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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괴물 (23/62)

chapter 21. 괴물

「보통 사람들은 삽을 받으면 땅을 파는 데에 쓰지, 누군가의 머리를 찍어버리는 데에 쓰지는 않는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상처가 있겠느냐마는, 그중에서도 화상은 고통의 강도로 따지면 퍽 상위에 자리할 부상이었다. 화끈거리면서 근질근질하고, 때로는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상처의 깊이가 얕으면 얕은 대로, 깊으면 깊은 대로 끈질기게 고통을 주다가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피올은 왼쪽 정강이 거의 전부를 덮은 화상에 새 약을 바르고 거즈를 붙였다. 거즈가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는 손길이 아주 꼼꼼했다. 마지막 매듭까지 정성들여 묶고 나자 이마를 흠뻑 적셨던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씁……. 더럽게 아프네.”

그의 부상은 네이기스의 스케치북을 꺼내오는 중에 입은 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이라의 사망을 확인하는 와중에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가 화상을 입었다. 어차피 소방대원이 와서 다 확인해 줄 것을 눈앞에서 약혼자를 잃은 여자에게 쓸데없는 동정을 발휘했다.

자신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던 걸 생각하면 헤이라도 피할 시간이 충분했을 텐데 왜 제때 피하지 못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었다. 하긴 이 사건에 이상한 점이 한두 개인가. 지금으로서는 누가, 왜 불을 붙였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하지만 그건 소방대에서 밝혀낼 일이고 당장은 부상 치료가 먼저였다. 네이기스 앞에서 다친 걸 티내기 싫어 버텼다가 상처가 악화된 걸 유렌이 알고 얼마나 자신을 긁어댔었나.

‘이런 등신 새끼를 봤나. 몸뚱이로 먹고사는 새끼가 피할 수 있는 부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 멋진 척 하다가 상처를 악화시켜? 나더러 잠을 처자든 연습을 하든 하라더니, 동네 개보다 못한 새끼가 여기 있네. 씨발, 아주 그냥 배려를 원수로 갚아요.’

치안대와 연결된 병원에서 처치를 받는 내내 유렌의 험한 욕설을 감당해야 했지만, 아무리 성질이 나도 맞받아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이렇게 집에 틀어박혀 쉬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까.

심한 화상은 아니어도 워낙 면적이 넓어서 고통이 만만치 않았다. 관절 부위는 무사하다는 게 그마나 다행이었다. 나중에 다 나았을 때 움직임에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팔굽혀펴기라도 좀 해 볼까 하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야, 아베드, 너 다쳤…….”

“이 미친 새끼가!”

라비린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침실과 응접실과 식당이 벽도 없이 함께 있는 자그마한 집인지라 피올은 어디 숨지도 못하고 속옷 바람인 꼴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말았다.

피올은 부상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벌떡 일어나 문을 닫았다. 그로도 모자라 라비린의 정강이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발길질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확 부러뜨려 버리고 싶다는 심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격이었다. 비록 라비린이 잽싸게 피해 버리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라비린이 짐짓 놀랐다는 듯 손뼉을 쳤다. 짝, 짝, 짝.

“이야, 아베드, 너 언제 이렇게 컸냐? 이젠 꼬맹이라고 못 놀리겠네.”

“누가 아베드야! 피올이라고 불러, 피올이라고! 내가 치안대원 된 지가 언젠데 아베드 소릴 하고 있어? 브란젤에 돌아온 지도 한참 됐으면서 아직까지 정보 갱신이 안 됐어?”

방음이라곤 기대할 수 없는 싸구려 방이었다. 옆집에 사는 다른 세입자를 배려해 쥐죽은 듯 조용히 살았던 피올이지만, 몇 년 만에 만난 형이 꺼낸 옛 이름은 참지 못했다.

라비린은 피올의 고성은 들은 체 만 체하며 방을 훑었다. 일인용 침대와 작은 옷장, 식탁 겸으로 쓰는 게 틀림없는 테이블과 의자 하나면 가득 차는 작은 방이었다. 세면대와 화장실은 갖춰져 있었지만 부엌은 없었다. 아무리 사람 많고 물가 비싼 브란젤이라지만 개중에서도 퍽 하위에 속하는 집이었다.

“설마 갱신이 안 됐겠냐. 하지만 어떡하냐? 가계도에서 네 이름이 아직 안 지워졌는데.”

“뭐? 그럴 리가!”

“어머니가 산트렘 출신이라는 걸 잊었어? 네가 치안대원이랍시고 이름까지 바꿔가며 쇼를 하고 있어도 어머니 자식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거지. 산트렘 사람들이 얼마나 핏줄에 집착하는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타우레드 저리가라 수준이야.”

피올은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차라리 빈정대는 게 낫지, 이렇게 반박도 못할 말을 하며 성질을 긁어대다니. 몇 년 만에 나타나서는 얄미운 소리나 찍찍 해대는 주둥이를 후려갈기고 싶은 걸 참는 게 몹시 힘들었다.

차라리 안 봐야지 싶은 마음에 아예 고개를 돌리고 옷을 꿰어 입었다. 붕대로 싸놓은 상처부위에 닿지 않을 만큼 통이 넓은 바지가 잠옷바지밖에 없다 보니 볼품없는 꼴이 되긴 했어도 속옷 바람보다는 백 배 나았다.

라비린은 피올이 싫은 내색을 비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낡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짚을 넣은 부실한 매트리스는 둘째 치고 어긋난 프레임이 빽빽 질러대는 비명이 아주 시끄러웠다.

“내가 떠나는 그날까지도 어머니와 라디아타를 잘 돌봐달라 부탁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집을 나갔으면 잘 지내기라도 해야지, 이 꼴이 다 뭐야? 그러게 내가 너는 산트렘 기사단 따위 안 맞는다고 백 번도 더 말했는데 귓등으로 듣더라니…….”

“그렇게 걱정이 됐으면 처음부터 떠나질 말았어야지. 열넷이 되기 전에 집을 나갈 거라고 내가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관심도 없었으면서 새삼. 그보다 너, 계속 그따위 피곤한 잔소리를 지껄일 거면 그냥 꺼져. 너나 내가 뭐 얼마나 살가운 형제 사이였다고 걱정하는 척을 해?”

“방 꼬락서니를 봐라. 잔소리가 안 나오게 생겼나.”

“나야 이제 기사도 아니고 그냥 치안대원이지만 라비린 너는 아직 기사지? 장갑으로 뺨을 쳐 줘야 그 빌어먹을 혓바닥을 멈출 거라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어.”

“까짓 거 던져 보든가. 네 말대로 일개 치안대원이 남작에게 장갑을 던졌다는 게 얼마만 한 스캔들이 될지 알고 싶다면 말이지만. 아, 스캔들 내는 게 싫으면 그냥 가문으로 돌아오면 돼. 그럼 그냥 형제싸움이 될 테니까.”

“아으! 으아아으아으!”

피올은 뻗치는 성질을 다독이느라 머리통을 붙들고 괴성을 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입꼬리를 삐죽 올린 얄미운 얼굴을 무릎으로 찍어버리고 싶다. 사실 성공할 거란 확신은 있는데 문제는 후환이었다.

“씨발! 왜 왔어! 서로 없는 척하고 살면 되잖아! 이제까지 잘했으면서 왜!”

“괴물 때문에.”

“하! 아직도 유모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잠을 설치기라도 해? 웬 괴물?”

“머리가 달려 있으면 생각을 해라, 아베드. 오드리와 라디아타가 다 연관된 일이 아니었으면 나도 네놈 새끼 따위 신경 안 쓰고 살았을 거야.”

“화가 저택 얘기면 치안대랑 소방대에 가서 물어. 조사를 한 건 그쪽인데 왜 나한테 와서 지랄이야? 안 그래도 다쳐서 짜증나는데 뭐 별…….”

“고가의 작품이 있는 저택에 여자들만 산다는 걸 노린 강도가 침입했고, 식사 중이었던 화가들이 참변을 당했지.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헤이라 씨의 약혼자가 헤이라 씨를 챙겨 2층으로 도망쳤지만 따라잡혀 죽었고, 그 광경을 목격한 헤이라 씨는 자신을 지킬 목적으로 불씨가 담긴 구슬을 던졌지만 애먼 저택만 태우고 본인도 사망. 당시 저택에 있었으면서도 살아남은 사람은 화가 페리와 요리사와 정원사, 레이디 그웬의 개인 하녀 루말 양까지 네 명. 그러나 강도는 시체도 찾지 못했고.”

“아직 완료되지도 않은 사건 내용을 잘도 알고 있네. 위에서 흘렸을 리도 없는데……. 뭐 개인적으로 파고 다니기라도 했어? 여전히 재주가 좋은데. 난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도착해서 자세한 얘기는 몰랐는데 알려줘서 고마워. 그렇게 된 일이었군. 아쉬운 일이야, 다리가 멀쩡했으면 내가 직접 망할 강도놈을 잡으러 다녔을 텐데.”

뻔뻔스레 딴청을 피우는 피올이 어찌나 재수가 없는지, 라비린은 하마터면 피올의 다친 다리를 걷어찰 뻔했다.

오드리와 라비린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전보에 대한 뉴스는 강도살인과 화재라는 자극적인 뉴스에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다. 수확제에서 전보를 정식으로 공개하기까지 계속해서 화제가 되길 바랐는데 이대로라면 영 글렀다.

라디아타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후원하던 화가들 다섯 중 셋이 죽었으니 재산상의 피해보다 그 충격이 더 컸다. 하지만 마냥 애도만 하기엔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몹시 무거웠다.

수확제 준비를 하는 동시에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진행하고 유족에겐 위로금을 지급했다. 더불어 살아남은 이들이 머물 다른 장소를 물색해 정돈하는 일까지 하다 보니 차 한 모금 넘길 시간도 없이 바빠 얼굴이 반쪽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네이기스가 그웬가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냈으니, 오드리도 라디아타도 기가 막혀 뒷목을 잡을 밖에.

라디아타는 물론이고 오드리까지 맨발로 뛰쳐나와 네이기스를 설득했지만 네이기스는 완강했다. 이대로 화가의 길을 포기하는 거냐는 물음엔 아니라고 답하면서도, 무조건 집에는 돌아가야겠다는 식이었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으면서 고집이 어찌나 센지, 오드리도 라디아타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네이기스는 결국 그웬가로 돌아갔다. 메너트는 굉장히 기뻐하며 오드리에게 값진 선물을 잔뜩 보냈지만, 오드리가 그걸 어떻게 기쁘게 받겠는가. 그녀는 간만에 겪어보는 투자 실패를 쓰라리게 받아들였다.

한편, 라비린은 수확제 준비에서 벗어나 있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만큼 개인적으로 따로 화가 사건을 파고 다녔다. 타우레드의 장자라는 위치가 퍽 도움이 됐다. 치안대가 필사적으로 묻고 있는 괴물 사건을 들춰볼 수 있었으니까.

다 타버린 시체에도 남아 있던 흉흉한 상처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자마자 리가 항구에서 마주쳤던 괴물이 떠올랐다. 오드리를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오던 그 괴물 말이다. 기록을 읽는 내내 등골이 오싹해지고 입에서 침이 말랐다.

“루말 양을 만났어.”

“그게 누군데? 그렇게 요란하게 약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람이야? 아, 됐어. 설명할 필요 없어. 라비린 네가 누굴 만나고 다니든 내 알 바 아니니까, 꺼져.”

피올이 마치 가게에서 얼쩡거리는 양아치를 내쫓듯 라비린의 멱살을 쥐어 일으켰다. 하나 그대로 당할 라비린이 아니니, 그는 붕대가 감긴 정강이를 노려 확 걷어찼다. 억! 피올이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함께 바닥을 굴렀다.

“헉, 으흑……. 이 개새끼가……! 기사 작위 반납해, 새끼야!”

“하하, 반납? 순진한 소리 하지 마라, 아베드. 이런 일쯤이야 산트렘의 기사 노릇하면서 많이 해 봤을 거잖아? 국왕 전하의 사나운 개새끼 노릇이 지긋지긋해서 뛰쳐나온 주제에 이런 사소한 비겁함에 당하다니, 순진한 자식. 그동안 치안대원 노릇이 꽤 편했나 보지?”

라비린은 구겨진 옷깃을 펴며 바닥에서 끙끙대는 피올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오드리를 볼 때면 달콤한 초콜릿처럼 녹아내리는 갈색 눈동자가 얼어붙은 땅처럼 싸늘했다.

피올에게는 지독하리만치 익숙한 눈빛이었다. 단지 그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짓눌리는 기분이 드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는 비참함에 이를 갈면서도 감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나약하고 어린 날에 목줄이 매인 짐승은 충분히 힘이 갖춰진 뒤에도 줄이 묶인 말뚝을 뽑을 생각을 못한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미친 새끼……. 너 같은 걸 사자로 착각하다니, 타우레드 후작도 한물갔어. 네 약혼녀 되는 분은 네가 이렇게 미친 새끼인 줄 알아?”

“순진하고 멍청한 아베드, 내가 이런 놈이니까 사자의 후계자인 거다. 만약 네가 오드리에게 일러바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 그녀는 내 이런 면을 보고 놀라 쓰러지거나 새삼 두려워할 여자가 아니니까. 아,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그녀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구는 건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너는 알지? 하고 싶은 일을 방해받으면 내가 얼마나 사나운 짐승이 되는지. 그러니 얌전하게 굴어.

“타우레드 후작은 너 같은 짐승에게 어떻게 목줄을 걸었는지 모르겠어.”

“이런, 아베드……. 내가 누구에게 이런 방식을 배웠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설마 왕궁에서 배워왔겠냐? 생각을 해라, 생각을. 그런 머리통으로 산트렘의 기사 노릇은 어떻게 한 거야? 이모님께서 네놈 때문에 속 좀 끓였겠어.”

“쓰레기 새끼.”

“욕을 하더라도 적절한 욕을 골라 써라, 멍청아. 내가 쓰레기면 쓰레기에게 밟혀서 감히 일어나지도 못하는 넌 뭐가 되게?”

라비린은 피올을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아까보다 기가 확 꺾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진작 이렇게 얌전히 굴었으면 좋았을걸, 괜히 힘을 뺐잖은가.

“자, 이제 제대로 얘길 해 보자. 괴물에 대해 치안대는 어디까지 알고 있지?”

“산트렘의 기사는 입이 무거워. 그리고 난 지금 부상으로 요양 중인 치안대원이야. 당장 내일도 의사를 만나러 갈 건데, 무슨 수로 내 입을 열게 할 거지?”

“산트렘의 기사 따위는 예전에 집어치우고 나왔잖아, 아베드.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라비린, 너야말로 눈에 씐 깍지를 뗄 때가 왔다는 걸 이제 인정하지 그래? 아베드 따윈 이제 없어. 난 피올 보티안이야.”

“하, 이런 귀여운 자식을 보았나. 피올 보티안? 평민 치안대원이 작위가 있는 귀족에게 손을 대고도 무사할 것 같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아베드라고 부르는 것부터 그만두시지.”

브란젤 외곽, 부엌도 없는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벌집 같은 꼴을 하고 있는 낡은 건물에서 사자 두 마리가 마주 앉아 이를 드러냈다. 집주인에게는 불행하게도, 말로 곱게 끝날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 * *

브란젤의 호가르 거리는 역사 깊은 유흥가였다. 브란젤의 성벽 아래 주춧돌이 놓일 때부터 있었다는 도박장, 매년 새롭게 단장하는 주점, 리즈비아 거리의 우아한 극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의 공연을 하는 작은 극장들이 와글와글했다.

그리고 그 거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숙소도 그만큼 많았고 수준도 천차만별이었다. 허름하다 못해 비가 새고 쥐새끼가 제 집처럼 출몰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하룻밤 방을 빌리는 일에 금화 한 개를 받는 고가의 호텔도 있었다.

샤를레아는 그중에서도 사람이 많이 오가는 펍의 2층에 세 들어 살았다. 썩 훌륭한 숙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호가르 거리의 대형 도박장들 가운데에 자리 잡은 건물이었으니, 인간은 좋아하지 않아도 도박은 좋아하는 그녀다운 자리선정이었다.

혹시 몰라 꼼수를 부려 남긴 마법으로 문을 잠그고 자물쇠를 세 개나 달았건만, 셰비언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도대체 어딜 돌아다니는지 연락이 안 되는 샤를레아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보다 아예 집에 눌러앉아 기다릴 작정으로 샤를레아의 방에 들어왔다.

로렐라이에서 마련해 주겠다는 숙소도 마다하고 잡아놓은 방엔 생활감이 별로 없었다. 부엌은 물기가 마른 지 오래고 창틀엔 먼지가 소복했다. 테이블에 펼쳐 놓은 브란젤 지도와 흐트러진 침대, 욕실에 놓인 젖은 비누 정도가 그나마 사람이 산다는 느낌을 줄 뿐이었다.

셰비언은 싸늘하게 식다 못해 냄새마저 희미해진 매트리스를 더듬거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월세는 꼬박꼬박 내고 있다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거, 여기 들어오기는 해?’

이래서야 방에서 기다리기보다 도박장을 뒤지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눈에 확 띄는 미인인데 목격담 하나 안 나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뻔히 알면서도 도박장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간 갑갑한 게 아니었다.

테이블에 펼쳐 놓은 브란젤 지도를 살폈다. 이곳저곳에 동그라미를 친다든가 하며 살핀 흔적이 보였다. 어느 때엔 펜 대신 손톱으로 눌러놓은 듯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셰비언은 지도책을 살랑살랑 넘기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괴물이 등장하는 부분에 표시를 해둔 거라고 생각했는데, 꼼꼼하게 살펴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예전에 뿌려놓았던 마력구슬을 도로 찾으려고 돌아다녔던 부분들에 집중적으로 표시가 남겨져 있었다.

‘뭐지, 이거…….’

순간, 벼락 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미리 담아둔 마력을 조금씩 방출하면서 마법망을 수선하는 마력구슬.

다른 마력을 들쑤시고 헤집는 성질을 가진 용의 마력과 인간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다른 종족의 마력.

괴물은 타인을 살해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죽인다. 그러나 그게 정말로 ‘자살’일까? 혹시, 증오스러운 인간을 죽이는 ‘살해’는 아니었을까?

“맙소사……. 괴물을 만든 게 나라고?”

뒷목이 빳빳하게 굳고 시야가 심하게 흔들렸다. 괴물이든 뭐든 어차피 인간의 사정이니 용과는 상관없다고, 알아봐야 한다는 샤를레아의 말을 몇 번이나 무시했던가. 인간이 마법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다투는 일에 무슨 간섭을 해야 하느냐는 방관자적 입장이 곧바로 뒤집혔다.

셰비언은 즉시 지도책 전부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샤를레아가 마력으로 막아놓긴 했지만 셰비언은 마법의 주인이었다. 어설픈 마력 자물쇠를 푸는 거야 어린애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웠다. 쉬워야 했다.

“읏!”

허공에 띄워두었던 지도책이 새파란 불길에 휩싸였다. 셰비언이 걸었던 복사 마법마저 흐물흐물하게 녹여 버릴 만한 열기였다. 셰비언은 무의식중에 불에서 책을 꺼내려다 화끈한 통증에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마법으로 만든 불이 아니라 화룡의 권능으로 붙인 불이었으니, 얼음과 한기를 다루는 셰비언과는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하여간 악취미야……. 태울 거면 바로 태워 버리든가 할 것이지, 왜 불 속에 가둬놓기만 하는 건데? 보면서 열 좀 받으라 이거야?”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바로 재가 되면 허무하잖아? 노력하면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쪽이 훨씬 좌절감을 주기 좋지.”

혼잣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부터 방에 들어와 있었는지 모를 샤를레아가 문지방에 기대어 서서 셰비언을 비웃었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평소답지 않은 화려한 중부식 드레스 차림에 화장과 머리까지 완벽했다.

“네 불이 대단하긴 해도 내가 저 지도책을 못 꺼낼 거란 생각은 안 드는데?”

“하지만 시간은 걸리겠지. 그럼 그걸로 충분해. 꺼내기 직전에 태워 버리면 되니까.”

“이 지도책으로 뭘 하고 다녔기에 그래?”

“뭘 하고 다녔긴? 그냥 약간의 호기심을 충족시켰을 뿐이야. 누군가 흥미로운 물건을 여기저기 흩뿌려 놓았기에 좀 가지고 놀고 싶더라고. 왜, 그게 뭔지 궁금해?”

둥그렇게 휘는 눈매가 아찔했다. 누군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져서 간도 쓸개도 내줄 미소지만, 셰비언에겐 짜증나는 말꼬리 돌리기에 불과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이를 갈았다.

“그나마 조금 남겨뒀던 자비까지 모조리 거둬가길 바라? 좋아, 정말 밑바닥까지 긁어보자고. 그럼 네가 숨긴 마법이 얼마나 되는지 나오겠지.”

“성질머리 하고는. 다나, 구슬 좀 꺼내볼래?”

“다나?”

낯선 이름에 셰비언이 의문을 표하는 가운데, 샤를레아의 치마폭을 방패 삼아 숨어 있던 여자가 주춤주춤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과 금색이 너저분하게 섞인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은 여자였다. 왕궁마법사의 감청색 로브 때문인지 더더욱 창백해 보이는 피부에 눈 밑의 검은 그늘이 아주 짙었다.

놀라우리만큼 건강해 보이지 않는 안색은 둘째 치고, 셰비언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용의 마력에 몹시 놀라고 말았다. 바짝 엎드려 숨죽이고 있으면서 그를 속였던 오드리의 마력과는 달리, 따로 손을 잡지 않고도 알 정도로 존재감이 확실했다. 그녀에게서는 짙은 유황 냄새가 났다.

워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다나는 자신을 소개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셰비언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샤를레아의 재촉을 받고서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로브 안에서 마력구슬을 꺼내 내밀었다. 새카만 연기 속에 별가루 같은 금빛이 떠다니는 구슬이었다.

“왕궁마법사, 다나 트왈릿이에요.”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 왕궁마법사 이상으로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던 다나로서는 굉장히 큰마음 먹은 소개이지만, 그를 알 리 없는 셰비언에게는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샤를레아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이 여자의 뭘 믿고 따라다녀요? 그것도 마법사가.”

“마법사니까요.”

다나가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반짝거렸다. 마법사로서 마법의 원류인 용을 만났는데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투였다. 샤를레아가 용이 가진 마법을 나누는 일에 얼마나 인색하게 굴었는지 뻔히 알고 있는 셰비언에겐 황당하기만 한 답변이었다.

“미쳤어요?”

“이 마력구슬에 새겨둔 수식이 정말 독창적이었어요. 따라 해 보려다가 계속 실패만 했다니까요! 샤를레아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해석도 힘들었을 거예요. 방출하는 마력의 파장을 따라서 마법망이 안정적으로 변하는 과정이 정말 흥미로웠는데…….”

“다나, 이제 그만 돌아가. 나는 내 동족과 할 말이 있으니까. 마법망에 대한 건 다음번에 만났을 때 마저 설명해 줄게.”

“네! 편할 때 불러주세요!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으니까요!”

왕궁마법사가 얼마나 바쁜지 뻔히 아는 셰비언은 다나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지만, 정작 그 말을 한 사람은 발에 날개라도 달린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북적대는 거리 한가운데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는 샤를레아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제법 상냥한 미소를 띠고 마주 손을 흔드는 샤를레아가 셰비언에게 얼마나 가식적이고 황당하게 보이는지. 그는 샤를레아가 제대로 된 정장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 몹시 아쉽게 여겼다. 도대체 다리가 어디쯤에 있는 건지 가늠이 안 되는 통에 정강이를 걷어찰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인간까지 끼고서 괴물을 만들고 다녔어?”

“그건 또 무슨 말이람.”

“용의 마력이 인간 내부의 마력균형을 흐트러뜨리는 걸 알잖아. 그게 괴물화로 이어지는 거고.”

샤를레아는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핀을 뽑아내다 말고 소리 내어 웃었다. 같은 정보를 접하고도 하도 반응이 없기에 혹시 내가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게 아닌가 했는데, 죄책감에 젖은 표정을 보니 기대했던 것 이상의 쾌감이 몰려왔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어? 느리네, 셰비언. 어쩌다 너 같은 게 마법의 주인이 됐나 몰라.”

“그야 당연히 나만 한 녀석이 없었으니까 마법의 주인이 됐지. 마법으로는 내 발끝도 못 따라왔으면서 그따위로 주절거리다니 양심도 없지. 아무튼 그래서 뭔데? 네가 정말로 괴물을 만들고 다녔어?”

“내가 아무리 미친년이라도 그 정도는 아니야. 난 그냥 네가 만들어 뿌렸던 마력구슬을 재배치했을 뿐이거든.”

“내가 만들었던 마력구슬?”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는 내 말을 듣고도 계속 방치하기에 용의 마력은 다른 마력을 자극하는 성질을 가졌다는 걸 까맣게 잊은 줄 알았지.”

샤를레아가 불 속에서 지도책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어느 한 부분을 펴서 몇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그으니, 그 궤적을 따라 종이가 까맣게 타들어갔다.

워커와 함께 브렌젤의 마법망 상태를 조사하고 다녔던 셰비언은 그녀가 짚어낸 구역이 어떤 곳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침저녁으로 유독 심하게 마법망이 요동치는 탓에 골머리를 앓았던 곳들이었다. 타들어간 지도를 받아든 그의 안색이 눈처럼 창백해졌다.

“다나는 네가 뿌린 구슬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만났어. 눈치도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게 아주 귀엽더라고. 마력도 아주 마음에 드는 게……. 이 더위에 잘도 로브를 껴입고 다닌다 했더니, 화룡의 마력을 타고났더라!”

샤를레아가 다나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더 지껄였지만, 셰비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는 조각난 채로 머릿속에 돌아다니던 정보들을 조합하느라 아주 바빴다. 지도는 곧 그의 손에서 얼음조각이 되어 바스러지며 명을 다 했다.

“……괴물을 만든 게 아니라더니 순 거짓말이잖아. 쉽게 영향 받을 만한 지역을 골라서 뿌려놓고! 적당히 골골거리며 살았을 사람도 이 정도로 용의 마력이 주변에 넘쳐나면 영향을 받게 돼 있어.”

“그래서 그걸 내가 만들었어? 아니잖아. 네가 만들었고, 네가 뿌렸고, 네가 부주의했어. 처음엔 몰랐더라도 괴물 소식이 계속 들려왔으면 알아봤어야지. 안 그래, 마법의 주인?”

“이……! 그래, 내 잘못이라고 치자. 그럼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짓을 한 거지? 역병을 옮기는 짐승처럼 괴물을 만드는 게 재미있었어? 네 눈앞에서 인간이 괴물이 되니 즐거웠나?”

“겨우 인간 서넛 맛 가는 걸 구경하는 게 무슨 재미라고 내가 그런 수고를 했겠어? 그야 당연히…….”

“당연히, 뭐?”

“당연히 네가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말이야. 하하, 하하하하!”

샤를레아는 허리를 젖혀가며 시원하게 웃었다. 끝을 앞에 두고 무의미한 발버둥을 친다며 늘 비웃음을 담고 자신을 보던 눈이 다급해진 걸 보다니, 기대 이상으로 짜릿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반쪽만 남은 심장이 또 뽑힌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까드득 이 가는 소리마저 음악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이 빌어먹을 년이……. 죽고 싶다고 아주 사정을 하지.”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든가. 하지만 이렇게 즐거우니 얌전히 죽어주진 않을 거야. 난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려고 노력할 거니까, 날 죽이겠다면 오드리 아가씨가 머무는 이 도시를 죄다 깨부술 요량으로 덤벼야 할걸.”

히죽히죽 웃는 낯을 가만히 바라보던 셰비언이 갑자기 발을 굴렀다. 그의 발밑에서 은빛 사슬이 솟아올라 샤를레아의 사지를 결박했다. 분명 타이밍 맞춰 피했던 샤를레아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내가 왜 이러지.

“그래도 동족이라고 아끼며 자비를 베풀지 말걸 그랬지. 그래, 진작부터 이랬어야 해.”

샤를레아의 목에 커다란 고리가 걸렸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나 두꺼운 데다 틈새도 없이 그녀의 목에 딱 들어맞았다. 놀란 샤를레아가 목을 더듬으며 빼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불의 권능을 사용하기까지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뭐야?”

“보면 몰라? 개목걸이 채운 거잖아. 많이 회복했다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지? 이런 단순한 마법을 못 피하고 그냥 걸리다니. 경계했던 시간들이 다 아까워질 지경인걸.”

“빼!”

“이름이 다나였나. 화룡의 마력을 타고나 너를 따라다니는 그 정신 나간 왕궁마법사.”

샤를레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셰비언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의지를 배반했다. 바위를 부술 힘을 담아 휘두른 손은 몇 번이고 허공을 갈랐다. 마법에 걸린 몸뚱이는 제 것이 아닌 듯한 위화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불을 다루는 화룡들은 하나같이 성질머리가 더러운 데다 성급하기까지 해서 전쟁에서 가장 먼저 죽어나갔지. 그런 화룡의 마력을 강하게 타고난 마법사라니 제법 흥미로운걸. 왕궁마법사면 제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도 못하고 갈려나가고만 있을 텐데 내가 붙들고 가르쳐 볼까?”

“셰비언!”

“뭘 그렇게 화를 내지? 마법의 주인이 마법사를 길러보겠다는데, 왜?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인간을 좋아하잖아. 화룡이면 어때, 용의 마력을 타고났는데. 마력의 계통도 같겠다, 아주 열심히 가르쳐 주지.”

“셰비언, 마력의 계통도 같은데 왜 그따위로 반응하는 거야? 인간들 틈에 끼어 살더니 이젠 네가 용이라는 것도 잊어버렸어? 그 아가씨한테 하는 것과 너무 다른 거 아냐?”

“글쎄? 어쩌겠어, 아무 느낌도 안 드는걸. 유황 냄새가 맡아질 정도로 확실한 화룡의 계통이라 싫은가 보지. 샤를레아, 내가 그 마법사에게 접근하는 게 싫으면 네가 친 사고를 수습해. 취약점에 뿌려놓은 마력구슬을 몽땅 수거해서 내 연구실로 가져와. 기한은 모레 밤까지야. 무사히 일을 끝마치면 목걸이를 벗겨주겠어. 마법의 주인으로서 하는 약속이야.”

샤를레아가 분을 못 이기고 발을 굴렀다. 쾅! 상아로 만들어 보석으로 장식한 구두굽이 부러지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좋아, 시키는 대로 하지. 이 빌어먹을 목걸이를 차고는 널 죽일 수가 없으니……. 하지만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구슬을 재배치하기 전에 이미 괴물이 나왔었다는 걸. 사고를 친 건 너야, 셰비언. 나는 단지 규모를 키웠을 뿐이지.”

“시끄러워. 원인을 만든 나나 일부러 규모를 키운 너나 다를 거 하나도 없어. 네가 마력구슬 주워 모으는 동안 나는 뭐 놀고 있을 줄 알아?”

셰비언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개목걸이는 그의 손짓에 충실히 반응했고, 샤를레아는 갑자기 숨통을 조이는 목걸이를 붙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깐이었지만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의 고통이었는지라, 생리적인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 너……. 언젠가 내 손으로 꼭 죽여 버린다. 사지를 찢어서 끓는 물에 삶아버릴 거야.”

“이런, 그거 아주 무서운 협박인걸. 네가 정상이기만 했다면 말이지만. 깨어나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아지다니, 그동안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잠깐 사이 이렇게까지 몸이 나빠지다니.”

“먼저 간 동족들처럼 나도 죽을 때가 됐나 보지. 안 그래도 난 심장이 반쪽밖에 없잖아?”

“나머지 반쪽도 뜯어내기 전에 네가 저지른 짓 수습이나 해. 지금 네 상태로는 그 반쪽 떼어내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으니까.”

“나는 금방 회복할 거니까 좀 더 지껄이고 싶거든 뒷일을 좀 생각하고 말하는 게 어때.”

샤를레아는 신경질적으로 구두를 벗어 내던지고 드레스의 끈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다닐 곳이 많은 만큼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것이다. 성격만큼이나 손도 빨라 순식간에 겉옷이 벗겨지고 코르셋이 드러났다. 그녀는 코르셋 위에 착용한 버슬을 벗다 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나가? 뭐 얼마나 보고 있으려고 그래? 당장 나가!”

“인간 여자도 아니면서 몸 좀 보이면 어때서 그래? 새삼 수치심을 느끼지도 않을 거면서.”

“어쨌거나 지금 겉모습은 인간 여자잖아. 이건 기분의 문제야. 구두 굽에 처맞고 싶어? 왜 이렇게 미적대? 나가!”

“나 참, 별 꼴을 다 보겠네. 그러게 평소처럼 입고 다닐 것이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불편한 옷을 다 챙겨 입고……. 아, 간다, 가.”

딱딱하게 심을 넣은 모자가 날아왔다. 셰비언은 뭐라도 더 던질 걸 찾는 샤를레아를 피해 서둘러 현관문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개목걸이도 채웠겠다, 더 기다릴 이유도 없으니 그대로 돌계단을 걸어서 밖으로 나왔다.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지만 아직도 햇살은 뜨거웠다. 화살 같은 빛이 감은 눈꺼풀을 뚫고 들어와 안구를 할퀴었다. 피곤에 젖은 손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멍청하게 군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르네.’

샤를레아를 좀 더 경계했어야 했다. 혹시나 살아 있는 동족이 있을지 모른다며 절절하게 매달리던 게 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졌을 때, 드디어 현실을 받아들인 거라고 쉽게 생각해선 안 됐었다.

셰비언은 샤를레아가 짚어가며 태운 구역의 면적을 떠올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지역 특성에 맞지도 않는 방식으로 퍼져나간 용의 마력에 영향을 받아 엉망으로 흐트러졌을 마법망을 수선하러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마력구슬에 담아놓은 마력이 다 소진되면 괴물의 등장은 자연히 뜸해질 테지만, 그게 대체 언제가 될지는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으니 당장 손을 봐야만 했다. 샤를레아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한두 군데만 손보면 됐을 것을 이젠 온 브란젤을 다 뛰어다니게 생겼다.

“아가씨 보고 싶다…….”

문득, 그리고 매순간 그랬듯이 오드리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세피아 항구에서 전보를 설치하며 마주친 이후로는 전혀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전에는 수확제 준비를 하는 와중에 짬짬이 공간에 찾아와 밀린 잠을 몰아 자고 돌아가곤 했는데 요즘엔 그것마저 없었다.

공간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건만, 새삼 놀랍게 성장한 워커의 그림자만 얼핏 비쳤다 사라질 뿐이고 셰비언의 우주는 여전히 고요했다.

오드리의 주변에 맴도는 상쾌한 향을 맡고 초록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면 이런 피로감 따위는 금세 날아가 버릴 텐데. 샤를레아를 막을 목적으로 삼키게 한 비늘은 셰비언에게도 빗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마력구슬의 부작용을 적어서 방문 요청을 하면 바로 만나주실 텐데.’

오드리가 작금의 괴물 사태에 셰비언의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틀림없이 그를 만나주리라. 앞뒤 사정을 파악하고 밖에 알려지기 전에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할 테니까.

하지만 얼굴 한번 보려고 그런 얘길 꺼내기엔 셰비언의 낯짝이 그리 두껍질 못했다. 자신이 바로 전설 속의 용이고 마법의 주인이라 그리 잘난 척을 했는데, 하나 있는 동족을 통제하지 못해서 마른 들판에 불을 질렀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사실을 알게 된 오드리가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처럼 자신을 베어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 등골이 다 서늘했다.

“어휴…….”

셰비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걷기 시작했다. 길거리의 여자들 얼굴이 죄다 오드리로 보일 지경인데 진짜 오드리를 만나러 갈 수 없다니 그저 서러웠다.

셰비언이 제 눈을 비비며 그리움에 시달리던 그 시각, 오드리는 라비린과 함께 왕궁을 방문했다. 그동안 걱정해 온 일이 터진 탓이었다.

국왕, 펠른 3세가 로렐라이 상단주를 소환했다.

클로드는 오드리와 라비린이 정식으로 약혼식을 치를 때까지만이라도 펠른 3세를 막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수확제의 떠들썩함을 이용하고 싶었던 건 오드리만이 아니었다. 왕립 기계 연구소가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지금, 로렐라이가 국왕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리기에 이만큼 좋은 시기가 또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펠른 3세는 로렐라이의 단주를 만날 시간을 일부러 따로 빼놓기까지 했으면서도 오드리가 소환에 응할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헨젤 백작이 딸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계산속이 있었고, 지금은 오드리가 라비린과 약혼을 했으니만큼 타우레드가 그녀를 막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벌이에 뛰어든 귀족 여성을 보는 세간의 시선은 딱 두 가지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대한 동정, 혹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모르고 날뛰는 머저리를 향한 멸시.

동정과 멸시가 뒤섞인 시선으로 오드리를 보아왔던 건 펠른 3세도 다르지 않았다. 오드리가 그동안 로렐라이를 통해 축적한 개인적인 재산에 손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자비로움과 관대함을 보여주기엔 충분하다고, 그리 여겼을 뿐이었다.

남부식 드레스를 챙겨 입은 오드리가 라비린을 옆에 끼고 예정된 시간에 나타난 걸 보고서도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혹시 그동안 지원해 준 것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라도 하러 왔나 했으니까.

“벨키스 경이 로렐라이의 주인이라고?”

그러니 라비린이 실은 검술수련여행을 떠난 게 아니라 쭉 만탈락에 머무르며 오드리를 대리로 내세워 로렐라이를 운영했다는 말을 했을 때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경, 날 속이려 들지 말게.”

“전하, 그 시절의 헨젤 영애는 어린 소녀였습니다. 갑자기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제 어머니와 돌아가신 헨젤 백작부인은 절친한 친구 사이셨고, 헨젤 영애를 아끼셨던 어머니께서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연습한 말이 줄줄 흘러나왔다.

클로드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여 만탈락으로 내려왔던 일은 친구의 딸을 걱정한 로샨의 안배가 됐고, 메이즈로 신분을 숨기고 일했던 건 오드리가 지역에 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 다정한 배려가 됐다. 클로드가 로렐라이에 지원을 몰아주었던 이유 역시 라비린이 됐으며, 최근에 브란젤을 휩쓸었던 스캔들은 오드리가 데뷔탕트를 마치기만을 기다렸던 라비린의 인내가 됐다.

그의 말대로라면, 로렐라이의 과감한 인재 발탁과 만탈락의 성공적인 도시 운영의 뒤에 라비린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봐도 좋았다.

“타우레드 후작의 대범함이 놀랍군. 한창 인맥과 경력을 쌓을 나이의 후계자를 그런 시골로 보내 성공할지 아닐지 모를 일에 써먹다니.”

“처음에는 어머니의 눈물에 지셨고, 그 다음에는 제가 떼를 썼습니다.”

“떼를 썼다고?”

“예.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습니다. 제 아버지도 사랑에 눈 먼 경험이 있는 분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오래지 않아 포기하셨습니다.”

라비린이 로렐라이의 대리인으로 일하며 늘은 것들 중엔 뻔뻔함과 배짱도 포함됐다. 그는 제 속을 파낼 듯이 바라보는 펠른 3세의 추궁을 능숙하게 넘기며 웃었다. 어찌나 유들유들하게 답변을 해내는지, 혓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하고 왔는가 싶을 정도였다.

하니 펠른 3세의 화살은 오드리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드리 역시 연기라면 나름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화가를 기함하게 했던 강렬한 눈빛은 까맣게 칠한 속눈썹 아래에 숨기고 두 손을 가슴 앞에서 꼭 모은 채 연약하고 마음 약한 귀족영애를 연기했다.

“헨젤 영애는 이름만 빌려줬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부끄럽게도 제가 그때는 아는 게 없는 어린 소녀였던지라, 벨키스 경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럼 로렐라이의 주인을 불렀을 때 왜 함께 나왔나? 벨키스 경만 보내면 됐을 텐데.”

“제가 아는 게 없어 벨키스 경에게 모든 걸 맡기기는 했지만, 그동안 전하께서 얼마나 따스하게 로렐라이를 돌보아주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를 직접 뵙고 감사인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그보다 좀처럼 가질 수 없는 기회에 대한 기대에 몸을 맡긴 소녀처럼 뺨을 붉히고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안 그래도 작은 축에 속하는 체구인데 라비린 옆에 있으니 몸이 더 작아 보여서, 지금 오드리는 마치 갓 둥지를 벗어난 새끼 새 같았다.

라비린은 뿌듯하게 생각했다. 아, 역시 내 약혼녀는 연기를 잘해.

“이렇게 직접 전하를 뵙고 따스한 음성을 들으니,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말을 잇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하, 참.”

펠른 3세는 할 말을 잃었다. 감격에 겨워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까지 찍어내는 꼴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기가 막힌데, 저 어린 것들의 주장을 깨부술 논리가 자신에게 없다는 게 더 어이가 없었다.

무슨 질문을 하든 하나에서 열까지 어긋나는 부분이 하나도 없이 매끄럽게 말이 이어졌다. 만약 말을 증명할 자료를 요구하면 그것도 재깍 제출할 게 눈에 보였다. 얼마나 준비를 했을지 대충 가늠이 됐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 당연히 로렐라이를 넘겨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과는 준비의 정도가 달랐다. 화분에 심긴 게 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깜박 잊다니, 자신도 나이를 먹은 모양이었다.

‘이거야 원, 반성해야겠어. 번잡스럽고 작은 일이라고 타우레드 후작에게 일을 다 맡겨두었더니 이런 꼴을 다 보는군.’

펠른 3세의 치세 초반은 반란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약화된 왕권을 우습게 보고 전복 시도를 했던 어리석은 치들의 피로 바닥을 다지고 그들의 뼛조각으로 높다란 탑을 쌓아 조각난 위엄을 다시 세웠다.

지금 왕궁에서 그럴듯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부와 권세를 누리는 자들은 왕좌 아래에서 흐르는 시뻘건 강을 똑똑히 목격한 이들이었다.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어도 너무 늦지 않게 그의 발아래에 고개를 조아린 이들이기도 했다.

타우레드와 헨젤도 다르지 않았다. 저울이 기울기도 전에 먼저 찾아와 충성 맹세를 바친 가문들이었다.

“헨젤 영애는 헨젤 백작과 그다지 닮지 않은 것 같군.”

“예, 전하. 저를 보는 이들마다 먼저 가신 어머니를 빼어 닮았다 이야기하곤 합니다.”

“뱀에게 잡아먹힌 사슴이 제 흔적을 남겼나 보아.”

오드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단순히 생김새를 언급한 게 아니었다는 걸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미 뱉은 말을 어쩌겠는가. 어쨌거나 헨젤 백작과 겉으로 닮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니, 그렇게 알아들은 척해야지. 그녀는 아무것도 못 알아들은 순진한 소녀처럼 천진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전하, 소녀가 알기로 뱀은 살아 있는 먹잇감을 통째로 삼킨다 하던데, 그렇게 먹힌 사슴이 어떻게 흔적을 남긴다는 것입니까?”

“하하하하!”

오드리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냉랭하던 분위기가 일시에 풀렸다. 펠른 3세는 탁자를 두드리며 웃었고 라비린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졌다.

“이런, 벨키스 경이 어린 헨젤 영애를 혼자 내버려 두지 못했던 이유를 알겠군.”

“예, 전하. 저는 헨젤 영애를 당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팔이 가느다랗고 체구가 작은데도 이길 자신이 없어서 매번 져 주게 됩니다.”

“그래 보인다네. 그보다 벨키스 경, 자네가 헨젤 영애를 대리하여 만탈락과 로렐라이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헨젤 백작도 아는가?”

“당연히 알고 계시기에 저희의 약혼을 허락하셨습니다.”

헨젤 백작은커녕 클로드마저도 두 사람이 지금 저지르는 일을 모르지만, 라비린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대답했다. 국왕 앞에서 이렇게 저질러 버린 이상 아무리 싫어도 말을 맞춰줄 사람들이었다.

하여간 결혼 동맹은 정말 좋은 핑계였다. 아직 약혼식을 치르기도 전이건만, 라비린은 오스미다 왕비가 축사를 읊어준 일을 실컷, 정말 실컷 써먹었다. 밀리나와 로샨에서부터 이어진 인연이라는 점도 끊임없이 강조했다. 펠른 3세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물러날 때까지, 계속.

“과연 타우레드 후작의 후계자로군. 앞으로도 잘해 보게. 로렐라이에는 내가 기대하는 바가 몹시 크니까……. 이왕이면 왕립 기계 연구소와 협업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군.”

의심의 여지없는 항복 선언이었다. 펠른 3세는 사정설명을 듣는 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게 무색하게도 웃는 낯으로 그들을 내보냈다. 사정이 그렇다면야 로렐라이는 앞으로도 단주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심까지 쓰면서.

“표정이 왜 그래?”

“…….”

“원하던 대로 됐잖아. 로렐라이는 앞으로도 네 거야.”

큰 산을 생각 이상으로 수월하게 넘겨 기분이 좋았던 라비린은 좀처럼 미간에 잡힌 주름을 펴지 못하는 오드리를 이상하게 여겼다. 좀 좋아해도 좋을 텐데, 지금 오드리는 앉아 있는 마차 의자의 쿠션을 다 잡아뜯어 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라비린.”

연약한 어린 새 같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사나운 짐승 같은 눈이었다.

“왜?”

“우리, 약혼 무를까?”

“뭔 소리야, 갑자기. 미쳤어?”

“아, 그렇지. 안 되지. 맞아, 안 될 일이지.”

오드리는 화장이 번지든 말든 마구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다이앤이 정성 들여 붙여놓은 가짜 속눈썹이 손바닥을 찔러대는 느낌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알현도 끝났겠다 속눈썹을 잡아 뜯으려는데, 라비린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쥐고 막았다.

안 그래도 구석에서 없는 사람인 척하고 있던 다이앤은 마차를 전부 채울 듯 커다랗게 보이는 라비린의 덩치에 숨을 삼키며 몸을 더욱 쪼그라뜨렸다. 단지 몸을 일으켜 다가왔을 뿐인데 왜 이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데?”

“……기분이 더러워서 그래.”

“그러니까, 대체 왜! 내가 계약서에 어긋나는 짓이라도 했어? 일을 무사히 끝마쳐 놓고 이유도 알 수 없게 이따위로 굴면, 내가 앞으로 널 어떻게 신뢰하지? 결혼은 기본적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계약 관계야.”

라비린은 다다다 말을 뱉어놓고 입을 꽉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데, 분명 겁을 먹을 텐데, 생각하면서도 견디지 못하고 말이 튀어나왔다. 뱉은 말이 있어 차마 사랑해 달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믿게 해달라는 말이나 하는 남자의 비참함이란!

마차의 작은 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이 오드리의 얼굴을 비췄다. 높고 곧은 콧대가 그녀의 뺨에 그늘을 만들었다. 피부가 가무잡잡해 유독 희게 느껴지는 이가 붉게 칠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 아무리 친근하게 굴어도 일정 이상으로 다가가기는 허락하지 않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 향긋한 체향을 들이마시고 싶다. 매끄러운 머리칼을 마구 헤집어 흐트러뜨리고 싶다…….

덜컹! 튀어나온 포석이라도 밟았는지, 마차가 흔들렸다. 그대로 버틸 수도 있을 텐데, 라비린의 몸은 무의식중에 앞으로 기울었다. 펄펄 끓는 눈동자를 홀린 듯 들여다보며 넋을 잃었다.

“라비린.”

오드리의 목소리는 마치 주문 같았다. 라비린의 손에서 저절로 힘이 풀렸다. 그는 마치 불에 닿은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오드리는 라비린에게 잡혔던 손목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왔던 주제에 어찌나 섬세하게 힘 조절을 했는지, 그녀의 손목엔 희미한 붉은 자국조차 없었다.

“내가 한 일들을 내 입으로 부정하고 다른 사람의 공으로 돌리는 거, 생각 이상으로 기분 더러운 일이더라. 어차피 당사자들이 사실을 아는데 목적을 위해 연기 좀 하는 게 뭐가 문제겠냐고 생각했었는데…….”

“…….”

“거짓말로 국왕전하를 기만한 죄를 물지 않으려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겠지. 만탈락도, 로렐라이도 내 재주가 아니었다고 여기저기 떠들면서…….”

“오드리, 내가…….”

자세를 고쳐 앉는 라비린을 향해 오드리가 눈을 흘겼다. 그리고 그림처럼 예쁜 미소를 지었다. 라비린은 누군가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듯 말을 삼켰다.

“사과하지 마. 모르고 네 제안에 응한 거 아니야. 하도 기분이 더러워서 조금 감상적이 된 것뿐이야. 나야말로 미안해, 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고 오히려 내가 기대했던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는데, 괜히 내가 예민했지. 어린애처럼 떼를 썼네.”

“……아니, 내 잘못이야. 네가 상실감을 느낄 거라는 걸 짐작했어야 했어. 결과물이 좋으니 지난 과거를 몽땅 부정한 것쯤은 별거 아닌 듯이 취급하다니, 내 생각이 짧았어.”

라비린이 의자에서 내려와 좁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당황한 오드리의 손을 쥐고 그녀의 손끝에 입술을 맞췄다.

“라비린?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오드리.”

오드리를 올려다보며 웃는 그의 얼굴에 햇빛 한 조각이 떨어졌다. 늘 짙은 초콜릿색으로 보이던 눈동자가 투명한 갈색으로 빛났다.

“약속했었지, 내가 끝내주는 바지사장 노릇을 해주겠다고. 앞으로 네가 해낼 일들에 대한 찬사는 전부 네 몫으로 돌아가도록 해줄게.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내가 오늘 했던 말들이 전부 의심 거리가 되도록 만들어줄게.”

“…….”

“그러니 부탁이야. 부디 나를 믿어줘.”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분명 라비린은 믿어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 말이 사랑해 달라는 말로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라비린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게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마차의 진동 때문인지 가늠이 어려웠다.

문득 의심이 들었다.

이게 정말 우정인가?

깊은 우정만으로 상대를 이렇게 볼 수 있던가?

“라비린, 너……. 혹시 나를 사랑해?”

혹시 아니라고 하면 그 민망함을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스쳤지만 그건 정말 염려로 끝났다. 라비린이 놀라울 정도로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응.”

오드리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고 들었지만, 라비린이 워낙에 단단히 잡고 있어 쉽지 않았다. 그녀는 좁은 공간에서 몇 번이나 애를 쓰다 왈칵 신경질을 냈다.

“왜……. 왜? 사랑 같은 건 시집과 연극에나 있는 거라고 했었던 건 너야!”

“때때로 현실은 창작보다 더 극적이더라고.”

오드리는 셰비언을 떠올렸다. 전설에나 등장하는 용이 정말로 세상에 있고, 용이 자신을 두고 운명이라 부르며 사랑을 속삭이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해 봤던가.

하지만 오드리에게 라비린은 지독히 차갑고 냉정한 현실이었다. 감정 아닌 이성으로 택한 미래였다. 갑자기 감성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이성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라비린, 너는 지금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한 거야. 내가 여자라서!”

“아니, 그건 아니야. 내가 네게 청혼하던 볼린의 밤에 분명히 말했었어. ‘너는 내가 가진 조건에 관심도 없는데, 나는 네게 필요 이상으로 빠질 것 같아’라고. 내가 이런 한심한 꼴이 될 줄을 그때부터 예감했던 거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가 뱉은 말이 있어 이제껏 사랑한다 말하지 않았어. 사랑해 달라고 하기도 어려웠고. 하지만 말하지 않았어도 내 마음이 전해졌다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행복한걸.”

기가 막힌 오드리가 붕어처럼 입술만 벙긋대는데, 라비린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 오드리의 손가락에 입 맞춘 뒤 여신상을 바라보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지? 그럼 가까이에 있으면 마음도 가까워질 확률도 높겠지. 어차피 마음을 들켰겠다, 나는 앞으로 퍽 뻔뻔해질 작정이야.”

“뭐?”

“내가 네 약혼자라서 얼마나 즐거운지 넌 짐작도 안 갈걸. 이 예쁜 손가락에 가문의 반지를 끼워줄 날을 고대하고 있을게.”

마차는 여전히 덜컹대며 움직였다. 라비린의 얼굴을 비추던 햇빛이 자리를 옮겼다. 갈색 토파즈처럼 빛나던 눈동자가 녹아내린 초콜릿색이 되었다. 핥으면 단맛이 날 것 같은 색이었다.

* * *

“당분간 요양을 가는 게 어떨까 싶다, 오드리.”

오드리는 난데없는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라비린과 함께 펠른 3세를 알현하고 돌아온 뒤, 당장 자신을 불러다 고성을 지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며칠 내도록 잠잠하던 헨젤 백작이었다.

조용히 넘어갈 거란 희망 따위는 품지 않았기에,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저 너무 바쁜 나머지 수확제가 끝나고 좀 한가해지면 그때 야단을 치려나 보다 했다. 수확제 당일 아침에 사람을 불러다놓고 요양 타령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헨젤 백작은 오드리의 당황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요새 날이 더우니까 시원한 곳이 좋겠지. 북부 지방에 내가 직접 수소문해서 골라놓은 곳이 있으니, 거기서 한 삼 년만 있다 와라. 준비는 다 해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릴. 오드리, 넌 내가 왜 이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헨젤 백작은 오드리와 라비린이 펠른 3세 앞에서 떠들어대고 온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오드리의 영리함을 높게 치는 것도 치는 거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타우레드의 후계자가 그렇게까지 과감하고 정교하게 도시의 행정을 조정했다니 말도 안 됐다.

더욱이 그 도시는 만탈락이었다. 멜브란트 건국의 주역 중 하나인 랄리우스의 도시. 그 자부심으로 하늘도 찌를 법한 인간들이 밀리나의 딸 이외의 사람의 지시를 따랐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타우레드 후작이 유독 신경 쓰던 걸 감안하더라도 로렐라이 상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정도가 끝일 게 분명했다.

그는 만탈락도 로렐라이도 오드리의 것일 거라고 확신했다. 만탈락 주민들의 인심도, 로렐라이의 부도, 모두 오드리의 소유일 거라고.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감쪽같이 속여왔다는 게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난 널 하찮게 여긴 적이 없어. 네 능력을 폄하한 적도 없다.”

겨우 아홉 살에 어미를 잃고 열 살에 낯선 도시로 쫓겨갔는데, 그 나이에 상단을 세우고 사람을 모으고 지원을 받아내고 도시를 발전시켰다.

헨젤 백작에게 있어 거기까지는 그저 놀라움과 경탄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타우레드의 후계자와 짜고 국왕 앞에서 거짓말을 늘어놓은 건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짓이었다.

데뷔탕트를 치른 욕심 많은 장녀와, 아직 어려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도 못하는 아들. 위기감이 드는 게 당연했다.

“만약 정말로 모른다면 나는 네가 아주 실망스러울 거다.”

“실망하세요, 그럼.”

오드리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막 만탈락에서 올라왔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에 헨젤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겨우 육 개월여가 지났을 뿐이건만, 헨젤 백작의 눈길 하나에 숨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던 소녀는 이제 없었다.

“저야말로 아버님이 몹시 실망스럽네요. 제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 안주거리처럼 씹히던 때보다는 퍽 온건한 소문이 날 텐데,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거든요.”

오드리는 차가운 회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이렇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있으면 의자에 앉은 헨젤 백작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목을 한껏 꺾어봐야 턱선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과는 달랐다.

“저는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귀족영애예요. 아버님은 뭐가 두려워서 저를 이리 급히 치우려 하시나요?”

“혓바닥이 아주 시건방지구나. 네가 아직 어리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면, 좀 더 세상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는 게 좋을 것이다. 머리가 조금 똑똑하다고 세상이 전부 네 편인 것처럼 굴지 말란 소리다. 당분간 북쪽의 별장에 가 있어라.”

헨젤 백작이 몸을 일으켰다. 후리후리한 체격인 그와 눈을 맞추려다 보니 오드리는 자연히 고개를 치켜들게 됐다. 어린 시절과 같은 자세였다. 갑자기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돌아오라고 할 때까지 북부에서 얌전히 지내거라.”

“올해 데뷔탕트를 치르고 약혼을 했어요. 수확제에 제가 얼굴을 내밀길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고 많은데, 당일에 요양을 떠난다 하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멍청한 헨젤 영애가 수확제 준비를 엉망으로 해서 분노한 헨젤 백작이 창피스러운 딸을 멀리 보냈다고 하겠지. 어차피 네 소문이 좋았던 건 잠깐뿐이니 가문은 걱정 마라. 크게 영향 받는 일은 없을 거니까.”

“왜 그리 소문에 관심이 없으셨나 했더니, 마음에 안 차는 딸을 쉽게 떨쳐 내려고 그러셨나 보죠.”

“시끄럽다.”

헨젤 백작이 오드리에게 당장 읽으라는 것처럼 서류 몇 장을 들이밀었다.

재빠르게 서류를 훑던 오드리는 낯익은 이름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물론이고 릴리의 눈까지 피해서 놀랄 정도로 꼼꼼하게 수확제 계획을 세운 게 대체 누군가 했더니, 과연 그럴 법한 인물이었다.

“알신다……. 릴리도 아니고, 알신다요? 가문의 정보를 외부로 빼냈던 하녀예요. 더불어 하녀 주제에 노골적으로 저를 무시했고요. 아버지, 이런 식으로 구시면 안 되죠. 저는 헨젤도 아닌가요?”

“알신다는 가문의 후계자를 위해 행동한 것뿐이야. 그리고 오드리, 네가 나마저 속이고 만탈락에서 로렐라이를 길러놓고 지금 헨젤을 운운하는 거냐?”

“그럼요, 그거야말로 아주 헨젤다운 행동이었는걸요. 내 것을 챙기고, 불리고, 절대 빼앗기지 않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요.”

오드리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쭉쭉 찢었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헨젤의 핏줄에 대한 미움을 담아서, 어쨌거나 아버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저 남자에 대한 분노를 담아서, 무슨 일이 있어도 동전 한 닢 빼앗기지 않겠다는 악을 담아서, 북북.

잠시 어린 시절의 기억에 짓눌렸던 순간 따위는 종이와 함께 찢어 바닥에 흩뿌리고 밟아 짓이겼다. 꽃잎처럼 떨어지는 종잇조각과 함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네가 이래도 소용없다. 데뷔탕트를 치렀으면 뭐 하냐, 아직 성년도 아닌데.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명령을 따라.”

“하델을 부르겠어요.”

오드리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기껏해야 라비린, 혹은 왕비전하를 들먹일 줄 알았던 헨젤 백작이 잠시 멈칫한 사이, 오드리는 망설이지도 않고 줄줄이 말을 내뱉었다.

“하델에게 대놓고 얘기하겠어요. 오, 하델, 내 동생아. 이 누나가 열 살 때에는 만탈락으로 쫓겨나 너와는 편지로만 대화했는데, 얼굴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젠 북쪽으로 가게 생겼구나.”

“…….”

“실은 내가 아버지 몰래 돈을 좀 벌었는데, 그게 아버지의 눈에는 네 후계자 자리를 욕심이라도 내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하늘 아래 하나뿐인 동생을 내가 해코지할 리 없는데, 믿어주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지.”

“할 수 있으면 해라. 알신다를 불러들인 건 내가 아니라 하델이야. 분명 날 이해할 거다.”

“그러죠.”

오드리는 그 자리에서 뒤돌아서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으악!”

집무실 문에 찰싹 달라붙어 들릴 리 없는 말을 들으려 애쓰던 하델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오드리는 바닥에 코를 박기 직전에 하델을 구해내고는 작은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델이 어리둥절하며 오드리의 어깨를 마주 안고 헨젤 백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헨젤 백작은 하델의 갑작스런 등장도 등장이지만, 아들의 눈빛이 예전처럼 마냥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남매가 사이좋게 지내는 줄은 알았지만,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감싸려고 들 줄은 몰랐다.

“하델, 네가 여기 왜 있는 거냐?”

“누나가 단장하는 걸 구경 갔는데 누나가 자리에 없기에 릴리에게 부탁해서 왔어요. 아버지, 누나는 왜 부르셨어요? 누나는 수확제 내내 아주 바쁠 거고 오늘은 특히 더 바쁠 텐데요.”

“당장 돌아가라.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네가 좀 더 나이가 들면 출입하게 해주마.”

헨젤 백작은 하델을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오드리가 그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있나. 그녀는 한탄과 슬픔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하델, 내가 준비한 수확제가 아비지 마음에 영 안 드시나 봐. 멍청한 딸이 너무 창피스러운 나머지 수확제는 고모님과 알신다에게 맡기고 나는 북쪽의 별장에 삼 년쯤 보내두어야겠다고 하시는구나.”

“예?”

하델은 오드리가 한 말에 충격을 받고 헨젤 백작을 바라보았다. 오드리가 멍청해서 창피스러운 딸이면, 자신은 뭐가 된단 말인가. 희대의 바보?

“쯧……. 오드리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라. 환절기마다 호되게 앓으니 괜히 브란젤에서 고생하지 말고 시원하게 북쪽에 쉬러 가라 한 것을 두고 서러워서 저러는 것이다.”

“수확제는요? 누나가 몇 날 며칠을 고생해서 준비를 해뒀는데요. 매년 하던 걸 누나가 오자마자 안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헨젤이 예전 같지 않다며 수군대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요.”

“많이 늘었구나.”

지난 육 개월 동안 변한 건 오드리만이 아니었다. 헨젤 백작은 하델이 예전과는 달리 가문의 평판과 안위를 잊지 않고 챙기는 걸 보고 몹시 흐뭇해졌다. 다정한 손길이 하델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오드리는 랄리우스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으니, 앓아누웠다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델, 생각해 봐라. 오드리는 지난봄에도 호되게 앓지 않았더냐? 또 그렇게 아프기 전에 한가한 곳으로 요양을 가는 게 오드리에게도 좋을 게다.”

그거 참 상냥한 배려이기도 하지. 하지만 하델은 제 아버지가 이상할 정도로 오드리를 챙기지 않았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봄, 그는 침대에 누워 며칠을 앓던 오드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하델은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로부터 누나를 지키겠다던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귀족이라고 할 수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등을 똑바로 폈다.

“알신다와 고모님 얘기는 뭔가요?”

“오드리가 쉬는 동안 빈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하잖느냐. 하던 사람이 쭉 해주면 좋지.”

“아니요, 아버지. 준비한 사람이 누나이니, 일의 진행도 마무리도 누나가 하는 게 옳아요. 수확제 도중에 쓰러져 앓으면 그때 요양을 가더라도 준비한 일의 결실을 다른 사람이 따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 예쁜 내 동생. 말도 잘하지. 오드리는 흐뭇하게 웃으며 하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오드리 아가씨의 단장을 보러 가자, 하델을 부추겼던 알렉스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옆에 서서 어깨를 누르는 다이앤의 손길이 묵직했다.

“그리고 알신다라니요? 아버지, 알신다는 이미 가문을 떠난 사람이에요.”

“네가 보살펴 온 사람이다. 거처를 마련해 주고 생활비를 보조해 주며 남몰래 드나들었지. 다시 부르고 싶어 그런 게 아니냐? 너에게 아주 충성스러운 하녀였다.”

하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동정과 연민, 약간의 반항심으로 저질렀던 짓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살림을 맡고 있는 누나의 권위를 무시한 행동이었죠. 제 잘못입니다. 경제적 지원을 끊고, 다신 알신다를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어차피 지금 하녀장도 엉망으로 일하고 있는 건 아니고, 메너트라면 금세 자기 식으로 적응해서 일하게 할 테니까.”

“아버지, 제가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고모님은 누나가 헨젤의 딸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걸로도 모자라 제 몸에 흐르는 랄리우스의 피 역시 부정하셨습니다. 그때의 허언을 철회하고 고개 숙여 사과하기 전까지 고모님은 이 집에 못 오십니다.”

“하델, 헨젤 백작은 나다.”

“그리고 저는 헨젤의 후계자고요.”

오드리는 그만 히죽 웃고 말았다. 그래, 후계자라는 카드는 이럴 때 내미는 것이다. 헨젤 백작이 제 손으로 후계자의 권위를 꺾진 못할 테니까. 헨젤 백작이 북부의 별장 얘기를 진행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의 승리였다.

시킨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면 보상은 후하게 주어야 한다는 게 오드리의 원칙이었다. 그래야 다음 일도 성심성의껏 해내지 않겠는가.

알렉스는 브란젤에서 가장 비싼 사탕가게의 사탕을 통째로 받았고, 릴리는 고향의 가족들 전부에게 새 옷을 입힐 만한 보너스를 받았으며, 다이앤은 귀한 약재가 가득한 약제실과 최고급 필기구 세트를 받았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오드리의 의도대로 일을 잘해준 하델에겐 좀 특별한 보상이 주어져야 했다. 오드리는 빈민가에 자선을 나갈 때마다, 날씨와 농사의 신 하랄에게 바칠 공물을 고를 때마다, 부엌의 신이자 곡물창고의 수호자 벤을 위해 피울 향을 살 때마다 하델에게 무슨 선물을 해줄까 고민했다.

어찌나 골몰하는지, 오드리에게 온 신경을 다 기울이고 있던 라비린이 모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레 동안 이어지는 수확제의 사흘째 날, 약혼자로서 함께 밤하늘에 풍등을 띄우던 라비린은 좀체 말이 없는 오드리의 옆얼굴을 가만히 훔쳐보다 견디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라비린, 열두 살짜리 소년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뭘까?”

“왜, 네 동생에게 선물이라도 하게?”

“응. 풍등을 사갈까 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런 건 창문으로도 실컷 볼 수 있으니까.”

내년의 좋은 날씨를 기원하며 풍등을 띄워 날리는 건 수확제의 오랜 전통이었다.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향해 멀리멀리 날아가는 풍등은 브란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좀 특별한 걸로 주고 싶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걸로.”

동생을 위해 고민하는 딱 절반만큼이라도 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싶은 게 라비린의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런 말을 정말로 꺼내봤자 그저 곤란해하는 표정만 볼 게 분명했다. 그렇게나 진심을 담은 고백 이후 몇 번이나 만남을 가졌지만, 그때마다 오드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만 하고 있었으니까.

네 옆에 있는 나를 좀 봐줘.

혀끝에서 맴도는 투정을 뱉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지금은 갓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떼를 쓸 게 아니라 어른스럽고 차분하게 굴어야 할 때였다. 이렇게 풍등을 날리는 등의 낭만적인 행사를 치르는 내내 약혼자라는 명목으로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면 말이다.

‘그래, 그 기사나부랭이와 눈엣가시 같은 마법사가 얼씬도 못하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지.’

라비린은 마음을 넓게 가지려 애쓰며 오드리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아 당겼다. 마치 거리를 메운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처럼. 워낙 사람이 북적북적한 거리인지라, 오드리는 별 저항 없이 그의 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는 남은 손으로 여분의 풍등을 휘휘 돌리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피올이 봤으면 소름이 다 돋는다며 비명을 질렀겠지만, 그는 지금 다 낫지 않은 다리로 복잡한 거리 뒷골목을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확제의 소란 속에서 일손이 부족해진 치안대가 결국 부상자를 불러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사이가 좋긴 좋은가 보네.”

“아버지로부터 날 막아준 든든한 기사님이거든. 하마터면 수확제에 참여도 못하고 북부의 별장으로 요양을 갈 뻔했지 뭐야.”

어찌나 놀랐는지, 라비린은 그만 쥐고 있던 풍등 하나를 통째로 망가뜨리고 말았다. 엉망으로 구겨진 풍등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지나는 사람들에게 밟혀 그나마 남은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뭐? 요양? 그런 일이 있었어? 왜 나한테 말 안 한 거야?”

“무사히 잘 해결됐으니까 그렇지. 봐, 어디 안 가고 여기 잘 있잖아. 그리고 가문 내의 일을 너한테 얘기해서 뭐 할 건데? 데뷔탕트를 치렀다지만 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했어. 아버님이 가라 하시면 가야 한다고.”

“넌 내 약혼자야. 타우레드에서 헨젤에 요청해서 나와 함께 타우레드 저택에서 머무는 방법도 있었어. 백작님께서 널 멀리 보내려 든다는 걸 네가 내게 알려주었더라면 지금처럼 손 놓고 있진 않았을 거라고!”

오드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방법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라비린은 오드리의 범위 안에 자신의 자리가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새삼 확인받은 기분에 그만 눈을 감았다. 단단한 포석이 깔린 길바닥이 늪처럼 발을 빨아들였다.

“내가 널 위해 뭘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넌 관심도 없지. 애처럼 징징대고 싶지 않은데 네 무심함을 확인할 때마다 난 자꾸 어린애가 돼. 날 봐달라고,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어져.”

덩치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커다란 사내가 어깨를 움츠리고 풀죽어 사랑을 호소하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동정을 살 법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누구나 한번쯤 고개를 돌아볼 만한 미남이라면 더더욱.

하니 그에게 기본적인 호감이 있는 데다 절절한 사랑 고백까지 받았던 오드리는 오죽하겠나. 마차에서의 일은 아예 없었던 일로 취급하기로 결심했음에도 마음이 누그러졌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가 강제로 요양을 가게 될 뻔한 건 나도 몰랐어. 수확제 첫날 아침에 갑자기 통보받은 얘기라서.”

“살림을 맡아 하는데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 하녀들을 장악하고 있을 거 아냐. 백작영애를 요양 보낼 계획을 세울 하녀가 설마 빨랫감이나 나르는 하녀일 리도 없는데……. 아, 혹시 헨젤 공자가 따로 보살핀다는 그 하녀 짓이야? 옛날에 하녀장이었다던?”

“눈치가 빠르네.”

“그거 말곤 답이 없는데 눈치 빠르단 말을 듣기엔 좀 민망하지. 백작가의 공자가 뒤에 있는 게 확실한 이상 네가 그동안 해고한 하녀들을 제 밑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 이런, 일이 틀어졌으니 좋다 말았겠군. 백작님과 한번 접촉한 이상 다시 시도할 게 분명한데, 어떻게 할 거야?”

라비린은 좀 전까지 축 처져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기가 돌았다. 오드리의 분위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확실히 동류에 속하는 인간들이었다.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내가 도울 일은 없어?”

“없어. 이런 거 하나 내 손으로 해결 못할까 봐?”

오드리는 코웃음을 치며 라비린의 손을 거절했다. 지금 헨젤가의 저택에는 다이앤이 있었다. 약초와 독초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그녀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할 약제사가 있는데 무슨 도움이 필요하겠는가. 더구나 갑자기 영역을 침범당해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하녀장 릴리는 한쪽 눈을 감을 준비가 만만했다.

“아하, 그래서 헨젤 공자에게 줄 선물이 특별해야 했던 거로군?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잃게 될 테니까.”

“뭐 그런 거지. 그러니까 너도 얼른 궁리 좀 해 봐. 무슨 선물이 좋을까? 넌 열두 살 때 뭐가 제일 갖고 싶었어?”

“그 나이의 나는 좋은 검이 갖고 싶었지. 지긋지긋한 목검 말고 은빛으로 빛나는 진검.”

“하델은 검을 놓았어. 원해서 놓은 것도 아닌데 그런 선물을 주면 놀리는 것밖에 더 돼?”

“왜? 재능이 없어? 그래도 열두 살이면 아직 더 노력해 볼 만도 한 나인데……. 헨젤 백작가는 무가가 아니라서 그런가?”

“내가 너와 약혼하고 결혼하는 것도 큰 부담인 거 알면서 뭘 물어. 읏!”

사람에 치인 오드리가 휘청거렸다. 라비린은 그런 오드리를 아예 들어 안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삼켰다. 그랬다간 지금보다 배는 더 쏟아질 시선을 감당해야만 할 게 분명했다.

그는 남보다 큰 덩치로 길을 뚫기 시작했다. 이젠 손에 남은 풍등도 없는데 이 소란 속에 계속 있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런 알겠는데 그래도 조금 안타깝네. 재능의 유무를 떠나서 좋아하는 걸 강제로 놓게 되는 건 몹시 슬픈 일인데. 벽에 부딪쳐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기다려 줄 순 없었고?”

“어머,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어. 하델은 벌써 열두 살이야. 저택 내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건 열네 살이면 끝난다구. 대책도 없이 바깥에 내보내서 충격받게 하는 것보다야 당장 조금 아픈 게 나아. 아, 젠장, 이래서야 고모님이 하는 말과 똑같잖아.”

“하하하!”

“아, 웃지 마!”

오드리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빽 소리를 질렀지만, 그런다고 라비린의 웃음이 멈춰지겠나. 그는 오드리가 신경질을 부리거나 말거나 낄낄대며 걸음을 재촉했다. 오드리는 어깨를 웅크리고 그의 걸음에 보조를 맞췄다.

“하여간 너 재수 없을 땐 되게 재수 없어. 아무튼, 어딜 가려고 이렇게 열심히 가?”

“그걸 이제야 궁금해하다니 너도 너다. 사람에 안 치이는 곳에 가려고 그러지.”

“수확제에 사람 없는 곳이 어디 있다고?”

“브란젤의 수확제를 경험하는 건 처음이면서 놀라울 정도로 심드렁한 아가씨, 놀랍게도 그런 곳이 있답니다.”

자신만만한 라비린의 말과는 달리 사람들의 밀도는 점점 더 빡빡해졌다. 밤하늘을 떠다니는 풍등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광장 외곽으로 몰린 탓이었다.

오드리는 라비린이 신체 접촉을 늘리고 싶어서 이런 식으로 구는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름 노력을 하는데도 자꾸만 몸 여기저기가 그와 닿았다. 넓은 가슴과 팔에 시야가 가려져 보이는 것도 없어 갑갑했다.

“수확제가 수확제지, 뭘……. 만탈락이나 브란젤이나 뭐 달라? 다 놀고먹고 옛부터 내려오는 풍습 똑같이 따르는 거지. 내가 이놈의 풍등을 얼마나 날렸는데 새삼 감흥이랄 게 있을 것 같아?”

“세상에, 우리 아버지도 안 하는 말을 열일곱 아가씨가 하네.”

“흥, 타우레드 후작님이야 수확제 때 놀고먹고 즐기기만 하잖아. 고생은 라디아타가 하지. 아침부터 자선활동 다니느라 빈민가를 돌고 저녁엔 온갖 행사에 참가해 얼굴을 내밀고.”

“지금 네가 하는 것처럼?”

“그렇지.”

오드리가 암만 얄밉게 툴툴거려도, 라비린에겐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그는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 리본이 앙증맞게 묶인 모자를 벗기고 초록색 머리칼에 입 맞추는 상상을 하다 그만 쓴웃음을 지었다.

‘중증이네.’

이젠 가을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날이 더워 해가 진 지 한참인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볍기만 했다. 오드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얇은 남부식 천의 사각거리는 감촉이 팔에 닿을 때마다 들킬까 겁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어허!”

“아, 적당히 밀어요!”

“악, 엄마!”

라비린은 농지거리 하던 것마저 그만두고 전력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여기저기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그의 귀에 들어가는 건 한줌도 되지 않았다. 목표 지점이 코앞이었다.

항아리 속에서 구르는 돌멩이처럼 라비린에게 이끌려 걷던 오드리는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지고 피부에 닿는 공기가 바뀐 걸 깨닫고 길게 목을 빼서 주변을 살폈다. 그들은 몹시 어둡고 작고 이상한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여긴 어디야? 바람이 안 불어……. 실내 같은데.”

“광장 시계탑 내부.”

“뭐어?”

오드리는 라비린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었는지 이해했다. 브란젤 중앙광장의 시계탑은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건국왕이 직접 터를 골라 세운 탑이었으니 당연했다.

웬만큼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회중시계를 하나씩 들고 다니고, 그 외에도 시간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요즘에도 이 시계탑은 때마다 종을 치며 시간을 알렸다. 왕궁과 함께 브란젤의 상징 같은 탑이었다.

“여기 열쇠를 무슨 수로 얻은 거야? 입구부터 마법장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데다 관리가 지독하게 철저한 곳인데.”

“왜 이래, 나 수완 있는 남자야. 열쇠는 여길 너와 함께 보려고 한참 전에 구해뒀던 거야. 사실 네 말대로 수확제의 풍경은 브란젤이나 만탈락이나 그게 그건데, 이 시계탑은 브란젤에만 있는 거잖아.”

“……어, 그래, 그 마음 씀씀이 참 고맙다…….”

오드리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고맙다지 어디로 보나 만족한 기색이 아니건만, 라비린은 씩 웃으며 오드리의 허리를 낚아채 끌어안았다.

“설마 시계탑 안에 들어와 보기만 한 걸로 만족할 건 아니지? 좀 흔들릴 거야. 꽉 잡아.”

“뭐? 뭐? 뭐가 있어서 흔들려? 꺄아악!”

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덜컹.

발밑이 흔들렸다. 오드리는 유일한 잡을 것인 라비린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동시에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이한 감각이 그녀를 찾아왔다.

공기가 두꺼운 담요처럼 어깨를 내리누르며 침묵을 강요하고 눈을 뜰 수 없게 얼굴을 할퀴어댔다. 살그머니 실눈을 떠보니 시계탑 내부 장치들을 비추는 마법등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 이상한 감각이 바로 상승감이라는 거구나.

아무리 시계탑이 높다지만 대체 언제까지 올라가는 걸까, 하고 생각할 즈음 상승이 끝났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이를 바드득 갈았다. 발판이 덜커덕 걸리는 느낌도 그렇고, 뱃속의 내장이 전부 떠올랐다가 도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도 정말 최악이었다. 침을 삼키기조차 어려웠다.

“누가 이따위 물건을 설계한 거야?”

“누구겠어. 마법과 기계를 이렇게 잘 다룰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지. 바일런 섀덤, 인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마법사. 그가 기차를 만들 투자금을 얻기 위해 왕실에 제공한 게 바로 이거야. 계단 대신 쓰라고 만들었는데…….”

“승차감이 최악이야. 차라리 날뛰는 말의 등에 올라타는 게 낫겠어.”

“무서운 소리 하기는. 아무튼 네 말대로 승차감이 너무 최악이라 시계탑에만 설치됐어. 시계탑의 관리자들이 입을 모아 끔찍하게 많은 계단보다는 최악의 승차감이 낫다고 했다나. 자, 그만 화내고 이리 와서 이 풍경을 봐.”

라비린이 오드리를 끌어당겨 바깥을 보게 했다. 오드리는 종소리가 잘 울려 퍼지도록 뻥 뚫린 탑 끄트머리에 서서 수확제의 풍경을 감상했다.

제법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은하수를 따라잡을 듯 종종걸음을 치는 풍등이 바로 눈앞에서 보였다. 아래로 고개를 숙이자 밤을 잊은 듯 환하게 마법등의 뚜껑을 연 집들이 색색으로 빛났다.

만탈락에서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일은 자주 있었지만, 이렇게 높고 좁은 데다가 바람이 휭휭 부는 탑 꼭대기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몹시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치 별을 밟고 선 듯한 기분이랄까? 어지러웠다.

“오드리, 예쁘지? 장관이지?”

“어……. 정말로. 그렇네.”

“내 비장의 장소야. 분명 진심으로 감탄한 거 맞아? 왜 그렇게 반응이 미적지근해?”

“난 지금 최대한으로 놀람을 표시하고 있어. 멋진 풍경이야. 마치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반으로 갈라 그 사이에 서 있는 것 같거든. 정말, 정말 예쁘다…….”

오드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라비린의 기분을 둥실둥실 띄웠다. 그는 품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흔들며 오드리의 주의를 끌었다.

“지금 이상의 놀람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금하네. 오드리, 이게 뭔 줄 알아?”

“뭔데 그래?”

“내 노력의 결정체. 헨젤 백작 부부의 결혼계약서야. 그것도 무려 원본! 이게 바로 타우레드다!”

오드리의 심장이 쿵쾅쿵쾅 큰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제 손이 떨리는 줄도 모르고 서류를 받아 확인했다. 랄리우스와 헨젤의 직인 아래에 밀리나와 뉴터의 서명이 있었다. 필적에 예민한 눈은 단숨에 그 서명이 진짜임을 알아보았다.

“라비린.”

“응?”

“뽀뽀해 줄까?”

라비린이 호쾌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내밀었다. 눈을 꼭 감고 입술을 내민 모양새가 제발 입술에 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오드리의 뽀뽀는 입술이 아니라 그의 이마와 뺨에 내려앉았다. 그것도 깃털처럼 가벼운 접촉이었다.

“이게 뭐야, 굿나잇 키스도 아니고.”

“나머지는 결혼한 뒤에 해줄게, 허니.”

오드리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손키스를 날렸다. 라비린은 고작 그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고개를 돌렸다. 브란젤 사람들이 하랄을 위해 날려 보낸 풍등들이 마치 자신을 위한 축하의 꽃다발 같았다.

수확제의 넷째 날, 별빛은 사그라졌어도 흰 달은 아직 남은 이른 아침. 셰비언은 마지막 마법망을 복구했다. 주변에 퍼진 용의 마력 때문에 뒤틀린 마법망을 무리해서 이어붙인 거다 보니 보기에 썩 좋진 않았지만, 이따위 마법망이라도 이전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이미 균형이 무너진 자들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적어도 괴물을 더 만들어내진 않을 테니까.

“아, 죽겠다…….”

셰비언은 벽에 등을 기대곤 마른세수를 하며 피로를 토했다. 이 더위에도 축축하게 젖은 담벼락이 그의 등을 적셨다. 길어야 하루 이틀일 거라고 생각했던 복구 작업은 그의 일주일을 통째로 잡아먹었다. 솔직히 말해, 마법망 복구 작업이 일주일 안에 끝난 것도 다행이었다.

길거리에 버려진 물건을 줍는 데 거부감이 없는 멜브란트의 문화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마력구슬이 신기했던 사람들은 마력구슬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랑하거나 집 안에 장식했다. 할 일 없는 몇몇 꼬마아이들이 마력구슬을 가지고 온 브란젤을 헤집으며 놀고 다녔다는 걸 알았을 때의 암담함이란.

그렇다 보니 목에 걸린 개목걸이를 풀고 싶어 안달이 났던 샤를레아조차 셰비언이 제시한 시간 내에 마력구슬을 전부 회수해 오지 못했다. 이를 갈며 브란젤 전역을 뒤지는 동안 본의 아니게 도둑질 기술만 정교하게 갈고 닦았다.

용족 최고의 전투력이 가택침입과 보안마법도구 무력화에 쓰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마지막 마력구슬을 훔쳐낸 샤를레아가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어서는 셰비언의 옆에 섰다. 발소리 하나 없는 걸음걸이가 밤길을 걷는 고양이보다 조용했다.

“자, 받아. 마지막 마력구슬이야. 이제 개목걸이 풀어줄 거지?”

“수고했어.”

딱! 셰비언이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샤를레아의 목에서 마법이 풀렸다. 보이지는 않아도 싸늘한 존재감으로 목을 옥죄던 마법이 풀리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아 샤를레아의 얼굴에 온기가 돌았다.

“이 빌어먹을 개목걸이. 하여간 치사한 자식이야, 너. 마력의 계통이 같은 마법사를 협박의 대상으로 삼고 말이야.”

“하, 너는 뭐 다른 줄 알아? 동족으로 착각할 만한 마력을 가진 아가씨가 있는 도시에 이런 마력구슬을 풀고 다녔잖아. 네가 나보다 훨씬 악질이야.”

“뭐 어때, 그 아가씨는 마법사가 아니잖아. 마법을 못 쓰는 용이라니, 그건 용도 아니지. 차라리 다나 쪽이 훨씬 나아.”

셰비언은 불쾌함에 미간을 찌푸리고도 차마 샤를레아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마법이 곧 용이라고 했던 게 자신인데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때, 째지는 비명과 고함이 그들이 등을 대고 있는 담벼락을 넘어왔다.

“도, 도둑이야!”

“도둑? 뭔 소리야, 먹고 죽을 것도 없는 집구석에 무슨 도둑이 들어?”

“그럼 이게 도둑이 든 게 아니고 뭔데! 당신, 지난밤에 창문은 잘 잠갔어? 또 술 처먹고 들어와서 덥다고 창문 열고 잤지! 이게 몇 번째야! 어휴, 못 살아!”

아무래도 샤를레아의 행각이 들킨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발각이었다. 아으, 이까짓 게 뭐라고 그렇게 깊숙이 넣어놨담. 셰비언에게 옆구리를 꼬집힌 샤를레아가 민망해하며 중얼거렸다.

“돈이 될 물건이라고 생각했나 봐. 일단 보기에 예쁘고 마력도 가득 차 있으니까……. 옷장 깊이 넣어뒀더라고.”

“안 들키고 빼낼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것도 환경이 받쳐 줘야 하는 거지. 코딱지만 한 집에 사람이 바글바글하던데 안 들키고 나온 게 다행이었어. 아, 몰라. 어차피 이런 빈곤한 동네, 안 그래도 수확제 기간이라 바쁜데 치안대가 오기나 하겠어?”

샤를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셰비언이 들고 있던 마력구슬을 잡아챘다. 새카만 구슬 안쪽에서 금가루 같은 금빛 마력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니까 이건 내 수고비 하자. 나 몸 안 좋은 거 알잖아, 하나만 까먹을게. 응?”

“이걸 동족이라고……. 어휴, 다 끝났으니까 맘대로 해. 처먹고 허튼 짓이나 하지 마.”

“아, 그럼! 당연히 안 하지!”

희희낙락, 만면에 웃음을 지은 샤를레아가 마력구슬을 톡톡 두드렸다. 단단한 구슬의 표면이 쩍 갈라지며 마력이 흘러나왔다. 샤를레아는 마치 병에 담은 음료를 마시는 것처럼 틈새에 입을 대고 마력을 마셨다. 마력구슬은 곧 텅 비어 투명해졌고, 샤를레아의 안색은 좀 전보다 훨씬 화사해졌다.

“아아, 좀 살 것 같다. 확실히 워커의 마력은 생각 이상으로 순도가 높아. 본래부터 이렇진 않았을 텐데, 네 덕이야?”

“약간의 가르침만 줬을 뿐인데 공간의 초입에 다다른 마법사야. 재능이지.”

“흠, 공간이라. 요즘 시대의 인간이 거기까지 닿다니 대단한걸. 다나도 타고난 마력이 있어 재능만으로는 뒤지지 않을 텐데, 생각보다 수준이 낮아. 제대로 된 스승을 못 만났나?”

“왕궁마법사잖아. 바빠서 그렇겠지. 워커 말로는 달성한 경지도 도로 떨어질 만한 업무량이라던데.”

“아……. 그런가.”

“정 마음에 걸리면 내가 가르쳐 줄까? 난 마법의 주인이잖아. 짧은 시간에 극한의 효율을 보여줄 수 있어.”

셰비언으로서는 나름 파격적인 제안이었는데, 샤를레아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귀를 후벼 팠다.

“웃기고 있네. 너에게 맡기느니 내가 있는 재주 없는 재주 다 끌어모아 보는 게 낫지. 멀쩡한 화룡이 있는데 왜 빙룡에게 걜 맡겨? 아무튼 나는 간다. 넌 네 아가씨나 챙겨. 용인지 인간인지 모를 반편이지만 혹시 알아? 어느 날 갑자기 마법사의 재능을 깨닫기라도 할지?”

“야!”

샤를레아는 셰비언의 고함을 못 들은 척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다나를 만나러 갈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마력을 먹고 남은 빈 마력구슬이 주머니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하여간 입버릇이 고약하다니까!”

굳이 빈구슬을 챙겨가는 샤를레아의 속셈이야 뻔한 것이지만, 셰비언은 혀 몇 번 차는 걸로 그녀에 대한 관심을 거뒀다.

자신이 오드리를 만나 완전히 시야가 바뀌는 경험을 한 것처럼, 샤를레아에게 그 다나라는 마법사가 중요한 인물이 되어준다면 마법망 안정화 수식쯤이야 못 가르쳐 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전보기계에 쓰는 마력구슬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다.

그보다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안색과 떨어지지 않는 피로가 더 걱정이었다. 오늘 오후에 브란젤과 세피아 항구 사이의 전보 개통을 정식으로 사람들에게 선언하는 행사가 있는데 말이다.

‘오늘은 아가씨를 볼 수 있는데.’

며칠 만에 만나는 오드리에게 창백하고 힘없는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두고 얼음요청처럼 아름답다 해주었으니, 될 수 있는 한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샤를레아처럼 단순히 마력의 문제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지금 셰비언의 피로는 무조건 쉬어야 낫는 종류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자고 일어나기 위해 서둘렀다. 아무리 피곤해도 행사에 불참할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일주일 내내 혹사당하다가 마침내 잠이 든 몸뚱이는 주인의 의지를 배반했다.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셰비언을 찾아 올라온 워커는 죽었나 싶게 잠이 든 그를 보고 쯧쯧 혀를 찼다.

“대체 뭘 하고 다니느라 이런 꼴이 된 거야? 요새 얼굴 보기도 힘들더니만……. 야, 셰비언. 일어나! 일어나! 전보 개통식 가야지! 너 안 일어나면 나 혼자 간다!”

“우으……. 으으으…….”

“일어나라니까! 행사에 오드리 아가씨도 오셔!”

철썩, 철썩! 셰비언이 용이라는 걸 알고도 반말을 하며 등짝을 마구 때리다니, 워커는 확실히 비범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워커도 오드리가 나올 게 분명한 행사에 셰비언을 빼놓고 갈 용기는 없었다.

워커는 가장 큰 실험용 비커에 얼음물을 가득 담아와 셰비언의 얼굴에 쪼르륵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얼린 우유처럼 고운 흰 피부를 따라 줄줄 흐른 물이 침대를 흥건하게 적셨다.

“으으…….”

“흐흐흐……. 그래, 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너한테 이런 짓을 해 보냐!”

전보 개발이 끝나면 강철새 연구에 도움을 주겠다고 단단히 약속해 놓고 잠적한 셰비언 때문에 워커도 나름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모처럼 찾아온 복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껏 즐겼다.

“오늘은 나도 할 말이 있다 이거야!”

운동과는 담을 쌓아 근력 없는 팔이 휘청 흔들렸다. 비커에 담겨 있던 얼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억,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당황한 워커는 비커를 내던지고 셰비언의 얼굴을 덮은 얼음을 걷어내려 손을 뻗었다. 놀랄 정도로 차가운 피부가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는 검은 세상, 별인지 등불인지 모를 빛들이 사방에서 반짝거렸다. 밤하늘을 반으로 뚝 잘라서 그 속에 기어 들어가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낯선 풍경이긴 해도 묘하게 피부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기운이 낯익었다.

“뭐야, 나 공간에 끌려 들어온 건가?”

저번에 공간을 열었다가 심하게 몸을 축낸 이후로, 워커는 공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 그 효용성이야 인정하는 바이지만, 공간 한 번 써보겠다고 덤볐다가 그대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그는 용이 아니었다.

여긴 셰비언의 공간이지만 오래 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워커는 어떻게든 나갈 곳을 찾아 허둥지둥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위도 아래도 없는 곳에서 나갈 방법 따위가 보일 리 없다. 등불 같고 별빛 같은 빛들이 꼭 그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깜빡거렸다.

“아, 정말, 셰비언! 이 사고뭉치 자식! 공간도 꼭 저 같은 걸 써먹지!”

어차피 끌려 들어올 공간이었다면, 이런 시커먼 곳이 아니라 브란젤 상공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셰비언이 비행마법을 가르쳐 주며 보여준 풍경이 요즘엔 꿈에서까지 나오는데 말이다.

워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이를 갈았다. 이대로라면 셰비언이 깨어날 때까지 계속 여기에 있게 생겼다. 지금 그는 얼굴에 얼음물을 부어도 깨질 않는 상태인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위아래 구분도 없는 공간에서 바람 소리 하나 없이 적막하기만 한 고요에 잠겨 있으려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늘 세상에 정식으로 첫 발을 내디디는 전보와, 지지부진한 강철새 연구와, 입을 삐죽대며 눈을 흘기는 이디케의 얼굴과……. 이디케의…….

“당장 나가야겠어.”

워커는 벌떡 일어나 초조하게 턱을 문질렀다. 셰비언이 자신을 알아채 주기를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앉아만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만 솟아나서 힘들었다.

‘서로의 공간을 경험한 마법사끼리는 공간을 이을 수 있어. 내 공간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바로 나갈 수 있고. 젠장, 내 공간은 딱 한 번밖에 안 열어봤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견디느니 무모한 시도라도 해보는 게 낫겠다. 워커는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눈을 감았다.

푸른 하늘을 주황색으로 불태우는 노을과 금빛으로 반짝이는 갈대밭, 그 사이에서 세찬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는 검은 깃의 새떼를 상상하며 마력을 엮어냈다. 거미줄로 천을 짜듯 조심스럽게.

곧 바람에 몸을 비비는 갈대 소리가 파도처럼 몰려오고, 새의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게 주변을 메웠다. 워커는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가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상상 그대로의 풍경이 딱 세 걸음 앞에 펼쳐져 있었다.

“와우! 그래! 난 천재라니까!”

한 번 해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시도하는 장소가 장소라 그런 건지 몰라도 이렇게 바로 성공해 버리다니. 갑자기 의식이 가물가물해진다거나 죽을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거나 하는 부작용도 없었다. 오히려 정신이 아주 맑아지면서 활력이 솟아나니,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사각거리는 마른 잎이 팔다리에 닿고, 마른 갈대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른 갈대를 하나 꺾었다. 손에 잡힌 갈대의 느낌이 아주 생생했다. 언제든 이 갈대 줄기의 감촉을 떠올리기만 하면 공간을 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하……. 하하하! 해냈어! 공간을 열었다고! 내가!”

우연에 우연이 겹쳐 얻어낸 성과이지만, 셰비언 성벽 아래를 산책하다 다이아몬드를 주워왔다는 건국왕도 있는데 이 정도의 우연은 다소 좋은 행운으로 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셰비언! 내 목소리 들리지!”

뒤를 돌아보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셰비언이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더라도 지금 자신의 목소리는 닿을 게 확실했다.

“일어나, 이 멍청아! 오드리 아가씨 볼 거라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잠이나 쿨쿨 자고!”

깜빡거리는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 들썩거렸다. 곧 깨어날 것 같았다.

“나 먼저 간다! 야호!”

워커는 공간 사이에 틈을 만들고 서서히 벌렸다. 서로에게 영향을 받거나 충격을 입지 않도록 공간을 분리하는 작업이었다. 일단 공간을 다룰 수 있게 되자 그동안 셰비언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론 수업이 빛을 발했다.

‘이제 공간에서 강철새를 실험할 수 있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하늘을 나는 거야.’

워커의 머릿속은 강철새에 새길 수식으로 가득 찼다. 데멘사와 전보는 그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꿈은 하늘에 있었으니까.

셰비언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지만, 금세 잊어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공간이, 그 안에 담긴 가능성이 마냥 황홀했다.

수확제 넷째 날의 오후, 멜브란트에서 가장 떠들썩하고 호화롭게 진행되는 수확제에 맞춰 연 전보 개통식은 노림수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예전부터 전보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 말고도 내가 몰랐던 무슨 행사가 열리나 싶어 호기심에 기웃거린 사람들마저도 홀딱 사로잡았다.

기계를 살 필요도 직접 선을 깔 필요도 없이, 전국의 기차역에 설치될 지점에 가서 말만 하면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니. 왕비전하께서 지원하고 계시다는 안내 한 줄이 사람들의 마음을 솜사탕처럼 부풀렸다.

기차가 세상을 바꿨듯이, 이번엔 전보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

고아원에서 열릴 낭독회 감상을 취소하고 행사에 참석했던 라디아타 역시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지금이야 귀족영애가 신경 쓸 일도 아닌 쪽에 눈을 돌렸다는 비난을 듣겠지만, 언젠가는 오늘의 행사에 참석한 것을 자랑으로 말할 날이 올 게 분명하다고.

사람들이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은발의 마법사가 그녀의 확신에 무게를 더했다. 오드리는 그가 진짜 용일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심이 커져만 간다고 말이다.

‘일반인이 마법의 온오프를 할 수 있도록 만든 것도 모자라 전보의 발명에 큰 역할을 할 정도의 마법사면……. 기대를 걸 만도 하지.’

세상을 바꾼 마법사에 바일런 섀덤뿐만 아니라 셰비언이라는 이름이 함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용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드리의 아래에서 불만 없이 일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역시 오드리가 아까운데.’

로렐라이도, 데멘사도, 거기서 일하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도 모두 오드리의 사람. 전보 개발에 사하스바티가 큰일을 했다지만, 이제 그는 왕립 기계 연구소장이었다. 그의 능력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게 해주던 로렐라이의 마법사들 없이 얼마나 대단한 연구를 해낼지는 아무도 몰랐다.

라디아타는 투자 희망자들 사이를 물고기처럼 누비는 오드리와 라비린을 바라보았다. 오스미다 왕비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만큼 돈이 필요해서 저러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아마 홍보 목적이 더 클 터였다. 그들 태반이 돈과 명예, 그리고 떠들어댈 입이 있는 치들이었다.

그중 둥그렇게 모여선 몇몇이 라비린의 안목을 칭찬했다. 젊다 못해 어리다고까지 할 만한 나이에 앞날을 내다보고 과감한 투자를 하다니 대단합니다, 앞날이 기대됩니다, 로렐라이의 마법사와 벨키스 경이 얽혀 있는 걸 보니 역시 로렐라이 단주의 정체는…… 등등.

오스미다 왕비가 오드리의 요청에 따라 지원을 시작했다는 얘기는 레이디 헨젤이 벌써부터 약혼자를 내조하느냐는 감탄으로 끝났다. 그 망아지 같은 레이디도 사랑을 하니 바뀌나 봅니다. 하하하. 산트렘의 공주를 브란젤의 요조숙녀로 바꾼 집안의 후계자가 아닙니까 블라블라.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나 보죠. 제게도 들려주시겠어요, 신사님들?”

“아, 그……. 별거 아닙니다, 레이디 타우레드.”

“그렇습니다. 사내들끼리 통하는 저급한 농담인지라, 감히 레이디 앞에서 읊을 수 없음을 용서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보다 레이디 타우레드께서도 전보에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이런 신문물에 숙녀분께서 관심을 가지다니 놀랍습니다.”

“과연 타우레드의 영애이십니다. 미모만큼이나 안목이 출중하시군요!”

라디아타가 정면으로 나설 줄은 몰랐는지, 온갖 사탕발림을 지껄이며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 기를 쓰는 꼬락서니가 아주 대단했다. 타우레드의 영애 앞에서 지껄인 헛소리를 없던 일로 하고 싶었던 그들은 라디아타가 만족할 때까지 아부를 늘어놓은 다음에야 간신히 풀려났다.

허둥지둥 자리를 뜨는 치들을 보며 혀를 차는 라디아타의 곁에 다가온 오드리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라디아타가 그들 앞에 불쑥 나설 때부터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던지라 부채에 가려지지 않은 눈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우리가 친구라는 걸 새삼 실감했어. 하긴, 네가 저런 말을 들으면서 참고만 있었으면 브란젤의 황금장미가 되지도 못했겠지.”

“어머 그런 당연한 말을. 오드리, 잠깐 나 좀 봐.”

마침 붕어똥처럼 오드리 곁을 지키던 라비린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태였다. 라디아타는 오드리를 데리고 사람이 별로 오지 않는 데멘사 사무실 2층으로 몸을 피했다. 귀빈실의 문을 닫고 동행한 에스코트 기사를 문지기로 세우니 그럭저럭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공간이 됐다.

“왜 이래? 무슨 얘길 하려고?”

“오드리, 진짜 오라버니와 결혼할 거야?”

오드리는 터지려는 한숨을 꿀꺽 삼켰다. 이미 예전에 설명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왜 또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혼했잖아……. 왕비전하께서 축사도 해주셨어. 라디아타, 그 얘긴 이제 그만하자. 응?”

“나도 네 사정 알아! 다 알아! 몰라서 하는 말 아니야. 오라버니가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니까 이러는 거야.”

“……? 자세히 말해봐.”

“이 축제가 끝나면 널 타우레드의 본가로 데려가려고 해. 아, 나도 알아. 약혼 기간엔 서로의 집에서 머무는 경우가 있다는 거. 하지만 그건 수도 저택에서나 그렇게 하는 거지. 오라버니가 널 데려가려는 곳은 본가라고, 영지에 있는 본가! 약혼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그게 말이 돼? 남들이 알면 네가 임신이라도 한 줄 알 거야!”

오드리는 그만 쓴웃음을 지었다. 북부의 별장으로 쫓겨갈 뻔했단 얘기가 라비린에게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듯했다.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본가 얘길 꺼내다니.

그것도 겨우 하루만에. 정말 놀라운 추진력이었다.

하지만 사정 모르는 라디아타는 몹시 당황하며 오드리의 배에 손을 얹었다. 흥분해서 말하느라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허옇게 질렸다.

“왜 웃어? 세상에, 둘이 합의하고 꺼낸 얘기였어? ……설마 진짜 임신이라도 했어? 사생아가 생길 위기이기라도 해?”

“그건 아니야.”

“나한텐 얘기해도 돼. 솜씨 좋은 의사를 소개해 줄 테니까.”

“맙소사, 라디아타! ……푸흡! 푸흐흡!”

곱게 자란 귀족영애에게서 뒷골목 의사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오드리는 이번에야말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매 사이가 아주 나쁜 것도 아닌데, 라디아타에게 라비린은 어지간히 못난 오라버니인 모양이었다.

“하하, 하하하……. 그런 게 필요하면 다이앤을 쓸 거야. 걱정 마. 그게 아니라, 라비린은 내가 곧 브란젤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아. 어떻게든 붙들어둬야겠다고 고민한 결과물이 본가에 데리고 가는 거라니, 귀여운데.”

“오라버니가 귀엽다고? 그 덩치를 보고 빈말이라도 귀엽다는 말이 나와? 하여간 네 취향도 이상한 곳이 있어. 그보다 네가 왜 쫓겨나? 만탈락에서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얘기하자면 길어.”

“그럼 더 길어지기 전에 당장 얘기해. 마침 지금은 우릴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까.”

눈에 불을 켜고 말하는 라디아타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오드리는 차마 더 피하지 못하고 사실을 이야기했다. 왕궁에 갔었다는 것, 이전에 했던 약속대로 라비린이 로렐라이의 숨은 주인 행세를 했다는 것, 그리고 사실을 안 헨젤 백작이 오드리를 북부의 별장에 보내려고 시도했었다는 것까지.

사정을 다 들은 라디아타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녀는 화를 내거나 당황하거나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습관적인 미소를 띠지도 않았다. 허공을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연 건, 기다리다 못한 오드리가 라디아타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겨우 생각해 낸 대책이라는 게 그따위라니. 이 멍청이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어. 내가 이야기했던 시점부터 따지면 기껏해야 몇 시간……? 그 사이에 생각해 낸 방법이 본가라니, 꽤 귀엽지 않아?”

“귀엽기는 무슨, 멍청하기만 하지. 이게 밖으로 퍼지면 요즘 그나마 나아진 네 평판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질 게 분명한데, 네 동의도 얻지 않고 그따위 말을 꺼냈단 말야. 그런데 어떻게 멍청하지 않단 말을 할 수가 있어? 자꾸 떨어지는 평판을 핑계 삼아 헨젤 백작님이 널 멀리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윈 전혀 안 한 게 분명하잖아. 그렇게 생각이 짧아서 어디다 써먹어? 제기랄, 화분 취급도 아까운 인간이 내 오라버니일 줄이야!”

라디아타는 친남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잘근잘근 라비린을 씹어댔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처음엔 오냐오냐 고개를 끄덕이던 오드리가 슬그머니 라비린의 편을 들어줄 정도였다.

“알잖아, 내가 그 평판이라는 거에 별로 신경 안 쓰는 거. 기껏 관리해 봤자 내가 로렐라이의 진짜 주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평판이야. 라비린에게서 작위를 넘겨받아도 마찬가지고. 라비린도 그걸 아니까 단순하게 생각한 거겠지.”

“와, 그래도 약혼자라고 편드는 거 봐.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나쁜 거야. 네가 평판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구니까!”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목표 달성을 우선시하는 그녀의 사고방식으로는 라비린의 대처가 그리 나쁘지 않게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니 갑갑한 건 라디아타뿐이었다.

“아무리 네가 괜찮다고 해도 오라버니는 신경 썼어야 했어. 너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있다면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행동하기 전에 약혼녀의 평판을 신경 썼어야 했다고. 네 평판은 네 것이지, 오라버니의 것이 아닌데 자기가 뭐라고 그걸 그렇게 하찮게 취급해?”

“라디아타, 진정해.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니잖아. 타우레드 후작부부께서 그걸 허락할 리도 없고.”

“당연하지. 약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멀쩡한 레이디의 평판을 바닥까지, 아니 지하까지 떨어뜨릴 수는 없으니까! 너도 오라버니가 그런 식으로 구는 걸 내버려 두지 마.”

“알았어, 알았어. 따끔하게 뭐라고 할게.”

“입으로만 그러지 말고 꼭 말해. 사랑한다며 취급이 이게 뭐야! 떨어뜨리는 정도로 흠집나지 않는다고 다이아몬드를 땅바닥에 굴리는 사람은 없단 말이야.”

난 보석이 아니라 사람인걸. 오드리는 부지불식간에 튀어나갈 뻔한 속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라디아타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아채고 눈을 홉뜨고 있긴 했지만, 괜히 입을 열었다가 듣지 않아도 될 잔소리를 덤으로 뒤집어쓰는 건 사양이었다.

“라디아타, 이제 할 얘기는 끝난 거야?”

“아마도……. 아, 동생에게 줄 선물은 골랐어?”

오드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재산도 들켰겠다, 사려면 얼마든지 비싼 걸 고를 수 있는데 도무지 마음에 차는 게 없었다. 장인이 심혈을 기울인 회중시계, 로렐라이에서 가장 화려한 만년필, 우아한 에메랄드 귀걸이와 검을 숨긴 지팡이 모두 후보에서 미끄러졌다.

“정 줄 게 없으면 향수라도 맞춰줄까 했는데, 그건 너무 이른 것 같아서 고민이야.”

“그럼 하루 데리고 나와서 놀아줘. 나이가 안 찼어도 보호자가 있으면 밖에 나올 수 있잖아? 수확제 마지막 날의 퍼레이드를 보여주면 엄청나게 좋아할 거야. 호위가 필요하면 베텔 경과 동행해서 나오면 되고.”

“퍼레이드를 보여주라고? 진심이야? 그날은 왕궁에서 무도회가 있어.”

“어차피 참석하나 안 하나 상관없는 무도회야. 전보도 공개했겠다,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건 오라버니에게 맡기고 넌 동생과 추억이나 쌓아.”

“걘 헨젤가 담벼락에 개구멍도 뚫은 애야. 브란젤의 수확제는 나보다 더 많이 봤을걸.”

“혼자 보는 것과 같이 보는 게 같아? 헨젤 백작님은 이 시기엔 미친 듯이 바쁘시니까 공자랑 따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을 거야. 당연히 제대로 본 일도 없겠지. 이왕 특별한 선물을 하려거든 돈으로 살 수 없는 걸로 해.”

라디아타의 말은 구구절절 정론이었다. 오드리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다 번뜩 든 생각이 있어 살짝 눈을 흘겼다.

“나 없는 사이 라비린에게 뭔가 심술을 부리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왜 아니겠어? 약혼녀가 아니라 여동생 에스코트에 시간을 죄다 뺏기는 게 바로 그 심술인데.”

“나 참……. 아무튼 좋은 의견 고마워. 라비린은 좀 실망하겠지만, 겨우 하루니까 이해해 주겠지.”

어디 실망만 할까. 몹시 좌절할 것이다. 당당하게 오드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춤출 수 있는 기회가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런 쪽으로는 아예 생각도 않는 것처럼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오드리를 태도를 보며 라디아타는 라비린이 아주, 아주 약간 불쌍해졌다. 오드리를 볼 때면 바보멍청이처럼 웃으며 있지도 않은 꼬리를 살랑거리는 꼴을 몇 번이나 본 다음이라 더 그랬다.

‘오드리는 그 용인지 뭔지 모를 마법사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마법사도 마찬가지고. 설마 오라버니, 모르나?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는데……. 혹시 알고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건가? 그게 퍽이나 상관없겠다.’

라디아타는 라비린이 못마땅해 또 인상을 썼지만, 사실을 알거나 모르거나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오드리를 잡겠다고 결정한 건 라비린 본인이었다. 본래 자기 인생은 자기 좋을 대로 쓰는 것이다. 쓰레기통에 처박든, 가질 수 없는 걸 가지려 애쓰다 닳아빠지든,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말을 얹어봐야 어쩌겠나.

그리고 지금은 라비린보다 자신의 사정이 더 급했다. 가을무도회를 무사히 치러낸 이후 로샨이 어찌나 빠르게 일에 적응하는지, 하루하루 자신에게 넘어오는 일이 줄어들었다. 아침에 눈뜨고 일어날 때마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줄어들었다.

내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걸 보는 기분은 끔찍했다. 타우레드로 남고 싶었던 이유들이 급격히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있지, 오드리.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권력과 명예라도 갖는 게 낫겠지?”

오드리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건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라고. 가을무도회 이후 라디아타도 카프러스도 아무런 말이 없기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보다고 짐작은 했지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그걸 후작부인이 아니라 나한테 물어보는 건 듣고 싶은 말이 정해져 있어서 그런 거지?”

“알면 말 좀 해줘.”

기다리면 다른 사랑이 찾아올 거라는 식의 말을 할 수도 있었다. 원하는 사람을 신랑감으로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꿈을 이뤄보라고. 하지만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부탁한 말 그대로를 입에 올렸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라디아타가 오드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미 한참 전에 져 버린 라일락 향기가 오드리를 덮쳤다.

“고마워, 오드리.”

“……고맙긴 뭐가 고마워. 난…….”

난 네가 왕자비가 되면, 나아가 왕비가 되면 내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부터 생각했는데. 미안함과 민망함을 담은 말이 오드리의 입안에서 맴맴 돌았다. 차마 뱉지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라디아타가 웃었다.

“후후, 넌 내 선택을 두고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야. 그리고 내가 뭘 하든 지지해 줄 사람이기도 하고. 아냐?”

“전자는 확실히 맞는 말인데, 후자는 모르겠다. 내가 널 몹시 좋아하긴 하지만, 거기까지는 장담 못해.”

“으음……. 솔직하기도 하지. 좀 달콤한 말을 해줄 순 없어?”

“정말 그런 말만 하면 싫어할 거면서.”

“혹시 알아? 좋아할지. 아무튼 오드리, 오라버니는 몰라도 넌 꼭 내 생일파티에 참석해야 해.”

라디아타가 약속을 요구했다. 오드리는 그녀와 새끼손가락을 얽으며 감히 미래를 점쳤다. 라디아타의 생일파티에서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에스코트할 사람은 분명 가스트로 왕자가 될 거라고.

라디아타의 옆에 설 사람이 가스트로라면, 자신의 옆에는 누가 설까.

‘……안 돼.’

오드리는 무심결에 셰비언을 상상했다가 그만 입술을 깨물었다. 정략결혼에 사랑은 의무가 아니라지만, 법적으로 배우자가 될 사람이 노골적으로 마음을 드러냈는데 계속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셰비언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걸 그만두었던 것이다. 밀려드는 업무량에 쫓겨 피로가 누적되더라도, 그의 얼굴만 보면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보려고.

하지만 조금 전에 본 놀랍도록 창백한 안색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촉박한 기일 때문에 정신이 나가도록 쪼아대던 건 이제 그만두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뭘 하느라 저렇게 얼굴이 엉망일까 궁금했다.

라디아타가 행사장을 떠나고 난 뒤에는 더했다. 어떻게든 셰비언을 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건만, 그가 보내오는 시선에 목덜미가 간질간질했다. 도저히 못 참고 눈길을 주었더니, 덜컥 눈이 마주쳤다. 태연히 웃으며 시선을 흘렸지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라비린은 그 광경을 전부 보았다. 여전히 오드리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셰비언과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는 오드리를. 별거 아닌 장면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쓰린지.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표정을 관리하는 게 몹시 어려웠다.

‘내가 이렇게 속이 좁은 놈은 아니었는데…….’

정말이었다. 다리를 절고 얼굴에 화상이 있었어도, 메이즈는 만탈락에서 나름 인기 있는 남자였다. 로렐라이의 대리인인 만큼 밥벌이 확실한 데다 성격에 모난 구석 없고 몸에 매너가 배어 있어 탐내는 사람이 많았다.

라비린은 자기 좋다고 먼저 다가오는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여러 번의 연애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관계에 진지하지 못한 그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금세 떠나가곤 했으니, 그의 연애는 잠깐 피었다 지는 봄꽃같이 짧았다. 이렇게 깊은 질투를 할 정도로 상대에게 빠진 건 오드리가 처음이었다.

라비린이 제 마음 변화를 관찰하는 사이, 오드리와 셰비언의 시선이 다시 한번 교차됐다.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목을 막았다. 그는 끈끈이주걱처럼 달라붙은 사람들을 떨쳐 내고 행사장을 가로질렀다.

오드리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불쑥 다가온 라비린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만탈락은 물론이고 브란젤에서도 작은 축에 속하는 오드리와는 달리, 라비린은 북부의 광부들만큼이나 덩치가 컸다.

그런 라비린이 오드리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니, 오드리는 꼼짝도 못하고 그의 품에 폭 끌어안겼다. 그가 잔뜩 등을 굽히고 오드리에게 속삭였다.

“오드리, 이제 나머지는 기자들에게 맡기고 우린 나가는 게 어때? 사업 설명도 했고 시연도 했잖아. 이만하면 홍보할 만큼 했어.”

“벌써? 난 좀 더 있고 싶은데.”

“내가 널 독점하고 싶어서 그래. 여긴 널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지나치게 많아서 좀 짜증이 나려고 하거든. 그러게,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나왔어?”

오드리는 차마 대답을 못하고 표정관리에 집중했다. 라비린의 이마와 뺨에 입을 맞췄던 게 바로 어제이지만, 그건 단둘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짓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시선 때문에 목덜미와 팔이 따끔거렸다.

“남부식 드레스도 예쁘지만 가끔은 중부식도 좋지. 내가 선물한 옷과 보석이 정말로 잘 어울리는걸. 라디아타에게 도움을 받길 잘했어.”

“라비린.”

“가만히 있어봐.”

라비린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의 뺨에 입을 맞췄다. 경애하는 레이디가 아니라 사랑하는 약혼녀에게 하는 다정한 스킨십이었다. 보지 않는 척 그들을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숨죽인 비명과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만하면 과시는 충분히 한 것 같아서 말이야.”

“야.”

“다른 사람들과 네 시선이 얽히는 게 싫어. 남들은 어쩔 수 없대도 너는 나만 봤으면 좋겠는걸 어떡해.”

“어쩌겠어, 내가 사람이라 그럴 수가 없는데. 너만 보길 원하면 그냥 개를 키워서 데리고 다녀.”

“와, 냉정하네. 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날 이해하게 될걸. 분명해.”

내용이야 어떻든,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귓속말을 속삭이는 연인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다정하게 보였다. 과연 브란젤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의 주인공들답다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라비린은 뒤통수가 뚫릴 것처럼 뜨거운 시선을 느꼈지만, 굳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누가 보내는 시선인지 뻔했다.

“라비린 너, 지금 굉장히 못된 표정 짓고 있는 거 알아?”

“본래 사랑에 빠지면 성격도 좀 나빠지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애처럼 왜 이래?”

“진짜 애처럼 굴어줘?”

오드리는 라비린이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녀는 한숨을 쉬며 라비린을 밀어냈다. 라비린이 희희낙락 한 걸음 물러서서 오드리의 손을 쥐었다.

“계속 거절했으면 안아서라도 데리고 나갔을 거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진짜라니까.”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홀린 듯이 자리를 비켰다. 오드리는 제 앞에 생겨난 외길을 바라보고 한숨을 삼켰다. 피할 수도,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는 길이 곧장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까지 뻗어 있었다.

‘이런 건 정말 취향이 아닌데.’

누군가에게 이끌려 다니는 것도, 정해진 길을 걷는 것도. 멈칫대고 있으려니 라비린이 정말 안아 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가왔다. 손을 저어 거절하고 스스로 한 발 내디디려는데, 뒤에 선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오드리 아가씨!”

서늘한 손에 팔목을 잡혔다. 행사 내내 전보 기계 근처에서 서 있던 셰비언이었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를 급하게 헤치고 나오느라 느슨하게 땋아 늘어뜨렸던 머리카락이 다 풀려서, 황홀한 은발이 그의 얼굴을 타고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얼음 낀 강 같은 옅은 푸른색 눈동자가 거울처럼 오드리를 비췄다. 오드리는 놀라 눈을 크게 뜬 자신의 얼굴을 셰비언의 눈동자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저녁 무렵의 고양이처럼 길쭉한 타원형의 동공은 짙은 검은색이었다. 주변의 풍경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

기세 좋게 뛰어나와 오드리의 팔목을 잡은 주제에, 셰비언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요 근래,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드리의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그녀에게서 풍기는 마력의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쿵, 쿵, 쿵.

심장이 가슴에만 있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도 있는 모양이다. 귀찮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죄다 사라지고 뛰는 심장 소리와 오드리의 얼굴만 남았다.

“아가씨.”

“…….”

“제 하늘은 언제나 비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가씨가 원하실 때면…….”

“셰비언 씨, 레이디의 손은 함부로 잡는 게 아닙니다. 연구에만 몰두하다 보니 세간의 예의도 잊었군요.”

라비린이 불쑥 끼어들어 셰비언의 손을 떼어놓았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말투엔 날이 섰고 태도는 위협적이었다. 큰 키와 덩치를 십분 활용한 방해였다.

오드리도, 셰비언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여긴 공간이 아니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전보 행사장 한복판이었다. 빼곡하게 둘러선 사람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연구실에 초대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약혼녀까지 챙기다니, 이래서야 찾아가지 않을 수 없겠어요. 조만간 연구실에서 봅시다.”

“아가씨, 저는…….”

“오드리, 가자.”

라비린은 셰비언이 다른 말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예쁘게 꾸민 오드리를 보여주는 것도 싫은데 대화할 시간 따위를 줄까 보냐.

그러나 셰비언은 애달프게 오드리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오드리를 앞에 두었는데 라비린에게 정신을 팔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내 공간은, 나의 하늘은 항상 열려 있으니 원할 때 오라.

오드리가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과연 그녀가 무언가 대답을 해줄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니, 셰비언은 그 입에서 나오는 한 줌의 숨결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라비린의 손을 잡고 그대로 뒤돌아서서 행사장을 벗어났다. 여긴 사람이 많았고, 라비린은 그녀의 약혼자였고, 삼각관계의 주인공이라는 소문 따위가 퍼지는 건 반갑지 않았다.

무엇보다, 셰비언과 눈이 마주친 순간 주변이 아득해졌던 경험이 너무 무서웠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라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좀 전의 자신은 그걸 송두리째 잊어버렸다. 이렇게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심장이 뛰었다.

어느새 해가 기울기 시작한 거리엔 막바지를 향해 달리는 수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달짝지근한 수확제 전통 과자 냄새가 거리 전체를 뒤덮고 있어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설탕으로 절여지는 듯했다.

오드리는 괜히 발을 굴러 바닥을 확인했다. 디디고 있는 바닥이 단단하다는 게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주황색 노을을 품은 구름, 노랗고 붉게 물들기 시작한 가로수, 한껏 꾸미고 웃는 낯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그 틈바구니를 헤치고 지나가는 마차. 모두 그림책의 한 장면처럼 낯설었다.

‘한 번만 돌아볼 걸 그랬나. 간절해 보였는데, 딱 한 번만…….’

그때, 라비린이 멍한 표정의 오드리를 훅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체온과 대비되는 시원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잠시 잊고 있던 현실감이 거짓말처럼 찾아와 오드리의 어깨를 눌렀다. 드러낸 목덜미를 데우는 햇살이 뜨거웠다.

“오드리, 잠깐만 있어봐.”

라비린은 길거리의 소녀에게서 종이꽃 한 다발을 사다 오드리에게 안겼다. 그리 잘 접은 종이꽃은 아니었지만, 오드리에게 잘 어울리는 진주색 종이가 마음에 들었다. 정작 꽃을 받은 장본인은 뭐 이런 귀찮은 걸 주느냐는 식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말이다.

“이걸 벌써 주면 어떡해? 계속 들고 다니게 생겼네.”

“걱정 마, 금방일 거야. 하늘이 벌써 붉잖아.”

향기 없는 종이꽃은 이따 밤이 되면 하랄에게 바쳐야 하는 제물이었다. 모닥불에 던져 태우며 내년의 풍작을 기원하는 용도였다. 평소에는 신선한 꽃을 파는 꽃장수들도 오늘만은 가진 손재주를 모두 발휘한 종이꽃을 팔았다.

라비린은 꽃다발에서 꽃송이 하나를 빼내어 오드리의 귓가에 꽂고는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열기 없이 차가운 눈동자는 서글퍼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여 머리를 기대는 동작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아마 그녀는 자신에게 이런 버릇이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지금 유행이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라는 게 아쉬워. 진주만큼 네게 잘 어울리는 보석이 없는데.”

“진주는 별로야. 투자 가치가 없어. 값은 어지간한 다이아몬드와 비슷하게 나가면서 시간과 함께 삭아가는 보석이라니, 최악이야.”

“하하, 그거야 나도 알지. 하지만 그때뿐인 광채라 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아?”

“별로. 하여간 너도 참 취향이 희한해.”

뒤에 서서 바지사장 노릇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질 않나, 날 사랑한다고 하질 않나. 오드리가 삼킨 말이 라비린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엷은 미소를 띠고 오드리의 뺨에 입을 맞췄다.

오드리는 흠칫 놀라 눈을 내리깔긴 했지만, 라비린의 키스를 피하진 않았다. 라비린은 미미하게 주름이 생긴 미간을 손으로 눌러 펴며 웃었다. 처량맞아 보이지 않길 바라며 지은 미소였지만 스스로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내가 네 약혼자라서 정말 좋다……. 이렇게 마음대로 뺨에 키스도 할 수 있고.”

“…….”

“사랑고백을 듣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그래도 난 네 약혼자니까 몇 번이고 기회가 있는 거지. 이렇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남들 앞에서 마음껏 표현도 할 수 있고.”

“나도 널 좋아해.”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겠지. 나도 눈치라는 게 있어.”

피곤한 낯을 하고 지금은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를 사방에 뿌리며 서 있던 셰비언이 단숨에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달려나와 오드리의 손목을 쥐었을 때. 그의 절박한 표정보다 한 번도 본 적 없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오드리가 더 놀라웠다.

그 순간 알아차리고 말았다. 왜 그렇게 셰비언이 싫었는지.

“사랑을 달라 매달리는 건 꼴사납다고 생각해. 그럼에도 난 네 손을 놓을 수가 없어. 시간이 지나면,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내 얼굴을 좀 더 자주 보면, 그땐 날 봐주지 않을까. 시작이 우정이면 어때, 끝이 사랑이면 되지…….”

“라비린.”

오드리는 어쩔 줄을 모르고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덩치가 무색하게 풀이 죽어 수그러든 라비린은 처음이었다. 분명히 웃는 얼굴인데도 어딘지 우는 것만 같아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더듬었다. 바싹 마른 속눈썹이 오드리의 손끝을 간지럽혔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라비린이 그녀의 손을 쥐고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 전과는 약간 다른 미소였다. 거두려다 잡힌 손이 뜨거웠다.

“알아, 서로 합의한 정략결혼에 사랑을 바라는 내가 욕심쟁이라는 거.”

“……아니,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했던 내가 잘못이야. 차라리 제대로 거절할 걸 그랬어. 이제라도 제대로 말할게. 라비린, 나는…….”

“그 마법사, 좋아하지? 나랑은 다른 의미로.”

오드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닌 척 가장할 정신도 없어서 다급히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빌어먹을 구두가 문제였다. 폭이 좁고 굽이 높은 구두는 오드리를 제대로 지탱해 주지 못했다. 도리어 라비린이 힘을 주어 당기는 걸 견디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끌려들어 가고 말았다.

라비린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꽁꽁 감추려고 노력해 왔을 일을 대뜸 입에 올렸으니 오드리가 퍽퍽 때리는 것쯤이야 그냥 맞아줄 셈이었지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힘이 셌다.

“윽……. 오드리, 아파. 진짜, 진짜 아파!”

“여자 힘이 세면 얼마나 세다고 아프대!”

“농담이 아니라, 진짜 아파!”

라비린의 목소리가 진짜 아픈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오드리는 때리기를 멈추고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라비린은 팔을 풀어주지 않고 좀 전보다 더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드리는 아예 옴짝달싹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미안. 네가 누굴 사랑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내가 먼저 말해놓고……. 네 마음이 누구를 향하든 간에 넌 내 약혼녀로 내 옆에 있을 건데.”

“……알면 뭐 하러 입 밖에 냈어? 난 이미 널 택했는데. 너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 줄 알아? 그냥 모른 척 기다리면 될걸, 왜 말을 꺼내!”

“사랑하니까. 사랑의 신 볼린의 다른 이름이 질투의 신이라는 걸 새삼 깨달아 버렸거든. 그 마법사……. 전에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지금은 아주 죽여 버리고 싶어.”

오드리가 치마 아래에서 발길질을 했지만 라비린은 잽싸게 피해 버렸다. 힘만 세지 기술은 없는 여자 발길질 몇 번쯤 맞아주는 게 뭐 대수랴만, 지금은 아니었다. 죽이고 싶다 상상만 했지 실행은 안 했잖은가.

“해코지 안 해, 화내지 마. 정말 그랬다간 너에게 아주 크게 미움을 살 텐데 그런 짓을 어떻게 해? 무서워서 못해.”

“……넌 셰비언을 못 죽여.”

셰비언은 용으로 의심될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야. 허투루 시도했다간 네가 죽을걸. 오드리는 진심으로 한 말이지만, 그게 어디 진담으로 들렸겠는가. 라비린이 숨죽여 웃었다.

“아아, 알았어, 알았어. 그가 대단한 마법사긴 하지. 응. 이름도 아주 특이하고 말이야.”

“진짜야. 아, 웃지 말고. 진짜라니까?”

“스케일이 큰 농담이지만, 네가 하는 말이니까 믿을게.”

“농담 아니래도.”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너니까 믿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 중요한 거래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진 않을 거라서.”

라비린은 얌전해진 오드리를 풀어주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손에 잡힌 가느다란 어깨와 입술에 닿는 따뜻한 체온이 서글프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셰비언은 절대 하지 못할 짓이 아닌가.

“그러니 오드리, 앞으로도 쭉 날 택해줘. 조금 전에 셰비언과 나 사이에서 날 택했듯이, 그렇게. 응? 약속해 줘.”

조금 전까지 덩치가 아깝게 쭈그러들어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던 남자는 어디로 갔나. 오드리는 눈을 빛내며 약속을 요구하는 라비린을 바라보며 내심 한탄했다. 이거, 완전히 말려들었다. 어쩐지 눈가가 아주 보송보송하더라니.

“너, 이 말 하려고 아까부터 밑밥 깐 거지.”

“글쎄……? 난 정말 솔직한 내 심정을 말했을 뿐인데? 그러다보니 말이 이렇게 흘러왔을 뿐이야. 그래서 오드리, 안 돼? 난 네 약혼자인데?”

“그 약속이 어떤 상황을 부를 줄 알고 그런 광범위한 약속을 해? 안 돼. 그런 약속이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는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고. 허튼 짓 하지 마.”

“와……. 너, 날 정말 못 믿는구나.”

“나도 조금은 너에 대해 알게 된 거지. 내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알면서 그런 약속을 요구하는 걸 보면 그 속셈이 그리 하얗진 않겠구나. 그리고…….”

오드리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라비린을 향해 양팔을 뻗었다. 이디케였으면 아주 진저리를 쳤을 미소인데, 라비린은 어쩐지 혼이 나간 얼굴을 하고 순순히 그녀를 위해 몸을 굽혔다.

따뜻한 손이 뺨을 감싸고 향긋한 숨결이 입술 바로 옆을 스쳤다.

기껏해야 목을 끌어안을 거라고 생각했던 라비린은 기대 이상의 접촉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고 말았다. 오드리가 그런 그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모처럼 내게 들어온 선택권을 헛걸로 만들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라고.”

“……무슨 노력?”

“중요한 거래 상대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한 노력. 그래야 내가 너에게 계속해서 신의를 지킬 거 아냐?”

라비린은 속에서 올라오는 쓴물에 차마 입도 떼지 못하고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하여간 잔인한 여자였다. 정말 사랑을 줄 듯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가,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자마자 이렇게 냉정하게 군다.

“본래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야. 나한테 사랑을 고백할 거였으면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내 대리인 노릇을 몇 년이나 했으면서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단 말야?”

“알았지. 알았는데……. 설마 신의를 지킬지 말지 고민해야 하는 수준일 거라곤 생각 못했지. 그래도 조금은 중요한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거든. 약혼했잖아.”

“약혼했으니까 내가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지. 약혼이 너에게만 안전장치일 거라고 여겼어?”

발랄하게 웃고 있으면서도 오드리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그동안 사랑에 가까운 우정을 쌓았다고 생각한 건 모조리 라비린의 착각이라는 것처럼.

“난 우리가 꽤 괜찮은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 사이 이상이 되고 싶다고 졸라댄 건 너야. 그럼 나도 고민을 해 봐야지. 이런 내가 싫으면 그냥 친구로 남는 게 좋겠다고 해. 그럼 바로 예전처럼 허물없이 대해줄 테니까.”

라비린은 오드리와의 관계에서 자신은 철저한 약자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하긴 언제 자신이 그녀에게 우위를 점한 적이 있기는 하던가.

라비린은 오드리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 주변을 살폈다. 워낙에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서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목소리를 낮추면 주변에 깔린 기자들에게 들릴 것 같지 않았다. 잔뜩 몸을 낮추고 다시 한번 오드리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주, 아주 다정한 연인 사이처럼.

“싫어지긴 무슨. 그게 너인데, 내가 반한 오드리 헨젤인데 어떻게 싫어져? 두고봐, 오드리.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내가 될 거니까.”

당장 약속을 받아내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셰비언 대신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계속해서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런 선택의 순간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자신을 벗어날 수 없게 될 테니까. 욕심 많은 오드리 헨젤은 손에 들어온 걸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약속도 필요 없어. 넌 계속 날 고르게 될 거야. 장담해.”

“자신만만하네.”

오드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라비린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에 쓰고 싶은 기자들이 사방에 있다는 걸 안다. 속내야 어찌됐든 겉으로는 사이가 좋아야 했다.

광장 곳곳에서 오늘의 행사를 위한 장작이 쌓이는 가운데, 저물어가는 해가 브란젤 구석구석을 붉게 물들였다.

늦은 밤, 피로에 젖어 귀가한 오드리는 하델의 마중을 받았다. 몰래 알신다를 만나러 다녔던 걸 들키는 바람에 개구멍이 모조리 막힌 소년은 누나를 보자마자 울상을 지었다.

“누나! 왜 이렇게 늦었어요?”

“사교철에 모임 다닐 때도 이 시간에 들어왔어. 그보다 네가 왜 아직도 깨어 있어? 일찍 자라니까. 늦게 자면 키 안 커.”

“그렇게 말하는 누나도 작잖아요. 분명 나도 작을걸요. 그보다 선생들이 수확제라고 오지도 않으면서 숙제는 하도 많이 내줘서, 그거 하느라 깨어 있었던 거예요! 누나가 새로 붙여준 선생들은 하나같이 숙제를 빽빽하게 내준단 말예요.”

“핑계는 좋아. 며칠 내도록 미뤄두다가 한꺼번에 몰아서 하느라 힘든 건 아니고?”

“미룬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준 일거리를 우선으로 하다 보니까……!”

“으응, 그래, 그래.”

오드리는 새끼제비처럼 지지배배 말을 늘어놓는 머리통을 마구 쓰다듬고 훌쩍 길어진 몸을 폭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와인 냄새를 맡은 하델이 와락 콧잔등을 구겼다.

“누나는 잘 먹고 돌아다니나 봐요. 술 냄새나.”

“으응, 수확제잖아. 여기저기에서 자꾸 끌어당기면서 먹으라고들 해서…….”

자선을 명목으로 귀족가의 식량창고가 열리는 시기였다. 브란젤에 수도 저택을 마련한 귀족가들이 다투어 제 가문의 부유함을 자랑하니, 요즘 브란젤의 인심은 어느 지역보다도 넉넉했다.

별 탈 없이 자선이 이어지면서 엉덩이에 뿔난 망아지 같다는 말을 듣던 오드리의 평판은 퍽 좋아졌다. 브란젤에서 수확제를 치르는 건 처음일 텐데 제 고모 하던 것과 다를 바 없이 잘하는 게 의외라는 식이었지만 말이다.

“알잖니, 나 먹는 거 좋아하는 거.”

호의로 건네는 음식은 맛있었다. 그리고 음식엔 술이 빠질 수가 없는 법이니, 라비린과 함께 브란젤을 누비는 동안 오드리가 홀짝홀짝 받아 마신 와인은 거의 한 병에 달했다.

하델은 급격히 서러워졌다. 작년만 해도 개구멍으로 바깥에 나가 거리를 쏘다녔는데, 올해는 이게 뭔가. 아무리 저택의 요리사가 수확제 음식을 빼놓지 않고 식탁에 올리고 고용인들이 온갖 잡동사니를 사다 날라도, 담벼락 안쪽에서 혼자 즐기는 수확제는 재미가 없었다.

“알죠. 알지만……. 그런데 누나, 종이꽃은 왜 꽂고 왔어요?”

“종이꽃? 다 태웠는데?”

하델이 오드리의 귓가에서 종이꽃을 빼내 오드리에게 보여주었다. 오드리는 그제야 라비린이 귓가에 꽂아준 종이꽃 한 송이를 깜빡 잊고 태우지 않았음을 알았다. 진주처럼 하얗게 빛나던 꽃은 그새 잿가루가 묻어 회색으로 얼룩덜룩했다.

당장 방에 가면 금가루 은가루 뿌린 종이들이 잔뜩 있건만, 하델은 오드리가 가져온 종이꽃이 탐이 났다. 밖에 나가지 못해서 그런가, 사소한 게 다 부럽다. 하델은 오드리를 졸라 종이꽃을 받아내곤 뺨을 붉혔다.

“벽난로를 피우라고 해야겠어요. 거기다가 태울래요.”

“더울 텐데……. 그래,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마음대로 하렴.”

“근데 누나, 술을 그렇게 먹도록 벨키스 경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예요? 약혼자면서 누나를 말리지도 않았어요? 정 거절 못 하는 잔이면 대신 마셔줘야죠! 설마 사내면서 누나보다 술이 약한 건 아니겠죠? 덩치도 크면서!”

오드리가 외출용 모자를 벗고 머리칼을 푸는 동안에도 하델은 좀처럼 그녀의 옆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나가지 못하는 동안 꾹꾹 눌러왔던 불만이 갑자기 터진 것만 같았다.

“하델, 일단 이거 먹으면서 입 좀 다물고 있으렴.”

오드리는 광장에서 사 온 주전부리를 하델에게 떠안겼다. 저택의 요리사는 절대 만들어주지 않는, 재료도 맛도 수상쩍은 것들이었다. 하델이 알면서도 넘어가 준다 쫑알대며 끄트머리가 타들어간 설탕과자를 입에 넣고 쪽쪽 빠는 걸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났다.

라디아타의 충고가 떠올랐다. 특별한 선물을 하려거든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하라더니, 단순히 퍼레이드를 같이 보라는 뜻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저택에 갇힌 사람의 갑갑함을 알고 한 말이었다.

‘하긴, 난 그런 쪽으로는 경험이 부족하지.’

열 살에 만탈락으로 쫓겨난 이후, 오드리는 정말 엉덩이에 뿔난 망아지처럼 날뛰며 귀족영애에게 씌워진 온갖 굴레들을 다 벗어던졌다. 막 살기로 했는데, 귀족영애답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런 걸 지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이다.

머리칼을 정돈하는 다이앤을 손짓으로 밀어내고 하델을 가까이 불렀다.

“그렇게 밖에 나가고 싶어?”

“…….”

“하델, 수확제 마지막 날 밤에는 도시 전체를 행진하는 큰 퍼레이드가 있다는 거 알지? 누나랑 갈까? 갈래? 네 나이가 부족하긴 해도 나와 함께면 나갈 수 있어.”

하델의 손에서 설탕과자의 막대기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개구멍으로 몰래몰래 바깥을 드나들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퍼레이드였다. 평소엔 하델의 일탈을 잘만 눈감아주던 고용인들도 그날만은 사람이 몰려서 위험하다며 절대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 어어……. 진짜요? 누나, 무도회에 안 가요? 수확제 마지막 날에는 왕궁에서 무도회가 있다던데!”

“안 가도 돼.”

“하지만 아버지는 매년 꼬박꼬박 참석을……. 아니, 그보다 벨키스 경은요? 괜찮대요?”

“북부의 별장으로 쫓겨날 위험으로부터 날 구해준 멋진 기사님에게 보답을 하려는데, 기사님이 거절을 하시네. 이거 참, 어쩐담.”

“아, 아뇨! 좋아요! 준비할게요!”

하델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곤 알렉스를 재촉해 오드리의 곁을 떠났다. 하델의 곁을 지키느라 수확제를 전혀 즐기지 못했던 알렉스 역시 얼굴이 붉긴 마찬가지였다.

오드리는 잔뜩 들뜬 소년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부르튼 발에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내던지고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대어 자세를 무너뜨렸다. 어찌나 피곤한지, 이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교하게 땋은 머리카락을 정성들여 풀어내는 다이앤의 손길이 간질간질했다.

“아가씨, 벨키스 경께서 정말 괜찮다고 하셨어요?”

“괜찮지 않으면? 내일도 같이 다니면 수확제 여섯 날 중 다섯 날을 함께한 거야. 그만하면 됐지.”

오드리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다이앤은 자신이 따라 나가지 못한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했지만, 차마 묻지는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오드리는 자비롭고 상냥한 주인이었지만 정해진 선을 넘는 것까지 용납하지는 않았다.

“다이앤. 난 내일 과자가게에 들를 거고, 고용인 전체에 돌릴 과자를 사서 배달시킬 거야. 내용물은 초콜릿이 좋을까, 말린 무화과가 좋을까?”

“알신다는 초콜릿을 별로 안 좋아한대요. 선물을 받더라도 자신은 안 먹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가 많았다더라고요.”

“그럼 말린 무화과로 해야겠네. 설탕과 꿀에 졸여 아주아주 달콤한 걸로. 괜찮겠지?”

다이앤은 약재실 구석에서 잘 숙성 중인 약을 떠올렸다. 설탕에 졸여 과자에 넣은 무화과의 단맛이라면 약간의 쌉쌀함 정도는 충분히 가려줄 게 분명했다.

“충분해요, 아가씨. 알신다가 아주 좋아할 거예요.”

“그래야지. 그래야 선물하는 보람이 있지.”

오드리의 말투가 스산했다. 다이앤은 입을 다물고 시중에만 집중했다. 오드리는 번잡한 대화 없이 편안하게 목욕을 즐기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푹신한 매트가 몸을 빨아들일 듯 잡아당겼다.

“커튼은 치지 마.”

오드리는 침대에 누운 채 창밖으로 보이는 달을 구경했다. 수확제 첫날에는 완벽한 원이었던 보름달이 지금은 퍽 야위어 그늘이 짙었다. 대신 색은 더 진해져 마치 황금으로 만든 머리핀처럼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평소 은빛으로 빛나는 달을 볼 때는 셰비언의 은발 생각이 났는데, 오늘의 달은 셰비언보다는 라비린의 머리칼에 더 가까웠다. 상처 받지 않은 척 머리카락 속으로 눈을 숨기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여간……. 그냥 거절로 끝낼 수 있는 걸 굳이 그런 식으로 화를 내게 만들어.’

차라리 이전처럼 사랑을 달라 하지, 왜 꼭 자신을 선택해 달라 한 건지. 어차피 약혼한 사이고, 별일이 없으면 그대로 결혼을 할 거고, 평생을 중요한 파트너로 함께 살게 될 텐데. 행사장에서 셰비언이 아니라 라비린의 손을 잡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쭉 그럴 텐데.

왜 라비린은 언젠가 오드리가 라비린과 셰비언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굴었을까. 그는 내게 무얼 감추고 있는 걸까.

이리저리 궁리를 해 봐도 떠오르는 건 없고 짜증만 솟았다. 퍽! 내던진 베개가 침실 바닥을 굴렀다.

‘됐다. 더 생각해 봐야 뭐 나올 것도 없어. 다른 거나 생각해야지. 그래, 나랍의 폭우 문제라든가……. 드디어 기존의 관리인을 전부 갈아치웠으니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최근 로렐라이는 나랍의 사탕수수 농장을 관리하던 인원을 확실하게 물갈이하고 인부들의 생활환경 개선에도 신경을 썼다. 사람을 쥐어짜서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었던 만큼 당분간 생산량이 떨어지는 걸 감수해야겠지만,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 언젠가는 했어야 할 일이었다.

농장의 경비원으로 여자 용병들을 쓰고 있으니만큼 더더욱.

나랍의 여자 용병들은 그 실력에 비해 삯이 놀라울 만치 쌌다. 지원자 사이에 얼굴의 문신을 지운 치들이 섞여 들어올지 모른다고 걱정하던 이디케의 마음마저 돌려세웠을 정도였다.

아직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헌신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일을 잘한다는 말만 올라왔지만, 실상은 어떨까. 폭우에 농장 인부들의 집이 쓸려가고 전염병이 돌아 사람이 죽어나가도 전혀 몰랐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관리인 전부가 살해당하고 농장을 잃는 건 아닐까. 이젠 타우레드 후작이 방파제가 되어주지도 않을 텐데, 그 일로 국왕에게 로렐라이가 트집을 잡혀서 약혼한 보람도 없이 상단을 빼앗기고…….

“안 돼, 안 돼, 정신 차려야지.”

벌떡 일어나 다이앤이 자리끼로 떠놓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불안이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게, 마치 로렐라이를 만들었던 초기 같았다. 매일 밤 상단이 망하고 만탈락이 파산하여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비는 꿈을 꾸던 시절 말이다.

이런 불안이 그냥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만약의 일에 대한 대비에 도움이 된다지만, 지나치게 몰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걸 알 때까지 값비싼 수업료를 치렀는데 잊을 리가.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

쉴 새 없이 손가락을 튕기며 창문을 열었다. 실내 공기가 워낙 시원한 탓인지, 약간 후덥지근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달콤한 과자 냄새 사이에 종이 탄 고소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라비린과 함께 모닥불에 종이꽃을 던진 게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인데 이상하리만치 아득하게 느껴졌다.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함께 있을 때, 그 뜨거운 손을 쥐고 있을 땐 놀랍도록 현실감이 넘치다가도 이렇게 멀어지면 그림책 속의 한 장면을 본 것처럼 인상이 흐려지곤 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나.

대신 셰비언과 눈을 마주쳤던 순간이 훨씬 생생하게 떠올랐다. 행사장에서 만나 얼굴을 익히고 대화를 나눈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검은 형제로만 기억될 뿐인데, 그 틈새로 자신을 바라보던 열기 어린 푸른 눈동자는 지나칠 정도로 뚜렷했다.

내 하늘은 언제나 비어 있어요.

색 옅은 입술로 뱉은 말이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아주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이렇게 머리가 번잡하고 어지러운 순간에, 그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휴식처라니.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살짝 다녀올 수 있다니.

하지만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셰비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으면서, 라비린의 질투를 알면서, 세비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자신을 두려워하면서.

‘사실은…… 라비린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돼. 그래, 그게 제일 문제지. 이해된다는 거.’

오드리는 얼굴을 손으로 덮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노력해도 종국에는 셰비언에게로 생각이 흐르고야 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안색이 나빴던 셰비언이,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행사에 나와서 끙끙대고 있었던 이유가 알고 싶었다. 그게 자신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은 자신을 곱씹고 슬퍼하되 미워하진 않길 바랐다.

라비린과 셰비언을 대하는 마음의 온도가 이렇게나 차이가 났다. 최악이었다.

오드리가 제 속을 들여다보며 자괴감에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 시각, 브란젤의 치안대원들은 하루의 업무를 마무리하다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해가 뜬 이후부터 지금까지 괴물이 단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하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왕궁마법사 한 명을 불러다가 위험지역으로 꼽았던 곳들을 한 바퀴 돌았다.

눈 밑이 퀭한 왕궁마법사 스와디는 잠들기 직전에 끌려나온 탓에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였지만 깍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피냄새 폴폴 나는 망토를 걸친 치안대원들을 무시할 깜냥은 없었다. 정 피곤해서 안 되겠다면 업어서라도 데리고 다니겠다는데 어쩌겠나.

“마법망이 아주 안정된 상태예요. 이정도면 왕궁보다 낫네.”

“그, 그럼 이제 괴물은 안 나오는 겁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법망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그렇겠죠.”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스와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그게 치안대원들의 귀에 들리기나 하겠는가. 아직 수확제가 이틀이나 남아 있고 마지막 날에는 대형 퍼레이드도 있건만 그들은 미리 준비했던 와인을 땄다.

“괴물만 안 나오면 살 만하지!”

“까짓 거, 소매치기랑 도둑 몇 놈쯤이야!”

“빌어먹을, 이제 입막음하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해서 미쳐 버리겠는데!”

왕실에서 내려준 와인이었다. 향도 맛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다들 기분 좋게 잔을 들었다.

“이건 어느 신에게 감사를 표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이 와인을 하사한 하랄? 마침내 괴물이 사라졌으니 브란젤을 수호해 준 벤? 끝끝내 버텨낸 우리의 승리니까 벨트람? 아니면, 퍼레이드가 시작되기 전에 괴물이 사라진 행운에 감사하며 포모스?”

“야, 그냥 다 감사해! 다 감사하면 되지, 뭘 골라!”

“그래, 이왕이면 칼레이도 넣어줘라! 괴물을 죄다 저승으로 끌고 갔잖아!”

와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사무실을 울렸다. 치안대에서 수확제 최악의 행사로 꼽는 퍼레이드는 내일 모레에 열릴 예정이었기에, 그들에게는 아직 하루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작년과 재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마시고 즐길 요량으로 목구멍을 적셨다. 수확제였다.

하나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 치안대원들 뿐으로, 그들에게 불려나왔던 스와디는 와인도 마다하고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숙소로 돌아갔다. 그녀는 돌아가자마자 이번 괴물 사태에서 괴물의 해부와 분석을 맡고 있는 동료들을 두드려 깨웠다.

“일어나! 큰일 났어!”

“뭔데에……. 괴물 시체가 폭발하기라도 했어? 아님 펄펄 살아 있는 놈이라도 들어왔어?”

“왜 깨워어! 좀 자자아!”

“야, 너네 지금 잘 때가 아냐! 마법망이 안정됐어!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잠에 겨운 눈들이 느릿하게 껌뻑거렸다. 갑갑함에 가슴을 치던 스와디는 방에 있는 마법등의 뚜껑을 전부 걷어버렸다. 갑자기 실내가 환해지자 여기저기에서 비명과 신음이 울렸다. 어떤 년이야! 죽여 버린다! 험한 욕설이 합창처럼 메아리쳤다.

“괴물 출몰 예상 지역의 마법망이 안정됐다고! 내 눈으로 보고 왔어!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 아주 왕궁 한복판을 보는 것 같았다니까!”

“무슨 미친 소리야? 그럼 이제 괴물이 안 나온다는 거야?”

“그래! 치안대원들이 그러는데, 오늘 해 뜨고 나서 나타난 괴물이 하나도 없대!”

잠에 겨워 흐느적대던 왕궁마법사들이 스프링처럼 벌떡벌떡 일어났다. 눈곱을 떼는 손길이 아주 다급했다.

“그럼 이제 샘플을 어디서 구해?”

“아직 남은 거 많잖아. 냉동 마법도구에 넣어뒀던 거 쓰면 되겠지. 얼마 전엔 죽은 직후의 시체도 들어왔고……. 아씨, 아직 말하는 놈이랑 말 못 하는 놈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을 못 찾았는데!”

“말하는 게 문제야? 공격성이 뭣 때문에 발현되는 건지도 모르는데.”

“염병, 잠 홀딱 깨네, 진짜.”

바쁘고 바빠서 연구를 미뤄두고 살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마법사였다. 마법을 쓰면 그만큼 목숨과 건강을 깎아먹는데, 어차피 써야 한다면 자신을 위해 쓰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게 당연했다.

실력을 더 쌓아서 더 높은 경지에 이르면 이 거지같은 왕궁마법사 노릇을 때려치워야지. 유명한 상단에 들어가서 유유자적 연구마법사로 살아야지. 왕궁마법사들 대부분의 꿈이었다. 실제로 그걸 해내는 사람은 매우 적었지만 말이다.

스와디의 고함을 들었는지, 옆방의 마법사들 몇몇이 방 안으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마법망에 관한 연구를 하는 이들이었다.

“마법망이 안정됐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자세히 얘기 좀 해 봐.”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런데 우리가 위험지역으로 꼽은 곳들 있잖아? 거기 마법망이 죄다 멀쩡하더라고! 왕궁의 온실을 보는 줄 알았어! 진짜로!”

“미친……. 마법망을 안정시키려면 마법도구를 근방에서 다 치워 버리고 출입금지 지역으로 지정해서 몇 년을 내리 방치해야 되는데, 그러고도 안 되는 일이 허다한데, 그게 하루만에 안정됐다고? 너 제대로 보고 온 거 맞아?”

“그렇다니까!”

“아니, 그게 말이 안 되잖아. 너 졸려서 대충 보고 온 거 아냐?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마법망이라도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 언뜻 멀쩡해 보이기도 하잖아. 너, 설마 거기서 가시화만 하고 온 거야? 마법을 써보긴 했고? 소리는 내봤어?”

스와디를 추궁하는 마법사는 왕궁마법사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실력이 좋은 이였다. 좀 사는 집안 출신이라 어릴 적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던가.

실력 차 때문에 일순 움츠러들었던 스와디는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했다. 이대로라면 사실을 말하고도 거짓말쟁이가 될 판이다. 억지로 어깨를 펴고 눈에 힘을 주었다.

“내가 아무리 실력이 별로라도 그 정도로 눈이 없진 않아. 정 미덥지 못하면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든가!”

“스와디, 난 상식을 말하는 거야. 하루만에 마법망이 안정되는 게 가능했으면 로렐라이 본점이 있는 만탈락이 아직도 그 꼴이겠어? 브란젤에서는 일 년을 족히 쓰는 물건이 만탈락에서는 길어야 칠 개월로 끝난다는 걸 몰라?”

“그, 그야…….”

“그래도 난 너를 존중하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야. 사람이 괴물이 되는 세상인데 혹시나 그런 일이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다른 방법을 써보긴 했…….”

“트왈릿! 다나 트왈릿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요즘 걔가 마법망 연구에선 최고 아냐? 괴물이 마력불균형 때문에 나타난 거고, 그게 마법망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걔가 제일 먼저 알아챘잖아. 마법망이 안정되는지 안 되는지 물어보자. 네 상식이 상식이 아니게 됐을지도 모르잖아?”

“빌어먹을 다나 트왈릿…….”

스와디를 추궁하던 마법사의 눈꼬리가 확 치켜 올라갔다. 다른 마법사들의 표정도 일제히 구겨졌다.

스와디는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를 느꼈지만 그래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성질머리가 고약하고 일을 시키면 남들은 손도 못 대는 괴상한 방식으로 처리해 버리는 괴짜이긴 해도 실력이 좋다는 것만은 정말이었으니까.

“스와디 얘가 브란젤에 온 지 얼마 안 되서 뭘 모르네.”

“그러게, 아는 게 없어.”

마법사들이 스와디를 끌어당겼다. 그리곤 속닥속닥 다나의 험담을 시작했다. 안 해도 되는 일거리를 멋대로 받아와 죽을 둥 살 둥 일하게 만들어놓고는 정작 자기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다며 자리를 비우는 마법사. 자신이 해야 할 분량의 일을 남에게 떠미는 게 특기인 뺀질이.

“다나 트왈릿, 그 여자랑 친해져서 돌아오는 건 일거리밖에 없어.”

“실력이 좋으면 뭐해, 그 실력을 영 엉뚱한 데다가만 써먹는데.”

“마법망안정화 같은 얘기 다나 트왈릿에게 꺼내지도 마. 바로 또 이상한 연구 계획서를 써서 위에다 올려 버릴 년이니까! 자긴 연구직에 있지도 않으면서 연구 계획서는 무진장 그럴듯하게 쓴다니까? 자기는 이름만 올려놓고 쏙 빠지고 내용물은 전부 다른 사람들이 채우게 만들 거면서.”

“아, 저건 예전 얘기고……. 걔 이제는 연구직이야. 그치만 연구직이 되자마자 마법망 쪽에 자리 잡고 새 계획서는 한 장도 안 쓰는 거 보면 뻔하지. 이제 자기가 직접 일해야 하니까 안 쓰는 거야.”

“입으로는 바빠서 그렇다는데 여기 안 바쁜 사람이 어디 있어? 다 바쁘지. 그런데 걘 자기 혼자서만 바쁜 것처럼 일을 자꾸 떠민다구. 그래놓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인 척을 해. 일이 너무 바빠서 연구도 못하는 불쌍한 나! 재능이 아깝기도 하지!”

스와디를 추궁하던 마법사가 이를 까드득 갈았다. 그녀는 다나 트왈릿의 연구 파트너였다. 만약 파트너를 고를 선택권이 있었다면 절대 다나를 고르지 않았을 거라는 게 그녀의 입버릇이었다.

“걔가 연구직이 된 것도 일이 너무 많아서 연구를 못한다고 하도 불평을 해대서 마법사장님이 편의를 봐준 건데, 제대로 연구실에 나온 적이 없어. 걔가 빠지면서 실무를 맡은 애들은 걔 몫의 일도 같이 하느라 개고생 중인데, 그걸 알면 연구라도 열심히 할 일이지……!”

“오늘도 마찬가지야. 난 그 너저분한 머리카락 코빼기도 못 봤어!”

“주제에 문장은 아주 화려하다니까! 새빨간 불나비들이 석양 지는 바다 위를 가로질러 날아간다구.”

스와디는 곧 그들에게 휩쓸렸다. 한 명도 아니고 서너 명이, 그것도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다나 트왈릿을 믿어선 안 되는 이유를 구구절절 읊는데 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타 지방에서 브란젤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딱히 다나와 친분이 있지도 않았다.

“그럼 트왈릿 씨한테는 아무것도 맡기지 말란 거야?”

“누가 그러래? 다만, 일을 부탁하거나 맡길 땐 두 번 세 번 생각하라는 거지. 그 여자가 잘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정신 차려보면 하다 말고 사라진 상태라 네가 다 뒤집어쓰고 마감까지 갈려나가기 십상이니까!”

“오……. 그래? 이상하네, 난 일 똑부러지게 잘한다고 들었는데…….”

“일 열 개를 맡아오면 그중 네 개는 잘해. 다섯 개째부터 슬슬 주변 눈치를 보다가 여섯 개부터는 아예 사라져서 그렇지. 실무 쪽 애들은 걔가 빠져줘서 고생이야 좀 하더라도 속은 아주 시원할걸.”

“그럼 그냥 이름을 빼면 되잖아?”

당연한 의문이었다. 왕궁마법사들은 반드시 짝을 지어 일을 하고 보고서도 함께 써서 올려야 했다. 정말 그렇게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아예 이름을 빼버리면 되는 거였다.

한데 이제까지 기세 좋게 말을 잇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머뭇거리는 게 아닌가. 스와디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붉은색과 금색이 섞인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묶고 왕궁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다나가 복도가 꺾이는 지점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어, 안녕, 트왈릿……. 언제부터 듣고 있었어?”

“안녕, 스와디. 네가 마법망이 안정돼서 이제 괴물이 안 나올 거라고 소리소리 지를 때부터 듣고 있었어.”

스와디의 낯이 확 붉어졌다.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다나의 관심은 이미 그녀에게서 떠난 지 오래였다. 그녀는 자신을 두고 말이 많던 무리의 마법사들 중 가장 앞에 선 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보고서에서 내 이름을 뺄 수 없는 거야 당연하지. 열 개 중 네 개는 나 혼자 한 것이고, 남은 여섯 개도 절반은 손을 댔으니까. 하도 일을 엉망으로 해서 믿고 맡길 수가 있어야지. 뒤치다꺼리도 지긋지긋해서 연구직으로 옮겼는데, 세상에 거기도 저런 바보멍청이가 있을 줄은 몰랐지 뭐야.”

“여전히 넌 너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구나.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끌고 와서 감당도 못할 정도로 일거리를 늘렸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걸 가지고 잘난 척은. 그리고 뭐? 바보멍청이? 연구실에 나오지도 않는 게 뭘 안다고 그 따위 소릴 해?”

“그래서 감당했잖아. 그걸 두고 왜 뒷담화를 하고 난리야? 설마 내가 다 맡아 해주기를 바라기라도 했어? 와, 월급은 똑같이 받으면서 너무 도둑심보다! 그리고 네 수준 같은 건 안 봐도 알아. 마법망 연구를 하는 주제에 요즘 같은 때에 어떻게 계속 연구실에 처박혀 있을 수가 있지? 괴물이 나올 정도로 마법망이 불안정한데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난 순찰 당번도 빼먹고 연락도 안 되던 누구랑은 다르게 책임감도 있고 동료의식도 있거든. 내 연구는 잠시 미뤄두더라도 괴물에 치여서 죽을 둥 살 둥 하는 동료들을 도와줄 정도로 말이야.”

스와디는 자신이 아주 재수 없는 자리에 끼었다는 걸 알았다. 둘 사이에서 튀기는 불꽃이 어찌나 대단한지, 복도에 선 채로 말라죽을 지경이었다. 방구석에 숨어서 사태를 지켜보던 몇몇 마법사들이 스와디를 방으로 끌어들였다.

“놀랐지? 쟤들 자주 저래. 오늘은 아주 제대로 붙었다, 야.”

“하필 붙어도 이런 야밤에 붙었다니. 괜히 잠자기도 어렵게. 다나 트왈릿 쟤는 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꼬박꼬박 어지간하다니까. 성질머리하곤……. 어휴.”

“어, 왜? 저렇게 말을 잘하는데.”

“다구리에 장사 없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가 돌아오는데 어떻게 배겨? 머릿수부터 차이가 나.”

“트왈릿 쪽이 더 정당하다는 듯한 말투인데……. 도와주지 않아도 돼?”

“글쎄? 트왈릿이 자기 재능을 믿고 다른 마법사들 면박 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말이야, 알아도 편들어주기가 좀 싫으네. 어차피 쟤도 돈 없어서 숙소 못 나가니까 금방 수그러들 거야. 안 그래도 벌점이 아슬아슬할 거거든. 그리고 도와줬다가 내가 피해를 보면 어떡해? 너도 조심해. 저쪽 애들 속이 코딱지만 해서, 찍히거나 하면 여기서 생활하기 힘들어.”

그러나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복도의 다툼은 점점 소리를 키워갔다. 이렇게 된 거 잠이나 자자며 이불 속으로 도로 기어들어 갔던 마법사들이 신경질을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네 계속 지랄할 거면 나가서 해! 아니면 마법사장님께 쫓아가서 다 일러 버릴 거야! 그럼 어떻게 될지 알지!”

마법사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싸우는 소리가 뚝 끊겼다. 고용, 배치, 승진, 급여, 자잘하게는 숙소 배정까지, 왕궁마법사 관리에 한해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대체 누가 이겼을까. 스와디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슬그머니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이 붉어진 마법사들을 확인하기도 전에 다나가 로브자락을 휘날리며 그녀의 앞을 지나쳤다.

다나의 발자국을 따라 새파란 불길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짙은 유황 냄새가 복도를 물들이고 스와디의 코를 찔렀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걸 봤나?’

스와디는 눈을 벅벅 문질렀다. 복도는 그저 희고 깨끗했다. 불의 흔적도, 떨어진 유황 조각도 없었다.

다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견디지 못하고 숙소를 뛰쳐나왔다. 이 상태로 방에 들어갔다간 집기를 다 때려 부수며 성질을 부릴 게 확실했다. 브란젤 중앙공원의 호수를 죄다 말려 버리기라도 하면 이 짜증이 풀릴까.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에 처박혀 차가운 돌 벽에 이마를 박았다. 머리가 식으면서 조금 진정되는 것 같긴 한데, 거칠게 날뛰는 마력을 통제하는 게 몹시 어려웠다. 샤를레아가 기껏 나눠준 마력이 줄줄 새는 게 아까워 죽겠는데 말이다.

‘아, 아까 샤를레아님과 함께 마력구슬을 만들었었지.’

부리나케 주머니를 뒤져 아이들이 갖고 놀 법한 사이즈의 수정구슬 서너 개를 꺼내 줄줄 새어나가는 마력을 꾹꾹 눌러 담았다. 새파란 불길 같던 마력이 깊은 바다처럼 짙은 빛깔을 띨 때까지 넣었다. 기운은 좀 빠졌지만 사방팔방 유황 냄새 흩뿌리고 다니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인위적으로 마법망을 안정화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멍청한 년. 가만히 있었으면 공동 연구자로 이름을 올려줬을 텐데, 제 복을 제가 찼지.’

도로 주머니에 넣으려다 말고 손에서 구슬을 굴리며 고민했다. 그녀가 만든 이 새로운 마력구슬엔 개량한 마법망 안정화 수식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셰비언과 워커가 만든 것보다 훨씬 많은 마력을 담고 더 넓은 영역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대로 왕궁마법사장에게 찾아가 마력구슬을 건네주기만 하면, 그동안 그동안 깎인 점수쯤은 순식간에 메울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어쩌면 급여가 오를 수도 있었고, 가점을 받아 승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숙소에 독방을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기가 싫었다.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대로 연구할 시간도 없이 일에 쫓기는 왕궁마법사 노릇은 지긋지긋했다. 지나치게 마법을 많이 써서 비쩍 말라가는 몸도 싫고, 멍청이들을 동료랍시고 참아내는 것도, 빌어먹을 따돌림을 견디는 것도 싫었다.

피로에 젖고 잠이 부족한 머리는 그리 이성적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다나는 다른 마력을 자극하고 뒤흔드는 용의 마력이 사방팔방 뻗어나가면 어떤 영향을 미칠까 궁금해졌다. 마법의 주인이 수리한 마법망을 도로 엉망으로 만들 정도는 될까. 내 수식으로 그게 될까.

다나는 주머니 가득 든 수정구 전부에 마력을 때려 넣었다. 샤를레아가 넣어준 용의 마력은 써도 써도 줄지를 않았다. 아니, 줄어드는 걸 인지하지 못한 것도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이 따위 세상, 망해 버리라지.’

그녀는 기분상 묵직해진 주머니를 끌어안고 골목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괴물이 인간의 변형이라는 사실 따위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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