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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셰비언의 고백 (12/62)

chapter 11. 셰비언의 고백

「“저주받을 바일런! 그놈은 천재가 아니라 악마야! 악마가 아니면 연구서를 이따위로 남길 수는 없는 거라고! 염병할 새끼!” - 마법동력 개량을 연구하던 마법사의 비명」

오드리는 메시지 장치의 놀라움에 할 말을 잃었다. 세상을 바꿀 물건을 만들어냈다며 빨리 오라고 그렇게 재촉을 해대더니,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을 줬어야지!

딸깍딸깍. 딸깍딸깍.

그녀가 침을 삼키며 장치를 노려보고 있는 사이에도 장치에서는 끊임없이 종이쪽지가 튀어나왔다. 다이앤이 워커의 옆구리를 찔러가며 보내는 메시지들이었다. 두 사람은 지하연구실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워커의 살림집에 있었다.

<이거 정말 보내지긴 해요? 아가씨, 제 메시지가 보이>

<이디케가 고용한 하녀, 솜씨가 좋네요. 이디케, 얼마>

<아가씨, 우리 저녁에 외식하면 안 돼요?>

<요즘 브란젤 날씨가 꼭 만탈락 같아요.>

<아가씨 답장 좀 주세요 주세요 주세요오>

아무 말이나 하라고 했더니, 정말 아무 말을 하고 있다. 워커와 셰비언이 요구하는 연구비를 집행해 줄 때마다 이를 갈던 이디케는 아까부터 장치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허공에 뿌린다 생각하고 쓴 돈이 이렇게 구체적인 형태가 되어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할 것이다.

오드리는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다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돈값 하는 걸 만들었네.”

셰비언이 잽싸게 마법망을 건드렸고, 오드리의 말은 1층의 살림집으로 곧바로 전해졌다. 셰비언은 확인증을 오드리에게 넘겼다. 방금 보낸 ‘돈값 하는 걸 만들었네.’라는 말이 찍혀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이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할 거라고 해서요.”

“굳이 보낼 필요는 없는 말이었지마는……. 그래, 잘 했어. 세심하군.”

오드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배부른 미소였다.

셰비언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미소에 잠시 넋을 놓았다. 저런 웃음을 보다니,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며 만든 보람이 있었다. 눈치 없는 심장이 가슴뼈를 뚫고 나올 듯 쿵쿵거리고 귓가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저, 아가씨…….”

이 장치가 정말로 만족스러우냐. 내가 만든 것이 그대를 기쁘게 했느냐. 직접 물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혀뿌리를 간질였다.

“두 사람에게 돌아오라 전해.”

오드리는 셰비언의 말을 뚝 자르는 것도 모자라 고개마저 돌리고 그를 외면했다. 갑자기 봄날의 꽃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뺨을 붉히는 얼굴이 몹시 어여뻐, 계속 보고 있다간 또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릴 것만 같았다. 중요한 순간에는 이성적이겠노라 결심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음……. 걱정 안 해도 되겠네.’

두 사람 사이에서 끼어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이디케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셰비언이 암만 고개를 들이밀어도 오드리가 잘 자른다면야 그걸로 됐다. 메시지를 입력하는 셰비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가씨! 이거 너무, 너무너무 신기해요!”

“거 봐! 내가 잘 된다고 했지! 아가씨, 다이앤이 하도 제 옆구리를 꼬집어서……!”

워커와 다이앤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돌아왔다. 메시지 장치가 제대로 작동된 걸 보고 나니 흥분이 주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채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띄엄띄엄 허공을 수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드리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기분이었다. 저 메시지 장치가 변화시킬 세상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비록 거리가 한정되어 있는 데다 보낼 수 있는 메시지의 길이도 짧고 반드시 마법사를 통해야만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실시간이라는 장점이 모든 단점을 상쇄했다.

뱃속에서부터 욕심이 끓어올랐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던 어린 시절의 치기는 저 밑바닥에 파묻어 버린 지 이미 오래인데, 새삼 그 때의 결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래 방치된 그림처럼 퇴색됐던 꿈이 다시금 오드리를 설레게 했다.

“비마법 연구가들에게 맡기지 않고 그대들이 직접 설계했다고 했지.”

“네, 아무래도 사하스바티가 나간 데다가 워낙 구조가 특이해서요! 셰비언 녀석의 놀라운 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발상을 해낸 건 워커죠.”

워커와 셰비언이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사이, 오드리는 은빛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수정구를 톡톡 두드렸다.

이 혁신적인 장치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게 바로 이 수정구라고 했다. 다른 상단에서 장치를 뜯어내고 똑같이 베껴 만들어도, 이 수정구가 없으면 제대로 작동을 못할 거라고. 더불어 이 수정구는 베끼는 게 불가능할 거라는 장담도 들었다. 시장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식과는 전혀 달라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구조를 알아낼 수 없을 거라나.

‘내 등에 포모스가 업혀 있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지. 그때 말 걸기를 정말로 잘했어.’

계산은 빨랐고 결심은 더더욱 빨랐다.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개선만 하면 될 것이다.

“두 사람, 이건 널리 퍼질수록 소용이 되는 장치라는 거 알지? 지금이야 이렇게 딱 두 대만 있으니 문제없다지만, 열대엿 대가 한꺼번에 작동해도 괜찮은 건가?”

워커와 셰비언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믿어지지 않는 성공에 취한 나머지 실험이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몇 대 더 제작해서 메시지가 뒤섞이지는 않는지 제대로 확인하고, 혹시라도 섞이면 개선해. 거리도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알아보고, 최대한 늘리면 어느 정도까지 늘릴 수 있나 알아봐.”

“네.”

“그 부분이 해결되고 나면 어디에서 어디로 보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수단도 필요해. 메시지 길이가 더 짧아지더라도 좋으니 번호라도 매겨서 출력되게 해. 이왕이면 단순한 일련번호가 아니라 정보가 담긴 번호였으면 좋겠군. 장소, 시간, 순서……. 이디케, 잘 할 수 있지?”

번호 출력이야 워커와 셰비언의 몫이지만, 번호 체계를 만들어야 할 사람은 오드리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디케에게 떠맡겼다.

“저요? 제가 해요?”

“난 이번 여름에 브란젤에 없잖아.”

곧 여름휴가 시즌이었다. 오드리는 본래 만탈락에 가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라디아타의 초대를 받아 리가 항구에 있다는 타우레드의 별장에 갈 예정이었다. 당연히 따라갈 거라 믿었던 이디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되도록 빨리 연구를 마쳐줬으면 좋겠어. 이디케, 이거 연구개발 자금 대는 건 로렐라이와 별개로 진행해. 왕립은행에 숨겨두었던 계좌를 전부 열어 써도 좋아. 다만 내놓을 만큼 완성하는 그날까지, 이 장치를 아는 사람은 여기 있는 다섯으로 끝내.”

난데없는 말에 다들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웅성거렸지만, 오드리는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연구, 개발, 보급까지 전부 내 개인적인 돈으로 할 거고, 후원자도 나로 할 거야.”

“아니, 왜요? 이거 한두 푼 드는 거 아니에요, 아가씨! 마침 로렐라이에 돈도 많은데!”

“재정 문제로 수고가 많아, 이디케.”

사하스바티가 퇴사한 이후, 클로드는 오드리의 만남 요청에 응하지 않았고 편지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한 달이 넘게 그런 태도를 이어가며 오드리의 피를 말리더니, 며칠 전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라디아타와 함께 있는 자리에 문득 생각나서 들른 것처럼 나타나서는, 제 딸과 함께 휴가를 가주면 좋겠다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차마 라디아타의 앞에서 클로드의 멱살을 잡을 수는 없었던 오드리는 남몰래 이를 갈며 라디아타의 초대를 수락했다.

오드리는 이런 클로드의 태도를 두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양딸로 삼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고,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스스로 후원자를 자처하면서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럴까.

결론은 하나였다. 타우레드가 로렐라이에게 미치던 영향력을 거둬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로렐라이와 손잡고 쏠쏠하게 이득을 보고 있던 클로드의 자의일 리가 없으니,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부터 명령이 내려왔을 터였다.

“다들 잊고 있나 본데, 타우레드는 지난달에 사하스바티를 로렐라이에서 빼냈어. 맡겨놓고 부리던 그를 빼냈다는 건, 타우레드가 보기에 로렐라이에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는 거야.”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바로 딱 한 달 전, 로렐라이는 출입금지마법의 시연회를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지금 제작파트의 마법사들은 넘치는 주문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로렐라이의 강점은 심미성에 있지 실용성에 있는 게 아니라던 이미지가 극적으로 바뀌고 있는데 왜 미래가 없다는 걸까.

“이건 내 짐작일 뿐이지만, 국왕전하께서 로렐라이를 원하시는 것 같아. 알다시피 로렐라이의 단주는 전면에 나서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그분이 마음만 먹으면 이런저런 핑계 대기가 아주 쉬울걸.”

오드리는 웃고 있었지만, 조금 전 메시지 장치의 성공으로 들떠 있었던 분위기가 대번에 얼어붙었다. 아슬아슬한 현실이 피부에 와 닿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단주의 얼굴도 이름도 노출하지 않은 상단 따위가 이렇게 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왕실과는 나름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국왕전하께서 드디어 거위가 낳는 황금알로는 만족 못하게 되신 게지. 그걸 짐작하면서 거위 목에 진주 목걸이를 둘러줘서야 되겠어? 당연히 내 목에 걸어야지.”

“어쩐지 고작 백작 작위 하나 가지고 천문학적인 금액을 요구하시더라니…….”

이디케가 새삼 머리를 싸쥐었다. 감히 꿈도 꾸지 말라는 듯한 금액을 요구받았을 때에도 지금처럼 화나지는 않았는데, 오드리가 저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혔다. 욕을 입에 담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한편 로렐라이를 만들고 키우는 데에 노력과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던 셰비언은 다른 쪽에 생각이 미쳤다.

“상단이 국왕에게 넘어간다고 칩시다. 그럼 아가씨께 약속된 작위는 제대로 나와요? 중요한 건 그거잖아요. 제값 받는 거.”

“모르지. 애초 국왕전하께서 로렐라이를 원하실 거라 생각한 것도 내 짐작일 뿐이잖아? 그저 짐작이라기엔 확률이 너무 높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희망은 있어. 타우레드 후작이 증인으로 있으니 아주 입을 씻지는 못하실 거거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약속을 어긴 걸 입막음하려면 아주 큰 걸 대가로 치르셔야 할 테니까.”

“뭐 그런…….”

셰비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로렐라이가 넘어간대도 오드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게 뭐 어떠냐 할랬는데, 그것조차 불투명하다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어디 당사자인 오드리만 하겠냐마는, 그의 안에서도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꾸역꾸역 화를 삼키며 살펴본 오드리는 예의 평온한 낯 그대로였다. 그녀는 오히려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살며시 어깨를 끌어안았다가 떨어진 그녀가 남긴 향기가 코끝에 남았다.

“셰비언, 그리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은 짓지 않아도 돼. 백작은 아니어도 자작이나 남작 작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귀족의 서열을 작위로 가르던 시절은 한참 전에 끝났어. 이 메시지 장치를 제대로 보급할 수만 있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든 돼.”

“……그건 너무 모험이잖아요.”

뚱한 표정으로 웅얼거리는 말이 어찌나 귀여운지,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포모스는 행운의 여신이지만 동시에 모험의 신이라고 분명히 말해줬을 텐데 이런 식의 반응이라니. 사과처럼 달아올랐던 뺨이 창백하게 식은 게 조금 아쉬웠다.

“처음부터 공정하지 못한 거래였어. 언젠가는 돈 말고 상단 자체를 원하시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고. 단지 그날이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게 당황스럽긴 하지만……. 저게 있잖아.”

“메시지 장치가 그렇게 유용한가요?”

“그만한 파급력이 있지. 지금 내가 이렇게 태연한 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비상시를 대비해서 쌓아둔 재산을 다 털어 넣어도 아깝지 않을 물건이라고. 나는 지금 그대들이 내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천상의 모든 신들에게 감사하고픈 심정이야.”

오드리의 말은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작위를 얻어 헨젤 집안에서 나가는 거야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만,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 가주가 되어 맨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건 그다지 즐거운 출발이 못되었다. 오드리에게 작위가 내려지는 순간부터 만탈락을 가문에 편입하기 위해 움직일 헨젤 백작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삼 년만 더 뒤에 일어났어도 좋았을 것을.’

성년을 기점으로 삼아 준비했던 모든 게 쓰레기가 되었다. 설령 그녀의 짐작이 틀렸다고 해도 시일이 앞당겨질 것만은 분명했다. 이 소식을 만탈락에서 고생 중인 락시 부인에게 알리면 오랜만에 길길이 뛰며 화내는 부인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저 메시지 장치는 오드리에게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시기도 딱 좋았다. 우편국이 막 몸집을 불리려 하고 있었고, 그 수장인 센네페르 그웬은 헨젤 백작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이 달아있었다.

오드리는 센네페르가 자신을 도와줄 것을 확신했다.

이 메시지 장치는 우편국과 연계하면 서로에게 큰 이득을 줄 수 있었다. 꾸준히 저질러 왔던 부정을 최근 들어 수습한 센네페르가 그를 무마할 만한 업적을 마다할 리 없었다. 심지어 그게 헨젤가의 명성에 흠집을 낼만한 일이라면 더더욱.

“걱정 마, 그대들의 노고가 헛된 일이 되도록 하지는 않을 테니. 내 등의 포모스는 아직 내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거든.”

오드리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침울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살려냈다. 다들 잔뜩 움츠러들었던 등을 펴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만 이디케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걷히지 않았다. 티는 내지 않았어도 귀족들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리가 항구에 간다는 사실에 내심 들떠 있었는데……. 휴가는커녕 예정에도 없던 일에 깔려죽게 생겼다.

“아가씨, 그럼 저는 여름휴가 시즌에 브란젤에 남아서 이 둘을 보조하면 되는 건가요? 만탈락의 예산을 다시 짜고 집행하면서?”

“뭐, 그런 얘기지. 너무 걱정하지 마, 릴리가 있잖아.”

“아, 내 인생…….”

말갛게 웃는 오드리가 어찌나 얄미운지, 이디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만탈락에서 오드리의 대리를 맡고 있는 어머니가 불을 뿜듯 화내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럼 다들 잘 부탁해.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내보자고.”

오드리는 웃으며 말했지만, 가혹한 일정이었다.

“오, 맙소사……. 어머니가 날 죽이려고 하실 거야.”

“아가씨, 마법 도구의 동작 정지에 관련된 발표가 코앞에 예정되어 있다는 건 알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와, 차라리 저더러 죽으라 하시지! 저 강철새 날개 만져 본 날이 언젠지 까마득해요!”

“이야, 난 마법에도 숫자 계산에도 재주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워커, 잘해 봐요. 셰비언 씨도 열심히……. 아야!”

“하여간 너는 손만 문제가 아니라 입도 문제야!”

망연자실한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자유로운 다이앤이 신나서 약을 올리다 이디케에게 옆구리를 꼬집혔다. 다이앤이 손을 피하며 소란을 피우고 워커는 이디케에게 응원의 박수를 치는 와중에도, 셰비언은 도무지 오드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밝게 웃고 있는 얼굴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아가씨.”

가까이 다가가 서늘하게 식은 손을 붙들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오드리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재빨리 떨어져야 하는 걸 알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오히려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언제나 그를 한여름의 숲 한가운데로 떨어뜨리곤 하는 그 눈동자에 비가 되지 못한 구름이 고여 있는 것만 같아서.

허리를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좀 속상해하셔도 괜찮아요.”

“…….”

“미리 대비하는 것도 좋고, 문제의 해결책이 때맞춰 나왔다는 것도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상처 입지 않을 리 없고 아프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마음이란 연약한 거니까요.”

오드리는 절로 벌어지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조심스레 닿아온 손길은 따뜻하고 옅은 하늘색 눈동자엔 염려가 가득 담겨 다정했다. 꽁꽁 싸매놓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만 무른 마음 한 조각이 콧잔등을 찌르르하게 건드렸다.

“나, 나는…….”

아무렇지 않다, 걱정할 것 없다 얘기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이런 목소리로 괜찮다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견고하게 잘 만들어 쓰고 있던 가면이 모래로 만든 성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손을 뿌리쳐 떼어내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격렬하게 말을 달리고 난 직후처럼 가슴이 뛰고 숨이 차올랐다. 눈 주변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고 목이 메었다. 심호흡을 하려하는데 좀처럼 되질 않아 계속 숨이 찼다.

“……헉, 허억……. 흑…….”

들썩이는 어깨며, 헐떡이는 숨이 심상치 않다. 셰비언은 당황해 오드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거세게 거절당했다. 맞은 팔이 얼얼했다. 흘끔 다른 사람들을 확인했다.

“……니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뭘요. 만탈락에서 릴리도 왔다면서요? 아가씨 보필하는 건 다이앤이 하고, 로렐라이 일은 릴리가 보면 되겠네. 딱 좋네.”

“우와, 본인 일 아니라고 막말하는 거 봐!”

워커와 이디케는 여전히 말싸움 중인데, 다이앤은 그 사이에서 더 싸워라 싸워라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드리에게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지만, 이대로 오드리의 이상상태가 지속된다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셰비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으로서 당연한 상심마저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오드리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할 리가 없으니까. 그는 다시 한번 오드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가씨. 잠깐 의식세계에 피해 있을래요?”

오드리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셰비언은 더 기다릴 것 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디케에게 한참 정신을 쏟던 워커가 휙 돌아보는 것도 같았지만 개의치 않고 공간에 진입했다.

구름 없이 파랗게 펼쳐진 하늘, 폭신폭신한 잔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의 수면을 가르는 백조들……. 오드리가 좋다 했던 브란젤 중앙공원의 풍경 그대로였다.

“마음 편히 가지셔도 돼요. 이제 아무도 못 보니까…….”

위로의 말과 함께 자연스레 손이 뻗어나갔다. 셰비언은 평소보다 훨씬 동그마해 보이는 어깨를 두드리려다 흠칫 놀라 손을 거뒀다. 아무도 못 본다고 해놓고 자신이 어깨를 두드리면 다 헛말이 되는 거 아닌가. 그는 질끈 눈을 감고 돌아섰다.

“으음. 저는 눈감고 돌아서 있을게요.”

“흐으, 흐…….”

“노래라도 부를까요? 그다지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흣, 윽……. 됐어.”

오드리는 셰비언이 꿈지럭거리는 기척을 들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목을 조여오던 압박감이 서서히 흩어지며 숨통이 트였다. 무서울 정도로 뛰던 심장도 가라앉고, 숨을 몰아쉬느라 갑갑하게 느껴지던 드레스도 그럭저럭 견딜 만해졌다.

숨이 쉬어지니 이제 괜찮다 말하려 고개를 들었는데, 돌아선 셰비언이 뒷짐 진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꼼지락대는 게 보였다. 저가 한 말이 있어 돌아보지도 못하면서, 도저히 숨기지 못하는 초조함과 걱정이 뒷모습 전체에서 흘렀다.

“저, 아가씨. 메시지 장치 말고도…… 필요한 건 여러 가지로 계속 만들어드릴 테니까,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모험이 실패할 리 없게 도와드릴게요. 아가씨 주변엔 좋은 사람이 많잖아요. 그, 저, 저도 있고…….”

두서없이 더듬더듬 뱉는 말은 그저 따뜻했다. 잔뜩 긴장해서 단단히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자그마하게 줄어들었다. 자그마하게 남아 있던 응어리마저 긴 한숨을 타고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렸다.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완벽한 날씨의 인적 없는 공원, 거기에 햇살을 머금은 은발을 늘어뜨리고 자신을 걱정하느라 애가 닳는 남자. 머리에 인 햇살이 신부의 베일처럼 반짝이며 그의 은발을 장식했다.

은빛 파도처럼 흔들리는 머리칼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지만, 보기 좋다고 계속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도움은 고맙지만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다간 버릇이 될 것만 같았다. 마음을 다잡고 그를 불렀다.

“그보다 셰비언. 이제 그만 돌아서 봐.”

“네, 아가씨.”

셰비언이 냉큼 뒤돌아섰다. 훌쩍 키가 큰 자신이 그녀를 내려다보지 않도록, 슬쩍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춰오는 통에 얼굴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오드리는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심호흡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내 무른 구석을 건드리지 마라, 자극하지 마라, 나는 지금 약해질 수가 없는 시기다……. 꼭 해야지 마음먹은 말 중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대신 깊은 한숨만 줄기줄기 새어나왔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고집부리며 살았고, 분명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마음은 연약한 거니까 조금 서운해해도 된다는, 그저 그런 한 마디에 무너져 내린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카드로 만든 집이라도 이보다는 견고하지 않았을까.

사실, 그 위로가 이렇게까지 마음에 닿은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셰비언이니까.

알고 지낸 지 반년을 겨우 채웠을 뿐이고, 얼굴을 자주 본 것도 아니며, 서로 나눈 대화를 다 합쳐 봐야 세 시간이 안 될 것이고, 주고받은 선물이 있는 것도 아니며-알룬드의 목걸이는 일방적으로 강요받은 선물이니 제외하자-, 서로의 얼굴을 그리며 편지 한 장 쓴 적도 없다.

그런데도 잠깐의 틈만 생기면 저도 모르게 그의 흔적을 좇는 자신이 기가 막혀 웃음이 날 지경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지금은 때가 아니라 아무리 타일러도 해를 쫓는 해바라기처럼 마음이 흐르고야 마는데.

그런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위로해 주는데, 모르는 사이 말랑해진 마음 구석에 콕 박히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테다.

“아가씨, 의자를 놓아드릴게요.”

우물대며 말이 없는 오드리를 채근할 법도 한데, 셰비언은 그녀의 바로 뒤에 안락의자를 만들어내고는 앉아 쉬라 종용했다. 그리곤 그늘을 만들어야 한다며 나무를 키우고, 마음이 안 좋을 땐 알록달록한 게 최고라며 짙푸른 잔디 가득히 장미를 피웠다.

달콤한 장미향을 품은 바람이 뭔가 하얀 것을 싣고서 눈처럼 나풀거렸다. 고개를 들자 새하얀 체리꽃을 다닥다닥 달고 무겁게 팔을 늘어뜨리고 있던 나무가 그녀가 바라보길 기다린 것처럼 꽃잎을 흩날렸다.

오드리는 의자에 앉아 꿈같은 풍경에 잠겼다. 머리로만 계산하던 배신을 입 밖으로 꺼내며 자신도 모르게 입었던 상처가 이제야 눈에 보였다. 한데 이렇게 냉정해져서 바라보니, 그렇게 아파할 일도, 상처 입을 일도 아니었다.

제 미숙함은 물론이고 어느새 안이해져 있던 마음까지 함께 돌아보게 해주었으니 오히려 고맙다 해야 할 것을. 당장 생긴 생채기야 어쩔 수 없다마는,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 곧 괜찮아질 것이다.

뭔가가 발치에서 거치적거렸다. 슬쩍 내려다보니, 바삭바삭하게 마른 빨간 낙엽 한두 장이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계절이 엉망인데.”

“뭐 어때요, 예쁘면 그만이지. 눈이라도 내리게 할까요?”

“됐어.”

봄여름가을이 함께 뒤섞인 풍경만으로도 이미 충분이 괴상하고 이상한데, 여기에 겨울까지 보태고 싶진 않았다.

하려던 말을 잊은 것처럼 입을 다물고 멍하니 호수만 바라보는 오드리가 걱정이 되었는지, 셰비언이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오드리는 딱히 손을 쳐 내거나 하는 대신 흘끔 그의 얼굴에 눈길을 주었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미쳤네, 나.’

미안함과 걱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자가 만족스럽고, 혹시 열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이마를 짚는 손이 기분 좋았다. 그의 손을 타고 청량감 도는 마력이 밀려들어와 차 찌꺼기처럼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던 피로를 싹 날려 보냈을 땐 무심코 앓는 소리를 낼 정도였다.

“다이앤의 마사지보다 나은 걸……. 셰비언, 재주가 많네.”

“아가씨 말씀대로 잔재주가 많은 마법사니까요.”

오드리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숙녀가 할 만한 자세는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이곳에서는 누구도 저를 탓하지 않는데.

그녀는 제 옆에 주저앉아 저를 올려다보는 세비언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다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도리 없이 마음이 흔들리는 건 반갑지 않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를 얻어 다행이었다. 로렐라이에게나, 자기 자신에게나.

“잔재주라고 폄하했던 걸 사과해야겠어. 그날 그때, 그대에게 말을 걸어서 다행이야.”

“어…….”

셰비언의 얼굴에 또 불이 붙었다. 희기만 하던 뺨에 붉은 물이 퍼지는 광경은 마치 잘 만들어진 조각상에 생명이 깃드는 걸 보는 것처럼 신기했다. 오드리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었다. 매끄러운 피부는 다행히 돌이 아닌 살갗이라 부드럽고 말랑했다.

제 뺨을 쓰다듬는 손가락이 기분 좋은 듯, 셰비언이 살짝 눈을 감았다. 풍성하고 긴 은빛 속눈썹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눈 아래에 그늘을 만들었다. 색 옅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그야말로 꽃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달짝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허공을 헤매던 꽃잎이 셰비언의 높다란 콧대에 걸려 한들거리다 다시 날아갔다. 호숫가에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 백조들이 날갯짓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드리는 태연한 척 느릿하게 손을 떼고 막 달아오르려는 뺨을 식혔다. 하여간 눈과 마음에 해로운 얼굴이었다. 공들여 갈아두었던 날카로운 말들이 순식간에 그 예기를 잃고 무뎌져 개울가의 자갈 꼴이 되었다.

다시 한번 손 뻗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참았지만, 어째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다. 느슨하게 땋아 늘어뜨린 은발 위에 떨어진 새끼손톱만 한 흰 꽃잎이 머리장식처럼 아름다웠다.

그 모습 어딘가가 왕궁의 정원에서 셰비언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밤바람에 흰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마치 전설 속의 얼음요정처럼 서 있던 남자.

오랫동안 마음 구석에 고여 있던 질문이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입 밖으로 뛰쳐나왔다.

“셰비언, 왕궁에는 왜 왔었던 거지? 데뷔탕트가 있던 날, 정원에서 만난 그대가 내게 망토를 주었잖아.”

“아아……. 그날이요.”

셰비언은 곧바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상식을 익히라는 주변의 재촉이 아니더라도, 지금 자신이 하려는 말이 얼마나 미친 소리인지는 알았다. 셰비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웃어대는 사람들을 보며 이미 뼈저리게 느낀 바였다.

오드리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일 게 틀림없었다. 그만한 실력으로 어째서 가명을 쓰느냐, 의아해하던 그때처럼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불쾌하다며 혀를 차겠지. 겨우 쌓아올린 호감과 신뢰가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그럼에도, 셰비언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의식세계이며, 따라서 거짓을 말했다간 그에 상응하는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에게만은 솔직하고 싶었다.

어쩌면 자기만족에 가까운 솔직함으로, 셰비언은 사실을 고했다.

“내 것을 찾으러 갔지요.”

“내 것? ……그러고 보니, 그대는 보석 경매장에서도 그리 말했지. 이 건 본래 내 것이며,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하다고. 설마 왕궁에서 도둑질이라도 할 셈이었나?”

“음……. 글쎄요. 전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보기엔 도둑질일 수도 있었겠죠. 보석 경매장에서 블루다이아몬드를 꺼내왔을 때처럼.”

오드리의 낯에서 핏기가 가셨다. 농담처럼 그냥 해 본 말에 긍정이 되돌아올 줄이야. 왕궁에서 도둑질을 할 예정이었다니.

호화로운 왕궁에 훔칠 만한 보석이 얼마나 많겠느냐만, 당장 떠오르는 건 멜브란트 국왕의 왕관 가운데에 박힌 커다란 다이아몬드였다. 건국왕이 셰비언 성벽에 산책을 나갔다가 주워온 원석으로 만들었다던가. 애도 안 믿을 전설이지만, 그 상징성이란 무시할 게 못됐다.

‘그런 걸 도둑맞았다간 나라 전체가 뒤집힐 거야. 경매장처럼 돌려놓는다고 끝이 아니니…….’

오드리는 자신의 추측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며 물었다.

“사실이야 어쨌든, 그게 도둑질로 보인다는 걸 알기라도 해서 다행이군. 뭘 가지고 가려고 했던 거지?”

“내 것. 내가 감당했어야 하는 것. 도둑맞길 바라고 내주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새삼 후회가 들어 도로 찾아오고 싶어졌거든요.”

“잘…… 모르겠는데.”

“보석은 아니니까 그렇게 굳은 얼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드리의 표정이 더더욱 이상해졌다. 셰비언은 눈꼬리를 내려웃으며 오드리의 뺨에 붙은 꽃잎을 떼어냈다. 손끝에 닿는 체온이 얼마나 기적처럼 느껴지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처음에 내줄 땐, 나름 목적이 있었죠. 그 도둑은 내가 원했던 그대로 충실히 행동해 주었고……. 그에 불만은 없어요. 덕분에 이겼고, 살아남았으니까.”

“…….”

“하나 그 선택의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건 너무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진하게 만든 잉크라 한들 고작해야 잉크. 잉크 한 병 따위, 바다에 떨어뜨리면 곧바로 사라져 버리는 게 당연한 것을 뒤늦게 깨닫고 나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나 싶어 모골이 송연하더군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문 모를 소릴 하는 셰비언의 표정이 너무나 아련하고 슬퍼서 도저히 말을 끊을 수 없었다. 숨을 죽인 채 듣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었죠. 도둑더러 가져가라 내주었던 것을 되찾아서, 바다에 떨어뜨린 잉크 한 병을 다시 긁어모을 셈이었어요.”

“그건 불가능해.”

“네, 불가능하죠. 어떻게든 긁어모은대도 그게 이전의 잉크와 같을 리도 없고. 근데 그땐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정신이 나갔던 거죠. 그런데, 기차가 있더군요.”

갑자기 웬 기차 얘기인가. 오드리는 어리둥절해졌지만 셰비언은 진심이었다. 바다에 떨어뜨린 잉크가 잉크 아닌 다른 걸로 모습을 바꾼 걸 봤을 때의 충격이란. 바일런 섀덤은 진정 천재였다.

“그때 겨우 조금 정신이 들었어요. 다 같이 결정해서 내준 것을 내 멋대로 되찾겠다 기를 써도 되는 건가, 싶은……. 하지만 상의할 동료는 이제 없으니, 마음이 바람에 휘말린 눈송이처럼 흔들리더군요. 그렇게 갈등하며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아가씨를 만난 거죠.”

셰비언이 오드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따라 밤이 밀려나고 새벽이 찾아왔다. 그를 덮고 있던 슬픔이 자리를 잃었다.

“왜 이렇게 끌리는지, 처음엔 잘 몰랐지요. 그저……. 조금 미뤄도 되지 않을까 했어요. 이미 엎지른 잉크보다는 당장 내 발목을 잡아당기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게 더 낫겠구나, 생각했죠. 그래놓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왕궁을 찾아갔다가 아가씨를 또 만나 버린 겁니다. 세상에,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었는지.”

오드리는 제 손에 부채가 없다는 게 아쉬워졌다.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려야 하는데 왜 하필 이럴 때 손이 비었단 말인가. 하여간 저 아름다운 남자는 이전부터 태연한 표정으로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말을 자꾸만 해댔다. 심지어 스스로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몹시 악질이었다.

“흰 꽃잎을 잡으러 깡총거리는 걸음이 귀여웠고, 추위에 떠는 어깨가 안쓰러웠죠. 무심결에 입고 있던 망토를 걸쳐주고 나서야 깨달았지 뭡니까. 아, 내가 반쯤 미쳐 있었구나.”

셰비언은 오드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날 때부터 회색 구름과 흰 눈보라가 익숙했던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한데 초록으로 빛나는 오드리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여름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처럼 활력이 솟고 웃음이 났다.

망토를 걸쳐 주던 순간, 그때까지도 뿌옇게 흐려져 있던 이지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저지르려 했던 짓의 무게가 새삼 놀라워 숨이 막혔다.

만약 그때 그 자리에 오드리가 없었다면, 그녀가 그를 향해 이름을 묻지 않았다면, 왜 이곳에 왔느냐 묻지 않았더라면.

셰비언은 도둑에게 내주었던 것을 도로 찾아왔을 것이다.

“대체 그대가 내주었던 게 무엇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마법이요.”

“……뭐?”

셰비언이 오드리의 앞에서 예를 갖춰 인사했다. 오드리의 손을 청하고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는 동작이 놀랍도록 우아하고 자연스럽다.

“아가씨, 다시 인사드립니다. 북쪽 셰비언 절벽의 지배자이며 마법의 주인이자 관리자, 이제는 이 세계에 마지막 남은 용, 셰비언입니다.”

오드리는 커다란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셰비언의 자기소개를 제대로 듣긴 들었는데, 그게 머릿속에서 잘 해석이 안 됐다.

그녀가 알기로, 용은 멸족했다. 오래된 기록들은 용을 두고 지독히 아름다우면서도 지겨우리만치 오래 사는 종족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로렐라이의 전설 이후로 전해지는 게 없었다. 마법을 잃은 용은 종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멸했다는 게 기록들의 공통된 결말이었다.

“로렐라이가 용의 둥지를 도둑질할 마음을 먹도록 부추긴 것도, 그에게 마법을 담은 알을 내준 것도, 알에 담겼던 마법을 세상에 퍼뜨릴 방도를 가르친 것도, 모조리 저입니다. 아가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세상에 퍼진 마법을 도로 주워 담아 알을 만들어보겠다 발악했겠죠.”

오드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에라도 이 거짓말쟁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셰비언을 겪어 온 시간들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따라올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문장, 급하게 외우기라도 한 듯 부족한 상식과 어설픈 예의. 거기에 더해 이젠 기록으로만 남은 옛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남녀노소 취향차이를 불문하고 아름답다 평해지는 마법사. 의심의 근거는 충분했다.

“……설명이 필요해. 나는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 마침 의식세계라서 바깥과는 시간이 다르게 흐를 테니 잘됐군. 더 얘기해 봐.”

오드리는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쨌거나 바로 허언증 환자 취급을 하는 게 아니라 들어보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으니, 셰비언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마력과 마법의 본질은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영케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기억나. 무슨 뜻인지 알려달라고 했더니 뺀질뺀질하니 말을 돌렸었지.”

“하하…….”

셰비언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타래를 꼼지락댔다. 오드리에게 완전히 반했음을 인정하면서 언젠가는 설명할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닥치니 입을 떼기가 몹시 어렵다.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본래 마법은 용의 것이었죠. 용은 마법으로 번식하는 생물이고요.”

“기록에서 마법을 잃은 용이 종족을 유지하지 못하고 멸족했다고 하던 게 그럼…….”

“네, 제가 알을 깼으니까요. 마법이 세상에 퍼진 이후, 용은 용을 낳을 수 없게 됐죠. 뭐, 사실은 이미 그 전부터 문제가 있었지만요.”

셰비언은 마치 아침 메뉴를 말하는 것처럼 간단히 말했지마는, 그 내용 무겁기로는 세피아 항구를 오가는 무역선의 닻보다 더하다. 오드리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렇게 가볍게 말할 문제는 아니잖아?”

“뭘요. 멀쩡한 마법을 가지고 있을 때도 용이 태어나지 않았던 건 마찬가진데요.”

용이 도대체 언제부터 마법으로 자손을 남겼던가. 가장 나이든 용도 그 시점을 가늠할 수 없이 오래된 일이었다. 다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문제가 닥쳤을 때, 용은 이미 마법이 없으면 종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원인? 그런 걸 알 수 있었다면 좋았겠죠. 해결책? 원인도 모르는데 해결책은 무슨. 알은 새끼 용을 품은 채 썩어버렸고, 어쩌다 새끼 용이 태어나더라도 금방 죽어버렸어요. 게다가 한참은 더 살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성년 용들까지 픽픽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린 급격하게 숫자가 줄었어요.”

갑작스럽게 닥쳐 온 멸망의 위기 앞에서, 살아남은 용들 사이에 패가 갈렸다. 어떻게든 마력을 쥐어짜 하나라도 알을 더 낳아보자는 쪽과, 다른 종족과 섞이는 일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자는 쪽.

처음에는 전자가 더 우세했으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악화되기만 하자 후자에 힘이 실렸다.

“다른 종족의 모습으로 몸을 바꿔서 사는 일에는 이미 익숙했으니, 그중에서도 다른 종족과의 결합에 거부감이 없는 동족들이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피를 섞었죠. 마력이 많은 용족은 어느 종족에게든 꽤 아름답게 보이는 모양이라, 그리 어렵지도 않았어요.”

셰비언이 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기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햇살에 비친 옅은 물색 눈동자가 맑고 맑은 연못 같았다. 오드리는 그제야 그가 제 겉가죽의 아름다움을 익히 알고 이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망할 종자 같으니라고.

오드리가 마음속으로 이를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셰비언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한데 태어난 아이에게 용의 피가 한 방울도 물려 내려가질 않더군요. 온갖 방법을 다 써본 바, 용의 피를 물려주려면 상대에게도 마법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죠. 마법망을 다루는 재능의 씨앗을 품고 있어야 했어요.”

마법으로 번식하는 용족은 반려를 만들지 않았다. 성체가 되어 일정 이상의 마력과 마법을 갖춘 용은 오롯이 혼자서 알을 가지고 낳아 길렀다. 그러나 그 길이 막힌 상황에서, 다른 종족처럼 반려를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마법을 나눠줘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반발은 극심했다. 피를 섞어야 한다고 했을 때보다도 더.

“난리가 났죠. 용족만 갖고 있던 마법을 다른 종족에게 나눠줘야 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셰비언은 그때도 마법의 주인이자 관리자였다. 그는 용족의 쇠퇴를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상태였고, 그리하여 중립의 원칙을 깨고 타 종족에게 마법을 개방하자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반려가 아닌 자들에게도 마법을 완전히 개방하자고까지 주장했다. 좋으나 싫으나 피를 섞어야 하는 시점에까지 왔는데 계속 마법을 끌어안고 있어봐야 뭐 어쩔 거냐며. 마법이 곧 용 자체이니, 어차피 생의 대부분을 다른 종족의 모습을 하고 사는 판에 형태에 미련 갖지 말자고.

마법의 주인이 꺼낸 말은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전과 같은 방식의 번식은 끝장났다는 선언과 같은 말이었으니 오죽할까. 어떻게든 알을 더 낳아보자던 쪽은 충격을 받고 침묵했고, 대신 반려에게만 마법을 줄 건지 아니면 아예 마법을 풀어버릴 것인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예전이라면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누군가는 정말로 목숨을 잃기도 했을 테지만, 워낙에 숫자가 줄어 있었던 터라……. 다들 입으로만 싸워댔죠. 꽤 재미있는 광경이었어요. 각자 마음에 드는 종족의 껍데기를 하고서 고성에 삿대질을 해댔으니까요.”

어쨌거나 셰비언은 마법의 주인이었다. 여론은 그가 원하는 쪽으로 흘러갔고, 불만이 있는 자들도 조용히 다수의 결정에 따랐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알을 더 낳아 용의 피를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용들이 무력행사를 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때에 당했어요. 나와 뜻을 같이 하던 용들 태반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구속당했고 일부는 죽었죠. 나는 끌려가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했고요.”

“판세가 뒤집혔는걸. 그래서?”

오드리는 성실한 청자의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셰비언이 하는 말은 너무나 터무니없어 믿기가 어려웠지만, 옛날이야기 듣는다 생각하고 들으면 들을 만했다.

어쨌거나 오드리의 호응은 셰비언에게 대단한 의욕상승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손짓발짓을 아끼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빈틈을 노린 습격을 감행한 용들은 뜻밖의 결과에 당황스러워했다. 아무리 많은 용을 잡아들였다 한들, 마법의 주인인 셰비언을 놓쳐서야 성공했다고 할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소수가 다수의 용들을 계속 잡아두는 건 워낙에 힘든 일이라, 곧 스스로 구속을 풀어버리는 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셰비언의 상황이 좋기만 한 건 또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상대는 죄다 마법엔 능하지 못해도 몸싸움에는 도가 튼 용들이라 부담이 심했다. 그래도 구속을 풀고 찾아오는 용들 덕에 머릿수가 늘어나면서, 그들은 곧 엇비슷한 전력을 갖추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이 됐다. 몇 차례의 충돌이 있었지만 어느 쪽도 승기를 잡았다 말할 수는 없었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엎치락뒤치락 하며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익히 알고 있었듯이, 시간은 용의 편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적은 숫자가 또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쯤엔 서로 감정이 완전히 상해 있었어요. 어느 쪽이 이기든, 진 쪽은 전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수준이 됐죠. 게다가 자꾸만 동족의 숫자가 줄어가니 어떻게든, 뭐든 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점점 심화됐고요.”

의견이 갈려 시작된 전쟁에 감정이 섞이면서 다툼은 점차 질척하고 지저분해져 갔다. 알을 낳자던 용들은 피를 섞고 마법을 개방하느니 차라리 이대로 멸족하는 게 어떠냐는 극단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긴 전쟁에 지친 나머지 그 개소리에 넘어가는 이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건 큰 문제였다. 셰비언은 전쟁에 이기기보다 그냥 마법을 세상에 풀어버리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자 선택지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셰비언의 눈에 로렐라이가 들어온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마력이라곤 이슬 한 방울만치도 없는 인간 주제에, 땅요정과 나무요정에 이어 바다요정의 신물을 모조리 훔쳤다던가.

“왜 로렐라이를 끌어들인 거지? 어차피 풀어버릴 마법이라면 직접 하면 됐잖아.”

“상대도 바보는 아니라서 직접 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거든요. 로렐라이는 마력이 없는 인간이니 감시망에 걸릴 일 없고, 과시욕이 있는 자니 부추기기 쉬우며, 물욕이 많은 자가 아니니 마법을 혼자 삼킬 일 없다는 점에서 적임자였죠.”

“과시욕? 도둑이?”

오드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욕 없이 도둑질 하는 거야 상황이 급한가 보구나 하고 알겠는데, 과시욕이라니. 셰비언은 쓰다듬고 싶어 움찔거리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로렐라이는 유명한 괴짜였어요. 훔치기 어렵다 소문난 것들만 골라서 훔쳐서는 사람들 앞에 전시하길 즐겼죠. 내전으로 정신이 없던 용의 귀에까지 이름이 들려올 정도니 오죽했겠어요.”

로렐라이를 꼬드기는 건 셰비언이 맡았다. 다른 용들에게 들키지 않고 나돌아 다닐 수 있을 만큼 마법 실력이 출중한 자는 그 외에는 없었으니까. 로렐라이는 용의 둥지를 털어보자는 말에 크게 흥미를 보였다. 그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말을 꺼냈던 셰비언이 오히려 당황스러워질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시작이 어쨌건 로렐라이는 적어도 중반부터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에게서는 어쩐지 사명감마저 느껴졌거든요.”

동기야 무엇이든, 로렐라이는 셰비언이 원했던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셰비언을 비롯한 용들의 보호를 받았다 한들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난을 훌륭히 견뎌내고 무사히 마법을 담은 알을 훔쳐내 세상에 마법을 뿌렸으니, 그날로 마법은 용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알을 낳자던 용들은 크게 분노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고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 역시 전쟁에 지쳐 있었던 건 마찬가지인지라, 대부분이 싸움을 포기하고 둥지에 틀어박혔다. 로렐라이는 마법을 훔쳐 뿌리는 것으로 용들의 내전마저 끝낸 것이다.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겹겹이 쳐 둔 방어마법을 몸으로 때려 부수며 덤벼온 용이 있어 마지막에 큰 싸움을 치러야 했지만, 그마저도 결국엔 이겼다. 그러나 그때 크게 다친 상처가 워낙 커서 긴 회복기를 가져야 했던 것만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셰비언은 무심결에 왼쪽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나 긴 회복기를 가졌건만, 상처는 완벽하게 아물지 않고 하얗게 패인 흉터를 남겼다. 몸이 반으로 갈라질 뻔한 상처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긴 했다.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맨몸으로 마법을 깨고 오느라 지친 상태였는데도 정말 죽기 직전까지 그를 몰아붙였다. 이제 생각해 보면, 팽팽하게 대립했다는 것조차 그저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지난 일이다. 그를 몰아붙였던 그녀도 이젠 죽고 없을 것이다.

“회복기에 들어가면서 짐작은 했습니다. 깨어나면 나 혼자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깨어나 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마법이 곧 용이다, 그리 장담을 해놓고도 용은 이제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용족의 쇠퇴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게 그대 아니었나?”

“머리로만 알았던 거지요. 거기에 용이 사라지는 걸 지켜본 것도 아니고, 잘 회복해라 건강해라 말을 나눴던 기억은 생생한데 눈 뜨니 그들 전부가 사라지고 없으니……. 분명 예상했던 결과인데도 모든 게 다 내 잘못 같아 힘들었죠. 기차를 보고 마법의 변화를 실감하고서야 겨우 주변이 보이더군요. 그리고 아가씨를 만나면서 정신이 들었고요.”

긴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오드리는 저를 바라보는 셰비언의 시선이 지극히 부담스러웠다. 안 그래도 자기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이 그에게 끌리는 와중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거위의 속털처럼 보드랍게, 식후의 디저트처럼 달짝지근하게 보내오는 시선을 받자 천근의 무게가 되어 가슴에 얹혔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는데도, 자꾸만 그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다른 사람이 꺼낸 말이었다면 당장 코웃음을 치고 비웃었을 것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질 않았다.

‘이러면 안 돼. 오드리 헨젤, 이성적으로 굴어. 뱀답게 굴라고.’

오드리는 자신의 불안과 동요가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어깨를 폈다. 손잡이를 두드리고 싶어 움찔대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심호흡을 했다.

이디케가 워커에게 말했던 그대로, 흔들리는 자신에게 놀란 오드리는 내면에 묻어두었던 허세를 모조리 꺼내 쓰는 중이었다.

“좋아. 백번양보해서, 그대가 전설 속의 그 용이라고 치지. 그럼 그 알룬드의 목걸이는 대체 뭐지? 그것도 그대의 거라며?”

“셰비언 절벽에서 나는 모든 것들은 전부 내 것인걸요. 내 땅이니까요.”

“뭐 그런 억지가 다 있어? 셰비언 성벽에 있는 광산은 아주 오래전부터 왕실의 소유라고. 정말로 그 성벽 전체가 그대의 땅이었다면 그런 일이 없도록 진즉에 영역표시를 해뒀어야지.”

셰비언의 얼굴에 억울함이 어렸다. 영역표시야 당연히 해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표시 역시 낡아버렸다. 너덜너덜해진 마법망과 마법사의 수준하락을 예측하지 못하고 마법망에 표시를 해둔 게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오드리는 반박하고 싶어 하는 셰비언의 기색을 알아채고도 입을 뗄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게 무슨 황당한 이유이든, 저 예쁜 얼굴로 종알대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이고 말 것 같았다.

“하다못해 시골의 손바닥만 한 밭뙈기도 주인이 십 년 이상 권리 주장을 하지 않으면 그냥 부쳐 먹는 사람의 소유로 인정해 준다고. 제아무리 주인 있는 땅이라고 해도, 그 주인이 몇 백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땅에서 사는 사람이 주인의 존재를 잊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 용에 비하면 인간의 생은 덧없이 짧아서, 시간에 대한 체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그건 아니에요! 아무리 용이라도 껍데기는 무시할 수가 없거든요. 본체로 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 저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인간의 시간감각을 그대로 따라가요. 아가씨께서 언급한 몇 백 년이 어떤 시간인지 충분히 이해했어요. 네. 정말이에요.”

셰비언의 필사적인 변명이 오드리를 좀 더 침착하게 만들었다. 쉴 새 없이 두방망이질을 하던 심장도 평소와 같아졌고, 안개가 낀 듯 흐릿하던 머릿속도 깨끗해졌다. 무엇보다, 망가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머릿속의 주판과 저울이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야기 잘 들었어. 하지만 셰비언, 내가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왕궁정원에서 날 보자 정신이 들었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그때 내게 망토를 벗어주기까지 했지. 대체 왜?”

셰비언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핥으며 말을 골랐다. 생전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모든 게 다 서투르고 말 한 마디 내뱉는 것조차 겁이 났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그녀가 자신을 이해할까. 흔들림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모험을 망설이지 않는 모습에 반했다고 해도 될까? 하지만 워커는 그런 말을 했다간 뺨을 맞을 거라고 했는데. 덥지도 않은데 손바닥에 땀이 찼다.

“그게……. 음.”

“역시 마력의 계통 때문인가? 마력의 계통이 가까울수록 호감을 느낀다는 연구를 봤어. 그런 거라면 이렇게 거창한 이야기를 지어낼 것 없이 그냥 그렇다고 하면 될 텐데. 옛날이야기를 들은 건 너무 오랜만이라 굉장히 즐거웠어.”

“아가씨……?”

“위로 고마웠어, 셰비언. 덕분에 마음도 가벼워졌고, 머리도 맑아졌지. 그러니 이제 그만 의식세계를 접고 현실로 돌려보내 주겠어?”

담담하게 말하는 오드리는 입가에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셰비언의 뇌리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이대로 대화를 끝냈다간 영영 오해를 풀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는 모처럼 차리고 있던 예의마저 잊고 오드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뇨, 그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마력의 계통 때문에 끌린 게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오드리는 차마 셰비언의 손을 떨치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마음을 흔드는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타고난 마력에 휘둘리는 건…….”

“목소리가 좋아서 끌리면 안 되나요? 얼굴이 마음에 드는 건? 성격이 좋아서, 취향과 관심사가 비슷해서,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옆에 오래 있다 보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이렇게나 많은 핑계들이 있는데, 마력의 계통이 같아서 눈길이 갈 수도 있죠!”

“……사랑?”

“네. 마법의 주인이자 관리자이며, 셰비언 절벽의 주인이고,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용인 셰비언이 오드리 헨젤을 사랑합니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눈동자를 사랑하고, 모험을 두려워않는 성품을 사랑합니다. 아가씨가 싫어하는 연약하고 무른 부분마저 내게는 그저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가씨를 볼 때면 여름의 한복판에 선 듯이 세상이 반짝거립니다.”

바람이 불었다. 꽃비가 와르르 쏟아졌다. 보기 드문 은발이 하얗게 반짝거렸다. 오드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너무 반칙이야.

그 반칙 같은 풍경 속에서 셰비언이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오드리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그렇게.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원하는 걸 이룰 수 있게 돕고 싶고, 힘든 일이 있으면 기대 쉴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걷고 싶어요. 아가씨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피가 식는 듯 두려워져요.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죠?”

셰비언이 오드리에게 손을 청했다. 오드리는 홀린 듯 그에게 손을 내주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입술은 미적지근하기만 한데 몸을 도는 피는 지나치게 뜨거워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렇게 강렬한 감정은 처음이에요. 나조차 놀라서 내가 언제부터 이랬더라, 생각해 봤더니, 의외로 오래됐더군요.”

“……그날? 내 마력을 안정시켰던…….”

오드리가 꿈에라도 다시 보고 싶도록 아름다운 마법망을 보고, 몸이 떨리도록 황홀한 음악을 들은 날. 셰비언의 손을 잡고 그의 문장 세계를 헤매고 꽁꽁 숨겨왔던 욕심을 처음으로 뱉은 날. 바로 그날, 셰비언은 그녀에게 만약에-로 시작하는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아니요.”

하나 셰비언은 고개를 저어 오드리의 추측을 부정했다. 그는 기차에서 오드리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선명한 초록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던 순간, 아득하게 멀어지던 기차의 소음과 대번에 퇴색해 버리던 주변의 풍경.

이전에는 그저 이상하게 발목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다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때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고 있다. 여름을 담은 눈동자에 그대로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아가씨,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려 보시겠어요?”

“처음 만난 날? 그, 기차? 설마, 그때부터라고?”

“네, 아가씨. 아가씨께서 제게 말을 걸고 다가오신 순간, 첫눈에 반했답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블루다이아몬드를 생각해 낸 것도 아가씨께 선물하고 싶어서였어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진귀한 보석을 선물하는 건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구애방법이잖아요?”

오드리의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가까스로 그녀를 버티게 하던 허세가 전부 날아갔다. 예외 없이 공평하던 세상에 나타난 단 한 명의 예외가 그녀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나, 나는 이만 돌아가겠어. 내보내 줘!”

오드리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셰비언은 기꺼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지하무대 연구실에 있었다.

워커와 이디케는 여전히 말싸움 중이었고, 다이앤은 싸움을 부추기느라 신이 나서 낄낄거렸다. 셰비언은 오드리를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앞에 서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느슨하게 땋아 허리 부근에서 흔들리는 은빛 타래를 보는 순간, 오드리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이거야 원, 내가 꿩도 아니고 얼굴만 숨겨서 뭐하게…….’

오드리가 셰비언의 감정을 아예 짐작도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는 오드리 앞에서만은 좀처럼 표정을 꾸며내질 못했으니까. 언젠가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구애하리라 예상하기도 했다. 그녀가 놀란 건 셰비언의 고백을 바로 거절하지 못한 자신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사랑 같은 건 없다고, 어떤 순간에도 감정이 이성을 잡아먹게 두지 않겠다고 스스로 분명하게 정해두지 않았던가. 흔들리는 마음 역시 오롯이 혼자만의 문제라고 생각해 왔건만 상대가 잡아당긴다고 정신없이 끌려가 버리다니.

‘한심하기는. 이러면 안 돼.’

셰비언이 떠들어댄 용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반대편 귓구멍으로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오드리는 자꾸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부단히 노력했다. 눈을 감고 괜찮다, 별거 아니다 연신 되뇌니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다.

바깥에서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하던 카프러스가 더 견디지 못하고 연구실로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그는 다음 스케줄은 까맣게 잊은 듯한 하녀들을 어이없어 하며 바라보다가 눈가가 발긋하게 달아오른 오드리를 발견했다.

“아가씨? 어디 아프십니까? 역시 지하 공기는 별로지요. 나가시겠습니까?”

걱정스러워하며 내민 손은 커다랗고 울퉁불퉁했다. 오드리가 그 손을 거절하기도 전에, 카프러스가 오드리의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쟀다.

“약간 미열이 있으시군요. 초기 감기 같은데……. 역시 실내외 온도차가 너무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스한 온기가 닿은 것만으로도 어딘지 안정이 됐다. 오드리는 완전히 침착해져서, 평소와 같은 미소를 그려냈다. 어딘지 목덜미가 빳빳하게 굳고 뺨이 당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할 만 했다.

“괜찮아요, 경. 환절기만 아니라면 나는 꽤 건강한 편이니까요.”

“그래도…….”

“그보다 이디케와 다이앤을 좀 달래서 데려와주시겠어요? 라디아타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어요.”

“……예.”

카프러스가 미심쩍어하면서도 오드리의 명을 수행하러 간 사이, 오드리는 뒤돌아서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셰비언의 옷자락을 툭툭 쳐서 그를 돌려세웠다. 조금 전에 쏟아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세비언의 흰 뺨에는 옅은 홍조가 어려 있었다.

“셰비언.”

“네.”

“그대의 마음은 고맙게 받겠어. 하지만, 그대도 알다시피 내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 그에 보답해 줄 수는 없다는 걸 이해해주길 바라.”

셰비언의 낯에서 빠르게 핏기가 사라졌다. 그를 인형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도록 하던 온기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손을 뻗으면 오드리의 어깨를 잡을 수도 있는 거리였는데, 담담히 말하는 오드리가 하염없이 멀게만 느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제부터 그대가 저 메시지 장치를 개선할 거라는 걸 생각하면 바로 지금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 그대의 마음에 응해줄 수도 있을 것처럼 굴면서 날 위해 일해라 말해야겠지만……. 진심을 그렇게 이용하고 싶지 않아.”

“…….”

“그대가 예전부터 개발하고 싶어 하던 게 바로 저 메시지 장치지? 그러니 그대는 그대를 위해 장치를 개량하길 바라.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민망하긴 하지만, 난 꽤 공정한 투자자라 그대에게서 어떤 공도 빼앗을 생각이 없어. 어딜 가도 나만 한 투자자를 구할 순 없을 걸. 모자람 없이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도 아끼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연구해.”

오드리는 막힘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마치 미리 작성한 대본이 눈앞에 있어 그걸 읽어내려 가는 듯 했다. 스스로의 마음을 감춰놓고 꺼내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거의 진심에 가까운 말이니 당연했다.

오드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셰비언의 안색은 점차 본래대로 돌아왔다. 색 옅은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까, 제가 아가씨를 사랑하는 건 상관없는 거네요.”

“……뭐?”

물 흐르듯 이어지던 말이 뚝 끊겼다. 오드리는 제 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믿어지지 않아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고맙게 받으신다면서요, 제 마음. 받아달라 우길 생각도 없고, 보답해 달라 강요할 생각도 없으니 제 마음은 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거죠.”

“그, 셰비언…….”

그게 거절이야. 거절이라고! 넌 지금 거절당한 거고, 날 사랑하지 말란 말을 들은 거야! 조금 전까지는 멀쩡하더니, 갑자기 왜 눈치 없는 척하는 거야? 너 진짜 용이야? 그래서 인간의 대화법을 책으로 배우기라도 한 거야? 표면적인 말 말고, 돌려서 하는 말도 좀 알아듣고 그래라!

오드리는 퍼붓고 싶어 목구멍을 간질이는 말을 꿀꺽 삼켰다. 저쪽 구석에서 카프러스에게 한바탕 설교를 듣고 풀이 죽은 이디케와 다이앤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히 조금 전 오드리와 셰비언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지는 못한 듯했다.

“아가씨, 죄송해요…….”

“됐어. 다이앤은 바로 타우레드 후작가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이디케는 바로 일에 들어가. 당분간 내 시중에 힘쓰지 않아도 돼. 안 그래도 시간이 모자랄 테니까.”

외면하고 싶었던 일거리를 다시금 확인받은 이디케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다이앤이 장난과 심술을 담아 어깨를 두드리다가 옆구리를 얻어맞고 신음을 흘렸다.

카프러스는 메시지 장치를 흘끗 바라보곤 오드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상단주로서 일을 하는 오드리를 수행하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그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가시지요, 아가씨.”

“…….”

오드리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카프러스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셰비언의 고백을 거절한 것만으로도 오늘 분의 심력을 다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법등을 잔뜩 달아놓은 통로는 조금도 어둡지 않은데 이상하게 눈앞이 깜깜했다.

오드리 일행이 지하 연구실을 떠나고 나자 널따란 공간에는 셰비언과 워커만 남았다. 내내 웃고 있던 셰비언은 오드리의 옷자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웃음기를 지웠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춘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마음은 멋대로 해도 상관없다니, 헛소리…….’

아무리 상식이 모자란 셰비언이라도 눈치가 있는데, 오드리의 거절을 모를 리 있을까. 심지어 그 충동적인 고백을 위해 읽어치운 책이 얼마인데. 연구로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로맨스 소설을 펼쳐 드는 통에 워커에게 당한 비웃음만 모아도 책을 한 권 쓸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한편, 워커는 조금 전 느껴졌던 기이한 감각을 되짚었다. 펼치지도 않은 마법망이 뒤흔들리고 차가운 뭔가가 머릿속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셰비언이 공간을 여는 시범을 보여줄 때와 엇비슷하면서도 약간 달랐다.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 버렸지만 확실했다.

더욱이 좀 전까지 멀쩡하게 웃는 낯이었던 셰비언이 저렇게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세상 시름 다 짊어진 꼴을 하고 있으니 확실했다. 워커는 셰비언의 엉덩이를 툭툭 걷어찼다.

“야, 셰비언. 아까 너 의식분리 썼지?”

“…….”

“야아, 내 말 안 들려? 셰비언!”

셰비언은 제 실패를 곱씹느라 워커의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주의 깊게 듣는 것 같았던 용의 이야기를 끝내 믿지 않은 거야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 역시 그 많던 종족들이 다 사멸하고 인간만 덜렁 남았다는 걸 뻔히 보면서도 믿기 어려우니, 그것과 비슷한 맥락일 터다.

하나 발목을 잡아당기듯 정신없이 끌리는 이 감각을 저 혼자 느끼고 있다는 건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력의 계통이 가까울수록 강한 호감을 느낀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었을까.

‘혹시, 마력 때문에 끌리는 거 말고는 전혀 호감이 없다거나……?’

대단히 현실적인 추측에 셰비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가 오드리를 안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제게 순수하게 가진 호감이 없다면 마력의 계통에 따른 호감이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휘둘리는 걸 질색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셰비언의 심사가 어떤지 따위 워커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의식분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이 뒤집히기 일보직전이었고, 제 속에 콕 틀어박힌 셰비언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그의 머리 위에 찬물을 양동이로 퍼부을 용의도 있었다.

그래도 모름지기 문명인이라면 그런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대화를 시도하는 게 순서일 터다. 워커는 셰비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그가 반응할 만한 말을 골랐다.

“셰비언, 차일 거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너무 그렇게 낙심하지 말고 다음 기회를 노려봐.”

“……내가 차일 거였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 그보다 내가 고백한 건 어떻게 알았어?”

몸을 돌돌 말아 웅크리고 있던 셰비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워커는 제 지레짐작이 맞아떨어진 것에 내심 쾌재를 부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네가 아까 의식분리를 할 만한 사람이 아가씨 말고 더 있어? 그러고 나서 갑자기 이렇게 축 처진 빨래 같은 몰골을 하고 있으니 의식분리 중에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를 수가 있나.”

“내가 차일 걸 어떻게 알았냐니까?”

“그야 당연하지. 아가씨 인생에 사랑은 첫째가 아니니까.”

셰비언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잘 빚어진 도자기 인형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무색하게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워커는 그의 앞에 의자까지 끌어다 앉아서는 턱을 괴고 셰비언을 놀렸다.

“오드리 아가씨가 사랑에 빠져서 모든 걸 내던질 만한 사람으로 보여?”

“……아니. 하지만 감정이란 게 그렇게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잖아.”

셰비언은 풀 죽은 목소리로 항의했다. 반려를 맞는 문화가 없었다 한들, 용족이 감정마저 메마른 이들은 아니었다. 그 역시 사랑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셰비언, 그 자신이 하는 짓이 딱 좋은 표본이었다.

하나 워커에겐 그저 우스운 헛소리로 들렸을 뿐이었다. 사랑이란 게 어디 혼자서 하는 건가? 그런 건 보통 짝사랑이라고 부르고, 이루어질 확률이 극히 희박한 일로 치부된다. 하물며 오드리는 타고난 귀족 신분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셰비언은 업적도 명성도 없는 평민 마법사였다.

워커가 요란하게 한숨을 쉬며 셰비언의 어깨를 두드렸다. 셰비언은 갑작스런 접촉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차마 워커의 손을 쳐 내지 못했다.

“셰비언, 이 헛똑똑이 같으니라고. 사랑은 타이밍인 거 몰라? 아까 아가씨 하시는 말씀 못 들었어? 로렐라이가 왕실로 넘어갈 조짐이 보이는 때에, 사랑? 사아라앙? 있던 마음도 접을 판에!”

“아…….”

“어이구. 이제야 아, 소리가 나와? 셰비언, 너는 분명 뛰어난 마법사야. 저 메시지 장치가 세상에 퍼지면 분명 널 바일런 섀덤과 동급으로 평가하는 자들도 생겨날 테지. 그때가 되면 네 명성과 실력으로 로렐라이와 아가씨를 지킬 수도 있을 거야.”

워커는 잠깐 말을 쉬고 날개를 펼친 채 지상에 붙박여 있는 강철새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의 인생을 통째로 잡아먹은 강철새는 여전히 도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침을 삼켰다. 목이 탔다.

“저 강철새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날이 오기만 하면 나도 아가씨를 지키는 데 한몫 할 수 있을 거고……. 하지만 지금은 너나 나나 흔해빠진 마법사에 불과해. 그런 상황에서 아가씨가 너에게 마음을 기울인다? 야, 꿈 깨라.”

“…….”

“네 말대로 사랑은 때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만, 그렇게 감정에 휩쓸리기엔 오드리 아가씨는 너무 이성적이시지……. 사랑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두지도 않을 분이고, 설령 사랑에 정신이 나가더라도 한순간뿐일걸.”

오래도록 오드리를 보아온 워커의 추측은 예리했다. 그는 셰비언에게 마음이 기운 오드리의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도 그녀의 사고흐름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의 말투에서 묻어나는 확신이 셰비언의 가슴에 비수를 박았다. 틀렸다 우기기에는 너무나 맞는 말인데, 맞다 인정하고 물러나기에는 속이 쓰리다. 셰비언은 불퉁하게 입을 내밀고 투덜댔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대놓고 거절도 당했겠다, 이제 포기하라고?”

“아니. 내가 너한테 뭐라서 그런 얘길 하냐? 마음을 계속 갖고 있을 건지 아닌지는 당연히 네가 정하는 거지. 다만…….”

워커가 씩 미소를 지으며 메시지 장치를 향해 턱짓했다. 셰비언은 워커가 할 말을 듣지 않고도 알 것 같은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다행히 우린 아가씨의 인생에서 첫째가 뭔지 알고 있잖아. 그걸 좀 더 빨리 이루게 해드릴 능력도 있고. 그 다음에 둘째인 사랑 얘길 꺼내는 게 어때? 아가씨의 마음에 여유가 생겼을 때 다시 도전해 봐.”

“하……. 결국은 일하라는 거네. 겸사겸사 너한테 의식분리도 좀 가르쳐 주고?”

워커는 셰비언에게 정곡을 찔리곤 뱅글뱅글 눈동자를 굴렸다. 촉박한 일정에 셰비언이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 있어서야 될 일도 안 될 게 뻔해서 한 말이었으니.

하나 셰비언이 주목한 부분은 다른 쪽이었다. 첫째를 충족시키고 나서 둘째 이야기를 해 보자는 말이 귀에 솔깃했다. 그는 메시지 장치와 강철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심을 굳히고 워커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주의를 끌었다.

“차이긴 했어도 내 마음은 내 거니까 쉽사리 거두고 그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메시지 장치의 개량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다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말만 해! 내가 아는 거라면 다 대답해 줄 테니까!”

“저 강철새. 정말 포기 못 하겠어?”

워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는 냉담하게 셰비언의 손을 뿌리치고 옷자락을 정돈했다. 그는 셰비언만 한 천재가 아니었고, 요즘 들어서는 정말 눈감는 순간까지 강철새를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마저 느끼고 있긴 했다.

그래도 꿈은 꿈이다. 오드리의 첫째가 자유를 얻고 권력을 쟁취하는 거라면, 워커의 첫째는 강철새를 완성하고 마법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일이었다.

“평생토록 재능을 낭비하다가 죽은 멍청이로 남는 한이 있어도, 저건 포기 안 해.”

셰비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는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빛처럼 불확실한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좋아했다. 하긴 고양이털 한 가닥만 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마법의 개방을 주장했던 이였으니, 무의식적으로 동류를 찾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하나 더 물을게. 넌 어느 게 우선이야? 강철새를 띄우는 것? 아니면, 천시받는 비마법으로 뭔가를 해낸 마법사로 기억되는 것?”

“어…….”

워커는 처음 듣는 질문에 진심으로 당황했다. 애초 강철새를 왜 만들기 시작했었나. 굳이 비마법을 고수한 이유는 대체 무언가.

세상에서 마법이 사라져 간다는 자신의 주장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느새 강철새를 띄우는 것 자체가 첫째 목표가 되어버렸지만, 비마법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세우는 마법사가 된다거나 하는 건 아예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마법망을 수리할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잖아. 그럼 이제 저 강철새를 띄우는 데 굳이 비마법을 고수할 필요는 없는 거네. 네가 비마법을 고집한 건 마법망이 망가지고 마법이 사라질 거라는 불안에서 기인한 거였으니까.”

“……어어? 그, 그렇지? 하지만, 비행마법은 워낙에 훼손이 심해서…….”

“그게 무슨 걱정이야? 내가 있는데.”

셰비언이 씩 웃으며 허공에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서 살구만 한 크기의 새하얀 빛구슬이 퐁, 솟아나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시장의 광대패처럼 재주를 부리는 그를 넋을 놓고 바라보던 워커의 낯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이제까지 나한테 보여준 건 뭐야, 설마 나름대로 한 번 거르기라도 했었다는 거야? 셰비언,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두 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빛구슬을 따라 워커의 눈도 정신없이 흔들렸다. 셰비언은 빛구슬의 크기를 좀 더 키워 커다란 사과만 하게 만들어서 한쪽 손 위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빛구슬을 톡, 건드렸다.

동그랗던 빛구슬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펼쳐졌다. 커다란 꽃봉오리가 일순간에 개화하듯이, 그렇게. 끝은 뾰족하고 안쪽은 넓적한 삼각형의 꽃잎들은 일부러 만들어낸 것처럼 정교한 규칙성을 가지고 화사하게 펼쳐졌다.

“손 내밀어봐.”

엉겁결에 내민 손 위에 빛으로 만들어진 꽃이 올라왔다. 워커는 마치 얼음으로 조각된 꽃을 든 것처럼 서늘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셰비언이 몸을 굽히고 꽃에 입김을 불었다. 꽃잎이 흩어져 날아올랐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창공으로.

워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환상인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지만, 거칠 것 없는 바람이 옷자락을 헤집으며 맨살을 더듬고 희롱하는 느낌이 너무나 선연했다. 조금 전까지 분명 지하연구실에 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더더욱 무서운 건, 분명 바닥을 딛고 선 것 같긴 한데 그 바닥이 보이질 않는다는 거였다. 눈앞의 셰비언은 보는 사람이 다 어이가 없을 청도로 편안하게 허공을 딛고 서 있었다.

워커는 되도록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 역시 허공에 서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지금의 침착함마저 무너질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절절 끓어오르는 마법사적인 흥미에 집중했다.

“셰비언!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네가 만든 의식세계야?”

“아아, 역시 너는 눈치가 빨라.”

“상황이 이렇게 뻔해서야 그 빠른 눈치 써먹을 필요도 없겠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내 정체?”

셰비언이 삐죽 웃었다. 워커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워커는 한 걸음씩 다가오는 셰비언을 피해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는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마침내 코앞에까지 다다른 셰비언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의 발밑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흰 눈이 덮인 설원과, 설원 너머 끝이 보이지 않도록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과, 껑충하게 키가 큰 아름드리 침엽수들. 바람에 휩쓸린 눈이 아우성치며 떨어지다 올라가다를 반복했다.

“북쪽 셰비언 절벽의 지배자이며 마법의 주인이자 관리자,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용, 그게 나야.”

“절벽의 지배자이며…… 마법의 주인? 용?”

“분명히 말하는데, 마법은 일부러 도둑맞은 거야.”

셰비언은 몹시 진지한 어조로 옛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로렐라이를 끌어들인 건 자신이었음을 피력했다. 비록 오드리는 믿지 않았지만, 마법사라면 전설을 그냥 전설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말해준 워커는 좀 다를 거라고 기대하면서.

하지만 시간은 너무나 오래 흘렀고 전설은 취사선택하기 지극히 좋은 재료였다. 워커에게 셰비언의 말은 황당한 개소리로 들렸고, 그는 개소리를 들은 사람답게 행동했다. 그때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종이 몇 장을 셰비언을 향해 내던진 것이다. 가없는 허공 아래로 빈 종이가 팔락팔락 흩어져 떨어졌다.

“미친놈.”

“……뭐?”

“야, 네가 진짜 대단한 놈인 건 알겠고, 아는 것도 많다는 거 알겠는데. 그래도 뻥도 적당히 쳐야 믿어주는 척이라도 하지. 마법의 주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용이라고? 용?”

“그렇다니까. 내가 로렐라이에게 마법을 넘긴 그 용,”

“네가 용이면 난 로렐라이다! 아 씨, 이놈의 의식분리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 더럽고 치사해서 안 배운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장난 그만치고 빨리 내보내 줘.”

워커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욕설을 줄줄이 내뱉으며 발을 굴렀다. 이쯤 되니 나름대로 워커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그를 신뢰했던 셰비언도 슬슬 화가 난다. 눈 덮인 설원과 절벽, 아름드리 침엽수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눈보라마저 그의 손짓에 따라 자취를 감췄다. 셰비언이 긴 팔을 뻗어 워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뭐야? 놔!”

워커가 있는 힘껏 발길질을 했지만 셰비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책상물림 마법사래도 상대도 마법사인데 힘의 차이가 확연했다.

“나는 너를 매우 높이 평가하는데, 그런 내 평가가 정말 맞았는지 어디 확인해 볼까?”

발밑이 쑥 꺼졌다. 내장이 죄다 뒤집어지는 것만 같은 끔찍한 부유감이 워커의 전신을 휩쓸었다. 심장이 떨어지듯 놀라 눈을 질끈 감아버렸지만, 시야가 차단되자 감각이 더 선명하고 예리해졌다. 마치 강철새를 타고 시험비행을 나섰다가 속절없이 떨어지던 때 같았다.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뜬 워커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허겁지겁 셰비언의 팔을 움켜쥐고 매달렸다. 셰비언이 길쭉한 눈을 둥그렇게 휘며 웃었다.

“놓으라며?”

“성질 더러운 새끼!”

“놓을까?”

“야아! 셰비언님! 천재님! 살려주십셔!”

낄낄거리며 워커를 놀리던 셰비언이 남은 손을 휘젓자 추락이 뚝 멎었다. 급격한 정지는 곧 구역질을 불러왔다. 워커는 희뿌연 구름으로 채워져 그나마 바닥 비슷한 느낌이 드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목구멍까지 올라온 토기를 가라앉혔다.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뒤집히고…… 죽을 것만 같았다.

“워커, 고개 들어.”

셰비언이 무릎에 고개를 처박고 꿈쩍도 하지 않는 워커를 불렀다. 그럼에도 워커가 대답이 없자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워커는 끔찍한 체험 때문에 기분이 상해 꿋꿋하게 고개를 들지 않고 버텼으나, 셰비언이 계속 건드리자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 왜! 왜 자꾸 고개를 들래? 내가 헛구역질하는 게 그렇게 웃겨?”

“아래를 봐.”

“아래는 뭐 하러! 어차피 구름으로 가득 찬 허공인……데…….”

화를 내려던 워커는 말을 잊었다. 바닥을 이루듯 가득 차 있던 구름이 사방으로 물러나면서 낯익은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멜브란트의 수도 브란젤.

낯익은 건물, 낯익은 형태의 길. 언제나 고개를 번쩍 들고 우러러 보아야만 했던 건물들이 손바닥만 하게 작아져 워커의 발아래에 있었다. 손톱만큼 작아진 사람들이 도시의 길을 따라 돌아다녔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어린 시절에 관찰하던 개미떼 같았다.

좀 더 시야를 넓혀보았다. 브란젤을 휘감아 돌며 흘러가는 제스본강이 보이고, 그 끝에 연결된 셰피아 항구와 바다도 보였다. 흰 돛을 단 배들이 세숫대야에 띄워놓은 장난감 같았다.

반대로 고개를 돌리자 한창 푸르게 물든 들판이 펼쳐졌다. 길게 누운 뱀처럼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이 보였다. 들판 곳곳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들과 그가 비행실험을 하는 언덕배기들은 모래바닥에 흩어진 돌멩이 같았다.

강철새를 타고 수십 번은 족히 날아올랐지만,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아까부터 긴장과 공포로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하던 심장은 이제 다른 의미로 뛰기 시작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이게 뭐야…….”

“하늘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어때?”

“하늘? 이게 하늘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라고?”

“그래. 네가 일평생 원하던 풍경이지.”

할 말을 잃은 워커의 발 아래로 다 자란 독수리가 날았다. 위풍당당하게 펼친 갈색 날개깃에 햇살이 비쳐 매끄러운 광택이 흘렀다. 워커가 아래에서 바라보며 상상할 때보다 훨씬 넓고 강인한 등과 날개였다. 드러누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워커는 넋을 잃고 멀어지는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이건 상상으로 만들어낸 풍경이 아니야……. 그렇지?”

“맞아. 기억의 재현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봐, 워커. 그런 말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모처럼 진짜 하늘을 체험할 수 있게 됐잖아.”

조금 전, 워커가 허공에 내던진 종이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조각조각 나눠져 있던 종이들은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들어가 제법 그럴듯한 공책의 꼴을 갖췄다. 셰비언은 그 공책을 집어 워커에게 내밀었다. 품에서 꺼낸 만년필은 지극히 친절한 배려였다.

“비마법 비행도구? 좋지. 분명 의미 있는 도전이야. 하지만 네 목표는 하늘을 나는 거지 비마법으로 일가를 이루는 게 아니잖아. 마법망을 복구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 놓고 계속 비마법에 매달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그, 그렇게 말을 해도…….”

“아, 비행마법이 거의 소실됐다고 그랬던가? 맞아, 아무리 천재라도 맨 땅에서 시작하는 건 힘든 일이긴 해.”

하얗게 몰려든 구름을 바탕 삼아 마법 수식이 펼쳐졌다. 워커는 홀린 듯이 필기를 시작했다. 그 어떤 땜질도 없는, 아름다운 마법이 눈앞에 있었다.

“이봐, 워커.”

“…….”

“이젠 믿겠어? 내가 용이라는 걸?”

“믿지! 믿고말고! 믿습니다!”

워커가 열렬하게 눈을 반짝이며 입으로 찬양가를 읊었다. 셰비언은 워커의 공책을 슬쩍 들여다보았다가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지금 워커는 입으로는 믿습니다, 를 중얼대면서 손으로는 비행마법 수식을 정교하게 비틀어 강철새에 적용할 수 있도록 변형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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