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chapter 23. 원본 유언장의 행방 (25/62)

목차

chapter 23. 원본 유언장의 행방

chapter 24. 괴물이 날뛰는 밤

chapter 25. 파혼

chapter 26. 인어 아가씨

chapter 27. 브란젤로 돌아오다

chapter 28-1. 셰비언

chapter 23. 원본 유언장의 행방

「사랑과 호의를 보호로 표현하는 남자는 오래된 낭만의 결과물이다.」

본래 수확제가 끝나고 나면 연달아 라디아타의 스무 살 생일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오드리도 초대장을 받았다. 그러나 괴물 사태가 발생하고 타우레드의 직계가 영지로 모이면서, 라디아타의 생일파티는 없던 일이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리 호화스럽게 축하했으니, 한 번쯤은 조용히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라디아타 본인은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로샨은 달랐다. 의욕적으로 딸의 스무 살 생일을 준비했던 그녀는 제대로 된 연회도 무도회도 없이 생일을 넘기는 걸 참지 못했다. 덕분에 본가의 창고에서 잠들어 있던 보물들이 햇빛을 보았고 요리사는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날리지 않게 됐다.

해서, 전투용으로 지어져 삭막한 요새와 같았던 영주성은 수십 수백 개 마법등으로 치장돼 빛나고 가을꽃으로 장식된 긴 식탁엔 호화로운 연회 음식이 올라왔다. 비록 식탁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 중 단 한 명을 제외하곤 죄다 타우레드의 일족이지만 말이다.

식사가 마무리 되어갈 무렵, 타우레드 후작이 일어나 잔을 들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이들도 함께 잔을 들었다.

“일단, 내 딸의 생일을 축하하러 와주어서 고맙소.”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가스트로는 낡아빠진 전통이라고 했지만, 그 낡아빠진 전통은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다. 일족 간의 결속을 강화하고, 자신감을 고취시키고, 자부심을 북돋았다. 전통을 지키려다 왕에게 미움을 사면 어쩌냐며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후작의 농담에 거리낌 없이 웃었다.

“말이 길어봤자 팔만 아프니, 짧게 말하겠소. 부디 즐겁게 지내다 가시오. 저승의 술이 아무리 미주라도 이승의 화주만은 못할지니!”

“살아 있는 동안 즐기세!”

술잔이 빠르게 비었다. 오드리는 라디아타의 주량이 온전히 어머니에게서 온 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타우레드의 사람들도 술을 즐겼다. 식탁이 치워지고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두 번쯤 바뀔 때까지도 다들 손에서 잔을 놓질 않으니, 오드리는 살짝 기가 질리고 말았다.

“산트렘도 이 정도는 아닐 거야.”

“글쎄……? 저기 봐. 누구보다 어머니께서 제일 즐기고 계신걸.”

라비린의 말대로, 로샨은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거침없이 소리 내어 웃고 술을 홀짝거렸다. 수도 저택의 문 밖을 나서는 것도 싫어하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사람이 바뀌었네. 시간이 그렇게까지 많이 지난 것도 아닌데…….”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대로 돌아오고 있는 거지. 역시 어머니에게는 브란젤이 맞지 않아. 여기서 요양하면 회복 속도가 확 오를 텐데 그건 어렵겠지…….”

“당연한 말을. 라디아타가 하고 있던 일들을 본인이 맡아 하겠다고 가져가셨는데 어떻게 마냥 쉴 수가 있겠어? 브란젤이 힘들어도 버티셔야 돼.”

“냉정하기는.”

라비린은 흘끗 오드리를 훔쳐보았다. 오드리는 지극히 남부식으로 자신을 꾸미고 나왔다. 머리칼은 반만 묶어 늘어뜨리고 꽃의 형상으로 조형한 보석 핀을 꽂아 장식했다. 드레스도 얇고 팔랑거리는 남부식이라 약간 추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잔을 들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몹시 어여뻤다.

‘내가 예쁘다고 말해봐야 좋아하지도 않겠지? 젠장, 어떻게 나는 약혼자인데 여동생만도 못한지…….’

보초탑에서 거하게 싸운 이후, 오드리는 좀처럼 그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뒤늦게 용서를 청하며 체술을 직접 가르치겠다 나서보기도 했지만,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건네는 사과는 필요 없다는 식의 답변을 받았을 뿐이었다. 아주 야멸찼다.

라디아타에게도 말을 꺼내보았다. 네가 오드리와 친하니, 한 번 말을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그러나 라디아타는 여전히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얄밉게 웃으며 곧 셰비언이 작위를 얻을 것 같다는 듣기 싫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거기다 오드리에게 받았다는 목걸이까지 자랑했다.

‘오라버니, 이 목걸이 예쁘죠? 오드리가 준 거예요.’

‘친구 사이에 생일 선물로 오가기엔 좀 과한 보석 같은데.’

‘한 번쯤 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냥 가지라며 줬어요. 정말 가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알룬드의 목걸이니까요. 돌려주기 전에 걸어봤어요.’

‘알룬드의 목걸이는 무슨……. 약혼선물로 그 목걸이 이상 가는 걸 고르라는 압박이지?’

‘눈치도 빠르셔라.’

‘친구를 아끼는 만큼 이 오라비를 좀 아껴봐라.’

‘둘 다 아끼니까 둘이 맺어지지 않길 바라요.’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말해주다니, 그것만으로도 참 고맙구나.’

라비린은 라디아타와의 대화를 떠올리길 그만두었다. 생각할수록 슬퍼졌다. 그의 관심은 다시 오드리에게로 돌아갔다.

만약 로샨이 라디아타의 생일 연회를 억지로라도 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오드리에게 파트너가 필요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옆에 서서 대화하는 건 한참 뒤로 미뤄졌을 게 분명했다. 나란히 서 있는 이 순간이 기적 같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머리장식이 비뚤어지기라도 했어?”

“어? 응? 아니야, 그냥……. 옆에 있으니까 좋구나, 싶어서.”

오드리는 약간 민망해졌다. 그렇게 며칠 내도록 가시를 세우고 화를 냈는데 라비린은 이전과 똑같았다. 파트너가 되어 가까이에 있게 되면 원망의 말 한 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그저 가까이에 있어서 좋단다.

“……속없기는.”

“응? 뭐라고?”

“아니, 됐어. 난 잠시 쉬어야겠으니까 사람들 상대는 네가 하고 있어.”

브란젤을 넘어 왕국 전체에 소문이 퍼진 유명한 연인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 무더기였다. 마침 둘이 함께 있는 데다 얼마든지 말을 걸어도 좋은 연회장 안이니 다들 기회를 엿보느라 눈이 번쩍거렸다. 라비린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오드리, 이렇게 가면 어떡해!”

“뭘 어떡하긴, 다 네 친척들이잖아. 잘해봐.”

오드리는 그 귀찮은 사람들을 라비린에게 죄다 떠밀고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술기운이 올라 쉬고 싶었지만, 이 건물에 쉴 만한 테라스가 없을 게 뻔하니 휴게실에라도 갈 셈이었다.

한데 오드리가 아무리 모퉁이를 돌고 돌아도 휴게실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방어용 건물이고 건물 전체가 미로와 같아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배운 규칙대로 걷고 있는데 목적지는 나오지 않고 길은 점점 화려함을 잃어가는 데다 인적도 뜸해졌다.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복잡한 곳이 아니었는데?’

그 복잡한 만탈락의 시장통에서도 한 번도 길을 잃어본 적 없는 오드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길을 잃을 리 없다, 처음에는 그렇게 부정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벽장식을 마주하고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잃은 것이다.

“뭐 이런 집이 다 있어?”

맹세컨대, 벽에 주먹질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오드리는 충분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벽에 새겨진 포모스의 초상이 그녀를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인이라도 하나 데리고 올걸.”

길을 잃었으면 일단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건만, 오드리는 그런 걸 알지 못했다. 애초 길을 잃어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녀는 지나는 하녀나 하인이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사람이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여긴 타우레드의 본가였다. 아무리 후작 일가가 브란젤에 머무른다지만 평소 비워놓는 곳도 아니고 하물며 지금은 타우레드 일족들로 바글바글했다. 당연히 그들 이상으로 고용인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비어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벽에 매달린 마법등을 슬쩍 문지르자 손에 까맣게 먼지가 묻어나왔다. 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바닥 청소는 되어 있는데 사소한 부분이 허술한 걸 보면 아무래도 이쪽 복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드문 모양이었다.

‘이거, 재수 없으면 한참 동안 발견되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

마음이 급해졌다. 오드리는 홱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짚기 시작했다. 포모스의 초상이 있던 그 자리까지만이라도 가면 될 것 같았다.

몇 개의 모퉁이를 돌고 갈림길을 골라 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짚어 왔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복도가 그녀를 반겼다. 장식도 그림도 없는 데다 손톱만 한 창문도 없고 벽에 달린 마법등조차 적어 분위기가 아주 을씨년스러웠다.

이미 길을 잃은 상태라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며 왔었는데 이런 꼴이라니, 기가 막혔다. 정말 미로에 빠진 기분이었다. 아니면 요정의 장난질에 홀리기라도 했던가.

‘뭐 이따위 집이 다 있어!’

오드리가 침착하기 위해 눌러두었던 성질을 폭발시키기 직전, 복도 끄트머리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잔뜩 화가 난 듯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그는 키가 상당히 크고 비쩍 마른 데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성이었다. 하인의 옷을 입은 건 아니지만 그리 고급스러운 차림도 아니었다. 걷는 태를 보아선 적당히 부유한 중간 계급처럼 보였다.

“여긴 오지 말라고 분명히……!”

울컥 화를 내려던 그는 오드리의 얼굴을 확인하고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이 경악으로 벌어지고 입술은 파들파들 떨렸다. 광대뼈 부근의 살이 심하게 움찔거렸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걸 본다면 이렇게 놀랄까 싶었다.

“레, 레이디 랄리우스? 아니, 그분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를 아는 사람인가 보군. 나는 헨젤 백작가의 장녀, 오드리 헨젤이다. 당신은 누구지?”

오드리의 자기소개를 듣고도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이다 마른세수를 하고 다시 오드리를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길을 헤매는 동안 오드리의 인내심은 많이 얄팍해졌다. 하나 어머니의 지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버럭버럭 화를 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터지려는 짜증을 억누르며 남자를 찬찬히 살폈다.

‘왜 이렇게 낯익지?’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묘하게 낯이 익었다. 평범한 인상이라 많이 보아서 그런 게 아니라, 어디선가 저 남자의 얼굴과 아주 흡사한 누군가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게 대체 누굴까.

남자가 갈등하는 내내 오드리도 함께 고민에 빠진지라, 두 사람 사이에선 썰렁한 침묵이 잔잔하게 깔렸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끙끙대는 와중, 갑자기 오드리가 고개를 번쩍 들고 손가락을 튕겼다.

“아. 생각났다.”

“예……?”

“데멘사 아노말리아. 당신, 그를 몹시 닮았어. 초상화로만 본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밀리나의 유언장을 공증하고 장례식장에서 읽는 파격을 저지른 변호사, 데멘사 아노말리아. 술과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빚에 눌려 살다 도망치듯 브란젤을 떠나 행방을 감춘 남자.

암만 찾아도 나오질 않는 데다 락시 부인이 그의 이름과 함께 칼레이의 마차를 언급했으니, 오드리는 그가 죽었으리라고만 생각했다. 전보를 다룰 회사의 이름을 데멘사라고 지은 건 그를 죽였으리라 짐작되는 헨젤 백작의 반응을 기대하고 한 짓이었다. 그만큼 그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데멘사가 무사히 살아서 나이를 먹었다면 당신 또래가 되었을 거야. 당신, 그의 형제인가?”

“……예? 예! 제가 데멘사의 형입니다! 에르멘 아노말리아입니다, 레이디.”

“오호. 그에게 정말로 형제가 있었다니, 몰랐는걸. 데멘사가 떠넘기고 간 빚 때문에 힘들었겠어.”

“아, 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 망할 녀석이……, 앗 죄송합니다. 레이디 앞에서. 아무튼, 그 녀석이 빚을 얼마나 많이 남겼는지, 갚느라 아주 등골이 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그럼 지금은 다 갚았나?”

“아니요……. 아직 다 못 갚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타우레드 영지에서 고용인 노릇을 하며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긴 외간 벽지이긴 해도 돈은 후하게 잘 주거든요.”

남자의 말은 막힘이 없었고, 일견 아주 그럴듯하게 들렸다. 휙휙 바뀌는 표정과 적당히 굽실대는 허리, 파리처럼 비벼대는 손바닥이 그를 상당한 기회주의자처럼 보이게 했다.

“이런, 힘들겠어.”

오드리의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얼어붙은 그대로였다. 벽에 걸린 마법등이 그녀의 얼굴에 깊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가무잡잡한 피부가 어둠 속에 녹아들고 빛이 닿은 부분만 흑진주처럼 우아한 광택을 내며 빛났다.

“하도 힘들어서 몇 달 사이에 몸뚱이가 반쪽이 되었군, 에르멘 아노말리아. 저번 달에 만났을 땐 허리둘레가 럼주를 담는 오크통 같더니 체중 감량의 비결이 뭔가? 잡지에 기고하면 대인기를 누리겠어.”

“어…….”

“데멘사는 가족과 연을 끊은 지 이미 오래전이라더니, 그 말이 진짜였어. 제 형이 누굴 만났는지도 모르다니 말이야.”

남자, 데멘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큰 칼이 가슴에 꽂힌 것처럼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내버려 두었다간 이대로 도망갈 게 분명했다. 오드리는 냅다 달려들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어딜 가려고? 데멘사,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내게 설명해야 할 것 같지 않아?”

“아닙니다! 레이디께서 누굴 만나셨는지는 몰라도, 사람 잘못 보신 겁니다. 제가 진짜 에르멘입니다!”

“에르멘이 어찌 내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 온갖 잡지며 신문에 좍 깔린 건 내 얼굴이지 어머니 얼굴이 아닌데!”

“그, 그건…….”

데멘사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부들부들 다리를 떠는 꼬락서니가 어찌나 한심한지. 오드리는 전의를 잃은 그의 옷깃을 움켜쥔 채 눈을 맞췄다. 마법등의 불빛에 번들번들 빛나는 눈동자는 뱀도 사슴도 아니라 굶주린 사자에 가까웠다.

“그대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저, 저는……. 그건…….”

“그건?”

데멘사는 타고나길 연약한 심지를 타고났다. 젊은 시절에는 밀리나가 제시한 돈에 눈이 멀어 천성에 안 맞는 객기를 부려보기도 하였으나, 그마저도 헨젤 백작이 끼어들자 금방 꺾여 버렸다. 그가 도박에 속수무책으로 빠진 데에는 헨젤 백작의 수작도 있었지만 유혹에 약한 본인의 성격도 한몫을 했다.

그는 오드리의 눈빛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이젠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밀리나의 얼굴이 오드리에게 덧씌워져 보인 순간, 이젠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 흔적만 남은 죄책감과 알량한 양심이 그의 혓바닥을 움직였다.

“베, 벨키스, 벨키스 경 때문입니다…….”

“벨키스 경? 라비린 벨키스 타우레드? 내 약혼자?”

데멘사가 울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리는 약간 맥이 빠졌다. 라비린이 데멘사를 찾아 헤맨 날들이 도대체 언제부터이던가. 백작부부의 결혼계약서를 빼낸 뒤라 남은 건 밀리나의 유언장뿐이니, 각별히 힘을 써서 데멘사를 확보했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는 데멘사의 옷깃을 놓아주었다. 굶주린 사자 같던 눈빛도 퍽 기세가 줄었다. 데멘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오드리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 그게 그러니까……. 수확제가 시작되기 닷새 전부터입니다.”

“……수확제?”

오드리는 라비린과 종이꽃을 태웠던 날을 떠올렸다. 브란젤과 세피아 항구를 연결하는 전보를 공개적으로 시연하는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셰비언이 행사장에서 돌연 튀어나와 오드리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대신 라비린의 손을 잡았었다.

그리고 라비린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자신을 선택해 달라 부탁했었다. 언젠가 오드리가 라비린을 저울에 올릴 일이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가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어 그날 밤 잠을 설쳤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알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미 한 번 실망했는데, 두 번이 될까 두려워졌다.

“정확한가?”

“네, 네! 정확히 기억합니다. 수확제가 있기 닷새 전, 벨키스 경께서 제가 머물던 은신처 문을 깨부수고 들어오셔서는 제 멱살을 잡으셨지요. 초라한 집일망정 나름 아늑한 곳이었는데 다 망가졌습니다……. 도망 중에도 고이 보관했던 서류도 다 뺏기고…….”

데멘사가 울 듯이 중얼거렸다. 도박 빚에 쫓겨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도 보관했던 서류들이 있었다. 밀랍으로 봉인하고 기름 먹인 가죽으로 한 번 더 싸서 애지중지했던 것들인데, 라비린은 가방의 이중바닥에 숨겼던 것까지 죄다 찾아내 빼앗았다.

“그중에 레이디 랄리우스의 유언장도 있었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이제부터 알게 되었군. 그 유언장은 원본이었나?”

데멘사의 눈이 사방으로 굴러다녔다. 괜한 말을 했다고 자책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드리는 그의 발을 지그시 밟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 심약하고 멍청해 보이는 남자야말로 밀리나의 유언장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이다.

“워, 워, 워, 원본이라니요? 유언장에 사, 사, 사본도 있습니까?”

“지금 본인이 얼마나 멍청한 소릴 하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나? 세상의 모든 서류엔 당연히 사본이 있어.”

“…….”

“변호사 맞아? 나 참, 어머니께선 어쩌다 이런 멍청이를 고르셨는지……. 정말 사람이 없긴 없었던 모양이야.”

“아가씨! 제가 비록 협회에서 제명되긴 했지만 자격증은 있습니다! 도박 빚 때문에 신분이 드러나서는 안 되다 보니 그건 못 써먹고 다른 일을 했지만요!”

내내 쭈그러들어 있던 데멘사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냈다. 비록 도망친 이후엔 작은 술집의 장부 정리나 해주며 떠돌이로 살았지만, 평민으로서 독학해서 변호사 자격증까지 딴 건 그가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과거였다.

‘이젠 그 장부 정리 일도 못하겠지만……. 망할 놈의 벨키스 경.’

라비린은 데멘사가 간신히 일궈낸 평화로운 생활을 완전히 박살냈다. 대체 뭐라고 떠들어댄 건지, 그의 수하들에게 양팔을 붙들려 끌려가는 동안 아주 죽일 놈을 보는 듯한 시선을 사방에서 받았더랜다.

끌려가면서도 아무리 귀족이라도 무고한 사람을 이렇게 핍박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니냐며 항의했지만, 정말 무고하다고 생각되면 이 자리에서 본명부터 대고 보라며 빈정대는 통에 그만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본명을 댔다간 다른 무거운 죄를 덮어씌워주겠다는 의지가 그의 눈에 아주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친 변호사에게 덮어씌울 수 있는 죄는 무궁무진했고, 멜브란트 왕국은 지식인의 범죄를 특히 무겁게 처벌했다. 데멘사는 정말 죽었다 생각하고 그가 두는 대로 타우레드 영지에 처박혔다. 고용인이 붙은 생활은 편안했지만 감시당하는 느낌에다가 행동반경이 제한되니 갑갑했다.

그럼에도 데멘사는 꿋꿋하게 어깨를 폈다. 브란젤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던 짧은 시기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시절이었다. 그걸 무시당할 수는 없었다.

오드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데멘사를 바라보았다.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이전에도 숱하게 만나보았다. 지나가 버린 용기와 반짝임을, 간직하지도 못한 것을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아 사는 사람들. 그녀는 다정하게 데멘사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떠올릴 때면 항상 그대의 모습도 같이 떠올랐지. 말리는 사람을 모두 밀쳐 내고 나서서, 적대적인 시선을 받으면서도 길고 긴 유언장을 소리 높여 읽는 변호사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기억했던 건 어린아이의 착각이었군.”

“어…….”

“말할 수 없다면 그냥 그렇게 살도록 해. 자세한 건 그대가 아니라 라비린에게 들으면 될 테니까.”

“베, 벨키스 경에게요? 레이디 랄리우스의 유언장을 제게서 빼앗아 가고도 아가씨께 말을 전하지 않은 분이십니다. 아가씨께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할 리가 없…….”

“그는 내 약혼자야.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듣고 판단한다. 그대는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지금처럼 타우레드의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숨어 살도록 해. 만약 그대가 라비린에게 빼앗긴 유언장이 진짜 원본이라면 내 아버지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어쩌면 이건 보호에 가깝겠어.”

헨젤 백작의 얘기를 꺼내자마자 데멘사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했다. 오드리는 그가 헨젤 백작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었음을 확신했다. 그게 협조든, 아니면 협박이든 간에 헨젤 백작의 민낯을 볼 기회가 있었으리라.

“쯧, 나름대로 기대했었는데.”

오드리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돌아섰다.

“그대는 어머니와 인연이 있는 자니, 그늘을 원한다면 당연히 나를 찾아올 줄 알았어. 한데 내 보호는 미덥지 않았던 모양이지……. 어린 시절의 기억도 있고 해서 전보를 다루는 회사 이름을 일부러 데멘사라고 지었는데, 괜한 짓을 했어.”

“아, 아가씨! 그, 그 회사 이름이 데멘사인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겁니까?”

“우연일 리가 있나. 그대의 행동 이후로 장례식장에서 유언장을 읽는 게 장례식의 한 절차처럼 여겨지게 됐다는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난 전보가 세상을 바꾸는 존재가 될 거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대의 이름을 붙였다. ……이제는 회사의 이름을 바꾸는 걸 고려해야 봐야 할 것 같긴 하지만.”

길은 몰라도 태연히 발을 내딛는 오드리의 몸짓에는 여유가 넘쳤다. 사실이야 어찌됐든 마치 타우레드 사람들의 이목이 죄다 연회장에 쏠려 있는 이 시점에 일부러 데멘사를 만나기 위해 이쪽에 온 것 같아 보였다.

오드리의 그런 뒷모습은 데멘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밀리나의 딸이 아니라 오드리라는 개인으로서. 데멘사는 허옇게 질린 낯으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뛰어가 오드리의 앞을 막아섰다.

“오드리 아가씨.”

세상에 양심처럼 무르고 연약한 것도 없고, 기분과 감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건만, 데멘사는 멍청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오래전, 밀리나의 의뢰를 받아들였을 때 이후로 두 번째 저지르는 멍청한 짓이었다. 아니다, 밀리나 이후에 헨젤 백작이 있었으니 세 번째였다.

“벨키스 경께서 가져가신 건 원본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작한 사본입니다. 아마 벨키스 경이 아가씨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그걸 원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에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요.”

오드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첫째로는 의도한 바이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태도를 바꿀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였고, 둘째로는 데멘사가 밝힌 말의 내용이 너무 뜻밖이라서였다.

“정교하게 조작한 사본을 소중하게……. 왜 그런 짓을 했지?”

“그래야 유언장이 조작된 일이 없다고 믿을 테니까요. 빚에 쫓기면서도 버리지 않고 안고 다니던 서류가 사실 가짜였다고 누가 믿겠어요?”

“누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겠군. 내 아버지겠지?”

데멘사가 입을 다물었다. 헨젤 백작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 아직 두려운 건지, 좀체 말할 기색이 없었다. 오드리는 방향을 바꿨다.

“원본은 어디 있지? 하티의 신전?”

“아니요. 중앙은행의 금고에 있습니다.”

멜브란트 왕실의 인정을 받아 왕국 내의 어음을 유통하고 금화를 주조하는 중앙은행. 중앙은행에서 고객의 물건을 맡아주는 금고 서비스는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서류의 수호로는 아직도 하티의 신전이 제일이었다.

데멘사는 의아해하는 오드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치며 반문했다.

“하티의 신전이 정말로 서류의 안락한 보금자리이던가요? 거길 뚫으려는 노력은 수 세기 전부터 계속돼 왔고 일부 사람들은 실제로 이뤄내기도 했습니다.”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티의 신전에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었을 헨젤 백작 부부의 결혼계약서를 빼낸 사람이 바로 라비린이었다. 하티의 신전을 믿지 못한 데멘사가 이해가 됐다.

“타우레드 후작가와 헨젤 백작가는 서로 으르렁대면서도 은근히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저는 둘 모두와 관계없는 곳을 골라야 했습니다.”

“도박 빚을 지고 쫓기는 빚쟁이에게 계좌가 있을 수 있던가? 대체 누가 당신에게 명의를 빌려주었지?”

“그건 제 사업 비밀입니다. 정보원을 아끼는 건 좋은 변호사의 필수적인 조건이죠.”

“변호사 그만두고 도망쳤던 사람이 말은 잘하지…….”

오드리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일단 데멘사를 믿기로 했다. 누구 명의로 된 계좌든, 원본 유언장이 정말 중앙은행에 있다면 가져올 시도를 해 보는 게 당연했다. 유언장을 조작하게 만든 배후에 대해 그를 추궁하는 건 그 다음에 해도 좋았다.

그러나 여기는 타우레드 영지였다. 오드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인력이라곤 다이앤 정도에 불과했다. 젊고 어여쁜 데다 오드리의 하녀인 탓에 사방에서 관심을 받고 있는 다이앤 말이다. 오드리의 단장을 도맡아 하는 다이앤을 대뜸 브란젤에 보낸다면 의심 받을 게 분명했다.

다이앤도 그런 제 처지를 잘 알았다. 그녀는 오드리가 드레스 아랫단 가득 묻혀온 먼지를 털어내다 말고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부재를 들키지 않고 브란젤에 다녀올 방도가 없었다. 오가는 것만으로도 이레 이상을 써야 했다.

“아가씨, 벨키스 경에게 도와달라고 하시는 건 어때요? 벨키스 경이라면 얼마든지 도와주실 텐데요. 그럴듯한 핑계를 대어 제가 브란젤에 다녀올 수 있게 해주신다든가…….”

“안 돼. 이곳에서 온전한 내 편은 너 하나야. 그런데 그런 널 바깥으로 내돌릴 수는 없어.”

다이앤의 뺨에 은근한 홍조가 올랐다. 이디케 없이 혼자서 오드리를 챙기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이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말을 들을 때면 주체하기 힘들만큼 기분이 둥둥 떴다.

“데멘사는 라비린이 유언장이 사본이라는 걸 모르고 감췄을 거란 식으로 말했지만……. 그럴 리 없어.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냐. 어머니의 유언장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를 거란 걸 뻔히 아는 사람이, 그렇게…….”

“벨키스 경께서 지금 원본을 찾느라 고군분투하고 계신 거 아닐까요? 아직 원본을 찾지 못해서 아가씨께 말을 못했나 보죠. 좀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럼 어느 날 갑자기 원본을 가져올지도 모르잖아요. 결혼계약서 때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 그러니까 못 믿는 거야.”

다이앤이 둥그렇게 뜬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오드리가 라비린을 두고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건 처음인 탓이었다. 보초탑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오드리는 제 눈치를 흘끔대는 다이앤을 무시하고 생각에 빠졌다.

수확제 넷째 날, 종이꽃을 태우던 날. 라비린은 언젠가 오드리가 제 손을 놓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내비쳤다. 수확제가 시작되기 닷새 전에 데멘사를 확보했다 했으니, 그때는 데멘사가 갖고 있던 유언장이 예상과 다르다는 걸 알고도 남았을 시기였다.

예상이 틀렸던 거라고 하기엔 정보의 출처가 너무 확실했다. 오스미다 왕비와 타우레드 부인, 두 사람이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를 아는 라비린이 사본 유언장을 고스란히 원본으로 믿었을 리 없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나를 선택해 줘.’

혹시, 그때 이미 원본을 찾아낸 건 아니었을까. 원본을 찾아내고 내주기 싫어서 감춘 건 아닐까. 말로는 헨젤 백작과 대립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막상 유언장과 결혼계약서를 받아들면 마음이 바뀔 거라 여긴 걸까. 어려운 싸움 끝에 후작 위를 받아내면 약혼도 결혼도 걷어내 버리고 날아가 버릴까 걱정했을까. 가만히 있기만 하면 모든 일은 예정대로 흘러갈 테니, 그게 가장 좋다고 여긴 건 아닐까.

걱정과 불신이 오드리의 숨통을 졸랐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방 안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다이앤은 또 시작했구나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한쪽 구석으로 몸을 비켰다. 팡팡, 드레스를 양껏 두드렸지만 치맛자락에 묻은 먼지는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연회장을 벗어나 쉬다 왔다더니만 어디 비밀장소라도 탐험하고 왔나 싶었다.

‘하긴 이런 분이니까 그 변호사도 만나고 그러셨겠지……. 내가 이해해야지.’

그녀가 드레스의 먼지를 털어내고 주름을 다시 잡아 차곡차곡 접어 상자에 넣는 내내 오드리는 방을 돌았다. 그러다 덜컥 멈춰 서서는 혼잣말을 했다.

“편지 정도는 괜찮겠지?”

“뭐어……. 기차가 없어서 좀 늦게 가기야 하겠지만 편지 좀 하는 거야 누가 뭐라 하겠어요. 낯선 곳에 홀로 온 레이디가 외로움을 나눌 곳을 찾는다고 하면 되죠. 그런데 누구에게 보내시게요? 그 변호사가 편지처럼 기록 남는 건 절대 안 된다고 그랬다면서요.”

“보낼 사람이 없으니 사람을 불러야지.”

“이디케도 릴리도 바쁠 텐데요…….”

“시끄럽고 얼른 편지지나 꺼내오렴.”

다이앤이 입을 삐죽 내민 채 편지지와 만년필을 대령했다. 오드리는 만년필을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베텔 경.

에스코트 기사인 경에게 감히 바랄 수 없는 호의를 바랍니다. 이 편지를 받거든 속히 타우레드 영지로 와주시기를 부탁드리오니……. (후략)>

편지는 세피아 항구의 데멘사 사무실로 보내졌다. 이디케는 카프러스에게 그대로 내용을 전했고, 카프러스는 두 번 생각지 않고 곧장 말을 끌어내 브란젤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원칙적으로는 헨젤 백작에게 행선지를 고하고 허락을 받은 뒤에야 떠날 수 있는 것이지만, 허락이 떨어질 리 없는 데다 그는 에스코트 기사였고 핑계를 대려면 못 댈 것도 없었다.

“경, 나도 갈래요.”

편지도 조용히 받았고 준비도 하인 손 하나 빌리지 않고 홀로 하고 있건만, 어떻게 알았는지 하델이 나타나 떼를 썼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카프러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매섭게 거절하기엔 알신다의 장례 이후 눈 밑에 생겨난 검은 그늘이 몹시 안쓰러워 다른 쪽으로 불똥이 튀었다.

“알렉스, 도련님 모시고 들어가거라.”

“내 말 못 들었어요? 나도 간다고요.”

“알렉스! 애초 도련님을 모시고 나오지 말았어야지!”

알렉스는 하델과 카프러스 사이에서 고개를 푹 떨군 채 가만히 서서 야단을 감내했다. 본디 알렉스의 주인은 하델이니 마땅히 하델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할 것이지만……. 사실은 카프러스의 명령을 따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말 하델이 바라는 대로 일이 굴러갔다간 이렇게 혼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칫, 이 정도로 끝나는 게 다행이라는 거 알긴 아는데…….’

사고가 터질 때마다 겪던 일이니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한동안 너무 편하게 지낸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이 일의 원인이 오드리라는 사실도 잊고 잠시나마 오드리를 그리워했다. 오드리 아가씨가 있었으면 도련님이 이렇게 날뛸 수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알렉스의 속내를 모르는 하델에게 그 모습은 카프러스에게 야단맞고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하델은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 알렉스를 잡아 제 뒤로 숨기고 앞으로 나섰다.

“베텔 경, 나는 누나에게 확인할 게 있어요. 직접 물어볼 게 있다고요.”

“그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께서 돌아오시거든 물어보시지요. 알렉스,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만 있을 거냐?”

“알렉스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자꾸 알렉스를 찾아요? 베텔 경, 짐 되지 않을 테니 나도 데려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짐입니다.”

카프러스는 마음이 급했다. 지금 하델의 행동 너머를 헤아릴 여력이 없었다. 얼른 하델을 떼어놓고 타우레드 영지로 갈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귀찮은 파리라도 쫓는 듯 손짓하며 마저 짐을 실었다.

카프러스의 노골적인 태도는 하델에게 꽤 큰 충격을 안겼다. 하델은 헨젤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자라며 이 집 안에서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오드리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때 하델의 스승이었던 카프러스가 이런 식으로 굴다니, 충격이 두 배였다.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도련님께서 아가씨께 할 말이 있다며 집을 나가면 그 대가를 누가 치를 것 같습니까? 그 정도도 짐작 못할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델은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을 꾹 다물었다. 카프러스가 하는 말이 어떤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원인으로서 오드리가 지목되어 책임을 질 것이고, 그 벌을 내릴 사람은 오드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헨젤 백작이 될 거란 뜻이었다.

이전이라면 미안한 마음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아 어쩔 줄을 몰랐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도리어 열 올라 뜨겁던 머리는 싸늘하게 식고 심장은 그와 대비되게 쿵쾅거렸다. 알신다의 창백한 낯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정 궁금한 게 있으시거든 편지를 쓰시죠. 누가 감히 헨젤 백작가의 공자가 쓴 편지를 열어보겠습니까?”

“……내가 편지를 쓰더라도 베텔 경이 전할 생각은 없나 보죠?”

“고작 편지 한 장인데 그걸 꼭 제가 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편국을 이용하시죠. 확실하게 전해줄 겁니다. 저는 바빠서 이만 서두르겠습니다.”

카프러스는 기가 막힐 정도로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 후계자고 뭐고 하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속으로나마 오드리를 찾던 알렉스마저 슬그머니 하델의 기분을 살폈다. 하델의 안색은 안타까울 정도로 새파랬다.

“그……. 도련님. 이렇게 될 거 알고 계셨잖아요.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이상하지. 헨젤의 후계자는 나인데, 이 가문은 앞으로 내 것이 될 텐데 왜 이렇게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까?”

“예?”

“알신다가 죽어서? 새로 하녀장이 된 릴리가 내게 협조적이지 않아서? 아버지보다 누나의 눈치를 보는 고용인이 늘어서?”

“도련님?”

“어머니의 초상화를 봐야겠어.”

밀리나의 초상화가 걸린 방은 하델에게 출입금지구역이었다. 알렉스는 크게 당황해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지만, 그 알신다조차 포기한 일이었다. 알렉스에겐 어림도 없었다. 알렉스는 나중에 크게 혼날 걱정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하델의 뒤를 따랐다.

초상화가 늘어선 지하의 방은 여전히 서늘하고 어두웠다. 마법등의 뚜껑 아래로 새어나온 빛은 어둠에 잡아먹혀 별 도움이 되지 않건만, 하델은 익숙하게 방을 가로질러 가장 안쪽에 있는 마법등의 뚜껑을 열었다. 주변이 일시에 환해지며 밀리나의 초상화가 드러났다.

“와…….”

알렉스는 밀리나의 초상화를 처음 보았다. 밀리나가 살아 있을 적에 만난 적도 있다는데 그건 기억에 없으니 이게 첫 대면인 셈이었다.

“오드리 아가씨께서는 돌아가신 마님을 엄청나게 닮으셨네요. 머리색과 눈동자 색만 아니면 거의 빼다 박았다고 해도 되겠어요. 아, 분위기가 조금 다르긴 하네요.”

“……아냐, 안 닮았어.”

“예?”

“하나도 안 닮았다고!”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하델이 쿵쿵 발소리를 내며 거칠게 방을 나갔다. 알렉스는 황급히 마법등의 뚜껑을 닫고 하델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봐도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았는데, 도대체 무슨 심사로 저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괴물사태는 분명히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그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도시 내 빈민들이었다. 괴물은 굳이 사람을 해치려 들지 않았고 광장에서 변이를 일으킨 이들은 전체 규모에 비하면 소수였다. 그렇다 보니 난리통에 휩쓸려 일시적으로 실종됐던 사람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연일 이어지던 장례도 거의 끝을 볼 무렵이 되자 브란젤은 겉으로나마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카페에서 이어지는 토론거리의 주제는 가을답지 않은 날씨와 가파르게 오르는 밀 가격 등으로 바뀌었고, 어떻게든 브란젤을 벗어나려 발악하던 사람들은 결국 포기한 듯 사교행사를 열고 모임을 유지했다.

그건 필사적인 회피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괴물사태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검은색 잉크의 판매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수확제 이후면 창문에 으레 내걸리던 화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올 겨울의 유행 패션은 검은 상복이라는 우울한 농담이 퍼져 갈 무렵, 신문에 괴물사태의 내막이 자세하게 실렸다. 금기가 왜 금기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일부 마법사들이 저지른 불법적인 실험이 원인이라고 했다. 처음엔 작은 규모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잘 나오자 점점 대담해져 마침내 브란젤 전체를 범위로 삼게 됐다고.

그동안 사람들이 카페와 펍에서 쑥덕대며 추측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얘기였다. 하지만 그 기사들을 고스란히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사람의 심리란 참 우습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어느 모로 보나 앞뒤가 딱 들어맞는 합리적인 해명이 나오자 오히려 믿지 않게 된 것이다.

“마법사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기사에서는 마법을 쓰면서 줄어드는 수명과 체력을 개선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하지만……. 모르지, 다들 죽어버렸으니.”

사람들이 기사를 믿지 않는 건 살아남은 범인이 아무도 없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자기 유리한 대로 말을 고치는 건 얼마나 쉬운가. 머리를 맞대고 수군대는 동안 추측은 확신이 되고 이야기는 부풀려지고 변형되어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에서, 장바구니 들고 나온 시장에서, 사람들은 머리가 둘 이상만 되면 소곤소곤 말을 나눴다.

“수확제 전에 소문이 짜하게 돌았잖아. 괴물 나온다고. 치안대가 계속 입을 막고 다녔다는데 혹시…… 이거 왕궁마법사들이 하던 거 아닐까?”

“뭐어? 그런 말 함부로 하고 다니다간 큰일 나!”

“그렇잖아. 이만한 일을 어떻게 마법사 몇 명이서 할 수 있겠어? 돈도 돈이거니와 인력이 엄청나게 들었을 텐데. 죄다 괴물에게 잡혀 죽었다는 것도 어이없고……. 범인 숨겨주느라 그런 거 아니야?”

“어휴, 그걸 어떻게 장담해!”

“에이, 딱 그렇게 생겨먹었잖아. 왕궁마법사들이 이상한 거 만드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이번에도 그러다가 사고 친 거지, 뭐!”

“미쳤어, 정말! 그런 말 어디 가서 하고 다니지 마. 이번에 괴물사태 수습하다가 죽은 왕궁마법사도 있는데 어떻게 그래.”

“아, 그랬지 참. 이름이 뭐였지? 디나? 디아나?”

“다나 트왈릿. 초상화 보니까 아주 뼈밖에 없더만……. 그렇게 약한 사람이 무리를 하다 죽기까지 하고.”

소문을 부풀리던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닫았다.

다나의 이야기였다. 포박되어 갇힌 채 자백을 강요받던 그녀가 영웅으로 포장되어 알려진 데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다.

일단 재판관은 자백만 있지 증거가 없는 다나를 죄인으로 확정짓는 것에 부담을 느꼈고, 왕궁마법사장은 어쨌거나 왕궁마법사 소속인 다나를 죄인으로 세상에 알리길 원치 않았다. 안 그래도 지원자가 없어 힘든 와중에 이미지가 더 망하면 곤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끌어안고 있기도 부담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어딜 가도 작위를 받기에 충분한 인재인 셰비언이 멜브란트의 귀족이 되는 조건으로 다나를 요구했으니, 서로의 이해관계가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셰비언이 작위를 받고 나면 다나는 제 발로 왕궁마법사를 그만두고 그의 제자가 될 예정이었다. 그게 모두에게 좋았다.

한데 그런 다나가 죽어버렸다. 목에 시퍼런 손자국이 생겨서는, 누가 봐도 목이 졸려 살해당한 몰골로. 셰비언은 격분했고 왕궁마법사장은 지옥을 맛봤다. 셰비언의 분노를 달래려던 왕궁마법사장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나에게 명예를 주자고 제안했다.

‘다나 트왈릿이 왕궁마법사 내에서 얼마나 따돌림 당하는 존재였는지 압니까? 벌써 한 번 뒤집어엎었는데도 아무도 안 나옵니다. 범인은 물론이고 증언도 안 나왔습니다. 다나가 있던 곳이 하필 자료실이라 죽은 시간 측정도 안 되고, 서로 감싸주는 게 분명한 이상 찾는 건 불가능할 테죠. 남은 왕궁마법사들을 고문이라도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살인범이 당신의 휘하에 있는 게 찝찝하지도 않나?’

‘어쨌거나 다나 트왈릿만 한 놈은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놓고 재판도 없이 멀쩡히 살아 나간다고 하니 울컥했나 보죠. 솔직히 이해 못할 바도 아니고.’

‘기회만 된다면 당신이 직접 죽였겠어.’

‘셰비언 씨……. 내가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당신에게 다나 트왈릿을 넘겨주겠다고 했던 겁니다.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 그런 거래가 성립이 안 돼요. 이번 일을 눈감아준다면, 로렐라이 상단의 제안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스크롤에 대한 것 말이죠.’

이미 다나는 죽었고 살인범을 찾을 방법은 요원하니, 그럴 바엔 눈곱만 한 이득이라도 챙겨야겠다. 셰비언은 그런 심정으로 동의했고, 샤를레아는 다나가 영웅으로 알려진다는 점에 초점을 두어 동의했다.

그렇게 다나는 영웅이 됐다. 헌신적으로 괴물을 처리하고 뒷수습에 매진하다가 지나치게 몸을 상해 죽은 왕궁마법사. 마법사가 단명하는 거야 워낙 유명한 사실이니 의심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신문은 다나 트왈릿이 왕궁마법사로서 얼마나 유능하고 헌신적이었으며 충직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했다. 그녀가 사방에서 미움을 받으며 진행한 연구들의 양과 질이 새삼 주목을 받았으며,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는 코멘트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범인이 모조리 죽어버렸다는 발표를 믿지 않고 왕궁마법사들을 흰 눈을 뜨고 의심하던 사람들조차 다나에게는 애도를 표했고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으니, 그로써 왕궁마법사는 체면을 지켰고 다나는 살아서 얻을 수 없었던 명예와 인정을 죽어서야 가졌다.

샤를레아는 단골 펍의 구석자리에 앉아 다나를 입에 담는 인간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미 죽은 다나를 되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성 밖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묻히는 것보다는 영웅으로 기억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건 그녀 자신이었다. 한데 사람들이 다나의 이름을 조잘거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에 돌이 얹혔다.

‘셰비언 새끼, 죽여 버릴까.’

셰비언이 다나더러 인간의 법으로 심판받으라는 조건을 걸지만 않았어도. 조용히 꺼내오려는 걸 도망자 신세 만들 일 있냐며 거래로 해결하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나오기 전에도 좀 지켜줄 것이지, 그 전엔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둔 안일함이 원망스럽다.

“씨발, 하나 남은 동족만 아니었어도…….”

엄지손가락만 한 잔에 따라야 하는 독주를 커다란 물 컵에 콸콸 부어 훌쩍 마셨다.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아주 짜릿했다. 이대로 실컷 마시고 인간 주정뱅이들처럼 화끈하게 취하기라도 하면 그 핑계로 셰비언을 찾아가 목을 졸라 버릴 텐데, 정신은 기가 막힐 정도로 말똥말똥했다.

샤를레아는 물 잔마저 치워 버리고 아예 병나발을 불다 도저히 취기가 오르지 않자 그만 일어섰다. 꼬리라도 달린 듯 살랑대는 점원에게 동전 몇 개를 집어던지고 휘적휘적 거리로 나왔다. 가을답지 않게 뜨거운 햇살이 거리를 온통 반짝반짝하게 만들었다. 가로등은 물론이고 지붕 장식과 간판, 심지어 하수구 뚜껑까지도 반짝거렸다.

문득 차가운 깨달음이 들이닥쳤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다나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불러도, 그건 거짓 제단에 바치는 헛된 공물이라. 명예도 애도도 닿을 리 없으니 다나를 위한 위로로는 역시 복수가 제일이라고.

샤를레아의 동공이 세로로 뾰족하게 수축했다. 뿌옇던 시계가 일시에 밝아지고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늘어졌던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의욕이 차올랐다.

‘어디부터 해야 할까.’

단순히 살해범을 찾아내 죽이기만 하는 건 아까웠다. 좀 더, 더 근본적인 복수가 필요했다. 칼레이의 마차를 타고 저승으로 떠난 다나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승으로 뛰쳐나올 만한, 그런 복수가 하고 싶었다.

멜브란트의 국왕, 펠른 3세는 귀족의 숫자를 줄이는 걸 중대한 목표로 삼은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치세 아래에서 귀족의 숫자는 선대에 비해 삼분지 이로 줄어들었다. 그렇다 보니 셰비언의 작위수여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히 폭발적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날이 올지 몰라!

의전담당관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작위수여식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시종과 시녀들은 의욕에 차서 홀을 꾸미고 다듬었다. 떠나지 못해 억지로 브란젤에 남아 있던 귀족들이 제 발로 찾아와 구경꾼 되기를 자처했으며, 기록화를 그릴 왕궁화가들은 열과 성을 다해 화구를 다듬었다.

연신 우울한 뉴스를 전하던 신문사들 또한 셰비언의 작위수여식에 보이는 관심과 열의가 아주 대단했다. 기자들은 셰비언에 대한 한 조각의 정보라도 얻기 위해 로렐라이를 기웃거렸고, 작은 스케치북과 목탄을 쥔 취재화가들이 셰비언이 지나갈 만한 거리 곳곳을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신문에 실린 셰비언의 기사와 초상은 기차와 우편마차에 실려 멜브란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잡지가 아닌 이상 신문은 브란젤 내에서 소비되고 끝인 게 보통인데, 이런 현상은 몹시 이례적이었다.

“잘생겼잖아요.”

“…….”

“직접 볼 때만은 못하지만, 이 화가 참 잘 그렸네요. 은발 표현이 아주 그럴듯해요. 모델로 세워놓고 그린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어쩜 이렇게 잘 그렸을까.”

브란젤에서 온 신문을 들춰보던 라디아타가 아낌없이 감탄했다. 라비린은 짜증스럽게 제 몫의 신문을 내던졌다. 신문에 실린 초상이 사람이 아니라 요정처럼 아름다운데, 실물은 그보다 낫다는 걸 알고 있으니만큼 라디아타의 말에 반박을 못하겠다.

“작위수여식이 있으면 있다고 그냥 소식만 전하면 될 것이지, 뭘 신문까지 사서 보낸 거야?”

“잘생겨서 그런다니까요. 젊고 미혼인 데다 로렐라이의 수석 마법사라니 돈도 잘 벌 텐데 이젠 작위까지 생겼죠. 그것만으로도 관심이 집중될 텐데 이렇게나 미남! 보는 순간 감탄이 나오는 얼굴이잖아요.”

“그런 조건은 나도 해당돼. 그런데 내 초상은 이렇게까지 안 퍼졌잖아.”

“본인 얼굴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이만하면 잘생겼어.”

“뭐어……. 그렇다고 합시다. 오라버니는 오드리와 연애한다고 실린 거니까 그랬죠. 남의 접시에 있는 음식이라구요. 하지만 셰비언 씨는 다르죠. 게다가 이젠 작위까지 받았으니, 웬만한 귀족영애의 신랑감으로도 손색이 없어요. 아르젠 남작이라니……. 와, 브란젤의 매파들이 엄청나게 바빠지겠어요.”

“왜, 아까워? 글렀어, 넌 가스트로 녀석 약혼녀니까. 그러게 안 된다니까 하필 골라도 그런 놈을 골랐어. 웬만한 집안이면 확 파혼이라도 시켜줄 텐데 하필 왕가라서 그것도 힘들고.”

라디아타는 괜히 시비를 걸어대는 라비린을 향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셰비언에게 눈길을 주는 오드리 때문에 그에게 질투가 나고 그가 작위를 받은 상황이 불안한 건 알겠는데, 짜증에 자신을 끼워 넣으면 안 되지 않은가.

“오라버니, 저는요. 화분 취급도 과분하다 하시면 그 이하로 봐드릴 의향이 아주 충분하답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어린 시절의 예쁘고 상냥하던 여동생은 어디로 갔나 어쩌고저쩌고. 라디아타는 라비린이 한탄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기사를 훑었다. 기자가 하루 종일 셰비언을 졸졸 따라다니기라도 하는 건지, 셰비언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 안에 다 있었다.

“지난여름 출입금지마법과 마법도구 온오프 발표로 화제를 모았던 아르젠 남작은 마법사협회와 함께 옛 마법을 연구하기로 합의했다. 연구라고는 하지만 거의 전수에 가까운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이며……. 우와. 공격마법을 썼다는 걸 이렇게 넘어가네요. 어떻게 되나 궁금했었는데, 옛 마법이라는 게 이렇게 대단하구나…….”

“라디아타,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제가 뭘요? 아르젠 남작은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에요. 만약 오드리가 지금 브란젤에 있었다면 초대장으로 책장을 채울 수도 있었을걸요. 오드리가 만탈락의 주인이자 로렐라이의 특급 고객으로서 로렐라이의 마법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라디아타는 점점 침착함을 잃어가는 라비린의 표정을 즐겁게 감상했다. 라비린은 오드리가 엮이기만 하면 여유가 없어졌다. 본인은 아직 모르는 것 같았지만.

“너한테 내가 뭘 바랐나 싶다……. 아무튼, 오드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글쎄요? 내가 오드리와 친하긴 하지만 하루 종일 붙어 있지는 않는걸요. 왜 갑자기 찾아와 얼쩡대나 했더니 오드리를 찾는 거였어요?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새삼 상처받은 척 하지 마라. 아닌 거 아니까.”

“이런. 예전의 오라버니가 아니네요. 쥐면 날아갈까 불면 꺼질까 애지중지하시더니, 오드리만 엮이면 나는 뒷전으로 밀려나서…….”

라디아타가 눈물을 찍는 시늉을 했다. 라비린은 가증스럽기까지 한 연기에 이마를 짚었다. 자신을 대놓고 화분 취급하면서 이렇게 놀려먹을 때만 절절하게 사이좋은 오누이 연기를 하다니.

“놀릴 거면 나중에 실컷 놀리고 지금은 오드리의 행방이나 좀 알려주면 좋겠다. 아침나절부터 찾고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 다들 말이 제각각이야. 누구는 말을 타러 갔다고 하고, 누구는 영지 구경을 갔다고 하고, 누구는 서재에 가는 걸 봤다고 하고…….”

“어딜 가든 오드리 마음이죠. 일부 구역을 제외하고는 다 풀어줬잖아요. 왜 그렇게 행방을 궁금해해요? 오라버니, 지금 되게 부인이 외도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못난 남편 같아 보이는 거 알아요?”

“비유를 해도 꼭…….”

라비린은 질색을 하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차마 아니라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가 오드리를 찾기 시작한 건 그녀 대신 받은 우편물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이디케가 아주 두툼한 우편물을 보냈는데, 언뜻 봐도 일반적인 편지가 아니었다. 고용인에게 맡겨 전하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자신이 직접 전해주고 싶었다. 그 김에 얼굴도 한 번 더 보고, 대화도 한 번 더 하고.

하지만 오드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봤다는 말은 나오는데 정작 만나려 하니 행방불명이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다이앤조차 보이지 않으니, 라비린은 엄마를 찾는 어린애처럼 애가 닳았다.

“정말 그런 거예요?”

라디아타가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신문을 다시 펴 들었다.

“오드리의 초록색 머리카락은 정말 특별한 표지예요. 오드리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머리카락 색만 보면 오드리인 줄 알죠. 이 영지에서 오라버니의 약혼녀가 초록색 머리칼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그런 걱정은 넣어두세요. 설령 오드리가 먼저 눈길을 주었대도 멀리멀리 도망칠 테니.”

“……사랑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일단 불이 붙기만 하면 그런 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죠? 타우레드의 후계자로서 이성적인 사랑을 강조, 또 강조하던 오라버니가 불 같은 사랑 같은 말을 한 거 맞아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나는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걸 알고 있어요. 오드리와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는지 알면, 오라버니는 아르젠 남작이 아니라 나를 더 질투하게 될걸요?”

라디아타가 제 목을 쓸었다. 연회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목엔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따로 공들여 꾸민 것도 아닌데 그녀의 화려한 금발과 알룬드의 목걸이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 생각에 오라버니보다는 오드리가 훨씬 이성적인 사람인 것 같으니까. 타우레드 후계자의 약혼녀라는 위치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어떤 건지, 오드리는 잘 알고 있어요. 그걸 더럽혀 봐야 아쉬워지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요.”

“……알았다.”

라비린은 더 말하기를 포기하고 라디아타의 방에서 나왔다. 하지만 오드리를 찾을 생각을 완전히 접지는 못했으니, 그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열흘쯤 전, 영지 구석구석을 순찰하던 기사 한 명이 은밀히 라비린에게 전한 말 때문이었다.

‘레이디 헨젤께서 따로 은밀히 남자를 만나는 걸 보았습니다.’

영주성 근처에 사냥용으로 조성해 놓은 숲 부근. 안 그래도 인적이 드문 곳에서 저녁 어스름이 내릴 시간에 남몰래 만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눴다는 남녀. 여자는 큰 모자를 써서 머리칼을 감췄고, 남자는 마치 그녀의 숭배자라도 되는 양 정중했다고.

기사는 모자 아래로 흘러내린 초록색 머리칼과 남자와 맞잡은 손이 가무잡잡한 걸 보고 그녀가 오드리라는 걸 확신했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는 말도 곁들였다. 그 당시, 라비린은 과장된 태도로 웃어젖히며 기사의 보고를 뭉갰다.

‘염색하면 그만인 머리카락에 너무 큰 의미를 두는군. 자네, 요즘 브란젤에서는 오드리가 입고 다니는 남부식 드레스가 유행하고 있다는 걸 아나? 허리에 코르셋을 차지 않으면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다고 하던 브란젤에서 말이야. 이번에도 비슷한 일일 거야. 누군가 오드리처럼 머리를 염색한 거겠지. 신경 쓰지 말게.’

기사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을 하고도 수긍하고 물러났지만, 정작 그렇게 기사를 돌려보낸 라비린이 번뇌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오드리가 얼마나 셈이 빠르고 이성적인 사람인지 잘 알면서도, 그녀의 인생에서 사랑은 몹시 순위가 낮다는 걸 알면서도 번득번득 신경이 쓰였다.

라디아타의 말대로 오드리의 초록색 머리카락은 정말 강력한 표지였다. 초록색 머리카락 한 올만 보아도 사람들은 오드리를 떠올렸다. 호기심 많은 마을 처녀 몇몇이 오드리를 따라 초록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했다가 주변에서 온갖 말을 듣고 머리색을 되돌린 후로는 더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그 초록색 머리칼의 여자가 오드리가 아닐 가능성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녀가 남들의 시선을 피해가며 만난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기사의 묘사대로라면 남자는 셰비언이 아니었다. 덩치가 크고 그럭저럭 단정하게 생겼다니, 셰비언에게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묘사도 없었다. 만약 그 남자가 셰비언이었다면 몹시 비참해졌을 텐데, 아닐 거라는 확신이 서자 어째 미묘하게 화가 났다.

오드리가 눈에 보이는 곳에 있을 때는 괜찮았다. 제가 자꾸 찾아가는 걸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어도 어쨌거나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안도가 찾아왔다. 한데 오늘은 아침나절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찾을 수도 없으니 하도 마음이 급해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건지…….”

쌓이고 쌓인 초조함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라비린은 자괴감에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오드리를 찾으러 영주성의 다른 곳을 뒤질 생각을 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들이 남아 있었다.

모자 아래로 갈색이 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오드리는 몹시 낯설었다. 초록색 머리카락보다 훨씬 얌전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인데도 말이다. 카프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오드리를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그림처럼 자리한 얼음산을 바라보는 오드리는 신분을 짐작하기 힘든 차림이었다. 옷감의 질이나 드레스의 형태 등을 짐작할 수 없도록 도톰한 로브를 걸치고 머리엔 장식 없이 단순한 모자를 썼다. 머리카락에 자국이 남지 않도록 느슨하게 묶은 머리끈 탓에 언뜻 보면 머리를 풀어헤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셰비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경, 저를 왜 그렇게 보세요?”

“아, 그, 그게…….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로브를 입고 온 게 이상하게 보이시나요? 여긴 중부지방이고 수확제도 지났으니 입을 만도 한데요. 햇살이 계절에 안 맞게 좀 뜨겁긴 해도 한 달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졌답니다.”

“그게 아닙니다. 다만, 그 며칠 사이에 염색을 빼신 건가 싶어져서요…….”

“아하.”

오드리가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연지를 칠하지 않은 입술이 비뚤어진 호선을 그렸다.

“가발이에요. 여기선 초록색 머리카락이 너무 눈길을 끌어서요.”

그 머리색은 딱히 타우레드 영지가 아닌 곳에서도 눈길을 끌었지만, 고지식한 카프러스에게도 그걸 말하지 않을 정도의 분별은 있었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여장한 데멘사를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데멘사는 긴 갈색 가발을 쓰고 얼굴 전체에 꼼꼼하게 화장을 한 상태였다.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드레스를 입고 오드리와 비슷한 로브를 둘러 몸매를 감췄다. 입술에 바른 새빨간 연지 때문인지 그는 그럭저럭 여성으로 보였는데, 카프러스가 중앙은행에서 찾아온 서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도, 카프러스의 시선도 비껴가는 듯한 집중력이었다.

데멘사를 꺼림칙해하는 카프러스의 기색을 알아챈 오드리가 짓궂은 미소를 짓고 카프러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떻게든 외모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이리 가상하니, 괜히 흔들어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심리다.

“아노말리아, 꽤 잘 어울리지 않아요?”

“…….”

“다이앤의 역작이에요. 우릴 평범한 처녀로 보이게 하려고 전력을 다했어요. 킥, 영주성에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그만큼 서로 얼굴을 모르는 고용인이 많았거든요.”

“……다이앤은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긴요. 그야 당연히 아노말리아의 거처에 있지요. 오늘 아노말리아는 컨디션이 너무 나빠 종일 방 밖에 나가지 않을 예정이에요.”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굳이, 이렇게 꼴사나운 분장까지 해가면서…….”

오드리가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렸다.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카프러스는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 말을 바꾸지 않았다.

“장수를 기원하며 어린애를 성별을 바꿔 키우는 풍습이 있는 건 알지만, 멀쩡한 성인 남성이 저렇게 드레스를 입고 있는 꼴을 보니 역겹습니다.”

“저번에 들킬 뻔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이 정도는 해줘야 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누가 지금 아노말리아 씨를 보고 변호사 데멘사를 생각하겠어요?”

카프러스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때 오드리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려 타우레드의 기사가 접근하는 걸 알아채지 못했던 게 좀 민망하긴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숨어서 명령을 받아야 할 이유부터 납득이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오드리의 일이라면 간도 쓸개도 없는 것처럼 뭐든 내주려드는 라비린이 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카프러스의 침묵에 기분이 상한 오드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가 말을 더 보태려는 순간, 무섭게 서류에 집중하던 데멘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서류가 모자랍니다.”

“뭐?”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있습니다.”

데멘사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서류를 쥔 손도 마찬가지였다. 짙게 화장을 했는데도 얼굴이 창백해진 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을 받은 카프러스가 즉각 반응했다.

“난 손대지 않았소.”

“예, 뭐……. 기사님이 뭘 알아서 건드렸겠습니까. 의심 안 합니다.”

의심 안 한다는데 왜 이렇게 불쾌한지. 카프러스는 바보 취급 받은 기분에 얼굴을 구겼지만 따로 말을 더 보태지는 못했다. 오드리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가 잘못 안 건 아닌가? 금고 계좌에 있는 걸 그대로 갖고 오기만 했는데 없다니. 다른 곳에 두고 잊어버렸다거나 한 건 아닌지 생각해 봐. 틀린 계좌를 알려줬을 수도 있잖나.”

“그럴 리 없습니다. 그 정도로 머리가 녹슬진 않았어요.”

데멘사는 고개를 저었다. 빚쟁이에게 쫓겨 도망치는 처지에 계좌를 여러 개 만들지는 못했다. 금고 계좌는 하나였고 거기서 꺼내온 다른 것들은 멀쩡하니 누군가 손을 댔다는 결론밖에 안 나왔다. 그의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대체 누가…… 누가 이런 짓을 했지?’

만들고 나서는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는 계좌를 대체 어떻게 알아냈으며, 그 많은 서류 중에서 밀리나의 유서 원본과 오스미다 왕비의 인장이 찍힌 공증확인서만 빼간 의도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없어진 서류가 뭐지? 중요한 건가?”

“핵심이 사라졌습니다……. 유서 워, 원본과… 오스미다 왕비님의 공증확인서가…….”

“다시 찾아봐. 서류가 워낙 많으니 사이에 끼어 있는 걸 놓쳤을 수도 있잖나.”

“예, 예…….”

데멘사가 그 자리에 철퍽 주저앉아 서류를 사방에 펼쳐 놓고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를 생각했다. 역시 헨젤 백작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밀리나의 유서와 오스미다 왕비의 공증확인서에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이라면 그가 가장 유력했다.

사정 모르는 카프러스는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만 이해했다. 그는 데멘사가 마구 파헤치는 서류를 주워 정리하며 오드리의 설명을 기다렸다. 하나 그에게 차근차근 말을 해주기엔 데멘사도 오드리도 마음이 몹시 초조했다.

“없나?”

“예……. 없습니다…….”

“정말 착각한 게 아니야?”

“네. 누군가 손을 댄 겁니다.”

“……역시 아버님이 손을 대신 건가…….”

오드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비린도 찾아내는 데멘사를 헨젤 백작이 찾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 뒀다는 게 이해가 안 갔는데, 중요 문서를 확보한 뒤였다면 납득이 갔다. 하지만 데멘사는 그럴 리 없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헨젤 백작이 서류를 가져갔을 리는 없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제가 아직 살아 있잖습니까. 그게 헨젤 백작님 손에 들어갔으면 전 그 길로 칼레이의 마차에 탔을 겁니다.”

“나 참……. 일종의 구명줄이었군. 어쩐지 잘 살아 있다 했어.”

“그러니 이게 없는 게 더 이상한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데멘사는 더 없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여장을 하라고 대뜸 드레스를 들이밀 때도 이렇게 당황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이마에 흐른 땀 때문에 화장이 죄다 지워질 지경이었다. 손에서 나는 땀 때문에 서류가 우글우글해졌다.

‘나를 선택해 줘.’

라비린이 했던 말이 다시 환청처럼 귓가에 울렸다. 무럭무럭 덩치를 키운 의심이 오드리의 가슴에 커다란 돌이 되어 얹혔다.

“일단…… 돌아가자.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지금 세 사람이 있는 곳은 렘 강의 갈대밭 부근이었다. 예년과 확연히 다른 날씨에도 가을을 맞은 갈대는 사람 키를 훌쩍 넘길 만큼 자라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고기잡이를 하느라 매일 같이 강을 오가는 영지민들이야 이상함을 알겠지만 변장을 했으니 괜찮았다. 그래도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 꼭대기에 올랐던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베텔 경, 아노말리아는 나와 함께 영주성으로 돌아갈 거예요. 경은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면 정식으로 방문해 날 찾으세요.”

“그때가 되면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실 겁니까?”

“설명이 필요한가요? 경은 나의 기사인데.”

카프러스가 헨젤가의 기사인 걸 뻔히 알면서도, 오드리는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은 내가 편지를 보내거나 말거나 오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가주에게 미운털이 박힌…… 후계자도 아닌 아가씨를 위해 여기까지 오셨으니 나의 기사라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지나치게 경을 믿는 건가요?”

믿음과는 별개로,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지시대로 움직이길 바라는 건 기사가 아니라 칼에게 하는 대접이었다. 카프러스는 오드리가 그걸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한 도시의 주인으로서 보낸 세월이 있는데 설마 모를까 싶다가도, 알면서도 자신을 이렇게 다룬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지럽게 부딪쳤다.

“베텔 경, 설명이 필요해요?”

“……아닙니다. 저녁 무렵에 영주성으로 가겠습니다.”

카프러스는 끝내 자신의 섭섭함을 비출 수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데멘사를 추슬러 영주성으로 돌아가는 오드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그녀의 앞에 서서 갈대를 헤쳐 주고 혹시 모를 위험한 짐승을 쫓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서걱서걱 흔들리는 갈대가 제 대신 투덜거려 주는 것만 같았다.

오드리는 무사히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들키지는 않았다. 수더분하게 웃고 발을 쾅쾅 구르며 걷다가 다른 나이 많은 고용인에게 몸가짐을 조심하라 꾸중을 듣기까지 했으니 누가 그녀를 헨젤 백작영애로 의심하겠는가. 오드리와 도매금으로 묶여 실컷 혼난 데멘사가 뒤늦게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대단한 연기력입니다, 아가씨.”

“내가 만탈락에서 사고뭉치 노릇을 좀 해 봤어.”

“그래도요. 어떻게 아가씨를 코앞에서 보고도 모르는 겁니까? 아가씨의 눈동자 색은 정말로 특징적인데요.”

“애초 내가 백작영애일 거란 생각 자체를 못 해서 보고도 모르는 거야. 옷을 바꿔 입고 머리색을 다르게 했으니까 당연히 아닐 거라고 여기는 거지. 내가 넝마를 입고 얼굴에 덕지덕지 검댕을 묻히고 길거리에 앉아 있으면 다들 동전을 던져 줄걸? 아니면 뭐 어떻게 한 번 해 보려고 껄떡대는 놈들이 오든가.”

옷을 편하게 입어서 그런지. 아니면 옆에 이디케가 없어서 그런지 오드리의 입담엔 거침이 없었다. 껄떡댄다는 말을 귀족영애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던 데멘사는 제 정신 건강을 위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더 얘기했다간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온종일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픈 사람인 척하고 있던 다이앤은 오드리와 데멘사의 귀환을 격하게 반겼다. 쉬는 것도 좋고 침대에 누워 원 없이 낮잠 자는 것도 좋은데, 그게 너무 길어지니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나.

다이앤은 누워 있느라 지겨웠던 시간만큼 번개 같은 솜씨로 오드리의 옷을 갈아입히고 가발을 벗겼다. 그리고 장인이 만든 빗으로 엉킨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빗질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옆에서 가발의 핀과 씨름하고 있는 데멘사는 보는 체도 안 했다. 데멘사는 빠진 머리카락에 눈물을 머금으며 슬퍼했다.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마른기침을 했더니 목이 다 갈렸다니까요. 아노말리아 씨도 내일까지는 기침하는 흉내를 좀 내야 할 거예요. 갑자기 싹 나으면 이상하잖아요.”

“아, 예…….”

“아가씨, 볼일은 잘 보고 오셨나요? 베텔 경께서 일을 아주 잘 해주셨겠죠?”

“베텔 경이야 날 실망시킨 적이 없지. 문제는 다른 곳에 있지만……. 자세한 얘기는 좀 뒤에 해주마.”

데멘사는 오드리와 다이앤을 신기해하며 바라보았다. 변호사 일을 하며 여러 부유한 중간계층은 물론이고 귀족가에도 다녀보았는데, 저렇게 사이가 돈독한 주종은 보기 드물었다. 기사인 카프러스에게도 해주지 않은 얘기를 하녀에게는 해주겠다니 말이다. 밀리나 헨젤도 하녀와 저렇게 친근하게 굴지는 않았다.

“아, 따거!”

하지만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지금 당장은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뽑아대는 핀이 큰 문제였다. 머리카락이 한 줌은 뽑힌 것 같은데 가발은 아직도 머리에 붙어 있었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이 아주 징글징글했다. 그는 울 듯한 목소리로 다이앤을 불렀다.

“몰리 양, 나는 언제 도와줄 겁니까?”

“아, 참. 깜빡했네요.”

깜빡하기는 무슨. 일부러 모른 척한 거면서. 데멘사는 입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불평을 애써 단속했다. 다이앤이 없으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가발도 가발이지만 이 끔찍한 화장을 지울 방도를 몰랐으니까.

과연 눈 몇 번 깜빡였을 뿐인데 가발이 벗겨졌고, 숨 몇 번 쉬는 동안 얼굴에 뭔가가 처덕처덕 묻었다가 물 묻힌 수건에 닦여나갔다. 데멘사는 거울을 확인하고 다이앤의 손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았다.

“아까 화장을 받을 때도 생각했는데, 몰리 양의 손에는 용의 마법이라도 깃들어 있습니까? 순식간에 사람이 바뀌네요.”

“용의 마법은 아니어도 화장의 마법은 부릴 줄 알죠. 혹시 다음번에 여장을 또 하게 되면 그땐 이번과는 또 다른 얼굴로 만들어 드릴게요.”

화장의 위력을 직접 체험하긴 했지만, 두 번 겪고 싶지는 않다. 데멘사는 질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제발 다음에는 이런 분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일할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나는 매일 겪는 일인데, 그대에게는 아주 괴로운 체험이었나 보군. 고려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오드리는 승마복 바지 차림이었다. 오드리가 옷을 갈아입을 때는 파티션 반대편에 있었고 나왔을 땐 가발을 벗느라 정신이 없었던 데멘사는 오드리의 바지 차림에 너무 놀라 삿대질까지 했다. 오드리에겐 낯익은 반응이었다.

“그, 그…….”

“이런, 혓바닥에 담아두었던 기름이 다 떨어졌나 보지? 이 정도에 그렇게 놀라다니 나중에 증언은 제대로 할까 모르겠어.”

“아가씨!”

“주방에 말해서 기름이라도 한 컵 얻어 마시도록. 겨우 바지 정도에 녹스는 혓바닥은 곤란해.”

여기서 비상식적인 사람은 누가 봐도 오드리인데, 타박은 데멘사가 들었다. 데멘사가 억울함에 가슴을 쳤다. 하나 오드리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이앤을 뒤에 달고 거침없이 성의 복도를 걸었다. 사람의 인지를 흐트러뜨리는 걸 목적으로 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되어 있었지만 길은 예전에 다 외웠다.

구역이 바뀌자 복도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정교하게 자수를 놓은 태피스트리가 벽을 장식했고 뚜껑을 연 마법등이 빛을 뿌렸다. 그 복도를 바쁘게 오가던 성의 고용인들은 오드리를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비록 금방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아 당황을 감추었지만 말이다.

“해괴하게들 구네. 바지 때문에 저러나?”

“그렇겠죠. 여긴 만탈락이 아니잖아요. 브란젤의 고용인들도 바지 차림의 아가씨를 뵐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요. 모르셨어요?”

“그야 알지. 하지만 여긴 산트렘 출신의 안주인이 머물렀던 성이기도 해. 외부인이 많아서 그렇다곤 해도 잘 이해가 안 되는걸.”

오드리의 의문은 타당했다. 라비린이 들려 준 로샨의 과거 중에는, 기사들이 안주인과 함께 검을 수련하기를 불편해하자 아예 정원을 밀어버리고 새로 연무장을 만들었다는 거짓말 같은 일화도 있었다. 그런 안주인의 과거를 모를 리 없는 고용인들이 왜 바지 정도에 당황하는 걸까.

그녀의 궁금증은 자신이 머무는 방에 돌아와서야 풀렸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손님방 응접실에 사람이 있었다. 라비린이었다. 그는 책상이 놓인 벽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마법등의 불빛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그를 뒤덮어 더없이 음울해 보였다.

“늦었네.”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라비린이 자세를 바꾸자 혹사당하던 관절에서 두둑 소리가 났다. 오드리는 그가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타우레드의 손님맞이는 이런 식이야? 손님에게 머무르라 내준 방에 주인이 불쑥불쑥 들어와도 돼?”

“아침부터 종일 찾아다녔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어쩐지 고용인들이 날 보자마자 땅바닥으로 고개를 처박더라니. 아무리 약혼녀라지만 주인도 없는 방을 네가 점거하고 있으니, 나 보기가 낯부끄러웠겠지.”

“오드리!”

“소리 지르지 마. 내가 이 영지에 어디에서 뭘 하고 다니든 괜찮다고 허가한 사람이 바로 너야. 네 시야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고 싶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말을 했으면 듣긴 했겠어? 네가? 목줄 거는 거냐고 성질을 부렸겠지.”

“여긴 타우레드의 땅이야. 당연히 수긍했을 거야. 너,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새파란 침묵이 방을 가득 메웠다. 마주 보는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뒤로 물러나 있던 다이앤이 슬금슬금 오드리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기척을 느낀 라비린이 매서운 눈으로 다이앤을 노려보니, 오드리가 다이앤을 몸으로 가렸다.

“다이앤, 나가 있어.”

“아가씨, 하지만…….”

“나가 있어!”

다이앤은 미적대며 방을 나갔다.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뭔 짓을 할까 걱정돼 꿈지럭대는 걸음이 아주 거북이 저리 가라 수준이었다. 그러다 오드리에게 한 소리를 더 듣고서야 문을 닫았으니, 오드리가 쓰는 손님방 응접실에는 라비린과 오드리 두 사람만 남았다.

라비린은 화를 참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오드리는 승마복을 입고 있었지만, 정말 승마를 하고 왔다기엔 이마에 땀 한 방울도 없는데 무슨 승마란 말인가. 다리에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대체 어딜 다녀왔을까, 누굴 만났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 미칠 것 같았다.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

“그럴 수만 있다면, 볼린의 밤에 내가 했던 말을 도로 주워 담을 거야.”

“결혼하자던 말?”

“아니. 네가 누굴 만나든 상관하지 않겠다던 말.”

라비린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정도 이상으로 빠질 것만 같다는 예감은 그때도 있었는데, 대체 무슨 배짱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도 상관없다는 말을 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그땐 자신이 이렇게 질투에 눈이 돌아버린 멍청이가 될 거라는 건 몰랐으니, 과도한 자신감이 부른 참사라 하겠다.

“네가 보이지 않으니까 하루 종일 초조했어.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나 말고 다른 녀석과 얼굴 마주보고 웃고 있는 건 아닐까……. 도둑맞은 내장을 찾으러 다니는 칼레이처럼 온 성을 쑤시고 다녔지. 내가 이런 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맞아, 정말 꿈에도 몰랐지. 네가 이렇게 형편없이 굴 줄은 나도 몰랐어.”

오드리가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벗어 내던졌다. 그 서슬에 핀이 빠지며 다이앤이 기껏 정돈해놓은 머리카락이 와르르 쏟아졌다.

“오드리…….”

“네가 이러는 거, 나한테 정말 부담이야. 서로 감정 없이 이득에 집중하자고 해놓고 이렇게 자꾸 들이대면 난 널 어떻게 대해야 하지? 손발을 맞춘 동료? 아니면 평범한 구혼자? 너, 나더러 아내의 의무를 다하면서 인생의 동반자이자 가장 믿을 만한 친구로 곁에 있어달라며? 그래놓고 이게 대체 몇 번째야!”

성큼성큼 라비린에게 다가간 오드리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당겼다. 신장 차가 크다 보니 라비린은 허리를 잔뜩 굽힌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오드리와 얼굴을 마주보는 꼴이 됐다. 오드리의 눈에서 이글대는 불길이 라비린의 얼굴거죽을 붉게 덥혔다.

“계속 이 따위로 굴 거면 파혼해.”

“그랬다간 로렐라이가 곤란해질 텐데?”

“로렐라이를 너무 아낀 나머지 얌전히 국왕전하께 넘기려 했던 날 비난했던 사람이 누군데?”

“지금은 로렐라이보다 네가 더 중요해.”

“나도 내가 더 중요해. 잠깐 곤란한 정도야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어. 그러니 라비린, 태도를 분명히 정해. 처음에 네가 말했던 걸 지키란 말이야.”

“손발 맞춘 동료이자 구혼자로 대해.”

“라비린!”

라비린이 오드리의 손목을 쥐고 다른 팔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드리가 아무리 힘이 세다지만 라비린은 기사였다. 그가 오드리의 힘을 알고 작정하고 안으니 오드리는 옴짝달싹 못 했다. 라비린은 어떻게든 벗어나려 꿈지럭대는 오드리를 더 꽉 끌어안고 속삭였다.

“난 꾸준히 말해왔어, 내가 이전과 같지 않다고. 그걸 빈말로 흘리면서 모른 체한 건 너야.”

“허울뿐인 약혼 관계야. 계산적인 정략결혼이고.”

“나도 알아. 계속되는 거절에도 꾸준히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게 그 약혼자라는 허울 때문인데, 파혼? 내가 왜 파혼을 해?”

라비린은 고개를 숙여 바짝 굳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강가에서 자라는 갈대 냄새가 그녀의 머리칼에 배어 있었다.

“그 허울을 잘 지켜서 결혼하고, 쭉 네 곁에 있을 거야. 그걸 위해서라도 난 너와 약속한 걸 충실히 지킬 거고. 욕심 많은 오드리 헨젤은 내가 주는 것들을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너 아주 인성이 글러먹었구나?”

“이왕이면 계산이 빠르다고 해줘. 오드리, 너야말로 상인이면서 왜 그렇게 계산이 느려? 내가 너에게 푹 빠질수록 네게 유리하다는 걸 몰라? 왜 자꾸 날 밀어내는 건데? 이미 약혼도 한 거, 더 잘 써먹을 생각을 해 보는 게 어때.”

오드리가 팔을 뻗어 라비린의 등을 끌어안아 당겼다. 그리고 뜻밖의 접촉에 놀란 라비린의 경계심이 잠시 풀린 틈을 노려 무릎으로 그의 사타구니를 찍었다.

“악!”

“와, 이거 정말 유용하네. 단번에 풀려났잖아?”

자유로워진 오드리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자세가 무너져 고통스러워하는 라비린을 돌아본 건 그 다음이었다.

“괜찮아?”

“……괜, 괜찮아 보여? 젠장, 이런 건 대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베텔 경이 가르쳐 준 유일한 호신술이야.”

라비린은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일반적으로 귀족영애에겐 필요 없다 여겨지는 호신술을, 그것도 끌어안긴 상태에서 낭심을 찍어버리는 과격한 방법을 가르쳐 준 저의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지금 오드리를 당당히 끌어안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내는 라비린, 그뿐이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오드리는 일단 손수건을 꺼내서 라비린의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부터 닦았다. 입술이 닿는 순간 오소소 돋아났던 소름이 좀체 가라앉질 않았다. 한껏 인상을 쓴 채로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계산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없는 마음을 가장해서 라비린 네 비위를 맞출 계산을 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네가 아니라 아버지 앞에 엎드렸을 거야. 머리를 염색하는 짓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을 거고, 가무잡잡하게 태운 피부도 어떻게든 하얗게 돌려놓았겠지. 가족의 품이 그리웠노라, 아버지 옆에 조금이라도 더 있게 해달라 울고불고 빌어서 결혼을 미룰 수도 있었을 거야.”

“…….”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게 결혼의 탈을 쓴 거래를 제안했던 거 아니야? 이거야 원, 저번에 보초탑에서 했던 말을 다시 하게 되겠군. 라비린, 달콤한 과육을 얻고 싶으면 껍질과 씨앗도 각오했어야지.”

라비린은 휘청거리면서도 기어이 몸을 일으켜 오드리의 맞은편 의자를 찾아 앉았다. 통증은 여전히 끔찍했지만 계속 바닥에 뒹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좋아하는 여자의 앞이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오드리 너야말로 과육을 먹으려면 껍질과 씨앗을 내버려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은 거 같은데? 어차피 결혼하면 평생 얼굴 맞대고 살 건데, 이렇게까지 밀어낼 것 없잖아. 젠장,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헨젤 백작과 비교 당하다니 자존심이 상하는걸.”

마법등의 불빛이 라비린의 콧대에 부딪쳐 짙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미간에 채 가시지 않은 고통이 고여 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인지 그마저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섬세하고 우아한 셰비언과는 정반대의 미남이었다.

‘분명히 내 취향의 얼굴인데…….’

오드리는 문득 생각했다. 자신이 셰비언을 만나기 전에 라비린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럼 뭔가 좀 달라졌을까? 수렁에 빠진 자신에게 동아줄을 내려준, 그것도 취향 그 자체일 정도로 잘생긴 남자에게 이렇게 무덤덤하게 굴었을까? 조금쯤은 그가 원하는 대로 마음을 내주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 봐야 헛되기도 하고. 오드리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라비린, 내가 널 밀어내는 게 그나마 널 진심으로 대해서인 거라곤 생각 안 해 봤어?”

“…….”

“서로 적당히 거리가 있을 때가 오히려 나았어. 기자들을 꼬리로 달고 다니며 애정행각을 벌이는 척하고 다닐 때는 정말로 즐거웠다고. 그런데 이 어색함은 대체 뭐야.”

“……그런 것도 같고.”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오드리가 활짝 웃었다. 라비린은 그럴 리 있느냐며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거리감 있는 게 좋다면 그렇게 해주면 그만이지.’

라비린은 자꾸만 초조해지는 자신을 애써 달랬다. 오드리는 아주 이성적인 데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뚜렷한 사람이니, 계속 사랑이 고픈 애새끼처럼 굴다간 지금 같은 관계도 어려워질 거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질문이 있었다.

“너, 나랑 결혼하긴 할 거지?”

“당연한 소릴. 내가 여길 무슨 자격으로 와 있는 건지 잊었어? 갑자기 왜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고 그래?”

“……그래, 결혼은 할 거라니 그나마 다행이네.”

라비린이 마른세수를 했다. 빛을 받으면 금실처럼 반짝이는 옅은 갈색 머리칼이 마구 흔들렸다. 오드리는 잘생기고 신분 높고 부유한,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남자가 저 때문에 괴로워하는 꼴을 퍽 즐겁게 감상했다. 자신에게 그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건 정말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문질러서야 어디 얼굴가죽 벗겨지겠어?”

“내 얼굴가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책상이나 확인해. 이디케한테서 편지 왔어.”

오드리는 서둘러 편지를 확인했다. 밀랍으로 단단히 봉한 편지는 꽤 두껍고 크기가 컸으며, 봉투에 타우레드 지역의 우편물을 뜻하는 사자 소인과 함께 급한 우편임을 알리는 독수리 도장이 찍혀 있었다.

오드리는 이걸 왜 이제야 주느냐, 혹시 열어본 거 아니냔 의심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라비린을 노려보았지만, 라비린은 자신은 손댄 적 없다며 억울하다 했다.

“그 우편 내가 대신 받아서 여기다 가져다 놓은 거야.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나오는 걸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그리고 이디케가 보내는 거면 뻔하지. 로렐라이나 데멘사 쪽 보고서겠지.”

“그야 그렇지만…….”

“네가 훑어보고 정말 보고서면 나도 듣겠어. 나한테도 지분이 있는 거니까.”

“로렐라이에 네 지분 없어.”

“데멘사에는 있지. 그리고 로렐라이의 일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어야 나중에 국왕전하께서 스쳐 가듯 물으셔도 대답을 할 수 있잖아.”

좀 전까지 연신 한숨을 쉬는 걸로 모자라 우습기까지 한 질문을 하던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오드리는 그가 몇 번이고 이 대답을 연습하지 않았을까 짐작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서 그대로 밀랍 봉인을 뜯었다.

“……네 짐작이 너무 잘 들어맞아서 짜증나…….”

“진짜 보고서인가 보지?”

“응. 안부인사는 그냥 형식적인 거고……. 스크롤 사업이 잘될 것 같다는데? 왕궁마법사 쪽에서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대. 이상하네, 이득은 적고 관리비용은 많이 들어가는 일인데 그걸 굳이……. 셰비언이 작위를 받아서 그의 눈치를 보느라? 아니야, 그런 걸로 움직일 위인들이 아니야. 뭐 때문이지?”

오드리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셰비언이라고 부르는 이름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라비린은 아르젠 남작이라고 정정해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에 대한 정보는 밀알 한 톨만 한 것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셰비언 씨의 옛 마법에 편승해서 괴물사태의 책임을 회피해 보려던 게 영 안 됐나 보지. 내가 그 대포 안 먹힐 거라고 했잖아.”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좋은데.”

“꿈 깨. 아마 신년제를 할 때까지는 여기 꼼짝없이 잡혀 있어야 할 거야. 다른 얘긴 없어?”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신년제라니, 한 달은 족히 남았다. 아무리 이디케와 릴리가 유능하다지만 이렇게 새로운 일거리가 쏟아질 때는 가까이에 있는 게 제일인데 공석이 너무 길다.

“반항의 대가가 좀 혹독하다…….”

“그 말, 내 친척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지 마. 난리 난다.”

“알아, 안다고. 그런데 신년제 얘기하니까 좀 기분이 이상하긴 하다. 솔직히 지금 날씨는 좀 따뜻한 가을이잖아. 겨울은 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남부라면 모를까 여긴 중부지방인데…….”

수확제를 치르고도 한 달이 넘게 지났다. 연말까지는 겨우 한 달 남짓이 남았을 뿐인데 본래 짧고 화려하게 지나가던 가을의 옷자락이 올해는 유난히 길었다. 이래서야 신년제가 치러질 무렵이 되어야 눈발이 조금 날리려나 싶었다.

“만탈락은 어떠려나 몰라. 락시 부인은 계속 괜찮다 소리만 해. 밀도 더 사야 하고 나랍에서 약초도 더 들여와야 하는데…….”

오드리는 만탈락 걱정에 미간을 좁혔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날씨가 엉망이면 또 농사가 망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락시 부인에게 편지로 말을 해두긴 했지만 역시 눈으로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이 없어진 건 아닐까 걱정돼.”

“말도 안 되는 소릴……. 이러다 갑자기 추워지겠지. 날씨를 우리가 무슨 수로 바꾸겠어. 그보다 그 스크롤 얘기 말곤 없어?”

“있어. 눈 밝고 귀 밝은 내 고모부님께서 돈 냄새를 맡으셨나 봐.”

“고모부님이라면……. 그웬 백작? 우편국을 담당하는 인사가 로렐라이와 무슨 관련이 있어서?”

“로렐라이가 아니라 데멘사야. 가스트로 왕자가 국경의 요새들 사이에 전보선을 깔 것을 요구했던 거 기억나?”

국경의 요새들을 잇는 전보선. 가스트로 왕자가 브란젤에 전보선을 깔지 못하게 막았던 규제를 풀어주는 대가로 요구했었으나, 라비린과 오드리가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산트렘 지역의 요새들끼리만 연결하는 걸로 합의를 봤었다.

본래는 우편국과 연계해서 선을 깔 예정이었지만, 라비린이 거액을 추가로 투자하고 오스미다 왕비의 지원금이 들어오면서 우편국과의 연계는 없던 걸로 하고 데멘사 단독으로 선을 깔고 있었다. 지리를 잘 아는 군이 인력으로 나선 데다 생각보다 지역 주민들이 협조를 잘해줘서 진척이 아주 빨랐다.

진척 속도를 주의 깊게 보던 가스트로 왕자는 최근에 산트렘과 브란젤을 연결하는 전보선을 추가 주문했다. 그리고 요새 간 전보와 산트렘과 브란젤을 잇는 전보가 시간 차 없이 단번에 연결되길 원했다.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이유는 알겠지만, 정말이지 맞추기 힘든 요구였다. 산트렘과 브란젤 사이의 거리가 얼만데 그 시간을 짠 듯이 맞추나. 그래도 거절할 수가 없어 주문을 받긴 받았는데, 참 곤란했다.

센네페르가 끼어들 구석을 찾아낸 건 그 지점이었다. 어차피 기찻길을 따라 전보선을 깔 거라면 우편국이 도와주겠다고 말이다. 기차역마다 있는 우편국 지점에 데멘사 지점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나. 전보가 브란젤과 산트렘 사이에 있는 다른 도시로 뻗어나갈 수 있는 교두보가 되어주겠다는 것이다.

라비린은 오드리가 넘겨준 보고서를 읽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웬 백작이 시류를 잘 타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머리를 들이밀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네이기스 일도 있고, 고모님이나 아버지 눈치가 보여서라도 내가 엮인 곳에는 거리를 뒀었는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표면적으로 데멘사의 사장은 라비린이었지만 거기에 오드리가 함께 엮여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드리가 전보의 개발에 거액을 투자했음을 공공연히 말하며 라비린과 함께 전보를 홍보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끼어야겠다 싶었나 보지. 그웬 백작은 예전부터 헨젤 백작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며?”

“응. 작위도 같은데 거의 가신 수준으로 부렸으니까……. 꽤 예전부터 불만이 쌓여 있었던 걸로 알아.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는 건 좀 놀라워. 그것도 내가 아버님과 이렇게 대놓고 갈등을 빚고 있는데…… 아, 그래서인가. 내가 타우레드의 본가에 있어서? 날 헨젤이 아니라 타우레드로 가정하고 끼어드는 느낌인데.”

“아마도 그럴걸. 어쨌거나 명목상 데멘사의 주인은 나니까, 오드리 네 사업이 아니라 타우레드의 사업에 끼어드는 거라고 할 수 있잖아. 널 이용해서 헨젤 백작에게 불만 표시도 하고, 전보 사업에 참여해 이득도 보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셈이군. 이 정도가 되는 사람이었어?”

“글쎄……. 잘 모르겠네. 깊게 대화해 본 일이 거의 없어서……. 고모님의 영향력이 줄었나?”

“그웬 영애가 본명으로 그림을 걸었잖아. 친정인 헨젤가도 너 때문에 난리고……. 예전 같으면 이상하지.”

“아버님 심기가 말이 아니겠어. 킥, 꼴좋다.”

귀애하는 아들에게, 수족과 같은 고용인들에게, 그리고 이젠 가신처럼 부렸던 매부에게. 눈치채지 못한 사이 주변이 조금씩 비어가는 걸 그는 얼마나 체감하고 있을까. 기왕이면 마지막 순간까지 몰랐으면 좋겠다.

오드리는 키득거리며 보고서 끄트머리에 지시사항을 적었다. 센네페르의 속셈이 뭐든, 우편국의 자발적인 참여는 환영할 만한 사안이었다. 다만 모래를 입에 문 것처럼 텁텁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빌어먹을, 약혼식도 안 올렸는데 날 타우레드로 취급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어차피 결혼할 거잖아. 그러려니 해.”

“이러다 내가 랄리우스 후작위를 계승하기라도 하면 뭐라고 떠들어댈까 몰라. ……뭐야, 왜 웃어? 내가 랄리우스 후작위 얘길 하는 게 웃겨?”

라비린은 채 지우지 못한 웃음기를 얼른 수습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자신을 보는 오드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또 낭심을 맞는 건 사양이었다.

“헨젤 백작과 싸우기 싫어서라도 랄리우스 후작위엔 생각 없다고 했으면서 새삼 그런 말을 하니까 그렇지.”

“어째 그런 건 까먹지도 않고 기억하고 있담……. 그러고 보니, 데멘사를 찾는 건 잘돼가?”

“쉽지 않아. 죽었으면 죽은 흔적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이건 끊어질 듯 말 듯 계속 이어져서 말이야. 아무래도 시간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라비린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 거짓말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오드리는 조금 전에 자신이 만나고 온 남자가 데멘사가 아니라 데멘사를 사칭하는 다른 사람은 아니었을까 순간 의심했다.

‘그를 알아본 건 내가 먼저야. 사칭은…… 아냐. 뭐 좋을 게 있다고 사칭을 해? 그것도 타우레드의 본가에서.’

오드리가 데멘사의 금고에서 나온 문서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라비린은 흩어진 보고서를 모아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보고서 속에서 셰비언의 이름이 반복되는 걸 보았지만 그냥 눈을 감았다. 셰비언이 왕궁마법사 쪽과 무슨 거래를 해서 스크롤 협의를 성사시켰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그저 그걸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은 오드리가 조금 서운할 뿐이었다.

‘아무리 셰비언을 싫어해도 그가 세운 공까지 무시할 정도로 초라해지진 않았는데.’

더 이상 오드리와 마주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라비린은 정리한 문서를 오드리 앞에 차곡차곡 쌓고 일어섰다.

“계속 데멘사를 찾아봐야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이젠 데멘사가 아니라 그가 가졌던 걸로 추정되는 원본을 추적하는 쪽으로 선회할까 해.”

“……만탈락의 인원을 조금 나눠줄까?”

“괜찮아. 만탈락 쪽 사람들을 썼다간 헨젤 백작의 눈에 걸릴 확률이 높아.”

“내 수하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나에 대한 충성심도 높고, 능력도 쓸 만하다고.”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네 수하들이야. 헨젤 백작이 그들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다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 네가 브란젤에 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분명 감시를 붙여뒀을걸.”

“그런가…….”

“쉬어. 그리고 다음에 강변에 나갈 땐 나도 함께 가. 뱃놀이는 아니어도 강변에서 산책하는 데에는 나도 모자람이 없을 테니까.”

라비린은 오드리의 반응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화가 난 듯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문을 뚫고 들려왔다. 오드리는 그가 어떻게 자신이 강변에 다녀왔는지를 알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여,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방에 들어와 오드리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다이앤을 붙들고 물었다.

“다이앤, 내가 강변에 다녀온 게 티가 나니?”

“그럴 리가요. 갈대꽃 하나 남지 않게 제가 얼마나 신경 썼는데요.”

“그럼 어떻게 알았지…….”

본래 제 몸에서 나는 냄새는 맡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오드리와 찰싹 붙어 있던 다이앤도 후각이 둔해진 건 마찬가지라, 라비린이 어떻게 오드리의 행적을 알았는지는 미궁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하늘이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화려하게 물든 시간에 카프러스가 타우레드 본가를 찾아왔다. 현재 행적이 어떻든 간에 일단 기사로서의 자부심과 올곧은 신념 등을 가풍으로 내세우는 타우레드는 스스로 정한 주인을 위해 압력을 이기고 찾아온 카프러스를 대단히 환영했다.

더불어 그만한 기사를 품으로 거둔 오드리에 대한 평가도 수직 상승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오드리가 입은 승마바지를 모른 척 넘어갈 정도였다. 로샨이 나무라지 않고 라비린이 용납했다는 게 첫째 이유긴 하겠지만 그래도 놀랍도록 관대한 분위기였다.

도리어 카프러스가 훨씬 기겁했다. 그는 오드리가 머무는 손님방 응접실에 앉아서도 어떻게든 오드리를 정면으로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말을 달릴 때면 모를까, 이렇게 멀쩡한 방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설마 승마바지를 입고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후작부인은 과거에 정원을 밀고 거기서 검술 연습을 한 적도 있다는데요 뭐. 그에 비하면 승마바지쯤이야 애교죠.”

“그분이야 산트렘 출신이시고, 설마 다리에 딱 붙는 바지를 입고 연습하신 것도 아닐 텐데 아가씨와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경, 말에 뼈가 있네요. 그래도 말이에요, 이 바지 덕분에 경이 가르쳐 준 호신술을 제대로 써봤단 말이죠. 연습하는 내내 실패했던 건 아무래도 치마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궤변이다. 코르셋을 차는 중부식 드레스를 입고 수련한 것도 아닌데 치마여서 실패했을 리가 있나. 그냥 요령이 부족했던 거고 이번이 운이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카프러스는 그를 지적하는 대신 대체 어쩌다 호신술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됐는지부터 따졌다.

“어쩌다 보니 그랬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무사히 넘어간 걸로 됐다고 해주세요. 그보다, 이제 경이 있으니 체술을 계속 배울 수 있겠네요. 정말 잘됐어요.”

“아가씨,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시죠. 이건 꼭 들어야겠습니다!”

카프러스의 추궁이 계속됐지만, 오드리는 이리저리 말을 돌려가며 대답을 피했다. 그 대화는 카프러스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이어졌으니, 그는 반쯤 이를 갈며 본격적으로 체술을 가르쳐 줄 것을 약속했다.

“힘들다고 우시면 안 됩니다. 호신술을 가르쳐 드릴 때처럼 봐드리지 않을 겁니다.”

“……와우, 그게 봐준 거였단 말예요? 갑자기 걱정되네요…….”

“입으로만 죽는 소리 하시면 뭐 합니까? 눈이 웃고 있는데요. 제가 어떻게 할지, 두고 보시죠.”

카프러스의 반 협박에도 오드리는 그저 웃었다. 남부식 드레스에 민망해하고 승마바지를 질색하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했다는 게 몹시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재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라비린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지운 무게가 너무나 큰 탓이었다.

카프러스가 열의를 가지고 교육 커리큘럼을 짜는 며칠 동안, 오드리의 머릿속에서는 라비린이 떠나질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 놀랄 정도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한 라비린을 도대체 어떻게 믿느냐 싶다가도, 그가 이제까지 보여준 신의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쯤 더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내가 등신이지…….’

오드리는 하녀가 떠다 준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찰박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뻔히 알면서도 좀체 결정을 못하겠다니 기가 막혔다. 어찌 생각하면 지금 브란젤에 있는 게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브란젤에서 로렐라이의 서류를 쥐고 있었으면 딴생각을 하느라 실수를 연달아 하고 있었을 테니까.

‘정말이지, 이제까지 내쉰 한숨을 쌓으면 천장에 닿겠네.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다고 이렇게 갈등이람…….’

타우레드 영지에서, 그것도 타우레드의 본가에서 오드리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이앤을 옆에 끼고 카프러스를 불러들여 운신의 폭을 넓혔지만 그게 전부였다. 중앙은행의 계좌 문제를 더 조사하는 것조차 여기서는 힘들었다. 지금은 라비린에 대한 신뢰와는 별개로 그에게 일을 맡기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문제를 덮고 넘어가는 건 오드리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믿든, 믿지 않든, 그래서 어떤 결말을 맞든 확실하게 맺음하고 싶었다.

그렇게 오드리가 출구 없이 꽉 막힌 문제 앞에서 끙끙대는 동안, 타우레드 영주성 지하에서는 소름끼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