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 가을무도회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얼마 안 되는 실수가 워낙 치명적이라서 그렇지. -어느 마법사의 한탄」
희미하게나마 하늘을 장식하던 초승달마저 모습을 감춘 그믐밤, 가을 무도회가 열리는 왕비궁의 정원은 수없이 많은 마법등으로 장식돼 있었다. 꽃잎 사이에서 빛나는 작은 마법등의 불빛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달의 조각 같았다.
환상처럼 아름다운 정원만큼이나 공들여 꾸민 무도회장엔 특별히 주문한 마법등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수확제가 코앞이라, 봄 무도회에는 안 와도 가을 무도회에는 오는 사람이 많아 벌어진 일이었다.
그 바글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드리와 라비린은 단연 눈에 띄었다. 짙은 남색 원단을 사용해서 옷을 맞춰 입은 것도 모자라 처음부터 서로를 파트너 삼아 온 것처럼 딱 달라붙어 다녔기 때문이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질 것만 같은 시선으로 서로를 보고, 요깃거리로 준비된 음식들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고, 머리를 맞대고 속닥속닥.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달콤하고 다정한지, 그들의 스캔들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마저도 차마 가까이 다가가질 못하고 멀리서 구경만 했다.
그러나 달콤하고 다정한 건 그저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뿐으로, 찰싹 붙어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는 그다지 달콤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더 붙어, 더. 아니다, 아예 팔에 머리를 좀 기대봐. 시선을 끌어야지.”
“이만큼 붙었는데 뭘 더 붙으래? 아예 날 안고 다녀라!”
“진짜 그럴까?”
“너 지금 내가 남부식 구두를 신었다고 말을 막 하는가 본데, 내일은 중부식 정장 드레스를 입을 거거든? 구두굽에 발가락 짓이겨져 볼래?”
“하, 네 춤 솜씨로 내 발을 밟겠다고? 황당하기도 하지! 윈디를 타고 제스본강가를 내달리는 네가 망아지 등에도 못 타고 떨어지는 흉내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라비린은 오드리의 위협을 코웃음으로 넘겼다. 오드리의 평판이 바닥을 달리던 때에도 그녀의 춤 솜씨를 두고는 말이 안 나왔다. 본래 한번 몸에 밴 습관과 재주는 어지간해서는 흐려지지 않는 법이었다.
마침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바뀌었다. 삼삼오오 모여 말을 나누던 사람들이 저마다 파트너의 손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라비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귓속말을 했다.
“오드리, 이왕 밟을 거 내일 말고 오늘 밟아보는 거 어때?”
“춤추자고? 지금?”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인이 무도회장에 함께 와서 춤 한 번 안 춘다는 건 좀 이상하잖아?”
“엄밀히 말하면 함께 온 건 아니잖아. 난 베텔 경이랑 왔고 넌 라디아타와 왔지.”
“지금 우릴 보는 사람들이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아? 헨젤 백작님이 어디까지 묵인하는지도 가늠할 겸, 약혼도 안 한 우리가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얼마나 붙어 있느냐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할걸.”
그 말이 또 맞는 말이라, 오드리는 바로 거절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라비린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오드리를 회장 가운데로 끌어내 춤추는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들었다. 터무니없이 작게 느껴지는 손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드리가 손을 올려놓은 어깨에서 시작된 짜릿한 감각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발랄한 춤곡이었다. 이제 막 시작한 연인에게 어울릴 법한, 그런 곡. 발을 밟아주겠다던 오드리는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날렵하게 발을 놀렸고, 라비린은 살짝 홍조가 도는 오드리의 얼굴을 보며 벙긋 미소를 지었다.
“역시 춤을 잘 춰. 리가 항구에서 어울릴 때도 생각한 거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사교춤을 춰보니까 더 확실히 알겠어. 오드리, 네 발목에 정말 날개 없어?”
“이런, 기대에 어긋나서 어쩌지. 내 발목엔 아무것도 없답니다~”
“해 본 말이야. 하도 가볍게 춤추니까 신기해서.”
“매번 말은 잘 하지.”
오드리는 라비린의 칭찬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라비린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사소한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칭찬을 했다. 본래 칭찬으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는 남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만약 그와 소꿉친구로 함께 자란 가스트로가 오드리의 생각을 들었다면, 체면불구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라비린이 얼마나 칭찬에 박한 남자인지 알려줬을 터였다. 그랬다면 오드리도 라비린의 칭찬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 봤을 테지만, 라비린에게는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그런 사담을 나눌 정도로 친하지 않았다.
“넌 라디아타가 희대의 바람둥이가 되면 어쩌냐고 걱정했지만, 내가 보기엔 너도 만만치 않아. 입 발린 소릴 어쩜 그리 진심처럼 잘해? 브란젤이 들썩이도록 스캔들을 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난리도 아니었을걸.”
“난 매번 진심인데.”
마침 턴을 해야 하는 시점이겠다, 라비린은 오드리의 허리를 확 끌어안고 속삭였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숨처럼 오드리의 귓가를 간질였다. 오드리의 등과 팔뚝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오드리는 턴이 끝나 라비린이 허리를 놓아주자마자 다급히 주변을 살폈지만, 춤곡이 한창 연주되는 중인 무도회장 한가운데에서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정한 연인 흉내를 내고 있으니만큼 그래선 안 되기도 했고 말이다.
“……으! 너, 너! 징그러워!”
“어쩔 수 없어. 네가 익숙해져.”
그녀는 닭살 돋은 팔을 쓸지도 못하고 진저리를 치며 라비린을 비난했지만, 라비린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오드리를 볼 때면 자주 짓곤 하는 소년처럼 맑은 웃음에 장난기가 잔뜩 스며 있었다.
“피올 녀석이 너 아주 연기 잘한다고 하던데, 실력 좀 발휘해 봐. 지금 너랑 나 춤추는 거 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징그럽대? 당장 저쪽에서도 우리 부모님과 헨젤 백작님이 함께 서서 우릴 보고 있다고.”
“뭐? 어디?”
“어허, 고개 돌리지 마. 네 등 뒤라서 어차피 안 보여. 뭔가 얘길 하고 계시는데……. 어, 어머니 어디 가신다. 왜 혼자 가시지?”
“휴게실에 가시는 거겠지. 나는 뒤돌아보지도 못하는데 중계 좀 하지 마. 아니, 너도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좋겠다. 부인은 괜찮다고 하시는데 왜 믿지를 못하고 그 난리야? 제기랄, 이놈의 음악은 또 왜 이렇게 길어.”
오드리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 음악을 원망하며 쏘아붙였지만, 라비린은 좀처럼 관심을 거두지 못하고 계속 주변을 살폈다. 아버지를 떨쳐 내고 혼자서 무도회장을 떠난 어머니의 행방이 대단히 신경 쓰였다.
로샨의 가을 무도회 참가는 타우레드 일가 전체를 긴장시킨 큰일이었다. 일단 마음을 먹고 나서는 그동안 집에만 있던 시간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변화를 보여준 로샨이지만, 사람이 우글우글한 가을 무도회 참석을 무사히 해낼지에 대해서는 다들 회의적이었다.
로샨 본인만 빼고.
타우레드 일가는 로샨이 집에서 나와 마차를 타고 왕궁까지 간 다음 정원을 가로질러 무도회장에 입장하는 내내 마음을 놓질 못했다. 오랫동안 모습을 감췄던 로샨을 향해 쏟아질 관심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샨은 그런 걱정이 무색하도록 잘 적응했다. 엊그제까지 사교모임에 다녔던 사람처럼 빠르게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고 대화를 나눴다. 그녀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클로드 때문에 사람들이 뾰족한 말을 하지 못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정말이지 놀라운 변화였다.
“아버지께서 옆에 계시니까 어머니가 잘 적응하셨던 거라고. 혼자서 어딜 가시는 건지…….”
“나 참, 걱정도 어지간히 한다. 아까 인사하면서 보니까 과연 산트렘의 공주라는 별명이 있을 만한 분이로구나 싶던데 뭐. 난 타우레드 부인보다 라디아타가 더 신경 쓰여. 아까부터 회장 내에서 보이질 않잖아.”
“완전히 괜찮아졌다고 확신할 수 없는 분이야. 당장 괜찮아 보인다고 안심했다가 또 예전처럼 돌아가 버리면 큰일이라고. 그보다 라디아타 걱정은 왜 그렇게 하는 거야? 베텔 경도 안 보이긴 마찬가지야. 둘이 정원 산책이라도 하나 보지.”
“으…….”
라디아타와 카프러스 사이에 있던 일을 모르는 라비린은 뭐가 문제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정을 아는 오드리는 초조함에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카프러스더러 라디아타를 잘 챙겨달라는 말을 했던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멀리 가진 않았겠지. 이 춤이 끝나기 전까진 돌아올 거야.’
그러나 로샨과 라디아타는 길고 긴 춤이 끝날 때까지도 무도회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마른 입술을 샴페인으로 적시던 오드리는 난데없이 오스미다 왕비의 호출을 받았다. 정갈하게 머리칼을 넘긴 시녀는 놀라 몇 번이나 확인하는 오드리를 재촉해 왕비의 응접실에 데려다놓았다.
붉은색과 금색을 기조로 꾸며진 왕비의 응접실은 호화롭고 화려하면서도 조금도 천박하거나 어지럽지 않았다. 드높은 천장을 장식한 샹들리에가 뿌리는 빛과 사방의 벽을 빈틈없이 채운 묵직한 장식이 압도적인 분위기를 내며 방문객의 기를 죽일 뿐이었다.
그 응접실에 앉아 오드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오스미다 왕비 한 명이 아니었다. 춤곡이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 무도회장을 떠나 라비린의 걱정을 샀던 로샨이 오스미다와 한 테이블에 앉아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다.
“오, 레이디 헨젤이 왔군. 앉게나.”
“헨젤 양, 그렇게 굳어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에 맹세코, 오드리는 락시 부인의 조언을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오스미다 왕비를 만나게 해달라고 로샨이나 라디아타에게 부탁한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조만간 말을 해야지, 하고 벼르고만 있던 참에 이렇게 불려오다니 놀랍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뜻밖의 일에 머리가 텅 빈 와중에도 몸은 착실하게 익힌 대로 움직였다.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심장에 손을 대어 인사했다.
“뉴터 비레직 헨젤과 밀리나 랄리우스 헨젤의 딸, 오드리 헨젤이 왕비전하를 뵙습니다.”
“잘 알고 있으니 인사는 생략해도 된다네.”
인사를 생략해도 된다니, 이건 무슨 말일까. 왜 왕비전하는 나를 저렇게 호의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가. 타우레드 후작부인이 왕비전하와 친분이 깊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굉장히 사이가 좋아 보인다.
오드리는 감춘다고 감췄지만, 그녀의 혼란은 오스미다의 눈에 너무도 잘 보였다. 머리가 희게 세고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진 왕비는 어린 레이디에게 이가 시리도록 차갑고 달콤한 음료를 권했다. 만탈락을 비롯한 남부에서 즐겨 마시는 음료였다.
“헨젤 양, 그대가 데멘사의 주인이라지.”
뜻밖의 말에 로샨의 눈이 토끼눈이 됐고, 안 그래도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던 오드리는 하마터면 마시던 음료를 뿜을 뻔했다.
‘라디아타? 아니야, 라디아타가 굳이 그런 말을 떠들고 다닐 이유가 없어. 이해당사자도 아니고, 함부로 말을 흘리고 다닐 사람도 아니니. 그럼…….’
가스트로 왕자. 라비린을 통해 자신을 불러내서는, 말 같지도 않은 규제를 풀어주겠다며 사실상 선택지 없는 협상으로 전보를 뜯어간 양아치. 나이 먹고 꼭 탈모가 오길 기원하고 있는 남자. 그의 이미지에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수다쟁이가 추가됐다.
“데멘사라는 이름은 그대가 지었나? 어디서 따왔지?”
“제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유언장을 읽은 변호사의 이름을 땄습니다. 그의 파격적인 행보가 전보의 특성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박으로 신세를 망친 변호사의 이름인데 쓸데없이 과감하군.”
오드리는 어떤 대답도 없이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정작 데멘사로 이름을 지으면서 반응이 오길 바랐던 하티의 신전이나 헨젤 백작은 조용하기만 하고 다른 곳에서만 말을 듣다니.
“그대는 정말 레이디 랄리우스를 꼭 빼닮았어.”
“……감사합니다. 자주 듣습니다.”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 쓸데없이 과감하고 도박을 꺼리지 않는 면을 두고 말하는 거지. 어쩌면 그나마 손에 쥐고 있던 것마저 잃을 수 있는데도 망설이는 걸 본 적이 없어. 체구는 작아도 대범하고 호탕했지.”
일반적으로 여성을 평하는 데에는 쓰이지 않는 표현이었다. 오드리는 그 말이 정말로 칭찬일까 의심했지만, 오드리의 얼굴을 보며 추억을 더듬는 오스미다의 표정은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그건 헨젤 양도 마찬가지군. 전보를 개발하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지? 어쩌면 만탈락에서 비축한 돈의 대부분을 썼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네.”
오드리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 정도로 쓰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가문에서 독립하는 걸 다시 고려해 봐야 할 정도로 큰돈을 쓰기는 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확신과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믿음으로 벌인 일이었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기술에 눈이 멀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저지른 미친 짓이었다. 두 마법사야 그렇다 쳐도 그 이디케마저 군말 없이 자신을 따라오다니, 다 같이 어딘가 미쳤던 게 분명했다.
전보 개발이 예상보다 늦어졌다면? 사하스바티를 영입하지 못했다면? 라비린의 투자가 없었다면? 혹,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서도 끝내 보급에 실패한다면 그때는 어쩔 건지? 상상만으로도 차갑게 식은 땀이 등을 적셨다.
“운이 좋았습니다. 정말로요.”
아무리 준비를 열심히 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짜도 틀어지기 일쑤인 걸 잘 알면서도, 그저 장밋빛 전망에 눈이 멀어 무작정 달려들었다. 되돌아보면 어떻게 이렇게 진행됐는지 신기할 따름으로, 운이 좋았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됐다. 눈을 감고 구슬을 꿰었는데 생김새는 물론이고 색깔마저 딱 들어맞는 목걸이를 만들어낸 것과 같았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지. 포모스를 등에 업고 있는 것처럼 운이 좋은 사람들.”
“네. 아무래도 제가 그런 사람인가 봅니다.”
“하지만 포모스는 모험의 신이기도 해. 매력적인 모험을 하는 사람의 등에 업혀 가능성을 탐험하길 즐기는 신이니, 그녀에게 그대가 그렇게 보였다는 거겠지.”
오스미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오드리는 몰랐겠지만, 오스미다는 데뷔탕트에서 오드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를 쭉 눈여겨보고 있었다.
평판이 바닥을 달리는 걸 보며 당혹하기도 했지만, 차림도 행동도 바꾸지 않고 끝끝내 자신의 생활 패턴을 고집하는 걸 보며 과연 밀리나의 딸이로구나 생각했다. 밀리나 역시 남부식 드레스를 고집하며 만탈락 돌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자랐나 궁금해서 성장 과정을 따로 알아보기도 했다. 랄리우스의 도시인 만탈락에서 소녀 시절을 보내며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을 도시 운영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걸 알았을 땐 제 딸도 아닌데 몹시 흡족하여 축배를 들었다.
그렇게 오스미다가 오드리에게 가지는 관심을 익히 알고 있던 가스트로는 오드리가 데멘사의 주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그녀에게 사실을 알렸다. 놀라기를 기대하고 한 일이었지만, 오스미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드리의 연인이라는 라비린이 데멘사의 큰 투자자라는 말을 듣고 짐작했던 그대로구나, 하고 담담히 답했을 뿐이었다.
하여간 오스미다는 오드리에게 기대가 컸다. 데뷔탕트 이전엔 저택 내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다른 귀족영애들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며 자랐을 게 분명한 레이디였다. 한번쯤은 제대로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하고 싶은데, 구설수 없이 만날 구실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러니 모처럼 찾아온 로샨이 오드리 얘기를 꺼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옳다구나 시녀를 보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벨키스 경과 연인 사이라지?”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나.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보는 것도 경험인데. 약혼이 빨리 성사되도록 부탁하러 온 타우레드 후작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헨젤 양이 조금 아깝군. 헨젤 양, 약혼을 좀 미루는 건 어떤가? 자유로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오드리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애초 사랑으로 시작한 게 아닌 관계인 데다, 약혼 시기를 결정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 헨젤 백작이었다.
“전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면 제가 여기 브란젤에 있겠어요? 산트렘에 있지.”
“그도 그렇군. 멜브란트 전역을 뒤흔들었던 로맨스의 주인공을 앞에 두고 내가 헛말을 했어.”
“젊은 시절의 열정을 누가 이기겠어요.”
오스미다와 로샨은 오드리를 한쪽에 앉혀둔 채 하하호호 수다를 떨었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밀리나의 이름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사실 두 사람의 공통분모라고 할 만한 건 밀리나뿐이기도 했다.
“……십 년이나 지나서 다른 건 다 가물거리는데, 그날의 풍경은 확실히 기억난다네.”
“오호, 어떠셨는데요?”
“며칠 내도록 가시지 않는 구름 때문에 마음까지 어둑어둑한 날이었어. 게다가 그날엔 아침부터 부슬비가 계속 내려서 정원 전체가 뿌옇게 흐려 보였지.”
“잡혀 있던 약속도 취소할 만한, 그런 날이었네요.”
“그렇지. 그런데 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레이디 랄리우스의 방문 요청을 받아준 거야.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아마, 운명이었겠지.”
레이디 랄리우스가 환절기가 되면 꼬박꼬박 몸살감기에 걸려 앓았던 것 기억하나? 며칠씩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면, 평소에 열심히 먹고 찌워둔 살이 죄다 빠져서 겨울나무의 가지처럼 앙상해지곤 했었지.
그런 사람이 봄비가 쏟아지는 날에 방문 요청을 하니, 시간을 안 낼 수가 없더군.
얼굴을 보고서는 정말 깜짝 놀랐다네. 시기가 시기이니 야위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때의 레이디 랄리우스는 뭐랄까……. 해골 위에 사람 거죽을 씌워놓은 것 같았어. 의자에 앉지 않고 창가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혹시 내가 유령을 보고 있는 건가 생각할 정도였으니.
‘회색 구름, 물에 잠긴 꽃, 빛바랜 낙엽, 세월에 낡은 진주. 어떤 게 낫나? 골라보게.’
‘그냥 유령이라고 하셔도 됩니다. 다들 그렇게 부르는걸요.’
‘누가 감히 그런 말을 입을 담는단 말인가? 레이디 랄리우스, 헨젤 백작부인에게.’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저도 거울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있기도 하고요.’
참 이상했지, 그렇게 마르고 창백한데도 눈빛만은 불꽃처럼 번뜩인다는 게.
‘실은 전하께 유언장 공증을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유언장을 쓰기엔 좀 이른 나이가 아닌가? 딸자식이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하늘을 채운 회색 구름은 곧 비를 쏟고 흩어질 것이고, 물에 잠긴 꽃은 문드러질 것이며, 빛바랜 낙엽은 행인의 발에 밟혀 조각나고, 세월에 낡은 진주는 광택을 잃고 바스러지죠. 제 끝이 그리 머지않았음을 전하께서도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었겠나? 그냥 알았다 했지. 레이디 랄리우스는 내가 말을 들어줄 걸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왔더군.
‘내용이 반쪽이군. 변호사와 함께 쓴 것치고는 너무 부실한 것 아닌가? 이래서야 만탈락을 딸에게 물려주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좀 더 구체적으로 쓰는 게 어떤가?’
‘그쪽에 관련해서는 결혼계약서가 있으니까요. 유서는 노골적으로 쓰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대의 지참금이 만탈락이라는 착각이 세간에 만연한 걸 알지 않나? 딸자식이 어리니 자칫하면 손도 못 쓰고 뺏길걸세. 암만 총명하다 하나 아직 열 살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지 않나. 아, 혹시 어려서 이렇게 썼는가? 어떻게든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착각하도록?’
이런, 타우레드 후작부인의 눈빛이 아주 험하군. 그래, 내가 잘못하였네. 내 말실수였어. 랄리우스의 핏줄들이 하나같이 짧게 살다 가는 것도 알고, 레이디 랄리우스의 몰골이 그녀의 말마따나 유령과 같은 걸 보고서 그런 말을 하였으니.
한데 레이디 랄리우스는 그 말을 듣고도 그냥 웃더군. 저 죽을 날을 이미 안다는 듯, 그렇게.
‘설령 제가 이 봄을 마저 넘기지 못한다 해도…….’
그리 말하며 비쩍 마른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는데, 가슴 한복판에 화살이 꽂힌 것 같았지. 내가 이 자리에 올라앉아 지낸 삼십여 년 동안 온갖 종류의 사람을 다 만나보았는데, 레이디 랄리우스처럼 신기한 사람은 참 드물었어. 그러니 아직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거지만.
내가 그리 부탁할 때는 세상에서 저가 제일 잘났다는 듯이 그렇게 단칼에 쳐 내더니만, 그래서 브란젤에 있는 내내 나와 껄끄럽게 지냈으면서, 당연히 도와줄 거라는 확신은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일테니아 후작각하가 계시니, 저는 걱정 없습니다.’
한데 레이디 랄리우스가 나를 일테니아 후작이라고 부르더군. 직계가 전부 죽어 방계로 넘어갈 뻔했던 작위를, 국왕을 들들 볶고 억지 도움까지 받아서 내가 가진 그 작위를. 그거 하나 가진다고 바뀌는 것도 없는데 그땐 왜 그렇게…….
아무튼, 가진 지 십 년이 넘어가도록 불린 적이 없어 나조차 기억이 가물거리는 작위명이 불리는데, 전신에 소름이 쫙 돋더군. 젊은 시절의 객기가 전부 보상받는 느낌이었어.
‘그대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법을 정말 잘 아는군.’
‘제게 형제가 한 명만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쭉, 그렇게 생각했어요.’
‘입 발린 소리도 잘해.’
결국 입이 댓발은 나온 채로 유언장의 공증인이 됐다네. 내 서명을 받아냈으면 나와 차라도 한잔하고 가는 게 도리지 않겠느냐고 붙들었지만, 레이디 랄리우스는 딸이 기다린다며 금세 돌아가 버렸지.
그때 레이디 랄리우스는 나더러 두고 보라며, 반드시 놀라게 해주겠노라고 장담했다네. 유언장도 미리 봤는데 내가 뭘 얼마나 놀라겠나 싶어 그냥 웃었는데, 설마 그 유언장을 장례식장에서 읽게 할 줄은 몰랐지. 이제는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지만 그땐 정말 놀랐었어.
오드리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오스미다 왕비는 사정을 잘 알 거라던 락시 부인의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지참금은 만탈락이 아니었다던 말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럼 만탈락은 내 거야? 돌려주지 않아도 돼? 진짜?’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실망도 클까 봐 겁냈던 가능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니, 욕심이 끓어올랐다. 사시나무 떨듯 몸이 떨렸다. 어떻게든 손을 마주잡고 진정하려 애썼지만, 손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땀 때문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묻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정리가 안 되고 입안에서 맴맴 돌았다.
헨젤 백작부부의 결혼계약서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만탈락은 정말로 지참금이 아니었는지, 만탈락을 자신에게 물려주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유서의 내용은 얼마나 기억나는지, 어머니에게 부탁했다던 게 대체 뭐였는지,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떤 사이였는지, 사실이 왜곡되는 걸 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이유는 대체 뭔지.
오스미다는 어떻게든 혼란을 숨기려고 애쓰는 오드리를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을 텐데 함부로 말을 뱉지 않고 침착하려 애쓰는 게 몹시 마음에 들었다. 나이답지 않다 싶을 정도로 참을성이 있었다.
의외로 참을성의 한계를 맞닥뜨린 쪽은 오드리가 아니라 로샨이었다. 그녀는 바로 조금 전까지도 밀리나의 의사와 결혼계약서 얘기를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문제로 갈등했다. 말하자니 헨젤 백작이 약혼에 동의해 주지 않을 것 같아 라비린에게 미안했고, 입을 다물자니 밀리나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스미다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침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어찌나 화가 나는지! 뺨뿐만 아니라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노래하듯 우아한 브란젤의 억양은 간데없이 딱딱하고 뚝뚝 끊어지는 산트렘식 억양이 쏟아졌다.
“전하. 무거운 입이란 일반적으로 훌륭한 덕목입니다만, 자그마치 팔 년입니다. 밀리나에게 그만한 신뢰를 받으셨으면서, 사정을 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침묵하신 거죠?”
“그럼 내가 그때 무얼 어떻게 해야 했을까, 타우레드 부인?”
“왕비전하로서, 일테니아 후작으로서, 유언장의 공증인으로서,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하셨어야죠. 세간의 착각을 바로잡고 밀리나의 유언장이 제대로 집행되게 하셨어야죠.”
“과연 포도와 기사의 땅, 산트렘 출신다운 발언이군. 맞아, 그랬어야지. 그게 원칙이지.”
우아하게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오스미다의 분위기가 섬뜩하리만치 위압적으로 변했다. 염색 따위 하지 않은 흰 머리칼 몇 가닥이 대리석 같은 이마에 흘러내려 그늘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혼자였어. 날 받쳐 주고 함께 싸워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일세. 레이디 랄리우스도 그것까진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 그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을 텐데?”
로샨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사교계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밀리나와 친밀하게 지냈으면서, 유언장의 내용을 정확히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혔던 과거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헨젤 양.”
“네……. 네!”
“이렇게까지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만탈락을 공들여 가꾼 입장에서 당연히 기대하는 바가 있을 테지. 하나 레이디 랄리우스의 유언장 원본은 나에게 없다네. 결혼계약서도 없지. 당시에 나선 것도 아닌 내 기억과 진술만으로는 어떤 증거도 되지 못해.”
“그 말씀은, 제가 어머니의 유언장 원본과 부모님의 결혼계약서를 가지고 제 권리를 주장하기만 하면 전하께서 제 편에 서주실 수도 있다는 건가요?”
오드리는 말을 뱉고서야 자신이 무심결에 본심을 꺼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장으로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하고 등이 뻣뻣해졌다. 자꾸 거칠어지려는 숨을 단속하는 게 몹시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해 잠시 예의를 잊고…….”
오스미다는 주름진 손을 뻗어 오드리의 손을 쥐었다. 난데없는 접촉에 놀란 오드리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다 지나간 옛일이라 생각했었지. 이미 지나간 일을 괜히 들출 필요도 없을 거라고 여겼고. 하지만 이렇게 헨젤 양을 가까이에서 보고 나니 확실히 알겠군. 핏줄은 속일 수 없고 타고난 본성은 변하지 않아. 사슴의 자식이 뱀이 되는 일은 없어.”
오드리는 자신의 말실수가 오스미다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잔뜩 긴장했지만, 오스미다는 오드리의 욕심 많은 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 보면, 당장 오스미다부터가 직계인 자신이 살아 있는데 왜 작위가 방계로 넘어가느냐며 난리를 피워 작위를 가져온 사람이었다. 미혼 여성이 아니니 당연히 남편인 국왕, 혹은 자식에게 넘길 거란 예상을 걷어차고 아직까지도 일테니아 후작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오스미다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오드리의 손을 좀 더 세게 쥐었다. 어린 나이답게 보드랍고 말랑하고 매끈한 손이 참 기꺼웠다. 창창하게 많이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하면 짜릿하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 고꾸라져 죽는 한이 있어도 일테니아 후작 작위를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던 때의 흥분과 열의가 다시 끓어오르는 듯했다.
“헨젤 양, 하고 싶은 대로 하게나. 이대로 벨키스 경과 약혼하고 결혼하여 편안히 지내도 좋고, 레이디 랄리우스가 그대에게 남긴 것들에 대한 정당한 소유를 주장해도 좋네. 어느 쪽을 택하든 최선을 다해 도와주지.”
갑작스러운 제안에 오드리도 놀랐지만, 로샨도 놀랐다. 과거 얘기를 듣고 냅다 오스미다에게 분노를 토하기는 했어도, 그녀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오드리와 라비린의 약혼 문제 때문이었다.
“전하, 오드리는 라비린과 약혼할 겁니다. 둘을 따로 두지 마세요. 왜 멀쩡한 연인을 갈라놓으려 하십니까?”
“레이디 랄리우스가 남긴 걸 헨젤 양이 다 갖게 되면 헨젤 양은 랄리우스 후작이 되네. 벨키스 경이 그걸 감당할 수 있다고 보나?”
“감당하고도 남습니다. 제 아들인걸요. 그렇게 길렀습니다!”
“그거야 그대가 벨키스 경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네. 어디, 헨젤 양의 의견도 들어볼까. 헨젤 양은 어떻게 생각하지? 벨키스 경은 정말 그만한 도량이 있는 사람인가?”
오드리는 오스미다의 랄리우스 후작 발언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불타는 듯한 두 쌍의 눈 사이에 끼고 말았다. 두 사람 다 오드리가 당연히 제 편을 들 것을 확신하고 있어 대답이 아주 곤란했다.
‘이제까지의 행동으로 보면 도량이 충분한 사람으로 느껴지지만……. 태도가 변하지 않을 거라 믿기엔 랄리우스 후작 작위가 너무 크고……. 아이 정말, 내가 라비린을 그리 잘 아는 것도 아닌데, 이게 뭐야!’
애초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가 아닌데, 그 말을 하려면 밝혀야 할 진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중 어느 것도 오드리 혼자 꺼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오드리는 무도회장에 내버려 두고 온 라비린을 생각했다.
‘억지로라도 끌고 올걸.’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두 분 사이에 낀 채 이런 정신고문을 받고 있나. 어차피 당할 거면 동지라도 있었어야 하는데! 오드리의 얇은 남부식 드레스가 땀으로 젖어들었다.
“어으, 귀 간지러. 누가 내 욕하나?”
라비린은 갑자기 간질간질한 귀를 파며 투덜거렸다. 가을 무도회를 앞두고 단장하는 동안 하녀들이 달려들어 껍질을 한 꺼풀은 족히 벗겨냈으니 뭐 나올 것도 없는데 계속 귀가 간지러웠다.
“벌레라도 들어갔나?”
그는 자꾸만 들러붙어 이 말 저 말 붙여보려는 사람들을 피해 정원으로 나온 상태였다. 작은 마법등이 잔뜩 뿌려진 정원은 대단히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날벌레도 많았다. 퉤! 잠깐 입을 열었다고 그새 입에 날벌레가 들어갔다.
다시 들어갈까, 날벌레를 감수하더라도 밖에 있을까.
고민은 짧았다. 어떻게 빠져나온 자린데, 이깟 날벌레 때문에 도로 들어가야 한다니 말도 안 되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달라붙는 시선들이 끈끈이주걱보다 더 끈질겼다. 날벌레야 빛 없는 곳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한데 왕실의 정원사들이 어찌나 열심히 정원을 꾸며놓았는지, 분명 이만하면 괜찮겠지 싶어 간 곳에도 빠짐없이 마법등이 있었다. 마법등에 씌워놓은 덮개의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다. 가느다란 나무를 뼈대로 삼아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짐승들의 모양을 만들고 얇은 천을 씌웠다.
라비린은 무릎이 아프도록 정원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날벌레나 피해보자는 마음에 시작한 정원 탐험이었지만, 갖가지 모양의 마법등을 구경하는 건 의외로 즐거운 일이었다.
“오, 이거 제법…….”
왕비궁의 정원을 모조리 훑어볼 기세로 걷던 라비린은 커다란 사자 마법등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키 크고 잎이 무성한 정원수들을 신하처럼 거느리고 앞발을 들어 반쯤 몸을 일으킨 사자는 위풍당당한 날개까지 달고 있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성 들여 가꾸고 장식한 정원을 구경하는 건 나무 그늘에 선 자신과 바람을 타고 노는 몇 마리 새가 전부였다. 인적 없는 정원 구석구석을 쓸고 가는 바람소리가 서늘했다. 하늘엔 별, 땅엔 마법등. 아름답고 쓸쓸한 광경이었다.
그는 사자 마법등과 자신 사이에서 졸졸 흐르는 인공 개울을 훌쩍 뛰어넘었다. 정원사들이 죽을 고생을 해서 꾸며놨을 텐데 이렇게까지 보는 사람이 없다니 그것 참 안 될 일이었다. 꾸민 보람이 있도록 가까이에서 아주 자세하게 뜯어볼 작정이었다.
“……왜죠?”
“그야…….”
바람결에 실려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비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기척을 죽였다. 사자의 커다란 날개 아래에 몸을 감추고 귀를 활짝 열었다. 낯익은 향기가 코를 건드렸다. 라일락, 레몬, 엠버, 그리고 차가운 금속성의 냄새.
“난 내 마음을 분명하게 전했어요. 내가 타우레드로 남아 있기 위해서만 경을 원하는 건 아니라고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나요? 다시 얘기해 줘요?”
“그건 아닙니다. 저는…….”
오, 이런 빌어먹을. 망할. 산책 따위 하지 말걸! 아까부터 회장 내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던 라디아타와 카프러스가 이런 정원 구석에서 이런 대화를 하고 있을 줄이야.
라비린은 절로 신음을 뱉을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계속 숨어 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나마 데면데면한 수준이었던 남매 사이가 끝장날 게 너무나 뻔했다.
‘들키면 큰일 난다. 들키면 안 돼……. 최소한 아까 있던 자리까지는 가야 돼.’
큰 덩치를 잔뜩 웅크린 채 숨죽여 정원을 기었다. 아까까지는 별것도 아니었던 정원의 장식품들이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 그를 막았다. 조금 전엔 훌쩍 뛰어넘었던 인공 개울이 드넓은 강처럼 보였으니 말 다 했다.
‘좋아, 여기만 건너면 돼.’
바람의 방향이 바뀌지 않길 빌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데, 뒤에서 뻗어온 손이 라비린의 어깨를 잡아챘다. 깜짝 놀란 라비린은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크게 휘둘렀지만, 상대는 가뿐하게 그를 피했다.
“자네, 몸이 많이 둔해졌군?”
“……전하.”
“역시 검술수련여행은 무슨, 다른 일을 하러 다닌 거였어. 뭐 했나? 정말로 만탈락에서 레이디 헨젤과 연애라도 한 건가?”
가스트로의 밝은 금발머리가 희미한 별빛 아래에서도 화려하게 빛났다. 그는 푸른 눈동자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라비린을 놀렸다. 갑자기 사라져 종적을 감췄던 지난 몇 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사람은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나름대로 예의를 차려가며 가스트로를 응대했을 라비린이지만, 지금은 너무 다급한 상황이었다. 라비린은 가스트로의 입을 덥석 틀어막고 그를 번쩍 들어 근처의 생울타리 뒤로 몸을 숨겼다.
나뭇가지를 살짝 벌려 라디아타와 카프러스를 확인했다. 과연 좀 전의 소란을 들었는지, 카프러스가 찌푸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카프러스는 타우레드의 장남인 라비린의 기준으로도 퍽 괜찮은 실력의 기사였다. 가스트로의 입을 막은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으읍! 읍!”
“잠깐만 참으시죠.”
“으으으으읍!”
가스트로가 화를 내며 손등을 두드려 댔지만, 라비린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바쁜 와중에 라디아타와 춤 한 번 추겠다고 볼린의 밤을 노리기까지 했던 녀석인데 무슨 방해를 할 줄 알고 놓아준단 말인가.
“되도 않는 힘으로 자꾸 탈출 시도하지 마시죠. 금방 놔드릴 테니까 좀 얌전히 있으세요.”
“으으읍!”
한결 얌전해진 가스트로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라비린은 등에서 땀이 흐르는 걸 무시하고 시야를 가린 나뭇가지를 살짝 벌렸다. 라디아타와 카프러스 사이의 대화가 흘러들어왔다.
“내가 부끄러움도 민망함도 모두 참고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 했는데, 또 회피할 셈인가요?”
“레이디 타우레드…….”
“저번처럼 내 마음의 순수성을 가늠하려 들지 말고 경의 마음을 똑똑히 말해줘요. 내가 경의 상대로 모자람이 있다고 여겨지나요?”
“그게 아닙니다. 저야말로 레이디 타우레드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
라비린은 거의 숨도 쉬지 못하고 대화에 집중했다. 워낙 거리가 있는 데다 밤을 누비는 새와 작은 짐승의 소리들이 제대로 말을 듣는 걸 자꾸만 방해했다. 가스트로가 얌전하기라도 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말이 좀 이상한데? 저런 얘기를 전에도 했던 건가? 이번이 두 번째야?’
라비린은 라디아타가 카프러스에게 이미 한 번 고백을 했다가 차인 적이 있다는 걸 몰랐다. 요새 그들 남매 사이에 찬바람이 숭숭 부는 데다, 오드리가 라디아타에 대한 의리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오드리가 그랬듯 카프러스 역시 라디아타가 거절당할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피를 나눈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고 영리하고 상냥하며 집안마저 좋았다. 누구든지 탐내는 신붓감이었다.
그러니 카프러스가 라디아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는 걸 보았을 때, 라비린은 이제 당연히 카프러스와 라디아타가 연인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가스트로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라, 그는 제 입을 막던 손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잔뜩 긴장해서는 나뭇가지 틈새로 두 사람을 관찰했다.
“이봐, 라비린. 나중에 약혼식을 훼방놓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둘을 떼어놓는 게 그나마 모양새가 나올 것 같지 않나?”
“전하도 라디아타에게 화분 대접을 받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젠장…….”
속닥속닥 말을 나누면서도 두 사람의 주의는 나무 저편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침묵이 길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는 가운데 긴장으로 자꾸만 입이 말랐다.
“……송구합니다, 레이디.”
이미 한 번 차였음에도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모아 다시 물은 것인데,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라디아타의 분홍빛 뺨에서 핏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째서죠? 라디아타 베텔이 되어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아름답지 않은가요? 꼭 코르셋을 차야 하는 약한 허리가 경의 마음에 안 드시나요? 이 선명한 금발 때문에 내가 멍청하게 느껴지나요? 혹시 내가 산트렘의 핏줄을 이은 게 부담스러운가요? 그도 아니라면…….”
오늘의 용기를 내기까지, 라디아타는 무수한 고민을 했다. 남들 눈에는 단점이 아니라도 그에게는 단점일지 모른다며 끙끙 앓았다. 그 고민들이 형태를 가지고 입 밖으로 술술 흘러나왔다.
카프러스는 당혹스러워하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레이디 타우레드, 저는 따로 마음에 둔 분이 있습니다.”
“오드리를 말하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오드리 아가씨는 단지 제 주인이실 뿐이고…….”
거짓말. 카프러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부정했지만, 라디아타는 그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오드리가 모르는 것에 기뻐하며 그가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기만을 그토록 바라지 않았던가.
라디아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또 거절당했다는 민망함과, 싫다는 사람 붙들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허탈함이 함께 몰려왔다.
카프러스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데 그게 오드리이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람. 조건으로 구애했을 땐 조건을 들어 거절하고, 마음을 꺼내 보여주며 구애하니 마음으로 거절하는 것을. 안 될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재빨리 포기했어야 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아프고 그 사이로 찬바람이 불었다. 어리석은 자신을 마구 비웃고 싶었다.
“그래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내 고백이 얼마나 당혹스러우셨을까…….”
“레이디, 죄송합,”
“사과하지 마세요. 경이 사과할 일이 아니니까. 내가 아름답고 조건이 좋으니 당연히 날 사랑하고 내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내가 오만했어요.”
라디아타가 자신에게 구애하는 가스트로를 보며 꺼림칙하다고 생각해 왔던 게 바로 그 점이었다. 너에게 나만 한 조건은 없고, 지금 아무리 날 싫어해도 결국은 내 손을 잡게 될 거라는 자신감이 꼴 보기 싫었다. 그래놓고 아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게 우스울 따름이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군요.”
카프러스는 차마 입조차 떼지 못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걸, 괜히 타우레드를 들먹이며 상처를 줬다.
왜 그랬을까 자문해 보자 답은 의외일 정도로 쉽게 나왔다. 오드리를 알게 된 건 비슷한 시기인데,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영역 안에 깊숙이 들어가는 라디아타가 부러웠던 거였다. 얄팍한 속내를 깨닫자마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가…….”
“잠시 혼자 있게 해주세요. 어차피 회장에 돌아가면 또 경의 에스코트를 받아야 하는데, 당장은 평소처럼 웃을 자신이 없거든요.”
카프러스는 쓴웃음을 짓는 라디아타에게서 눈을 떼질 못했다. 사과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질투 따위를 입에 담기 싫은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그렇다고 라디아타가 원하는 대로 자리를 뜨지도 못했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하는 카프러스의 모습이 라비린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뻔했다. 그는 남매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걸 각오하고서라도 나설지, 아니면 상처받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동생을 배려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저 가진 거라곤 검 솜씨밖에 없는 기사 나부랭이가 감히……!”
“……자네가 그런 식으로 기사를 폄하하는 건 처음 듣는군.”
“그럼 욕을 안 하고 배깁니까? 저 망할 놈은 왜 계속 라디아타 앞에서 얼쩡거리는 거야? 썩 꺼져 주기나 할 것이지!”
가스트로는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이를 가는 라비린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형제 없이 혼자 자라서 그런지, 평소엔 툴툴거리고 싸우면서도 형제가 뭔가 불이익을 얻는다 싶으면 제 일처럼 화내는 게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 조건의 남자가 감히 라디아타를 거절했다는 게 참 마음에 안 들기는 했다. 누구는 몇 년째 에스코트 신청을 줄줄이 거절당하고 있는데, 그녀의 마음을 거절한 걸로도 모자라 저렇게 멀거니 서서 자존심을 다친 라디아타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는 꼴이라니.
“타우레드 영애의 구애를 거절하다니 안목 없는 작자인 건 확실한데, 나에겐 나름 고마운 작자로군. 내게 아직 기회가 남았다는 얘기니.”
“예? 뭐라고요?”
라비린은 기가 막혀 고개를 돌렸다가, 가스트로가 제법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정면으로 보고 말았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지. 자네는 여기서 잠시 기다리게.”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고! 라비린은 벌떡 일어나려는 가스트로를 다급히 붙들었다. 바로 이번 가을 무도회에서도 에스코트를 거절당했으면서 대체 어디서 온 자신감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전하, 미치셨습니까?”
“자네 입버릇이 몹시 고약하군.”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라비린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가스트로는 그 틈을 타서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비린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갑자기 사라지기 전의 내 벗으로 돌아와 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아. 자네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내게 미쳤냐는 말 따위를 할 수 있겠나?”
“야, 가스트로!”
“하지만 선은 지켜주게나. 어렸던 그 시절처럼 어울리기엔 서로 나이를 먹었으니.”
“이 망할 놈이……!”
“라비린, 자네는 여기 계속 있지 말고 얼른 회장으로 돌아가기나 하게. 헨젤 백작이 미래의 사윗감을 찾느라 아주 바빠 보이더군. 약혼시켜 달라고 오만 군데에 다 티를 내고 다녔으면서 정작 미래의 장인에게 잘 보여야 할 순간에 자리를 비워서야 일이 잘 되겠나?”
깜짝 소식에 놀란 라비린이 눈을 부릅떴다. 가스트로는 벗의 보기 드문 표정을 실컷 놀려먹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라비린의 등을 떠밀었다.
“온 브란젤을 다 시끄럽게 하며 연애를 했으면 시기를 놓치지 말고 결실을 맺도록. 열매를 제때 따지 못하면 떨어져 썩고 말아.”
“어……. 일부러 그 말 해주려고 날 찾은 거면 고마운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왕자 전하. 어딜 끼어들려고 그래? 라디아타는 전하 별로라고 한다니까!”
“레이디 헨젤도 처음부터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을 거 아닌가. 딱 봐도 자네는 레이디 헨젤의 취향이 아닌걸. 도저히 거절하기 힘든 조건을 걸었겠지. 뻔하지 뭐. 넌 어릴 때부터 쭉 그랬어.”
처음에는 체면 차리는 말투로 점잔을 빼던 가스트로였지만, 말이 길어지자 곧 옛날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는 샐쭉하니 눈을 가늘게 뜨고 툴툴대다 라비린의 빈틈을 노려 정강이를 확 걷어찼다.
“억!”
“계속 거기 있지 말고 얼른 네 연애의 결실을 따먹으러 가. 난 내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괜히 말릴 생각은 말고.”
가스트로는 정강이를 붙들고 끙끙대는 라비린을 매정하게 버려두고 어색한 분위기가 맴도는 고백의 현장에 난입했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가스트로를 본 라디아타와 카프러스의 놀라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카프러스는 리가 항구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무례를 떠올리고 완전히 굳어버렸고, 라디아타는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두 사람, 산책이라도 나온 건가? 하긴 왕궁의 정원사들이 아주 심혈을 기울이긴 했어. 정원 전체가 빛으로 만들어낸 작품과 같으니, 예술을 사랑하는 레이디 타우레드에게 몹시 매력적으로 보였겠군.”
“기사 카프러스 베텔이 왕자전하를 뵙습니다.”
카프러스가 뒤늦게 예를 차리는 가운데, 라디아타는 슬그머니 카프러스의 앞을 막아섰다. 가스트로가 공사의 구분이 확실한 사람인 건 알지만, 그가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어디까지 아는 걸까 생각하니 등골이 다 서늘해졌다.
“전하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 한창 회장에서 춤을 추고 계셔야 할 분이.”
“파트너를 친구에게 양보한 상냥한 레이디에게 에스코트를 청하러 왔지. 여기까지 와서야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 레이디는 에스코트 해줄 사람이 이미 있답니다. 헛걸음을 하셨군요.”
“정말 내가 헛걸음을 했을까?”
가스트로는 라디아타를 제 쪽으로 홱 끌어당겼다. 당황한 라디아타가 몇 걸음 움직이자 그녀의 뒤에 가려져 있던 카프러스가 드러났다. 깍듯하게 예를 지킨 채로 동상처럼 선 카프러스를 본 가스트로가 서늘하리만치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예를 차리는 사람이 요새 누가 있다고……. 과연 사자의 따님께서 눈여겨본 기사답군.”
“전하!”
“기사다운 건 좋지만 눈치가 없다는 건 좀 아쉬워. 이제 그만 자리를 피해주겠나? 설마 귀머거리 기사라서 필담이 필요한 건 아니겠지?”
가스트로의 빈정거림에 라디아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어떻게든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려 했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카프러스가 즉각 가스트로의 명령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반박도 뭣도 없이 멀어지는 등은 라디아타의 마음에 큰 돌이 되어 얹혔다. 손은 따뜻해도 눈빛은 차갑고, 말투는 다정해도 내용까지 다정하지는 않았던 날들이 새삼 사무쳤다.
“가면을 쓰고 안 쓰고의 차이가 큰 사내로군. 그래도 조금은 더 버텨볼 줄 알았는데.”
넋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던 라디아타의 시선이 가스트로를 향했다. 가스트로가 라디아타의 손끝에 정중히 입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라디아타 못지않게 화려한 금발이 희미한 별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며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깊은 이야기는 가면을 벗고 만나는 날에 하자던 말, 난 아직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레이디 타우레드는 아닌가?”
전하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맴맴 돌았다. 가스트로는 라디아타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다.
“그대가 내 구애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걸 알아. 왕자라는 신분, 제법 쓸 만한 외모, 그대의 친정에 안겨줄 수 있는 특혜 따위를 줄줄이 늘어놓으며 어차피 나 말고는 다른 상대도 없다고 자신하는 게 꼴같잖고 싫겠지.”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하지만 생각해 보게.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도, 수컷이 마음에 드는 암컷을 꾈 때는 제가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던가? 아름답게 손질한 깃을 펼쳐 보여주고, 정성껏 꾸민 둥지를 구경시켜 주며, 뭐든지 사냥을 해서 바치고 환심을 사려 하지. 내가 하는 구애도 그와 다를 바 없다네.”
“전하께서 날짐승입니까? 아니면 제가 날짐승입니까? 무슨 비교를 하셔도 그런 어이없는 비교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겠나. 마음을 전할 방법이라곤 그런 것밖에 모르는걸.”
“마음은 무슨…….”
라디아타는 자기도 모르게 속내를 토해낼 뻔하고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뒤늦은 걱정에 가스트로의 반응을 슬그머니 살펴보았더니, 그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생물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대도 같은 방법을 쓰지 않았나.”
“……다 들으셨나 봅니다?”
“글쎄? 나름 사정을 알 만한 부분은 다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디부터 들었어야 다 들은 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군.”
“으…….”
“그대도 라비린도 내가 오로지 조건만을 보고 그대를 원한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건 아니라네. 그 증거로, 나는 그동안 숱하게 거절을 당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한 적이 없어.”
라디아타는 뺨으로 피가 확 몰리는 걸 느꼈다. 아주 귓불까지 화끈거리는 게, 화장이 아니었다면 얼굴 전체가 새빨갛게 변한 걸 보였겠구나 싶었다.
“다 들으셨군요…….”
“난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 단박에 거절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니, 이 정도까지 진척된 것만으로도 몹시 행복하군. 기다리는 거야 익숙하니 걱정 말게나. 그보다, 왜 굳이 이런 장소를 고른 건가? 날이 아무리 더워도 가을은 가을인데 밤이슬 맞고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가스트로가 싱글싱글 웃으며 라디아타에게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하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 팔을 잡았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아는 라디아타는 그의 팔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전하, 오늘은 좀…….”
“아, 그렇지. 오늘은 라비린과 헨젤 영애의 약혼 발표가 있는 날이었지. 그런데 내가 그대의 에스코트를 하며 등장하면 시선이 죄다 이쪽으로 쏠리겠군. 그래서야 안 될 일이지. 될 일도 안 돼. 타우레드가는 남매간의 우애가 아주 끈끈해서 보기 좋아.”
남매간의 우애 따위, 하안참 전에 파이와 함께 조각내서 꿀꺽 삼켜 버렸다. 라디아타는 새삼 타우레드가 남매들 사이의 가느다란 우애를 말하기보다 다른 주제에 집중했다. 오늘이 오드리와 라비린이 약혼 발표를 하는 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하고.
“두 사람이 약혼 발표를 한다고요? 저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만.”
“헨젤 백작이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했던 모양이라네. 정원을 헤매던 라비린을 잡아다 회장으로 돌려보낸 지 얼마 안 됐으니 빨리 가면 그 소동을 볼 수도 있을 거야. 가겠나?”
“당연하죠.”
라디아타가 의욕적으로 치마를 쥐고 걸었다. 가스트로가 뒤에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 같았다.
가스트로는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좀 전까지 라비린이 있었던 자리를 흘끗 확인했다. 라디아타에게 상처가 될까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그 자리에 누군가 있었던 흔적도 없었다.
‘언제든 이익이 큰 쪽을 택하는 게 그 녀석의 본능 같은 거긴 했는데……. 동생을 그렇게 챙기더니만 급할 땐 약혼녀로군.’
하긴 그 약혼녀가 데멘사의 주인이며 전보를 개발할 만한 마법사와 기술자들을 거느린, 거기에 부유하기까지 한 귀족 영애이니 그 행동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이제 생각해 보면 그 엉망진창인 평판마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까 싶은 사람인 것이다.
그는 불편한 구두를 신고도 놀랍도록 빠르게 걷는 라디아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뒤를 따르는 자신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 마음이 급해 보였다. 재빨리 따라붙어 말을 걸었다.
“라비린은 어린 시절부터 안목이 좋았지. 그대가 생각하기에 이번엔 어떨 것 같나?”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라비린에 대해서는 대충 알겠는데, 헨젤 영애에 대해서는 영 모르겠어서 그렇다네. 내 귀에 들려오는 얘기들은 신기할 정도로 극과 극이라서 말이야. 누군가는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행정가라 하고 누군가는 상종도 못할 망나니라 하는데, 어느 쪽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
라디아타는 걸음을 늦추고 가스트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괜히 한 말이 아니라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는 헨젤 영애와 친분이 있잖나. 그 두 사람의 약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알다시피 타우레드의 결혼에는 왕실도 큰 관심을 갖고 있거든.”
가문의 문장에 백합이 들어가는 귀족의 결혼에는 왕실의 허락이 필요했다. 비록 드문 일이기는 해도, 약혼 기간을 충분히 가졌음에도 왕실의 허락이 없어 결혼 직전에 파투난 사례도 있었다. 클로드와 로샨의 결혼이 괜히 충격적이었던 게 아니었다.
산트렘을 품으며 세를 불린 타우레드가 이번에는 헨젤의 영애와 결혼을 하겠다 하니, 왕실에서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당연했다. 일단 군사력과 재력의 결합인데다, 타우레드에는 적게나마 왕실의 피도 함께 흘렀다.
하나 그건 왕실의 입장일 뿐이고, 라디아타의 입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다. 오드리가 아깝다.
하지만 그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스트로 앞에서 그대로 뱉기에는 좀 망설여졌다. 라비린뿐만 아니라 오드리도 라비린과의 결혼을 통해 실익을 얻는 부분이 확실히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에는 더더욱 그랬다. 자칫 말실수를 하면 오드리의 계획이 틀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 보니 질문자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딴소리를 할 수밖에.
“오드리는 좋은 친구입니다. 신의가 있고, 다정하며, 주변인을 잘 챙기죠. 안 그래도 활달한 성품인데 만탈락에서 자유로이 지냈던 경험이 아직 몸에 남아 있다 보니 오해를 사서 평판이 나쁠 뿐이에요.”
“타우레드의 안주인으로서는 어떨 것 같나? 지금까지 그대가 해온 것들을 잘할 것 같아?”
“만탈락에서의 경험이 있는데 어련히 잘하겠지요.”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가스트로가 이후에도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라디아타는 이리저리 말을 돌려가며 죄다 피해 버렸다. 어찌나 잘 빠져나가는지, 나중에는 가스트로가 괜히 물어봤다며 툴툴거릴 정도였다.
라디아타는 그 툴툴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녀의 관심은 온통 오드리와 라비린이었다. 카프러스와 함께 걸을 땐 그리 넓은 것 같지도 않던 정원이 어찌나 넓고 큰지, 회장까지의 거리가 까마득했다.
‘망할 오라버니, 일부러 파트너까지 바꿔줬는데 혼자 정원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단 말이야? 오드리는 대체 어디다 두고 그리 나다녀!’
라비린이 라디아타의 생각을 알았으면 억울하다 말했을 테지만, 지금 그는 회장에 막 도착해서 오드리를 찾느라 아주 바빴다. 죽고 못 사는 연인을 연기 중이니만큼 헨젤 백작에게 갈 때도 당연히 둘이 가야 하지 않겠는가.
꿀을 본 벌떼처럼 들러붙는 사람들을 적당히 상대해 주며 초록색 머리칼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곧 따스한 체온이 팔을 붙드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오드리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라비린, 어딜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어, 미안. 잠시 나갔다 왔어.”
“산책을 갈 거면 같이 가지. 잠깐 나랑 얘기 좀 할까?”
오드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물러나며 길을 터줬다. 혹시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황급히 눈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조금 전 라비린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사람들이 왜 이래?”
“소문난 망나니답게 물어뜯어 줬거든. 이로 뜯지 못하고 말로만 해서 아쉽지만 말이야.”
“야아……. 아무리 평판에 신경 안 쓴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한 거 아니냐…….”
“뭐 어때. 내 평판이 바닥이라고 네가 결혼을 무를 것도 아닌데.”
오드리는 라비린을 끌고 회장 2층에 있는 발코니 중 하나를 차지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빈 곳이 한 군데도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이른 시간이다 보니 다행히 빈 곳이 있었다.
그녀가 발코니 문을 닫고 꼼꼼하게 커튼까지 치는 동안, 라비린은 오드리가 하는 짓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찰싹 붙어 있는 꼴을 최대한 많이 보여야 하는 상황인 걸 알면서 왜 굳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왕비전하께서 뭐라고 하셨기에 네가 이래?”
“라비린, 잘 들어. 내가 랄리우스 후작 작위를 이을 수도 있대.”
“……? 그야 당연하지. 네가 사생아도 아니고 명백한 직계인 데다 미혼인데. 네 동생이 죽어야 가능하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멜브란트 왕국에서 귀족의 작위 계승 순서에는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직계 남성, 미혼 여성, 방계 남성. 미혼 여성은 결혼해서 영지의 통치권을 남편에게 맡기는 방식이지만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고 이혼하면 남편에게 주었던 작위를 도로 가져올 수도 있었다. 기혼 상태에서 이혼도 하지 않고 작위를 가져온 오스미다 왕비의 경우가 특별한 거였다.
오드리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결혼할 때 조건이 있었대. ‘랄리우스의 후계자는 레이디 랄리우스가 직접 정한다.’ 그 증명이 바로 만탈락을 물려주는 거였고. 왕비전하께서 보증해 주셨어.”
“오호……. 그래, 랄리우스가 헨젤에 굽히고 들어갈 정도면 그만한 조건이 있을 법도 하지. 한데 만탈락은 지참금이잖아? 그걸 물려주는 게 어떻게 증명이 돼?”
“사실 어머니의 지참금은 만탈락이 아니었고…….”
처음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라비린이었지만, 오드리의 설명이 이어지자 점점 표정이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지금은 오기로 쫓고 있는 유언장의 무게가 새삼 실감이 난 탓이었다.
그는 오드리가 쳐 놓은 커튼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바깥으로 새어나가서 좋을 얘기가 아니었다.
“유언장과 결혼계약서가 세트로군. 둘 다 있어야 좀 싸워볼 만하겠어. 그게 아니라면 아예 시작할 엄두도 내지 않는 편이 낫고. 증거를 다 갖춰오지 않는 이상 왕비전하는 움직이지 않으실 거야.”
“……놀라지 않았어?”
“지금 엄청나게 놀랐거든? 랄리우스 후작이라니……. 맙소사. 벨키스 남작 작위 같은 것보다 훨씬 대단하잖아? 이래서야 내가 제시한 조건이 너무 시시해지는걸.”
라비린은 자기도 모르게 턱을 문지르며 탄식했다. 벨키스 남작 작위를 넘기겠다는 건 작위를 갖고 가문에서 독립하길 원하는 오드리에게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이었다. 한데 랄리우스 후작이라니, 왕비의 후원이라니.
‘헨젤 백작부인은 대체 어떤 분이셨기에……. 한참 전에 돌아가신 분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군.’
절로 쏟아지려는 한숨을 꿀꺽 삼켰다. 오드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비를 등에 업은 이상, 이 결혼의 패를 쥔 사람은 더 이상 헨젤 백작이 아니었다. 이제 오드리는 약혼을 통한 이득은 실컷 취하고 정작 결혼은 무르는 짓도 할 수 있었다.
라비린은 팔짱을 낀 채 오드리의 앞에 바짝 붙어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데이트를 핑계로 찰싹 붙어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취해본 적 없는 자세였다. 그는 언제나 몸을 낮추고 오드리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곤 했었으니까.
발코니에 매달아놓은 마법등을 등지고 선 탓에, 라비린의 그림자는 커다란 괴물처럼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며 오드리를 덮었다.
“널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두게 하는 정보야. 나에게 말하지 않고 꽁꽁 감췄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는 게 좋았을 테지. 그런데 이렇게 말을 꺼낸 이유는 대체 뭐야?”
“라비린, 넌 후작 작위를 가진 아내를 어떻게 생각해? 영지의 통치권도, 후계권도 주지 않을 건데.”
“작위를 가진 아내가 싫었으면 벨키스 남작 작위를 주겠다는 약속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 대체 뭣 때문에 그런 걸 묻는 거야? 지금 상황으로는 그저 결혼만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불쾌한가?”
“아니. 내 갈등이 헛것이 되지 않아 기뻐.”
“뭔 소리야?”
오드리가 손을 뻗어 라비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라비린의 어깨를 넘어온 소량의 빛만으로도 초록색 눈동자가 짓궂게 반짝였다.
“어차피 내가 랄리우스 후작 작위를 가져올 수 있을 확률은 낮아. 유언장과 결혼계약서를 확보하거나 왕비전하의 도움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은폐를 시도한 게 틀림없는 아버지와 싸워 이기는 게 제일 큰 산이지.”
“그래서, 쉬운 길을 택하겠다? 나와 약혼해서 로렐라이를 지키고, 벨키스 남작 작위를 얻고, 거기에 더해 왕비전하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헨젤 백작님과는 싸우지 않겠다?”
“그러면 안 돼? 귀족의 유언장을 조작하는 건 왕족이라도 중한 처벌을 피할 수 없는 큰 죄야.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 않는 수준으로 합의만 보면 돼. 분명 만탈락쯤은 쉬이 받아낼 수 있을걸.”
“이야, 업혀 있던 포모스가 도망갈 말을 잘도 하네.”
포모스는 행운의 신이지만 동시에 모험의 신이었다. 안전한 선택을 하는 사람의 등에 계속 올라타 있을 리가 없었다.
오드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낯빛을 굳혔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라비린의 옷자락을 정돈했다. 산책을 다녀왔다더니 풀밭에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에 풀잎이 붙고 주름이 잡힌 꼴이 아주 볼만했다.
“내 욕심이 크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너에게도 이득이 되는 얘기잖아? 너, 내가 랄리우스 후작 작위를 얻으려고 투쟁하며 널 끌어들이기를 바라? 아니잖아? 너, 로렐라이를 멀쩡하게 지키는 겸사겸사 네 아버지 뒤통수를 거하게 치고 싶은 거잖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날 시험했어? 네게 작위를 주겠다고 말했던 나를? 아버지와 내가 로렐라이의 단주를 소환하려는 국왕전하를 계속 막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남작위와 후작위는 다르니까. 어차피 나는 너에게 네 목표를 위한 도구에 가까웠잖아? 아버지를 이겼다는 상징물, 혹은 트로피. 완전히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을걸?”
라비린은 오드리의 냉정한 말에 크게 상처 입은 자신을 발견하고 몹시 놀라고 말았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 손잡은 사이라는 걸 잊은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울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쌓인 애정과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 방금 그 발언 사과해. 트로피라니? 너는 나뿐만 아니라 너 자신까지도 모욕했어.”
“네 말이 맞아. 내가 실수했어. 미안해.”
오드리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와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가능성이 나타나 너무 흥분했었나 봐.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컸어.”
“알면 됐어. 다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오, 그걸로 끝? 좀 더 혼날 줄 알았는데.”
“내가 부모도 아니고 혼내기는 무슨. 바로 사과했으니까 됐어.”
라비린이 오드리의 실수 따위 자신에겐 별것도 아니었다는 양 허세를 부렸다. 괜히 어깨를 으쓱거리고 코웃음을 쳤다. 분명 마음 숨기는 게 익숙한 사람인데 전신에서 어색함이 줄줄 흘러넘쳤다.
세상에서 허세만큼 꼴 보기 싫은 것도 드물지만, 어째 이런 허세는 귀엽게만 느껴졌다. 오드리는 아직도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라비린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너랑 친구 하길 잘했어. 결혼을 하더라도 분명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겠지.”
“그……. 다,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라비린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이제껏 수없이 많은 데이트를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오드리가 결혼 생활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정략결혼은 서로 이득을 챙기고 아이만 낳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대단히 회의적이고 차가운 입장을 유지하던 사람이었는데.
투덕투덕 핀잔 섞인 말을 나누고,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비밀을 공유하고, 함께 식사하고 쇼핑하며 취향을 알아가는 동안 소복소복 애정이 쌓게 자신만이 아니었다고, 그리 생각하기에 충분한 변화였다.
라비린은 상상 이상으로 상처 입었던 자신의 마음이 오드리의 말 몇 마디에 바로 회복되는 걸 똑똑히 느꼈다. 좀 전까지 진창에 처박혀 있던 기분이 단숨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고, 자신을 보고 웃는 얼굴이 땅에 떨어진 달처럼 빛났다.
결혼을 하더라도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그 별거 아닌 말에 기대가 부풀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마음이 쓰이고 괜한 질투가 났던 모든 일들이, 우정이 깊어 그런 거라고 애써 외면해 왔던 순간들이 선명한 색을 띠고 퐁퐁 솟아났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도 자신의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이 작은 여자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눈앞이 아찔했다.
‘맙소사…….’
본래는 위협할 목적으로 바짝 다가서서 내려다보았던 것이지만, 지금은 조화로 장식한 정수리가 예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남들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남자와 단둘이 있으면서도 무서운 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뻗는 손에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아버지를 보며 연기 참 열정적으로 한다 비웃어왔는데, 그의 모습이 곧 자신의 미래가 되겠구나 싶은 직감이 들었다. 쥐면 터질라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아끼며 웃음 한 자락, 눈물 한 방울에 기분이 오락가락할 게 분명했다.
오드리는 자신에게 아무 관심도 없을 텐데, 이거 너무 손해였다. 한데 그 손해가 아깝거나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이제까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냈지?’
있는 줄도 몰랐던 애정을 자각하고 나니 마음이 둑을 넘으려는 물처럼 술렁거렸다. 모든 감각이 오로지 눈앞의 오드리를 향해 곤두섰다.
조각난 마법등 불빛에 반짝거리는 초록색 머리칼, 얇은 남부식 드레스를 따라 드러난 어깨 라인, 시원한 아카시아 향 안쪽에서 풍기는 샌달우드 향기……. 오드리가 말을 시작하자 그녀의 숨결이 가슴팍을 간질였다.
“그러니까 포모스 얘기까지 꺼내면서 빈정대지 마. 괜히 불안해진다고.”
“알았어. 그쯤이야 못해줄 것도 없지.”
“또, 또, 빈정댄다. 내가 왕비전하와 타우레드 후작부인 앞에서 네 칭찬을 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뺨과 목덜미의 체온이 마구 오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 밤이라서, 장소가 조명이 약한 발코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이런 라비린의 속내를 꿈에도 모르는 오드리는 주먹을 꽉 쥐고 결연히 다짐했다.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유언장과 결혼계약서는 꼭 찾아내야 돼. 너와 나, 둘 다를 위해서.”
“…….”
“아, 왜 아까부터 그렇게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있어? 아까는 작위 있는 아내여도 괜찮다며? 거짓말이었어?”
“그럴 리가. 지금 나는 약혼과 결혼에 대한 네 뜻이 변하지 않았음에 매우 기뻐하고 있는 중이야. 내 사랑스러운 오드리, 이제 밀회는 그만두고 헨젤 백작님을 좀 찾으러 가볼까? 내 소꿉친구의 말대로, 수확 시기를 놓친 과일은 떨어져 썩을 뿐이니까.”
능글맞은 태도로 손끝에 입을 맞추는 라비린을 보는 오드리의 얼굴에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사랑스러운 오드리 따위의 말은 이미 숱하게 들어서 이젠 나름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이번엔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초콜릿색 눈동자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듯했다.
“오드리, 오늘은 손이 따뜻하네. 보내는 의사마다 별일 아니라고만 하더니, 무슨 치료를 받은 거야?”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력의 문제였어. 셰비언의 도움을 받았지.”
“아……. 그 마법사.”
라비린은 오드리를 향해 농도 짙은 시선을 보내던 셰비언을 떠올리고 그만 마음이 불편해졌다. 겨울 요정을 연상시키는 생김새도 생김새지만, 쓸데없을 정도로 능력이 좋은 마법사라는 게 더 마음에 안 드는 작자였다.
‘멀리하라고 해 봤자 눈곱만큼도 안 듣겠지. 다른 곳으로 가면 큰일 날 마법사니…….’
워커가 오드리 아래에 있는 건 이해가 됐다. 돈 잡아먹는 귀신인 강철새를 진심으로 지원하는 투자자를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셰비언의 이유는 좀처럼 짐작이 안 됐다. 비마법, 아니 기계와 마법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고 밝히긴 했지만, 그의 능력이라면 굳이 로렐라이가 아니라 어딜 가도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원하는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자식은 아무리 봐도 오드리 때문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알면 멀리하기는커녕 이용해야겠다고 하겠지. 젠장!’
라비린은 셰비언에 대한 험담을 줄줄이 늘어놓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오드리는 자신을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질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원하는 대로 하라 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보내는 의사는 그렇게 귀찮아했으면서, 어떻게 마법사의 진찰을 받을 생각을 했어? 마력 문제 때문에 체온이 떨어질 수도 있다니……. 난 그런 증상은 들어본 적도 없어.”
“셰비언은 공간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야. 내가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어.”
“……공간이라니 대단하긴 한데, 넌 마법사가 아니잖아.”
오드리는 한숨을 삼켰다. 안 그래도 묘하게 셰비언을 경계하는 라비린인데, 그에게 셰비언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와 마력의 계통에 대한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생각하니 그저 까마득했다. 회피라는 걸 알지만 설명을 미룰 수 있다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싶었다.
“이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호된 감기를 앓았어.”
“환절기에 감기로 앓는 건 흔한 일이야. 게다가 너는 만탈락에서 오래 살다가 날씨 변화가 큰 브란젤에 왔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 말은 왜 꺼내?”
“어머니도 환절기마다 앓았어. 어렸을 적에는 가벼운 감기였고, 좀 자라서는 몸살을 앓았지. 우리 남매를 낳은 뒤로는 몸이 급격히 약해졌고, 몸살감기가 찾아오면 한 달은 족히 누워 있었어야 했어. 나 역시 강도만 낮았지 어머니와 증세는 비슷했어. 환절기 감기, 고질적인 두통.”
라비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드리의 이름 뒤에 붙은 성이 헨젤인 데다 아침마다 윈디를 타고 강가를 달리는 등 건강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랄리우스가 대대로 단명하기로 유명한 가문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새카만 불안이 몰려왔다. 그는 한 손으로는 오드리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이마의 열을 쟀다. 손도 이마도 적당히 따뜻했지만 그게 오히려 걱정을 부추겼다.
“넌? 너는 괜찮아? 가을 무도회잖아. 아무리 날씨가 거의 바뀌지 않았더라도 환절기인데! 혹시 지금 몸이 따뜻한 게 열이 올라서 그런 거야?”
“치료 받았대도. 마력 균형이 어쩌고저쩌고 설명을 들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나. 사실 치료를 받을 당시에는 이게 될까 싶었는데……. 봐, 이렇게 멀쩡하잖아. 멀쩡하면 그만이지. 두통도 없고, 환절기마다 고질적으로 앓았던 감기도 올 가을엔 없어.”
오드리가 치맛자락을 쥐고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얇은 치맛자락이 붕 떠올랐다 몸에 착 감기며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팔랑거리던 나비가 날개를 접듯 우아했다.
“그럼 랄리우스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단명한 건 그 마력 균형인지 뭔지 하는 문제 때문이었던 거야? 마법사만 있으면 될 일을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게 가문이 무너져 내렸다니…….”
“글쎄, 정말 마력 균형 문제인지는 나도 모르지. 셰비언이 나 말고 다른 랄리우스 가문 사람을 만난 적은 없으니까. 그리고 그새 잊었나 본데, 셰비언은 공간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야. 그런 마법사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게 내 선조들의 죄가 될 순 없을 것 같은데.”
“그도 그렇네.”
라비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오드리의 손을 쥐었다. 걱정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지만 전보다 몸이 좋아진 건 확실하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셰비언 씨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는걸.”
“네가? 왜?”
“내 약혼녀의 건강을 지켜줬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우리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도 그가 멀쩡했으면 좋겠는데.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단명한다는데 걱정이야.”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재수 없게 해? 셰비언이 오래 살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어도 모자랄 판에.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우리 아직 약혼 안 했어. 약혼식은커녕 약혼 선언도 없잖아.”
“오드리, 내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황급히 정원에서 회장으로 돌아왔는지 알아?”
라비린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를 당겼다. 체구가 작은 오드리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라비린은 벅찬 마음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가스트로 녀석이 전해주더라고. 헨젤 백작이 드디어 자식에게 져 주기로 마음먹었으니, 다 익은 과일을 수확할 때를 놓치지 말라고. 장담하는데, 우릴 헨젤 백작님에게 안내할 시종이 이 발코니 바로 앞에서 우리가 나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걸.”
“…….”
“그동안 끔찍하게 더운 브란젤을 휘젓고 다닌 보람이 있어. 이제 국왕전하의 인내심이 언제 닳아빠질지 초조해하지 않아도 돼.”
오드리는 얌전히 라비린에게 안긴 채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대체 언제가 되어야 아버지가 마음을 비우고 약혼을 허락할까 생각해 왔었다. 바쁜 와중에도 몇 번이고 호출 하는 걸 꾸준히 무시하며 기싸움도 했다. 터지기 직전의 둑처럼 갈등만 누적되는 상황이 드디어 끝난다는데,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뻐해야 하는데…….’
감정과 이성은 별개. 그러니 사랑과 결혼도 별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라고 결정한 만큼,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도구였다.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발판이고 활발한 대외활동을 위한 쓸 만한 명패였다.
타우레드의 후계자, 벨키스 경의 약혼녀. 바라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사랑한다, 아가씨의 마음을 원한다,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고백하던 셰비언의 간절한 눈빛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별뿐인 허공이었던 그의 공간과, 서늘하고 차갑던 체온도 함께 떠올랐다. 인간은 결혼을 대체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던 말도.
‘나는 용이 아니야……. 셰비언처럼 살 수는 없어.’
얼음덩이처럼 무거운 팔을 뻗어 라비린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향기를 풍기는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기자들이 어마어마하게 좋아하겠어. 이렇게까지 기삿거리가 끊이질 않는 커플 찾기도 힘들 거 아냐. 이제 남은 게 뭐가 있지? 로렐라이, 데멘사, 어쩌면 어머니 유언장과 결혼계약서 얘기를 밖에 흘려야 할 수도 있고…….”
“감사장이라도 써 보내라고 할까? 우리 덕분에 장사가 엄청 잘될 텐데.”
“농담은.”
“긴장 풀렸지? 가자.”
오드리는 라비린의 손에 이끌려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조금 전과는 쏟아지는 시선의 양이 완전히 달랐다. 시선에도 무게가 있다면 그대로 깔려 죽었겠다 싶었다.
질투. 선망. 경멸. 동경. 미움. 응원. 동정. 호기심.
추종자 무리를 주변에 거느리고 서 있는 라디아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드리는 왜 라디아타의 주변에 카프러스가 없는지 궁금했지만, 달려가 물어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헨젤 백작과 타우레드 후작부부, 거기에 오스미다 왕비까지 한데 모여 라비린과 오드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뜻 봐도 약혼의 합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점점 좁아질수록 어쩐지 숨이 막히고 등에서 땀이 쏟아졌다.
오드리가 막 오스미다 왕비의 앞에 서려는 순간, 헨젤 백작이 나서서 오드리의 팔을 잡아챘다. 온기 없는 회색 눈이 오드리를 거울처럼 비췄다.
“오드리.”
“……아버님.”
“긴 말 않으마. 돌이키고 싶다면 지금뿐이다.”
“저는,”
“이런, 백작님. 인사는 조금 뒤에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라비린이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헨젤 백작이 눈썹을 까닥거리며 불쾌감을 표시하고 오드리가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가슴을 때렸지만, 라비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왕비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그렇군.”
헨젤 백작은 뒤로 물러나며 오스미다 왕비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스미다 왕비는 한없이 다정한 눈길과 손길로 오드리를 챙기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말 몇 마디로 끝나는 약혼 합의라도 왕비가 증인으로 끼어들면 이미 그 자체로 약혼식이나 다름없는 효력을 낸다. 사교계의 전면에 나서지 않은 지 좀 됐다 하더라도 오스미다 왕비가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사양을 물리치고 자꾸 끼어들려 하는 행동이 헨젤 백작의 의심을 샀다. 안 그래도 그녀는 밀리나의 유언장을 공증해 줬던 전적이 있었다.
분명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가시질 않는 불안이 그의 등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