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28-2. 셰비언
chapter 29. 욕망
chapter 30. 아뉴람브 성
chapter 31. 두 마리 용과 브란젤의 벨트람
chapter 32. 셰비언의 둥지
chapter 28-2. 셰비언
갑자기 찾아와 오드리를 만날 거라며 깨우기를 요구하는 하델만 아니라면 말이다. 다이앤은 오드리의 방문 앞에 서서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주무세요.”
“이 시간에? 해가 진 지 얼마나 됐다고?”
“손님 치르느라 고단하셨어요.”
하델은 다이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오드리가 빨리 자는 편이라고 해도 지금은 일러도 너무 일렀다. 친척들과 함께 만찬을 들고 달구경을 마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한창 사교 모임에 다닐 때는 이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일이 흔했었다.
하필 제 앞을 막아선 게 다이앤이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조금 전까지 오드리의 방에 있었으면서도 그녀에게선 여전히 싸한 약 냄새가 났다.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란 데다 알신다의 일로 경계가 심한 하델에게는 지극히 낯설고 위험하게만 느껴지는 냄새였다.
“너, 내가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거지?”
“제가 그럴 리가 있나요. 아가씨의 잠을 깨울 수 없어서 막은 거니 도련님께서 이해해 주세요.”
“가서 깨워.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셨던 친척분들 중에 누나를 따로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니까.”
“네? 아가씨께서 조금 전에 한 바퀴 다 도셨는데요.”
아무렇게나 댄 핑계는 금세 가로막혔다. 순간 당황하여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거짓말이라는 게 곧바로 탄로 났으니, 민망함에 하델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급히 튀어나온 말은 어린애 같은 투정이었다.
“이디케였으면 이런 실랑이 없이 곧바로 누나를 깨워왔을 거야.”
“저는 다이앤 몰리예요, 도련님.”
“나는 지금 네가 하녀 주제에 지나치게 뻣뻣하게 군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내가 핑곗거리를 줬으면 깨우려는 시늉이라도 했어야지.”
말하면서도 억지라는 걸 알았다. 이건 핑계다. 알신다에게 독을 만들어 보냈을 걸로 짐작되는 하녀를 야단칠 기회를 잡은 게 너무 즐거워서 이러는 거다.
하델은 그런 자신을 알면서도 방치했다. 스스로를 잡고 있던 고삐를 놓아버렸다. 흰 튤립에 파묻힌 알신다의 마지막 모습이 생기 넘치는 다이앤과 대비돼 견딜 수가 없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서.”
무릎을 꿇고 선 다이앤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하델과 눈높이가 비슷해져서 그런지, 하델의 눈에 담긴 적의가 뚜렷하게 보였다.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증거는 깨끗하게 없애 버려 찾을 수 없어도 알신다의 죽음에 자신이 얽혀 있다고 짐작해서 저런 거겠지.
“소리 내지 마. 네 말대로 누나가 자고 있는데 시끄러워서 깨면 안 되지.”
하델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다이앤의 뺨을 쳤다. 다이앤의 얼굴이 휙 돌아가고 가무잡잡한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어린애의 손이라도 제법 매서웠을 텐데, 다이앤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짜증나.’
하델은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울며 빌 때까지 쳐도 속이 풀리지 않을 테지만, 오늘은 신년제 첫날이었다. 적당히 해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까 하델이 지적한 대로,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다이앤이 하델에게 맞는다는 얘기는 순식간에 집사의 귀에 들어갔다. 신년제를 맞아 복귀해서 부재중에 있었던 일을 확인하던 집사는 허둥지둥 서관으로 달려와 하델을 말렸다.
“도련님, 신년제입니다. 이 하녀가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이만하세요.”
“나를 우습게 봤어. 꼬박꼬박 말대꾸에 내 명령을 수행하는 척도 안 했다고! 그리고 이 하녀는……!”
“그거 참 채찍으로 다스려도 모자란 죄입니다만, 도련님, 오늘은 신년제입니다. 머물고 계신 분들의 귀에 이 일이 퍼지게 되면 백작님이 곤란해지십니다.”
“내가 벌인 일에 아버지가 왜!”
“아직 열넷이 되지 않으셨으니까 그렇지요. 그리 억울해하지 않으셔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도련님은 금세 키가 클 거고, 공무를 보게 될 거고, 아리따운 아가씨와 약혼도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헨젤가의 주인이 되시겠죠. 그런 분이 이런 하녀를 벌하느라 시간을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게 맡기시지요.”
흥분으로 씨근덕대던 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델은 아까보다 한결 침착해진, 하지만 여전히 적의가 살아 있는 눈으로 다이앤을 노려보다 그 자리를 떴다.
집사는 뻣뻣하게 굳어 통증이 올라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다이앤을 일으켜 세웠다. 어찌나 맞았는지 입술이 찢어져 피가 비쳤다. 가무잡잡한 피부가 아니었더라면 보기에 아주 흉했을 게 분명했다.
“몰리 양, 오늘의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도련님이 알신다가 죽고 마음 둘 곳을 잃어서 저러시는 거니까. 귀족가에서 일하다 보면 한 번씩은 다 겪는 일이야.”
“……네.”
“따로 처벌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도련님이 나중에 확인하시거든 채찍으로 열 대는 맞았다고 엄살 좀 피우며 말하게. 아까처럼 가만히 맞고만 있으면 더 화를 부추기는 걸 왜 몰라?”
“…….”
“그리고 몰리 양이 쓰는 그 약재실인지 약제실인지 모를 그 방은 정말 자네만 들어갈 수 있게 해놓은 게 맞나? 나도, 하녀장도, 하다못해 아가씨까지도 못 들어가나?”
다이앤이 흡, 숨을 들이마셨다. 경직된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네. 비전문가가 함부로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공간이라 저만 들어갈 수 있게 해뒀습니다. 어차피 약초와 간단한 약 조제도구 말고는 있는 것도 없어요. 만드는 것도 간단한 감기약이나 두통약, 염색약 정도고……. 혹시 그게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렸던 걸까요?”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해뒀는지는 이해하지만……. 정말 그런 것만 만드는 곳이라면 신년제가 끝나는 대로 도련님도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하게. 대엿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뭔지도 모르는 걸 함부로 만질 분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다이앤이 너무도 간단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의심을 담아 물었던 집사가 되레 민망해졌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크흠, 흠……. 그리고 아가씨께는 비밀로 하게. 오랜만에 만난 오누이인데 사소한 일로 감정이 틀어지면 안 돼. 도련님마저 아가씨의 적으로 돌아서면 누가 백작님에게서 아가씨를 지키나? 내 말 이해하지?”
다이앤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뺨을 짚었다. 맞은 자리가 후끈후끈했다. 오드리와 하델의 사이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말할 수 있어야 집사가 되고 하녀장이 되는가 보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내일까지 이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올까요?”
“이 저택에 하녀가 몰리 양 하나인 것도 아니고, 아가씨를 오래 모신 하녀가 혼자뿐인 것도 아니잖나. 락시 양도 슬슬 바깥으로는 그만 돌고 돌아올 때가 됐지. 자네는 잠시 쉬게.”
하델에게 실컷 맞으면서도 나쁜 감정은 가지지 않았던 다이앤이지만, 이디케를 언급하는 걸 듣는 순간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분기가 피어올랐다. 오래된 질투심이 순식간에 덩치를 키우고 봉오리를 터뜨려 원망을 꽃피웠다.
‘도련님 때문에…….’
무의식중에 다이앤보다 이디케를 더 의지하는 오드리를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약해지고 위태로운 때에 더더욱 옆을 지키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의 입은 내가 막을 테니 혹여 말이 흘러들어 갈까 걱정 말고.”
“……네.”
다이앤의 부풀어 오른 뺨은 충실히 제 역할을 했다. 릴리는 있는 대로 혀를 차고는 집사와 함께 고용인들의 입을 틀어막았고, 곧이어 신년제에도 데멘사에 처박혀 남은 일을 하던 이디케가 한밤중에 불려왔다.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 오드리는 오랜만에 다이앤이 아니라 이디케의 시중을 받으며 잠에서 깼다.
“……내가 꿈을 꾸나?”
“저를 꿈에서도 볼 만큼 그리워하셨다는 말로 받아들일게요. 아가씨, 일어나세요. 단장하셔야죠.”
“네가 왜 여기 있어? 다이앤은?”
“다이앤은 아파요. 간밤에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다나 봐요.”
“뭐!”
아직 몽롱한 머리를 부여잡고 끄덕대던 오드리가 튕기듯 일어났다. 이디케는 그런 오드리를 능숙하게 이끌어 세안을 시키고 기본단장을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의사는 불렀어? 괜찮대? 아니, 신년제라 의사도 없었을 거 아냐?”
“다행히 영업을 하는 의사가 있어서 그쪽에 보냈대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왕진은 못 올 정도라 어쩔 수 없었대요. 너무 걱정은 마세요, 위가 안 좋아서 그런 거라고 쉬면 나을 거라고 했대요.”
“이런……. 브란젤에서 처음 맞는 신년제에 신경을 너무 많이 썼나 봐. 문병이라도 가야겠네.”
“그런 귀여운 이유일 리가 없잖아요. 자꾸 식사를 건너뛰어 버릇하니까 위가 상하는 거라고요. 아가씨가 문병 가면 제 잘못은 까맣게 잊고 엄청 좋아할 테니 가지 마세요.”
“너흰 도대체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니…….”
“제 욕심 때문에 혈육에게 독을 쓰고도 눈곱만큼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해요? 아무리 재주가 좋으면 뭐 해요, 쓸 곳 안 쓸 곳을 못 가리는데요. 그나마 아가씨를 잘 따르니까 거부감 드는 걸 억누르고 있는 거예요.”
완벽한 이유였다. 오드리는 진심으로 싫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이디케를 거울 너머로 바라보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물었다.
“나는? 나도 하델을 죽여 버리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데? 하델이 죽고 나면 나는 아버님의 유일한 자식이 돼. 헨젤도 랄리우스도 무난히 내 차지가 될걸. 지금처럼 돌아서 가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빠르고 간단하지 않을까, 매일 밤 생각하는데.”
“상상이야 자유죠. 뒤돌아서서 욕하는 건 임금님도 못 막는다는데, 머릿속에서 뭔 짓을 하건 그걸 어떻게 막겠어요. 행동으로 옮기지만 않으면 돼요.”
오드리는 다이앤을 부려 알신다에게 독을 넣은 과자를 보냈었다. 이디케는 의사와 장의사를 매수했고 릴리는 장례 준비를 도맡으며 혹시 나올지 모를 뒷말을 막았다. 알신다가 괴물에게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것도 두 사람의 수작이었다. 그래놓고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이디케의 참 신기한 점이었다.
“혈육만 아니면 되는 거야?”
“이왕이면 그런 짓을 안 하고 사는 게 제일 좋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선이라는 거죠. 저는 아가씨를 믿어요.”
“널 위해서라도 정도 이상으로 못된 짓은 안 하고 살아야겠네.”
이디케가 빗을 쥐고 활짝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미소인데, 오드리는 어쩐지 섬뜩한 느낌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과연 폭풍 같은 잔소리가 쏟아졌다.
“그건 아가씨의 양심을 위해서 하시고, 절 위해서라면 말도 안 되게 무모한 내기 같은 걸 하지 마세요. 제가 야밤에 불려와 설명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크흠! 흠, 흠. 그게, 상황이…….”
“어쩐지, 이 저택에 아가씨 하녀가 다이앤만 있는 것도 아닌데 릴리가 왜 날 그리 급하게 찾았나 했어요. 그놈의 욱하는 성질머리, 어떻게 좀 누를 수 없었어요? 전부 아니면 전무라니, 그건 내기가 아니라 도박이에요. 도박은 안 된다고 그리 말씀드렸건만……. 쯧쯧.”
“아니, 아직 지지도 않았어. 릴리가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며 애쓰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릴리는 백작님을 모르잖아요. 걘 만탈락 출신이라고요.”
“…….”
“그때 제가 곁에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지난 일을 어쩌겠어요. 이제 최선을 다하는 일만 남은 걸. 이왕 시작한 내기, 무조건 이겨야죠.”
오랜만에 오드리의 시중을 맡은 이디케는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해서 의욕적으로 오드리를 단장시켰다. 다행히 다이앤이 준비해 둔 게 있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올라 헨젤가의 대문이 열렸을 때, 오드리는 예정대로 정원 한 가운데에 마련한 자리에 앉아 아기 손님을 기다렸다. 숯을 넣은 화로를 발 근처에 두고 따끈한 차를 마시면서 햇살 아래에서 책을 펼쳤다. 글자가 좀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헨젤가에 짐을 풀고 머무는 친척들이 저택을 나서다 말고 정원에서 책을 읽는 오드리를 흘끗거렸다. 본래 신년제의 둘째 날은 친구를 위한 날인 데다 올 겨울엔 영지에 가지 못한 귀족들이 태반이니, 오늘 브란젤 명사들의 집은 문턱이 닳아 없어지도록 손님으로 붐빌 터였다.
아무리 헨젤 백작의 손님이 왕궁으로 갔을 거라고는 하나 데뷔탕트를 치르고 사교계 활동을 한 오드리가 있는데도 오늘 이 저택은 지나치게 한가로웠다.
오드리는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세 권째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네 시 이십분. 슬슬 햇빛이 줄고 바람이 차가워지는 시간이었다. 화로의 숯을 몇 번이나 갈아내는 동안 그녀를 찾아온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라디아타와 함께 어울리며 사귀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작년 초여름 오드리가 아파 누워 있을 때 문병 왔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파혼을 위로하러 찾아올 법도 하건만, 헨젤은 오드리를 지키지 않고 타우레드의 심중은 알 길이 없으니 다들 몸을 사리는 것이다.
하나 지금 오드리의 머릿속은 그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라 돈을 빌리는 데 동의했던 부모들의 명단으로 꽉 차 있었다. 분명 내일이 아니라 오늘부터 문을 열 거라고 했고, 자신에게 축복을 받은 이후 다른 곳에 가더라도 개의치 않겠다고 말을 전해두었는데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다는 게 영 괴이쩍었다.
“릴리, 서관의 하녀 둘을 데리고 돈을 빌려간 부모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집에 있는지 확인해라.”
“네? 아가씨, 오늘은 신년제 둘째 날이라 집을 지킬 사람이 없는 게 당연…….”
“하라면 해! 집 안까지 들어가서 가재도구를 살펴! 정말 아이를 키우는 집인지 다시 확인해! 이런 걸 내가 일일이 말해줘야 하니?”
오드리가 와락 신경질을 부리는 통에, 릴리는 입도 떼지 못하고 서둘러 채비해 저택을 나섰다. 수확제 괴물 사태로 비어버린 빈민가에 언젠가부터 다시 꾸역꾸역 모여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오드리에게 돈을 빌린 부모들 태반이 그곳에 살았다.
오드리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릴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오랫동안 찬바람을 쐰 탓에 손발이 식어 감각이 사라져 가는 것도 몰랐다.
그때, 활짝 열린 문을 지나 오드리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추위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듯 가벼운 차림을 하고, 긴 은발을 느슨하게 땋아 한쪽 어깨로 내린 남자. 마법사의 로브를 벗은 셰비언이 정원을 느긋하게 가로질러 오드리의 앞에 섰다.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아르젠 남작.”
“그냥 셰비언이라고 불러주세요. 그건 제 이름 같지가 않아서 들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요.”
타우레드 영지에서 셰비언을 부른 후, 오드리는 셰비언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전처럼 이름을 마구 부를 순 없겠지,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서 정중하게 대해야겠다, 시계탑에서의 일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진 않을 거야, 어쨌건 자연스럽게 대처하면……. 기타 등등.
하지만 셰비언의 얼굴을 보고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 고민들은 다 헛것이 되었다. 겨울날 눈밭에 떨어지는 한 조각 햇살 같은 미소 앞에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차게 식었던 손발에 온기가 돌고 뺨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앉아도 되나요?”
“어, 얼마든지……요.”
멍청하게 세워둔 걸로 모자라 말까지 더듬었다. 셰비언의 미소가 한층 짙어지는 걸 보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오드리는 이토록 멍청하게 구는 자신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라비린의 배신이 아프다며 밤새 울고불고 하던 게 바로 얼마 전이 아니었느냔 말이다.
‘저 남자와 얽히면 도대체 나답지가 않아져.’
분명 나름대로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얼음 낀 강 같은 눈에 무슨 마력이 있는지 머릿속에 가득하던 잡념이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아기 손님을 위해 색색으로 꾸며둔 정원인데도, 셰비언은 주변이 흐릿해 보일 정도로 유독 도드라졌다. 하긴, 어딜 가도 묻히지 않을 미모이긴 했다.
아무튼 계속 바보 같은 꼴을 보일 수는 없다. 오드리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잘 차려입은 셰비언을 앞에 두고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굉장한 정신력이 필요했다.
“말씀대로 정말 오랜만이네요. 타우레드 영지에서 도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냐고 신문에서 난리던데, 브란젤에는 언제 돌아오셨나요?”
“지금 막 도착했어요. 신년제의 둘째 날은 친구를 위한 날이라면서요? 늦고 싶지 않아서 조금 빨리 왔죠. 아, 그런데 아가씨가 저한테 존댓말을 쓰시니까 굉장히 어색하네요. 처음 만났을 때 같아요. 이것도 그 작위의 효과인가요?”
“……그때는 제가 무례했던 거죠. 문장을 그려내는 마법사는 귀족에게도 존중 받는 게 관습인데 가명을 의심해서 멋대로 굴었으니까요. 이후에라도 고쳤어야 하는데 고집을 피웠고요.”
“아하……. 그게 관습이었구나. 어쩐지…….”
셰비언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여간 놀라울 정도로 세간의 상식에 둔한 사람이었다.
오드리는 새삼스럽게 셰비언의 둔함에 혀를 내둘렀다. 도저히 인간사회에서 자라났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순백이 오드리가 그의 정체를 절반이나마 믿은 이유이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구석에 팽개쳐 뒀던 이성이 기지개를 켰다.
어쨌건 덕분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셰비언의 얼굴에 홀리고 뛰는 심장에 넋이 나가서 되는대로 대답만 하고 있던 오드리는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그에게서 들을 말이 많았다.
“셰비언 씨, 타우레드 영지의 괴물 사태는 어떻게…….”
“근데 저는 아가씨가 반말해 주시는 쪽이 더 좋아요. 계속 그렇게 해주시면 안 돼요?”
“……네? 왜요?”
화제 전환은 무슨, 순식간에 말려들었다. 셰비언이 목소리에 애교를 담뿍 싣고 말하는 통에 무시하고 말을 계속 이을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차라리 말을 않고 필담이라도 하자 할까 하다 급히 생각을 지웠다. 그랬다간 저 가느다랗고 길쭉길쭉한 예쁜 손가락을 보느라 정신을 다 팔아먹을 게 분명했다. 지금도 옅은 분홍색 입술을 만지작대는 손가락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왠지 특별한 느낌이 들잖아요.”
“특별은 무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두고 예의도 모른다 욕할 거예요.”
“그 친분을 부러워하지는 않고요? 저는 용이고, 인간들이 보기에 시대를 따지지 않고 최고의 마법사일 텐데요.”
오드리는 이디케가 해준 화장이 충분히 두껍기를 바랐다. 목소리는 어떻게든 꾸며내겠는데, 아까부터 따끈하다 못해 화끈거리는 얼굴은 진정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시대를 따지지 않고 최고의 마법사란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바일런 섀덤이 있잖아요.”
“아, 그렇네요. 바일런 섀덤……. 그가 남겼다는 연구자료를 최근에 좀 들여다봤는데,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어요. 어떻게 그따위 연구로 그런 결과물을 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던데요. 세상에, 하나 둘을 세기 시작하자마자 백이 나오는 수준이었어요.”
셰비언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댔다. 기차의 엔진이 수없이 복사되기만 하고 개량품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뭔가 궁금했는데, 연구자료를 봤더니 그럴 법도 했다, 바일런 섀덤 얘기만 나오면 이를 가는 마법사들이 이해가 간다…….
정작 바일런 섀덤의 이름을 꺼낸 오드리가 황당해하며 웃었다.
“남들 보기엔 셰비언 씨도 그렇게 보일걸요. 연구 과정이랄 것도 없이 대뜸 결과물부터 끄집어낸 사람이 누굴 탓하는 거예요? 바일런 섀덤의 이름이 기차와 함께 남았듯 셰비언 아르젠의 이름은 전보와 함께 남을 거예요.”
“그야 나는 경우가 다르죠. 나는 용이지 인간이 아닌걸요.”
“하하, 전부터 계속 말했었죠. 셰비언 씨, 진짜 용이에요?”
“그럼요. 아가씨, 증명해 보일까요?”
셰비언이 허공에 선을 그었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 반짝이는 황금색 선이 생겨났다. 톡톡 두드리자 새하얀 눈이 그 선에서 떨어져 찻잔에 빠졌다. 뜨거운 찻물에 순식간에 녹아 사라진 눈을 보느라 오드리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셰비언이 손을 내밀었다. 언제 보아도 희고 예쁜 손이었다. 무심결에 그 위에 제 손을 겹치려던 오드리가 황급히 손을 뺐다.
“또 의식세계에 데려가려고 그러죠? 싫어요, 거긴 뭐든지 셰비언 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아가씨에게 거짓말은 안 해요. 그게 비록 의식세계라고 해도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한 말이 정말이라는 걸 잘 알았다. 이제까지 셰비언은 그녀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예 말을 하지 않다가 들키거나, 믿기 어려운 말을 해서 의심을 사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어쩐지 민망해져 시선을 내렸더니, 셰비언이 그어놓은 선에서 여전히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머랭을 잔뜩 넣어 구운 쿠키 위로 눈이 설탕가루처럼 쌓였다. 오드리는 그 쿠키를 입에 넣고 씹었다. 눈은 입 안에서 쿠키와 뒤섞여 보드랍게 녹아내렸다. 혓바닥과 목구멍을 찌르는 차가움이 눈이 허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문득 이거면 됐다 싶은 충족감이 들었다. 세상에 이만한 일을 할 수 있는 마법사가 또 어디에 있어서 계속 의심을 할까. 용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떨까. 오드리는 그냥 믿기로 했다.
“괜찮아요, 증명하지 않아도 믿을게요. 물론 그와는 별개로 셰비언 씨가 의식세계에서 뭘 보여주려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오늘은 안 돼요. 난 아주 중요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단 말예요. 정신이 흐트러지는 건 달갑지 않아요.”
“아가씨, 셰비언 절벽 너머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오드리의 눈이 흔들렸다. 전쟁의 신 벨트람이 산맥에 도끼질을 해서 산 절반을 갈라 버렸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가파르고 높은 셰비언 절벽. 그 너머는 아직까지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미지의 장소였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절벽을 성벽이라고 부를까.
어느 기행 작가가 남긴 감상에 따르면, 셰비언 성벽을 눈으로 보게 되면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이 사실은 커다란 상자에 담겨 있는 정원에 불과하다 해도 믿을 수 있을 법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셰비언이 부드럽게 오드리를 재촉했다.
“믿는다고 하셨잖아요? 마법의 주인이자 셰비언 절벽을 영지로 삼은 용인 제가 보여드리는 풍경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남작님, 아가씨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내내 옆에서 침묵을 지키며 시중만 들던 이디케가 나서서 셰비언을 말렸다. 하지만 셰비언은 손을 거두지 않고 계속 오드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옅은 푸른색 눈동자에 갈등에 휩싸인 오드리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춰졌다.
오드리는 입술을 깨물고 망설이다 기어이 손을 뻗었다. 싸늘하게 식은 제 손만큼이나 차가운 손을 덥석 붙들었다. 아가씨! 이디케가 울 듯한 목소리로 오드리를 불렀다.
“이디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셰비언 씨, 궁금해요. 성벽 너머엔 대체 어떤 풍경이 있나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럼 바로 보여드릴게요.”
“세상에, 손만 잡으면 바로 보여줄 것처럼 굴더니 이렇게 조건 거는 법은 누구에게 배웠어요?”
“그야 당연히 라비린에게서 배웠죠. 제가 괜히 타우레드 영지에 한 달이 넘게 잡혀 있었던 게 아니에요.”
“라비린이 쓸데없는 지혜를 가르쳤군.”
오드리의 말투가 대번에 예전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먼저 바랐으면서도 셰비언이 입술을 삐죽댔다.
“라비린을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지 마세요. 파혼하셨잖아요?”
“그대야말로 편하게 이름을 부르고 있잖아? 라비린이야 괴물 문제도 있고 하니 무척 사근사근하게 굴었겠지만, 그대가 라비린을 친근하게 여길 이유가 있던가? 언제부터 그리 친해졌는지 모를 일이야.”
“친해진 건 모르겠지만 그 녀석에겐 존댓말 쓰기 싫다는 건 확실하거든요. 존댓말 따위, 어차피 종족도 다르겠다 별 의미를 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싫은지……. 아가씨가 라비린을 편하게 대하는 것도 엄청 싫어요.”
파혼을 했더라도 친구로 지낸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어쩌란 말인가, 하고 오드리가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셰비언이 그녀를 제 쪽으로 쑥 잡아당겼다. 그리곤 얼결에 몸을 일으킨 오드리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제가 이유를 모르고 허우적대고 있으니, 타우레드 영애가 가르쳐 주더라고요.”
“라디아타가 뭐라고 했는데?”
“그걸 두고 인간들은 질투라고 부른대요.”
숯을 넣은 화로가 무슨 소용이고 담비 털가죽이 다 무슨 소용일까. 셰비언의 말을 듣는 순간, 오드리는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체온과 한여름 같은 더위를 느꼈다. 민망함에 다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그들은 이미 정원이 아니었다.
새하얗게 눈이 쌓인 뾰족한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의 광장이었다. 하늘은 흐릿한 회색으로 덮여 눈송이가 점점이 떨어지는데,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든 바람이 그 눈송이를 허공에서 춤추게 했다.
오드리는 어느새 바짝 다가붙어 있던 셰비언을 밀어내고 홀로 섰다. 지붕에는 한 뼘도 넘는 눈이 쌓여 있었지만, 바닥은 누군가 빗질이라도 한 것처럼 눈이 얕았다. 물이 나오긴 할까 의심스러운 분수대에 바닥에서 치워진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눈이 엉겨붙은 빗자루와 넉가래도 함께였다.
“여긴…….”
“셰비언 절벽 아래의 마을이에요. 이곳 주민의 태반이 광부고 나머지는 군인이죠.”
빈 광장에 사람이 다니기 시작했다. 피부색이 창백하고 체모색이 옅으며 코끝이 벌건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입은 두툼한 털옷은 만탈락과 엇비슷할 정도로 색이 화려하고 무늬가 복잡했다.
오드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풍경을 천천히 감상했다. 셰비언 성벽을 그린 그림은 많이 보았으나 그 성벽의 광산에 기대어 사는 마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기행 작가의 책 속에도 마을 그림은 없었다.
“만탈락과는 완전히 달라.”
말을 할 때마다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입에서 안개를 뱉는 못된 요정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도 헨젤가의 정원에 나와 있을 때보다 춥지 않으니, 저절로 마음이 들떴다.
“만탈락은 더운 곳이고, 여긴 춥잖아요. 당연히 다르죠.”
“그야 그렇겠지만…….”
오드리와 셰비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을이 깨어났다. 조금 전까지 꼭꼭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고 식료품점과 포목점과 푸줏간이 장사를 했다. 만탈락의 술처럼 벌컥 들이켰다간 목구멍이 불타 버릴 것 같은 술을 파는 주점도 문을 열었다.
아직 해가 떠 있는 시간인데도 주점은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키도 크고 덩치도 컸다. 브란젤에서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눈에 확 띄는 라비린도 여기에 오면 평범한 체구가 될 것 같았다.
“무슨 거인들의 마을도 아니고 다들 엄청 크네.”
“진짜 거인은 이보다 훨씬 커요. 이 사람들처럼 주정뱅이도 아니고요. 더 둘러보실래요? 조금 더 가면 대장간도 있어요. 거기선 농기구가 아니라 주로 광부들이 쓰는 물건을 만들죠.”
“아니, 됐어. 그보다 성벽은 어디 있어? 여기, 성벽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아냐?”
“아까부터 보고 계신걸요.”
셰비언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오드리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고개를 젖혔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짙은 구름에 가려서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하늘의 절반이 무언가로 뒤덮여 있었다.
“……천장? 마을에 웬 천장? 그것도 절반만 있네?”
“천장이 아니라 저게 셰비언 절벽의 일부예요.”
절벽을 이루는 바위는 신기할 정도로 색이 밝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구름 낀 하늘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 약간의 투명감마저 감도는 게, 마치 구름을 굳혀 쌓으면 저렇게 될까 싶었다.
“오……. 성벽의 색이 하늘과 같아서 해가 뜨면 해를 품고 달이 뜨면 달을 품는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군. 그림과 글로는 영 상상이 안 가더니 눈으로 보니까 알겠어.”
“그냥 주변과 비슷한 색을 띠는 것뿐인데, 그걸 그렇게 표현하나요? 사람들이 참 기발하네요.”
“내 감동을 깨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이런 절벽이 대륙을 가로지르고 있단 말이지? 대단해, 과연 성벽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해.”
“용도 경계로 삼을 만큼 큰 산맥이고 긴 절벽이긴 하죠. 비록 인간들이 그 절벽에 구멍을 뻥뻥 뚫어서 마을을 짓고 있긴 하지만 말예요…….”
통칭 셰비언 성벽이라고 불리는 절벽은 대단히 광활하고 넓은 지역이었다. 멜브란트의 국경선을 이루는 절벽의 한쪽 끝은 바다와 닿아 있고, 다른 끝은 아무도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셰비언 산맥의 원시림과 이어졌다.
그렇게나 넓은 지역인데도 그 사이에 늘어선 도시와 마을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었다. 워낙 환경이 가혹하다 보니 그나마 보석이 나는 광산 근처에만 사람이 몰려 사는 탓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절벽 틈에 둥지를 트는 새처럼 절벽 틈새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룬 것도 그 노력 중 하나였다.
오드리는 목이 꺾이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하는데, 셰비언은 이렇게 생긴 마을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하긴 이 절벽은 그의 영지이니, 치료차 잠들어 있는 사이 멋대로 보석을 캐가고 절벽에 마을을 세우는 게 기꺼울 리가 없었다.
“절벽이 바람과 눈을 상당히 막아준대도 그렇지, 다들 너무한다니까요. 내 땅인데.”
“그러게 좀 눈에 띄는 방식으로 표시를 해놨어야지.”
“그때 기준으로는 눈에 띄는 방식이었어요. 그 사이 마법망이 이렇게 엉망이 될 줄 누가 알았나요? 남은 종족이라곤 인간밖에 없는데 그들은 마법 구성의 원리를 거의 잊어버린 상태였고 말이죠. 그래도 참 신기하긴 한 게, 원리를 잊고도 마법도구는 잘만 만들더라고요.”
셰비언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을 곳곳에 설치된 마법도구들이 환하게 빛을 내며 도드라졌다. 마을 지하에서 거미줄처럼 이어진 수도관과 길가에 설치된 가로등을 비롯해 상점과 가정집마다 갖추고 있는 필수 마법도구들이 뿜어내는 빛으로 사방이 반짝거렸다.
“마법도구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여기서 살지 못했을 거예요. 본래 여긴 인간이 살기엔 지나치게 가혹한 환경이거든요. 마을을 이루지도 못했겠죠.”
“절벽이 막아주는데도 눈이 이렇게 쌓이고 바람이 저만큼이나 부는 걸 보면 정말 그랬겠지. 광산만 아니었으면 버려도 진작 버렸을 땅이야. 여기에 보석 광맥이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전 아무리 보석이 난다고 해도 이런 환경에서 꾸역꾸역 발붙이고 사는 인간들이 더 신기해요. 자칫하면 굶어죽거나 얼어 죽을 텐데, 무섭지도 않은 걸까요? 보석을 씹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인간의 탐욕은 때때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거든. 내가 바로 그 좋은 예시잖아.”
오드리의 말 속에서 전에 없던 자조가 묻어났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던 오드리의 낯선 모습에 셰비언은 물론이고 오드리 자신까지 놀랐다.
“아가씨, 저는…….”
“아아, 됐어! 마을 구경도 좋지만 이건 내가 직접 와서 봐도 볼 수 있는 풍경이야. 셰비언, 나는 저 절벽 너머를 보고 싶어.”
셰비언의 눈치가 오랜만에 제 역할을 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오드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드리가 기대에 찬 눈을 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몸을 숙여 서늘한 손등에 입 맞추고 사뭇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가씨, 새삼 높이 나는 걸 두려워하진 않으시죠?”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걷는 것도 두렵지 않았는데, 절벽 정도야 뭐가 무섭겠어.”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기묘한 부유감이 몸을 감싸고, 곧이어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오드리는 부지불식간에 셰비언에게 달라붙어 그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처음부터 허공이었던 곳을 걷는 것과 땅에서 몸이 뜨는 건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내장이 뒤집힐 듯 요동쳤다. 목을 빳빳하게 고정하고 숨을 참았다.
“아가씨, 무서우신 건 아니죠?”
“안 무서워!”
“그럼 계속 제 가슴팍만 보지 마시고 주변도 좀 둘러보세요. 자, 발아래가 조금 전까지 우리가 있었던 마을이에요.”
오드리는 주춤주춤 고개를 내렸다. 인형의 집처럼 작고 귀여워진 눈 쌓인 뾰족지붕들, 마을을 둘러싼 침엽수림과 그 사이로 실뱀처럼 구불구불하게 흘러가는 강, 바람에 희롱당하는 눈송이가 장대한 그림이 되어 그녀의 눈길을 빼앗았다.
마치 새가 된 것 같았다. 날개를 달고 만탈락으로 날아갔던 그 꿈에서처럼.
마을이 점이 된 뒤엔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구름 낀 하늘과 꼭 같은 색의 절벽이 보였다. 위아래양옆,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을 차지한 절벽은 누군가 정성껏 다듬은 것처럼 정갈하게 각진 바위기둥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렇게 멀리서 보는데도 기둥의 모양새가 뚜렷한 걸 보니, 그 하나하나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감히 짐작이 됐다. 아마 오드리가 양팔을 벌리고 그 앞에 서도 기둥의 끝에서 끝까지 닿지 않을 것이다.
“……성벽이라는 말이 정말로 잘 어울려. 누군가 일부러 만든 것 같아.”
“자연은 언제나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내죠. 아가씨, 잠깐 멈춰서 노을을 비추는 절벽을 보고 가지 않을래요? 정말 근사해요. 시간을 들여 볼 만한 가치가 있어요.”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아시잖아요, 여긴 저의 의식세계고 제 공간이라는 거. 제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아가씨에게도 보여드릴게요.”
셰비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름이 걷혔다. 잿빛으로 무겁던 하늘이 새파란 호수처럼 빛나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놀란 숨을 채 삼키기도 전에 누군가 하늘에 물감을 엎었다.
몇 조각 남아 있던 흰 구름은 자줏빛과 보랏빛으로 물들어 귀부인의 베일처럼 한들거렸다. 구름 사이로 떨어진 노오란 햇빛 줄기가 눈 덮인 침엽수림 위에 떨어져 조각났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빛 원반이 조금씩 자리를 옮길 때마다 붉은색이 차지하는 면적이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부터 하늘 전체가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절벽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잿빛 구름과 같은 색이었던 게 거짓말처럼 지금은 완벽한 노을로 물들었다. 절벽 따위는 없이 하늘만, 하늘만 쭉 이어지는 것처럼. 그 아래 땅을 덮은 눈은 황금빛으로 반짝여 마치 황금실로 짠 융단 같았다.
오드리도 수없이 많은 노을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노을 한복판에 파묻힌 것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무 것도 디디고 있지 않아 더욱 완벽했다.
“……아깝다.”
“네? 뭐가요?”
“내가 네이기스의 절반만이라도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면, 이 풍경을 화폭에 담아 두고두고 꺼내볼 텐데.”
“언제든 말씀만하시면 몇 번이고 보여드릴게요.”
“아니야……. 다시 보는 건 의미가 없어. 이 순간의 내 감흥을 담아두고 싶은 거야.”
땅에서 발이 떨어질 때의 두근거림, 세상의 주인이 된 것만 같은 황홀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첫 경험의 특별함, 뭐 이런 것들. 두 번째에는 느낌이 다를 게 당연했다.
“평생 그림 그리는 재주 같은 걸 부러워해 본 일이 없는데, 오늘은 조금 아쉽네.”
“음……. 그 감흥 안에 저도 있나요?”
오드리는 대답을 피했다. 보기 드문 아름다운 은발이 노을에 물들어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건 정말 특별한 볼거리였지만, 그 말을 본인에게 하는 건 어쩐지 민망했다. 사교계에서 외모를 칭찬하는 일은 흔하게 했던 건데도 말이다.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식히며 태양 반대편에서 세력을 넓혀가는 밤의 옷자락에 시선을 주었다. 어제 친척들과 함께 본 달은 통통하게 배가 부른 보름달이었는데, 셰비언이 보여주는 하늘의 달은 얄팍한 초승달이었다.
“이 풍경은 그대가 본 어느 날의 노을인 건가?”
“치……. 대답도 안 해주시고 질문만.”
셰비언이 오드리를 살짝 끌어당겼다. 경치 구경을 하는 내내 셰비언의 팔을 꼭 붙들고 있었던 오드리는 앗 하는 사이 그의 품에 안겼다. 허공에 서는 것도 이젠 퍽 익숙해졌겠다, 밀어내려면 밀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등에 닿는 체온이 지나치게 기분 좋았다.
“별자리마저 지금과는 다를 만큼 오래전의 하늘이긴 하죠. 아직 용이 하늘을 날고 바다엔 인어가 살던 시절이긴 해도 제가 본 노을 중엔 이게 제일 아름다웠어요. 아가씨가 보기엔 어떠세요?”
“아주 아름다워. 요즘에는 이런 하늘을 볼 수 없나?”
“예전에야 여기 엎드려서 노을을 보는 게 취미였지만, 요즘에는 잘 모르겠어요. 깨어난 다음에는 노을을 보려고 기다린 적이 없거든요. 아가씨, 저랑 확인하러 가실래요?”
오드리는 하마터면 덜컥 알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만약 셰비언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를 등지고 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고개를 쳐들었다.
“절벽 너머를 보여준다고 꼬드겨 놓고 이번엔 노을인가? 아무리 바깥과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해도 너무 차이가 나면 내가 적응하기 힘들어.”
“맞아요, 의식세계에 오래 있는 건 위험하죠. 현실을 잊고 안주하고 싶어지니까……. 하지만 아가씨, 제가 노을을 확인하러 가자는 건 여기가 아니라 현실세계의 얘기인데요?”
“그런 거면 시점을 확실히 해서 얘기해. 함께 노을 보는 것 정도야 뭐가 어렵겠어? 그쯤이야 시간 나는 대로 함께하면 되지.”
“진짜죠? 좋아요, 그럼 언제든 반드시 저와 함께 노을 보러 가는 거예요. 약속하신 거예요. 어기면 안 돼요!”
오드리는 보잘 것 없는 약속에 굉장히 기뻐하는 셰비언이 이상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자신이 놓친 게 있나 대화를 다시 복기하려는데, 셰비언이 오드리의 허리를 휙 끌어안았다.
“뭐야, 갑자기!”
“이제 절벽 위를 구경 가야죠. 아가씨, 잠시 눈감고 계세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허리 감은 걸 가지고 화를 낼 수가 없다. 오드리는 허리에 닿은 셰비언의 팔이 미친 듯이 신경 쓰이는 상황에서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있나.
편안히 늘어뜨렸던 자세가 빳빳해진 건 물론이고 숨 들이쉬고 내쉬는 것마저 어쩐지 부자연스러웠다. 숨 쉬는 걸 의식해서 해야 한다니 말로 들었다면 우습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마 견뎌야 하는 시간이 짧아서 다행이었다. 곧 얼굴에 닿는 공기의 느낌이 달라졌다. 눈 떨어지는 마을에서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서늘한 한기가 들었고, 젤리 속에 빠진 것처럼 주변이 물컹물컹했다.
“조심하세요.”
“어, 어어……. 꺅!”
셰비언이 미리 경고한 보람도 없었다. 오드리는 허리를 감고 있던 셰비언의 팔이 풀리자마자 휘청거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허리보다 더 높이 쌓여 있던 눈이 그녀를 푹신하게 받아냈다. 드레스의 깃을 장식한 레이스에 눈이 잔뜩 엉겨붙었다.
오드리는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눈의 깊이가 상상 이상이었다. 이디케가 신경 써서 차려 입힌 드레스자락이 몸을 칭칭 감아버린 탓인지, 오드리는 일어나려고 시도할 때마다 계속 미끄러졌다.
금실로 수놓은 좁은 소매가 다 젖고, 희고 붉은 치마가 볼품없이 늘어졌다. 멋들어지게 잡아놓았던 버슬이 끝내 모양을 잃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오드리는 그 지경이 되어서야 스스로 일어나길 포기하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셰비언이 눈구덩이 근처에 서서 그녀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키가 큰 만큼 체중도 오드리의 두 배는 나갈 텐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눈에 조금도 빠지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동그랗게 뜬 눈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화가 났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안고 노을을 보러 가자 속삭이던 사람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안 잡아주고 뭐 하는 거야!”
“하, 하하하……. 아가씨, 진짜 눈에 익숙하질 않으시네요.”
“당연하지! 나는 태양이 이글대는 도시에서 자랐어! 만탈락에는 눈이 안 내린다고!”
“아하…….”
셰비언이 그제야 손을 내밀어 오드리를 끌어올렸다. 오드리는 그의 손에 의지해 꾸역꾸역 눈구덩이를 기어올랐다.
“으, 추워!”
“젖어서 그래요.”
셰비언이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툭툭 털었다. 그것만으로도 금세 물기가 사라지고 보송보송해졌다. 비록 엉망이 된 버슬의 모양은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세상에, 그 짧은 사이에 꼴이 엉망이 됐네.”
“여전히 예뻐요.”
“말은 잘해. 라디아타가 그런 것도 가르쳤나 보지? 아니면, 라비린이?”
오드리는 셰비언 앞에서 추레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꾸역꾸역 옷자락을 정리했다. 비록 손재주가 없어 별 소용은 없었지만. 오드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셰비언이 피식 웃으며 오드리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누가 그런 걸 가르쳐요? 아가씨, 아가씨가 넝마를 걸치고 있어도 제 눈엔 예쁠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저는 용이라고요. 제가 인간의 패션을 이해하면 얼마나 이해하겠어요?”
“그래도 예쁜 거 안 예쁜 거 구분은 할 거 아냐. 개도 짝을 구할 때 외모를 따지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드리는 투덜대던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면 개는 그래도 동족의 외모를 따지는 거지만 셰비언과 오드리는 아예 종족이 달랐다. 겉가죽이 같다고는 해도 그건 셰비언이 일시적으로 바꾼 모습에 불과했다.
“그렇군. 그대는 용이지. 인간의 패션 감각이 와 닿지 않을 만도 해. 그래서 그렇게 마법사 로브만 줄곧 입고 다닌 건가? 솔직히 그건…… 좀…….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귀가 있는데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요? 안 그래도 그게 음침해 보인다는 걸 알 정도는 돼요……. 그냥 편해서 입고 다닌 거지. 그걸 입으면 쳐다보는 사람도 적고,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다고 타박하는 사람도 없고…….”
“여기저기에서 말 많이 들었나 보군?”
“인간들의 관습은 너무 복잡하더라고요. 그래도 다행이죠, 마법사 로브 하나면 다들 모른 체 넘어가 주고!”
활짝 웃는 얼굴이 굉장히 밝다. 오드리는 그게 어이가 없어 그만 함께 웃어버렸다. 마법이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시대이니만큼, 마법사에게는 다들 무르게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더라도 셰비언은 사람들의 그런 면을 착실히 이용해 먹은 셈이었다.
오드리는 배와 가슴을 압박하는 코르셋을 새삼 의식했다. 아기 손님을 데려올 부모들 생각에 갖춰 입은 중부식 정장이었다. 불편해서 그렇지, 예쁘긴 예뻤다.
그러나 인간의 패션은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셰비언에게도 이 중부식 드레스가 예쁠까? 자신이 어떤 옷을 입었을 때 가장 예뻐 보였을까?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는데, 어째서인지 입이 안 떨어졌다.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은 바로바로 뱉으면서 살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나 오드리의 그런 마음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셰비언은 모처럼 셰비언 성벽 위로 올라와 놓고 옷 얘기만 하는 오드리가 서운할 뿐이었다. 여긴 그의 영지, 그의 집이고 고향이었다.
“아가씨, 주변 구경은 안 하세요?”
“해야지. 그런데 주변이 온통 눈뿐이고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는걸. 어딜 보나 그냥 지평선…… 잠깐, 지평선?”
오드리는 눈에 걸리는 것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벌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눈 덮인 북부 지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셰비언 성벽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눈, 눈뿐이었다.
“이게…… 성벽 위의 풍경이야? 그 까마득한 위에 이런 평지가 있었어?”
“실감이 안 나죠? 자, 이리 오세요.”
셰비언이 오드리를 이끌었다. 또 눈에 빠질까 당황했던 오드리는 발이 빠지기는커녕 발자국도 거의 남지 않는 걸 보고 신기해했다. 마치 눈 위를 종종거리며 걷는 참새가 된 것 같았다.
“진작 이렇게 만들어줬으면 아까 안 빠졌잖아.”
“깜빡 잊었어요. 여기에 용이 아닌 다른 종족이 오는 건 처음이라서요.”
셰비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오드리는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말하는 처음에는 뭔가 설레는 울림이 있었다.
“……크흠, 흠. 그래? 옛날엔 날개 달린 종족도 살았다면서. 그런데도 용이 아닌 종족은 내가 처음인가?”
“몸이 무겁다거나, 뭔가가 가슴을 누른다거나, 그게 아니면 꼭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저항감이 느껴진다거나……. 뭐 그런 이상한 느낌 안 드세요?”
“주변 공기가 젤리 같아. 허공에 손을 이렇게 휘저으면 보이지 않는 젤리를 가르는 것처럼 저항감이 들어. 움직이는 것도 약간 힘들고,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조금 벅차.”
“그것 때문이에요. 이 지역의 마력은 밀도가 대단히 높거든요. 날개를 가진 조인족은 이렇게 농밀한 마력을 견디지 못해요. 날개 없는 종족들은 여길 올라올 엄두도 못 내고요.”
“그래서 여길 네 영지로 삼은 건가?”
“비슷해요. 비단 제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용은 이런 곳을 좋아하거든요. 마력이 풍부하거나 지각활동이 활발하거나 날씨 변화가 무쌍한 곳 말이죠. 성룡이 되어 자기 둥지를 틀 때가 되면 그 세 가지 조건에 맞는 곳을 찾느라 난리가 나는 게 보통이었어요.”
오드리는 낯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셰비언이 용족의 습성에 대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을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과거를 이야기할 때면 늘 어딘지 가라앉아 있던 이가 살짝 들뜬 기색마저 느껴졌다.
“여기가 네 고향이라고?”
“네에……. 애초 여긴 마법의 주인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영지예요. 제가 성룡이 되고 바로 이름과 함께 물려받았죠. 그래서 이 지역은 항상 셰비언 절벽이었어요.”
“용의 존재가 전설이 되어도 이름은 남았군.”
“전쟁의 신이니 뭐니 엉뚱한 전설이 붙고 절벽이 아니라 성벽으로 부르고 있지만요. 이왕 다 잊어버릴 거 이름도 까먹지 왜 이름은 남아가지고 어디 가서 제 소개 할 때마다 웃는 사람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
“아, 아가씨더러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뭐라 하는 거 아니라는 말이 더 민망하다. 오드리는 입을 꾹 다물고 열심히 걷기만 했다. 셰비언도 제 실수를 깨달았는지 입을 다문 통에 두 사람 사이엔 앵앵대는 바람 소리만 시끄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오드리가 젤리 같은 공기 속에서 숨쉬기가 버거워 헐떡대기 시작했을 때쯤, 셰비언이 멈춰 서서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가 절벽의 끝이에요.”
오드리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몸뚱이를 질질 끌고 셰비언이 가리킨 자리에 가서 섰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로 손에 잡힐 듯한 곳에 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게 보였다. 구름 사이로 땅이 보이긴 했지만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까만 땅 사이로 흐르는 큰 강이 실지렁이처럼 가늘었다.
아래쪽에서 올라온 바람이 오드리를 홱 떠밀었다. 안 그래도 힘들었던 오드리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젤리 같은 공기 속에서 움직이느라 뻘뻘 흘렸던 땀을 식혔다. 늘 올려다보았던 구름이 발 아래쪽에 머물러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일으키는 대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바람을 맞았다. 사방이 다 흰 색인 이곳에서 오드리의 초록색 머리칼과 가무잡잡한 피부는 더욱 눈에 띄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정말 성벽 끝이로구나…….”
“확인해 보니 기분이 어떠세요? 아무 것도 없어서 실망하진 않으셨어요?”
“글쎄……. 실망보다는 무서워. 여기가 인간의 땅이 아니라는 게 실감이 나. 어떤 인간이 구름을 발아래 놓을 생각을 해 봤겠어? 여긴 성벽이나 절벽보다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거야.”
“세계의 지붕이라……. 그 별명 괜찮네요. 처마에서 보석이 우수수 떨어지는 지붕이 되겠죠. 아, 사실 여기서 나는 보석은 전부 내 건데.”
아직도 보석에 미련을 못 버린 셰비언이 작게 투덜거렸다. 인간이 캐가는 보석이라 봐야 전체 매장량에 흠집도 못내는 적은 양이지만, 눈뜨고 도둑질 당하는 기분이라 영 좋을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모처럼 로브를 벗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셰비언을 슬쩍 훑었다. 워낙 이목구비와 체형이 아름다운 데다 얼음요정처럼 색이 옅어서 무슨 보석을 장식해도 잘 어울릴 게 분명했다. 이 땅과 꼭 닮은 은발에 새파란 토파즈 장신구를 올려놓으면 무척 보기 좋을 듯했다.
문득 침대 머리맡 보석함에 보관 중인 알룬드의 목걸이가 떠올랐다. 시신과 함께 물에 잠겨 있었던 데다 하루아침에 두 배는 무거워진 물건이라 찜찜하긴 해도 블루 다이아몬드의 광채만은 대단했다. 라디아타뿐만 아니라 셰비언에게도 아주 잘 어울릴 게 분명했다. 비록 그 디자인이 여성용이라고 해도.
당연히 알룬드의 목걸이가 왜 무거워졌는지를 물어야겠지만, 오드리는 그 질문은 잠시 뒤로 미뤘다. 대신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기를 바라며 슬쩍 옆구리를 찔렀다.
“보석 좋아해?”
“좋아하죠. 보석만큼 마법을 담기 쉬운 매개가 없어요. 요즘 인간들의 마법에선 그 역할을 마법수식과 소재가 대신하고 있긴 하지만요. 아, 그리고 마법진도.”
“치장하는 데 쓸 생각은 없고?”
“마법 담은 보석이 아니면 굳이 무겁게 그걸 매달고 있어야 하나 싶긴 하죠.”
“그렇구나…….”
“그래도 아가씨가 보석으로 치장한 모습은 좋아해요. 예쁘거든요. 이왕이면 그 보석 하나하나에 다 마법을 걸어드리고 싶…… 잠깐,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설마, 설마 보석 사주시게요? 저 치장하라고?”
오드리의 뺨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이디케가 공들여 발라놓은 화장이 다 소용없을 만큼의 부끄러움이었다. 보석 광맥이 넘쳐나는 셰비언 성벽이 죄다 자기 것이라는 용에게 무슨 보석 선물이란 말인가?
셰비언이 후다닥 일어나려는 오드리의 손을 낚아채 쥐고 그녀를 다시 주저앉혔다. 얼음 낀 강 같은 푸른 눈에 오드리가 가득 담겨 출렁거렸다.
“아가씨, 보석은 예나 지금이나 구애의 상징이라는 거 알고 말씀하신 거죠?”
“그,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냐!”
“전 아가씨가 주시는 거라면 뭐든 좋은데. 그래도 이왕이면 목걸이로 주세요, 한시도 떼어놓지 않고 걸고 있을 테니까.”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비단실 같은 은발이 사르륵 흘러내려 오드리의 손등을 간질였다.
오드리는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행복하게 웃는 셰비언의 얼굴을 앞에 두고는 오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한다고 그가 들을 것 같지도 않지만, 기껏 나온 말이라는 게 겨우 이런 거였다.
“……아직 준다고 하지도 않았어.”
“그렇군요. ‘아직’이로군요? 그건 ‘언젠가는 꼭’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죠?”
“돌아가면 내가 좋은 사전을 골라줄 테니 공부 다시 해.”
“피이……. 하지만 전 지금 이 순간을 곱씹으며 기념하고, 아가씨가 제게 보석을 선물하기를 기다릴 거예요.”
“…….”
“저 기다리는 거 잘해요.”
오드리는 손을 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놓으라고 화내지도 못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겁이 났다. 이 소리가 밖에 들리면 어쩌지?
“난 얼마 전까지 라비린의 약혼녀였어.”
“알아요.”
“어렴풋하게나마 마음도 줬지. 그에게 파혼을 당하고선 억울하고 슬퍼서 몇날 며칠 울었어. 그런데 내가 그대에게 보석을 줄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난 몇 번이고 그대의 손을 밀어냈는데.”
셰비언이 소리 내 웃었다.
“그야 우리가 만난 건 운명이니까요.”
“뭐 그런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소릴 하고 있어.”
“아가씨, 우리가 만날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상상해 본 적 있어요? 일단 나는 용이고 아가씨는 인간이에요. 난 좀 더 잘 수도 있었고, 그 기차에 타지 않을 수도 있었고, 로렐라이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그 밤에 왕궁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또…….”
하나씩 꼽아본 우연이 다섯 개를 넘어갔다. 셰비언이 손가락을 접을 때마다 오드리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운명이니 뭐니 하는 달짝지근한 말이 낯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건 그냥 우연이야.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에 운명 아닌 게 없어. 그대와 워커 사이의 우연만 따져도 어마어마할걸? 하필 같은 시대에 있고, 같은 상단의 마법사이고, 숙소마저 같은 건물이지. 무엇보다 워커는 인세에 드문 천재 마법사라 그대의 가르침을 꽤 빠르게 받아들이기까지 해. 이 정도면 운명 아냐? 나보다 더하네!”
“와, 그렇게 들으니까 정말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제 마음이 아가씨를 향하는걸요. 이 수많은 우연 속에서 하필 아가씨에게만 심장이 뛰어요.”
“그건 그대의 마음이고. 내 마음을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묻잖아.”
“그게 사실은요…….”
셰비언이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오드리와 눈을 맞췄다. 오드리는 그의 시선이 저를 꽁꽁 옭아매는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거미줄에 산 채로 매달린 먹잇감의 심정이 이렇겠구나 싶었다.
“다 들리거든요.”
“……뭐가 들리는데?”
“저와 눈을 마주할 때마다, 아가씨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들려요.”
“…….”
“열기 어린 시선으로 저를 보는 게 느껴져요.”
“…….”
“그런데 어떻게 운명을 의심할 수 있겠어요? 수많은 우연 속에서 마주친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을 주었는데요.”
오드리는 그만 눈을 감았다. 더는 셰비언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을 감자 시각 대신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졌다. 나란히 앉은 셰비언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정말 곤란했다.
다 들리고 다 느껴진다는데, 스스로도 부정하기 힘든 마음을 다 들켰는데 아니라고 박박 우겨봐야 무슨 소용일까. 그게 마력의 계통에서 시작된 것이든 아니면 보기 좋은 얼굴 때문이든 간에, 이렇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고 손이 닿을 때마다 주변이 흐려지는데.
하지만 오드리는 아무리 강렬한 사랑이라도 평생을 갈 거라 믿지 않았다. 사랑 같은 건 잠깐 스쳐 가는 바람에 불과했다. 거기에 운명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싶진 않았다.
달뜬 눈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이야기했던 라비린의 선택이 어떠했던가. 아무리 친척들의 압력이 거셌다지만 그는 파혼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난 사랑도 믿지 않고, 운명 같은 말장난은 더더욱 믿지 않아. ……하지만 그대를 볼 때면 내 심장이 뛰는 것만은 사실이야. 잠깐만 빈틈이 나면 생각이 나고, 얼굴을 마주하면 마음이 풀리고, 체온을 느끼면 빈 줄도 몰랐던 가슴이 뭔가로 가득 찬 것 같은 기분이 들지.”
“그게 사랑이고 운명이라니까요.”
“끝까지 들어.”
오드리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떴다. 요정처럼, 태양처럼 웃는 셰비언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자 또 마음이 약해졌다. 웃음인지 아닌지 애매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머물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야.”
‘아가씨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야.’
워커가 셰비언에게 했던 말이 오드리에게서 똑같이 흘러나왔다.
“내겐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있고, 지금은 사랑에 집중할 때가 아냐. 내 목표를 위해선 사랑은 얼마든지 뒤로 미룰 수 있어. 어차피 사랑은 잠깐의 열병에 불과한 거잖아? 그대의 마음은 고맙지만, 그대도 나도 서로 모른 체하고 삼 년만 지나면 깨끗하게 잊어버릴 거야.”
“열병……. 삼 년이면 나아버릴 열병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래.”
오드리가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셰비언은 자신을 사로잡은 초록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아가씨, 용에게 일 년이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 아세요?”
“……글쎄? 인간보다야 짧은 기간이겠지. 용은 오래 사는 종족이니까.”
“아뇨, 그런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라요……. 용이 어떻게 일 년을 세는지 아시냐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용은 인간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한 바퀴 돌아도 일 년이 지났다고 하지 않아요. 인간들이 지금 역법을 어떻게 세고 있는 건지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예전과 비슷하다면 아마 인간의 기준으로 육십 년이 용의 일 년일걸요.”
오드리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 살. 몇 달 뒤에는 열여덟 살이 된다. 삼 년도 길게 느껴질 나이에 육십 년이라는 시간은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제 삼 년이면 아가씨는 세 번을 살고 죽어요. 이래도 열병이라고 하실 건가요?”
“그……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인간과 비슷하게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고 했잖아.”
“비슷하게 느끼긴 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슷한 거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 아가씨를 만난 걸로 모자라 서로 같은 감정을 가졌다는 건 제게 기적과 같은 일이에요.”
“…….”
“다른 종족을 사랑하지 마라, 어른들이 끊임없이 강조하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셰비언은 살그머니 손을 뻗어 오드리의 뺨을 톡 건드렸다. 만지면 사라지는 솜사탕처럼 보드라운 감촉과 체온이 손가락 끝에 남았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걸 알고 잠깐의 행복 뒤엔 긴 어둠이 자신을 기다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 비해 오드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기에, 이리저리 재고 따질 여유 같은 걸 부릴 수가 없었다.
“용의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러가네요. 할 수만 있다면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어 병에 가둬 버리고 싶어요.”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고, 그대는 분명 금방 내게 질려 버릴 거야.”
“글쎄요? 제가 아가씨에게 질릴 만큼 아가씨를 잘 알았던가요?”
“못 알아들은 척 말고. 그런 뜻으로 말하는 질린다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
“사랑에 눈이 멀면 검은 것도 흰 것으로 보인다고들 하죠? 아가씨가 죽기 전에 제 눈이 멀쩡해질 날은 오지도 않을걸요.”
“……나는 인간이야. 그대가 변하지 않아도 나는 변할 수 있어.”
“알아요. 알지만 사랑해 버린걸요. 어쩌겠어요,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인데…….”
셰비언이 속삭이는 사랑의 말이 안개처럼 오드리를 감쌌다. 오드리는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안락함을 다시 맛보는 기분에 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기분이 좋더라도 휩쓸리면 안 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 아냐. 지금은 내 인생 계획을 다 바꿔야 할지도 모를 중요한 내기가 걸린 상황이야. 사랑에 넋을 놓더라도 지금은 안 돼. 안 되는데……. 하지만…….’
머리로는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충동적으로 팔을 뻗었다. 셰비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금 전까지 마냥 부드럽기만 하던 손길은 거짓말처럼,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았다.
빈 줄도 모르게 비어 있던 가슴에 무언가가 소복소복 쌓였다.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하고, 전신으로 온기를 보내는 어떤 것. 그게 뭘까 자세히 관찰하기도 전에 서늘한 손이 뺨을 감싸고 타인의 입술이 숨결을 훔쳤다.
놀라 밀어내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오드리는 무의식중에 셰비언의 목에 매달려 그가 주는 자극을 탐욕스럽게 받아 삼켰다. 서늘한 몸이 따뜻하게 데워져 서로의 체온이 비슷해질 때까지, 계속.
섬세한 손가락이 목덜미를 장식한 레이스 사이를 파고들자 번득 정신이 들었다. 오드리는 더는 안 된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담아 셰비언을 밀어냈다.
“……여기까지야.”
조금쯤은 버틸 줄 알았는데, 셰비언은 오드리가 다 놀랄 정도로 깔끔하게 손을 떼어냈다. 오드리는 좀체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셰비언에게 기댄 채 멍하니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조금 빠르고 다급하게 뛰는 소리가 마치 북소리 같았다. 자신의 심장도 그와 똑같은 속도로 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미쳤지…….”
미쳤다. 돌았다. 사랑에 한눈팔 시기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먼저 팔을 뻗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라며, 서로 모른 척 잊어버리자고 해놓고 이 무슨 미친 짓이었는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입맞춤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셰비언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평소에 비해 퍽 따뜻해진 손이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어린애 달래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냐며 짜증을 내려는데, 그가 귓가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는 바람에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려 버렸다.
“이, 이……!”
아무리 삿대질하며 화를 내봐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데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로는 영 설득력이 없는 게 사실이다. 셰비언이 삿대질하는 손을 낚아채 쥐고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제가 말씀드렸나 모르겠는데, 이 풍경 자체가 제 기억의 재현이에요. 조금 전의 일은,”
“거기까지! 더 말 안 해도 알겠으니까 거기까지만 해. ……아으으! 아으으으으!”
오드리는 얼굴을 싸쥐고 끙끙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미친 짓을 했다는 자각이 뚜렷한데 더한 말을 들을 준비는 안 돼 있었다.
“……조금 전의 일은 기억 위에서 저지른 일이니까 이 풍경처럼 몇 번이고 돌려보진 못해요. 제 기억 속에만 남아 있겠죠.”
“진짜?”
“네에. 화가들은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을 덧씌우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저는 기억 위에 다른 기억을 덧씌울 재주가 없어서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물론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지울 수 없지만 그 정도는 이해하시고요.”
오드리가 눈에 띄게 안심한 모습을 보였다. 셰비언은 아쉬움 속에서도 오드리를 다시 끌어당겨 안고 그녀의 체온을 즐겼다. 아까 입을 맞출 때보다도 체온이 높았다.
“세상에 영원한 게 뭐가 있겠어요? 하늘에서 반짝이는 저 별도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바꾸는데요. 하지만 제가 변하기까지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거예요. 아가씨는 제가 변할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드리는 셰비언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쑥 솟은 나무 한 그루, 뾰족 지붕 하나 없이 뻥 뚫린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별이 총총하게 빛났다. 마치 남색 비단에 하얀 반짝이라도 뿌려둔 것 같았다.
이 아름다운 하늘과 따뜻한 체온에 감싸여 안락하게 머무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셰비언은 자신이 어떤 풍파에도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지켜줄 것이니,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편안히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런 걸로는 만족하지 못할 자신을 잘 알았다. 누군가는 부러워 어쩔 줄 모르는 삶을 살면서도 불만스럽게 허덕댈 스스로가 눈에 훤했다. 결국 그녀는 셰비언의 가슴을 밀어내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가씨?”
“이대로 그대에게 기대 버리면……. 그래, 분명 행복하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거야.”
“제 말이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않나요?”
“아니, 그래서가 아니야. 나는 사랑에 모든 걸 던지는 사람이 못 돼. 그대가 아무리 좋더라도 내가 포기한 걸 떠올릴 때마다 아쉬울 거야. 홀라당 넘어간 나를 탓하기보다는 그대를 원망하는 쪽이 훨씬 쉬울 테고.”
“…….”
“빛나는 감정에 눈이 멀었다가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더럽히고 싶진 않아. 그러니 그대의 구애가 아무리 기쁘고 고마워도 응해줄 수 없어. 미안해.”
셰비언은 한 걸음 물러서려는 오드리의 손을 낚아채 그녀를 멈춰 세웠다. 인생에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오드리의 말을 아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사랑을 포기할 당위가 되지는 않는다. 둘 다 가지면 왜 안 된단 말인가?
“아가씨, 저는 용이에요. 그런데 왜 제가 저한테는 의미도 없는 인간의 작위를 꾸역꾸역 받았을까요? 아가씨도 안 계신 브란젤을 최선을 다해 지킨 이유는요? 라비린 녀석이 성질 긁어대는 걸 참으며 타우레드 영지에서 한 달을 넘게 있었던 이유는 또 뭘까요?”
“…….”
“아가씨의 소원을 알아요. 국왕의 정전에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서 당당하게 나가는 게 아가씨의 꿈이었죠. 그 과정에 아르젠 남작은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지 않나요? 제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셰비언이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귀족식 인사를 선보였다.
“저를 이용하세요. 그래도 돼요.”
“……그대를 이용하라고?”
“네. 기꺼이 허락해 드릴게요.”
오드리는 제 손가락에 닿은 그의 입술이 싸늘하게 식은 걸 느꼈다. 그가 감추고 표현하지 않은 긴장이 맞닿은 손을 통해 흘러들어 왔다. 울컥, 이유 모를 화가 치밀었다.
“내가 그대를 어떤 식으로 이용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오드리는 그의 앞에서만은 나름 선인이고 싶었던 욕망을 끝내 내려놓았다.
“정말 그대의 사랑이 내 평생이 끝나도록 변하지 않는다면, 난 결혼은 내게 이득을 줄 사람과 하고서 그대에겐 끝없이 희생만 요구할 수 있어. 가끔 이렇게 그대의 공간에 들어와 남들 몰래 안아주고 입 맞춰주는 걸 미끼로 삼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겠지. 그대가 바라는 건 조금도 내어주지 않으면서, 철저히 도구로만 쓸 거야.”
“…….”
“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그의 아이를 낳고 살다가 죽어서 그의 곁에 묻히는 걸 빤히 보고만 있어야 한대도 참고 견딜 수 있다면, 그대의 말대로 이용하는 걸 생각해 보겠어.”
셰비언이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야말로 두렵지 않으세요? 인간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용이 아가씨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선언한 셈인데. 혹시 아가씨가 이득을 좇아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제가 좌절이라도 할 것 같으세요? 흠……. 그거 참 이상하네요.”
“……뭐?”
“아가씨가 라비린과 약혼했을 때도 저는 상관없다고 했었어요. 오히려 어차피 정략결혼인 걸 아는데 왜 내가 거기에 상처받느냐고 물었죠. 내가 원하는 건 아가씨의 마음뿐이라고요. 그 마음이 제게 있는데 좌절할 일이 뭐가 있고 애써 견딜 일이 뭐가 있죠? 아가씨, 결혼은 인간의 제도예요.”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예전에 들을 때는 허세도 아주 거하게 부린다는 생각 정도만 하고 무심히 흘려 넘겼던 말인데, 그가 용이라는 걸 확신하고 다시 들으니 그만큼 무서운 말이 없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
“나는 인간이라, 그대와는 다르게 빨리 변해. 그대를 계속 의식하면서도 라비린에게 어렴풋이 마음을 줬는데, 다른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않겠어? 하물며 남편이라면 더더욱. 그래도 그대는 좌절하지 않는 건가?”
“아가씨…….”
셰비언이 손을 뻗어 오드리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계속 밀어내는 오드리의 말에도 그는 마냥 웃고 있었다.
“조금 전에 얘기했죠, 우리는 운명이라고요. 제가 아가씨 곁에 있는데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완전히 줄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셰비언, 나는 인간이야.”
“어림도 없어요. 라비린에게 마음을 주셨다고요? 지금도 그런가요? 아까 제가 아가씨를 안고 입을 맞출 때, 그때도 그의 생각이 나던가요?”
“라비린과는 파혼했어.”
“그것만으로 덜렁 잘려나갈 마음이면 준 것도 아니죠. 제가 라비린을 싫어하고 질투하는 건, 아가씨가 그와 약혼했던 전적이나 이런 것 때문이 아니에요. 저는 모르는 아가씨의 상황과 속내를 그가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해서죠. 아, 생각만 해도 짜증나네요.”
오드리가 평판이 떨진 상태에서 악명까지 얻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로렐라이와 만탈락을 지키지 못하면 어떤 타격을 입는지, 그녀의 소원을 위해선 어떤 길을 가야 하고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
나름 인간사회에 잘 적응했다고 자부했던 셰비언이지만, 라비린과 대화하다 보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라비린의 표현에 따르면 셰비언은 보물을 쥐고도 쓸 줄 몰라 허공에 흩뿌리고 다니는 멍청이였다.
“그래도 라비린이 도움이 되긴 했어요. 이왕 얻은 작위를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아주 자세히 가르쳐 줬거든요.”
“……라비린이?”
“네에. 라비린이 말하길, 제 작위는 앞으로도 계속 올라갈 일만 있지 떨어질 일은 없다 하더군요. 그런 제가 아가씨께 공개적으로 구혼하며 마음을 표현하면, 대체 어떤 남자가 감히 아가씨의 곁에 있겠다 나설까요?”
라디아타가 그 좋은 예였다. 사교계의 꽃이자 브란젤의 황금장미로 가문도 명성도 미모도 성품까지도 빠지는 게 없는데, 왕자가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자 그 많던 구혼자가 싹 사라졌다.
라비린은 셰비언이 왕자가 했던 것과 같은 효과를 내려면 지금과 같은 실적을 계속 유지해야 할 거라며, 마법을 너무 많이 써서 몸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했다. 마법의 주인인 셰비언에겐 우습게 들릴 뿐인 걱정이었다.
“물론 아가씨께서 직접 상대를 고르실 수도 있죠. 하지만…….”
셰비언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황금빛 실이 뻗어 나와 주변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범위가 넓었다. 별빛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던 설원은 이제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 차 울렁거렸다. 마법망에 이슬처럼 맺힌 마력들이 바람에 차르르 흔들리자 영롱한 방울 소리가 바람 소리를 대신해 울렸다.
“저보다 아가씨에게 이득이 될 누군가가 과연 있을까요? 인세에 다시없을 마법사 이외의 대체 누구요?”
“…….”
“바일런 섀덤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 한, 그런 사람은 없어요.”
오드리는 차마 셰비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눈 닿는 곳 전부를 황금빛 마법망으로 빛나게 하고서도 그는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의 공간에서 벌이는 일이라지만 대단한 솜씨였다.
“……그대의 자신감이 이해가 가.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내가 곁에 둘 사람은 그대뿐이라는 거군.”
“바로 그거예요.”
“나 참…….”
오드리는 혀를 차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셰비언이 기꺼이 그 손을 받아 쥐고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화인이라도 찍히는 듯 닿은 자리가 뜨거웠다. 손등에서 시작한 열기가 몸을 휘돌고 머리를 데웠다.
“난 그대를 이용할 거야.”
“얼마든지요.”
“연인으로서의 대우를 해주지 않을 수도 있어.”
“지금 아가씨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저도 알아요. 그걸 뒤집으려면 연인으로서의 대우를 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도록 제 입지를 다져야 한다는 거겠죠.”
오드리는 셰비언의 변모에 놀라 입을 벌렸다. 라비린이 한 달 동안 뭘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까지 변하는가 싶을 정도였다. 셰비언이 그런 그녀와 눈을 맞추고 사르르 웃었다.
“지금 브란젤은 괴물로 몸살을 앓고 있죠. 제가 없는 동안 난리도 아니었을 거예요. 그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저뿐이니, 입지를 다지는 건 쉬운 일이에요. 아가씨는 금방 제 에스코트 신청을 받아주게 되실걸요.”
“아아……. 그래, 괴물 사태가 있었어. 왕궁마법사도 치안대도 한계에 다다른 것 같으니, 이 시점에 괴물 사태를 해결하면 그대의 명성은 순식간에 하늘을 뚫겠군. 그런데 해결 방법은 있는 건가? 이전에 브란젤에 있을 때도 괴물을 잡기만 했다면서.”
“타우레드 영지에 있는 동안 수확이 좀 있었어요. 같이 갔던 왕궁마법사들이 돌아오면 바로 시작할 테니, 기대하셔도 좋아요.”
“알겠어, 한껏 기대하고 있도록 하지. 아,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보여줄 게 있었어……. 여긴 정말 아름답고 좀 더 오랫동안 있고 싶지만,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다음에는 기억의 재현 따위가 아니라 진짜 셰비언 절벽을 보여드릴게요.”
“그래, 다음에는.”
그 다음이 언제가 될지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의견차가 조금, 아니 상당히 있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으니 서로 알 리가 있나.
오드리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녀는 익숙한 정원에서 셰비언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잠시 잊고 있던 한기가 손목과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콜록!”
셰비언 성벽 꼭대기에서 그랬듯 숨을 깊이 들이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 오드리는 다급히 몸을 돌리고 마구 기침했다. 젤리처럼 묵직하게 몸을 감싸던 마력이 없자 몸이 너무 가벼워 적응이 안 됐다.
“아가씨!”
“쿨록, 쿨록! 그냥 사레가, 사레가 들린 거야. 쿨록!”
오드리는 기침하는 와중에 슬쩍 제 차림을 살폈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옷은 단정했다. 셰비언의 공간에서 모양을 잃었던 버슬도 드레스 주름도 현실에선 멀쩡했다. 머리도 화장도 멀쩡하겠구나, 하고 생각하자 마음이 좀 놓였다.
“하아, 하아……. 이디케, 별거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돼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보지 않아도 돼. 시중은 됐고, 가서 내 침대 머리맡에 있는 보석함 좀 가져와.”
이디케 입장에서야 오드리가 셰비언의 손을 잡고 서서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요란하게 기침을 하는 거니 걱정이 안 될 수 없겠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일이 설명해 주기엔 자리가 좋지 않았다.
차마 입으로 불평은 못해도 꿈지럭대는 걸로 불만을 표시하던 이디케는 오드리에게서 한 번 더 재촉을 받고 나서야 무거운 걸음을 뗐다. 바로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려던 하녀들은 오드리의 제지를 받고 물러났으니, 테이블 주변엔 오드리와 셰비언 둘만 남았다.
“아마 들어서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타우레드 영주성에서 괴물들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어. 역시 내 마력 때문인 건가?”
“네.”
“하지만 수확제 이후에 그대가 내 마력 문제를 해결해 줬었잖아. 그리고 브란젤에 돌아와서는 괴물에게 쫓긴다거나 하는 일을 겪은 적이 없어. 그런데도 내 마력 탓이라고?”
“사실이 그런걸요. 여기서 멀쩡했던 거야 괴물이 아가씨께 가기 전에 잡은 거겠죠.”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물었는데 대답이 너무나 즉답이었다. 오드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자꾸 손이 떨리는 게 새삼 느낀 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셰비언이 그녀의 찻잔에 각설탕 하나를 떨어뜨렸다. 퐁당. 자그맣고 흰 토끼가 금세 제 형체를 잃고 녹아내렸다. 입맛에 딱 맞게 설탕을 탔던 오드리가 질색을 했다.
“뭐 하는 짓이야?”
“그렇게 안 좋은 표정 짓지 마시고, 단 거 먹고 힘내시라고요.”
“말로 해!”
“네. 다음엔 말로 할게요. 그런데 아가씨, 사탕에 개미가 꼬이면 그건 사탕의 잘못인가요, 개미의 잘못인가요? 아무리 사탕에서 단내가 났더라도 사탕이나 개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인데요. 아가씨가 일부러 마력을 뿌리고 다닌 것도 아니거니와 아가씨의 마력이 원인이 돼서 사람들이 괴물로 변한 것도 아니에요. 엉뚱한 곳에 책임감 느끼지 마세요.”
오드리의 귀가 활짝 열렸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모른다며 자신을 탓하던 미묘한 죄책감이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제가 궁금한 건 다른 쪽이에요. 수확제 때 아가씨의 사탕그릇은 멀쩡했어요. 뚜껑이 조금 열려 있었던 걸 제가 알고 나중에 잘 닫아뒀단 말예요. 그런데 왜 금이 갔을까요?”
“금이 갔다고? 또 균형에 문제가 생겼단 말이야?”
“아까 손을 잡았을 때 알았어요. 또 마력이 새고 있더군요. 자세한 건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너무 걱정은 마세요, 몸이 마력을 감당하기에 벅차서 일부러 흘리고 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어?”
“네. 지나치게 강한 마력을 타고 난 용은 육체가 성숙되기 전에 가끔 그런 일을 겪어요. 나중에 좀 더 몸이 자라고 그릇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지죠.”
“난 인간인데? 더 자랄 것도 없고 마법사도 아니니 커질 그릇도 없어. 마력은 생명력이라며, 계속 그렇게 마력을 흘리면 위험한 거 아닌가?”
“보통 인간일 경우엔 그렇겠지만 아가씨 곁에는 제가 있잖아요. 당장 큰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예요. 괴물 사태가 있어서 빨리 알았으니 그것도 다행이고요.”
셰비언의 관심은 오드리에게로 급격히 기울었다. 브란젤을 위협하는 괴물 사태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좋은 구경을 시켜드리겠다고 했는데, 그건 좀 뒤로 미뤄야겠네요. 치안대며 왕궁마법사며…… 이만큼 버텼으면 앞으로 며칠 더 버티는 것쯤이야 알아서들 할 테고. 아가씨, 저 내일 또 와도 되죠?”
오드리는 셰비언의 말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살짝 기분이 들뜨는 걸 느끼고 당혹했다. 당장 제 몸에 문제가 없다면 희생자가 있는 쪽을 먼저 해결하게 하는 게 마땅한데,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야단은 못할망정 귓가가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내가 미쳤나……. 왜 이러지?’
뭔가 잘못 먹은 것처럼 입도 잘 안 떨어졌다. 오드리는 지나치게 달콤해진 차를 거푸 들이켜며 얼른 이디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셰비언과 단둘이 앉아 있는 게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다행히 이디케는 그녀의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고, 오드리는 제 얼굴이 푸슬푸슬 풀어지기 전에 셰비언에게 알룬드의 목걸이를 보여줄 수 있었다.
“처음 담수저장고에 빠져 죽은 하녀가 쥐고 있었어. 족히 사흘은 시체와 함께 있었겠지. 라디아타가 갑자기 보석이 무거워졌다며 기겁을 해서 내가 나중에 따로 그대에게 보여주려고 가지고 있었어.”
알룬드의 목걸이는 여전히 이름처럼 아름다웠다. 푸른 다이아몬드에 비친 햇살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하나 셰비언은 알룬드의 목걸이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아가씨를 위해 특별히 골라낸 보석인데……. 인어의 마력이 잔뜩 담겼네요. 이럴 바엔 먼저 마법이라도 걸어놓을 걸 그랬어요.”
“인어의 마력이라……. 그러고 보니 괴물이 된 하녀가 꼭 물고기처럼 변하긴 했지. 인어의 마력이 뭐 어때서 그렇게 질색을 해?”
“인어는 기분 나쁜 종족이에요. 성체는 다른 종족의 몸에 알을 까고, 새끼는 기생충처럼 숙주의 마력을 먹어치우며 성장하죠. 설령 알을 까지 않더라도 죽은 시체에서 흘러나온 마력은 통제되지 않는 용의 마력과 같아 주변을 죄다 망가뜨려요. 아가씨의 사탕그릇이 무사하면 그게 더 이상했겠어요.”
결국 괴물이 꼬인 건 다 이 목걸이 탓이었다는 말이었다. 목걸이를 내내 머리맡에 두고 지냈던 오드리는 떨떠름한 기색을 영 감추지 못했다.
“그럼 이제 어쩌면 좋은데?”
“어쩌긴요. 이 물건은 인간들 손에 안 들어가는 게 좋아요. 있어봐야 혼란밖에 부르지 않을 테죠. 나 참, 타우레드 영애는 왜 이런 게 있다고 알려주질 않은 건지…….”
셰비언이 연신 혀를 차며 목걸이를 챙겼다. 오드리는 딱히 아낀 적도 없던 목걸이가 제 손을 떠나는 걸 아쉽게 바라보았다. 라디아타에게 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서운했다. 그런 기색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셰비언이 말을 보탰다.
“다른 보석을 선물해 드릴게요.”
“필요 없…….”
“보석을 선물하는 건 구애의 표시죠. 이번에는 제대로 이름을 새겨서 보낼 거예요.”
“……필요 없다니까.”
“사탕그릇에 금이 간 원인을 알았으니 또 올 핑계가 없잖아요. 선물이라도 들고 와야죠.”
오드리의 귀가 또 빨갛게 변했다. 이디케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둘 사이에서 오가는 분위기를 살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뿐인데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치 갓 연애를 시작한 풋풋한 연인 같았다.
더 있을 핑계가 없다면서도 셰비언은 좀처럼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더 찾아오는 손님도 없겠다 오드리 역시 셰비언을 쫓아낼 생각이 없었으니,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디케만 속이 터졌다. 내버려 뒀다간 저녁 식사까지 하고 갈 기세라, 이디케는 대체 무슨 핑계를 대는 게 좋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디케가 적정한 핑곗거리를 찾기도 전에 릴리가 돌아왔다. 아기를 안은 여자 두 명을 대동한 채였다.
여자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차림이 남루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축복을 받으러 간다면 나름 차려입기 마련인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치맛자락엔 음식 얼룩이 있었고 소매는 너덜너덜했다. 목깃은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찌든 때로 너저분했다.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기를 안은 팔은 가늘었고 뺨은 움푹 들어가 광대뼈가 도드라졌다. 그을린 피부엔 버짐이 조금 피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로 보나 제대로 먹지 못한 몸이었다.
오드리가 이제껏 만탈락에서 보아왔던 아기 손님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행색이 초라한 건 둘째치고, 기가 죽을 대로 죽어서 주변의 풍경에 완전히 매몰된 사람들이었다. 귀족가에 들어왔다는 흥분과 기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드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이들을 등 뒤에 매달고 릴리가 깊게 몸을 숙였다.
“아가씨, 아기 손님이 왔습니다.”
“……그렇군. 환영하네.”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다. 아기 손님의 머릿수 둘을 채웠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오드리는 하녀들이 재빨리 내놓은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 제 앞에 무릎 꿇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아기를 주기 싫은 듯 움찔거렸지만, 옆에 선 릴리가 옆구리를 찌르자 견디지 못하고 아기를 내밀었다.
“추, 축복을 부탁드, 드립니다.”
오드리는 익숙하게 아기를 받아 들었다. 누런 포대기에 싸인 아기는 머리를 가누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애였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이 안아 들었으니 빽빽 울 법도 한데, 도리어 검은 눈을 크게 뜨고 오드리를 빤히 바라보다 배시시 웃었다.
“아기가 아주 순하군. 어머니를 고단하게 하지 않는 착한 아이야.”
여자는 오드리가 제 아이에게 축복을 내리는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지켜보았다. 향긋한 향유를 묻힌 천으로 아기의 얼굴을 닦고 이마에 입 맞추는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데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오드리에게서 아기를 돌려받고 나서야 눈에 띄게 안심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기가 아주 순해서 나도 쉬웠다네.”
오드리가 미소를 지으며 아기의 뺨을 톡, 건드리자 아기가 손을 뻗어 오드리의 손을 냉큼 붙들었다. 아기 특유의 뜨거운 체온이 오드리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찬물에 씻은 손이라 놀라 빼려 했지만 미간에 주름까지 만들며 용을 쓰니 그냥 빼기가 미안했다.
“붙임성도 아주 좋군. 아가야, 넌 어디서 뭘 하고 살든 배곯을 일은 없을 것 같구나.”
“죄, 죄송합니다…….”
여자가 아기의 손을 냉큼 오드리에게서 빼앗더니 아기를 포대기로 다시 꼭꼭 싸서 품에 안았다. 그 동작에 어찌나 긴장이 넘치는지, 마치 괴물에게서 아기를 지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오드리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건 머릿속에 있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억지로 데려왔군.’
오드리는 릴리가 결코 평화적인 수단으로 아기 손님을 데려온 게 아니라는 걸 짐작했다. 돈도 빌려주었겠다, 아마 할 수 있는 협박이란 협박은 다 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경계하는 게 설명이 안 됐다. 뭐, 별로 상관은 없었다.
“축복을 내렸다고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먹을 것을 준비해 두었으니 먹고 가게. 돌아갈 때 양껏 싸줄 테니까 아껴먹을 생각 말고 배불리 먹도록 해. 그동안 아기는 하녀들이 봐줄걸세.”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어 하던 여자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몹시 망설였으나,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닭고기 스프를 비롯한 명절음식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홀린 듯 식탁에 가 앉는다.
오드리는 곧바로 손을 씻고 다음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영 다른 쪽에 눈길이 꽂혀서 오드리가 손을 내미는 줄도 모르다가, 릴리의 눈총을 받고서야 화들짝 놀라 오드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아이를 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드리의 눈치를 보면서도 셰비언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고 흘끔거렸다. 그러다 긴장으로 마른 입술에 잔뜩 침을 묻히고 간청했다.
“저, 아가씨……. 제, 제가 가, 감히 부,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해 보게.”
“저기 계신 저 신사분……. 아르젠 남작님이 마, 맞으시죠? 남작님께 축복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드리가 하는 양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셰비언이 놀라 반쯤 몸을 일으켰고, 오드리도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잊었다. 거기서 뭔가 매달릴 만한 여지를 느꼈는지, 여자는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며 셰비언에게 다가와 그의 옷자락을 쥐고 매달렸다.
“제발, 남작님! 제 아이가 괴물이 되지 않게 축복해 주세요!”
열심히 스프를 먹고 있던 다른 여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셰비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곧 스푼을 내던지고 함께 애걸하기 시작했다.
괴물이 되지 않게, 아이에게 축복을!
그들이 특별히 담이 크고 용감무쌍해서 남들은 다 도망친 구역에서 사는 게 아니었다. 아무도 살길 원하지 않으니 그만큼 집값이 싸서, 이 겨울에 길에서 얼어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거기에 들어가 사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그들의 공포심은 다른 브란젤 시민들의 몇 배에 달했다.
바람을 타고 유황 냄새가 번질 때마다 오늘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와 내일은 어떨지 모른다는 공포가 함께 요동쳤다. 마음 같아서는 아기만이 아니라 자신의 안녕 역시 부탁하고 싶겠지만, 여긴 귀족가였고 신년제에 축복을 받는 건 아기뿐이었다.
오드리는 애절한 손길을 떨쳐 내지 못하고 곤란해하는 셰비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볼품없는 빈민에게 무시당했다는 반감이 든 것도 잠시, 곧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셰비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셰비언, 축복해 주지 그래?”
“네에? 제가요? 제가 저 아기들을 축복하라고요? 저는…….”
“그대가 남자라는 건 알아. 하지만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는데 해줄 수도 있지. 아니면 역시 신년제에 아기 손님을 맞는 건 여자의 일이라 부끄러워?”
“그럴 리가 있나요. 하지만 제가 돌보던 아이들은 다 죽었어요. 숨 멎은 어린 시신들이 아직도 눈에 생생한데 제가 어떻게 아기를 축복해요?”
“그렇다는군. 어떻게 생각하나?”
오드리가 갑자기 여자들에게 물었다. 여자들은 돌보던 아이가 다 죽었다는 셰비언의 말에 크게 놀랐으면서도, 도저히 놓을 수 없다는 듯 셰비언의 옷자락을 쥐고 버텼다.
“괜찮은가 본데? 이리 와, 축복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셰비언을 끌고 오드리는 차근차근 축복의 절차를 설명했다.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향유를 묻힌 깨끗한 천으로 아기의 얼굴을 닦아준 뒤 건강하길 축원하며 이마에 키스를 하면 된다. 간단하지만 아기를 능숙하게 안고 울지 않게 달래는 등의 요령이 필요한 일이었다.
셰비언은 체념한 듯 오드리가 가르치는 대로 급하게 절차를 배웠다. 그리고 아기를 안아 들었는데, 거기서 끝이었다. 그는 아기의 얼굴을 닦아주기는커녕 불편해하는 아기를 고쳐 안지도 못했다.
아기가 막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 오드리가 냉큼 아기를 빼앗아 안고 얼렀다. 아기는 금세 얌전해져 방긋 웃었다. 오드리는 한 팔로 아기를 안고 셰비언에게 턱짓해 향유에 적신 천을 들고 오게 했다.
“영 미숙해서 아기를 맡길 수가 없군. 자, 내가 안고 있을 테니 아기의 얼굴을 닦아줘.”
“이거 참,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셰비언이 쩔쩔매면서 아기의 얼굴을 닦아냈다. 그러나 축원하며 이마에 입 맞추기는 도저히 못 하겠다고 버티니, 결국 그건 오드리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절차를 끝마치고는 다시 셰비언을 불러 작게 속삭였다.
“하는 척만 해도 좋아. 저 아기 엄마들이 안심할 수 있게 가볍게 손만 대.”
“꼭 해야 하나요……?”
“이용해도 좋다며? 그건 그냥 말뿐이었나 보지?”
이렇게까지 나오면 어쩔 수가 없다. 셰비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아기의 작은 손을 쥐고 키스했다. 지나치게 어리고 약한 생명체의 체온은 그에겐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뜨거워 어쩐지 만지기가 겁났다.
“……아프지 말고 죽지 마라.”
“보호 마법 같은 거라도 있으면 걸어주지 그래?”
“이렇게 어린애한테 그런 걸 어떻게 걸어요? 큰일 나요.”
“있긴 있단 말이네. 릴리!”
릴리가 기다렸다는 듯 얇고 넙적한 상자를 가져왔다. 뚜껑을 열자 장식도 세공도 없는 은반지 약 이십여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기 손에나 맞을 법한 작은 반지였다.
“보석은 마법을 담기에 가장 좋은 매개라면서? 아쉽게 보석은 아니어도 은 정도면 그럭저럭 쓸 만하겠지. 보호 마법 좀 걸어봐.”
“음……. 아가씨, 제가 오늘 올 줄 아셨어요?”
“그럴 리가. 이건 내가 만탈락에서도 매년 아기 손님을 맞을 때마다 준비하던 거야. 올해는 조금 특별한 반지가 되겠지만. 자, 빨리.”
피할 핑계가 없었다. 셰비언은 은반지를 하나 쥐고 마법을 걸었다. 보석도 아니고 그냥 얄팍한 은반지엔 딱히 강한 마법을 걸 수가 없어 물리적 충격을 약간 막아줄 정도의 보호막을 만드는 마법을 걸었다. 반지 안쪽에 마법수식이 음각으로 새겨졌다.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마법 반지를 얻은 여자들을 감격했다. 준비된 음식을 먹는 것도 잊고 아기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나중에 정 급한 때가 오거든 팔아서 식량을 사게나. 금은 아니라도 제법 순도 있는 은을 썼으니 나름 값이 나올걸세. 마법이야 금방 사라지겠지만 그 아르젠 남작이 직접 마법수식을 새겨준 반지라고 소문내고 팔면 은값보다 더 나올지도 모르지.”
“네, 네……! 감사합니다, 아가씨!”
사정이 어려워지면 팔아도 좋다고 대놓고 말하는 오드리의 배려가 여자들에겐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투박하고 특징이 없는 반지라 마법이 걸렸다는 말만 하지 않으면 누군가 탐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오드리는 처음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들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셰비언 덕분에 돈과 은반지만으로는 낼 수 없었을 효과가 났다.
“그리 고마우면, 소문 좀 내주게.”
“네?”
“아르젠 남작이 오드리 헨젤과 함께 있다고 말해주게. 아기에게 축복을 해줬다고도.”
여자들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셰비언의 눈치를 봤다. 말을 전하는 거야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마는, 아까 오드리가 말했던 것처럼 아기 손님을 맞는 건 일반적으로 귀부인과 귀족 영애의 일이었다. 멀쩡한 귀족 남성인 셰비언이 여자나 하는 일을 했다는 소문이 나면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게 확실했다.
‘지금 누구 눈치를 보는 건지 모르겠군.’
오드리가 셰비언을 툭 건드렸다. 여자들이 제 눈치를 보거나 말거나 오드리만 쳐다보던 셰비언이 즉시 반응하여 해사하게 웃었다.
“아가씨, 왜요?”
“셰비언, 내일 아침에 날 데리러 와. 왕궁에 갈 건데 에스코트 해줄 남자가 필요해.”
“제게 에스코트를 맡기시겠다니 굉장한 영광이네요. 새벽부터 준비해서 기다릴게요.”
“오후에는 나와 함께 이 정원에 있자. 괜찮지?”
“그럼요.”
여자들은 오드리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일 것 같은 셰비언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오드리의 평판은 여전히 바닥이었고 요즘엔 괴물을 끌고 다니는 마녀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돌건만, 괴물 사태를 해결할 유일한 마법사와 오드리 사이에서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는 장님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냉큼 오드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 말씀만 하세요.”
오드리가 흐뭇하게 웃었다. 릴리의 협박에 못 이겨 도살장 끌려오듯 헨젤가로 왔던 여자들은 오늘 집을 비우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의 말대로 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