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 파혼
「하티의 신전에 가기 전까지는 볼린의 영역 - 오래된 농담」
갈가리 찢긴 구름이 하늘에 조각조각 흩어졌다. 그 사이로 대낮에도 알아볼 만큼 큰 번개가 번쩍였고, 동시에 시엘라 거리의 뒷골목에서 황금빛 빛줄기가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내처 입술을 뜯으며 대기하고 있던 치안대와 왕궁마법사가 뛰어들어 까맣게 탄 괴물을 마주했다.
“뭐가 이렇게 화려해.”
유렌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투덜거렸다. 셰비언이 마음먹고 괴물 처리에 나선 건 좋지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죄 지은 놈들 잡아내는 게 직업인데 어째 번쩍이는 벼락만 보면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는 거 아닌가 되돌아보게 됐다.
그런 유렌의 옆에서 피올은 괴물 시체를 뒤적이며 신원 확인에 쓸 만한 게 있나 살폈다. 척추가 굽고 팔이 네 개인 걸 보니 괴물이 맞긴 한데, 어찌나 확실하게 구워놨는지 신분패고 뭐고 남아난 게 없었다.
“씁, 또 신원미상처리 되겠네……. 이거 꼭 태워야 하는 건가?”
“태우는 게 싫으면 네가 가서 말 좀 해 보든가. 저번처럼 얼려달라고 해.”
“어, 그건 싫어. 셰비언 자식, 이상하게 날카롭단 말이야. 잘못 건드렸다간 내가 홀랑 구워질 것 같은 느낌?”
“그렇게 말 걸기 무섭냐? 나보다 훨씬 친하게 지냈잖아.”
“그럼 안 무섭게 생겼어? 괴물이 다시 나타났다는 걸 확인한 날부터 지금까지 잠도 안 자고 저러고 있는데. 마법사들은 큰 마법 한두 개 쓰고 나면 탈진해서 쓰러지는 게 보통 아닌가? 솔직히 사람 같지가 않아.”
피올의 시선이 브란젤 중앙광장에 있는 시계탑에 가 닿았다. 호가르 거리에서 사람들을 물어뜯으며 인명피해를 낸 괴물에게 벼락을 떨어뜨렸던 그 순간 이후로, 셰비언은 시계탑 꼭대기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했다. 애초 어떻게 올라간 건지부터 의문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번개를 떨어뜨리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물어보기도 무서웠다.
“덕분에 피해가 적은 걸로 만족해야지. 수확제 때처럼 고생하지는 않으니까.”
“하긴 그래. 사람 물어뜯은 놈도 그때 바로 잡아버렸고.”
“이제 그놈의 마법망 뭉치만 어떻게 해결하면 될 텐데 그건 안 된다니 거 참…….”
피올의 말 그대로, 셰비언은 마법망 뭉치의 위치를 유추해 내는 데 실패했다. 그는 자신의 도움 없이 찾아낸 마법망 뭉치가 일곱 개를 넘어가고 나서야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했다.
결국 셰비언은 계속 브란젤을 살피다가 괴물이 나타나자마자 벼락을 때리고, 대기하던 왕궁마법사들이 바로 근처에서 마법망 뭉치를 찾아내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 이 방법을 설명하면서 셰비언의 표정이 어찌나 살벌했는지, 능글맞게 말을 걸던 피올조차 주춤 뒷걸음질을 했을 정도였다.
“뭐, 그쪽에 관련해서는 상대가 더 우위였나 보지. 누구든 특기인 분야가 있으면 모자란 부분도 있기 마련이니까. 난 오히려 그쪽이 더 인간적이고 좋은데?”
“유렌, 그 말 셰비언 앞에서는 절대 하지 마.”
“내가 돌았냐, 그 말을 아르젠 남작 앞에서 하게. 실수인 척하고 벼락 때릴까 봐 무서워서라도 못한다.”
실속 없는 한담을 나누는 사이 수습반이 와서 괴물의 사체를 정리했다. 유렌과 피올은 주변을 기웃대는 구경꾼들을 내쫓으려 시도했다. 위험하다니까 왜 계속 여기에 있습니까, 제발 저리 꺼져요, 금방 갈 거예요, 괴물은 죽었는데 위험은 무슨 위험!, 계속 이따위로 굴면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
실랑이가 길어졌다. 치안대의 노력에도 구경꾼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바로 왕궁마법사들의 마법망 가시화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반짝거리는 금빛 마법망이 나풀나풀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은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와아……!”
구경꾼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유렌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혀를 찼다. 왕궁마법사 스와디가 일대를 거의 다 뒤덮을 정도로 넓은 지역에 걸쳐 마법망을 가시화시키고 있었다. 금빛 안개에 감싸인 것처럼 시야 전체가 번쩍거렸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심장처럼 펄떡거렸다. 금빛 안개를 헤치고 뻗은 흰 손이 심장 같은 마법망 뭉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과일을 쥐어짜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쥐니, 마법망 뭉치가 그대로 터져 나가며 날카로운 바람이 일대를 휩쓸었다. 치맛자락이 들썩이고 열어둔 창문에 매달린 커튼이 펄럭거렸다.
금빛 안개는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주변을 자욱하게 물들이는 가운데 펄떡이는 심장이 있던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스와디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니, 구경꾼들은 그 펄떡이던 게 마법망 뭉치였고 방금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함성이 터졌다. 길에서 마법망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소리를 질렀다. 마법망 뭉치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괴물이 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유렌과 피올을 비롯한 치안대원들은 스와디를 향해 몰려드는 군중을 죽을힘을 다해 막았다.
때는 이때다 하루가 멀다 하고 호외를 찍어내는 신문 덕분에 요즘 마법망 뭉치를 제거하는 마법사들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시계탑 꼭대기에 앉아 번개를 떨어뜨리는 셰비언과 직접 마법망 뭉치를 찾아 발로 뛰는 왕궁마법사들의 삽화가 화가의 작품집처럼 시장을 돌아다녔다. 희생적이고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다고 알려진 다나의 초상도 거기에 끼어 함께 팔렸다.
마법사는 지독히 이기적이고 괴팍한 족속들이라는 편견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긴 어렵겠지만, 이대로라면 마법사가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왕궁마법사의 호위 노릇을 하게 된 치안대원들이 이런 상황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유렌이 거의 이를 갈아붙이며 불평했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 관심을 좋아해? 힘들어 죽겠네!”
“내가 알아? 젠장, 리즈비아 거리 최고의 인기 가수라도 이런 인파는 안 몰릴 건데!”
팔짝팔짝 뛰고 손을 흔들며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던 스와디가 로브를 뒤집어쓴 다른 왕궁마법사들에게 끌려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사람들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치안대원들은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몸뚱이를 끌고 한산해진 거리의 구석진 곳을 찾아 주저앉았다.
“저 재수 없는 여자가 왕궁마법사 중에서 제일 마법망 뭉치를 잘 찾아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나도 그래. 내가 아는 마법사한테 물어보니까 저 스와디란 마법사가 그렇게 아르젠 남작을 따라다닌다더라. 남들은 시계탑 근처에 가는 것도 무서워서 질색을 하는데 매일 시계탑을 오른대.”
“허, 진짜?”
“예전에 수확제 때도 제자 삼아달라고 엄청 졸랐다던데 진짜 제자가 된 거 아닐까?”
“미친……. 진짜야? 어떻게 제자로 삼아도 하필 저런 여자를 골랐대? 사람들 시선이 좋아서 미쳐 버린 여자를?”
“내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냐? 그냥 그런 정황이 있더라 하는 거지. 근데 수확제 이후에 갑자기 실력이 확 오른 건 맞대.”
쑥덕대는 대화 속에서 어느새 스와디는 셰비언의 제자가 돼 있었다. 고급 상점이 밀집된 시엘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은근슬쩍 치안대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 내일이면 저 근거 없는 수다가 신문 기사 중 하나가 되어 브란젤에 뿌려질 게 분명했다.
“너네 그러다 고소당한다.”
브란젤 지도에 마법망 뭉치의 출현 장소를 기록하던 유렌이 툭 말을 내뱉었다. 떠들어대던 말소리가 삽시간에 줄어들고 대신 헛기침 소리가 요란해졌다.
“그럼 아니야? 보티안, 넌 뭐 따로 아는 거 있어?”
“알겠냐. 하지만 정말로 스와디가 셰비언의 제자였으면 내가 탑에 음식을 나르고 있겠어?”
“하긴…….”
“진짜 제자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럼 난 안 가도 되잖아.”
피올의 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루 두 번 꼬박꼬박 시계탑 꼭대기에 음식을 나르는 것도 싫고, 그때마다 우편부가 떠맡기는 팬레터를 갖다 주는 것도 싫었다. 차라리 몰래 시계탑 출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징계를 받는 게 낫지!
하지만 카즈네 공작은 다들 기피하는 셰비언을 상대하는 일을 피올에게 떠맡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피올은 그날 저녁도 식사거리와 우편 한 다발을 챙겨 시계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시계탑 꼭대기, 바람이 몰아치는 곳에서 셰비언은 석상처럼 서 있었다. 풀어헤친 긴 은발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등골이 오싹한 한기가 옷자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노을 진 브란젤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저 사람이 셰비언이 맞다는 걸 분명 알고 있는데도 감히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하여간 촉도 좋은 놈들.’
피올은 셰비언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에 사방팔방 개미새끼들처럼 도망가던 동료들을 떠올리고 이를 갈았다. 굳이 따지자면 시계탑에서 셰비언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나불나불 떠들어댄 자신을 탓해야겠지만, 본래 그는 자기변호에 능한 편이었다.
“셰비언!”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문질러 풀고 셰비언을 불렀다. 하나 셰비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피올은 익숙하게 혀를 차며 그의 옆에 주저앉아 음식을 펼치고 냅다 제 입으로 집어넣었다. 어차피 먹지도 않고 남길 거, 배고픈 사람이 먹는 게 나았다.
“넌 어떻게 지치지도 않냐? 잠은 자?”
“내가 자는 동안 괴물이 나오면 어쩔 건데?”
“어떻게든 잡겠지. 야, 치안대 무시하지 마라. 하면 해. 아까도 마법망 뭉치 하나 더 찾아냈어. 자, 봐.”
피올이 건넨 지도를 확인한 셰비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사람 같지 않은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피올은 겨우 숨통이 터진 기분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염병, 이제야 좀 살겠네. 셰비언, 너 진짜 인간이긴 해?”
“나 인간 아닌데.”
“어 그래. 용이라고? 망할, 그걸 믿으라고……. 안 그래도 왕궁마법사들이 너 만나보고 싶어서 아주 미치려고 들던데 의사도 추가하고 싶어? 그 사람들 끈질기기로는 마법사보다 더 할 건데.”
“믿지도 않으면서 뭐 하러 물어봐? 아무튼 꽤 많이 찾아내긴 했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어. 분명 더 나올 거야.”
셰비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고민에 잠겼다. 피올이 지도에 표시해 둔 것들은 유용하긴 했지만 정보값이 지나치게 단순했다. 위치만으로 어떤 마법진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만큼 다른 정보가 더 있어야 했다.
“빌어먹을 샤를레아.”
정말이지, 용족 최고의 전투력이란 별명이 아깝지 않았다. 전장을 구른 세월이 아무리 길었다 한들, 마법의 주인을 이 정도로 고생시키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놀랍다고 짜증이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셰비언……. 너 이러고 있는 거, 괴물 때문이 아니지?”
“뭐라는 거야.”
“자존심 상해서 그러는 거 아냐? 누군지는 몰라도 너도 못 푸는 문제를 꺼내놓고 튄 게 짜증나서.”
“하……. 알면 입을 좀 조심하는 게 어때?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무섭다 어쨌다 해 봤자 다 거짓말 같지.”
셰비언의 동공이 세로로 뾰족해졌다. 예전과는 다르게 마력을 퍽 잘 제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올의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는 서둘러 따로 옷 안에 넣어왔던 편지를 꺼냈다.
“무섭다는 건 진담인데. 다만 나는 네가 터지기 직전에 가라앉힐 수 있는 포인트를 알고 있으니까 그거 믿고 이러는 거지.”
“팬레터는 안 받아.”
“그거야 나도 알지. 하지만 오드리 아가씨가 팬레터를 보낼 사람은 아니잖아? 로렐라이 일 관련해서 뭔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셰비언이 번개 같은 속도로 편지를 낚아챘다. 피올은 한 입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구겨 넣고 마구 씹으며 벌렁 드러누웠다. 멀쩡히 약혼자가 있는 사람을 좋아해 봤자 무슨 소용이라고 저리 매달리는 셰비언이 한심하다가도, 네이기스만 생각하면 마음이 울렁대는 자신을 생각하면 나무랄 처지가 못 되어 한숨이 났다.
“피올, 아까 치안대만으로도 괴물 잡는 건 문제 없을 거라고 했었지?”
“어, 어?”
“타우레드 영지에 다녀와야겠어.”
기겁한 피올이 벌떡 일어났다.
“야아? 타우레드 영지면 여기서 족히 사흘은 걸려! 내가 말한 건 네가 잠깐 잠이라도 자라고 한 말이지, 아예 며칠 자리를 비울 걸 두고 한 말은 아닌데?”
셰비언이 편지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비늘을 피올에게 떨어뜨렸다. 피올은 얇은 유리 공예품 같은 비늘을 쥐고 어리둥절했다. 저물어가는 햇살에 비춰보며 정체를 추측하려 했지만, 물결처럼 섬세한 무늬를 확인한 거 말고는 영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게 뭔데?”
“인어의 비늘.”
“……인어? 그, 전설에 나오는 인어? 노래로 뱃사람 홀려서 잡아먹고…… 뭐 그런 거? 말도 안 돼, 인어는 그냥 전설이야!”
“지금 나오는 괴물은 뭐 다른 거 같아?”
“어……. 인어랑 괴물이랑 무슨 상관인데?”
“옛 종족 중에 인간에게 위험하지 않은 게 뭐가 있을까마는, 그중에서도 인어는 특히 위험해. 당장 가야 한다고. 타우레드 영지까지는 뭐가 제일 빠를…… 날아갈까? 아냐, 위험해……. 인어가 나왔는데 모험을 할 수는 없지. 명색이 사자의 집안인데 이레 정도로 전멸하지도 않을 테고…….”
셰비언은 재빨리 머릿속의 지도를 뒤지다가 그만 혀를 찼다. 통째로 넣어두었던 기차의 노선표에 타우레드 영지로 가는 게 없었다.
“타우레드는 황금사자니 뭐니 하면서 왜 영지에 기차도 안 놨어? 황금이 아니라 볏짚이야?”
“야, 무슨 말을 그렇게…….”
“됐어. 아마 말이 제일 빠르겠지.”
셰비언이 재빨리 승강기를 향해 달렸다. 셰비언의 혼잣말을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그의 등을 바라보던 피올이 달려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셰비언, 이렇게 가면 어떡해? 사정 설명을 해줘야지! 타우레드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건 알겠어! 근데 인어랑 괴물은 대체 무슨 상관이야?”
“왕궁마법사들과 조 짜서 다닌다며? 그 사람들한테 물어.”
“셰비언!”
승강기의 문이 닫혔다. 황당함과 얼떨떨함에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던 피올은 곧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셰비언이 사라진 상황에서 대체 무슨 수로 괴물을 빠르게 잡고 마법망 뭉치 위치를 짐작한단 말인가? 괴물이 한참 돌아다닌 뒤에야 출현을 깨닫게 될 텐데!
“망했다…….”
피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좌절했다. 기사가 넘쳐나는 타우레드야 조금도 걱정이 안 되지만, 셰비언이 타우레드 영지에 얼굴만 비추고 돌아온다고 해도 이레는 족히 필요했고, 그 기간은 고스란히 치안대의 부담이 될 터였다. 경축, 야근!
* * *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낮에 괴물로 변이하는 사람은 없었다. 밤새 숨죽이고 조용히 처박혀 있다가 낮에 돌아다니는 놈들이 드디어 사람들의 눈에 띈 것뿐이었다.
그놈들은 검을 뽑기만 하면 부리나케 달아나는 주제에 유독 오드리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게 얼마나 노골적이었냐면, 잠깐 사람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오드리가 쓰는 기도실 문짝이 괴물의 손자국으로 가득 찼을 정도였다.
오드리는 머무는 기도실을 바꿔보기도 하고 피를 뽑아 성 반대편에 뿌려보기까지 했지만 어떤 처방도 소용이 없었다. 밤이 되어 공격적인 괴물이 날뛰기 시작하면 그나마 좀 잠잠해지니, 방에 틀어박혀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견디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게 하루, 이틀……. 낮에는 오드리를 지키고 밤에는 괴물을 잡으며 보초를 서니, 기사의 소모가 극심했다. 아직도 소식이 없는 클로드를 찾으러 갈 수색대를 꾸릴 여유는커녕 제대로 된 교대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다 괴물이 나오기 시작한 지 닷새째 밤, 지친 기사들은 첫날만큼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그 결과로 괴물 한 마리를 놓쳤다. 그 괴물은 뒤늦게 쫓아온 기사들에게 잡혀 죽을 때까지 무려 세 명이나 되는 사람을 물어 죽였다.
오드리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쩌다 괴물의 목표가 되어서 기도실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던 동정은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하자마자 미움으로 탈바꿈했다.
안 그래도 사람들에게는 원망할 게 필요했다. 마침 오드리는 괴물의 목표였고 낮에도 호위를 받으며 기사들의 체력을 지나치게 고갈시키는 원흉인 데다 외부인이기까지 하니, 원망의 대상으로서 아주 적합했다. 오드리 대신 성내를 오가는 다이앤이 해코지를 당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라비린과 라디아타는 화를 내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면서 막아보려 애를 썼다. 그러나 모두가 그들처럼 오드리를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타우레드 일족 가운데에서도 오드리를 감싸고도는 두 사람에게 반발하는 이들이 속속 나타났다.
기도실 외부로 출입을 삼가는 오드리지만 이런 분위기를 모를 수는 없었다. 나갔다 올 때마다 다이앤이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데다 카프러스가 넌지시 브란젤로 돌아가는 게 어떠냐 권하기도 했는데 모르면 바보다.
하지만 오드리를 찾아온 라비린에게서 그런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지금 영주성을 책임지고 있는 라비린에게 쏟아지는 압력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전하는 말은 모두 밝기만 했다.
쓰러졌던 로샨은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희생자 명단 작성도 나름 진척을 보이고 있어 라디아타가 한숨 돌렸으며, 행방불명으로 애를 태우던 클로드에게서 곧 돌아갈 테니 기다리라는 전갈이 왔다고.
“망할 아버지, 아무래도 멀쩡한 것 같아. 거동이 불편했던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이렇게 늦었는지 모르겠다니까. 소식이라도 좀 빨리 주면 좀 좋아?”
“그래도 덕분에 한숨 돌렸을 거 아냐. 그냥 솔직하게 기뻐하지 그래?”
“기쁘긴 무슨…….”
“말은 그래도 입이 웃고 있는데 뭐. 그보다 셰비언은 아직이야?”
“이야, 네가 독촉하는 걸 다 보다니 놀라운데. 이제 겨우 이레째야. 뭘 그렇게 초조해하는 거야?”
오드리보다도 더 마음이 급하고 힘들 사람은 라비린인데도, 그의 여유롭고 느긋한 얼굴에선 까맣게 타들어갔을 속이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라비린이 말문이 막혀 어물거리는 오드리의 손을 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내가 있잖아. 넌 걱정할 필요 없어.”
“……셰비언이 안 오면, 그땐 어쩌려고?”
“그땐 그때 나름대로 방도가 생기겠지. 당장 아버지도 빈손으로 오진 않으실 거고, 왕궁마법사를 부르는 방법도 있어. 오드리, 타우레드는 멜브란트와 역사를 함께한 가문이야. 그렇게 쉽게 쓰러지지 않아.”
지극히 담담하고 차분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불안에 차 있던 오드리를 달래기에는 불충분했다.
오드리는 라비린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늘 맡던 향수 냄새 아래에서 희미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속에서 무언가가 찌르르 흔들리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나 쫓아내자는 사람 많지 않아?”
“없어, 그런 사람.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해?”
라비린이 오드리의 질문을 단박에 부정했다.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두드리며 다정하게 토닥거렸다. 그게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오드리는 정말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까는 찔끔 눈물이 나더니만, 지금은 또 구름에 폭 안긴 것처럼 괜히 기분이 둥실둥실 떴다. 스스로도 이해 못 할 변덕스러움이었다.
“애 취급하기는.”
“어허, 내가 너보다 여덟 살이나 더 먹었어. 네 나이 때 나는 동북부 전장을 구르면서 기사 작위를 땄다고.”
“그러느라 비마법을 허술하게 공부해서 워커의 제안서를 버렸지.”
“아, 그 얘기 꺼내면 내가 좀 가슴이 아픈데……. 그래도 덕분에 너를 만났잖아. 그럼 됐지.”
“……정말 그걸로 돼?”
“충분해. 내가 망할 아버지에게 고맙게 여기는 건 그거 딱 하나야. 날 만탈락으로 보내고 네 옆에서 일하게 한 거.”
오드리는 자신이 라비린을 끌어안고 있는 상태라는 걸 몹시 다행으로 여겼다. 안 그랬으면 홧홧하게 달아올라 사과처럼 익어버린 얼굴을 감출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심장이 어찌나 요란스럽게 뛰는지, 혹시나 맞닿은 가슴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질까 겁났다.
‘세상에, 예전에 들을 땐 그냥 민망하기만 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데…….’
종일 작은 기도실에 덩그러니 앉아 괴물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견디다 마침내 라비린의 얼굴을 보면, 그 순간부터 뭐라 표현하기 힘든 안도감에 젖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저녁 시간 잠깐이 하루의 기쁨이었다.
그런 날들이 겨우 사흘 반복됐을 뿐인데, 아주 작은 씨앗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시간이 무색하게 덩치를 키웠다. 눈비탈을 굴러 내려가는 눈덩이가 순식간에 덩치를 불리듯이 고독과 공포를 잡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내가 네 발목을 잡다니……. 미안해.”
라비린은 반복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해주었지만, 오드리는 어쩐지 그 말을 입에 담기가 부끄러웠다. 하여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좋아한다, 혹은 사랑한다가 아니라 미안하다 였다. 그러고도 혹여 미안하다 안에 감춰둔 마음을 들킬까 긴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비린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뭘, 지켜준다고 했잖아. 다음엔 내가 네 발목을 잡을 테니 그때 나 버리지만 마.”
“당연한 소릴.”
“오, 그런 장담을 들으니까 굉장히 든든한데.”
라비린은 무슨 대단한 약속이라도 받은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오드리를 위해 꾸며낸 웃음은 아니었다. 목을 두른 팔의 온기와 물기 배인 속삭임이 그만큼 흡족해서였다. 오드리를 방에 가두고 자신만 기다리게 두고 싶다던 언젠가의 바람이 현실로 이뤄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오드리만 얽히면 제대로 된 사고가 힘들었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깜빡거렸다. 이러면 안 된다, 제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수없이 되뇌다가도 기도실에서 얌전히 앉아 있던 오드리가 자신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 걸 보기만 하면 그런 다짐이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오드리의 등을 마주 끌어안고 지켜줄게, 하고 속삭이는 순간 이건 정상이 아니라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던 미약한 경고음마저 침묵했다. 독한 술에 취하고 달콤한 과일에 취한 사람처럼 넋이 나가서 발밑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거 위험한데…….”
“응? 뭐가? 뭐가 위험한데?”
“좀 더 있고 싶은데, 계속 뭉그적거리다간 라디아타가 불을 뿜으면서 달려올 것 같아.”
라비린은 급하게 둘러댄 말이었지만 퍽 신빙성이 있었다. 오드리는 라비린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고 라디아타에게 털어놓는 상상을 했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하필 라비린이냐며, 오라버니가 무슨 수작을 부렸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결국엔 이해해 줄 테지만 그 과정이 몹시 험난할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빨리 가야겠네.”
“와, 미련 한 톨 없이 보내려고 하는 거 봐. 서럽다.”
“날 지켜준다며? 화난 라디아타에게서도 좀 지켜줘.”
“그렇게 말한다면야 분부대로 해야지.”
라비린이 오드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좋은 밤, 오드리.
오드리 역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춰 인사를 돌려주었다. 좋은 밤, 라비린.
좋은 밤이 될 수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나마 평안하길 바라며 하는 인사였다. 제발, 좋은 밤이기를.
하지만 바람이 현실이 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되던가. 라비린은 좋은 밤은커녕, 오드리를 지켜주겠다던 호언장담마저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이전에 그랬듯이 오드리가 있는 기도실 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괴물을 잡았는데, 목을 치고 보니 그 괴물이 그의 사촌 누이 클레멘테였다. 에베소 일가의 참사 이후로 타우레드가 괴물이 된 건 처음인데, 하필 오드리를 따라다니는 놈이 되다니. 지나치게 공교로웠다.
끊어진 목걸이 펜던트를 확인한 클레멘테의 어머니, 나바테아는 그 자리에서 혼절했고 클레멘테의 아버지 캄포스는 오드리를 브란젤로 돌려보낼 걸 요구했다. 말로는 브란젤이 더 안전하니까 그리로 보내는 게 좋다는 거지만, 그건 공개적으로 파혼을 종용하는 행위였다. 브란젤까지 가는 길이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라비린은 버럭버럭 악을 쓰는 숙부를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소란을 눈치채고 몰려드는 친척들이 대단히 부담스러웠다.
“숙부, 클레멘테의 비극에는 나도 동정을 금할 수가 없지만, 그게 오드리의 탓도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디 헨젤만 아니었으면 클레멘테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모두가 내심 생각하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고 꾹꾹 눌러 담아왔던 말이 기어이 터져 나왔다. 추측만으로 사람을 모함하지 마라 라비린이 점잖게 타일렀지만 창졸간에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그게 통할 리가 없다. 차마 라비린을 향하지 못한 원망이 고스란히 오드리에게로 쏟아졌다.
“그놈들, 밤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놈들이 해만 뜨면 레이디 헨젤이 머무는 기도실 문을 두드립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등 관심도 안 보이는 놈들이요! 한데 어떻게 레이디 헨젤이 괴물과 무관하다 하십니까?”
“어떤 쥐도 자신을 잡아먹을 고양이를 부르지 않습니다.”
“아니요! 쥐가 있으니 고양이가 꼬이는 겁니다! 고양이를 쫓아내려면 쥐부터 없애는 게 마땅합니다!”
라비린의 능력을 믿지 못해 오드리에게 서류를 떠맡겼던 사람이 하기엔 몹시 우스운 말이건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오드리의 공을 입에 담으며 그를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순간, 오드리는 그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하기 딱 좋은 외부인이었고 라비린은 아직 앞날을 알 수 없는 후계자에 불과했다.
‘빌어먹을……. 아버지만 있었더라도 이런 식으로 대들지는 못했을 텐데.’
라비린은 잠시 입을 다물고 끓어오르는 화를 삭였다. 그리고 말은 안 해도 침묵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친족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섰다.
“다른 분들도 같은 생각입니까?”
라비린의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한 명이 성큼 앞으로 나서서 캄포스의 옆에 섰다. 눈치를 보던 사람 몇이 또 우르르 나섰다. 그렇게 모여 선 이들이 전체 숫자의 절반쯤 됐다.
“레이디 헨젤 때문에 지나치게 기사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후작부인도 그 정도 호위는 받지 못하는데 이건 지나칩니다.”
“괴물 한 마리를 놓쳐서 멀쩡한 사람 셋이 죽는 일이 또 반복되면 어쩝니까?”
“벨키스 경, 아무리 사랑이 좋다지만 명색이 후계자인데 가문을 좀 더 중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감정적으로 굴어서 뭐가 되겠습니까?”
멍석을 펴주자 잇따라 한 마디씩 내뱉는 꼴이, 아무래도 라비린이 모르는 곳에서 입을 놀린 경험들이 아주 많은 듯했다. 라비린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얼굴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분명히 새겨 넣었다.
“브란젤의 괴물 사태를 진정시킨 공로로 로렐라이의 마법사인 셰비언 씨가 아르젠 남작이 된 걸 모르는 분 계십니까?”
침묵이 깔렸다. 로렐라이가 기점으로 삼은 도시가 바로 만탈락이며, 그 만탈락의 주인이 오드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괴물에 대한 공포로 머리가 마비된 상태라 다들 잊고 있었을 뿐이지. 캄포스는 불만스러운 낯으로 뭔가 말하려 했지만 누군가 다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물탱크에서 하녀의 시체가 발견된 날, 오드리는 부검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젠 남작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타우레드 영지에서 괴물이 나타났으니 괴물 퇴치로 작위를 가진 자답게 당장 와주기를 청했습니다.”
“외부에……?”
“그걸 왜 말을 않…….”
반사적으로 라비린을 비난하려던 몇몇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얻어맞고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타우레드가 아무리 외부에 흠 잡히길 싫어하더라도 이건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내부적으로 수습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빨리 도움을 청했다면 그만큼 피해가 적어질 터였다.
“무사히 브란젤에 도달한 우편을 받은 아르젠 남작이 지체 없이 달려온다면 이레인 오늘에 도착했어야 하지만……. 짐을 꾸리는 데 필요한 시간을 생각하면 조금 늦는 게 자연스럽다고 봐야죠.”
“아무리 레이디 헨젤이 만탈락의 주인이라도 그렇지, 아르젠 남작이 그렇게 빨리 오겠습니까? 솔직히 그는 이제 로렐라이에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
“아르젠 남작은 옵니다.”
확신에 찬 어조가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을 설득했다. 어두운 터널에서 반짝이는 빛을 만난 사람들은 가냘픈 희망을 허겁지겁 붙들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르젠 남작은 작위를 받은 뒤에도 로렐라이 소속이고, 귀족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서너 가지 이유가 줄줄이 떠오르는데, 그걸 일일이 설명해야 합니까?”
라비린의 날카로운 대꾸에 기가 눌린 사람들이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르젠 남작이 오기만 하면 괴물 사태는 곧 끝납니다. 며칠만 더 버티면 됩니다. 그 며칠을 못 참아서 돌려보내라는 말이 나옵니까, 다들? 그게 파혼을 의미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솔직히 말해, 벨키스 경이 레이디 헨젤과 꼭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스캔들을 퍼뜨리기 전까지만 해도 레이디 헨젤의 평판이 얼마나 밑바닥이었는지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아는데! 가문의 이익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약혼인데 그렇게 기를 쓰고 지키려고 들다니, 그게 다 벨키스 경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은 아닙니까?”
입을 막던 손을 기어이 떼어버린 캄포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라비린은 오드리의 평판을 걸고넘어지는 말을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뒤에서 몰래몰래 말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이렇게 대놓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던지라, 어쩐지 신선하기까지 했다.
“숙부, 내가 온 브란젤이 시끄럽도록 스캔들을 내고 다니는 동안 아버지가 왜 조용히 있었는지 압니까?”
“그야 후작부인이 돌아가신 헨젤 백작부인과 친했으니까…….”
“숙부가 보기에 아버지는 가문의 이익이 걸린 결혼을 결정할 때조차 어머니에게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까?”
“클로드가 로샨의 말이라면 깜빡 죽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벨키스 경은 모르겠지만, 클로드가 로샨과 결혼하겠다고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그 당시 멜브란트 전체가 뒤집혔습니다. 결혼 이후에도 그런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순진하시기는.”
라비린이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시원시원한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는 냉소였다. 그 냉소는 아버지인 타우레드 후작을 몹시 닮아 있어서, 캄포스는 두 번이나 말을 끊기고도 화를 못 냈다.
“아버지가 정말 어머니에게 깜빡 죽는 사람이었으면, 어머니가 우울에 빠져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브란젤에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까다롭고 관리 힘든 산트렘, 그 산트렘에서 공주라고 까지 불리며 사랑받던 사람을 브란젤로 데려와 전시함으로써 아버지가 얻은 이익이 얼마인지 압니까? 숙부, 정말 아버지가 내 결혼에 주판을 튕기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럼…….”
“부디 아버지가 있을 때 파혼 얘길 꺼내보시죠. 무슨 반응이 돌아오나 궁금하니까. 여러분, 답변을 충분히 들었으면 이만 기도실로 돌아가시죠. 시간이 무섭지 않습니까?”
라비린이 벽에 걸린 큰 시계를 가리켰다. 어느새 자정에 가까운 한밤중이었다. 흥분이 가신 사람들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딱 한 사람, 캄포스만 빼고.
자신의 편을 들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보는 캄포스는 대단히 허탈하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세월이 새긴 주름이 유독 깊었다.
“숙부도 이만 돌아가시죠. 밤이 되면 공격적인 괴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쓰러진 숙모님도 돌보시고…….”
“라비린. 나는 이만 내 집으로 돌아가겠다.”
라디아타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닥쳤다. 라비린은 클로드를 향해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은 욕설을 읊조렸다.
“안 됩니다.”
“왜?”
“그럼 되겠습니까? 숙부님이 빠져나가면 다른 사람들도 줄줄이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돌아와서 정식으로 모임의 종료를 선언할 때까지는 안 됩니다.”
“그럼 클레멘테의 시신을 가지고 장례를 치를 수도 없는데 계속 여기에 있으란 거냐? 라비린, 나는 지금 널 원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벅차.”
“원망하셔도 됩니다. 만약 입장이 바뀌어 숙부님께서 라디아타를 베었다고 하면 저는 숙부님이 보여주시는 침착함의 절반도 못 따라갈 겁니다.”
“이런 때에도 여전히 말은 잘하는구나. 넌 어릴 적부터 언변이 좋은 아이였지. 아르젠 남작이 올 거라는 변명은 아주 좋았어. 나조차 잠깐 혹했었다. 약혼녀를 지키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기껏 번 며칠이 지나면 그땐 무슨 말로 변명할 거냐?”
“거짓말도 변명도 아니니 그런 식으로 빈정대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르젠 남작은 옵니다. 며칠 내로 끝나니 조금만 견디시죠. 모든 일이 끝나면, 클레멘테의 재라도 가져다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애의 재를 어떻게 구분할 수는 있고?”
“따로 태웠습니다. 보관해 두라 명령했으니 지금쯤 어느 단지에라도 넣어두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따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곧바로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임이 끝나는 날, 나가는 길에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캄포스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눈으로 라비린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처진 어깨와 구부러진 등은 기억과 달리 몹시 처량하고 슬퍼 보였다.
라비린은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기고 겨우 며칠의 시간을 벌었다. 바깥에도 괴물이 나타난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셰비언 본인이 괴물을 불태우며 올 수 있다는 걸 다들 아니 기껏해야 며칠이 한계였다. 초조함에 입이 말랐다.
‘셰비언, 빨리 와라, 빨리 와……. 어차피 올 거면서 왜 시간을 끌어.’
그 며칠 안에 셰비언이 오기만 하면, 하다못해 클로드가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셰비언이 도착하면 괴물 사태가 해결되는 것이고, 타우레드 후작이 돌아오면 책임을 넘기고 홀가분해질 수 있을 테니까.
라비린은 그날부터 손을 꼽아가며 하루하루 흘러가는 날짜를 셌다. 왔어야 할 이레로부터 하루, 이틀, 사흘……. 셰비언도 타우레드 후작도 오지 않은 채 사흘이 더 지났다. 브란젤에 편지를 부친 날로부터 열흘이 지난 것이다.
통제된 공간에서 사흘이면 기사는 물론이고 가장 말단에 있는 고용인들에게도 셰비언이 온다는 소식이 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문에서만 보던 사람이 곧 올 거라고, 셰비언이 아니더라도 왕궁마법사 정도는 올 테니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속삭이는 사람들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반짝거렸다.
그런 사람들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라비린의 가슴에 돌이 쌓였다. 처음에는 작은 자갈에 불과하던 돌은 점점 수를 더해가며 무게를 늘렸다. 부담이 커지면서 하루가 일 년처럼 느리게 흘렀다. 쓸데없이 반감을 살까 싶어 오드리를 만나러 가는 일을 그만두었기에 더욱 그랬다.
열흘째 되는 날의 늦은 저녁, 라비린은 순찰을 마치고 제 몫의 기도실에 틀어박혀 휴식을 취했다. 누군가 때린 것도 아닌데 온몸이 쑤셨다. 침대에 누운 것도 아니고 의자에 기대어 앉은 것뿐인데 바닥으로 가라앉기라도 할 것처럼 몸이 늘어졌다. 눈앞이 흐려졌다.
“오라버니!”
“…….”
“오라버니, 당장 일어나요!”
깜빡 잠이 들었던 라비린은 라디아타가 마구 몸을 흔들어대는 통에 눈을 떴다. 마법등의 빛이 폭력적으로 눈을 찌르는 가운데, 뺨이라도 칠 것처럼 높이 쳐든 손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손목을 쥐어 막고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야? 돌아다니다가 괴물과 마주치면 어쩌려고 이래!”
“여유롭게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숙부가 미쳤어요!”
“무슨 소리야?”
“캄포스 숙부가 오드리를 죽이려고 사람을 모았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릴……. 라디아타, 진정해. 오드리는 내 약혼녀로서 타우레드의 성에 머무는 거야. 레이디 헨젤이 타우레드에게 살해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숙부가 모를 리 없어.”
“그거야 정상적인 상황일 때 얘기고요. 괴물이 되어 죽었다고 하면 누가 의심하겠어요? 지금은 아버지도 안 계시니 숙부를 막을 사람은 오라버니밖에 없어요. 오라버니, 빨리요!”
라디아타의 재촉에도 라비린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미적거렸다. 아직 잠의 여파가 나른하게 남아 있는 데다 캄포스가 그런 미친 짓을 시도한다는 게,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누가 네게 그런 정보를 줬어? 나도 아직 모르는 걸, 네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그건…….”
라디아타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녀의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발언의 신뢰도도 함께 하락했다. 라비린이 한숨을 쉬며 라디아타를 달랬다.
“라디아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아랫것들의 장난질에 휘둘리고 있는 거 아니냐?”
“내가 그런 등신이면 브란젤의 황금장미라는 별명을 달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오라버니, 그냥 믿어주면 안 되나요?”
“안 돼. 캄포스 숙부가 끼어 있는 일이야. 클레멘테의 목을 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난데, 출처도 밝히지 못하는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숙부를 들쑤셨다가 오해였음이 밝혀지면, 그땐? 가문 전체가 둘로 쪼개질 거다.”
“정 못 미덥거든 확인만이라도 좋아요. 네? 오라버니, 이러다 오드리가 클레멘테 꼴이 난다고요!”
“말조심해. 정 나를 움직이고 싶거든 출처를 말하고!”
라비린의 태도가 아주 단호했다. 라디아타가 신뢰할 만한 출처를 대지 않는 한 절대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하지만 라디아타도 끈질겼다.
“오라버니는 오드리의 약혼자잖아요. 오드리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데, 내 말을 믿지는 못해도 확인해 볼 시늉도 안 하는 게 말이 돼요? 오라버니가 계속 이런 식이면 억지로라도 오드리를 브란젤로 보낼 거예요. 여기보다야 거기가 훨씬 안전하겠죠!”
“건방지게 굴지 마라. 네가 대체 뭐라서 멋대로 후계자의 혼사에 개입하겠다는 건데? 라디아타, 네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 급하다면서?”
라디아타가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입술을 잡아 뜯었다.
“절대 밝히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세요. 그럼 밝힐게요.”
“전쟁의 신 벨트람의 날개와 그녀의 남편 칼레이의 검은 마차에 걸고 맹세하마.”
“손과 목숨을 걸다니, 거창한 맹세네요. 좋아요, 오라버니는 기사니까 약속의 신 하티가 먼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죠.”
“비꼬지 말고.”
“이 정보를 가르쳐 준 사람은 나바테아 숙모님이세요. 오드리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멀쩡한 처녀를 죽인다고 클레멘테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아는 현명한 분이시죠. 이건 아니다 싶어 털어놓긴 하지만 남편과 딸을 배신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 다시는 같은 말을 해주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오라버니, 숙모님의 증언은 기대하지 마세요.”
라비린은 캄포스의 뒤에 서서 자신에게 대거리하던 친족들을 떠올렸다. 며칠만 기다리라는 말에 동의하여 물러가 놓고도 캄포스의 무리에 합류한 이들이라면 어지간히 과격한 인사들이란 뜻이다.
“……일부러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을 노렸군.”
숙부의 편을 들면 오드리가 죽고, 오드리의 편을 들면 가문이 쪼개진다. 오드리가 죽는 건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숙부의 앞을 막아서서 오드리를 구해낸다고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테다. 어느 쪽도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테니까.
시간에 기대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오드리와 결혼한다 하더라도, 오드리는 평생 친족들과 미묘한 알력 싸움을 하며 지내야 할 것이다. 유독 친족들끼리 유대감이 끈끈한 타우레드에서 오리둥지 속의 돌멩이처럼 겉돌면서, 그렇게, 평생…….
평생.
웃음과 생기를 잃고 방에 틀어박혔던 시기의 로샨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오드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화사하고 당당하던 사람이 그렇게 시들 줄 누가 알았던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 위태롭게 미소짓던 얼굴이 눈앞에 훤히 떠오른 순간, 라비린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오라버니, 여기서 오드리는 오라버니 말고는 방패가 없어요. 제발요!”
“잠시만……. 라디아타, 잠시만 생각 좀 할게.”
라디아타는 충격에 휩싸였다.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기는 했어도, 라비린이 오드리를 사랑한다는 걸 의심해 본 일은 없었다. 비록 정략으로 시작하긴 했어도 시간이 지나며 라비린은 진심이 된 것처럼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생각이요……? 오라버니, 지금 생각이라는 걸 하셔야 한다고요?”
“그래, 생각. 나는 차기 타우레드 후작이니까.”
“……알겠어요. 오라버니는 생각하세요, 나는 지금 당장 행동할 테니까!”
라디아타가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기도실을 뛰쳐나갔다. 라비린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 이상으로 쉽게 기울어 버린 저울에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행동하기로 마음먹은 라디아타는 거칠 게 없었다. 그녀는 문을 막아서는 기사들을 눈짓 하나로 밀어내고 오드리의 기도실에 난입했다. 갇혀 있느라 뻐근한 몸을 체조로 해소하고 있던 오드리가 라디아타의 난데없는 등장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디아타? 이 시간에? 아니 그보다, 누가 네가 여길 오는 걸 허락한 거야?”
“어머, 오드리. 바지 입고 있었네? 잘됐다. 몰리 양, 당장 짐을 싸. 목적지는 브란젤, 최대한 빨리 갈 거니까 무겁지 않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당장 떠나야 해.”
라디아타는 빠르게 사정을 설명했다. 라비린의 갈등만 빼고. 클레멘테의 죽음이고 뭐고 아무 것도 몰랐던 오드리는 몹시 충격을 받았고, 다이앤은 아까보다 두 배는 되는 속도로 짐을 쌌다. 챙길 만한 물건이 별로 없는 탓에 짐은 순식간에 완성됐다.
문제는 오드리였다.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잡아당기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버텼다.
“지금 여길 떠나면 파혼이지? 그럼 안 가. 내가 여기까지 오느라 무슨 고생을 했는데?”
“고생이 아깝더라도 목숨만큼 아깝겠어? 오드리, 지금은 브란젤로 가. 다음을 기약해!”
“내가 만탈락으로 가라는 아버지 명령을 거부하고 여기 온 거 벌써 잊었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파혼으로 끝나면 내가 무슨 꼴이 될 것 같아? 안 돼, 못 가.”
“죽는 것보단 낫잖아!”
“내가 이대로 얌전히 죽어줄 줄 알고? 안 죽어. 후작님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잖아? 돌아오신다는 전갈을 보낸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어. 이 성의 모두가 캄포스란 사람에게 넘어간 것도 아닐 테고, 조금만 버티면 후작님도 올 거고 셰비언도…….”
라비린이 기도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제자리에서 놀란 고양이처럼 뛰어오른 라디아타가 오드리를 제 뒤로 감췄다. 노골적인 경계에 라비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라디아타,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여기 온 이상 내 결정도 너와 같아.”
“그럼 왜 이렇게 늦었어?”
“오드리를 끌어내는 게 제일 힘든 일일 게 뻔해서, 다른 일부터 처리하고 왔지. 말로는 설득이 안 될 거거든.”
라비린은 라디아타보다 훨씬 과격했다. 그는 오드리를 단번에 들어 올려 마치 포대자루처럼 어깨에 걸쳤다. 오드리는 휙 뒤집어진 시야에 당황한 데다 라비린의 어깨가 명치를 찔러대는 통에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라비린의 등을 팡팡 두들겼지만 라비린은 꿈쩍도 하지 않고 도리어 다이앤을 불렀다.
“몰리 양, 그렇게 날 죽일 듯 쳐다보지 말고 오드리의 입을 막을 수단부터 좀 찾아봐. 소리를 질러대면 위치를 들키거든.”
다이앤이 즉시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오드리의 입을 막는 재갈로 썼다. 과격한 조치여도 효과는 확실했다. 라비린은 들썩대는 오드리를 고쳐 메고는 다이앤의 간덩이 크기에 휘파람을 불었다.
“대체 어디에 가면 이런 하녀를 구할 수 있지? 나도 만탈락에 꽤 오래 있었지만 도무지 짐작이 안 가.”
“으으읍! 읍읍!”
“빨리 가야겠다. 라디아타, 너는 숙부의 발을 좀 잡고 있어. 숙부가 아무리 정신이 나갔대도 널 해하지는 않겠지.”
“새삼 내가 타우레드라는 게 걸리지는 않을 거고…… 왕자전하의 약혼녀라서?”
“잘 아네. 널 해하면 숙부는 자신이 세운 명분을 스스로 깨는 꼴이 되잖아. 괜찮을 거야.”
캄포스는 오드리가 가문 전체를 좀먹고 있다며 그런 벌레는 빨리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니, 라디아타에게 칼을 들이밀었다가 가스트로 왕자에게 노여움을 사는 건 피하고 싶을 것이다. 애초 타우레드가 국왕의 명령을 무시하고도 무사한 이유는 라디아타가 왕자의 약혼녀이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라디아타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눈을 한껏 휘며 웃었다.
“정말이지,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치고는 끝내주는 혼처를 골랐네. 오드리, 내 몸값이 로렐라이의 단주보다 비싸다는 게 믿어져?”
“으으으으읍!”
본래 왕족의 목숨은 귀족보다 비싸! 오드리의 반론은 재갈에 막혀 조금도 새어나가지 못했다. 곧이어 라비린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명치의 고통이 심해지면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사라져 버렸다.
라비린은 기도실을 나와 문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 것을 명령하고는 바로 옆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카프러스가 벌떡 일어나 오드리를 받아 내렸다.
“으읍! 으으읍!”
오드리의 항의는 이번에도 무시됐다. 카프러스는 미리 챙겨온 식량 일부를 다이앤에게 떠넘겼고, 다이앤은 제 몸뚱이만 한 짐에 식량을 쑤셔 넣었다. 그동안 라비린은 침대를 잡아 빼고 벽에 걸린 신상을 이리저리 조작했다. 그러자 딱 침대가 기대어 있던 공간이 안으로 밀리며 뻥 뚫린 길이 나타났다.
“자, 빨리 들어가. 빨리.”
통로를 연 라비린이 얼른 들어가길 재촉했다. 다른 사람들은 비밀통로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해 황당해하면서도 그가 이끄는 대로 비밀통로로 발을 들였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라비린이 침대를 잡아당겨 통로의 문을 닫자 통로는 완전히 어둠에 휩싸였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잠깐만 기다리게.”
라비린이 벽 어딘가를 더듬어 젖히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벽감에 들어 있던 마법등이 팟, 빛을 밝혔다.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도 온오프가 가능한, 로렐라이에서 가장 최근에 출시된 마법등이었다. 그가 마법등을 들고 선두에 섰다.
“뭐해? 안 오고. 설마 비밀통로에 최신 마법등이라니 안 어울린다고 할 셈이야? 고루하기는.”
“이 성엔 대체 없는 게 뭡니까?”
“경, 질문이 틀렸어. 도대체 이런 쓸데없는 걸 왜 유지하는 거냐고 물어야지.”
“미리 관용을 베풀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이런 쓸데없는 건 왜 유지하는 겁니까? 요즘 세상에, 막대한 돈을 들여가면서.”
“호, 베텔 경 입담 늘은 걸 보니 놀려먹는 것도 끝났군. 경, 타우레드가 전쟁 준비에 보이는 집착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안 돼.”
마치 본인은 타우레드가 아닌 것 같은 말투였다.
“후작 본인과 후계자만 아는 길이니까 숙부 일행에게 쫓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빨리 가야 해. 떠날 수 있는 준비가 가능한 곳은 한정되어 있고 라디아타가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을지 모르니까.”
통로의 끝은 외성의 한적한 곳과 이어져 있었다. 라비린은 통로를 닫자마자 일행을 독촉해 말과 마차를 준비해 둔 곳까지 데려갔다. 야밤에 끌려나와 흥분한 말을 다독이던 사람들이 일행이 오는 걸 보자마자 슥 사라졌다.
“푸하!”
카프러스의 손에서 겨우 벗어난 오드리가 재갈부터 풀고 숨을 몰아쉬었다. 통로를 지나는 동안 어찌나 채근을 당했는지, 이마에 땀에 축축했다. 오드리는 이마의 땀을 닦을 생각도 않고 냅다 라비린의 멱살부터 움켜쥐었다.
“이 망할 자식!”
“워, 화는 나중에 실컷 받아줄 테니 진정해. 몰리 양, 빨리 짐을 넣고…… 벌써 넣었군. 베텔 경, 마차 좌석 아래에 짐을 넣어둘 공간이 더 있어. 거기에 약간의 무기와 식량을 넣어두었으니 확인하게. 그리고…….”
짝! 말을 잇던 라비린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오드리가 어찌나 호되게 때렸는지,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지켜준다 그리 자신을 하더니, 문제 생기자마자 파혼 선택지부터 골라?”
“어차피 정략결혼이잖아.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얻을 게 너무 없더라고.”
“그래,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네가 순 손해만 보는 거래이긴 했어. 그래도 나는 꽤 너를 믿었는데. 며칠을, 겨우 며칠을 못 참아서!”
라비린은 오드리에게 멱살을 붙들린 채 쓴웃음을 지었다. 잔뜩 붉어져서는 눈물이 찰랑찰랑한 눈을 보는 게 상상 이상으로 마음이 아팠다. 분명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던 저울이 다시 재어봐야겠다는 듯 흔들거렸다.
‘안 돼.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을 순 없어.’
꽉 쥐고 있는 게 아닌데도 멱살 잡은 손을 떼어내는 간단한 동작이 왜 이렇게 힘들까.
욱신거리는 입가를 닦아보자 손에 벌겋게 피가 묻어났다. 이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어이없을 정도의 힘이었다. 멱살을 잡힌 이상 또 사타구니를 걷어차이는 것까지도 각오했는데, 뺨 정도에서 끝나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난 성의를 다 했어. 비밀통로까지 개방했잖아.”
“누가 그러래!”
“떼쓰지 마.”
곧게 몸을 편 라비린이 가소롭다는 듯 오드리를 내려다보았다. 햇빛이 닿으면 금빛으로 보이던 갈색 속눈썹은 달빛에 닿아 차가운 은색으로 빛났다.
오드리는 자신보다 훨씬 큰 라비린이 언제나 기꺼이 몸을 굽혀 시선을 맞춰줬음을 새삼 실감했다. 목이 꺾이도록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봐야 하는 라비린은 이제까지 봐왔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오드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내가 떼를 쓴다고?”
“그럼 이게 떼가 아니야?”
차가운 미소와 서늘한 냉기가 가슴을 짓눌렀다. 오드리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눈앞이 어찔했다. 휘청, 몸뚱이가 흔들리는 걸 본 카프러스가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바로 세웠다.
“너를 지켜서 로렐라이를 얻더라도 너 때문에 가문이 두 쪽 난다면 그쪽이 훨씬 손해야. 그 정도 계산은 할 줄 알잖아.”
“후작님이 오시면,”
“아버지의 결론도 다르지 않았을 거야. 아니, 어쩌면 널 숙부에게 넘겨서 분을 풀게 하고 괴물의 짓으로 포장하는 쪽을 선택하실지도 모르지. 본래 내가 못 갖는 보물은 남도 가지면 안 되는 법이잖아?”
“뭐 그런 개 같은 소릴 하고 있어?”
“라디아타가 널 좋아하긴 하지만 그 애도 본질은 타우레드라 결국엔 가문을 위해 입을 다물 거야. 그리고 솔직히 네가 헨젤 백작님에게 사랑받는 딸은 아니잖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만 증명하면 너그럽게…….”
“라비린!”
“넘어가 주시겠지.”
오드리는 치미는 분기에 입을 뻐끔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무수히 많은데 그 말들이 죄다 한꺼번에 몰려와 목구멍을 틀어막고 머리를 하얗게 만들다니 기가 막혔다. 이 순간을 이렇게 보내고 나면 뒤늦게 이불을 발로 차고 베개를 집어던질 게 뻔한데 왜!
“그러니 내가 비장의 비밀통로까지 이용해서 빼돌리는 건 대단한 호의의 발로라는 걸 좀 알아줬음 좋겠어. 당장 떠나고 싶은데 네 유치한 떼쓰기 때문에 발을 구르는 두 사람도 좀 생각해 주고.”
“아가씨,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무슨. 아까부터 계속 성 안쪽을 신경 쓰는 게 뻔히 보이는데.”
카프러스는 자꾸 이죽대는 라비린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상황이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했더라도 좋게 헤어져 친구로 남을 수도 있는 걸, 왜 이렇게 정 한 방울마저 다 떨어지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참, 이걸 깜빡할 뻔했네. 이제 널 붙들고 있을 이유도 사라졌는데 전해줘야지.”
라비린이 품에서 모퉁이가 닳아빠진 편지를 꺼내 오드리에게 내밀었다. 오드리가 받아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릴리였다. 웬만한 일로는 편지 같은 걸 보냈을 리 없는 릴리의 성품을 생각하자 뒷목이 서늘해졌다.
“이걸 왜 이제 줘?”
“그걸 받아 읽으면 바로 돌아가겠다고 할까 봐 안 줬지.”
손이 벌벌 떨렸다. 당장 봉투를 찢고 내용을 확인하려던 오드리는 문득 드는 위화감에 봉투에 찍힌 밀랍 봉인을 다시 확인했다. 밤이긴 해도 달빛이 환해서 그런지 자잘한 부분까지 자세히 보였다.
“뜯었어?”
“아니라고 하면, 믿을래?”
“……이 개만도 못한 자식, 네 시체는 개도 까마귀도 안 뜯어 먹을 거야…….”
“귀족영애가 입에 담기엔 몹시 흉악한 욕설인걸. 파혼하길 잘했어. 그보다 베텔 경,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지? 아무리 주인이라지만 계속 이렇게 떼쓰기를 받아줄 건가?”
마침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성 안쪽에서 고함과 비명이 울렸다. 오드리와 다이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도 카프러스의 귀에는 들렸다. 라비린 역시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기사 작위는 공으로 딴 게 아니었다.
“빨리 가. 시간 없어.”
“벨키스 경,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감사! 꺅! 베텔 경! 지금 이게 뭐 하는 건데요! 당장 내려놔요!”
카프러스는 곧장 오드리를 들쳐 안아 마차에 밀어 넣고는 마부석에 올라타 고삐를 잡았다. 문을 붙들고 발만 동동 구르던 다이앤이 냉큼 뒤따라 타서 오드리가 나가지 못하게 꽉 끌어안고 버텼다.
“아가씨, 일단 도망가는 것부터 생각해요. 네? 목숨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다이앤이 어떻게든 문을 닫으려 애쓰는데, 라비린이 마차 안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오드리, 내 말 잘 들어.”
“뭘! 뭘 들으라고!”
“데멘사는 브란젤에 못 가. 그는 괴물이 되어 죽는다. 무조건. 증언 같은 건 기대하지 마.”
버둥거리던 오드리가 반항을 딱 멈췄다. 대신 초록색 눈동자가 전에 없이 선명하게 빛나니, 라비린은 독 묻은 창에 가슴이 꿰뚫리는 기분으로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진짜 유언장은 헨젤 백작이 갖고 있어.”
말을 끝내자마자 마차의 문을 닫았다. 고삐를 쥐고 가슴을 졸이던 카프러스가 때맞춰 말 궁둥이를 후려쳤고, 마차는 난폭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서 오드리와 다이앤이 짐과 함께 구르는 소리가 났지만 승차감까지 신경 써주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제기랄…….’
라비린은 멀어져 가는 마차 꽁무니를 바라보다 말고 문득 가슴을 움켜쥐었다. 오드리에게서 정을 뗄 작정으로 험하게 굴 때는 그럭저럭 견딜 만하더니, 막상 그녀가 탄 마차가 멀어지니 숨이 턱 막혔다.
‘이제 완전히 끝이겠지.’
최근 들어 부쩍 부드러워졌던 오드리가 떠올랐다. 자신을 보고 활짝 웃던 얼굴과 기꺼이 목에 둘러주던 팔 같은 게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하지만 자신이 헨젤 백작과 뒤에서 손을 잡고 있었던 걸 흘린 이상, 오드리가 다시 제게 눈길 줄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더불어 결혼을 통해 가문을 벗어나길 시도할 일도 없을 테고. 자신의 설익은 청혼을 거절하던 그녀로 돌아가 결혼이 아닌 다른 활로를 찾을 것이다. 평판이 도로 떨어지긴 하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은 아니었다.
라비린에게도 이득이 있었다. 어떤 사정이든 헨젤이 타우레드의 본가에서 죽는 걸 막았고, 가문이 두 쪽 나게 생긴 상황에서 아예 원인을 치웠다. 비록 라디아타의 도움이 있긴 했어도 라비린의 능력을 의심하던 친족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게 됐다. 또한 캄포스의 회유에 흔들린 일부 기사들도 잡아냈다.
잘했다, 가문을 위해서 좋은 선택을 했다. 오늘의 일은 가문을 장악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몇 번이고 되뇌어도 가슴의 통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 커다란 대못을 가슴에 대고 망치질을 하면 이렇게 아플까.
“도련님, 가보셔야 합니다.”
그늘 아래에 몰래 망을 세워두었던 기사가 다가와 라비린을 재촉했다. 멀어지는 마차 꽁무니를 보며 감상에 젖을 시간도 아까운 게 지금 상황이었다. 라비린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 고였던 눈물을 털어내고 돌아섰다.
“벨키스 경이라고 불러라. 숙부는?”
“야닌 경이 이끄는 기사들이 기도소 입구에서 막고 있다고 합니다.”
“나이 먹고 고생하는군. 가자. ……참, 내가 아까 레이디 헨젤에게 한 말은…….”
“전 아무 것도 못 들었습니다.”
눈치 빠른 기사가 냅다 오리발을 내밀었다. 라비린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영주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기사 수련을 하면서 수도 없이 들락거린 성이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졌다.
오드리는 기댈 언덕으로 꼽았지만 라비린은 하등 쓸모없는 인물이라 평했던 타우레드 후작은 오드리와 고작 몇 시간의 차이를 두고 성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괴물을 몇 마리나 잡고 새로운 이상 증상들을 기록하다 보니 생각 이상으로 늦어진 것이다.
클로드는 돌아오자마자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나뒹구는 친족들과 기사 일부를 마주해야 했다. 라비린은 가주가 없는 사이 후계자이자 대리인인 자신의 눈을 피해 칼부림을 하고자 했던 이들을 좋게 달래지 않았고, 제압 과정에서 흘리는 피를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저렇게 묶어서 연무장…… 아니, 화장장에 던져 놓고 하룻밤을 보내게 하겠다?”
“그게 벌입니다. 괴물이 나타나면 그쪽으로 몰이하라는 지시를 내려뒀습니다.”
“그러다 괴물이 안 나오면 어쩌려고? 새벽녘이 다 된 지금까지도 괴물이 안 나왔으면 한 놈도 안 죽고 넘어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럼 저 사람들이 대단히 운이 좋은 게 되겠죠.”
“무르기는. 다 죽여도 좋았을 거다.”
“제가 가주였다면 그랬을 겁니다.”
괴물 나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빨리빨리 왔어야지 뭐 하다가!
“내가 없는 성에선 네가 가주지.”
전권을 맡기고 갔는데 친족들 장악도 못한 놈이 뭐 잘했다고 투정이야?
서로를 향해 눈으로 욕하던 부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둘 다 마냥 떳떳하지는 않은 탓이었다.
“……레이디 헨젤과 마무리는 잘 했느냐?”
“그랬겠습니까?”
“제 여자 하나 못 지키고 파혼을 택해?”
“가문을 택한 거죠.”
클로드는 라비린의 매끈한 낯을 살피다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닮으라는 건 고집스럽게 안 닮아놓고, 제발 닮지 않았으면 하는 건 귀신같이 닮은 장남. 젊은 날의 실수가 아들에게서 고스란히 반복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등신새끼.”
“뭡니까, 갑자기. 아버지가 오드리를 붙들고 있었으면 했던 건 알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이상 오드리와 제가 결혼하면 가문이 반으로 쪼개질…….”
“그런 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럼 가문이 아니라 사랑을 택하기라도 했어야 한단 겁니까? 제가? 타우레드의 후계자가?”
“그래.”
라비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평생 들을 거라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말을 하는 저 사람이 정말 제 아버지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대놓고 클로드를 위아래로 살피다 만년필에 이마를 맞고서야 그만두었다.
“라비린, 가문이 권력을 가져야 할 이유가 뭔지 아느냐?”
“권력이 있어야 가솔들을 지키고 영지민을 먹여 살리죠. 자칫하면 폭풍을 부르겠지만 때로는 해일도 버티게 하는 힘이 됩니다.”
“맞다. 타우레드는 특히 그렇지. 제 몫을 찾아먹지 못하면 목줄이 매여서 온갖 전장에 질질 끌려 다니다 이빨이 빠지자마자 죽게 될 거다. 가문이 권력을 가져야 사람을 지킬 수 있어. 알아듣겠느냐? 사람이다! 권력은 제 사람을 지킬 때 의미가 있어. 그런데 너는 가문을 위해 사람을 내쳤다. 우선순위가 틀렸어.”
라비린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제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가문을 위해서 오드리의 마음을 얻어오라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낯설었다.
“네가 레이디 헨젤에게 몹시 진심이었다는 거 안다. 캄포스 저 멍청이가 앞으로 네 발 닦개가 되어 설설 기어다닌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지키고 싶은 사람이 없는데.”
“누가 들으면 제가 앞으로 평생 총각으로 늙어 죽겠다고 선언이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파혼 한 번 했다고 제 몸값 그리 떨어지지 않습니다. 저와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 많아요.”
“마음 다잡기가 그리 쉬우면 내가 로샨을 브란젤에 데리고 오질 않았지. 라비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레이디 헨젤과 화해할 준비를 해라.”
“화해 시도 같은 건 안 합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후회는 하지 않을 거거든요.”
라비린이 제 아비를 비웃었다. 클로드는 뭐라 더 한 마디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본래 저 나이 때에는 어른의 충고가 다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이었다.
“됐다. 나중에 울며 도와달라고 하지나 마라. 그보다 아직 왕궁마법사 쪽에선 소식이 없느냐?”
“설마 왕궁마법사에 연락하셨습니까?”
“부검 결과 나오자마자 연락했다. 괴물이 나왔는데 이 성의 마법사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아직까지도 안 온 거냐? 이쯤이면 오고도 남을 때인데 설마 오는 길이 막혔나……?”
라비린은 외부에 이 사태를 알리다니 어쩌구저쩌구 거품을 물던 친족들을 떠올렸다. 어차피 영향을 받지도 않았고 그들 태반이 포승줄에 묶여 연무장을 뒹구는 처지이긴 한데, 어쩐지 억울해졌다. 나가기 전에 언질이라도 주고 갈 것이지, 괜한 말을 들었지 않은가.
“저는 아르젠 남작에게 연락했습니다. 설령 길이 막혔더라도 그가 있으면 쉽게 뚫을 수 있을 테니까 곧 올 겁니다. 혹시 압니까? 오드리를 보내자마자 아버지가 오셨듯이 이번엔 마법사들이 도착할지.”
“내가 놀다 온 것도 아닌데 너는 무슨 말을…….”
“제가 지금 아버지더러 늦으셨다고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게 딱 하루만 더 일찍 왔으면 캄포스 숙부가 아예 나대질 못했을 거 아닙니까. 그럼 오드리를 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라비린이 하지도 않은 말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클로드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곧 오겠지.”
“예. 곧 오겠지요. 아버지는 피로하셨을 텐데 이만 주무시죠. 남은 순찰은 제가 돌 테니.”
“아니, 순찰은 내가 하마. 넌 연무장이나 지키고 있어.”
“지금 제가 거기 가면 멀쩡한 생목숨이 죽습니다. 정 자기 싫으시면 보던 서류 마저 봐주시고, 그것도 싫으시면 어머니께 가서 위로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라디아타를 좀 달래주시거나.”
“……자야겠다.”
타우레드 후작은 냉큼 잠을 선택했다. 라비린이 제시한 네 가지 중에 그나마 가장 감정 소모가 덜한 일이었다.
라비린은 서류를 좀 보다가, 로샨을 위로하고,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는 라디아타를 달래 재운 뒤 나바테아를 만나러 갔다. 이성과 양심에 따라 남편의 계획을 라디아타에게 알렸던 나바테아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완전히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초조하게 기도실을 빙글빙글 돌던 그녀는 라비린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라비린! 캄포스는? 그는 무사하니? 괜찮은 거지? 응?”
“숙부님께서 운이 좋으시더군요.”
“다행…… 다행이다…….”
나바테아가 그 자리에 주르르 주저앉았다. 하나뿐인 딸을 잃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남편의 목숨이 운에 달린 상황이 되었으니, 이성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라비린은 그녀를 손수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숙모님은 지금부터 재산 관리를 어떻게 할 건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뭐?”
“숙부가 타우레드에서 맡고 있던 직분 전부가 박탈될 겁니다. 지금껏 모아온 재산으로도 어느 정도 생활은 되시겠지만 정기적인 수입이 끊기는 건 큰 타격이겠죠.”
“내가, 내가 정보를 줬는데도?”
“숙모님께서 원하시면 이혼도 괜찮습니다. 친정으로 가신다면 넉넉하게 돈을 챙겨드리겠습니다.”
“이혼이라니, 말도 안 돼. 내 나이가 몇인데 친정으로 가라는 거야? 라비린, 내 얼굴을 봐서라도…….”
“다른 분들은 식솔과 함께 연무장에 있습니다. 숙모님이 걸치고 계신 따뜻한 숄과 이 작은 기도실이 제가 드리는 특혜입니다.”
나바테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식구가 전부 함께 끌려갔는데, 자신 혼자만 이렇게 특별대우 중이라면 누가 봐도 자신이 배신자였다.
“그러고 보니 인사가 늦었군요. 감사합니다, 숙모님. 덕분에 레이디 헨젤이 타우레드의 본가에서 살해당하는 참사를 막았습니다.”
라비린이 우아하게 몸을 굽혀 인사했다. 나바테아는 그 인사가 힘없는 자신에 대한 조롱인 것만 같아 그만 눈을 감았다.
“말하지 말걸 그랬다. 가만히 있었어야 했어.”
“애초 숙모님이 아니었으면 사로잡으라는 명령 같은 건 내리지 않고 전부 목을 치라 했을 겁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하니…….”
“사실이니까요. 그러니 나중에 누군가 오늘의 일로 숙모님을 원망하거든 제 핑계를 대세요. 라비린이 다 죽이려다 나를 봐서 그만둔 거니 고맙게 여기라고 말이죠. 물론 그것도 아침 해를 무사히 맞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매끄럽게 짓는 미소 너머에서 악의가 타올랐다. 제 입으로 했던 다짐을 깡그리 부숴가며 약혼녀를 떼어낸 라비린은 바짝 약이 오른 독사 같았다.
나바테아는 절망감에 물든 얼굴을 가렸다. 역시 말하지 않았어야 했다. 남편을 말렸어야 했다. 클레멘테를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다. 후회되는 지점이 너무 많아 통곡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계는 지금이 새벽이라 하는데, 몇 시간만 버티면 해가 뜰 거라 하는데, 과연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해가 뜰 날이 오긴 할지 의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