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13. 마음의 저울
chapter 14. 로맨스의 계절
chapter 15. 밤에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chapter 16. 볼린의 밤
chapter 13. 마음의 저울
「“멜브란트 놈들에게 포도주 맛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었는데!” - 살론의 농담」
토미는 오랜만에 구두닦이 상자를 둘러맸다. 거의 보름 만의 일이었다. 집 안 구석에 틀어박혀 바깥에 내다팔 밀짚모자를 짜던 여동생이 웬일로 배웅을 하려는지 현관까지 쫓아 나왔다.
“오빠, 구두닦이 상자 메고 나가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 호구 용병님이 만탈락을 떠나시는 날이 오늘이었어?”
“에이미, 샤를레아님 덕분에 그동안 잘 지냈는데 말을 해도 꼭…….”
“아이고, 샤를레아님은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만탈락에 오자마자 오빠 같은 인간을 만나서 호구처럼 돈을 쭉쭉 빨리셨을까? 라고 할까? 나라면 진즉 엉덩이를 걷어찼을 텐데 샤를레아님은 참 착하시기도 하지.”
토미는 차마 대꾸를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도시 안내를 핑계로 샤를레아에게 뜯어낸 돈이 워낙 많긴 했다.
“뭘 그렇게 민망해해? 오빠가 그런 사람인 덕에 이만큼 먹고 사는 거 내가 모를까 봐 그래? 아무튼 잠깐만 기다려 봐.”
에이미가 부리나케 방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다 만든 밀짚모자를 꺼내왔다. 평소 만들던 밀짚모자보다 훨씬 화려하고 예쁜 자태의 모자였다. 길게 늘어진 포도주색 리본이 나비의 날개처럼 살랑거렸다.
“샤를레아님 드리려고 만든 거니까 어디다 팔아먹지 말고 꼭 갖다드려.”
“……이 리본 가격이…….”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갖다 드리라니까?”
에이미가 주먹을 치켜들고 눈을 부라렸다. 굳은살 박인 작은 주먹에 맞아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만, 토미는 과장되게 무서워하는 시늉을 하며 모자를 받아들었다. 한 철 쓰고 말 밀짚모자라고는 믿기지 않게 예뻤다. 샤를레아를 위해 만든 게 틀림없었다.
말로는 호구니 뭐니 하면서도 샤를레아를 굉장히 좋아하던 에이미이니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갔다. 직접 갖다 주고 싶을 테지만, 에이미는 햇볕을 오래 쬐면 피부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수포가 돋는 병을 앓고 있었다. 원인도 치료 방법도 모르는 병이었다.
“그나저나 이 리본은 내가 사다준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언제 나갔었어?”
“그저께 야시장에서 산 거니까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돼.”
“누가 야밤에 혼자 나다니래!”
“혼자 안 갔어! 내가 뭐 오빠 아니면 같이 다닐 사람도 없는 줄 알아?”
뾰로통하게 내민 입술은 귀엽지만, 말투는 하나도 안 귀엽다. 토미는 제 동생의 머리통을 마구 헤집으며 새둥지를 만들다가 옆구리를 얻어맞고서야 그만두었다.
“아, 알았어, 알았다니까! 네가 샤를레아님 드리려고 특별히 만든 거라고 꼭 얘기할게.”
그렇게 토미는 등에는 구두닦이 상자를 메고, 손에는 밀짚모자를 든 채 샤를레아의 배웅을 나갔다. 가는 시간을 굳이 알려줘 놓고도 샤를레아는 토미가 오거나 말거나 만탈락역의 벤치에 앉아 주변인들 구경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얄미워서, 토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모자를 내밀었다.
“샤를레아님, 이별 선물이에요.”
“이별 선물?”
샤를레아는 화려하게 장식된 모자를 받아들고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셔츠에 조끼, 가죽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은 그녀의 차림에는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토미, 네 센스가 많이 부족해졌다? 드레스 골라올 때는 꽤 괜찮더니?”
“제 동생이 샤를레아님 드리려고 특별히 만든 거래요. 싫으셔도 받아주세요.”
“에이미가 준 선물인데 싫을 리가 있나.”
샤를레아는 정수리 부근에 묶어두었던 머리끈을 휙 잡아당겨 풀었다. 금빛 도는 붉은 머리칼이 허리께까지 쏟아졌다. 도박장을 휩쓸고 다닐 때처럼 비단드레스로 온몸을 휘감은 것도 아닌데 머리를 푼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화려해졌다.
그 위에 밀짚모자를 쓰자 포도주색 리본이 머리카락과 멋지게 어울렸다. 옷차림에 비해 다소 과하다 싶었던 장식들조차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다. 샤를레아는 자랑이라도 하듯 턱을 치켜들고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어때, 어울리지?”
“네에……. 샤를레아님이야 뭘 걸쳐도 어울리시죠.”
“표정 봐라, 표정. 진심이 없어.”
“으어, 으어어어!”
실컷 볼을 꼬집힌 토미가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붙들고 퉁퉁 부어 있는 동안, 샤를레아는 모자챙을 만지작대며 에이미를 생각했다. 마주친 횟수는 적어도 쉬이 잊히지 않는 아이였다.
‘그 검은 반점과 수포……. 의사들은 그게 뭔지 모른다고 했었지.’
에이미는 샤를레아 앞에서 유독 부끄러움을 탔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입도 제대로 못 떼는 에이미를 볼 때마다 토미는 저게 내숭을 떠는 거라며 열변을 토했지만, 샤를레아의 눈에는 그저 귀엽기만 했었다.
아쉽게도 손을 잡아보지는 못했지만, 샤를레아는 에이미의 병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갔다. 마력에 예민한 아이가 만탈락처럼 마력 흐름이 이상한 도시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해결 방안인데, 단순히 만탈락을 떠나게 한다고 나을 것 같진 않았다.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마법도구들이 흩어져 있었고, 마력 흐름은 꼬일 대로 꼬여 있는 데다 마법망은 그에 걸맞게 너덜너덜했다.
“바로 셰비언 성벽으로 가실 거예요?”
“아니, 브란젤로 갈 건데. 네가 도박장은 브란젤이 최고라며?”
“……음. 저도 듣기만 한 거라 확실치는…….”
“걱정 마라, 만탈락이 더 나아도 쫓아와서 너한테 뭐라고 하진 않을 거니까.”
“샤를레아님, 브란젤의 도박장들은 역사가 깊어서 건물이 고풍스럽고 장식도 우아하대요. 만탈락의 게임장이 흥행하는 게임 몇 가지 위주로 돌아간다면, 거긴 정말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게임이…….”
“거기까지만 해라.”
“넵.”
토미는 입을 꾹 다물고 샤를레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구두닦이 상자를 펼 만한 곳을 찾아 여기저기 눈을 굴렸다. 샤를레아를 따라다니는 사이 본래 그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빼앗긴 지 오래라, 새로운 자리를 개척해야만 했다.
‘구두도 닦고 모자도 팔고 하려면 신사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구석지지 않은 자리가 좋은데…….’
토미의 눈에 좋은 자리는 남들 눈에도 좋은 자리라, 눈여겨보는 자리마다 좌판이 펼쳐져 있었다. 토미는 게을러진 자신을 반성하며 내일부터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자리를 맡을 결심을 했다.
그때,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고 풀어놓은 머리칼을 계속 만지작거리던 샤를레아가 토미를 불렀다.
“토미, 내가 선물 하나 줄까?”
“예?”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토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샤를레아를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가득 어린 푸른 눈은 평소와 똑같은데, 어딘지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적시며 올라왔다. 감탄이 절로 나오도록 아름다운 얼굴이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게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전신의 솜털이 다 빳빳하게 일어서고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요란했다.
“자, 골라봐라. 첫째, 너와 에이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풍족하게 쓰고도 남을 정도의 돈. 둘째, 에이미의 병이 깨끗하게 낫는 것.”
“……둘 다는 안 돼요?”
“안 돼. 난쟁이의 선물 상자 두 가지를 몽땅 차지했다가 쫄딱 망한 할아버지가 나오는 옛날이야기 몰라? 너무 욕심을 부리면 가질 수 있는 것도 놓치는 거야.”
토미는 어깨를 파고드는 가죽 끈을 꽉 움켜쥐었다. 난쟁이의 선물 상자와 욕심쟁이 할아버지라니, 토미는 그런 옛날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온갖 소문과 이야기가 다 모여드는 만탈락의 역사에서 몇 년이나 구두닦이를 했는데도 말이다.
샤를레아가 이상하게 구는 거야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하나 그녀는 빈 말을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둘 모두를 고를 수 없다면 하나라도 잘 골라야 할 테다. 토미는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샤를레아님. 그 선물은 누구에게 주시는 건가요?”
“그야 당연히 에이미에게 주는 거지. 이 예쁜 모자에 대한 답례로 주는 거야.”
토미는 고민에 빠졌다. 샤를레아가 만탈락의 도박장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쓸어모았는지는 이미 보아서 알고 있었다. 남매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돈 정도야 우습게 대줄 수 있을 터였다.
따뜻하고 안락한 집, 빼먹지 않고 배부르게 먹는 끼니, 깨끗한 새 옷……. 돈이 생기면 새 구두닦이 상자도 살 수 있고, 에이미에게 예쁜 장갑과 양산도 사줄 수 있다. 아플 때 의사에게 갈 수 있고, 약도 필요한 만큼 살 수 있다.
“……둘째요.”
하지만 토미는 두 번째를 골랐다. 에이미에게 주는 선물이라는데, 당연히 에이미를 위한 걸 골라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에이미의 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샤를레아라면 뭔가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이한 예감이었다. 샤를레아는 토미가 던진 승부수에 기꺼이 보답했다.
“토미, 넌 나보다 더한 도박꾼이야. 승리를 축하한다.”
“샤를레아님……?”
“이걸 에이미에게 먹여. 좀 거친 방법이라 며칠 앓기야 하겠지만, 병은 감쪽같이 나을 거다.”
토미는 샤를레아가 제 손에 넘겨준 물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엄지손톱 크기의 얇고 동그란 판은 불을 품은 동전 같았다. 반들반들하고 매끈한 표면을 문지르자 어쩐지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브아아아아앙-.
토미가 그걸 보고 있는 동안,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만탈락 특유의 느긋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던 역사가 브란젤역만큼이나 시끄러워졌다.
샤를레아는 제 가슴팍에 겨우 닿는 토미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 새둥지를 만들어놓고는 씩 웃었다.
“잘 있어.”
“어…….”
토미는 와글와글하니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로 요령도 좋게 사라지는 붉은 머리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인생 최대의 행운을 방금 떠나보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냐. 너무 큰 행운은 불운을 부른댔어.’
붉고 얇은 판을 꽉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발이 가벼워졌다. 소년은 등에 멘 구두닦이 상자가 미끄러지는 것도 모르고 아지랑이가 이글대는 대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집까지 가는 길이 온통 눈부신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 * *
라디아타는 쓰러지고서도 별거 아닌 것처럼 굴었지만, 말과 달리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일정이 열흘은 족히 뒤로 밀렸다.
그 짧은 사이, 네이기스가 사고를 쳤다. 피올에게 억지로 응원을 받아낸 네이기스는 집에 돌아가 사실은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도 계속 그릴 거라는 선언까지 했으니, 안 그래도 갑자기 마차에서 뛰쳐나간 네이기스 때문에 난리가 났던 그웬가는 완전히 뒤집혔다.
메너트는 귀부인의 품위도 잊고 네이기스의 뺨을 갈기려다 냅다 끼어든 에이쉬에게 막히고 분통을 터뜨렸다. 에이쉬는 손찌검에 놀라 얼어붙은 네이기스를 잡아끌어 제 등 뒤로 숨겼다.
“네이기스, 빨리 올라가라.”
“오라버니!”
“빨리 가! 드케, 누나 챙겨라!”
구석에 숨어 고개만 기웃대던 드케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네이기스의 손을 잡아챘다. 네이기스는 메너트의 앞을 막아서는 에이쉬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동생과 함께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네이기스의 방은 큰 침실에 거실과 드레스룸, 파우더룸이 연달아 이어져 있는 형태였다. 드케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부터 죄다 걸어 잠갔다. 그래봤자 집사나 하녀장이 열고자 하면 다 소용없겠지만, 일단 무슨 시도든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야, 사고를 쳐도 형이 칠 줄 알았는데 누나라니. 정말이지 깜짝 놀랐지 뭐야. 우리 남매 중에서 제일 얌전하던 누나 맞아?”
“오, 오라버니는 괜찮을까?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나셨는데…….”
손을 달달 떨며 어쩔 줄을 모르는 네이기스는 조금 전 그림 이야기를 하며 당당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소심해 보였다.
드케는 한심해하는 표정을 감출 생각도 않고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댔다. 드케 그웬의 나이는 고작해야 열세 살. 어린 소년이 취하기엔 거만한 자세였지만, 또래보다 키가 크고 늘씬한 데다 이목구비가 서늘해서인지 어이없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주제에 안 맞게 남 걱정부터 하는 거 보니까 우리 누나 맞네. 난 딴 사람이 누나 흉내를 내는 줄 알았지.”
“드케…….”
“어머니가 화가 얼마나 나셨든, 형은 가문의 후계자야. 딸인 누나나 예비품인 나랑은 처지부터 다르니까 누나 걱정부터 좀 하자. 누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림 얘길 한 거야? 드러내 놓고 말하면 뭐 어머니가 갑자기 사람이 휙 바뀌어서 아이고 내 딸, 그렇게 그림이 그리고 싶었니, 몰랐구나 미안하다, 이럴 줄 알았어?”
“나는…… 그냥…….”
“됐어, 이미 저지른 일 곱씹어서 뭐해. 이제 어쩔 거야? 계획은 있어?”
네이기스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이답지 않게 조숙한 동생은 언제나 상대하기가 껄끄러웠다. 매번 마주앉아 말을 나누다보면 저가 더 어린아이가 된 듯 혼나곤 했으니까. 과연, 드케가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른 누나를 향해 환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타우레드 후작영애가 누나를 후원해 주겠다고 했다며.”
“으, 응…….”
“그럼 빨리 짐 싸. 웬만한 건 거기서 다 대줄 테니, 따로 돈 될 만한 것들 위주로 먼저 챙겨.”
귀족의 후원이란, 해당 예술가의 삶 전반을 책임지는 것이다. 레이디 그웬은 레이디 타우레드에게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지만, 화가 네이기스는 달랐다. 갈 곳이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네이기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치 마법등의 덮개를 벗겨낸 듯했다.
“나, 왕립은행에 계좌 있어.”
“계좌? 누나한테 웬 계좌?”
“오드리 언니가 만들어줬어. 돈도 있어. 기다려 봐, 열쇠가…….”
네이기스가 허둥지둥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그 부산스러움을 보며 드케는 몰래 입술을 깨물고 분을 삼켰다. 제물로 바쳐질 양처럼 순순하던 누나가 겨우 제 욕망에 눈을 떴는데, 어린 자신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애용하던 탈출 통로를 가르쳐 주고 영업마차를 타라 조언하는 게 전부였다.
“내 비장의 개구멍을 이렇게 공개하게 되다니……. 누나, 꼭 성공해.”
“고맙다, 내 동생. 사랑해.”
“이럴 때만 사랑한다고 하지. 아이고, 남매간 우애 별거 없다.”
“으으응……. 나중에 연락할게.”
네이기스는 가끔은 오빠 같이 느껴지는 동생을 꽉 끌어안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그웬가를 빠져나왔다. 드케가 애용하던 개구멍을 쓴 탓에 드레스 여기저기에 흙이 묻고 머리는 산발이 됐지만 상관없었다. 이 꼴이라도 환영해 줄 곳이 있고 품에 든 금고 열쇠가 더없이 든든했으니까.
그렇게 네이기스는 라디아타의 그늘 아래로 몸을 피했다. 메너트는 가출을 감행한 딸을 향해 이를 득득 갈면서도 그놈의 평판 때문에 즉시 움직이질 못했다. 거기에 라디아타가 네이기스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자 한다며 늦은 초대를 사과하는 편지를 보낸 뒤에는 네이기스를 억지로라도 데려올 수 있는 명분마저 잃고 말았다.
결국 메너트는 에이쉬에게 끌려 셰비언 성벽으로 예정된 휴가를 떠났으니, 자초지종을 다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없었다.
“……히힛.”
이디케는 눈 밑의 그늘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로 서류를 보다 말고 히죽히죽 웃었다. 오드리에게 네이기스의 일탈을 따지러 왔다가 붉으락푸르락해서 돌아간 메너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났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그 꼴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섬뜩하리만치 무서운 웃음이기도 했다. 특히, 손보라는 메시지 장치 대신 새 강철새 도안을 그리고 있던 워커는 이디케가 웃을 때마다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디케는 며칠째 워커의 지하 연구실에 눌러앉아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헨젤가의 저택 집무실에서 일하면 편할 텐데, 왜 굳이 이 불편한 곳에서 이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끝끝내 압박을 견디지 못한 워커가 결국 그녀의 책상 앞에 가서 섰다.
“이디케, 웬만하면 저택에 가서 일하는 게 어때요?”
“왜요? 내가 있는 게 불편해요?”
“그럼 편하겠어요? 당장 칼레이의 마차에 올라타고도 남을 거 같은 얼굴로 히죽거리고 있는데. 저택에 집무실 새로 꾸몄다면서 왜 이러고 있는 건데요?”
“그야 집사님은 제가 휴가 내고 만탈락으로 간 줄 아니까 이러죠.”
“아가씨께서 브란젤을 떠나는 날짜가 뒤로 밀렸다면서요? 그런데 휴가를 냈다고요?”
“릴리도 있고 다이앤도 있는데 뭔 걱정이에요?”
이디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 태도가 어찌나 태연하고 빳빳한지, 누가 보면 이 지하연구실의 주인이 워커가 아니라 이디케인 줄 알 것 같았다. 이디케는 어이가 없어 입만 벌리고 선 워커의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새로 그려지다 만 강철새 도안이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여기만큼 일하기 편한 데가 따로 없어서 말이에요. 감시하기도 아주 좋고.”
“감시?”
이디케는 가타부타 말을 더 붙이지 않았다. 그저 강철새 도안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질을 했을 뿐. 그것만으로도 워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도안을 감추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마냥 내버려 두면 자꾸만 한눈을 파는 누군가가 있어서 말이에요. 이렇게 바쁜데도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네요.”
“아니, 진짜……. 그 메시지 장치는 내가 아니라 셰비언이 다 만든 거라니까요? 이디케, 나는 할 만큼 했어요. 전송 거리를 늘리는 문제는 셰비언이 해결할 일이라고요!”
워커는 진실을 말한 것이지만, 그게 이디케의 화를 돋웠다. 누구는 일에 깔려 죽어 가는데, 그걸 뻔히 보면서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있단 말이지.
“아, 그렇게 여유로우면 내 일이나 좀 도와주든가요! 예산 다시 짜는 건 못 도와줘도 번호체계 세우는 일에 손 좀 보태주면 뭐 어때서!”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화를 내고 난리예요? 히죽히죽 웃는 게 무지 기분 좋아 보이던데 뭘! 기분 좋게 하면 되지!”
“내가 일이 재밌어서 웃은 줄 알아요? 그리고 도와달란 소리 안 한 거야 워커가 메시지 장치 개량에 힘쓰는 줄 알았으니까 배려하느라 그런 거죠!”
“누가 그렇게 지레짐작하래요?”
평소에는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으면서 웬일로 그런 배려를 다 했느냐, 항상 배려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놈의 배려를 얼마나 해줬는지 난 받은 기억이 없다……. 유치찬란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때마침 2층의 방에서 모자란 잠을 채우고 지하로 내려온 셰비언은 황당한 광경에 말을 잊었다. 어린애처럼 단순한 면이 있는 워커는 그렇다 쳐도, 매사 차분하고 냉정한 면이 있는 이디케까지 저렇게 애처럼 악악대고 싸울 줄이야.
그는 이제까지 읽었던 수많은 로맨스소설을 떠올렸다. 눈앞의 상황과 꼭 같은 장면을 글로 읽은 기억이 났다.
“둘이 연애해?”
“미쳤어요?”
“미쳤어?”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를 어찌 들었는지, 둘이 홱 고개를 돌리고 입을 모아 화를 냈다. 셰비언을 보는 눈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아주 눈빛으로 잡아먹게 생겼다.
“뭐……. 아님 말고.”
“그런 헛소리를 진지하게……!”
“잠깐만, 잠깐만.”
워커가 목청을 높이는 가운데 이디케의 눈빛도 심상치 않다. 셰비언은 홀랑 잡아먹히기 전에 용건을 꺼냈다. 잠들기 직전까지도 놓지 못하고 들고 올라갔던 수정구를 불쑥 내밀자, 워커와 이디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마력을 어찌나 농축해서 담았는지, 본래 은빛으로 빛나야 할 수정구가 비를 품은 구름처럼 짙은 회색이었다.
“워커, 네가 말한 대로 마력을 있는 대로 때려박아 봤는데, 거리가 안 늘어나. 안정화에도 그다지 도움 안 되는 거 같고……. 역시 수정구에 새기는 수식을 개선해야 할 거 같아.”
“으이씨…….”
마력의 양으로 어떻게든 때워보려던 워커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디케는 세상 다 산 표정을 짓고 있는 워커가 신경 쓰여 뒤를 흘끔대면서도 셰비언을 끌고 복도로 나왔다. 셰비언을 앞에 세우고 팔짱까지 척 낀 모습이 퍽 진지했다.
“셰비언 씨. 의식 분리하는 데 필요한 거리가 얼마나 돼요?”
“그런 건 뭐 하러 물어요?”
“연구를 워커에게 미뤄놓고 리가 항구에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요.”
그동안 들은 게 있다 보니 이디케는 나름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셰비언이라도 의식분리를 위해서는 가까이에 있어야 할 거라고. 아무리 거리가 멀어지더라도 같은 도시에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몰아붙이듯 말하는 이디케의 말투가 거슬릴 만도 한데, 셰비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얼음 낀 강 같은 눈동자로 그냥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침묵이 기묘한 압박이 되어 이디케를 내리눌렀다.
“어디서 뭘 하든 그건 내 자유일 텐데요.”
“아가씨를 흔들지 말아요.”
이디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압박감을 떨치려 노력했다. 오드리가 뭔가를 마음에 담아두고 꺼내지 못한 채로 끙끙대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건 고작 며칠 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로렐라이 상단의 문제 때문일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으나, 정말 그렇다면 자신에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드리가 남몰래 고민할 만한 문제의 이유에서 로렐라이를 제쳐 놓고 생각하니 남은 건 셰비언뿐이었다. 셰비언이 오드리를 좋아한다는 티를 내고 다닌 거야 한참 전부터인 데다, 오드리 역시 그를 향해 마음이 기울어지는 듯한 낌새를 보였으니까.
‘의식분리 해놓고 고백한 거야. 틀림없어.’
남들 다 알게 대놓고 말하지 않은 센스야 칭찬해 줄 만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오드리가 신분이 높고 재력이 있는 남자를 만나 편안히 사는 꿈을 아직 포기하지 못한 이디케에게 셰비언은 하염없이 모자란 신랑감이었다.
“아가씨 인생에 사랑은 첫째가 못돼요. 당장은 감정에 휘둘려 첫째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뒤에 가서 반드시 후회하실 테죠.”
확신에 차 말하는 이디케를 보며 셰비언은 워커를 떠올렸다. 오랫동안 오드리의 곁을 지킨 두 사람이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니 정말로 오드리에게 사랑은 첫째가 못되는 모양이었다.
하나, 오드리에게 사랑이 첫째가 아니면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첫눈에 반한 것도 모자라 두 번, 세 번 연달아 오드리에게 반한 셰비언이었다. 그러는 동안 사랑에 빠져 모든 걸 제쳐 놓는 그녀는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거늘, 이미 예상했던 일에 새삼 실망이라도 하라는 건가?
게다가 셰비언은 워커가 해줬던 충고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첫째가 충족되고 나면 둘째인 사랑에 눈이 갈 수도 있다던. 셰비언 역시 그에 동의하는 바였기에 워커에게 비행마법의 수식을 가르쳐 줬지 않던가.
“이디케, 난 아가씨에게 굳이 첫째가 아니어도 되는데요.”
“……네?”
“둘째여도, 셋째여도 상관없으니 그분의 마음에 들어가기만 하면 돼요.”
이디케는 셰비언의 발언이 어이가 없어 말을 잊었다. 오드리가 첫째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 줄 알고 저런 순진한 말을 하는가. 그러나 뒤따라 나온 말은 이디케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러니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아가씨를 흔들어볼 작정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둘째는커녕 셋째도 못 될 거 같거든요.”
“당신이 뭐라고……!”
“그러게요. 이디케, 당신이 뭐라서 내가 이렇게 참아주고 있는 걸까요? 흔들지 말라는 말은 당신이 아니라 아가씨가 직접 할 말이에요. 위한다는 핑계로 멋대로 굴지 말아요.”
부드럽게 휘는 눈매가 아름답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하염없이 다디단데, 맹수의 앞에 무방비로 선 듯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소금인형처럼 굳었던 이디케는 셰비언이 그녀를 내버려둔 채 자리를 비키고 나서야 겨우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놀란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뭐야, 저거…….”
간신히 말을 뱉었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돌아서서 지하연구실의 문을 열 용기가 안 났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도, 온갖 기호로 가득 채워가던 지도도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결국 그녀는 도망치듯 통로를 빠져나와 임시로 빌려둔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의 대화는 이디케의 안에서 셰비언에 대한 경계심이 몇 단계나 뛰어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직접 헨젤가에 갈 수 없었던 그녀는 부디 조심하시라 오드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그 순간의 공포가 오드리에게 제대로 전해졌느냐 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숫자와 보고서에 익숙한 이디케의 문장은 안타까울 정도로 사무적이었기에.
네이기스가 가출을 감행하고 이디케는 껍데기뿐인 휴가를 낸 채 일에 파묻혀 있는 동안, 오드리는 업무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라디아타가 쓰러지는 통에 생긴 틈을 못 참고 서류를 들여다보았다가 릴리에게 어찌나 혼이 났던지.
이디케나 릴리나 락시 부인 아래에서 배운 건 똑같았지만, 릴리는 오드리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봐주는 이디케와는 달랐다. 릴리는 웃는 낯으로 오드리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고 그녀를 치장시켜 밖으로 내몰았다.
“가만히 있는 걸 도저히 못하시겠거든 산책이나 좀 하다 오세요. 계속 일을 하려고 드시면 기차 우편으로 서류 보낼 테니 그렇게 아시고요. 결제 밀려서 구멍 뻥뻥 나고 일이 개판이 되어도 저는 모릅니다.”
“릴리, 네가 말하면 정말 저지를 거 같아서 무섭거든?”
“아가씨의 직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놀랍다니까요. 감히 말하건대, 아가씨는 도박사로 나가도 성공하셨을 거예요. 자, 나가세요. 나가요!”
오드리가 일을 줄여야 한다는 것에는 카프러스도 다이앤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오드리는 꼼짝없이 둘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하나 등 떠밀려 나오고 나니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뭔가 구경하는 걸 좋아하질 않다 보니 전시회도 연극도 다 논외인 데다, 일하지 말라 했으니 쇼핑도 금지고 우편국에도 못 간다. 취미라고 할 만한 건 승마 정도인데, 이런 날씨에 윈디를 뛰게 하는 건 정말이지 못할 짓이었다. 말도 사람도 녹아내린 마시멜로우 꼴이 날 수도 있겠다 싶은 날씨였다.
“……정말 도박이나 하러 갈까.”
“아가씨,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타우레드 후작가에 가시는 건 어때요? 어차피 지금 그웬 부인은 브란젤에 안 계시잖아요! 가서 그웬 영애도 만나시고 타우레드 영애도 만나시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반대가 뒤따랐다. 애초 그냥 꺼내본 말인데 이렇게 빠르게들 반응을 해주다니. 오드리는 괜히 입술을 삐죽댔다. 주사위 도박이나 간단한 카드게임 정도는 사교계에서도 충분히 통용되는데도, 그녀의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도박 대하길 역병 대하듯 했다.
“그냥 해 본 말이야. 그래, 꽃집에 꽃구경이나 갈까?”
“꽃도 안 좋아하시는 분이 웬일로 꽃구경 얘길 다 하세요?”
“도박장으로 가도 돼. 혹시 알아? 릴리 말대로 내가 대단한 도박사가 될지?”
도박장 아니면 꽃집. 행선지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드리는 리즈비아 거리 초입에 있는 큰 꽃집에 발을 디디곤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눈과 코를 즐겁게 하는 자태와 향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서늘하게 피부를 식히는 실내 온도가 만족스러웠다.
“아가씨, 시원할 줄 알고 여기 오자고 하신 거죠?”
“알면서 뭘 묻니. 시원해서 좋잖니?”
다이앤은 차마 반박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에 냉방 마법도구를 얼마나 가져다 놓았는지, 열기에 못 이겨 마른 땅에서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바깥과는 계절감부터 달랐다. 마치 무르익은 가을로 뛰어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되니 오드리의 차림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다이앤은 일을 하지 못하자 짜증만 늘어가는 오드리에게 남부식 드레스를 입혀두었던 것이다. 몸을 조이지 않는 얇고 팔랑팔랑한 옷을 입고 나자 짜증이 줄어 몹시 만족했었는데 이렇게 추운 곳에 오게 될 줄이야.
‘감기……. 감기 걸리기 딱 좋은데 어떡하지.’
때가 때이니만큼 가벼운 숄이나 겉옷 따위는 챙기질 않았다. 잠깐만 있다 나가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희망을 걸어보았지만, 오드리는 웬일로 꽃을 즐기는 모양새였다. 커다란 백합에 얼굴을 들이밀고 향기를 맡으며 즐거워하는 그녀에게 목적지도 없는 바깥으로 나가자 조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걸칠 만한 옷을 재빠르게 사오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일 터다. 마침 리즈비아 거리이니, 조금만 발품을 팔면 그럭저럭 쓸 만한 옷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다이앤은 슬쩍 카프러스의 옷자락을 붙들고 그를 불렀다.
“베텔 경, 저는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경?”
한데 평소라면 가볍게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응했을 사람이 영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어딘지 표정이 굳어 있기까지 했다. 고개를 들어 카프러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이런 곳에서 마주칠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
라비린 벨키스 타우레드.
꽃보다 검이 훨씬 잘 어울리는 사람이 세상 진지하게 꽃을 고르는 중이었다. 타우레드 저택의 온실이 사시사철 꽃을 피워낼 텐데 거 참 의외의 등장이었다.
“오, 이런.”
다이앤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잠깐 눈을 뗀 사이 오드리와 라비린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활짝 피어난 해바라기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다가 부딪치곤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레이디. 제가 미처 보지 못하고……. 레이디 헨젤?”
“벨키스 경?”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정말로 우연한 만남이었다. 그러나 라비린이고 오드리고 제 속마음 속이고 표정 꾸미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당황한 낯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려낸 듯 매끄러운 미소만 얼굴에 남았다.
“벨키스 경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어요. 라디아타를 위한 꽃을 사러 오셨나요?”
“그렇다고 하면 양보해 주실 겁니까?”
“라디아타를 위해서라면 양보 못 할 것도 없죠. 친구인걸요.”
“하하……. 그 말씀을 전해주면 라디아타가 무척 기뻐할 겁니다. 그보다 레이디 헨젤,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라비린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그대로 오드리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워낙 체격의 차이가 심한지라, 오드리는 라비린의 겉옷에 폭 감싸였다. 인상적인 초록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진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들었다.
“이게 무슨…….”
“입술에 색이 없을 정도로 떨고 계시는 걸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 돌려주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해바라기를 양보해 주신 대신 드리는 거니까.”
“아니요. 라디아타에게 갈 꽃을 양보하면서 뭔가를 받고 싶진 않아요.”
“아, 사실 이게 라디아타에게 갈 게 아니거든요. 라디아타에게 병문안 선물로 뭔가를 준다면 꽃보다는 책이 더 좋을 거라고 감히 추천 드립니다.”
둘 모두가 탐냈던 해바라기 한 다발은 어느새 라비린의 품에 들어가 있었다. 졸지에 해바라기를 놓친 오드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제 어깨를 덮은 겉옷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체온으로 덥혀진 옷은 몹시 따뜻했고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럼 어디로 가는 꽃인가요?”
“하티의 신전에 바쳐질 꽃이죠.”
“하티라…….”
약속과 계약을 담당하는 공정한 정의의 신, 하티. 그의 이름 앞에서 한 약속은 그 무엇보다도 굳건히 지켜야 할 약속으로 여겨진다. 연인을 수호하는 건 사랑의 신 볼린이지만, 결혼 서약만은 하티의 앞에서 하는 이유가 그래서였다.
“뭔가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으신가 보죠?”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친해져서 나쁜 신은 아니잖습니까?”
라비린은 신을 옆집 사는 친구처럼 친근하게 부르며 웃었다. 정말로 그런 이유로 가는 건 아니지만 오드리가 황당해하는 걸 보는 게 재미있었다. 하나 장난이 지나치면 미움을 받을 테다. 그는 서둘러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실은 확인해 봐야 하는 계약서가 있어서 보러 갑니다.”
“하티의 신전에 보관을 부탁할 정도면 꽤 중요한 계약서겠어요.”
한때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신들의 위명은 옛이야기가 되었고 풍습과 관례에 흔적으로만 남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티의 신전이 유지되고 있는 건, 중요 서류와 계약서를 철저하게 보호해 주는 곳으로서 이름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뭐 그렇지요. 레이디 헨젤, 제가 먼저 자리를 뜨는 걸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꽃이 시들기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제가 벨키스 경의 길을 막고 있었군요. 얼마든지 가보세요.”
오드리는 기꺼이 길을 비켜주려 했지만, 그 전에 라비린이 손을 내밀었다. 인사를 해야겠으니 손을 달라는 것이다.
그녀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싫은 소리를 꿀꺽 삼켰다. 서로를 알아보자마자 했어야 하는 인사를 헤어질 때 하겠다 하는 건 무슨 경우냐 싶으면서도, 정중하게 청해오는 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라비린이 오드리의 손을 잡고 그녀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우유를 부은 초콜릿처럼 예쁜 갈색 눈동자에서 짙은 호의가 흘렀다. 오드리는 무심결에 손을 잡아 빼려 했지만 그에게 잡힌 손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느지막이 차리는 예의를 탓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옅은 갈색 머리칼이 손등 위로 흩어졌다. 손끝에 닿는 입술이 어찌나 뜨거운지, 나중에 화인이라도 찍히지 않았나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사를 받았으니 답을 해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말랐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오드리의 상태를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라비린은 답인사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흔들림 없이 웃는 낯으로 제 품에 있던 해바라기 다발에서 한 송이를 빼내 오드리의 손에 올려주곤 그 자리를 떠났다. 오드리는 그의 입술이 닿았던 손끝을 움켜쥐고 쿵쿵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어쩌면 내가 실수를 했던 건지도 모르겠어.’
라디아타가 쓰러졌던 날. 라비린은 오드리에게 타우레드의 온실 안내를 자청했고, 오드리는 그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거액의 돈을 들여 일 년 내내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는 온실은 대단히 아름다웠고, 그곳에서 마시는 차는 향긋하니 맛있었다.
라비린은 오드리와 함께 라디아타의 건강에 대해 걱정했고, 코르셋을 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패션이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그 외에도 이곳저곳을 떠돌며 얻어들었다는 이야기들로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속내야 어쨌거나 그는 대화 상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리하여, 라비린이 리가 항구로의 휴가에 동행을 청했을 때 오드리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비록 라디아타의 동의를 받아와야 한다는 조건을 걸긴 했지만 라디아타 역시 오드리의 동의를 받아오라는 조건을 건 다음이었으니 동행은 그걸로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분명 그땐 몸 약한 여동생을 걱정하는 오라버니라고만 생각할 정도로 적당한 거리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방금 전에 비춘 호의는 의아할 정도로 짙었다. 그때의 대화 이후로는 얼굴을 마주친 적도 없는데 말이다.
타우레드의 후계자에게 호의를 얻어 나쁠 게 뭐가 있겠느냐마는, 오드리는 동생의 친구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호의 이상을 보이는 그가 껄끄러웠다.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낯익은 느낌이 드는 것도 이상하기만 했다.
“아가씨, 그 꽃 가져가실 거 아니죠?”
오드리와 라비린 사이에 감히 끼지 못하고 뒤에서 안달만 내던 다이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눈을 홉뜨고 해바라기를 노려보는 게, 당장이라도 뺏고 싶어 손이 근질대는 모양이었다.
오드리는 제 손에 들린 해바라기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선 바닥에 홱 내동댕이치고 싶긴 한데, 여긴 사람들의 눈이 지나치게 많았다. 눈에 띄는 미남인 라비린과 잠시 대화한 것만으로도 은근한 시선 쏠림이 느껴졌다.
“……버리기에는 너무 싱싱한 꽃이잖니. 베텔 경, 잠시만 이리 와주시겠어요? ……베텔 경?”
경직된 낯으로 출구를 보고 있던 카프러스가 뒤늦게 오드리의 앞에 섰다. 오드리는 영 평소답지 않게 구는 카프러스가 이상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의 옷깃에 꽃을 달았다.
“에스코트 기사에게 꽃을 주는 걸 두고 뭐라 할 사람은 없겠죠.”
카프러스의 옷차림에 샛노란 해바라기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에게 거부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제 가슴에 달린 꽃을 어색하게 내려다보다 딱 그만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타우레드의 첫째 공자도 휴가에 동행하십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네, 그분도 함께 가십니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오드리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겉옷을 따로 챙기던 다이앤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의 황당해하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카프러스는 꿋꿋하게 주장했다. 라비린이 휴가에 동행한다면, 에스코트 기사인 자신이 빠질 수 없노라고.
“베텔 경, 정식으로 타우레드의 초대를 받아서 가는 겁니다. 에스코트 기사는 필요 없어요. 다이앤에게도 가자마자 휴가를 줄 건데 에스코트 기사라니요.”
“그렇다면 호위기사로 가겠습니다.”
카프러스의 태도는 굳건했다. 오드리는 도대체 카프러스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프러스는 어이없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원리원칙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호위기사와 에스코트 기사의 차이를 모를 리도 없으면서 이런 고집을 부리다니.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네요.”
“그렇다면 백작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경,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요? 휴가를 받으면 그동안 소홀했던 수련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북쪽 지방에 산다던 친구도 만나러 가야죠.”
“수련은 가서도 할 수 있고, 친구는 나중에 만나도 됩니다.”
오드리는 오랜만에 옆머리를 때리는 두통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갈 곳도 없겠다, 더위를 피하려 꼼수를 부렸을 뿐인데 라비린을 만난 데다 카프러스까지 고집을 부리니 기껏 식힌 열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했다.
그러나 감정을 마음껏 터뜨리는 건 오드리의 방식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의식적으로 미간을 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채 셋을 세기도 전에 눈을 뜬 그녀의 얼굴엔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웃는 얼굴, 다정한 목소리건만 그 말이 어찌나 차갑게만 느껴지는지. 카프러스는 피가 서늘하게 식는 느낌에 감히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졸지에 같이 얼어붙었던 다이앤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흘겼다.
“경……, 아가씨 화나셨잖아요. 말 주워 담기도 글렀는데 어쩌려고 이러세요?”
“몰리 양에게는 미안합니다. 그래도 번복은 안 할 겁니다.”
“어휴, 난 몰라요. 아가씨! 잠시만요!”
잠깐 말을 나누는 사이 오드리는 벌써 가게 입구에까지 나간 상태였다.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아간 다이앤이 없는 꼬리라도 만들어 흔들 것처럼 애교를 피웠다. 오드리는 치대며 달라붙는 다이앤을 귀찮아하면서도 끝내 밀쳐 내지 못하고 웃었다.
카프러스는 제 옷깃에 달린 해바라기를 떼어냈다. 오드리의 손끝에 입을 맞추며 웃던 라비린을 떠올리면 와락 구겨 버리고 싶지만, 오드리가 직접 달아준 꽃이었다. 꽃잎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이 애틋했다.
“베텔 경, 거기서 뭐 해요? 빨리 오세요.”
다이앤이 카프러스를 불렀다. 카프러스는 성큼성큼 걸으며 해바라기를 다시 옷깃에 달아보려 했지만, 투박한 손으로는 영 무리였다. 결국 그는 꽃을 망토 안쪽에 대강 구겨 넣고 말았다.
* * *
브란젤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매년 오던 태풍이 오지 않아서 그런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가 계속 이어졌다. 한낮의 도로에선 아지랑이가 이글거렸고, 열기를 식히려 뿌린 물은 순식간에 말라 버리기 일쑤였다.
도시의 기반 시스템 여기저기에는 자꾸 이상이 생겼다. 도로에 구멍이 생기는 일이 전보다 훨씬 잦아졌고, 길을 따라 설치된 가로등은 하루걸러 하나씩 고장이 났다. 심지어 상수도 시스템 중 일부가 오작동을 하는 바람에 중앙 광장의 분수에 물이 마르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그 분수가 포함되어 있던 구획에 대형 공중목욕탕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참사였다.
매해 여름마다 날이 뜨거워지면 벌어지는 일이라지만 유독 올해는 예년보다 사고가 많았다. 당연히 왕궁마법사들은 넘치는 업무량을 못 이기고 시체와 같은 꼴로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떠나는 날을 계속 미루고 있던 오드리와 라디아타도 더는 일정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이디케가 없는 상황에서 오드리의 짐을 챙기는 건 릴리와 다이앤의 몫이었다. 릴리가 대부분의 짐을 싸고 다이앤이 소소한 물건들을 챙겼다. 일이 없어 심심해하던 오드리도 그에 끼고 싶어 했지만 릴리와 다이앤이 그녀를 끼워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짐 싸기에서 철저하게 밀려났다.
마침내 브란젤을 떠나기 하루 전날. 오드리는 테라스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얼음이 든 음료를 깨작거렸다. 더위도 더위거니와, 제 앞에 선 카프러스 때문에라도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호위기사로라도 좋으니 오드리의 휴가에 따라가야겠다던 그가 정말로 헨젤 백작의 허락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호위가 아닌 에스코트 기사 신분 그대로.
“초대받아 가는 휴가에 에스코트 기사 동행이라니……. 베텔 경, 나는 이 사태를 라디아타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백작님의 딸 사랑이 지극하다고 하시죠.”
“개도 안 물어갈 변명인 거 알죠?”
“그럼 감시로 붙였다고 하시든지요. 백작님께서 타우레드에 딸을 보내고 싶어 할 분이 아니라는 변명은 아주 잘 먹힐 겁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맞받아치는 게, 예전의 카프러스가 아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드리를 따라다니는 사이 말주변이 많이 늘었다. 오드리는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속에 음료를 들이부었다. 그런다고 시원해지지는 않을 테지만 기분이 좀 나아지긴 했다.
그때, 하녀가 오드리에게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손님? 누구?”
“치안대원이신 피올 보티안 씨이십니다. 돌아가시라고 할까요?”
이디케 대신 오드리의 잔시중을 드는 하녀가 말을 덧붙이곤 뿌듯한 표정으로 오드리의 눈치를 살폈다. 요 며칠 셰비언의 방문을 내리 거절했으니 피올도 당연히 그러리라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하나 피올은 셰비언과는 경우가 달랐다. 약속도 없이 찾아온 피올을 환영할 이유는 없었지만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누가 너더러 내 속내를 짚어내라 했니? 테라스로 모시려무나.”
“……네에.”
실망한 하녀에게 퉁명스러운 대접을 받은 피올은 황당해하는 얼굴로 테라스로 들어와서는 오드리의 손끝에 입을 맞춰 인사했다. 오드리의 곁에 서 있던 카프러스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찔거렸지만, 피올은 그를 뻔히 보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무시했다.
“하녀에게 뭐라고 하셨기에 이렇게 푸대접입니까?”
“이런, 불만스러운 대접을 받으셨나요? 안 좋은 일을 겪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하녀장에게 얘길 해둬야겠군요.”
“마음에 안 드는 하녀 골라내는 데에 절 써먹지 마시죠. 아가씨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하녀들을 갈아치운다는 말이 제 귀에까지 들려오는데요.”
피올의 말에 오드리가 말갛게 웃었다. 검은 꿍꿍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듯 고운 미소를 목도한 피올이 진저리를 쳤다. 오드리는 피올의 과장된 몸짓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오랜만에 웃었네요. 그래,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게…….”
피올의 입 안에서 네이기스의 이름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네이기스가 가출을 해서 라디아타의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는 소식은 치안대에 이미 짜하게 퍼진 상태였다. 치안대의 동료들 모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피올에게 사정을 물어댔다.
피올은 동료들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했다. 네이기스가 비번인 자신에게 찾아와 화가로서 성공할 거라는 축원을 부탁했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용기를 얻었다던 그 말이 틈만 나면 귓가에서 울려대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마터면 네이기스의 이름을 입에 올릴 뻔했던 피올은 초록 눈동자에 가득 담긴 염려를 알아보고 씁쓸하게 입을 다물었다. 치안대원 피올 보티안은 화가 네이기스 그웬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가 여전히 아베드 타우레드였다면 모를까. 피올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등 위로 파란 핏줄이 돋아났다.
‘그래, 신분을 넘어선 사랑 따위는 소설 속에나 있는 거지.’
피올은 태연한 척 품에 넣어왔던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어차피 오늘 방문의 이유는 네이기스가 아니라 이 상자였다.
“심부름을 왔습니다.”
“음……. 낯익은 포장이로군요. 또 보석 경매장인가요? 거긴 왜 멀쩡한 치안대원을 심부름꾼으로 쓰는 거죠?”
“제가 압니까. 제 상관이 보석 경매장에서 뭔가 받아먹기라도 한 모양이죠.”
치안대의 수장은 테이란 하루마키스 카즈네 공작으로, 현 왕의 동생이었다. 누가 듣고 고발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오드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네이기스가 가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격려를 부탁했다더니, 마음이 심란하긴 한 모양이었다. 네이기스가 어린 피올을 한눈에 알아봤더라는 얘기까지 했다간 큰일이 날 기미가 보였다. 오드리는 제 입에 아교를 발라놓을 결심을 했다.
“보석 경매장에 뭔가를 주문한 기억은 없는데…….”
포장을 풀자 비단으로 마감한 고급스러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알룬드의 목걸이가 다시금 떠오르는 자태였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진귀한 보석을 선물하는 건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구애 방법이잖아요?’
애써 기억 구석으로 밀어두었던 말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상자를 쥔 오드리의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잠잠하던 심장이 주책없이 쿵쿵 뛰었다. 식사도 거를 정도로 음료를 많이 마셨는데 이상하게 목이 말랐다.
‘라디아타가 보낸 걸 거야. 그래, 바로 내일이 떠나는 날이니까……. 분명해.’
오드리의 짐작은 그저 바람으로 끝났다. 빠끔히 입을 벌린 상자 안에는 옐로 다이아몬드를 메인 보석으로 세공한 장신구 세트가 들어 있었다. 알룬드의 목걸이처럼 세공이 호화스럽지는 않아도 장식과 형태가 대단히 세련되어 보였다.
게다가 하나의 큰 다이아몬드를 쪼개 만든 듯 목걸이, 귀걸이, 팔찌에 박힌 옐로 다이아몬드의 광채와 빛깔이 거의 동일했다. 그에 더해 머리장식과 브로치까지 갖췄으니,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치스러움에 말을 잊을 터였다.
오드리는 물론이고 피올 역시 기본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다. 체면 차리지 않고 고개를 쭉 빼고 구경하던 피올이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재수 없는 도둑 새끼가 또……. 아, 죄송합니다. 아닐 수도 있는데. 갑자기 그때 뺑뺑이 돌던 게 떠올라서요.”
오드리는 피올을 나무라지 못하고 그저 웃었다. 알룬드의 목걸이 도난 사건의 범인이 바로 수사를 도우라며 보낸 셰비언이 아니었던가. 그를 알고서도 덮은 장본인이다 보니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상자에 든 카드에 그 재수 없는 도둑놈의 이름이 쓰여 있으니만큼 더더욱.
<리가 항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시기를 바라며. - 셰비언>
보고서를 쓸 때와는 사뭇 다르게 우아한 필체였다. 어디선가 보석을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를 바람결에라도 들은 일이 있는지 오드리가 재빨리 기억을 되감는 사이, 피올이 카드의 발신인을 확인하고 휙-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아. 셰비언 자식, 쓸 때는 쓰는 녀석이었군요. 만날 돈 많다 말만 하고 쓰는 꼴을 못 봤었는데.”
“……부담스러워서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선물이네요.”
오드리는 한숨과 함께 상자를 닫았다. 선물을 할 때는 상대방의 상황을 좀 생각하라고 분명히 얘기했었거늘. 남들 보기에 그들은 약혼자도 친척도 아니며, 그저 얄팍한 친분이 있을 뿐인데 이런 선물을 받아봐야 스캔들밖에 더 나는가.
어차피 악명을 잘 영근 포도송이처럼 줄줄이 달고 다니는 판에 스캔들 한두 개쯤이야 뭐가 두렵겠냐만, 상대가 셰비언이라는 게 내키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감정도 없는 사이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마음만은 고맙게 받았노라 전해주시고, 이건 돌려주세요.”
“보석 경매장을 통해서 보내기까지 했는데, 안 받아주십니까?”
그래도 같이 일해 본 사이라고, 피올의 팔이 셰비언을 향해 굽었다. 피올이 생각하는 셰비언은 아무한테나 이런 고가의 선물을 하는 녀석이 아니었다. 분명 이 장신구도 고르고 고른 것일 테다. 그렇게 보낸 선물을 단칼에 거절당한 것을 알게 된다면……. 피올은 어쩐지 셰비언이 안쓰러워졌다. 그는 은근슬쩍 오드리에게 셰비언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 친구, 생긴 것도 잘생겼고, 머리도 좋고, 상식은 좀 부족해도 눈치는 빨라서 연애 상대로 괜찮고…….”
오드리는 착잡한 표정으로 상자를 밀어냈다. 보석 경매장을 통해서 왔으면 무얼 하는가. 이런 종류의 스캔들엔 한없이 가벼워지는 게 사람들의 입이었고 그녀는 셰비언과 그런 방향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보티안 씨는 퍽 눈치가 있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나오신다면 저도 할 말이 아주 많다는 걸 아셔야죠?”
“크흠, 절 두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러시는지.”
“라디아타가 새로 후원하는 화가가 있는데, 앞날이 아주 기대된다더군요. 가을 전시회에도 내보낼 생각이래요. 인물화는 좀 약해도 풍경화에 강점이 있어서 경쟁력이 있다고요. 이름이 뭐랬더라…….”
“아이쿠, 이런.”
혹 네이기스의 이름이 나올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던 피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보석 상자와 포장을 수습해 제 품에 밀어 넣으며 오드리의 입을 막았다.
“심부름을 왔던 것뿐인데, 제가 너무 오래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불에 덴 아이처럼 황급히 도망치는 피올을 보며 오드리는 그만 쯧쯧 혀를 차고 말았다. 그 순한 네이기스가 집에서 뛰쳐나오는 용기를 발휘했는데 상대가 저렇게 꽁무니를 말고 있어서야. 둘이 어울려 봐야 좋을 게 없으리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저렇게까지 피하니 어딘지 분하게 느껴졌다.
“네이기스가 뭐 어떻다고 저렇게 펄쩍 뛰는 거람.”
카프러스는 그런 오드리가 어이가 없어 그만 웃고 말았다. 정작 두 사람이 사귄다고 하면 기겁을 하고 말릴 거면서, 말은 꼭 도와줄 것처럼 하니 우습지 않은가. 피올이 보석 상자를 가지고 돌아간 이후 이상하게 들뜬 마음이 그의 입을 열었다.
“신분이 맞지 않는 사랑은 힘들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경,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보티안 씨처럼 입담 좋은 이가 허둥거리는 걸 보니까 굉장히 즐겁습니다.”
매번 피올을 만날 때마다 그의 입담에 휘말려 전전긍긍하던 카프러스다운 대답이었다. 그 솔직함이 오드리를 웃겼다. 맑은 웃음소리가 영롱하게 울려 퍼졌다.
“하하, 하하하! 앞으로 보티안 씨와 시비가 붙으면 네이기스의 이름을 꺼내시면 되겠네요. 그럼 곧바로 꽁무니를 뺄 테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거예요.”
“그럴 수 없습니다. 보티안 씨에게도, 그웬 영애에게도 실례되는 일입니다.”
“여전히 고지식하시군요…….”
카프러스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오드리 역시 그의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여름 햇살이 쏟아지는 테라스에 침묵이 감돌았다. 오드리는 말없이 얼음을 연달아 깨물어 먹고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체 어떻게 저러고 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본인이 좋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오드리는 늘 그랬듯 가문의 체면과 카프러스의 명예, 그리고 자신의 편안함을 저울에 올렸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답을 골랐다. 마음이든 물질이든 일단 저울에 재고 나서 생각하는 건 그녀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경이 고집을 부렸다고 할 거예요.”
“예.”
“다른 변명은 조금도 하지 않을 거예요.”
“사실이니까요. 다른 말로 치장하려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용하되 보호하지 않겠다는 말인데도 카프러스의 시선엔 흔들림이 없고 대답은 담백했다. 그야말로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법한 기사의 태도였다.
오드리는 그가 다른 기사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때때로 그의 반듯함은 오래전에 장례를 치르고 비석까지 세워 버린 오드리의 정의감마저 쿡쿡 찌르는데 다른 기사들은 오죽할까. 가끔은 그의 곁에 있기가 괴로울 순간이 있을 터였다. 바로 지금의 자신처럼.
“……내일이 출발일이니, 경도 준비를 해두세요. 이렇게 갑자기 결정을 했으니 하녀들이 짐을 챙길 틈도 없었을 거 아닌가요. 따라오실 필요는 없어요, 집 안이니까.”
오드리는 카프러스를 떼어놓고 곧바로 제 침실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사람의 선의를 제멋대로 이용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 괴로울 일도 아닌데 묘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하여간 베텔 경만 얽히면 내가 죄인이 된 거 같다니까.’
무거운 마음은 어깨를 짓누르고 눈꺼풀을 끌어내렸다. 오드리는 잠옷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머리장식마저 내버려 둔 채 그대로 잠들었다. 어찌나 곤한 낮잠이었는지, 용건이 있어 찾아왔던 다이앤마저 차마 그녀를 깨우지 못하고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도로 나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이앤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오드리는 마음 편히 자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몸은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있을지언정 그녀의 의식은 영 엉뚱한 곳에 가 있는 상태였다.
새파란 하늘, 적당히 따스한 햇살, 뺨을 스치는 바람, 코를 간질이는 향긋한 꽃내음, 거기에 하늘을 고스란히 비추는 잔잔한 호수. 완벽한 날씨에 완벽한 풍경이었지만, 그걸 보는 순간 오드리의 기분은 그야말로 바닥을 찍고 말았다.
정말 생생한 꿈이로구나 착각하기엔 오드리는 이미 의식세계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다. 그녀가 섬세하게 가꿔진 장미꽃에 발길질을 하자, 발등에 잎사귀가 쓸리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장미 줄기가 힘없이 꺾였다. 일전에 겪었던 것보다 훨씬 현실감이 높은 의식세계였다.
‘이 망할 놈이……. 이게 납치랑 뭐가 달라!’
오드리는 어찌할 수 없이 솟아오르는 불쾌감에 이를 갈았다. 이전처럼 자신이 셰비언에 대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아, 어쩌다 보니 또 마력이 동조해 버렸구나 하겠는데 이번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드리가 잠들기 직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은 카프러스를 어쩌면 좋으냐는 것이지, 셰비언이 아니었다.
“셰비언.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당장 나와서 이 상황에 대해 변명해 봐.”
“으음. 변명거리가 별로 없어서 어떡하죠. 무슨 이유를 대도 혼날 거 같은데.”
오드리는 그제야 셰비언이 제 뒤에 서 있었다는 걸 알았다. 해를 마주보고 서 있다 보니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알면서 저질렀단 말이야?”
셰비언은 홱 돌아선 오드리의 표정이 말도 못하게 살벌한 걸 보고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화를 낼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산 채로 토막이라도 낼 수 있을 거 같은 분위기였다.
“꼭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계속 저를 피하시니 이럴 수밖에요. 방문은 거절하시고, 와달라는 요청은 무시하시고.”
오드리의 표정이 더 살벌해졌다. 그동안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좀 너무할 정도로 셰비언을 거절하긴 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건가. 그녀에게 셰비언을 만나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잘못을 저질러 놓고 상대방 때문이라며 상대를 탓하는 건 변명 중에서도 최악의 변명이었다. 얼굴을 볼 때마다 뛰던 심장도 이 순간만큼은 서늘하게 식어 그저 차분했다.
“날 탓하다니, 변명이 너무 너절한데. 그런 논리라면 세상에 죄인이 없겠어. 그게 뭐든 원인제공을 한 사람이 문제가 될 테니까.”
“죄송합니다…….”
차분한 빈정거림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결국 셰비언은 더 변명하지 못하고 사과했다. 이후에도 싫은 소리를 실컷 듣고 나서야 겨우 뭔가 말을 나눠볼 분위기가 됐다.
오드리의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이 여전한 가운데, 셰비언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은빛 아지랑이가 그의 손끝에 모여들어 형태를 만들었다. 검은 비단으로 마감한 멋진 보석 상자였다.
셰비언은 그 상자를 오드리에게 내밀었다. 오드리는 조금 전에 피올에게 들려 돌려보냈던 상자와 다른 점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다른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피올은 보석 경매장으로 갔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오드리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받은 셰비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보석 경매장을 통해 오드리에게 보석을 보내면서도 받아줄 거란 기대는 그다지 하지 않았다. 당장 워커부터가 바보짓이라며 혀를 그렇게 차지 않았던가.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낚아챘거든요.”
“내가 거절할 걸 알고 있었나?”
“그러실 가능성이 높다고는 생각했죠.”
“그럼 또 거절해도 놀랍지 않겠군. 가지고 돌아가.”
야멸찬 대답에 셰비언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마치 선물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하고 상처 입은 어린아이 같아서, 오드리는 내심 당황하고 말았다. 네 구애에 응하지 않겠노라 딱 잘라 말한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 일은 아주 없었다는 듯 굴다니.
“좀 받아주시면 안 돼요? 아가씨의 평소 스타일에 맞춰서 공들여 만든 건데요.”
“그래서 뭐. 마음을 거절했으니 스캔들이라도 감당하라고?”
“마음을 거절한 상대니까 스캔들이 나도 상관없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스캔들 자체가 싫어. 내가 결혼시장에 나온 상품이라는 걸 체감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는 보석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날 치장시켜 놓고 즐기는 건 내가 아니라 내 하녀들이지.”
오드리는 딱 잘라 부정했다. 안 그래도 뭔가 계기가 생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셰비언의 고백이 재생되는 상황에서 그와 스캔들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힐 게 분명했다.
그런 오드리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셰비언은 퍽 상심했다. 그가 오드리에게 주고 싶어 한 옐로 다이아몬드 장신구 세트는 그의 역작이었다. 장식적인 면뿐만 아니라 마법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축복, 저주, 기원과 마법을 담기에 보석은 대단히 좋은 매개체였다. 오드리가 이 옐로 다이아몬드 장신구 세트를 전부 착용한 상태라면, 그녀는 산사태에 휩쓸려서도 다치지 않고 살아나올 수 있을 정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셰비언은 절대 보석을 받을 거 같지 않은 오드리를 흘끔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스캔들을 싫어할 줄 알았더라면, 조금 질이 떨어지더라도 보석이 아닌 다른 걸 매개로 준비할 걸 그랬다.
“그냥 장신구가 아닌 데도요? 이건 방어마법이 걸린 보석이에요. 웬만한 위험은 다 막아줄 거라고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도록 일부러 장신구 형태로 만들었어요.”
오드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석 상자를 바라보았다. 위험을 막아주는 보호마법이 담긴 보석이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만탈락 저택의 도서관이나 타우레드의 수도 저택 도서관에 처박힌 먼지 냄새 풀풀 나는 어느 책의 구석에는 기록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자기가 용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천재 마법사였다. 덮어놓고 의심부터 하는 건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그럼 하나 물어보지. 그 위험이란 물리적인 걸 말하는 건가, 아니면 정신적인 걸 말하는 건가?”
“그야……. 굳이 따지자면 물리적인 거……?”
“고위층을 대상으로 판매하면 잘 팔리겠군. 보석이 아니라 다른 것에도 담을 수 있다면 군인들에게도 인기 있겠고. 그렇지만 내가 굳이 스캔들까지 감당하면서 받을 물건은 아니야. 이번 휴가에 베텔 경이 함께 가느니만큼 더더욱.”
조금 전까지 카프러스의 동행을 영 못마땅해했던 건 까맣게 잊은 듯, 오드리는 냉큼 그를 팔아먹었다. 지금 그녀는 셰비언과의 스캔들을 피할 수만 있다면 카프러스가 아니라 라비린까지 팔 수 있었다.
“그래도…….”
“시키지도 않은 걸 만들어온 이유가 뭐지? 당초 예정보다 보름 가까이 일정이 밀린 지금에야 들고 온 걸 보면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닌 거 같은데.”
셰비언은 며칠 전에 발견한 신문기사 한 토막을 떠올렸다. 발톱 섬에서 뿜어내던 연기가 드디어 멈춤에 따라 새로운 탐사대가 출발할 예정이라며, 이번에야말로 무사히 일을 마치고 오길 바란다는 요지의 기사였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이 뒷목을 적셨다. 그의 옆구리를 끊어놓을 뻔한 상처를 입힌 장본인의 영지가 그 남쪽바다가 아니었던가. 시간이 흐르며 섬과 바다의 형태가 바뀌고 이름마저 달라졌지만 쉬이 잊힐 곳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화산이 터지고 사람이 실종되는 등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을까. 태풍이 오지 않아 날이 더운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의심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데.
그러나 용의 시대는 끝났다. 그 흔들림 없는 확신이 셰비언의 입을 막았다. 그는 하고팠던 말 대신 멀리 보내려니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는 둥, 기차가 터널을 지난다는데 무너지면 어쩌냐는 둥, 엉뚱한 걱정을 늘어놓다가 오드리의 기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더 듣고 싶지 않으니까, 닥치고 상자나 치워.”
“네…….”
허공에서 나타난 상자는 역시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워커가 봤다면 도대체 무슨 원리로 의식세계에 물건을 자유롭게 넣었다 뺐다 하느냐고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을 테지만, 오드리는 워커가 아니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선 채 이왕 끌려온 거, 뭘 얻어낼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셰비언. 위험에 대해 마법으로 물리적인 방어를 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방어가 가능한 마법도 있다는 거겠지?”
“그렇죠. 지금 시대는 이상할 정도로 공격 마법이 남아 있지 않아서 굳이 필요할까 싶긴 하지만요.”
뺏고 빼앗기는 전쟁의 역사가 그렇게나 길고 치열한 데다 마법이 사회 시스템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데도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공격마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공격용 마법도구가 활발히 개발되고 있었지만, 아직은 안정성도 위력도 보장할 수 없는 불완전한 물건이었다.
일반적으로 문명 발전의 수혜를 가장 빠르게 입는 분야가 전쟁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작금의 인간문명은 어딘지 기이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학자도, 마법사도 아니었으며, 사치품에 가까운 물품을 취급하는 장사꾼이니만큼 전쟁에도 관심이 없었다.
“마법의 계보에 따른 흥망성쇠는 워커에게 물어보도록. 그나저나 그 정신방어마법은 의식세계로 끌려가는 것도 막아주나?”
그제야 오드리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셰비언이 영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나 오드리나 하루가 짧아 발을 동동거리며 사는 상황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의식분리를 포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디케가 들볶든 말든 리가 항구와 브란젤을 왕복할 생각까지 하고 있던 셰비언이니만큼 더더욱.
‘못 막는다고 할까 보다.’
그러나 거짓은 거짓을 낳고 때로는 진실의 탑을 쓰러뜨린다. 탑을 다시 쌓고 내용물을 다시 채운들 무너지기 전과 같을 수는 없으니, 그는 짧은 망설임 끝에 이실직고했다.
“그렇죠.”
“그럼 그런 마법을 걸어서 가져와. 그거야말로 내가 스캔들을 감수하고서라도 받아줄 만한 것일 테니.”
“냉정하기도 하셔라…….”
“난 본래 이런 사람이야.”
오드리가 셰비언의 칭얼거림을 단칼에 잘라냈다. 셰비언은 그런 오드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만 픽 웃고 말았다. 그래, 그녀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새삼 화내거나 실망하거나 억울해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셰비언은 주섬주섬 품을 뒤져 작은 동전 같은 걸 꺼내 내밀었다. 크기는 엄지손톱만 하고, 두께는 고양이 수염처럼 얇았다. 순은을 가공한 듯 멋진 은빛이면서도 투명감이 느껴지는 데다 매끄럽게 손에 감기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오드리는 주는 거니 일단 받아놓고서도 그게 뭔지 몰라 미간을 모았다.
“용의 비늘이에요.”
“이름 한번 거창한데. 이걸 가지고 있으면 의식분리에 끌려오지 않을 수 있나?”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확실한 건 먹는 거죠. 아가씨는 제가 드린 마력을 갖고 계시니까 거부반응이 올라올 일도 없을 거고요.”
오드리는 비늘을 들고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셰비언이 준 거라지만 덥석 입에 넣기에는 거부감이 심했다. 게다가 말이 의식세계지, 여기서 겪은 일이 현실의 몸뚱이에도 영향을 미치는 걸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하지 않았던가.
“……먹는 건 역시 별로야. 어쨌거나 잘 쓰도록 하지.”
“아가씨, 절 너무 못 믿으시는 거 아니에요? 워커는 금방 믿어줬는데!”
“워커는 본래 사람을 잘 믿어. 육 년 전의 워커는 안목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멍청했던 게 아닐까, 가끔 나조차 의심할 때가 있을 정도야.”
평소 오드리는 워커의 안목을 퍽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이 스스로를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용이라고 주장하는 걸 순순히 믿었다고 하니, 평가를 수정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워커가 멍청한 거면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어디 있…….”
“시끄러워. 볼일도 끝났으면서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짜증난다. 이따위 의식세계에서 당장 나가고 싶다. 오드리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셰비언과 오드리를 제외한 나머지가 먹물에 풍덩 담긴 듯 시커멓게 물들었다. 당혹스러워하며 주변을 살피던 셰비언이 어둠에 먹히듯 휩쓸려 사라진 뒤엔 윤곽과 양감만 어렴풋이 파악되던 주변 풍경마저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검은 공간은 조용하고 안락했다. 이제야 좀 쉴 수 있겠어. 오드리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오드리가 눈을 떴을 때는 방 전체에 붉은 물이 들어 황홀하게 빛나는 저녁 시간이었다. 창문을 열어두었는지, 노을에 젖은 커튼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이디케의 잔소리처럼 오드리를 간질였다. 그녀는 상체만 일으켜 앉은 채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해가 정수리를 조금 넘어간 때에 잠들었는데, 벌써 노을이 내리는 시간이라니. 얼렁뚱땅 지나가 버린 하루가 놀라웠다. 하루가 너무 짧아 발을 동동거리며 사는 게 습관이 되어 있을 텐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는지.
의식세계에서 손에 꼭 쥐고 있었던 용의 비늘이 떠올라 손을 폈다. 예상했던 대로 은빛 동전 같고 잘 만든 얼음 모형 같은 비늘이 얌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용이라는 고백을 여전히 허언 취급하는 중이니, 용의 비늘이니 뭐니 하는 말도 믿지 않았다. 다만 아까 워낙 효과를 보았으니 먹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다. 슬쩍 입에 가져다 댔지만 역시 거부감이 들었다. 결국 먹지 못하고 드레스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말았다.
그래도 다시 시도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오드리가 깨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는지 발소리를 죽이며 들어온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아가씨! 언제부터 깨어 계셨던 거예요?”
“방금 일어났지.”
“이런……. 좀 더 주무시는 게 어때요? 제가 불편하지 않도록 옷도 갈아입혀 드리고 머리도 잘 풀어드릴게요.”
끼니도 거르고 잤는데, 뭐든 챙겨 먹일 생각은 않고 더 자라고 하다니. 심지어 생글생글 웃는 낯이라 더 수상쩍다. 오드리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주거나 말거나, 릴리는 대뜸 오드리의 머리장식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머리가 이렇게 눌렸는데, 핀이 불편하지도 않으셨어요? 아, 이 모자는 이제 못 쓰겠다.”
“릴리, 대체 왜 이러니? 내가 깨어 있으면 안 될 일이라도 있어?”
“그럴 리가요. 그동안 피로가 얼마나 쌓여 있었으면 이렇게 정신없이 주무셨을까, 하는 마음에 이러는 거지요.”
다이앤이 오기 전까지는 오드리의 치장을 맡았던 릴리였다.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정리해서 한쪽으로 묶는 솜씨가 아주 능숙했다. 그녀가 머리칼에 이어 드레스 끈에 손을 대려할 때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나.”
하델이었다. 알신다의 일로 충돌한 이후, 공부에 집중하겠다는 핑계로 오드리와는 얼굴도 마주치지 않던 아이가 웬일인지. 칫, 혀를 찬 릴리가 오드리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사실 도련님께서 아까 낮부터 아가씨가 깨기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네 멋대로 전할 말을 고르다니, 한 달 감봉이다.”
“누나, 나랑 얘기 좀 해요.”
“……잠깐만 기다리렴. 릴리, 드레스는 끈만 다시 잘 묶어줘.”
입고 잠든 탓에 꼬깃꼬깃한 드레스이지만, 이 드레스의 장점은 애초부터 주름이 많이 잡혀 있는 시원한 재질의 천을 썼다는 것이다. 릴리의 손을 타자 영 못 볼 꼴이던 드레스가 그럭저럭 봐줄 만해졌다.
“머리도 새로 올려드릴까요?”
“아니, 이 정도로도 충분해. 나머진 내 손으로 할 테니, 넌 하델을 응접실에 데려다줘.”
릴리는 오드리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델에게 동정적인 이디케와는 달리, 그녀는 하델을 영 좋아하지 않았다.
오드리와 알신다가 대립하는 동안 입으로만 중재했던 걸로 모자라 알신다를 해고하면 안 된다며 난리를 피우는 걸 눈으로 보고 나니 미운털이 콕 박힌 게다. 그렇다고 하델이 그 미운털을 빼낼 만큼 릴리에게 예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마음이야 어찌되었든 태도만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하델을 대해왔는데, 하델은 릴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눈치가 빠르고 예민했다. 응접실까지 안내하는 릴리를 향한 눈초리가 영 곱지가 않다.
“릴리, 솔직히 대답해 봐. 누나는 자느라 날 만날 수가 없다더니?”
“도련님께서 제게 와서 말씀하실 때까지만 해도 주무시고 계셨죠.”
“날 누나와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고?”
만나게 해주기 싫어서 오드리에게 하델의 만남 요청을 아예 전하지 않긴 했어도, 조금 전까지 오드리가 자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릴리는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그윽하게 눈을 내리깔고 미소 지었다.
“이런, 도련님. 저는 금방 들킬 얄팍한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그 말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용의가 있다는 식으로 들리는데.”
“트집을 잡으려면 뭔들 못 잡을까요. 도련님께서는 알신다의 자리를 차지한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계시지요. 하지만 저는 제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하델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릴리가 알신다의 이름을 꺼내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정말로 릴리가 싫어서 이렇게나 그녀가 못마땅하고 신경에 거슬리는 건지, 아니면 알신다 대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싫은 건지 스스로도 가늠이 어려웠다.
“……어쨌거나 난 네가 싫어.”
“예, 도련님. 세상이 어떻게 자기 좋은 사람으로만 가득 차 있겠어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릴리의 말이 마치 ‘나도 네가 싫다’라는 말처럼 들렸다. 하델은 입술을 깨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헨젤 백작가의 유일하고 영민한 후계자로서 누구에게나 존중과 애정을 받아왔던 그에게 릴리는 지나치게 낯선 유형의 인물이었다.
“안 들어가세요? 아가씨는 손이 빠르세요. 금방 오실 텐데 문 앞에서 마주치면 민망하실 거예요.”
“들어갈게. 문 열어줘.”
하델은 자연스럽게 명령했고, 릴리는 시키는 대로 순순히 문을 열었다. 빈 응접실은 더욱 진해진 노을로 가득 차 마치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릴리는 오드리가 오기 전에 여기저기에 놓인 마법등의 뚜껑을 열고는 다과를 준비해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하델은 땀으로 미끈거리는 손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긴장을 풀었다. 기껏 용기를 내어 이렇게 찾아왔는데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면 따돌려진 알렉스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지금쯤 알렉스는 서관 옆의 숲에서 애초 떨어뜨린 적도 없는 팔찌를 찾아 수풀을 뒤지고 있을 텐데 말이다.
하나 하델이 완전히 긴장을 풀기도 전에 오드리가 응접실에 나타났다. 하델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노을을 뒤집어써서 그런지, 아니면 낯선 형태의 드레스를 입어서 그런지 오드리는 평소의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하델, 오랜만이구나. 웬일로 나를 다 찾았니?”
“누나……가 저녁 정찬에 나오질 않았으니까요.”
“내가 저녁 정찬에 제대로 나가지 않은 건 이미 한참 전부터였을 텐데? 변명을 대려거든 그럴듯한 걸로 대고,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바로 하도록 해. 들어는 줄 테니.”
오드리의 싸늘한 태도가 하델을 자극했다. 누나의 낯선 모습에 기가 죽어 눈치 보던 모습은 어디론가 훅 사라지고 눈빛에 불이 붙었다.
“누나, 알신다에게 제대로 된 소개장을 써줬던 거 맞아요?”
“설마 내가 헛것을 주었을까.”
“그럼 왜 알신다가 직장을 못 구하고 있는 건데요?”
며칠 전, 하델은 알신다의 편지를 받았다. 긴긴 편지는 하델의 건강과 미래와 학업을 걱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작 하델이 궁금해했던 알신다 자신에 대한 건 겨우 몇 줄에 불과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행방을 알 수는 없어도 어쨌거나 같은 도시 안에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하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앞으로 이 년 뒤면 마음대로 저택 밖을 나갈 수 있으니, 그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해 왔던 안이함이 뼈아팠다.
내내 피해왔던 오드리를 찾아온 건 며칠 밤을 내리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얼굴 보기가 어색하고 껄끄럽긴 해도, 그녀가 이대로 휴가를 떠나 버리면 앞으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정말로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그건 어찌 알았니?”
“편지를 받았어요. 말로는 가족이 보고 싶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럴 리가 없단 말이에요. 알신다는 결혼도 안 한 데다 휴가도 안 쓰고 내내 브란젤에만 붙어살아서 예전 가족들이랑 사이가 나빠요.”
“아주 속속들이도 아는구나.”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만데 그걸 몰라요? 알신다는 있을 곳을 못 구한 거예요. 나이가 있으니까 추천서가 소용없었을지도 모르고요. 누나, 알신다 좀 용서해 주면 안 돼요? 네? 내가 이렇게 빌게요. 제발, 누나.”
무릎이라도 꿇을 듯 애원하는 하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누구든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질 정도로 애절한 모습이었으나, 오드리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때마침 릴리가 차를 내왔기에, 그녀는 시원한 냉차를 머금은 뒤 대답했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돌아가.”
오드리의 대답은 짧았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몸이 나른한데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으며 하델을 설득할 만한 의욕이 없었다. 오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말을 보탰다.
“부탁을 하기도 전에 날 의심하는 말부터 꺼낸 건 너야. 그러고도 내 도움을 바라다니. 너무 앞뒤가 안 맞지 않니? 나를 탓하든지, 내게 부탁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했어야지. 네 화술 선생은 대체 네게 뭘 가르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네 선생들이 분명 내게 네 성취를 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전부 감언이설이었어. 조만간 네 선생들을 갈아치울 테니 그렇게 알고 가라.”
“누나!”
“시끄럽다. 이만 돌아가.”
오드리는 순식간에 비워 버린 컵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한낮부터 지금까지 반나절을 쫄딱 굶은 셈인데 어째 식욕이 전혀 돌지 않는 게, 더위 때문인지 짜증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카프러스는 하델을 두고 이제 철이 좀 든 것 같다며 걱정할 일 없을 거라 했는데 좀 따져 봐야 할 거 같았다.
“……내가 후계자예요.”
갑자기 이게 뭔 소린가. 응접실을 나가려던 오드리가 휙 고개를 돌리고 하델과 눈을 맞췄다. 하델의 옅은 연둣빛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잔뜩 부푼 눈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게 용했다.
“헨젤을 이을 다음 사람은 나라고요.”
“너도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는 이유가 뭐야?”
“후계자인 내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한 번쯤 들어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원망이 잔뜩 섞인 투정이었다. 오드리는 그 순간 정말 진심으로 하델의 교사진 전부를 해고할 결심을 했다. 헨젤 백작가에 특별히 애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뱀이 되어야 할 후계자가 양으로 자라서야 영 곤란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오드리는 하델의 턱을 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해서 눈을 맞췄다. 그녀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하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델, 네가 후계자라면 나는 장녀야. 그 말은 즉, 네게 무슨 변고가 생기면 다음 계승자는 내가 된다는 뜻이지. 물론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려면 데릴사위를 들여 가문을 이어야겠지만 그런 번거로움은 아무것도 아니야.”
“어…….”
“게다가 나는 이미 데뷔탕트를 마친 열일곱 살이고, 너는 아직 저택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열두 살이지. 후계자인 너를 존중해 달라는 말은 네가 스무 살이 되어 비레직 남작 작위를 이어받고 비레직 경이 되기 전까지는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걸 알아두도록 해.”
하델은 제 턱을 쥔 오드리의 손을 밀쳐 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도 너무나 태연하게 변고가 생겼을 때의 이득을 입에 담는 그녀가 무서워 몸이 떨렸다. 하델의 낯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하델, 뱀이 되어야지. 그렇게 순하게 있어서야 어디 가문은 고사하고 네 몸이나 지킬 수 있겠니?”
오드리는 비꼬듯 말을 뱉어놓고 뒤늦게 혀를 찼다. 이거야 원, 여차하면 널 죽여 없앨 수도 있다는 말 같지 않은가. 아무래도 어린 시절 가끔 생각하던 진심이 묻어나 버린 듯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장에 맹세코, 하델을 해칠 생각이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유언장 얘기를 꺼내는 대신 물러선 하델에게 다가가 얼어붙은 뺨을 톡톡 두드리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지하 초상화실에 걸린 밀리나의 초상과 똑같은 미소였다.
“하델, 난 어머니께 널 사랑하겠노라 약속했단다. 내가 돌아가신 분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렴.”
“……어머니가 날 걱정했어요?”
내내 창백하던 하델의 뺨에 혈색이 돌았다. 가뭄에 메말랐던 화초가 소낙비를 맞고 살아나는 것처럼 생기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이에게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던 소년은 누이의 옷자락을 쥐고 눈을 빛냈다.
“정말 그랬어요? 어머니는 나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거 아니었어요? 날 사랑했어요?”
“하델, 차례대로 대답해 주마. 첫째, 난 이제까지 네게 거짓말을 한 게 없단다. 둘째, 어머니께서는 본래 건강한 분이 아니셨어. 우리를 낳고 건강을 심하게 해치셔서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 길어지셨던 거지, 자식에게 관심이 없는 분은 아니셨어. 셋째, 사랑하셨다 대답해 주고 싶지만 그것만은 나도 확신할 수가 없구나. 나에게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는 재주는 없는 데다가, 어머니를 만나면 날 예뻐해 달라 조르기에 바빠서 동생은 영 관심 밖이었거든.”
“……누나가 그랬다고요? 상상이 안 가는데…….”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적의 나는 지금의 너보다 어렸다는 걸 좀 생각해 주겠니?”
하델은 늘 어른스럽기만 하던 오드리가 툴툴거리는 걸 처음 들어보았다. 손에 닿지 않는 별처럼 멀리 있던 누이가 갑자기 제 곁으로 내려온 것만 같았다. 그동안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누나, 본관의 중앙 계단 아래쪽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는 거 알아요? 그 지하 통로 끝에는 초상화로 가득 찬 커다란 방이 있어요. 어머니의 초상화도 거기 있어서, 전 예전부터 거길 자주 갔어요…….”
하델은 쉴 새 없이 어머니 이야기를 종알거렸다. 그토록 가엾다던 알신다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그 순진하고 잔인한 변덕스러움을 보며, 오드리는 자신과 하델이 얼마나 닮은 남매인가를 새삼 실감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