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8. 준비하고 대비하라 (19/62)

chapter 18. 준비하고 대비하라

「“누구나 가슴 속에 괴물 한 마리쯤은 키우며 사는 거잖아?” - 멜브란트 초대 국왕」

길었던 휴가철이 끝났다. 더위를 피해 브란젤을 떠났던 사람들이 속속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은 여전히 뜨거운 데다 건조하기까지 한 브란젤의 날씨에 경악했지만, 그렇다고 매년 당연하게 치러지던 일정들이 미뤄질 수야 없는 일.

보름만 더 있으면 본격적인 사교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가을 무도회가 열릴 예정이었고, 이 달 말엽에는 일 년 중 가장 큰 축제인 수확제가 있었다.

필리아 거리와 시엘라 거리의 상점들이 살론의 최신 유행에 맞춘 새 드레스와 장신구, 인테리어 용품을 내놓고 리즈비아 거리의 극장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새로운 공연을 홍보하는 와중에, 브란젤에서 가장 큰 미술 전시관에서 가을 전시회가 열렸다.

그림에 취미가 있는 귀족을 비롯해 삽화가를 원하는 출판업자와 신문사까지, 예술작품의 주요 수요층이 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쏠리는 전시회였다. 당연히 경력이 일천한 신인부터 나름 이름이 있는 중견까지 나서서 작품을 내걸었다.

봄 전시회에서 쓸 만한 신인이 등장하지 않아 아쉬워했던 사람들은 네이기스의 그림에 주목했다. 구름이 흩뿌려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새빨갛게 한들거리는 양귀비가 보여주는 생명력이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봄, 혹은 여름 - 네이기스 그웬>

본명을 당당하게 걸어놓은 행동도 그림만큼이나 놀라웠다. 가끔 창작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지 못한 귀족 여성이 작품을 내더라도 반드시 가명을 쓰는 것이 그간의 관례였다. 네이기스는 그동안 암묵적으로 지켜지던 룰에 대놓고 침을 뱉은 셈이었다.

평가는 가혹했다. 전시장에 사람을 구름처럼 끌어 모으고 신문의 한쪽 면을 차지할 정도로 높은 주목도만큼이나 날 선 비난과 혹평이 쏟아졌다.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 감각은 촌스러움이 됐고, 화폭에서 요동치는 강렬한 생명력은 기분 나쁘고 불쾌한 무언가가 됐다.

네이기스를 후원한 걸로 모자라 본명은 안 된다며 곤란해했던 전시회장 측에 압력을 넣기까지 한 라디아타에게도 비난이 쏟아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성 화가를 골라 후원하는 괴팍한 행보가 새삼 도마 위에 올랐다.

오드리는 저를 씹고 뜯고 즐기는 신문기사를 재미있는 소설로 소비했지만, 안타깝게도 네이기스에게 그 정도의 배짱은 없었다. 라디아타의 만류도 뿌리치고 본명을 내밀 때의 호기는 어디로 갔는지, 요즘 그녀의 어깨는 아래로 떨어져 좀처럼 올라오질 못했다.

“너무 힘들어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물어뜯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누가 본명을 쓰랬냐. 덕분에 어머니 쓰러지셨다.”

에이쉬는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진 말이었지만, 네이기스의 낯빛은 하얗게 질렸다. 그에 멈추지 않고 벌떡 일어서기까지 하니, 그녀의 앞에 있던 찻잔이 곧 넘어질 듯 덜거덕거렸다.

“괜찮아, 금방 일어나셨어.”

“정말로요?”

“응. 걱정 마라, 지금은 아버지와 서로 멱살이라도 잡을 듯 싸우고 계시니까. 오늘도 여기 직접 오신다는 걸 막느라 아주 진땀 뺐어.”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 네이기스의 표정이 엉망이 됐다. 자존심이 상할 때 더욱 화려하게 치장하는 습관이 있는 메너트가 무도회라도 나갈 듯한 옷차림으로 찾아와 다른 화가들을 내려다보며 경멸 어린 눈빛을 던지는 상상을 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빈 말로도 돈독하다고 할 수는 없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받는 비난을 두고 신경 쓸 것 없다,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다, 아가씨의 그림은 훌륭하다, 격려와 위로 정도는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과연 진심일까 의심스럽긴 해도 힘이 났던 건 사실이었다. 그 사람들이 분노와 모멸감을 참으며 메너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나면, 그들과 네이기스의 관계가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힘들어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데.

네이기스는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걱정이 한낮의 꿈처럼 희미해졌다.

“으……. 오라버니. 앞으로도 어머니 여기 못 오시게 해줘요.”

“걱정 마라, 예술가 혐오증에 걸린 사람은 아버지 한 명으로 족해.”

본래 그웬 백작가는 대대로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형편이 넉넉할 때에는 예술가 여러 명을 후원한 적도 있었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선대 그웬 백작이 가문을 말아먹는 꼴을 똑똑히 목격한 센네페르는 좀 예외였지만 말이다.

센네페르는 메너트가 자식들에게 예술을 가르치는 것조차 싫어했다. 귀족으로서 당연한 교양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숨기질 못했다. 만약 메너트가 가문 내에서의 입지가 약했더라면 그 기본 교양조차 익히지 못하게 했을 게 확실했다.

에이쉬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닮았다. 일찌감치 가문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살론에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그의 관심사는 가문의 번영이나 운영이 아니라 예술에 있었다.

후계자라고 기껏 유학까지 보내며 공부시켰던 에이쉬가 예술가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만으로도 속이 터질 노릇인데, 믿었던 네이기스까지 그림을 그리겠다고 집을 나가버렸으니, 부부사이가 멀쩡할 리 없었다.

센네페르와 메너트는 이 상황의 원인이 상대에게 있다고 여겼다. 센네페르는 메너트의 교육방침을 문제 삼았고, 그때마다 메너트는 다 그웬의 핏줄 탓인 걸 왜 멀쩡한 교육을 핑계 삼느냐고 화를 냈다.

에이쉬는 북부의 서늘함조차 녹여 버릴 듯 싸우던 두 사람을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브란젤로 돌아오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네이기스가 본명으로 그림을 걸면서 싸움이 더 격화됐다.

“아무튼 당분간 어머니 만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가을 무도회에서도……. 잠깐만. 거기 나올 거야? 갈 수는 있어? 옷과 장신구가 필요할 텐데.”

“……모르겠어요.”

네이기스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꾹 다문 입술과 내리깐 눈썹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레이디 타우레드가 원하면 지원해 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역시 좀 망설여져서…….”

“그래도 가고 싶긴 한 거고.”

에이쉬는 그만 이마를 짚었다.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것조차 힘들어하면서 무슨 무도회냐 싶었지만, 자라는 내내 저택에 갇혀 있던 네이기스가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지는 겨우 일 년도 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니 나려던 화도 가라앉았다.

조금만 참으면 아름다운 드레스와 반짝이는 보석을 걸치고 눈부신 샹들리에 아래에서 밤늦게까지 춤추며 놀 수 있다고, 그러니 지금 갑갑한 건 좀 참으라고 어린애를 달래고 또 달랬을 게 뻔했다.

‘후계자인 나한테도 그랬었는데 네이기스한테는 오죽했을까.’

조금 전에도 전시장에서 보고 온 그림이 또 눈앞에 어른거렸다. 새빨간 태양 같고 도려내진 살덩이 같던 양귀비, 그 다음이 보고 싶었다. 후원자인 라디아타가 최선을 다해 네이기스를 지키겠지만, 솔직히 그녀에게 모든 걸 맡기기에는 불안했다.

‘유학이라고 살론으로 나 혼자 도망쳤던 벌을 이렇게 받나…….’

에이쉬의 입가에 쓴 미소가 어렸다. 그는 적당히 놀고먹다가 가문을 물려받은 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려던 인생 계획은 한참 전에 어그러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편하게 살고 싶었으면 그날에 어머니의 손을 막으면 안 되지 않았냐고 쏘아붙이던 막냇동생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대충 살기는 무슨……. 네이기스.”

“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갑자기 비장해진 에이쉬의 기색에 네이기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쉬는 그런 동생의 손을 쥐고 정중하게 손끝에 입을 맞췄다. 난데없는 짓에 놀란 네이기스가 기겁을 하고 손을 빼냈다.

“오라버니, 뭐 하는 짓이에요? 징그러워!”

“동생이 아니라 날 사로잡은 화가의 손에 경의를 표한 거야.”

“네?”

“계속 그려. 어머니나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말고. 타우레드 후작영애만큼이나 사방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순 없지만 집안에서 나오는 압박은 내가 막아줄 수 있으니까.”

네이기스는 멍하니 에이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메너트에게서 뺨을 맞을 뻔한 걸 구해주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믿음직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오라버니, 뭐 잘못 먹었어요? 아픈 건 아니죠?”

“야, 말을 해도 꼭…….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손 아끼고. 나 간다. 안 나와도 돼.”

“배웅해 달래도 안 해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네이기스는 대문까지 쫓아나가 에이쉬를 배웅했다. 그리고 저택의 정원을 가로지르며 그가 입을 맞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톱 가장자리에 붉고 푸른 물감이 배어 지저분해 보이는 손이었다. 따로 고용한 하녀가 무진 애를 쓰고 있긴 한데, 워낙 독한 물감을 쓰는 데다 채 지워지기 전에 또 묻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영 진척이 없었다.

‘날 사로잡은 화가의 손에 경의를 표한 거야.’

이 손이 그려내는 그림이 대체 뭐기에 라디아타는 듣지 않아도 될 욕을 들으며 웃고, 살갑지도 않은 형제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돌아서지 못하는가.

답을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기분에 휩싸인 채 정원을 거의 다 가로질러 저택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페리가 뛰쳐나와 곰살궂게 웃으며 네이기스의 팔짱을 꼈다. 네이기스의 당황은 아랑곳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웬 양, 방금 그 청년은 누구예요? 오라버니? 동생?”

페리는 네이기스와 에이쉬가 응접실에서 말을 나누는 내내 근처를 맴돌며 두 사람을 엿보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나오는 귀족적인 몸놀림에 짓눌려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오라버니예요.”

“어머, 설마 했는데 정말 그웬 공자셨구나. 그웬 양을 걱정해서 찾아온 건가 보죠? 정말 상냥하고 좋은 오라버니네요. 그웬 공자는 예전부터 예술가들과 교류가 많기로 소문이 났던 분이니 그웬 양의 그림에도 좋은 평가를 해주셨겠죠?”

“네에…….”

“그럴 줄 알았어요! 헛소리를 찍찍 해대는 놈들이랑은 다를 줄 알았어요. 내 눈은 틀린 일이 없다니까요!”

페리의 호들갑은 네이기스의 심사를 툭툭 건드렸다. 네이기스는 뾰족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몇 번이고 참으며 미소 지었다. 팔뚝에 닿는 미적지근한 체온이 싫어 슬그머니 팔을 빼려 했지만 페리가 워낙 단단히 잡고 있어 그조차 쉽지 않았다.

‘보티안 씨가 보고 싶어.’

그녀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명 잘했다고, 노력했다고 말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신문에 혹평이 떠들썩하게 실리고 있으니만큼 전시회에 그림을 건 걸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다.

‘설마 내 그림이 마음에 안 드신 걸까? 아니야, 바빠서 아직 못 보신 걸 거야.’

둔해빠진 네이기스도 괴물에 대한 소문은 들어보았다. 덕분에 치안대가 미친 듯이 바쁘다는 얘기도. 스캔들 기사는 아직 뜨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림을 보고 실망해서 발을 끊었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으니, 그녀의 추측은 피올이 괴물 때문에 너무 바쁜 거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네이기스의 추측은 반만 맞았다.

피올은 전시회 첫날에 네이기스의 그림을 보러 갔다. 쪽잠 잘 시간도 없는데 그림 같은 걸 보러 가다니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네이기스의 그림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네이기스의 우려와는 달리 그림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만족했다. 평소의 얌전하고 수줍음 타는 네이기스라곤 믿을 수 없이 강렬한 그림이 그녀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만족하며 보고도 네이기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독하게 바쁘기 때문이었다. 괴물의 출현 빈도가 훅 높아지면서, 잠깐 꽃집에 들러 심부름을 부탁할 여유조차 사치가 됐다. 그저 눈 뜨면 순찰을 돌고 괴물을 잡다가 등을 대고 드러누우면 잠드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신문을 읽었다면 어떻게든 짬을 냈을 텐데, 그럴 틈도 없었다. 지나다니며 흘끗 보는 신문의 1면에는 온통 오드리와 라비린의 스캔들 기사만 떠들썩하니, 피올은 네이기스의 소식을 거의 알지 못했다.

어떻게든 신문을 챙겨 읽는 몇몇 치안대원들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좋은 소식도 아니고 기사 내에 피올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네이기스의 이름은 치안대 내에서 암묵적인 금기어가 됐다.

아무튼 이렇게 일거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아무리 명예로운 치안대라도 다들 도망갈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때마침 다행인 소식이 들려왔다. 드디어 수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왕궁마법사들이 치안대의 지원 요청에 응했다는 거였다.

괴물의 등장이 마법사의 소행이라는 의심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일부 치안대원은 왕궁마법사의 등장을 반가워하지 않았으나, 수장인 테이란이 밀어붙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괴물은 늘어가고 보건국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리는데 왕궁마법사 정도면 믿을 수 있는 조력자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하도 바빠서 괴물을 만드는 것처럼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유가 아주 그럴듯했다.

비쩍 마르고 곯은 얼굴을 하고 치안대에 지원을 온 왕궁마법사는 뾰족한 가시 같은 시선 가운데에서 지도를 노려보았다. 브란젤의 외곽지대 곳곳에 찍힌 붉은 점은 개수가 많기도 했다.

“이거……. 대충 패턴이 눈에 보이네요.”

“패턴? 외곽에서 주로 나온다는 건 우리도 압니다.”

“눈이 있으면 모를 수가 없지.”

몇몇 치안대원이 왕궁마법사를 향해 조롱과 비웃음을 날렸다.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쑥덕거림에 익숙한 왕궁마법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로 지도를 짚었다.

“마법망이 불안정한 지역에서 주로 발생했어요.”

“……마법망?”

“마법사가 아닌 분들의 눈에는 그냥 우연히 외곽에서 사건이 많이 발생한 걸로 보이겠지만, 마법사의 눈에는 아니에요. 희한할 정도로 지역이 겹치네요.”

왕궁마법사는 브란젤 외곽 구석구석까지 안 가는 곳이 없었다. 아무리 가난한 거리라도 최소한의 상하수도는 깔려 있는 게 당연한 도시가 브란젤이었다.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거리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햇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다닥다닥 어깨를 맞댄 건물들 사이로 넘어지기 딱 좋게 울퉁불퉁한 포석을 깐 길이 미로처럼 이어지는 거리. 터무니없이 싼 가격만큼이나 질 낮은 음식을 파는 식당과 골목마다 자리 잡은 전당포들. 수시로 고장 나는 수도 때문에 구석구석 곰팡이가 피고 악취가 진동하는 건물들.

마법은 끝나지 않았어도 비마법 부분이 고장 나 들어온 물건들을 산처럼 쌓아두고 고쳐서 파는 상점과 그 고객들이 유독 많은 지역들이었다. 경력이 부족한 신입 왕궁마법사를 출장 보내면 열에 아홉은 울며 돌아오는 곳이기도 했고.

“본래 마법망이 엉망인 지역에서는 마법도구의 고장이 잦아요……. 사람도 그렇게 고장 난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만한 현상이죠. 그 괴물, 사람이 변하는 거라면서요? 내부의 마력 균형이 엉망이 되면서 겉가죽까지 무너진 거예요.”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왕궁마법사는 자신을 벌레 보듯 보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아직 보고 못 받았어요? 보건국에 다녀온 동료가 그건 아무리 봐도 사람이 변한 거라고 그랬는데.”

사람을 두고 고장 났다, 라고 표현한 부분이 문제가 된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한 말이었다. 말로는 괴물이다 징그럽다 하면서도, 고인의 유족과 친구들을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그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과 안쓰러움을 버리지 못했던 치안대원들은 저절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보고야 받았지만…….”

“뭐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표정들이 왜 그래요? 고장 났다는 표현이 불편해요? 그럼 뭐라고 그래야 되나. 망가졌다? 이상이 생겼다? 그나마 고장 났다고 하는 게 제일 낫지 않아요?”

어딘지 어긋난 듯한 태도가 대단히 마법사다웠다. 새삼 마법사란 족속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괴팍함을 떠올린 치안대원들이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왕궁마법사는 낯설지도 않은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고 지도로 관심을 돌렸다. 붉은 점 대부분이 마법망이 불안정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아닌 점들도 있었다. 여러 번 반복되지 않고 단발로 끝난 경우들이었다.

‘브란젤의 마법망 특성을 정리해 뒀더라면 자료가 됐을 텐데……. 젠장, 생각만 하고 안 한 게 게 좀 많아야지.’

하도 일에 치여서 개인적인 연구는 저 멀리 미뤄둔 삶이었다. 숙식이 제공되고 월급이 따박따박 잘 나오는 것만 아니면 당장 그만뒀을 텐데. 그녀는 아쉬움에 혀를 차면서도 지도의 한구석을 짚었다.

“아무튼, 다음에 괴물이 우르르 나온다면 이곳일 거예요. 조건이 딱 들어맞는 곳이니까.”

마법망이 유독 불안정한 곳이면서 마법도구 전문 수리점이 몰려 있는 지역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붉은 점이 많지 않다는 게 오히려 신경 쓰였다.

“거긴 외곽이 아닌데…….”

“그럼 외곽 순찰 계속 도시든가요.”

“확신할 수 있습니까? 틀리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그걸 내가 왜 책임져요? 조언해 달래서 조언해 줬으니, 그걸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당신네들 마음인걸. 나 필요 없으면 빨리 얘기해 줘요. 돌아가서 잠이나 좀 자게.”

왕궁마법사를 둘러싸고 있던 치안대원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테이란이 적극적으로 데려온 마법사인데 대놓고 무시할 수야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들 얼굴이 허옇게 뜨도록 과로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확하지도 않은 조언에 따르느라 일을 더 짊어져야 한다니, 기껍다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참을 그렇게 헛된 눈싸움과 치열한 눈치주기의 끝에 그들은 치안대의 전통에 따랐다.

“염병…….”

피올은 끄트머리가 검게 칠해진 종이쪽지를 쥐고 깊이 좌절했다. 유렌이 하도 뽑기를 못 뽑기에 자신이 나선 거였는데 이런 결과물을 얻다니. 놀릴 건수를 잡고 즐거워진 유렌이 마구 구박을 해댔다.

“야, 내 손이나 네 손이나!”

“그래, 놀려라, 놀려. 오늘까지만 놀려라. 네가 이럴 때 아니고서야 언제 날 놀려먹겠냐.”

내가 뽑고 싶어서 뽑았냐, 네놈 전적을 생각해 봐라, 이만한 게 다행이다……. 서로 의미 없는 투덜거림을 나누는 치안대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궁마법사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새삼 악수라도 하자는 건가, 싶어진 치안대원이 순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잠깐 후끈할 거예요.”

“예? 그게 무슨 말……. 으앗!”

불에 덴 듯한 화끈함이 온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기겁을 하고 손을 떼어낸 치안대원이 다급히 제 손을 확인했다. 감각만으로는 시뻘겋게 익어서 물집이 잡혔어야 하는데, 손은 평소와 똑같이 멀쩡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확인해 본 거예요. 고장 날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다행히 괜찮네요.”

치안대원들의 눈에 서늘한 한기가 어렸다. 인간에서 괴물이 되는 과정을 똑똑히 목격한 이도 있는데 거기다 대고 예비 괴물 취급을 했으니 반응이 좋을 리 있을까. 이렇게 분위기가 싸늘해지면 눈치를 좀 볼 만도 한데, 왕궁마법사는 태연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위험한 지역에 가는 건데 다른 분들도 봐드릴게요.”

“아뇨, 됐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왕궁마법사는 나름 호의를 가지고 한 제안이었으나, 다들 끔찍한 벌레라도 보는 듯 그녀의 손을 피했다. 몇 번 더 권해봤지만 이제 그만 가서 자라는 말까지 나오니, 그녀는 머쓱해진 손을 거두고 짐을 챙겨 사무실 건물을 나섰다.

‘숙소 가서 좀 뻗어 있어야지…….’

가을이라는 계절이 믿어지지 않게 폭력적인 햇살이 눈을 찔러댔다. 하늘은 쾌청하고 바람은 건조하니, 비가 올 기미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날씨였다. 까슬하게 메마른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비가 계속 안 와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일해야 하는 거면 진짜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마법은 마법사의 수명을 갉아먹는다.

딱히 연구 결과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한계까지 마법을 사용해 본 마법사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속설이었다. 온몸이 텅 빈 듯한 탈력감에 시달리며 며칠간 자리보전을 하고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별이 반짝이는 경험을 하고 나면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일이 많기로 정평이 난 직업이라지만 요즘 왕궁마법사들이 소화하는 업무량은 도저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무능한 왕궁마법사들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민간의 도움을 받는다며 혜택을 줄여야 한다고 주절대는데, 정말 그랬다간 지금 그나마 붙어 있는 왕궁마법사들이 한꺼번에 사표를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망할 놈들, 지들도 펜 한 번 놀릴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경험을 해 봐야 입을 닥치지. 이 빌어먹을 세상, 콱 망해 버렸으면 좋겠네.”

봄과 비교하면 굵기가 절반으로 줄어버린 손목을 부여잡고 헛소리를 써대는 신문기자들을 욕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뛰어나와 그녀를 붙들었다.

“잠시만 멈춰보시죠.”

“누구시죠?”

“저는 피올 보티안이라고 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아까 하셨던 말씀 때문에 궁금한 게 있어서요.”

“아아……. 피올 보티안 씨.”

피올이 치안대원의 망토를 보여주자 고슴도치처럼 바짝 가시를 세웠던 왕궁마법사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래도 귀찮아하는 기색은 여전하니, 피올은 재빨리 입을 놀렸다.

“괴물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아마도요.”

“그건 무슨 기준으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진지한 피올의 태도에 왕궁마법사의 눈빛도 덩달아 변했다. 치안대원 중 이렇게 진지하게 반응해 준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타고나기를 내부의 마력 균형이 잘 맞춰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어요. 보통은 균형이 안 맞더라도 좀 골골거리면서 그냥저냥 잘 사는데, 건강을 해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겉껍데기에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 망가지면 괴물이 되는 거예요.”

피올은 희생자들의 공통점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괴물이 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병을 갖고 있었다. 사소하게는 일 년 내내 코를 훌쩍거렸던 사람부터, 크게는 환절기마다 쓰러져 며칠을 내리 앓았던 사람도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마법사가 아닌 사람의 몸에도 마력은 흐르고, 마력이 있는 이상 마법도구에 둘러싸여 살면서 마법망의 영향력에서 아주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요. 그 마법망이 불안정한 지역에서 마력이 엉망진창으로 꼬이다 못해 겉모습마저 변형된 인간의 시체가 발견됐으니, 마력 균형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죠.”

“그럼 타고난 마력 균형이 안 좋은 사람을 위험지역에서 대피시키면 괴물이 줄어든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왕궁마법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마력 균형이니 뭐니, 인간의 몸에 흐르는 마력의 기원을 모를 일반인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말일 텐데 대뜸 거짓말로 치부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마법망이 불안정한 곳이 브란젤의 특정 몇 군데뿐일까요?”

“……예?”

“불안한 마법망 때문에 마법도구가 자주 고장 나기로 악명 높은 도시는 이미 몇 개나 있지만, 거기선 괴물이 나오지 않고 있죠. 대체 왜일까요?”

피올은 리가 항구에서 괴물이 나왔다는 보고를 받았던 걸 떠올렸다. 브란젤 이외의 지역에서는 최초의 사례였기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더는 발생하지 않고 단발로 끝났다. 괜한 불안을 전파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다들 함구하는 중이었다.

“난 현상을 보고 짐작했을 뿐이에요. 길바닥이 젖은 걸 보고 비가 왔었구나, 하고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죠. 사실은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 양동이로 물을 뿌린 걸 수도 있고, 쌓였던 눈이 녹은 걸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내게 확신이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치안대 사무실을 나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

“보티안 씨 말대로, 마력 균형이 나쁜 사람을 지역에서 대피시키면 좀 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모르는 상황에서 그건 그냥 임시방편에 불과해요.”

“그 원인은 언제가 되어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너무 바빠서 몸을 혹사하고 있는 건 알겠지만, 웬만하면 빨리 알아내주면 좋겠는데.”

“시간이 아니라 사례가 필요해요. 이만큼 알아본 것도 사례가 나름대로 쌓여 있었기 때문인걸요.”

피올의 낯이 싸늘하게 굳었다. 사례가 더 필요하다는 말은 희생자가 더 필요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사람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야기책 속의 기사나 할 법한 말을 하시네요. 놀랍게도.”

“기사가 아니라 사람이라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대화를 나누는 상대의 이름 정도는 물어보는 게 보통인데.”

왕궁마법사가 피식 웃으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안 그래도 비쩍 말라 음침한 인상이었는데 후드의 그늘이 더해지자 그녀는 마치 이야기책 속의 마녀처럼 보였다. 손가락뼈가 도드라진 손이 딱딱하게 굳은 피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사례도 시간도 줄이면서 원인을 알아내려면 인원이라도 늘려야 하는데, 지금 왕궁마법사들 대부분이 오늘내일하는 상태라서요. 보티안 씨의 걱정은 알겠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 보긴 할게요, 사람은 숫자가 아니니까.”

노골적인 비웃음은 아니어도 빈정거린다고 여기기엔 충분한 말투였다. 피올은 어깨에 닿은 마른 손을 쳐 내고 불쾌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게 정말로 불만이었으면 아까 자기 소개할 때 얘기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세상만사가 다 귀찮은 사람처럼 덜렁 왕궁마법사입니다, 소리만 해놓고 이제와 왜 날 못된 사람으로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못된 사람이라고 했나요? 그저, 사람으로 보기 힘든 겉모습을 가진 괴물에게 어떻게 그렇게 연민을 가질 수 있는가 의아했을 뿐인데.”

“난 오히려 그렇게 냉정한 당신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은 한때 사람이었고, 당연히 가족도 이웃도 있었는데 그렇게 차갑게 셈할 수 있다는 게. 동네를 떠돌아다니던 개의 시체를 봐도 그보단 연민을 가질 겁니다.”

“아하……. 개로 비유하니까 알겠네요. 어쩐지, 아까 반응이 이상하다 했어. 다들 내가 불쌍한 희생자를 괴물 취급하면서 머릿수로 세어서 기분이 나빴던 거구나?”

왕궁마법사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붉은색과 금색이 뒤섞여 지저분해 보이는 머리카락이 후드 밖으로 삐져나와 흔들거렸다. 그녀는 한참이나 웃고 나서야 피올에게 형식적인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내가 좀 이상하죠? 동료들한테도 미쳤단 말 많이 들어요.”

“…….”

“미친 마법사가 말 한 마디 보태자면……. 보티안 씨, 괴물에게 연민 가지지 마요. 그 사람들은 괴물로 변이하기 시작한 순간에 이미 죽은 거니까. 남은 몸뚱이는 그냥 마력에 지배당한 시체일 뿐이에요.”

“당신…….”

“지금이야 깃들어 있는 육체를 살해하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근처에 있는 타인을 공격할걸요? 치안대에도 마법사 있죠? 굳이 왕궁마법사한테 지원 요청을 한 거 보면 실력이 별로인가 본데, 그래도 나랑 비슷한 생각은 하고 있을 거예요.”

“당신, 이름이 뭡니까?”

“이제 이름 알아서 뭐 하게요? 명예로우신 치안대원께 트집잡히긴 싫으니까 안 가르쳐 드릴 거예요. 또 제 얼굴 보기도 싫으실 테니 다음번엔 다른 마법사를 보내드리죠. 그럼 이만.”

왕궁마법사는 헤실헤실 웃으며 뒤돌아서더니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내달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피올은 그 뒷모습을 보며 당장이라도 쫓아가 뒷덜미를 움켜쥐고 싶은 걸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악다문 입술 사이로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났다.

“여자만 아니었어도…….”

“왕궁마법사의 거의 대부분이 여잔데 뭔 여자만 아니었어도야. 왕궁마법사들 태반이 저 꼴인데. 지들만 아는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으면서 결론은 안 내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게 쟤들 특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뒤늦게 나와 왕궁마법사와 피올 사이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렌이 피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했다. 피올보다 훨씬 빨리 치안대에 들어온 유렌은 왕궁마법사들과 협업을 진행해 본 경험이 있었다.

“……진짜 다 저 모양이라고?”

“그렇다니까. 동료들한테도 미쳤단 소리를 듣는다니 저 여자가 좀 심한 축에 속하나 보다, 싶을 텐데 절대 아니야. 나는 셰비언이랑 워커를 보면서 마법사라고 다 미친 건 아니었구나 싶었다니까.”

“정신 상태가 어떤지는 상관없으니까 대책이나 빨리 내놓았음 좋겠는데.”

“나중에 서면으로 통보해 주면 더 좋지. 얼굴 안 봐도 되고……. 어휴, 꿈이다 꿈. 야, 나갈 준비나 하자.”

그러고 보니 본래 나가야 하는 순찰 시간이 이때이긴 했다. 정해진 코스 외에도 왕궁마법사가 지목한 곳도 가야 했고 말이다. 잔뜩 구겨진 피올의 미간에 화 대신 한숨이 차올랐다.

“이번엔 시체 안 봤으면 좋겠는데.”

“나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하루만이라도 좀 편해봤으면…….”

두 사람의 소박한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늘 다니던 순찰길은 무사히 넘겼지만, 왕궁마법사가 지정해 준 골목 입구에서 문제가 생겼다.

고장 나 내버려진 마법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좁은 골목, 햇볕 한 줌 없어도 바삭바삭하고 건조한 공기 사이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피올과 유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코를 킁킁거리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망했어.”

“빌어먹을 왕궁마법사, 주제에 능력은 좋네. 어떻게 이렇게 딱 집었지?”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 왕궁마법사 해먹고 있겠지. 젠장, 그래도 짜증나긴 한다. 네가 제비만 잘 뽑았어도 굳이 시체 안 봐도 됐을 텐데…….”

“아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두 사람은 어깨를 짓누르는 짙은 피로를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변이를 시작하면 생포는 그른 얘기가 된다는 걸 뻔히 알다보니 굳이 뛰어서 체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까발리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되는 거지?”

“수확제가 끝날 때까지는 어림도 없다잖아. 젠장, 아직도 한 달은 족히 남았어. 미친 거 아니야?”

아직 원인도 해결 방법도 모르는데 괜한 불안을 부추기고 싶지 않은 왕실은 치안대에 함구령을 내렸고, 가을 무도회와 수확제를 앞두고 장사에 집중하고 싶은 상인들은 함구령에 기꺼이 협조했다. 가족이 괴물이 되어 죽었다는 소문을 내기 싫은 유족과 나쁜 소문이 싫은 이웃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정도로 소문이 퍼진 상태인데 억지로 입을 막고 있으니 쓸데없는 쪽에 쏟는 힘만 늘고 있었다.

“인원 보충이 필요한데, 안 해주려나?”

“치안대 말고 경비대 애들을 늘려야 돼. 만날 고생만 하고 받는 게 없으니까 애들이 이를 갈다가 계속 탈출하잖아. 덕분에 걔들이 하던 일 우리가 다 떠맡고.”

“……경비대 같은 게 있었어?”

“몰랐냐……. 딴 곳은 몰라도 브란젤에는 있었어, 그런 게. 치안대가 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진 않아도 일은 열심히 해서 데리고 있는 애들. 옛날엔 걔들이 순찰 절반은 다 돌아줬는데 요즘엔 그런 거 없이 다 우리 몫이잖아. 아이고, 죽겠다.”

“혹시 그거 예전의 나 같은 거 아냐? 견습생들?”

“크흠, 흠, 흠.”

“에라이, 망할 인간아.”

두 사람은 아웅다웅 투덕대면서도 먹잇감을 찾는 개라도 된 양 코를 자극하는 피비린내를 따라 걸었다. 바싹 마른 공기 사이로 습기가 섞이기 시작하면서 피비린내도 점점 더 강해졌다. 얼마 안 가 울퉁불퉁한 포석 사이로 흐르는 시커먼 핏물을 발견했다.

유렌은 손가락에 핏물을 묻혀 문질러 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는 등 상태를 확인했다. 색은 시커멓고 온기 없이 싸늘한 피인데도 조금도 굳지 않은 게, 일반적인 인간의 피라기엔 몹시 수상했다. 괴물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틀림없었다.

“색은 이래도 썩은 내는 안 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난 요새 검은 피를 하도 많이 봐서 이제 잉크병에 담긴 잉크도 핏물로 보여.”

“네가 그런 말을 해서 이젠 나도 그렇게 보이게 생겼네. 유렌 너는 매사 입이 문제야, 입이.”

“네 상상력이 부족한 걸 왜 날 탓해?”

유렌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피올은 그런 그를 가뿐히 무시하고 핏물을 따라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유렌은 그의 등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가 곧 포기했다. 상대는 신경도 안 쓰는데 혼자 열 내봐야 힘만 빠졌다.

쌓인 불만을 입안에서 구시렁거리며 따라 걷던 그는 덜컥 멈춰선 피올의 등에 코를 부딪치고 울컥 화를 내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사람인지 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꼬락서니의 괴물도 괴물이지만, 그 앞에 버티고 선 사람이 있었다. 정수리 근처에서 높게 묶은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목격자가 있네.”

유렌의 말을 듣고 반응이라도 하는 건지, 움직임이 없던 괴물이 비늘 돋은 손으로 갑자기 바닥을 긁어댔다. 다리는 문드러져 형체가 없고 몸뚱이는 뱀과 다를 바 없이 변한 상태라 배를 끌며 앞으로 기어오는데, 눈은 허옇고 코는 납작해진 데다 얼굴 전체에 비늘이 돋아 도저히 사람같지가 않았다.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팔도 시시각각 상태가 나빠졌다. 손가락이 뭉그러지고 팔 전체가 쪼그라들었다. 괴물은 더 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꿈틀대며 몸을 펄떡였다. 본래는 인간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인 혐오가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올랐다.

괴물이 입을 벌렸다. 귀가 있던 곳까지 커다랗게 벌어진 입안에서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끼에에엑!”

비명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 괴물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냅다 몸을 날려 목격자의 정강이를 콱 물어버렸다. 커다란 입안에 목격자의 정강이가 거의 다 들어갔다.

그 순간, 피올과 유렌은 생각할 틈도 없이 검을 뽑았다. 피올의 검은 괴물의 목을 갈랐고, 유렌의 검은 괴물의 심장 근처를 꿰뚫었다.

피올은 그때까지도 목격자의 정강이를 물고 있는 머리통을 걷어차 떼어냈다. 검은 핏물이 솟구쳐 벽과 바닥을 더럽혔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들러붙은 머리통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벽에 부딪치고서야 멈췄다. 신선한 피비린내가 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조금만 더 지나면 근처에 있는 타인을 공격할걸요?’

왕궁마법사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고작 한나절 만에 예상이 현실이 될 거라고는 그녀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괴물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동안 발생할지도 모를 부상자, 혹은 사망자의 숫자를 생각하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보다시피 신발이 이래서.”

목격자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긴 가죽 부츠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괴물에 온통 신경을 쓰고 있던 피올과 유렌은 생각지도 못한 가느다랗고 높은 목소리에 놀라 목격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두 배로 놀라고 말았다.

“……숙녀분이셨군요?”

자유분방하게 목깃을 풀어헤치고 팔을 걷은 셔츠, 대충 구색만 갖춰 걸친 조끼, 달라붙는 바지와 긴 가죽 부츠, 그리고 허리에 찬 빈 검대. 용병이라고 하기도 뭐 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 한 기묘한 차림이었다.

하여간 수상쩍었다. 그 차림을 한 사람이 여자, 그것도 꿀색 피부의 나랍인이니만큼 더더욱. 나랍 출신 여자 용병들의 솜씨를 일찍이 경험해 본 바 있는 피올의 경계심은 최대치로 올라갔다. 상대가 아무리 절세미인이라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이 있으십니까?”

“와, 나 지금 범인 취급당하는 건가? 인간도 아니고 괴물 시체 옆에서?”

“괴물의 발생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치안대 사무실로 모시기 전에 협조해 주시죠.”

“나 참…….”

지나치게 익은 과일은 물러 터져 땅으로 떨어지고, 구름은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모든 걸 집어삼킬 듯 밀려든 파도라도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샤를레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란 그런 거였다. 모두에게 공평하며 감히 피할 수 없는 일련의 흐름, 혹은 이치.

그런데 인간들은 자연스러움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세상의 만물이 모두 자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종족을 위협하는 ‘자연스러운 것’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을 정도.

하지만 일단 지금은 감탄하거나 내뺄 때가 아니라 협조할 때였다. 함께 어울려 사는 인간답게 말이다.

“이거면 되나, 치안대원님들?”

샤를레아는 품에서 로렐라이의 사원임을 증명하는 패를 꺼내 내밀었다. 피올이 패에 달린 태엽을 돌리자 안쪽의 톱니바퀴들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에 맞춰 겉에 조각돼 있던 부조가 움직이니, 오므리고 있던 꽃이 피고 웅크리고 있던 용이 날개를 펼쳤다. 과연 복제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패다운 정교함이고 섬세함이었다.

“진품이군요. 성함이?”

“이름은 샤를레아, 나랍 출신 용병, 세피아 항구에서 일거리를 구해보려다가 브란젤에 주저앉아 로렐라이에서 마법사들의 호위를 맡고 있지. 지금은 계속 맡고 있던 일이 끝나서 브란젤 관광이나 다니고 있지만.”

나랍인의 외형을 하고 있는 샤를레아는 차림마저 특이한 탓에 숱하게 많은 검문을 당했다. 검을 차고 있으나 안 차고 있으나 마찬가지였던지라, 신상명세를 읊는 데에는 아주 도가 텄다. 그래도 로렐라이의 패가 생기고 난 뒤에는 예전에 비해 검문 시간이 절반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피올은 줄줄이 신상을 읊는 샤를레아를 향한 의심의 눈길을 좀처럼 거두질 못했다. 로렐라이에서 마법사에게 호위를 붙였다는 말도 처음 들어보거니와, 브란젤 관광을 다닌다면서 이런 구석에는 왜 왔단 말인가. 외곽은 아니라도 충분히 어둡고 더럽고 음침한 곳인데.

“멜브란트어를 굉장히 잘하시는군요……. 아무튼, 제대로 된 관광을 하려거든 리즈비아 거리나 필리아 거리를 가시죠. 용병답게 도박을 하고 싶거든 호가르 거리를 가시고.”

“하하하……. 그런 번듯한 길이야 호위하는 동안 이미 실컷 다녔지.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소문의 괴물이었어. 설마 정말로 만나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샤를레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괴물의 시체 쪽으로 돌아갔다. 괴물 시체 이곳저곳을 찔러보며 상태를 분석하던 유렌이 슬그머니 몸으로 시체를 가렸다.

“이런, 이렇게 흉한 걸 뭐 하러 보려고 그래? 눈에도 담지 말고 입에도 담지 마. 무슨 뜻인지 알지?”

반말은 둘째치고라도, 사람 좋게 웃으면서도 칼자루를 쥔 손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없던 눈치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샤를레아는 슬쩍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채웠으니 이제 됐어. 어디 가서 절대 말 안 할 테니 일 열심히 하라고.”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모처럼 잡은 직장은 물론이고 용병협회에까지 치안대가 들이닥칠 줄 알아. 죄목은 뭐든 갖다 붙일 수 있어.”

“알았어, 알았다니까.”

샤를레아는 피올이 내민 패를 낚아채 쥐고 잽싸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수상쩍다는 표정을 감출 생각도 없는 사람들 앞에 계속 서 있어봐야 의심밖에 받을 게 없었다.

햇볕 한줌 드는 것도 어려운 좁은 골목을 벗어나 조금 넓은 길로 나와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몇몇 눈썰미 좋은 사람들이 피 묻은 부츠에 시선을 주었지만, 샤를레아는 그깟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당당히 걸었다.

그리고 서점에 들러 브란젤의 지도책을 샀다. 치안대나 왕궁마법사들이 쓰는 것만큼 정교한 건 아니나, 브란젤의 대략적인 지리를 익히고 주요 건물들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가지고 나가지는 않고 계산대 근처에 서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애체를 쓰고 신문을 읽던 점원이 슬쩍 다가왔다.

“일자리 구하는 거야?”

“아니. 그냥 보는 거야. 아직 익히지 못한 길이 있어서.”

“그래? 내가 알려줄까? 내가 브란젤 토박이라서 말이야, 모르는 길이 없다고.”

“귀찮으니까 꺼져.”

“아니, 빼지 말고. 지도책으로 길을 익히겠다니 말이 돼? 직접 부딪쳐 보거나 안내자의 도움을 받는 게 제일 빨라.”

꺼지라고 했는데도 옆에 붙어 종알대는 게 몹시 짜증났다. 샤를레아는 보던 지도책을 덮고 점원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보기 드문 미인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친 점원의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기름먹인 부츠에 정강이를 걷어차이기 직전까지만.

“억!”

고급스러운 흑단으로 끝을 마무리한 애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샤를레아의 발길질을 버티지 못하고 넘어진 점원은 애지중지하던 애체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정강이를 붙들고 신음을 흘렸다.

“으윽…….”

“귓구멍이 막혔나, 말을 못 알아들어. 주인장, 여기는 점원을 이따위로 관리하나? 손님에게 껄떡대는 놈을 고용해?”

“언젠간 저렇게 될 줄 알긴 했소만……. 교훈을 거창하게 얻는군. 야, 인마! 네놈이 구르는 건 구르는 거고, 책은 건드리지 마라! 하여간 멍청해 빠진 놈, 포모스도 걷어차고 갈 놈 같으니!”

주인은 점원보다 좀 더 현명했다. 그는 샤를레아의 빈 검대가 괜한 장식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고,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대신 점원을 탓했다.

시원하게 정강이도 걷어찼겠다, 샤를레아는 주인에게 혼나는 점원에 대해서는 금방 관심을 거뒀다. 그녀는 지도책을 덮고 계산대 근처에 잔뜩 꽂힌 잡지들에 눈을 돌렸다. 낯익은 사람의 초상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레이디 헨젤…….’

예전에는 오드리가 그렇게 유명인인지 알지 못했다. 사방팔방 신문이며 잡지에 계속 기사가 나도 관심이 없는데 알 리가 있나. 하지만 동족으로 착각할 만큼 순수한 마력을 접하고 나니 새삼 눈이 뜨였는지, 스치는 곳마다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한 권 빼내서 펼치자마자 오드리와 라비린의 약혼을 기정사실화하는 기사가 나왔다. 클로드가 인터뷰를 통해 헨젤 백작가에 청혼서에 넣었다는 걸 공개적으로 밝혔는데, 헨젤 백작은 딱히 불쾌해하거나 거절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더라는 얘기였다.

게다가 그 짧은 사이 두 저택 사이를 심부름꾼이 몇 번이나 오간 게 확인되면서, 이제 남은 건 발표와 약혼식뿐이라고. 곧 있을 가을 무도회에서 함께 등장할 두 사람의 모습이 기대된다는 문장에서 기자의 확신이 느껴졌다.

라비린의 얼굴도 초상이 있었다. 표지를 장식한 오드리보다 더 정성들여 그렸는지, 작은 그림인데도 꽤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때 그 남자로군. 둘이 결혼하나?’

무심결에 한 장 더 넘기려는데, 점원을 혼내는 중이었던 주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더 읽으려면 사서 읽으시오.”

용병에 대한 두려움도 장사에 대한 열정은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샤를레아는 잠시 고민하다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던졌다. 배가 나와 뒤뚱거리던 주인이 날렵한 솜씨로 동전을 잡아채곤 투덜거렸다.

“아니, 돈을 꼭 던져야 하오? 어차피 계산대 옆에 있으면서 거기다 올려놓으면 되는 거 아니오?”

“싫으면 팔지 말든가.”

“누가 안 판다고 했소? 흠흠, 그보다 그 커플에 대한 기사라면 다른 잡지에도 많이 있소만, 거기엔 관심 없소? 요새 신문과 잡지가 그 두 사람 일로 난리도 아니라오.”

“남의 연애에 다들 관심이 많은가 보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소? 뱀과 사자가 결혼한다는데. 얼마나 두 사람의 기사를 충실히 잘 쓰느냐에 따라 판매 부수가 왔다 갔다 하니, 요새 기자들은 밥 먹고 담배 한 대 태울 시간도 없이 바쁘다오.”

지금 신문사와 잡지사들은 가을 무도회의 취재 자리를 두고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 중이었다. 나름 명성이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웠으나, 그게 아닌 쪽에서는 몇 석 남지 않은 자리를 어떻게든 얻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왕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기사의 내용부터 변했다. 처음부터 들어갈 엄두도 못 낸 몇몇 가십지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그 외의 신문과 잡지는 판매 부수 앞에 내던졌던 품위를 허겁지겁 주워 걸쳤다.

서점 주인은 가십을 좋아했다. 그는 샤를레아가 보채지도 않았는데 떠벌떠벌 입을 놀렸다. 정강이를 끌어안고 쓰러져 있던 점원이 비척비척 일어나 그를 원망스럽게 보고 있는 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헨젤 가문의 아가씨가 돈이 많긴 많은가 보더이다. 요즘 잡지마다 그 아가씨가 가진 돈 얘기로 떠들썩하오. 그냥 얻은 돈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도시를 경영해서 번 돈이라는데, 아주 대단하지 않소?”

“영리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지.”

“둘 다가 아니겠소. 이 나이 먹도록 살아보니까, 둘 중 하나만 가지고서는 되다가 말더이다. 영리하기만 한 사람은…….”

“알았어, 주인장. 잘 들었어. 저기 뒤에 점원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 여기 책을 혼자 관리할 생각이 아니라면 좀 달래주는 게 좋겠어.”

더 들어봐야 충고를 가장한 잔소리나 실컷 들을 게 뻔하니, 샤를레아는 냅다 서점 주인의 말을 끊고 그의 등을 떠민 뒤 서점을 빠져나왔다.

“어딜 가나 나이 먹은 치들이 하는 말은 다 엇비슷하다니까.”

괴물 문제에 관심이 없는 셰비언을 두고 어려서 그런 거 아니냐 의심하던 과거는 다 잊어버린 듯한 말이었다. 하긴 남이라면 모를까 내 얼굴에 묻은 때는 잘 안 보이는 게 세상 이치이긴 했다.

그녀는 지도책을 보고 외운 길대로 걷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에 망설임일랑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에 지친 사람들이 모자도 양산도 없이 걷는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샤를레아는 구색 맞추기로 입은 조끼 주머니에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겉으로 봐서는 손의 절반이나 들어갈까 싶은 장식용 주머니인데 손목까지 무난하게 들어갔다. 주머니 안에 넣어둔 마력구슬이 서로 부딪쳐 짤깍짤깍 소리를 냈다.

‘아가씨 얼굴을 보고 나니까 갑자기 조금 미안해지긴 하네. 동족 같은 마력을 가진 사람인데…….’

미안하다 생각하면서도 샤를레아는 푸슬푸슬 웃었다. 로렐라이 브란젤 지점의 창고에서 찾아낸 구슬은 아직도 몇 개나 남아 있었다.

샤를레아가 서점에서 본 신문과 잡지들은 당연히 오드리에게도 흘러들어 갔다. 다이앤이 그녀의 기사가 실린 신문과 잡지를 빠짐없이 챙겨서 오드리에게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차가운 주스를 마시며 팔락팔락 잡지를 넘겼다.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 신문에 비해 한 달에 한번 나오는 잡지는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스캔들을 깊게 파고 있었다.

오드리가 만탈락에서 행정을 본격적으로 맡은 이후 벌인 사업들을 쭉 나열하고 로렐라이가 그 사업들에 어떤 혜택을 입으며 어떻게 성장했는지까지 연결한 기사는 좀 감탄도 했다. 비록 그 모든 게 어리고 철없는 귀족영애의 이상이 아주 운 좋게 현실화되는 과정으로 폄하된 건 별로였지만 말이다.

집요하게 스캔들을 파헤치는 몇몇 기자들은 밀리나와 로샨의 옛 인연까지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들이 함께 어울렸던 짧은 시간들이 과거로부터 캐내져 속속들이 지면에 실렸다. 클로드가 헨젤가에 직접 청혼서를 들고 간 배경에 밀리나와 친했던 로샨이 있음을 짐작하는 기사도 있었다.

“와, 상상력이 대단한데. 소설가 해도 되겠어.”

“나 참……. 그게 재밌으세요?”

빈 주스잔을 채우던 다이앤이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다가 어쩌다 시간이 남으면 일단 잠부터 자던 사람이, 그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신문과 잡지를 정독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재밌지. 본래 실화 기반 소설이 더 재밌는 거야. 타우레드 후작부부 연애담이 아직도 소설로 도는 거 봐.”

“아, 그건 저도 읽어봤어요. 재밌더라고요. 얼마 전엔 헨젤 백작님 얘기가 소재로 나온 것도 봤어요.”

“풉! 쿨럭쿨럭! 뭐? 쿨럭!”

주스잔을 기울이던 오드리는 황당한 말에 연신 기침을 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부모님이 얼마나 사이가 나빴는지는 희미한 옛 기억으로도 선명한데 로맨스 소설의 소재로 나왔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이앤은 오드리의 구겨진 드레스 주름을 펴고 흘러내린 잔머리를 다듬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는 소중한지 몰랐다가, 아내가 떠나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고 후회하는 남자주인공으로 나오시던데요. 죽은 아내와 너무 닮은 딸을 보는 게 괴로워 시골 영지로 보냈지만 결국 보고 싶어져서 나중에 불러들였는데, 딸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해서…….”

“아, 그만. 그만. 내가 잘못했어. 진짜 소설가들의 상상력을 무시했네.”

“재미있긴 했어요. 백작님의 이름을 그대로 쓰진 않았거든요.”

“읽는 것까진 내가 뭐라고 못하겠지만, 앞으로 내 앞에서 그 소설 얘긴 금지야.”

오드리가 몸을 부르르 떨며 거부 의사를 비췄다. 마치 상상만 해도 견디기 힘들다는 것처럼.

다이앤은 오드리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비록 오드리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헨젤 백작이 오드리와 하델을 차별 대우하는 걸 보고 있으면 과거라고 뭐 달랐겠는가 싶었다. 지금도 차별당하는 오드리에게 손위 남자 형제와 줄곧 비교당하며 자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비춰볼 때가 종종 있는데 말이다.

“네. 얘기 안 할게요. 아, 그런데 알신다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계속 그냥 두실 거예요?”

“글쎄……. 어쩔까.”

오드리는 아직 알신다를 어쩔 것인가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계속 헨젤가 주변을 얼쩡거린 걸로 모자라 하델이 내민 손을 덥석 잡기까지 한 게 몹시 괘씸하긴 한데, 단순히 괘씸하다는 것만으로 철퇴를 휘두르기는 마음이 안 좋았다. 일단 지금은 헨젤가를 나간 사람이 아닌가.

“봐주지 마세요.”

“음?”

“알신다는 하녀장이었어요. 당연히 능력도 있고, 인맥도 있고, 야망도 있을 거예요. 언젠가 아가씨는 이 집안을 떠날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을 안 했을 리 없어요. 아가씨는 데뷔탕트를 마친 결혼적령기의 귀족영애잖아요. 지금 스캔들 기사를 보면서 좋아서 춤이라도 추고 있을걸요? 아, 내가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구나!”

다이앤의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그녀는 손위 남자형제와의 경쟁에서 단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음에도 끝내 가업을 이을 수 없었다. 뛰어난 재능과 형제보다 배로 쏟아부었던 노력이 오히려 독이 되어 그녀를 길바닥으로 몰아냈다.

다이앤을 감옥으로 보냈던 독의 대상은 가족이었다. 다이앤을 쓸 만한 도구로 사용하다가 그녀가 감히 주인의 자리를 넘보는 기색을 보인 순간 아 뜨거라, 하고 냅다 내버렸던 사람들. 눈앞에서 닫히던 나무문의 무늬가 아직까지도 종종 꿈에 나타나곤 했다.

알신다가 어떤 마음으로 작은 집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는지, 다이앤은 아주 실감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목표 앞에서 거꾸러진 사람이 갖는 원한을 자신도 품어보았기에.

“아가씨께서 가문에 계실 동안은 아주 얌전할 거예요. 도련님이 실권을 쥐고 자신을 다시 부르기만을 칼을 갈며 기다릴 테죠. 그러다 그날이 오면, 그동안 악에 받쳐 상상해 왔던 것들을 전부 풀어낼 거예요.”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언제가 되든 반드시 올 날이긴 하잖아요. 복수는 눈과 귀를 가리고 목표만을 향해 내달리게 해요. 실패해 쓰러져 울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느껴지게 하고요.”

오드리는 다이앤의 말을 아주 진지하게 들었다. 다이앤은 오드리가 아는 한 그녀의 성공을 가장 바라고 있는 사람이었다. 짓밟힌 꿈, 꺾여 버린 욕망을 그대로 오드리에게 투영하고 오드리의 성공과 실패를 곧 자신의 성공과 실패로 여겼다.

지금도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언젠가 알신다가 다시 헨젤의 하녀장이 되어 오드리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걱정이 바탕이었다. 오드리가 가문을 떠나 어떤 성취를 이루든 출신까지 바꿀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네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잘 알겠다. 잊지 않고 기억해 두마.”

“아가씨, 그럼…….”

“기다리렴, 다이앤. 그토록 간절한 복수심은 반드시 실수를 만들어. 너도 잘 알고 있잖니?”

“네…….”

다이앤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오드리는 다이앤이 누구에게 쓰고 싶어 독을 만들었다가 들켰는지 알고 있었다. 그 재주 비상하니 아깝게 낭비하지 말고 곁에 있으라며 오드리가 직접 손을 잡아준 그날 밤, 스스로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고백했기에.

오드리는 그렇게 알신다의 일을 뒤로 미뤘다. 급한 일이 산처럼 쌓인 지금에 굳이 시간을 쪼개가며 처리하기엔 너무 사소한 일이었다. 대신 그녀는 침울하게 가라앉은 다이앤의 손을 쓰다듬으며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그보다 집필은 잘 되고 있니? 브란젤에 와서도 시중을 계속 들어야 해서 시간이 모자랐을 텐데.”

“아……. 알고 계셨어요?”

“모를 리가 있나. 넌 만탈락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역사가 깊은 약사 집안의 노하우를 전부 꿰고 있는 데다 뛰어난 재능도 있어. 내 시중을 드느라 그냥 묻어버리기엔 아깝지.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정말 잘했어.”

다이앤의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바쁜 틈틈이 몰래 메모를 하며 글을 쓰고 있다는 걸 들킨 게 민망하면서도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거야말로 이디케는 엄두도 못 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지금은 그냥 끄적이는 정도예요……. 다 쓰면 보여드릴게요.”

“약에 관한 한 너한테 그냥은 없다는 걸 알아. 기대하고 있을게.”

오드리가 칭찬을 하면 할수록, 다이앤의 얼굴은 점점 홍당무가 되어갔다. 이디케에게 지기 싫어서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칭찬받을 일이 되다니. 실생활에 쓸 만한 약초 모음집 정도였던 목차가 마음속에서 두 배는 길어졌다.

그때, 릴리가 방에 들어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오드리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미간을 확 찌푸렸다. 새로 뽑은 하녀들을 교육시키고 오드리가 놓은 일들을 떠맡은 상태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사람이 이런 사소한 말을 전하러 오다니.

“오늘은 쉬겠다고 했잖아. 누가 왔기에 그래?”

“그웬 백작부인께서 오셔서 응접실에 모셨습니다. 가지고 오신 물건이 좀 많으십니다.”

릴리는 최대한 사무적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까지 메너트가 오드리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온갖 장신구와 드레스와 귀한 옷감을 싸들고 찾아온 게 어이없을 뿐이었다.

“용무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아마도 그웬 영애와 관련된 일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오드리는 찌푸려진 채 좀처럼 펴지지 않는 미간을 억지로 눌러 폈다. 네이기스가 전시회에 그림을 건 지 이미 며칠이나 지났다. 관련 신문과 잡지에 입에 담지 못할 혹평이 쏟아지는 거야 첫 작품을 낸 여성화가의 통과의례 같은 거니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관점이고, 메너트에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말 한 마디 없이 찾아오다니. 아무리 친척이라도 자신과는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예나 지금이나 참 어지간한 사람이었다.

“하긴, 가을 무도회가 코앞이긴 하지. 그 전에 일을 수습하고 싶은 건가……. 그보다 대체 뭘 얼마나 가져왔기에 릴리 네가 첨언을 하는 거지?”

“일단 보석 장신구 세트가 세 개입니다. 진주, 루비, 초록색 사파이어. 그 보석 세트에 맞춘 모자와 드레스 일습, 특별히 주문한 걸로 보이는 붉은색 비단이 두 필, 상아로 장식한 회중시계, 그리고…….”

“그만. 갑자기 구멍을 채워 넣느라 그웬가의 사정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아주 작정을 하고 오셨군.”

“돌아가시라 할까요?”

“그만한 선물을 들고 오셨는데? 장사꾼이 공짜를 마다하면 쓰나. 기다리시라 그래. 갑자기 오셨으니 어느 정도 기다릴 각오는 하셨겠지.”

릴리는 오드리의 옷차림을 살짝 훑었다. 편안한 실내복에 머리카락은 가볍게 묶어 정돈한 수준인 데다 화장도 하지 않았다. 만탈락에서야 뭔 차림이든 상관없이 다녔다지만 여긴 브란젤이었고, 상대는 메너트였다. 다이앤이 벌써부터 오드리의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뜨거운 차를 내드리겠습니다.”

“찻주전자는 되도록 큰 걸로 내드려. 알겠지? 큰 찻주전자야.”

그렇게 계절에 맞지 않는 뜨거운 차를 받은 메너트의 심경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락 없이 갑자기 찾아온 자신이 잘못한 게 맞긴 한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차 다섯 잔은 족히 나올 법한 찻주전자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심란해졌다.

‘거절이라고 말만 안 했지 거절인가…….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네이기스가 본명으로 그림을 건 이후, 안 그래도 삐걱거리던 그웬 백작부부의 의견이 반으로 갈렸다. 센네페르는 호되게 고생을 해 봐야 집으로 돌아올 테니 내버려 두라고 했지만, 메너트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네이기스의 평판이 떨어지면 자기한테도 타격이 올 텐데, 그런 건 모르고 마냥 나만 탓하지. 그웬가의 사람들이 대대로 예술을 좋아했던 건 생각도 안 하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며 계속 어깃장을 놓던 센네페르를 떠올리자 또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의 방해가 어찌나 심했는지, 어떤 고용인도 그녀의 편지를 전하려 들지 않았다. 선물더미를 짊어지고 도둑처럼 헨젤가에 들이닥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져온 선물은 메너트가 네이기스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들의 일부였다. 고르고 골라 마련했던 것들을 제대로 쓸지 의심스러운 조카에게 덥석 주려니 배알이 뒤틀리긴 하지만, 딸의 평판에 흠이 가는 걸 그냥 두고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어쩌자고 딸을 낳아서.’

연둣빛 찻물에 잠긴 뱀의 문양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약간 서늘하게 맞춰진 실내 온도 때문인지, 뜨거운 차도 나름 괜찮게 느껴졌다.

메너트는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한숨을 찻물에 담아 삼켰다. 타우레드 후작부인의 명의로 날아온 청혼서를 받았을 때, 그녀는 북부의 휴가지에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라디아타의 치마폭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 네이기스를 데려올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에 받은 청혼서였다.

그 순간, 그녀는 오드리를 이용해 라디아타를 압박할 생각을 했다. 타우레드가 정말 오드리를 원한다면, 라디아타는 헨젤 백작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신의 요구를 어느 정도까진 들어줘야 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 혼사가 성사가 되든 안 되든, 그걸로 네이기스를 빼내오면 되겠다고.

‘청혼서를 받자마자 브란젤로 돌아왔어야 하는데. 에이쉬 녀석만 아니었어도…….’

에이쉬는 당장 브란젤로 돌아가려던 메너트를 막아섰다. 지금 브란젤은 유례없는 폭염인 데다 수도가 끊겨서 물을 배급받아 써야 하고, 곳곳에서 강도까지 날뛰고 있다는데 어딜 가냐며. 어차피 타우레드에서도 당장 반응이 오길 기대하진 않았을 테니 조금만 사태가 진정되면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녀를 설득했다.

당장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오랫동안 함께 있지 못한 어머니와 형제들의 방해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센네페르와 고성을 지르며 싸우고 돌아와 잔뜩 골을 내고 앉아 있으면 산책을 가자 손을 잡아끌며 기분을 풀어주는 장남이 마냥 예뻤다.

네이기스의 가출 사건 이후로 내내 경직돼 있던 모자관계는 빠르게 회복됐다. 메너트는 다 큰 장남과 보내는 다정한 시간을 꿈처럼 즐겼다. 그러나 그 시간의 대가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타우레드 후작은 결례를 무릅쓰고 직접 헨젤가에 청혼서를 넣었고 오드리와 라비린은 보란 듯 데이트를 하며 기자들을 끌고 다녔다. 메너트가 쥐고 있던 청혼서는 그냥 종이쪼가리가 됐다.

어디 그뿐일까. 그녀가 허망하게 날아간 기회에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네이기스는 무려 본명으로 전시회에 그림을 걸었고, 절대 타우레드를 용납할 것 같지 않던 헨젤 백작은 약혼을 확실시하는 언론에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요즘 에이쉬는 퍽 노골적인 태도로 네이기스를 싸고돌았다. 어떻게든 네이기스가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하려고 애쓰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막내인 드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드케도 그에 협조하고 있는 것 같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동생을 아끼면 안 된다는 걸 슬슬 알아야 할 때가 됐는데.’

그런 에이쉬의 태도가 못마땅하다가도,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아끼는 걸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에이쉬 때문에 기회를 날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적당한 수준에서만 유지해 주면 바랄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흘렀다. 커다란 찻주전자에 담긴 차가 절반은 족히 비고, 슬슬 등이 뻐근해졌다. 서향으로 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점점 제 구역을 늘렸다.

메너트가 이러다 응접실에 앉아 노을을 보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하기 시작했을 무렵, 드디어 단장을 마친 오드리가 응접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남부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작은 몸을 얇고 팔랑거리는 푸른 천이 여유롭게 감싸고, 가슴 아랫부분에 금사로 수를 놓은 장식끈을 묶은 형태였다. 머리를 정교하게 틀어 올려 훤히 드러낸 목덜미가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화장은 아주 옅었다.

메너트는 오드리의 행색을 보자마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남부식 드레스는 중부식에 비해 절반의 시간이면 입을 수 있었고, 아무리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틀어 올렸대도 이 큰 찻주전자를 절반이나 비울 정도로 오래 걸리는 건 말이 안 됐다. 일부러 기다리게 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요즘 많이 바쁜 것 같던데, 내가 괜히 찾아와서 쉬지도 못하게 했나 보군요.”

“고모님이야말로 많이 야위셨어요. 휴가는 잘 보내셨나요? 셰비언 성벽이 그렇게 대단하다는데 얘기 좀 해주세요.”

늦었다 타박하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살갑게 웃으며 말을 붙이는 게 어찌나 얄미운지. 메너트는 한 마디 더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이미 타우레드 저택은 메너트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 휴가 중에 청혼서를 보내놓은 주제에 답이 너무 느렸다며 꼬투리를 잡는 꼬락서니가 어이없긴 했지만, 오드리에게 하는 것처럼 멋대로 쳐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 가을 사교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때 보자고 이를 악물고 차선을 택할 밖에. 하도 참고 참아서 속에서 불이 날 것 같긴 해도, 지금 매달려 볼 사람은 오드리뿐이었다.

“조카님, 곧 가을 무도회인 건 알고 있죠? 준비는 잘되고 있나요?”

“그럼요. 가을이라고 하기엔 날씨가 굉장히 여름 같지만 말이에요.”

“어쩌겠어요, 하랄의 뜻인걸. 가끔은 이런 해도 있는 거죠. 준비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에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메너트는 이상하게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오드리를 만나거든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해야지, 많은 생각을 해뒀는데 혀뿌리가 굳기라도 한 양 움직이질 않았다.

오드리가 뭔가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편안히 앉아 차를 마시고 다과를 먹으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한기가 등줄기를 식히고 심장을 죄었다. 마주친 시선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눈가 근육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그런 메너트의 모습은 오드리에게도 좀 이상하게 보였다. 안 그래도 처음 봤을 때부터 낯빛이 안 좋기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 싶었는데, 지금은 아주 새파랗게 질려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고모님, 지금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

“고모님?”

오드리가 말을 건네보았지만, 메너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하얗게 분을 바른 눈 밑이 검게 물들고, 찻잔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대로 뒀다간 그대로 드레스에 차를 엎지를 것 같았다.

하녀를 시켜도 되겠지만, 오드리는 직접 몸을 일으켜 메너트의 손을 감싸 쥐고 찻잔을 거뒀다. 온도조절마법이 걸린 찻주전자에서 따라낸 찻물은 아직도 흰 김이 몽글몽글하게 올라왔다.

“의사를 불러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난 정말 괜찮아…….”

“제가 보기에는 전혀 괜찮지 않은데요.”

“괜찮으니까 의사는 부르지 말아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뭘 어쩌겠나. 곁에 선 다이앤도 아무 말 않으니, 오드리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너트는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오드리가 손을 잡아준 순간, 차갑고 상쾌한 바람이 몸을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오그라들 것만 같던 심장도 괜찮아졌고, 이상하게 등을 식히던 한기도 사라졌다.

오드리가 내려놓은 찻잔을 다시 쥐는 척, 슬쩍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보았다. 조금 전의 떨림이 무색하게 아주 잘 움직였다. 뜨거운 찻물을 삼키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오드리와 눈을 마주하자 또 심장이 뛰었다. 아까처럼 아프도록 죄는 게 아니라 긴장으로 가득 차 쿵쿵쿵 가슴을 때려댔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에 눈앞이 흐려졌다.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걸 참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조카님, 네이기스를 좀 설득해 줘요.”

어찌나 급했는지, 앞뒤를 모조리 잘라먹고 본론만 덜렁 튀어나왔다. 오드리가 자신을 이상한 사람처럼 바라본다는 걸 알면서도, 메너트는 또 입이 막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쫓겨 몰아치듯 말을 쏟았다.

“내가 찾아가는 걸 거부해요. 그 애를 후원하는 타우레드 영애도 날 만나주지 않고요. 어린 네이기스야 몰라서 그렇다 쳐요. 하지만 알 만큼 아는 타우레드 영애가 그러면 안 되죠.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

“네이기스는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에요. 올해 데뷔탕트를 한 어린애라고요. 집 안에 갇혀 자라는 동안 큰 무도회에서 춤추는 자신을 꿈꾸는 게 인생 최고의 낙이었던 애가 본명으로 그림을 걸게 두다니요.”

희게 질린 안색, 긴장으로 떨리는 입술, 그렁그렁하게 물이 맺히는 눈. 메너트는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오드리는 찻잔을 기울여 얼굴을 가렸다.

“요샌 무서워서 신문과 잡지를 펼 수가 없어요. 안 좋은 얘기만 끊임없이 쏟아지니까……. 암만 좋아하고 재능이 있으면 뭐 해요, 세상이 그렇게 봐주질 않는데. 지금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림도 없어요.”

“…….”

“제 아무리 눈부신 재능과 뜨거운 열정을 가졌더라도 그건 장작이 있어야 타는 불꽃과 같아요. 끊임없이 물을 맞으며 장작이 어떻게 타겠어요. 조카님, 많이 바라지 않아요. 가을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집에 돌아오라고, 딱 그 말만 전해주면 돼요.”

오드리는 같이 그림을 보러 가자고 설득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지금 메너트는 네이기스의 재능을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네이기스가 화가로서의 삶을 견뎌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고, 그때가 되었을 땐 이미 늦었을 거란 불안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

“이대로 계속 평판이 떨어지다간, 젊고 예쁜 시기를 다 놓치고 쭈그렁이 되어서 멍청했던 과거의 자신을 미워하며 재취 자리를 알아보게 될 거예요. 맙소사, 그 애는 정말 내 자랑이었는데!”

“네이기스는 정말로 그림을 좋아하고 재능도 있어요. 어쩌면 그걸 알아주는 남자를 만날지도 모르죠. 그러면 정말 마지막까지 화가로 살 수 있을 거예요.”

메너트의 눈에 노여움이 스쳤다.

“그 피올 보티안인지 뭔지 하는 치안대원을 말하는 건가요?”

“글쎄요. 저는 만약의 가능성을 언급한 건데요. 미래는 알 수 없는 거잖아요, 고모님. 우리가 이렇게 사이좋게 마주앉아 네이기스의 장래 얘기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듯이 말이에요.”

“조카님……. 뻔뻔하기도 하셔라. 그 치안대원에 대한 말이 퍼지는 걸 막고 있는 게 조카님이라는 걸 내가 정말 모를 줄 알고 하는 말인가요?”

메너트는 자신이 없는 사이 네이기스와 피올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교류가 있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여기저기에 말을 뿌렸다.

네이기스는 그저 순진하고 선량한 아이라, 명예로운 치안대원의 문장을 두른 남자의 인사치레 몇 마디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이런 사달이 났다고. 그러니 잘못은 이제 막 저택 밖으로 나온 순진무구한 어린 레이디에게 헛된 바람을 불어넣은 그에게 있노라고.

그러나 라디아타의 압력을 받은 신문과 잡지는 메너트의 말을 지면에 싣지 않았다.

애초 그림 쪽에 말을 얹는 사람치고 라디아타의 후원금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떤 평가를 내려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 스캔들에 대한 말만 하지 말라는데 듣지 않을 이유도 없었기에, 그들은 오로지 그림에 대한 혹평만을 썼다.

따로 흥미로운 스캔들을 파러 다니는 기자들은 오드리와 라비린의 손에 입이 막혔다. 네이기스와 피올의 스캔들 기사를 내지 않아주는 대가로 종종 자신들의 행적을 노출시키거나 가까이에서 간단한 초상을 그릴 수 있게 해주거나 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오드리와 라디아타가 피올이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열심히 막는 건 네이기스가 그림에 대한 혹평은 견뎌도 피올이 휘말리는 건 견디지 못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이기스의 감정을 모르는 메너트에게 두 사람의 행동이 어떻게 비치겠는가. 화가 노릇이나 스캔들이나 귀족영애의 앞날을 막는 건 마찬가진데 한 가지만 열심히 틀어막으니 다른 이유가 있다 생각할 밖에.

“내 입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차라리 퍼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거 아닌가요. 이대로 가을 무도회가 열렸다간 그 애의 일탈이 사교계에 전부 소문날 텐데도!”

“설마 고모님은 네이기스와 치안대원의 스캔들이 신문과 잡지를 달구길 원하셨던 건가요? 그랬다간 그림에 대한 혹평 이상으로 지저분한 얘기가 퍼질지도 모르는데요. 그건 네이기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요.”

“네이기스가 아니라 그 치안대원을 보호한 거면서 말은 좋군요. 그 치안대원은 예전부터 조카님과 매우 친분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만약 조카님이 네이기스를 보호할 의지가 있었으면 진작 그 애를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보냈겠죠.”

“아니요, 고모님. 저는 틀림없이 네이기스를 보호했어요.”

오드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허리를 곧게 폈다. 네이기스가 예전처럼 우물쭈물하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네이기스는 그림 그리는 삶을 원한다고 분명히 의사표시를 한 상태였다. 그러니 그녀의 욕망을 부추기고 후원자와 연결해 준 사람으로서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네이기스는 그림을 원하고, 그를 위해서는 혹평 속에서도 그 애를 지탱해 줄 마음의 기둥이 필요해요.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고모님께는 그럴 의지가 보이질 않으니, 당연히 그렇게 해줄 다른 사람을 보호해야죠. 그게 네이기스를 위한 일이니까.”

“조카님, 난 조카님이 충분히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죠. 아이가 사탕을 원한다고 끝없이 사탕을 물려주는 부모는 없어요. 네이기스가 원하는 것과 그 애를 위하는 건 다른 거라고요.”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왜 메너트와 네이기스의 만남을 막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면을 가진 네이기스가 이렇게 진심과 간절함으로 호소하는 어머니를 직접 보게 되면, 암만 바위처럼 굳었던 결심이라도 흔들릴 게 뻔하니까.

“네이기스는 조카님을 좋아하고 따르는데 그 애에게 왜 자꾸 가시밭길을 권하는 거죠?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제발 내 말만 전해주면 돼요.”

“고모님. 저는 네이기스에게 고모님의 말을 전할 의무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으며, 무엇보다 네이기스는 제 보호 아래에 있지 않아요.”

“조카님…….”

“네이기스의 후원자는 제가 아니라 라디아타예요. 알고 계시잖아요? 저 말고 라디아타를 설득하세요.”

그게 될 일 같으면 조카님에게 오지도 않았어요. 애초 타우레드 영애에게 네이기스를 소개시켜 준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발을 빼나요?

잔뜩 속이 상한 대답이 메너트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또다시 찾아온 압박감이 그녀의 머리를 짓누르고 혀뿌리를 옭아맸다.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이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번뜩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보는 게 힘에 겨웠다.

“고모님께서 가져오신 선물은 용도에 맞게 잘 쓸 테니 걱정 말고 이만 돌아가세요. 다이앤, 직접 안내해 드리렴.”

메너트는 불가해한 공포에 쫓기며 응접실을 나왔다. 심장이 가슴뼈를 부술 듯 뛰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통에 침착하게 걷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응접실을 나오고 복도를 따라 한참이나 걷고 나서야 겨우 심장박동이 평소대로 돌아오고 목에 걸려 있던 한숨이 쏟아졌다. 잠깐 새에 땀을 얼마나 쏟았는지, 내의가 죄다 젖어 몸에 불쾌하게 들러붙은 게 느껴졌다.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는데,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와 그녀의 앞에 섰다.

“고모님? 언제 오셨어요?”

“……하델.”

이름을 불린 하델이 활짝 미소 지었다. 공원의 잔디에 쏟아지는 햇살을 그대로 담아둔 듯 화사한 웃음이었다. 메너트는 홀린 듯 하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따스한 온기가 몸에 흘러드는 듯 긴장이 풀렸다.

“휴가는 잘 보내셨어요? 오늘은 누굴 만나러 오셨던 거예요? 아버지? 아니면 누나?”

“곧 가을 무도회니까, 오드리에게 드레스도 좀 챙겨주고 할 겸 잠깐 들렀단다. 그보다, 뉴터가 오늘 집에 있니?”

“아니요. 혹시 아버지를 만나러 오셨다면 헛걸음을 하셨겠구나 싶어서 여쭤봤어요.”

“아하……. 그랬구나. 상냥하기도 하지.”

하델은 자꾸만 머리와 어깨를 쓰다듬는 메너트가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어쩌다 머리를 쓰다듬어도 딱 한 번 정도에 불과했는데, 어째 오늘은 밀가루 반죽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만지작댔다.

“어딜 가는 길이었니?”

“누나를 보려고요. 모처럼 집에서 쉬잖아요. 그보다…….”

하델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 바로 직전, 메너트가 하델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쥐고 몸을 굽혀 귓가에 속삭였다.

“하델, 이 고모가 충고하마. 네 누나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렴.”

“네?”

“저 남쪽지방의 수사슴은 화려한 뿔로 뱀을 꿰어죽이고 마른 겉가죽을 목에 걸고 다닐 수 있을 것도 같아서 하는 말이란다.”

하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메너트가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분명 오드리와 상당한 마찰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는 아프도록 제 어깨를 쥐고 있는 손을 밀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겨울 보리가 자라나는 들판에는 뱀이 몸을 숨길 만한 작은 굴조차 없었나 보군요.”

“하델, 내가 널 아껴서 하는 말이야. 너야말로 헨젤의 후계자니까.”

“예, 제가 바로 헨젤의 후계자지요. 그러니 후계자답게 말하겠습니다. 비록 몰랐다고는 하나 헨젤의 예산에 흠집을 내셨고 알신다를 이용해 정보를 빼내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건, 고모님께서 오랫동안 헨젤에 보여주셨던 지극한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메너트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잘 마무리된 일이고 그러니 더는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델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다니. 언제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환영하던 하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도저히 참아 넘길 수가 없습니다. 고모님, 오드리 헨젤도 헨젤입니다. 제게도 랄리우스의 피가 흐르는 건 마찬가지고요. 같은 피를 나누고 한 지붕 아래에 있는 남매를 멋대로 편 갈라 이간질하셨으니, 당분간은 이 집에 오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델. 네가 몰라서 그런 거란다.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이앤, 고모님을 잘 모셔다 드리도록 해.”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도련님.”

평소 하델을 좋아하지 않는 티를 팍팍 내던 다이앤이 세상에서 제일 공손한 하녀가 되어 깍듯이 대답했다.

하델은 황망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메너트를 무시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몹시 따가웠다. 걸음을 재촉해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집요한 시선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흐아, 힘들었다.”

한숨을 쏟아내며 쓰러지듯 벽에 기댔다. 이런 식으로 냉정하게 말해 본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하필 상대가 메너트였으니, 심력을 쏟아부은 만큼 심장이 뛰었다. 이대로 입을 벌리고 있으면 심장이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델의 뒤를 따라서 모퉁이를 돌아온 알렉스도 그동안 참았던 한숨을 함께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아, 후아, 후아……. 아직까지도 심장이 뛰네. 도련님은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여? 실은 아직도 죽을 것 같아.”

“그래도 진짜 깜짝 놀랐어요. 도련님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니. 꼭 백작님을 뵙는 것 같았어요.”

“으, 그런 말을 듣기엔 좀 민망한데.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 거니까……. 그보다, 빨리 가자. 고모님과 누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야겠어.”

하델은 쑥스러운 칭찬에 뺨을 문지르며 열을 식히곤 씩씩하게 발을 옮겼다. 메너트와 오드리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메너트가 오드리를 대놓고 외부인 취급을 하며 이간질을 시도하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렇게 돼서, 당분간은 못 오실 거예요.”

“이런, 맙소사. 내 어린 동생이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사정을 들은 오드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하델의 뺨을 꼬집었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보아온 조카이니 당연히 제 편을 들을 거라 믿었다가 한 방 먹은 메너트를 생각하니 좀처럼 표정 단속이 안 됐다.

“그런데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고모님이 그런 말을 하신 거예요? 웬만해서는 그렇게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릴 분이 아닌데.”

“네이기스가 전시회에 그림을 냈거든. 알고 있지?”

“아, 네. 잡지를 봤거든요. 전시회에 사람이 그렇게 몰린다죠? 안 그래도 내 눈으로 꼭 확인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누나도 아직 안 갔죠? 나중에 갈 때 나 좀 데려가요.”

“내가 아직 안 보러 간 줄은 어떻게 알았니?”

하델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데려가 달라니까 그 말은 못 들은 척하는 걸 보니 전시회는 또 타우레드 공자와 함께 가겠구나 싶었다. 하여간 나이가 어리다는 건, 그래서 집 안에 계속 갇혀 있어야 한다는 전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

“신문만 읽고 있어도 누나의 지난 일정을 다 알 수 있는데요 뭐. 아, 고모님은 혹시 그것 때문에 오신 거예요? 그림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도록 설득해 달라고?”

“정답. 네이기스를 위해 준비해 두셨을 물건들까지 잔뜩 가져와서 부탁하셨지만 내가 거절해서 기분이 좀 많이 상하셨을 거야. 하지만 어쩌겠니? 간절히 원해서 하는 일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막아?”

“어……. 평이 아주 나쁜데도 계속하게 그냥 둘 거예요? 어쩌면 그게 그웬 영애의 길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잡지와 신문 전부 고상하게 욕하는 글밖에 없던데.”

나도 재능이 모자라 검을 놓았잖아요. 말하지 않고 삼킨 뒷말이 들리는 듯해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반대하는 부모님에게 반발해 끝내 집을 뛰쳐나가고 만 네이기스와는 달리, 하델은 집안 전체가 동참한 암묵적인 압력에 굴복해 검을 놓았다. 미련이 없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압력을 받을 때는 모른 척 그저 방관하던 누나가 네이기스에게는 적극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있으니, 어린 마음에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부럽니?”

“……조금은요.”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네이기스가 안정적인 미래와 훌륭한 평판 대신 그림을 택했듯이, 너도 검에 모든 걸 거는 인생 대신 헨젤의 후계자로서의 미래를 택한 거 아니었니?”

하델은 무심결에 왼손 엄지로 오른손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검술 연습을 하며 달고 살았던 굳은살이 이제 다 빠져서 손바닥이 말랑말랑했다.

“내가 검을 골랐더라면, 뭐가 좀 달라졌을까요?”

“그랬다면 아버님의 분노가 하늘에 닿은 걸 볼 수 있었겠지. 고이 기른 후계자가 하루아침에 자리를 팽개쳤는데. 고모님과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이었을 거다.”

“……누나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요. 헨젤의 후계자는 누나가 하고 나는……. 아얏!”

하델은 오드리에게 꿀밤을 맞은 이마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만년필과 찻잔, 그리고 고삐를 쥐는 게 전부인 손이 어찌나 아프고 매운지, 눈물이 핑 돌았다.

“왜 때려요!”

“멍청아. 내가 남자로 태어나 헨젤 집안의 후계자로 자랐으면 넌 만탈락에 처박혀서 다신 못 올라왔어. 네가 머리가 굵기 전에 아버지가 널 거기 던졌을 거고, 시간이 지나 내가 머리가 굵은 다음엔 어떻게 하면 저 동생 녀석 앞날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까 고민했을 거다.”

“어……. 내가 후계자 자리에 관심이 없어도요?”

“네가 배우는 과목 중에 법률도 있지 않니? 법률에서 귀족법이 굉장히 초반에 나올 텐데 다 까먹었니? 결혼과 작위 계승에 관련된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다뤘을 텐데.”

“배우긴…… 배웠죠……. 으음…….”

“그냥 외우지 말고 응용을 좀 하렴.”

랄리우스와 헨젤은 둘 다 멜브란트에서 손에 꼽히는 명문 귀족 집안이었다. 만약 오드리와 하델 모두가 사내아이였다면, 둘은 각각 헨젤과 랄리우스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다. 아마 첫째인 오드리가 헨젤을 갖고 둘째인 하델이 랄리우스를 가졌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헨젤 백작이 그걸 가만히 두고 봤겠는가. 오드리가 생각하기에, 그는 기껏 삼킨 랄리우스를 도로 토해낼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어차피 애정도 뭣도 없이 이득을 위해 맺어진 냉랭한 사이겠다, 농담이 아닌 진심으로 밀리나와 하델을 살해할 궁리를 했을지도 몰랐다.

“지금 너와 내가 이렇게 사이좋게 마주 앉아 별다른 유감없이 얘길 나눌 수 있는 건 우리가 남매이기 때문이야. 지금 네가 헨젤과 랄리우스의 후계권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와 경쟁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누나, 너무해요…….”

“사실인걸. 이 누나에게도 욕망이 있고 야망이 있단다, 어린 동생아. 그러니 너 좋을 대로 상상하고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해 봐야 다 헛 거야. 그보다 하델, 네 수업 진도에 대해서 말인데…….”

이후 하델은 오드리에게 실컷 잔소리를 들었다.

계속 진도만 나가면 뭐 하냐, 뒤를 배우면 앞을 까먹는데 계속 공부를 해야지, 글로만 익히지 말고 실제 사례에 적용하는 연습을 해라, 종합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결과물에 구멍이 생긴다…….

오드리 입장에서야 실수투성이였던 자신의 경험을 거울 삼아 진지한 충고를 해준 거였겠지만, 하델에게도 그게 그렇게 들렸겠는가. 그는 오드리의 충고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어설픈 핑계를 대며 응접실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다 쉬었어요. 이제 그만 가서 공부할게요. 네. 진짜로 공부해서 다음엔 더 잘하는 걸로. 누나, 전시회에 굳이 나 데려갈 생각 안 해도 돼요. 안 봐도 괜찮거든요. 네.”

“나 참……. 저 도망치는 뒤통수가 꼭 나 어릴 적 같네. 그때 락시 부인이 날 보면서 이런 심정이었구나.”

오드리는 새삼 락시 부인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냈다. 선생들을 감탄시키던 총명함은 간데없이 매일 사고만 치고 다니는 꼴을 어떻게 일 년 가까이 참았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고뭉치 오드리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그만둔 선생 대신 새로운 선생을 구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희어졌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마침 그 락시 부인에게서 온 편지를 가져온 릴리가 오드리의 말을 받았다.

“그때마다 저희가 혼났죠. 제발 아가씨랑 어울리면서 엉뚱한 짓 좀 가르치지 말라고요. 나 참, 억울해서. 가르치긴 누가 가르쳤다고.”

“그랬어? 그래도 계속 같이 놀았잖아.”

“아가씨가 제 아가씨가 아니라 정말 동네 친구였으면 예전에 도망갔어요. 어휴, 사막에서 길 잃고 헤매다가 죽을 뻔했던 것만 생각하면 내가…….”

“아이고, 알았어, 알았어. 그때 일은 내가 다 잘못했어. 괜히 널 꼬드겨서 큰일 낼 뻔했지. 응.”

오드리는 릴리가 새삼 꺼내드는 과거지사를 귓등으로 흘리며 편지를 펼쳤다. 기다리느라 피가 마르는 줄 알았던 편지다 보니 자꾸만 손이 떨렸다.

<오드리 아가씨께.

내 예쁜 아가씨. 말 안 듣는 아가씨. 업무지시 외에는 한 번도 따로 편지를 하지 않으시더니, 궁금한 게 생기고 나서야 편지를 보내주시는군요. 하긴 아가씨는 매년 날아오는 헨젤 백작님의 연하장에도 한 번도 답장을 하신 적이 없으셨지요……. 그런데 제가 형식을 갖춘 안부를 받아보다니, 이 유모 감격해서 하마터면 울 뻔했습니다.>

익숙한 잔소리는 휙휙 뛰어넘었다. 만탈락의 고용인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탰을 게 분명한 안부인사만 그럭저럭 훑었다. 누구는 그새 결혼했고, 누구는 아이를 낳았고, 누구는 이사를 했고……. 다정하게 지낸 시간만큼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한가득이었다.

오드리는 몇 장이나 되는 편지지를 계속 넘겼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 가서야 손을 멈추고 진지하게 편지에 집중했다. 오드리에게 필기를 가르칠 만큼 정갈한 글씨체를 자랑하는 락시 부인의 글씨가 하염없이 흔들리는 구간이 있었다.

<……밀리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아가씨에게 후계자에게나 할 법한 교육을 시키셨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분은 저를 자신의 충실한 수족이자 다정한 친구로 여겨 몹시 아껴주긴 하셨으나, 진실로 중요하게 마음먹은 일에 대한 논의까지 함께하진 않으셨습니다. 저보다는 타우레드 후작부인, 혹은 왕비전하께서 더 정확한 사정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로샨은 그렇다 쳐도, 갑자기 오스미다 왕비가 튀어나왔다. 오드리는 혹시 자신이 잘못 읽은 게 아닐까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지만 종이에 스며든 잉크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밀리나님께서 쓰셨던 결혼계약서에 대한 내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없이 밀려드는 청혼서 속에서 왜 하필 헨젤 가문의 청혼을 받아들이셨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는 것은, 돌아가신 선대 후작님을 대신해 밀리나님께서 받으셨어야 할 포상이 헨젤 백작가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밀리나님께서 헨젤의 성을 달았다고는 해도 놀라울 정도로 조용히 치러진 일이었습니다.

……

밀리나님의 유서에 대해서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제 기억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나, 지금 만탈락에 있는 유서의 사본은 밀리나님의 장례식에서 낭독된 유서와 거의 다르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만약 그 유서를 통해 랄리우스의 후계자가 지명됐다면 제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

하지만 아가씨의 말씀을 듣고 새삼 고민해 보니, 그때 변호사가 읽었던 유서도 원본은 아니었던 게 생각이 납니다. 흥분한 일부 조문객들이 직접 봐야겠다며 유서를 빼앗으려다 유서가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변호사가 품에서 여분의 유서를 꺼내서 마저 읽어 마무리했으니까요.

기억을 더듬어 이디케에게 그 변호사의 이름을 전해주었습니다만, 찾으려는 시도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이건 제 짐작일 뿐이지만, 그 변호사는 이미 칼레이의 마차를 타고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아가씨, 하티의 신전을 뚫으려 애쓰기보다는 밀리나님의 유서를 공증해 주신 왕비전하를 찾아가는 게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요즘에야 장례식에서 유서를 읊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때는 달랐으니까요. 팔 년은 족히 지난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떨리는 손으로 썼을 편지 속에서 오스미다 왕비의 존재감이 훅 드러났다. 오드리는 새삼 지난봄의 데뷔탕트에서 만난 오스미다 왕비를 떠올렸다. 일부러 나쁜 소문을 내려고 남들과 다르게 입은 오드리를 보고도 기분나빠하기는커녕 귀여워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었다.

<추신. 제가 아가씨를 따라 만탈락으로 간 건 밀리나님의 부탁이 있어서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어쩐지, 주변 사람 전부가 뜯어말려도 락시 부인은 별말이 없더라니. 잘했다, 과거의 나. 오드리는 고집 세고 무모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곧 눈앞이 깜깜해졌다. 락시 부인은 오스미다 왕비를 만나보라고 했지만……. 요샌 좀 나아지긴 했어도 평판이 엉망인 데다 뒤를 봐줄 귀부인도 없는 오드리에겐 너무 까마득한 사람이었다.

“릴리, 내가 왕비전하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가스트로 왕자님과 약혼하세요. 그럼 만나 뵐 수 있을걸요.”

단번에 튀어나온 대답이 오드리를 웃겼다. 가스트로 왕자가 매 사교철마다 라디아타에게 에스코트를 신청한다는 기사가 안 실린 잡지가 없는데 웬 왕자 얘기인지.

“불가능한 얘기라는 거 알고 하는 말이지?”

“당연한 말씀을. 아, 타우레드 공자님께 다리를 놔달라고 해 보시는 건 어때요? 타우레드의 후계자시니까 어릴 적엔 왕궁에서 자랐을 거 아녜요.”

“왕궁에서 자랐을 뿐이지 왕비님 슬하에서 자란 건 아니잖아.”

“하긴 그렇겠네요. 그럼 타우레드 영애는요? 브란젤의 황금장미시잖아요. 가문도 가문이겠다, 분명 왕비님과 직접 친분이 있을걸요.”

“…….”

“싸웠어요?”

“……그런 거 아니야.”

“두 분 다 애도 아니면서 웬 싸움을……. 아, 저는 이만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새로 고용한 하녀들이 영 일을 못해서요. 가르칠 게 너무 많아 큰일이라니까요.”

릴리는 오드리의 낯빛이 변하는 걸 예민하게 알아채고 재빨리 꽁무니를 뺐다. 하델에 비하면 아주 세련된 퇴장이었다.

혼자 남은 오드리는 괜히 락시 부인의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귀퉁이를 접고 펴고 손톱으로 긁고 도르르 말고……. 몇 번 반복하니 종이에 회색 보풀이 일어나고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금방 떨어질 듯 덜렁거렸다. 쭉 잡아 뜯어 버릴까 하다가 그냥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후…….”

갑갑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 한숨이 쏟아졌다. 편안하기 그지없는 응접실 의자에서 이렇게 저렇게 자세를 바꾸다가 종국에는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물 밖으로 끌려나온 물고기처럼 맥 빠진 자세였다.

릴리에게는 싸운 거 아니라고 했지만, 요즘 오드리와 라디아타 사이에서는 예전과 달리 영 어색한 기류가 맴돌고 있었다.

로렐라이 때문이었다.

오드리가 베일에 싸여 있는 로렐라이의 단주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라디아타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오드리의 비밀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신뢰를 얻었다는 사실 자체는 기쁘지만,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동안 사방에서 자신을 속였던 모든 거짓말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머리가 멍하다고 했다.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쭉 날 속였어. 적당히 정보를 걸러서 알아도 괜찮은 것만 보여주고 들려주고, 그에 맞는 반응을 기대하고……. 날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 인형 취급했어.’

생각 이상으로 격렬한 분노에 놀란 라비린이 자신도 어쩔 수 없었노라 황급히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게 더 라디아타의 화를 돋웠다.

‘오라버니는 입 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봤자 오라버니도 동조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오드리, 날 믿고 큰 비밀을 털어놓은 건 정말 고맙지만, 지금 내 마음 상태가 그걸 바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내게 시간을 줘.’

이게 클로드가 헨젤 백작에게 직접 청혼서를 건넨 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뒤로 라디아타는 오드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전시회장에 압력을 넣어 네이기스의 본명으로 그림을 걸고, 스캔들을 막고, 가을 무도회를 준비하며 이런저런 물건을 사들이는 내내 말이다.

라비린의 옆구리를 찔러 물어보아도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집 안에서의 라디아타는 평소와 똑같다고 했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함께 휴가를 다녀온 이후 그나마 온기가 좀 돌던 남매사이가 다시 냉랭해졌다는 것뿐이라고.

예전에도 딱히 매일 만나며 소식을 주고받지는 않았으니, 라디아타는 그저 평소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드리가 느끼는 초조함은 상당했다. 혹시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두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려는 건가, 하는 불안이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솟구쳤다.

셰비언의 고백을 걷어차고도 이렇게 안절부절못하진 않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라비린은 식욕마저 예전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오드리를 보며 그저 황당해했다. 이전에는 저 작은 몸 어디에 음식이 저렇게 들어가나 싶게 먹더니만, 지금은 딱 몸집만큼 먹었다.

“아무리 인생 첫 친구라지만 너무한 거 아냐? 나 참, 이래서야 셰비언 씨가 아니라 라디아타를 경계해야 할 판이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동생이 연적이라니 이게 무슨 사태야.”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서로 이득이 맞아 하는 결혼에서 웬 연적 타령인가. 그녀는 라비린의 헛소리는 아예 듣지도 못한 척 뭉개 버렸다.

“인생 첫 친구라니,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만탈락에 있는 내 친구들이 들으면 뒤로 넘어가며 웃겠네.”

“그럼 왜 그렇게 라디아타를 신경 쓰는 건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해온 거짓말을 참을 수 없어서 멀어지겠다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 아는데……. 그냥 속이 상해. 당연히 이해해 줄 거라고만 생각했나 봐.”

라비린은 더 말을 얹지 않고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도 모르겠다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빈 잔에 와인을 따라 내밀며 달랠 뿐이었다.

“라디아타에겐 시간이 좀 필요한 것뿐일 거야. 정말 너랑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을걸. 자, 기분 풀고 계속 얘기하자. 가을 무도회에 무슨 색 옷을 입을 거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옷은 흰색으로 할까 해. 천은 살짝 광택이 도는 걸로 골라서…….”

“광택 나는 흰색 천이면 언뜻 은색으로 보이겠네. 장신구는 물론이고 소품까지도 은색만 고르더니만 옷도 그래?”

오드리는 뜻밖의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만탈락의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소녀 시절을 보낸 그녀의 색 취향은 선명한 원색에 가까웠다. 라비린이 알아챌 정도로 은색 제품만 골랐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랬어?”

“그래, 매번 그랬어. 오드리, 난 은색이 정말 안 받는다니까? 차라리 검은색을 입자.”

“장례식 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예 노란색은 어때?”

“노란색은 너나 어울리지. 안 그래도 본격적인 남부식 드레스를 입을 건데 거기에 어울리지도 않는 노란색은 더 최악이야. 차라리 초록색을 입자고 해.”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곧 있을 가을 무도회에 맞춰 입을 옷과 장신구 등을 상의했다. 기자들이 바글바글하게 몰려들고 관심이 쏟아지는 가을 무도회에서 누가 보나 약혼자로 보이도록 옷을 맞춰 입고 파트너로 입장해서 빼도 박도 못하게 못을 박으려는 게 목적이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소문과는 달리 헨젤 백작이 아직까지도 청혼서에 답장을 보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약혼의 마지막 단계만 남겨두고 망설이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이미 단계는 다 밟았는데 차일피일 대답을 미루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라비린이 권하는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던 오드리는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가방을 열었다. 오늘의 만남에는 헨젤 백작의 등을 떠밀 수작을 꾸미는 것 말고도 목적이 있었는데, 라비린과 얘기하는 게 생각보다 즐겁다 보니 깜빡 잊을 뻔했다.

“참, 줄 게 있는데 잊어버릴 뻔했네. 자, 받아.”

“뭔데?”

“어젯밤에 이디케에게서 최종 보고서가 왔어.”

리비린은 반색을 하고 서류를 받아 들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최종 보고서였다. 좀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받게 되다니 놀라웠다. 하긴 전보 자체는 거의 완성된 장치였으니, 이디케가 노력한 것일 테다.

“동시 전송 문제를 해결했군? 막대한 돈과 인력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기반을 깔고 시장을 구축해서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형태는 여전하지만.”

“왜, 부담돼?”

“세상을 바꿀 게 틀림없는 장치야. 파산 직전까지 가더라도 다 털어야지. 땅을 파서 선을 매립하는 게 기본인 사업이니, 여기저기에 타우레드의 이름을 팔고 다녀야겠는걸…….”

“후작님이 짜증내겠어.”

“아니, 그보다는 입을 대고 싶어 하겠지. 타우레드의 사자가 황금분수를 깔고 앉았다는 말이 왜 나왔겠어. 그래도 나도 타우레드니까 막을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볼게. 명색이 후계자인데 설마 내가 하던 걸 뺏지야 않겠지.”

“매정하기도 해라…….”

매정하다 타박하면서도 오드리는 빙글빙글 웃었다. 어디 한번 실컷 고생해 봐라, 이런 느낌의 웃음이었다. 라비린도 그에 지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너나 나나. 나중에 로렐라이의 주인이 너라는 거 밝혀지면 백작님 기절하시는 거 아닌가 몰라.”

“작위를 넘기겠다는 너보다야 내가 낫지.”

제 아버지의 뒤통수를 때릴 준비가 만만한 남녀는 서로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보다 사업체 이름은 뭐로 할래? 로렐라이 쪽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따로 이름을 써야 하잖아. 사장도 바지사장인데.”

“데멘사.”

“……그거, 그 변호사 이름 아니야? 백작부인의 장례식에서 유서를 읽은…….”

“맞아.”

“맙소사……. 아무래도 나, 벤의 신전에도 기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벤의 신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저택에 돌아가면 주방장에게 물어봐. 주방에 밥 얻어먹으러 오는 고양이 중에 어떤 녀석이 벤의 화신 같으냐고.”

“진짜 벤의 화신은 밥을 얻어먹고 다니는 게 아니라 쥐를 잡겠지…….”

라비린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부엌의 신이자 가정의 수호자이며 때로는 국가를 지키는 강력한 수호신인 벤이 제발 자신도 좀 지켜줬으면 싶은 마음에.

‘돌아버릴 것 같아도 할 수 없지. 발 빼기엔 너무 늦었으니.’

하티의 신전에서 로샨의 유서를 좀처럼 내놓지 않고 버티자 라비린은 곧바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유서를 오스미다 왕비에게 가져가 공증까지 받았을 변호사를 찾으려 시도한 것이다.

데멘사 아노말리아라는 이름을 알아내는 것까진 쉬웠다. 사망한 귀부인의 유서를 장례식장에서 읽는 파격을 저질렀으니, 동종업계의 사람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파격의 값이 어찌나 컸는지, 데멘사는 정원이 딸린 집을 사고 하녀를 고용하는 등 퍽 부유한 삶을 살았다. 갑자기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기 전까지는.

그는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됐고, 도박 빚에 시달렸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겨 기차를 타고 도주했고 그대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빚쟁이들은 그의 집에 들이닥쳐 쓸 만한 물건은 죄다 뜯어냈고 그도 모자라 그의 친척들을 들쑤시며 돈을 회수했다.

당연히 데멘사의 친척들은 그의 이름을 언급하기조차 싫어했고, 근처에 살았던 이웃들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각자 말이 달랐다. 어디에도 그가 사망했다는 기록은 없었지만, 반대로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도 없었다.

“하티의 신관들이 보면 굉장히 싫어하겠어. 사장은 바지사장이어도 투자자가 나인데 아주 대놓고 하는 도발 아냐. 네 녀석들 말고도 유서 가진 놈 또 있는 거 안다, 계속 거절하면 그쪽을 파보겠다…….”

“응. 뭔가 반응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

“그래도 그렇지, 도박 빚에 쫓겨 도망친 사람의 이름을 쓰겠다니……. 아, 자존심 상해. 내가 타우레드의 후계자인데 하티 신전을 상대로 이런 도발이나 하고 앉았고 말이야. 어휴, 내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꼭 알아내고 만다.”

라비린이 결연한 표정으로 다짐하는 걸 보면서 오드리는 그저 웃었다. 사실 그의 짐작과는 달리 그녀가 반응을 기대하는 쪽은 하티의 신전이 아니라 헨젤 백작이었다.

갑작스럽게 큰돈이 생긴 사람이 도박에 빠져 흥청망청 재산을 탕진하다 빚을 지고 자취를 감춘다.

아주 자연스러운 전개였다. 오드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락시 부인이 그의 이름과 함께 칼레이의 마차를 언급하기 전까지는. 이상하지 않은가, 그녀가 오드리와 함께 만탈락으로 떠날 때까지만 해도 데멘사는 멀쩡히 브란젤에 있었는데 그가 죽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는 게.

라비린은 끝까지 데멘사라는 이름을 싫어했지만, 오드리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길고 긴 설전 끝에 전보 사업은 행방이 묘연한 변호사의 이름을 달고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브란젤역 근처의 건물에 <데멘사>라는 간판을 단 사무실이 생겼고, 전보를 체험해 볼 체험장이 마련됐다. 중계소에서 일할 인력을 구하는 광고가 신문마다 실렸다.

홍보는 간단했다. 어딜 가든 기자를 끌고 다니는 오드리와 라비린이 팔짱을 끼고 찾아가 한번 만져 본 것만으로도 신문마다 기사가 났으니까. 이제 막 문을 연 왕립 기계 연구소의 추천사도 함께 실렸다.

<단 며칠도 아까운 급박한 소식을 전해야 하는 당신에게>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신기한 장치의 등장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이 매일 찾아와 이런저런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전보의 설치 비용은 호기심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일단 보내는 곳과 받는 곳 모두에 기계가 있어야 했고, 두 지점 모두 중계소에 전보선이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사람은 구름처럼 몰려도 그게 실제 판매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파격적인 할인가를 제시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의 제재가 들어왔다. 도로마다 골목마다 마법도구가 묻혀 있는 브란젤에서 함부로 땅을 파서 전보선을 묻게 둘 수는 없다는 거였다. 도시의 기반시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했다.

마법사협회는 전보 개발에 참여한 마법사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실의 제재를 모르쇠했다. 항의 한 번 하지 않는 행태에 분노한 워커가 그동안 꼬박꼬박 낸 회원비가 아깝다며 장문의 글을 써서 신문사에 보냈지만 실리지 않았다.

데멘사의 큰 투자자로 이름이 알려진 라비린이 나서서 타우레드의 이름까지 꺼내들었지만 그것도 먹히지 않았다. 다른 마법도구와의 간섭은 없다고, 다 실험했다고 아무리 얘길 해도 소용이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가을 무도회까지 겨우 이틀밖에 남지 않은 날의 밤, 오드리는 창가에 놓은 의자에 앉아 입술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먼 북쪽 하늘에 희미하게 은하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게 보였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아직도 여름에 머무르고만 있는 것 같은데 계절은 착실히 흐르고 있다는 게 어쩐지 우스웠다. 그녀는 가슴팍에 닿는 차가운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하루를 되새김질하다 문득 이를 갈았다.

‘돈 밝히는 건 부자가 똑같아.’

오늘 새벽, 가스트로는 라비린을 통해 오드리를 불러내 대면했다. 본래부터 군사력 증강에 관심이 많았던 가스트로는 전보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오드리가 데멘사의 진짜 주인이라는 사실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후작가 공자인 라비린조차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이 자신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는데 참 별난 사람이었다.

‘국경의 요새들 사이에 무료로 전보를 놔주게. 그럼 민간에서도 전보를 설치할 수도 있도록 허가해 주지. 전보의 특성을 보니 우편국과 연계해서 보급하면 파급력이 더 커질 것 같은데, 그것도 가능하게 해주겠네.’

‘전하,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라비린, 자네가 있어서 내가 이렇게 많이 양보한 거라네. 왕립 기계 연구소장이 개발진으로 얽혀 있으니만큼 왕실의 기술이라고 우기면서 빼앗을 수도 있었어.’

‘그랬다간 심한 반발을 살 겁니다. 왕립 기계 연구소가 정식으로 생기기 전에 참여했던 일이 아닙니까?’

‘오, 알아, 그것도 안다네. 하지만 어디 빼앗을 명분이 그것뿐이던가? 핑계야 붙이기 나름인 것을.’

떠올리니까 또 화가 났다. 오드리는 휙 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공짜 좋아하다 탈모나 와라, 개새끼!”

나무랄 사람도 없겠다, 양껏 욕을 뱉었지만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등을 받치고 있던 쿠션을 끄집어내 퍽퍽 때렸다. 어찌나 열심히 때렸는지, 실컷 두드려 맞은 쿠션이 터져 속에 들었던 깃털이 팔랑팔랑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으!”

오드리는 콧잔등과 뺨에 달라붙은 깃털을 거둬 내던지고 쿠션까지 뻥 걷어차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다.

국경지대에 요새가 어디 한두 개인가. 거리는 또 얼마며, 지형은 또 얼마나 험난한가. 가스트로는 큰 인심이라도 쓰는 듯 인력은 지원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은 인력 말고 다른 건 다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이미 전보선을 까는 일 자체를 금지당한 상황에서, 유일한 정통 왕위계승자인 가스트로의 제안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했다. 성년이 지난 지 한참인데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이 약점인 사람이었다. 그의 발언권은 대단히 컸다.

“양아치 같은 새끼.”

라비린과 합심해서 깎고 깎아 겨우 산트렘 지역에 있는 요새들로 합의를 봤지만 그것만으로도 속이 쓰렸다. 전쟁의 역사가 긴 산트렘은 그만큼 요새도 많아서, 미리 제작해 둔 전보선만으로는 모자랄 게 분명했다. 추가 생산이 불가피했다.

일부러 데멘사의 이름을 쓰고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데도 하티의 신전은 물론이고 헨젤 백작조차 아무 반응이 없어 짜증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라비린이 클로드를 설득해서 거액의 투자금을 받아 오지 않았더라면 하늘이 노랗게 보였을 게 틀림없었다.

오드리는 쿠션 없는 의자에 주저앉아 쉴 새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생각만 해도 열 받는 일이지만, 이왕 뜯긴 거 최대한 좋은 쪽으로 써먹을 궁리를 해야 했다.

‘왕실에서 특별히 주문한 걸로 홍보하자. 공짜란 소린 하지 말고. 왕자가 우편국과 연계해서 보급하게 해준다고 했으니까, 개인 판매에 그리 연연하지 않아도 돼. 타우레드의 이름에 크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고. 일단 기찻길을 따라 전보선을 매립하고 역마다 데멘사 지점 겸 중계소를 개설해서 보급을 확대한 다음, 이용할 때마다 요금을……. 아, 머리 아파.’

뜨거운 바늘로 관자놀이를 쑤시는 것만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오드리는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손으로 관자놀이와 이마를 덮자 그마나 통증이 좀 가시는 듯했다.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두통이었지만, 요즘 들어 빈도도 잦고 강도도 세지는 느낌이었다. 다이앤의 진통제가 듣지 않게 된 것도 최근이었다. 하지만 어느 의사에게 물어도 이상이 없다는 진단만 나오니,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며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평소에는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아졌는데, 어째 오늘은 두통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괜찮아지는 것 같다가도 손을 떼면 또 통증이 밀려왔다. 끊임없이 밀려오며 발을 적시는 파도 같았다.

‘안 되겠다. 일단 누워야겠어.’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조심조심 발을 내렸다. 시야가 자꾸만 흔들리는 것도 모자라 거리감마저 엉망이었다. 의자가 놓인 창가에서 침대까지의 거리가 하염없이 멀어 보였다. 바닥에 깔아놓은 카펫의 무늬가 불쑥 솟아올라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결국 채 반도 가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섰다. 몸에 열이 오르는지 가슴팍에 닿는 펜던트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이제 안 아플 거라며……. 셰비언, 이 거짓말쟁이 자식.’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는데 셰비언을 원망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겠느냐만, 가끔은 밑도 끝도 없이 원망할 대상이 필요할 때가 있고 오드리에겐 그게 지금이었다. 밀리나 역시 비슷한 증상으로 앓았다는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더 걷지 못하고 벽에 기댄 채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펜던트를 열고 비늘을 꺼내 아예 이마에 갖다 댄 채로 눈을 감았다. 서늘한 바람이 몸을 감싸는 듯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쉬고 싶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 거지 같은 두통 없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편안하고 느긋하게. 셰비언이 만들어줬던 공간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봄여름가을이 모조리 뒤섞인 호숫가의 벤치와 겨울의 정수가 모인 요정 같던 남자.

문득 그날의 풍경이, 제 손길에 눈을 감던 그의 얼굴이 그리워졌다. 그가 준 비늘을 몸에서 떼놓지 않고 있으니만큼 이제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아는데도 말이다.

오드리는 얄팍한 비늘을 손안에서 뱅글뱅글 돌리며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내가 용족의 마력을 타고났다는데, 나는 공간을 못 만드나? ……하긴, 용이 곧 마법이라는데 난 마법도 못 쓰지……. 셰비언이 꾸며준 공간 좋았는데, 한 번 더 들어가고 싶다.’

그 순간, 갑자기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분명 단단한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몸에 닿아 있던 것들이 몽땅 사라졌다. 허공에 내팽개쳐진 듯 괴상한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거기에 더해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 통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

익숙한 천장 대신, 별이 가득 박힌 하늘이 오드리의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새하얀 우윳빛 은하수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었다. 당연히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손을 뻗어 정말로 닿는지 확인해 볼 정도였다.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적시는 가운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한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눈길 닿는 곳 전부가 별의 바다였다.

‘셰비언이 또 날 제 공간에 불러들인 건가?’

손을 뻗어 등 아래쪽을 확인했다. 굉장히 편안하게 누운 자세이지만 손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밤하늘에 떠 있는 것이다.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도 마법사의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이미 체험해 본 바였다. 오드리는 비늘을 쥐고 있던 손을 확인했다. 혹시 떨어뜨리기라도 했나? 그래서 셰비언과 또 연결이 된 건가? 싶어서. 하지만 비늘은 얌전히 그녀의 손안에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셰비언!”

셰비언……!

오드리의 외침은 멀리멀리 퍼져나가다 아스라이 사그라졌다. 소리가 부딪칠 곳이 없으니 메아리조차 돌아오질 않는 것이다. 텅 빈 허공을 가르고 다가온 바람이 귓가에 비명을 지르니, 더럭 겁이 났다.

‘셰비언이 한 짓이 아니라면, 내가 만든 공간인지도 몰라. 그럼 멋대로 바꿀 수도 있겠지.’

디딜 곳 없는 허공이지만 어떻게든 곧게 섰다. 잡을 곳 하나 없이 되겠나 했는데 의외로 자세가 금방 잡혔다. 아래쪽은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눈을 감고 상상했다.

살갗을 태우는 뜨거운 태양, 껑충하게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 건조한 공기 속에 스며 있는 달콤한 과일 향기, 강렬한 원색으로 물들인 천이 깃발처럼 걸린 빨랫줄, 가끔은 신경질이 날 만큼 시끄러운 새들의 지저귐.

만탈락의 풍경을 몇 번이고 덧그리고 있으려니 정말 주변이 그렇게 변한 것 같았다. 시끄럽게 아우성치던 바람 소리 대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얇은 옷자락 너머로 살갗을 데우는 햇볕이 느껴지는 듯했다.

-야옹.

웬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착각이려니, 하고 넘기려는데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발목에 부드러운 털이 닿았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우와…….”

눈앞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저 별로 가득 찬 허공은 어디론가 간데없고, 오드리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의 만탈락이 그녀를 반겼다.

고개를 숙이자 발치에서 맴도는 얼룩무늬 고양이가 보였다. 오드리는 만탈락에서 자주 그랬듯이 고양이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사람에게 익숙한 고양이는 당연하다는 듯 오드리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햇볕에 데워져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운 털이 뺨을 간질였다. 말랑말랑한 귀를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넌 어디에서 왔니?”

“어디서 왔긴요, 아가씨께서 상상하는 만탈락 속에 있었던 거죠. 그 고양이 많이 예뻐했나 봐요?”

“으악!”

사람 하나 없던 곳인데 뒤에서 갑자기 사람 소리가 들렸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고, 품에 안겨 있던 고양이는 화들짝 놀라 도망쳐 버렸다.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렸다가 꿀이라도 머금은 듯 다디단 미소를 짓고 있는 셰비언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옅은 하늘빛, 얼음이 녹아 찰랑찰랑 물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행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고 주변의 풍경이 일시에 퇴색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만났었는데 왜 이래……. 그땐 괜찮았는데!’

오드리는 며칠 전과 확연히 다른 자신의 상태에 당혹했지만,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왕실의 전보 제재 때문에 워커를 비롯해 이디케에 라비린까지 함께한 대책회의라 다른 곳에 팔 정신이 없었던 거고 이건 단둘이 가까이에서 만나는 거였다.

‘잠옷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실내복이라도 챙겨 입고 있길 잘했어.’

있는지 없는지 구분도 안 가게 몸 안에서 얌전히 흐르던 마력이 제멋대로 날뛰는 게 느껴졌다. 진정하자, 마력에 휘둘리지 말자, 아무리 되뇌어도 귓가와 목덜미는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고 입술은 아교라도 발린 듯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아가씨가 내 공간에 찾아와 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내, 내가? 내가 무슨 수로?”

“입장권을 갖고 계시잖아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가리켰다.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꽉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폈다. 푸른빛 도는 은빛 비늘이 그 안에 있었다.

“그럼 여기가 네 공간이야? 그런데 왜 내가 멋대로 이렇게…… 주무를 수 있는 건데?”

“아가씨에겐 언제든 열려 있어요. 마음껏 쓰세요.”

지금 셰비언은 로브도 쓰고 있지 않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였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쉬었는지 검게 죽었던 눈 밑도 뽀얗게 밝아지고 피부에서 광채가 흘렀다. 촘촘한 은빛 속눈썹이 발갛게 홍조 오른 뺨에 긴 그늘을 드리웠다.

팔랑이는 속눈썹에 정신이 팔려 하마터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뻔한 오드리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윈디를 타고 격렬하게 뛰다 온 것처럼 머리까지 전해지는 심장 박동 때문에 숨이 차고 어지러웠다.

“그…… 마법사에게 공간은 중요한 거 아니야? 여기서 마법 연구도 하고 점검도 하고 그런다면서.”

“중요하긴 하죠. 하지만 아가씨만큼 중요한 건 아니라서요. 만탈락이 그리우셨던 거잖아요? 이왕 만들었으니 같이 걸어요.”

오드리는 얼굴을 가린 손가락 틈으로 셰비언이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생각했지만, 참 희고 가지런하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어느 예술가가 공들여 빚어낸 조각 같았다.

얼굴을 보는 게 아닌데도 심장은 여전히 평소의 배로 뜀박질을 하고, 눈앞의 손을 잡고 싶어 손가락이 절로 꼼지락댔다.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실수로라도 보지 않게 손가락을 꼭 붙여 틈을 없앴다.

‘이 망할 놈의 마력 계통 같으니.’

내 인생의 최우선은 사랑이 아니라고 분명히 정했으니 마음도 그에 따라야 하는데, 셰비언을 마주할 때마다 날뛰는 마력이 묻어둘 수도 있었을 감정을 계속 일깨웠다. 살랑대는 봄바람 같고 달콤한 과일 향기 같은,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자꾸만 속에서 싹을 틔우려고 움찔거렸다.

하지만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감정에 인생을 걸기엔 오드리는 욕심도 많고 지킬 것도 많고 더불어 겁도 많았다. 언젠가 사랑에 빠져 놓아버린 것들을 되돌아보며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무서워서 등골이 다 서늘해졌다.

‘마력에 휘둘려선 안 돼. 타우레드 후작부인을 봐, 산트렘의 공주라는 별명까지 있던 분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저절로 감탄이 나오도록 아름답던 포도나무 응접실은 낯선 땅에서 날개가 꺾이고 방에 갇힌 로샨을 상징하는 것만 같던 곳이었다. 오드리는 이를 악물고 등을 빳빳하게 폈다. 얼굴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셰비언의 손을 거절했다.

“네 비늘이 이 공간의 출입증인 걸 미리 알았으면 좀 더 신중하게 굴었을 텐데……. 셰비언, 나는 만탈락이 그리워서 여기 온 게 아니야.”

“……그럼요?”

“아파서. 두통이 너무 심해서 쉴 곳이 필요했어. 마법사의 공간이라면 남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시간 가는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생각이 났지. 본의 아니게 기대하게 했다면 미안하군.”

“어……. 아파서 오신 거라면 이렇게 서 계시면 안 되지 않나요?”

오드리가 선 자리 바로 옆에 긴 의자가 나타났다. 통풍이 잘 되도록 질긴 나뭇잎을 이용해 성기게 짠 것으로, 반쯤 누워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만탈락의 큰 나무 아래에는 이런 의자가 몇 개씩 있는 게 보통이었다.

“쿠션 깔아드릴까요?”

“괜찮아.”

오랜만에 보는 남부식 긴 의자였다. 오드리는 마다하지 않고 의자에 드러누웠다. 살짝 탄성이 있는 등받이가 부드럽게 몸을 받쳐 주는 게, 몸의 긴장이 저절로 풀어졌다. 커다란 나뭇잎이 한 차례 걸러낸 햇빛이 그녀의 이마와 목덜미에 아롱아롱 맺혔다.

셰비언은 의자 곁의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은 오드리를 구경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함께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깊은 밤에 적셨다 꺼낸 것처럼 검은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세는 것조차 즐거웠다.

참 이상도 하지. 아무리 마력의 계통이 같다 해도 오드리는 용이 아닌데,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뜨고 정신이 산란해졌다. 그녀의 웃음 한 번에 피로가 다 사라지고, 함께하던 동족들이 모조리 사라진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마저 까마득하게 멀어져 마음에 훈기가 돌았다.

뭔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안 되는 샤를레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다가도, 그녀가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일에 도움이 되고 오드리에게 이득이 될 거라 생각하면 다 참을만한 수준이 됐다. 우스운 일이었다.

‘아플 때 내 공간을 휴식처로 골라준 건 기분 좋지만……. 아예 안 아픈 게 가장 좋은데.’

하나로 굵게 땋아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살금살금 손을 댔다. 매끄럽게 감기는 머리카락 끝을 쥐고 살짝 마력을 밀어넣었지만, 곧바로 거부당했다. 셰비언에게서 받은 마력을 제대로 소화한 오드리의 몸은 아주 견고한 성채와 같아 함부로 상태를 살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오드리의 안락한 휴식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잠깐만 손잡아봐도 돼요?”

“안 돼.”

“두통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마력 문제일지도 모르니까 한 번만 확인해 볼게요.”

“이제 안 아플 거라고 장담한 건 그대였어. 그런데 새삼 마력 문제라니?”

누워 있던 오드리가 벌떡 일어났다. 주름 잡힌 미간에 짜증과 불안이 가득 고인 채였다. 셰비언이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했다.

“지금 아가씨는 제게서 뺏어간 마력을 거의 다 소화했어요. 그러면서 마력의 성질 자체가 변해서, 언뜻 보면 용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예요. 그래서…….”

“난 인간이야.”

“네, 아무리 용과 비슷할 정도로 순수한 마력을 가졌다고 해도 아가씨는 인간이죠. 틈이 있어요. 그런 부분은 용의 마력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아가씨는 제가 드린 비늘을 먹지 않고 계속 갖고 다니셨잖아요? 확인이 필요해요.”

“정말이지, 귀찮게스리……!”

오드리는 울컥 짜증을 내다 말고 말을 꿀꺽 삼켰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살금살금 자신의 눈치를 보는 셰비언의 모습이 보기 싫은 것도 싫은 거지만, 좀처럼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각한 순간 몰려온 부끄러움이 너무 컸다.

‘기껏 신경 써서 고쳐 준다는데 왜 신경질이야.’

분명 귀족적이고 우아한 몸짓과 말투를 어린 시절부터 단련해 왔을 텐데, 왜 셰비언만 앞에 두면 그런 건 죄다 잊고 충동적인 인간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냥 솔직해지다 못해 제 기분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쓰레기가 된 것 같았다.

“비늘이 문제면 그냥 돌려줄까?”

“아니요. 그날에 짐작하셨겠지만 샤를레아는 제 동족이에요. 혹시 몰라서 샤를레아의 마법을 제한해 두긴 했지만 역시 좀 불안해서요. 방벽은 있는 편이 낫죠.”

오드리는 자신을 셰비언으로 착각하고 자꾸만 손을 잡아보자 보채던 샤를레아를 떠올리고 신음을 흘렸다. 뒤늦게 확인한 서류에서 그녀는 약간 괴팍한 면이 있는 평범한 용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추천인은 셰비언이었다.

“용은 그대만 남은 줄 알았는데.”

“저도 그런 줄 알았죠.”

“그……. 동족을 만나 기쁘겠군.”

단순히 마력의 계통만 같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동족이잖나.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빈정거림이 튀어나가려는 걸 혀를 깨물며 참았다. 셰비언의 마음에 응해줄 것도 아니고 그가 용이라는 걸 진심으로 믿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식으로 구는 건 비겁했다.

오드리의 그런 노력을 알 리 없는 세비언은 왼쪽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때 샤를레아에게 반 동강이 날 뻔한 몸은 이제 다 아물어 하얗게 살이 차오른 흉터만 남았는데, 그녀의 얘길 하고 있으면 이유도 없이 통증이 도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족도 동족 나름이죠. 저를 반쯤 갈라놓았던 강경파의 수장이 바로 샤를레아인데요. 지금 이렇게 얼굴 마주보고 지내는 것도 놀랍다고요.”

“…….”

“샤를레아가 아가씨를 봤잖아요. 지금이야 얌전하지만 눈이 돌아가면 뭔 짓을 할 줄 모르니 아가씨에게 최소한의 방어책은 필요해요.”

“왜 나를 보고 눈이 돌아가? 방어책은 왜 나한테만 필요한 거고? 샤를레아가 호위 일을 하면서 만난 인간이 어디 한둘이야?”

“그야 다른 인간들은 용족의 마력이 없거나 있어도 손톱만큼 밖에 안 되니까 그렇죠. 샤를레아는 동족에 대한 집착이 강해요. 아가씨처럼 용족의 마력이 진하면 호기심에라도 들쑤셔 볼지 몰라요. 샤를레아는 어차피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니까 미리 조심해야 해요. 그러니까 비늘을 돌려줄 생각은 꿈에도 마시고, 손이나 내놓으세요.”

전보 개발 때문에 이디케와 밤낮으로 붙어 있더니 그녀의 말솜씨를 고스란히 배워온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반론에 질려 그만 손을 내밀었다.

“확인이든 뭐든 마음대로 해.”

“좀 차갑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셰비언은 친절하게 미리 경고까지 하고 마력을 불어 넣었지만, 오드리는 한기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손을 타고 들어오는 마력이 약간 따뜻하다고까지 생각했다. 몸이 노곤해지며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평한 오드리와는 달리, 셰비언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어쩐지 오드리의 두통이 계속 마음에 걸리더라니, 오드리의 마력 균형은 그리 상태가 좋지 못했다. 오드리가 잘 소화해 낸 용의 마력은 소량의 다른 마력과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었지만, 외부에 있는 용의 마력이 자꾸 균형을 흐트러뜨린 흔적이 있었다. 지나치게 차가운 손도 그 때문이었다.

“……음. 균형이 살짝 무너진 상태네요. 역시 비늘을 계속 갖고 다니는 게 문제가 된 거예요. 아가씨, 이제는 비늘을 갖고만 다니지 마시고 드셔야 해요.”

“으…….”

“그렇게 싫은 표정 짓지 마시고요. 마침 제가 옆에 있으니까 금방 소화되도록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아, 그냥 먹기엔 너무 큰가요?”

셰비언이 오드리가 쥐고 있던 비늘을 낚아채 뚝 쪼갰다. 오드리가 말릴 새도 없었다.

얼음이 깨지는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단단한 비늘이 두 동강이 났다. 그는 오드리의 경악에 신경 쓰지 않고 몇 번이고 더 비늘을 쪼갰다. 조각난 비늘이 손톱만 한 진주보다 더 작아질 때까지.

오드리는 알갱이 굵은 모래처럼 변해 버린 비늘을 받아들고 서글퍼했다. 펜던트에 넣어두고 잘 꺼내보진 않았지만 걸고 있으면 시원하니 좋았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형체를 잃다니.

“셰비언, 이거 한 장 더 받을 수 있을까?”

“왜요? 일단 먹고 나면 방어벽이 확실하게 세워지니까 더 갖고 있을 필요 없어요. 갖고 다녀봤자 두통만 도질 건데.”

“……아니, 그냥 해 본 말이야. 마실 것 좀 주겠어?”

오드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흰 거품이 모여들어 보글거렸다. 오드리가 허공에 둥둥 뜬 거품 아래에 손을 갖다 대자 거품은 간데없이 얼음물이 가득 찬 유리컵이 나타났다. 컵을 톡, 건드리자 유리컵이 허공에서 흔들리며 달그락달그락 얼음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살도 얼음과 함께 흔들렸다.

“이건 무슨 연출이지? 유치하잖아.”

“음, 좋아하실 것 같아서 해 봤는데. 별로예요?”

“내가 한 다섯 살 정도였으면 좋아했겠군. 이런 거에 정신 팔릴 나이 지난 지가 언젠데.”

별 쓸데없는 짓을 다 한다 나무라면서도 오드리의 눈에서는 빛이 반짝거렸다. 채 억누르지 못한 웃음이 입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좋아하시네. 앞으로도 계속 해드려야지.’

셰비언은 앞으로도 계속 유치찬란한 연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시절을 일찍 끝낸 오드리를 위해 시험 삼아 해 본 일이었는데 저렇게 본인도 모르는 사이 좋아하는 걸 보니 뿌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셰비언의 결심을 알 리 없는 오드리는 비늘을 먹어야 한다는 거부감에 금세 웃음을 잃고 끙끙댔다. 동전처럼 커다랗던 전보다야 지금이 훨씬 먹기 좋지만,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처럼 반짝이는 걸 삼키는 일 역시 껄끄럽긴 마찬가지였다.

오드리는 손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비늘 조각을 노려보다 흘끔 셰비언의 눈치를 봤다. 그는 망설이는 오드리를 계속 보면서도 한 마디 독촉도 하지 않고 웃는 얼굴이었다. 오드리가 당연히 먹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백 마디 독촉보다 그게 더 마음의 부담이 되니, 결국 그녀는 싫다 소리를 하지 못하고 비늘 조각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음?”

오드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딱딱하고 차가우니 얼음 씹듯 씹거나 물과 함께 삼켜야겠구나, 했던 예상과는 달리, 비늘 조각은 입에 넣자마자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졌다. 양치용으로 마시는 물처럼 청량한 기운만이 입에 남았다.

“어디 아프진 않으시죠?”

“어, 괜찮아. 셰비언, 이거 꼭 솜사탕 같아. 순식간에 녹…….”

신기해하며 식감을 설명하던 오드리의 말이 뚝 끊겼다. 커다란 망치로 명치를 맞은 듯 끔찍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지독한 통증에 숨이 막히고 혓바닥이 굳었다. 귓가에서 이명이 울리는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부터 감각이 사라졌다.

“셰, 비…….”

오드리는 어떻게든 셰비언을 부르려 했지만, 입술조차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눈앞의 풍경이 호수처럼 일렁거리다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손에서 미끄러진 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아가씨?”

셰비언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오드리를 잽싸게 받아내 품에 안았다. 창백해진 안색과 핏기 잃은 입술, 놀랍도록 차가운 체온이 그의 심장을 식혔다. 좀 추워하고 말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줄이야.

마음이 급한 나머지 안은 자세 그대로 마력을 불어 넣었다.

“윽…….”

셰비언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대량으로 빨려나가는 마력에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조금 더 지나자 오드리를 안고 등을 토닥이는 간단한 동작마저 버거워졌다.

“나도 참……. 멍청하기도 하지…….”

오드리의 마력이 일단 기회를 잡으면 놓치지 않고 양껏 배를 채우는 성질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상태가 나쁜 것에 놀라서 화를 자초했다. 상태가 안 좋다고 대뜸 마력을 붓는 게 아니라 잠시 기다리며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하나 이제와 후회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력은 이미 빨릴 대로 빨렸고 시간을 되돌리는 것따위는 마법의 주인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속이 텅 비어 휑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잘 먹고 며칠 쉬면 금세 괜찮아질 터였다.

셰비언은 이젠 돌로 만든 조각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는 오드리를 긴 의자에 눕혔다. 오드리의 상태는 아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입술엔 혈색이 돌아왔고 숨소리도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창백하던 뺨에 홍조가 올라 얼굴 전체가 환했다.

‘마력을 부은 보람이 있네.’

마력을 그만큼 부었는데 안 괜찮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테지만, 어째 그런 생각은 한줌도 들지 않았다. 하긴 그녀에게 주어 아까운 게 있긴 하던가.

이마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자, 보통 사람들처럼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얼음덩이 같던 몸에 체온이 돌아온 걸 확인하자마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셰비언은 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짝 마른 뜨거운 땅이 얇은 옷감을 뚫고 열기를 전했다. 평소라면 뜨거워 싫다며 펄쩍 일어났을 텐데, 마력을 절반쯤 비워 속이 텅 비어 있다 보니 마른 흙바닥이 따끈따끈한 방석처럼 느껴졌다.

주저앉은 김에 오드리가 누운 긴 의자에 턱을 괴고 기대 앉아 잠든 얼굴을 구경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사람이니 좀 더 보고 싶은데, 몸이 노곤해지면서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볼 수 있을 때 더 봐야 하는데, 그녀가 언제 또 이렇게 찾아와 줄지 모르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암만 애를 써도 무거운 눈꺼풀은 이길 수 없었다. 그는 바닥에 앉은 채 의자에 머리만 올려놓은 이상한 자세로 잠들고 말았다.

“으음…….”

오드리는 셰비언보다 일찍 깨어났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손가락의 감각은 무사한지, 앞은 잘 보이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몸은 전부 정상이었다. 솜털을 쭈뼛 서게 할 정도였던 통증은 사라지고 없고 이명도 들리지 않았다.

“후우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녀는 혹시나 또 고통이 찾아올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몸은 아주 가뿐했고, 늘 관자놀이 근처를 맴돌던 미미한 두통도 없었다. 몸 전체에 기력이 충만하고 상쾌하니, 기자에 쫓기고 일에 치이며 힘들었던 근래에 드물게 상태가 좋았다.

‘아프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 뭐 그런 건가…….’

잠깐 아파서 이렇게 상태가 좋아지는 거면 그 정도 아픔쯤이야 참을 만한 일었다. 하지만 통증에 대해 미리 말을 듣지 못한 일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이렇게 아플 줄을 모르고서 한낮에 비늘을 먹었다가 쓰러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단 말인가. 뒤늦게 찾아온 경계심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남이 주는 걸 그냥 꿀떡꿀떡 받아먹고, 내가 미쳤나.’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먹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먹으면 좋다는 셰비언의 말만 믿고 덜컥 입에 넣었다는 게.

‘셰비언이 끼어들면 내 기준이 너무 관대해져……. 오드리, 공평해야지. 모두에게 똑같이 굴어야지.’

오드리는 모두에게 공평하던 자신의 세상에 예외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그의 얼굴만 보면 자꾸만 기준이 무너져 버리는 자신 역시도.

지금도 그랬다. 비늘을 먹고 생길 수 있는 증상들에 대해 왜 미리 설명을 하지 않았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스스로 변명을 붙였다.

‘의도는 좋았잖아, 결과도 좋잖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거야. 몰랐겠지!’

라비린은 물론이고 이디케, 혹은 라디아타가 그랬더라도 내가 이럴까 생각해 보자 답은 더 명확하게 나왔다. 셰비언이 아니라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물렁하게 굴 리가 없었다. 공평하게 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은 금세 셰비언에 대한 분노로 탈바꿈했다.

“셰비언!”

오드리의 목소리는 아주 뾰족했다. 릴리나 다이앤이 들었으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하던 일마저 버려두고 바로 뛰어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셰비언은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꼼짝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사방을 둘러보다 뒤늦게 그의 머리통을 발견한 오드리는 황당함에 말을 잊었다.

‘자기가 고양이도 아니고……. 왜 이러고 자?’

그녀가 만탈락에서 예뻐하던 고양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세로 잠을 자곤 했다. 몸을 둘둘 말고 자는 건 기본이고, 굵은 나뭇가지에 젖은 빨래처럼 널려서 자거나 푹 파인 구덩이에 몸을 구겨 넣고 자는 일도 많았다.

오드리의 눈에 지금 셰비언의 자세는 딱 고양이처럼 보였다. 의자에 올린 팔에 머리를 대고 자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주저앉아 의자에 턱만 달랑 올려놓고 자다니. 하여간 희한한 자세였다.

‘나 참…….’

가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화가 푸스스 식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은 물론이고 친척까지도 용이라고 주장할 정도의 괴짜에게 뭐 얼마나 대단한 상식과 예의를 기대했나 싶어지고 말았다.

일단 화가 식고 나니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핏기를 잃고 창백해진 뺨, 푸르스름한 입술, 이마를 잔뜩 적신 땀, 눈 밑에 생겨난 짙은 그늘 같은 것들 말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잘 먹고 잘 쉬어서 건강하고 윤기 나는 얼굴이었는데, 지금 그는 떨어지기 직전에 다다른 꽃처럼 창백하고 힘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곳이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장소라지만 그리 길게 머문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나한테 또 마력을 넣었나?’

자신의 몸은 생기와 활기로 가득한데 셰비언은 보는 것만으로도 상태가 나쁘니, 당연히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 지난날, 오드리에게 마력 절반을 털렸다며 이럴 줄은 몰랐다고 투덜대던 표정이 잠든 그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그래도 그때 그는 이렇게 무방비로 잠들진 않았었다. 큰 마법을 쓰느라 지나치게 마력을 소비한 마법사들이 드러누워 골골대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금방 소화되도록 도와준다는 게 이런 거였어……?”

부르는 이름도 못 듣고 자는 사람에게 물어봤자 무슨 대답이 있겠느냐만, 단지 대답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따스하게 온기가 돌던 손끝 발끝이 차갑게 얼어붙고 머리가 멍해졌다. 낯선 감각이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코 밑에 손가락을 대고 숨은 쉬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로는 모자라 목덜미에도 손을 댔다. 한 번에 맥이 뛰는 곳을 찾지 못해 목덜미를 더듬는 꼴이 됐지만 민망하다고 의식하지도 못했다.

“아, 괜찮네.”

얇은 피부 아래에서 힘차게 뛰는 맥박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안심이 됐다. 바짝 곤두섰던 신경이 느슨해지고 나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놀라서 한 일이고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얼굴에 열이 오른 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드리는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만탈락을 상상할 때 북적거리는 사람들까지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나 왜 이래, 정말. 돌아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요?”

“깨, 깨어 있었어? 어, 언제부터?”

어찌나 놀랐는지, 말이 잘 안 나왔다. 입을 열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드리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지둥 옷매무새며 자세를 고쳐 앉는데, 셰비언은 그 이상한 자세 그대로 입만 삐죽 내밀고 종알거렸다.

“아가씨께서 제 목에 손을 댔을 때부터요. 근데 진짜 조금만 더 있다 가시면,”

“깼으면 벌떡 일어날 것이지 왜 계속 그러고 있었던 건데!”

“그야 아가씨가 만져 주시니까 좋아서 그랬죠.”

“마, 만져…….”

“계속 잠든 척하고 있을 걸 그랬다.”

오드리의 얼굴이 가을의 사과처럼 새빨갛게 익었다. 손끝에 닿았던 그의 서늘한 체온과 살갗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정작 만질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제야.

오드리가 뒤늦게 찾아온 수치심에 부들부들 떠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셰비언은 주섬주섬 일어나 흙먼지가 묻은 옷자락을 털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이상한 자세로 잤으면서도 허리는 안 아픈 모양이었다.

“몸은 어떠세요? 마력이 꽤 들어갔으니까 나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궁금해요.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혹시 많이 아프셨어요?”

“……아픈 건 잠깐이었고……. 지금은 괜찮아.”

“손 좀 줘보세요.”

셰비언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니, 부끄러워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같았다. 오드리는 자꾸만 밖으로 표출되려 하는 수치심을 꾹꾹 눌러 숨기고 손을 내밀었다.

“꼭 이렇게 접촉해야 알 수 있는 건가?”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면 편리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진 못해요. 먹어보지 않고서는 맛을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하죠.”

“먹지 않고도 맛을 알 수 있을 때가 있는데.”

“그럼 그냥 모른다고 할게요. ……아, 괜찮네요. 상태가 아주 완벽해요.”

셰비언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드리의 손을 놔주었다. 오드리는 잠깐 사이에 차갑게 식은 손끝을 감싸 쥐고 새삼 그의 손이 얼마나 차가운가를 실감했다.

동시에, 하나같이 의사를 붙여주지 못해 안달하는 라비린과 다이앤의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다. 셰비언의 손이 미적지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식어 있었으니 그들의 걱정이 하늘에 닿았던 것이다.

“그대는 괜찮나?”

“네?”

“내게 마력을 많이 빼앗긴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겨울요정이 내 손을 쥐고 있는 것 같았어.”

오드리는 생각난 김에 건넨 걱정이지만, 셰비언에게는 대단히 행복한 관심이었다. 날렵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고 창백하던 입술에 꽃물이 들었다. 눈보라치는 들판에 서 있던 겨울요정은 순식간에 봄의 들판에 서서 꽃을 물고 웃었다.

“제 걱정을 하셨어요?”

아, 이런. 오드리는 부주의한 제 입을 때리고 싶어졌다. 자신의 감정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최대한 중립적으로 들릴 법한 단어를 골랐다.

“……마법을 지나치게 사용한 마법사가 앓아눕는 걸 자주 봤으니까. 워커만 해도 출입금지마법 연구 중에 덜컥 쓰러져서 참여를 못 했잖아?”

“용의 마력이 조금 섞여 있긴 해도 워커는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용인걸요. 조금만 쉬면 괜찮아져요.”

“…….”

“저는 아가씨가 더 걱정이에요. 제 마력이 아가씨의 마력 균형에 도움이 됐으니 저야 그걸로 만족하는데, 샤를레아가 어떻게 반응할지가 좀 애매해서요. 아예 무관심한 게 제일이지만 그녀가 과연 그럴까 싶고.”

“왜? 내 마력이 용의 마력과 더 비슷해지기라도 하는 거야?”

“아무래도요. 지금도 언뜻 보면 용으로 착각할 정도로 특이한 상태인데 거기에 제 마력을 더 보탰으니…….”

꿈꾸듯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던 셰비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하나뿐인 동족이라 절로 마음이 누그러지긴 하는데, 딱 그만큼 재수 없고 짜증나는 샤를레아. 마법을 빼앗긴 했지만 자신의 몇 배나 되는 시간을 산 용이니만큼 꼼수에도 능통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가 어려웠다.

“샤를레아를 조심하세요.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물어도 절대 내주지 마시고, 뭔가를 선물하거든 반드시 저의를 의심하세요. 제가 마법을 빼앗긴 했지만 샤를레아도 용은 용이라서, 자신의 마력을 가지고 아가씨의 마력을 뒤흔들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어요.”

“알기 쉽게 설명해 줬으면 좋겠군. 예를 들어봐.”

“용의 마력은 다른 종족의 마력을 뒤흔들고 어지럽혀요. 치료를 위해 적절히 사용하면 득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독이 되죠. 회복한 지 얼마 안 됐다지만 샤를레아도 비늘 한 조각 정도는 뗄 수 있고, 당연히 그 비늘엔 용의 마력이 가득 담겨 있어요. 샤를레아는 동족을 지나치게 아낀 나머지 마법을 가져간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아직도 남아서…….”

셰비언은 샤를레아가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나쁜 짓들을 구구절절 읊었다. 말하면서도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긴 해도 막상 오드리를 앞에 두니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오드리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셰비언의 걱정을 들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용은 지나치게 강한 마력과 힘을 타고난 나머지 본의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고 다니는 종족이었다. 종족전쟁의 끝에 승리자로서 살아남은 인간이라도 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연약하니, 곁에 있지 않는 게 제일 좋았다.

악의 없이 가볍게 휘두른 팔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하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샤를레아는 불특정다수의 인간에게 악의적으로 팔을 휘두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존재이니만큼 더더욱 경계하며 피해야 했다.

“샤를레아가 인간에게 그렇게나 위험한 존재라면, 그대는?”

“네?”

“둘 다 용이라며, 그대는 내게 위험하지 않느냐는 말이야.”

“당연하죠, 저는 샤를레아가 아닌걸요.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사랑해요.”

내가 그대를 사랑하노라, 부끄러움 없이 전하는 마음은 순백의 눈처럼 그저 희었다. 오드리는 외면할 수도 없게 전해지는 진심이 고통스러워 그만 눈을 감았다. 그의 말에 기뻐하며 거세게 뛰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분명 거절했을 텐데.”

“흐르는 물이 언제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듯이, 마음도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기 마련이죠. 보세요, 그때는 거절하셨지만 오늘은 이렇게 찾아오셨잖아요?”

“그거야 아프니까 쉴 곳을 찾다가 온 거지. 그 비늘이 출입증이라는 것만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거짓말. 술술 나오던 거짓말이 목에 덜컥 걸렸다. 오드리는 말을 끝맺지 못한 자신에게 놀라 목을 쥐고 입을 뻐끔거렸다. 거짓말에 딱히 반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에도 능숙한데 왜 말이 나오지 않는 건지.

혹시 셰비언이 이 공간에 뭔가를 해놓은 건 아닌가 의심하며 쳐다보았지만,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춘 오드리를 걱정하는 쪽에 더 신경이 팔린 듯했다. 진심을 숨기지 않는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사람 마음 휘두르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만탈락에 있을 때부터 이미 숱하게 해 온 일인데 새삼 죄악감이 들었다. 아이만큼이나 순수한 애정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걸 돌려줄 생각도 없이 이용만 하고 있는 자신이 굉장히 끔찍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오드리는 셰비언이 내미는 손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든 자세를 바르게 하고 꿀꺽 침을 삼켰다. 맞잡은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라비린과 약혼할 거야. 약혼 기간을 채우면 결혼할 거고.”

셰비언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오드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오드리의 약혼과 결혼 얘기를 정면에서 듣고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애가 닳은 오드리의 목소리만 높아졌다.

“신문 기사만 났지 아버지의 허락은 없었으니 무산될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야. 당장 내일 모레 열리는 가을 무도회에서 파트너로 함께할 거고, 그렇게까지 하고 나면 아버지도 더는 미루지 못하실 거야.”

“오, 축하드려요. 아가씨가 원하던 대로 일이 잘 풀리고 있네요.”

셰비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빈정거리는 것도 아니고, 빈말도 아니었다. 정말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웃는 얼굴이 그저 환했다. 큰마음 먹고 말을 꺼냈던 오드리는 그만 황당해지고 말았다.

“결혼할 거라니까? 그대가 내게 아무리 마음을 주더라도, 나는 그에 보답해 줄 수 없어.”

“에이, 결혼은 사랑해야 하는 거라고들 하지만 아가씨는 아니잖아요. 목적이 있어서 결혼을 도구로 삼고 계시면서 왜 마음 얘기가 나오죠?”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결혼이라니, 누가 그런 말을 해?”

“이디케도 워커도 같은 말을 하던데요.”

오드리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서 오드리 본인을 제외하면 그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이디케였다. 더불어 워커도 만만치 않았다. 아직 자세한 사정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둘에게 자신의 연기가 통했을 거란 기대는 별로 없긴 했다.

“아가씨의 마음이 아가씨의 것이듯, 제 마음은 제 것이죠. 그러고 보니 제가 읽었던 로맨스 소설에서는 결혼을 하면 몸도 마음도 상대의 소유가 되는 것처럼 묘사했던데, 정말 그런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오드리는 셰비언이 읽었다는 로맨스 소설이 대체 뭔지 궁금해졌다. 단지 결혼을 한 것만으로 몸도 마음도 상대의 소유가 되는 얘기라니, 그거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어쨌거나 오드리의 부정이 마음에 든 셰비언이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그렇죠? 만들어진 의식을 치르는 것만으로 상대의 마음을 소유하게 된다니, 말도 안 되죠. 아가씨, 저는 아가씨의 마음 안에 제 자리가 있기를 원해요. 지금처럼 이렇게 제 공간에 찾아올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이면 충분해요. 물론 좀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좋겠지만요.”

“그게 바로 그대가 원하는 보답이고, 난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아가씨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단지 결혼했기 때문에요? 이것 참, 인간의 관습이란 어렵기도 하지…….”

셰비언은 용이었고, 용은 홀로 사는 것에 익숙한 종족이었다. 인간의 사회에 적응해서 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지만, 인간들에게는 그가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관습이 너무나 많았다. 신분이니, 예의니……. 인간은 어울려 사는 종족이니 그런 게 필요한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억지로 납득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용족에게 특정한 상대와 영원을 약속하는 의식 따위는 없었다. 그런 게 없어도 한번 방향을 정한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으니, 상대의 마음에 자신의 자리를 얻어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유부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도, 불륜은 나쁜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도, 머리로 알고만 있을 뿐 완전히 이해하는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제도와 관습이 아니라 그저 마음뿐이니까.

그렇다 보니 오드리가 라비린과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그건 셰비언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결혼 의식을 치른다고 오드리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마음을 욕심내는 게 왜 안 된단 말인가.

셰비언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제 앞에 선 오드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드리는 모르는 것 같지만, 그리고 알아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출입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남의 공간에 당당히 들어오는 걸로 모자라 멋대로 공간을 주무르려면 공간의 주인에게 그만한 감정을 갖고 있어야만 했다.

그 감정의 종류가 사랑인지 미움인지 아니면 동경인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게 맹점이긴 하지만, 셰비언은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마력의 계통이 같아 쌓이는 호감이 있는데 설마 미움이겠는가.

“귀를 기울이면 아가씨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요.”

“그대가 계속 황당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화내고 싶은 걸 참느라 뛰는 거야.”

오드리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나 쉽게 할 수 있는 거짓말인데 아까는 왜 입이 틀어막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말투도 표정도 자세도 완벽한 거짓말이었는데, 속아 넘어가야 할 셰비언은 오드리의 속마음쯤이야 다 안다는 것처럼 개구진 미소를 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요? 내 얼굴만 보면 화가 나요?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말을 태연히 하다니, 그건 무슨 자신감이야?”

“우린 마력의 계통이 같잖아요.”

마력의 계통 얘기가 나오자마자 오드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마음이 의지를 배반할 때마다 이게 다 마력의 계통 때문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뇌고 있긴 했다. 하지만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당연히 호감이 있을 거라고 장담하는 말을 들으니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그 마력의 계통에 따른 호감이라는 거, 말은 거창하지만 간단히 얘기하자면 마력의 기원이 되는 종족이 같아서 느끼는 친근감과 비슷한 거 아닌가?”

“어…….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한 개념이지만…….”

“같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도 미워 죽겠을 때가 있는데, 까마득하게 먼 마력의 기원 따위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감을 갖지 않는 게 좋겠어. 당장 그대와 샤를레아를 봐, 동족이니 당연히 마력의 계통도 같을 텐데 둘은 사이가 나쁘잖나.”

오드리의 공격은 굉장히 효과가 좋았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말로 믿는 구석을 부정당한 셰비언은 몹시 상심하고 말았다. 그의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려면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겠네요.”

“약혼자가 있는 여자의 주변을 맴돌며 사랑을 구걸하는 것만큼 구질구질한 꼴도 없어, 하지 마.”

“왜요? 마음도 없이 하는 결혼인 걸 뻔히 아는데 사랑 구걸쯤이야 할 수도 있죠. 어차피 저는 용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관습을 지키는 것보다는 아가씨의 마음을 얻는 쪽이 더 중요해요.”

“그놈의 용, 그놈의 마음…….”

“솔직히 말해, 저는 인간이 왜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자기들이 만든 제도에 집착하고 구속받으며 사는지 잘 모르겠는걸요. 그…… 로맨스 소설 속에서는 상대에 대한 소유욕? 뭐 그런 말로 나오던데……. 도무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나와는 다른 존재고 물건처럼 가질 수 없는 게 당연한데요. 왜 가질 수 없는 걸 가지려고 하지?”

오드리는 결혼이 당연한 사회에서 나고 자랐다. 나이가 차고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어디가 모자라거나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결혼 제도 자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셰비언의 사고방식은 아주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진짜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진지하게 셰비언이 정말로 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건 처음이었다. 상식이 부족한 괴짜라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달랐다.

“아까는 마음 없는 결혼이니 무시하겠다더니, 이젠 결혼 자체를 부정하는군. 아예 인간의 사회제도와 관습 전부를 부정하지 그래?”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어쩌겠어요, 지금은 인간들의 세상인걸. 제가 이만큼 적응하고 사는 것도 굉장한 노력의 결과라고요. 아무튼, 이젠 내 식대로 할 거예요.”

잔뜩 골이 나서 입을 삐죽거리던 셰비언이 갑자기 발을 굴렀다. 그러자 오드리의 발아래에서부터 새하얀 빛줄기들이 융단처럼 뻗어 나와 좁은 골목으로 이어졌다.

“이게 뭐지?”

“아가씨께서 지금 가장 만나고 싶은 분을 향해 데려가줄 길이죠.”

“내가 누굴 만나고 싶어 할 줄 알고? 용의 마법은 죽은 사람도 만나게 해주나?”

“죽은 영혼을 만날 수는 없어도 기억에 남아 있는 허상과 대화할 순 있겠죠. 어차피 상대를 결정하는 건 아가씨 본인인걸요.”

“허상과의 대화라…….”

셰비언의 장담이 오드리의 흥미를 자극했다.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셰비언의 마법은 언제나 그녀를 놀라게 했었다. 발아래에서 반짝거리는 흰 길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뛰었다. 허상이라도 좋으니 초상화로만 남은 어머니를 만나 대화를 한다면 즐거울 거란 기대가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좋아, 재밌겠네.”

오드리는 대엿 개는 되어 보이는 길 중 가운뎃길을 골랐다. 빛나는 길을 타박타박 걸어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만탈락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정수리 위에서 좁은 골목으로 뚝 떨어지는 햇빛과 건조한 공기가 추억을 불러냈다.

“이거 원, 승마 바지를 골라 입고 만탈락을 쏘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걸.”

“어……. 귀족 영애들은 일정 나이가 되기 전엔 집 안에 갇혀서 자라지 않나요?”

“내가 그렇게 컸으면 로렐라이를 만들 수 있었을 것 같아?”

“하긴 그렇겠네요. 근데 그렇게 돌아다니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진 않았어요?”

“계속 그러니까 포기하더라고. 다들 그러려니 하던데?”

셰비언은 오드리의 어린 시절을 굉장히 궁금해했다. 평소라면 그런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라고 칼같이 잘랐을 오드리지만, 주변의 풍경이 그녀의 마음을 녹여놓았는지 술술 대답이 나왔다. 그렇게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며 몇 번이고 갈라졌다 합쳐지는 골목길을 걷던 두 사람은 낯설고 이상한 길을 만났다.

희한한 골목이었다. 양옆으로는 벽돌을 쌓아 지은 건물이 높다랗게 솟아 있고, 막다른 벽에 화려한 장미가 양각으로 새겨진 검은 문이 달려 있었다. 만탈락은 벽돌로 집을 짓지 않고, 높게 짓지 않으며, 검은 문은 칼레이의 마차를 떠올리게 한다 하여 기피하는 풍습이 있었다.

여러모로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길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마침 반짝이는 길이 검은 문 앞까지 이어져 있기도 했다.

오드리는 검은 문 앞에 서서 문에 양각된 조각을 구경했다. 멀리서 볼 때는 장미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장미, 튤립, 백합 등 온갖 종류의 꽃이 죄다 등장하는 화려한 문이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은 목재가 대단히 고급스러웠다.

“손잡이가 없군.”

“그럼 노크를 해야죠. 들여줄지 말지는 안에 있는 사람이 결정하겠죠.”

“죽은 사람이 결정은 무슨…….”

오드리는 투덜대면서도 순순히 문을 두드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들어오세요.”

피로에 젖은 듯 가느다랗고 낮은 목소리가 출입을 허락함과 동시에 문이 한 뼘쯤 열렸다. 문틈으로 라일락과 레몬, 앰버가 뒤섞인 우아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향이 낯익어.’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많이 맡아본 향기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 문을 열지 말고 뒤돌아서서 도망쳐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솟아올랐다. 뒤에 선 셰비언을 향해 무시무시한 시선을 날렸다.

“만날 사람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며?”

“아가씨가 ‘지금’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했죠. 그런데 제 경험상, 자신의 바람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더라고요. 아가씨도 그랬던 거겠죠.”

차마 반박할 수도 없는 정론이었다. 오드리는 혓바닥 위까지 올라왔던 욕을 우물우물 씹어 삼키고 열린 문을 노려보았다.

“상대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면, 허상이 아니라 진짜를 만나는 건가? 무슨 수로?”

“그야 당연히 의식 분리를 통해서 제 공간에서 만나는 거죠. 근데 안 들어가세요? 상대는 지금 문만 보면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는데.”

“동의 없이 공간에 끌어들이는 건 납치라고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그새 잊었나?”

“동의가 없다니요? 아가씨, 노크하셨잖아요? 상대를 고르고 의식 분리를 시키고 만날 의사를 물은 것 전부 아가씨가 하신 일이죠. 저는 그저 자리를 빌려드린 것뿐인데요.”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지! 마음을 얻겠다더니, 하는 짓은 순 사기꾼이잖아?”

태연히 말을 늘어놓는 얼굴이 어찌나 얄미운지 저절로 이가 갈렸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데, 그러기엔 신장 차이가 너무 나는 데다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마음에 걸렸다.

“엄청나게 놀랐을 텐데, 나중에 수습은 어떻게 할 거야? 기억을 지우기라도 할 거야?”

“에이, 무서운 말씀을 쉽게도 하시네요. 기억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나요. 그냥 생생한 꿈을 꾸었다, 정도로 처리할까 해요. 막 일어났을 땐 아주 잘 기억나지만 반나절만 지나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꿈.”

“하여간 멋대로지……. 나중에 두고 봐.”

멋없는 말이지마는,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밀었다. 검은 문은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문틈으로 짐작했다시피, 방은 어둑어둑했다. 가로는 좁고 세로는 길며 장식용 창살이 잔뜩 달린 창문은 채광에 그다지 좋은 형태가 아닌 데다가, 어린아이 눈썹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의 빛은 얇은 커튼조차 뚫지 못했다. 벽 곳곳에 달린 마법등도 뚜껑을 다 열어놓은 게 아니었다. 햇빛으로 가득 찬 만탈락의 골목길을 걷다가 들어온 오드리에겐 지나치게 어두운 방이었다. 오드리는 방 안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멈춰 서서 눈이 적응하길 기다렸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대신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라일락, 레몬, 앰버향 아래에 은근하게 깔린 포도향이 맡아졌다. 펜촉이 매끄러운 종이 위를 달리는 사각사각 소리와, 여름용 천이 마찰되며 내는 바스락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꾹 눌러 담은 웃음소리도.

“오드리, 언제까지 그렇게 옆모습만 보여주고 있을 거야?”

“……으.”

오드리는 아예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신음을 흘렸다. 귓바퀴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방이 어두워서 천만다행이었다.

“라디아타…….”

“응, 오드리. 이리 와서 앉아. 그리고 저 문에 대해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어. 사실 지금 나는 내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운 상황이거든.”

라디아타가 오드리의 뒤쪽에 둥둥 떠 있는 검은 문을 향해 턱짓 했다. 그리고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괴롭히던 서류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마법등의 뚜껑을 더 열었다. 책상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차가 있으면 좋을 텐데, 하녀를 부르긴 좀 그렇지? 저 문을 보면 기절할지도 몰라.”

“어차피 여기 오지도 못해. 방이 차가우니까 차는 뜨거운 걸로 할게.”

오드리가 빈 책상에 손을 휘젓자 그 자리에 찻주전자와 찻잔은 물론이고 설탕통과 다과, 우유까지 모두 갖춘 제대로 된 다과상이 차려졌다. 찻주전자를 기울이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뜨거운 차가 쪼르르 흘러나왔다. 라디아타가 평소에 즐기는 가향차의 향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세상에, 이거 정말 요정의 마법 같아. 마법사들이 하는 거 말고, 아이들 이야기책에 나오는 마법 말이야. 이건 대체 무슨 꿈이지?”

“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지금 앉은 채로 잠들어서 꿈을 꾸는 것 같거든. 내 집무실에 갑자기 허공에 뜬 문이 생겨나더니 그 문을 통해 네가 들어왔잖아? 게다가 네가 허공에 손을 휘저으니까 다과상이 차려졌어. 이게 꿈이 아니고 뭔데?”

입에 머금은 찻물은 향긋하고 다과는 달콤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일 리가 없었다. 라디아타는 자신을 기다리는 서류를 걱정하면서도 꿈에서 깨기 싫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꿈이라기엔 좀 지나치게 생생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드리, 너 요정이었어?”

“……큽! 푸흡!”

라디아타가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물었는지, 오드리는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꾸역꾸역 찻물을 삼키고 나자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책상을 마구 두드려 대며 웃었다. 내려놓은 찻잔이 소서 위에서 달각달각 흔들렸다.

겨우 웃음을 수습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나자 라디아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야금야금 갉아먹던 쿠키를 대번에 내려놓았다.

“무도회를 앞두고 고생한 보람을 고스란히 날릴 뻔했네. 어쩐지 배가 차는 느낌이더라.”

“……감상이 그게 다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쉴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좋아. 가끔 초대해 줘.”

“그리고?”

“이왕 쉬는 거, 내 집무실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쉬고 싶긴 한데……. 그랬다간 의식 분리가 끝나고 나서 일하는 데에 문제가 생기겠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는 게 너무 아쉽네.”

라디아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쉽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얼떨떨한 감이 없잖아 있고 이게 무슨 동화 같은 일이냐 싶긴 했다. 하지만 눈앞에 갑자기 생겨난 문이 둥둥 떠 있는 데다 말을 꺼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오드리였다.

“네가 하는 말인데, 내가 못 믿을 이유가 대체 뭐겠어.”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다시 차오른 긴장 때문에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오드리는 라디아타의 그런 반응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로렐라이 이야기를 당장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시간이 필요하다던 사람과 동일인물 같지가 않았다.

“그……. 화 안 내?”

“네가 이렇게 찾아오기 전까진 화가 났었지.”

라디아타는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다. 오드리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이 얼마나 컸는지, 직접적인 이해관계 없이 진실을 들은 건 자신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었다. 머리로는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심부름꾼을 불렀다가 도로 돌려보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말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잠시 거리를 두자고 한 건 자신이면서도 찾아오지 않는 오드리에게 괜한 서운함이 솟았다. 아주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건 자신 혼자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오드리가 ‘지금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고른 걸 알게 되었을 때, 서운함은 비를 맞은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일하던 와중에 허공에 갑자기 문이 나타났을 때는 정말 오만 생각을 다 했는데, 노크를 거절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네가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나였잖아. 그거면 됐어.”

“…….”

“의식 분리니 뭐니, 신기한 체험도 하게 해주고 말이야. 그리고 용일지도 모르는 마법사에 대한 얘기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오라버니도 모르는 거잖아?”

“응.”

“그래, 나도 남들은 모르는 거 하나쯤은 알고 있어야지. 아, 기분 좋다.”

“좀 더 일찍 용기를 낼 걸 그랬네…….”

“글쎄,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요즘 하도 바빠서,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찬 데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상태였거든. 이렇게 특이하게 찾아오는 게 아니었으면 왔다는 말 듣자마자 짜증내면서 그냥 가라고 했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냐며 오드리가 황당해했지만, 라디아타는 진심이었다. 가을무도회와 수확제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바쁘지 않은 귀부인이 누가 있겠느냐마는, 요즘 라디아타는 미모 유지를 위한 관리 시간을 줄여야 할 정도로 바빴다.

그동안 귀부인으로서의 의무를 방기하고 칩거중이었던 로샨이 갑자기 자신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동기가 뭔지는 몰라도 칩거를 끝내겠다고 결심했다니 참 고맙고 좋은 일이었지만, 클로드는 물론이고 라디아타와 라비린까지 달려들어 그녀를 말렸다. 라디아타의 생일파티 준비를 하는 것과 가을 무도회와 수확제를 준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끈질긴 설득으로도 로샨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한동안 쉬었을 뿐이지, 한때는 타우레드 후작가의 안살림을 무리 없이 운영했으니 조금만 고생하면 다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를 치는데 당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라디아타는 오랜만에 펜을 잡은 로샨에게 세월이 흘러 바뀐 것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그녀가 실수한 일들의 뒤치다꺼리를 맡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일거리는 평년의 두 배인데 효율은 반밖에 안 나왔다.

그래도 해 본 가락이 있는지라, 한두 해만 더 지나면 라디아타의 도움이 필요 없을 수준에 이르게 될 게 분명해 보였다.

“후작님의 도움이 없이는 대문 밖을 나서는 것도 힘들어하신다면서?”

“그게 극복이 되는 거였더라고. 얼마 전엔 얼굴을 가리고 대장간에도 다녀오셨어. 직접 검을 골라 오셔서 깜짝 놀랐지 뭐야.”

오드리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로샨이 아름답게 꾸며놓은 포도나무 응접실에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산다고 해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터였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가 상처를 극복하는 게 싫은 게 아니야. 나 그렇게 나쁜 딸 아니야. 다만 그로써 타우레드 후작가에 내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당위성이 떨어지는 게 마음에 걸려. 차라리 희망을 품지 말았다면 모를까, 이건…….”

라디아타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책상 아래로 숨겼다. 자신을 가문에 남겨두기로 결정한 아버지의 마음이 하루아침에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오도록 불안했다.

이전에 그랬듯이 쫓아가서 물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질문이 오히려 그를 자극할까 두려웠다. 필요한 정보만 주면서 꼭두각시처럼 자신을 조종한 아버지에 대한 공포는 분노마저 잡아먹고 덩치를 키워 자꾸만 발을 잡아끌었다.

“아버지가 날 사랑하는 건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아버지가 바라는 모습을 충실히 수행해 냈기에 사랑받은 면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니까……. 웬만하면 거스르고 싶지 않아.”

“그럼 아직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베텔 경을 잡아. 가을 무도회와 사교모임에 같이 다니면서 네가 데릴사위를 들이면 들였지 타우레드에서 나가지는 않을 거라고 이미지를 쌓아버려. 후작부인은 사랑의 가치를 높게 치는 분이라며? 분명 도와주실 거야.”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카프러스에게 차였을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무려 타우레드의 황금장미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아름답고 총명하며, 기사인 남편을 맞으면 그를 확실히 위쪽으로 밀어 올려줄 수 있는 배경까지 갖췄는데 설마.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어, 라디아타……? 갑자기 안색이 나빠졌어. 어디 아파?”

라디아타는 눈치 없는 질문을 하는 오드리를 보며 새삼 그날의 기억을 되감았다. 카프러스에게 대답을 재촉했다가 차였던 그날. 안 그래도 속이 잔뜩 상해 있었는데 오드리와 라비린이 찾아와 충격적인 비밀을 털어놓았었다.

“내가 너에게 말을 안 했었네.”

“음? 뭘?”

“나 차였어.”

오드리의 손에서 쿠키가 뚝 떨어졌다.

“생각해 보니 네가 로렐라이의 주인이라는 말을 들은 날이 바로 그날이었네. 차인 날. 어쩐지 감정이 폭발적으로 치밀어 오르더라…….”

“……미안해, 몰랐어.”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내가 말하지 않았고, 베텔 경 역시 말하지 않으셨을 테니.”

라디아타는 무심히 말했지만 오드리는 갑자기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되었다. 괜히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문 뒤에 숨어 있을 셰비언을 아쉬워했다.

“오드리, 가을 무도회에 누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올 거야? 헨젤 백작님? 아니면 베텔 경?”

“베텔 경……이 해주시기로 했지만……. 네가 불편하다면 내가 어떻게든, 정말 어떻게든 아버지를 파트너로 모셔볼 테니까! 아니면, 어, 그래, 에이쉬도 있어. 에이쉬에게 부탁할까?”

“그웬 영애에게 무도회에 참석하라고 보석과 드레스를 보내놓고 네가 그웬 공자를 채가면 돼? 내 눈치는 보지 말고, 꼭 베텔 경과 함께 참석해.”

“……정말?”

“그게 아니라면 내가 무슨 수로 베텔 경을 만날 수 있겠어? 꼭 같이 와.”

오드리는 잔뜩 움츠러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무도회까지 겨우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보다 길었다면 분명 위장에 구멍이 났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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