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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퍼레이드는 취소되었습니다 (24/62)

chapter 22. 퍼레이드는 취소되었습니다

「축제, 연극, 마상시합, 그리고…….」

수확제의 마지막 날에 벌어지는 퍼레이드는 부엌의 신 벤을 위한 것이었다. 부엌의 신이자 곡물창고의 수호자이며 때로는 국가를 지키는 강력한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벤에게 다음 추수까지 무탈하게 지낼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벤이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세상을 떠돈다는 속설 때문에 거리는 온통 고양이 모양의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오드리는 잔뜩 들뜬 하델에게 고양이 귀가 달린 머리띠를 사서 씌웠다.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삐죽 솟아오른 검은 귀는 정말 미치도록 귀여웠다.

하델은 당장이라도 머리띠를 벗어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오드리가 워낙 귀여워하니 차마 벗지는 못하고 뺨만 통통하게 부풀렸다. 알렉스에게 오늘 하루 휴가를 주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주 귀여워.”

“그냥 모자 쓰면 안 돼요?”

“이왕 퍼레이드를 보러 나왔는데 이런 걸 해 보는 것도 재밌잖니. 다른 때는 쓸 수 없는 거니까.”

오드리가 부드럽게 달랬지만 하델의 표정은 여전히 뚱하기만 했다. 열두 살이나 먹어서 고양이 귀 머리띠라니, 창피할 따름이었다. 퍼레이드를 보러 나온 또래들 중에서 머리띠를 한 아이는 자기뿐인 것 같았다.

“나도 누나처럼 가면 쓸래요.”

“안 돼.”

“왜요?”

“사람 많은 것 좀 봐. 내가 널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하델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사람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개구멍으로 저택을 나와 브란젤 곳곳을 쏘다녔던 전적이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리어 브란젤에 온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오드리가 걱정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말이다.

“베텔 경, 방금 누나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해요? 걱정해야 하는 대상이 좀 바뀌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제게는 두 분 다 보호의 대상이라서 제 의견을 물으셔도 의미 없습니다.”

“세상에……. 최소한 나는 브란젤 길은 잘 알아요. 날 잃어버리면 그냥 저택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고요.”

하델이 무슨 말을 하든 오드리나 카프러스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열두 살짜리 꼬맹이가 아무리 길을 잘 안다고 주장한들 그게 먹히겠나. 그것도 귀족가의 도련님인데 말이다.

“난 가면을 쓴 누나가 더 걱정이에요. 그렇게 입만 내놓고 있으면 누나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내가 어떻게 찾으란 거예요? 이 브란젤에 흰 고양이 가면 쓴 사람이 얼마나 많을 줄 알고!”

“하델, 남부식 드레스를 입고 초록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숙녀가 브란젤에 나 말고 또 있을 것 같니?”

“초록색 머리카락은 확실히 특이한데요, 어차피 모자 속에 거의 다 집어넣어 버렸잖아요. 남부식 드레스도 여기저기에 많이 보이고요.”

남부식 드레스 차림을 한 오드리가 라비린과 스캔들을 일으키고 잡지에 자주 등장한 데다 유례없는 더위가 이어지면서, 브란젤에는 남부식 드레스를 입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코르셋도 차지 않는 데다 얇고 팔랑팔랑한 옷감을 쓰는 편한 옷은 금세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허리끈 위치를 약간 낮춰 걸쳐서 날씬한 허리를 강조하는 방식이 유행이었다.

오드리는 주변을 살펴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하델의 말대로 남부식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퍽 많이 보이긴 했지만,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은 없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색과 라인과 무늬가 다르잖니. 미래의 약혼녀를 위해 눈썰미를 기르렴. 정 급하면 모자 벗고 머리칼을 풀어버릴 테니까 걱정 말고.”

“세상에! 베텔 경, 경은 어떻게 생각해요?”

하델이 카프러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제 편을 들어달라는 것이었지만, 오드리가 빤히 보고 있는데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카프러스는 두 사람의 시선에 곤란해하다가 결국 누구의 편도 들지 않기로 했다.

“사람이 많습니다. 두 분 다 제 곁에서 떠날 생각하지 말고 딱 붙어 계시죠.”

“와, 또 대답을 피했어! 베텔 경 치사해요!”

“크흠, 흠.”

“하델, 베텔 경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 그보다 어제 누나가 발견한 과자점에 같이 가지 않을래? 어제 사온 무화과 과자 말고도 맛있는 게 잔뜩 있었어.”

하델도 오드리만큼이나 단것을 좋아했다. 고양이귀 머리띠에 골을 내던 소년은 입을 삐죽대면서도 누나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남매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복잡한 거리를 걸었다.

카프러스는 어쩐지 콧노래가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하는 에스코트가 무도회가 아니라서 정말 즐거웠다. 꼴 보기 싫은 얼굴을 안 봐도 되다니 말이다.

‘좋은 날씨야.’

달콤한 음식 냄새를 품은 바람이 가로등에 걸린 깃발을 흔들었다. 햇살은 뜨거워도 가로수의 이파리는 노랗고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고 하늘은 물감을 부은 것처럼 새파랗고 청량했다.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허공을 떠다녔다. 수확제를 즐기기에 완벽한 날씨였다.

하나 브란젤의 치안대원들은 그 완벽한 날씨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괴물 때문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잠잠했던 건 오늘을 위해서였다는 것처럼 사방에서 괴물이 출몰했다.

모처럼 마음 편히 집에 드러누워 있었던 피올도 결국엔 불려나왔다. 그는 얼굴의 절반이 눈으로 빼곡한 여자의 목을 떨어뜨리며 신경질을 냈다. 이젠 몇 마리를 죽였는지 세기도 어려운데 고물더미 아래에서 또 괴물이 기어 나왔다.

“빌어먹을! 환자 대우가 아주 개판이야! 붕대 갈 틈은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씨부렁댈 틈이 있으면 한 마리라도 더 잡아. 읏차!”

체이서가 막 고개를 내민 괴물의 목을 검으로 푹 찔렀다가 뽑으니 새카만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라 피올의 다리를 적셨다. 그의 다리에 감긴 붕대는 이미 피에 젖을 대로 젖어 흰 부분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라서, 피올은 진저리를 치며 다리를 털었다. 뜨뜻한 피가 신발 안쪽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아주 더러웠다. 왜 안 굳는지 의심스럽게 차갑던 피가 지금은 마시기 좋은 차처럼 따끈따끈했다.

피올도 체이서도 지칠 대로 지쳤는데, 잠깐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괴물이 나왔다. 이번엔 어린애였다.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천사처럼 하얀 날개를 등에 달고 주춤주춤 고개를 내미는 게, 공격성은 없어 보였다.

“지, 지나가면 안 돼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종달새 울음소리처럼 가냘프고, 맑은 푸른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 긴 소맷자락 안에 손을 감춘 채 덜덜 떠는 모습에 체이서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어딜 가려고?”

“저, 저쪽이요…….”

두 치안대원은 눈빛을 교환했다. 대화가 되는 괴물은 처음이었다. 왕궁마법사가 봤다면 아주 미쳐 날뛰며 무조건 생포해야 한다고 난리를 부렸을 게 분명했다.

피올이 체이서에게 턱짓을 하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다정하게 얼렀다.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 가득히 지은 미소가 몹시 상냥했다. 얼굴 곳곳에 튄 핏자국만 아니었다면.

“저쪽에 뭐가 있는데?”

“가야 돼요……. 가야 돼요…….”

“그러니까, 왜? 누가 시키기라도 했어?”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뺨을 흥건하게 적시고 남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낡은 옷자락을 적셨다. 놀랍게도 소년은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형한테 얘기해 봐. 응? 저쪽은 광장이잖아. 광장에 꼭 가야 하는 이유가 뭔데?”

“가야…… 가야 한다니까요!”

빽 소리를 지른 소년의 얼굴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피부엔 자그마한 비늘이 빽빽하게 돋아났고, 푸른색 눈동자는 새카맣고 커다랗게 변해 눈자위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콧대가 내려앉으며 콧구멍이 훤히 보이고 입은 뾰족하게 튀어나와 딱딱해졌다.

슬그머니 소년의 뒤를 차지하고 선 체이서는 그 변화를 보지 못했지만, 피올은 정면에 선 탓에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절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단속하며 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왜? 이유를 말하면 형이 데려다줄게.”

“아아아아아악!”

소년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리고 피올에게 덤벼들었다. 피올은 잽싸게 몸을 돌려 맹금 같은 손톱을 피하고 무릎을 세워 가슴팍을 후려쳤다. 흉곽이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소년이 컥, 검은 피를 토하곤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헐떡거렸다.

“허으으으윽! 커허헉!”

“아으 씨, 죽으면 안 되는데. 왕궁마법사들이 또 지랄할 거 아냐. 저번에도 지들이 늦어놓고는 날더러 괴물을 죽였네 어쨌네 난리를 부렸는데……. 그 난리를 어떻게 또 감당하지?”

피올은 엎어져 헐떡대는 몸뚱이를 발로 굴려 뒤집었다. 부러진 뼈가 내장을 찌르기라도 했는지 소년은 영 숨을 못 쉬고 바르작거리며 바닥을 긁었다. 피에 젖은 흙바닥이 소년의 손톱이 지나갈 때마다 푹푹 패였다.

체이서는 이제 소년이라고 불러주기 힘든 얼굴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인 데다 대화 비슷한 걸 해서 나름 기대했는데, 다 헛것이었네.”

“날개나 팔이나 뭐 다를 게 있다고 기대를 해? 체이서, 주변을 좀 봐라. 피와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곳에 검을 든 인간들이 있는데 멀쩡히 두 발로 서서 말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야.”

피올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 두 사람이 버티고 선 길목은 흡사 지옥도의 한 장면이었다. 사방에 잘려나간 팔다리가 굴러다니고, 길게 혀를 빼문 머리통은 셀 수가 없었다. 정오를 살짝 넘긴 해가 바닥에 고인 검은 피에 담겨 눈부시게 빛났다. 정말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후각은 이미 예전에 기능을 잃어 피비린내 따위 맡지도 못하건만, 피올은 괜히 코를 문지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코 밑에 검은 줄이 생겼다.

“오늘이 수확제 마지막 날이라 다행이야. 이렇게 괴물이 많이 기어 나오는데 뭔 수로 입막음을 해?”

“뭔 수로 하긴. 불 질러 버리면 되지.”

“불? 브란젤에 불을 지른다고?”

“그래. 어차피 이쪽 구역은 그다지 잘사는 곳도 아니고……. 적당히 범위 잡고 왕궁마법사 동원해서 소각해 버리면 돼. 마침 수확제 마지막 날이라 사람도 많이 빠졌겠다, 남은 사람도 적어서 생존자 튀어나와도 처리 쉽겠네.”

그리고 신문사랑 잡지사 동원해서 전염병이 도져서 구역 전체 소각했다고 하면 돼. 덧붙이는 말투가 아주 평이했다. 마치 오늘 저녁 메뉴 결정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피올이 팔뚝을 문질렀다.

“와, 씨발, 어린애라고 안쓰러워하더니만 치안대 살벌한데? 산트렘 기사단 못지않아.”

“나야말로 놀랍다. 산트렘 기사단은 대체 뭐 하는 곳이라서 못지않단 말이 나와? 기사 중의 기사, 국왕전하의 오른팔, 뭐 이런 곳 아니었어?”

피올의 입이 꾹 닫혔다. 체이서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기에 그는 발밑을 구르는 팔 한쪽을 걷어차 치우고 한숨을 내쉬었다.

“유렌 놈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지원 기다리다가 말라 죽겠다. 하여간 느려터진 새끼.”

“그 느려터진 새끼 이제 왔다.”

“어어, 왔어?”

유렌이 체이서의 멱살을 박력 넘치게 움켜쥐었다.

“망할 자식, 너 나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말한 거지? 발소리 들었을 거면서! 하여간 체이서 이 자식, 앞에서는 원칙주의자면서 뒤돌아서기만 하면 험담이야!”

“원칙주의자랑 험담이 무슨 상관이야? 야, 그리고 이건 험담이 아니라 사실이야, 사실. 괴물 쏟아지기 시작할 때 지원 요청해야겠다며 간 놈이 이제야 와? 그래놓고 느려터졌단 말이 듣기 싫다니, 양심도 없어. 지금 이만큼 소강상태인 것도 나랑 보티안이랑 더럽게 고생해서 그런 거야.”

“야! 다른 데도 다 바빠서 그런 걸 어떡해! 군까지 갔다 왔다!”

“그래? 근데 데려온 게 저거 하나야?”

체이서가 왕궁마법사를 손가락질했다. 유렌에게 질질 끌려 온 왕궁마법사는 바로 스와디였다. 눈 밑의 그늘이 턱까지 내려온 것도 모자라 한걸음 걸을 때마다 휘청대기까지 하는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감청색 로브 절반이 검은 피에 젖어 엉망이었다.

“어쩌겠어. 야, 골목 청소할 생각은 때려치우고 나오라더라.”

“누가 그래? 미쳤나?”

“타우레드 후작이 직접 내린 지시래. 괴물들이 홀린 것처럼 광장으로 다 몰려드니까, 그냥 큰 길목에서 틀어막자고. 병사들까지 죄다 나왔으니까 그쪽가면 좀 편해질 거야. 거기 왕궁마법사! 확인 끝났어요?”

“아뇨……. 잠시만요…….”

스와디는 토할 것 같은 속을 달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 큰 바늘이 머리를 쑤시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팔다리가 굴러다니는 골목길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통증이었다.

‘도망치고 싶다.’

왕궁마법사가 되고 집안 식구들의 성화가 얼마나 심했던가. 버는 족족 집으로 다 들어가는 월급을 참다못해 택한 브란젤행이었다. 일이 많다많다 해 봐야 얼마나 많겠나 했는데, 당장 내일 아침 해를 볼 수는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속내가 어찌됐든, 스와디의 마력은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곧 그녀의 마력에 자극받은 마법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덜너덜한 천쪼가리처럼 사방에 구멍이 난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 상태에서 빛이 번쩍이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니, 마법에는 문외한인 치안대원들이 보기에도 심상치가 않다. 피올이 제 눈을 비볐다.

“뭐야, 저거 왜 저래? 본래 저런 건가?”

“보티안 너, 마법사들이랑 친하게 지냈잖아. 뭐 아는 거 없어?”

“염병할……. 난 돈 되는 거에나 관심 있지, 마법망 따위엔 관심 없어서 물어본 적도 없어. 왕궁마법사 씨, 뭐 이상한 거라도 찾았어요?”

“아뇨……. 저도 잘 몰라요. 그냥 확인만 하는 거예요.”

“그럼 빨랑 갑시다. 괴물이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몰라요. 참, 아직 숨이 붙은 괴물이 있는데, 가져갈래요?”

스와디는 피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눈을 찌푸렸다. 성화(聖畵)에나 나올 법한 흰 날개가 검은 피에 더럽혀진 꼴을 보는 게 즐거울 리 없었다.

“금방 숨이 끊어지겠는데요.”

“아직 살아 있잖아요. 꼴은 이래도 어, 숨도 멀쩡히 잘 쉬고! 이거 말도 했어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알아들었나? 아무튼. 다른 놈들이랑은 좀 달라 보였어요.”

소년의 입은 이제 길쭉한 부리처럼 보였다. 기침할 때마다 부리 안에 찼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말을 할 줄 알아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됐어요. 이렇게 부상이 심한데 끌고 가서 뭐 하겠어요. 치료까지 해서 써먹을 정도로 샘플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오, 안 가지고 갈 거면 나야 좋죠. 왕궁마법사가 허락한 거니 마음 놓고 마무리합니다?”

“하세요, 마무리. 아, 그래도 다른 동료들에게는 제가 그랬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냥 없던 걸로 하면 되죠, 뭐.”

피올은 희희낙락 소년의 목에 검을 박았다. 비늘이 돋아나던 목에 큰 구멍이 뚫렸다. 핏방울이 뺨까지 튀었건만, 그는 별 감흥이 없는 듯 뺨을 닦을 생각도 않고 시체를 발로 굴려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망설임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냉혹한 손속이었다. 아직 가야 한다 애원하는 애절한 목소리와 눈빛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체이서는 요란하게 혀를 차며 유렌의 옆구리를 찔렀다.

“피올 보티안 저놈, 산트렘 기사단에서 적응 못 하고 뛰쳐나온 게 아니라 쫓겨난 거 아냐? 저런 인성으로 무슨 기사를 해?”

“글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산트렘 기사가 되어보든가. 아 참, 거긴 산트렘 출신만 받아주지? 야, 정말 다행이다. 실력 말고도 다른 핑곗거리가 있어서.”

“이……. 네놈은 나더러 뒷담한다고 뭐라고 할 게 못돼, 이 망할 자식아.”

“내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망해 있었어. 새삼스럽게 뭘. 그리고 뒷담보다는 앞담이 낫지 않냐?”

유렌이 체이서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입꼬리는 삐죽하니 위로 올라갔고 낄낄대는 소리도 나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 섬뜩했다.

“하여간 재수 없는 새끼. 잠깐 실적 좋았다고 기고만장해서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혓바닥을 놀리지.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뒷담 할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둘러. 앞뒤 가릴 거 없이 꽉 틀어막힌 놈을 좋게 원칙주의자라고 불러주니까 저가 뭐라도 된 줄 알지.”

“누가 뒷골목 출신 아니랄까 봐……!”

“헹, 치안대에서 누가 출신을 따지냐? 그러니까 네가 등신 소릴 듣는 거야. 귀족 출신 애들 앞에서 머리 숙일 생각도 없는 놈이 꼭 나 같은 뒷골목 출신한테만 출신이 어쩌고저쩌고……. 좀 치사하지 않냐? 응?”

“유렌, 거기서 뭐 해? 체이서 멱살은 적당히 잡고 괴물 나오기 전에 빨리 와.”

“금방 가, 금방!”

휘청대는 스와디를 붙들고 선 피올이 유렌을 불렀다. 유렌은 대답하기가 무섭게 체이서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곤 이를 악문 체이서 옆에 딱 붙어서 낮게 속삭였다.

“하여간 내 파트너가지고 또 쑥덕거리기만 해 봐. 그땐 콱……!”

유렌은 씨근덕대느라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는 체이서를 뒤에 버려두고 퍽 다정하게 피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귀가 밝은 죄로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전부 들은 피올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 그런 식으로 말하고 다니다 칼 맞는다.”

“내가 누울 자리를 얼마나 잘 보는데 그런 재수 없는 소릴 하냐. 고마우면 그냥 고맙다고 해.”

“그래, 쓸데없는 배려 고맙다.”

“고마우면 다 끝나고 술이나 한잔 사.”

“가난뱅이의 주머니를 털 생각을 하다니, 잔인한 놈.”

“야, 가난뱅이라니. 가문에서 뭐 챙겨주는 거 없어? 이름을 버렸다지만 자식인데, 진짜로 버려뒀을라고?”

“이름만 버렸나? 성도 버렸지. 집 나간 자식이 뭐가 이쁘다고 지원을 해주겠어.”

에이, 그래도 그렇지. 어느 가문인지는 몰라도 참 냉정하다. 피올은 유렌의 중얼거림을 귓등으로 흘리며 골목을 나섰다. 검은 피가 찰박찰박하게 밟히는 공간을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조용한 거리가 나타났다. 가을이라곤 믿어지지 않게 뜨거운 햇살이 길바닥을 달구고 있었다.

“대피 끝냈나 보네.”

“군이 나섰잖아. 타우레드 후작이 전면에 나왔는데 일을 허술하게 했겠어? 황금 분수에 빠져 허우적대니 뭐니 해도 멜브란트의 사자인데.”

유렌의 말에는 신뢰가 가득 담겨 있었다. 타우레드 후작가가 멜브란트에서 갖는 위상을 짐작케 하는 발언이었다. 피올이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래, 괜찮을 거야. 광장으로 사람이 많이 빠진 상태니까 오히려 통제하기 쉬울 수도 있어.’

광장을 향해 몰려간다는 괴물들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왕궁마법사에 군까지 나왔는데 설마 무슨 큰일이 나겠는가. 사람들이 광장에서 수확제 퍼레이드를 즐기는 동안 모든 일이 끝날 것이다. 나중에 핏물이나 열심히 닦으면 된다.

괴물을 막으려 동원된 사람들, 군의 지시에 따라 집을 비우고 대피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브란젤 중앙광장은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퍼레이드 행렬이 올 길을 따라 수확한 곡식을 담은 자루를 매단 장대가 늘어섰다. 사람들이 바친 꽃송이들이 장대 아래에 수북했다.

누군가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고, 지나던 이가 거기에 꽃과 동전을 던졌다. 한창 연애 중인 커플들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대목에 흥이 난 꽃장수들이 웃는 낯으로 꽃을 팔았다.

달콤한 축제 음식 냄새와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 다녔다. 만약 냄새에 색을 입힐 수 있다면, 지금 광장은 금색과 보라색 베일로 뒤덮여 있을 게 분명했다.

오드리 일행은 광장 근처에 있는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오드리는 차가운 냉차를 마셨고, 하델은 얼린 복숭아를 갈아 만든 주스를 마셨다. 카프러스는 물만 마셨다. 오드리의 잔은 아직 절반이나 차 있는데, 하델은 텅 빈 잔을 붙들고 초조하게 발을 까닥거렸다.

“하델, 네 시선이 하도 뜨거워서 내 차가 따뜻해질 것 같구나.”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담같이 해요?”

“농담이 아니니까 진담 같지. 있지 하델, 난 내 체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그런데 널 따라다니려니 너무 힘들어서 말이 안 나와. 누나 좀 쉬자. 응?”

“그럼 나 혼자서…….”

“그건 안 돼. 저 복잡한 곳에 널 어떻게 혼자 보내니? 네가 베텔 경과 함께 간다면 모를까.”

하델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자신이 카프러스와 함께 가면 오드리가 혼자 남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가겠다고 할 정도로 정신이 없진 않았다. 대신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하델, 일어나렴. 귀족가의 공자가 뭐 하는 짓이니?”

“싫어요. 누나가 일어날 때까지 이렇게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계속 그렇게 있어. 일어나면 혼난다.”

오드리는 하델의 뺨에 유리잔 아래 깔려 있던 코스터를 덜렁 올려놓았다. 하델이 차갑다며 징징거렸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락시 부인의 머리를 하얗게 만든 사고뭉치 경력이 있는데 이쯤이야.

“한 잔 더 시켜야겠다.”

“누나아…….”

“왜? 시원함이 떨어졌어? 바꿔줄까?”

“잘못했어요…….”

“음, 맛있다. 역시 여름엔 냉차야. 이왕이면 조금 더 달았으면 좋겠는데 여긴 브란젤이니 어쩔 수 없지. 하델, 네가 마신 주스는 어땠니? 얼린 거라 향이 좀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어?”

이깟 코스터 따위, 그냥 내려놓으면 되는 거지만 왠지 오기가 난다. 하델은 대답하는 대신 뺨을 통통하게 부풀린 채 광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조금 전보다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누나.”

“코스터 바꿔줄까?”

“좀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요. 표정이 어둡고, 옷도 나들이옷이 아닌 것 같고……. 뭐지?”

입은 웃고 있지만 어두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 수확제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염료를 치맛단에 잔뜩 묻히고 어린 자식의 손을 꽉 쥔 사람들. 나들이하러 나온 게 맞는가 싶게 큰 보퉁이를 짊어진 사람들.

“꼭 피난 온 사람들 같네.”

“도련님, 그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내 물만 홀짝이며 남매의 대화에 끼지 않던 카프러스가 불쑥 말을 걸었다. 하델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가 코스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슬그머니 오드리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냉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쪽이요. 어, 더 늘어났다.”

카프러스는 하델이 가리킨 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 차림새, 분위기……. 어딘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달콤한 솜사탕 같던 공기 사이로 희미한 피비린내가 섞인 듯도 했다.

“아가씨, 아무래도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퍼레이드는 내년으로 미루시죠.”

“네에? 베텔 경,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데요!”

“……알겠어요. 하델, 미안하지만 내년을 기약하자. 내년엔 수확제 내내 데리고 다녀줄게.”

“누나!”

“쉿. 저쪽 골목 안쪽을 좀 봐. ……병사들이야.”

하델은 물론이고 카프러스까지도 몹시 놀랐다. 수확제 마지막 날, 퍼레이드를 보러 나온 인파가 아무리 몰린대도 병사가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간혹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닐 때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 축제를 즐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골목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병사들이 나와 있다니! 이건 절대 개인적인 일이 될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치안대원도 보이질 않으니, 눈치 빠른 사람들 몇몇이 재빨리 몸을 피했다.

오드리도 딸꾹질을 시작한 하델의 손을 잡아끌고 병사가 있는 골목 반대편으로 걸었다. 카프러스가 적극적으로 사람을 밀치며 길을 열었다.

놓치지 않고 따라가느라 여기저기 어깨를 부딪치고 발도 많이 밟았다. 죄송하다, 미안하다, 급해서 그런다 말을 입에 달고 뛰다시피 걷고 있는데, 오드리를 따라가는 데 모든 정신을 쏟던 하델이 장대 아래 쌓인 꽃을 밟고 미끄러졌다.

“악!”

“하델! 괜찮아?”

“누, 누나…….”

오드리는 황급히 하델을 일으켜 세웠다. 어찌나 호되게 넘어졌는지, 하델의 이마에 상처가 나서 피가 맺혔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하델의 눈에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베텔 경! 베텔…… 맙소사.”

겨우 몇 발 앞에 있었던 카프러스가 벌써 저만치 떠밀려 가고 있었다. 잠시 멈춰 기다리면 카프러스가 곧 되돌아올 텐데, 주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그들을 가만 내버려 두질 않았다.

“곧 퍼레이드 행렬이 올 텐데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나와요, 나와! 위험해!”

“아니, 잠깐……!”

오드리도 하델도 키가 작았다. 졸지에 미아가 되어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들의 뒷덜미와 어깨밖에 보이지 않으니 불안감이 확 부풀었다. 하델은 이마의 아픔도 잊고 오드리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누나, 이제 어떡해요?”

“내 손 잘 잡고 있어. 베텔 경이 금방 돌아올 거야. 그러니 잠깐만 있으면 돼.”

오드리는 하델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섰다. 이렇게 붐비는 곳에서 잃어버린 일행을 찾겠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간 다 같이 미아가 되는 수가 있었다.

“아까 그 자리에서 벗어났잖아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베텔 경은 키가 크잖아. 우리 정도는 쉽게 찾을 거야.”

“진짜요? 누나는 불안하지도 않아요?”

“만탈락도 이만큼은 붐벼. 내가 만탈락 시장통을 헤집고 돌아다닌 게 몇 년인데 이쯤이야 별 것도 아니지. 그보다 하델, 네가 브란젤 지리는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니? 괜한 걱정 말고 어떤 길로 가면 빨리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궁리부터 해 보렴.”

오드리가 태연하게 굴자 하델의 불안도 덩달아 사라졌다. 하델은 마음 편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경로 수십 가지를 떠올렸다. 개구멍을 뚫은 뒤 중앙광장과 영광의 거리 근처를 어찌나 싸돌아 다녔는지, 그는 작은 골목길 하나하나를 전부 다 기억했다.

그래, 전부 다 기억했다. 어떤 골목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어떤 상점을 가로지르면 지름길이 되는지, 출입문을 닫아놓은 건물로 들어가려면 어떤 수를 써야 하는지.

“누나, 나 좀 위로 올려줄 수 있어요? 손이라도 흔들어보게요.”

오드리는 체구에 비하면 놀랍도록 힘이 셌다. 그녀는 하델을 가뿐히 들어 올렸다. 하델은 불쑥 높아진 시야에 감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과연 장대 부근에서 헤매는 카프러스의 뒤통수가 보였다.

“경! 베텔 경! 여기예요!”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워낙 사람이 많고 소음이 커서 그런가 좀처럼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뒤만 돌아보면 되는데, 카프러스는 자꾸 엉뚱한 곳으로 걸어갔다. 이제까지 그들이 왔던 길을 되짚는 듯했다.

“하델, 언제까지 안고 있어야 하니?”

“조금만 더요. 사방이 시끄러워서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나 봐요. 조금만 크게 부르면……. 어?”

행여 카프러스를 놓칠까, 그의 머리를 눈으로 좇던 하델은 병사의 숫자가 배가 된 걸 발견하고 눈을 비볐다. 아까는 작은 골목 몇 개를 막고 있을 뿐이었는데, 짧은 사이 막힌 골목의 숫자가 훌쩍 늘어났다.

쿠르릉……! 어디에선가 천둥이 울렸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사방을 두리번댔다. 하나 하늘이 맑고 새파랬기에, 조금 웅성대다 말았다. 아직 밤도 안 됐는데 성미 급한 누군가가 크게 폭죽이라도 터뜨렸나 보지.

하지만 하델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에 팔의 솜털이 죄다 곤두섰다.

“하델,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인지 보여?”

“누나, 나 좀만 더 위로 올려줘요.”

“아, 정말이지!”

“빨리요!”

오드리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델의 목소리가 몹시 심각해서 계속 들어주는 것인데, 만약 장난이라면 집에 돌아가자마자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릴 셈이었다. 귀하디귀한 후계자라 매질이 안 된다면 안장 앞에 태워서 한참 뛰어다닐 용의도 있었다. 두 가지 다 엉덩이에 불이 나기 딱 좋은 벌이었다.

“누나, 이제 내려줘도 돼요.”

“베텔 경이 봤어?”

“아니요. 그보다, 광장을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상치가 않아. 내 손 놓치지 말고 따라와요.”

“하델!”

누나를 지켜야 한다. 하델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하델이 잡아끄는 힘은 보잘 것 없었지만, 이 북새통에 동생을 놓칠 수는 없었던 오드리는 하델의 뒤를 어쩔 수 없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골목을 막고 있던 병사들은 팽팽한 긴장상태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멍청하게 돌진만 하다가 잡혀 죽었던 괴물들이 점점 영리해지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괴물을 미끼로 던지고 그 틈을 타 빠져나가려는 괴물, 처마 밑 그늘에 숨어 몰래 지나가려는 괴물, 나무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나가려는 괴물…….

대체 어느 집 부엌에서 꺼내온 건지 생선 손질용 긴 칼을 여섯 개나 되는 손에 쥐고 휘둘러대는 괴물을 잡다가 중상자가 발생한 뒤로는 분위기가 아주 살벌해졌다. 회피형이 대부분이었던 괴물들이 어느새 공격형으로 바뀌어 여기저기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막아! 야, 이 비루먹은 새끼야, 막으라고!”

“목을 쳐!”

치안대원들이 영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병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런 괴물은 난생 처음 접하는 병사들은 그저 억울할 뿐이었다. 대체 어떤 목을 쳐야 한단 말인가. 머리가 세 개나 되는데! 철판이라도 씹어 먹을 듯 턱을 딱딱대는데!

유렌이 머뭇거리는 병사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목 두 개를 한 번에 날리고 심장에 칼을 꽂자 피올이 끼어들어 남은 목을 쳤다. 새카만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치안대 제복 가슴팍까지 튀었다.

“이 등신 새끼가! 네놈 새끼 귓구멍은 귀지로 가득 찼냐! 설마 듣고도 모르는 거면 확 잘라 버려! 달려 있어도 기능을 못하는데 뭐 하러 달고 있어! 장식이냐!”

“억!”

부지불식간에 정강이를 걷어차인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유렌은 병사의 멱살을 잡고 일으키곤 출신이 아깝지 않은 욕설을 퍼부었다. 듣다 못한 피올이 유렌을 떼어내 병사를 구원했다.

하지만 욕만 빠졌다 뿐이지, 피올의 혓바닥도 유렌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목이 세 개면 세 개 다 치면 되지, 뭘 망설여? 그걸 꼭 말로 해줘야 알아?”

“말이 쉽지……! 젠장!”

“말만 쉬운 게 아니라 실행하기도 쉬워. 방금 당신 눈앞에서 우리가 괴물 잡은 거 못 봤나? 혹시 바지에 오줌 지리느라 바빠서 못 본 거라면 이해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서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눈을 보이는 게 좋을 거야.”

“야 이 등신 새끼야, 너 봉급은 어떻게 받아먹었냐! 그 솜씨로 돈 받아먹기가 미안하지도 않든? 그 실력으로 목구멍에 밥이 들어가? 응? 너 같은 새끼는 변방으로 보내서 용병들이랑 똥통에서 서너 달은 굴러야 하는 건데!”

“닥쳐! 치안대라고 기만 살아서는……! 컥!”

“입만 산 네놈보단 나으니까 저쪽에서 찌그러져 있어.”

피올은 마구 떠들어대려는 병사를 걷어차 대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냥 뒀다간 유렌이 병사의 팔다리를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 아니면 병사가 유렌의 멱살을 잡든가. 안 그래도 저쪽에서 병사들을 통제하느라 애를 먹는 장교가 유렌을 아주 잡아먹고 싶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어휴, 유렌……. 입 좀 적당히 놀려. 뒷골목 출신이라고 아주 광고를 해라.”

“씨발, 닥칠 만해야 닥치지! 머릿수만 많지 도움은 하나도 안 되는 새끼들! 생긴 게 이상해서, 움직이는 게 예측이 안 돼서 못 당해내겠다는 게 말이 돼? 멜브란트 병사들 훈련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어? 어? 이 정도였냐고! 해군이 사략해적 따위에 당해서 바다에 처박히는 이유를 알겠다!”

유렌의 대단한 점은,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도 검 끝에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다. 피올마저 말리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젓는 동안에도 그의 욕지거리는 끝을 모르고 터져 나왔다. 듣다 못한 체이서가 끼어들었다.

“적당히 해, 유렌! 분위기가 점점 나빠지잖아!”

“저 등신들 사기야 떨어지든 말든! 어차피 방해만 되는데!”

“누가 사기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아군끼리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아서 이러지!”

“에에이, 염병! 야, 등신 새끼들아! 내가 재수 없으면 일 끝나고 나중에 치안대에 와서 나 찾아와! 일대일로 붙어서 내가 지면 두드리고 싶은 대로 두드리게 해준다!”

유렌이 나름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소리를 질러대는데, 그게 곧이곧대로 들릴 리가 없다. 어렴풋이 소문으로만 돌던 괴물을 눈으로 확인한 것도 당혹스러운 상황에 욕까지 들어먹은 병사들의 눈빛이 몹시 사나워졌다.

유렌은 한층 거칠어진 병사들을 보고서야 성질을 조금 거뒀다. 공포 대신 짜증과 분노의 크기가 커지자 몸놀림이 그나마 봐줄 만해졌다.

“개새끼도 아니고, 지랄염병을 해야 그나마 쓸 만하게 굴다니.”

군이 나왔으니 안심이라고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낙관적인 예측이 무색할 만큼 상황이 나빴다.

일단 괴물의 존재를 처음 목도한 병사들의 동요가 몹시 컸다. 끔찍한 외형도 외형이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훈련을 해온 병사들은 좀처럼 괴물을 궁지로 몰아넣질 못했다.

게다가 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영리해졌고, 한 번에 나타나는 숫자도 점점 늘어났다. 괴물은 사람이 변해서 만들어지는 거라던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놀랍기만 했다. 괴물들이 부두를 적시는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덕분에 치안대원들은 망토에 묻은 핏물을 털어낼 틈도 없이 괴물 처리에 투입됐다. 이 일만 끝나면 브란젤 바깥으로 전근 신청을 낼 거라고 이를 갈면서도 그들은 착실하게 시체를 쌓고 핏물을 짜냈다.

그럼에도 전선은 계속 뒤로 밀려났다. 광장의 음악소리와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괴물을 죽이느라 정신이 없던 치안대원들은 이제 괴물보다 이 끔찍한 풍경을 사람들에게 들켰을 때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 꼴을 사람들이 보면 난리 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깐 사람들이 죄다 광장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걸 정말 다행으로 여겨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한 마리라도 놓쳐서 광장 안쪽으로 진입하는 걸 허용하기라도 하면 그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차마 말로 꺼내지도 못하는 불안이 조용히 퍼졌다.

“야, 설마 방어선이 이게 전부겠어? 몇 겹으로 깔았겠지. 괜찮을 거야.”

“하긴……. 타우레드 후작이니까, 어련히 잘했겠지.”

누군가 마음을 달래려는 듯 중얼거렸다. 기대 이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병사들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던 건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싶은 눈치였다.

피올의 얼굴에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집에서 뛰쳐나와 가족과 연을 끊은 지 이미 오래이건만, 이성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하여간 잘 좀 할 것이지.

“비켜!”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장 앞에서 싸우고 있던 치안대원들과 병사들 모두 주문에 걸린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괴물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벼락이 떨어졌다.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피올은 누군가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날려갔다.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할 정신머리가 돌아왔다.

“……맙소사.”

혹시 저 말, 내가 뱉은 감탄사인가? 무심결에 입을 더듬었지만 입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피올과 비슷한 꼴로 나뒹굴다 몸을 일으킨 유렌이 중얼거렸다. 미친.

길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정수리와 목덜미를 데우는 햇살은 여름이라 착각할 정도로 뜨거운데, 슬쩍 만져 본 얼음은 손가락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수십 마리 괴물들이 그 얼음 속에 꼼짝도 못하고 갇혀 있었다.

“미친, 어떤 미친 새끼가 이런 짓을 한 거지?”

“혹시 이거 마법인가?”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마법이야? 마법으로 이런 짓이 가능하면 군인은 필요도 없겠다!”

“왜, 살론의 사략해적들은 배에 마법사를 태우고 다닌다잖아! 이런 게 되니까 태우는 거 아니야?”

“염병, 그게 됐으면 살론 놈들이 벌써 세계를 제패했겠지!”

숨도 못 쉬고 굳어 있었던 건 정말로 잠깐이었다. 기적인지 마법인지 모를 현상을 앞에 두고 다들 흥분해서 파르르 끓어올랐다. 장교의 제지가 없었다면, 당장 달려들어 얼음을 핥아보기라도 했을 사람이 한 묶음이나 됐다.

그 난리통 속에서 왕궁마법사들이 뭔가 커다란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폭죽을 쏠 때 쓰는 것과 엇비슷해 보이는 무언가가 실려 있었다.

“저기 잠깐만 비켜주세요! 잠시만!”

왕궁마법사들은 피올이 서 있던 곳 근처까지 다가와 수레를 멈추고 뭔가 작업을 시작했다.

“왕궁마법사들이 한 짓이었구만!”

“뭔가 신기한 걸 만들어냈나 보지? 드디어 밥값 했네. 영락없이 도둑인 줄 알았더니!”

다들 호기심에 젖어 왕궁마법사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피올의 관심은 영 다른 쪽으로 쏠렸다.

왕궁마법사들과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자리를 바꾸고 사라진 마법사의 정체가 궁금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어쩐지 체구며 분위기가 낯이 익었다.

“유렌, 나 잠깐 빠져도 되지?”

“미쳤냐?”

“금방 올게.”

“보고한다. 마침 대장님도 근처에 와 계시고, 딱 좋네. 전장무단이탈은 징계가 좀 세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야, 나 부상자인데도 나와서 일하고 있는 거잖아! 쉬어야 한다고! 정상참작 해줘야지!”

“시도해 봐. 부상자를 대하는 예우로 화상 입은 정강이를 확 걷어차 줄 테니까. 틈났을 때 제복에 묻은 피나 털어.”

유렌의 태도는 아주 단호했다. 발군의 실력으로 부상자라곤 생각되지 않는 활약을 해주는 피올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전선이 밀리는 경험을 했는데 여유가 좀 생겼다고 보내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애초 공짜로 일하는 것도 아니잖아, 이 자식아. 아까 그 꼴을 보고도 다른 데 가겠다는 말이 나오,”

- 쾅! 쾅! 콰르르르……!

땅바닥에 몸을 낮춘 천둥이 울려 펴졌다. 황급히 대화를 멈추고 뒤를 돌아본 피올과 유렌은 그만 멍하니 입을 벌렸다. 괴물을 가둔 얼음들이 쪼개지고 있었다. 그것도 안에 든 괴물까지 함께!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왕궁마법사들만이 분주했다. 얼어붙은 검은 피는 검은 얼음조각이 되어서도 녹지 않고 바닥을 뒹구는데, 그들은 조각을 주울 생각도 않고 수레부터 챙겼다. 정신을 차린 장교가 병사들을 다그쳤다.

“다들 뭐 하고 있어? 당장 앞으로 나가! 안쪽까지 진입한다! 치안대도 함께 간다! 따라와!”

“들었지? 헛꿈꾸지 말고 따라와.”

피올은 슬쩍 빠져나갈 기회를 완전히 잃었다. 그는 유렌에게 끌려 얼음조각을 넘으면서도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 * *

셰비언은 후드를 더 깊이 눌러쓰고 코를 막았다. 브란젤 전체에 자욱한 유황 냄새가 진짜 냄새가 아니라 마력의 향취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코를 막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샤를레아가 찾아와 등을 두들기며 깨우기 전까지 전혀 맡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브란젤 전역을 돌며 간신히 안정적으로 만들었던 마법망이 죄다 엉망이 된 걸 눈으로 보고나자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말이 안 나왔다.

‘마력이야 용의 마력이지만……. 마법망을 이렇게까지 휘저어놓은 건 인간의 솜씨야.’

범인으로 짐작되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화룡의 마력을 타고나 샤를레아의 가르침을 받은 마법사, 다나 트왈릿. 샤를레아가 마법망 안정화 수식이 담긴 마력구슬을 넘긴 지 기껏해야 사나흘인데 이 난리라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다음 구역은? 어디로 가야 하지?”

“수레의 속도가 생각보다 안 나와서 조금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

“됐어. 수레를 일일이 기다리다간 괴물이 광장까지 닿겠어. 나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서 따라다녀.”

“말이 다르잖아요!”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 그 못 써먹을 물건을 꺼내오겠다고 늑장부리는 걸 이만큼 기다려 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 난 계속 얼려놓을 테니까 깨는 건 너희들 알아서 해!”

“셰비언 씨!”

뒤따라온 왕궁마법사가 비명을 질렀지만 알 바 아니었다. 셰비언은 턱 밑에 들이밀어진 도전장 같은 이 사태를 빠르게 해결할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다나를 찾아오겠다고 나선 샤를레아도, 아직 공간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마법망 안정화를 시키겠다고 나선 워커도 미덥지 않았다.

아예 인간의 모습을 벗어버릴까, 잠시 유혹이 찾아왔지만 고개를 젓고 마음을 다잡았다. 겨우 마법사 하나의 도발에 홀라당 넘어갈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손톱만큼 마법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기적이니 뭐니 떠들어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하여간 귀찮게 굴어!”

셰비언은 로브를 푹 눌러쓰고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일부러 용의 마력을 살짝 흘리고 있었기에 그의 앞을 막는 간 큰 인간은 없었다. 하니 수레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셰비언을 잡아놓으려던 왕궁마법사는 순식간에 그의 뒷모습을 놓치고 발을 굴렀다.

“아, 미치겠네! 하여간 천재 새끼들은 다 재수 없어! 다나 트왈릿 그 망할 년은 어딜 가서 안 나오는 건데! 뒈지기라도 했나!”

괴물이 이전에 없던 규모로 날뛴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왕궁마법사들은 현장에 나가 마법망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멀쩡해졌던 마법망이 역시 하루아침에 맛이 갔다는 사실을 알고 거품을 물었다.

마법망 안정화 연구를 하던 왕궁마법사들이 죄다 불려와 머리를 맞댔지만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연구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던 다나 트왈릿은 벌써 이틀째 숙소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친구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는 데다 늘 후드를 뒤집어쓰고 이름도 밝히지 않고 나다니는 인사라 연락할 방법이 묘연했다.

결국 민간에서는 마법망 안정화라는 연구 과제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며 마법사협회에 협조 요청을 보냈는데, 뜻밖의 거물이 나타났다.

로렐라이의 두 천재 마법사, 워커 크라티우스와 셰비언이었다.

전보의 제작에 마법망 안정화 수식이 쓰였다며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데 그게 어찌나 든든하던지. 답이 없는 보고서를 뒤적대며 피가 바짝바짝 말라가던 왕궁마법사장에겐 천국의 감로수 같은 등장이었다. 감히 의심하기엔 그들이 이뤄낸 것들이 너무 컸다.

과연 워커는 그 자리에서 마법망 안정화 수식을 그리기 시작했고, 셰비언은 이젠 옛 문헌에서나 나오는 옛 마법을 직접 시연하며 단시간에 괴물을 잡을 수 있다 장담했다.

왕궁마법사장은 마법 실력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가 좋아 그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셰비언이 구사하는 마법을 보자마자 타우레드 후작의 의뢰로 만들었다가 실용성이 떨어져 창고에 처박힌 대포를 끄집어낼 것을 지시했다.

대포는 단 한 기에 불과하지만 셰비언이 얼려 버린 괴물들을 왕궁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대포로 부수는 장면을 보여주면 그것만으로도 이 사태를 막아내지 못한 왕궁마법사의 책임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다나 트왈릿이 행방을 감춘 지금, 왕궁마법사장의 판단은 아주 적절했다. 셰비언이 그의 말을 얌전히 잘 들어주었더라면 말이다.

천재 놈들 다 재수 없다, 빙판 걷다 발목이나 부러져라, 길거리에서 음식 사먹고 탈이나 나라! 소심한 저주를 줄줄이 내뱉던 왕궁마법사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좌절했다. 코앞에 다가온 줄 알았던 승진이 저 멀리 사라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예년대로라면 가장 여유로워야 할 수확제 마지막 날이건만, 타우레드 후작가의 저택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타우레드 후작이 잔뜩 굳은 얼굴로 다급히 저택을 나갔다는 게 첫째 이유고, 라비린과 라디아타 사이의 갈등이 두 번째 이유였다.

“에스코트 정도는 그냥 가문의 기사에게 시켜도 되잖아. 꼭 날 데려가야 해?”

“오랜만에 화분 취급 말고 오라버니 대우를 해주겠다는데, 무슨 불만이 그리 많아요?”

“이게 무슨 오라버니 대우야? 훌륭한 화분 취급이지. 오드리가 없는 무도회에서 쏟아질 시선을 죄다 받아내란 거잖아.”

“오라버니가 없으면 나 혼자 다 감당해야 할 시선이에요. 오라버니는 내가 데뷔탕트를 치르기도 전에 이 집을 떠났잖아요. 한 번쯤은 날 도와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라비린은 상처라도 받은 듯 가련하게 눈을 내리까는 라디아타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정 타인의 시선이 두려우면 아예 무도회에 안 가면 그만인 것을, 아침나절부터 보석을 다시 고르고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는 이유가 대체 뭔가.

“라디아타, 그냥 가지 마. 어차피 수확제 마지막 날의 무도회는 나이와 작위가 있는 귀족들이 주로 참석하는 곳이고, 미혼의 귀족영애는 그냥 예쁜 꽃 취급밖에 못 받잖아. 황금장미니 뭐니 해도 네가 정말로 꽃도 아닌데 굳이 가서 꽃 노릇 하지 말고 그냥 수확제를 즐겨.”

“몇 년이나 브란젤에 있지도 않으셨던 분께서 어쩜 그리 잘 아세요?”

“난 가문의 후계자야. 설마 내가 집을 떠나 있었다고 정말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놈의 후계자 타령. 라디아타는 앵두처럼 발갛게 물들인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래도 난 오늘 오라버니가 필요해요. 오늘 무도회에서 왕자전하와 마지막 춤을 출 거란 말예요.”

미끼다. 이건 무도회 가기 싫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던진 미끼다. 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안 물 수가 있단 말인가. 라비린은 에스코트 문제는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설마 가스트로 놈의 구애를 받아주기라도 하게?”

“가스트로 왕자전하세요.”

“내가 그놈을 놈이라고 부르는 건 그놈도 아니까 걱정 마라. 그보다 베텔 경은 어쩌고 왜 가스트로 같은 놈을? 말이야 번드르르하게 잘하고 생긴 것도 멀쩡하긴 하지만 그 예쁜 머리통 속에 든 건 멀쩡하지가 않은 놈이야! 어린 시절부터 손익계산에 눈이 벌건 놈이었다고! 그냥 베텔 경을 택해!”

“그날 근처에 있었으면서. 내가 차이는 거 다 보고 들었잖아요.”

다다다 가스트로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던 라비린은 차마 라디아타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라디아타가 알아채기 전에 자리를 떴건만, 어떤 경로로 그걸 알게 됐는지 뻔했다.

‘가스트로, 이 망할 새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라도 언젠가 왕위에 오를 이이기에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욕을 퍼부었다. 그때 뭔 짓을 해서라도 말하지 않을 걸 약속받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지금이라도 네가 베텔 경을 원한다고 한 마디 말만 하면 네게 그를 안겨줄 수 있어.”

“…….”

“타우레드 후작가라는 배경은 이럴 때 써야지.”

라비린은 정말 자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라디아타의 남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프러스의 뒷조사를 철저히 해둔 상태였다.

“베텔 경에겐 결혼한 여동생이 한 명 있는데, 남편은 북부의 광산을 지키는 부대에서 병사로 일해. 자식은 아들 한 명인데, 몸이 약해서 자주 아프다더군. 치료비가 많이 들어 살림이 쪼들리는 모양이야. 베텔 경은 조카를 위해서 꼬박꼬박 돈을 부치고 있어.”

“…….”

“대쪽 같은 성품의 사람이라도 혈육이 얽히면 얘기가 달라지기 마련이지. 일단 베텔 경 매제의 근무처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주겠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조카를 후원해 줄 것을 대가로 제시하면 돼. 무슨 뜻인지 알지?”

라디아타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북쪽의 광산지대는 정말 사람이 살 곳이 못되거든. 나을 병도 안 나을 곳이야. 시작은 조금 나쁘더라도 일단 결혼만 하고 나면 그 다음은 금방이다. 넌 예쁘고 사랑스러우니 베텔 경도 너에게 금방 빠질 거야. 주제를 알고 성실한 사람이니만큼 헛된 꿈을 꿔서 널 귀찮게 하지도 않고, 가정에 아주 충실하겠지.”

“……그러니까, 그 사람을 돈으로 사라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그냥…….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하라는 거지. 베텔 경은 너를 통해 여동생의 안녕과 조카의 건강을 얻고, 너는 가스트로 따위가 아니라 마음을 줄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를 남편으로 얻고. 아주 좋은 거래야. 결혼은 본래 그런 거잖아.”

“오라버니와 왕자전하가 왜 그렇게 쿵짝이 잘 맞는 좋은 친구인지 이제 알겠어요. 두 사람이 생각하는 게 아주 똑같네요. 틀에 찍어낸 것 같아.”

“어허, 솔직히 그건 아니지. 그놈이 나보다 훨씬 냉정하고 차가운데! 그리고 말이야, 너 되게 차별적인 거 알아? 나랑 오드리도 엄청 비슷한데 왜 오드리는 좋아하고 난 그렇게 질색을 하는 건데?”

“오라버니랑 오드리랑 같아요? 어디 비교할 게 없어서 그런 걸 비교하고 있어.”

라디아타는 주변을 슬슬 둘러보았다. 뭐 집어던질 게 있나 찾는 거였지만, 손 빠른 하녀들이 죄 들고 도망을 가서 잡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입술 한쪽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결혼은 본래 그런 거라고 말하는 오라버니는 왜 오드리의 마음을 원해요? 오드리를 볼 때면 오라버니 엉덩이에 있지도 않은 꼬리가 달린 것처럼 보인다고요.”

“라디아타. 한동안 신문도 잡지도 안 봤어? 우리 기사가 얼마나 많이…….”

“다 들었어요. 오드리에게 나는 꽤, 몹시, 특별한 친구거든요. 열일곱 살 소녀에게 친구가 얼마나 중요하게 느껴지는지 일일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겠죠? 오늘 약혼자와 무도회에 가지 말고 동생과 시간을 보내라고 조언해 준 사람이 누군지, 꼭 말해야 해요?”

사랑은 사람을 얼마나 연약하게 만드는가. 지금 라비린에게 라디아타의 의미심장한 미소는 들개 떼의 이빨보다 무서웠다. 그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물러섰다.

“내가 졌다. 가스트로든 누구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에스코트는 안 돼. 네 목적을 아니까 더더욱 안 되겠다.”

“왜요?”

“내가 무도회에서 왕자전하의 정강이를 걷어찰지도 모르겠거든.”

라비린이 허공에 발길질하는 시늉을 했다. 잘못 맞았다간 뼈 부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제법 힘이 들어간 발길질이었다.

라디아타는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일단 가면 얌전히 잘 할 거면서 저렇게 기를 쓰고 가지 않으려는 이유야 뻔했다. 광장에 나가서 오드리를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볼린의 밤에 통했던 기가 막힌 우연을 다시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낭만적인 사람이 되었는지.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야 오라버니가 알아서 하실 일이죠. 왕자전하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순간에 내 옆에 고작 에스코트 기사 따위를 둘 수는 없어요.”

“그럼 아버지에게 부탁해. 모양새로는 남작 나부랭이보다야 후작이 낫지.”

저택 사람들치고 타우레드 후작이 다급히 검을 챙겨 뛰쳐나간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라비린은 태연히 그를 언급했다. 울컥한 라디아타가 라비린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 생각했을 때, 몸 곳곳에 검은 피를 묻힌 병사가 라비린을 찾아왔다.

당혹스러워하며 받아든 명령서엔 다급하게 휘갈긴 타우레드 후작의 사인이 선명했다. 짙은 불안과 긴장감이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번졌다.

<기사 작위가 있는 귀족 자제는 즉시 출전할 것.>

라비린은 명령서를 대충 접어 뒷주머니에 넣었다. 말을 떼기도 전에 발 빠른 시종들이 검과 무구를 끌어안고 복도 저편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다들 진정해. 내가 검술수련여행을 사 년이나 다니다 왔는데 미덥지가 않은가 보지?”

“오라버니.”

“괜찮아. 네 에스코트 안 해도 돼서 기분 최고다! 하하!”

부러 한껏 너스레를 떨고는 저택을 나섰다. 공기 중에는 달콤하고 향긋한 내음만이 가득한데, 라비린을 이끄는 병사는 한껏 긴장한 채였다. 그의 턱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인지 대충이라도 설명해 봐. 출전이라니?”

“그……. 괴,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괴물? 소문의 그 괴물? 그게 대체 뭐라서 치안대로 모자라 군이 나서고, 기사 작위만 있는 애송이들까지 죄다 불러들여?”

병사는 말을 아꼈다.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 쾅! 쾅! 콰르르르……!

바짝 마른 공기를 가르고 천둥이 울었다. 불길한 예감에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확제 마지막 날을 즐기던 사람들이 속도를 높인 말에 기겁을 하고 길을 비켰다.

* * *

샤를레아는 다나를 찾아 브란젤을 헤맸다. 끝없이 튀어나오는 괴물도, 구멍이 숭숭한 마법망도 그녀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저 공기 중에 자욱한 유황 냄새가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이러라고 퍼준 마력이 아닌데.’

샤를레아가 한동안 빌빌거리고 다녔던 이유는 다나에게 마력을 퍼주었기 때문이었다. 다나가 보유한 마력 수준에 맞춰 마법을 가르칠 만한 재주가 없었기에 택한 방법이었다. 대량으로 쏟아진 용의 마력에 적응하느라 안 그래도 엉망이었던 안색이 더 푸르죽죽해지는 걸 봤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아직 용의 마력을 완전히 흡수하지도 못했으면서 이런 큰일을 벌이다니, 혹시라도 인적 드문 곳에서 쓰러져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죽음을 각오한 잠에서 깨어난 후 그 정도로 뚜렷한 화룡의 마력과 마법사의 재능을 동시에 가진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기껏 남은 동족이라곤 재수 없는 셰비언밖에 없는데 다나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샤를레아는 용의 기색을 풀풀 풍기며 골목길을 뒤졌다. 마력을 감지하려면 그게 편했다. 덕분에 웬만한 소동물은 근처에도 오지 않았는데, 괴물은 예외였다. 담장을 타고, 하수구를 타고, 처마에 매달려 광장으로 향하던 괴물들이 일제히 샤를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꺼으으…… 꺼어…….”

“이 멍청한 것들!”

마법의 주인인 셰비언은 마법으로 해결했지만, 용족 최고의 전투력이라는 평을 들어온 샤를레아는 검으로 해결했다. 마법이 안 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녀가 걷는 걸음마다 새카만 피가 도랑이 되어 흘렀다.

“다나! 다나 트왈릿! 대답해! 어디 있는 건데!”

목이 터져라 외쳐도 돌아오는 건 괴물의 아우성뿐. 이래서야 도저히 못 찾겠다 싶어 쌓인 시체를 밟고 뛰어 4층 건물의 지붕을 밟았다. 마력을 촘촘하게 풀었다.

얼음처럼 찬 마력 덩어리인 셰비언이 종횡무진 브란젤의 뒷골목을 누비고 있고, 그와 엇비슷한 마력을 가진 오드리는 광장에 있었다. 한 자리에 머무는 바람 같은 워커도 있고, 작은 등불 같은 다른 마법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나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죽은 게 아닐까.

붕붕 고개를 저어 나쁜 생각을 떨쳐 내고 마력 감지에 좀 더 공을 쏟았다. 그랬더니 아까는 인지하지 못했던 게 느껴졌다.

화룡의 마력이 주기적으로 방출되어 주변의 마법망을 엉망으로 만드는 지점들이 있었다. 너덜너덜한 마법망에 올라탄 화룡의 마력이 너덜너덜한 마법망을 타고 넓게, 넓게 퍼져나갔다. 그러다 파장이 끊길 만한 곳에 이르면, 화룡의 마력을 공급하는 새로운 지점이 나타나 힘을 보탰다.

그런 지점들이 엮여 거대한 그물처럼 브란젤 뒷골목을 덮고 있었다.

“크엑!”

벽을 타고 기어올라 발목을 잡으려는 괴물을 걷어차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괴물이고 나발이고 다나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짓을 했다는 건 확실했다.

샤를레아는 다나에게 용의 마력과 마법망 안정화 수식을 주었지, 일일이 손을 대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마법망을 망치는 구조 같은 걸 가르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역시 나의 제자. 화룡의 마력을 타고난 나의 일족.

아직 다나를 찾지는 못했지만 샤를레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워커를 두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 다나도 천재 맞잖아.’

셰비언이 워커를 칭찬할 때마다 뭔가가 울컥울컥 솟아오르더니만, 파장이 그물처럼 출렁거리는 광경을 보니 마음이 다 뿌듯했다. 만나거든 그녀의 인형놀이에 종일토록 협조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나의 행방을 찾는 게 먼저였다. 그녀는 그물의 끄트머리에 집중했다. 그러다 어느 한 부분의 그물이 점점 영역을 넓히는 걸 발견했다. 새로운 지점들이 생겨나 파장의 범위를 늘리고 있었다.

“저기다.”

아직 죽지 않았어. 무사히 살아 있어.

죽을힘을 다해 건물을 기어오르는 괴물들의 머릿수가 좀 전보다 곱절은 늘었지만, 샤를레아에게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녀는 괴물의 길쭉한 머리통을 밟고 뛰어올라 건물의 지붕에서 지붕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델은 오드리를 끌고 광장을 가로질러 외곽에 다다랐다. 꽃, 주스, 머리띠, 작은 램프, 옷에 다는 장신구, 설탕과자, 타 대륙에서 넘어온 독특한 장식품, 내구성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기발한 재치가 돋보이는 마법 도구들……. 온갖 물건들이 좌판을 펼쳐 놓고 사람들을 꼬드기고 있었다. 역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코를 마비시킬 것처럼 강렬한 단내와 향내 사이로 희미한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하델의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는 예감이 그를 자꾸만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한데 탈출로로 생각해 뒀던 골목마다 병사들이 서 있었다. 계속 다른 골목으로 이동하다 지쳐 아예 병사를 붙들고 대체 왜 여길 지키고 섰느냐 물었더니, 브란젤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두루뭉술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델은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을 원했지만, 관계자도 아닌데 병사가 그런 걸 대답해 줄 리가 있나. 결국 포기하고 다른 골목들을 기웃대던 하델이 울컥 성질을 부렸다.

“빠른 길은 다 막혔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길밖에 없어요. 안전을 위한다면서 왜 이따위로 굴지?”

“확실한 건, 광장 밖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야. 하델, 저기 보렴. 저 사람…….”

오드리가 가리킨 사람은 잔뜩 구겨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중년 여자였다. 장식이나 천을 보아 나들이용 옷은 맞는 것 같은데, 다림질이 되어 있지 않아 몹시 초라해 보였고 차림에 맞지 않는 큰 짐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고, 어린 아들의 손을 필요 이상으로 꽉 쥐고 있었다. 불편해진 아이가 손을 놓으려 하자 무섭게 윽박질러 얌전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병사들로 막혀 들어갈 수 없는 골목 안쪽을 자꾸만 기웃거렸다.

“꼭 저 안쪽에서 쫓겨나온 사람 같지 않니?”

“에이, 군이 사람을 왜 쫓아내요? 골목을 막은 것도 이상한데 사람을 일방적으로 바깥으로 내몰았으면 광장이 이렇게 평온할 리 없어요. 쫓겨나온 건 아닐 거예요.”

“글쎄다……. 하지만 누가 맞느냐를 따질 때가 아니긴 하지. 하델, 조금 돌아가더라도 광장을 나가자. 빨리 가는 길은 다 막혔으니 어쩔 수 없잖니.”

“아주 다 막힌 건 아니에요.”

하델은 패기 있게 말해놓고는 차마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오드리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아무리 얇고 가벼운 남부식 드레스라도 바닥까지 내려오는 치마였다. 길 아닌 길을 가기엔 좀 문제가 많은 차림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마니? 막히지 않은 길이 있으면 그리로 가야지. 뭐가 문제야?”

“그게……. 그 옷을 입고 개구멍을 기거나 담장을 타넘을 수는 없잖아요.”

“저택 담벼락에 개구멍 뚫고 나가서 뭘 하고 다니나 했더니……. 브란젤 대탐험을 하고 다녔구나?”

하델의 뺨에 확 붉은 물이 들었다. 며칠 전에 아버지에게서 누나를 지킨 일로 의젓하고 멋진 기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좀 들떠 있었는데, 이렇게 곧바로 예전의 행적을 들켜 버리다니 말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멀쩡한 바닥을 발로 괜히 툭툭 걷어찼다.

“누가 내 동생 아니랄까 봐, 내가 만탈락에 가자마자 한 짓을 브란젤에서 똑같이 하고 있네.”

“……진짜요?”

“이 누나가 만탈락에서 얼마나 대단한 말썽쟁이였는지, 집에 무사히 돌아가면 얘기해 줄게. 릴리와 이디케에게 물어보면 아주 신이 나서 떠들어줄 거다.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거든. 그러니까 길 아닌 길이라도 얼른 얘기해 보렴.”

좋아하는 누나의 회유에 하델은 쉽게 넘어왔다. 하델은 집안에서 억눌렀던 말썽쟁이 기질을 다 터뜨리며 알아낸 길을 자랑스럽게 오드리에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웃으며 듣고 있던 오드리였지만 말이 점점 길어지자 결국 표정에 금이 갔다.

“……너 정말 내 동생이구나.”

“네?”

“이디케가 알렉스를 예뻐하는 이유를 알겠어.”

오드리는 그만 얼굴을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델이 걱정했던 그대로, 이렇게 길고 치렁한 치마를 입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개구멍이야 어떻게든 지나간다손 쳐도, 담장을 기어오르고 지붕을 타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하델, 네 비밀 통로를 알려준 건 고마워. 근데 네 말대로 이 옷으론 무리야. 돌아서 가자.”

“네에…….”

“네가 업무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치고 여유가 생기거든 만탈락에 데려가 줄게. 그땐 내가 말썽쟁이 시절에 알아낸 길을 가르쳐 줄 테니까 기분 풀어.”

“정말요?”

“그래. 숙제는 산더미처럼 받겠지만 그쯤이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내 동생이잖아?”

하델의 낯빛이 불쌍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안 그래도 오늘의 퍼레이드를 보겠다고 나오면서 숙제를 잔뜩 미뤄둔 참이었다. 내일 선생들이 와서 닦달을 하기 전에 모두 마치려면 오늘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할 수 있을 거예요. 네……. 누나 동생이니까.”

“그래, 믿는다.”

오드리는 짓궂게 하델의 머리를 마구 흩뜨려놓았다. 하델이 울상을 지었지만 그마저 퍽 귀여워 보이다니, 큰일이었다. 이 귀여운 동생의 믿음을 배신할 일이 몹시 미안해지기 시작했으니.

한편, 그새 구겨져 버린 머리띠를 품에 챙겨 넣던 하델은 굉장히 이상하게 생긴 새를 발견했다. 5층이나 되는 큰 여관 지붕에 올라앉은 새였는데, 독수리보다 크면서 앵무새처럼 알록달록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살폈지만 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니, 조금 움직인 것 같기도 했다.

‘저게 새 맞긴 한가?’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새의 모습을 그럭저럭 확인하자마자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고 입에서 침이 바싹 말랐다. 세상에 머리가 세 개인 새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저건 새가 아니었다. 오드리의 손을 잡아당겼다.

“……누나. 저길 봐요.”

“응? 왜?”

하델이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오드리는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 올라설 수 없는 곳에 새처럼 앉아 있으니만큼 새라고 해야 할 것인데, 세 개나 되는 머리며 몸에 뒤집어쓴 사람의 옷가지를 보자마자 머리는 다른 결론을 냈다.

괴물.

오드리는 리가 항구에서 인간이 괴물로 변하는 과정을 본 바가 있었다. 괴물을 둘러싼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을 콕 집어 다가오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세 개나 되는 머리로 사방을 살피는 저 괴물도 자신에게 다가오려 할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당장 피해야 한다. 이왕이면 문이 튼튼하고 창문이 모두 닫히는 공간이 좋았다. 경비원이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하델, 이것 좀 갖고 있으렴.”

소매치기 당하지 않도록 꼭 쥐고 있던 가방을 하델에게 맡겼다. 하델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오드리가 맡긴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잠깐 숨참아.”

오드리는 하델을 번쩍 안아들어 엉덩이를 받쳤다. 다섯 살 어린애처럼 덜렁 들린 하델은 놀라 버둥거렸지만, 오드리가 곧바로 뛰기 시작하자 어쩔 줄 모르고 그녀의 목에 손을 둘렀다.

“아니, 뭐 하는 거야!”

“밀지 말아요!”

마구 밀쳐진 사람들이 불평하는 말은 남매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고 흘러갔다. 세상이 마구 흔들리는 가운데 하델은 괴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집중했다. 두리번거리는 머리통이 불길했다.

오드리가 광장 근처에 무기상이 모여 있는 골목으로 뛰어들 때쯤, 괴물의 머리 하나가 그들이 있는 쪽을 정확히 돌아보았다. 하델은 자기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눈이 마주쳤어요.”

“그래? 기분이 어때?”

“아주 거지같아요. 머리 세 개가 다 우리를 보고 있……. 누나! 내려와요!”

세 개의 머리에 머리칼 대신 깃털을 달고, 날개깃 대신 작은 팔이 수없이 돋아난 괴물이 건물 외벽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날지는 못하나 봐요.”

“그거 정말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오드리는 다행이라는 말만 연신 되뇌며 문이 열린 가게를 찾아 뛰었다. 수확제에 무기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어 가게 대부분이 닫혀 있었다.

다른 골목을 찾아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왔다. 사람이 별로 없이 썰렁한 골목을 봤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뛰어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라도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고민을 시작할 때쯤 문을 연 가게가 보였다. 보잘 것 없이 작은 가게였다.

사실 문을 연 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가게 문이 한 뼘쯤 열려 있었을 뿐이니까. 어쩌면 가게를 연 게 아니라 문이 고장 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오드리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벌컥 문을 열고 가게로 뛰어들었다. 안은 어둡고 습했으며 몹시 더웠다. 더불어 비릿한 쇠 냄새와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델을 내려놓고 문을 닫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 손으로 잠금장치를 찾아 걸었다.

덜컥.

걸쇠가 걸리는 느낌이 나자 겨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방이 막힌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어마어마했다. 건물 벽을 팔 힘으로 오르내리는 괴물에게 이런 얇은 나무문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든 건 그 다음이었다.

다시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 숨을 곳 따위를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델을 안고 뛸 시간이 있었으면 병사들에게 가서 보호를 요청했어야 했다.

‘꼭 날 쫓아올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혼자 불안해서.’

이게 다 리가 항구에서의 기억이 너무 선명한 탓이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시궁창 냄새를 풍기는 괴물이 치맛자락을 쥐었을 때의 충격이 전혀 가시지 않았다는 걸 이렇게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가게가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형편없이 떨리는 손을 하델에게 보일 뻔 했다. 하지만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오드리는 문에 등을 댄 채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하델이 기겁을 했다.

“누나! 괜찮아요?”

“괜찮아. 그냥 좀 놀란 것뿐이야. 그보다 하델, 미안하다. 바로 군인들에게 갔어야 하는데 내가 판단을 그르쳐서 이런 곳엘 왔어.”

“뭘요, 놀라면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누나, 무슨 힘이 그렇게 세요? 난 내가 무슨 다섯 살 꼬마애가 된 줄 알았잖아요. 열두 살이나 먹은 데다 마르지도 않았는데 날 번쩍 들고 그렇게 뛰다니……. 누나, 솔직히 말해 봐요. 나 하나도 안 무거웠죠?”

괴물에 대한 말은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주 가상했다. 오드리는 하델의 얕은 수에 홀딱 넘어간 척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음……. 난 예전부터 힘이 셌어. 락시 부인이 그러는데, 랄리우스의 핏줄들은 본래 힘이 세대.”

“뭐야, 키 작은 건 둘이 똑같은데 좋은 건 누나만 물려받았네. 이왕 작을 거면 힘이라도 셌으면 좋았을걸. 지금은 그만뒀다지만 난 검도 배웠고 하니까 내가 누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누나랑 싸우면 내가 지겠는데요.”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난 힘은 세도 제대로 쓰는 법은 못 배웠어. 다른 건 다 괜찮다던 락시 부인도 그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기껏해야 호신술 약간 정도……?”

“누나, 그럼 나한테 배워볼래요? 난 힘은 누나보다 못할지 몰라도 기술은 누나보다 나을 텐데!”

오드리는 하델이 심술궂게 웃는 걸 보았다. 목소리는 아주 상냥하고 다정하게 꾸며냈는데, 이곳이 어둡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가 됐다는 건 잊은 모양이었다.

“누나를 놀려먹는 게 재밌나 보지? 표정 다 보인다.”

“쳇.”

말랑말랑한 볼살을 쭈욱 늘리는 걸로 야단을 대신했다. 어쨌거나 눈이 보이기 시작하니 긴장이 훨씬 덜해졌다. 오드리는 아예 편하게 주저앉아 가게 곳곳을 살폈다.

내부가 어두울 때 짐작했듯이, 빈 가게였다. 쇠 냄새며 기름 냄새가 아직도 진하게 나는 걸 보면 가게를 비운 지 얼마 되지 않는 듯했다. 전 주인이 남기고 간 쓰레기가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괴물이 벽을 타고 내려왔다고 했지?”

“네. 꼭 거미 같았어요. 큰 팔에 다른 팔이 잔뜩 달려 있는 게 거미랑은 다르게 좀 소름끼쳤지만요. 소문이 사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거, 광장에 있던 사람들도 봤겠죠?”

“봤을 거야. 우리가 조금 일찍 봤을 뿐이지…….”

조용하던 문 너머가 시끄러워졌다. 비명, 고함, 거친 욕설과 묵직한 군홧발 소리. 말발굽이 돌바닥을 걷어차는 소리도 났다. 남매가 이런 대화를 나누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괴물 때문에 광장을 포위하다시피 하고 있었던 게 맞나 봐요.”

“그런가 보다……. 괜히 피한 건지도 모르겠는걸. 그나저나 하델, 올해 퍼레이드는 글렀다. 이런 소동이 났는데 퍼레이드를 할 리가 없어.”

“아녜요. 완전히 취소될 리가 없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수확제인데! 이렇게 큰 이벤트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고요. 퍼레이드는 아니더라도 분명 다른 게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누나……. 제발…….”

“그래, 그래. 혹시 퍼레이드 대신 다른 걸 하거든 꼭 데려가 줄게.”

“좋아요! 그땐 베텔 경에게 가시풀처럼 꼭 붙어 있을 거예요. 누나, 가시풀이 뭔지 알아요? 작은 갈고리처럼 생긴 씨앗이 동그랗게 맺히는 풀인데요, 그 곁을 지나가면 옷에 붙어서 되게 안 떨어져요. 알신다가 제 개구멍 주변에 그걸 일부러 심어놔 가지고…….”

하델은 정도 이상으로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는 타입이었다. 오드리는 끊임없이 조잘대기 시작한 하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의 음량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생각은 점점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괴물이 그놈 한 마리뿐이고 빠르게 잡힌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한 마리가 아니라면? 혹시 놓친 놈이 있어서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어 손을 뻗기라도 하면?

리가 항구에서의 혼란이 다시금 떠올랐다. 라비린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정말 사람에게 밟혀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던 순간이었다. 한데 브란젤의 광장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크고 사람도 몇 배나 더 많았다.

‘괜찮아, 오드리. 진정하자. 여긴 브란젤이고, 치안대도 있고 군인도 있어. 별일 없이 잘 잡을 거야.’

스스로를 다잡기가 무섭게 문이 덜커덕 흔들렸다. 무언가가 문에 강하게 부딪친 것 같았다. 흔들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몇 번이고 반복됐다. 쿵, 쿵, 쿵. 부실한 걸쇠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삐걱댔다.

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으로 문을 막고 섰다. 뭐가 들어오려는 건지는 몰라도 좋은 건 아닐 게 분명했다.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의 내용도 바뀌었다. 병사들의 말소리가 한층 뚜렷하게 들렸다. 내용이 험악해진 건 물론이었다.

심장 말고 목을 노려라, 목이 여러 개면 전부 잘라 버리면 된다.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계속 묶어둬라. 버텨라, 지원이 올 거다…….

문 아래쪽 틈으로 흘러들어온 액체가 남매의 신발을 적셨다. 피비린내가 빈 가게에 배어 있던 오래된 냄새들과 뒤섞여 실내를 가득 메웠다.

“……누나, 한 마리가 아닌가 봐요.”

“내 생각에도 그래. 아무래도 이 문 밖에 우글우글한 것 같지?”

“네. 엄청 많은가 봐요……. 누나? 누나!”

오드리가 걸쇠를 풀었다. 하델은 기겁을 하고 오드리에게 매달렸지만, 문 밖 상황을 봐야 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뗐다.

오드리는 손가락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문을 조금만 열고 바깥을 살폈다.

검은 피로 목욕을 한 병사들, 바닥을 구르는 괴물의 머리통, 포석 틈으로 개울처럼 흐르는 피…….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머리가 깨진 괴물이 드러누워 숨을 헐떡대고 있었다. 물고기처럼 생긴 입에선 피거품이 보글대는데, 괴물의 눈은 남매가 있는 실내를 향하고 있었다.

너무 끔찍한 광경인데 이상하게 현실감이 안 들었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뭐야, 저거. 아직 살아 있네?”

병사들 틈에 섞여 있던 피올이 가게 문 앞에 드러누운 괴물을 발견했다. 내버려 둬도 곧 죽을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살아 있다는 걸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나니 그냥 두기가 찝찝했다.

그는 물고기처럼 변해가는 괴물의 목을 치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얼마나 많이 베었는지, 검의 날이 다 상해서 아주 도끼를 휘두르는 기분이었다.

“쯧, 보급품 품질하고는. 명예로운 치안대면 좀 좋은 걸로 줄 것이지…….”

혹시 중간에 떼먹는 놈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개인적으로 파본 적도 있는데, 그런 간 큰 놈은 없었다. 본래 나오는 품질이 이 모양인 것이다. 그는 짜증스럽게 시체를 걷어찼다.

‘하여간 이상한 놈들이야. 왜 이렇게 꿀단지 발견한 개미처럼 꼬여드는 거지?’

홀린 것처럼 광장으로 향하는 괴물들을 본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진 의문이었다. 도대체 저 광장에 무엇이 있기에 저리 가고자 하는 건가.

광장을 향하지 않는 무리가 있긴 했지만, 전체에 비하면 매우 소수에 불과했다. 일선에 있는 그가 그런 흐름을 알 리가 없으니 괴물 전체가 광장으로 향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아이고, 삭신이야……. 이거 일 끝나기는 하는 건가 모르겠……. 하?”

피올과 오드리의 눈이 마주쳤다. 좁은 틈 사이로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본 순간, 피올은 하도 기가 막혀서 숨 쉬는 법도 잊었다. 오드리가 문을 조금 더 열고 얼굴을 확인시켜 주고 나서야 겨우 숨이 트였다.

“그…… 그러니까, 오드리 아가씨? 왜 아가씨가 여기에……. 잠깐만, 잠깐만 안에 들어갑시다.”

피올은 자신을 보는 눈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가게 안으로 쑥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젠장, 여긴 왜 이렇게 어두워? 앗, 아가씨 앞에서 욕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약간 흥분상태라서요. 말이 걸러지지 않고 그냥 나오네요.”

“괜찮아요. 이해해요. 상황이 상황이니까.”

“감사합니다. 진정할 만한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얘기하죠. 아가씨, 여긴 왜 계세요? 괴물이 날뛰는 곳에, 제 한 몸 지키기도 변변찮은 분이 도련님까지 달고. 설마 두 분이 사이좋게 괴물 구경이라도 나오신 건 아니시죠?”

“나야말로 묻고 싶네요. 퍼레이드를 하겠다고 광장을 열기까지 했으면 괴물을 잘 통제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군에 치안대에 다 나섰으면서 어떻게 광장에 괴물이 나타나도록 둬요? 여관 지붕에 괴물이 나온 걸 봤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은 가요?”

“광장에 괴물이 나타났다고요?”

“그래요. 하델이 보고 알려줘서 급히 그 자리를 피해서 이리로 왔을 뿐이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긴 텅 빈 골목이었다고요.”

“광장, 광장……. 아으, 돌아버리겠네!”

피올은 유렌에게 배운 욕설을 아낌없이 구사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발을 굴렀다. 뭔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광장으로 향하던 괴물들을 보고 온 참이었다. 오드리의 말이 영 헛소리로 들리지가 않았다.

“아 빌어먹을! 어쩐지 체이서 그 새끼를 그렇게 급하게 불러가더라! 아무튼 아가씨, 그 괴물이 어떻게 생겼기에 보자마자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다 하셨죠? 보통은 괴물이 나오면 조금이라도 구경 좀 해 보겠다고 주변을 기웃대던데?”

“보티안 씨는 내가 의심스러운가 보죠?”

“셰비언 씨가 아주 날아다니고 있거든요. 이야, 난 마법사가 그렇게 파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어요. 나중에 그가 아가씨의 사람인 게 밝혀지면 꽤 힘이 되겠던데요.”

“셰비언이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치안대끼리 정보 공유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건 알겠네요. 내가 왜 구경은 안 하고 도망부터 쳤는지 알고 싶으면 리가 항구의 치안대에 협조 요청을 하세요.”

“설마 거기 아가씨도 계셨……. 그렇겠네, 볼린의 밤에 일어난 일이니 당연히 계셨겠죠. 네. 이해했습니다.”

자세히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대충 짐작이 갔다. 때가 되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했나 보지.

그럼 이제 그 다음을 생각할 때였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재수 없게 말려든 헨젤 남매를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 말이다. 평민도 아니고 귀족 자제를 계속 여기에 둘 순 없는데, 사람을 여럿 빼내기엔 문 밖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일말의 희망을 담아 물었다.

“아가씨, 함께 나온 에스코트 기사는 없습니까? 베텔 경이라든가, 벨키스 경이라든가…….”

“베텔 경이 함께 나왔지만 광장에서 잃어버렸어요. 그러고 보니 그가 몹시 놀라 찾고 있겠군요. 미안하기도 하지…….”

“잘됐습니다. 저와 함께 가죠.”

피올은 씩 웃으며 제 왼쪽 허벅다리를 두드렸다. 부상과 호위, 둘 다 전장을 떠나기에 아주 적절한 핑계였다.

* * *

워커는 왕궁마법사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수식을 그렸다. 다들 눈빛이 번들번들한 게,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으면 정말 멱살이라도 잡혔겠구나 싶었다.

“마법망 안정화라는 연구 분야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요.”

“마법망이 불안정한 지역이라고 사람이 안 사는 건 아니잖아요. 거기에도 수도랑 길은 깔려야 하는 거고요. 저야말로 신기하네요. 민간에서 마법망 안정화를 연구하는 분이 있었다니……. 마법사협회 쪽에 자료가 전혀 없어서, 그쪽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뼈 있는 말에 워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는 주절주절 변명을 주워섬겼다.

“하하, 하하하……. 곧 등록할 거였어요. 네. 아시다시피 협회에 등록하면 다들 개떼처럼 달려들어서 수식을 빼다가 연구하잖아요. 그리곤 금세 퍼져 버리죠. 출입금지마법도 그랬고, 마법도구 온오프도 그랬고……. 솔직히 새로 뭔가를 만들어내면 어느 정도 수익이 날 때까지는 다들 등록 안 하고 버티잖아요?”

“관례인 거 알아요. 거기도 땅 파먹고 연구하는 게 아닐 텐데 그걸 모를까. 됐고 넉넉하게 좀 그려요. 현장에 나가는 왕궁마법사들이 다 한 장씩 가져가려면 지금으로는 어림도 없겠네.”

“차라리 복사마법을 쓰죠. 다 일일이 손으로 그리려니 손목이 뻐근한데.”

“복사 마법도구 덩치 몰라요? 그걸 여기까지 들고 오라고요? 워커 씨, 밖의 상황이 어떤지 아직 감 못 잡았어요?”

왕궁마법사의 목소리가 훅 높아졌다. 대량으로 출몰한 괴물을 막아내느라 가용인력이 모조리 투입된 상황에서 손목 따위를 말하고 있다니, 그녀의 화는 몹시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니 워커는 아직 셰비언처럼 자유자재로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공간에 적응할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체력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더 나았을 텐데. 사실 이런 생각은 어설픈 자기 위로에 가까웠다.

원할 때마다 공간을 열 수 있게 된 후, 워커는 셰비언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시간과 장소의 구애 없이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공간을 주무르며 마법을 시험한다는 건 그가 상상한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셰비언이 워커를 제때 공간에서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는 또 기력을 잃고 탈진했을 게 뻔했다. 할 수 있다고 전부 해도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덕분에 알았다. 그러니 지금도 감히 공간에서 복사할 시도도 못하고 이렇게 몸으로 때우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아까 그 천둥소리 같은 건 뭐였어요? 마법망 흔들리는 게 여기까지 느껴지던데.”

“그건 대포라는 거예요. 타우레드 후작님께서 예전에 의뢰하셨던 건데 위력은 좋아도 효율이 영 별로라서…… 아니, 마법망 흔들리는 걸 느꼈다고요? 여기서?”

“그럼요. 꼭 꽝꽝 언 얼음을 망치로 후드려 깨는 것 같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못 느꼈어요?”

왕궁마법사는 워커가 그리는 수식을 부지런히 옮겨 적으며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워커 씨, 당신 되게 재수 없네요. 이런 말 자주 듣죠?”

“…….”

“빨리 그리세요. 바쁘니까.”

셰비언이 나타나기 전까지, 저 재수 없다는 말은 항상 워커의 차지였다. 매양 들을 때는 지겨운 말을 지겨운지도 모르고 잘도 한다 싶었는데, 저 말이 나오는 이유를 알고 나니 몹시 뿌듯했다. 그는 손목 아픈 줄도 모르고 즐겁게 수식을 그렸다.

“사실 이 수식은 마력구슬을 만들어서 거기다 새기면 훨씬 효율이 좋은 물건이에요. 마력을 넣어 저장하면 지속적으로 마법망을 안정시키기 때문에 지역 전체를 개선시키죠. 이 마법망 안정화의 개념은 셰비언이 제시한 거지만, 그걸 수식으로 만든 건 저인데…….”

“각하! 괴물이 광장에 나타났습니다!”

셰비언의 마법과 대포의 활약으로 일견 낙관적인 분위기가 감돌던 지휘부 전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제각각 자기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타우레드 후작과 카즈네 공작에게로 쏠렸다. 군과 치안대의 지휘를 맡은 그들이야말로 이 지휘부의 심장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앞으로 안 나오고 뒤쪽에서 몰래 건물 지붕을 타는 놈이 있었습니다. 그놈이 광장의 여관 지붕에 기어올라서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지금은 외곽으로 몰이하여 다른 무리와 함께 잡는 중입니다.”

“후작, 치안대는 시민들의 대피 쪽으로 빠지겠네.”

“……퍼레이드는 취소로군요.”

“수확제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보다야 퍼레이드를 취소하는 게 낫지. 혹 전하께서 진노하시거든 내 핑계를 대게나. 그 정도 방패는 되어주겠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고맙다 말하면서도 클로드의 안색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라비린이 로렐라이의 주인임을 주장하고 나선 일로 국왕의 심기를 단단히 거스른 상태였다. 카즈네 공작이 방패막이가 되어준다고 한들 꼬투리를 잡으려면 뭔들 못 잡겠나.

그러나 지금 이 사태를 빨리 마무리하지 못하면 그 걱정조차 사치가 될 테다. 그는 급하게 불러 모은 기사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몰이사냥에 힘을 기울일 것을 지시했다. 방어선을 더 두텁게 해서 대피하는 시민들을 보호하는 건 물론이었다.

그러는 동안 왕궁마법사장은 워커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괴물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예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태해결의 가장 큰 열쇠라면서 말이다. 수식을 받아가려는 왕궁마법사들이 워커의 앞에 긴 줄이 되어 늘어섰다.

샤를레아는 지붕을 타 넘으며 브란젤을 가로질렀다. 어찌나 빠르게 달리는지, 그녀를 쫓아 함께 달리던 괴물 대부분이 경주에서 탈락했다. 끝끝내 따라붙은 몇몇은 금방 그녀의 칼에 목이 떨어졌으니, 시엘라 거리에 진입했을 때쯤엔 따라오는 괴물 없이 홀가분했다.

격식 있고 호화로운 상점이 즐비한 전통 있는 쇼핑 거리, 손님을 가려 받을 정도로 콧대 높은 가게들이 어깨를 맞댄 시엘라 거리는 평소와 다르게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대로 가게 문을 닫고 도망을 쳐야 하는지 아니면 상점을 지켜야 하는지 좀체 구분이 안 가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괴물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는 구역과는 물리적인 거리가 있다 보니 실감이 안 나는 듯했다.

불안해하던 점원 한 명이 용병 차림의 샤를레아를 붙들고 물었다. 지금 사람들이 못 믿을 말을 하는데, 혹시 당신은 뭐 아는 게 있느냐고 말이다.

괴물은 사실이니 피할 거면 지금 당장 도망가라. 그깟 한 마디 해주는 게 뭐가 어려울까마는, 지금 샤를레아에겐 그 정도의 여유조차 없었다.

“꺼져.”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휘두를 듯 사나운 표정에 기가 죽은 점원이 주춤 물러났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수확은 있었는데, 샤를레아에게 배어 있는 피 냄새를 맡은 것이다. 점원은 후다닥 가게로 뛰어들어 짐을 챙겨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필 그 시점에 광장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시엘라 거리로 몰려들기 시작했으니, 거리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샤를레아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인간이야 지겨울 정도로 많은데 죽든지 말든지.

“다나? 다나! 다나 트왈릿!”

샤를레아는 사방팔방 달려 나가는 사람들 헤치고 걸으며 다나를 찾았다. 유황 냄새가 도처에서 맡아져 곤혹스럽긴 했지만, 그건 그만큼 찾을 단서가 많다는 뜻도 됐다.

과연 인형 가게와 모자 가게 사이의 좁은 틈에서 다나를 발견했다. 골목이 아니라 틈인 이유는, 폭이 비쩍 마른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 좁았기 때문이었다. 처마에서 떨어진 빗물이 옆 건물 처마에 닿아 떨어질 것만 같은 틈이었다.

감청색 왕궁마법사 로브를 입은 다나가 벽에 몸을 기대어 억지로 서 있었다. 입술만 보이도록 후드를 푹 눌러쓴 그녀에게서는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사람 흉내를 내는 인형을 보는 듯했다.

“다나!”

“어……. 샤를레아님. 여긴 웬일이세요?”

샤를레아를 발견한 다나가 배시시 웃으며 후드를 젖혔다. 샤를레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만큼 다나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눈 밑은 검게 죽고 입술이 새파랬으며, 머리카락은 부슬부슬하니 손만 대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너야말로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이리 나와.”

“잠깐만요. 조금만 더 그리면 돼요. 이것만 하면 마무리예요.”

다나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그 ‘조금만’을 하도록 내버려 뒀다간 그나마 남아 있는 생기마저 모조리 소비하고 죽어버릴 게 분명했다.

“너 하는 거 당장 멈춰. 하지 마!”

“금방 끝나요. 샤를레아님이 성격 급한 건 알지만 저도 한 고집 하거든요? 어휴, 힘들다.”

“말 좀 들어, 다나!”

샤를레아는 좁은 틈으로 꾸역꾸역 몸을 집어넣고 팔을 뻗었다. 손가락 끄트머리에 로브자락이 닿을락 말락했다. 하지만 다나가 한 발짝 옆으로 옮기자마자 다 헛일이 되어버렸다.

“아, 정말이지!”

샤를레아가 이를 득득 갈았다. 다나는 저 사이에 서서 잘도 팔을 놀리는데, 자신은 이렇게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니 분통이 터졌다.

“너, 잡히면 가만 안 둬.”

“네, 조금만 있으면 제 손으로 잡혀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잠시만 참아주세요.”

다나는 즐겁게 손을 놀렸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이 수식을 완성하면, 이틀 동안 여기저기 뿌려놓은 마력구슬이 제대로 연결되어 견고한 그물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럼 그때부터는 그물이 스스로 브란젤 바깥으로 영역을 넓히게 될 것이다.

“샤를레아님, 제가 만드는 게 뭔지 아세요?”

“아니까 잡으러 온 거야. 다나, 감당 못할 짓 하지 마.”

“왜 감당을 못해요? 전…….”

부지런히 수식을 그려 넣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벽면에 그려 넣은 수식에 새빨간 핏물이 튀었다. 놀라 피를 닦으려던 다나는 뒤늦게 제 손목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통증이 찾아온 건 그 다음이었다.

“아아…… 아아아아…….”

“다나!”

아무리 마른 다나라도 이 좁은 틈에서는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옆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와야 하건만, 지독한 고통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앞이 그저 하얗기만 했다.

샤를레아는 이를 갈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괴물을 처리하고 있어야 할 셰비언이 처마 끄트머리에 서서 다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셰비언! 뭐 하는 짓이야? 마법사의 손목을 자르다니!”

“그러게 얼른 그만두게 했어야지. 되도 않는 설득 따윌 하고 있으니까 내가 나선 거 아냐.”

“닥쳐! 손까지 자를 이유는 없었어! 제기랄, 거기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당장 다나를 꺼내줘야 할 거 아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 자기 동족이 사는 도시의 마법망을 망쳐 놓은 마법사야. 위험인물인데 당연히 손을 잘라야지.”

“야! 너는 뭐 달랐는 줄 알아? 동족혐오 적당히 하고 당장 꺼내줘!”

“무슨 소리야, 나와 저 여자는 완전히 경우가 다르지. 나는 명백하고 정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저 여자는 아니잖아.”

“정당한 이유 좋아하시네. 그건 너한테나 그랬던 거지! 시시비비 다시 따져 볼래?”

조금만 더 내버려 뒀다간 샤를레아가 폭발하게 생겼다. 셰비언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나를 슬쩍 옮겨서 샤를레아의 손에 잡히게 해주었다. 그것도 옷자락만 겨우 닿을 정도였다. 치사하게.

샤를레아는 다나의 손목에 약을 듬뿍 부었다. 덕분에 피는 멎었지만 잘린 손목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잠깐 동안 흘린 피가 워낙 많아 안색이 창백했다. 당장 처치가 필요했다.

일말의 희망을 담아 셰비언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치료해 줄 의사가 전혀 없는 듯했다. 곁에 서서 멀뚱멀뚱 보기만 하는 꼬락서니가 딱 그랬다.

“야, 너 아직도 나한테 마법 돌려줄 생각 없지? 치료해 줄 생각도 없고?”

“당연한 말을.”

“개자식……. 됐어, 네가 없어도 인간들의 치료술도 꽤 쓸 만해. 다나, 병원에 가자.”

샤를레아는 이를 악물고 다나를 들쳐 업었다. 다시 지붕을 타고 달려고 자세를 잡았는데, 셰비언이 그녀를 막아섰다.

“내려놔.”

“닥쳐.”

“저 여자가 괴물을 광장으로 향하게 만든 덕분에 광장이 난리가 났어. 당연히 지금 병원은 발 디딜 틈도 없을걸. 제때 치료 받기는 글렀어.”

“괴물이 광장으로 향했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 뒤를 졸졸 따라온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셰비언은 공포에 젖어 시엘라 거리를 뛰고 있는 사람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옷자락 여기저기에 검은 피가 묻은 이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셰비언도 샤를레아도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하긴 뭐 샤를레아라고 그들이 보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건 내 눈으로 확인을 못했지만 광장으로 가는 놈들은 확인해서 말이야. 네 뒤를 몇 마리가 따랐든, 그건 극히 일부일 거야. 내 뒤에도 몇 마리 따라오긴 했거든. 너나 날 쫓는 놈들 말고는 다 광장으로 갔어.”

“시끄러워, 치료해 줄 거 아니면 비켜. 셋 셀 때까지 안 비키면 널 밟아버리고 갈 거니까 그리 알아! 하나, 둘…….”

“곧 군인들이 이리로 올 거야. 군의관도 함께 있을 테니 그에게 보여.”

“군인? 군인이 왜?”

“왜겠어? 당연히 날 따라오는 거지. 사태를 해결하려면 원흉을 제거하는 게 기본 아냐?”

“원흉 소리를 하는 놈에게 다나를 맡기라고?”

“원흉은 이미 제거했는데 뭐.”

셰비언은 건물 틈에서 구르는 손을 가리켰다. 수식을 제대로 그릴 손이 날아갔으니, 이제 다나는 마법사로서는 반쪽이었다. 남은 왼손으로 부단히 노력한다면 예전만은 못해도 나름 쓸 만한 마법사가 되겠지만, 이런 일을 저지른 이상 그런 기회가 올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다나를 꼭 인간 사이에 둬야 하나?’

샤를레아는 이대로 다나를 데리고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마법을 쓸 수 없는 자신은 제 한 몸 추스르며 살기에도 벅찼다. 다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등에 업힌 다나가 움찔거릴 때마다 무력감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인간들이 그 말을 납득할까?”

“내가 있는데? 안심해, 이왕 살린 거, 인간이 죽이진 않게 할 테니. 어차피 인간들도 다나가 이런 짓을 어떻게, 왜 벌였는지 궁금하기도 할 거고.”

귀가 번쩍 뜨였다. 샤를레아는 자기도 모르게 셰비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어쨌거나 치료가 필요하긴 한 거네? 그럼 네가 해.”

“흥, 네가 나한테 원하는 건 손을 도로 붙이는 걸 텐데, 내가 미쳤냐? 그걸 해주게? 네 말마따나 인간의 치료술도 꽤 쓸 만하니까 믿어보라고.”

“셰비언! 나중에 네가 나에게 부탁할 일이 생기거든 그게 뭐든지 간에 한 번은 꼭 들어줄게.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도 되니까 형태만이라도 유지하게 해줘. 인간이 장애를 가진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너도 알잖아. 응? 제발!”

자존심을 접어두고 인간을 위해 애원하는 샤를레아라니, 꿈에서도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광경이었다. 셰비언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손목을 자른 건 자신인데, 보복을 받기는커녕 모양만 붙여주는 걸로 생색도 내고 빚을 지울 수도 있다니 이거 너무 남는 장사였다.

“……좋아. 하지만 여기서는 안 돼. 치유마법을 쓰는 장면을 들켰다간 엄청나게 피곤해질 거야. 어휴, 공격마법 몇 번 쓴 거 가지고도 아주 그냥 난리가 났어……. 그래, 지붕 어때? 이 난리통에 하늘 쳐다보며 다니는 사람은 없겠지.”

셰비언이 마음을 먹었는데 지붕이든 지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샤를레아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건물 지붕으로 올라가 다나를 내려놓았다. 셰비언이 그새 잘린 손목을 주워와 다나의 손에 가져다 댔다.

“피가 돌고 어느 정도 움직이기도 하겠지만 마력통로는 막아놓을 거야. 오른손으로는 수식도 못 그리고 마법도구 작동도 못하게 되겠지. 그래도 상관없는 거지?”

“상관없어. 그 정도면 일상생활 정도는 할 수 있게 될…… 다나?”

아파서 색색대기만 하던 다나가 왼손으로 샤를레아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창백한 입술이 벌어졌다.

“……싫어요.”

“다나? 뭐가 싫다는 거야?”

“마법도 못…… 못 쓰는 손 따위는, 필요…… 없어요. 뻔히 달려 있는데 제 기능을 못하는 걸 보며 좌절할 바에는, 차라리 없는 게 나아요.”

샤를레아는 가차 없이 무시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의견이었다. 셰비언도 샤를레아에게 빚을 지울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다나는 팔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용족 둘이 달려들어 몸을 누르는데 당할 도리가 없었다. 금색 빛무리가 그녀의 손목을 휘감고 지나가자 잘려나갔던 손이 말끔하게 붙었다. 접합 부분에 불그스름한 선이 생기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이 만능은 아니니까 말이다.

“다나, 손가락 움직여 봐.”

“…….”

“고집피우지 말고. 빨리.”

다나는 오른손 위에 문장을 띄우려고 시도했다가 좌절했다. 다섯 손가락 모두 멀쩡히 움직이고 감각도 느껴지는데 마력을 쓰려고 하면 나무토막을 달고 있는 듯 낯설어졌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런 손 필요 없어요…….”

“배부른 소리 말고 마력이나 받아. 도대체 넌 무슨 생각으로 이런 대단위 마법을 혼자 발동시킨 거야? 네가 용이야? 내가 넣어준 마력이 무한으로 펑펑 샘솟을 것 같았어?”

샤를레아가 잔소리를 퍼부으며 마력을 쏟아 부었다. 시체가 부럽지 않던 다나의 안색이 활짝 핀 꽃처럼 살아났다. 눈물 콧물 훌쩍이며 입을 삐죽댄다.

“샤를레아님, 잔소리쟁이…….”

“잔소리 안 하게 좀 해 봐. 너 방금까지 쓰던 수식 다 썼으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죽었어. 아, 그만 울어! 손 하나 날아갔다고 마법사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닌데!”

“문장도 못 꺼내는 게 무슨 마법사예요?”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눈물이 배로 늘었다. 셰비언은 샤를레아와 다나가 벌이는 촌극을 코웃음치며 구경했다. 길거리의 혼란은 아까보다 배로 늘었는데 지붕에선 이런 한가로운 대화가 오가고 있다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혈육이 모두 죽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울어대는 다나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단초를 만든 건 자신이지만, 정작 마음먹고 인간을 괴물로 만든 건 다나가 아닌가 말이다.

“흠, 다나?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이런 일은 왜 벌인 거지? 마법망을 안정시킨 게 나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정말 궁금했다. 감히 마법의 주인이 만진 마법망을 건드릴 생각을 한 이유가 대체 뭘까.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하고 싶었다면 이런 과격한 방식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을 텐데, 왜?

“내가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그냥 궁금했어요. 무려 마법의 주인이 건드려 놓은 마법망을 내가 얼마나 흔들 수 있을까……. 설마 진짜 될 줄은 몰랐지만요. 실은 지금도 실감이 안 나요. 히히, 히히히…….”

눈물에 젖은 입술이 히죽 웃었다. 셰비언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불안하게 바라보던 샤를레아가 다나를 등 뒤로 감췄다.

“신경 쓰지 마. 딱 보면 알잖아. 얘 지금 제정신 아니야.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거야.”

“그건 더 들어봐야 알지. 샤를레아, 저 인간이 네 새끼도 아닌데 아주 새끼 돌보는 어미처럼 감싸고도는군? 나중엔 영지도 물려주겠다고 설치겠어. 비켜, 아직 물어볼 거 다 안 끝났어.”

“셰비언!”

“아까 부탁 하나는 꼭 들어주겠다며? 그 부탁 지금 쓰지. 난 지금, 당장, 이 마법사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야겠어.”

셰비언은 샤를레아를 밀쳐 내고 다나의 어깨를 쥐었다. 마력을 잔뜩 받은 다나는 전에 없이 혈색이 좋았지만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 와중에 샤를레아가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외면하자 아예 꽁꽁 뭉친 솜뭉치처럼 오그라들었다.

“다나 트왈릿. 괴물들을 광장으로 향하게 한 이유가 뭐지?”

“몰라요…….”

“왜 몰라? 네가 짠 수식이고 네가 망가뜨린 마법망이야. 굳이 괴물에게 방향을 설정했을 땐 뭔가 목적이 있었을 거 아냐.”

“모른다니까요…….”

“광장에서 노는 사람들이 싫었다든가, 수확제를 망쳐놓고 싶었다든가, 네 실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었다든가?”

“익……. 이깟 세상 쫄딱 망해 버렸으면 싶어서 한 일은 맞아요. 하지만, 괴물이 광장으로 간 이유 같은 건 몰라요. 전 목표 같은 건 지정하지 않았단 말예요. 그래도 만약 괴물이 정말 누군가를 따라다닌다는 게 사실이라면…….”

다나가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을 차례로 가리켰다. 셰비언, 샤를레아, 그리고 자신.

“아마 용의 마력이 목표일 거예요. 물고기가 물을 찾듯이, 부족한 용의 마력을 빨아 마시고 불안정한 마력균형을 맞추려고 들겠죠.”

“아, 그래서 내 뒤를 그렇게 미친 듯이 쫓아왔던 거구나……. 어쩐지 끈질기더라.”

샤를레아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셰비언은 아니었다. 그는 앞길 트이라고 마력을 뿌리는 자신을 앞에 두고도 광장으로 가지 못해 안달하는 괴물들을 충분히 많이 보았다.

“그럼 왜 광장으로 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러니까 모른다고요! 용의 마력이 손톱만큼 있는 정도로는 반응할 리가 없는데! 광장에 두 분도 모르는 다른 용이라도 있었나 보죠!”

“샤를레아가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까 이게 정도를 모르고……!”

잘한 것도 없으면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밉살맞다. 좀 치사하지만, 붙여준 손을 도로 떼어내고 싶다.

다나를 보며 이를 박박 갈던 셰비언의 안색이 갑자기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둘이 모르는 다른 용은 없어도, 샤를레아가 용으로 착각했던 인간은 한 명 있지 않던가. 오드리 말이다.

샤를레아도 금세 그 사실을 깨달았다.

“셰비언, 우리가 모르는 다른 용은 없어도 짐작 가는 인간은 한 명 있지 않아?”

“…….”

“오드리 아가씨가 광장에 있는 거라면 다 말이 되잖아.”

“오늘은 수확제 마지막 날이라 왕궁에서 무도회가 열려. 거기 갈 준비를 하려면 낮부터 광장에 나오는 건 무리일 게 분명해…….”

“그래? 그럼 공간으로 끌어들여서 확인해 봐. 같은 도시 안이니까 어렵지도 않잖아.”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그렇게 했다. 셰비언은 견고하게 자신의 접촉을 튕겨내는 오드리의 방벽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샤를레아의 접근을 막고 오드리를 보호하려고 했던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샤를레아는 사정을 짐작하고 심술궂게 웃었다. 그 소중한 아가씨에게 자신이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리 예민하게 굴더니만, 그게 발목을 잡은 모양이었다.

“직접 다녀오지 그래?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되겠지.”

“내가 없는 사이 네가 뭘 짓을 할 줄 알고? 네가 이 마법사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치면 그 뒷감당은 온전히 내 몫이잖아.”

“글쎄……. 그러기엔 내 상태가 그다지 온전치 못해서 말이야.”

앞뒤 생각 않고 다나에게 마력을 퍼부은 탓에 샤를레아의 안색은 아까보다 눈에 띄게 나빴다. 꿀색 이마를 덮은 붉은 머리칼이 땀에 푹 젖어 마치 세수라도 한 것 같았다. 그녀가 셰비언의 어깨 너머를 향해 턱짓했다.

“아까 다나에게 마력을 좀 넘치게 담아주었더니 그 냄새를 맡았나 봐. 몰려오는군. 큰일이야, 난 앞에서 날뛰는 게 전문이지 지키는 싸움은 약한데.”

“개소리하고 있네. 차라리 개미 밟아 죽이는 게 더 어렵다고 해라. 뭘 바라고 이래?”

“마법망을 빨리 본래대로 되돌리고 수식을 깨줘. 다나 이 녀석, 제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수식을 구성했어. 이대로 두면 내가 다나에게 마력을 붓는 속도보다 다나가 말라죽는 속도가 더 빠를 거야.”

“샤를레아님! 아니에요! 전 아주 멀쩡해요!”

다나가 비명을 질렀지만 샤를레아는 코웃음을 쳤다. 실시간으로 마법망에 마력을 빼앗기고 있는데 멀쩡할 리가 있나. 당장은 괜찮은 것 같아도 금세 상태가 안 좋아질 게 분명했다.

“나도 조금 전까지는 괜찮은 줄 알았지. 여기 있는 셋 중에서 내가 마력에 대한 감이 제일 좋을걸. 셰비언, 뭐 해? 빨리 가. 병사가 아니라 괴물이 먼저 오는 걸 보면서 아무 생각이 안 들어? 멍청하게 굴지 말고 당장 가. 마법사가 못 된 반푼이라도 동족은 동족인데, 저 따위 되다만 것들에게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

셰비언의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는 허옇게 질린 낯을 하고도 빳빳하게 고개를 세웠다. 광장에 정말 오드리가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인 데다, 행여 광장에 있더라도 자신을 지켜줄 사람 없이 맨몸으로 나왔을 리가 없었다. 아직은 괜찮을 게 분명했다.

“저 마법사가 인간 사회의 법에 따라 죗값을 치를 거란 맹세를 해주면 가지.”

“하여간 진짜 저놈의 의심병……. 데리고 갈 힘 같은 거 없다니까 믿지를 않아요. 야, 매번 이런 식으로 굴래? 알았어, 알았어. 맹세한다! 다나 트왈릿은 인간의 법대로 심판받을 거야! 단, 네가 다나 트왈릿이 만든 수식을 깨고 마법망을 복구해서 그녀의 목숨을 구했을 경우에만!”

“좋아.”

맹세를 들었으니 시간을 더 쓸 이유가 없었다. 셰비언은 얼음을 쥐고 바람을 밟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나는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제 처분이 결정된 것에 몹시 황망해하면서도 감히 샤를레아에게 항의하거나 하지는 못했다.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괴물의 물결이 그녀에게도 보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샤, 샤를레아님…….”

“다나, 겁먹지 마. 그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날 도와주는 거니까 괜히 도망가거나 하지 말고.”

샤를레아는 심호흡을 하고 단단히 검을 움켜쥐었다. 마법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저 되다만 것들을 상대하는 건 이 철검 한 자루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보다 제 아가씨의 안위에 정신이 팔린 셰비언이 제때 일을 마칠까 하는 게 더 걱정이었다.

광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광장에 난입한 괴물은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을 뿐인데도 그 끔찍한 외형이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치안대원들이 시민들을 빠져나갈 길로 유도하고 있었지만, 공포에 젖은 사람들은 좀체 유도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흩어졌다.

오드리는 하델의 손을 단단히 부여잡고 피올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마치 양떼 무리를 헤집고 다니는 개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긴장이 과했는지 손이 땀으로 젖어 자꾸만 미끄러졌다.

“하델, 누나 손 꼭 잡아. 놓치면 큰일 난다.”

“네, 네…….”

하델의 대답이 영 시원치 않다. 오드리는 흘끗 하델을 살폈다가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더니, 하델의 상태가 나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 작은 체구로 사람들을 밀어내려니 평소의 두 배로 체력 소모가 있는 것이다.

“안 되겠다. 업혀.”

“누나, 그건 좀……. 난 괜찮아요. 잘 따라갈 수 있어요!”

“시끄러워. 자존심은 이럴 때 챙기는 게 아니야. 반항은 그만하고 얌전히 업혀. 또 미아가 되고 싶니?”

오드리는 얌전해진 하델을 들쳐 업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하는 양을 본 피올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아가씨 나이대의 다른 귀족영애들은 찻잔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도 없을 게 분명한데…….”

“네이기스가 끼고 사는 캔버스만 해도 찻잔보다 몇 배는 무거워요.”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진다. 네이기스 얘기가 나오자 피올은 몹시 약해졌다. 안 그래도 네이기스가 이상한 고집을 부린다며 설득을 도와달라는 걸 모조리 무시했던 전적이 있었다.

“나 참. 나중에 힘들다고 난리 부리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말고 길이나 뚫어요. 그런데, 치안대원이 많이 보이네요?”

“아마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유도하려는 걸 겁니다. 저쪽으로 가죠.”

치안대원이 나서서 광장을 벗어나게 해준다면 그거 참 좋은 일이다. 오드리는 불편하게 덜렁거리는 신발을 질질 끌며 뛰다시피 걸었다. 한데, 갑자기 섬뜩한 한기가 등줄기를 적시는 게 아닌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덜컥 멈춰서고 말았다.

“누나?”

하델이 의아해하며 오드리를 불렀다. 오드리 자신도 몹시 놀랐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어떻게든 떼어 피올에게 가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이 발을 꽁꽁 묶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앞서가는 피올을 불러 세웠다.

“보티안 씨! 저, 발이 안 움직여요!”

“예? 잘만 오시던 분이 왜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던 피올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번개같이 검을 뽑아 오드리의 어깨 근처를 베어냈다. 누군가의 팔이 뚝 떨어지고 새카만 피가 튀었다.

“어……?”

피올은 잘린 팔을 부여잡고 휘청대는 사람을 걷어차 쓰러뜨리고 목을 베어냈다. 이마를 가렸던 앞머리가 헤쳐지며 세 번째 눈이 드러났다. 괴물이었다.

“아아아아악!”

“살인이야! 치안대원이 사람을 죽였어!”

“사람이 아냐, 괴물이다! 괴물이야!”

“괴물이 사람 사이에 섞여 있어!”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주변인들 사이에서 비명이 올랐다. 행운의 포모스, 전쟁과 승리의 벨트람, 수호의 신 벤……. 신을 찾는 목소리가 간절했다. 그럭저럭 유도에 따르던 이들마저 패닉에 빠져 내달리는 가운데,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중심으로 동그란 원이 생겼다.

“염병, 어지간히 사람처럼 생겼네. 아깐 말하는 놈이 나오더니만 이젠…… 쯧.”

피올은 손수건을 꺼내 오드리의 뺨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아가씨, 괜찮아요? 이제 움직일 수 있겠어요?”

“괘, 괜찮아요. 이제 발이 떨어져요.”

“그럼 계속 갑시다.”

인간과 흡사하게 생긴 괴물은 이후로도 계속 나타났다. 그들 대부분은 멀쩡한 옷을 입고 사람처럼 행동하며 자연스럽게 인간들 틈에 섞여 있다가 오드리의 근처에 접근했다. 괴물이 일정 거리 이내로 들어오면 오드리의 발은 땅바닥에 딱 달라붙었고, 피올은 그런 그녀의 곁에 붙어 있다가 접근해 오는 괴물을 잡았다.

이게 몇 번이나 반복되다 보니 피올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괴물에게도 학습능력이 있는데, 오드리가 가는 길을 따라 시체가 생겨나는 걸 알면서 왜 자꾸 접근하는가 말이다.

“아가씨, 내가 정말 진지하게 묻는 건데……. 괴물 꼬드기는 향수라도 뿌렸어요? 이놈들이 왜 계속 아가씨를 따라오죠? 짐작 가는 거 있으면 아무거나 말해 봐요.”

“그런 게 있겠어요? 초록색 머리카락이 취향인가 보죠.”

“이거 참, 곤란한데.”

피올은 잠시 숨을 돌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 전, 맹목적으로 광장을 향해 가던 괴물들이 일제히 머리를 돌리고 방향을 틀었다. 제일 먼저 텅 빈 거리로 뛰어 들어간 괴물은 굳게 닫힌 문에 머리를 쿵쿵 박다 쓰러졌고. 그 문 안에는 오드리와 하델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여관 지붕에 나타난 괴물은 뭔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대다 하델과 눈이 마주쳤다 했고, 인간 사이에 숨어 있던 괴물은 오로지 오드리에게만 손을 뻗었다.

“아가씨, 리가 항구에서의 얘길 좀 해 보시죠. 단서가 있을 것 같은데요.”

“그건 리가 항구의 치안대와 협력해서…….”

“어차피 수확제가 끝나면 괴물의 존재를 발표할 예정이었어요. 이렇게 된 이상 기밀을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쯤 신문사고 잡지사고 미친 것처럼 기사를 써대고 있을 거고, 내일 새벽이면 온 브란젤에 호외가 뿌려질 겁니다. 조금만 일찍 말한다 생각하고 얘기해 보시죠.”

오드리는 망설였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고 냅다 약속을 어기면 누가 귀족의 약속을 귀중하게 쳐 주겠는가. 극한 상황에서도 어기지 않는 약속이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드리가 망설이는 사이 괴물 시체 한 구가 더 늘었다. 뛰던 사람들이 괴물의 피와 시체를 밟고 도망쳤다. 피 한 방울이라도 닿을까 사방으로 흩어지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새 익숙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피올은 오드리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이렇게나 많은데 이대로 피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도록 둘 수 없었다.

“이렇게 하죠. 제가 질문을 하면, 아가씨는 네 아니오만 하시는 겁니다. 이 정도면 괜찮죠?”

“……좋아요. 타협하죠.”

“리가 항구에서 괴물을 봤다.”

“그래요.”

“그 괴물이 아가씨를 인지했다.”

“그래요.”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 없이, 아가씨를 잡으려고 했다.”

오드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정도면 의심하기에 충분한 것 같은데, 아가씨 생각은 어떠신지?”

“그렇긴 하네요.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내가 목표인가 보죠.”

“그러니 아가씨는 치안대원이 유도하는 길로는 못 가십니다. 추가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요. 웬만하면 다른 곳으로 가죠. 어디 구석에라도 박혀 있다가 구조되길 기다리는 게 나아요.”

오드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괴물을 끌어당기는 게 사실이라면 어디로 가도 안전할 수 없었다. 열과 성을 다해 지켜주는 피올의 곁에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꼭 붙어 있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일 테다.

하지만 하델은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정말 짐짝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만, 오드리가 피난하는 사람들의 물결을 이탈할 조짐을 보이자 바로 그녀의 등에서 뛰어내려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돼! 누나가 왜요! 다 짐작일 뿐이잖아! 치안대에 항의할 거예요! 의심과 짐작으로 귀족영애를 위험에 처하게 했……!”

“알면서 고집 피우지 마. 보티안 씨, 가죠.”

하델의 반항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진압됐다. 오드리가 하델을 덜렁 들어 어깨에 얹었기 때문이었다. 숫제 포대자루 취급이었다. 어깨에 명치가 눌린 하델은 컥컥거리며 숨 쉬기도 바빠 말을 못했다.

“와아, 아가씨……. 정말…….”

오드리가 하델을 업고도 그럭저럭 잘 뛰는 것까지야 그러려니 했던 피올이지만, 열두 살이나 되는 소년을 짐짝처럼 메는 것엔 정말이지 놀라고 말았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힘이 솟아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해야 그런 힘이 생깁니까? 좀 알려주시죠, 저도 따라 하게.”

“난 어릴 적부터 이랬어요. 랄리우스 가문의 사람들은 본래 힘이 세요.”

“이야, 부러워라……. 저 도련님에겐 그 힘이 물려내려가질 않은 모양이죠? 정말 다행입니다.”

피올은 온갖 잡소리를 주워섬기며 길을 뚫었다. 짐작이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드리가 경로를 바꾸자 괴물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어째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왼쪽 정강이가 은근하게 당겼다. 아무래도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한 탓이 분명했다. 쉬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쉬겠다고 빠지면 오드리가 어떻게 될지가 너무 뻔했다.

하여간 이게 다 자업자득이었다. 호위로 빠지면 좀 편할 줄 알았더니만, 편하기는 개뿔이. 오드리가 죽기 살기로 하델을 챙기고 있어서 그나마 좀 나은 거였다.

“보티안 씨, 어디까지 가요?”

“금방 도착합니다. 금방이에요.”

“아까부터 금방, 금방……! 안 되겠다. 하델, 업혀.”

오드리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하델을 업었다. 어깨에 짐짝처럼 얹혀 있는 것보단 낫다 싶었는지, 하델도 거북이 등딱지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누나, 괴물이 왜 누나를 따라다닐까요?”

“난들 알겠니. 진짜 초록색 염색 때문이면 돌아가자마자 염색물 빼버릴 거야.”

설마 염색 때문이겠는가. 그를 알면서도 오드리는 이를 박박 갈았다. 다 와간다는 말만 하는 피올의 뒤를 따라가는 게 점점 벅차고 고되어 다리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피난하는 사람들 틈에 섞이지 않기로 결정했던 게 정말 잘한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쯤, 갑자기 누군가가 오드리의 어깨를 홱 잡아챘다.

“꺄악!”

“아가씨! 접니다!”

카프러스는 생각 이상으로 놀라는 오드리 때문에 일차로 놀랐고, 자신의 목을 잘라 버릴 듯 위협적으로 날아온 검에 이차로 놀랐다. 가까스로 놓치지 않고 막아내서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 목 없는 시체가 될 뻔했다.

“보티안 씨! 뭡니까!”

“……베텔 경? 난 또, 괴물인 줄 알고…….”

“괴물은 무슨 괴물! 보티안 씨, 지금 눈은 멀쩡합니까? 앞은 잘 보여요?”

카프러스의 질문은 비꼬는 게 아니라 퍽 진심이었다. 그만큼 피올의 상태가 나빠 보였다. 괴물의 피를 얼마나 뒤집어썼는지 그의 머리칼은 갈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고, 눈에선 흉흉한 기운이 흘렀다. 치안대의 제복은 오물을 털어내는 기능이 있을 텐데도 소맷자락과 바지자락에 검은 핏물이 들었다.

“내 눈은 멀쩡해. 조금 전은 좀 곤두서 있어서 그랬던 거야. 어차피 이런 소란 속에서는 사람 한둘 실수로 죽여봐야 티도 안 나는데 뭐.”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당신이 산트렘 기사단 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습니다.”

“안 믿어지면 어쩔 거야, 사실인데.”

피올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던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아까 오드리를 닦아줄 때만해도 뽀얗던 손수건이 아주 걸레짝처럼 시커메졌다.

“젠장, 손수건을 새로 사든가 해야지……. 씁, 돈 없는데.”

“이 와중에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니, 당신도 참 어지간한 사람입니다. 그보다 아가씨, 도련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까 제 부주의로 두 분을 놓치고 얼마나 놀랐는지…….”

평소의 카프러스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그만큼 놀랐던 것이리라. 하나 오드리는 그런 그를 안심시켜 줄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언제 괴물에게 잡힐까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어깨를 잡혔다는 게 꽤 큰 타격이 됐다. 심장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뛰는 게 느껴졌다.

“베텔 경, 일단 하델 좀…… 하델 좀 맡아줘요. 내가 지금 너무 놀라서…….”

“죄송합니다. 놓치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도련님, 이리 오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또 짐짝이네. 하델은 오드리에게서 카프러스의 품으로 넘어갔다. 어미 품에 안긴 새끼원숭이처럼 매달려 있으려니 서글프다가도, 그래도 오드리에게 업혀 있는 것보단 낫다 싶어 묘하게 안심이 됐다.

“베텔 경, 이 난리통에 어떻게 우릴 찾아냈어요? 아까 내가 그렇게 부를 때는 전혀 못 들었잖아요.”

“괴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왔습니다.”

“경도 괴물이 누나를 따라다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다들 왜 그러지? 아니라니까! 정확하지도 않은 걸 그냥 미루어 생각하지 말라고요. 경은 누나 곁에 계속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데요? 이건 꼭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하델, 거기까지.”

“누나!”

“너는 입 다물고 듣기만 해.”

오드리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꽤 진정이 된 상태였다. 정확히는, 하델이 아버지 얘기를 꺼내자마자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베텔 경, 하델을 부탁해요. 저택까지 무사히 데려다 줘요. 나는 여기 있는 보티안 씨와 함께 움직일게요.”

“안 됩니다. 두 분 모두 가셔야 합니다.”

“경, 괴물이 날 따라다녀요. 이 복잡한 사람들 사이에 티내지 않고 끼어 있던 놈들이 나만 보면 따라와 손을 뻗어요. 그런 괴물을 끌고 저택에 돌아갈 수는 없어요. 하델은 그냥 인정하기 싫어서 저러는 거예요.”

“괴물이 아가씨를 쫓는다면 저택에서 아가씨를 감싸고 보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동안 문가의 기사라고 경비나 서면서 편히 지냈으니 몸을 푸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오드리는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카프러스의 기사다운 태도는 몹시 존중해 줄 만한 것이지만, 때때로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경. 나는 가문의 후계자를 가문의 기사에게 맡겼어요. 경은 후계자를 위험에서 지키세요. 이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내가 왜 경을 설득해야 하는 건지 영 모르겠네요.”

“아가씨, 저는…….”

“호위기사 노릇은 여름휴가 때에만 하는 거였잖아요. 여긴 브란젤이지, 리가 항구가 아니에요. 그러니 지금 당장 가세요. 괴물이 오기 전에, 당장.”

카프러스의 단정한 얼굴에 미묘한 균열이 생겼다. 망치를 들어 균열을 때리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져 남몰래 감춰둔 속내를 모조리 드러낼 것만 같았다.

“그래도 행선지는 밝혀두는 게 좋겠죠. 보티안 씨, 우리 목적지가 어디죠?”

“시계탑으로 갈 겁니다, 아가씨. 시계탑 안에 들어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릴 셈이죠.”

“그렇다네요. 경, 우린 여기서 헤어지죠. 동생을…… 하델을 잘 부탁해요. 보티안 씨, 가요.”

오드리는 피올을 끌고 뒤돌아섰다. 하델을 내려놓아 등이 가벼워져서인지 아니면 드디어 목적지를 알게 돼서인지, 그녀의 걸음은 구름을 걷는 듯 아주 날랬다.

카프러스는 오드리를 따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곧바로 돌아서지도 못한 채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오드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우울감이 덮쳐 와 다리가 떨렸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아주 완벽한 날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누나! 같이 가요! 경, 놔 줘요! 누나만 보내다니 말도 안 돼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델이 어떻게든 카프러스에게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어림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카프러스가 하델을 꽉 끌어안은 채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경! 놔달라니까요!”

“안 됩니다.”

“왜요! 내가 가문의 후계자라서 그래요?”

“네. ……만약을 위해서라도 두 분은 따로 계셔야 합니다.”

어느 한쪽이 죽더라도 다른 쪽은 살아남도록. 그래야 가문을 계속 이을 수 있으니까.

카프러스의 말에 담긴 함의를 알아차린 하델의 낯이 허옇게 질렸다. 하나 하델의 마음이 아무리 상했더라도 그 말을 한 카프러스만큼 속이 아플까. 지켜주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뱉었던 몇 시간 전의 자신이 죽도록 부끄러웠다.

한편, 피올은 카프러스의 참담한 심정을 몹시 선명하게 짐작했다. 그 역시 기사가 되어 사람을 지키겠다는 꿈을 품어본 입장이었다.

“아가씨, 너무 잔인한 거 아닙니까?”

“내가 뭘요?”

“명색이 기사인데, 보호 대상이 당신 도움은 필요 없다고 한 꼴이잖아요. 그것도 그냥 보호대상도 아니고, 무려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

연정을 품은 대상인데.

뒷말은 하지 않고 삼켰다. 어차피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마침 괴물이 덤볐기에 말을 하다 말아도 자연스러웠다. 과연 오드리는 피올이 삼킨 말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뭐라는 거야. 그럼 내가 베텔 경의 보호를 받아서 하델과 함께 헨젤가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쳐요. 보티안 씨는 그걸 가만 두고 봤을 거예요?”

“그럴 리가 있나요. 괴물을 끌고 온 브란젤을 휘젓느니 광장에 얌전히 박혀 있는 게 낫습니다. 여긴 그나마 병사도 있고 치안대원도 있고 방어선도 구축돼 있으니까.”

“거봐요. 못된 역할을 하지 않고도 넘어갈 수 있게 됐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아 예, 고맙습니다. 고오맙습니다아.”

투덕거리는 사이 시계탑 아래에 도착했다. 사실 직선거리로 따지자면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피하면서 덤벼드는 괴물까지 처리하며 오다 보니 시간이 몇 배로 걸렸다.

“아가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피올이 오드리를 확 끌어안았다. 어깨를 감싸는 강한 팔과 코를 찌르는 짙은 피비린내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오드리는 시계탑 안에 들어와 있었다. 며칠 전에 한 번 와봤다고 흐릿한 마법등이 비추는 어두컴컴한 내부가 낯이 익었다.

눈을 깜빡이며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사위가 조용했다. 비명도, 고함도, 발소리도, 발치에서 꺽꺽대는 괴물의 신음소리도 없었다. 침묵이 이렇게나 달콤할 줄이야.

“놀라지 않으시네요?”

“라비린과 시계탑 꼭대기에서 풍등 구경을 했거든요. 놀랄 건 그때 다 놀랐어요.”

“아하…….”

“그보다 여길 들어올 땐 상대를 안고 들어와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건가요? 라비린도 그렇고 보티안 씨도 그렇고 사람을 왜 덥석덥석 안고 그래요?”

“아가씨는 여기 등록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죠. 사실 나나 벨키스 경도 어릴 적에 아버지가 몰래 등록시켜 주지 않았으면 못 들어왔을걸요. 여기 들락거릴 수 있는 거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큰일 나요.”

오드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가 공자인 라비린이야 그렇다 쳐도 피올 역시 별로 큰일을 걱정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지만, 어쩌겠나. 본인이 그렇다는데.

“일단 위로 올라가죠. 바깥 상황도 살펴야 하고 하니까. 아, 손잡이는 바닥에 있어요.”

라비린은 손잡이 같은 건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냥 자신을 꽉 잡고 있으라고 했지. 라비린이 자신의 무지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드리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애꿎은 손잡이만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나중에 만나면 두고 보자.

시계탑의 꼭대기에 오르자 브란젤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광장을 감싸고 지키는 병사들과, 브란젤의 길거리를 검게 물들이고 있는 괴물들의 피와, 어디에서 불이라도 났는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연기까지.

날아가는 풍등을 구경하며 감상에 젖었던 밤이 고작 며칠 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바람에 실려 온 피비린내가 짙었다.

“광장에 들어온 건 정말 소수였네요…….”

“뭐, 정말 소수일지 아닐지는 까봐야 아는 거죠. 워낙 사람 흉내를 잘 내는 놈들이 많아 가지고. 하여간 생긴 거라도 사람이랑 많이 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본 놈들은 너무 사람 같아서 짜증난다니까요. 꼭 사람 죽이는 기분이라서.”

오드리는 피올의 한탄은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괴물을 관찰했다. 자신이 괴물을 끌어당긴다는 건 이제 기정사실인데, 그녀가 아니라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괴물들이 있었다. 규모도 상당했다.

‘괴물이 쫓아다니는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나?’

샤를레아와 다나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놈들이지만 오드리가 그걸 알 리가 없다. 지금 그녀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마냥 안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저는 바로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괴물은 처음 나온 거니까 알려야 할 듯해요. 아가씨는 여기 잠시 계시면…….”

“나 혼자 여기 있으라고요?”

“저 중에 날아다니는 놈이 한 놈도 없잖습니까. 만약 아가씨가 괴물을 끌어당긴다는 걸 보고해도 된다면 같이 지휘부에 가셔도 됩니다만.”

오드리는 기겁해서 고개를 저었다.

“예. 알려져서 좋을 거 없는 얘기긴 하죠. 그랬다간 파리 꾀는 약통 취급을 받으며 위험지역 여기저기에 내돌려질 테니까.”

“……보티안 씨에게 뭔가 불이익이 있는 건 아니죠?”

“들키면 생기겠죠.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요. 이건…… 아주 개인적인 사유로 저지르는 짓이니까. 민간인을 미끼로 쓰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아주 낡고 지친 표정이 피올의 얼굴에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가르쳐주고 시계탑을 떠났다.

혼자 남은 오드리는 종각을 떠받치는 기둥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다 저 먼 곳에서 벼락이 치는 걸 발견하고 놀라 눈을 비볐다. 하늘에 구름이라곤 한 조각도 없는데도 벼락이 연달아 떨어졌다. 마땅히 따라와야 할 천둥이 없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마른벼락이었다.

“……셰비언?”

저런 걸 할 수 있는 존재가 셰비언 말고 또 있을까. 옛 마법을 한 손에 쥐고 부리는 마법의 주인 말고 누구에게 저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의 일이니 자신과는 상관없다 방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나섰다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몹시 든든해졌다.

‘셰비언이 나섰으면 금방 해결되겠지.’

오드리는 곧 태평해졌다. 날개는 없어도 튼튼한 팔로 시계탑을 기어오르는 괴물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가지지 못했을 태평함이었다.

* * *

“맙소사…….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스와디는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눈을 뜬 채 잠들어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하는 게 더 믿음직했다. 있는 힘껏 팔을 꼬집었는데도 깨지 않으니 분명 현실일 텐데도 말이다.

셰비언이 손끝으로 벼락을 부리고 있었다. 그가 손짓할 때마다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괴물을 태웠다. 벼락에 벼락을 맞춰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하는 묘기도 부렸다. 흰 빛이 그물처럼 머리를 덮고 번쩍이고 나면 괴물이 숯덩이가 되어 널브러졌다.

소리 한 점 없고 오조준도 없었다. 종이 한 장 차이를 두고 산 사람은 그냥 두고 괴물만 태우니, 지독히 효율적인 살육이었다. 괴물이 얼음에 갇히지 않으니 왕궁마법사들이 끌고 다니는 대포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왕궁마법사님, 저거 마법이에요?”

“네……. 저거 마법이에요. 공격마법.”

“미친…….”

셰비언의 마법에 넋이 나간 건 스와디뿐만이 아니었다. 그 구역에서 괴물을 잡던 병사들 역시 제 눈을 믿지 못하고 욕설 섞인 감탄사를 뱉었다.

“저런 마법사가 한 부대에 한 명만 있어도 든든할 텐데.”

“전투 한 번 하고 나면 반시체가 될걸요. 저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튼튼한 거예요.”

“그래도요. 쓰러진 거야 잘 먹고 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저렇게만 싸워준다면 매 끼니를 고기로 채워준대도 이해할 텐데…….”

“…….”

“진짜 대단하네요. 귀족나리들이 마법사에게 존대를 하는 전통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옛날 마법사들은 다 저랬다는 거잖습니까? 그렇죠?”

“……네.”

인간 마법사 사이에서 공격마법은 오래 전에 실전되어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옛 유산이었다. 쓸 때마다 체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갉아먹는 게 마법의 특성이라지만,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해 마법사들이 작정하고 합심해서 묻어버렸다.

그럭저럭 쓸 만한 마법사를 길러내는 데만도 십 수 년에 달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공격마법은 단 몇 년 만에 그런 마법사를 시체로 만들어 버렸기에 선택한 일이었다. 지독하게 단합이 안 되고 제 이익 좇는 것에 눈이 벌건 마법사들이 수많은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이뤄낸 성과였다.

그런 사정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스와디는 저 공격마법이 탐났다. 아름드리나무를 쪼개고 사람을 숯덩이로 만드는 번개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희롱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꼭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냥 익히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을 게 분명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스와디는 셰비언의 옷자락을 쥐고 매달려 있었다. 스스로가 저지른 짓에 경악하면서도 옷자락을 놓지 못하고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뭐야?”

“저, 저도 배우고 싶어요. 그 마법!”

“안 돼. 마법사협회에서 공격마법류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거 알잖아.”

“당신은 익혔잖아요! 나도 가르쳐 줘요! 어디 가서 쓸 생각도 없어요. 저도 제 목숨은 아까운 걸요. 그냥 연구만 할게요. 네? 연구만!”

애절한 부탁이었으나 셰비언은 그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나에게 주었던 마법망 안정화 수식이 괴물 사태로 돌아왔는데, 남을 해치려고 만든 공격마법을 넘기고 싶을 리가 있나.

“연구만 좋아하시네. 손에 칼이 있으면 쓰게 되어 있어. 연주하라고 준 피리로 사람 머리통을 깰 수도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아니에요! 저는 정말 연구용으로 익히고 싶은 거예요!”

“너 정도 되는 실력과 체력이면 벼락 한 번에 목숨 한 번이야. 되도 않는 욕심은 그만 부리고 그 종이에 있는 거나 열심히 해. 마법망 안정화를 해둬야 더 이상 괴물이 나오지 않을 테니.”

셰비언이 스와디가 들고 있는 마법수식 종이를 툭, 건드렸다. 워커가 만든 마법종이였다. 수정구슬에 수식을 새겨 마력구슬을 만들 형편이 못 되는 데다, 왕궁마법사들이 수식을 익힐 시간을 줄 수도 없자 종이에 마법을 담아냈다.

마력을 주입하기만 하면 수식이 발동하면서 마법이 발현되는 종이.

사정이 급해 임시방편으로 만든 것이라지만, 충분히 대단한 발명품이었다. 체력이 모자라 공간을 오래 열 수 없어서 아쉬울 뿐이지, 천재는 천재였다.

“하여간 욕심은.”

“욕심 부리는 게 뭐가 나빠서요? 내 실력과 체력이 어때서요? 체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실력은 나름 괜찮거든요? 내가 여자라서 왕궁마법사를 하고 있지, 남자였으면 상단에서 먼저 찾아와 모셔갔을 거예요! 당신은 뭐 얼마나 잘나서!”

“옹달샘과 바다 정도의 차이는 나지. 한 컵의 물을 뜰 때야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겠지만, 한 양동이의 물을 퍼내야 할 때는 얘기가 달라.”

“이……!”

“자자, 왕궁마법사님. 적당히 하고 놓아드리세요. 다른 곳에도 가셔야 하는 분인데 계속 붙들고 있으면 어쩝니까?”

안절부절못하고 스와디의 곁을 지키던 병사가 나서서 그녀를 떼어냈다. 어느 모로 보나 스와디보다 셰비언을 더 높게 쳐 주는 기색이었다.

‘분해.’

스와디는 자신에게서 벗어나자마자 훌쩍 자리를 뜨는 셰비언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남자 동료가 상단의 스카웃을 받아 나갈 때도 이렇게 분하지는 않았고, 마력만 넣으면 마법이 발현되는 종이를 받았을 때도 그저 감탄스럽기만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펄펄 끓는 수프처럼 속이 끓었다.

“왕궁마법사님, 설마 화나셨습니까? 아니시죠? 저야 당연히 왕궁마법사님 편인데, 지금은 사정이 급하니까…….”

“됐고, 비켜봐요.”

적당한 장소에 서서 종이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펼친 종이 가득히 그려진 수식이 황금빛으로 빛나며 주변의 마법망을 가시화시켰다. 다 찢어진 그물 같았던 마법망이 얼기설기 엮이며 복구되기 시작했다. 병사가 과장된 태도로 감탄했다.

“와, 이건 몇 번을 봐도 멋지네. 역시 저런 싸가지 없는 민간마법사보다는 왕궁마법사님이 최고죠! 길도 고쳐 주고, 수도도 고쳐 주고, 뭔 일이 생기면 이렇게 나와서 일도 봐주시고…….”

“아부는 됐어요. 나한테 그렇게 공들여 봤자 아무것도 안 나와요.”

“크흠, 흠, 흠. 꼭 뭐 해달라는 건 아니고요.”

병사가 주절주절 변명을 시작했다. 스와디는 그의 변명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아름답게 반짝이는 마법망을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감탄사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건 자신이 해낸 일이 아니었다.

“천재 놈들 다 재수 없어.”

눈 밑이 퀭해서 마법수식을 그리던 워커가 귀를 휘적거렸다. 누가 내 욕하나. 그의 옆에서 배운 대로 함께 수식을 그리던 왕궁마법사가 대답했다. 사방에서 욕하고 있을걸요.

너덜거리는 마법망을 안정화 시키는 거야 워커의 수식이 하는 일이지만, 일종의 증폭장치처럼 작동하며 수식을 연결하는 마력구슬을 찾아내 파괴하는 건 셰비언의 몫이었다. 그는 오드리를 찾는 틈틈이 발견한 마력구슬을 산산조각 냈다. 벌써 다섯 개째였다.

‘왜 안 잡히지.’

셰비언은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오드리를 찾으려고 깔아놓은 마력에 오드리는 안 걸리고 마력구슬만 걸렸다. 그의 마력에 홀린 괴물들이 꾸역꾸역 주변으로 몰려들 때마다 착잡해지는 마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 꼴을 그녀도 보았겠구나. 좋은 것,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인간의 미의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셰비언이 보기에도 괴물은 영 추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용의 마력을 한 방울이라도 탐하고 싶어 안달하는 꼬락서니가 몹시 섬뜩했다.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맴 돌았다.

“오드리 아가씨.”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달짝지근해졌다. 조급해진 마음만큼 거칠게 날뛰고 싶어 하는 마력을 어르고 달래 훑어내는 범위를 넓혔다. 도망치거나 숨거나 병사들과 싸우던 괴물들이 셰비언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박혀 있던 마력구슬이 깜박거리며 제 존재를 알렸다.

저 거슬리는 것들, 속을 메슥거리게 하는 것들을 당장 때려 부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지금 중요한 건 오드리지 저 따위 것들이 아니었다. 이만큼 했으면 샤를레아에 대한 면피로 충분했다.

이번에야말로 대답해 주길 바라면서, 한 번 더 속삭였다.

“오드리 아가씨.”

-셰비언?

“……아가씨?”

비록 귀로 들은 건 아니나, 오드리가 대답하는 걸 분명히 들었다. 아마도 촘촘하게 깔아놓은 마력을 타고 전해진 말일 것이다.

셰비언은 아예 눈을 감고 마력을 퍼뜨렸던 곳을 샅샅이 훑었다. 한데 마력이 닿는 곳 전부를 훑었는데도 오드리를 찾을 수 없었다. 오드리가 자신의 부름에 대답을 해줬는데도 불구하고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미련을 갖고 몇 번이고 같은 구역을 훑어내던 그는 아예 다른 방식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마력으로 찾을 수 없다면 육안으로 찾기로 한 것이다. 퍼뜨려 놓았던 마력을 죄다 거둬들어 꽁꽁 싸맸다. 자신을 바라보는 괴물의 시선도, 마력구슬의 깜빡임도 아득하게 멀어졌다.

근처에서 숯덩이를 뒤적이는 치안대원을 붙들고 물었다.

“유렌 씨, 브란젤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뭐죠? 역시 시계탑인가요?”

“그렇죠, 아무래도. 왜요? 높은 데서 보게요? 근데 거기 들어가려면 출입허가를 받아야 하는데요. 게다가 지금은 벨키스 경이…… 셰비언 씨!”

유렌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전, 라비린이 다급한 표정으로 시계탑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얘기를 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던데. 서로 인사도 안 하고, 데면데면한 게……. 괜찮을까 몰라.’

부모 없는 어린애를 구슬려서 동전 한두 푼으로 하루 종일 일하게 하는 업자들이 흔해빠진 곳이 뒷골목이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유렌의 눈치는 비상했다.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에 관해서라면 더더욱.

‘남들 없는 곳에서 마주치면 개처럼 싸울 것 같은데.’

그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동전을 던져 누가 이길까를 점쳤다. 평소라면 당연히 라비린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조금 전 하도 압도적인 마법을 본 탓인지 셰비언에게로 마음이 기울었다.

“앞면이면 벨키스 경, 뒷면이면 셰비언 씨.”

멋대로 지정하고 주먹을 폈다. 동전은 앞면이었다.

시계탑 꼭대기는 평화로웠다. 해가 아무리 뜨겁더라도 계절은 변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듯 바람이 신선했고, 적당한 그늘이 있었으며, 조용했다. 아래쪽의 난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오드리는 기둥에 기대어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위에 눌렸다. 형태를 알 수 없는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웅크린 어깨를 마구 짓누르며 왈왈댔다. 꼭 안개로 이루어진 개에게 눌리는 것만 같아 얼른 털어내고 싶었지만, 몸은 돌로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악몽은 많이 꾸었지만, 가위에 눌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들은 건 있어서 온갖 종류의 기도문도 외워보고, 손가락발가락 하나하나 힘을 주려고도 해 보았다. 하지만 하나도 효과가 없었다.

끙끙대는 동안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웅크린 자세 그대로 납작해지는 건 아닐까 겁이 날 정도였다. 숨 쉬는 것마저 힘들어서 헉헉대는데,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오드리 아가씨.

이 안개가 말도 하는구나. 내 혀는 돌처럼 굳고 입술은 아교라도 바른 듯 붙어 신음소리 하나 흘리지 못하는데, 안개 주제에 말을 한다. 어쩐지 억울해졌다.

한데 안개의 목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었다. 애정과 걱정을 담아 조심스럽게 부르는 어조라든지, 나지막하고 듣기 좋은 저음이라든지. 한 번만 더 들으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것도 같았다. 오드리는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귀를 기울였다.

-오드리 아가씨.

“셰…… 셰비언?”

입이 떨어졌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안개가 사라지고 가위가 풀렸다. 오드리는 벌떡 일어나 어깨를 주무르고 주변을 살폈다. 혹시 셰비언이 제 옆에 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 하지만 시계탑 꼭대기는 텅 비어 혼자뿐이었다.

“……뭐야, 나 혼자 꿈꾼 거야?”

분명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대답을 한 건데, 그게 사실은 혼자서 종알거린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누구 보는 사람도 없는데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다.

“어휴, 어휴! 도시 전체에 난리가 났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대책은 생각 않고 태평하게 졸기나 해서 그래. 정신 차리자, 정신.”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며 난간 근처로 발을 옮겼다. 아직 기세가 맹렬한 햇살에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저놈의 해는 대체 언제 지는 거야.

오드리는 한쪽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며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얼굴과 팔에 회색털이 북실북실한 괴물이 시계탑 벽면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것처럼 큰 머리에 주먹만 한 눈이 인상적인 괴물이었다.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면 눈이 얼굴에서 빠져 데굴데굴 구를 것만 같았다. 아직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괴물만 확대한 것처럼 크게 보였다.

‘왜 안 눌리던 가위에 눌렸나 했더니…….’

가까이에 오지도 않았는데 몸이 굳은 걸 보니, 근처까지 오면 뱀 앞의 개구리 신세로 꼼짝도 못하고 잡힐 게 분명했다. 잡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드리는 뭔가 던질 걸 찾아 주변을 뒤졌다. 하지만 종을 칠 때 쓰는 줄은 두께가 오드리의 팔뚝만 해서 도저히 끊을 수 없었고, 멀끔하게 단장된 돌 벽은 부스러기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구두라도 좀 높은 걸로 신을걸!”

굽 높은 구두를 신었으면 제대로 뛰지도 못했을 텐데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이성이 흐려졌다. 초조함에 머리끝부터 홀라당 잡아먹히기 직전, 작은 자물쇠가 달린 나무문을 발견했다.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찼다.

- 쾅!

문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경첩이 빠져 너덜거리는 문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안을 확인하니, 작은 골방 안에 청소도구가 한가득이었다. 종을 닦을 때 쓰는 솔 달린 긴 막대와 걸레, 큰 양동이와 주전자, 물뿌리개, 액체류를 담는 큰 통…….

오드리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긴 막대를 꺼냈다. 손에 막대를 쥐어 마음이 든든해진 것도 잠시, 이걸 제대로 쓸 수는 있나 걱정이 밀려들었다. 힘이 세고 승마술과 춤 등에는 능숙해도 무기를 다루는 법은 배운 적 없었으니까.

결국 막대를 던져 놓고 다시 청소도구를 뒤졌다. 그러다 액체류를 담는 큰 통에 뭔가가 가득 담겨 있다는 걸 발견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자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톡 쏘는 냄새가 올라왔다. 급히 머리를 들었지만 그 잠깐으로 기침이 마구 쏟아지고 코가 매웠다.

“푸엣치! 엣치! 어휴, 어휴……. 이거 세제인가? 세제 맞겠지?”

귀족영애인 오드리는 청소도 빨래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세제 구경도 한 적이 없었다. 봄맞이 대청소를 하고 난 뒤의 욕실과 길거리에 자리 잡은 세탁소가 뿜어내는 더운 증기에서 맡은 냄새 정도가 세제에 대한 기억 전부였다. 그렇게 아는 건 없어도 이 세제가 몸에 퍽 해롭겠구나 싶은 생각은 들었다. 당장 몸뚱이가 콧물을 훌쩍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변해서 괴물이 되는 거니 이 세제도 분명 효과가 있겠지.

오드리는 물뿌리개에 세제를 가득 채워 난간 근처로 가져갔다. 심호흡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괴물이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다. 끔찍한 노린내가 코를 파고들었다. 으윽……. 비명이 터지려는 입을 틀어막았으나 새어나가는 신음까지 막지는 못했다.

인기척을 느낀 괴물이 고개를 들어 오드리를 쳐다보았다. 납작한 코가 쉼 없이 벌렁거리고, 입술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딱. 딱딱. 돌을 박아 넣은 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앞니를 쉴 새 없이 부딪쳤다. 저 이빨에 물리거들랑 손가락 하나 두 개쯤은 우습게 없어질 것 같다.

“말도 아닌 게 말 흉내를 내고 있어. 이 더러운 괴물 놈아, 성질 사나운 윈디도 나한테는 입질 안 해. 사냥개도 내 앞에선 꼬리를 내리는데 감히 누구 앞에서 이를 딱딱대?”

오드리는 세제를 담은 물뿌리개를 난간 위에 올리고 신중하게 겨냥했다. 높은 곳이라 바람이 세게 불어서 물뿌리개로 뿌리는 소량의 액체는 바람에 죄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이야!’

물뿌리개를 기울였다. 상한 우유처럼 희고 걸쭉한 세제가 아래로 떨어졌다. 절반은 바람에 날려갔고 남은 절반의 절반은 괴물의 팔에 묻었으며, 나머지 사분의 일 정도만 괴물의 얼굴에 묻었다. 눈과 입, 코가 흰 세제로 뒤덮였다.

“끄어어엉! 으엉어억!”

괴물이 벽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눈을 비볐다. 하나 그럴수록 팔에 묻은 세제가 더 눈에 들어가니, 고통만 커질 뿐이었다. 얼른 물에 씻어야 하지만 괴물은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발광하던 괴물은 결국 두 손을 다 놓고 눈을 비볐고,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마지막까지 안심하지 못하고 난간 아래를 주시하던 오드리는 괴물에게서 흐른 피가 검은 융단처럼 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했다.

“설마 저 꼴로 다시 올라오진 않겠지. 나 참, 개구쟁이 시절의 경험이 이런 데 다 쓰이네.”

만탈락의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창문으로 낙엽을 던져 지나가는 사람의 머리를 맞추는 놀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나날이 말썽의 정도를 높여가던 오드리도 그에 동참해서 낙엽을 던지고 다니다가 락시 부인에게 끌려들어가곤 했으니, 조금 전의 훌륭한 조준은 그 시절의 놀이에 어느 정도 빚이 있었다.

어쨌거나 세제가 확실히 통한다는 걸 알고 나니 마음이 좀 든든해졌다. 피올의 말대로 날개가 달려 날아오는 놈이 아니고서야 반드시 벽을 기어오를 텐데, 그때마다 세제를 부어주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몸이 굳지만 않으면 괜찮을 터였다.

걱정되는 건 세제의 양이었다. 큰 통으로 하나 가득 들어 있긴 해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세제가 다 떨어지기 전에 피올이 돌아오거나 사태가 진정되길 바랄 뿐이었다.

‘이 일이 끝나면 가벼운 호신술이라도 배워야겠어.’

오드리가 이제까지 체술을 배우지 않은 건, 주변의 만류보다도 본인이 관심이 없었던 탓이 컸다. 솔직히 말해 그녀가 마음만 먹었으면 락시 부인이 백날 말려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타고난 신분이 있는데 설마 내가 몸으로 싸울 일이 있겠나 했지……. 젠장! 락시 부인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계속 우겼어야 했어. 베텔 경에게 부탁해서…… 아냐, 보나마나 안 된다고 하겠지. 그럼 하델에게라도 배울 거야.’

오드리는 안일했던 자신을 탓하며 물뿌리개를 들고 시계탑 꼭대기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이 놓친 괴물이 있을까 봐 눈에 불을 켰다. 할 일이 생겨서 그런지 꾸벅꾸벅 쏟아지던 잠이 거짓말처럼 달아났다.

처음의 그 북실북실한 털 괴물 이후에도 벽을 타는 괴물은 계속해서 등장했다. 다행히 다리가 굳거나 가위에 눌리는 일은 없었지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건 변하질 않으니, 오드리는 그때마다 세제를 유용하게 사용했다.

“끼에에엑!”

세제를 뒤집어쓰고도 떨어지지 않으려 발악하던 괴물이 끝내 바닥에 떨어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걸 보니 다시 올라올 수는 없을 듯했다.

지금 몇 시지?

무심결에 허리춤을 뒤적이며 가방을 찾다 하델에게 맡기고 돌려받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가 없으니 감으로 맞춰야 하는데, 잠깐 졸아서 그런지 아니면 긴장이 과해서 그런지 피올이 떠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전혀 가늠이 안 됐다.

“보티안 씨가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제각각 다르게 생긴 괴물의 생김새와 검은 피에 익숙해진 것도, 벽에 달라붙은 꼴을 볼 때마다 덜그럭 소리를 내며 내려앉던 가슴이 덤덤해진 것도 좋다. 일일이 비명을 지르며 충격 받을 수 있을 만큼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처음보다 많이 가벼워진 세제통의 무게를 실감할 때마다 불안이 쌓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 철퍽……. 철퍽철퍽

그래서 등 뒤에서 난 소리가 너무나 반가웠다. 계속 곁눈질을 하던 터라 승강기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뻔히 알고 있었는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걸 까맣게 잊었다. 당연히 피올일 거라고 생각하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 뒤돌아섰다.

“보티안 씨! 왜 이렇게 늦었…….”

뽀얀 피부의 소녀가 난간을 넘어 들어왔다. 주근깨 박힌 콧잔등, 양갈래로 땋아 내린 갈색 머리칼과 하얀 토끼 머리띠, 파랑색과 초록색이 섞인 커다란 눈동자, 노란 개나리가 그려진 나들이 드레스…….

괴물은 어린 소녀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활짝 웃는 얼굴이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녀였다. 다 까져서 검은 피가 줄줄 흐르는 손끝과 피가 고여 걸음마다 철퍽 소리를 내는 발이 아니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가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어린애? 저런 어린애도 괴물로 변한단 말이야? 변이 조건이 뭔데 어린애한테 이런 일이 벌어져?’

오드리는 주춤 뒤로 물러서며 아까 던져 두었던 막대를 찾아 쥐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눈을 피해 여기까지 올라온 건지는 몰라도, 반갑다는 듯 쭉 뻗은 손에 잡히면 큰일 난다는 것쯤은 알겠다.

그녀는 외형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하며 막대를 휘둘렀다. 기술은 없어도 힘은 세다 보니, 요령 없는 단순한 동작임에도 제법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웃으며 다가오던 괴물이 흠칫 발을 멈췄다.

“다가오지 마.”

“우으…….”

“가까이 오면 아주 흠씬 두드려 줄 거야.”

괴물은 오드리가 엉성하게 휘두르는 막대가 무서운 것 같았다. 겁먹어 일그러진 낯을 하고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럼에도 오드리에게 다가가고 싶어 애가 달아서는 손가락을 꼼질꼼질…….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한 발짝 다가왔다가 어깨를 호되게 맞고 울상으로 물러섰다.

오드리는 사람을 때리는 감촉이 싫어 미간을 찡그렸다. 외형이라도 괴물다우면 좋다고 환호성을 질러줄 텐데, 울상을 한 얼굴이 너무나 사람이었다. 만탈락의 꼬마아이들과 멱살을 쥐고 드잡이질을 하며 뛰어다닌 적도 있다지만, 그건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아무튼 이 허술한 막대기질에도 겁을 먹고 가까이 오지 않는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었다. 양몰이라도 하는 것처럼 괴물을 난간 쪽으로 차근차근 밀어냈다.

“너희, 대체 왜 날 쫓아다녀? 좀 가라. 가.”

“우으으…….”

“왜?”

“우으아아악!”

등에 난간이 닿을 때까지 밀려났던 괴물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오드리는 기겁을 하고 옆으로 피하며 괴물을 후려쳤다. 등을 호되게 맞은 괴물이 바닥에 엎드려 질질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마치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낮추고 빈틈을 노리니, 암만 아파도 오드리를 포기하진 않겠다는 의지가 선명했다.

“야아, 울고 싶은 건 나거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흥분한 피가 전신을 빠르게 질주하는 게 느껴졌다. 손에 땀이 나서 막대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후에도 오드리와 괴물은 몇 번이고 푸닥거리를 했다. 오드리의 솜씨는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질 않고 괴물은 요령 없는 매질이 겁나 몸을 사리니, 당사자들은 진지해도 어린애 개싸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오드리의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이 정도로 지칠 체력이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힘이 쭉쭉 빠졌다. 반면 괴물은 점점 더 얼굴에 윤기가 돌고 눈빛이 반짝거리니, 오드리는 어떻게든 세제를 뒤집어씌울 궁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세제 낭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오드리는 막대를 아까보다 훨씬 매섭게 휘둘렀고, 괴물은 그녀가 유도하는 대로 착실하게 물러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서너 걸음을 더 뒤로 물러선 괴물이 난간 근처에 이르러 다시 덤비려는 순간, 오드리는 냅다 물뿌리개를 낚아채 괴물에게 뿌렸다.

“끼이이이익!”

뿌린 세제의 태반은 괴물의 팔에 막혔지만, 한두 방울이 눈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괴물은 충분히 괴로워했다. 오드리는 괴로워하는 괴물의 가슴팍을 막대로 세차게 찔렀다.

“제발 떨어져, 제발!”

“끼이익! 끼에에에!”

“이익!”

괴물이 막대를 움켜쥐고 제 쪽으로 당겼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눈을 비비거나 막대를 놓지 않는 게, 그랬다간 틀림없이 탑에서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지쳤고 괴물은 의외로 힘이 세서, 둘은 막대 끝을 쥐고 서로를 노려보는 형국이 됐다.

- 딩동.

승강기에서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승강기를 타고 꼭대기에 올라왔단 소리였다. 오드리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라비린!”

“오드리, 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오드리는 고개를 돌리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괴물이 막대를 빼앗아 내던지고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게 똑똑히 보였다. 쩍 벌린 입안은 징그러울 정도로 새빨갰고, 두 갈래로 갈라진 혀가 꿈틀댔다.

라비린이 내지른 검이 오드리의 오른쪽 상박을 베고 괴물의 목을 꿰뚫었다. 그러나 괴물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괴물은 제 목이 뚫린 건 상관 않고 손을 쭉 뻗어 오드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목을 물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안 돼!”

라비린이 손을 뻗어 오드리의 어깨를 쥐었다. 그녀를 괴물에게서 빼앗을 요량으로 거세게 잡아당기는 순간, 시계탑 꼭대기에 흰 빛이 번쩍였다. 오드리도 라비린도 눈을 질끈 감았다.

“후아,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아가씨, 괜찮아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어조였다. 허공을 밟고 나타난 셰비언이 오드리의 안부를 물었다.

오드리는 믿어지지 않는 음성에 조심스레 눈을 떴다가 제 눈앞에서 얼음이 되어 굳은 괴물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반사적으로 밀쳐 내려 시도했지만, 어깨와 팔뚝이 불타는 것만 같아 팔을 들어 올릴 수조차 없었다.

반사적으로 아픈 부위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온 붉은 피가 손가락까지 타고 흘러 바닥을 더럽혔다.

“흐윽……!”

“아가씨!”

셰비언은 그제야 오드리가 다친 걸 보았다. 오른쪽 상박 부분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얼려놓은 괴물이고 뭐고, 얼른 치료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다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방해꾼이 있었다. 라비린이 나서 오드리를 제 등 뒤에 감추고 셰비언을 막아선 것이다. 그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셰비언의 접근을 차단했다.

“오드리에게 접근하지 마.”

“벨키스 경? 비켜요. 아가씨가 아프잖아요.”

“아니! 너처럼 수상한 마법사가 오드리 가까이에 오게 할 수 없어. 물러나, 오드리는 병원으로 갈 테니. 오드리, 상처를 꽉 눌러. 그것만으로도 진통 효과가 있어.”

라비린은 셰비언이 수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

셰비언이 오드리를 향한 마음을 공개적으로 내비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 괴물 사태가 벌어졌고, 그는 실전된 지 오래라는 옛 마법을 숨 쉬듯 부리며 제 가치를 증명했다. 수십, 수백 마리 괴물을 얼리고 태우면서도 지친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 워커마저 동경과 찬탄의 눈길로 셰비언을 바라보는데 왕궁마법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입으로는 워커가 만들어 나눠준 종이가 참말로 대단하다 하면서도 눈으로는 해를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목을 빼고 셰비언을 좇았다.

이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고 나면 셰비언의 공적이 얼마로 계산될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지난 십여 년간 영향력 있는 귀족의 숫자를 줄이는 기조를 일관성 있게 유지해 온 왕실도 이번엔 그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이 모든 게 셰비언의 수작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공간을 다룰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냔 말이다. 심지어 그에게는 동기도 있었다.

오드리 헨젤 백작영애.

신분도 뭣도 없는 마법사는 말을 걸기도 힘든 상류계급의 아가씨. 아무리 귀족에게 존대를 받고 눈부신 실력으로 찬탄을 들어도, 평민 마법사가 감히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드리의 평판이 개선되고 있는 지금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셰비언이 왕실에게서 공적을 인정받고 나면 곁에 설 수 있게 된다. 결혼까지는 힘들다 하나, 그만한 능력자가 올라가려 마음만 먹으면 뭐가 어렵겠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만한 사건을 만나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울 테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나만큼 잘 아는 녀석도 없어.’

남작의 작위도, 기사의 칭호도, 아버지의 신뢰와 세간의 평판마저 오드리 앞에서 빛을 잃었다. 그녀의 미소와 손길 한 번이면 모자란 것 없이 배부른 기분이 되었다.

오드리가 감정보다 이성을 우선하는 타입의 사람이라는 게 정말로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날이 덩치를 키워가는 독점욕과 질투가 감당이 안 됐을 게 분명했다. 지금도 오드리를 바라보는 셰비언의 눈을 뽑아버리고 싶은 기분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셰비언이 그저 유능한 마법사에 불과할 때에도 오드리의 곁에서 어정대는 게 싫었는데, 그 실력에 어울리는 사회적 위치를 손에 넣고 나면 그땐 어떤 심정이 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결국 실낱같은 질투가 대량의 의심을 낳은 셈이었다. 라비린은 고집스럽게 그를 막아섰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검에 베여 주저앉은 오드리의 어깨를 안고 괜찮을 거다 다독이고 싶지만, 수상한 마법사가 그녀에게 접근하는 걸 막는 쪽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셰비언에게 그런 라비린의 태도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혹 오드리에게 상해가 갈까 싶어 태우지 않고 꽁꽁 얼려놓은 괴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왜 자신을 경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병원보다 내가 낫습니다. 벨키스 경, 비켜주세요.”

“마법사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대체 뭐가 있다고 자꾸 비키라는 건지 모르겠군. 조금 전에 그랬듯 허공을 날아 오드리를 병원에 데려갈 건가?”

“내가 치료할 겁니다. 비켜요!”

“무슨 개소리야, 그게! 네가 의사라도 돼? 너야말로 여기서 어정대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 강력한 공격마법을 원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왜 여기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거지?”

“시간낭비라니! 이게 왜 시간낭비야!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아가씨는……!”

“닥쳐,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그리고 네가 없어도 충분히 잡을 수 있었어!”

두 남자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동안, 오드리는 오른쪽 상박을 꽉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라비린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고 상처를 누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통증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기자, 셰비언과 라비린이 하는 양이 몹시 웃겼다. 치료하려면 당장 하고, 병원에 데려가려면 얼른 안아 들기나 할 것이지 자신을 가운데 두고 실랑이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어서 아픈 줄도 모르겠다.

‘나 참……. 인간이나 용이나 하는 짓이 똑같네.’

마음 같아서는 언제까지 저러고 있나 두고 보고 싶은데, 그러기엔 팔의 상처도 상처거니와 아래쪽의 상황이 신경 쓰였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일어섰다. 머리가 핑 울리고 세상이 흔들렸다.

“아가씨!”

“오드리!”

혹 오드리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조금 전까지 박박 싸우던 남자들이 오드리를 양옆에서 받쳤다. 걱정을 담아 바라보는 눈이 아주 똑같았다.

“아픈 사람 옆에 두고 그렇게 싸우니까 재밌어?”

셰비언도 라비린도 슬그머니 오드리의 시선을 피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밖에 안 되는 게 사실이었다.

“셰비언,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할 수도 있나?”

“네! 당연하죠!”

“그럼 지금 당장 치료해 줘.”

“오드리, 저런 황당한 말을 뭘 믿고……!”

라비린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셰비언의 손에서 금색 빛무리가 흘러나와 오드리의 상처를 감싸고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쩍 벌어져 피를 흘리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라비린은 자신도 모르게 오드리의 팔을 문질렀다. 급한 나머지 오드리가 다치는 걸 감수하고 괴물의 목을 꿰뚫었고 그녀의 팔을 베던 순간 느껴진 감촉이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데, 상처의 흔적이라곤 잘려나가고 피 배인 옷자락뿐이라니? 채 마르지도 않아 손에 묻어나는 붉은 피가 거짓말 같았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렇게 쉽게 상처가 낫는다는 게……. 그럼 병원은 왜 있어? 의사는 왜 필요하고 약은 왜 써? 대학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보면,”

“라비린, 그냥 받아들여. 셰비언은 마법에 있어서만큼은 못하는 게 없다는 모양이니까.”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설마 저 젊은 나이에 마법에 통달하기라도 했단 거야? 셰비언 성벽에서 날아와 인간의 모습을 한 용이라도 돼?”

라비린이 멋모르고 진실을 입에 담았다. 오드리는 살짝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상관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셰비언은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왕궁마법사들이 보내는 뜨거운 시선에 아주 질린 상태였다.

“뭐……. 그렇게 생각하든가. 셰비언, 발도 부탁해.”

아까 광장에서 하델을 업고 뛰는 동안 발 여기저기가 많이 상했다. 굽이 낮은 남부식 구두였지만 뛰기에 적합한 물건은 아니었다. 홀라당 벗겨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그랬으면 맨발로 뛰었어야 할 테니까.

셰비언의 마법은 까져 딱지 앉은 상처와 시퍼런 멍을 본래부터 없던 일인 것처럼 지워 버렸다. 오드리는 앞꿈치로 바닥을 두드려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점심나절에 저택을 나설 때보다 몸 상태가 좋았다.

“보티안 씨가 말하길, 그대가 아주 날아다니고 있다던데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지? 치유마법이라도 쓰고 다녔어?”

“에이, 그럴 리가요. 이런 거 들키면 귀찮아져요. 그보다 저거 있잖아요, 저거. 저기 괴물 얼려놓은 거요. 저러고 다녔어요. 저것처럼 보이는 대로 괴물을 얼리고 태우고……. 공격마법이 실전된 상태라 그런지 다들 신기해하더라고요.”

신기해한 게 아니라 감탄하고 탐낸 거지만, 셰비언에겐 그렇게 보였다. 오드리는 짐작한 바를 말해줄까, 하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아까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더니만, 그게 그대의 짓이었단 말이지?”

“네. 그게 제일 조준이 쉽거든요.”

“큰 소리가 나던 것도? 꼭 누군가 큰 폭죽을 터뜨리는 것 같았어.”

“그건 제가 아니에요. 왕궁마법사들이 대포인가 뭔가 하는 걸 끌고 와서 쏴댄 거죠. 광장의 사람들에게 괴물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기에 일부러 지저분한 흔적이나 소리가 없도록 얼려두었는데 그걸 굳이 산산조각을 내더라고요. 수고스럽게.”

“대포? 그런 건 처음 들어.”

“저도 처음 봤어요. 시제품으로 하나 만들었다가 무기로는 영 쓸 만한 게 못돼서 처박아뒀었다나 뭐라나……. 정말 그래 보이긴 했어요. 안 그래도 모자란 마법사가 몇 명이나 붙어서 끙끙대고 마력을 붓는데, 저러다 곧 죽겠다 싶었거든요. 한참 개량하지 않으면 그냥 창고에 넣어둬야 할 거예요.”

“그래? 새로운 마법도구인가 보지? 무기면 타우레드 후작님의 입김이 들어갔을 거야. 라비린, 너는 뭐 아는 거 없어?”

라비린은 대포를 직접 봤다. 그가 투입되어 싸우던 구역에도 마법사들이 대포를 끌고 들어왔었다. 하지만 셰비언이 괴물을 홀라당 태우고 얼음은 한 조각도 남기지 않은지라 아예 포를 쏘지 않고 지나가 버렸다.

“나도 오늘 처음 구경했어. 아버지가 손 댄 무기 개발이 어디 한두 개야? 그중 성공하는 건 극히 드물고, 그런 게 아니면 따로 알아볼 생각 같은 거 안 해 봤어.”

“하긴 그렇겠다……. 실패작이 어디 한두 개여야지.”

“무기의 질과 실용성 따지는 거엔 세상 깐깐한 사람이야. 왕궁마법사장이 무슨 생각으로 굳이 실패작을 꺼내왔는지는 몰라도 대포로 원하는 효과를 얻기는 힘들걸. 계속 셰비언 씨와 같이 다녔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서.”

“호오……. 그 정도로 활약했단 말이지.”

셰비언은 오드리의 시선을 받으며 얼굴을 붉혔다. 칭찬이라면 수도 없이 들었는데 어째 오드리가 대단하다는 듯 바라봐 주니 이상하게 손발이 간지럽고 등이 뻣뻣해졌다.

“벼, 별거 아닌데 다들 저렇게 과하게 반응한다니까요. 귀찮게.”

“셰비언, 얼굴이 새빨개. 내가 바로 마법의 주인이라며 뻔뻔하게 자랑하던 낯짝은 어디로 갔나 모르겠군.”

“그러게요. 제 생각에도 좀 놀라워요. 제가 왜 이러죠?”

셰비언은 서늘한 손을 뺨에 갖다 대고 열을 식혔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듯 귀여워, 오드리는 그만 소리 내어 웃었다. 괴물 사태가 발생한 이후로는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라비린은 다정하게 대화하는 두 사람을 보며 낯선 거리감을 느꼈다. 분명 자신도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들과 자신 사이에 투명한 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셰비언과 오드리 사이에 구축되어 있는 유대감이 몹시 거슬렸다.

그러나 셰비언과 오드리는 라비린의 심사를 세심하게 살필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동안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 왔던 게 거짓말처럼 자연스럽게 나누는 대화에 완전히 정신이 팔렸다.

“셰비언, 그대가 보기에 이 사태가 진정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곧 끝날 거예요. 워커가 일을 아주 제대로 하고 있거든요.”

“워커가? 워커는 체력이 아주 쓰레기일 텐데, 대체 이 사태에서 무슨 일을 한다고?”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죠. 이 사태가 벌어진 원인을 해결하느라 아주 바빠요. 왕궁마법사들이 함께하고 있으니 체력 좀 모자란 거야 어떻게든 될 거예요.”

치안대와 군대가 괴물을 아무리 열심히 잡는다 한들 마력균형을 어그러뜨리는 원인이 제거되지 않으면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멀쩡하던 사람도 계속해서 괴물로 변해갈 테니까. 하지만 셰비언이 일부나마 수식을 제거했고 워커가 마법망 복구에 손을 보태고 있으니, 끝이 그리 머지않았다.

“마법망 안정화를 빨리 하겠다고 워커가 뭘 만들었는지 아가씨께 얼른 보여드리고 싶네요. 보면 엄청나게 놀라실걸요.”

“그래? 이 괴물 사태가 마법망과 연관돼 있나 보지?”

셰비언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새삼 비밀유지의 의무 뭐 이런 것 때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광장에 괴물이 난입한 시점에서 비밀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셰비언은 지휘부의 사람들조차 모르는 진실을 잔뜩 알고 있었다. 셰비언, 샤를레아, 다나 트왈릿 셋만 알고 있는 이야기들 말이다. 오드리 역시 용의 마력을 가졌기에 괴물의 목표가 되었으니만큼 그녀에게도 알려주어야 할 텐데, 그러기엔 라비린이 마음에 걸렸다.

라비린에게 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자신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경계하며 싫어하는데, 뭐가 예쁘다고. 셰비언은 남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으음, 그게……. 미루어 짐작하자면, 그래요. 왕궁마법사 쪽에서 마법사협회에 마법망 안정화에 대해 협조 요청을 했거든요.”

“아하, 그래서 나온 거로군? 어지간해서는 연구실에서 안 나오는 사람들이 웬일로 나왔나 했더니만.”

“그런 요청이 아니어도 나왔을 거예요.”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인걸요. 뒤따르는 말은 그저 그런 겸양인데, 사르르 접히는 눈매가 남부의 과자만큼이나 달았다. 오드리는 제 뺨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게 숨겨놓은 마음 탓인지, 아니면 저 예쁜 얼굴 탓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라비린의 기분은 바닥까지 수직하강했다. 그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드리가 반사적으로 손을 쳐 냈지만 꿋꿋하게 버텨 그녀의 어깨를 사수했다.

“셰비언 씨가 나서준 게 정말 큰 도움이 됐지. 괴물이 점점 영악해져서 곤란했는데, 셰비언 씨가 지나는 자리마다 괴물이 씨가 말랐거든.”

“라비린, 너도 괴물을 잡고 있었어? 왜? 후작가의 공자가 위험하게!”

“걱정 들으니까 기분은 좋다만……. 나도 기사야. 피올에게 네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넌 상상도 못할걸.”

오드리는 그제야 피올을 떠올렸다. 금방 온다고 하더니, 아직도 안 왔다.

“보티안 씨가 널 여기로 보냈어?”

“그걸 보냈다고 해야 하는 건지……. 동료에게 잡혀 끌려가는 중에 날 발견하곤 부리나케 뛰어오더니, 글쎄 네가 여기에 혼자 있다는 거야.”

라비린은 가무잡잡하고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잠깐의 접촉임에도 입술에 따스한 온기가 스몄다. 징계를 각오하고 뛰쳐나온 보람이 있는 온기였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네가 헨젤 공자와 함께 퍼레이드 구경을 나온 건 알고 있었지만 베텔 경과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거든. 어떻게 된 거야?”

“처음에는 그냥 사람들에 휩쓸려 미아가 됐던 거고, 두 번째는 일부러 보냈어. 괴물이 자꾸 날 따라와서……. 잠깐, 괴물이 아까부터 계속 시계탑을 기어 올라왔어. 당장 확인해야 돼.”

오드리는 곧바로 난간에 뛰어가 아래를 확인하려 했다. 세제통을 홀랑 비우도록 기어 올라오던 괴물이 당장이라도 난간을 넘어 들어올 것만 같아 불안했다. 셰비언이 그런 그녀를 막아섰다.

“아가씨,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당장 확인을…… 설마 오는 길에 그 괴물들을 네가 다 잡기라도 했어?”

“으음……. 죄다, 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거의 다 잡긴 했을 거예요. 지금 저 아래는 순 얼음밭일걸요. 안심하세요.”

오드리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장 눈앞에서 괴물을 얼음덩이로 만든 마법사가 하는 말이었다. 안심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 순순함에 라비린은 빈정이 상하고 말았다. 셰비언을 얼마나 믿기에 눈으로 확인도 않고 저리 고개를 끄덕이냔 말이다.

“거 참 대단하네요, 셰비언 씨.”

“뭐가요?”

“사람의 출입이 제한되는 이 시계탑에 사람이 있을 줄 어떻게 알고 주변을 죄다 쓸어버리면서 왔나 싶어서요.”

오드리가 라비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팔꿈치에 찍힌 옆구리가 아프고 오드리의 시선이 닿는 뺨이 몹시 따가웠지만, 라비린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치졸하다는 건 알아도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 오드리에게 뭔가 마법이라도 걸어놨습니까? 마법으로 못하는 게 없다니, 추적마법 정도야 아무것도 아닐 텐데.”

“라비린, 적당히 해.”

“내가 뭘? 나는 지금 합당한 의심을 하는 거야. 이 괴물 사태 자체가 셰비언 씨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 같거든.”

“정말이지……!”

오드리의 만류에도 라비린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드리는 셰비언 역시 싸울 의지가 충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기가 막힌 나머지 아예 고개를 돌렸다. 둘이 아웅다웅하고 싸우는 거야 둘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이왕 싸울 거라면 자신이 없을 때 싸웠으면 싶을 뿐이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라비린의 팔을 풀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추적마법이라…….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아가씨께 그런 걸 걸지는 않았죠. 지저분하잖아요. 물론 아가씨가 여기 계시다는 걸 알고 온 건 맞지만요.”

“추적마법을 걸지도 않았으면서 뭔 수로 오드리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와?”

“사람을 찾을 때 쓰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을 썼죠. 불렀어요.”

“……뭐?”

“불렀다고요. 저는 오드리 아가씨, 하고 불렀고 아가씨는 셰비언, 하고 대답하셨죠. 대답을 들었는데도 위치가 정확하게 잡히질 않아서 좀 헤맸지만요. 뭐, 그 때문에 이 주변의 괴물을 죄다 잡고 왔으니 나쁠 것도 없죠.”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당당하게…….”

셰비언이 뻐기듯 어깨를 폈다. 라비린은 할 말을 잃었지만, 짐작되는 바가 있는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그럼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야?”

“꿈?”

“네? 아가씨, 설마 꿈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잠깐 졸았었어. 그러다 가위에 눌렸는데, 누가 날 부르잖아……. 딱 네 목소리라서 이름을 불렀더니 가위에서 풀려났지. 난 내가 희한한 꿈을 꾼 줄 알았어.”

“어쨌거나 대답하신 건 맞네요.”

“그 혼잣말을 들었다고?”

“들렸으니까 왔죠.”

셰비언은 아까보다 더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 들였고, 라비린은 어이가 없어 이마를 짚었다.

“오드리……. 셰비언 씨와 얽히면 매사 이런 식이야? 상식 어디 갔어? 무슨 옛날이야기 한복판에 들어온 것 같잖아!”

“그러려니 해. 일일이 따지다간 끝이 없어.”

“그게 돼?”

“안 되면 뭐 어쩔 거야.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부정이라도 할 거야?”

“비위도 좋아……. 이래서야 일일이 짜증내는 내 쪽이 이상한 사람 같네.”

하도 황당한 대답을 들어서 그런지, 좀 더 비꼬고 싸울 의욕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경계심과 의심은 여전하지만 그걸 굳이 지금 풀어낼 필요는 없겠구나 싶다.

“오드리, 내 손 잡아.”

“손? 손은 왜?”

“그만 가야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안 돼. 괴물이 나를 따라다닌다고 했잖아. 광장만 해도 이 난리인데 저택까지 괴물을 끌고 갈 수는 없어. 보티안 씨도 일이 끝날 때까지는 나더러 여기 있으라고 했단 말이야.”

라비린은 리가 항구의 괴물이 오드리를 콕 찍어 바라보고 손을 뻗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이었다. 피올의 당부도 있었고, 시계탑을 향해 머리를 고정하고 넋 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괴물들을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피올이 왜 이랬는지는 들었어. 하지만 그건 아직 추측에 불과하잖아. 괜히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빌미를 주지 마. 설령 괴물이 네 뒤를 쫓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저택까지 가지 못하게 확실히 막을 테니까 걱정 말고.”

“광장을 뚫려놓구선 말은 잘해.”

“셰비언 씨가 그랬잖아, 곧 끝날 거라고. 목적지가 확실한데 개체수도 줄어들면 길목 틀어막고 지키는 거야 일도 아니지. 자, 얼른. 너무 늦으면 이 아래에 깔린 군인들 사이를 뚫고 가야해.”

아까는 셰비언을 두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라고 했으면서, 이럴 때 가져다 붙이기는 아주 잽싸다. 오드리는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그때, 셰비언이 라비린과 똑같은 포즈로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 잠시만 손을 주실래요? 괴물이 아가씨를 쫓아오지 않게 해드릴게요.”

괴물이 왜 오드리를 쫓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가?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장담을 하지? 라비린의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거리낌 없이 셰비언에게 손을 맡겼고, 셰비언은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차갑고 시원한 마력이 오드리의 내부를 훑고 지나갔다. 오드리는 갑자기 찾아온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괴물이 왜 날 쫓는지 알고 있어?”

“괴물은 아가씨를 쫓는 게 아니에요. 특정한 조건이 맞는 사람을 쫓는 거지. 그 조건이 뭔지 아가씨도 마땅히 아셔야겠지만……. 여기선 안 돼요.”

셰비언이 라비린을 흘끔 쳐다보았다. 마치, 그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라비린의 미간이 확 좁아졌고 오드리는 급격히 피곤해졌다. 말을 듣지 않아도 이유는 뻔했다. 몸속을 흐르는 용의 마력은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 괴물이 날 안 쫓는 거지? 조치 취한 거지?”

“네. 괴물은 아가씨가 곁을 지나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저, 이유는 나중에 따로…….”

“그대가 장담할 정도면 괜찮겠지. 그 이유가 뭔지 같은 건 하나도 안 궁금해. 말할 필요 없어.”

“아가씨!”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셰비언이 다급히 손에 힘을 주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요정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괜찮아. 라비린과 함께 가면 돼.”

“아래쪽은 지금 눈뜨고 볼 만한 광경이 못 돼요. 제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모셔다 드릴게요. 네?”

“눈에 안 띄게 어떻게? 조금 전 그대가 그렇게 왔듯이 허공을 날아서?”

“네!”

“미친…….”

곁에 서 있던 라비린이 작게 욕을 뱉었다.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라비린은 흉내도 못 낼 방법을 제시하는 셰비언이 귀엽고, 그의 절박함이 못내 흡족한 자신의 속내가 그저 씁쓸했다.

“새로운 경험을 제시해 주는 건 고마운데, 허공을 걷거나 나는 건 좀 무서울 것 같아. 거절하지.”

거짓말. 셰비언은 오드리가 가없는 허공을, 별만 반짝이는 고요한 우주를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셰비언 자신이 만들어낸 풍경이라지만 느껴지는 감각은 실제와 다를 바 없는데도 무서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아가씨, 그럼…….”

“아까 나를 불러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가위에서 깨어나고 괴물이 올라오는 것도 확인해서 대처할 수 있었거든. 그 부름이 아니었으면 꼼짝도 못하고 괴물에게 당했을 거야.”

오드리가 돌아섰다. 셰비언은 오드리가 라비린의 손을 잡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내민 손을 거절당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첫 번째에는 괜찮았다. 그때는 공개된 장소였고, 주변에 사람이 많았으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만 하는 오드리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때 자신의 손을 잡지 않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지금은 이 손을 잡아주어도 될 텐데.

좀 전까지 처져 있던 라비린이 보란 듯이 오드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얄미운지, 셰비언은 스스로를 제어하느라 아주 애를 먹었다. 한데 막 승강기에 타려던 오드리가 뒤돌아서서 셰비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셰비언, 그대는 또 괴물을 잡으러 갈 건가?”

“……네.”

셰비언의 대답은 느렸다. 할 일은 많았다. 괴물을 잡고, 수식을 파괴하고, 와중에 마력구슬도 찾아내 부숴야 했다. 샤를레아와 약속한 걸 지켜야 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죄다 때려치우고 싶긴 하지만, 그랬다가 다나가 상하기라도 하면 샤를레아가 얼마나 날뛸지 가늠이 안 됐다.

“남은 괴물 잡고, 워커를 챙기고, 마법망 안정화에 손을 좀 보태고……. 그리고…….”

할 일이 쌓인 걸 아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다. 셰비언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대만 한 마법사에게 이런 걱정을 하는 게 조금 우습겠지만……. 부디 몸 조심해. 다치지 마. ……셰비언?”

머뭇거리며 건넨 걱정이 달콤했다. 셰비언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떼면 화를 내거나, 울거나…… 하여간 못난 꼴을 보일 것만 같았다. 햇살에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돌바닥이 너무 뜨거웠다.

수확제의 마지막 날을 통째로 망쳐 놓은 괴물 사태는 해가 지기 전에 마무리됐다. 일단 마법망이 제대로 안정되고 나자 괴물이 새로 생겨나지 않은 데다 병사들이 괴물 상대에 익숙해지며 처리 속도에 불이 붙은 탓이었다.

괴물의 숫자는 곧 사람의 숫자. 흥청이던 수확제의 분위기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울음소리가 브란젤을 채울 만도 하지만, 가족과 친구의 죽음에 통곡하는 것도 그럴 사람이 남아 있을 때의 얘기다. 개미탑처럼 빽빽한 건물에 사람이 와글와글 모여 살던 뒷골목은 검은 핏물에 젖어 텅 비었다.

군의 명령에 따라 집을 비웠다 돌아온 사람들은 길과 외벽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토악질을 참으며 청소를 한 뒤 까만 불안을 덮고 잠들었다. 다 끝났다고 했는데, 설마 또 괴물이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왕궁마법사들이 신기한 걸 그렇게 많이 보여줬는데 아무렴, 괜찮겠지.

살아남은 브란젤의 주민들은 다 끝났을 거라는 말을 되뇌며 밤을 보냈지만, 브란젤을 관리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괴물 사태는 이제야 시작이었다.

왕궁마법사들이 이제 괴물의 출몰은 끝났다며, 남은 건 뒤처리뿐이라는 말을 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괴물을 잡는 데 들어간 물자와 인력, 갑작스러운 인구공백, 술렁거리는 민심……. 모든 게 다 일이었다. 수확제만 끝나면, 을 되뇌며 살던 사람들이 시체 같은 낯으로 보고서 더미에 처박혔다.

하나 괴물은 괴물이고, 무도회는 무도회였다. 수확제 내내 오늘을 기다리며 준비된 무도회장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라디아타는 생각 이상으로 참석자가 많은 무도회장을 찬찬히 훑었다. 괴물 사태가 벌어졌으니 평년보다 사람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빼고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정말 즐거운 기색은 아니었다. 서로의 영지 안부를 묻고 가뭄 피해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며 곡물 가격을 두고 흥정하는 그 모든 표정들이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 같았다.

화려하게 치장한 라디아타를 향해 눈길을 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어느 곳을 가든 어둔 밤에 떠오른 등불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곤 하던 라디아타는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상황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즐거운가?”

사람 구경에 정신을 빼놓은 라디아타 뒤에서 가스트로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라디아타는 놀란 토끼처럼 두근대는 가슴을 붙들고 새치름하게 눈을 흘겼다.

“전하, 인기척도 없이 다가오시면 제가 놀라지 않습니까?”

“헛기침 정도는 했다네. 그대가 사람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 못 본 게지.”

“말씀은 참 잘 하시지.”

“모처럼 여유롭게 무도회를 즐기는데 미안하지만, 같이 춤을 췄으면 좋겠는데. 어떤가?”

라디아타는 제게 내민 가스트로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본래 두 사람이 오늘 약속한 건 무도회의 마지막 춤이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내 춤 신청을 받아준 적이 없잖나. 꼭 마지막 춤이 아니어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한 인상을 주기엔 충분할걸세.”

“그리고 마지막 춤도 같이 추고요?”

“뭐, 그렇지.”

라디아타에겐 관심 없는 사람도 가스트로에겐 관심이 있었다. 라디아타는 주변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는 걸 느꼈다. 무심히 비껴가던 시선들이 두 사람 주변에 머물렀다. 마지막 춤을 출 거면 이 춤도 받아줘야 한다. 한숨이 났다.

“정말이지, 전하는 좋아할 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내 곁에 있어줄 거잖나.”

“그런 식으로 말하는 분이시라 싫은 겁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 조금도 고치질 않으시니 더욱 그렇고.”

싫다, 화난다, 속삭이면서도 라디아타의 낯은 해사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보는 사람들 모두 눈부시다 할 만한 미소를 짓고 가스트로의 손을 잡았다. 춤을 추러 나왔던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중앙 자리를 비웠다.

적당히 거칠고 적당히 단단한 손이 라디아타의 손을 쥐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일반적인 예의로 용납될 만한 태도가 아니었다. 한데 라디아타가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고 내치지도 않으니, 두 사람을 주시하던 사람들 사이에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역시 브란젤의 황금장미. 효과가 좋은걸? 분위기가 바로 반전됐어.”

“주변은 그만 살피시고 저한테나 신경 쓰세요.”

“하하, 미안하군. 그래도 말이야, 눈길이 가는 걸 어쩌겠어. 그대, 분위기가 확연히 바뀐 게 느껴지나?”

정말이었다. 베일처럼 회장을 덮고 있던 우울한 기운이 많이 사라졌다. 다들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가 타우레드의 영애와 다정하게 춤을 추는 게 어떤 의미인지 추측하느라 머리와 입이 바빠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들 이런 무도회는 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은 얼굴들이더니만, 지금은 계산이 먼저군.”

“전하께서 아무리 순정이라 우기셔도 통하지 않는다는 거겠죠.”

“어허, 왜 그리 부정적인가? 내가 그대를 쫓아다닌 세월을 생각해 보게. 특집 기사가 몇 번이나 났는데!”

“그 숱한 기사들 중에 전하의 접근을 순수하게 해석한 기사가 몇이나 된답니까?”

라디아타는 가스트로를 비웃었다. 약혼을 받아들인 자신도 가스트로의 진심을 믿지 않는데 누가 그 말을 믿어줄까. 그리 요란하게 애정을 과시하고 다닌 오드리와 라비린도 정략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리고 전하, 분위기 쇄신에 절 너무 써먹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저는 곧 브란젤을 떠날 거거든요.”

“뭐? 왜?”

“타우레드의 전통을 알고 계실 텐데요? 위급한 일이 생기면 직계 자손 전부가 본가로 모이는 거요.”

아직 구체적으로 말이 나온 것도 아니고 직접 경험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저택 전체에 감도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로샨은 저택의 하녀들을 부려 짐을 꾸렸고, 검은 피를 뒤집어쓰고 들어온 라비린은 라디아타에게 되도록 빨리 돌아오라 신신당부했다.

“대체 언제적 전통인가? 혹시 영지전이 활발하던 때 만들어진 건가? 삼십여 년 전의 반란 이후로 영지전은 금지됐을 텐데?”

“영지전이 없다고 전통이 사라질까요.”

“그거 참 시대착오적이군. 괴물 뒤처리를 해야 할 사람이 후작인데 어딜 떠난다는 건가?”

“아니죠, 전하. 뒤처리를 해야 할 분은 아버지가 아니라 카즈네 공작각하이시죠.”

음악이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치맛자락이 활짝 핀 꽃처럼 펼쳐지고, 뒤로 몸을 젖혔다가 일으킨 라디아타가 가스트로의 손을 깍지 끼고 생긋 웃었다. 가스트로는 저도 모르게 터지려는 한숨을 삼켰다.

“그대는 지금 귀족들이 괴물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 왕궁무도회에 참석한 이유를 아나?”

“글쎄요? 제가 몹시 어리석어 잘 모르겠네요. 전하께서 가르쳐 주시겠어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는 건지……. 부왕께서는 이런 일로 귀족들이 브란젤을 떠나는 걸 용납하지 않으실 거다. 여기 온 치들은 그걸 알고 있는 자들이고.”

“단호하기도 하셔라. 오지 않은 자들은요?”

“치안대의 방문을 받겠지. 라디아타, 그대가 가문을 아낀다면 후작을 설득해서 떠나지 않도록 해. 가문의 전통 운운하며 타우레드 후작이 브란젤을 떠났다간 부왕의 진노를 살 거야.”

“어마……. 전하, 그건 전하께서 막아주셔야죠. 약혼녀의 가문이잖아요?”

“그대, 이러려고 내 구혼을 받아준 건가?”

“언젠가 큰 걸로 보답해 드리죠. 사자는 은혜를 잊지 않는답니다.”

가스트로는 라디아타에게 사랑을 말했지만 라디아타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약속한 것들이 마음에 들어 그의 구혼을 받아들였다. 귀부인의 영예, 가문의 번영, 일신의 안녕…….

가스트로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약혼반지가 오가기도 전에 이런 요구를 받을 줄은 몰랐다.

‘이거 꼭, 시험받는 것 같지 않은가.’

잡은 손은 보드랍고 끌어안은 허리는 가냘픈데 어쩐지 등에서 땀이 났다. 가스트로의 불편한 심사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라디아타가 살며시 눈을 휘었다.

“전하, 절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제가 가진 것들의 가치가 떨어지면 전하는 더는 절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거 아니었나요? 제가 틀렸나요?”

“…….”

“사실 저는 그래도 상관없답니다. 저는 사자의 딸이고 브란젤의 황금장미니까요. 사자는 단매에 죽지 않고 전하만큼 높은 기준을 가진 사내는 흔치 않죠.”

“울며불며 매달리는 걸 보는 쪽이 차라리 쉽겠어…….”

가스트로가 앓는 소리를 냈다. 라디아타는 하하 웃고 말았다.

“전하는 현명하신 분이죠. 가질 수 없는 것에 미련을 갖거나 집착하지 않고, 손에 닿는 것을 사랑하기로 하셨으니까. 저 역시 언젠가 전하를 닮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대는 미련을 가졌나?”

“보셨잖아요, 제 미련. 저는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러운데, 전하께서는 까맣게 잊으셨군요.”

“그렇군. 보았었지. 미련이 만든 틈새를 치고 들어갔으면서도 그새 잊었군. 왜 잊었을까…….”

“글쎄요? 질투라도 하셨나 보죠. 볼린은 사랑의 신이지만 동시에 질투의 신이기도 하잖아요.”

무심히 한 말이 정곡을 찔렀다. 가스트로는 커다란 바늘에 가슴을 관통당한 듯한 기분에 잠시 말을 잊었다.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니, 놀라웠다.

머리로 시작한 사랑이 대체 언제부터 가슴에 들어앉았는가.

“……이 짓을 또 할 수는 없지…….”

“네?”

“못 들었다면 그걸로 됐어. 내 황금장미에게 약속하지. 타우레드의 전통은 전통으로 존중받을 거고, 거기엔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이라고.”

적당히 알았다 소리만 해도 만족할 요량이었다. 설마 약속까지 해줄 줄은 몰랐던지라, 라디아타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놀랐나 보군?”

“……네, 아무래도.”

“내 장미는 내가 지켜야지. 그 정도도 못해서 어디 사내라 하겠나?”

싱긋 웃는 가스트로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라디아타는 이제까지 그에게서 수없이 많은 구애와 청혼을 받았지만, 그가 눈에 이런 열기를 품은 건 처음 보았다.

“그, 전하?”

“왜 부르지? 뭔가 더 부탁할 게 있나? 말해보게.”

“제가 국왕전하를 뵈올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요? 기왕이면 단독으로요.”

“어렵지 않지. 그대가 본가로 돌아가기 전에 자리를 만들어보겠다.”

대답이 아주 호쾌했다. 라디아타가 무슨 이유로 국왕과의 독대를 원하는지 묻지도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게, 역시 라디아타가 알던 가스트로가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전하에게 쌍둥이가 있진 않을 테고…….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음악이 끝났다. 놀란 와중에도 몸에 익은 동작은 어디로 가지 않아서, 라디아타는 완벽한 자세로 춤을 끝냈다. 자세를 바로잡자마자 숨을 곳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사람 없는 테라스에라도 들어가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었다.

얼른 돌아서려는 라디아타에게 가스트로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주겠다는 듯 내민 손은 당당하고 정중했으며,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라디아타는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손을 잡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뺨과 목에 닿는 시선들이 설탕물처럼 끈끈했다.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모를까, 뒤늦게 뿌리치기라도 하면 어떤 말이 퍼질까. 어쩔 수 없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가스트로에게 기댔다.

“오늘의 전하는 제가 알던 분이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이 어찌 한 가지 모습만 가질까. 그대에겐 앞으로 더 많은 모습을 보여주지.”

“……그게 제게 좋은 일일까요?”

라디아타는 무서웠다. 자신은 카프러스가 채 감추지 못한 마음 한 자락을 발견할 때마다 오드리가 미웠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세상에 까발리고 싶은 충동이 문득문득 솟아오르는 통에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 애를 먹었다. 오드리가 잘못된다고 해서 카프러스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돌아올 거라곤 거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실망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드리가 너무나 소중한 친구인데도 그랬는데, 가스트로에게 카프러스는 어떻게 느껴지겠는가. 자신이 마음을 주었다는 것만으로 그가 불이익을 받는 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감히 상상이 안 갔다.

“노력이야 해 보겠지만 마냥 좋은 일이 될 거란 장담은 못해. 미안하군.”

“입 발린 거짓말보다는 낫네요.”

정말이었다.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못 믿을 장담을 하는 것보단 이렇게 솔직한 게 나았다.

“그래도 기왕이면 좋은 면만 보고 싶……. 전하!”

가스트로가 불쑥 라디아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퍽 느릿하고 유혹적인 몸짓이, 담백한 인사와는 천지차이였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흘끔대던 사람들 여기저기에서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전하, 이, 이건…….”

“뭐 어떤가? 그대는 내 사람인데.”

라디아타는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빨갛게 익어 말을 잇지 못하는데, 가스트로는 아무렇지 않게 씩 웃었다. 그리곤 자신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보란 듯 어깨를 폈다.

“타우레드 후작영애는 오늘부로 나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기로 했으니, 혹시 브란젤의 황금장미를 연모하는 사내가 있거든 부디 마음을 접어주었으면 좋겠군.”

오, 드디어! 전하, 약혼은 언제 하십니까? 전하, 저는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사방에서 말을 얹었다. 라디아타는 몰려드는 시선을 다 감당치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기에 벼락이라도 떨어졌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라디아타에게는 아쉽게도, 별이 총총하니 맑은 날이었다.

괴물 출몰은 끝났지만 치안대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주민이 사라져 텅 비어버린 구역을 돌보고 범죄를 막고 물자 사재기를 단속했다. 울며불며 가족을 찾는 사람들을 받아주는 것도, 브란젤을 떠나고 싶어 눈치를 보는 귀족가를 돌며 왕실의 경고를 전달하는 것도 치안대의 일이었다.

“안 간다고 하지 않았소! 내가 브란젤을 뜰 거였으면 수확제 마지막 날의 무도회에 참석하지도 않았소! 내 방문기록이 왕궁에 남아 있을 텐데 치안대가 찾아오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예, 이건 의례적인 방문입니다. 그러니 그리 화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러오? 나는 단지, 카즈네 공작각하께서 우리 가문의 충정을 의심한 게 속이 상하여…….”

예, 예, 알겠습니다. 예. 유렌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명단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이나 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지라, 그가 뭐라고 떠들어대든 그저 지겨울 뿐이었다.

꽥꽥 소리를 지르던 귀족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고, 유렌은 입 닫고 멍하니 서 있는 피올을 낚아채 저택을 나왔다.

“야, 너 지금 나한테 항의하냐?”

“내가 뭘.”

“내가 뭘? 내가 뭐얼? 내가 뭘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래, 통지문 읽기를 나한테 다 떠넘긴 건 그렇다 쳐! 뒤에서 욕 좀 처먹어도 귀족나리들 펄펄 뛰는 거 코앞에서 구경하고 재밌지! 한데 네 태도가 그게 뭐야? 짝다리를 짚고 서서 세상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내가 그랬나?”

“그으랬나아? 그으랬나아? 그랬다! 그랬다, 인마! 네가 그 꼴로 서 있으니까 나까지 같이 업신여기잖아! 어깨 좀 펴고, 고개 좀 들고, 자세를 잘 잡고……!”

유렌이 오지랖과 걱정이 섞인 태도로 훈수를 두었다. 하나 피올은 만사 귀찮았다. 부상자의 몸으로 괴물을 열심히 사냥해 줬으면 됐지, 이렇게 뒤처리에까지 사람을 동원하다니 하여간 양심도 없었다.

“벼락이나 맞아라.”

“그래, 그렇게 행동이 불량한 놈은 벼락이나…… 야, 그거 방금 나한테 한 말이냐?”

“딱히 너한테 한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포함될 수는 있겠지. 쉬어야 한다는 부상자를 두 번이나 끌어낸 분들은 벼락이나 맞고 뒈지셨으면 좋겠다, 싶거든.”

피올을 추궁하던 유렌의 낯빛이 얼음처럼 굳었다. 피올을 굳이 현장으로 불러낸 사람 중에는 유렌도 끼어 있었고, 그걸 피올도 알았다. 피올은 ‘어쩌면’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정말로 ‘어쩌면’이겠는가.

“이 새끼가……. 야, 네가 중간에 제멋대로 빠졌던 거 내가 수습해 주느라 불러낸 거 몰라?”

“그건 레이디 헨젤을 호위하러…….”

“그래서 레이디 헨젤을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긴 했어? 중간에 놓쳤잖아, 자식아! 헨젤 공자는 그 가문의 기사가 모셔갔고, 레이디 헨젤은 벨키스 경이 데려다 드렸는데! 시작을 네가 했으면 끝도 네가 냈어야지!”

“…….”

“내가 예전에 그랬지. 사고는 감당 가능한 수준에서 치라고. 네놈 출신이 좋은 것도 알겠고 실력이 대단한 것도 알겠는데, 그게 널 언제까지나 지켜주진 않는다고 했지.”

“…….”

“피올 보티안. 네가 부상자라는 걸 몰라서 위에서 널 끌어낸 줄 알아? 네가 인간형으로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괴물의 존재를 알리기라도 했으니까 이 정도로 끝나는 거야.”

“징계 대신이라는 건가.”

“그래, 이 멍청한 새끼야. 그러니까 좀 성실하게 굴어라. 그래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거 아냐. 한때는 나도 징그러울 정도로 일하더니만, 요새 왜 이래? 다친 게 다리가 아니라 머리통이냐?”

유렌은 고개를 푹 숙인 피올의 머리통을 콱 쥐어박았다. 기분 나빠할 만한데도 피올은 별 반항이 없었다. 그 순순한 태도가 어딘지 기분이 나빴다.

“……너 뭔가 꾸미고 있지.”

“내가 뭘?”

“그놈의 내가 뭘……. 암만 봐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눈인데, 뭔 속셈으로 그렇게……. 아항, 알겠다.”

짐작 가는 게 있어 명단을 후루룩 훑었다.

“역시. 그웬 백작가가 우리 담당이었네?”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네.”

“네가 성질에도 안 맞는 멍청한 게으름뱅이 흉내를 낼 정도로 그웬 백작가가 가기 싫었나 본데……. 네이기스 아가씨한테 뭐 죄라도 지었냐?”

“죄는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래? 생사람 잡지 마.”

피올은 딱 잘라 부정했다. 하지만 유렌은 이미 느물느물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멱살을 잡아서 마구 구겨진 피올의 옷깃을 빳빳하게 폈다. 피올이 질색을 하는데도 손길에 아주 거리낌이 없다.

“아니, 네가 다리를 다쳤던 그 화재사건 이후에 그 아가씨가 집으로 돌아갔잖냐. 하는 거 봐서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안 갈 것 같더니……. 혹시 네가 돌아가라고 하기라도 했어?”

“머릿속이 어떻게 생겨먹어야 그리로 생각이 튀는 건데?”

“아주 합리적이고 직관적으로 생겨먹었지.”

“아주 뒤죽박죽으로 생겨먹었군.”

“그래, 그 뒤죽박죽인데 합리적이고 직관적으로 생긴 머리통을 가진 사람이 말하는데, 그웬 백작가에는 네가 혼자 가는 게 좋겠다.”

“뭐? 미쳤어? 이거 징계 대신이라며 어떻게 혼자 다녀?”

“하하, 피올. 세상을 어떻게 원칙대로만 사냐? 적당히 꼼수도 쓰고, 요령도 피우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귀족나리들 발작하는 거 보니까 여길 둘이서 다 돌다가는 끝이 없겠더라. 따로 가자! 난 다음 곳부터 갈게!”

뭐라는 거야 저 미친놈이. 유렌은 피올이 욕을 퍼붓기 전에 잽싸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피올은 얼결에 떠맡은 명단을 손에 쥐고 이를 득득 갈았지만 단지 그것뿐으로, 유렌을 쫓아가지는 못했다.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염병……. 세상에 이런 등신새끼가 있나.’

피올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순히 그웬 백작가로 가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센네페르 그웬 백작에게 브란젤에 얌전히 머물러 있을 것을 통보했다. 그는 예상보다 침착한 표정을 짓고 통보를 받아들였다.

“나는 집에 있을 거요.”

“예. 하지만 백작님 말고 다른 분들은 좀 다르겠죠.”

“설마 아내와 자식들도 브란젤을 나가면 안 된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혹 몰래 빼돌리려는 시도를 하다 적발되면 그때는 상당한 수준의 처벌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피올은 환영받는 손님이 아니었다. 집주인인 센네페르는 물론이고 지나다니는 고용인조차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치안대원이 불쾌한 소식을 전하고 다니더라는 소식이 벌써 퍼졌나 싶을 정도였다.

‘역시 유렌 녀석을 잡아왔어야 했어.’

가시방석에 앉은 듯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센네페르가 화를 내고 자신의 충성을 과시하기라도 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그는 너무 차분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요?”

“네.”

“하지만 타우레드는 예외고?”

“저는 일개 치안대원이라 세부적인 시행사항까지는 모릅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따로 카즈네 공작각하께 확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센네페르의 시선이 피올에게 오래오래 머물렀다.

“……그렇군. 이런, 손님이 왔는데 차 한 잔도 내오질 않다니……. 보티안 씨, 미안하오. 대접이 엉망이군. 바로 가져오게 하리다.”

“괜찮습니다. 다른 곳에도 말을 전해야 하니 이만 가야 합니다.”

피올은 서둘러 일어섰다. 지금 이 자리에서 차를 얻어 마셨다간 꼼짝없이 체해서 앓아누울 것만 같았다. 다리도 아파 죽겠는데 배앓이까지 하면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사람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차를 내온 사람이 네이기스였다. 센네페르는 재차 권했고, 피올은 도로 주저앉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고삐 잡힌 말처럼 순순히 네이기스가 권하는 차를 받았다. 입술에 닿는 향기가 몹시 부드럽고 달콤했지만 피올은 확신했다. 이거 이대로 얹힌다.

네이기스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피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센네페르가 집요할 정도로 피올을 뜯어보았다. 만약 그의 눈길에 칼이 달려 있었다면, 피올은 지금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고깃덩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보티안 씨, 차 한잔하자 먼저 청했던 말이 우습긴 하지만, 난 당장 나가보아야겠소.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어서……. 대신 내 딸이 말상대를 해줄 테니, 천천히 마시고 가시오.”

피올은 당황해 함께 일어서려 했지만, 센네페르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예의를 따져 가며 차 대접을 하겠다던 사람치고는 참 이상한 태도였다. 갑자기 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며 손님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뜨다니 말이다.

“이것 참…….”

반쯤 일어섰다가 도로 주저앉은 남자와, 먼저 넣은 설탕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계속 설탕을 떠 넣는 여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몹시 어색했다.

“그웬 영애, 그렇게 설탕을 넣다간 입에 대지도 못하게 될 겁니다.”

“……네? 네, 네! ……윽!”

네이기스는 황급히 스푼을 내려놓고 차를 마셨다가 한 모금을 간신히 넘기고 도로 내려놓았다. 설탕물인지 차인지 모르게 달았다. 피올은 웃었고 네이기스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네이기스의 부끄러움이야 어찌됐든, 덕분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그리 나쁘기만 한 것 같진 않군요.”

“아……. 그, 그게…….”

“잘 지내고 계신 듯해서 안심입니다.”

“……그렇게 보이나요?”

“아닙니까?”

“아, 아뇨……. 맞아요, 아버지와는 나름 잘 지내고 있어요. 오라버니와 동생과의 관계도 좋고…….”

좀 전까지 발랄하게 웃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도 없이 어두운 그늘이 졌다. 삽시간에 얼굴이 우중충해지는 게,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다.

피올은 뽀얗고 예쁜 네이기스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가 저택에 있는 동안 네이기스의 손은 그리 고운 적이 없었다. 손톱 아래 살에는 물감이 배어 있었고, 독한 물감 때문에 손끝이 터지고 갈라져 피가 맺힌 적도 부지기수였다. 감추려 장갑을 끼고 다녔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저러다 손이 아주 흉해지겠구나 싶어 안타까울 적도 많았는데, 그걸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예전으로 돌려놓다니 그웬가 하녀들의 솜씨가 아주 대단했다. 네이기스가 더는 물감에 손을 대지 않으니까 가능한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역시 그림은 못 그리는 건가. 어머니와는 사이가 안 좋은 것 같고…….’

네이기스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녀가 계속 그웬가 바깥을 돌다가 혹시나 광장의 소란에 휩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선뜩해지는데.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무사하니 그걸로 충분했다.

“다행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물론입니다. 광장에서 벌어진 난리에 대해서는 들으셨지요? 괴물이 브란젤 한복판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셨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건…… 그렇네요. 네……. 제가 이 집에 있지 않았더라면, 축제의 현장을 느껴보겠다고 뛰쳐나갔을 테니까요. 네, 분명 그랬겠죠…….”

찻잔을 쥔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몸은 멀쩡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게 눈에 뻔히 보이건만, 피올은 그를 외면했다.

“무사하셔서 기쁩니다.”

“저도 보티안 씨께서 무사하셔서 기뻐요. 다리는 이제 많이 나으셨나요?”

“제 다리야 항상 멀쩡하지요.”

“들었어요. 그날에…… 화상을 입으셨다고요.”

“다 나았습니다. 아니었다면 지금쯤 침대에 누워 있지,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겠습니까?”

피올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 거짓말의 결과로, 그는 네이기스가 자리를 파할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에게 절룩대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타우레드 후작가는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본가로의 복귀를 선택했다. 브란젤을 떠나지 말라는 경고가 노골적인 와중에 내려진 결정이라, 여기저기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공신 가문이라도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거였다.

“왕자전하 약혼녀가 좋긴 좋네요. 이런 간 큰 짓을 해도 조용하고. 약혼식도 아직인데 감싸는 게 무슨 왕자비 같네요.”

“이디케, 그런 식으로 조롱하지 마. 라디아타가 이럴 줄 알고 왕자전하 구애를 받아들인 게 아니잖아. 알면서 왜 그래.”

“아, 알죠. 알기야 알죠. 그냥 질투나서 그래요. 레이디 타우레드께 앞날을 내다보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겠어요?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요. 왜 아가씨도 같이 가자는 건데요!”

“약혼녀라 그렇다잖아. 전통이라는데.”

“약혼반지도 안 나눠 꼈는데 약혼녀는 개뿔!”

오드리는 다시 악악대기 시작한 이디케를 외면하고 편지지를 만지작댔다. 후계자의 약혼녀로서 의무를 다하라는 글귀가 정갈하고 단정했다. 아직 반지 교환도 하지 않은 구두 약혼녀를 참 성실히 대한다 싶다가도, 이렇게까지 해가며 굳이 자신을 불러내는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라비린의 짓인가?’

시계탑에서 유난스럽게 셰비언을 경계하며 싫어하던 걸 떠올리니 자연스레 생각이 그리로 흘렀다. 들키지 않으려고 그리 애를 썼는데, 어떻게든 티가 나긴 난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예전부터 셰비언을 싫어했다. 입맛이 썼다.

“아가씨, 설마 응하실 건 아니죠? 이런 식으로 굴다간 아무리 타우레드라도 국왕전하의 눈 밖에 날 거라고요. 아가씨는 아직 반지도 못 받았는데 같이 끼어서 미움 살 필요 없잖아요.”

“미움은 이미 샀어.”

“네? 아가씨가 뭘 했다고 국왕전하께 미움을 사요?”

“로렐라이를 지켰잖아.”

“아……. 그게 문제가 될까요? 애초부터 로렐라이는 아가씨가 만들고 키운 상단인데…….”

“누가 만들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전하께서 원하실 때 내가 내놓지 않은 게 문제지.”

오드리는 손가락을 튕기며 생각을 거듭했다. 타우레드의 부름에 응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장단이 뚜렷했다.

‘타우레드의 그늘 좋지. 좋은데……. 자칫하다간 타우레드에 질질 끌려 다니는 수가 있어. 역시 거절하는 게 낫겠지.’

오드리와 라비린은 아직 약혼식을 치르지 않았다. 아무리 오스미다 왕비가 축사를 해줬다지만 손가락이 비어 있는 이상 핑계를 대려면 못 댈 것도 없었다. 타우레드도 그를 알고 있을 테니, 오드리는 부담 없이 거절 편지를 작성했다.

그러나 답장을 보내기 전, 헨젤 백작에게서 호출이 왔다. 며칠 내도록 퇴근도 못하고 일만 하더니만 돌아오자마자 오드리를 찾는다는 거였다. 불길한 예감이 등을 타고 흘렀고, 오드리는 봉투에 넣었던 편지지를 도로 꺼냈다.

“아가씨?”

“보내지 말고 보관만 해둬.”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아버지이지만, 그의 능력만은 인정하는 바였다. 하델과 카프러스를 붙들고 입막음을 단단히 해뒀지만 그가 그들의 입을 여는 데 성공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헨젤 백작은 카프러스에겐 모셔야 할 주인이었고, 하델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보호자였다.

‘설마 광장에서의 일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집안을 정돈하는 동안 흐려졌던 경계심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드리는 라비린, 피올과 입을 맞춰 외워두었던 변명을 곱씹으며 복도를 걸었다. 말이 틀리면 안 되니까. 하나 오드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만탈락에 가 있어라.”

“……네?”

언제는 만탈락에 보내기 싫어 이 핑계 저 핑계 안 대는 게 없더니, 이게 무슨 말인지. 오드리는 자신이 몹시 멍청해 보일 걸 알면서도 반문했다.

“왜요?”

“타우레드에서 편지를 받았을 텐데? 아직 반지도 주고받지 않았는데 괜히 끼어서 피 보지 말고 만탈락에 가 있으란 말이다.”

“그건 어떻게 알고…….”

“나한테 그 정도 귀도 없는 줄 아느냐? 설마 마법사가 괴물을 잡을 때 내리친 벼락에 맞기라도 했느냐?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

“설마 그럴 리가요. 그저 너무 낯설어서 그러죠. 아버님은 제가 만탈락에 가는 걸 싫어하셨잖아요.”

“명분에는 명분으로 대응해야 하는 법이다. 전통을 들고 나왔으니 이쪽은 네가 한 도시의 주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지. 국왕전하 앞에서 헛소리를 해댈 땐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했는데……. 이렇게라도 써먹으니 다행이구나. 당장 준비해라.”

“아니, 그건 저도 알아요.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왜?”

헨젤 백작이 미약하게나마 짜증을 내비쳤다.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뛰었다.

“왜 갑자기 절 만탈락으로 보내려고 하시냐고요. 절 요양 보내려고 하실 때에도 만탈락이 아니라 북부의 별장을 말씀하시던 분이 만탈락 얘길 꺼내시니까 이상하잖아요.”

“같은 말 두 번 하게 만들지 마라. 딱 들어맞는 명분이 있는데 써먹지 않을 이유도 없잖느냐.”

“명분이 문제라면 굳이 만탈락까지 갈 필요도 없는데요? 반지를 받은 것도 아닌데 약혼녀의 의무를 수행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고만 하면 되잖아요. 제가 브란젤에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

“오드리! 지금 남들은 자식을 브란젤 밖으로 빼내지 못해 안달인데, 넌 기회를 만들어줬는데도 왜 그리 말이 많은 거냐? 가라면 가! 이런 시국에 브란젤에 남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생각을 좀 해라!”

헨젤 백작의 고함을 정면에서 듣자 숨이 턱 막혔다.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귀를 메우고 입을 막았다. 잘만 움직이던 입술이 아교라도 바른 듯 떨어지질 않았다.

오드리는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어차피 타우레드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대문 밖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자신을 쫓아오던 괴물에 대한 기억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반면 만탈락에는 자신을 길러준 락시 부인이 있는 데다, 눈치 보지 않고 로렐라이를 돌보기도 쉬웠다.

하지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커다란 돌이 가슴에 얹힌 듯 갑갑했다.

“……하델은요?”

“하델은 왜?”

“아버님 말씀대로 브란젤은 위험하죠. 그럼 제가 아니라 하델부터 빼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너 하나 빼내는 것도 힘들었다. 타우레드가 웬일로 헛발질을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너도 브란젤에 발이 묶였어. 타우레드의 억지에 휘둘릴 생각은 꿈에도 마라.”

“아버님, 하델은요? 브란젤이 위험한 건 하델도 마찬가지잖아요. 마침 남부의 영지에 대리인만 보내놓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슬슬 본가의 사람이 갈 때도 되었죠. 하델을 보내시는 게 어때요?”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런 변명이 통했으면 브란젤에 묶여 있을 귀족이 하나도 없어! 오드리, 너 하나도 힘들었다는 말이 거짓말로 들리기라도 하는 거냐?”

“제가 만탈락에 가지 않아도 타우레드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어요. 그런데도 절 굳이 브란젤에서 떨어뜨려 놓으려 하시니, 브란젤이 그리 위험한데 하델은 어떻게 되는 건가 궁금해져서요.”

앵무새처럼 하델의 이름을 외는 오드리의 태도가 헨젤 백작의 성질을 건드렸다. 하델이 브란젤에서 움직일 수 없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도 않으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타우레드가 국왕전하의 심기를 거스를 걸 알면서 본가로 돌아가는 것처럼 헨젤은 이 집을 지켜야 한다. 그 애는 헨젤의 후계자야. 왕실이 피난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여기 있어야 해.”

“…….”

“이 말이 듣고 싶어서 계속 하델을 걸고넘어진 게 아니었느냐? 왜 그런 표정이야? 하델이 그리 걱정이 되느냐? 하여간 희한하기도 하지. 같이 자란 것도 아닌데 너희는 이상하리만치 서로에게 살가워.”

이국의 낯선 생물을 보는 듯 관찰하는 시선이 오드리를 훑었다. 하나 그의 짐작과는 달리, 오드리는 하델의 걱정을 하는 게 아니었다. 헨젤이라면 마땅히 이 집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을 뿐이었다.

‘나는 헨젤이 아닌가?’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뭔 일을 하든 꼬박꼬박 너는 헨젤이라며 가문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더니, 이럴 때는 후계자에게 방해가 된다며 멀리 치워놓으려 든다. 가슴에 얹혔던 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이 기분 낯설지 않은데……. 아, 그래. 만탈락으로 쫓겨 가던 날에도 딱 이런 기분이었어. 기억났다.’

헨젤 백작은 고개를 푹 숙인 오드리가 얌전해졌다고만 여겼다. 예전에 그랬듯이 약간 반항하긴 했어도 자신의 야단에 금세 기가 죽었다고. 그는 짐짓 누그러진 표정을 짓고 오드리의 머리에 살짝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그래도 하델을 광장에서 따로 돌려보낸 건 아주 잘했다. 애초 데리고 나가지 않는 쪽이 가장 좋았겠지만, 이미 나간 상황에서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다.”

어린 시절의 오드리가 그토록 바라던 칭찬이었다. 만탈락의 사탕처럼 다디달 게 분명한 인정의 말인데, 오드리는 이상하리만치 감흥이 없는 자신에게 몹시 놀라고 말았다. 기쁘거나 가슴이 벅차오르기는커녕, 가슴에 얹혔던 돌이 불길이 되어 목을 태웠다.

“만탈락에 남겨둔 수족들은 제가 없어도 잘할 거예요.”

“……수하를 믿는 거야 좋지만……. 그래서 브란젤에 남겠다는 거냐? 웬만하면 돌아가는 쪽이,”

“그건 아니고요. 전통의 이름으로 성실하게 초대장을 보냈으니 그에 응해볼까 하고요.”

헨젤 백작의 표정이 얼음처럼 싸늘하게 굳었다. 오드리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도 멀어졌다.

그래도 오드리는 괜찮았다. 두려워 몸이 떨리지도 않았고, 심장이 마구 뛰지도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검은 피에 젖은 피올의 뒤를 따를 때가 더 긴장됐고, 탑을 기어오르는 괴물에게 세제를 부을 때가 더 가슴이 뛰었다. 헨젤 백작의 존재감이 어깨를 짓누르기는 해도, 머리가 세 개나 달렸던 괴물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드리는 웃는 낯으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이대로 만탈락으로 갔다가 비겁하게 도망쳤단 말을 들으면 그게 더 분할 것 같아요.”

“오드리!”

“기껏 평판이 좋아졌는데 이런 걸로 날려먹기엔 조금 아쉽잖아요?”

온기 없는 회색 눈에 분노가 어렸다. 오드리는 헨젤 백작이 다시는 손을 내밀지 않을 걸 알았다. 하나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 안달하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난 것이다.

지금은 저 회색 눈에 불을 지른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무엇보다 만족스러웠다. 그에게 분노를 일으킬 만한 대상은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져졌지?”

“에이……. 오래전 일이라 아버지는 까맣게 잊으셨나 본데, 저는 본래 이랬어요. 주제도 분수도 모르는 딸이라 만탈락에 보내셨던 거잖아요? 새삼 그리 놀라시면 안 되죠.”

“라비린인가 뭔가 하는 놈을 믿고 그따위로 구는 거냐? 아니면, 왕비전하?”

오드리는 구겨진 치맛자락을 착착 털어 정리했다. 말을 섞을수록 확실해졌다. 헨젤 백작은 자신에게 어떤 감정적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본래 이랬다니까요.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실까. 하여간 아버님,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리 멀지 않다고는 해도 준비를 하려면 지금부터 바쁘거든요.”

“짐은 넉넉하게 싸라. 그래야 만탈락까지 편안히 가지. 기차 좌석은 일등석으로 잡아주마.”

브란젤에서 타우레드의 본가까지는 기차가 다니지 않았다. 헨젤 백작은 오드리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것이다. 고함을 눌러 참은 오드리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그녀는 저를 안내하려는 집사를 밀쳐 내고 제 손으로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기차표 따위는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떠나드리죠. 할아범, 기차표 같은 거 들이밀기만 해 봐. 내가 만탈락에서 얼마나 말썽쟁이였는지 직접 체험하게 해주지. 거기 너희들,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마. 얼굴도 이름도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오드리를 제압하려 다가오던 고용인들이 주춤 물러섰다. 그들의 월급은 헨젤 가문에서 나오지만 해고와 추천서 작성 여부는 오드리의 손에 달려 있었다. 오드리는 망설이는 고용인들 사이를 뚫고 제가 머무는 서관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이디케! 다이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뛰쳐나온 하녀들이 오드리의 어깨에 얇은 여름 외투를 걸쳐 주고 외출용 모자를 씌웠다. 그것만으로도 바깥나들이를 할 만한 차림이 됐다.

“아가씨, 마차 준비해 뒀어요. 저는 전보 때문에 못 따라가지만 다이앤이 따를 거예요.”

“급한 짐만 쌌어요. 다른 건 릴리가 보내줄 거예요.”

“릴리는 지금 어디 있는데?”

“릴리는 본관의 고용인들을 포섭하느라 여기 못 왔어요.”

소리를 질러가며 하녀들을 불렀던 오드리마저 깜짝 놀랄 정도의 반응속도였다.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이런 걸 다 준비한 거야?”

“어휴, 우리가 아가씨 한두 해 봐요? 그렇게 전투적인 얼굴을 하고 나가셨는데 일이 잘 끝나면 그게 더 신기하죠. 혹시나 저희가 잘못 짚은 거면 빨리 말씀해 주세요. 얼른 수습하게.”

“이디케, 네 기민함에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걸. 수습할 필요 없어, 이대로 갈 거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도 전보 관리 잘하고 있어.”

“아, 정말이지……. 그놈의 전보. 아가씨의 수행은 제 일인데 요샌 자꾸만 다이앤에게 빼앗기네요. 다이앤, 잘 부탁해.”

“너 없는 동안에도 잘했어. 새삼 걱정은. 아가씨, 타우레드의 본가로 가시는 거죠? 아니면 만탈락으로?”

“타우레드의 본가로 가자. 자, 빨리, 빨리!”

이디케는 헨젤 백작의 입김이 닿는 가문의 마차가 아니라 외부의 마차를 불러두었다. 지붕 없는 마차에 갈색 말 두 마리가 매여 있었다. 마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출발하기를 저어했지만, 오드리가 워낙 강경하게 나가니 주춤대면서도 마편을 쥐었다.

“아가씨, 뭔 일이 생겨도 제 탓은 아닙니다! 예?”

“알겠으니까 출발이나 하게. 채찍을 입으로 휘두를 건가?”

“예, 예. 그럼 바로 출발…….”

“누나!”

막 마편을 휘두르려던 마부가 기겁을 하고 손을 거뒀다. 겁도 없이 마차 앞에 뛰어든 하델은 꽤 절박한 표정으로 마차에 달라붙었다.

“누나, 왜 이렇게 떠나요? 브란젤에 계속 있어도 되는 건데, 대체 왜요?”

오드리는 하델이 이렇게나 빨리 사태를 알아차리고 달려왔다는 것에 몹시 놀랐다. 제 눈치를 보느라 주춤대던 고용인들 사이에 하델을 우선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 당연히 있겠지……. 어차피 후계자는 하델이니까.’

하델은 그냥 태어났을 뿐이었다. 아이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장자로 태어나 후계자의 자리를 얻고, 그 미래에 자신을 건 수하의 충성을 받고. 이 모든 건 하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를 잘 알면서도 심사가 뒤틀렸다.

“만탈락에 가는 게 별로면 그냥 브란젤에 있어요. 네? 벨키스 경보다 내가 누나를 더 잘 지켜줄 수 있어요. 누나도 내가 누나의 기사 같다고 했잖아요.”

“하델.”

몸을 홱 밖으로 기울이고 손을 뻗어 하델의 옷깃을 쥐고 눈을 맞췄다. 지붕 없는 마차라 가능한 묘기였다. 하델이 상기된 얼굴로 발끝을 세웠다.

“내가 이렇게 떠나는 건, 너 때문이다.”

하델의 눈이 커다래졌다. 뚜렷하게 느껴지는 적의에 연둣빛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네가 사랑스럽지만, 동시에 미워. 어머니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널 사랑하려고 이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누, 누나?”

“돌아가. 날 지켜준다며? 지금 이렇게 날 잡는 것도 방해야.”

오드리는 거의 내던지다시피 하델을 밀쳐 냈다. 하델이 위험하게 매달려 있어 안절부절못하고 둘을 바라보던 하인이 달려들어 하델을 받아냈다. 오드리는 그들의 시선이 곧바로 자신을 향하는 걸 보았다. 서늘한 위기감이 목 뒤를 타고 흘렀다.

“뭐 하고 있나? 당장 출발해!”

“예, 예!”

오드리의 고함에 놀란 마부는 당장 마차를 출발시켰다. 채 한 블록 가기도 전에 후회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멈추기엔 늦어서,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계속 말을 몰았다. 타우레드의 저택까지 가는 짧은 길이 하염없이 길었다.

지붕 없는 마차에 햇살이 쏟아졌다. 아까부터 입을 삐죽대던 다이앤이 양산을 펴 오드리의 머리 위에 씌웠다. 오드리는 양산이 만들어낸 그늘에 폭 파묻혔다. 그녀의 옷자락에 레이스 무늬 구멍이 생겼다.

“아가씨……. 도련님의 잘못이 아닌 걸 아시면서, 왜 그러셨어요?”

“몰라서 묻니. 질투나서 그랬지.”

오드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다이앤이 뺨을 부풀렸지만 다른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질투가 맞았으니까.

“그보다 그 말이 이디케가 아니라 너에게서 나왔다는 게 놀랍구나. 넌 하델을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딱히 도련님을 좋아해서 여쭌 말은 아니에요. 그저 아가씨답지 않게 치졸하게 구신 게 이상해서 여쭤본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열두 살 어린애라 귀엽다고 하셨잖아요.”

“누가 들으면 귀여워하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미운 마음만 남은 줄 알겠어. 사람 마음이 어디 한 가지 면만 있다던? 사랑스럽고, 밉고, 그러면서도 귀엽고 안쓰럽고 그런 게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다이앤의 얼굴에 스물스물 웃음기가 올라왔다. 한손으로 입가를 가리긴 했지만, 눈가에 웃음이 가득해서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세상에, 정말 질투였군요? 아가씨도 열일곱 살이긴 했네요……. 하긴, 열일곱이면 아직 소녀죠.”

“시끄러워.”

“네, 방금 하신 말씀은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약속의 신 하티의 이름 앞에 맹세해요!”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냥 조용히 하기나 해.”

연달아 타박을 놓고 나서야 마차가 조용해졌다. 오드리는 귓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하델은 알아들었을까?’

오드리는 무심결에 쓴웃음을 지었다. 차근차근 설명해 줘도 모자랄 것을, 속에서 끓는 화를 그냥 쏟아붓고 나왔으니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꼭꼭 눌러두었던 미움을 훤히 까발리기까지 했으니, 이제까지 차근차근 쌓아온 신뢰가 모조리 깨진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나 별로 후회되지 않았다. 열두 살짜리 어린애, 그것도 자신에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겹쳐 보는 동생에게 쓸데없는 화풀이를 했다는 자각이 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니, 다이앤의 말대로 자신 역시 아직은 어린애인 모양이었다.

오드리의 예상은 거의 그대로 들어맞았다. 하델은 오드리가 보인 미움이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둘은 사이좋은 오누이였고, 서로를 애틋하게 여겼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새카만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괴물이 두드려 대는 문을 함께 막았던 기억은 강렬했다.

하델은 오드리에게 실망하기 전에 헨젤 백작부터 찾았다. 그녀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일 때는 백이면 백 헨젤 백작과 충돌한 다음이었다.

하지만 헨젤 백작은 하델을 상대할 틈이 없었다. 그는 오드리가 타우레드 영지에 접어들기 전에 데려올 계획을 세워야 했고, 멋대로 뛰쳐나간 오드리를 맥없이 놓친, 혹은 놓아준 걸로 보이는 고용인들을 야단치느라 바빴다. 아무리 오드리가 살림을 맡았다지만 명령의 우선순위를 헷갈리는 게 말이 되느냐며 말이다.

“네 이야기는 이따 저녁 때 들으마. 지금은 네 누나의 일을 처리하기도 급하구나.”

서늘한 손길이 하델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하델은 차마 더 붙들고 늘어지지 못하고 물러섰다. 그래도 저녁때가 되면 시간을 내줄 거라 믿고 기다렸는데, 해가 질 무렵에 다시 찾아간 그에게 전해진 건 헨젤 백작이 다시 왕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도련님. 요즘 백작님이 너무 바빠서 그런 것이니, 이해하시지요.”

“할아범…….”

“네, 도련님. 말씀하시죠. 제가 듣고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집사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하델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잔뜩 풀이 죽은 듯 어깨를 늘어뜨린 어린 도련님이 안쓰러웠다. 하나 숙였던 고개를 도로 치켜든 하델은 불이 이글대는 눈을 하고 있었다.

“누나가 집을 박차고 나갈 거란 말은 마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내 귀에 들어왔는데, 내게 저녁 약속을 해주신 아버지가 왕궁으로 다시 출근하셨다는 말은 왜 전해지지 않은 거지?”

“그야 백작님께서는 이 집의 주인이시며 도련님의 윗분이시니까요. 아가씨와는 경우가 다르지요.”

“나는……!”

“아직 후계자이시죠. 도련님, 속상해하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헨젤을 위한 것입니다. 언젠가는 도련님께서 물려받을 가문이니, 결국 도련님을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궤변이야!”

“사실이지요. 오드리 아가씨의 일에는 도련님께서 그리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인님이 계신데요. 아무렴, 그분도 헨젤인데 안 좋은 일에 휘말리게 두실 리가 없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었으면 누나가 아플 때 의사를 더 불렀겠지. 할아범, 아버지는 누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

“도련님……. 주인님께서는 오드리 아가씨를 위해서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저택에 돌아오셨습니다.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약간 다른 것뿐이지, 아가씨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거나 한 건 아닙니다.”

집사가 하도 단호하게 나오는 통에 하델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자신보다야 집사가 아버지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겠다 납득하는 머리와는 달리, 가슴 한편 어딘가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럼 누나는 왜…….”

“도련님!”

하델이 아까 오드리가 속삭인 말을 꺼내려는 순간, 갈색 머리칼 여기저기에 흰 밀가루를 묻힌 알렉스가 나타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상상 못할 무례에 집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알렉스……!”

“할아버지, 야단은 이따가 맞을게요. 지금 제가 너무 급해서요! 도련님, 이리 오세요. 빨리요.”

알렉스는 막무가내로 하델을 끌고 사람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델은 벌겋게 달아오른 손목을 만지작대며 얼굴을 구겼다. 손목을 잡혀 끌려오다니, 알렉스가 아니었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거였다.

“뭔데? 무슨 일인데 이렇게 사람 없는 구석까지 끌고 들어와?”

“그……. 어휴. 그러니까…….”

“아, 왜 그러는데!”

“……도련님,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창밖에 내린 노을이 불타는 것처럼 붉었다. 아이보리색 벽지를 바른 벽에 기대서서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는 알렉스의 눈가에도 붉은 물이 들었다.

“알신다가 죽었대요.”

“뭐?”

“알신다가 집안일 하는 하녀를 하나 고용해서 쓰고 있던 거 아시죠? 그 하녀가 괴물이 되어서 알신다를 잡아먹었대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괴물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어.”

하델의 장담은 힘이 없었다. 애초 빈 가게의 문을 두들기고 오드리의 뒤를 쫓던 괴물들을 눈으로 보고도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만한 성품이 아니었다. 검은 피에 덮인 알신다를 상상하자마자 심장이 무섭게 뛰고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누가, 누가 네게 그런 걸 알려줬어?”

“주방 하녀들이 떠드는 걸 들었어요…….”

“거짓말이야.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던 알신다가 보이질 않으니까 그냥 도는 소문이야. 그런 거에 휘둘리면 어떡해!”

“하지만 얘기가 너무 구체적이었단 말예요. 알신다의 가족에게 연락을 해 보려고 했지만 영 소식이 닿질 않아서…… 하녀장님이 우리가 장례를 치러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얘길 했었대요.”

“……하녀장이?”

“네. 엄밀히 말하면 이제 헨젤가의 고용인이 아니니까 굳이 해줄 이유는 없지만, 오랫동안 일했는데 부랑자들이나 묻히는 묘지에 비석도 없이 묻히게 할 순 없다며……. 도련님!”

알렉스는 힘없이 주저앉은 하델을 부축해 일으켰다. 어떻게든 바로 세울 생각이었지만,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자마자 의욕이 꺾였다. 허겁지겁 위로의 말을 찾는 동안 알렉스의 눈에도 덩달아 눈물이 고였다.

“언젠 거짓말일 거라면서요…….”

“거, 거짓말 아니라고 한 건 너, 너잖아.”

“그야 그랬지만요. 더 구체적으로 알아올게요. 진정하세요.”

“응…….”

알렉스의 위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델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아 울었다.

하델이 괴물은 오드리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오드리와 알신다는 사이가 나빴으며, 오드리의 하녀 중 한 명은 약초와 독초를 잘 다룬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난 뒤, 알신다의 장례식장에서였다.

괴물에게 잡아먹혔다던 알신다의 시신은 장의사의 염습 솜씨가 하늘에 닿았나 싶게 깨끗했다.

* * *

타우레드 영지는 브란젤과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나 브란젤과는 달리 마법망이 굉장히 불안정한 지역이었고, 그에 따라 주변 환경이 몹시 뒤죽박죽인 곳이었다.

기본적으로 중부지역답게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였지만 저 멀리 시선을 돌리면 북부에서나 볼 법한 얼음산이 영지를 감싸고 있었다. 그 얼음산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물이 마르지 않는 강이 되어 영지를 관통해 흘렀다.

비가 오지 않아 가물었던 건 타우레드 영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산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이 있어 아주 죽을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수확량은 줄었어도 겨울을 버티고 내년을 기약할 정도는 됐다.

타우레드 영지를 먹여 살린 렘 강의 경치는 아주 훌륭했다. 산꼭대기의 찬바람을 품고 달려온 바람이 강변을 훑으면 빼곡하게 자라난 갈대가 몸을 부비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금빛 햇살이 물결에 부서지고 그 위를 오리 떼가 날아 지나갔다.

오드리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경치를 감상했다. 타우레드의 본가는 영지전에 대비해 지어진 게 틀림없는 요새 같은 건물이라, 창문이 연하장 카드처럼 작고 그나마 전망을 볼만한 곳은 오드리에겐 개방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갈대를 흔들고 올라온 바람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오드리의 곁에 서 있던 라비린은 자연스레 손을 뻗어 흩날리는 머리칼을 정돈했다. 매끄러운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겼다가 빠져나갔다. 그리 멀지도 않은 여름, 리가 항구에서는 꿈도 꿀 수 없던 일이었다.

“어때? 경치 좋지?”

“응. 꾸역꾸역 데리고 올라올 때는 아주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과연 올라올 만한 가치가 있는 경치야.”

“하하, 하하하……. 말이 너무 진심인데? 절반은 내가 너를 안고 올라왔잖아.”

“남은 절반은 내 발로 걸어 올라왔지. 구두 신고.”

“으음……. 흠, 흠.”

라비린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저택의 꼭대기 따위가 아니라, 전시에 보초병이 보초를 서는 탑 꼭대기였다. 브란젤의 시계탑 승강기 같은 마법도구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주제에 높기는 까마득하게 높았다.

“그래도 여길 보여주고 싶었어. 언젠가 네가 타우레드의 안주인이 되면 이 땅이 네 디딤돌이 되어줄 거야. 평생토록 널 지지하며 네가 쓰러지지 않게 받쳐 줄 거야.”

“……내가 타우레드의 안주인이 되면, 말이지…….”

“말투가 좀 불안한데……? 설마 여기까지 와서 무르고 싶은 건 아니지?”

오드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몇 번 헛손질을 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반지를 받기도 전에 본가에 온 나나, 내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면서 마차를 대기시키고 헨젤가의 추격을 저지한 너나……. 칼레이의 마차에 올라탄 영혼이야. 그만두기엔 늦었지. 그러니까 이런 짓은 이제 그만해도 돼.”

“이런 짓이라니?”

“모르는 척 하기는. 지금 하는 짓 말하는 거잖아. 새로 산 옷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 난 꼬맹이처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영지 구경시켜 주는 거.”

“크흠, 흠.”

“재미있기는 했어. 심심하진 않더라고. 그래도 말이야, 이 탑은 좀 무리수였어. 멋진 경치이긴 하지만, 이런 짓은 여기서 끝내자.”

“……응.”

대답은 잘 했지만, 라비린은 오드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오드리의 옅은 미소 아래에 자신은 짐작도 못할 뭔가가 큰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근거 없는 불안이었다.

“도망 안 가니까 그렇게 불안하게 보지 마.”

오드리가 손을 내밀었다. 라비린은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거절하지 않고 잡은 걸로 모자라 그녀를 덥석 안아들었다.

“뭐야!”

“슬슬 내려가야지. 발 아프다며? 이번엔 약혼자답게 마지막까지 안아서 옮겨줄게.”

“오~ 믿어도 돼?”

“못 믿을 건 또 뭔데? 넌 나만 믿고 있어. 1층에 갈 때까지 절대 안 내려놓을 거야.”

라비린은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오드리가 쿡쿡 웃으며 목에 팔을 감았다. 그녀의 팔이 닿은 곳에서부터 생겨난 열기가 심장을 달구고 머리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팔에 느껴지는 무게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확 묶어서 방에 가둬놓고 싶다.’

본가에 데려온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됐다. 가장 보드라운 비단으로 꽁꽁 싸매어 침대에 앉혀놓고 바깥 날씨도 모르게 가둬놓고 싶었다. 일탈을 꿈꾸게 만드는 저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만을 바라봐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친 생각인 건 알고 있었다. 실현하려는 시도라도 했다간 이 어설픈 관계조차 박살날 거라는 것도. 하지만 꿈꾸는 것까지 죄는 아니니, 라비린은 제 검은 속내를 깔끔하게 감추고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내 옆에 이렇게 있는데 불안하긴 무슨. 오드리, 내일은 렘 강에 가보지 않을래? 날씨도 좋겠다, 뱃놀이하기 좋은 시기야.”

“영지 구경은 그만 시켜줘도 된다니까.”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너 리가 항구에 있을 때도 뱃놀이는 한 번도 못 해 봤잖아.”

“됐다니까. 뱃놀이 같은 걸 시킬 거면 나 체술이나 가르쳐 줘. 기본만이라도 괜찮아.”

이게 벌써 몇 번째 듣는 말인지. 라비린은 진절머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귀족 영애가 체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렇게 심심해하면서 뱃놀이는 왜 싫다는 거야? 정 가만히 있으면서 시간 보내는 게 괴로우면 서재라도 가. 수도 저택의 도서관만은 못해도 나름 쓸 만한 것들로 잘 채워놨어.”

“심심? 누가 심심해서 같은 말을 계속하고 있는 건 줄 알아? 정말 필요하니까 하겠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너한테 그게 왜 필요하냐고. 내 보호가 못 미더워? 그때 팔 벤 게 그렇게 불만이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나중에 사과했잖아. 너도 그땐 이해한다고 해놓고 왜 갑자기 이러는데?”

“그런 일을 겪었으니까 나도 나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거라고. 널 탓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야.”

“그럴 일 없게 해준다고 하잖아!”

라비린의 고함이 탑의 계단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잖아, 하잖아, 하잖아……. 몇 번이고 메아리가 반복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오드리의 낯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내려줘.”

“마지막까지 안아다 준다고 했으니 그렇게 해야지. 얌전히 있어.”

“계단에서 굴러서 목 부러져 볼래?”

“오드리, 무슨 말을…….”

“내가 못할 것 같아? 말 실행에 옮기기 전에 당장 내려놔.”

라비린도 오드리도 서로를 노려보며 물러서지 않았다. 오래된 보초탑의 계단 통로는 경사가 급하고 폭이 좁았다. 만약 오드리가 작정하고 버둥거리기라도 하면 정말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구조였다.

침묵이 길어지는 가운데 오드리가 라비린의 어깨를 쥐고 발로 허공을 찼다. 라비린은 그 반동으로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아래 계단을 세게 디딘 왼발에서 찌릿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정말 구를 뻔했다는 걸 깨닫고 나자 등에서 땀이 솟았다.

“미친 거 아냐? 진짜 구를 뻔했잖아! 귀족 영애에게 체술 같은 건 가당치도 않다는 걸 알면서 왜 이래!”

“귀족 영애에게 가당찮은 짓만 골라 하면서 큰 게 나야! 이 가무잡잡한 피부, 초록색 머리카락! 로렐라이를 만든 지식과 작위에 대한 욕망! 거기에 체술이 더해지는 게 뭐 어때서!”

“너…….”

“미쳤냐고? 미쳤지, 그럼! 미치지 않고서야 사방에서 돌았다고 손가락질하는 걸 어떻게 버텨? 나 미친년이니까 이번에야말로 구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려놔!”

“젠장, 무슨 협박을 그 따위로 해?”

말로는 투덜거려도 라비린은 오드리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오드리를 내려놓았다. 오드리는 바닥에 발을 딛고 서자마자 냅다 라비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억!”

라비린은 정강이를 붙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예쁜 공예품에 불과한 구두의 파괴력에 치를 떨었다. 기름먹인 소가죽에 비단을 씌우고 보석으로 치장한 여성용 구두의 앞코가 이렇게 단단할 줄이야. 하도 아픈 나머지 말이 안 나왔다.

아파서 몸을 떠는 그를 앞에 두고 오드리는 태연하게 머리칼을 다시 정리하고 모자를 고쳐 썼다. 아까 라비린이 머리카락을 만지며 하도 아련한 표정을 짓기에 그냥 두었는데, 솔직히 말해 그의 손재주는 영 별로였다. 모자에 눌린 부분이 아팠다.

“내가 키가 컸으면 네 뺨을 때려줬을 텐데, 아쉬워.”

“큭……. 정강이로도 모자랄 정도로 내가 잘못했단 말야……? 대체 뭘? 난 네 약혼자고, 네 남편이 될 건데? 널 지키는 건 내 의무이자 권리가 될 거야. 너야말로 내 진심을 짓밟고 있는 거 알아?”

“내가 바로 그 보호를 받는 게 싫어서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던 걸 벌써 잊어버렸나 봐? 라비린, 세상에는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사람도 가끔 있어. 칼레이의 마차라고 못 뛰어내릴 건 아닌가 보더라고.”

“파혼이라도 하자는 거야, 지금?”

“네가 이런 식으로 굴면 할 수도 있다는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된다던 게 네가 내세운 결혼 조건 아니었어? 그걸 지금부터 깰 작정이 보이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널 믿고 결혼을 해?”

“왕비전하께서 축사를 해주신 약혼인데 그걸 깨겠다고?”

“그 축사를 해주시기 전에 나에게 직접 물으셨지. 꼭 약혼을 해야겠냐고 말이야. 이제 와 못하겠다고 해도 그냥 웃으며 넘기실걸. 아버님이야 뭐, 두 손 들고 환영하시겠지.”

라비린은 뻐근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심호흡을 했다. 정강이의 아픔은 이제 고통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결혼을 하고 옆에 두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매번 의견이 갈릴 때마다 이런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이 좁은 계단에는 셰비언도 없고 오드리와 자신 단둘뿐인데도 어째 시계탑에서 경험했던 비참한 소외감이 다시 찾아왔다.

“하……. 그놈의 체술이 대체 뭐라고…….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마음 넓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

오드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조롱에 가까운 감사인사에 열 받은 라비린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본래 그런 성격이었다. 일일이 남의 기분을 신경 쓰면서 어떻게 피부를 태우고 머리를 염색하며 궤도에서 벗어난 길을 걸었겠는가. 미친년 운운한 건 그저 화가 나서 내지른 말이었다.

“베텔 경이 없으니 네가 다른 기사를 좀 소개시켜 주면 좋겠어. 어차피 넌 날 가르쳐 줄 것 같지도 않고…….”

“난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어.”

“…….”

“내 상관없이 누가 널 가르칠까 싶긴 하지만, 잘 찾아봐. 하나쯤은 나오겠지.”

오드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여긴 타우레드의 본가였고 라비린은 타우레드의 후계자였다. 그의 방관을 무심히 넘길 기사는 한 명도 없을 게 분명했다. 저절로 이가 갈렸다.

“날 사랑한다며, 어떻게 이따위로 굴어?”

“너야말로 내 마음을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굴 수 있는 건데?”

라비린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길고 큰 그림자가 오드리를 덮었다. 벽에 매달린 마법등의 불빛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페즈날이 아무리 변덕스럽고 잔인해도 너만큼은 아닐 거야. 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조각배처럼 흔들리는 내가 보이지도 않아?”

“잔인한 건 너야, 라비린.”

오드리가 라비린보다 아래쪽 계단에 서 있었기 때문에, 체구가 작은 그녀는 한껏 목을 꺾고서야 라비린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뒤쪽에서 계단을 밝히는 마법등 때문에 자세한 표정은 보이지 않고 그저 검은 윤곽만 보였다.

“나더러 미쳤다 소리를 할 거면 날 이해해 주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인 척 굴지 말았어야지. 네가 사랑한다는 나는 그 미친 짓을 꾸준히 해온 결과물인데, 어떻게 과정은 빼먹고 결과만 가지려 들어?”

라비린은 파르르 화를 내는 오드리를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미쳤느냐는 식의 발언이 과했다는 건 알겠지만, 그만큼 오드리의 요구가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언쟁을 벌여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사과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오드리의 표정도 차가워졌다. 그녀는 갑갑한 듯 가슴께를 쿵쿵 두드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설마 내가 결혼하고 나면 변할 거라고 여긴 거야? 다른 귀부인들처럼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안살림에 만족하는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아니야.”

“……그래. 그건 대답이 빨라 참 다행이다.”

오드리가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라비린은 저도 모르게 뒤를 따라가 오드리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의 손을 세차게 쳐 냈다. 손이 어찌나 매운지, 라비린의 손등이 금세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황급히 변명했다.

“그렇게 갑자기 잡으면 놀라잖아.”

“오드리, 나와 결혼은 할 거야?”

“겨우 그런 걸 물으려고……. 그래, 할 거야. 안타깝게도 너만큼이라도 되는 남자는 참 드물고, 마침 넌 나와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져. 결혼해서 네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던 거나 까먹지 마.”

오드리는 그 말을 끝으로 매몰차게 돌아섰다. 라비린은 멀어지는 발소리의 걸음 수를 세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던 말은 기억해도 사랑하노라는 고백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다니.

‘정말이지……. 바다의 신 같은 것보다 오드리 네가 열 배는 더 잔인해. 이 집에 있는 너를 내가 무슨 심정으로 보고 있는지 같은 건 관심도 없지. 내 마음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리 매정해?’

오드리는 타우레드의 본가에 훌륭하게 녹아들었다. 모두가 그녀를 환영했다. 거절해도 좋았을 본가행을 마다않고 왔다는 게 호감의 원천이었다. 본래부터 타우레드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저택에 머무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눈이 부시고 설명하기 힘든 만족감에 심장이 떨렸다.

아침부터 밤까지 틈틈이 얼굴을 마주치는 일상이 처음도 아닌데, 리가 항구에서의 나날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았다는 것만으로 하루하루가 이렇게 특별해질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희생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괴물 사태가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데 정작 라비린에게 특별한 매일을 선물하고 있는 오드리는 그를 거의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게 몹시 티가 났다. 응하지 않아도 됐을 부름에 응한 이유가 라비린이 아니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건 그에게 기이한 초조감을 불러 일으켰다.

괜히 영지 곳곳을 구경시키고 특산 음식을 먹이고 보초탑을 오르고 생전 해 본 적도 없던 뱃놀이를 제안하고……. 오드리가 눈치챌 정도로 티 나게 굴었는데, 사랑한다면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듣다니.

‘내 보호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역시 그때 상처 입힌 걸 용서한 게 아닌 건가? 제기랄, 그렇다고 내가 이제부터 마법을 배워서 치유마법 따위를 할 수 있을 리도 없잖아.’

라비린이 계단에 주저앉아 시계탑에서의 제 행동이 어땠는가를 곱씹는 동안, 오드리는 구르다시피 계단을 달려 탑을 벗어났다. 탑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이앤이 땀범벅이 되어 나타난 오드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꼴이 그게 뭐예요?”

“젠장, 승마를 그렇게 하는데 왜 계단은 힘든 거야? 운동량을 늘려야 하나?”

“운동을 이 이상 늘렸다간 승마복 바지를 죄다 다시 재단해야 할걸요. 그보다 벨키스 경은요? 같이 올라가셨잖아요? 설마 계단에서 구르기라도 하신 건 아니죠? 혹시 아가씨가 미신 거예요? 와우, 여긴 타우레드 영지라서 그런 종류는 수습 어려운데 어떡하지.”

“다이앤, 네 머릿속에서 난 대체 어떤 사람인 거니?”

“안 그럴 것 같으면서 화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네 입부터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오드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타박을 놓으며 달달 떨리는 다리를 두드렸다. 정말 확 구를 작정으로 라비린을 협박한 게 조금 전이었다. 만약 라비린의 단련이 부족했다면 그대로 굴렀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안 굴렀으면 됐지.’

하여간 열이 머리끝까지 오르면 확 눈이 뒤집히는 이 성질머리가 문제였다. 나이를 먹으며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만큼 화나는 일이 없었던 거였다.

“크흠, 흠. 아가씨도 참……. 그래서 벨키스 경은요? 설마 아가씨를 혼자 내려 보낸 건 아니겠죠?”

“그건…….”

“그러게, 오드리. 왜 혼자 있어? 다리는 왜 주무르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오드리의 말을 잘랐다. 오드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택에서 바쁘게 지내고 있어야 할 라디아타가 이 외곽까지 나오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라디아타, 네가 왜 여기 있어?”

“오라버니가 널 데리고 보초탑에 갔다기에 왔지. 하여간 멍청하기는, 그게 높이가 얼만데 널 데려가?”

라디아타는 까마득하게 높은 보초탑을 올려다보며 혀를 쯧쯧 찼다. 주인에게 애교피우는 강아지처럼 안달을 내는 꼴이 우스워 내버려 뒀더니 도를 넘어섰다. 아무리 안아서 옮긴다고 해도 계단을 오르내리며 흔들리는 걸 참고 안겨 있는 것도 퍽 힘든 일인데 말이다.

“오드리, 오라버니는 됐고 나랑 뱃놀이나 가지 않을래?”

“나 참……. 지금이 딱 뱃놀이할 시기라도 되나 보지? 라비린도 그 말을 했어.”

“생전 뱃놀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남자랑은 노는 거 아냐. 하지만 나랑 가면 경치 구경은 물론이고 대화하기도 좋을걸!”

라디아타의 장담이 어찌나 자신만만한지, 오드리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과연 라디아타는 이미 준비를 완벽하게 해둔 상태였다. 노잡이꾼이 딸린 배, 따가운 햇살을 막아줄 양산, 맛난 음식이 가득 든 도시락…….

오드리는 커다란 양산을 어깨에 기대어 편 채로 뱃전에 기댔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며 부서진 물방울이 뺨까지 튀었다. 금빛으로 출렁이는 물결 아래로 손가락만 한 물고기가 떼를 지어 헤엄쳐 가는 게 보였다.

갈대가 무성히 자란 강둑 근처에 와글와글 모여 앉은 새끼 오리들이 꾸벅꾸벅 조느라 머리를 끄덕였다. 보송보송한 갈색 털에 노란 줄무늬가 귀여웠다. 무심결에 손짓을 해 봤지만 당연히 외면당했다.

조금 목이 마르다 싶었는데, 라디아타가 때맞춰 상자를 내밀었다. 뭘까 하며 열자마자 차가운 냉기가 확 퍼졌다. 냉각 마법이 걸린 상자였다. 오드리는 머리가 아프도록 차가운 주스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라디아타, 라비린에게 데이트 강의 좀 해줘.”

“역시 나랑 오는 게 좋지?”

“응. 역시 그 보초탑은 너무했어. 경치는 좋았지만 다신 안 갈 거야.”

라디아타가 깔깔 웃었다. 오드리는 치마 아래에서 슬그머니 구두를 벗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것만으로도 구두와 계단에 혹사당한 발이 좀 나아졌다.

“라디아타, 내가 체술을 배우겠다는 게 그렇게 이상해?”

“적당히 체력단련만 하는 것도 아니고 본격적으로 체술을 배우겠다고? 귀족영애가?”

“역시 너도 그렇게 말하네…….”

오드리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귀족영애에게 어울리지 않는 교육을 제공한 락시 부인도 오드리가 체술을 배우는 것만은 반대했다. 라비린이 그렇게 반응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역시 기대하는 게 아니었어. 괜히 실망을 하잖아.’

헨젤 백작에게도 하지 않았던 기대를 라비린에게 했던 게 문제였다. 뭐든 괜찮다, 지금의 네가 좋다 했으니 당연히 체술도 상관없다고 할 줄 알았다. 그 역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걸 까맣게 잊었다.

축 늘어진 어깨를 흘끔대던 라디아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라비린과 보초탑에서 한바탕 싸운 모양이었다. 모양새만 예쁜 발 달린 화분 오라버니는 은근히 고집스럽고 꽉 막힌 구석이 있어서, 오드리가 체술 얘길 꺼내자마자 무슨 말을 했을지 보지 않아도 훤했다.

“이유를 말해봐.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을 거 아냐.”

“괴물이 날 따라와.”

라디아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오드리는 앞으로 손을 쭉 뻗었다. 얼음산을 타고 내려온 시원한 강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휘감고 지나갔다. 정말이지, 이곳은 만탈락과 같은 것이 한 군데도 없었다.

“예전에 말했지? 내 몸에 흐르는 마력의 성질. 그것 때문이래.”

“누가…… 누가 그래!”

“셰비언이.”

“지금은? 지금은 괜찮은 거지?”

“응. 조치를 취했다고 했는데……. 혹시 모르지. 그조차 괴물 사태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거든. 또 시계탑에서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어? 그때가 되면 내 몸을 지켜야지.”

라디아타는 무심결에 허리를 만지작댔다. 단단하게 허리를 받치고 있는 코르셋이 만져졌다. 느슨하게 매고 왔는데도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 얘기, 오라버니에게도 했어?”

“아니.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얘길 해야 하는데, 과연 믿을까 싶기도 했고……. 자신이 보호해 줄 걸 믿지 못하냐고 하는 바람에 잔뜩 화가 나서 싸우느라 거기까진 말이 안 나왔어. 젠장, 그거랑은 상관없다니까 믿지를 않아.”

“기사 집안 남자들의 머릿속은 뻔하지. 위험에서 상대를 지키는 게 사랑의 표시인 인간들이거든.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했다니까 좀 우습네. 산트렘의 공주란 별명을 가진 어머니에게서 검의 기초를 배운 남자가.”

“타우레드 부인이 라비린을 가르치셨다고?”

“응. 아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다. 오드리, 어머니에게 말을 전해둘게. 어머니는 오라버니가 뭐라고 했거나 말거나 널 가르치실 거야.”

로샨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는 라디아타의 어조엔 묘한 열의가 담겨 있었다.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대며 듣다가 텅 빈 주스잔을 내려놓고 발을 까닥거렸다.

“타우레드 부인이 네가 할 만한 일을 다 거둬가셨구나?”

“……칫.”

“어차피 너는 왕자전하와 결혼할 거잖아. 사람들 다 알게 수확제 무도회에서 떠들어놓고 왜 계속 집안일에 미련을 가져? 부인께서 열심히 잘 하신다면 다행으로 여겨. 최소한 네가 해놓은 것들을 다 말아먹진 않을 거 아냐.”

라디아타는 희미하게 웃었다. 로샨은 몹시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업무능력은 한참 모자랐다. 흘려보낸 세월이 그만큼 길었던 데다 그녀의 정신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로샨이 의욕을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라디아타는 빠르게 업무에서 배제됐다. 그녀의 역할은 로샨을 돕는 것으로 제한됐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왕자와 결혼해서 가문을 떠나는 게 확실해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기 전에 선택한 거라고, 이게 최선이라고 끊임없이 되뇌는데도 미련은 녹다 만 사탕처럼 진득하게 목구멍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고 라디아타를 괴롭혔다.

“마음이 내 뜻대로 되는 거였으면 내가 그렇게 속앓이를 할 일도 없었겠지.”

“그건……. 그렇네. 마음이 그렇게 뜻대로 되는 거였으면…….”

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라디아타는 오드리의 처진 어깨에서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꼭 카프러스를 생각하며 울적해할 적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오드리 너, 오라버니랑 약혼한 것 때문에 여기 온 거 아니지? 약혼녀의 의무 어쩌고 한 건 그냥 변명이었지?”

오드리는 고민에 빠졌다. 거짓 없이 영원한 우정을 맹세한 사이답게 솔직하게 말할 것인지, 아니면 이제껏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적당히 면피하기 좋은 대답을 할 것인지. 그 잠깐의 망설임이 라디아타에겐 충분한 힌트가 됐다.

“그냥 곧이곧대로 아니라고 해. 어차피 내가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뜸을 들여?”

“민망해서 그래.”

“민망할 것도 많다.”

오드리가 웃었다. 그 웃음에 드리운 그늘이 몹시 짙었다. 어디서 온지 모를 그늘이었다. 속이 따끔거렸다. 라디아타의 목에 걸려 있던 사탕이 들썩거리며 그녀를 충동질했다. 라디아타는 굳이 말하지 않으려던 사실을 불쑥 뱉어냈다.

“셰비언 씨에게 작위가 내려질 것 같다던데.”

“……뭐?”

“이번 괴물 사태 때 공적이 워낙 크잖아. 마법사협회에서도 모른다는 마법도 많이 알고 있고……. 주인이 없어 회수됐던 작위 중 하나를 내려줄 것 같대. 마법사에게 작위 수여라니 이례적인 일이지만 살론을 앞지르기 위해선 그가 멜브란트의 귀족인 편이 낫다는 거겠지.”

“난 아무 말도 못 들었어.”

“그땐 본인에게도 소식이 전해지기 전이었어. 내가 타우레드의 영애라서 일찍 알 수 있었던 거지. 지금쯤이면 본인도 알게 되지 않았을까?”

“…….”

“오드리, 셰비언 씨가 작위를 갖게 되더라도 로렐라이에 있을까?”

“……있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그가 용이라서?”

강 한복판이고, 주변에 다른 배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드리는 주변을 살폈다. 내리쬐는 햇살이 금빛으로 조각나는 가운데 배에 부딪치는 물소리와 오리의 날갯짓 소리, 강바람에 몸을 비비는 갈대 소리만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그 한적한 소음 속에서 오드리는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노잡이의 귀도 귀였다.

“웬만하면 그 종족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

“아니 뭐……. 네가 바란다면야.”

“그 얘길 꺼낸 이유가 대체 뭐야?”

고민거리를 선물 받은 오드리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라디아타는 방긋방긋 웃으며 양산을 뱅글뱅글 돌렸다.

“굳이 오라버니랑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구.”

“…….”

“어차피 급한 불은 껐잖아. 상단의 소유권을 지켰고, 운영권은 네게 있어. 로렐라이는 여전히 단주의 이름과 얼굴을 노출하지 않고 영업 중이고. 솔직히 말해, 셰비언 씨만 한 마법사가 작위까지 얻으면 백작영애의 결혼상대자로도 손색이 없지. 오라버니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생겼으니 주변을 좀 돌아보란 말이야.”

“내가 라비린과의 결혼을 선택한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거야.”

“알아. 작위 때문이지……. 하지만 말이야, 셰비언 씨도 작위에 미련 없기로는 마찬가지 아닐까? 그에게 인간의 작위 따위 무슨 의미가 있겠어. 네가 달라고 하면 바로 넘겨줘 버릴걸.”

“라디아타, 난 네가 자꾸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이해가 안 가. 대체 왜 이래? 난 지금 라비린의 약혼녀로 여기에 와 있는 거라고.”

라디아타가 속삭이는 말이 지나치게 달콤해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셰비언에게 작위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펼쳐지는 가능성이 너무 장밋빛이었다. 하지만 셰비언 쪽의 조건이 더 좋아 보인다고 냅다 넘어가기엔, 다치는 자존심은 둘째치고라도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았다.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라비린과는 꽤 괜찮은 신뢰관계를 쌓아왔어. 다른 쪽에 더 좋아 보이는 선택지가 생겼다고 해서 그걸 냅다 깰 이유는 없는 것 같아. 넌 내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 왜 자꾸 그러는 거야?”

“네가 바로 그렇게 말하니까 오라버니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싶은 거야. 난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결혼했으면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예쁜 아이를 낳아 기르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라디아타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를 아는 오드리의 미간이 아까보다 한층 더 깊어졌다.

“……나 참, 뭐 대단한 이유라도 나올 줄 알았더니……. 라디아타, 난 그런 거엔 관심 없어. 내 기준에 사랑은 그리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않아. 알잖아.”

“그럼 왜 그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너, 나랑 있을 때는 굳이 얼굴 표정을 꾸미지 않아서 속내가 그대로 읽혀.”

“사랑 말고도 내 걱정거리는 지겹도록 많아. 추측은 적당히 해. 애초 그런 짓을 했다간 따라올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이나 하고 말하는 거야?”

오드리의 대답에 짜증이 잔뜩 실렸다. 하나 라디아타는 조금 전과 똑같이 태연한 낯으로 양산 손잡이를 만지작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 현실적인 문제 중에 가장 큰 건 역시 상단이겠지? 파혼했다간 우리 아버지가 더 이상 로렐라이를 보호하지 않을 테니까, 그땐 정말 눈뜨고 빼앗기게 될지도 몰라서. 그게 왕실이 되든 헨젤 백작님이 되든 네게는 다를 게 없을 테니.”

“응. 내게는 똑같아. 아니, 아버지 쪽이 더 괴로울라나…….”

“흠……. 내 생각에 그 부분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라디아타의 어조는 산뜻하고 가벼웠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녀가 대체 뭘 바탕으로 그렇게 판단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오드리를 귀엽게 바라보던 라디아타가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속삭였다.

“국왕전하의 용태가 심상치 않아. 조만간 검은 드레스를 입을 일이 생길지도 몰라.”

“뭐……?”

오드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라디아타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기도 전에 타우레드의 영애가 국왕이 곧 죽을 거라는 말을 떠들고 다니더라는 소문이 돌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공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라디아타, 아직 제정신이지? 제정신이면 눈 세 번만 깜빡여 봐. 아니지, 이래가지고서야 알 수가 없지. 뭘, 뭘 물어봐야 하지? 의사부터 불러야 하나? 아니면, 셰비언이라도 설득해서…….”

횡설수설하는 오드리가 더 미친 것 같다. 라디아타는 오드리의 손을 떼어냈다.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손쉽게 길들이는 손이건만, 어떤 저항도 없이 간단히 떨어졌다.

“그만해. 나는 아주 멀쩡해.”

“멀쩌엉? 그 말을 믿으라고? 그것도 타우레드의 영애라서 알 수 있는 정보야? 그게 말이 돼?”

“국왕전하와 독대했어. 왕자전하가 약속을 지켜줘서…….”

“가까이에서 뵌 경험이라면 나도 있어. 아주 정정하고 튼튼하시던데? 낯빛도 좋고, 몸에 군살도 없고. 손자도 무리 없이 보실 것 같던데?”

“네가 뵀을 땐 그랬나 보지. 하지만……. 나 때는 아니었어. 어의가 항시 옆에 있다면 그나마 살 확률이 높아질 텐데, 국왕전하 본인께서 그걸 내켜 하지 않더라고. 별것도 아닌데 자꾸 따라붙어서 귀찮게 하는 게 싫다던가……. 혹 어의에게 질문을 받더라도 증상을 얘기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어.”

“세상에, 목숨과 귀찮음을 저울질하면 당연히 목숨으로 저울이 기우는 거야. 겨우 귀찮음 따위로 어의에게 증상을 숨긴다는 게 말이 돼? 정말 별거 아닌 거 아냐?”

오드리의 의문은 아주 타당했다. 아무리 의서를 즐겨 읽고 최신 논문을 섭렵해도 라디아타는 의사가 아니었다. 국왕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의 증세를 보고 칼레이의 마차를 떠올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나 라디아타는 구체적인 대답을 해주는 대신 그저 웃었다. 새하얀 손으로 오드리의 머리칼에 붙은 깃털을 떼어내며 그녀의 뺨을 쓸었다. 자수정을 그대로 박아 넣은 듯 아름다운 눈동자가 우아하게 휘었다.

“비밀이야. 알지?”

“……당연히 비밀이지.”

오드리는 한숨과 함께 비밀을 약속했다. 좋자고 시작한 뱃놀이가 어쩌다 이런 비밀공유의 장이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양산을 되돌린 라디아타가 화사하게 웃으며 다시금 오드리를 부추겼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 봐, 오드리. 이런 기회 흔치 않아. 내가 왕비가 되면 왕실이 로렐라이를 탐내는 일은 없어질 거야. 내 아버지는 내가 설득할 테니 넌 네 아버지만 어떻게 잘 설득하면 돼.”

“그게 됐으면 내가 만탈락에서 자랐을 것 같아? 바람 좀 그만 넣어. 장사의 기본은 신뢰라고. 난 실낱같은 가능성에 내 인생을 몽땅 갈아 넣을 만큼 미치지 않았어.”

“치이…….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단 말이야.”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잖아. 나보다 네가 더 잘 알면서 자꾸 그런 소리 하지 마.”

오드리가 로샨을 들먹이자 라디아타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지만 때때로 그림자조차 꼴 보기 싫어 도망쳐 나온 상황이었다. 그녀는 사랑타령을 그만두고 대신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셰비언 씨는 몹시 바쁘겠어. 작위라니, 생각은 했을까?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로렐라이 소속이니까 이디케가 알아서 해줄 거야. 바쁘긴 하겠지만 그건 작위보다 괴물 사태 뒤처리에 치여서 일걸. 아니면 왕궁마법사들에게 시달리고 있거나.”

셰비언이 출입금지마법을 만들고 마법도구를 일반인이 끌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을 때 로렐라이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흥분했던가. 제작파트의 마법사들까지도 셰비언을 만나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엔간히 고생을 했었다.

“이번엔 예전처럼 쉽게 넘어가기도 힘들 거야. 공격마법이라니, 다들 눈이 벌걸 테지.”

오드리의 짐작은 정확했다. 왕궁마법사들은 셰비언은 물론이고 워커의 척수까지 쪽쪽 빨아먹을 기세로 그들을 들들 볶고 있었다. 셰비언에게서는 잊혀진 공격마법이, 워커에게선 마법망 안정화 연구 내용이 탐나서였다.

“누가 그걸 그렇게 그냥 가르쳐 주래요!”

이디케는 빽 소리를 지르곤 타는 속에 물을 들이부었다. 마법을 종이에 옮겨 담아서 필요한 마력만 넣으면 바로 마법이 발동하는 종이라니, 그건 혁신 그 자체였다. 그 종이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들은 날, 이디케는 금화에 파묻혀 죽는 꿈까지 꿨다.

활용할 만한 구석이야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쓸모는 공격마법이었다. 셰비언의 공격마법을 얻어내 그 종이에 담아내면 위험한 전장에 마법사가 갈 필요도 없이 공격마법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살론의 사략선은 물론이고 지긋지긋한 해적놈들을 퇴치하기에 그만한 무기도 없었다.

한데 그걸 왕궁마법사들이 이미 알고 있단다. 마법망 안정화 수식을 담은 종이를 워커 혼자서 대량으로 만들려니 너무 힘들어 왕궁마법사들의 손을 빌린 거라고는 하지만, 덕분에 기술이 완전히 유출되고 말았다. 왕궁마법사들이 워커에게 기대하는 게 마법망 안정화에 대한 연구 내용뿐이라는 게 뭘 의미하겠는가 말이다.

억울함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죽을 것 같은 이디케와는 달리, 워커는 그저 태평하기만 했다. 기술을 돈으로 바꾸는 일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한층 짙어진 눈 밑 그늘을 더 염려했다. 본래도 안색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어째 갈수록 해골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이디케, 그렇게 계속 소리 지르다간 목 다 쉴걸요.”

“젠장, 젠장, 젠장!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신기술을 가르쳐 줄 거면 서면계약까지는 못 써도 구두계약이라도 했어야죠! 우리 쪽 권리를 주장하러 갔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글쎄, 같이 개발한 거래! 그러니까 돈을 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워커, 같이 만들었어요? 진짜로?”

“그건 아니죠.”

“거 봐! 그런데도 같이 만들었다고 헛소리를 찍찍 해대고 말이야! 제기랄! 젠장할! 전보만 아니었어도 내가 직접 거기에 따라갔을 건데!”

괴물 사태 당시, 이디케는 세피아 항구의 데멘사 지점에 있었다. 수확제 마지막 날, 브란젤은 괴물로 아수라장이 됐지만 세피아 항구는 아니었다. 세피아 항구의 주민들과 선원들은 전통에 따라 실컷 먹고 마시고 즐겼다.

전보로 브란젤의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이라고 여겼지만, 같은 소식이 두 번, 세 번 전해지자 세피아 항구는 혼란과 걱정에 휩싸였다. 누군가는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며 기차표를 끊었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데멘사 지점에 몰려들어 새로운 소식을 기다렸다.

세피아 항구의 혼란은 브란젤은 무사하고 모든 일이 잘 끝났다는 전보가 도착하고서야 한풀 꺾였고, 직접 확인하겠다고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전보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자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 뒤에는 브란젤에 사는 친척과 친구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전보가 폭주했지만 말이다.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전보 기계 앞에 달라붙어 있던 이디케도 오드리가 무사히 저택에 돌아왔다는 전보를 받고서 간신히 안심했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전보고 뭐고 아가씨 옆에 있었어야 했다는 후회를 했지만, 따져 보면 그때 브란젤에 있었어도 오드리를 따라 나갈 수는 없었다. 장소만 브란젤이지,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했던 건 똑같았을 것이다. 그나마 전보가 있어 멀리 있으면서도 빨리 소식을 전해 받은 게다.

그렇다 보니 이전에는 전보의 유용성과 가능성을 알면서도 오드리의 곁에 있지도 못하게 한다며 내심 전보를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던 이디케가 지금은 왜 타우레드 영지에는 전보가 없냐며 이를 갈고 있었다.

“이 미치고 환장할 일을 아가씨께 알리고 상담해야 하는데! 거긴 기차도 없잖아! 마차 우편은 너무, 너무 느리단 말예요!”

“아이고, 무서워라…….”

오드리의 이름이 나오자 태평하던 워커가 어깨를 움츠렸다. 한데 그게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이디케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이미 지난 일이라 어쩔 수 없는 걸 갖고 내가 지나치게 화내는 것 같죠?”

“으음, 그게, 그러니까…….”

“그러게 이건 내 기술이라고 말 한 마디만 하지 그랬어요. 지금이야 상황이 급하니 가르쳐 주지만, 나중에 또 쓰고 싶거든 로렐라이와 정식으로 계약하라고 왕궁마법사장에게 딱 한 마디만 해뒀어도 이 꼴은 안 났을 건데. 지금 왕궁마법사들이 마법을 담은 종이에 스크롤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자기들끼리 돌려 쓰고 있다고요.”

“어……. 팔지는 않았나 보네요. 상단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럼 그냥 우리가 만들어서 팔면 되잖아요?”

이디케가 쥐고 있던 깃펜이 부러졌다. 만년필을 쥐고 있다간 내던져 망가뜨릴 것 같다더니, 예상 적중이다. 이디케는 부러진 깃펜을 바닥에 내버렸다. 그나마 싸구려 깃펜이라 다행이었다.

“워커 씨. 시간 있어요? 체력은? 솔직히 지금 괴물 사태 뒤처리에 협조하는 것도 힘들잖아요?”

“가르치면…….”

“누굴? 누굴 가르쳐서 써먹게요? 셰비언은 작위 받을 준비로 바쁘고, 제작파트의 마법사들은 지금 팔리는 물건 물량 대기도 벅차요. 스크롤까지 제작할 여력이 없단 말예요. 왕궁마법사는 머릿수라도 많지! 제기랄, 왕궁이 가장 큰 거래처가 될 텐데 그걸 놓쳤어!”

아니 그럼 마법사를 더 구하면 되지. 워커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마법사 몸값이 얼만지 알면서, 오드리가 전보에 부은 돈이 얼만지 알면서 이 말까지 했다간 이디케가 정말 폭발할지도 몰랐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 그럼……. 이디케, 왕궁마법사들이 스크롤을 만들어 쓸 때 돈을 받으려고 했던 거잖아요? 그럼 아예 확 공개해 버리는 게 어때요? 왕궁마법사들 말고 다른 상단들한테 사용료를 받으면 되잖아요.”

“누가 그 돈을 줘요? 기술만 받고 꿀꺽하지.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에요?”

“왕궁마법사들이랑 나눠 먹으면 되죠. 그럼 거기서 열심히 감시해 주지 않겠어요? 로렐라이가 없는 지역에도 왕궁마법사는 있잖아요. 솔직히 그게 무슨 왕궁마법사야, 그냥 왕국마법사지.”

“…….”

“그래, 이왕이면 막 스크롤 감정소 이런 것도 만들고, 담은 마법에 따라서 등급도 매겨주고, 등록번호도 부여해서 그거 없으면 유통 못 하게 하고……. 그…… 안 돼요? 히, 힘든가? 너무 과한가?”

이디케가 워커의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승마로 단련된 악력은 연약한 마법사에게 벅찼다. 워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맘에 안 들면 말로…….”

“난 당신이 마법에만 천재인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워커.”

이디케가 워커를 와락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리곤 워커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눈부신 미소를 남기고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워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뺨에 남은 온기를 더듬었다. 시체처럼 퀭한 낯에 희미하게나마 핏기가 돌았다.

“좋아?”

“아, 깜짝이야! 사하스바티?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네가 이디케 씨에게 멱살 잡혀서 짤짤 흔들리고 있을 때부터.”

사하스바티의 대답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알아서 치운 의자에 앉아 알아서 사 온 음료를 마시며 너저분한 책상에 발을 올렸다. 마치 자기 연구실을 차지한 것처럼 편안한 자세였다.

워커의 미간이 구겨졌다. 새삼 사하스바티의 방자한 자세 때문은 아니었고, 그가 연구실에 있었던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전이어서였다. 그 정도면 거의 처음부터 본 거나 다름없었다.

“왜 기척도 안 내고 도둑처럼 들어온 거야?”

“뭐래. 난 인사하고 들어왔어. 날 보이지도 않는 연기 취급한 건 너랑 이디케 씨야.”

젠장. 워커는 거울을 내던지고 욕을 뱉었다. 사하스바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한테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강철새에만 목숨 걸고 살다 죽을 줄 알았더니만. 아무튼 상대가 이디케 씨라는 게 진짜 놀라워. 너, 취향이 너무 피학적인 거 아냐? 널 들들 볶는 여자가 취향이었어?”

“어휴……. 단명하는 마법사가 좋아하는 여자 있어서 뭐 하게? 말 같은 소리를 해라. 너는 왕립 기계 연구소 소장이라는 자리를 맡았으면 얌전히 네 사무실이나 지키고 있을 것이지, 왜 엉뚱한 곳에 와서 헛소리를 찍찍 하고 있는 거야?”

사하스바티의 표정이 똥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나한테 월급 주는 분들이 너한테 가보라더라.”

“뭐?”

“왜 이렇게 성과가 안 나오냐면서, 예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한테 도움 좀 받으래! 기계 연구소 괜히 만들었다는 말까지 들으면서 있으려니 죽을 것 같아서 도망 나왔어. 염병, 빌어먹을, 사지를 찢어죽일 새끼들 같으니.”

“아니, 기계 연구소 만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성과 타령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암만 전문가라지만 비마법, 아니 기계라는 게 주문한다고 뚝딱 나오는 건 줄 알아. 무기라니, 하기도 싫지만 내가 그런 걸 해 본 적이 있어야지……. 그렇다고 왕궁마법사들이 협조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젠장, 바라는 건 많은데 도와주는 사람은 없어.”

힘이 쭉 빠진 대답을 듣고 나니 사하스바티가 새삼 안쓰럽게 보였다.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한 것도 방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심신이 지쳐서 그런 것 같았다.

“셰비언 씨는?”

“작위 받을 준비하잖아. 바빠.”

“흠…….”

“네가 셰비언을 찾는 걸 보니까 급하긴 급한가 보다. 그렇게 피해 다니더니.”

“아니, 그 사람은……. 묘하게 압박감이 느껴져서…… 으음. 이상하게 피하게 되더라. 생긴 것도 예쁘고 성격도 무난한데 대체 왜 그러나 몰라. 곁에 있으면 몸이 으슬으슬하게 한기가 드는 게……. 어휴.”

워커는 내심 감탄했다. 신경을 곤두세운 셰비언의 곁에 있을 때면 그 역시 이상한 한기를 느낄 때가 있었다. 본인의 말로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 마력이 새서 그렇다는데,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면 느끼지 못했다. 한데 그걸 사하스바티가 느끼는 것이다.

“넌 역시 마법사를 했어야 했어.”

“내가 헛소리 좀 했기로서니 그렇게 개소리를 해야겠냐.”

“재능 있다니까. 지금이라도 시작해 볼래? 누가 그러는데, 배움엔 끝이 없대. 나이를 먹어도 얼마든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더라.”

“너야말로 새로이 기계 연구에 발을 디뎌보는 게 어때. 내가 도와준 적도 없는데 강철새를 저만큼 만들어낸 걸 보면 진짜 재능 있어.”

함께 일한 시간이 긴 만큼 그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잡아먹을 듯한 눈싸움이 이어지길 몇 분, 갑자기 워커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사하스바티, 너 할 일 없으면 나랑 잠깐 어디 좀 가자.”

“더워.”

“괜찮아, 밖에 안 나갈 거니까.”

밖에 나가지 않고 어딜 간단 말인가. 워커는 의아해하는 사하스바티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에 사각사각 흔들리는 갈대와 그 위를 날아가는 새떼의 풍경을 떠올리며 발을 쿵, 굴렀다. 공간이 열렸다.

“어어, 어어어……?”

사하스바티는 갑작스럽게 변한 주변 환경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가 앉아 있던 의자와 발을 얹었던 책상이 싹 사라져 버렸다. 의자가 있던 자리엔 빽빽하게 자란 갈대뿐이었다. 내가 미쳤나, 생각하긴 했지만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코를 적시는 풀냄새가 지나치게 진짜 같았다. 고개를 들자 까만 깃을 가진 새떼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마법사의 공간에 온 걸 환영해.”

워커가 기척도 없이 사하스바티의 곁에 나타났다. 그는 혼이 빠진 듯한 사하스바티의 얼굴을 보며 키득키득 웃더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하스바티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손을 따라갔다.

“하?”

좀 전까지만 해도 갈대만 무성하던 자리에 낯익은 강철새가 서 있었다. 바닥도 흙바닥이 아니라 단단한 돌바닥이었다. 사하스바티는 홀린 듯 다가서서 강철새에 손을 댔다. 금속 특유의 냉기가 느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선 채로 꿈을 꾸나?”

“그런 건 아니고……. 마법사가 일정 이상의 경지에 이르면 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장소야. 지금은 내가 널 내 공간 속으로 초대한 거고.”

“이게 마법이라고? 말도 안 돼……. 이건 너나 나 둘 중 하나는 미친 거야. 아님 둘 다 돌아버렸든가.”

사하스바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욕을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그쯤이야 이미 예상한 바였다. 워커가 허공에 손짓하자 강철새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그에 그치지 않고 배의 뚜껑이 열리며 내부 구조가 훤히 드러났다.

“여기선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연구를 할 수 있어.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어때?”

“뭐가 어떠냐는 거야?”

“세계 최고의 기계 전문가 사하스바티 씨, 강철새 배 한 번쯤 갈라보고 싶어 했잖아? 밖에서는 못해도 여기선 해도 돼.”

“하…….”

사하스바티는 강철새 내부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강철새에 대한 호기심이야 늘 있었다. 하늘을 나는 기계라니,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물건이 또 있을까. 다만 로렐라이에 있을 땐 너무 바빠서 엄두도 못 냈고 말없이 로렐라이를 떠난 다음에는 아예 마음을 접었다.

“나한테 이런 거 보여줘도 돼?”

“안 될 건 또 뭔데. 이건 로렐라이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나 개인이 만드는 물건이야. 알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이거 남들에게 보여주기 엄청나게 싫어했잖아. 죽어도 연구자료 끌어안고 죽을 것처럼 굴더니만, 무슨 바람이 불었어?”

“뭐……. 실은 전보 만들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 혼자 끌어안고 끙끙대는 것보단 도움을 좀 받더라도 완성하는 게 낫겠다 싶어졌어.”

“와우, 나야 좋지만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아무튼 로렐라이에서 예산이 들어가잖아. 내가 손대면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로렐라이는 강철새 연구의 후원자야. 그게 내 고용 조건이라고.”

워커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강철새의 부품들이 큰 덩어리로 분리됐다. 살펴보기 좋게 분리된 상태에서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기 싫으면 지금 당장 말해. 바로 내보내 줄 테니까.”

“누가 싫대? 그냥 좀, 당황스러워서 그런 거지. ……그런데, 만약 내가 도와서 강철새가 완성되면…… 내 이름도 개발진에 넣어줄 거야?”

“과연 사하스바티. 자신감 하나는 끝내주네. 내가 몇 년을 매달리면서도 계속 실패했던 걸, 넌 보자마자 완성을 장담하는 거야?”

“그야 네가 쌓아놓은 자료가 있잖아. 나는 맨바닥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고.”

워커의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었다. 그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하스바티가 진심이 되어 달려들어 준다면, 이름자 하나 넣는 것쯤이야 뭐가 어려울까.

“네가 하고 싶은 건 나한테 다 말해. 다 이뤄지게 해줄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오래는 못 있어. 밖에서 연구하고 여기서는 적용만 하는 식으로 해야 돼.”

“왜? 이 공간인지 뭔지 하는 걸 여는 데 몸이 그렇게 많이 축나?”

“내 안색을 봐라. 조금 있으면 해골이 형님, 하고 부르게 생겼어.”

“그러게 운동해서 체력 좀 기르라니까……. 셰비언 씨에게 좀 도와달라고는 못해?”

“이 공간을 다룰 수 있게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 같아?”

“아……. 도와줄 만큼 도와줬네.”

사하스바티는 바로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체력이 끝내주고 마력을 섬세하게 다루는 셰비언이 아쉽긴 했지만, 이 정도 핸디캡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기를 만들기 싫어 늘어져 있던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는 강철새의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 순수한 기계 강철새 맞아? 마법이 좀 들어간 것 같은데?”

“비행마법을 좀 넣어봤어.”

“비행마법? 그런 것도 있어? 그것도 셰비언 씨의 작품인가?”

“절반쯤은. 너도 알다시피 기계에 마법을 적용하려면 뜯어고쳐야 하는 게 좀 많잖아. 그리고 그건 내가 전문가고, 너랑 나는 최고의 파트너지.”

“그야 그렇지. 이거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재밌겠는데.”

강철새를 홀라당 구워먹을 것처럼 눈을 빛내는 사하스바티를 보며 워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리에게 백 번 천 번 말했던 강철새의 완성이 코앞에 다가온 듯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그 시각, 셰비언은 왕궁마법사들에게 지독하게 시달리고 있었다. 작위 받을 준비 때문에 오라더니만, 설명은 5분 만에 끝나고 그 다음에는 자기들 호기심을 채우려 들이닥친 왕궁마법사들의 차지였다.

마법망 연구를 시작한 계기, 공격마법의 출처, 다른 옛 마법을 더 알고 있는지 여부, 전수의 조건과 가능성……. 호기심은 끝이 없고 셰비언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걸 도대체 언제까지 받아줘야 하지?’

친구의 형태로라도 오드리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작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지만 않았더라면, 눈 밑이 검게 죽은 이디케가 아무 대꾸도 안 해줘도 되니까 밉보이지만 말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지만 않았더라면, 셰비언은 귀찮게 구는 왕궁마법사들을 진작 다 떨쳐 냈을 것이다.

“왕궁마법사가 될 생각은 없습니까?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개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을 것을.

셰비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궁마법사장은 어설픈 미소를 흘렸다. 하긴, 그가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제안이었다. 로렐라이는 마법사 대우가 좋기로 유명한데 거기서 왕궁마법사로 넘어올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나중에 왕궁마법사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봐야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겠어요. 그렇죠?”

“잘 알고 계시군요.”

“하하……. 나라도 개고생하는 왕궁마법사를 하느니 로렐라이에 있을 거라서. 이젠 작위도 받을 텐데 뭐가 아쉬워서 왕궁마법사를 하겠어요. 그냥 한 번 물어봤습니다. 위에서 하도 쪼아대는 통에.”

왕궁마법사장은 한숨을 내쉬며 찻잔에 새 찻물을 따랐다. 셰비언은 차에 아예 손을 대지도 않았기에, 연둣빛 찻물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마법사협회에서는 난리 안 쳐요?”

“무슨 난리를 말씀하시는지?”

“공격마법을 썼잖아요. 반쪽짜리 대포 가지고도 어마어마한 항의 서한을 받았는데, 셰비언 씨에게는 더하지 않았겠어요?”

“으음…….”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이디케가 퀭한 눈으로 뭔가 편지 비슷해 보이는 걸 잔뜩 수거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대체 뭐냐 물었더니 불쏘시개라고 하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그게 그 항의 서한인 모양이었다.

“셰비언 씨는 중간에서 차단해 주는 사람이 있나 보네요. 이야, 부러워라…….”

“계속 무시하면 어떻게 되죠?”

“항의 방문을 하겠죠. 그리고 왜 공격마법을 익혀서도, 퍼뜨려서도 안 되는지 설명을 해주겠다며 몇 시간이고 설교를 해댈 거고요. 그 다음엔 협회에서 회원에게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들먹이며 접근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협박을 하겠죠.”

“구체적이네요.”

“다 당해본 것들이라서요.”

왕궁마법사장의 한숨이 반쯤 빈 찻잔을 채웠다. 마법사협회가 갖추고 있는 논문과 연구자료는 아주 방대했다. 왕궁마법사측이 아무리 희귀자료를 잔뜩 갖고 있더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가 추가되는 마법사협회와 척을 지어서는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가 없었다.

“대포에 쓴 게 공격마법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데에만 이틀을 썼습니다. 항의 서한을 무시했으니 셰비언 씨에게도 조만간 그들이 찾아가지 않을까요?”

“내가 작위를 받아도?”

“마법사의 재능이 귀족의 핏줄이라고 피해가겠어요? 협회상층부에 귀족 출신 마법사가 몇이나 있습니다. 로렐라이가 셰비언 씨를 아무리 감싸도 강요를 피하긴 어려울 테죠. 그러니…….”

왕궁마법사장이 습관적인 미소를 지었다.

“공격마법을 우리 쪽에 넘기세요. 최선을 다해 막아드리죠. 귀찮은 건 딱 질색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귀찮아도 그건 안 넘깁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왕궁마법사의 머릿수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싶은가 보죠? 충고하건대, 무기가 필요하면 대포부터 개량하세요. 로렐라이에서 최고로 꼽히던 비마법 전문가가 마침 왕립 기계 연구소장으로 있지 않습니까? 멀리 있는 걸 바라지 말고 가까이에 있는 것부터 보시죠.”

셰비언은 딱 잘라 거절하고 일어섰다. 인간에게 공격마법이라니, 안 될 말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점잔을 빼고 뜸을 들이나 싶어 두고 봤다가 헛소리를 들었다.

“셰비언 씨. 왕궁마법사는 민간 마법사가 진행하는 마법실험에 허가를 내릴 권리를 갖고 있어요.”

이젠 거의 요식행위에 불과한 절차가 되기는 했지만, 하고자 마음먹으면 마법사 한 명쯤 괴롭히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왕궁마법사장은 셰비언이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확신했다. 막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그가 홱 돌아서서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로서 계속 연구를 하고 싶다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겁니다.”

“나 참……. 당신, 꽤 처세를 할 줄 안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멍청하군. 그게 아니면 공격마법에 눈이 멀어서 정신이 나갔든가.”

셰비언의 말투가 완전히 바뀌었다. 왕궁마법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 일어섰다. 찻잔이 엎어져 탁자를 더럽혔다.

“멜브란트가 아니면 마법사 노릇을 못한다고 누가 그러지?”

“당신…….”

“왕실에서 작위를 주고서라도 잡고 싶어 하는 마법사가 훌쩍 멜브란트를 떠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저질 협박을 해? 나도 아는 걸 어떻게 당신이 모를 수가 있지?”

“셰비언 씨, 당신이 이뤄놓은 것들은 전부 멜브란트에 있어요. 전보, 출입금지마법, 마법도구 온오프…….”

“멜브란트가 아니면 내가 그걸 못 했을 것 같아? 상상력이 부족하군 그래. 멜브란트가 아니어도 내가 갈 곳은 얼마든지 있어. 나는 당신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고, 인간이 사는 땅의 범위는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어. 왕궁마법사장, 이 좁은 궁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아닌가?”

이제껏 느끼지 못했다는 게 이상할 정도의 한기가 왕궁마법사장을 덮쳤다. 공격마법에 대한 욕심에 잠시 눈이 멀었던 왕궁마법사장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거칠게 흔들린 마력이 몸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시야를 까맣게 물들였다.

그는 한참이나 끙끙댄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문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셰비언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서서 셰비언이 나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왕궁마법사 무리뿐이었다.

“셰비언 씨는?”

“예? 셰비언 씨를 왜 여기서 찾으세요? 왕궁마법사장님과 함께 있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셰비언 씨는 한참 전에 나갔어.”

왕궁마법사들이 저들끼리 모여서서 웅성댔다. 혹시 놓친 건 아닌가 서로 캐묻는데,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애초 셰비언을 들인 이후로는 왕궁마법사장의 집무실 문이 열린 일 자체가 없었다는 증언만 나왔다. 등 떠밀려 대표로 나선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왕궁마법사장을 위아래로 훑었다.

“손님 모셔놓고 꿈꾸셨어요?”

“아니야, 그게 아니야……. 왜 본 사람이 없지? 왜? 그래, 옛 마법 중에 남들 눈에 안 보이게 스스로를 투명하게 만드는, 그런 마법은 없어?”

“있죠. 있기야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을 열지도 않고 나올 수 있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데요. 유령이라면 모를까, 육신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라져요? 전설 속의 용도 그렇게는 못할걸요. 셰비언 씨, 혹시 아직 안에 계신 거 아니에요?”

왕궁마법사장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아무리 당황했던들 그렇게까지 존재감이 강한 사람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희가 들어가서 확인해 봐라.”

때는 이때다, 기회를 잡은 왕궁마법사들은 눈을 빛내며 왕궁마법사장의 응접실을 구석구석 훑었다. 그러나 삭막한 집무실엔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이 없었고, 엎질러진 찻물과 책상에 말아놓은 대포의 설계도 말고는 따로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분명 여기 들어가는 걸 봤는데.”

“나도, 나도 봤어. 마법사장님하고 같이 들어갔잖아.”

“나도…… 나도 봤어. 그런데 없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옛 마법 중에 축소 마법이라든가 이런 것도 있던데, 그런 걸 써서 몸을 작게 만든 다음 몰래 빠져나간 거 아닐까? 마법사장님의 로브자락에 숨어 있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재빠르게…….”

“셰비언 씨가 왜? 곧 작위를 받을 마법사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좀도둑 같은 짓을 해? 그것도 옛 마법까지 써가면서.”

“……그건 그렇지. 그럼 대체 뭔데……? 우리 전부가 한꺼번에 선 채로 잠들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게 말이 돼? 용이 아니고서야.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없어.”

“뭐……. 이름은 용 같다. 저 먼 북쪽,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셰비언 성벽과 같은 이름이잖아. ‘진귀한 보석을 원하는 자는 북쪽으로 가라, 용이 그대에게 보물을 줄 것이다.’”

“야, 전설은 전설로 끝내. 갑자기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섬뜩하잖아.”

와글와글 떠들던 이들은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떴다. 집무실의 주인인 왕궁마법사장만 도망치지 못하고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아 셰비언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나는 당신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내 실력이 모자람을 비웃느라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설마 지금까지 보여준 것도 전부가 아니었어? 마법으로 사람의 감각을 흐리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게 가능했단 말이야?’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평선 너머에 선 사람의 얼굴 표정을 읽어내려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짓을 했다는 허탈함도 함께 왔다. 가끔 연구팀 마법사들만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보일 때가 있는데, 셰비언은 그보다 몇 배는 높은 벽이라는 것도 모르고 감히 기어오를 꿈을 꿨다.

“전설 속의 용이 진짜로 있다면 저럴까…….”

왕궁마법사장의 어깨가 바닥으로 축 처졌다. 모자란 재능으로 왕궁마법사장의 자리에 앉은 걸로 만족하고 마법 실력 향상에 대한 미련을 놓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미련은 끈덕지게 남아 그를 괴롭혔다. 그도 인간이고 마법사였다.

비는 그저 내릴 뿐이고, 꽃은 그저 봉오리를 터뜨릴 뿐이다. 제가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고 어떤 감상을 불러일으키는지, 자연은 관심이 없다.

셰비언도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의미 있는 몇몇 외의 다른 인간들, 그러니까 그가 혼란을 남긴 왕궁마법사들 따위는 그에게는 흘러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좋은 향기가 실린 바람이라면 관심 한 자락 줄 수도 있겠으나, 왕궁마법사들은 그쪽에 속하질 않았다.

셰비언은 눈 뜬 장님이 된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 건물의 지하에 진입했다. 당연히 외부인을 막기 위한 마법도구가 충실히 갖춰져 있었지만 그에겐 단순한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지하에 갖춰진 마법사들의 실험실과 연구실을 지나, 가장 구석에 있는 자료실을 찾아 들어갔다.

자료실은 피부에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웠다. 기껏 확보한 괴물의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온도조절 마법도구를 쓰고 있는 탓이었다. 뚜껑이 덮이지 않은 마법등이 블록처럼 쌓인 괴물들의 시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다나는 그 시체들 틈에 있었다. 예전에 셰비언이 만들어서 치안대에 넘긴 적 있는 구속구를 차고 그럭저럭 두꺼운 담요 한 장을 깔고 덮은, 초라한 몰골로 바닥에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꼴이 엉망이네.’

붉은색과 금색이 뒤섞인 머리카락은 멀끔히 감고 다닐 때에도 부스스하더니만, 피에 젖은 채로 방치된 지금은 고약한 냄새까지 더해져 사람 꼴이 아니었다. 얼굴 곳곳엔 시퍼런 멍이 든 데다 터진 입술엔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아마 옷에 가려진 몸뚱이는 보이는 곳보다 더할 것이다. 슬쩍 이마에 손을 대보았더니 약한 미열이 느껴졌다.

‘샤를레아가 알면 술을 오크통째로 작살내겠어.’

넌지시 떠볼 적에는 그래도 꽤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대답하더라니, 그건 어디까지나 ‘죄인’치고는 잘 지내는 거였나 보다.

그녀의 곁에는 스와디도 있었다. 로브자락이나 간신히 걸친 다나와는 달리 따뜻한 옷을 겹겹이 껴입고 잠든 걸로 보아 죄인은 아니고 다나의 감시역인 듯했다.

‘귀찮게.’

추운지 다나 바로 곁에 있는 스와디를 발로 밀어 떼어내고 다나를 툭툭 걷어찼다. 발코에 얻어맞은 다나가 뒤척거리며 자세를 바꿨다. 쉽사리 일어나지 않을 기세였다.

“일어나.”

“으음…….”

“일어나라, 다나 트왈릿.”

다나는 돌연 잠에서 깼다. 그녀는 허옇게 서리가 앉은 눈꺼풀을 무겁게 들어올렸다. 몇 번을 봐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시체들이 보였다. 잉크 같은 검은 피로 범벅된 괴물 시체들은 취향이 고약한 조각가의 작품을 마구잡이로 쌓아둔 것 같았다. 끔찍한 몰골을 계속 보고 싶지 않아 그냥 눈을 감았다.

뼛속까지 스민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다. 몸에 마력을 돌리려다 손발에 차고 있는 구속구 때문에 실패했다. 매번 실패하면서도 매번 시도하다니, 추위 때문에 뇌마저 얼어버렸나 싶었다. 옹송그린 손에 입김을 불자 조금 나은 것도 같았다.

“빌어먹을 놈의 용 새끼들…….”

대뜸 손목을 잘랐다가 흥정 끝에 붙여놓는 등 멋대로 굴면서 마법사로서는 손 못 쓰는 불구로 만들어 버린 셰비언이나, 지켜준다 하더니만 군인이 와서 신병을 요구하자 대뜸 넘긴 샤를레아나. 다 똑같이 빌어먹을 것들이었다.

마법구슬 따위를 만들어 괴물을 발생시킨 셰비언만 아니었어도, 너야말로 나의 후계자다 나의 동족이다 듣기 좋은 말로 꼬드긴 샤를레아만 아니었어도,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백 번을 곱씹고 곱씹어도 시간을 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괴물을 만들어내며 즐거웠던 건 잠깐이고, 필리아 거리의 지붕에서 붙들린 이후의 시간은 차라리 죽는 게 나았겠다 싶은 순간들뿐이었다. 마법사로서의 수명이 끝났다는 절망에 순순히 내가 범인이다 자백했던 게 지독히 후회스러웠다.

이 끔찍한 공간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가늠이 안 됐다. 어떻게든 짐작해 보려고 했지만 마법등 때문에 어두워지지 않는 데다 드나드는 사람이 무시로 있어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과 굶주림, 집요한 추궁은 다나를 급격히 약화시켰다.

‘나도 죽으면 저렇게 쌓아놓으려나? 아니지, 난 괴물이 아니니까 성 밖 부랑자 묘지에 대충 파묻어 버리겠지. 제기랄, 그냥 다 불어버릴까…….’

다나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건 자백했지만, 무슨 수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굳건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원하는 내용을 알아내지 못해 미치고 팔딱 뛰는 왕궁마법사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꾸역꾸역 버텼지만 그것도 슬슬 힘에 부쳤다.

떨어져나갈 것처럼 아픈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다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용 새끼들.”

“아주 팔팔하군.”

“……셰, 셰비언님?”

뒤늦게 셰비언을 발견한 다나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추위에 굳은 데다 구속구를 찬 이래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뚱이는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녀는 볼썽사납게 담요 위에서 허우적댔다.

“그냥 있어도 돼.”

“그래도……. 일어나야 하는데…….”

“체력을 바닥까지 끌어 쓰고 그 구속구를 찼는데 무슨 수로 움직이겠다는 거야? 엎어져 있어.”

셰비언이 그렇게 말한다고 다나가 계속 그렇게 있을 위인은 아니었다. 다나는 한참을 끙끙대고 허우적대면서도 기어이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창백한 이마 가득 땀이 맺혔다. 그녀의 시선이 곤히 잠들어 일어나지 않는 스와디를 향했다.

“셰비언님이 잠재우신 건가요?”

“그래.”

거멓게 죽어 있던 다나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셰비언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손가락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저 데리러 오신 거 맞죠? 빨리, 빨리 데리고 나가주세요. 여기 계속 있다간 미쳐 버릴 것만 같아요.”

“지금은 안 돼.”

“네? 왜, 왜요?”

셰비언이 대답도 없이 로브자락을 탁, 털어냈다. 다나는 어떻게든 매달려 있으려고 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해 비리비리한 몸뚱이로는 안간힘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다 바닥을 기어와 다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좀 전에 제가 욕한 것 때문에 그러세요? 그건 제가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지쳐서 그런 거예요. 말이 헛나왔어요. 제발, 제발 데리고 나가주세요. 네?”

“네가 뭐라고 지껄였든 나한텐 별 의미가 안 돼. 다나, 무의미하게 매달리지 마. 내가 여기 온 건 샤를레아의 부탁 때문이야.”

다나는 용족을 욕하던 조금 전은 까맣게 잊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탐탁찮게 생각했던 셰비언과는 달리, 샤를레아는 자신을 몹시 아껴주었다.

“아……! 샤를레아님! 믿고 있었어요, 샤를레아님은 절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셰비언님, 샤를레아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안 된다는 게 샤를레아님이 직접 오실 거라서 그런 거예요?”

조금 전 말했듯이, 셰비언은 다나가 용족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든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태도가 바뀌는 걸 보니 조금 기분이 나빠지긴 했다.

“샤를레아는 대체 네 어디가 예쁘다고……. 다나, 아직 네 지식을 다 털어놓거나 하진 않았지?”

“네, 네! 한 마디도 안 했어요! 그래서 샤를레아님은 언제 오신대요? 내일? 모레? 빨리 데리러 와주셨으면 좋겠는데!”

“샤를레아는 안 와. 못 오지.”

“네?”

셰비언이 다나의 뺨에 살짝 손을 올렸다. 맞닿은 피부를 타고 차가운 냉기를 품은 마력이 다나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검게 죽었던 다나의 낯빛이 점점 환해지고 윤기가 흘렀다.

“앞으로도 말하지 말고 버텨. 내가 멜브란트에서 작위를 받는 조건 중의 하나가 널 빼내는 거야.”

“어……. 어쩐지 감옥에 안 가서 이상하다 했어요……. 그래서였구나. 그런데 작위 받으세요? 셰비언님이요? 용이 인간에게 작위를 받아요? 그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될 건 또 뭔데? 인간들도 타국에서 작위 받잖아.”

“어어……. 왠지 연상이 잘 안 되는데요. 굉장히 어색해요.”

“그럼 지금부터 상상해. 아무튼, 내가 널 그냥 빼내면 넌 도망자가 돼. 정식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려. 네가 우리에게 배운 걸 공개하는 건 그 다음이다. 그 전에 발설했다간 네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샤를레아가 날뛸 테지. 그런 사태는 피하고 싶다.”

다나는 갑자기 눈앞에 내려진 동아줄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유일한 탈출로이니, 그녀는 필사적으로 동아줄을 움켜쥐었다.

“어, 얼마든지 그렇게 할게요. 그럼요, 아무도 제 입을 열 수 없을 거예요. 팔다리를 다 잘라내고 머리와 목만 남긴대도 말 안 해요.”

“다짐이 아주 거창한데. 내가 그걸 믿어도 돼?”

“그럼요.”

“넌 내가 가르쳐 준 마법망 안정화와 마력구슬 제작법을 네 동족을 살해하는 데에 썼어.”

“그건 샤를레아님이 가르쳐 주신…… 아니, 아니에요. 셰비언님에게 배워놓고 제가 멍청하게 큰 실수를 했어요. 다신 안 그래요. 어차피 저는 오른손을 쓰지도 못하잖아요. 마법사로서는 불구나 마찬가진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다나는 진심이었다. 빌어먹을 용 새끼들, 이라는 욕설도 지금의 매달림도 모두 진심이었다. 셰비언은 회의적인 눈으로 다나를 훑어보면서도 미래를 약속했다.

“네가 무사히 나오고 나면 그땐 널 내 제자로 받아주지.”

“제가 마법을 계속할 수 있다고요? 정말로요? 샤를레아님이 뭐라고 하신 거예요?”

“샤를레아와 합의한 거야. 널 빼내어 살리고 가르치는 걸 내가 도맡는 대신 샤를레아는 너에게서 손을 뗄 거다.”

다나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셰비언은 손을 망가뜨린 원망스러운 이였지만, 동시에 그 손을 무사히 옛날로 돌려놓을 수 있는 단 한 명이기도 했다.

“싫으면 지금 말해. 사실 나도 널 내 제자로 받는 게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니까.”

“아, 아뇨! 좋아요! 마법의 주인에게 배울 수 있는 건데, 어떻게 싫을 수 있겠어요!”

“그럼 나갈 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 내 보호는 네가 나온 다음부터 시작되는 거니 그 이전엔 네가 알아서 해야 하니까.”

셰비언은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발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다나는 시체를 올려둔 책상 다리에 기대어 앉아 히죽히죽 웃었다. 셰비언이 넣어준 마력 때문에 몸 상태가 좋아진 것도 좋아진 거지만, 앞날에 대한 희망이 생겼다. 설마 제자의 손을 지금처럼 불구로 두진 않을 거라는 희망. 시체가 쌓인 자료실이 이전처럼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날 여기에 그냥 둘 분들이 아니시지. 난 특별하니까……! 좀 추운 거야 잠깐 피서라도 왔다고 생각하면 돼.’

다나는 삐걱대는 무릎을 끌어안고 셰비언의 마법을 배운 자신을 상상했다. 고쳐진 오른손으로는 화려한 문장을 띄우고, 왼손으로는 벼락을 자유로이 다루며, 허공을 밟고 날아올라 구름을 타고 놀 미래를.

샤를레아에게 배울 때도 엄청나게 좋았는데, 셰비언은 무려 마법의 주인이었다. 질적으로 다른 전수가 있을 게 분명했다. 상상만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아 일부러 목소리를 냈다.

“셰비언님의 제자가 되면…… 다 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재수 없는 년놈들의 머리에 벼락을 때려야지. 그리고 멀리 떠나야지. 발톱섬에도 가보고, 실렌다 사막의 유적지에도 가고…….”

“……누구의 제자가 된다고?”

다나는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드러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기에 계속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스와디가 몸을 일으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빛이 아주 형형했다.

“제자? 무슨 제자? 꿈꿨나 보지? 역시 북부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달라. 옷 좀 도톰하게 입었다고 이런 곳에서 잠도 잘 자고 말이야. 중부 출신인 나는 너무 추워서 제대로 드러눕는 것도 힘이 드는데.”

“내가 지금 몰라서 묻는 걸로 보여?”

“네가 꾼 꿈을 왜 나한테 따져? 황당하게. 정말이지, 북부의 녀석들은 하나같이…… 악!”

스와디가 다나의 발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확 걷어찼다. 묵직한 쇳덩이에 부딪힌 다른 쪽 다리의 정강이가 끔찍한 고통을 선물했다. 다나는 발목을 쥐고 웅크렸다.

“뭐, 뭐 하는…… 억!”

이번엔 머리였다.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눈앞에 불이 번쩍이고 몸이 옆으로 홱 넘어갔다. 얄팍한 담요는 별 도움이 안 되어서, 바닥에 부딪힌 광대뼈가 얼얼하니 아팠다. 자세를 다시 잡기도 전에 스와디가 다나의 위에 올라타서는 체중으로 그녀의 배를 눌렀다.

“허억, 헉, 무, 무거워……! 비켜…….”

“셰비언 씨의 제자? 네가?”

“컥…….”

마법사의 재능을 알게 되기 전까지 거친 북부의 칼바람 속에서 밭을 고르고 땅을 일구던 손이 다나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사람을 괴물로 만든 네가? 일부러 괴물 시체 사이에 처박아놨는데도 반성은커녕 조롱만 주절대던 네가?”

“끄윽…….”

“너 같은 괴물은 칼을 잡으면 안 돼. 나도 안 되는데 네가 된다니 말도 안 돼!”

너만은 안 돼, 반복적으로 읊는 스와디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붉은색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긴장과 흥분에 휩싸여 뛰는 소리가 귓가에 아주 요란했다. 사람에서 괴물로 변해가던 이들의 절망적인 눈빛과 비탄 섞인 울음이 다나의 얼굴에 덧씌워졌다. 안타깝고 동정적이며 혐오스러운 괴물들.

“죽어! 죽어버려!”

숨이 모자란 몸뚱이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다나의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구속구는 개량을 거듭하여, 이젠 마력은 물론이고 육체적인 힘까지도 상당히 제약하는 물건이었다. 저항은 점차 잦아들다 끝내 멈추고 말았다.

“헉, 헉, 허억…….”

스와디는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감촉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널브러진 다나의 목에 남은 시뻘건 손자국을 보자 더럭 겁이 났다. 툭툭 건드려도 보고 코에 손가락을 대고 숨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다나 트왈릿은 그녀의 손에 확실히 시체가 되었다.

‘이제 어떡하지.’

혼자 잘 살겠다고 기껏 가족을 등지고 고향을 떠나서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망치다니. 끔찍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그냥 풀려날 낌새인 다나를 죽여 버린 것에는 후회가 없었지만, 겨우 다나 때문에 인생이 망가질 거란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는 와중에도 스와디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다나의 자세를 웅크린 모양새로 바꾸고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서 얼굴과 목을 가렸다. 얇은 담요로 덮고 나자 추워서 웅크려 자는 것만 같은 모습이 됐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스와디는 풀숲에 머리를 박은 꿩 꼴을 하고 자신이 저지른 짓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아무도 그 꿩을 사냥하지 않았으니, 결국 다나의 사인은 동사로 조용히 처리되고 말았다. 수십에 달하는 브란젤의 왕궁마법사 중, 다나의 목숨을 아깝게 여긴 이가 한 명도 없었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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