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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네이기스의 용기 (13/62)

chapter 12. 네이기스의 용기

「때때로 사소한 말 한 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지하연구실을 부리나케 빠져나온 오드리는 마차를 타고 타우레드 후작가로 향했다. 라디아타와 오드리는 리가 항구로 가지만 네이기스는 여름휴가를 셰비언 성벽이 있는 북쪽으로 간다고 했기에, 본격적인 휴가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한번 모이기로 한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좀 더 일찍 출발했어야 하는데, 메시지 장치에 홀려 보낸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길었다. 늦게 출발한 만큼 빨리 가야 하거늘 급해서 질러간 지름길에는 꼭 진흙탕이 있다던 말 그대로였다.

아침만 해도 텅 비어 있던 브란젤의 대로는 마차와 사람이 뒤엉켜 난리였다. 대로를 메운 마차들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맨 듯 느려 터졌고, 양산과 모자를 쓴 사람들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 사이를 질러 다녔다. 뜨거운 뙤약볕에 이글이글 달궈진 도로에서 끓어오른 열기가 사람들의 성질을 돋우기라도 하는지,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울렸다.

“어떻게 빨리 못 가는가?”

“아이고 기사님. 저 말들에게 날개라도 달린다면 모를까 어림도 없습니다.”

“급해서 그러네. 본래 이렇게까지 밀리는 시간이 아닌 걸 아는데.”

“글쎄요……. 어디서 사고라도 났나 보지요. 아니면 어디 도로가 꺼지기라도 했는지도 모르고요. 요즘 도로 여기저기가 갑자기 망가져서 난리라니까요.”

칼은 면구스러워 혀를 차면서도 꿋꿋하게 제 탓이 아님을 주장했다. 마차 안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칼을 채근하던 카프러스는 기어이 마부석으로 넘어가 직접 고삐를 쥐었지만 그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마차는 여전히 거북이걸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디케는 이 복잡한 도시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곱씹었다. 오드리의 재산지출을 감독하고, 메시지 장치의 개량이 잘 되어가는지를 틈틈이 확인하고, 메시지 장치에 적용할 번호 체계를 고안하고, 만탈락에서 진행하던 일을 다시 조율해야 한다.

‘나랍의 일이 줄었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어…….’

어느 것 하나 쉬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없다. 게다가 이번엔 오드리가 옆에 없을 예정이니 짊어져야 할 부담이 평소의 두 배였다. 안 그래도 뻐근하니 통증을 호소하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리저리 어깨를 돌려가며 풀고 싶지만, 지금 그녀는 오드리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디케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에 힘을 주고 눈을 감았다.

‘난 분명 평범하게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대체 뭐람.’

집안 살림하는 법을 배우며 평범하게 자라서, 나이가 차면 적당한 집안의 남자를 소개받아 결혼하고, 자식의 자식을 보며 늙어가다 죽으면 남편과 한 무덤에 묻힐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인생을 살게 됐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되짚어보면 오드리에게 손을 붙들려서 수학 선생 앞에 앉은 그날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한 것 같긴 했다. 한데 일에 깔려 죽겠다 싶으면서도 다 내팽개치고 도망갈 생각은 안 든다는 게 또 우스운 일이었다.

흘끗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오드리를 살폈다. 그녀는 아까부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마차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중이라 바깥 풍경은 변하는 게 없는데 저러고 있는 걸 보면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기야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뭐든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일거리에서 갑자기 떨어져 두 달을 보내야 하게 생겼으니까.

하나 이디케의 짐작은 틀렸다. 지금 오드리의 머릿속에서는 셰비언의 고백이 고장 난 오르골처럼 반복해서 울리는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용이라는 황당한 주장 따위는 전혀 믿지 않는데도, 처음 보았던 순간부터 반해 있었노라 고백하는 말이 좀처럼 뇌리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용, 용이라…….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딱 맞아떨어지긴 하는데…….’

오드리는 저 먼 북쪽에 있는 셰비언 성벽을 상상했다. 눈이 멀 것처럼 하얀 설원에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 허공을 춤추는 눈보라마저 넘기 버거워 보이는 절벽을 보고 있노라면, 왜 성벽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가 된다 했다. 가본 적은 없어도 그림으로는 실컷 보았는지라, 눈이 쏟아지는 설원의 풍경은 쉽사리 머릿속에 떠올랐다.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차피 상상이니 쏟아지는 눈발에 달빛을 더해보았다. 달을 조각낸 듯 빛나며 흩날리는 눈송이와, 하얀 얼음덩이를 띄우고 천천히 흐르는 강물과, 하늘을 가르며 나는 은빛 용. 셰비언의 고백이 머릿속에서 다시 되감겼다.

‘하, 내가 미쳤지.’

오드리는 꿈지럭대고 싶어 안달하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고백을 받은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거절해 버렸다. 왜 그렇게 놀랐는지 짐작은 가도 이해는 안 됐다. 되돌아보니 그 순간의 자신은 마치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진심을 이용하고 싶지 않다고? 그 무슨 안이한 말인가. 단단하던 바닥엔 이미 균열이 시작됐고 자칫하다가는 외줄 위에서 위태로운 춤을 추어야 할 판에! 사랑처럼 사람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뺏는 감정이 또 어디에 있다고, 이용할 건 전부 이용해야 할 것을.

사랑에 정신이 팔려 판단력이 흐려진 건 셰비언이 아니라 자신인 모양이었다.

‘한심하긴…….’

오드리의 심사와는 상관없이, 그림처럼 멈춰선 여름 풍경 위로 다른 계절이 겹쳐졌다. 하얗게 흩날리는 작은 꽃잎과 새빨갛게 핀 장미, 바짝 말라 간간이 허공에 뜨는 낙엽. 그리고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웃는 얼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떠오르는 얼굴에 마음이 들끓었다. 바짝 마른 장작에 떨어진 불씨가 주변을 살라먹고 제 덩치를 키우듯이, 셰비언의 고백이 오드리의 마음 안에서 조금씩 제 자리를 넓히려 들었다.

이디케는 무표정하면서도 어딘지 심란한 기색이 엿보이는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친하다 한들 오드리의 속내를 완벽히 들여다볼 재주 같은 건 없었기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오드리는 로렐라이의 일로 어깨가 무거운 아가씨가 되었다.

평소라면 걱정 마라, 내가 있다, 어떻게든 안심시켜 주려 노력했을 테지만, 지금은 이디케 자신의 어깨에 얹힌 짐도 무거웠다. 더군다나 그 짐을 얹은 사람은 다름 아닌 오드리가 아닌가. 이디케는 샐쭉하니 입술을 내밀고 오드리를 불렀다.

“아가씨.”

“……으응.”

평소보다 반응이 느렸다. 어지간히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이디케는 콧잔등을 찡긋대며 할 말을 고르다가, 조금 심술을 부려보기로 했다. 사실 리가 항구에서의 휴가는 이디케도 꽤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게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저, 맡기신 일을 다 하고나면 리가 항구에 쫓아가도 되죠?”

“……뭐?”

겨우 움직이기 시작한 풍경 속에서 저도 모르게 셰비언을 닮은 은빛을 찾느라 정신을 빼놓고 있던 오드리였지만, 이디케의 말은 귀에 쏙 들어왔다. 두 달 내로 끝날 일도 아니거니와, 그 뒤엔 또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손을 놓겠다니?

이디케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담긴 당혹을 쉽사리 읽어냈고, 오드리만큼이나 크게 놀랐다. 서로가 서로를 분신으로 여길 만큼 딱 붙어 자란 젖형제였다. 그녀가 제 목소리에 담긴 투정과 심술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디케, 내가 없는데 너마저 일을 놓으면 그 뒤는 대체 누가 맡아 한다고?”

“아가씨…….”

이디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서로 다른 시기에 태어났을지라도 젖형제로 함께 자라며 그녀의 앞날을 닦는 게 자신의 운명이라 여기고 살았다. 한데 진심으로 놀라 동그래진 눈동자를 보자 갑자기 심장을 쥐어 잡힌 듯 가슴이 아팠다.

가슴을 치고 올라와 목구멍을 두드리는 뭔가가 있어 입을 열었는데,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멍청하니 입술만 벙긋대다 고개를 떨궜다. 생전 처음 느껴본 서러움이 가랑비 고인 물웅덩이처럼 발을 적셨다.

“이디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그래?”

오드리는 이렇게 움츠러든 이디케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때까지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셰비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이디케의 어깨 근처에까지 손을 올리고서도 차마 안아주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굴렀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금방 그 속내를 알아챘을 텐데, 이디케였다. 언젠가 워커가 확신했듯이, 오드리에게 이디케는 또 다른 자신이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오드리는 혼란에 빠졌다.

다이앤은 오드리와 이디케의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다 그만 입술을 깨물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브란젤까지 따라왔을 땐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이 부풀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쪼그라들었다.

도대체 자신은 언제가 되어야 오드리에게 이디케만 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오래된 질투심이 은근하게 피어올랐다.

‘하여간 미워죽겠어.’

계속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다이앤은 찝찌름한 피 맛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한순간 잡아먹혔던 질투만큼 큰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새삼 좌절하기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다이앤은 눈두덩을 몇 번 꾹꾹 누른 것만으로 말짱하게 표정을 바꾸고 오드리의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아이참, 아가씨도 상냥하시기는. 지금 이디케는 아가씨께 투정을 부리는 거예요. 리가 항구에 간다니까 저보다 더 들떠서 유명한 맛집을 알아보고 다녔다니까요? 안 그래도 못 가서 속상한데 아가씨께서 일 얘길 하니까 그게 또 서운해서…… 읍!”

“다이앤!”

이디케는 조금 전까지 풀죽어 있던 게 거짓말처럼 다이앤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자신이 감정에 취해 부린 투정을 이렇게 면전에서 들어보니 어쩜 그렇게 창피한지, 오드리에게 서운해 침울해졌던 일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입이 막힌 다이앤은 버둥거리지도 않고 눈만 흘기고 있었지만, 손을 떼기만 기다리는 듯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디케는 지지 않고 시선을 맞받아치면서도 입으로는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가씨, 다이앤 말에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농담으로 해 본 말인데, 아가씨께서 너무 진지하셔 가지고 장난 좀 친 거예요.”

“이디케…….”

오드리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디케는 오드리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다이앤의 입을 막은 손에 들어간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얼굴이 붉어진 다이앤이 이디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다이앤, 내가 알아본 맛집 리스트 다 너 줄게. 내가 직접 가보지 못하게 돼서 아쉽긴 하지만, 네가 가서 먹어준다면 분명 고생한 보람이 있을 거야! 다녀와서 어땠는지 얘기만 해줘!”

다이앤은 눈썹을 사납게 치켜세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다간 숨 막혀 죽게 생겼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아가씨, 소란스럽게 굴어서 죄송해요.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린 걸 면전에서 지적당하니 너무 창피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다이앤의 입을 막았지 뭐예요. 다이앤, 괜찮지? 미안해, 나 때문에 화장이 다 번졌네.”

“뭘, 네 손목이나 신경 써. 내가 좀 세게 잡았나봐, 상처가 다 났네. 아가씨, 저 잠시 화장 좀 고칠게요. 이 꼴로 사자우리에 갈 순 없잖아요.”

이디케는 그제야 상처 난 손목을 소매로 감추며 자세를 바로 했고, 다이앤은 손거울을 꺼내 번진 화장을 정돈했다.

‘나 참…….’

오드리는 겉으로만은 평화롭고 사이좋은 제 하녀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디케가 등으로 시야를 가린 탓에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평소의 둘을 생각하면 귀로 들은 내용과 차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조금 친해진 거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다이앤은 만탈락의 하녀들 사이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받았다. 안 그래도 독을 다루다 감옥에까지 다녀왔는데, 다이앤이 자신의 독 다루는 솜씨에 종종 자부심을 내비치곤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다이앤의 재주를 아껴 감싸고돌았던 오드리의 행동이 불을 붙였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오드리는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다이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를 만탈락에서 꺼내주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탈락엔 다이앤을 미워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이디케는 다른 하녀들과 달리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성격이었으니, 당장은 사이가 나쁘더라도 오래 붙어 있으면 나아질 거라 여겼건만…….

‘역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의 마음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셰비언은 그렇다 쳐도 이디케나 다이앤, 심지어 자기 자신의 마음까지도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질 않으니 하는 생각이었다. 잠깐 정신을 흩뜨리자마자 또 셰비언의 얼굴이 비집고 올라오지 않느냔 말이다.

오드리는 팔꿈치로 이디케의 옆구리를 톡톡 두드렸다. 번듯한 숙녀가 할 만한 몸짓은 아니었지만, 지금 마차 안에는 그걸 지적할 카프러스가 없었다.

“이디케, 네가 투정부리는 걸 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리가 항구에 가는 걸 그렇게나 기대하고 있었다니, 꿈에도 몰랐지 뭐야.”

“제 소원은 제 이름으로 기차 1등칸을 장기 대여해서 평생 여행만 하고 다니는 거예요.”

“에이, 지난달엔 내 결혼식 의상을 손보는 거라고 그랬으면서. 지지난달에는 평생 수학책에 파묻혀 살면 좋겠다고 했었고.”

“사람이 살면서 꼭 소원을 하나만 가질 필요는 없잖아요. 장담하는데, 저는 앞으로도 살면서 소원이 오십 개쯤은 더 생길 거예요.”

조금 전엔 그렇게나 창피해했으면서, 이디케의 대꾸는 어째 천연덕스럽기까지 했다. 오드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디케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 오십 개에 달하는 소원을 전부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그중 몇 개는 지금 약속할게.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나고 나면 긴 휴가를 줄게.”

“……정말요?”

“당연하지. 실렌다 사막의 유적지, 리가 항구의 축제, 달튼 섬의 불꽃놀이, 살론의 휴양지……. 원하는 곳 어디든 여행해. 나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까, 어디든 자유롭게, 이디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시중들지 말고 시중 받으면서 편안히 여행해.”

이디케는 차마 입술을 떼지 못했다. 자신도 뭐라 딱 정의하지 못하는 복잡한 마음이 가슴 안에서 뒤섞였다. 이렇게나 쉽게 떠나도 좋다는 말을 하는 게 야속하다가도, 시중들지 말라는 말에 담긴 배려가 금방 끓인 차처럼 따스해 작은 아쉬움마저 녹여 버렸다.

‘하긴 어차피 망한 인생……. 결혼도 아이도 평범한 삶도 버린 지 오래이면서 새삼 아쉬워하기는.’

오드리에게 잡혀 있던 손을 홀랑 뒤집어 손깍지를 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던 오드리가 이내 화사하게 웃었다. 이디케가 평생을 건 미소였다. 우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뭐……. 꼭 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아가씨께서 보내주신다는데 마다할 수야 있나요. 이리 약속하시니 지금부터 계획을 세워봐야겠네요.”

“그래, 이왕이면 세계일주 계획을 세워봐.”

고작 말 몇 마디였지만은, 이디케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녀는 좀 전의 침울한 모습은 멀리 날려 버리고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데 아가씨. 아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셨던 거예요? 눈앞에서 마차가 뒤집어져도 모르겠던걸요.”

“……아, 메시지 장치 생각하고 있었어. 그 마력구슬 말이야.”

오드리는 얼버무리며 대충 댄 대답이었지만, 이디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메시지 장치 어디에 놀라지 않을 구석이 있겠느냐만, 마력구슬을 통해서 일정량의 마력을 계속해서 공급하는 방식은 대단히 혁신적이었다.

그게 없으면 장치가 구동되지 않는 데다 복제 불가능한 물건이라는 장담까지 붙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덜컹!

도로의 구멍 난 곳에 바퀴가 잠깐 끼이기라도 했는지, 마차가 크게 덜걱거렸다. 이디케는 창밖의 풍경을 확인했다. 마차는 마침 필리아 거리의 초입에 들어선 참이었다. 조금 빨라졌나 싶었던 마차는 다시 기어가는 중이었고, 로렐라이의 브란젤 지점은 바로 코앞이었다.

“아가씨, 타우레드 후작가에 제가 꼭 붙어 가야 하는 건 아니죠? 다이앤도 있고.”

“그야 그렇지만……. 왜?”

“바로 일에 들어갈까 하고요. 얼른 일을 마치고 세계일주 계획을 세우려면 바쁘거든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어깨를 으쓱이는 이디케의 몸짓이 어찌나 능청맞은지, 오드리는 기꺼이 그녀의 일탈을 허가했다. 바쁘다는데 어쩔 수 없지.

“다이앤, 칼에게 말해서 잠깐 길가에 대어달라고…….”

“이렇게 느린데요 뭐. 멈추면 더 늦어요. 아가씨, 그럼 이따 저택에서 봬요!”

치맛자락을 쥐고 희극적으로 인사한 이디케가 마차에서 홱 뛰어내려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마차가 느리다지만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길을 가로지르다니,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오드리는 물론이고 마부석으로 통하는 창문을 열려던 다이앤까지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말을 잊었다. 그때 마부석의 창문이 벌컥 열리고, 평소의 침착함은 마차 밑바닥에 내버린 카프러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가씨, 방금 무슨 일입니까? 락시 양이 갑자기 뛰쳐나갔습니다!”

“내가 심부름을 보냈는데……. 멈추면 더 늦어진다고 뛰어내렸네요.”

“이……!”

“경, 그리 화내지 말아요.”

“아뇨, 그냥 못 넘어갑니다. 락시 양이 돌아오면 꼭 제게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마차가 느려도 그렇지, 도로에서 뛰어내리다니! 그러다 말발굽에 밟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가씨, 꼭 보내주셔야 합니다!”

카프러스는 거의 이를 갈다시피 화를 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어서, 오드리는 몇 번이고 알겠노라 답을 해줘야 했다. 오드리에게서 대답을 듣고도 붉으락푸르락하는 낯빛을 보아하니, 이디케는 돌아와서 상상 이상의 잔소리를 뒤집어쓰게 생겼다.

죽상을 쓰는 이디케를 상상하니 번진 화장만큼 쌓여 있던 짜증이 일시에 해소되는 기분이라, 다이앤은 다시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예쁜 미소였다.

“다이앤,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야 저 혼자서 타우레드 후작가에 가시는 아가씨를 수행하는 건 처음인걸요. 이디케는 항상 저를 못 미더워했단 말이에요.”

“이디케는 그냥 걱정이 많은 거야. 너무 그리 마음 쓰지 않아도 돼. 방금도 보렴, 네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당연하게 맡기고 갔잖니.”

오드리가 이런저런 말을 하며 달래보아도 다이앤의 표정은 변하질 않으니, 그녀도 결국엔 지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오드리는 자세를 무너뜨리고 편안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만탈락에서 떠나온 지 벌써 반년인데, 도대체 너희는 언제 친해지는 거니?”

“이만하면 많이 나아졌지요 뭐.”

“하여간 입은 살아가지고…….”

대꾸가 어찌나 천연덕스러운지, 더 나무랄 기운도 없다. 오드리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까 내 실수 덮어줘서 고맙다. 이디케에게 잡혔던 부분은 괜찮니?”

“입술연지 번진 것쯤이야 다시 바르면 그만인데요. 하여간 아가씬 이디케에게 너무 무르세요. 걘 가끔 자기가 하녀가 아니라 아가씨 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군단 말이에요.”

“하하……. 젖형제로 함께 자랐는데 어떡하니. 나도 때때로 이디케가 내 쌍둥이 자매처럼 느껴지는걸.”

다이앤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혼날 일이라는 걸 알고 하는 짓이니, 오드리는 기꺼이 그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다이앤은 기껏 다시 바른 입술연지가 또 번진 걸 확인하고 울상을 지었다.

“입술연지쯤이야 다시 바르면 그만이라며?”

“그야 그렇지만 번거롭잖아요.”

오드리는 부리나케 화장을 고치는 다이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번거롭다, 번거롭다 말하면서도 다이앤은 치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보석을 좋아하되 소유욕이 없고, 연애도 남자도 싫어 결혼은 생각도 없다 하는 사람치고는 과할 정도였다.

“하녀에게 화장을 강요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꾸준하기도 하구나. 난 이놈의 백분을 안 바르고 살 수만 있으면 한 분기 수익쯤은 포기할 용의가 있는데.”

“아가씨, 그 말씀을 꼭 이디케 앞에서 해주세요. 그런 여유가 있었다니, 분명 치장 예산을 두 배로 늘리자고 할걸요. 걘 아직도 아가씨께서 왕자님 손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꿈을 못 버렸다니까요.”

“……으음, 어쩌나. 그 왕자님은 라디아타에게 관심이 있는데. 이디케가 헛꿈을 꾸는군.”

“그렇다니까요.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래요.”

공교롭게도 지금 멜브란트 왕국에서 왕자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고, 그는 무도회가 있을 때마다 라디아타에게 에스코트 신청을 하고 있었다. 비록 그때마다 매정한 거절을 당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매번 딱지를 맞는 왕자의 인터뷰가 신문에 시리즈로 실리며 가십이 되고 있긴 해도, 언젠가 그가 타우레드의 황금장미를 품에 안을 걸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여직 꿈을 꾸고 있다니, 이디케도 참 어지간했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고백에 대해서는 이디케에게 반드시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디케에게 셰비언은 셰비언 씨가 아니라 셰비언 놈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데 말해봐야 좋은 소리라고는 눈곱만큼도 못 듣고 잔소리만 뒤집어쓸 게 너무 분명했다.

‘다이앤은 내가 하는 일은 전부 옳다고 하니까 상담 상대가 못 되는데…….’

오드리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조언을 듣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은 폭력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자신을 파고들었다. 거기에 대뜸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어딘지 두려웠다.

오드리가 셰비언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대형 사건을 알 리 없는 다이앤은 오드리가 표정을 굳힌 이유가 이디케의 험담을 듣기 싫어서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디케를 향해 알고 있는 욕을 모조리 퍼부어준 뒤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화장은……. 화장을 해야 예전의 제가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기거든요. 맨얼굴은 싫어요. 집에서 쫓겨나서 길거리를 헤맬 때가 생각난단 말예요.”

“그런 이유라면야 어쩔 수가 없구나. 아예 염색을 해보는 건 어떠니? 지금의 고동색 머리칼도 예쁘지만, 화사한 금발이나 밝은 금갈색 머리칼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염색하면 손 많이 가요. 아가씨 머리카락이라면 모를까, 제 머리카락에 그런 정성을 쏟을 생각은 없어요.”

다이앤은 오드리의 초록색 머리칼을 아쉬움을 가득 담아 바라보았다. 저놈의 초록 염색! 오드리의 강요 아닌 강요에 밀려 만든 건데, 지금 생각하면 절대 못 만든다 바닥에 드러눕기라도 할 걸 그랬다.

오드리의 본래 체모는 아주 짙은 검은색이었다. 길게 길러 굽이치는 머리칼을 풀어놓고 빗질을 하면, 달 없는 밤에 떠오른 별빛을 품은 듯 근사하게 반짝거렸다. 차갑고 매끄러운 머리칼을 손에 쥐면 여름밤의 은하수를 손에 쥔 듯했다. 그랬었다.

짙은 초록색으로 염색을 하고도 그 윤기만은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지, 오드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테다.

“아가씨, 정말로 그 염색 안 빼실 거예요?”

“이렇게 초록색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 본다 했던 건 너란다.”

“제 입을 꼬집어주고 싶네요…….”

다이앤이 제 입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입술연지를 바르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마차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마부 칼과 카프러스는 꽉 막힌 도로 때문에 먹지도 않은 저녁이 다 얹히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필리아 거리는 예전부터 통행량이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막히는 건 처음이었다.

때마침 해를 가리던 구름이 자리를 비켜서는 바람에 노란 햇살이 도로 위로 쏟아졌다. 안 그래도 신경이 곤두서 있던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칼이 허겁지겁 말을 달래는 동안 카프러스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골목길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차라리 말을 타고 뒷골목을 가로지르는 게 빠르겠군.”

“베텔 경,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하고 입 밖으론 내지 말아주십시오. 아가씨께서 들으시면 진짜 저지르실까 봐 겁난단 말입니다.”

“미안하군. 하지만 계속 이 꼴이면 내가 말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상황이 될 걸세. 나도 하는 생각을 아가씨께서 못 하시겠나?”

“포모스시여……. 불쌍한 마부를 보살피시어…….”

창백해진 칼이 포모스를 향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카프러스는 그 포모스는 오드리 아가씨의 등에 올라타 있노라, 말을 보태려다 입을 다물었다. 인도 저 멀리에서부터 웬 아가씨가 정신없이 뛰고 있는데, 그 얼굴이 몹시 낯익었다.

“레이디 그웬……?”

카프러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지만, 그의 눈은 아주 멀쩡했다. 복잡한 사람들 틈을 헤집어가며 뛰는 사람은 틀림없는 네이기스였다.

하녀가 정성 들여 손질했을 적갈색 머리칼은 죄다 풀려 등 뒤에서 출렁거리고,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사랑스러운 외출복은 치마밑단이 바닥에 끌려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표정만은 태양을 품은 듯 환하니, 지나던 사람들이 저마다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카프러스는 네이기스를 쫓아오는 시중인이 어디쯤 있는지 확인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당혹스럽게도 그녀는 혼자서 필리아 거리의 인도를 내달리는 중이었다. 그는 황급히 마차로 통하는 창문을 열었다.

“아가씨, 그웬 영애께서 인도를 가로질러 뛰고 계십니다.”

“……음? 그 애가 왜요? 타우레드 후작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사정은 모르겠지만, 시중인이 보이질 않습니다.”

오드리도 다이앤도 놀랐다. 황급히 마차의 창문에 달라붙었지만 보이지 않아 아예 마차의 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다. 카프러스만큼 눈이 좋지는 않았지만 길을 가던 사람들이 네이기스를 위해 몸을 비키고 있는 덕에 쉬이 알아보았다.

네이기스는 정말 잘 뛰었다. 코르셋을 단단히 조인 데다 무거운 외출 드레스를 입고 굽 높은 구두를 신었을 텐데도, 마치 발목에 날개가 돋은 것처럼 달렸다. 전쟁의 신 벨트람이 부리는 전령새가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는 듯했다.

계속 마차의 문을 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드리는 마차의 문을 닫고 마부석으로 통하는 창문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칼, 한 마리만으로 마차를 끌 수 있나?”

“어림도 없습니다!”

오드리가 하려는 말을 짐작한 칼이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말 네 마리가 끄는 사두마차라면 모를까, 이건 이두마차였다. 사람 넷에 마차 하나. 마차 끄는 말이라도 귀족가의 말인데 짐마차 끄는 노새처럼 죽을 고생을 시킬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네이기스에게 말을 빌려줄 수 없다면,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카프러스를 바라보았다.

“베텔 경! 경이 언제나 내 걱정에 몸이 닳는 걸 알지만, 이번만은 부탁하지 않을 수 없네요. 네이기스를 좀 챙겨주겠어요? 마침 필리아 거리고 하니, 그리 어렵진 않을 거예요.”

카프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드리가 굳이 필리아 거리를 언급한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로렐라이 상단의 브란젤 지점에서 말을 빌려서 네이기스를 수행해 달라는 말이었다.

에스코트 기사가 필요 없는 소박한 모임에 가는 오드리와, 외출복을 입고 혼자 거리를 내달리는 네이기스. 어느 쪽이 더 카프러스를 필요로 하는지는 명백했다. 그를 뻔히 알면서도, 모시는 아가씨는 오드리라는 핑계를 대고 싶어 혀뿌리가 간질간질했다.

“경.”

대답을 기다리는 초록색 눈동자가 팔다리를 옭아맸다. ‘상대를 가려가며 주장할 정의라면, 가슴 안에 넣어두고 꺼내지 말아요.’ 언젠가 그녀에게서 들었던 말이 시간 맞춰 울리는 시계탑의 종소리처럼 귓가를 울렸다.

카프러스는 지극히 기사다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오드리는 그가 아가씨의 곁을 떠날 수 없다며 완고하게 굴기보다 네이기스를 돕겠노라 기사답게 나서기를 바라는 걸 알기에. 아무리 내키지 않는다 한들, 그게 그녀의 기쁨이 된다면 그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곧 따라가겠습니다.”

“고마워요. 경이라면 믿을 수 있죠. 네이기스를 잘 부탁해요.”

믿을 수 있다, 믿는다. 다디단 말에 움찔거리는 입매를 혹여 들킬까, 카프러스는 훌쩍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길을 건넜다. 조금 전에 같은 짓을 한 이디케를 나무랐던 일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오드리는 카프러스가 네이기스의 앞을 막아서서 동행을 청하는 모습을 창문을 통해 바라보았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다시 뛰려던 네이기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손을 잡는 것까지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그래도 타우레드 영애께서는 사유를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라디아타는 눈도 귀도 밝으니까…….”

사교계의 보석, 타우레드의 황금장미는 놀라울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미모와 드높은 신분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이지. 만약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지금쯤 타우레드 후작가는 치열한 후계 다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만. 라디아타에게 셰비언 얘기를 해 볼까? 왕자전하께서 관심 두는 걸 알면서도 구혼자가 넘쳐 난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좋은 조언을 해줄지도 몰라.’

오드리가 남몰래 라디아타에게 말을 전할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하는 동안, 마차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교통정체를 일으키고 있던 원인이 제거된 모양이었다.

오드리 일행은 몰랐지만, 마차가 그리 밀린 이유는 필리아 거리 끄트머리께 도로 한가운데에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구멍 때문이었다. 마차 한 대 쯤은 꿀꺽하고도 남을 정도로 크고 깊은 구멍이라, 끝내 왕실 마법사들까지 불려오고 나서야 일이 해결됐다.

하나같이 눈 밑이 퀭한 왕실 마법사들은 도로를 메우자마자 또 다른 곳엘 가봐야 한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도로는 물론이고 가로등, 상하수도, 기차역 등 왕실 마법사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 왕왕 있었다.

어쨌건 때맞춰 도로가 수리되고 칼이 최선을 다해 노력해 준 덕분에, 오드리는 너무 늦지 않고 타우레드 후작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디아타는 평소보다 더 환하고 예쁘게 웃으며 오드리를 맞았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낯빛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오드리를 잡아끌었다. 뛰다시피 걸음이 빨랐다.

“라디아타, 어딜 가는 거예요? 오늘은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잖아요?”

“알아요, 알아. 그 전에 잠깐만 시간 좀 내줘요.”

타우레드 후작가의 수도 저택은 헨젤 백작가보다 부지가 더 넓은 데다, 건물이 한 채 더 있었다. 그중에서도 어떤 건물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동떨어진 작은 건물이 라디아타의 목적지였다. 난데없이 정원을 가로지르게 된 오드리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라디아타!”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바로 저기예요. 저 조그만 건물이요.”

오드리는 흘끗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라디아타는 조그만 건물이라고 했지만, 그건 그녀의 기준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목적지에 다다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건물 안에 들어서서도 긴 복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브란젤식 여성용 구두는 바닥이 딱딱하고 굽이 높아 빨리 걷거나 뛰는 데에 적합하지 않았다. 오드리는 점점 걸음이 느려지는데, 라디아타는 비슷한 높이의 구두를 신은 데다 코르셋을 꽉 조이고도 기가 막히게 잘 걸었다.

“윽, 라디아타, 제발 좀, 천천히……! 그 구두를 신고 대체 어떻게 그렇게, 으윽, 걷는 거예요?”

“어느 무도회에 가든 춤 신청을 연달아 다섯 번쯤 받는 게 일상이 되면 나처럼 돼요.”

“나한테는 해당 없는 얘기잖아요!”

“어머, 오드리. 나랑 어울리면서 기껏 쌓아둔 악명이 꽤 희석됐다는 걸 모르는군요? 아, 하긴 요즘은 큰 사교모임이 없었죠. 가을 무도회를 기대해 봐요, 난 오드리가 춤 신청을 열 번 넘게 받는다는 거에 저번에 맞춘 오팔 귀걸이를 걸 수도 있거든요. 오, 다 왔어요! 바로 저기예요!”

라디아타는 발가락이 아픈 오드리가 원망스레 바라보는 시선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휘청거리는 오드리를 끌고 복도의 끝에서 방향을 꺾은 순간, 오드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간이 그들을 반겼다.

아치형의 문틀에는 문이 없었다. 그러나 어두운 복도와 문틀 너머에 가득한 빛이 완벽하게 두 공간을 분리했다. 떠밀리듯 빛 속으로 발을 들여놓은 오드리는 이토록 환한 빛을 내는 마법등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유리천장……?”

목을 한참 꺾어야 하는 드높은 천장에는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았다. 그저 둥그런 유리 돔이 천장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돔을 지탱하는 철골의 형태가 마치 활짝 피어난 연꽃 같았다. 그 너머에서 구름을 벗어난 해가 뿌리는 빛이 홀을 밝혔다.

홀 바닥에는 색이 다른 대리석을 써서 모자이크로 표현된 사자가 앉아 있었고, 그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기둥이 솟아 있었다. 그 끝에는 과연 전장의 사자가 섬길 법한 신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전쟁과 승리의 신 벨트람, 죽음의 신 칼레이, 행운의 신 포모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 호사스럽고 화려한 홀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일반적인 가문이라면 응당 본관에 연결해 가문의 성세를 과시하는 데에 썼을 법한 이 홀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예술품이라는 사실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신이 떠받치는 유리천장에서 쏟아진 빛이 사방으로 산란하여 기둥 사이의 벽에 걸린 그림들과 곳곳에 놓인 조각들을 빠짐없이 비췄다. 예술가의 영혼 일부를 담은 듯 반짝이는 작품들이 한데 모여 은하수처럼 사람을 홀리며 타우레드의 재력과 역사를 과시했다.

몸이 짓눌리는 듯 강렬한 압박 속에서 오드리는 욱신거리는 발의 통증마저 잊고 그저 감탄했다. 이제까지 예술은 그저 즐기기 위한 여흥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녀에게, 이 홀은 생경하고 놀라운 공간이었다.

빳빳하게 굳은 입술을 핥으니, 혀끝이 아릿해지며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라디아타가 친근하게 오드리의 손을 잡아왔다.

“아름답죠? 어린 시절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예요.”

“라디아타가 왜 그렇게 그림에 관심이 많은지 알 것 같긴 하네요. 이런 걸 보고 자랐으니 그럴 수밖에요.”

“후후……. 이 홀의 빈자리에 내가 후원하는 화가의 작품을 거는 게 내 소원이랍니다. 그나저나 오드리, 이리 와봐요. 이 그림, 어때요?”

“음…….”

라디아타가 굳이 오드리를 앞에 세워두고 어떠냐 물은 그림은, 한 가족의 초상화였다.

여윈 뺨을 지닌 어두운 눈매의 여자가 천에 감싸인 갓난아이를 안고 의자에 앉아 있고, 의자 뒤에는 당당한 어깨를 편 남자가 그녀를 지키듯 서 있었다. 그들의 곁에는 어린 남자아이 둘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가 양친을 꼭 닮아 사랑스러웠다.

“라디아타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그린 그림인가 보죠? 벨키스 경은 젊은 시절의 타우레드 후작님과 많이 닮았네요. 보티안 씨는 두 분을 섞어놓은 듯 닮았고, 라디아타는 후작부인을 닮았어요. 남매가 참 개성 있게 얼굴이 다르다 했더니 그럴 만해요.”

“……오드리도 이 그림을 보고 둘째 오라버니가 떠올라요? 하나도 안 닮았잖아요!”

라디아타가 그림을 찌를 듯 손가락질을 했다. 그 말이 맞긴 한 것이, 초상화 속 어린 시절의 피올은 지금의 얼굴로 자랐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귀여웠다. 통통한 뺨, 순진한 표정, 어머니의 옷자락을 꼭 쥔 작은 손. 오드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얼굴이야 좀 다르지만, 타우레드 후작가의 가족 초상화인데 보티안 씨를 생각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누구에게 또 이 그림을 보여줬기에 ‘오드리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웬 영애에게 보여줬지요. 보자마자 보티안 씨? 하고 알아보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네이기스에게요? 왜요?”

“왜긴요! 여긴 타우레드에서 후원받는 화가들이라면 다 한 번씩은 거치는 곳이라고요.”

오드리는 침음성을 흘리며 미간을 좁혔다. 다 거치는 장소인데 네이기스만 예외로 둘 순 없었다는 말에 뭐라 타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그림 속의 피올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실 피올이 양친을 섞어놓은 듯 닮았다는 말은 다 자란 지금의 얼굴을 생각해서 한 빈 말이지, 저 서너 살배기 어린애 얼굴 그림을 보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저 어린애의 얼굴에서 피올을 떠올린 네이기스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있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보티안 씨가 타우레드의 둘째 공자라는 걸 아니까 단박에 알아본 거지, 이 그림만 봐서는 지금의 보티안 씨와는 도저히 연결 짓지 못할 거 같거든요. 혹시 라디아타가 무심결에 보티안 씨가 타우레드의 둘째라고 말을 흘렸던 거 아닐까요?”

“오드리도 많이 놀라긴 했나 봐요. 그런 이상한 말을 다 하고. 오라버니에게 사실을 밝혀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건 오드리뿐이에요.”

라디아타는 바로 오드리의 추측을 부정했고, 오드리는 자신의 실수를 사과했다. 라디아타는 입 밖으로 낸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귀족이었다.

“그웬 영애는 이 그림을 보고 난 뒤로는 뭔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되어서, 시선은 허공을 헤매는 데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도무지 듣는 거 같지가 않았어요. 하마터면 치맛자락을 밟아서 넘어질 뻔했다니까요.”

“세상에…….”

“그대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을 거 같아서 나중에 다시 보자하고 돌려보냈어요. 그래도 너무 마음에 걸리지 뭐예요. 대체 어떻게 알아봤을까요? 정말 화가의 눈이라는 건 뭔가 다른 걸까요?”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본 네이기스는 하녀도 시중인도 없이 필리아 거리를 뛰고 있었는데, 라디아타는 마치 제대로 마차에 태워 그웬가로 보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돌아가던 중간에 마차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했나? 대체 왜? ……설마, 보티안 씨가 라디아타에게 다리를 놔줬다는 걸 알아챈 건가?’

라디아타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아마도 그 추측이 사실에 가까울 터이다. 오드리는 화가의 안목이니 뭐니 하는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라디아타를 아연히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라디아타는 네이기스가 피올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셋이 있을 때 피올을 화제로 삼은 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라디아타 앞에서의 네이기스는 그저 그림에 열정적인 귀족 출신 화가였다.

“어, 라디아타……?”

“왜요?”

“네이기스는 보티안 씨를 좋아해요.”

“……네?”

“아마 보티안 씨도 알고 있을 거예요. 일단 나부터 네이기스에게 여지주지 말라고 경고한 적도 있고요.”

난데없는 얘기에 라디아타는 뭐라 말도 꺼내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좀 전에 그렇게 걸으면서도 갑갑한지 몰랐던 코르셋이 숨통을 꽉 조이는 게 느껴졌다. 숨을 마시는 것도 뱉는 것도 힘들어지면서 눈앞의 풍경이 마구 뒤섞이기 시작했다.

“아까 네이기스가 필리아 거리를 혼자 달리고 있는 걸 봤어요. 뒤따르는 시중인 하나 보이질 않기에 베텔 경에게 보호를 부탁했어요.”

“…….”

“내 생각이지만, 네이기스는 분명 보티안 씨를 만나러 갔을 거예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고백을 하려는 걸지도 모르죠. 뭐, 보티안 씨는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잘 거절할 거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네이기스죠……. 라디아타, 부탁인데…… 라디아타? 괜찮아요? 라디아타!”

두 손을 배 앞에서 맞잡고 서 있던 라디아타가 푹 주저앉았다. 오드리는 깜짝 놀라 라디아타를 부축하고 등을 쓸었지만, 라디아타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렸다. 안 그래도 우유처럼 흰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고, 힘 빠진 손이 미끄러졌다. 보석 같은 자안이 눈꺼풀 너머로 숨어들었다.

“빌어먹을 코르셋!”

오드리는 허겁지겁 라디아타의 드레스 끈을 풀고 코르셋도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자 라디아타가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번쩍 눈을 떴다. 그 짧은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그런데 쓰러지면서 어딘가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라디아타는 숨을 되찾고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드리는 벌떡 일어났다.

“하녀를 불러올게요. 잠깐만 여기 있어요.”

라디아타는 고개를 들어 올릴 힘도, 소리쳐 오드리를 잡을 힘도 없어 그저 가만히 누워 유리천장을 바라보았다. 연꽃처럼 펼쳐진 철골 너머의 하늘엔 서서히 구름이 끼고 있어서, 파란 부분이 점점 줄고 있었다.

그녀는 기형적으로 휘어진 갈비뼈를 더듬거리다 킥,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는 한순간에 불과한 감정의 격류조차 감당해 내지 못하고 픽 쓰러지고 말았다. 감정 조절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오드리를 걱정시켰다.

‘네이기스 그웬…….’

그림 이외의 일에는 그저 얌전하게 굴던 네이기스가 과감한 일탈을 저질렀단 말을 듣는 순간, 이제껏 겪어본 적 없던 격렬한 질투가 온몸을 휩쓸었다. 도대체 그녀의 어깨는 얼마나 가볍기에, 뒷일은 생각도 않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싶어서.

어리석었다. 귀족 신분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네이기스의 어깨가 충분히 무겁다는 걸 알면서, 무의식적으로 제 것과 비교하고 멋대로 판단해서 부러워했다. 인간이란 누구나 제 등에 진 짐이 가장 무겁고 제가 겪은 불행이 가장 끔찍하다 호소한다더니 그 말 그대로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 라디아타.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거 알잖아…….’

라디아타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천천히 되짚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단 하루를 살아도 좋으니 그런 미모와 가느다란 허리를 가져 보고 싶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고, 타우레드의 그늘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신발 밑창을 핥기라도 할 것처럼 구는 사람도 얼마든지 보았다.

날 때부터 쥐고 태어난 것들이 하나같이 귀한 보물이며, 소소한 굴곡이야 있을지언정 충분히 축복받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아 비극 없는 삶이 어디에 있을까. 한번 끓어오른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그녀를 괴롭혔다.

저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발소리가 바닥을 타고 진동으로 먼저 전해져 왔다. 고용인들을 죄다 물려놓았으니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오드리의 발이 생각 이상으로 빨랐던 모양이었다.

라디아타는 무거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질투와 오래된 열등감의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게 틀림없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구두굽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익숙한 향수 냄새. 라디아타는 저도 모르게 팔을 내리고 얼굴을 확인했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라버니가 왜 여기 있어요?”

“발 달린 화분이라 좀 돌아다녀 봤다. 어차피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설마 나 몰래 뒤따라 다니기라도 한 거예요? 그래요?”

“무슨 소리야, 난 그냥 정원 구경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날 더운데 나무그늘이 참 시원하더라.”

라비린은 개도 안 믿을 변명을 주절대며 라디아타를 안아 올렸다. 라비린의 바로 곁에 오드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기 때문에, 라디아타는 차마 라비린을 더 나무라지 못하고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잠깐 눈을 뗀 사이 쓰러져서 돌아온 라디아타 때문에 타우레드의 저택은 발칵 뒤집혔다. 의사가 급히 불려오고, 간호에 능숙한 하녀들이 라디아타의 방을 차지했다. 어린 시절에는 툭하면 픽픽 쓰러지곤 했던 탓에 다들 무슨 매뉴얼이라도 있는 듯 대처가 능숙했다.

“오드리, 미안해요. 부른 건 나인데 내가 이렇게 쓰러져서…….”

“뭘요, 라디아타는 몸이나 잘 챙겨요. 그놈의 코르셋은 꼭 불태워 버리고요.”

오드리는 라디아타의 코르셋에 대한 적대감을 아낌없이 표출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라디아타는 살을 더하고 코르셋을 빼야 했다. 창백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장밋빛으로 생기가 도는 라디아타의 뺨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펄펄 끓었다.

그러니 코르셋을 불태워 버리라는 말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건만, 라디아타는 그저 웃기만 하고 약속을 해주지 않았다. 오드리는 그게 또 못마땅하여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코르셋을 차야 예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얼마나 많은데요. 타우레드의 황금장미라는 별명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그놈의 예쁘다 소리 들으려다가 숨넘어가겠어요.”

“어머, 그 정도로 죽을 거였으면 벌써 예전에 죽었어요. 그보다 오드리, 아까 하다가 내가 쓰러지는 바람에 끝맺지 못한 부탁이 있었죠? 마저 해 봐요. 이젠 잘 들을 테니까.”

라디아타가 귀 옆에 손을 가져다 대고 눈을 깜빡거렸다. 어린애나 할 법한 깜찍한 동작이건만, 워낙에 얼굴이 미형인지라 그런 것조차 잘 어울렸다. 오드리는 잠시나마 걱정도 잊고 웃고 말았다.

“별말 아니었어요. 혹시 네이기스가 풀 죽어 찾아오면 잘 대해달라고 할 셈이었거든요. 아마 라디아타보다는 나한테 먼저 올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그야 그렇겠죠. 나보다는 사촌인 오드리가 훨씬 가까울 테니까요. 그나저나, 하려던 말은 그게 전부예요?”

라디아타가 오드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냥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오드리의 속을 샅샅이 파헤치려는 듯 날카로웠다.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오드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그게 전부일 리가 있나. 네이기스의 일이 신경 쓰여 죽겠고 쓰러진 라디아타 때문에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셰비언의 얼굴이 머리 한구석에서 떠나지가 않고 있으니, 라디아타의 조언이 정말로 절실했다.

“그게 전부예요.”

하지만 오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라디아타의 방에는 열 명이 넘는 하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미간을 잔뜩 찡그린 의사까지 곁에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낯이 두꺼운 오드리라도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리가 항구에서는 계속 붙어 있을 텐데……. 그때 얘기하면 되겠지.’

클로드가 두 사람이 꼭 휴가를 함께 보냈으면 좋겠다고 압력을 넣을 땐 그렇게 욕을 했는데, 이제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오드리는 상대적으로 시선에서 자유로운 리가 항구에서 느긋하게 라디아타와 대화할 생각에 부풀었다.

“라디아타는 누워서 쉬어요. 계속 이렇게 앉아 있다간 나을 것도 안 낫겠어요.”

“다들 호들갑을 떠는 거예요. 난 벌써 멀쩡한걸요.”

라디아타는 고개를 저으며 제 몸이 멀쩡함을 주장했지만, 방 안에 있는 누구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휴가 준비를 하다가 불려온 의사는 더했다. 오드리와 라비린은 더 이상 환자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며 방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오드리는 라비린과 함께 복도로 밀려나고 나서야 그가 라디아타에게 말 한마디도 못 붙였다는 걸 깨달았다. 라디아타가 워낙 자연스럽게 그를 무시한 덕분이었다. 남매간에 사이가 나쁘다는 말은 들은 적 없는데, 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오드리는 그에게 뒤늦은 예의를 차렸다. 조금 전엔 너무 당황한 탓에 인사고 뭐고 할 시간도 없이 그를 끌고 건물 안으로 달렸던 것이다.

“벨키스 경. 조금 전에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좀처럼 고용인을 찾지 못해 당황했었거든요. 경을 만난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라디아타가 혼자 있을 때 쓰러졌다면 어떻게 됐을지……. 레이디 헨젤께서 옆에 계셔서 정말로 다행이었습니다.”

본래 라디아타가 혼자 있는 순간은 잠드는 때 말고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녀는 오드리에게 그 그림을 조용히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곁에 있던 하녀들을 전부 물렸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라비린은 입에 발린 말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는 오드리를 향해 다른 제안을 했다.

“깜짝 놀라셨을 텐데, 이대로 보내드리려니 민망하군요. 후작가의 온실을 열어 드릴 테니, 잠시 쉬다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

“아픈 동생 대신 제가 말동무를 해드리겠습니다. 부족하겠지만 부디 사양치 말아주십시오.”

오드리는 라비린이 더 없이 신사적으로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교모임에서 늘 그랬듯 홱 거절해 버릴까 고민도 해봤지만, 그가 라디아타의 오라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그녀는 차마 거절을 말하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누워 있는 라디아타가 문 밖의 상황을 알았다면 회복이고 나발이고 벌떡 일어나 둘을 떼어놨겠지만, 안타깝게도 후작저의 문은 두꺼웠고 라디아타는 피올과 네이기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둘째 오라버니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화가를 소개했나 했더니…….’

라디아타가 아는 아베드 타우레드, 피올 보티안은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은 남자였다. 비록 기사의 길을 걷겠다며 열세 살에 가문을 나가는 바람에 직접 얼굴을 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편지 교류는 여전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피올이 네이기스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녀를 지원하려고 결벽적으로 멀리하던 과거의 인연을 이용할 생각까지 한 걸 보면 피올 본인도 어느 정도 감정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오드리는 피올이 사리분별을 잘할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라디아타는 그 생각에 퍽 회의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행동력을 갖춘 낭만주의자였다. 검에 그랬듯 사랑에도 저돌적일지 누가 알까.

라디아타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 여름휴가 시즌이었다. 귀족들 대부분이 휴가를 떠나서 브란젤의 사교계가 텅텅 비는 계절이고, 가을 전시회를 위해 화가들이 전력을 다하는 때이기도 했다.

‘아주 조금만, 등을 떠밀어볼까.’

오드리는 라디아타와 피올 사이의 우애의 깊이를 간과했다. 라디아타는 제 둘째 오라비를 위해서라면 신분 차이 나는 사랑 정도야 세기의 로맨스로 포장해 팔아치울 자신이 있었다.

네이기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력한 우군을 얻은 셈이었다.

모르는 사이 라디아타를 등에 업은 네이기스는 카프러스와 나란히 말을 타고 필리아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낮에 대로를 걷는 말에 놀란 사람들이 휙휙 고개를 돌리다가 카프러스의 시선을 받고 얌전히 제 갈 길을 갔다.

“베텔 경, 조금만 빨리 가면 안 될까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달리시겠다는 겁니까?”

카프러스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대꾸에도 네이기스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마차는 안 된다고 굳세게 주장하더니만, 정말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다리는 얌전히 한쪽으로 모으고 앉아 있었지만 고삐를 쥔 손이 어쩔 줄 모르고 움찔거렸다.

‘누가 오드리 아가씨 사촌 아니랄까 봐…….’

하긴 대뜸 찾아와 시곗줄을 디자인하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아무리 초대를 했다지만 그날로 찾아와 엉덩이를 붙였던 것도 그렇고, 네이기스도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평소의 행실이 워낙 얌전하고 예의발라 제멋대로 착각한 것이지.

“목적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시면 제가 빠른 길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아, 어떡하지, 하필이면…….”

죄 없는 말갈기만 쥐어뜯던 네이기스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불타는 첫사랑에 눈 먼 열여섯 아가씨는 피올의 순찰 시간과 코스, 근무 일자를 줄줄이 외고 있었다. 바로 목적지를 말하려던 네이기스는 불현듯 떠오른 사실에 사색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피올은 비번이었다.

카프러스는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린 네이기스의 표정을 보니 나름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급하게 구는 이유도 알 만했다. 그웬가에 그녀의 일탈이 알려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중일 테다.

“혹시 목적지가 사람입니까? 예를 들어……. 보티안 씨라든가?”

네이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등을 떠미는 초조함이 그녀를 솔직하게 만들었다.

“……네. 방금 떠오른 건데, 그분은 오늘 비번이세요. 경께는 죄송해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히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괜찮습니다, 제가 아니까.”

피올은 그 붙임성에도 불구하고 다니는 곳이 한정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단골 음식점 몇 군데, 서점이나 마시장, 그도 아니라면 치안대원들이 주로 가는 술집들을 뒤지면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베텔 경이 그걸 어찌 아세요? 두 분 많이 친하세요?”

“안 친합니다. 어쩌다 보니 자주 마주쳐서 아는 겁니다.”

“아, 네…….”

카프러스의 대답이 어찌나 단호한지, 반가워 한껏 톤이 높아졌던 네이기스의 목소리가 다시 수그러들었다. 그녀는 앞서 가는 카프러스를 놓칠세라 허겁지겁 말을 몰았다.

카프러스는 정 못 찾으면 피올이 하숙한다는 집의 대문을 두드릴 생각까지 했는데, 그런 각오가 무색할 정도로 쉽게 피올을 찾아냈다. 카페 디노에서 마법사들과 어울려 뭔가 신나게 떠들고 있던 피올은 난데없이 나타난 카프러스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베텔 경, 당신은 어째 그렇게 나랑 다니는 곳이 똑같아? 혹시 나를 따라다니는 건가?”

“보티안 씨 당신은 여전히 자의식 과잉이군. 잠깐만 나와.”

“싫은데. 정 볼일이 있으면 여기서 하면 되잖아? 왜, 여기 이 친구들 앞에서는 못할 말인가 보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꼰 채 발을 까닥대는 피올은, 그 잘생긴 얼굴을 확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재수가 없었다. 카프러스는 여기서 네이기스의 이름을 대면 저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했다. 얼굴을 붉힐까, 당황할까, 아니면 정색할까.

피올은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프러스에게서 심상찮은 기색을 감지했다. 평소 과묵한 편이긴 해도 일단 시비가 붙으면 아낌없이 입을 놀리는 사람이 저렇게나 조용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는 재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이,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내 술 남겨놔.”

“엉덩이 뗐으면 끝이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냐?”

“이왕 뗀 엉덩이, 술값 낼 때까지 안 돌아오길 바란다면 마셔도 돼.”

“쳇…….”

피올의 잔을 향해 욕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던 마법사들이 꼼지락대던 손을 치웠다. 피올은 카프러스를 질질 끌고 카페 디노를 나섰다.

“대체 왜 온 건데? 아가씨 심부름 다니는 건 당신 몫이 아니었잖아? 왜, 락시인지 몰리인지하는 하녀들 중 하나랑 임무를 바꾸기로 했어? 그도 아니면 일일하녀체험 중이라든가?”

피올의 빈정거림 따위야 이미 익숙해서,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카프러스는 밝은 햇살 아래에서 피올의 차림을 쭉 훑어보았다.

가슴팍이 다 보이도록 풀어헤친 셔츠는 구깃구깃했고,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맷자락 아래로는 흉터투성이 팔이 다 드러났다. 머리는 감았는지 안 감았는지 모르겠는데 어째 평소보다 윤기가 도는 게 안 감은 것 같고, 잠을 못 잤는지 술을 너무 처먹었는지 눈 밑 그늘이 짙었다.

전체적으로 못 봐줄 몰골은 아닌데 그렇다고 귀족영애의 앞에 내놓을 만한 꼴은 아니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따라와.”

“어, 뭔데? 뭔데 이래?”

피올은 일언반구 없이 앞장서는 등에 불쾌해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하나 그 순순하다는 게 입까지 해당되는 건 아니어서, 카페 디노를 비롯해 음식점과 술집이 밀집된 거리를 지나 근처의 작은 공원에 진입하는 순간까지 카프러스는 부단히 인내심을 함양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체 뭐냐니까? 사람을 갑자기 불러낸 것도 모자라 더워 죽겠는데 이렇게 멀리까지 끌고 오고 말이야. 저 말들은 또 뭔데? 어디 가야 되는 건가? 그것도 말까지 타고? 나 내일 근무인데? 이거 사람을 너무 험하게 부리는 거 아냐?”

“셔츠 단추나 잠가.”

네이기스가 말 두 마리를 경비원 삼아 사철나무 뒤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단추를 잠그라는 조언은 카프러스가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그 자비가 들어 먹혔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었지만.

“내 가슴팍이 어때서?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하게 잘 빠진 몸인데 좀 드러내 놓고 다녀……도…….”

자랑하듯 셔츠 앞섶을 쥐고 흔들던 손이 우뚝 멎었다. 잎 끄트머리가 노란 황금사철나무 뒤에 숨어 있던 네이기스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엉성하니 비뚤게 꽂힌 머리장식 아래로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려 팔랑거렸고, 우아함을 한껏 강조한 외출 드레스 여기저기에 주름이 잡히고 먼지가 묻었다. 귀족영애다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말갛게 웃는 뽀얀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었다.

피올은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지만, 그런다고 눈앞의 네이기스가 사라지진 않았다. 너무 따가워서 짜증을 부추기던 햇살은 그녀의 어깨를 장식하는 망토 같았고, 귀찮게 거치적대던 풀잎은 그녀를 돋보이기 위한 무대 위의 소품 같았다. 분명 라디아타를 소개해 주면서 마음에 얹혀 있던 돌을 치워 버렸을 텐데, 그랬을 텐데…….

카프러스가 네이기스의 손끝에 입을 맞추고 몇 마디 말을 나누는 것도, 아주 자연스레 말고삐를 쥐고 옆에 서는 것도 지금의 피올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급히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맷자락을 내렸다. 구깃구깃한 주름은 몇 번 문질러 보다 금세 포기했다. 더 문질러 봐야 손때만 탔을 테니 현명한 행동이었다. 대신 엉망으로 헝클어졌을 머리칼이라도 어떻게 해 보려는데, 카프러스가 노린 것처럼 타박을 놓았다.

“보티안 씨, 레이디 그웬께 인사하지 않고 뭐 합니까?”

저 나쁜 새끼. 죽일 놈의 새끼.

피올은 온 진심을 다해 카프러스를 욕했다. 물론 속으로만.

흠잡을 데 없는 예절로 네이기스의 손끝에 입을 맞추는 그는 전혀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네이기스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어쩜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이신 걸까…….’

서둘러 셔츠를 잠그는 모습도, 팔뚝까지 올렸던 소맷자락을 내리는 모습도 네이기스의 눈에는 그저 멋져 보였다. 타우레드 후작가를 박차고 뛰쳐나가 산트렘의 기사가 되고, 그마저도 벗어던지고 치안대원이 된 사람이지 않은가. 흐트러진 모습은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갈색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춰지는 게 황홀했다. 선물도 마음도 부담스럽다, 거절을 당한 이후로는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서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실은 아직 마음을 접지 못했다, 자꾸만 당신이 떠오른다, 말하고 싶지만…….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자꾸 웃음이 새는 낯을 다스렸다. 새삼 사랑 고백을 하려고 이렇게 그를 찾은 게 아니었다.

네이기스는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왼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살짝 쥐어 들고, 오른손으로는 심장이 뛰는 가슴팍을 눌렀다. 지극히 정중하게 자신을 낮추는, 왕족 앞에서나 할 법한 인사였다.

“레이디 그웬?”

난데없이 극상의 예를 받은 피올은 크게 당황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자기도 모르게 네이기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화들짝 떼어내기까지 했다. 네이기스는 피올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절 놀리려고 하신 거라면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감사해요.”

“네?”

네이기스가 웃었다. 옅은 초록색 눈동자는 햇살을 머금고 금빛으로 반짝이는데, 기쁨과 감사와 온갖 좋은 것들로 뺨을 붉게 물들이고는 꽃 같은 입술로 감사를 말했다. 피올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 뒤를 들으면 안 돼. 그랬다간 벗어날 수 없게 될 걸.

그러나 다리는 저주라도 걸린 듯 굳어 움직이지 않고, 입술은 접착제라도 발린 듯 떨어지질 않았다. 그는 무력하게 서서 네이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했다.

“제가 그림에 빠져 있다고 오드리 언니에게 말을 흘린 사람도, 타우레드 후작영애께 제 후원을 부탁한 사람도 보티안 씨였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 감사해요. 제 등을 떠밀어주셔서, 망설이는 걸음에 빛을 비춰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네이기스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올은 자신이 아니라 부정해 봤자 조금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걸 깨달았다. 오드리도 이디케도 실수로라도 입을 열 사람들이 아닌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들킨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홀의 그림을 보았어요. 보티안 씨, 제가 비록 아둔하긴 해도 멍청하지는 않답니다.”

피올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야 어떤 변명을 대든 네이기스더러 멍청하다 비웃는 말이 되게 생겼다. 그럴 거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나았다.

침묵을 택한 피올을 향해 네이기스가 한 걸음 다가섰다. 피올은 무심결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그가 물러서는 만큼 네이기스가 다가오는 통에 얼마 못 가 멈추고야 말았다.

“대체…… 무얼 바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훌륭한 시곗줄과 그림을 선물받은 답례였을 뿐입니다.”

“딱 한 마디만 해주시면 돼요.”

피올은 가만히 네이기스를 바라보다 마치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기스는 꿀꺽 침을 삼키고 내내 생각해 왔던 말을 꺼냈다.

“제가 화가로 성공할 거라고 말해주세요.”

“…….”

“붓을 든 이후로, 제가 잘될 거라고 말해준 사람은 굉장히 많았어요. 모두 감사한 말이었고, 들을 때마다 힘이 났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 보티안 씨가 말해주는 걸 듣고 싶어요.”

꽉 움켜쥔 피올의 주먹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 순간 네이기스의 바람을 들어주는 건 그녀에게 여지를 주는 행동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녀의 소망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성공하실 겁니다. 대단한 화가로 역사에 남으실 거고요.”

쥐어짜듯 토해놓은 격려이건만, 네이기스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햇살을 품고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에 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긴 속눈썹 가닥마다 눈물을 매단 채 여름날의 해처럼 웃었다.

“제가 지금 얼마나 큰 용기를 얻었는지……. 보티안 씨는 모르실 거예요.”

“…….”

“고마워요.”

그걸로 끝이었다. 네이기스는 피올에게 더 많은 말을 해달라고 보채지도 않고, 곁에 있어달라고 하지도 않고, 어떤 감정도 바라지 않은 채로 돌아섰다. 그녀는 카프러스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오르자마자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공원을 떠났다.

해마다 오던 태풍도 올해엔 잠잠하건만, 피올은 태풍에 휩쓸린 조각배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이기스와 대화하는 내내 카프러스가 곁에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네이기스가 자리를 뜨고도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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