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전조 (10/62)

chapter 9. 전조

「뱀 개구리 잡아먹는 꼴 보고서야 봄이 온 줄 안다 – 만탈락 속담」

긴 봄의 끝자락, 브란젤은 아직 서늘하고 만탈락은 곧 찾아올 본격적인 더위에 대비할 무렵. 로렐라이는 아직 나랍 진출 준비 중이고 오드리는 보석 경매장의 도난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때.

멜브란트와 나랍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달튼 제도의 작은 섬, 발톱섬에서 화산이 터졌다. 흙이야 기름지다지만 돌투성이 땅이라 경작도 어렵고 유독 사나운 짐승이 많아 정착해 사는 사람도 없던 섬인지라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덕분에 소문이 퍼지는 것도 느렸다.

배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어장이 풍부하지도 않던 섬인지라 그 소식은 주변을 다니는 한가로운 낚시꾼들을 한차례 휩쓴 뒤에야 내륙으로 퍼져 나갔다.

발톱섬의 화산분화는 여러모로 특이했다. 화산이 터졌다지만 큰 연기가 일고 돌이 날아다니는 격렬한 분화대신 뜨거운 초콜릿이 컵을 넘쳐흐른 것처럼 마그마가 조용히 흘러내려 땅을 덮었다. 더불어 일대의 마법망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부근의 마법도구를 망가뜨리기까지 했다.

지질학자와 식물학자에 더해 호기심 많은 몇몇 마법사들까지, 뒤늦게 소식을 접한 관련 학자들은 다투어 배를 수배했다. 그러나 어떤 뱃사람도 그들에게 배를 내주려 들지 않았으니, 불을 뿜는 섬에 함부로 발을 디뎠다간 불의 저주를 받아 페즈날의 가호를 받을 수 없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아니, 페즈날이 명색이 바다의 신인데 그깟 불에 진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아무튼 안 갑니다요. 벌써 사흘째 연기가 올라오는데 근처를 지나는 것도 꺼림칙해요.”

“빌리는 게 안 되면 사겠네. 배를 살 테니까, 일만 해주게. 저주를 받는 건 배라면서?”

“싫습니다! 같이 저주받으면 어쩝니까!”

이런 대화가 항구도시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때를 놓칠까 마음 졸이는 학자들의 사정이야 딱하지만 혹여 저주가 진짜면 그땐 어쩌란 말인가. 시달릴 대로 시달린 뱃사람 몇이 비리비리한 학자들을 바다에 처박아 버리는 사건이 몇 번 일어난 뒤로는 소소한 마찰마저 줄어들었다.

그런 와중에 정말로 돈이 급한 뱃사람 몇이 학자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배는 의뢰인이 대고, 뱃사람들은 섬까지 왕복만 하는 조건이었다. 하루하루 바다를 바라보며 이를 갈던 학자들 입장에서는 만세를 부를 일이었다. 쓸 만한 배를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뱃사람을 못 구해서 손가락만 빨던 때보단 나았다. 학자들은 처음 모여들었던 항구도시에서 꽤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배를 구해왔다.

하늘은 새파랗게 빛나고, 바람은 딱 적당하니 좋은 날, 그들은 식량과 물을 가득 싣고 돛을 활짝 펴고 기세 좋게 출항했다. 설마하며 부두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저, 저 미친놈들…….”

“누가 저 샌님들에게 배를 판 거야? 좀 맞아야겠는데?”

“내가 아냐. 아무튼 저 배는 이 항구로 안 돌아왔음 좋겠는데. 재수 없게 저주라고 달고 돌아오면 어떡해.”

“그냥 바다에 콱 빠져 버리라지.”

출항하는 배의 뒤꽁무니에 대고 할 만한 말이 아니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고개를 끄덕여댄다. 그리고 그 말들이 진짜가 되었는지, 학자들을 태운 배는 예정일이 지나도 항구로 돌아오지 않았다.

풍랑이 일었던 것도 아니고, 해적이 날뛰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달튼 제도의 바다는 숙련된 뱃사람에겐 고분고분하니 고개를 숙이는 얌전한 바다였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배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그 배에 대한 이야기를 피했다. 학자들이 찾아왔었다는 것도, 돈이 급한 뱃사람들이 그들을 태웠다는 것도, 다 없었던 일처럼 굴었다. 어쩌다 말이 나오기라도 하면 가라앉은 배 얘기 하는 건 재수 없다며 서로 입을 막기까지 했다.

그러나 배는 가라앉지 않았고, 예정일을 한참 넘긴 시점에 항구에 돌아왔다. 그것도 학자부터 뱃사람은 물론이고 쥐 잡이 시키겠다며 태운 고양이 한 마리도 남기지 않은 채로. 시체라도 있으면 차라리 나았을 걸, 먹다 버린 뼛조각조차 없다.

“쓰벌…….”

“소름끼쳐 뒈져 버리겠네. 이거 불 질러 버려야 하는 거 아냐?”

“뭘 불까지 질러? 바다에 끌고 나가서 바닥에 구멍 몇 개 내는 게 빠르고 깔끔하지.”

“그래, 그래. 불의 저주를 받았는데 태워봐야 뭐 해결이나 되겠어?”

구멍 하나 나지 않은 깨끗한 돛을 단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들어와 정박했는데, 배 안에 사람이 없다니. 망망대해에서 유령선을 보는 것보다 더 소름끼치지 않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를 뒤져 보던 사람들은 등골을 적시는 선뜩함에 럼주 한 병, 레몬 한 조각도 챙기지 못하고 허둥지둥 배에서 내렸다.

그들은 관청에는 신고도 하지 않은 채로 배를 처리했다. 누구 말마따나 먼 바다에까지 끌고 가 바닥에 구멍을 내는 깔끔한 방식으로 말이다.

한꺼번에 실종된 학자들을 수상쩍게 여긴 조사단이 마을로 찾아왔지만, 안 온 걸 보면 어디 암초에라도 부딪쳐 바다에 가라앉은 거 아니냐는 말 이외에는 들은 게 없었다. 마을 전체가 부정하고 어떤 뱃사람도 그 섬에 가려하지 않는 통에 사건은 그대로 마무리됐다.

바다의 신 페즈날과 날씨의 신 하랄이 싸우느라 폭풍을 부른다는 초여름, 멜브란트 왕국 최남단의 작은 항구마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 *

이디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소란스런 카페 디노의 구석에서 무념무상의 상태로 말린 생선포를 씹는 중이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워커가 머리 꼭대기까지 술을 부어넣은 채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래요, 그래. 힘들어요?”

“이런, 씨이……. 힘들죠!”

“어이구.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나, 나는……. 나는 이만큼 하는데도 시간이 이마~안큼 걸렸는데! 그랬는데!”

셰비언의 천재성에 대해서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워커지만, 정작 셰비언이 불가능해 보이던 일정을 무서운 속도로 해치우고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상대적인 박탈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휘하 마법사들에 대한 교육, 나랍에서 쓰는 마법도구 개량, 마법도구에 동작정지 기능을 부여하는 수식 정리, 거기에 개인 연구까지. 이걸 한 계절 내에 해내고 있으니, 이젠 허탈하기까지 해서 경쟁심도 안 든다나.

“쯧…….”

이디케는 새 생선포를 씹으며 워커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최근 몇 년간 비마법 비행도구 연구는 영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설계 변경이 몇 십 번이나 이루어졌는데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소형으로 축소 제작해 실험할 때는 무사히 잘 날다가도, 사람이 탈 만큼 크기가 커지면 여지없이 추락했다. 솔직히 이디케는 워커가 실험을 하겠답시고 비마법 비행도구에 올라탈 때마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실패가 계속되는 데다가 주변인들 전부가 입을 모아 워커의 꿈을 비웃으니, 티는 안 내도 속이 말이 아니었을 테다. 그 와중에 셰비언의 연구는 쑥쑥 진행돼서 이제 남들 앞에서 출입금지마법을 건 마법도구를 시연할 정도가 되었으니, 스스로도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다.

요즘 워커는 연구실 한가운데를 당당하게 차지한 강철새가 꼴도 보기 싫은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천재 놈들 다 나가 죽어라…….”

얼씨구. 이디케는 워커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셰비언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바로 천재 마법사라며, 세상 당당하던 사람이 누구였는데 저따위 말을 하는가.

“이봐요, 워커 씨. 당신이 바로 천재 마법사라며?”

“아니에요. 난 똥이야. 똥이에요. 나 같은 건 그냥 똥덩어리예요. 상단 돈만 처먹는 좀벌레야. 흐흐흑.”

이디케는 이제 질질 짜기 시작하는 워커를 보며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오드리가 일부러 카페 디노에까지 찾아가서 살펴보라고 할 땐 왜 그러나 했는데, 직접 마주하니 상태가 심각한 걸 알겠다.

“잘난 척 설계한 경비 마법도구 수준은 남들보다 나은 게 없고, 비마법 비행도구는 만날 추락하고, 심지어 이젠 마법도구도 아닌 거에 판매량도 밀리고!”

카프러스가 제안했던, 뚜껑 안에 거울을 단 회중시계가 최근에 로렐라이의 신상품으로 등장했다. 뚜껑표면에는 꽃과 새 등을 형상화한 섬세한 무늬를 새기고 시곗줄은 네이기스가 시제품으로 만들었던 것들을 다양하게 내놓았다. 시계로서의 실용성도 실용성이지만, 장식성을 강조한 회중시계는 사교계 여성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 물품이다 보니 가격도 저렴해서, 구매 계층이 한정되어 있던 만년필보다 판매량도 좋았다. 그게 또 워커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놈의 자존심, 섬세하기도 하지.’

어쨌건 워커가 이렇게까지 우울해 있는 걸 보는 건 이디케로서도 처음이었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웃고 뭐든 못 해낼 게 없는 것처럼 굴던 남자가 아이처럼 찡찡대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어딘지 짠했다.

“워커, 난 로렐라이가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해요. 애초 당신이 아니었으면 시작조차 못했을 거라고요.”

“……흑.”

“이런 말은 우리 아가씨 뒷담 같아서 좀 별로긴 하지만……. 사실, 우리 아가씨도 어릴 땐 그냥 쪼만한 꼬맹이였단 말이에요. 만탈락 가는 마차 안에서 나랑 손가락 걸고 막 살아보자, 뭐 이런 약속을 할 정도로.”

“……정말요?”

워커가 매번 궁금해 죽으려고 하던 이야기다. 그를 만나기 전의 오드리. 드디어 고개를 든 워커를 위해 이디케는 오드리의 어린 시절을 팔아먹기로 했다.

“지금이야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서라면 당장은 막 산다는 욕을 먹어도 괜찮아, 지만……. 어릴 때야 뭘 알겠어요. 말 그대로 막 살아보자는 거지. 칭찬 들으려고 백날 노력해 봐야 돌아오는 게 이따위 거라면 그냥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겠다고 하셨었어요.”

“헤에…….”

“얼굴이 까맣게 타거나 말거나 하루 종일 말 타고 돌아다니고, 승마 드레스는 귀찮다고 승마복을 입으시고, 공부란 공부는 다 팽개쳐 놓고 만탈락 골목길 탐험을 하고 싸돌아다니셨다 이거예요.”

“진짜 어린애였네요?”

“그럼요. 그땐 나도 어린애라서, 그런 아가씨를 말릴 생각은 안 하고 좋다고 같이 산비탈을 타고 다녔어요. 아가씨는 산비탈을 타는 건 처음이라고, 저보다 못하는 게 있다니 분하다고 풀이 죽어 있으셨지만 말이에요.”

산비탈이란 말이 나오자 워커가 벙긋 웃음을 지었다. 그가 오드리를 만난 게 바로 그 산비탈에서였다. 초기 비마법 비행도구 실험을 하다가 실패하고 풀밭에 엎어져 있던 그를, 오드리가 냅다 걷어찼었다.

‘양도 아닌 게 왜 풀밭을 차지하고 있어? 당장 일어나, 여긴 공동으로 쓰는 목장이야!’

돌이켜 보니, 풀이 죽어 있었다고 생각하기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발랄함이다. 싸늘한 워커의 시선을 이해한 이디케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아가씨는 당황하거나 놀라면 허세를 부리거든요. 가끔 아닐 때도 있지만.”

“아하.”

“아무튼, 그때 당신이 비마법 비행도구에 대한 설명을 했을 때, 그때 아가씨는 아신 거예요. 아, 이 비마법 비행도구가 완성되면 정말 세상이 변하겠구나. 내가 후원자가 되어 비마법 비행도구를 완성시키면- 여자라고 무시하는 것들에게, 여자보다 보는 눈이 없다고 비웃어줄 수도 있겠다.”

이디케가 양손을 쫙 펼쳤다. 그래봤자 남자들에 비하면 손가락 마디 하나는 더 작은 손이었다.

“이 손으로, 세상을 바꿔봐야지.”

“어…….”

“그 다음은 당신이 아는 그대로예요. 로렐라이가 괜히 로렐라이겠어요? 용에게서 마법을 훔쳐 낼 정도의 배짱으로 세상을 엎어보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거라고요.”

워커의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머리끝까지 차올라 찰랑대던 술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가슴 속에서 뭔가 간지럽고 몽글몽글한 것이 퐁퐁 솟아올랐다.

“아가씨는 내 강철새 두고 만날 욕만 하시는데.”

“애정이에요, 애정. 아가씨가 당신더러 때려치우라거나, 웃기는 짓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한 적 있어요?”

“……없어요.”

“그죠? 이번에 나랍 문제 때문에 예산 깎인 거 가지고 너무 우울해하지 마요. 아가씨께서 더 속상해하고 계시니까.”

“진짜요?”

“그럼요.”

이디케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워커의 표정이 사르르 풀리고, 다시 생글생글 웃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90%의 진실에 10%의 거짓을 섞었을 때 사람이 가장 쉽게 속아 넘어간다더니, 딱 그 짝이다.

“그런데 말이에요. 세비언이 대단한 마법사인 건 알겠는데,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

“……왜요. 그런 건 알아서 뭐 하게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난 워커 당신도 대단한 마법사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당신 문장 진짜로 화려하잖아요. 노란 들판에 쏟아지는 검은 깃털들……. 저번에 당신 문장 속에 들어갔을 때, 정말로 환상적이었어요. 하도 멋있어서, 며칠 동안은 꿈까지 꿨다니까요.”

워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게다가 난 이제까지 당신처럼 비마법과 마법을 잘 조화시키는 마법사는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당신이 셰비언을 두고 천재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궁금해서 말이에요.”

워커가 입을 삐죽였다. 자신을 구슬려서 셰비언의 수준을 가늠하려는 이디케의 속셈이 너무 빤히 보였다. 하나 이디케가 그걸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굳이 수준을 가르자면……. 난 이제 막 머리가 굵어지는 열세 살 꼬맹이고, 저쪽은 다 큰 성인 마법사 느낌? 뭐 그래요.”

“하아? 그건 비유가 안 돼요. 우리 아가씬 열 살에 역사 선생과 논쟁을 했다고요.”

“에이씨, 깨알같이 아가씨 자랑하기는.”

워커는 셰비언과의 격차를 느꼈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초반에는 그렇게까지 수준차이가 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독특한 발상과, 그 발상을 수식으로 구현해 내는 수준이 워낙 남달라 천재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자신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비마법 비행도구에 매달리느라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차이가 나는 것뿐이라고, 작정하고 메우려고 덤비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고.

셰비언이 보석 경매장을 턴 걸 알고서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에게서 공간을 다루는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런 생각은 뒤집히고 말았다. 이디케가 촉박한 일정을 이유로 세비언을 독촉하기 시작했을 때, 워커는 그가 곧 축 늘어진 생선 같은 꼴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셰비언은 처음에만 조금 곤란해했지, 곧 무서운 속도로 일을 해치웠다. 종이 위에서만 완벽하던 수식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놀라운 수준으로 개선됐다. 그때부터 조금씩 수준 차이를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디케가, 그녀가, 이제까지 워커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미소를 지으며 셰비언을 칭찬했다. 이런 속도로 일정을 소화하다니 몹시 흡족하다며, 대단히 만족스럽다고. 딱 워커가 꿈꾸던 그런 칭찬이었다. 그랬다. 결정타는 이디케가 날렸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뭐예요?”

갑자기 네 탓이다, 라는 말을 들은 이디케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워커의 어깨가 급격히 쭈그러들었다.

“셰비언은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뤄요. 나는 감히 따라갈 수도 없는 수준이죠. 분명 의식 분리도 할 수 있을 걸요.”

“워커는 못해요?”

“……못해요. 난 어림도 없어요. 이건 단순히 사용하는 마법 체계가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수준의 차이예요.”

워커의 말투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이디케는 내팽개쳐 두었던 생선포를 다시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요즘 오드리가 셰비언을 대하는 태도에 묘하게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그의 독보적인 실력 때문인지 다른 요인 때문인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워커를 찔러본 거였는데, 어째 이쪽도 모르는 눈치였다.

‘대체 우리 아가씨를 어떻게 홀린 거야?’

셰비언의 외모는 당연히 나무랄 데 없었다. 실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도 실력도 타고난 신분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그걸 모를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디케는 갑자기 착잡해져 다 씹지 못한 생선포를 꿀꺽 삼켰다. 아가씨가 정말 그 녀석에게 마음이 있는 거라면 어쩌지?

“어어, 여기서 뭐하나들?”

“피올!”

갑작스레 나타난 피올을 워커가 반색을 하고 반겼다. 어깨를 부딪치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죽고 못 사는 죽마고우라도 되는 줄 알 것이다. 자연스레 합석해 맥주를 시키는 피올은 제복이 아니라 사복이었다. 비번인 모양이었다.

“여기 오면 워커를 만날 줄은 알았지만, 락시 양까지 만날 줄은 몰랐는데요.”

“나도 보티안 씨를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디케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필사적으로 더 말하지 말라는 손짓을 했지만 워커가 옆에 있어서 그리 적극적이진 못했다. 심지어 피올은 맥주잔의 거품에 시선을 빼앗겨 그 소심할망정 필사적인 손짓을 보지 못했다.

“오늘 로렐라이 상단에서 출입금지마법 시연이 있다면서요? 어지간한 귀족들은 다 초청받았다는데, 락시 양이 여기에 있는 거 보니 레이디 헨젤께서는 안 가셨나 봅니다?”

이디케는 슬그머니 워커의 눈치를 보았다. 워커는 그녀가 이제껏 자신감을 북돋아준 것도 다 소용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간 한 번 열었다가 몸이 과하게 축나 쓰러져 있었던 것도 억울한데, 그새 연구의 태반이 끝나 버렸으니.

“……다이앤이 따라갔어요.”

“아하. 하필 보석이라면 눈이 돌아가는 하녀를 데려가다니, 그 꽉 막힌 기사님은 지금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겠군요. 레이디 헨젤은 안목을 높이는 거라며 관대하게 내버려 둘 테고 말이죠.”

피올은 뭐가 그리 웃긴지 킥킥대고 웃었지만, 그런 그의 옆에서 워커는 다시 우울해지고 있었다. 이디케는 워커의 눈을 피해 피올에게 한껏 찡그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디케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던 피올이 뒤늦게 워커의 상태를 알아채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디케가 입을 벙긋거렸다. ‘내가 기껏 기 살려놨는데 이게 뭐예요? 수습 좀 해요.’ 피올이 어색한 태도로 짝, 박수를 쳤다.

“아, 맞다. 워커, 그 비마법 비행도구인가 뭔가 하는 건 잘되어가?”

“……물어서 뭐해.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카페 디노에 처박혀 있는 거 보면 몰라?”

“레이디 헨젤은 워커 네 연구를 두고 기차와 비견될 만한 발명이 될 거라고 했는데 어서 완성해야지.”

“어서 완성은 무슨. 만날 실패만 하는데……. 가만, 기차?”

“그래, 기차. 내가 레이디 헨젤 앞에서 네 연구를 두고 꿈만 꾸는 것 같다고 했다가 한소리 들었거든. 레이디 헨젤께서 나더러 그러던데? 기차의 선례가 있는데 그 강철새가 그렇게 되지 못할 이유는 또 뭐냐고.”

워커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다른 사람에게서 같은 말을 들으니 갑자기 힘이 솟는 모양이다. 하긴, 기차에 비하면 비마법 비행도구의 연구 기간은 한참이나 짧았다. 워커는 마시던 맥주잔을 내던져놓고 바삐 짐을 챙겼다.

“어디가게?”

“제2의 기차를 만들어야지.”

쏜살같이 사라지는 워커의 뒤꽁무니를 보며 피올이 혀를 찼다. 멀쩡히 상단에 소속된 마법사인데 왜 애인이 없나 했더니 연구와 사랑에 빠져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

“워커 맥주 값은 보티안 씨가 내세요.”

“내가 왜요? 나랑 같이 마신 것도 아닌데.”

“기껏 살려놓은 기를 죄다 죽일 뻔했잖아요. 내가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도로 살려놨으면 됐지, 뭘……. 아 잠깐, 잠깐. 가지 말고 잠깐만 있어봐요.”

구시렁대던 피올이 일어나려는 이디케를 붙들고 늘어졌다.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이다. 그 표정이 어찌나 간절한지, 이디케는 지끈대는 머리를 붙들고 도로 주저앉았다.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어두컴컴한 카페 디노에서 이게 뭔 일인지. 다이앤이 이렇게까지 부럽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요?”

“그게…….”

피올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닳아 없어져 가는 인내심을 맥주로 충전하던 이디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벌써 맥주잔의 바닥이 보일랑 말랑했다.

“이거 다 비우도록 말 안 하면 그냥 갈 거예요.”

“한잔 더 시켜드리죠. 어이, 여기 맥주 한잔 더!”

대체 뭔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피올은 이디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맥주를 추가했다. 이디케는 사양하지 않고 잔을 받았다.

“공짜 술이니까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마셔야겠네요.”

“무슨 여자가 그렇게 술을 잘 마시……. 아, 얘기하면 될 거 아닙니까.”

피올은 괜히 딴 소리를 하다가 눈빛 공격을 받고도 내내 망설였다. 그러다 이디케의 맥주잔이 절반쯤 비었을 무렵이 되고서야 겨우 웃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평범한 회중시계를 꺼내 내놓았다. 이디케에겐 낯익은 물건이었다.

“……뭐야. 이거 그웬 영애에게서 받은 그 시곗줄이잖아요.”

“락시 양은 여전히 눈썰미도 기억력도 좋군요. 뚜껑을 열어보시겠어요?”

“왜, 이 안에 그웬 영애 초상화라도 새겼어……요? 세상에, 이게 뭐람.”

이디케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그마한 시계 뚜껑 안쪽에 그려진 그림이 눈이 튀어나오도록 화려했던 탓이었다. 포도와 백합과 검이 언뜻 봐도 비범한 형태로 디자인되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웬 영애께서 그려주신 거 맞죠?”

“남들 눈에 띄어봤자 좋진 않을 거라며 안에 그려주셨더군요.”

맥주를 들이켜는 피올의 표정은 어딘지 착잡했다. 오드리에게 청탁을 넣고 나서 나중에 뚜껑을 열어보고 어찌나 놀랐었는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재능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 내내 마음에 걸렸다.

‘좀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오드리의 보호를 받으며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자고, 후회하는 자신을 달래고 달랬다. 하지만 그녀가 끝내 버티지 못하고 그웬가로 돌아갔다는 걸 안 순간부터, 목구멍에 돌이 걸린 것처럼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묻히기 아까운 재능이 아닙니까. 레이디 헨젤께서 한 번만 더 도와주시면…….”

“안 돼요.”

이디케는 대번에 피올의 말을 잘라먹고 회중시계를 돌려주었다. 오드리가 네이기스를 보호하느라 뒤집어쓴 욕이 얼마인데 뭘 또 도와달라는 건가. 게다가 오드리의 후원 제안을 걷어찬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네이기스였다.

“본인이 그만두겠다고 하고 나갔는데 우리 아가씨더러 뭘 어쩌란 거예요? 멀쩡히 집에서 잘 있는 걸 데려다가 그림 그리라고 가둬놓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하지만 이렇게 재능이 있고, 본인도 원하는데요. 그만둔다고 한 거야 백작부인 때문일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웬 영애의 그림은 나도 마음에 들었어요. 두 점이나 샀다고요. 그렇지만 그분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그게 우리 아가씨가 똥물을 뒤집어쓸 이유는 못되잖아요. 친자매도 아니고, 고작 사촌인데.”

노골적인 단어 선정에 충격받은 피올이 잠시 말을 잊은 사이, 이디케는 남은 맥주를 모조리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잘 마셨어요. 그렇게 돕고 싶거든 보티안 씨가 직접 도와요.”

“잠깐, 잠깐만!”

“아 왜요! 맥주 더 시켜줘도 안 먹어요. 배불러요.”

“잠깐만 앉아봐요.”

피올은 정말로 급했다. 벌떡 일어났던 이디케는 피올에게 팔을 잡히곤 그의 팔 힘을 못 이겨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술이 오리주둥이처럼 퉁퉁 튀어나왔다.

“내가 락시 양의 아가씨에게 사람을 소개시켜 드리죠. 분명 큰 도움이 될 사람일 겁니다. 그 사람과 레이디 그웬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다리만 놔주시면 됩니다.”

“만나게만 해주면 되는 거면, 보티안 씨가 직접 하지 그래요?”

“그게 되면 이런 부탁은 하지도 않죠. 베텔 경도 날 볼 때마다 찢어죽이고 싶다는 눈을 하는데, 레이디 그웬의 오라비가 날 가만히 둘 것 같아요?”

“하긴 그웬 영애께서는 표정 관리가 영 안 되는 분이시니…….”

에스코트 기사의 본분 중 하나는 지키는 레이디에게 웬 잡놈이 꼬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그 잡놈에는 행동거지가 추한 자들뿐만 아니라 신분이 맞지 않는 자들도 포함된다.

오드리야 귀족 영애로서 당연한 사교 활동이라는 산뜻함으로만 피올을 만나니 카프러스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네이기스는 경우가 달랐다. 피올을 볼 때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어쩔 줄을 몰라 하니, 당연히 에이쉬의 견제 대상에 속할 수밖에.

“그 소개시켜 주겠다는 사람, 정말로 우리 아가씨께 도움이 될 사람이에요?”

“당연하죠. 내가 아가씨께 해 될 사람 소개해서 뭐 이득 보는 게 있다고.”

“그웬 영애를 도와서 이득 볼 것도 없는데 돕고 계시잖아요, 지금.”

지당한 지적이었다. 피올은 제 속을 푹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무시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의 나 같아서 그럽니다. 가고 싶은 길은 뚜렷한데 용기가 없어 망설일 때에, 괜찮다 용기를 가져라 끌어주는 손이 얼마나 간절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

이디케는 핑계 같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평민 하녀 주제에 무슨 공부냐며 몸을 빼는 그녀를 잡아다가 선생 앞에 앉혀놓은 게 바로 오드리였다. 두려워하는 손을 움켜쥐고 걱정 말라며, 내가 지켜주겠노라 앞서 걷던 자그마한 등에 홀딱 반해서 인생 말아먹은 게 지금의 자신이 아닌가.

이디케는 피올에게 반박하는 대신 걱정스런 마음으로 그에게 충고했다.

“……그웬 영애에게서 너무 호감을 사지 않도록 주의하셔야겠네요. 깜깜한 길에 혼자 서 있을 때 손 내미는 사람은 태양보다 밝아 보이거든요. 몸이 홀랑 타버릴 걸 알면서도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그 말, 어째 경험담 같군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치안대원이 평민에 불과하다는 거야 뼛속까지 잘 알고 있으니까. 레이디 그웬을 바닥으로 끌어내릴 생각은 없어요.”

“이야, 그거 대단한 각오네요.”

이디케는 자세를 고쳐 앉고 피올과 머리를 맞댔다. 처음에는 이렇게 간절한데 말이나 들어보자 싶었던 것이지만, 피올의 계획은 의외로 현실성이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완전히 집중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락시 양, 도와줄 거라고 믿겠습니다.”

“아가씨만 허락하시면요.”

“분명 허락하실 겁니다.”

피올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비록 가문을 버리고 뛰쳐나오면서 아버지와는 철천지원수처럼 지내고 있지만, 아직도 여동생과는 사이가 좋았으니까.

“타우레드 후작 영애와 알고 지내서 나쁠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의욕이 빵빵하게 차오른 상태로 연구실에 간 워커는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셰비언을 발견했다. 긴 머리채를 대충 땋아 늘어뜨리고 의자에 기댄 채 얼굴에 책까지 덮고 있는 꼴이 밤을 꼴딱 샌 모양이었다.

“셰비언, 자? 연구실 말고 방에 가서 자.”

“안 자…….”

“지금은 안 자도 금방 쓰러지겠구만 뭘. 일어나, 일어나.”

“안 일어나……. 안 자…….”

평소라면 워커가 흔든다고 흔들릴 셰비언이 아니건만, 어째 지금은 의자에서 미끄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중얼중얼 말대꾸를 하면서도 눈은 뜨질 않는 게, 딱 잠에 취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아 진짜……. 일 혼자 했나! ……그래, 혼자 했네.”

워커는 은실처럼 눈부신 머리타래를 홱 잡아당겨 볼까 고민하다가, 한동안 보는 사람이 다 질릴 정도로 일에 파묻혀 있던 셰비언을 불쌍하게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소외당한 것 같아 불쾌하긴 했지만, 덕분에 몸의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게 왜 알아서 일정을 당긴다고 난리를 피운 거야? 이 고생을 하면서.”

흔드느라 떨어진 책을 도로 펴서 얼굴에 덮어주고, 춥지 말라고 담요까지 챙겨다 덮어주었다. 올해의 여름은 유독 뜨거워질 징조를 보이고 있다고 해도, 여긴 지하였다. 조만간 더위를 견디게 해줄 냉방 마법도구를 갖다놔야겠지만 아직까진 담요가 필요했다.

“하여간 덩치는 커가지고. 무슨 마법사가 이렇게 몸이 좋아? 보는 마법사 부럽게시리.”

마법망을 다루다보면 멀쩡하던 사람도 몸이 점점 쇠약해지는 게 보통인데, 셰비언은 카프러스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덩치가 좋았다. 펑퍼짐한 로브로 몸을 둘둘 말고 다니는 데다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옅다보니 다들 착각하는 것뿐이었다.

넓은 어깨에 끙끙대며 담요를 덮어놓고 엉망으로 어질러진 책상에 눈을 돌렸다. 괴발개발 갈겨놓은 종이들을 그러모아 정리하는데, 워낙 글씨가 엉망이라 순서조차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마음먹고 쓰면 아주 잘 쓸 수 있으면서, 연구서 쓸 때는 아주 그냥……. 분명 바일런 섀덤도 이랬을 거야. 다들 낙서나 쓰레기인 줄 알고 버린 걸 거라고. 그게 아니면 남은 연구서가 한 장도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니까?”

입을 삐죽 내밀고 대강 내용을 훑던 눈이 덜컥 멎었다. 당연히 마법사 없이도 마법도구를 동작정지 시키는 건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워커는 좀 전까지 불평하던 것도 잊고 새로운 종이를 꺼내 수식을 깔끔하게 옮겨 적기 시작했다.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토막이 나 있던 수식들이 금세 정리되며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좀체 믿어지지 않는 수식을 몇 번이고 읽으며 눈을 비볐다.

“마법망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한다니……. 이게 돼?”

“돼.”

“아, 깜짝이야! 어, 야, 셰비언. 나 이거 그냥 보기만 한 거야. 뭐 따로 베껴서 훔치고 그럴 생각은 없었어!”

“알아. 너한테 그런 주변머리가 있었으면 아직도 저 강철새를 붙들고 있었겠냐.”

대체 언제 잠에서 깬 건지, 셰비언이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담요를 걷었다. 훔쳐보다 들킨 꼴이 된 워커는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그러나 정작 셰비언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태평하기만 했다.

“수식 봤으면 된다는 거 알았을 텐데, 왜 네 눈을 못 믿고 그래?”

“그럴듯한 말이야 누구든 할 수 있는 거니까. ……씁, 그래, 맞아. 이해는 가. 마법사 둘이 같은 자리에서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리면 마법망 시야를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근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어?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이야……. 네가 그렇게 상품성을 따지는 녀석인 줄은 몰랐는걸.”

“저 강철새를 계속 연구하려면 로렐라이가 돈을 잘 벌어야 되거든. 쟤 먹이가 좀 많이 들어.”

워커는 뻔뻔하리만치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셰비언은 고개를 내저으며 워커가 챙기지 않은 종이를 주웠다. 수식이 아니라 괴상한 선이 잔뜩 그려진 종이였다. 그는 그 위에 얇은 종이를 깔고 슥슥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자, 봐……. 마법사가 마법망을 직접 건드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장치를 통해서…….”

“흠, 발상이 비범한데.”

워낙 비마법에 흥미가 많아 마법사들 사이에서 괴짜로 통하는 워커다. 셰비언이 대체 언제 이렇게 비마법에 대한 지식을 쌓았을까 놀라우면서도, 영 쓸모없어 보이던 마법이 점점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춰가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마법사가 아니라 이 장치가 핵심이 되는 거네.”

“그렇지. 마법사가 있어도 장치가 없으면 메시지를 보낼 수 없어.”

“장치가 있어도 마법사가 없으면 메시지를 보낼 수 없고.”

“마법망을 다룰 수 있는 건 마법사뿐이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어때, 이 정도면 상품성 괜찮지 않아?”

“이론상으로는.”

셰비언이 대체 뭐가 문제냐며 따졌지만, 워커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종이 위에서는 완벽하던 물건이 현실세계로 나오면 온갖 문제를 다 일으키는 꼴을 어디 한두 번 봤어야지.

게다가 이번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로렐라이 최고의 비마법 전문가가 보름쯤 전에 퇴사했어.”

“……너 퇴사했어?”

“높게 쳐 줘서 고맙긴 한데, 진짜 전문가는 다른 사람이었어. 사하스바티라고……. 초창기부터 있던 사람이라 설마 퇴사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는데……. 왕궁 쪽에서 사람 모집한다고, 그리로 간다더라.”

워커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다행히 사하스바티 혼자 퇴사한 것이고, 그가 길러낸 후학들이 여전히 로렐라이에 남아 있긴 하지만 이렇게 창의적인 장치를 만들어낼 정도의 실력은 되지 못했다.

“내 생각이지만 이건 네가 직접 설계하는 게 더 빠를걸.”

“뭐야, 전문가가 그 사람 하나는 아니었을 거 아냐.”

“이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비마법이잖아. 적용되는 마법의 형식도 다르고. 어느 정도까지는 네가 직접 설계하는 쪽이 효율이 높아.”

셰비언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죽을 둥 살 둥 일해서 일정을 앞당겼고, 개인 연구도 대충 끝마쳤으니 이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달튼 제도에서 화산이 터졌다는 소식을 본 게 벌써 한참 전인데 아직도 브란젤에 매여 있다니!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나도 퇴사할까…….”

“아가씨 비밀도 알아놓고 퇴사?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셰비언, 넌 로렐라이에 코 꿰인 거야. 끝났어, 끝났다고.”

“젠장…….”

셰비언은 책상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진짜…….”

산더미 같은 일에 깔려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눈앞에 오드리의 얼굴이 아른거려 좀처럼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기차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의 반짝임은 시간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발목을 잡아당기는 끌림에 대해서는 이미 저항하기조차 두렵다.

이렇게나 마음이 휘둘리는 게 놀랍고 황당한데, 그게 그녀가 자신과 동족이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순수하게 끌리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더욱 고통스럽다.

‘마력 따위에 농락당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 와중에 오드리는 마력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만 같으니, 혼자서만 발을 동동거리며 애달파 하는 제 꼴이 너무 우스웠다. 마력을 받은 건 그쪽인데, 왜 넘겨준 자신이 이 꼴인 걸까.

“……아가씨는 뭐 하고 계시려나.”

머릿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말이 덜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란 셰비언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워커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워커는 수식에 집중하느라 셰비언의 표정까지 보지는 못한 듯, 태평하게 대꾸했다.

“뭐하긴, 네가 일정 당겨놓은 출입금지마법 시연회에 가셨겠지. 안 그래도 촉박한 일정을 왜 당겼나 했더니, 이거 연구하려고 당겼나 보지? 유명세를 원할 땐 언제고, 날짜를 당길 거면 발표는 딴 사람에게 맡기라는 말에 동의하기에 웬일인가 했더니만.”

“비마법 장치까지 내 몫인 줄 알았으면 좀 쉬엄쉬엄 했을 텐데.”

“어쩌겠어, 이미 저지른걸. 구덩이를 팠으면 메우는 것도 본인이 해야지 않겠어? 잘해 봐.”

“그 구덩이가 내 키보다 깊을 것 같아서 그러지.”

셰비언은 한숨을 삼키며 주섬주섬 종이를 주워 모았다. 살면서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는데, 어째 오드리만 얽히면 이리도 얄팍해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야, 워커. 마법도구 동작정지 건은 네가 해라.”

“마법도구 동작정지? 야, 그건 네 몫이잖아.”

“너 쓰러져 있는 동안 출입금지마법 교육 끝낸 게 누군데. 나한테 떠맡기고 튄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차피 그 동작정지 연구 골격은 끝내놨으니까 발표 준비만 좀 하면 돼.”

“뭐야, 제일 귀찮은 걸 떠맡기고 있어!”

“귀찮아도 교육만큼 귀찮았겠냐.”

워커는 있는 대로 꿍얼거리면서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그런 큰일을 앞에 두고 절대 무리하지 않았을 것을, 셰비언이 있다는 생각에 안이하게 행동한 건 사실이었으니.

그는 서글픈 한숨을 내쉬며 셰비언의 책상에서 연구 자료를 거둬들였다. 제2의 바일런 섀덤이 되는 건 조금 더 미뤄야 할 듯했다.

그 시각, 오드리는 워커의 말대로 출입금지마법 시연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연이 어찌나 성공적이었는지, 먼저 사용해 본 사람으로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소감을 말해주느라 지쳤으면서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연회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디케가 미리 퍼뜨린 입소문을 듣고 몰려왔던 사람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마법사가 필요 없고, 사용자를 식별하는 마법도구.

이제까지 작동 정지에 마법사가 따로 필요 없는 마법도구는 기차에 사용되는 마법동력이 유일했다. 일정량의 마력을 각각 다른 회로에 주입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작동 정지가 되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었고, 많은 마법사들의 연구대상이었다.

바일런 섀덤, 마법동력을 발명한 천재는 연구 일지를 남기지 않았으므로.

오드리는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붉게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시연회에서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열기가 옮기라도 한 것처럼 피가 끓었다. 시연한 마법사의 속옷 색까지 알아낼 기세로 질문을 퍼붓던 기자들을 생각하니 흡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정을 바꾸길 잘했어. 신제품으로 화제를 끌다가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 더 주목받을 수 있을 거야.’

마음 같아서는 꽁꽁 숨겨두고 로렐라이의 제품에만 적용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마법사협회의 항의를 받게 된다. 소속이 있는 마법사의 연구엔 별 말 없이 사후허가를 내줬던 왕궁마법사 쪽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고.

애초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오면 전부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공개하는 것이 마법사 사회의 원칙. 그게 바일런 섀덤의 마법동력을 개량하진 못해도 복사는 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로렐라이라도 그 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가씨,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아. 경의 눈에도 그게 보이는가요? 이런, 집에 들어가면 표정 관리를 해야겠네요.”

오드리가 민망해하며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통에 좋은 의도로 말을 꺼냈던 카프러스는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는 그게 아니라며 어물어물 변명을 하다가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를 뻔히 알면서 오드리는 일부러 뒷말을 기다리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다이앤은 웃음을 참으려 입을 틀어막으니, 카프러스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절 놀리는 게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어 미안하군요. 시연회가 잘 끝나서 기분이 좋았어요. 생각 이상의 호평이었으니까요.”

카프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오드리의 말에 동의했다. 안 그래도 시연한 마법사에게 쏟아부은 질문만으로는 모자란 기자들이 자꾸만 오드리의 부근을 맴도는 걸 막아내느라 꽤 고생한 참이었다.

“아가씨께서 셰비언의 고집을 받아주실 땐 대체 왜 그러시나 했는데, 확실히 알았습니다. 셰비언이 직접 시연자로 나섰으면 그 마법이 이렇게까지 주목받지는 못했겠다 싶더군요. 날짜를 당기더라도 시연자를 바꾼 건 정말 좋은 결정이었습니다.”

“……고집?”

“하도 출입금지마법을 먼저 시연해야 한다고 우겨서 아가씨께서 미리 세워두셨던 계획을 다 변경하셨잖습니까. 본래는 이렇게 이르게 발표할 예정이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

“고생하시는 거 보는 동안 영 마음이 안 좋았는데, 그럴 만한 일이었군요.”

카프러스의 말은 거기서 끝났지만, 오드리는 입이 바싹 말라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하다 우는 소릴 하던 셰비언이 갑자기 뭐에 홀린 것처럼 일을 하더니, 오히려 일정을 당겨달라 요청을 한 건 사실이었다. 한 번에 큰 충격을 주는 것도 좋지만, 순차적으로 계속해서 제품을 내는 쪽이 주목도로는 더 좋을 것 같다며.

이미 결정하고 추진하던 일정을 바꾸는 건 상당히 수고로운 일이었다. 평소라면 어차피 로렐라이를 대체할 상단 같은 건 없으니 일정대로 하라 했을 것이거늘, 오드리는 쉬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시연자를 바꾸라는 조건을 걸면서도 왜 그랬는지 이유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랬지.’

지나고 나서 자신의 결정을 되짚어보자 이유는 의외일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셰비언이 남들 앞에 나서는 게 싫었다. 수십 쌍의 눈길이 그에게 박히는 게 싫고, 자꾸만 마음을 끄는 얼굴이 그림으로 그려져 신문에 실리는 게 싫었다. 마법의 주목도를 높여야 한다든가 하는 건 둘째 문제였다.

‘감정에 휘둘려서 중심을 잃었어. 이러면…….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오드리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현기증이 찾아들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놀란 카프러스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이 창백하고 평소보다 숨이 거친 게,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안 그래도 며칠이나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던 경력이 있는 오드리가 아닌가 말이다.

크고 따뜻한 손이 오드리의 이마를 짚었다.

“흠……. 걱정될 정도의 열은 아닌데 살짝 미열이 있습니다. 역시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닙니까? 도착하면 일은 하지 마시고 바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리한 거 아니에요. 그저…… 잠깐 어지러워 그런 것뿐이니 경이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마차 멀미라도 하나 보지요.”

카프러스가 다시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오드리는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열린 창문으로 햇볕에 달아오른 바람이 들이쳤다. 이번 여름은 유독 뜨거울 모양인지, 여름 휴가 시즌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음에도 열기가 대단했다. 마치 만탈락의 바람 같았다. 그 바람이 오드리에게 그럭저럭 평정을 흉내 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이앤, 너는 돌아가면 바로 목욕물 준비를 해두렴. 베텔 경께서는 하델을 좀 봐주세요.”

“도련님의 검 선생은 그만두었습니다. 도련님께서도 이제 검은 안 들겠다고 하셨고.”

“매정하신 분 같으니. 그 애가 그만두고 싶어 그만둔 것도 아닌데, 마음을 좀 달래줄 수도 있죠.”

알신다를 쫓아내며 부딪친 이후, 하델은 이제껏 놀았던 시간들을 메우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알렉스가 오드리를 찾아와 말려달라 사정하기도 했지만, 오드리는 자신이 개입해 봐야 역효과만 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프러스에게 부탁하는 것인데 정작 카프러스는 영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도련님께서 그동안 처지에 맞지 않는 꿈을 꾸셨던 겁니다. 가문을 나갈 용기도, 백작님의 뜻을 거스를 각오도 없으셨으니 언젠가 반드시 맞이할 결말이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깨달으셨으니 차라리 다행입니다.”

“경의 말은 알겠어요. 하나 실행에 옮기고 못 옮기고는 상관없이 꿈을 꾸는 건 어린 시절의 특권이니까요. 어쩔 수 없이 놓아버린 꿈이 독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예.”

“오늘 하루 동안만 경을 내 에스코트 기사에서 해임합니다. 내 걱정은 말아요, 만탈락에서도 혼자서 잘 다녔으니까.”

“예? 아가씨!”

카프러스가 나설 틈도 없었다. 오드리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에스코트도 없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매일 아침 승마를 하는 보람이 있어, 긴 드레스를 입었다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날렵한 동작이었다. 다이앤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서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오드리를 보며, 카프러스는 씁쓸하게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잠깐 닿았을 때의 온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데, 깃털 같던 체온이 아쉬운 자신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한편, 카프러스의 고민을 알 리 없는 오드리는 돌아가자마자 서류를 뒤졌다. 범위는 셰비언과 관련된 결정들. 이미 처리해서 넘겼던 서류들은 릴리가 깔끔하게 분류해서 정리해 둔 덕에 찾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넓은 책상에 순서대로 서류를 펼쳐 놓고 당시의 사고흐름이 어땠는지를 되짚었다. 서류를 앞에 놓고 보니, 처음에는 대단히 이성적이었던 결정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기점은 역시 문장 속에 다녀왔던 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셰비언과 관련된 일을 처리할 때면 다분히 감정적이 되었다. 냉정하게 저울을 재지 못하고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결정을 내리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끝내 그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혹은 그가 제안한 방향으로 결정이 이루어졌다.

오드리는 입을 틀어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성적인 결정에 감정 따위가 영향 줄 일 없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우스웠다.

‘맙소사…….’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불질러 버릴까 싶다가도, 나중에 서류가 필요한 날이 올까싶어 그럴 수가 없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본래 있던 자리에 서류를 챙겨 넣고 책상에 엎드려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잘하면 돼. 이미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다행히 손해 본 일은 아직 없으니까. 더욱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냉정하게…….’

이렇게 다짐해 봐야 정작 셰비언의 얼굴을 눈앞에 두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몰랐더라면 계속 감정에 휘둘리는 결정을 해왔을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목욕물이 준비됐고, 오드리는 하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물속에 몸을 담갔다. 다이앤은 살림을 쥔 오드리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기웃대는 하녀들을 쫓아내며 이디케를 기다렸다.

‘아무리 젖형제라도 그렇지, 대우가 너무 다르다니까. 나도 만탈락에서 왔는데 언제 저렇게 신뢰를 얻어보나…….’

이디케가 들었다면 어차피 비슷한 처지에 별 소리를 다 한다 쏘아붙였을 것이다. 어쨌건 다이앤은 뒤늦게 돌아온 이디케에게 오드리를 맡기고 제 할 일을 하러 사라졌고, 또 욕조에서 잠든 오드리를 깨우는 건 이디케의 몫이 되었다.

“아가씨, 이렇게 욕조에서 주무시다간 퉁퉁 불은 면발이 될 거라니까요.”

“……으음.”

“하여간……. 또 뭐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셔서 이 꼴이신 거예요? 시연회가 잘 안 됐어요?”

“아냐, 시연회는 아주 성공적이었어. 워커는 어땠어? 지나치게 의기소침해 있지는 않았어?”

“자기가 상단의 좀벌레니 뭐니 하고 있기에 아가씨 좀 팔았어요.”

“좀벌레? 나 참……. 그래서 무슨 말을 해줬는데?”

“막 살아보겠다고 드레스 내던지고 승마복 입고, 저랑 같이 목장 풀밭 다 뛰어다니고, 뭐 그랬던 얘기요. 아가씨께서 워커의 강철새 얘기에 홀딱 반해서 로렐라이 만든 거라는 얘기도 좀 하고요.”

오드리의 얼굴에 빨갛게 열이 올랐다. 철없던 어린 시절 얘기를 왜 굳이 꺼내가지고는. 그때 오드리는 정말 조금만 더 연구하면 워커의 강철새가 완성될 줄 알았다. 정말, 조금만 더 하면.

“내가 워커한테 낚였지, 낚였어……. 워커는 낚시도 못하면서 대어를 낚은 거라니까.”

“후후, 정말로요. 출입금지마법 시연회 얘기에 다시 우울해지긴 했는데, 보티안 씨가 기차 얘기를 하니까 금방 살아나더라고요.”

“기차? 웬 기차?”

이디케가 욕조에서 오드리를 꺼내 물기를 닦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이디케가 말리는데도 자꾸만 눈을 비비다가 손등을 맞았다.

“그 왜, 예전에 아가씨께서 보티안 씨 앞에서 워커 편 든 적 있잖아요. 비마법 비행도구가 기차처럼 되지 못할 일은 또 뭐냐고요. 그 말 들으니까 또 기운이 났나 봐요. 바로 제2의 기차를 만들겠다며 씩씩해져서 갔어요.”

“하여간 단순하다니까……. 주제에 고집은 또 대단하지. 그놈의 비마법만 고수하지 않아도 금방 성공할 텐데.”

“왜 그렇게 비마법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어요. 본인도 마법사면서.”

“내가 아나? 난 워커 머릿속 이해하기 포기한 지 오래 됐어.”

워커가 비마법을 고수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는 그 특유의 고집으로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오드리와 이디케는 이제 거의 설득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놈의 강철새에 들어가는 돈만 보면 속이 쓰리지만 말이다.

그새 머리가 다 말랐다. 이디케가 목욕 수건 대신 잠옷을 입혀주자 오드리의 눈에 졸음이 와르르 매달렸다. 목욕 중에도 꾸벅꾸벅 졸았는데 잠옷을 챙겨 입고 침대에 누우니 정말 죽을 것처럼 졸립다. 오드리는 다이앤이 데워놓은 침대에 주섬주섬 기어들어가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아, 맞다. 아가씨, 보티안 씨 말인데요.”

“응…….”

“생각보다 꽤 괜찮은 집안 출신인가 봐요. 산트렘 기사단에 들어가는 걸 굉장한 일탈로 얘기해서 놀랐다니까요. 아무튼, 어떻게든 레이디 그웬께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모양인데, 혹시 아가씨께서도 거기에 동참해 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네이기스에게 관심 없다더니, 순 개소리였잖아.”

피올이 괜찮은 집안 출신이라는 건 몸에 익은 인사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드리 역시 피올을 보며 그는 어느 집안에서 뛰쳐나왔을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치안대는 출신을 가리지 않고 받아주는 대신 다시는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제약이 있는 곳이었다.

혹 네이기스 때문에라도 가문에 돌아가고 싶어졌대도 이미 그른 일. 본인도 알고 있을 터였다. 오드리는 그 때문에 피올에게 경고한 전적도 있었다. 어차피 안 될 일이니, 그녀에게 너무 희망을 주지 말라고.

어쨌건 네이기스의 재능은 정말로 아깝고,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계좌 열쇠를 쥐어주었는데도 움직일 기미가 전혀 없는 걸 보면 뭔 수를 쓰든 써야 할 판이기도 했고.

“뭐, 나서준다면야 좋지……. 근데 무슨 수로 도와주겠대?”

“도와줄 법한 끈이 있대요.”

“치안대원 주제에 웬 끈? 그웬 백작가를 힘으로 찍어 누르려면 어지간한 고위 귀족이 아니면 안 될 텐데.”

“타우레드 후작영애랑 연결시켜 주겠대요.”

잠이 확 깬다. 이디케는 벌떡 일어나려는 오드리를 진정시키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쩜 이렇게 좀 전의 자신과 똑같은 반응인지.

“걱정 마세요, 자세한 사정을 알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어요. 타우레드 후작영애는 여성 화가를 지원하기로 유명한 분이라 꺼낸 말 같았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거기에 어떻게 말을 넣겠다고……. 설마, 사자가 잃어버렸다던 자식이 보티안 씨인가? 하지만 보티안 씨는 산트렘 기사단이었잖아. 산트렘 기사단은 그쪽 지역 출신이 아니면 단원으로 받아주지 않을 텐데?”

“가능성은 있죠. 지금 타우레드 후작부인은 산트렘 지역 출신이시니, 실력만 있었으면 산트렘 기사단에 들어가는 게 힘들지 않았을걸요.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셨잖아요, 보티안 씨는 분명 브란젤 부근 출신일 거라고.”

“하……. 그랬지. 그랬었지. 하도 놀라서 잠이 다 깨네.”

“잠이야 드러누우면 다시 올 건데요. 보티안 씨에게는 아가씨께서 동의하셨다고 얘기할게요. 이만 주무세요.”

이디케는 램프를 들고 나갔고, 오드리는 너무나 까매서 제 손의 윤곽만 간신히 보이는 어둠에 잠겼다. 그녀는 그 어둠이 몹시 낯익다고 생각했고, 무심결에 혼자서도 푸른빛을 흘리는 알룬드의 목걸이를, 하얀 꽃잎을 날리는 체리나무를 떠올렸다가 짜증스럽게 이불을 뒤집어썼다.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사자가 잃어버린 자식일지도 모르는 피올에 대한 생각도, 네이기스의 진로에 대한 고민도, 하다못해 로렐라이의 앞날조차 머릿속을 차지하질 못하다니 말이다.

* * *

쥐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한 채 홀로 돌아온 배 때문에 두려움에 빠져 있던 항구 마을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활기를 되찾았다. 처음에야 저주를 두려워했다지만 나갈 때마다 물고기는 만선이요 태풍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역시 배를 가라앉혀 떠나보내길 잘했다는 말까지 돌았다.

그런 와중에 마을에 웬 외지인이 한 명 나타났다. 설마 또 조사단이 온 건 아닐까 경계하던 마을 사람들이었지만, 외지인이 겨우 젊고 아리따운 여자 한 명이라는 걸 알자마자 퍽 살갑게 굴었다.

새빨간 머리칼을 정수리 부근에서 묶어 늘어뜨린 샤를레아가 마을의 주점에 나타나 술을 주문하면, 가장 큰 잔에 넘칠 듯 술을 따라 주고 슬금슬금 다가와 추근대는 게 살가운 인사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샤를레아, 그 무거워 보이는 검은 내려놓고 내 검의 성능을 시험해 보는 게 어때?”

“네 검?”

“이거 말이야, 이거.”

샤를레아에게 구운 소세지 한 접시를 서비스조로 내놓은 바텐더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제 허벅지를 두드리자, 주점 여기저기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미친놈! 어디 그런 과도만도 못한 걸 들이대? 어이, 샤를레아! 저 녀석의 검은 반동가리야, 반동가리! 속으면 안 돼! 대신 내 건 어때? 내 물건은 저어기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건너가는 배의 마스트처럼 굳건하다고!

온갖 음담패설이 부두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다음 조업을 나기기 전에 주점에 죽을 치고 있던 뱃놈들이 서로 나를 봐달라 아우성을 치며 샤를레아 앞에서 광대 노릇을 했다.

“미친놈들.”

샤를레아가 자신을 향해 껄떡대는 남자들에게 통렬한 비웃음을 날렸다. 그 비웃음조차 어찌나 아름다운지, 수치를 잊었던 자들마저 새삼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했다.

“자꾸 그따위로 기분 나쁘게 굴면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그 물건들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줄 줄 알아.”

샤를레아는 옆구리에 차고 있는 큰 검을 툭툭 두드리다 못해 반쯤 뺐다가 도로 넣기까지 했다. 어찌나 날을 세워놓았는지, 주점의 흐릿한 조명에도 시퍼렇게 번들거렸다. 심지어 그녀는 그런 애매모호한 경고로 끝내지 않았다.

“못 믿겠지? 잘 봐.”

그녀는 정강이를 감싼 부츠 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크기가 크고 날이 예리한 것이 장식용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웬만한 생선 대가리쯤은 우습게 잘라낼 게 틀림없었다.

샤를레아는 바로 제 앞에 선 바텐더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그 큰 단검으로 그의 허벅지를 은근하게 눌렀다. 바텐더는 가까워진 그녀의 얼굴에 황홀해하면서도 사타구니를 위협하는 단검의 존재에 헐떡거리며 땀을 흘렸다.

“찌를 것까지도 없어. 슬쩍 그어주기만 하면 그 자랑스러운 물건은 반토막이 날 거야.”

“샤, 샤를레아…….”

“한 번만 더 물건 자랑을 해댔다간 진짜 잘라 버릴 테니까 닥쳐.”

미모를 압도하는 무력시위에 터진 밀가루 포대처럼 음담패설을 쏟아내던 입들이 꾹 닫혔다. 샤를레아는 제 사타구니를 가리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하는 사내들 사이에 바텐더를 내던지고 술잔을 비웠다.

불을 붙일 수도 있을 법한 독주를 한입에 털어넣고 한 잔 더! 를 외치자, 이번엔 바텐더 대신 점주가 직접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부스스한 긴 머리칼을 대충 틀어올리고 회색 앞치마를 걸친, 바닷바람에 터져 붉게 달아오른 뺨이 인상적인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히죽 웃는 얼굴로 샤를레아에게 말을 걸었다.

“이야, 화끈한 아가씨네. 그 성질머리로 어떻게 며칠을 참았어?”

“혹시나 괜찮은 놈이 있을까 싶어서 참았지. 근데 알곡은 없고 죄다 쭉정이뿐이라니, 이 동네는 글렀어.”

“그야 당연하지. 진짜 괜찮은 놈들은 죄다 저 바다에 나가 있거든. 육지에 발붙인 뱃놈이란 다 시시하고 너저분한 것들이야!”

“킥…….”

“그래, 나랍의 용병께서 멜브란트엔 웬일이실까?”

“나랍의 용병? 내가 그렇게 보이나?”

주점의 주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샤를레아를 위아래로 살피는 시늉을 했다.

핏물에 담갔다 뺀 것 같은 붉은 머리칼은 그렇다 쳐도, 꿀색 피부는 나랍인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거기에 몸에 딱 맞는 검은 가죽옷과 허리춤의 대도, 몸 곳곳에 꽂아놓은 단검 등을 조합하면 나랍의 용병이라는 결론밖에 안 나왔다.

“당신 꼴을 봐. 누가 봐도 나 나랍인이오 하고 있잖아. 거기선 여자도 용병이 될 수 있다지? 소문은 익히 들었어. 이거 영광인데? 멜브란트에서 여자 용병을 볼 줄은 몰랐거든. 여긴 웬일이야?”

샤를레아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아름답게 조형된 이목구비가 태양처럼 빛났다. 점주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어휴, 이젠 여자도 꼬셔?”

“저 쭉정이들보다는 100배는 더 꼬실 보람이 있는걸. 이봐, 주인. 셰비언 절벽이라고 알아?”

“셰비언 절벽이 아니라 셰비언 성벽이겠지. 거기라면 왕실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곳이잖아. 일 년 내내 눈이 내리는 곳이라 사람 살기가 아주 팍팍하다던데.”

“오호.”

“왜, 관광이라도 가게? 내가 길을 자세히 알려줄 수는 있지만, 공짜로는 안 돼서 말이야. 뭘 줄래?”

샤를레아가 품에서 금화를 꺼냈다. 요새는 왕립은행의 어음과 수표가 더 많이 쓰인다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현금이 최고다. 그녀는 당장 눈빛이 바뀐 주점 주인의 손바닥에 금화를 떨어뜨렸다.

“그 셰비언 성벽에 갈 수 있는 루트 전부를 알려줘. 교통수단도 확보해 주고.”

“그건 돈을 더 주면…….”

“어허. 대가는 적정해야지. 돈을 더 원하면 나도 그 이상을 요구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응?”

점주는 입을 꾹 다물고 얼른 금화를 챙겼다. 바로 다음 날, 셰비언 성벽까지 가는 기차표와 역까지 갈 마차 등등이 준비되었고, 샤를레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차에 몸을 실었다.

“날씨가 끝내주는군.”

태풍이 오지 않은 하늘은 지독하리만치 맑고 투명했다.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푸르게 반짝거렸다.

샤를레아는 그 눈부신 풍경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히죽 웃었다.

“곧 끝나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뭍에 오른 이후로 가장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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