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 인어 아가씨
「멜브란트의 수도가 처음부터 브란젤이었던 건 아니다. 본래 하루마키스 가문의 근거지는 브란젤보다 훨씬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도를 브란젤로 옮긴 건 산트렘의 복속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 -지리로 보는 정치학 中」
라비린은 진심으로 괴물을 바랐다. 열흘의 시간 동안 그렇게 괴물을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동쪽 하늘이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는데도 괴물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는 몹시 실망하고 말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은 캄포스의 머리통이 지독히 짜증스러웠다.
‘죽여 버릴까.’
대화를 하자고 안으로 끌어들여서 죽여놓고 낮에 나타나는 괴물에게 죽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다 죽일 수는 없어도 딱 한 명, 저 캄포스만 죽이면 분이 절반은 풀릴 것 같은데. 날이 밝기 시작해서 그만 방심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라비린의 고민은 거의 실행으로 옮겨질 뻔했다. 셰비언과 왕궁마법사 일행이 때 맞춰 영주성에 도착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로 캄포스를 끌어내 성으로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예상했던 날짜보다 몹시 늦은 도착이지만, 퍽 험한 여행길이었는지 왕궁마법사들은 다들 낯이 창백했다. 개중에 몇몇은 마차에서 구르다시피 뛰쳐 나와 꺽꺽대며 토하기까지 했다. 반면 셰비언은 말끔하다 못해 산뜻하기까지 해서 그들과 한 일행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아르젠 남작, 왕궁마법사분들, 환영하오. 다만 성의 사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대접하기 어려움을 이해해 주길 바라오. 일이 해결되는 대로 아쉽지 않게…….”
“안녕하세요, 후작님. 못 본 새 얼굴이 좀 수척해지셨네요.”
“……남작이 내가 수척해진 걸 알아볼 정도로 우리가 가까웠는지는 미처 몰랐소.”
덜렁 말이 끊긴 클로드가 불쾌감을 내비쳤지만, 셰비언은 그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 일행을 마중 나온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며 오드리를 찾았다. 편지로 자신을 불렀던 만큼 당연히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보이지 않았다.
셰비언은 라비린에게 오드리의 행방을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오드리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라비린이 제게 보이는 적대감이 상당했다. 귀족이 되어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을 만난 덕에 눈치라는 게 생겼다. 아직은 손톱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꽤 긴 손톱이었다.
셰비언은 방긋 웃으며 괴물에 지친 사람들이 가장 원했을 만한 걸 입에 담았다.
“아무래도 일부터 해야겠죠?”
아직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한 왕궁마법사들이 질색을 했지만 셰비언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왕궁마법사들을 영주성 곳곳에 배치해 놓고 북편 건물 지붕에 불쑥 솟아오른 굴뚝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다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
라비린은 높은 곳에 올라 신난 어린아이처럼 발을 흔드는 셰비언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괴물을 잡겠다며 무조건 가장 높은 곳, 하늘이 보여야 하는 곳이 필요하다는 말에 지붕을 내주긴 했지만, 마법사의 비실비실한 몸뚱이를 믿을 수가 없어 그 역시 지붕이었다.
셰비언이 경사 급한 지붕을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걷는 걸 본 순간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대뜸 내려가기도 좀 면구하니, 라비린은 아예 지붕에 주저앉아 셰비언이 하는 양을 관찰했다.
아침 햇살 아래에서 제대로 본 셰비언은 역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오래된 전설 속에서 얼어붙은 강을 지배했다던 얼음요정이 육체를 입고 현세에 튀어나왔다면 딱 저런 모습일 것이다. 내리깐 눈, 허공을 짚는 손가락, 까닥대는 고개…….
밉기도 밉고 재수도 엄청 없긴 한데, 정신없이 눈길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법사들 사이에 끼어 있을 때에도 풀밭에 혼자 피어난 꽃처럼 시선을 잡아끌더니, 지금은 숫제 눈밭에 피어난 장미 같았다. 억지로 시선을 잡아떼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들 해를 보는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쑥 빼고 위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저러다 목 아프다고 난리날라.’
쯧쯧, 혀를 차고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차갑고 서늘한 것이 몸을 쭉 훑고 지나갔다. 겉가죽만 서늘해진 게 아니라 그 안쪽에 있는 뼈와 장기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것만 같은 서늘함이었다.
라비린은 자신도 모르게 반쯤 일어났다가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셰비언의 주변에 온통 황금빛 그물이 펼쳐져 있었다. 금실을 뽑아 허공에 두른 듯 아름다운 마법망은 점차 덩치를 불리더니 어느새 타우레드 영주성 전체를 휘감았다.
“미친…….”
까딱 잘못하면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릴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넋을 잃었던 라비린은 조심스레 마법망에 손가락을 올렸다. 하지만 그건 보이기만 할 뿐, 만져지지는 않았다. 억울한 마음에 마력을 담아서 건드려 봤는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홀씨를 따려고 헛손질하는 고양이처럼 연신 헛손질을 하는 라비린을 보고 셰비언이 깔깔 웃었다.
“마법사도 아닌 게 어딜 만져요?”
“꼭 마법사여야 이걸 만질 수 있나요?”
“다른 조건도 있지만……. 마법망을 건드리기 위한 가장 쉬운 조건이 그거죠. 마법사일 것.”
“그거 말고 다른 조건은 뭔데요?”
“알 거 없어요. 어차피 벨키스 경은 조건에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라비린은 차마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미련을 담아 마법망을 더듬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가 실패할 때마다 셰비언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결국 라비린은 목까지 벌게진 얼굴로 마법망 건드리기를 그만두었다. 머리로는 마법망은 마법사의 영역이고 검사인 자신은 모르고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도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용이라고……. 이게 사태진정에 도움이 돼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내가 괜히 왕궁마법사를 끌고 온 게 아니라니까?”
셰비언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마법망에 손가락을 얹었다. 라비린의 손가락은 죄다 무시하던 마법망이건만, 셰비언은 마법망을 하프의 현처럼 퉁기며 연주를 시작했다.
마법망에 이슬처럼 맺혀 있던 마력들이 바르르 흔들렸다. 맑고 맑은 종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매끄러운 음율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음악에도 색을 칠할 수 있다면 이 순간 영주성의 허공에는 다채로운 색상들이 서로 어울려 황홀하게 엉키고 있을 것이다. 왕립악단의 특별 공연에서도 듣기 힘든 연주였다.
꿈을 꾸듯 황홀한 음율에 젖어 있던 라비린은 연주가 끝나고도 약간 시간이 지난 뒤에야 현실로 돌아왔다. 황금빛 마법망이 계속 눈앞에서 일렁거리는 통에 현실이 현실 같지 않긴 했지만, 여봐란 듯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니 정신이 확 들었다.
박수를 치려고 가슴께까지 올라갔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 팔짱을 꼈다. 마치 본래 그러려고 했다는 것처럼. 꼴사나운 짓이라는 건 알지만 솔직해지기엔 셰비언의 미소가 너무 재수 없었다.
“아르젠 남작이 음악에도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뜻밖이로군요.”
“마법수식을 정교하게 쌓아올리는 과정은 음을 쌓아 올리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난 오히려 마법사들이 왜 음악을 배우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가요.”
“방금 그 발언이 세상에 퍼져 나가면 내년 왕립 음대의 지원자 절반은 마법사로 채워질 겁니다. 책임질 수 있겠어요?”
“벨키스 경만 입 다물면 되는데 내가 왜 그런 걱정을 해야 하죠?”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좀 전의 연주를 듣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라비린은 이해 못 할 말에 함께 음악을 들었을 사람들이 있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상에서 고개를 빼고 있던 사람들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 멀뚱멀뚱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경이로운 통제력에 팔뚝과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경에게만 보여준 거예요.”
“……내게만? 왜?”
“자랑에 이유가 있던가요?”
“자랑에는 이유가 없어도 자랑할 대상을 고르는 데에는 보통 이유가 있던데, 남작은 무슨 이유로 내게 자랑을 하셨는지? 난 마법사도 아닌데.”
“마법사가 아닌 건 알지만 퍽 자랑하고 싶은 상대이긴 했거든요. 그보다 벨키스 경, 오드리 아가씨는 어디에 계시죠?”
2층 북편과 서편을 잇는 복도의 창문에서 눈부신 빛이 새어나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비명이 울렸다. 괴물이다! 번개다! 괴물이 죽었다! 소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타우레드 영주성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작은 창문에서 빛이 번쩍거릴 때마다 짙은 유황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라비린은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혔다. 당장 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명과 고함, 자욱한 유황 냄새를 망토처럼 두르고 순진하게 웃고 있는 저 마법사가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저는 오드리 아가씨가 보낸 편지를 받고 온 거예요. 편지를 받자마자 왔어야 하는데, 저 귀찮은 왕궁마법사들이 자기들도 같이 가자고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늦었지 뭐예요. 그러게 사나흘짜리 마차 여행도 못 견딜 체력으로 뭘 그리 굳이 따라오겠다고 그러는지…….”
“……어제 도착했으면 좋았을 텐데.”
“벨키스 경?”
“어제 낮, 아니 저녁에라도 와줬다면…….”
캄포스가 오드리를 죽일 마음을 먹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전에, 아니 아예 클레멘테가 괴물로 변하기 전에 와줬더라면. 시간을 돌리는 건 불가능하고 셰비언이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원망이 응어리졌다.
“벨키스 경, 내가 하루 늦은 것 때문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요?”
라비린은 마구 화내며 삿대질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셰비언에게 자제력을 잃고 날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말지.
“오늘 새벽에 오드리가 브란젤로 돌아갔습니다.”
“아…….”
“아르젠 남작? 기뻐할 줄 알았더니 표정이 아주 안 좋군요. 갑자기 어디 아프기라도 합니까? 의사를 불러다줄까요? 아직 괴물이 안 됐어야 할 테지만, 이 성의 의사 솜씨가 나쁘진 않습니다.”
왜 표정이 안 좋은지 뻔히 알면서, 라비린은 유들유들하게 셰비언의 성질을 긁었다. 왕궁마법사들을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안 하겠다고 손 털고 가겠느냐는 계산과,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오드리를 놓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개인적인 원망이 섞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셰비언은 라비린이 왜 그러는지 알아채질 못하고 눈만 멀뚱멀뚱 떴다. 눈치가 늘었다고는 하나 오드리가 브란젤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파혼을 짐작할 정도는 못됐던 것이다. 그는 체력이 달리는 왕궁마법사들을 챙기다가 오드리와 아슬아슬하게 엇갈렸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하긴, 자신이 늦게 오는 바람에 오드리와 라비린이 파혼에 이르렀다는 걸 알았더라면, 인간의 관습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용답게 안타깝다 위로를 하는 걸로 라비린의 속을 뒤집었을 테니 라비린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모르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난 딱히 의사가 필요 없지만 그렇게 솜씨 좋은 의사라면 왕궁마법사들이나 좀 봐줬으면 좋겠네요. 오는 길에도 골골거려서 마차 밖으로 던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괴물 처리와 마법망 조정을 끝내고 나면 아예 탈진할 것 같아요.”
“……그러죠.”
하지만 그런 걸 알 리 없는 라비린은 태연자약하게 구는 셰비언의 태도를 두고 네깟 놈은 이제 상대도 안 된다, 쯤으로 해석하고 몹시 서러워지고 말았다. 시계탑에서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나오면서 승자의 기쁨을 만끽했던 게 고작 두 달 전인데 이게 무슨 꼴인지.
“참! 경, 아가씨가 나한테 보냈던 편지에 들어 있던 비늘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고 있어요?”
“내가 떼어다 줬는데 모를 리가 있을까요. 담수저장고에 빠져 죽어 있던 시체에서 떼어낸 겁니다. 의사는 시체의 폐가 부레처럼 변했다면서 물고기가 물을 찾아 들어간 거라고 하더군요.”
“그럼 그 괴물 이후에도 같은 종류의 괴물이 나온 적이 있나요?”
라비린은 이제까지 자신이 본 괴물 시체들을 꼼꼼히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온갖 형태의 괴물들을 다 보았지만 헤세처럼 물고기의 특징을 가진 괴물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요. 물고기로 보이는 놈은 없었습니다. 혹시 해터 양처럼 쉬이 보이지 않는 곳이 변했다면 못 알아봤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질문이 참 이상하군요. 괴물이 그냥 괴물이지 종류도 있나요?”
셰비언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있죠. 당연히 있어요.”
인어. 수많은 종족들이 이 땅과 하늘에 발붙이고 살던 시절에도 인어만큼 특이한 종족은 없었다. 인간과 물고기를 합쳐 놓은 듯 괴이쩍은 생김새, 민물과 소금물을 가리지 않는 적응력, 타 종족을 끌어들여 제 종족의 새끼를 낳게 하는 괴악한 생태.
그러나 다른 종족들이 인어라면 소름끼치게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마력에 있었다. 인어의 마력은 죽어서도 그 육신을 떠나지 않고 머무르며 주변을 오염시켰다. 마치 통제를 잃은 용의 마력처럼.
셰비언은 인어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한 뒤 자신이 받은 비늘을 꺼내놓았다.
“인어의 시체는 이미 태워 버렸다지만 처음 그 인어가 죽은 장소가 하필 담수저장고라서……. 그 물을 전부 정화해야 합니다. 마력을 걸러내야 해요.”
“예, 남작님……. 알긴 아는데요…….”
비늘을 보는 왕궁마법사들의 낯빛은 몹시 우중충했다. 그들은 브란젤에서 타우레드 영지까지 오는 내내 셰비언에게 시달리며 인어에 대한 즉석 강의를 들었다. 인어의 마력을 찾아내는 법, 걸러내는 법, 걸러낸 마력을 처리하는 법…….
셰비언은 제법 실전 위주의 담백한 강의를 했지만, 브란젤에서 괴물을 잡느라 체력이 한참 떨어진 뒤에 이어진 마차 여행인지라 그 강의의 태반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귀로 들어오자마자 코나 입으로 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게다가 타우레드 영주성에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괴물 사냥을 했다. 괴물을 탐지하고 벼락을 때린 건 셰비언이지만, 괴물이 사라진 성 구석구석에서 마법망을 가시화하고 마법망 뭉치를 찾아내 풀어낸 건 왕궁마법사들이었다. 셰비언은 거기에 눈곱만큼도 기여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왕궁마법사들은 인어고 뭐고 당장 드러누워 자고 싶은 상태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나 뱃속을 할퀴는 허기보다 머리를 울리는 두통과 졸음을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좀 쉬고 하면 안 될까요?”
“쉬자고요? 하루 쉬면 그 하루만큼 또 일이 쌓일 텐데 그냥 한 번에 해 버리는 게 낫지 않나요?”
이 영주성에 괴물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바로 물이다. 물. 사람들이 씻고, 먹고, 마시는 물. 일단 영주성 내부 곳곳에 있던 마법망 뭉치를 제거했으니만큼 며칠은 무사하겠지만, 그게 근본적인 해결은 될 수 없었다. 쉬는 동안 또 문제가 안 생기면 다행이지.
셰비언이 그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며 채근했지만, 왕궁마법사들은 끝끝내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 마법의 대가는 시전자의 체력과 수명이다. 마법사의 길을 걷는 이상 오래 사는 건 포기했다지만 한계까지 마법을 쓰다가 골병이 들어 골골대며 사는 건 사양이었다.
‘저 괴물 새끼.’
‘우리가 다 저 같은 줄 아나.’
셰비언이 작위를 받은 이상 대놓고 반항하지는 못해도 시선들이 아주 따갑기 그지없었다. 계속 강요했다간 일이고 뭐고 아예 드러누울 태세니, 셰비언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혹 타우레드 후작에게 말하면 뭔가 달라질까 했으나, 숨어 있던 괴물을 다 처치한 데다 일단 오늘은 확실하게 괴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장담을 들은 클로드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진 상태였다.
“해결방법을 확실히 갖고 있다는데 하루 미루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겠소. 푹 쉬도록 하시오. 그 정도야 기다릴 수 있고말고.”
그렇게 밝아진 게 어디 타우레드 후작뿐일까. 하루하루 불안한 밤을 넘길 때마다 어두워지던 고용인들 역시 태양을 삼킨 듯 환한 얼굴로 영주성 청소에 나섰다. 핏자국과 뼛조각을 치우면서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저녁 어스름이 내릴 즈음이 되자 잠들었던 왕궁마법사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그들은 주방장이 있는 힘껏 솜씨를 부린 음식을 앞에 두고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건가?”
“안 되는 거면 아르젠 남작이 미리 말하지 않았을까? 조금만 먹으면 되잖아.”
“젠장, 난 안 먹어. 우린 일반인이 아니라 마법사잖아. 일단 변이가 시작되면 아르젠 남작도 못 막는데 뭘 믿고 이런 걸 입에 넣어?”
셰비언은 담수저장고의 물 자체가 문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루 늦어지는 것쯤이야 어떻게든 메울 수 있지만 공포와 혼란을 수습하는 건 다른 차원의 얘기였다. 껄끄러워 좀체 식사를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왕궁마법사들 사이에서 한 명이 불쑥 접시 위에 손을 뻗었다. 옅은 꿀색이 도는 피부색이 이질적인 마법사였다.
“그럼 너흰 먹지 마. 나 혼자 맛있게 먹을 테니까.”
“아이샤!”
“네가 그렇게 나오면 우린 뭐가 되니?”
아이샤는 다른 마법사들이 흰눈을 뜨거나 말거나 열심히 먹었다. 뭐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보아하니 셰비언은 자신들을 그냥 조수로만 데려온 게 아닌 듯한데, 단순히 껄끄럽다는 이유로 식사를 걸렀다간 내일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을 뿐이었다.
아이샤의 짐작은 정확했다. 다른 마법사는 몰라도 그녀 본인에게는.
다음 날, 셰비언은 뽀얗게 피어오른 아침 안개가 가시기도 전에 아이샤를 깨웠다. 타우레드에서 새로 내준 방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던 아이샤는 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영문도 모르고 셰비언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담수저장고가 있는 곳이었다.
“아이샤 씨, 오는 길 내내 연습은 충분히 했죠? 저기 올라가서 물에 인어의 마력이 얼마나 있나 확인해 주세요.”
“여, 여길 올라가라고요?”
아이샤는 제 키를 훌쩍 넘는 담수저장고의 규모에 기가 질렸다. 아무리 타우레드의 본가라지만 평소에는 거의 비워놓다시피 하는 성이라는데 뭐 이렇게 큰가. 이만큼 물을 비축해 두니 이 지독한 가뭄에도 무사했던 거겠지만 대비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샤 씨는 나랍 혼혈이라 수영 잘 한다면서요?”
“윽.”
입이 문제다, 입이. 아이샤는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햇살에 수면이 반짝이는 렘 강을 보고 헤엄치고 싶다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문화차이 때문인지 나랍인들이 멜브란트인에 비해 수영을 잘 한다는 거야 사실이고, 혼혈이라지만 어린 시절을 나랍에서 보낸 아이샤 역시 수영을 꽤 잘 하긴 했다.
하지만 이 담수저장고는 사람이 빠져 죽은 물이 아닌가. 정화마법도구를 계속 돌려서 물을 순환시켰다지만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거지 뭐 아주 잘 한다고 할 수는 없는데요…….”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은 자맥질이 뭔지는 알까 싶은 정도니까.”
퇴로가 막혔다. 아이샤는 애원이라도 하고 싶다는 얼굴로 셰비언을 바라보았지만, 곧 체념하고 말았다. 그가 그런 떼를 들어주지 않는 성품이라는 건 왕궁마법사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버텨봤자 예쁜 얼굴로 가슴에 비수나 꽂겠지.
“빠지면 꺼내줘야 해요.”
“걱정 마세요,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거 참 안심되는 말이네요.”
만약을 대비해 로브와 신발을 벗고 머리도 꽁꽁 묶고 훌쩍 담수저장고의 사다리를 탔다.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배는 가볍고 날쌘 몸놀림이었다.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고 셰비언이 흡족해하거나 말거나, 뚜껑을 연 아이샤는 상상 이상으로 깊은 물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으, 뭐가 이렇게 깊어?’
지하라지만 마법등이 사방을 밝히고 있으니 어둡지도 않고, 정화를 마치고 담수저장고에 담긴 물이니 더럽지도 않은데 깊이가 어마어마했다. 투명하게 찰랑대는 물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을 게 확실했다.
‘이거야 원, 꼭 달튼 제도 앞바다에 있는 블루홀을 뚝 떼다 옮겨놓은 것 같네.’
바다의 신 페즈날이 머문다는 블루홀. 해마다 배 한 척을 제물로 바치며 항행의 안전을 기원하는 블루홀이 지하에 나타난 것처럼 깊다. 아무래도 이 담수저장고는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규모가 더 큰 모양이었다.
꿀꺽 침을 삼키고 투명한 물에 손을 푹 담갔다. 서늘한 냉기가 등줄기를 찌르르 울렸다. 손에 마력을 잔뜩 집어넣고 휘젓자 과연 이질적이고 기분 나쁜 무언가가 손에 걸렸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는데 불쾌한 감촉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기어 올라왔다.
“으읏!”
몸이 안쪽으로 확 기울었다. 아이샤는 황급히 팔을 끄집어내고 사다리에 매달렸다. 아래쪽에서 당기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하마터면 빠질 뻔했다. 놀란 심장이 쿵쿵 뜀박질을 했다.
눈을 닦고 물을 다시 살폈지만 팔을 당긴 무언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담수저장고의 물은 얄미우리만치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아이샤 씨, 뭔가 있나요?”
“잠깐만요!”
이런 기현상을 앞에 두고 호기심이 끓지 않으면 마법사가 아니다. 아이샤는 소매를 둥둥 걷어 질끈 묶고 다시 물에 손을 집어넣었다. 물은 그냥 물이었다. 팔꿈치를 넘어 상박까지 넣고 휘휘 저어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손에 마력을 불어 넣으려다 멈칫했다.
‘빠지면……. 살 수 있을까?’
좀 전에 팔을 잡아당기던 그 기세로 몸을 잡아당기면 내가 빠져나올 수 있을까? 아이샤는 어릴 적 목격했던 물에 빠진 시체를 떠올렸다. 퉁퉁 불어 이목구비 확인도 안 되던 시체. 차가운 물에 몸이 한기로 떨리면서도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아이샤 씨, 위험할 것 같으면 그냥 내려와도 돼요.”
“잠깐…… 잠깐만요. 생각 좀 하고요.”
셰비언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금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게 확 떠올랐다. 여긴 물살이 있는 개울도 아니고, 얼음으로 뒤덮인 호수도 아니다. 게다가 자신의 특기는 잠수다.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오래 숨을 참을 수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용기가 솟아올랐다. 아이샤는 사다리에 걸려 있던 밧줄을 풀어 제 허리에 감고 물에 팔을 담갔다.
“남작님! 제가 빠지면 꺼내주기로 하신 거 잊지 마세요!”
“예에?”
셰비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력을 풀었다. 손끝을 타고 마력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금빛 마력이 투명한 물을 헤치고 거미줄처럼 연결됐다. 마치 셰비언이 견본이라고 보여주었던 마법망 같았다.
‘이게 인어의 마력…….’
매혹적이다. 눈길을 뗄 수가 없다. 물속에서 아른아른 빛나는 금빛 그물이 온 신경을 잡아끌었다. 머리가 멍해지면서 사다리를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동시에 차갑고 매끈매끈한 무언가가 아이샤의 팔을 쭉 잡아당겼다.
첨벙!
큰 물소리가 났다. 동시에 사다리 끝에 매달려 있던 아이샤의 형체가 사라졌다. 셰비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의 날 듯이 사다리를 올라 담수저장고 위에 섰다.
“하……?”
담수저장고를 가득 채운 투명한 물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이샤가 뻗어낸 마력이 인어의 마력과 뒤엉키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아이샤는 금빛 거미줄 같은 마력에 휩싸여 자꾸 아래로 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숨을 꾹 참고 팔다리를 휘젓는 걸 보니 정신은 멀쩡한 듯했다. 아니, 나오려고 수영을 하는 게 아니라 눈앞에서 흘러 다니는 마력을 쥐고 싶어서 허우적거리는 거다.
셰비언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러게 위험할 것 같으면 그냥 내려오라니까 굳이 허리에 밧줄까지 감아가면서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나 참, 목숨이 두 갠가?”
쭉쭉 끌려 올라오던 아이샤가 덜컥 멈췄다. 인어의 마력이 아이샤를 휘감고 버티는 것이다. 셰비언이 용의 마력을 흘려보내며 위협했지만 인어의 마력은 그럴수록 더 완강하게 아이샤를 붙들었다. 금빛 거미줄이 아이샤를 고치처럼 둘러싸고 지켰다.
“이런……. 아이샤 씨한테 인어의 마력이 있었나?”
셰비언은 미리 확인하지 않은 자신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어준 다음 몸소 담수저장고로 뛰어들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마력이 팔다리에 훅훅 감기는 걸 무시하고 고치를 움켜쥐었다. 물이 의지를 가진 듯 흉포하게 달려들었지만 발이 닿는 곳마다 얼려 버리며 계단 밟듯 올라가는데 당할 도리가 없다. 그는 아이샤가 든 고치를 무사히 물 밖으로 끄집어냈다.
고치를 확 찢자 그 안에 가득 찼던 물이 왈칵 쏟아지며 아이샤가 굴러 나왔다. 한데 그녀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숨을 참지 못할 정도로 긴 시간이 아니었는데, 잔뜩 물을 먹어서는 숨을 쉬질 않았다.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지.’
좀 전까지 인어의 마력에 휩싸여 있던 사람에게 저지르기엔 위험한 일이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셰비언은 아이샤의 손을 잡고 마력을 신중하게 밀어 넣었다. 초조함에 입이 말랐다.
아이샤의 몸은 졸지에 전쟁터가 됐다. 몸을 차지하려는 인어의 마력과 셰비언이 밀어 넣은 용의 마력이 서로 줄다리기를 하며 엎치락뒤치락 싸웠다. 불리한 건 셰비언 쪽이었다. 계속 시간을 끌었다간 아이샤가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뭐 하는 거예요?”
어떻게든 인어의 마력을 거의 다 밀어냈을 때쯤, 갑자기 나타난 흰 손이 셰비언을 확 밀쳐 냈다. 아이샤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던 셰비언은 얼결에 아이샤에게서 떨어진 다음에야 제 앞에 나타난 사람을 확인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을 한 라디아타였다.
“물부터 토하게 해야죠!”
라디아타는 아이샤의 옆에 달라붙어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꽉 조인 코르셋 때문에 몸을 굽히는 게 힘들고 가슴을 누를 때마다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은 물을 토하게 해야 한다는 상식도 없는 남자에게 환자를 맡길 수가 없었다.
“쿨럭! 컥! 흐아아! 하아! 하아!”
좀처럼 반응이 없어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쯤, 아이샤가 물을 한 바가지나 토해내곤 숨을 쉬기 시작했다. 셰비언은 상태를 알아보고 남은 마력도 회수할 겸 아이샤에게로 손을 뻗었으나, 지쳐 주저앉아 있던 라디아타가 그 손을 딱, 때렸다.
“어디 젊은 처녀에게 손을 대려고 해요?”
“아니, 나는 괜찮나 확인하려고…….”
“이분이 걱정되거든 저기 로브나 좀 가져다주세요. 체온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셰비언은 몹시 억울해졌다. 라디아타가 아무리 인공호흡을 잘했다 한들, 셰비언이 인어의 마력을 밀어내지 않았으면 아이샤는 숨을 쉬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심해하는 시선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체온이 떨어지는 걸 막으려면 옷보다는 불이 낫겠죠.”
딱! 셰비언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화르르 타오르는 불이 나타났다. 따뜻한 온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데 이상하게 눈이 부시거나 하진 않았다. 라디아타와 아이샤 모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이, 이게 뭐죠?”
“세상에…….”
라디아타가 놀라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반면 아이샤는 겁도 없이 불을 향해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불은 따뜻하고 밝았지만 손에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도 쫄딱 젖었던 옷이 금세 물기를 잃고 말라가는 게 느껴졌다.
“과연 셰비언님이시네요. 그 지독한 협회 놈들이 꼬리를 내릴 만해요.”
“그런 칭찬해 봐야 떨어지는 것도 없어요. 아이샤 씨, 그보다 손 좀 줘봐요.”
셰비언은 아이샤가 의심 없이 내민 손을 잡고 조금 전 넣었던 용의 마력을 싹 회수했다. 아이샤는 안 그래도 힘든데 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을 받고 기겁을 하며 손을 뺐다.
“뭐, 뭐예요?”
“치료를 위해 급하게 넣었던 마력을 회수한 것뿐이에요. 그래도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니까……. 문장 좀 띄워봐요.”
“치료하는데 마력은 왜 넣어요? 셰비언님이 마력 컨트롤을 잘 하는 건 알겠는데, 다시는 하지 마세요. 그거 실수하면 몸이 그냥 터져서 죽는 거잖아요. 무서워죽겠네, 진짜.”
“난 실수 안 해요.”
“……우와,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아이샤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차면서도 순순히 문장을 띄웠다. 기하학적 도형으로 가득 찬 커다란 문장이 태양처럼 떠올랐다. 심상치 않은 크기와 광채에 라디아타가 두려움도 잊고 감탄했다.
“이렇게까지 화려한 문장이라니……. 이제까지 제가 보아온 문장 중에서도 수위에 꼽혀요. 아이샤 씨, 대단한 마법사였군요.”
“아뇨, 이건…… 이건……. 이건 내 문장이 아니에요…….”
아이샤는 두려움과 기쁨, 경외가 뒤섞인 눈으로 제 손바닥 위의 문장을 바라보았다. 문장은 마법사가 마법을 처음으로 발현할 때 형태가 정해졌다. 그리고 마법사가 마법을 얼마나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느냐에 따라 조금씩 크기와 모습을 달리했다. 아이샤 역시 문장 속의 도형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해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냥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뭔가 특별한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닌데 갑자기 커진 문장이 두려웠다. 몸에 담긴 마력이 물에 들어가기 전보다 몇 배는 더 늘었다는 것 역시. 물어볼 만한 마법사가 곁에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셰비언님, 제 마력이…… 어어, 무슨 개구리 거품처럼 부풀어서……. 이, 이게 뭐죠? 뭔지 아세요?”
“마법과 마력은 본래부터 종족의 번영과 번식을 위한 힘이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잠재돼 있던 재능이 깨어났나 보죠.”
아이샤는 기가 막혀 말을 잊었다. 마법과 마력이 종족의 번영과 번식을 위한 힘이라니? 적지 않은 시간을 왕궁마법사로 살아왔지만 그런 얘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죽을 고비 운운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셰비언이 바닥에 널브러진 고치 쪼가리를 가리켰다.
“일반적인 상황도 아니었고요. 여하간 정말 잘된 일이에요. 그렇죠, 아이샤 씨?”
셰비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아이샤는 아니라고 했다간 아예 목이 비틀릴 것만 같은 기분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눈꼬리를 휘며 웃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그럼 이제 다른 얘길 해 보죠. 고치에 갇힌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음……. 그게, 그러니까…….”
아이샤는 고치 속에서 본 걸 더듬더듬 묘사했다. 큰 물줄기 속에 펼쳐진 금빛 그물, 영롱하게 반짝이는 햇살, 커다랗고 어두운 그림자 곁에서 너울너울 흔들리는 초록 잎사귀, 그리고 신선한 비린내…….
“냄새? 냄새를 맡았어요?”
“네, 바다 비린내는 아니었어요. 아주 옅고 신선한 게, 꼭 산골짜기의 샘물 같은…….”
“왜 그리 물을 먹었나 했더니만, 숨을 쉬었군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 죽을 뻔했구나. 아이샤는 제가 저지른 멍청한 짓에 얼굴을 붉혔다. 물에 빠졌다는 걸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고 숨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는데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친척 동생들이 들으면 몇 년을 두고두고 놀려먹을 게 확실했다.
“저기, 셰비언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공호흡은 내가 했어요.”
라디아타가 덥석 끼어들어 제 공을 주장했다.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입술을 만지작대기 시작한 아이샤와 한껏 미간을 찌푸린 셰비언 앞에 서서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이름 모를 왕궁마법사님, 감사 인사는 앞뒤 사정을 모두 알게 된 뒤에 들을 테니 잠깐 참으세요. 아르젠 남작님, 제가 어제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담수저장고에 가실 때는 반드시 말을 하고 가시라고!”
“…….”
“본래 담수저장고는 타인에게 쉬이 개방하는 곳이 아니에요.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마법사라면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르젠 남작께서 괴물 사태 해결을 위해 반드시 확인해 봐야 한다고 하시기에 타우레드의 기사 한 명을 동행하는 조건으로 허락해 드린 거예요.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죠?”
보랏빛 시선이 아이샤의 전신을 훑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매서운지, 아이샤는 바닥에 버려진 채였던 로브를 주워 입고 슬그머니 후드를 눌러썼다. 아, 왜 나는 여기에 끼어 있을까. 도망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뛰쳐나가고 싶다.
“제가 담수저장고를 확인하러 오지 않았더라면, 타우레드는 담수저장고에 누가 들어갔다 나온 것 따위는 까맣게 몰랐겠군요. 남작님,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셨죠?”
“음……. 굳이 알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알 필요 없는 일? 여긴 타우레드 영지예요. 그런 게 있을 것 같아요? 말씀해 보세요, 남작님. 저 담수저장고에 대체 뭐가 있는 거죠? 우리가…… 이 성의 사람들이 마시고 쓴 물에 대체 뭐가 있는 거냐고요!”
셰비언은 왜 오드리와 라디아타가 그리 친하게 지내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가 좋은 것도 좋은 거지만 성격이 아주 그냥 판박이라서, 뭘 하든 손발이 짝짝 맞았겠다. 그는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고치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 물은 오염됐어요. 죽은 괴물이 남긴 마력이 물을 오염시켰고, 그 다음엔 물을 마신 사람을 오염시켰죠. 마력 균형이 예민하고 아슬아슬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괴물이 됐을 거예요. 괴물이 늘어나면서 마법망에도 문제가 생겼을 거고, 그건 또 괴물을 만드는 촉매가 됐을 테죠. 어제 마법망에 생긴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건 마지막 고리를 끊은 것에 불과해요.”
“그……. 마력 균형? 그게 뭐죠? 잘 이해가 안 가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마법사가 아닌 이상 말씀드릴 수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세요.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이 자꾸 괴물이 되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요. 그 원인은 저 안에 들어있고요.”
“그런 이유면 왜 미리 말을 안 하고 이렇게 따로 오셨나요?”
“이제까지 마시고 쓴 물 자체가 문제였다고 하면 성이 뒤집어질까 봐서요. 살짝 들어와서 얼른 해결하려고 했죠.”
라디아타는 셰비언의 말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오드리가 원인인 것 같으니 그녀를 죽여야겠다고까지 하는 사람들이 나온 판이었다. 실은 여기에 와서 먹고 마신 모든 게 원인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화살이 어디로 돌아갈지 뻔했다.
차라리 제집에 있게 두지 뭐 하러 본가에 불렀느냐는 원망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노라,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걸리는 사람은 다 찔러 죽일 것처럼 곤두섰던 가시가 차분히 내려앉았다.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셨다는 말이로군요. 이해해요. 하지만 아버지나 오라버니에게는 말씀을 드리는 게 좋았을 거예요. 그분들이라면 남작님이 우려하는 일이 없도록 잘 통제해 주셨을 텐데요.”
“이렇게 타우레드 영애께서 아셨으니 그분들도 아시겠죠. 이제 오염 제거 작업을 마저 해도 될까요? 타우레드의 마법사들이 오기 전에 끝내고 싶은데.”
“편히 하세요.”
라디아타가 선뜻 뒤로 물러났다. 평화로워진 분위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아이샤는 갑자기 후드가 훌렁 벗겨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겁지겁 벗겨진 후드를 다시 쓰려 하니 셰비언이 영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왜, 왜요? 왜 그렇게 봐요?”
“로브 입고 물에 들어갈 거예요?”
“네에? 물에 또 들어가요? 왜요?”
“옆에 서서 뭐 들었어요? 오염이 아직 남았으니 마저 제거해야죠. 마력 보유량도 몇 단계나 뛰었겠다, 시험해 보기 딱 좋잖아요? 자, 올라가요.”
방금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사람더러 또 물에 들어가란다. 아이샤는 따뜻한 불을 품에 끌어안고 주춤주춤 물러서며 라디아타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라디아타가 그녀에게 눈부신 미소를 돌려주었다.
“이름 모를 왕궁마법사님, 잘 부탁드려요. 혹시 또 냄새를 맡으려다 물을 먹더라도 인공호흡은 제가 잘 해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라디아타는 후작가의 영애, 아이샤는 평범한 나랍혼혈인 왕궁마법사. 관습에 따라 함께 존대하고 있어도 신분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아이샤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어 송구합니다. 저는 왕궁마법사 아이샤 아네메 입니다. 레이디 타우레드, 아까 절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국 도망은커녕 미루지도 못하고 블루홀을 연상케 하는 물 앞에 또 선 아이샤는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건 갑자기 늘어난 마력을 시험해 보기에 딱 좋은 기회다. 짐작대로 인어의 마력과 접촉한 결과로 마력이 늘었는지도 확인해 봐야 한다. 진짜 수준이야 어찌 됐든 문장을 더 화려하게 띄울 수 있게 되면 왕궁마법사장과 왕궁마법사 사이의 알력싸움에서 벗어나 유유자적 지낼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아이샤 씨, 준비 다 됐죠? 하나, 둘…….”
“자, 자, 잠깐만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어요!”
“그건 일단 들어간 다음에 해도 충분할 것 같네요.”
셰비언이 아이샤의 등을 툭, 밀었다. 아주 가볍게 친 것 같은데도 사다리를 잡고 버티던 아이샤는 그대로 담수저장고 안으로 추락했다. 개자식아아아아아! 욕설 같은 비명이 울렸지만 셰비언도 라디아타도 못 들은 척했다.
쌍욕을 하며 물에 들어간 것치고 아이샤는 일을 아주 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타고났던 인어의 마력이 새삼 깨어나기라도 한 듯 그녀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팔다리를 휘저을 때마다 물이 몸에 착착 감겼고, 숨을 참는 것도 아주 손쉬웠다.
‘어쩌면 숨을 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기분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정말 기분대로 실행했다간 물에 빠져 죽겠지. 아이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접어두고 헤엄에 열을 올렸다. 그녀의 궤적을 따라 인어의 마력이 금빛으로 빛나며 따라붙었다. 아이샤는 마력을 불어넣은 손으로 그 금빛 실을 움켜쥐고 수면 위로 올라와 담수저장고 바깥으로 내던졌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담수저장고에 있던 인어의 마력은 한 가닥도 남지 않고 깨끗하게 사라졌다. 셰비언은 직접 물에 손을 넣고 확인하고 나서야 아이샤를 담수저장고 밖으로 꺼내주고 불덩어리도 하나 안겨주었다.
“이걸 며칠 더 해야 할 거예요. 담수저장고 안에 있는 물 말고도 지금 정화 중인 물이 있고, 사람들이 쓰고 있는 물이 다시 돌아오는 시간도 있으니까요.”
“네, 네……. 으으, 으으으, 추워……. 으으…….”
“아네메 씨, 잘 부탁해요. 내가 아네메 씨에겐 특별히 고용인을 따로 붙여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시고요.”
라디아타가 마치 성녀처럼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비록 화려한 금발 때문에 성녀보다는 금박을 입힌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아이샤는 무례인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몸이 하도 떨려서 말이 안 나왔다. 안고 있는 불덩어리가 아니었다면 저체온증으로 진즉 죽었겠다 싶을 정도의 추위였다. 아까 물속에 있을 때는 조금도 춥지 않더니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마력은 어때요? 아직도 개구리 거품 같나요?”
“아, 아니요. 음…… 괜찮아요. 덩치가 커, 커진 건 으으, 여전하지만요…….”
“잘됐네요. 이제 어지간한 마법을 써서는 피곤하거나 쓰러지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
아이샤의 마력을 재본 셰비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얼음요정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샤는 갑자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미간을 찌푸렸다.
“셰비언님, 그런데 왜 셰비언님이 직접 정화를 하지 않고 절 시키신 거예요? 셰비언님도 수영 못 하세요?”
“그럴 리가요. 저 수영 잘해요.”
와 이 개새끼 좀 보소. 아이샤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마력이 늘어난 건 좋은 일이지만, 죽을 뻔했던 순간의 기억이 훨씬 강렬했다.
“그런데 왜 절 시키신 거예요?”
“그야 당연히 난 바로 브란젤로 돌아갈 거니까 그렇죠. 여기서 며칠이나 시간을 쓸 생각은 없어요.”
“네에? 올 땐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일도 하고 교육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지원한 건데!”
아이샤가 기겁을 하고 항의했다. 마법망이 불안정한 타우레드 영지에 파견 나가면 온갖 기반시설 수리에 불려다니며 무진장 시달릴 걸 알면서도 경쟁이 치열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셰비언이 교육을 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특전을 건 장본인이 브란젤로 돌아가겠다고 하다니, 이건 상상도 못 해 본 사태였다.
“오는 내내 수업을 귀로 듣는지 코로 듣는지 모르겠던데, 교육을 받겠다고요?”
“그거야 힘들어서 그랬죠! 빠지기 전에 최대한 일해야 한다며 브란젤 전체를 순찰시켰단 말예요. 다들 푹 쉬고 나면 집중력도 회복될 거고, 또…….”
“스무 명 중에 한 명이라도 내 수업을 잘 듣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 말을 믿어줬을 텐데요. 무려 사흘 동안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으면서 말은.”
“아니, 여자이면서 마법을 배워 마법사가 된 걸로 모자라 왕궁마법사까지 된 사람들인데 좀 믿어줄 수도 있죠! 다들 근성이라면 끝내준다고요.”
“퍽이나…….”
아이샤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가슴을 쳤다. 체력이 약한 마법사다 보니 연이은 격무와 거친 여행을 견디기 힘들었을 뿐인데, 이 망할 남작님은 괴물인지 사람인지 천재 마법사 주제에 체력마저 좋아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하질 못했다.
“잠깐, 잠깐만요.”
대화가 끊긴 틈에 라디아타가 끼어들었다. 셰비언이 돌아간다는 말에 크게 놀랐는지, 붉어야 할 입술이 혈색 없이 창백했다.
“아르젠 남작님, 왜 브란젤로 돌아가겠다고 하시는 거죠? 괴물은 이곳에 있는데요.”
“레이디 타우레드, 설마 아직도 소식 못 들으셨어요? 요즘 브란젤에서도 괴물이 나와요.”
아이샤는 저보다 더 추워 보이는 라디아타에게 불덩이를 양보했다. 어릴 적 갖고 싶었던 인형보다 더 예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몹시 안쓰러웠다.
“족히 열흘은 됐어요. 아마 타우레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을걸요.”
“신문이……. 신문이 안 왔는데.”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열흘이 넘게 지나는 동안 타우레드 성은 한 번도 신문을 받지 못했다. 사나흘에 한 번씩 도착하는 신문을 가져다줘야 할 마을에서도 괴물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브란젤의 괴물 소식을 담은 신문이 봉투에 담겨 우편국의 책상에 놓인 지가 벌써 나흘 전이었다.
라디아타는 날짜를 헤아려 보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하루하루 까맣기만 한 시간을 견디는 것에 지쳐 놓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럼 아르젠 남작님과 왕궁마법사 분들은 브란젤의 괴물을 두고 여기로 오신 건가요? 반대가 없었어요?”
“반대야 있었겠지만 저는 말단이라 잘 몰라요. 어차피 지금 브란젤의 괴물은 소강상태니까 괜찮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나보다 하는 거죠. 아, 셰비언님은 잘 아시겠다. 어땠어요?”
“난리도 아니었죠. 브란젤의 괴물을 완전히 해결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고 어찌나 말들이 많던지.”
셰비언은 불덩이를 하나 더 만들어 아이샤에게 주었다. 잠깐 사이 또 오들오들 떨고 있던 아이샤가 반갑게 불덩이를 끌어안았다.
“그래서요?”
“왕궁마법사를 데리고 가라는 게 조건이었어요. 봐서 왕궁마법사들에게 맡길 만한 일이면 죄다 맡기고 난 얼른 브란젤로 돌아오라나 뭐라나……. 알겠다고 하고 사람을 모으려니까 지원자가 아무도 없었죠.”
라디아타의 시선을 느낀 아이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흠, 흠.
“이래선 며칠이 지나도 못 가겠다 싶어서 가는 김에 교육도 해주겠다고 했더니 그땐 지원자가 너무 몰리더군요. 갈 사람을 선별하고 제가 없는 동안 브란젤을 어떻게 방어할지 계획을 짜고…… 뭐 그러다보니까 사흘이 후딱 지났지 뭔가요.”
“그래서 이레면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열흘이 넘어서야 온 거군요.”
“그렇죠. 왕궁마법사들 체력이 바닥이라 이동 시간도 오래 걸렸고……. 하여간 다들 운동 좀 해요. 어차피 마차 타고 가면서 몇 시간만 지나면 쉬어 가자 난리를 부리고.”
“셰비언님이 이상한 거예요. 보통 마법사들은 셰비언님처럼 체력이 좋지 않다고요. 큰 마법을 그렇게 남발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요? 옛 마법은 요즘 마법보다 효율이 압도적으로 좋은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니까 또 효율 소리를 하네요. 알고 쓰는 것과 모르고 쓰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라니까요. 공부를 해요, 공부를.”
“으……. 셰비언님이 말하는 건 숨을 쉴 때마다 폐의 움직임을 의식하라는 것과 비슷하잖아요. 마법을 손발처럼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들인 공부와 시간이 얼만데 여기서 더 얼마나 공부를 해요…….”
“거 봐, 의지 없네요. 그러니 레이디 타우레드, 제가 여기 오래 있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담수저장고의 오염은 아이샤 씨가 열심히 거둬서 정화해 줄 거고, 괴물을 만들어내는 마법망 뭉치는 다른 왕궁마법사들이 수시로 확인해서 처리할 거예요.”
“의지 있어요! 있다니까요! 으아, 말도 안 돼! 셰비언님이 우리만 남기고 브란젤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니까요! 셰비언님, 거짓말 아니에요? 셰비언님 우리한테 거짓말 잘 치잖아요!”
아이샤가 펄쩍 뛰며 귀환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중에도 라디아타는 별말이 없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되도록 불덩이를 움켜쥐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상한 건 분명해 보이는데, 표정이 없어서 그런지 정확한 속내를 읽기가 어려웠다.
‘내가 저 표정을 읽을 수 있으면 용이 아니라 인간이지.’
셰비언은 어깨를 으쓱이곤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게으른 해가 떠오를 시간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왕궁마법사들에게 앞으로 할 일을 대강 일러주고 바로 떠나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잠을 줄이며 달리면 오드리보다 먼저 브란젤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셰비언 혼자만의 계산이었다.
셰비언이 브란젤로 돌아갈 작정이라는 걸 알게 된 왕궁마법사들은 전심전력으로 그를 방해했다. 일부는 피로가 도무지 풀리지 않아 마법망 가시화도 못하겠다며 침대에 드러누웠고, 일부는 배울 게 너무 많아서 큰일이라며 셰비언의 발목을 잡고 늘어져 수업부터 해달라고 졸랐다.
타우레드의 사람들 역시 왕궁마법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당장 내어줄 말이 없다, 며칠을 두고 먹을 만한 저장식량이 다 떨어졌다, 준비하는 동안 왕궁마법사님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냐……. 부실한 변명이 종일토록 이어졌다.
이리저리 내돌려지던 셰비언이 사태를 파악하기 직전, 라비린이 나타나 그를 질질 끌고 제 방의 응접실로 데려가 앉혔다. 셰비언이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의자에 늘어졌다.
“벨키스 경도 나한테 마법을 배우고 싶은가 보죠?”
“가르쳐 주겠다면 사양하진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마법사의 재능이 없어서 말이죠.”
“그럼 나는 왜 데리고 왔어요? 다들 정신 나간 것처럼 들러붙어서 수업을 해달라 뭘 해달라 난리인데. 가르쳐 줄 때는 늘어져서 하나도 안 듣더니 지금은 무슨 거머리처럼……. 어휴.”
“그게 인간이란 거죠. 자기 이익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아르젠 남작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내가 뭘요?”
“오드리가 없는 타우레드에는 도움을 주기 싫잖아요.”
셰비언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제 속을 다 안다는 듯 눈을 휘며 웃는 라비린의 얼굴이 얇고 정교하게 제작된 가면 같아 어쩐지 짜증이 났다. 오드리나 라디아타의 무표정을 대면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벨키스 경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보죠?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알고 있게?”
“안 봐도 알죠. 만약 오드리가 여기 이 성에 있었으면 그래도 남작이 브란젤로 돌아가겠다고 했을까요? 난 아니라는 거에 타우레드의 후계자 자리도 걸 수 있는데.”
“의미 없는 내기에는 관심 없어요.”
“그렇겠죠. 보나마나 내가 이길 거니까.”
셰비언이 문을 흘끔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 왕궁마법사들에게 시달리는 것과 영 목적을 알기 어렵게 구는 라비린을 경계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을지 재보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궁마법사 쪽이 낫겠다고 판단한 그가 슬금슬금 엉덩이를 떼려는데, 라비린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가리고 섰다. 셰비언의 이마에 핏대가 올랐다.
“아 진짜……. 벨키스 경, 경은 나 싫어하면서 왜 이래요? 우리 둘이 같이 있어서 뭐 좋은 일이 있다고? 내가 보여줬던 마법망이 그렇게 인상적이기라도 했어요?”
“그럼요. 아주 인상적이었죠. 재수 없고 싫은 당신을 어떻게든 붙들어서 타우레드에 남겨야겠다 생각했을 정도로.”
“하! 당신이 오드리 아가씨 약혼자만 아니었으면 뭘 해도 진즉에 했을 텐데 하필……. 내 인내심이 다 닳아빠지기 전에 비켜요.”
옅은 푸른색 눈동자가 라비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라비린은 그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살이 파헤쳐져 뼈가 드러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을 뿐, 기사가 아닌 마법사인데도 자꾸만 몸이 떨렸다.
“오드리와는 파혼했습니다. 그녀는 이제 내 약혼녀가 아니에요.”
“오, 그래요? 이거 참,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꽤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음이 아프겠어요. 아, 근데 이땐 위로하는 거 맞긴 하죠?”
셰비언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지만 라비린에게도 그게 그렇게 들리겠는가. 라비린은 당장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인내심과 침착성을 긁어모았다. 다행히 얼굴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을 정도는 됐다.
“아르젠 남작이 오로지 오드리를 위해,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작위를 받은 거 압니다. 그러니 최우선은 당연히 언제나 오드리겠죠. 나야 그걸 이해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불만이 생길 때마다 오드리 탓을 할 겁니다.”
라비린이 품에 넣어왔던 종이를 셰비언에게 건넸다. 셰비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종이를 열었다. 괴발개발 흘려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 괴물이 생겨난 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둘. 괴물이 빠져 죽지 않은 다른 담수저장고에서도 상당량의 오염이 발견됨.
셋. 주변 마을에서도 이상 현상이 발생함. 영주성 가까이에서는 괴물이 나오지만, 멀리서는 몸의 일부가 붕괴하는 증상을 보임. (기준 불확실)
넷. 증상이 발생한 마을은 모두 물 공급을 렘 강에 의존.
- 수원(水源)의 확인이 필요함. 아르젠 남작의 참여가 필수적.>
“아이샤 아네메라는 왕궁마법사가 주고 간 거예요.”
“으음…….”
셰비언이 왕궁마법사와 타우레드 성의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동안 아이샤는 클로드가 조사해 온 지도를 분석했다. 그녀는 성 바깥에서도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점과, 피해지역은 전적으로 렘 강에 의존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지하수를 주로 쓰는 마을은 눈에 띄게 피해가 적었다.
‘담수저장고를 오염시킨 최초의 괴물은 왜 생겨났는가? 혹시 그 원인이 성 밖에 있는 것은 아닌가?’
당연히 샤를레아가 원흉일 거라고 생각한 셰비언과는 아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품을 수 있었던 의문이었다. 성 밖의 문제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셰비언에게 내심 불만을 갖고 있던 라비린은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즐겁게 감상했다.
“세상에, 왕궁마법사장은 물론이고 마법사협회까지도 비위를 맞추지 못해 절절맨다는 천재 마법사가 수원이 문제일 거란 의심을 못 했을 거라고 누가 믿을까요.”
“……수원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정도는 왕궁마법사들만으로도 아주 충분하다고요. 내 참여가 필수적이긴 무슨……. 쯧, 떠나기 전에 말만 해두면 되는걸.”
“아니요,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 타우레드에게서 파혼을 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헨젤가의 영애가 당신에게 말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은 게 틀림없다고 떠들어대겠죠. 만탈락의 주인이라는 위치를 그런 식으로 활용하다니 악질이라는 말까지 덧붙여서요.”
“벨키스 경……. 솔직히,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왜 내 잘못을 두고 오드리 아가씨를 욕한다는 거죠?”
라비린은 이걸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잠깐 회의에 젖었다. 셰비언의 천재성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데, 가끔 이렇게 멍청하게 굴 때가 있었다. 혹시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다가도 맑기만 한 얼굴엔 거짓이 없어 한숨이 났다.
“강자는 원망하기조차 어렵지만 약자는 때리기 쉬워요. 당신이 오드리를 챙기느라 미뤄두는 모든 일들이 죄다 오드리를 향한 창과 칼이 될 테죠.”
“그거 참 알쏭달쏭한 말이네요……. 오드리 아가씨는 귀족 신분에다 꽤 큰 부자이고, 집안도 잘 살잖아요. 그런데 왜 오드리 아가씨가 약자죠?”
“그걸 몰라서 물어요? 오드리는 여자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요?”
용족이 내전을 벌이며 대립할 때, 셰비언의 가장 큰 적은 샤를레아였다. 그녀는 용 가운데에서 가장 강한 전사였고 셰비언과 목숨을 걸고 싸워 그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지금은 동족을 모두 잃고 깨어난 것에 더해 마지막으로 아끼던 마법사까지 잃고 살짝 맛이 가서 미친 짓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샤를레아를 동족으로 둔 셰비언에게 성별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 사느라 그들의 관습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인간의 관습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오드리 아가씨가 여자라는 게 대체 뭐라서 약자라는 건지 나는 영 모르겠어요. 귀족 신분, 풍족한 재산, 강력한 가문……. 모두가 선망하고 두려워하는 것 아니었어요?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야 그 강력한 가문을 이어받을 사람은 따로 있는 데다 여성이 돈을 버는 일은 관습적으로 터부시되는…… 이런 젠장,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야 하다니, 정말이지……. 당신은 대체 어느 산골에서 살다 온 거죠?”
“셰비언 절벽에서 왔죠.”
“절벽이 아니라 성벽…… 아니, 됐습니다. 말을 해 봐야 나만 성질나지. 오드리의 곁에 있으려면 작위를 얻어야 한다고 조언해 준 사람은 대체 누구죠? 당신을 설득하느라 아주 진땀을 뺐겠어요.”
“안 돼요.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서요.”
“안타까워요. 그 사람이 이왕이면 세간의 상식이라는 것도 같이 집어넣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어이가 없으면서도 라비린은 왜 오드리가 셰비언을 좋게 봤는지 알 것 같았다.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남작이라는 작위조차도 오드리를 위해 받은 거니 정 귀찮아지는 날이 오면 길가의 돌멩이처럼 걷어차 버릴 게 분명했다.
문득 발목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문, 작위, 체면과 재산……. 이제까지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무거운 족쇄가 되어 자신을 묶고 있는 것 같았다.
라비린은 의식적으로 발을 털었다. 많은 것을 갖고 태어난 대가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에 눌리는 경험은 한참 어린 시절에 극복했다. 새삼 고개를 든 부담감에 사로잡히기엔 그는 많이 자랐고, 생각의 방향을 돌리는 일에도 익숙했다.
‘천재 마법사야. 본인이 원하지 않는대도 남들이 놓아줄 리 없어. 분명 위로 쭉쭉 올라가겠지……. 남작으로 끝난다는 건 말도 안 돼.’
이런 사람이 오드리의 곁에 있다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일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잘됐다 생각하면서도 속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낯선 감정은 아니었다. 오드리가 셰비언과 눈을 마주치고 잠시잠깐 넋을 잃는 걸 보았던 그날에 이미 맛보았던 감정이었다.
무심결에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검대는 텅 비어 있었다. 사고칠 일을 미연에 방지한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어야 하건만, 어째 대견함보다 아쉬움이 더 컸다. 큰일이었다.
셰비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라비린의 웃음이 자꾸 짙어지는 게 이상하게 불안했다. 자꾸 새어나오는 적대감이 여전히 살갗을 찌르는데 설탕처럼 달고 나긋나긋하게 변한 말투를 계속 고수하는 것도 껄끄럽고 말이다.
“벨키스 경, 나 싫다면서요. 왜 갑자기 그렇게 사근사근하게 굴어요? 안 그래도 말투 바뀐 거 참는 것도 힘든데 이런 식으로 구니까 더 이상하네요.”
“하, 하하하……. 작위를 받고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났을 거면서 그렇게 질색을 하니까 이상하네요. 알아서 좀 참아요.”
셰비언이 싫어하거나 말거나 라비린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끓는 속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심력이 들었다.
“남작에게 작위를 가지라고 조언해 준 사람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작위를 가졌으면 뭐 해요, 계속 악평을 안기는데. 오드리가 그런 사람을 기꺼워할 리 없죠.”
“오드리 아가씨는 악평 같은 거 신경 안 쓰는 사람인데요?”
“아뇨, 이젠 신경 써야 합니다. 내가 오드리의 약혼자로서 로렐라이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국왕전하께 거짓말했던 거 당신도 알죠? 그런데 그런 나와 파혼했으니, 이제 로렐라이는 누구의 것이 되는 걸까요?”
“…….”
“명목상의 주인은 오드리이니, 일단은 오드리의 것인데……. 알다시피 오드리는 데뷔탕트는 치렀어도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했어요. 만탈락의 권리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죠. 딸을 아끼지 않는 헨젤 백작이 로렐라이를 오드리의 손에 남겨두려고 할 리가 없습니다.”
라비린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셰비언은 아니라는 말도 못 하고 그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파혼하면 바로 남이 되는 거라고 들었는데 라비린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략결혼의 경우는 뭐 다른가? 아, 그렇지. 감정이 아니라 조건으로 이뤄진 인연이니만큼 감정이 남아도 조건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겠다. 혹시 그런 경우라서 나한테 계속 적개심을 갖고 있는 거였나? 오, 그렇게 생각하니까 말이 되는데!’
셰비언은 흐뭇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렵고 어려운 인간의 감정문제를 이렇게 성공적으로 해석해 낸 자신이 무척 기특했다.
‘쯧, 오드리 아가씨의 운명은 나인데……. 안 되는 사랑을 품었군.’
셰비언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인간인 라비린이 용의 마력을 대량으로 품은 오드리에게 반하는 건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오드리의 운명은 라비린이 아니라 자신이니, 라비린의 사랑이 이뤄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만한 자신감이었다.
라비린은 셰비언이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모르고 셰비언이 작위에 걸맞은 일을 함으로써 명성을 쌓아야 할 필요성과, 그렇게 쌓인 명성으로 오드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 등을 구구절절 읊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대체 불가한 마법사인 셰비언은 오드리와 로렐라이의 훌륭한 방패막이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야 할 셰비언은 브란젤까지 가는 길을 되짚느라 정신이 없었다. 라비린의 말은 귓구멍으로 들어가자마자 콧구멍으로 빠져 나와 사라졌다.
“알겠어요? 남작은 대체 불가능한 마법사로서 오드리를 지지하고, 그 결과로 오드리의 평판을 끌어올림으로써 그녀의 안목이 로렐라이의 주인으로서 합당하다는 평가를 받게 해야 해요. 그러려면 역시 괴물 사태 해결만큼 효과적인 게 없고……. 저기, 듣고 있어요?”
“……어, 그래서 뭐라고요?”
“어휴, 내가 진짜. 말을 말지.”
라비린이 이마를 짚고 좌절했다. 멀뚱멀뚱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던 셰비언은 어쨌거나 라비린이 더 하는 말이 없으니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됐다고 판단했다. 이 순간에도 점점 브란젤과 가까워지고 있을 오드리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했다.
“수원에 관련해서 짐작되는 사항 몇 개를 남겨두고 갈게요. 왕궁마법사들이 바보도 아닌데 그걸 보면 금방 익혀서 써먹겠죠. 그보다 벨키스 경, 말 좀 빌려줘요. 이왕이면 크고 튼튼하고 잘 달리는 놈으로다가…… 으앗!”
성큼성큼 다가온 라비린이 엉덩이를 들썩대는 셰비언의 어깨를 콱 눌러 앉혔다. 그리고 그는 셰비언에게 욕을 하지 않고 웃는 낯을 유지하는 것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줌의 인내심을 모조리 소모하고 말았다.
“좋은 말로 해서는 남작이 영 못 알아듣는 거 같으니까, 이번엔 비관적인 얘길 하겠습니다. 남작, 당신이 이 성의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고 가지 않으면 오드리는 죽습니다.”
“네?”
“낮에 활동하는 괴물이 오드리를 따라다녔다던 거, 들었죠? 서류 기록은 남기지 않았지만 다들 그 얘기뿐인데 성을 돌아다니면서 안 들었을 리가 없지.”
“…….”
“안 들었군요.”
오드리가 브란젤로 떠나고 없다는 말을 들은 후, 타우레드 영주성 괴물 사태에 대한 셰비언의 관심과 의욕은 거의 절반 이하로 떨어져 버렸다. 남은 거라곤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원흉인 샤를레아의 동족으로서 느낀 책임감과 의무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데 거기에 더해 다나가 아닌 샤를레아가 만든 괴물이 오드리를 따라다녔다는 말을 들으니, 이 성에 대한 그 얄팍한 책임감마저 죄다 사라지려 했다. 그나마 라비린이 하는 말을 마저 들어야 한다는 한 가닥 이성이 그를 의자에 붙여놓고 있었다. 그의 동공이 점점 세로로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괴물이 오드리 아가씨를 따라다니는데 왜 내가 이 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죠? 당장 브란젤로 떠나도 모자랄 판에.”
“인간은 겁이 많아요. 자신과 다른 생물을 용납하지 못하죠.”
라비린은 제가 누르고 있는 게 정말 사람인지 다시금 의심했다. 눈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상 이상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맹수가 인간의 껍질을 쓰고 새침을 떠는 것 같았다. 어깨를 눌렀던 손을 떼어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가다듬었지만 그 짧은 새에 등이 땀으로 젖었다.
“괴물이 오드리를 따라다니는 이유 같은 건 생각지도 않을 겁니다. 불안과 공포에 젖어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을 테죠. 오드리가 괴물을 만들어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드시 생길 거고, 그들은 오드리를 죽여서 화근을 뿌리 뽑고 싶어 할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오드리를 환영하던 내 친족들이 그녀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죠. 내가 괜히 파혼을 했겠어요?”
“……그들을 얌전히 내버려 뒀나요?”
“모조리 포박해서 하룻밤 내내 연무장에 던져 놓았었죠. 괴물이 나오기를 그렇게 바라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게 매일 밤 나오던 괴물이 그날은 안 나왔습니다. 오드리가 성을 떠나고 나자마자 괴물이 안 나왔으니, 그들의 추측은 이제 확신이 됐겠죠.”
클로드는 그들을 왜 죽이지 않았느냐 라비린을 탓했지만, 그렇게 말한 클로드도 막상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자 선뜻 칼을 쓰지 못했다. 그만큼 피가 가까운 데다 가문 내에서 요직을 맡은 이들이 많았다. 처벌이 말보다 약해질 게 뻔했다.
“이 성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어디로든 퍼져 자신이 보고 들은 걸 읊어댈 겁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건 오드리가 떠나자 괴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일 테고요. 그 말이 퍼지면 오드리가 어떤 일을 겪을까요?”
“…….”
“남작, 당신이 이 성에 남아 괴물을 완전히 해결하고 오드리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해줘야 오드리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잘 알면 경이 직접 말해도 될 텐데요. 브란젤에도 괴물이 나왔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원인을 밝히는 정도야 왕궁마법사들만으로도 충분해요.”
“브란젤의 괴물은 나름 대책을 마련해 놓고 왔다고 들었습니다. 남작, 왕궁마법사들은 권위가 부족하고, 내가 말하는 건 사랑하는 여자를 감싸기 위한 변명으로 들릴 겁니다. 당신이 남아야 합니다. 오드리가 마녀로 몰려 처형당하는 꼴을 보기 싫다면요. 이건 내가 이 성뿐만 아니라 오드리까지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