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7. 브란젤로 돌아오다 (29/62)

chapter 27. 브란젤로 돌아오다

「대개 자식의 것은 부모의 것이다. 대개가 아닌 예외의 경우도 그만큼 많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느 변호사의 농담」

셰비언이 자리를 비운 브란젤은 아슬아슬한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괴물의 위치를 특정해 주는 벼락은 없어도 나름 괴물을 찾아내는 요령을 터득한 왕궁마법사와 치안대의 공로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불안만은 어쩔 수 없어서, 브란젤의 거리는 여름휴가 기간을 연상케 할 정도로 한가했다. 다들 바깥출입을 삼가며 집에 틀어박힌 것이다.

그중에서도 헨젤 백작가는 특히 더 조용했다. 헨젤 백작은 왕궁의 일거리에 발목 잡혀서 저택으로 돌아오지 못한 지가 벌써 한 달 가까이 됐고, 하델은 그를 핑계로 저택의 고용인 대부분에게 휴가를 주었다.

저택 유지에도 빠듯할 정도로 최소한의 고용인만을 남겨두었기에, 남은 고용인들은 하루 온종일 바쁘게 돌아다녔다. 아무리 도련님이라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며 우는 소리가 콸콸 쏟아졌지만, 하델은 아무 것도 안 들리는 척 깡그리 무시했다.

애초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에게 거의 신경 쓰지 못하기를 바랐으니 당연했다.

하델은 텅 비다시피 한 저택을 마음껏 헤집고 돌아다녔다. 몇 안 되는 고용인들의 눈을 피해 오드리의 집무실과 서재 등에 숨어들어 서류를 뒤지는 게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뒤지는 데에도 나날이 요령이 붙어서, 예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비밀서랍을 찾아내기도 하고 잠긴 상자를 열기도 했다.

오늘은 그저께 찾아낸 열쇠가 들어가는 곳을 찾아 오드리의 서재를 살피는 중이었다.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책상 아랫부분을 손가락으로 훑고 있으려니 목도 아프고 팔도 뻐근했다.

“으이씨, 여기도 아니면 엄청 귀찮아지는데…….”

“어쩌니, 거기가 아니라서.”

“……! 으앗, 헉! 악!”

쿵! 벌떡 일어나던 하델은 상판 아래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어찌나 거세게 부딪쳤는지, 눈앞에서 별이 번쩍거렸다. 머리를 끌어안고 끙끙대는 와중에 망했다, 최악이다, 등등의 생각들이 무수히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프겠다. 하델, 잠깐 손 치워봐.”

서늘한 손이 아픈 부위를 덮고 열을 식혔다. 머리는 식었는데 대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하델은 있는 힘껏 오드리의 손을 쳐 내고 책상 밑에서 빠져나왔다.

“누나가 여기 왜 있어요? 지금 타우레드 영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야말로 내 서재엔 웬일이니? 주인이 자리 비운 사이에 도둑질을 하려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게 당당하네.”

“도둑질이라뇨! 저는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좀 찾아보려고……!”

“그래, 내가 없는 사이에 몰래 말이지. 보통 그런 걸 두고 도둑질이라고 해. 맙소사, 헨젤의 후계자가 손버릇 나쁜 도둑이라니 기가 막힌 일이네. 그나마 네가 아직 밖에 나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밖에서 이런 짓을 하다 들켰으면 엄청난 망신이었을 텐데.”

“누나!”

“지금 내게서 예쁜 말을 기대하지 말렴. 손에 든 것부터 내놔.”

하델이 머뭇대면서 열쇠를 내놓았다. 말이 열쇠지, 언뜻 봐서는 그냥 정교한 용 조각 장식품에 불과한 물건이었다.

‘어지간히 뒤졌군.’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러고 보면 하델이 수상한 짓을 한다며 릴리가 편지를 보낸 시점이 거의 보름 전이었다.

“이게 뭔지는 알고 뒤졌니?”

“……만탈락, 혹은 로렐라이에 관련된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했어요.”

“맞아. 그런데 왜 뒤졌니? 뭐가 궁금해서? 누나의 재산 목록이라도 뽑아보고 싶었니?”

“빈정대지 마세요. 저는 그냥…….”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빈정대지 말라니, 너무 과한 요구였다. 자신이 온 줄도 모르고 책상 밑에 정신이 팔려 있던 걸 걷어차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건데 말이다.

“누나, 누나가 로렐라이의 주인이에요?”

“갑자기 무슨 말이람. 난 만탈락의 주인이고 로렐라이의 특급 고객이야. 아, 투자도 조금 하긴 했지.”

“시치미 떼지 마요. 누나가 단주 맞잖아요.”

오드리보다야 못하다지만 하델도 그 나이 또래에선 제법 영민한 축에 속하는 아이였다.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오드리의 집무실과 응접실, 서재 등을 뒤지고 또 뒤진 끝에 의외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편견이 적었기에 가능한 결론이었다.

“만탈락을 누나가 맡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파격인데, 그 도시의 돈으로 상단을 만들다니요. 누나, 이게 퍼지면 대단한 스캔들이 되겠는데요? 나더러 손버릇이 나쁘다며 가문의 망신이라고 할 게 못돼요. 망신은 이미 누나가 다 시키고 있잖아요.”

“가문의 망신? 내가?”

“그럼요. 귀족영애가 상단이라니, 우습지도 않아서. 레이디 그웬은 그림 한 점 냈다가 평판이 바닥을 쳤는데, 누나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잖아요. 그거야말로 가문의 망신 그 자체죠.”

“하델…….”

“누나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더니, 그 수단이 겨우 상단이었어요? 그깟 돈?”

하델이 해사하게 웃었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 특유의 보드라운 미소였다. 검은 고수머리에 쏟아진 햇살이 물비늘처럼 반짝거렸다.

“너무 걱정 마세요, 누나.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않을 테니까. 몇 년을 길러온 자기방어 수단을 한순간에 잃어버린다니, 그건 좀 가혹하잖아요.”

“…….”

“열심히 버세요. 때가 되면 제가 찾아갈 거라는 거 잊지 말구요.”

오드리가 일궈온 만탈락과 로렐라이가 언젠가는 제 몫이 되리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말이었다. 당장 빼앗아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라는 식이니, 그 말을 듣고도 배알이 꼴리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오드리는 하델은 지켜줘야 하는 어린 동생이라는 기존의 평가를 깨끗하게 삭제했다. 어려도 뱀은 뱀이고 성질이 순해도 헨젤은 헨젤이었다. 허리를 숙여 하델과 눈높이를 맞추고 빨갛게 칠한 입술을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네가 가져갈 수 있을까?”

“당연히 내 거잖아요. 잠깐 누나에게 맡겨두는 거예요.”

“그거 아니, 하델? 나는 만탈락의 주인이야. 성년이 되면 가문에 돌려줘야 하는 임시 주인이 아니라 완벽하고 온전한 주인이지. 내가 원한다면 타인에게 넘기거나 팔 수도 있어.”

하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자라며 배우고 들은 것과는 너무 다른 얘기였다.

“왕비전하께서 확언해 주셨단다. 레이디 랄리우스는 장녀 오드리 헨젤에게 만탈락을 남겼다, 라고.”

“아니야.”

“하델, 레이디 랄리우스라는 호칭이 좀 이상하지 않니? 왜 헨젤 백작부인이 아니라 레이디 랄리우스일까? 응?”

“그냥……. 그게 더 마음에 드셨나 보지.”

“그냥이라니, 말도 안 되지. 사교계에서 호칭이 얼마나 중요한데 왕비전하께서 그냥 그렇게 부르셨을 리가 있나. 어머니께서 랄리우스 후작가문의 계승권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레이디 랄리우스라고 부르셨던 거야.”

오드리는 자꾸 뒷걸음질을 치려는 하델의 어깨를 움켜쥐고 멀어지지 못하게 붙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깐 맡기는 것뿐이라며 승리감으로 빛나던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였다.

짜릿했다.

오래 묵은 질투와 시기가 마침내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지개를 켰다. 혓바닥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만탈락이 랄리우스 영지의 중심 도시였다는 걸 아니? 어머니가 만탈락을 물려주는 아이가 차기 랄리우스 후작이야. 하델, 랄리우스 후작위의 계승자는 네가 아니라 나란다.”

하델은 허우적거리며 오드리를 밀어냈지만, 벗어나려 아무리 기를 써도 오드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가느다란 손가락이 쇠갈고리처럼 어깨를 죄어왔다.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 거짓말이라고 하고 싶을 거야. 그렇지? 그런데 어쩌겠니, 만탈락은 지참금이 아니라 어머니의 개인 재산이었고, 랄리우스의 계승권은 아버지에게 넘어간 적조차 없는데!”

“거, 거짓말…….”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야. 어머니의 지참금 목록은 부모님의 결혼계약서에 들어 있고, 계승권에 관련된 약속은 어머니의 유언장에 들어 있어. 궁금하면 직접 찾아봐도 좋아.”

“얼마 전까진 누나도 내가 헨젤과 랄리우스의 계승권을 다 갖고 있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우리가 싸우지 않고 사이좋은 거라며!”

“그건 내가 왕비전하를 만나 뵙기 전이지. 알잖아? 왕비전하께서 어머니의 유언장에 공증을 서주셨다는 거. 유언장 공증은 처음 해 본 거라며 다 기억하시더라고.”

“누나, 유언장이랑 결혼계약서 둘 다 본 거 맞아? 아니지? 왕비전하께서 한 마디 하신 거 가지고 나 놀리는 거지?”

“귀여운 동생아, 네가 아무리 귀엽더라도 내가 설마 작위를 가지고 장난을 치겠니. 어머니의 유언장은…… 이런, 만탈락에 두고 왔네. 하지만 아버지도 한 부 갖고 계시겠지.”

오드리의 눈이 기이한 빛을 띠고 일렁거렸다. 한여름 숲의 푸르름보다는 깊은 물속에서 흔들리는 수초 같은 초록색. 하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오드리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하델, 네가 아버지의 집무실과 서재도 턴 거 알아. 어머니의 유언장을 가져오렴. 원본 유언장을 찾아오면 결혼계약서를 보여줄게.”

“……난 도둑이 아니야. 터, 털거나 훔치거나 한 적 없어.”

“와우, 조금 전에 내 책상에서 비밀 공간 찾다가 들킨 사람 누구?”

“조금 전에 주인 없는 곳에서 물건 뒤지는 것도 도둑질이라며 날 나무란 사람은 누군데?”

“하하, 맞아. 도둑질은 안 되지. 그러니 굳이 도둑질까지 해서 찾아볼 생각 말고 이 누나가 하는 말 그냥 믿어.”

오드리는 여전히 수초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산뜻하게 손을 뗐다. 하델은 오드리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잡혔던 어깨가 아팠다.

“내가…… 유언장 가져오면 결혼계약서 보여주는 거야?”

“아무렴, 보여주고말고. 하지만 원본이어야 해. 사본은 의미 없어. 원본 서류가 뭔지 구분할 줄은 알지?”

“알아.”

“귀엽기는. 하델, 그런데 왜 갑자기 말이 짧아졌니? 나는 너더러 말을 편히 해도 된다고 허락해 준 적이 없는데? 자, 하늘같은 누나에게 존댓말.”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소년은 순식간에 누나에게 말려들었다.

“……네. 아, 그런데요 누나. 진짜 왜 브란젤에 있어요? 벨키스 경이랑 타우레드 영지에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먼저 와도 돼요?”

“걷어차고 왔어.”

하델이 입을 떡 벌렸다. 눈꼴시게 연애를 하며 대형 스캔들을 내고 왕비전하를 증인 삼아 약혼 선언까지 하더니 안 가도 될 본가행까지도 함께했다. 당장 내일 결혼할 것처럼 굴다가 갑자기 걷어차고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왕비전하께서 화내시는 거 아니에요?”

“이미 말씀드리고 왔어. 브란젤에 오자마자 갔었지. 화 안 내시던데? 결혼은 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인생을 즐기라고 하시더라.”

“인생을 즐기라니……. 왕비전하께서 하신 말씀이라곤 믿어지지가 않아요.”

“좋은 분이야. 어머니를 많이 아끼셨대. 하델, 네가 열넷이 되어서 왕궁 출입이 가능해지면 꼭 한 번 뵙고 인사드려.”

“네. ……누나, 저는 이만 가볼게요.”

“왜? 조금 더 있다 가지. 곧 다이앤이 차를 내올 거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랑 차도 한잔하고, 그간 밀린 얘기도 하면 좋잖아. 타우레드 영지 얘기 해줄게. 거긴 렘 강이 정말 아름다워.”

하델은 다이앤의 이름이 쓰여 있던 문을 떠올렸다. 헨젤의 후계자인 자신에게도 막혀 있던 문. 오로지 방의 주인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마법이 걸린 문 너머에서는 싸한 약초 냄새가 풍겼었다. 굳어지려는 표정을 의식해 억지로 입술을 끌어당기고 미소를 지었다.

“아뇨. 파혼하고 돌아온 누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시킬 순 없죠. 거기서 있었던 일은 다 잊고 편히 쉬세요. 제 이야기는 다음에 들려드릴게요.”

오드리가 기분 나빠 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도저히 다이앤이 내온 차를 마실 용기가 안 났다. 도망치듯 서재를 나와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마침 쟁반을 들고 오던 다이앤과 마주쳤다.

“도련님!”

하델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 걸으면서 초상화 속의 어머니 얼굴을 생각했다. 예전엔 오드리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졌었는데, 오늘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알신다를 죽인 게 정말 누나가 맞을까? ……아마 맞겠지. 설마 하녀 혼자 그런 걸 결정했을 리는 없으니까…….’

걸음걸음 걸을 때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달그락달그락 흔들렸다. 분한 마음에 어떻게든 응어리를 풀어내고 싶어서 오드리의 약점을 잡겠다고 서재와 집무실 등을 뒤졌다. 로렐라이와 연결되는 끈을 발견하고 이거면 됐다, 싶었는데…….

“……이런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정신을 차려보니 헨젤 백작의 서재 앞이었다. 하델은 오드리에게 정신없이 휘둘리는 자신이 한심해 그냥 돌아갈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만탈락과 랄리우스는 자기 것이라고 속삭이던 오드리의 목소리가 자꾸 귓전에서 맴돌았다.

그까짓 만탈락이 아무리 번영하더라도 남부 대평원만은 못하고, 랄리우스가 아무리 빛나는 이름이라도 작금의 헨젤만은 못한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손에서 빠져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졌다.

‘본래 다 내 건데……. 그렇잖아, 다 내 거라고 했다고. 확인만, 확인만 해 보자.’

하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지나가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손을 뒤로 뻗어 서재의 문을 밀었다. 잘 관리된 문은 미끄러지듯 소리도 없이 열렸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다. 평소에도 자주 들어오는 곳이고, 잘 숨겨둔 비밀공간을 찾으며 논 적도 있는 곳인데 오늘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비밀공간들을 하나씩 까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정말 오드리의 말이 맞아서, 만탈락과 랄리우스가 내 몫이 아니었던 거면 어떡하지? 답은 금방 나왔다.

‘무슨 상관이야, 그때가 되면, 아버지에게 얘기해서 내 걸로 만들면 되지!’

브란젤의 밤은 밝았다. 달이 하늘에 없어도 가로등이 거리 구석구석을 비추며 어둠을 몰아냈다. 잘 포장된 길 어느 곳에 서더라도 두 개 이상의 그림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만큼 가로등이 없는 곳은 깊은 어둠에 잠겼는데, 헨젤 백작저의 서편에 조성된 숲도 대단히 어두운 곳 중 하나였다.

오드리는 제 방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찬 기운을 품은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헤매는지, 마른 낙엽이 땅에 떨어지며 톡톡 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마치 여름날의 빗소리 같았다.

타우레드 영지에서 돌아온 후, 오드리는 아주 의욕적으로 일에 뛰어들었다. 오스미다 왕비에게 파혼 소식을 전하고 실컷 야단을 맞은 건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묘하게 적대감을 내비치는 하델을 달래고 릴리가 임시로 처리하고 있던 가문의 살림을 돌려받은 데다 이디케를 닦달해 데멘사와 로렐라이의 서류까지 받아들었다.

어찌나 바쁜지, 아침 승마를 대신하는 셈 치고 호신술을 가르치던 카프러스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할 정도였다. 계속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다간 크게 앓게 될 테니 적당히 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잠깐의 여유라도 생기면 라비린에게 일방적으로 파혼을 당하던 순간이 계속해서 반복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한 라비린이, 단호하게 자신을 밀어내던 손이, 얼음장처럼 새파랗던 음성이, 계속…….

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낮에 무리를 했으니 잠이라도 잘 자야 한다며 다이앤이 서류를 몽땅 거둬 도망가 버렸는데, 오라는 잠은 안 오고 잡념만 들끓었다.

깃털 이불 뒤집어쓰고 두어 시간을 끙끙대다 결국 이렇게 창가에 주저앉아 빗소리 같은 낙엽소리를 들었다.

‘진짜 유언장은 헨젤 백작이 갖고 있어.’

바람에 구르는 낙엽 소리가 라비린의 목소리로 바뀌어 들렸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생각하지 않으려 끙끙대던 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형태로 들이밀어진 순간이었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떨어지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타우레드 영지에서 브란젤로 돌아오던 길이 어땠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통상 소요하는 시간보다 며칠이나 더 걸렸다는 걸 생각하면 여정이 몹시 험했을 성싶은데, 어째 칼로 깨끗이 도려낸 것처럼 하얬다.

다이앤도 카프러스도 그 시간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오드리는 차마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아 마냥 미루는 중이었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나 정신 나간 것처럼 굴었는지 알아봐야 낯만 뜨거워질 것이다.

‘진짜 유언장은 헨젤 백작이 갖고 있어.’

이왕 라비린의 목소리가 들릴 거면 사랑한다 좋아한다 달콤한 말이었으면 좋을 텐데, 들리는 거라곤 실은 내가 너를 오래전부터 속여왔다는 고백뿐이다. 오드리는 창문에 입김을 불고 라비린의 이름을 쓰다가 소맷자락으로 벅벅 문질러 지웠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해가 떠 있을 때는 견고한 이성으로 무장한 척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밤이 되어 감상에 젖으니 꼭꼭 묶어두었던 마음이 거칠 것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 많이 퍼준 것도 아닌데 물그림자처럼 남은 애정의 흔적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멍하니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보던 오드리의 뺨이 축축하게 젖었다. 뒤늦게 깨닫고 물기를 훔쳤지만 내일 아침이면 눈이 퉁퉁 부을 게 틀림없었다. 그나마 고용인들을 죄다 복귀시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찬바람에서 유황 냄새가 났다. 이 깊은 밤에도 브란젤 어디에선가는 또 괴물 사냥을 하고 마법망 뭉치를 해체하는 모양이었다. 치안대와 왕궁마법사들이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드리는 남은 눈물을 박박 닦아내고 크게 심호흡했다. 상쾌하지도 않고 기분 좋지도 않은 냄새이지만 덕분에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던 라비린이 조금은 옅어졌다. 싸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됐어, 내가 이렇게 아파할 필요 없어. 라비린 녀석이 멍청한 거야.’

브란젤로 돌아오자마자 셰비언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벌써 열흘도 더 전에 왕궁마법사들을 이끌고 타우레드 영지로 떠났다고 했다. 출발 일자를 계산해 보면 오드리가 떠난 날과 그다지 차이 없이 도착했을 게 분명했다.

“배신자를 내가 뭐 얼마나 좋아할 줄 알구……? 라비린 같은 거에 목매기엔 내가 아깝지.”

벌써 며칠째 같은 말을 하는 걸 알면서도 내일은 다를 거라 믿으며 또 똑같은 결심을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결심이 거듭될수록 견디는 게 조금씩 쉬워진다는 것이다. 시간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약이었다.

오드리는 침대로 들어가려다 말고 머리맡에 두었던 상자를 열었다. 마법등의 빛에 노출된 알룬드의 목걸이가 요사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빛났다. 망설이다 목걸이를 손에 쥐자 불길하리만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셰비언은 언제 돌아오지? 그가 와야 이걸 물어볼 텐데.’

라디아타에게서 목걸이를 받을 때만 해도 나중에 셰비언을 만나서 이 보석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한데 어쩌다 보니 셰비언은 타우레드 영지에, 보석은 자신과 함께 브란젤에 있다.

마법등 아래에서 알룬드의 목걸이를 보는 탓인지 흰 이불에 투명감 넘치는 깊은 푸른색이 맺혔다. 같은 푸른색인데 셰비언의 눈동자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한쪽이 깊은 바다라면, 다른 한쪽은 얼어붙은 강. 하지만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싶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오드리는 알룬드의 목걸이를 도로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조금 전까지 라비린을 생각하며 울어놓고 바로 셰비언을 떠올렸더니, 어쩐지 민망하다 못해 죄의식이 들었다. 거 참 우스운 일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착하고 경우 있었다고 이래?’

스스로를 비웃어봐도 상자를 쥔 손은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오드리는 뚜껑을 열까 말까 한참을 갈등하다 상자를 던지다시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자야 할 때를 훌쩍 넘겼는데 저 따위 상자에 계속 시간을 쓰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쉬자. 쉬어야 돼. 쉬어야 피로를 풀고 또 일을 하지.’

그날 밤, 깃털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끙끙대다 잠이 든 오드리는 만탈락에 가는 꿈을 꿨다. 그것도 나풀나풀한 잠옷을 입고 발아래 펼쳐진 기찻길을 따라 등에 돋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아서 가는 꿈.

만탈락에서는 아무도 오드리를 보지 못했다. 오드리는 높이 자란 나무에 앉아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구경하고, 좌판의 과일을 훔쳤다. 훔친 과일을 먹으며 길가에 주저앉아 햇살에 늘어진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털이 알록달록한 고양이는 노란 눈으로 오드리를 쳐다보곤 도로 머리를 떨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보들보들한 털을 실컷 만지고 말랑말랑한 귀를 조몰락댔다. 살이 통통한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다가 쭉쭉 뻗은 꼬리를 쓰다듬으니 심사가 불편해진 고양이가 야옹, 울면서 꼬리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귀찮으니 그만 만지란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들지 않는 게으름이 몹시 귀여워 오드리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고양이나 한 마리 기를까…….”

“갑자기 고양이는 무슨 고양이에요? 털 날린다고 싫어하실 땐 언제고.”

다이앤이 대뜸 핀잔을 주며 끼어들었다. 오드리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거의 뛰어오를 것처럼 놀랐다.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자, 브란젤 저택의 하녀복을 입고 머릿수건을 두른 다이앤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 혹시 잠꼬대 하시는 거예요?”

“……잠꼬대?”

오드리는 벌떡 몸을 일으키곤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만탈락은 무슨, 여긴 헨젤 저택 서관에 있는 그녀의 방이었다. 로렐라이에서 출시된 최신 마법도구들이 즐비하고 잉크 냄새, 종이 냄새가 향수보다 더 진하게 풍기는 방.

조금 전까지 정수리와 목덜미를 데우던 햇살과 손바닥 가득 느껴지던 털의 감촉은 온데간데없었다. 다이앤이 열어놓은 창문을 타고 들어온 서늘한 아침 공기가 잠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퉁퉁 부은 눈을 비비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엄청나게 생생한 꿈을 꾸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날개를 퍼덕거리며 하늘을 날던 해방감이나 만탈락에서 느낀 안락함 따위는 다 허상이었다는 것도. 잠들어 꿈을 꾼 것이니 깨어나는 거야 당연한 일인데, 아쉬움이 대단히 컸다.

“조금만 더 늦게 깨우지.”

“죄송해요. 하도 또렷한 말로 중얼거리시기에 깨어 계신 줄로만 알았어요.”

“아깝다 고양이…….”

“주방에라도 가보실래요? 아침 얻어먹으러 온 고양이들이 한두 마리는 있을 거예요.”

“아냐, 됐어. 지금 시간이면 전쟁터일 텐데 내가 가봐야 방해만 되지. 잠이나 더 잘래.”

오드리는 꿈이 다시 이어지길 바라며 털썩 드러누웠다. 꿈이라도 좋으니 만탈락의 햇살을 한 번만 더 만끽하면 이 아쉬움이 좀 달래질 것 같았다. 부드러운 침대가 노곤하게 늘어진 몸을 쭉쭉 빨아들였다.

하지만 다이앤은 오드리가 잠들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불을 홱 걷어젖히고 그녀를 맹렬히 흔들어댔다.

“아가씨, 주무시면 안 돼요! 차라리 고양이라도 만지고 계세요!”

“왜에!”

“왜라니요! 백작님이 아가씨를 보겠다고 했던 날이 바로 오늘인데요! 백작님이 퇴근을 못 하셨으니 아가씨께서 직접 왕궁에 가셔야 해요. 준비하셔야죠!”

이불을 붙들고 버티던 오드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게 오늘이야?”

“네, 오늘이에요! 어제도 말씀드렸는데 잊어버리신 거예요? 아이 참, 눈에 붓기 빼야 되는데 도로 주무시면 어떡해요?”

“아니, 그럴 거면 주방 가서 고양이 쓰다듬으란 소린 왜 했어?”

“농담하시는 건 줄 알았죠! 설마 새카맣게 잊어버리셨을 거라고 제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오드리가 울상을 지었지만 다이앤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이불을 마저 걷어치우고 따뜻하게 데운 세숫물로 오드리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힘이 빡 들어간 게, 아주 방자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퉁퉁 부은 눈을 닦으면서는 혀도 끌끌 찼다.

“세상에, 사랑에 눈물짓는 아가씨를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죠. 할 수만 있다면 일 년 전의 저에게 가서 속닥속닥 말해주고 싶네요.”

“말해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믿느냐가 문제지. 믿겠어?”

오드리의 장난스런 대꾸에 다이앤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타우레드 영지를 떠나온 이후 내내 우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일에만 파고들던 오드리가 이렇게 발랄하게 농담에 대꾸하는 건 처음이었다.

“믿을 리가 없죠. 어디서 날 속이려 드냐며 뺨이라도 올려붙이지 않으면 다행이게요?”

“거 봐. 나도 내가 이러는 게 안 믿기는데 너희는 믿겠니?”

“그건 그래요. 그래도 오늘은 이전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좋은 꿈이라도 꾸신 거예요?”

“응. 엄청 좋은 꿈! 만탈락 꿈을 꿨어.”

“어쩐지……. 갑자기 고양이를 찾으시더라. 그 얼룩이 고양이라도 만나셨나 봐요?”

자주 챙기던 고양이 얘기에 오드리가 웃었다. 다이앤은 그 웃음만으로 행복해져 함께 따라 웃었다. 퉁퉁 부은 눈의 붓기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는 웃음이 싹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이거, 아무래도 화장을 짙게 해야겠는데요. 웬만해서는 안 가려지겠어요.”

“쯧……. 얼마나?”

“……신년제 제의를 집전하실 때 정도는 해야…….”

“그 정도면 아예 분장 수준이잖아. 됐어, 옅게 해.”

“그럼 눈 부은 게 다 티가 날 텐데요……. 사람들이 비웃을 거예요. 왕궁에 눈이 얼마나 많은데요.”

“멜브란트 전체가 다 알 만큼 요란하게 연애해서 약혼해 놓고 몇 달 만에 파혼했어. 비웃음거리가 되는 건 피할 수 없으니 동정이라도 사야지. 약간 초췌해 보이는 쪽이 나아.”

라비린과 약혼하고 수확제의 자선을 성공적으로 해내며 끌어올린 오드리의 평판은 이제 뚝뚝 떨어질 일만 남았다. 웬만해서는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는 쪽이 좋지만, 헨젤 백작이 그런 걸 배려해 줄 사람이었으면 애초 왕궁으로 오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안 그래도 라비린 마음에 안 들었다며 파혼해서 잘됐다던 사람 맞아?”

거울에 비친 다이앤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리어 퉁퉁 부은 눈을 한 오드리 쪽이 훨씬 냉정하고 침착해 보였다.

“그야 속상해서 그러죠. 벨키스 경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은 저지 아가씨가 아니잖아요.”

“말은 잘하지. 됐어, 이제 괜찮아. 내가 꿈을 아주 제대로 꾼 것 같아. 만탈락의 햇살을 실컷 쬐고 왔더니 마음이 싹 가라앉았어. 지금 같아서는 라비린과 마주 앉아서 농담 따먹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짜야.”

“아가씨……. 제가 최선을 다해서 꾸며드릴게요. 걱정 마시고 눈 감으세요. 붓기부터 빼요.”

오드리의 진심은 전해지지 않았다. 수건에 물을 적시는 다이앤의 손길에 비장미가 넘쳤다. 오드리는 오늘의 단장이 매우 수고스러울 것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의욕으로 불타오르는 다이앤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 * *

헨젤 백작이 일하는 재무국은 왕국에서 바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특히 수확제 즈음과 봄 직전이 가장 바빴다.

그래도 예년에는 그 사이에 잠시 쉬는 기간이 있었는데, 올해는 괴물 사태 때문에 그 휴가가 사라져 버렸다. 괴물 사태에 투입되는 인력에 대한 지원과 도시 복구 비용 마련, 우선순위에 따른 재원 분배 등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밀려들었다.

재무국의 직원들이 일 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휴가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일에 매달렸지만 괴물 사태가 재발하면서 일거리는 제곱에 제곱이 되어 돌아왔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눈 밑에 시커먼 그늘을 매단 채 서류에 파묻혀 허덕였다. 끌어올 수 있는 사람은 죄다 끌어왔는데도 이 꼴이라니, 조만간 서류에 머리를 처박고 죽게 생겼다는 한탄이 괜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탈자 없이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는 건, 이탈했을 때의 처벌도 무섭지만 재무국의 수장인 헨젤 백작이 퇴근도 마다하고 종일 재무국에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내가 하는 것보다 몇 배의 업무를 해치우면서 다음 일을 독촉하는 괴물이 위에 버티고 있으니, 혹시 이거 별것도 아닌데 내가 모자라서 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그렇게 잉크 냄새 종이 냄새에 절여진 채 눈이 빠지도록 서류를 보고 있던 직원들은 헨젤 백작의 호출을 받고 나타난 오드리에도 반응이 늦었다. 분명 신분을 고지 받았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얼른 생각해 내지 못하고 오드리를 멀뚱히 세워둔 것이다.

오드리는 상당한 시간을 기다리고서야 헨젤 백작의 집무실로 안내됐다. 그녀를 안내한 보좌관 일랑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갔는데, 헨젤 백작은 고개도 들지 않고 오드리를 맞았다.

“오드리 헨젤이 아버님의 부름을 받고 왔…….”

“앉아라.”

“앉을 곳이 없어요.”

그제야 헨젤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서류로 뒤덮이다시피 한 의자와 테이블 등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분명 아침나절에 치워뒀는데 그새 또 서류가 쌓였다. 삐걱대는 몸을 일으켜 점찍어둔 테이블과 의자에서 서류를 밀어냈다.

“이제 앉을 수 있겠지.”

오드리는 얼결에 헨젤 백작이 마련해 준 자리에 앉으며 슬쩍 그의 행색을 살폈다. 한 달 가까이 집에 안 들어온 것치고는 꽤 깔끔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랫동안 바깥에 있었던 사람치고 깔끔하다는 것이지, 평소의 그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항상 갓 접은 냅킨처럼 단정하던 이가 면도를 건너뛰기라도 했는지 턱이 거무스름했다. 카라는 구깃구깃했고, 소맷자락엔 때가 묻었다.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서류를 하도 만져서 손바닥과 손톱에 잉크가 뱄다.

바깥의 직원들도 그렇고 헨젤 백작도 그렇고, 여러모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오드리가 직원들의 무례를 용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무려 헨젤 백작을 측은하게 여길 정도였다.

“왜 집에 돌아오지 않으실까 했더니……. 상상 이상으로 바쁘셨던 거군요.”

“그럼 뭐 다른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느냐?”

“하지 말라는 약혼을 하고, 가지 말라던 타우레드 본가행을 따라가서 결국 파혼으로 끝났으니, 제게 화가 많이 나신 줄 알았죠. 얼굴도 보기 싫으신 줄 알았어요.”

“그것도 있었군.”

마치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한 말투였기에, 오드리는 완전히 의문에 빠지고 말았다. 인사에도 관심 없고, 파혼하고 돌아온 걸 야단하려는 것도 아니면, 대체 자신을 왜 왕궁으로 불러들였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바쁜 때에.

헨젤 백작이 오드리의 앞에 서류 한 장을 들이밀었다. 오드리가 당황하여 살펴보니 임시 계약직 채용 서류였다.

“읽어보고, 서명해라.”

“……네?”

“만탈락에서 많이 봤을 거 아니냐. 설마 행정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당연히 아니죠. 하지만 아버님, 그건 도시의 주인으로서 당연한 본분을 한 거고요. 이건 좀 다르지 않나요? 설마 저를 노동력으로 쓰려고 부르신 건가요? 아니시죠? 에이, 귀족 여자가 어떻게 공무를 보나요? 집안 살림을 감독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말도 안 돼요.”

오드리가 보란 듯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담비 숄을 팔락였다. 다이앤이 이를 악물고 꾸며준 덕분에, 지금 오드리는 새벽마다 말을 타고 강변을 내달리는 왈가닥이 아니라 아주 우아하고 가냘픈 여인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가녀린 여인에게는 공무를 맡기지 않는 게 세간의 상식이었다.

상식.

그중에서도 여자는, 으로 시작하는 수 십 가지 이야기들. 맞는 말과 틀린 말이 뒤섞인, 대체 누가 시작한 건지 모를 것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믿는 것들.

이제까지 오드리는 마음껏 상식을 파괴하며 살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닥치면 상식적으로 내가 그럴 리 있느냐며 요리조리 빠져나오곤 했다. 거의 대부분은 잘 통했다.

하지만 가끔 그런 술수가 통하지 않는 소수의 사람이 있었는데, 헨젤 백작이 바로 그 소수에 해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정략이었다고 해도 그는 밀리나의 남편이었다. 부부로 산 기간이 자그마치 10년이었고 약혼 기간도 있었으니, 상식이 깨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드리, 나는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할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일이 몰려드는데, 여자의 재주라고 못 쓸 이유가 뭐지? 마침 너는 몇 년이나 만탈락을 운영한 경험자고, 만탈락의 번영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오드리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저 달콤한 말을 지껄이는 사람이 헨젤 백작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여자의 재주라고 못 쓸 이유가 없다고요?”

“왕궁마법사의 태반은 여자지만 일을 아주 잘하고 있지 않더냐? 네가 만탈락의 주인으로 있으면서 쌓은 경험을 이렇게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감사해라. 자, 어서 서명해.”

그렇게나 듣고 싶어 했던 말을 들었는데, 어쩐지 전혀 감흥이 없었다. 심장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느리게 뛰었고 머리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차갑기만 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 안달하던 소녀는 한참 전에 죽고 없다는 걸, 또 이렇게 실감한다.

“저는 제가 신기할 정도로 어머니만 빼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가 봐요. 이제 보니 아버님을 닮은 구석도 있네요.”

오드리는 헨젤 백작이 내민 서류를 살짝 밀어냈다.

“저도 합리적인 걸 좋아하거든요.”

헨젤 백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집무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침 서류를 한아름 안고 집무실에 들어오려던 시종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돌아갔다.

“이 서류에 서명하고 일거리 받아서 일하면, 몸이야 힘들어도 기분은 좋겠죠. 제 재주를 높이 사서 써주신다는데 어떻게 싫겠어요?”

“그럼 바로…….”

“하지만 그 다음은요?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레이디 헨젤이 주제도 모르고 왕궁에서 감히 공무를 봤다더라는 말이 퍼지고 나면 제 평판은 어떻게 될지 뻔하지 않나요?”

“네가 평판에 신경을 쓴다니, 별소릴 다 듣겠다. 일부러 악평을 조장하고 있었던 걸로 아는데?”

헨젤 백작은 오드리가 일부러 평판을 떨어뜨렸던 걸 알고 있었던 듯했다. 어쩐지, 평판이 계속 떨어지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했다. 오드리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없는 일로 떨어지는 평판은 언제든지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지만, 사실 때문에 떨어지는 평판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평판이 떨어지면 사교계에서 갈 수 있는 곳이 지나치게 제한돼요.”

“쯧…….”

“만탈락에서의 행정 경험이 아무리 귀중하다 한들, 저는 아직 어리고 브란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죠. 이런 저보다는 연륜 있는 귀부인 쪽이 훨씬 적합하다는 걸 아실 텐데도 굳이 제게 서명하라 하시는 건, 그분들의 평판이 떨어지는 걸 아버님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요?”

“…….”

“아버님이 절 아끼지 않는다는 건 이미 사교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고 고모님은 절 미워하시죠. 라디아타는 제 편을 들어주겠지만 지금은 타우레드 영지에 있고 돌아와서 정식으로 왕자전하와 약혼식을 올리고 나면 운신의 폭이 많이 좁아질 거예요. 라비린과 파혼한 지금, 대체 누가 절 보호하죠?”

“그러게 왜 파혼을 한 거냐? 마음먹고 추격까지 따돌리며 갔으면 돌아오질 말았어야지. 베텔 경을 불러내는 것까지도 용인해 줬는데 결과가 왜 이래?”

“제가 파혼을 하고 싶어서 했나요?”

“아니, 네가 찬 것도 아니고 당하고 왔어?”

헨젤 백작의 목소리가 확 커졌다. 헨젤이 타우레드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긁었다. 뒤지는 거라곤 가문의 역사뿐인데 일방적인 파혼을 해놓고 연락 한 통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클로드 이 자식……. 청혼서 안 받아주면 당장 국왕에게 쫓아가 따질 것처럼 굴어놓고, 아들놈이 변심하는 걸 그냥 둬? 괴물이고 나발이고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아주……!”

“아, 아버님.”

“너도 너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가진 거라곤 덜렁 기사 작위밖에 없는 놈이 널 차? 헨젤이 타우레드에게 대체 뭐가 부족해서?”

“…….”

“무슨 상황이었는지 자세히 얘기해 봐라. 타우레드 영주성에 괴물이 나타났다더니, 그게 원인이었느냐? 설마 괴물이 나왔다고 외부인에게 화살을 돌린 건 아니겠지?”

“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후작님에게서 따로 들으시는 게 어떨까요? 파혼하고 나왔는데 제 입으로 나불나불 떠들기는 좀 그래서요.”

“파혼하고 나왔으니까 나불나불 떠들어도 되는 거다. 그게 겁이 났으면 널 안 보냈어야지.”

“그래도 내키지 않아요.”

헨젤 백작의 표정이 점점 나빠지건만, 오드리는 말하지 않고 버텼다. 타우레드의 일족들이 분열했다는 말을 해주면 매우 기뻐하겠지만,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도 않는데 냅다 정보를 토해낼 이유가 없었다.

“……다만, 라비린이 절 돌려보낼 때 후작님은 성에 안 계셨어요. 그분이 계셨다면 절 잡아두셨을 거예요.”

“괴물 때문이군. 기사 작위밖에 없는 애송이가 겁을 먹었나 보지? 후계자 주제에 식솔들 장악도 못 했나? 생긴 것만 멀쩡한 속 빈 씨앗 같은 놈…….”

다시 만나는 날에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헨젤 백작이 험한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오드리는 그 들리지 않는 욕을 듣고 있는 게 어쩐지 불편해졌다. 한숨을 삼키며 일어섰다.

“욕을 하시려거든 얼굴 맞대고 하시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어요.”

“가다니? 서명하고, 일하다 가야지.”

“거절했잖아요. 이건 아버지의 합리이지 제 합리가 아니에요.”

“네게 선택권이 있다고 누가 그러더냐? 이거라도 하고 있어야 만탈락에 가지 않고 브란젤에 머무르는 핑계가 된다는 걸 생각해라.”

나긋하게 인사하고 걸어 나가던 오드리가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러고 보면 오드리가 타우레드의 본가행에 따라나섰던 이유는 만탈락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던 라비린이 곁을 떠났으니, 이제 이야기는 다시 원점이 된 것이다.

“열렬하게 연애해서 약혼했는데, 창졸간에 파혼을 당하고 돌아왔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오래 지냈던 만탈락에서 마음을 추스르라 보냈다고 하면 누가 의심하겠느냐?”

“…….”

“앉아라.”

어깨가 오르락내리락,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린 오드리가 돌아섰다. 할 수만 있으면 헨젤 백작을 찔러 죽이고 싶을 텐데, 심호흡의 효과인지 낯빛이 아주 평온했다.

“제가 그 서류에 서명하고 공무에 손을 댔다가 평판이 돌이킬 수 없는 바닥을 치면, 그땐 그걸 이유로 만탈락에 돌려보낼 생각이시잖아요. 어차피 보낼 건데 놀리지 말고 일이나 좀 시키다가 보내야겠다, 이게 아버님의 본심이 아닌가요?”

“…….”

“쫓겨 가든 제 발로 가든, 어차피 가게 될 만탈락이라면 제 평판이라도 지키는 게 합리적인 결정이겠죠. 마침 아버님은 너무 바쁜 나머지 집에 돌아올 시간도 없으신 것 같으니, 괴물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는 브란젤에 있을 수 있겠네요.”

“그게 네 마음대로 되겠더냐. 여기에 앉아서도 심부름꾼 정도는 충분히 부린다.”

“아버님의 편지를 받아볼 집사 할아범은 휴가 중이예요. 어디 집사뿐일까요? 지금 저택에 남아 있는 소수의 고용인들 전부가 제 수족과 같은 사람이에요. 어마, 화내지 마세요, 제가 한 일 아니니까. 돌아와 보니 귀여운 동생이 그렇게 해두었더라고요. 고용인이 적으면 눈과 귀도 적어질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깜찍하죠?”

오드리는 하델이 휴가를 준 고용인 중 제게 호의적인 사람 몇 명을 도로 불러들였다. 괴물이 나타난 브란젤에서 집에 있기 불안해하던 고용인들은 기꺼이 출근했고, 덕택에 일에 치여 죽을 둥 살 둥 하던 다른 이들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사람 몇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효과는 확실했다. 오드리는 앉은 자리에서 하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원본 유언장을 가져오라는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요즘 하델은 헨젤 백작이 쓰는 공간을 죄다 뒤지고 돌아다녔다. 그런다고 찾을 수나 있겠느냐마는,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게 귀여워 내버려 두고 있었다.

헨젤 백작은 오드리가 보일 듯 말 듯 지은 미소만으로도 사정을 짐작하고 한숨을 삼켰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죄다 오드리에게 넘어간 걸 저번에 실감했으니, 하델은 제가 누나에게 휘둘리는 줄도 모르고 휘둘리고 있을 테다. 그 상황이 아주 눈에 훤했다.

“……네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칭찬이세요?”

“당연히 칭찬이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거란 말이, 대체 왜 칭찬이란 말인가? 골라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태어난 이상 바꿀 수도 없는 성별 때문에 재주가 있어도 못 써먹어 아쉽다는 말이.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열통 터지는 심사를 입 밖으로 꺼내봐야 별나다는 말밖에 들을 게 없으니, 오드리는 자연히 다른 식으로 말하는 법을 익혔다.

“아버님은 계산이 빠르고 결정에 주저함이 없는 분이시죠. 지난 일에 만약을 붙여서 뭐 하겠느냐만, 만약 제가 사내아이였다면 하델은 태어나지도 않았을걸요. 아버님은 하델을 아끼시니, 되레 제가 딸로 태어난 게 천만다행이지요. 그러니 제가 욕심이 많은 건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

“하긴 네 욕심에 대해서는 나도 익히 알지. 그 넘치는 욕심에 로렐라이는 이제 어쩔 셈이냐? 네가 정말 이름만 빌려주고 구경만 했을 리가 없는데, 타우레드 없이 어떻게 해나갈 요량이야?”

오드리는 침착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워커와 계약서를 쓰고 어머니의 보석을 넘겨주던 그 순간부터, 언젠가 반드시 헨젤 백작에게 추궁당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중간에 라비린이 끼어들면서 조금 달라지나 했었는데, 결국엔 이렇게 맨몸으로 그의 앞에 서게 됐다.

“왜요? 이번엔 아버지가 제 뒤에 서보실 생각이세요? 타우레드가 했던 일을 아버님이 해주신다면야 저야 좋죠. 초기에 타우레드 후작님에게서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거든요. 아낌없는 조언이 정말로 감사했어요.”

“타우레드야 상단 투자로 돈을 버는 가문이니 그랬겠지. 하나 로렐라이가 암만 대단하다 해도 남부 대평원만은 못해. 안 그래도 바쁜데 작은 일에 일일이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물론, 하델이 로렐라이에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

“아직도 로렐라이 단주의 얼굴은 비어 있잖느냐. 거기에 하델을 넣어라. 그렇게만 해준다면, 네가 하델의 후견인으로서 로렐라이 운영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도움을 주마. 어차피 너는 로렐라이의 주인으로서 나서지도 못하니 이만하면 좋은 조건이 아니냐.”

“제 예상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말씀을 하시네요. 하델의 후견인 자리라…….”

아주 좋은 제안을 들었다는 것처럼 오드리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헨젤 백작이 뭐라고 하든, 그녀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버님. 로렐라이는 제 거예요, 언젠가는 뒤로 물러나야 하는 후견인 따위로는 참을 수 없어요. 제가 주인으로서 나설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로렐라이의 단주는 계속 베일에 싸인 채가 좋아요.”

“하델은 네 동생이다. 그런데도 안 된다는 거냐? 하델은 누나의 공로를 모른 체하지 않을 텐데도?”

“제가 욕심이 아주 많아서요. 어린 동생의 앞날을 닦아주고 물러나는 아름다운 미덕을 발휘할 자신이 없어요. 솔직히 하델이 제 눈에 안 차기도 하고요. 아버님이야 몇 년만 기다리면 자란다고 하시겠지만, 그동안 저라고 가만히 있겠어요?”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델이 무르기는 해도 우둔하진 않아.”

“대뜸 단주 자리에 앉혀놓고 뭘 가르칠 수 있죠? 제가 하델을 로렐라이 밑바닥부터 몇 년 동안 굴려도 된다고 하시면 가르치는 걸 생각해 보겠어요. 하지만 하델은 후계자 교육을 받아야 하니 그건 안 될 일이죠.”

어떻게든 부드러운 말로 오드리를 달래려던 헨젤 백작은 드디어 말 섞기를 포기했다. 오드리의 고집이 생각 이상인 데다 문 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아주 간절했다.

‘무능한 놈들.’

헨젤 백작이 기준이 된다면 세상에 유능하다고 평가받을 사람이 몇이나 나오겠냐만, 그는 그런 부분에 있어 조금도 양보가 없었다. 재무국의 직원들이 아주 약간만 더 유능했어도 한 달 가까이 왕궁에서 숙식하진 않았을 테니까.

“오늘은 일단 가봐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네에. 아버님, 가끔은 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집에 오세요. 많이 초췌해지셨어요.”

“빈말인 거 다 안다.”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드리는 빈말이라는 걸 부정도 않고 산뜻하게 뒤돌아섰다. 토끼처럼 깡총대진 않아도, 그녀의 뒷모습에서 즐거움이 배어났다. 부녀지간에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을 만치 바쁘다니, 지긋지긋한 괴물 사태도 좋은 점이 있었다.

그 뒷모습을 빤히 보던 헨젤 백작이 대뜸 그녀를 불러 세웠다.

“오드리.”

“네?”

“네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내 보호 아래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만탈락과 로렐라이는 네게 주어진 잠깐의 즐거움일 뿐이니, 거기에 너무 빠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미성년자의 재산 관리는 본래 부모의 몫이라는 걸 이렇게나 따뜻하고 자애롭게 말하다니, 그것도 참 재주라면 재주다. 여차하면 절차와 힘으로 뺏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제가 아버님을 닮았으니, 그런 면에 있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리기는 해도 제게 무엇이 유리한지쯤은 볼 줄 압니다. 합리적으로 행동할게요.”

‘손해만 보는 거래를 자꾸 제시하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값을 받고 팔아버릴 겁니다. 로렐라이를 탐내는 사람이 아버님이 전부는 아니거든요.’

헨젤 백작은 오드리의 가시를 알아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국왕이 로렐라이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나서기라도 하면 하델을 단주 자리에 올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동생에게 주느니 남에게 팔아버리겠다니, 정말 납득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다.

“네가 헨젤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긴 한 거냐? 하델은 좀 아끼더니만, 다 거짓이었어?”

“하델을 아끼는 것과 제 것을 놓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요. 아버님, 이번에야말로 정말 가봐도 될까요?”

“……그래. 아, 잠깐만.”

볼일은 전부 끝났다고 해놓고 왜 자꾸 붙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럴 거면 아예 할 말 목록을 적어둘 것이지. 오드리는 내심 투덜거리며 반쯤 숙였던 허리를 다시 폈다.

“베텔 경에게 전하거라. 은행에 갔던 일은 잘되었느냐고 묻더라고 해.”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양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심장은 무서울 정도로 시끄럽게 뛰는데 손끝은 왜 이렇게 차가울까. 알겠노라, 무사히 전하겠노라 답하면서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역시 알고 있었네.’

원본 유언장이 헨젤 백작에게 있는 걸 라비린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당연히 본인이 가르쳐 주었으니까 안 거지. 중앙은행에 있는 데멘사의 계좌는 이미 예전에 털린 것도 모자라 감시를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정면에서 이런 식으로 꺼낼 줄은 몰랐다. 저 말은 카프러스가 아니라 오드리에게 하는 말이었다. 네가 밀리나의 원본 유언장을 찾아서 랄리우스 후작위를 계승할 가능성 따위는 없다고 말이다.

그새 차가워진 회색 눈이 오드리의 전신을 찬찬히 훑었다.

“대답을 전할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오드리는 몸에 익은 대로 인사하고 헨젤 백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서류를 안고 발을 구르던 직원들이 반색을 하고 열린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그들 뒤에 남아 있던 다이앤이 오드리의 낯빛을 살폈다.

“아가씨, 바로 돌아가실 거죠?”

“……아니.”

“네? 이렇게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딜 가시려고요?”

“바로 집에 들어가는 건 싫어.”

저택에는 하델이 있었다. 헨젤 백작의 흔적도 여기저기에 많았다. 보란 듯 서관을 다 뜯어고쳐 놓긴 했지만, 지금 가면 자신이 없었던 시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될 것 같았다.

문득, 지난밤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정수리를 데우고 목덜미를 간질이는 뜨거운 햇살과 한겨울에도 짙푸르게 빛나는 두꺼운 잎의 나무들, 모래 냄새를 싣고 날아온 바람의 냄새, 형형색색 화려한 원색의 옷을 입고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를 드러내고 크게 웃는 사람들.

태어나기는 브란젤에서 태어났어도 자라기는 만탈락에서 자랐더니, 이 서늘하고 찬 브란젤의 공기가 새삼 괴로웠다. 만탈락에 있을 때는 뜨거워서 도망치기 바빴던 햇살이 눈물 나게 그리워졌다.

“……온실에 가자.”

“네?”

“온실. 왕궁의 온실이 그렇게 아름답다며? 난 백작영애니까 따로 허락 받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어.”

“그야 그렇지만, 아가씨 혼자서요?”

“내가 왜 혼자야? 네가 있는데. 가자!”

“하녀가 어떻게 동행이 돼요? 아이, 아가씨! 혼자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헨젤 백작도 못 꺾은 고집을 다이앤이 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이앤은 오드리의 돌발행동에 당황해 옷자락까지 붙들고 말렸지만, 결국 울상을 지은 채 오드리의 뒤를 졸졸 따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드리에게 잡혀 길안내를 시작한 시종은 귀족영애가 왜 마땅한 동행도 없이 혼자 다니는가 의아해하면서도 군말 없이 그녀를 온실까지 안내했다.

“레이디 헨젤, 해가 지기 전에 나오셔야 합니다. 해가 지면 온실의 문을 전부 닫고 아침이 될 때까지 열지 않습니다.”

“혹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그대로 갇히는 건가?”

멜브란트 전역의 식물을 고루고루 볼 수 있는 걸로 유명한 온실은 그 규모가 어지간한 저택 이상으로 컸다. 여차하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은 오드리의 기색을 눈치챈 시종은 불길한 예감에 땀을 흘렸다.

“문을 닫기 전에 혹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나 반드시 확인합니다.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거 아쉽네.”

시종은 오드리의 중얼거림은 못 들은 척하고 재빨리 사라졌다. 다이앤은 그런 시종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오드리의 흘김을 받고서야 온실의 문을 열었다.

은테를 둘러 장식한 유리문을 열었을 뿐인데, 차가운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바깥과는 달리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녹였다. 굳었던 어깨가 저절로 펴지는 온기에 취해 발을 딛자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오드리와 다이앤을 맞았다.

왕비궁의 무도회장만큼이나 높은 유리 천장에 닿을 듯 크게 자란 나무와, 나무를 타고 오른 덩굴식물 모두가 녹색이었다. 그 녹색 사이로 색색으로 피어난 꽃들이 생기를 더했다. 어딘가에 수로를 조성했는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인기척을 느낀 새 몇 마리가 푸드득 날아 멀어졌다.

아무래도 남부지방의 식물군을 통째로 옮겨온 듯, 두툼하고 커다란 이파리며 화려한 꽃송이들이 눈에 익어 반가웠다. 그중에서도 흰 꽃잎 바탕에 자주색 반점이 있고 노란 꽃술이 솟아난 큰 꽃은 만탈락의 특산 품종이었다.

오드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눅눅하게 늘어지는 공기를 즐겼다. 따가운 햇살과 모래 냄새 품은 바람은 없어도, 이 눈부신 초록과 온기만으로도 충분히 만탈락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어깨에 올라앉아 가슴을 짓누르던 우울이 상당히 옅어지며 기분이 둥실 떠올랐다.

“이런, 재무국 일을 받아들일 걸 그랬어.”

“네? 웬 재무국이요?”

“아버님이 많이 바쁘셨나 보지.”

오드리는 말을 아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도 벌써 다이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자신 대신 화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힘이 되는 일이었다.

“네……. 백작님께는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되죠. 알면서도 자꾸 잊어버리네요. 아가씨, 재무국 일과 이 온실은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래야 왕궁에 매일 들어올 핑계가 생기잖아.”

“아하, 들어온 김에 여기 온실도 매일 보고요? 차라리 정원을 밀고 온실을 짓는 건 어때요?”

“안 돼, 짓는 건 어떻게 짓더라도 온실을 유지하려면 상주 마법사가 있어야 하잖아. 그건 좀 부담스러워. 타우레드 후작가쯤 된다면 모를까…….”

오드리는 장미향 가득한 온실 가운데에서 라비린과 나란히 앉아 책을 읽던 기억을 떠올렸다. 겨우 몇 달 전의 일인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득했다. 그녀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을 추억 속으로 묻어버리며 부러 웃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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