으니, 말을 지켜야지.”
오드리가 배배 꼬인 심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심술궂게 웃었다. 바쁜 와중에도 공들여 판 함정이 헛일이 된 헨젤 백작의 얼굴을 꼭 봐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과연 오드리에게서 아기 손님의 명단을 받은 헨젤 백작의 표정은 아주 볼만했다. 오드리는 대놓고 화도 짜증도 내지도 못하는 그를 앞에 두고 대놓고 비웃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물이 넘었다는 게 진짜냐.”
“설마 제가 가짜 명단을 내밀었을까요? 확인해 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을. 아버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웃지는 않아도 당당하게 펴진 어깨와 화사한 안색이 지금 오드리가 느끼는 승리감을 짐작케 했다. 집무실에 앉아서도 오늘 오드리의 행적을 훤히 꿰고 있던 헨젤 백작은 그 꼴이 보기 싫어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를 이용하다니, 천박한 방식이다. 안 그래도 파혼으로 말이 많은데 그건 어쩔 셈이냐?”
“그러게요? 이기는 것에 급급해서 거기까진 생각을 못해봤어요. 하지만 아버님이 계시니 저는 걱정 없어요. 사람들은 제 연애 얘기를 하려다가도 재산 문제에 나서서 입을 막은 아버님을 떠올리며 조심할 테죠.”
생각을 못하긴 무슨. 일단 이기기만 하면 다 나한테 떠넘길 생각으로 저지르고 본 거겠지. 헨젤 백작은 대놓고 빈정대고 싶은 걸 꾹 참았지만 그 역시 사람이라, 치미는 감정을 완전히 누르지는 못했다.
“타우레드에서 네 행실을 꼬집어 문제 삼고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고 따지면 어쩌려고?”
“엘라인 부인은 처녀 시절에 자신에게 프러포즈한 남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머릿수 세기를 즐겼고, 매일 남자를 바꿔가며 오페라 공연을 보러 다녔다죠. 그래도 사람들은 인기 많은 레이디는 그럴 수도 있다며 옹호하기 바빴어요. 남자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었으니 얼마나 공정하냐고요.”
“그건 살론 얘기지. 거기야 궁정연애니 뭐니 결혼하고 나서도 연애놀음 하는 걸로 매일 시끄럽지 않더냐. 여긴 멜브란트다. 무엇보다, 네가 그 유명한 엘라인 부인과 견줄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헨젤 백작은 오드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초록색 머리칼과 꼴 보기 싫은 가무잡잡한 피부, 브란젤의 귀족 영애들에 비하면 통나무처럼 두꺼운 허리 말고는 도무지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지긋지긋한 밀리나와 꼭 닮은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픽 웃음이 샜다.
“자신감이 과하구나.”
“뭐 어떤가요? 타우레드의 후계자인 벨키스 경과 몇 십 년 만에 작위를 받아낸 대마법사 아르젠 남작이면 숫자는 적어도 엘라인 부인의 발끝 정도는 따라가겠지요.”
오드리는 웃는 낯으로 헨젤 백작의 속을 박박 긁어댔다. 뒷일 걱정 안 하고 이렇게 멋대로 굴 수 있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말을 보탤 때마다 바르르 떨리는 손을 보는 게 너무 즐거워서 큰일이었다.
이러다 아예 크게 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드리는 여전히 서류로 빼곡한 집무실을 슥 둘러보곤 우아하게 일어나 인사했다.
“아버님, 신년제 연휴에도 이렇게 일이 많으신데 제가 너무 시간을 뺏었죠. 제가 여기 더 있다간 아버님께서 계속 집에 돌아오지 못하실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너는 내가 집에 못 들어갈 정도로 바쁘기를 바라지 않더냐?”
“설마요. 아버님, 아무리 바쁘셔도 가끔은 집에 들러주세요. 하델이 비레직 영지를 맡고 힘들 텐데, 조언도 해주시고 도와주기도 하셔야죠.”
“너는? 너는 뭐 하고?”
“저야 새로 얻은 재산을 관리해야죠. 생각보다 덩치가 커서 요새 아주 애를 먹고 있답니다. 저는 아직 미숙해서 제 재산 관리와 하델 가르치는 걸 동시에 하기엔 모자라니, 부디 아버님께서 나서주세요. 하델도 아버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는 걸 더 좋아할 거예요.”
헨젤 백작이 쥐고 있던 만년필의 촉이 벌어져 잉크가 샜다. 화를 참느라 만년필로 서류를 자꾸 쑤셔댄 탓이었다. 그가 만년필을 내던졌다.
“그래, 하델은 내가 직접 돌보마. 넌 이만 돌아가라. 계속 네 얼굴을 보고 있다간 오늘 일을 죄다 망쳐 버릴 것 같으니.”
“네, 아버님. 그럼 저는 헨젤의 그늘이 어떤 건지 체감하기를 기대하며 돌아가겠습니다.”
오드리는 마지막까지 헨젤 백작의 속을 뒤집고서야 집무실을 나왔다. 뒤에서 문이 닫히자마자 참아왔던 희열이 손끝 발끝을 타고 온몸을 내달리다 목구멍을 따끈하게 데웠다. 마구 소리 지르고 싶기도 하고,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싶기도 했다.
겨우 단 한 번의 승리에 이렇게 들떠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기가 어려웠다. 입가가 자꾸 바들바들 떨렸다.
이런 기분을 앞으로 계속 맛볼 수만 있다면, 어제 오늘 같은 가시밭길 따위는 웃으며 건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치한 승부욕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얼굴에서 빛이 나는 그녀를 본 보좌관 일랑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오스미다 왕비가 테라스에서 일부러 오드리를 챙겼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내내 기분이 안 좋은 헨젤 백작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하늘이 노랬다.
‘나는 왜 재무국 따위에 지원해서 이런 꼴을 당할까……. 휴일에도 못 쉬고…….’
일랑이 대충 인사하고 집무실로 들어가려는데, 오드리가 그를 붙들었다.
“일랑 보좌관.”
“……예?”
“내 재산에 대해서 먼저 알고 아버님께 알린 이가 그대라지요?”
“그……. 예, 제가 맞습니다. 워낙 큰돈이 움직이는 거라 말씀 안 드릴 수가 없어서……. 혹시 그 일로 뭔가 문제라도 생기신 겁니까? 백작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는데요.”
“문제가 생겨서 따지려고 잡은 게 아니라……. 흠……. 일랑 보좌관, 재무국 일이 힘들지 않나요? 봉급도 적을 텐데 이렇게 휴일에도 나와서 일하고.”
일랑은 대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오드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오드리의 손짓대로 주춤주춤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년이면 내 남동생이 열네 살이에요. 아버님은 벌써 비레직 영지를 통째로 맡기고 일을 가르칠 준비 중이시죠. 당연히 재무국에 올 테고, 빠르게 승진할 거예요. 헨젤이니까.”
“…….”
“로렐라이는 언제나 인재를 환영해요.”
말을 마친 오드리가 일랑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멀어졌다. 일랑은 허리를 펴고 오소소 소름이 돋은 뒷목을 쓰다듬었다.
“누가 헨젤 아니랄까 봐……. 부녀가 둘 다 뱀이로군.”
헨젤 백작이든 오드리든 들었으면 거세게 반발했을 발언이었다.
신년제가 끝나고, 오드리는 헨젤의 그늘이 어떤 건지 제대로 체감했다. 아직 본격적인 사교철은 시작되지도 않았고 헨젤 백작은 사교 모임에 나서는 사람도 아니건만, 오드리를 두고 마녀 어쩌고 하던 소문은 놀랍도록 빠르게 가라앉았다. 어린 귀족영애가 터무니없이 많은 재산을 가졌다며, 자기 것도 아닌 재산을 두고 경박하게 입을 놀리던 사람들도 금세 조용해졌다.
오드리가 어딜 가든 따라붙던 시선의 종류도 바뀌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익숙해졌던 비웃음은 간데없이 말 걸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신년제 둘째 날에, 문을 열고 기다릴 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친애의 편지와 초대장이 첩첩이 쌓였다.
오스미다 왕비도 오드리가 그런 시선을 받는 데 한몫을 했다. 일테니아 후작의 편이 되라더니, 그게 꼭 티타임의 정식 멤버가 되라는 말이었다는 것처럼 오드리를 자주 불러냈다. 덕분에 요즘 오드리는 평생 인연이 없을 줄 알았던 귀부인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고 있었다.
이디케는 어안이 벙벙하다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매일 오드리 앞으로 날아든 편지를 고르며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 수다를 떠는 게 그녀의 일과에 추가됐다.
“진작 이렇게 해주셨으면 좀 좋아요? 하여간 백작님도 웃긴다니까요.”
“그러게……. 상상이상으로 안락한데. 다른 귀족영애들은 본래 이렇게 살았던 건가?”
오드리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비웃음과 폭언과 악담들이 생각보다 날카로웠다는 게 새삼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다이앤이 빠지면서 생겨난 업무 공백을 메우느라 일이 늘었는데도 만성적으로 찾아오던 두통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아가씨가 좀 힘겹게 사신 거죠. 이게 평범이에요, 이게. 기준을 예전에 두지 마세요.”
“아니, 이게 기준이 되면 나중에 또 구설수에 휩쓸렸을 때 정말 힘들 것 같아. 이건 어쩌다 찾아온 행운이라고 생각해야지.”
“아가씨도 참……. 그나저나 참 이상하네요. 이렇게 깔끔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 왜 유언장에 손을 대는 무서운 짓을 하셨을까요?”
“본래 큰 사기를 치려면 자잘한 약속을 잘 지켜야 돼. 그래야 잘 속아 넘어가거든.”
마침 집무실로 들어오던 릴리가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느냐고 따지고 싶긴 한데, 그거 참 그럴듯하네요. 제가 그 수법에 속아서 사막을 따라갔었잖아요. 내가 미쳤지. 요즘도 실렌다 사막에 관광 간단 사람들을 보면 뜯어말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니까요.”
“아니, 언제 적 얘기인데 그 얘길 아직도 하고 있어? 이제 좀 잊을 때 되지 않았어?”
“좀 인상적인 기억이었어야 잊죠. 그래도 아가씨께서 워낙 질색하시니까 성년 될 때까지만 하고 안 할게요.”
“누가 들으면 내가 내일 당장 성인 되는 줄 알겠어.”
“안타깝게도 앞으로 이 년하고 한 달밖에 안 남았죠. 어휴, 남은 인생은 그보다 훨씬 긴데. 쯔쯔쯔. 그보다 아가씨, 열여덟 살 생일까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어쩔 생각이세요? 작년에는 기차에서 생일을 보내시느라 별것도 못 해 보고 그냥 넘겼잖아요. 올해는 크게 파티 하실 거죠?”
“흠……. 몇 달 전만 해도 생일은 최대한 조용히 넘길 생각을 했었는데……. 상황이 달라지니까 욕심나긴 하네. 그런데 그럴 여유가 있긴 해? 둘 다?”
로렐라이와 데멘사에서 밀어닥치는 일을 떠올린 이디케와 릴리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로렐라이의 단주가 오드리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슬슬 퍼져 나가는 와중에도 로렐라이의 매출은 여전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만년필은 고급 필기구 시장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고, 출입금지마법이 걸린 문짝은 없어서 못 팔았으며, 일반인도 온오프가 가능한 마법도구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데멘사의 전보는 이제 슬슬 구간 개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브란젤과 산트렘을 잇는 긴 전보선을 굳이 한 번에 개통해야 할 필요는 없는지라 내린 결정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낯설어하는 경향이 있긴 해도 오가는 전보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건 확실했다.
이것만으로도 다들 몸을 갈아 넣으며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 오드리의 생일 파티? 그것도 성대하게? 악명이 드높을 때라면 모를까, 헨젤 백작이 딸을 잊지 않았음을 사방에 알린 지금에 생일 파티를 열겠다고 알리는 순간 밀어닥칠 일은 파도가 아니라 해일 수준일 게 분명했다.
이디케는 희희낙락 읽고 있던 초대장을 본래대로 접어 한쪽 구석에 쌓았다. 거절 답장을 보내는 것도 일이었다.
“소규모로 하죠, 아가씨.”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래도 아주 작게는 못 해. 릴리, 초대할 만한 사람들 명단 추려서 올려. 귀족은 적당히 불러도 되지만 로렐라이 고위직에 있는 자들은 많이 부르도록 해. 안 그래도 사정을 알고 싶어서 다들 안달이 났을 거야. 이디케, 워커는? 요새 워커 녀석 뭐 해? 아직도 연구실에 처박혀서 소식이 없나?”
“네. 솔직히 죽었나 살았나도 모르겠어요. 먹을 게 꾸준히 줄어드는 데다 사하스바티가 들락거려서 그나마 살아 있구나 싶은 거라……. 워커도 초대할까요?”
“죽었으면 살려내서라도 참석시켜. 셰비언이 올 건데 워커가 안 오면 말이 안 되지.”
“아르젠 남작이 온다고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릴리가 놀라 물었다. 그도 그럴 게, 요새 셰비언은 헨젤가에 좀처럼 방문하질 못하고 있었다. 셰비언이 헨젤가에 방문할 때마다 자꾸 돌아갈 시간을 미루는 통에, 왕궁마법사들이 이를 갈며 그가 헨젤가로 가는 걸 막고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두 사람은 셰비언의 공간에서 거의 매일 밤 만나고 있었다.
공간에서 만나서 뭐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드리도 셰비언도 피곤해서 호숫가에 긴 의자를 펼쳐 놓고 드러누워 쉬기 바빴다. 봄여름가을이 다 뒤섞인 호수를 바라보며 하루 동안 있었던 얘길 조곤조곤 늘어놓고, 별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다 까르르 웃었다.
나란히 누워 손가락을 얽고, 가끔은 서로를 끌어안고 체온에 기대어 잠드는 시간은 애정으로 충만했다. 언젠가 둘 다 일정이 한가해지는 날이 오길 기다리며 하나씩 추가한 명소 리스트가 하염없이 길었다.
일 얘기도 했다. 셰비언은 브란젤을 뒤덮은 샤를레아의 악랄한 마법진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고, 오드리는 슬슬 정체가 드러나는 상황에서 로렐라이와 데멘사를 운영하며 직면하게 된 속 터지는 상황에 대해 마구 떠들어대고 싶었으니까.
오드리가 곧 열여덟 살 생일을 맞는다는 걸 알게 된 셰비언은 이번에도 보석 선물을 약속했다. 줬다 뺏은 꼴이 된 알룬드의 목걸이를 대신할 만한 보석을 기대하라고 했었다. 용이 보석을 어떻게 쓰는지 보여주겠다나.
오드리는 이런 얘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셰비언의 정체를 아는 라디아타만 어렴풋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디케도 릴리도 엉뚱한 곳에 사실을 흘릴 사람이 아니건만, 그런 걸 알면서도 어쩐지 말하기가 쑥스러웠다. 남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인데도 그랬다.
“교제 시작하고 처음 맞는 아가씨 생신인데 안 올 리가 있나. 안 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지.”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당연하지.”
다행히 오드리가 말하지 않아도 저들끼리 사정을 납득하고 그냥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입이 말랐다.
“그쯤엔 타우레드 후작가도 브란젤로 돌아올 테니 라디아타의 몫도 준비해 둬. 아, 라디아타에게 알룬드의 목걸이 대신 줄 생일 선물도 따로 마련해 놓고.”
“……아가씨, 타우레드 영애랑 계속 친하게 지내시려고요?”
“라디아타가 날 아끼는 게 사실인데, 사이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있어?”
오드리의 태도는 지극히 건조하고 담백했다. 매일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불고하던 오드리를 기억하는 하녀들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아뇨……. 아가씨께서 괜찮다고 하시는데……. 네……. 저희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럼 그렇게 알고 이만 나가봐.”
오드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녀들을 쫓아내고 혼자 남아 집무실 책상에 길게 엎드렸다. 할 일이 산처럼 쌓였는데도 셰비언이 보고 싶었다. 그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일하면 효율이 몇 배는 오를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엎드린 채 흩어진 서류를 뒤적거렸다. 마침 샤를레아의 행방을 추적한 중간보고서가 손에 잡혔다. 샤를레아가 용이며, 브란젤과 타우레드에 괴물 사태가 또 일어나도록 수작을 부린 장본인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오드리는 그녀의 행방을 쫓는 것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샤를레아가 브란젤을 나간 뒤 타우레드 영지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보고를 받은 날에는 지독한 불안에 잠을 설쳤다. 만탈락도 타우레드 영지와 거의 비슷한 조건의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불안정한 마법망, 좁은 공간에 사람이 몰려 사는 밀집성. 거기에 더해 타우레드 영지와는 달리 브란젤과 거리가 멀었다. 셰비언이 너무 늦지 않게 소식을 접하더라도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만약 셰비언이 곧바로 만탈락에 가겠다고 하더라도 그가 브란젤을 비운 사이 죽을 고생을 한 왕궁마법사들과 치안대가 거품을 물고 반대할 게 뻔했다. 기껏해야 스와디나 아이샤를 보내고는 셰비언이 일을 해결하고 갈 때까지 현상유지만 하며 버티라고 하겠지.
“내가 실수한 걸까…….”
정말 실수한 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셰비언에게 빨리 브란젤의 괴물 사태를 해결하고 만탈락에 가달라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불안이 오드리의 뒷목을 콕콕 찔렀다.
그날 밤, 셰비언의 공간에서 그를 만난 오드리는 넌지시 운을 띄웠다. 하지만 셰비언은 갑자기 속도를 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답변을 주었다. 느릿하게 진행하는 만큼 철저하게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며, 일단 급한 것부터 해치우고 남은 것들을 청소하는 빠른 방법은 쓰기 힘들다고. 그녀는 크게 한탄했다.
“샤를레아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다나가 죽어서 머리가 돈 거죠. 본래 미쳐 있었는데 한 번 더 미치더니 앞뒤도 못 가리는 바보가 됐어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누군가를 향해 적대적인 감정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처음 보았다. 아무리 옛날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적이라지만 지금은 단둘만 남은 동족인데, 셰비언의 발언에선 짙은 혐오마저 묻어났다.
“다나라면 다나 트왈릿? 수확제 괴물 사태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신문에서 그러던데.”
“큰 활약을 하긴 했죠. 모처럼 용의 마력을 짙게 타고난 데다 마법사의 재능까지 갖춘 인재라서 샤를레아가 제 마력을 나눠주고 직접 마법이론을 가르칠 정도로 아꼈는데, 그렇게 받은 마력으로 기껏 한 게 브란젤에 괴물을 푸는 일이었으니까요. 스승이나 제자나 아주 똑같은 짓을 한다니까요.”
“음? 다나 트왈릿이 괴물을 풀었다고? 괴물을 막다가 죽은 게 아니라?”
오드리가 의문을 표했다. 셰비언이 괴물 사태 진정의 핵심 인물이긴 하지만, 그녀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남들보다 많이 아는 거라곤 전보의 개발 중 만들어낸 마법망 안정화 기술 실험이 괴물화 현상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몸 안의 마력 균형이 무너져 괴물이 된 자들은 용의 마력을 탐한다는 것 정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셰비언이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걸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다나와 샤를레아를 욕하다 말고 갑자기 딴청을 피우기 시작한 셰비언이 수상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긴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오드리가 벌떡 일어나 셰비언을 찔렀다.
“뭔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셰비언, 내게 거짓말은 안 하기로 했지? 내가 틀린 정보를 알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입을 다물면 그건 기망이야.”
“으, 으음……. 지나간 얘기인데 꼭 해야 돼요?”
“당연한 말을.”
셰비언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민망해하며 사실을 고백했다. 오드리는 다나와 샤를레아 사이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동안 가져왔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분명 실수를 깨달은 뒤 마력구슬을 회수하고 마법망을 보수하는 등의 수습을 했고 효과도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한데 수습이 이뤄진 며칠 뒤에 갑자기 괴물이 대량으로 튀어나온 이유에 대해서는 도무지 밝히지 않더라니, 얽힌 사정이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다.
“난 또, 전보 개발과정의 실수가 괴물 사태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원인인 줄 알았지. 그래서 데멘사의 이름으로 자선도 통 크게 했는데…….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을 한 셈이 되었군. 그대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나? 왜 해명하지 않았지?”
“유일한 원인은 아니어도 결정적인 원인은 맞으니까요.”
셰비언이 드물게 풀 죽어 대답하니, 오드리가 픽 웃었다.
“그대는 그대의 실수를 깨닫고 스스로 나서서 수습했어. 그리고 애초 샤를레아와 다나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리 커질 일도 아니었던 거잖아? 그들이 저지른 죄까지 그대가 짊어질 필요는 없어. 정 그래야 한다면 그건 나의 몫이지. 전보 개발을 지시하고 돈을 댄 책임자는 나잖아.”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마력이 문제…….”
“책임자는 나라니까? 아랫사람의 실수를 책임지는 게 나의 일이야. 이거야 원, 그대의 그 쓸데없는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자선의 규모를 유지해야겠는 걸.”
“…….”
“그래, 그렇게 웃어. 보기 좋잖아. 아무튼, 내가 보고서를 받았던 시점에서는 아직 다나가 살아있었군?”
“그때는……. 네. 범인은 아직 못 잡았어요.”
“왕궁마법사 짓일 거야. 그런 큰일을 저질러 놓고 왕궁마법사를 그만두는 걸로 끝나게 생겼으니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아마도요. 그런데 서로 철저하게 감싸서 누군지 알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왕궁마법사들 전부를 털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왕궁마법사장은 다나를 영웅으로 포장해서 선전하는 걸로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 했고, 샤를레아도 거기 동의했어요. 그래서 신문이 그렇게 나간 거예요.”
“그야 왕궁마법사 내에 범인이 있었다고 하면 나라가 전부 뒤집힐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응, 그래, 이해해.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인범은 입을 다물 테니 왕궁마법사의 대외적 이미지를 지키기에도 좋을 거고…….”
고개를 끄덕대던 오드리가 갑자기 셰비언의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군살 없는 옆구리는 잡히는 것도 없는데 셰비언이 당장이라도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것처럼 엄살을 부렸다.
“아야야야야!”
“엄살인 거 다 알아! 그래, 처음에는 그럴 수 있어. 혹시 비밀이 새어나가 샤를레아를 자극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 했겠지! 하지만 다나가 죽고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왜 말을 하지 않은 거지? 몇 달이야? 아무리 내게 마법사의 재능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대 혼자서만 알고 있는 게 말이 돼?”
“그래서 지금 말했…… 아야야!”
“아까 말 꺼내기 싫어하는 거 보아하니 내가 안 물어봤으면 끝까지 숨겼겠네! 내가 괴물에게 쫓기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걸 알면서……! 몰랐으면 계속 다나 트왈릿을 좋게 봤을 거 아냐! 시계탑 꼭대기에서 내가 무슨 시간을 보냈는데!”
오드리가 시계탑에서 세제통을 들고 괴물과 싸웠던 기억을 떠올리고 치를 떨었다.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다이앤과 이디케가 그 세제가 무슨 세제인지 알고 원액을 썼느냐며 기겁을 하고 오드리를 통째로 빨래할 기세로 목욕시켰었다. 자칫했으면 손톱이 빠질 뻔했다나.
하나 시계탑에서의 일이라면 셰비언도 할 말이 있었다. 그날 그는 괴물을 잡느라 바빴고, 다나가 저지른 일도 해결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드리의 위험을 알자마자 곧바로 그녀를 찾아 시계탑으로 달려왔는데, 오드리는 그의 손을 거절했었다.
“그날 라비린 녀석만 시계탑 꼭대기에 없었어도 다나 트왈릿이 범인이라고 바로 말했을 거예요. 아니면 아가씨가 제 손을 잡아주기만 하셨더라도, 제가 아가씨의 의식을 공간에 끌어들일 수 있게 조금만 틈을 주셨더라도, 하다못해 제 방문 요청을 받아주기만 하셨어도…….”
“변명은 거기까지. 셰비언, 정말 말하려는 의지가 있긴 했어? 어차피 죽었는데 브란젤에 괴물을 풀어놓은 미친광이보다는 영웅으로 남는 게 낫겠다 싶었던 거 아니야? 그렇잖아, 마력의 계통이 같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호감을 느낀다며! 다나 트왈릿은 용의 마력을 가진 마법사였는데, 나랑은 비교도 안 되는…….”
‘잠깐, 내가 뭔 말을 하는 거야. 꼭 내가 다나 트왈릿을 질투하기라도 하는 것 같잖아!’
오드리는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에 지독히 부끄러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셰비언은 자신이 오드리를 사랑하는 것엔 마력의 계통이 상관없다고 말해줬는데, 알았다 해놓고 여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었음을 이런 식으로 고백해 버리다니.
조금 전 셰비언의 옆구리를 거세게 꼬집던 기세는 간데없이, 오드리는 갑자기 귀를 쫑긋대는 강아지처럼 셰비언의 기색을 살폈다. 제발 못 알아들었어라. 당신 본래 눈치 없잖아!
셰비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가씨도 마법 쓰고 싶어요? 의외네요, 그쪽에 별로 미련 없어 보였는데.”
“…….”
“안타깝게도 마법은 재능에 영향 받는 부분이 너무 커서 저도 어떻게 방법이 없어요. 아가씨는 워커를 휘하에 둔 데다 저도 있으니까 그걸로 만족하세요.”
“……응.”
뭔가 입안이 씁쓸한 것이, 안심인지 실망인지 애매모호한 기분이다. 오드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셰비언은 조용해진 오드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오드리에게서 전해지는 온기에 눈이 노곤하게 감겼다. 그는 보통 인간들보다 체온이 약간 낮았다.
“아가씨와 제가 마력의 계통이 같다는 걸, 제가 언제 알았는지 아세요?”
“글쎄? 음……. 처음 봤을 때부터? 그대는 그때부터 내게 이상하리만치 호의적이었어.”
“인간의 마법사들이 다른 종족의 마력을 인간에게 부어넣었다는 사실을 안 게 한참 뒤의 일인데 그럴 리가 있나요. 하지만 아가씨에게 저절로 눈길이 간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가 맞아요.”
“…….”
“제가 이전에 말했던가요? 당연히 살아 있을 거라 믿었던 동족들이 모두 죽고 없고 마법도 거의 사라져 흔적만 남았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도 모르게 반쯤 미쳐 있던 제가…… 아가씨를 만나자마자 머리가 맑아졌다고요. 그게 설마 아가씨의 마력 계통을 알아서 그랬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첫눈에 반한 거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 이건 예전에 했던 말이네요. 하하, 했던 말을 또 했네.”
오드리의 얼굴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그녀도 비슷했다. 객실에서 부산한 이디케와 다이앤을 피해 복잡한 기차 식당칸에 들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지만 곧 내려야 한다는 것 따위, 셰비언을 보는 동안 죄다 잊어버렸다.
그때 자신을 떠밀어 그에게 말 걸게 했던 충동이 대체 어디에서 온 건지, 오드리는 아직도 영 가늠이 안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뿌연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감정의 종류가 모호하기만 했다.
“반면 다나 트왈릿은 애초 제대로 된 마법사 교육을 받은 게 아닌지 줄줄 마력을 흘리고 다녀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마력의 계통을 알겠더군요.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어요. 아, 그렇구나……. 인간의 숫자가 이렇게 많은데, 용의 마력을 이어받은 사람이 한 명은 아닐 수 있겠다. 딱 거기서 끝났어요.”
“…….”
“아가씨만 특별해요. 그러니까 더는 자신을 낮추지도 말고, 남과 비교하지도 마세요. 아가씨는 오만하고 당당한 게 훨씬 더 잘 어울려요.”
“……뭐야, 다 알고 있었잖아. 다 알면서 왜 모른 척했어?”
오드리의 볼멘 투정에도 셰비언은 그저 웃었다.
“국왕의 정전에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서 당당하게 서겠다는 꿈, 저야 응원하지만 아닌 사람이 수두룩할 거라는 거 이젠 알아요. 아가씨를 깎아내리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충분히 많다는 것도요. 아가씨는 그런 자들이 멋대로 떠들수록 자신을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해요.”
셰비언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사근사근했다. 오드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어쩜 그리 잘 아는지 몰랐다. 곤두섰던 신경이 따뜻한 물로 채운 욕조에 들어가 누운 듯이 사르르 풀렸다.
“세상 사람들이 날 두고 뭐라고 떠들어대도 그대는 개의치 않는다는 건가?”
“인간들 사이의 평판이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리고 설령 그 말들이 전부 사실이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죠? 저는 언제나 아가씨 편인데.”
“언제나 나의 편…….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만약 내가 살인자가 된다거나…….”
“당연하죠. 아가씨, 인간의 법과 도덕 따위가 제게 얼마나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가씨가 누군가를 죽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이유 없이 죽였다면 그러고 싶었던 걸 테죠. 아가씨가 뭘 하든, 무얼 원하든 저는 아가씨의 편이에요.”
오드리는 눈을 감고 셰비언의 말을 곱씹었다. 어떤 조건도 없이 자신의 편이라는 확언이 미치도록 달았다.
만탈락으로 쫓겨난 후, 오드리는 자신이 버려진 아이라는 걸 강하게 의식하며 살았다. 아버지에게 자신은 필요 없는 아이였다는 걸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이 손으로 세상을 바꿔봐야지.’
그 소망은 세상에 대한 자기증명과 같았다. 언젠가 아버지가 나를 버린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욕심이고 고집이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받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인정받고 싶은 욕구만은 끈질기게 남아서 끊임없이 오드리를 채찍질했다.
브란젤로 돌아와 아버지 앞에 나설 때마다 긴장으로 숨이 막혔고, 원치 않아도 열 살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그의 존재감에 짓눌렸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되뇌어도 예상과 같은 결과를 맞을 때마다 실망이 쌓였다.
그래도 저번에 수확제 괴물 사태를 겪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일단 아버지 앞에 나설 때마다 저절로 위축되던 증세가 깨끗하게 없어졌고, 가족으로서의 애틋함이나 사랑은 없어도 그나마 남아 있던 인정욕구마저 깡그리 사라졌다.
그러나 그 욕구가 사라지고 아버지를 완벽하게 헨젤 백작으로만 여길 수 있게 되고 나니, 이젠 세상 사람들에게 듣는 말이 신경 쓰였다. 악평이든 악명이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던 때처럼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됐다.
더 기가 막힌 건, 사람들이 떠드는 악평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동안 기껏 쌓아올렸던 단단한 마음도 조금씩 부스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나하나는 아주 작은 흠집에 불과했지만 그게 쌓이니 상처가 퍽 깊어지고 말았다.
물론 외부에서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 좋은 사람들 내부의 욕망 역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디케는 오드리가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이왕이면 오드리가 헨젤 백작의 그늘에서 벗어나길 원하기는 하지만, 적당히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 한평생 편안하게 살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축이었다. 지금 죽어라 일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다이앤은 오드리에게 자신을 투영해서 보고 있었다. 가업을 잇기에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도 모자란 오라버니에게 밀려난 데다 나중엔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린 가엾은 자신 대신 오드리가 원하는 바를 성취해 내는 걸 보길 원했다. 만약 오드리가 목표를 상실하거나 방향을 틀면 가장 먼저 실망하고 떨어져 나갈 사람이었다.
릴리는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받으면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줍고 가르친 사람이 락시 부인이고 오드리가 보수를 아끼지 않고 주기에 오드리를 따랐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릴리를 더 귀하게 쓰고 더 높은 급여를 주겠다고 꼬드기면 넘어갈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워커는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강철새를 놓지 못할 인물이었다. 스스로는 오드리를 매우 아껴 그녀를 따른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오드리와 강철새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떤 선택을 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라디아타는 놀라울 정도로 순수하게 오드리와 우정을 나누는 상대였다. 그녀는 모자람 없이 태어났고 자신이 가진 것들의 가치를 잘 알았다. 그러나 누리는 권리만큼 무거운 의무에 묶여 자라서 그런지 오드리가 규범을 깨뜨리는 걸 보는 일을 지나치게 즐겼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이 있는 법이고 욕망 없는 인간은 없건만, 오드리는 그를 알면서도 종종 가까운 친인들에게서 버림받는 상상을 했다. 오드리가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주변인들이 하나씩 그녀의 곁을 떠나 각자의 길을 가는 상상 말이다.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또 버려질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발밑이 죄다 무너져 끝없는 늪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은 공포가 몰려왔다. 이유 없이 잠에서 깨어 어둔 방을 서성이다 괜히 베개 탓, 이불 탓을 하며 침구를 통째로 갈아치운 게 벌써 여러 번이었다.
이런 불안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건만, 셰비언은 그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대가 없는 사랑을 말했다. 오드리가 어떤 사람이더라도 자신이 변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언제나 스스로 채워 넣느라 바쁘던 자존감이 저절로 채워지는 건 몹시 낯설고 매력적인 경험이었다. 습하게 물기가 남아 있던 마음 어디 구석에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것 같고 오랫동안 움츠렸다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것 같기도 했다.
오드리는 근처에 떨어진 빨간 낙엽을 한 장 주워 셰비언의 머리에 살짝 올려놓았다. 생각했었던 푸른 토파즈는 아니어도 낙엽의 붉은 빛깔이 반짝이는 은발에 퍽 잘 어울렸다.
“내가 그대에게 부족한 사람이 아니길 바라.”
셰비언은 오드리의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요즘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던 미약한 그늘이 싹 사라져 보기 좋았다. 마치 기차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 같았다. 그는 오드리의 허리에 팔을 단단히 감고 그녀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길을 완전히 봉쇄했다. 그리곤 입을 삐죽대며 고자질을 시작했다.
“아니, 누가 할 말인데 그걸 아가씨께서 말하시는 거죠? 저야말로 제 부족함 때문에 아가씨께 피해 가는 게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걸요. 안 그래도 주변에서 말이 많다고요.”
“무슨 말?”
“귀족영애를 만날 거면 제발 상식 좀 챙기라고요……. 제가 뭔 말만 했다 하면 설마 헨젤 영애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냐고 타박, 옷차림이 조금만 허술하면 얼굴만 믿고 그렇게 입으면 안 된다고 타박……. 다들 절 못 괴롭혀서 안달이에요.”
“다들 평소에 네게 쌓인 게 많았나 본데?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어.”
“왕궁마법사 중에 제 편이 한 명도 없는데, 아가씨는 제 편을 들어주셔야죠!”
셰비언이 어린애처럼 뺨을 부풀리고 항의를 하니, 결국 참지 못한 오드리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는 셰비언의 어깨까지 두드려 가며 한참을 웃다가 눈에 고인 눈물을 닦고는 그의 뺨에 살짝 입 맞췄다.
“나도 언제나 그대 편이지. 조금 심술을 부려본 것뿐이야.”
“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 그대가 날 운명으로 여기듯, 샤를레아도 다나를 운명으로 여겼을까?”
“어……. 글쎄요?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요. ……동족을 아끼기는 샤를레아가 저보다 더하니, 충격을 받았어도 저보다 더 크게 받았겠죠. 그 와중에 만난 다나는 용의 마력, 그것도 화룡의 마력을 가졌죠. 마력의 양도 질도 상당했고 실력도 괜찮았고…….”
셰비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간 샤를레아가 다나에게 했던 행동을 되짚었다. 다나가 원한다니 기꺼이 화장하고 묵직한 버슬 드레스를 입는 등 인형놀이에 어울려 주고, 심장이 반쪽밖에 없는 주제에 마력을 나눠주었다. 다나가 마법사여서 마음에 든달 때는 언제고 마법사로서 불구가 된 뒤에도 변함없이 애정을 보였다.
“샤를레아는…… 아가씨를 두고 반쪽짜리 동족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마법을 타고나지 못했으니 반쪽이라며……. 하지만 다나는 마법사였으니, 그녀의 눈에 진짜 동족으로 보였을지도 몰라요. 운명까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용을 보살피는 어미용처럼 살뜰하게 대했던 건 확실하거든요. ……아.”
“왜?”
“그러고 보니 샤를레아의 알이 깨어나지도 못하고 죽었던 게 생각났어요. 둘……? 셋……? 일반적인 용답지 않게 자손에 집착했었죠. 설마 다나를 그 대신으로 삼았나. 그렇네요, 이제 이해 가요. 평소 인간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다나가 죽은 걸로 이렇게 미친 짓을 하는 게 이상했거든요…….”
“……다나를 죽인 범인을 찾을 수가 없댔지.”
“아무도 말을 안 해요. 억지로 입을 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관찰만 하고 있을 뿐이죠.”
“보는 것만으로 알아?”
“짐작 가는 게 있어요.”
오드리는 그 짐작 가는 게 대체 뭐냐며 대답을 졸랐지만 셰비언은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아직 확실한 것도 없는데 괜한 말을 흘릴 순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단히 심각한 표정으로 오드리에게 경고했다.
“만약 샤를레아가 그저 미친 게 아니라 자식의 복수를 하고 있는 거라면 단순히 괴물 사태를 재발시킨 것 정도로 끝날 리 없어요. 아가씨, 정말 죄송하지만 당분간 공간은 못 열어드릴 것 같네요.”
“뭐? 요새 바쁘지 않아? 여기서 이렇게 있으면 그대도 피로가 풀린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상대가 진심이 된 샤를레아면 저도 힘을 비축해야 돼서요. 개미 눈물만 한 힘이라도 아껴두려고요.”
오드리가 셰비언의 옷깃을 꽉 붙들었다. 그건 일부러 그랬다기보다는 무의식적인 행동에 더 가까웠다. 언젠가 셰비언이 샤를레아를 옹호하느라 늘어놓았던 그녀의 무용담이 이젠 그녀의 불안을 부추기고 있었다.
셰비언은 기껏 불안을 거둬낸 얼굴에 다시 그늘이 끼는 걸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좋은 말로 오드리를 달래려 하기 보다는 확실하게 현실을 전하는 쪽을 택했다. 그가 치열하게 내전을 치르는 동안 깨달은 게 있다면, 장밋빛 전망에 홀려 방심하는 것보단 불안에 떨며 대비하는 쪽이 낫다는 것이다.
“제 옆구리에 있는 큰 흉터가 샤를레아의 작품인 거 아시죠? 마법을 금지당한 상태에서 제 방어마법을 죄다 몸으로 깨고 달려들어서 그만한 상처를 남긴 상대예요. 지금은 심장이 반쪽밖에 없으니 그때만큼은 못하겠지만 대신 머리가 돌아버렸죠.”
“세상에…….”
“아가씨께서 왜 그렇게 불안해하셨는지 아깐 영 모르겠더니, 이젠 제가 딱 아까의 아가씨 심정 그대로가 됐네요. 샤를레아는 브란젤뿐만 아니라 멜브란트 전체를 엎어버리겠다고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그 꼴이 나면 저도 뒷수습이고 뭐고 도망치고 싶어질 게 분명하거든요…….”
오드리의 손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셰비언은 딱딱하게 굳은 오드리를 끌어당겨 따뜻한 입술에서 숨결을 훔쳤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과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이 꼭 제 탓 같아 미안했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방심하다 기습당했던 그때랑은 다르니까……. 어쩌면 이렇게 불안해한 게 다 헛일이 될 수도 있어요. 일이 커지기 전에 막아버릴 테니까요.”
“……난 샤를레아가 일으킬지도 모를 만약의 사태를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럼요?”
“그대를 걱정하는 거야. 그대는 개미 눈물만 한 힘이라도 비축하는 대비를 하는데 내가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속이 상해…….”
걱정한다는 말이 어찌나 듣기 좋은지, 셰비언의 입가가 상황에 안 맞게 헤실헤실 풀어졌다. 그는 오드리가 귀찮아할 만큼 실컷 키스를 퍼붓고는 대뜸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가씨 얼굴을 보면 쌓였던 피로가 싹 풀리고 기분도 좋아져요. 아무리 바빠도 틈이 생기는 대로 헨젤가에 갈 테니, 그땐 피하지 말고 절 만나주시는 거예요. 제 피로회복은 그걸로 충분하니까, 설마 거절하지는 않으실 거죠?”
“……그쯤이야 뭐가 어렵다고. 하지만 셰비언, 나도 그대에게 부탁이 있어. 그게 언제든 어떤 상황이든, 내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반드시 말해줘.”
“그럴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네요.”
둘은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굳게 약속했다. 서로가 필요한 때에 외면하지 말자고.
그날 이후, 오드리는 정말로 셰비언의 공간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됐다. 셰비언은 굳게 공간의 문을 걸어잠그고 대신 닷새에 한 번 꼴로 헨젤가를 찾아와 오드리와 차를 마시고 돌아갔다. 조금이라도 더 있으려 하던 전과는 다르게 찻잔을 비우자마자 칼같이 일어나니, 그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지 짐작할 만했다.
물론 바쁜 오드리에게도 셰비언과 차를 마시는 시간은 상당히 행복한 휴식시간이었다. 셰비언의 공간에서 느긋하게 쉬던 시간이 사라져서 그런지, 의식하지 못했던 과중한 스케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아닥쳐 오드리를 후려갈겼다. 그녀는 곧 책상 앞에서 귀신이 되면 어쩌나 걱정하기 시작했다.
둘이 각자 어떻게 지내든, 시간은 하루하루 착실하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브란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괴물 사태는 거의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오드리의 생일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영지에서 아예 나올 생각이 없는 건가 싶던 타우레드 후작가의 사람들이 브란젤로 돌아온 것도 그쯤이었다.
그리고 오드리의 생일이 겨우 이레 남은 날, 하늘이 맑고 공기가 찬 아침에, 왕궁의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 조기(弔旗)가 올랐다. 국왕의 죽음을 알리는 조기였다.
“풉! 쿨럭, 쿨럭쿨럭! 쿨럭! 뭐, 뭐라고?”
“국왕전하께서 돌아가셨대요.”
오드리는 소식을 듣고 놀라 마시던 차를 뿜어냈다. 이디케가 눈살을 찌푸리며 차에 젖어 못 쓰게 된 서류들을 거둬들였다.
“갑작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막 노년에 접어드는 나이셨잖아요. 그럴 수도 있죠.”
“말도 안 돼. 난 지난 신년제 때 코앞에서 전하를 뵀어. 아주 멀쩡하셨단 말이야!”
“겉으로는 표 안 나는 병도 많잖아요.”
놀란 오드리에 비해 이디케는 어이없을 정도로 침착했다.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다이앤도 그녀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며칠 소화불량을 앓더니 갑자기 심장이 멎는 일도 있고, 며칠 어지럽다 두통이 있다 하더니 쓰러져서 다시는 눈 못 뜨는 경우도 있어요. 겉으로 건강하다고 안심해서는 안 될 일이죠. 그런데 우스운 건요, 건강하겠다고 매일 운동하고 좋은 것만 먹고 지낸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죽는 일도 있다는 거예요. 사람 목숨은 사람이 아니라 칼레이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에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문외한인 나는 더 할 말이 없네.”
“자격증도 없는데 제 전문성을 인정해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아가씨. 부디 왕실의 사람들도 어의의 말을 믿어줘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자칫하면 장례가 끝나자마자 교수형당하는 어의를 볼 수도 있겠는데요.”
다이앤의 걱정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그 말을 들으며 오드리는 국왕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을 거라고 장담하던 라디아타를 떠올렸다. 아무리 국왕이 숨기고 싶어 했다지만 라디아타가 알 정도면 당연히 어의도 알았을 텐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늠이 안 됐다.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건 됐고……. 왕족의 장례에서 애도 기간은 한 달이지? 생일파티는 꼼짝없이 취소로군. 이디케, 초대장 보냈던 곳에 선물도 같이 딸려서 취소 편지 보내.”
“으……. 기껏 준비한 게 다 헛수고가 됐네요. 마침 딱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쉽지만 어쩌겠어. 앞으로 한 달 동안 브란젤에선 파티고 뭐고 다 금지야. 다이앤, 내 옷 중에 상복이 있던가?”
“네, 당연히 있죠. 근데 아가씨 신체 치수가 좀 변한 것 같아요. 수선이 필요하겠는데요?”
“윽……. 의상실이고 매장이고 죄다 미어터질 텐데 수선 끝날 때까진 아예 나가질 말아야겠군. 참, 릴리에게 아버님께 상복 갖다 드리라고 전해. 이왕이면 여러 벌 갖다 드리라고 하고……. 보나마나 또 한동안 못 돌아오시겠지.”
이디케와 다이앤은 슬픈 낯으로 이제까지 열심히 준비했던 파티 계획을 죄다 엎었다. 특별히 불렀던 요리사도, 악단도, 며칠 전부터 서관을 화사하게 꾸미기 시작했던 장식들도 모두 없던 일이 됐다.
브란젤 전체가 우울함에 잠겼다. 거리의 가게들은 자발적으로 검은 깃발을 내걸었고, 사람들은 화사한 색 옷 입기를 삼갔다.
펠른 3세는 그리 못난 국왕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 벌어진 반란을 훌륭히 진압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해적과 싸워 무역을 확대했고 문화적 변방이었던 멜브란트를 살론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이 들리도록 끌어올렸다. 철도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서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끈 것도 그의 치적이었다.
문제는 거기에 들어간 돈의 태반이 빚이었다는 것이다. 가스트로 왕자는 부왕의 죽음을 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왕실이 지고 있는 빚의 내역서부터 받아들었다. 짐작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액수에 입이 떡 벌어졌다.
“부왕께서는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돈을 빌려 쓰신 건가?”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지 않습니까. 셰비언 성벽에서 가장 많은 광산을 확보하고 있는 게 멜브란트 왕실이니 다들 안심하고 빌려준 게지요.”
“보석이 아무리 값비싸도 사치재야……. 많이 풀면 값이 떨어지고, 적게 풀면 빚을 온전히 갚기가 어렵지. 헨젤 백작, 자네가 이런 걸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왜 아버님을 말리지 않았나? 이래서야 왕립 기계 연구소 같은 걸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나?”
“말씀이야 드렸습니다. 하지만 상환 기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는 데다 이제껏 투자한 것들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금액이라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가 대체 언제 나오는데!”
“때를 놓치면 안 되는 사업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예산이 부족하다고 철도를 안 깔았으면 지금의 멜브란트는 없었을 겁니다.”
헨젤 백작의 반론이 지나치게 정론이었다. 가스트로는 서류를 내던지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지난밤에 흘렸던 눈물은 벌써 말라붙어 흔적만 남았다. 마른세수를 하는 내내 뺨에 남은 소금기가 불쾌하게 얼굴을 간지럽혔다.
“결국 문제는 하나야. 부왕이 계실 땐 넉넉하던 상환 기간이, 내가 왕위를 이어받을 때가 되니 갑자기 촉박해졌다는 것.”
“…….”
“헨젤 백작, 해결 방법은 있나?”
“일부라도 상환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쪽의 지불 능력을 의심하게 될 테니까요. 다이아몬드를 추가 채굴해서 보석으로 지불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겠지만…….”
“그것도 의심을 사겠지. 아직 상황을 두고 보고 있는 다른 빚쟁이들이 당장 달려와 재촉을 시작할 우려가 있어.”
“예.”
간결하게 떨어지는 대답이 가스트로의 목을 콱 졸라맸다. 그는 어두운 낯으로 서류를 다시 주워 훑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작위 장사라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심정이로군.”
“절대 안 됩니다.”
헨젤 백작의 대답이 아주 단호했다. 작위 장사는 삼십여 년 전에 벌어졌던 반란을 촉발한 주요 원인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원인이 있긴 했지만 일단은 그랬다. 내전이든 정벌이든 전쟁은 돈 잡아먹는 괴물이었고, 전쟁 후 망가진 경제를 복구하는 데에 인생을 다 쓰다시피 한 헨젤 백작은 전쟁의 단초가 될 만한 거라면 사과 한쪽도 싫은 사람이었다.
가스트로도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도 답답한 나머지 그냥 해 본 말일 뿐이었다.
“정색하기는. 내게 부왕을 존경하는 이유 중 딱 하나만 꼽으라면 작위 장사를 끝장낸 일을 꼽을걸세. 그럴 일은 없어.”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대관식도 전에 사표부터 던질 뻔했습니다.”
“농담을 해도 그런 종류는 하지 말게. 이런 시기에 헨젤 백작마저 없으면 난 어떻게 일을 하라고?”
“저 없어도 일은 잘하실 겁니다. 조금 비효율적이라서 그렇지.”
은근슬쩍 제 자랑을 한 헨젤 백작이 준비해 온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재원 마련 대책을 몇 가지 구상해 봤습니다. 일단 장례식과 대관식에서 자리 판매를 해 보는 건 어떠십니까?”
“자리?”
“기부금을 받고 그 액수에 따라 가까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배정하시죠. 국왕의 장례식과 대관식인데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사람이 엄청 많을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엔 상단 쪽에 물리는 세금을 높이시죠. 철도이용료 할인을 없애고 일정 규모 이하의 상단에 들어가던 지원금을 깎으면…….”
“새 국왕이 들어서자마자 지원금이 사라진다고 하면 오죽 좋아하겠군. 게다가 상업 쪽은 이제 한창 꽃이 피어 거두는 세금이 나날이 늘어나는데 지원금을 깎고 규제를 시작하자고? 난 차라리 농업 쪽에 지급하는 금액을 줄이고 싶군. 식량 안정도 좋지만 지금 들어가는 돈은 너무 과해. 흉년일 때나 지급하는 돈을 풍년일 때도 다 타먹는 도둑놈들이 아주 많아. 백작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남부 대평원을 소유한 대지주인 헨젤 백작이 냉큼 긍정하기엔 난감한 문제였다. 그 역시 왕실의 지원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가스트로는 헨젤 백작이 곤혹스러워하는 걸 관찰하다 쓴웃음을 짓고 손짓했다.
“자리 판매 의견은 재미있게 들었네. 일단 나가보게.”
“전하, 대답을 너무 끌면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대답해 줄 필요도 없지. 백작, 바쁘지 않은가?”
언제는 그대가 없으면 일이 안 된다더니, 쫓아낼 땐 문간에 찾아온 거지에게도 이렇진 않겠다 싶게 차갑다. 가스트로는 헨젤 백작을 쫓아내고 집무실 의자 뒤편에 잘 감춰진 문을 열었다. 일하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방이었다.
방은 아주 작았고, 길고 좁은 창문이 한쪽 벽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있는 가구래 봐야 일인용 침대 하나와 협탁 정도.
마치 어린아이들이 사고치고 벌을 서는 징벌방 같은 삭막한 공간이었다. 그곳에 라디아타가 백지장처럼 허연 낯을 하고 앉아 있었다. 어찌나 자세가 꼿꼿한지, 밤새 그 방에 있었으면서도 국왕의 알현을 위해 차려입은 버슬 드레스가 주름 없이 깔끔했다.
“내 친애하는 약혼녀. 조금 전에 헨젤 백작과 내가 나눈 대화를 전부 다 들었겠지?”
“전하…….”
“애도 기간이 끝나는 대로 정식 약혼식을 올리도록 하지. 내가 원하는 지참금의 수준을 정해서 보내줄 테니 그대로 준비해서 오도록.”
라디아타는 자신의 지참금이 죄다 왕실의 빚잔치에 쓰일 걸 짐작했다. 더불어 그 규모가 상상 이상이 될 거란 것도. 이래서야 숫제 돈주머니 취급이었다. 밤새 갇혀 있으면서도 차분하고 침착하던 눈빛에 서늘한 분노가 차올랐다.
“정식 약혼식이 아직이어서, 정식으로 지참금을 받은 적이 없어 정말 다행이로군요, 전하. 지참금을 한 명에게서 두 번이나 받으면 그게 무슨 꼴불견이었겠어요?”
“빈정대지 마.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지참금을 받았어도 곧바로 파혼했을 거야. 아버지를 죽인 여자와 결혼이라니, 내 인생도 참 어지간하지.”
“국왕전하께서는 심장발작으로 돌아가셨어요. 하필 그때 제가 국왕전하와 독대 중이었다는 건 그저 불행한 우연일 뿐이에요. 국왕전하의 죽음 자체가 어떻게 제 탓이 된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죠? 설마 제가 독이라도 먹였다고 의심하시는 건가요? 의사를 부른 것도 저예요!”
“그래, 아버지는 심장발작으로 돌아가셨고 그대는 의사를 불렀어. 다만 응급조치를 하지 않았고 의사를 좀 늦게 불렀을 뿐이지.”
가스트로가 벌떡 일어나려는 라디아타의 어깨를 꽉 붙들고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린 라디아타는 어깨의 고통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가스트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전하, 저는 의사가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대응이 조금 늦어진 게 죄라면 죄겠지만요.”
“그럴듯한 말이야. 남들은 다 그렇게 믿겠지. 하나 이를 어쩌지? 나는 그대가 살론의 의서를 백화점 카탈로그처럼 매일 넘겨보는 걸 알아. 봐, 조금 전 그대는 부왕의 사인이 심장발작이라고 했어. 내가 사인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아주 잘 알고 있군.”
“당연하잖아요, 생각할 시간이 하룻밤이나 있었어요. 제가 여기서 그 순간을 곱씹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어디 지식뿐일까? 행동력도 만만찮지. 타우레드 영지에서는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왕궁마법사를 훌륭하게 응급조치해 살려냈다면서? 아이샤인지 뭔지 하는 마법사가 그대를 향한 찬양가를 불러대고 있다는 걸 몰랐나?”
“가스트로!”
“이름 부르지 마, 나의 친애하는 약혼녀. 아직 약혼반지가 오가지도 않았는데 그리 부르면 난 심장이 너무 뛰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추위에 얼어붙은 뺨을 쓰다듬는 손이 아주 섬찟하고 차가웠다. 라디아타를 향해 사랑을 속삭이던 입술은 그런 적 없다는 듯 싸늘했고 언제나 정중하던 눈엔 이성으로 눌러놓은 광기가 일렁거렸다.
“공식적으로 그대는 부왕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쇼크를 일으켜 기절한 거다. 곧 타우레드 후작이 와서 그대를 데려갈 텐데, 그에게 사정을 밝힐지 말지 확실히 입장을 정해.”
“입장? 전하께서 그리 확신을 하고 계신데, 대체 제가 무슨 입장을 정할 수 있다는 거죠? 차라리 왕국 내에 공표를 하세요! 제가 국왕전하의 죽음을 방조했노라고!”
“그럴 수는 없지. 그러면 그대와 결혼할 수가 없잖나.”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가스트로는 그녀의 입술에 묻은 피를 낼름 핥고 가느다랗게 떨리는 어깨와 팔을 매만졌다. 한 손으로 잡고도 남을 만큼 가늘었다.
“이렇게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레이디가 충격적인 상황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냐며, 엉뚱한 곳에 화살 돌리지 말란 소리 따위나 들을 텐데 내가 왜? 내 친애하는 약혼녀, 어디로든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그대는 내 아내가 되는 거야.”
“제 생각에, 전하께서는 지금 부친을 잃은 충격에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
“그래, 딱 그런 말이나 듣겠지. 동정은 그대에게, 비난은 나에게. 결혼하든 파혼하든 똑같은 결과라면 이득이라도 챙겨야지. 어쩌면 잘됐지, 부왕께서 그리 바라시던 사자의 목줄이 내 손에 쥐어진 셈이니.”
“전하…….”
“난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대를 잘 알고 있어. 아무리 이성으로 시작했다 한들 사랑이 아닌 건 아니었으니, 남들처럼 쉽게 속아 넘어갈 거란 생각은 꿈에도 마.”
가스트로가 라디아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말하는 통에, 라디아타는 그의 표정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억누르고 있는 격정과 분노는 섬뜩하도록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어젯밤 내내 그대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 시중인은 없어. 알아도 입을 다물 것이고……. 사람들은 남녀간의 일에 상상력이 아주 풍부하지. 친애하는 약혼녀, 그대가 도망치려 들면 내가 직접 그대의 평판을 바닥으로 떨어뜨릴 거라는 걸 명심해. 장미는 아름답지만 꺾기도 쉬운 꽃이야.”
“전하께서 무슨 말을 하시든 제가 아버지를 설득할 일은 없어요. 그게 제 입장이에요.”
“타우레드 후작부인이 대문 밖으로 걸음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어머니 생각을 해야지. 또 충격을 받으시면 이번엔 방에 처박히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라디아타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전하, 이런 식으로 절 협박하시다니, 저와 평생 원수로 지내고 싶으신가요?”
“그건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야. 어의가 처치해도 소용없도록 시간을 끄는 동안 그대는 내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나? 내가 그대를 원망하고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건, 내 감정 같은 건 그대에게 어떤 의미도 없었어?”
“저는 당당하고 떳떳합니다.”
“하…….”
단호하게 떨어지는 라디아타의 음성을 듣는 순간 가스트로는 마음이 확 기우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정말 사실을 말하고 있고, 자신이 엉뚱한 의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눈을 가리려 들었다.
‘이성으로 시작한 사랑이니, 어떤 순간에도 이성적으로 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가스트로는 어리석은 자신을 실컷 비웃었다. 스스로를 속이기란 정말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는 깊은 자괴감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타우레드 후작은 조금 늦는다는군. 그대는 좀 더 여기 있도록.”
“전하!”
라디아타의 눈앞에서 문이 다시 닫혔다. 집무실의 소리는 잘 흘러들어 가도 방의 소리는 나오지 않게 특수 제작된 장소인지라, 그녀의 목소리는 한줄기도 밖으로 새지 않았다.
가스트로는 다시 책상 앞에 앉는 대신 곧바로 집무실을 박차고 나와 오스미다 왕비를 만나러 갔다.
오스미다 왕비는 홀로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치고는 아주 멀끔하고 단정한 얼굴로 가스트로를 맞았다. 남편을 잃었다는 슬픔 같은 건 터럭 하나 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외부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는 잉꼬부부처럼 행세했어도 사실은 한 달에 한 번 얼굴 볼 일이 있을까 말까 하게 데면데면한 사이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오스미다가 웃는 낯으로 가스트로에게 자리를 권했다.
“밖에 나가거든 내가 많이 슬퍼하고 있더라고 하렴. 위로하느라 아주 애먹었다고 말이야.”
“그 정도 말하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남들 앞에서 우는 시늉 정도는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쓰러지는 시늉은 했으니 됐다.”
가스트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부모님이 평생 서로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걸 보면서 자랐다. 그 때문에 오스미다의 발언은 그에게 그리 놀랍지 않았다. 만약 죽은 쪽이 왕비였더라도 왕의 반응 역시 별로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잔소리를 더 하는 대신 고이 품고 온 서류부터 내밀었다. 빨리 빚 갚으라는 독촉장들이었다. 기한이 아직 한참 남은 데다 상대가 일국의 왕실인데 다들 아주 기세등등했다.
오스미다는 가스트로가 보자마자 현기증을 일으켰던 서류를 아주 느긋하게 훑었다. 우아한 검은색 레이스 깃이 조금 창백하게 화장한 얼굴을 감싸고 그녀의 침착함을 더욱 강조했다.
“재미있구나. 자칫하면 멜브란트 왕실이 빚을 못 갚아 파산하는 진귀한 구경을 하겠어.”
“어머니는 알고 계셨어요?”
“네 아버지는 뒷일 생각 않고 돈 쓰는 버릇이 있어서……. 나중에 네가 죽을 고생을 하겠구나 짐작은 했다. 설마 빚쟁이들이 장례를 시작하기도 전에 차용증을 들고 뛰어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그럼 어머니,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내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려고? 먼지까지 다 털어도 이만한 돈은 없어.”
“일단 일부만 변제하면 됩니다. 아직 날짜가 남은 걸 저를 믿지 못해 급히 가져온 것들이니, 적당한 금액만 손에 쥐어주고 나머지는 기일에 맞춰 갚으면 되죠. 어머니, 작년에 일테니아 후작령에서 생산해 판매한 도자기 금액이 상당한 걸로 압니다. 충분히 여력이 되실 텐데요.”
일테니아 후작령에서는 멜브란트 왕국 내에서 유통되는 도자기 거의 대부분을 생산했다. 왕궁과 귀족가의 응접실을 장식하는 최상급 도자기에서부터 새벽시장의 찻집에서 손님에게 내주는 싸구려 찻잔까지 일테니아에 소재한 공방 도장이 찍히지 않은 게 없었다. 그 공방들 태반이 일테니아 후작, 즉 오스미다의 소유였다.
가스트로는 오스미다가 도자기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왕비가 공방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면제받는 세금이 어마어마한데 모를 리가. 가끔 면제 금액을 확인해 보고 수익이 확 뛰었다 싶으면 오스미다를 찾아가 용돈을 조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들로서 귀엽게 용돈을 조르는 것과 왕실을 대표해 급전을 빌리는 건 좀 사정이 달랐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 낯이 뜨거워지고 시선을 피하게 된다. 민망했다.
“뭐……. 그래, 작년에 일테니아 후작령에 수익이 많이 났던 건 사실이다. 왕실이 위태롭고 네가 곤란하다는데, 못 빌려줄 것도 없지. 내가 왕비로서 받은 혜택도 있고.”
“빌려주신다고요?”
“그래. 이율은 높을 것도 낮을 것도 없이 시중 평균 이율로 하자. 기한은 상의를 좀 해 봐야겠지만…… 상당한 장기 채무가 되겠지. 왜, 그래도 부족해? 공짜로 날름 받고 싶으니? 용돈이라도 받는 것처럼? 안 될 말이지, 그러기엔 너무 큰돈이다.”
속내를 들킨 가스트로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빌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지원해 주신다면, 데멘사의 전보에 개인으로 투자하시면서 군인을 동원한 걸 눈감아 드리죠.”
“세상에, 그걸 어디 나 혼자 했다니? 너도 같이했잖아!”
“제 서명은 예전에 다 지웠습니다. 증거 없어요.”
가스트로가 얼굴에 뻔뻔하게 철판을 깔았다. 어이없어 하며 그를 바라보던 오스미다가 소리 내 웃었다.
“내가 자식 하나는 아주 잘 키웠구나. 가스트로, 하나 물으마. 데멘사가 전보를 연결하면 그 이득은 나와 데멘사만 본다던?”
“저도 투자를 하긴 했죠.”
“돈만 두고 하는 말이 아냐. 마법사의 수명은 짧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마법도구는 때때로 세상을 바꾸지. 수도가 그랬고 정화시설이 그랬고 기차가 그랬던 것처럼, 전보도 그런 물건이 될 거다. 지금 사람들이 수도와 마법등이 없고 도로가 연결되지 않은 곳에서 살기를 꺼리듯이, 전보가 연결되지 않은 곳은 꺼리게 되는 날이 올 거야.”
가스트로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민간에서의 사용보다 전보의 군사적인 유용성과 왕권강화의 가능성을 먼저 따지긴 했지만 그건 정말 세상을 바꿀 물건이긴 했다. 괜히 데멘사에 압박을 넣었던 게 아니었다.
“감히 국가기반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에 사비를 털어 투자하고 있는데 그까짓 인력쯤이야 좀 쓸 수도 있지 않겠니.”
“어머니, 그건 궤변입니다.”
“알아. 하지만 나는 일테니아 후작이면서 동시에 이 나라의 왕비다. 네가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정치, 행정, 군사 모두 내 손에 있어. 네가 정식으로 왕관을 쓰고 인장을 넘겨받았을 때, 그때도 내가 개인적으로 군사를 부린 일이 문제 삼을 만한 일이 되어 있을까? 지금 내가 가만히 있는 건 오로지 네 위신을 위해서라는 걸 생각해 주렴.”
“그렇게 대놓고 서류 조작하겠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뭘, 이미 한 너도 있는데. 그러니 가스트로, 내 돈을 빌리고 싶거든 다른 미끼를 내놓으렴.”
가스트로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이럴 줄 알았다. 원하는 걸 원하는 형태로 얻지 못할 줄 알았다. 유일한 왕자로서 온갖 혜택을 다 받으며 자랐지만 오스미다는 언제나 그에게 엄격했다.
“후……. 어머니께서 원하는 게 있으시겠죠. 말씀해 보세요, 되도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할 테니까.”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내가 원하는 건 하나란다. 내가 후계자를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일테니아 후작에게는 후계가 없었다. 오스미다는 후작으로서 통치권과 계승권을 다 갖고 있었지만, 가스트로에게 후작위를 넘겨주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방계로 넘어가길 원하지도 않아서, 그녀 사후 후작위를 자동 승계할 만한 인물에게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스스로 계승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보니 만약 지금 오스미다가 요절이라도 하게 되면 일테니아 후작위는 그대로 가계가 끊기고 작위와 영지가 왕실로 회수되는 상황이었다. 왕실로서는 오스미다가 따로 후계자를 세우는 걸 반길 이유가 없었다. 가스트로 역시 비슷한 견해였다.
“제게 후작위를 주실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차기 일테니아 후작으로 만드시겠다는 건데, 차라리 제게 작위 장사를 하라고 하시죠. 안 됩니다.”
오스미다는 몇 번이나 가스트로를 더 찔러보았지만, 바늘은커녕 털끝도 안 들어갈 단호함만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대단히 아쉬워하며 담뱃대를 물었다.
“이래서 백합 무늬 따위는 영광만 있지 순 쓸데가리가 없다니까……. 후계자도 왕실 허락 없이는 못 세우고 말이야.”
“그러게 제게 주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굳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찾아 주겠다고 하시니 그렇지요.”
“네게 줄 거면 진작 줬지. 아무튼 돈이 그리 급한 건 아닌가 보구나. 다른 곳 어딘가에서 돈 나올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
“정 급하면 왕관에 박힌 다이아몬드라도 빼서 팔면 그만이죠.”
주먹만 한 최상급 다이아몬드면 죽어가는 보석시장에 호흡기를 다는 것도 모자라 뛰어다니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수가 없어서 그렇지.
“말은……. 그럼 다른 제안을 하마. 가스트로, 로렐라이와 데멘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그녀에게 작위를 줘라. 전보 일부를 국유화하는 조건 정도면 기꺼이 응할 것이고, 기부금 명목으로 상당한 재산도 받아내서 빚 갚기에 보태.”
“작위 장사 진짜 하려고 말 꺼낸 거 아닙니다.”
“전보 정도의 업적이면 작위 정도야 줄 수도 있지. 게다가 그 아르젠 남작이 오드리에게 아주 목을 매고 있는데, 고삐 채우는 겸 해서 고려해 보렴.”
“싫습니다. 헨젤 백작의 딸에게 작위요? 브란젤이 뒤집힐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레이디 랄리우스의 딸이기도 하지 않니. 랄리우스 후작가는 반란에 찬동하지 않고 왕실 편을 들어 싸우다가 가주가 죽는 바람에 가문이 문을 닫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 일을 보상하는 셈 치면 돼.”
“글쎄요? 아버지는 그 보상으로 랄리우스 가문에게 면죄권을 줬어요. 그걸 헨젤 백작가에 홀랑 팔아먹은 건 랄리우스인데 왜 또 보상을 해주죠? 어머니께서 레이디 헨젤을 아끼는 건 알지만 적당히 하시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스트로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돌아섰다. 오스미다에게 돈을 빌리지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타우레드 후작가에서 받으면 그만이었다. 라디아타가 있는데 돈을 안 줄 리가 없었다.
매정하게 돌아나가는 그의 어깨를 오스미다의 목소리가 덜컥 붙들었다.
“그래, 헨젤 백작은 랄리우스가 진 빚을 대신 갚아주고 혼인까지 하며 면죄권을 샀지. 그리고 그걸로 남부 대평원을 지켰다. 만약 랄리우스에게 면죄권 따윌 주는 대신 보상금을 제대로 지불했으면 남부 대평원의 주인이 아직도 헨젤일까?”
“……지난 얘기입니다.”
“너야말로 헨젤 백작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좀 줄이는 게 좋겠다. 때를 놓치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이득은커녕 생색도 못 내는 상황이 돼.”
오스미다는 오드리가 유언장과 결혼계약서를 가져올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확신이 얼마나 굳건했는지, 자세한 사정 따위는 모르는 가스트로의 등에도 오싹 소름이 돋았다.
가스트로는 총명하게 반짝이던 초록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라비린의 방해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만은 기억났다. 하지만 아무리 총명해 봤자 아직 미성년인 귀족영애고 그녀의 아버지는 헨젤 백작이었다. 그는 오스미다의 조언 따위는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 * *
조기가 올라온 지 열흘째, 펠른 3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방부 처리를 마친 시신이 브란젤의 대로를 따라 행진했다. 우울하고 묵직한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흰 튤립과 백합으로 장식된 관을 수십 명의 군인이 둘러싸고 걸었고, 검은 천을 뒤집어쓴 말을 탄 자들이 흐느끼는 군중과 군인들 사이를 갈랐다. 관이 가는 길을 따라 융단처럼 깔린 흰 튤립이 발에 짓밟혀 뭉그러졌다.
행렬의 뒷부분엔 펠른 3세의 생전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세워졌다. 최근 일 년간 초상화를 그린 적이 없어 시신을 보고 다급히 그려낸 초상화였지만 제법 생동감이 넘쳤다. 초상화를 그린 사람은 바로 페리. 시신의 초상화는 불길하다며 다들 꺼리는 와중에 라디아타의 추천을 받아 그린 작품이었다.
페리는 세상 뿌듯한 얼굴로 서서 저 멀리에서부터 다가오는 초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눈물 찍어내기 바쁜 사람들 틈에서 그녀의 밝은 표정은 몹시 이질적이었다.
“솔직히 이건 기적이에요. 겨우 여드레 안에 저만한 크기의 그림을 그려내다니!”
“네, 네. 고생 많았어요.”
네이기스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흘끔흘끔 메너트의 눈치를 봤다. 백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왕궁 내에 자리를 얻지 못해 이렇게 바깥에서 행렬 구경을 하는 처지라, 메너트는 아침나절부터 잔뜩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복잡한 틈을 타 이렇게 페리를 만날 수 있는 건 좋지만 이러다 혹 들키기라도 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왕궁마법사들이 물감 건조에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세상에, 나는 마법도구가 그렇게 다양하게 쓰이는 줄 처음 알았다니까요. 온실용 마법도구를 캔버스 뒤쪽에 대고 작동시키니까 물감이 신기하게 그 자리에서 마르더라고요. 그리고…….”
분명 페리는 나름 눈치가 있는 사람인 것 같았는데, 그녀는 타들어가는 네이기스의 속내는 들여다볼 생각도 않고 자꾸만 옆구리를 찌르며 대답을 졸랐다.
“참, 그웬 양. 구스토 씨에게 연락은 했어요?”
“……네? 네에, 아직, 아직이에요…….”
“아니, 편지 전해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연락을 안 했어요? 하면 한다, 안 하면 안 한다 빨리 말해줘야 그쪽도 일정을 잡죠.”
“알고야 있지만…….”
자꾸 말을 흐리는 네이기스가 답답해 휙 고개를 돌렸던 페리는 자신을 죽일 듯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는 메너트를 발견하고 슬그머니 자세를 바로했다. 일단 인식하고 나니 뒤통수가 아주 따가웠다.
“아휴, 어디 티타임 같은 곳에서라도 만날 일 없는 사이이라는 게 정말 다행이라니까요. 그웬 양, 저는 이만 가볼게요.”
“버, 벌써 가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초상화가 여기까지 올 텐데요.”
“눈칫밥은 질색이라서 더는 못 있겠네요. 참, 나는 당분간 살론에 가 있을 예정이니까 오늘처럼 갑자기 얼굴 보자고 사람 보내지 마요. 오늘도 세피아 항구로 바로 가려다가 나온 거라고요.”
“살론에는 갑자기 왜요?”
“화가가 살론에 가는 이유가 뭐겠어요? 곧 살론의 람사 예술대학에서 전시회가 열려요. 매년 초상화 일정 때문에 못 갔었는데 올해는 한가하니 가보려고요. 그웬 양도 생각 있으면 보러 와요. 재밌대요. 아이고, 더 떠들다간 진짜 끌려 나가게 생겼네. 그럼 진짜 안녕이에요.”
“어……!”
페리는 네이기스가 더 붙잡을 틈도 없이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이 워낙 많았는지라 네이기스는 금세 페리를 놓치고 말았다. 까치발을 해서라도 찾으려 했지만 고개를 길게 빼자마자 메너트에게 팔을 붙들렸다.
“뭐 하는 거니? 두리번거리지 마라, 방정맞게!”
“네에.”
사람들을 의식해서 낮춘 목소리가 무서웠다. 네이기스는 더는 페리를 찾을 엄두도 못 내고 가만히 서서 행렬에 시선을 주었다. 페리가 기적이라고 자화자찬하던 초상화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
네이기스는 선 채로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페리는 생전의 펠른 3세를 가까이에서 본 일이 한 번도 없을 텐데도 초상화 속의 펠른 3세는 네이기스가 몇 번이고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혹자는 시신의 얼굴을 보고 그렸으니 똑같은 거야 당연하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얼굴은 엄연히 달랐다. 얼굴색과 입술색은 물론이고 인물 특유의 눈빛과 분위기, 표정과 생기 등은 시신에선 읽어낼 수 없는 정보였다.
한데 페리의 그림은 시신만 보고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전의 펠른 3세와 흡사했다. 멋들어지게 길러 다듬은 수염 아래로 웃음기 어린 입술, 그럼에도 매섭게 빛나는 눈 등이 아주 똑같았다.
“……잘 그리긴 잘 그리는구나.”
메너트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페리를 칭찬했지만 네이기스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행렬도 다 봤으니 이만 다른 약속에 가자는 메너트에게 머리가 아프다,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아무래도 집에서 쉬어야겠다 등등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고는, 그대로 즐겨 찾던 화방으로 가서 작은 캔버스와 수채물감 세트, 붓과 스케치북 등등 화구를 한가득 사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번에 의뢰서를 받은 이후 사다놓았던 마릴린 구스토의 동화책을 펴놓고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외출을 위해 차려입은 드레스에 물감이 떨어지고 손톱 사이에 목탄 가루가 끼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목마른 사람이 허겁지겁 물을 들이켜듯이, 그렇게 그림에 빠져들었다.
당연히 하녀들은 난리가 났다. 그들은 옆에서 빌기도 하고 소리도 질러보고 무릎 꿇고 애원도 해 보았지만 네이기스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종국에는 이젤을 부수고 억지로 옷을 갈아입힐 궁리를 시작했다. 당연히 큰 벌을 받겠지만 이대로 뒀다가 메너트에게 들키는 것보단 나았다.
하지만 그들이 기껏 뽑은 행동대장이 뭔가 시도를 해 보기도 전에 메너트가 돌아왔다. 아프다는 딸이 걱정돼 약속을 취소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실성한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네이기스와 새파란 낯을 한 하녀들이었다.
“이……!”
고급 레이스로 장식한 검은 드레스에 흰색 물감이 떨어지는 걸 본 순간, 메너트의 머리도 하얗게 비었다. 그녀는 그대로 네이기스에게 달려들어 붓을 빼앗아 부러뜨리고 내던졌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네이기스의 낯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어, 어머니……. 어, 언제 오, 오셨…….”
순식간에 움츠러든 네이기스의 모습이 메너트의 화를 더 부추겼다. 멋대로 굴 거면 당당하기나 할 것이지, 매번 겁먹어 떨면서 이게 무슨 짓인지. 손목을 움켜쥐고 목탄가루로 엉망이 된 손과 물감으로 얼룩진 드레스를 확인했다.
“당분간 이 옷은 못 입겠구나. 그럼 나갈 수도 없겠지.”
짝! 가차 없이 휘두른 손에 네이기스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네이기스는 쓰러질 듯 휘청거렸지만 메너트에게 손목을 잡힌 채라 넘어지지도 못하고 다시 제자리에 섰다.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뜨끈뜨끈해지고 눈물이 고여 앞이 흐려졌다.
“어머니…….”
“그림은 보기만 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니! 아예 금지한 것도 아닌데 고작 그걸 못 참아서 이따위 짓을 해? 화가로서 후원받아서 살겠다고 잘난 척 집을 나갔다가 도로 기어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
“제, 제가…….”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널 위해 뭘 하고 다니는데 넌 도대체 감사할 줄을 모르는구나! 그렇게 네 인생을 오물통에 처박고 싶으니? 응? 정말 그렇다면 당장 말해라! 그웬의 이름값에 침 흘리는 게걸스런 놈들 중 하나를 당장 골라줄 테니까!”
메너트가 네이기스의 손목을 내팽개쳤다. 네이기스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나동그라졌건만, 메너트는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네이기스보다 주변을 메운 화구가 눈에 더 잘 들어왔다. 흥분으로 숨이 차올랐다.
“예술가랍시고 나대는 자들 태반이 도시의 빈민이 되어 가난하게 살다 죽는데, 너라고 뭐 다를 것 같니? 칭찬 좀 들었다고 우쭐해서는 네가 뭐 대단한 화가라도 될 것 같아? 안 돼, 안 된다고! 어림도 없어!”
“하지만 어머니……. 레이디 타우레드는 제게 가능성이 있다고…….”
“그만! 타우레드 영애가 오드리와 친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사교계에 없다! 친한 친구가 친척 동생을 데려와서 후원 좀 해달라는데, 면전에서 거절할 수 없어 그냥 받아준 걸 너 혼자 그리 의미를 두었니? 아주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손톱만큼이라도 있긴 하니 받아준 거지만, 그걸 두고 정말 인정받은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되지!”
네이기스의 반대쪽 뺨도 시뻘겋게 물들었다. 메너트는 그에 그치지 않고 몇 번이고 네이기스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곱게 땋아 올리고 장신구를 꽂아 장식한 머리 모양이 죄 흐트러져 산발이 됐다. 어쩔 줄 모르고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던 하녀들이 결국 방을 비우고 물러나니, 부러지고 쪼개진 화구들이 있는 방엔 메너트와 네이기스만 남았다.
“세상에서 여성화가라고 불리는 치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몰라? 예민하고 까다롭고 자기만 아는 미친년, 성격파탄자, 사회부적응자! 난 그런 딸 낳은 적 없어! 내 딸이 그런 말 듣는 것도 못 참아!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처럼 머리가 꽃밭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말을 듣는 게 낫다!”
“…….”
“한 번만 더 이따위 그림을 그렸다간, 네가 내 딸 노릇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결심으로 알아듣겠다. 그땐 다시 돌아와도 받아주지 않을 거야. 평생 가족들을 보지 못할 줄 알아라!”
“어머니…….”
“지금은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마라! 듣기 싫으니까! 하여간 네가 정신 차릴 때까지 당분간 외출 금지다. 국왕전하의 애도 기간이라 다행이구나, 네가 안 보여도 딱히 이상하진 않을 테니! 쯧쯧, 도대체 그놈의 전시회는 왜 나가서 그동안 쌓은 명성을 다 깎아놓은 건지……!”
메너트는 네이기스의 가슴을 갈가리 찢고서야 조금 만족하여 돌아섰다. 마침 용케 쓰러지지 않고 이젤 위에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캔버스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동화풍의 그림은 처음 그려보는 데다 흥분한 상태에서 그린 거라 미숙하고 어설픈 점이 곳곳에 보이는 그림이었다.
“이따위 그림도 그림이라고……. 이런 거에 누가 기꺼이 돈을 지불한단 거냐? 보나마나 네 웃음 한 번 보고 싶고 네 말 한 마디 듣고 싶은 치들이 억지로 사고는 되도 않는 칭찬을 해대겠지. 뻔해.”
“…….”
“천박하기는. 내가 어쩌다 저런 모자란 걸 낳았지?”
문이 닫혔다. 네이기스는 다리를 모아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이마를 박았다. 문 밖에서 와글와글 모여 있던 하녀들이 메너트에게 혼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사방이 조용해진 뒤에도 방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허기지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아서, 네이기스는 홀로 앉아 메너트의 말을 곱씹으며 옷자락을 눈물로 흠뻑 적셨다.
응원까진 바라지도 않았건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는 원망과 어머니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기존의 관념이 충돌했다. 마땅히 부모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예전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서로 완벽하게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갈림길에 서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두 뼘은 족히 이동했을 즈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뺨이 벌겋고 입술 한쪽이 찢어진, 거기에 단추가 떨어져 셔츠 깃이 멋대로 벌어진 에이쉬가 숨을 몰아쉬며 네이기스에게 손짓했다.
“미래의 대 화백께서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오라버니?”
“나 지금 가출할 건데, 너도 갈래?”
에이쉬, 이 빌어먹을 자식! 당장 꺼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우렁우렁한 고함 소리가 2층 복도를 울렸다. 에이쉬는 태연하게 귀를 후비적대곤 훅, 입김을 불어 귀지를 날려 버렸다.
“안타깝게 오래 기다려 줄 순 없겠다. 아버지가 화가 많이 나셨네. 어쩔래?”
네이기스는 갈림길에 더 머물 수 없는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결심은 순식간이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보석함을 뒤집어 털었다. 루비 목걸이, 은 귀걸이, 오팔 브로치 등등이 우수수 떨어졌지만, 그녀는 그건 신경도 쓰지 않고 가장 아래 감춰두었던 왕립은행의 계좌 열쇠와 마릴린 구스토의 의뢰서만 소중하게 챙겼다. 산발한 머리에 모자를 꾹 눌러쓰고 날듯이 뛰어와 에이쉬의 손을 잡았다.
“가요.”
“보석은 안 챙겨?”
“어차피 처분할 재주도 없어요. 오라버니가 챙길래요? 나름 재산이 될 텐데.”
“흠, 처분할 재주는 있는데 그걸 가문 몰래 할 재주는 없네. 어쩔 수 없지, 맨몸으로 나가는 수밖에.”
한때 몰락 직전까지 갔었던 그웬가의 저택에는 정원이 없었다. 현관문과 대문 사이에 약간의 녹지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두 사람은 이렇다 할 제지도 받지 않고 도로변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오라버니, 이제 어디로 가려고요?”
“기다려 봐……. 왔다! 여기요! 여기!”
대여마차 한 대가 두 사람 앞에 섰다. 에이쉬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웬 백작 부부가 뛰쳐나오기 전에 얼른 네이기스부터 마차에 밀어 넣고 자신도 탔다. 쾅! 마차 문 닫히는 소리가 천상의 음악처럼 감미로웠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야 네이기스가 그때까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후아……. 이렇게 또 나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래? 난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가출이 아니라 쫓겨나는 형태로라도 그웬과는 영영 이별할 줄 알았지.”
“네에? 오라버니는 가문의 후계자잖아요? 잠깐 하는 가출이 아니라 이별이라고요?”
“내가 가문을 이으면 그웬은 망해. 난 딱 할아버지과라서 말이야……. 하하, 나보단 드케가 훨씬 잘할 거야. 그 녀석은 나나 너보다 부모님을 훨씬 많이 닮았잖아. 자, 얼굴 닦아.”
에이쉬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네이기스는 민망해하며 얼굴을 닦았다. 아침나절에 예쁘게 화장한 얼굴이지만 펑펑 우는 동안 다 번지고 지워져서 지금은 광대 분장 꼴이었다. 에이쉬는 덜그럭대는 마차 안에서 솜씨 좋게 네이기스의 머리칼도 다시 땋아주었다.
“오라버니,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어요?”
“살론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실컷 놀러 다니면서 익힌 기술이지. 네이기스, 넌 나 같은 남자 만나면 안 된다. 집안 식구들 엄청 고생시킬 놈이야.”
에이쉬가 제 입으로 살론에서의 방탕한 생활을 고백했다. 네이기스는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파티와 음악회와 극장과 전시회장을 떠돌며 지낸 나날들의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비록 그 나날들 어디에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여자의 머리를 만져 주고 화장을 고쳐 주는 기술을 익힌 건지 알아내는 건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요? 갈 곳은 정하셨어요?”
“내 친구들에게 갈 거야. 가출하면 오라고, 언제든지 받아주겠다던 녀석들이 있거든.”
“그……. 염치불구하고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당연하지. 미래의 대 화백을 누가 거절하겠어?”
그러나 에이쉬의 자신만만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출한 에이쉬는 기꺼이 환영해 준 친구들이 네이기스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너야 상관없지만 그웬 영애는 안 돼.”
“아, 왜? 둘 다 집 나온 건 마찬가지라니까?”
“그웬 영애는 미성년자잖아. 너야 친구 된 입장에서 거리를 떠돌게 둘 순 없었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그웬 영애에 대해선 내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어? 안 그래도 그웬 백작부인께서 멀쩡한 화가 한 명의 생계를 끊어놓다시피 했다는 걸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절대 안 돼. 아마 어딜 가도 안 된다고 할걸.”
“와, 이 치사한 놈들……. 이런 놈들을 친구라고 내가.”
“당당하지 못한 친구라 미안하게 됐다. 차라리 레이디 타우레드에게 데려가지 그래? 그웬 영애가 화가로 활동할 때 후원해 줬잖아. 멀쩡한 후원자 두고 왜 여기 와서 곤란하게 이래.”
“너희들 나중에 두고 보자.”
같은 퇴짜를 몇 번이고 맞는 동안 네이기스의 어깨가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서도 민망해하는 에이쉬를 도리어 위로했다.
“오라버니 친구분들 말씀이 맞아요. 후원자가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에게 의탁할 필요 없죠. 마침 타우레드 후작 일가가 영지에서 돌아왔으니 그리로 가볼게요.”
“어휴, 내가 민망해서 진짜……. 미안하다. 데려다주기라도 할게.”
타우레드 후작가에서는 네이기스를 받아주겠지. 비록 네이기스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 화가생활을 그만뒀던 전적이 있긴 하지만 라디아타가 네이기스에 대한 후원을 거두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한 적이 없으니까 괜찮겠지. 페리를 비롯해 살아남은 여성 화가들이 계속 후원을 받고 있으니 네이기스에게도 호의를 베풀 거야.
그러나 그 희망도 무참히 꺾였다. 타우레드 후작가는 라디아타가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해서 피후원자의 자격이 애매한 상태인 네이기스를 받아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라디아타가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지금 그녀는 왕궁에 잡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고 로샨은 라디아타의 여성화가 후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네이기스는 창백한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발밑이 좁아져 한 걸음 떼기가 어렵고 숨 쉬는 것도 버거웠다.
“네이기스, 호텔에 방이라도 잡아줄까?”
“안 돼요……. 미혼의 처녀가 그랬다간 진짜 결혼 못 할 거라고요.”
“내가 같이 묵으면 되지.”
“됐어요. 오라버니는 친구들 믿고 돈도 안 챙겨 나왔잖아요. 호텔비는 누가 내요?”
에이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얌전하기만 했던 제 동생이 이렇게 날 선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오라버니, 헨젤가로 가요. 오드리 언니라면 받아줄 거예요.”
“거기도 안 받아주면?”
“그럼 그땐 진짜 호텔 가야죠, 뭐……. 아니면 리즈비아 거리에 싸구려 방이라도 하나 얻든지. 다행이에요, 계좌 열쇠라도 챙겨 와서. 내 발로 집에 도로 들어가는 최악의 상황은 안 생길 것 같아요.”
네이기스는 품에 넣어둔 계좌 열쇠를 두드렸다. 오드리가 반 억지로 만들어 떠넘긴 계좌엔 시곗줄 판매 금액과 그림을 판 돈이 들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하녀를 고용하느라 조금 줄긴 했어도 자기 명의의 돈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에이쉬는 갑자기 야무져진 네이기스를 데리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헨젤가로 갔다. 세간의 입소문과 평가에 개의치 않는 오드리가 네이기스를 받아주길 간절히 빌면서. 그러나 두 사람을 맞이한 건 오드리도 하델도 아닌 하녀장 릴리였다.
“아가씨는 지금 안 계십니다.”
“왕궁에서 아직 안 돌아온 건가?”
“아뇨, 그게 아니라…….”
오드리는 하델과 함께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사람 한둘 빠진다고 국왕의 장례식장이 텅 비는 건 아니라면서. 그 말이 맞았는지 아직까지는 아무도 오드리와 하델을 찾지 않았는데, 대뜸 네이기스가 찾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릴리는 네이기스를 물리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네이기스는 오드리가 특히 아끼는 친척 동생이었고, 가출한 상황에서 갈 곳이 없다는데 이대로 돌려보냈다간 나중에 무슨 말을 들을지 뻔했다.
“레이디 그웬, 일단 들어오세요. 방을 내드리죠. 하지만 아가씨께서 부재중이시니 그웬 공자께도 방을 드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나는 갈 곳이 따로 있어. 네이기스, 내 거취가 정해지면 연락하마. 나중에 보자.”
“오라버니…….”
“그렇게 아련하게 안 봐도 돼. 너보단 내 처지가 훨씬 나아. 아까 똑똑하고 야무지게 굴던 사람 어디 갔어? 그 사람 안 돌아오면 오드리에게라도 대신 앞가림 좀 해달라고 해. 그래야 안심되겠다.”
에이쉬는 그렇게 네이기스를 헨젤가에 맡겨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네이기스는 뭔가 아련한 기분에 휩싸여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집을 떠날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언젠가는 떠났겠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쨌거나 드디어 발붙일 곳을 얻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한결 안심이 됐다. 릴리가 내준 방은 훌륭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쓸 만했다. 게다가 화구까지 제대로 갖춰둔 센스가 마음에 들었다.
“관리 상태가 좋네.”
“이 화구들 전부 그웬 영애의 물건이니 언제든 오시면 쓸 수 있게 해두라고 하셨습니다.”
“오드리 언니는 어딜 간 거야? 이런 때 갑자기 자리를 비우다니, 언니답지 않아.”
“그건 제가 멋대로 답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아가씨께서 돌아오시면 직접 여쭤보시지요. 레이디 그웬, 식사하시겠습니까? 원하시면 이 방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릴리의 태도는 상당히 방어적이었다. 네이기스는 자신이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했다. 하긴 주인이 집에 없는데 손님이 마구 나대며 돌아다니면 불편하겠지.
네이기스는 인형처럼 얌전히 있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오드리가 돌아올 때까지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