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0-2. 화가 저택의 비극 (22/62)

목차

chapter 20-2. 화가 저택의 비극

chapter 21. 괴물

chapter 22. 퍼레이드는 취소되었습니다

chapter 20-2. 화가 저택의 비극

식당은 본래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천장에 달렸던 마법등은 바닥에 떨어져 파편으로 나뒹굴고,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아름다운 가구들은 피에 뒤덮여 우아함과 품위를 잃었다. 정원을 볼 수 있도록 크게 낸 창문에도 핏물이 튀어 있었다.

피올은 식당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를 셌다. 창문가에 손을 뻗은 채 숨진 하녀가 한 명, 사용한 식기류를 담은 접시와 함께 엎어진 하인이 한 명. 그리고 언뜻 봐도 하녀는 아닌 걸로 보이는 여자 둘이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죽어 있었다.

‘따뜻해.’

쏟아진 찻물에선 아직도 김이 오르고 나이프에 묻은 소시지의 기름이 번들번들했다. 가장 먼저 죽은 걸로 보이는 화가들 역시 아직 몸이 식지 않았다. 힘없이 늘어진 손을 따라 흐른 피가 바닥에 똑똑 떨어져 고였다.

“……흐읍.”

울음 참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한껏 긴장한 상태였던 피올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잘 들렸다. 그는 뭔가가 튀어나오면 바로 찔러 버릴 작정으로 조심스럽게 식탁보를 들췄다.

얼굴 전체가 눈물로 범벅된 하녀가 식탁 아래에 숨어 있었다. 머리부터 허리까지, 상반신 전체에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 몹시 흉했다. 그녀는 피올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괜찮습니다. 치안대원입니다.”

“…….”

“괴물이 어디로 갔는지 압니까?”

하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2층?”

끄덕끄덕.

“일단 거기서 나올 생각은…… 없군요. 괴물의 목을 따다 보여드릴 테니 그땐 나오세요. 아니면 얼른 정원으로 도망치든가.”

피올은 하녀를 설득하는 대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에도, 계단 위의 복도에도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뭔가 무거운 걸 질질 끌고 가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핏자국이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런 자국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땐 이렇게 환하고 고급스러운 곳이 아니라 쥐새끼가 들락대는 지하였지만.

“안 돼! 안 돼! 아아아악!”

복도 저편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피올은 정신없이 내달렸다. 몇 개나 되는 모퉁이를 돌아 몇 번이나 엉뚱한 문을 열어보며 허탕을 친 끝에 사람이 있는 방을 찾아냈다.

마구 찢겨진 그림 앞에 엎어져 오열하는 여자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떼어내 찢는 데에 정신이 팔린 남자. 질긴 캔버스를 북북 찢어내는 남자의 팔은 육식동물의 앞다리처럼 커다랬고, 부숭부숭하고 시커먼 털로 덮여 있었다.

다행히 둘 다 문을 등지고 있어 피올을 눈치채지는 못한 상태였다.

‘뭐야, 팔만 변했잖아?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감각도 영 못 써먹을 정도인 것 같고……. 저거 살려야 돼, 죽여야 돼? ……씁. 에라, 모르겠다. 사람을 몇이나 해친 놈인데 설마 죽인다고 징계 먹겠어?’

지독한 물감 냄새와 피비린내, 짐승의 노린내가 뒤섞인 악취가 진동하느니만큼 냄새로 자신을 알아챌 가능성은 적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다가갔다. 딱 좋은 거리까지 다가가 단숨에 심장 부위를 찌르고 비틀어 뽑았다. 새카만 핏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컥!”

“으, 더러워.”

피올은 눈살을 찌푸리고 핏줄기를 피했다. 색은 그래도 냄새만은 보통 피와 똑같지마는, 기분의 문제였다.

쉬이 죽지 않고 버둥대는 걸 오금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등을 밟아 누른 상태로 단숨에 오른팔을 잘라낸 뒤 왼팔은 검으로 찍어 바닥에 고정시켰다. 새카만 피가 바닥의 카펫을 적시는 가운데 뒤늦게 찾아온 쇼크에 남자가 몸을 펄떡였다.

“끄으윽…….”

“나, 참.”

피올은 얼굴에 몇 방울 튄 피를 닦아내며 혀를 찼다. 웬만하면 양팔을 다 잘라내려고 했는데 검이 생각보다 안 들었다.

‘새 검을 하나 사야 하나……. 보급품 수준 떨어지네, 진짜.’

움찔거리는 몸뚱이를 괜히 걷어차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괴물과 한 공간에 있으면서 죽지 않았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다지 멀쩡한 몰골은 아니었다.

깨진 뒤통수에서 흐른 피에 등 전체가 붉었고, 괴물에게 잡힌 게 분명해 보이는 팔과 어깨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꽤 신경 써서 예쁘게 차려입은 걸로 보이는 옷 전체가 피로 젖어 끔찍했다. 아마 2층 복도에서 질질 끌려 다니며 핏자국을 낸 장본인이 그녀인 듯했다.

찢겨진 그림에서 눈을 못 떼는 여자를 흔들어 억지로 주의를 끌었다. 혼이 나간 듯 텅 빈 눈동자가 거울처럼 피올을 담아냈다.

“치안대원입니다. 이름이 뭡니까?”

“헤이라…….”

“헤이라 씨,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일단 밖으로 나가면 의사를 불러다주겠습니다.”

“밖? 의사?”

“괴물은 잡아놓았습니다. 팔도 잘라냈습니다. 못 쫓아옵니다. 그래도 혹시 불안하신 거면 다리의 힘줄이라도 끊어놓을까요? 헤이라 씨? 제 말 듣고 계세요?”

피올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헤이라는 핀에 박혀 판에 고정된 곤충처럼 고정된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그의 잘린 팔과 검은 피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약혼자였다. 수확제가 끝나면 결혼할 예정이었다. 오늘은 데이트가 있었다. 아침 일찍 만나서 피크닉을 나가려다 동료들이 이왕 얼굴을 봤고 마침 식사 시간이니 함께 먹자고 조르는 통에 식사를 함께했다.

식탁 분위기는 아슬아슬했다. 페리를 위시한 동료들은 헤이라를 부양하지 못하는 그를 은근히 무시하고 깔보며 자극했지만, 결혼을 하고서도 저택에서 나갈 형편이 되지 못하는 헤이라는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생각 이상으로 잘 참는 그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가 재미있는 걸 주웠다며 동그란 수정 구슬을 꺼냈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을 담아놓은 듯 내부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회색 안개가 신기했다. 약간의 마력을 불어넣으면 안에서 번개가 치듯 불꽃이 이는 신기한 물건이라 서로 돌려가며 구경했다.

당연히 그에게도 순번이 돌아왔다. 그는 마력이 굉장히 적은 편이라 마법도구 사용도 꺼리는 사람이었지만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머뭇대면서도 구슬을 받았고, 그 다음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안고 갈 만한 상황이 못 되어서요.”

피올은 넋이 나간 것처럼 영 대답이 없는 헤이라를 번쩍 들어 어깨에 얹었다. 크게 충격 받았을 걸 알지만 어르고 달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처리반을 부르기 전에 얼른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한데 얌전하기만 하던 헤이라가 갑자기 버둥거리며 반항했다. 어지간하면 무시했을 텐데, 무릎에 가슴팍을 거세게 차이고 나자 짜증이 밀려왔다. 결국 바닥에 내려놓고 짜증을 터뜨렸다.

“아, 갑자기 왜 이럽니까! 잠시만 참으라니까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그보다 이 저택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어요.”

“식당에 있는 하녀라면 벌써 만났습니다. 식탁 밑에서 영 나오지 않으려고 하던데……. 혹시 모르죠, 제가 올라온 뒤에 알아서 도망쳤는지. 아직 거기 있더라도 가는 길에 챙겨가면 됩니다.”

“그 애 말고요. 부엌에 요리사가 있어요. 손님……에게 인사를 하러 나오다가 다시 돌아가 숨는 걸 봤어요.”

헤이라는 주먹을 꽉 말아 쥐고 힘주어 손님이라는 단어를 뱉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눈썰미 좋은 치안대원이 알아채기라도 할까, 아예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여긴 내 작업실이에요. 잠시만 더 있다가 내 발로 내려갈게요.”

“나 참, 뭔 말을 하나 했더니……. 혼자 걸을 수 있다니 잘됐습니다. 전 이 저택의 구조를 모르니 요리사가 숨었다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죠. 정 싫으면 힘으로 제압해서라도 끌고 갈 겁니다.”

피올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또 짐짝처럼 어깨에 얹고 갈 기세였다. 이래서야, 어쩔 수 없다. 헤이라는 피올을 똑바로 바라보며 검에 꿰인 괴물 시체를 가리켰다.

“내 약혼자예요.”

“…….”

“이젠 약혼자였다, 라고 해야 하나요.”

이마는 다치지 않았는데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꼭 핏물이 들어간 것 같았다. 이상도 하지, 아무리 눈을 깜빡여 시야를 깨끗이 하려고 해도 좀처럼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애도를 표합니다.”

“그가 괴물이 되어 죽었으니 시체도 내 몫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더는 바라지 않을게요.”

피올은 헤이라의 턱을 타고 떨어지는 붉은 눈물을 차마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괴물을 죽인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게 약혼녀의 앞이었다고 생각하니 어딘지 등이 서늘해지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요리사는 어디에 숨었습니까?”

“식당에서 주방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어요. 나오려다가 도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멀리 가진 못했을 거예요. 아마 통로 중간에 쪼그리고 앉아 떨고 있지 않을까요.”

“그의 무사를 확인하는 대로 헤이라 씨를 찾으러 오겠습니다. 많은 시간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피올이 사라지고 난 뒤, 헤이라는 괴물이 된 약혼자의 시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아직 따뜻한 목덜미에 손을 얹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북북 찢긴 캔버스와 터지고 짓이겨진 물감, 부러진 붓 등이 나뒹구는 작업실은 끔찍했다. 팔이 괴물로 변하자마자 그가 저지른 짓이 믿기지 않았다. 손에 묻은 피가 그냥 붉은 물감 같았다. 이게 어째서 피란 말인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정말 착하고 순한 사람이었는데…….’

얼굴이 보고 싶었다. 헤이라는 바닥에 엎어진 그의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늘 웃음을 머금고 있던 상냥한 얼굴은 어디 가고 긴 주둥이에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온 데다 털이 부숭부숭한 짐승의 얼굴만 있었다.

“괴물……!”

생리적인 혐오감이 치솟았다.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던 헤이라는 등에 벽이 닿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비현실이었던 풍경이 현실이 됐다.

고약한 짐승 누린내와 피비린내, 상처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고통과 핏물 머금어 무거운 옷자락과…… 잘 움직이지 않는 팔과 손가락. 통증이 심하긴 해도 그럭저럭 움직이는 왼손과 달리 오른손은 어깨부터 삐걱거리고 검지와 중지가 축 늘어진 채로 감각이 없었다.

그를 깨달은 순간 괴물의 얼굴을 봤을 때보다 더한 공포가 밀려왔다. 입에 손가락을 넣고 세차게 깨물었다. 손가락의 살점이 으드득 씹히는 느낌이 나고 입 안에 비린내가 가득 찼다. 그러나 고통은 없었다.

“아아……. 아하하…….”

괴물이 된 약혼자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보다 더한 절망이 몰려왔다. 그쳤던 눈물이 다시 흐르며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괴물의 시체에 다가가 머리를 걷어찼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빗나간 게 아쉬워서 몇 번이고 다시 찼다.

이건 그 사람이 아니다, 괴물이다. 괴물이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제까지 치안대가 괴물에 대한 소문을 어떻게 통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막을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죽은 사람들은 나름 이름이 있는 화가들이었고, 여긴 안 그래도 세간에서 말이 많은 여성 화가들의 저택이었다.

‘이 일이 밖으로 새면 타우레드 영애에게 타격이 갈 거야. 그렇게 둘 순 없어. 손가락 한두 개쯤 없어도 그림은 그릴 수 있단 말이야!’

이 일은 괴물의 의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단순 사고여야 한다. 라디아타를 위해서, 그녀가 지원하는 여성 화가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처세에 능하고 민활한 머리가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헤이라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물감을 그러모아 사방에 뿌렸다. 구석에 쟁여놓았던 물감도 다 털었다.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기름 냄새가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휘청거리면서도 잡동사니를 넣어두던 서랍에서 불씨가 담긴 구슬을 찾아 꺼냈다.

찢긴 캔버스를 주워모아 괴물 시체 위에 정성스럽게 덮었다. 훨훨 타라, 잘 타라! 마력을 불어넣기 직전, 문득 웃음이 났다.

“페리 언니는 당신 때문에 내가 쫄딱 망할 거라고 그랬는데……. 정말 그렇게 됐네, 내 사랑.”

발치에 널브러진 시체는 내 약혼자가 아니다. 그는 괴물로 변하는 순간 죽어버렸다. 괴물에게 잡아먹혔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내 그림을, 손가락을 망가뜨렸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정당한 복수인 것이다.

불씨가 떨어졌다. 가연성 짙은 유화물감을 머금은 캔버스는 아주 좋은 장작이었다. 일부러 열어둔 창문을 타고 바람이 들어왔다. 바닥을 더럽힌 물감 자국을 타고 불길이 번졌다.

요리사 찾아내 구출하고 돌아온 피올은 2층으로 가는 계단 입구까지 자욱하게 깔린 연기를 보고 기겁했다. 고약한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제기랄, 이게 무슨 일이야? 아 이거 추가 수당은 나오나? 미쳐 버리겠네, 진짜!”

식당에 쫓아가 냅킨을 적셔 입과 코를 막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벽을 더듬어가며 괴물이 누워 있을 방을 찾았다. 헤이라야 다리가 멀쩡하니 알아서 도망쳤을 테고, 중요한 건 괴물 시체를 확보하는 거였다.

그러나 목표한 방이 있는 복도에 도착했을 때, 피올은 앞으로 나아갈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복도 전체가 불바다였다. 이대로라면 1층으로 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피올은 일말의 미련으로 조금 더 기웃대다가 망토 끄트머리를 태워먹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 아까보다 한결 거세진 불길과 연기를 헤치고 무너지기 직전의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내렸다. 현관 밖으로 뛰쳐나와 맑은 공기를 마시자 좀 살 것 같았다.

치마를 잔뜩 움켜쥐고 현관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네이기스가 피올의 팔을 붙들었다.

“보티안 씨! 이 연기가 다 뭐예요?”

“레이디 그웬, 왜 여기까지 와 계십니까? 쓰러진 분 옆에 있어달라고 제가 부탁했었는데요. 괴물이 나타났더라는 말을 듣고도 현관 앞까지 쫓아 나오다니, 제정신입니까?”

“페리는 내 하녀가 보고 있어요. 혹시 안에 불난 거예요? 어디에서요? 부엌? 부엌이죠?”

“아뇨,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2층에서……. 레이디!”

네이기스가 피올을 밀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피올에게 허리를 잡혀 도로 끌려나왔지만, 포기를 못하고 허공에 뜬 발을 동동거렸다.

“놔주세요! 들어가야 돼요!”

“미쳤습니까?”

“내 작업실! 내 작업실이 2층에 있어요!”

“그림 구하다가 목숨 버릴 일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피올은 아까 헤이라를 들었던 것처럼 네이기스를 어깨에 걸치고 성큼성큼 저택에서 멀어졌다. 네이기스는 피올의 어깨에 배가 눌리는 통에 숨쉬기도 힘들어 비명도 못 질렀다.

피올은 페리 곁에까지 와서야 네이기스를 내려주었다. 페리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네이기스는 다시 벌떡 일어나려했지만, 피올이 더 빨랐다. 그는 네이기스의 어깨를 꾹 눌러 자리에 주저앉히고 몸을 낮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레이디, 아무래도 이 저택에서 지내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곧 소방대가 오겠지만 당분간 따로 지낼 곳을 찾아야 할 겁니다.”

“갈 곳 따위를 생각할 정신이 없어요. 나는 내 그림을 찾아와야 한단 말예요!”

“그림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불타는 저택에 뛰어들고 싶을 만큼?”

“네!”

피올은 쓴웃음을 지었다. 황당한 말을 당당하게 하는 걸 들으면서도 어쩐지 싫지가 않으니 이거 참 큰일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근처에 있는 작은 분수대에 망토를 넣고 푹 적신 뒤 단단히 비끄러맸다. 머리에도 물을 잔뜩 끼얹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레이디보다는 제가 다녀오는 게 낫죠. 대략적인 위치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네이기스의 낯빛이 백지장보다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연기가 새어나오는 2층 창문을 새삼 다시 보고 피올의 팔에 매달렸다.

“안 돼요! 안 가르쳐 드릴 거예요!”

“거기 하녀 아가씨, 식탁 밑에서 용케 잘 나왔군요. 당신 주인의 작업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고맙겠습니다. 헤이라 씨의 작업실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거길 기준으로 설명해 주면 됩니다.”

“헤이라 님의 작업실이 있는 복도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루말! 말하지 마!”

“고맙습니다, 루말 양. 그보다 치안대가 오기 전에 세수도 하고 손도 좀 씻어두세요. 지금 꼴로는 당신을 범인으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거든요. 레이디 그웬, 다녀오겠습니다. 금방 오죠.”

“안 된다니까요……!”

피올은 손목에 감긴 리본에 입을 맞췄다. 벨트람의 응원을 받은 듯 발이 가벼워질 걸 기대하면서. 과연 네이기스가 뺨을 붉게 물들이고 어쩔 줄 모르는 걸 보자 다시 그 불구덩이를 뚫고 들어갈 용기가 났다.

네이기스는 잡을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피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만약 그가 잘못된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자신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루말 역시 혼이 나갔기는 마찬가지였다. 피올이 얼굴과 손을 씻으라 했건만 벌겋게 피 묻은 손을 덜덜 떨며 네이기스의 옷자락을 쥐고 늘어졌다.

“아가씨, 어떡해요……. 치안대원님이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아냐. 무사히 나오실 거야. 그렇게 믿자.”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말하면 안 됐는데, 제가, 제가…….”

“울지 마, 루말. 아무 일 없으실 거야. 아무렴, 산트렘의 기사였던 분인걸.”

푸른 하늘을 덮는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불안을 가까스로 다독이며 시간을 짓씹었다. 딱히 부딪친 적도 없는데 누군가 명치에 못을 박는 것처럼 아팠다.

초조함에 미치기 직전이었던 네이기스는 저택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의 인영을 발견하고 숨을 멈췄다. 다리 한쪽을 끌며 걷는 저 사람이 정말 피올이란 말인가.

“보티안 씨?”

“치안대원님?”

피올이 얼굴 여기저기에 잿가루를 묻힌 채 네이기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깔끔하게 정돈하고 다니던 머리카락은 일부러 컬을 넣은 것처럼 구불구불하고, 옷 곳곳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그래도 어디든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는 곳은 없었다.

“레이디, 다녀왔습니다.”

“보티안 씨!”

네이기스는 저도 모르게 피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피올이 주춤 뒷걸음질을 하는 게 느껴졌지만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다. 지독한 불 냄새가 나는 옷자락을 쥐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잠깐 사이 명치에 잔뜩 얹힌 응어리들을 눈물로 쏟아냈다.

피올은 그런 네이기스를 안아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밀쳐 내지도 못한 채로 가만히 눈물을 받아냈다. 그러다 네이기스가 한결 진정한 기색을 보일 때가 되어서야 어깨를 토닥거려 떼어냈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차마 마주볼 자신이 없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며 망토에 감싸서 들고 나온 스케치북을 건네주었다.

“불이 번져서 그림을 다 건져올 순 없었고……. 부끄럽지만 급한 대로 스케치북 한 권만 겨우 챙겼습니다.”

물에 적신 망토를 두르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으면 제 몸부터 챙겼어야지, 종이인 스케치북이 혹 타기라도 할까 봐 감싸고 나온 정성이 어지간했다.

네이기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받아 들었다. 완성된 그림들보다도 이 스케치북 한 권이 더 간절했던 걸 어떻게 알고 챙겨왔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것도 다 꽂아두지 못해 바닥에 쌓아둔 수십 권의 스케치북 중에서, 하필 이걸.

“표지가 조금 울었습니다. 내용이 많이 상하지 않았어야 할 텐데……. 한번 확인해 보시죠. ……아, 이런.”

별 생각 없이 당장 확인해 볼 것을 권유했던 피올은 그만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고개를 돌렸다. 팔랑팔랑 넘어가는 스케치북 가득히 그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웃는 얼굴, 찌푸린 얼굴, 생각에 잠긴 옆모습, 가로등에 기대어 선 뒷모습, 검자루를 쓰다듬는 투박한 손, 잠이 모자라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모습……. 상세히 그린 것보단 급하게 스케치한 게 많고, 기억에 의존해서 그린 듯 비슷한 동작을 여러 번 연습한 흔적도 잔뜩이었지만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일부러 골라온 건 아닙니다.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가져왔는데…… 아, 아니, 나름 손때가 탄 걸 고르기는 했……. 젠장! 하필 가져와도 꼭 그런 걸 가져왔는지…….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정말 잘 골라주셨어요. 제가 가져오려고 했던 게 바로 이거인걸요.”

“…….”

“보티안 씨,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뭐든지 들어드릴게요.”

“……뭐든지요?”

“네, 뭐든지요!”

피올은 햇살처럼 웃는 네이기스를 아연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귀족이었고, 귀족의 입에서 나오는 약속이 얼마나 무거운지 철저히 교육받고 자랐을 백작영애였다.

말은 신중하게 하고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게 귀족의 품위고 자존심이었다. 관습은 물론이고 법까지도 그를 뒷받침했다. 뒷골목에서 구르는 노름꾼과 사채업자도 귀족의 약속은 믿었다.

괜히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느라 말을 빙빙 돌리고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화법이 유행하는 게 아니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 뭐든지, 라는 말을 입에 담다니.

“제가 무슨 보상을 원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열한 요구를 하면 어쩌시려고?”

“네? 저를 위해 불타는 저택에 들어갔다 나오신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리 없잖아요.”

본명으로 전시회에 그림을 걸고 난 후 신문과 잡지를 비롯해 온갖 사람들 입에 올라 별별 못 들을 말을 다 들었으면서도, 네이기스의 웃음은 여전히 순진하고 뽀얗기만 했다.

피올은 견디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가 조금만 더러웠으면, 적당히 약삭빠르고 제 이익을 챙기고 상대를 불신하는 사람이었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이런 순간에도 모든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는 자신 같은 사람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그렇다면, 레이디. 딱 하나만 청하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본가로 돌아가세요. 그웬 백작저로 돌아가 거기서 지내세요.”

네이기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가 품에 안은 스케치북을 꽉 끌어안았다.

“오늘만 벌써 두 건입니다. 첫 번째는 제가 지켜드릴 수 있었지만, 두 번째는…… 그저 운이 좋으셨던 것뿐이죠.”

피올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페리와 그녀의 곁에 앉은 루말을 바라보았다. 둘 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네이기스 역시 저들과 같았다. 사건이 일어날 때 저택 내에 없었다는 점에서.

“제가 딱 붙어 지켜드릴 수도 없는데 제발 안전한 곳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웬 백작저 정도면 지키는 이들도 많고 레이디를 소중히 여겨줄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말씀하시는 거라면 납득할 수가 없는데요. 레이디 타우레드에게 부탁하면 저더러 타우레드 후작저에 있어도 된다고 해줄 거예요.”

“조금 전 뭐든지, 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네이기스의 눈가가 다시 발갛게 물들었다. 코도 입술도 분홍빛이 됐다.

“본가로 돌아가면 그림을 못 그릴 거예요……. 알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레이디의 무사함과 그림을 두고 저울질하라면 저는 언제든 전자를 고를 겁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만약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손님과 주인 중 어느 쪽이 더 귀하게 대접 받겠습니까?”

“흑…….”

네이기스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울었다. 하고 싶은 말이야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이미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말한 다음이었다. 턱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닦아낼 생각도 못한 채로 울다가 스케치북을 피올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아주세요. 본가에 가지고 가면 간직하는 것조차 힘들어질 거예요.”

“……제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럼 이걸 누구에게 드리죠? 다른 분께 가느니 차라리 태워지길 바라겠어요.”

피올은 더 거절하지 못하고 스케치북을 받아들었다. 몇 장 되지도 않는 종이뭉치에 불과한 것이 피곤에 젖은 몸뚱이보다 더 무거웠다. 누군가 명치에 커다란 돌덩이라도 얹어놓은 듯 갑갑해졌다.

그때쯤 드디어 소방대가 나타났다. 무거운 장비를 이고지고 나타난 소방대원들이 불길을 잡으려 뛰어드니,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제야 안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방대원들 중 책임자로 보이는 이가 피올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어찌된 일인지 파악하셨습니까?”

“강도가 들었소. 몸을 피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했나 보더군. 아마 2층에서부터 불길이 시작된 것 같았으니 그쪽을 잘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소.”

“감사합니다.”

피올이 입은 치안대원의 제복은 그 자체로 신뢰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소방대원은 곧바로 수긍하여 물러났다. 사정을 아는 루말은 당황하여 소방대원을 부르려 했으나, 피올에게 곧바로 제지당했다.

“손을 씻으라고 했는데, 아직도 그 꼴이군요. 범인으로 몰리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루말 양.”

“네? 네?”

“솔직해지는 건 치안대에서만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까?”

식탁 아래에 숨은 루말을 어르고 달래며 다정하게 굴었던 건 다 거짓말인 것처럼 루말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놀라우리만치 차가웠다. 루말은 달달 떨며 고개를 끄덕이고 분수대에서 정신없이 손을 씻었다. 맑은 물에 번지는 핏물이 그녀의 앞날만큼이나 불길했다.

* * *

브란젤에서 마차로 한나절, 기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세피아 항구는 멜브란트 왕국 해상 유통망의 핵심이었다. 매일 수없이 많은 배가 들어와 짐을 하역하고 또 떠났다. 특히 올해는 매년 오던 태풍이 오지 않은 만큼 그 활기가 예년의 배는 됐다.

항구 주변에 늘어선 선술집엔 쉬러 온 선원들과 새 선원을 구하는 선장들로 바글바글했다. 배를 타고 몇 달은 가야 나온다는 다른 대륙에서 온 검고 붉은 피부의 외국인, 브란젤에서야 평판이 나쁘지만 여기선 흔해빠진 꿀색 피부의 나랍인, 백지처럼 창백한 북부인과 갈색으로 그을린 남부인이 뒤섞여 고향의 억양이 섞인 멜브란트어와 살론어를 떠들어댔다. 서로 자기 나라 말만 지껄이면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주정뱅이들도 흔했다.

싸구려 여관방도 모자란 어느 날엔 마대자루 하나 덮고 골목 구석에서 잠을 청하는 멍청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잠들었다가는 밤새 주머니를 털어간 소매치기를 찾아 눈에 불을 켜게 될 걸 모르고 말이다.

온갖 재료가 담겨 바글바글 끓는 솥처럼 한 시도 멈춰있지 않은 곳이 바로 세피아 항구였다. 항구로서의 역할보다 관광지, 휴양지의 역할이 더 큰 리가 항구와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그렇다보니 세피아 항구의 선원들은 브란젤의 소문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내일의 날씨, 모레의 파도, 오늘의 술값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전보에는 흥미를 보였다. 소포를 보내거나 돈을 부치는 등, 기차를 이용한 우편의 혜택을 톡톡히 본 경험이 있는 그들에게 전보는 매력적인 수단으로 다가왔다. 좀처럼 움직이는 법이 없는 군인들까지 나서서 죽을 둥 살 둥 급하게 전보선 매립 공사를 했으니만큼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경비가 삼엄해서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슬금슬금 공사 현장을 배회하다가 쫓겨나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전보를 설치하는 날인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우편국 옆에 위치한 데멘사의 사무실 근처엔 오드리와 라비린을 따라온 기자들과 호기심 넘치는 젊은 선원들이 뒤섞여 길이 좁으니 네가 비켜라 서로 아우성이었다.

오드리는 데멘사의 사무실에 마련된 귀빈실에서 느긋하게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전보를 설치한다고 홍보를 한 것도 아닌데 지겹도록 사람이 많았다. 일부러 중부식 정장 드레스를 입고 온 보람이 있었다.

“한 시간 정도만 더 기다리면 완료된다고 했지? 아무리 브란젤과 세피아 항구가 가깝다지만 생각보다 빠르네. 기껏해야 열흘 남짓한 시간밖에 안 걸렸다니…….”

“네. 왕비전하의 추진력이 엄청나셔서요. 무슨 수를 써서 군인들까지 동원하실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덕분에 빨리 끝났어요. 지금은 셰비언이 기계 점검 중인데 그거 끝나면 바로 연결할 거래요.”

오늘 전보를 연결하고 며칠 시험 운영을 해 본 다음, 수확제를 기해 공식적으로 전보의 출발을 알릴 예정이었다. 공식적으로 약혼관계가 된 오드리와 라비린의 뒤를 따라온 기자들은 공식 발표 이전에 전보의 설치를 확인하는 행운아가 될 터였다.

물론 전보가 멀쩡히 작동했을 때의 일이지만 말이다.

오드리는 셰비언을 믿고 마음 편히 귀빈실에서 쉬고 있지만 라비린은 그렇지가 못했다. 기차를 타고 오는 한 시간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마음을 쓰던 그는 데멘사 세피아 항구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전보 점검 작업을 눈으로 봐야겠다며 사라져 버렸다.

‘또 멍청한 짓 하고 있는 거 아냐?’

오드리는 버석하게 말라오는 입술을 냉차로 적시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최근의 라비린은 몹시 이상했다. 셰비언이 오드리에게 꼭 필요한 인재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그를 껄끄럽게 여겼고, 그와 그녀가 단둘이 만나는 걸 불쾌해했다.

어쩌다 셋이 한 자리에 있게 됐을 땐 하는 짓이 아주 가관이었다. 마치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오드리에게 붙어서는 이것저것 챙기려 들었다. 단순히 약혼녀를 세심하게 챙기는 거라기엔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셰비언이 그에 반응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원숭이가 부리는 재롱을 감상하듯이 재미있어 하며 구경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걸 모를 라비린이 아닌데 도대체 쓸모도 없는 짓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드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없었지만 평생 오드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지낸 이디케는 그녀의 불안을 금세 알아보았다.

“아가씨, 뭐가 그렇게 불안하세요?”

“글쎄……. 라비린이 셰비언에게 시비라도 걸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어.”

“으음. 가능성 있는 얘기긴 하네요. 벨키스 경께서는 셰비언 씨를 싫어하니까요.”

“네 눈에도 그게 보여?”

“퍽 노골적이시죠. 자주 보지 못한 저도 알 정도니까요. 좀 이상하긴 해요. 그렇게 접점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러는 건지……. 따지고 보면 질투의 화신이 될 만한 사람은 워커인데 정작 워커는 아주 멀쩡하다는 게 우습죠.”

지나치게 뛰어난 셰비언은 여기저기에서 시기와 질투를 샀다. 모두가 오드리처럼 그의 재능을 아끼고 칭송하는 건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셰비언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워커마저도 한때는 천재 놈들 다 죽어버리라며 허공에 대고 욕을 하지 않았던가.

셰비언이 전보의 발명에 크게 기여했다는 게 확실시 되는 요즘에 와서야 질투의 말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격차를 보고 의욕을 상실한 마법사들이 차라리 그를 존경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 같았다.

우스운 꼬락서니이긴 해도 그들은 마법사였다. 시기, 질투, 체념, 동경과 갈망……. 왜 그런 감정을 가지는지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라비린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는 귀족가의 공자였고, 훌륭한 대리인이었으며, 쓸 만한 검사였다. 그가 셰비언을 싫어할 이유는 찾기가 어려웠다.

“혹시 셰비언 씨가 아가씨 곁에 있는 게 싫어서 그러시는 게 아닐까요? 이를테면……. 질투라든가?”

“농담도……. 정략결혼에 시집에서나 나올 법한 사랑은 필요 없다고 한 사람이야. 설마 그럴 리가.”

“하긴 그렇겠죠? 정략이라지만 어차피 하는 결혼, 이왕이면 우리 아가씨에게 홀딱 빠져서 여기저기에 질투하고 다니셨음 좋겠는데 그럴 분이 아니라서 아쉽긴 해요.”

질투를 입에 담는 이디케의 태도는 퍽 장난스러웠지만 오드리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때때로 깊은 우정은 사랑과 엇비슷하다고들 하지 않던가. 거듭된 만남만큼 쌓인 시간들에 그가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니 등골이 다 서늘했다.

‘우리 사이에 우정 이상의 뭔가가 있을 리 없어. 그건 라비린도 알 거야.’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처음부터 서로의 이득을 위해 잡은 손이었고 그에 동의한 사이였다. 쓸데없는 착각으로 관계가 일그러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목이 따끔거렸다.

‘역시 마력의 계통 얘길 해야 했을지도 몰라.’

사랑이 아니라 신뢰가 필요한 관계인데 라비린에게 숨기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의 태반은 셰비언과 연관되어 있었다. 라비린은 눈치가 빨랐고, 자신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미련하게 굴고 있었다.

용, 마력의 계통, 정교하게 이어진 마법망이 연주하는 음악, 상상한 대로 뭐든 이루어지는 공간과 방어조로 삼킨 용의 비늘…….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자꾸만 미루다가 라비린의 신뢰를 잃는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라디아타에게는 어떻게든 털어놓을 수 있었던 말들이 라비린의 앞에만 서면 목에 턱 걸려서는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않았다.

‘이상하지, 굉장히 멍청해진 기분이야.’

유리창에 살짝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한기가 열 오른 머리를 식히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이마를 짚어주던 셰비언의 서늘한 손이 떠올랐다. 약간 차갑고, 보드랍고, 다정한 손길.

무심결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드리는 저가 웃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입가를 만지작대다 작게 한숨을 흘렸다. 표정 숨기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어떻게 셰비언만 떠올리면 좀처럼 그게 되질 않았다.

‘유모가 보면 하룻밤 내내 잔소리를 들을 거야. 사랑 따위가 뭐라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하겠지. 정신 차리자, 오드리. 감정에 휘둘리지 마. 사랑이 내 삶의 기둥이 될 수는 없어. 난 그렇겐 못 살아.’

사랑도 감상도 현실을 살아내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아주 약간 휘둘린 것만으로도 모두를 평등하게 재던 저울추가 기울어 버리는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오드리는 창문에서 이마를 떼어내고 숨을 들이마시며 표정을 단속했다. 이제 창문 밖의 풍경은 관심 없다는 듯 뒤돌아서서 이디케를 불렀을 때,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이디케, 세피아 항구에서의 나날은 어땠어?”

“좋았죠.”

이디케의 대답은 아주 시원스러웠다. 그녀는 전보선 공사가 시작됐을 때부터 세피아 항구에서부터 살다시피 했는데,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 짧은 사이에 광대뼈 아래로 그늘이 질 정도로 말랐다. 그런데도 눈에선 빛이 나고 전신에서 활력이 넘쳤다.

“가라 할 때는 내가 왜 이런 일까지 맡아 해야 하냐며 화를 내더니만 굉장히 좋았나 보네.”

“벨키스 경의 이름값은 대단하더라고요. 평소라면 저 같은 게 아무리 말을 해 봐야 듣는 척도 안 할 고고한 분들께서 안달복달 못하고 제 눈치를 다 보더라니까요.”

이디케가 심술궂게 낄낄거렸다. 이디케는 라비린이 직접 오드리에게서 빌려다 쓰는 인재라는 형식으로 데멘사에 파견된 상태였다. 그녀는 라비린이 데멘사에 투자한 금액만큼 당당히 데멘사 사무실에 책상을 두고 서류를 들여다봤다.

로렐라이의 대리인이면서도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이전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대우였다. 이디케와 라비린의 관계를 두고 찧고 까불며 입을 놀리는 치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 쓰기엔 공식적인 자리가 주는 달콤함이 훨씬 컸다. 고생에도 불구하고 낯빛이 환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재밌는 경험이었나 봐. 이런, 이러다 이디케를 데멘사에 뺏기면 어쩌지? 그건 안 돼, 이디케. 누가 내게서 널 대신한단 말이야? 줄 수 있는 건 적어도 널 놓칠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계속 내 옆에 있어.”

“어머, 꼭 프러포즈 같네. 걱정 마세요, 조만간 아가씨 곁으로 돌아갈 거니까. 제 빈자리는 릴리와 다이앤이 잘 메울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지만 저 없이도 너무 잘 지내시면 괜히 심술 나요.”

“돌아오자마자 릴리와 다이앤이 한 일을 죄다 뒤엎어가며 확인할 거면서 말은 잘하지.”

“그렇게 너무 맞는 말씀을 하시면 제가 민망하잖아요. 가끔은 서로 모르는 척도 해야죠.”

괜히 눈을 흘기며 오드리를 웃긴 이디케가 서랍 구석에 처박아뒀던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에 있으니까 재밌는 얘기를 잔뜩 들을 수 있었어요. 서류로 올라오지 않는 얘기가 많더라고요.”

“어떤 얘기?”

“나랍에 때 아닌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든가 하는 얘기요. 멜브란트에 왔어야 할 비가 그쪽에 다 내리고 있다던데요.”

“그건 나도 알아. 덕분에 사탕수수 수확량이 확 줄었잖아. 설탕 판매량은 예년 수준을 회복했는데 사탕수수 수확량이 영 별로라……. 쯧.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중이잖아. 그나마 마법도구를 대량으로 넣어서 전보다 효율이 좋아졌으니 망정이지.”

“그 수확량을 맞추느라 사람이 죽어나간단 얘기가 들려요. 주거지가 엉망이 되고 병이 도는데 쉬게 해주질 않는다고요.”

오드리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에게 올라오는 보고서에는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다. 말브레 극장 습격사건에서 검을 들고 날뛰었던 인물들이 고스란히 나랍으로 돌아갔다는 걸 알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등골이 다 서늘했다.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너무한걸. 다들 너무 빨리 잊어. 브란젤 사람들이야 그들의 목소리를 죄다 묻어버렸으니 모를 수도 있다지만 나랍은 아니잖아. 분명 그런 일이 벌어졌던 배경을 훤히 알고 있을 텐데.”

“어쩌겠어요. 폭우에 지붕이 무너지든, 병이 돌아서 일가족이 죽어나가든, 자기 일이 아닌데요. 그 사람들의 일은 목표 할당량을 채워서 보내는 거예요. 중간에 떼먹는 놈들이 없어져서 자기 몫이 늘어났으니 얼마나 신났겠어요.”

“이래서 갈아치울 때 다 물갈이했어야 하는 건데……. 인력 모자라다고 적당히 솎아냈더니 그새 물들었나?”

“그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 하죠. 본래 나쁜 건 빨리 번지잖아요. 그 서류 속의 얘기가 전부 진실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전부 거짓이지도 않을 거예요. 최소한 비가 이상하게 많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니까요.”

오드리는 이를 갈며 서류를 챙겼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읽어봐야 열만 오르지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돌아가서 찬찬히 읽어볼 요량이었다.

“널 여기 보내길 잘했어. 시야가 넓고 판단이 빨라. 일이 터지기 전에 알아채고 먼저 끊어내는 건 정말이지 네가 최고야.”

“……으음. 웬일로 칭찬이 길어지시네요. 또 어디 멀리 보내려고 그러시는 거죠?”

“눈치가 빨라. 이디케, 바다를 실컷 보았으니 포도밭은 어때? 곧 포도주를 담글 계절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콧대를 높이던 이디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넓디넓은 멜브란트에서 포도를 기르는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이겠느냐마는, 포도밭으로 상징되는 지역은 딱 한 곳이었다.

기사와 포도의 땅, 산트렘. 비옥한 땅을 지키기 위해 남녀 가리지 않고 말을 타고 검을 쥐는 풍습이 아직도 살아있는 곳. 긴 차별에도 불구하고 멜브란트의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풍습을 꿋꿋이 유지하는 억센 성정의 주민들.

“산트렘이요? 설마요? 아니죠? 에이, 아닐 거야. 아니라고 좀 해주세요!”

“가스트로 왕자전하가 네 배경이 되어줄 거야. 지금처럼 쑥덕거리는 녀석들은 깡그리 사라질걸. 대단한 경력이 될 거야. 그래도 싫어?”

“싫죠, 당연히! 제가 뭐 일하는 거에 목숨 건 사람도 아니고 거기에 뜻을 둔 것도 아닌데 산트렘까지 가는 게 어떻게 좋아요? 인정받으며 일해서 기분 좋은 것도 어쩌다 한 번이지!”

“내가 작위를 갖고 독립해서 로렐라이의 주인이라는 걸 밝힐 수 있게 되면 너도 공식적으로 일할 수 있잖아. 그때 잔말 나오지 않을 수 있는 경력이야. 무려 왕자전하라니까?”

“그때가 되면 절 공식적으로 부려먹을 생각 마시고 사람을 뽑으세요.”

이디케의 거부 의사가 이렇게 확실하니 오드리도 어쩔 수 없었다. 하긴 어릴 적부터 성실하고 괜찮은 남자와 결혼해서 예쁜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던 이디케였다. 능력이 아까워도 본인이 싫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래도 아쉽기는 했다. 왕자를 뒷배로 두고 일할 수 있는 건 정말 드문 기회였다.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싫어할 걸 몰랐다는 게 더 놀라워요. 아가씨, 계속 그렇게 미련 떨고 계실 거면 여기 있지 말고 내려가서 전보 기계 구경이나 하세요. 벨키스 경이 걱정된다고 하셨잖아요.”

오드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굴렸다. 정확히 말하면 라비린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그가 할 지도 모를 멍청한 짓이 가져올 파장을 걱정하는 것이지만, 이디케는 다분히 고의적으로 말의 의도를 곡해하고 있었다. 하나 그걸 지적하면 곧바로 다른 반박이 날아올 테지.

“혹시 셰비언 씨가 아가씨 좋아하는 게 마음에 걸려요? 설마 아가씨도 그가 마음에 들어서 벨키스 경과 함께 있는 걸 보이는 게 껄끄러운 건 아니죠? 셰비언 씨 앞에서 애정행각이라도 좀 해 봐요. 포기하게.”

“그거 이미 라비린이 다 했는데, 소용없더라고. 그래도 또 해?”

“그야 벨키스 경께서 하셨으니까 소용이 없죠. 어차피 정략결혼인데 상대가 아가씰 좋아하는 것만 봐서야 무슨 타격이 있겠어요? 아가씨가 직접 하세요. 약혼도 했겠다, 아예 목을 끌어안고 키스라도 해주시면 더 좋겠네요.”

“잔인하네, 이디케.”

“어설프게 희망 주면서 질질 끄는 게 더 잔인해요. 가세요, 빨리.”

말로 엉덩이를 걷어찰 수 있다면 이디케는 아마 백 번도 더 오드리를 걷어찼을 것이다. 오드리는 이디케에게 떠밀려 전보 기계가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여름을 맞은 항구 도시의 지하임에도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널따란 공간 가득히 작은 마법등을 촘촘하게 박아 넣은 덕분에 어둡지는 않았다. 오히려 햇빛이 내리쬐는 바깥보다 더 환한 느낌이 들었다. 한쪽 벽면 가득히 대형 전보 기계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도 그랬다. 이 넓은 곳에 사람이라곤 라비린과 셰비언뿐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오드리의 걱정과는 달리 지하실은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셰비언은 기계의 이곳저곳을 만지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라비린은 그런 그의 뒤통수를 구경하고 있었다. 소 닭 보듯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 가능한 평화였다.

그 애매모호한 평화는 라비린이 오드리를 발견하자마자 깨졌다.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고 기계 근처에서 서성이던 라비린은 만면에 밝은 웃음을 걸고 달려와 대뜸 오드리를 끌어안았다.

“오드리, 웬일로 이렇게 일찍 내려왔어?”

“네가 또 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

“하하, 하하하하……. 말은.”

라비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요즘은 좀 심했다. 오드리가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대체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구느냐고 짜증을 낼 정도였으니.

하지만 셰비언이 오드리에게 보내는 시선이 거슬려 미치겠는 걸 어쩌란 말인가. 오드리가 아무리 능숙하게 흘려보내더라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의미도 소용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뒤틀린 심사를 그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못 견디겠는걸.

“하여간 적당히 해. 셰비언, 일은 잘 되어가나?”

“그럼요.”

“고생하는군. 처음부터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텐데 제작자라고 발표를 못해서 이렇게 파견 근무에 가까운 형태를 띠게 했어. 그 점은 무척 미안해.”

“괜찮아요, 아가씨. 당장은 상황이 받쳐 주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시는 걸 알아요. 어차피 나중에 제가 한 일을 빼앗아가실 분은 아니잖아요?”

“그거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자신감인걸.”

“출입금지마법을 응용해서 다시 제작한 마법도구의 판매대금 일부를 챙겨주시는 걸 보고 확신했죠. 아, 워커가 로렐라이에 괜히 붙어 있는 건 아니구나.”

셰비언의 너스레에 오드리가 웃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온오프 스위치로 작동시킬 수 있는 마법도구가 바로 며칠 전부터 시장에 풀리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만큼이나 반응이 좋았다.

“마법도구는 딱 값어치만큼의 일을 하지만 사람은 대우를 해주면 그 이상의 일을 해내거든. 본래 사람이 제일 비싸. 지금 로렐라이에서는 워커 다음으로 네 몸값이 비쌀걸. 몸값 비싼 마법사, 시험 운전을 위해선 얼마나 남았지?”

오드리와 셰비언이 나누는 대화는 대단히 평이했고 라비린이 따로 불쾌해할 여지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도 라비린은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고 서서 계속 말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하고 오드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예정보다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삼십분이면 충분할 것 같대. 그러니 그를 방해하지 마.”

“이 정도 질문도 방해가 되나?”

“아뇨, 아가씨. 잠시 대화할 시간 정도는…….”

“충분히 방해되지. 안 그래도 아까 이것저것 물어보다 귀찮게 하지 말라고 혼이 났거든.”

보란 듯 짓궂게 눈을 휘며 말하는 라비린을 보면서, 셰비언은 내심 조금 전의 언사를 후회했다. 라비린이 이런 식으로 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질문이 짜증났어도 그냥 받아줄 걸 그랬다.

오드리는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꼈다. 아마 자신이 오기 전에 대화를 가장한 기싸움이 어지간히 격렬했던 모양이었다.

‘피곤한 인간들 같으니…….’

끼지 말자. 알아서들 하라고 해. 결심은 쉬웠다. 오드리가 시큰둥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두 남자도 금세 아까와 같은 태도로 돌아갔다. 아예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까는 전보 기계를 눈빛으로 태울 듯 노려보던 라비린의 관심은 완전히 오드리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다리 아프지 않으냐며, 오드리를 위해 앉을 것을 찾아오는 등의 수선을 떨다가 끝내 한소리를 듣고서야 그만두었다.

“오늘 아침에도 윈디를 타고 달렸어. 그걸 뻔히 알면서 웬 수선이야?”

“수확제가 코앞이라 일하는 게 힘들잖아. 만탈락에서야 능숙하게 했겠지만 여긴 브란젤이고…….”

“괜찮아, 고모님의 기록이 있으니까. 문제없어.”

메너트는 충실한 기록가였다. 그녀는 헨젤가의 살림을 맡아 한 십여 년 동안 치러낸 행사를 아주 꼼꼼하게 기록했고, 그건 오드리에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세피아 항구에 나오는 일정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였다. 이디케를 떼어놓지도 못했을 테고 말이다.

기록을 남긴 장본인은 분해서 이를 갈고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쫓아와서 기록을 불태울 수도 없고 가져갈 수도 없는데.

라비린은 자신만만한 오드리의 태도에 적이 안심했다. 이렇게까지 자신감을 비출 정도면 당연히 잘하지 않겠는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얘기해, 도와줄게.”

“수확제 준비는 전적으로 가문의 여주인들 몫이야. 라디아타라면 몰라, 네가 뭘 해 본 적이 있다고 도와준대?”

“그러게, 정말 그렇네. 주제넘은 말이었어.”

오드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라비린이 돌연 눈을 접으며 웃었다. 달콤한 초콜릿색 눈동자가 녹을 듯한 애정을 담고 오드리를 비췄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손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나라서 할 수 있는 일도 있지. 수확제를 전후해서 사교모임이 폭발하듯 늘어날 거야. 입고 다닐 옷을 보내줄게. 이 멋진 초록색 머리칼에 어울리는 모자와 가무잡잡한 피부색에 딱 어울리는 장신구도 같이. 내가 보낸 구두를 신은 너와 함께 사교모임에 다닐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즐거운데.”

“너, 날 가지고 인형놀이라도 할 셈이야?”

오드리가 일부러 짜증을 담아 대꾸했지만 라비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아주 정중하게 몸을 굽히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인형놀이는 무슨. 약혼자의 특권을 행사하려는 거지. 미혼의 여성에게 보석과 옷, 장신구를 선물할 수 있는 건 가족과 약혼자뿐이잖아?”

“언제적 얘길 하고 있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가 선물한 것들로 몸을 감싼 널 보기를 기대하고 있어.”

타우레드의 상징물은 사자. 사자의 후계자 역시, 사자. 이빨을 숨기고 발톱을 감추고 몸을 낮추고 사냥감을 기다린다.

오드리는 자신이 사냥감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숨을 멈췄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애정고백도 하지 않았지만 입보다 눈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모를 수 없었다.

‘이전과는 달라. 대체 언제부터? 어쩌다?’

라비린은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오드리의 눈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시작이 우정이면 어떤가? 마지막이 사랑이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손가락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약혼반지를 아직 못 맞췄지……. 어떤 게 좋아? 아무리 약혼반지라지만 유행하는 보석을 쓰는 건 역시 좀 그렇겠지? 우리 약혼 기간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니까 질리지 않는 형태로 하는 게 좋겠어. 네 생각은 어때?”

“난…….”

“어머니는 벌써부터 약혼식 얘기를 하고 계셔. 하지만 수확제가 끝나면 곧바로 라디아타의 생일이니까 그것까지 지내고 나서 해야겠지.”

잡힌 손을 통해 뜨거운 온기가 흘러들었다. 오드리는 제 몸이 다시 싸늘해진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뜨거울 리가 없었다.

- 깡! 깡! 깡!

그 순간, 쨍한 금속성 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시체도 일으켜 세울 법한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오드리가 다급히 손을 잡아 뺐다. 이곳엔 오드리와 라비린, 단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셰비언이 이제껏 본 적 없는 짜증이 어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예 팔짱을 끼고 전보 기계에 기대어 선 자세였다.

“아, 정말 못 들어먹겠네. 거기 두 분, 저한테 말만 안 걸면 다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이런. 셰비언 씨에게 이 정도는 당연히 안 들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어떻게 안 들립니까? 귀가 이렇게 멀쩡한데.”

“그렇군요. 의외이긴 하지만, 다음부터는 주의하죠. 셰비언 씨, 어서 점검을 마무리해야죠? 오드리는 수확제 때문에 바빠서 여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쓸 수 없어요.”

셰비언은 자꾸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팔뚝 아래로 숨겼다. 빙긋 웃는 라비린의 얼굴이 너무 얄미워 자칫하면 그의 얼굴을 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까 계속 말을 거는 걸 무시했다고 이따위로 보복하다니.

라비린의 옆에 선 오드리가 그에게는 손을 내주면서 자신에게는 시선 한 자락 주지 않는다는 게 몹시 상처가 됐다. 결혼이니 약혼이니 자신과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조금 전의 오드리를 보며 새삼 느끼고 말았다.

‘상관없는 건 나뿐이었어.’

오드리는 셰비언의 선물은 거절하면서 라비린의 선물은 받았고, 셰비언에게는 절대 다가올 수 없는 선을 그었으면서도 라비린에게는 침범을 허락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라비린이 그녀의 약혼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앞에서 오드리와 다정한 모습을 만들어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라비린의 속내를 이제야 알겠다. 오드리의 태도나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옆에 설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내가 주는 보석은 쳐다보지도 않는데 저 자식은…….’

얼음을 둥지로 삼고 눈보라를 정원수 삼아 성장한 용이건만, 불을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되고 자신은 안 된다는 걸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게 너무 어려웠다.

약혼이, 결혼이 대체 뭐라서 이렇게 차별을 받는가. 차별의 기준이 마음이었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았을 텐데.

라비린은 셰비언의 짜증을 즐기며 오드리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이 뭔 짓을 해도 신기한 동물 보듯 보던 사람이 저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몹시 흡족했다.

“셰비언 씨, 점검해야죠.”

“다 했습니다.”

“오, 한 시간이 삼십분이 되더니만 그보다 더 짧아졌다는 건가요?”

“두 분이 붙어서 속닥거린 시간이 얼마나 됐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삼십분은 예전에 지났어요.”

오드리는 서둘러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셰비언의 말대로였다. 라비린과 옥신각신하는 사이 어느새 삼십분 이상이 지나 있었다.

“……몰랐어. 정말로 방해였겠군.”

“그렇게 재촉하셨으면서 얼마나 정신을 팔고 계실까 궁금해서 내버려 뒀는데, 그랬다간 한도 끝도 없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요.”

셰비언의 목소리가 어찌나 싸늘한지 오드리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용족이 세상에 있을 리 없다며 비웃었을 때도 이런 식의 말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순간적으로 이 지하에 겨울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어쩌겠어, 우린 약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연인이라고.”

“라비린.”

“떨어져 있는 한순간은 천 년처럼 길고 함께 있는 시간은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는걸. 그렇지, 오드리?”

오드리는 혹시 제 몸이 다시 식은 건 아닌가 의심했다. 라비린은 어깨에 손을 살짝 얹기만 했는데도 거기서부터 전해지는 체온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견디지 못하고 슬쩍 밀어냈지만 그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얼른 놔.’

‘내가 미쳤어? 안 놔.’

서로의 속내야 어떻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입을 벙긋거리는 두 사람은 겉모습만은 달달하게 꿀이 떨어지는 연인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라비린이 오드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드러내는 게 세상 신기했던 셰비언은 제 앞에서 찰싹 달라붙은 두 사람이 몹시 짜증이 나 미간을 좁혔다. 단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다니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됐다.

“이제 켤 겁니다. 뒤쪽으로 물러나세요.”

“켜는 것만으로도 그리 위험한가?”

“아가씨야 괜찮죠. 문제는 벨키스 경입니다. 경처럼 마력이 적은 분은 휘말리면 위험하거든요. 저~기 뒤로 가세요.”

마음 같아서는 다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말고 덜컥 켜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오드리에게 능력을 의심받을 것이다. 오드리를 감싸 안고 뒤로 물러난 라비린이 꼴 보기 싫어 기계에 집중했다.

사하스바티의 역작인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워커와 셰비언의 마력을 잔뜩 머금고 기계 곳곳에 박혀 있던 마력구슬들이 어둔 밤을 헤매는 짐승처럼 눈을 떴다. 은빛 몸체가 구슬들이 뿜어내는 빛으로 반짝거렸다.

셰비언이 딱히 가시화를 시킨 것도 아닌데 마법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아빠져 너덜너덜하고 여기저기 구멍이 난 처참한 모습이었다.

전보 기계의 수명과 원활한 전보 송수신을 위해서라도 전보 기계 주변의 마법망은 일정 기준 이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었다. 셰비언은 몹시 귀찮아하며 마법망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 참……. 마법망을 안정시키는 수식을 빼고 만들었더니 수작업의 범위가 지나치게 늘어나 버렸잖아. 어차피 메시지가 전달될 수준까지 안정되지 않아도 되고 범위가 좁아도 괜찮으니까 처음으로 만들었던 마력구슬 방식을 그냥 써먹어도 될 것 같은데.’

앞으로 전보를 설치할 곳은 점점 늘어날 텐데 계속 이런 방식을 고수하다간 브란젤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니게 될 게 뻔했다. 셰비언은 당장 내일부터 브란젤에 뿌려놓았던 마력구슬을 도로 주우러 다니기로 결심했다.

그게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 거란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착각인지도 모르고.

셰비언은 전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걸 확인하고 브란젤의 전보와 연결된 램프에 불이 들어와 있는지를 살폈다. 과연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쪽의 전보도 전원이 들어와 있고, 세피아 항구에 있는 이 전보와 무사히 연결됐다는 뜻이었다.

셰비언이 손을 텀과 동시에 지하를 가득 채우고 일렁거리던 황금빛 그물이 자취를 감췄다. 완전히 넋이 나가서 마법망을 구경하던 라비린이 사라진 마법망이 아쉬운 듯 허공을 짚었다.

“오드리, 방금 그게 마법망이었어? 햇살에 비친 거미줄처럼 화려한…….”

“맞아, 그게 마법망이야. 몇 번이나 봤는데도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네.”

“굉장한걸.”

라비린은 셰비언을 다시 보았다. 낡고 헤져 구멍이 뚫린 마법망이 그가 손을 대자마자 아름답게 바뀌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더니 그의 수준이 새삼 실감이 났다. 수준 있는 마법사에겐 귀족마저 존대를 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셰비언은 그런 라비린의 감탄사를 코웃음으로 날렸다.

“벨키스 경, 지금 시대에 나만 한 마법사는 없어요. 아마 이전에도 없었을 거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이제라도 안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아가씨, 설치가 끝났으니 시험해 보러 가시죠. 1층에서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셰비언 씨, 당신 정말…….”

“참아.”

오드리가 옆구리를 꼬집지 않았더라면, 라비린은 당신 정말 재수 없다는 말을 셰비언의 면전에 대고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먼 거리를 연결한 전보를 처음 사용해 보는 영광은 오드리에게 돌아갔다. 본래는 손님의 말을 직원이 받아 적어줘야 하는 거지만 오드리는 직접 펜을 쥐었다. 그녀를 둘러싼 데멘사 직원들의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했다.

<브란젤, 오늘의 사건사고는? -오드리 헨젤>)

“뭘 그런 걸 물어봐?”

“그냥 적어본 거야. 그럼 뭐, 시구라도 적었어야 해?”

“하여간 낭만이 없어요.”

답변은 이상할 만치 느렸다. 브란젤의 데멘사 사무실에도 사람들을 대기시켜 놓고 왔는데 말이다. 이거 잘못된 거 아니냐며 직원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말이 나오기 시작할 즈음 답장이 왔다.

<오늘 아침, 화가 저택에서 강도살인 및 화재 사건 발생. -데멘사 브란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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