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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밤에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16/62)

chapter 15. 밤에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바일런 섀덤이 만들어낸 당구의 규칙들은 현재에도 유용하게 통용된다.」

브란젤은 여전히 살인적인 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강과 바다를 바로 근처에 끼고 있는 도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냉방 마법도구를 갖출 능력이 되지 않고, 더위를 이유로 일을 쉬지도 못하는 빈민들 사이에서는 더워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워커와 셰비언이 머무는 건물은 살인적인 더위가 무색하게 시원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냉방 마법도구를 일찍부터 갖춰놓은 데다 마법도구가 멈추면 즉시 수리할 능력이 있는 마법사가 둘이나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다보니 워커와 셰비언은 햇빛을 싫어하는 두더지처럼 집에 처박혀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방, 지하연구실, 방, 지하연구실……. 연구 때문에 본래도 잘 나오지 않았지만, 직접 마력구슬을 뿌리느라 한낮에 외출을 한 이후로는 더했다.

그러나 연구가 벽에 부딪치면서 셰비언은 지하연구실보다 방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산산조각 난 메시지 장치의 잔해를 쓸어 담으며 실패를 곱씹고 있노라면, 지금 치우는 게 버려야 할 잔해인지 박살난 자존심인지 구분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약해진 마음은 몸에도 영향을 줬다. 보는 사람마다 겨울요정처럼 아름답다 말하던 얼굴에 그늘이 졌고, 음식을 잘 넘기지 못해서 늘 걸치고 다니던 로브가 헐렁해졌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밤새 침대에서 뒤척이는 날들이 늘어갔다.

반면 워커는 셰비언보다 상태가 나았다. 강철새를 연구하며 보낸 시간 동안 이미 무수한 실패를 경험했던 게 약이 되었다. 셰비언이 없는 지하연구실에서 온갖 새로운 시도를 궁리하는 게 요즘 그의 일과였다.

이런 상황을 몰랐던 이디케는 식사가 될 만한 주전부리를 한 바구니나 사왔다가 당혹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셰비언을 찾았다. 대식가인 그의 먹성을 고려해서 큰 바구니 하나를 전부 채워왔는데 먹을 사람이 없다니 곤란한 일이었다.

“왜 혼자 있어요? 셰비언 씨는?”

“아아……. 셰비언은 방에 있어요. 자꾸 실패하니까 좀 우울해진 모양이이에요. 그래도 뭐, 실패야 마법사의 숙명 같은 거니까 금방 일어날 거예요. 근데 손에 들고 온 거 뭐예요? 먹을 거? 맛있는 냄새 나는데, 설마 난 냄새만 맡게 할 거 아니죠?”

“안 그래도 먹으라고 사온 거예요. 일리아가 기껏 식탁을 차려놔도 먹는 사람이 없다며 나한테 하소연을 했다고요. 두 사람, 뭐 먹고 살긴 해요?”

“그럼요, 먹죠. 내 단골음식점이 얼마나 많은데요. 근데 일리아? 그게 누군데 당신한테 가서 하소연을 해요?”

“당신이 쓰는 1층 청소해 주는 하녀 이름이 일리아예요……. 인사를 그렇게 했으면서 아직도 이름을 못 외웠단 말이에요?”

이디케가 기막혀 하든 말든, 워커는 바구니 안의 파이를 해치우는 데 더 열을 올렸다. 집안 청소해 주는 하녀 이름이 일리아든 이리아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 이름을 외울 정신이 있으면 설계도를 한 번 더 들여다 볼 것이다.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이디케는 이마를 짚고 끓어오르는 화를 삭였다. 무슨 말을 듣는대도 고칠 생각이 없는 게 훤히 보이는데 잔소리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해봤자 심력이나 닳고 입만 아프지. 단골음식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한편 워커는 그새 손바닥만 한 파이를 해치우고 다음 파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디서 사온 건지 궁금할 정도로 맛있는 파이였다. 설탕에 절인 과일을 듬뿍 넣은 단맛이 딱 만탈락에서 먹던 그대로였다.

“어디서 산 거예요? 엄청 맛있는데.”

“알려주면 또 일리아가 해놓은 음식은 안 먹고 파이만 사다 먹으려고 그러죠? 내가 당신을 어디 한두 해 보는 줄 알아요? 이건 간식이니까 가끔만 먹어요.”

“와, 치사하다. 무슨 맛집을 혼자서만 알려고 해.”

“어차피 알려줘 봐야 못 사먹어요. 아주머니가 너무 더워서 파이 못 굽겠다고 당분간 문 닫는댔어요.”

“우워어……. 내 단골집도 절반은 문 닫았는데…….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이거 너무한 거 같아요. 만탈락도 덥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야 덥기는 만탈락이 더 덥겠지만, 거긴 더위 대비가 브란젤보다 훨씬 더 잘되어 있잖아요. 워커, 제발 입에 음식물 있을 땐 말하지 마요. 나 안 주고 혼자 다 먹어도 되니까 그렇게 손짓하지도 말고요.”

이디케도 먹으라며 요란하게 손짓하던 워커가 잠잠해졌다. 이디케는 얄미운 볼따구를 확 꼬집어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지하연구실을 본격적으로 둘러보았다.

난데없이 마력구슬을 떠맡아 브란젤 곳곳을 돌아다닌 날 이후로는 되도록 오지 않으려 노력하던 곳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난리인 걸 보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집은 엉망이어도 연구실은 깔끔하던 과거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눈 닿는 곳마다 메시지 장치의 파편이 나뒹굴고 꼬깃꼬깃한 종이뭉치가 책상 아래에 가득했다. 심지어 강철새의 날개를 손가락으로 쓱 쓸어보자 새카만 먼지가 묻어나기까지 했다.

“시험비행 나간 지 한참 됐나 봐요.”

“아무래도 메시지 장치에 들이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워커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스레 대꾸했지만, 그가 강철새에 가진 정성과 집착을 익히 알고 있던 이디케에게는 놀랍기 짝이 없는 대답이기도 했다. 아무리 메시지 장치가 급해도 그렇지, 워커가 강철새를 손에서 놓다니 말이다.

“당신에게 강철새보다 우선해서 연구하는 게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급하대서 급하게 작업하는 건데 지금 시비 걸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놀라워서 그러죠. 이제까지는 없었던 일이잖아요.”

워커는 제게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매정한 뒤통수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도 빼먹은 것 하나 없이 단정한 차림은 정말로 이디케다운데, 그런 그녀가 뱉는 ‘그냥’이라는 단어는 지독히 낯설었다.

‘앞뒤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혹시 무슨 일 있나?’

입맛이 뚝 떨어졌다. 좀 전까지 입을 기쁘게 하던 달콤함이 순식간에 씁쓸함으로 바뀌고 나른하게 풀려 있던 신경이 한껏 경계심을 가지고 곤두섰다.

“이디케, 여긴 왜 왔어요? 설마 파이 가져다주러 온 건 아닐 테고.”

“…….”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도 얘길 해줘야 대비를 하죠. 난데없이 물벼락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디케가 뒤돌아섰다. 보기 드문 무표정이 워커의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손에 쥔 파이 조각이 우그러드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아가씨께 보고를 올렸어요.”

“보고? 아직 보고할 만한 수준이 안 되는데 무슨 보고를 해요?”

“이대로라면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거란 보고를 올렸죠. 계속해서 손해만 보다가 다른 선택지마저 없어지기 전에 손을 떼는 게 좋겠다고요.”

“이디케, 정말이지 당신은 뭐가 그렇게 급해서……!”

“나는 항상 이랬어요. 그게 내 일이고요. 내가 예외를 두는 건 저 강철새 딱 하나였다는 걸 잊었나 보죠?”

서늘하게 식은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묵직하게 채웠다. 워커는 반론을 늘어놓는 대신 짜증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며칠 전, 워커와 이디케는 크게 말다툼을 했다. 이디케는 장치를 완성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이제 그만 다른 쪽을 생각하자고 했고, 워커는 이 정도는 개발 과정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한 실패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개처럼 물고 뜯으며 더 싸울 수도 있었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기에 납득한 거라고 여겼는데, 아예 다른 쪽으로 수를 썼을 줄이야. 이디케의 의견을 중하게 듣는 오드리의 경향을 생각하니 입에 침이 말랐다.

“내 의견만 보낸 건 아니에요. 워커 당신의 의견도 분명히 전했어요.”

“내가 했던 말?”

“비마법 전문가가 필요하다면서요. 비마법 전문가만 있으면 지금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완성할 수 있다며, 마법사가 둘이라서 느린 거라고 열변을 토했잖아요. 난 그 얘기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썼는데 혹시 그게 거짓말이었다고 말할 건가요?”

이디케가 문득 의심을 할 정도로 워커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까칠해진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한 워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은 아니죠. 하지만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그 비마법 전문가의 실력이 적어도 사하스바티 정도는 되어야 할 거라고 말이죠. 그가 없는 지금은 이 속도가 최선이라고요. 몇 번이고 말하지만, 메시지 장치는 기존의 비마법도구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로 움직여요. 그걸 파악하고 개선할 정도로 창의력과 응용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선 그저 방해만 될 뿐이에요.”

“그 이야기도 첨언했어요.”

워커의 귀에 이디케의 대꾸는 어쨌거나 말은 전했으니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들렸다. 비마법 전문가 영입은 워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다지 현실성이 없는 방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사하스바티 수준의 실력자, 그것도 이런 민감한 일을 맡길 수 있을 만한 사람을 갑자기 어디서 구해오느냔 말이다.

이디케를 바라보는 워커의 눈동자에 원망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당신은 예전부터 메시지 장치를 싫어했죠.”

“그럴 리가요. 메시지 장치는 정말 획기적인 발명품이에요. 아가씨의 어릴 적 꿈을 이룰 수 있을 만한 물건인데, 내가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요? 상황이 나빠서 진득하게 돈을 투자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일 뿐이죠.”

“이러나저러나 연구를 접자는 말이잖아요. 내가 바본 줄 알아요?”

“글쎄 나는 그런 논조로 쓰지 않았단 말이에요. 비마법 전문가만 구하면 된다고 분명히 적어 보냈다니까요. 아가씨께서 타우레드의 후계자와 함께 휴가를 가셨는데 거기에 좀 기대를 걸어보자고요!”

워커가 주섬주섬 일어나 손에 묻은 파이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손때 탄 연습장을 꺼내고 연필과 만년필을 챙겼다. 책상 서랍에 박아두었던 마력구슬도 주머니에 넣었다. 거기에 마법사 로브를 걸치고 챙 넓은 모자까지 쓰니, 꾀죄죄한 꼴이라도 바로 외출할 만한 상태가 됐다.

워커가 아예 대화를 끊어버릴 조짐을 보이자 나름 희망적으로 보고서를 마무리했던 이디케는 그만 당혹스러워졌다.

“아니, 이 더위에 어딜 가려고 옷을 챙겨 입어요? 마법도구는 뭘 그렇게 챙기고?”

“답장 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 아녜요. 그 사이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거예요. 혹시 알아요? 노력을 가상히 여긴 포모스가 내게 축복을 내려줄지?”

“그 전에 하랄이 당신을 화덕에서 구워지는 빵처럼 구워버릴걸요.”

“구워지기 전에 페즈날이 하랄의 멱살을 잡기를 기도해야겠네요. 파이 잘 먹었어요.”

워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연구실을 나왔다. 이디케가 화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 셰비언의 방문을 두드렸다.

“셰비언! 셰비언! 야! 문 좀 열어봐!”

“……뭐야?”

워커가 한참을 두드리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소음을 견디다 못해 문을 연 것이니 셰비언의 표정은 아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겨울요정이 아니라 칼레이가 현신했다고 해도 믿을 만한 분위기였지만, 워커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셰비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야, 나가자.”

“뭔데, 갑자기!”

“우리가 계속 실패하는 게 마법망 안정이 균일하게 안 돼서 그런 거잖아? 어느 땐 잘되고 어느 땐 안 되고 그러는 거 말이야.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그게 아무래도 마력구슬의 수식보다도 지역적인 문제 쪽이 더 큰 것 같단 말이지!”

당장이라도 워커를 걷어찰 것 같던 셰비언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는 문틀에 기대어 서서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워커가 메시지 장치의 파편을 쓸어 담으며 생각해 왔던 가설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역에 따라 마법도구의 평균 수명이 차이 나잖아. 브란젤에서는 일 년을 쓸 마법도구가 만탈락에서는 반년이면 망가지는 것처럼 말이야. 혹시 그게 지역마다 마법망 상태가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지역에 따라 마법도구의 수명이 다르다고?”

워커는 의아함이 가득 담긴 질문에 와락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마법사라면 다들 상식으로 취급하는 얘기인데, 누가 용 아니랄까 봐 이렇게 아는 게 없다.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너무 귀찮았기에, 그는 대충 얼버무렸다. 정말로 궁금하면 알아서 책이라도 뒤져 보지 않겠는가.

“있어, 그런 게. 아무튼 지역마다 마법망의 상태가 다르다고 가정하면, 브란젤 내에서도 사소하게나마 그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당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지하연구실을 기준으로 작업한 마력구슬의 수식이 주변의 마법망과 맞질 않아서 제 역할을 못하는 거 아닐까?”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는데……. 그래서 뭐. 나가서 직접 확인해 보자고?”

“그렇지. 웬만하면 네가 훌훌 털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이 좀 급해졌거든. 아무래도 이디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모양이야.”

사정 설명을 들은 셰비언의 낯에 착잡함이 어렸다. 안 그래도 박살난 상태였던 자존심에 굵은 소금이라도 뿌려진 듯 속이 따끔거렸다. 눈치를 보다 슬쩍 손목을 놓은 워커가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 이디케가 좀 괘씸하더라도 너무 화내지는 말고. 그게 이디케의 일이니까.”

“……도움이 될 거라고 장담했던 일이 선택지를 줄이는 꼴이 됐으니 그보다 더한 말을 써 보냈대도 감수해야지. 잠깐 기다려,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야, 지금도 멀쩡한데 대충 로브만 걸치고 나가면 되잖아. 아가씨 계실 땐 주구장창 로브만 뒤집어쓰고 다니던 게 새삼 뭔 옷을 따져?”

“시끄러워.”

마음이 급한 워커가 문을 붙들고 항의했지만 셰비언은 매정했다. 워커는 닫힌 문 앞에서 툴툴대며 셰비언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바가 있어 벌컥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마침 상의를 벗는 중이었던 셰비언이 소리를 듣고 홱 고개를 돌렸다. 잔뜩 구겨진 미간이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가 문 열래?”

“셰비언, 이왕 챙겨 입을 거면 모자 꼭 써. 햇볕 엄청 뜨거워!”

“그 머리통 당장 안 치우면 확 잘라 버린다.”

“아이고 무서워라…….”

욕을 한 것도 아닌데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찌나 무서운지, 자칫하면 진담이라고 믿어버릴 것만 같다. 워커는 냉큼 문을 닫고 오돌토돌하게 소름이 돋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용이면서 웬 흉터가 그리 커? 아, 용이라서 그 부상을 입고도 안 죽고 산 건가?’

생전 햇볕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흰 등의 옆구리 부근을 장식하고 있던 흉터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마 부상을 입었을 당시엔 몸이 반쯤은 갈라질 정도로 큰 상처였을 게 틀림없었다.

‘근데 용이 그런 상처를 입을 일이 대체 뭐가 있지? 혹시 용끼리 싸우면 저렇게 싸우나?’

동족끼리 피터지게 싸운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떠들어서 뭐가 좋을까. 셰비언은 워커에게 완벽한 비행마법과 공간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종족을 증명하고 난 뒤로 그에게 어떤 말도 해준 적이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던 워커 역시 그 이상을 요구한 일이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흔적만으로도 섬뜩해질 정도로 큰 흉터를 보고나니 온갖 상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의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을 옛 마법이 세상에 남아 있던 시절의 싸움은 대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퐁퐁 솟아올랐다.

‘마법으로도 상대를 공격하는 게 가능했을까? 가능했으니까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걸 텐데 도무지 상상이 안 가네. 마법 쓰겠다고 시간 끄는 동안 몸으로 덤비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은데……. 역시 마법이 아니라 몸으로 싸운 거겠지?’

마법이 아니라 몸으로 싸운 거라면 그건 또 어떻게 싸운 걸까. 지금 보는 것처럼 인간의 형태를 하고 검을 휘둘렀을까, 아니면 다른 종족의 모습을 하고 싸웠을까. 혹시 완벽한 용의 모습으로 물고 뜯은 건 아닐까.

하등 쓸데없는 궁금증인데, 워커는 셰비언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이런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워커의 당부대로 구겨진 모자일망정 꺼내 쓰고 나온 셰비언이 워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워커?”

“아, 깜짝이야!”

“뭐야, 뭔 생각을 하느라 나온 줄도 몰라?”

“셰비언, 너 옆구리는 어떻게 다친 거야? 마법? 몸싸움? 그도 아니면, 그냥 사고?”

이디케가 늘 한탄하듯이, 워커는 제 궁금증이 급해지면 상식 같은 건 저 뒤로 제쳐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마법사라는 직종의 인간들이 죄다 그렇다지만 상대가 용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는 걸 보면 참 어지간한 성격이었다. 셰비언이 질린 표정으로 혀를 찼다.

“……넌 나한테 상식 없다고 뭐라고 할 게 못 돼.”

“뭐라는 거야. 야, 난 빨리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면 몇날 며칠 그 생각만 한단 말이야. 당장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쌓였는데 물어봐서 해결되는 거면 빨리 물어봐야 효율이 오르지.”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인데, 거기에 예의와 상식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게 문제다. 셰비언은 자신에게 제발 상식을 갖춰 달라 호소하는 이디케의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고 말았다.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몸싸움하다가 다친 거야. 참고로 내가 이겼어.”

“오오……. 상대도 용?”

“그럼 인간이겠냐. 대답해 줬으니까 됐지? 빨리 나가자.”

대답이야 해줬지만 셰비언이 어찌나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지, 워커의 부실한 눈치가 오랜만에 제 기능을 했다. 그는 가장 큰 의문을 해결한 것에 만족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질문들을 꿀꺽 삼켰다.

‘하도 인간 같아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자꾸 깜빡한단 말이지.’

셰비언이 인간 흉내를 잘 내는 건지, 아니면 인간이 마법에 익숙해지며 용을 닮아간 건지. 선후를 따질 수 없는 문제였지만 워커는 인간이었다. 그는 셰비언이 지나치게 인간과 닮은 게 문제라고 내심 혀를 차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쨌거나 방에 박혀 있던 셰비언도 끌어냈겠다, 지겨운 답보 상태에서 벗어날 연구 생각을 하자 발걸음이 그저 가볍기만 했다. 그러나 지하연구실에서 받아줄 사람 없는 화를 쏟아내다 지친 이디케와 현관 앞에서 마주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 이디케. 이제 가요? 아까 갔을 줄 알았는데.”

“이…….”

“파이는 두고 가도 되는데요.”

“……어휴. 셰비언 씨, 파이 먹어요. 다 먹어요. 이거 맛있는 거니까 워커한테는 한 입도 주지 말고요!”

이디케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파이 바구니를 셰비언에게 떠맡기고 사라졌다. 셰비언은 조금 전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눈곱만큼도 몰랐지만, 평소의 둘을 생각하면 누구의 편을 들어줘야 할지는 명확했다.

셰비언은 호시탐탐 파이를 탐내는 워커에게서 충실히 파이를 사수했다. 이디케의 당부가 없더라도 나눠주기 싫을 만큼 맛있는 파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위에 녹초가 되어 광장 벤치에 널브러진 피올과 유렌을 만났을 땐 기꺼이 남은 파이 조각을 나눠주는 인심을 발휘했다. 존경받는 치안대, 백합을 감은 검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불쌍한 꼴을 하고 있는 탓이었다.

유렌은 파이를 받자마자 아구아구 먹어치웠지만, 피올은 몇 입 먹다말고 먹을 힘도 없다는 듯 아예 벤치에 드러누웠다. 그 상태에서 때탄 망토로 얼굴을 덮기까지 하니, 영락없이 길바닥에서 먹고 자는 노숙자였다.

“나 참, 둘 다 꼴이 왜 이래요? 거지가 친군 줄 알고 인사하겠네.”

“집에 못 들어간 지가 며칠이나 됐는지 기억도 안 나서 이럽니다. 피올, 넌 기억나?”

“말 시키지 마…….”

“그럼 셰비언 씨가 주는 파이 내가 다 먹는다. 그래도 되지?”

“씁,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인마. 염병, 굶어봤자 나만 힘들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꾸물대던 피올이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손에 쥐고만 있던 파이를 꾸역꾸역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건 분명 식사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그저 식사라고 부르기엔 모자라게 느껴질 정도로 우악스럽다 못해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피올이라면 모를까, 낯만 익힌 유렌과는 마주보고 있기가 부담스러웠던 워커가 겁을 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반면 그동안 치안대원들과 나름 친분을 쌓아왔던 셰비언은 오히려 피올을 손가락질하며 유렌에게 물었다.

“유렌 씨, 보티안 씨가 좀…… 많이 이상해진 거 같은데. 왜 저래요? 이 더위에 망토 걸치고 다니는 게 힘든 건 알겠는데 그게 저렇게 될 정도인가?”

“망토도 망토지만, 그보다 더한 게 있어서 그렇죠. 말했잖아요, 집에 못 들어간 지 얼마나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유렌은 새 파이를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치안대원들이 겪고 있는 이야기를 하려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요즘 시체가 자주 발견되거든요. 지금은 다페이 거리에 다녀오는 길이고.”

워커와 셰비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브란젤만 한 대도시에서 사람 죽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러는가, 하는 태도였다.

브란젤은 치안이 상당히 좋은 편이고 정비도 아주 잘되어 있는 도시였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어두운 부분도 분명히 존재했다. 서쪽 구역에 있는 다페이 거리가 대표적이었다. 꿈을 갖고 브란젤을 찾아왔다가 좌절한 이들은 빵 한 조각을 위해 도둑질도 강도질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 되어 다페이 거리를 비롯한 뒷골목에 정착했다.

어디 그뿐일까. 일주일에 한 번 발행되는 신문들의 부고란에는 신원미상의 사망자를 다루는 부분이 아예 따로 나눠져 있었고, 브란젤의 성벽 바깥에는 비석에 새길 이름도 없는 묘들이 모인 구역이 있었다.

“근데요? 거기 본래 사람 많이 죽지 않나? 신문에서 특집기사로도 자주 다루던데. 워커, 너도 저번에 같이 봤잖아.”

“맞아. 같이 봤었지. 아, 여름이라 싫은 거 아냐? 시체가 빨리 부패하잖아.”

“아하……. 그럴듯한데. 신고가 늦으면 끔찍한 꼴을 보겠어. 유렌 씨, 그래서 그런 거죠? 비위 상해서?”

유렌은 사정 모르는 마법사들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여름에 시체 확인하는 일을 하며 비위 상하는 건 맞는데, 치안대원으로 일하면서 그런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든 건 시체에 낀 구더기 따위가 아니었다. 사실 다페이 거리처럼 워낙 험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곳에서는 웬만한 걸로는 치안대원을 부르지도 않았다. 거리의 주민들 사이에 형성된 암묵적인 규칙대로 알아서 뒤처리를 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럼에도 치안대에 신고를 했다는 건 그들의 규칙에 어긋나는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원한도 명분도 없는 살인이 이어지는데 범인을 특정할 수가 없다거나, 외부인이 개입된 흔적이 역력해서 직접 손을 쓰기엔 좀 부담스럽다거나.

그걸 알고 있는 피올과 유렌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다페이 거리에 나갔다가 상상이상으로 끔찍한 꼴을 맞닥뜨렸다. 심지어 위의 두 가지 경우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건이었다.

“마법사들은 머리가 좋다는데 그거 다 헛소린가 보죠. 며칠이나 집에 못 들어갔다니까 왜 자꾸 까먹어요? 비위 문제가 아니라, 시체 상태가 좀 이상해서 그래요.”

“시체가 다 시체지 뭘……. 왜, 햇볕에 바싹 마른 도마뱀 꼴이기라도 했어요?”

“정말 도마뱀 같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살면서 엉덩이에 비늘 돋은 꼬리가 달린 인간은 처음 봤거든요. 길이도 엄청 길어서 나는 다리가 셋인 줄 알았어. 시체라 망정이지, 한밤중에 만났으면 내 손으로 죽여 버렸을……. 씨발, 말하니까 또 생각나잖아.”

유렌은 역겨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깨진 머리쯤이야 별거 아니었지만, 짐승이 파먹기라도 한 듯 헤쳐져 주변에 흩어진 내장은 별꼴을 다 본 치안대원에게도 충분히 별거였다.

게다가 쩍 벌어진 다리 사이로 늘어져 있던 그것. 엄지손톱만 한 비늘이 빽빽하게 달리고 끝은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형태가 아무리 봐도 파충류의 꼬리였다. 만들어 붙인 게 아니라 시체의 몸에 달려 있는 신체 일부분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밀려오던 역겨움이 어찌나 크던지.

다페이 거리의 주민들은 시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유렌과 피올을 붙들고 그 사람이 얼마나 평범했는지,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지를 필사적으로 늘어놓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람이었어요.’

‘병치레가 잦아서 일을 자주 그만두긴 했어도 성실했습니다.’

‘바로 이틀 전에도 같이 목욕탕엘 갔었어요!’

유렌과 피올은 그런 주민들의 하소연을 매정하게 쳐 내다 원망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걸 들어주는 건 치안대원의 일이 아닌 데다가, 구역질을 참는 것에 이미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탓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크고 징그러운 꼬리를 단 시체는 처음이라도, 인간의 신체기관이 아닌 것들을 가진 이상한 시체에 대한 신고가 브란젤 곳곳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이마에 눈이 달린 시체, 피부가 먹물처럼 검은 시체, 등에 깃털을 덕지덕지 단 시체……. 심지어 목에 아가미 비슷한 기관이 있는 시체도 있었다. 사인은 가지각색이었지만 주변인들의 증언은 대체로 비슷했다.

자주 아팠거나 타고난 병이 있던 사람이되, 죽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떤 이상 조짐도 없이 멀쩡했다는 것. 아침에 웃는 낯으로 이웃과 인사하고 저녁 때 시체로 발견된 어떤 사람은 그 짧은 사이에 팔이 네 개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치안대는 물론이요 보건국까지 난리가 났다. 병이라기엔 그 증상이 너무나 기괴하지만 괴담으로 일축하기엔 증거가 너무 명확했으니까. 보건국이 의과대학과 협력해 시체를 조사하는 사이, 치안대원들은 집에 들어갈 시간도 없이 순찰 뺑뺑이를 돌았다.

“그럼 집에 못 들어갔다는 게…….”

“아침에는 멀쩡하다가 점심에 뒈져서 저녁에 발견되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순찰 돌면서 찾아내라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염병,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치안대가 제일 만만하지. 명예고 나발이고 입만 번지르르한 새끼들 같으니.”

믿을 수 없는 얘기에 워커와 셰비언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피올이 유렌의 말에 한 마디 반론도 없이 죽상으로 파이를 씹고 있는 걸 보면 과장은 좀 있을지언정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그럼에도 셰비언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신문에선 아무 말도 없었는데요.”

“당연하죠. 신문사며 기자며 진즉에 다 압력이 들어갔는데 어떤 모지리가 그걸 기사로 낼까. 아무리 특종이 좋아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거죠.”

“그런데 우리한테는 왜 알려주는 거죠? 어디 가서 수군수군 말이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나는 나름대로 믿고 얘기해 준 건데, 죽고 싶으면 어디 가서 떠들지 말고 지금 당장 얘기해요. 안 그래도 피곤한데 일 늘어나면 짜증나니까.”

늘 나른한 고양이처럼 느긋한 표정을 짓던 얼굴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얼굴이면서도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자세를 잡는 모습이, 단순히 말뿐인 경고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위협적인 유렌의 태도에 겁을 먹은 워커가 슬그머니 셰비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셰비언이 물러서지 않으니 이내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옆에서 내내 방관하고 있던 피올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유렌, 내가 너 그 따위로 말하고 다니지 말랬잖아. 하여간 너는 입이 말썽이야. 그 못돼 처먹은 입버릇 언제 고칠래?”

“내가 뭘. 틀린 소리 한 것도 아닌데.”

“틀린 소리지, 인마. 내가 옆에 있는데 어디서 칼부림하겠단 말을 그렇게 쉽게 꺼내? 너야말로 죽고 싶냐? 칼레이의 마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한번 시켜줘?”

피올이 실력 행사를 할 조짐을 보이자 유렌이 입을 삐죽대면서도 물러섰다. 산트렘의 기사였던 피올의 실력은 치안대 내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것으로, 그가 진심으로 나서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치사한 새끼.”

“닥쳐. 억울하면 연습이나 더 해.”

꿍한 유렌이 투덜대든 말든 피올의 관심은 셰비언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괜히 셰비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먼지를 터는 시늉을 했다. 기분 풀라며 씩 웃는 얼굴이 개구졌다.

“저 멍청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셰비언 씨, 돌아다니다가 언뜻 봐도 이상해 봬는 놈을 발견하면 놓치지 말고 알려줘요. 치안대원은 아무래도 숫자에 한계가 있어서 동시에 모든 지역을 챙길 수가 없거든요.”

“이런, 안타깝네요. 힘이 돼주고 싶긴 한데, 우리는 잠깐 햇볕이나 좀 쬘까 하고 나온 거라서 말이죠.”

“에이, 그럴 리가.”

피올이 셰비언의 어깨에 자연스레 손을 올리곤 옷깃을 정리했다. 잘 하면 이마가 닿겠다 싶을 정도로 바짝 다가붙은 채였다. 그리곤 다른 사람은 들리지도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나는 말이죠, 덩치에 맞지도 않는 큰 가방을 들고 돌아다니는 이디케를 보고도 못 본 척 해준 적이 있단 말입니다.”

“그…….”

“얼마 뒤엔 여기 두 사람이서 같이 브란젤 전역을 돌아다녔죠. 그것도 이디케와 똑같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말입니다. 셰비언 씨, 당신은 얼굴이 너무 튀어요. 조금만 수고를 들이면 행적을 알아내기가 아주 쉽죠.”

순간, 일대의 마법망 전체가 흔들렸다. 마법망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피올이나 유렌은 그저 셰비언의 안색을 살피기에 바빴지만, 마법사인 워커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섬뜩한 느낌에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용은 이런 것도 돼? 마법의 주인 어쩌고 할 땐 솔직히 좀 비웃었는데 우습게 볼 게 아니잖아…….’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끔찍한 더위도 더위지만 그늘이랄 게 별로 없는 광장이다 보니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광장 주변의 가게들도 절반은 문을 닫은 채였다. 잠깐이나마 마법망이 요동쳤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듯했다.

그러나 마법망의 상태에 민감한 게 어디 마법사뿐일까. 광장 곳곳에 세워진 가로등은 물론이고 광장 지하의 상하수도 시스템, 광장 주변 가게들이 갖추고 있을 수십 가지 마법도구…….

‘이 부근의 마법도구는 전부 다 고장이다. 틀림없어.’

안 그래도 도시의 기반 시스템이 자주 고장 나는 통에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왕궁마법사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 거 아니냐는 기사가 신문마다 실렸다. 그런 때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워커는 허옇게 질린 낯으로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한 걸음만 더 걸으면 셰비언이 있고 그의 옷자락도 잡을 수 있는데,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제발 진정하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엄두가 안 났다.

참 마법사답지 않다고 생각했던 넓은 어깨가, 인간 같지 않은 광택을 자랑하는 은발이, 미동 없이 조용히 서 있는 뒷모습이 그저 무섭고 낯설었다. 아무것도 몰라서 태연한 치안대원들이 차라리 부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워커의 불안을 알 리 없는 피올은 셰비언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당신들이 브란젤을 돌아다니며 뭔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아가씨를 위한 거겠죠. 굳이 캐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좀 도와줘요. 브란젤이 뒤숭숭해지면 좋을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다고. 어차피 브란젤 전체를 돌 거 아닙니까.”

“……그거 참 맞는 말이긴 한데…….”

셰비언의 동공이 순간 세로로 가늘어졌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눈썰미 좋은 피올조차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아주 잠깐이었다.

“말하는 꼴이 꼭 협박하는 거 같아서 들어주기 싫어지는 걸 어쩌겠어요.”

“하하, 셰비언 씨. 그간 우리 나름대로 잘 지내지 않았어요? 서로 좋게 협조합시다. 말이 좀 거칠었던 건 미안해요. 유렌 녀석이 말했다시피 워낙 험한 꼴을 보고 온 직후다 보니까 내가 예민했어요.”

피올의 사과는 아주 재빨랐다. 그는 셰비언의 얼굴을 스쳐간 냉기를 포착하자마자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낮췄다.

셰비언은 겨우 그것만으로도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솟아오르던 불쾌감이 잠잠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리 메시지 장치가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지, 대체 얼마나 예민해져 있었던 건지. 겨우 말 몇 마디에 자제력을 잃었다는 걸 깨닫고 나자 민망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으……. 나도 미안합니다. 연구가 마음처럼 잘 진행되질 않아서 초조했어요. 좋아요, 협조하죠. 언뜻 봐도 이상해 보이는 놈이라는 건 대체 뭐죠?”

“협조 감사합니다. 아침에는 팔이 두 개였는데 점심엔 팔이 네 개였으니, 그 사이쯤엔 팔이 세 개지 않겠냐 싶어서 한 말입니다. 아니면 얼굴에 비늘이 돋았다든지, 털이 없을 곳에 털이 났다든지,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생겼다든지.”

“……그런 시체가 진짜 있었다는 거예요?”

“예. 보건국에서 시체 수집은 그만하고 산 놈을 잡아오라고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살아있는 걸 봐야 자기들도 뭘 어떻게 해보지 않겠느냐고 아주……. 어휴.”

피올이 오만상을 짓고 손사래를 치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살아서 돌아다니는 걸 봤다는 사람도 없이 시체만 덜렁 남아 있는 꼴이 우리도 황당해 죽겠는데 바랄 걸 바라야지, 진짜. 휴가지에서 강제로 끌려와서 짜증나는 건 알겠는데, 치안대라고 뭐 상황이 달라야 말이죠. 이렇게 부려먹을 거면 사람이나 많이 뽑아주든가.”

“맞아, 맞아. 썩을 놈들, 하여간 치안대가 제일 만만하다니까! 왕제전하께서 수장이면 뭐 해, 허허 웃기만 하는 분이신데. 셰비언 씨, 이왕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확실히 해주세요. 나나 피올 놈이나 제발 집에 가서 마음 편히 씻고 잠 좀 자게.”

유렌이 피올의 하소연에 뒤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더위와 피로에 찌든 얼굴로 거의 빌다시피 부탁하는 모습이 어찌나 가여운지, 워커는 물론이고 셰비언의 동정심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러죠. 그나저나 계속 이렇게 있어도 돼요?”

“가야죠……. 젠장, 진짜 들어가기 싫다.”

안 그래도 보건국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쪼아대는 통에 사무실 분위기가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시체 한 구가 또 추가됐다는 소식을 들고 돌아가려니 두 사람의 입에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뭉개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피올과 유렌은 침울한 표정을 하고도 남은 파이를 악착같이 먹어치우고 나서야 주섬주섬 돌아갈 채비를 했다. 검을 챙기고 망토를 정돈하는 손길이 세상 느렸다.

“그렇게 가기 싫어요?”

“차라리 구운 달걀이 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런.”

마법사들이 돈 안 드는 동정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두 치안대원은 영 도움 안 되는 동정을 어깨에 가득 얹고 발을 질질 끌며 그 자리를 떠났다.

워커는 치안대의 망토가 시야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로브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마법도구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늘 갖고 다니던 풍향, 풍속 측정용 마법도구는 물론이고 테스트 겸 작게 만들어 휴대하던 냉방 마법도구까지 싹 망가진 걸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셰비언. 이거 어쩔 거야?”

“뭘?”

“네가 아까 마법망을 뒤흔드는 바람에…… 이거 봐, 다 망가졌잖아.”

“……음.”

난처한 안색으로 고장 난 마법도구를 만지작거리는 셰비언은 워커가 익히 알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상식과 예의는 좀 부족해도 행동에 악의가 없어 미워하기 힘든 사람 말이다.

워커는 조금 전까지 바짝 얼어붙어 셰비언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건 까맣게 잊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제 이 대형 사고를 어쩔 거야? 이 일대의 마법도구는 전부 망가졌을 텐데.”

“주택가나 상점가도 아니고, 텅 빈 광장인데도 대형사고야?”

“이 땅바닥 아래에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장 오늘부터 우리 건물에 물이 안 나와도 넌 불평하지 마라.”

“그거 큰일이네.”

“야, 그렇게 남일 말하듯 하지 말고. 뭐 대책 없어? 아까 했던 것처럼 마법망을 다시 건드려서라도 어떻게든 복구시켜 본다든가.”

“그게 되면 메시지 장치를 예전에 완성했지.”

셰비언이 천연덕스러운 대답으로 워커의 속을 홀라당 뒤집어놓았다. 어차피 워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이 사태의 원인을 알지도 못할 테고, 마법도구 고장 난 거야 고치면 되는데 그게 뭐가 대수냐는 식이었다.

워커는 그런 그를 보며 이제껏 왕궁마법사들을 향해 실력도 없이 시키는 일만 하는 멍청이들이라고 비웃어왔던 지난날을 깊이 반성했다.

‘고치러 다니느라 바빠서 있던 실력도 다 까먹겠네……. 개인 연구는 개뿔.’

안 그래도 수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도시의 기반시스템을 관리하느라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 텐데, 거기에 이런 큰 짐을 지우다니. 어쩌다 카페 디노에서 만나거들랑 맥주라도 한 잔 사줘야 마음의 짐이 덜어질 듯했다.

하나 셰비언이 워커의 이런 속내를 알 리가 있나. 워커가 한숨을 쉬거나 말거나 그의 관심사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였다. 인간의 것이 아닌 기이한 신체기관을 단 채로 죽어 발견된다는 시체 말이다.

“그보다 워커, 그 팔이 네 개라든가, 꼬리가 달렸다든가 하는 시체 얘기 말이야.”

“그게 뭐. 진짜로 찾아보게? 브란젤이 얼마나 넓은데 그걸 찾아? 어차피 정말 기대하고 한 말도 아닐 텐데 신경 쓰지 마.”

“아니, 그게 아니라……. 넌 낯익다는 생각 안 들었어? 빠른 시간 내에 진행되는 신체변형과 뒤이은 사망이라는 양상이…….”

“셰비언, 마법사가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실험하거나 연구하는 게 금지된 건 벌써 이백년도 더 지난 얘기거든? 얼마나 철저하게 막았는지 그런 게 있었다는 기록만 남았지 자세한 연구 내용은 하나도 없어. 만탈락의 도서관에도 없으면 진짜로 없는 거야.”

워커가 정색을 하고 셰비언의 말을 막았다.

마법이 지금보다 더 융성하고 마법사도 넘쳐났던 시절, 일부 마법사들 사이에서 인간 신체의 변형에 대한 연구가 흥한 적이 있었다. 인간의 몸에 흐르는 수십 가지의 마력 중 쓸모 있다 싶은 종족의 마력을 골라내 신체 일부를 강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지하에서 암암리에 행해지던 연구가 세상에 발각됐을 때, 사람들의 경악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양심을 잊은 듯 잔혹한 실험 과정과 조악하고 끔찍한 결과물의 결합은 대중의 극렬한 분노와 증오를 샀고, 그들의 연구는 겨우 몇 줄의 문장만 남기고 불태워졌다. 그나마 남은 것조차 전부 왕궁마법사들만 이용하는 자료실에 들어가 있으니, 워커와 같은 민간인 마법사는 들여다볼 기회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그때의 충격은 남아 있지 않을지라도 인간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마법사인 워커 역시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어떤 미친놈이…… 아니, 미친 집단이 있어서 그 연구를 계속 해왔다고 쳐. 그래도 말이 안 되는 게, 그런 위험한 연구에 손을 대는 놈들이 성공작도 아니고 실패작을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시킬 만큼 허술하다고?”

“그럼 너는 마법의 개입 없이 그런 괴상한 것들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술술 말을 잇던 워커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이미 비슷한 짓을 저지른 전력이 있었다. 셰비언의 의심은 합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커는 도저히 마법사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법사 윤리강령 따위가 없던 시대에도 지하에서 몰래 진행했던 일이야. 요즘 시대에 그런 짓을 하다가 걸리면 제발 교수형으로 끝내달라고 비는 처지가 될 거라고.”

“그런 논리면 세상에 범죄가 없겠어. 안 걸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가 문제가 터졌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아?”

“합리의 문제를 따지자면 그런 연구 따위 하지 않는 게 제일 합리적이지. 마력의 계통마저 희미해진 요즘 시대에 신체 변형을 일으킬 정도로 마력을 분리할 기술이 있다? 출신이 어떻든, 과거에 뭔 짓을 했든 무릎 꿇고 모셔갈 곳이 널렸어.”

비마법 비행도구를 연구하겠답시고 좋은 조건 다 차고 어린 오드리에게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 바로 워커였다. 셰비언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워커가 연구의 합리성 운운하기엔 너무 양심이 없다 생각했지만, 정작 워커는 한없이 진지했다.

“설령 어떤 미친놈이 그 연구에 목숨을 걸었다고 쳐. 그 돈은 누가 대는데? 인간을 실험 재료로 쓰는 걸 은폐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대체 얼마일 거며, 나중에 성과를 낸다손 치더라도 그걸로 무슨 돈을 벌 거야?”

“으음……. 용병들은 좋아할 거 같기도 하고……?”

“기사도 전장에서 밀려나는 요즘 시대에 용병이 타깃이면 미친 거지. 그 타우레드 후작가도 비마법에 투자하는 세상인데.”

“…….”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걸 치안대라고 모르겠어? 분명 그쪽으로도 알아서 조사 들어갔겠지. 조만간 우리한테도 협조하라고 공문서 날아올지도 몰라.”

셰비언이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워커는 로브의 모자를 젖히고 목덜미를 적시는 땀을 닦아냈다. 휴대용 냉방 마법도구가 망가진 탓에 끔찍한 더위가 고스란히 들이닥쳤다.

“젠장, 테스트기 믿고 로브 입고 나왔는데 이게 뭐야. 더워 죽겠네.”

“어차피 테스트용이라 금방 망가질 거라고 해놓고 그걸 믿었어? 안이한데?”

“네가 같이 가는데 못 믿을 건 또 뭔데? 말 나온 김에 좀 고쳐 봐. 이 근처 가게들 전부 난리 났을 텐데 어디 들어가 쉴 곳도 없어.”

지은 죄가 있는 셰비언은 워커의 억지에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휴대용 냉방 마법도구를 받아 들었다. 마법망 전체를 건드려서 원하는 결과를 내는 건 불가능해도, 이런 작은 마법도구 하나 만지는 거야 쉬웠다.

“근데 진짜 별걸 다 만든다. 이런 게 효과가 있어?”

“없는 거 보단 백배 낫지. 마법으로 해결 가능하네 어쩌네 하지 마라, 마법도구의 의의는 마법사가 아닌 사람도 쓸 수 있다는 것에 있으니까.”

“뭐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셰비언은 막 마법망을 시각화 시키려던 동작을 취소했다. 쉴 새 없이 땀을 닦던 워커가 뒤늦게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아쉬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 고쳤으니까 받고 이제 일하러 가자.”

“마법의 주인이라더니 괜한 말이 아니네……. 나도 이거 개발엔 참여 안 해서 고치려면 한참 걸릴 건데 넌 어떻게 이렇게 뚝딱 고치는 거야?”

“마법망이 흔들려서 그런 거니까 그 부분만 건드렸어. 뭉그적대지 말고 당장 일어나, 할 일 많아.”

“어으 씨…….”

“마법망 상태 확인도 하고, 다니는 김에 보티안 씨 부탁대로 이상한 놈 안 보이나 살피기도 해야지. 네 말대로 마법사 탓이 아니면 뭔가 다른 원인이 있다는 건데 그냥 둘 수는 없잖아.”

“아이고…….”

더위에 시달린 잠깐 사이에 체력이 바닥이 된 워커가 죽는 소리를 했지만 셰비언은 가차 없이 그를 끌고 걸었다. 할 일이 많았다.

그렇게 워커가 셰비언에게 끌려다니며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치안대 사무실은 피올과 유렌이 들고 온 소식 때문에 분위기가 아주 침울해졌다.

“……꼬리?”

“예. 웬만한 장정 팔뚝만 한 꼬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도마뱀의 꼬리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는데, 은색 비늘이…….”

“됐다. 조금 있으면 보건국 놈들이 서류 꾸며서 들이닥치겠지.”

테이란은 까슬까슬하게 수염이 올라온 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는 목에 아가미가 달린 시체더니, 오늘은 꼬리라니. 방역부서 놈들이 난리 피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리가 항구에서 휴가를 즐기다 불려온 이후 제대로 잠을 자본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가 왕제로서 전통에 따라 카즈네 공작이 되고 치안대의 수장이 된 지가 이미 수십 년인데, 그 세월 동안 온갖 사건들을 다 접해보았지만 요즘처럼 기이한 사건은 처음이었다.

“쉬어라. 잠깐이라도 쉬어야 또 나가지.”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피올과 워커는 퇴근 소리는 꺼내볼 엄두도 못 내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 책상에 엎어졌다. 안 좋은 소식 때문에 사무실 분위기가 엉망이었지만, 쉬어야 또 나간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그들은 사무실 내에서 칼부림이 난대도 일어나지 않을 결심으로 눈을 감았다.

“……왕궁마법사장한테서는 답변이 왔나?”

“예. 말이 길긴 한데……. 요약하자면 왕궁마법사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데요.”

“개소리하고 있네. 관련 자료 남은 데가 왕궁밖에 없는데 어떻게 상관이 없어?”

“그런 딴짓을 할 시간이 없답니다.”

안 그래도 쌓인 서류가 산이 되어가는 책상에 두툼한 서류 한 철이 또 올라왔다. 왕궁마법사장이 보낸 것으로, 왕궁마법사들 개개인의 올 한 해 동안의 지난 일정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테이란은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서류를 넘기다 그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 서류대로라면 왕궁마법사들은 밥 먹고 잠 자는 시간을 뺀 나머지 전부를 일에 쏟아붓고 있는 셈이었다. 서류의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확인서가 소름끼치게 많았다.

매년 왕궁마법사 모집이 그렇게나 난항을 겪는 이유를 알 법했다. 이따위로 일이 많은데 어떤 마법사가 왕궁에 가려고 하겠는가. 숙식이 제공된다지만 상단에서 받는 돈에 비하면 그다지 대우가 좋은 것도 아닌데.

“있는 마법사 괴롭히지 말라고 그렇게 난리를 떨더니 괜한 말이 아니었군……. 그래도 본인이 직접 하지는 못하더라도 자료를 빼돌렸을 가능성이 있어. 그쪽에 대한 확인이 부족한데, 어떻게 된 거지?”

“자료 관리는 왕궁마법사 소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연락 넣어두었으니 곧 서류가 올 겁니다.”

“요청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준비 중이야? 느려터진 놈들 같으니.”

테이란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날밤을 새며 관련 자료를 확인 중인 문서관리부서의 직원들이 들었다면 억울함에 눈물을 흘렸을 말이었다. 평소 인원의 절반이 휴가 중인 상황에서 이만큼 하는 것도 대단한 거 아니냐고 말이다.

아무튼 증거도 뭣도 없는 상황에서 심증만으로 왕궁마법사들을 탈탈 털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치안대가 할 수 있는 건 끊임없이 순찰을 돌면서 현장을 잡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일뿐이었다.

치안대원들도 그걸 알기에 다들 입이 한 뼘은 나오고서도 불평불만 없이 일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성과가 없으니 사기가 쭉쭉 떨어졌다. 다들 낯빛이 어두컴컴했다.

테이란은 이를 벅벅 갈며 벽에 걸린 브란젤 지도를 노려보았다. 브란젤 외곽 곳곳, 시체가 발견된 장소마다 찍어둔 붉은 점이 많기도 했다. 하나 무덤가의 비석처럼 서서 지도를 노려본다고 뭐가 바뀔까. 그는 책상에 팽개쳐두었던 모자를 눌러쓰고 지팡이를 챙겼다.

“나 잠깐 나갔다 온다.”

“예?”

“보건국에서 사람이 올 겁니다!”

“대장님!”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울렸다. 평소에는 테이란이 사무실에 오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던 치안대원들이지만, 보건국에게 시달리는 요즘 같은 때에는 그만큼 든든한 방패도 없었다.

테이란이라고 그런 속내를 모를까. 그는 귀찮다는 듯 지팡이를 휙휙 휘둘러 부하들의 입을 막았다.

“보건국에서 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대며 꽥꽥대거든, 하도 시달린 나머지 내가 직접 순찰 나갔다고 해라.”

“그 말을 퍽이나 믿겠습니다.”

“그럼 그놈 이름 알아놔. 그리고 나한테도 다리와 입이 달렸다는 사실을 말해주면 좀 닥치겠지.”

무슨 말을 듣든 마냥 허허 웃기만 하던 테이란이 태도를 바꿀 조짐을 보이자 치안대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테이란은 치안대의 수장이면서 현 왕의 하나뿐인 동생이며 카즈네 공작이었다. 게다가 왕실에 장성한 왕자라곤 가스트로 하나뿐이니 다음 대 카즈네 공작위와 치안대 수장 자리는 그의 아들 차지가 될 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위세를 부리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면서도 뭐든 둥글게 넘기는 그의 성품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속이 터졌던가. 치안대원들의 눈이 사냥 기회를 포착한 야생동물처럼 번쩍거렸다.

“그래도 안 닥치면 좀 두드려 줘도 됩니까?”

“말뼈다귀가 아니라 닭뼈다귀니까 부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두드려라.”

소리 없는 환호성이 울렸다. 다들 싱글벙글한 표정을 감출 생각도 않고 한 마디씩 말을 보탰다.

“푹 쉬다 오시죠!”

“때 빼고 광내고, 잠도 한숨 주무시고! 우리 대장님 나이도 있으신데 몸 생각 하셔야죠! 휴식은 중요합니다! 예!”

“하여간 뻔한 놈들. 다녀오마.”

테이란은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가차 없이 쏟아지는 햇살이 조금 버겁기는 했지만,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져 데친 채소처럼 축축 처져 있던 치안대원들이 잔뜩 들떠 와글대던 걸 생각하니 퍽 힘이 났다.

‘그나저나 올해 날씨는 정말 이상하군.’

브란젤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이렇게 기이한 여름 날씨는 처음이었다. 만탈락을 연상케 할 만큼 맹렬한 더위도 더위지만, 사나흘에 한 번씩 내리던 비가 전혀 오지 않는다는 게 말이다. 갈수기인 가을까지도 이런 날씨가 계속된다면 그땐 정말 큰일이었다.

하지만 날씨는 하늘에 달린 것인데, 아무리 걱정을 한들 인간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날씨의 신 하랄이 자비를 베풀어 지상의 생명들을 말려 죽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테이란은 절반 이상의 가게가 문을 닫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영광의 거리 뒤편이라지만 그래도 브란젤에서 손꼽히는 상권인데, 그나마 문을 연 가게에도 손님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거리 전체가 한산했다.

‘사건이 휴가철에 일어나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세상에서 가장 막기 어려운 것들 중 하나가 사람의 입이었다. 신문과 잡지를 틀어막고 기자들에게 재갈을 물려도 야금야금 말이 퍼지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으리라. 그나마 브란젤이 비다시피 하는 여름 휴가철이라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늦는 것이었다.

‘빨리 끝내야 하는데…….’

브란젤처럼 커다란 도시가 불안에 휩싸여 술렁거리기 시작하면 그 여파는 주변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로 퍼져나가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히기 마련이었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일을 마무리 하든지, 그게 안 되면 사건의 원인이라도 찾아내야 했다.

테이란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골목을 누비는 일은 젊은 치안대원들이 맡아 하고 있으니, 자신은 시체가 발견됐던 장소들을 다시 가볼 셈이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지나는 영업마차를 잡아탈 생각이었는데, 거리 전체가 한적하니 불러 세울 마차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꼼짝없이 영업마차들이 정차해서 손님을 기다리는 곳까지 걸어야 할 판이었다.

“아이고 덥다…….”

연신 흐르는 땀에 흥건하게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고, 지면에서 이글거리는 열기가 모자 아래의 얼굴을 익혔다. 나이는 먹었으되 치안대의 수장이라는 자리에 부족하지 않도록 단련한 몸인데도 저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챙겨 나온 지팡이에 의존해 거리 끄트머리에 닿았을 즈음, 그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하고 몹시 놀라고 말았다.

산뜻한 연둣빛 평상복 드레스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적갈색 머리칼은 예쁘게 말아서 반만 늘어뜨려 꾸민 네이기스가 고민에 빠져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치안대 사무실에 자주 오지 않는 테이란이지만 네이기스의 얼굴은 잘 알고 있었다. 한참 사건이 몰려 정신없이 바쁘던 지난 봄, 직접 만들었다는 과자를 들고 격려차 사무실에 왔던 게 기억에 남아 있는 탓이었다.

‘레이디 그웬은 휴가를 안 간 건가?’

치안대원들 사이에서는 네이기스가 피올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녀가 가출 상태인 것도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났지만 테이란은 예외였다. 멀쩡한 귀족영애를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걸 들켰다간 토할 때까지 훈련장에서 구를 게 뻔했으니 다들 알아서 입조심을 한 것이다.

그러니 사정 모르는 테이란은 너무 한적해서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게 마냥 반가울 뿐이었다. 그는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집중한 네이기스에게 다가가 헛기침으로 주의를 끌었다.

“크흠, 흠, 흠. 레이디 그웬?”

“네? 네? 저, 저는 레이디 그웬이 아니라……. 헉, 왕제 전하? 아, 아니, 카즈네 고, 공작님, 어, 어어…….”

이름이 불린 것에 놀라 어설픈 거짓말을 하던 네이기스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데뷔탕트를 앞두고 몇 십 번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외웠던 초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이 눈앞에 있었다.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고 인사를 올렸지만, 좀 전까지 더워서 흘리던 땀과는 전혀 다른 식은땀이 목덜미를 적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두 배는 빠르게 뛰는 듯 귓가에서 쿵쿵 소리가 울렸다.

“레이디 그웬, 이런 날씨에 수행인도 없이 어딜 가는 거요? 그것도 그렇게 큰 짐을 손수 들고.”

“아, 그, 그게…….”

“브란젤의 치안이 아무리 좋다지만 연약한 레이디가 혼자서 돌아다니다니 안 될 말이지. 어딘지 말해주면 내가 직접 데려다주겠소.”

네이기스는 바란 적 없는 친절에 당황해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테이란이 다시 한 번 독촉하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실을 토해냈다.

“치안대 사무실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음? 레이디가 직접 치안대 사무실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아, 사정이 있을 텐데 일일이 캐물으면 곤란하겠지. 미안하군. 자, 그럼 가봅시다.”

테이란의 곁에서 걷는 내내 네이기스는 악몽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역시 직접 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고, 심부름꾼을 보낼 걸 그랬다고 후회하던 중에 이게 무슨 일인지. 하필 마주쳐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다니 말이다.

‘내가 너무 멍청했어. 이렇게 꾸미고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길 바라다니…….’

과연 되돌아온 테이란을 보고 뭐 두고 가신 거 있냐 묻던 치안대원들이 네이기스를 바로 알아보고 놀라 눈을 키웠다. 네이기스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지는데, 사정 모르는 테이란은 그녀를 잘 챙겨주라 당부하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그……. 레이디 그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이기스는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사무실 벽을 바라보고 섰다. 자신이 여길 왜 왔는지 뻔히 안다는 것처럼 피올을 찾는 사람들이 민망해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아교라도 발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한편 단잠에 빠져있던 피올은 제 등짝을 치는 손길에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저를 깨운 동료에게 짜증을 내려다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 눈꼽을 떼며 검을 챙기는 그를 보고 동료 하나가 히죽거렸다. 피올은 그런 동료의 옆구리를 검집으로 찌르며 경고했다.

“어디 가서 레이디 그웬이 여기 왔었단 얘기하면 가만 안 둘 거니까 그렇게 알아.”

“왜? 브란젤 전역에 소문을 내도 모자랄 판에…….”

“해봐.”

늘 차분하던 갈색 눈동자에서 불길이 일렁거렸다. 살벌한 기세에서 진담을 읽어낸 치안대원이 입을 삐죽대며 웃음을 거뒀다. 정말로 싸움이 붙으면 이길 자신이 없으니, 적당한 시점에서 빠져야 했다.

“야, 넌 어떻게 뭔 일만 생기면 주먹부터 들이대? 귀족 출신 맞아?”

“산트렘 출신에게 뭘 바래? 억울하면 덤비든지.”

“치사한 새끼.”

피올은 우우, 들려오는 야유를 등에 지고 네이기스에게 다가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서 있었던 건 잠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버거웠던지라, 네이기스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그는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심장을 외면하고 침착하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그웬……. 잠시 나가시겠습니까?”

네이기스가 얇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피올은 제 심장을 쥐듯이 그 작은 손을 쥐었다. 피곤에 절어 몸이 축축 처져 있었던 게 조금 전인데 이상하리만치 기운이 났다.

거리에선 여전히 폭력적인 햇살이 눈을 찔러댔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더위를 피할 만한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파리를 쫓으며 하랄을 욕하던 주인이 반색을 하며 첫손님을 반겼다.

“무슨 일로 직접 찾아오신 겁니까? 그 가방은 또 뭐고요?”

레이디 그웬은 라디아타와 함께 리가 항구에 가 있는 걸로 되어 있는데도 심부름꾼을 쓰지 않고 직접 오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피올의 어깨가 긴장으로 단단히 굳은 것도 모르고 네이기스는 어물어물 말을 골랐다.

“그……. 약속해 주신 걸 받으러 왔어요.”

“예?”

“초상화 모델이 되어주겠다고 하셨잖아요.”

피올은 그만 얼이 빠져 말을 잃었다. 자신이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얼마 전 수선화 네 다발을 들고 사과하러 갔을 적에 했던 약속이었다. 도울 수 있는 건 다 돕겠다 했더니 그럼 모델을 서 달라기에 알았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요구라면 그냥 심부름꾼을 시켜 불러내도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렇게 바쁜 때에 심부름꾼이 왔다면 대번에 거절의 답을 보냈겠지만 말이다.

피올이 말이 없는 사이, 네이기스는 재빨리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목탄을 꺼냈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가만히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을 얼른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겨우 그것 때문에 한낮에 찾아오신 겁니까?”

“…….”

“나, 참…….”

그림에 집중한 네이기스는 대답이 없었다. 피올의 얼굴과 스케치북을 번갈아가며 보는 눈이 수면에 비친 해처럼 반짝거렸다. 하긴 기껏 끼고 온 레이스 장갑이 목탄에 새카매져 가는 것도 모르도록 빠졌는데 무슨 말이든 귀에 들어갈 리도 없다.

기가 막히지만 이왕 나온 거 어쩌겠는가. 피올은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잘 깔린 포석 위로 햇살이 굴러다니는 걸 구경하는 동안,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시선이 이마를 훑고 뺨을 어루만졌다가 목덜미를 더듬었다.

사각사각, 스케치북에 목탄 스치는 소리와 가늘게 내쉬는 숨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긴장이 풀렸다. 잘 잠가두었던 마음의 빗장이 부지불식간에 느슨해졌다. 치안대 사무실에서 네이기스를 본 순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다음엔 이렇게 찾아오지 마시죠.”

쉴 새 없이 들려오던 사각사각 소리가 멎었다. 피올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고 있는 네이기스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고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림에만 집중할 땐 언제고, 하필!

“꼭 모델이 필요하신 거면 제가 가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보티안 씨는 바쁘시니까요. 그렇게 귀찮게 할 수는 없어요. ……사실은 지금도 피곤하시잖아요.”

눈 밑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 까칠하게 부르튼 입술, 아닌 척해도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 그가 피곤하다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애초 치안대 사무실의 분위기부터 어딘지 날이 서 있었다.

“저번에 주셨던 수선화가 제게 쓸데없는 용기를 주었어요. 조금만 더 친절하게 대해주시면 그땐 정말로 착각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이상을 바라게 되겠죠.”

“…….”

“그러니까, 제가 쫓아다니는 걸 눈감아주시는 정도만 해주시면 돼요. 그것만으로도 넘치고도 남아요.”

네이기스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줄어들었다. 부끄러움에 스케치북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달달 떨리는 손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피올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침묵했다. 이토록이나 선명한 마음을 받았으면 그에 맞는 답을 해주는 게 마땅할 것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앞날을 약속할 용기도, 그렇다고 거절하고 멀어질 용기도 없군.’

분명 이전의 자신은 꽤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쩌다 이런 겁쟁이가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네이기스 쪽이 훨씬 용감하고 당당하지 않은가.

어색한 침묵이 테이블을 메우는 가운데, 좀 전에 포모스의 화신이라도 맞는 듯 두 사람을 환영했던 주인이 쭈뼛대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잘 손질한 수염가닥마다 미안함과 민망함을 단 채였다.

“저, 손님. 죄송하지만 주문하신 차를 낼 수가 없게 됐습니다.”

황당한 얘기였다. 두 사람이 오늘의 첫 손님이라며, 요즘은 장사가 안 되어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게 바로 조금 전인데 말이다.

“갑자기 물이 안 나와서 말입니다. 그, 제가 어떻게든 해 보려고 옆 가게에도 가봤는데, 글쎄 거기도 물이 안 나온다지 뭡니까. 저번엔 도로가 푹푹 꺼지더니 이번엔 망할 놈의 수도가 말썽을 부리나 봅니다.”

“이 일대의 수도 전체가 마비됐다면 그거 큰일인데. 정말 한 방울도 안 나오는 건가?”

“반주전자를 딱 채운 이후로는 안 나옵니다. 하여간 왕궁마법사 녀석들은 일을 제대로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뭐가 이렇게 자주 고장이 나는지.”

“알겠네. 가게 문을 닫아야겠군. 잠시만 기다리면 금방 자리를 비켜주지.”

민망함에 자꾸 말이 길어지던 주인은 살았단 표정으로 물러났지만, 테이블에 남은 두 사람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피올은 겉옷을 챙겼고 네이기스는 주섬주섬 목탄과 스케치북을 정리했다.

“마차 타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보티안 씨는 사무실에 가셔야 하는데 더 시간을 뺏으면 안 되죠.”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목소리는 덜덜 떨릴망정 하는 말만큼은 야무지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태연한 척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피올은 한숨을 삼키며 네이기스의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레이디를 혼자 돌려보낼 수 없었다고 하면 다들 이해해 줄 겁니다. 절 예의도 뭣도 없는 쓰레기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따라오시죠.”

“아…….”

“다들 그 정도 융통성은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쉬라고 준 시간에 안 쉬고 딴짓 하다가 뭔 일이 생기든, 본인이 책임지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융통성과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피올이 어서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네이기스는 홀린 듯 그에 응했다가 까맣게 묻어나는 목탄 자국을 보고 경악했다. 이런 손으로 누굴 잡는단 말인가.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피올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휙 끌어당겨 팔짱을 끼기까지 했다. 그러자 마치 정식으로 에스코트하는 것만 같은 자세가 되었다. 네이기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보티안 씨, 이게 무슨…….”

“목탄 가루 정도야 별것도 아닙니다. 치안대원이지 않습니까. 더 험한 꼴도 자주 봅니다.”

“험한 꼴을 보신다고요?”

네이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재촉했다. 좀 전까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던 걸 잊기라도 한 듯 걱정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피올은 그런 네이기스를 자연스레 이끌며 그녀가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들을 골랐다.

빈집털이를 하려고 담벼락을 기어오르다 쓰레기통 위로 떨어진 도둑, 비번이라고 술에 취해 광장에서 잠들었다가 주머니를 탈탈 털린 치안대원…….

험한 이야기를 뺐더니 풀어놓을 이야기가 심하게 빈약해졌지만 네이기스는 그것만으로도 즐겁게 웃었다. 그 웃음이 햇살보다 밝게 반짝거렸다.

‘내가 미쳤나?’

피올은 자신이 돌로 포장된 길을 걷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햇볕에 달궈진 돌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가 푹신푹신한 솜이불 같았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눈앞의 풍경이 어지럽게 일렁거렸다. 아무래도 너무 더워서 머리가 돌아버린 모양이었다.

마차는 의외일 정도로 금방 잡혔다. 말이 너무 지쳐서 일찍 돌아가는 길이었다는 마부는 치안대원의 부탁을 어떻게 안 들어줄 수 있겠느냐며 기꺼이 네이기스를 태웠다. 마차의 문이 닫히기 직전, 피올은 저도 모르게 닫히는 문을 붙들어 막았다.

“보티안 씨?”

네이기스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피올을 바라보았다. 마차의 그늘에 가려져 조금 색이 짙어진 연둣빛 눈동자를 보는 순간, 피올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혼자 다니지 마십시오.”

“네?”

“아무리 브란젤이라도 위험합니다. 레이디를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고, 싫어서 이러는 것도 아닙니다. 순수하게 걱정으로 하는 말이니까, 제발 제 말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피올은 대귀족의 공자로 태어나 보기 드문 재능을 자랑스레 빼어 들고 남이 뭐라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으며 살았다. 그런 삶 가운데에서 이렇게 간곡한 청유형의 문장을 사용해서 말하는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난데없이 꺼낸 말에 네이기스가 놀란 걸 알면서도 피올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내장이 헤집어진 채로 죽어 나자빠진 시체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목이 비틀린 시체, 물기 없이 바싹 말라비틀어진 시체, 시체, 시체…….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던 유족들의 울음과, 저런 꼴로 돌아다니는 걸 눈앞에서 보면 생포는커녕 일단 죽이고 볼 것 같다던 동료들의 질린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아무래도 브란젤의 외곽에서 주로 일어나는 일이니 네이기스가 연관될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걱정이 샘솟았다.

“제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는 건가요?”

네이기스의 질문에 피올의 입이 턱 닫혔다. 그는 유렌이 아니었고, 네이기스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어떤 구체적인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네이기스는 곤란해하는 피올의 기색을 눈치채고 어설프게 웃었다. 치안대의 일을 함부로 떠들 수 없다는 거야 이해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다면 차라리 언질도 하지 말지.

“생각해서 말씀해 주신 보티안 씨에게는 죄송하지만, 장담은 못하겠어요.”

“왜…….”

“그래도 다른 건 다 당부하신 대로 했어요. 개인 하녀도 고용했고, 끼니도 잘 챙기고,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고도 노력해요. 그러니 그것까지 지키지 못하는 건 보티안 씨가 이해해 주세요.”

네이기스에게서 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말이 피올을 당황시켰다. 그가 어떻게든 대답할 말을 찾는 사이 네이기스가 손을 뻗어 피올의 어깨를 밀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건드린 것이지만, 피올은 거인에게 밀쳐지기라도 한 듯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다음에 봬요.”

피올의 눈앞에서 마차의 문이 닫혔다.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던 마부는 안에서 재촉이 심해지자 얼른 마차를 출발시켰다.

피올은 멀어져 가는 마차 뒤꽁무니를 약간 얼이 빠진 상태로 바라보았다. 좀 전까진 인식도 못하고 있던 더위가 정수리를 데우는 와중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하, 참……. 그렇지……. 그웬 영애도 고집으로는 웬만한 사람이 아닌 걸 잊고 있었어.”

수줍어하는 모습을 주로 보아왔기에 의외라고 여겨질 뿐이지, 그림을 그리겠다고 가출까지 감행한 걸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내가 알아서 적응해야겠군.’

피올은 그녀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어깨는 물론이고 얼굴에 도는 피까지 전부 홧홧했다. 목덜미를 데우는 햇볕이 없더라도 등이 땀으로 젖을 것만 같은 뜨거움이었다.

‘영광의 거리 쪽 수도가 고장이면 사무실 쪽도 포함인 건가? 염병……. 집엘 못 가면 목욕탕이라도 가고 싶은데 거긴 괜찮을까 모르겠네.’

네이기스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지만, 땀에 전 옷차림 그대로 그녀의 곁에 섰던 걸 생각하면 그저 민망하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팔짱을 끼고 에스코트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정 모르는 피올은 목욕탕이 또 문을 닫았을까 봐 걱정하고, 찻집의 주인은 내일의 장사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사태는 그들의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셰비언이 사고를 친 자리가 하필 브란젤의 담수저장고 바로 위였기 때문이었다.

올해처럼 가문 여름에도 브란젤의 물 사용량을 너끈히 감당하고 있는 담수저장고는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정교한 시설이었다.

브란젤 전체에서 모여드는 빗물과, 제스본강에서 끌어들이는 물, 그리고 도시에서 발생하는 일정량의 하수를 정수마법도구로 깨끗하게 정수해서 보관했다가 상수도 제어장치를 통해 브란젤 전체에 공급했다.

최근에는 빗물과 강물보다 하수의 비중이 월등히 높아져 정수마법도구가 굉장히 무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마법망이 흔들리면서 정수마법도구는 물론이고 상수도 제어장치까지 한 번에 고장이 나버렸다.

때마침 순찰을 도는 중이었던 왕궁마법사가 그걸 발견하고 담수저장고를 닫아버림으로써 오수가 브란젤 전역으로 퍼지는 아찔한 상황은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브란젤 전체에 상수도 공급이 끊어지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워낙 큰일이다 보니 왕궁마법사들 전체가 달려들어 수리를 시작했으나, 하루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생각 이상으로 시간을 잡아먹었다.

다른 게 아니라 정수마법도구 때문이었다.

여름 내내 감당할 수 있는 양 이상의 오수를 정수하며 혹사당했던 정수마법도구는 몇 차례에 걸친 수리에도 본래의 성능을 되찾지 못했다. 뿌옇고 냄새나는 물을 쏟아내는 꼴을 볼 때마다 왕궁마법사들의 안색도 같이 흐려졌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영화는 무슨, 월급 받으려고 이러고 있죠. 새삼스럽게. 암튼 이 정도면 그냥 새로 제작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수리론 안 되겠어요.”

“염병, 이거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공이 얼만데 새로 만들어? 우리 할 일 많아, 계속 여기에 매달리고 있을 수는 없다고.”

“그럼 되도 않는 수리를 계속 시도해 보자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그래, 몇 번 더 해 보면 수리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아? 수명이 얼마 안 남은 게 뻔히 보이는데 어차피 할 때 해 버리면 좋잖아. 뭐 하러 두 번 일을 해?”

“맞아요. 한 번으로 끝내자고요.”

“그걸 누가 모른대? 할 일이 많으니까 임시로라도 메워두고 다른 일을 우선으로 하자는 거잖아!”

씻지 못해 꾀죄죄한 몰골로 정수마법도구를 둘러싸고 있던 왕궁마법사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갔다. 다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상태였다.

“언젠 우리가 세운 계획대로 일이 굴러간 적 있어요? 만날 임시로 때우다가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분명 다른 일에 치여서 또 고장 나기 전까진 손댈 엄두도 못 낼걸요?”

“그래서 다른 일은 어쩌고? 지금 이것만 말썽이야? 아니잖아!”

“다들 입 닥쳐. 지금 왕실에서 얼마나 난린지 몰라서 이래? 무조건 정수마법도구가 먼저야. 새로 제작을 하든 수리를 하든! 무조건!”

조금 전까지 왕궁에서 찾아온 시종에게 시달리다 온 마법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목소리를 높이던 다른 마법사들이 입을 딱 닫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상수도가 끊긴 지금, 브란젤의 식수 공급은 왕궁 전용 담수저장고에서 물을 빼내 배급하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강물을 퍼다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처음에는 왕실에서도 흔쾌히 사용을 허락해 줬지만, 수리가 예정보다 늦어지고 불편을 감수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왕궁마법사들을 닦달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다른 쪽도 급하다는 거 알지. 근데 그쪽에 신경 쓰다가 미운털 박히면 그땐 어쩔 건데? 다들 목숨 안 아까워?”

분위기가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하긴, 상수도 이외의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누가 모를까. 광장 일대의 마법도구가 원인을 알 수 없이 일제히 망가지는 바람에 온갖 문제가 연달아 터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중에서도 큰 문제는, 더위 탓에 사람들의 활동 시간이 저녁과 밤에 맞춰진 상황에서 도시 중심부의 가로등이 꺼졌다는 것이었다. 근처 가게들의 절반 이상이 휴가로 문을 닫은 상태라 자발적으로 내거는 마법등도 그다지 기대할 수 없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왕궁마법사들이 금방 가로등을 수리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정보다 수리가 늦어지면서 도시는 기약 없는 어둠에 잠겼다. 거리는 혼란에 빠졌다. 밤의 감시자였던 가로등이 사라지자 도둑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창문이 깨져나간 상점들로 거리가 엉망이었다.

치안대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흉흉한 소문이 주민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큰 자루를 든 도둑들이 밤마다 골목길을 달린다는 둥, 다페이 거리의 전당포들이 뜻밖의 호황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는 둥, 도둑질을 막으려다 사람이 죽어서 골목길이 온통 피칠갑이라는 둥…….

왕궁마법사들도 귀가 있는데 이런 상황을 모르겠느냐만, 당장 목줄을 잡고 있는 왕실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성이 오가는 내내 침묵하던 마법사 한 명이 떡진 머리카락을 긁적대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먹어. 뭘 해도 욕먹을 거, 우리 목숨부터 챙겨야지. 안 그래?”

“…….”

“……그래도…….”

“씨발, 내가 사람인지 통 속의 포도인지 모르게 쥐어 짜이느라 죽겠는데 인간신체변형실험했냐고 들들 볶인 게 엊그제야. 치안대도 개고생 좀 해 보라고 해.”

안 그래도 피곤하고 힘든데 지난 육 개월 간의 업무 내용을 정리해서 확인서와 함께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은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피눈물나게 억울해도 누명을 쓸 수는 없어서, 부족한 잠을 줄여가며 보고서를 제출했던 악몽 같은 기억이 모두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침묵이 용기를 부여했다.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보던 마법사들이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그게 치안대의 일이잖아.”

“그래요, 상수도 문제만큼 급한 게 어디 있겠어요. 왕실에서도 불편하다고 하는데 그거부터 해야죠.”

왕궁마법사들은 상수도 문제를 최우선으로 삼는 것에 다 같이 동의했다. 상황을 몰랐던 왕궁마법사장이 뒤늦게 설득을 시도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상수도 이외의 문제는 뒤로 밀린 채 시간이 흘렀다. 가로등, 도로, 기차역……. 왕궁마법사들이 손을 놓은 시간이 길어지면서 브란젤 전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일상에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불편함과 불안이 스며들었다.

더위와 불편함으로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선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이 등장하는 괴담이 입에서 입을 타고 퍼져나갔다. 변해 버린 몸뚱이가 두려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뒷골목을 헤매다가 치안대원의 칼에 찔려 죽는 괴물의 이야기 말이다.

치안대는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든 괴담을 통제하려 애썼다. 도시에 악재가 찾아온 상황에 괴담이 돌아서 뭐가 좋겠는가. 하지만 쓸데없이 호기심 넘치는 몇몇 사람들이 괴담 속의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발견한 이후로는 그 노력이 다 헛것이 되고 말았다.

‘밤마다 뒷골목에 괴물이 돌아다닌다.’

‘목격자가 없는 건 그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치안대원들은 도둑이 아니라 괴물을 잡으려고 순찰을 돌고 있다.’

‘괴물은 한 마리가 아니다.’

‘브란젤 외곽의 뒷골목 구석엔 괴물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

나름 구체적인 증거까지 들먹이며 그럴듯하게 퍼지는 괴담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기름 넣은 램프라도 들고 밤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밤거리가 비면서 절도 피해를 당하는 상점의 범위도 넓어졌다. 불 꺼진 광장의 주변에 자리한 상점에서, 가로등이 켜져 있어도 인적은 뜸한 골목의 구멍가게로 피해가 확산됐다. 심지어 도둑을 막으려고 가게를 지키다 크게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도시의 치안에 직접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자, 상수도 마비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린 걸 참고 있었던 치안대에서도 결국엔 말이 나왔다. 안 그래도 괴상한 시체들 때문에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가로등을 미루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아무리 상수도가 급해도 그렇지, 인원을 나눠서 진행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인원을 나눠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왕궁마법사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그 왕궁마법사들은 치안문제는 치안대에 맡겨놓고 자신들은 상수도에 집중하기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고.

그렇다고 브란젤의 치안이 급속도로 나빠지는 걸 마냥 방관할 수는 없었다. 늦어지는 일처리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왕궁마법사들을 향해 쏟아내는 불만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숙소에서 출퇴근하던 왕궁마법사들 대부분이 차라리 실험실에서 나가지 않기를 선택할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왕궁마법사장은 마법사협회에 임시로 일해줄 마법사를 모집해 달라는 협조 요청을 보냈다. 가로등을 비롯한 공공 마법도구 복구 작업에 참여하는 마법사에겐 왕궁의 마법자료 일부를 개방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걸어서 말이다.

왕궁의 마법자료 중엔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는 것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연구가 벽에 부딪친 상태에 있었던 마법사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골수가 빠지도록 부려 먹힐 걸 뻔히 알면서도 참여를 고민하는 마법사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워커와 셰비언도 협회에 속해 있었으니 당연히 협조 요청서를 받았다. 요모조모 요청서를 뜯어 읽던 워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왕궁 마법자료 좋아하네. 일부 단서 달아놓은 거 보면 뻔하지. 있는 대로 부려먹고 정작 자료 줄 때가 되면 예외에 해당하는 일부라서 못 준다고 할 거 아냐. 그렇다고 돈을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빠져나갈 구멍을 곳곳에 만들어놓은 요청서를 보자 짜증부터 치밀었다. 사람을 부리려면 제대로 값을 치를 생각을 해야지, 이따위로 구니까 왕궁마법사 모집이 매년 난항을 겪는 게 아니냔 말이다.

“그나저나 분야가 가로등, 도로, 하수도, 기차역 유지 보수……. 뭐야, 상수도랑 왕궁 내부 일 빼고 다 있네? 왕궁 내부의 일이야 외부인에게 맡길 수 없으니까 그렇다 치고, 설마 전부 상수도에 매달려 있는 건가?”

“명색이 왕궁마법사인데 아직도 상수도에 매달려 있는 거면 너무 무능한 거 아냐? 까짓 마법망 조금 흔들려서 고장 난 걸 왜 이렇게 수습을 못해?”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던 셰비언이 무심히 말을 보탰다. 워커는 그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 별거 아닌 마법망을 흔들어서 브란젤 전체에 혼란을 불러온 원흉이 누군데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당장 로렐라이만 해도 제작 파트 마법사들 거의 전부가 밀려드는 수리 요청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로렐라이 내에서의 워커의 입지만 아니었어도, 워커와 셰비언 역시 수리를 도우러 갔어야 할 상황이었다.

“상수도에 설치해 놨던 마법도구가 하나가 아닌가 보지. 아니면 아예 수리가 불가능해서 새로 제작하는 걸 수도 있고.”

“언제까지 물을 배급받아야 하냐고 신경질 내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렇게 호의적이야? 왕궁마법사들 무능하단 소리는 네가 매일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잖아.”

“새삼 반성 중이야. 여기 일 목록을 보니까 있던 실력도 다 없어지게 생겼어.”

“본래부터 실력이 없었든, 있던 실력이 없어졌든 간에 결론은 실력이 모자란다는 거지. 왕궁마법사가 한두 명인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까지 시간을 끄는 것 자체가 무능의 증거야.”

워커는 셰비언이 용이라는 것, 그리고 마법의 주인이라 자신을 소개할 정도로 마법에 정통한 마법사라는 걸 새삼 되새겼다. 수식은커녕 구조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테스트 제품을 단번에 수리해 냈다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도 상수도 문제로 절절매고 있는 왕궁마법사들이 우습게 보일 만도 할 것이다. 아직까지 공간의 초입에서 헤매는 자신을 두고 천재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겸손이었다.

‘참자, 참아……. 셰비언 눈에 유능한 마법사가 몇이나 되겠어.’

워커가 끓는 속을 가라앉히느라 말이 없는 사이, 셰비언이 워커에게서 협조 요청서를 빼앗아 훑었다. 그의 눈에도 왕궁의 마법자료 일부 개방이라는 단어가 확 들어왔다.

“참여할 거야?”

“안 해. 너 있는데 내가 왜 거기 가서 개고생을 해? 내가 원하는 자료를 줄지 안 줄지도 모르는데.”

“이야, 전엔 그래도 조금 눈치 보고 그러는 게 있었는데 이젠 그냥 노골적이네. 내가 네 연구용 자료집이지?”

“너도 나 자료집으로 쓰잖아. 궁금한 거 있으면 책 찾아보라니까 듣지도 않으면서.”

서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두 마법사는 곧바로 공격을 그만두었다. 그들은 흥미를 잃은 협조 요청서를 내던지고 퍽퍽하고 맛없는 빵을 씹으며 자료 정리에 집중했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브란젤을 죽어라 돌아다니며 마법망의 상태를 확인한 결과, 상당히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 정말로 장소에 따라 마법망이 마력구슬에 반응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 무슨 이유로 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가 더 필요하지만 말이다.

“워커, 오늘은 저녁에 나가보자. 마법망이 장소도 장소지만 시간에 따라서도 조금씩 차이가 발생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 부분도 정리해야지.”

“저녁에? 저녁에 나가면 밤새 돌아다니자는 건데……. 난 좀 그런데. 요새 소문이 너무 안 좋아.”

“소문? 아, 그 도둑? 너 뭐 털릴 거 들고 나가?”

“내가 털릴 거라고 해봤자 만년필밖에 더 있냐. 그냥…… 아무래도 분위기가 흉흉하니까 밤에 나가는 건 좀 꺼려진다는 거지. 괴물 얘기도 있고…….”

유렌과 피올이 말해주지 않았던가, 인간이 아닌 신체 부위를 단 채 발견되는 시체가 있다고. 요즘 브란젤을 휩쓰는 괴담 속에 등장하는 괴물의 이야기가 괜한 헛소문으로 들리지 않는 워커였다.

셰비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워커를 보며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브란젤 전역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무서움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더니만 갑자기 웬 겁쟁이 노릇인지.

“다페이 거리에서 시선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던 사람이 누군데 갑자기 왜 이래?”

“거긴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괴상한 시체가 발견된다는데 괴물 얘기도 나오니까 찝찝하잖아. 그 시체랑 괴물이랑 같은 놈이면 어떡해?”

“도둑질하고 사람 죽이는 것도 사람이다, 잊지 마. 그리고 그놈의 괴물 소리……. 난 슬슬 치안대원들 말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넌 안 그래? 돌아다니다보면 꼭 마주칠 것처럼 말하더니만 그림자도 못 봤잖아.”

“뭔 소리야. 치안대원이 우리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어서 의심을 해? 애초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녹초가 돼서 돌아다녔을……. 아.”

무심결에 치안대원들 편을 들던 워커는 제 실수를 깨닫고 혀라도 깨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문이 신경 쓰여서 밤에 나가기 싫다고 해놓고는 그게 얼마나 가능성이 낮은 일인지 제 입으로 뱉은 꼴이었다.

셰비언이 워커에게 담요를 내던졌다.

“해질녘에 나갈 거니까 그때까지 잠이나 자둬.”

“망할…….”

“하여간 넌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 내가 용인데, 그깟 괴물 따위가 뭐가 무섭다고 그래?”

셰비언은 괴물을 겁내는 워커가 정말로 이해가 안 됐다. 마법의 정점에 서 있는 자신이 곁에 있는데 대체 왜 저럴까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워커는 공격마법 같은 건 책에 남은 기록이라고만 생각하며 자란 세대의 마법사였다. 셰비언이 아무리 자신의 무력을 자랑해도 가슴에 와 닿을 리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굴러가는 게 아닌 걸 어떡하냐? 젠장, 잠은 너나 자라. 난 나갔다 올 거야.”

워커는 먼지를 뒤집어쓴 강철새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또 추락해도 좋으니 당장 끌고 나가서 하늘을 날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메시지 장치에 집중하느라 설계 변경을 적용하지 못한 데다 통로를 개방하기로 약속된 날짜가 아니었다.

‘내 연구도 좀 했어야 하는데…….’

기껏 완전한 비행마법을 얻었는데 제자리에 멈춰 버린 강철새 연구를 생각하자 씁쓸함만 밀려왔다. 워커가 착잡함과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걸 알기라도 하는지, 지하연구실 구석에 갖다놓은 침대에 누워 꾸물대던 셰비언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가는 건 상관없는데, 강철새 끌고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떨어진다.”

“야, 어차피 못 갖고 나가! 통로 막혀서!”

“그럼 다행이고. 정 아쉽거든 저기 저 작게 만든 강철새를 갖고 나가는 게 어때. 그건 나름대로 손을 봤었잖아. 혹시 알아? 그거라도 갖고 놀다보면 기분도 풀리고 무섬증도 좀 가실지.”

“셰비언, 너 진짜 재수없다.”

워커의 한 마디에 숨기지 않은 진심이 담겼다. 하지만 말로 토하는 불만 따위가 셰비언에게 무슨 타격을 입힐 수 있겠는가. 셰비언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그래, 자라. 난 작은 강철새나 갖고 놀다 오련다.”

워커는 이를 득득 갈며 작은 강철새를 챙겼다. 강철새가 연달아 추락하던 시기에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작게 만들어 실험하던 물건이었다. 메시지 장치 때문에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에 이거라도 손을 봐둬서 다행이었다.

로브 주머니마다 온갖 마법도구를 잔뜩 넣고 지하연구실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이 정수리를 후려쳤다. 버석버석하게 마른 공기가 목구멍을 태울 듯 집요하게 입술을 헤집고 들어왔다.

‘이거야 원, 꼭 사막지대를 걷는 느낌이잖아. 만탈락에 있을 때 딱 한 번 가보고 다시는 안 간다고 다짐했는데 브란젤에서 그걸 겪네.’

서둘러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것만으로도 좀 살 만해지는 걸 보면 정말 사막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도로변에 늘어선 가로수는 노랗게 끄트머리가 타들어간 이파리를 땅바닥을 향해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렇게 끔찍한 더위와 건조함 때문에라도 저녁과 밤에 활동해야 할 텐데, 흔들리는 치안과 사그라지지 않는 괴담은 사람들을 한낮의 햇살 아래로 몰아붙였다.

워커는 이전보다 월등히 사람이 많아진 거리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다들 영혼의 조각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흐느적흐느적 걸어 다녔다.

그게 신문사와 출판사가 많은 리즈비아 거리만 그렇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마차를 잡지 못한 워커가 브란젤을 가로질러 걷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은 거의 비슷했다. 이런 날씨에 바깥을 다녀야 한다면 좀 예민하게 굴 법도 한데 짜증이나 화를 낼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반면 평소보다 월등한 빈도로 눈에 띄는 치안대원들의 상태는 좀 달랐다. 그들은 잔뜩 독이 오른 독사처럼 신경이 곤두서서는 지나는 사람들을 잡아먹을 듯 관찰했다. 특히 로브의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걷는 워커를 볼 때는 그 예민함이 배로 뛰어올랐다.

의심의 눈초리를 떨치지 못하고 워커를 바라보던 치안대원 한 명이 결국 워커를 불러 세웠다.

“어이, 거기 가는 마법사 씨. 잠깐만 이리 와보시죠.”

“……예? 저, 저요?”

“그럼 이 근처에 마법사가 당신 말고 누가 있……. 뭐야, 크라티우스 씨였습니까.”

워커의 얼굴을 확인한 치안대원이 맥이 빠져 중얼거렸다. 워커는 무심결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셰비언이 한참 치안대 사무실을 들락거리던 무렵, 귀찮아도 덩달아 얼굴을 익히기를 정말로 잘했다 싶었다.

“성으로 부르지 말라니까 체이서 씨도 어지간하시네요.”

“크라티우스 씨와 내가 무슨 사이라고 자꾸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겁니까? 쓸데없이 친밀해 보이는 건 딱 질색이니까 다시는 이름 얘기 꺼내지 마시죠. 그나저나 이 더위에 어딜 가십니까?”

신원은 확인했다지만 의심은 채 거두지 않은 눈이 워커를 위아래로 훑었다. 지금 치안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날뛰는 도둑들 때문에 웬만한 일은 죄다 뒤로 미뤄놓은 상태였다. 인간이 아닌 몰골을 한 괴물을 생포하려는 일도 중단을 겨우 면했다.

따라서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는 전부 용의자로 올려놓고 수사하려던 계획은 세워지자마자 멈춰 버렸지만, 아주 엎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워커처럼 상단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자유 연구를 진행하는 마법사는 최우선 조사 목록에 올라 있었고 말이다.

워커는 빈말로라도 눈치가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미 들은 얘기가 있다 보니 체이서의 의심을 모르기도 어려웠다. 협조 요청 대상자가 아니라 용의자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살짝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미니사이즈 강철새를 보여주었다. 섬세하게 만들어진 부품들마다 새겨놓은 마법수식이 마치 장식 문양처럼 화려했다.

“어딜 가긴요, 비행 실험 하러 가죠. 보실래요? 큰 건 아니고 작게 만든 건데, 나름 제 역할을 해요. 새로운 연구 성과를 적용시킨 거라 기대가 아주 크다니까요! 어떤 연구 성과냐면…….”

분명 처음에는 의심을 피하려고 꺼낸 얘긴데, 체이서가 나름 열심히 듣는 체를 하자 거기에 흥이 난 워커의 말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졌다.

열정적으로 떠들어대는 워커를 보면서, 체이서는 딴 마법사는 몰라도 워커는 절대 인간신체변형 연구에 손을 댈 자가 아니라고 확신하던 동료들을 떠올렸다.

‘워커는 이미 인생 다 걸고 연구하는 게 있잖아. 비마법 비행도구라나 뭐라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다가 돈을 그렇게 때려 붓는다는데.’

‘맞아, 워커는 그런 거 연구하라고 돈 받으면 죄다 강철새 연구에 써버릴 놈이야. 확실해.’

‘마법사인데 결혼 자금은 모아놨을까 의심스러운 녀석이잖아. 그놈은 연구랑 결혼했어.’

말을 들을 때는 설마 그 정도일까 생각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제 흥에 취해 말하는 걸 보니 그게 정말인 걸 알겠다. 강철새의 날개에 슬쩍 손을 대보자 서늘한 한기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등을 식혔다.

“이게 바로 그 돈만 먹고 성과는 없다는…….”

“뭐라고요?”

“크흠, 흠, 흠. 죄송합니다. 말이 헛 나왔습니다. 제스본강변으로 가십니까?”

워커가 로렐라이에서 번 돈 대부분을 실현 가능성도 안 보이는 비마법 비행도구 연구에 들이붓는다는 얘기는 이미 유명했다. 워커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 면전에서 해도 괜찮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체이서는 되도록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제 말실수를 주워 담았다.

“요새 제스본강변에 사람이 많습니다. 보는 눈이 많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구경꾼이야 항상 많았는데요 뭐.”

“그렇다면야 제가 끼어들 건 없겠군요. 아, 크라티우스 씨.”

“예?”

“웬만하면 밤에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워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장 오늘밤에 브란젤 전체를 나돌아 다닐 예정인데 이런 말을 듣다니. 그는 짐짓 태연한 척 표정을 관리하며 강철새를 담은 가방을 등에 둘러맸다.

“왜요? 뭔 일 있어요?”

“요즘 도둑이 극성이지 않습니까. 옛 말에 경비원 열 명이 도둑 한 놈을 못 잡는다고 그랬는데, 지금은 경비원보다 도둑놈 머릿수가 더 많은 형편이니……. 괜한 걱정인 건 알지만 말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하. 저는 또, 굳이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법사를 콕 찍어 부르시기에 거기에 관련된 일인 줄 알았지 뭐예요. 하하하.”

“이 더위에 그런 로브를 입은 것도 모자라 후드까지 쓰고 가는데 어떻게 수상해 보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전 뭐 장물이라도 들고 가는 줄 알았습니다.”

은근하게 찌르는 워커의 말에도 체이서는 능청맞게 웃으며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런 그의 이마와 목은 온통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매도 마찬가지였다. 셔츠는 단단한 가슴팍에 철썩 달라붙은 상태였다.

워커는 젖혔던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고 피식 웃었다. 정수리에 무자비하게 내리꽂히던 햇살이 가려지자 훨씬 숨쉬기가 편해졌다.

“이렇게 건조하고 햇살이 뜨거울 땐 차라리 몸을 가려야 돼요. 그래야 시원하죠. 체이서 씨처럼 살을 드러내고 있으면 더 뜨겁고 탈수도 빨리 와요.”

“오……. 하지만 망토는 그냥 덥기만 하던데요.”

“머리를 가리는 게 핵심이에요. 사막을 다니는 여행자들의 지혜죠. 머리를 가리면 더위가 꽤 가시거든요. 레이디들은 양산을 쓰고 다니지만 남자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이런 거라도 해야죠.”

“그럼 밀짚모자라도 사다 써야겠습니다. 남자도 쓸 만하게 만들어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주겠죠. 아, 그랬다간 너무 농부 같아서 치안대에서 안 된다고 하려나…….”

체이서가 아쉬워하며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았다. 어찌나 땀이 많은지, 마치 녹아내리는 눈사람 같았다.

워커는 그가 문득 안쓰러워졌다. 마법사라고 대뜸 의심부터 한 건 기분 나쁘긴 한데, 어떻게 보면 그저 일을 열심히 한 것뿐이지 않은가. 주머니를 뒤져 휴대용 냉방 마법도구를 찾아 꺼냈다.

“자, 그리고 이거야말로 진짜 비장의 비법입니다.”

“어, 이게 뭔데……. 오오? 오오오?”

별 생각 없이 받아든 체이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먹만 한 철 상자에서 쏟아지는 냉기가 기가 막히게 시원했다. 반사적으로 목과 이마에 가져다 대고 몸을 식히니 앓는 소리가 절로 쏟아졌다.

워커는 체이서가 어쩔 줄 모르고 몸 여기저기에 마법도구를 갖다 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더위를 타지 않는 셰비언은 이런 게 꼭 필요하냐는 식의 발언을 해서 살짝 기분이 상했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몹시 흡족했다.

“아직 팔 만한 물건은 아니고, 그냥 테스트용 제품이긴 한데……. 체이서 씨 쓰세요.”

“아니, 제가 이런 걸 받으면 안 되는데요. 로렐라이의 제품이면 엄청 비쌀 거 아닙니까.”

“글쎄요…….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팔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물건인데요 뭐. 그거, 만드는 데에는 공이 많이 들어가는데 정작 유지 시간이 굉장히 짧아서 수지가 안 맞거든요. 애지중지 잘 다루면 한 달 가려나?”

“그래도 날씨가 이렇다 보니 가격이 얼마든 사겠다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한 달만 버티면 여름이 끝나기도 하고.”

“잘 써야 한 달이라니까요. 고쳐 달라고 난리 피우는 걸 감당하느니 안 팔고 말죠. 저는 하나 더 있어서 양보하는 건데, 혹시 고장 나면 그땐 따로 찾아오세요. 파는 게 아니라서 지점에서는 안 고쳐 줄 테니까.”

“제 검보다 아끼겠습니다.”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치안대원에게 검은 목숨일 텐데, 그보다 아끼겠노라 장담하는 모습이 워커를 웃겼다. 다행히 체이서에게 준 테스트 제품은 얼마 전에 셰비언이 수리했던 그 물건이었다. 다른 테스트 제품보단 수명이 좀 더 길 터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도둑놈들 잘 잡으세요.”

“말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크라티우스 씨도 강철새 연구에 꼭 진척이 있길 바랍니다.”

체이서의 응원은 조금 전과는 달리 굉장히 진심이었다.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불볕더위를 견딜 만하게 만들 정도로 신통방통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마법사라면 언젠가 정말로 하늘을 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덕분에 워커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제스본강변에 도착했다. 체이서가 굳이 보는 눈 걱정을 한 이유를 알 것처럼 사람이 많았다. 적당히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강철새를 꺼내자마자 시선이 쏟아졌다.

사람이 직접 탈 만큼 큰 강철새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어린아이들이 강변에서 흔히 날리는 연과 비슷해 보일 텐데 왜 이렇게까지 쳐다보나 싶을 정도였다.

그 시선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법도 하건만, 조금 전에 진심이 담긴 응원을 듣고 와서 그런지 부담 대신 용기와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강철새에 부딪친 햇살이 눈부셨다.

‘바람이 좋아. 강철새 상태도 좋고.’

점검도 할 겸, 마법망을 시각화시켰다. 새벽하늘을 가르는 아침 햇살로 짠 듯 금빛으로 빛나는 마법망이 워커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가느다랗기는 해도 끊어짐이 없고, 제멋대로인 듯해도 규칙성이 있었다. 곳곳에 마력이 고여 생긴 방울이 거미줄에 맺힌 이슬처럼 달랑거렸다.

워커를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마법사, 그것도 수식을 제작하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아예 볼 일 없는 풍경이니 얼마나 신기하게 느껴질까.

하나 워커는 다른 쪽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셰비언과 함께 브란젤 곳곳을 누비며 마법망을 숱하게 시각화시켜 보았지만, 이렇게 안정적인 마법망은 처음이었다. 아니, 브란젤로 한정할 것도 없었다. 이제까지 그가 머물렀던 어느 장소보다도 마법망의 상태가 완벽했다.

‘꼭 마력구슬로 안정화 작업을 한 마법망 같네. 모든 지역이 다 이랬으면 메시지 장치 만드는 데 이렇게까지 고생 안 했을 텐데.’

툭 건드리면 실내악은 아니어도 오르골 소리 정도는 날 것 같았다. 무심결에 마법망에 손을 대려던 워커는 여기저기에서 목을 빼고 있는 구경꾼들을 의식하고 얼른 마법망을 치웠다. 이미 충분히 구경거리인데 소리까지 났다간 진짜 서커스의 동물 취급을 받을 판이었다.

마법망이 멀쩡한 것도 확인했겠다, 그새 따끈하게 데워진 강철새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말소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개량 이후로는 처음 날려보는 거야. 실패해도 크게 실망하지 말자.’

강철새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강물을 스치고 나뭇가지를 뒤흔들던 바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돌려 강철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모자가 벗겨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한껏 바람을 머금은 날개가 바르르 흔들렸다. 워커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이 부푼 기대를 담아 강철새를 바람 위에 올려놓았다. 휘몰아치는 바람은 쉽사리 강철새를 떠안고 높이 솟아올랐다.

‘여기까지는 좋아. 아주 좋아.’

워커는 강철새의 목에 조종간 대신 감아둔 실에 마력을 불어넣어 강철새를 조종했다. 일단 제대로 날아오른 강철새는 조종에 따라 바람을 거스르며 자유롭게 하늘을 누볐다. 바람에 몸을 맡기는 연과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에 사람들의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 연도 아닌 게 잘 올라가네!”

“무거워 보이는데 신기하기도 해라…….”

“진짜 새 같아.”

구경꾼들의 감탄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다들 홀린 것처럼 목을 꺾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아주 장관이었다.

그러나 워커의 귀에는 그런 감탄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순순히 말을 듣던 강철새가 어느 순간부터 그의 통제를 벗어나려고 기를 썼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살아 있는 새도 아닌데 바르르 몸을 떠는 게 매어놓은 실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칫하면 실을 끊고 제멋대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서둘러 마력을 수습하고 내려오게 하려는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강철새를 휘감은 바람이 계속해서 위로, 위로 치솟으며 실을 잡아당겼다. 안 되겠다 싶어서 아예 마력을 끊어버렸는데도 강철새는 추락할 기미 따위 없이 유유히 하늘을 날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손을 파고들었다. 차라리 실을 끊고 날아가면 포기라도 하겠는데, 그건 또 아니라서 도무지 실을 놓을 수가 없었다.

워커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끌려가지 않으려 버텼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강철새가 흔들릴 때마다 몸도 덩달아 휘청거렸다. 이러다 손이 다 헤질 때까지 질질 끌려 다니는 거 아닌가 싶은 불안이 닥칠 때쯤, 낯선 손길이 워커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이거, 그냥 끌어당기기만 하면 되는 건가?”

마른 흙냄새, 반쯤 타들어간 장작 냄새, 바삭바삭한 낙엽 냄새, 그리고 희미한 유황 냄새. 이런 강변에서 맡아질 리 없는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손 다 망가지겠어. 빨리 대답해, 그냥 당기면 돼?”

워커는 얼른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저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어깨 너머에서 뻗어 나온 꿀색 피부의 손이 와락 실을 움켜쥐었다.

“힘 빼고 웅크려 있어.”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에 힘이 들어가며 단단한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동시에 워커의 손을 파고들던 실의 압력이 확 줄어들었다.

“바람이 장난이 아닌데……. 이거 놓치면 큰일 나는 거지?”

“당연하죠! 저거 만드는 데 들어간 수고가 얼만데요!”

어찌나 놀랐는지, 막혔던 입이 다 뚫렸다. 워커는 잠시 느슨해졌던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실에 매달렸다. 변형한 비행마법 수식을 적용한 첫 번째 강철새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매달리면 오히려 불편해. ……이런, 내 말을 들을 상황이 아니로군.”

팔의 주인이 난처한 듯 중얼거렸지만, 그 중얼거림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담겨 있었다. 팔의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강철새의 고도가 뚝뚝 떨어졌다.

바람의 결을 타고 날던 강철새는 목에 매인 실에 끌려 땅으로 내려왔다. 애초 아주 소량의 마력을 넣었고 나중엔 실을 통해 공급하던 마력마저 끊어버렸는데도 강철새는 그때까지도 바람을 휘감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워커는 마침내 품에 안은 강철새의 마법수식 작동을 정지시키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는 도저히 끌어내릴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다고 생각하니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술이라도 한잔 살 테니 같이…… 헉.”

뜻밖의 도움을 준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던 워커는 그제야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당황했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 대뜸 술자리를 권유하다니, 그 자리에서 뺨을 맞아도 할 말 없는 짓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아, 그, 실례했습니다. 숙녀분이신 걸 모르고 제가……. 그게, 다른 의도가 있는 말은 아니었고…….”

횡설수설 말을 잇는 동안 워커의 얼굴이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붉어졌다. 필사적으로 오직 감사를 표시하고자 한 발언이었음을 강조하곤 있었지만, 눈앞의 여자는 그런 말을 지겹게 들었겠구나 싶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길게 땋아 한쪽 어깨에 걸쳐 놓은 머리카락은 노을을 품은 듯 붉고, 그와 대조적으로 새파란 눈동자는 조화로운 이목구비에 넘치는 야성미를 부여했다. 브란젤에서는 우유처럼 흰 피부를 제일로 치지만, 그녀의 꿀색 피부에 흠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워커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여자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선명한 유황 냄새가 워커의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술을 살 건데? 맥주? 와인? 위스키? 개인적인 취향을 미리 말해주자면, 난 독한 술을 좋아해.”

“아, 저는 독한 건 잘 못 마셔서……. 맥주…….”

“흐흥, 호기롭게 술 얘기부터 꺼내기에 잘 마시는 줄 알았더니. 뭐, 공짜로 먹는 거라면 맥주도 나쁘지 않지. 그럼 오늘 내게 맥주를 사줄 당신의 이름은 뭐지?”

“워커 크라티우스……입니다. 로렐라이 상단의 마법사죠.”

“내 이름은 샤를레아야.”

샤를레아가 웃었다. 눈이 황홀할 정도의 미인인데, 어딘지 등골이 서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워커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자꾸 무릎에 힘이 빠졌다.

“용병이지.”

“아, 그래서 차림이…….”

“내 차림이 어때서? 치마 입고 앉아 있다고 일 줄 것도 아니면서 다들 말들이 많다니까. 자, 앞장서.”

워커는 어딘지 목이 졸리는 기분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곁에서 따라오는 샤를레아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는데 이상할 정도로 존재감이 컸다.

‘카페 디노 문이 닫혀 있었으면 좋겠다…….’

맥주를 파는 가게가 카페 디노만 있는 것도 아닌데, 워커의 생각은 거기까지 닿지를 않았다. 당장 샤를레아와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는 상황을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상대는 용병이라는 걸 알면서도 골목길을 볼 때마다 그대로 도망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런 워커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샤를레아는 워커의 강철새에 무척 관심을 보였다.

“그거 정말 잘 날던데, 이름이 뭐지?”

“어……. 이름은 딱히 없고요. 그냥 비마법 비행도구 미니 사이즈……?”

“비마법 비행도구? 그런 거치곤 마법수식이 좀 많이 새겨져 있는 거 아냐? 누가 보면 일부러 문양을 새겨 장식한 건 줄 알겠다 싶게 화려하던데.”

“아예……. 시작은 비마법 비행도구였는데 요즘은 생각을 좀 바꿔볼까 싶어가지고요…….”

본래 강철새가 화제가 되면 자제가 안 될 정도로 말이 많아지는 워커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가방을 추슬러 안으며 샤를레아의 관심이 사그라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페 디노의 문은 열려 있었다. 항상 와글와글하던 손님이 절반으로 줄어 자리가 넉넉했다. 샤를레아는 희희낙락 메뉴판을 펼쳤지만, 워커는 이대로라면 맥주 한 모금에 체할 것 같은 예감에 시달렸다.

‘아는 사람 없나? 아는 사람…….’

카페 디노면 마법사들이 모이기로 유명한 가게인데 어째 오늘은 마법사보다 일반인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합석할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워커의 눈에 아주 뜻밖의 인물이 들어왔다.

셰비언.

분명 워커가 지하연구실에서 나올 때만 해도 저녁에 나갈 것을 대비해 잠잘 채비를 하던 그가 카페 디노의 구석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는 꼴이 뭔가에 기분이 단단히 상한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의 워커에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샤를레아 씨, 잠시만요. 이 강철새를 만드는 데에 크게 도움 준 친구가 마침 저쪽에 있는데 좀 데려올게요.”

워커는 샤를레아가 대답할 틈도 없이 일어나 셰비언에게로 다가갔다. 혼자 앉아서 하는 생각이 뭐가 그리 심각한지, 셰비언은 워커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이름을 부르고서야 워커를 알아보았다.

“뭐야, 강철새 날린다고 나간 녀석이 이 시간에 여기 왜 있어.”

“그건 나야말로 묻고 싶다. 잔다며? 아무튼 잘됐다, 잠깐 나 좀 구해줘.”

막무가내로 손목을 잡아당기는 워커의 표정이 어찌나 간절한지, 셰비언은 아주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보기로 했다. 비록 워커를 찾아온 사람 때문에 잠을 설쳐서 기분이 몹시 나쁘더라도 말이다.

“갑자기 뭘 구해달래? 그 짧은 사이 무슨 생명의 위협이라도 당했어? 손은 또 그게 뭐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존재감? 아니 그, 압박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걸? 하여간 그런 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잠깐 내 옆에 앉아만 있어.”

“무슨 설명이 그래? 똑바로 말해 봐.”

“그게, 그러니까……. 강철새를 잃어버릴 뻔한 걸 막아주신 분이 계시거든. 내가 숙녀분인 걸 모르고 술 한잔 산다고 했는데, 알았다고 하셨단 말이야. 근데 그분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그게, 아주…….”

워커는 두서없이 말이 꼬이는 자신을 원망하며 입을 때렸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별반 나아지지는 않았다. 충분히 시원한 가게 안에 있는데도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주머니에 넣어둔 온도조절 마법도구가 고장 난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셰비언은 그제야 워커의 상태가 평소와 같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얼굴은 열이라도 오른 듯 붉고, 심장은 불안하게 펄떡거렸다. 이마와 목덜미를 가득 적신 땀도 심상치 않았다.

“대체 누굴 만났기에 이런…….”

워커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린 셰비언과 샤를레아의 눈이 마주쳤다. 셰비언의 눈이 경악으로 커지는 가운데, 샤를레아가 셰비언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붉은 입술이 발랄한 호선을 그렸다.

‘안녕.’

그 순간, 워커는 손을 통해 파고드는 냉기에 기겁해 그때까지도 쥐고 있던 셰비언의 손목을 홱 뿌리쳤다. 눈보라치는 겨울날의 들판에 맨몸으로 나간 듯 몸이 떨렸다. 샤를레아 때보다 더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르는 통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셰비언이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벙긋대는 워커의 어깨를 두드렸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압박감이 해소된 워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셰비언은 옅은 공포가 서린 눈동자를 확인하고 살짝 미안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워커, 아까 지하연구실로 널 찾아온 손님이 있었어.”

“……손님?”

“사…… 사하……. 뭐였더라. 아무튼 이름이 꽤 긴 남자였는데, 네가 비행 실험 나갔다고 하니까 알 만하다면서 돌아갔어.”

“사하스바티가? 나간 다음엔 연락 한 통 없던 녀석이 웬일로 지하연구실까지 왔대?”

“글쎄. 억지로 잠에서 깨서 만난 거라서 말이야……. 워낙 졸린 상태라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못 들었어. 그래도 다시 오겠다는 말은 확실히 들었거든. 그러니까 네가 지하연구실에 가서 그 손님을 기다리면 좋겠는데.”

“그, 그럴까? 하지만…….”

“저 여자는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말해둘 테니까.”

워커는 물끄러미 셰비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샤를레아를 두고 아무렇지 않게 저 여자, 라고 지칭하는 셰비언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샤를레아 씨에게서는 유황 냄새가 났어. 그리고 너에게선 아주 간혹이지만 냉기가 느껴졌지.”

“정말이지, 넌 너무 예민하다니까……. 짐작하다시피 구면인 사이야. 그러니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넌 가서 사하스바티인지 뭔지 하는 녀석을 기다리라고. 내내 계속 입에 달고 있던 이름이잖아?”

셰비언과 샤를레아가 짐작대로 동족이라면, 좀 전에 느꼈던 압박감의 정체야 쉽사리 짐작 가능한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던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워커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그러지 뭐.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면 내가 걱정할 건 하나도 없겠네.”

셰비언은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워커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정면에서 용의 기운에 노출되고도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는 마법사라니……. 그게 셰비언이 워커를 아끼는 이유 중 하나이긴 하지만 겪을수록 놀라웠다.

“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싶긴 하지만, 본래 우리 아가씨 지론대로 인생의 절반은 우연으로 이뤄지는 법이니까. 그럼 너는 동족과의 해후를 즐기고 와. 이따 보자.”

워커는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를 남기고 재빠르게 카페 디노를 빠져나갔지만, 셰비언은 워커의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샤를레아. 남쪽 바다의 지배자이며 고요한 섬의 주인.

용족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력을 행사하는 데 거침이 없던 그녀가 워커와 접촉한 게 정말로 우연일까?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웃고 있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이젠 다 아문 옆구리가 괜히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 있는 동족이 있는 건 좋지만, 하필…….’

셰비언의 미간이 사정없이 좁아지는 걸 확인한 샤를레아가 씩 웃었다.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대앉은 자세에서 여유와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빨간 혀가 붉은 입술을 선정적으로 핥고 지나갔다.

“왜, 내가 물어뜯은 옆구리가 아직도 아파?”

“말을 해도 꼭……. 그 옆구리 상처쯤이야 아문 지 이미 오래거든. 당신이야말로 심장은 잘 뛰고 있어? 내가 절반쯤은 후벼 파서 뭉개놨던 것 같은데, 움직이기 버겁진 않아?”

“누구 씨가 아주 자비를 베풀어서 절반쯤은 남겨준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아.”

“그거 안타까운 일이네. 절반이 아니라 그 이상을 뭉갰어야 하는데.”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건 여전하네. 그럴 능력은 됐고? 나도 꽤 봐줬던 거라는 걸 생각해야지. 치켜세워 줄 때 고맙게 받아.”

“봐줄 여유라곤 비늘 한 조각만큼도 없었던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헛소리야.”

한 명은 얼음요정의 현신 같고, 한 명은 용암 위에 피어난 붉은 꽃 같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두 미남미녀가 마주앉아 서로에게 독설을 날리고 있으니, 여기저기에서 흘끔대는 시선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셰비언이고 샤를레아고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인사가 아니니, 애꿎은 가게 주인만 애가 닳아 사방으로 눈을 부라렸다. 어쩌다 한 번 오는 일반인들보다야 단골 중의 단골인 마법사를 더 챙겨야지 않겠는가.

따악, 셰비언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주변에 얇은 막이 생겨났다. 대화가 새어나가는 걸 막아주는 것으로, 용들이나 알아볼 법한 오래되고 정교한 마법이었다.

셰비언은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짜증을 부렸다.

“젠장, 당신을 브란젤에서 보다니. 달튼 제도에서 희한한 화산이 터졌다고 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어. 정신을 완전히 차리기 전에 숨통을 끊어버렸어야 하는 건데.”

“내가 깨어난 직후였으면 손쉽게 죽일 수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꿈도 야무져.”

“뭔 소리야. 아예 끝내지는 못해도 도로 처자게 만들 정도는 쉽거든?”

“그래, 그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었겠다.”

샤를레아가 큰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셰비언은 그녀의 여유가 짜증나고 재수 없어 혀를 차면서도 차마 반박하진 못했다.

로렐라이가 세상에 마법을 풀어버리고 난 뒤, 이미 늦은 걸 알면서도 단지 화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셰비언을 죽이려고 덤볐던 샤를레아였다. 겹겹이 걸어놓은 보호마법을 몸으로 때려 부수고 들어온 무력에 얼마나 놀랐었나.

더구나 그때의 샤를레아는 이미 부상도 심했던 데다가 셰비언에게 마법마저 빼앗기고 지닌바 무력이 반쪽이 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셰비언은 옆구리를 크게 찢기고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심장 반쪽을 짓이기고 끝내 이겼다지만 운이 좋았던 게 컸다.

긴 내전을 거치는 동안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내던 사이인데 이렇게 마주앉아 말을 나누고 있으려니 온몸의 신경이 올올이 곤두섰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지만 태반이 잠으로 흘려보낸 세월이었다. 머리와 감정이 따로 놀았다.

셰비언이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는 가운데, 샤를레아가 조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손수건 한장이나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은 얄팍한 주머니에서 아이 주먹만 한 마력구슬이 튀어나왔다. 워커의 마력이 담겨 밤처럼 검은 구슬 안쪽에서 별처럼 노란 가루가 차르르 흘렀다.

셰비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마력구슬이야 브란젤 구석구석에 뿌리고 다녔으니 어디서든 주웠으려니 하겠는데, 하필 그게 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마법은 다 뺏은 줄 알았는데.”

“요샌 이런 잔재주도 마법으로 쳐? 셰비언 수준 떨어졌네.”

명색이 용인데, 마법으로 살아가는 거나 마찬가지인 종족인데, 설마 모든 마법을 빼앗겼을까. 그러나 산을 깎고 바다를 퍼내던 재주는 흔적도 없고 남은 마법이라곤 이런 잔재주가 전부이니, 샤를레아의 말투는 자연히 뾰족해졌다.

“이걸 처음 봤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바일런 섀덤은 죽었다는데 대체 어떤 천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건가 싶었다고. 한데 이렇게 네 얼굴을 보니까 알겠어. 너였구나?”

“다 내가 한 건 아니고.”

“그야 그렇겠지. 솔직히 너나 내가 하기엔 전형성에서 너무 벗어나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한 거였으면 이거 보자마자 알았을걸.”

마법망을 안정시키는 기술은 셰비언의 것이라도, 그걸 수식으로 바꿔서 구현하는 방식은 워커의 작품이었다. 샤를레아는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냈다.

“아까 그 마법사랑 같이 한 거 맞지? 이야, 비행마법 잘 고쳤더라. 아직 어설퍼서 그렇지, 조금만 더 다듬으면 마법의 궤도를 아예 벗어난 물건이 나올 수도 있겠던데.”

“워커는 천재니까.”

“아아, 맞아. 그런 걸 만들 정도의 창의력과 재능이면, 언젠가는 기차보다 더한 걸 만들 수도 있을 거야.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 하지만 비행마법에 대한 힌트를 준 건 너겠지? 짐작되는 원형이 딱 네 스타일이던데.”

“그런 건 왜 묻는 건데? 애초 워커에게 접근한 것도 우연은 아닐 텐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렇게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해. 심장 반쪽 날려먹고 실컷 자다 일어나니 성격이 바뀌기라도 했어?”

“감싸고돌기는. 야, 기차 제작자는 한참 전에 죽었대서 실망했는데 이런 마력구슬을 발견했다고 생각해 봐. 너 같으면 흥분 안 하게 생겼어?”

샤를레아는 손 안에서 마력구슬을 굴리며 셰비언을 흘겼다. 이 마력구슬을 발견한 뒤, 그녀는 셰비언을 만나러 북쪽으로 가려던 것도 미루고 브란젤에 주저앉았다. 제작자를 찾아 헤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장 마법사협회부터 찾아갔는데, 외국인한테는 회원 명단을 보여줄 수가 없다는 거야. 고집이 대단하던데. 내가 멱살을 잡아도 안 됐어. 덕분에 허비한 시간과 수고를 생각하면 진짜……. 어휴, 하마터면 오늘 비행실험 현장을 놓칠 뻔 했다니까.”

“그러니까 네가 왜 흥분해서 만나려고 난리냐고. 용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마법이 퍼지는 걸 제일 반대한 건 너잖아.”

“그랬지. 실은 지금도 불쾌해. 하지만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는 걸 어쩌겠어? 예전처럼 분풀이를 하겠다고 날뛰기엔 내 상태가 그리 좋은 것도 아니고.”

샤를레아가 셔츠 단추를 툭툭 풀고 옷깃을 홱 젖혔다. 그러자 비단처럼 아름다운 꿀색 피부에 새겨진 큰 상처가 드러났다. 일부러 떠내기라도 한 것처럼 깊이 팬 상처는 아직도 아무는 중이라, 상처 부위가 불그스름했다.

“마법망이 엉망인 세상에서 이런 마법을 만들어낼 재주를 가진 마법사라면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끝에 닿아 있는 게 결국 너라니.”

독백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한숨이 묻어났다. 샤를레아는 한탄하듯 말했지만 셰비언의 기분은 좀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몸 상태가 저 꼴이면 난데없이 행패를 부릴까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바로 마법의 주인이야. 워커가 아니라 바일런 섀덤이 살아와도 내 허락 없이 그 상처 치료 못 해. 억울하면 잠이나 더 처자면서 치료하든가.”

“빈말로라도 치료해 준다는 소리는 안 하지. 하긴, 너와 내가 그런 입 발린 소리 하며 웃을 사이는 아니긴 해.”

샤를레아가 주문한 독한 위스키가 그제야 나왔다. 그녀는 얼음 한 조각 넣지 않은 잔에 위스키를 잔뜩 따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불이라도 머금은 듯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에 고이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후, 이제 좀 살아 있는 것 같네. 야, 셰비언.”

“왜?”

“남아 있는 동족이라곤 진짜 너랑 나밖에 없는 거야? 어디 구석진 곳에 숨어 살아서 못 찾고 그러는 거 아니고?”

“…….”

“그래, 마법의 주인인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무슨 말을 들을지 뻔히 알면서 그걸 또 미련하게 물어봤네, 내가.”

줄어드는 동족들을 보며 속을 끓이던 시간들이 엊그제 같은데, 눈 떠 일어나 보니 세상은 이미 변할 대로 변했고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가진 줄도 모르게 갖고 있던 희망이 꺾이자 반쪽만 남은 심장이 새삼스러운 고통을 호소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잔을 채웠다. 불을 담은 물을 몇 번이고 들이켜고 나니 눈앞이 핑 돌면서 괜한 웃음이 샜다.

“씨발,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뭘 그렇게 피터지게 싸웠나 싶다. 싸울 시간에 다른 방법을 더 찾아볼 걸 그랬어.”

“다른 방법 같은 건 없었어. 피할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말귀 못 알아듣는 건 여전하네.”

“그렇게 쉽게 멸망을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등신아. 살아 있다면 모쪼록 마지막까지 발악해 봐야 하는 거야.”

셰비언은 더 이상 말을 받아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주정뱅이와 토론해 봐야 맨정신인 쪽만 피곤해지는 법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샤를레아가 겨우 위스키 몇 잔에 이 꼴이 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긴 했지만, 가슴의 상처를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마법이 곧 용이라고 말해봐야 통하지 않겠지……. 하긴, 나도 받아들일 때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는데.’

진즉에 멸망을 받아들인 셰비언도 오드리를 만날 때까지 반쯤 미쳐서 돌아다녔는데, 마지막까지 끝을 부정했던 샤를레아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멀쩡한 인간인 척 모습을 꾸미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마법 말고 다른 방법도 써볼걸……. 마법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다른 길을 놓친 것 같단 기분이 계속 들어…….”

“할 수 있는 건 우리 쪽에서 다 해 봤어.”

“그래……. 젠장,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야.”

샤를레아가 자꾸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거나하게 취했다. 그놈의 동족이 뭔지, 셰비언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걸 참고 그녀의 앞으로 요리 접시를 밀어주었다.

샤를레아는 편식하는 아이처럼 접시 위에서 닭고기만 야금야금 골라 먹었다. 바다를 영지로 하고도 생선보다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셰비언이 툭 말을 던졌다.

“너, 인간 잡아먹었지?”

“응……. 응?”

“네 섬에서 터진 화산을 조사하겠다고 갔던 배가 텅 비어서 혼자 항구로 돌아왔다고, 세상에 이런 괴기현상이 다 있느냐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

“아……. 그게 또 소문이 났어? 역시 인간들은 모여 살아서 그런가 말이 빠르네. 머릿수가 이렇게나 많은데 그중에 겨우 몇 명 줄어든 걸 가지고 어지간히 호들갑을 떨었나 보지?”

샤를레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닭고기 한 점을 더 먹었다. 향신료에 재워 구운 닭고기엔 특유의 풍미가 살아 있어 아주 맛있었다.

“그리고 텅 비긴 무슨……. 억울하다, 그거. 재산을 제일 중요한 걸로 치는 것 같아서 그건 안 건드리고 돌려보냈어.”

“그걸 자랑이라고…….”

마력을 흡수하고,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습득하고, 통용되는 언어를 익히고. 셰비언이 마법으로 해결한 모든 일들을, 마법을 빼앗긴 샤를레아는 가장 폭력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

샤를레아가 잠들기 전의 시대는 다수의 종족이 힘겨루기를 하며 서로 죽이기를 서슴지 않던 때였고, 그녀는 가장 격렬한 전장에 빠지지 않고 서던 이였다. 막 깨어나 방비가 약해진 상태에서 자신의 영지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유화적인 방법을 택했어야 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젠장, 화산 터졌다는 기사를 봤을 때 당장 가봤어야 하는 건데……. 어휴.”

그를 뻔히 알면서도 한숨부터 나오는 건, 셰비언이 인간들의 사회에 머문 시간이 샤를레아보다 월등히 길어서일 것이다. 샤를레아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탁자를 불만스럽게 두드렸다.

“뭔 한숨이야, 한숨은. 마음에 안 들면 최소한의 마법이라도 좀 돌려주든가.”

“그 최소한의 마법으로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해치워 놓고 뭘 달래? 너 같음 주겠어?”

“그럼 한숨을 쉬지 말든가. 지금 내가 이만큼 적응해서 지내는 것도 나름 대단한 거 아냐?”

“아 그래, 엄청 대단하다.”

셰비언은 대충 장단을 맞춰주며 샤를레아의 먹성을 구경했다. 자신도 꽤나 대식가인데, 샤를레아는 그보다 더했다. 닭고기 채소 볶음 요리가 벌써 두 접시째였다. 채소는 거의 손대지 않았대도 대단한 양이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접시를 비우던 샤를레아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참, 요새 뒷골목에 좀 이상한 것들이 돌아다니던데, 봤어?”

“이상한 거?”

“응. 인간은 인간인데, 뭐랄까……. 다른 종족하고 섞인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옛 종족들은 마력의 형태로만 인간 내에 존재하잖아. 한데 그 마력이 형태를 갖추고 튀어나오더라고.”

셰비언의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인간의 형태에서 벗어난 기괴한 시체는 지금도 꾸준히 발견되고 있었다. 지금 브란젤을 휩쓰는 괴물에 대한 소문이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겠는가.

정작 눈이 벌게져서 찾아다니는 치안대원들 눈에는 한 번도 띈 적 없고, 마법망을 확인하러 브란젤을 헤집고 다니는 셰비언과 워커의 눈에도 띈 적 없는데, 그게 왜 하필 샤를레아의 눈에 띄었을까.

그는 몸을 기울여 샤를레아가 막 마시려던 술잔을 빼앗았다. 샤를레아가 짜증을 부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자세히 얘기해 봐.”

“아 진짜……. 내가 너라서 참는다. 오래된 건 아니고, 며칠 전에 본 거야.”

며칠 전, 흰 초승달이 별의 바다를 가르고 항해하는 늦은 밤. 샤를레아는 이른 저녁부터 호가르 거리의 도박장에서 게임을 즐기다 굳이 골목길에 나와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달밤인데도 후끈하게 피부를 달구는 더위를 즐기는 중, 골목길 저쪽 끝에서부터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인영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술을 어찌나 처마셨는지 싸구려 알콜 냄새가 거리를 뛰어 넘어 코를 자극했다.

도둑과 강도가 날뛰는 때에 술을 마시고 밤길을 걷는 용기라니,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저리 간덩이가 클까. 호기심이 일어 눈을 떼지 않고 비틀대는 인영을 지켜보았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 그림자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가진 게 없어 두려울 것도 없는 놈이네.’

후줄근한 옷엔 때가 덕지덕지 묻었고, 머리와 수염은 이발할 때를 놓쳐 봉두난발이었다. 게다가 구멍 난 신발을 찍찍 끌면서도 한 손엔 싸구려 술병을 들었다. 요즘 일부 빈민들이 배급받은 물을 팔아 술을 사 마신다더니 딱 그런 놈이구나 싶었다.

샤를레아는 곧 흥미를 잃었다. 그녀는 남은 담배를 맛있게 태우고 돌아가 또 게임을 즐길 생각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종족의 주도권을 쥐고 싸울 일이 없어서 그런가, 인간들의 세상은 흥미로운 오락거리가 많기도 했다.

샤를레아의 담배가 거의 다 떨어져 갈 때쯤, 그녀의 근처에까지 온 취객이 술병을 떨어뜨렸다.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골목길을 울리고 샤를레아의 주의마저 끌어당겼다.

취객은 그대로 주저앉아 쏟아진 술을 아까워하며 바닥을 더듬거렸다. 그런다고 이미 쏟아진 걸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손을 다칠 위험만 늘어나는데도, 그런 건 전혀 모르는 듯했다.

땡그랑!

세상에 무슨 변덕이 불었는지, 샤를레아는 주머니에서 구르던 동전 몇 개를 꺼내 던졌다. 싸구려 술 한 병은 충분히 살 만한 금액이었다.

젖은 바닥을 핥을 기세로 바닥을 훑던 취객은 난데없이 떨어진 동정을 허겁지겁 주웠다. 그리고 흘끔, 고개를 들었다가 샤를레아와 눈이 마주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달빛을 녹이는 붉은 머리칼과 음영이 확실한 고전적인 이목구비만으로도 눈을 뗄 수가 없는데, 셔츠에 바지라는 자유분방한 차림에 허리엔 큼직한 칼을 찼다. 거기에 한 손에 긴 담뱃대를 들고 붉은 입술에서 흰 연기를 뱉는 모습이 마치 전쟁의 신 벨트람의 현신 같았다.

샤를레아는 저를 보고 몽롱하게 변해가는 눈동자를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이미 숱하게 겪어본 일이라 새삼 신기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취객의 이마에 불그스름한 실선이 생겼다 벌어지고 그 사이로 초록색 눈동자가 데구루루 구르는 걸 보았을 땐, 너무 놀라 담뱃대를 떨어뜨릴 뻔했다.

‘나무요정? 아니야, 분명 인간이었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취객의 손이 주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팔을 더듬고 몸을 더듬고 얼굴을 더듬었다. 취객은 멋대로 움직이는 손을 괴물 바라보듯 보았으나 그것도 잠시.

“아……어……으억…….”

왼손은 비명을 지르려는 혓바닥을 움켜쥐었고, 오른손은 숨을 헐떡대는 목을 졸랐다. 웅크린 등에서 가시가 돋아 옷을 찢고 튀어나왔고, 발은 형태를 잃고 나무뿌리처럼 변했다. 바닥에 이마를 몇 번이고 처박으며 꿈틀대던 몸이 얼마 못 가 동작을 멈췄다.

신음소리는 물론이요 숨소리마저 사라진 골목엔 가로등 불빛에 이끌려온 날벌레들의 날갯짓 소리만 요란하게 남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샤를레아가 취객의 이마에 생겨난 눈에 당황한 나머지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에 좀 취했을 뿐 멀쩡히 살아 있던 취객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방식으로 죽어버렸고, 그의 시체는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좀 민망한 상태가 되었다.

샤를레아는 시체를 발로 툭툭 건드려 밀었다. 나무뿌리처럼 퍼진 발이며 등에 솟아오른 가시가 방해가 되어 완전히 뒤집히지는 않았지만, 일단 시체가 옆으로 쓰러지니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슬쩍 걷어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원망과 분노를 가득 담아 부릅뜬 눈이 시체의 이마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포만 담긴 아래쪽의 두 눈과는 눈동자 색깔도 눈빛도 전혀 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마법의 주인은 아니라도 용인데, 명색이 마법의 종족인데 도저히 상황이 짐작되질 않았다. 잡아먹은 인간의 지식을 되살려 샅샅이 뒤져도 정보가 나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지식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일정량의 탈락이 있다지만 이 정도 백지라면 아예 없다고 봐야 했다.

‘기분은 별로지만……. 어쩔 수 없지.’

시체에 마력을 주입해서 상태를 살피는 건 상당한 불쾌감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하물며 이렇게 인간도 요정도 아닌 시체라면 찝찝함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아주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 샤를레아는 시체의 이마에 손가락을 올리고 소량의 마력을 밀어 넣었다.

“윽…….”

이마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 샤를레아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반응이지만 역시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느껴지는 마력의 성질도 이상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나무요정에 더 가까운데……?’

인간의 옛 마법사들이 종족전쟁을 치르며 타 종족들의 마력을 훔쳐왔다는 거야 알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짓이긴 해도 알맹이는 제각각이면서 형태는 똑같이 유지하다니 대단한 솜씨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시체는 그 균형이 전혀 맞지 않았다.

인간의 외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둑이 무너지면서 잠들어 있던 나무요정의 마력이 한순간에 깨어났다고 봐야 했다. 그것도 형태를 가지고 발현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본체에 해당하는 인간의 몸을 살해할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말이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일이로군.’

시체를 탐색하면 할수록 불쾌감은 커지는 데 반해 돌아오는 정보량은 보잘 것 없으니, 샤를레아는 그만 지쳐 시체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한데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양 시체가 다시 변형을 시작했다.

등에 솟아났던 가시들이 시체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복부를 헤집고 큰 상처를 만들었다. 뿌리처럼 변한 발은 쩍쩍 갈라지다 못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아직 신선한 피가 골목길에 쏟아지며 짙은 피비린내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샤를레아는 동그랗게 퍼지는 피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까짓 피 좀 밟는다고 어떻게 될 건 아닌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담뱃대를 물고 질겅대다 끝내 빨아들이지 못하고 뱉었다. 꼴 보기 싫은 시체를 앞에 두고는 피울 맛이 안 났다. 거기에 돌아서서 도박장으로 다시 들어갈 마음도 안 나는 걸 보니, 오늘의 흥은 완전히 깨졌다.

“씁, 살다 보니 별 꼴을 다 보겠네.”

그녀는 시체를 폴짝 뛰어넘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희한한 꼴의 시체가 생겼으니 곧 브란젤이 시끄러워지겠구나, 생각하면서.

샤를레아는 말을 끝내자마자 셰비언에게서 잔을 빼앗았다. 호박색으로 찰랑거리는 위스키를 또 한 번에 넘기고는 입술을 닦았다.

“그런데 있잖아, 너무 조용하더라고. 여기 브란젤에는 기자니 뭐니 남들 사는 게 궁금한 시끄러운 짹짹이들이 잔뜩 있는데 떠드는 놈이 아무도 없어. 사람이 안 다니는 길도 아니고, 평범한 시체도 아닌데 말이야.”

“…….”

“하도 이상해서 그 골목길을 다시 가봤지? 한데 시체가 뭐야, 핏자국 하나 없더라.”

그 골목길 주변에 있는 상점들을 다 돌면서 확인했지만, 누구도 샤를레아의 질문에 긍정의 답변을 주지 않았다. 다들 아무 일도 없었는데 무슨 소리냐며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하지만 샤를레아는 그 골목이 평소 얼마나 지저분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눈발처럼 날리던 담뱃재와 여기저기 뱉어놓은 가래침을 기억했다. 때때로 코를 막고 싶게 하던 지린내까지도.

“다들 아니라고 하니까 혹시 내가 선 채로 꿈을 꿨나 고민까지 해 봤다니까. 그런데 평소에 그 지저분하던 길이 아주 반짝반짝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거야. 골목이 아니라 대로변인 줄 알았어.”

시체를 수습하고 골목길을 청소한 누군가가 주변 상인들은 물론이고 목격자와 기자들의 입까지 모조리 틀어막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샤를레아는 턱을 괴고는 손에 든 잔을 살랑살랑 흔들며 셰비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취기가 올라 머리가 멍하고 눈앞이 살짝 어지럽긴 해도, 셰비언이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고 있는 건 아주 잘 보였다.

“넌 마법의 주인이잖아. 그런데 몰랐어?”

“내가 마법의 주인인 거랑 그런 괴물이 나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걸 알아?”

“옛날엔 다 알았잖아.”

“그거야 옛날 일이고. 요즘 세상에 마법사가 어디 한둘이야?”

셰비언이 어처구니없어 하며 쏘아붙였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시대엔 마법이 너무 많았다. 그가 한눈에 모든 걸 파악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랐다. 당장 브란젤만 해도 수십, 수백 가지의 마법도구를 기반으로 해서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튼 어떤 미친놈이 인간신체변형연구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 신경이 쓰였었는데, 샤를레아의 목격담을 듣고 나니 그쪽으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봤자 이해할 수 없는 괴현상이라는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거기까지 관심을 가져서 뭘 하겠는가. 당장 메시지 장치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그는 곧바로 방관자의 입장이 되어 느긋해졌다.

“인간의 외형 안에 수십 가지 종족의 마력이 담겨 있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갑자기 변형되는 것도 모자라 그대로 죽었다는 게 황당하긴 하네.”

“그러니까. 내가 눈앞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게?”

“그 시체를 치우고 입을 막은 건 치안대일 거야. 이상한 시체가 자꾸 나와서 곤란하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 그러니 웬만하면 너도 어디 가서 떠들지 마. 생포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괜히 얽혀봐야 좋을 거 없어.”

“이상한 시체라……. 하긴, 지금의 인간들은 인간 외의 종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 같긴 하더라. 아마 어느 미친 마법사의 짓일 거라고 생각하겠지.”

“난 눈앞에서 본 것도 아니고 시체도 본 적 없어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데. 네가 보기엔 뭐 때문인 거 같아?”

“그걸 내가 알면 너한테 물어봤겠어? 마법사의 짓은 아니라는 것만 확실히 알 뿐이야. 오래 전에 인간의 마법사들이 해놓은 짓이 이제 와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게 아닐까?”

샤를레아의 접시가 거의 다 비었다. 셰비언은 더 주문하는 대신 제 몫의 맥주를 마시며 그녀를 비웃었다.

“이제 와서? 마력의 계통마저 무의미해진 지금에 와서?”

“끙…….”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유독 인간 외의 마력을 많이 가진 인간들이 있으니까……. 그 취객도 그런 종류였겠지.”

셰비언은 오드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 역시 이 시대의 인간이라기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용의 마력이 뚜렷했다. 우연과 착각이 겹친 일이었지만, 그때 마력을 안정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리 긴 삶을 살지 못했을 터였다.

한편 샤를레아는 만탈락에서 비늘을 떼어주었던 에이미의 경우를 생각했다. 햇볕을 쬐면 수포가 돋는 통에 하루 온종일 집 안에만 있던 아이였다. 다른 인간들과는 마력의 성질 자체가 달랐다. 하지만 단순히 마력 문제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겨우 그것뿐이라 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엉망진창인 마법망이었다.

‘에이미만 해도 만탈락 특유의 괴상한 마법망이 상태를 악화시키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어.’

인간은 인간과 살아야 하기에, 그리고 지금의 인간 문명에선 마법을 빼놓을 수가 없기에 비늘을 떼어주었던 게 아니었나. 마법과 마법도구 속에서 살아가면서 마법망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콧잔등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긴 셰비언을 찬찬히 관찰했다. 아무리 마법사가 많고 마법도구가 넘쳐나는 시대라도, 이렇게까지 마법망이 이상한데 마법의 주인이 저렇게 경각심이 없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다.

‘어려서 그런가? 아냐, 그보다는……. 그래, 어차피 예전과 같을 수는 없는 거니까……. 당장 나만 해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용이 멸족의 길에 접어든 원인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무사히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숨이 멎어 일어나지 않던 동족들처럼 죽을 수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샤를레아는 끓는 속에 연신 위스키를 부어넣었다. 보다 못한 셰비언이 그녀를 말렸다. 고운 말은 아니었다.

“적당히 처먹어. 다른 종족도 아니고 용이 술 먹다가 죽었다고 하면 얼마나 웃기겠어.”

“죽지 않을 정도로는 조절하고 있어.”

“갈 곳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면 나 있는 데로 오든가.”

“너 있는 데? 뭘 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상한 물건 만드는 곳에 마법도 못 쓰는 내가?”

“마법사 말고 용병으로 지원해. 옛날부터 너 몸 쓰는 일은 잘했잖아.”

셰비언은 늘 가슴에 품고 다니던 금속 명함을 꺼냈다. 예전에 오드리에게 받은 것이라 남 주는 게 아까워 죽을 것 같긴 했지만, 나중에 도로 빼앗아오면 그만이었다.

“필리아 거리의 로렐라이 지점에 가. 이거 가지고 가서 셰비언이 추천했다고 해. 그럼 면접 기회를 줄 거야.”

“로렐라이라……. 재밌는 물건을 많이 팔던 거기네. 좋아, 나름 흥미가 생기는걸. 나중에 나 끌어들이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나 하지 마라.”

샤를레아는 셰비언이 말을 무르기 전에 벌떡 일어나 그가 펼쳐 놓은 막을 비집고 나갔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 누군가의 대화 소리, 박자도 음정도 엉망인 연주……. 까맣게 잊고 있던 시끄러운 소음이 밀려들었다.

“……활기차네.”

문득 자조가 밀려왔다. 지키겠노라 맹세했던 걸 모조리 잃고도 어쨌거나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자신에 대한 미움.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그저 변명일 뿐이었다.

샤를레아는 뱃속에 담은 불만큼 타오르는 증오와 분노를 웃음으로 삼키며 햇빛 아래로 걸어 나갔다. 어차피 살 거라면 제대로 살아야 했다. 그저 숨만 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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