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7. 절반의 우연과 절반의 필연
chapter 8. 너구리굴에 연기 피우기
chapter 9. 전조
chapter 10. 폭풍이 오는 계절
chapter 11. 셰비언의 고백
chapter 12. 네이기스의 용기
chapter 7. 절반의 우연과 절반의 필연
「마법망을 다루는 마법사의 재능은 핏줄에 따라 발현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 친족관계인 마법사들은 대개 엇비슷한 형태의 문장을 가진다.
하지만 핏줄에 상관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마법사는 남들과 전혀 다른 형태의 문장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남들의 배 이상으로 정교하고 큰 마법을 다룰 정도로 뛰어난 재능과 성취를 보이지만, 그만큼 마법망의 반발 작용도 심하게 겪기 때문에 대부분 단명한다.
그러나 걱정 마라, 마법사 천 명 중 한 명이 그런 경우일까 말까 하니까. - 당신의 아이가 마법사일 확률 中」
헨젤가의 본관에 있는 넓고 화려한 집무실은 제 몫을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집무실의 주인인 헨젤 백작이 왕궁에 있는 집무실에서 거의 모든 일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가 저택에 돌아와 하는 일이라곤 고작 잠자는 것과 도저히 처리하지 못하고 가져온 일을 마저 해치우는 것뿐이었다. 어쩌다 일찍 들어오면 자식들과 식사를 함께하곤 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드물었다.
그날도 그는 마저 끝내지 못한 한 무더기 일과 함께 퇴근했다. 치안대 놈들이 얼마나 악랄하게 비리 관료와 귀족을 쳐냈는지, 업무 증가량이 말도 못 했다. 곧 대규모 채용 시험이 있을 시기라는 것에 희망을 걸고 있을 뿐이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저택의 본관은 백작을 마중하기 위해 깨어 있었다. 그가 탄 마차가 정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마법등의 뚜껑이 벗겨지고 아직 깨어 있는 고용인들이 현관 앞에 모여 섰다.
헨젤 백작은 평소처럼 집사에게 겉옷과 모자를 넘겼다. 왕궁에서부터 따라온 하인에게 서류를 옮겨놓을 것을 지시하고 그 역시 집무실로 가려는데, 집사가 어쩐지 곤란한 표정을 하고 그를 붙들었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애가 왜?”
“요 며칠 내리 만남을 거절하셨으니 화가 나셨나 보지요.”
이상할 정도로 집에 박혀 있던 오드리가 갑자기 만남을 청하기 시작한 건 며칠 전부터였다. 바빠서 안 된다, 몇 번이고 거절했음에도 포기를 않더라니, 기어이 집무실을 차지하고 앉은 모양이었다.
“쯧……. 하델은?”
“오전의 역사, 고전, 살론어 수업은 성실히 들으셨습니다. 요즘은 승마에 재미가 들리셨는지 오후 시간엔 계속 승마 연습을 하십니다.”
“검술 수업은?”
“베텔 경이 아가씨의 에스코트 기사가 되면서 수업을 그만두셨는데, 이후엔 딱히 나서는 기사가 없어서…….”
집사가 말을 흐렸다. 헨젤 백작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델은 늘 검술에 욕심을 냈지만 재능은 모자랐다.
카프러스는 모자란 재능을 알면서도 묵묵히 가르쳤다. 언젠가 헨젤가를 떠날 사람이었기에 하델을 가르치는 데에 부담이 없었다. 하나 다른 기사들은 카프러스와는 사정이 달랐다. 대를 이어 헨젤가에 봉직하는 그들이 후계자의 심기를 거스르기가 어디 쉬울까.
헨젤 백작은 그들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차피 하델에게는 재능이 없었다. 있다 해도 그가 결국 손에 쥐게 될 것은 검이 아닌 펜이었다.
“그래……. 놀이도 그쯤 하면 오래했지. 계속 그런 상태로 두게. 연무장은 이용할 수 있게 하되, 혹시라도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기사가 없도록 단속하도록.”
“주인님, 그건 도련님께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닙니까. 안 되면 안 된다고 처음부터 말씀해 주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스스로 포기해야 미련도 없다네.”
그렇게 말하는 헨젤 백작의 등이 몹시 괴로워 보여, 집사는 차마 말을 더 보태지 못했다. 하델의 성취가 조금씩 늘어날 때마다 답지 않게 티가 날 정도로 기뻐했던 사람이 이제 와 자의적인 포기를 언급하는 마음을 어떻게 가늠하겠나.
헨젤 백작은 집무실의 문고리를 돌리기 전 잠깐 멈춰 서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발 좀 포기해 줬으면 싶은 건 하델뿐만 아니라 오드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 손에 쥘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한 줌의 재산이 전부인 것을, 모래알처럼 빠져나갈 것을 쥐고 날뛰는 꼴이라니.
“기다릴 것 없네.”
“예.”
늦은 밤, 마법등의 차가운 빛으로 채워진 집무실은 어딘지 음산했다. 효율을 이유로 책상 주변에만 마법등을 설치해 둔 탓에, 오드리가 앉은 탁자 주변은 어둠과 빛이 뒤섞여 어둑했다.
그런 집무실이 무섭지도 않은지 반쯤 어둠에 먹힌 채로 태연히 차를 마시던 오드리가 헨젤 백작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나긋하게 인사했다.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얌전한 자태였다.
“오셨어요.”
“이런 밤에 무슨 일이냐.”
“이제 헨젤가의 살림을 제가 건사해 볼까 하고요.”
예상했던 요구였다. 헨젤 백작은 충실한 하인이 쌓아둔 서류를 펼치고 일할 준비를 했다.
“그런 건 네가 신경 쓸 거리가 못돼. 골치 아픈 일이니 하던 대로 네 고모에게 맡겨두고 넌 네 일이나 해라.”
“네, 저도 제 일만 하고 싶은데……. 고모님의 방해가 워낙 심해야말이죠.”
클로드가 또 비마법 무기 개발 기획서에 추천인으로 서명을 해서 서류를 올렸다. 멜브란트가 겉으로는 예전에 없던 성세를 누린다지만 속까지 그렇지는 않다는 걸 뻔히 알면서. 비마법 무기 개발은 돈 먹는 괴물이었다.
“네가 워낙 못 봐줄 꼴을 하고 다니니까 그랬겠지. 그나마 요즘은 새벽에 말을 달리는 짓은 그만두었더구나. 잘했다.”
“제가 무슨 꼴을 하고 다니든, 이미 다른 집안으로 시집가신 고모님께서 하녀장까지 동원해가며 간섭할 일은 아니시죠.”
“그웬이면 헨젤과 한집안이나 마찬가지다. 네 평소 행실이 똑바르지 못해서 고용인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을, 애꿎은 다른 사람 탓을 해서는 안 되지.”
헨젤 백작은 바로 서류에 반려 표시를 하려다 멈칫했다. 전장이 육지에서 바다로 옮겨가는 지금, 멜브란트의 주전력이었던 기사 집단은 싸울 장소를 잃고 서서히 영락해 가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들어도 비마법 무기 개발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클로드의 말은 분명히 타당성이 있었다. 그는 고민을 시작했다.
“집안 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면 차라리 낫죠.”
살론보다 기차에 대한 투자가 늦었던 탓에 입은 손해를 생각하면, 늦기 전에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당장 쓸 만한 비마법 연구가를 어디서 구해온단 말인가. 어디 상단에서 빼 오기라도 하란 건가? 급여가 낮아 왕궁마법사 충원도 제대로 못 하는 판에?
밑바닥에서부터 사람을 굴려 키워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시간 단축과 성과를 동시에 잡으려면 각 상단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대체 무슨 당근을 제시해야 할지 가늠이 어렵다. 이쪽 문제는 차라리 클로드와 상의를 하는 편이 좋을 성싶기도 했다.
“사교계에서 퍼지는 악평이 심상치 않아요. 네이기스를 치안대에 보내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셨던 분께서 제게는 어떤 보호도 제공하지 않으시거든요. 어디 그뿐인가요? 사교계에서 제 악평을 사탕과자 부풀리듯 부풀리는 무리 중에 고모님이 계시더군요.”
“네 고모가 보내는 옷을 입고, 보내는 보석을 차고 나가라. 그 너저분한 머리 염색도 빼고. 그럼 바로 널 보호해 줄 거다. 보호 따위 필요 없다는 듯이 굴고 있는 건 바로 너다.”
“제가 무슨 꼴을 하고 다니든, 고모님이 그렇게 하실 주제는 못되시죠.”
헨젤 백작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와 줄다리기를 하는 중에 딸의 억지까지 들어줘야 하다니, 너무 고달프지 않은가 말이다.
“주제를 따지자면, 네가 더 주제넘지. 바닥을 기는 평판으로 대체 무슨 살림을 하겠다고? 지금 내게 딸이 사치하다가 헨젤을 말아먹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까지 들으란 말이냐?”
“저는 제 의무를 다하고 있으니, 응당 제가 가질 권리도 이 손에 쥐여주셔야죠. 그게 뱀 같고 칼 같은 헨젤의 원칙이 아닌가요?”
“내가 정말로 원칙대로만 행동했으면, 네게 만탈락의 권리 따위는 주지 않았다. 난데없이 떨어진 행운 덕분에 네 분수에도 맞지 않는 사치를 실컷 부렸으면 이제 놓을 줄도 알아야지.”
내내 의자에 앉아 있던 오드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제껏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 있던 시선을 똑바로 맞춰왔다. 집무실은 여전히 어두컴컴한데도, 초록색 눈동자가 강렬한 기백을 품고 빛났다.
헨젤 백작은 그 지독한 눈빛을 이전에도 본 일이 있었다. 지금의 오드리보다 좀 더 차갑고, 냉혹하며, 철저히 계산적이었던 여자. 칼레이의 품에 안긴 지 오래인 얼굴이 왜 새삼 다시 떠오르는가.
자꾸 음이 어긋나는 서툰 연주가 귓가에 울렸다. 밀리나는 뭐든지 다 잘 할 것 같은 여자였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악기 연주만은 몹시 서툴렀다. 그녀가 건반악기를 선택한 이유는 다른 악기에 비해 그나마 소리를 내기 쉬워서였다. 오드리는 피아노를 꽤 괜찮게 연주한다던데, 정작 남들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곡은 몇 개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하여간 이상한 곳에서마저 닮은 모녀였다.
헨젤 백작은 무심결에 오드리의 피아노 연습 시간이 언제쯤이었는지 가늠했다. 내일 이른 새벽에 나가지 않고 조금 늑장을 부리면 짧고 간단한 몇 곡을 하염없이 반복하는 연습을 들을 수도 있을 듯했다. 그는 출근을 늦출 핑계를 주르르 떠올렸고, 그런 자신에 기함했다.
“아니요. 뱀 같고 칼같이 행동하셨기에 제게 만탈락의 권리를 주셨죠. 아무리 왕비 전하께서 공증해 주셨다고 해도, 부인의 유언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줄 누가 알았을까요. 그러니 아버님, 이번에도 그 공정함을 발휘해 주세요.”
“……나가라.”
“고모님께 살림 넘기란 말을 도저히 못 하시겠거든, 그냥 입이라도 다물고 계세요. 저는 제 권리를 눈뜨고 빼앗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답니다.”
“나가라니까!”
깡! 헨젤 백작이 내던진 잉크병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탁자 위를 굴렀다. 오드리는 시커멓게 잉크가 튄 옷자락을 아무렇지 않게 탈탈 털고는, 잉크병을 주워 책상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이왕이면 시대에 맞는 물건을 쓰세요.”
황당해 말을 잇지 못하는 헨젤 백작을 앞에 두고 오드리는 태연히 드레스의 주머니를 뒤졌다. 외출복이 아닌 실내복이었던 덕에 간단한 손수건 따위를 소지할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녀는 그 주머니에서 매끈한 만년필을 꺼내 헨젤 백작의 깃펜 옆에 올려놓았다.
“만년필 한 자루쯤은 선물로 드릴게요. 아버님 말씀대로, 저는 꽤 사치하는 딸이니까요.”
“오드리!”
“일은 적당히 하시고 일찍 주무세요. 혹여 아직 살론어로는 간단한 대화도 어려운 하델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 얹힐까 두렵거든요.”
헨젤 백작의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마법등의 창백한 빛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이니, 더 긁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나겠다. 오드리는 잽싸게 집무실을 빠져 나와 얼른 문을 닫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집사가 사정을 짐작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 맹랑한 아가씨에게 퍽 동정적인 편이었다. 그건 어린 시절의 오드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손자인 알렉스가 만날 때마다 오드리의 좋은 점을 줄줄이 읊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모셔다드릴까요, 아가씨?”
“입에 발린 소리 고마워, 할아범. 안에 냉수 한 잔 넣어드려.”
“그러지요. 아가씨, 가는 길이 어둡습니다.”
오드리는 집사가 건네는 램프를 고맙게 받아 들었다. 애초 그녀가 가져왔던 램프는 집무실 안에 두고 온 채였으니, 안 그래도 갈 길이 걱정이었던 터다.
“이런 말은 좀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지만……. 아가씨, 하녀장과 화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막 돌아서려던 오드리가 걸음을 멈추고 집사를 바라보았다. 집사는 허옇게 서리 낀 수염을 몇 번 긁적대다가, 오드리와 눈이 마주치자 몹시 선량하고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 어린 아가씨를 바라보는 눈에서 자애로움이 흘러넘쳤다.
“하녀장 하는 일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지요. 전부 다 아가씨를 위해 하는 일일 겝니다.”
“…….”
“소녀 시절부터 헨젤가에 있으면서 몸이 바스러지도록 일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계속 다투셔 봐야 아가씨께 도움 될 게 없어요. 고용인들도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집사는 퍽 진심이었지만, 오드리가 듣기에는 그만큼 우스운 말이 없었다. 자신은 알신다와 싸운 적이 없었다. 알신다 혼자 적개심을 가지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을 뿐이었다. 뭣보다, 다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일 거라니. 착각도 정도가 있다.
“얼마 전에 에드와 상단에서 애체라는 물건을 내놨어. 투명한 수정을 얇고 동그랗게 깎아서 아주 얇은 테에 끼운 물건이었지. 이렇게 눈에 쓰는 거야.”
난데없는 신상품 얘기에 집사는 그저 어리둥절해졌다. 오드리가 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아 눈앞에 갖다 대는 시늉을 했음에도 영 모르는 눈치다.
“그걸 쓰면 흐려 보이던 시야가 깨끗해진다는군. 할아범에게 하나 사다줄 테니까, 꼭 끼고 다니도록 해.”
“예?”
“할아범 하는 말을 들으니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집사가 표정을 굳혔지만, 오드리는 그를 놀리듯 경쾌하게 걸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묵직한 문을 지나 달빛 비치는 정원을 가로지를 즈음 그녀의 걸음은 꽤 느려진 상태였다. 조금 전의 대화를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었다.
데뷔탕트를 치른 이상, 헨젤가의 살림을 맡을 권한의 우선순위는 당연히 오드리였다. 오드리는 이미 만탈락의 행정과 재정을 도맡아 운영한 전적이 있으니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평판 따위를 운운하다니.
아름답게 조형해서 깔아놓은 돌길을 걷다 말고 낮은 덤불을 냅다 걷어차자, 시끄러울 정도로 주변을 울리던 벌레 소리가 뚝 끊겼다.
‘그 개 같은 평판 부추기는 게 고모님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오드리의 평판은 아직도 바닥을 달렸다. 그녀가 부추겼던 소문들은 의도했던 이상으로 부풀어 도저히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단순히 차림과 씀씀이를 조롱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지 않은 말을 했다 하고, 가지 않은 곳엘 갔다 하며, 어울리지 않은 사람과 어울렸다고 비난했다.
소문 속의 오드리는 승마복을 입고 다리 선을 드러내며 신사들의 눈길을 끄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인 발랑 까진 여자였다. 더해서 아프다, 귀찮다, 온갖 핑계로 사교 모임에 불참하고 그 시간에 도박장을 들락거리며 돈을 탕진하고 온갖 사치를 즐긴다나 어쨌다나. 매춘굴에서 남자를 사더라는 소문이 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기까진 오드리도 별생각이 없었다. 남들이 기대하는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구설수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슬슬 메너트에게서 곳간 열쇠를 받아올 작업을 시작하면서, 그녀가 자신의 소문을 퍼뜨리고 부풀리는 진원지라는 걸 알게 됐다.
오드리는 자신도 아는 사실을 헨젤 백작이 모르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는 직접 면전에서 언급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딱 한 마디만 해주면 해결되는 걸, 도대체 왜……!’
눈앞이 흐려졌다. 달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이 형태를 잃고 무너지고 빛과 그림자가 뒤섞였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 도저히 혼자 걷기가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디케나 다이앤을 불러 함께 올 것을. 오드리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주저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빌어먹을…….”
모처럼 시원하게 욕을 했는데도 울렁이는 속은 여전했다. 눈두덩을 꽉 눌렀다. 잠시 웅크리고 있는 사이 다시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했다. 서관 옆의 숲에서 밤꾀꼬리가 시끄럽게 구는 와중에, 유유히 정원을 가로지르던 점박이 고양이가 낯선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대다 후다닥 도망갔다. 처음 왔을 때보다 한결 따뜻해진 바람이 오드리의 등을 쓸고 멀어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장미가 피는 시기였다.
태풍이 몰아닥치는 날의 구름처럼 깊은 우울이 그녀를 덮었다. 아무리 애써봐야 원하는 바를 이루기는 불가능할 거라는 어두운 전망이 자꾸만 뇌리를 채웠다. 오래된 절망이 다시금 발밑에서 고개를 들었다. 무기력함이 서서히 차오르는 밀물처럼 발을 적셨다.
자유, 그게 뭐라고 그렇게 발버둥을 쳐?
어차피 다들 그렇게 살아.
여기서 그만둬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안 그래도 힘들잖아.
다 내려놓고 쉬는 게 어때?
분명 편해질 거야.
유혹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하게 오드리를 꼬드겼다. 아니, 어쩌면 유혹은 그대로인데 오드리의 마음이 물렁하니 연약한 상태인 것뿐일 수도 있다. 무의식적으로나마 의지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상대에게 밀쳐진 충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아팠다.
그렇게 동그랗게 몸을 말고 얼마나 있었을까. 서늘하니 차가운 손이 어깨를 두드렸다.
“아가씨, 고개 좀 들어볼래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동시에,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오드리는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달빛을 등에 진 셰비언이 어쩐지 곤란한 표정을 하고 그녀의 앞에 함께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백작저의 경비가 엉망진창이군.”
“왕궁도 들락날락했는데 백작저쯤이야 별것도 아니죠.”
가볍다 못해 팔랑팔랑 날아갈 것 같은 어투의 말을 들으니 발을 적시던 우울감마저 약간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달빛을 품고 반짝이는 은발에 감싸인 얼굴이 워낙에 아름답기도 했다.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화도 누그러뜨릴 만한 얼굴이었다.
“하긴, 무려 공간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인데 기사들을 탓하면 안 되겠지.”
지금도 저택 부지 곳곳을 순찰 돌고 있을 기사들을 두둔하며 일어나려는데, 얼마나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지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순간, 오드리는 치맛자락을 밟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셰비언이 재빠르게 받아주지 않았다면 흙바닥에 엎어질 뻔했다.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것을, 오드리는 화들짝 놀라 셰비언에게서 물러난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셰비언과 닿은 곳에서부터 오싹한 한기가 솟아올라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마치 눈 더미 속에 몸을 던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 때문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이 물렁물렁해져 있던 경계심이 뾰족뾰족 솟아올랐다.
“……셰비언.”
“네, 아가씨.”
“이곳엔 왜 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뭘?”
셰비언은 대답 대신 문장을 띄웠다. 일전에 카페 로열에서 보여줄 땐 겨우 수박만 한 크기였지만, 지금 그가 띄운 문장은 사람 하나는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문장 속의 그림들 역시 훨씬 생동감이 넘쳤다. 문장의 테두리를 움켜쥔 용이 오드리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눈꺼풀을 껌뻑였다.
문장은 여전히 은빛과 초록빛이 섞여 반짝거렸다. 본관에서 서관으로 가는 좁은 길 한복판에 난데없이 밝혀진 빛 때문에 주변 풍경이 한낮처럼 잘 보였다. 그런데도 전혀 눈이 부시지 않으니, 거 참 기이한 일이었다.
문장 주변의 마법망이 자르르 흔들렸다. 그에 맞춰 오드리 안에 잠자고 있던 마력들이 깨어나 들끓기 시작했다. 오드리는 제 안의 마력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에 당황하다가, 조금 전까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마법망이 별가루처럼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놀라 입을 벌렸다.
“맙소사…….”
마법망은 아주 가느다란 거미줄 같았다. 이른 아침, 촉촉이 내린 이슬비에 젖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거미줄. 한없이 연약해 보이되 정교하고 아름다운 연결망 곳곳에 덩어리진 마력이 맺혀 있었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마법망을 건드렸다. 마법사의 재능이 없어 본래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야 정상일 마법망이 그녀의 손길에 반응했다.
시작은 단조로운 피아노 연주였다. 그러나 떨림이 떨림을 부르고, 소리는 소리를 불렀다. 오드리를 감싼 마법망이 피아노 위에 비올라를, 첼로를, 클라리넷을 얹었다. 충분히 아름다운 선율이건만 어딘지 아쉬워 안달하고 있으려니, 셰비언이 다가와 마법망의 어느 부분을 건드렸다.
호른, 팀파니, 오보에, 바순, 바이올린……. 소리는 점점 풍성해지고 화려해지며 오드리를 이끌었다. 바짝 곤두세웠던 경계가 황홀한 선율 속에서 느슨하게 풀어졌다. 마법사들은 내내 이런 연주를 들으며 사는가.
“내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이런 밤에 몰래 찾아온 비상식을 용서하고 싶어질 광경이야.”
“그럴 리가요. 아가씨께는 그런 재능 따위, 밀알 한 톨 만큼도 없는데요.”
“그럼 이건 뭔데?”
오드리는 황당해하며 마법망을 가리켰다. 여린 거미줄 같은 마법망은 여전히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 중이었다. 그러나 쓴웃음을 지은 셰비언이 마법망을 향해 손짓하자, 선율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멎어버렸다. 그나마 보이는 거라도 그대로라서 다행이었다.
“문젯거리, 그 자체죠. 재능이 있더라도 마법망을 다루는 데엔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마법사들이 괜히 빌빌대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재능도 없는 아가씨가 이렇게 마법망을 다룬다는 건…….”
“이제까지 아무 일도 없었어. 그대에게 문장을 돌려주고 나선 그걸로 끝이었다고.”
“아마도 그게 기폭제가 됐을 게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제가 문장을 크게 띄웠더라도 마법망이 보이거나 만져지면 안 되는 겁니다. 환절기마다 앓는다고 하셨죠? 계절이 바뀌는 시기엔 마법망이 크게 흔들리니까,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겁니다.”
평소의 나긋나긋한 어조는 어디로 갔는지,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과 말투가 셰비언의 다급함을 대변했다. 오드리는 자꾸만 시선을 끌어당기는 마법망을 보지 않으려 아예 눈을 감았다. 혈통과 상관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마법사는 단명하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유독 수명이 짧았다. 오드리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하여간 되는 게 없는 날이야.’
그나마 다행이라면, 셰비언의 난데없는 등장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자신을 잡아먹던 우울감과 무기력감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놈의 아버지가 뭐라고, 상처받지 말자 생각하면서도 번번이 상처받고 일일이 좌절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또 한심할 뿐이었다.
“……알겠어. 이런 밤에 이렇게 찾아올 정도로 급한 일이었다는 거군. 해결 방안은?”
“저와 잠깐만 여행을 다녀오시면 됩니다.”
“미쳤나 보군.”
숨 쉴 틈도 없는 비난이 이어졌다. 지금이 로렐라이에 얼마나 중요한 시점인지는 아느냐, 가문에 매인 귀족 영양이 가고 싶다고 어디 마음껏 나다닐 수 있는 처지냐, 해결 방안이라는 게 어떻게 여행일 수 있느냐, 게다가 아무 사이도 아닌 남녀 단둘이 무슨 여행을 가느냐…….
“말씀 다 하셨어요?”
“아직 다 못 했어!”
“그럼 저쪽 보면서 얘기하시죠.”
셰비언이 오드리의 뒤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무심결에 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오드리의 낯이 창백해졌다. 오늘 저택 야간 경비를 맡은 기사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변명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빨리 문장 지우고 숨어.”
“아뇨, 잘 보세요.”
셰비언이 왈칵 화를 내려는 오드리의 어깨를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체구가 작은 오드리는 그의 품에 완전히 감싸여 움쭉달싹 못하는 채로 기사가 다가오는 걸 보아야 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체온이 싸늘하게 식고 입에서 침이 말랐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오드리와 셰비언은 둘째 치고라도 주변을 온통 환하게 밝히고 있는 문장을 못 봤을 리가 없는데, 기사의 표정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그는 평범하게 주변을 살피며 다가오면서도 그들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으흠……?”
오드리와 셰비언을 그대로 지나치려던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멈춰 섰다. 그는 어딘지 신중한 기색으로 문장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문장을 그대로 통과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이었다.
“요즘 피곤한가?”
기사는 뻑적지근한 어깨를 괜히 주무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드리는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해서 그런지, 심장이 쿵쾅거리고 등에서 땀이 쏟아졌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지? 꼭 우릴 못 본 것처럼 지나쳤어.”
“그야 당연히, 제가 공간을 다루는 마법사니까 그렇지요.”
셰비언이 사실을 밝혔음에도 오드리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모른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아가씨께서 제 말을 듣고 고개를 드신 순간부터 이 근처는 전부 제 공간이었어요. 제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올 수도, 볼 수도 없는. 저 기사의 눈에는 평소와 똑같았겠죠. 아, 굳이 손을 뻗어 확인한 걸 보면 마법사의 혈통을 옅게나마 가졌을지도 모르겠네요.”
“말도 안 돼…….”
“여행이라고 해도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하룻밤의 꿈이면 족해요. 이미 저번에 한 번 겪어보셨잖아요?”
오드리는 그가 말하는 게 보석 경매장에서의 ‘의식 분리’임을 금세 눈치챘다. 그러나 납치하듯 날름 낚아챘던 그때와는 달리 이렇게 직접 찾아와 여행을 운운할 땐, 의식만 분리하는 게 아니라 몸까지 동반한 여행일 것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반드시 확인할 게 있다.
“내가 그대와 동행해 여행한다고 해도, 이 현실에서는 눈 한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에 불과할 거란 뜻이라고 해석해도 되나?”
“네, 그렇죠. 아주 잠깐일 거예요.”
셰비언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자 마침 상처 입어 물렁해졌던 마음이 돌개바람에 휘말린 종잇조각처럼 흔들렸다.
오드리는 쓴웃음을 감추려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째 저 남자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이렇게나 흔들리는지. 그저 매번 때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가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인생의 절반은 우연이라지만 나머지 절반은 필연일 텐데, 운명처럼 다가온 인연은 끊임없이 자신을 흔들어댄다.
머리 한구석에 살아 있는 이성은 당장 죽는 거 아니라고,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서 워커도 만나보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뒤에 결정하는 게 어떠냐고 속삭이는데, 조금 전까지 지독한 우울감에 휩싸였던 마음은 어디로든 떠나고 싶지 않으냐고, 이런 기회가 어디 있냐고 부추긴다.
“……정말로 고칠 수 있나?”
“아무렴요.”
“위험한 건 아니겠지?”
“이 문장에 대고 맹세하죠. 즐거운 산책과 다를 바 없는 여행일 겁니다.”
셰비언이 정색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오드리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그 손을 한 번 보고, 번쩍거리는 문장을 한 번 보고, 여전히 주변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마법망까지 보고서야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정말 하룻밤 꿈과 같은 여행이길 바라겠어.”
셰비언은 오드리의 손을 쥔 채 문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웬만한 장정보다 더 큰 문장 속으로 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문장이 출렁이며 그의 손을 꿀꺽 삼키는 게 아닌가. 마법망이 흔들리며 맑은 종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놓치지 말고 따라오세요.”
씩 웃는 얼굴이 미치도록 얄밉다. 오드리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면서도 잡은 손을 놓칠까 단단히 긴장한 채 문장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까지도 옆에 서 있던 셰비언이 먼저 들어가며 오드리의 손을 쑥 잡아당겼다.
‘아직, 아직인데!’
내심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문장은 셰비언을 삼켰던 것처럼 오드리도 가뿐히 받아들였다. 귓가를 울리던 종소리가 사라지고 대신 수십 마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주변을 채웠다.
조심조심 눈을 뜬 오드리는 자신이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몸통을 가진 나무들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인 남성 서넛이 달라붙어야 겨우 둘레를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나무들이 눈 닿는 곳마다 빼곡하고, 사방으로 뻗은 가지엔 짙은 초록색 덩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목을 꺾자 까마득한 나무 꼭대기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반짝거렸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가 바로 머리 위를 푸드덕 날아 지나쳤다.
“와아…….”
오드리는 이전에 겪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에 넋을 빼고 말았다. 문장 속으로 들어가기에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다를 줄이야. 어두운 나머지 손발도 안 보이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멋진 곳이네. 예전과는 달라.”
“그때랑은 사정이 다르니까요.”
웃으며 대꾸한 셰비언이지만은, 그의 어깨는 긴장으로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는 입고 있는 옷에 몇 번이고 손을 문질러 땀을 닦아내고는, 선 자리에서 조심스레 발을 떼어 확인했다. 응당 엉망으로 꺾여 흔적이 남았어야 할 수풀은 상한 곳 하나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역시…….”
“셰비언? 대체 뭐가 역시인지 갑자기 불안이 밀려오는데.”
“이 공간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정원 같은 곳이라는 걸 새삼 확인했죠. 아가씨, 저 꽃을 꺾어보시겠어요?”
셰비언이 오드리와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하얀 꽃을 가리켰다. 엄지손톱만 한 하얀 꽃잎이 겹겹이 모인 꽃이었다. 어른 주먹만 한 꽃송이에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황홀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오드리는 시키는 대로 꽃을 따러 가려 했지만, 셰비언이 꿈쩍을 않았다. 손을 잡아당기며 독촉했지만 그는 오히려 손을 놓으려 했다. 당황한 오드리가 멀어지는 손을 움켜쥐고 제 쪽으로 당겼다.
“놓지 말라 할 땐 언제고?”
“넘어왔잖아요. 이젠 놔도 돼요.”
오드리가 더 어떻게 해 볼 틈도 주지 않고 손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허공을 헤매는 빈손을 얼른 거둬들이고 몸을 돌렸다.
“……그렇군. 아무렇지도 않아.”
멋쩍음을 감추려 헛기침을 하며 씩씩하게 꽃 앞에까지 걸어갔다. 무릎 부근까지 무성하게 자란 풀잎들이 걸음을 방해할 만도 하건만, 어째 왕궁의 무도회장 바닥처럼 매끄럽기만 하다. 이상한 일이지만은, 일일이 따질 마음 따위는 문장을 넘어온 순간부터 버렸다.
하지만 뻗은 손에 꽃줄기가 잡히지 않을 땐 그녀도 놀랐다. 주먹만 한 꽃송이에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이렇게나 뚜렷한데, 꽃줄기는 마치 허상처럼 잡히지 않으니. 약이 올라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는 오드리를 셰비언이 말렸다.
“아가씨, 그만하세요. 아가씨와 저는 이곳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부탁한 거니까.”
“그래? 그럼 이게 정상이란 말인가?”
“네. 거기서 그렇게 잡아먹을 듯 보지 마시고 이리 오세요. 여행을 하려면 움직여야죠.”
“여긴 그대의 공간이잖나. 원하는 대로 다 통제할 수 있을 텐데, 내가 굳이 움직여야 하나?”
마법사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 셰비언의 표정에서 의문을 읽어낸 오드리가 피식 웃었다.
“랄리우스는 오래된 가문이야. 만탈락의 저택엔 선조들이 긁어모은 책들이 잔뜩 쌓여 있지. 게다가 워커를 영입한 게 바로 나인데, 모르기도 어렵지 않겠어?”
“아, 네……. 하여간 아가씨께는 매번 놀라게 되는군요. 그래도 움직여야 해요. 아가씨의 핏줄이 대체 어디서 기원한 건지 모르겠거든요.”
“난 인간이야.”
“네, 인간이죠. 과거에 존재했던 수많은 종족을 잡아먹고 태어난 인간.”
처음 듣는 끔찍한 말에 오드리가 눈을 크게 떴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반응에 괘념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오드리는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실내복이라도 옷자락이 길어 거추장스러웠으나, 발에 걸리는 게 없어서 그나마 편했다.
“무슨 얘기야? 예전에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 종족들이 살았던 건 사실이지만, 인간이 그들을 잡아먹었다니? 옛 종족들은 자기들끼리 전쟁하다 멸망했어. 실렌다 사막에 가면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아직도 볼 수 있다고.”
“그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죠. 하지만 마법사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얘기는 달랐습니다.”
오드리를 만나기 전,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은 다 밟고 돌아다니던 시절부터 셰비언을 괴롭히던 의문이 있었다.
‘인간은 대체 언제부터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기 시작했는가?’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나는 자들은 그렇다 쳐도, 재능의 파편조차 없는 자들도 마력을 갖고 태어났다. 아무리 미약한 마력을 타고난 자라도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마법도구의 시동을 거는 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로렐라이가 용에게서 마법을 훔쳐내 뿌릴 때만 해도, 인간은 한 줌의 마력도 갖고 있지 않았는데.
“수없이 많은 종족이 어울려 살던 시절의 인간은 지금의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었죠. 강하고 아름다운 다른 종족들 사이에서 눈치 보느라 하루하루가 바쁜 연약한 종족.”
오드리가 뒤처지는 걸 느꼈는지, 셰비언이 걸음을 늦추었다. 덕분에 오드리는 그의 등이 아닌 다른 곳에도 시선을 돌릴 여유를 얻었다.
처음에는 크고 굵은 나무기둥에만 정신이 팔렸는데, 뒤늦게 살펴보니 나무만 큰 게 아니라 꽃도, 잎도, 덩굴도 모조리 크고 두껍다. 그 큰 잎만큼이나 커다란 짐승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풀을 뜯었다.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그 전설은 나도 알고 있어. 도둑 로렐라이가 나오는 이야기잖아. 로렐라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의 집에 들어가 보물을 훔쳤지만, 용의 거처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용의 거처에 숨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오드리의 머리칼보다 더 짙은 초록 잎에 커다란 이슬이 맺혔다가,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초록 잎사귀를 머리에 이고 풀을 뜯던 토끼-인지 뭔지 모를 짐승-이 난데없는 물벼락에 펄쩍 뛰어올라 숲 속으로 사라졌다.
“용의 거처는 차가운 빙벽 꼭대기에 있었다. 로렐라이는 일곱 날 일곱 밤을 기어올라, 깊고 깊은 숲을 지나, 얼어붙은 호수를 가로질러 마침내 용의 거처에 도달했다. 용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그는 용의 알을 훔쳤다.”
셰비언이 걸음을 늦추며 오드리의 말을 가로챘다.
“로렐라이는 훔친 알을 자랑으로 여겨 팔지 않고 집에 모셔두었는데, 어느 날 그의 집에 놀러온 요정족이 말하길, 저 알 속에는 새끼 용이 아니라 마법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알 속의 마법을 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의 한복판에 알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갑자기 등장한 커다란 알을 궁금하게 여긴 사람들이 옹기종기 주변에 모여들자, 알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날, 이 세상에 용의 전유물이었던 마법이 풀려났다. 자, 제대로 알고 있잖아.”
중간에 말을 가로채였던 오드리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셰비언의 표정은 그다지 풀리지 않았다.
셰비언이 그의 키보다 큰 이파리 앞에 서서 손짓했다. 그는 문장 속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이파리 속으로 들어갔고, 오드리도 그의 뒤를 따랐다.
온통 초록색으로 가득 차 있던 시야가 뻥 뚫렸다.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출렁거리는 수면이 보석이라도 뿌린 것처럼 햇살에 반짝거리고, 가끔 저 먼 곳에서 물고기가 뛰어올라 작은 물보라를 일으켰다.
자갈들 위로 찰랑거리는 물은 가장 맑은 수정처럼 투명했다. 오드리는 무심결에 호숫물을 뜨려다가 실패하고 실망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런 오드리의 모습에 키득대던 셰비언이 호숫가의 바위를 두드리며 자리를 권했다. 오드리는 사양치 않고 앉았다. 정수리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스해서 기분이 좋았다.
“워커가 그 뒤의 얘기를 해주더군요. 풀려난 마법의 혜택을 본 건 인간만이 아니었기에, 인간은 여전히 약했고, 그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고요. 마침 번성하던 종족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인간들은 그걸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죠.”
“그게 무슨 소리야?”
“설명하긴 어렵고, 눈으로 보면 빠르겠네요.”
셰비언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아름답긴 하나 텅 비어 있던 호숫가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키는 오드리와 비슷한데, 숯처럼 검은 피부색을 가지고 초록색 머리칼을 말아 올린, 특이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재잘거리며 호숫가를 거닐었다. 오드리가 난생처음 보는 외양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는 동안에도 호숫가의 사람들은 착실하게 늘어났다.
낯선 피부색과 머리색이 점점 늘어나고, 기이할 정도로 신기한 생김새를 가진 자들도 한둘씩 생겨났다.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갈라진 자들, 목덜미에 물고기 비늘이 달린 이들, 팔 대신 날개를 단 사람들, 눈이 세 개인 이들…….
어디 그뿐인가? 호수를 헤엄치는 붉은 머리칼의 미인에게는 다리 대신 물고기 꼬리가 달려 있었다. 그녀가 호수에서 빠져 나와 뭍에 오르자 물고기 꼬리는 사람의 다리가 되었다. 그도 모자라 잔뜩 젖은 머리칼의 물기를 짜내며 두 사람이 있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는 통에, 오드리는 만져지지 않는 사람이 옆에 앉아 있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됐다.
“이게 무슨 풍경이야? 꼭 어릴 적에 보던 동화책의 그림을 생생하게 보는 것 같군.”
“좀 더 보세요.”
파랗기만 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주변은 한낮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 차고, 평화로웠던 풍경은 금세 깨졌다. 조금 전까지 다정하게 어울리던 이들이 종족을 나눠 갈라선 채 무섭게 싸우기 시작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지고, 죽은 자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셰비언의 배려인지 비명이 들리는 것도 아니고, 흐르는 핏물이 발을 적시는 것도 아니건만, 끔찍한 광경임은 틀림없다. 조금 전까지 살아서 움직이던 이들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은 어딘지 섬뜩하기까지 했다.
오드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발을 바위 위로 끌어 올렸다. 맡아지지도 않는 비릿한 냄새가 살갗에 배어드는 것만 같고 속이 거북해져서다. 꺼리는 기색을 눈치챈 셰비언이 오드리의 눈을 가려주었다.
“비위 상하면 안 봐도 돼요.”
“보게 하는 이유가 있는 거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꼭 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말은 보는 쪽이 낫다는 거잖아. 그럼 치워.”
셰비언이 머뭇대며 손을 치웠다. 오드리는 토기가 치미는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들었다.
전쟁은 길었다. 살아남은 자들끼리 싸우고 또 싸워, 생존자는 점점 줄고 종족의 숫자도 줄어갔다. 그렇게 호숫가가 피와 살점으로 점철되어 가는 동안, 저 멀리 숲 어귀에 숨어 사태를 관망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사태가 진정되어 가는 시점이 되자 전쟁에 끼어들더니, 겨우 서넛 남아 있던 자들을 거침없이 살해했다.
오드리는 구역질을 참느라 허옇게 질린 낯으로 물었다.
“저들은 누구지?”
“종족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게 누구였어요? 당연히 인간이죠. 아, 시작됐다. 보세요.”
뒤늦게 끼어든 자들이 둥그렇게 모여서서는 저들끼리 손을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죽은 자들에게서 색색의 빛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 북쪽 지방의 겨울 하늘에 나타난다는 오로라가 땅에서 펼쳐지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짝!
형형색색의 안개가 무릎 부근까지 피어올랐을 즈음, 셰비언이 손뼉을 쳤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가 멈춰 섰다. 잎사귀를 흔들던 바람도, 풀잎에 맺혔다가 떨어지던 핏방울도, 하늘을 유영하던 구름까지도.
셰비언은 오드리를 바위에서 내려 안개 속으로 이끌었다. 오드리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인도에 따라 걸었다. 밟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시체를 피해 발을 디디다 어쩔 도리 없이 흥건하게 고인 피 웅덩이를 밟아야 하는 순간이 오자 입술을 깨물며 멈칫거렸지만, 피가 신발에 묻지 않는다는 걸 안 뒤에는 대담하게 걸었다.
“자, 아가씨. 안개 속에 손을 집어넣어 보세요. 무언가 잡힐 겁니다.”
오드리는 셰비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과연 잡히는 게 없어야 할 허공에서 뭔가가 손에 감겼다. 차갑고, 서늘하고, 매끄럽다. 팔뚝을 타고 오르는 느낌에 놀라 안개에서 손을 빼자, 손가락 굵기만 한 가느다란 초록색 뱀이 그녀의 팔에 감겨 있었다. 눈은 흑요석처럼 까만데 날름거리는 혓바닥은 기이하게도 은빛이었다.
뜨거운 남쪽 도시, 만탈락에서 자라면서 수없이 많은 뱀을 보았고 독사의 위험성도 충분히 알고 있었던 오드리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배, 뱀이잖아!”
오드리는 기겁하고 팔을 털어댔지만 뱀은 떨어지질 않고 그녀의 팔에 꼭 붙어 있었다. 어떻게든 떨쳐 내려 애써봐야 소용없다는 것처럼, 아주 찰싹 달라붙는다. 오드리는 제 앞에 서 있는 셰비언에게 도움을 청했다.
“떼줘!”
“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는데, 아가씨는 역시 땅요정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네요. 그 뱀이 아가씨에게 해 끼칠 일은 없어요, 걱정 마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기해!”
“저기 선 자들이 바로 전쟁 이전의 인간이에요. 그들은 죽은 다른 종족에게서 마력을 갈취해 자신들과 섞었어요. 마력은 생명력이기도 하지만 혈통이기도 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지른 일이었죠.”
오드리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셰비언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팔에 감긴 뱀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뱀은 저가 고양이라도 되는 양 그의 손가락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피웠다.
“인간의 마법사들 전부가 동의한 일이었으니, 한 종족이 사멸할 때마다 인간은 조금씩 강해졌어요. 그리하여 종족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항상 바닥에 엎드려 눈치만 보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죠.”
하늘을 꽉 메우고 있던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빛이 닿는 곳마다 무릎까지 끼어 있던 안개가 점점 옅어지고, 호숫가에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도 자취를 감췄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텅 비었던 호숫가는 곧 인간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드리와 셰비언은 다양한 차림을 한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활기차게 오가는 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한 사람들이 마치 유령처럼 그들을 통과해 지나갔다.
얼어붙은 오드리의 앞에서 셰비언이 웃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다른 종족을 모두 잡아먹고, 인간은 승리했어요.”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어.”
“마법사들에게서나 전해지는 얘기니까요. 제가 모른다고 했더니, 워커 녀석이 얼굴이 허예져서는 하던 연구도 멈춰놓고 얘기해 주던데요.”
셰비언은 그날의 워커를 떠올렸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느냐며, 어떤 스승인지는 몰라도 직무유기라고, 당장 협회에 알려 자격을 빼앗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었다. 그리곤 얼굴에 묻은 기름은 닦을 생각도 않고 셰비언을 앉혀놓고 속성 강의를 했다.
‘알아들었어? 지금의 인간은 예전에 존재하던 종족들을 모조리 합해놓은 것과 마찬가지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잔혹한 짓이었고, 마법사들이 져야 할 원죄야. 그러니 우리는, 마법사는 전설을 그저 전설로 취급해서는 안 돼.’
워커에게서 전설의 뒷이야기를 듣고 난 뒤, 셰비언은 로렐라이의 직원들을 표본으로 삼아 그들의 마력을 확인하러 다녔다. 난데없이 그에게 손을 잡히고 당혹스러워하던 인간들의 마력은 하나같이 기이한 꼴을 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잘 정돈된 육체 안에 가지각색의 마력들을 갖고 있었다. 어디서 기인했는지까지 뚜렷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많게는 수십 색의 마블링 물감을 뒤섞어 놓은 듯한 마력들은 어딘지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저 꼴이 되도록 살아남으려 노력했구나.
수없이 많은 종족의 마력을, 피를 게걸스레 삼키고서도 인간의 겉모습을 유지했구나.
엉망으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대단한 솜씨다.
정말이지, 인간의 옛 마법사들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그 뒤에 이어진 결론이라는 게 당장 오드리를 찾아가 마력을 안정시켜야겠다는 결심이었고 세상에 치료법을 알릴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 그녀와 같은 증상을 겪는 누군가는 그의 무심함을 비난하기도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나. 어차피 어지간한 마법사는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동의가 없었음에도 타인의 문장을 다루고, 시험할 겸 흘려 넣은 마력을 퉁겨냈던. 그와 동시에 환절기의 열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호되게 앓던 창백한 낯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찾아가기 적합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 따위는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마력량도 꽤 돼요.’
흘리듯 지나쳤던 말이 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마법사의 혈통을 타고난 건 아니지만, 특별히 마법에 예민한 종족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게 틀림없었다.
본래는 이렇게 급하게 끌고 올 생각이 아니었다. 다급히 달려가긴 했어도 낯익은 정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성이 되살아났으니까. 그래서 바로 돌아가려 했지만, 평소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어디에 뒀는지 쪼그려 앉아 우울해하고 있는 오드리를 보자마자 그런 다짐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어떻게든 쓸모 있는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좋았을걸, 그 순간 생각난 거라곤 다른 쪽으로 정신을 돌려야겠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급히 떠올린 화제라는 게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던 오드리의 마력에 대한 얘기였다.
‘나는 왜 이렇게 말주변이 없어서…….’
셰비언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는 오드리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본 적 없이 듣기만 한 이야기를 구현해 내려다보니, 지나치게 잔인한 꼴을 보게 하고 말았다. 연습이라도 한두 번 하고 왔으면 좀 나았을 것을.
“있지도 않은 스승이 워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니까요.”
“그렇게 웃으며 말하기에 너무 끔찍한 얘기 같은데.”
“어쩌겠어요. 그게 생존 본능인데. 다른 종족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해서 멸족할 위기에 놓여 있었으니, 뭐든지 다 할 수 있었겠죠. 저는 오히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고 이야기가 전승돼 왔다는 게 더 신기해요.”
“그런가…….”
“그보다 아가씨께서 너무 놀라셨을까 봐 저는 그게 더 걱정인데요.”
하지만 셰비언의 걱정과는 달리, 오드리의 조금 전의 끔찍한 광경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아무리 생생하다고 한들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 게다가 그저 보이기만 할 뿐, 소리도 냄새도 없고 죽은 자들의 생김새조차 낯설었다.
분명 지나던 길에서 고양이의 시체를 본 것만으로도 입맛을 잃어 식사를 걸렀던 때가 있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일이었다.
‘됐어, 어차피 지난 얘기야. 중요한 건 불안정하다는 내 마력 치료지.’
오드리는 풀 죽은 셰비언에게 불쑥 제 팔을 내밀었다. 오색 안개 속에서 대뜸 튀어나와 팔에 감긴 녹색 뱀이 아직도 팔뚝에서 꿈틀거렸다.
“아니, 괜찮아. 그러니까 그대의 말에 따르면 인간들은 옛 종족들의 마력을 갈취하면서 혈통도 함께 섞였고, 그 때문에 나한테는 땅요정의 피가 흐른다는 거지. 충분히 이해했으니, 이제 이 뱀이 무슨 의미인지도 좀 알려주겠어?”
“땅요정은 뱀을 자신들의 상징물로 삼았거든요. 인간의 몸에 갇혀 있던 뱀이, 제 동족들의 기운을 느끼고 뛰쳐나온 거죠.”
셰비언이 녹색 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아진 뱀이 살랑살랑 몸을 흔드는 꼴을 보며 오드리는 등에서 오싹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어느새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의 환영도 사라진 상태인지라, 뱀의 자그마한 비늘 조각이 햇살에 부딪혀 반짝이는 게 지나칠 정도로 잘 보였다.
“그럼 이게 내 안에 있던 거라고?”
“네. 이 뱀이 바로 아가씨의 마력이에요. 왜 떼어드릴 수 없었는지 이제 아시겠죠?”
오드리는 절로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셰비언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알지만, 방싯방싯 웃는 얼굴이 얄미워 미치겠다. 피부에 닿는 서늘한 감촉이 익숙해져 가는 것도 끔찍한데, 제 마력이라는 뱀이 정작 주인은 놔두고 셰비언에게 애교 피우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했다.
“그럼 이제 어쩌면 되지? 내 마력이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 확인만 하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였나?”
“그럴 리가요……. 잠깐 눈을 감아주실래요?”
“뭘 하려고 눈까지 감으라는 건데?”
코앞에서 전쟁터도 만들어냈었으면서, 이번엔 뭘 하려고 눈을 감으라고 하나. 의심으로 가득 차 물으니 셰비언이 헤실헤실 웃는다.
“뜨고 계셔도 상관없지만 분명 감고 싶어지실걸요.”
뜨고 있어도 된다는 말이 어째 더 무섭다. 오드리는 결국 눈을 감았다. 셰비언이 웃는 것도 같았지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전에 팔뚝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뱀이 닿는 면적이 점점 넓어지고, 무거워진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눈두덩을 덮고 힘을 주었다.
셰비언은 아예 고개마저 돌리고 있는 오드리를 보며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드리가 눈을 감은 순간부터 쑥쑥 커진 뱀은 이제 그의 손목만큼이나 몸통이 굵었다. 제법 커다래진 머리가 손에 뿌듯했다. 턱 아래쪽을 살살 문지르며 다정히 얼렀다.
“자, 착하지…….”
초록 비늘의 뱀이 온순하게 머리를 숙이고, 셰비언은 그 반들거리는 미간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닿은 곳에서부터 뱀의 비늘이 은빛으로 변해가는 게 아닌가. 셰비언이 자신의 마력을 쏟아부어 뱀의 성질을 바꾼 것이다.
셰비언이 뱀을 달래는 것처럼 뱀을 톡톡 두드리자, 흑요석 같은 눈만 빼놓고 전부 은빛이 된 뱀은 서서히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비슷한 덩치가 됐는데도 계속 두드리자 조금 반항하는 것 같긴 했지만, 곧 가느다란 은줄처럼 보이는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자, 이제 눈 뜨셔도 돼요.”
“……진짜지?”
“그럼요.”
오드리는 셰비언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셰비언이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팔을 저릿하게 만들던 무게감은 사라졌어도 섬찟한 감촉만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손목에 감겨 있는 건 거대한 뱀이 아니라 가느다란 은줄이었다. 무심결에 은줄에 손을 댔더니, 그게 꿈틀대며 다른 손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서늘하고 차가운 감촉이 순식간에 팔뚝을 타고 올라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으, 으, 으으으으으!”
뱀이 지나는 자리마다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데, 그게 또 지독히 소름 끼쳤다. 오드리는 비명도 못 지르고 혼비백산해서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옷 안으로 뱀이 들어간 상황이니, 체면이고 나발이고 생각할 겨를도 없다.
“아, 안 떨어져!”
“떨어지면 큰일이죠. 아가씨, 손 줘보세요.”
어째 말하는 꼬락서니가 믿음직스러운 구석은 하나도 없지만, 당장 급하니 얼른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에서부터 서늘한 한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고, 그 서슬에 피부 위에 남아 있던 간지러움이 죄다 쓸려나갔다.
한기를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꿈틀대던 뱀은 오드리의 심장 부근에까지 이르자 냉큼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따끔한 느낌에 놀란 오드리가 파드득 몸을 떨었지만, 셰비언이 워낙 손을 꽉 쥐고 있어 도망칠 수가 없었다.
눈물 고여 찰랑찰랑한 눈에 마음이 약해진 셰비언이 어린애 달래듯 오드리를 달랬다.
“끄집어냈던 걸 도로 집어넣는 과정이니,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본래 아가씨 뱀이라니까요.”
“젠장, 왜 하필 뱀인데. 내가 헨젤이라는 거 티내는 것도 아니고…….”
헨젤 백작가는 열쇠를 품고 똬리를 튼 검은 뱀을 문장으로 삼고 있었다. 만탈락에서 자라 뱀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오드리는 제 마력이 뱀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셰비언, 내가 부모님 중 어느 쪽 피를 통해서 이런 걸 물려받았는지 알아볼 방법은 없어? 미리 말해두지만, 내 외가 쪽의 사람들은 유독 단명하거든? 여자일수록 더! 혹시 모계에서 온 걸까?”
뱀이 파고든대도 워낙 얇은 실뱀이라 그런지 고통은 심하지 않지만, 심리적 저항감이 워낙에 높다. 오드리의 입이 점점 험해지고 있었다.
“그 외가 쪽 친척이 남아 있다면 어떻게 알아볼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다 죽고 남은 사람도 피가 흐릿하다면서요. 솔직히 말해서 아가씨 마력이 이런 체질을 타고 난 것도 굉장한 우연이에요. 다들 섞인 마력이 한둘이 아닌데 아가씨만 이렇게 한 가지 종족의 피가 진하다니요.”
“염병……. 내 동생도 이럴까?”
“그야 모르죠. 혹시 아가씨 동생분도 환절기마다 앓아요? 마력이 또래에 비해 유독 많다던가?”
“아니, 걘 건강 체질이야. 마력도 그럭저럭이고……. 그런데 그런 특성이 있으면 나처럼 한 가지 종족의 피가 진할 확률이 높은 건가?”
“제가 인간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확신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아녜요.”
아무리 옛 종족의 피가 진하대도, 아가씨처럼 특이한 마력을 가진 경우는 정말로 드물걸요. 셰비언은 꺼내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뱀을 달래는 것에 집중했다.
‘반항이 이상할 정도로 심해.’
오드리의 성질머리를 닮기라도 했는지, 바깥에서는 고분고분 온순하던 뱀이 일단 몸 안에 집어넣고 나니 미친 듯이 날뛴다. 셰비언의 인도에 순순히 따르지 않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게, 기가 막힐 정도로 뻣뻣했다.
셰비언이 오드리에게 쏟아붓는 마력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점차 강해지는 한기를 견디는 것도 벅차서, 오드리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겨울 눈 폭풍 속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것처럼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 언제까지, 해, 해야 해?”
셰비언은 입술을 깨물고 갈등에 휩싸였다.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것도 같은데, 오드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다. 본인도 어찌할 수 없을 만치 몸을 떠는 것도, 입술이 파랗게 질린 것도 좋은 징조가 아니니.
뱀을 넣으려 시도하기 전까지는 이 정도로 오래 끌 줄은 몰랐다. 땅요정의 마력을 다스리는 게 뭐 얼마나 힘들겠느냐 우습게 본 것도 있었고, 바깥에서 그랬듯 온순하리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것 같다는 것도 계산 착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정말로 계산 착오면, 그땐 정말로 오드리가 위험해질 것이다.
셰비언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상냥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눈부신 미모에 그런 웃음까지 지으니, 오드리의 경계가 일순 풀어지고 만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드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뭐, 뭐 하는 짓……!”
놀란 오드리가 퍼드득 몸을 떨었지만, 셰비언은 그에 상관치 않고 그녀의 등을 강하게 눌렀다. 맞닿은 가슴으로 심장이 펄떡대는 게 느껴졌다. 그 박동을 놓치지 않고 단숨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헉!”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의 번영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마력과 마법의 본질. 오드리의 심장은 셰비언이 주는 마력을 탐욕스럽게 받아 삼켰다. 주는 셰비언마저 놀랄 정도로 끊임없이.
‘분명 땅요정 계통의 마력이었는데 이게 무슨……!’
워커마저 그 양을 가늠하지 못했던 압도적인 마력이 순식간에 절반 이상 빠져나가고서야, 겨우 떨어져도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비할 틈도 없이 빠져나간 마력 때문에 눈앞이 허옇게 점멸하고 자꾸만 손이 떨렸다. 셰비언은 휘청거리며 오드리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한데, 그렇게 많은 마력을 냅다 받아먹었으면 셰비언보다 훨씬 팔팔해야 할 오드리가 힘없이 미끄러지는 것이었다.
“어, 어어…….”
셰비언은 바닥에 고꾸라질 뻔한 오드리를 겨우 감싸 안고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엉망으로 일그러졌던 시야가 겨우 깨끗해지고 귓가에서 울리던 이명도 가라앉았을 때쯤, 오드리가 몸을 움찔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깨어난 줄 알았는데, 그녀의 눈꺼풀은 굳게 닫힌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자꾸만 몸을 움찔대니, 이상한 일이다. 셰비언은 그녀의 뺨을 살살 두드려 가며 깨우려고 시도했다.
“아가씨, 일어나 봐요. 아가씨?”
오드리가 홱 몸을 일으켜 반듯하게 앉았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다. 잘못될 만한 일은 하지 않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셰비언이 더럭 겁을 먹고 오드리의 어깨를 짚은 순간, 오드리의 등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얇은 실내복의 등 부분이 부욱 소리까지 내며 찢어져 커다란 혹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훤히 드러났다.
셰비언이 뭔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혹의 표면이 마치 익을 대로 익은 과일이 벌어지듯 갈라지더니, 그 자리에서 새하얀 날개가 솟구쳐 나왔다. 몇 방울의 피가 셰비언의 입술에까지 튀었다. 무심결에 입술에 묻은 피를 핥자,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입안을 채웠다.
“……땅요정이 아니었어.”
셰비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오드리의 등에서 솟아난 날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크기는 오드리의 키보다 더 크고, 생김새는 박쥐의 날개를 닮았으나 그보다 훨씬 우아한 곡선을 가졌다. 색은 진한 우유 크림처럼 흠 없는 흰색이고, 만져 보지 않아도 그 매끄러움이 짐작되는 광택이 돌았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인상이지만 동시에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날개였다. 저 날개로 제대로 홰를 치며 날아오르면, 자그마한 체구의 오드리는 아주 쉽게 공중에 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날개는 금세 힘을 잃었고, 형체마저 유지하지 못하는 채로 희미해지며 사라졌다.
“내 잘못이야.”
셰비언은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기력을 잃고 넘어가려는 오드리를 추슬렀다. 몰래 침입한 게 아니라고, 자신을 속여가며 썼던 치유 마법이 이런 형태로 돌아오다니. 눈뜨지 못하고 날개를 접고 살던 용에게 빌미를 준 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던 인연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평소의 자신을 잃고 대책 없이 그녀에게 끌렸던 이유까지도.
그들은 동족이었다. 겉모습이 어떠하든, 피부 아래에 흐르는 마력의 계통만큼은.
마력을 실컷 퍼먹고서도 오드리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셰비언은 그녀에게 품을 내준 채 반듯한 이마를 쓰다듬었다. 오드리가 모르는 틈을 타 뱀, 아니 드디어 날개를 편 용을 찾아 그녀의 마력을 샅샅이 훑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그 워커조차 용의 마력은 겨우 한 줌에 불과했는데, 로렐라이의 이름을 문장으로 삼은 당신이 용의 마력을 이렇게나 품고 있다니.’
안정화 작업 전에는 몰랐지만, 오드리의 마력은 용에게서 기원한 것이었다. 그것도 뒤섞인 마블링 물감처럼 마력이 섞인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도가 높았다. 게다가 그녀의 마력은 눈치도 좋았고, 인내심도 있었다. 시작은 셰비언이 오드리에게 썼던 치유 마법이었을 테다. 마법사로 발현하지 못한 오드리의 육신 속에서, 순도 높은 마력은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 마침내 기회가 오자, 혹여 내쳐질까 미리 대비라도 한 것처럼 온순한 뱀인 척, 무해한 땅요정인 척 그를 기만하다 엄청난 양의 마력을 꿀꺽 먹어치웠다.
마력 주제에 놀라울 정도의 영악함이었다. 어쩌면, 주인이 하는 짓을 고스란히 배웠을 수도 있고. 멍청하다 못해 쇼핑에 넋을 놓은 망나니 흉내는 오드리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연기 중 하나가 아니던가.
‘하여간 마력도 꼭 자기 같아서는. 어쨌건 다행이야. 마법사의 재능도 없이 용의 마력만 품고 있다간 단명하기 딱 좋으니까. 설마 그 대대로 단명했다는 외가의 사람들도 같은 경우였던 건가?’
셰비언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오드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전히 용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꽤 즐거웠다. 오드리가 일어날 때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한데 일순간에 절반이나 되는 마력을 퍼준 여파가 뒤늦게 몰려오며 잠이 쏟아졌다. 셰비언은 자지 않으려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었으나,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오드리는 셰비언이 잠들고 얼마 후에야 눈을 떴다. 하도 무거워 돌덩이를 얹어놓은 줄로만 알았던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지만, 그걸로 끝.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 늘어진 채 눈만 깜빡거렸다.
시선을 약간 옆으로 돌리자,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잠든 셰비언의 얼굴이 보였다. 햇살을 뒤집어써서 더욱 눈부신 은발을 사방으로 흩뜨리고 세상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를 볼 때마다 절로 시선을 빼앗기던 눈동자는 얌전히 눈꺼풀 안에 숨겨져 있는데도, 숨 막힐 듯한 미모는 여전했다.
오드리는 자신이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어쩐지 살짝 따뜻한 게 기분 좋더라니, 햇살이 아니라 체온 덕분이었던 듯하다. 항상 서늘하던 체온이 왜 지금은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여긴 그의 공간 안이니 하고자 하면 뭔들 못하랴.
사람을 침대로 쓰고 있었으니 눈을 뜬 이상 얼른 일어나는 게 맞는 것이련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게 힘이 없고 상대는 잠들어 있으니 좀 더 있어도 되지 않겠느냐 싶었다. 상대의 반응이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저 눈부신 미모를 감상할 좋은 기회기도 하고.
‘이상도 하지, 이렇게까지 호소력 있는 외모라니.’
이디케와 다이앤은 물론이고, 로렐라이의 고용인들 모두가 입을 모아 셰비언을 아름답다 했다. 성별, 연령, 출신지와 사회적 배경마저 다른 사람들이니 그만큼 취향도 다양할 텐데도. 그 기이함이란, 어쩐지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는 전설 속의 요괴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셰비언이 약간 이상해 보일 정도로 상식이 부족한 것도, 어쩌면 저 놀라울 정도의 미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길쭉한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으면, 조금 전 뭔 짓을 했건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마니까. 하여간 외모란 정말로 강력한 자산이었다.
‘하긴 뭐 나라고 다른가…….’
브란젤에서는 우유처럼 흰 피부를 최고로 친다는 걸,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랄리우스를 그리워하는 만탈락 주민들의 마음을 살 목적으로 피부를 태웠다.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며 말리던 락시 부인과 자신을 두고 미쳤다 욕하던 이디케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리천장이 달린 방을 만들었다.
검은 머리칼은 모자 속에 숨기고, 가무잡잡하게 태운 피부를 드러내고, 코르셋을 차지 않는 남부식 드레스를 입은 채로 만탈락의 거리를 걷고 사람들과 만났다. 당신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옛 주인의 후예가 이곳에 있노라, 과시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공식적으로 주어진 권한은 한정적이었으나 그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말 한마디, 눈짓 한 번이면 제 뜻대로 사람들이 제꺽 움직여 주는 쾌감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그게 바로 권력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빌려서 부리는 권력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성년까지는 앞으로 삼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일은 순조로웠고, 이대로라면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에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좇는 눈동자가 뜨겁다. 오드리는 왕비궁의 무도회장이 아닌, 국왕의 정전에 선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이제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조금만 더 하면…….”
“네, 조금 더 계셔도 돼요. 자세는 편하세요?”
내내 자는 줄 알았던 셰비언이 대번에 말을 받았다. 오드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과 시선을 마주치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다른 게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에. 아직 익지도 않은 과일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입맛을 다신 것과 다르지 않은 추태지 않은가.
하나 셰비언이 그런 그녀의 내심을 알 리가 없다. 그는 혹시 불편한가 싶어 몇 번 더 묻다가, 오드리에게 그만 물으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질문을 그만두었다. 셰비언이 입을 다물자 어색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셰비언은 그 와중에도 오드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까는 안 보였던 용이 혹시나 이번에는 보일까, 어쩔까. 지금은 순백의 물감처럼 하얗게 보이는 마력 어딘가에 흰 용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사정 모르는 오드리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었다. 어떻게든 다른 곳을 바라보며 몸에 힘이 돌아오길 기다리는데, 자꾸만 얼굴이 간지럽다. 모른 척 계속 견디기엔 지나치게 신경이 쓰였다.
“……대체 언제가 되어야 기력이 돌아오는 거지? 난 빨리 일어나고 싶은데.”
“아, 그건 금방 괜찮아지실 거예요. 지금 아가씨는 마력으로 채워진 욕탕에 누워 계신 거나 다름없으니까.”
“난 마법사가 아니잖아. 마력과 기력이 무슨 상관이야?”
셰비언은 그 천진난만한 질문을 받고 길쭉한 눈을 접으며 웃었다. 어째 이 시대의 마법사들은 죄다 잊고 있는 것 같지만, 마력과 마법은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전하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 종족전쟁 시기에 그 놀라운 인간의 마법사들이 왜 타 종족의 마력을 갈취했겠는가.
‘하긴, 그 덕에 번식력만은 마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발달했으니 잊을 만도 한가.’
그는 산발로 흐트러진 오드리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모아 정리했다. 손끝에 스치는 목덜미의 체온이 자신과 엇비슷했다. 뱀인 척, 땅요정인 척 가장하고 제 마력을 퍼먹은 용이 괘씸하지 않은 게 아닌데 어쩐지 묘하게 기분이 좋다.
“마력의 본질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있어요. 기다려 보세요, 금방 좋아질 테니까.”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만탈락 저택의 오래된 도서관에 걸고 말하건대,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마법사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건가?”
“세상엔 잊혀진 게 좀 많죠.”
“그냥 좀 가르쳐 주면 어디가 덧나나?”
“종족전쟁 뒷얘기 해드린 것만으로는 부족하세요? 제가 마법사도 아닌 아가씨께 그 얘길 해드린 걸 워커가 알면 절 죽이려고 들 텐데요.”
셰비언이 능청을 떤다. 오드리는 그 얄미운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허탈하게 눈을 감았다. 화났던 마음마저 스르르 풀리는 얼굴이었다.
“마력의 본질이 생명력이라 이거지. 그래서 그렇게 날 끌어안고 마력을 쏟아부었나 보지? 어찌나 꽉 안았는지,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
“어, 그건……. 아무래도 손을 통해 마력을 넣는 것보단, 심장으로 직접 넣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아서 그랬, 불쾌하셨어요? 역시 미리 말을 해야 했는데, 너무 급해서……. 심장은 굉장히 튼튼한 마력 통로 중에 하나거든요! 손도 뭐 나쁘진 않은데 그래도 심장에 비하면…….”
안 그래도 마음에 걸리던 부분을 지적당한지라, 셰비언은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꾸만 길어지는 변명을 들으며 오드리가 키득키득 웃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그가 자신을 천하의 죽일 놈으로 만든 다음이었다. 색 옅은 입술이 불쑥 튀어나왔다.
“……놀리니 재밌으세요?”
“치료의 일환이었다는 걸 알아. 내가 계속 덜덜 떨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쓴 거겠지. 변명은 잘 들었어.”
“너무하십니다.”
“뭘 너무해? 내가 그대를 좀 놀렸기로서니, 하룻밤 꿈과 같은 여행일 거라고 해놓고 끔찍한 꼴을 보게 한 그대만큼 너무할까?”
오드리는 아까보다 몸에 힘이 돌아온 걸 느끼며 까칠하게 대꾸했다. 필요했으니 보게 했으리라 생각하고, 본 것을 후회하지도 않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게 틀림없을 풍경이긴 했다.
“음…….”
이번에야말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셰비언이 할 말을 잃고 어물거렸다. 그러면서도 오드리가 그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자 황급히 부축해서 앉혀준다. 지극히 정중한 손길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아서, 오드리는 스스럼없이 그에게 몸을 기댔다.
“치료는 끝난 거지?”
“네. 축하드려요, 아가씨. 이제 환절기마다 앓던 건 끝났어요.”
오드리는 셰비언의 축하를 귓등으로 흘리며 눈앞에서 화려하게 흔들리던 마법망을 떠올렸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얇은 거미줄과 이슬처럼 맺힌 마력들, 귀를 간질이고 몸을 떨게 하던 황홀한 음악.
그런 걸 들으면서도 어째서 마법사들이 예술가가 되지 않는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목숨에 위협이 된다 할 때는 보지도 않으려 애써놓고는 다 끝났다 하니 이리 아쉽다.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았는데.”
문득 어머니가 생각났다.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지방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신기할 정도로 눈 내리는 풍경을 좋아하던 분. 랄리우스의 여자들은 본래 단명하는 편이라지만, 그녀의 삶은 슬플 정도로 짧았다. 어쩌면 그녀에게도 셰비언의 치료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저 짐작일 뿐인데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졌다.
“……가끔 아쉬워질 것 같아.”
“별걸 다 아쉬워하시네. 그것보다 더 멋진 풍경을 보여드릴 테니까, 이제 일어나세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오드리는 엉겁결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바로 쓰러져 버릴 줄 알았는데, 다리는 떨리지도 않고 굳건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자, 이걸 걸치고 따라오세요.”
오드리는 제 옷의 등 부분이 너덜너덜하다는 걸 아직 몰랐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매끈한 등을 훔쳐보는 꼴이 된 셰비언은 다급히 제 로브를 벗어 오드리에게 걸쳐 주었다. 키 큰 셰비언의 전신을 다 가리던 옷인지라, 오드리는 부모님의 옷을 훔쳐 입은 꼬마가 되고 말았다.
오드리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소매를 펄럭거리며 불평했다.
“이걸 입고 어떻게 걸으란 말이야?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어도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다만.”
“글쎄요. 제가 보기엔 아가씨께 딱 맞는 로브입니다만.”
셰비언이 빙글빙글 웃으며 오드리의 옷자락을 정돈했다. 오드리는 뭐라 말을 더하려다가, 어느새 로브가 자신의 몸에 딱 맞게 줄어든 것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난쟁이부터 거인까지 입을 수 있겠어.”
“제 공간이잖아요. 제 물건이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요.”
셰비언이 어깨를 으쓱이고 앞장섰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수풀을 헤치며 걷는 걸음에 망설임이 없다. 오드리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셰비언의 등을 따라 걷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저 걷고만 있는 데도 기차에 탄 것처럼 주변 풍경이 빠르게 변했다. 세월을 가늠하기 힘든 거목들이 연달아 뒤로 밀려나고, 오드리의 머리만 한 꽃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머리가 파랗고 날개가 노란 새들이 오드리의 어깨에 앉았다가 금세 날아갔다.
“다 왔어요.”
“벌써?”
오드리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에 걸리는 것도 없고 숨이 차지도 않는 데다 계속 바뀌는 주변 풍경에 취해서 몰랐는데, 어느새 야트막한 언덕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숲이 갑작스레 끝나며 시야가 탁 트였다.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쥐고 몇 걸음을 더 가다 멈춰 섰다. 그녀는 한 발만 더 가면 까마득한 절벽이라는 걸 깨닫고 놀라 숨을 삼켰지만, 그보다 눈앞에 펼쳐진 경치에 먼저 마음을 빼앗겼다.
“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은 완만한 곡선이었다. 발아래 절벽에서부터 지평선까지 이어진 짙푸른 수해(樹海)에는 옅은 안개가 흰 베일처럼 휘감겨 신비롭고, 이제껏 의식하지도 못했던 바람이 산발한 머리칼을 곱게 빗었다.
오드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마음껏 바람을 즐겼다. 슬쩍 옆에 다가와 앉은 셰비언이 그녀의 품에 체리꽃이 풍성한 가지를 안겼다. 난데없이 봄을 선물 받은 오드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손짓에 따라 오드리 곁에서 나무가 자랐다. 자그마한 싹이 돋고 가느다란 묘목이 되었다가 곧 커다란 거목이 된다. 사방으로 펼쳐진 가지에 새하얀 꽃이 다닥다닥 피었다.
“왕궁의 정원에서 유독 좋아하셨던 거 같아서.”
“이제 와서 난 꽃은 별로라고 해 봤자 믿어주지도 않겠군.”
“어……. 그럼 뭘 좋아하시는데요? 저번에 보니까 보석도 별로이신 거 같던데.”
셰비언이 당황하며 물었다. 오드리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제 품의 꽃가지를 쓰다듬었다. 광활한 수해를 앞에 두고 들어본 적 없는 질문을 들으니 어쩐지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지금 내가 하는 말, 밖에서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알려주지.”
“하, 참……. 맹세라도 해드려요? 여긴 바로 문장 속의 세계라 맹세할 필요도 없지만.”
“그런 자세 아주 좋아.”
오드리는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셰비언에게서 말이 샐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주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는 장소다. 그래서 그녀는 보기 드물게 솔직해졌다.
“나는 권력이 좋아.”
“……네?”
“삼십이 년 전, 왕국에 반란이 일어났어. 단번에 일소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오래갔지. 아무래도 멜브란트는 해상 전력이 약한 면이 있어서……. 쯧. 아무튼, 그때 수많은 귀족이 목을 잘렸고 그들의 작위와 영지는 주인을 잃고 왕실에 반환됐어.”
오드리의 외가인 랄리우스도 그 반란의 여파에 휘말려 몰락한 케이스였다. 안 그래도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재산을 야금야금 까먹고 있던 차에 그나마 투자했던 사업들이 반란 이후 죄 망해 버리며 거대한 빚을 지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반란의 진압 과정에서 랄리우스 후작이 사망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후계자 밀리나 랄리우스에게는 빚을 갚아줄 부유한 신랑감이 필요해졌다.
재산은 없어도 랄리우스의 이름값이야 그대로 남아 있던 때이니 침 흘리는 혼처가 오죽 많았겠냐만, 밀리나는 뉴터 헨젤을 자신의 신랑감으로 골랐다. 헨젤에는 이득이어도 랄리우스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위험한 결정이었다.
명문 귀족끼리의 결합이니 밀리나의 아이가 랄리우스를 이을 수는 있겠지만, 만약 밀리나가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들을 둘 이상 낳지 못하면 그땐 대책이 없었다.
다들 레이디 랄리우스가 헨젤 공자에게 홀딱 빠진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혹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저런 도박을 하는 거라고도 했고. 오드리는 후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밀리나가 뉴터에게 반했다기엔 그녀는 남편에게 지나치게 차가웠고, 그들 부부의 결혼생활은 최악이었다. 오드리와 하델이 태어난 것조차 놀라울 정도이니 말해 뭐할까.
게다가 둘을 낳고 난 뒤 시름시름 앓던 밀리나는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니, 그녀의 도박은 실패로 끝났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러함에도 밀리나는 딸인 오드리에게 만탈락을 물려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무려 오스미다 왕비를 공증인으로 삼아 유언장을 작성했고, 당시로써는 놀랍게도 변호사까지 고용해서 장례식장 한복판에서 수십 개 조항의 내용이 담긴 유언장을 낭독하게 했다. 헨젤 백작이 지금껏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인 것도 그 유언장 때문이었다.
오드리는 어머니를 떠올리고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기억 속 어머니는 아픈 몸이 무색하게 유쾌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인 동시에 엄격하게 오드리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빚을 갚아줄 만한 신분 맞는 사람이 드물었대도 너무 도박이었어……. 나라면 절대 그렇게 안 했을 텐데. 신분은 좀 처지더라도 돈이 있는 사람을 데릴사위로 들였다면 랄리우스가 지금 같진 않았을 걸…….’
그래도 밀리나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만탈락을 헨젤 가문에 넘기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소유로 지켰던 걸 보면, 그 파격적인 결혼에도 뭔가 얻을 게 있긴 있었던 게다. 새삼 거기까지 되짚어 생각하던 오드리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어머니는 대체 뭘 얻었지? 어딜 봐도 랄리우스가 손해만 보는 결혼이었는데 왜 하셨던 거지? 결혼계약서라도 좀 찾아봐야 하나? 하티의 신전에서 계약서를 보관해 줄 텐데, 거기에 결혼계약서도 포함이 되던가……?’
이런 복잡한 속내를 알 리 없는 셰비언이 잠시 말을 잊은 오드리를 보챘다.
“그래서요? 그 작위와 영지가 아가씨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하여간……. 나는 그 작위를 사서 집을 나갈 거야. 그리고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서 정전에 설 거야.”
“오, 그러려면 얼마나 모아야 하는데요?”
오드리는 셰비언의 순진한 반문에 그만 웃어버렸다. 평소엔 상식 없는 게 그리 불편하더니, 지금은 그게 참 기껍다. 자신의 목표를 두고 불가능한 일이라 단언하지 않는 사람을 만난 게 대체 얼마만의 일인지.
그 이디케조차 처음 들었을 땐 오드리더러 미쳤다 말했고, 지금도 그게 될 거라 믿지 않는데. 그저 많은 돈을 모아서 헨젤가에서 독립하려고 한다고만 믿고 있는데. 코르셋을 쉬이 포기하지 못하고, 가끔 결혼을 종용하기도 하는 것도 그래서인데.
“많이 모아야 해. 아주, 많이.”
“로렐라이는 꽤 부자인 상단이지 않아요?”
“그거 통째로 팔아도 부족해. 아무래도 여자가, 그것도 미혼 여자가 작위를 사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거든. 처음은 언제나 비싼 법이라서.”
“열심히 도와야겠네요.”
셰비언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리의 목표를 듣고 나니, 그녀가 왜 로렐라이에 목을 매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무리 태생이 귀족이라도, 국왕의 앞에 설 정도의 작위를 사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태도는 오드리에게 몹시 의아한 것이었다.
그대와 나 사이에 무엇이 있어서 그리 성실하게 날 돕겠다 하는가.
오드리는 슬쩍 셰비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대체 왜?’ 그렇게 묻는 듯한 시선을 알아챈 셰비언이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아가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가 발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기묘한 인연을 느꼈죠. 만약 아가씨에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었다면, 분명 아가씨의 문장은 내 것과 쌍을 이뤘을 겁니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건 마치, 서로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통제 잃은 심장이 멋대로 쿵쿵대며 전신으로 피를 돌렸다.
얼른 이 괴상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떠나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어서, 어서 빨리. 불가해한 감정에 발목 잡히기 전에,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