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0. 폭풍이 오는 계절 (11/62)

chapter 10. 폭풍이 오는 계절

「……정의의 신 하티의 앞에서 결혼 계약서의 이행을 맹세한다. 결혼식이 마무리되면 결혼 계약서는 하티의 신전에 보관되며……. - 젊은 연인을 위한 결혼절차안내서 中」

와야 할 태풍은 오지 않고 대신 뜨거운 태양볕이 정수리를 데우던 어느 날, 오드리는 타우레드 후작영애의 티타임 초대장을 받았다. 딱히 에스코트 기사를 동반하지 않아도 되는 소소한 모임이었다.

“정말로 왔군.”

“그러게요. 보티안 씨가 진짜 타우레드 후작가의 공자였던 걸까요?”

“알 게 뭐야, 이젠 성은 물론이고 이름마저 버린 치안대원인데. 후작영애와는 아직 연결이 남아 있는 모양이지만, 후작가의 가신들 눈에는 침을 뱉어도 모자랄 후레자식일걸.”

오드리는 초대장을 팔락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가계도에서 이름이 파인 지 오래일 남자가 기를 쓰고 연결해 준 초대장이다. 네이기스의 후원을 위해서라지만 오드리에게도 나쁜 기회는 아니었다. 타우레드 후작영애쯤 되면 다루는 정보도 고급일 테니까.

더불어 타우레드 후작영애와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결혼시장에서 몸값이 뛰는 게 현실이었으니, 메너트는 네이기스와 같이 가고 싶다는 오드리의 전갈에 조카님 참 가식적이다 이를 갈면서도 네이기스를 보내주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최대한 얌전히, 좋은 인상을 남기고 와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저, 레이디 타우레드를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어요. 정말이지 황금장미처럼 아름답고 사람의 시선을 끄는 분이었어요.”

후작가로 향하는 길, 마차에서 두 손을 꼭 모으고 타우레드 후작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네이기스의 눈은 동경으로 반짝반짝했다.

“그래요?”

“네! 한 번쯤은 꼭 가까이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그분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아서……. 그런데 이렇게 티타임에도 가볼 수 있게 되고, 지금 너무 행복해요. 언니, 내게 동행하자고 말해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그림 그릴 때보다 더요?”

네이기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독한 물감에 상한 손가락은 좀처럼 이전대로 회복되지 않았고, 지금도 레이스 장갑을 껴서 감춘 채였다. 서서히 나아지는 손가락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가도 원치 않게 놓은 붓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완성하지 못하고 놓아둔 그림들, 하나하나 아껴가며 관리했던 붓들, 보는 것만으로 황홀하던 물감들, 꽃향기보다 맡기 좋던 물감 냄새, 캔버스에 붓질하던 순간의 촉감. 꿈에서나마 그림을 그리다가 깨어나면 새벽이었던 나날들.

“네…….”

진심이 아닌 목소리는 가냘팠다. 오드리는 웃는 낯으로 네이기스의 욕망에 불을 붙였다.

“내가 그림 세 점을 샀었죠. 타우레드 후작영애에게 그 그림 중 한 점을 선물했어요. 아주 흥미로워하시던걸요.”

“……네?”

“후작영애가 초대하고 싶었던 건 내가 아니라 네이기스예요. 나야 뭐 전령새 노릇을 하는 것뿐이죠. 그러니까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요.”

“네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덤벼들 준비요. 그림 그려야죠. 그 재능을 썩히다니, 세상에 죄짓는 거예요.”

“하지만……. 남편 되실 분이 싫어하시면……. 그땐 어떡해요…….”

“몰래 하면 되죠. 내가 돕고 후작영애가 도우면 누가 알겠어요?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이지만, 에이쉬도 도와줄지 몰라요.”

“오, 오라버니가요?”

“어머, 몰랐어요? 고모님이 네이기스를 찾으러 오는 걸 늦춘 것도, 네이기스가 집으로 돌아간 뒤 큰일을 당하지 않도록 막은 것도 그의 노력이었는걸요. 에이쉬도 네이기스의 그림이 대단하다고 했어요.”

“전혀…… 몰랐어요. 오라버니가……. 말도 안 돼…….”

네이기스에게 오드리의 말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살론에 유학을 가 있었던 에이쉬는 네이기스와 그리 친하지 않았고, 에스코트도 어쩔 수 없이, 설렁설렁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게다가…….

“오라버니는 사교 모임에 다녀오면 거기 참석했던 레이디들의 지적 수준 운운하는 못된 버릇이 있……. 헉, 이건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그놈의 살론에서는 소리만 하는 줄 알았더니만. 알겠어요, 앞으로 모른 척할 테니까 네이기스는 당장 닥친 일부터 고민해 봐요.”

네이기스는 모든 게 다 꿈결 같았다. 오드리의 웃는 얼굴도, 고만고만한 수도 저택 중 하나라곤 믿어지지 않는 후작가의 넓고 아름다운 정원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한 티테이블도, 타우레드 후작영애의 환대도, 자신의 그림을 두고 ‘작품’이라고 불러주며 후원을 약속하는 다정한 음성도.

아이스크림을 뜬 스푼을 막 입에 넣었던 네이기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밭은기침을 할 뻔했다. 겨우 아이스크림을 삼키고 나서도 형편없이 혀가 꼬였다.

“후, 후원이요?”

“어머나. 몰랐어요? 내가 여성 화가들을 후원한다는 거.”

“제가 화가라고요? 아니요, 전 그냥 취미로…….”

라디아타 타우레드. 사교계의 보석, 황홀한 황금 장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오드리는 라디아타에게서 질책하는 듯한 시선을 받고 쓴웃음을 지었다.

“네이기스가 그렇게 냉큼 대답할 아이였으면 제 선에서 이미 끝났을 테죠. 네이기스, 솔직하게 말해 봐요. 그림 좋아하잖아요? 계속 그리고 싶잖아요. 캔버스 앞에 앉았을 때 가장 행복하지 않았어요?”

“하, 하지만……. 완벽한 레이디가 되려면 그림은 그리면 안 된다고, 그렇게 좋거든 보기만 하라고, 어머니께서…….”

네이기스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그림에 대한 미련과, 어머니의 질책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발목을 잡아당겼다.

하향결혼이라는 수군거림에 오랫동안 시달렸던 메너트는 남들이 보기에 완벽한 가정에 집착했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만은 흠 없는 부부관계,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자식들을 원했다. 예술가와 어울리는 장남까지는 참아 넘길 수 있지만, 그림 그리기에 빠져 화가 흉내를 내는 딸은 수비범위 바깥이었다.

“이런. 무슨 상황인지 알 만하네요.”

라디아타는 쓴웃음을 지으며 스푼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후원하는 여성 화가 대부분은 중류계급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물며 네이기스는 귀족 계급의 여성이니 말해 무얼까.

“레이디 그웬,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내가 하는 건 후원이지 강요가 아니니까요. 거절해도 상관없어요.”

“네?”

“그래도 일단 듣고 나서 결정해요. 후원을 승낙하면, 작품 활동하는 걸 그웬 백작부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감춰줄게요. 핑계는 얼마든지 댈 수 있어요. 설마 타우레드 후작영애와 교류하는 걸 반대하진 않으실 테니까.”

네이기스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라디아타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가명을 써야겠지만 전시회에 작품을 걸 수도 있을 거고, 잡지사와 인터뷰를 할 수도 있어요. 아, 물론 서면으로 해야겠죠. 거기에 더해 당신의 서명이 들어간 그림이 팔려나가 온갖 곳의 벽에 걸릴 거예요. 어때요?”

“어, 어어…….”

“난 레이디 그웬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니 어느 정도의 수고는 감수할 수 있어요. 당장 결정하기 힘들죠?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침대에 누워 잘 생각해 봐요. 결정이 나면 언제든 찾아오고요. 후작가의 문은 언제든 열려 있어요.”

네이기스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돌아갔다. 올 때와는 달리 혼자 돌아가는 게 오드리에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도저히 동행할 기분이 아니었다. 라디아타가 오드리와 좀 더 얘기하고 싶다고 하기도 했고.

하나 오드리는 라디아타와 마주 앉아 있는 게 영 꺼림칙했다. 저 보랏빛 눈동자가 호감으로 반짝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뭇 사람들은 라디아타의 금을 녹여 만든 듯한 눈부신 금발이나 도자기 인형 같은 피부 따위에 정신이 팔려 속아 넘어갈지 몰라도 오드리는 아니었다. 무언가 분명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오드리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라디아타를 보았다.

반면 라디아타는 찻잔에 각설탕을 몇 개 떨어뜨리며 오드리의 경계심을 즐겼다. 오드리 본인이야 모르겠지만, 그녀는 오드리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비록 그 대부분이 좋은 얘기는 아니었지만, 소문에 이리저리 휩쓸리던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둘째 오라버니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레이디 그웬을 도와주고, 그녀를 후원해 달라고요.”

타우레드 후작가엔 ‘공식적으로’ 둘째 아들이 없었다. 라비린 벨키스 타우레드 공자와 라디아타 타우레드 영애가 있을 뿐.

마치 속내를 읽은 듯한 말에 오드리는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라디아타는 그런 오드리를 아쉬운 듯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본래 이름은 아베드 타우레드였는데, 요즘은 피올 보티안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죠. 그나저나 놀라질 않으시네요. 짐작하셨나 봐요?”

“사자에게 잃어버린 자식이 있다는 건 유명하니까요. 미리 언질도 들었고. 그보다 저는 레이디 타우레드께서 제게 흥미를 가지는 이유가 더 궁금한데요.”

“평범한 티타임 초대장을 보내놓고 그림을 받을 줄은 몰랐거든요.”

라디아타는 초대장에 네이기스를 언급하지도 않았고, 그림 후원을 하겠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초대장을 받자마자 네이기스의 그림을 보낸 건 전적으로 오드리의 판단이었다.

“레이디 타우레드께서 후원하고 있다는 화가들의 작품을 미리 확인했어요. 과연 후원받을 만한 실력들이었죠. 보티안 씨가 뭐라고 했든, 네이기스의 실력을 보고 싶어 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라디아타가 눈을 사르르 잡으며 웃었다. 재능은 있으나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 여성 화가를 후원하기 시작한 지가 이미 몇 년인데, 사람들은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할 일 없는 귀족 영애의 쓸데없는 도락이라던가.

우스운 얘기였다. 아픈 후작부인 대신 후작가의 큰살림을 도맡은 지가 언젠데, 설마 별거 아닌 도락에 시간과 공을 들이겠는가. 라디아타는 퍽 진지한 태도로 후원에 임하고 있었다. 자칫 묻혀 사라질 뻔한 화가를 발굴해 내는 건 놀라울 정도의 성취감을 주었다.

“아, 정말 기분 좋네요. 맞아요, 그 오라버니를 홀딱 반하게 한 실력을 꼭 보고 싶었어요. 화가 본인을 만나기 전에 먼저 그림을 볼 수 있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죠. 게다가 그림도 굉장히 내 취향이었고. 정작 본인이 아무 생각도 없을 줄은 몰랐지만요.”

“네이기스는 분명 연락해 올 거예요. 그 애가 그림을 포기할 리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이미 한 번 자유를 맛보았는걸요. 그 결과물로 돈도 벌었고요. 게다가 이렇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겠노라 나서주는 사람도 생겼는데, 망설임은 그다지 길지 않을 거예요.”

“흐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하네요. 내 생각도 그래요. 레이디 그웬은 곧 날 찾아올 거예요. 그런 눈빛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자신을 놓지 못하죠.”

라디아타는 오드리가 보내온 그림을 침실에 걸었다. 본래 걸려 있던 연못 그림마저 떼어내고 걸어둘 만큼 마음에 들었다. 어디서 자신의 취향을 알았을까 궁금할 지경이었다. 우연이라면 대단한 운이고, 미리 조사한 거라면 박수라도 쳐 줘야 할 것이다.

“있죠, 오라버니가 내게 보낸 편지엔 레이디 그웬에 대한 얘기만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레이디 헨젤에 대해서도 잔뜩 적어 보냈죠. 뭐라더라, 가까이 지내서 나쁠 것 없는 사람이니, 웬만하면 찰싹 붙어 있으라던가. 하긴, 레이디 헨젤에 대해서는 저도 궁금한 게 많긴 했어요.”

라디아타는 뽀얗고 예쁜 각설탕을 집게로 집어 살랑살랑 흔들다가 제 찻잔에 떨어뜨렸다.

“레이디 헨젤께서 봄 무도회에서 선보인 만년필이 지금 브란젤에서 대유행이랍니다. 달지 않은 차는 싫다며 이 각설탕을 온갖 티타임에 싸들고 다니셨던 것도 레이디 헨젤이었죠. 이번에 나온 획기적인 경비 마법도 레이디 헨젤께서 가장 먼저 써보셨다고요.”

“아무래도 로렐라이의 특급 고객이니까요. 게다가 만탈락에서 편의를 워낙 많이 봐주었던 터라, 뭐든지 신제품은 제게 가장 먼저 온답니다.”

오드리의 말에 라디아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휘저었다. 각설탕이 찻잔 속의 작은 회오리를 따라 녹기 시작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왜 가망도 없어 뵈는 비마법 비행도구에 미친 마법사와 어울려 다니고, 귀족 영애에게 붓을 쥐어주고, 유명세만 있지 실속은 없는 치안대원에게 기꺼이 시간을 쓰실까요? 그 모든 게 로렐라이와 관련된 건 아니잖아요?”

“변덕에 이유가 필요하던가요?”

오드리는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악평에 걸맞은 오만한 동작이었건만, 라디아타는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뽀얀 뺨에 발그레한 물이 들었다.

“와, 이런 식으로 다 빠져나가셨던 거구나. 연습 얼마나 하셨어요? 굉장히 잘 어울려서 놀라울 정도예요!”

“…….”

“제 귀는 레이디 헨젤께서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곳에까지 열려 있답니다. 나는 당신이 소문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이렇게 보니 더 확실히 알겠어요. 소문도 평판도 일부러 내버려 두고 있는 거죠? 내 눈엔 비늘이 없으니 부정할 생각 말아요.”

라디아타의 어조엔 확신마저 어려 있었다. 오드리는 내심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타우레드 후작, 이 망할 영감탱이. 집안 단속 제대로 안 하고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으로부터 육 년 전, 오드리가 막 워커를 만나고 그의 비마법 비행도구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던 때. 한발 늦게 워커를 찾아온 클로드는 그때 오드리를 처음 만났다.

‘세상에, 이런 어린 아가씨에게 선수를 뺏기다니.’

클로드는 오드리의 진짜 목표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또한 비마법과 마법의 조화에 관심이 많아 로렐라이에 온갖 연구 의뢰를 하며 돈을 투자하는 투자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오드리에게 클로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로렐라이가 왕실과 끈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고, 수준 높은 비마법 연구자를 소개받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상단 초기에 발생했던 온갖 문제들을 그리 쉽게 넘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번 나랍의 설탕 무역 건에 대해서도 그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다만 최근 들어 자꾸만 로렐라이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깔짝대는 바람에 마찰이 잦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 상단의 공적인 일이지, 집안에서 정보가 샜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마음 같아선 당장 클로드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지만, 일단 지금은 당장 눈앞의 라디아타를 구슬리는 게 먼저다. 오드리는 처연한 표정을 짓고 라디아타의 확신을 부정했다.

세상에 욕먹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느냐고, 어떻게 그 악평을 일부러 내버려 두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느냐며. 개성이 좀 지나친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말이 많을 줄은 몰랐다고, 때때로 만탈락으로 돌아가고 싶을 지경이라고.

오해가 서글퍼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눈가의 눈물을 닦는 시늉까지 했는데, 라디아타의 표정은 변하질 않았다. 그녀는 굉장히 재미있는 일인극을 본 것처럼 웃었다.

“내가 레이디 헨젤에 대한 이야기를 대체 언제부터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절 찾아와 한탄하셨죠. 라디아타, 저기 남쪽 도시에 이 아비를 홀딱 반하게 한 꼬마 아가씨가 있는데 말이다…….”

라디아타는 아주 그럴듯하게 클로드를 흉내 냈다. 오드리는 무심코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꼬마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항상 궁금했어요. 아버지는 그 꼬마 아가씨를 입양해 오지 못한 걸 늘 아쉬워했거든요.”

“……그 헛소리를 집에서도 하셨단 말인가요?”

“어머, 왜요. 귀여운 여동생이 생기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설렜었는데요. 안 온단 말에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죠? 데뷔탕트도 치렀으니 이제 동생은 어렵겠지만, 친구는 어때요?”

“네?”

“난 레이디 헨젤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나랑 친구가 되어주겠어요?”

라디아타가 찡긋 한쪽 눈을 감으며 윙크했다. 오드리는 이 후작영애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이런 말을 하나 싶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호의를 전해오는 상대를 싫어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오드리는 준비해 왔던 종이 몇 장을 꺼내 라디아타에게 넘겨주었다. 한때 신문과 잡지에 실리며 브란젤의 사교계에서 설탕 소비를 멈추게 만들었던 그림들이었다.

사탕수수 대신 도구 속에서 쥐어 짜이는 사람, 설탕 포대에 설탕 대신 들어가 있는 사람, 찻잔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

“레이디 타우레드의 방식은 정말로 세련됐어요. 그림의 출처를 캐다가 깜짝 놀랐지 뭐예요. 모처럼 치안대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타우레드 후작께서 양껏 검을 휘두르는 동안, 후작영애께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타격을 주신 거죠. 이런 간접적인 방식이 먹히다니, 정말 대단해요. 레이디 타우레드의 영향력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우와아……. 이걸 들킬 줄은 몰랐는데요.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모르는걸…….”

라디아타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이 그림들은 그녀의 후원을 받는 화가들에게 의뢰해 그린 것들이었다. 그들을 설득해 서명을 하지 않도록 했고, 사람들의 인상에 깊게 남을 수 있도록 단순하게 그리되 과장을 보탰다.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궁금했죠. 조용히 기다리기만 해도 모든 일이 잘 끝날 텐데, 왜 이런 모험을 하셨는지.”

오드리의 질문이 라디아타의 속을 파고들었다.

‘말하면 이해해 주려나……?’

그저 가만히 주저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말하면, 자신을 이해해 줄까? 보기 좋은 꽃처럼 치장하고 향기롭게 피어 있는 게 덕목인 귀족 영애들의 정점에 있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납득해 줄까?

그녀는 대답을 고르며 망설이다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변덕에 이유가 필요하던가요?”

“이런, 맙소사.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다니요.”

“내겐 귀와 입만 있는 게 아닌데 그런 모험이라고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정보만 넘기고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에요.”

오드리는 라디아타가 마음에 들었다. 백작영애더러 감히 자기 수양딸 하라고 지껄이던 후작의 딸다웠다. 자신은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 딸을 키워냈다. 라디아타는 놀라울 정도로 오드리와 닮아 있었다. 생김새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마음이.

“이 그림은 왜 가지고 오셨어요? 이미 지난 일인데.”

“만약 네이기스의 태도를 문제 삼아 후원을 못 해주겠다고 하면 내밀 카드였어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오드리가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웃었다.

“하지만, 친구 사이라면 그런 협박을 하면 안 되겠죠.”

“풋! 역시 오드리는 나와 닮았어요. 마음에 들어요. 아, 이름 불러도 되죠?”

“그럼요, 라디아타.”

그렇게 오드리는 새 친구를 사귀었다. 둘은 의외로 대화가 잘 통했다. 아무래도 큰 가문의 살림을 도맡고 있는 처지다 보니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한편, 네이기스는 그림에 대한 미련과 어머니의 질책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라디아타의 제안에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끌리다가도, 들켰을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쿵 내려앉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런 그녀에게 뜻밖의 아군이 나타났다. 에이쉬는 네이기스가 오드리와 함께 라디아타를 만났다는 걸 알자마자 그 모임의 뒷모습을 알아채고 네이기스를 부추겼다.

“타우레드 후작영애가 후원해 주겠다고 한 거 맞지? 망설이지 말고 받아. 혹 어머니께서 의심을 하시거든 내가 막아줄 테니까.”

“……오라버니가 대체 왜요? 평소엔 나더러 멍청하다고 그렇게 욕했으면서.”

“그럼 되지도 않을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렇게 쫓아다니는 걸 두고 멍청하다는 소리 말고 뭔 말을 해야……. 야아, 네이기스, 울지 말고…….”

네이기스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며 에이쉬는 그만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할 땐 언제고, 갑자기 왜 이렇게 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지.

“혹시…….”

“네, 차였어요! 들으니까 기분 좋아요?”

“네가 그만두기로 한 게 아니라 차였다고? 아니, 그 치안대원 놈은 저가 뭐가 잘났다고 널 차? 그놈 이름이 뭐라고?”

네이기스는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사랑처럼 사치스러운 게 귀족 인생에 있을 거 같으냐며 그렇게 빈정대 놓고 이렇게 화를 내다니. 덕분에 마음이 좀 차분해지긴 했다.

“그 사람 얘긴 오라버니가 알 거 없고……. 레이디 타우레드가 후원해 준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요?”

“너 나중에라도 그 빌어먹을 놈 이름 꼭 얘기해라. 알겠지? 아무튼, 타우레드 후작영애가 여성 화가 후원한단 얘기는 유명해. 다들 할 일 없는 귀족 영애가 심심풀이로 하는 짓이라고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후원받는 화가들의 실력이 제법 괜찮거든.”

“어…….”

“예술은 전적으로 재능의 영역이고, 그 재능을 시궁창에 처박는 꼴을 눈뜨고 못 봐서 이러는 거니까 이 오라버니 믿어라. 나 혼자서는 힘들어도, 널 돕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에 손 하나 얹는 거야 어렵지도 않으니까.”

네이기스의 인생에서 에이쉬가 믿음직하게 느껴진 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지만, 이번만은 좀 달랐다. 네이기스가 욕망을 추구할 용기를 얻기에 충분한 격려였다. 소원했던 시간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남매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첫 번째 티타임이 있던 날로부터 사흘째가 되던 날, 네이기스는 타우레드 후작가의 정문을 두드렸다.

그날 이후, 오드리와 라디아타, 네이기스는 타우레드 후작가에서 정기적인 티타임을 가졌다. 네이기스가 그림에 빠져 있는 동안, 남은 두 사람은 함께 수다를 떨거나, 차를 마시거나,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가끔은 네이기스의 요청으로 모델도 섰다.

그렇게 티타임 아닌 티타임을 한 다섯 번쯤 가졌을까. 네이기스가 그림에 빠져 있는 사이, 라디아타가 오드리의 손을 잡고 이제껏 간 적 없는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뛰다시피 걸음이 빠르다.

호화롭게 장식된 복도를 몇 개나 지나고, 모퉁이를 뱅글뱅글 돌고, 커다란 문을 몇 번 지나고 나자 오드리조차 구조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예요?”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겨우 허락을 얻었거든요!”

빠르게 걸어서인지, 아니면 기대감 때문인지, 라디아타의 뺨이 붉었다. 라디아타는 오드리에게 설명도 해주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까마득한 천장에 닿을 듯 커다란 문이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열리고,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폭포수처럼 복도로 쏟아졌다.

오드리의 눈이 동전만큼이나 커졌다. 방은 커다란 원통과 같은 특이한 구조였고, 벽 전체에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목을 꺾고 올려다봐야 하는 천장에는 빛나는 마법등들이 별처럼 매달려 있었는데, 덕분에 서가 곳곳에 놓인 긴 사다리가 마치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것만 같았다.

“타우레드 후작가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에요. 오드리는 옛 마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잖아요? 아버지에게 한참을 졸라서 개방을 허락받았어요.”

“과연……. 허락을 구해야 할 만한 도서관이네요.”

오드리는 자석에라도 끌리는 것처럼 도서관에 발을 디뎠다. 책을 보관하기에 딱 좋은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그녀를 휘감았다. 바깥 공기는 계절에 맞지 않게 뜨겁고 커다란 창이 있는 복도 역시 적당히 데워진 공기 때문에 드레스 안쪽에서 땀이 흐르는데 말이다.

가까운 서가에서 책등을 살펴보았더니, 익히 알고 있던 귀한 책들이 수두룩빽빽하다. 절반쯤은 만탈락의 도서관과 겹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머지 절반만으로도 대단했다. 오드리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타우레드 후작가의 본가는 브란젤이 아닐 텐데, 왜 본가가 아니라 수도 저택에 이런 도서관을 둔 거예요?”

“마법 설계 때문에요. 이만한 도서관 유지에는 수십 가지의 마법도구가 들어가는데, 본가에 설치하는 마법도구는 이상하게 일찍 망가진다더라고요. 마법사들이 그러는데, 가끔 그런 곳이 있대요.”

“아아……. 맞아요, 들어봤어요. 만탈락에 있는 저택에 뭔가를 설치할 때 마법사들이 그렇게 신경질을 냈었어요. 허구한날 수리를 요청했거든요.”

“만탈락도 그랬어요? 세상에, 거긴 로렐라이의 본점이 있는 곳인데도 그렇단 말이에요?”

“그렇다니까요. 수리하러 올 때마다 입이 이만큼 나와서는, 이런 거지같은 곳에 자리잡은 선조는 대체 누구냐고 화를 냈었죠. 자기가 본 곳 중에 마법망이 불안정하기로는 손에 꼽힌다나 뭐라나…….”

“와우. 만탈락의 실질적인 지배자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였다니, 웬만큼 간이 크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짓인데요. 오드리, 혹시 그 마법사가 워커 크라티우스 씨인가요? 로렐라이의 수석 마법사라는?”

잡히는 대로 책을 빼들고 대강 넘기던 오드리는 그만 픽 웃어버렸다. 예전엔 워커를 두고 스스럼없이 미친 마법사라고 부르더니, 이젠 친구의 지인이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라디아타가 너무 귀여웠다.

“워커 녀석이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지 좀 오래 됐죠. 그 만들다 만 비마법 비행도구에 직접 타서 비행 실험을 하는데요.”

“아하…….”

“가끔 성공할 것 같은 날엔 미리 연락해서 구경하라고 하기도 하는데, 전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요. 혹시 보고 싶은 거라면 말 전해줄게요.”

“아뇨, 성의만 고맙게 받을게요. 오드리, 난 여기 앉아서 다 못 읽은 책을 읽고 있을 테니까, 마음껏 구경해요. 다만 책을 가지고 나갈 수는 없으니, 자료가 필요하면 고용인을 불러서 복사 마법 도구를 갖다달라고 하세요.”

오드리는 배려를 사양치 않고 받아들였다. 이만한 도서관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다니, 대단한 행운이었다.

도서관의 구조는 독특했다. 입구에서 볼 때는 동그란 방의 벽을 따라 서가가 둘러 서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렇게 직접 걸어보니 서가의 책장은 한 겹이 아니었다. 한 겹, 또 한 겹. 어느 것은 짧다가 어느 것은 길고, 다음 겹으로 나아가는 출구의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일부러 미로를 만들려고 작정한 것처럼 구조가 복잡하고 어지럽다. 인간이 오랫동안 쌓아온 지혜가 형태를 갖추고 오드리 주변에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오드리는 책으로 된 숲을 거닐며 오래된 책이 자아내는 독특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보티안 씨는 대체 왜 집을 나간 거지. 검으로 이름 높은 타우레드 출신에, 산트렘 기사단이면 집을 나갈 필요도 없었을 것 같은데.’

다들 명예롭다 칭송하는 포도송이의 문장을 안감에 새기고 과거를 잊은 듯 행동하는 치안대원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이 무어라고 그의 인생에 참견을 하겠나. 쓸데없는 생각이라, 오드리는 곧 머리를 내저으며 그에 대한 생각을 쫓아냈다.

‘어디보자……. 고대 종족이나 종족전쟁에 관련된 책은 어디에 가야 있으려나. 마력에 대한 옛 연구도 괜찮고……. 아니, 아예 전설 쪽을 뒤져봐야 하려나.’

서가의 숲을 헤매던 오드리는 이렇게 혼자서 책을 찾아봐야 별 소용이 없으리라는 걸 곧 깨달았다. 뭔가 기준이 있어 거기에 맞춰 정리해 둔 것 같긴 한데, 만탈락의 도서관과는 방식이 판이하게 달랐다. 사서가 필요했다.

결국 직접 찾기를 포기하고 미로 같은 서가를 되짚어 나가려는데,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묵직한 구두 소리와 차가운 느낌의 향수로 미루어보건대, 기척의 주인은 지위가 있는 남성이었다. 이 저택의 주인인 클로드 타우레드 후작일까, 아니면 이 저택에 찾아온 다른 손님일까.

다람쥐처럼 쪼르르 움직여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드리는 도리어 기척의 주인을 찾아 서가를 뒤졌다. 신중하고 꼼꼼한 라디아타가 다른 손님이 있는 도서관에 오드리를 들일 리 없으니, 후보자는 클로드 한 사람으로 좁혀졌기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클로드를 만나면 꼭 할 말이 있었다. 이미 편지로 한바탕 퍼부어주었지만 아직 부족했다.

‘망할 사자 영감.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그렇지, 사람을 그렇게 난폭하게 빼가면 어떡해?’

난데없이 왕실로 가겠다며 로렐라이 상단을 빠져나간 비마법 전문가, 사하스바티가 문제였다. 그가 클로드의 입김에 영향을 받는 인물인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따위로 빼갈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제까지 로렐라이와 클로드는 나름 괜찮은 파트너였다.

‘로렐라이만큼 그 사람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곳도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다행히 그동안 키워낸 사람들이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진행하던 연구에 타격은 크지 않아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드리가 복잡한 서가를 뱅글뱅글 도는 동안, 낯선 기척은 천천히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오드리는 더욱 몸이 달아 걸음을 재촉했다. 귀한 책들을 가득 끌어안은 책장을 몇 개나 지나쳐 모퉁이를 도는 순간, 기척의 주인이 나타났다.

오드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좁은 통로가 더욱 좁아 보이는 넓은 어깨. 팔뚝까지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단단한 근육질의 팔이 보기 좋게 드러나 있다. 멀찍이서부터 느껴지던 차가운 향기가 얼굴로 쏟아졌다.

“어……!”

오드리는 부딪치기 직전에 가까스로 몸을 멈췄다. 놀라기는 상대도 마찬가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다 들고 있던 책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값을 헤아리기도 힘든 귀한 책들이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장면을 보니, 시퍼런 한기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다.

“이런……!”

보통이라면 고용인을 불러 치울 것을 명령했을 텐데, 그렇게 시간을 쓰기엔 책이 너무 귀했다. 오드리도, 그녀와 부딪칠 뻔했던 남자도 황급히 주저앉아 책을 수습했다.

책은 두꺼운 게 하나도 없이 얄팍했다. 분야도 다양했다. 경제학, 지리학, 비마법, 의학, 수학……. 심지어 점술도 있었다. 도무지 취향을 짐작할 수가 없는 구성이었다.

제 근처의 책을 재빠르게 주운 남자가 오드리의 품에 있던 책을 받아갔다. 손이 어찌나 큰 지, 그 많은 책을 한 손으로도 쉬이 잡는다. 오드리는 굳은살은 있을지언정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손을 보고서야 그가 클로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는데, 마침 길게 내려온 마법등이 마치 후광처럼 그의 머리 뒤에서 빛나고 있어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마법등 때문에 금발처럼 반짝거렸다.

오드리가 면전에서 미간을 찌푸리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남자가 자연스레 허리를 굽혀 시선의 높이를 맞춰왔다.

‘누구지……?’

긴 것도, 짧은 것도 아닌 머리칼이 단정하게 이마를 덮고 있었다. 눈동자는 우유를 부은 초콜릿색이었고, 코는 곧고 높았다.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했고, 살짝 미소 짓는 입술은 형태가 뚜렷해서 보기 좋았다.

얼음요정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셰비언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미남이었다.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서서, 어떤 바람에도 날려가지 않도록 든든히 손을 잡아줄 것만 같은 인상이랄까.

그가 오드리의 손을 청하고 잉크 냄새 밴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유독 뜨거운 체온이 손가락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단지 그것뿐인데, 그가 풍기는 향이 통째로 자신에게 옮겨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라비린 벨키스 타우레드입니다. 벨키스 경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오드리 헨젤입니다. 사자의 아드님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는데, 뜻밖의 만남이로군요.”

오드리는 내주었던 손을 당겨 감추며 라비린을 빠르게 훑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어쩐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혈육들의 얼굴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걸로 치기엔, 타우레드의 사람들은 생김새가 참 제각각인데 말이다.

라비린이 인사하느라 서가에 대충 올려놓았던 책들을 챙기며 삐죽 웃었다. 환한 웃음도, 비웃음도 아닌 묘한 웃음인데 그게 또 이상하리만치 잘 어울렸다. 뜨거운 여름처럼 생겨선 어째 공들여 조각한 얼음 같은 인상을 주니, 거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검을 쥐느라 바쁜 사자도 책을 좋아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검술 수련을 하겠다고 여행을 떠나셨다고 들었으니까요. 이렇게 브란젤에 돌아와 계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아아……. 그런 거라면, 네. 사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사교 시즌에 맞춰 돌아오라는 당부를 들었었는데,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지 뭡니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시기를 놓쳤습니다.”

그 생각지도 못한 일이 대체 뭘까. 호기심이 일긴 하지만, 초면인데 대놓고 물을 수야 없는 노릇이다. 오드리는 불쑥 치솟은 호기심을 다독여 재우고 예의바른 미소를 지었다.

“그러셨군요. 벨키스 경, 제가 이 도서관의 놀라움에 빠져 원하는 곳을 찾아갈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종족전쟁에 대한 자료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시나요?”

“이런, 안타깝게도 반대쪽으로 오셨습니다. 저 통로로 조금 걸으면 벽이 나오는데, 그 벽을 따라 반 바퀴쯤 걸어가시면 됩니다.”

“친절한 안내에 감사드립니다.”

“뭘요, 집주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안내할 고용인을 붙여드릴까요?”

오드리에겐 불필요한 친절이었다. 그녀는 정중하게 제안을 거절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라비린은 책을 정돈하는 척 오드리의 뒷모습을 흘끔대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때까지 들고 있던 책을 서가의 빈 공간에 마구잡이로 쌓아놓고 서가에 기대 마른세수를 했다.

“자연스러웠겠지…….”

“지금 꼬락서니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데요, 오라버니. 꼴사납게 서가에 기대서 뭐 하는 거예요?”

뒤늦게 오드리가 헤매고 있을까 걱정되어 인기척을 찾아왔던 라디아타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혀를 차고 말았다. 아버지를 닮아 커다란 덩치가 아깝게 어깨를 쭈그러뜨린 라비린이라니, 눈 건강에 심히 좋지 않은 광경이었다.

“오늘은 내 친구가 오는 날이니까 웬만하면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도 했잖아요.”

“이야, 사교계의 보석, 타우레드의 황금장미께서 오라버니를 두고 방에서 키우는 화분 취급을 하는구나. 비 오면 들여놓고, 해 뜨면 내놓고.”

“그랬으면 차라리 편하게요. 화분이면 발이 달리지 않아 내가 필요할 때에 필요한 곳에 있었을 텐데.”

라디아타가 내지른 비수가 어찌나 아픈지, 라비린은 차마 대꾸도 못했다.

로샨 타우레드 후작부인은 그저 몸이 아파서 후작가 살림을 놓은 게 아니었다. 자유로운 기풍의 산트렘 지역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말이 많은 데다 서로를 평가하는 문화가 있는 브란젤의 사교계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첫째와 둘째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텼지만……. 부모와 전혀 닮지 않은 금발자안의 셋째, 라디아타를 낳았을 때 그녀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왕실의 혈통이었던 증조모를 닮은 거라지만, 산트렘 출신인 자신을 누가 믿어주겠느냐는 절망이 그녀를 짓눌렀다. 외도한 게 틀림없다며 흘끔댈 사람들의 시선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클로드의 위로는 마음에 닿지 않았다. 그는 그런 말을 듣지 않을 사람이니까!

로샨은 점차 자신을 잃어갔다. 후작가의 정문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했고, 산트렘의 공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잘 쓰던 검을 내려놓았으며, 꽉 조인 코르셋과 가느다란 허리에 집착했다. 마음의 병은 곧 육체의 병이 되었고, 하루 내내 침대에 누워 있는 날들이 늘어갔다.

자연히 후작가의 살림은 일찍부터 라디아타의 몫이 되었고, 데뷔탕트 이후엔 후작부인이 감당했어야 할 일까지 죄다 떠맡았다. 상황이 이런데 사교계의 보석이니 황금장미니 하는 별명이 처음부터 생겼을 리가 있나.

“내가 어린 나이에 살림을 이어받아야 해서 울며 공부할 때도 오라버니는 내 옆에 없었고, 사람들이 내 금발을 두고 수군거릴 때도 오라버니는 내 옆에 없었죠.”

“라디아타…….”

“그나마 내가 처음 코르셋을 찼던 일곱 살 때는 옆에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빈말로도 라디아타는 너무 어리다, 코르셋은 너무 가혹하다 같은 소리도 해 본 적이 없죠. 처음 배운 검이 너무 신나고 즐거워서 말이에요.”

지금 놀라울 정도로 가느다랗다 칭송받는 라디아타의 허리는 로샨의 작품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코르셋을 차고 산 덕에 갈비뼈 모양은 변형됐고 이제 코르셋 없인 제대로 허리를 곧추세우지도 못하는데 다들 라디아타의 허리를 부러워했다.

피올은 그런 라디아타를 감싼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는 로샨과 코르셋으로부터 라디아타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결국 그도 열셋이 되자마자 자신의 꿈을 좇아 집을 떠나 버린 탓에 라디아타를 사교계에서 보호해 주지는 못했지만, 그 잠깐의 어린 시절만으로도 라디아타는 피올의 웬만한 잘못은 다 용서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런 오라버니를 화분 취급 좀 하는 게 어때서요? 하여간 내 친구에게 방해되니까 이만 돌아가요. 설마 벌써 만난 건 아니죠?”

“그 설마가 진짜가 됐는데 어떡하지. 레이디 헨젤이 네 친구인가 봐? 평판 좋은 사람들만 골라 만나는 것 같았는데 레이디 헨젤이라니, 이거 놀라운걸.”

“오드리는 평판과는 상관없이 내겐 아주 소중한 친구예요. 내가 누구와 친구를 하든 그게 오라버니랑 무슨 상관이에요?”

“네가 아무리 평판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다들 헨젤가의 망나니가 황금장미의 눈을 흐린다고 떠들어댈 거야.”

라디아타의 눈이 커다래졌다. 멀쩡히 후계자 수업을 받던 라비린이 열여덟 살의 나이에 검술수련여행이라는 웃기는 명목으로 집을 떠난 게 벌써 육 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살아 있다는 소식만 전할 뿐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사람이 브란젤 사교계 상황을 어찌 저리 잘 아는가.

‘정보 라인이 벌써 넘어간 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니, 처음부터 끊긴 적이 없을지도 몰라.’

라디아타는 무심결에 입술을 깨물었다. 위의 두 오라버니가 자리를 비운 육 년 동안 타우레드 후작가에 남은 유일한 자식으로서 누렸던 특권들이 본래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게 뼈에 사무치게 실감났다.

“레이디 헨젤은 너와 사정이 달라. 헨젤 백작은 딸을 전혀 보호하지 않으니까. 그나마 그녀를 보호하는 건 만탈락의 금뿐인데, 사내새끼들 졸렬한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제 모자람은 생각도 않고 잘난 여자 끌어내릴 생각만 하는 놈들 천지니, 덩달아 끌려 내려가지 않게 조심해라.”

“사교계 사정에 아주 밝으시네요. 검술수련여행이라는 건 역시 그냥 핑계였던 거죠? 육 년 동안 뭘 하다 오신 거예요?”

라비린은 무심결에 라디아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가 대번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얼얼하니 아픈 손등을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기억 속의 막냇동생은 여전히 열세 살 어린아이다 보니 그만 실수를 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놈인 줄 알았던 오만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왔지.”

“동생의 교우관계에 참견하고 싶어 안달을 하시는 걸 보니, 아직 덜 치르신 모양이에요. 이왕이면 십 년 딱 채우고 오실 것이지.”

“이야, 무서운 말을 쉽게도 하네. 역시 내 동생.”

킬킬대며 웃던 라비린이 서가에 대충 올려뒀던 책을 다시 챙겼다. 그리고 얌전히 방에 돌아갈 것처럼 몇 걸음을 떼었다가, 돌연 품 안의 책 중 한 권을 빼내 라디아타에게 내밀었다.

라디아타가 얼결에 받아보니, 바로 얼마 전까지 읽고 있던 의학서의 다음 권이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라디아타는 서점에 붙어있던 광고를 상기해냈다. 다음 주쯤 의학서의 새 시리즈가 나올 거라던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미 출간 도서라는 소리였다. 어떻게 아직 나오지도 않은 책이 라비린의 손에 있는 걸까? 라디아타는 의심으로 눈을 빛냈다.

“오라버니, 제가 이런 거 읽는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게다가 이거 미 출간 책이잖아요.”

“화분에서 벗어나고 싶은 오라비의 가련한 노력이라고 생각해 줘. 리즈비아 거리의 출판사에서 일하는 친구 녀석을 달달 볶아서 얻어온 거야. 서점에는 다음 주부터 깔린댔어. 왜, 별로야?”

모처럼 얻어낸 책인데 언제 전해주면 좋을까, 온종일 라디아타 주변을 서성댔던 라비린이다. 그는 됐다 소리를 들을까 잔뜩 긴장해서는 동생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오드리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잔뜩 날이 섰던 라디아타는 덩치와 인상에 안 맞는 짓을 하는 오라비 때문에 그만 맥이 다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읽고 싶었던 책을 고맙게 받아들고 새침하게 턱을 들어올렸다.

“특별히 오늘은 발 달린 화분 정도로 생각해 드릴게요. 그럼 오라버니, 볼일을 다 마치셨으면 이만 방으로 돌아가 주시겠어요? 그리고 내 친구에 대한 관심은 이만 거둬주셨으면 좋겠네요.”

“어라,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노골적으로 흘끔대는데 모르는 게 바보죠. 자, 선물한 책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빨리 가요. 빨리!”

라비린은 그렇게 도서관에서 쫓겨났다. 읽으려고 챙겼던 책들의 표지도 펼쳐보지 못한 채로. 그는 도서관 문에 멍하니 기대어 서서 안쪽의 소리를 들으려 애쓰다 후작가에 설치된 마법도구의 성능이 얼마나 훌륭한지만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엿듣기를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가던 그는 문득 멈춰 서서 제 어깨 근처에 손을 올리고 높이를 가늠했다. 아까 오드리와 마주 섰을 때 그녀의 머리 높이가 딱 그쯤이었다.

“…… 키가 의외로 좀 작은 편이네…….”

멀리서 스치듯 보기만 하던 사람을 코앞에서 보니 충격이 대단했다. 그동안 연습한 보람이 있어 실수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라비린 벨키스 타우레드. 그는 지난 사 년 동안 로렐라이 상단에서 상단주의 대리인으로 일했던 메이즈와 동일인물이었다.

대리인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일 잘하고 착실하던 메이즈가 그만둔다는 말에 섭섭해하며 퇴직금까지 쥐어준 오드리가 알면, 이번에야말로 클로드의 멱살을 잡겠노라 길길이 날뛸 일이었다.

* * *

브아아아아앙-

기차가 특유의 소리를 내며 만탈락역에 도착했다. 브란젤로 향하는 상행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샤를레아는 복잡한 사람들 틈을 날렵하게 빠져나와 역사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유독 눈에 띄는 외모에 독특한 차림을 한 그녀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쏠렸다가 황급히 멀어졌다. 기사의 위상도 바닥에 떨어지는 세상인데 용병의 취급은 말할 것도 없다. 치안대가 아무리 유능하다지만 애초 날벼락을 맞지 않는 게 제일이었다.

“아, 다른 건 다 별거 없는데 이 기차가 참 신기하단 말이야.”

사람들이 흘끔대거나 말거나, 샤를레아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사방이 뚫린 역사의 기둥에 기대선 채로 기차를 감상했다. 뭍에 올라와 만난 신기한 것들은 손가락이 모자라도록 많지만, 개중에서도 기차의 마법동력이 최고였다.

‘바일런 섀덤이라고 했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라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기차 내의 급사들이 브란젤이란 도시에 가면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말해준 덕에, 샤를레아의 목적지는 셰비언 성벽에서 브란젤로 급히 수정된 상태였다.

중간에 내려서 딴짓을 한 탓에 일정이 한참 지체됐지만, 그럼에도 만탈락에서 기차를 내린 건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는 주변 풍경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차 창문 너머로 너른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역 부근까지 오니 갑자기 키가 크고 잎이 넓은 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한눈에 봐도 식생기후부터 다른 두 식물군이 자그마한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저 멀리 낮은 언덕에는 양을 키우는 목초지까지 있었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샤를레아의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물기 없이 버석한 바람에선 모래 냄새가 났다. 저 목초지가 있는 언덕 너머로 사막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뭐 이런 미친 동네가 다 있어?”

샤를레아는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예전만큼 눈이 밝고 감각이 예민했다면 좀 더 잘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어쩐지 이젠 흉터만 남아 있을 등의 상처가 쑤시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쨌거나 만탈락은 유흥 문화가 발달한 곳이라고 했으니, 이 신기한 기후도 즐길 겸 잠시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더불어 그렇게나 독특하다는 마법도구 구경도 좀 하고.

“꼬맹아, 잠깐 이리 와봐라.”

아까부터 눈이 사팔뜨기가 될 것처럼 샤를레아를 훔쳐보던 구두닦이 소년이 쪼르르 달려와 그녀의 앞에 섰다. 샤를레아가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어주자 소년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부르셨어요, 레이디.”

“너는 내 차림을 보고도 레이디라는 말이 나와?”

“하지만 이렇게나 아름다우신걸요.”

“세상에, 요즘 인간들이란. 예상보다 상태가 안 좋네. 아무튼 꼬맹아, 내가 만탈락에 온 건 처음인데 안내 좀 할래? 돈은 섭섭지 않게 주마.”

소년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소년은 장사밑천인 구두닦이 상자를 냉큼 정리해 등에 짊어졌다. 구두약이 거뭇하게 묻은 뺨을 다급히 소맷부리로 문질러 닦고 구겨진 옷 주름을 두드려 펴더니, 제법 그럴 듯한 인사를 선보였다.

“어떤 걸 원하시죠? 로렐라이 상단의 신상 마법도구? 갈라베 거리의 도박장? 음식점? 쇼핑? 나랍에서 들어온 수입 상점도 있고 살론의 예술품 전시장도 있습니다! 아, 연극 공연장은 어떠세요? 연극이 별로시면 노래 극장도 있어요!”

다다다 말을 늘어놓는 목소리가 해변의 모래알처럼 반짝거린다. 샤를레아는 품에서 커다란 은화를 꺼내 소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소년이 헉, 소리를 내며 은화를 옷 깊숙한 곳에 숨겼다.

“내가 안내자를 잘 골랐네. 도박장부터 가자.”

“그럼요! 낮이고 밤이고 사람 없을 때가 없는 곳이 바로 갈라베 거리 도박장이죠! 저만 따라오세요!”

소년은 즐겁게 앞장서서 등에 멘 상자의 끈을 꽉 움켜쥐었다. 종일 허리를 굽히고 앉아 구두를 닦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았으니, 최고의 안내자 노릇을 할 생각이었다.

* * *

커다란 지하 공연장, 날지 못하는 강철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연구실에서 작은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어서 다친 사람 없이 미완성의 비마법도구가 완전히 망가지는 정도로 끝났다.

그러나 그 비마법도구를 만든 장본인인 셰비언에게는 그만한 좌절도 없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가. 이론상으로는 완벽한데 어째서 시험 작동만 하면 이런 난리가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커다란 연구실 구석구석을 헤매며 손톱만 한 나사를 찾던 셰비언이 치솟는 성질을 못 이기고 탁자를 걷어찼다. 폭발에 휩쓸려 시커멓게 그을린 탁자가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 휘청거렸다.

“이야, 그렇게 차가지고 탁자가 쓰러지겠어? 힘도 좋으면서 좀 더 세게 차지, 왜.”

마침 연구실로 들어오던 워커가 웬일로 빈정거렸다. 하긴 장치가 완성됐다며 실험을 하겠다는 셰비언을 극구 뜯어말렸다가 무시당한 바로 뒤이니, 성질을 내는 셰비언이 어찌 곱게 보일까.

워커는 상하지 않도록 잘 모셔둔 서류를 펼치면서도 계속 이죽거렸다. 발표 준비는 진즉 끝냈지만, 기존에 쓰고 있던 마법 수식들을 수정하느라 하루가 바빴다. 웬만하면 셰비언도 손을 보탰으면 좋겠는데,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또 시도하겠다고 날뛰면 곤란했다.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 네가 만든 장치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불안정하다고. 거리가 멀어지면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억지 작동을 하다가 폭발해 버리는데 그걸 어떻게 써먹어?”

“이론으로는 완벽한데.”

“종이에서 현실로 나올 땐 뭐든 문젯거리를 가지고 나오기 마련이지. 그거 유효거리는 끽해야 거리 한 블록이야. 못 써먹어.”

“아냐, 조금만 더 하면…….”

겨우 나사를 찾아내 서랍에 던져 넣은 셰비언이 다시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이를 갈면서도 꾸역꾸역 장치 설계도를 다시 그리고 있는 걸 보니,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큰소리를 탕탕 쳐 놨는데 이렇게 실패할 수 없어.”

“누구한테 무슨 큰소리를 얼마나 쳐 놨기에 그렇게 필사적이야? 어, 너 설마 아가씨한테 직접 얘기했어?”

셰비언이 퀭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얼굴에 당혹과 놀라움이 함께 담겼다.

그는 오드리에게 구체적인 내용은 말하지 않았어도 비마법과 마법이 결합된 연구를 하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고, 오드리는 그에 대해 아주 기대된다고 대답했었다.

그게 언제냐면, 오드리에게서 흰 옷감의 공수를 부탁받을 때다.

당장이라도 완성될 것처럼 말했던 연구에 돌입하는 것마저 이렇게 오래 걸렸는데, 결과물마저 늦게 주고 싶진 않았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넌 낚시 하지 마라. 물고기가 널 낚겠어.”

워커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셰비언이 오드리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예전에 눈치챈 바였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오드리의 부름이 있을 때마다 묘하게 설레는 표정을 감추질 못하고, 그림 구경하러 다녀왔다더니 정작 그림은 기억 못하고 오드리 낯빛만 기억하는데. 어쩌다 워커가 오드리 얘기를 꺼내면 귀가 쫑긋 서는데.

셰비언이 단순히 개인 연구에 대한 집착으로 저러는 거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오드리에게 한 장담을 지키려는 거라면 더 문제였다.

‘도대체 아가씨의 어느 구석에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셰비언더러 뭐라 할 게 아닌 제 처지를 생각하자 속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워커는 얼굴을 감싼 손바닥을 가면 삼아 표정을 감췄다. 그가 손을 떼었을 땐, 평소와 똑같이 가볍고 밝은 얼굴만 남아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허세나 부린 얼간이가 되기 싫은 건 이해하겠는데, 아가씨는 비마법과 마법을 연계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계신 분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애써서…….”

“잠깐만, 뭐라고?”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저 강철새 붙들고 헛짓 하는 걸 아가씨가 몇 년이나 봤을 거라고 생각해? 네가 로렐라이에 온 지 겨우 한 계절이 지나갈 정도밖에 안 됐는데…….”

워커의 말이 한귀로 들어왔다가 한귀로 흘러나갔다.

셰비언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속내가 겉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형태는 물론이고 색상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저 아득하기만 한 감정이 햇빛 아래에 억지로 끌려나왔다. 일찍이 한 번도 가져 본 일 없는 감정은 놀라울 정도로 야만스럽고 난폭하게 셰비언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는 허겁지겁 물러섰다. 그저 동질감에 불과한 것을, 그 이상의 무엇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동족이라, 아니 동족의 마력이라 잠깐 정신이 나갔었던 것뿐이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촉이 휘어버린 만년필을 내던지고 새 펜을 찾았다. 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자꾸만 손이 떨렸다.

“아가씨를 딱히…… 좋아하거나 하는 건 아니야. 마력의 계통이 같아서 끌리는 것뿐이야.”

“네가 그렇게 말해도 뻔히 보여. 좋아하는 마음이 죄도 아닌데, 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하냐. 그보다, 마력의 계통?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 그런 소리를 해?”

워커는 셰비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력의 계통이라니, 그런 거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한때는 같은 인간들끼리도 지닌 마력의 기원에 따라 계통을 나눈 시기가 있었고, 그에 따라 혼인하여 아이를 낳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계통은 섞이고, 섞이고, 또 섞여서…… 이젠 누구도 자신의 뿌리를 명확하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껍데기는 인간이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

워커는 턱을 괴고 앉아 셰비언의 혼란을 구경했다. 문헌에만 남은 옛 마법을 펑펑 써대더라니, 어째 사고방식마저 그 시대에 갇혀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마력의 계통이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강한 매력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긴 하더라. 그런데 그 계통이라는 게 그렇게 절대적이었으면 지금처럼 섞였겠어?”

“……뭐?”

“지금처럼 섞였겠냐고. 마력 때문에 끌리는 것 이상으로 끌리는 무언가가 있었으니 서로 다른 계통의 마력을 가진 이들끼리도 결합했을 거 아냐.”

워커의 설명에도 셰비언의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워커는 그런 셰비언을 향해 한숨을 쉬다 끝내 모른 척하지 못하고 그의 앞에 섰다. 셰비언이 끄적거리는 종이 위에 긴 그림자가 졌다.

“야, 셰비언.”

“…….”

“보아하니 아가씨 마력과 네 마력이 같은 계통인 걸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순도가 높은가 본데……. 뭐, 마력 때문에 좋은 거면 어때서? 얼굴도 좋고 성격도 좋은데 마력도 잘 맞으면 더 좋지.”

워커의 말이 커다란 몽둥이처럼 셰비언의 머리를 때렸다. 애정이 아닐 것이라 부정하기 바쁘던 이성이 덜컥 고꾸라지자, 그 자리에 남은 건 당혹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감정뿐이었다.

보고 싶고, 닿고 싶고, 뭐든 주고 싶고,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자신을 비추고 싶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연히 심장이 뛰고 체온이 올랐다.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들끓음은 낯설었다. 그러나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얼음요정 같은 얼굴은 제 속의 혼란을 고스란히 비춰냈다. 워커는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마음을 여유롭게 훔쳐보았다. 안 되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멈추지 못하는 감정을 옆에서 보는 게 어찌나 재미있는지.

“이제야 깨달았나 보네. 아무튼 아가씨는 쓸모 있는 사람을 좋아하셔. 넌 출입금지마법과 마법의 동작정지 연구로 네 쓸모를 이미 증명했으니, 그 되도 않을 물건에 집착할 필요 없어. 그보다 나랑 같이 기존 수식들을 싹 재정립해서 올리는 걸 더 좋아하실 거라니까.”

세비언이 혼란에 빠진 때를 놓칠까, 워커가 잽싸게 저랑 같이 일하자 그를 꼬드겼다. 셰비언은 무심결에 워커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두둑하게 쌓인 서류를 보자마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가던 이성을 깨울 정도의 일거리였다. 기껏 떠넘긴 일을 뭐 하러 도로 받아오겠나. 워커를 바라보는 눈에 경계심이 잔뜩 어렸다.

“뭐가 되도 않을 물건이야? 그건 네 강철새겠지. 넌 이론도 제대로 못 세웠지만, 이건 아니거든? 감응도를 조금만 더 높이면 돼.”

“아, 진짜……. 하여간 천재 아니랄까 봐 재수 없기는. 셰비언, 잘 봐.”

긴 한숨을 내쉰 워커가 단숨에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망을 시각화시켰다. 워커에게서 제 설계도를 뺏으려 헛손질을 하던 셰비언이 갑작스런 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망을 보려거든 혼자서나 볼 것이지, 뭐 좋은 게 있다고 나까지 억지로…… 보라는…….”

셰비언의 말이 뚝 끊겼다. 워커가 만들어낸 마법망은 그가 만들어내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셰비언의 마법망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거미줄이었다. 새벽이슬이 내리기 전, 가장 솜씨 좋은 거미가 하루를 기대하며 정성들여 짜낸 거미줄. 그 거미줄 구석구석 마력이 방울져 맺히고, 톡 두드리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울렸다.

하지만 워커의 마법망은 군데군데 헤진 구석이 있는 거미줄이었다. 아름다운 금빛 실은 균일하지 못하고 두께가 제각각이었고, 어느 곳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맺혀 있는 마력도 그다지 순도가 높아 보이지 않았다.

셰비언은 마법망의 구석을 톡, 건드렸다. 마법망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그가 기대했던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어긋난 연주가 흘러나오다가 음이 튀고, 삐걱거리고, 불협화음이 울리다가 종종 끊기기까지.

“그걸 뭐 하러 건드려? 괜히 시끄럽게.”

셰비언의 마법망이 어떤 상태인지 알 리 없는 워커에게 마법망이란 본래 이런 거였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게 아슬아슬하고, 자칫 건드렸다간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 수식을 짜려면 한 번씩 펼쳐 봐야 하니 아예 안 보고 살 수는 없는데, 웬만하면 보고 싶지 않은 것.

“너도 알다시피 마법망은 본래 불안정하고 예민해. 이렇게 예민한 마법망에 메시지를 실어서 한 문장이라도 보낸 게 대단한 거야. 단순히 장치를 개량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안 된다는 걸 인정해.”

“마법망이……. 아무리 마법이 희미해져 가는 시대라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마법이 희미해져 가는 시대. 듣는 이가 누구든 비웃을 만한 발언이었다.

마법으로 관리되는 상 하수도가 지하를 흐르고, 어둠이 찾아오면 뚜껑을 벗은 마법등이 땅에 내린 별처럼 빛난다. 마법동력을 실은 기차는 땅을 가로질러 달리고, 마차가 지나는 도로엔 손상을 막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집집마다 여름을 대비한 냉방 마법도구를 구비했고 전문 마법사와 마법도구를 갖춘 세탁소와 공중목욕탕이 자연스러웠다.

마법은 일상이었다. 저 넓은 강을 가득 채워 흐르는 물이었고,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누구도 마법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다. 낮이면 해가 뜨고 밤이면 별이 뜨듯이, 그렇게 당연히 옆에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워커는 셰비언의 말을 비웃지 않았다. 워커는 제가 마법망을 펼쳐 놓았다는 것도 잊고 셰비언에게 몸을 기울였다. 좀 전까지 열성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는 이미 뒷전이었다.

“너도 알아?”

“뭘?”

“마법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

워커의 성장은 마법과 함께했다. 그는 태어나 눈 뜬 그때부터 마법망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성장했다. 마법망을 움직이는 수식을 익히는 건 즐거운 일이었고, 마법사가 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여러 마법사들이 기꺼이 평생의 공부를 넘겼다. 그러나 그 수많은 스승 중 누구도 시간이 가고 세월이 지날수록 마법망이 점점 불안정해지는 걸 알아채지는 못했다. 잘 작동하던 마법도구가 고장이 났을 때, 그게 마법망의 이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히 없어진 거라고, 마법이란 본래 그런 거라고 했다.

기껏 만들어 쓰던 수식이 갑자기 먹히지 않을 때에도 비슷했다. 뭐가 또 예민해서 수식이 또 꼬였느냐고, 마법이란 정말로 손이 많이 간다며 투덜거렸다. 갓난아이만큼이나 세심하게 돌봐야 하는 게 마법이라고.

마법망에 대한 민감도가 다른 마법사들의 배 이상 되는 워커가 듣기에는 그만한 개소리도 없었다. 마법이 예민해서 세심하게 손봐야 하는 게 아니라, 마법망의 밀도가 바뀌는 것도 모자라 형태마저 제멋대로 흔들리니 수식을 고쳐 써야 하는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워커가 짜내는 수식이 남들이 만든 것보다 배는 더 튼튼하고 효율적인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마법은 전부 누더기야. 이렇게 안 되면 저렇게, 그래도 안 되면 또 이렇게. 어떻게든 결과물을 내려고 온갖 잡다한 것들을 다 가져다 붙여놓았어. 그게 사람의 잘못이면 고치면 그만인데, 근본적인 마법망의 문제이니 방법이 없는 거야.”

손짓발짓까지 더해가며 열성적으로 말을 잇는 워커의 등 뒤에서 아까 그가 시각화시킨 마법망이 여전히 번쩍거렸다.

셰비언은 그 낡은 마법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마법을 도구에 깃들여 쓰는 방식으로 발전했는지 궁금했는데, 워커가 펼쳐 내는 마법망이 저 꼴인 걸 보니 능히 짐작이 갔다.

‘마력이 섞이면서 문제가 나타난 거군…….’

셰비언 본인이 마법망을 펼칠 땐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 그의 결론은 그렇게 흘러갔다.

마법망은 멀쩡한데 이용하는 인간들이 문제인 거라고.

“셰비언. 솔직히 말해서, 마법망이 이 모양인데 문헌에나 나오는 옛 마법을 쓰는 네가 얼마나 이상해 보이는지 알아?”

“마력의 순도 문제야. 그렇게 뒤섞인 채로 마법망을 쓰는데 문제가 안 생기고 배기…….”

“그게 아니야!”

으아아아아! 워커가 제 부족한 말주변을 원망하며 머리채를 잡아 뜯었다. 검은색과 금색이 섞인 독특한 머리카락이 팔락팔락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력 계통이라는 게 의미 없어진 한참 후까지도 공간을 다루는 마법사, 의식 분리를 하는 마법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단 말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런 마법사들이 죄다 사라져 버렸다고.”

“…….”

“난 그게 마법망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때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마법의 맥이 끊길 수 있냔 말이야. 마법을 도구에 깃들여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마법사들이 죄다 사라지고 난 다음이라고.”

셰비언은 의지만으로 빛을 다루고, 바람을 부르며, 마법을 발현했다. 그에게 마법 수식은 이미 발현한 마법을 좀 더 개선하거나,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에 불과했다. 워커는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신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를 볼 때면, 마치 마법망이 멀쩡하던 시대의 마법사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너 혼자서 다른 시대를 사는 것 같아.”

종족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약해진 종족들의 마력을 야금야금 갈취해서 인간 종족 전체의 마력을 키운 마법사들. 타 종족의 마력을 끌어안고도 인간의 형태만은 유지한 업적을 세워놓고서 그들은 아침 해를 맞은 새벽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들이 만들어낸 마법은 남아 있었으나, 세월과 함께 낡아가다 마침내 누구도 익힐 수 없는 마법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익힐 수 없는 마법은 죽은 마법인지라, 죽어버린 마법들과 지식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시간에 묻혀 잊혀졌다.

그 뒤 마법은 당연히 도구에 깃들여 써야만 하는 게 되었다. 일부의 마법사가 마법망을 뜯어보며 수식을 만들어내면, 대부분은 그 수식대로 마법을 사용했다.

한때 공간을 다루고 의식 분리를 행하는 건 뛰어난 마법사의 증명과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손바닥만 한 문장이라도 만들어내면 다 마법사로 쳐 주는 시대였다. 마법사의 숫자도, 질도, 초기에 비하면 비참할 정도로 하락했다.

워커는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특출하게 뛰어난 마법사였다. 마법망을 숨 쉬듯이 다루고, 수식을 자유로이 변형하며,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냈다.

워커는 셰비언더러 이상하다고 말하지만, 셰비언의 눈에는 워커가 더 이상했다. 토끼 떼 사이에 들어앉아 토끼인 척 하는 개를 보는 느낌이었다.

“선대의 마법을 이을 만한 재능 있는 자들이 모자라다 보니 자연히 사라진 거겠지. 워커, 너만 해도 내가 가르치는 마법을 족족 다 빨아들이잖아. 가르치자마자 공간 초입에까지 들어선 녀석이 누구더러 이상하대?”

“그럼 마법이 사라져 가는 시대라는 말은 왜 꺼냈는데? 사방팔방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마법인데, 왜?”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셰비언을 앞에 두고 워커가 히죽 웃었다.

“거봐, 너도 아는 거야. 로렐라이가 훔쳤던 마법이 주인에게 돌아갈 때가 된 거라니까? 그런데, 이제까지 내 말을 믿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이야. 다들 나더러 미치광이에 망상병 환자라고 했다고.”

워커를 아꼈던 스승들조차 마법이 사라져 간다는 발언까지 용납하지는 않았다. 워커는 서서히 바른말 하기를 그만두었고, 대신 비마법에 탐닉했다. 훼손이 가장 심하다는 비행마법을 대체할 비마법 비행도구를 만들어내는 게 그의 꿈이 되었다.

셰비언이 흥미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게 워커의 용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오래도록 가슴 속에 고여 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마법이 희미해져 가는 시대라는 걸 알아준 타인은 셰비언이 처음이었다.

“언젠가는 이 세계를 엮고 있는 마법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올 거야. 그게 지금이 아니라도 반드시 그런 날은 와. 그러니까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고. 이젠 구현할 수도 없는 옛 마법에 매달릴 게 아니라 어떻게든 비마법의 수준을 높여야 돼.”

“나는 그저 내가 아는 마법들이 거의 잊혀진 마법이라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지만……. 네 의견도 듣고 있자니 꽤 재밌는데. 음모론이라고 하지, 그런 걸?”

셰비언이 손을 휘둘렀다.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상자가 마법망을 타고 미끄러져 워커의 앞에 안착했다. 그 매끄러운 활용에 워커가 소리 내어 감탄했다.

“예의가 아니라 묻지 않았지만 이젠 물어봐야겠어.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마법과 비마법의 조합에 관심이 넘치는 셰비언.”

“그런 대외적인 이미지 말고. 나는 스승이라면 잔뜩 가져 봤는데, 너처럼 대단한 놈에 대한 말은 들은 적 없어. 게다가 너는 지나간 시대의 마법을 쓰잖아.”

경계심과 기대가 뒤섞인 눈동자가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쿵쿵, 워커의 심장 뛰는 소리가 셰비언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로 그는 흥분상태에 빠져 있었다.

입술을 매만지며 워커를 애태우던 셰비언이 돌연 책상에 나뒹굴던 종이쪽지를 집어 들었다.

“이 장치를 완성하는 걸 도와주면 가르쳐 주지.”

“야 이……. 저 마법망 안 보여? 저 너덜너덜한 마법망에 뭔 메시지를 실어 보내겠다고 그래? 대답해 주기가 그렇게 싫어?”

“잘 봐.”

셰비언이 워커의 마법망 한구석을 건드렸다. 워커는 또 시끄러운 소리가 울릴 것을 예감하고 한껏 미간을 찌푸렸지만, 마법망 어디에서도 아까와 같은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셰비언이 건드린 자리에서부터 금빛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금빛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낡은 거미줄 같던 마법망이 눈에 띄게 변화했다. 듬성듬성하던 구멍이 메워지고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던 실이 튼튼하게 바뀌었다. 어딘지 탁하던 마력 방울마저 맑은 이슬처럼 반짝거렸다.

워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법망을 툭, 건드렸다.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종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음악은 아니지만, 듣기에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어……. 어어……. 이게, 이게 무슨…….”

“이 정도 수준의 마법망이면 메시지 보내는 데 무리 없겠지?”

워커는 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가 없긴, 보내고도 남는다! 낡은 마법망을 보수하는 방법이 있었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접근이었다. 마법이 주인에게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그는 자신의 가설을 단숨에 폐기처분했다.

“되도 않을 장치에 매달린다고 했던 말, 취소할게.”

“빠른 인정, 아주 좋은데.”

“이런 기술이 있었으면 진작 얘길 했었어야지. 이 장치에 마법망을 강화시키는 그 기술을 넣어보자. 그럼 안정성과 거리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될걸.”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야. 마력을 다루는 아주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돼. 자, 봐…….”

“오, 알겠어, 알겠다고. 그러니까 조금만 천천히 다시 해 봐.”

워커의 눈이 번쩍거렸다. 그는 조금 전까지 기를 쓰고 들여다보던 마법 수식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장치의 개선안을 만드는 데에 열을 올렸다. 아무래도 비마법에 대해서는 워커보다 떨어지는 면이 있었던 셰비언에게는 반가운 도움이었다.

반복해서 마력 방출 요령을 가르쳐 주던 셰비언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입을 뗐다.

“이게 성공하면 돈 많이 벌겠지?”

“성공만 하면 많이 벌겠지. 근데 그 전에 모아놓은 돈 다 까먹는 게 더 빠를걸.”

“뭐? 왜? 기존 수식에 동작 정지 기능 넣는 걸로 돈 많이 벌 거라고 그랬잖아? 이건 그거보다 훨씬 혁신적인 건데 왜 돈을 까먹어?”

워커가 어이없어 하며 셰비언을 바라보았다. 사업 감각이라고는 개미 발바닥의 때만큼도 안 되는 자신도 아는 걸, 셰비언이 모를 줄이야.

“이건 혼자 쓰는 물건이 아니잖아. 그것도 개인끼리 한두 개 놓는 걸로는 그다지 효용도 못 볼 물건이야. 제대로 허가받고 널리 보급하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

“…….”

“너무 걱정하지는 마.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이건 분명 세상을 바꿀 물건이야.”

어쩌면 내 강철새보다 더 극적으로 바꿀지도 모르지. 워커는 씁쓸한 감상을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고 셰비언을 격려했다.

“돈이 얼마가 들든 아가씨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거야. 그런 분이니까.”

워커의 말 속에 확신이 들어 있다. 오드리는 이디케를 오른팔을 넘어 자신의 분신쯤으로 여길 정도로 신뢰했고, 이디케는 그녀의 신뢰에 실망으로 답한 적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을 알고 있는 워커에게 이디케의 말은 곧 오드리의 말이었다.

‘이 손으로, 세상을 바꿔봐야지.’

수십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강철새를 지원하는 오드리인데, 완성이 목전인 메시지 장치를 지원하지 않을 리 없다. 워커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셰비언은 오드리에게서 권력을 원한다는 말을 직접 들은 바가 있었다. 로렐라이를 통째로 팔아도 작위를 사기는 부족하다 했었다. 돕겠노라 약속했었는데, 꼭 만들고 싶었던 장치가 그녀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진다.

그 심란한 마음 자체가 셰비언에게 충격이 되었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기준이 오드리가 되었단 말인가. 그녀의 옆에 서고픈 마음을 자각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마음의 눈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녀를 제 기준으로 삼았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러든가. 아, 이거 은근 재밌네.”

셰비언은 마법망을 주물럭거리는 데에 정신을 판 워커를 내버려 두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마법등을 잔뜩 달아놓은 통로는 환하기만 한데, 정작 1층의 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오니 이미 해가 진 지 오래인 시간이었다.

골목은 어두워도 가까운 대로의 가로등이 훤하게 밝아 어둠을 몰아내고, 늦은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밤의 적막을 깬다. 리즈비아 거리에 즐비한 출판사와 신문사들은 잠을 잊은 듯 이 시간에도 문이 열려 있었다.

“조용한 곳이 없네…….”

셰비언은 괜히 근방을 서성이다 갈 곳이 없어 그냥 집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는 편을 택했다. 한 달 전보다 확연히 뜨거워진 바람이 뺨을 툭툭 두드리다 멀리 도망갔다. 하긴 벌써 7월 중순이었다. 다투어 피어나던 봄꽃들은 다 떨어졌고 대신 짙푸른 녹음이 주변을 채울 때였다.

“하아…….”

고개를 꺾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좁은 골목길 때문에 길쭉해진 하늘에 총총하게 박힌 별이 반짝거리는 게, 마치 고급 비로드 천의 광택 같았다. 그 가운데 솟아오른 극장 지붕의 천사상이 날개를 펼치고 셰비언을 굽어보았다. 감정 없는 시선이 따갑고 아팠다.

셰비언은 기껏 들고 있던 머리를 웅크려 모은 무릎에 처박았다. 생각이란, 상념이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나 무거운지.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게 왜 이리 힘든 것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울어진 기준점은 아무리 애써도 돌아올 기미가 없고,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얼굴만 자꾸 눈앞에 어른거린다. 찬바람 품은 겨울은 이제 가고 없고 진짜 여름이 목전에 있는데 어째 떠오르는 건 초록 눈동자 속에서 빛나던 여름.

“……보고 싶다.”

무심결에 흘러나온 말에 본심이 담겼다. 셰비언은 허겁지겁 입을 막았지만 이미 쏟아진 말을 무슨 수로 주워 담을까. 그는 텅 비어 있는 줄 알았던 마음에 누군가를 향한 갈망이 차오르는 걸 멍하니 방관했다.

“운명에 휘둘리고 싶진 않은데…….”

마음이 의지대로 되는 것이었다면, 그는 진작 이 도시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충동이 들 때마다 불쑥불쑥 솟는 마음이 발목을 잡아당기고 어깨를 눌러 그를 제자리에 주저앉혔다.

고작해야 백 년이라고, 잠깐 눈감고 쉬었다 가는 거라 생각하면 그만이라고.

어떻게든 외면하려고 애쓰던 감정을 기어이 깨닫고 나니,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일하고 우스웠던 것인지를 새삼 알겠다. 우습게 생각했던 백 년이 지나고 나면, 그 뒤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질까. 한기가 등줄기를 식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보고 싶었다.

그 순간, 감각이 확장됐다. 분명 잘 여며놓았던 마력이 일순간에 온몸을 타고 흐르며 의식의 범위를 넓혔다.

번쩍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지만, 길쭉한 하늘도 마법등의 창백한 빛도 없다. 더불어 끊임없이 들려오던 발소리와 말소리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검고 조용한 세계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의식세계였다.

셰비언은 당혹스러워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만한 경지에 이른 마법사에게 의식분리가 뭐 어렵고 낯선 일이겠느냐마는, 이렇게 의지에 반해 갑자기 펼쳐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보다 얼른 의식 세계를 접어야겠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그는 서둘러 의식 세계의 끄트머리를 찾아 접으려 했다. 한데, 의식세계의 귀퉁이에서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설마 누군가가 자신을 초대한 걸까. 세비언은 다른 이의 기척을 찾아 성큼 다가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드리가 자신만큼이나 당황스러워하며 서 있었다.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흰 빛을 뿌리는 그녀는 마치 정교하게 제작된 장식용 마법등 같았다.

“아가씨?”

“셰비언? 뭐야, 여기. 네 의식세계야? 갑자기 의식분리를 시키면 어쩌자는 거야?”

오드리가 어깨를 떨며 화를 냈다. 셰비언은 그녀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했다. 침대에 누워 하루의 피로를 풀어야 할 시간에 난데없이 남의 의식세계로 끌려왔는데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나. 게다가 그에게는 보석 경매장에서의 전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셰비언도 할 말이 있었다. 하늘에 맹세코 일부러 그녀를 끌어들인 게 아니었다. 그저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단지, 생각만…….

“아.”

짚이는 바가 있었다. 오드리에게 집어넣었던 마력. 같은 도시 안에 있는 정도의 거리라면 그리 멀지도 않으니, 아직 그녀에게 동화되지 않은 마력이 그의 바람에 부응한 건지도 모른다.

하나 사정을 알 리 없는 오드리에게 저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셰비언의 꼴이 달갑게 보일 리가 없다. 안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괜히 타우레드 후작가에서 복사해 온 자료를 뒤적이다가 끌려온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얼굴을 만났으니, 이제 멀쩡히 자기는 다 글렀다.

“사정을 얘기해.”

“어, 그게……. 아가씨께 넘겨드렸던 마력이 문제가 된 것 같아요.”

“뭐?”

셰비언은 민망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손바닥 아래에 숨기고 더듬더듬 설명했다. 밤거리에 혼자 앉아 아가씨를 생각했는데, 갑자기 의식이 확장되더니 의식세계에 빠졌다고. 아마 그 과정에서 자신의 마력 일부를 갖고 있는 오드리를 강제로 끌어들인 모양이라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오드리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셰비언을 보며 덩달아 제 뺨도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의식세계에 끌려 들어오기 전, 마력의 계통에 관련된 연구서를 보고 있었다. 기왕 종족전쟁의 뒷얘기를 알게 되었으니만큼 좀 더 지식을 쌓고 싶어 긁어모은 자료 중 하나였다.

‘하필 그런 걸 읽고 있어가지고…….’

마력의 계통이 가까울수록 강한 호감을 느낀다니, 그 무슨 황당한 얘기인지. 하지만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이 밑도 끝도 없이 쌓이던 호감의 원인을 찾은 느낌이라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셰비언이 말하지 않았던가, 오드리에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었다면 분명 서로의 문장이 짝을 이뤘을 거라고.

자신이 그를 생각하고 있던 시간에 그 역시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성적으로 행동하겠다던 결심은 햇살 아래 안개처럼 흩어졌다. 대신 통제하기 어려운 충동이 불쑥 솟아올라 오드리를 살살 꾀었다.

이건 로렐라이와 관련된 일이 아니야.

지금은 뭔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도 아니야.

그러니, 잠깐은 쉬어도 돼.

이건 기회야, 보고 싶었잖아.

오드리는 입술을 깨문 이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알싸한 통증이 퍼져 나가는데도, 제 속의 속살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이렇게 조금씩 선을 내주다보면 언젠가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렸다.

이 끌림이 온전히 마력 때문이라면 차라리 좋을 텐데, 스스로의 욕망을 살피는 것에 익숙한 마음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며 소란을 피웠다. 깨문 입술이 찢어지기라도 했는지, 비릿한 냄새가 입안에 감돌았다.

“뭔 생각을 했기에 내게 주었다던 마력이 새삼 그대에게 응한 거야? 이제까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잖아.”

셰비언은 여전히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이 없었지만, 귓불이 붉었다. 헐렁한 로브 바깥으로 드러난 흰 살갗도 순식간에 분홍색으로 변했다. 사방이 온통 검어 눈 돌릴 곳도 없는데 거 참 심장에 안 좋은 광경이었다.

아, 괜한 걸 물었다. 오드리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제 뺨에 손바닥을 올려 열기를 식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답이 없는데도 들은 기분이었다. 워커는 셰비언이 제법 표정을 잘 숨긴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에게 눈을 잘 보는 의사를 소개시켜 줘야 할 모양이었다.

“들은 걸로 하지.”

“……네. 감사합니다. 저, 진짜로 일부러 끌어들인 게 아니라…….”

“변명은 됐어. 다리 아프니까, 의자 좀 만들어봐.”

“아, 네!”

셰비언이 그제야 얼굴에서 손을 뗐다. 지나치게 하얗고 단정해서 얼음요정처럼 보이곤 하던 얼굴에 발그스름한 핏기가 도는 게, 어째 오늘은 요정이 아니라 제법 사람 같다.

오드리는 곧바로 제 뒤에 나타난 의자를 확인했다. 평소 셰비언이 찾아올 때면 앉곤 하던 응접실 의자였다. 그에게는 이게 가장 낯익은 물건이었으리라. 그녀는 사양치 않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주변이 온통 시커먼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바꿔야죠. 뭐가 좋으세요?”

“음……. 브란젤 중앙공원이 좋아. 거기 호수가 예뻤어.”

얼마 전, 오드리는 그리로 라디아타와 소풍을 갔었다. 안 따라와도 된다는 걸 부득불 따라온 카프러스를 사공으로 삼아 호수에서 뱃놀이도 했다. 예년보다 해는 뜨거웠어도 바람이 시원해서 좋았다. 드물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셰비언도 브란젤 중앙공원을 알고 있었다. 가끔 군것질거리를 사러 가는 상점이 그 부근에 있었다. 그가 호수 근처에 갈 때마다 자맥질하던 백조들이 꽥꽥 소리를 질러대며 도망을 쳐서 굉장히 시끄러웠다.

“아, 거기 호수 좋죠. 백조들이 참 탐스럽게 생겼던데.”

“……공원의 백조 함부로 잡아먹으면 큰일 나. 왕실의 백조들이라고.”

“압니다, 알아요. 하도 시끄러워서 통구이 해먹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요.”

“풋! 맞아, 거기 백조들이 좀 시끄럽지. 웬만한 짐승들은 내가 다가가면 조용해지는데, 그 백조들은 도리어 난리를 부리더란 말이지.”

“그럼 여기서는 조용한 백조를 만들어볼까요.”

그의 손짓에 따라 주변의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매끄럽고 검던 바닥엔 잘 손질된 잔디가 깔리고, 머리 위엔 흰 조각구름 몇 조각이 떠가는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너른 팔을 펼친 나무 몇 그루가 순식간에 자라나고 근처에는 하늘을 고스란히 품은 호수가 생겼다.

새하얗고 커다란 백조 몇 마리가 수면을 가르며 유유히 헤엄쳤다. 출렁이는 물결에 햇살이 부서져 반짝거렸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중 몇 마리가 호숫가로 올라와 털 고르기를 시작했다. 아카시아 향기를 품은 바람이 나뭇가지를 희롱하다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쟤들은 조용할 거예요.”

“응……. 그대의 말대로야. 조용하군.”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오드리는 의자에 편안히 몸을 묻고 고개를 젖혔다. 매끄럽고 넓은 잎사귀에 햇살이 맺혀 아롱거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에 돌멩이처럼 얹혀 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갔다.

바깥에 있을 때는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서 심장이 펄떡거리더니, 난데없이 끌려온 의식세계에서는 이렇게나 편안하다. 일 밀릴 걱정 없이 쉴 수 있다니 이거 조심해야겠다고, 잘 하면 중독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드리는 가르릉 목을 울리는 고양이처럼 편안하게 늘어졌다.

셰비언은 그런 오드리의 의자 옆에 주저앉아 팔걸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가 팔걸이 너머로 편안히 떨어뜨린 손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따뜻한 물이 찰랑찰랑 솟는 것만 같았다.

보이는 것마다 아름답지 않은 게 없고 들리는 것 모두가 음악처럼 영롱하다. 코끝을 스치는 물비린내마저 향긋하게만 느껴지니, 곤란한 일이었다. 그는 샐샐 웃기 시작한 입가를 끌어내리려 애쓰다 그만 포기했다.

‘마력 때문에 시작된 거면 어때? 동족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걸…….’

젖는 줄도 모르게 젖어들기 시작한 감정에 머리끝까지 빠졌음을, 끝내 인정하고 말았다. 발목을 잡아당기던 무언가가 두 배는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진즉 알고 있던 것이긴 하지만 새삼 다시 실감했다. 이제 정말로 벗어나기는 글렀다.

“……아, 맞다. 저기, 아가씨. 저 질문 한 가지만 해도 돼요?”

“해.”

“아가씨는 권력을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그걸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그랬지.”

“동시에, 기차처럼 세계를 바꿔놓을 만한 발명품도 원하시죠. 그래서 워커의 강철새를 두고 그렇게 불평을 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못하고 계시고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그 얘기는 새삼 왜 꺼내나 싶어 몸을 일으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름 속에 내려앉은 얼음요정이 길쭉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세상을 바꿀 게 틀림없는 발명품과 돈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무얼 고르시겠어요?”

“……꼭 하나를 골라야 하나?”

“발명품을 택하면 이제껏 번 돈을 모조리 쏟아부어야 할 수도 있어요. 어쩌면 망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권력을 얻는 건 불가능해지겠죠.”

“끝끝내 기획서 한 장 제출하지 않고 진행하는 네 개인 연구가 그런 종류인가 보군. 일단 완성해서 가져와. 보고 나서 결정할 테니까.”

셰비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드리의 반응이 의외였다. 마치, 돈이 아니라 발명품을 고를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챈 오드리가 피식 웃었다.

“세상을 바꿀 발명품에는 당연히 명예와 돈, 권력이 따라붙기 마련이야. 가질 수 있다면 당연히 가져야지. 망할지도 모른다고? 그런 위기는 이제까지 몇 번이고 넘겨왔어. 다들 내 등에는 행운의 여신 포모스가 업혀 있다고 하면서, 포모스의 다른 이름이 모험의 신이라는 건 까먹고 있는 것 같군.”

“자칫하면 아가씨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도요?”

“그러니 웬만한 걸로는 꿈쩍도 하지 않지. 하지만 그만한 위험을 안고도 도전할 만한 발명품이라면 얘기가 달라. 내가 그 매력에 완전히 빠져서 덤비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란 말이야.”

팔걸이 너머로 불쑥 고개를 내민 오드리의 경쾌한 미소를 본 순간, 셰비언의 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어긋났다. 주변의 풍경이 아득히 멀어지고 그녀의 미소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이거야 오드리를 처음 보던 날, 그 기차 안에서 이미 한 번 겪었던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셰비언은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숨기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그날 그 순간부터 이미 그녀에게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 * *

클로드는 마법등의 뚜껑도 벗기지 않은 채 집무실 창가에 주저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이 내리는 밤, 계절마다 피는 꽃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은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정원 곳곳에서 자그마하게 빛나는 마법등이 땅에 내려앉은 별빛 같아 더더욱. 그 아름다운 정원에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여자들이 있었다.

로샨과 라디아타.

라디아타가 오랜만에 병석에서 일어난 로샨을 데리고 밤의 정원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요즘의 로샨은 차 한 잔 마실 시간만큼만 걷고도 힘들다 칭얼거리곤 했는데, 어떻게든 정원 한 바퀴를 다 돌게 만들고 있으니 대단한 끈기였다.

진이 다 빠지도록 힘든 일일 텐데도 라디아타는 생기가 넘쳤고, 로샨은 딸의 재촉이 싫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모녀는 정원의 벤치에서, 분수대에서, 때로는 잔디밭에 주저앉아 머리를 맞대고 킥킥거렸다.

클로드는 열리지 않는 창문을 아쉽게 두드렸다. 저렇게 사이좋은 모녀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끼어봤자 좋은 말을 듣지 못할 게 뻔하거니와 일이 너무 많았다.

라비린은 아쉬움에 눈을 떼지 못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끝내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할 말이 있다며 불러놓고 내내 바깥 구경에 정신을 놓고 있다니, 황당하지 않은가.

“아버지, 왜 부르셨습니까? 이런 밤에.”

“낮에 할 말은 아니라서 밤에 불렀지. 앉아라.”

그제야 창 밖 풍경에서 눈을 뗀 클로드가 라비린에서 서류 몇 장을 건넸다. 라비린은 혀를 차며 마법등의 뚜껑을 벗겼다. 차가운 빛이 금세 집무실을 채우며 퍼져 나갔다.

“뚜껑은 뭐 하러 열어?”

“제가 아버지만큼 밤눈이 좋은 줄 아십니까?”

“타우레드의 사자가 밤눈이 나쁘다니 그것 참 질 나쁜 농담인데?”

“생각이란 걸 좀 해 보시죠. 전 지난 육 년을 사자가 아니라 뱀으로 살았습니다.”

라비린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빈정거렸다.

육 년 전, 클로드는 라비린이 문전박대하여 쫓아낸 워커를 찾아 만탈락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그날로 라비린에게 검 한 자루와 위조 신분을 들려서 만탈락으로 쫓아 보냈다. 남들에게는 라비린이 스스로 검술수련여행을 떠난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사기를 치면서.

브란젤을 떠난 라비린은 어린 시절 입은 화상 때문에 얼굴도 흉한 데다 다리까지 저는 불쌍한 메이즈가 되었다. 머리칼은 검게 염색했고, 목소리는 나랍의 약초를 써서 듣기 싫게 바꿨다. 그 상태로 만탈락에 정착했고, 나중엔 로렐라이 상단의 대리인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 모든 게 클로드의 지시였다. 오드리의 결정 하나하나를 내부에서부터 알고 싶었던 클로드는 보는 눈 없는 장남을 기꺼이 장기말로 썼다. 안목은 부족하대도 이제껏 배워 익힌 게 있으니, 오드리라면 그런 그를 놓아주지 않을 거라 여기고 벌인 술수였다.

타우레드의 도서관에서 라비린을 마주친 오드리가 그를 두고 괜히 낯익다 여겼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대리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 초상화를 전부 외우고 있었으니까. 메이즈의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뒤덮여 있지만 않았다면, 분명히 알아봤을 것이다.

“아버지는 모르시나 본데, 뱀은 본래 눈이 어둡습니다.”

“뱀 껍질 둘러쓰고 산 세월이 아무리 길어도 사자는 사자지.”

라비린은 고까운 대답을 귓등으로 흘리며 서류를 훑었다. 자식을 두고 잘 가르친 장기말 취급을 하는 아버지에게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가 넘겨준 서류는 로렐라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라비린이 처음 만탈락에 갈 때의 나이는 열여덟 살. 스물 먹은 해 로렐라이가 시작될 때부터 일해 스물넷이 되도록 있었으니, 그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성취들은 전부 로렐라이에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서류를 훑고, 또 훑어보던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시작했다. 타우레드의 핏줄을 증명이라도 하듯 넓은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왜 갑자기 돌아오라 하셨나 했더니…….”

방금 읽은 서류가 믿어지지 않았다. 왕실에서 로렐라이를 은근히 지원하는 걸 보며 이상하다 느끼긴 했지만, 로렐라이가 왕실에 보내는 연구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왔다. 이제까지 둘은 나름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국왕전하께서 일개 상단주를 호출해서 직접 만나보시겠다니, 말이 돼? 못 나오는 걸 뻔히 알면서 하시는 일이니, 모르는 체 하기엔 속셈이 너무 빤한걸.’

헨젤에서 독립하지 못한 지금, 국왕이 아니라 죽은 건국왕이 살아 돌아와 호출을 한대도 오드리는 거기에 응할 수가 없다. 하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여느 협상자리에서처럼 대리인을 내놓을 수도 없다.

지금 국왕은 로렐라이가 명확한 사유를 대지도 못하면서 명령을 따르지 않을 걸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영예로운 호출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명분으로 삼아 로렐라이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싶어서.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지만, 상대는 국왕이다. 하려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물며 로렐라이의 지분 한쪽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타우레드의 협조를 얻으면 그야말로 접시 위의 케이크 한쪽을 집어먹는 것처럼 쉬울 텐데.

국왕이 로렐라이만큼 이름 있는 다른 상단에게는 절대 하지 못할 폭력적인 처사를 강요하는 건, 그저 주인이 오드리이기 때문에. 오드리 헨젤이 미성년자고, 여자이며, 보호자 역할을 해줄 성인 남자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라비린은 떨리는 손을 감추려 과장된 태도로 서류를 접어 내던졌다. 어쩐지 속이 거북했다. 그는 눈꺼풀을 파고드는 빛을 견디지 못하고 기껏 벗겼던 마법등의 뚜껑을 도로 덮었다. 타우레드의 집무실은 다시 부드러운 달빛으로 가득 찼다.

“설마 제가 바지사장이라도 하겠다고 나설까봐 걱정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불러야 할 때가 돼서 부른 것뿐이다. 라디아타도 몇 달만 지나면 성년인데, 언제까지고 후계자를 바깥에 내돌릴 수야 있나. 그리고 그 명령서가 내려온 건 겨우 닷새 전이야.”

클로드의 말은 마치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처럼 들렸다. 그러나 라비린은 제 아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마냥 그렇구나 믿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오죽 많아야지.

“지난 달에 갑자기 사하스바티를 빼내셨잖습니까. 왕실로 간다더니 중간에 잠적해 버려서 황당했었습니다. 그때 이미 국왕 전하의 속내를 알고 미리 빼돌리신 거 아닙니까?”

“네가 아비를 점쟁이로 아는구나. 앞날을 그리 쉽게 알았으면 오죽 좋겠느냐.”

“그럼 대체 무슨 일로 그를 로렐라이에서 빼내신 겁니까? 사하스바티는 로렐라이에 있어야 제몫을 하는 사람입니다.”

“왕립 비마법 연구소를 설립할 테니 그에 맞는 인물을 천거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아직은 기밀이라 행방을 확언할 수 없는 것뿐이야. 앞으로 그는 거기에서 일하게 될 거다.”

왕립 비마법 연구소.

일전에 클로드가 헨젤 백작에게 올렸던 서류가 통과된 결과물이었다. 어차피 안 될 거라 생각하면서도 찔러나 보자 싶어 올렸던 서류가 통과된 건 좋은데, 대신 그 안의 사람을 직접 채워 넣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사하스바티를 빼낸 건 클로드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라비린은 그의 말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장검으로 사과 껍질을 깎지 않듯이, 사람을 쓸 때도 그에 맞는 자리와 역할이 있다. 사하스바티가 대단한 비마법 전문가이긴 해도, 그의 진짜 장기는 비마법과 마법의 조화였다.

“아버지, 사하스바티에게는 맞지 않는 역할입니다. 그는 마법사가 필요해요! 게다가 지금의 왕실은 그만한 전문가를 다루지 못합니다! 어린애에게 보석을 쥐어줘서 뭐 어쩌자는 겁니까? 그걸로 색깔 맞추기 놀이라도 하라고 하시게요? 제가 도대체 뭘 두고 아버지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사하스바티도 그동안 쌓은 노하우가 있어. 충분히 잘 할 거다. 그리고 시기가 그렇게 겹친 걸 어쩌란 말이냐? 여름의 태양에게 왜 그리 덥냐고 화를 낼 셈이야? 자꾸 어린애처럼 떽떽거리지 마라, 왕립 비마법 연구소는 내 오랜 숙원이었어! 국왕전하께서 로렐라이를 요구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야!”

“하……. 그래요, 사람들의 말대로 아버지의 등에 포모스가 업혀 있긴 하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사하스바티가 영영 아버지의 손이 닿지 못할 곳으로 가기 전, 그 절묘한 타이밍에 그를 낚아챈 꼴이 되었으니.”

“……로렐라이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쓸데없는 감상이 늘었어.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는 곳이니, 미련을 버려라.”

“하…….”

라비린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고 비웃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사하스바티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굶어죽을 뻔했던 사하스바티에게서 비마법 연구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한 클로드가 직접 거둬 후원하며 비마법을 가르쳤다던가. 사하스바티는 하늘이 무너져도 타우레드의 사람이었다.

바꿔 말하면, 사하스바티만큼 타우레드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머지는 모조리 로렐라이에 남았다는 뜻이었다. 왕립 비마법 연구소에 눈이 먼 클로드가 다른 비마법 연구가들을 빼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라비린이 알기로, 로렐라이의 비마법 연구가들은 얼굴도 비추지 않는 단주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 중요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대우를 받던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잘 곳과 일할 곳을 제공하고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고용주다. 어떻게 충성을 바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빈 얼굴에 국왕을 끼워 넣겠다는 계산이야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워커였다. 로렐라이를 지탱하는 천재 마법사, 워커 크라티우스가 단지 돈 때문에 로렐라이에 붙어 있다고?

라비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워커가 단주의 얼굴을 모를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하스바티가 타우레드의 사람이듯, 워커는 오드리의 사람이었다.

‘사하스바티가 없어도 그 자리는 어떻게든 채울 수 있겠지만 워커의 자리는 달라. 오드리 헨젤이 없으면 로렐라이는 무너져.’

얼마 전 수도 저택 도서관에서 보았던 오드리가 떠올랐다. 고작 가슴팍까지밖에 안 오는 작은 키에, 놀라우리만치 선명한 초록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여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순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일순 눈동자 너머에서 번뜩였던 예기는 무서울 정도였다.

그 빛을 본 순간, 라비린은 그녀가 정말로 로렐라이의 주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끝없이 그를 감탄시키던 안목, 통찰력, 결단력, 거기에 기가 질릴 정도의 과감함까지, 그 모든 걸 갖춘 바로 그 사람이라고. 그녀에게 로렐라이라는 이름은 지독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아버지는 오드리 헨젤이 로렐라이를 그렇게 쉽게 뺏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국왕전하가 끼어 계시니 뭔가 다르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이면 로렐라이를 만드는 고생을 하느니 다른 길을 찾았을 텐데.’

라비린의 속을 알 리 없는 클로드는 엎드린 아들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거렸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애초 이런 계약이었다. 로렐라이는 왕실로 가고, 오드리는 작위를 얻고. 그저 시간이 좀 일러졌을 뿐이야.”

놀라운 얘기였다. 라비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처음부터 결정된 일이었다?”

“……끝내 이렇게 되리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처음부터 공평할 수가 없는 거래인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면 알보다 거위를 원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잠깐의 망설임이 라비린의 분노를 부추겼다. 클로드의 말대로, 오드리라면 분명 짐작했을 것이다. 로렐라이가 크게 성장하는 만큼 빼앗길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이제껏 잘 지냈으니 앞으로도 잘 지내리라 생각한 자신이 바보였다.

“전하께서 이렇게 변칙적으로 구시는데, 그녀가 작위를 얻을 수는 있습니까?”

“타우레드가 증인이다. 아무리 국왕 전하라지만 타우레드까지 무시하실 순 없어. 오드리는 제 성을 가지고 헨젤에서 독립할 수 있게 될 거다.”

라비린은 제 등을 두드리는 클로드의 손길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부자의 시선이 엇비슷한 높이에서 맞부딪쳤다.

“로렐라이가 국왕 전하의 아래에서 멀쩡히 굴러갈 리가 없습니다.”

“안다.”

“국왕 전하께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얻는 게 아니라 거위의 배를 가르려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도 그를 알고 계시면서, 왜 말리지 않으십니까?”

클로드는 훌쩍 자란 아들이 기꺼웠다. 열여덟 살이나 먹어놓고는 눈이 땅바닥에 붙어서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났네 거들먹거리던 놈이 이렇게나 변해서 오다니, 흉한 꼴로 만들어 만탈락에서 굴린 보람이 있었다.

비록 그런 그의 보람에 찬 미소는 라비린에게는 끔찍한 꿍꿍이속을 감춘 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라비린은 제 아비의 웃음이 지독히 꺼림칙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가 내버린 워커의 투자 제안서를 눈앞에서 흔들며 웃던 그날 같았다.

“라비린, 내 아들아. 네 눈에는 로렐라이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으냐? 정말로?”

“…….”

“그동안 훌륭한 분장의 덕을 잘 보았구나. 표정을 숨기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걸 보니.”

라비린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욕을 뱉을 뻔했다. 어딜 가서도 표정 못 숨긴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건만, 저 늙은 사자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눈이 밝았다.

“곧 여름휴가 시즌이다. 로샨은 나와 함께 산트렘의 별장으로 갈 테지만, 라디아타는 리가 항구의 축제를 보러 갈 거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어 기쁜 나머지 앞뒤 재지 않고 그 친구를 초대할 테지. 호위 겸 해서 동행해라.”

“……자식을 장기말로 쓰는 그 버릇은 여전하십니다. 저야 그렇다 쳐도, 라디아타는 아버지께서 퍽 아끼는 자식이 아니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용하겠다는데 그 애가 동의했습니까?”

“내가 기른 내 딸이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할지는 이미 훤해. 네가 그렇게 이를 갈면서도 라디아타와 동행할 것을 이미 알듯이 말이다.”

클로드는 조개처럼 입을 다문 라비린의 어깨를 두드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역사 깊은 타우레드 후작가의 복도는 가문이 버텨온 시간만큼이나 묵직했다. 이제껏 가문이 참가했던 전쟁들, 그 수많은 피와 승리의 시간들이 벽화가 되어 복도를 장식하고 있었다.

“네 녀석들이 아무리 날고 뛰어봤자 내 자식들이지…….”

클로드는 어렴풋이 피비린내마저 감도는 것 같은 복도를 걸으며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남들은 멜브란트의 사자가 돈에 빠져 정신을 놓았다 수군대어도, 그는 검으로 하는 전쟁보다 돈과 머리로 하는 전쟁이 훨씬 좋았다. 적어도 자식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오드리 타우레드.

클로드는 다시 한번 그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역시 듣기 좋은 이름이었다.

* * *

셰비언과 워커가 진심이 되어 달려들자, 메시지 장치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일단 안정성이 대폭 개선됐다. 보내고 받을 수 있는 메시지의 길이도 늘어났다. 문제는 거리였는데, 그것만은 마법망의 문제인지라 해결이 어려웠다.

워커는 눈을 감았다 뜨는 매 순간마다 어떻게 마법망을 안정시킬 마력 운용을 장치에 담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마법사가 하루 온종일 장치 옆에 붙어서 마법망을 안정시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머리 굴려봐야 안 될 땐 안 돼. 부탁인데, 제발 나가서 좀 씻고 와라.”

“……내가 그렇게 더러워?”

“공중목욕탕 가지 말고 집에서 씻어. 쫓겨난다.”

점점 꼬질꼬질해지는 워커를 견디다 못한 셰비언이 그를 연구실 밖으로 쫓아냈다. 워커는 공중목욕탕도 못 갈 꼴이라는 말에 결국 1층의 살림집 욕실을 썼다. 그가 연구실에 처박혀 있는 사이 이디케가 기어이 하녀를 고용하는 데에 성공했는지 다행히 욕실이 깨끗했다.

그는 대충 욕조에 물을 가득 받고 목욕용 수정구를 꺼내 약간의 마력을 부어 던졌다. 수정구가 담긴 물은 금세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도록 따뜻해졌다. 욕조에 들어가 이젠 텅 비어 아무것도 아닌 수정구를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그 순간, 번뜩이는 영감이 찾아왔다.

워커는 허겁지겁 몸을 닦고 수정구를 쥔 채 연구실로 뛰어 들어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본 셰비언이 질색을 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수정구에 마력회로를 그리자!”

“뭔 소리야?”

“우리가 필요한 건 마법이 아니잖아! 마력을 특정 방식으로 방출하면서 마법망을 안정시키기만 하면 충분해!”

워커가 흥분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불성실하게 의자에 늘어져 있던 셰비언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는 중구난방으로 튀어나가는 워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현실성이 있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매우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근데 그거, 일회용이잖아.”

“그건 네가 해결해야지.”

“뭐?”

“셰비언, 내가 가장 중요한 걸 해냈잖아. 새로운 발상! 그 다음은 네가 해야지. 억울하면 나보다 먼저 생각해 내지 그랬어.”

워커는 놀라우리만치 능글능글하게 셰비언의 약을 올리고 잽싸게 욕실로 도망쳤다. 이번에야말로 안락하게 목욕을 즐기고 푹 잠들 셈이었다.

‘이제 한동안은 마음 편하게 쉬어야지.’

그러나 셰비언은 워커의 기대를 배신했다. 그는 채 사흘도 지나지 않아 수정구에 마력회로를 그렸고, 일회용이라는 단점마저 개선해 냈다. 미리 담아놓은 마력이 회로를 돌며 주변 마법망을 안정시키다가 서서히 닳아 기준 이하로 떨어지면 새로운 마력을 더 담기만 하면 됐다.

워커는 셰비언의 마력이 담겨 은빛으로 빛나는 수정구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천재 놈들 다 재수 없어.”

“천재는 너야. 이 정도는 공간만 능숙하게 다루면 금방 할 수 있어. 공간은 마법사의 상상으로 구성되고 만들어지는 곳이니까. 수식을 짜서 마법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일단 마법을 만들고 나서 그에 맞는 수식을 짤 수 있게 돼.”

“너한테서 천재라는 말 듣는 거 정말 짜증나긴 하는데, 그 공간 얘기만 나오면 없는 꼬리를 만들어서라도 흔들고 싶어지는 걸 어쩔 수가 없네. 야, 자세히 얘기해 봐.”

열의에 불타는 워커는 무엇도 막을 수가 없었다. 설령 이디케가 온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을, 셰비언이 무슨 수로 대답을 피할까. 그는 쓴웃음을 짓고 강의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메시지 장치의 완성은 며칠 뒤로 미뤄야 할 성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