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6. 볼린의 밤 (17/62)

chapter 16. 볼린의 밤

「남이 쓴 가면을 벗기면 삼 년은 재수가 없다. - 멜브란트의 속담」

브란젤에서 벌어진 난리는 리가 항구에도 전해졌다. 우선 휴가를 즐기다 도로 불려간 사람의 머릿수가 적지 않고, 리가 항구에 남은 사람들도 편지를 통해 소식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크게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브란젤에 출몰한다는 괴물에 대해서는 다들 헛소문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브란젤이라는 도시의 회복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멜브란트 왕국 제1의 도시였다. 잠깐 혼란스럽더라도 휴가를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면 모든 게 다 정리되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런 때에 브란젤에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숨 돌리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가 항구의 밤은 여전히 화려했다. 여름 휴양객의 주머니를 털고 싶은 극장들은 경쟁적으로 새로운 극을 올렸고, 항구의 배에선 술과 꽃으로 가득 찬 야회가 벌어졌다. 분수광장을 비롯해 리가 항구의 골목골목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작정하고 카프러스와 시간을 보내려고 마음먹은 라디아타를 위해, 오드리는 두 사람을 부단히도 엮어 외출을 보냈다. 덕분에 카프러스는 영문도 모르고 극장으로, 식당으로 라디아타를 에스코트하며 돌아다녀야 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오드리와 카프러스가 짝을 이뤄 다니고 남매인 라비린과 라디아타가 함께 다녀야 하는데, 카프러스만 빼고 나머지 셋이 한통속이니 그로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몇 번 입을 떼어보았다가 두 배로 당하고 쭈그러들기를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이게 내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오드리와 라디아타가 함께 외출하는 날이었다. 리가 항구의 밤 축제에 함께 가보자던 약속을 드디어 지키는 것이다. 브란젤에서부터 했던 약속을 두고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둘이 가려는 밤 축제가 하필이면 가면을 쓰고 벌어지는 축제라는 게 문제였다.

카프러스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따질 마음을 먹고 라비린을 찾아갔다. 라비린도 두 아가씨와 같은 편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

라비린은 마침 브란젤에서 온 편지를 뜯어 읽던 중에 카프러스를 맞았다. 그는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프러스를 보고 내심 웃음을 삼켰다. 좀 더 일찍 올 줄 알았는데, 정말 오래도 참았다.

“자존심 높은 베텔 경께서 날 다 찾아오시고, 별일인걸. 그래, 무슨 일로 왔나? 나는 바쁘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하게.”

“정말 바빠 보이긴 합니다. 휴양지에 계시면서도 편지가 끊이질 않으시니.”

“비꼬려고 온 거면 그만 갔으면 좋겠네만.”

라비린이 치웠던 편지를 다시 펼칠 듯 탁자로 팔을 뻗었다. 카프러스는 무심결에 그를 막으려는 손짓을 했다가 라비린의 짓궂은 미소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놀리는 게 뻔한데 번번이 넘어가는 자신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오늘 저녁에 아가씨들끼리 외출을 하신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아아. 알고 있지.”

“제가 에스코트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왜 그렇게 따라가려고 그러나? 아가씨들에게 받을 거라도 있나?”

카프러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한 말인데, 라비린의 대답은 또 심술을 부리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벼웠다. 라비린은 카프러스가 울컥하기 전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리가 항구의 광장에서 가면 축제가 열리는 첫날이야. 부부이거나 약혼 사이가 아닌 이상 남녀가 짝을 이뤄 나가면 안 되는 날이라고.”

“압니다, 그런 풍습이 있다는 건. 하지만 연약한 아가씨들만 내보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안 따라갑니까?”

그동안 라디아타를 에스코트하며 카프러스가 알게 된 건, 그녀가 정말 대단한 미인이란 것이다. 아무리 단출하게 꾸며도 특유의 빛이 났고,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소리 없는 경탄과 질투, 선망 등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선은 오드리와 함께 다닐 땐 겪어본 일 없는 것들이었다. 멀쩡히 에스코트 중인 카프러스가 있음에도 어떻게든 말 한 마디 걸고 싶어서 얼쩡대는 놈팡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게다가 오드리도 특이한 차림과 염색, 가무잡잡한 피부색 때문에 경원시당해서 그렇지, 그 부분을 제쳐 놓고 생각하면 어디 가서 빠지는 미모가 아니었다. 하물며 여긴 그런 일탈이 자유로이 허용되는 리가 항구였다. 오드리의 피부색과 머리색도 하나의 매력으로 통할 게 분명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주변인들의 시선을 모조리 사로잡을 게 뻔한 라디아타와 그녀의 곁에 서서 뭇 남자들의 시선을 받을 오드리를 생각하면 카프러스는 벌써부터 속이 따끔따끔하니 아파왔다. 태연자약한 라비린이 이해가 안 갔다.

“여자들끼리 왔다는 걸 알자마자 온갖 잡놈들이 다 달려들어 껄떡댈 겁니다. 약혼자도 없는 미혼이라는 걸 광고하는 꼴이지 않습니까.”

“본래부터 약혼자 없는 미혼들끼리 모여서 화끈하게 놀아보라고 만들어진 축제야. 괜히 볼린의 밤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지.”

“벨키스 경!”

볼린의 밤이라니, 거 참 노골적인 별명이었다. 볼린은 사랑의 열정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예술의 천사 뮤즈를 거느리고 세상 모든 연인들을 수호하는 볼린은 대단한 변덕쟁이인 데다 책임감이라곤 쥐뿔도 없어서, 결혼 서약을 담당하는 하티와는 아주 앙숙이었다.

라비린은 허옇게 핏기가 빠진 카프러스의 얼굴을 퍽 재미있어하며 바라보았다. 어차피 거래로 맺어질 결혼 전에 잠깐 연애놀음 좀 하는 게 어떻다고 저렇게 파들대는지. 라디아타가 아주 애를 먹는 게 우스우면서도 이해가 갔다.

“나 참……. 경, 라디아타는 매년 이 시기마다 리가 항구에 휴가를 왔어. 어지간한 건 라디아타가 알아서 걸러낼 테고, 가문의 시종들이 멀리서나마 지켜볼 거야. 그렇게까지 걱정할 것 없다네.”

“……저는, 경께서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신지 모르겠습니다.”

“베텔 경. 가면 축제에 쓰고 나가는 가면이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인지는 아나? 눈가만 가리는 것도 아니고, 손잡이를 달아서 들고 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야. 이마부터 턱까지 얼굴을 모조리 가리고 눈구멍과 콧구멍만 뚫어놓은 거야.”

라비린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눈만 빼꼼이 내밀었다. 초콜릿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휘었다.

그의 말대로, 리가 항구의 가면 축제에서 쓰는 가면은 가면 안쪽의 얼굴을 거의 노출하지 않았다. 희고 검은 밋밋한 가면에 제각기 개성에 맞는 화려한 장식을 해서 쓰는 게 전통이었다.

“당연히 얼굴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지. 옷차림도 다들 과감하고, 가면도 화려해. 거기서 라디아타와 레이디 헨젤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것 같진 않군그래.”

“그런 어설픈 이유로……!”

“정 걱정이 되거들랑 베텔 경도 참여하게. 경도 미혼이니 참여할 자격이 되지 않나. 가면이 없다면 당장 공수해 주지. 혹시 고향에 약혼자가 있어서 참여하기가 곤란한가?”

“참여하겠다는 게 아니라 에스코트를 하겠다는 겁니다. 한데 아가씨들은 제 말을 귓등으로 듣고 계시니 벨키스 경께서 말 좀 보태달라는 거고.”

“이것 참, 고지식하기는. 경이 가면을 쓰고 옆에 있으면 다들 부부이거나 약혼한 사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접근 자체를 안 할 텐데 그게 바로 에스코트고 호위지 않겠나.”

라비린이 어찌나 유들유들하게 말을 돌리는지, 카프러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올라오는 화를 삭였다. 뱃속에 담긴 말은 백 마디 천 마디인데 그중 뭔 말을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가면을 준비해 주시죠. 저는 지금 당장 아가씨들의 가면을 확인하러 가야겠으니까.”

“마음대로. 가면은 자네 방으로 보내주지.”

라비린은 금세 멀어지는 카프러스의 등을 보며 터지려는 웃음을 삼켰다. 화가 잔뜩 난 카프러스가 안쓰럽긴 한데, 과연 라디아타가 자신이 쓰고 나갈 가면을 그에게 가르쳐 줄까 생각해 보면 별로 기대가 안 됐다.

‘그 녀석은 의외로 운명이니 우연이니 하는 걸 좋아하니까……. 베텔 경 속만 타들어가겠군.’

리가 항구의 가면 축제에는 퍽 낭만적인 전설이 있었다. 복잡한 축제 한가운데에서 가면을 쓴 상대를 한 눈에 알아보는 연인은 볼린의 가호를 받아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어떤 가면을 쓸지 미리 알려주지 않는 게 포인트였다.

그러니 카프러스를 에스코트 기사가 아니라 남자로 보고 있는 라디아타가 그에게 단서를 줄 리 없었다. 워낙 머리색과 눈동자색이 눈에 띄는 데다 옷차림과 가면에서 개성이 드러날 테니 그걸 보고 찾아내기를 기대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도 이번엔 가르쳐 주는 게 좋을 텐데. 가스트로 놈이 리가 항구에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단 말이지. 꼴 보기 싫은 녀석인데 그래도 왕자라 아주 무시할 수는 없고…….’

라비린은 접어두었던 편지를 다시 펴 읽다가 나직이 혀를 찼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휴가 따위완 담을 쌓고 살던 가스트로가 새삼 리가 항구에 오면서 자신에게 편지를 쓴 의도가 너무 투명해서 어이가 없었다.

드높은 방벽인 클로드가 라디아타의 곁에 없고,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접근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라디아타의 옆자리를 차지해 보겠다는 것이다.

‘에이, 알아서 하겠지. 내가 도와주나 봐라.’

왕자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게 바로 전인데, 라비린은 가스트로의 편지를 쭉쭉 찢어 쓰레기통에 내버렸다. 그는 철저히 이해득실을 계산해서 여동생에게 접근 중인 소꿉친구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고지식할지언정 차라리 카프러스가 나았다.

서랍을 열고 가면을 꺼냈다. 새하얀 가면엔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아 가면의 주인을 상상할 여지가 전혀 없이 밋밋했다. 라비린은 가면을 슬쩍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의 얼굴에 딱 맞춰 제작된 거라 그런지 약간 갑갑하긴 해도 못 쓸 건 아니었다.

‘베텔 경과 나 중에 누가 먼저 레이디 헨젤을 찾아낼지 궁금한데.’

카프러스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라비린 역시 축제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비록 청혼을 거절당했다 한들 아직 포기하지 못한 남자로서 이런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봐도 가스트로를 욕할 게 못되는 입장이건만, 라비린은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이 들뜬 마음으로 가면을 두드렸다. 볼린의 밤, 사랑의 신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춤추는 밤이 기다려졌다.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준비해 준 축제 의상을 받아 들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면축제에 입고 나가는 옷들이 파격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디아타가 이런 옷을 준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코르셋과 페티코트 없이 늘씬하게 몸의 선을 드러내는 형태에 가슴 아래쪽에 허리선이 위치한 건 남부식 드레스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나비의 날개처럼 얇은 천을 길이가 다르게 몇 겹이나 겹쳐서 사랑스럽게 살랑이게 하는 치마 재단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천 아래쪽에 손가락을 넣어보자 반질반질한 윤기 아래로 손가락 윤곽이 그대로 비쳤다. 아무리 천이 몇 겹이나 되고 시간대가 밤이라지만, 광장에 설치된 가로등이 어디 한두 개던가. 천이 바람에 나풀거릴 때마다 몸의 선이 훤하게 비칠 게 분명했다.

“이걸 입으라고요?”

“네. 예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라디아타는 이미 의상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약간 두껍다 싶은 천으로 여유롭게 몸을 감싸고 위아래가 짧은 코르셋을 과감하게 바깥에 착용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가 도드라졌다.

우유처럼 희고 윤기가 흐르는 목과 어깨를 전부 드러냈음에도 전혀 천박해 보이지 않는 게 대단했다. 반만 묶어 꽃으로 장식하고 나머진 전부 늘어뜨린 금빛 머리칼이 부족한 장식을 모두 대신할 듯 화려했다.

라디아타가 제자리에서 휙 한 바퀴를 돌았다. 버슬 없이 주름만 잡은 긴 치맛자락이 우아하게 다리에 감겼다 풀렸다. 도저히 정장이라고 부를 수 없는 차림이었음에도 묘한 위엄과 당당함이 느껴졌다. 마치 벨트람이 부리는 전령새가 사람이 된 듯했다.

잠시 그녀의 자태에 넋을 놓았던 오드리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라디아타가 아니었다.

“그거야 라디아타 얘기죠. 만탈락에서도 이보다는 두꺼운 천을 써요. 이렇게까지 비치는 천은 장식용 숄을 만들 때나 쓰는 거라고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 위에 외투를 입을 거니까. 아무리 여름이라도 바닷바람은 무섭거든요.”

“이제까지는 한 번도 외투 같은 거 입지 않았잖아요.”

“에이, 그거야 차림이 달랐으니까 그렇죠. 오드리, 그만 버티고 빨리 입어요. 설마 평상복을 입고 나갈 건 아니잖아요? 승마복도 다 치워놨으니까 차라리 바지를 입을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말아요.”

오드리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 바엔 처음부터 가면축제에 입고 나갈 의상을 자신이 준비하겠다고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라디아타니까 져 주는 거예요.”

“알아요.”

그 옷이 시작이었다. 가장 큰 산을 넘은 라디아타는 오드리를 살살 달래고 꾀어가며 그녀를 제 입맛대로 꾸몄다.

눈에 확 띄는 머리카락을 말끔히 땋아 올리고 큰 꽃으로 장식해서 색이 잘 보이지 않게 가렸다. 어차피 가면으로 가릴 거지만 화장도 꼼꼼하게 했다. 그리고 엉덩이를 덮는 큼직한 코트를 입히자, 오드리는 평소의 모습을 거의 떠올릴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편하긴 하네……. 꼭 남부식 옷을 입은 것 같아. 아, 애초에 라인이 거의 비슷했었지.’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꽤 자신의 취향을 고려해서 옷을 골라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를 조이지 않고 상체에 달라붙지도 않는 드레스는 숨쉬기 편했고 외투는 해안에서 밀려오는 바람을 충분히 막을 정도로 따뜻했다. 마차의 좌석에 앉을 때도 거슬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사랑스럽게 팔랑거리는 치마 밑단이라든가, 커다란 리본과 레이스로 치장된 외투라든가, 머리카락 곳곳에 꽂아놓은 생화 같은 건 너무 어색해서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꼭 이렇게 입어야 해요?”

“그럼요. 평소와 비슷해서야 가면축제에 나가는 의미가 없죠. 가면까지 쓰면 웬만한 사람들은 정말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이 정도면 베텔 경도 못 알아채겠죠.”

라디아타는 정말로 흡족해했다. 오드리의 가면이 뭔지 가르쳐 달라고 찾아왔던 카프러스를 매정하게 쫓아낸 사람다웠다.

오드리는 어이가 없어 그만 웃고 말았다. 가면축제의 낭만적인 전설을 라디아타가 그냥 지나칠 것 같진 않았지만, 그게 괜히 전설일까. 당연히 이뤄지기가 어려우니까 전설이었다.

“그 복잡한 곳에서 베텔 경이 정말 단서 하나 없이 라디아타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웬만하면 날 나침반으로 써먹을 수 있게 가르쳐 주지 그랬어요.”

“안 돼요, 안 돼. 그럼 내가 아니라 오드리를 찾아낸 거잖아요. 걱정 말아요, 가면은 안 가르쳐 줬어도 내 드레스는 보여줬거든요.”

“맙소사……. 가면만 아니면 된다는 거예요?”

“그럼요. 베텔 경이 오드리를 찾으려거든 무조건 날 먼저 찾아야 할 거예요. 외투를 걸치긴 했지만 설마 그 정도 눈썰미도 없을까.”

라디아타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며 마차의 창문을 슬쩍 열었다. 축제가 열리는 도시다운 시끄러운 소리가 열린 창문을 타고 흘러들었다. 항구도시 특유의 비릿하고 큼큼한 냄새도 함께였다. 오드리는 반사적으로 창문을 닫으려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창문은 좀 나중에 열어도 될 것 같아서요.”

“음, 냄새가 좀 심하죠?”

“조금은요. 낮에 돌아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데요?”

“축제가 시작되면서 사람이 몰렸으니까요. 게다가 여름이고……. 뭐든 빨리 부패하는 시기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래도 조금만 더 참아요. 이 난리통을 지나면 바로 램프가 걸린 큰 거리예요.”

“그래요……. 이 냄새를 견딜 수 있을 만큼 훌륭해야 할 거예요.”

오드리는 꽤나 부풀었던 기대를 차곡차곡 접었다. 램프를 건 밤거리는 기대됐지만 냄새가 너무 지독했다.

유례가 없을 정도의 더위 앞에선 마법도구도 소용이 없어 매일 상해서 버려지는 생선이 몇 수레나 된다니 참아야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육지에 끌려 올라온 생선이 부패해 가는 냄새는 시원하고 짭짤한 바다 냄새와는 전혀 달랐다. 저절로 코를 틀어막게 하는 냄새였다.

하지만 라디아타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호언장담했다. 분명 즐거울 게 틀림없다면서, 자기를 믿으라나. 그리고 오드리는 오래가지 않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말이 큰 거리지, 리가 항구의 거리는 브란젤의 대로보다 훨씬 좁았다. 하지만 영광의 거리에 비하면 골목길이나 다름없는 그 좁은 거리 양쪽에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과, 각 건물들 창문마다 내놓은 페어리 램프와, 거리를 가로질러 허공에 매어놓은 줄에 달랑달랑 걸린 램프들은 브란젤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오드리마저 한 번도 본 적 없는 패턴으로 짜인 직물들이 램프들 사이를 가로질러 매여 있었다. 그 직물들은 램프의 빛을 통과시키기도 하고 가두기도 하면서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눈구멍의 좁은 시야가 너무 아쉬워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바다에 면한 항구도시의 여름밤.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거리를 휩쓸 때마다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가락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껏 차려입고 화려한 가면을 쓴 사람들은 평소의 자신을 내려놓고 양껏 밤을 즐겼다.

“우리도 춤추러 가요.”

“춤?”

“분수광장에 가면 알아요.”

라디아타는 리가 항구의 거리를 샛길까지 모조리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오드리의 손을 쥐고 핏줄처럼 퍼진 좁은 골목 샛길을 거침없이 누볐다. 벽이 새하얗고 창문이 동그란 건물들이 그들의 주변을 스쳐 지나갔다.

갯강구처럼 몰려다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걷느니 샛길을 택한 라디아타의 선택은 몹시 탁월했지만, 아직 길을 다 익히지 못한 오드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시야가 좁은데 비슷비슷한 건물들 사이를 정신없이 끌려 다니니 거의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라디아타, 언제, 언제 도착해요? 왜 이렇게 멀어요?”

“금방 도착해요~ 골목길이라 조금 돌아서 가는 거예요.”

“으윽…….”

그들이 마침내 리가 항구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분수광장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의 상태는 매우 달랐다. 오드리는 체면불구하고 쪼그려 앉아 토기를 가라앉히는데, 라디아타는 어이없을 정도로 생생했다.

“어머, 오드리. 의외로 체력이 부족하네요. 아침 승마를 그렇게 다니면서 왜 걷기만 하면 나보다 체력이 달리는 거예요? 그래가지고서야 나중에 사교모임에서 춤 신청을 받아줄 수 있겠어요?”

“우으……. 체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멀미가 나서 그런 거예요. 리가 항구의 복잡한 길도 나름 눈에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시야가 좁아진 채로 걸어보니까 난 아직 어림도 없다는 걸 알겠어요.”

“오드리는 가면을 처음 써보는 거니까요…….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나름대로 편하게 만들려고 신경 많이 썼는데, 숨 막히거나 그렇진 않죠?”

오드리는 당장이라도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은 걸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볼린의 밤이라는 별명을 달고 있긴 해도 일단은 가면축제였다. 주변 사람들 모두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가면을 쓰고 있는데 여기서 혼자 벗어봐야 주목만 끌 뿐이었다.

라디아타는 흰색 바탕에 당초무늬를 금색으로 그려 넣고 사파이어로 장식한 가면을, 오드리는 겨울밤의 은하수를 담아낸 듯 반짝거리는 구슬을 잔뜩 단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뭐 이렇게 화려한 걸 쓰는가 싶었는데 막상 나와보니 이 정도면 아주 얌전한 편이었다. 다들 관습과 규율에 억눌려 있던 개성을 모조리 끄집어낸 듯했다. 보석과 비단으로 호화롭게 치장한 자들은 흔해빠졌고, 도대체 어떻게 저런 차림을 하고 고개를 들고 다니나 싶은 이들도 있었다. 공작 깃털을 목깃 주변에 빙 두른 것도 모자라 가면에 부리까지 달고 살랑살랑 다니는 사람을 보았을 때, 오드리는 그만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만탈락에 있으면서 온갖 꼴을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보니까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겠어요.”

“후후, 이런 일탈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게 리가 항구의 매력이죠.”

라디아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가면으로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데도 능청스럽게 눈을 휘는 모습이 연상됐다.

“가면축제에 이렇게나 익숙하고, 샛길도 잘 알고……. 라디아타, 솔직히 얘기해 봐요. 이렇게 노는 거 처음 아니죠?”

“뭐어, 그건 비밀. 여자는 비밀이 있어야 아름답죠.”

“핑계는…….”

“어머, 핑계라니요. 적당한 비밀과 무지야말로 신비함의 원천인걸요. 자, 오드리.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놀아요. 봐요, 다들 춤추고 있잖아요?”

라디아타가 오드리를 잡아당겼다. 그 태도가 어찌나 적극적인지, 오드리는 어어 하며 그대로 끌려갔다. 널따란 분수 광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는데, 라디아타는 요령 좋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광장 가운데에서는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머리 위에는 별과 램프가 반짝였다. 화려한 가면을 쓰고 특이한 치장을 한 사람들이 몇 겹이나 되는 원을 그리며 마주 서서 흥겹게 발을 놀렸다.

춤은 쉬웠다. 이쪽 지방의 춤은 처음 보는 오드리도 몇 번 곁눈질을 하는 것만으로도 동작을 익히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음악에 맞춰 왼발, 오른발, 턴, 오른발, 왼발, 오른발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리다 왼발, 그리고 턴…….

“어어?”

음악이 바뀌었다. 마주보고 있던 사람이 손을 내밀어 오드리를 당겼고, 어느새 위치가 바뀌었다. 그 상태로 또 몇 번 발을 놀리고 턴을 하다가 다시 한 번 자리 바꾸기. 음악은 점점 빨라졌고, 그에 맞춰 사람들의 발도 점점 빨라졌다.

딴, 딴, 따라란, 따라라, 딴, 딴, 딴…….

정신없이 자리를 바꾸며 춤추던 오드리가 결국엔 항복 선언을 했다. 아, 힘들어! 더는 못하겠어요! 곁에 있던 라디아타가 깔깔 웃으며 그녀를 대열에서 빼냈다.

“정말이지, 이 정도로 지치면 안 된다니까요.”

“아무래도 춤추는 체력과 말 타는 체력은 따로 있는 모양이에요. 세상에, 벌써부터 발이 아파.”

“그럼 잠깐 쉴까요?”

“더 하자고 하면 바닥에 픽 쓰러져서 안 일어날 거예요.”

이 축제가 익숙한 라디아타에게 오드리의 투정은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무슨 고민이 그리 많은지, 편히 쉬고 있으면서도 웃는 얼굴 너머로 근심을 비추던 친구가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웃고 있었다.

“목마르죠? 저기 물장수가 오네요. 한 잔 사 마실까요?”

“물장수요? 리가 항구의 상수도도 마비된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상수도가 마비된 브란젤에서는 빈민들이 배급받은 물을 팔아서 생계를 꾸린다더라. 그리고 마실 게 못되는 물을 자꾸 마셔대서 뒷골목에 병이 돈다더라. 그 병에 걸린 병자는 괴물이 되어 뒷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치안대원에게 죽는다더라.

리가 항구에서 휴가를 보내는 귀족들 사이에 돌고 있는 소문이었다. 일부는 믿었으나, 대부분은 가뭄과 상수도 마비가 겹치는 통에 부풀려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오드리는 후자에 속했다. 물을 판다는 얘기까진 믿어보겠는데, 괴물이라니.

라디아타는 오드리의 썰렁한 농담에 대답해 주는 대신 크게 손을 흔들어 물장수를 불렀다. 커다란 수레에 컵과 물통을 싣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물장수가 신나게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물장수는 아무 장식 없는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얼마지?”

“한 컵에 동전 두 개입니다, 아가씨.”

물장수는 진흙을 구워 만든 컵에 물을 가득 담아 건네주고 동전을 챙겼다. 이미 여러 명이 사 마셨는지, 주머니에서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수도가 끊긴 것도 아닌데 물장수가 있다니, 생각도 못 했어요.”

“에헤이, 아가씨도 참. 광장에서 한참 재미나게 놀다가 애써 상수도를 찾아가려면 흥이 깨지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곱게 차려입은 옷에 물주머니를 챙겨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저 같은 물장수가 생길 밖에요.”

물장수가 익살스럽게 지껄이며 끼어들었다. 가면에 그려진 웃는 입술이 본래 그의 표정인 것처럼 능청스러웠다.

“그래도 그렇지, 주스라면 모를까 물이라니…….”

“수고를 더는 데에 값을 지불하는 거지요! 자, 나무요정 같은 아가씨께는 한 잔 더 드리겠습니다. 물을 잘 줘야 나무가 크게 자라는 법이니까요!”

마침 한 잔으로 모자랐던 오드리는 고맙게 컵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나무요정이라는 말은 낯간지럽다 못해 창피하기까지 했다. 가면이라도 쓰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고마워. 잘 마시도록 하지.”

“아이쿠,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아, 다 드시고 나면 컵은 바닥에 던져 깨버리시면 됩니다.”

“그대가 가져가지 않고?”

“가면축제 때 길에서 물을 사 마시고 나면, 컵은 그 자리에서 깨는 게 전통이랍니다. 그대로 집에 들고 가면 재수가 없거든요.”

물장수가 수레에 가득 실려 있는 컵 중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도료도 뭣도 발려 있지 않은 컵은 금세 부서져 흙으로 돌아갔다. 물장수는 그 파편을 발로 밟아 흔적마저 지워 버렸다.

“액운은 이렇게 발로 밟아 부숴 버려야죠.”

아하. 오드리는 금방 납득했다. 이 지방의 미신 같은 것이리라. 오드리 역시 다 마신 컵을 바닥에 내던져 깨뜨렸다. 조각난 파편을 꾹꾹 밟아 부수는 게 은근히 중독성 있고 재미있었다. 옆에 있던 라디아타도 컵을 깨뜨렸다.

“저는 이만 다른 분들께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한 잔 더 마실까, 오드리가 고민하는 사이 물장수가 자리를 떴다. 춤을 추다가 지쳐 대열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물장수를 부르고 있었다. 바쁘기도 하지. 오드리에게는 여러모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리가 항구에는 저런 장사꾼도 있군요.”

“축제 때에만 있어요. 아무래도 평상시에 물을 사 먹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이런 때에만 가능한 장사라고나 할까……. 아, 그런데 왠지 낯익은 느낌의 물장수였어요.”

“라디아타도 그랬어요?”

“오드리도? 그럼……. 이상할 정도로 인상적인 사람이라 그렇게 착각했던 걸까요?”

“그럴 수도 있죠. 리가 항구는 처음인 내가 저 물장수를 알 리 없으니까.”

라디아타는 찝찝함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장수는 단출한 옷을 입고 단순한 흰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화려한 옷과 가면을 착용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할 정도로 존재감이 있었다.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만으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였다.

하나 아무리 존재감이 있고 낯이 익대도 물장수는 그저 물장수. 둘은 곧 관심을 거두고 남은 축제를 즐겼다.

가면을 쓴 채 돌아다니는 건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가면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았다. 오드리의 녹색 머리칼도, 라디아타의 선명한 금발도 눈에 띄지 않을 리 없는데 다들 축제를 위한 분장 정도로만 취급했다.

어딜 가든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시선을 끌어 모으던 오드리와 라디아타 모두 시선에서 자유로웠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음 편히 숨을 쉴 수 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라디아타가 왜 리가 항구를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이 축제가 좋은 거죠?”

“흠흠, 흠흠.”

“달도 예쁘고, 별도 예쁘고, 램프들도 예쁘고. 이왕이면 베텔 경이 빨리 와서 라디아타를 찾아주면 더 좋겠는데, 좀 늦네요.”

라디아타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 표정은 전혀 알 수 없는데도 당황한 기색이 그대로 전해졌다.

“사람이 많으니까 어쩔 수 없죠. 금방 오실 거예요.”

“라디아타, 베텔 경이 끝내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야 암만 노력해도 안 될 수도 있겠는걸요. 전설이 괜히 전설이 아닌가 봐요. 이 정도 인파면 가면을 가르쳐 줘도 소용이 없을…….”

“아, 정말! 일부러 그러는 거죠!”

하하하하! 오드리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라디아타는 발을 구르며 심통을 부렸다. 우연과 운명을 사랑하는 만큼, 그녀는 카프러스의 가면을 알아보지 않고 나왔다. 덕택에 주변에 카프러스와 비슷한 체구의 남성이 지나갈 때마다 뛰는 가슴을 안고 눈길을 주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실망이 쌓이는 만큼 희망도 함께 자라났다. 그가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다면, 그가 맞다는 것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가면 너머로도 웃는 얼굴을 알 수 있을 법한 눈으로 놀려대는 오드리가 아주아주 얄미울 밖에. 라디아타는 이미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컵 부스러기를 다시 한 번 짓이기며 화를 삭였다.

“오드리, 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요. 뭐라도 먹을 걸 사올 테니까. 이런 축제에서는 노점음식을 먹는 것도 재미거든요.”

“네? 나 혼자서요? 같이 가요!”

“절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고요. 무슨 일이 있거든 소리 질러요, 바로 후작가 경호원들이 달려올 거예요.”

“아니, 같이 가자니까요!”

오드리가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라디아타는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물결 사이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날렵한 동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치이는 경험이 부족한 오드리는 감히 쫓아갈 엄두도 못 내고 그 자리에 못 박히고 말았다.

‘나 참……. 너무 놀렸나. 기다리면 오겠지.’

오드리는 경호원을 부르는 대신 근처 벤치에 주저앉아 라디아타를 기다렸다. 이렇게 버려두고 간 게 괘씸하긴 해도 차마 그녀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애달픈 짝사랑을 놀림감으로 삼았으니 이 정도 복수로 끝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베텔 경은 라디아타가 별로인가? 이쯤 되면 입장을 밝힐 만도 한데, 도대체 왜 계속 모른 척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기사다운 태도를 유지하는 카프러스를 보며 오드리가 그의 마음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카프러스에게는 입도 벙긋하지 말아달라는 라디아타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오드리는 진즉 카프러스에게 가서 왜 그렇게 미묘하게 구느냐고 따져 물었을지도 몰랐다.

거센 바닷바람이 멍하니 앉은 오드리의 외투를 파고들었다. 옷 안쪽에 걸고 나온 펜던트가 가슴팍 맨살에 찰싹 달라붙으며 한기를 뿌렸다. 등골이 다 오싹해지는 차가움에 놀라 급한 대로 옷 위에서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연구는 잘되고 있겠지?’

새카맣게 잊고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잠깐의 틈만 생기면 셰비언의 얼굴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프러스에게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라디아타를 볼 때마다 가슴 한쪽 구석이 싸하게 식고 아련한 통증이 일었다.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 사랑에 정신 뺏겨선 안 된다 다짐하고 이전보다 더한 의지로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어야 말이지. 게다가 오드리는 그의 어깨에 자신의 미래를 맡겨놓기까지 하지 않았나.

사실, 자존심을 굽히고 라비린에게 부탁해 사하스바티를 연구의 조언자로 보내놓은 뒤 아직 소식을 받지 못했다. 때가 되면 어련히 소식을 전할 이디케를 알기에 독촉하지 않고 참고 있었지만, 겪어본 일 없는 초조함이 파도처럼 밀려드니 그 인내가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오드리는 괜히 애꿎은 모래바닥을 헤집으며 라디아타를 기다렸다. 빨리 그녀가 와서 춤을 추자, 거리를 걷자, 재잘거리며 정신을 쏙 빼놓으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때, 그런 오드리의 눈앞에 누군가가 찰랑찰랑하게 물을 채운 물 컵을 불쑥 내밀었다.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오드리가 파드득 놀라 고개를 드니 흰 가면을 쓴 물장수다. 가면에 그려진 미소가 본래 그의 표정인 듯 잘 어울리는, 이상할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그 물장수.

“나무요정 아가씨! 한 잔 드시겠어요?”

“나무요정은 무슨……. 물장수를 부른 적은 없는데.”

“마지막 잔이니까,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다 팔았거든요!”

오드리는 조금 황당해졌다. 마지막 잔인 것과 그걸 자신에게 주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흘끗 살펴보니 아까까지 애지중지 끌고 다니던 수레마저 보이지 않았다.

“수레가 보이지 않는군.”

“빌린 거라 반납했어요. 안 드세요?”

낯선 사람이 대가도 없이 주는 물을 무얼 믿고 마시나. 오드리는 거절했고, 물장수는 마지막 남은 물이 아깝다며 저가 전부 마셔 버렸다. 물을 마시느라 드러난 하관이 퍽 남자답게 잘생겼다. 그는 컵에 가득 담긴 물이 꽤 많았는데도 단숨에 비우고는 빈 컵을 오드리에게 내밀었다.

“근심이 많아 보이셔서요. 제가 특별히 양보해 드릴 테니까 깨뜨리셔도 돼요.”

“나는 괜찮으니 그대나 깨뜨리도록 해.”

“에이, 저는 굉장히 운이 좋은 놈이라 괜찮아요. 저보다는 이렇게 멋진 풍경을 앞에 두고도 모래바닥이나 헤집고 계신 분께서 깨뜨리셔야죠. 무슨 근심이 그렇게 많으신 건지 궁금할 정도거든요.”

“그만한 눈치가 있는 사람이 왜 자꾸 내 심기를 거스르지? 컵은 됐으니 가져가고, 저리 비키기나 해.”

싸늘한 어조에 물장수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하지만 흘끔흘끔 오드리의 눈치를 보면서도 컵을 만지작거리는 꼴이, 좀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드리는 적당히 싫은 티를 내면 물러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오드리의 예상보다 더 끈질겼다.

오드리가 노려보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 다시 슬그머니 다가왔다. 가면을 쓰고 있다 한들 온몸으로 마땅치 않다고 표를 내고 있는데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것처럼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는 게 정말로 불편하고 불쾌했다.

‘소리를 질러야 하나?’

평소의 오드리라면 이런 자를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물장수를 걷어차거나 사람을 부르는 대신 망설였다.

볼린의 밤, 미혼남녀들의 가면축제. 가면 아래의 얼굴은 궁금해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는 이 축제에서 이런 접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영 가늠이 안 됐다.

하지만 물장수가 또 한 걸음 접근했을 때, 오드리는 더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다른 벤치를 찾아갈 셈이었다. 자리를 바꾸더라도 따라오거들랑 그때야말로 소리를 쳐 사람을 부르면 된다.

음식을 사러간 라디아타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 근처 지리라면 손바닥 손금 보듯 훤히 아는 그녀이니 어떻게든 찾아오겠지 싶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거침없이 내민 발이 아래로 훅 꺼지며 오드리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셰비언을 생각하며 헤집은 모래구멍이 생각보다 깊었던 게다.

‘윽!’

낯선 사람 앞에서 이게 무슨 창피람. 갑작스럽게 몸이 쏠리는 건 당황스럽지만 그동안 승마를 열심히 한 보람이 있어서, 오드리는 넘어지지 않고 바로 균형을 회복했다. 그런데 구겨진 옷자락을 툭툭 털고 고개를 드니 물장수가 바로 코앞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지?”

“……하, 하하하하. 그러게요. 뭘까요.”

물장수는 오드리가 휘청거리자마자 달려와 넘어지지 않게 받아줄 자세를 취했던 것인데, 오드리가 제 힘으로 바로 서니 거 참 민망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갈 데 없이 허공에 내밀어진 손을 거두는 게 어찌나 면구스러운지, 등에서 땀이 다 났다.

“컵 이리 내봐.”

거절할 틈도 없었다. 오드리는 물장수의 손에 있던 컵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져 깨뜨렸다. 그리고 잘근잘근 밟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재수가 없긴 없나 봐, 별것도 아닌 구덩이에서 휘청거리기나 하고. 컵 잘 썼어.”

“아…… 네…….”

“비켜. 이제 컵도 없으니까 괜한 변명하며 따라오지 말…….”

“오드리! 먹을 거 사 왔어요!”

오드리가 물장수의 어깨를 밀어내려 손을 뻗으려는 순간, 라디아타가 도착했다. 뭐가 들었는지, 따뜻한 김이 오르는 종이봉투를 끌어안고 춤이라도 추듯 달려오던 라디아타가 눈앞의 광경에 놀라 발을 멈췄다.

“……당신 뭔데 내 친구를 꼬셔?”

“아니, 이건 꼬시는 게 아니라 밀리는 건데요. 게다가 누가 봐도 손을 내민 건 여기 나무요정 아가씨지 내가 아니잖, 악!”

오드리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인 물장수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굽이 낮다 해도 가죽구두였다. 기름을 둠뿍 먹여 단단하게 마감한 구두코는 차라리 흉기에 가까웠다. 정강이를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물장수의 어깨 위로 싸늘한 말 몇 조각이 떨어졌다.

“누가 나무요정이야? 창피하게.”

나무요정 아가씨라니, 그 낯간지러운 말을 또 듣느니 좀 난폭한 여자가 되고 말겠다. 오드리는 닭살이 돋은 팔뚝을 쓸며 물장수에게서 슬쩍 멀어졌다.

어느새 종이봉투를 벤치에 내던진 라디아타가 물장수의 가면에 손을 뻗었다. 정강이를 쓰다듬느라 정신이 없던 물장수가 허겁지겁 가면을 움켜쥐었지만 늦었다.

흰 가면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벗겨졌다. 금발에 가까운 옅은 갈색 머리칼이 훤한 이마 위로 쏟아지고, 짙은 초콜릿색 눈동자가 난처한 빛을 띠고 휘었다. 시원한 콧대며 날렵한 입매며, 라디아타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화려했다. 라비린이었다.

“오라버니!”

라디아타가 제 가면마저 벗고 비명을 질렀고 오드리는 황당함에 이마를 짚었다. 예의상으로라도 같이 나가자 물었을 땐 싫다던 사람이 왜 물장수 노릇을 하며 수레를 끌고 돌아다녔단 말인가.

“으……. 라디아타, 넌 정말 여전하구나. 기껏 얼굴을 가렸는데 가면을 벗기면 어떡해?”

“물장수 따위로 변장하는 건 괜찮고요? 목소리는 또 왜 그래요!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인 줄 알았네!”

“이왕 변장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나랍 특산품이야.”

라비린이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내용물을 꿀꺽 마셨다. 그리고 헛기침을 몇 번 하자 평소보다 높고 가느다랗게 변했던 목소리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징그러워!”

“뭐가 징그러워?”

티격대는 남매를 보며 오드리는 조금 전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이 후회했다. 그깟 나무요정이 뭐라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짜증을 내며 정강이를 걷어차다니 말이다. 리가 항구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너무 젖어 있었던 듯했다.

어쨌거나 셋 중에 둘이 가면을 벗었는데 혼자 쓰고 있기도 뭐 한지라, 오드리도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옹기종기 모인 세 사람 모두가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확인하는 꼴이 됐다.

“물장수로 변장해서 사람을 속이다니, 정말 질이 나쁘잖아요!”

“네가 가면만 안 벗겼어도 들킬 일 없었어. 대뜸 가면을 벗기다니, 뭐 하는 짓이야? 가면 아래 얼굴을 궁금해하면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으……!”

단호한 어조로 라디아타를 침묵시킨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는 귀족식 인사였다. 차림은 여전히 단출하지만 가면을 벗고 자세를 바르게 한 것만으로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오드리,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나야말로. 정강이는 괜찮아?”

“응분의 대가라고 생각하지, 뭐. 계속 신경을 거슬리게 한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냅다 정강이를 걷어찰 줄은 몰랐지만. 하하.”

말 속에 뼈를 담은 라비린은 인사가 끝났는데도 오드리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악수라도 하는 것처럼 흔드는가 싶더니 슬쩍 손을 잡아당겼다. 오드리는 바로 몸에 힘을 주어 버텼지만 남자의 힘에는 당할 수 없었다. 넘어지는 오드리를 받아내듯 끌어당긴 라비린이 작게 속삭였다.

“사하스바티와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어.”

홱 밀어내려던 손이 흠칫 굳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라디아타가 불같이 화를 내며 둘을 갈라놓았다.

“오라버니! 뭐 하는 짓이에요!”

“신사답게 군 거지. 설마 오드리가 바닥에 쓰러지도록 두고 봤어야 한다는 거야?”

“이……! 뭐 하러 나왔어요! 그냥 별장에 있지! 그리고 오드리! 두 사람은 나 모르는 사이에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예요? 막 이름도 부르고! 말도 놓고!”

오드리는 슬쩍 고개를 돌려 라디아타를 외면했다. 두 사람이 편하게 말을 나누게 된 건 다른 게 아니라 오드리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청혼은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친구는 괜찮을 것 같다고.

무슨 구실을 대든 일단 거리를 좁히고 나면 사하스바티를 빌려달라는 말을 하기 쉬울 거란 속셈에 한 제안이었다.

라비린은 오드리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냉큼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오드리의 우선순위를 충족하면서도 로렐라이를 지킬 방도를 궁리하느라 머리가 쪼개질 지경이었는데, 본인이 먼저 와서 친구가 되자 하니 어떻게 그걸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오드리, 하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손발이 사라질 것 같이 민망한 탓에 오드리가 없는 자리에서는 꼬박꼬박 레이디 헨젤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라디아타는 억울함에 몸을 떨었다. 라비린보다 훨씬 빨리 만났는데, 훨씬 더 친한데, 그게 뭐가 됐든 간에 그보다 늦었다는 게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이젠 마음대로 부를 거야. 오드리, 기분 나쁘더라도 그냥 참아.”

“……음. 라디아타 편한 대로 해. 하나도 기분 안 나빠.”

오드리는 라디아타의 선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응했을 뿐인데, 라디아타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라디아타는 냉큼 오드리를 제 곁으로 끌어다 팔짱을 끼고 라비린에게 과시라도 하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나더러는 볼린의 밤에서 우연을 기대하다니 쓸데없이 낭만을 좋아하는 어린애라고 그렇게 놀렸으면서, 실은 오라버니도 기대했던 거죠?”

“그런 우연을 기대할 정도로 열정적이진 않다, 동생아.”

“오드리, 들었지?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뭐라고 하든 저얼대 넘어가지 말기. 다 입 발린 말이니까!”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청혼했다는 걸 라디아타가 알 리가 없는데, 그녀는 뭔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드리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오드리가 막 긍정의 대답을 하려는 순간, 라비린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라디아타, 그보다 네가 우연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가면을 쓰고 광장으로 나가는 게 좋을걸. 조금 전에 베텔 경이 광장 저편에서 헤매고 다니는 걸 봤거든.”

“네……?”

“이렇게 가면도 안 쓰고 구석에 몰려서 있는 게 어지간히 눈에 띄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광장을 가로질러 오기만 하면 바로 알아볼걸.”

라디아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얼른 가면을 쓰고 광장에 나가고 싶은 마음과, 오드리와 라비린을 떼어놓고 싶은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오드리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에 가면을 쥐어주었다.

“라디아타, 갔다 와. 난 잠시 쉬고 있을 테니까.”

“아니야. 오드리, 나랑 같이,”

“같이 가면 뭐. 베텔 경은 네 곁에 내가 있으면 바로 신경이 나한테로 쏠려 버릴걸. 모처럼 이렇게 과감하고 예쁘게 꾸미고 나왔는데 그러면 너무 아쉽잖아. 볼린의 가호를 받으려면 용기를 내야지.”

“그럼, 잠깐만……. 오라버니, 나 없는 사이에 오드리에게 추근대지 말아요.”

“넌 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냐?”

“오드리, 금방 올게.”

“한참 춤추다 와도 돼. 날 끌고 다니는 추진력으로 베텔 경도 끌고 다녀 봐.”

그렇게 라디아타는 오드리의 손에 등을 떠밀려 광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면을 쓰고 있어 보이는 건 몸매와 머리칼뿐인데도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그녀에게로 쏠렸다. 사랑에 대한 반짝이는 기대가 후광이 되어 그녀를 비추는 듯했다.

“진짜 베텔 경이 나온 게 맞아? 라디아타를 떼어놓으려고 그냥 한 말 아니지?”

“당연하지. 내가 준비해 준 가면이야. 딱 보면 알지.”

“아항. 라디아타의 훌륭한 후원자가 내 앞에 있었군.”

오드리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라디아타가 사 온 종이봉투를 열었다. 엄지손가락만 하게 구운 작은 빵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덜컥 입에 넣자 빵 안에 송송 박혀 있던 말린 과일이 씹히며 단맛이 입을 가득 채웠다.

“많이 달 텐데.”

“난 단거 좋아해.”

“하긴. 만탈락의 음식들은 죄다 달지. 처음 갔을 땐 내가 식사를 하는 건지 설탕을 씹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였으니……. 그런데 이젠 그 단맛을 즐기다 못해 그립기까지 하다니, 입맛이란 놀랍다니까.”

“만탈락의 단맛은 설탕이 아니라 사막의 선인장으로 내는 거야. 혹시 먹고 싶으면 얘기해, 한 통 정도는 올려 보내줄 테니까. 그런데 진짜 물장수 변장은 왜 한 거야? 사하스바티에 대한 얘기라면 별장 안에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마침 팽개쳤던 가면을 다시 쓰는 중이었던 라비린은 슬쩍 오드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평소답지 않게 모양을 내서 틀어 올리고 꽃으로 장식한 녹색 머리칼은 여름의 정원 같았고, 반투명한 얇은 천을 겹쳐 모양을 낸 치마 밑단은 마치 강줄기에 피어오른 아침안개 같았다.

격식 없이 빵을 먹느라 통통해진 뺨과 오물거리는 입술이 자꾸만 눈길을 잡아끌었다.

“라비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물장수 변장은 왜 했냐니까?”

“아아. 첫째는 남들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었고……. 둘째는 나도 볼린의 가호를 받아보고 싶었거든. 베텔 경보다 빨리 찾아내다니, 수레를 끌고 다닌 보람이 있는걸.”

오드리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낭만도 포장도 없는 싸늘한 청혼이긴 했어도 그는 자신의 구혼자라는 게 새삼 떠올랐다. 장식 없는 흰 가면 위로 라비린의 미소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무심결에 칫, 하고 혀를 찼다. 하여간 타우레드 후작가의 남매들은 하나같이 곤란할 정도로 예쁘고 잘생겼다. 입안에 있던 빵을 얼른 씹어 삼키고 가면을 주워 썼다.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하스바티에 대해 할 말 있다며. 얼른 얘기해.”

“너한테는 몹시 좋은 소식이야. 사하스바티가 말하길, 네 마법사들이 만들고 있는 게 정말로 대단한 물건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이름을 남겨야겠다던데. 나중에 이득 따져가며 자길 연구에서 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래.”

“오호…….”

“애매한 소식도 있어. 사하스바티가 들어갈 연구소의 이름이 정해졌대. 왕립 기계 연구소.”

“기계? 그건 또 뭐야? 비마법이 아니잖아?”

마법은 오랫동안 세계의 기준이었다. 마법이 아닌 것들은 따로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조차 없이 그저 비(非)마법이었다. 비마법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원하던 오드리조차 따로 이름을 붙여줄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새로운 단어를 만든 건가? 굳이, 왜? 이유를 모르겠는걸…….”

“긴장해야 할 거야. 사하스바티의 반응을 봐서는 굉장히 감격스러운 일인 것 같았거든.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느끼는 듯했어.”

“흠…….”

“로렐라이의 비마법 연구가들은 사하스바티가 부추겨도 움직이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 그들에게는 얼굴 없는 상단주일망정 로렐라이의 주인이 은인이니 그랬겠지. 하지만 왕실에서 비마법에 기계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새로운 분야의 선구자, 권위자 등으로 포장해서 띄워주기 시작하면 그들도 흔들릴 거야.”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그 다음엔 정신적인 만족감을 탐하게 되는 게 사람이었다. 로렐라이의 비마법 연구가라는 명함에 만족하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왕실에서 인정하는 새 분야의 권위자라는 명예에 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어 있는 상단주의 얼굴에 국왕전하를 넣고 나면 퍼즐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져. 국왕전하께서 비마법 연구가들을 남들의 배로 대우하며 불러 모아 실력을 발휘하게 하고, 실력과 성과가 검증되자 새로운 분야로서 인정하며 이름까지 새로 붙여서 왕립 연구소를 세웠다고 말이야. 다들 입을 모아 국왕 전하를 찬양할 거야. 오, 현명하고 위대하신 전하, 당신의 혜안에 감탄을 금할 수 없나이다!”

라비린이 오드리와 시선을 맞추고 힘주어 물었다.

“그래도 괜찮아? 작위만 있으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아?”

“…….”

“네가 했던 모든 시도와 성과를 도둑맞더라도 어떤 박탈감도 느끼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작위만 받으면, 가문에서 독립할 수만 있으면, 언젠가 무도회장이 아닌 국왕의 정전에 설 수만 있으면.

그럴 수만 있으면, 로렐라이쯤이야 백 번도 팔아주지.

언제나 해왔던 생각이었음에도, 오드리는 차마 말을 뱉지 못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상실이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성큼 눈앞에 나타나자 속에서 분기가 끓어올랐다.

아까웠다. 너무 아까웠다.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대리인으로 일했던 라비린이 로렐라이를 이리도 아끼는데, 오드리가 로렐라이에 쏟아 부은 애정이 그보다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의 오드리가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밧줄을 걸어놓고 그 위를 위태위태하게 걷고 있는 판에. 종이봉투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던 빵이 죄다 뭉그러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너랑 결혼하고 널 바지사장으로 내세우라고? 그게 국왕전하의 얼굴이 전면에 나서는 것과 뭐가 달라서? 내 모든 시도와 성과가 다른 사람의 몫이 되는 건 똑같잖아.”

“당연히 다르지. 난 네 몫을 빼앗을 생각이 전혀 없거든. 로렐라이에서 네가 이룬 성과는 모조리 네 거야.”

라비린이 오드리의 손을 끌어당겼다. 서늘한 가면이 손등에 닿았다 떨어졌다. 초콜릿색 눈동자가 램프를 품고 반들반들 빛났다.

“너조차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넌 만탈락의 운영자고 만탈락의 번영에 관심을 가지는 귀족은 대단히 많아. 네가 미혼 여성인 데다 사교계에서의 평판이 좋지 않아서 접근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오드리는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귀족들이 만탈락의 번영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걸 들은 적이 있긴 했다. 로렐라이의 단주가 제법 머리가 있어서,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어린 운영자가 있는 도시를 골라 들어앉았다고들 했다.

“글쎄? 그 관심이 좋은 쪽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네가 제대로 된 보호자를 두고 있지 않은 어린 귀족영애라 함부로 말하는 거지. 두고 봐, 내가 끼어들면 어떻게 변하는지. 아주 재미있을걸.”

“흠…….”

“어쨌건 네가 국왕 전하의 지시를 받아 모든 일을 처리한 거랑, 나와 협력해 일을 진행한 건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게 돼 있어. 그리고 나는 어린 아가씨의 말에 정신없이 휘둘린 못난이가 될 준비가 되어 있고.”

“……말했잖아, 난 작위가 필요해.”

“헨젤을 벗어나는 데 반드시 작위가 필요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네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거겠지. 오드리, 벨키스 남작은 어때?”

라비린이 하도 태연하게 말하는 바람에 오드리가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대답 없이 멀뚱멀뚱 앉아 있는 오드리가 답답했는지 라비린이 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보탰다.

“네가 나와 결혼해 준다면, 정식으로 네게 작위를 넘겨주겠어. 오드리 타우레드가 아니라 오드리 벨키스 타우레드가 될 수 있도록. 그 정도면 네가 포기해야 하는 작위에 대한 보상이 되겠지.”

“당신……. 미친 거 아니야? 지금 나한테 사과 한 알 주겠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아? 메이즈로 일은 어떻게 했어? 그렇게 손해만 보는 계산서를 들이미는 장사꾼이 어디 있어?”

“손해라니. 네가 내 곁에 있을 텐데 그게 왜 손해지? 당장 작위를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결혼하고 나면 넘기겠다는 건데. 내가 보는 너는 남작 작위 따위보다 훨씬 비싸. 자기 몸값을 좀 높게 치는 게 어때.”

“내가 무슨 암소도 아니고 뭔 몸값 타령이야?”

“결혼시장에 나온 미혼남녀는 죄다 몸값이 있다는 걸 외면하지 말라고. 만약 네가 나와 결혼해 준다면 작위가 있는 아내를 두는 건 내가 최초……가 아니군. 지금 왕비전하께서도 작위를 갖고 계시니까.”

오스미다 왕비는 특수한 케이스였다. 삼십여 년 전, 반란 진압 과정에서 친정 가문의 후계자가 모두 사망하자 펠른 3세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빼앗다시피 작위를 계승했다. 당시에는 방계에 넘겨도 될 걸 왕비가 굳이 가져가서 작위를 왕실에 헌납하려 한다며 말이 많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작위를 지키고 있었다.

“아, 말해두는데 이 얘기는 아버지에겐 비밀이야. 혹시나 말하게 된다면 그건 결혼계약서에 서명한 이후에. 무를 수도 없어 길길이 날뛰는 꼴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굉장히 즐거울 텐데.”

라비린이 심술궂게 키득거렸다. 오드리는 라비린이 대뜸 다른 사람이 되어 타지방에 내려가 살라는 명령을 군소리 없이 따를 정도로 아버지에게 순종적이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만탈락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기에 이렇게까지 사람이 변했단 말인가.

어쨌거나 오드리가 감히 상상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다. 로렐라이를 지킬 수도 있고, 작위를 가질 수도 있었다. 상대는 권세 있고 부유한 후작가의 후계자이면서 사지 멀쩡한 미남이고, 게다가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 지원해 주겠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천장에 혓바닥이 달라붙은 듯했다. 그렇다고 고개가 끄덕여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실에 꽁꽁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굳었다.

‘……추워.’

옷 안쪽에 걸고 있는 펜던트가 너무 차가웠다. 펜던트가 아니라 얼음을 걸고 있는 듯 지독한 한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옷 위로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손에 잡힌 펜던트가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 같았다.

셰비언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단호한 거절을 듣고도 방긋방긋 웃던 사람인데, 어떻게 떠오르는 건 본 적도 없는 슬픈 표정이었다.

“오드리.”

가만히 오드리를 지켜보던 라비린이 그녀를 불렀다. 늘 당당하게 펴고 있던 어깨가 조금 처진 채였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야. 나중에 네가 어떤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이런 조건은 힘들걸. 그런데도 그렇게 망설이다니, 내가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

“그런 건…… 아니야.”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혹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야?”

오드리는 또 말이 없었다. 라비린은 오드리의 얼굴을 가린 가면이 몹시 갑갑해졌다. 좀 전까지는 가면 위로도 충분히 표정이 읽혔는데, 어째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초록색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오드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무요정 아가씨, 나와 춤추시겠습니까?”

“그놈의 나무요정 소리. 이 머리카락은 염색이라는 거 뻔히 알면서.”

“그만큼 잘 어울리니까 하는 말이지. 게다가 네 눈동자는 근사한 초록색이니까, 언젠가 다시 흑발로 돌아간대도 계속 나무요정 같을 거야.”

가면에 가려진 오드리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라비린이 하도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지껄인 덕분에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셰비언의 얼굴이 조금은 흐려졌다.

“네 춤 솜씨가 대단하다는 말은 만탈락에서부터 들었어. 악평이 자자한 브란젤에서도 네 춤을 두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 걸 보면 정말 어지간한 거겠지. 나한테도 볼 기회를 좀 줘.”

“가을 무도회에서 실컷 보면 되잖아.”

“알았어, 정확히 말할게. 너한테서 또 거절의 말을 들을까 봐 무서우니까 어떻게든 내 매력을 좀 더 어필해 봐야겠어. 춤이라도 잘 추면 가산점이 있을지 누가 알아?”

과장된 태도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민하는 척하는 라비린은 의외로 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오드리는 단순한 흰 가면을 뚫고 비춰지는 장난기에 그만 풋, 웃어버렸다.

오드리의 웃음에 신이 난 라비린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 농담에 웃어주다니 기분 좋은걸. 자, 고민은 잠깐 미뤄두고 일어나 춤추자. 이런 곳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시선만 끌지 좋을 게 없어.”

“나 참…….”

더는 뺄 구석도 없다. 오드리는 라비린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라비린이 그녀를 사람들의 무리 안쪽으로,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둥그렇게 겹겹이 원을 그리고 선 사람들 틈에 끼어 섰다. 안쪽에는 오드리가, 바깥쪽에는 라비린이 자리를 잡았다.

마침 잠시 쉬고 있던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오드리가 좀 전까지 춤추던 곡과는 다른 곡이었다. 당연히 스텝도 달랐다.

얼추 리듬이 비슷하니 스텝도 비슷하겠거니, 쉽게 여기고 덤볐던 오드리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앞에 선 라비린은 볼 틈도 없고, 옆 사람과 엉켜 쓰러지지 않도록 정신없이 발을 놀리며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얄미울 정도로 능숙하게 스텝을 밟고 있던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팔을 뻗었다. 한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깍지를 꼈다. 오드리가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라비린이 가면 너머에서 웃었다.

“본래 이 춤은 마주 보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추는 거야. 내가 리드할 테니까 따라와.”

“뭐야, 그런 거였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지. 혼자 쩔쩔매는 거 보니까 재밌었어?”

“귀여웠지. 그보다 손이 왜 이렇게 차? 한참 움직였는데도 차갑네. 장갑을 꼭 껴야겠는걸.”

라비린이 서늘한 손을 쥐고 오드리를 걱정했다. 오드리는 그저 침묵했다. 셰비언의 마력을 받아 마력을 안정시킨 이후 자꾸만 체온이 떨어지고 있긴 한데, 그걸 누군가에게 말로 꺼내고 싶진 않았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좋은 대답이 돌아올 리 없으니까.

딴 생각을 하느라 손을 잡고도 휘청대는 오드리를 향해 라비린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춤 잘 춘다더니, 그건 사교용 춤에만 해당되는 거였나 봐?”

“그렇게 비웃지 않아도 금방 배울 거거든.”

자존심과 오기가 오드리를 움직이게 했다. 확실히 손을 잡고 있으니 움직이기가 한결 편했다. 오드리는 한 곡이 끝나기 전에 스텝을 모두 익히고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라비린이 어깨를 떨며 웃음을 참았다.

“아, 정말 네가 내 여동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가문이 멀쩡한데 무슨 입양이야? 그쪽 집안에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뭘. 너만 동의했더라면, 아버지는 뭔 짓을 해서라도 말이 되게 만들었을걸. 너한테 거절당하고 돌아와서는 몇날 며칠을 속 쓰려 하셨는지……. 열 살 남짓한 꼬마 아가씨보다 보는 눈이 없다며 날 메이즈로 만들어서 쫓아 보낸 것도 그 뒤야.”

“아하. 내가 네 막냇동생이 됐으면 네가 집에서 쫓겨날 일도 없었던 거구나?”

“그런 거지. 그리고 이건 너니까 하는 말인데, 워커 녀석의 제안서는 정말 엉망진창이지 않았어? 난 그걸로 가능성을 알아본 아버지가 신기해 미칠 지경이었다고. 넌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야?”

“이런, 이거 미안하네. 나는 실물을 먼저 보고 설명도 본인에게 직접 들었지. 제안서는 영입을 결정한 다음에 받았어. 사실, 설명을 듣고 제안서를 봤으니 망정이지 제안서만 봤으면 너랑 똑같았을 거야.”

“세상에 맙소사. 이렇게 억울할 데가!”

라비린이 하늘이 무너지듯이 한탄했다. 오드리는 그 과장된 한탄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하하하! 가면마저 뚫고 나온 시원한 웃음소리가 음악과 뒤섞였다.

“데뷔탕트도 해버렸으니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 거지만……. 한번 물어나 보자. 대체 왜 거절한 거야?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헨젤 백작님은 그다지 좋은 배경이 못되잖아. 널 전혀 도와주지도 않고. 힘들지 않아?”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지.”

“가문에서 독립하는 게 목표라면 처음부터 내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게 나았을 텐데. 좀 재수 없긴 해도 완벽한 후원자가 되어줬을걸. 아버지 노릇도 아주 제대로 했을 거고 말이야.”

“알아. 분명 그러셨겠지. 하지만 내게 어머니는 한 분뿐인걸. 다른 분을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었어.”

“……헨젤 백작부인께서 칼레이의 마차에 타신 건 네가 많이 어릴 때 아니야?”

“어머니는 내가 아홉 살 때 마차에 타셨지만 후작님을 만난 건 열한 살 때야. 그만하면 어지간히 사리분별도 할 줄 알고 성격 형성도 웬만큼은 끝난 나이잖아. 더 어릴 때면 모를까, 늦었지.”

아니야. 아니라고. 열한 살이면 아직 애라고. 라비린은 다급히 반박하려 했지만 그의 사정과 상관없이 춤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마주보고 서 있던 고리가 어긋나면서 파트너가 바뀌었다. 라비린과 맞춤이라도 되는 것처럼 장식 없는 검은 가면을 쓴 아가씨가 오드리의 자리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아, 미안합니다.”

“어머, 그렇게 가시면 안 되죠. 이 축제에서 춤을 거절당한 아가씨는 오랫동안 결혼을 못한다는 말이 있다는 거 몰라요?”

검은 가면의 아가씨는 황망하게 내빼려는 라비린의 손을 움켜쥐고 거침없이 몸을 붙여왔다. 새카맣게 빛나는 눈동자가 몹시 인상적이고 아름다웠지만, 멀어져 가는 오드리를 확인한 라비린에게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라비린은 아가씨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무례하다고 뺨을 맞을 각오도 했는데, 상대는 눈을 조금 찌푸렸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 오드리의 손을 잡아챘다. 새로운 파트너와 춤을 추고 있던 오드리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지만 개의치 않았다. 황당해하는 남자를 슬그머니 밀어내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달아오른 체온을 식히는 차가운 손이 반가웠다.

“얘기하다 말고 훌렁 가버리면 어떡해?”

“뭐 그리 중요한 얘기라고 그래.”

“아냐, 중요해. 이래봬도 난 너에게 구혼 중인 남자라고. 이렇게 손잡고 춤출 수 있는 시간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데.”

“구혼 중인 상대에게 막냇동생 했으면 좋았을 거란 소리나 하면서 뭔…….”

“그야 네가 귀여워서 그랬지.”

라비린의 헛소리에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안 그래도 빠르던 음악이 더 빨라졌다. 아직 스텝이 완전히 몸에 익지 않은 오드리는 슬슬 숨이 차고 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흘끗 살펴보니 라비린은 아주 멀쩡한 게, 어째 이 지역의 춤은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운동량이 많은 것 같았다. 아니면 그의 체력이 범상치 않든가.

라비린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발 놀리기를 멈추지 않는 오드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하여간 지기는 싫어해서.’

오드리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곁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도 못했던 일면들이 자꾸만 드러났다.

자신 있는 분야에 한해서라지만 의외일 정도의 승부욕,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발휘되는 한량없는 관대함 같은 것들 말이다. 당구는 좀 못 쳐도 되지만 춤은 잘 춰야 하고, 이왕 휴양지에 왔으니 자신이 좀 불편하더라도 하녀에게도 휴가를 주고.

오드리를 위해 꽃을 고르는 시간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었다. 함께 승마하는 아침 시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던 호감이 경사로를 구르는 눈덩이처럼 자꾸만 덩치를 불렸다.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쥐고 있는 손을 놓치면 굉장히 후회할 것 같다는, 그런 예감. 자그마한 어깨에 어울리지 않는 야망을 등에 진 이 여자가 굉장히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오드리, 내가 청혼해야 하는 대상이 너라서 정말로 다행이야.”

“뭔, 소리람, 갑자기.”

라비린이 오드리를 휙 끌어당겼다.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왔던 사람들이 둘을 피해 자리를 잡았다. 축제에 놀러온 연인을 피해주는 배려를 발휘한 것이다. 달갑지 않은 배려에 오드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라비린은 빙글빙글 웃었다.

“너도 알잖아. 귀족의 후계자는 로맨틱한 사랑 같은 거 못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 이왕이면 나도 마음이 가는 사람이면 좋지.”

“내 의견은 어디로 가고?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며?”

“이성적으로 생각하란 거지. 결혼을 피할 수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작위를 얻어서 가문에서 독립한다면 더더욱 그렇지. 가문을 이어갈 후계자가 필요하잖아. 그때 어떤 녀석이 네 남편이 되겠다고 기웃거릴지 상상해 봐.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몰려들걸.”

“으음…….”

“조건도 조건이지만, 나 정도면 괜찮은 상대 아냐? 최대한 너에게 충실할 거고, 아이가 생기면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어. 네 일에 전폭적인 지지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잠깐 멈춰서며 회복했던 체력이 바닥났다. 오드리는 대답을 해주는 대신 억지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와 광장 구석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지나가는 물장수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목말라?”

오드리를 뒤따라온 라비린이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말이 물주머니지, 물이 담겨 출렁거리는 몸체는 투명하고 거기 예쁘게 장식된 꼭지가 달려 있는 마법물품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로렐라이의 제품이다. 물이 출렁이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고 물 소비량을 바로 알 수 있는 실용성까지 더해져 제법 잘 팔렸다.

오드리는 사양하지 않고 물주머니를 받았다. 숨을 몰아쉬느라 따끔거리던 목에 물이 들어가자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후, 살겠다. 잘 마셨어.”

“설마 생각할 시간이 아직도 필요해? 난 우리가 좋은 친구로 평생을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 말이야.”

“막냇동생에 이어 이젠 친구야?”

“그럼 뭐, 사랑해서 연애를 해야만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이라도 하게? 어린애야? 어차피 너나나나 결혼은 해야 해. 잘 생각해, 나만 한 조건을 걸 수 있는 남자는 없어.”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정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오드리이건만, 라비린이 확신에 차서 하는 말을 들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 정 밀어붙이고 싶거든 정식으로 청혼서를 넣어. 그렇게 못할 거면 하지 말고.”

“청혼서를 넣는 거야 뭐가 어렵겠어. 아버지께 편지 한 통만 보내면 신나서 바로 헨젤가에 직접 쳐들어가실 텐데. 과연 헨젤 백작님이 동의해 주실까가 문제인 거지.”

“알면서 자꾸 왜 이래? 혼처를 결정하는 건 내가 아냐. 내가 왜 평판을 바닥까지 떨어뜨려 놨는지 몰라?”

“알아.”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바짝 다가붙었다. 위협이 되지 않게 허리를 굽히고 다가왔는데도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벽에 좀 더 몸을 붙였다. 표정을 알 수 없는 흰 가면 너머 초콜릿색 눈동자가 너무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오드리, 오늘은 볼린의 밤이야. 미혼남녀가 눈 맞아 사고치기 딱 좋은 때라고.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는 거고 거짓말을 할래도 앞뒤가 맞아야 하지. 너만 동의해 준다면, 난 기꺼이 도둑과 사기꾼이 될 용의가 있어.”

오, 맙소사. 오드리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심장이 시끄럽게 쿵쾅거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사실, 난 지금 조금 걱정이 돼. 너는 내가 가진 조건에 관심도 없는데 나는 네게 필요 이상으로 빠질 것만 같거든.”

“…….”

“누군가는 안락한 보금자리를 꾸며줄 수 있는 여자를 좋아하겠지만……. 난 아니야. 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어가 줄 여자가 좋고,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조금만 더 지나면 분명 내 등을 맡겨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도자기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는 오드리를 바라보던 라비린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오드리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색색의 램프와 하늘거리는 천이 광장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바닥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봐. 널 가로막는 걸림돌은 내가 치워줄게.”

“……대리인 노릇 하면서 혓바닥에 기름칠하는 재주만 늘었나 봐.”

“에이, 그건 예전부터 잘하는 일이었고. 내 진짜 재주는 앞으로 보여주도록 할게.”

라비린이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하겠으니 따라오라는 것처럼. 오드리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는 앞으로도 꾸준히 에스코트를 하겠노라 손을 내밀어올 게 틀림없었다.

“이런 말 하려고, 날 네 편으로 꼬시려고 휴가에 따라오겠다고 한 거야?”

“맞아.”

“처음부터 끝까지, 포장이 없네…….”

“네가 내 손을 잡아준다면, 죽는 순간까지 평생토록 포장하며 살아줄게.”

오드리의 머릿속에 셰비언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목에 걸린 펜던트가 새삼 무거워 목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이번엔 입이 움직였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시와 연극에 나오는 그 사랑?”

“…….”

“네게 그런 질문을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래, 상관없어. 아내의 의무를 다하면서 인생의 동반자이자 가장 믿을 만한 친구로 내 곁에 남아만 준다면야.”

라비린이 희극적인 태도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이 연출됐다. 비록 벽에 기대어 선 레이디와 그 앞에 무릎 꿇은 기사의 얼굴에 가면이 씌워져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제 내 손을 잡아줘.”

“……좋아.”

오드리는 결국 라비린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라비린이 새삼 마음에 들어왔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의무만 다한다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된다는 너그러운 장담 따위는 미덥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셰비언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랑 같은 거에 홀리면 안 돼. 마력 따위에 휘둘리면 안 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야. 이게 가장 현실적이야.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야…….’

오드리의 다짐 따위, 라비린이 알 리 없다. 그는 제 손에 얹어진 손의 무게에 짜릿한 성취감과 행복을 느꼈을 뿐이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잠깐만.”

라비린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가면을 벗었다. 그리곤 오드리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자그마한 체구만큼 작은 손에서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또 정강이를 맞더라도 나무요정이라고 부르고 싶은 향이었다.

“하하……. 대답도 들었는데 왜 손이 떨리지.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라비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드리는 그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냈다. 할 수만 있다면 뒤로 물러나고도 싶었지만 바로 뒤는 벽이었다. 라비린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야기책의 기사도 아니고. 어디 마상시합이라도 나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도 기사 작위는 있거든? ……오드리, 잠깐 하티의 신전에 갈래?”

“뭐?”

“구체적인 내용은 더 의논해야겠지만, 서로 뜻은 통했잖아. 간단하게라도 계약서를 작성해서 맡기자고. 뭐야, 왜 그렇게 놀래? 설마 이대로 결혼이라도 하자는 건 줄 알았어?”

오드리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지극히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켰을 테니까.

“시끄러워, 넌 가면이나 써. 하티의 신전은 브란젤로 돌아간 다음에 가자.”

“그래도 상관없어. 귀족의 자존심이 있지, 설마 레이디 헨젤이 말을 바꾸지는 않을 테니까.”

좀 전의 떨림은 어디로 갔는지, 대답하는 라비린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가득했다. 그마저 곧 가면 너머로 사라져 버렸지만. 오드리는 다시금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는 걸 대단한 깨달음처럼 말하지 마.”

“킥……. 우리가 함께 브란젤에 있는 하티의 신전에 가면, 내용과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스캔들이 될 거야. 지금부터 각오해 둬.”

“난 만탈락으로 쫓겨 간 그날 이후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은 날이 없어. 너야말로 이제까지 들어본 적 없는 비방에 시달리게 될걸.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

“그런 걱정은 됐어. 나야말로 태어나서 관심 받지 않은 날이 없는 사람이니까. 타우레드의 장남 자리라는 게 그다지 만만한 건 아니라서 말이야. 아, 잠깐만 고개 좀 숙여봐.”

오드리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라비린이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을 듯 팔을 뻗었다. 그리곤 언제 꺼냈는지 모를 리본으로 오드리의 머리칼을 휘리릭 감아 묶었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란 오드리가 밀쳐 낼 틈도 없이 아주 재빠르고 정확한 솜씨였다.

긴 리본의 끄트머리가 오드리의 목을 톡톡 건드렸다. 오드리는 슬쩍 리본의 끄트머리를 확인했다.

금사와 은사로 화려하게 달과 별을 피워낸 짙푸른색 비단이 램프의 불빛만으로도 근사한 광채를 뽐냈다. 매끈하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는 게, 대단히 고품질의 비단이었다. 이런 광장 근처의 가게에서 그냥 살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미리부터 준비해 온 게 틀림없었다.

“이게 뭐야? 웬 리본이야?”

“미래의 약혼녀가 될지도 모를 분을 위해 준비해 왔지. 다행히 제 역할을 하게 됐네.”

“가면 모르고 왔다는 거 거짓말이지? 아무리 봐도 가면이랑 맞춤이잖아. 색도, 장식도.”

정말 그랬다. 밤하늘을 옮겨놓은 듯 별빛을 형상화한 가면과 달과 별이 새겨진 리본은 마치 맞춤처럼 어울렸다. 우연이라기엔 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라비린은 오드리의 의혹을 강경하게 부인했다.

“네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걸 골라왔을 뿐이야.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더라면 굉장히 화려하게 잘 어울렸을 텐데, 좀 아쉽네.”

“……믿기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니까 믿어준다. 그리고 머리 묶어 올린 게 어때서? 바람이 이렇게나 부는데 늘어뜨려 봤자 아주 산발이 됐을 게 뻔한걸. 귀찮기만 하지.”

“어, 그래? 난 아가씨들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걸 보면 화려해서 좋던데. 광채도 아름답고, 색상도 아름답고. 그런데 정작 본인들의 감상은 좀 다른 모양이지?”

“그 보기 좋은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여자들이 쏟아붓는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알게 되면 놀랄걸.”

“가능하면 평생 모르고 싶은 얘기네.”

라비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진지한 태도라, 오드리는 피식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광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신없이 춤추는 사람들을 보며 냉정을 찾으려고 했던 건데,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라디아타가 언뜻 보아도 카프러스가 아닌 남자와 나란히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라비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라비린, 라비린, 저기 좀 봐.”

“왜 그래? 어딜 보라는 거야?”

“아, 정말이지. 라디아타가 저기 있잖아. 저 금발! 라디아타 앞에 있는 남자, 베텔 경 아니지? 그렇지?”

조금 전에 결혼 얘기를 해놓고 곧바로 라디아타 타령이라니. 라비린은 이해할 수 없이 밀려오는 서운함을 삼키며 오드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과연 바글바글한 사람들 틈에서도 유독 반짝거리는 금발이 눈에 확 띄어 찾기 쉬웠다.

“그러게. 베텔 경은 아닌데……. 옆모습이 이상하게 낯이 익은걸.”

라비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좀 더 집중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시야를 가리는지라 남자의 정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극히 우아하게 망토를 정리하는 손동작을 본 순간, 라비린의 잇새에서 욕이 새어 나왔다.

“저 망할 새끼가…….”

“라비린.”

라비린은 뒤늦게 오드리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누군데? 누군데 네가 욕까지 해? 라디아타에게 저렇게 접근하면 안 좋은 사람이야?”

안 그래도 모르는 남자가 라디아타에게 몹시 친근하게 구는 게 거슬려 어쩔 줄 몰라 하던 오드리였다. 당장이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튀어나갈 듯 목소리부터 심상치 않다. 라비린은 얼른 오드리를 붙들었다.

“안 돼, 방해하지 마. 가스트로 녀석이야.”

“가스트로? ……왕자전하가 여길 왜 와? 확실해?”

“볼린의 밤에 라디아타에게 말을 걸고 싶으니 가면과 옷차림을 알려달라는 편지가 왔었어. 입단속을 시켜놓고 답장도 안 보냈는데 어떻게 용케 알아봤네. 잘 봐, 저기 망토 안쪽에 새겨놓은 백합 문장을. 괜히 안 좋은 인상을 남기면 나중에 골치 아파져.”

지금 왕실에서 백합 문장을 쓸 수 있는 미혼 남자는 가스트로 딱 한 명이었다. 가스트로는 가면을 써서 얼굴만 가렸다 뿐이지, 망토 안감에 문장을 새겨서 대놓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과시하고 있었다.

라비린은 새삼 가스트로를 재평가했다. 이 복잡한 곳에서 힌트도 없이 라디아타를 찾아낼 정도라면 그 열의 없는 구혼에도 나름의 진심은 있는 게 아니겠나, 하고 말이다.

하나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가스트로를 몹시 내키지 않아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계산속으로 하는 청혼인 걸 서로가 뻔히 아는데 뭘 그렇게 세기의 사랑처럼 포장하느냐고.

“그럼 더더욱 끼어들어야겠는걸. 저렇게 막고 있으면 라디아타가 베텔 경을 만날 수가 없잖아.”

“잠깐, 잠깐만. 진정하고 저길 봐, 흰 바탕에 푸른 깃털을 그려 넣은 가면을 쓴 남자. 저 사람, 베텔 경이야. 저게 바로 베텔 경에게 준 가면이거든.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났는걸. 자, 라디아타의 기사님께서 뭘 어떻게 하실지 볼까.”

“우와, 못됐다. 안 좋은 인상을 남기면 안 되니까 난 끼지도 말라더니, 베텔 경은 다르다 이거야?”

“당연하지. 내 동생을 차지하려면 웬만한 남자로는 안 된다고.”

“하, 결정은 라디아타가 하는 건데 네가 뭐라고…….”

두 사람은 연신 투덕거리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관찰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다니던 카프러스가 가스트로를 알아본 듯 멈칫하는 게 보였다.

“역시 내가 가서,”

“가만히 있으라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네 에스코트 기사인데 좀 믿어라, 좀.”

라비린은 카프러스의 기사도를 내심 고깝게 여기면서도 꽤 높이 사는 편이었다. 기사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세상에 그만큼 꿋꿋하게 살기도 쉽지 않았다.

과연 카프러스는 라비린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거침없이 라디아타와 가스트로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가스트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라디아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우신 아가씨, 제게 아가씨와 함께 춤을 추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이봐, 대화 중에 이렇게 끼어들면 어쩌자는 건가?”

“부디 거절치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멜브란트 왕실의 유일한 왕자인 가스트로가 어디서 이런 유령 취급을 받아보았겠는가. 가면축제의 규칙이 있어 차마 제 입으로 나 누구요, 말은 못 하고 애꿎은 망토만 펄럭여 댄다. 하나 카프러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공연한 수고였다.

‘오, 맙소사…….’

라디아타는 카프러스가 어떤 가면을 쓰고 어떤 옷을 입고 나왔는지 몰랐다. 알려면 알 수도 있었을 것이나, 일부러 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가스트로를 막고 서서 손을 내민 남자를 보는 순간, 라디아타는 그가 카프러스라는 걸 알았다. 체구가 어떻고, 눈동자 색이 어떻고, 드러난 머리칼의 색이 어떻고, 이런 걸 따져서 아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냥 알 것 같았다.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 너머로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 보였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라디아타는 흘끗 가스트로를 바라보았다. 가면축제의 전통에 따라 제대로 가면을 쓰고 의상도 갖췄지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은 잊지 않은 남자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덩그러니 뚫린 눈구멍 너머에서 전해지는 시선이 뜨거웠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자신에게서 벗어날 순 없을 거라는 듯, 전신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녀가 카프러스의 손을 거절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게 느껴졌다.

라디아타는 가면 아래에서 심술궂게 웃었다. 가스트로가 저렇게 대놓고 문장을 박고 나타난 이상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기분을 맞춰주는 게 현명한 일일 테지만, 여긴 가면축제였다. 이름을 들은 것도 아니고, 얼굴을 확인한 것도 아니다.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어쩐지 뿌듯하게까지 느껴지는 승리감을 만끽하며 카프러스의 손을 잡았다.

“이 밤이 지나 아침이 올 때까지도 춤출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아니, 잠깐만……!”

“빨리 가요. 밤은 짧으니까. 이름 모를 신사분, 깊은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죠. 언젠가 우리가 가면이 없이 만난 날에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면 말이에요.”

라디아타는 가스트로가 가면을 벗는 선택을 하기 전에 카프러스를 끌고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둘, 혹은 서넛이 모여 춤을 추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가림막이 되어주었다.

그러다 적당히 끼어들 만큼 여유가 있는 공간에 이르렀을 때, 라디아타는 걸음을 멈추고 카프러스의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카프러스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저, 레이디!”

“베텔 경, 구해줘서 고마워요.”

“곤란해하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는데 어떻게 끼어들지 않을 수 있겠……. 아니, 그보다 절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그러는 베텔 경은요?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 맞죠?”

만약 모른다면 당장 가르쳐 주겠다는 듯, 라디아타가 가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비스킷에 모여든 개미떼처럼 바글바글한 주변 사람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덕분에 카프러스는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황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당연히 압니다. 레이디 타우레드가 아니십니까.”

“맞아요, 내가 바로 라디아타 타우레드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보니 알겠던가요?”

“그런 건 아니고……. 옷을 보고 알았습니다. 아까 잠깐 보여주셨던 옷과 같은 거라서.”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던 것이지만 이번엔 조금 아팠다. 라디아타는 슬그머니 카프러스의 팔을 놓아주었다.

“이런, 나는 그냥 알겠던데.”

“레이디 타우레드는 눈썰미가 좋으시니까요. 제가 따라가지 못하는 겁니다.”

“글쎄요. 만약 찾아야 할 대상이 제가 아니라 오드리였다면 단박에 알아보셨을 테죠.”

“예……?”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잊어버리세요.”

라디아타는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가 더 놀라 고개를 저었다. 짝사랑이 아무리 아프더라도 죄 없는 친구를 미워해서야 안 될 일인데, 뾰족하고 못된 마음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러면 안 된다,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입맛이 썼다.

‘나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사랑이라는 걸 시작하게 된 이후로, 하루하루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애타는 갈망, 치졸한 질투, 깃털 같은 기쁨, 늪과 같은 절망…….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하늘로 솟았다가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가시를 삼킨 듯 아팠으니, 이제 그 자리에 아픔을 잊을 설탕물을 부을 차례다. 라디아타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손을 내밀었다.

“춤추자더니,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둘 셈인가요?”

“그건 그냥 핑곗거리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저는 이 지역의 춤을 모릅니다. 그보다 왜 혼자 계신 겁니까? 오드리 아가씨와 함께 계실 줄 알았는데 놀랐습니다.”

“설마 내가 오드리를 어디 골목길에 혼자 버려두기라도 했을까 봐 그렇게 걱정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레이디 타우레드이신데요. 저는 그저…….”

“그렇다면 얼른 이 손을 잡아주세요. 이 축제에서 춤을 거절당한 아가씨는 아주 오랫동안 결혼을 못한다는 속설이 있는 거 알죠?”

“……으음. 서툰 제가 레이디께 폐를 끼치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프러스는 끝내 라디아타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으로 라디아타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쌌다. 귀중한 도자기라도 다루는 양 조심스럽고 신중한 손길이었다.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을 느낀 순간, 라디아타의 기분은 곧바로 급격한 상승세를 탔다. 그의 어설픈 스텝이나, 어떻게든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뻣뻣한 동작 같은 것도 마냥 귀여워보였다. 스스로도 어이없지만 정말로 그랬다.

경쾌한 음악이 바닷바람을 타고 광장에 매달린 램프를 흔들었다. 색색의 천들이 머리 위에서 펄럭거렸다. 정성들여 꾸민 가면들이 여기저기에서 반짝거리고, 긴 치맛자락들이 만개한 꽃잎처럼 펼쳐졌다 오므라들었다.

“베텔 경, 조금 전에 제 앞에 있던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예. 가스트로 전하가 아니십니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끼어든 거예요?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려고요. 대체 왜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레이디께서 곤란해하셔서 그랬다고. 레이디를 존중하는 건 기사의 의무이자 신사의 미덕이고 가스트로 전하 역시 그 범주에 속하시는데 제가 망설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디아타의 심장이 세차게 펌프질을 했다. 카프러스의 말에 쓸데없이 다른 이유를 붙여선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카프러스가 애써 유지하고 있던 간격을 부수고 그에게로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당황한 그가 내쉬는 숨소리가 귓가에 닿아 황홀했다.

“베텔 경, 내게 오지 않겠어요?”

“예?”

“헨젤에 딱히 충성심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산트렘의 기사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는 걸 알아요. 하지만 헨젤은 기사에게 좋은 뒷배가 못되죠. 내게 와요, 타우레드가 도와줄 테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까지 눈치 없는 척을 하면 화가 났을 텐데……. 이것 참.”

라디아타는 가면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곤 그대로 카프러스의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댔다. 쪽. 이번에야말로 예의를 잊은 카프러스가 다급히 라디아타를 밀쳐 냈다.

자칫 넘어질 뻔했지만, 라디아타는 기분이 좋았다. 카프러스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고 있노라니 그저 유쾌할 뿐이었다. 어깨가 조금 욱신거리긴 해도 밀쳐진 것따위 별일도 아니었다.

“이, 이게, 이게 무슨 짓……!”

“내가 아무리 좋아한다고 티를 내봐야 자신은 모른 척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가 불러온 결과랍니다. 경, 솔직히 말해봐요. 산트렘의 기사가 되고 싶잖아요? 내가 외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눈동자가 흔들렸잖아요.”

도저히 무시하기 힘든 조건을 내세우며 오드리를 꾀어낸 라비린이나, 카프러스가 평생 품어온 꿈을 언급하며 제게 올 것을 종용하는 라디아타나. 기저에 깔린 감정은 다를지라도 사용하는 수단만큼은 아주 꼭 닮은 남매였다.

“오드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대답을 듣고 나서 가르쳐 드릴게요. 자, 잘 생각해서 대답해 주세요. 타우레드는 경을 산트렘의 기사로 만들 수도 있지만 그 길을 막을 수도 있거든요.”

“…….”

“아, 오드리에게 내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네요. 나와 어울리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오드리의 악평이 족히 절반은 사라진 거, 알고 있죠?”

이러다 거절을 당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하려는지, 라디아타는 무서울 정도로 카프러스를 몰아붙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봐 주지 않는 등을 보며 느낀 위기감이 그만큼 컸다고 봐도 좋을 테다. 여기서 잡지 못하면 다음엔 더 철저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유지할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 브란젤로 돌아간 뒤에는 기회가 없을 거라는 불안.

침묵하는 카프러스를 보는 라디아타의 입에서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좋았던 기분은 썰물처럼 빠지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메웠다. 하도 긴장을 해서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경, 대답을…….”

“괴물이다!”

“저게 뭐야? 꺅! 저리 가!”

“으아악!”

광장 한쪽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비명 소리가 배의 돛을 부풀리는 바람처럼 밀어닥치고 도망치는 사람들의 물결이 마치 큰 파도와 같았다.

라디아타는 사람들에게 휩쓸릴까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잠깐 사이에 어깨를 몇 번이나 부딪히고 이대로 넘어지겠구나, 각오한 순간 단단한 팔이 그녀를 감싸고 보호했다.

“지금은 레이디의 마음에 대답할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불편하더라도 잠시만 참으시길.”

“경!”

카프러스가 라디아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앉혔다. 몸이 가느다랄 뿐이지 여자치곤 키가 훤칠해서 무게가 만만치 않을 텐데 아주 가뿐했다. 그래도 불안정한 건 어쩔 수 없으니, 라디아타는 기겁을 하며 카프러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꽉 잡으시면 불편합니다.”

“아, 네. 네. 너무, 너무 무서워서요.”

“괜찮습니다. 절대 떨어뜨리지 않을 테니까요. 오드리 아가씨께서 어디에 계신지만 알려주시죠.”

밀려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다리를 잡아주는 팔이 든든했다. 라디아타는 시야를 제한하는 가면마저 벗어버리고 사방을 살폈다.

광장을 가로질러 빼곡하게 걸린 램프는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면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누군가는 정신없이 도망치고, 누군가는 관심이 없었으며, 누군가는 호기심에 차 기웃거렸다.

재빨리 오드리가 있었던 자리를 훑었다. 한데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라비린이 오드리를 혼자 뒀을 리 없는데, 체구가 작은 오드리는 그렇다 쳐도 덩치 큰 라비린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오색찬란하게 꾸민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흰 가면은 굉장히 눈에 띄었는데 말이다.

“오드리는 오라버니와 함께 있었어요. 둘 다 있던 자리에 안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리를 옮긴 모양이에요.”

“벨키스 경과 함께 계신다니, 오드리 아가씨께서 사람들에게 휩쓸렸을까 봐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군요. 이젠 우리만 잘 챙기면 되겠습니다. 레이디, 어느 쪽이 사람이 적습니까?”

“저쪽, 저기 저 담벼락 근처가 사람이 적어요. 오른쪽으로 반걸음만 돌아서 직진하세요.”

가면을 쓴 데다 사람에 가려 시야가 좁은 카프러스는 라디아타가 가르쳐 주는 대로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한데 가면 갈수록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꽃과 음식과 향수 냄새 사이로 다 썩어가는 시체나 풍길 법한 끔찍한 피비린내가 났다.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라디아타도 같은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체면도 잊고 코를 킁킁거리다 카프러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베텔 경,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든데……. 굳이 비유하자면, 생선 썩는 냄새 같은 거요. 부두라면 모를까 여긴 광장인데…….”

“……코를 막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카프러스는 어깨에 앉은 라디아타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괴물이라 외치던 사람들의 비명이 갑자기 신경 쓰였다. 인파를 헤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잠시후, 그들은 끔찍한 몰골의 시체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등은 꼽추처럼 굽었고 목은 사슴처럼 길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가물어 갈라진 땅처럼 쩍쩍 금이 갔고 그 틈으로 새카만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시체 주변은 이미 피바다였다.

카프러스는 재빨리 라디아타부터 어깨에서 내렸다. 너무 놀라서 신음소리도 못 내는 그녀의 눈을 가리고 주변을 살폈다. 흉한 시체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피했고 남은 이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구경꾼들이었다. 어쩐지 사람을 계속 거스르는 느낌이다 싶더니, 여기가 원흉이었다. 흉측한 시체를 보니 왜 괴물이라는 비명이 울렸는지도 알 법했다.

‘골격이 언뜻 봐도 사람이 아닌데 옷도 입고 있고 가면도 쓰고 있고……. 피 냄새도 이상하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충격적인 시체를 보고도 혐오와 공포보다 호기심이 먼저 일었다. 하지만 그가 시체에 정신을 빼앗기기 전에 긴장으로 차갑게 식은 손가락이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돌아, 돌아가고 싶어요. 마차까지 데려다주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그, 걸을 수는 있으십니까?”

“아니요……. 부끄럽지만 제 다리로 걸을 자신이 없군요.”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카프러스가 라디아타의 무릎 뒤쪽과 등을 받쳐 안아들었다. 라디아타는 그의 품에 안겨 그의 목을 끌어안고도 자꾸만 몸을 떨었다.

“미, 미안해요. 내가 너무, 너무 놀랐나 봐요.”

“미안해하실 건 하나도 없습니다. 기사로서 당연한 일인데요. 마차를 어디에 두셨는지는 기억나십니까?”

“램프가 걸리기 시작한 길 근처에 세워두었어요. 하지만 마부가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는 자, 장담할 수가 없네요. 아, 내가 왜, 왜 이러지……. 바,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괜찮습니다.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겁니다.”

“누, 눈물은 또 왜……. 아, 창피해…….”

라디아타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본인도 어떻게든 멈춰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놀라서 나오는 눈물이 쉬이 그칠 리가 있나. 그녀는 창피를 견디다 못해 벗었던 가면을 도로 눌러 썼다.

“모, 못 본 걸로 해, 해주세요.”

“레이디께서는 가면을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안심하시죠.”

라디아타는 아예 카프러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울음을 삼켰다. 맨 얼굴로 훌쩍거린 걸 뻔히 보고도 못 봤다 어색한 거짓말을 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카프러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충격을 받은 라디아타도 라디아타지만, 마차에 가면 자리를 옮겼는지 보이지 않는다던 라비린과 오드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디아타가 장담하지 못했던 마부는 다행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좀 전까지 노점상을 기웃대고 있었던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음식 봉투를 끌어안은 채였다.

심상치 않은 광장의 분위기를 느끼자마자 마차로 달려와 고삐를 쥐었던 마부는 카프러스에게 안겨오는 라디아타를 보자마자 아주 기겁을 했다. 안색이 허옇게 바래서는 어쩔 줄 모르고 마편을 만지작대는 게, 당장이라도 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카프러스도 라디아타도 오드리와 라비린을 기다려야 한다고 입을 모으니, 그는 점점 복잡해져 가는 도로를 보며 까맣게 속을 태웠다.

그렇게 속이 타는 사람이 어디 마부뿐일까. 실망 가운데에서도 오드리와 라비린이 금방 올 거라고 믿었던 카프러스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지러워졌다. 바로 맞은편에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는 라디아타가 있는데도 자꾸 눈과 귀가 마차 밖을 향했다.

지나는 바람이 문을 흔들 때마다 흠칫 놀라고, 말소리와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무심결에 고개가 기울었다. 이상하게 목이 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직접 갔다 오는 게 어떠세요?”

“……네?”

“오라버니와 검을 겨뤄 경이 이겼다고 들었어요. 오라버니가 못 미덥기도 하겠죠. 다녀오세요.”

카프러스는 그제야 자신이 눈앞의 라디아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해졌다. 기운지도 모르게 기울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임무에 정신이 팔려 실례를 범했습니다. 레이디 타우레드를 혼자 두고 제가 어딜 가겠습니까.”

임무는 무슨. 라디아타는 입 밖으로 나가려던 빈정거림을 꿀꺽 삼켰다. 남들 보기에 카프러스는 완벽한 에스코트 기사였지만, 남들의 배로 카프러스를 관찰하는 라디아타는 그의 눈에 담긴 열기를 금세 알아챘다.

하나 열기 어린 시선을 받는 오드리는 물론이고 카프러스 본인조차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라디아타는 질투 한 조각도 꺼내놓을 수가 없었다. 괜히 들쑤셨다가 카프러스가 자신의 감정을 자각이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말이다.

“모습을 보이지는 않아도 근처에 후작가의 경호원들이 있어요. 경께서 자리를 비우셔도 저는 혼자가 아니랍니다. 그러니 다녀오셔도 돼요.”

“레이디 타우레드의 곁에 후작가의 경호원이 있다면, 오드리 아가씨 곁에도 그들이 있겠지요. 그리고 벨키스 경의 솜씨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제가 모자란 짓을 한 건 사실이오나, 부디 쫓아내지는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프러스는 포장에 서툴렀다. 그는 눈앞의 라디아타보다 오드리의 안전을 우선으로 하는 자신의 기준을 무심결에 드러냈고, 라디아타는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저 사람의 우선순위에서 첫째가 될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라디아타는 이를 악물었다. 머리로는 내가 뭐가 모자라서 자존심도 뭣도 없이 매달려야 하나 싶은데, 언제 이렇게 부풀었는지 모를 마음이 치졸하게 구는 게 뭐 어떠냐고 속삭였다. 내용물이야 어쨌거나 타우레드의 이름을 주고 곁에 두면 그만이 아니냐고.

‘사랑이 대체 뭐라고, 나답지 않은 생각을 다 하고…….’

자존심 따위 죄다 내려놓고 협박에 가까운 조건을 걸며 대답을 강요할 때보다, 비겁하게 굴자 속살거리는 마음의 소리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는 지금이 더 비참했다. 늘 꼿꼿하게 펴고 있던 어깨가 안으로 굽었다.

평소답지 않게 자세가 무너진 라디아타를 본 카프러스가 당황하며 다가왔다. 외투를 벗은 채라 드러난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들고 가면 너머로나마 표정을 읽으려 노력하니, 라디아타는 바란 적 없는 친절이었다.

“레이디,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이런, 몸이 너무 찹니다.”

“……별일 아니에요. 아까 놀란 게 아직 진정이 덜 됐나 봐요.”

카프러스는 서둘러 라디아타의 어깨에 외투를 덮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동료들에게 하던 것처럼 어깨와 팔을 주무르려다 흠칫 놀라 손을 멈췄다. 외투에 덮인 어깨가 지나치게 좁고 가느다랬다. 잘못 만지면 그대로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헤매는 그때,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이 벌컥 열렸다. 뺨이 벌겋게 상기된 마부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가씨! 기사님! 벨키스 경께서 심부름꾼을 보내셨습니다!”

“……오라버니가? 아니, 본인이 오지 않고 웬 심부름꾼을……. 뭐라고 했는데?”

“벨키스 경과 헨젤가의 아가씨께서는 따로 할 일이 있어 늦을 테니 아가씨는 먼저 별장으로 돌아가시랍니다.”

기껏 두 사람을 기다렸던 라디아타와 카프러스에게는 그저 황당하기만 한 얘기였다. 라디아타는 가면을 벗고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었다.

“심부름꾼을 돌려보내진 않았겠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 베텔 경, 문을 열어주세요.”

호화로운 마차에 덜컥 끌려 들어와 당황한 심부름꾼은 어린 소녀였다. 광장 근처에서 꽃을 팔다가 동전 몇 개에 심부름을 온 소녀는 풀물이 든 손을 꼭 모은 채 라디아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까, 치안대에 들러야겠다고 했단 말이지?”

“네……. 네! 아무래도 많이 늦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혹시 기다리고 있을까 봐 말을 전하는 것이니, 마차가 없다면 그냥 돌아와도 된다고 하셨고요.”

“뭔가 특이한 건 없었고?”

“두 분의 옷에 시커멓고 이상한 물이 잔뜩 튀어 있었어요. 냄새도 엄청났고요. 색깔만 아니었다면 생선 썩은 물이 묻은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심부름꾼 소녀는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자신이 본 광경을 묘사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오드리와 라비린이 끔찍한 시체의 피가 옷에 잔뜩 묻을 정도로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글쎄요.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말씀해 주지 않으셨거든요.”

소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드리와 라비린이 심부름꾼 소녀에게 따로 말을 해주지 않은 건, 그들도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카프러스가 라디아타를 빼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걸 구경한 후, 두 사람은 강가에 남겨진 오리알처럼 덩그러니 선 가스트로를 피해 광장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설마하니 가면을 쓴 라비린을 알아볼 리가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라비린이 꽃 파는 소녀에게서 꽃 한 다발을 구입했다. 그리곤 오드리의 머리카락 곳곳에 꽂을 꽂기 시작했다. 적당히 우아하고 발랄하게 보이던 머리 스타일이 순식간에 꽃밭이 됐다.

“네 초록색 머리카락은 아무래도 너무 눈에 띄어.”

“네가 리본까지 둘렀으면서 뭐가 보인다고 이러는 거야?”

“리본을 둘러놓으니까 초록색이 더 도드라져서 이러지.”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어차피 이 가면축제에 나온 사람들 중 염색 안 한 사람이 더 드문 상황에 초록색 머리칼이 뭐가 대수라고. 하나 머리에 꽃 좀 꽂는다고 뭐 달라질 게 있겠나. 그냥 내버려 두고 물을 홀짝이며 주변을 구경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원을 그리고 춤을 추던 사람들의 대형이 바뀌어 있었다. 둘, 혹은 서넛이 짝을 이뤄 춤을 췄다. 서넛보다는 둘이 훨씬 많았다. 음악도 아까보다 훨씬 느릿하고 부드러웠다.

‘사고치기 딱 좋은 때라더니, 그 말이 정말이긴 하네.’

여름이라 은하수는 없어도 그를 대신할 만한 램프들이 머리 위에 빼곡하고, 색색으로 물들인 천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코를 스치는 가운데 광장의 악사들이 끊임없이 음악을 자아냈다.

공작새처럼 치장한 미혼 남녀들이 가면에 정체를 감추고 일탈을 즐기는 이 밤에, 라디아타는 카프러스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을까. 오드리는 혹 라디아타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고개를 쭉 빼고 미간을 좁혔다.

그때, 오드리의 근처를 지나던 남자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몸을 굽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물 컵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우우욱…….”

가면 아래로 검은 물이 쏟아졌다. 생선 썩는 냄새처럼 고약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손부채질을 하며 냄새의 원흉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으, 으, 으우우욱…….”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이 불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그를 피해 물러섰다. 사람이 적은 외곽이라지만 나름대로 북적대던 곳에 동그란 빈 공간이 생겼다.

각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사태를 눈치채는 게 늦었던 오드리와 라비린은 제때 뒤로 물러나지 못했다. 그들은 남자를 둘러싼 원의 가장 안쪽에 서서 끔찍한 몰골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되었다.

남자가 바닥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등은 계속해서 솟아올라 꼽추처럼 굽었고, 쭉 뺀 목은 점점 길어져 머리가 무거운 듯 아래로 휘었다. 여기저기에서 억누른 비명 소리가 새어나왔다.

“오드리, 이리 와.”

“아니, 난 괜찮…….”

“오라면 와.”

라비린은 주먹을 꽉 쥐고도 괜찮다 버티는 오드리를 끌어당겨 팔 안에 가뒀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데, 끔찍한 몰골을 굳이 보고 있을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차가운 손이 팔을 때리는 걸 무시하며 어떻게든 물러날 곳을 찾아 눈을 굴렸다.

하지만 워낙에 사람이 빽빽했다. 그는 큰 덩치를 이용해 사람들 사이를 억지로 파고들었다. 그나 오드리나 입은 옷이 풍성하거나 장식이 많은 종류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끄으으윽…….”

남자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가 바닥을 구를 때마다 얇은 옷자락이 찢어져 구멍이 났다. 멀쩡하던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시커먼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고약한 냄새가 한층 더 진해졌다.

바닥을 구르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마치 사냥감의 냄새를 맡는 개처럼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곤 정말 개처럼 네 발로 기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곳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필이면 오드리와 라비린이 있는 방향이었다. 사람이 몰리면서 안 그래도 빽빽하던 공간은 더 빽빽해졌고, 두 사람은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라비린의 팔에 안겨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던 오드리가 다급히 라비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라비린, 라비린!”

“아, 왜!”

“뒤 좀 돌아봐!”

“봐서 뭐 좋은 게 있다고 자꾸 뒤를 보래?”

인파를 뚫어보려 용을 쓰던 라비린은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가, 정확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확인하고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죽을힘을 다해 밀어낸다 했지.’

남자가 가면 아래로 검은 물을 뚝뚝 흘리며 그들을 향해 기어왔다. 그가 바닥을 디딜 때마다 무릎이 까지고 팔뚝에 금이 갔다. 금방이라도 몸이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으나, 안쓰럽게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흉측한 몰골이었다.

라비린은 오드리를 아예 들쳐 안고 자리를 옮겼다. 일단 점점 괴물처럼 변해가고 있는 남자의 정면에 서 있는 것만이라도 피할 셈이었다.

한데, 그들이 옆쪽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남자가 고개를 홱 돌리는 게 아닌가. 그리곤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꾹꾹 비명을 참고 있던 사람들이 끝내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으아아악!”

“괴물이다! 괴물!”

“저리가! 가! 꺅!”

남자가 펄쩍 뛰어올라 오드리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오드리는 치미는 혐오감 속에서 라비린의 목을 꽉 끌어안았고, 라비린은 남자의 가슴팍을 냅다 걷어찼다. 단순히 떼어놓으려고 한 짓이었는데, 남자의 가슴뼈가 수수깡처럼 부러지며 가슴에 큰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에서 시커먼 피가 솟아올라 라비린의 바지를 적시고 오드리의 치마를 더럽혔다. 그런 와중에도 오드리의 치맛자락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니, 라비린은 몇 번이나 더 걷어차고서야 남자의 손을 떼어낼 수 있었다.

치맛자락을 놓친 남자는 데굴데굴 굴러 처음 피를 토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번 숨을 몰아쉬며 팔다리를 버르적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숨이 멎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체에서 흐르는 피가 융단처럼 광장바닥을 덮었다.

소란이 커졌다. 도망치는 사람, 호기심에 기웃대는 사람, 바닥에 못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 지독한 냄새와 끔찍한 몰골 때문에 누구도 시체에 접근하지 않아 시체는 엎어진 모습 그대로 구경거리가 됐다.

“우윽……. 내, 내려줘. 내려줘, 빨리!”

“잠깐만 참아.”

냄새를 견디지 못한 오드리가 라비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라비린은 그런 오드리의 등을 다독거리며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대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은 골목길로 빠지고 나서야 오드리를 내려주었다.

“괜찮아?”

“괜찮을 것 같아? 우욱!”

오드리는 진저리를 치며 가면을 벗었다. 안 그래도 토기가 올라오는데 팔에 안겨 흔들리며 복잡한 골목길을 빙글빙글 돌고 났더니 미칠 것 같았다. 화장이고 뭐고 코를 싸쥐고 입으로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토하고 싶으면 토해도 돼.”

“아직 거기까지 떨어지진 않았어. 그런데 이거 피 맞긴 해?”

그럭저럭 숨을 돌린 오드리가 제 치맛자락을 펼쳤다. 나비의 날개처럼 연약한 원단이 새카만 피에 젖어 엉망이었다.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검은 데다 푹 썩힌 생선처럼 고약한 냄새가 나다니. 금방 흘린 피라고는 믿을 수 없게 상태가 이상했다.

라비린은 가볍게 발을 굴려 신발에 붙은 핏덩어리를 털어냈다. 젤리처럼 변한 핏덩이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확실히 이상해. 색도, 냄새도……. 이렇게까지 굳을 정도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이 꼴이 된 것도. 하지만 살이 갈라지면서 피가 흐르는 걸 봤잖아.”

“봤지……. 봤는데도 내 눈이 믿어지질 않아. 그게 인간이긴 했을까?”

“브란젤에서 발견된다는 괴물이 바로 저런 종류인지도 모르지. 괴물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생김새잖아.”

오드리가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브란젤에서 괴물이 나타난다는 말을 헛소문 취급하며 비웃고 넘겼었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그걸 괴물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대체 뭘 괴물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라비린이 오드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돌아가자. 너 안색이 아주 창백하니 안 좋아. 돌아가서 씻고, 한숨 자. 일단 마차로 돌아가서……. 아, 이런.”

“라디아타가 탔을 거야.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베텔 경이 가만있었을 리 없지.”

“기껏 마차 위치도 알아뒀는데 다 헛일이 됐군.”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업마차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리가 항구의 중심부에서 타우레드의 별장까지는 걸어서 가기엔 지나치게 멀었다. 라비린이야 부츠를 신었다지만 오드리처럼 구두를 신고서는 어림도 없었다.

치덕치덕하게 젖어 자꾸 다리에 달라붙는 바지를 억지로 떼어내던 라비린이 뭔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흠……. 오드리, 이왕 이렇게 된 거, 치안대에 갈래?”

“치안대는 왜?”

“어느 지역의 치안대든 항상 여유분의 마차를 구비해 두거든.”

“타우레드의 이름값을 마차 빌리는 데에 쓰자는 거야?”

오드리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라비린은 진심이었다.

“보나마나 내일이면 치안대원들이 목격자를 찾겠다고 미혼 남녀가 있는 집은 다 쑤시고 다닐 거야. 그리고 많은 목격자들이 분명 우릴 언급하겠지. 그 괴물이 우릴 보고 고개를 돌린 데다 네 옷을 붙들기까지 했는데, 아무렴.”

“그러니까, 미리 가서 진술도 하고 그 김에 마차도 얻어 타자? 그렇게 되면 타우레드의 이름값을 쓰는 건 아니다?”

“그렇지.”

“말은 잘해……. 그래, 가자 치안대에. 어차피 겪을 일이면 미리 해치워 버리는 게 낫겠지. 그런데 혹시 라디아타가 우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해? 들러서 확인해 봐야 하나. 여기 치안대 사무실은 방향이 어디야?”

“……마차 세워둔 데랑은 정반대.”

오드리가 들으란 듯 구두 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만한 거리는 절대 못 걷는다는 의사표시였다.

“또 안고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그땐 진짜 멀미할지도 몰라. 바로 치안대로 가자.”

“아냐, 진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 오드리, 이리 와서 안겨. 아깐 급하게 뛰느라 그랬지만 이번엔 제대로 편안하게 안아서 옮겨줄게.”

라비린이 자신만 믿으라는 듯 팔을 벌렸다. 자신만만한 태도였지만, 한번 좁아진 오드리의 미간은 도대체 펴질 줄을 몰랐다. 아무리 자신이 체구가 작아도 그렇지, 리가 항구의 시내를 가로지르는 내내 안아 옮기겠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이다.

“저……. 레이디.”

가냘픈 목소리가 오드리를 불렀다. 나뭇잎과 덩굴을 엮어 얼기설기 만든 가면을 쓰고, 큰 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소녀였다. 작게 나눠 포장한 꽃다발을 잔뜩 들고 있는 걸 보니, 꽃을 파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고 옷자락을 정돈했다. 그래봤자 더럽혀진 치맛자락을 어찌할 수는 없어서, 결국 외투를 벗어 팔에 걸쳐서 얼룩을 가렸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바람이 스쳤다.

“꽃을 사줄 사람을 찾고 있니? 어쩌지, 지금은 꽃을 사기가 좀 그런데…….”

“아냐, 잠깐만. 꼬마야, 이리 와봐라.”

라비린이 소녀를 불렀다. 그는 소녀가 팔고 있던 꽃을 전부 사고는, 동전 몇 개를 더 꺼내 건넸다. 시선이 맞도록 몸을 굽히곤 가면까지 벗은 채 다정하게 웃었다.

“꼬마야, 심부름 하나만 해주련.”

“뭐, 뭔데요……?”

“내가 알려주는 곳에 가서 말을 전해주면 돼.”

꽃도 다 팔았겠다, 심부름 값도 받았겠다, 소녀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가 항구의 골목길을 샅샅이 알고 있으니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램프가 걸리기 시작하는 동쪽 길 입구에 가서, 백합을 목에 감고 있는 사자의 문장을 문에 달고 있는 마차가 있는지 확인해 줄래? 혹시 있으면 먼저 돌아가도 좋다고 전하고, 없으면 그대로 집에 돌아가.”

“먼저 돌아가라고 하는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요?”

“치안대에 들렀다 간다고 전해줘. 그럼 알아들을 거야. 좀 늦을지도 모르니까 너무 기다리진 말라고 하고. 자, 이 가면을 갖고 가면 믿어줄 거다.”

소녀가 흰 가면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돌아섰다. 다다다 달려가는 다리가 빠르기도 했다.

“대체 뭘 믿고 미리 돈까지 주면서 심부름을 시켜? 저대로 도망가도 절대 못 잡을 텐데.”

“잘할 거야. 구걸이나 소매치기를 하지 않고 꽃이라도 팔면서 먹고 사는 성실한 아이잖아.”

“태평하기는.”

“네가 너무 의심이 많은 거야. 정 못 미덥거든 나중에 치안대원에게 부탁해서 확인하면 되잖아.”

오드리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타우레드의 이름값을 쓸 생각은 없다더니, 순 거짓말이지 않은가.

마차 확인이 생략됐으니 바로 치안대로 가면 되건만, 라비린은 또 팔을 벌렸다. 오드리가 눈을 흘겨도 꿋꿋했다. 결국 오드리는 라비린의 팔에 몸을 기댔다. 본인이 이렇게 간절하게 안아서 옮겨준다는데 더 사양하기도 좀 그랬다. 발도 아팠고.

라비린은 장담대로 가뿐하게 오드리를 들어올렸다. 좀 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자세라, 잔뜩 긴장했던 오드리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졌다.

“……휴가는 끝장난 거 같지?”

“뭐, 그렇지. 조만간 브란젤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거야. 소문이 도는 걸 보면 거기라고 아주 멀쩡한 것 같진 않지만…….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올해 리가 항구의 상점들은 수익이 아주 엉망이겠어.”

“그러게……. 아주 엉망이겠어.”

오드리는 라비린의 머리에 턱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스타일이 망가진다며 라비린이 구시렁거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도시 전체를 휘감던 음악은 끊긴 지 오래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 대신 썩은 내가 코를 가득 메웠다. 본의 아닌 휴가였어도 나름 즐거웠는데, 끝이 이 모양이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우릴 돌아본 게 맞을까……?”

“맞아.”

“왜 그랬지?”

“글쎄.”

오드리는 옷 위로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한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느낌이었다.

<4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