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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 로맨스의 계절 (15/62)

chapter 14. 로맨스의 계절

「신이 어떤 한 가지만을 상징하는 일은 드물다. 예컨대 포모스는 행운의 신이자 모험의 신이며 볼린은 사랑과 예술의 신임과 동시에 질투의 신이다. 신이 가지는 다면성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데……. - 신화와 인간성 中」

다음 날, 마침내 오드리가 라디아타와 함께 휴가를 떠나는 날. 카프러스는 이른 아침부터 기이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좀 덥다 뿐이지 날씨는 완벽에 가깝고 모든 준비는 순조로우며 가장 걱정했던 라디아타마저 그를 쉬이 일행으로 받아주었는데도 말이다.

브아아아아앙-.

기차가 마법 동력 특유의 소음을 내며 브란젤역을 출발했다. 유리창 밖의 세상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기찻길에 세워진 가로등과 그 사이에 선 가로수, 골목을 헤집으며 노는 아이들, 낮은 지붕 위에 늘어져 잠든 고양이……. 형체 잃은 색이 길쭉하니 늘어나 뒤섞였다.

카프러스는 적당히 챙긴 짐을 주어진 객실 침대 아래에 대충 밀어 넣고 마른세수를 했다. 기차가 출발하고 나고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이 실감 난 탓이다.

‘도련님더러 뭐라 할 주제가 아니었군.’

오늘 새벽, 그는 휴가를 같이 가겠다며 마차 짐칸에 숨어든 하델을 잡아냈다. 어쩐지 도련님께서는 그리 좋아하시는 아가씨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으냐 한껏 비꼬는 동안 하델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라니. 하델은 경 또한 다를 거 없다 반박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방해하지 말라는 표지를 문에 걸어두었는데 별일이었다.

“라비린 벨키스 타우레드네. 들어가도 되나?”

“…….”

“잠깐 실례하지.”

너무나 뜻밖의 사람인 탓에 당황해서 대답하지 못한 사이 문이 열렸다. 카프러스는 라비린이 자연스럽게 객실에 들어와 의자를 차지하고 앉는 꼴을 지켜보았다. 거절은 생각지도 않은 듯한 태도가 거슬렸다.

라비린은 무표정으로 형식적인 예의를 갖추는 카프러스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기사교본에서 튀어나온 듯 고지식한 기사라고 하더니, 이거야 원 전혀 아니잖은가. 라비린은 카프러스의 적대감 어린 시선을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타우레드 후작가의 후계자, 벨키스 남작, 기사 작위가 있고 사지 멀쩡하며 재산도 넉넉하지. 추문을 일으킨 적 없고 더러운 습관이 없는 데다 이만하면 인물도 나쁘지 않아. 헨젤 영애에게도 꽤 괜찮은 조건 아닌가?”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자네가 내게 보이는 적대감은 에스코트 기사라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상당한 수준이거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해. 모시는 아가씨와 에스코트 기사 사이의 로맨스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는 거지.”

카프러스의 무표정이 산산조각났다. 대단한 모욕을 받은 듯 일그러지는 얼굴에서 충격과 분노가 드러났다.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찾는 모습이, 장갑을 끼고 있었으면 앞뒤 재지 않고 던졌을 것만 같다.

‘고지식하다는 평이 맞긴 하군. 이제 알아서 잘 하겠어.’

라비린은 카프러스를 더 상대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일어났다. 애초 카프러스가 오드리를 바라보는 눈빛에 미묘한 열기가 어려 있음을 눈치채고 찾아온 길이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경고를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알아서 스스로를 잘 단속할 게 틀림없었다.

“리가 항구는 귀족들이 선호하는 휴양지 중 한 곳이지. 대부분은 휴가를 가서도 품위를 유지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도 널려 있어. 날 경계하기보다는 축제 분위기에 휩쓸린 어린놈들의 자제심을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현명할 거야.”

“……충고 감사합니다.”

“뭘. 알아서 휴가를 반납하고 일하겠다는데 그 정도 충고는 해줘야지.”

짓궂게 웃으며 나가는 라비린이 어찌나 얄미운지. 카프러스는 닫힌 문을 향해 울분을 담아 베개를 내던졌다.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베개가 떨어졌다. 소박한 침대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라비린을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조건이고 나발이고, 인사를 핑계로 끈적하게 손을 잡는 남자를 어떻게 경계하지 않겠는가. 아가씨의 주변에 다가오는 남자들을 막는 거야말로 에스코트 기사의 임무이지 않던가.

괴상한 옷 입기를 즐기고 남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골라 하더라도 가문의 아가씨였다. 보호와 충성의 대상이었다. 밝혀지면 곤란한 비밀을 말해준 믿음에 보답해야 했다. 저절로 눈길이 가고 유독 마음이 쓰이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그녀의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북쪽 지역의 체리꽃을 구해다 선물하고, 이른 아침의 승마를 빠지지 않고 따라붙고, 에스코트 기사가 필요 없는 티타임을 수행한 것도 모자라 억지를 써가며 휴가에 동행한 지난 행동은 전혀 돌아보지 않은 결론이었다.

라비린과 카프러스 사이의 신경전을 알 리 없는 오드리와 라디아타는 기차 여행을 알차게 즐겼다. 지역 특산물로 꾸려진 식사와 디저트를 즐기며 각종 게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카드놀이를 하다 지치면 악단을 불러 연주를 듣거나 마술사의 쇼를 구경하기도 했다.

기차칸에 갇혀 있다시피 하는 여행이니 지루할 만도 하건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는 갑갑한 시간마저 쏜살같이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말의 첫머리를 꺼내면 이미 그 뒤를 알아 답하고, 눈짓만으로도 속내를 읽어내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라디아타는 일정이 미뤄지는 내내 침대 신세를 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멀쩡했다. 길고 긴 여름해가 지고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오르면 딱 그만큼 반짝거리는 눈으로 와인을 찾았다. 일단 자정이 지나면 영 맥을 못 추고 침대를 찾는 오드리와는 정반대였다.

오드리는 잠깐 눈을 뗀 사이 새 와인을 딴 라디아타를 어이없어하며 바라보았다. 늦게 떠오른 달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시간, 식당칸을 휘황하게 밝히던 마법등도 하나둘 뚜껑 아래로 빛을 숨기는데 새 와인이라니.

“라디아타, 그게 들어가요?”

“안 들어갈 건 또 뭐죠? 오드리도 더 마실 수 있잖아요?”

손 빠른 급사가 그때그때 치워서 그렇지, 두 사람이 비운 와인은 한 병이 아니었다. 라디아타는 말술인 오드리가 질릴 정도로 마셔놓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드리에게 한 잔 더 하라며 권하기까지 했다.

“마지막이에요. 딱 한 잔만 더 해요.”

“마지막은 아까도 마지막이라면서요?”

“에이, 그건 그 병의 마지막이고요. 이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먹는 마지막.”

“내일 낮이면 기차에서 내려야 하는 거 알고 마시는 거죠?”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다 깨잖아요. 문제없어요. 자, 건배!”

라디아타는 대놓고 질린 표정을 짓고 있는 오드리를 재촉해 계속 술을 마시게 했다. 끝내 라디아타를 이기지 못한 오드리가 졸린 눈을 비비며 잔을 기울이는 동안, 그녀는 흘끔 오드리의 어깨 너머를 훔쳐보았다.

기차 여행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오드리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인내심을 발휘한 기사가 라디아타의 흥미를 끌었다. 굳이 올 필요도 없는 티타임에도 꼬박꼬박 수행을 올 때부터 그 고지식함을 짐작했지만, 기차에서도 이럴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오라버니는 진즉에 나가떨어졌는데.’

라비린은 어떻게든 둘 사이에 끼어 앉아 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끊임없이 오가는 술까지 견디지는 못했다. 그는 오드리와 라디아타가 와인 세 병을 연료 삼아 신화와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에스코트 기사의 입장인 카프러스는 와인을 마시지 않았으니 라비린보다야 나았겠지만, 관심 없는 이야기를 맨정신으로 계속 듣고 있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고역이었을 터다. 그럼에도 불쾌감이나 짜증보다 걱정을 먼저 비치는 저 성실함이라니.

오드리는 잠과 술이 뒤섞이자 정신을 못 차리고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그녀는 라디아타가 카프러스에게 관심을 두는 건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대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라디아타……. 이젠 진짜 못 먹겠어요. 내일 내가 인사불성이 되어 못 일어나면 다 라디아타 탓이에요.”

“어제도 똑같이 말해놓고 새벽같이 일어났잖아요. 그렇지만 더 먹였다가는 내가 베텔 경에게 혼날 것 같긴 하네요.”

가만히 있다가 벼락을 맞은 카프러스가 어깨를 움질거렸다. 오드리가 베텔 경을 괴롭히지 말라는 둥의 말을 웅얼댔다. 그 짧은 새에 잠에 반쯤 취해서 발음이 엉망이었다. 라디아타는 빈 잔에 와인을 더 따르며 손짓했다.

“베텔 경, 오드리를 객실까지 데려다주세요.”

“레이디 타우레드께서는 일어나지 않으십니까?”

“저 바깥을 보세요.”

카프러스는 라디아타의 손짓에 따라 창문 밖에 시선을 주었다. 시간이 시간이라, 기차는 간이역에 멈춰 선 상태였다. 간이역에 줄지어 늘어선 마법등의 불빛이 어둠을 쫓는 가운데 날벌레 수십 마리가 등 주변에서 춤을 췄다. 배경이 낯설 뿐,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저 마법등의 불빛들이 마치 땅에 떨어진 별빛처럼 보인답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별빛 가운데에 잠겨서 잔을 기울이고 있는 거죠. 낭만적이지 않나요?”

낭만은 무슨 얼어 죽을 낭만. 카프러스는 라디아타가 마신 와인의 양을 어림짐작해 보곤 내심 혀를 찼다. 얼굴색이 멀끔하고 혀가 꼬이지 않아서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지, 웬만한 장정도 고꾸라지기 충분한 양이었다.

“……일단 아가씨를 바래다 드려야 해서 자리를 비웁니다만,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식당칸에서 오드리의 객실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카프러스는 반 억지로 오드리를 일으켜 세우고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일어나자 오드리도 잠이 좀 깨는지, 비틀대면서도 어떻게든 제 발로 복도를 걸었다. 그래도 카프러스의 손을 지팡이 대신으로 삼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복도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마법동력이 멈춘 데다 승객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마법등만 뚜껑을 벗겨놓았기 때문이었다.

딱딱한 구두굽이 나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타박타박 울렸다. 자줏빛으로 칠한 복도에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오드리가 숨을 쉴 때마다 달콤한 와인 향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카프러스는 제 눈과 귀와 코가 평소보다 배는 예민해져 오드리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휘청거릴 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다 곤두섰다. 와인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는데 술에 취한 듯 심장이 정신없이 뛰고 체온도 달아올랐다. 지팡이 대용으로 잡힌 손에서 자꾸 땀이 났다.

식당칸에서 오드리가 머무는 객실까지의 거리가 한없이 짧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짧다 생각했던 거리였는데, 어째 평소의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도착한 듯했다. 금박 입힌 방 번호가 밉다가도 그게 미운 자신이 놀라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문을 여는 자신의 손이 떨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경, 수고했어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내일은 일찍 일어나셔야 합니다.”

“내가 못 일어나면 다 라디아타 탓인 줄로 아세요.”

끝끝내 라디아타 탓을 하며 웃던 오드리가 문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카프러스는 텅 비어버린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이 낯설어 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는 무심결에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오드리의 손 모양을 머릿속으로 그려내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모시는 아가씨에 대한 경애가 지나치다.’

약간의 호기심, 낯선 모습에서 느껴지는 흥미,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마음. 분명 처음엔 그게 전부였던 거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그림자를 존경과 애정이 뒤범벅된 마음으로 좇고 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계속 이렇게 오드리의 객실 앞에 서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카프러스는 복도를 채운 와인 향기를 헤치고 식당칸으로 돌아갔다. 자리까지 창가로 옮겨 유유자적 잔을 기울이던 라디아타가 놀란 토끼눈이 되어 그를 맞았다.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는데.”

“레이디께서 혼자 계실 걸 아는데 어떻게 오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타우레드의 기사에게도 기대하지 않을 기사도였으니까요.”

카프러스는 이미 숱하게 들어온 얘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라디아타의 뒤에 섰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술을 마실 수도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라디아타에게는 몹시 신선하게만 느껴졌다. 오지 말라는 걸 끝끝내 따라올 때는 그렇게 재수 없고 밉더니, 이럴 때는 꽤 든든하지 않은가.

‘고지식한 것도 나름 매력이 있네.’

첫째로는 앞에 앉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들고, 둘째로는 잔소리가 없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말은 없어도 표정으로라도 잔소리를 할 수 있을 텐데, 창문에 비친 기사는 속내를 알 수 없게 무표정했다.

라디아타는 느긋한 태도로 연달아 잔을 비웠다. 휴가가 끝나고 나면 소식을 들은 부모님에게 불벼락을 맞을 테지만, 당장은 방해 없이 술을 즐기는 이 시간이 행복할 뿐이었다.

“난 술을 일찍 배웠어요. 어머니께서 산트렘 출신이시라, 식사 때마다 내게도 포도주 한 잔이 나왔거든요. 까다로운 예법을 지켜가며 힘겨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마시는 달콤한 백포도주가 그렇게 좋았어요.”

“산트렘이 포도주로 유명한 지역이긴 합니다만, 어린아이에게 술이라니 놀랍습니다.”

“하하……. 곧고 바른 베텔 경에겐 좀 낯선 문화일지도 모르겠네요.”

쓸데없는 혼잣말에도 성실하게 대답하는 카프러스는 괜찮은 말동무였다. 라디아타는 정말 즐겁게 남은 병을 모조리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정을 좀 미루는 건 어떻겠습니까? 수면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내게는 익숙한 시간이에요. 경, 에스코트 해주겠어요?”

타우레드의 황금장미는 우아하게 헨젤의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왕자의 에스코트를 매번 거절하고 있다는 건 왕국 전역에 유명했다. 그를 뻔히 알면서도 카프러스는 라디아타의 요청에 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하면, 그게 더 없이 기사다운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리가 항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정확히는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 그리고 하늘과 똑같은 색으로 빛나는 바다가. 걸리는 것 없이 뻥 뚫린 시야가 시원하고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어떤 음악보다 듣기 좋았다. 쭉 내뻗은 손에 소금기 묻은 바람이 달려들어 손가락 사이를 희롱하다가 멀리 사라졌다.

가슴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약간 비릿하고 짭짤한 냄새가 폐 안쪽까지 가득 밀려들었다. 익숙하게 맡아오던 숲의 향기와는 전혀 다른 냄새인데 찝찝하거나 불쾌하지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바다 냄새를 고스란히 담아서 브란젤의 방에 가져다 놓고 싶을 정도였다.

반면 만탈락에 가기 전엔 틈날 때마다 리가 항구를 들락거리곤 했던 라비린에게 바다는 익숙한 장소였다. 그런 그에게 테라스에서 도통 나올 생각을 않는 오드리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그는 오드리에게 감상적인 면모를 기대한 적이 없었다.

“바다가 마음에 드십니까?”

“아름답잖아요.”

오드리는 라비린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타우레드의 별장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이런 식으로 불쑥 다가와 말을 거는 그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초반엔 매번 깜짝깜짝 놀랐었지만, 어느새 본래 그런 사람이겠거니, 하고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라비린은 그런 오드리의 태도에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주방에까지 가서 받아온 차가운 음료 두 잔을 난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마치 마실 테면 마시고, 싫으면 말라는 듯이 담백한 태도였다.

“하긴, 이 계절의 리가 항구는 보석처럼 아름답지요.”

대화가 끊겼다. 오드리는 대꾸할 말을 찾는 노력을 하는 대신 라비린이 밀어준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지역에서 으레 마신다는 새콤한 과즙음료일 줄 알았는데, 신맛이 덜해진 대신 달콤한 베리류를 잔뜩 넣은 맛이 났다.

“음, 딸기? 블루베리? 라즈베리? 거기에 구스베리가 좀 들어간 거 같기도 하고……? 벨키스 경, 이건 무슨 음료인가요?”

“입맛에 맞으신가 봅니다.”

“네, 아주 맛있어요. 뭘 넣은 건지 궁금하네요.”

오드리의 칭찬에 라비린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음료는 오드리가 딸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그가 직접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기껏 저장해 둔 딸기며 베리를 그렇게 써대면 남은 계절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투덜대는 요리사를 견딘 보람이 있었다.

“다음에 또 만들어드리도록 하죠.”

“경께서 만드신 건가요?”

“네. 제조법은 제 특급 비밀입니다. 그러니 요리사를 비롯해 주방일하는 고용인들에게 직접 물어보셔도, 그 친화력 좋은 하녀를 동원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라비린이 짐짓 허세를 부리며 어깨를 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으니, 오드리는 그런 그를 몹시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일정 이상의 신분과 재산이 있는 사람이 부엌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게 보통인 사회였다. 베이킹이 귀부인의 교양 중 하나로 꼽히긴 해도 필수는 아니었다. 당장 오드리만 해도 당근 한 토막 씻어본 일이 없고 밀가루 한 줌 만져 본 적이 없었다. 네이기스가 직접 과자를 만들어 피올에게 선물했다는 말을 듣고 괜히 놀랐겠는가.

“놀랍네요…….”

“레이디 헨젤, 바다가 마음에 드셨다면 이렇게 멀리서 보지만 마시고 가까이 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음료만큼 맛있는 파이를 파는 가게를 알고 있습니다.”

“검술수련여행을 다니셨다더니 그 여행지 중에 리가 항구도 있었던 모양이죠?”

“근 칠 년만의 방문이긴 합니다만, 절대 망하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만한 가게입니다.”

대귀족의 후계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파이라니, 오드리도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라비린과 단둘이 외출하는 건 조금 꺼려졌다. 기차에서의 그는 더할 나위없는 신사였지만, 꽃집에서 받았던 인사가 아직 뇌리에 남아 있는 탓이었다.

“가게 이름과 위치를 알려주시면 라디아타와 함께 가고 싶군요.”

“그러자면 며칠은 더 기다리셔야 할 텐데요. 그동안 내내 이렇게 테라스에서 바다 구경만 하고 계실 셈입니까? 손님을 초대한 주인으로서 너무 면구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음…….”

오드리는 차마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라비린의 말 그대로였다. 이 별장에 도착한지 이미 이틀이 지났지만, 그녀는 별장 밖으로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상태였다.

라디아타가 안타깝게도 와병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병명은 어이없게도 술병. 기차에서의 마지막 날 퍼마신 와인이 문제가 됐다. 본인은 취할 만큼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럴 순 없다며 억울해했지만, 출발 직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느라 떨어진 체력을 고려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베텔 경도 불러서 같이 가는 게 어떻습니까? 낯선 지역이라 그런지 신경이 곤두선 것 같던데 긴장도 풀어줄 겸.”

카프러스의 동행 자체를 반기지 않았던 오드리지만, 라비린이 먼저 말을 꺼내준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대번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삐쭉삐쭉 가시를 세운 카프러스를 달랑달랑 달고 리가 항구에 나들이를 나갔다.

리가 항구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기울어진 지대를 따라 다닥다닥 붙어 새하얗게 반짝이는 건물들, 우아한 검은 돌로 포장한 도로, 흑백의 대비에 질릴 틈 따위는 주지 않으려는 듯 빈 공간마다 자리 잡은 나무들. 사거리마다 솟아오른 장대엔 색색의 깃발이 매달려 쉴 새 없이 펄럭거리고, 나지막한 담벼락에 드러누운 고양이는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입을 쩍 벌리고 하품했다.

오드리는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없다는 것에 감탄했다. 아무리 휴양으로 유명한 도시라도 누군가에겐 그저 그런 삶의 터전일 텐데, 다들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하염없이 긍정적인 분위기에 전염이라도 될 것 같았다. 마차를 타고 왔더라면 몰랐을 분위기였다. 라비린이 꼭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이 도시엔 뭔가 특별한 마법이라도 걸려 있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올해엔 태풍이 없었으니 그것 때문이겠죠. 게다가 물고기도 엄청나게 많이 잡힌다니 다들 마음이 넉넉한 거 아니겠습니까.”

리가 항구는 매년 여름이 닥치기 직전이면 태풍에 시달리곤 했다. 워낙 귀족들의 별장이 많은 데다 휴양지로도 명성이 높은 도시라 태풍 대비는 철저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피해가 아주 없을 수는 없었다. 한데 올해는 그 태풍이 깜빡 잊은 것처럼 오지 않았으니 오죽 좋을까. 평년보다 비가 적고 더위가 좀 심하긴 해도 충분히 견딜 만하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오드리는 올해는 브란젤에도 태풍이 오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어디 태풍만 안 왔을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고 난 뒤론 비 한 방울 오지 않은 덕분에 브란젤은 절절 끓는 수프 냄비처럼 뜨거웠다.

“이상하네요. 여기도 저기도 다 태풍이 없다니. 아무래도 올해는 페즈날과 하랄이 싸우지 않기로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죠.”

“수백 년을 싸웠는데 한 해쯤은 쉬어가는 해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저기 목적지가 보이는군요. 역시 안 망했을 줄 알았습니다.”

라비린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색색의 과일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과일 가게 바로 옆에 놓인 자그마한 파이 가게 표지판이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라비린은 신나게 커다란 살구파이 한 판을 사고 나서야 가게 내에 들어가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혹해했다. 파이 주문은 문간인지 창문인지 모를 곳에서 받고 있었지만 테이블이 있는 내부는 수리 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라비린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주인장은 능숙한 솜씨로 살구파이를 포장해서 내밀었다.

“이걸 이렇게 주면 어쩌란 건가? 서서 먹으라고?”

“수리 중인 걸 어쩝니까? 당장 치울 수도 없는데. 다른 곳에 가져가서 드시지요.”

포장지 안쪽에서 달달한 파이 냄새가 새어나와 코를 자극했다.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바로 그 향기였다. 라비린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파이를 받아 들고 말았다. 아, 이러면 안 됐는데. 반 박자 늦게 찾아온 이성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와 카프러스는 길바닥에 서서 먹어도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만, 오드리는 사정이 달랐다. 명색이 객을 초대한 주인으로서 나선 길인데, 외출 드레스 곱게 차려입고 따라나선 손님을 길바닥에 세워놓고 음식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 이런……. 바깥 테이블에서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벨키스 경의 눈에는 저기서 뭔가를 먹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나 보죠?”

오드리가 가리킨 바깥 테이블에는 온갖 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장 공간이 없으니 바깥 테이블에 그냥 짐을 잔뜩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매끄러운 말솜씨를 자랑하던 라비린이지만 이번만은 댈 변명이 없었다. 더위가 아니라 당혹스러움 때문에 이마에 땀에 맺혔다. 대화하는 내내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고 듣기만 하고 있던 카프러스가 보내는 비난의 시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레이디 헨젤, 조금 더 걸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쪽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 분수광장이 나오는데, 거기에 야외 벤치와 테이블이 있습니다.”

“칠 년 만에 오셨다며 아주 훤히 아시네요.”

“머릿속에서 이 풍경을 수없이 되돌려 보았기에 그렇습니다. 화가가 그려낸 화첩보다 기억이 더 선명할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 중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당연히 부정당할 거라 생각한 라비린이 짓는 미소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러나 오드리는 그가 하는 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쌓았던 추억들이 딱 그런 형태로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드리가 선생에게 받은 칭찬을 자랑하면, 밀리나는 자랑한 오드리가 부끄러울 정도로 칭찬을 해주었다. 함께 차를 마실 때면 랄리우스 가문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벌건 숯이 든 화로가 아쉬운 계절이 오면 만탈락에서 전승되는 이야기들을 속삭여 주었다.

이런 기억들은 찻주전자 아래에 가라앉은 찌꺼기처럼 조용히 가슴 안쪽에 머물러 있다가 어떤 계기가 생기면 휙 솟아올라 그리움으로 오드리를 채웠다. 그리고 그건 그저 그리움으로 끝나지 않고 때로는 용기가 되고 때로는 든든한 바닥이 되어 그녀를 지탱하곤 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라비린에게는 리가 항구가 바로 그런 곳이었으리라. 집을 떠나 육 년의 세월을 떠도는 동안 마음의 지주가 되어준 도시라면 머릿속에 화첩이 생길 정도로 떠올리고 또 떠올렸어도 이상하지 않다.

오드리는 피식 웃으며 라비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뜻밖의 곳에서 느낀 동질감 때문인지, 이제껏 그에게 세웠던 가시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게 선명한 기억에 대해서라면 저도 모르는 바가 아니랍니다. 리가 항구는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니, 그 분수광장이라는 곳도 분명히 아름답겠지요?”

“브란젤 중앙광장의 분수 못지않죠. 레이디 헨젤께서는 돌고래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리가 항구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는데,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진 뱃사람이…….”

라비린은 오드리가 내민 손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제 손 위에 그녀의 손을 올리고는 거침없이 길을 이끌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이지만 그의 머릿속엔 완벽한 지도가 들어 있는 듯했다.

리가 항구의 탄생에 얽힌 전설, 사거리마다 깃발을 세워두는 이유, 온통 하얗게 칠해놓은 건물들 때문에 길을 잃은 초보 배달원의 실수담……. 밤새도록 들어도 재미있을 이야기들이 오드리의 발을 가볍게 했다. 라비린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오드리는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애정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듣기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분수광장에 도착한 라비린은 두 번째로 당혹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가 오는 내내 자랑한 분수광장의 분수가 절반은 멎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수 중앙에 자리한 돌고래는 여전히 멋진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돌고래를 둘러싼 인어들의 물동이는 비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뭘요. 여기도 한동안 비가 안 왔나 보네요.”

“강의 수위가 기억보다 낮은 걸 보긴 했습니다. 워낙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못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라비린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리가 항구는 항구라는 이름은 붙어 있지만 무역보다 휴양지로서 번성하는 도시였다. 아무리 비가 안 왔다지만 이런 시기에 분수의 물을 줄이다니, 좋지 않았다.

“태풍이 안 온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그리 심한 가뭄은 아닐 거예요. 생활에 가장 영향이 없는 부분부터 조절하고 있는 거겠죠.”

“다음 달이면 축제가 시작되는데 그때까진 비가 좀 오길 바랄 수밖에 없겠군요.”

“열흘은 족히 남았는데 설마 그때까지도 가물려고요.”

오드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태풍이 안 온 탓에 담수 저장고가 좀 비었다 해도, 본래 이 시기의 동부 지역은 비가 많았다. 리가 항구의 토박이들도 걱정하지 않는 걸 외지인이 걱정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드리 일행은 가뭄 걱정은 접어두고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살구파이를 즐겼다. 잘 구워져 바삭바삭한 테두리는 고소하고, 안을 채운 살구 필링은 새콤달콤했다. 말캉하게 씹히는 살구 과육이 더위에 지친 입맛을 훅 끌어올렸다. 과연 귀족들의 휴양지인 리가 항구에서 오랫동안 장사할 만한 맛이었다. 테이블도 없는 가게라 쉽게 보았던 게 미안해졌다.

“벨키스 경께서 그토록 장담하신 이유를 알겠어요. 살구파이가 아닌 다른 파이도 먹어보고 싶네요. 이왕이면 계절에 맞는 과일 필링을 올린 걸로요.”

“입맛에 맞으시다니 기쁩니다. 머무시는 동안 종류별로 맛보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레이디 헨젤, 그렇게 격식과 예의를 갖춰서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 모처럼 편한 차림으로 바깥에서 먹는 건데요.”

우아하게 파이를 자르던 오드리의 손이 멎었다. 테이블이 없을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커트러리 세트를 죄다 챙겨왔으면서 그게 무슨 소리인지.

하지만 라비린은 나름 진심이었다. 리가 항구가 자리한 동부는 브란젤과는 유행하는 드레스의 형태가 사뭇 달랐다. 소매가 넓고 몸의 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동부식 드레스는 중부식과는 비교도 안 되게 몸이 편했다.

장식이 적고 코르셋이 없다는 건 남부식과 같지만 가슴 아래에 끈을 묶는 대신 허리 부근에서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린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예법도 훨씬 느슨했다. 과일이나 작은 간식거리를 손으로 집어먹는 건 흉도 아니었다.

그는 오드리가 만탈락에서, 브란젤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사람이라는 것도. 자의든 타의든 모처럼 휴양지에 왔으니, 맛있는 걸 먹고 편한 옷을 입으며 제대로 된 휴식을 하길 원했다.

“레이디 헨젤의 가무잡잡한 피부도, 코르셋을 차지 않는 드레스도, 심지어 그 특이한 머리 염색까지도 이곳에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파이를 맨손으로 집어먹는 것도 마찬가지죠.”

라비린은 파이 한 조각을 냉큼 손으로 집어 들었다. 브란젤의 예법대로라면 한 입에 들어갈 크기로 깔끔하게 잘라 포크로 찍어 먹어야 할 텐데, 그는 그런 과정을 거침없이 생략하고 파이를 와작 깨물었다.

오드리가 눈을 둥그렇게 떴고 카프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라비린은 입 안에 넣은 파이를 다 씹어 삼키고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닦아내며 주변을 가리켰다. 분수광장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들에게 시선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풀어진다고 해서 수군거리지 않고, 흘끗대지도 않습니다. 여긴 휴양지니까요.”

“…….”

“레이디 헨젤께서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시선에 부담을 느끼는 분이셨다면 브란젤에서 남부식 드레스를 입지 않으셨을 것이고, 그 머리색과 피부색을 유지하지도 않으셨을 테죠.”

오드리와 라비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라비린은 으레 짓는 사교적인 미소 대신 장난꾸러기 어린아이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잘 다듬어진 얼음조각 같던 인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가끔은 무시하는 것조차 피곤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제가 벨키스 경 앞에서 풀어진 채 있어야 할 이유가 되나요?”

“그런 이야기는 아니죠. 그저 편히 계시라는 겁니다. 모처럼 쉬러 오셨으니까.”

오드리는 더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라디아타라면 모를까, 라비린에게 허락할 거리는 딱 이 정도면 충분했다. 라비린 역시 오드리가 바로 편하게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아무튼 맛있었어요. 라디아타에게도 사다줘야겠네요. 한 입만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마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어릴 적엔 살구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군요.”

“입맛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과연 라디아타는 오드리가 사간 살구파이를 아주 좋아했다. 마침 이제 환자식을 벗어나 간식을 먹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참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사왔느냐며. 파이를 잘라 입에 넣는 동작이 이목구비만큼이나 우아했다.

“달달한 간식을 먹으니까 기분이 확 좋아지네요.”

“맞아요, 아플 땐 단 게 먹고 싶죠. 라디아타는 어릴 적에 살구를 좋아했다면서요? 많이 먹어요.”

“어머,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가르쳐줬어요?”

“벨키스 경이 알려줬죠. 아, 그 살구파이 사온 가게도 벨키스 경이 가르쳐 준 곳이에요.”

“음……. 오라버니가 그랬단 말이죠…….”

라디아타는 입맛에 딱 들어맞게 맛있는 살구파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살구를 좋아한단 소리는 한 마디도 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고 기억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라비린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신경 쓰지 않는 척 하면서 사실은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 말이다. 심지어 직접 가져다주지 않고 자신은 쏙 빠진 채 오드리에게 들려 보낸 것조차 딱 라비린다웠다.

“하여간 의외의 곳에서 섬세하다니까요. 그 가게가 아직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가 좋아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나 봐요.”

“음? 라디아타도 아는 가게였어요?”

“맛만 기억하는 거죠. 오드리도 알다시피, 귀족영애는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까지는 저택에서 나갈 수가 없잖아요. 오라버니는 리가 항구에 다녀올 때마다 파이를 사왔어요. 살구, 포도, 사과, 복숭아……. 필링은 매번 달랐어도 맛은 좋더라고요.”

로샨은 라디아타의 간식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식사 이후 나오는 입가심 디저트 이외엔 손도 댈 수 없었다. 그러나 라비린이 먼 곳에서 일부러 사오는 파이까지 막지는 않았기에, 라디아타는 리가 항구에 간 오라비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내가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면 함께 그 파이 가게에 가자고 약속했었는데…….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약속을 지키라고 독촉해 봐야겠네요.”

이제껏 라비린을 대할 때면 묘하게 차가운 거리감을 유지하던 라디아타였다. 하지만 오래된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 표정이 점점 풀어지면서 분위기도 함께 부드러워졌다. 인형보다 예쁜 얼굴에 홍조가 오르고 몽글몽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근데 오라버니가 약속을 지킬지 모르겠어요.”

“왜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나한테는 가게 이름도 안 가르쳐 줬단 말이에요. 그래놓고 오드리는 가게까지 직접 데려가고. 하여간 밉살맞아요.”

장난스럽게 삐죽거리는 입술이 굉장히 사랑스럽다. 언제나 예쁜 미소만 짓고 있는 인형과는 전혀 다른 사랑스러움이었다.

오드리는 라비린이 왜 그렇게 리가 항구 들락거리기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고, 훈련도 당당하게 빠질 수 있다. 거기에 파이 하나 사가는 걸로 이렇게 예쁜 여동생이 방긋방긋 웃어주는데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파이 사다주는 걸로 라디아타의 이런 표정을 볼 수 있다니, 나라도 그 가게 안 가르쳐 줄 거 같은데요.”

“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오라버니가 안 가르쳐 줘도 오드리는 가르쳐 줘야죠!”

“에이, 오누이끼리 한 약속인데 거기에 내가 끼면 안 되죠.”

라디아타는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가, 오드리가 그 표정에 까르르 웃는 걸 보고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하여간 아닌 거 같으면서 은근히 장난기가 심한 친구였다. 더 재촉해 봐야 원하는 대답은 못 듣고 안달하다가 결국엔 못 이기는 척 넘어갈 게 뻔했다.

괜히 애꿎은 파이를 난도질 수준으로 조각내어 입에 넣었다. 설탕과 꿀에 절은 살구가 말캉하니 씹히며 특유의 향취가 코를 자극했다. 하여간 가게 이름은 몰라도 맛은 근사했다.

“그러고 보니 베텔 경도 함께 외출했었다면서요? 베텔 경에게 물어보면 되겠어요.”

“당장 베텔 경의 입부터 막아야겠네요. ……이런, 다이앤한테 휴가 줬는데.”

오드리가 아쉬워하며 혀를 찼다. 이곳에서 라디아타보다 오드리의 명령을 우선해서 수행해 줄 하녀는 다이앤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이앤이 저택에 없으니, 카프러스에게 입을 다물라는 명령이 전해질 리가 있나.

“아, 그 재미있는 하녀 말인가요? 하긴, 그녀라면 오드리를 위해 뭐든 하겠죠. 그보다 오드리, 이렇게 휴가에도 따라올 정도인데 베텔 경과는 어떤 사이예요?”

“윽……. 당연히 그냥 에스코트 기사와 레이디 사이죠. 그저 걱정과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라 그런 거예요.”

“그래요? 아쉬워라……. 로맨스 소설처럼 낭만적인 사랑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조금 기대하던 참이었는데요. 오드리, 혹시 베텔 경에게 마음이 있는데 남들 시선 때문에 망설이는 거면 얘기해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보기 드문 자줏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했다. 백작 영애와 에스코트 기사 사이의 신분 차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정말 진심으로 스캔들을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미 자기 편하자고 카프러스의 명예에 흠집을 낸 뒤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스캔들까지 나면 정말로 들 낯이 없게 된다.

“내 평판이야 이미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이니 그렇다 쳐도, 그런 소문이 나면 베텔 경의 명예에 흠집이 나요. 라디아타도 잘 알고 있잖아요? 신분 차이 나는 연인이 사교계에서 어떤 말을 듣는지.”

“이런, 오드리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줄은 몰랐어요. 소문에 개의치 않는 만큼 사랑에도 과감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정말 뜻밖이네요.”

“나야말로 뜻밖이에요. 라디아타는 사랑을 믿어요? 귀족영애가 사랑을 해 봐야…….”

긍정적인 결과는 기대할 수 없는데. 오드리는 말을 끝내지 않고 얼버무렸지만, 라디아타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귀족영애가 아무리 고귀하다 떠받들려도 결국 가문을 위한 재산. 사랑으로 상대를 선택하는 게 가능할 리 없다. 후작 영애로 살아온 시간이 얼만데 설마 그걸 모를까마는, 라디아타는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꿈꾸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한순간이라는 걸 아니까 더욱 영원을 바라고야 마는 게 사랑이잖아요. 재가 되어도 좋으니, 한 번쯤은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보고 싶어요.”

“로맨스 소설의 대사 같네요.”

“하하하, 그런가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내 어머니는 산트렘 출신인걸요.”

난데없이 후작 부인의 출신지 얘기가 나왔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오드리가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는 가운데, 라디아타는 손에 쥔 포크를 뱅글뱅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산트렘의 사람들은 남녀불문하고 감정에 솔직하고 과감한 기질을 가지고 있죠. 어머니는 그 기질을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셨어요. 다들 나이를 먹으면서 적당히 자제할 줄 알게 됐지만, 속은 그대로예요.”

“전부 다 그래요? 삼남매가 다?”

“그럼요. 어머니 손을 가장 덜 탄 내가 이런데 오라버니들이야 말할 것도 없어요. 아베드……. 아니, 둘째 오라버니가 특히 그래요. 기사에 대한 로망이 있으면 가문에 있으면서 해도 될걸, 굳~이 끝을 보겠다고 가문을 나가서 산트렘 기사단까지 기어들어갔잖아요.”

“음…….”

“산트렘 지역 출신이 아니라서 안 된다는 걸, 외가까지 팔면서 들어갔으면 잘 버티기라도 할 것이지 그러지도 못했으니 가문을 나간 보람도 없고. 어머니께서 넌 분명 못 버틸 거라고, 안 된다고 그렇게 말리고 또 말렸는데 그걸 죄다 귓등으로 들어서…….”

라디아타가 애정 어린 투덜거림을 시작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조잘조잘 잘도 떠든다.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드리는 라디아타에게 셰비언에 대한 상담을 하려던 마음을 조용히 접었다. 말을 꺼내자마자 세기의 로맨스를 찍어보라며 부추길 라디아타의 모습이 너무나 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던 셰비언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놓고 나니 다른 고민거리가 퐁, 솟아올랐다. 감정에 솔직하고 과감한 산트렘 지역민의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피올이 네이기스와 함께 브란젤에 있지 않은가 말이다.

‘보티안 씨가 네이기스에게 관심이 아주 없는 건 아닌 거 같았는데……. 게다가 네이기스도 은근히 엉뚱하고 충동적인 면이 있고 말이야.’

막연한 불안감이 오드리를 엄습했다. 그러나 브란젤도 아니고 리가 항구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뭘 어쩔 수 있겠나. 그저 피올이, 네이기스가 조금만 더 이성적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네이기스가 브란젤에 있는 까닭은 다른 게 아니었다. 라디아타와 함께 휴가를 가는 대신 가을 전시회에 낼 작품에 몰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라디아타가 자신이 후원하는 여성 화가들을 위해 제공하는 큰 저택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렸다.

브란젤 외곽 지역에 자리 잡은 저택에는 각자 독립적인 방과 작업실을 제공받아 머무는 화가가 네이기스를 포함해 무려 다섯 명이나 됐다. 또한 그들의 생활을 돌보기 위해 고용인 넷이 상주했다.

고용인들은 화가들의 식사를 챙기고, 저택을 청소했으며, 빨랫감을 거둬 세탁소에 맡기고 찾아왔다. 물감을 비롯한 화구가 떨어지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하고, 정원이 무성한 정글이 되지 않도록 정리했다. 저택 내에 설치된 마법도구들의 작동을 점검하는 것도 그들의 일이었다.

화가들은 그림 이외의 어떤 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는 이 저택에서의 생활을 두고 천국과 같다 할 테지만, 부유한 백작가의 딸로 자란 네이기스에게는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 생활이었다.

옷을 혼자 입고 벗고, 목욕 준비를 스스로 하며, 주변을 제 손으로 정돈하는 것 모두가 너무 낯설고 서툴렀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사소한 일들이 이렇게나 손이 많이 가는 거였는지 새삼 실감하게 되는 나날이었다.

한낮의 맹렬한 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간, 그림에 몰두하던 네이기스는 문득 지독한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손을 멈췄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마침 티푸드가 나올 시간이었다. 점심을 건너뛸 때는 시계를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안 나더니, 배가 고프니까 순 먹을 것 생각만 난다.

저택에 있을 때라면 하녀를 불러서 먹을 걸 챙겨오라 했을 텐데, 이곳의 고용인들은 화가의 개인적인 수발까지 들어주진 않으니 직접 식당까지 가야 했다. 네이기스는 무거운 발을 끌며 1층의 식당까지 내려갔다.

이 저택의 요리사는 사람이 오거나 말거나 식사 시간이 되면 음식을 차렸다가 때가 지나면 가차 없이 치웠다. 때맞춰 식사하는 법이 없는 저택의 화가들의 건강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과연 티푸드와 간식으로 채워져 단내가 폴폴 나는 식당에는 평소엔 얼굴 마주칠 일도 없는 다른 화가가 두 명이나 앉아 있었다.

인물화를 그리는 페리, 정물화를 그리는 헤이라.

그들은 중류계급 출신의 화가로, 라디아타에게 후원을 받은 기간이 꽤 긴 데다 나름 자신의 분야에서 이름이 있었다. 티푸드로 나온 머핀을 갉아먹던 둘의 시선이 네이기스에게 닿았다. 헤이라는 냉큼 일어나 의자를 빼주었고 페리는 새 찻잔을 챙겼다.

“어서 오세요, 레이디 그웬.”

“여기 앉으세요. 점심을 거르셨던데, 자꾸 그러면 안 돼요. 몸이 상해요.”

네이기스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사교모임은 질리도록 다녔지만 어디서도 이렇게 호들갑스러운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과하게 반겨주는 다른 화가들이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고마워요.”

“고마워하실 것까지야. 나중에 그웬가에서 초상화 그릴 일이 생기면 꼭 저를 불러주세요.”

“복도에 장식할 정물화는 저 불러주셔야 돼요.”

가출 상태인 네이기스가 대답하기엔 좀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녀의 애매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페리와 헤이라의 입담은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웬가 사람들의 그림 취향 등을 묻고, 네이기스가 정말로 가을 전시회에 그림을 걸 건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레이디 그웬은 정말 가을 전시회에 나가실 생각이세요? 귀족영애가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에 냈다간 결혼시장에서 평판이 엄청 떨어질 텐데요.”

“에이, 언니도 참. 당연히 가명으로 내시겠지. 설마 백작부처께서 외동딸을 형편없는 남자에게 보내려고 하시겠어? 화구값 정도야 거뜬히 댈 수 있는 남자로 골라주실 거야.”

“하긴 그렇겠다. 남자 걱정은 레이디 그웬이 아니라 너나 내가 해야 하는데……. 하여간 우리 같은 여성 화가들은 좋은 남자 만나기가 너무 힘들어서 문제라니까.”

“우와, 이 언니 은근슬쩍 나 끌고 들어가는 거 봐. 난 약혼했거든? 나 끌어들이지 마, 내 약혼자는 내가 그림 그리는 게 좋다고 해줬단 말이야.”

화제의 주인공이 네이기스에서 헤이라로 바뀌었다. 얼마 전에 연인과 약혼식을 올린 헤이라가 발끈해서 제 약혼자의 자랑을 줄줄이 늘어놓았지만, 페리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너, 결혼하면 타우레드 영애의 후원이 끊기는 거 아니냐고 나한테 상담했었지?”

“그거야……. 언니도 알다시피 화구값이 워낙 비싸니까 걱정돼서 그랬지.”

“헹, 퍽이나 그렇겠다. 그놈이 네 활동을 전혀 뒷받침 해주지 못하니까 그런 걱정을 했던 거 아냐.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도 네가 너무 아깝다니까? 네 돈 빨아먹으면서 편히 살고 싶어서 눈이 벌건 놈이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감싸?”

“언니!”

“연애는 연애고 결혼은 현실이라니까 말을 안 들어. 너 정도면 괜찮게 성공한 화가인데, 돈도 있고 사회적으로 명성도 있는 남자를 만나란 말이야. 네 약혼자란 놈이 지금이야 네가 돈 버니까 좋다하는데, 나중이 되면 열등감에 미쳐 버릴걸.”

말을 뱉은 페리는 태연자약한데 듣던 헤이라가 정말로 화가 났다. 헤이라는 입을 벙긋대며 씨근덕대다 먹던 머핀마저 내던지고 자리를 떴고, 식당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안 듣는 척 귀를 기울이고 있던 네이기스는 슬그머니 먹는 속도를 높였다. 남자 문제로 페리의 혓바닥에 올라가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얼른 먹고 올라가는 게 최선이었다. 하나 손보다 혀가 빠른 게 당연하지 않은가. 페리가 네이기스를 상대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사실은 헤이라도 다 알고 있단 말예요, 그놈이 쭉정이라는 거. 저렇게 화를 내면서도 내 말이 틀렸단 소리는 안 하잖아. 근데 그놈이 뭐라고 그렇게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사랑하나 보죠.”

“사랑이 밥 먹여주나요? 아무리 열렬한 사랑이라도 삼 년을 채 못 가는데, 거기에 평생을 걸면 안 되죠.”

네이기스는 끝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집을 나오면서까지 그림을 그릴 결정적인 용기를 얻은 계기는 사랑이었다. 그것도 모두가 비웃는 짝사랑 말이다. 헤이라를 타박하는 페리의 말이 마치 자신을 향한 것만 같아 듣기 괴로웠다.

“페리 씨, 날 레이디 그웬이라고 부를 거면 그만큼 말도 가려서 하세요.”

“아끼는 동생이 걱정돼서 한 말인데 불쾌하셨다니 죄송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페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했다. 심지어 심기를 거슬러 미안하다며, 편히 먹으라고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했다. 그 순순한 태도가 어찌나 불쾌한지, 네이기스는 차마 남은 찻물을 다 넘기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짜증나…….’

이 저택에 있는 화가들은 그녀를 동료 화가로 대접하지 않았다. 얼마 못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귀족영애로만 대했다. 혼담 얘기는 물론이고 부끄럽고 민망할 정도로 잘 대해주는 태도에서부터 그게 드러났다.

데뷔하면 바뀔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가을 전시회까지 남은 한 달이 하염없이 길었다. 처음 전시회 준비를 시작했을 땐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 온몸의 피가 마를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사소한 노동에서 쌓이는 피로와, 저택의 화가들 사이에서 겉돌며 느끼는 소외감, 힘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한 명도 없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이 네이기스의 의지와 열정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네이기스는 남은 차를 마저 비우지 못하고 손을 내려놓았다. 분명 창자가 꼬이는 듯한 지독한 허기에 시달리며 내려왔는데 어째 뭘 넣어도 입이 써서 넘길 수가 없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무력감이 팔다리를 잡아당겼다.

문득 내다본 창문 밖은 오후의 햇살로 가득했다. 저택의 담벼락을 타고 자란 담쟁이덩굴이 창문가에 이파리를 살랑거렸다. 나뭇잎을 통과한 햇살이 초록색으로 반짝거렸다.

‘나갈까?’

지금 브란젤은 절절 끓는 솥처럼 뜨거웠다. 냉방 마법도구가 갖춰진 저택 내부는 지내기 쾌적하지만, 나갔다간 순식간에 물에 삶은 고기처럼 땀에 푹 젖을 게 뻔했다.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간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팔다리에 피가 돌았다.

일단 마음을 먹자 행동은 재빨랐다. 네이기스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 혼자서도 그럭저럭 챙겨 입을 만한 외출복을 찾아내 갈아입었다. 머리 손질은 할 줄 몰라 하나로 높게 묶어 모자 안에 쑤셔넣었고 화장은 입술만 발랐다.

다 마치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늘 보던 귀족영애는 간데없고 어설프게 꾸미다 만 평민 아가씨만 한 명 서 있다. 네이기스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흡족하게 웃었다. 어차피 그웬 백작영애는 리가 항구에 가 있는 걸로 되어 있으니, 이 정도면 아주 충분한 치장이었다.

“광장의 분수 구경하면서 아이스크림 사먹어야지.”

아이스크림이야 이 저택에서도 요청하면 나오는 것이지만은, 네이기스는 꼭 광장 근처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다른 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올해 브란젤의 여름은 좀 이상한 면이 있었다. 아무리 태풍이 없었다 한들 이렇게까지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게 말이다. 수량이 풍부한 제스본 강이 도시를 끼고 흐르고 마차로 한나절만 가면 세피아 항구가 있는데, 하늘은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파랗기만 하고 더위는 나날이 심해져갔다.

계속 이렇게 맑은 날들이 이어지다간 아무리 브란젤이라도 물 부족에 시달릴지 모른다는 말들이 나왔다. 그러나 광장의 분수는 매일같이 물을 뿜고 대형 공중목욕탕은 그 큰 탕에 물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집집마다 연결된 수도 역시 물이 마르지 않았다. 워낙 담수 저장량이 많은 데다 수도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덕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가뭄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브란젤의 치수 관리를 맡고 있는 부서만 잔뜩 긴장한 채 애꿎은 왕궁마법사들을 달달 볶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이라고 무슨 재주가 있어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겠는가. 하루에 두 번 도시의 상하수도 시설 점검을 나가는 게 전부였다.

이런 와중에 브란젤의 치안대는 그야말로 개고생 중이었다. 안 그래도 빈집털이 전문 도둑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인데 평년보다 덥기까지 했으니까. 낮 순찰조는 지독한 더위와 싸우며 거리를 돌아다니느라 녹초가 됐고, 밤 순찰조는 해 지고 나서야 쏟아져 나온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했다.

피올은 낮 순찰조, 그것도 오후 담당이었다. 이전에는 저녁이었지만, 순서를 바꿀 때가 되어 실시한 제비뽑기에서 두 번째로 긴 막대기를 뽑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막대기를 확인한 피올의 표정이 어찌나 참담했던지, 운 없는 제 파트너에게 걸쭉한 욕설을 퍼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유렌마저 그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순찰을 앞두고 허옇게 질린 안색으로 햇살이 이글대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정오가 지나면서 한풀 꺾인 듯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끔찍했다. 치안대의 제복에 망토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여름이 이렇게 더운데, 인간적으로 여름 제복에는 망토를 빼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이. 솔직히 이거 겨울에도 안 따뜻하잖아? 뭐 하러 입히는 거야?”

“그러니까. 염병, 문장 박을 게 그렇게 필요하면 재질이라도 바꿔줄 것이지 진짜…….”

“늬들은 순찰을 입으로 하냐? 당장 나가!”

“가, 간다니까!”

나갈 시간이 됐는데도 안 나가고 문가에서 잡담을 하는 게 누구에게 고와 보일까. 둘은 싫은 소리를 한 바가지나 듣고서야 꾸역꾸역 거리로 나섰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돌바닥에서 솟은 열기에 등이 순식간에 땀으로 흠뻑 젖었다.

더위가 심한지라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다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있거나 아예 활동 시간을 저녁으로 옮긴 것이다. 유렌은 군데군데 문을 닫은 가게를 부럽게 바라보았다.

“나도 휴가 가고 싶다…….”

“글렀어. 꿈 깨. 너랑 나는 겨울은 되어야 순번이 돌아올걸.”

“망할, 치안대 때려치우고 도망갈까 보다.”

“전국에 수배지 내걸리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유렌이 뒷골목 출신을 자랑하듯 쌍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피올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거리를 걸었다. 그나마 해가 기울어 가로수의 그늘이 길쭉해진 시간이라 다행이었다.

그러다 중앙광장 앞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광장 초입의 나무 아래에 멈춰 서고 말았다. 분수 소리야 시원하지만 광장엔 그늘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었다. 꼼꼼하게 포장된 돌바닥은 잘 달궈진 프라이팬 표면과 다를 게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으려 심호흡을 하자 폐를 익힐 듯 뜨거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걸어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우리 뭐라도 사먹을까? 좀 차가운 걸로.”

“아이스크림 어때.”

“그거 좋네.”

평소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이럴 땐 마음이 착착 맞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향을 틀었다. 광장 주변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이겠느냐만, 하필 그들이 발을 들인 가게는 네이기스가 먼저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곳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시기, 보는 것만으로도 더운 치안대원의 망토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유렌은 먼저 온 손님들의 시선이 쏟아지거나 말거나 태연히 아이스크림을 주문했지만 피올은 슬금슬금 숨을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골라도 어쩜 이런 가게를 골랐는지, 확 트인 실내엔 숨을 만한 곳이 한 곳도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가게를 둘러보던 피올은 어딘지 눈길이 가는 뒷모습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모자 아래로 삐죽 삐져나온 적갈색 머리칼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꼭 어디에선가 보고 머릿속에 기억해 뒀던 것만 같은, 그런 색이었다.

“유렌, 내 건 아무거나 시켜놔.”

“안 그래도 그렇게 했어. 왜 그래?”

혹 피올이 수배자라도 발견한 거 아닌가 싶어진 유렌이 목을 빼고 가게 내부를 살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이상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올의 등을 눈으로 좇았다. 피올은 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고정하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가씨, 잠시…….”

잠깐 얼굴 좀 확인하자 말하려던 피올은 순간 말을 잊었고,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가게에 치안대원이 들어온 줄도 몰랐던 네이기스는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내가 화가로 성공할 거라고 말해주세요.’

그날의 대화 이후로는 처음 마주치는 것이다. 어쨌거나 서로를 알아봤으니 자연스레 인사를 하면 될 것을, 두 사람은 서로 눈만 마주친 채 말 없이 입술을 어물거렸다. 유렌이 착각하기엔 충분할 정도의 어색함이었다.

유렌은 마침 점원이 가져다 준 아이스크림을 들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본래부터 여기서 만날 약속이 있었다는 양 자연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걸고서. 심지어 엉거주춤 서 있는 피올을 슬쩍 끌어당겨 자리에 앉히기까지 했다.

“레이디 그웬,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네……. 유렌 씨, 맞으시죠?”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레이디. 피올 녀석을 여기 데려다놓는 임무를 마쳤으니 전 이만 자리를 비켜야겠군요. 즐거운 대화 나누시길 바랍니다.”

“야!”

유렌이 벌떡 일어나 나갈 자세를 하자 당황한 피올이 유렌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안 그래도 어색한데 이런 분위기에 단둘만 남는다니, 말도 안 된다. 절박한 손짓이었지만 유렌은 거침이 없었다.

“레이디 그웬 가출했다며. 그럼 너랑 비슷한 처지인 거 아냐? 이젠 신분 같은 거 따지지 않아도 되니까 잘됐네. 잘해봐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제 앞에서 소리 죽여 나누는 귓속말이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네이기스는 붉어진 볼에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하면서도 전혀 관심이 없는 척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귀족영애다운 태도였다.

“오늘 순찰은 내가 돌 테니까, 천천히 얘기 나누다 와.”

“이……!”

네이기스 앞이라 차마 욕은 하지 못한 피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나 유렌은 피올이 저렇게 화를 내면서도 네이기스를 버려두고 자신을 따라 나오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귀족 출신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몸에 매너와 예의가 밴 녀석인 것이다.

그렇게 유렌이 뿌듯해하며 자리를 뜨고 나자 남은 두 사람의 분위기는 뭐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어색해졌다. 뒤늦게 네이기스의 손끝에 입을 맞추는 피올은 귀가 벌겠고, 네이기스는 좀처럼 얼굴의 홍조를 가라앉히질 못했다.

그러나 우연한 만남이 불러온 두근거림도 잠깐. 네이기스는 테이블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금도 꾸미지 않고 나온 자신을 원망했다. 물감이 밴 손톱이나 껍질이 벗겨진 손가락은 물론이고 정돈되지 않은 차림이 죽도록 부끄러웠다.

‘좀 꾸미고 나올걸.’

형식만 갖췄지 거의 조이지 않은 코르셋 때문에 허리는 두꺼웠고 무난하게 고른 옷은 지나치게 수수했다. 제대로 올리지 못한 머리카락은 모자 아래로 흘러내려 너저분하고 관리를 멈춘 얼굴 피부는 까칠한 데다 화장도 전혀 하지 못했다.

피올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전의 자신처럼 보이지 않아 좋다고 생각했던 모든 요소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최고로 예뻐 보이고 싶은 게 소녀의 마음이 아니던가.

‘차라리 모른 척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네이기스는 좀처럼 피올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테이블의 아이스크림만 노려보았다. 그러는 사이 유렌이 쌓아두고 간 아이스크림이 슬금슬금 녹아내렸다. 이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건 의외로 피올 쪽이 먼저였다.

“레이디의 휴식 시간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아서 나온 길인걸요.”

“뭔가 부족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림에 관련된 모든 게 풍족해요. 타우레드 영애는 정말 좋은 후원자세요. 그저…….”

아, 이러면 안 돼. 네이기스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말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앞에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말이 술술 나올 뻔했다. 상대가 피올이라는 것도, 자신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저 그동안 느낀 소외감과 외로움을 토해내고 싶어 몸이 달았다.

‘화가로 성공하겠다며 당당히 말해놓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 너무 꼴사납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원자를 연결해 준 피올의 앞이었다. 힘들다는 말 같은 건 절대 할 수 없었다. 네이기스는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꾹 눌러 담고 생긋 웃었다. 조금 전까지 어떻게든 감추려 안달하던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귀엽게 투덜거렸다.

“손이 너무 상해서 그게 조금 속상한 것뿐이에요. 이대로 흉이 지면 정말 꼴 보기 싫어질 거예요. 앞으로 바깥에 나올 땐 얇은 장갑이라도 껴야겠어요.”

“레이디의 노력이 담긴 손입니다. 조금도 흉하지 않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엔 숨기지 않은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네이기스의 뺨에 다시 홍조가 오르는 가운데, 피올은 슬그머니 그녀에게로 아이스크림 그릇을 밀어주었다. 언뜻 보아도 이전보다 야윈 게 눈에 들어왔다.

“집을 떠나 생활하는 게 힘드시더라도 건강은 잘 챙기셔야 합니다. 사실은 이런 간식이 아니라 좀 더 영양가 있는 걸 사드려야 하는데 민망하군요.”

“저택에서도 충분히 좋은 음식을 제공하고 있어요. 제가 제대로 챙겨 먹질 않을 뿐이죠.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 그게 실천하는 게 쉽지가 않아서 말이에요. 하녀가 없다는 게 이렇게까지 불편한 일인 줄은 몰랐어요.”

“시곗줄 판매 금액이 들어오고 있지 않으십니까? 개인적으로 고용하시죠.”

피올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네이기스는 단박에 풀이 죽었다. 안 그래도 저택의 화가들 에게 잠시 변덕을 부리는 귀족영애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다른 사람들은 개인적인 시중이 없어도 잘 지내는데 하녀를 따로 고용하는 건 어쩐지 유난을 떠는 것만 같아 꺼려졌다.

“아뇨……. 저 혼자서만 따로 하녀를 쓰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요.”

풀죽은 목소리, 내리깐 눈썹, 축 처진 어깨, 아이스크림 그릇을 만지작대는 손가락. 네이기스는 입이 아니라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힘들고, 외롭고, 그래서 위로가 필요하다고. 당신이 내게 힘이 나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피올은 그녀가 열여섯 어린 나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꿈을 좇겠다는 결심만은 바위와 같아도, 그 아래엔 단단한 땅바닥이 아니라 무른 모래밭이 깔린 나이. 그래서 누군가 마음먹고 흔들면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마는 어린 나이.

‘내가 열여섯일 때도 저렇게 불안정했나.’

열여섯 살이면, 피올이 산트렘 기사단에 막 입단했던 때였다. 집을 뛰쳐나오면서 아버지와는 연을 끊었어도 외가의 지원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그는 지금의 네이기스와는 처지도 상황도 완전히 달랐다.

그러니 피올은 네이기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집을 나온 건 스스로의 선택이니 그에 따르는 고통 역시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을 뿐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그렇게까지 하라고 등을 떠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줄창 들었던 말을 적당히 바꿔 네이기스에게 건넸다.

“견디는 게 많이 힘들면 돌아가셔도 됩니다.”

“……네?”

“그림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디의 재능과 열정이 아쉽긴 해도, 그게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면 포기하는 게 마땅합니다.”

“…….”

“어차피 포기할 거면 빨리 해라. 남이 할 수 있는 충고 중 그나마 쓸모 있는 충고입니다.”

빈말이라도 괜찮다, 잘할 수 있을 거다 격려를 들을 거라 기대했던 네이기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림에 재능 있다 칭찬하며 후원자를 연결해 준 피올이 포기를 언급했다는 게 그녀를 상처 입혔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정한 말은 아니어도 상처 입힐 의도를 가지고 휘두른 말도 아니고 그리 매정하게만 들을 말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굴렀다.

“저기, 레이디 그웬?”

피올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당황했다. 네이기스는 그가 뻗은 손이 얼굴에 닿기 직전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며 일어섰다. 어찌나 급했는지 그 서슬에 모자가 미끄러져 떨어지며 엉성하게나마 모자 속에 숨어 있던 머리카락이 와르르 쏟아졌다.

네이기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어설픈 옷차림이나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보다 마구잡이로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더 창피했다. 어떻게든 귀족영애다운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노력도 다 헛것이 되었다.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이스크림 잘 먹었어요.”

한 숟갈도 뜨지 않은 아이스크림에 대한 감사 인사를 남기고 네이기스는 도망치듯 가게를 떠났다. 피올은 엉거주춤 선 채로 네이기스가 광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걸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등을 전부 덮을 정도로 긴 적갈색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을 맞은 깃발처럼 팔락거리며 멀어졌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도 어이가 없어 입 밖으로 투덜거려 보았지만, 가게에 있던 몇 안 되는 손님들에게서 험악한 시선만 받았을 뿐이었다. 조만간 치안대원이 멀쩡한 여자를 울려서 보냈다며 소문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뭘 쳐다봅니까?”

피올은 저를 쳐다보는 손님들에게 도리어 사나운 시선을 되돌려 주고 나서야 가게를 나왔다. 한데, 시원한 실내에 있다가 무지막지한 햇살을 뒤집어쓰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네이기스를 보냈다간 정말 다시는 얼굴 못 보는 사이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은,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그를 찾아왔다. 분명 바라던 바일 텐데,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딘지 등골이 서늘하게 식고 숨이 막혔다.

그는 서둘러 영업마차들이 옹기종기 모인 골목을 향해 뛰었다. 네이기스가 마차에 타기 전에 잡아챌 셈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어도 불안하게 펄떡대는 심장이 피올의 등을 마구 떠밀어댔다.

그러나 가게에서 허비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게 아니면 네이기스가 정말 뜀박질을 잘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산트렘 기사단에서도 손에 꼽히던 발이 영업마차 무리에 도착했을 때, 적갈색 머리카락은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한심해 미치겠다, 진짜…….’

피올은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에 침을 바르곤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네이기스의 미래는 재능과 가능성으로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 미래에 얼룩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지던 뺨을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하니 아파왔다. 초조함이 메슥거리며 목구멍을 타고 올랐다.

‘이 바보 같은 새끼. 힘들다는 사람에게 좋은 소리 하나 해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던 별다른 피올은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렸다. 도대체 뭘 보내야 네이기스가 마음을 풀지 모르겠으니, 일단 리즈비아 거리에 있는 커다란 꽃가게에 가볼 생각이었다.

거기서 세상 심각한 얼굴로 화병에 담긴 꽃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디케를 만나는 건 정말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웬만하면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눈이 마주쳤다. 죽상을 하고 있던 피올은 얼른 얼굴을 폈고 이디케는 팔지도 않는 장식용 꽃에 관심을 두고 있던 게 거짓말처럼 자세를 고쳤다. 둘은 서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를 팍팍 내며 인사했다.

“락시 양,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헨젤의 휴가에 동행한 것 아니었습니까?”

“만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저는 따로 휴가를 썼어요. 보티안 씨야말로 그런 차림으로 여긴 웬일이에요? 근무시간에 웬 꽃집?”

“심부름입니다. 사무실에 놓을 꽃 좀 사오라고 해서.”

치안대에도 잡일과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사환이 있을 텐데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인지. 이디케가 황당해하는 걸 알면서도 피올은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본래 거짓말은 뻔뻔하게 해야 성공률이 높은 법이었다.

“그래요, 그렇다고 치죠. 그래서 무슨 꽃을 사 가시려고요?”

“음…….”

피올은 그만 난처해지고 말았다. 이디케의 눈길도 눈길이지만, 네이기스의 꽃 취향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라디아타가 편지로 종종 얘기하지 않았던가, 아무 꽃이나 보낼 거면 차라리 보내지 말라고.

고민하는 피올을 보던 이디케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의를 끌고는 한쪽에 곱게 모여 있는 수선화를 가리켰다.

“레이디 그웬은 수선화를 좋아해요.”

“……네?”

“사무실에 꽃을 사갈 거면 그 김에 그웬 영애 것도 좀 사서 보내라고 알려드리는 거예요.”

“그걸 락시 양이 어떻게 압니까?”

“한동안 헨젤가에 머무셨잖아요. 아가씨의 손님이셨는데 모를 리가 있나요.”

이디케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심지어 수선화가 정확히 뭔지 몰라 헤매는 피올에게 수선화 다발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녀는 수선화를 꼭 안은 피올이 사무실에 핑계거리로 가져갈 다른 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걸 빤히 보다 피식 웃었다.

“거 봐. 역시 그웬 영애 드릴 걸 사러 왔네요.”

“아니, 이건 그냥…….”

“내가 화가로 성공할 거라고 말해주세요.”

피올의 말문이 턱 막혔다. 조금 전의 뺀질뺀질함과 뻔뻔함은 어디로 갔는지, 갈 곳 잃은 눈동자가 사방을 굴러다녔다.

“그, 그걸 어떻게…….”

“베텔 경이 그 공원에 같이 있으셨잖아요.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그웬 영애께 큰 의미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제 충고는 역시 소용이 없었군요.”

“……나는 충분히 조심했습니다.”

피올의 말은 이디케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정말 조심할 거였으면 네이기스의 요청에 대답 같은 걸 하면 안 됐다. 어떤 기대도 할 수 없게끔 매정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여지를 남겨서 마음을 끊을 수 없게 한 게 누군데 변명인가.

“아, 그래요. 그 순진무구한 그웬 영애께서 보티안 씨 한정으로 눈치가 빨라지는 걸 제가 깜빡했네요. 어쨌거나 이렇게 꽃까지 선물하고 그러는 거 보니까 그웬 영애의 마음을 받아줄 마음이 생긴 모양이죠?”

“그럴 일 없습니다. 이건 제가…….”

“웬만하면 받아주세요. 이러다 가을 전시회에 작품까지 걸고 나면 진짜 큰일이라고요.”

“그게 뭔 소립니까? 타우레드 영애에게 후원을 받고 있는 데다 본인의 실력도 재능도 충분한데. 분명 금세 유명세를 타고 화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될 겁니다. 큰일은 무슨…….”

이디케는 물색없는 소리가 갑갑해 가슴을 쳤다. 만약 네이기스가 그웬 공자였다면 피올의 말이 정답이었을 테다. 처음에야 귀족 출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겠지만 워낙 재능이 대단하니 곧 수그러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이기스는 그웬 영애였고, 성년이 되려면 아직 사 년이나 남아 있었다. 비아냥거림은 비난이 될 것이고, 재능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며, 수군거림 역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귀족영애가 직접 창작활동에 뛰어든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그녀가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후원도 후원이지만 모진 비난을 견디게 해줄 만한 마음의 버팀목이 절실히 필요했다. 보호자인 그웬 백작부처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디케는 그 부분에 있어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백작 부인께서 세간의 눈을 얼마나 신경 쓰시는데요. 화가 노릇을 하는 딸? 말도 안 되죠. 그웬 영애를 가출 상태로 계속 둘 리 없어요.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노력이 실패하면, 곧바로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시겠죠.”

“다른 쪽?”

“아, 정말이지! 그렇게 빠르던 눈치는 어디다 팔아먹고 이래요? 그웬 영애랑 아주 정반대네. 그야 당연히 결혼이죠. 데뷔탕트는 치렀는데 성년은 아직 안 됐잖아요. 아직 어리고 예쁜 시기인 데다 가문 이름값도 있으니 혼처는 금방 찾을 수 있을 테죠. 당연히 결혼하고 나면 붓은 구경도 못하실걸요.”

피올은 몹시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렸다.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이고 본인의 의지도 확실한데 그런 비관적인 전망이라니. 그러나 이디케는 그런 피올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그의 품에 수선화 한 다발을 더 안길 뿐이었다.

“우리 아가씨를 보세요. 그분은 뭐 의지가 없고 능력이 없어서 열 살에 만탈락으로 쫓겨가셨나? 하여간 남자들은 뭘 모른다니까.”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이디케가 괜히 성질을 내며 수선화 한 다발을 더 얹었다. 피올은 졸지에 수선화를 세 다발이나 끌어안고 섰다. 워낙 풍성한 꽃다발이라 앞도 잘 안 보이는데 이디케의 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멀쩡히 잘 살던 귀족영애를 자극해서 끝이 뻔한 길에 뛰어들게 했으면 책임을 지란 말예요. 그웬 영애에게는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는 남자가 필요해요. 치안대원이면 신분은 모자라도 명예는 있으니 나쁘지 않아요. 마침 둘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으니 더 좋고요.”

“조금 전에 본인 입으로 성년도 안 된 어린 아가씨란 소리를 해놓고 나더러 책임지란 소리 하고 있으면 민망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난 그렇게 어린 아가씨가 날 좋아한다고 해서 마냥 좋아하는 쓰레기가 아니라서 말이죠.”

“나이 차이래 봤자 여섯 살밖에 안 나면서 말은…….”

“열여섯과 스물둘이 같습니까? 게다가 귀족영애들은 데뷔탕트를 치를 때까지 집에 갇혀 있다시피 하는데. 세상물정 모르는 귀족영애의 마음을 받아봐야 곤란하기만 하죠.”

이디케는 저도 모르게 칫, 소리를 냈다. 과연 결혼에서 사랑보다 정략이 우선인 귀족사회에서 벗어난 사람다운 대답이었다. 그녀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누가 꼭 결혼하라고 했어요? 약혼만 해둬도 웬만한 방패는 다 되잖아요.”

“약혼을 깨는 건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는 거 알고 있을 텐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죠. 결혼은 본인의 의지가 제일 중요한 겁니다.”

“어머, 대귀족의 공자로 태어나 자라신 분께서 하시는 말씀이라곤 믿어지지 않네요. 귀족영애의 결혼에 본인의 의지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다 정략이지.”

“그 말씀, 레이디 헨젤께도 하실 수 있습니까?”

“그럼요. 백 번도 더 말할 수 있어요. 아무튼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레이디 그웬께서 가출까지 해 버린 상황에 우리 아가씨와 타우레드 영애께서 감싸는 걸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이미 여성 화가 여럿을 후원해 본 라디아타가 설마 네이기스를 그리 쉽게 뺏길까마는, 심란해질 대로 심란해진 피올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자신이 뱉은 말이 얼마나 경솔했는지에 대해 곱씹기도 바빴다.

이디케가 말했던 미래를 네이기스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면,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결심을 하고 집을 뛰쳐나온 셈이었다. 정말 딱 한 시즌만 화가 활동을 하고 원치 않은 결혼생활로 끌려들어가 평생을 살 각오를 한 거니까.

그런 각오가 흔들릴 정도로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 힘들면 그만둬라, 인생에 그림이 전부는 아니지 않느냐……. 그림을 그려보라고 후원을 연결해 준 사람으로서 할 말이 아니었다. 뒤늦은 깨달음이 씁쓸한 죄책감으로 되돌아왔다.

“수선화 세 다발로는 모자랄 거 같습니다……. 네 다발은 보내야겠네요.”

“오, 마음 받아주시는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이제 생각난 거지만, 레이디 타우레드가 마음에 드는 화가를 그렇게 쉽게 놓칠 거 같진 않거든요.”

거절은 단호하고 이유는 명확하니, 더 몰아붙일 수 없게 된 이디케가 쳇,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심히 얄밉긴 해도, 피올은 고마운 마음으로 이디케가 차림에 안 어울리게 들고 있는 큰 손가방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수선화 한 다발만 더 집어주시죠. 아니면 그냥 점원을 불러주셔도 좋고.”

이디케가 냉큼 수선화 한 다발을 더 추가했다. 피올은 시야를 빼곡하게 가린 꽃 사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점원이 안달복달하기 시작한 걸 확인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못 견디고 달려와 냉큼 꽃다발을 받아갈 것만 같았다.

그는 점원을 향해 갈 것처럼 몸을 돌리며 이디케의 손가방을 향해 눈짓했다. 이디케가 손가방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

“락시 양, 다음에 또 봅시다. 그땐 그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좀 가볍게 하고 와요.”

“보티안 씨는 남의 가방에 관심 두지 말고 꽃이나 잘 챙겨서 가세요. 계절에 안 맞게 피운 거라 비쌀 텐데 죄다 떨어뜨리겠네.”

이디케는 끝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며 피올을 보냈다. 그러나 좀체 긴장을 풀지 못하고 초조하게 자리를 지키다가, 그가 저 멀리서 점원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고서야 겨우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눈길도 주지 않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그렇게 쿡 찌르고 갈 줄이야.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품에 안은 가방이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내던지고 싶었다.

‘망할 놈의 마법사들 같으니. 별걸 다 시켜!’

가방 안에는 마력구슬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 구슬들을 들키지 않도록 브란젤 곳곳에 숨겨두는 게 이디케의 임무였다. 뭔 짓을 해도 마법망 안정화 범위를 개선하지 못한 워커와 셰비언이 이럴 바엔 구슬을 많이 깔면 어떻겠느냐며 부탁한 것이다.

심지어 부탁이라면서 조건이 까다롭기까지 했다. 구역도 꼼꼼하게 나누고 어느 곳은 자리마저 지정했다. 리즈비아 거리 초입에 있는 이 꽃집도 그렇게 지정된 장소 중 하나였다.

가게에 사람이 적은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도대체 어디다 숨겨둬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한번 장식하면 계절이 지날 때까지 좀처럼 바뀌지 않는 장식용 화병이 제일 적합했다.

이디케는 주변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마력구슬을 손에 쥐었다. 거짓말이라면 도가 텄고 아닌 척 잡아떼는 데에도 능숙한데 왜 이렇게 손에 땀이 나는지, 둥그런 구슬이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졌다.

“크흠, 흠, 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얼른 화병에 마력구슬을 집어넣었다. 꽃 모양이 조금 흐트러진 거 같긴 하지만, 더 건드리며 시간을 끌기엔 간덩이가 모자랐다. 이디케는 해바라기 한 송이를 사서 얼른 꽃집을 나왔다.

“으, 덥다.”

오랫동안 꽃집에 있었던 탓에 몸이 식었었는데, 나오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밀려오며 숨이 턱 막혔다. 시선을 좀 끌더라도 남부식 옷을 입고 나올 걸 그랬다고 후회를 해 보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디케는 남은 장소들을 헤아려 보다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더위에 브란젤 절반을 마저 돌아야 했다. 묵직한 가방을 추스르던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 방식이 효과가 있어도 곤란한데.’

한시가 급한데 진도는 나가지 않으니 양으로 밀어붙이려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안정화를 이루는 건 그다지 마뜩치가 않았다. 장치를 원활하게 쓰기 위한 물밑 작업에만 지나치게 많은 돈과 인력이 들어갔다.

안 그래도 우편국과의 연계를 전제로 하는 사업이라 마음이 불안한데, 이래서야 메시지 장치 보급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편국에 질질 끌려 다니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세상을 바꿀 발명품에 자신의 협조가 필수라는 걸 센네페르가 깨닫기라도 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작위를 받을 때까지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오드리가 너무 불리했다.

‘역시 몇 개 빼는 게 나을까? 일부러 빼먹은 티 안 나게 드문드문 하면 속아 넘어갈 것도 같은데.’

이디케는 마력구슬을 만지작대며 고민했다. 마력구슬의 양에 기대면 안 되는 이유를 골백번 설명했는데도 기어코 자신을 바깥으로 내몬 마법사들이다. 확실한 실패를 경험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을 게 뻔했다.

‘빼돌린 건 마법도구 폐기점에 가서 망가뜨려 달라고 하면……. 안 돼, 수상해 보일 거야. 차라리 수도 지점 창고 구석에 처박아놓을까? 거긴 워낙 마법도구가 많아서 못 찾을 테고, 어쩌다 들켜도 내가 실수로 몇 개 흘린 거라고 변명할 수도 있고. 좋아, 딱 좋아.’

이 여름에 햇볕 한 자락 보지 못해 얼굴이 밀가루처럼 허연 워커와 셰비언이 알면 거품을 물었을 사고 흐름이었다. 하나 그런 걸 신경 쓰면 그게 이디케일까. 그녀는 씩씩하게 영업 마차가 모이는 골목을 향해 출발했다.

리즈비아 거리는 역사 깊은 공연장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였다. 공연장을 기준으로 앞쪽엔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함으로 승부하는 의상과 소품을 파는 가게가 빼곡하고, 뒤쪽으론 일 년 내내 바쁜 출판사와 신문사가 있었다.

당연히 유동인구도 어마어마했다. 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일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뜨거운 물에 데쳐진 채소처럼 허우적대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디케는 가방을 꼭 끌어안고 영업마차의 순서를 기다리는 줄에 섰다. 한낮부터 일을 나온 마차가 적어 줄이 길었다. 가방만으로도 손이 모자란지라 앞에 선 사람이 든 양산의 그림자에 슬쩍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옆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어?”

무심결에 고개를 쭉 빼고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워낙에 사람이 많았다. 이디케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는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져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분명히 알신다였는데. ……아닌가?’

꾹 다문 입매, 화난 듯 주름 잡힌 눈가, 경직된 어깨와 빳빳한 등이 딱 알신다였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이디케가 확신하지 못하는 건, 그녀의 차림이 몹시 궁색했기 때문이었다.

알신다는 차림에 몹시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늘 입는 하녀복일망정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리고 얼룩 하나 없도록 관리 했다. 그런 사람이 낡고 닳아 밑단이 헤진 데다 실밥이 너절하게 풀린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갔다. 오드리가 그녀에게 쥐어준 퇴직금만 해도 상당한 금액이었는데 말이다.

‘아닐 거야. 잘못 봤겠지.’

제대로 알아보려면 줄에서 이탈해서 쫓아가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이디케와 알신다 사이에 무슨 의리가 있고 사연이 있어서 이런 땡볕에 뒤를 쫓을까. 이디케의 관심은 줄이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려 보는 쪽으로 돌아갔다.

마차는 적고 사람은 많으니, 합석을 하는데도 줄이 줄어드는 속도는 느리기만 했다. 무거운 가방을 내팽개치고 싶은 걸 참고 버티고 서 있는 동안 등과 목덜미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갖춰 입은 속옷이 피부에 달라붙어 불쾌했다.

이디케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을 훔치며 오드리만큼 두껍지 못한 얼굴 가죽을 슬퍼했다. 역시 남부식 옷을 입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다시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다음엔 당당히 남부식 옷을 입고 나올 자신이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말이다.

‘여기 사람들은 덥지도 않나? 어떻게 이런 옷을 입고 여름을 나지?’

브란젤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아련한 옛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이디케였다. 다들 올해 브란젤의 여름은 기이하도록 덥다고 입을 모아 말해도 그녀가 그 말을 실감하기는 어려웠다. 작년 이맘때엔 사흘에 한 번씩 비가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날씨였다.

무례인 걸 알면서도 흘끗흘끗 사람들의 옷차림을 살피던 중,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뒷모습을 발견했다.

움직임이 편한 셔츠에 조끼를 걸치고, 늘씬한 다리에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다. 정강이를 모두 덮는 긴 부츠를 신고 허리춤엔 긴 칼을 찼다.

가끔 거리에서 마주치던 용병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차림인데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그 차림의 주인이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남자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어도 확연히 드러나는 몸의 곡선 때문에 도저히 성별을 착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소매를 걷어 올려 드러난 팔뚝의 피부가 짙은 꿀색이었다. 말브레 극장 사건 이후 나랍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브란젤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피부색을 노출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 아가씨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니.’

이디케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나랍인 용병에게 내심 감탄했다. 흘끔대는 시선이 점점 늘어나는 걸로 모자라 주변에 동그랗게 빈 공간이 생기고 있는데도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없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바람이 불었다. 핏물에 담갔다 뺀 듯 새빨간 머리타래가 바람결에 헝클어져 흐트러졌다. 마치 바람에 춤추는 불길처럼 허공에 날리는 머리칼이 어떻게든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던 사람들의 눈길마저 모조리 사로잡았다.

여자가 귀찮다는 듯 머리칼을 정리하며 뒤돌아섰다. 본의 아니게 정면에서 얼굴을 마주본 이디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조각상처럼 우아한 이목구비에 야성적으로 빛나는 푸른 눈, 만사 귀찮다는 듯 꾹 다문 입술……. 굳이 따지자면 라디아타의 금발이 더 호화롭고, 오드리의 눈동자가 더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신비롭기로는 셰비언을 따를 수 없고, 라비린의 이목구비가 더 뚜렷하고 화려했다.

그러나 이질적인 차림이나 꿀색 피부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꼭 벨트람이 지상에 내려온 것 같네. 칼을 차고 있어서 그런가?’

순수하게 감탄하느라 잠시 정신을 빼놓고 있다가 그만 눈이 마주쳤다. 빤히 바라보던 걸 들킨 이디케가 부끄러워하며 뺨을 붉히자, 여자는 그런 이디케가 귀엽다는 듯 빙긋 웃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웃음이 걸리자 오므렸던 꽃망울이 터진 듯 분위기가 바로 화려해졌다.

“가방, 떨어지겠는데.”

“네……. 네? 아, 이런!”

도대체 언제 손에서 힘이 빠졌던 건지, 분명 꼭 끌어안고 있었던 가방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게다가 반쯤 열리기까지 해서 안에 가득 담긴 마력 구슬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디케는 허둥지둥 가방을 수습해 다시 끌어안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뭘. 가방이 무거워 보이는데, 잠깐 들어줄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친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걷어 올린 소매 때문에 팔뚝에 잡힌 근육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그녀라면 이디케가 무거워하는 가방도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뇨, 괜찮아요. 그건 너무 실례인걸요.”

하지만 이디케는 가방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사람을 홀리는 분위기를 풍긴대도 상대는 용병이었다. 기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용병의 무얼 믿고 가방을 맡길까.

말이야 순순하다지만 은근하게 느껴지는 경계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한데, 여자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호쾌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전쟁의 신 벨트람을 연상케 하는 사람이었다. 이 도시 안에서 어깨에 전령새 한 마리를 얹고 있대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듯했다.

“본인이 싫다는데 억지로 우길 수야 없지. 그래도 그렇게 꼭 끌어안고 있는 걸 보면 퍽 소중한 물건이 들었나 보지? 그렇다면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쓸데없이 눈을 빛내는 녀석들이 여기저기에 보이거든.”

여자의 시선을 받은 소매치기들이 슬금슬금 발을 뺐다. 아무리 여자라도 칼을 찬 용병인데, 소매치기가 감히 덤빌 상대가 아니었다. 재수 없게 다리나 손이 상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그걸 확인한 이디케가 고슴도치라도 된 듯 뾰족뾰족하게 가시를 세웠다. 그걸 본 여자가 본래 일행이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디케의 곁에 서서 그녀를 감쌌다.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만 곁에 있어주지. 그 정도는 괜찮잖아?”

“그렇긴 한데, 왜…….”

“왜긴 왜겠어, 영업하는 거지. 내 이름은 샤를레아야.”

이디케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평범한 평민 복장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용병 쓸 일이 얼마나 있을 거라고 영업인지 이해가 안 가서였다. 게다가 여긴 브란젤이었다.

“샤를레아 씨, 일이 필요하면 브란젤 말고 국경지대로 가셔야죠. 그게 아니면 요즘 해적 때문에 말이 많은데 무역선에 호위로 타시든가요.”

“공짜 호위가 싫어? 나 그냥 갈까?”

“호의로 해주신다면 마다하지 않겠어요.”

공짜를 마다할 이디케가 아니었다. 그녀는 샤를레아의 보호 아래 마음 편히 순서를 기다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쏠리는 게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그동안 샤를레아는 이디케에게 몸으로 그늘을 만들어주려는 듯 햇살을 등지고 서 있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땀을 흘리지 않았다. 아무리 셔츠가 얇다지만 조끼까지 걸치고 있으면서도 보송보송한 이마와 목덜미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랍인은 다들 샤를레아 씨처럼 더위를 안 타나요?”

“설마 그럴 리 있나. 땀이 없는 건 내 체질이야. 아, 순서가 됐군. 얼른 타.”

“샤를레아 씨는요? 어디 갈 곳이 있어서 여기 서 계셨던 거 아니에요? 목적지가 어디예요? 비슷하면 같이 타요. 전 필리아 거리로 갈 거예요.”

“나랑은 행선지가 반대인걸. 난 다음 마차를 탈 테니 먼저 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디케를 마차에 태워 보내고, 샤를레아는 미련 없이 줄에서 벗어났다. 사실 더위를 타지 않는 데다 체력도 걷는 속도도 남다른 그녀에게 마차는 별 의미 없는 이동 수단이었다.

아무리 사람으로 북적이는 리즈비아 거리라도 인적 뜸한 뒷길은 있었다. 샤를레아는 어깨가 닿을 듯 좁은 골목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사람은 물론이고 흔해빠진 시궁쥐며 고양이 한 마리 없는 적막한 길은 햇살조차 없이 온통 그늘이었다.

샤를레아는 그 그늘 속에서 조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자 납작하기만 하던 주머니에서 조금 전까지 이디케의 가방 속에 들어 있었을 마력 구슬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먹물처럼 검은 마력으로 가득 찬 구슬 속에 가루 형태의 금빛 마력이 차르르 흘러 다니는 모습이 굉장히 예뻤다.

“재밌는 걸 주웠어.”

마력 구슬을 들여다보는 얼굴에서 호기심과 장난기가 철철 흘러넘쳤다. 샤를레아는 마력 구슬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장난을 쳤다. 구슬이 크게 상하운동을 할 때마다 마법망이 함께 흔들리는 걸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바일런 섀덤은 죽었다고 했는데……. 이런 걸 만들어낼 만한 천재가 인간 중에 또 있었단 말이지.’

도박도 실컷 즐겼고 기차 구경도 질리도록 했겠다, 슬슬 떠나려던 참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발목을 잡아당기며 브란젤에 좀 더 있으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급할 것도 없겠다, 샤를레아는 이제까지 몇 번이고 자신을 구했던 예감에 기꺼이 몸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이 재미있는 물건을 가방 한 가득 가지고 있던 아가씨의 이름을 모른다는 게 생각이 났다. 의심을 사지 않고 접근해서 구슬을 빼내는 일에 집중하다 묻는 걸 잊은 자신도 우습지만, 묻지 않는다고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상대도 어지간했다.

‘야무진 아가씨네.’

마차도 같이 탈 수 있을 것처럼 다정하게 굴어놓고 가명조차 대지 않다니 말이다. 필리아 거리라는 행선지는 밝혔지만 그걸로 어떻게 사람을 찾을까. 사막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샤를레아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 예감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헨젤 백작저의 동관은 유독 햇살이 잘 드는 건물이었다. 주변에 해를 가릴 만한 구조물이나 키 큰 나무가 없기 때문인지,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하루 내내 황금빛 햇살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응접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관의 응접실은 늦은 오후라 부드러워진 햇살로 따스하게 반짝거렸다.

하델은 응접실 의자에 앉아 알신다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그레하게 물든 뺨과 평소보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에서 소년이 품고 있는 기대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제 굳은살이 많이 사라진 손가락이 쉴 새 없이 꼼지락댔다.

반면 하델의 옆에 선 집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하델이 오드리 몰래 알신다를 저택으로 불러들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련님……. 아가씨께서 아시면 화내실 겁니다.”

“하지만 날 야단치러 브란젤로 당장 오진 못하시잖아?”

오드리가 휴가를 떠나는 날, 마차에 숨어들었다가 들키는 바람에 저택에 일대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담백한 대답이었다.

“알아도 그다지 화내진 않으실 거야.”

“그걸 어찌 아십니까?”

“내게 뱀이 되라 하셨으니까.”

집사는 하델이 바닥을 기어 다니던 시절부터 그를 보아왔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유모도 없이 자라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누나의 행방을 묻던 안쓰러운 꼬마아이를 기억했다.

사랑받고 싶어 쉴 새 없이 주변의 눈치를 보고 어떻게든 사랑받을 행동을 골라 하던 소년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주변인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게 된 뒤에도 하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미 완전히 몸에 배어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지극히 인간적인 안쓰러움에서 기인한 사랑이 집사의 눈을 가렸다. 해서, 그는 하델이 열두 살이나 먹었다는 걸 좀처럼 체감하지 못했다. 바쁜 아버지에게 받는 사랑만으론 너무 부족해 허덕이던 어린애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지워지질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가뿐히 뱀을 입에 올리는 하델은 집사의 머릿속에 있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건 헨젤의 장기잖아. 싫어도 칭찬하실 거야. 그나저나 릴리가 알기 전에 알신다가 왔으면 좋겠는데……. 조금 늦네.”

헨젤 백작과 오드리가 가끔 비추던 서늘한 낯빛이 볼살 통통한 어린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집사는 알렉스가 자란만큼 하델도 자랐음을 새삼 실감했다. 궁색한 차림을 하고 나타난 알신다를 꽉 끌어안으며 이전과 똑같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걸 봤을 땐 놀랍기까지 했다.

‘베텔 경의 말 그대로야. 이제 종종대며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걸.’

알신다를 몰래 불러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능숙하게 그녀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안심이 됐다. 집사는 하델의 성장을 좀 더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 * *

유례없는 더위가 몰아치는 여름은 아침햇살마저 폭력적이었다. 오드리는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이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건, 어젯밤 늦게까지 타우레드 남매와 함께 당구를 즐겼기 때문일 터다.

라비린이 먼저 제안한 것이지만 본래 당구는 신사들의 놀이였다. 상체를 깊숙이 숙이고 큐를 다루는 동작이 여성에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오드리 역시 당구는 쳐 본 적이 없었는데, 한번 배워보니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타우레드 남매가 한 팀을 이루고, 오드리는 카프러스와 편을 짰다. 라디아타는 코르셋이 방해가 되어 연신 실수를 했고, 오드리는 초보자치고는 준수한 솜씨를 발휘했다. 어디까지나 초보자치고는.

자연히 라비린과 카프러스의 대결이나 다름없는 양상이 되었는데, 두 남자가 어찌나 승부욕을 불태우는지 아주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다 빨릴 지경이었다. 끝을 알 수 없이 팽팽하게 이어지던 접전에서 정작 승패를 결정지은 건 라디아타의 마지막 한 타였지만 말이다.

우연에 우연이 겹친, 그야말로 포모스의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공을 두고 두 남자가 어찌나 허탈한 표정을 짓던지. 라디아타와 오드리는 마구 웃지 않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덕택에 평소보다 굉장히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었는데도 잠 오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래놓고도 이렇게 일찍 깨어버리다니, 야속한 햇살이었다. 게다가 몸에 익은 습관이 있어 눈을 몇 번 비비는 것만으로 잠이 홀라당 날아가 버렸다.

“어머, 깨어 계셨어요?”

해바라기를 한아름 안고 들어오던 하녀가 오드리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잠을 방해할까 살금살금 들어왔는데 먼저 깨어 일어나 있을 줄이야. 하녀는 몹시 아쉬워하며 침대 옆 화병에 해바라기를 꽂았다.

“눈 뜨셨을 때 바로 보실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웬 해바라기야?”

“벨키스 경께서 보내셨어요. 꽃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건 알지만, 그래도 보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느냐면서요.”

“이런, 그런 의미라면 내가 보냈어야 맞는 건데 아쉽게 됐는걸. 당구를 그렇게 열심히 치셨는데 결정타를 라디아타에게 뺏겼으니 얼마나 억울하실까.”

오드리는 나름 진심을 담아 한 대꾸인데, 하녀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농담을 들은 듯 웃었다. 주근깨 송송 박힌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반질반질했다.

“에이, 그 정도로 억울해하실 만큼 마음이 좁은 분은 아니실 거예요. 오래 모시지 못한 제가 보기에도 정말로 신사이신걸요.”

고용되어 일하는 처지이니만큼 팔이 안으로 굽었다 할 수도 있겠지만, 오드리는 내심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라비린은 자신의 손으로 끝을 내지 못해 아쉬워할지언정 괜한 억울함이나 분을 품을 사람이 아니었다.

‘잠깐 사이 느낌이 많이 바뀌었네.’

촉촉하고 부드러운 꽃잎을 손가락에 감고 장난을 치고 있으려니 꽃집에서 라비린을 마주쳤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되감겼다. 그때는 불쑥 다가와 손을 뻗는 그가 불쾌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는데, 어느새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거의 사라졌다.

아무래도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잦아져서인 듯했다. 게다가 라비린은 놀라울 정도로 관찰력과 주의력이 좋은 데다 섬세하기까지 했다. 오드리가 미처 표현하지 않은 불편함과 아쉬움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먼저 배려해 주는데 싫을 리가 있나. 가랑비에 옷 젖듯 야금야금 호감이 쌓이고 있었다.

‘오늘도 기다리고 있으려나?’

라비린은 오드리에게 이 별장에서 관리하는 말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녀가 마음껏 말을 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에 더해 승마를 즐길 만한 풍광 좋은 길을 안내하는 수고도 자청했다. 덕분에 오드리는 매일 아침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카프러스는 그런 라비린이 굉장히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주인으로서 손님을 대접하겠다는데 괜한 트집을 잡아봐야 오드리의 낯만 깎일 뿐이니 참아야지.

사실 라비린이라고 별로 다르지 않은 게, 그는 아침마다 승마에 동행하는 카프러스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오드리라고 두 남자 사이에서 오가는 미묘한 신경전을 모를 리 없건만 그녀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둘을 내버려 두었다. 괜히 사이에 끼었다가 골머리를 앓거나 바닷바람을 맞으며 즐기는 아침 승마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러나 승마드레스를 곱게 갖춰 입고 라비린과 함께 나타난 라디아타를 봤을 땐, 천하태평 느긋하던 오드리도 당황하고 말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오드리도 오늘은 일찍 깨는 게 어려웠는데, 정오는 되어야 눈을 뜨던 라디아타가 이 아침에 단장을 마치고 나오다니 말이다.

게다가 승마바지를 꿰어 입고 머리를 대충 말아 올리고 나온 오드리와는 달리, 라디아타는 당장 브란젤의 승마 사교모임에 나가도 될 정도로 차림이 완벽했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자고 일어나기는 언제 일어나 준비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라디아타, 안 졸려요?”

“졸려요.”

라디아타의 대답이 아주 빨랐다. 곱게 화장해서 피로함을 감춰놓긴 했지만 눈꺼풀에 잠이 아주 주렁주렁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무리를 하는지. 축제가 시작되면 같이 외출하자고 약속했는데, 이래서야 또 쓰러져 누워도 이상하지 않다.

“졸린데 왜 나왔어요? 더 자지. 평소 일어나던 시간이 아니잖아요.”

“대체 무슨 매력이 있어서 아침마다 승마를 가나 궁금했거든요. 나도 할 거예요, 승마. 왜요, 내가 끼니까 싫어요?”

이 무슨 어린애 같은 투정인지. 도대체 왜 안 말렸느냐는 비난을 담아 라비린을 노려보았지만, 그의 다 포기한 듯한 미소를 보자 대충 사정이 짐작됐다. 그가 알았을 땐 이미 라디아타를 막기엔 늦었던 게다.

“아침 승마에 끼고 싶어 하는 걸 알았으면 어제 그렇게 늦게 안 잤죠.”

“오드리라고 일찍 잔 거 아니잖아요. 아무튼 나도 갈 거예요.”

라디아타가 입을 삐죽대며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이렇게까지 꾸미고 나왔는데 말 등에 잠깐 올라타는 걸로 끝낼 수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몇 번이고 거듭해 말해보아도 그럴수록 태도가 강경해지니, 결국 오드리마저도 그 황소고집 꺾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넷이 가죠. 벨키스 경, 오늘의 코스는 어디죠?”

오드리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훌쩍 말에 올라탔다. 그 날렵한 동작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라디아타는 라비린의 도움을 받고서야 안장에 자리를 잡았다. 라비린이 한쪽으로 발을 가지런히 모은 라디아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동안 말이 레이디 헨젤께 많이 익숙해졌으니 오늘은 좀 달려볼까 했습니다만……. 라디아타, 그 자세를 하고 뛸 수 있겠어?”

“그럼 당연하죠. 오라버니는 내가 수수깡 인형으로 보여요?”

“아니 뭐, 네가 그렇다면야 나야 믿어야지. 자, 레이디들. 따라오시죠.”

라비린은 입이 삐죽 나온 라디아타를 달랠 생각도 않고 냉큼 길안내를 시작했다. 그가 제일 앞에 서고, 가운데에는 오드리와 라디아타가 나란히 섰다. 후위는 카프러스가 맡아서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했다.

오늘 라비린이 안내하는 길은 현지의 어부들이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는 해안가의 모래사장이었다. 아침 햇살을 품은 모래가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운데, 부지런한 어부를 태운 쪽배가 고요한 아침바다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해안가 한쪽에서는 온몸이 시커멓게 그을린 사람들 여럿이 나와 어젯밤 쳐 두었던 그물을 걷어내고 물고기를 거두느라 바빴다.

모래는 거칠었고, 깨진 조개껍데기가 곳곳에 섞여 있었다.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해초 찌꺼기가 파도를 타고 밀려왔다가 물러나며 모래사장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관광객을 위해 말끔히 정비된 장소는 아니었지만, 나름 거친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오라버니는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아요?”

“내가 리가 항구를 얼마나 들락거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 조심해라. 여기 모래사장은 모래가 좀 깊은 편이라 발이 푹푹 빠지거든.”

“안 그래도 조심하고 있어요.”

라디아타는 태연하게 대꾸하면서도 재차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바닥이 불안정한 상태다 보니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흔들리는 게, 자칫하다간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질 것처럼 불안했다. 그녀에 비하면 오드리의 자세는 안정적이기 그지없었다. 잘 포장된 길을 걷는 것처럼 편안해보이기까지 하니, 라디아타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오드리, 정말 잘 타네요……. 매일 제스본강변을 달린다더니 그 실력이 여기서 발휘되나 봐요.”

“드레스가 아니라 바지니까요.”

“나도 바지를 입으면 잘 타게 될까요?”

“그건 아니고요. 바지를 입는대도 그렇게 옆으로 앉아 타서야 다를 게 없죠. 남자들이 타듯이 다리를 벌리고 타야 안정적이 될 거예요.”

“아하…….”

오드리가 보란 듯 허벅지를 두드렸다. 라디아타는 오드리의 손을 따라 무심결에 시선을 내렸다가 그만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돌렸다.

바지를 입은 탓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다리 라인이 너무 선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카프러스와 라비린은 오드리가 바지 차림으로 다리를 쩍 벌린 자세를 매일 보면서 어쩜 저렇게 태연하게 굴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일부러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상한가……?’

사실 카프러스는 몇 달을 내리 보다 보니 익숙해진 것이고 라비린은 오드리가 뭔 꼴을 하고 있든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이라 그런 것이지만, 라디아타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쌓아온 세간의 상식을 벗어난 세 사람을 보며 되려 자신의 정상성을 의심했다. 그중에서도 남자들처럼 다리를 벌리고 말을 타고서도 부끄러움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오드리의 태도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오드리가 웃는 낯으로 라디아타를 칭찬했다.

“그래도 라디아타는 정말로 잘 타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예쁜 드레스를 입고 이런 길을 걸었으면 한참 전에 떨어졌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나마 위로가 되네요.”

두런두런 말을 나누는 사이 드문드문 풀이 난 지역에 접어들었다. 말을 다루는 데 계속 애를 먹었던 라디아타는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한시름 놓고 이제 좀 다닐 만하겠구나 했지만, 라비린은 이렇게 가벼운 산책으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처음 말고는 입 한 번 떼지 않고 일행을 이끌던 그가 말을 멈추고는 반쯤은 예상했던 제안을 했다.

“역시 다들 그냥 산책만 하다 돌아가기엔 좀 아쉽죠? 땅도 제법 단단하겠다, 저기 저 언덕 꼭대기까지 달려보는 거 어떻습니까?”

라비린의 손끝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바다인지 하늘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새파란 하늘 아래에 야트막해 보이는 언덕이 솟아 있었다. 덤불은 좀 있어도 크게 자란 나무는 없어 말을 달리기에도 괜찮아 보였다.

“라디아타, 뛸 수 있지?”

웃는 낯으로 콕 집어 라디아타를 지목하는 게, 정말로 뛸 수 있을지 의심하는 티가 확 났다.

라디아타는 그 의심에 자존심이 상해 눈썹을 치켜 올리고도 차마 긍정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까짓 거 조금만 무리하면 못 뛸 것도 없지마는, 그 뒤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또 드러누우면 오드리에게 미안한데.’

만탈락에 가야 한다는 걸, 반쯤은 억지를 써서 동행한 휴가였다. 예상외로 라비린이 그녀의 부재를 잘 메워주었지만 계속 그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라디아타는 결국 자존심을 굽혔다.

“뛸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네요. 바다도 하늘도 이렇게 예쁘잖아요.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고 있을게요.”

“라디아타가 안 뛴다면 나도 굳이 뛸 필요 없…….”

“오드리, 나는 경치도 예쁘고 파도 소리가 듣기 좋아서 잠시 여기 있겠다는 거예요. 오드리는 말을 달리는 걸 좋아하잖아요? 그러니 나와 함께 파도 소리를 듣는 건 저 언덕에 다녀온 다음으로 해요.”

평소 직설적으로 말하기를 즐기는 라디아타답게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놀다 오라는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낸 대답이었다. 거기에 더해 어서 가보라, 오라버니가 기다린다 손짓까지 하며 오드리를 재촉했다.

“시원하게 달리고 와요. 오드리만 태우면 뻣뻣하게 굳는다던 말도 이제 이렇게 말을 잘 듣는데 그냥 들어가면 정말로 아쉽잖아요.”

이쯤 되면 배려를 거절하는 게 오히려 상처가 될 것이다. 오드리가 수긍할 조짐을 보이자 라비린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냉큼 끼어들었다.

“베텔 경, 라디아타를 잠시 부탁하겠네.”

“예?”

“라디아타를 혼자 둘 순 없지 않나.”

라비린은 호스트로서 오드리를 안내해야 하니 라디아타의 곁을 지킬 사람은 카프러스뿐이라는 얘기다. 맞는 말인데 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는 건, 라비린이 예의바른 표정 너머로 희미하게 비추는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카프러스는 눈치고 뭐고 없는 척 거절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거절의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건 기사답지 않은 일이었다.

“베텔 경, 라디아타를 잘 부탁해요.”

“……네.”

그에 더해 오드리까지 말을 보태자 더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카프러스는 빠르게 표정을 정돈하고 라디아타의 곁에 섰다. 라디아타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라비린은 이 상황을 의외일 정도로 반가워하는 라디아타의 기색을 민감하게 눈치챘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알아서 잘할 동생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말을 달릴 기대감으로 뺨을 붉게 물들이는 오드리였다.

“보기에는 가까워 보이지만 의외로 멉니다. 저 야트막해 보이는 언덕도 의외로 높고요. 길도 일직선이 아니라 완만히 휜 곡선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덤불과 바위가 적당히 있으니 달리는 맛이 있겠네요. 벨키스 경, 저 먼저 갑니다. 뒤처지지 말고 따라오세요. 이랴!”

오드리는 라비린이 미처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박차를 가해 뛰쳐나갔다. 물기 없이 마른 흙이 단번에 속살을 드러내며 뽀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말이 이제껏 오드리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아 계속 애를 먹였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의 출발이었다.

“이것 참……. 라디아타, 금방 다녀오마.”

“천천히 오셔도 돼요.”

“그 말,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

라비린은 장난스러운 대답으로 카프러스의 속을 덜컹 흔들어놓고 바로 출발했다. 그의 승마술 역시 훌륭했다. 오드리에 비하면 한참 늦은 출발이었음에도 금세 언덕 아래에까지 도달해 오드리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먼저 출발했는데 따라잡히다니, 승마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오드리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윈디가 아닌 다른 말을 탔다지만 라비린이라고 딱히 더 좋은 말을 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승부를 가릴 필요는 없지만 지기 싫어진 오드리의 자세가 바뀌었다. 마치 경주하는 선수들처럼 상체를 낮추곤 엉덩이를 살짝 들어 허벅지로 몸을 지탱했다. 그 상태로 박차를 가해 질주하기 시작하니, 라비린이 기겁을 했다.

‘이거 원, 괜히 여유 부렸는데? 처음 달리는 길일 텐데 뭐 저렇게 대담해?’

말을 잘 탄다는 말은 들었지만 간이 배 밖에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 어쨌거나 라비린에게도 오드리의 승부욕이 전염되기라도 했는지 그 역시 꽤 진심이 되었다.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하게 달렸고, 의외로 멀다던 언덕 꼭대기가 코앞에 다가왔을 즈음엔 오드리가 아주 약간 앞선 상태였다.

“이랴! 하!”

“레이디! 꼭대기 끝은, 절벽입니다!”

집중해서 말을 몰던 오드리가 홱 고삐를 당겼다. 실컷 뛰다 갑작스레 정지 명령을 받은 말이 거품을 물며 허공에 앞다리를 휘저어댔다. 자칫하면 그대로 뒤집혀 낙마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 바짝 옆에 다가온 라비린이 고삐를 빼앗아 낚아채 쥐고 말을 진정시켰다.

“이…….”

라비린은 입안에 고인 말을 차마 바로 뱉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목구멍에 큰 돌덩이가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크게 놀란 심장이 무섭게 두방망이질을 치고, 등줄기를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며 한기가 흘렀다.

반쯤 흘러내린 머리칼, 떨어지기 직전의 모자, 땀으로 범벅된 이마와 목덜미, 그 모든 게 다 짜증스럽고 화가 났다. 낙마 사고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를 리 없으면서 그렇게 내달리다니. 말문이 막힌 사이 그나마 약간 남아 있던 이성이 속에서 타는 불길을 식혔다.

“끝도 모르는 길을 이렇게 무모하게 달리실 거면, 다시는 바지 입지 마시죠.”

“음……. 잡아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수월하게 멈췄네요.”

생긋 웃는 얼굴 어디에서도 두려움이나 후회는 보이지 않았다. 라비린은 그게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지만, 충분히 멈출 자신과 실력이 있었던 오드리로서는 그게 최선의 대답이었다.

“조언도 고마워요. 다음엔 끝을 미리 알고 달리도록 하죠.”

“레이디 헨젤!”

“그보다 벨키스 경의 승마 실력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감탄을 금할 수가 없네요. 저도 말이라면 제법 잘 탄다고 생각해 왔는데, 하늘이 창문 모양이라 생각한 멍청이와 같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지 뭐예요. 더 정진해야겠어요.”

조금 전, 오드리가 왜 승마바지를 고집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한 라비린이었다. 그 실력에서 뭘 더 정진하겠다는 건지 황당할 지경이건만, 시원하게 웃음 짓는 오드리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푸스스 김이 샜다.

“……저야 타우레드의 후계자가 아닙니까.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배웠습니다. 레이디 헨젤이야말로 어떻게 그렇게 실력을 갈고닦으신 겁니까? 저는 산트렘의 숙녀를 보는 줄 알았습니다.”

“잘해서 좋았고, 좋아하다 보니 열심히 했어요. 그것뿐이랍니다.”

라비린은 속아주기 어려운 거짓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좋아서 열심히 한 정도로 쌓일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라 토를 달 수가 있어야지. 그는 한숨을 씹어 삼키고 그때까지 쥐고 있던 고삐를 넘겨주었다.

“괜한 참견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또 이런 순간이 온다면 저는 또 끼어들 테니까요.”

“미리 감사하겠습니다, 벨키스 경.”

“빈말이라도 달래주시지 않는군요…….”

라비린의 나직한 투덜거림은 오드리의 귓등도 스치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오드리는 라비린을 지나쳐 코앞의 정상을 향해 말을 몰았다. 가장 높은 꼭대기를 장식한 바위 너머에는 내려다보기도 겁나는 절벽이 있건만, 그녀는 평지를 걷는 듯 유유자적했다.

“멋진 경치예요.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질 않아요. 바람이 시원해서 더위가 깡그리 잊히는군요.”

오드리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모자를 벗었다. 반쯤 흘러내린 머리칼을 고정하던 끈도 풀어버렸다. 구불구불한 긴 머리칼이 화려하게 쏟아졌다. 바다를 달려온 바람이 뺨을 쓰다듬고 머리칼을 헤집었다.

라비린은 오드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곁에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풀고 귀밑을 지나는 바람을 즐기는 모습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고 놔주질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초록색 머리칼이 어찌나 자유롭게 느껴지는지. 정해진 길을 걷지 않는 일탈이 눈부셨다.

“초록색 머리칼이 정말로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요? 하도 말이 많아서 색을 빼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하하……. 웬만하면 그냥 두시죠. 마치 레이디 헨젤을 상징하는 색처럼 느껴지거든요.”

수평선에만 박혀 있던 오드리의 시선이 라비린을 향했다. 라비린의 표정은 비꼬는 거 아니냐고 무심결에 생각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환하기만 했다. 감탄 어린 눈빛은 괜히 민망해질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건 제 눈이 초록색이라서 그런 건가요?”

“물론 눈의 영향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서……. 음, 뭐라 표현해야 하지. 그래요, 레이디 헨젤을 보고 있으면 여름이 떠오릅니다. 태양이 불타고 숲의 녹음이 진해지는 계절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분명 염색인데도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죠. 쭉 보고 싶습니다.”

라비린은 낯부끄러운 말을 쉽게도 내뱉었다. 입에 발린 외모 칭찬을 했다면 오드리도 천연덕스럽게 대꾸했을 텐데, 이런 식의 칭찬을 들으니 어쩐지 얼굴이 간지러웠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귀를 알아본 라비린이 굳이 말을 덧붙였다.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다 생각하시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제 감상이 이런데요.”

“염색 빼자는 말을 또 듣거든 그땐 벨키스 경의 말씀을 좀 팔아야겠네요. 그래도 될까요?”

“제 부족한 감상이 레이디께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시죠.”

선 굵고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남이 소년처럼 웃었다. 웃을 때마다 묘하게 느껴지던 냉기는 간 데 없이 보는 사람마저 따라 웃게 만들 정도로 발랄한 미소였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같이 웃다가 뒤늦게 멋쩍어하며 고개를 돌렸다.

“멋진 경치도 봤고 바람도 즐겼으니 슬슬 내려가죠.”

“아니 뭐……. 굳이 일찍 내려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좀 더 즐기다 가시죠.”

“라디아타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글쎄요? 그 라디아타는 우리가 조금 늦게 오길 기대하고 있을걸요.”

라비린이 보기에 라디아타는 카프러스에게 관심이 있었다.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유형의 인물이라 관심을 가지는 건지, 아니면 다른 쪽으로 눈길이 가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처럼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겼는데 이럴 때 방해하면 눈치 없다 소리 듣습니다.”

“……네? 그, 말씀이 마치, 그러니까……. 라디아타가 베텔 경을 좋아한다는 말처럼 들리거든요?”

“그런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죠. 어쨌거나 관심이 있고, 좀 더 알고 싶어 한다는 건 확실합니다. 이제까지는 단둘이 있을 기회가 전혀 없었으니 이럴 때 눈치껏 피해줘야죠.”

애써 얼굴을 돌렸던 것도 소용없이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오드리는 흥미진진함을 감출 생각도 없이 즐거워하는 라비린을 보며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내게 라디아타는 정말로 소중한 친구이지만, 베텔 경도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에요. 그를 흥밋거리로 취급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군요. 라디아타에게도 한마디 해야겠어요.”

오드리는 당장이라도 뛰어 내려갈 것처럼 몸을 돌렸지만, 이내 라비린에게 제지당했다.

“그렇게 화내지 마시죠, 레이디. 라디아타가 베텔 경을 그저 흥밋거리로만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오해를 했다는 걸 알면 상처받을 겁니다.”

“후작영애가 일개 기사에게 관심을 기울이는데 그게 어떻게 흥밋거리가 아닐 수 있죠? 과정도 끝도 아름답지 못할 게 뻔한데!”

“라디아타라면 가능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애를 아주 많이 아끼시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라디아타를 정략결혼의 말로 쓸 생각이 없으시단 얘깁니다. 그 애가 원하는 상대가 아버지 눈에 차기만 한다면 기사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으실 겁니다.”

“라디아타는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경께서는 잘도 알고 계시네요.”

“지금도 꿋꿋하게 가스트로를 거절하는 녀석인데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걸 알려줍니까? 라디아타 성격에 이걸 알았다간 역사에 남을 바람둥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라비린은 왕국에 하나뿐인 왕자의 이름을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부르듯 부르며 혀를 찼다. 남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라디아타와 가스트로가 맺어질 거라고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가스트로가 라디아타의 마음을 얻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반복적으로 에스코트 신청을 하는 주제에 그렇게까지 열기가 없는데 무슨 수로 라디아타의 마음을 얻을까.

“제가 보기에 베텔 경은 아버지의 눈에 충분히 들 만한 사람입니다. 생김새도 남자답고, 실력도 그만하면 괜찮고……. 성품이 조금 고지식하긴 해도 그게 그의 장점이죠. 라디아타를 잘 보호해 줄 겁니다.”

요 며칠 라비린과 카프러스 사이의 불편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오드리로서는 황당할 정도로 후한 평가였다. 아예 없는 사람처럼 무시할 땐 언제고 여동생과 결혼시켜도 좋을 법한 사람이라며 금칠이란 말인가.

“벨키스 경의 지난 태도를 생각할 때 정말 믿어지지 않는 평가로군요. 내 판단은 라디아타의 말을 들어본 뒤로 미루도록 하겠어요.”

“원하는 대로 하시길. 그래도 이왕 올라온 길인데 하늘과 바다를 좀 더 즐기다 가시죠. 구름 한 점 없이 좋은 날씨인데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쉽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오드리를 더 붙들어놓으려는 라비린의 노력이 아주 가상했다. 어제도 그제도 구름 한 점 없이 좋은 날씨였고 아마 내일도 모레도 날씨가 좋을 텐데 날씨를 운운하는 게 말이다.

오드리는 저 멀리 언덕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간 라디아타와 카프러스가 자그마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서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까지 알아보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귀족영애와 기사 사이에 분위기가 나쁠 이유도 없는데 이상하게 신경 쓰이네. 아, 정말이지, 이상한 말을 들어서 그래.’

근거도 뭣도 없는 말, 그냥 흘려버리면 되는데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건 대상이 라디아타이기 때문이었다. 이젠 자매처럼 느껴지는 이디케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사귄 마음이 통하는 친구라서.

문득 궁금해졌다. 라디아타는 힘든 시기에 곁에 없던 라비린을 두고 화분만도 못한 오라비라며 입을 삐죽대는데, 정작 라비린은 마치 라디아타를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라디아타가 자신이 정략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역사에 남을 바람둥이가 될 거란 말만 해도 그렇다. 오드리도 동의하는 바이긴 해도 그 말을 라비린이 했다는 게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벨키스 경은 라디아타의 곁에 없었던 시간이 무려 육 년이나 되는데 어떻게 라디아타의 성격을 확신하시나요?”

“그야 어머니께서 라디아타를 옆구리에 끼고 가르치며 키우셨으니까 알지요. 우리 삼남매 중에서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게 바로 라디아타인데요.”

오드리는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라디아타는 남매 중에서 어머니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게 자신이라고 말했었으니까.

그러나 라비린이 보기에 라디아타는 그가 어린 시절에 기억하고 있던 어머니와 성격이 아주 똑같았다. 브란젤의 사교계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마모되기 전, 젊은 날의 로샨이 딱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불같은 사랑을 꿈꾸는 낭만적인 일면마저 고스란히 빼닮아 걱정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는데, 딸은 어머니를 닮는 건가…….’

라비린은 자신을 앞에 두고도 영 딴 생각에 빠진 오드리를 흘끗 바라보았다. 사실 신기할 정도로 어머니를 닮은 건 라디아타만이 아니라 오드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에 몇 번 본 게 전부인 밀리나가 그녀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겹쳐질 때가 있었다.

“레이디 헨젤께서도 헨젤 부인을 많이 닮지 않으셨습니까? 솔직히 하도 예전 일이라 그분의 얼굴이 완전히 기억나는 건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닮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피부색 때문만은 아닌 거 같은데……. 분위기가 똑같은가?”

라비린의 말이 오드리를 상념에서 건져 올렸다. 난데없이 어머니 얘기가 나온 탓에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제 어머니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가끔 타우레드의 정원에서 몇몇 분들과 티타임을 가지곤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머니께서 개인적으로 초대하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스치듯 뵈었는데도 기억에 남았죠. 체구가 작은 편이었는데도 인상이 굉장히 강렬하셨거든요.”

오드리는 재빨리 기억을 뒤졌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 남은 밀리나는 파리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조금 밝아진 얼굴로 정원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가. 제대로 단장을 하고 외출을 하거나 손님을 초대하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었다.

하긴 밀리나가 세상을 떠난 게 오드리가 아홉 살 때였다. 가끔 있었다던 특별한 하루를 기억하지 못한대도 이상할 건 없는데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헨젤가의 저택에 남아있는 밀리나의 흔적이라곤 달랑 초상화 한 장이 전부인데 엉뚱한 곳에서 말이 나오다니 말이다.

“막 사교계에 나갈 무렵에 뵙고 조언을 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열넷에 만났었다는 건데……. 자그마치 십 년 전이잖아요? 얼마나 인상이 강렬하셨기에 십 년 전에 만난 분을 기억해요?”

“타우레드의 장남에게 검은 이제 한물갔으니 기사될 생각일랑은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비마법에 투자하라고 하셨거든요.”

라비린은 다시 그때를 떠올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검을 잘 다뤄 산트렘의 공주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었던 로샨이 옆에 있는데도 밀리나의 입담은 거침이 없었다.

기사가 전쟁의 주역으로서 존경받을 날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엉뚱한 곳에 젊은 시절을 낭비하지 말라니, 지금 생각하면 미래를 꿰뚫어본 혜안인데 그때는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오드리는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았다. 라비린의 말이 헛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밀리나는 정말 비마법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오드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비마법에 대한 교육을 시켰다. 오드리가 워커를 잡아챈 안목을 대체 어떻게 길렀겠는가.

“어머니께서 벨키스 경을 꽤 좋게 보셨던 모양이에요. 타우레드의 장자에게 할 법한 평범한 말을 해줄 수도 있으셨을 텐데 그러지 않으셨던 걸 보니.”

“그보다는 제 어머니와의 친분이 있어 솔직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 조언을 감사히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끝내 기사 작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질 못해서 비마법 쪽 공부를 시작하는 게 좀 늦었죠. 그때 비마법 공부를 시작해서 투자 감각을 익혔으면 워커 크라티우스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

“워커 크라티우스라면, 로렐라이의 마법사를 말하는 건가요?”

“예. 그의 비마법 비행도구 연구 제안서를 팽개친 게 바로 저거든요. 그 일로 아버지에게 평생 먹을 욕을 한꺼번에 다 먹었습니다.”

워커가 사방팔방에 넣은 제안서에 긍정적인 반응을 돌려준 사람은 오드리와 클로드뿐이었다. 만약 라비린이 그를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워커는 타우레드의 마법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뒤늦게 워커의 뒤를 쫓아 만탈락까지 내려온 클로드의 행적을 생각하면 매우 가능성 높은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벨키스 경께 감사 인사를 해야겠네요. 워커가 없는 로렐라이는 상상할 수가 없으니까요. 제 재산의 절반은 벨키스 경께서 만들어주셨군요.”

“절반만 입니까? 조금 더 써주셨으면 좋겠는데.”

“마음 같아서는 절반 이하라고 하고 싶은데, 인심 써서 절반이에요.”

“우와……. 야박하시군요. 사실은 제가 로렐라이에서 일한 적도 있는데, 그걸 감안하면 조금 더 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비린은 오드리가 깜짝 놀라 눈을 키우는 걸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가 로렐라이에서 메이즈로 일한 시간이 자그마치 사 년이었다. 로렐라이는 그에게도 중요했다. 클로드는 메이즈의 정체를 밝히지 않길 바라겠지만, 그런 바람 따위 알 바 아니었다.

“무려 대리인으로 일했었는데요.”

“……대리인이요?”

“예. 화상 자국을 꾸며 얼굴을 가리고, 한쪽 다리를 저는 척 연기하며 다녔죠. 머리색은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바꾸고, 라비린이 아니라 메이즈라는 이름을 썼지요. 그만두기 전까지 나름대로 신임 받는 대리인이었습니다. 사 년이나 일했죠.”

오드리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는 척하며 표정을 가렸다. 메이즈는 로렐라이가 시작될 무렵부터 일했던 대리인이었다. 사고를 당해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게 싹싹하고 재주도 많은 사람으로, 여기저기에서 추천을 많이 받아 고용했었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메이즈는 로렐라이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만탈락에 정착한 사람이었지만 그 기간이 기껏해야 이 년 정도니까……. 이런, 시기가 아주 딱 맞아 떨어지네. 하긴 요즘 세상에 검술수련여행이라니 우스운 얘기긴 했어.’

라비린이 아무것도 모르고 메이즈가 되어 로렐라이에서 일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렴, 무려 타우레드의 장남이 아닌가. 클로드와 모든 정보를 공유하진 않았어도 최소한의 귀띔 정도는 받았을 터였다.

‘그 사자인지 능구렁이인지 모를 사람이 로렐라이에 그만한 투자를 하면서 제 사람을 심은 거야 이상한 일이 아니긴 한데, 그게 장남이었다는 건 좀 놀랍네. 무려 대리인에 구멍이 났었다는 것도 기막히고. 잘 걸러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어.’

어쨌거나 라비린이 네 정체를 알고 있다 선전을 한 것도 아닌데 제 입으로 비밀을 밝힐 이유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오드리는 딱 적당한 정도의 놀람을 얼굴에 드러냈다.

“대리인이라……. 네, 그 정도였으면 절반 해드려야겠네요. 그런데 정말 놀라워요. 검술수련여행을 떠나신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상단의 대리인을 하셨다니요.”

“에이, 요즘 세상에 검술수련여행이 다 뭡니까. 당연히 핑계죠. 워커 크라티우스를 놓친 저에게 화가 나신 아버지께서 네놈이 무슨 멍청한 짓을 했는지 옆에서 지켜보라며 절 만탈락에 보내셨던 겁니다.”

“단순히 그런 이유라고만 생각하기엔 너무 과한 분장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렇다 하시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그나저나 사 년이면 로렐라이의 시작부터 함께한 거나 다름없으신데, 단주를 만나보신 적도 있으시겠네요?”

“로렐라이의 단주가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는 거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몇 번 시도했었는데 다 실패했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좀 지나서는 그런 여유를 부릴 틈도 없이 바빠지기도 했고 말이죠.”

서로 속내를 빤히 알면서 겉핥기만 하는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메이즈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사실을 밝힌 라비린이 로렐라이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대답을 피하니, 오드리는 슬슬 짜증이 났다.

‘이따위로 굴 거면 메이즈 얘기는 대체 왜 꺼낸 거람.’

오드리가 차마 입 밖으로 불만을 꺼내진 못하고 툴툴대고만 있는데, 라비린이 또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보는 사람마저 함께 웃게 만드는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모르는 새 잔뜩 경직돼 있던 오드리의 어깨에서도 저절로 힘이 빠졌다.

“경께서 무려 로렐라이의 대리인으로 일했으니 타우레드 후작께도 몹시 이득이 되었겠어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갑자기 집에서 쫓겨나 다른 사람인 척 변장까지 하고 지내게 됐는데 뭐가 좋아서 착한 아들 노릇을 합니까? 호된 맛 좀 보라고 일부러 엉뚱한 정보를 흘린 일도 있었는데 그런 건 기가 막히게 잘 걸러내시더군요. 속이려고 노력한 보람도 없게시리. 쯧.”

활짝 웃으면서 하는 말의 내용이 이 따위니, 라비린이 메이즈로 지내면서 클로드에게 어떻게 굴었는지 알 만했다. 아무래도 클로드는 장남을 로렐라이에 넣어두고도 제대로 된 정보를 받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메이즈와 타우레드 간에 연결이 있긴 했어도 그게 그렇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는 뜻인가? 하긴 초기의 로렐라이는 타우레드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그쪽으론 정보가 좀 샜어도 문제될 게 없긴 한데…….’

오드리의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지는 가운데 라비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시작한 만탈락 생활이었지만, 제게는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시작은 억지였어도 나중엔 진심이 되어서 일했죠. 로렐라이가 커지는 건 제게도 충분히 보람찬 일이었습니다. 뭐, 제게 기대한 만큼 정보를 받지 못한 아버지야 불만이 하늘을 찌르셨지만 말이죠.”

오드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거나 말거나 라비린은 진심이었다. 비마법에 대해 공부하면서도 편견을 다 벗지 못했던 그에게 로렐라이의 상품들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왜 밀리나가 비마법에 투자하라고 조언했는지 완벽하게 이해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만탈락을 운영하는 레이디 헨젤에게도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확신이 있다 한들, 로렐라이를 그렇게까지 지원하는 건 굉장한 모험이었을 텐데 놀라웠죠.”

오드리는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했다. 라비린은 그녀가 로렐라이의 주인이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오드리는 눈이 밝고 대담한 만탈락의 운영자였다.

“레이디 헨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 뵐 수 있어 몹시 기쁩니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으셨죠? 이제까지 말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 텐데요.”

“제가 메이즈로 지냈던 걸 밝히길 원하지 않는 분이 계셔서 말이죠. 타인이 있는 자리에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타우레드 후작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그 이유에 대해서는 레이디 헨젤께서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양녀로 삼고 싶을 정도라며 후원자를 자처해 놓고 쥐새끼를 보냈다곤 밝히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요. 비록 그 쥐가 쥐 노릇은커녕 다른 쥐를 쫓는 고양이 노릇을 했더라도 말이죠.”

라비린은 오드리의 표정이 변하는 걸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얇게 씌워져 있던 귀족영애다운 얌전함과 고상함이 씻은 듯 자취를 감추고 대신 베일 듯한 서늘함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야 말하기 편해졌네요. 그럼 이제 후작님의 의사에 반해서 내게 사실을 밝힌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세요.”

“로렐라이는 제게도 중요하니까요.”

오드리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말에 타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멱살이라도 잡았을 기세였다. 라비린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의 진폭을 퍽 즐겁게 감상했다. 곱게 치장한 미소도 싫진 않았지만, 역시 꾸밈을 벗어던진 얼굴 쪽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메이즈로 지낸 사 년의 시간이 진심이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스물 초반의 모든 열정을 다해서 일했고 그만큼 로렐라이를 사랑했습니다. 저는 로렐라이가 무너지지 않길 바랍니다.”

“뭔가 알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타우레드의 후계자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레이디 헨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기 쉬운 위치에 있죠.”

“예를 들면?”

“사하스바티의 거취라든가, 국왕전하의 의중이라든가. 거기에 조금 더 보태서 타우레드 후작이 취할 향후 태도까지도.”

거센 바닷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휩쓸었다. 드넓은 대양을 건너 절벽을 기어오른 바람이 내뱉는 숨소리가 침묵에 무게를 더했다. 차려입은 옷자락 구석구석 스며든 햇살이 차가운 침묵에 얼어붙어 버석거렸다.

그러는 동안 오드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뚜렷하게 드러나던 감정도 점차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말 한 마디 없이 분위기만으로 추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라비린은 그 요구에 따를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지금 제가 구구절절 아무리 말을 늘어놓아도 그것만으론 레이디 헨젤의 믿음을 살 수 없을 걸 압니다.”

말보단 글, 공허한 약속보다는 명확한 계약서. 오드리의 취향은 명확했고 라비린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납득하실 만한 자료와 함께 따로 만남을 청하겠습니다. 그때는 부디 사양치 마시고 제 손을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씀에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제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라비린이 시원하게 웃었다. 이제껏, 이라는 단어에 메이즈로 보냈던 시간들을 묻어버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오드리는 메이즈가 놓아주기 아쉬울 정도로 좋은 대리인이었다는 걸 새삼 떠올렸다.

‘메이즈로 일했던 시간을 생각해서 조금만 참아볼까…….’

오드리가 누그러지는 기색을 귀신같이 알아챈 라비린이 언덕 아래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새 해가 높아지면서 카프러스가 그늘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만 내려가죠.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두 사람이 뙤약볕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라디아타에게 주근깨 생기면 안 되는데.”

나무 한 그루 없는 언덕 정상의 바위에서 햇살을 뒤집어 쓴 채 나누기엔 이상한 대화였다. 제 살갗 타는 건 생각도 않고 다른 사람 주근깨 걱정이나 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오드리와 라비린은 올라갈 때보다는 천천히, 그렇지만 충분히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왔다.

모자는 대충 구겨 주머니에 찔러 넣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내려온 오드리를 본 라디아타와 카프러스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카프러스는 할 말이 많지만 참는다는 뜻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라디아타는 구겨진 모자를 향해 거침없이 손가락질을 했다.

“오드리, 머리카락을 올리라고까지는 안 할 테니까 제발 모자만이라도 써주겠어요?”

“리가 항구에선 웬만한 일탈은 다 허용된다면서요? 더운데 모자까지 쓰면 더 더워요.”

“아무리 리가 항구라도 덥다고 알몸으로 다니지는 않아요. 어떻게 숙녀가 모자도 없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말로는 안 되겠다, 이리 와봐요.”

끝내 견디지 못한 라디아타가 제 모자에 달려 있던 리본을 풀어 오드리의 머리카락을 묶었다. 어설픈 솜씨로 목 부근에서 질끈 동여맨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라디아타의 안색이 환히 밝아졌다.

“이렇게만 해도 깔끔하고 좋네요. 자, 여기 모자.”

“더운데…….”

“더우니까 모자 안 쓰겠다는 투정은 어린애도 안 부려요. 그리고 해가 눈부셔서 눈을 그렇게 찡그리고 있을 거면 아무리 더워도 써야죠.”

차림새를 가지고 나무라는 말을 듣는 건 오드리가 제일 싫어하는 일일 텐데, 어째 라디아타가 뭐라 하는 건 그리 싫게 느껴지지가 않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피부색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으면 그땐 어떨지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은 그랬다. 오드리는 입을 삐죽대면서도 라디아타가 시키는 대로 구깃구깃한 모자를 얌전히 머리에 올렸다.

오드리와 일행은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해안가 구경으로 시간을 잡아먹은 탓이었다. 그 와중에 카프러스와 라비린은 식사도 거르고 검을 맞대보겠다며 휑하니 사라졌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이었다.

오드리와 함께하겠다고 무리해서 일찍 일어나 승마까지 다녀온 라디아타는 피곤에 절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식당에 가자며 옷까지 갈아입었으면서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내버려 뒀다간 그대로 침대로 기어들어갈 태세였다.

“라디아타, 식사해야죠.”

“난 지금 식사보다 잠이 더 급해요…….”

“몸도 약하면서 이렇게 대충 지내다간 휴가 동안에 병을 얻어가겠어요. 방으로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나랑 같이 먹어요.”

“역시 그때 쓰러지지 말았어야 했어요. 모처럼 놀러왔는데 몸 생각 하느라 싫은 걸 해야 하다니!”

“세상에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데 싫다 소리가 나오다니 놀랍네요.”

오드리는 코르셋을 차고 자라지 않았다. 새 모이만큼 먹고도 코르셋이 위장을 압박하는 바람에 음식물이 역류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허리 문제로 리가 항구에서조차 코르셋을 벗을 수 없는 라디아타의 눈에 억울함이 차올랐다.

“오드리도 코르셋 차고 살아봐요, 먹는 게 즐겁나.”

“벗을 수 없으면 사이즈라도 좀 늘려요. 꼭 그렇게 가느다란 허리를 유지할 필요는 없잖아요.”

“재미없는 농담 잘 들었어요.”

라디아타에겐 귀 기울일 가치도 없는 조언이었다. 아픈 로샨 대신 사교계에서 타우레드 후작부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그녀에게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드높은 자리에 있던 자가 파멸하는 이야기만큼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재가 얼마나 될까. 라디아타는 물어뜯길 요소를 잔뜩 가진 사교계의 보석이었고, 반짝거리는 황금장미를 꺾고 싶어 몸이 달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코르셋을 채운 어머니가 미울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이해해요. 아름다움은 때때로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는 걸로 모자라 입까지 틀어막는 힘을 발휘하니까요.”

“으음…….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만탈락 주민들의 마음을 사겠다고 피부를 가무잡잡하게 만든 사람이 말하기엔 좀 양심 없는 대사였다. 라디아타가 오드리의 피부색이 타고난 게 아니라는 걸 몰라서 망정이지, 알았다면 퍽 배신감을 느꼈을 터다.

오드리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돌렸다. 가느다란 허리에 의지해야 하는 라디아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계속 그 주제로 말을 나눴다간 그녀의 억지에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저번에 사다 준 파이는 잘 먹었잖아요.”

“그건 간식이고 이건 식사잖아요. 둘은 엄연히 다르다고요.”

“말이나 못하면……. 이럴 거면 의학서는 뭐 하러 읽어요? 내과, 외과, 분야 안 가리고 고루고루 읽잖아요. 읽기만 하고 실천도 안 할 거면 내가 선물한 의학서 도로 내놔요.”

유치찬란한 협박이었지만, 움직이기 싫어 끙끙대던 라디아타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없는 식욕에 억지로 입에 수프를 떠 넣으며 불평했다.

“책으로 협박하다니 치사해요.”

“난 이보다 더 치사해질 수도 있으니까 알아서 건강 챙겨요.”

“뭐야, 그게. 그럼 나도 치사해질래요. 오드리, 아까 오라버니와 무슨 얘길 한 거예요? 정상에 한참이나 있었잖아요.”

“흐응……. 듣고 싶어요? 정말? 말해줄까요?”

느긋하게 빵을 찢던 오드리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라디아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라디아타는 뜻밖의 적극적인 태도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의심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내 흉 봤죠?”

“에이, 설마요. 라디아타는 그놈의 코르셋만 아니면 흉 볼 곳도 없는데요.”

“아니야. 코르셋 가지고 흉 본 게 틀림없어. 오라버니도 오드리도 내 코르셋을 엄청 싫어하잖아요. 내 말 맞죠?”

“안타깝게도 틀렸어요. 라디아타가 타우레드 후작부인을 얼마나 닮았는가를 이야기했죠. 벨키스 경께서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건 라디아타라고 단언하더라고요.”

라디아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얘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어느 정도 자라 주변을 기억할 나이가 되었을 때의 로샨은 이미 지금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산트렘의 공주라는 옛 별명이 이해가지 않을 만큼 연약한 몸과 마음을 가진, 금간 유리인형 같은 사람 말이다.

“라디아타는 남매 중에서 어머니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건 자신이라고 했는데 말이에요. 덕분에 좀 혼란스러웠지 뭐예요.”

“오라버니의 기억이 많이 왜곡되어 있는 모양이네요. 브란젤에 돌아가면 오드리에게도 어머니를 소개해 드릴게요. 한번 만나보면 그런 혼란 따위 깨끗하게 가실 거예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오라버니가 또 뭐 다른 쓸데없는 이야기 한 거 없죠?”

흘리듯 툭 던진 말에 미약한 불안이 묻어 있었다. 안개에 묻혀 가라앉은 꽃향기 같은 불안이었다. 오드리는 무심하게 안개를 휘젓고 잠겨 있던 불안을 끄집어냈다.

“라디아타가 베텔 경에게 관심이 있더라는 얘길 했죠. 언덕에 좀 오래 있어야 라디아타가 좋아할 거라면서요.”

“어…….”

“어차피 벨키스 경의 농담이겠지만……. 어머, 이런 맙소사.”

오드리는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라디아타의 뺨에 너무나 선명한 홍조가 떠오른 탓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드리더러 카프러스와 어떤 관계냐며 연애를 하고 싶으면 도와주겠다던 사람이 얼굴을 붉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그러나 라디아타 역시 오드리 못지않게 놀란 상태였다. 어떻게 표정관리를 시도할 틈도 없이 얼굴에 열이 확 몰리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얼른 사교용 가면이라도 뒤집어쓰려고 했지만, 어째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오라버니는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입술만 우물거리던 라디아타는 결국 사교계의 보석이라는 별명이 놀라울 정도로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곧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들어 버렸지만 말이다.

“오라버니가 엉뚱한 소리를 다 했네요. 어유, 부끄러워라.”

“라디아타, 굉장히 어색해요. 연극 관람도 그림만큼이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좋아한다고 다 잘할 수 있었다면 타우레드 저택의 홀에 라디아타의 그림이 걸렸을 테다. 오드리라고 그를 모를 리 없으니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었지만, 라디아타는 재치 있는 대꾸는커녕 뺨을 달군 열조차 식히지 못했다. 손부채질을 하면 할수록 점점 얼굴이 뜨거워지니 거 참 곤란한 노릇이었다.

“……표정 감추는 재주라면 나름 괜찮다고 자부해 왔는데…….”

“그, 음……. 괜한 얘기를 했어요. 미안해요.”

이쯤 되니 오드리의 낯도 덩달아 붉어지고 말았다. 친구가 감추고 싶었을 은밀한 속마음을 백주대낮에 까발린 꼴이니 어떻게 민망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타는 목을 달래려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그다지 소용이 있진 않았다. 안 그래도 작은 빵을 잘게 조각내며 이럴 때 ‘친구’가 할 만한 대화 주제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라디아타, 그 답 없이 고지식한 기사의 어디가 마음에 든 거예요?”

“음……. 그 고지식한 면이요.”

고지식한 게 좋다니, 오드리는 도저히 이해 못할 취향이었다. 어쨌거나 베텔 경에 대해 대놓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된 것만으로도 라디아타의 눈동자가 별을 품고 빛나기 시작했다.

“오드리도 알다시피 타우레드는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가문이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이야기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사는 처음 봤어요. 어떻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어요? 베텔 경에게 나는 모시는 아가씨의 친구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걸요.”

“베텔 경이 정말 기사다운 분이긴 한데…….”

오드리는 차마 라디아타 앞에서 카프러스가 잔소리 많은 남자라는 소리는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하긴 그런 말을 해봐야 카프러스처럼 곧은 기사가 잔소리를 잔뜩 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행동거지를 고백하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분이기에 베텔 경에게 라디아타의 관심은 몹시 부담스럽게 느껴질 텐데요.”

“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답니다. 내가 아무리 좋다고 들떠봐야 베텔 경께서 싫다 하시면 그만이라는걸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발그레하게 달뜬 뺨, 분홍빛으로 물든 귀……. 라디아타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표정을 짓고 달콤한 꿈을 말로 빚어냈다.

“하지만 여긴 리가 항구잖아요. 잠깐의 일탈 정도는 충분히 통용되는 곳이죠. 그리고 일탈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이고요. 브란젤로 돌아가면 모조리 사라져 버릴 환상이더라도, 여기서는 현실로 즐길 수 있잖아요?”

“라디아타……. 베텔 경은 내 에스코트 기사예요. 라디아타가 낭만적인 사랑을 원하는 건 알겠는데, 왜 하필 대상이 내 기사인 거죠? 끝이 뻔한 사랑으로 내 기사를 흔드는 건 환영할 수가 없는데요. 알잖아요, 후작영애와 기사라니 말도 안 된다는 거요.”

오드리는 낭만주의자가 아니었다. 사랑과 현실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언제든 현실을 고를 사람이었다. 그녀는 서슴지 않고 라디아타의 꿈을 조각냈다.

“두 사람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잖아요. 둘 다 상처만 입을 거예요.”

매정한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라디아타를 찔렀다. 조금 전까지 잔뜩 들떠서 붉게 물들었던 뺨이 창백해졌다. 그 차이가 어찌나 큰지, 오드리는 순간 숨을 삼켰다.

“네……. 맞아요. 정말로 그렇죠. 말도 안 되죠. 로맨스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죠…….”

말끝을 흐리던 라디아타는 당황해서 헛손질을 하는 오드리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무심히 말을 던져 놓고 상처 입었을까 눈치를 살피는 게 귀여웠다. 나쁜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밉지도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귀족영애가 이렇게 대놓고 무안을 주었다면 잘 기억해 뒀다가 분명히 보복했을 텐데, 상대가 오드리가 되니 자신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좀 모자란 마음이었어요. 끝이 뻔한 관계는…… 아직 호감일 때 접는 게 낫겠죠. 금방 떨쳐 낼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재가 되어도 좋으니 불같은 사랑을 원한다던 라디아타였는데, 괜찮다 웃는 얼굴에선 어딘지 처연함마저 느껴졌다. 오드리는 무심결에 제 목에 걸린 목걸이의 펜던트에 손을 가져다댔다. 셰비언이 준 용의 비늘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펜던트는 차가웠다. 만지작댈수록 자꾸만 차가워지는 통에 무서워서 손을 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라디아타의 그늘진 얼굴을 보자 저절로 손이 갔다.

‘셰비언을 거절하던 내 표정이 딱 저랬으려나……?’

아주 의연하고 태연하게,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를 거절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라디아타의 웃는 얼굴 너머에서 그늘이 느껴지듯이 자신도 그랬을지 어떻게 아는가. 혹시 셰비언이 그 그늘을 알아보고 포기하지 않겠노라 했던 거 아닐까, 생각하자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하게 식었다.

모르는 새 겉으로 드러난 복잡한 심사를 알아본 라디아타가 식탁을 두드리며 오드리의 주의를 끌었다.

“오드리, 무슨 생각을 하느라 표정이 그래요? 내 말이 별로 안 믿겨서 그래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어, 설마 오드리도 베텔 경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드리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라디아타가 까르르 웃으며 조금 남은 수프를 밀어버리고 아예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오드리는 라디아타와 함께 있을 때면 몸에 완전히 배어 있을 터인 예의를 죄다 벗어버리기라도 한 듯 편하게 굴곤 했는데, 라디아타 역시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하여간 생긴 건 달라도 속은 꼭 닮은 친구지간이었다.

“농담이에요. 조금 전의 오드리는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혹시 브란젤에 나 모르는 애인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농담은 한 번만 해요…….”

“이번 건 농담 아닌데. 오드리,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나한테 얘기해야 해요. 우린 친구잖아요. 나중에 알게 되면 굉장히 충격 받을 거예요.”

“우와, 본인은 말 안 하다가 들키니까 얘기해 놓고 그러면 안 되죠. 그것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재만 남을 때까지 타들어가도 좋으니 열정적인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해놓고, 뭐? 끝이 뻔한 사랑이니 아직 호감일 때 접겠다고요? 라디아타, 지금 그 말이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얼굴인 건 알고 있어요?”

“내, 내 얼굴이 뭐 어때서요!”

겨우 홍조가 가라앉았던 라디아타의 뺨에 도로 붉은 꽃이 피었다. 언제나 한 송이 장미꽃처럼 화려하고 우아하던 라디아타였지만, 부끄러워하며 뺨을 감싸는 그녀는 장미보다는 활짝 핀 프리지아가 더 어울렸다. 막 피어나는 봄이 그대로 담긴 듯 싱싱하고 화사했다.

‘계속 저렇게 웃었으면 좋겠다.’

사랑이 라디아타를 행복하게 하는데 남성편력이 좀 생기면 어떻고 연애사가 화려해지면 어떤가. 아무래도 신분차가 있으니 사교계에서 조금 힘들어지기야 하겠다마는 그때는 딸을 아끼는 타우레드 후작이 직접 나서주겠지.

오드리는 라비린의 당부를 기꺼이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끝이 뻔하지 않다면 어떻게 할래요?”

“……오라버니가 무슨 얘기를 했군요. 얘기해 줘요.”

“확실한 건 벨키스 경에게 더 따져 물어야겠지만……. 아마도 라디아타는 결혼상대를 스스로 고를 수 있다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오드리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라디아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라비린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리가 항구라고 평소보다 약간 여유가 있는 코르셋을 차고 있어서 망정이지, 브란젤과 같았다면 또 쓰러졌겠구나 싶을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계속 라디아타 타우레드로 있을 수 있다고……?’

존재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선택지가 사실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것이었다니. 아등바등 일하면서도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서러워지곤 하던 밤들이 눈앞을 스쳤다. 이런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그 시간들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충격이 지나가고 나자 마음이 솜사탕처럼 부풀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평소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뭐든 다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의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내 눈도 그렇게 바닥은 아니니까 문제없어요. 베텔 경이라면 충분하죠.”

“라디아타, 굉장히 즐거워 보여요.”

“그럼요.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오드리, 들어봐요. 내가 언제부터 베텔 경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냐면요…….”

아무리 친구라지만 다른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그것도 짝사랑을 하며 앓는 얘기를 계속 듣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이 못됐다. 하지만 그런 걸 열심히 들어주는 것도 친구의 미덕일 터다. 오드리는 제 지루함이 라디아타에게 전해지지 않길 바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약간 이른 점심을 먹으며 시작된 수다는 기어이 정오를 넘겼다. 기껏 먹은 음식이 죄다 소화될 기세로 떠들던 라디아타는 해가 머리꼭대기를 지날 무렵이 되자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졸려……. 역시 낮잠을 자야겠죠?”

“한숨 자고 나서 마저 놀아요. 그동안 나도 쉬고 있을 테니까. 역시 어제 너무 늦게 잤나 봐요. 나도 몸이 무겁네요.”

“그럼 이따 만나요.”

아무리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됐다고 해도, 오드리 역시 전날 당구를 즐기느라 새벽에 잠든 터였다.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라디아타처럼 본격적으로 잠자리에 들진 않을지라도, 한 시간 정도는 자두는 게 좋을 성싶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간 오드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안락한 침대가 아니라 두툼한 편지 봉투를 쥔 다이앤이었다. 그동안 뙤약볕 아래를 얼마나 쏘다녔는지 얼굴이 가무잡잡하다 못해 시커멨다. 얼굴을 보니 반갑기는 하지만, 오드리가 다이앤에게 준 휴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네게 준 휴가가 너무 길었니?”

“우편국에 잠시 들렀다가 빨리 전해드려야겠다 싶은 게 있어서 챙겨왔어요. 릴리도 아니고 이디케가 아가씨께 편지를 쓰다니 이상하잖아요.”

아직 열흘은 족히 남은 휴가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다이앤의 대응은 재빨랐다. 휴가 중에도 일을 까먹지 않았다는 걸 은근히 과시하며 편지칼을 챙겨 내미니, 오드리는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편지를 열었다.

“그래, 이디케가 대체 무슨 일로 편지를 다 보냈을까…….”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편지 쓰는 일이 없는 이디케였다. 난데없이 셰비언을 조심하라는 엉뚱한 편지를 보낸 전력이 있긴 해도 평소 하던 행동이라는 게 있잖은가. 성격만큼 깔끔한 글씨체를 읽어 내리는 동안 오드리의 낯이 점점 딱딱해졌다.

<……이후 두 사람이 마력구슬을 다시 배치했음에도 효과를 보지 못함. 오히려 퇴보했나 싶을 정도. 일부 구역은 마력구슬의 효과를 전혀 보지 못하는 듯한 현상마저 발생했고…….>

이디케가 전한 소식은 암울했다. 워커와 셰비언은 메시지 장치의 전송 거리를 늘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전송 거리를 늘리기 위해 시도한 온갖 종류의 실험과 그에 따른 실패의 기록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실패, 실패, 실패.

오류, 오류, 오류.

성공의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가운데 급격하게 줄어드는 잔고에 대한 경고.

당장 시장에 내놓을 수 있을 듯하던 메시지 장치는 돈 잡아먹는 귀신이 되어 오드리의 선택지를 줄여가고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감춰뒀던 계좌마저 연 결과물이 이런 거라면, 그녀의 대담한 투자는 처참한 끝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한동안 잊고 있던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굵은 바늘로 관자놀이를 푹푹 찌르는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잠은 한참 전에 달아났다. 입술을 꽉 깨문 채 종이를 넘겼다.

<……마법사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비마법 전문가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워커와 셰비언이 아무리 천재라도 그들의 영역이 아닌 일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 뒤엔 비마법 전문가와 함께 작업할 경우의 수에 대한 보고가 줄줄이 이어졌다. 조금 전과는 달리 상당히 긍정적인 전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오드리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실패와 경고로 두툼한 편지지를 몇 장이나 가득 채워놓고 마지막엔 희망을 얘기하다니. 이디케의 갈등이 손에 잡힐 듯했다.

‘이디케도 그 메시지 장치가 마음에 든 거야.’

이성적으로는 당장 메시지 장치에서 손을 떼고 그나마 남은 선택지를 잡자고 말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러지 못했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당장 자신부터가 남은 잔고를 헤아리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비마법 전문가. 비마법……. 그것도 사하스바티 수준의 비마법 전문가…….’

오드리는 사하스바티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는데, 이렇게 특출한 재능이 필요한 시점이 되자 그의 부재가 지나치게 뼈아팠다.

생각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라비린에게로 흘러갔다. 사하스바티의 거취를 알고 있다며, 오드리의 편이 되어주겠노라 말을 흘렸던 게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오드리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점점 깊어져 갔다.

다이앤은 슬금슬금 오드리의 눈치를 보았다. 이디케가 이렇게 멀리 떨어진 도시에 편지를 보냈을 정도면 분명 중요한 일일 테니 빨리 가져다줘야겠다는 마음에서 갖고 온 거였는데 오드리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으니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냥 뒀어도 우체부가 가져다줬을 걸, 나는 왜 나서가지고……. 어휴.’

별장에서 손님을 위해 내준 넓고 훌륭한 방의 공기가 무겁게 등을 짓누르는 듯했다. 맞잡은 손을 꼼지락대며 어떻게든 긴장을 떨쳐 보려 해도 쉽지가 않다. 누가 누른 것도 아닌데 머리가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다이앤.”

“네? 네!”

“혹시 내가 목표를 이루지 못해도……. 아니, 아니다, 괜한 말을 했어. 편지 가져다줘서 고맙다. 이제 가보렴. 남은 휴가를 즐겨야지. 돌아가면 엄청나게 바빠질 텐데.”

있는 대로 인상을 쓰던 조금 전과는 달리 예쁘게 웃는 얼굴이 다이앤의 속을 긁었다. 사교모임에라도 나간 듯 꾸민 미소가 자신을 향했다는 게 말이다. 대체 이디케가 무슨 말을 적어 보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자칫 그 미소마저 볼 수 없게 될까 싶은 두려움이 입을 틀어막았다.

결국 다이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오고 말았다. 편지를 안고 올 때는 한껏 들떠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동부식으로 시원스럽게 큰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마저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다 이디케 때문이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태어난 원망의 화살은 오드리가 아닌 이디케를 향해 날아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급한 거면 나한테도 상황 알려줄 수 있잖아. 내가 뭐 입 가볍게 놀린 전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 브란젤로 달려가 이디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데,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어 속만 부글부글 끓었다.

다이앤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리가 항구에서 가장 길고 두툼한 편지지를 사서 이디케에게 싫은 소리를 잔뜩 적어 보낼 작정이었다. 차마 닫았던 문을 다시 열고 들어가 ‘휴가 안 쓸 테니까 하려던 말씀, 마저 해주세요!’ 하고 외칠 용기는 없었으니까.

다이앤이 오드리의 속을 심란하게 하는 편지를 전하고 몇 시간 뒤, 라디아타는 아직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시각, 오드리는 라비린의 방문을 받았다.

이디케의 보고서를 읽은 이후 머리가 복잡해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던 오드리는 라비린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지난밤엔 당구를 즐기시고, 오늘 아침엔 승마를 하셨죠.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베텔 경과 검을 겨루셨고요. 피곤하지도 않으세요?”

“이 정도야 별거 아닙니다. 메이즈로 있을 때는 며칠씩 날밤을 새며 일할 때도 자주 있었는데요.”

“어머, 내가 그렇게 일을 많이 시켰던가요……?”

“일정이 급해지면 사정 안 봐주는 무자비한 고용주이셨죠.”

라비린의 어조에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오드리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면서도 딱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디케마저도 질색할 정도로 대량으로 올라오는 보고서들을 대체 누가 썼겠는가.

“새삼 일 많이 시켰다 원망하러 오신 건 아니실 테고,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이런. 바로 몇 시간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납득하실 만한 자료와 함께 만남을 청하겠다고 말이죠.”

“그게 당장 오늘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당황스럽네요.”

“우편물을 받은 게 바로 오늘이거든요.”

라비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두툼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오드리는 홀린 듯 봉투를 받아 입구를 열었다. 사자와 수사슴, 백합으로 이루어진 왕실의 문장이 찍힌 편지봉투가 테이블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마치 가을비를 맞은 낙엽 같았다.

“잠시 실례하겠어요.”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가에 다가가 봉투에 햇빛을 비췄다. 그러자 종이에 금박으로 새겨져 있던 문장 가운데에서 백합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허공에 꽃을 피워냈다. 향기라도 뿜을 듯 생생한 모습이었지만 툭, 건드리자 금세 흩어지고 금박만 남았다. 왕실에서 쓰는 봉투가 확실했다.

오드리는 제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걸 알았다. 얄팍한 편지가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꿀꺽 침을 삼키는 것만으로는 진정이 안 돼서, 아예 라비린에게서 몸을 돌려 뒤돌아섰다.

“읽어도 되는 거죠?”

“당연하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비린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오드리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머리칼을 단정하게 땋아서 틀어 올린 덕분에 드러난 예쁜 목선과 동그마한 어깨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이렇게 보면 마냥 자그마한 사람인데…….’

뒷모습만으로는 가장 보드랍고 따뜻한 담요로 감싸서 어떤 것에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것처럼 연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초록색 눈동자가 쏘아 보내는 시선을 마주하면 작다는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긴장으로 뛰는 심장만 남아버리니.

‘메이즈 노릇을 너무 오래 했어.’

라비린이 내심 혀를 차거나 말거나, 오드리의 관심은 온통 편지를 읽는 일에 쏠려 있었다. 로렐라이 상단은 설립 초기부터 국왕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아왔지만, 직접적으로 연결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개적으로 나설 수 없는 오드리를 대신해 클로드가 로렐라이와 국왕 사이에서 가교 노릇을 해왔었다.

때문에 국왕이 로렐라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편지를 읽으니 클로드가 둘 사이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처음부터 약속을 제대로 지킬 생각이 없으셨군. 이만큼 온 것도 망할 후작 영감 덕인가……. 젠장.’

국왕에게 로렐라이는 과실수였다.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길 기다리며 거름과 물을 주어 기른 과실수. 작은 화분에 심어 기른 것치고는 놀랍게 잘 자라 눈길이 가는 존재였다.

슬슬 영글어가는 열매를 딸 시기를 재고 있던 국왕이 마음을 굳힌 결정적 계기는 바로 출입금지마법이었다. 로렐라이의 강점은 심미성에 있지 실용성에 있는 게 아니라던 인식을 바꾼 걸로 모자라 제작 파트 마법사들을 과로의 늪으로 몰아넣고 이디케를 행복하게 했던 그 마법.

셰비언이 만들어낸 출입금지마법을 보았을 때, 워커는 앞으로는 마법도구의 사용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질 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도구를 끄는 데에 무조건 마법사가 필요한 지금과는 달리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국왕이라고 그걸 모를까. 본인이 마법사는 아니어도 휘하에 둔 마법사가 몇 명인데. 그는 다른 상단들처럼 어떻게든 출입금지마법의 구조를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는 대신, 과실수의 화분갈이를 하는 쪽을 택했다.

오드리의 로렐라이가 아니라, 왕실의 로렐라이가 되도록.

안 그래도 얼굴을 감춘 왕족이 운영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듣던 로렐라이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국왕전하의 호출에 응할 수가 없어. 이거야 원, 얼굴을 드러낼 수 없다는 약점이 너무 커. 후작이 돌아서면 그날로 빼앗기겠는걸.’

예상했던 그대로의 일이었다. 다만 그 방식이 국왕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조야하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오드리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잘 읽었어요. 이제 이걸 내게 보여준 의도에 대해 설명을 들을 차례인 것 같네요. 타우레드 후작님과 벨키스 경은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드리는 창가에 기대어 선 채 편지를 정리해서 봉투에 넣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자꾸만 손이 미끄러지는 통에 봉투만 꾸깃꾸깃해졌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라비린이 대신 편지를 정리했다. 그리고 오드리를 부축하듯 어깨를 쥔 채로 시선을 맞췄다.

“아버지는 레이디가 국왕전하께 얌전히 로렐라이를 바치기를 바랍니다.”

“…….”

“대신 레이디가 작위를 받아 헨젤에서 독립하는 걸 보장하실 겁니다. 그게 아버지가 레이디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고 보상이죠. 지금 아버지는 오랜 숙원이 이뤄지기 직전이라 레이디를 도울 수가 없어요.”

“후작님의 오랜 숙원이라면……. 왕립 비마법 연구소?”

“그렇습니다. 도저히 국왕전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죠.”

“사하스바티를 왜 빼내갔나 했더니 쓸 데가 있었군요.”

오드리는 그제야 사하스바티의 갑작스런 퇴사를 이해했다. 왕립 비마법 연구소 설립 계획이라니, 클로드로서는 도저히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클로드는 예전부터 비마법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왔다. 비마법으로 작동하면서도 검보다 수월히 다를 수 있는 무기 개발에 유독 관심을 갖고 로렐라이 연구진을 독촉했다. 최근에는 자꾸 일정이 뒤로 밀린다고 볼멘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

“왕립 비마법 연구소가 설립되고 사하스바티가 요직에 앉고 나면 아버지가 로렐라이에 바랄 만한 건 거의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레이디가 국왕전하께 순종하기를 바라시죠.”

라비린의 어조가 차디찼다. 용케 빈정거림을 참고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알겠어요. 후작님의 의중은 그렇다 치고, 벨키스 경의 바람은 뭐죠?”

“별거 있겠습니까. 로렐라이가 로렐라이답기를 바라는 거죠.”

오드리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녀가 신경 써서 빼놓은 곱슬머리 몇 가닥이 그녀의 뺨을 건드렸다. 라비린은 무심결에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다 움찔 놀라 손을 거뒀다.

“……레이디가 없는 로렐라이에 워커가 계속 붙어 있을까요? 그 천재 마법사야말로 로렐라이를 지탱하는 기둥인데 말입니다.”

“비마법 비행도구 연구자금만 계속 대주면 붙어 있을지도 모르죠.”

“그 말씀을 워커가 들으면 서운해 죽으려고 하겠군요. 사하스바티가 제 아버지의 사람이듯, 워커는 레이디 헨젤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레이디 헨젤이 없는 로렐라이에 워커가 있을 리 없고, 워커가 없는 로렐라이는 지금과 같을 수 없습니다.”

과연 대리인으로 사 년을 일했던 사람답게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맞는 말이 오드리의 신경을 건드렸다. 묻어두었던 화가 들썩들썩하며 가슴을 데웠다.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예요? 국왕전하와 후작님이 작정하고 뺏겠다 하면 내주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가 있다고?”

“절 이용하시죠.”

라비린이 오드리의 손을 쥐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몹시 뜨겁게 느껴지는 입술이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이 그녀의 손등을 간질였다.

“기꺼이 방패가 되어드리겠습니다. 하티의 신전에 저와 함께 가주십시오.”

오드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하티의 신전에 함께 가자니, 마치 청혼이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라비린이 말을 잊은 채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오드리를 향해 씩 웃었다. 오늘 아침에 언덕에서 보았던 그대로,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맑은 미소였다.

“로렐라이의 주인이 국왕전하의 부름에 응하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지 않습니까. 제가 검술수련여행이랍시고 떠나 있던 시간 동안 만탈락의 운영자인 레이디의 협조를 얻어 로렐라이를 운영했다며 나서면 됩니다. 타우레드 후작도 그래서 로렐라이 일에 적극적이었던 거라고 해명하고요.”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 정말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티의 신전이 필요한 거죠. 뒤에 물러나 있었지만 사실은 내가 주인이었습니다, 따위의 말이 통하려면 혼인관계만큼 확실한 보장이 없으니까.”

창문을 넘어 들어온 햇살이 라비린의 머리에 사뿐히 올라앉았다. 옅은 갈색머리가 금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라디아타와 닮은 화려한 이목구비가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멋진 풍경을 자아냈다.

“벨키스 경…….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내가 벨키스 경의 뭘 믿고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죠? 결혼 뒤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레이디와 제 사이의 믿음의 문제라면 계약서를 쓰면 됩니다. 겉으로는 내가 로렐라이의 주인이라도, 실질적인 권한과 권리의 모든 건 레이디께 있다고요. 결혼계약서 형태로 써서 하티의 신전에 맡기면 아주 잘 지켜줄 겁니다.”

라비린이 아주 열심히 자신의 무해함을 주장하는 바람에 오드리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딱히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결혼 따위를 꿈꾼 적은 없지만, 이렇게까지 낭만 없는 청혼을 받을 줄은 몰랐다.

“……장남이 결혼까지 해가며 로렐라이를 지키려고 한다는 걸 후작님께서 아시면 기절하실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시고…….”

“레이디 헨젤, 제 아버지는 아주 예전부터 당신을 양녀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딸로 삼아서 타우레드의 성을 주나, 아들과 결혼시켜서 타우레드로 만드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제가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

“실제로 제게 레이디 헨젤을 잘 꼬셔보라며 야단을 하신 적도 있는데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로렐라이가 아니라 바로 레이디 헨젤이라면서 말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그에 동의하는 바이고요.”

“아들이 결혼의 탈을 쓴 바지사장을 자처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하신 말씀이셨겠죠.”

“언제나 품 안의 자식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화가 나도 차남에 이어 장남까지 집을 나가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실 테니 결국 편을 들어주실 겁니다. 그리고 일단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은 확실하게 지키는 게 타우레드의 가풍이죠.”

“벨키스 경…….”

대화가 이어지며 오드리는 서서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목에 건 펜던트를 움켜쥐고 용의 비늘이 뿜어내는 서늘한 한기를 만끽하고 나니 엉킨 실타래 같던 머릿속도 깨끗해졌다.

사랑 따위로 아무리 예쁘게 포장해 봤자 귀족의 결혼은 거래였다. 라비린은 포장에 공을 들이는 대신 내용물을 까놓고 보여주며 거래를 제안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드리는 그 거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공정한 거래를 강요할 때는 그렇게 재미있더니, 당해보니까 정말로 재미가 없었다.

“경께서 착각하고 계신 게 있어요.”

“음? 설마 사랑 없는 결혼은 안 된다, 뭐 그런 말씀을 하실 건 아니시죠? 귀족의 결혼이란 근본적으로 거래가 아닙니까. 이만하면 서로에게 괜찮은 거래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문제가 아니에요. 경께서는 지금 거래의 대상을 잘못 짚으셨어요.”

오드리는 그때까지도 라비린의 손에 잡혀 있던 오른손을 잡아 뺐다.

“저는 제 인생을 위해 로렐라이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로렐라이를 위해 내 인생의 가능성 중 하나를 접는다? 말도 안 되죠. 앞뒤가 바뀌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 전에 경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작위를 받아 헨젤에서 벗어나는 걸 타우레드 후작님께서 보장하실 거라고요. 그게 제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말인지, 경께서는 잘 모르실 거예요.”

라비린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애초 나기를 대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나, 자라기를 후계자로 자랐다. 성년이 되자마자 벨키스 남작 작위를 당연히 얻었던 그에게 작위에 연연하는 오드리의 간절함은 지나치게 낯선 무언가였다.

“로렐라이, 중요하죠. 엄청나게 중요하죠. 제 인생의 거의 전부를 쏟아부었는걸요. 하지만 로렐라이 자체가 제 인생이 될 수는 없어요.”

“……로렐라이는 레이디께서 구축한 성입니다. 아름다운 영지고 풍요로운 들판이죠. 잠시 머물렀던 저조차 로렐라이의 영속을 바라는데, 정작 주인인 레이디께서는 그 모든 게 무너지더라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선순위가 명확하다고 해주세요.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되죠. 로렐라이를 위해 나를 깎아내는 걸 감수하는 일을 반복하다간, 언젠가 그렇게 소중한 로렐라이가 미워질 날이 올 게 분명해요. 난 그게 더 슬프게 느껴져요.”

오드리의 태도는 단호했다. 라비린은 이대로는 오드리를 설득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마음먹고 어색한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오드리의 손을 쥐고 있었던 손바닥이 괜히 화끈거렸다.

“저 편지들을 내놓으라고, 레이디 헨젤은 사랑보다 거래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에도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

“휴가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동안 레이디의 우선순위를 충분히 고려한 제안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흠잡을 데 없이 인사하는 동작이 지극히 우아했다. 라비린은 청혼을 거절당하고도 웃는 낯으로 손님방을 나갔지만, 남은 오드리는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오드리는 라비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의자에 주저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랜만에 찾아온 두통은 끔찍한 통증을 동반했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난쟁이가 망치질을 하는 것 같았다.

‘아, 사하스바티에 대해서 물어볼 걸 그랬다……. 계속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러울지 고민했었는데 결국 잊어버렸네.’

국왕의 편지도 그렇고, 뜬금없는 청혼도 그렇고, 정신없이 휘둘리느라 물어봐야지 생각했던 건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문 밖으로 쫓아나가 사하스바티에 대해 묻기엔 너무 민망하지 않은가.

‘다음에 물어보자. 일단은 좀 자야겠어. 머리 아픈 것도 다 잠이 부족해서 그래.’

설마 잠이 부족한 게 진짜 원인이겠느냐마는, 오드리는 이번에야말로 모든 고민거리를 뒤로 미뤄 버리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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