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 괴물이 날뛰는 밤
「마법의 혜택은 공평하지 않다.」
타우레드 영주성 지하에는 정수마법도구를 이용한 정수 시스템과 담수저장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바로 근처에 마르지 않는 렘 강이 있었지만 혹시 영지전에서 고립당할 때를 대비해 설치한 것이었다. 이번 여름에는 정말이지 설치한 보람이 있었지만, 마법도구의 수명이 짧은 지역 특성상 끔찍하게 돈이 많이 들었다.
그 유지비용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바로 마법사 고용비용이었다. 타우레드에 고용된 마법사 두 명은 매일 하루 두 번씩 정수마법도구와 담수저장고를 점검했다. 그들은 그날도 자잘하게 발생한 고장을 고치고 담수저장고로 걸음을 옮겼다.
대량의 물이 보관된 지하는 습하고 어두웠으며, 물소리 때문에 몹시 시끄러웠다. 물이 튀어 미끄러운 길을 걸을 때마다 마법사들은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음침하다고 농담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어째 오늘은 그런 농담을 할 여유도 없다는 듯 낯빛이 푸르죽죽했다.
“후……. 저장고 안을 꼭 들여다봐야 하나?”
“어제도 안 보고 그제도 안 봤잖나. 오늘은 봐야지.”
“젠장……. 꿈자리도 뒤숭숭한 게 기분 나쁜데. 이상하게 가슴이 막 뛰는 것도 같고…….”
“걱정 말게. 빠지면 바로 꺼내주겠네.”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재수 없게 하지.”
투덜투덜, 투덜이 마법사가 저장고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올라 저장고 뚜껑을 열고 마법등으로 수면을 비췄다. 한데, 거울처럼 매끄러워야 할 수면에 뭔가가 둥둥 떠 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부유물이 마법등의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초처럼 수면에서 넘실대는 갈색 머리카락, 넓게 펼쳐진 검은색 치마, 퉁퉁 불은 흰 손가락…….
“으, 으, 으아아아아아!”
“왜? 왜 그래? 진짜 빠진 거야?”
“시, 시체! 시체가 있어!”
“거기 무슨 시체가 있어? 혹시 벌레 시체라도 떠 있는 거 가지고 날 놀리려고…….”
“사람! 사람이야! 웬 여자가 빠져 있다고!”
타우레드 영주성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생활용수는 물론이고 식수로도 쓰이는 물을 보관하는 저장고에 사람 시체라니!
황급히 끌어낸 시체는 영주성의 하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시체를 끌어낸 하인들이 구석에서 토악질을 하는 가운데, 다급히 불려온 하녀장이 신원을 확인했다.
그녀의 이름은 헤세 해터. 라디아타의 보석 관리를 담당하는 하녀로, 사흘 전부터 갑자기 보이지 않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해터 양은 라디아타 아가씨께서 애지중지하는 보석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보석을 가지고 도망친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외부로 나가는 길목만 수색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런 꼴이 되어 있을 줄은…….”
“그 보석이라는 게 혹시 이겁니까?”
하녀장이 헛숨을 삼켰다. 오드리가 라디아타의 성년을 축하하며 준 알룬드의 목걸이가 집사의 손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물에 젖어서 그런지 그 푸른 광채가 전보다 더 깊어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맞습니다. 네, 아가씨의 물건이에요.”
“이리 주게. 내가 전해주지.”
“도련님, 그건 제가…….”
“내가 주는 게 나아.”
어느새 내려왔는지, 피곤한 낯을 한 라비린이 목걸이를 챙겼다. 그는 목걸이는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시체 쪽에 더 관심을 보였다. 헤세 해터는 사흘 전에 실종되어 이제야 담수저장고에 떠 있는 채로 발견됐는데, 언뜻 보기엔 몸에 상처가 없었다.
“시체 상태만 봐서는 제 발로 물에 들어간 자살자 같군.”
“말도 안 됩니다. 물에 빠져 죽으려면 코앞에 렘 강이 있는데 굳이 이 지하까지 내려와서 저장고에 빠져 죽을 이유가 대체 뭐랍니까?”
“이왕 죽을 목숨, 주인에게 타격을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지금 주방은 시체 썩은 물로 요리를 했다는 충격에 난리가 났어.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들어먹질 않아. 하녀장, 해터 양은 자기 일에 불만이 없었나? 일은 만족했고? 혹시 주변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던가 하는 건 없고?”
“……확인해 보겠습니다.”
라비린은 퉁퉁 불어 얼굴도 확인하기 힘든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도대체 어쩌다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녀 신세를 고칠 수도 있을 법한 보석을 손에 쥐었으면 당연히 도망부터 쳤어야지 웬 자살인가.
그러다 보니 혹 일당이 있어 함께 도망치려다 배신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흘렀다. 라비린은 헤세 해터의 시체를 뒤집어 뒤통수와 등을 확인했다. 상처가 있을까 싶어 한 짓이었으나, 긁힌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으니, 그는 치맛자락을 홱 걷어 올렸다.
“시체에 발정하는 미친놈은 아니니까 그렇게 쳐다보지들 마.”
“아니, 그래도 도련님…….”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거나 말거나, 라비린은 마법등까지 들이밀고 헤세의 치마 아래를 살폈다. 과연 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퉁퉁 불은 허벅지 안쪽에 시퍼런 비늘이 몇 개 돋아 있었다.
“하녀장, 해터 양의 집안은 어떤 곳인가? 성이 있으니만큼 나름 가계가 이어지는 곳일 텐데.”
“평범한 집안입니다. 성이 있긴 하지만 이제는 그냥 구색뿐인 곳이죠.”
“그럼 주인 아가씨의 물건을 도둑질해서 도망치려다 자살한 딸은 반갑지 않겠군. 시체를 돌려주지 않을 방법을 찾아봐.”
“네? 도련님, 그건 너무 무도한 짓입니다! 반역이 아닌 이상, 부모는 자식의 시체를 돌려받아 장사지낼 권리가 있어요!”
“부검할 거야.”
“네에? 유가족이 동의해 주지 않을 건데요? 자살했는데 부검까지 하겠다고 하면 난리가 날 겁니다.”
“그러니까 아예 시체를 주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대라고. 부검한 시체를 꿰매봐야 전과 같을 수는 없으니, 그냥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란 말이야.”
“도련님!”
“하라면 해. 의사를 불러와서 부검할 준비를 하고, 마법사들은 부검실 조성에 협조하라고 해. 명령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집사와 하녀장은 말이 퍼지지 않게 고용인들 입부터 막아.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것도 내가 하겠다.”
상식을 벗어나는 명령에 다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라비린은 개의치 않았다. 브란젤의 괴물사태를 몸으로 겪은 입장에서, 같은 일이 타우레드 영지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다 서늘했다.
라비린은 타우레드 후작에게 가기 전에 오드리부터 찾았다. 오드리는 마법사들이 새로 정화해 준 물로 한바탕 목욕을 끝내고 쉬는 중이었다. 아직 단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꼭 봐야 한다고 하도 재촉을 하는 통에 덜 마른 머리를 하나로 동여매고 입기 쉬운 남부식 드레스에 외투를 걸치고 응접실에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사람을 들들 볶아? 다이앤이 거의 울려고 했어.”
“너라면 셰비언 씨를 여기로 부를 수 있겠지?”
앞뒤 없이 튀어나온 본론에 오드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비린은 고용인들 몰래 떼어온 푸른 비늘을 그녀의 앞에 내어놓았다.
“이게 뭐야? 난 생선 비늘 같은 건 잘 몰라.”
“헤세 해터에게서 떼어낸 거야.”
“헤세 해터? 꼭 사람 이름 같은 물고기네.”
“담수저장고 속에서 둥둥 떠 있던 하녀의 이름이야.”
호기심 어린 동작으로 비늘을 만지작대던 오드리의 손이 딱 멎었다. 드높은 시계탑, 새파란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정면으로 마주했던 검은 피의 괴물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풍경이 선명하게 그러졌다.
오드리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비늘을 내려놓았다. 브란젤의 괴물사태는 완전히 마무리되었는데, 갑자기 이런 곳에서 괴물 출몰이라니 기가 막혔다.
“……셰비언을 찾는 이유는?”
“그날 그 시계탑엔 나도 있었어. 왕실에선 범인 일당이 괴물에게 죽었고 왕궁마법사들과 군인들이 힘을 합쳐 원인을 없앴다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분명 셰비언 씨의 개입이 있었을 거야. 그렇지?”
“몰라.”
“네가 모른다니, 그게 말이 돼? 보고 받았을 거 아냐.”
라비린의 계속된 추궁에도 오드리는 솔직한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보고를 받긴 받았으나 그 내용이 밖에 내돌릴 만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보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마법망 안정화 기술이 괴물사태의 원인이 됐다는 걸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오드리조차 보고서를 읽자마자 불에 태워 없애 버린 것을.
오드리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어차피 타우레드 영지에는 전보를 놓지도 않았고 마법망 안정화 관련 실험을 한 적도 없었다. 괴물이 나왔대도 다른 원인일 게 분명했다.
“자세한 보고는 받지 않았어.”
“지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징그러울 정도로 보고서를 독촉하고 수시로 감사를 하는 로렐라이의 상단주가 왕실의 요청으로 외부의 일을 하고 돌아온 소속 마법사의 보고를 받지 않았다고?”
오드리의 침묵은 라비린에게 서늘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정략결혼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몇 번이고 말한 장본인이 이렇게 말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다니.
라비린은 당장 오드리의 어깨를 움켜쥐고 마구 흔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 타우레드 영지에는 셰비언이 필요했고, 작위 수여 이후 미치도록 바쁠 그를 이리로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은 오드리뿐이었다. 셰비언에 대한 거부감 따위, 영지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누를 수 있었다.
“오드리, 넌 만탈락의 주인이지. 그러니 이 작은 타우레드 영지에 괴물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거야. 말해줘, 셰비언 씨가 괴물사태 진정에 한몫한 게 맞지?”
타우레드 영지가 작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헨젤의 소유인 남부 대평원만은 못해도 타우레드 영지의 면적도 만만치 않았다. 렘 강의 발원지인 얼음산부터 렘 강 일대의 평야가 전부 타우레드 후작가의 영지였다.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보여준 건 영주성 부근에 있는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법도구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지역이 많아서 실제 면적과 인구에 비해 거주 가능 지역이 좁았으니, 마을의 인구밀도가 몹시 높은 편이긴 했다. 만약 브란젤과 비슷한 양상으로 괴물사태가 발생하면 인명피해가 커질 게 분명한 환경이었다.
‘인구 감소는 곧 세수 감소로 이어져……. 타우레드가 아무리 황금사자래도 기반이 되는 영지가 황폐화되어서는 버틸 수 없겠지.’
그리고 연약해진 사자는 들개 떼의 먹잇감이 된다. 벌써부터 오드리 헨젤을 오드리 타우레드로 간주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타우레드가 약해지는 걸 방관할 수는 없다. 오드리는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건 모르는 거야. 하지만 네 말대로 셰비언의 능력이라면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 사정을 설명하고, 바로 와달라고 편지를 쓸게. 문제는 시간이야. 편지를 받자마자 말을 타고 전력으로 온다고 해도 이레는 족히 걸릴 거고 늦으면 열흘 이상 걸릴 텐데……. 도대체 여긴 왜 기차를 안 놓은 거야?”
“놓고야 싶었지. 어쩌겠어, 허가가 안 나오는걸. 아무튼 알겠어. 젠장, 열흘이라니 미쳐 버리겠군. 지금 당장 편지 써줄 수 있어? 내가 바로 보낼 테니까.”
라비린이 조급하게 오드리를 재촉했다. 오드리는 라비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셰비언에게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와주기를 청하며 헤세 해터에게서 떼어낸 비늘을 넣고 봉했다. 라비린은 내키지 않아 했지만 오드리가 우겼다.
“비늘이 딱 하나만 달려 있었던 것도 아닐 거 아냐. 이 정도 증거가 아니면 안 움직일 수도 있어.”
“글쎄……? 셰비언 씨는 네가 밥 한 끼 먹게 타우레드 영지에 오라고 해도 오지 않을까 싶은데.”
“시계탑에서 내가 누구의 손을 잡았는지 잊었어? ……괴물 문제가 아니었으면 내가 먼저 그에게 편지를 쓸 일 따위는 없었을 거야.”
오드리가 샐쭉하니 눈을 치켜뜨고 투덜거렸다. 라비린은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입술 대신 아직 발그레한 뺨에 입술을 꾹 누르고 맞기 전에 잽싸게 물러섰다.
“쉬는 걸 방해해서 미안해, 난 이만 가볼 테니 푹 쉬어.”
“말은. 그런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퍽이나 편하게 쉴 수 있겠다…….”
오드리는 다급하게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괴물사태 이후로는 머리카락도 본 적 없는 셰비언을 타우레드 영지에서 볼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눈앞이 깜깜해졌다. 커다란 덩어리가 목과 가슴 언저리에 걸려 내려가지 않고 버티는 것만 같았다.
* * *
타우레드 후작과 면담을 마친 라비린이 우편국에 편지를 부치고 라디아타는 알룬드의 목걸이를 두고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던 그 시각, 브란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괴물이 다시 나타났다.’
어디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소문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번졌다. 안 그래도 신경이 곤두서 있던 치안대는 집요하게 소문의 출처를 캤다. 그리고 그게 어느 노부인에게서 시작됐다는 걸 알아냈다.
“나, 나는 그냥…….”
“부인, 그리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만 말씀해 주시면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
피올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그도 그럴 것이, 난데없이 치안대의 방문을 받은 노부인은 불쌍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죄를 물으러 온 게 아닙니다. 정말 괴물이 또 나타났다면 큰 일로 번지기 전에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래요?”
“그럼요. 부인, 언제까지 서 계실 겁니까? 의자에 편히 앉으시죠.”
노부인은 피올의 정중한 태도에 조금은 안심한 것 같았다. 귀족 출신임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세련되고 우아한 매너는 겁먹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효과를 보였다. 과연 오래지 않아 노부인의 입이 열렸다.
“그게, 그러니까…….”
노부인이 사는 집은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공용주택이었다. 개미집처럼 빽빽하진 않아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살았다. 하지만 괴물사태가 벌어진 이후, 건물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빈민들처럼 모여 살면 괴물이 된다는 헛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한 집이 비더니, 어느새 노부인을 포함해 서너 가구만 사는 음침한 건물이 되고 말았다.
“부인께서는 왜 이사하지 않으셨습니까?”
“남편도 일찍 죽었고 자식새끼는 앞세웠고. 남은 건 나 하나뿐인데 이제와 괴물이 되는 게 무섭겠어요? 아무튼, 내가 그 일을 겪은 건 닷새쯤 전이었어요.”
닷새 전의 늦은 밤, 노부인은 장을 보고 돌아와 음식을 하고 있었다. 낮에 했으면 좋았을걸,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었더니 밤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서둘러 마법등의 뚜껑을 열고 조리를 시작했다. 이레는 족히 먹을 식재료를 사온 탓에 미룰 수가 없었다.
커다란 냄비에 감자와 당근, 고기를 듬뿍 넣은 수프를 끓이고 팬에 채소를 볶고 있을 무렵, 어딘가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배가 고파 우는 거라기엔 심하게 날카로운 데다 소리가 컸다. 어디 다치기라도 했거나, 아니면 본래 성질머리가 사나운 아기인 듯했다.
“에그, 아기 엄마 힘들겠네. 그때는 딱 그 생각만 했지요. 하지만 그 소리가 도무지 끊이질 않으니…….”
이레를 두고 먹을 음식을 모두 만들고, 장기 저장해야 하는 식재료를 따로 챙겨 정리하고, 느지막이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아기 울음소리가 울렸다. 그쯤 되자 이해심 많은 노부인도 화를 참지 못했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집은 공교롭게도 제일 꼭대기에 사는 젊은 부부의 집이었다. 무거운 램프를 들고 삐걱대는 무릎을 두드려 가며 계단을 오르는 건 노부인에게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몇 번이고 그냥 돌아가서 귀를 틀어막고 잘까 싶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아기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서 나중엔 숫제 비명처럼 들렸다.
“뭔가 큰일이 났나 보다 했어요. 그래서 급하게 계단을 올라 냅다 문을 열었지요.”
어찌나 마음이 급했는지,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문이 닫혔을 거란 생각도 못하고 밀고 들어갔더니, 온통 검은 피로 목욕을 하고 귀청을 찢을 듯 울고 있는 아기가 있었다. 왜 맡지 못했을까 이상할 정도로 끔찍한 피비린내가 집 전체에 진동했다.
“그 아기가 괴물이었어요.”
“네?”
“세상에 등에 날개가 달린 아기가 어디에 있답니까?”
아기가 깔고 앉은 검은 피는 아기의 등에서 흐른 것이었다. 검게 젖어 바닥에 나뒹구는 흰 날개가 천사 조각상의 파편 같았다. 울음에 마음이 약해진 엄마가 채 뽑지 못한 남은 날개 한쪽이 퍼덕거리며 사방에 검은 피를 튀겼다.
노부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등뼈가 드러나도록 큰 상처를 입은 채 우는 아기도, 남은 날개를 쥐고 함께 우는 아기의 어머니도, 신발을 축축하게 적시는 검은 피까지도 전부 끔찍한 악몽의 한 장면 같았다.
“상처는 계속 벌어져 있지만은 않았어요. 아기가 우는 동안 서서히 아물었거든요. 하지만 아기 엄마가 남은 날개를 잡아당기면 도로 벌어지며 피가 흘렀죠. 생각해 보면, 평범한 애가 그렇게 오래 울고서도 탈진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한 거긴 했어요.”
“그 뒤엔 어떻게 됐습니까?”
“아기 엄마가 큰 포대기를 가져와서 아기를 둘둘 싸서는 황급히 집을 떠났어요.”
“왜 신고하지 않으셨습니까?”
새하얗게 눈 내린 머리칼이 무색하도록 또랑또랑 말을 잇던 노부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피올과 그 옆에 선 유렌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 잘생긴 대원님은 아직 결혼을 안 하신 것 같고……. 그러니 애도 없으시겠지. 하지만, 이쪽은 어떠신지?”
“제 파트너도 결혼은 하지 않았……. 유렌?”
노부인을 따라 유렌에게 시선을 주었던 피올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치안대 경력만큼 표정 바꾸는 것쯤이야 별것도 아니라던 유렌이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노부인의 주름진 입가에 씁쓰름한 미소가 매달렸다.
“너무 어린 아기였어요. 목을 쳐서 죽이기엔, 너무…… 너무 어린……. 이제 겨우 한 살은 됐을까 싶은, 걸음마를 하기 시작할 무렵의 애였다고요.”
“부인, 그래도 신고를 하셨어야죠. 주변에 말을 하실 거면 충분히 신고도 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애초 자세한 얘기까진 하지 않았어요. 그냥…… 괴물은 전부 검은 피를 가졌는지, 아주 어린 아기도 괴물로 변하기도 하는지, 그런 걸 묻고 다녔을 뿐이에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질문에 본인이 직접 봤다고도 하셨지 않습니까.”
노부인이 눈을 피했다. 피올은 한숨과 함께 노부인을 문 밖에서 기다리던 다른 치안대원에게 넘겼다. 사무실에 데려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셈이었다. 피올은 그때까지도 하얗게 질려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유렌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유렌, 왜 이래? 설마 그 애가 네 애라도 돼? 숨겨놓은 자식이었어?”
“닥쳐. 농담을 해도 꼭 그따위 농담을…….”
유렌이 거의 이를 갈며 피올의 손을 뿌리치곤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사이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빳빳하게 굳은 어깨와 등이 고통을 호소했다.
“조카 녀석이 떠올라서 그랬을 뿐이야. 걸음마를 시작한 조카의 등에 날개가 돋으면, 난 그 엄마란 사람처럼 내 손으로 날개를 뗄 수 있을까, 싶어져서…….”
“얼씨구. 만날 조카 새끼라며 세상에 그런 악마가 없다고 할 땐 언제고? 그렇게 애틋한 조카삼촌 사이인 줄은 몰랐네.”
“악마 새끼라고 하는 거야 그냥 하는 말이지…….”
“난 잘 모르겠는데. 친자식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단 말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사랑에 빠지면 목숨을 주네 마네 하는데, 피 섞인 혈육인 데다 날 때부터 지켜봤는데 친자식 아니라고 유대감 못 느낄 이유가 없지.”
피올이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유렌은 피올이 이름도 성도 버리고 집을 뛰쳐나온 놈이라는 걸 새삼 떠올렸다. 아마 높은 확률로 가족과 틀어졌을 것이다.
“……됐다. 너한테 이런 말을 해 봤자 뭐 하냐. 아무튼, 그 괴물이 정말 한 살 남짓한 아기라면 일이 심각해져. 남은 날개를 뽑아버리고 아픈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인 척하고 돌아다닐 가능성이 있어. 검은 피를 한 방울 흘릴 때마다 소문이 번질 거야.”
“그럼 제보 받기 편하겠네. 대상이 딱 특정되잖아. 신고 들어오는 대로 확인하러 다니면 되겠어. 기왕이면 아기 등까지 확인해서 제보해 주면 좋겠네. 발품 덜 팔게.”
“글쎄……. 사람들이 다 너처럼 매정할까 싶다. 닷새나 지났는데 아직 한 건의 신고도 안 들어온 걸 생각해 봐.”
유렌이 피올을 향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피올은 아예 못 본 척을 했다.
“하여간 아닌 것 같으면서 은근히 매정하다니까, 너. 아무튼 왕궁마법사에게 연락해야겠……. 근데 걔들이 뭐 할 수는 있나?”
“마법사협회나 로렐라이에 연락해 보는 게 어때? 셰비언을 불러보자고. 괴물 퇴치 공로로 작위도 받았는데 설마 외면하진 않겠지.”
“오~ 화제의 아르젠 남작의 이름을 막 부르네? 인맥 자랑이야?”
“인맥 자랑은 무슨.”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을 하긴 했지만, 피올은 셰비언이 과연 올까 의심했다. 그는 요즘 몸이 두 개, 세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로렐라이에서 다른 마법사들도 전보를 설치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틈틈이 마법사협회에 불려나가 옛 마법에 대한 강의를 했다. 워커가 개발한 스크롤에 관련된 업무도 그의 몫이라 왕궁마법사 쪽에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어찌나 바쁜지, 같은 건물에 사는 워커도 셰비언을 못 보는 날이 많다고 했다. 강철새에 매달리느라 종일 연구실에 있느라 못 보는 건가 싶다가도 그의 스케줄을 들으면 미쳤다는 말부터 나왔다.
“뭐, 안 오면 할 수 없고.”
피올은 이제 그럭저럭 멀쩡해진 다리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가장 걱정되는 네이기스가 그웬 저택에 얌전히 있는데 까짓 수색이 조금 늦어진들 뭐가 문제겠느냐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피올의 예상과는 달리, 셰비언은 전갈을 받자마자 모처럼의 휴식도 팽개치고 치안대 사무실로 달려왔다.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괜히 불안하게.”
“급하다면서. 내가 시간 이렇게 딱 맞아 떨어지는 날이 많은 줄 알아? 그 괴물 있었다는 곳부터 좀 가자.”
막 사무실에 도착한 참이었던 피올은 다리가 아파온다며 꾀를 부렸지만, 셰비언이 그런 그의 뒷덜미를 붙들고 마력을 들이붓자 결국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별 희한한 기술을 다 알고 있네.”
“마력을 제한해서 육체를 구속할 수 있으면 그 반대로 활력을 주는 것도 가능한 거야. 간단해.”
“간단은 무슨……. 마력으로 그런 게 된다는 거 처음 들어봐. 혹시 다른 마법사들 가르칠 때도 그렇게 간단하다고 하면서 가르치는 거야?”
“간단하니까 간단하다고 하는 건데 왜. 못 따라오는 건 그 사람들의 역량이 모자란 거지.”
“맙소사. 다른 마법사들에게 애도를 표해야겠군.”
피올은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을 평범한 마법사들에게 성의 없이 혀를 차고는 문제의 집 현관문을 열었다. 쇠비린내 같은 피 냄새가 왈칵 쏟아졌다. 두 사람은 검게 물든 나무 바닥을 밟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노부인은 괴물이 된 아기의 존재를 눈감아줄 정도의 아량은 있었지만 엉망이 된 집 안을 치워줄 정도의 담력은 없었다. 집 안에는 검은 피가 점점이 튄 가구들로 가득했다. 창가의 꽃무늬 커튼에는 검은 피가 엉긴 흰 깃털이 붙어 있었고, 침실 문짝에는 살점이 말라붙어 있었다.
“닷새 전이라고 했지?”
“응. 하지만 노부인이 이상을 눈치챈 게 닷새 전인 거고……. 날개가 언지 돋았는지는 몰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셰비언이 마법망을 구체화시켰다. 황금빛 그물 같고 장인의 레이스 같은 마법망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가 마법망을 건드릴 때마다 방울 소리가 영롱하게 울리고 피리를 닮은 소리가 가락을 연주했다.
피올은 물론이고 현장을 스케치하던 치안대원들 모두 넋을 잃고 마법망을 감상했다.
“아, 이 자리에 화가가 있었어야 했는데……. 내 손은 저런 거 못 그려.”
“연습 좀 더 하지 그랬냐. 이런 걸 우리끼리만 본다니 뭔가 죄짓는 기분이야.”
“뭐래, 이만큼 그리는 것도 피나는 노력 끝내 해낸 거거든? 근데 마법망 같은 걸 보면 뭐 단서가 나오나?”
“이유가 있으니까 하겠지. 히야, 끝내준다. 근데 어디서 요상한 냄새 안 나? 꼭…… 온천 근처에 갔을 때 나는 냄새 비슷한 게 나는데.”
“야, 난 온천 같은 데는 가본 적 없는 촌놈이라 그게 무슨 냄샌지는 몰라. 근데 이상한 냄새가 나긴 나네. 염색공방 근처에서 나는 냄새야.”
치안대원들의 대화는 셰비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마법망이 이렇게까지 안정되어 있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누군가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이럴 수가 없었다. 그는 미약하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셰비언은 아기 방에 놓인 작은 아기 침대 앞에서 멈춰 섰다. 마법망 일부가 마력구슬처럼 둥그렇게 뭉쳐져 침대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툭, 건드리자 나뭇잎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와 짙은 유황 냄새가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뭉쳐진 마법망은 예전에 다나가 만들었던 마력구슬과 매우 흡사했다. 그러나 마법망을 안정시키는 건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고, 매우 좁은 범위 내에 있는 한두 명을 확실히 괴물로 바꾸는 게 진짜 목적이라는 게 달랐다. 만약 이런 게 브란젤 전역에 퍼져 있다면 수확제 때의 혼란이 재현될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샤를레아.’
셰비언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욕설을 속으로 쏟아부었다. 화산을 집으로 삼은 화룡 샤를레아의 마력은 짙은 유황 냄새가 특징이었다. 마법을 빼앗긴 이후엔 마력 갈무리가 잘 안 되어 주변에 냄새를 줄줄 흘리고 다닐 때가 잦았다.
하지만 마법을 빼앗겼대도 용은 용. 마법망을 다루는 것쯤이야 숨 쉬는 것처럼 쉬웠을 테다. 변이를 일으키는 마력구슬을 직접 손에 쥐고 만져 본 적도 있으니 응용이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고. 로렐라이에 갑자기 사표를 내고 행방을 감출 때만 해도 다나가 죽고 많이 상심해서 그런 거려니 했는데, 아무래도 상심한 정도가 아니라 미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셰비언, 그게 괴물을 만든 원인이야?”
“어. 마법망이 꼬이면서 주변에 영향을 미친 거야. 어린 아기라 이 근처를 벗어날 일이 별로 없어서 부모보다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야.”
“그래? 저번에 회수한 그 수정구랑은 다른 건가 보지? 빌어먹을 놈들, 지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왜 이렇게 크게 벌여놓은 거야?”
“아마…….”
범인은 샤를레아다, 곧이곧대로 말하려던 셰비언은 덜컥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야 그만두고 나갔다지만 로렐라이의 용병이었던 샤를레아가 범인이라고 하면 오드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야. 용병나부랭이가 이렇게 정교한 작업을 했다고 하면 나더러 미쳤다고 하겠지. 친척이라고 보증을 섰던 건 나니까, 도리어 내가 배후로 의심받을지도 몰라……. 아가씨에게도 불똥이 튈 거고.’
남작 작위를 받고 원치 않게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셰비언은 이제 대충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됐다. 마법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신의 이름이 입에 배었으면서도, 인간들은 신비를 믿지 않고 전설을 농담 취급했다. 용이니 마법의 주인이니 하는 건 어린애의 잠자리에서나 읽어주는 동화에 불과한 것이다.
셰비언은 오드리가 자신을 용이라 믿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오드리는 매번 그와 대화할 때마다 ‘용이라고 치고’라는 말을 꼬박꼬박 붙이곤 했으니까. 그래도 괴물사태까지 겪었는데 이제는 용이라는 걸 믿지 않느냐,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데 그녀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셰비언? 왜 말을 하다 말아?”
“생각 좀 하느라고. 이건 아마…… 수정구를 만들기 전에 시험 삼아 만들어본 걸 거야. 범위가 작아.”
“아니, 멀쩡한 가정집에 어떻게 들어와서 이런 짓을 하고 갔다는 거야? 설마 애 아빠가 그 미친 마법사 일당 중 하나였던 건가?”
“거기까진 나도 모르지.”
“제기랄……. 하나가 아니겠지?”
“하나일 리가 없지. 아마 도시 곳곳에 있을 거야. 늦게 움트는 싹처럼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 자리에 있던 치안대원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꿈결처럼 아름다운 광경에 경탄하던 눈이 순식간에 어물전의 생선처럼 썩어들어 갔다.
“씨발……. 괴물사태 끝나고 이제야 좀 살 만해졌나 싶은데, 한 달도 더 지나서 이렇게 터질 줄이야…….”
“한 세 군데 정도만 더 찾아내면 그걸 바탕으로 다른 곳을 찾아낼 수 있어.”
“이런 곳이 적어도 세 군데 이상 있을 거란 얘기네. 근데 이거 마법망을 가시화시키지 않으면 못 찾아내는 거잖아. 나 같은 인간들은 바로 옆을 스쳐 가도 모를 거고.”
셰비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피올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수도의 치안대는 팽팽 놀면서도 월급은 월급대로 받는 직장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 놈을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아무튼 알았어. 이상한 제보가 들어오는 대로 연락할 테니까, 너도 다른 일정 잡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
치안대에 비상이 걸렸다. 이전에도 이번에도 사람이 모여 사는 건물에서 시작된 만큼 수색의 방향도 그쪽으로 잡혔다. 마법망을 확인하기 위해 차출된 왕궁마법사들이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까지도 일일이 확인했다.
뭐 하는 짓이냐는 주민들의 원성에도 아랑곳 않고 수색한 결과는 꽤 괜찮았다. 서쪽 성벽 근처의 빈 집에서 하나를 찾아냈고, 다페이 거리의 전당포에서도 하나를 찾아냈다. 급히 꾸려진 수색대는 하나만 더 찾아내면 셰비언이 어떻게든 다음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조기에 일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가득 찼다.
호가르 거리의 뒷골목에서 검은 피를 흘리는 남자가 걸어 나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물어뜯고 있다는 제보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말도 안 돼, 거긴 인구밀집지역이라 제일 먼저 훑었는데!”
“유렌, 진정해. 도박장이 몰려 있어서 뒷골목이 거미줄 같잖아. 놓쳤나 보지.”
“진정은 무슨 진정! 빌어먹을 왕궁마법사들. 보나마나 힘들다고 대충 살폈겠지!”
“욕은 적당히 하고 셰비언에게 연락부터 해.”
허겁지겁 달려간 호가르 거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도박장에 딸린 직원들은 제일 빨리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고, 술과 약에 취해 흐느적대느라 발이 늦은 도박꾼들이 느지막이 도망치고 있었다. 뛰는 건지 걷는 건지 모를 속도였다.
거리 곳곳에는 괴물에게 공격당한 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물어뜯겼다는 말 그대로의 상처였다. 목, 팔, 다리……. 이빨에 찍힌 자국이 선명했다. 살점이 한 뭉텅이나 떨어져 나간 자도 있었다. 태반이 죽었고 살아 있는 자들도 숨이 아주 가늘었다. 상처의 크기에 비해 아주 과한 결과였다.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흘린 걸로 보이는 검은 피가 점점이 바닥에 떨어져 있긴 했지만 도망치는 사람들이 죄다 밟아버려서 그걸로 추적하기는 글렀다.
“이거, 아무래도 늦은 거 같지……?”
“씨발.”
유렌은 욕을 주워섬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쪽 하늘이 보라색과 자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이 노을을 삼키고 황홀하게 빛났다. 아무리 마법등의 뚜껑을 열어두어도 밤과 낮이 같을 수는 없고, 밤은 본래 짐승의 시간이었다.
“그 괴물, 밤눈도 밝을까?”
“어둡기를 바라야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유렌은 별로 기대가 없었다. 인간보다 밤눈이 어두운 짐승은 손에 꼽히는 게 보통이고, 그 괴물의 밤눈이 인간과 비슷하다면 그게 더 충격적일 게 분명했다. 뒤이어 도착한 왕궁마법사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안색이 아주 새파랬다.
콰르릉! 쾅!
하늘을 가르고 땅을 엎을 듯 큰 천둥소리가 울렸다. 호가르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
흰 구름이 절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노란 빛이 쉴 새 없이 내리꽂히니, 마치 번개로 어둠을 가르고 하늘과 땅을 끄집어냈다던 창세신화가 재현되는 것만 같았다.
“벤이시여…….”
누군가가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만한 광경이었다.
* * *
라디아타는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였다. 몸이 축축 처지는 게 느껴져 감기인가 싶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이라도 감고 있으면 나을까 싶었지만 영 헛수고였다. 시각이 차단되니 오히려 다른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나며 정신을 깨웠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밤에 지저귀는 새 소리, 여우가 캥캥대는 소리…….
그녀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마법등의 뚜껑을 열고 방을 밝혔다. 마법등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알룬드의 목걸이가 새파란 빛을 사방에 뿌렸다. 청혼 선물로나 쓸 법한 큰 보석이라 오드리에게 돌려주려 했건만, 시체와 함께 담수저장고에 들어가 있던 물건이 되고 나니 돌려줄 수가 없었다.
“이걸 어쩐다…….”
돌려줄 수도 없고, 목에 걸고 다니기에도 찝찝하고. 그렇다고 그냥 상자에 보관만 하기엔 너무 아까운 물건이었다.
“중요한 건 블루 다이아니까 그것만 빼서 새로 세공할까? 그래도 선물 받은 물건인데. 으음. 오드리라면 허락해 줄 것 같기도 하고……. 반으로 쪼개서 쌍으로 펜던트를 만들어도 충분히 좋을 것 같고.”
손에 목걸이를 쥐고 블루 다이아의 크기를 가늠하던 라디아타는 미묘하게 무게가 달라진 것만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려주기 전에 양껏 걸어보려는 욕심에 한참 걸고 다녔기에 그 묵직함에는 이미 익숙했는데, 어째 전보다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귀족 영애의 방에 저울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 라디아타는 아예 목에 목걸이를 걸고 무게를 가늠했다. 과연 무게가 달랐다. 손에 들었을 때는 미묘한 차이인 것 같더니, 목에 걸어보니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적어도 두 배는 무거워졌다.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살이 찔 수도 없는 보석의 무게가 변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착각일 거라고, 몸이 피곤해서 헷갈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서야 부정할 수도 없었다.
황급히 목걸이를 풀어 내려놓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어 아쉽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그 푸른 광채 자체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저 목걸이를 손에 쥐고 죽은 헤세의 혼령이 붙어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예부터 죽은 사람은 푸른빛을 띠게 그리지 않던가.
저걸 어디 서랍에라도 넣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라디아타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만큼 놀랐지만, 다행히 귀신이 아니라 하녀였다.
“아가씨, 헤세 해터의 부검이 끝났습니다.”
“그래? 잠시만 기다려.”
라디아타는 서둘러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하녀를 앞세워 복도를 걸었다. 헤세의 시신을 부모에게 돌려주지 않고 부검을 할 거란 얘기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에 강조를 하기에 그럼 결과라도 함께 듣겠다고 우겼다. 곁에 두고 오래도록 보아온 하녀의 장례식에 꽃을 보낼 수조차 없게 됐는데 그거라도 해야겠다고.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며칠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야밤에 부검이 끝났다는 전갈이 오다니 당황스러웠다. 날이 밝기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부검을 해야 했던 이유가 대체 뭔지 짐작이 안 갔다. 어쩐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헤세 해터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의사는 몹시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다. 타우레드 후작 일가와 라비린의 약혼녀인 오드리까지 끼어 앉은 청중 앞에서 퍽 긴장한 것 같은데, 긴장보다 피곤함이 더 두드러졌다. 그는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겉은 인간이지만 속은 인간보다 물고기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부레가 있었으니까요.”
“부레? 활을 만들 때 접착제의 재료로 쓰는 그 부레 말인가? 사람의 몸에 부레가 있었다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예, 후작님.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해터 양의 몸 내부는 사람보다 물고기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인은 익사지만요.”
“물고기라며? 물고기가 익사를 하다니 말이 돼?”
“부레 안에 공기 대신 물이 가득 차 있었으니 익사지요. 사람도 폐에 물이 차면 익사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는 표현을 못하겠습니다.”
의사가 수염이 까칠하게 돋아난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질문을 막으려는 것처럼 서둘러 검사지를 넘겼다.
“폐 대신 부레가 있었고, 허벅지 안쪽에 푸른 비늘이 돋아 있었습니다. 속뿐만 아니라 겉모습까지도 변해가던 중이었던 듯합니다. 해터 양은 전설에 등장하는 인어의 후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담은 그만하게.”
“죄송합니다. 아무튼 사인은 익사가 확실한데, 이걸 자살로 볼지 말지는 너무 애매해졌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찾아 들어간 걸 자살시도라고 하진 않으니까요.”
의사의 말이 어찌나 충격적인지, 다들 말을 잊었다. 특히 헤세와 오랜 시간을 붙어 있었던 라디아타의 충격은 대단했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에 희미한 핏기마저 사라져 얼굴이 숫제 백지장 같았다.
“해터 양이 괴물이었다는 건가?”
“브란젤에 출몰했던 괴물은 제가 해부해 본 바가 없어서 해터 양도 그와 같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생물의 특징이 인간의 몸에 드러난 상태를 두고 괴물이라고 한다면……. 네, 해터 양은 괴물이 맞습니다.”
라디아타가 가슴을 움켜쥐고 헐떡거렸다. 그녀는 의사의 말을 더 듣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오드리는 방문 너머로 사라지는 옷자락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푸른 비늘을 보고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게 있어서 라디아타처럼 놀라지는 않았지만, 의사의 입으로 확언을 듣고 나니 가슴에 돌이 얹힌 듯 갑갑해졌다.
‘여기엔 전보를 깔지도 않았고, 따로 마법망 안정화 구슬을 가져오지도 않았어. 리가 항구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셰비언의 비늘은 내가 씹어 삼켰는데, 대체 왜 괴물이 된 거지?’
셰비언이 용의 마력은 주변의 다른 마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뒤흔들고, 어지럽히며, 잘 잡혀 있는 균형을 흐트러지게 만든다고. 이제 오드리 자신의 마력은 인간보다 용에 더 가깝다고 하니, 그게 문제일지도 몰랐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오드리는 자신이 변이의 원인일 가능성을 점쳐 보다 고개를 저었다. 정말 자신이 원인이면 어쩌다 한 번 마주치는 헤세보다는 하루 종일 붙어 있는 다이앤이 훨씬 먼저 변했어야 했다.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오드리는 헤세의 이름도 몰랐다.
그래도 불안했다. 확신할 수 없으니만큼 더 그랬다. 만약 셰비언이 근처에 있으면 그의 공간에라도 침범해서 물어보겠는데, 지금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거리가 너무 멀었다.
오드리는 침실을 정돈하는 다이앤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부검 결과를 듣고 오는 동안 혼자 울기라도 했는지 눈가가 살짝 발긋한 거 말고는 평소랑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다이앤, 어디 아프거나 한 곳은 없지? 이상한 곳도 없고?”
“그런 건 왜 물으세요? 혹시 헤세가 아팠대요? 병이었대요?”
“아냐……. 그냥 물어본 거야. 그런데 헤세라니, 해터 양과 친했나 봐?”
“어딜 가든 사람들과 빨리 친해지는 게 제 장점이잖아요.”
다이앤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붙임성을 자랑했다. 그 말이 과장이 아닌 게, 그녀는 정말로 사람들과 잘 친해졌다. 약초를 잘 다루고 재잘재잘 말도 잘하고 듣기도 잘하니,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만탈락의 저택에서도 독을 만드는 걸 자랑스레 드러내지만 않았더라면 따돌림까진 당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헤세는 아팠던 게 분명해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니?”
“상태가 영 아니었거든요. 자꾸만 숨을 몰아쉬고 쉽게 지치고……. 본인은 아픈 곳이 아무 데도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게 멀쩡한 거면 세상에 약 먹고 의사 찾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걸요. 의사에게는 왜 안 가냐고 했더니, 혹시 큰 병이라 휴가를 받거나 잘리면 안 된다고 진료 안 받는 거랬어요.”
“……그랬구나.”
“정말이지, 보석 얘길 마음껏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였는데……. 헤세도 저처럼 보석을 좋아했거든요. 통하는 게 많아서 얘기하는 게 즐거웠어요.”
다이앤은 주책없이 또 고인 눈물을 훔쳤다. 주변 사람이 죽는 걸 처음 겪은 것도 아닌데 헤세를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났다. 이상을 느꼈을 때 헤세가 뭐라고 하든 간에 억지로라도 진료를 받게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계속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해터 양이 라디아타의 보석 담당이었지. 알룬드의 목걸이도 해터 양이 관리했었니?”
“네? 네……. 그 알룬드의 목걸이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그렇게 크고 화려한 블루 다이아는 처음 본다면서, 알룬드의 목걸이라는 별명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 용의 목걸이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냐면서요. 그래도 그걸 훔칠 애는 아니었는데…….”
“용의 목걸이. 알룬드의 목걸이…….”
무수히 많은 용의 전설 가운데에서 보석과 관련된 전설은 유독 많은 편이었다. 에리뇰의 관, 테이아르의 방패, 사트린의 반지, 알룬드의 목걸이 등등. 사람들은 보기 힘든 귀한 보석이 나오면 그 전설 속 용의 이름을 따서 보석에 별명을 붙였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에는 물을 다스리는 용의 이름이 아주 잘 어울렸다. 그 블루 다이아가 굳이 목걸이로 세공된 데에는 전설의 영향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셰비언도 그걸 알룬드의 목걸이라고 불렀어……. 옐로 다이아 세트는 그냥 다이아라고 했는데…….”
오드리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기이한 예감이 그녀를 찾아왔다. 셰비언은 보석에 마법을 걸 줄 아는 용이니, 그냥 보석 목걸이였던 알룬드의 목걸이는 정말로 용의 목걸이가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확인해 봐야겠다고 말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잠옷을 벗어 던졌다.
“다이앤, 나 옷 좀 갈아입혀줘. 라디아타에게 가야겠어.”
“네에? 이 시간에요?”
“라디아타도 깨어 있을 거야.”
자정을 약간 넘긴 새벽이었다. 오드리는 다이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을 나섰다. 다행히 마법등의 뚜껑이 열려 있어 복도가 어둡진 않았으나, 밤에 보는 복도는 낮과는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어딘지 우울하고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적셨다.
게다가 텅 빈 손님방이 줄줄이 늘어선 복도 저편에서부터 이상한 소음이 울렸다. 굽이굽이 꺾인 복도를 타고 들리는 소리라 무슨 소리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큰 소란이 난 모양이었다.
“아가씨, 방에 계시는 게 좋겠어요.”
다이앤이 오드리를 말렸지만, 오드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뗐다. 손님방이 밀집된 영주성 서편에서 타우레드 일족이 기거하는 북편까지 가려면 꽤 많은 복도를 지나야 했다. 부지런히 걸으면 이마에 땀이 맺힐 때쯤엔 라디아타에게 갈 수 있을 듯했다.
몇 개의 모퉁이를 지나 얇은 카펫조차 깔려 있지 않은 복도에 진입했다. 서편과 북편 건물을 연결하는 구름다리 형식의 통로였다. 거의 절반을 온 셈이었다. 다이앤이 다시 한번 오드리를 만류했다.
“아가씨…….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그냥 돌아가서 주무시고, 라디아타 아가씨는 날이 밝고서 만나보시면 안 될까요? 네?”
“그렇게 붙어서 조잘거릴 거면 얼른 들어가 자렴.”
다이앤은 울상을 짓고도 오드리의 뒤에 찰싹 붙어 걸었다. 서편 건물의 복도와는 달리 이 구름다리 복도는 오싹하리만치 조용했다. 덕분에 돌바닥을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타박타박 울렸다.
- 끼이…….
구름다리 복도 모퉁이를 두 개쯤 돌았을 무렵, 발소리 사이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다친 고양이가 흘리는 신음소리처럼 안타까운 소리였다. 오드리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다이앤도 덜컥 멈춰서니, 복도 전체가 조용하고 적막했다.
“아, 아가씨…….”
“조용히 해.”
오드리는 아예 다이앤의 입을 막았다. 타우레드 후작가가 거리를 떠도는 고양이를 후하게 대접한다는 거야 유명한 얘기였지만, 그렇다고 키우는 건 아니었다. 이런 시간에 건물 안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숨소리마저 아끼며 귀를 기울였지만, 신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이번에는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렸다. 끼아아아악! 곧이어 무거운 군화 소리, 거친 숨소리가 연이어 들렸고, 쇠 냄새가 났다. 아주, 아주 짙은 쇠 냄새. 달마다 월경을 겪는 여자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냄새였다. 피 냄새.
오드리와 다이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얼굴을 마주보고 같은 소리를 듣고 같은 냄새를 맡았는지 확인했다. 착각이 아니라는 걸 서로의 표정을 통해 확인하자마자 오드리는 바로 몸을 돌렸다.
여긴 타우레드의 본가이고, 영주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타우레드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이 피 냄새의 주인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산목숨을 남들 몰래 끊어내는 자 앞에 힘만 세지 기교도 없고 체술은 낭심 차는 것만 아는 오드리가 나서봐야 큰일만 생길 게 분명했다.
오드리가 최대한 빨리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다이앤이 오드리의 옷자락을 쥐고 매달렸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와들와들 몸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목소리도 개미만큼 작아 아주 기어들어갔다.
“아, 아가씨……. 저, 시, 신발이라도 벗을까요? 전 아가씨처럼 조용히 모, 못 걸어요…….”
“다이앤, 너무 긴장하지 말렴. 어차피 여기까지 오는 소리를 다 들었을 거야. 우린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지면 돼.”
어차피 현장을 본 것도 아니고, 특별히 큰 소리를 낸 것도 아니다.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타우레드의 본가에서 헨젤 백작영애가 다치거나 죽는 건 심각한 일이 될 테니,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생각이라는 게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곱게 보내줄 것이다.
그건 오드리의 착각이었다.
그 누군지 모를 상대에겐 생각할 머리가 없었던 것이다. 오드리와 다이앤이 최대한 침착하게 걷기 시작하자마자 잠깐 조용했던 군화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창문이 작고 돌로 만들어진 복도는 마치 동굴처럼 군화 소리를 몇 배로 키워 울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 아가씨…….”
다이앤이 또 오드리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옷 잡지 말란 소리를 들은 게 조금 전인데, 공포에 질리니 그런 건 생각도 안 나는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다이앤에게서 옷을 빼내고 대신 손을 꽉 쥐었다. 사실 침착한 척은 해도 오드리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라, 따뜻한 체온이 손에 잡히자 조금 안심이 됐다.
오드리는 달달 떠는 다이앤을 감싸 안고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데 발소리의 주인은 아직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마법등 덕분에 복도는 대낮의 거리처럼 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복도가 어두운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마법등의 불빛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괴물에 쫓겨 들어간 텅 비고 어두운 가게 안에서 하델과 함께 떨고 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딱 그때와 비슷한 긴장감이었다. 입이 말랐다.
오드리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길쭉하게 늘어난 그림자가 모퉁이 너머에서 흔들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그림자라는 게 몹시 해괴하게 생겼다. 동그란 머리통에 뭔가가 삐죽삐죽 솟아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축제용 분장 머리띠라도 쓴 것 같았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괴물…….”
괴물 한 마리가 나왔으면, 두 마리도 세 마리도 나올 수 있다. 오늘 발견됐다 뿐이지, 헤세가 사라진 건 자그마치 사흘 전이었다.
“네? 괴물이요?”
“다이앤, 뛰자.”
“아가씨! 악!”
손도 잡고 있겠다, 오드리는 다이앤을 끌고 달렸다. 어째 수확제 이후로는 미친 듯이 뛰는 일만 자꾸 늘어나는 것만 같다. 벽에 걸린 마법등이 뒤로 쑥쑥 밀려나는 동안 급박한 구두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군홧발 소리가 따라오는지 안 따라오는지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헉, 아, 아가, 아가씨! 저 죽어요! 죽…… 허억!”
다이앤이 비명을 지르고서야 오드리가 멈춰 섰다. 오드리는 근처의 벽에 기대어 서서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어찌나 격하게 달렸는지, 목이 아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머리가 멍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속도에 맞추느라 무리한 다이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의 죽을 지경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우…… 우웨에에엑!”
하도 뛰어서 토기가 올라온 모양인데, 헤세의 시체를 담수저장고에서 발견했다는 소식 이후로 먹은 게 없어서 나온 거라곤 노란 위액뿐이었다. 한참을 웩웩대던 다이앤이 텅 빈 눈으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흐어어어……. 아가씨, 다음에 괴물이 또 나오거든 저 그냥 버리고 가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진짜예요. 이렇게 뛰다가 죽느니 그냥 편하게 죽을래요.”
“넌 괴물을 진짜 본 적이 없어서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거야. 그것들을 정말로 보게 되면 편하게 죽어야지 같은 생각 안 들걸.”
다이앤이 조용해졌다. 오드리는 그녀를 꾸역꾸역 일으켜 세우고 다시 손을 단단히 잡았다.
“이 새벽에, 이렇게 요란하게 달렸는데 아무도 안 와. 이상하지 않니? 아무리 시간이 늦었어도 누군가는 깨어 있을 텐데 말이야.”
“어……. 그야 서편은 죄다 손님방이고, 비어 있잖아요…….”
“베텔 경에게 가자. 그때까지만 참아.”
카프러스가 머무는 방은 영주성에서도 꽤 외곽에 있었고, 다이앤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오드리는 다이앤이 표정으로 욕하는 걸 봤지만 나무라는 건 다음으로 미뤘다. 지금은 도망치는 게 더 급했으니까. 그때, 오드리가 바라마지 않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오드리 아가씨! 오드리 아가……!”
“베텔 경!”
“아가씨!”
복도를 헤매며 오드리를 찾던 카프러스가 오드리와 다이앤을 보자마자 단박에 달려왔다. 그는 셔츠에 조끼를 대충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는데, 그러면서도 한쪽 손엔 검을 쥐고 있었고 정강이까지 감싸는 가죽부츠가 온통 시커멨다.
카프러스에게서는 짙은 피냄새가 났다. 그가 괴물을 잡으면서 왔다는 걸 바로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처소에 안 계셔서 찾고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수확제 때와 같습니다.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어디로?”
“영주성 안쪽에 있는 기도소에 피난처가 마련됐다고 들었습니다. 안으로 갈수록 괴물이 많으니 절 놓치지 말고 따라오셔야 합니다.”
타우레드 본가는 세월이 흐르면서 증축을 거듭한 건물이었다. 영지전에서의 농성을 대비한 구조가 중앙부에 집중돼 있었다. 그 요새 같은 폐쇄적인 구조가 불편해 외곽에서 머물렀던 사람들이 일제히 중앙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을 따라 괴물도 함께 몰렸다.
카프러스는 최선을 다해 길을 열었다. 수확제에서 오드리를 피올에게 맡기고 뒤돌아서야 했을 때의 절망감을 다시 곱씹고 싶진 않았다. 그는 괴물을 잡는 틈틈이 뒤를 돌아보며 오드리와 다이앤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두 사람 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데다 아예 입을 틀어막고 있긴 해도 어찌어찌 뒤처지지 않고 오고 있었다.
“아가씨,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조심해서…….”
“베텔 경! 앞에!”
“괜찮습니다.”
카프러스의 정강이를 물어뜯으려던 괴물의 목이 뎅겅 떨어졌다. 다이앤은 사람이든 괴물이든 산 것의 목이 저리 쉽게 떨어지는 것이던가 의문을 가졌지만, 이미 그가 떨어뜨린 목이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그중 하나의 얼굴이 다이앤의 눈에 콱 박혔다. 눈이 세 개인 데다 입이 흉하게 찢어져 있긴 해도 낯이 익었다.
“아가씨……. 저 괴물, 제가 아는 사람 같아요. 분명 주방에서 일하는…….”
“다이앤, 자세히 보지 마.”
“몰리 양, 괴물이 본래 사람이었다고 해서 동정하지 말도록. 괴물이 공격적이니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 있다.”
카프러스의 말대로, 지금 타우레드 영주성의 복도를 돌아다니는 괴물들은 공격을 받아야 반격하던 수확제의 괴물들과는 천지차이로 공격성이 높았다. 괴물이 아닌 사람의 시체가 복도 곳곳에 보였고,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뒹굴며 싸우느라 반항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카프러스는 오드리를 찾으러 오기 전에 확인했던 것보다 괴물이 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타우레드의 성실하고 실력 있는 기사들이 주인을 위해 괴물 사냥을 했을 텐데 왜 이리 숫자가 많은가.
그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타우레드 기사 복장을 한 괴물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괴물은 전설 속의 늑대인간처럼 피부에 털이 부숭부숭했고, 멋대로 자란 이가 입술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바지를 뚫고 나온 긴 꼬리가 휙휙 무섭게 흔들렸다.
“괴물이 되어서도 검을 쓰다니…….”
“따로 이동하지는 않지만 주변에 다가오는 건 괴물이든 사람이든 다 잡아 죽이는 모양이네요. 베텔 경, 어쩔 건가요?”
“지나가야 하니 죽여야겠습니다. 아가씨는 저기 벽에 등 기대고 물러서 계시지요.”
복도가 좁았다. 오드리는 최대한 방해가 안 되도록 벽에 기대어 서서 눈을 감았다. 카프러스가 괴물이 된 기사와 맞부딪치는 걸 보는 게 몹시 힘들었다.
‘얌전히 방에 있을걸. 그랬다면 이런 걸 마주칠 일도 없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였다. 눈을 감아 예민해진 귀에 귓전을 긁는 쇳소리와 거친 숨소리, 억눌린 신음소리와 돌바닥을 박차는 발소리들이 들렸다. 발소리들. 여러 명의 군홧발 소리.
“베텔 경!”
라비린의 목소리였다. 오드리는 번쩍 눈을 떴다. 기사들을 이끌고 온 라비린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사실은 마법등의 불빛이 그의 머리 쪽에 있어서 그런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라비린과 함께 온 기사들이 카프러스의 싸움에 손을 보탰다. 서로 어울려 훈련한 적도 없는데 손발이 기가 막히게 잘 맞으니, 괴물이 된 기사는 금세 무력화되어 목이 잘렸다. 다른 시체엔 눈길도 주지 않던 기사 한 명이 그 머리를 따로 챙겨 자루에 던져 넣었다. 그를 감독하던 라비린의 관심이 오드리에게로 넘어왔다.
“오드리, 괜찮아? 많이 놀랐지?”
“괜찮아. 보다시피 베텔 경이 지켜주셨고……. 이미 한 번 겪은 일인데 뭐.”
“이럴 땐 그냥 힘들고 무섭다고 해도 돼.”
라비린이 씩 웃으며 오드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문의 기사를 직접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굉장한 정신력이었다. 영주성 내를 돌아다니는 괴물도, 괴물에 물려 죽은 사람들도 전부 라비린이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너야말로 괜찮아?”
“괜찮아. 공으로 기사 칭호 딴 거 아니야. 동북부 전장에서 구른 시간이 있는데 아무렴.”
“그래도…….”
“네가 걱정해 주니까 기분 좋긴 한데, 그 정도로 무너질 놈은 아니니까 거기까지만 해.”
라비린이 제 가슴을 두드렸다. 검은 핏물이 튄 가슴보호구가 쩔그렁 소리를 냈다. 급박하게 뛰쳐나왔을 텐데도 그는 제대로 방어구를 갖춘 늠름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나마 좀 안심이 되는 기분에 어설픈 미소를 그렸다.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줘.”
“미안. 아직은 네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어. 기사를 한 명 붙여줄 테니 일단 너는 그를 따라서 몸을 피해.”
“손발 맞는 기사를 빼면 어떡해. 베텔 경과 함께 갈게. 경이 나와 다이앤을 아주 잘 지켜줄 거야.”
“안 돼. 저렇게 허술한 복장으로 괴물이 와글와글한 통로를 뚫게 둘 순 없어. 몸이 마음을 못 따라갈 때가 얼마나 많은데? 내 약혼녀의 기사면 그 역시 내가 보호할 대상이야.”
“제가 왜 보호의 대상입니까?”
카프러스가 항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라비린보다 빨리 오드리를 찾아내어 그녀를 여기까지 무사히 데려온 장본인이었다. 괴물이 되고도 검을 썼던 이상한 놈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벌써 기도실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게 분명했다.
“누가 들으면 제가 괴물이라곤 한 마리도 못 잡고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줄 알겠습니다.”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군, 베텔 경. 하지만 나는 내 약혼녀의 유일한 기사가 혹시라도 다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것도 내 가문의 성에서는 말이야. 어차피 피난처에도 기사는 필요하니, 제대로 방어구를 갖춰 입고 나면 곧바로 보내주지. 설마 경이 방어구를 챙기는 동안 오드리를 옆에서 기다리게 할 건 아니겠지?”
“벨키스 경, 저는 이대로도 충분…….”
“충분하지 않아. 야닌 경!”
라비린은 카프러스의 반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정리하는 기사 중 한 명을 불러 오드리와 다이앤을 맡겼으니, 두 사람은 졸지에 카프러스와 헤어져 기도소로 가게 됐다. 한데 야닌을 따라 몇 발짝 걷던 오드리가 돌연 돌아서더니, 핏물을 밟고 달려와 라비린의 손을 잡았다.
“라비린.”
“어? 왜? 혹시 뭐 방에서 꼭 챙겨 나와야 하는 물건이라도 있어? 얘기해 주면 내가 챙겨서…….”
“다치지 않게 조심해.”
굳이 약혼녀나 친구 사이가 아니어도, 스치듯 안면 있는 사이에도 할 수 있을 법한 걱정이고 당부였다. 그런데도 라비린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환하게 주변을 밝히는 마법등 때문에 극적인 변화가 더욱 확연히 보였다.
라비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늦었다. 그의 얼굴색 변화를 똑똑히 본 주변의 기사들이 놀릴 의사가 가득한 표정으로 씩 웃었던 것이다.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이 일로 주구장창 놀림받을 앞날이 눈에 훤했다. 망했다.
라비린만큼 오드리도 당황했다. 친구 사이에 평범하게 할 수 있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라비린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녀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음……. 라비린? 내가 뭐 잘못 말했어? 혹시 타우레드에서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나?”
“아니. 그냥……. 너한테서 이런 말랑말랑한 걱정을 들을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놀란 것뿐이야.”
“나 참. 나도 평범하게 걱정할 줄 아는 보통 사람이거든? 아무튼 조심해. 말만 기사지, 검 안 잡은 지 한참 됐잖아.”
“그런 말은 들어봤자 김만 빠지니까 굳이 붙이지 않아도 돼. 이왕 걱정할 거라면……. 그래, 갑자기 손수건을 바라거나 하진 않을 테니, 대신 뺨에 키스 정도는 해주는 게 어때? 약혼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어차피 놀림받을 거, 이득이라도 챙겨야겠다. 라비린의 요청에는 그런 사심이 잔뜩 들어 있었다.
‘면피하려고 한 말인 건 알아도 며칠은 갈 줄 알았는데…….’
오드리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뺨에 하는 키스 정도야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뭐가 어렵겠냐마는, 라비린더러 부담스러우니까 들이대지 좀 말라고 화를 냈던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데에 동의한 것처럼 알았다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키스를 요구하는 라비린이 뻔뻔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데굴데굴 눈을 굴려 주변을 확인했다. 돌바닥엔 피가 고이고 머리가 담긴 자루가 묵직한데, 어째 이런 상황에서도 다들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라비린이 망설이는 오드리를 독촉했다.
“뭘 망설여? 예전에 기자들 앞에서 잘 하던 짓이잖아. 새삼스럽게 빼기는.”
“그래도…….”
“이런 것도 윗사람의 일이야. 사기진작에 좋아.”
결국 오드리는 끝끝내 피하지 못하고 라비린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피비린내 속에서도 라비린이 즐겨 쓰는 향수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라비린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여간 기회를 놓치질 않아.”
“어허. 내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을 누구에게 배웠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라비린은 오드리가 대답하려고 미적거린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새 장갑을 벗어버린 손으로 오드리의 뒤통수를 받치고 대담하게 입술을 눌렀다. 말캉한 감촉이 입술에 확실하게 닿았다 싶은 순간, 정강이에 끔찍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정강이를 끌어안고 끙끙거렸다. 아무리 두꺼운 군화를 신고 있었대도 약점은 약점이었다. 기름먹인 가죽으로 만든 구두 앞코로 정강이를 차이는 건 끔찍하게 아팠다.
“윽……. 오드리, 너무하잖아.”
“너무해? 정말 너무한 게 누군지 한번 물어볼까? 거기 서 계신 기사님들. 네, 지금 박수 치려다 말고 어정쩡하게 손들고 계시는 분들, 대답해 보세요. 누가 더 너무하죠? 무사귀환을 위해 뺨에 키스를 해달라더니, 갑자기 입술을 들이댄 라비린? 아니면 난데없는 희롱에 놀라 정강이를 걷어찬 나?”
잔뜩 화가 난 오드리의 박력이 아주 대단했다. 기사들은 얼른 라비린의 편을 들지 못하고 슬금슬금 오드리의의 눈치를 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오드리가 라비린보다 우위에 있었다.
“당연히 벨키스 경께서 잘못하신 겁니다. 그렇게 갑자기 입술을 갖다 대면 아가씨께서 놀라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베텔 경이야말로 숙녀의 놀란 마음을 살필 줄 아는 유일한 신사이세요.”
그 와중에 카프러스가 당당히 오드리의 편을 들었으니, 오드리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 봐. 네가 더 너무하다잖아.”
“와……. 내가 저런 것들을 가문의 기사라고 믿고…….”
“아무튼 다치지 말고 와. 내가 찍은 입술자국이 아깝지 않게.”
“당연한 말을.”
라비린이 오드리의 손끝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오드리를 담은 초콜릿색 눈동자가 달콤하게 녹아들었다.
“내 아가씨는 안전한 곳에서 마음 편히 기다리고 있어. 일을 마치면 제일 먼저 달려갈 테니.”
기도소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다. 라비린은 괴물이 우글거리는 길이라고 했지만 그건 그냥 과장이었나 보다 싶을 정도였다. 괴물이 된 기사가 있었던 그 길목이 가장 괴물의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 보니 가끔 보이는 괴물을 잡는 야닌의 동작에도 여유가 가득해서, 오드리와 다이앤은 그나마 좀 편한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기도소 앞에 다다라 문을 열기 직전, 야닌이 오드리의 앞을 가로막고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아까 편들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실은 벨키스 경이 웃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보아서……. 욕심을 부렸습니다.”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라비린은 평소에도 실없이 잘 웃어요.”
“그건 아마도 아가씨의 앞이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벨키스 경이 열네 살 이후로 웃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
“딱 보니 알겠습니다. 우리 도련님이 아가씨께 먼저 반한 게 맞지요?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셨을 텐데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두 분이 앞으로도 쭉 지금처럼 사이좋게 지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럼 아가씨를 모시는 데에 큰 보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드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과를 받은 건 좋은데, 야닌의 마지막 말이 몹시 거슬렸다. 자신이 받는 환대가 라비린의 약혼녀라는 위치 덕분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문득 만탈락의 공기가 그리워졌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먼지 섞인 바람에 실린 달콤한 과일 향기와 지독한 뙤약볕 같은 것들. 불현듯 찾아온 향수가 오드리를 할퀴었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 떠봐야 여긴 만탈락이 아니라 타우레드의 본가였다. 침입자를 경계해 복도를 미로처럼 복잡하게 만들고 침입자의 발소리를 듣기 위해 복도에 카펫조차 깔지 않은 성. 영지전이 사라진 지 몇 십 년이 흘렀는데도 전쟁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땅.
울컥 솟아오른 화는 속으로 삭였지만 채 지우지 못한 칼날이 혀끝에 어렸다.
“주제넘은 발언 잘 들었어요. 야닌 경은 앞으로 그 입을 조심하도록 하세요. 충성에 조건이 있다는 걸 그렇게 떠들고 다녀서야 끝이 몹시 험하지 않겠어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문이나 여세요.”
타우레드 영주성의 기도소는 영지전에서 농성을 하게 되는 상황을 대비해 마련된 공간 중 하나였다.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었고 그를 위한 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괴물이 나타난 걸 알자마자 재빨리 기도소로 모여들었다.
더불어 기사들이 나서서 아직 괴물이 되지 않은 사람들을 죄다 기도소로 보내고 있으니, 오가는 사람 없던 기도소는 사람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바글바글했다. 타우레드의 성이 붙은 자들은 가족끼리 함께 있을 수 있는 작은 기도실을 하나씩 차지했지만, 고용인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도소의 높은 천장 아래 옹기종기 모여앉아 심장 아래 고인 불안을 퍼 올렸다.
옆에 누워 멀쩡히 잘 자던 동료가 괴물이 되었다, 아무 징조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됐다, 괴물에게 물려 죽은 동료가 있다, 여기서도 또 괴물이 나타나는 거 아니냐, 이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소곤소곤 나누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섬뜩하고 우울했다.
고참 몇이 입단속을 하려 시도했지만 영 헛수고였다. 그만큼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이 컸다. 기도소 안을 지키는 기사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보호자가 아니라 감시자처럼 느껴지는 탓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괴물로 변하면 그 즉시 달려와 목을 치려고 지켜 서 있는 게 틀림없다고, 다들 말은 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그 우울한 공기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타우레드 후작 일가가 머무는 가장 안쪽의 기도실 문을 열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라일락 향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초조함을 가득 안고 홀로 앉아 있던 라디아타가 달려와 오드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드리! 왜 이제야 왔어!”
“그게, 어쩌다 보니까. 그런데 너 왜 혼자야?”
“우리 부모님이 성의 주인이신걸. 이런 일이 터졌는데 안쪽에 틀어박혀 속 편하다 하실 분들이 아니야. 오라버니는 기사들과 같이 현장에 나간 것 같고……. 이럴 때 나는 안전한 곳에 얌전히 있는 게 모두를 돕는 거야.”
“그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거고. 왜 하녀 한 명도 없이 있냐고, 귀족영애가.”
나름 말썽꾸러기로 자란 오드리도 일상생활에 하녀의 손길 없는 생활을 상상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허리 문제로 코르셋을 필수로 차야 하는 라디아타가 하녀 한 명 없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문만 열면 이 안에 들어오고 싶은 고용인이 잔뜩 있는데.
어울리지 않게 눈을 굴리던 라디아타가 알룬드의 목걸이를 꺼내 내밀었다. 오드리는 별 생각 없이 목걸이를 받았다가 예상외의 무게에 숨을 삼켰다. 목걸이만 덜렁 들어본 적이 없어 비교하긴 어렵지만, 일반적인 보석 목걸이의 무게라기엔 믿을 수 없이 무거웠다.
“헤세가 죽고 돌아온 건데……. 어때, 이상하리만치 무겁지? 그 전엔 이 무게의 절반이었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갑자기 무거워졌어. 워낙 화려한 목걸이라 본래 무게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야.”
셰비언이 용일지도 모른다는 말까지도 웃으며 받아들였던 라디아타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기현상에는 상당한 공포를 호소했다. 시체와 함께 사흘 동안이나 물에 잠겨 있던 목걸이라는 점이 그녀를 괴롭혔다.
“계속 생각했었는데, 이거 아르젠 남작이 네게 선물한 거라며. 혹시 뭔가 마법이 걸려 있는 게 아닐까? 응? 그 사람, 인간은 모르는 옛 마법을 잔뜩 알고 있을 거 아냐. 그…… 용이니까!”
오드리는 주의 깊게 목걸이를 살폈다. 혹 이 목걸이에 마법이 걸려 있어 문제의 마력구슬과 같은 역할을 했던 거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방을 뛰쳐나왔는데, 가까이에서 살펴본 목걸이는 깨끗하기만 했다. 요리조리 돌려보다 문득 허탈해졌다.
“네 말이 맞긴 한데……. 내가 마법사와 친분은 깊어도 마법의 재능이 있는 건 아니라서 확인을 할 수가 없어.”
확인도 못할 걸 뭐가 그리 급해서 이 야밤에 뛰쳐나왔을까. 아무래도 괴물의 등장에 받은 충격이 그만큼 컸구나 싶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그랬다면 카프러스가 오드리를 찾아 성을 헤맬 일도, 라비린을 만나 키스를 강요받을 일도 없었을 것을.
“넌 용의 마력을 갖고 있다며. 한번 마력 넣어봐.”
“보석 무게가 두 배로 늘었는데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그래? 안 돼, 안 돼. 이건 내가 갖고 있다가 선물한 본인에게 물어볼게.”
그리 말하며 오드리가 알룬드의 목걸이를 챙기자 라디아타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핏기 없이 퍼렇던 얼굴에 홍조가 돈다.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쉽게 용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마음 편히 용 얘길 꺼내고 싶어서 여태 혼자 앉아 기다린 거야?”
“비밀이잖아.”
“다이앤은 괜찮았어?”
“……아.”
오드리는 감추지 않고 웃었다. 제 하녀는 모조리 물려놓고는 정작 다이앤은 신경도 안 쓴 허술함이 귀여웠다. 웃음의 이유를 눈치챈 라디아타가 이건 믿음과 신뢰의 문제라고 강조했지만, 그새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세심하고 사려 깊은 내 친구. 네가 남자였으면 분명 널 사랑했을 텐데.”
“뭐라는 거야. 이런 상황에 농담이 나와?”
“해터 양의 시신에서 나온 비늘을 동봉해서 셰비언에게 편지를 보냈어. 그가 올 거야.”
“부검 결과는 한밤중에 나왔는데 편지는 대체 언제……. 아니, 그보다 남작이 올까?”
“올 거야. 안 올 리가 없어.”
오드리는 불안해하는 라디아타를 끌어안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어조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시계탑에서 손을 거절당한 셰비언이 얼마나 처참한 눈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느니만큼, 그가 자신을 위해서 올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저 셰비언이 보고서 속에서 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낸 깊은 책임감을 기억할 뿐이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동이 틀 때까지 남아 있던 몇 시간이 마치 며칠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렸다. 급히 마련된 피난처에 빼곡히 구겨 앉은 사람들 사이의 누군가가 갑자기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람들의 신경을 갉작갉작 갉아댔다.
그렇게 아침이 됐다. 성 곳곳에서 나타난 괴물들은 물론이고 피난처에서 변이한 일부도 목 없는 시체가 되어 연무장에 쌓였다. 차곡차곡 포개놓은 시체들이 마치 강둑에 쌓아둔 모래주머니 같아 보였다. 그래도 해가 뜨니 더 이상 변이하는 사람이 없었다.
변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무참한 시체 위에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이어 주방에서 대량으로 만들어낸 따뜻한 수프와 빵을 오드리와 라디아타가 직접 돌리기 시작하자 적잖이 안심했다. 귀한 아가씨들이 가까이에 다가와 손을 잡아주고 등을 쓸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태가 진정됐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일 뿐이었고, 라비린을 위시해 괴물을 잡으러 다니던 기사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겨우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죽은 기사가 벌써 다섯이나 됐고 부상자는 더 많았다. 괴물화의 원인을 집어내지 못한 상황이니만큼 전투 인력의 감소는 뼈아팠다.
기사들과 함께 있을 땐 다 괜찮다, 힘내라, 격려하기에 바쁘던 라비린은 오드리와 작은 기도실에 단둘이 있게 되자마자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머리카락에 튄 피를 닦아내는 손이 피로로 달달 떨렸다.
“제기랄, 싸우다 죽은 놈보다 괴물로 변해서 죽은 놈이 더 많다니 이게 말이 돼?”
“몇이나 변했는데?”
“다섯.”
“다 괴물이 돼서 죽었네. 대체 어쩌다 변한 건지는 아직 모르지?”
“몰라, 기준이 없어. 괴물이 되어서 하는 행동도 완전히 다르고. 최악은 성내를 돌아다니면서 마주친 고용인들을 죽여 버리는 놈이었어. 빌어먹을, 머리에 뿔이 난 놈이 천천히 걸어 다니는데 왜 도망들을 안 가고 잡혀 죽은 거야?”
오드리의 등에 쭉 소름이 돋았다. 비명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답시고 나섰다간 죽을 뻔했다.
“보아하니 부상자도 많은 것 같은데, 의사 한 명, 조수 한 명으로 되겠어? 다이앤 빌려줄게. 데려다 써.”
“다이앤? 몰리 양 말하는 거야? 네 하녀잖아. 하녀를 데려다 어따 써? 기사들 땀 닦아주는 용도로? 뭐, 그것도 나름 효과가 있긴 하겠네.”
“몰리는 만탈락에서 손꼽히는 약사 집안이야. 만탈락의 약재상치고 몰리에 약재를 대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없고 그 약을 탐내지 않는 의사가 없어. 잘 알 텐데?”
“그거야 알지. 하지만 그 집안엔 딸이 없잖아. 있는 거라곤 아들 하나뿐이라고……. 설마 진짜 그 몰리 집안 출신이야?”
“그 하나뿐인 아들과 후계자 자리 놓고 개싸움하다가 쫓겨났어. 내가 거뒀지.”
“오…….”
라비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쫓겨난 게 분한 나머지 오라버니에게 독을 먹이려다가 감옥에 들어간 전적이 있다는 말까지 들으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겠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어차피 지금은 화려하게 치장할 상황도 아니고, 가벼운 몸단장 정도는 라디아타의 하녀에게 부탁해도 충분해. 다이앤을 빌려줄 테니까, 너무 혹사시키지만 말고 쓰다가 돌려보내 주면…….”
“아니,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왜? 손이 모자라잖아. 괴물이 자꾸 나와서 미칠 것 같달 땐 언제고? 피난처에 데려다놓은 사람들마저 변이하는 바람에 힘들다며.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려야지. 의료진에 손 하나가 더 생기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느는데.”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라비린이 오드리의 어깨를 붙들어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새 까칠해진 입술로 오드리의 이마에 꾹 도장을 찍었다.
“네가 얌전히 독립된 공간에 머물러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어림도 없어. 몰리 양이 진짜 약사라니 정말 다행이야. 한결 마음이 놓여.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무조건 널 우선으로 치료해 줄 거 아냐. 의사는 아니어도 적어도 응급처치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말이 되는 소릴 해. 당장 부상자가 넘치는데 전투 인력에라도 치료 인력을 보내야지. 나중에 내가 귀한 치료 인력을 하녀로 데리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면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그땐 내가 막아줄게. 보호해 준다고 했잖아.”
“그놈의 보호는 아주 입버릇처럼…….”
오드리는 넌덜머리를 내며 라비린을 밀쳐 냈다. 지금 라비린은 오드리를 보호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큰 사건에서 차기 후작부인으로서 신의와 인망을 잃어서는 훗날 타우레드를 제대로 장악하는 데 몇 배의 힘이 들 게 분명했다.
“날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다이앤이 없으면 내가 치료 못 받을 처지도 아니잖아. 네 보호만 믿고 네가 하라는 대로 했다간 내가 허수아비가 될걸. 그러다 결국엔 후계자의 약혼녀로서 부적합하단 말이 나올 거야.”
“넌 베텔 경을 내게 맡겼어. 널 지켜줄 최소한의 방패를 내게 넘겼는데 치료 인력 하나라도 데리고 있어야지. 누군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내가 아예 입을 비틀어 버릴 테니 넌 엉뚱한 곳에 신경 쓰지 말고 네 몸이나 챙겨.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나한테 맡겨.”
“네게 다 맡기라고……? 그럼 다 돼?”
“당연하지. 내가 집안 식구들에게서 약혼녀 하나 못 지키는 칠푼이인 줄 알아? 걱정하지 말고 안전하게,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마. 그게 최고야.”
기껏 밀쳐 낸 걸 도로 끌어당겨서 안고 한다는 말이 이 꼴이라니. 귀에 닿는 숨결은 간지럽고 어깨를 감싸 안은 팔은 다정하고 따뜻한데, 정작 듣는 오드리는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손끝 발끝에서 차오른 화가 뜨거운 열기가 되어 피가 부글부글 끓였다.
“난 로렐라이의 주인이야.”
“알아. 누가 뭐래?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네 그늘 아래에서 귀히 여겨지는 것만으로 만족할 만한 인간이었다면 로렐라이 같은 건 만들지 않았을 거란 얘기야.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느니 아버지에게 매일 눈물 젖은 편지로 분수에 넘치는 지식을 탐한 일에 대해 용서를 빌었을 거라고.”
이전에 거칠게 끝났던 대화가 조금 형태를 바꿔 반복됐다. 라비린은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는 무조건 자신의 말을 따르라 했고, 오드리는 위험한 상황이기에 보호만 받으며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대화는 자연히 평행선을 달렸다.
“제발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데 그게 그리 힘들어?”
“내가 네 개야? 네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네가 해주는 보호만 바라보고 있는 게 싫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거라고!”
“개? 난 널 개 취급 한 적 따위 없는데, 비유가 어떻게 그렇게 나와? 이렇게 위험할 때만이라도 내 말을 들으라고. 왜 그렇게 고집불통이야? 그래, 차라리 개가 낫지. 개는 앉으라면 앉고 짖으라면 짖으니까!”
“그럼 개나 한 마리 키우면서 보호해! 그럼 이렇게 골치 아플 일 없고 좋겠네! 후작부인도 라디아타도 받지 않는 특별대우를 나 혼자서만 받을 이유가 대체 뭔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우선순위에서 밀리니까 그렇지! 괴물이 나타났을 때 고용인들은 널 가장 늦게 찾았어!”
“누가 그걸 몰라? 알지만 특별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고 하는 거잖아!”
“야 이 고집불통아!”
말이 오갈수록 목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부풀어 작은 기도실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그나마 한줌 남은 이성이 서로 멱살을 잡는 걸 막고 있었다.
“저……. 오드리 아가씨, 벨키스 경.”
“모, 몰리 양?!”
“다이앤! 어, 언제부터 들어와 있었어?”
“음, 벨키스 경께서 칠푼이 운운하실 때부터요……. 두 분, 저는 전혀 안 보이시는 것 같아서……. 하, 하하…….”
다이앤이 어색하게 웃었다. 귀족다운 우아함은 맨바닥에 던져 버리고 목소리를 높이던 두 사람은 문이 꼭 닫혀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름 안심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야?”
“쌓아두었던 시체 중 일부가 일어섰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브란젤에서 나타난 괴물들은 심장이 상하면 동작이 굼떠지고, 목이 잘리면 죽었다. 간밤에 타우레드 영주성에서 나타난 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연무장에 시체를 쌓으면서 신원 확인을 어찌 할까 하는 고민은 해 봤어도 시체가 움직이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리 잘린 시체가 일어나 비틀비틀 걸으며 움켜쥘 만한 걸 찾아 허공을 더듬는 걸 보았을 때, 라비린은 눈을 물로 씻고 못 본 걸로 하고 싶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장면이었고 혹시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나 의심 가는 광경이었다.
“기름을 가져와라! 모두 태워!”
클로드의 대응은 라비린보다 빨랐다. 그는 뒤늦게 상황을 확인하러 온 라비린이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기름을 시체에 뿌릴 것을 명했다. 하인들이 기름통을 매단 긴 작대기로 굼뜨게 움직이는 시체를 쿡쿡 찔러 넘어뜨리곤 기름을 뒤집어씌웠다. 그 옆에서 대기하던 하녀들이 불붙인 횃불을 시체에게 내던져 장작으로 삼으니, 움직이는 시체는 곧 불덩이가 되었다.
“잘도 탄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적당한 크기로 쪼개 쌓아둔 장작도 잘 마르기 전까진 불을 붙여봐야 연기만 뿜어낼 뿐인데, 살아 있는 시체들은 마른 장작에 기름을 뿌린 듯 잘도 타서 시커먼 재만 남겼다. 다른 시체들과 비교해 봐도 확실히 달랐다.
겨우 안정되어 가는 듯하던 성내의 분위기는 다시 엉망이 됐다. 시체가 타들어가는 냄새는 어떻게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시체를 태우는 시커먼 연기는 까마귀의 날개처럼 하늘을 날았다.
라비린 역시 불안에 잡아먹혔다. 아니, 먹힌 정도는 아니어도 불안을 업은 정도는 될 것이다. 우울하게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문 사람들이 피워내는 공기가 지독히 무거웠다. 라비린은 사람들을 채근하며 이름과 소속을 물어 적고 있던 카프러스를 구석으로 끌어냈다.
“베텔 경은 헨젤 영애의 옆에 가 있도록 해.”
“이 사람들을 두고 말입니까? 경, 이들을 내버려 두어선 안 됩니다. 쓸모없는 일 같아도 계속 말을 걸고 대답하게 해야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겁니다.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북쪽 지역에서는 가끔 산에 사는 짐승이 내려와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남은 사람들의 눈빛이 꼭 그런 사건의 생존자 같은…….”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안 그래도 내 가문이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이야. 그러니 베텔 경은 경이 보호해야만 하는 사람 옆으로 가게. 오드리를 지켜.”
“…….”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보나? 설마 약혼녀를 마음에 둔 기사를 내치지 않고 써먹을 줄은 몰랐나 보지? 어떻게든 감추려고 애를 쓰기에 나도 모른 척하기로 했네. 내 하해와 같은 마음씨에 감사를 표할 생각이라면 지금 하게.”
“농담은 적당히 하시죠. 저는 그저 경께서 미움 받을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솜씨가 한두 번 해 본 것 같지 않아 놀라는 겁니다.”
“하하, 본래 사랑에 빠진 남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거든. 그래서 싫은가?”
거절은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 물은 라비린이 웃는 낯으로 말을 보탰다. 만약 이름도 모르는 저 사람들이 오드리보다 더 신경 쓰인다면, 고용인들과 함께 다 타들어간 잿더미를 뒤지며 혹시 남았을지 모르는 유품을 골라내게 하겠다고 말이다.
카프러스는 한숨과 함께 기껏 적었던 명단을 접었다. 외통수로 몰아붙이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가씨께 벨키스 경이 시켰다고 꼭 말할 겁니다.”
“타우레드 영애의 구애를 두 번이나 거절한 사내가 내 강요를 못 이겼다고 하면 오드리가 퍽이나 믿겠군. 그래, 그러고 보니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어. 내 동생을 찬 이유가 대체 뭔가? 그 애가 뭐가 모자라서?”
한참 전에 끝난 일, 이런 식의 추궁을 당할 줄은 몰랐던 카프러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라비린이 팔짱까지 끼고 답을 채근했다.
“브란젤은 물론이고 멜브란트 전체에서 따를 자가 없다는 미모에, 살론의 의학서도 막힘없이 읽어내는 머리에, 예술에도 조예가 깊고 사생활도 깨끗해. 집안도 모자람이 없어서 경의 앞길도 훤하게 뚫어줄 수 있어. 그런 애가 좋다는데, 대체 왜 찼나?”
“……그런 걸 꼭 물어보셔야 합니까?”
“온실 속 화초로 고이 길러낸 내 동생의 사랑을 감히 일개 기사가 걷어찼는데 이유가 궁금한 거야 당연하지. 제대로 된 대답을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게 아니면…….”
라비린의 눈초리가 매우 사나웠다. 마음에 차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얼굴에 주먹이라도 갈길 기세였다.
카프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비린내와 탄내가 뒤섞인 냄새가 났다. 폐가 새카맣게 물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타우레드 영애께서 너무 진심이시라,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뭐?”
“저도 사내입니다. 타우레드 영애께서 약속하시는 것들이 탐이 나지 않았을 리가 있습니까? 만약 그분이 가문에 남기 위해 곁에 둘 적당한 인물을 고르신 거라면 저도 장단을 맞출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어서…… 저도 진심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비린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카프러스 베텔, 이 고지식한 기사는 거절의 이유마저 고지식했다.
“……짜증나네.”
“예?”
“짜증난다고.”
“아니, 캐물으실 땐 언제고 갑자기 짜증난다 소리를 하고 계십니까?”
“무슨 말을 하든 턱을 날려줄 생각이었는데 싹 사라졌어. 됐고, 경은 오드리에게나 가보게.”
“하여간 제멋대로인 분이십니다.”
라디아타와 함께 피난처의 사람들에게 나눠줄 구호품을 챙기고 있던 오드리는 카프러스의 등장에 몹시 놀란 눈치였다. 오드리는 슬쩍 라디아타의 눈치를 살폈다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짓자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비린이 옆에 있으라고 시킨 거죠?”
“아가씨께서 가만히 기도실에 계신다면 모를까, 성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챙기실 거라면 당연히 제가 옆에 있어야지요.”
“베텔 경, 말이 많이 늘었네요. 후……. 시체가 도로 일어나 걸어 다닌다는데 제가 필요없다 말해봐야 별 소용도 없을 것이고……. 그래요, 이왕 온 거 찰싹 붙어 계세요.”
오드리는 카프러스를 떼어낼 시도도 하지 않았다. 라비린이 다른 기사도 아니고 굳이 카프러스를 콕 집어 보낸 이유야 뻔했다. 오드리가 뭐라고 하든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니까 고른 것이다.
“마침 피난처들을 한 번쯤은 봐야겠다 싶었는데 잘됐어요. 함께 가죠.”
“진짜 가실 겁니까?”
“경이 안 왔다면 구호품을 배당해 주는 걸로 끝냈을 거예요.”
카프러스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하나 조금 전에 뱉은 말이 있어 차마 안 된다는 말은 못 했다. 다이앤이 뒤에서 몰래 혀를 찼다. 차라리 오지를 말지.
오드리는 그런 카프러스와 다이앤을 뒤에 졸졸 달고 성 내를 휘젓고 돌아다녔다. 곳곳에 마련된 피난처들을 한 바퀴 쭉 돌았고, 그 뒤엔 구석에 숨어 좀처럼 나오지 않으려 드는 사람들을 찾아 끄집어내 피난처로 보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찾으십니까?”
“난 숨바꼭질의 귀재였거든요. 내가 술래가 되면 놀이가 너무 빨리 끝난다고 다들 불만이 많았어요.”
만탈락을 뒤집어놓으며 놀던 오드리의 어린 시절을 알 리 없는 카프러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드리는 숨바꼭질에 얽힌 추억을 찔끔찔끔 풀어놓으며 성 북편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호기심에 차서 오드리의 얘기에 집중하던 카프러스는 그녀가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문 앞에 멈춰 서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문에 새겨진 덜 자란 사자를 보니, 설명이 없어도 누구의 방인지 알겠다. 라비린이 타우레드의 후계자로서 쓰는 방이었다.
“아가씨, 여기에도 숨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이앤, 문 열어.”
“네, 아가씨.”
다이앤이 문에 달라붙어 몇 번 달각달각 하더니 순식간에 문을 열었다. 비온 뒤의 숲이 떠오르는 청량한 향기가 문틈으로 쏟아졌다. 자물쇠로 마법도구를 썼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여긴 마법이 불안정한 땅이었고 구식 잠금장치를 따는 건 다이앤에게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오드리는 마치 자신의 방에 들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오드리를 따라 엉겁결에 따라 들어온 카프러스가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철컥, 문 닫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그, 그, 아가씨? 여기에도 놀라 숨은 사람들이 있는 겁니까?”
“이제 찾아봐야죠.”
라비린이 쓰는 방은 침실과 응접실, 서재와 드레스룸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람을 찾는다던 오드리와 다이앤은 곧바로 서재로 직행해 서류를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에 흩어진 것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서랍을 열어보거나 책 사이를 확인하는 게, 누가 봐도 목적이 있어 찾아온 도둑이었다.
“아가씨……. 이게, 무슨…….”
“경은 사람들을 찾아보세요. 전 다른 걸 좀 봐야겠어서요.”
혹시 숨겨진 장치가 있는 건 아닌가 책장을 섬세하게 매만지며 하는 말이 아주 뻔뻔했다. 카프러스는 그런 오드리를 아연하게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말려봐야 듣지도 않을 테고, 그럴 바엔 재빠르게 목적을 달성하고 나가는 편이 좋았다.
“뭘 찾으면 됩니까?”
카프러스의 반응에 오드리도 다이앤도 몹시 놀랐다. 오드리가 카프러스의 이마를 슬쩍 짚더니만 열은 없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전 아주 멀쩡합니다.”
“아, 네……. 그럼 다른 건 바라지 않을 테니 지금 서재 풍경을 완전히 기억해 주세요. 라비린이 돌아와서도 누가 뒤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돌려놔야 하거든요.”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보면 될걸, 굳이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지만 하라 하시니 하겠습니다.”
오드리는 불만 가득한 카프러스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마저 책장을 뒤졌다. 책장은 군사학과 행정학으로 가득 차 있었고, 구석에 비마법에 대한 책자가 조금 꽂혀 있었다. 만탈락으로 가기 전 라비린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구성이었다.
오드리가 내리 허탕을 치는 동안 다이앤은 책상 서랍에 감춰진 이중바닥을 찾아냈다. 하지만 들은 거라곤 오래된 먼지뿐이었다. 두텁게 쌓인 회색 먼지엔 뭔가가 들어 있었던 흔적조차 없었다. 그녀는 실망을 담아 서랍을 닫았다.
“아가씨, 서류가 여기에 있긴 할까요?”
“데멘사가 여기에 있어.”
“하지만 그의 서류는 브란젤에 있었잖아요. 애초 여기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서류를 두기엔 그다지 보안이 좋은 곳이 아니라고요. 비밀을 감추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중요한 걸 따로 떼어놓았으려고?”
“마법도구 뒀다 뭐 해요? 저라면 여기가 아니라 브란젤의 저택에 감춰두겠어요.”
오드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이앤은 오드리가 라비린의 서재를 뒤져 보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반대 의견을 피력했었다. 만약 라비린이 정말로 데멘사의 서류를 감췄더라도 여긴 아닐 거라고 말이다.
“아니면 그 변호사처럼 중앙은행의 금고에 넣어두든가요.”
“다이앤의 말이 맞습니다. 저라도 저렇게 부실한 잠금장치가 있는 곳에 뭔가를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꼭 이 성에 가져와야 했다고 해도 보관을 여기다 하진 않았을 테죠.”
카프러스마저 합세했다. 오드리는 두 사람의 공세에 밀려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이 맞았다. 라비린에 대한 의심과 실망이 뒤범벅된 상태로 내린 판단은 성급했다. 세 사람은 이제까지 건드렸던 것들을 감쪽같이 돌려놓고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오드리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라비린의 서재에 밀리나의 유언장 원본이 있을 확률이 대단히 낮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대뜸 행동에 옮기기부터 하다니 스스로가 실망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요새 내가 왜 이러지…….”
“네?”
“몇 시간을 못 기다려서 새벽에 방을 뛰쳐나가고, 좋은 뜻으로 한 말인 걸 알면서도 설득하는 대신 화를 내고, 근거 없는 의심으로 믿음을 스스로 깨고…….”
“저, 아가씨…….”
“어린애가 된 것 같아. 당장 생각난 대로 행동해야 속이 풀리는 어린애처럼 여기저기에 쿵쿵 부딪치고 다니는 꼴이라니.”
“아가씨!”
다이앤이 다급히 오드리의 팔을 쥐고 멈춰 세웠지만 늦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오드리는 단단하면서 탄력 있는 벽에 이마를 부딪쳤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비린이었다.
“라비린? 네가 왜 여기 있어?”
“너야말로 왜 그렇게 풀이 죽어서 앞도 안 보고 걷는 거야? 머리가 그렇게 무거워?”
오드리는 곧바로 주변을 살폈다. 여긴 영주성 북편의 중앙이었고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동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북편이 타우레드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면, 동편은 후작의 집무실을 비롯해 성을 움직이는 핵심이 자리한 곳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발을 뒤로 뺐다.
“미안. 이런 시국에 여기 오면 안 되는 건데 내가 경솔했어.”
“아니,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라비린은 창백한 얼굴로 물러서는 오드리를 덥석 붙잡으려다 손을 늦춰 살며시 붙들었다. 언제나 푸르른 상록수처럼 꼿꼿하고 단단하던 오드리가 이상하리만치 연약하게 보였다. 보호하겠다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면서도 항상 일말의 의심이 있었는데, 지금의 오드리에겐 그 말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네가 이 성에서 못 갈 곳은 없어.”
라비린이 잔뜩 몸을 굽혀 오드리와 눈을 맞추고 속삭였다. 새끼 새를 어루만지듯 보드랍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가 그렇게 얘기했잖아. 가장 꼭대기층만 아니면 어디든 된다고.”
“…….”
“대체 무슨 일이야? 뭔데 이렇게 풀이 죽은 거야? 얘기해 봐, 들어줄 테니. 응? 오드리.”
오드리는 라비린의 손을 떼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다정함이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을 제멋대로 침범했다. 평소라면 거침없이 밀어내고 다시 선을 그었겠지만, 어째 지금은 그게 안 됐다.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감정의 진폭이 크고 충동이 등을 떠밀어대는 이 순간에 라비린의 접근을 허용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혹시 아직까지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찾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막아줘서 고마워. 내가 지금 여기에 오는 건 아닌 것 같아. 갈게. 라디아타 혼자 고생하고 있겠다.”
라비린이 대답할 필요도 없게, 붙잡을 명분도 없게, 다다다 말을 쏟아내고 휙 돌아섰다. 다이앤과 카프러스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침착함을 잃은 발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진정이 안 됐다.
오드리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라비린에게서, 그가 한결같이 내보여 온 진심 앞에서 겁을 먹었다. 약해진 자신이 무너져 버릴까 봐.
다이앤과 카프러스가 허둥지둥 오드리의 뒤를 따르고 나니, 복도엔 라비린 혼자 남았다.
“이것 참…….”
라비린은 손가락 끝에 남은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드리는 체향이 옅은 편이라 주변의 향기에 쉽게 물들곤 했다. 조금 전 가까이 붙었을 때 그녀에게서는 자신이 즐겨 쓰는 향이 났다. 비에 젖은 숲의 향기.
‘자물쇠는 어떻게 땄나 모르겠네.’
고지식한 기사에게 그런 좀도둑 같은 재주는 없었을 테니 아마도 다이앤의 손재주일 테다. 방에 쓸 만한 거라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는데, 그 빈 방으로 오드리를 이렇게나 흔들어놓다니. 이거 참 심하게 남는 장사를 했다.
“아무래도 해터 양에게 감사해야겠는걸.”
늪지대처럼 불안정한 땅 위에서도 단단하게 서 있던 사람이 갑자기 기우뚱거리는 게, 아무래도 수확제 때 괴물을 정면으로 마주쳤던 게 큰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하긴 그만한 일을 겪었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라비린은 품에서 얇은 편지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한참 망설이다 오드리에게 전해주려고 가져온 거였는데, 역시 주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는 편지를 반으로 찢으려다 말고 고이 접어 다시 품에 넣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낮이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피난처의 사람들은 배급받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불안에 떨며 잠을 설쳤다. 낮 내내 별일 없었으니 밤에도 멀쩡할 거란 기대를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인 곳에 있으면 괴물이 될 확률이 높다는 브란젤발 소문이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 타우레드 일족이 제 가족들과 함께 기도실을 하나씩 차지하고 따로 머문다는 사실이 소문을 부추겼다. 정작 섞여 자겠다고 하면 그땐 불편해 미치겠다고 할 거면서, 그들이 제 안전을 챙기는 것 같자 불만을 품었다.
일부 사람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몰래 기도소를 빠져나가 빈 방을 찾아가 숨었다. 일단 지난밤에 나타난 괴물은 전부 처단됐다고 믿었기에 할 수 있는 대담한 일탈이었다. 그러나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비웃듯이 밤은 고요히 지나갔다.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 로샨은 이르게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기도실 밖으로 나왔다. 피난처에서 벗어나는 것도, 다른 이와 살 부대끼며 있는 것도 두려운 사람들이 어떻게든 틈을 만들려 몸을 옹송그리고 자고 있었다. 피곤에 찌들어 파리한 낯빛으로 불침번을 서던 기사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잘 주무셨습니까.”
“나야 경들이 있어서 걱정 없이 잤다네. 밤새 괴물로 변하는 자가 있었나?”
“아니오. 조용하고 평화로운 밤이었습니다.”
“그거참 기쁜 소식이로군.”
어제 낮과 저녁 내내 그나마 제정신인 고용인들을 추려내 지휘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던 로샨은 진심으로 기뻤다. 습관대로 일찍 일어나 멀쩡한 척을 하고 있지만, 혹사당한 다리와 목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괴물의 출현 자체는 끔찍하고 놀라운 일이지만, 그게 단 하루로 끝난다면야 견디지 못할 일도 아니다. 로샨은 산뜻한 마음으로 타우레드 후작의 사촌동생 일가가 머무는 기도실 문을 두드렸다. 귀족의 기상시간으로는 많이 이른 때이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일어나 있을 게 분명했다.
“마릴린, 깨어 있죠?”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로샨은 고개를 갸웃대다 옆 기도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불길함이 뒷덜미를 잡아당기니, 서너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안에서 잠긴 소박한 나무문이 말할 수 없이 섬뜩했다.
‘검을 놓은 뒤로 육감 같은 건 없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됐는데……. 그래도 무시하는 건 좀…….’
기도실을 쓰고 있는 사람이 낯선 타인이 아니라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는 친인척이라는 게 로샨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실수를 하더라도 자신을 비웃거나 뒷담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기사들을 손짓으로 불러들였다.
“야닌 경, 집사를 불러오게. 기도소의 열쇠를 가지고 지금 당장 오게 해, 자네들은 기도실 주변에서 사람들을 물리게. 아예 한쪽으로 밀……. 아니, 아니야. 확실한 것도 아닌데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지. 이건 못 들은 걸로 해.”
로샨은 눈곱도 못 떼고 달려온 집사에게서 열쇠를 빼앗아 직접 문을 열었다. 손에 걸리는 묵직한 무게감이 태산 같았다. 슬쩍 문을 밀자 마법등의 빛이 틈새로 새어나왔다. 찰박찰박 물 밟는 소리와 코를 마비시킬 것처럼 짙은 피비린내는 그 다음이었다.
더운 숨결이 얼굴에 훅 끼치는가 싶더니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마님!”
마침 곁에 있던 야닌이 로샨을 홱 끌어당기고 안에서 튀어나온 괴물을 막아냈다. 시커멓고 길쭉한 주둥이가 야닌의 검을 씹어대다 피를 보고서야 떨어져 나갔다. 주둥이 밖으로 튀어나온 송곳니가 붉었다.
“크르르르…….”
“뭐 이런…….”
야닌이 급히 훑어본 작은 기도실은 온통 피칠갑이었다. 소박한 침대는 물론이고 신화를 담은 태피스트리와 작은 신상까지, 전부. 그리고 목이 끊어지고 내장을 파 먹힌 시체 두 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실내를 살피는 잠깐 사이에 괴물이 다시 달려들었다. 크게 벌린 입안에 상아를 깎아 만든 듯 날카로운 이빨이 자르르했다. 그래봤자 머리 나쁜 괴물이라, 야닌은 괴물의 훤히 드러난 배를 걷어차 기도실 안으로 밀어 넣고 잠깐 움찔하는 틈을 타서 목을 쳤다.
질긴 가죽을 가르고 뼈의 틈새를 후벼 파는 느낌이 검을 타고 전해졌다. 겨울 사냥에서 늑대를 잡을 때와 손맛이 아주 비슷했다. 하긴 두 발로 걷는 늑대처럼 생겼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끄르륵…….”
목의 절반 이상이 잘려나간 괴물이 목과 입에서 피거품을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아무래도 힘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단번에 죽여주는 게 차라리 자비다. 야닌은 도망치는 괴물의 목을 마저 자르고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을 확인했다.
에베소 타우레드와 그의 부인 마릴린 타우레드가 처참한 꼴로 누워 있었다. 마릴린은 자다가 당했는지 잠옷 차림이었지만, 에베소는 잠옷을 입고도 검을 쥐고 있었다. 흰자위의 핏줄이 죄다 터졌는지 눈이 온통 시뻘겠다.
야닌은 에베소의 눈을 감겨주려 시도하다 포기했다. 싸늘한 시체는 눈감기를 거부했다. 충격과 경악으로 물든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대체 왜……?”
타우레드의 성을 가진 남자치고 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계승 서열이야 밀린대도 에베소 역시 타우레드라, 저런 괴물 한 마리 잡는 게 어려웠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괴물 때문에 기도실로 피한 상황이었으니, 괴물의 등장에 이렇게 놀랄 이유가 없었다.
“야닌 경.”
“헉!”
“뭘 그렇게 놀라나? 이름 좀 부른 것 가지고.”
라비린이 놀란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오른 야닌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놀리는 것처럼 어조에 웃음이 배어 있었지만 라비린의 시선은 에베소에게 꽂혀 떠날 줄을 모르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마치 잘못 만들어진 가면 같았다.
“세상에……. 일어나 계셨습니까? 이 시간에?”
“방금 깼네. 어머니께서 기절해서 실려 들어오셨는데 계속 잘 수 있을 만큼 신경이 무디질 못해서 말이야.”
에베소의 시신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눈을 감겨주려 애쓰는 라비린은 셔츠에 가죽바지라는 단출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허리엔 검대가 매달렸고 뒷굽에 쇠를 박은 전투용 부츠를 신었으니, 야닌은 긴장한 채로 의자에 앉아 밤을 새우는 라비린의 모습을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도련님, 이럴 때일수록 잘 먹고 잘 자며 잘 쉬어야 합니다.”
“도련님이 아니라 벨키스 경. 그리고 내 컨디션은 내가 챙길 테니 걱정 말게.”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전 다른 건 다 믿어도 벨키스 경께서 제 몸 잘 돌본다는 말은 못 믿습니다.”
“나 참, 경에게는 내가 아직도 열다섯 살 꼬맹이로 보이나 보지……? 정말이지, 야닌 경은 예전부터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을 텐데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나?”
“본래 버릇 고치기가 제일 힘든 겁니다.”
“말이나 못하면. 제발 부탁인데 경은 그 혓바닥 단속 좀 하게. 화를 부를 입이야.”
안 그래도 야닌이 오드리에게 한소리 들은 지 하루밖에 안 지났다. 라비린은 갑자기 정색하고 침묵하는 야닌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괴물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잘려나간 머리는 영락없이 늑대인데, 몸뚱이엔 천쪼가리를 걸치고 손가락엔 반지까지 끼고 있었다.
라비린은 반지에 새겨진 표식을 확인했다. 기도실 숫자가 충분치 않아 한 방에 한 가구만 배분했다. 한데 에베소 부부의 시신만 있지 그들의 아들 시신이 없어 이상타 했더니, 괴물이 끼고 있는 반지가 몹시 낯이 익었다. 입이 썼다.
“괴물이…… 내 육촌 동생이었군.”
“아.”
야닌은 왜 에베소가 검을 쥔 채 죽었는지 이해했다. 본래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도 부모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던 모양이라고.
“그럼 저 괴물 시체는…….”
“수습해서 태워야지. 그보다 당숙 부부의 시신은 부검실에 옮겨놓고 마을에서 장의사를 불러다 장례 준비를 해. 난 이제부터 뒤처리를 하러 가야 하니 그런 줄 알고.”
야닌은 라비린이 너무 냉정한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비상상황이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에베소 일가의 시신은 재빨리 치워졌다. 기도실을 따로 쓰고 있던 사람 중에서 괴물로 변이하는 자가 나왔다는 게 몹시 충격적이었다. 만약 기사가 먼저 발견했다면 불필요한 희생은 없었을 거란 점에 다들 동의했으나, 타우레드의 성을 가진 이들을 고용인들과 함께 기도소 바닥에 뒹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기사들의 업무가 대폭 늘어났다. 이제 그들은 피난처를 감시, 순찰하는 동시에 시시때때로 타우레드 일족이 머무는 기도실 문을 열어봐야 했다. 처참한 꼴을 보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쓰러진 로샨의 업무는 고스란히 라디아타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이전처럼 라디아타를 도울 수가 없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문의 안주인이 하는 일을 맡길 수는 없다나. 그렇다고 이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려니 도움 받는 당사자가 껄끄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결국 오드리는 아무 일도 없이 빈둥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드리는 후계자의 약혼녀로서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라비린은 오드리를 거의 격리하다시피 했다. 타인과 함께 있는 게 두려워 피난처를 빠져나간 사람들을 찾는 것도, 구호품을 배분하는 것도, 하다못해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조차 그녀의 몫이 아니라면서.
“얌전히 보호받는 것도 일이야. 베텔 경을 붙여줄 테니 넌 가만히 있어. 아무 것도 하지 마.”
“왜? 내가 아직 헨젤이라서?”
“물론 그것도 있지. 너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와줬는데, 그런 너를 못 지키면 그게 무슨 창피야.”
라비린이 오드리의 어깨에 큰 숄을 둘러주었다. 오드리가 멀어지는 라비린의 손을 낚아채 쥐고 그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그게 다야?”
친족의 시체를 수습하고 온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침착하던 표정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시신을 내 손으로 수습하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잡혔던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이 어찌나 차가운지, 늘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체온을 자랑하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뾰족하게 곤두섰던 신경이 단번에 허물어졌다.
“너……. 괜찮아?”
“네가 멀쩡한 지금은 괜찮지.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가 괜찮을 수 있도록 몸을 사려.”
“라비린, 너 지금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 잠깐이라도 쉬는 게 좋겠어.”
까칠하게 일어난 피부와 핏발선 눈, 거뭇하게 내려앉은 눈 밑 그늘이 이제야 눈에 보였다. 오드리는 라비린을 끌어당겨 제가 앉았던 의자에 앉히고 라비린이 덮어주었던 숄을 벗어 그의 상체를 덮었다.
“침대가 아니라 좀 그렇지만……. 자.”
“안 돼.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셨어……. 당장 가야 돼…….”
일어나려고 시도하던 라비린은 오드리의 손길에 동작을 멈췄다. 체구 차이만 해도 머리 하나 이상이고 오드리가 딱히 강압적으로 누르는 것도 아닌데 어째 거역할 수가 없었다. 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와 뇌에 들러붙었다.
오드리는 입만 살았지 고분고분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라비린이 몹시 낯설었다. 제 손 따위는 단번에 치워 버리고 뚜벅뚜벅 걸어 나갈 것처럼 말하는 주제에 몸뚱이는 인형처럼 얌전했다.
“이런 시국에 후작님이 자리를 비우셨다고? 어쩌다?”
라비린은 고개를 흔들며 졸음을 쫓으려 애썼다. 이상하게 자꾸 눈이 감겼고, 말을 잇는 게 힘들었다. 머리가 둔했다.
“어젯밤에 성 바로 근처의 마을에서도 괴물이 나왔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경비대가 발견하고 목을 쳐서 죽이긴 했다는데 아무래도 불안하셨는지……. 금방 오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안 들어오셨어.”
오드리의 등에 소름이 쭉 돋았다. 성 근처의 마을이라면 라비린과 함께 둘러본 적도 있는 곳이었다. 우편마차가 들어오는 곳이라 분위기가 활기차고 수확제 뒤라 사람들의 인심도 넉넉했다. 도련님의 약혼녀를 만나게 되다니 영광이라며 간식을 챙겨주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알룬드의 목걸이는 그 마을에 있었던 적이 없어. 그럼 원인이 정말 나…… 나인가?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헤세가 가장 먼저 변한 게 말이 안 돼. 나는 상관없어.’
얼굴 아는 사람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보다 자신이 사태의 원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게 먼저라니! 오드리는 매정한 자신에게 혀를 차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보단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건 누가 알아?”
“가야 돼…….”
“라비린. 라비린?”
가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던 라비린의 눈꺼풀이 굳게 닫혔다. 그새 잠들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태연하게 행동했다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그가 짊어지고 있을 부담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했다.
‘괴물은 사람이 변해서 생기는 거야. 타우레드의 기사들이 벤 괴물은 전부 언젠가는 라비린이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을 테지…….’
오드리는 만탈락의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고, 자신이 책임자가 되어 그들을 죽이는 걸 상상했다. 단지 상상일 뿐인데도 금세 이마에 땀이 나고 등에 소름이 돋았다. 라비린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져 잠든 게 이해가 됐다.
오드리는 이렇게 무방비한 표정의 라비린은 처음 보았다. 웃는 것도 비뚤어진 것도 아닌 입술은 약간 창백했고, 긴 속눈썹이 눈 밑의 그늘에 농도를 더했다. 어쩐지 신기한 기분으로 뺨을 톡, 건드렸다.
“으음…….”
라비린이 눈썹을 찡그리며 뒤척거렸다. 오드리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가슴이 마구 뛰었다.
‘깨워야 하는데.’
성을 지켜야 할 영주인 타우레드 후작이 자리를 비운 건 당연히 후계자인 라비린을 믿고 그런 것일 테다. 부재한 시간이 길어지는 게 의도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만탈락을 경영해 본 오드리는 이런 상황에 머리가 비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수하의 충성심이나 능력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파격적인 결정이 연달아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시기에는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니 당장 라비린을 깨워 일하라 보내는 게 마땅함을 알면서도, 오드리는 망설였다. 까무룩 잠들어 버린 라비린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가 않았다. 배려 받는 장본인이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드리는 무심결에 그의 목깃에 닿도록 숄을 끌어올려 덮고 나서야 자신이 한 짓을 알았다. 아마도 자신은 라비린이 잠깐의 휴식을 즐기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긴 속눈썹이 그려낸 그늘을 보는 거나 고른 숨소리를 듣는 게 의외로 즐거웠다.
‘라비린이 만날 날 보호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이런 기분이라 그랬던 건가…….’
계속 자게 내버려 뒀다간 나중에 깨서 잔소리를 퍼붓고 화를 내겠지만, 그쯤이야 그냥 감수해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잠이 모자란 상태에서는 멍청한 결정을 내리기도 쉬운 법이니, 라비린이 낮잠 조금 자는 건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한 후, 오드리는 발소리도 없이 사뿐사뿐 기도실을 나왔다. 그리고 본래 라비린이 갔어야 할 집무실을 찾아가 그가 쓰러지듯 잠들었다며, 웬만하면 재우고 싶지만 정 상황이 급하면 깨우겠다고 말을 전했다.
“주무신다고요?”
“그래요. 의자에 앉혀두었을 뿐인데 금세 잠들더군요.”
“세상에……. 도련님이? 낮잠 같은 걸 잔다고?”
“야닌 경이 밤새 깨어 있었던 것 같다고 하더니, 진짜 그랬나 본데.”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라워하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수군 말을 나눴다. 집무실을 채운 사람들이 죄다 타우레드의 친인척이라 오드리는 불편한 기분으로 자꾸 문을 흘끗거렸다. 괜히 재웠나, 역시 깨우는 게 좋았으려나, 하고 후회가 들 때쯤, 그들이 대뜸 오드리에게 자리를 내주곤 일거리를 떠넘겼다.
“중요한 일은 아니고, 검토만 좀 해주시면 됩니다.”
“아니, 내가 뭐라고 이런 걸 다 떠넘겨요?”
좀 전까지 할 일을 찾아 성을 배회하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주가 해야 할 일을 받아드는 건 좀 아니었다. 라디아타가 후작부인의 일을 오드리에게 맡길 순 없다고 했던 걸 생각해 봐도 그랬다.
“난 그냥 라비린의 약혼녀일 뿐인데!”
“하하, 차기 후작부인이시죠. 본래 가주가 부재중일 땐 부인이 그 자리를 채워주시는 겁니다.”
“후작부인이 멀쩡히 계시고 라디아타도 있어요. 내가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오드리는 앞에 쌓인 서류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아무래도 당장 라비린을 깨워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채 책상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말이 오드리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후작부인은 쓰러져 계시고 라디아타 아가씨는 후작부인 대리를 하느라 바쁘시죠. 후작부인이나 벨키스 경이 깨어나면 곧바로 넘길 테니 잠깐 구멍만 메워주시면 됩니다.”
“레이디 헨젤은 만탈락을 경영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만탈락의 번영은 저희들 사이에서도 꽤 화제입니다.”
만탈락 얘기가 나왔는데 회피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드리는 도로 자리에 앉아 울며 겨자 먹기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중요한 일은 아니라더니, 순 거짓부렁이네요.”
“벨키스 경이 현장에서 구두로 지시한 사항을 추려서 서류 형태로 꾸려낸 겁니다. 중복되거나 충돌이 있을 법한 것들, 다시 살펴야 하는 것들만 따로 빼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내가 서명하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쯤이야 못할 것도 없죠. 나중에 라비린에게 꼭 확인받으세요.”
“아무렴요.”
오드리는 금세 일에 빠져들었다.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서류 보기로 채우던 나날이 바로 몇 달 전이었다. 지금은 릴리와 이디케에게 많은 부분을 맡기고 최종 결재 정도만 하는 형편이지만 그렇다고 몸에 익은 속도나 집중력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녀 앞에 쌓였던 서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보기만 한다더니, 끄적끄적 추가로 기입하는 것들도 잔뜩이었다.
“과연 만탈락의 주인이오. 양식이 다를 텐데 헤매는 것도 없고 따로 묻지도 않으시는군.”
“벨키스 경이 대체 어떻게 레이디 헨젤의 마음을 얻었을까 궁금하지 않소?”
“그건 잡지에 많이 나오더이다. 난 그보다 벨키스 경이 레이디 헨젤 앞에만 가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하는 게 더 무섭소. 아무리 못 본 시간이 길다지만 그 정도면 숫제 사람이 바뀐 수준 아니오?”
“아, 그건 그렇소만……. 그거야 지금 후작도 마찬가지잖소. 부인 앞에만 서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 되는데.”
“아비를 닮은 거군.”
로렐라이는 여전히 단주를 숨긴 채 영업 중이고 타우레드 후작은 친인척들에게 따로 해명을 하지 않았기에, 라비린이 로렐라이에서 일했던 시간은 여전히 그의 경력에 있어 커다란 공백이었다.
알게 모르게 라비린의 능력을 의심하던 사람들은 오드리의 속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정략과 상관없이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한 상대가 신분도 맞고 부족한 곳을 충실하게 메워줄 수도 있는 사람이라니 라비린 녀석 참 복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슬금슬금 책상 위에 추가 서류가 쌓였다. 오랜만에 서류에 빠진 오드리는 좀처럼 양이 줄지 않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잠에서 깨고 서둘러 달려온 라비린에게 보던 서류를 빼앗기고 나서야 상황을 알아챘다.
거의 다 끝났을 거라 생각했던 서류는 오히려 처음보다 더 많이 쌓여 있었고 오랜만에 깃펜을 쥔 손가락엔 잉크가 까맣게 묻었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빵과 차를 보자 끼니를 거른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하……. 어쩐지 배고프더라.”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네 땜빵했지. 아, 내가 만년필에 너무 익숙해졌나봐. 손이 이게 뭐람. 라비린, 만년필 보급된 지가 언젠데 왜 여긴 아직도 깃펜인 거야?”
정작 오드리는 마른 빵을 씹고 차게 식은 차를 마시면서도 태연하건만, 그 꼴을 보는 라비린은 속이 뒤집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걸 체감했다. 그는 빼앗은 서류를 흔들며 화를 냈다.
“날 깨웠어야지!”
오드리는 생각 이상으로 화를 내는 라비린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짚이는 바가 없지 않으니, 그녀는 입에 들은 빵을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고 벌떡 일어나 라비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역시 내가 너무 주제넘었나 봐. 아직 혼인식을 올린 것도 아닌데 멋대로 서류를 보고. 미안해, 잠깐이라면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걸 말하는 게 아냐!”
“그럼? ……아, 잠에서 깨우지 않아서 화내는 거야? 그것도 미안해. 네가 하도 곤히 자기에, 조금이라도 더 자게 해주고 싶었어.”
슬쩍 라비린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오드리는 평소답지 않게 살짝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라비린은 그런 오드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푸스스 식어버린 자신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던 감각을 되살려 보려 애썼지만 영 헛수고였다.
“……그래도 깨웠어야지. 내가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랬어?”
“아무 일도 없었어, 일이 있었으면 당장 깨웠을 거야. 너 자는 방 앞에 기사 한 명 대기시켜 뒀었는데 못 봤어?”
“그런 거 볼 정신이 어디 있어. 잠에서 깨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네가 알아? 다시는 그러지 마.”
“음……. 네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은 가. 안 그래도 나중에 잔소리 엄청 듣겠다 싶었거든.”
오드리가 라비린을 끌어 의자에 앉히고 그에게 서류를 떠넘겼다. 라비린은 뼈도 없이 흐물대는 사람처럼 그녀가 이끄는 대로 자세를 잡고 깃펜을 쥐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오드리의 얼굴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
“그치만 다음에는 안 그러겠다는 약속은 못해. 아까처럼 네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 걸 뻔히 보고도 모른 척 할 수는 없어.”
“왜?”
“왜냐니, 그런 걸 왜 물어? 당연한 거 아냐?”
라비린은 손을 뻗어 오드리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떼어냈다. 느릿하게 입술을 쓰는 손길에 오드리의 주의가 죄다 그리로 쏠렸다. 공연히 등줄기가 간지러워 몸을 뒤로 빼려는데, 라비린이 그녀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고 달착지근하게 속삭였다.
“걱정했어?”
오드리는 라비린을 확 떠밀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귓가에 닿은 솜털 같은 숨결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심장이 감당 안 될 정도로 뛰었다. 얼굴 전체가 홧홧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뺨이 상상됐다.
“거, 걱정은 무슨!”
“걱정했네.”
“아냐!”
“뭘 그렇게 부정해? 걱정이야 할 수도 있지. 친구 사이에.”
라비린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말이야 맞는 말인데, 오드리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어째 그 말에 동의했다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벌써 가게?”
“네가 일어났는데 내가 계속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좀 더 있어주면 좋겠는데.”
“아니, 갈게. 오랜만에 서류를 봤더니 피곤해. 다이앤이 잘하고 있나 확인도 해야 하고, 라디아타도 보고 싶고…….”
오드리는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까 뜨뜻하게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가 전혀 가시질 않아서 그런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그럼 가서 쉬어. 베텔 경을 불러두었으니 같이 가고. 다이앤은 네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깨자마자 바로 왔다며 둘은 언제 부른 거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그냥 놀랐다고 했지. 라디아타에게 굳이 갈 필요는 없으니 바로 방에 가서 쉬어. 베텔 경에게 단단히 말해두었으니 다른 곳으로 빠질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으…….”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낮에는 괴물이 추가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밤에는 다를지 모르잖아. 오드리, 곧 해가 져. 제발 부탁이니 안전한 곳에 안전하게 있어. 네가 날 깨우지 않았던 그 마음으로 내가 네 안전을 바라고 있으니까.”
라비린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조금 전의 짓궂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묘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서늘하고 창백한 마법등의 빛이 일순 한낮의 따스한 햇볕 같아 보였다.
“이젠 내 마음을 이해하잖아. 그렇지?”
가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드리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뛰쳐나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오드리 아가씨!”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프러스가 놀라 이유를 물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는 라비린이 어떤 달콤한 말을 하고 다정하게 굴어도 아무 감흥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마음이 울렁거리는지.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난 셰비언을 사랑하는 거 아니었나? 그새 마음이 바뀐 건가? 아냐, 그를 생각하는 건 예전과 다르지 않아. 그럼 이건 뭐지? 뭐가 진짜지? ……아니, 내가 셰비언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 맞긴 했나? 그냥 마력 때문에 끌렸던 걸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고?’
처음 겪어보는 감정의 혼란은 오드리에게 몹시 버거웠다. 카프러스의 부축을 받아 제 몫으로 주어진 기도실로 돌아간 그녀는 그대로 앓아누웠다. 놀란 다이앤이 라디아타에게 부탁해 의사를 불러오는 등 수선을 피우는 동안 해가 기울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자 성은 밤을 준비했다. 기사들은 자신의 배치를 확인하고 무장을 점검했으며, 변이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밤을 경계할 것을 주문받았다. 마법등의 뚜껑이 전부 벗겨져 성내는 대낮처럼 환한 빛으로 가득 찼다.
라비린은 서류를 보느라 뻐근해진 몸을 풀며 혹시 모를 전투를 준비했다. 부디 해가 뜰 때까지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지만,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희망이란 것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깊은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아버지는 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지…….’
금방 돌아올 것처럼 나간 클로드는 아직까지 귀환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단신으로 나가지 않았고 괴물은 기사 한 명으로도 웬만큼은 상대가 됐다. 괴물이 나온다는 걸 알고 나간 상태에서 방심했을 리도 없었다.
당연히 무사할 거라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부재가 길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라비린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 이들이 오드리에게 서류를 떠맡겼고 라디아타는 후작부처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개똥만도 못한 영감탱이.”
채 속으로 삭이지 못한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라비린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도 않고 이를 득득 갈았다. 문제가 될 거란 걸 뻔히 알면서 이렇게까지 오지 않는다니, 차라리 크게 부상이라도 당해서 오면 좋겠다.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히 돌아오면 자신이 나서서 목을 졸라버리고 싶어질 게 분명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대체 누가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나 했더니, 라디아타였다. 라디아타는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몸을 푹 묻고 피로로 딱딱하게 굳은 목을 주물렀다.
“이 시간에 네가 여기 있으면 어떡해? 나도 곧 나갈 거라 여긴 빌 거야. 돌아가서 기사들에게 보호 받으며 쉬고 있어.”
“이런 시간이 아니면 오라버니를 어떻게 혼자 만나요? 그보다 나는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오라버니는 아주 안색이 좋네요.”
라비린은 머쓱하게 얼굴을 쓸었다. 낮잠은 본의가 아니었지만 덕분에 머리도 명료하고 몸도 가벼웠다. 로샨이 애쓰는 가운데에도 고용인을 한 손에 넣고 있었던 라디아타이니, 분명 사정을 다 알고 하는 말이다.
“내일은 수색대를 보낼 거죠?”
“그 전에 오시겠지.”
“아뇨, 날이 밝으면 바로 수색대를 보내서 아버지를 모셔오는 게 좋겠어요. 사정이 있어서 늦으시는 거겠지만 설마 성내에서 괴물이 또 나오는 줄은 모르시겠죠.”
“네가 이렇게 곤두선 걸 보니까 상황이 몹시 나쁜 모양이지?”
“아직은 괜찮아요. 사건이 충격적이긴 해도 하룻밤에 한 명 변한 거니까. 본래 사람은 자기 일이 아니면 괜찮거든요. 그보다 마법사들이 문제죠. 돈을 물처럼 처먹는 미친놈들이 브란젤에 가서 해결책을 알아오겠다고 주절대고 있거든요.”
라디아타는 꽤 화가 나 있었다. 평소엔 왕궁마법사쯤은 제 발치에도 못 미친다며 거드름을 피우던 놈들이, 막상 괴물이 제 앞에 닥치자 원인을 찾아낼 생각은 안 하고 도망칠 핑계부터 찾는 게 아주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은 말 같지도 않은 모양이에요. 분명 안 된다고 했는데 자꾸 여기저기 틈을 찌르면서 나가려고 시도하더라고요. 그러니 아주 말이 잘 먹힐 만한 사람이 필요해요.”
“아주 방자한 놈들이군. 그런 놈들을 그냥 둘 네가 아닌데, 어떻게 처리했어?”
“괴물 시체를 쳐다보는 것도 싫어하기에 연구 좀 해 보라고 친히 한 방에 넣어주었죠.”
라비린은 마법사들을 위해 속으로 애도를 빌어주었다. 라디아타가 험한 말을 입에 담을 정도로 화가 났으니, 정말 해결책을 찾아내거나 딱 죽기 직전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 풀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안 통할 걸 알지만 넌지시 말을 얹었다.
“내가 가서 말해주랴?”
“오라버니로 될 거 같았으면 내가 수색대 얘길 했겠어요?”
라디아타가 눈을 세모꼴로 떴다.
“지금이야 마법사만 문제라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 같아요? 지난밤과 같은 일이 한 번만 더 일어나면, 고용인이 아니라 친척 중에 한 명이 또 변하면? 다들 당장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겠죠! 따라온 고용인들도 아주 두 손 들고 환영할 테고요! 그걸 막으려면 타우레드 후작 작위를 가진 사람이 필요해요. 가장 위험한 곳에 작위를 가진 자가 없으면 어쩌냐고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날이 밝는 대로 수색대를 보낼 테니 그리 알고 넌 이만 돌아가. 난 밤새 순찰을 돌 거니까 또 생각나는 거 있으면 기다렸다가 그때 얘기하고.”
“오라버니, 아버지를 꼭 찾아와야 해요.”
“알았다니까.”
“그러면 오드리가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서류 처리를 할 일도 없어지겠죠.”
“……너, 수색대는 그냥 사족이고 실은 그 말 하려고 온 거지?”
“설마요. 나는 아직 약혼 상태에 불과한 오드리가 타우레드에 지나치게 엮이는 걸 경계하느라 변명을 쥐어짜내서 받을 수 있는 도움도 거절했는데, 누구는 태연히 서류 처리를 맡긴 걸 알고 화가 좀 나긴 했지만 그게 본론일 리가 있나요.”
손바닥 뒤집듯 표정을 바꿔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이지만, 곧이곧대로 듣기에는 매우 큰 무리가 따랐다. 하나 라비린도 만만치 않기는 마찬가지라, 그는 라디아타의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한술 더 떴다.
“역시 그렇지? 장차 왕자비가 될 내 동생이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우선했을 리가 없지. 그것도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말이야.”
“당연하죠. 우선순위를 살펴 행동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에요. 오드리가 기도실로 돌아오자마자 앓아눕지만 않았어도 오드리의 이름을 꺼내는 일조차 없었을 거예요.”
“……앓아누웠다고?”
장갑을 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라비린이 동작을 멈췄다. 라디아타는 다분히 보여주기 식으로 짓고 있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 일어섰다.
“이제까지 몇 번이고 밝혔지만 난 오라버니와 오드리의 결혼을 반대해요. 하지만 오드리가 이 성에 와 있는 이상 사람들이 그 애를 타우레드로 간주하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고, 그걸 막을 생각도 없어요. 그건…….”
“오랫동안 어머니 대신이었던 네가 반대하면 나중에 정말 결혼했을 때 오드리의 입지가 나빠질 테니까. 그렇지?”
“맞아요. 내 본의가 어떤지는 상관없이 그렇게 될 게 분명해서 잠자코 있었어요. 그 덕분에 오드리는 친척들 사이에서 이미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인 대우를 받고 있어요. 그러니 오라버니, 이제 오라버니가 오드리를 지켜야죠. 울 일 없게, 앓을 일 없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돌아오자마자 앓아누워요?”
“보호라……. 글쎄? 오드리 본인도 그걸 원할까?”
다다다 쏘아대던 라디아타가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라비린이 빙긋 웃으며 라디아타의 약을 올렸다.
“라디아타, 아무래도 너보단 내가 오드리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라비린은 입을 뻐끔대는 라디아타를 위해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계속 자신을 방해한다면 후작 대리로서 명령할 수밖에 없다는, 다소 강압적인 말까지 곁들여 그녀를 쫓아냈다.
후환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보다 앓아누웠다는 오드리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온통 그쪽으로 신경이 쏠리고 말았다.
‘오드리가…… 열일곱 살이었지.’
일부러 선정적으로 입술을 만지작댄 건 사실이지만, 겨우 그 정도에 그렇게 놀랐을 줄이야. 새삼 열일곱이라는 나이가 실감날 정도로 순진한 반응이었다. 예전에 기자들 앞에서 보란 듯 입술을 훔쳤을 때는 미간을 찌푸리고 손등을 꼬집은 정도로 끝났었는데 말이다.
“날 조금 의식하긴 하는 건가……? 진짜로? 내 짐작이 아니라 진짜?”
붉어진 채 좀처럼 가라앉지 않던 안색이 떠오르자 내내 차분하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라비린은 장갑을 벗어 오드리의 입술을 쓸었던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댔다. 입술에 닿은 손가락이 몹시 뜨거웠다.
순찰 중에 틈을 내서 반드시 만나러 가야지. 굳은 다짐이었지만 다짐은 다짐으로 끝났다. 자그마치 네 사람이나 괴물로 변이했기 때문이었다. 부엌에서 일하던 하녀 한 명, 하인 두 명, 그리고 정원사.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변이한 이들은 모두 예전부터 영주성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변이했고 변이하자 꽤 공격적인 기질을 보였지만, 서로를 감시하던 사람들이 변이 초기에 눈치채고 재빠르게 기사에게 넘겨 일이 커지지는 않았다.
라비린은 괴물이 된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목을 친 다음 지체하지 않고 불태웠다. 졸지에 화장장이 된 연무장은 하룻밤 내내 고약한 냄새를 피우며 회색 연기를 하늘로 뿜어냈다. 그 연기가 어찌나 짙고 거칠었는지, 마치 봉화대에서 불을 피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봉화 같은 연기는 성에서 꽤 멀리까지 떨어진 마을에 나가 있었던 타우레드 후작 일행에게도 보였다. 마을을 돌며 괴물이 나오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던 기사 한 명이 황급히 클로드에게 보고했다.
“후작님, 성에서…….”
“보았다. 또 괴물이 나왔나 보군. 괜찮아, 라비린이 잘하고 있을 테니. 마을은 어떤가?”
“아직까지 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염병이 돌 계절도 아닌데 앓아누운 주민들의 증상이 몹시 이상합니다. 몸의 일부가 붕괴해 소실됐고, 그 자리에서 마력이 줄줄 새어나옵니다.”
“마력? 웬 마력? 자네 마법사의 재능이 있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근처에 마법도구를 가져가면 죄다 망가진다고 하더군요. 마법등조차 작동을 안 해서 기름을 넣은 램프를 쓰고 있었습니다.”
“마법등은 마법도구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인 물건인데……. 그건 확실히 이상하군. 일반적인 병이 아니야. 지도를 가져오게.”
클로드는 이제껏 마을을 지나치며 보아온 이상 현상을 지도에 기록해 왔다. 괴물 출몰, 앓아누운 사람들, 갑작스러운 마법도구의 고장……. 촘촘히 지도를 메운 표시들을 노려보던 후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거 아무리 봐도 성이 중심지인데. 자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예. 성에서 멀어질수록 발생 빈도도 줄고 사건의 강도도 약해집니다. 이렇게 선으로 표시해 보면…….”
“마치 수면에 이는 파문 같군.”
한번 생겨난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서로 부딪치고 흔들리며 새로운 파문을 만든다. 중심지인 성에서 벌어진 사건이 일회성이 아니니 주변지역의 혼란은 이제 시작인 거나 다름없었다.
“치안대에서 끼어들고 싶어 아주 난리를 부리겠어.”
“이미 상당부분을 내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더요?”
“타우레드의 영지민들은 치안대보다 가문의 기사들을 더 신뢰하지. 발언권도 더 높고 영지에 대해서도 잘 아니까……. 그게 불만인 거야. 영지의 치안을 완전히 장악해서 내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고 싶은 게지.”
“보병은 다 해체한 지 오래고 기사도 치안을 위해 최소한으로만 남겨두는데 아직도 부족하다니요.”
“헨젤을 보게. 남부 대평원의 주인이라지만 겨울이 되어도 영지로 내려가지 못하고 왕궁에 잡혀 있는 꼴을. 거기 대리인은 주인의 얼굴도 까먹었을걸세. 타우레드 역시 그 정도는 되어야 만족하시겠지.”
클로드는 저 멀리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연기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체를 태우는 게 분명할 저 연기가 타우레드의 앞날에 낀 먹구름처럼 보였다.
“이게 타우레드 영지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기를 바라야겠군.”
“왜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래야 감히 국왕전하의 심기를 거스르고 본가에 가더니만 벌을 받았다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을 테니.”
“이왕이면 브란젤에서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주종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킬킬 웃었다. 심각하던 분위기가 아주 약간 부드러워졌다. 기사는 지도를 둘둘 말아 치우며 물었다.
“연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마법도구를 고장내는 환자들의 상태를 좀 더 살피고 가세. 혹 괴물로 변할 기미가 보이면 처분해야지.”
클로드는 귀환을 미뤘다. 성에는 라비린이 있으니 하루 이틀 더 미룬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라 믿었다. 겨우 하루 이틀인 것이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은 믿음이 전해지길 바라는 것만큼 무용한 게 없다. 라비린은 이젠 숫제 화형장처럼 보이는 연무장에 서서 돌아오지 않는 클로드를 향한 욕을 곱씹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아들에게 싫은 일을 다 떠맡기고 나가 있으니 마음 편하고 좋은가 보지. 어떻게 전령 하나도 안 보낼 수가 있어?’
어제 낮에 태운 괴물 시체는 기름뿌린 장작처럼 잘 탔는데, 지난밤에 새로 나온 괴물 시체는 흉한 꼴로 오그라들고 까맣게 그을려 끔찍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좀처럼 타질 않았다. 보통 시체와 비교해도 몹시 늦었다. 아무래도 괴물화 정도에 따라 잘 타고 안 타고가 다른 모양이었다.
마지막 시체가 불 속에 던져진 지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날이 밝았다. 연무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던 라비린은 동쪽 하늘이 파르스름하게 밝아오는 걸 보고서야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괴물이 나타나고 세 번째 맞는 아침이었다.
“또 하룻밤을 넘겼군. 다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벨키스 경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비린의 격려를 듣는 기사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웃는 얼굴에서도 그늘이 느껴졌다. 희망 없는 시간은 견디기가 어렵다. 언제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고 살타는 냄새를 맡아야 하는지 모르니 심력의 소모가 대단했다.
“다들 얼굴 펴. 윌레 경의 연애편지도 아니고 표정이 그게 뭔가? 곧 괜찮아질 거야. 브란젤에서 채 이틀도 되지 않아 사태를 해결했는데 여기라고 못할라고? 아버지가 괜히 성을 비운 게 아니니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벨키스 경, 말씀은 알겠는데 거기에 왜 제 연애편지가 나옵니까?”
“만날 쓰다가 구겨서 버리잖아. 한 통이라도 보냈으면 몰라……. 쯧쯧. 버려지는 종이가 아까우니 이젠 제발 보내. 계속 그러다간 케이린이 진절머리를 내고 떠나갈 거야.”
“케이린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공들여 쓴 연애편지를 받는 것도 한 재미라고요.”
“저번에 독촉 받는 거 다 봤어.”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남의 연애, 그것도 망한 연애만큼 재미있는 얘기가 또 있을까. 윌레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혔지만 대신 전체적인 분위기는 훨씬 좋아졌다.
그렇게 기분 좋게 일을 마무리하려는데, 안쪽의 감시를 맡았던 기사가 일련의 무리를 연행해 왔다. 조금 낡고 더러워지긴 했을지언정 멀쩡히 고용인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뭐지? 괴물로 변해가는 사람들 같진 않은데?”
“식량을 훔쳐 도주하려던 자들을 잡았습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하녀 하나, 하인 하나로 구성된 도둑들은 모두 에베소 일가의 집에서 일하던 자들이었다. 급료를 주던 주인 일가가 전부 유명을 달리한 상황에서 괴물이 나오는 성에 계속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돈이 될 만한 비싼 걸 훔쳤다간 추적이 들어올 테니, 잔뜩 쌓인 식량을 조금만 훔쳐서 도망갈 요량이었다고 했다.
라비린은 하도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왔다. 겨울이 오면 식량은 그 무엇보다 귀한 재산이 된다. 심지어 올해는 가뭄이 독하게 들었으니 까짓 금붙이 조금보다 식량이 귀해질 게 뻔했고, 성에 쌓인 식량은 가난해 굶주리는 영지민을 위해 비축한 구휼미가 대부분이었다.
“상황판단이 빠른 자들이로군. 어차피 사람들이 계속 괴물로 변하니, 사람 두세 명 사라진 걸로는 티도 안 날 거라 여겼다 이거지……. 괴물이 되어 죽었거나 괴물에게 죽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
사실, 첫날에 변한 사람들이 대체 누구인지 아직 다 파악하지도 못했다. 변하면서 얼굴이 엉망이 된 이들이 많은 데다 시신을 태운 상태라 라디아타는 명단 작성에 애를 먹는 중이었다. 게다가 모여 있길 겁내는 사람들이 자꾸만 구석으로 숨어드는 통에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실은 살아 있었던 일이 왕왕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만약 식량을 훔쳐갈 생각만 하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몰래 빠져나가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구석에 숨으려나 보다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거나, 급료를 줄 주인도 없는데 앞으로 어찌 살겠냐며 도주를 눈감아주는 이가 분명 있었을 테니.
하나 그건 가정일 뿐이고, 라비린은 예외 없이 원칙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었다.
“그럼 그 소원대로 해주지. 오늘 밤 나타난 괴물은 여섯이다. 목을 자르고 태워.”
해쓱한 얼굴로 라비린만 바라보던 도둑들이 비명을 지르며 라비린에게 매달렸지만, 기사들의 제지에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살아보겠다는 발버둥은 금세 기사들의 억센 손에 제압당했고, 그들은 바닥에 머리를 짓눌린 채 울며 애원했다.
“베, 벨키스 경……!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입부터 막고 끌고 가.”
“으읍……!”
아주 작은 구멍이 둑을 무너뜨리는 법이다. 제 목숨을 먼저 챙기려 제 몫이 아닌 식량을 훔치려 드는 행위가 있었다는 게, 그러고도 살아남았다는 게 주변에 알려지면 그땐 수습할 수도 없이 구멍이 늘어날 게 뻔했다.
그러나 그 도둑들 역시 본래는 라비린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오드리를 만나러 가려던 걸 미루고 도둑들의 처분을 지켜보았다. 기사들의 처리는 신속하고 깔끔했기에, 도둑들은 순식간에 목이 잘려 장작더미에 던져졌다.
“피를 깨끗하게 닦아야 할 거야. 날도 밝았는데 붉은 피가 저렇게 흥건한 걸 보면 괴물이 아닌 사람을 죽였을까 다들 의심하게 될 테니.”
라비린은 심장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오드리가 대뜸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내내 검을 쥐고 순찰을 돌면서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놓았는데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니 어이가 없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 역시 한 마음으로 당황하는데, 장본인인 오드리만 영문을 모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내가 한 조언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게 아니라…….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서 놀란 거야. 베텔 경은 너에게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예전에 배운 거 말곤 새로 배운 거 없는데? 신경이 온통 눈앞의 광경에 쏠려서 그랬겠지.”
혼자라면 모를까, 평생 검으로 먹고 산 사람들이 몇인데 그 사람들 전부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오드리가 승마 이외엔 따로 몸을 단련한 적이 없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라비린은 찝찝함을 눌러 삼키고 오드리를 돌려세웠다.
“그래, 내가 못 들은 거겠지. 피는 바로 닦을 테니까 넌 들어가서 쉬어. 어제는 앓아누웠다더니 동 트자마자 왜 이런 곳엘 와?”
“아팠던 건 다 나았고, 동이 텄으니까 온 거야. 해가 떴으니까 네게도 조금은 숨 돌릴 틈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어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윌레가 라비린의 등짝을 쿡 찔렀다. 그리곤 빨리 꺼지라는 듯 파닥파닥 손짓했다. 자리 정리쯤은 기사들만으로도 할 수 있으니, 당신은 얼른 약혼녀와 시간을 보내라는 듯이.
“윌레 경?”
“크흠흠. 약혼녀 되시는 레이디 헨젤께서 따로 하녀를 보낸 것도 아니고 이렇게 직접 찾아오셨는데 설마 그냥 돌려보내려고 하시는 건 아니시죠?”
“경은 별걸 다 신경쓰는군.”
“레이디 헨젤께서 직접 오셨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벨키스 경처럼 강심장이 되질 못해서 연애편지 한 장도 못 쓰는 소심한 인간은 벌써부터 가슴이 막 두근두근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벨키스 경, 빨리 가시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윌레에게 연애 관련 조언을 듣고 싶진 않은데, 사방에서 말을 얹으며 라비린을 압박했다. 어찌된 일인지 오드리도 그런 기사들에게 사양의 뜻을 밝히거나 말리지 않으니, 라비린은 어쩔 도리 없이 등이 떠밀려 연무장을 떠났다.
“덕분에 쫓겨났어.”
“주인의 연애까지 챙겨주다니, 사랑받는가 보지.”
“입 발린 소리 하기는. 왜 날 찾은 거야? 그것도 다이앤도 안 달고 혼자서. 베텔 경은 네가 이러는 거 알아?”
“조금 전의 광경을 다이앤이나 베텔 경이 봤으면 큰일이었다는 것쯤은 알지. 자애로우신 국왕전하께서는 평민에게도 재판을 받을 권리와 무죄를 주장할 권리를 부여하셨는데, 감히 영주도 아닌 일개 남작이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않은 사사로운 판결로 두 목숨을 거두었으니 말이야.”
따로 할 말이 없어진 라비린은 입을 꾹 다문 채 복도에 누가 있는가 살폈다. 다행히 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드리가 그런 그의 앞에서 해사하게 웃었다.
“기사들도 그걸 모를 리 없는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실행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 과연 타우레드의 기사다워.”
“그런 얘기 하려고 온 거야?”
“설마 그럴 리가. 난 네게 여유 시간이 있다면 잠시 차라도 한잔할 수 있을까 싶어서 간 거야.”
라비린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휘적였다.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 네가? 나랑?”
“왜? 약혼자들끼리 차 한잔하자는 게 뭐 이상해?”
“이상하진 않은데…….”
라비린은 홀린 듯 오드리를 따라 그녀가 머무는 기도실에 들어갔다. 아카시아 향기가 밴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확 쏟아졌다. 새벽의 찬 공기에 얼은 줄도 몰랐던 얼굴 가죽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앉아.”
“……잘 꾸며놨네.”
벽에 두른 태피스트리와 방에 뿌려둔 향수 덕분인지 오드리의 기도실은 농성을 위해 준비된 폐쇄공간이라기보다는 카페 로열에서 제공하는 단독 공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다이앤이 금세 다과상을 차려내고 연둣빛 차를 찻잔에 따르기까지 하자 그런 분위기는 두 배가 됐다.
“다이앤이 힘썼지.”
“내가 쓰는 기도실과 기본 구조는 똑같을 텐데 전혀 모르겠어. 태피스트리는 왜 저리 많이 걸었어? 사방이 난리네.”
“내가 만탈락에서 자라서 그런지 추위를 많이 타. 예년보다야 덥다지만 해가 지면 추워. 너도 그럴걸? 봐, 코가 이렇게 빨개졌네.”
오드리가 라비린의 코를 톡 두드렸다. 그 닿은 지점에서부터 열기가 훅 퍼졌다. 라비린은 서둘러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감기만 안 걸리면 되지.”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거야?”
“잘 먹고 잘 쉬면 돼.”
“그래? 그럼 여기서 좀 쉬다가든지.”
쿨럭! 쿨럭쿨럭! 막 목구멍을 넘어가던 차가 턱 걸리고 말았다. 라비린은 목이 아프도록 기침했다. 사레가 아주 단단히 들렸는지, 눈가에 눈물마저 맺혔다.
“내, 내가 왜 여기서 쉬어? 난 내 기도실에 가서 쉴 거야. 거기도 침대 있어!”
“이 방을 나가서 바로 쉴 수 있어? 아니잖아. 이번엔 제때 깨울 테니 잠깐이라도 눈 붙이고 가.”
“설마 나 재우려고 불렀어?”
“응. 다이앤, 잠시만 나가 있어.”
오드리가 다이앤을 내보냈다. 라비린은 다시 한번 제 귀와 눈을 의심했다. 오드리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약혼하기 전 스캔들을 내고 다닐 때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지만,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남들 보기에도 꽤 건전한 만남만을 가졌다.
그건 오드리가 타우레드 본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라디아타를 끼워 셋이서 만나거나 혹은 다른 믿을 만한 사람과 동석해서 시간을 보냈다. 단둘이 있을 때는 뭔가 큰 일이 생겼거나 비밀을 지켜야 하는 얘기를 할 때뿐이었다.
다이앤이 나가고 기도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섬뜩했다. 라비린은 잔뜩 긴장한 채 등을 빳빳하게 세우고 추궁했다.
“재우려고 불렀다는 거 거짓말이지? 대체 뭐야, 무슨 무서운 얘길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
“나 참……. 사실을 말해줘도 믿지를 못하네. 내가 너에게 그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어?”
“그런 게 아니라, 네 행동이 예전과 다르니까 하는 말이잖아.”
오드리는 찻잔을 쥔 채 눈을 내리깔았다. 라비린의 말이 맞았다. 약혼은 어디까지나 정략이라고, 마음 같은 건 아무것도 없대놓고 이렇게 다정한 약혼자인 척 배려를 하겠다고 들면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앓았다더니,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딱히 다른 일은 없었어. 다만,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을 뿐이야.”
“그게 대체 뭔데 내가 자야 하는 건데? 내가 자야만 확인할 수 있는 거야?”
“그냥 쉬었다 가라는 건데 이유를 꼭 캐물어야겠어? 너에게 나쁜 것도 아니잖아.”
비슷한 질문과 대답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하지만 라비린은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고 자꾸 잠을 강요하는 오드리에게 설득되지 않았고, 아직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오드리는 흐르는 시간만큼 밀려드는 초조함과 짜증을 삭히느라 쉴 새 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라비린에게 아주 약간의 여유라도 있었다면 그걸 보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곧 생각의 방향을 바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날밤을 샌 직후였고, 심력을 갉아먹는 판결을 내리고 오는 길이었다. 시야가 좁아진 게 오로지 그의 탓은 아니었다.
“정말 내게 나쁜 일이 아니면 이유를 얘기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사전에 말할 수 없는 이유라면 바로 돌아가겠어.”
그리고 오드리는 지배자가 되는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었고, 실제로 도시 하나의 주인이었다. 오드리는 거센 추궁에 어서 대답해야 한다는 압박감, 혹은 라비린이 왜 저럴까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는가에 대한 불쾌감을 먼저 느꼈다.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됐어, 마음 바뀌었으니 가. 시간 뺏어서 미안하게 됐어.”
“이왕 시간 버린 거, 이유라도 들어야겠는데?”
“바로 돌아가겠다면서. 가.”
“이유 듣기 전엔 안 가.”
라비린이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버텼다. 눈썹을 씰룩이며 같이 짜증을 내던 오드리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항복 표시를 했다.
“어젯밤에 네가 그랬지. 네가 나를 보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제는 나도 알지 않느냐고. 잠깐이나마 그 말에 흔들렸어.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었지.”
“……뭐?”
“네가 편안히 잠든 모습을 다시 보면 어제 그랬던 것처럼 또 가슴이 뛸까 궁금했거든.”
“그런 거면 빨리 얘기해 줬어야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말하기 싫었다, 왜! 하지만 이제 마음이 바뀌었어. 네 자는 모습 같은 거 하나도 안 궁금해. 그러니까…….”
라비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는 반쯤 남아 있던 차를 홀짝 들이마시고 냉큼 침대 옆에 세워둔 파티션을 젖혔다. 오드리가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등짝을 철썩 후려쳤다.
“어딜 누우려들어? 나가!”
“이불에서 좋은 냄새 나. 향수 뿌려뒀어?”
“나가라니까!”
“실은 아까부터 굉장히 졸립고 피곤했거든. 잠깐만 자고 갈게.”
“야!”
철썩철썩, 등을 때리는 오드리의 손이 굉장히 매울 텐데도 라비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연기를 의심케 하는 속도로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 영락없이 잠에 빠진 사람이었다.
“이……!”
오드리는 이를 득득 갈면서도 결국 때리기를 멈췄다.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진을 빼고 있으려니 손바닥이 너무 아팠다. 그녀는 침대 옆에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아 색색 숨소리를 내는 라비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피곤하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안색이 조금 창백했다. 긴 속눈썹이 부채처럼 펼쳐져 눈가에 그늘을 드리웠고, 입술 껍질을 잡아 뜯었는지 아랫입술에 피가 약간 맺혀 있었다. 언제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초콜릿색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숨자 화려한 이목구비가 어째 청초해 보였다.
“얼굴은 정말 내 취향인데.”
라비린 들으라고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얼굴은 내 취향인데 성격은 왜 이 모양이지?”
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울렸다. 본래 라비린은 코를 골지 않으니 순 오드리 들으라고 낸 소리였다. 하나 오드리가 그걸 알 리가 없으니, 그녀는 깜짝 놀라 급하게 숨을 죽였다.
‘피곤하다더니, 정말이었어?’
중얼거림 이후 숨까지 참고 지켜보는 내내 라비린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과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오드리는 그가 정말로 잠들었다고 착각했다. 뭐 이렇게 빨리 잠드는가 싶긴 해도 아주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하고 납득해 버렸다.
‘졸려서 짜증이 많았나? 하긴, 밤새 돌아다녔을 테니까…….’
한번 안쓰럽게 생각하니 이해심의 넓이가 한량없이 늘어났다. 아까 짜증을 내며 이유를 추궁하던 것도 그럭저럭 있을 수 있는 일 정도로 취급할 수 있을 정도로. 오드리는 약간 해쓱해진 얼굴을 멍하니 구경하다 손가락으로 뺨을 콕, 찍었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다.
어떤 방어기제도 없이 순하게 잠든 얼굴이 마음에 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났다. 꽃밭에 앉아 있으면 향이 묻고 안개 속에 서 있으면 모르는 사이 옷이 젖듯이, 붙어 있는 사이 라비린의 취향을 닮아버린 것만 같았다.
연약하고, 무방비하고,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에 마음이 가다니……. 열이라도 오른 듯 뺨이 화끈거리는 걸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은 한 번에 한 명하고만 하는 거 아니었나? 내가 소설만 봐서 모르는 건가?’
셰비언을 생각하면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지고 갈증이라도 난 사람처럼 보고 싶어지는 건 여전한데, 그 와중에 라비린에게도 이렇게 심장이 뛴다는 게 기가 막혔다. 지난여름, 라디아타가 자유연애를 시작하면 알아주는 바람둥이가 될 거라고 걱정했던 게 무색했다.
오드리는 잔뜩 이마를 찌푸린 채 고민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 놓이니 셰비언에게 느끼던 감정이 정말 사랑인지조차 알 수가 없게 됐다. 마력의 계통이 같아 자연히 끌리는 걸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처음 해 보는 사랑은 낯설고 혼란으로 가득 차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셰비언이 곧 오니까…… 그래, 곧 올 테니까. 그때 얼굴을 보고…… 근데 보면 뭐 하지?’
본다고 마음을 표현할 수가 있나, 그렇다고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있나. 제대로 말을 나누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피해 다니는 자신이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헤세의 시체가 발견됐을 땐 셰비언의 공간에 침범이라도 해서 해결책을 묻고 싶었는데 지금은 얼굴 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더럭 겁이 났다. 오드리는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어차피 결혼할 거……. 마음 가면 좋지. 그래, 그거면 됐지…….”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됐으니 라비린의 노력이 통했나 보구나, 하고 생각할 밖에. 이왕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 살 거라면 상대를 사랑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문득 빨갛게 딱지가 앉은 입술이 신경 쓰여 손을 뻗었다가 제 꼴을 생각하고 황급히 손을 거뒀다. 잠든 사람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다니, 그거 참 변태 같은 행동이었다.
“하, 내가 돌았나 봐.”
이만하면 확인은 충분히 했다. 라비린에게 끌리는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어도 그를 염려하며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확실했다. 아마 이대로 계속 마음이 흘러간다면, 언젠가 자신 있게 나는 라비린을 사랑한다, 제 입으로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오드리는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차가운 손으로 식히며 파티션 너머로 돌아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어제처럼 집무실에서 서류라도 보면서 머리를 식히고 싶지만 그랬다간 또 라디아타가 화낼 것 같았다. 어제 의사를 대동하고 앓아누운 오드리를 찾아왔던 라디아타의 표정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다시 집무실에 갔다간 오드리를 가둔 채 기도실 문에 못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조금 이따 깨우면 되겠지. 대충 차 한 잔 마시는 정도면 될 거야.’
오드리는 준비해 뒀던 모래시계를 뒤집고 반쯤 남은 찻잔의 차를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흔들리는 마음 때문인지, 시간은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렀다.
그러나 평화로운 건 오로지 오드리뿐, 자는 척 드러누워 코고는 시늉까지 했던 라비린은 열 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덮고 심호흡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벌떡 일어날 뻔했어…….’
입술 근처를 배회하던 기척이 지나치리만큼 생생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그래서 짐작할 수조차 없었던 오드리의 마음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는 게 기가 막혔다. 쿵쿵 소리를 내며 뛰는 심장이 너무 시끄러워 얇은 파티션 너머에 있는 오드리에게 들릴까 겁이 났다.
어떻게든 심장 소리를 가라앉히고 나니 이제 오드리가 내는 소음이 속속들이 귀에 들어와 곤란해졌다. 찻물을 삼키는 소리와 옷깃 스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아주 작은 소음일 텐데도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쟤는 열일곱이나 되어서 뭐 저렇게 경계가 없어?’
이렇게 좁은 기도실에 남자와 단둘이 있으면서 왜 저리 태연한가.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채 몸을 짓누르고 무도한 짓을 하면 어쩌려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쓰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 얼굴을 붉혔으면서 경계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
춥다춥다 하면서도 답답한 건 싫어해서 언제나 훤하게 목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오드리였다. 그 드러난 목에 끌어안고 입 맞추면 순식간에 따뜻하게 달아오를 체온과 금세 자신과 같은 향으로 물들 옅은 체향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수색대를 꾸리고 고용인들을 단속하고 불안해하는 친족을 달래야 하는데, 그 모든 걸 알면서도 꼼짝도 하기 싫었다. 기도실 특유의 딱딱하고 좁은 침대이건만, 오드리의 향수가 배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푹신한 침대 부럽지 않았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정상이 아니라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일어나기 싫다는 게 진짜 문제다. 그래도 일어나긴 해야 하니, 라비린은 몸을 뒤척이며 언제 일어날까 타이밍을 쟀다. 시간을 재는 훈련은 충분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는 척을 시작한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안 됐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
쾅쾅쾅!
누군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모래시계를 바라보던 오드리가 놀라 일어섰다. 다이앤에게 문을 지키도록 해뒀는데, 누군지는 몰라도 이렇게 거칠게 문을 두드리게 두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이 안 갔다.
“무슨 일이지?”
오드리보다 라비린이 더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침대를 박차고 나와 벌컥 문을 열었다. 얼굴이 밀랍처럼 하얗게 변한 다이앤이 천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입을 뻐끔댔다.
“왜 두드렸어? 말을 해.”
“위, 위에…….”
“위?”
천장에 매달려 문을 두드려 대던 괴물이 라비린과 시선을 마주치고 히죽 웃었다. 팔다리가 각각 네 개나 되는 게, 마치 거대한 거미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라비린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고, 그를 본 괴물은 겁먹은 표정을 짓더니 후다닥 천장을 타고 사라졌다.
낮의 안식은 끝났다. 겨우 사흘 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