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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1. 셰비언 (30/62)

chapter 28-1. 셰비언

「멜브란트 북부의 셰비언 성벽에서는 백 가지가 넘는 보석을 캘 수 있다. 이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광물학자가 수십에 이르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한 달 사이 해가 바뀌었고, 뒤늦게 찾아온 겨울이 제법 겨울 유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날이 본격적으로 추워지면서 오드리가 일하는 집무실의 벽난로는 매일 한 무더기의 장작을 삼켰는데, 그러고도 오드리는 매양 춥다고 난리였다.

“춥다니까! 추워!”

“아이 참, 벽난로를 이렇게 때는데 계속 춥다 하시면 어떡해요? 에이, 이거라도 두르고 계세요.”

“이놈의 털가죽! 무거워!”

오드리가 가죽의 무게에게 진저리를 내거나 말거나, 다이앤은 부득불 그녀에게 회색과 검은색 털이 부숭부숭한 담비가죽 숄을 덮었다. 보통이라면 멋진 털 코트를 만들 만한 가죽이지만, 오드리에게 오는 바람에 웬 털가죽 숄이 됐다.

보기엔 좀 나빠도 털가죽은 따뜻했다. 오드리는 싫다고 하던 건 까맣게 잊은 듯 어깨를 움츠리고 숄을 끌어당겨 몸을 꼭 덮었다. 다이앤이 불가에서 따뜻하게 데워오기라도 했는지 금세 체온이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몸통뿐, 손발의 한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실내복에 맞지 않게 털부츠를 신고 장갑까지 꼈는데도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고 손가락이 곱아 펜이 자꾸 미끄러졌다.

“난로를 가져올까요?”

“연기 냄새 싫어.”

요새 다이앤은 오드리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날이 좀 추워지긴 했어도 벽난로를 어마어마하게 때는데 왜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만탈락에서 오래 지내서 그렇다기엔 만탈락에서 나고 자란 자신은 옷을 조금 두껍게 입은 것만으로 그리 힘들지 않았다.

주변에 물어보니 올해 겨울은 평소보다 늦게 찾아왔고 그나마도 따뜻한 편이라는데, 올해 이 모양이라면 앞으로는 어떨지 까마득했다. 눈이라도 오면 침대로 식사와 일거리를 죄다 나르라 할지도 몰랐다.

“숯을 넣은 화로예요. 이건 연기 안 나니까 책상에 둘게요.”

“오, 그나마 낫네. 젠장, 왕궁의 온실이 여기보다 따뜻할 거야.”

“당연히 그렇겠죠. 남부의 나무와 꽃이 그렇게 잘 자랐는데요.”

“온실은 마법으로 난방하지? 그런데 실내난방은 왜 금지인 거야? 어차피 여름에는 마법도구로 냉방하잖아.”

“그야 마법으로만 난방하다가 마법이 갑자기 사라지면 그냥 얼어 죽으니까 그렇죠. 매년 여름마다 냉방 마법도구가 망가져서 더위 먹고 쓰러지는 사람이 종종 나오는데 어떻게 실내난방을 허락해요? 온실에도 그래서 상주 마법사가 붙어 있는 거잖아요.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자요, 목도리도 하세요.”

오드리는 목도리를 둘둘 말고 장갑을 벗었다. 연기가 나지 않는 숯 화로에 손을 갖다 대고 온기를 느끼니 그나마 좀 나았다.

“워커는 요새 뭐 한대? 따로 하는 일 없지? 그럼 온도조절마법도구 개량 좀…….”

“아가씨! 그거 불법이에요!”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불법 소리부터 하니? 그냥, 기존 것보다 온도의 범위를 좀 많이 넓히라고 하려 한 것뿐인데.”

“그게 불법이죠…….”

당연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었다. 오드리도 알았다. 오드리는 자신에 비하면 한결 가볍게 입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다이앤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그래, 워커에게 시켜봐야 그놈의 강철새 만든다고 바빠서 봄이나 되어야 들여다보겠지. 요새는 사하스바티까지 데려다가 같이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는다며?”

“네. 그냥 그 안에서 먹고 자고 하는 모양이에요. 왕립 기계 연구소에서 왜 출근을 그쪽으로 하냐고 항의가 들어오고 있긴 한데……. 어쩌죠?”

“뭘 어쩌긴 어째?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공문이나 써 보내라고 해. 그거 보고 연구소로 가는지 마는지는 사하스바티 본인이 결정하겠지. 참, 그건 꼭 로렐라이에서 전해줘. 혹시 해고당하면 로렐라이에서 고용해 준다는 말을 덧붙여야 하니까.”

오드리는 속이 빤한 말을 하며 다이앤이 챙겨온 신문을 폈다. 이젠 익숙해진 사망자 명단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매일 늘어나는 명단의 길이가 한도 끝도 없이 우울했다.

‘그놈의 괴물.’

계속되는 독촉에도 셰비언은 아직 브란젤로 돌아오지 않았다. 브란젤은 왕궁마법사와 치안대의 과로와 희생으로 나름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매일 서너 명씩 발생하는 희생자가 있긴 해도, 수확제 때와 비교하면 대단한 발전이었다.

문제는 투입되는 인력이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타우레드로 간 인원을 제외하고 본래 정원의 사분의 삼만 남아 있던 왕궁마법사는 절반 가까이가 쓰러졌고, 치안대의 소모도 상당했다. 그저께는 치안대원 중에서도 처음으로 사망자가 나왔다. 부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다이앤, 편지지를 가져와. 라디아타에게 편지를 써야겠어.”

“레이디 타우레드는 아직 편지 한 통 안 보내셨는데, 아가씨가 먼저 보내시게요?”

“누가 먼저인 게 그리 중요해?”

“그냥 서운해서 그래요. 서운해서.”

“계속 그런 식으로 내 말에 꼬투리를 잡으면 그만 이디케를 불러올 거야.”

다이앤이 입을 꾹 다물고 편지지를 대령했다. 이디케는 아직도 데멘사에 붙들려 오드리에게 돌아오질 못하고 있었다. 파혼까지 한 마당에 왜 계속 하녀를 빌려주느냐는 주변의 핀잔이 있긴 했지만, 이제와 빼내기엔 산트렘 쪽으로 깔리는 전보선 문제가 너무 중요했다.

오스미다 왕비의 자금력과 동원력에 우편국의 지원이 더해지며 전보선 작업은 거의 국책 사업을 연상케 하는 수준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올해 상반기가 지나기 전에 브란젤과 산트렘을 연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는 이디케 이름만 나오면 흥분하더라. 대체 왜 그렇게 이디케를 싫어해?”

“이디케가 싫은 게 아니라 아가씨 옆을 독점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말은 잘하지.”

다이앤의 입이 오리발처럼 튀어나왔다. 오드리는 그런 다이앤을 모른 체하고 편지지에 집중했다. 의례적인 인사말과 근황 등을 적다 말고 문득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데멘사의 일을 하는 데에 계속 라비린의 동의를 구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라비린이 아무리 바지사장이라고는 하나 상당한 돈을 투자한 투자자인데 그대로 데멘사를 꿀꺽해 버릴 위험도 있었다.

“데멘사 명의를 라비린에게 주지 말 걸 그랬어.”

“그땐 이렇게 될 줄 몰랐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멍청했지. 내 것은 내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 이게 무슨 꼴이야…….”

하나도 놓치기 싫어 아등바등하다가 정작 잡아야 할 걸 잊어버렸다. 로렐라이를 국왕에게 팔아넘기는 한이 있더라도 전보를 지켰어야 하는 걸 이런 식으로 돌려받다니.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편지지를 쭉 찢었다. 손이 충분히 녹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지 글씨가 영 안 나왔다. 그렇게 몇 장이나 되는 편지지를 낭비하고 있는데, 릴리가 오드리 못지않게 뺨이 수척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아가씨, 신년제 준비는요?”

어찌나 급한지, 인사고 뭐고 싹 빼버리고 대뜸 본론부터 묻는다. 오드리의 안색이 순식간에 두 배는 해쓱해졌다.

신년제라 하면, 해가 바뀌고 첫 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에 벌어지는 축제였다. 한 해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제의가 집집마다 거행되고, 가족끼리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그리고 채 한 살이 되지 않은 아기에게 일 년의 건강과 복을 빌어주는 풍습이 있다.

이 마지막 축복이 신년제의 핵심이었다. 오래전 신의 이름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신전의 신관들이 축복을 해주었다던데, 이제는 하티의 신전 말고는 신전이랄 게 없으니 축복을 내리는 주체도 자연히 바뀌었다.

귀족의 영지에 사는 영민이라면 해당 영지의 귀족에게 아기의 축복을 받고, 자유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장에게 축복을 받았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는 촌장, 혹은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축복을 내렸다.

브란젤에서는 국왕부처가 대표로 뽑힌 아기에게 축복을 내릴 테지만, 그 외에도 마음에 찍어두었던 귀족에게 찾아가 축복을 비는 일이 아주 흔했다. 보통 아낙이 아이를 안고 오는 만큼 귀부인과 귀족영애가 축복을 내렸다.

평소엔 굳게 닫혀 있던 귀족가의 정문이 아기를 데려온 이들에게만큼은 활짝 열리는 날이었다. 근래에 장례를 치른 게 아니라면 축복을 내려줄 만한 귀부인과 영애가 없더라도 여는 게 보통인지라, 헨젤가도 신년제 날 만큼은 항상 정문을 열었다.

올해는 오드리가 아기 손님들을 맞아 축복을 내려줘야 했다. 만탈락에서 수도 없이 했던 일이니만큼 의식 자체는 아주 익숙하지만, 여기는 만탈락이 아닌 브란젤이고 오드리는 추위를 지독하게 많이 탔다. 종일토록 정원에 앉아 오매불망 사람을 기다릴 생각을 하면 한숨부터 났다.

마침 연애를 시끄럽게 해놓고 파혼을 한 탓에 평판도 바닥이요 악평도 자자하니, 오드리는 사심을 듬뿍 담아 축복 일정을 대단히 짧게 잡았다. 늦은 아침에 열었다가 점심때가 되기 전에 닫을 예정으로,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이디케가 없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릴리 네가 있었지…….”

“아가씨. 브란젤에서는 귀부인과 영애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는가를 두고 경쟁한다는데, 오드리 헨젤은 축복도 한 번 못 내렸다고 비웃음 당하고 싶으신 거예요?”

“아기 손님 숫자로 서로 겨룬다고? 그런 문화가 있었어?”

랄리우스와 경쟁할 만한 귀족이 없는 만탈락에서 나고 자란 다이앤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다이앤이 잽싸게 릴리의 옆에 가서 섰다. 오드리는 둘로 늘어난 적군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얘들아, 생각해 봐. 나에게 자식의 축복을 받고 싶은 부모가 있겠니? 요즘 내가 어떻게 불리는지 너희도 다 알잖아.”

“아, 괴물을 끌고 다니는 마녀인가 뭔가 하는, 그거요? 애들이 시장통에서 노래도 부르고 다니던데. 까만 피부의 마녀, 브란젤과 타우레드에 재앙을 불렀네 어쩌고 하는 거? 그게 뭐 어때서요? 그 따위 노래 좀 돈다고 아가씨가 질 것 같아요?”

릴리가 삐딱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이 경쟁은 수만 많으면 그만인 거잖아요? 그렇죠? 손님의 격 같은 건 따질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릴리? 표정이 무섭거든? 지금 무슨 생각하니? 나는 그런 우스운 경쟁에 끼어서 함께 춤출 생각 없어.”

“그건 아가씨 생각일 뿐이고요. 남들이 이미 아가씨를 무대 위에 올렸는데 우습든 안 우습든 경쟁이면 이겨야죠. 이기게 해드릴 테니 하루 종일 문 여는 걸로 해요.”

오드리는 제 주변의 하녀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태도가 방자한가 고민했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던데, 주종도 서로 닮는 건가 싶었다. 사실 매번 방자하다 생각하면서도 그를 나무라거나 교정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당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그녀는 회피하기를 포기했다. 암만 우겨봐야 신년제가 끝나고 나서까지도 바가지를 긁힐 게 뻔했다.

“뭘 어쩌려고? 똑바로 말해봐. 납득되지 않는 방법이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줄 테니까.”

“음……. 아가씨, 그거 아세요? 가난하고 앞날이 없는 계층의 사람들일수록 애가 많아요. 끊임없이 낳고, 죽고, 낳고, 죽고……. 자식 열을 낳아놓고 살아남은 자식은 달랑 둘, 혹은 셋 뿐인 집이 흔해요. 부모 중 한쪽이 없는 집도 많고.”

“릴리, 그런 말은 좀…….”

듣기 불편해진 다이앤이 릴리의 옆구리를 찔렀다. 릴리는 다이앤의 손가락을 콱 잡아 밀어내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지독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꾸역꾸역 살아남은 자식 중 하나였다. 락시 부인이 그녀를 주워다 하녀로 삼기 전까지 시장바닥을 기어 다니며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살았었다.

“전 담백하게 사실을 말한 거예요. 그만큼 낳아야 한둘이라도 살죠. 근데 그들이라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거든요. 그 부모들의 소원은 다 똑같아요. 자식이 안 굶고 사는 거죠.”

“그런 사람들일수록 미신에 민감하고 소문에 잘 휘둘릴 텐데?”

“아가씨는 부자잖아요. 그것도 아직 모양새도 못 갖춘 로렐라이를 알아보고 투자해서 재산을 몇 십 배로 불린 부자요. 그만한 안목의 부자가 직접 아이를 축복해 준다는데 혹하지 않을 부모는 없어요. 소문? 소문이 뭐 어때서요? 소문이 사람을 죽이나?”

“귀족 사회에선 소문 때문에 사람이 죽어.”

“고결하다는 칭송보다 한 덩이의 빵을 더 값지게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에요. 아가씨에게 갈 이유를 만들어주기만 하면, 다른 곳은 거들떠도 안 보고 이리로 올걸요.”

“……이유? 무슨 이유를 어떻게 만드는데?”

“그야 간단하죠. 돈을 쓰면 돼요. 자, 그러니까 빨리 서류 처리부터 해주세요. 예산을 좀 더 늘려주시고, 정문 개방 시간도 바꾸고…….”

릴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가운데에서 용케 신년제 관련 서류를 쏙쏙 뽑아내 수정과 결재를 요구했다. 오드리가 빈 공간에 숫자를 채워 넣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앤, 감기약 미리 만들어놔. 난 아무래도 그날 하루 손님 받고 열흘은 누워 있을 것 같으니까.”

다이앤과 릴리가 승리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오드리는 몹시 슬퍼지고 말았다.

* * *

공식적인 신년제 기간은 사흘이다. 첫날은 가족과 친척을 위해, 둘째 날은 친구를 위해, 셋째 날은 이웃을 위해 쓴다. 때에 따라 셋째 날 이후에도 휴일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다.

신년제 첫날, 네이기스는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최근 우편국 일이 많아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못하던 센네페르도 이날만큼은 휴가를 받아 식탁에 앉았다. 제각기 바쁜 다섯 식구가 다 함께 모인 식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닭고기를 허브와 함께 뭉근하게 끓인 수프, 얇게 구워낸 빵에 특제 양념으로 볶은 쇠고기를 채운 샌드위치, 견과류를 듬뿍 넣어 만든 케이크, 소스를 발라 반질반질하게 구운 거위, 꿀에 절인 사과 한 조각과 따뜻하게 데운 포도주.

신년제 음식으로 가득 채운 식탁은 풍성하고 호화로웠다. 하지만 네이기스는 좀처럼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신년제 음식을 싫어한다거나, 배가 불러서가 아니었다. 맞은편에 앉은 메너트를 견디기가 어려워서였다.

“네이기스, 아기 손님을 위한 드레스를 준비해 두었단다. 식사 후엔 가서 꼭 입어보렴.”

네, 어머니.

“매년 하던 일이니까 잘하겠지만, 올해는 특히 중요해. 알고 있지?”

네, 어머니.

“다른 사람들에게 지면 안 돼.”

네, 어머니.

“이번 신년제를 기회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안 그래도 네가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들은 부인들이 널 보고 싶어 해. 젊은 시절 잠깐의 일탈이야 웃어넘길 수 있는 넉넉하고 우아한 분들이란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네이기스는 의례적인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메너트의 말이 이어질수록 식욕이 뚝뚝 떨어졌다. 제 앞에 놓인 게 음식인지 아니면 음식을 흉내 낸 종이쪼가리인지 헷갈렸다.

메너트는 괴물 때문에 대다수의 귀족들이 영지로, 시골로 내려가지 못하고 브란젤에 남아 있는 상황을 이용해서 겨울의 사교계를 구축하다시피 했다. 끊임없이 사람을 초대하고 모임에 참여하며 네이기스의 평판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예전이라면 그런 노력에 대해 그저 감사한 마음만을 가졌을 텐데, 요즘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땐 잠시잠깐 즐겁다가도,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침대에 누워 되짚으면 도대체 오늘 내가 무얼 했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주 중요한 걸 제 삶에서 도려내 버린 것처럼 하루하루가 공허했다.

‘보티안 씨는 내가 유명한 화가가 될 거라고 말해줬는데.’

매일 미용수에 담그고 보습 관리를 받는 손은 하얗고 매끄러워 물감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고, 에이쉬가 기껏 사다 준 스케치북은 누가 볼까 무서워 구석에 숨겨놓고 감히 펼쳐 보지도 못했다.

메너트는 쇄골이 확연히 두드러지도록 마른 네이기스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몰래 집을 나가고 전시회에 본명으로 그림을 거는 등 반항이 심하던 딸이 다시 돌아온 이후에는 고집피우지 않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니 싫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 페리니 뭐니 하는 이상한 여자와는 어울리지 마라. 충분히 좋은 말로 방문 요청을 거절했는데도 영 알아듣지 못한 척을 하며 거듭 찾아오다니, 못 배워먹은 티를 너무 내서 아주 불쾌해.”

“……페리 씨의 방문 요청을 계속 거절하셨다고요? 어머니, 페리 씨는 제 친구예요.”

“친구도 격에 맞춰서 사귀어야지. 네가 초상화를 그릴 일이 생기더라도 그 사람을 부를 일은 없을 줄로 알렴. 내가 다른 부인들에게도 다 말을 해놓을 거다.”

네이기스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페리는 인물화가였고,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게 주 수입원이었다. 사교계에서 나쁜 소문이 한 번 돌면 일이 끊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에이쉬가 끼어들었다.

“어머니, 페리 씨는 꽤 괜찮은 실력의 인물화가예요. 특히 귀족영애들의 장점을 잘 살린 초상화를 그려서 인기가 높죠. 레이디 타우레드의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것도 그녀의 작품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건 좀 아쉬운 일이에요.”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서 그리 친절하게 이르는 거니? 그럼 이것도 알겠구나, 화가 페리가 강도의 습격을 받은 이후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 말이야. 화폭에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괴물의 얼굴만 그리고 있다지?”

“어머니, 그건 그냥 소문일 뿐입니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면 또 어떻지? 중류계급의 화가 주제에 내 딸을 두고 감히 친구 운운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런 사람에게 네이기스의 초상을 맡기고 싶지 않다. 에이쉬, 네 표정이 아주 볼만하구나. 내가 잘못했다는 거니?”

메너트와 에이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누구도 양보가 없고 먼저 수그리는 사람이 없으니, 네이기스는 겨우 수프 두 숟가락을 삼켰을 뿐인데 토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태평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퍼먹는 막내 드케가 대단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녀는 간절한 시선으로 센네페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이쉬, 어머니에게 사과해라.”

“아버지.”

“격에 맞는 친구를 사귀라는 건 네이기스만이 아니라 네게도 해당되는 말이야. 네이기스는 그나마 화가 한 명이기라도 하지, 너는 대체 뭐냐? 화가, 작가, 가수, 배우……. 발이 넓어도 너무 넓어. 좀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나라.”

“아, 방금 그 말씀을 부디 제 친구들이 몰라야 할 텐데요. 그걸 알게 되면 저는 당장 모임에서 쫓겨날 겁니다. 다들 자기 세계가 뚜렷한 예술가들인데, 저는 뭐 내세울 게 있어야지요.”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으니 최선을 다해 소문내야 할 모양이다.”

“제가 예술 전 분야에 걸쳐 관심이 있는 건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새삼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황스럽네요.”

“에이쉬! 뭘 잘했다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니!”

아, 이런. 센네페르도 메너트도 자식들의 교우관계에 불만이 많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네이기스는 자신을 감싸주다가 불똥을 맞은 에이쉬를 볼 낯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한 마디 거들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도무지 입이 안 떨어졌다.

드케가 그런 네이기스의 옆구리를 콕 찌르고 속삭였다.

“누나, 자세를 무너뜨리면 어머니가 더 화내실 거예요.”

“응.”

“너무 귀담아 듣지 말고 그냥 한 귀로 흘려요.”

그렇게 말하는 드케는 티 없이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탁의 살벌한 분위기를 뻔히 보면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하지만 네이기스는 드케의 충고를 따르지 못하고 부모님의 말을 차곡차곡 가슴에 쌓아 자신을 눌렀다. 그러지 않으면 피올과의 약속을 잊고 또 집을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신년제의 식탁이 살벌한 건 그웬가 뿐만이 아니었다. 헨젤 백작이 모처럼 집에 돌아온 헨젤가도 만만치 않았다.

하델과 단둘이 있을 때는 근황을 물으며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헨젤 백작은 식탁 앞에 앉아 오드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찬바람 쌩쌩 부는 남이 되었다.

“오드리, 내가 없는 동안 너도 아주 바쁘게 지냈더구나.”

“침대에 누워 울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더라고요.”

“그만한 재산을 그렇게 빠르게 옮기는 건 어지간한 준비가 아니고서야 힘든 일이지. 보좌관이 바쁜 건 알지만 이건 살피는 게 좋겠다며 일부러 자료를 가져왔을 정도였다.”

“이런, 다들 바빠서 정신없을 때를 노린 건데 그걸 잡아내셨단 말인가요? 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그분 참 유능하시네요.”

“로렐라이쯤 되는 상단의 자산이 그렇게 대대적으로 이동하면 누구나 눈길을 주게 돼 있어. 지금쯤 돈의 흐름에 관심을 둔 자들 거의 대부분이 알게 됐을 테지. 로렐라이의 단주가 누구든, 헨젤 영애가 그의 목줄기를 쥐고 있다고.”

오드리는 말없이 웃었다. 괴물 처리 뒷감당과 신년제 준비로 헨젤 백작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그의 충실한 수족인 집사 할아범도 없는 틈을 타서, 그녀는 로렐라이의 재산 거의 대부분을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여러 사람의 명의로 잘게 조각내어 나눠두었던 지분을 자신의 명의로 바꾸고 무기명 투자금으로 묶어두었던 돈도 다 손을 댔다. 로렐라이 지점이 들어가 있는 땅도 이제 상단의 땅이 아니라 오드리의 땅이었다.

그 외에도 상단의 기반이 되는 재산 태반이 오드리의 것이 되었으니, 앞으로 로렐라이의 단주 자리를 누가 차지하든지 간에 오드리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꼭두각시 춤을 추어야 할 것이다. 설령 그녀가 상당한 수준의 재량권을 준다고 해도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을 테고 말이다.

오드리는 이전에도 부자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탈락의 재산에서 비롯했고 만탈락을 갖고 있어야만 유지되는 부인지라, 알게 모르게 폄하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오드리가 제 앞으로 돌린 재산은 온전히 본인의 것이었다.

상류계급의 여성이 돈을 번다고 하면 천박하다 하지만, 재산이 많다고 하면 구애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 된다. 질투와 시기, 뜬소문에 기반한 악평도 함께 따라오는 법이지만 이미 평판이 바닥을 찍은 마당에 악영향을 걱정할 주제가 아니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성년이 되기 직전에 해치웠어야 할 일이었다. 미성년 귀족영애가 갖고 있기엔 지나치게 큰 재산인지라, 욕심 많은 이들의 목표물이 되기 딱 좋았으니까. 익명의 그늘에 계속 숨어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헨젤 백작이 직접 하델을 입에 올린 이상 마냥 미룰 수가 없었다.

오드리가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한 건 헨젤 백작에게 들켜 모든 시도가 사전에 막히는 사태였다. 왕국의 재무를 총괄하는 주제에 쓸데없이 꼼꼼하고 시야가 넓은 헨젤 백작이라면 오드리가 뭘 하려는 건지 금방 알아채고 말 테니까.

한데 그 헨젤 백작이 오드리의 시도를 눈치챘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오드리가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올해의 그는 너무 바빴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보통 어떤 일이 장기화되면 나름 관성이 생겨 일이 쉬워지기 마련인데, 괴물 사태 뒤처리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문제가 생기는 유형은 갈수록 다양해졌고 인력은 갈려나갔으며 돈 나올 구멍은 점점 줄어들었다. 언제면 끝난다는 보장조차 없고 유일한 희망은 타우레드 영지에 처박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그 와중에 신년제 준비까지 해야 했으니, 그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오드리까지 데려다 쓰려고 했던 걸 보면 정말 어지간했던 것이다. 사실, 신년제 기간 내내 쉬는 일반 직원들과는 달리 그는 첫날인 오늘만 쉬고 내일이면 다시 왕궁으로 가야만 했다.

“국왕전하께는 뭐라고 할 셈이냐?”

“파혼 선물로 받았다고 하려고요.”

“그걸 믿으라고?”

“아버님이 도와주신 걸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일방적인 파혼으로 고명딸의 평판이 땅에 떨어졌는데 점잖게 뒷짐만 지고 있을 헨젤이 아니잖아요. 이득을 챙겨야죠.”

“나더러 네 뒷감당까지 하라는 얘기로군.”

바로 그거라는 듯 생긋 웃는 얼굴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헨젤 백작은 그만 쥐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고 말았다.

로렐라이든 뭐든, 자신이 바쁜 틈을 타서 제 몫을 챙긴 수완 자체는 칭찬해 줄만했다. 게걸스런 사자 놈들이 입을 대는 걸 보느니 오드리가 갖는 게 차라리 나았다. 문제라면, 낱알 하나도 남지 않게 쓸어낸 재산에서 가문의 몫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은 일대로 하고 얻을 건 하나도 없을 걸 생각하니 식욕이 싹 사라졌다. 하필 그 뒷감당이라는 게 그가 가장 싫어하는 감정노동에 가까운 일이라 더욱 그랬다.

“너는 네가 필요할 때, 유리할 때만 헨젤임을 내세우는구나. 가문의 그늘 아래에서 자랐으면서도 가문에 기여할 생각은 없이 이득 빼먹을 생각만 해. 도대체 누가 널 가르쳤지? 어떤 교육을 하면 이런 망종이 튀어나오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음……. 그렇죠, 가문의 그늘 아래 자랐으면 마땅히 은혜를 갚아야죠. 아버님의 말씀이 백번 옳아요.”

오드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하델이나 뒤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고용인들 모두 숨을 죽이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헨젤 백작의 다그침에도 그녀의 신색은 태연하기만 했다.

“한데 아버님, 제가 헨젤의 그늘 아래에 있던가요? 저는 브란젤로 돌아온 이후 그 그늘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요. 아버님도 고모님도 저를 보호하지 않으시잖아요.”

헨젤 백작은 오드리의 비난 섞인 시선을 코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그녀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머리칼을 초록색으로 염색하고 피부를 까맣게 태워왔다고 해도 헨젤은 헨젤인데, 데뷔탕트 무도회에서부터 방치하다시피 내버려 둔 건 사실이니까.

한데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태어나 먹고 입고 배우며 자란 모든 것에서 가문의 배경이 작용했을 텐데. 이름 뒤에 성을 붙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헨젤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이다. 젊고 어려 뭘 모를 땐 자신이 평지에서 탑을 쌓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이면 자신이 선조들이 쌓아올린 탑 꼭대기에서 버둥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네가 어리긴 하구나. 마녀 소리를 들으면서도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것만 해도 헨젤의 덕을 보는 건 줄 알아라. 만약 네가 헨젤 백작영애가 아니라 힘도 재산도 없이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영애였다면 수군거림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또 그렇군요. 파혼을 당한 것도 마녀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제 행동의 결과로 얻은 건 아니지만, 그마저도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여기시는 거겠죠. 잘 알겠어요.”

오드리는 식사를 중단하고 일어섰다. 따스한 닭고기 수프 위로 싸늘하게 얼어붙은 공기가 조각나 떨어지는 게, 여기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었다간 단단히 체할 것 같았다. 감기가 예정돼 있는데 체하기까지 하는 건 사양이었다.

“허락 없이 일어나지 마라.”

헨젤 백작이 불쾌해하더라도 좋은 핑계가 있었다. 신년제에서 제일 바쁜 사람은 가문의 귀부인과 영애들이지, 제의만 끝내면 할 일이 싹 사라지는 가주가 아니었다.

“아기 손님 받을 준비를 해야 해서요.”

“헛수고다. 네 이름으로 여기저기에 돈을 풀고 있다는 건 알지만, 부모 마음이란 다 똑같은 법이지. 어딜 가도 환영받을 텐데 굳이 마녀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아기의 축복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다.”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노력은 해 봐야 하는 거니까 소홀히 할 순 없죠. 혹시 아나요? 때 아닌 자선에 마음이 동한 누군가가 찾아올지.”

희망적인 기대가 다분히 녹아 있는 말이었다. 헨젤 백작은 오드리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 반, 우스운 기대를 한다는 비웃음 반을 섞은 채로 웃었다.

“좋다. 나쁘지 않은 자세야. 그럼 우리 내기를 할까? 브란젤은 대도시이니, 네 말대로 때 아닌 자선에 혹해서 오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겠지. 하나 나는 그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열은 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너는 어떠냐?”

“……내기에 응하기 전에 상품을 먼저 알고 싶은데요.”

“만약 네가 이기면, 로렐라이의 재산을 네가 꿀꺽한 것에 대해 다른 뒷말을 듣지 않게 해주겠다. 물론, 그 재산으로 뭘 하든 나는 간섭하지 않으마.”

굉장한 상품이었다. 헨젤 백작의 의중이 어떻고 계기가 어떻든 상관없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나서기만 하면 오드리는 헨젤의 그늘이 어떤 건지 제대로 체감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무의식중에 오드리의 자세가 바뀌었다.

“내가 이기면, 너는 아무 것도 하지 마라.”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요?”

“그래. 살림도 사교도 없다. 누가 오든 접객 일도 제외다. 로렐라이와 데멘사는 물론이고 만탈락의 일도 그만둬. 만탈락에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도 않겠다. 기한은 네가 성년이 되는 날까지다.”

“그런…….”

“싫다면 내기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랬다간 내가 네 재산에 일일이 간섭하는 걸 앞으로 쭉 견뎌야 할 거다. 본래 미성년자의 재산관리는 부모의 몫이지. 내가 어떤 식으로 재산을 운용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거라 믿는다.”

오드리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헨젤 백작의 말이 맞았다. 데뷔탕트를 치렀더라도 오드리는 아직 미성년자였고, 누군가와 약혼한 상태도 아니었다. 왕국의 법률은 재산의 주인을 충분히 존중하니 일방적으로 빼앗기지는 않겠지만 상당부분이 전용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이래서 성년이 되기 직전에 하려고 했었는데.’

통째로 넘기고 손가락만 빨며 분해하는 것보다는 일부를 잃더라도 지키는 게 낫다. 그런 판단으로 한 일이었는데, 그걸 뻔히 짐작하면서도 이렇게 여우사냥 하듯 자신을 구석으로 몰며 선택을 강요하다니 하여간 악취미였다.

“왜, 잃는 게 너무 커서 무서우냐?”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아기 손님이 오는 건 일러야 내일부터인데 오늘 얘기했으면 충분히 시간을 주고도 남은 거다. 자, 어서 대답해라. 어쩔 거냐?”

오드리는 한쪽 구석에 꼿꼿하게 서 있는 릴리에게 눈길을 주었다. 릴리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눈을 반짝이며 ‘당장 수락하세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아기 손님 열 명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감이 넘쳤다.

‘이런 애매한 도박은 딱 질색인데.’

오드리는 크게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크게 딴다는 도박판의 격언 따위는 취급하지 않았다. 그녀가 과감한 선택을 할 때는 위험을 최소화하거나 피해갈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실한 전망이 있을 때뿐이었다. 도박과 투자는 엄연히 영역이 달랐다.

“저는…….”

“하델, 네가 곧 열세 살이 되니 이젠 슬슬 배운 걸 써먹어볼 때가 됐다. 비레직 영지의 관리를 맡아보는 게 어떠냐?”

헨젤 백작이 오드리의 말을 썩둑 자르고 하델을 불렀다.

신중하게 케이크를 자르고 있던 하델은 난데없는 말에 깜짝 놀라 포크를 놓쳤다. 비레직은 헨젤 백작이 갖고 있는 남작위였다. 영지도 딸려 있었다. 그래봐야 작은 마을 서너 개에 불과하지만, 그마저도 없는 귀족이 얼마나 많던가.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으면 굉장히 좋아하며 냉큼 알겠노라 했을 텐데, 하델은 오드리의 서재를 뒤지는 동안 본의 아니게 알게 된 게 너무 많았다. 헨젤 백작의 일을 도우면서 붙은 자신감이 깡그리 사라지기에 충분한 경험이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아는 것도 없고……. 더 배우고 난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실전에 부딪치며 익히는 게 빨라. 경험 삼아 한 일 년 정도 굴려보고, 정말 안 되는지는 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어차피 지금도 헨젤가의 일을 돕고 있지 않더냐?”

“그래도…….”

“넌 헨젤의 후계자다. 그만한 교육을 받았어. 오드리가 만탈락을 맡았을 때는 너보다 더 어렸다는 걸 생각해 봐라. 열셋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아무 문제없다. 넌 잘할 거야.”

헨젤 백작의 거듭된 독려가 하델이 더 거절할 여지를 모두 없애 버렸다. 하델은 지나친 부담으로 창백해진 안색을 되돌리지 못한 채로 배시시 웃었다. 헨젤 백작이 식탁 예절을 무시하고 하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보는 동안 오드리는 표정관리를 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자신에겐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와 격려를 하필 제 앞에서 하델에게 쏟는 이유야 뻔했다. 내기에 응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수를 던지는 헨젤 백작을 보고 있자니 그의 내기에 응할 마음이 점점 사라졌다.

“하델, 신년제가 끝나면 비레직령에서 사람이 올 거다. 그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일을 시작하면 된다.”

“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누이가 널 도와줄 테니.”

헨젤 백작의 입에서 난데없이 오드리의 이름이 나왔다. 오드리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헨젤가의 살림과 만탈락의 일, 그리고 로렐라이와 데멘사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다. 초보자를 일일이 가르치며 끌고 나갈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아버님, 저는…….”

“민폐가 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드리는 곧 한가해질 테니까.”

오드리의 패배를 확신하는 듯한 어투였다. 설령 오드리가 내기에 응하지 않더라도 손수 바쁘지 않게 만들어주겠다는 의지도 느껴졌다.

오드리는 내기를 거절한다고 해서 그리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하겠다는 걸 직감했다. 괴물 사태가 천년만년 갈 것도 아니고 헨젤 백작이 이렇게 바쁜 시기가 계속 있지는 않을 텐데, 그때가 되면 내기에서 진 것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무 준비도 없이 이렇게 몰아붙일 분은 아닌데…….’

커다랗고 검은 구멍이 한 발짝 앞에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냥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릴리의 수완과 자신감을 믿어줄 밖에.

“아버님께서 그토록 저와 내기를 하고 싶어 하시니, 기꺼이 참여하도록 하죠. 내기에서 이기려면 최선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긴 하지만 말예요.”

“나는 여유롭게 기다리도록 하마. 신년제가 끝나고 나면 왕궁으로 사람을 보내라.”

“좋은 소식을 들고 직접 가겠어요.”

피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동안 긴장으로 등이 뻣뻣해졌다. 그래도 정말 즐겁다는 듯, 한껏 눈을 휘어 넘치도록 웃음을 담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 테니, 즐겁게 식사하세요. 올 한 해, 포모스의 행운이 등에 업히기를 바랍니다.”

“네게도 행운이 있길 바란다.”

하델은 웃는 낯으로 오가는 살벌한 대화에 숨도 쉬지 못하고 다시 접시에 코를 박았다. 예전부터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전에는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싸우는 느낌이더니 오늘은 서로의 얼굴에다 화살을 쏴대는 느낌이라 견디기가 힘들었다. 오드리는 물론이고 헨젤 백작까지도 한껏 날이 서서는 건드리면 베일 듯 날카로웠다.

‘이래서야 아무 것도 물어볼 수가 없잖아……. 몰래 서재를 뒤진 걸 알면 엄청나게 화내실 텐데.’

오드리가 로렐라이의 주인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내고 상당히 의기양양해 있었는데, 오늘 보니 그건 그다지 놀라운 일이 못되는 것 같다. 헨젤 백작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얘기했고 오드리는 그걸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응했다.

하니 유언장도 결혼계약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건 하델의 착각이었지만, 한껏 움츠러든 하델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신년제가 끝나고 비레직 영지에서 사람이 온다니, 그 일이 너무 크고 가까워 눈이 흐려졌다.

헨젤 백작이 오드리를 만탈락으로 쫓아냈을 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 살이었고, 만탈락이 눈부시게 발전하기 시작했을 무렵엔 지금의 하델과 엇비슷한 나이였다. 하델은 입에 넣은 생크림이 갑자기 텁텁해져 입맛을 잃었다.

‘아버지도 누나도 나와는 아예 종족이 다른 사람들 같아.’

헨젤 백작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고, 경험이 다르니까. 하지만, 오드리는? 평범한 오누이처럼 가까이 지내며 잊어버렸던 격차가 새삼 실감났다. 그녀가 만탈락을 관리하듯 자신이 비레직 영지를 관리해야 한다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하여간 네 누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아까운 사람이다. 만약 남자였으면 사방에서 데려가고 싶어서 난리가 났을 텐데…….”

잘게 자른 케이크를 끼적대던 하델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항상 오드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헨젤 백작이 오드리를 칭찬하는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의 말끝이 흐려지는 게 묘하게 자신에 대한 책망 같았다. 왜 너는 사내로 태어난 주제에 누나를 따라가지 못하느냐, 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순간 눈앞이 까매졌다.

“……아버지. 저도 나이를 더 먹고, 더 배우면 누나보다 나아질 거예요.”

손에서 미끄러지려는 포크를 꽉 움켜쥐고 꺼낸 말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다. 하델은 미래를 기약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놀지 말걸, 더 열심히 공부할걸.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는 선생들의 잔소리가 이제야 마음에 와 닿았다.

하나 헨젤 백작에게 하델의 그런 속내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저 큰 책임을 맡고 새삼 각오를 다지는 걸로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흐뭇하게 하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래야 헨젤의 후계자지. 오드리도 너만 할 때는 실수가 많았을 거다. 옆에서 타우레드 후작이 어지간히 도와줬겠지. 아쉽게도 내가 널 하나하나 도와줄 만한 시간이 안 되니, 누나에게 많이 배워라. 알겠지?”

“그…… 사실 제가요, 요새 누나랑…….”

“혹시 싸웠으면 빨리 풀고. 사내는 도량이 넓어야 돼.”

“……네.”

알신다가 죽었어요, 범인은 누나의 하녀인 것 같아요, 아마 누나가 배후에 있을 거예요, 증거는 없지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헨젤가의 하녀장이 알신다의 장례를 주관했겠어요……. 다다다 떠들어봐야 소용없을 말이 하델의 목구멍에 턱 걸렸다.

‘하녀 하나의 일에 그리 열 내지 마라.’

묻지도 않은 말에 대한 대답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증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이 추측만으로 말해봐야 야단 말고는 돌아올 게 없다.

‘내가 나아져야 돼. 누나보다 더 잘해야 돼.’

오드리의 성취에 순수하게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질투하고 경계하고 자신을 채찍질했어야 했다. 오드리보다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알신다도 그걸 바랄 거야.’

하델은 오드리와 자신이 ‘경쟁자’라는 걸 처음으로 ‘제대로’ 인식했다. 그들은 한 무대에 서 있었고, 남을 수 있는 건 승자뿐이었다. 멋모르고 멀뚱히 서 있기만 하다가는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떨어질 것이다.

“아버지 말씀대로 누나에게 도움을 청해야겠어요. 그러려면 일단 오늘이 끝나기 전에 사과부터 해야겠죠? 솔직히 제가 크게 잘못한 것 같진 않지만……. 누나 기분을 맞춰줘야 할 것 같아요.”

“잘 생각했다. 원하는 걸 위해서는 조금 억울하더라도 굽힐 줄 알아야 돼.”

“네, 아버지.”

그러니,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 한다. 하델은 이를 악물고 알신다의 일은 잠시 미뤄두기로 마음먹었다.

헨젤 백작은 오드리가 당연히 하델을 도울 거라 여겼지만,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어려도 뱀은 뱀, 순해도 헨젤은 헨젤이라는 결론을 내린 오드리가 하델을 도와줄 리가 있나. 설령 사이가 좋을 때라도 도와주다 말고 몇 번이고 회의를 느낄 일인데, 바빠서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 싶은 요즘에 비레직 영지의 작은 마을 몇 개가 대체 뭐라고. 차라리 남부의 대평원 관리를 맡겼다면 그땐 경험을 쌓는 차원에서라도 고민을 좀 해 봤을 것이다.

하여간 지금 오드리의 머릿속에 하델은 그림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아기 손님을 불러 모으기 위해 벌인 일에 이상은 없는지, 혹시 변수가 생기지는 않았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오드리의 때 아닌 자선과 그녀가 만탈락에서 신년제를 지낼 때마다 아기 부모들에게 얼마나 후했는지에 대한 소문 덕분에 오드리에게 축복을 받더라도 나쁘진 않을 거라는 분위기가 형성된 건 확실했다. 또한 릴리에게 매수를 당한 일부 부모들도 있었다.

“다들 반드시 가겠다고 했어요, 아가씨.”

“아니! 릴리 네 말대로 그들이 고결한 칭송보다 한 덩이의 빵을 더 귀하게 여긴다면, 나보다 더 큰 빵을 주는 곳으로 가겠지. 그깟 말뿐인 약속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다른 가문에서도 나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

“네, 아가씨. 그럼 바로 가서…….”

“잠깐만. 그래, 사정이 급한 집을 골라 돈을 빌려줘. 이율은 없어. 단, 내게 축복을 받을 경우에만 없는 거야. 내게 오지 않는다면 일반 이율의 두 배를 받겠다고 해.”

본래 아기 손님을 불러들이는 일에 열심이었던 건 릴리지 오드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생이 달린 내기가 걸리자 못된 꾀가 샘처럼 퐁퐁 솟아났다. 릴리가 난색을 표했다.

“저, 아가씨……. 그러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데요. 그냥 돈 안 빌리고 다른 가문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나올 수 있어요.”

“제안하면서 살짝 말을 흘려. 아기 손님을 많이 받아서 아가씨가 기분이 좋아지면 그 정도 빚쯤은 탕감해 줄지도 모른다고.”

“진짜 그렇게 해주시게요?”

“내가 내기에서 이기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지면 탕감해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될 거야. 공증인에게 사람을 보낼 수조차 없게 될 테니까.”

“아, 그렇겠네요. ……흐음.”

고개를 주억거리던 릴리가 갑자기 오드리의 책상에서 서류를 싹 걷어냈다. 아기 손님이 아무리 급해도 오드리의 일정은 오늘 하루 종일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럼 이 다음 일은 제게 맡겨주세요. 아가씨는 이만 신년제의 주역으로서 일을 하셔야죠.”

“일은 무슨 일…….”

“신년제의 첫날은 가족과 친척을 위한 날이란 거 아시잖아요. 여기저기에서 사람이 올 거라고요.”

그쪽은 완전히 잊고 있었던 오드리의 낯이 납빛이 되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다이앤이 희색을 띠고 오드리를 드레스룸으로 납치했다. 안 그래도 시계의 분침이 한 눈금씩 움직일 때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과연 오후가 되자 백작저에 손님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년제 때나 되어서야 얼굴을 보는 먼 친척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가계도에서 이름만 알았지 얼굴은 처음 보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아서, 오드리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쁘게 손님을 치렀다.

오드리는 손님을 치르는 동안은 완벽하게 웃는 얼굴이었다가, 밤이 되어 침대에 눕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그러자 너무 바쁜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던 불안이 몽글몽글 솟아올라 눈앞을 가렸다. 천장이 까맣고 드러누운 침대가 늪과 같이 몸을 빨아들였다.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앉아 침대 시트를 더듬었다. 하녀들이 미리 데워놓은지라 한기라곤 조금도 없이 따뜻했고 시트와 이불은 보드랍고 감촉이 좋았다. 늪을 연상할 만한 요소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 불안으로 계속 가슴이 뛰었다.

“……다이앤, 내일 괜찮겠지?”

“그럼요. 오늘 오전 내내 확인하셨잖아요.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넌 어쩜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니…….”

“그야 아가씨가 얼마나 노력하시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만큼 하는데 앞날이 막히면 포모스의 멱살을 잡아야 돼요. 부족한 건 운뿐이니까 얼른 운을 내놓으라고 해야죠.”

다이앤이 허공에 멱살을 잡는 시늉을 했다. 오드리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물렁물렁하게 푹푹 꺼지던 침대가 조금은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조금 아쉽긴 해요. 아가씨가 외동이셨으면 이렇게 고생하진 않았을 텐데, 싶어서.”

“내가 외동이었으면 만탈락에 갈 일도 없었어. 당연히 널 만날 일도 없었지.”

“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렇지. 이디케나 릴리와는 경우가 다르잖아.”

이디케는 오드리와 함께 자란 젖형제이고, 릴리는 락시 부인이 직접 건져 낸 인재다. 릴리는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락시 부인은 예전부터 은퇴하면 꼭 만탈락으로 갈 거라고 노래를 부르곤 했으니 언제가 되어도 만났을지 모른다. 오드리가 직접 감옥에서 끄집어낸 다이앤과는 달랐다.

“갑자기 도련님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 것 같네요.”

“하하, 샘솟는 거면 샘솟는 거지, 같은 건 또 뭐야?”

“애매하거든요. 아가씨와 닮은 얼굴을 보면 나름 귀여운데, 아가씨가 고생하시는 걸 옆에서 보고 있으면 화가 나서요. 가진 게 그리 많으면 하나 정도는 양보해도 될 텐데……. 하는 마음이 절로 들거든요.”

“왜, 네 오라비를 보는 것 같아?”

“……조금은요. 아, 물론 제 오라비 쪽이 훨씬 재수가 없지만요. 그때 못 죽여서 아가씨를 만난 건 다행이지만 죽일 수 있었으면 그건 그것대로 엄청 좋았을 거예요.”

다이앤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히죽 웃었다.

“모든 걸 주기로 결정하고 장애물을 다 치워주었던 자식이 창졸간에 죽어버리면 그 부모가 어떤 표정을 할까……. 항상 보고 싶었거든요.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더라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섬뜩한 소리 하기는. 안 돼, 네가 없으면 내 감기약과 염색약은 누가 만들어주고? 다이앤, 내가 허락한 일 이외에는 독 쓰지 마. 알지?”

“그럼요. 아무렴요. 저는 아가씨 명령만 들어요. 말씀하셨던 감기약도 잔뜩 만들어뒀어요. 숙성만 조금 더 하면 돼요.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주무세요.”

다이앤이 오드리를 반 강제로 침대에 눕혔다. 오리 깃털을 잔뜩 넣어 부풀린 베개가 오드리를 푹 감싸 안았다. 끄트머리를 쫑쫑 땋은 초록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약속해 놓고 안 오는 부모는 제가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오게 할 테니까, 오늘 자는 동안엔 좋은 생각만 하세요. 아기 손님이 열 명을 넘어가면 백작님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뭐 이런 거요.”

“킥…….”

“기분 좋은 생각을 해야 잠도 잘 와요. 푹 자야 내일 화장도 잘 먹을 거고요. 퀭한 얼굴로 아기 손님을 맞을 건 아니시죠? 혹시 내일 아가씨 피부 상태가 엉망이면 그땐 정말 각오하세요. 특제 미용액에 아주 푸욱 담갔다 빼드릴 거예요.”

“그거 정말 대단한 협박이네. 알았어, 바로 잘게.”

오드리가 과장되게 겁먹은 척을 하며 냉큼 눈을 감았다.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조금 뒤척이더니, 다이앤이 마법등을 끄자마자 금세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었다.

“아가씨, 주무세요? ……진짜 주무시네.”

다이앤은 안심했다. 오드리가 타우레드 영지에서 브란젤로 오는 길 내내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렇게 쉽게 잠들 정도인 지금은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다.

<7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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