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17. 스캔들
chapter 18. 준비하고 대비하라
chapter 19. 가을무도회
chapter 20-1. 화가 저택의 비극
chapter 17. 스캔들
「가난한 집 아가씨의 남편감으로는 마법사가 최고야. 좀 괴팍하긴 해도 돈 벌 구석이 확실한 데다 일찍 죽거든! - 중매쟁이의 농담」
왕궁의 마법 자료를 탐낸 마법사들이 마법시설 복구 작업에 참여하면서 브란젤의 기반시설은 빠르게 복구됐다.
가장 먼저 정상화가 이루어진 것은 도로였다. 다음에는 나날이 허름해지던 기차역이 다시 반짝거리게 됐고, 자꾸 막혀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던 하수도도 보수를 마쳤다. 그리고 가로등이 다시 광장 일대를 밝히게 됐을 무렵, 마침내 상수도가 완전히 복구됐다.
물을 확보하지 못해 문을 닫았던 공중목욕탕이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식수를 배급받느라 길게 줄을 서던 시민들은 물론이고 매일 물을 사들이던 음식점도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물문제가 해결된 건 브란젤뿐이고 계절에 맞지 않는 가뭄은 여전하니, 곡창지대를 소유한 귀족과 지주들은 이대로라면 올해의 농사를 모조리 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들은 수확을 몇 달이나 앞둔 시기부터 어떻게든 곡물세를 덜 내보고 싶은 마음에 헨젤 백작을 괴롭혔다.
“가뭄이 이렇게 심한데 곡물세를 어떻게 작년처럼 냅니까?”
“맞습니다, 절반은 줄여주셔야 됩니다.”
“요 몇 년은 계속 풍년이었는데 똑같이 거둬가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입에서 침을 튀기며 아직 매기지도 않은 곡물세를 운운하는 치들을 보면서, 헨젤 백작은 모진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매년 가을이면 겪던 일이지만 올해는 여름부터라니.
“올 초 관개수로 정비를 대대적으로 했던 걸로 압니다. 비가 좀 적게 와도 농업용수를 쓰는 데엔 무리가 없었을 테죠. 작년만 한 풍작은 기대할 수 없어도 농사를 모조리 망친다니 말도 안 됩니다.”
“백작님, 그 농업용수라고 해봐야 쥐꼬리만큼 밖에 더 됩니까? 수확량 감소는 필연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조리 망친 게 아니라도 겨우 일 년 먹고 살 정도나 나올 텐데요. 풍작일 때나 흉작일 때나 같은 세금이라뇨.”
“백작님도 남부에 곡창지대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 심정을 잘 아실 텐데요. 소출은 주는데 나가는 것만 그대로라니, 안 됩니다.”
“영지민들이 난리를 부릴 겁니다. 안 그래도 영 아니다 싶으면 세 갚을 생각도 없이 땅을 버리고 그대로 도주해 버리는 놈들이 심심찮게 나오는데요. 요즘은 기차를 타고 먼 지방으로 훅 떠나 버리니 잡기도 어렵습니다.”
남부의 명가로 꼽히는 헨젤 백작가의 기반은 넓은 곡창지대였다. 삼십여 년 전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많은 귀족이 사라지고 권력이 왕가로 집중되는 와중에도 헨젤은 부유한 영지를 지켜냈다.
거의 대부분의 땅을 잃고 큰 빚까지 져서 가문의 존속이 어려웠던 랄리우스와의 결합이 그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지금이야 어림도 없지만, 그때는 명가의 핏줄을 지킨다는 핑계가 먹힐 때였다. 죽은 랄리우스 후작이 받았어야 할 공적에 대한 보상을 헨젤이 대신 받았으니.
그렇게 혼인을 이용해서 지켜낸 곡창지대를 잡음 없이 운영해 온 건 순전히 헨젤의 수완이었다. 왕실의 금고지기로서 할 일이 많아 영지에 거의 내려가지 못하면서도 헨젤의 영지에선 소란이 없었다. 그를 위해 헨젤 백작이 들이는 노고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나 할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무능력한 돼지새끼들……. 그저 물려받은 걸 처먹기에 바쁘지.’
가만히 있어도 땅에서 돈이 솟던 시절이 끝나고 있었다. 바다 너머에서 황금을 실어오던 배는 곧 식량을 실어올 것이다. 더 싸고, 더 질 좋은 곡물을.
타우레드가 기사를 양성하는 대신 비마법에 눈을 돌렸듯이, 땅에 기대어 살던 이들도 곧 다른 방향을 찾아야 했다. 헨젤 역시 고민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세금만 줄여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듯 태평한 얼굴들을 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제 배 불리는 데에 바빠서 땅이 말라가는 건 신경도 안 쓰는 놈들.’
왕실의 돈으로 만든 관개수로는 농업용수를 사용할 때 일정량의 사용료를 받았다. 그 자료를 분석하면 어느 영지에서 관개수로를 얼마나 이용했는지 파악이 가능했다. 아직 자료를 받기 전이긴 하지만, 헨젤 백작은 제 앞에서 가뭄 타령을 하는 놈들의 태반이 정말 최저한도로 관개수로를 이용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올 봄에 관개수로 정비를 할 때도 어지간히 어깃장을 놓던 인사들이었다.
“평작일 때 거두던 세금이나 풍작일 때 거두던 세금이나 다르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는 분은 여기 없는 것 같습니다.”
앞다퉈 항의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합죽이가 됐다. 서로 눈치를 보며 옆구리를 찔러대는 꼴이, 정말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농사가 잘됐다고 더 걷은 게 없으니, 농사가 안 됐을 때 덜 걷을 이유도 없습니다. 내 말이 함의하는 바를 잘 기억해 두길 바랍니다.”
풍년일 때 추가로 걷지 않은 세금까지 한꺼번에 때려 버리기 전에 닥치고 꺼져.
다행히 눈치가 없진 않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헨젤 백작의 심기를 더 거스르기 전에 허둥지둥 인사만 하고 와르르 퇴장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헨젤 백작의 회색 눈에 짙은 환멸이 어렸다.
“저놈들 명단 적어뒀지?”
내키지 않는 손님도 손님인지라, 내왔던 차며 다과를 정리하던 보좌관 일랑이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가을 감사 때 두 배로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영지민이 도주한다는 놈은 세 배로 보도록. 법률이 정한 이상으로 지세를 받아먹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정황 포착하는 대로 카즈네 공작전하께 알려라.”
세금 줄여보러 왔다가 치안대에게 탈탈 털리게 생겼군. 보좌관이 내심 혀를 차는 동안, 다시 서류에 집중해 보려던 헨젤 백작이 짜증과 함께 만년필을 내던졌다.
“잉크가 떨어졌군.”
“그……. 죄송합니다. 곧 충당할 테니, 일단 이걸 쓰십시오.”
보좌관이 이전에 쓰던 깃펜과 잉크를 꺼내왔다. 만년필의 잉크는 로렐라이 상단의 전용 제품을 써야 했는데, 미리 구입해 둔 게 마침 딱 떨어지고 없었다.
헨젤 백작은 깃펜을 받자마자 서류에 서명을 하려다 어색하게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써서 손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던 깃펜인데, 겨우 몇 달 만년필을 썼다고 벌써 낯설어져 버렸다. 봄 무도회를 휘젓고 다니며 만년필을 홍보하던 오드리가 떠올랐다. 귀족 영애가 아닌 장사꾼처럼 구는 여식이 창피해 자리까지 피했었건만 막상 만년필을 손에 잡아보고 나니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여자애만 아니었다면.’
입안이 씁쓸해졌다. 만탈락은 예전부터 발전 가능성이 높은 도시였다. 한때 랄리우스 후작 영지의 중심을 이루던 도시답게 기반시설이 충분히 갖춰진 데다 물류도시로서의 입지조건이 아주 좋았다.
밀리나가 죽는 날까지 도시의 권리를 끌어안고 버티지만 않았더라도, 헨젤 백작은 진즉에 만탈락을 남부의 곡물 전체를 거래하는 도시로 개발했을 터였다.
그녀가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몹시 고대하고 있던 도시의 권리가 겨우 아홉 살짜리 딸에게 돌아갔을 때, 그가 얼마나 당황했었나. 오스미다 왕비의 공증만 아니었다면 그 빌어먹을 유언장을 갈가리 찢어버렸을 것이다.
귀족영애가 데뷔탕트를 하는 거야 열다섯에서 열일곱 살이지만, 성인이 되는 건 무려 스무 살은 되어야 했다. 그러니 만탈락을 개발하는 건 그 이후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드리는 그가 상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도시를 부흥시켰다.
오드리는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 로렐라이 상단을 지원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느냐면, 만탈락이라는 도시 전체가 로렐라이를 위해 움직이나 싶을 정도였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가 싶었던 때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로렐라이 상단과 만탈락이 함께 흥했으니 옳은 결정이었다.
‘로렐라이가 만탈락에 자리를 잡은 건 우연이라고 해도, 그 다음은 우연이 아니지. 정말, 여자애만 아니었더라면…….’
헨젤 백작이라고 오드리의 영리함을, 결단력을 왜 모를까. 포모스를 등에 업고 태어난 듯한 행운을 어떻게 모를까.
그저, 그의 저울이 가문의 후계자가 될 하델에게 기울었을 뿐이었다. 오드리가 헨젤에 욕심을 가지게 되는 순간, 하델은 그녀에게 방해물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누가 그 여자 딸 아니랄까 봐 욕심은 지독해서.’
당장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타우레드의 영애와 휴가를 갔다 온다더니 예정보다 일찍 왔기에, 마침 얼굴 본 김에 만탈락의 수입을 물었더니 제 아버지를 예비 도둑 취급했다.
‘만탈락의 권리가 제게 있는 동안은, 그곳에서 나는 물 한 방울까지 제 것이에요.’
‘누가 뭐라더냐.’
‘몇 해가 내리 풍작이었어요. 아버님이라면 흉작에 대한 대비는 이미 끝내두셨겠죠. 괜한 핑계를 대며 만탈락의 재산을 끌어다 쓸 생각은 꿈에도 마세요.’
도시에 상단을 두어 얻는 수익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을 뿐인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말도 못 꺼냈다. 예전에 메너트와 살림 문제로 갈등이 있었을 때도 그렇고, 오드리는 제 권리와 얽힌 화제만 나오면 위협을 받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심하게 경계를 했다.
차라리 하델이 그런 면을 보이면 안심이 될 텐데, 하델은 제 영역에 대한 욕심이 적었다. 사람 욕심이 있는 건 좋은데 거기서 머무르고만 있는 게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아…….”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역시 깃펜이 불편하신 거죠?”
무심결에 흘린 한숨이었는데, 찔리는 게 있던 일랑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눈치를 봤다. 헨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냉큼 만년필용 잉크를 구하러 다녀올 기세였다.
“아니, 됐어. 나중에 하인을 시키도록 하지. ……그보다 자네 괜찮나?”
“예……. 예?”
“요즘 괴물 시체가 계속 나온다면서. 이번에 나온 구역을 보니까 자네가 사는 지역과 가까운 것 같아서 그러지.”
“아, 괜찮습니다. 금방 치워서 핏자국 조금 본 게 단데요 뭐. 덕분에 집세도 내렸고.”
헨젤 백작은 보좌관의 환한 표정에서 사정을 읽어내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브란젤의 집세는 살인적이었다. 월급이 쥐꼬리만 한 일랑에겐 집 앞에서 괴물 시체가 발견되는 것보다 월세가 오르는 게 더 끔찍할 터였다.
다들 저렇게 밝기만 하면 참 좋을 텐데, 요즘 보건국과 치안대는 철천지원수처럼 지내고 있었다.
시작은 치안대원인 체이서가 죽기 직전의 괴물을 몇 번이나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순식간에 몸이 무너져 내리는 괴물을 보게 된 그는 산 채로 포획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숨이 끊어진 뒤에도 계속해서 변형을 일으키는데 무슨 수로 포획을 한단 말인가.
그의 보고를 받은 치안대는 보건국에 아예 직원 한 명을 파견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체이서가 유독 살아 있는 괴물을 발견하는 빈도가 잦으니, 그와 함께 순찰을 보내서 현장에서 샘플을 채취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치안대의 요청이 그럴듯하다고 여긴 보건국은 안 그래도 빠듯한 인원 중 한 명을 빼내 치안대에 보내주었다. 그런데 보건국의 직원과 함께 다니기 시작한 뒤로 체이서는 단 한 마리의 괴물도 발견하지 못했다. 살아 있는 괴물은 고사하고 시체를 발견하는 것도 늦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상황에 치안대는 다급해졌고, 보건국은 능력 있는 직원이 소득도 없이 계속 자리를 비우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게 됐다.
그 뒤론 뭐, 개싸움이었다. 누가 옳다고 말할 수도 없는 설전이 매일매일 오가고, 모든 실패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기 바빴다. 평소 온화하고 사람 좋던 테이란이 불 같이 화를 내며 보건국장의 멱살을 잡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으니.
“그보다 백작님, 신문사에 넣는 돈이 자꾸 늘어나는데요. 계속 둬야겠습니까?”
“막을 수 있을 때까진 막아봐야지.”
“으음……. 이미 집세가 내릴 정도로 소문이 났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어.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떠들지만 않으면 괴물 시체 따위는 헛소문이라고 할 거다.”
“아슬아슬한 평화입니까…….”
“큰 도시를 운영하다 보면 이런 꼼수도 필요한 법이지. 어차피 공격성은 없는 괴물이니까 막을 방법만 찾아내면 돼.”
헨젤 백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도 브란젤 내에서 괴물의 발생 지점을 표시한 지도를 슬그머니 감췄다. 서서히 안쪽으로 파고들어오는 붉은 점들이 불길했다. 고위층 인사가 괴물로 변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공격성 없는 괴물.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공격해 자살로 끝나는 사건.
지금 치안대와 보건국을 위로하는 건 아직까지 괴물로 인한 상해 및 사망사건이나 질병이 없다는 점이었다. 입이 막힌 신문사가 소문이 도는 걸 알면서도 끓는 속을 참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오드리는 라비린과 함께 하티의 신전에 갔다가 사람들에게서 괴물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해주는 것처럼 접근해서 한다는 말이 고작해야 공격성 없는 괴물이라니.
우스운 얘기였다. 리가 항구의 광장에서 나타난 괴물은 분명히 대상을 특정했고, 심지어 빠른 속도로 움직여 오드리의 치맛자락을 잡기까지 했다. 그 행동은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언젠가 괴물에게 당하는 사람이 나올 게 분명했다.
그런데 브란젤은 너무 조용했다. 리가 항구야 치안대가 필사적으로 입을 막았고 휴양지라는 특성이 있어 다들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지만 여긴 자그마치 왕국의 수도인데 말이다. 좀 더 불안이 팽배할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평온했다.
오히려 상수도가 복구되고 가로등이 다시 점등되면서 일상이 돌아왔다며 감격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신문에 나는 기사라곤 도둑이 줄어 다행이라는 내용과 왕궁 마법사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내용, 왕궁마법사들에게 들이는 지원에 대한 트집들뿐이었다.
‘신문에 기사 한 줄 안 나더라니, 이런 식으로 막고 있었나 보지.’
오드리는 아주 갈아 마시고 싶은 마음을 잘 갈무리하고 적당히 장단을 맞춰줬다. 리가 항구의 치안대에서 공식적인 발표를 하기 전에는 입단속을 해달라는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던지라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괴물에게 치맛자락을 잡혔던 당사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했다. 이전이라면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쳐 갔을 인사들이, 라비린과 함께 왔다는 것만으로도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와 제 딴에는 아주 비밀스러운 얘길 전한다는 게 말이다.
“라디아타와 한창 붙어 다닐 때도 이 정도로 사람들 태도가 바뀌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지금은 사교철도 아닌데 이렇게 사람들 눈치가 빨라?”
“걔는 타우레드의 후계자가 아니니까 그렇지. 확인 다 했으면 감상 좀 말해줘.”
“자, 여기. 잘 써왔네. 그래도 라디아타가 후작부인 역할을 다 하는데 이렇게까지 차이날 줄은 몰랐지.”
“내가 로렐라이의 대리인으로 일한 경력이 몇 년인데 이런 계약서 하나 못 쓸까. 그리고 라디아타가 아무리 어머니의 대리를 잘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 그 애는 아무래도 결혼 얘기에만큼은 낄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렇겠네.”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에 나갈 때마다 춤 신청을 연달아 다섯 번씩이나 받는다는 라디아타가 다른 가문의 결혼 문제에 끼어들기란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도 악평이 자자해 상의할 상대로 꼽히지도 않는 오드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힘들 터였다.
“그래도 베텔 경과 약혼하고 나면 완전히 달라질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타우레드의 이름을 계속 가지고 있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진데. 아무튼 오드리, 마음에 들었으면 이대로 보관한다?”
“그렇게 해.”
지금 두 사람은 하티의 신전에서 마련해 준 별실에 마주앉아 계약서를 검토 중이었다. 도대체 평소에 얼마나 친분을 쌓아둔 건지, 신전 측에서는 라비린이 찾아와 인사를 건네자마자 초고속으로 별실을 내주었다.
라비린이 써온 계약서는 오드리와 라비린이 결혼하게 될 경우 나누게 될 결혼계약서의 초본이었다. 대체 어떻게 써올지 궁금한 마음에 한번 해 봐라 했는데, 일전에 나눴던 대화를 거의 그대로 옮긴 계약서를 들고 왔다.
‘멀쩡하게 생겨선 조건도 좋은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할까. 후작가 후계자의 인생에서 로렐라이는 스쳐 가는 풍경에 불과한 거 아닌가?’
오드리는 희희낙락 즐겁게 계약서를 정리하는 라비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족함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히고 앞날이 창창하게 보장된 남자가 왜 이렇게 손해 보는 결혼을 하려는 건지가 이해가 안 갔다.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리 귀족의 후계자는 사랑을 못하는 게 정석처럼 굳어졌다고 해도, 타우레드 후작가 정도면 그렇게까지 급을 따지지 않아도 됐다. 당장 라디아타만 해도 카프러스가 마음에 들어 발을 동동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무심결에 가슴팍을 더듬었다. 다이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걸고 나온 펜던트가 살갗에 닿아 싸늘한 감촉을 전했다. 얼음으로 만든 창이 가슴을 관통하기라도 한 듯 심장이 시렸다.
그런 오드리의 몸짓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라비린이 씩 웃으며 탁자를 두드렸다. 그의 초콜릿색 눈동자에 오드리가 고스란히 비쳤다. 흠칫 놀란 그녀가 가슴팍에서 손을 떼는 동작까지도, 전부.
“그렇게 굳은 표정 할 필요 없어. 다 잘될 거야.”
“…….”
“방해물은 내가 다 치워주겠다고 했잖아. 넌 그 혁신적이라는 마법도구 쪽에나 집중해. 사하스바티까지 빼가고 말이야, 진짜 확실한 거 맞지?”
“……로렐라이의 대리인을 몇 년이나 했다고 뻐기던 사람이 누군데 새삼 의심이야.”
“아, 그렇지. 네가 내 상사였지 참.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궁금해지는걸. 매번 나를 놀래키던 분을 홀딱 반하게 한 그 마법도구가.”
“메시지 장치라고 했잖아.”
“아아, 그랬지. 정말 기대되는데.”
라비린이 또 소년처럼 웃었다. 보는 사람의 눈을 빼앗고 마음마저 술렁이게 하는 미소였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목에 걸린 펜던트가 묵직했다.
“매번 그림 같은 미소만 짓더니, 이젠 좀 사람 같다.”
“무슨 뜻이야?”
“별거 있나. 다양한 표정을 보게 돼서 좋다는 얘기지.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너 전에는 사람이 아니라 초상화에 그려진 그림 같은 미소만 보여줬었어. 일 다 봤으면 일어나자, 연구소에 데려다준다며?”
이왕 만난 거, 한꺼번에 일을 해치우기로 한 날이었다. 이대로 말브레 극장에 꾸려둔 연구실로 가서 워커와 셰비언,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하스바티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오드리는 라비린이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코르셋에 버슬까지 갖춘 본격적인 중부식 정장드레스 차림인지라 혼자서 홱홱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허리를 죈 채로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일어나자 머리가 아찔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라비린이 휘청거리는 오드리를 급히 부축하며 혀를 찼다. 그 역시 브란젤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버슬로 치마를 부풀린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긴 한데, 창백하게 질린 오드리의 낯빛이 너무 신경 쓰였다.
“그러게 적당히 입어도 된다고 했잖아. 봄 무도회에서도 이렇게까지 정장을 하진 않았으면서 무슨 바람이 분 거야?”
“하티의 신전에 오는 거니까 일부러 갖춰 입은 거야.”
망할 신관 놈들. 오드리는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낮게 이를 갈았다. 하티의 신전에는 헨젤 백작부부의 결혼계약서와 밀리나의 유언장이 보관돼 있었다. 그동안 몇 번이고 열람을 요청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거절당했다.
웃기는 얘기였다. 결혼계약서는 그렇다 쳐도 밀리나의 유언장은 엄연한 당사자인데 계속 거부하다니. 말로는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 안 된다지만, 오드리는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여기 신관들은 내 악평이 아주 신경 쓰이나 보더라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장에 손이라도 댈 것 같은지 보여주질 않아서……. 옷이라도 멀끔하게 입으면 점수를 좀 딸까 했지.”
“흠……. 백작 부인의 유언장은 왜? 사본 갖고 있을 거 아냐.”
“완전본이 아닌 게 분명해서 그래. 사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뭔가 빼먹은 것처럼 부실한 부분이 있어.”
밀리나의 유언장은 오스미다 왕비의 공증을 받은 정식 문서였다. 라비린은 원본과 사본이 다를 리 없다고 반박하려다 꿀꺽 삼켰다. 오드리의 얼굴에 확신이 가득한 이유를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들어 봤자 좋은 소리를 들을 리 없었다.
“그런 이유로 불편한 옷을 감수하지는 마. 유언장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무슨 소리야?”
라비린이 오드리의 귓가로 몸을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오드리의 뺨을 간질였다. 별실을 나와 신전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던지라,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그들에게 꽂혔다.
“굳이 이렇게 붙어서 말해야…….”
“기사들이 전쟁터에 가기 전에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서 맡기는 곳이 하티의 신전이야. 그리고 타우레드는 예전부터 신전에 많은 기부금을 내왔지. 네 말대로 자격이 되는데도 유언장을 보여주지 않을 만큼 너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라면, 너와 결혼할 예정이라는 나에게는 그만한 호의를 보여줄 거야.”
“……일하는 방식 보니까 메이즈 맞네.”
“하하, 그럼 아닌 줄 알았어?”
둥그렇게 휜 눈가에 햇살이 떨어져 부서졌다. 안 그래도 화려한 이목구비 전체가 화사하게 반짝거렸다. 오드리는 무심결에 라디아타의 미소를 라비린에게 겹쳐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생김새는 전혀 다른데 어째 분위기는 아주 비슷했다.
“라디아타랑 남매인 것도 맞네…….”
“뭔 소리야, 갑자기.”
“있어, 그런 게. 귀담아 들을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오드리가 무슨 말을 했든, 그녀가 메이즈를 제대로 기억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라비린은 마차에서도 내내 싱글싱글 웃었다. 오드리에겐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마차에서 둘을 기다리던 다이앤은 크게 놀라 연신 라비린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저분이 저렇게 웃는 분이었나? 아닌데……. 생긴 건 한여름 가로수 같아도 웃을 땐 눈보라 치는 들판 같던 분인데…….’
우아하게 눈꼬리를 접어 웃을 때마다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곤 했었다. 날카롭게 벼려낸 칼 같진 않아도 찬 얼음을 깎아 조각한 작품 같은 냉기가 보는 사람을 압도했었다. 차가운 느낌의 향수가 맞춤처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오드리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에서는 아주 활기가 넘쳤다. 눈보라 치는 들판은 무슨, 바람에 몸을 눕히는 청보리밭도 지금 라비린보다 싱그럽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라비린을 보아온 사하스바티의 놀라움은 다이앤보다 더했다. 라비린이 오드리와 함께 온다는 소식에 이른 아침부터 뭐 빼먹은 거 없나 종일토록 확인하고 확인하던 그는, 라비린이 오드리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청동동상처럼 굳어버렸다.
“다들 이디케에게 오늘의 방문을 미리 들었겠지. 이쪽은 라비린 벨키스 타우레드. 벨키스 남작이며 기사 작위가 있는 분이니 벨키스 경이라고 부르도록. 라비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메시지 장치 개발의 핵심 인력들이야. 왼쪽부터 마법사 셰비언, 워커 크라티우스, 개발 빼고 다 하는 이디케 락시, 그리고 비마법 전문가 사하스바티.”
오드리의 어조는 오늘 브란젤 성문을 드나든 사람의 이름을 읊는 것처럼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라비린의 이름은 친근하게 부르며 팔을 두드리니, 워커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슬그머니 옆에 선 셰비언의 안색을 살폈다.
‘어……. 의외로 멀쩡하네?’
본래 남의 눈치 따위 보지 않는 셰비언이니만큼, 그의 표정은 언제든지 쉽게 읽혔다. 한데 지금 셰비언은 한 점의 그늘도 없이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다. 그저 오드리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 즐겁다는 것처럼.
오드리는 그런 셰비언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충분히 각오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가 준 비늘이 담긴 펜던트를 목에 걸고 왔으니 돌연 그의 의식세계로 끌려가진 않겠구나 싶은 것만이 위안이 됐다.
“사하스바티가 연구에 합류했을 때 짐작했겠지? 앞으로 라비린이 메시지 장치 연구의 후원자가 돼줄 거야. 따로 간섭하는 일은 없겠지만, 내가 받는 보고와 동등한 수준의 보고가 올라가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해.”
“예…….”
“그럼 이제 보고를 들어볼까. 사하스바티가 들어왔으니 연구에 진척은 좀 있었겠지? 내가 좀 이르게 돌아왔다지만 보고받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은 아닐 거라고 믿어.”
오드리는 이디케가 준비해 둔 의자에 앉아 성과 보고를 주문했다. 라비린도 함께 앉아 흥미로 눈을 반짝였다. 메시지 장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은 들었지만 그게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보고를 듣게 되었으니, 그의 귀는 당나귀 귀 만큼이나 커다래졌다.
지하연구실의 멤버들 중에서 첫 번째 보고자로 나서야 할 사람은 사하스바티였다. 그가 새로이 제안한 마법망 안정화 방식이 좋은 결과를 냈으니만큼 당연한 순서였다.
한데 사하스바티는 아직 청동동상에서 인간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워커에게 연신 옆구리를 찔리면서도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왜 그래? 정신 차려!”
“어……. 그러니까, 그게…….”
“어휴, 내가 진짜……. 비켜봐요. 바쁜 분들 앞에 두고 뭐 하는 짓이야, 이게.”
그 꼴을 한심하게 보고 있던 이디케가 냉큼 사하스바티를 밀어내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미리 준비해 뒀던 자료를 건네는 손길이 아주 야무졌다.
“메시지 장치의 문제점은 안정성이었어요. 마력구슬을 아무리 촘촘히 뿌려서 마법망을 안정시켜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까지 커버하지는 못했거든요. 그래서 계속 메시지 전달에 오류가 발생했고요.”
“그래서? 해결 방법은?”
“사하스바티가 방법을 제시했어요. 마력구슬이 아니라 선을 까는 거죠. 수도관처럼.”
브란젤은 물론이고 멜브란트 왕국에서 사람 좀 있다 싶은 지역이라면 어김없이 존재하는 수도관은 문명의 첨병이자 마법도구의 정수였다.
정교하게 만든 수도관 표면에 마법회로를 새겨 물이 상하지 않고 고이지 않도록 했다. 일정한 규격을 정해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매립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여유분이 있을 시 즉시 교체도 가능했다.
“아하. 그런 거군. 괜찮은 발상이야.”
만탈락의 운영자인 오드리는 단번에 설명을 알아들었다. 만탈락이 번영하면서 물 사용량이 폭주하자 용량이 작은 기존의 수도관이 온갖 문제를 계속 일으켰었다. 그걸 큰 난리 없이 교체하느라 얼마나 골치를 썩었던가. 만탈락의 수도관 지도를 거의 외울 정도로 고생했었다.
‘수도관?’
한편, 수도의 혜택을 보며 자랐지만 관리자인 적은 없었던 라비린은 서둘러 보고서를 뒤졌다. 딱히 설명을 더 해주지 않는다는 건 이미 자료가 주어졌다는 얘기였다. 로렐라이에서 대리인으로 일했던 그는 이디케의 문서 작성 방식에 아주 익숙했다.
이디케는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라비린을 흘끗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빠르게 보고서를 훑는 걸 보니 괜히 마음이 흡족했다. 신분도 재력도 태도도 모두 합격이었다.
“실어 나를 것도 없으니 수도관까지 만들 필요도 없어요. 특수가공한 가죽 안쪽에 마법회로를 새긴 다음, 둘둘 말아서 선 형태로 매립하면 돼요. 그럼 그 선 자체가 안정적인 마법망이 되는 거죠. 지역과 시간에 따라 상태가 다른 마법망을 일일이 고려해서 회로를 다르게 짤 필요도 없고, 마력을 계속 저장해 둘 필요도 없어요. 메시지를 보낼 때 필요한 만큼의 마력만 넣으면 선을 타고 아주 안정적으로 메시지가 전달될 거예요.”
“흠……. 그래, 되니까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겠지. 그런데 꼭 가죽이어야 해? 가죽은 썩을 위험이 너무 커. 금속으로는 불가능한가?”
“금속으로 하면 더 좋긴 한데, 그럼 금액이 너무 많이 뛰어요.”
이디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금속이 좋다는 거야 누가 모를까마는, 문제는 비용이었다. 금속에 마법회로를 새기는 공임비는 가죽에 비해 세 배는 더 비쌌다.
“마법망이 안정적인 지역에서는 마법도구의 마법이 오래간다고 들었어. 하물며 이건 마법망을 안정시키는 마법이야. 마법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가죽이 먼저 썩는 사태가 발생하면 어쩔 거지?”
“그러니까 특수처리를 하는 거죠.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특수처리한 가죽으로 수도관을 대신하기도 하는걸요. 보고서 여섯 번째 장을 보시면 그렇게 사용되는 가죽의 종류와 수명에 대한 통계가,”
“아니, 그건 아니지. 사용 지역의 거의 대부분이 북부에 집중돼 있잖아. 그 지역의 토양과 기후를 생각하면…….”
“잠깐, 잠깐만.”
보고서를 읽느라 대화에서 철저히 소외됐던 라비린이 급히 끼어들었다. 마차에서 간단히 설명만 들었을 때는 아직 껍데기만 완성된 정도인 줄 알았는데, 보고서 속의 메시지 장치는 거의 실용단계 직전에 이른 물건이었다.
“이 정신 나간 마법도구는 누가 만든 거지?”
“납니다.”
셰비언이 퉁명스레 손을 들어올렸다. 라비린을 향한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얼굴 보는 것도 재수 없는 샤를레아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만드는 메시지 장치인데 정신 나간 마법도구라니.
“정신 나간 마법도구가 아니라 메시지 장치죠. 그것도 아직은 가칭일 뿐이지만.”
이죽대는 말투, 삐딱한 표정, 짝다리 짚은 자세.
라비린은 제 심사가 틀어진 걸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셰비언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오드리를 향해 짓던 청보리밭 같은 미소는 사라지고 없어도 충분히 정중한 동작이었다.
“셰비언 씨의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봤습니다. 출입금지마법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여기저기에서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데, 이건 그보다 더하군요.”
“…….”
“기차 다음으로 세상을 바꿀 겁니다. 사하스바티가 절대 이 연구에서 빠질 수 없다고 내게 선전포고를 한 이유를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라비린의 입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하스바티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메시지 장치를 보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편지를 꽤 거칠게 썼던 것 같긴 한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한데 라비린이 선전포고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보니 어쩐지 등에서 땀이 났다.
사하스바티의 곁에 서 있던 워커는 다 이해한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오드리를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엉망진창인 보고서를 받다 못한 오드리가 그의 앞에서 보고서를 또박또박 읽어준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나 라비린은 새삼 우정을 다지는 두 사람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셰비언의 손을 잡고 흔들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보고서 말미에 보니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한 실험들이 전부 성공했다고 적혀 있던데, 사실입니까?”
“네.”
“와우. 그럼 지금 당장 볼 수도 있을까요?”
“그건 아가씨의 허락을 받아야…….”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오드리에게 쏠렸다. 오드리는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셰비언과 라비린이 나란히 서 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울렁거렸다.
“……새 후원자께서 성능이 궁금하다는데 안 보여드릴 수 없지. 준비해.”
지하연구실의 인원들은 난데없는 시연을 위해 바삐 움직이게 됐다. 마력구슬로 마법망을 안정시키던 때와는 달리, 선을 이용한 메시지 전송에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동안 오드리와 라비린은 가차 없이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준비 과정을 지켜보던 라비린이 오드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또 옷 위로 펜던트를 만지작대던 오드리가 짜증을 내며 그의 손을 쳐냈다.
“왜?”
“가죽보단 금속이 낫지?”
“당연한 소릴. 마법이 마법사의 몸을 갉아먹듯, 마법의 사용이 늘어나면 비마법 부분의 수명이 줄어들어. 마법이 사라지기 전에 비마법이 망가지는 경우도 충분히 많고. 출입금지마법에서 이미 그 부작용을 톡톡히 경험하는 중인데 이렇게 더운 지역에서 가죽이라니……. 말도 안 되지.”
“성공할 걸 확신하고 있는 말투네.”
“너도 말했잖아, 기차 다음으로 세상을 바꿀 물건이라고.”
“맞아, 정말 그럴 거야. 하지만 저게 정말 제대로 세상을 바꾸려면 어지간한 투자로는 어림도 없어. 우편국이 기차와 연계해서 한꺼번에 망을 구축했던 경우를 참고해야 할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뺨을 긁적이며 미간을 찌푸리던 라비린이 오드리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출입금지마법의 정지 방식, 다른 마법도구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거지?”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아무리 관례가 있다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걸 보면 의외로 적용이 쉬울 수도 있겠고.”
“왜 묻냐니까.”
“마법무기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 마법도구를 무기로 운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마법사가 있어야만 한다는 건데, 그건 그 제약에서 자유롭잖아. 안정성과 수명 문제가 둘째 문제로 따라오긴 하겠지만 말이야.”
오드리는 살짝 질린 표정으로 라비린에게서 떨어졌다. 클로드도 마법도구를 무기로 활용하는 일에 그렇게 집착을 하더니만, 로렐라이에서 사 년을 보낸 라비린도 다를 게 없었다.
“누가 타우레드 후작가의 인물 아니랄까 봐……. 공격마법 사장된 지가 언제인데 마법무기 소릴 해?”
“알아. 하지만 비마법……. 아니, 기계와 연동해서 보조로만 쓴다면 못 만들 것도 없지. 장담하는데, 로렐라이가 수식을 등록하면 첫 번째 열람자는 내 아버지일걸.”
“정말 그렇다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야겠네. 순식간에 털리면 어떡해?”
오드리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협회의 독촉은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었다. 핵심은 빼놓고 등록할 게 뻔한데도 여기저기에서 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마 지금도 판매 중인 출입금지마법을 가지고 온갖 실험을 다 하고 있을 터였다.
“순식간에 털리기는 무슨……. 어차피 껍데기만 공개할 거면서 엄살떨지 마. 그나저나 셰비언 씨는 어디서 만나서 영입한 거야? 난 워커 말고도 저런 천재 마법사가 로렐라이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인생의 절반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는 법이지.”
“그놈의 우연. 워커를 만난 것도 우연이라며? 너는 뭐 포모스를 등에 업고 다니기라도 해?”
“뭐, 가끔 그런 거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긴 하지만……. 정말 내 등에 포모스가 업혀 있었으면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지는 않았겠지.”
“아냐, 네 등에는 포모스가 업혀 있는 게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을 바꿀 천재 마법사를 둘이나 휘하에 둘 수는 없는 거라고. 세상에, 내가 널 택해서 정말 다행이야.”
두 사람이 말을 나누는 사이 준비가 다 끝났다. 선이 있어서 이전처럼 멀리서 하지는 못하고, 지하연구실의 이쪽에서 저쪽 끝에 삼각형 형태로 놓은 메시지 장치에 선을 연결하고 장치를 작동시켰다.
이디케의 보고도 끊어먹고 메시지 장치를 보고 싶어 했던 라비린은 금세 메시지 장치의 신기함에 빠져들었다. 이런 저런 말도 보내보고, 그에 맞는 답장도 받아보고. 그러다 혹시 자신이 하는 말을 듣고서 답장해 주는 건지도 모른다며 직접 메시지를 입력해 보기도 하고.
“이거 진짜 괜찮은걸…….”
장난스럽게 빛나던 눈동자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메시지 장치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어서 어디에서 온 메시지인지 확인도 가능하고, 전송 속도도 상당히 좋았다.
‘국경지대에 연결해 두면 효과가 좋을 거야. 여차하면 땐 선을 끊어버리면 그만이고. ……이런, 이래서야 정말 영락없는 타우레드잖아.’
라비린은 메시지 장치가 파발마나 전령새를 대신할 가능성부터 생각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쪽으로 괜찮게 느껴지는 걸 어쩌란 말인가. 빠르고 정확했다. 적군이 중간에 내용을 탈취하거나 변조할 가능성도 없었다.
“락시 양, 하나 물어보지. 만약 메시지 장치가 일렬로 나란히 세 대가 연결되어 있다고 할 때,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양 끝끼리도 메시지가 이어지나?”
“가운데에 있는 장치가 켜져 있다면 가능합니다.”
“이런, 그거로는 안 되는데. 그건 구멍이 너무 커.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장치가 고장이라도 나면? 꺼지면? 다른 루트를 타고 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럼 장치가 아니라 선의 수명이 끝났을 땐 어떻게 구분해서 대처할 거지? 어느 부분이 마비된 건지 추적할 방법이 있어? 수도관처럼 지도라도 만들어서 관리할 건가? 그럼 그 인력은 대체 어떻게 충당할 거지?”
딱따구리처럼 다다다 이어지는 말이 어찌나 빠른지,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그런데도 목소리가 듣기 좋고 발음도 정확해서 못 알아듣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또 있었는데. ……메이즈? 아냐, 메이즈랑은 목소리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뭣보다 메이즈는 절름발이였는데? 하지만 말하는 게 너무 닮았어.’
이디케는 제 귀를 의심하면서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지적하는 부분 모두가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얘기였다.
“그 부분을 해결해 오면 개인이 아니라 타우레드의 이름으로 오드리의 사업을 후원하도록 하겠어. 아, 선은 가죽 말고 금속으로 해. 내구도는 신뢰를 위한 중요한 척도 중 하나니까.”
오드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뺨에 닿는 셰비언의 시선을 피하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타우레드가 마음먹고 덤비면 우편국에 기댈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우편국이 제발 협조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타우레드에는 그만한 권력과 재력이 있었다.
“진심이야?”
“그럼 내가 예비 약혼녀 앞에서 거짓을 말하겠어? 걱정 마, 내가 아버지 멱살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네 뒤를 받쳐 줄 테니.”
예비 약혼녀.
오드리의 안색은 창백해졌고 이디케는 불을 붉혔으며 워커는 또 셰비언의 눈치를 봤다. 셰비언의 시선은 여전히 오드리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사하스바티는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치려다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라비린은 순식간에 어색해진 공기가 느껴지지도 않는지, 오드리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보란 듯 친밀함을 과시하는 동작이었다.
“그러니 넌 이 메시지 장치에 이름부터 붙여. 언제까지 메시지 장치라고 부를 거야? 멋없게.”
“잠깐만…….”
오드리는 눈을 감고 귓가에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가슴 안쪽에서 주체하기 힘든 흥분이 부글부글 끓었다.
‘도저히 진정이 안 돼.’
떨어질 생각을 않는 라비린의 옷자락을 감아쥐고 그를 끌어당겼다. 라비린이 순순히 몸을 굽혀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코가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남의 뒤에 서 있는 게 취미야? 왜 이래?”
“왜, 내가 다른 사람의 성과에 질투하지 않는 것 같아 이상해?”
라비린의 뜨거운 손이 오드리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느닷없는 어린애 취급에 눈살을 찌푸리는 오드리를 향해 그가 씩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을 지원한다고 해서 내 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뭘. 본래 뛰어난 예술가의 뒤에는 안목 있는 후원자와 투자자가 있는 법이야. 난 딱 그 위치면 적정해.”
오드리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심정이 되었다. 라디아타처럼 화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거야 후원자의 존재가 두드러지니 그렇다 치더라도, 메시지 장치 보급은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오드리의 혼란은 라비린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라비린은 보들보들한 뺨을 콕 찔러보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잡힌 옷자락을 빼냈다. 순순히 옷자락을 놓는 손이 몹시 차가웠다.
‘이상한걸. 몸이 이렇게까지 차가워질 정도로 냉방중인 것도 아닌데…….’
그는 임시방편으로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오드리의 어깨에 걸쳤다. 더워 죽을 것 같은 날씨에도 정장을 죄다 갖춰 입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설어 움찔거리는 오드리의 어깨를 안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왜 그렇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이름부터 지으라니까. 설마하니 메시지 장치라는 이름으로 보급할 거야? 아무리 너라도 그건 안 돼.”
“……생각해 둔 이름은 있어.”
빨리 말해 보라는 듯 라비린이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이제껏 살면서 어떤 기대든 부담스럽다 느껴본 적이 없는 오드리인데, 어째 라비린의 눈빛을 받고 있자니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듯 가슴이 갑갑해졌다.
오드리는 메시지 장치를 바라보는 척 라비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한데 하필이면 그녀가 고개를 돌린 바로 그 자리에 셰비언이 서 있었다.
얼음 낀 강 같던 눈동자가 호수와 같았다. 라비린의 정신 나간 마법도구 발언에 못마땅해하던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그는 자신에게 닿은 오드리의 시선 한 자락이 그저 행복한 듯 보였다.
예비 약혼자라는 라비린의 발언을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과시하듯 어깨를 끌어안은 팔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부드럽게 휜 눈매며 입매가 봄날의 고양이 같았다. 땋아서 어깨에 걸쳐 놓은 은발을 쓰다듬으면 따스한 온기가 느껴질 듯했다.
오드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이미 거절한 마음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 같은 게 아니라던 결심도 변하질 않았는데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흔들리다니.
‘마력의 계통이라는 게 무섭긴 무섭네……. 정신 차려야지, 오드리.’
어깨에 걸쳐진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눈도 감았겠다, 라비린이 즐겨 쓰는 향수가 주변을 가득 채운 느낌이 들었다.
“전보라고 부를 거야.”
“전보……. 나쁘지 않은 이름이네. 짧고, 간결하고.”
“장담한 거나 지켜. 헛된 공수표로 끝나지 않도록.”
“내 약혼녀를 위해서인데 그럼 지켜야지.”
라비린이 싱글싱글 웃었다. 소년처럼 맑은 웃음이었다. 오드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겉옷을 벗어 그에게 내밀었다. 아직 청혼서가 백작가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틈만 나면 약혼녀 타령을 해대니, 혹시 일부러 그러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잊지 말고 예비를 붙여. 자, 여기 옷. 춥지도 않은데 뭘 자꾸 입히려고 드는 거야?”
“몸이 너무 차가워서 그렇지.”
“아픈 곳은 한 군데도 없다니까 그러네. 난 더 할 나위 없이 건강해.”
안 그래도 오드리의 체온이 너무 낮은 게 걱정된 다이앤이 의사를 끌고 와서 온갖 검사를 다 했었다. 결과는 당연히 모든 게 정상. 검사 결과를 납득하지 못한 다이앤이 자꾸 수상쩍은 건강음료를 내밀어서 곤혹스러운 요즘이었다.
라비린 역시 오드리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드리의 강경한 태도에 못 이기는 척 겉옷을 받아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당장 부를 수 있는 의사들의 명단을 짰다.
“뭐야, 그 꿍꿍이속이 있는 웃음은.”
“별거 아냐. 날이 이렇게 더운데 어딜 가서 뭘 먹어야 할까, 고민을 좀 했을 뿐이야. 식사 때를 놓쳤는데 배고프지 않아? 아직 청혼서를 넣기 전이니,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서 카페 로열 어때?”
노골적인 말 돌리기에 오드리는 미간을 찌푸리는데, 셰비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라비린의 말을 환영했다. 두 사람의 방문을 준비하느라 끼니를 놓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카페 로열 좋죠. 벨키스 경, 우리 아가씨는 단 음식만큼이나 고기 요리를 좋아하세요. 꼭 생선 말고 고기를 시켜주세요.”
“그거 고마운 힌트로군. 오드리, 이리 와.”
오드리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라비린의 팔짱을 꼈다. 식욕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계속 여기에 죽치고 있어봤자 이디케에게 잔소리만 실컷 들을 게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결혼할 거란 귀띔을 받았을 때 이디케가 얼마나 좋아했던가. 어차피 할 정략결혼, 상대가 타우레드의 공자라면 오히려 오드리 쪽에서 결혼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박수까지 쳤었다.
‘이디케 녀석, 아무리 봐도 스캔들이 나길 바라고 붙여놓는 것 같은데. 아직 청혼서도 안 들어온 걸 알면서……. 하여간 못됐어. 갈수록 뻔뻔함만 는다니까.’
오드리는 지하연구실에서 입구까지 이어지는 긴 통로를 걸으며 내심 이를 갈았다. 이디케가 다이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다이앤 역시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좀처럼 옆에 다가오지 않으려 해서 곤란했다.
하지만 그렇게 이디케를 욕하는 오드리 역시 스캔들이 날 걸 뻔히 알면서 카프러스를 자꾸 라디아타에게 보내고 있었으니, 이디케가 오드리의 속내를 들으면 세상에 그렇게 웃긴 일이 없다는 듯이 웃을 테다.
“오드리.”
“……응?”
말없이 통로를 걷던 라비린이 갑자기 오드리를 불렀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든 오드리는 내내 싱글싱글 웃고 있던 방금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라비린을 보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몇 달 전, 타우레드 후작가의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엇비슷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라비린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얼음을 베어 문 듯 서늘하게 들어 올린 입술이 그가 뿌리고 다니는 향수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그 마법사……. 셰비언 씨가 널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과하던데, 혹시 알고 있었어?”
“아니, 몰랐어. 어땠는데?”
거짓말은 쉽게도 나왔다. 오드리는 내가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차분해졌던 심장이 요란하게 팔딱거렸다.
산트렘의 기사 출신인 피올을 속인 전적도 있으니만큼, 오드리의 연기는 훌륭했다. 그러나 라비린은 셰비언의 눈빛 공세를 눈앞에서 보았다. 곁에 선 자신조차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시선이었다. 오드리가 아무리 시선에 익숙한 사람이라 하나 모를 수가 없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드리를 추궁하는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워낙에 서늘한 손이라 뜨거운 체온이 입술 모양으로 남겠구나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다른 쪽만 봤으면 모를 수도 있지……. 눈빛으로 돼지 통구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어. 내가 네 예비 약혼자라고 밝히기까지 했는데 시선이 바뀌질 않더라고.”
“흠……. 나한테 반했나? 하긴, 다들 어떻게든 기술 하나라도 더 빼내겠다고 눈이 벌겋지 나처럼 자유연구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사람은 별로 없긴 하니까.”
오드리가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스스로를 자랑했다. 라비린은 그런 그녀가 귀여워 웃으면서도 제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거리낌 없이 꺼내 내보였다.
“약혼식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지금은 어디까지나 당사자들끼리 구두로 한 약속이야. 그걸 알고 그렇게 눈빛을 보내는 거면 아주 무례한 놈인데. 천재 마법사라 망정이지, 일반인이었으면 그냥…….”
“그냥 뭐. 뭔 짓이라도 하게? 네 말대로 지금은 그냥 구두로 약속을 나눈 수준에 불과한데, 무슨 자격으로?”
“……그러게, 내가 무슨 자격으로. 잊어버려, 그 재능에 질투가 좀 났나 보지. 이것 참, 헨젤 공자를 비웃었던 과거가 민망해지는걸.”
라비린이 괜히 너털웃음을 지으며 딴청을 피웠다. 오드리도 하델에 관련해서는 할 말이 없는지라, 그저 쓴웃음밖에 지을 게 없었다.
예정일보다 일찍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오드리는 라비린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라비린은 도타워진 친분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과감하게 행동했고, 일찍 돌아온 누나를 반가워하며 쫓아 나왔던 하델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몹시 예민하게 굴었다.
혹여나 누나를 빼앗길까, 라비린을 향해서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경계심을 드러내는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일찍 철이 들어서 놀리는 재미가 없던 두 동생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기에, 요즘 라비린은 하델을 놀려먹는 데에 재미가 붙었다.
아침 승마를 함께하겠다며 제스본강변이 아니라 헨젤가의 정문에서 오드리를 기다렸고, 라디아타의 심부름꾼 노릇을 자청하며 오드리를 자주 만났다. 몇 번이나 봤으니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하델의 반응은 언제나 신선하기만 했다.
“적당히 놀려먹어. 남의 귀여운 동생을 말이야, 놀림감으로나 삼고.”
“귀엽기는 무슨. 아무리 어려도 뱀 새끼는 뱀 새끼라, 벌써부터 제 사람 챙기는 게 남다르던데 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질 못해서 이리저리 흘리고 다니는 게 귀엽잖아.”
라비린은 오드리의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드리는 때때로 타우레드의 남매들을 두고 어쩜 그렇게 다 똑같냐 한탄하곤 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헨젤가의 남매도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벌써 열두 살인 하델을 두고 마냥 어린아이 취급하는 오드리가 신기할 뿐이었다.
‘정말이지, 꼭 닮았다니까.’
그는 입이 간지러울 정도로 올라왔던 말을 꾹 눌러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서늘한 손의 주인과 팔짱을 끼고 함께 걷는 통로가 너무 짧아서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한편, 오드리와 라비린이 지하연구실을 빠져나가고 난 뒤 지하연구실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해졌다. 라비린이 눈치챈 셰비언의 눈빛을 다른 사람이라고 모를 리 없으니까.
오드리와 라비린의 결혼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이디케는 셰비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어 하는데, 셰비언에게 동정적인 워커는 그런 그녀를 말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미 차였다니까요. 알잖아요, 아가씨 성격.”
“우리 아가씨야 걱정 안 하죠. 그치만 벨키스 경이 불쾌해하면 어떡해요? 아직 청혼서가 왔다 갔다 한 것도 아닌데!”
“에이, 설마요. 그 정도로 속이 좁은 남자는 아가씨 감당 못해요. 아까도 봤잖아요? 아무렇지 않게 아가씨를 뒤에서 돕겠다고 하는 거.”
“일이랑 사랑이 같아요? 둘은 허용치가 다르다고요, 허용치가!”
구석에 숨어 소곤대는 두 사람 사이에 사하스바티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 그건 신경 안 써도 될걸요. 자기 여자에게 추종자가 있다는 걸 싫어할 분이 아니라서. 오히려 즐길 수도 있어요.”
“어머, 사하스바티 씨는 뭘 잘못 먹고 입이 붙어버렸을까 했는데 멀쩡했네요?”
“윽……. 그건 내가 아까 너무 놀라가지고 그런 겁니다. 도련님이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봤거든요. 아까 나 대신 자료도 나눠주고, 설명도 해주고……. 고마워요, 이디케. 덕분에 살았어요.”
얼굴이 벌게진 사하스바티가 이디케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거렸다. 인사를 받은 이디케는 흥, 하는 콧소리 한 번으로 끝났는데, 옆에 있던 워커가 괜히 기분이 좋아 히죽거리다 옆구리를 얻어맞고서야 표정관리를 했다.
“윽……. 아무튼 벨키스 경과 아가씨가 같이 있는 걸 보고 나면 굉장히 우울해하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너무 태연해서 기분이 이상하긴 해요. 그렇게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더니, 정말 그냥 얼굴만 보고 싶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이디케와 사하스바티가 워커의 중얼거림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셰비언은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종이 위를 달리는 펜에 날개라도 달린 듯 손이 가볍고, 책상 아래에서 까닥거리는 발은 앉은 채 춤이라도 추는 듯했다.
‘용의 사랑은 인간이랑은 뭔가 다른 건가?’
셰비언이 용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이 셋 중에 워커 딱 한 명이었다. 그러나 뭐라 형용하기 힘든 이질감과 낯섦은 셋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피와 함께 흐르는 마력이 가르쳐 주는 본능이었다.
귀족의 결혼은 정략이고 거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연애까지 거래인 건 아니었다. 반쯤은 거래라도 나머지 반쯤은 진짜이니, 브란젤의 일부 신문들은 귀족들 사이에서 도는 온갖 스캔들을 자극적으로 실어서 먹고살았다.
가십거리의 소재가 되어줄 만한 연령대의 귀족들 대부분이 휴가를 떠난 여름이면 그런 신문들은 저급한 통속소설이나 휴가지까지 따라가서 취재한 내용을 싣곤 했다. 그만큼 기삿거리가 없을 때였다. 하지만 올해는 좀 달랐다.
라비린과 오드리의 열애설이 터진 것이다. 라비린이 오드리와 함께 아침 승마를 다니던 초기에만 해도 그들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오드리와 라디아타의 친분이 워낙 돈독하니만큼 의례적인 사교의 일환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했다.
하나 누가 의례적인 사교로 정장을 갖춰 입고 나란히 하티의 신전에 간단 말인가. 단순히 확인할 게 있었다는 변명을 대기엔 그 전과 이후의 행적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벨키스 경, 아침마다 헨젤 저택 앞에서 헨젤 영애를 기다려>
<사자와 뱀의 열애!>
<벨키스 경과 헨젤 영애가 애용하는 승마 코스 탐색>
<리즈비아 거리를 함께 걷는 두 사람. 목적은 쇼핑? 데이트?>
오랫동안 사교계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타우레드의 후계자와 엉덩이에 뿔난 망아지 취급을 받던 헨젤 영애의 연애라니! 심지어 라비린은 타우레드의 후계자라는 탐나는 신랑감이면서 보는 사람의 눈이 즐거운 미남이었다.
사람들은 뜻밖의 조합에 열광하며 신문을 사들였다. 하필 두 사람 다 권세 있는 가문의 자제인지라 차마 대놓고 인터뷰 요청은 하지 못한 기자들이 써대는 소설이 그만큼 재밌기도 했다.
타우레드 영애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리가 항구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기는 동안 서로에게 빠져든 나머지 어쩌고. 검술수련여행을 다니는 동안 만탈락에 들렀던 벨키스 경이 말을 달리는 헨젤 영애를 우연한 기회에 목격하고 한눈에 반한 나머지 여동생인 타우레드 영애에게 소개를 부탁했고 저쩌고.
바닥을 기던 오드리의 평판을 생각하면 그녀가 라비린을 꼬셨다는 식의 기사도 나올 법한데, 어떻게 약속이라도 한 듯 그쪽 방향의 글은 나오지 않았다. 두고 보면 재미있을 거라던 라비린의 말 그대로였다.
오드리는 제 이름이 나오는 소설이라도 읽는 기분으로 기사를 읽었다. 그녀가 타우레드 남매와 함께 리가 항구에 휴가를 갔던 걸 바탕으로 전말을 추측한 기사는 특히 재밌게 읽었다.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남녀의 심리묘사가 아주 탁월했다.
“아, 다음 편이 없네.”
“누나…….”
태평하게 다음 편 타령을 하는 오드리와는 달리, 하델은 오드리가 내려놓는 신문을 보며 아예 신문사를 불질러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신문사로 쫓아가 이따위 소설은 그만 쓰라고 하고 싶은데, 현실은 저택에 갇혀 꼼짝없이 서류나 들여다보는 신세라니.
“도대체 몇 부를 보고 있는 거예요? 아니, 기사 쓸 게 그렇게 없나? 여기저기 다 가뭄으로 난린데 그런 거나 좀 쓰지!”
“가십지에 뭘 바라니? 가뭄 기사는 다른 신문사에서 충분히 많이 쓰고 있어. 하델, 서류 겹쳤다.”
“으으…….”
하델이 진저리를 치며 그냥 넘길 뻔했던 서류를 떼어냈다. 하델이 보고 있는 서류는 헨젤가의 남쪽 영지에서 올라오는 서류들이었다. 유례없는 가뭄 탓에 왕궁에 묶여 있다시피 한 헨젤 백작 대신 영지에서 올라오는 서류 검수의 첫 단계를 맡은 것이다.
오랫동안 헨젤 백작을 도와온 집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겠지만 그렇다고 허술하게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델은 너무 힘들다며 거의 울 것처럼 굴었지만, 이게 다 후계자 교육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힘드니? 그동안 검도 놓고 열심히 공부했잖아.”
“아주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누나가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여기 이 부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누난 만탈락에서 많이 해 봤을 거잖아요.”
“물론 도와줄 순 있지. 뒷감당을 못해서 그렇지. 하델, 넌 이 누나가 정말 브란젤에서 쫓겨나기라도 바라는 거니?”
“윽.”
하델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오드리는 집중해서 서류를 챙기는 동생을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는 순식간에 큰다고 하더니, 휴가를 다녀오느라 보지 못했던 짧은 기간에 하델은 훌쩍 자라 있었다.
일단 오드리가 없는 사이를 이용해서 알신다를 챙길 생각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그래봤자 알신다에게 따로 거처를 마련해 주려다 릴리에게 죄다 들켜 버린 허술함을 보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언제 그렇게 컸니? 뒤뚱대며 걷다가 풀썩풀썩 엎어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런 얘길 해요? 내후년이면 사교계 데뷔도 할 건데요. 데뷔하고 나면 그때부턴 내가 누나를 에스코트 할 거예요.”
“어머나……. 나더러 앞으로 이 년 내내 베텔 경과 붙어 다니라는 거니?”
“네.”
하델의 눈이 이글이글했다. 자신은 어리다고 따라가지도 못했는데, 얼굴 멀끔한 후작가의 공자는 누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매일 아침마다 누나와 승마를 나가고 얼굴 보기 지겹도록 저택을 들락거렸다. 아무리 인사라지만 누나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던지는 눈빛이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다.
“제가 두 살만 더 먹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죠. 베텔 경은 가문의 기사이니까 괜찮아요.”
그렇게 티 나게 라비린을 못마땅해하더니,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오드리는 내려놓았던 신문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수습하기 힘들게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하델이 보았다간 정말 화를 낼 것이다.
“네가 나이를 먹기 전에 이 누나가 약혼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때는 약혼자의 에스코트를 받아야 할 텐데, 그때도 거절할까?”
“…….”
“미안. 그냥 해 본 말이었어.”
하델의 눈망울이 너무 애처로워 오드리는 얼른 말을 거뒀다. 어차피 곧 사교철이 시작되면 그때는 라비린의 에스코트를 받는 자신을 보게 될 텐데, 잠깐의 꿈이야 꾸게 해도 좋지 않겠는가.
하나 하델도 바보는 아니어서, 오드리의 눈웃음만 보고도 사정을 짐작한 뒤였다. 어차피 자신이 사교계 데뷔를 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 자체가 억지이기도 했다. 하델은 괜히 만년필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투덜댔다.
“오늘도 어디 가요? 설마 또 하티의 신전에 가요?”
“그건 왜 묻니?”
“코르셋에 버슬까지 다 갖춰 입었잖아요. 평소엔 만날 남부식 옷만 입고 있으면서.”
귀엽기는. 오드리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여성의 복식에 대해 아는 거라곤 색깔 정도밖에 없던 녀석이 진지하게 코르셋과 버슬을 얘기하는 걸 듣게 되다니.
“하티의 신전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 분을 뵈러 가지.”
“그게 누군데요?”
“타우레드 후작부인.”
하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만년필을 떨어뜨리지 않은 게 용했다. 자그마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누나!”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두 분이 친분을 나누셨다는데, 어떻게 초대를 거절할 수 있겠니? 다녀오면 네게도 얘길 전해주마.”
리가 항구에서 라디아타는 오드리에게 후작부인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아직 휴가철이 끝난 게 아니니 적어도 가을 사교철은 되어야 지켜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정이 앞당겨졌다.
본래 일정대로라면 아직 클로드와 함께 산트렘에 있어야 할 로샨이, 라비린이 오드리와 약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자마자 남편의 멱살을 쥐고 브란젤로 달려온 탓이었다.
로샨은 오드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밀리나를 아는 사람이었다. 오드리는 들뜬 마음으로 뺨을 물들이고 후작가의 복도를 걸었다. 안내역을 자청한 라디아타가 그녀를 이끌었다.
“이렇게 빨리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
“나도 내 어머니가 그렇게 추진력이 있는 분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어. 그만큼 놀라운 얘기긴 하지만. 맙소사, 너와 오라버니가 약혼이라니……. 옷은 또 왜 이렇게 신경 써서 입고 왔어?”
봄 무도회는 물론이고 데뷔탕트에서도 입지 않은 중부식 정장 드레스를 갖춰 입은 오드리를 보는 라디아타의 표정은 마냥 복잡했다.
“친구의 어머니를 뵈러 오는 건데 당연히 잘 입어야지.”
“……어휴. 어휴, 어휴! 오드리, 진짜 다시 생각해 주면 안 돼? 다른 사람 많은데 왜 하필 오라버니야? 응? 제발!”
오드리와 라비린이 약혼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이후, 라디아타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든 청혼서가 오가기 전에 오드리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어 했다.
당연히 라비린이 오드리를 만나러 다니는 것도 싫어했다. 오드리가 자꾸 카프러스를 후작가에 보내 라디아타의 시간을 뺏지만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둘 사이에 끼어서 오드리의 옆자리를 사수했을 게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반대하느냐 물었더니, 대답이 간단했다. 라비린과 결혼하기엔 오드리가 너무 아깝다나. 밖에서 지나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물어도 오드리가 분에 넘치는 남자를 잡았다고 할 텐데, 라디아타의 눈에는 전혀 반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에게 라비린은 가장 힘들 때 옆에 없었던 못난 오라비에 불과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라디아타, 내가 가족이 되는 게 싫어?”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난 오라버니가 네게 홀딱 반해서 청혼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아무리 집을 떠나 있었대도 타우레드의 후계자로 자란 사람이야. 감정을 속이는 일 따윈 능수능란하게 해낼 거란 말이야.”
“아아……. 괜찮아, 내가 원한다면 평생토록 연기하며 살아주겠다고 했어. 능수능란하다니 더 좋네. 좋아, 가산점 추가.”
“거 봐, 한눈에 반했다는 건 역시 거짓말이었잖아. 평생토록 연기해 주겠다니, 뭐 그런 청혼이 다 있어? 응? 오드리!”
“감정에 따라 상대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내 사정이 여유롭지는 않아서. 알잖아? 내 아버지. 라비린 정도면 아주 좋은 조건이야. 네가 날 싫어한다고 해도, 그를 놓치기는 좀 아까워.”
“누가 너 싫대? 그런 얘기가 아니라고 했잖아…….”
라디아타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이상할 정도로 오드리를 챙기지 않는 헨젤 백작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헨젤 백작이 지금은 오드리를 사교계에 내보내 이런저런 정보 수집책으로 잘 써먹고 있긴 하지만, 하델이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내후년이 되면 그땐 어떤 대우를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늙어 새끼를 낳지 못하는 소를 팔아버리듯 팔아치울지도 몰랐다.
“네가 내 가족이 되는 건 좋아. 그저 네가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라서 그래.”
“그럼 됐네. 이제 후작부인의 허락만 얻으면 되겠어.”
“……몰라. 내 도움은 기대하지 마. 난 여전히 반대야.”
라디아타는 차마 더 말리지 못했다. 라디아타가 카프러스를 마음에 두고 발을 동동대는 건 그녀가 부모님에게 사랑받는 딸이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였다. 사정을 뻔히 알면서 사랑이 아닌 조건을 따지는 친구를 나무랄 자신이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후작부인의 응접실 앞에 이르렀다. 길쭉한 손잡이를 잡고 망설이던 라디아타가 별안간 뒤돌아섰다.
“오드리, 어머니가 좀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마음 상하지 마.”
“응?”
“외양을 많이 보는 분이야. 보통 사람들은 말하지 않을 이야기도 거침없이 할지 몰라.”
“음……. 괜찮아, 내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던 분이잖아. 남부에서 소녀 시절을 보낸 사람이 코르셋과 버슬을 입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실 거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오드리는 태연하니 웃는 얼굴인데,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뱉어버리는 로샨을 아는 라디아타는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오라버니가 뭐라고 했든 신경 쓰지 말걸.’
로샨과 연관된 일에는 어지간해서는 말실수를 하지 않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라비린의 편지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로샨이 레이디 헨젤을 앞에 데려다 놓아라 성화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차일피일 미루다 없던 일로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 일은 저질렀고 파도는 눈앞에 닥쳤다. 라디아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코르셋의 압박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딸깍.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포도 향기가 쏟아졌다. 배부른 여우도 그냥 지나치지 못할 듯 달콤하고 농후한 향기가 치맛자락을 적셨다.
응접실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응접실 벽면과 기둥을 따라 뻗은 포도덩굴 사이로 보랏빛으로 잘 익은 포도가 언뜻언뜻 보였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응접실 곳곳에 놓인 화분의 나무들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와아…….”
오드리는 예의도 잊고 소리 내어 감탄했다. 실내에 꾸민 공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녹음이었다. 덩굴 틈으로 보이는 벽지와 화분 사이에 자리한 가구들이 주변을 가득 채운 식물들과 위화감 없이 멋지게 어울렸다.
‘응접실이 아니라 온실에 들어온 기분이야.’
시야를 채우는 색도 색이지만, 온도부터가 달랐다. 활동하기 쾌적한 온도로 맞춰진 다른 공간과는 달리, 이 응접실은 식물이 자라기 좋은 온도로 맞춰진 듯 조금 더웠다. 약간의 습기도 함께 느껴졌다. 공간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식물이었다.
상체를 꽉 죄는 드레스 안쪽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장식용으로 들고 왔던 비단부채를 부채 본연의 용도로 사용해도 될 것인지 고민했다. 시원함을 느낄 정도로 부치다간 연약한 부챗살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런 오드리의 기색을 눈치챈 라디아타가 그녀를 끌어다 소파에 앉히고 차가운 냉수부터 챙겨주었다. 커다란 유리컵에 가득 든 얼음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물에 잠겼다.
“조금 덥지? 어머니 취향이야. 포도나무로 가득 찬 공간이 좋으시대.”
“아……. 부인께서는 산트렘 출신이셨지. 포도와 기사의 땅.”
“한때는 산트렘의 공주라는 별명까지 있던 분이셨으니까. 브란젤이 답답하신 거겠지.”
오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접실을 구경했다. 아깐 실내를 가득 채운 녹음에 시선을 빼앗겨 몰랐는데, 벽과 가구를 뒤덮은 포도나무들은 섬세한 관리를 받으며 자란 게 틀림없어 보였다. 마음껏 가지와 덩굴을 뻗은 것 같으면서도 가구 사용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절묘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여길 관리하는 건 후작가의 정원사겠지? 솜씨가 대단한걸. 방 전체가 동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빌려다가 서관의 후원을 좀 맡기고 싶을 정도야.”
“그건 안 된단다. 이 방의 아이들은 하루만 소홀히 보살펴도 난리가 나거든.”
라디아타보다 조금 낮고 침착하면서도 우아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찌나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는지, 오드리는 깜짝 놀라 물 잔을 엎을 뻔했다. 오드리보다 더한 순발력으로 넘어지려는 잔을 사수한 라디아타가 볼멘 목소리로 로샨을 탓했다.
“어머니,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시면 어떡해요. 오드리가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하구나. 그런데 오드리라니, 언제 그렇게 친해졌니?”
“한참 전부터요.”
오드리와 라디아타가 처음 얼굴을 대면한 건 지난 7월 초의 일이었다. 아직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라디아타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만나자마자 마음이 통했고 어느 한곳 미운 구석이 없는 친구인데, 까짓 시간이 문제일까.
그녀는 재차 강조했다.
“오라버니보다 내가 먼저 만났어요.”
어찌나 진지한 어조인지, 누가 들으면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 정도였다. 왜 자신보다 라비린과 먼저 말을 놓았느냐고, 수차례 원망을 듣는 동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오드리마저도 얼굴이 붉어지는 가운데 로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내 아들은 물론이고 딸까지 홀랑 반한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아가씨겠어. 그렇게 아끼는 친구면 진작 내게 소개 좀 시켜줄 것이지, 왜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은 거니?”
“어머니는 본래 내 친구들에게 관심이 없으셨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라디아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녀는 열다섯 살에 사교계에 데뷔했고, 험한 소문들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친구들 여럿을 사귀었다. 그러나 사교계에 관심을 아예 끊어버린 로샨은 그에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니 라비린이 헨젤가의 영애와 약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자마자 산트렘을 박차고 나와 브란젤까지 달려온 로샨이 곱게 보일 리가 있을까. 라비린이 아무리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자식이라지만 의무를 팽개친 로샨의 빈자리를 채운 건 라디아타인데 말이다.
“라디아타.”
“어머니께 친구를 소개하는 건 처음이네요. 정말이지,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라디아타는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로샨을 외면했다. 로샨의 섬세한 감성을 세세히 맞춰주는 일에는 한참 전부터 이골이 났지만, 때때로 이렇게 표정 관리가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녀는 좀처럼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해 망설이는 오드리를 붙들어 로샨의 정면에 세웠다. 이 넓은 방에 도망치거나 숨을 만한 곳은 한군데도 없지만 로샨의 시선에서 잠시나마 피해 있고 싶었다.
“오드리, 인사해. 내 어머니셔.”
“안녕하세요, 타우레드 부인. 오드리 헨젤입니다. 부족하게나마 만탈락의 경영을 맡고 있습니다. 산트렘의 공주라는 별명까지 가지셨던 분을 만나 뵙게 되어 기쁘……. 부인? 괜찮으세요?”
오드리는 인사를 끝마치지 못하고 로샨을 걱정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은 그렇다 쳐도, 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며 커다랗게 벌어진 눈이 심상치 않았다. 곧 꼿꼿하게 잡혀 있던 중심이 허물어지고, 흰 팔이 잡을 것을 찾아 허공을 더듬었다.
“……어머니?”
그대로 쓰러져 버릴 듯 위태롭던 로샨은 라디아타에게 기대어 간신히 주저앉지 않고 섰다. 그러면서도 오드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니, 무슨 영문인지 알 리 없는 오드리는 쐐기풀로 만든 망토를 두른 듯 불편한 기분에 시달렸다.
‘대체 왜 저러시지?’
로샨의 갈색 눈동자에 차오른 눈물이 끝내 넘쳐흘렀다. 마른 뺨을 적셨다. 오드리와 라디아타 모두 크게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데, 정작 로샨은 자신이 울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로샨이 라디아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오드리에게 다가와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솜털 보송한 새끼 새를 만지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어떻게…….”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덜컥 낯선 문화로 뛰어든 젊은 시절의 로샨에게는, 무얼 줘도 아깝지 않은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차별 어린 시선에 기죽은 그녀에게 빳빳하게 고개를 들라며 화를 내주던 친구.
밀리나 랄리우스 헨젤.
가무잡잡한 피부와 망해 버린 친정 가문 때문에 로샨보다 더한 시선과 수군거림에 시달렸으면서도 한 번도 등이 굽은 적 없고 눈물 흘린 적 없던 밀리나. 로샨은 기둥에 기대어 자라난 포도 덩굴처럼 그녀를 의지했다.
그러나 몸은 약해도 마음만은 강인해서 언제든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던 밀리나가 칼레이의 마차를 타고 세상을 떠난 이후, 로샨은 겉보기만이라도 괜찮아 보이기 위해 하던 노력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식욕은 점점 떨어졌고,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어쩌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사교모임에 꾸역꾸역 다녀온 날이면, 하하호호 마주보고 웃는 얼굴들이 메스꺼워 돌아오자마자 구역질을 했다.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나날들이 늘어갔다.
라디아타를 낳고 몇 년을 내리 시달리던 증세였다. 그래도 밀리나를 만나고 나서는 거의 나았었는데, 그녀가 곁에서 사라지자마자 재발해 버렸다. 결국 로샨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 안에 틀어박혔다.
누군가의 달팽이 껍질은 손으로 눌러 깰 수도 있을 만큼 연약하지만, 다행히 로샨의 달팽이 껍질은 퍽 튼튼하고 든든했다. 그녀는 안락한 이불에 감싸인 듯 빈틈없는 보호 속에서 상처를 잊어갔다.
그러니 헨젤 영애와 약혼해야겠으니 청혼서를 넣어달라던 라비린의 편지를 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겠는가. 잊으려 애썼던 밀리나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고, 곧이어 그녀의 딸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지경으로 안달이 나고 말았다.
‘오드리 헨젤? 헨젤 영애라고? 밀리나의 딸? 클로드,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아요?’
‘맞소. 그 애가 어릴 적에 내 딸 삼고 싶어서 슬쩍 말 건넨 적도 있는데, 대차게 차였다오. 자기한테 어머니는 한 명이라 안 된다고 하더군.’
‘밀리나의 딸이면 당연히 그렇게 대답했겠죠. 클로드, 당장 브란젤로 가요. 난 그 애 얼굴을 내 눈으로 보아야겠어요.’
남의 집 일에는 끼어들지 말라는 메너트에게 가로막혀 밀리나의 죽음 이후로는 얼굴 한 번 보러 가지 못했었다. 잠을 설쳐 가며 기대했다. 응접실로 향하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어릴 적 한두 번 본 게 전부인 얼굴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오드리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로샨은 죽은 밀리나가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정말, 정말 많이 닮았어.”
“네?”
“밀리나를 쏙 빼다 닮았어.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밀리나는 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졌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데다 체구가 작았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내려가서 무표정일 때는 따스하고 다정한 인상인데,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려 웃는 버릇 때문에 미소를 지으면 오히려 차갑고 냉정해 보였다.
오드리는 염색 때문에 머리카락이 초록색이었고, 아주 영롱하게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피부가 가무잡잡했고, 체구가 작았다. 날카로운 얼굴 선 때문인지, 예의바르게 웃고 있음에도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여러모로 로샨이 밀리나를 겹쳐 보기에 충분한 조건들이었다.
“저……. 부인?”
그러나 이 모든 사정을 오드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녀는 로샨의 눈물이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로샨의 손을 쥐고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디아타가 오드리에게서 로샨을 떼어냈다.
“어머니, 몸이 안 좋으신 거면 의사를 부를게요.”
“아니야, 난 멀쩡하단다. 그냥 좀……. 놀란 거야. 라디아타, 날 앉을 수 있게 해주겠니?”
좀 놀란 것뿐이라기엔 지나친 반응이 아닌가 싶지만, 본인이 멀쩡하다 주장하니 어쩌겠는가. 라디아타는 찝찝해하면서도 로샨을 소파에 앉혔다.
하지만 로샨은 소파에 앉아서도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계속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어머니, 역시 의사를 부르는 게 낫겠어요. 침실로 가요.”
“부인, 잡아드릴게요.”
로샨은 제 앞에 내밀어진 손들을 보다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잃어버린 친구를 친구 딸의 얼굴에 겹쳐 보는 걸로 모자라 엉엉 울어서 걱정을 끼치다니, 어른으로서 부끄러워할 일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허리를 폈다.
“아니야, 나는 정말로 괜찮단다. 레이디 헨젤, 미안해요. 일부러 신경 써서 차림도 정돈하고 왔는데 내가 걱정을 끼쳤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정신을 차린 로샨은 조금 전 흐트러졌던 모습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단정했다. 그녀는 오드리가 놀랄 정도로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라디아타가 걱정했던 대로 외모를 두고 지적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가무잡잡한 피부를 의아해하기는 했다.
“어릴 시절의 헨젤 양을 본 건 딱 한 번뿐이긴 하지만……. 몹시 뽀얗고 깜찍해서 초록 눈의 토끼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 자라면서 밀리나를 닮아간 건가요?”
“아니요. 이건 일부러 태운 거예요.”
대화에 굳이 끼어들지 않고 있던 라디아타가 충격과 배신감에 물든 눈으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자기더러는 흰 피부에 주근깨 생기면 안 된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더니, 본인은 일부러 태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오드리는 라디아타의 시선을 느끼고 슬그머니 몸을 틀었다. 변명 아닌 변명이 이어졌다.
“제가 만탈락에 처음 갔을 때는 고작해야 열 살이었으니까요. 그냥 어린애가 아니라 도시의 지배자로 인정받으려면 어머니와 닮기라도 해야 했어요. 가무잡잡한 피부는 랄리우스 가문의 상징이니까요.”
“그렇군요.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어요.”
다행히 염색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의문을 푼 로샨은 자신이 기억하는 밀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냈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말을 하면 할수록 기억은 선명해지고 하고 싶은 말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오드리마저도 지쳐서 예의상 미소만 짓고 있는데 그게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부인께서 어머니와 이렇게까지 사이가 좋았던 줄은 미처 몰랐는걸.’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오드리의 사고는 다른 쪽으로 빠졌다.
하델이 꽁꽁 숨긴다고 숨겨놓은 알신다를 어떻게 할까, 얼굴 본 지 오래 됐는데 네이기스는 그림을 잘 그리고 있을까, 피올은 브란젤에서 나오는 괴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디케는 또 소식이 끊겼는데 얼마나 집중해서 일하는 걸까, 그리고 셰비언은 정말 자신의 약혼에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
‘용이라서 좀 다른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날 사랑한다고 해놓고 라비린이 내 어깨를 안는 걸 웃으며 볼 수가 있는 거지?’
오드리는 셰비언의 고백을 근본부터 의심하는데, 라비린은 아직도 셰비언을 찜찜해했다. 그의 미소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어서 빨리 청혼서를 넣고 싶은데 그웬 부인은 도대체 언제 북부에서 돌아오느냐고 아침마다 투덜거렸다.
“……도 헨젤 양이 내 아들과 결혼하게 될 걸 알았으면 정말 깜짝 놀랐을 거예요. 그것도 둘째가 아니라 첫째와……. 어휴, 둘이 나이차이가 여덟 살이나 나는데 이런 어린 아가씨에게 반하다니. 라비린 녀석에게 이런 취향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내가 정말 기가 막혀서…….”
“네…….”
정말 화가 난 듯, 로샨의 눈두덩이 바르르 떨렸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가 별안간 오드리의 손을 움켜쥐고는 시선을 마주했다.
“만탈락은 무조건 헨젤 양의 것이에요. 클로드나 라비린은 손끝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세요. 물론 내가 도와주겠지만, 아무래도 당사자가 의견을 명확히 해야 힘이 실리는 법이니까요.”
“그야 지금 만탈락은 제 것이죠. 하지만 과연 결혼한 뒤에도 제 것일까요? 만탈락의 권리를 제가 갖는 것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로 정해진 것이었고…….”
“헨젤 양,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만탈락은 랄리우스의 도시이고, 헨젤 양이야말로 랄리우스의 후계자인데요. 성인이 되기 전까지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죠?”
오드리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어디 가서 멍청하단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로샨이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이해가 안 가기는 로샨도 마찬가지였다.
“밀리나는 랄리우스의 후계자를 지명할 권리를 갖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수로 만탈락을 지켰겠어요?”
“만탈락은…… 어머니께서 지참금으로 가져오셨다고……. 그래서 딸인 제게 일부만이라도 물려주신 거라고…….”
“말도 안 돼요. 밀리나의 지참금은 만탈락이 아니라 남부의 들판이었어요. 본가는 아니었다지만 반란군에게 소액이나마 자금을 댔던 헨젤 가문이 어떻게 그 넓은 들판을 몰수당하지 않고 버텼는데요? 돌아가신 랄리우스 후작께서 받았어야 할 포상을 헨젤이 대신 받아 몰수를 면한 거예요.”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리던 오드리는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심장이 어찌나 거세게 뛰는지, 입을 열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만탈락에서 칠 년을 있었어도 들은 적 없는 얘기였다. 어머니의 심복이자 자신의 유모인 락시 부인도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티의 신전에서 석연찮은 이유를 대며 보여주지 않는 결혼계약서와 유언장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만탈락이 밀리나의 지참금이라는 건 오해예요. 밀리나는 자신이 아버지의 공로를 팔아 빚을 갚고 계승권을 지켰다는 사실 자체를 말하기 꺼려했으니 오해를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헨젤 양은 딸인데, 정말 몰랐단 말인가요?”
오드리는 그저 눈꺼풀만 깜빡거렸다. 어쩌면 밀리나가 오드리에게 얘기를 해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밀리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오드리의 나이는 고작해야 아홉 살이었다. 암만 똑똑하고 영리했대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었다.
하나 그와는 별개로, 오래된 궁금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큰 빚이라도 그렇지, 돈으로 랄리우스 후작이 될 수 있다면 못할 게 없는 남자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밀리나는 왜 헨젤과 결혼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로샨의 말대로라면 헨젤은 영지를 지키기 위해 랄리우스의 명예가 필요했고, 랄리우스는 다음 후계자가 성장할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해 줄 울타리가 필요했던 거였다. 서로 간에 주고받을 게 확실한 거래였다.
과연 헨젤 백작이 좋은 양육자이자 보호자인가 하는 의문은 남아 있지만, 그는 약속을 천금처럼 여기는 귀족이니 거기에 후한 점수를 준 것이리라. 헨젤쯤 되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라도 추접스럽게 굴지 못할 거란 계산도 있었을 테고.
그러나 이 모든 건 그저 오드리의 짐작에 불과했다. 아무리 앞뒤가 맞아도 확인할 길이 없어서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말 그런 얘기가 오갔으면 유언장에 써놨을 거야. 어머니는 말로 끝낼 분이 아니니까.’
갖고 있는 유언장 사본에는 관련된 이야기가 한 줄도 없었다. 하지만 유언장 사본이 뭔가 이상하다고, 뭔가 빠진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 온 게 어디 한두 해던가.
‘어땠었지? 장례식장에서 변호사가 유언장을 읽던 장면은 기억이 나는데…….’
오드리는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날의 기억을 되살렸다.
집 안의 커튼이 전부 검은색으로 바뀌고, 고용인들 모두가 검은 옷을 입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회색의 하늘 때문에 주변 풍경은 온통 컴컴했다. 몰려든 사람들은 대문 옆의 정원수만큼이나 컸고 수가 많았다. 졸리다고 칭얼대는 하델의 손을 잡고 큰 구덩이에다 새하얀 튤립을 던졌다.
물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뭉그러지는 가운데, 커다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유리병 안의 눈깔사탕처럼 제각각 색이 다른 눈동자들이었다.
웃는 얼굴, 화내는 얼굴, 놀란 얼굴, 무표정한 얼굴. 어린 자신을 한손에 짓누를 수 있을 것처럼 커다란 사람들이 짓던 표정은 생생한데 정작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희미했다.
‘……기억나지 않아.’
로샨은 오드리가 오랫동안 침묵하며 생각에 잠기도록 놔두지 않았다.
“나는요, 헨젤 양이 성년이 되면 당연히 만탈락의 권리를 잃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몹시 의아해요. 미성년자일 때 물려받은 도시를 성년이 되면 가문에 돌려주라니, 언뜻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오드리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봤자 코르셋 때문에 제대로 숨을 들이마시지는 못했지만, 이마와 목덜미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라디아타는 살그머니 오드리의 손을 잡았다. 비밀이 너무 많고 속을 다 보여주지 않는 친구가 얄밉긴 해도, 친구의 어머니라고 아슬아슬한 수위의 발언을 지적 않고 참고 있는 모습이 몹시 미안하고 고마웠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동아줄이라도 붙드는 것처럼 매달려 왔다.
“어머니께선 하델을 잘 돌보라고 제게 부탁하셨어요. 설령 부인의 말씀이 전부 옳더라도, 어머니께서 생각한 랄리우스의 후계자는 제가 아닐 거예요. 만탈락도 마찬가지죠. 만탈락에는 하델의 몫으로 책정된 부분이 분명히 존재해요.”
“헨젤 공자를 챙긴 거야 자식이니까 그랬겠지요. 헨젤 공자를 랄리우스의 후계자로 삼을 거였다면 밀리나가 계승권을 그렇게 아득바득 지킬 이유가 없어요. 어차피 헨젤의 후계자에게 물려줄 거, 결혼과 동시에 계승권과 만탈락을 양도했으면 가문 내에서 입지가 그렇게 불안정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하지만 어머니의 유언장에는 부인께서 말씀하시는 얘기가 한 줄도 나오지 않아요.”
“아, 유언장.”
로샨이 큰 유리잔에 얼음을 가득 넣고 물을 따랐다. 도저히 답답해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분명 물을 마셨는데 술을 마신 것처럼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래요, 말보다는 문서를 믿어야죠. 게다가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한 못난 친구라서, 그때 그 유언장 내용이 어땠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말이에요.”
밀리나가 죽었을 때 로샨은 브란젤에 없었다. 뒤늦게 편지로 소식을 받아보고 부랴부랴 브란젤로 돌아왔지만 때는 이미 늦어서, 그녀는 친구가 누운 관이 무슨 색이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장례가 있던 날의 하늘이 유독 흐렸고, 악단은 자꾸 실수를 했고, 나름 엄숙하게 진행되던 장례식 중간에 변호사가 나타나 유언장을 낭독하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알려면 못 알아낼 것도 없었을 텐데, 그때 나는 내가 아픈 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사교계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집 안으로 도망쳐 버렸죠. 이런 사람의 말을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 충분히 이해해요.”
“…….”
“하지만 헨젤 양,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밀리나는 당신을 랄리우스의 후계자로 키웠답니다. 헨젤 백작도 그걸 알고 있었고요. 두 사람 사이가 왜 나빴는데요? 랄리우스의 후계자를 지명할 권한을 가진 밀리나가 헨젤 공자에게 랄리우스를 주지 않을 태도를 분명히 했으니까 그랬던 거예요.”
오드리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면 밀리나가 수배해서 오드리에게 붙여준 선생들은 귀족영애에게 어울리는 수업을 하지 않았다. 귀족영애의 교양이나 귀부인으로서 살림을 꾸리는 법보다는 가문의 후계자에게나 할 법한 수업을 했다.
더불어 밀리나는 병약한 몸으로도 오드리를 거의 옆에 끼고 살다시피 하며 랄리우스에 관련된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멜브란트 건국에 힘을 보탰다던 초대 랄리우스 후작의 거짓말 같은 무용담, 만탈락의 언덕과 사막에 얽힌 전설들…….
오드리에 비하면 하델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았다. 밀리나가 하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델보다 오드리를 더 아꼈다. 그때는 몰랐지만 거의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확실했다. 머리가 멍했다.
“헨젤 양. 유언장에는 아무 말 없어도, 밀리나와 헨젤 백작이 결혼 전에 작성한 결혼계약서에는 관련된 내용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꼭 확인해 보세요.”
라디아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아무리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친인척도 아니면서 결혼계약서를 언급하다니.
“어머니!”
그녀는 더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로샨의 발언 수위가 아슬아슬해서 심장이 졸아붙는 기분이었는데, 계속 듣고 있다간 오드리보다 자신이 먼저 호흡 곤란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어머니, 이제 쉴 때가 되지 않으셨어요? 산트렘에서 돌아온 지도 얼마 안 되셨잖아요. 여독이 아직 덜 풀렸을 텐데 쉬셔야죠.”
“……음. 더 얘기해도 괜찮은 것 같은데…….”
“아니요, 지금은 기분이 좋아서 모르시는 거예요. 이만 쉬셔야 해요. 오드리, 미안하지만 다음에 내가 다시 초대할게. 어머니, 전 오드리를 배웅하고 올게요.”
라디아타는 오드리를 떠밀다시피 돌려보냈다. 오드리를 배웅하고 응접실로 돌아온 그녀의 어깨는 삼일 밤낮을 꼬박 샌 것처럼 쳐져 있었다. 자연히 마음이 뾰족해졌다.
기껏 초대받아 와서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만 듣다가 하얗게 질려서 돌아간 오드리에게 너무 미안했고, 이런 끝을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고, 햇볕을 쬐는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워 보이는 로샨의 얼굴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어머니는 대체 어떻게 저렇게 태평하지?’
라디아타는 응접실의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무슨 말이 오갈지 무서워 고용인을 배치해 두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고.
“헨젤 영애는 잘 돌아갔니? 어쩜 그렇게 밀리나를 닮았는지 놀라울 정도야.”
그녀의 안에서 뭔가가 툭, 소리를 내며 끊겼다. 열아홉 해를 살면서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빈정거림이 불쑥 튀어나왔다.
“오라버니의 예비 약혼자가 궁금해서 부르셨으면 딱 그만큼만 물으면 될 것이지, 난데없이 헨젤 부인 얘기는 왜 꺼내요?”
“라디아타, 오해란다. 나는…….”
“오드리가 만탈락의 경영자로서 쌓은 재산만으로는 모자라셨어요? 랄리우스의 후계자가 아니면 오라버니의 상대로 못마땅해요? 헨젤 백작 부부의 결혼계약서를 확인하라니, 그게 대체 무슨 무례예요! 어머니는 오드리의 친척도 아닌데!”
로샨은 오드리가 밀리나의 딸이기 때문에 만나고 싶어 했던 거지, 라비린의 예비 약혼자이기 때문에 보고 싶어 했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밀리나와의 친분을 얘기한 적도 없는데 라디아타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아쉬움을 삭이며 다음엔 어떤 얘기를 할까 벌써부터 고민하고 있었던 로샨은 언제나 상냥하고 착하던 딸이 드러내는 분노에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나이가 믿기지 않게 어른스러워 저절로 의지하게 되던 딸이 맞는가 싶었다.
“라디아타, 내 말을 좀 들어보렴. 밀리나는,”
“어머니께서 웬일로 허리둘레 얘길 안 꺼내시기에 내심 안심하고 있었어요! 아, 마음에 안 들어도 딸의 친구니까, 남부에서 지내다 왔다니까 배려를 하시는 거구나! 헨젤 부인과 친하게 지내셨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로샨의 얼굴빛이 새하얘졌다. 기껏 일어섰던 자리에 도로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게,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라디아타는 말을 멈추지 못했다. 착한 딸, 유능한 딸, 의지되는 의젓한 딸로 지내는 동안 라디아타의 속에 쌓여 있던 서러움이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쏟아졌다.
“제 친구가 누구인지, 평소엔 듣기조차 싫어하던 분이셨잖아요. 오드리를 데려오라고 오라버니가 아닌 절 볶은 게, 이런 말을 하려고였어요? 오라버니 앞에서는 말 못 할 것 같아서?”
애초 로샨이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한 건 부모와 전혀 닮지 않은 라디아타를 낳고 나서였다. 지금이야 어여쁘다 의지된다 아낀다지만 그게 어디 처음부터였을까.
“어머니가 힘들 때, 아플 때, 곁에 누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내팽개친 살림을 누가 맡아 하고, 사교계에서 후작부인 역할은 누가 했는데! 내가,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왜 날 친구 앞에서 부끄럽게 해요?”
“라디아타…….”
“울지 마요!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어머니가 울어요!”
딸에게 처음으로 원망하는 말을 들은 로샨은 물론이고 울지 마라, 소리 지르는 라디아타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라디아타가 눈에 고인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로샨은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가에 고였던 눈물을 닦고 라디아타를 끌어안았다. 내비친 원망만큼 거세게 쳐 낼 줄 알았는데, 라디아타는 생각 외로 얌전했다. 하긴 라디아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로샨에게 반항한 적이 없었다.
“라디아타, 미안하다. 내가 내 상처를 돌보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네 심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
“그래도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난 헨젤 영애가 밀리나의 딸이라서 만나보고 싶었던 거야. 라비린과는 아무 상관없어. 결혼계약서를 확인하라고 했던 건……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아. 분명 밀리나도 괜찮다고 할 거야.”
“그걸 믿으라고요?”
“내게 죽은 친구를 불러올 재주가 없으니 네가 믿지 못한대도 어쩔 수 없지만, 우린 그럴 만한 친구였어. 그리고 정말 신기한 인연이지 않니? 누가 소개를 시킨 것도 아닌데 대를 이어 친구가 되다니.”
로샨은 라디아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라디아타가 눈물을 훔치는 기척이 났다. 매섭게 날이 섰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헨젤 영애는 네게 정말로 소중한 친구인 거지? 그럼 지금부터 준비하고 대비하렴.”
“뭘요?”
“스캔들. 라비린에게 편지를 받자마자 그웬 부인에게 청혼서를 보냈거든. 헨젤 영애와 가장 가까운 여자 친척어른이잖니.”
“어머니!”
뜻밖의 말에 놀란 라디아타가 로샨을 밀쳐 내고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라디아타가 대외적으로 후작부인의 역할을 맡아 한다지만, 본인이 직접 움직이는 무게감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로샨은 라디아타가 왜 이렇게 당황하며 싫어하는지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뭘 그렇게 놀라니? 둘이 서로 좋다 하고, 가문도 신분도 나무랄 것 없는데 청혼서를 보내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뭐라서?”
“그웬 부인은 오드리와 사이가 별로예요. 오드리에게 좋은 일을 해줄 리가 없……. 아니, 그보다 오드리와 오라버니가 서로 좋다고 했다고요? 말도 안 돼요! 두 사람은 그냥 서로에게 얻을 게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요!”
“그게 뭐가 어때서 그러니? 서로에게 얻을 게 있다니, 손해 보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했나 보지. 난 그보다 그웬 부인과 헨젤 양이 사이가 나쁘다는 말이 더 마음에 걸리는구나. 헨젤 양의 결혼 과정은 전부 그웬 부인의 손을 탈 텐데 말이야.”
로샨은 붕어라도 된 것처럼 입을 뻐끔대는 라디아타의 뺨을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성년이 되는 스무 살 생일이 코앞이지만 아직 어리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보들보들했다.
“가문에서 정해줘서 하는 정략결혼도 아니고, 본인들이 서로 합의하고 동의해서 한 결정이야. 분명 이유가 있겠지. 라디아타, 네 기준에 안 맞는다고 반대만 하지 말고 헨젤 영애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해.”
“가졌어요! 들었어요! 하지만 싫은 걸 어떻게 해요!”
“피부를 일부러 태웠다는 건 몰랐잖니. 네가 아는 것보다 더 복잡한 이유가 있을 거야. 네게 숨기는 걸 서운해하지도, 독촉하지도 말고 기다려. 그러면 먼저 다가와서 얘기해 줄 거야. 친구잖아.”
“……말 안 해주면요? 나만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면 어떡해요. 오드리는 자기 얘기를 정말 안 해준단 말예요.”
웅얼거리듯 뱉는 말이 너무 귀여워서, 로샨은 하마터면 크게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정작 라디아타 본인도 부모에게는 말 한 마디 없이 짝사랑을 하는 중이면서 친구의 속내는 모조리 알고 싶어 하다니.
“고치 속의 벌레처럼 방에 박혀 있던 나도 끄집어낸 넌데, 어린 아가씨 한 명쯤 못 녹일까. 누구든 널 사랑할 거야.”
글쎄요, 적어도 한 명은 아닌 것 같아요. 라디아타는 회의적인 말을 꿀꺽 삼켰다.
카프러스는 아직도 라디아타의 고백에 별다른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오드리가 시키는 온갖 심부름을 마다않고 수행하느라 그렇게나 자주 얼굴을 마주보는데도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마치 볼린의 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그 때문에 라디아타는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먼저 묻기는 두렵고, 마냥 기다리자니 속이 탔다.
로샨은 라디아타의 얼굴에 희미하게 드리워지는 그늘을 알아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불꽃같은 연애를 했고, 남들이 다 말리는 결혼을 감행해 지독한 고생을 했다. 많이 나아진 지금도 클로드의 손을 잡지 않으면 대문 밖을 나서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클로드가 내민 반지를 받은 걸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밀리나에게 바보멍청이라는 비난을 그렇게 들었는데도 변하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자식들까지 같은 길을 걷기를 바라지는 않았는데, 하필이면.
“하여간, 넌 날 너무 닮았어.”
“……네? 내가 어머닐 닮았어요? 말도 안 돼.”
라디아타가 질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라디아타는 로샨을 사랑했지만 그녀를 닮았다는 말은 정말로 싫어했다.
어차피 겉모습은 조금도 닮은 바가 없으니 속이 닮았다는 말일 텐데, 로샨의 연약한 심지와 섬세한 감수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속에는 없는 부분이었다. 만약 있다면 온 힘을 다해서 도려내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다.
“우리 남매는 희한할 정도로 어머니를 안 닮았어요.”
“글쎄? 내 생각은 다른데. 라비린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베드와 너는 내 젊은 시절을 빼닮았어. 클로드에게 물어보렴. 분명 내 말이 맞다고 할 거다.”
“어머니, 증인을 잘못 골랐어요. 아버지는 하늘에 달이 두 개 떴다고 해도 어머니 말이 맞다고 할 분이시잖아요.”
라디아타는 로샨의 말을 그녀의 착각으로 치부하고 무시했다. 그보다 로샨이 메너트에게 보냈다는 청혼서가 더 신경 쓰였다.
도중에 그만뒀다지만, 한때 메너트는 오드리에 대한 악평을 주도적으로 생산하던 사람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네이기스가 라디아타의 품으로 도피한 직후에는 오드리를 찾아가 이게 전부 네 탓이니 네가 딸을 도로 데려와라 소란을 피운 전적도 있었다.
그런 메너트가 진정으로 오드리를 생각해 무언가를 결정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청혼서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얼마인지 주판부터 튕길 게 분명했다. 그웬 부인이 되고 나서도 헨젤의 기질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필 그웬 부인이 오드리의 청혼서를 받아보다니…….’
메너트가 청혼서를 흔들며 거절이든 승낙이든 뭐든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네이기스를 돌려달라고 말할 걸 상상하면 너무 불쾌해서 속이 다 메슥거렸다.
‘내가 찾아낸 보석이야. 오드리도 그웬 영애도 다 내 거야. 절대 안 뺏겨.’
라디아타는 증조모로부터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금발자안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욕심 많고 집요한 기질까지도 피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는 제 품에 들어온 보석을 잃어버릴 생각일랑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행히 메너트는 아직 북부에 있었다.
오드리와 라비린의 스캔들은 시간이 지나도 잦아들거나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덩치를 불렸다. 스캔들 초기부터 열과 성을 다해 소설을 쓰던 가십지는 물론이고, 웬만한 일로는 꿈쩍을 않는 신문사와 잡지사도 슬슬 기사를 실었다.
클로드는 고위귀족들 사이에서도 자주 읽히는 잡지를 펼쳐 들고 소리 내어 기사를 읽었다. 장소는 헨젤 저택의 본관 응접실이었다.
“헨젤 영애가 만탈락의 권리를 획득한 건 아홉 살 때이지만, 지배자로서 실질적인 경영을 시작한 건 그녀의 나이 열한 살 때부터였다. 도로를 정비하고 상하수도 시설을 개편하는 등 일찍부터 도시의 체질을 바꿔놓은 덕분에, 로렐라이 상단이 만탈락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 않나 하는 추측이…….”
“클로드, 그만하게.”
“……탁월한 판단력으로 만탈락의 번영을 이끌어낸 레이디 헨젤이 만탈락의 권리를 소유하는 건 스무 살까지로 한정되어 있다고,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머니의 지참금이 딸에게 물려지더라도 그 소유에 기한을 두지 않지만, 도시의 권리라는 예외적인 상황이 그를 가능케 만들었다.”
“그만하라니까.”
점잖게 만류하는 헨젤 백작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아까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헨젤 백작 때문에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하녀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헨젤 백작은 가벼운 손짓으로 고용인들을 전부 내보냈다.
“끊지 말게. 이다음이 더 재미있거든.”
헨젤 백작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든, 클로드는 희희낙락 다음 문장을 읽었다. 일부러 챙겨온 잡지인데 핵심을 읽지 못하면 가져온 보람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본 지는 고 헨젤 부인의 지참금은 다른 것이고, 만탈락은 부인의 개인 재산이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헨젤 영애가 물려받은 만탈락의 권리는 온전히 그녀의 것이며 성년이 된다고 가문에 돌려줄 의무가 없…….”
“닥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헨젤 백작이 클로드에게서 잡지를 빼앗아 내던졌다. 공들여 컬러로 인쇄한 잡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리 고용인을 전부 내보냈다지만 너무 막말을 하는 거 아닌가?”
“자네가 내 앞에서 그 따위 기사를 읽어대는 건 막말이 아니고? 만탈락 관련 기사만 골라서 읽는 짓에 의도가 없다고 할 수 있나?”
“내가 기껏 청혼서를 가져왔는데 거들떠도 안 보고 쓰레기통에 처넣었으니 이러는 거 아닌가.”
능글맞게 웃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지만, 얌전히 맞아줄 친구도 아니었다. 헨젤 백작은 내가 어쩌다 저런 놈과 친구가 됐을까 이를 갈며 청혼서를 도로 꺼냈다. 사자 문장이 음각으로 새겨진 멋진 봉투에 잉크가 묻어 엉망이었다.
봉투칼이 바로 곁에 있음에도 손으로 대충 봉투를 잡아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금박이 뿌려진 고급 종이에 정식으로 쓴 청혼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루룩 내용을 확인했다.
<……뉴터 비레직 헨젤 백작 귀하의 장녀, 오드리 헨젤 양과…….>
헨젤 백작은 더 읽을 것도 없다는 듯 청혼서를 쭉쭉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아까보다 험한 취급이건만, 클로드는 그가 청혼서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 하하 웃을 뿐이었다.
“둘이 서로 좋다잖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게. 결혼이 어디 애들 소꿉장난인가?”
“이런. 타우레드는 자네 성에 안 차나? 하긴, 헨젤 영애가 가진 게 좀 많긴 하지. 만탈락도 있고…….”
클로드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나이 먹어서도 참 멋지고 잘생겼다 할 테지만, 헨젤 백작에게는 뱃속에 독사 대엿 마리를 기르는 미친 사자로밖에 안 보였다.
‘망할 자식. 그때 저놈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애써서 쫓아낼 의욕마저 사라졌다. 헨젤 백작은 클로드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무시하는 걸로는 당최 해결이 안 되니, 잠시라도 제대로 상대해 주고 돌려보내는 게 차라리 나을 성싶었다.
“타우레드와 헨젤의 결합은 위험해. 창칼에 돈이 붙는 꼴을 전하께서 두고 볼 것 같나? 자네가 지금 부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왕실이 발칵 뒤집어졌던 건 아예 잊었나 보군.”
“진정한 사랑에는 장애물이 많은 법이니까.”
“미친놈.”
헨젤 백작은 답지 않게 욕을 했고 클로드는 오랜만에 듣는 친구의 욕설에 낄낄 웃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고 있지만, 클로드와 로샨이 결혼을 발표했을 당시에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요새 산트렘 하면 다들 포도와 기사를 떠올리지만, 본래 산트렘은 멜브란트 왕국이 한창 기세를 올리며 영토를 넓히던 무렵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지역이었다. 전쟁과 약탈에 단련된 산트렘의 전사들은 강하고 끈질겼으며,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차오르는 달처럼 상승세에 있던 멜브란트를 이길 수는 없었다. 멜브란트는 끝내 산트렘을 꺾고 비옥한 땅과 강력한 전사들을 왕국 내로 흡수했다. 산트렘의 포도주는 왕족의 식탁에 올랐고, 산트렘의 전사들은 멜브란트 영토 전쟁의 최전선에 섰다.
하나 피 흘리며 생겨난 감정의 골이 쉬이 메워지겠는가. 산트렘 출신이라면 다들 흰 눈부터 뜨고 보며 차별하는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가니, 수시로 마찰이 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산트렘의 전사들을 자신의 직속기사로 삼고 파격적인 혜택을 주며 전쟁의 중추로 끌어올린 것도 모자라 최고의 기사들이라는 명예를 부여하며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선선대 국왕 펠른 2세가 없었다면, 독립전쟁이 났어도 진작 났을 터였다.
펠른 2세 이후 시간이 지나 산트렘 기사단이 멜브란트 최고의 기사단을 의미하게 된 뒤에도, 성별에 관계없이 말을 타고 검을 쥐는 이질적인 문화와 타 지역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산트렘의 배타적인 성향은 변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골치가 아픈 와중에 타우레드의 사자와 산트렘의 공주가 결혼을 발표했으니, 왕실의 당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왕실에서 산트렘에 손을 내밀 때는 그렇게 모른 척을 하더니만, 어째서 타우레드는 괜찮은 거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제된 언어로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는 왕실의 편지에 카론 남작가는 어쩐지 다 포기한 듯 간단한 답장을 해왔다.
서로가 없으면 안 되겠다는데 어쩌겠냐고. 말릴 만큼 말려봤는데, 도저히 안 되어서 그러니 그냥 허락해 달라고.
장담하는데, 지금 서점에 깔린 로맨스 소설 중 삼분의 일은 타우레드 후작부부의 일화가 모티브일 게 분명했다. 로샨이 건강을 해치고 저택에 칩거하는 것마저 아내를 밖에 내보내기 싫어하는 클로드의 독점욕 때문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미혼 귀족남녀 사이에서 결혼까지 이어지진 못해도 연애는 하는 풍토를 조성한 장본인 중 한 명이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웃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진 말게. 국왕전하는 몰라도 왕세자는 꽤 현실주의자라서, 창칼에 돈을 바를 때가 됐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전쟁에 미친 새끼.”
“약하면 잡아먹히는 게 세상 이치야. 살론 놈들이 사략선에 마법사를 태우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나. 먼저 전쟁을 시작할 필요는 없지만, 무장을 다듬을 필요는 있어. 나처럼 전쟁 싫어하는 사람도 드물다네.”
헨젤 백작의 이마에 핏줄이 하나 더 섰다. 전쟁의 무대가 땅에서 바다로 옮겨가면서, 전통적으로 기사를 우대했던 멜브란트의 군사전력은 상당히 약화됐다. 당장은 용병으로 때우고 있지만 꼭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긴 했다.
돈을 보는 자신도 이런데, 군사 쪽에 발을 담근 클로드가 느끼는 위기감은 정도가 다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사람처럼 거만하게 말하는 꼴이 아주 짜증났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왕립 기계 연구소 설립에 내가 보탠 건 손이 아니라 발인 줄 알겠군. 창칼에 돈 바르는 거야 마음껏 바르되, 헨젤은 끼우지 말게. 이게 그렇게 알아듣기 어려운 얘긴가?”
“자네야말로 욕심은 적당히 부리게.”
클로드가 벽에 걸린 헨젤의 문장을 손가락질했다.
열쇠를 품고 똬리를 튼 뱀.
“타우레드의 사자는 목에 백합이 감겼지. 산트렘을 억누르는 카론 남작가는 물론이고, 충직하게 국경을 지키는 오래된 가문들도 예외는 없어. 그런데 헨젤은 뭔가? 금고지기라는 핑계로 홀로 자유롭잖나. 왕실의 허락 없이도 혼약을 맺고, 어린 후계자를 왕궁에 맡기지도 않아. 라비린이 왕궁에서 자라는 동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자네는 짐작도 못할걸세.”
“고작해야 금고지기야. 사병을 가진 전적은 물론이고 시도조차 한 적 없어. 그렇게까지 경계할 대상이 아니라서 그런 걸 새삼 왜 말을 꺼내고 난리,”
“랄리우스 후작가. 멜브란트의 건국을 함께했던 수사슴의 피를 끌어들여 남부의 영지를 지켰으니 저 뱀의 목에도 곧 백합이 감기게 될 거야. 아니, 뱀이라 목이라 할 게 없으니 혓바닥을 꿰어버릴지도 모르겠군.”
클로드의 어조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멜브란트 왕실은 백합을 상징으로 쓰지만, 왕실의 문장에는 왕국을 세울 때 크게 손을 보탠 두 가문의 상징이 함께 들어 있었다.
타우레드의 사자와 랄리우스의 수사슴.
랄리우스는 타우레드처럼 가문을 지키지 못했다. 한때 랄리우스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이제 헨젤의 몫이었다. 유독 몸이 약하고 단명하는 사람이 많아 후손이 귀했던 랄리우스는 헨젤의 부상에 힘없이 밀려났다. 경험이 쌓여 무르익기 전에 자꾸만 대가 바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랄리우스의 마지막 정통 후계자였던 밀리나가 헨젤과 결혼하고 일찍 죽어버렸으니, 펠른 3세는 가끔 헨젤을 두고 뱀이 수사슴을 잡아먹었다는 섬뜩한 농담을 던지곤 했다.
헨젤 백작은 생각하기도 싫은 가능성에 미간을 찌푸렸다.
“괜한 말 말게. 랄리우스는 이제 없어.”
“지금은 없지.”
“앞으로도 없네.”
헨젤 백작은 아주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헨젤은 뱀이었다. 먹잇감을 통째로 삼켜서 뼛조각 하나, 털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는 뱀. 랄리우스가 가졌던 인망, 역사, 이젠 모두 헨젤의 소유였다.
클로드는 그런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뱀에는 턱이 없어서 제 몸보다 몇 배는 큰 먹잇감도 삼킬 수 있다더니, 욕심이 아주 대단했다.
하지만 너무 큰 먹이를 삼켰다간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다 천적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는 느긋하게 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 아내가 헨젤 부인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는 걸 자네가 알고 있나 모르겠군.”
“알고 있네. 내 아내의 드문 인맥 중 한 명인데 모를 리가.”
“그럼 헨젤 부인의 그 드문 인맥들이 자네 부부의 결혼계약서 내용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아는가?”
막 찻잔을 입에 가져다대던 손이 잠깐 멎었다. 그러나 동요는 잠깐이었다. 침묵은 얇은 얼음판처럼 금세 깨어졌다.
“내가 죽은 아내와 아무리 사이가 나빴대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고인을 모욕하면 안 되는 걸세. 그녀는 누구보다 귀족적인 사람이었어. 부부 사이의 일을 함부로 밖에 떠들 사람이 아니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가문과 가문 사이의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
랄리우스와 헨젤의 거래쯤 되면 단순히 부부 사이의 일이라고 말하긴 좀 어렵긴 했다. 결혼계약서를 작성할 당시, 밀리나와 뉴터 두 사람은 각 가문의 후계자였다.
“헨젤 부인의 인맥 중에는 왕비전하도 계셔. 잊지 말게, 그분께서 헨젤 부인의 유언장을 공증해 줬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가 그런 얘길 하니 우습군. 사람을 꾀어 멋대로 휘두르고 싶으면 앞뒤를 맞추려는 노력이라도 하게. 그 당시 가장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사람이 바로 자네야. 왕비전하께서 나선다고 하시면 가장 앞에서 막아야 할 사람이란 말일세.”
“증거 있나? 나는 자네를 알아. 내가 무심코 남긴 증거까지도 모조리 수거해서 폐기했겠지. 난 완벽하게 깨끗할 거야. 확신하고 있다네.”
헨젤 백작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음 같아선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손에 든 찻잔을 내던지고 싶은데, 하녀가 손님용으로 내온 찻잔이 클로드에게 던지기엔 너무 고급이었다.
“……클로드, 자네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아니, 타협안을 제시하는 거야.”
클로드가 품에서 새로운 봉투를 꺼냈다. 헨젤 백작은 그 봉투 안에 들은 게 조금 전과 완벽히 똑같은 청혼서라는 걸 확인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왜 누님이 아니라 나에게 왔는지 알 만하군.”
“사인해 주게. 정 내키지 않는다면 약혼 기간을 좀 길게 잡아도 돼.”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오드리가 탐나나? 우리의 오랜 우정에 금을 내는 짓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이 정도로 금 갈 우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네.”
“대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확신이로군.”
“로샨이 며칠 전에 헨젤 영애를 만났다네. 그러더니 갑자기 왕비전하를 뵈어야겠다며, 자네 부부의 결혼계약서 얘길 꺼냈어. 산트렘의 사람으로서 친구에게 받은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고까지 했단 말일세.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가나?”
“……그놈의 산트렘.”
산트렘 지역 사람들의 의리는 유명했다. 친해지기는 힘들어도 일단 마음을 나누고 친구가 되면 기꺼이 목숨도 걸어주는 사람들. 친구를 사귀려면 산트렘의 사람들처럼 사귀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로샨이 밀리나와 그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면, 왕비전하 운운하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때야 나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지만 타우레드 부인이 산트렘의 이름까지 꺼내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막으려면 못 막을 건 아니겠지만, 신경 쓰이는데.’
헨젤 백작은 혀를 차며 청혼서를 탁자에 내던졌다. 아무리 기사의 위용이 전과 같지 않다지만 산트렘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무거웠다.
“잘하면 타우레드 후작이 이혼당하는 꼴을 볼 수도 있겠군.”
“산트렘 출신의 귀부인이 이혼까지 하면서 지키려는 의리의 내막은? 따위의 기사를 보고 싶진 않을 거라 믿네. 뉴터, 자네가 청혼서에 사인만 해주면 로샨을 막을 수 있어.”
대체 무슨 수로? 아내에게만은 한없이 약한 남자인 클로드를 뻔히 아는 헨젤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라비린의 상대잖나. 로샨은 어린 시절을 왕궁에서 보낸 첫째에게 아직까지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거든.”
“자식을 방패로 삼다니, 비정한 아버지군.”
“글쎄, 내가 아무리 비정해도 자네만 할까.”
“나만큼 관대하고 자비로운 아비가 또 어디 있다고 그러나.”
헨젤 백작은 지극히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으나, 하델이라면 모를까 오드리가 들으면 편두통이 도졌다며 이마를 짚었을 것이다. 어이없기로는 클로드도 마찬가지라, 그는 부탁하는 입장도 잠시 잊고 불쑥 대꾸했다.
“아비라는 말을 가주로 바꾸면 인정해 주지.”
“자네 인정 같은 건 필요 없다네. 아무튼 이만 돌아가게. 조만간 소식을 전할 테니, 부인이나 잘 막고 있게나.”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게 하는 말에 클로드의 낯빛이 확 밝아졌다. 그는 헨젤 백작의 손을 잡고 몇 번이고 흔든 뒤에야 헨젤가의 저택을 떠났다. 헨젤 백작은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마차를 확인하다 쯧, 하고 혀를 찼다.
“겨우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기삿거리에 눈이 벌게져 담벼락에 벌레처럼 들러붙어 있는 기자들에게 타우레드의 마차가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보일까. 어쩌다 인터뷰 요청이라도 받으면 거리낌 없이 청혼서를 넣고 왔노라 말할 게 뻔한 클로드를 생각하니 뒷목이 다 당겼다.
‘죽어서까지 내 발목을 잡다니……. 빌어먹을 밀리나! 남부의 영지 문제만 아니었어도 그 따위 거래에 응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멍청한 숙부가 저지른 실수를 틀어막는 데에 내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는군.’
내팽개쳤던 청혼서를 다시 챙겼다. 그저 봉투를 바라보고 있기만 하는데도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남은 기간은 겨우 삼 년이었다. 때가 되면 적당히 나쁘지 않은 놈을 골라 결혼시킬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영 글러먹었다. 약혼 기간을 길게 가져도 괜찮다는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됐다.
“……후계자는 한 명이면 충분해.”
가슴 안에 담아뒀던 말이 무심코 흘러나왔다. 헨젤 백작은 제 입이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먼저 나불거렸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 주먹을 꽉 쥐었다. 잘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혹여 들었을까, 찻잔을 비롯한 다구를 치우는 하녀를 흘끗 살폈다. 최근 들어왔는지 낯선 얼굴의 하녀는 값비싼 다구를 다루는 게 무서워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했다. 은제 티스푼과 설탕 그릇을 챙기는 데에 온 신경을 다 쓰고 있었다.
카페 로열은 유명인과 귀족들 다수를 단골로 둔 유명 식당이었다. 다들 음식이 맛있고 전속 악단의 실력이 들어줄 만하며 우아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어서 카페 로열에 간다고 했지만, 이게 핑계에 불과하다는 건 누구나 알았다.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인 식사 공간을 제공하며 종업원들의 입이 매우 무겁다는 게 카페 로열이 성업을 하는 진짜 이유였다.
그런 카페 로열에도 개방적인 공간은 존재했다. 금사로 수를 넣은 새하얀 테이블보를 깔고 계절에 맞는 생화로 장식한 테이블 열댓 개가 적절한 간격으로 놓인 1층이 그랬다. 덩굴 모양 창문살을 넘어 들어온 햇살이 푸른색 카펫이 깔린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독립공간이나 개방공간이나 가릴 것 없이 호화롭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게 카페 로열이었고, 손님에게 그만한 값을 받았다. 당연히 테이블을 모두 채우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오드리와 라비린이 카페 로열의 단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카페 로열의 1층엔 평소엔 보이지 않던 부류의 손님이 점점 늘어났다. 카페 로열의 값비싼 식사비용을 치르고서라도 기삿거리를 줍고 싶은 기자들이었다.
막 리즈비아 거리에서 취미에도 없는 쇼핑을 마치고 사람들의 눈길 없이 있을 곳을 찾아왔던 오드리와 라비린은 1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기자 손님들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저들 딴에는 평범한 손님인 척 연기하는데, 차림은 물론이고 행동에서부터 티가 많이 났다. 두 사람이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행동이 어색해지면서 쉴 새 없이 흘끔대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개중에는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 끄적대는 사람도 있었다.
“카페 로열에서 1층에 앉은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어지간하다, 진짜.”
“알고도 저러는 걸 거야. 안 그래도 입이 막힌 상태인데 기삿거리로 쓸 만한 게 우리밖에 없는 거지.”
“아 정말이지……. 조금 떠들다 말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날이 늘어가는 기자에 질린 오드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을 걸 각오하긴 했지만, 닭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개처럼 기자들이 따라다닐 줄은 몰랐다. 장담하는데, 가스트로 왕세자를 취재하는 기자들도 이 정도로 집요하진 않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놈들. 빌어먹을 놈들. 눈알을 뽑아서 고양이 밥으로 줘야 할 놈들 같으니라고.”
오드리가 기자들을 의식해 다정스레 라비린의 팔짱을 끼고선 예쁘게 웃는 낯으로 연달아 살벌한 욕을 뱉었다.
라비린은 웃는 입술 모양을 유지하면서 정확한 발음으로 욕하는 오드리에게 몹시 감탄했다. 대단한 재주였다. 그는 오드리가 잡고 있는 팔을 빼서 그녀의 어깨를 살짝 감싸 안고 속삭였다.
“쓰레기를 밥으로 주면 고양이에게 미안하잖아. 기왕 할 거면 아예 목을 쳐서 바다에 던져야지.”
말리기는커녕 한술 더 뜬다. 오드리는 그만 맥이 쭉 빠져 피식 웃었다.
“그런 짓하면 페즈날에게 벌 받아. 신 중에서도 바다의 신이 제일 성질머리 더러운 거 알면서.”
“아, 웃었다. 벌이야 알게 뭐야, 네가 웃었으면 됐지. 자, 잠깐만 숨 참아봐.”
“응? 뭘 하려고? 라비린!”
오드리에게 미소를 되돌려준 라비린이 냅다 그녀를 안아 올려 팔에 앉혔다. 이전에 리가 항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주 안정적인 자세였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 따위 전혀 없었던 오드리는 깜짝 놀라 라비린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서는 등짝을 후려치고 싶은데, 보는 눈이 있어 차마 거세게 화내지는 못하고 목소리 죽여 화내며 눈만 부라렸다.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긴. 기삿거리 제공 중이지. 자리 안내받으면 바로 내려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아 정말이지, 틈만 나면……!”
속닥속닥, 귓가에서 말을 나누며 눈을 맞추는 두 사람은 남들 보기에 충분히 사랑스럽고 달콤한 연인 사이였다. 실제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보는 사람이 저절로 부러워질 만큼 낭만적인데.
두 사람은 정체를 감출 생각마저 잊어버린 기자들 앞에서 한껏 애정을 과시했다. 평소 두 사람이 얼마나 산뜻하게 굴었는지를 알고 있던 종업원마저도 이제까지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연기는 독립적인 공간에 들어와서야 끝났다. 오드리는 내내 웃는 표정을 유지하느라 당기고 아픈 뺨을 꾹꾹 눌렀다. 예의고 뭐고 없는 짓이었지만, 그걸 따져야 할 라비린도 그녀의 앞에서 팔을 주무르고 있었다.
“으, 이 짓을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기자들 관심 떨어질 때까지.”
“윽……. 그 말 너무 무서운데.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윈디로 사람을 밟아버릴 뻔했잖아. 어휴, 그때 놀란 걸 생각하면…….”
오드리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쿵쿵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신이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지 질주하는 말 앞에 불쑥 끼어들 생각을 하다니, 그 기자는 진짜 미친놈이었다.
그날도 같이 승마를 나섰던 덕분에 그 섬뜩한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했던 라비린도 미간을 찌푸렸다. 윈디가 영리하고 좋은 말이라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진짜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 괴물 얘기가 신문에 실리기 시작하면 우리 스캔들 같은 건 순식간에 뒤로 밀려 버릴 테니까.”
“아, 그렇지, 괴물이 있었지……. 그런데 그 괴물 얘기가 실리긴 할까? 지금도 알음알음 소문만 퍼지고 있고, 치안대에서는 여전히 입막음을 해놓은 채로 발표도 없고. 스캔들로 눈길을 끌어놓고 괴물은 후다닥 처리할 것 같은데.”
“후다닥 처리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너나 내가 더 잘 알잖아. 젠장, 난 아직도 그 괴물 놈의 가슴뼈를 부러뜨리던 순간의 꿈을 꾼다고.”
라비린이 과장된 태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썩어가는 시체처럼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돌바닥을 적시던 검은 피와 수수깡 부러지듯 부러지던 가슴뼈 생각만 하면 괜히 기분이 나빠져 잠을 설친다면서.
제 약점이라 할 만한 사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긍정하는 라비린의 모습은 오드리에게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서로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건 그저 대외적인 거짓말, 실상은 서로를 이용할 뿐인 관계인데 대체 뭘 믿고 저렇게 경계심이 적은 건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못났다는 말을 하면서도 말투 안쪽에서부터 묘하게 자신감과 여유가 배어나오는 게 느껴져서 더더욱 이상했다.
한줌밖에 안 되는 내 사람에게도 속 깊은 고민과 약점을 드러내길 망설이는 자신과 저절로 비교가 됐다.
‘본래 타고난 성품인 건가? 아니면, 후계자로서 입지가 단단한 게 저런 성향을 만드는 데에 영향을 미친 건가? ……젠장, 나는 왜 정말 쓸데없이 자잘한 곳에 질투를 느끼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
오드리가 어린애 손바닥만 한 제 마음의 넓이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종업원이 계속 올 필요가 없도록 한꺼번에 차려지는 음식들로 테이블이 가득 찼다.
그동안 덜컥 입을 다물었던 두 사람은 종업원이 사라지고 문이 완벽히 닫힌 뒤에야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조금 전의 대화 주제는 약속이라도 한 듯 꺼내지 않았다. 날씨 얘기, 음식 얘기…….
능숙하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삶은 돼지고기를 접시 위에서 조각내던 오드리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그나저나, 하티의 신전에서는 아직도 말이 없어?”
“네 생각보다 네 평판이 괜찮았던 모양이야. 시도할 때마다 멋진 애인이라고, 미리 약혼 축하한다는 말만 실컷 들었어.”
“뭐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나한테는 그런 태도 보여주지 않았어.”
“다시 가봐. 태도가 휙 바뀌어 있을걸. 단지 내가 느낀 건, 신전이 단순히 네 평판 때문에 유언장을 안 보여주는 건 아닌 것 같단 거야. 대체 무슨 이유로 딸의 열람 요청을 계속 거절하는 건지는 내가 다 궁금하네.”
라비린의 한탄을 들으며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로샨이 뿌린 의심의 씨앗이 자꾸만 자라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밀리나가 데릴사위를 들이는 대신 왜 헨젤과 결혼하는 무리수를 두었는지에 대한 오랜 의문을 그렇게 깔끔하게 설명해 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요 며칠 내내 그녀가 해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정신이 없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만탈락에 있는 락시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놓았지만 아직 답장이 오지 않았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서류 볼 시간이 많이 줄었는데 자꾸만 실수를 하는 통에, 이럴 바엔 일을 줄이라고 릴리에게 한소리 듣기까지 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개입되어 있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 헨젤은 하티의 신전과 그다지 접점이 없어서 짐작되는 게 없는데……. 오히려 사이가 안 좋은 편에 속하잖아.’
라비린이 멍한 눈으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는 오드리의 미간을 콕, 눌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오드리가 대번에 손을 쳐 냈지만, 라비린은 놀라지도 않고 웃었다.
“걱정 마, 반드시 구해다 줄 테니까. 이렇게까지 틀어막는 걸 보니까 나도 오기가 생겨서 말이야. 그보다 오늘 우리 아버지가 헨젤 백작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셨는데, 잘됐나 모르겠다.”
“그분이 아버님은 왜 만나?”
“청혼서 때문에. 그웬 부인이 아직도 답장을 보내지 않고 있거든. 상의가 필요하니 시간을 달라는 답장이라도 보낼 만한데 그조차 오질 않아서 말이야…….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 이런 식이면 그웬 부인을 믿을 수 없다며, 예전에 그웬 부인이 헨젤 부인과 사이가 나빴던 얘기까지 꺼내시면서 아버지를 압박하셨어. 당장 청혼서를 갖고 가라고 말이야.”
오드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며칠 전에 만난 로샨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로드가 아내의 말 몇 마디에 움직였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다.
“말이 돼? 아무리 고모님께서 실수를 하셨대도 그렇지, 핑계를 대기엔 너무 옛날 얘기잖아. 타우레드가 예법을 무시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데 그런 핑계에 타우레드 후작님이 움직였다고? 부인은 뭐 후작님 약점이라도 갖고 있는 거야?”
“아버지는 네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어머니를 사랑하시거든. 우리 집의 주인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야.”
젊은 시절의 타우레드 후작 부처가 온 멜브란트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열애를 했다는 거야 오드리도 알았다. 로샨의 연약함을 싫어하는 라디아타마저도 그녀의 사랑만은 부럽게 여겨 종종 이야기를 하곤 했으니까.
하나 그 얘기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비린이 말하니 너무 우습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마침 물을 마시고 있었던지라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큰 돌멩이처럼 느껴지는 물을 억지로 꿀꺽 삼켰다.
“……웃기고 있네. 네 입으로 했던 말을 벌써 잊었어? 귀족의 후계자는 사랑 같은 거 못한다고 했었잖아. 차라리 폐쇄적인 산트렘 사람들을 뚫을 카드가 타우레드 부인뿐이라 애지중지 하는 거라고 해.”
“아름답다 생각하면 아름답게 보이고, 귀하다 생각하면 귀해져. 사랑이 그렇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뭔데?”
라비린은 살그머니 손을 뻗어 오드리의 눈가에 맺힌 물기를 거뒀다. 물을 삼키느라 고인 생리적인 눈물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손가락에 묻은 눈물이 한겨울 바닷물처럼 찼다.
“평생을 포장하며 살겠다는 말이 빈말처럼 들렸어? 걱정 마, 내 포장은 아버지보다 완벽할 거야. 오드리, 사랑해.”
라비린의 손가락이 닿을 때도 변하지 않던 오드리의 표정이 아주 약간 일그러졌다. 슬픔도 기쁨도 두려움도 아닌 미묘한 감정이 균열을 통해 흘러나왔다가 해를 맞은 아침안개처럼 사라졌다.
라비린의 속에서 뭔가가 철렁 내려앉았다.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 안에 들어앉아 심장을 꾹꾹 눌러대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가늠이 안 됐다.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듯 숨이 막혔다.
‘내가 왜 이러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초조함에 목이 메었다. 오드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붉게 물들인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기대되면서도 어쩐지 두렵게 느껴졌다. 그는 서둘러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화제를 돌렸다.
“이디케는 대체 어떤 교육을 받은 거야?”
“왜?”
“그냥 하녀라기엔 익힌 학문 수준이 너무 높은 것 같아서 그래.”
쇼핑에 취미가 없는 두 사람이 왜 리즈비아 거리를 헤매다 왔겠는가. 오드리와 라비린이 가게를 돌아다니며 기자들의 시선을 끄는 동안, 다이앤이 이디케를 만나 중간 보고서를 받아왔다.
연락도 끊고 일에 전념한 이디케는 눈 밑이 새카맣게 퀭해진 데다 바싹 마르기까지 해서 다이앤의 걱정을 샀다. 새삼 뭔가 보양이 될 만한 약이라도 만들어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다이앤이 고민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 훌륭한 보고서였다. 라비린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대강 검토한 것만으로도 전보 기계의 놀라운 발전은 물론이고 전보 관리에 대한 이디케의 구상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예산과 인력에 대한 고려를 집어치운 이디케의 계획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규모가 컸다. 우편국과의 연계를 고려한 적이 있다더니, 그때 우편국의 구조를 죄다 파헤쳐 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대로라면 전보국을 하나 만들어도 될 성싶었다.
오드리는 라비린의 의문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짐작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예산 부담과 시중들기에서 벗어나 일에만 집중한 이디케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그녀가 보기에도 몹시 훌륭했다.
“이디케는 나와 함께 공부했어. 귀족영애가 아니니까 미술이나 악기 연주, 사교춤은 안 했지만 다른 건 다 했지. 좀 늦게 시작했어도 진도 따라오는 데에 힘들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네. 특히 수학과 관련된 부분에선 천재라고 불러도 좋을걸.”
“윽…….”
라비린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열한 살이면 어느 정도 성격 형성도 끝났고 사리분별도 할 줄 아는 나이라고 태연히 대답하던 오드리가 천재라고 단언할 정도라니. 대체 이디케의 재능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안 됐다.
물론 귀족 자제의 옆에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는 하인은 남녀불문하고 어느 정도 교육을 시키는 게 불문율이긴 했다. 충성심 강한 고급 인력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디케처럼 주인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시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쓸데없이 똑똑한 하인이 자신보다 떨어지는 주인을 참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어쩐단 말인가.
“고작 하녀인데 왜 그런 교육을 시켰나 궁금해?”
“음? 크흠, 흠.”
속내를 들킨 라비린이 민망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나 오드리에겐 익숙한 반응이었다. 이디케에게 고급 교육을 시킬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어찌나 말이 많았는지, 그렇게 말을 보탠 사람들 명단을 적으면 편지지 한 장을 다 채울 수도 있었다.
“이디케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어. 처음엔 내가 잘난 척 하면서 이것저것 가르쳤는데, 어느 순간부터 따라잡혔지 뭐야. 배우지도 않은 걸 나보다 먼저 알아채기에 자존심이 상해서……. 에라, 어디 한번 고생해 봐라 하고 수학 선생 앞에 앉혀놨지.”
“그런데 예상외의 결과물을 낸 건가?”
“응. 세상에, 난 내 수학 선생이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인지 그때 처음 알았지 뭐야. 그 다음엔 뭐, 그냥 가르쳤어. 그렇게 잘하는데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간도 커. 아무리 젖형제라고 해도 결국엔 하녀인데, 그런 교육을 다 시키고.”
“그렇게 따지면 내 어머니는 여자애인 나에게 가문의 후계자나 받을 법한 교육을 시켰어. 둘 다 틀에서 벗어나긴 마찬가지인데 뭘.”
밀리나가 오드리를 랄리우스의 후계자로 여겼다는 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귀족영애가 후계자나 받을 법한 교육을 받았다니 과연 믿어줄까 생각했지만, 라비린은 바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라디아타와 비슷한 교육을 받고서 그렇게 도시 운영을 잘했다고 했으면 난 진짜 죽고 싶었을 거야. 그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너무 쉽게 믿어주는 통에 오드리는 몹시 당황스러워졌다. 그녀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부연설명을 붙였다.
“중간에 잠깐 그만둔 적도 있긴 하지만 만탈락에 가서는 계속 배웠어. 유모가 계속 선생을 골라줬거든.”
“그랬겠지. 설마 열 살에 모든 과목을 끝냈겠어? 그보다 그 유모,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퍽 특이한 사람인 걸. 어린 아가씨가 가만히 도시의 세금이나 받으며 지내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두지 않았다는 거잖아.”
“……그러게. 나한테는 너무 당연해서 생각해 본 일이 없네. 쭉 그런 교육을 받았으니까…….”
오드리는 어딘지 멍한 머리로 대답했다. 만탈락으로 내려온 직후의 오드리는 아주 말썽꾼이었다. 여자애가 공부를 열심히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수시로 수업을 땡땡이 치고 온 만탈락을 헤집으며 놀러 다녔다.
과수원의 꽃잎을 따러 뛰어다니고, 포도밭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잤다. 개울에서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물장난을 치다가 락시 부인에게 끌려나온 일도 허다하고, 사막 무서운 줄도 모르고 직접 오아시스를 보겠다고 나섰다가 길을 잃어 죽을 뻔한 전적도 있었다. 눈이 안 오는 게 서운하다고 엉엉 울었던 건 아주 사소한 말썽에 속했다.
그래놓고 우연히 워커를 만난 뒤에는 그를 이용해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로렐라이를 준비했다. 그제까지 하는 둥 마는 둥 손을 놓았던 공부를 밤을 새워가며 하고 도시를 제대로 운영해보겠다고 덤벼선 온갖 실수를 연발했다.
락시 부인은 오드리가 멋대로 굴 때는 바다 같은 인내심으로 기다려 주었고, 그녀가 마음을 고쳐먹었을 때에는 놀라운 수완으로 든든하게 뒷받침을 해주었다. 아가씨 때문에 내가 고생을 하도 많이 해서 빨간 머리가 흰 머리가 됐다는 게 그녀의 입버릇이었다.
이디케가 오드리의 오른팔이듯이, 락시 부인은 밀리나의 심복이었다. 그녀의 행동에는 밀리나의 의사가 어느 정도 들어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유모의 손길이 간절한 나이였던 하델을 두고 오드리를 따라 만탈락으로 가길 택한 것도, 오드리를 물심양면 보살피고 뒷바라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함께한 세월이 쌓이며 쌓인 사랑과 정을 무시하는 건 아니나 최초의 동기에 밀리나가 큰 비중을 차지할 건 분명했다.
오드리는 문득 밀리나가 그렸을 자신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어린 딸에게 온갖 분야의 선생을 붙이고 랄리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락시 부인은 어떤 꿈을 꾸며 말썽쟁이 아가씨의 교육을 포기하지 않은 걸까.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라비린은 아주 단순하게 내용을 정리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덕분에 만탈락 운영을 아주 잘했으니 고마워해야겠어. 아, 겸사겸사 어린 시절의 네 무모함에도 감사하자. 그게 아니었으면 이디케 같은 최고급 인력을 마음 놓고 부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
“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다니 놀라운데.”
“당연히 내 일이 아니니까 단순하지. 난 결과물만 봐.”
“나와 약혼하면 내 일이 네 일이 될 텐데?”
“아차…….”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라비린이 신음성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오드리는 그 작위적인 표정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을 텐데도 어딘지 경직된 자신을 웃기려 과장된 태도를 취하는 그의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과연 오드리의 미소가 만족스럽지 않은 라비린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리곤 그새 비어버린 그녀의 물 잔을 채우며 툴툴거렸다.
“이왕 웃을 거면 좀 환하게 웃어주지.”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어. 사교모임에서 다른 레이디들 앞에서 웃을 때처럼.”
오드리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주 우아하고 산뜻하면서도 어딘지 힘이 있어서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났다. 라비린은 오드리가 그렇게 놀라우리만치 잘 정돈된 사교용 미소를 짓는 건 처음 보았다. 그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차가운 미소는 아니었는데.”
“차갑다고? 흠…….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다시 연습해야 하나?”
“아니, 완벽해. 그냥, 그런 미소를 볼 바에는 차라리 무표정인 편이 낫겠다 싶어서 말이야.”
“싱겁게 굴기는. 알았어, 난 내 멋대로 할 거야.”
“이미 한참 전부터 그렇게 하고 계셨거든요?”
라비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꼬았지만, 오드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음식 접시를 비웠다. 본래 카페 로열은 생선 요리가 유명한 곳이었지만, 아무래도 강이 마르다 보니 요리 대부분이 돼지와 소, 새고기로 구성돼 있었다.
라비린은 말도 없이 식사에 집중하는 오드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입에 넣는 게 아닌데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저 조그만 체구 어디에 음식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드리가 샐러드와 메인요리를 정복하고 막 디저트에 눈을 돌릴 즈음, 라비린이 불쑥 입을 열었다.
“라디아타에게는 말 안 할 거야?”
“뭘?”
“로렐라이.”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담긴 그릇의 뚜껑을 열던 손이 덜컥 멈췄다. 온도조절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 계속 쥐고 있긴 좀 차가울 텐데, 오드리는 그 냉기를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아예 뚜껑에 손을 얹고 표면의 장식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라디아타는 이제까지 오드리가 기대해 본 적도 없던 깊은 신뢰와 우정을 보여주었다. 로렐라이의 비밀을 외부에 털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없었다. 분명 굳건히 입을 다물고 좋은 조력자가 되어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했다. 왜 이제까지 숨겨왔느냐며, 자신을 믿는 게 그렇게 어려웠느냐고 원망하는 그녀를 상상하면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이성적으로는 빨리 얘기하고 협조를 구하는 편이 낫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시기를 미루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카프러스에게 사실을 밝힐 때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지 입이 말랐다. 오드리는 무심결에 입술을 핥았다.
“해야지……. 얘기할 거야.”
“아, 그래? 태도 정한 거지? 그럼 이왕 할 거 좀 빨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당장 오늘 아침에도 날 찾아와서 한참 노려보다 갔어. 멱살이라도 잡히는 줄 알았다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라디아타가 그랬다고?”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일단 오전에 일어나는 일 자체를 힘들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거 참 신기한 일이긴 한데, 그게 왜 내 탓이야? 너한테 다른 불만이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네 일이 아니면 내가 라디아타에게 불만 살 일이 뭐가 있어? 라디아타에게 나는 그냥 눈에 거슬리는 화분인데, 그 화분이 애정도 뭣도 없이 친구를 채갈 것 같으니까 화를 내고 있는 거라고.”
흘끔흘끔 오드리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라비린은 끝내 그녀의 손에서 아이스크림 그릇을 빼앗아 뚜껑을 연 뒤에야 돌려주었다.
어지간히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는지, 장미를 정교하게 새긴 은제 뚜껑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런 물건에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손을 올려놓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의사를 부를 생각을 했다. 약혼만 성사되면 바로 불러다 진찰을 시켜야지.
“아무튼 말하기로 결정했다니 다행이다. 실은, 어머니를 부추긴 게 라디아타 같거든. 집에만 계시던 어머니가 그웬 백작부인의 행태를 어떻게 아셨겠어? 끝까지 감출 수 있다면 모를까, 말 안 하고 있다가 들키면 사태가 심각해질지도 몰라.”
“음? 아니야, 라디아타는 나더러 도움 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고 했어. 우릴 반대하는 사람을 꼽으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걸.”
“그건 나도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돕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싫은데, 네가 원하니까. 이야, 무슨 로맨스 소설 같다.”
막 아이스크림을 떠서 입에 가져가던 오드리의 손이 떨렸다. 은스푼에 소담하게 올렸던 아이스크림이 식탁에 툭 떨어졌다.
“어, 진짜야?”
“진짜겠어?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런 말을 농담이랍시고 하니까 라디아타에게서 화분 취급이나 당하는 거야.”
“아, 그런가.”
라비린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버리는 그 웃음이었다. 황당한 말에 뾰족해졌던 오드리의 마음도 함께 둥글어졌다.
“화분은 화분이라도 이왕이면 방 안의 화분이 되려고 노력해 보는 게 어때? 타우레드 부인의 응접실은 포도나무로 가득 차서 굉장히 멋지…….”
“셰비언!”
안에 있는 손님이 먼저 나서기 전에는 열리지 않는 문이 벌컥 열렸다. 용암처럼 붉은 머리칼을 목덜미 부근에서 아무렇게나 묶은 미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셔츠 단추를 두세 개나 풀어헤친 데다 소매를 둥둥 걷어 올리고 치마 대신 바지를 입은 여자였다. 허리엔 빈 검대가 걸려 있었다.
오드리도 라비린도 깜짝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자가 새파란 눈으로 오드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맞는데?”
“손님, 뭐 하시는 겁니까!”
앞서가던 종업원이 경악을 하고 돌아와 여자를 문에서 끌어냈다. 그리곤 오드리와 라비린에게 몇 번이고 사과의 말을 건넸다. 잠깐 사이 퍼렇게 질린 안색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노여워 마시고…….”
“알겠으니 그만 조용히 하게.”
라비린은 종업원 뒤에 서서 계속 오드리를 바라보는 여자가 몹시 신경 쓰였다. 눈앞의 개를 바라보며 저게 왜 고양이가 아니라 개지? 하고 의문을 갖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거기 자네는 사과 안 하나? 사람을 잘못 보고 식사를 방해했으면 마땅히 사과를 해야지.”
“……아, 그렇지. 죄송합니다. 워낙 닮아서 착각했나 봅니다.”
오드리와 셰비언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풍기는 분위기마저 여름과 겨울 정도의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을 동시에 안다면 도저히 착각할 수 없었다. 오드리는 엉뚱한 말에 울컥 화를 내려는 라비린을 손짓으로 말리고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셰비언을 아나? 마침 나도 그를 아는데 이것 참 신기한 우연이로군. 이제까지 나와 그가 닮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어서 신선하기까지 해. 정말 닮아 보이나?”
“예, 뭐. 신기할 정도로 닮았습니다.”
오드리 주변의 공기 온도가 훅 내려갔다. 종업원이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가운데, 여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오드리에게 박힌 상태였다.
“실은 지금도 놀랍습니다. 눈이 의심될 정도예요.”
라비린은 하도 기가 막혀 말을 잃었지만, 오드리는 그녀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가지고, 상식과 어긋나는 말을 하는 사람. 게다가 셰비언과 아는 사이라니.
“혹시…….”
“저, 아가씨. 손 한 번만 잡아봐도 될까요?”
오드리의 말을 툭 잘라 먹은 여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말은 양해를 구하는 질문인데, 그냥 뒀다간 오드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손을 잡아버릴 것만 같은 태도였다. 결국 참지 못한 라비린이 나서서 그녀의 손을 매섭게 쳐 냈다.
짝!
절대 작다고 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아무리 숙녀라고 볼 수 없는 차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여자였다. 종업원은 물론이고 오드리마저 당황해 라비린을 바라보았으나, 라비린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여자와 오드리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이름도 밝히지 않은 무뢰한이 하는 짓을 계속 두고 볼 수가 없군.”
아, 이름. 여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도 벌겋게 달아오른 손등은 물론이고 라비린에게도 별 관심이 없는 듯, 그저 그의 등 뒤에 있는 오드리를 보려고 자꾸만 고개를 기웃거렸다.
“맞다, 이름을 대야 했지. 깜빡했네. 제 이름은 샤를레아입니다. 이름을 밝혔으니 이제 손을 좀 잡아도 되겠죠? 잠깐이면 됩니다.”
“거절하지. 자네, 이 손님을 빨리 데리고 나가게. 괜히 상대했어.”
“아, 예. 손님, 이제 그만 가시죠. 여기서 계속 이러고 계시면 안 됩니다. 일행분이 기다리고 계신데 얼른 가셔야죠.”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던 종업원이 정신을 차리고 끼어들어 샤를레아를 말렸다. 그러나 용병 차림을 하고 있어도 여자라고 차마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하고 말로만 조잘조잘하니, 샤를레아에게 통할 리가 있나.
“잠깐이면 된다니까. 내가 뭐 해를 끼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말 잠깐이면 돼.”
“아, 손님! 제발요!”
결국 종업원은 예의를 집어치우고 샤를레아의 허리를 잡고 그녀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날씬한 몸뚱이가 어찌나 무거운지, 카페 로열에서 가장 무거운 조각상을 끌어당기는 듯 막막한 느낌만 났다.
길어지는 실랑이에 라비린이 직접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때, 아까부터 이름만 나오던 인물이 나타나 샤를레아의 손목을 확 움켜쥐었다. 셰비언이었다.
“샤를레아!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너랑 똑 닮은 사람을 찾아서 말이야. 하도 신기해서 손 좀 잡아보려는데 방해가 너무 많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너한테 제발 상식과 예의에 따라 행동하라고 했어, 안 했어? 죄송합니다, 샤를레아는 제 먼 친척인데……. 벨키스 경? 오드리 아가씨?”
황급히 사과하던 셰비언은 뜻밖의 인물에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름대로 인간 흉내를 잘 내고 있던 샤를레아가 왜 갑자기 헛소리를 하나 했는데, 라비린의 뒤에 팔짱을 끼고 앉은 오드리를 보자 상황이 바로 짐작됐다.
‘진작 말해뒀어야 하는데.’
셰비언이 오드리의 마력 안정을 위해 넣었던 마력은 이제 거의 대부분 오드리의 마력과 융화된 상태였다. 다만 그 과정에서 셰비언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오드리의 마력이 순수한 용과 매우 흡사해졌다.
셰비언과 샤를레아가 겉모습과 상관없이 서로를 금세 알아보았듯, 오드리 역시 마음먹고 살피지 않는다면 용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오드리는 셰비언이 준 비늘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으니, 샤를레아가 오드리를 보고 저리 흥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용족의 사정이고, 라비린이나 오드리에게 이해를 바랄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는 샤를레아의 어깨를 바스러뜨릴 듯 움켜쥐고 속삭였다.
“네가 생각하는 게 아니야. 사정은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지금은 인간답게 행동해.”
“염병, 사정은 무슨 사정이고 인간답게는 무슨 인간답게야……!”
“손톱만큼 쓰고 있던 마법도 죄다 뺏기고 싶어? 그렇게 해줄까?”
샤를레아가 입술을 꾹 다물고 얌전해졌다. 눈에서 아직 불꽃이 튀기긴 하지만, 일단 기다릴 기색을 보인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저를 붙들고 있는 종업원을 홱 떨쳐 내고 성질을 부렸다.
“자리로 안내해. 빨리!”
마음 같아서는 정말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을 텐데, 종업원은 용케도 참고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비켰다. 셰비언은 빨간 머리통이 충분히 멀어지고 난 뒤에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묵묵히 기다리던 라비린이 그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정말로 친척입니까?”
“죄송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셰비언 당신은 어디로 보나 북부 출신인데, 친척이라는 샤를레아 양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남부인이라니.”
셰비언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물 한 잔으로 달랬다. 비꼬는 말투가 불쾌해도 어쩔 수 없었다. 사실은 같은 종족이라서 친척이라고 했을 뿐이지 피는 한 방울도 안 섞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저 사정을 짐작한 오드리가 거짓말쟁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신경 쓰일 뿐이었다.
“아주 먼 친척이다 보니 좀 안 닮았죠. 워낙 소식이 오래 끊겼다 보니 직업도 직업이겠다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걸 안 건 최근이죠. 전보 만드는 데에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도움? 용병에게?”
“아시다시피 요즘 브란젤에 괴물이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마력에도 민감하고 솜씨도 좋아서, 호위로는 아주 그만입니다. 로렐라이 상단에 정식으로 고용된 상태이니 보안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이디케도 알고 있고, 제 친척이기도 하고……. 입이 무거워요.”
“흠……. 눈이 엉망인 용병이라 과연 쓸모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오드리를 보고 자꾸 당신과 닮았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던데.”
“그건…….”
셰비언이 채 관리하지 못한 시선이 오드리의 가슴팍에 가 닿았다. 늘어뜨린 펜던트에서부터 묘한 파장이 흘러나와 자꾸 주변의 마력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는 그 펜던트 안에 자신이 선물한 비늘이 들었을 걸 확신했다.
그러게, 먹으라고 준 걸 왜 갖고만 다니는 건지. 셰비언은 최대한 ‘정상적인 인간’ 다운 대답을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좀처럼 괜찮은 변명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니까…….”
“적당히 해, 라비린. 본인도 아닌데 어떻게 이유를 알겠어. 상단에 고용된 상태라니 이대로 도망갈 것도 아니고, 나중에 본인에게 추궁하면 그만이야. 우리가 다 읽질 못해서 그렇지, 아마 이디케의 보고서에도 올라와 있을 거야.”
보다 못한 오드리가 끼어들었다. 셰비언이 용이라는 걸 까발리지 않는다면 무슨 말로도 변명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괜히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느니 아예 입을 막아버리는 게 속이 편했다.
“두 사람은 무슨 일로 카페 로열에 온 거지? 그것도 2층에 말이야.”
“아……. 저희 두 사람만 온 게 아니라, 전보 개발 멤버 전부가 왔습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간만에 맛있는 거 먹고 힘내야 남은 길도 잘 간다면서 이디케가 예약을 잡아줬어요.”
“샤를레아 양이 일은 멀쩡히 잘하는 모양이군. 알겠어, 이만 가봐.”
“감사합니다.”
셰비언은 라비린이 끼어들기 전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냅다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조금 전처럼 둘만 덜렁 남았다.
오드리는 다시 조용해진 식탁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떴다. 카페 로열의 식기는 정말로 질이 좋아서, 뚜껑을 열고 방치한 지 시간이 좀 지났음에도 거의 녹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오드리를 보며 라비린은 자꾸 험악해지려는 자신을 애써 가다듬었다. 안 그래도 지닌 재주 말고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셰비언인데,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던 묘한 기류가 신경 쓰였다. 이전처럼 셰비언의 일방적인 마음이라고 치부하기엔 뭔가가 버스럭거렸다.
“오드리.”
“더 잡아둬서 뭐 하게? 애먼 사람에게 성질 내봐야 모양새만 나빠져.”
“셰비언 씨와 너 사이에 내가 알면 안 되는 게 있어?”
라비린은 말을 꺼내자마자 제 혀를 콱 깨물고 싶어졌다. 그와 오드리는 리가 항구에서 돌아와서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붙어 있었다. 오드리가 셰비언과 단둘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고 봐도 좋았다.
설령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왜 자신에게 말해주겠는가. 말 그대로 알면 안 되는 것을, 왜. 이런 멍청한 질문을 한 자신이 한심하고 어이없을 뿐이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내로서의 역할만 충실히 해주면 시와 연극에 나오는 사랑 따위는 네 멋대로 해도 된다고 말했던 게 대체 누구였던가. 사랑을 약속한 건 자신이었지 오드리가 아니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예민하게 굴었어.”
“알면 됐어. 앉아서 마저 먹어. 넌 네가 먹는 양의 절반도 아직 안 먹었잖아. 계속 나 먹는 거 쳐다보기나 하고.”
“그건 또 어떻게 알고…….”
라비린은 오드리가 밀어주는 접시들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리가 항구에서부터 같이 식사한 일이 수도 없이 많으니 당연히 알겠지.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괜히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붕 떠올랐다.
“체하지 않게 빨리 먹어. 먹고 바로 라디아타를 만나러 갈 거니까.”
친척이 아닌 이상 미리 연락을 하고 가는 게 예의라지만, 오드리와 라디아타는 서로 그런 예의를 무시하고 지내기로 약속한 지 좀 되었다. 그래도 약속만 했지 정작 실천해 본 일은 없었는데 오늘 시도해 볼 작정이었다.
“체하지 않게 빨리 먹으라니. 여유롭게 가되 빨리 도착하게 해달라는 주문을 들은 마부의 심정을 알겠는 걸……. 일단 노력은 해 볼게.”
라비린은 잠깐 사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제 기분에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오드리가 밀어주는 음식들을 사양하지 않고 먹었다. 셰비언이 자꾸만 흘끗거리던 오드리의 펜던트에 대한 궁금증도 함께 삼켰다.
그렇게 오드리와 라비린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배를 채울 때, 셰비언은 예약석에 앉자마자 공간을 펼쳐 놓고 샤를레아와 험악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배경 따위를 신경 쓸 사이도 아니다 보니 그들의 주변은 온통 시커먼 데다 텅 비어 있었다.
“그 아가씨, 용이지? 동족이지?”
“인간에게서 태어나 인간으로 자랐어. 확실히 인간이야.”
“말도 안 돼. 그렇게 순수한 마력을 갖고 있으면서 인간이라니! 셰비언, 정말 제대로 알아본 거 맞아? 인간 흉내를 내는 용일 가능성은 정말 없어? 손은 잡아봤어? 공간에 초대해 본 적은?”
거의 포기하고 있던 상황에서 순수한 용에 가까운 마력을 본 샤를레아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대충 묶어두었던 머리카락이 풀려서 마치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셰비언은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말했잖아, 가끔 한 종족의 마력을 압도적인 비율로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이 있다고.”
“…….”
“샤를레아. 이제 용은 없어. 너와 내가 전부야.”
“……아니야. 넌 내가 깨어난 것도 몰랐잖아. 네가 모르는 용이 또 있을지 어떻게 알아? 안 그래? 요즘 마법망을 하도 훑으며 다녀서 그런가, 예전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감이 다시 올라왔어. 너도 알다시피 탐색 쪽으로는 내가 너보다 낫잖아. 우리, 한 번만 더 찾아보자. 응?”
“없다니까. 다 죽었어, 하나도 없어.”
“그건 너랑 내가 따로따로 찾았으니까 그런 거지! 같이 다니면 어딘가에 박혀서 쿨쿨 자고 있는 녀석을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나 나나 깨어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목숨 걸고 잠들었던 거야. 잊었어? 그런데 다른 녀석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길 바라?”
“우리처럼 똑같이 잠든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셰비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싶은데, 샤를레아의 광기 어린 표정이 마치 오드리를 만나기 전의 자신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쓸데없는 희망을 불어넣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간 뒷감당이 안 될 게 뻔했다.
“난 마법의 주인이고, 넌 육체의 강함으로는 따를 자가 없는 용이었다는 건 까맣게 잊은 발언이로군그래.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내가 틀려서, 네 말대로 쿨쿨 자는 녀석을 찾았다고 치자. 그 뒤엔 어쩔 건데? 자는 걸 깨울 거야?”
“그건…….”
“우린 아무것도 못 해. 하염없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곁을 지키는 게 전부야. 그래도 깨어나는 걸 볼 수 있을 거란 보장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아. 그리고 그 전에 우리가 죽으면 어쩔래? 너, 설마 아직도 우리가 오래 사는 종족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건 아니지?”
“…….”
“용족이 왜 갑자기 줄어들었는지 아무도 몰라. 우린 한 발자국 앞도 알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어. 다 죽고 없는 동족을 찾겠다고 허우적대지 말고 살아 있는 생물답게 살아. 너도 그럴 생각으로 로렐라이에 들어오고 나를 돕고 있는 거 아니었어?”
셰비언의 말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샤를레아를 관통했다. 망연히 선 그녀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불같은 흥분이 꺼진 자리에 남은 건 하얗게 탄 잿더미뿐이었다. 셰비언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샤를레아, 마력이 곧 용이야.”
“……그 아가씨는 뭔데?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순수한 용의 마력이었어. 그럼 그 아가씨는 인간이야, 용이야?”
“당연히 인간이지.”
“웃기고 있네. 마력이 곧 용이면, 그 아가씨는 인간이 아니라 용이야. 덕지덕지 기워놓은 누더기인형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혼자 온전한데 그게 어떻게 인간이야?”
“그건 내가 집어넣은 마력 때문에 그런 거야. 본래 용의 마력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사람이었어. 거기에 내 마력이 대량으로 섞이면서 기존에 갖고 있던 다른 마력의 성질마저 바뀐 거야. 너도 알다시피 용의 마력은 다른 마력을 들쑤시고 자극하니까.”
샤를레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셰비언이 용의 마력이 다른 마력에 미치는 영향을 입에 담는 걸 듣는 순간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그녀가 던진 동전을 줍다가 마력의 균형이 무너져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주정뱅이. 잠잠히 잠들어 있었어야 할 나무요정의 마력이 의지를 갖고 깨어나 인간의 몸뚱이를 살해했었다.
그때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했지만 어쩌면 그게 자신의 마력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 추측을 곧바로 입 밖에 내는 건 조금 껄끄러웠다. 깨어난 뒤로 이제까지 만난 인간이 몇인데 브란젤에 와서야 갑자기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는 게 몹시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브란젤에는 용이 둘이나 있었고, 그중 하나인 셰비언은 자신의 마력을 담은 구슬을 브란젤 전체에 뿌려놓았다. 심지어 그 마력구슬에는 안에 담긴 마력을 주기적으로 방출해서 주변 마법망을 계속 안정화하는 회로가 새겨져 있었다.
“……셰비언, 혹시 인간이 용의 마력을 일정 이상 접하면…….”
“접하면 뭐. 전부 오드리 아가씨처럼 되냐고? 절대 그럴 일 없고, 오드리 아가씨도 용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내 말 못 들었어? 쓸데없는 기대는 아예 갖지를 마.”
샤를레아는 물에 빠진 듯 갑갑하게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그녀는 쾅, 쾅, 가슴을 두드리며 눈을 감았다. 셰비언이 하는 말이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의 일부처럼 희미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고이는 눈물이 짜증났다.
“잔인한 자식.”
“사실을 말한 거야. 종족으로서의 용은 이제 없어.”
단호하게 말하는 셰비언은 어딘지 오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래전, 동족들을 모아두고 이제 용족의 번식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던 그때가 떠오를 정도였다. 샤를레아는 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고 차올랐던 숨을 다스렸다.
‘도마뱀만도 못한 자식. 어쩌다 저딴 게 마법의 주인이 됐지?’
그녀는 자신의 추측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처럼 구는 저 망할 놈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발이 걸려 고꾸라지는 꼴을 꼭 봐야 할 것 같았다.
눈물 닦은 손으로 빈 검대를 훑자 흡사 불꽃과 비슷한 형태의 검이 불쑥 솟아올랐다.
“넌 용에게도 잔인하고, 인간에게도 잔인한 놈이야.”
난데없는 비난에 셰비언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샤를레아가 알 바 아니었다. 그녀는 마력으로 만들어낸 검을 허공에 내리그었다. 검기만 하던 공간이 벌어지며 바깥의 풍경이 빼꼼 드러났다.
쿠웅-. 충격을 받은 공간 전체가 흔들렸다. 하마터면 언젠가의 워커처럼 공간이 아예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던 것을 막아내느라 셰비언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긴, 이제 그만 나가고 싶다는 의사표시지. 왜? 마법도 못 쓰고 현실파악도 못하는 용 나부랭이가 흠집 좀 냈기로서니, 무려 마법의 주인께서 공간을 놓칠 뻔하기라도 한 거야?”
“빈정대지 마…….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했을 뿐인데 왜 그따위로 굴어? 대범하고 시원시원한 샤를레아 어디 갔어?”
“걘 예전에 죽었어.”
여기 있는 건 그냥 껍데기지. 말을 보태며 생긋 웃는 얼굴이 너무 산뜻해서 오히려 소름끼쳤다. 괜히 더 자극했다간 손에 든 검을 사방으로 휘저어댈 기세였다.
“……내보내 줄 테니까 검이나 집어넣어.”
셰비언은 이를 악물고 공간을 복구시켰다. 안 그래도 연구 때문에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던 탓에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안전하게 공간을 거둬들이고 쓰러지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대로 잠들고 싶을 만큼 탈력감이 심했다.
분노를 담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샤를레아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느긋하게 손가락을 튕기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꼴 보기 싫어 독설이라도 퍼부어주려는데, 독립공간의 문이 벌컥 열리고 이디케와 워커가 들어왔다.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눈 밑은 푹 꺼져서 검게 그늘지고, 흰자에 핏줄이 서서 온통 벌겠다. 피부는 거칠고, 만년필을 쓰는데도 손끝이 온통 잉크로 물들어 시커멨다. 쩍쩍 갈라진 입술엔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이디케가 구깃구깃한 치마를 말아 쥐고 샤를레아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졸음 가득한 눈꺼풀이 느릿하게 팔랑거렸다.
“뭐야, 먼저 와 있었네요?”
“락시 양이 맛있는 거 사준다는데 늦으면 쓰나. 냉큼 달려왔지.”
“누가 반말하래요? 하여간 샤를레아 씨는 그 입이 문제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대꾸는 잘 해줄 거잖아.”
이디케와 샤를레아는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워커와 셰비언은 너무 지친 나머지 서로 눈인사 한번 나누고 널브러졌는데 두 사람은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사하스바티는 왜 안 왔어?”
“연구소 준비하러 갔어요. 그쪽에서 할 일이 엄청 많은가 보더라고요.”
왕립 기계 연구소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사하스바티가 로렐라이에서 사람을 빼오는 건 실패했지만, 설마 비마법 연구가들이 거기에만 있겠는가. 연구소가 문을 열 날이 머지않았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한숨 돌리는 동안에도 당분간 바쁘겠네. 난……. 셰비언, 나 필요해?”
“너 필요한 건 끝났어. 당장 떨어져나가도 돼.”
셰비언의 대답은 야멸찼다. 냉랭한 대답에 이디케가 다 놀랄 정도였다. 사하스바티의 호위를 비롯해 브란젤의 마법망 상태 확인 및 분석에 상당한 기여를 한 친척인데 무슨 말을 저렇게 하나, 하고 말이다. 하나 샤를레아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듯 눈을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이제 시간 많네. 잘됐다, 이제 브란젤 구경이나 다녀야지.”
“구경은 무슨……. 호위하면서 브란젤 구석구석은 다 봤을 거면서. 도박장에 가려는 거 아니에요? 샤를레아 씨는 도박 엄청 좋아하잖아요. 잘 따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기껏 받은 급여를 전부 날렸을걸요.”
“에이, 나라고 매일 도박만 하나? 호위하느라 못 본 것들을 좀 즐겨보려는 거지. 본래 이쯤 되면 브란젤에 볼거리가 엄청나게 늘어난다며? 전시회도 열리고, 오페라, 연극, 수확제…….”
샤를레아는 즐겁게 손가락을 꼽았다. 리즈비아 거리를 비롯해 온갖 곳을 따라다니는 동안 귀에 들어온 이야기가 많고 많았다. 상주인구의 절반은 비다시피 하는 여름휴가 기간이 끝나고 이제 사람이 다시 몰려올 시기였다.
“실컷 돌아다녀 보려고.”
샤를레아가 무슨 생각으로 돌아다니겠다고 하는 건지, 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중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들은 시간이 많아졌다는 샤를레아에게 부럽다고, 재미있게 놀라고 한 마디씩 보태고 관심을 거뒀다.
“사고만 치지 마.”
뜬금없는 태도 변화에 이상함을 느낀 셰비언만 굳이 한마디를 더 보탰을 뿐이었다.
그 시각, 라디아타는 오랜만에 자신이 후원하는 화가들이 머무는 저택을 방문했다.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보고가 날아오고 있긴 하지만, 곧 전시회인데 한번쯤은 얼굴을 봐두는 것도 좋은 일이니까.
막 전시회 막바지 준비로 정신이 없던 화가들은 라디아타의 방문을 환영하면서도 껄끄러워했다. 후원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사람이 라디아타이니 대놓고 싫은 티는 못 내도, 왜 하필 이렇게 바쁜 시기에 왔는가 생각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심지어 페리는 인사만 대충 하고 바삐 작업실로 돌아가 붓을 쥐기까지 했다. 네이기스는 그런 행동에 몹시 놀랐지만, 라디아타는 그저 하하 웃을 뿐이었다. 그녀가 제안한 티타임에 참석한 사람은 네이기스 한 명이었다.
“그웬 양, 많이 놀랐어요?”
“그……. 조금은요.”
“예술가들이잖아요. 꽉 붙들고 채찍질해 봐야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는데, 뭘 야단하겠어요. 안 그래도 전시회가 코앞이라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을 걸 뻔히 아는데요.”
“네에…….”
라디아타는 애매한 미소를 짓는 네이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적갈색 머리카락인데도 말괄량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신기한 이목구비였다.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여기저기 눈을 굴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생활은 만족스러워요?”
“아, 네! 다들 잘 챙겨주시고, 지내기도 편하고, 그림도 잘 그려지고…….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라디아타는 네이기스가 개인 하녀를 따로 고용한 걸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 덕분에 위화감을 느낀 화가들이 그녀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려 하고 있다는 것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 따위는 한 명도 없을 텐데도 네이기스의 얼굴은 행복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메너트를 피해 타우레드 저택에서 몰래 그림을 그리던 때에도 얼굴빛이 밝았지만, 그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밝음이었다. 답삭 끌어안으면 설탕에 절인 과일처럼 단내가 날 것 같았다.
“그웬 양, 요즘 연애해요?”
“풉! 큽! 쿨럭! 쿨럭쿨럭!”
“어머, 진짠가 보네.”
네이기스가 먹던 차를 뿜어내고 기침했다. 라디아타는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차분한 손길로 냅킨을 건넸다.
“보티안 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가진 거라곤 어설픈 명예밖에 없는 치안대원이 이렇게 어리고 앞날이 창창한 아가씨를 꼬드기다니, 정말 안 될 사람이네요. 접근하지 말라고 편지라도 한 통 보내야 하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보티안 씨와 저는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그냥…… 저 혼자 좋아하는 거예요. 내가 정말로 그림을 그려도 될까 망설일 때, 힘이 되는 말을 해준 분이란 말예요.”
기침하느라 눈물 맺힌 눈을 하고서도 네이기스의 대답은 야무졌다. 평소 무슨 말을 해도 그저 방긋방긋 웃기만 하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장 오늘도 가십지에 스캔들 기사가 난 타우레드 영애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잖아요. 가문의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어디 다닐 때마다 베텔 경과 다니느냐고 하던데요? 지금 오드리 언니와 타우레드 공자의 스캔들로 난리라 그렇지, 평소였다면 레이디 타우레드의 스캔들로 브란젤 전체가 들썩였을 거예요.”
라디아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이기스에게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해 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만약 라디아타가 카프러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굉장히 불쾌하게 여겼을 말이었다.
그림이 걸렸을 때도 메너트 앞에서 한 마디 말도 못하던 사람이 사랑을 들먹이니 이렇게나 술술 입을 놀린다. 놀라운 변화였다.
“오……. 그웬 양, 그림을 그리는 손뿐만 아니라 혀도 많이 자유로워졌군요.”
네이기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바르르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추고 꼭 맞잡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디아타를 향해 그렇게 대뜸 공격적인 말을 쏘아붙였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약점을 들켰다고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상대를 공격하면 안 돼요. 내가 기분이 나빠져서 그웬 양에 대한 후원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죠?”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먼저 엉뚱한 얘길 꺼낸 것도 레이디 타우레드이시고요.”
“사실이라도 상대의 기분을 살펴가며 말해야 한다는 건 충분히 배웠을 텐데요. 내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기가 그리 어려웠어요? 그웬 양, 전시회에 그림 걸기 싫은가요?”
귀족 중의 귀족인 라디아타가 약속불이행을 입에 담다니. 네이기스는 당혹과 충격이 뒤섞인 눈으로 라디아타를 바라보았다. 그저 빈말로 치부하고 넘기기엔 자신이 가진 게 너무 없어 속이 불편해졌다. 입 밖으로 나가려는 말을 꼭꼭 눌러 삼켰다.
반면 라디아타는 그저 여유로웠다. 찻잔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긋했다.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찾아내 세상에 자랑하는 게 내 취미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취미랍니다.”
“레이디 타우레드…….”
“오늘의 실수는 오드리를 봐서 넘어가겠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입을 조심하세요. 전시회에 그림을 거는 순간부터 그웬 양은 온갖 말을 다 듣게 될 텐데, 내가 보호해 줄 수 있는 범위는 퍽 한정적이거든요. 보티안 씨 얘기에 괜히 발끈해서 나섰다간 안 그래도 좁은 범위가 더 좁아질 거예요.”
본래 라디아타는 네이기스에게 가명으로 데뷔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네이기스는 본명을 고집했고, 설득이 통하지 않자 라디아타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귀족영애로서 격에 맞는 대우를 받는 것보다 화가로서의 자아가 더 중요하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저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그림 이외의 일로도 온갖 말을 들을 게 분명한데 거기에 크게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네이기스는 그런 라디아타의 속내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오히려 미간을 찌푸리며 엉뚱한 말을 했다.
“앞으로는 잘 참을게요. 하지만, 그림을 평하는 말에 보티안 씨가 언급될 일은 없을 텐데 왜 굳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뭐라고요?”
“그렇잖아요. 화가는 저예요. 아무리 보티안 씨가 제 등을 밀어줬다고 해도, 그림을 그린 건 저란 말예요. 말을 듣는 건 저뿐일 테고, 그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어요.”
라디아타는 순진무구하게 종알대는 네이기스를 앞에 두고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당장은 오드리와 라디아타 때문에 네이기스까지 스캔들에 휩싸이지 않았지만, 데뷔하는 그날로 가십지를 장식할 예정이었다.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보고서 속에서 피올의 존재는 뚜렷했다. 사과의 뜻이라며 네이기스가 좋아하는 수선화를 몇 다발이나 가져다줬다고 했다. 외출했던 네이기스를 데려다준 일도 있었다. 그가 네이기스와 정말 연애를 하고 있든 아니든, 어느 정도 교류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보고서에도 올라온 일인데 가십지의 기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공식적으로 네이기스가 리가 항구에 가 있는 걸로 되어 있었으니 감히 타우레드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네이기스가 그림을 전시회에 내는 순간부터 그런 배려와 눈치는 아예 없는 셈 칠 게 뻔했다.
어떻게든 딸을 순수한 백지로 포장하고 싶을 메너트에게 피올의 존재는 얼마나 좋은 먹잇감이 될까. 네이기스가 집을 나간 것도,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도, 모두 그의 꾐에 빠져 그런 거라고 떠들어댈 터였다.
‘그러고 보니 그웬 양은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었지. 어휴, 오라버니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이렇게 어린 아가씨를…….’
라디아타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기분이 되어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그림과 진로를 주제로 얘길 나눌 때는 대단히 멀쩡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내가 괜히 보티안 씨의 이름을 꺼낸 게 아니에요. 두 사람이 서로 왕래를 하고 꽃과 선물을 주고받는 걸 알고 한 말이니까요. 기자들이 스캔들 기사를 싣지 않는 건, 그웬 양이 나와 함께 리가 항구에 가 있는 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일단 기사가 나면 말을 듣는 건 피할 수 없어요.”
“스캔들이 날 만한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에 불과해요. 주고받은 것들도 전부 의례적인 물건들이었고요.”
“오호. 그런가요?”
“그리고 그림을 그린 건 저인데, 왜 자꾸 스캔들 얘기를 꺼내시는지 모르겠어요. 피올 씨와 제 그림 사이에는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이에요.”
“그웬 백작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난 아니라고 보는데. 사람들은 그웬 양의 그림을 볼 때마다 보티안 씨를 떠올릴 거예요. 그리고 서로 속닥거리겠죠. 그 두 사람, 연애한다면서요? 오, 들었어요, 치안대원이 귀족영애에게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넣었대요.”
꿋꿋하게 반론하던 네이기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얼룩덜룩하게 물감 밴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에요, 어머니에겐……. 오, 오드리 언니의 스캔들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할 거예요. 스캔들이 이렇게 커진 이상 정식으로 청혼서도 받아, 받아야 할 거고…… 거절이든 승낙이든 일이 엄청날 테니까요……. 모자란 딸을 시, 신경 쓸 정신이 없을 거예요.”
“영악하네요, 그웬 양. 오드리를 방패로 쓸 생각을 다 하고.”
“…….”
“하지만 그 기대는 접어두세요. 청혼서는 그웬 백작부인이 아니라 헨젤 백작께 갔으니까.”
“네? 어째서요? 오드리 언니의 혼사를 준비하는 건 어머니의 몫인데요? 당연히 청혼서도 그리로 가야 하는 거잖아요.”
“오드리가 사나운 소문에 시달릴 때, 평판이 바닥을 달릴 때, 그웬 백작부인께서 뭘 하셨던가요? 내 어머니가 그분을 믿지 못한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무리 그래도…….”
네이기스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딸이 화가가 되겠다며 집을 나간 것도 모자라 당연히 자신이 주관해야 할 혼사에서 일방적으로 제외된 메너트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더불어 자신과 얽혀 엉뚱한 욕을 먹을 피올에게도 너무 미안해서 숨이 막혔다. 눈앞이 흐려졌다.
“이것 참…….”
라디아타는 손을 뻗어 네이기스의 눈에 고인 눈물을 거뒀다. 하지만 손으로 훔치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너무 못되게 군 건 아닐까 싶어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오드리 말마따나 흰 양 같은 아가씨인데 좀 너그럽게 굴어도 좋을 것을.
자리를 옮겨 살그머니 네이기스를 끌어안았다.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뚝뚝 흘리던 네이기스가 어린아이처럼 매달려 왔다. 등을 토닥이며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그웬 양, 나한테 와서 뭐라고 했었죠?”
“……화가로 살고 싶다고요…….”
“그래요. 그래서 내가 약속했죠. 내 보호 아래에서 그림만 계속 그린다면, 원하지 않는 혼사에 휩쓸리지 않고 화가로 살다 죽게 해주겠다고. 그때 이미 각오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웬 양, 다시 물어볼게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화가로 살고 싶은가요?”
네이기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분명 예전에도 들었던 말인데, 막 집에서 뛰쳐나와 흥분으로 가슴이 가득 찼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뒤로 미뤄두었던 게 당장 눈앞에 닥치자 눈앞이 그저 깜깜했다.
“저, 저는…….”
“아직 전시회에 그림 안 걸었어요. 지금이라면 돌이킬 수 있죠. 돌아가서 다시 예쁜 드레스 입고 편하게 하녀를 부리면서 사는 거예요. 분명 그웬 백작부인도 기뻐하겠죠……. 아직 평판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이니 나름 괜찮은 혼사 자리도 찾을 수 있을 거고요.”
네이기스는 멍하니 라디아타의 속삭임을 들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드레스 자락을 꽃처럼 펼치며 춤추는 자신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택에 갇혀 자라는 동안 백 번, 천 번도 더 꿈꾸던 광경이었다.
몸 곳곳을 장식하는 보석, 광택이 아름다운 드레스, 섬세한 레이스, 내 자랑스러운 딸이라고 말해주는 어머니, 어딜 가든 쏟아지는 사랑스럽다는 칭찬. 모두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를 위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고, 쭉 믿어왔었다.
“하지만 그림은 못 그려요. 아마 전시회 구경도 못할 거예요. 그땐 나도, 오드리도 도울 수 없어요. 그래도 된다면…….”
“그건 싫어요!”
라디아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네이기스는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제 말에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게 진심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도, 평판에 대한 부담감도 그림 앞에서 희미해졌다.
“그림 그릴 거예요……. 그릴 거라고요……. 흐으으…….”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
그녀는 흡사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라디아타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귀족영애의 품위나 이런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흡……. 흐으윽……. 흐어엉…….”
“그웬 양, 역시 화가를 포기할 수가 없죠? 그럼 멋진 그림을 그려서 그웬 백작부인에게 인정받아요. 그때까지는 무슨 말을 들어도 열심히 참고요.”
“네……. 흐읍……. 그럴게요……. 흐윽.”
네이기스는 라디아타가 건네는 냅킨으로 열심히 눈물을 닦았다. 실컷 울었더니 조금은 진정이 됐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라디아타의 드레스에 남은 눈물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민망함에 뺨에 확 붉어졌다.
하지만 라디아타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녀들이 다과로 내놓은 과자 이것저것을 끌어다 자꾸 네이기스의 입에 물리기 바빴다. 사과잼을 바른 비스킷, 초콜릿이 박힌 쿠키, 과일설탕조림……. 마치 새끼 새의 입에 먹이를 넣어주는 어미 새 같았다.
“단걸 먹으면 기분이 풀리잖아요. 그웬 양, 더 먹어요. 아, 목말라요?”
“괘, 괜찮아요.”
“그웬 양은 내 보물이에요. 이번에 벌써 두 번째로 약속했으니까, 다시는 흔들리지 말아요.”
네이기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디아타는 그녀의 눈물자국까지 살뜰하게 닦아주곤 보들보들한 뺨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보티안 씨에 대해서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깟 소문에 상처받을 사람이었으면 애초 가문을 나가지도 않았어요.”
“그……. 정말 그럴까요? 보티안 씨가 저한테 실망하는 건 아니겠죠? 나 좋은 거 하고 싶다고 어머니 부끄럽게 하고 보티안 씨 욕 먹이고…….”
“그게 뭔 소리예요? 화가가 되라고 등 떠민 게 누군데 그 정도야 당연히 감수해야죠. 그리고 오라버니도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겠다고 주변 사람들 말리는 거 다 뿌리치고 뛰쳐나간 사람이에요. 새삼 누구에게 실망을 하고 자시고 해.”
“아……. 그랬죠. 보티안 씨는 레이디 타우레드의 오라버니 되는 분이었죠. 그럼 아까 편지 운운하셨던 건…….”
“당연히 농담이죠. 오라버니와 난 나름대로 사이가 좋아요. 보티안 씨라고 부르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너무 날 세우지 말아요. 본인이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는데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네이기스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돌아왔다. 아까 스캔들 가지고 함부로 말해서 죄송해요, 하고 까맣게 잊은 것만 같았던 사과도 했다.
라디아타는 이후로도 한참이나 네이기스를 어르고 달래 방실방실 웃게 만들어서 작업실에 돌려보낸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 한 마디 했다가 이게 무슨 난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작업실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카프러스가 나타나 손을 내밀었다. 본래 오늘 라디아타의 에스코트는 라비린이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는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며 이른 아침부터 휙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았다.
화가 잔뜩 난 라디아타에게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카프러스가 대신이라며 온 걸 보면 라비린이 어디로 갔는지는 너무나 뻔했다.
당장이라도 심부름꾼을 보내 난리를 부릴까 고민했었지만, 카프러스가 내미는 손을 보는 순간 저절로 화가 가라앉고 웃음이 났다. 결국 라디아타는 한숨 한 번으로 라비린을 용서하고 말았다.
‘사실 나도 그웬 양더러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닌데.’
라디아타는 더할 나위 없이 예쁜 미소를 지으며 카프러스의 손을 잡았다. 손이 거칠다고 한 마디 했던 걸 기억하고 이 더위에 장갑을 끼고 와준 정성이 고마웠다.
“어쩐지 고용인들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 베텔 경이 다 물려준 거였어요?”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뜻하지 않은 스캔들로 레이디께 민폐를 끼치고 있는데.”
“어머……. 들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날 둘러싼 소문은 워낙에 많아서 이젠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을 지경이니까요. 곧 가라앉을 거예요.”
카프러스는 생글생글 웃는 라디아타를 보며 뭐라 말하기 힘든 죄책감에 휩싸였다. 라디아타가 소문의 중심에 서 있었던 건 이미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한데 카프러스와의 스캔들 때문에 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옛날 소문이 새삼 고개를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악의에 찬 소문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오드리의 경우를 통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가문에서 홀대받는 백작영애를 두고도 그랬을진대 브란젤의 황금장미, 타우레드 후작영애를 혓바닥 위에 놓고 떠들며 즐거워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감히 가늠도 안 됐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수락도 거절도 하지 않고 오드리의 부탁이라는 핑계로 이렇게 수행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못된 짓이었다. 하나 라디아타가 그날의 일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산뜻하게 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가씨께서는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싶으신 게 아닐까? 그래, 역시 실수였던 거야. 레이디 타우레드쯤 되면 얼마든지 괜찮은 남자를 고를 수 있는데.’
합리화에 가까운 생각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저 좋은 쪽으로 생각이 돌아갔다. 성가시고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준 남자가 마침 호기심이 드는 특이한 사람이었던 게 아니었겠느냐고. 게다가 그날은 다들 마음이 들뜨는 볼린의 밤이었다.
정말 그렇다면 어떤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괜히 나서서 말했다가 오히려 라디아타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카프러스는 제멋대로 라디아타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 말을 삼켰다.
사실, 카프러스는 그리 능숙하게 속마음을 숨기는 사람이 못됐다. 무뚝뚝한 말투와 덤덤한 표정, 기사라는 위치 때문에 사람들이 제멋대로 오해하는 일이 잦을 뿐이었다. 그와 조금만 가깝게 지내본 사람들은 쉬이 그의 속내를 읽어내곤 했다.
그러나 라디아타는 카프러스를 끊임없이 관찰하면서도 좀처럼 그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다. 눈치 빠르고 기민한 평소의 그녀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사랑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라디아타는 제 미소에 시선을 두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리는 카프러스의 눈치를 살피며 마음을 졸였다. 그가 자신과 얽힌 것 자체를 불쾌해 할까봐 걱정이 됐다. 심지어 카프러스는 라디아타가 있는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롯이 오드리를 향해 있었다. 늘 그렇듯이.
나는 타우레드 후작영애다, 브란젤의 황금장미다, 암만 되뇌어도 한번 떨어진 자신감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산트렘의 기사가 될 수 있도록 뒤를 봐주겠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단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주는 손은 믿음직했고 흘낏 훔쳐본 단단한 콧대에 가슴이 뛰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걸 보는 게 황홀했다.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요. 이왕 나왔으니 잠시 산책을 하고 싶어요. 정원이 몹시 아름답잖아요?”
인구밀도가 높은 브란젤에서 정원은 상당한 부가 있어야만 감당할 수 있는 사치였다. 숙련된 정원사는 상수도가 끊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꽃과 나무를 죽이지 않고 살려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저택의 벽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 산책로를 장식한 보랏빛 꽃잔디, 흐드러지게 피어난 색색의 나리꽃……. 흔히 심는 장미와 해바라기류가 없어 더 특이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은 유례없이 뜨거운 공기가 휘몰아치는 여름, 그것도 햇살이 쨍쨍한 한낮이었다. 곧 가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날씨에 산책이라니.
카프러스는 신기할 정도로 가느다란 라디아타의 허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코르셋을 꽉 죄어놓았을 텐데, 그 차림으로 이 더위를 견딜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구두는 또 어떻고? 마차에 올려주며 언뜻 스쳐 가듯 본 것이긴 하지만, 라디아타의 구두는 오드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고 화려해서 걷기에 매우 불편한 물건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날이 많이 덥습니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괜찮아요. 짬짬이 나무그늘 아래에서 쉬면 돼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말릴 수가 없다. 카프러스는 더 만류하지 못하고 라디아타와 정원 산책을 나섰다. 하녀 한 명이 부리나케 양산을 들고 따라 나왔다.
라디아타는 하녀가 내민 양산을 보며 갈등했다. 모자를 쓰긴 했지만 챙이 작은 장식용 모자였고, 더워서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었으니 양산을 쓰는 게 맞긴 했다. 하지만 양산을 쓰면 카프러스와 한참 떨어져서 걸어야 하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우물쭈물 망설이는 라디아타를 보던 카프러스가 대신 양산을 받았다. 그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하녀를 돌려보내고는, 직접 양산을 펴서 라디아타의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은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라디아타는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날씨에 산책을 하겠다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우면서도, 그가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에서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차올랐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은 음악과 같고 내딛는 길이 솜사탕처럼 폭신했다.
그러나 마음과 다르게 몸은 정직해서, 길게 팔을 뻗은 나무 아래에 놓인 벤치를 보자마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서슬에 떨어뜨린 부채를 주워 온 카프러스가 천천히 라디아타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라디아타의 얼굴은 열기와 부끄러움에 벌겋게 익어가는데, 정작 카프러스는 덤덤하기만 했다. 머리칼을 단정히 빗어 넘겨 훤히 드러난 이마 위로 조각난 햇살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몇 마리가 쪼로롱쪼로롱 울어대며 평화로운 정적을 깼다.
바람이 불었다. 치맛자락이 흔들리고 단단히 고정한 모자가 제자리를 잃었다. 라디아타는 혹 머리칼이 흘러내릴까 황급히 모자를 붙들었다. 카프러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론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그걸 경이 어떻게 알아요?”
“어린 시절 여동생의 머리 손질은 제 담당이었으니까요. 말도 못할 왈가닥이라, 흐트러지지 않게 머리를 고정시키는 게 참 큰일이었는데 그것도 요령이 생기니 늘더군요. 아가씨의 하녀들은 전문가이니 안심하고 손을 내리셔도 될 겁니다.”
그렇게 자주 붙어 다녔는데, 카프러스가 자신의 개인사를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그가 먼저 말을 붙이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다. 라디아타의 뺨에 홍조가 떠올랐다.
“경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니, 짐작도 못했어요. 여동생분은 어찌 지내시나요?”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아이도 있고요.”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기분이 둥실둥실 뜨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용기가 라디아타의 심장을 가득 채웠다.
“베텔 경, 약 한 달 뒤면 내 스무 살 생일이라는 건 알고 있나요?”
“아, 그러십니까? 몰랐습니다. 성년이 되는 생일이라니, 축하드립니다.”
“어머니께서 절 위한 파티를 열어주실 거예요. 그날, 제 에스코트를 경에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카프러스는 크게 당황했다. 뺨을 발갛게 붉히고 에스코트를 해달라 청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볼린의 밤에 있었던 일은 그냥 실수였을 거라고 제멋대로 내린 결론이 와장창 무너졌다.
“그……. 절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저는 오드리 아가씨의 에스코트 기사입니다. 설마 그날 오드리 아가씨를 초대하지 않을 생각이신 겁니까?”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라디아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창백해지는 입술을 꾹 깨물어 혈색을 만든 뒤 예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초대할 거예요. 내 소중한 친구니까요. 하지만 경, 그날 오드리의 에스코트는 경의 몫이 아닐 거예요.”
“예?”
“오라버니가 오드리와 약혼할 테니까요. 약혼자가 있는데 에스코트 기사를 쓸 이유가 없죠.”
카프러스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오드리와 라비린의 스캔들이 브란젤을 달구고 자신이 라디아타에게 끊임없이 보내지는 상황을 알면서도, 그는 두 사람의 약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타우레드 후작가와 연결되는 걸 헨젤 백작이 대단히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죽고 못 산다고 스캔들을 내더라도 혼인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헨젤 백작이 싫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헨젤 백작님께서 허락하실 리 없습니다.”
“아뇨, 허락하실 거예요. 내기해도 좋아요.”
라디아타의 눈이 확신으로 빛났다. 카프러스는 그녀가 설탕을 자제하는 유행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걸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해냈다는 것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카프러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라디아타와 눈높이를 맞췄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발갛게 뺨을 붉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이지만, 보이는 대로만 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가슴에 새겼다.
“레이디, 감히 여쭙겠습니다. 만약 제가 레이디께 라디아타 베텔이 되어달라고 청하면, 그때도 제가 좋다고 하실 겁니까?”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네요. 내가 타우레드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경의 앞날을 보장해 줄 수 있어요. 유산 상속 역시 베텔일 때와 타우레드일 때는 차이가 엄청날 거예요. 경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요?”
“무례함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레이디가 절 원하시는 이유가 제가 생각한 게 맞는가 궁금한 겁니다. 가진 재산이 없고 신분도 보잘 것 없으면서, 어디 가서 사고 친 적 없이 실력이 나름 쓸 만하니 밖에다 전시하기에 나쁘지 않으며, 앞날이 완전히 레이디의 손아귀에 잡혀 있기 때문이 아닌가.”
라디아타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붉어졌다. 설렘은 아니었다. 무릎 위에 놓은 손을 꽉 맞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경을 도구로써 원하는 건 아닐까 의심스럽나요?”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레이디께서 타우레드의 성을 잃지 않기 위해 필요한 한 조각이 바로 저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어떤 뒷배도 없어서 레이디의 자비에 앞날을 모두 기대어 의지해야 하는 남자 말입니다. 가진 소망이 간절할수록 레이디의 뜻대로 움직이기 더 쉬워지시겠지요.”
라디아타는 부디 자신이 멀쩡해 보이기를 바랐다. 슬픔으로 가슴이 가득 찬 이 순간, 핏기 없는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았다.
“……내가 표현한 마음을, 내 용기를 모조리 짓밟는 말씀이로군요.”
“레이디께서 절 마음에 두신 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레이디께서 타우레드의 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더라도 저를 선택하셨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경은 내게 일말의 마음도 없군요.”
말을 꺼낸 이후로 계속 라디아타를 똑바로 바라보던 카프러스는 끝내 고개를 떨궜다. 거짓으로라도 부정하지 않는 라디아타의 모습이 오히려 그녀의 진심을 전하니, 뒤늦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하지 마세요. 경의 말이 맞아요, 애초 경의 조건이 내가 계속 타우레드의 울타리 안에 머무를 수 있는 데에 적합했기 때문에 끌렸던 거예요.”
마음이 먼저였다. 그러나 처지가 처지인지라 감히 꿈도 꾸지 못하다가 선택할 기회가 있다는 걸 알았기에 용기를 냈던 것이지, 조건이 맞아서 마음을 준 건 아니었다.
한데 진실을 말할 때는 돌덩이라도 매달아놓은 양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던 혓바닥이, 거짓을 말할 때는 기름칠을 해놓은 듯 매끄러웠다.
“설마 그만한 조건을 걸고도 거절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지라 충격이 크네요.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 자리를 비켜주겠어요?”
“……너무 멀리 있진 않겠습니다. 가실 땐 불러주십시오.”
흔들림 없이 단정한 당부가 큰 바늘이 되어 심장을 찔렀다. 카프러스가 일부러 기척을 내며 멀리 사라졌다. 라디아타는 고개를 뒤로 홱 젖히고 나뭇잎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좀 전까지는 눈물이 고여 세상이 흐릿하더니, 혼자 남으니 오히려 눈이 말라 뻑뻑했다. 마음의 흐름만큼이나 눈물도 제멋대로라, 곤란할 때는 넘쳐흐를 것만 같더니 실컷 울고 싶은 순간에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