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0-1. 화가 저택의 비극 (21/62)

chapter 20-1. 화가 저택의 비극

「함부로 물건을 줍지 마라. 불운이 함께 올 것이다. - 살론의 속담」

막 밤 순찰을 마치고 돌아가던 피올은 마침 근처를 지나는 신문팔이 소년에게서 신문을 한 부 샀다. 왕궁마법사들이 괴물 일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치안대는 겨우 한숨 돌릴 만한 여유를 얻었다. 여유라고 해 봤자 제때 퇴근해서 편히 쉴 수 있을 정도는 아니고, 이렇게 신문 한 부 사볼 정도지만 전보다는 그나마 사람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났다.

여유가 생겼으면 잠이나 잘 것이지, 쓸데없는 곳에 돈과 시간을 쓴다며 투덜대던 유렌이 갑자기 관심을 보였다.

“뭐야, 너도 가십지를 읽어?”

“그럼 이 바쁜 때에 시사 잡지를 사 읽겠어? 그냥 가십지나 읽으면서 머리 비우는 거지.”

“활자를 읽으면서 머리가 비워진다니, 네가 사람이냐. 차라리 연습을 한다고 하면 내가 이해나 하지……. 저러면서 실력은 좋아요. 아이고, 불공평해.”

피올은 유렌의 투덜거림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둘둘 말린 신문을 펼쳤다.

<벨키스 경과 레이디 헨젤, 드디어 약혼!>

“……헐?”

피올은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1면 기사의 제목도 제목이지만, 그 아래에 그려진 그림이 정말 놀라웠다.

가을 무도회에서 벌어진 일의 한 장면을 그렸나 본데, 남들에 비해 훨씬 덩치가 큰 라비린의 품에 체구 작은 오드리가 쏙 안겨 있는 그림이 1면의 절반을 족히 채우고 있었다. 비록 미화가 심해서 오드리의 피부는 뽀얀 우윳빛이고 라비린의 어깨는 남들의 두 배는 될 듯이 넓었지만, 얼굴 윤곽만은 도저히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했다.

괴물 일에 시달리는 동안 신문 한 장도 못 읽은 피올이지만, 오드리와 라비린의 스캔들은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두 사람이 연애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동족혐오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제 이익을 놓치지 않고 확실하게 챙기는 성정이 아주 똑 닮은 두 사람이었다. 싸우면 싸웠지 친해지기는 힘들 게 분명했다. 혹시 공동의 목표가 있다면 그땐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그 두 사람 사이에 협력해야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 둘이 약혼이라니…….”

“음? 누가 약혼했대? 누가 약혼을 했기에 신문에 기사가 실려? ……오오, 이 커플이구나? 연애를 아주 요란스럽게 하더니만 약혼도 요란스럽게 하네.”

피올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유렌은 그에게 바짝 붙어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누가 가십지 아니랄까 봐 그림도 그림이지만 기사가 아주 흥미진진했다.

“이번 가을 무도회는 땅에 떨어진 달의 조각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정원이…… 됐고. 아, 여기네. 가을 무도회가 한창 무르익은 시간, 근래에 보기 드물게 뜨거운 이 커플을 위해 직접 약혼의 증인이 되어주신 오스미다 왕비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이야, 왕비전하가 증인도 서주셨어? 끝내주네.”

“이리 내놔.”

피올은 냅다 유렌을 밀쳐 내고 1면을 대충 훑었다. 가십지치고는 제법 사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티가 났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단편적인 데다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장면에 대한 서술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았다.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넘겼다. 아무리 가십지라도 상세한 내용이 실린 기사에는 좀 읽을 만한 대목이 있겠지, 기대하면서.

“야! 나도 좀 읽자!”

“머리 비우는데 활자는 뭐 하러 읽는지 모르겠다며? 넌 가서 잠을 자든 연습을 하든 해. 도움도 안 되는 활자를 읽느라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효율적이겠네. 둘 중 하나라도 충분히 해두면 다음에 괴물 잡을 때는 내가 돕지 않아도 될 테니까.”

“와……. 이 자식 재수 없는 거 보소.”

분명히 말하는데, 치안대는 일은 고되어도 명예가 드높고 지원이 좋은 곳이었다. 치열한 경쟁 끝에 들어온 치안대원들의 검 실력은 웬만한 기사 못지않았다. 유렌 역시 출신은 뒷골목이어도 치안대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이니만큼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기사 중의 기사, 국왕의 오른팔이자 가장 날카로운 검인 산트렘의 기사였던 피올을 당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야, 아까 네 도움 안 받아도 충분했거든? 내가 다리를 잘라 버리려고 딱 대기하고 있던 거 네가 무시하고 목을 날린 거잖아? 간만에 말하는 괴물이었는데 대뜸 목을 치다니, 너 정말 너무했던 거 알아?”

“죽어라 소리밖에 안 하는 걸 뻔히 들어놓고도 그런 말이 나오다니 자비롭기도 하지. 정말 말하는 괴물이 마음에 걸리면 이따 보고서에 써. 까짓 징계, 받으면 좋지. 집에서 편히 쉴 수도 있고.”

“야, 너야 며칠 쉬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내가 건사하는 입이 몇인데……! 아오,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놈이랑 파트너지? 세상에, 듀런트 망할 놈의 얼굴이 다 보고 싶네!”

유렌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전 파트너의 이름을 부르며 서러워했다. 피올을 배려하느라고 네이기스에 대한 이야기를 꽁꽁 묶어두었던 시간들이 다 헛일로 느껴졌다. 안 그래도 입이 간지러워 참기 힘들었는데, 이참에 확 말해 버릴까.

“너, 그거 알아? 얼마 전에 리즈비아 거리에서 열린…….”

유렌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가 조잘대려는 대상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낯짝 두꺼운 그라도 본인을 앞에 두고 악담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그 사람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아직까지 신문을 뒤적이느라 정신이 없는 피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고개 좀 들어봐.”

“왜.”

“그웬 영애가 왔어. 신문은 이리 내놓고 빨리 가라.”

“뭐? 너 지금 내가 신문 안 준다고 거짓말 하는 거지? 그웬 영애가 왜……. 어…….”

혓바닥에 칼을 달았나 싶게 독설을 뱉어내던 입이 딱 다물렸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피올의 속내가 유렌의 눈에 훤히 보였다. 저 사람이 여긴 대체 왜 왔나 궁금한 거겠지.

다른 곳에 정신 팔지 않고 직진으로 다가온 네이기스는 웃는 얼굴로 두 남자의 얼을 빼놓고 자연스럽게 피올을 유렌에게서 떼어냈다.

“유렌 씨, 순찰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셨죠? 그러니 보티안 씨는 제가 잠시 빌려가도 되는 거지요?”

“아, 예. 순찰도 끝났으니……. 아가씨 마음대로 하시죠.”

“고마워요.”

피올이 유렌의 소유도 아닌데 빌려준다는 것도 우습고, 순찰이 끝났다고 업무가 끝난 것도 아니지만, 유렌은 거침없이 피올에게서 신문을 빼앗고 등을 떠밀었다. 스케치북이 들어갈 만한 커다란 가방을 안고 있는 걸 보니, 딱 봐도 그림 때문에 온 거였다.

네이기스는 넋 빠진 피올의 팔짱을 끼고 사뿐사뿐 멀어져 갔다. 챙 넓은 커다란 모자에 달린 긴 리본이 바람에 팔랑팔랑 흔들렸다. 유렌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거절을 당하고도 또 오다니, 저 레이디는 자존심도 없나?’

네이기스는 가을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피올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했었다. 핏줄도 아니고 의무도 없는 사이에 여자가 먼저 나서서 에스코트를 부탁하다니, 평소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 대범함에 다들 엄청나게 놀랐었다. 그 용기를 알면서도 대번에 거절해 버린 피올 때문에 두 번 놀랐고 말이다.

사건을 알게 된 에이쉬가 엄청나게 화를 내며 네이기스의 에스코트를 맡아주었지만, 유렌은 거기까진 몰랐다. 아까 말한 것처럼 쉬는 시간에 굳이 활자를 읽어볼 의욕이 있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어쨌거나 피올도 없어졌겠다, 유렌은 느긋하게 피올에게서 빼앗은 신문을 폈다. 아까 읽던 기사의 뒷얘기가 궁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왕비가, 결혼도 아니고 고작 약혼에 증인을 서다니.

“뭐라고 하신 거지? 어디 보자……. 뭐야, 그냥 축사잖아. 왜 증인을 서신 건지 배경 얘긴 어디 없나? 뒤에 있나?”

유렌은 피올이 그랬듯 신문을 뒤적거렸다. 한데 누가 가십지 아니랄까 봐 자세하게 분석한 기사는 없고 순 알 필요도 없는 스캔들 얘기뿐이었다.

오드리와 라비린이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붙어 다녔다는 둥, 라디아타와 가스트로가 친밀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는 걸로 보아 곧 경사가 있겠다는 둥, 그웬 백작부인의 필사적인 보호가 있었음에도 네이기스는 춤 신청을 받지 못했다는 둥…….

“어쩐지 무지 얌전히 끌려가더라. 이거 보고 찔렸나?”

우글우글한 사람들 가운데에 네이기스 혼자 오도카니 서 있고, 그 주변으로 동그란 공백이 있는 그림이 있었다. 말이 많은 그녀에게 굳이 다가가려는 사람이 없었던 듯했다. 1면에 실린 그림처럼 열성적으로 그린 건 아니지만, 그래서 더 그 상황이 잘 보였다.

딱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얼굴과 이름을 알고 가끔 대화를 해 봤다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운 감정이 마구 솟아올랐다. 아무리 꿈이 좋아도 그렇지, 열여섯밖에 안 된 어린 아가씨가 견디기엔 힘든 일이었을 게 분명했다.

“쯔쯔……. 하여간 피올 놈,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요. 레이디가 그렇게까지 부탁하면 눈 딱 감고 들어줄 만도 했는데.”

“왜요, 보티안 씨가 뭐 또 잘못했어요?”

누군가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기척도 뭣도 없이 유령처럼 다가와 바짝 붙어 말을 하니, 유렌의 등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는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팔꿈치로 상대가 있을 법한 곳을 후려쳤다. 컥! 신음과 함께 묵직한 타격감이 돌아왔다.

“헉……. 흐억……. 나 죽네에…….”

“……뭐야, 셰비언 씨였네요. 난 또 뭐라고. 그러게 왜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걸고 그래요? 깜짝 놀랐네.”

말 한번 걸었다가 불시에 명치를 맞은 사람에게 말하기엔 너무 뻔뻔한 말이었다. 쭈그려 앉아 제대로 말도 못하고 아픔을 삭이던 셰비언이 황당해하며 손가락질을 했다.

“와,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쳐요? 아이고, 아파라! 나 죽네!”

“말하는 거 보니까 아주 멀쩡하네요 뭐. 셰비언 씨, 앞으론 조심해요. 칼 든 사람에게 그따위 장난치다가 재수 없으면 진짜 골로 가요.”

“치안대원이 그따위로 말해도 돼요? 사무실에 확 신고할까 보다.”

“하시든지. 백이면 백 그러게 왜 뒤에서 몰래 발소리며 기척이며 다 죽이고 들어와서 장난 쳤냐고 할 거니까.”

셰비언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투덜거렸지만, 유렌은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신문에 정신을 팔고 있었어도 그렇지, 발소리는커녕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니 등골이 다 서늘했다. 아무래도 바쁘더라도 연습을 좀 해야 할 성싶었다. 이래서야 다페이 거리를 걷다가 소매치기의 칼에 맞아죽을지도 몰랐다. 그랬다간 죽어서도 조롱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셰비언 씨가 웬일로 이 시간에 밖에 나왔어요? 매일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었잖아요. 와, 여름 내내 비 한 방울 없이 더웠는데 피부 허연 거 봐. 밀가루네, 밀가루야.”

“말을 해도 꼭……. 데멘사에서 전보를 설치할 거라기에 구경 나왔어요.”

사실은 구경이 아니라 감독이지만, 전보의 개발자라고 밝히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셰비언이 생각하기에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이었지만 유렌은 그의 말을 고스란히 믿었다.

“아, 전보 구경! 며칠 동안 브란젤 곳곳에 삽질하느라 바쁘더니만, 드디어 설치하는가 보죠? 안 그래도 치안대 마법사들이 죄다 흥분해 가지고 서로 먼저 구경 갈 거라고 기싸움을 하더라……. 그래도 언제 설치하는지 정확한 날짜까지는 모르던데, 셰비언 씨는 그런 정보를 어디에서 얻은 거예요?”

“데멘사의 큰 투자자가 벨키스 경이라서요.”

“아하. 이해했어요. 그 벨키스 경의 약혼녀는 레이디 헨젤이고, 그분은 로렐라이의 특급 고객이죠. 역시 세상은 인맥이야.”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다 보니 유렌의 추측은 엉망진창이 됐지만, 결론만큼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었다.

가을무도회 이후, 오스미다 왕비는 전면에 나서서 전보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불합리한 이유로 막혔던 전보선 설치가 허가되고 거액의 자금이 데멘사에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그게 정말 전보에 관심이 있어서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지점이 있었다.

오스미다 왕비는 전보가 가져올 변화, 혹은 이득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 대상은 오로지 오드리였다. 만약 데멘사의 주인이 오드리가 아니었다면 그만한 투자를 했을까 의심스러운 구석이 굉장히 많았다.

라비린도 오드리도 후원에 가까운 투자를 반기는 인사들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왕비였다. 조금이라도 더 뜯어낼 게 없을까 눈이 번들번들한 가스트로가 있는데 방패막이 역할을 해줄 사람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스미다 왕비가 일테니아 후작의 이름으로 전보를 보증해 준 뒤로는 우편국과의 협업도 빠르게 이뤄졌다. 개인 가입자에 기대기보다는 아예 먼 거리를 연결하고 수수료를 받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게 효과가 있어 반발도 적었다. 소액의 돈으로 전보의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나자 전보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머릿수가 확 늘었다.

유렌도 딱 그 정도로 관심이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뭐든지 값비싼 브란젤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친척들과 좀 더 자주, 편하게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혹시 이번에 연결되는 전보는 어디랑 연결되는 건지 알아요? 역시 만탈락인가? 아니면 세피아 항구?”

“만탈락까지 거리가 얼만데 만탈락 소리가 나와요? 당연히 세피아 항구죠. 가깝고, 중요하고. 왜요, 유렌 씨도 가서 구경할래요? 처음 연결하는 건데.”

“아……. 아이고, 아까워라.”

유렌은 몹시 혹하는 제안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네이기스가 피올을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단박에 따라나섰을 텐데, 순찰을 끝내고 보고할 녀석 둘이 다 사라지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하겠는가.

“아쉽지만 난 못 가요. 사무실에 돌아가 봐야 해서……. 치안대 마법사들에게 알려주면 좋아하겠네요. 말해도 되죠?”

“마음대로 하세요. 사실 유렌 씨가 그렇게 아쉬워하실 것도 없어요. 어차피 오늘은 설치만 하고 제대로 개통하는 건 수확제 때 할 거라고 하던데요. 며칠 남았지? 한……. 열흘?”

“열흘보다 짧을걸요. 수확제는 보름에 하니까 끽해야 한 엿새쯤?”

“우와, 진짜 얼마 안 남았네요. 어쩐지, 거리 전체가 뭔가 둥실둥실 떠 있더라.”

“일 년 중에 제일 큰 명절인데 그럼 당연하죠. 크으, 내가 수확제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유렌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새 그는 생일 선물을 고대하는 아이처럼 하루하루 날짜를 세며 수확제를 기다렸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는데 새삼 축제가 좋아서는 아니었고, 수확제가 끝나면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공론화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어서 그랬다.

요즘 나타나는 괴물은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것을 넘어서 목격자를 물거나 주변 기물을 파괴하기까지 했다. 괴물을 찾아내 잡아 죽이는 것보다 공포가 퍼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게 더 힘들었다.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협박하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출신이 출신이니만큼 새삼스럽지는 않아도 몹시 피곤했다.

“아, 참. 셰비언 씨, 샤를레아 씨랑 친척이라면서요? 진짜예요? 하나도 안 닮았는데. 셰비언 씨는 딱 봐도 북방계고 샤를레아 씨는 스쳐 가며 봐도 나랍 출신이잖아요. 뭔 수를 쓰면 둘이 친척이 돼요?”

“샤를레아 이름이 왜 나오죠? 뭐 사고 쳤어요? 내 귀에 들어온 건 딱히 없는데……. 뭔 짓을 하고 다녔기에 치안대원이 샤를레아 이름을 다 알아요?”

명치를 맞고도 무던하게 넘어가던 셰비언의 기세가 단번에 뒤바뀌었다. 햇빛에 녹지 않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얼굴에 짜증과 분노가 어렸다.

“기껏해야 도박장에 처박혀 있겠지 싶어서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으음…….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건 아니고……. 어째 자주 마주쳐서요. 용병치고는 검 솜씨도 좋고 해서 도움이 되니까 싫지는 않아요.”

“……도움이요? 그거, 설마…….”

유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셰비언은 그것만으로도 대강 상황을 짐작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샤를레아가 하도 자리를 비워서 마법사들이 호위를 부탁하려 해도 연락이 안 된다는 투덜거림을 종종 듣고 있던 차였다.

‘끼어들지 말랬더니,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흘끗 유렌의 안색을 살폈다. 유렌은 말실수를 했다는 듯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는 치안대원이었다. 말실수일 리가 없었다. 관계자도 아닌 사람이 자꾸 현장에 나타나니 의심스럽다는 얘기를 돌려서 한 거겠지.

요즘 오드리가 공간에 자주 찾아와 쉬기도 하고, 꽉 막혀 있던 전보 관련 일이 술술 풀려 나가기도 해서 꽤 상승해 있던 기분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헤집다 쓸어 넘겼다. 단정하게 땋아 늘어뜨렸던 머리 스타일이 금세 새둥지가 됐다.

“사이에 다리를 몹시 많이 건너야 하지만 일단 친척이 맞긴 해요. 마법사가 안 되고 검을 잡아서 그렇지, 마력에 민감하기로는 저보다 나은 녀석이니 뭔가를 느끼고 먼저 갔을 수 있어요.”

“오, 그래요? 하긴 마법사는 혈통을 타는 면이 있으니까……. 한 집안에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여러 명 나온대도 이상하진 않죠. 그나저나 셰비언 씨도 ‘그게’ 마력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 봐요?”

“알았으면 진작 알렸겠죠. 유렌 씨 말대로 이 더운 여름날에 얼굴이 밀가루가 되도록 지하에 갇혀 있었는데 뭘 어떻게 알아요? 이상한 마력, 자연스럽지 않은 마력을 찾아다니는 건 샤를레아 녀석의 고약한 취미 중 하나라서 짐작해 본 거예요. 설마 ‘그게’ 진짜로 마력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어요?”

“어느 정도는요. 셰비언 씨, 로렐라이를 떠나지 마요.”

유렌이 빙긋 웃었다. 평소 뒷골목 출신이라는 걸 믿을 수 없게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풍기는 그였는데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는 얼굴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나웠다.

“함부로 브란젤을 벗어나지도 마요. 지켜보고 있으니까.”

“나, 참……. 실력이 좋은 것만으로 의심을 사다니 억울하네. 멋대로 하세요, 유렌 씨. 나는 켕기는 구석이 조금도 없으니까.”

“부디 그 자신감이 떨어지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죠.”

굳은살 박인 거친 손이 셰비언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렌은 셰비언이 불쾌감을 표시하기 직전에 한 걸음 물러서서는 더 늦기 전에 사무실에 가봐야겠다며 멀어졌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화낼 기회를 놓친 셰비언은 유렌의 등을 향해 이만 바득바득 갈았다.

‘하여간 샤를레아 때문에 이게 뭔 꼴이야. 별 기분 나쁜 오해를 다 사고……. 근데 진짜 샤를레아 녀석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지?’

샤를레아,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대체 뭘? 살아야 할 이유와 의욕 같은 건 다 과거에 두고 온 듯 영혼 없는 눈을 하고 있는 널 움직인 건 대체 뭐지?

‘오늘도 연락이 안 됐었지.’

셰비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는 이대로 전보 설치를 감독하러 갈 것인지, 아니면 행방이 묘연한 샤를레아를 찾으러 다닐 것인지를 두고 갈등했다.

첫 번째 전보를 설치하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왕실의 돈이 유입되기 시작한 이후로 이디케가 얼마나 곤두서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번 일이 오드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대강 짐작이 갔다. 안 그래도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 꾸역꾸역 일을 진행하는 오드리인데, 자칫 실패라도 하면 재기하기 힘들 정도의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행방이 묘연한 샤를레아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했다. 유렌에게선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그것도 심장이 펄떡이는 짐승의 멱을 금방 따고 돌아온 것처럼 신선한 피 냄새였다.

소문이 이전보다 잠잠해진 걸로 미루어 보건대, 전처럼 신고를 받고 괴물 시체를 처리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순찰 중에 살아 있는 괴물을 찾아내 그 자리에서 정리해 버리는 방식이 됐다는 결론밖에 안 나왔다. 대응 수준이 현격히 오른 것이다.

‘원인과 범인은 몰라도 자주 나타나는 장소 정도는 알게 된 거야. 패턴을 파악했어. 이런 상황에 샤를레아 녀석은 어디다 머리를 들이밀고 꿈지럭대는 거지? 설마 이번 일에 그 녀석이 관련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셰비언은 바로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눈앞에서 갑자기 신체 변형이 일어난 인간이 있었노라고, 상황을 설명하며 너는 이게 무슨 일인지 아느냐 묻던 샤를레아였다. 괴물과 관련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굳이 사건을 따라다니며 치안대원에게 의심을 살 이유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당장 멱살을 잡고 뭘 하고 다니는 거냐며 따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인간과 짐승이 바글바글한 대도시 브란젤 어디를 돌아다니는지는 몰라도 상대가 용인 이상 찾아낼 방도도 있었다.

‘마법망을 흔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비록 마법을 빼앗긴 상태라 하더라도 샤를레아는 용이었다. 몸에 흐르는 마력이 마법망에 반응하는 패턴이 달랐다. 분석하느라 머리가 좀 아프긴 하겠지만 가능했다.

다만 그런 짓을 했다간 이전에 담수저장고를 고장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브란젤 전체에 일어날 거라는 게 문제였다. 마법망 상태에 예민한 마법도구들이 일제히 고장을 일으킬 터였다. 상하수도, 가로등, 도로 등 도시의 기반시설에 설치된 것들을 비롯해 집 안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십 가지 마법도구들과 큰돈을 들여 새로 제작한 전보선까지 전부.

“하하……. 미친 짓을 할 뻔했네.”

전보선까지 떠올리고 나서야 겨우 이성이 돌아왔다. 셰비언은 손에 잔뜩 맺힌 서리를 떼어내 바닥에 내던졌다. 메마른 바닥은 모처럼의 물기를 탐욕스럽게 집어 삼켰다.

“진정하자, 진정해……. 어차피 밤이 되면 들어오겠지. 일단 전보부터 설치하고 보자.”

어차피 따져 물을 거, 아침을 저녁으로 미룬다고 무슨 일이 있을까. 그 정도 시간을 절약하려고 도시 전체를 마비시키는 짓을 할 수는 없지.

셰비언은 제 안에서 이는 불안을 어르고 달래며 걸음을 재촉했다. 안 그래도 이른 아침이었다. 더 늦었다간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치여 기차를 타지 못할지도 몰랐다.

* * *

피올은 아침 이슬에 젖은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오른쪽에는 아직도 이파리가 짙은 초록색으로 번들거리는 담쟁이덩굴이 늘어져 있고 왼쪽으로는 어두침침한 그늘이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아침의 소란으로 가득 찬 대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양, 담벼락 그늘 아래에 고요함이 연못처럼 고여 있었다.

“이렇게 서면 됩니까?”

“네, 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팔짱을 껴주세요.”

피올은 네이기스에게 잡혀 끌려가며 나름 각오를 했다. 혼자서 힘들었다고, 애정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이 가주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그마저 거절해서 내가 당한 꼴을 보았느냐고, 원망 어린 말을 하겠지. 다시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고, 수선화 같은 걸로 때울 생각하지 말라고 하겠지.

하지만 네이기스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멋대로 피올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했다가 에이쉬에게 야단맞은 일, 메너트에게 당한 폭언, 가을 무도회에서 물에 떨어진 기름방울처럼 동동 떠서 혼자 돌아다녔던 서러운 시간에 대한 하소연 따위 하지 않았다.

그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포즈를 주문하고 스케치에 열중할 뿐이었다. 당혹스럽기는 해도 본인이 말을 않는데 피올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는 보이지 않는 차꼬를 찬 죄인이라도 된 기분으로 충실히 모델 노릇을 했다.

담벼락을 타고 흐르던 아침이슬이 피올의 옷자락을 적시기 시작했다. 피올은 등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걸 느꼈지만, 굳이 움직이거나 불편을 호소하지는 않았다. 등을 서늘하게 하는 한기가 잠 깨기에 아주 적당했다.

‘이 길 이상하게 조용한데. 너무 조용해서 이렇게 서 있는데도 잠이 와……. 담벼락이 차갑지 않았으면 선 채로 잠들었을지도 모르겠어. 세상에, 살다보니 아침 이슬에 고마워하는 날이 다 오네.’

정오를 비껴간 늦은 오후 순찰에 이어 이젠 밤 순찰이었다. 그것도 수확제를 앞두고 잔뜩 들뜬 사람들이 벌써부터 밤을 즐기는 시기에 말이다. 취객과 좀도둑을 상대하는 걸로 모자라 간간이 마주치는 괴물까지 잡으며 밤을 보냈으니 이 정도 자극은 있어야 깨어 있겠지 않겠나.

한데 잠이 홀딱 달아나고 나니 바로 맞은편에 서서 열심히 손을 놀리는 네이기스에게로 모든 정신이 집중됐다.

고운 피부가 볕에 탈까 하녀가 신경 써서 씌워준 챙 넓은 모자가 자꾸만 미끄러져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그때마다 귀찮아하며 고쳐 쓰면서도 벗을 생각은 하지 않는 성실함이 몹시 네이기스다웠다.

모자를 고쳐 쓸 때마다 목탄과 물감으로 물이 들어 엉망이 된 손톱이 드러났다. 넓은 모자챙 아래로 발그레하고 통통한 뺨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면 연둣빛 눈동자가 제 속을 파내기라도 할 것처럼 번뜩이는데, 마음대로 그림이 나오지 않는지 미간엔 살짝 주름이 잡혀 있었다. 집중하느라 꾹 다문 입술이 붉었다.

꾹 눌러놓은 마음이 요동쳤다. 자신을 보고 있으면서 보지 않는 눈동자에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듯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내리깐 눈꺼풀이 올라가기만을 애가 닳아 기다리다가 입술을 달싹여 소리를 냈다.

“레이디의 주 분야는 풍경화가 아니었습니까?”

“여성 화가의 작품 중에서 풍경화는 잘 안 팔린대요.”

“예?”

“인물화, 그것도 초상화를 잘 그려야 여기저기에서 찾아주는 사람이 있대요. 귀부인과 귀족영애들은 여성 화가가 그려주는 초상화를 선호한다고요. 사실 저는 딱히 그런 걸 신경 써본 일이 없지만, 생각해 보니까 어릴 적에 절 그려준 화가들은 거의 다 여자더라고요.”

정보의 출처는 역시 라디아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중견 화가인 페리였다. 에이쉬가 다녀간 뒤로 갑자기 친근하게 달라붙어 이런저런 말을 해주었다. 그 속셈 빤하기로는 저택에 머무는 사람 중에 모르는 이가 없는데, 네이기스는 그녀의 관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오드리의 말대로, 정말이지 흰 양 같은 소녀였다.

그나마 페리가 하는 말 중에 거짓말이 없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택의 누군가는 반드시 양심의 가책을 못 이기고 미주알고주알 사실을 말해주었을 것이다. 페리는 에이쉬가 갖고 있는 인맥이 아쉬워서 당신에게 잘해주는 거라고.

“딱 한 장 출품하고 강제로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건 에이쉬 오라버니가 막아준댔어요. 그러니까 다음 전시회에서는 인물화를 내서 좋은 평을 받을 거예요. 그래야 계속 화가로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예?”

“시곗줄 판매 대금이 계속 들어오고 있긴 하지만 처음보다는 확연히 줄었어요. 여러 가지 디자인이 많이 생겼더라고요. 그렇다고 그걸 또 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화가가 되고 싶어서 집을 나온 건데요.”

페리는 명예에는 관심 없어도 돈에는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라디아타의 후원이 언제까지고 지속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재능이 빛을 잃는 날, 후원도 끝난다. 그녀는 네이기스에게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인생은 길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반드시 돈을 모아두라고.

후원이 끝난 뒤에 화가 생활을 지속하기는커녕 인간다운 삶도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네이기스에게 상당한 공포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혹평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마음이 지친 상태였으니, 수요가 된다는 인물화에 귀가 열렸다.

“언젠가 제 재능이 빛을 잃어서 레이디 타우레드의 지원이 끊기는 날이 오더라도, 저는 삶의 품위를 잃고 싶진 않아요. 저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니, 그때까지 열심히 돈을 모아두려고요.”

네이기스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으로서, 피올은 네이기스의 사고 흐름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디아타의 끊이지 않을 후원을 받을 사람이 돈 걱정을 하는 게 너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받은 혹평에 대해 알지 못하느니만큼 더더욱.

“아니, 전시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그림이었습니다. 지나던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은 멈춰서 혼을 뺏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풍경화 화가로서 훌륭한 데뷔를 했는데 왜 인물화로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

“레이디가 제게 모델을 부탁하는 건 그냥 기분전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부탁하는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레이디, 돈이 되는 그림이 아니라 원하는 그림을 그리세요. 그런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으면서, 대체 왜…….”

떠오르는 대로 뱉어내던 피올은 완전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네이기스가 이제껏 본 중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었기 때문이었다. 등을 적시는 이슬 때문에 차갑게 식었을 터인 체온이 화르륵 타올랐다.

“왜…… 그렇게 웃으시는 겁니까?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전시회에 다녀오셨네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바빠서 감상을 따로 전해드리지 못했을 뿐이지 잘 봤습니다. 혹시 여성 화가라고 눈에 깍지를 쓴 사람들이 뭐라고 나불대기라도 했습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 갖지 못한 재능이 부럽고 질투 나서 하는 소리들이었을 테니.”

“하지만 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 저는 보티안 씨가 그렇게 말해주셔서 정말, 정말 기뻐요. 제 그림이 보티안 씨의 격려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던가요?”

“하여간 다들 속이 좁아터져서는……. 당연한 말씀은 하지 마시죠. 아가씨의 재능을 첫 번째로 알아본 사람이 바로 나라고, 동네방네 소리 지르고 다니고 싶은 그림이었습니다.”

네이기스의 뺨이 흥분과 기쁨으로 붉게 물들었다. 단 한 사람, 진실로 인정받고 싶었던 딱 한 사람의 칭찬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했다.

“정말이지…….”

피올을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 쓰지 않는 동안 네이기스가 어떤 말을 들었는지 짐작되지 않아 갑갑하고, 장대비에 부러진 풀잎처럼 자신감이 꺾인 게 눈에 보여 안타까웠다.

‘라디아타 녀석, 제 품의 화가를 지키지도 않고 뭘 한 거야? 오드리 아가씨는 또 뭘 한 거고? 다들 자기 앞가림으로 바쁘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을 방치해도 되나?’

북적이는 무도회장에서 오도카니 서 있던 네이기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가을 무도회에는 라디아타도 오드리도 참석했을 텐데, 만나서 격려 한 번 해주지 않았던 건가 싶어 화가 났다.

네이기스를 위해 피올을 보호한 라디아타와 오드리가 들으면 억울하다 하겠지만, 당사자가 모르는데 그게 무슨 공이 되겠는가. 당장 피올 자신부터가 자신의 말 한 마디가 네이기스에게 어떤 무게로 전해지는지조차 짐작을 못하는데.

피올은 언제가 되어야 그들을 찾아갈 만큼 시간이 나는지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확제가 지날 때까지는 도저히 시간이 안 났다. 둘 다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 한번 대면하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질 게 분명한데, 그런 상태로 멀쩡히 치안대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과 건강을 쥐어짜내 찾아간다고 해도 문제였다. 둘 다 가문의 살림을 맡아 하는 사람들이니, 수확제 준비로 미친 듯이 바쁠 게 분명했다. 만나주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 수확제가 끝나고 보자고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궁리로 머리가 복잡한데, 네이기스가 뜻밖의 요청을 했다.

“보티안 씨, 포즈가 흐트러졌어요. 아까랑 똑같이 서주세요.”

“……아직도 인물화로 전향할 생각이신 겁니까?”

“아뇨! 하지만 보티안 씨가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그리고 싶은 걸 그리라고요. 저는 보티안 씨를 매우 그리고 싶어요. 다른 사람이 그려준 초상화가 아니라, 제 손으로 그린 초상화를 갖고 싶거든요. 이왕이면 잘 그리고도 싶고요.”

주먹다짐이라면 모를까, 방글방글 웃는 얼굴은 도저히 당할 수 없었다. 피올은 조금 전과 똑같은 포즈로 다시 모델이 됐다.

좁은 골목은 다시 조용해졌다. 사각사각 종이에 목탄 스치는 소리와 스케치북을 넘기는 소리, 짙푸른 담쟁이덩굴 잎사귀가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소리 따위만이 간간이 흐를 뿐이었다.

‘골목이 너무 좁아.’

피올은 네이기스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딴생각에 집중했다. 라디아타와 오드리를 만나려면 언제가 좋을까. 아침에는 깨지도 않았다며 거절당할 것 같고, 저녁에는 시간에 쫓겨 제대로 말을 해 보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정오쯤에 찾아가기엔 잠이 아쉽고.

‘역시 늦은 오후가 좋으려나? 그래도 거절당할 가능성이 너무 높아. 빌어먹을, 수확제면 그냥 하랄과 벤에게 공물이나 바치고 먹고 마시다 끝낼 것이지, 가문의 안주인이 직접 나서서 자선행사를 하는 전통 따위는 왜 있는 거야?’

가문의 성세를 과시하면서도 반감은 사지 않을 정도의 적정한 규모와 방식을 고안하기 위해 다들 머리를 쥐어짜냈을 것이고, 지금은 한창 그 준비로 바쁠 때였다. 귀족가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다는 게 이럴 땐 불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밀고 들어가 우길 수가 없으니 말이다.

내심 혀를 차던 피올의 코끝에 이상한 냄새가 걸렸다. 잎사귀를 흔들고 치맛자락을 희롱하는 바람을 타고 희미한 피 냄새가 흘러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연상될 정도로 신선하고 신선한 피비린내. 등줄기에서부터 소름이 쫙 돋더니만 목까지 뻐근해졌다.

‘착각인가? ……아냐, 착각일 리가 없어.’

불과 몇 시간 전, 밤과 새벽이 섞이는 시간에 괴물을 잡았다. 정수리부터 꼬리뼈까지 가시가 돋고 눈이 열여섯 개나 되는 괴물이었다. 다리는 두 개였지만 팔은 네 개였다. 혓바닥이 갈라져 부정확한 발음으로 죽어라, 죽어라, 소리를 질러대며 바닥을 기어 다녔다.

웬만하면 팔다리만 자르고 살려서 왕궁마법사에게 가져다주려고 했지만 가시를 들이밀며 심하게 반항하는 게 거슬리기도 하고 유렌이 가시에 찔릴 뻔하기도 해서, 그냥 목을 쳐 버렸다. 그때 맡았던 피 냄새가 딱 지금과 같았다.

흐릿하던 피비린내가 조금씩 진해졌다. 마치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 보티안 씨! 움직이지 마세요!”

“레이디야말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마시죠.”

“네?”

“움직이면 지키기 어려워집니다.”

검을 움켜쥔 피올이 풍기는 분위기는 도저히 장난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네이기스는 스케치북을 보물처럼 끌어안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창 브란젤을 달구던 괴물에 대한 소문이 잠잠해졌기에 방심했었는데, 피올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몸이 떨렸다.

피올은 피 냄새의 근원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담쟁이덩굴이 있는 오른쪽이 아니라, 골목골목이 얽힌 왼쪽에서 냄새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네이기스가 안색이 새파래진 채로 달달 떨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알아서 도망치길 기대할 순 없겠어.’

온실에서 자란 연약한 레이디였다. 울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일지도 몰랐다. 이러다 괴물을 정면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짐작도 안 됐다. 날이 밝은 지 오래인데도 그늘이 짙은 골목길 안쪽과 네이기스를 번갈아보다 검에서 손을 놓고 네이기스의 어깨를 쥐었다.

“대로변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바로 마차를 타고 돌아가세요. 하지만 오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랬다간 치안대의 아주 불유쾌한 방문을 받게 될 테니까요.”

“네, 네……. 그런데……. 흡!”

네이기스의 동공이 확 벌어졌다. 코를 마비시킬 듯 짙은 피비린내가 등 뒤에서 훅 밀려왔다. 소름이 쫙 끼치고 귀가 커다랗게 열렸다. 점성이 있는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철퍽 소리, 거친 숨소리, 그리고 묵직한 생물이 땅을 박차는 소리!

몸에 익은 그대로 검을 뽑아 뒤돌아서며 허공을 갈랐다. 검에 걸리는 무게감이 예상보다 묵직했다. 얼굴의 절반은 차지할 듯 커다란 외눈과 눈이 마주쳤다. 끔뻑.

쿵! 다리가 하나뿐인 괴물은 그 하나뿐인 다리마저 잃고 바닥에 엎어져 버르적거렸다. 꺽꺽 뱉어내는 신음은 멱 따인 돼지의 비명 같은데, 이슬과 뒤섞여 바닥에 퍼지는 피는 푸르스름한 검은색이었다.

“……쯧.”

피올은 혀를 차며 괴물의 다리를 툭 걷어찼다. 딱 몸뚱이를 절반으로 가를 만한 높이에서 베어냈는데 다리가 잘렸다. 피 냄새는 한참 전에 맡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몰랐다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끄어어……. 끄어…….”

다리를 잃고 몸뚱이만 남은 괴물은 그대로 엎어져 있지 않았다. 괴물은 두 개뿐인 팔로 몸을 끌며 어떻게든 도망을 가려 했다. 그래봤자 굼벵이 기어가는 속도밖에 안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몹시 필사적이었다.

‘이걸 죽여, 살려?’

놀란 걸 생각하면 확 죽여놓고 싶은데, 왕궁마법사들이 웬만하면 살려서 갖고 오라고 신신당부하던 걸 생각하면 냅다 죽이기도 껄끄러웠다. 안 그래도 벌써 한 마리를 죽여 버렸는데 말이다. 이놈도 내버려 두면 실혈로 곧 죽을 것 같긴 하지만.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끅끅대는 괴물을 보던 피올은 괴물의 등에 큰 상처가 있는 걸 발견했다. 흘리는 피 만큼이나 피부색이 시커멓다 보니 발견이 늦었다. 발로 대충 건드려 보자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그러고 보니 피올이 다리를 잘라내기 전에도 피 냄새가 났었다. 누군가 먼저 괴물을 발견하고 베어 죽이려다 실패한 듯했다. 아마도 이 시간에 이곳을 순찰하는 치안대원일 것이다.

‘다리가 하나인데 다리부터 베었어야지. 멍청하게 굴기는…….’

피올은 검에 묻은 피를 털고 부츠에 묻은 핏물도 바닥에 문질러 닦았다. 바지와 웃옷에도 피가 좀 튀긴 했지만, 몇 번 털어내자 곧 깨끗해졌다. 덥고 추운 치안대원 정복에서 그나마 좋은 기능이었다.

“레이디, 곧 치안대원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는 제가 이 앞을 지켜야만 하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네이기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흥건하게 바닥을 적시는 푸르스름한 검은 피에 조금도 닿고 싶지 않았다. 소문의 괴물이 정말 있었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라, 끔찍한 몰골의 시체를 앞에 두고도 도무지 현실감이 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선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흉한 건 보지 않아도 된다는 듯 앞을 막아선 피올의 등과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만이 그나마 그녀의 정신을 붙드는 닻이 되었다.

“아, 뭐 하느라 이렇게 늦어.”

피올은 점점 불안정해지는 네이기스의 호흡이 신경 쓰여 부츠굽으로 초조하게 바닥을 두드렸다. 웬만하면 미리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었는데, 하필 괴물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도 모자라 죽이는 걸 보여 버렸다.

울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걱정스러웠다. 살면서 닭 목 비트는 것도 본 일 없을 사람이 아닌가. 자신이 상상한 이상의 충격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끄어……. 어어어…….”

“끈질기게도 살아 있네……. 쯧.”

피올은 아직도 살아서 꿈지럭대는 괴물을 툭툭 건드리며 혀를 찼다. 괴물이 아무리 빨라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늦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골목이 복잡하더라도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보고 쫓아오면 그만인 것을. 말도 안 되는 짐작이긴 하지만, 혹시 치안대원이 당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찾으러 가야 하나? 하지만 그럼 레이디가 괴물과 함께 있게 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 그의 귀에 낯익은 소리가 잡혔다. 쇠굽을 박은 부츠가 돌바닥과 부딪치는 소리였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뛰어도 모자랄 걸 왜 걸어와? 설마 다치기라도 했…….”

“어머, 또 만나네, 보티안 씨.”

“……샤를레아 씨.”

골목길 안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치안대원이 아니라 샤를레아였다. 인상적인 붉은 머리칼은 대충 땋아 어깨에 걸쳐 놓고, 여전히 목이 활짝 열린 셔츠에 조끼를 꿰어 입고 달라붙은 바지에 긴 부츠를 신은 용병 차림이었다. 허리에 찬 검대는 비어 있었다.

차림에 빛이 바래는 미모가 아닌지라 일순 골목길이 환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비록 한 손에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부지깽이를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상처, 당신이 한 짓입니까? 그 부지깽이로?”

“응. 마침 심부름 중이었거든. 맨손보단 나아서 잘 썼는데, 이거 그대로 들고 가면 혼나는 거 아닌가 몰라…….”

“갖고 가긴 어딜 갖고 갑니까? 내놓으시죠. 압수입니다.”

피올은 신경질적으로 부지깽이를 빼앗았다. 괴물의 피가 묻은 물건을 어디로 가지고 간단 말인가. 괴물이 나타난 현장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고, 그때마다 입이 닳도록 주의사항을 읊고 있는데도 샤를레아의 태도엔 변화가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샤를레아는 금세 부지깽이에는 흥미를 잃고 대신 시체 근처에서 기웃댔다. 핏물을 밟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나뒹구는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살짝 힘을 주어 밟자 다리에서 시커먼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등을 갈라놨으니 금방 죽을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멀리, 빨리 가서 당황했어. 다리도 하나밖에 없으면서 엄청 잘 뛰네. 어디서 나타난 놈인가 몰라.”

“당황하긴 했습니까? 하도 느긋해서 난 또 산책이라도 나온 줄 알았죠. 하여간 샤를레아 씨, 난 당신이 너무 신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자주 마주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요. 그 머리카락 속에 괴물 찾는 더듬이라도 숨겨놨습니까?”

피올이 이렇게 빈정대는 걸 처음 들은 네이기스는 깜짝 놀라 그의 등을 바라보았지만, 샤를레아는 피올의 독설 따위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어쩜 그리 잡아먹을 듯이 구는지, 로렐라이에 소속을 두지 않았다면 진즉 치안대에 끌려갔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샤를레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셔츠깃을 젖혀 목을 길게 뺐다. 고운 꿀색 피부가 훤히 드러났다.

“우연이라니까, 우연. 피부색이 이러니까 대로로 못 다녀서 골목길로 다니다 보니까 자주 마주치는 거라니까. 나랍인이라고 차별만 안 당했으면 괴물 만날 일도 없었어.”

“괴물을 보겠다고 일부러 골목길을 돌아다니던 걸 아는데 그걸 퍽이나 믿겠습니다.”

“한 번 골목길로 다녀보니까 편한 걸 알게 된 거지. 보티안 씨는 이 꿀색 피부로 대로를 다녀보질 않아서 모르는 거야. 다들 날 얼마나 쳐다보는지 아주 얼굴 거죽에 구멍이 날 것 같다니까.”

샤를레아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마에 흘러내린 몇 가닥의 붉은 머리칼이 허공에 살랑살랑 춤을 췄다. 네이기스는 홀린 듯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쁜 것도 예쁜 거지만 이상하게 무서운 느낌이 들어 눈길을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꼭 피부색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응? 거기 아가씨, 뭐라고 했어?”

네이기스의 웅얼거림을 들은 샤를레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할 땐 언제고, 그 조그만 목소리를 잘도 알아들었다. 황급히 도리질을 치는 네이기스의 앞을 피올이 가로막고 섰다.

“멀쩡한 여자가 그런 용병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시선이 안 쏠리는 게 이상한 겁니다. 그보다 샤를레아 씨, 존대어는 대체 언제 배울 겁니까? 이제 슬슬 흉내라도 낼 때 되지 않았어요?”

“아니 뭐……. 몰라도 괜찮지 않을까? 다들 그러려니 하던데. 발음 좋다고 칭찬은 많이 들었어! 혹시 내가 존대어를 배우면 보티안 씨가 쓸 만한 의뢰인을 소개라도 시켜줄 건가? 근데 로렐라이에서는 따로 상단 외 의뢰는 받지 말라고 하던데.”

“어휴……. 됐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뭘 바라서……. 가세요, 가.”

“그래? 일찍 보내준다면야 나야 좋지. 이런 흉한 시체 계속 봐봐야 기분만 나쁜데 잘됐지. 참, 보티안 씨. 치안대원들을 기다리나 본데, 다들 곧 올 거야. 저놈을 갈림길에서 놓치는 바람에 서로 다른 길로 쫓았거든.”

“그런 얘기는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피올이 짜증을 내든 말든, 샤를레아는 바람 같은 걸음걸이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잔뜩 얼어붙어 긴장하고 있던 네이기스는 그녀의 그림자마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간신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차마 입 밖으로 욕을 뱉지 못하고 우물대던 피올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안색으로 덜덜 떠는 네이기스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레이디 그웬, 괜찮습니까?”

“그냥, 좀, 추워서요…….”

네이기스의 대답은 황당했다. 춥다니? 가을 무도회가 지나갔고 곧 있으면 수확제가 있는데도 여름이 다 가지 않은 것 같다고들 하는 날씨인데? 그러나 피올이 걸쳐 준 망토를 끌어 모아 꼭꼭 감싸는 행동을 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피올은 조심스럽게 네이기스의 이마에 손을 댔다가 그 서늘함에 몹시 놀라고 말았다. 마치 차가운 물에 풍덩 빠졌다가 막 올라온 사람 같았다. 퐁퐁 솟아나는 식은땀이 그런 인상을 더욱 부추겼다.

“아니, 몸 상태가 이렇게 안 좋은데 이른 아침부터 돌아다니신 겁니까? 편히 쉬고 계셨어야죠!”

“아니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걸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네이기스가 억울해하며 항변했지만 당장 상태가 안 좋은데 그런 말이 먹힐 리 없었다. 피올은 형편없이 늦어지는 치안대원들을 향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네이기스가 앞에 있으니 마음으로만.

그의 욕설이 통했는지, 도무지 올 생각을 않던 치안대원들이 마침내 나타났다. 얼굴과 목덜미를 온통 땀으로 적시고 거친 숨을 헐떡이면서. 그들은 다리를 잃고 나자빠진 괴물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피올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건 그 다음이었다.

“헉, 헉, 아이고, 죽겠다. 저 괴물 새끼는, 다리도 하나인 게 빠르긴 더럽게 빨라서……. 어, 피올?”

“보티안, 네가, 헉, 여기 왜 있어? 풉! 쿨럭! 쿨럭쿨럭!”

피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체이서가 사레가 들려 마구 기침을 했다. 그러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수통을 떨어뜨리곤 흘린 물을 아까워하며 한숨을 뱉었다.

피올은 그런 그들의 모습이 이해가 안 갔다. 조금 전에 마주친 샤를레아는 땀 한 방울도 없이 산뜻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몰골은 마치 한 시간쯤 전력질주를 한 것만 같았다.

“왜 있긴. 이 괴물 다리를 누가 잘랐겠어? 한참 기다렸잖아. 왜 이렇게 늦었어?”

“야……. 호가르 거리 뒷골목에서부터 뛰어왔어! 안 그래도 토할 것 같아 죽겠는데!”

“호가르 거리? 미친 거 아냐? 브란젤의 삼분지 일을 뛰어왔네?”

“그렇다니까. 야, 그래도 네가 다리 잘라놔서 진짜 다행이다. 피를 그렇게 쏟으면서도 뛰기는 말처럼 잘 뛰어서, 이러다 대로로 뛰쳐나가는 꼴을 보게 되는 거 아닌가 진짜 걱정했어.”

수확제를 앞두고 필사적으로 입막음을 하는 이때, 날도 훤한 아침나절에 괴물이 대로를 활보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치안대원 셋은 끔찍한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우, 소름끼치는 소리 하고 있어. 샤를레아 씨는 아주 멀쩡하던데, 어디서 만난 거야?”

“몰라, 뛰다가 만났어. 와, 진짜 침착하던데? 외다리 괴물이 그렇게 뛰어가는데 보자마자 다리부터 걷어차고 등을 확 갈라 버리더라. 근데 벌써 왔다 갔다고? 핏자국도 안 따라갔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찾아냈지? 이야, 역시 나랍인만 아니면 치안대원으로 뽑고 싶……. 억! 야, 아퍼! 아, 더러워 죽겠네!”

바닥을 굴러다니던 다리에 어깨를 맞은 체이서가 질색을 했다. 점성 있는 검은 피가 줄줄 흘러 웃옷 전체를 더럽혔다. 털어내면 그만이라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였다.

“맞을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넌 말브레 극장 일을 벌써 까먹었어? 나랍인을 어떻게 믿냐?”

“실력도 좋고 도움도 많이 주는데 생각이야 할 수도 있지. 하여간 까다로운 자식 같으니라고…….”

“네 녀석이 너무 무던한 거야. 안 그러던 녀석이 왜 이렇게 변했나 모르겠네. 야, 아무튼 저기 몸뚱이 아직 살아 있으니까 처리반 불러서 알아서 옮겨. 자, 이건 샤를레아 씨가 들고 있던 부지깽이. 난 간다.”

“야, 좀 도와주고 가!”

“그래, 하다못해 처리반이라도 대신 불러줘! 지금 다리가 풀려서 못 뛸 것 같아서 그래!”

“시끄러워, 이 망할 놈들아. 무려 외다리 괴물의 다리를 잘라줬는데 뭘 더 도와달래? 양심도 없지. 혹시 가다가 처리반 마주치면 말은 전해줄게. 고생해라.”

세상에 길 가다가 처리반 마주칠 일이 설마 있겠는가. 피올은 안 하느니만 못한 약속을 해주고 돌아서서는 그새 쪼그려 앉은 네이기스를 안아 올렸다. 그녀가 머무는 저택에 데려다줄 셈이었다. 급한 마음만큼이나 걸음도 빨랐다.

“출근 시간이 충분히 지나지 않아서 마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치안대의 마차를 빌려서라도 빨리 돌아갈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보다 레이디 그웬, 오늘 보고 들은 건 전부 비밀인 거 아시죠?”

“네…….”

“그리고 직접 경험을 하였으니만큼 바깥이 위험하다는 것도 아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웬만하면 저택에서 나오지 마세요. 솔직히 괴물이 아니더라도 레이디 혼자서 길을 다니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매번 겁도 없이 쫄랑쫄랑…….”

다다다 잔소리를 쏟아붓던 피올이 덜컥 멈춰 섰다. 네이기스는 피올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잔소리를 흘려듣다가, 무슨 일이 나기라도 했나 싶어 피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까보다 훨씬 강렬해진 햇살에 빛나는 거리와, 모자를 쓰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빵집 입구에서는 구두닦이 소년이 호객을 하고, 아침 장사를 나온 꽃장수가 반쯤 찬 바구니를 챙겼다. 평범한 아침 풍경이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후드를 푹 눌러쓴 여자가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주변과 이상하리만치 어울리지 않았다.

샛노란 개나리꽃무리 가운데에 홀로 피어난 붉은 장미 같았다.

무얼 보는 건지 길 한쪽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여자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이기스는 그녀의 로브가 왕궁마법사의 것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보았다. 그녀가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 때문에 옷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보티안 씨가 아니신가요.”

왕궁마법사가 후드를 젖히고 얼굴을 드러냈다. 붉은색과 금색이 지저분하게 섞인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흩날렸다. 피올과 말다툼을 하고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치안대에 처음으로 지원을 왔던 그 왕궁마법사였다.

피올이 그녀와 마주치는 건 그날의 말다툼 이후로 처음이었다. 해를 보지 못해 피부가 창백하게 흰 데다 눈 밑에 그늘이 짙은 걸 보니 여전히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먼저 인사를 받고도 대답을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왕궁마법사가 과장된 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인사였다. 쓰지도 않은 모자를 벗는 척하는 손짓이 몹시 정교했다.

“치안대는 조금 숨통이 트였다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안녕하신가요, 레이디. 처음 뵙습니다. 왕궁마법사입니다.”

멍하니 피올에게 안긴 채로 왕궁마법사의 인사를 받은 네이기스가 후다닥 바닥에 내려섰다. 정작 안겨 있을 땐 몰랐던 민망함이 몰려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네이기스 그웬이에요. 당신은 이름이 뭐죠?”

“왕궁마법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레이디 그웬.”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요. 왕궁마법사가 당신 한 명인 것도 아닌데.”

왕궁마법사의 표정에 이채가 어렸다. 이런 식으로 이름을 되묻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이름을 가졌는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를 두고 예의를 차릴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다.

“백작가의 영애께서 일부러 기억하실 만한 이름은 아니랍니다. 저는 왕궁마법사로 충분하니 마음 쓰지 마세요.”

“사정이 있어서 밝히지 않는 거라면 내가 미안해요.”

“아이쿠, 왕궁마법사 주제에 백작영애의 사과를 받다니 이것 참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왕궁마법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인데도 어딘지 비틀린 것처럼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네이기스는 스멀스멀 피부를 간질이는 불쾌감에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피올이 그런 그녀를 감싸고 나섰다.

“적당히 하시죠, 왕궁마법사 씨. 무슨 일로 이런 시간에 여기에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잘됐습니다. 방금 저쪽 트왈린 거리 안쪽 골목에서 괴물 한 마리를 잡았는데, 끈덕진 녀석이었으니 어쩌면 아직도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혈로 죽기 전에 빨리 가보시죠. 치안대원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괴물이라…….”

“전염성이 없는 걸로 판단돼서 관할이 옮겨갔다고 그러던데, 아닙니까?”

피올의 말이 맞았다. 전염병이 아니라 마력균형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는 걸 알게 된 뒤 괴물의 시체는 보건국이 아니라 왕궁마법사들에게로 넘어갔다.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 중이라는데, 솔직히 기대는 안 됐다. 마력균형이 흐트러져 괴물이 되는 건 알아냈어도 그런 일이 발생하는 원인을 모르는데, 대체 무슨 수로 해결책을 알아낸단 말인가.

“요 며칠간 어떻게든 생포해 오라 난리를 부리지 않았습니까.”

“으음……. 내 관할은 그것들이 아니지만 살아 있을 때 좀 봐두면 동료들이 좋아하겠지요. 고마워요, 보티안 씨. 괴물 소식을 전해줘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보티안 씨에게서 괴물이란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지라 몹시 놀랍네요.”

“당신…….”

“상냥하고 아름다우신 레이디, 전시회에 거신 그림은 아주 인상적으로 보았답니다. 팬이 되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사인이라도 부탁드리고 싶은데, 지금은 시간이 급해서 안 되겠네요. 언젠가 또 뵙기를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왕궁마법사는 말 몇 마디로 피올의 표정을 마구 구겨놓는 데 성공하고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피올은 얄미운 뒤통수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펄럭이는 감청색 로브가 그렇게 재수 없을 수가 없었다.

“보티안 씨, 표정이 굉장히 무서우세요.”

“그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감정 조절을 못했습니다. 저치와는 이전에 조금 다툼이 있었던지라.”

“조금 특이한 분이시긴 해요. 숙녀가 모자도 쓰지 않고 머리카락도 그냥 풀어헤치고 다니는 게……. 그래도 나쁜 분은 아닌 것 같았는데요.”

“저게 조금 특이한 정도입니까? 오드리 아가씨도 저 꼴로는 안 다녔습니다. 그보다 레이디, 대체 어딜 봐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 겁니까? 언제는 마주 보고 서는 것도 싫어서 뒷걸음질을 하셨으면서.”

그야 당연히 내 팬이라고 했으니까 그렇죠. 얼토당토않은 소리인 건 알기에 차마 입 밖으로 뱉지는 못하고 네이기스는 그저 뺨만 붉혔다. 그래봤자 피올의 눈에는 그 속내가 어이없을 정도로 빤히 보이니, 그는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었다.

“레이디 그웬……. 세상엔 남들 등쳐먹으려는 사기꾼이 매우, 몹시 많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파는 놈이 있는가 하면 듣기 좋은 말로 살살 꾀어 전재산을 강탈하는 치들도 있어요. 부디 항상 경계하시고 함부로 사람을 믿지 마세요.”

피올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 충고이건만, 네이기스는 여전히 사람 좋게 방글방글 웃기만 했다. 그녀가 피올을 향해 까치발을 들고 손짓했다. 피올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위해 몸을 굽혔다.

“괜찮아요. 그런 일이 있어도 보티안 씨가 지켜주실 거잖아요?”

“……네?”

“치안대원이시잖아요.”

피올은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속삭임 속에 가득한 신뢰가 아찔했다. 설탕물에 몸을 굴렸다가 기름에 튀겨진 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달았다가, 뜨거웠다가. 왕궁마법사는 말 몇 마디로 사람의 기분을 쥐락펴락하더니, 네이기스는 말 몇 마디로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러니까 저는 그런 걱정은 안 해요.”

햇살 아래에서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눈부셨다. 모자 그늘 아래에서 빛나는 연둣빛 눈동자가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피올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계속 같이 있다간, 나도 아버지와 똑같은 꼴이 될지도 몰라.

사실 그런 생각을 한 시점에서 이미 망한 거긴 한데,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부정했다. 자신에게 보여주는 신뢰에 감동해서 이러는 것이다, 기사일 시절에도 받아보지 못했던 믿음이 달아서 이런다…….

“……폭력에서는 지켜드리겠지만 사기꾼은 못 막습니다. 스스로 지키세요.”

“네!”

대답은 잘하지. 하나 미덥지 못한 대답이어도 어쩌겠는가,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나마 아까는 제자리에 서 있지도 못하더니 이젠 자기 발로 걸을 수는 있게 되어 다행이다 싶을 뿐이었다.

그래도 안색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게 느껴지니 도저히 혼자 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네이기스의 곁을 지켰다.

그녀를 위해 마차를 잡고,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저택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아 아쉬웠다. 피부를 찌르는 햇살은 그대로인데 현실이 아닌 꿈을 걷는 듯 기분이 들떴다.

그건 피올뿐만 아니라 네이기스도 마찬가지였다. 피올이 세심하게 챙겨주는 거야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쩐지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좀 더 조심스럽고, 좀 더 다정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것처럼 눈빛이 따스했다.

“저……. 보티안 씨.”

“네, 말씀하시죠.”

“그……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괜한 생각을 했어요.”

그 괜한 생각이 뭔지 알 것도 같은 기분에 피올은 캐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일단 들어버리면 더 이상 회피도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네이기스가 그런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셨는데, 차 한잔하고 가세요.”

“근무 중이라 안 됩니다. 순찰이 끝났다고 정말 일이 끝난 게 아닙니다.”

“오래 붙들고 있지 않을게요. 잠시면 돼요.”

네이기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흘러넘칠 것처럼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본 순간 피올은 급격히 약해졌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 의 행동에 경악했지만, 네이기스의 웃는 얼굴 앞에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거 순 멍청이 아냐?’

자괴감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그의 다리는 충실하게 본능을 따랐다. 팔랑팔랑 나비처럼 걷는 네이기스의 뒤를 따라 정원을 가로질러 본관의 현관까지 다다랐다. 말끔한 흰색으로 칠해놓은 현관문을 코앞에 두고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레이디, 아무래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왜요? 잠시는 괜찮은 거 아니었나요? 제가 몹시 놀라 그러니, 절 위해서라도 함께해 주세요.”

“그게……. 그러니까…….”

피올이 되도 않는 변명을 쥐어짜내던 그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페리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뛰쳐나왔다. 문턱에 발이 걸려 나동그라지려는 걸 피올이 재빠르게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페리가 피올을 붙들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괴, 괴물……. 괴물! 괴물! 괴물이 나왔어! 오, 맙소사! 치안대, 치안대를 불러줘요! 치안대!”

“제가 치안대원입니다. 진정하시고, 괴물이라니요?”

“당장 가야 돼. 당장……. 아냐, 의사부터……. 그래, 의사부터 불러야지! 의사!”

페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피올을 밀쳐 내고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뒀다간 곧바로 대로로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피올은 황급히 그녀를 잡아 뒷목을 쳐 기절시키곤 근처의 나무 아래에 눕혔다. 잠시 훑은 것이지만 외상은 없어 보였다.

‘대체 어디서 이만한 피를 묻혀온 거지?’

네이기스가 황망한 표정으로 달려와 페리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치마에도 핏물이 번졌다. 피올이 말리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페리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손이 형편없이 떨렸다.

“페리, 페리!”

피올은 네이기스를 안고 어깨를 토닥이고 싶은 걸 참고 대신 검을 점검했다. 좀 전에 다리를 잘라놓고 제대로 손질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레이디, 이 저택에 상주하는 고용인은 몇 명입니까?”

“세 명……? 아니, 네 명……? 다섯은 안 넘을 거예요. 아마도…….”

“화가는?”

“다섯 명이요. 저와 페리는 여기 있고, 헤이라는 약혼자를 만나러 간다고 했어요.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요…….”

“충분합니다. 부인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곁에 있어주시고, 혹시 제가 없는 동안 대문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절대로 못 나가게 할게요. 밖으로 말이 새면 안 되는 거잖아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네이기스가 아주 결연하게 장담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과 덜덜 떨리는 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의 다짐이었다. 그 사려 깊음에 분명 고마워해야 하는데, 생선 가시를 삼킨 것처럼 목이 따끔거렸다.

“고맙…….”

말이 나오다 말았다. 소량의 양심과 이젠 희미해진 긍지, 대량의 미안함이 뒤섞여 목을 틀어막았다. 피올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네이기스를 바라보다 마른세수를 했다.

“보티안 씨?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닙니다……. 레이디, 누군가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고 해도 굳이 말리지 마세요.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레이디도 상황이 안 좋다는 게 느껴지거든 자리를 지키려 하지 말고 몸부터 피하시고요.”

“하지만, 그랬다간 보티안 씨가 곤란해지시잖아요.”

“그런 건 레이디가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다치지 마시고, 무모한 짓도 하지 마시고, 제가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따위의 생각도 하지 마세요.”

“네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시만요!”

네이기스가 피올의 망토자락을 잡아챘다. 그리곤 모자에 달려 있던 리본을 재빨리 풀어 그의 손목에 묶었다. 긴 리본이 치렁하게 늘어졌다. 네이기스는 민망해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부족하나마 부적이 됐으면 싶어서요…….”

손수건으로 깔끔하게 묶은 거라면 모를까, 이런 긴 리본은 부적은커녕 방해만 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피올은 네이기스를 책망하거나 리본을 푸는 대신 둘둘 말아서 풀리지 않도록 한 번 더 묶었다.

“감사합니다.”

형식뿐인 인사라도 그 형식이 진심보다 깊게 다가올 때가 있다. 네이기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올은 더 말이 길어질까 황급히 몸을 돌렸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라는 인사가 등 뒤에서 날아와 꽂혔다. 손목에 감긴 리본에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벨트람의 응원을 받은 듯 발이 가벼워졌다.

아까 반사적으로 닫아놓았던 문을 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페리가 달려 나오며 곱고 흰 대리석 바닥에 묻힌 피가 이정표처럼 그를 이끌었다. 핏자국은 넓은 실내를 가로질러 식당까지 이어졌다.

식당 입구에 자신이 흘린 피로 만들어진 연못에 엎어진 하녀가 보였다. 맥을 짚어보니 역시 죽었다. 시체를 뒤집어보자 어깨부터 가슴까지 깊게 베인 상처가 드러났다. 큰 짐승의 발톱에 당한 것처럼 보이는 상처였다.

‘꼭 곰한테 당한 사람을 보는 것 같네.’

서늘한 긴장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무리 상대가 싸울 줄 모르는 일개 하녀라지만 이렇게까지 큰 상처를 입히다니 마냥 쉬이 볼 놈은 아니었다. 검자루를 단단히 고쳐 쥐고 걸음에 신중을 더했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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