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 너구리굴에 연기 피우기 (9/62)

chapter 8. 너구리굴에 연기 피우기

「“요즘 웬 여자들이 화가를 한답시고 설친다던데, 진짜야? 대체 누가 여자들에게 그림을 맡긴다고?”

“타우레드 후작 영애가 후원한다더군.”

“아하, 귀족 영애의 엉뚱한 도락이었구먼? 그럼 그렇지. ……그런데, 돈은 많이 쓴대?” - 예술가의 요람, 카페 델라르망의 어느 테이블에서.」

따스한 봄날 동안 치안대를 달달 볶았던 큰 사건들이 마무리되고 나자 치안대원들은 갑자기 한가해졌다. 그러나 그동안 시달린 여파가 어찌나 큰지, 다들 책상이며 소파에 드러누워 나 죽었소, 흉내를 낸다. 평소라면 책상에 쌓인 서류를 피해 순찰 나가기만 손꼽아 기다렸을 거면서.

그들과 다르지 않은 꼬락서니로 소파에 철썩 붙어 있던 피올은 제 순찰 시간이 돌아오자 거의 이를 갈며 일어났다. 하필 배정 시간도 땡볕에 정수리가 뜨거운 한낮이었다. 어찌나 햇살이 쨍한지, 순찰대 건물을 나서자마자 포장된 길바닥이 하얗게 빛나는 것만 같다.

“기껏해야 초여름이면서 요즘 날씨 왜 이래? 갑자기 한여름이 된 것 같네.”

피올과 함께 나온 유렌이 오만상을 하고 모자를 눌러썼다. 지나던 사람들 몇몇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으……. 진짜 싫다. 아오씨, 뭔 놈의 길에 그늘도 없어.”

“나도 나가기 싫어. 유렌, 우리 광장 지날 때 주스 사 먹을래?”

“뭔 주스? 한나 아줌마네 주스? 난 거기 주스 미적지근해서 싫은데.”

“야, 자기는 길바닥 출신이라 뭐든 잘 먹는다고 나한테 자랑하던 게 누군데 미적지근을 따져? 이런 날씨에 얼음이 얼마나 비싼데!”

입이 한 뼘은 나온 채로 유렌과 투덕대던 피올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네이기스가 이렇게 사람 많은 길바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 그의 순찰 코스에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목을 빼고 있다.

피올이 보았으면 유렌도 본 것이다. 한창 바쁠 때 과자니 케이크니 온갖 먹을 것을 가지고 치안대 사무실을 들락거렸던 네이기스는 유렌에게도 낯익었다. 유렌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 피올의 등을 냉큼 떠밀었다.

“피올, 저 레이디 암만 봐도 너 기다리는 거 같은데.”

“윽…….”

“피하면 안 되지, 인마! 오늘 순찰은 나 혼자 돌 테니까, 나중에 밥 사라.”

“그런 배려 필요 없는데? 야, 야!”

유렌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 하는 피올을 끌고 성큼성큼 걸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네이기스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사람들은 치안대원이 나타나자 바로 시선을 거두고 제 갈 길을 갔다.

그제야 피올을 발견한 네이기스가 환하게 웃었다. 어찌나 밝은 웃음인지, 유렌은 피올 녀석이 설마 웃고 있기라도 한 건가 확인까지 할 정도였다. 하나 그럴 리가 있나. 흘끗 돌아본 피올의 표정은 꿈에 나올까 험악했다.

“야, 얼굴 펴. 얼굴! 레이디께서 보고 놀라시겠다!”

“……나중에 두고 보자.”

피올은 제 어깨에 팔을 두른 유렌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콱 찍으면서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굳이 싫은 표정을 보여줄 필요야 없지 않은가. 유렌은 과장된 태도로 비틀대더니, 옆구리를 움켜쥔 채 병원, 의사, 긴급! 따위의 말을 중얼대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 꼴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네이기스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으니, 피올은 멋쩍은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춰 인사했다.

“레이디, 이런 곳에 웬일이십니까? 그것도 이렇게 홀로 계시다니요.”

“하녀는 잠시 심부름 보냈고, 오라버니야 워낙에 바쁜 분이시니까요. 저, 보티안 씨. 드릴 게 있어요.”

“네?”

네이기스가 피올에게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어찌나 뿌듯한 미소를 짓는지, 피올은 거절도 못 하고 얼결에 상자를 받아 들었다. 오랫동안 품고 있어 따뜻하게 데워진 상자는 제법 묵직했다.

“이게 뭡니까?”

“얼른 풀어보세요.”

피올은 잠시 갈등했다. 길가에 피어난 엉겅퀴꽃 같은 오드리와는 달리, 눈앞에 있는 네이기스는 그야말로 온실에서 돌봄 받으며 피어난 장미꽃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많은 곳에 세워두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디라도 들어가시겠습니까?”

“그러면 저야 좋지만, 보티안 씨에게 너무 폐가 되잖아요. 괜찮아요.”

선량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려니 보자마자 도망치려던 자신이 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피올은 결국 그녀를 주변의 카페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음식점을 겸업하는 보통의 카페이지만, 다행히 식사시간을 좀 지난 탓에 손님이 적었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의 시선은 네이기스와 함께 있는 피올의 옆얼굴에 꽂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웬 백작 영애가…….’

‘치안대원…….’

‘얼굴이 낯익은데…….’

악단의 연주가 있는 데다 다들 소리 죽여 대화하니, 전문이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만 같아 피올은 괜히 옷깃을 곧추세우며 자리에 앉았다. 식사 대신 차를 주문하고 종업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네이기스가 또 피올을 보챈다.

“이제 열어보시겠어요?”

대체 뭘 넣은 상자이기에 이러나. 피올은 의문을 감춘 채 상자를 꺼냈다. 예쁘게 매둔 리본을 푸는 동안 네이기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린 상자 안에는 일전에 피올이 네이기스에게 넘겼던 그의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언뜻 보기엔 변한 게 없어 보인다. 그는 별생각 없이 회중시계를 꺼냈는데, 따라 나오는 시곗줄이 이전과 달랐다.

덩굴을 모티브로 한 시곗줄은 중성적인 디자인이었다. 실용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맛이 살아 있었다. 시계점에서 달아준 기본 시곗줄을 몇 년을 내리 쓰고 있었던 피올이지만, 출신이 출신인지라 심미안이 있는 편이었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 시곗줄은 꽤 괜찮은 물건이었다.

피올은 네이기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양뺨에 홍조를 띄운 채 기대감으로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한숨이 났다.

“이런 고가의 물건은 받을 수 없습니다.”

네이기스는 제게 돌아온 시곗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십 번 설계도를 고쳐 그리고, 평소 친분을 유지해 왔던 장인들에게 유독 까탈을 부려가며 만든 시곗줄이었다. 피올이 자신의 접근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딱 잘라 거절하다니. 마음이 아팠다.

“오, 오드리 언니가 준 만년필은 갖고 다니시잖아요.”

“산 겁니다.”

“받은 거 알아요!”

네이기스의 예쁜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차올랐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찻잔을 내려놓던 종업원이 놀란 얼굴로 네이기스를 흘끔거렸다.

네이기스가 손수건을 찾아 클러치를 더듬거리는 걸 보다 못한 피올이 테이블에 있던 냅킨을 건넸다. 네이기스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눈물을 훔쳤다. 새하얗던 냅킨에 순식간에 검은 물이 들었다. 피올을 만날 생각에 들떠서 진한 화장을 하고 나온 탓이었다.

“레이디 헨젤께서 주신 거야 어쨌거나 기성품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주문 제작품이잖습니까.”

“주문 제작이면 뭐 어때서요. 제가 보티안 씨께 보답해 달라고 조를 것도 아닌데.”

“보답을 바라지 않으신다는 그 점이 가장 부담스럽습니다.”

기껏 멈췄던 눈물이 또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올은 한숨을 삼키며 다시 냅킨을 내밀었지만, 네이기스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손수건을 찾아 눈물을 닦아냈다. 눈가를 찍어내는 손짓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랑살랑 우아하기 짝이 없으니, 어느 모로 보나 천생 귀족 영애다.

피올은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잠자코 차를 들이켰다. 이래서 귀족 영애와 얽히는 건 질색이었다.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쏟아붓는 마음은 그저 부담스럽기만 하니까.

네이기스는 몇 번이나 눈물을 찍어내고서야 겨우 진정했다. 그녀는 피올의 시선을 피해 맑은 노란색의 찻물에 눈을 고정하고서야 겨우 입을 뗐다.

“……죄송해요. 오드리 언니가 만년필을 줄 땐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 테니, 당연히 받아들이는 분의 부담도 다를 것을 알면서……. 제가 너무 막무가내였죠.”

“그럼 이건…….”

“그래도 받아주세요. 오드리 언니의 시곗줄을 디자인하면서 시제품을 여러 개 만들었어요. 그림과 실제가 어떻게 다를지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그 시곗줄은 그중 하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렇게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짐짓 의연한 태도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피올의 눈에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어깨가 너무나 잘 보였다. 시제품을 여러 개 만들었다는 거야 사실이어도 자신에게 준 시곗줄이 겨우 시제품 중 하나라는 말은 역시 거짓말일 테다.

그러나 귀족 영애가 이렇게까지 굽히며 들어오면 받아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언뜻 보아도 주문 제작품인 시곗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드리에게 그렇게 자신을 하더니, 생각 이상으로 잘 만들기는 했다.

“제가 직접 달아드릴게요.”

“아뇨, 레이디께 그런 걸 시킬 수는…….”

네이기스가 직접 시곗줄을 달아주겠다며 손을 뻗었다. 피올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거절하려다가, 네이기스의 손이 엉망진창이라는 걸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귀족 영애답게 정성스레 손질되어 있어야 할 손톱 끄트머리에 온갖 색의 물이 든 데다가, 살갗이 겹치는 부분은 껍질이 하얗게 일어나 벗겨지고 있었다. 황급히 시곗줄을 달아주고 나서야 피올의 시선을 눈치챈 네이기스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제 손을 숨겼다.

“엉망인 꼴을 보여 부끄럽네요. 장갑을 끼고 올 걸 그랬어요.”

“그림을 시작하셨습니까?”

“어쩜, 보기만 해도 아시다니, 신기하네요. 네, 아직은 초보자지만요.”

카페 유리창을 통과한 햇살이 사랑스럽게 달아오른 뺨에 쏟아졌다. 갖고 싶어 어쩔 줄 모르던 장난감을 마침내 가진 아이처럼, 평생 찾아 헤매던 유적을 마침내 발견한 탐험가처럼. 겨우 그림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네이기스는 그렇게 들떴다.

“본래는 오드리 언니의 시계 뚜껑에 그릴 그림을 그리느라 시작한 거였어요. 그런데, 회중시계는 겨우 하나인데 그 안에 담고 싶은 세계는 너무나 많아서……. 붓 한 번 놀릴 때마다 계속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

“부끄러운 얘기지만, 정신을 차려보니까 방 가득히 붓과 물감을 사다놓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지 뭐예요. 처음에는 물감을 섞는 것도 어려웠는데, 이젠 제법 괜찮게 색을 내요. 하나하나 그림이 늘어가는 게 정말로 뿌듯해요.”

피올은 표정을 감추려 찻잔을 들었다. 예의상으로라도 같이 기뻐해 줘야 하는데, 어쩐지 속이 불편해졌다. 실패는 자신의 탓인데 다른 이의 성취를 질투하다니, 놀랍도록 옹졸하다.

“그웬 백작부인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 그건…….”

“아직 모르시는군요. 적당히 즐기고 얼른 끝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이기스는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본래는 이렇게 손이 엉망이 되도록 그림에 빠져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오드리의 시곗줄 디자인을 하다 보니 욕심이 아주 약간, 약간 더 생겼을 뿐이었다.

“곧…… 곧 그만둘 거예요. 네, 어머니께서 알기 전에 곧…….”

네이기스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이러다 또 우는 거 아닌가. 피올은 제 옹졸함을 후회하며 냅킨을 다시 건네야 하나 생각했지만, 네이기스는 울지 않았다. 고개를 든 그녀는 말끔한 얼굴로 웃으며 제 몫의 차를 마셨다.

“어차피 한때의 꿈이에요. 어머니께서는 절 사랑하시니, 한 번의 일탈쯤이야 웃으며 넘겨주실 테죠. 그러니 보티안 씨, 아주 잠깐만 모른 척 해주세요. 그거면 돼요.”

“…….”

“시곗줄은 그 잠깐의 침묵을 부탁하며 제가 드린 성의로 해요. 그럼 좀 덜 부담스러우시겠죠?”

솔직히 말하면, 더 부담스러워졌다. 그러나 피올은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네이기스와 잡담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고, 영업 마차를 불러서 그웬 백작가로 태워 보내는 순간까지도.

여름에 가까워가는 한낮의 햇살을 뒤집어쓴 채, 그는 멍하니 회중시계를 만지작댔다. 잡을 수 없는 꿈을 향해 반짝이는 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씁쓸한 미소가 그의 얼굴 전체로 번졌다.

“아, 정말이지……. 정보값은 좀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크게 받을 생각이었는데.”

피올은 치안대로 돌아가 말을 빌려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지나던 영업 마차를 잡아탔다. 목적지는 헨젤 백작가, 방문 목적은 청탁이었다.

* * *

우편국에서 일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센네페르 그웬 백작에 대한 평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는 번듯한 외모에 항상 웃음을 달고 다녔으며,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하고 신입을 잘 챙겼다. 다들 그를 두고 바닥까지 추락했던 그웬 백작가를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은 주역이라고들 했다.

당대 사교계의 꽃이었던 메너트 헨젤과 결혼한 것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었다. 센네페르는 그 결혼을 통해 그웬에 대한 헨젤의 비호와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냈으니까. 게다가 정략결혼이었어도 현숙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통해 사랑스러운 아이를 셋이나 얻었으니, 겉으로 보았을 때 그는 지극히 성공한 사내였다.

센네페르가 메너트와 결혼한 지 이십 년도 더 지났고 가문의 힘도 그때와는 비할 수 없이 커졌는데도 여태 헨젤 백작가의 간섭이 이어지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빌어먹을 놈의 헨젤. 교활하고 차가운 뱀새끼 같으니라고.’

센네페르는 내심 욕을 퍼부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헨젤 백작이 일하는 재무국의 사무실 앞이니, 주변을 지나는 직원들 전부가 다 헨젤 백작의 눈과 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이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한 채로 헨젤 백작의 앞에 섰다. 출근하자마자 오라, 대뜸 말을 전해놓은 당사자는 그를 앞에 세워두고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요즘 일이 잘되는 모양인데.”

“우편국이야 잘될 거 알고 세우신 것이지 않습니까. 앞으론 더 잘될 겁니다. 지금이야 기차역이 있는 곳에만 우체국을 세웠지만, 곧 작은 마을에도 세울 계획입니다. 기차역에 있는 우체국이 중간 지점이 되고, 작은 마을까지는 마차를 이용…….”

“계획이야 이미 알고 있네. 다만, 마차 업체 선정 과정이 깨끗했다면 더 좋았겠지.”

센네페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재빠르게 말을 잇지 못하고 변명을 찾는 사이, 헨젤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열정도 뭣도 없는 회색 눈은 여전히 뱀처럼 차가웠다.

“그웬이 우편국을 맡는 것에 내가 힘을 얼마나 썼을 거라 생각하나?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게.”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더럽다고 표현하시면 곤란합니다. 전 깨끗하고 공정하게…….”

“누이가 알아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군.”

“제 부인은 이 일에 상관이 없습니다.”

“헨젤가의 살림에 자네가 장난치는 거 말하는 거야.”

센네페르는 헨젤 백작을 잘 알았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하는 건 이미 그만한 증거를 다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빳빳하게 굳은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누이는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알면 충격이 크겠지. 자네도 알다시피, 내 누이는 자존심이 아주 세. 사실을 알면 그웬 백작가가 발칵 뒤집힐 거야. 탈 없이 두 살림을 해내고 있다는 것에 꽤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테니.”

그웬은 헨젤이 간절히 필요했고, 현 그웬 백작부부의 결합은 지극히 정략적인 거래의 결과물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메너트는 가문 내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센네페르는 지긋지긋하고 사랑스러운 부인이 불을 토해내듯 화내는 꼴을 상상했다. 그건 몹시 쉬운 일이었다.

“잘못을 되돌릴 시간을 주지. 마차 업체 선정을 다시 하든가, 누이가 헨젤가의 살림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게. 둘 다 하면 좋지만, 하나만 해도 된다네.”

“……알겠습니다.”

열기 없는 눈동자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센네페르는 무거운 발을 간신히 떼어 헨젤 백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직원들이 올 때보다 대엿 배는 무거워진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 * *

오드리는 확실히 좀 여유가 생긴 상태에서 피올을 맞아들였다. 로렐라이의 나랍 진출은 자잘한 문제를 끊임없이 일으킨 것치고는 꽤 성공적이었다. 나랍의 주민들은 로렐라이에게 꽤 호의적었고, 매사 협조적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일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 있었다.

그렇다고 피올의 방문이 마냥 반가운 건 아니라, 응접실 의자에 앉아 연신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는 피올을 보는 오드리의 눈빛은 영 곱지가 않았다.

“차 한 잔도 안 주십니까?”

“뭐 반가운 손님이라고 차를 내줘요?”

“와, 너무하시다. 그래도 저 정도면 레이디의 사교 대상으로 나름 괜찮지 않습니까?”

이런 대접 받은 게 처음도 아닌데, 갑자기 자신의 가치를 어필하는 모습이 퍽 낯설다. 오드리는 어색하다 못해 수상쩍기까지 한 피올을 낱낱이 관찰하다가, 그가 아까부터 보란 듯이 회중시계를 꺼내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보여주고 싶으면 그냥 보라 하면 될 것을 뭘 그리 몸을 빼며 망설이는가. 새삼 서로 예의 차릴 사이도 아니면서. 그녀는 내심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보티안 씨, 회중시계 좀 보여주시겠어요?”

“으흠…….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야, 기꺼이.”

“내가 말 꺼내기를 기다렸으면서 얼굴 가죽이 두껍기도 하시지. 자, 명성 높은 치안대원은 무슨 회중시계를 쓰는지 볼까요?”

오드리는 괜히 피올을 놀리며 회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거친 언행 사이에서 언뜻 비치는 몸에 밴 우아함을 보아 분명 귀족 출신일 텐데 의외일 정도로 소박한 회중시계였다.

장식 없는 뚜껑 표면은 그저 매끈하기만 하고, 뒷면엔 가게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다. 태엽에도 따로 뭔가 박혀 있는 것 없이 수수했다. 하지만 시곗줄만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아름다워 오드리의 눈길을 끌었다.

“가치 있는 건 시계보다 시곗줄이로군요. 덩굴이 모티브가 된 것 같고……. 아주 섬세하고 아름다워요. 여성적인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렇다고 남성적인 것도 아니고. 독특하네요. 어디서 구입하셨어요?”

“알면서 물어보시는 거 아닙니까.”

“뭐, 그렇죠. 남의 연애담 듣는 것만큼 재밌는 게 또 어딨겠어요.”

“연애담은 무슨.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은근히 성격이 나쁘십니다.”

피올이 우우, 야유를 했지만 오드리의 표정은 그저 웃는 낯 그대로였다. 설령 정말 연애 중이라고 해도 안 믿을 거면서, 표정만은 태연해 얄미웠다.

백작 영양과 치안대원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귀족에게 존대를 듣고 어딜 가든 존경을 받는다지만, 치안대원은 기사조차 될 수 없는 평민에 불과하니까. 지난 과거를 다 버리고 치안대원이 된 피올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니 이건 그냥……. 오지랖이야. 쓸데없는 오지랖.’

피올은 돌려받은 회중시계를 만지작대며 망설이다가, 결국 오는 내내 연습했던 말을 꺼냈다.

“레이디 그웬께서 그림에 빠져 계신 것 같습니다.”

“그 애는 그림을 좋아했죠. 그러고 보니 전시회가 열릴 철이군요. 이번 시즌에는 눈에 띄는 신인이 없는 것 같던데, 네이기스가 용케 괜찮은 화가를 발견했나 보네요.”

“보는 게 아니라, 그리는 걸 말하는 겁니다.”

오드리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피올은 시곗줄을 오드리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 시곗줄, 짐작하신 대로 레이디 그웬께서 직접 디자인하신 겁니다. 아가씨께 드릴 시곗줄의 시제품이라고 하시더군요.”

“퍽이나 시제품이겠네요.”

“어쩝니까, 그렇다는데. 아무튼, 디자인 작업을 하다 보니 눌러뒀던 창작욕이 폭발하기라도 했나 봅니다. 마침 그웬 백작부인께서 사교 모임에 바쁘시니 몰래 작업하기도 쉬웠을 테고요.”

“흐음…….”

오드리는 메너트가 왜 그리 바쁜지 알고 있었다. 오드리가 곳간 열쇠와 관련해서 그녀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는 탓이었다. 처음에는 온갖 핑계를 다 대며 만남을 거절하더니, 요즘엔 아예 오드리가 접근할 수 없는 사교 모임으로 도피한 상태였다.

결혼한 귀부인들에게만 열려 있는 사교 모임은 헨젤가의 이름도 소용없었다. 고작 곳간 열쇠 얻어내자고 결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오드리는 봄 무도회 이후로 메너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다.

오드리의 평판이나 헨젤 백작의 의중이 어떻든, 데뷔탕트를 치른 오드리가 원하는 이상 헨젤가의 곳간 열쇠를 계속 붙들고 있을 명분 따위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다운 행보였다.

오드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손가락을 튕기기 시작했다. 메너트의 회피는 이미 예상한 바였으나, 네이기스의 일탈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부모님의 명령을 어겨본 적 없는 그 얌전한 아이가 어머니 몰래 그림이라니.

“놀랍네요. 네이기스는 정말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족 영애라는 느낌이었는데.”

“때로는 반듯한 길 말고 구부러진 길로 걷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거든요. 레이디 그웬도 딱 그 심정인가 보지요. 아니면, 그림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대단하든가. 방 안 가득히 그림도구를 채워놨다는 걸 보면 아마도 후자겠지요.”

피올은 오드리가 끼어들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며 부드럽게 녹아내리던 네이기스의 눈이 아직 생생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그녀를 돕고 싶은 이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말을 전해야 했다.

“이제까지는 그웬 백작부인이 사교에 바빠서 무사했지만, 계속 그림에 빠져 있다간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꽤 본격적으로 하는 모양인지, 벌써 손이 엉망으로 상했더군요.”

“그래서요?”

“아가씨께서도 레이디 그웬이 곤란해지는 건 바라지 않으실 거 아닙니까.”

“글쎄요?”

“사촌 언니에게 따라붙은 소문을 막아보려 그렇게 애를 쓰는데 좀 도와주시죠.”

“어머, 그래요? 그 애가 애를 쓰긴 쓰나 보네요. 나도 모르는 일을 치안대원께서 다 아시고.”

피올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드리는 이제껏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깔깔 웃었다. 피올이 자존심을 굽히고 네이기스를 위한 청탁을 하러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손에 잡힐 듯했다.

“좋아요. 내가 그 애를 초대해서 헨젤가에 묵게 하겠어요. 괴팍한 사촌 언니가 그림을 그려보라고 부추겼다고 하면 아무도 그 애에게 뭐라고 하지 않을 테죠.”

“……죄송합니다.”

“뭘요. 처음에 불을 붙인 건 나인데 책임을 져야죠. 그렇게까지 빠져 있다는데 외면할 수야 있나요.”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드리는 메너트가 유독 네이기스의 평판에 신경 쓰던 것을 생각했다. 어딜 가도 완벽하다 칭찬받는 딸이 본격적으로 일탈을 시작하면, 그때도 그녀는 마음 편히 사교 모임을 다니며 자신의 요청을 무시할 수 있을까?

‘분명 꼬리에 불붙은 개처럼 쫓아오겠지.’

속셈은 뱃속에, 미소는 얼굴에. 만탈락에서 무수히 단련된 미소가 아름다웠으나 피올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는 여전히 경직된 낯으로 제 손의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오드리가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낄 즈음, 이디케가 차를 내왔다. 역시 유행대로 설탕이 들지 않은 차였다. 대신 각설탕을 조금 내왔는데, 설탕이 들지 않은 차를 마시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거였다.

나랍에서야 흔한 게 각설탕이지만, 멜브란트에선 찾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설탕통에 담긴 설탕을 은수저로 떠서 취향대로 타는 방식이 훨씬 보편적이었으니. 요즘의 로렐라이는 각설탕을 브란젤에 퍼뜨리는 데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티안 씨, 뭐가 그렇게 불만이죠? 내가 네이기스의 방패가 되어주겠다잖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가씨는 거래를 아는 분이니, 분명 제대로 해주실 텐데…….”

오드리는 각설탕을 몇 개 집어 제 찻잔에 떨어뜨리고 저었다. 일종의 시범이었다. 피올은 낯설어하면서도 오드리를 흉내 내 각설탕을 제 찻잔에 넣었다. 직접 설탕을 타던 때보다야 못하지만, 아예 설탕이 없던 전보다는 먹을 만했다.

나름 괜찮기는 해도, 역시 그냥 설탕보다는 못한 각설탕. 피올은 자신이 네이기스에게 설탕을 줄 수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건 설탕이 아닌 각설탕.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후의라고 생각하면서도 왜 이리 마음이 복잡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말하는 피올이 어찌나 처량해 보이는지. 오드리는 입에 머금은 찻물이 갑자기 쓰게 느껴져 하마터면 뱉을 뻔했다. 제 앞의 앉은 남자가 바로 며칠 전의 그 사람 같지가 않았다.

“……보티안 씨, 나는 당신을 믿어요.”

“저도 아가씨를 믿습니다만, 그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십니까?”

“네이기스는 착하고 예쁜 아이지만, 보티안 씨가 그 애에게 마음 주지는 말았으면 싶어서 하는 얘기죠.”

“…….”

“데뷔탕트는 치렀대도 겨우 열여섯 살이니, 네이기스는 아직 어려요. 한때의 꿈 정도야 꿀 수 있는 나이지 싶어서 모른 척 내버려 뒀지만……. 상대도 신분을 잊어버리면 그땐 좀 곤란하죠. 하긴, 신분 차이 나는 사랑 같은 건 소설 속에나 나오는 거라고 했던 사람이 바로 보티안 씨인데 내 걱정이 좀 과한 거겠죠?”

현실을 지적하는 오드리가 몹시 진지해 보여, 피올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따지자면 이 응접실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비현실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누군데 이런 말을 하는가, 싶어서.

“그런 말 하시는 아가씨께서는 겨우 열일곱이십니다만.”

“어머, 네이기스랑 나는 사정이 다르죠. 난 그 애처럼 온실 속에서 자라본 적이 없는걸요.”

“차마 그 말씀까지는 부정할 수가 없군요. 제가 아가씨께 청탁했더란 얘기는 레이디 그웬께는 비밀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말해달라고 사정을 하셔도 말 안 할 건데요.”

“거 믿음직합니다.”

피올은 적당히 식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 일어섰다. 그는 벗어두었던 망토와 모자까지 착실하게 챙겨서 그 자리를 떠났다. 깔끔한 퇴장이었다. 남겨진 사람의 속이 깔끔하지 못해서 그렇지.

오드리는 그럭저럭 먹을 만한 차를 들이켜며 조금 전 자신의 발언을 되새겼다. 신분을 생각하라는 그 말. 그 말의 절반쯤은 자신을 향해 한 말이기도 했다.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인지…….’

그 밤에 겪었던 환상적인 체험이 꿈이 아니라는 건 찢어진 실내복을 보고 확실히 알았건만, 망할 놈의 마법사는 그날 이후로 슬슬 그녀를 피하고만 있었다. 미심쩍은 말로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어놓은 주제에 기막힌 일이었다.

“아가씨, 레이디 그웬께 초대장을 보낼까요?”

순식간에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던 오드리는 이디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직 차가 절반이나 남은 찻잔을 내려놓고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서로 무슨 특별한 사이인 것도 아닌데 피할 거면 피하라지.

“아니, 다이앤을 직접 보내. 그래야 화구 챙겨오기가 쉽지. 너는 로렐라이에 가서 새 경비 마법도구 진행 상황 좀 알아오고.”

셰비언이 개발한 혁신적인 출입금지마법은 워커를 통해서 교육이 진행 중이었는데,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구성 방식을 반기지 않는 일부 마법사들 때문에 일정이 자꾸 지체되고 있었다.

“못 따라오는 놈은 다 버리고 갈 거니까 악착같이 따라오라고 해.”

“그게 될까요?”

“이제까지는 안 그랬나? 똑같지.”

“흠……. 안 그래도 교육 속도가 아슬아슬한데 가을 시즌에 맞춰 내놓을 수 있을까요? 시기를 놓치면 진입이 힘든데.”

“쥐어짜. 나오겠지.”

워커가 들었다면 이제껏 이런 식으로 나를 부렸느냐 항의할 법한 발언이었다. 하나 이디케는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워커가 휘하의 마법사들에게 발휘하는 영향력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단주보다 훨씬 강력했다. 적어도 로렐라이 내에서 그는 괴짜가 아닌 세기의 천재로 통했으니.

그렇게 다이앤을 그웬 백작가로 보내놓고, 이디케는 로렐라이를 방문했다. 언제나 그랬듯 불시에 찾아온 감사인 척하며 서류를 뒤적이고 워커를 찾았다. 한데, 당연히 교육장에 있어야 할 워커가 제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다.

‘또, 또 그놈의 비마법 비행도구에 빠져 있겠지.’

너무 뻔해서 이젠 화도 안 난다. 이디케는 꿍얼대고 싶은 걸 꾹 참고 워커의 연구실로 향했다.

여전히 더러운 살림집을 까치발로 지나서 연구실로 가는 통로에 발을 들였다. 마법등을 잔뜩 달아 환해진 통로를 한달음에 통과하고 연구실 앞에 다다랐는데, 문이 열리질 않는다. 갖고 온 열쇠를 넣고 돌려보니 잠긴 게 아닌데도 말이다.

“출입금지마법 실험이라도 했나? 워커, 워커! 문 열어봐요!”

쾅쾅! 쾅! 주먹 쥔 손이 아프도록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문을 막아놓고 대체 뭘 하는 거지?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걱정이 됐다. 이디케는 끔찍하게 더러운 워커의 살림집에서 뭐라도 주워 와서 문을 부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녀가 고민을 실행으로 옮기기 바로 직전,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문이 빼꼼 열렸다. 이디케는 온힘을 다해 문을 밀어젖혔고, 순식간에 새카만 어둠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뭐……. 뭐야, 이게?”

분명 워커의 연구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는데, 이게 무슨 사태란 말인가. 어찌나 어두운지 앞도 뒤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희한하게 몸 전체에서 희미하게나마 빛이 나고 있어 그나마 제 몸뚱이는 확인이 됐다. 조심조심 발을 내딛자, 보드라운 흙을 밟는 것처럼 폭신한 감촉이 발을 따라 전해졌다.

“어……?”

발을 완전히 내려놓는 순간, 발아래에서 금색 파문이 시작됐다. 동그란 파문이 한 겹, 두 겹, 세 겹……. 파문이 겹쳐지면서 바닥에서부터 빛이 퍼졌다. 검은 바닥에서 초록색 풀잎이 솟아오르더니 노란 꽃을 활짝 피우고, 그 꽃이 시야가 닿는 저 끄트머리까지 가득 찼다.

검은 공간 가득히 노란 꽃이 피어나 들판을 이루고, 푸릇한 향기가 주변을 메웠다. 곧 들판 끄트머리에서부터 빛이 밝혀지며 새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 한 조각 없이 비현실적인 파란 하늘과 노란 들판.

아무리 바람 한 점 없다지만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향기는 있는데 소리는 없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 속에 들어온 듯 기이한 느낌에 정신을 빼놓고 있는데, 하늘 저편에서부터 새 떼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새 떼가 이디케의 머리 위를 지나며 장관을 연출했다. 이디케는 고개를 한껏 젖히고 새 떼의 비행을 구경했다. 새카만 깃털들이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통에무심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윤기가 줄줄 흐르는 깃털들이 팔에, 머리에, 어깨에 내려앉았다. 뺨에 닿았다 떨어지는 깃털이 간지러웠다.

팔을 내리고 옷에 붙은 깃털을 확인하려는데, 노란 꽃이 펼쳐진 초원도 새파란 하늘도 온데간데없이 낯익은 강철새만 덩그러니 앞에 있다.

워커의 연구실이었다.

이디케는 방금 자신이 겪은 것을 믿지 못하고 달달 떨며 제 옷자락을 확인했다. 분명 뺨을 간질이는 깃털과 어깨에 내려앉은 사뿐한 무게감을 느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바닥을 두드려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 워커, 워커! 여기 있어요? 워커!”

워커……! 본래 극장으로 쓰이던 공간이었는지라, 이디케의 목소리가 천장에 부딪쳐 메아리로 되돌아온다. 대답 없는 것에 당황한 그녀가 연구실을 죄다 뒤엎으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락시 양, 쉿……. 워커는 방금 잠들었습니다.”

“셰, 셰비언 씨? 당신이 왜 여기……. 아니, 그보다 방금 제가 겪은 얘길 좀 들어보시겠어요? 문을 열자마자 온통 새카만 공간에 빠져서는, 그러니까, 막 발을 구르니까 그게…….”

셰비언은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는 이디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 전의 비현실적인 공간의 전개는 워커가 처음으로 자신의 문장을 공간으로 구현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워커의 습득 속도는 반쯤은 충동적으로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던 셰비언조차 놀랄 정도로 경이적이었다. 순식간에 공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고 실험에 나서더니만, 벌써 문장의 세계를 구현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아직 미숙해서 겨우 껍데기만 만들어냈을 뿐이고 그것마저 금세 깨져 버렸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취였다. 심지어 본의는 아니었다 해도 멀쩡한 사람을 들였다가 무사히 뱉어내기까지 했으니.

정말이지, 마법이 좀 더 융성했다는 과거에 태어났더라면 대마법사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를 재능이었다. 다만 아직은 능숙하지 않아 구현했던 공간을 없애자마자 정신을 잃었는데, 아마 깨어나면 말도 못 할 수준의 탈력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락시 양은 방금 워커의 공간에 들어갔다 나온 겁니다. 깨어나면 축하해 주세요.”

“아……. 그게 ‘공간’이었어요?”

“네. ‘의식 분리’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남긴 했지만, 대단한 성취긴 하죠.”

가르친 셰비언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고 벙긋 미소를 짓는데 정작 듣는 이디케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가 않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두툼한 로브를 담요 삼아 바닥에 누워 있는 워커를 몸을 굽혀 확인했다. 드러누워서도 창백하게 질린 안색과 불규칙한 호흡 따위를 보니, 당분간 멀쩡히 돌아다니기는 글러 보였다. 그녀는 제 옆에 선 셰비언의 옷자락을 홱 잡아당겼다.

“얼마나 지나야 일어나는 거죠? 일어나자마자 일할 수는 있나요? 언뜻 봐서는 꽤 쉬어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 축하는 못 해줄망정 매정하시네.”

“성취도 좋지만, 일정 고려도 좀 해줬으면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인지라. 셰비언 씨, 여유 있죠?”

이디케는 셰비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제껏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를 셰비언의 손에 착착 쌓았다. 본래대로라면 워커에게 돌아갔어야 할 것들이었다. 무심결에 서류를 펼친 셰비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교육, 연구, 교육, 교육, 연구, 교육……. 일정이 말도 안 되게 빡빡했다. 출입금지마법 교육과 나랍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쓰는 마법도구 개선에 관한 연구 자료 목록이 어찌나 빼곡한지, 보는 것만으로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겁니까? 설마…….”

“하루가 급한 사람에게 공간 같은 걸 가르쳐서 쓰러지게 했으면 당연히 대타 뛸 각오 정도는 했다고 봐야 옳겠죠? 안 그래도 일정이 급한데 뻗대는 사람들이 몇 있으니까, 어떻게든 잘 끌고 가르쳐 봐요. 셰비언 씨 문장이 그렇게 화려하다고 들었는데 아주 커다랗게 그려서 과시라도 좀 해 보시든지.”

셰비언은 워커가 당장이라도 공간을 배워야겠다 우기고 죽을 둥 살 둥 연습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쩐지, 연구는 얼마나 진척됐느냐고 수시로 확인하더라니.

“망할 자식, 나한테 떠넘기고 튀었어…….”

“뭐, 꼭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요. 셰비언 씨가 있으니까 워커도 안심하고 새 경지를 개척한 거겠죠. 오늘치 교육은 뒤로 미뤄놨으니까, 오늘은 자료 검토에만 시간을 쓰시고 내일부터 해주세요.”

“락시 양, 연구 돌려달라고는 안 할 테니까, 로렐라이에 사표 내도 됩니까?”

셰비언은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지만, 이디케는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진심으로 아가씨를 돕겠다면서요? 급할 때일수록 몸 바쳐 도와야 아가씨께서 그 진심을 알아주실 텐데요. 말만 번드르르하게 해놓고 자꾸만 피하지 말고, 이럴 때 나서서 일해요.”

“……그건 또 어떻게…….”

“찢어진 실내복 수습은 누가 하고, 당신의 로브는 누가 돌려보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디케는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안 그래도 덜렁 혼자 헨젤 백작을 만나러 간 오드리 때문에 걱정으로 피가 마르던 밤이었다. 멀쩡하던 실내복의 등은 갈가리 찢어먹고 난데없이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채 돌아온 오드리 때문에 어찌나 놀랐었는지.

“난 본래 도둑의 말은 신용하지 않지만, 아가씨께서 당신을 믿고 계시니 어쩔 수 없지요. 셰비언 씨, 우리 아가씨의 믿음을 사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은 모르죠?”

“압니다.”

셰비언은 쓴웃음을 지었다. 문장까지 걸고 맹세하고서야 얻을 수 있었던 믿음이었다. 돕겠다던 말도 거짓은 아니었으니,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면 꽁무니를 뺄 수가 없지 않은가.

“락시 양의 말대로 아가씨의 믿음에 충실히 보답하도록 노력하죠. 다만, 아가씨께 이 말만 전해주시겠습니까?”

“뭔 말을 하려고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어요? 무섭게.”

“만약에, 로 시작했던 문장에 대해서는 부디 잊어주셨으면 한다고요.”

영문 모르는 이디케가 미간을 찌푸렸다. 셰비언은 그녀의 추궁을 미소로 받아넘기며 서류를 마저 챙겼다.

오드리를 무사히 돌려보내고, 용의 날개를 보았다는 흥분까지 가시고 나자 그럭저럭 냉정해진 이성이 그를 비웃어왔다. 아가씨와 네가 어떻게 동족이냐고, 말도 안 되는 꿈은 꾸지도 말라고.

‘아가씨가 마법사도 아니고, 그저 마력의 계통이 같을 뿐인 걸 두고 너무 들떠서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뿐인데…….’

또렷한 초록색 눈을 보면 여름날의 숲에 들어온 것처럼 기분이 들뜨는 것도, 가느다란 어깨선을 볼 때마다 뭐든 해주고 싶어 손이 근질대는 것도,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다가도 끈에 매인 새처럼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것도, 전부 그놈의 마력 탓.

지나치게 닮은 마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술렁거리는 것뿐이다. 셰비언은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며 재차 이디케에게 부탁했다.

“제가 우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노라고, 저의 불찰이라고 꼭 전해주세요.”

그러나 말을 전해 들은 오드리도 그의 말에 동의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인연의 절반이 우연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필연인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녀는 마력의 계통이 같다는 사실에 셰비언처럼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 예쁜 얼굴 들이밀고 사람 싱숭생숭하게 만든 게 누군데 새삼 꼬리를 말고 있어.”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말에 이디케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도 부탁하기에 말을 전했는데, 어째 오드리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아서다. 예쁜 얼굴이라니, 싱숭생숭이라니?

“아가씨? 대체 그 만약에로 시작하는 말이 뭔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셰비언 놈이 아가씨께 뭐 고약한 말이라도 한 건가요?”

셰비언 씨가 순식간에 셰비언 놈이 되었다. 찻주전자는 아주 다소곳하게 내려놓은 이디케이지만은, 어째 기세는 당장 부지깽이라도 찾아들고 연구실로 달려갈 것만 같다. 오드리는 이디케가 타준 냉차를 마시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굴렸다.

“별말 아니었어, 아니었는데…….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었지. 본인도 잊어달라 하니, 이젠 됐어.”

아직 절반쯤 남아 있던 냉차에 어설픈 흔들림, 낯선 두근거림, 고개를 기웃대는 흥미까지도 모조리 담아 꿀꺽 삼켰다.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흘러가는 차가운 액체가 짜릿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못 들은 이디케가 꿍얼거리는 것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보다, 다이앤이 늦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레이디 그웬께서 미리 짐을 좀 싸서 보내려고 하시나 봐요. 곧 해가 질 테니, 그전에는 오겠죠.”

차양 걷으니 해 뜬다고, 오드리와 이디케가 그런 대화를 하는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다이앤이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혹을 달고.

몇 대나 되는 마차에 드레스와 화구 등이 가득 들어찬 것은 이해하겠는데, 문제는 사람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가씨.”

“언니!”

하얗게 질린 다이앤의 뒤를 따라 방긋방긋 웃는 얼굴의 네이기스가 따라 들어왔다. 어머니에게 들키면 안 된다며 심부름꾼도 쓰지 못하게 하면서 다이앤의 애간장을 녹인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오드리를 보자마자 거의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오드리의 손을 쥐고 감사를 표했다.

“언니, 초대해 주어 정말로 고마워요.”

“뭘요. 내가 한 부탁 때문에 곤란하지 않았어요?”

“언니가 부탁하다니요! 내가, 내가 부탁한 거죠. 언니는 내 부탁을 들어준 것뿐인걸요. 며칠만 가지고 있겠다던 회중시계도 아직도 가지고 있고…….”

“네이기스. 내가 부탁한 걸로 해둬요. 그래야 고모님께 덜 야단맞을걸요. 나쁜 소문도 덜 나고요.”

네이기스의 연둣빛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쁜 소문이 나지 않게 자신을 방패막이로 쓰라는 사촌 언니의 배려는 너무나 따뜻하면서도 고맙고 미안했다. 그녀는 한참이나 오드리의 품에 안겨 훌쩍대더니,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표정을 했다.

“언니, 아직도 어머니와 만나지 못하셨죠?”

“워낙에 바쁘신 분이라서요.”

“제가 여기에 있으면서 사교 모임에 나가지 않으면, 분명히 드레스 자락이 뒤집히도록 빨리 달려오실 거예요.”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커다랗게 떴다. 분명 그럴 목적으로 초대한 것이지만, 스스로 사교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네이기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보이도록 애써도 모자랄 판에.

“그랬다간 오래 못 있을 거예요.”

“괜찮아요. 아무리 늘려봐야 한 달을 못 버틸 텐데, 날 도와준 언니에게 도움이라도 되어야죠.”

네이기스가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순진한지, 오드리가 새삼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였다.

“언니가 어머니에게 어떤 볼일이 있어서 계속 만나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언니가 나쁜 일로 그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꼭 힘내세요!”

네이기스는 들뜬 얼굴로 오드리를 응원한 뒤 손님방으로 향했다. 오드리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널 편들어준다고 다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충고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상당한 갈등에 휩싸였다.

“내버려 두세요.”

“다이앤?”

“마치 귀족 영애의 표본 같은 분이었거든요.”

헨젤가로 돌아오는 내내 네이기스와 같은 마차를 타고 있던 다이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뭐랄까, 당장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화를 속으로 삭이고 있는 얼굴이랄까. 오드리는 다이앤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네이기스는 헨젤가에 아주 빠르게 적응했다. 일전에 오드리와 크게 마찰을 일으켰던 알신다가 젤리처럼 말랑말랑해져 열과 성을 다 하고 있으니 오죽하랴. 오드리의 품에 들어온 하녀들 역시 네이기스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이기스는 어디서나 상냥하고 선물을 자주 뿌리니, 고용인들 사이에서 평이 나쁘기가 더 어려웠다.

다만 문제되는 거라면 역시 그림. 사교 모임도 가지 않고 밥도 잠도 아껴가며 그림을 그리는 귀족 영애란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나 이미 예상했듯 오드리의 악명이 모든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레이디 그웬은 너무나 상냥해서 레이디 헨젤의 억지를 거절하지 못하는 거라고.

고용인들 사이의 소문을 들은 오드리는 코웃음을 쳤다. 요즘 그녀의 관심사는 그런 소문보다 센네페르의 행보에 있었다. 우편 사업을 확장하면서 마차 업체 선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는데, 꼬투리 좀 잡아보려고 했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간덩이 큰 내 고모부님께서 새삼 제정신이 든 거 같진 않은데, 왜 그러셨을까?”

“그러게요. 희한도 하죠. 그것뿐만 아니라, 헨젤가 살림에 장난치던 것도 그만두려는 눈치예요.”

이디케가 내민 서류를 받아든 오드리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패였다. 센네페르가 손을 떼려는 정황이 곳곳에 보였다. 꽤 오래갈 것으로 보였는데 왜 이러는지. 두통이 몰려오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서류를 내려놓았다.

“붙들어 매놔. 길어봤자 한 달이면 돼.”

“네. 에드와 상단 쪽 자금 다 틀어막고, 마차 업체 선정에 훼방 좀 놓죠, 뭐.”

“아주 든든하네. 돈은 있어? 나랍 투자에 방해되지는 않겠지?”

“출입금지마법에 대한 소문을 좀 흘려놨어요. 다들 눈이 벌게졌죠. 자금 넉넉해요.”

이디케가 의기양양하게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셰비언이 인재는 인재라, 워커의 복귀가 늦어지는 와중에도 교육이 아주 빠르게 이뤄지고 있었다. 뭔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내내 반대 입장에 있던 마법사들이 다 같이 입장을 바꾼 탓이었다.

“이대로라면 기한 맞추는 것도 문제없겠네. 오히려 조금 빠를 수도 있겠어.”

“아마도요. 아가씨, 발표하기 전에 서재와 집무실에 출입금지마법을 시험 설치해 보시는 게 어때요?”

“…….”

“이왕이면 셰비언더러 직접 오라고 해서 제대로 설치하죠. 홍보 효과도 얻고, 효과가 어떤지 눈으로 확인도 하고. 어떠세요?”

헨젤가의 살림 권한을 다 갖진 못했어도 오드리가 쓰는 서관의 설비 정도는 바꿀 수 있었다. 며칠 전에 서재에 이어져 있던 응접실을 집무실로 바꾸고 응접실은 다른 곳에 새로 꾸민 게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러니 이디케의 제안은 아주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디케가 말 속에 숨긴 뼈가 작기라도 해야 모른 척을 하지. 냉차와 함께 꿀꺽 삼켰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연락해서 오라고 해.”

“네.”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그저 얄미워, 오드리는 들고 있던 서류를 이디케에게 내던졌다. 셰비언이 오면 이런 추궁, 저런 추궁, 다 해 볼 심산인 게 눈에 보였다.

“됐고, 내가 보기에 네이기스 실력이 아주 괜찮던데, 너희들 보기엔 어때?”

“그웬가로 돌아가시기 전에 한 장 달라고 하고 싶어요.”

“저는 벌써 한 장 찜해놨어요!”

이디케는 물론이고 구석에서 딴짓하고 있던 다이앤까지 급하게 끼어들어 네이기스의 그림을 칭찬했다. 로렐라이 일을 하며 예쁘고 좋은 것은 실컷 본 안목들이 하나같이 높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 네이기스의 재능이 진짜일 거란 쪽에 무게가 실렸다.

“좋아. 그런 재능은 일찍부터 침 발라야 내 것이 되겠지.”

“아가씨, 제발 그 입…….”

“알았어, 알았다니까. 본의 아니게 원석을 발견했으니 이제 갈고닦아 보자고.”

이후 오드리는 네이기스를 위해 활동 중인 화가를 불러주고 관련 책자를 사다주는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네이기스는 그것에 보답이라도 하듯 실력을 쌓아나갔다. 가르치러 왔던 화가가 처음에는 감탄하다 나중에는 화를 내며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네이기스의 머릿속에는 수십 장의 화첩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저 그녀의 손에 기술이 모자랐을 뿐. 부족한 기술이 보완되면서 짧은 사이에 자신의 화풍을 정립한 듯, 오드리가 보기에도 아름답고 독특한 그림들이 매일같이 쏟아졌다.

네이기스는 마차 몇 대를 채워온 드레스는 팽개친 채 거의 작업복만을 입고 지냈다. 칙칙한 회색 실내복 이곳저곳에 물감이 묻으며 점점 험한 꼴이 되어갔지만 그닥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물감으로 거칠어진 손이 붓을 쥐고 캔버스를 내달릴 때마다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계가 그 위에 펼쳐졌다.

그녀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색감이 화려하면서도 어딘지 몽환적으로 보이는 그림은 강렬한 흡입력을 가지고 사람을 끌어들였다. 지도하겠다고 나서는 기사가 없어 졸지에 자유시간이 잔뜩 생긴 하델은 여유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네이기스의 화실에서 보냈다.

“네이기스 누나의 그림은 정말 멋있어요. 이게 진짜 우리 집 정원이란 말이에요?”

“응……. 왜곡이 좀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보다, 하델…….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거나 하진 않니? 그러니까…… 여자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말이야.”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 오드리 누나는 쇼핑하고, 난 검을 휘두르고, 네이기스 누나는 그림 그리고. 누나, 이 그림 다 그리면 내 방에 걸 수 있게 해주세요.”

오드리에게 착실하게 교육받은 하델은 이제 그럴듯한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네이기스의 행복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붓은 좀 더 자유로워졌다. 사랑의 신 볼린이 거느린 예술의 천사 뮤즈가 네이기스의 팔에 앉은 것만 같았다.

피올은 종종 헨젤가에 들러 네이기스의 그림 구경을 했다. 그는 네이기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찾아와 그림만 보고 돌아가곤 했는데, 네이기스가 정말로 그의 방문을 몰랐는지는 당사자만이 알 일이었다.

그때쯤, 로렐라이의 제작 파트 마법사들에 대한 교육이 끝났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궁금할 정도로 예상보다 훨씬 빠른 결과였다. 새로운 시즌에 맞춰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것이 해결되면서, 오드리는 마법도구 동작정지 연구와 출입금지마법을 함께 발표할 계획을 세웠다.

살인적인 일정에 갈려 나갈 셰비언과 워커의 사정은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은 계획이었다. 공간 한 번 열었다가 몸이 어마어마하게 축난 워커는 물론이고, 워커의 일을 떠맡아 두 배로 고생한 셰비언까지도 입이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왔다.

그 와중에 셰비언은 헨젤가의 서관에 출입금지마법을 걸어야 한다며 불려오기까지 했으니, 그 불만이 오죽할까. 셰비언은 낯선 응접실 의자에 앉아 냉차에 각설탕을 다섯 개나 넣고 휘휘 저었다. 미처 녹지 않은 설탕이 찻잔 아래에 두껍게 깔렸다.

“알차게도 부려먹으시네요.”

“스승도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가 내 밑에 있는데, 그게 안 된단 말인가?”

일정 빡빡한 걸 모르지도 않으면서, 오드리의 질문은 태평하기까지 했다. 그 순간, 셰비언은 이디케에게 ‘못 해요?’란 말 듣는 게 최고로 싫다던 워커의 심정을 이해하고야 말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오기가 울컥 솟아올랐다.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요.”

“그럼 됐지. 출입금지마법은 서재와 집무실, 내 방 세 곳에 설치하도록 해.”

“출입 허가를 내줄 사람을 등록하려면 그 사람의 마력이 필요해요. 누구를 등록하면 되죠?”

“나, 이디케, 다이앤, 베텔 경, 릴리. 등록 방식은 어떻게 되지? 직접 가서 마력을 넣으면 되나?”

“……그런 방법도 있긴 하지만, 비전문가가 잘못 건드렸다간 위험해서요.”

셰비언이 품을 뒤지더니 예쁘게 생긴 유리병을 꺼냈다. 높이가 한 뼘쯤 되고 둘레는 엄지와 검지를 모은 것보다 아주 약간 더 두꺼웠으며,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하게 그려 넣은 장식이 인상적이다. 향수병이었다.

“여기다가 마력을 가득 채워주시면 됩니다. 급한 대로 달랑 다섯 개 챙겨왔는데 마침 딱 맞네요. 아가씨, 락시 양, 몰리 양, 베텔 경, 어, 근데 릴리는 누구죠?”

“집무실과 서재를 청소하는 하녀. 다이앤, 릴리 좀 데려와.”

오드리는 향수병의 뚜껑을 열었다. 급하게 비웠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 듯 아카시아 향이 확 피어올랐다. 고급스러운 병에 비해 내용물은 그냥 그랬는지, 그다지 좋은 향기는 아니었다.

“향수병이라는 발상은 좋아. 하지만, 고객에게 줄 때는 좀 좋은 향수를 쓰는 게 좋겠어.”

“네?”

“향기는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거든.”

마법사가 아닌지라 평소에는 쓸 일 없는 마력을 깨웠다. 몸 안에서 흐르던 개울물이 손끝에 고였다가 향수병 안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신선한 우유처럼 짙은 흰색이었다.

셰비언은 숨을 죽이고 그 새하얀 마력을 바라보았다. 한때 그녀의 마력은 선명한 초록색이었고 아직도 문장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렇게 하얀 마력이라니. 애써 머릿속 구석에 밀어두었던 용의 날개가 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품에 안겨 쉬던 체온이 떠올라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이거 재미있는 경험이네. 마법도구 쓸 때나 쓰던 마력을 이렇게 담다니……. 자, 이만하면 됐지? 받아.”

“…….”

“왜? 모자라나?”

셰비언은 저도 모르게 오드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볼 때마다 마음을 술렁거리게 하는 초록색 눈동자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시선을 받아쳤다. 잊어달라고 한 건 자신인데, 이렇게 멀쩡한 걸 보니 어딘지 속이 끓었다.

오드리는 대답 없는 셰비언의 손에 마력을 담은 향수병을 직접 넘겨주며 피식 웃었다. 어째 만남이 잦아질수록 저 예쁜 얼굴 속에 담긴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표정 숨기는 연습이라도 시켜야 할 판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뭔가 서운한 거라도 있나? 부족한 게 있으면 서면으로 올리도록 해. 이디케가 전달해 줄 거야.”

“……네.”

셰비언은 입술을 깨물며 제 손에 들어온 향수병을 챙겼다. 상대는 저렇게나 초연한데, 왜 자신 혼자만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허우적대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이게 전부 다 마력 때문인 걸까? 정말로? 이렇게나 마음이 흔들리는 게, 발목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게, 이 모든 것의 이유가 고작 같은 계통의 마력 때문이라고?

혼란을 삼키며 남은 향수병을 꺼냈다. 내내 오드리의 뒤에 서 있던 이디케가 향수병 안에 제 마력을 담았다. 그녀의 마력은 아주 옅은 파랑색이었다.

“일이 끝나면 네이기스가 그리는 그림이나 좀 구경하다 가. 정말 보기 드문 보석을 캐낸 것 같거든.”

“네이기스라면, 레이디 그웬? 그분이 그림을 그리는지는 미처 몰랐는데요. 과자는 잘 만드시는 것 같았지만. 아, 홍차 케이크 정말 맛있었는데 칭찬할 기회가 없었죠. 이 기회에 인사하면 되겠네요.”

이런 맙소사. 오드리는 크게 한숨을 내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피올이 네이기스에게 받은 음식을 치안대원들과 나눠 먹은 거야 알고 있지만, 설마하니 셰비언까지 끼어서 먹었을 줄이야. 워커도 먹었다는 말이 나올까 무서울 지경이었다.

“……앞으로 보티안 씨가 주는 과자 얻어먹지 마.”

“네? 왜요?”

“최소한 네이기스 앞에서만은 과자 맛있었단 얘기 꺼내지 말고 그림이나 칭찬하다 가.”

셰비언은 그제야 사정을 눈치채곤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올이 주기에 냉큼 받아먹었지만, 받으면 안 되는 거였던 모양이었다.

“걱정 마세요.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그의 장담이 오히려 오드리의 근심에 무게를 더했지마는, 일을 마치고 네이기스의 그림을 구경하던 셰비언은 감탄하느라 케이크 얘기를 까맣게 잊는 바람에 장담을 지켰다.

어디 그뿐인가? 돌아가는 길에 그림 한 점을 사 갔으니, 그 돈이 네이기스가 벌어본 최초의 돈이 되었다. 그것도 그림을 팔아서 번 돈.

네이기스는 셰비언에게 그림을 팔고 흥분한 나머지 작업복 차림 그대로 오드리에게 뛰어왔다. 셰비언은 왕립 은행에서 발행한 수표로 값을 치렀는데, 언뜻 보아도 0이 좀 많다.

오드리는 흡족한 마음으로 0을 셌다. 웬만큼 괜찮은 드레스 한 벌 값이었다. 오드리가 잠정적으로 매긴 그림값으로는 약간 부족하지만, 아직 데뷔도 못 한 화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나름 괜찮은 값이었다. 분명 나중에는 이 가격의 두 배, 세 배 이상으로 오르겠지만.

‘상식 좀 익히라고 야단한 보람이 있네.’

상식적이다 못해 왕립 은행에 계좌가 있다는 게 조금 놀랍기까지 했다. 하는 짓만 보면 은행이 뭐냐고 물어야 정상일 것만 같은데.

“그림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네이기스, 무슨 그림을 팔았어요?”

“서관 뒤에 있는 숲 그림이었어요……. 숲 가운데에 연못, 연못 그린 거……. 그, 근데 금액을 잘못 써주신 거 아닐까요? 네?”

오드리가 수표를 돌려주려는데, 네이기스는 만지기도 무섭다며 펄쩍 뛰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좋게 생각한 금액만큼 내고 사갔다는데 왜 이러는 건지. 오드리로서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가는 반응이었다.

“본인이 알아서 썼겠죠. 네이기스, 대체 왜 그래요?”

“저, 저는…… 분명 10젠티 정도면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동전으로 주셔도 되는 걸 왜 굳이 수표까지 쓰시나 했는데…….”

우물쭈물 꺼낸 말이 너무 황당해서, 오드리는 그만 두통이 도지고 말았다. 10젠티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10젠티면 흔한 카페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차 한 잔을 사 마시면 족한 돈이었다. 네이기스가 쓰는 물감과 화구값은 제하고서라도, 캔버스값조차 안 되는 돈이었다. 그녀가 쓰는 캔버스는 200젠티가 넘어가는 고가품이었으니까!

“10젠티? 10젠티를 불렀다고요?”

“네……. 꼭 값을 치러야겠다고 하셔서, 그럼 10젠티만 달라고 했어요.”

“아니, 네이기스가 그린 그림이 고작 10젠티짜리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어차피 취미로 그린 그림일 뿐인데 값을 매기기도 좀 그래서요. 그리고 좋아해주는 것만으로도 기뻤는걸요!”

오드리의 두통이 더 심해졌다. 제대로 된 값을 매겨 받으라는 오드리와, 어차피 취미생활인데 좋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네이기스 사이의 대화는 계속 평행선을 달렸다. 오드리로서는 뜻밖의 사태였다.

“네이기스의 그림이잖아요. 사람들은 값을 치르고 얻은 물건을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그만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해줘야죠.”

“그럴 리가요.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은 물건일수록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네이기스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어렸다. 오드리는 얼마 전 다이앤이 했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말았다. 네이기스는 정말 귀족 영애의 표본 같았다. 온실 속에서 피어나 그 밖의 세상 같은 건 상상하지 못하는, 자신의 세상은 그 온실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아가씨 말이다. 이쯤 되자, 오드리는 네이기스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한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네이기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팔아서 돈을 벌다니. 그럴 순 없어요……말도 안 돼요.”

어쩌면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할 뿐이고, 돈을 받고 팔지 않으니 아직 길을 벗어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래서야 화가로 써먹을 수 있을 리가 있나. 이건 비상사태였다.

오드리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네이기스의 손을 쥐고 그새 거칠어진 손을 쓰다듬었다. 네이기스는 상냥하긴 해도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던 사촌 언니의 친밀한 접근에 흠칫 몸을 떨었다. 살짝 서늘한 체온이 낯설었다.

“네이기스. 난 네이기스가 그린 그림이 정말로 좋아요. 이 수표에 써진 금액보다 더한 금액도 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손이 상하도록 애써서 그린 그림을 차 한 잔에 넘기겠다니요.”

“어, 언니…….”

“나, 난 정말, 너무 속상해서…….”

마냥 단단하기만 하던 오드리의 눈에 눈물이 넘칠 듯 고였다. 자칫하면 그대로 떨어질 것만 같다. 네이기스는 그녀에게 잡힌 손을 빼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발을 굴렀다.

“네이기스, 네이기스가 받은 돈은 그림값이 아니라 이 상한 손에 대한 성의라고 생각하는 게 어떨까요. 이렇게 손이 상하는지도 모르고 그려낸 그림을 도저히 차 한 잔 값으로 가져갈 수가 없어서 준 돈이라고요. 다른 방법으로 성의를 표시할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좋은 말 몇 마디로는 너무나 모자랐을 거예요.”

네이기스의 마음이 파르르 흔들렸다. 안 그래도 독한 물감 때문에 손가락의 살갗이 벗겨지고 손톱이 물드는 등, 상해가는 손이 마음의 부담이 되고 있던 차였다. 그 손에 대한 성의라 생각하니, 돈을 받는 게 그다지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그렇게 멋진 그림을 그려놓고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요? 좀 자랑해요! 타고난 눈동자 색 같은 것보다 훨씬 멋지잖아요.”

오드리는 얼른 눈물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그림값이 아니라 망가진 손에 대한 성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일단 돈을 받을 마음이 생겼다는 게 중요했다. 그를 위해서라면야, 이 정도 눈물쯤이야 못 흘릴 것도 없다.

“그나저나 이건 그냥 가지고 다니기엔 좀 거금이네요. 네이기스, 왕립 은행에 계좌가 있나요?”

“아, 아뇨……. 쇼핑은 항상 가문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제 계좌가 따로 있진 않아요.”

“그럼 이 기회에 하나 만들면 되겠네요. 네이기스 그웬의 이름으로.”

네이기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계좌라니,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나름 부유한 가문에서 나고 자란 덕에 씀씀이에 모자람을 느껴본 적은 없건만,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어……. 전 아직 성년이 아닌데, 제 이름의 계좌를 만들 수 있어요?”

“보증인의 동의만 있다면 가능하죠. 걱정 말아요, 내가 보증인 해줄 테니까. 네이기스도 알겠지만, 난 만탈락의 권리를 가지고 있거든요. 가짜 계좌가 아니라는 증명 정도야 가뿐하죠.”

까짓 계좌, 두 개 세 개도 만들어줄 수 있다. 오드리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지만, 네이기스는 오드리에게 이 이상의 부담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집에서 그림만 그리며 사교 모임에 나가지도 않는 자신을 감싸느라 오드리가 무슨 말을 듣고 있을지는 뻔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도 안 오시고…….’

잠시 망설이던 네이기스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었다.

“오드리 언니에게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 어차피 언니가 아니었다면 그림은 그릴 수도 없었을 테니, 이 돈은 언니에게 드릴게요.”

“……네?”

“내색은 안 하지만 저를 두둔하느라 어머니와 척을 지고 있다는 걸 알아요. 이건 제가 언니에게 드리는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해주세요.”

오드리는 당혹스러움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네이기스는 그런 오드리의 손에 셰비언에게서 받은 돈을 쥐여주었다. 수표의 까슬한 감촉에 오드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이기스, 그림을 살게요. 나한테 팔아요.”

“네?”

“아까 말했잖아요. 난 네이기스의 그림을 높이 친다고요. 내 성의는 네이기스에게 화가를 불러주고 그림을 그릴 장소를 마련해 준 것으로 다 보였으니, 네이기스도 그림을 파는 것으로 내게 성의를 보여요.”

“원하시는 그림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언니에겐 다 드릴 수 있어요!”

“아뇨, 팔아요. 난 공짜 싫어해요.”

이거야 원, 아무리 좋게 봐줘도 억지다. 그러나 마음 약한 네이기스는 오드리의 억지를 이기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셰비언이 치르고 간 돈의 네 배나 되는 수표를 받아들고 혼이 빠지고 말았다.

“어, 언니……. 이건 너무…….”

“그림이 세 점이니까 그 값을 준 거예요. 설마 다시 돌려주겠단 말을 하는 건 아니죠? 자, 옷 갈아입어요. 계좌 만들러 가죠.”

이제껏 네이기스를 보며 꾸미지 못해 안타까워하기만 하던 하녀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네이기스는 어어, 소리만 내다가 하녀들에게 잡혀 욕실로 끌려 들어갔다.

자고로 귀족 영애의 외출 준비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법. 오드리는 느긋하게 서류를 뒤적이며 네이기스를 기다렸다. 그러나 네이기스가 채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뜻밖의 인물이 오드리를 만나러 헨젤가에 방문했다.

그웬 백작가의 장남이자, 네이기스의 오라비이며, 오드리의 사촌. 에이쉬 그웬.

네이기스를 따라온 것을 사교 모임에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의례적인 인사 외에 다른 교류는 가진 적이 없다. 일전에 시계점에서 마주쳤을 때 나눈 대화가 그나마 제일 그럴듯했다.

그웬 백작가의 장남이니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이긴 하지만, 메너트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던 오드리로서는 실망스러운 상대였다.

“고모님은 안 오시고 웬 쭉정이가 왔군. 이디케, 저 꽃밭 그림은 응접실에 가져다 걸어. 지금 당장.”

오드리가 사들인 그림은 세 점이었다. 눈 덮인 숲은 오드리의 방에, 드높은 나무 위로 휘영청 뜬 달은 서재에, 흐드러지게 핀 꽃밭은 응접실에.

“손님이 오셨는데, 지금 당장이요?”

“그래, 지금 당장.”

“하여간 아가씨 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네요.”

고용인들은 황당한 명령에 서로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지만, 이디케가 눈을 부라리자 거역하지 못하고 끝내 명령에 따랐다. 오드리가 고용인 명부를 쥐고 난 뒤에 찾아온 변화 중 하나였다.

하녀가 내어준 차를 마시며 오드리를 기다리던 에이쉬는 오드리와 함께 들어온 꽃밭 그림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손님이 있는데 그림을 걸겠다고 부산을 떨다니 제정신인가.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될 거라는 것쯤은 짐작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냉대라니.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순진한 아이를 데려다가 그림 같은 걸 시킨 것도 모자라 손님 대접이 형편없지 않습니까.”

오드리는 불평을 늘어놓는 에이쉬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최악의 인상을 남겼던 저번의 만남 이후 알아본 바로는, 에이쉬는 살론에서 유학하는 동안 예술가들, 그러니까 화가며 작가, 음악가들과 두터운 친교를 쌓았다고 했다. 멜브란트로 돌아와서도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아 그웬 백작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금도 이렇게 불평을 하면서도 에이쉬의 눈은 그림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림에는 관심 없다던 사람들도 죄다 홀린 그림인데 남보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오죽할까.

“글쎄요……. 그보다 저 그림, 제법 괜찮지 않나요? 살론에서 유학하며 좋은 그림을 많이 보셨을 텐데, 에이쉬가 보기엔 어때요?”

“좋은 그림이긴 합니다……. 올해 전시회에서는 본 적이 없는 그림인데, 터치도 구도도 독특한 게 혹시 신인…… 아니, 이게 아니지. 오드리, 네이기스를 그만 돌려주시죠. 어린애의 어리광에 동조하는 것도 모자라 방패막이까지 자처하시다니, 제정신입니까?”

“저 그림은 네이기스의 작품입니다.”

“……네?”

“충분히 방패막이를 자처할 만하지 않나요?”

땅굴에 숨은 너구리를 끌어내듯 메너트를 꾀어내기 위해 네이기스를 불러들였던 것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희생을 자처한 일이 되었다. 하나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당장 눈앞에 앉은 에이쉬가 갈등을 시작했는데.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어요. 그런데도 이 정도니, 앞날이 참 기대됩니다. 제 눈에 네이기스의 재능은 진짜로 보이는데, 그건 에이쉬도 마찬가지죠? 평소에도 워낙 예술가들과 교류가 많았던 분이시니.”

“……저게 네이기스의 작품이라는 말, 거짓말이 아니길 빕니다, 오드리.”

“방금 한 말이 진짜라는 데에 만탈락에서 거둔 세금 일 년 치를 걸 수도 있어요. 에이쉬는 뭘 걸 수 있나요?”

오드리의 말투가 어찌나 자신만만한지, 에이쉬는 심적 갈등을 느끼며 그림을 노려보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하인들이 걸어둔 꽃밭 그림은 어딘지 몽환적이고 황홀한 분위기를 풍겼다. 꿈결 너머에서 들여다본 풍경인 듯 아련한 색감이 그를 홀렸다. 오드리의 말마따나, 방패막이 노릇을 하고도 남을 그림이었다. 저게 정말로 네이기스의 그림이라면 말이다.

“도박도 내기도 하지 않으니 그 제안에는 응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드리. 충고하는데, 저런 그림을 그려내는 손을 제대로 지키려면 단순히 방패막이 노릇으로는 안 될 겁니다.”

“음?”

“내가 네이기스를 데리고 가지 못하면, 어머니께서 직접 오실 테죠. 한데 네이기스는 어머니 말씀에 거역을 못 하는 딸이거든요. 과연 그 애가 그때에도 헨젤가에 있으려고 할지, 나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

“어머니를 막아보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그다지 기대는 마세요. 지독히 수명이 짧은 화가가 되겠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에이쉬는 정말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혀를 차다가 돌아갔다. 오드리는 그의 방문을 네이기스에게 알리지 않았고, 대신 왕립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어 그림값을 넣어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만의 재산을 가져 본 네이기스는 이제껏 사양했다는 게 우스울 정도로 금고 열쇠를 애지중지했다.

“오드리 언니……. 제가 전시회에 그림을 낼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낼 수 있죠. 안 그래도 이디케와 다이앤이 돈을 모아서 그림 하나를 샀다면서요? 분명 많은 사람이 네이기스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고, 갖고 싶어 할 거예요. 셰비언 씨를 봐요, 바쁘다면서 꼬박꼬박 찾아와 그림 구경을 하고 가잖아요.”

오드리는 끊임없이 속살거렸고, 네이기스는 그 속삭임을 들으며 금고 열쇠를 끌어안고 달콤한 꿈을 꾸었다. 새하얀 전시장 벽에 자신의 그림이 걸리고, 수많은 사람이 그 앞에 서서 그림을 원하는 꿈. 언젠가는 피올의 초상화를 자신의 손으로 그리고 거기에 서명을 남기는 꿈.

<화가 네이기스 그웬.>

그러나 그녀의 꿈이 채 여물기 전에, 모두가 예상했던 손님이 찾아왔다. 사교 모임에 얼굴을 비추지 않고 헨젤가에 박혀 그림을 그리는 딸을 견디지 못한 메너트가 직접 걸음을 한 것이다.

오드리가 올라오기 전에는 수시로 들락거렸던 저택인 만큼 좀 편하게 입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메너트는 마치 무도회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근사한 차림을 하고 왔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화려하게 틀어 올려 진주로 장식하고 희게 화장한 얼굴에서는 왠지 모를 전투 의지마저 느껴졌다.

“어머나, 고모님. 부르시면 제가 찾아갔을 텐데요.”

“오랜만에 보는구나, 오드리. 반갑기는 하지만, 지금은 내가 너와 함께 다정히 담소를 나눌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질 않다. 당장 네이기스를 불러오렴. 어미가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다니, 나쁜 버릇이 들었어.”

“이런, 고모님. 저는 고모님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데요. 네이기스를 보시려거든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에 그리하시죠. 이디케, 집사를 불러와.”

메너트가 오드리와 얼굴을 마주 보는 건 봄 무도회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드리의 집요한 만남 요청을 메너트가 꾸준히 거절해 왔기 때문이었다. 실은 이번 방문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어린 조카에게 기세로 눌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되도록 피하고 싶었으나 네이기스의 앞날이 걸린 이상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메너트는 응접실을 지키고 선 고용인들을 쓱 훑었지만, 어떤 고용인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알신다가 고용인 명부를 빼앗겼다더니, 그 여파가 이렇게 왔나 싶었다.

“집사까지 불러야 하는 이야기니?”

“그럼요. 자, 고모님. 앉으세요. 모처럼 뵈었잖아요? 이 조카에게도 시간을 주세요.”

곧 집사가 불려왔다. 오드리는 집사를 허수아비처럼 세워놓고 다이앤에게서 자료를 받아 탁자에 펼쳤다.

그 자료가 뭔고 하니, 센네페르가 헨젤가의 살림에 장난질을 한 흔적들이었다. 메너트는 살림을 하며 이왕이면 그웬에서 투자하는 에드와 상단의 물건을 구입해 왔는데, 메너트가 살피기 전 유통과 원자재 단계에서부터 센네페르가 손을 댄 것이었다.

결국 같은 금액을 주고도 질이 떨어지는 상품을 구입하거나, 똑같은 상품이면 수량이 적은 등의 피해가 있었다. 이게 ‘장난질’인 이유는, 적당히 눈감아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한 작은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메너트의 자부심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도 어쨌거나 한때는 헨젤이었으니, 메너트 역시 장부와 서류 정리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짙게 화장한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오드리, 이건 대체 뭐지? 아무리 살림을 갖고 싶대도 이런 가짜 서류를 들이미는 건 좀 심하잖니.”

“그게 가짜 같으세요, 고모님?”

“그웬에게 백작 작위가 버거웠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이런 소액이 아쉬워서 부정을 저지르다니, 말도 안 되지.”

오드리는 크게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견고한 건물도 작은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데, 그웬이 이런 소액으로 장난질을 치면서 헨젤의 신뢰를 잃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러나 그건 세간의 상식일 뿐이니, 오드리에게는 센네페르의 심사가 손에 잡힐 듯 훤했다.

목에 걸려 있는 줄이 끔찍했을 것이다. 지겨웠을 터다. 그렇다고 벗겨낼 수도 없었을 테니, 이렇게 소소한 걸로 화를 풀었겠지.

센네페르의 부정을 찾아낸 것도 그런 사고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반드시 뭔가 손을 쓰고 있을 거라고, 얌전히 헨젤의 통제를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고.

“그럼 이건 어떠세요?”

메너트의 앞에 새로운 서류가 펼쳐졌다. 에드와 상단이 최근에 자금경색에 빠졌음을 증명하는 서류들이었다.

에드와 상단은 최대 투자자인 그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마차 업체 재선정 문제가 쉽사리 풀리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는 센네페르는 당장 꺼내줄 수 있는 돈이 없었다.

여름만 넘기고 나면 투자한 배가 돌아와 그의 재산을 불려줄 테지만, 문제는 당장이었다. 당장 필요한 돈. 헨젤가의 살림에 치던 장난 규모를 아주 조금만 키우면 될 것도 같은 애매한 금액.

한 번 손댄 것에 두 번 손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서서히 그만둘 준비를 하고 있던 장난질이 다시 시작됐다. 이전과는 달리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라는 게 달랐지만, 부정이 아니라 할 수는 없었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대엿 가지 종류의 서류가 커다란 탁자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펼쳐놓고 비교하니 흐름이 한눈에 보였다. 너무 잘 보여서 곤란했다. 메너트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오드리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센네페르를 그렇게 구석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면서, 자신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척한다. 피올마저 감탄했던 연기력이 아낌없이 발휘됐다.

“로렐라이의 최대 투자자가 바로 저인걸요. 고모님께서 제게 드레스를 보내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고모님도 거기에 동의하시죠?”

“…….”

“제 피부색에 맞지 않는 드레스는 이제 사양할게요.”

메너트는 입술을 깨물고 서류를 보고 또 보았다. 그래봤자 서류 내용이 바뀌는 것은 아닌데도. 그 짧은 사이 십 년은 족히 늙은 것처럼 낯이 어둡다.

“오드리 너는 한 번도 입지 않았지만, 좋은 의상실에서 구입한 것들이었어.”

“그러셨겠죠. 하지만 그 좋은 의상실에 제 초상화를 보여주셨다면 몹시 좋았을 거예요. 진짜 저와는 별로 닮지 않은 그림이지만, 적어도 그렇게 밝고 환한 노란색과 분홍색은 보내지 않았을 테죠. 제가 그 드레스를 입고 나가봐야 데뷔탕트도 늦게 했으면서 어려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말밖에 더 들었겠어요?”

잡아먹을 듯 서류를 검토하던 메너트의 눈이 사나워졌다. 안 그래도 자신이 보내는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전부 처분하는 오드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였다.

“오드리, 너는 그 옷들을 갖고 싶어 안달 난 귀족 영애가 몇 명이나 되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니? 그 우스운 초록 염색을 당장 빼고, 까맣게 태운 피부를 하얗게 되돌리렴. 그럼 그 드레스들이 아주 잘 어울릴 거다.”

“이런, 전 이 머리색이 아주 마음에 드는걸요. 그리고 말을 타다 보면 이 정도 그을리는 것쯤이야 별것도 아니죠. 만탈락은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도시인걸요.”

“그거야 만탈락 얘기고, 여긴 브란젤이야!”

메너트가 울컥 화를 냈다. 그녀의 손에 잡힌 서류가 구깃구깃하게 구겨지는 게, 쌓였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지려는 모양이었다.

“데뷔탕트 때도 그 이상한 옷을 입고 왔었지. 코르셋은 흉내만 냈고, 재단은 엉망이었어! 까마귀 깃처럼 빛나는 검은 머리칼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그런 초록 잎사귀 같은 꼴이라니……! 데뷔탕트 이후에도 염색을 빼지 않았고! 말을 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럼 그냥 말을 타지 않으면 되지 않니!”

메너트의 상식에서 오드리의 행태는 이해할 수 없음, 그 자체였다. 타고난 아름다움이 있는데, 가꿀 생각은 않고 왜 굳이 비웃음을 사서 듣는단 말인가. 남들보다 자그마한 체구도, 염색을 하고도 매끄러운 머릿결도, 우아한 이목구비와 뚜렷한 눈동자 모두 미인의 조건에 틀림없이 들어맞는데.

‘가련한 레이디 흉내를 못 낼 정도로 못난 것도 아니면서!’

가무잡잡하게 태운 피부를 되돌리는 거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거야 한 계절만 버티면 된다. 헨젤가의 이름과 만탈락의 부가 있고, 사교계에서 이미 입지를 쌓은 자신이 도와주면 사방에 도는 악평의 절반은 사라질 터였다.

한때는 헨젤이란 성을 썼던 사람으로서, 메너트는 오드리에게 헨젤가의 흠집, 그 이상의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다.

“승마는 가끔 이른 아침에 하는 사교 승마 때에만 해도 충분해. 귀족 영애가 왜 그렇게 직접 말을 몰고 뛰어다니고 싶어 하는지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땡볕에서 일하는 아랫것들처럼 가무잡잡한 피부가 그렇게 좋은 거니?”

“…….”

“입을 조심하고, 표정을 조심하고,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상대를 잡아 결혼하기 전까지만 어떻게든…….”

오드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메너트는 오드리가 가무잡잡하게 태운 피부를 지적하고 싶었겠지만, 방금 그 발언으로 랄리우스 가문 전체를 욕보였다. 날 때부터 가무잡잡한 피부와 자그마한 몸집은 랄리우스의 특징이었으니까.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던 메너트는 갑자기 분위기가 휙 바뀐 오드리에게 놀라 입을 다물었다. 손위 친척에게 보이던 최소한의 예의마저 거둬들인 오드리는 마치 발톱을 드러낸 맹수 같았다. 목덜미에 쭈뼛 소름이 돋고 서늘한 한기가 등을 식혔다.

“고모님이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던 건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 내 피부색이 마음에 안 들겠죠. 그러나 그게 핏줄을 모욕하는 발언으로 이어지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이제 랄리우스의 성을 이은 자들은 남아 있지 않아도, 피를 이은 자들은 아직 여럿인데요.”

“그런 뜻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 트집은……!”

“랄리우스가 만탈락 하나만 남을 정도로 몰락하긴 했어도, 그 이름까지 빛바랜 적은 없다는 걸 굳이 상기시켜 드려야 할까요? 다급한 상황이었긴 해도 레이디 랄리우스는 신랑감을 자신의 손으로 골랐어요. 하필 상대가 헨젤이었다는 점이 그분의 불행이긴 했지만 말이에요.”

“너도 헨젤이야.”

“네, 랄리우스의 피를 절반이나 가졌는데 불행히도 헨젤이죠. 고모님은 헨젤이 아닌 그웬이시고요. 그러니, 이제 그만 헨젤가의 곳간 열쇠를 내려놓으세요. 그건 내 것이니까요.”

“……넌 아직 어려. 이런 살림을 관리하는 건 어른의 역할이야. 남편을 단속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다. 약속하마.”

오드리의 미간에 짜증이 고였다. 이거야 원, 너무 고집스럽지 않은가. 그녀는 메너트가 쥐고 있던 서류를 빼앗아 구겨진 부분을 쫙쫙 눌러 펼쳤다.

“우편국을 책임지는 고모부께서, 우편 업무에 끼고 싶었던 마차 업체에게 지난 몇 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돈을 받았어요. 그래놓고 갑자기 업체를 다시 선정하고 계시죠. 덕분에 그 돈을 토해내느라 에드와 상단의 요청에 제대로 응하지 못하셨고. 그런데 고모부께서 돈을 받기 시작한 이유가 대체 뭘까요? 이디케!”

이디케가 메너트에게 다가와 새로운 서류를 내밀었다. 메너트는 서류를 대강 훑다가 끝내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뇌물을 받은 시기를 보아하니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다.

장남인 에이쉬를 살론에 유학 보냈던 첫 해, 교역품을 실은 배가 침몰해 그웬의 재정이 상당히 나빴다. 유학을 그만두고 돌아오게 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어디서 구해온 돈인가 했더니…….’

자신만 믿으라며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받을 거면 흔적이나 남기지 말 것이지! 하여간 허술한 인간.

메너트가 마음에 안 차는 남편을 향해 내심 이를 가는 동안, 오드리는 점점 공세를 높여갔다.

“이 이야기를 사교계에 퍼뜨려도 되겠죠? 고모님께서 제 악평에 한몫하고 계시는데, 저라고 못 할 것 없죠. 아무래도 고모님에 비하면 신뢰도가 낮겠지만, 아시잖아요? 깨끗한 자리에 고고하게 있던 사람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더 즐거워해요.”

“…….”

“소문에 소문으로 대응해도 될까요, 고모님?”

조카에게 이런 압력을 받다니, 창피해 죽을 것만 같다. 게다가 오드리의 협박에 꽤 현실성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사교계 사람들이 가십을 오죽 좋아하던가.

장남 에이쉬, 독녀 네이기스, 차남 드케. 심지어 드케는 아직 어려 진로도 못 정했다. 몇 년 이내로 진로를 정하고 타 귀족 관료들 아래에서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그런 소문은 치명적일 수 있었다.

메너트가 쥐고 있던 부채에서 빠각, 소리가 났다. 상아로 만들어진 부채가 수명을 다한 것이다.

“……좋아요. 조카님께서는 뭘 원하죠? 안살림의 권한 전부면 충분한가요?”

“그건 당연한 일이고요.”

“알겠어요. 또 뭘 원하죠?”

메너트의 태도가 바뀌었다. 이제껏 손아랫사람 대하듯 깔아보던 시선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투마저 정중해졌다. 그게 또 지독히 헨젤 출신다워서, 오드리는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저에 대해 사교계에서 떠들어대시던 걸 그만 두세요.”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고모님도 아시다시피 헨젤의 이름값은 제법 괜찮고, 저는 귀가 밝답니다. 저 탁자에 서류를 한층 더 쌓길 바라시나요?”

메너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그만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오드리가 사교계에 워낙 관심이 없는 데다 일탈 행동을 그만두지 않아 의도한 것 이상으로 악평이 부풀려졌을 뿐이었다.

오드리는 혀를 차고 싶은 것을 참고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메너트가 쉬이 대답하지 않고 망설이는 이유 따위야 짐작하고도 남았다. 수습이 곤란해서 저러는 거겠지.

“이미 터진 꽃봉오리를 되돌릴 수 없고, 지나간 바람을 다시 잡아올 수 없으리란 걸 알아요.”

“내 입에서 더 말이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됐나요?”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밀알을 줍는 수고는 하셔야지요.”

“……그래요. 그 정도는 해야지요. 더 요구할 것이 있다면 지금 얘기하세요.”

“헨젤가의 살림에 더 간섭하지 않으신다면, 그걸로 충분…….”

원하는 것을 다 얻었으니 그만 말을 마무리하려던 오드리였건만, 네이기스의 그림이 눈에 밟혔다.

이렇게 고압적으로 말하는 어머니의 아래에서 그 순한 네이기스가 얼마나 제 뜻을 관철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에이쉬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저 방패막이 정도로는 불충분할 거라고.

“네이기스가 그림에 관심이 있어요.”

“쓸데없는 짓을. 조카님이 부추긴 건가요?”

“타고난 재능이 빛나는 걸 어쩌겠어요. 지금 당장 화가로 나서도 충분해요.”

“데리고 돌아가겠어요. 이거야말로 그웬의 문제니 조카님께서는 참견할 생각 말아요.”

“고모님, 네이기스는 정말로 재능이 있어요. 저 벽에 걸린 꽃밭 그림도 네이기스의 작품인걸요.”

메너트의 시선이 그림에 머물렀다. 그녀도 안목 없는 사람은 아닌지라, 그림이 풍기는 몽환적이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저게 네이기스의 그림이 아니라면 좋은 그림을 골랐다 솔직하게 칭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딸이 눈치 없기는 해도 멍청하지는 않군요. 서명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단호한 태도로 오드리의 말을 잘라냈다.

“그웬인 내가 헨젤에서 손을 떼었듯이, 헨젤인 조카님께서도 그웬의 일에 간섭하면 안 되죠. 자, 조카님. 더는 말을 돌리지 말고 네이기스를 데려오세요. 나는 충분히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해요.”

오드리는 더 버티지 못하고 네이기스를 불러왔다. 조금 전까지 그림에 빠져 있던 네이기스는 어머니의 앞에서 가련할 정도로 떨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은 온통 물감으로 얼룩덜룩했다. 메너트는 엉망진창인 딸의 꼴에 이를 악물고 화를 참았다.

“네이기스, 난 네게 충분한 교육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구나. 숙녀의 몸가짐에 대해 좀 더 배워야 하겠다. 그리고 조카님.”

“네에?”

“다시는 네이기스에게 쓸데없는 바람 넣지 마세요. 저 애는 그저 곱게만 자란 아이라, 조카님과는 달리 세간의 악평을 견디지 못한답니다.”

네이기스는 그대로 메너트에게 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헨젤가에 올 때 가지고 왔던 화구들은 붓 한 자루조차 챙기지 못한 채였다. 제법 많은 후원을 했던 오드리로서는 씁쓸한 결과였다. 네이기스가 말 한 마디라도 하기를 바랐는데, 그녀가 메너트 앞에서 입도 떼지 못했으니 오드리도 방법이 없었다.

“아가씨.”

그때까지 응접실 한켠에서 허수아비처럼 서 있던 집사가 오드리를 불렀다. 집사를 불러 오라 시킬 땐 언제고,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모르는 척을 하던 오드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할아범, 아직까지 거기 서 있었나? 그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잘됐네. 고모님께서 잠시 맡고 계셨던 곳간 열쇠는 이제 내 거야. 이건 내가 헨젤가의 영애로서 가지는 당연한 권리라는 거 알고 있지? 데뷔탕트도 마쳤고 고모님의 동의도 얻었으니, 아버님도 날 막을 수 없어. 그대가 증인이야.”

“압니다.”

“아버님이 화라도 내시면 할아범이 잘 막아줘.”

“아무렴요.”

집사는 오드리가 아직 어릴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아쉬웠던 아가씨였다. 만탈락에서 지내는 동안 그런 면은 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엎드려 숨을 죽인 채 때를 노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응접실을 나서며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 전부가 오드리에게로 돌아설 것을 예감했다.

“다이앤.”

“네, 아가씨.”

“네이기스가 뭐래? 받아들이겠대?”

오드리는 다이앤을 통해 네이기스에게 화가로서의 길을 제시했다. 본명으로 활동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가명을 써도 좋다. 마침 자신이 로렐라이 상단과 친분이 있으니 그쪽과 연결시켜 주겠다. 제품 디자인을 해도 좋고, 그림을 팔아도 좋다. 후원은 충분히 해주겠다.

“거절하셨습니다.”

“왜? 조건은 충분히 좋았을 텐데?”

“잠깐의 일탈을 즐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하셨어요. 그림에 너무 힘을 썼다간 장차 남편이 되실 분께 누가 될 수 있으니 이제 그만두시겠다고요. 그리고…….”

다이앤이 오드리에게 회중시계를 내밀었다. 오드리가 원했던 그대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세공을 한 시곗줄을 달고 있는 회중시계였다.

회중시계의 뚜껑 안쪽에는 숲속의 공터에서 바위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은 여신이 그려져 있었다. 나무 사이로 비쳐 들어온 햇살이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여신을 비췄다. 작은 그림인데도 꽃과 나뭇잎을 휘감은 옷자락과 작은 산새들이 장식 대신 앉은 머리칼이 섬세하기 그지없다.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그려 넣은 머리칼도, 시계를 바라보는 사람을 깔아 보듯 오만한 눈동자도, 선명한 초록색.

“……언제는 천사라더니, 이젠 여신이야?”

누구나 천재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천재성을 발휘할 영역을 찾아내고 거기에 매진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세상에는 천재가 드물다. 오드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천재성을 아쉬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드리만큼이나 네이기스에게 기대가 컸던 이디케도 아쉽기는 매한가지였다. 마무리 짓지 못한 그림을 챙기는 손길이 애틋했다. 예술이란 부자와 귀족의 도락이라며, 그림에는 관심 없다 해놓고 이미 두 점이나 사들였으니 그럴 법도 할 것이다.

“이제 어쩌실 거예요?”

“어쩌긴……. 기다려야지.”

“기다리면 뭔가 바뀔까요? 백작부인께 반항은 무슨, 말 한마디 못하시던데…….”

“처음부터 가져본 적이 없다면 모를까. 이미 한 번 맛보았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일탈의 결과물까지 손에 쥐고 있잖아. 내가 왜 그렇게 급하게 계좌를 열어줬는데.”

오드리는 자꾸만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렸다. 큰 사냥감을 잡으려거든, 그만한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

헨젤가의 살림에 대한 권한은 그날로 오드리에게로 넘어왔다. 메너트가 관리하며 보관하고 있던 각종 서류는 물론이고, 상징적 의미로 전해지는 놋쇠 열쇠까지도 전부.

헨젤 백작은 오드리가 살림을 맡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메너트 본인이 물려주기로 했다는 데다 집사의 두둔도 있어 대놓고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 자신만만했으니, 살림을 어떻게 하나 두고 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리 되니 오드리가 명부를 갖게 된 이후 조심하는 기색이 엿보이던 고용인들은 혹여 숨 쉬는 소리마저 거슬릴까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이제 그들의 거취를 결정하고 월급을 주는 사람은 메너트가 아니라 오드리였으니.

그리고 살림을 완전히 넘겨받고 딱 사흘 뒤, 오드리는 알신다에게 해고 통지를 보냈다.

알신다와 오드리 사이의 마찰은 이미 저택 내에 알음알음 다 퍼져 있었지만, 고용인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이리 되리라 짐작하고 있던 사람이 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몸 바쳐 일해온 알신다를 바로 해고할 수 있느냐는 사람이 반.

알신다 본인의 반응은 당연히 후자였다. 알신다는 해고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로 오드리의 집무실로 달려왔다. 황망한 와중에도 문을 두드리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화를 억누르며 조곤조곤 자신의 필요를 역설하는 모습을, 오드리는 지극히 낯설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굴 줄 알았으면서 왜 이제까지는 그렇게 감정적이었는가. 이유야 뭐 고민할 것도 없다. 오드리가 정말로 살림을 가질 줄 몰랐든가, 살림을 가지더라도 자신만은 못 자르리라 확신한 것이겠지.

“……그러니까, 네가 없으면 이 집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로군.”

“저만큼 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가씨.”

가슴을 펴고 단언하는 알신다는 정말로 당당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 시절에 이 집에 들어와, 머리가 희끗해지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일했다. 그녀는 헨젤가의 살림에 대해서라면 그 메너트조차 자신보다 모자르다고, 감히 단언할 수도 있었다.

오드리도 그런 알신다의 주장에 일부는 동의했다. 알신다가 헨젤 백작가를 제 분신으로까지 여기며 몸을 갈아 일했다는 것. 백작부인의 오랜 부재에 커진 자만심에 머리끝까지 빠지지만 않았더라면, 정말 유용한 수하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가정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릴리, 들어오렴.”

“네, 아가씨.”

“통지 받았지? 이제부터 네가 하녀장이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신다는 제 앞에서 벌어지는 촌극을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채 한 계절도 되지 않은 어린 하녀가 하녀장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 집안에서 오래 일한 고용인들 전부가 반감을 가질 게 틀림없는 인사였다.

“아가씨, 제 말은 듣지도 않으신 겁니까?”

“릴리를 데려오느라 락시 부인에게 많이 혼났어. 하긴, 애지중지 길러온 후계자를 대뜸 채갔으니 부인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

릴리가 쿡쿡 웃으며 오드리와 눈을 맞췄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가 둘 사이에서 풍겼다. 소개소에서 추천받은 하녀들을 면접보고 릴리를 직접 뽑은 당사자인 알신다는 황당함에 말을 잊었다.

“릴리는 만탈락에서부터 내 곁에서 일한 아이야. 락시 부인이 후계자로 점찍을 만큼 영리하고, 네 눈을 속일 만큼 처신을 잘하지. 나 대신 만탈락의 살림을 도맡을 수도 있을 만큼 철저한 교육을 받았어.”

“말도 안 되는……. 이 집에서 몇 년을 일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만탈락에서 사람을 갖다 쓰신다뇨!”

이제는 자신이 헨젤가의 고용인이 아니라는 것도 잊은 비명이었다. 오드리는 쓰고 있던 추천사를 마무리하고 서명했다. 착착 접어 봉투에 넣는 손길이 가벼웠다.

“그러니까 알신다, 너 하나만 자르는 거란다.”

“아가씨!”

“감히 주인에게 이를 드러내고 뒤늦게 제 쓸모를 주장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다들 알아야지. 제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한다면 후한 보상을 해줄 테지만, 그게 너는 아니로구나.”

“어떻게 저에게,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헨젤에 바친 세월이 얼마인데!”

“자, 받으렴. 추천장이다. 퇴직금도 조금은 챙겨주마. 그동안 일한 게 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분이 머리끝까지 오른 알신다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녀가 오드리가 내민 추천장을 잡아채 갈가리 찢어발기려는 순간,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연무장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고 있다던 하델이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누나!”

오드리가 문을 지키고 있던 이디케를 향해 눈썹을 까딱 치켜 올렸지만, 이디케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맞받아쳤다. 막았어야지.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도련님을 막아요? 나중에 두고 보자. 눈짓으로 오가는 대화가 살벌하다.

하델은 너무 급하게 달려 토할 것 같은 속을 다스리며 알신다의 앞을 막아섰다. 아직 여린 어깨가 어찌나 믿음직한지, 알신다는 더 없이 든든한 마음으로 하델의 뒤에 숨었다.

“누나, 알신다를 해고한다고요? 왜요?”

“너야말로 그런 걸 내게 와서 따지는 이유가 뭐지? 고용인의 거취를 결정하는 건 나의 권한이야. 고용인 앞에서 모자란 모습 보이지 말고 나가렴.”

“왜 알신다를 해고하냐고요! 제대로 일하지 않은 적도 있지만, 그거야 겨우 처음뿐이었잖아요!”

하델은 다급하고, 절박했다. 아버지는 다정하셨지만 언제나 바빴고, 고용인들은 친절했지만 다들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와중에 가까이 다가와 빈 곳을 채워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알신다였다. 제대로 일하지 않을 거면 그만두라고 한 적도 있었지만, 그거야 알신다를 믿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알신다는 그의 믿음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

“알신다가 저 릴리라는 하녀를 닦달해서 그래요? 그치만 내가 계속 막아줘서 크게 불이익을 본 것도 없을 텐데 그러지 마요. 앞으로는 그런 짓 못하게 할게요. 네? 누나아…….”

“하델, 알신다가 너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던 날을 기억하니?”

“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잖아요! 게다가 겨우 한 번뿐이었는데!”

“지금 네가 그날의 알신다 같은 짓을 하고 있구나. 이건 내 권한이란다. 내 권위를 꺾으려 들지 마.”

저 먼 북쪽, 셰비언 성벽에 쏟아지는 눈발처럼 서늘한 눈빛. 색은 전혀 다른데도 부친과 꼭 닮은 눈빛을 본 순간, 하델은 제 애원과 부탁이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등 뒤에 선 사람을 지킬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자 자꾸만 몸이 떨렸다.

“그동안 내가 했던 노력들은 다 쓸모없는 거였어요? 누나와 알신다 사이를 중재하려고, 내가 얼마나, 얼마나…….”

“이런, 하델. 너는 그런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단다. 그저 일이 벌어진 뒤에 입을 막기에 바빴지. 너는 중재를 한 게 아니라, 헨젤의 후계자로서 가진 권력을 알신다에게 행사했을 뿐이란다. 망나니 누이라도 후계자가 감싸고 있으니 괜히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말이야.”

하델의 뒤에 숨어 있던 알신다의 눈이 커다래졌다. 오드리의 말 그대로였다. 하델은 오드리와 알신다 사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헤친 적이 없었다. 일단 겉으로 잠잠하면 그걸로 되려니, 알신다에게 일방적인 침묵을 강요하곤 했다.

그게 더 알신다의 분을 부추기고 다툼을 키웠다는 걸, 하델은 몰랐다. 알신다도 굳이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델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데…….

‘아가씨는 알고 있었어. 알면서 내가 날뛰는 걸 방치한 거야. 도련님이 날 감쌀 수 없게 하려고.’

알신다는 가슴팍을 움켜쥐고 헐떡거렸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의 절반도 되지 않는 어린 아가씨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하델의 애원은 피가 끓듯 절절했다. 제발, 누나! 들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매달리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그게 권력이면 왜 누나에게는 통하지 않는 건데요!”

“그야 나는 네 하녀가 아니니까 당연하지 않니? 아무래도 너에게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하겠구나. 가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겨우 이 년밖에 안 남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베텔 경, 하델을 데리고 나가세요.”

카프러스는 영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델을 옆구리에 달랑 끼고서 집무실을 나갔다. 손쉽게 제압당한 하델이 악쓰는 소리는 이디케가 문을 닫자마자 자그마하게 줄어들었다. 알신다의 눈길이 안타까이 문을 향했다.

“알신다, 추천장은 잘 챙기도록 해라. 되도록 좋은 말을 쓰려고 노력했으니, 어딜 가도 취직이 어렵진 않을 거다.”

“아가씨, 도련님은 아직 어리신데 저리 내보내시면 어쩝니까? 그리고 저는 도련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권력이 있으셔서 따랐던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하델이 걱정됐으면 저 애를 방패 삼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내가 만탈락으로 쫓겨 갈 땐 고작 열 살이었단다.”

추천장을 움켜쥔 손에 핏줄이 섰다. 메너트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히 살림에서 손을 뗐고, 믿었던 하델은 허무하게 끌려 나갔다. 헨젤 백작은 오드리가 살림을 이어받은 것에 대해 어떤 의사표현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인정했다.

알신다는 이제 자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지금 자신은 볼 붉은 소녀 시절부터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까지 몸 바쳐 일했던 헨젤가에서 쫓겨나는 것이라고. 누구도 자신을 구해주지 못하리라고. 헨젤가에서 늙어가며 다음 대 헨젤 백작을, 그리고 그분의 후손까지도 모시리라 여겼던 미래가 산산이 조각났노라고.

그러나 어디 희망이라는 게 가능성이 있을 때에만 피어나는 것이던가. 알신다는 거의 무릎을 꿇을 기세로 오드리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릴리가 그녀를 떼어내려 했지만, 워낙 억세게 버티고 있어 쉽지 않았다.

“아가씨, 아가씨! 세 번의 기회를 주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아직 한 번이 남았습니다!”

“네이기스가 이 집에 머무를 때의 네 태도를 되짚어봐라. 나는 그 애가 헨젤이고 나는 그웬인 줄 알았다.”

알신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주름진 뺨이 젖고, 치마를 붙들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알신다는 그날로 짐을 싸서 헨젤가를 떠났고 릴리는 비어버린 하녀장 자리를 차지했다. 릴리는 오드리의 총애를 등에 업고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하녀들을 장악했다. 이디케와 다이앤의 도움이 있었음은 당연했다.

이후 하델은 떠나간 알신다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헨젤 백작은 물론이고 저택의 어떤 고용인도 소년을 도와주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친절한 미소 속에 감춰진 곤란함을 읽은 날, 하델은 검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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