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천재를 만났다
「“타우레드 후작 영애의 허리가 그렇게 가느다랗다며?” - 브란젤의 어느 의상실에서.」
회중시계는 신사들의 장신구였다. 그러니 시곗줄도 마찬가지. 시곗줄을 파는 상점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진열장을 들여다보는 오드리의 존재는 여러모로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오드리는 흘끗흘끗 바라보는 시선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카프러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베텔 경, 경이 보기엔 어때요?”
“안 어울립니다.”
“이건요?”
“그냥 새로 주문 제작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카프러스가 보기에 오드리에게 어울리는 시곗줄은 이 가게에 하나도 없었다. 어디 이 가게뿐인가. 벌써 몇 군데나 되는 가게를 돌면서 창고를 뒤엎었는데 그럭저럭 타협할 만한 것조차 없으니 차라리 주문 제작을 하는 게 빠를 터다.
오드리라고 왜 그걸 모르겠냐만, 주문 제작을 한다고 해도 그녀가 원하는 스타일의 시곗줄이 나온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었다. 몰랐을 때엔 그저 디자인화를 그려 갖다 주면 되겠지, 했지만 정작 눈으로 보고 나니 대단히 회의적이 되고 말았다.
‘아니 뭐 이미지라도 비슷해야 장인을 골라서 주문하지…….’
정말 그랬다. 오드리가 원하는 것처럼 섬세하고 정밀한 경향의 시곗줄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 바엔 가게를 통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인 길드를 직접 뒤져 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오드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궁리를 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오드리 언니!”
“어머, 네이기스. 오랜만이네요.”
“일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보니까 정말 좋네요. 얼굴이 창백한데 무리하는 건 아니죠?”
입 발린 소리라도 걱정해 주는 말은 언제나 듣기 좋다. 하물며 몇 번이나 병문안을 왔었던 네이기스라면 더더욱 그렇다. 오드리는 스스럼없이 손을 잡아오는 네이기스와 몇 마디 말을 나누다 그녀의 뒤에서 그림처럼 서 있는 신사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신사의 이름은 에이쉬 그웬. 그웬 백작가의 장남이며 네이기스의 오라비이자 오드리의 사촌형제였다. 네이기스와 꼭 닮은 적갈색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넘긴 그는 이제껏 오드리에게 영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이번엔 어째 조금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오드리, 시곗줄에 관심이 있나 봅니다.”
“조금은요.”
“남부 시……. 아니, 만탈락에서 오신 분치고는 유행에 민감하시군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오드리가 영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자 에이쉬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 살론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는 회중시계를 차고 다니는 게 유행이라나. 그러면서 진열장에 있는 시곗줄 중 몇 가지 제품을 골라냈다.
“아마 이것들이 최신 유행에 해당하는 것들일 겁니다.”
“흐응……. 내 취향은 아니네요.”
하나같이 괴상할 정도로 남성적인 제품들이었다. 단조롭고 굵직한 사슬들은 오드리의 취향에서 해와 달만큼 떨어져 있었다. 살론에서 본 것보다 조금 떨어지긴 해도 최신 유행인데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느냐고 에이쉬가 말을 보태는데, 네이기스가 그런 오라비를 가로막았다.
“언니 마음에 안 든다잖아요. 거기 사교계 유행 강요하지 말아요. 하여간 오라버니는 살론 거라면 다 최고라고 하지. 어휴, 그럴 거면 뭐 하러 돌아왔어요? 그냥 거기 있다가 살론의 영애랑 결혼하고 살지!”
“네이기스, 그건 좀…….”
“시끄러워요. 그웬 백작가에 남자가 어디 오라버니 한 명뿐이래요? 자꾸 그따위로 굴면 내가 사교계 영애들 사이에 소문 다 내버릴 거예요. 그웬 백작가의 에이쉬 공자는 사교 모임에 다녀오면- 읍! 읍읍!”
“오드리, 우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에이쉬가 네이기스를 질질 끌고 순식간에 가게를 빠져 나갔다. 한차례 폭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시선이 쏟아졌다. 시선을 무시하는 것에 도가 튼 오드리마저도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결국 오드리는 시곗줄을 사지 못하고 그대로 저택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경, 미안해요. 시곗줄은 다음에 보죠.”
“아닙니다. 백번 봐도 소용없을 것 같던데 주문 제작 하시죠. 혹시 압니까? 아가씨께서 만들어내신 시곗줄이 살론에까지 퍼질지.”
“불쾌하셨나 봐요.”
“귀족만 아니었으면 제 손에 이 몇 개는 빠졌을 겁니다.”
가게 안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잘 참더니, 정작 뒤에서는 경을 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불끈 주먹까지 쥐어 보이는 모습이 엔간히 화가 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귀족이라는 작자가 출신지를 이유로 사람을 평가하다니요. 명예도 존중도 모르는 자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웬 영애는 새삼 다시 보았습니다. 자기 의견을 그렇게 명확히 말할 줄도 아는 분이었군요. 아무튼 다음에 또 그러면 절대 가만 안 있을 겁니다.”
멜브란트를 살론과 비교하여 평가 절하한 것이 불쾌한 줄 알았더니, 오드리가 가꿔온 만탈락을 그저 남부 시골이라고 무시했던 게 더 불만이었던 게다. 정작 오드리는 그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면역이 되었는데.
“경도 참, 신기한 것에 화를 다 내네요.”
“아가씨께서 화내지 않으시니 저라도 화내는 겁니다. 세상엔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면 고마운 줄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같은 짓을 또 하는 놈들이 있는 법입니다.”
“고마워요. 그래도 다음번에도 오늘처럼 참아줘요. 경이 말하는 그런 자들일수록 지적을 고깝게 듣고 보복을 생각하니까. 난 내 사람 다치는 거 정말 싫어해요.”
카프러스를 바라보는 오드리의 눈빛이 봄바람처럼 보드랍다. 괜히 부끄러워진 카프러스가 연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피올이었다.
헨젤가에 꿀 발라놓은 것도 아니고, 겨울보리 수확하느라 진을 뺐으면 그냥 좀 쉴 만한데 웬 방문인지. 사실 사방에 인맥을 쌓는 것이 귀족 영애가 해야 할 일이고, 피올 정도면 충분히 수비범위 안에 들어오는 인물이긴 한데……. 어째 보석 배달 이후로는 그 반반한 낯짝조차 꼴 뵈기 싫어 오드리의 눈이 샐쭉해졌다.
“보티안 씨, 왜 또 왔어요?”
“제가 뭐 오면 안 되는 곳에 온 것도 아닌데 너무하십니다. 아 잠깐, 잠깐만. 쫓아내지 마시고. 다른 게 아니라, 워커가 편지 좀 전해달라더군요.”
“……누가요?”
“워커가. 레이디 헨젤께. 편지 좀. 전해달라더군요.”
피올이 빙글빙글 웃었다. 그는 보석 경매장의 도난 문제가 해결돼서 아주 약간의 틈이 생기자마자 워커와의 친분 다지기에 들어갔다. 말브레 극장 사건과 겨울 보리의 추수로 바쁘던 와중에 대단한 행동력이었다.
셰비언을 통해 만난 워커는 좀 이상한 연구에 빠져 있는 괴짜이긴 했지만, 그 실력을 생각하면 괴상한 취향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가치가 있었다. 무려 그 로렐라이 상단의 수식 제작 마법사 아닌가. 친해져 보니 나쁜 녀석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가씨와 대체 무슨 관계인지 확실히 해보고 싶어서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온갖 수단을 다 써봤는데 전부 실패했습니다. 그냥 특급 고객과 상단 마법사 사이의 일반적인 교류일 뿐이라는데……. 말은 많은데 입이 무겁다니 저에겐 천적 같은 녀석입니다. 아무튼, 이것 좀 전해달라던데.”
전할 게 있으면 이디케를 통하면 될 것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심지어 피올이 내미는 건 멀쩡한 편지라기보다는 대충 접은 쪽지에 가까웠다. 피올의 앞에선 표정 관리 따위 하지 않는 오드리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안 봤습니다. 저희 어머니 치맛자락에 대고 맹세합니다.”
“그런 거에 맹세해 봐야 누가 믿는다고.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보지 않았을 걸 알면서도 괜히 투덜거려 본다. 피올은 핀잔을 들으면서도 그저 웃는 얼굴이었다. 오드리는 그 자리에서 쪽지를 폈다. 어찌나 급하게 썼는지, 글씨가 괴발개발이었다.
<천재를 만났습니다.>
천재.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혹자는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자신이 재능을 보이는 분야를 찾아내지 못해 범인으로 그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뭐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많이 먹기의 천재, 오래 자기의 천재 등도 천재라면 천재 아니겠나. 어쨌건 재능과 노력과 성과와 시대적 요구까지 모두 맞아떨어지는 천재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는 게 현실이지만.
워커는 오드리가 이제껏 만난 사람들 중에 천재라는 말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 비록 그 천재성의 80%를 비마법 비행도구 개발에 쓰고 있긴 하지만, 나머지 20%의 재능만으로도 지금의 로렐라이를 지탱하고 있었으니까.
셰비언도 천재일 게 분명하지만, 오드리는 그가 알룬드의 목걸이 도둑이라는 확신을 마음에 품은 뒤로는 그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를 떠올리면 종일 마음이 심란해졌다. 흰 꽃잎이 나부끼는 정원에서 부드럽게 웃는 얼굴과, 약간 서늘한 체온, 목덜미에 닿던 숨결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렇다보니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실수도 잦아졌다. 정말 짜증스런 일이었다. 쪽지를 접어 챙기는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뭐랍니까?”
“천재를 만났다네요.”
“또 개소리를 했군요. 하여간 웃기는 친구입니다. 언젠가는 인간이 하늘을 정복할 거라느니, 뭐라느니……. 인간에게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날아서 바다를 건너겠다는 꿈을 꾸는 걸 보면 참 신기합니다. 솔직히 워커만 한 마법사는 처음 봤는데, 그만한 마법사들은 다 그렇게 대책 없이 꿈만 꾸는 족속인가 싶을 정도예요.”
오드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의 마법 동력을 개발한 바일런 섀덤은 그 꿈을 이룰 때까지 무수한 모욕과 가난을 감내했다고 들었다. 기차가 개발되고 본격적으로 상용화될 때까지 걸린 시간도 수십 년이었는데, 워커는 무려 비마법 비행도구로 대양횡단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욕할 때는 몰랐는데, 남이 욕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오드리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도 잊고 워커의 편을 들었다.
“혹시 모르죠. 기차의 선례가 있는데.”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 회의적이라서요. 그래도 혹시 워커 놈이 성공할 거 같으면 미리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투자 좀 하게요.”
오드리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피올은 의외로 괜찮은 대화 상대였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을 불려보고 싶은 피올은 이곳저곳 관심을 가지는 곳이 꽤 많았고, 치안대는 괜찮은 정보가 심심찮게 들어오는 곳이었다. 오드리는 허가받지 않은 실험을 하다가 사고를 내고 치안대에 끌려오는 무소속 마법사가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그렇게 멋대로 실험을 하도록 왕궁마법사들이 내버려 두지 않을 텐데요?”
“그야 그렇죠. 상단에서야 나중에 마법사협회에 어느 선까지는 내용을 공개하고 사고도 알아서 책임지는 조건으로 허가를 면제받는 거고……. 본래 개인이 마법 실험을 하려면 먼저 내용을 제출하고 허가를 받는 게 정상이니까요. 문제는 그거죠. 인력난.”
“아아, 인력난……. 이해했어요.”
“뭐, 대부분이 쓸모없는 것들이긴 해도, 가끔 눈이 번쩍 뜨이는 연구가 나오기도 합니다. 치안대원들 중에는 그런 연구를 골라서 투자하고 이득을 얻는 사람들도 있어요. 베텔 경, 관심 있으면 얘기만 하시죠. 바로 연결해 드릴 테니까.”
카프러스까지 끼어서는 제법 투자 가치가 있어 보이는 연구들에 대해 한창 말을 나누고 있던 중, 새로운 손님이 왔다.
“아가씨, 레이디 그웬께서 오셨습니다.”
“……으으음. 보티안 씨, 네이기스와는 안면이 있죠? 잠깐 같이 봐도 되겠죠?”
“예. 저야 상관없습니다.”
피올도 동의했겠다, 오드리는 네이기스를 바로 불러들였다. 선객이 있는 걸 알면 그 눈치 없는 아이도 할 말만 딱 하고 돌아가겠지, 싶어서. 결과적으로 그건 오드리의 착각이었다.
에이쉬와 그렇게 나가더니 돌아가서 한판 거하게 싸운 듯 퉁퉁 부은 얼굴로 들어왔던 네이기스는, 피올을 보자마자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흘끔 눈치를 보니 피올이라고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 듯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웬 백작가의 네이기스입니다. 치안대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뵙다니, 놀랍기 그지없네요.”
“예. 반갑습니다, 레이디 그웬. 치안대원 피올 보티안이 인사 올립니다.”
피올의 인사는 여전히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웠다. 멀끔하니 남성적인 매력을 강조하는 치안대원의 제복을 입고 네이기스의 손끝에 입을 맞춘다. 매끄러운 갈색 머리칼이 쏟아지며 네이기스의 손목을 간질였다.
네이기스의 얼굴이 숫제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하는 것을 보며, 오드리는 험난한 앞날을 예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네이기스와 잘 되어가냐며 피올을 놀리는 게 아니었는데. 어쩌면 저 사촌 여동생의 짝사랑 상담을 해줘야 하는 처지가 될지도 몰랐다.
“네이기스, 무슨 일로 온 거죠? 에이쉬 때문에 온 거라면, 나는 괜찮아요.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 그것도 있지만…….”
네이기스는 마구 두근대는 심장을 원망했다. 자신을 자꾸 치안대 사무실에 들락거리게 했던, 남몰래 호감을 느꼈던 남자가 왜 하필 이 자리에 있는 걸까. 이제부터 하려는 말을 듣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기껏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말도 꺼내지 못하고 갈 수는 없는데.
다행히 네이기스의 사촌 언니는 참을성 있게 그녀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어, 언니. 시계, 시곗줄, 마음에 드는 거 없, 없었던 거죠?”
“네. 그래서 따로 주문 제작을 하려고요. 혹시 네이기스가 추천해 줄 만한 곳이 있…….”
“정해놓은 게 없으시면, 제, 제가 그 시곗줄 디, 디자인해도 될까요!”
제대로 말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오드리의 말까지 잘라먹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네이기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피올이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네이기스를 얼른 붙들어 제자리에 세웠다. 네이기스의 얼굴색은 이제 붉어졌다 파래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네이기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네요. 일단 앉아요. 그나저나 네이기스가 직접 시곗줄 디자인을 하겠다니, 그쪽 일에 관심이 있나 봐요?”
“레이디 헨젤…….”
피올이 오드리에게 눈치를 주었다. 안 그래도 엄청나게 용기 내서 말한 게 딱 보이는데, 그걸 그렇게 찔러야 하겠느냐는 뒷말이 들리는 것만 같다. 오드리는 피올이 시선이 꽂힌 뺨이 따가운 걸 무시하고 방긋 웃었다.
네이기스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얼굴로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자꾸 더듬거려 듣기 어려운데다, 장황하고, 때로는 문장 구조마저 엉망이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특별히 원하는 장신구를 만들기 위해 친분을 유지하는 장인이 있다는 것.
“어머……. 그럼, 종종 화제가 되던 특이한 장신구들이 다 네이기스의 작품이었던 거예요?”
“자, 작품이라고 할 만한 건 아, 아니지만요…….”
“내 눈엔 충분히 훌륭한 작품인데요. 좋아요, 네이기스의 센스를 믿어보겠어요. 나 같은 문외한이 장인에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결과물이 나오겠죠.”
“그, 그럼 시곗줄을 달 시계도 좀 보여, 보여주세요.”
“그건 왜요?”
“어울려야 하니까요. 언니는 살론에서 유행한다는 그 시곗줄은 별로인 거죠? 하긴, 가느다랗고 우아하면서도 장식이 적은 스타일이 언니에게 잘 어울릴 거예요. 평소 입는 드레스도 다 그런 쪽이잖아요.”
조금 전까지는 긴장해서 입도 제대로 못 떼더니, 일단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눈이 반짝반짝한다. 오드리는 그런 네이기스의 태도 변화에 황당해하면서도 기꺼이 회중시계를 꺼내 내밀었다. 네이기스는 한참 동안 시계를 노려보며 말이 없었다.
오드리는 그 틈을 타 필담을 시도했다. 잉크를 찍을 필요 없는 만년필은 이럴 때 진가를 발휘했다.
- 언제 네이기스를 꼬신 거예요?
피올로서는 황당한 모함이었다.
- 만들어준 과자 맛있다고 칭찬한 것도 꼬신 거라면 그럴 겁니다.
오드리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 아니, 직접 만든 과자까지 얻어먹었어요? 왜요? 어쩌다가? 저 순진한 애가 착각하잖아요!
피올은 더 당황했다. 개인적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치안대 사무실에서 다 같이 나눠먹었는데 이게 뭔 말인가. 안 그래도 별 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방에서 놀려대는 통에 골치가 아픈데!
- 가져다준 걸 그럼 먹지 버립니까? 어차피,
“언니, 이 회중시계 뚜껑도 같이 디자인해도 돼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던 피올이 순식간에 종이를 치웠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만년필을 쥐고 있던 오드리의 손이 민망해졌다.
“제가 생각한 시곗줄하고는 조금 안 맞을 것 같아서요.”
“마음대로 해요.”
“네. 그럼 이건 며칠만 빌려 갈게요.”
네이기스는 좋아죽겠단 얼굴로 회중시계를 챙겨 넣었다. 그렇게 자기 볼일을 마치고서야 다시 피올이 생각났는지, 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저…… 이상한 여자 아니에요. 괜히 하는 말도 아니고요…….”
“압니다. 레이디 그웬께서는 그림을 무척 잘 그리시죠.”
담백한 칭찬에 네이기스의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저 사람은 항상 저렇다. 가까이 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으면서, 아예 돌아서지도 못하게 상냥하게 군다. 자신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끌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으니,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눈이, 귀가, 발이 그를 좇고 있었다.
더 있다가는 또 못 보일 꼴을 보일 것만 같았다. 네이기스는 서둘러 일어났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보티안 씨. 네이기스가 혼자 온 모양인데, 그웬 백작가까지 데려다주시는 게 어때요? 어차피 여기 오셨던 볼 일은 다 보셨으니 돌아가시는 김에 겸사겸사.”
이건 오드리의 심술이지만, 동시에 배려이기도 했다. 심술은 피올에게, 배려는 네이기스에게. 싫다고 하기엔 딱히 댈 핑계가 없었던 피올은 그저 알았다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피올이 내민 손을 잡는 네이기스는 목덜미까지 붉었다.
“그웬 백작부인께서 아시면 경을 칠 텐데요.”
일련의 소란 동안 아예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곁을 지키기만 하던 카프러스가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걱정스런 말을 건넸다. 유독 딸의 평판에 민감하게 구는 그웬 백작부인이 알면 네이기스는 물론이고 오드리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었다. 오드리는 코웃음을 쳤다.
“난리를 피워도 좋으니 날 만나주기나 했으면 좋겠네요. 어떻게 봄 무도회 이후로는 얼굴 뵙기가 영 힘들어서 말이죠. 이디케, 외출 준비를 해줘. 워커를 홀딱 반하게 한 천재 씨를 만나러 가보자고.”
카프러스의 표정이 몹시 흐렸지만 오드리는 예감이 좋았다. 피올의 앞에서는 같이 개소리 취급을 해줬지만, 워커의 눈에 대해서는 나름 신뢰하고 있는 편이었다. 아무렴, 열한 살 꼬마 계집애에게 인생을 전부 걸었던 마법사가 감히 천재라고 장담한 인물이다. 만나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난리를 겪고도 워커는 연구실을 옮기지 않았다. 마침 말브레 극장은 이번 시즌 내내 폐쇄상태라 더 좋다나 어쨌다나. 오드리의 끈질긴 설득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으니, 어지간한 고집이었다.
“그래서, 그 천재 씨는 어디 있어?”
“당연히 집에 갔죠.”
이걸 때릴까 말까. 그렇게 급하게 쪽지 써 보낼 때는 언제고 집에 갔대. 오드리의 눈매가 사나워진 걸 눈치챈 워커가 허우적허우적 손을 저었다.
“아가씨는 바쁘시잖아요!”
“이……!”
“이 멍청이가!”
퍽! 이디케에게 등을 거하게 얻어맞은 워커가 괴로움에 펄쩍펄쩍 뛰었다. 워커는 하녀가 주인의 대화에 막 끼어들어도 되느냐며 마구 따졌지만, 이디케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은 하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리인이기도 하니까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아가씨!”
“이디케는 괜찮아. 내 속을 기가 막히게 잘 알거든.”
오드리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이디케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연달아 얻어맞는 워커가 죽는 소리를 했지만, 이디케는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때려놓고서도 아쉬워하며 손을 거두었다. 귀족 영애가 이렇게 해가 훤할 때 폐쇄된 극장에 찾아오려면 어떤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똥멍청이는 맞아도 쌌다.
이러다 강철새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 거 같다며 워커가 엄살을 떨었다. 이디케가 가느다란 팔로 때려봐야 아프긴 얼마나 아프다고, 본전도 못 찾을 엄살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뭘 보고 천재라고 한 건데? 그놈의 강철새에 대한 혁신적인 이론이라도 제시했어?”
“그런 건 아니지만, 로렐라이의 매출을 두 배로 뛰게 해줄 마법이긴 해요. 아가씨, 이거 보세요.”
워커가 내민 종이는 꽤나 두툼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넘기던 오드리의 눈이 점점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집중력이 오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대체 저게 뭔데 아가씨께서 저래요?”
“획기적인 경비 마법이죠. 미리 지정해 둔 대상만 통과시키고, 다른 사람은 막아버려요. 단순한 잠금 마법이 아니에요. 게다가 지금까지처럼 사람이 들락거릴 때마다 마법사가 마법을 껐다 켰다 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계속 작동시켜 놔도 돼요.”
“작동을 정지할 마법사가 없어도 된다는 거예요?”
“그렇죠.”
마법도구의 작동을 정지시키려면 당연히 마법사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그 마법도구의 원리에 대해 알고 있는 마법사가. 그게 이제까지의 상식이었다.
때문에, 경비 마법도구는 작동시킬 땐 아무나 켜더라도 잠금을 풀 땐 마법사가 마법도구를 끄는 방식을 사용했다. 경비 마법도구를 판매하는 상단에서는 상주 마법사 고용 비용을 부담스러워하는 고객을 위해 상단의 마법사를 보내 마법도구를 꺼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게 가능해요?”
“일단 이론상으로는 완벽해요. 봐요, 눈 정확한 우리 아가씨가 저렇게 집중하는 거. 저걸 팔면 로렐라이가 어마어마하게 성장할 것 같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디케와 워커는 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오드리는 두툼한 종이 뭉치를 다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다음엔 아주 천천히 다시 한 번 더 읽었다. 도합 세 번쯤을 읽고 나서야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서 욕심이 뚝뚝 떨어졌다.
“아주 마음에 들어. 이렇게까지 정리 잘 된 수식은 오랜만이야. 당장 마법사들에게 배포하고 가르쳐도 될 수준인걸. 연구를 좀 더 하면 다른 마법도구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정말로 마법도구의 쓰임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질 수도 있겠어. 워커, 이걸 만든 천재는 대체 누구지?”
“셰비언이요.”
“……뭐?”
오드리와 이디케의 표정이 확 굳었다. 얼른 표정을 수습하긴 했지만, 워커에게는 그저 당혹스러운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직접 스카웃을 지시할 땐 언제고?
“그럼, 셰비언이 아니면 누가 저한테 천재 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데요?”
오드리는 가만히 보고서를 노려보았다. 단정하고 깔끔한 글씨가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계속 보고 있으려니 알룬드의 목걸이에 딸려왔던 종이 쪽지에 쓰여 있던 글씨체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처음에는 들어오려는 사람을 몽땅 얼려 버리는 마법이었는데 개선에 개선을 거듭하더니 그런 걸 만들었어요. 아예 마법도구의 마법을 멈추려면 여전히 마법사가 필요하지만, 이런 방식이면 굳이 마법도구를 멈출 필요도 없어요. 주인으로 등록만 해놓으면 마법도구가 알아서 감지하고 통과시킬 거예요. 이걸 응용하면 뚜껑이 필요 없는 마법등을 만들 수도 있어요. 그게 상상이 되세요?”
워커가 떠드는 소리가 한 귀로 들어왔다가 한 귀로 나갔다. 애써 눌러두었던 생각들이 표면 위로 마구 솟아올랐다.
제 손도 보이지 않던 검은 공간, 새파란 다이아몬드, 서늘한 숨결, 서늘한 체온, 솜사탕처럼 달고 부드럽던 목소리, 하얗게 휘날리는 꽃잎 사이에 서서 웃는 얼굴, 꽃잎을 그러모아 손에 올려주던 상냥함, 저를 푹 덮은 망토에서 나던 싸한 향기, 달빛을 담은 듯 아름다운 머리칼, 시선을 저절로 사로잡는 우아한 이목구비, 질투 날 정도로 예쁜 손가락 사이를 헤엄치던 빛 조각.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쏟아졌다.
그를 볼 때마다 남몰래 감탄했던 것, 웃는 얼굴에 가슴이 뛰었던 것, 그가 쥐여준 꽃잎을 놓쳐 아깝다 생각했던 것, 선물 받은 망토의 옷감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던 것, 굳이 찾아와 옷감을 전해주고 간 것, 얼굴 보지 못해 아쉬웠던 마음.
별안간 가슴이 뛰었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아가씨!”
상념이 깨졌다. 오드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를 쿵쿵 울리는 가운데, 이디케가 자신을 향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별것 아니야. 그냥……천재는 천재로구나, 셰비언은 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마법을 배웠을까, 뭐 그런 생각 했어.”
이디케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모았다. 평소의 오드리답지 않게 부연설명이 많아서다. 다른 생각을 한 게 분명한데, 어째 말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 더 추궁을 해 보려는데, 닫아놓았던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워커, 아까 내가 깜박하고 안 준 게 있는데…….”
빼먹은 연구 자료를 건네주러 왔던 셰비언은 오드리를 발견하고 그만 인형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피로에 절어 뿌옇기만 한 시야에서 초록색 눈동자가 혼자 반짝, 빛을 냈다. 그 빛은 점차 사방으로 번져 반듯한 이마를, 코를, 붉은 입술과 가느다란 어깨를 밝히고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타고 내려와 바닥에 고였다. 온통 뿌연 세상에 오드리 혼자만 뚜렷했다.
‘이게 무슨……. 내가 미쳤나? 웬 말도 안 되는 헛것을 보고…….’
최근 밥도 대충 먹으면서 수식 제작에 매달려서 이러나, 그래서 피곤한 나머지 헛것을 보나? 소맷부리로 눈을 벅벅 비비고 살그머니 떴다. 뿌옇기만 하던 세상은 좀 더 뚜렷해졌는데, 없어졌어야 할 오드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 아가씨?”
어찌나 놀랐는지, 목소리마저 떨렸다.
“……셰비언.”
헛것이 대답했다. 아니, 헛것이 아니다. 맙소사. 아가씨께서 왜 여기에 계시지?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는 당신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보는데.”
“어, 그렇죠? 여긴 워커의 연구실이고, 아가씨는 로렐라이의 주…… 아니, 특급 고객이시죠. 그보다 제가 말했나요?”
“꼴이 엉망이야. 이걸 만드느라 고생했나 보지.”
셰비언은 그제야 제 몰골을 확인했다. 늘 보기 좋게 땋아서 한쪽으로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칼은 까치집처럼 엉켜 대충 말아 올렸고, 깔끔하던 마법사의 로브는 군데군데 때가 타고 그을린 데다 꾸깃꾸깃했다. 소맷부리는 잉크로 얼룩덜룩한데 조금 전에 그걸로 얼굴을 문질렀다.
순식간에 얼굴이 뜨끈해졌다. 허둥지둥 닦을 만한 걸 찾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깨끗한 손수건을 건넸다. 냅다 낚아채서 얼굴을 닦았다. 손수건이 얼굴을 지날 때마다 검은 얼룩이 묻어나왔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해 얼굴을 문질렀다.
오드리는 마치 고양이라도 된 양 손수건 세수를 하는 셰비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전과 똑같았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식은 좀 부족해도 실력만은 최고인 마법사 그대로였다.
‘저런 인간이 보석을 훔치고 그걸 내게 선물을 하고……. 믿을 수가 없네.’
로렐라이의 주인, 이라고 말하려다 다급하게 고친 걸 보니, 어디 가서 말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목걸이를 받고 짐작했던 것이 확신이 되니 그나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가슴에서 덜걱덜걱 소리를 내며 구르던 돌이 겨우 잠잠해지며 숨통이 트였다.
“셰비언, 당신은 대체 누구에게 마법을 배운 거지?”
“어, 그거 중요해요?”
“궁금해졌어. 대체 누가 당신 같은 마법사를 길러낸 걸까?”
셰비언은 그저 웃었다. 깨끗하던 손수건을 걸레짝으로 만든 보람이 있어,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깨끗했다. 뭉친 빗자루 같은 머리칼이나 세탁이 필요해 보이는 로브는 여전한데도, 얼굴이 깨끗해진 것만으로도 다 괜찮아 보이다니.
“글쎄요. 난 스승 같은 건 가져 본 적이 없어서.”
워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둘 사이에 끼어들려는 순간, 이디케가 그에게 매달려 입을 틀어막았다. 이디케의 기세가 험악하다 해도 여자는 여자. 워커가 연구와 마법망 운용에 지친 마법사라도 엄연한 사내이니 떨쳐 내려면 그럴 수 있을 텐데, 어째 워커는 이디케의 어깨도 밀쳐내지 못하고 얌전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셰비언의 대답이 황당하게 들린 건 오드리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된 스승에 목말라하는 마법사들이 얼마나 많은데, 돌 맞을 소리를 잘도 한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때까지 들고 있던 서류를 워커에게 내밀었다.
워커는 그제야 이디케를 밀어내고 서류를 받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당장은 로렐라이에 거금을 가져다줄 연구이고, 멀리는 마법 세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킬 연구였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도 다루는 양 손길이 조심스럽다. 자신을 밀어낸 손을 노려보던 이디케가 괜히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오드리의 곁에 가 섰다.
오드리는 셰비언의 얼굴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눈이 마주쳤다고 바로 둥그렇게 휘는 눈매가 무척 얄미웠다. 자신이 했던 고민 따위, 그가 알 수 있는 게 아닌데도.
그녀는 얄밉고 심란한 마음을 잘 간수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셰비언이 자신의 비밀을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어 보이니, 실수할 여지만 줄이면 되겠다 싶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가 사람들 앞에 노출되는 걸 줄이면 되는 것이다.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해, 그대가 쓰는 마법은 지금 세상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것이니. 그대와 같이 유능한 인재를 놓고 싶지 않아.”
쓸데없이 흔적 남기고 다니지 마. 그러다 들키면 버려야 해.
“워커, 그 연구 배포에 대한 허락은 조만간 떨어질 거야. 즉시 제작 파트 마법사들 훈련시킬 준비하고, 추가 연구 일정 짜서 올려. 연구 진행은 워커와 셰비언이 같이하되, 협회 발표는 워커가 해.”
바깥에 나서지 마.
“둘이 공동 연구한 걸로 할 테니 따로 공을 뺏거나 하진 않을 거야. 셰비언, 괜찮겠지?”
알아들었지?
“아뇨. 발표는 제가 할 겁니다.”
아까부터 요란하게 울렁거리던 속이 넘칠 듯 출렁거렸다. 상식이 부족할 뿐, 눈치가 없는 건 아니면서 왜 그렇게 구는가? 나의 곤란이 보이지 않는가? 조금 전, 잠깐이나마 저치를 생각하며 가슴이 뛰었다는 게 견딜 수 없이 불쾌해졌다.
“왜?”
“유명세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거든요.”
“어쩌다?”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핑계가 없으면 얼굴 보기도 힘든 관계라는 게 있더군요. 그러나 그 유명세라는 게 있으면 그런 핑계 따위는 무시할 수 있더라고요.”
셰비언이 새파란 물빛 보석을 떠올린 건 왕궁의 정원에서 오드리에게 망토를 건네주고 난 다음이었다. 초록색 눈동자를 보고 왜 물빛을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막연히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던 블루다이아몬드가 목걸이가 되어 보석 경매장에 있다는 걸 알아내기까지는 생각 외로 시간이 걸렸는데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한 번 보았으면 싶었을 뿐이었다. 왜 갑자기 그 보석이 떠올랐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콧대 높은 보석 경매장은 이름 없는 마법사에게는 구경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딜 가든 통하던 로렐라이의 이름마저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보석을 훔치는 것. 막상 보고 나니 흥미가 사라져 서랍 구석에 처박아두었지만.
돌려줄 생각을 한 건 순전히 오드리 때문이었다. 그녀가 몹시 곤란해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길 바라긴 하지만, 아가씨께서 또 앓으시거든 그땐 제대로 된 선물을 당당하게 사가고 싶어요. 하지만 공동 연구에 이름만 겨우 올린 정도로는 어림도 없겠죠.”
셰비언은 이름 없는 마법사와 명문가의 백작 영애 사이에 놓인 아득한 간격을 체감하던 때를 떠올렸다. 의뢰받은 물품이 있다는 핑계가 없으면 찾아갈 수도 없어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 하던 나날들을.
신분 차이까지는 어떻게 이해하겠는데 그놈의 이름값, 유명세가 대체 뭐라고. 평민인 피올이 치안대원이라는 그늘을 쓰고 헨젤가를 편하게 들락거리는 꼴을 참고 보는 동안 기이할 정도로 속이 쓰렸다.
“셰비언…….”
생긋 웃는 얼굴이 몹시 차가웠다. 오드리는 그가 보석 경매장에 아예 발도 들이지 못했음을 짐작했다. 그러나 보통은 출입을 막는다고 도둑질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의 얄팍한 상식과 도덕이 새삼 놀라울 지경이었다.
난데없이 의식 분리에 끌려 들어갔을 때의 공포와, 숨겨야 하는 비밀을 들키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당혹감이 되살아났다. 비밀이 공개될까 불안에 떨었던 시간들도.
‘내가 왜 이렇게 물렁하게 굴었지? 대체 왜?’
셰비언에게는 어떤 고삐도 채우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워커처럼 일생의 목표를 두고 협력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이디케나 다이앤처럼 오드리를 통해서만 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의 빚 한 조각도 지우지 못했고, 하다못해 피올처럼 문제가 생겼을 때 같이 끌고 들어갈 수 있는 물증을 쥐고 있지도 못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럴까. 목걸이 선물을 받아서? 알룬드의 목걸이가 값나가는 것이긴 하다. 하나 보석에 눈이 먼 것도 아닌데 그게 다 무엇이라고? 이유도 알 수 없이 그에게만은 너그럽게 굴었던 자신이 놀라웠다. 가슴에 선뜩한 바람이 불었다.
하나 셰비언에게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오드리의 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나름 꿈에 부풀어 가슴을 두드렸다.
“단순히 돈이 많은 것만으로는 손님으로 받아줄 수 없다 하니, 그 유명세 한번 업어볼까 합니다.”
“그러게 가명을 쓰지 말았어야지. 쓸 거면 좀 그럴듯한 걸로 쓰든가.”
“가명이 아니래도 그러시네. 셰비언 절벽 부근 출신인 걸 어쩝니까?”
“셰비언 절벽이 아니라 셰비언 성벽이겠지. 꾸미려면 좀 더 공을 들여. 그래, 연구 책임도, 진행 지휘도, 발표까지도 모조리 일임할 테니까 잘해 봐. 그만한 실력이면 공동 연구도 필요 없을 테니 워커는 다른 일에나 집중해. 어차피 일이 쌓여 있는데 잘됐네. 워커, 곧 다이앤이 와서 뭘 해야 할지 알려줄 거야. 이디케, 가자.”
가까스로 표정을 무너뜨리지는 않았지만, 내뱉는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웠다. 오드리는 그대로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평소보다 거친 걸음걸이에서 그녀의 짜증이 묻어났다.
워커는 오드리와 셰비언 사이의 신경전에 감히 입도 못 떼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셰비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언제 알았어?”
“뭘?”
“아가씨께서 로렐라이의 주인이신 거.”
조금 전의 오드리는 셰비언이 앞에 있는 건 상관치 않고 로렐라이의 단주답게 행동했고, 이디케는 전혀 말리지 않았다. 워커는 그게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보안에 그렇게 목숨을 걸던 사람들이 갑자기 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셰비언의 앞에서 정체를 드러낸단 말인가? 게다가 셰비언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언제, 어떻게 알았나냐니까?”
“내가 물어볼 땐 곧 죽어도 모른 척하던 녀석이 그렇게 물으니까 좀 어색한데.”
셰비언은 워커가 안고 있던 서류를 고스란히 빼앗아서는 그 사이에 조금 전에 가져온 종이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워커가 설계도를 그리곤 하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서류를 촤르륵 훑었다.
오드리는 자신이 어떤 방향의 연구를 원하는지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일반인이 마법도구 온오프를 가능케 할 가능성이 있는 수식을 제작한 장본인으로서 모르기도 어려웠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가 대충 눈앞에 그려졌다. 시간이 약간 필요할 것 같긴 해도, 그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다른 마법수식들을 개량하는 게 훨씬 큰일이었다.
“셰비언!”
“그냥, 물건을 돌려놓으려다가 알게 됐어.”
“뭔 소리야?”
“몰래 얼른 끝내고 돌아와야 했는데, 하도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서……. 머뭇대다가 충동에 졌지 뭐야.”
“충동?”
“당장 선물하고 싶은 충동. 그래봤자 거절당하고 나중에 따로 보내긴 했지만.”
워커가 아무리 연구실에 처박혀 산다 해도 로렐라이의 수석 마법사였다. 보석 경매장에서 도둑맞았다고 수군수군 소문이 돌던 알룬드의 목걸이가 오드리에게 선물로 전해졌다는 가십 정도는 들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해, 그대가 쓰는 마법은 지금 세상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것이니.’
워커는 오드리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를 불현듯 깨달았다. 셰비언이 사용하는 독특한 마법 체계가 그를 도둑이라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 로렐라이에 해를 끼칠까 염려한 것이다. 이미 저지른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지나친 유명세를 경계하라는 뜻이었다.
워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마법망을 다루느라 약해진 몸은 생각지도 않고 셰비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체력도 힘도 비교할 수가 없는 수준이라는 걸 알지만,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네 녀석이 그 도둑이었어? 그래, 너라면 그 빌어먹을 경비쯤 우습게 뚫었겠지. 너 정도는 되어야 내 자존심이 용서할 만하지. 돈 같은 거 아쉽지 않다는 놈이 왜 그따위 짓을 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뭐? 재밌는 이야기?”
셰비언은 워커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문제의 보석은 분명히 돌려주었고 나중에라도 값을 치르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는 워커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의 손을 목덜미에서 떼어냈으나, 워커는 그런 배려 따위는 모르겠다는 듯 다시 달려들어 매달렸다. 안 그래도 구깃구깃하던 로브가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아가씨는 그 재밌는 이야기에 인생을 걸었어. 어디 아가씨뿐이야? 나도, 이디케도 마찬가지야. 더불어, 로렐라이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들 가족의 생계도 거기에 다 달려 있어.”
워커의 표정은 전에 없이 절박했다. 셰비언은 그런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워커의 실력이라면 어딜 가도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놈의 비마법 비행도구에 대한 미련만 끊어낸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그 예쁜 머리통에 뭔가가 들어 있어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다면, 아가씨가 로렐라이의 주인이라는 게 절대 재밌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아둬. 들키면 뺏기고, 뺏기면 끝이야.”
“자식의 것은 부모의 것……. 그거 때문에?”
“그래, 바로 그거야. 그건 절대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오드리 아가씨가 단주가 아닌 로렐라이는 로렐라이가 아냐. 네 녀석이 유명세를 얻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로렐라이에는 피해 입히지 마!”
“이봐, 워커. 뭘 그렇게 필사적이야? 오드리 아가씨가 아니면 네 연구에 돈 댈 사람이 없어서 그래?”
워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대다 이를 악물고 셰비언을 있는 힘껏 밀쳐 냈다. 그래봤자 셰비언을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하지도 못했지만, 기세만으로는 그를 훌쩍 넘어뜨리고 잘근잘근 밟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날 믿어준 사람은 아가씨가 처음이야.”
“음?”
“언젠가 내 강철새가 하늘을 날 거라고, 그래서 세상을 바꿀 거라고 내가 얼마나 떠들고 다녔게? 다들 미친놈 취급이나 하고, 나도 내가 돌았나 의심하던 와중에, 그 쪼그맣던 아가씨가 날 믿어줬다고. 그땐 정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다면 이런 기분일까 했어.”
돈? 당연히 좋다. 평생의 꿈인 비마법 비행도구를 완성시키려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필요한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오드리를 아끼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남들에게는 오로지 돈 때문에 로렐라이에 붙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거야 로렐라이와 오드리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였지 진심이 아니었다.
워커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제게 내밀어진 작은 손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벅찼다.
모두가 비웃는 계획을 진지하게 들어준 유일한 사람. 할 수 있다, 널 믿는다, 잘 될 것이다 말해준 사람.
“그런 분이 잘 되기를,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바라는 게 어때서?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하긴, 너야 바라는 것도 없고 간절한 것도 없어서 내 심정 같은 건 모르겠지. 하여간 아가씨께 해가는 일을 하기만 해 봐. 그땐 진짜…….”
“아니 뭐……. 아주 모르겠는 건 아닌데……. 아가씨에게 로렐라이가 대체 무슨 의미라서 그렇게까지 해? 돈?”
셰비언의 등에서 땀이 흘렀다. 워커가 그를 타지도 않는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세간의 인식을 한번 읊었다가 이런 식의 눈빛을 받을 줄이야.
“아가씨가 인생을 걸고 만든 로렐라이야. 당연히 돈 중요하지, 중요한데…….”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셰비언의 사과에도 워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알긴 뭘 안다고 저런대, 뭐 이런 불평을 중얼대며 흐트러진 설계도와 다른 자료들을 정리할 뿐이었다. 쓴웃음을 짓고 그의 등을 보던 셰비언이 툭 말을 던졌다.
“궁금하지 않아?”
“뭐가? 네가 왜 보석 경매장을 털었나 그런 거? 알 게 뭐야, 난 간이 작아서 그런 건 능력이 있어도 못 해.”
“그 만들다 만 비행도구를 직접 타고 시험 비행하는 거 보면 절대 작은 간이 아닌데? 아무튼, 내가 궁금하지 않으냐고 물은 건 다른 거야. 아가씨께서,”
“연구는 네게 맡긴다고 하셨으니까 너 알아서 해. 어차피 발표할 때 되면 나한테도 공개되겠지. 그때 보면 돼. 난 그동안 강철새에 전념할 거야.”
“아, 진짜……. 그거 말고. 지금 세상에서는 유일무이하다는 그 마법 안 궁금해?”
바지런히 서류를 챙기던 워커의 손이 우뚝 멈췄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귀가 커다랗게 열린 게 느껴졌다. 셰비언은 그의 등에 쐐기를 박았다.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제기랄.”
워커는 끝내 탄식하고 말았다. 지나치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오드리는 미친 것처럼 일에 매진했다. 채우지 못한 고삐가 검은 그림자처럼 자꾸 발밑을 잠식하는 통에, 거꾸러질 듯한 불안을 떨치려면 그게 최선이었다.
나랍 진출도 진출이지만, 겨우 끼어든 설탕 무역에서 준비해 온 시간이 무색하게 연달아 터지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고, 헨젤가의 살림을 메너트에게서 찾아올 방법도 찾아야 했다. 무역 일은 어떻게든 분산해서 한다 쳐도, 살림에 관련된 일은 오롯이 오드리의 몫이었다.
하는 꼴을 보니 메너트는 오드리에게 살림을 넘겨줄 의사가 없어 보였고, 헨젤 백작 역시 그동안 큰 문제가 없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장벽인데, 오드리의 악평이 오죽 대단한가? 로렐라이를 처음 만들 때도 이렇게까지 사람 구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쌓여가는 일이 마치 늪처럼 오드리를 빨아들였다.
잠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어서, 일단 식당에서 먹던 정찬을 포기했다. 그다음엔 하델과 살론어로 대화하던 티타임을 줄였다. 피아노 연습을 그만두었고, 꼭 가야 하는 사교 행사가 아니라면 가지 않았다. 아파 누워 있을 때만 아니면 빼먹지 않던 아침 승마마저 그만두었을 땐 헨젤 백작마저 의아하게 여겼다.
만탈락이었다면 이 정도로 고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나, 여긴 브란젤이었다. 이디케도 다이앤도 함께 갈려 나가고 있는 처지인지라, 오드리의 방문 앞을 지키는 건 꼼짝없이 카프러스의 몫이 되었다.
알신다에게는 그만큼 수상해 보이는 일도 없었다. 오드리는 아직 살림의 권한을 가져온 것도 아니면서 응접실과 서재가 딸린 방에 종일 처박혀 있는 데다, 무려 에스코트 기사는 그녀의 입김이 닿는 하녀들은 출입조차 할 수 없게 막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그녀는 일전의 충돌 이후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서관에 직접 발을 디뎠다. 서향이기도 하고 키 큰 나무들을 넘느라 느지막한 오후에나 해가 드는 건물인지라, 문턱을 넘자마자 계절에 안 맞는 서늘함이 목덜미를 적셨다.
해를 끌어들이려 복도에 커다란 창문이 늘어서 있었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약간 어두침침한 복도에 구름 낀 하늘을 품은 창문이 늘어선 꼴이, 마치 옛이야기에 나오는 마녀의 소굴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언제와도 기분 나쁜 곳이야…….’
작고한 백작부인이 머물렀던 곳도 이 서관이었다. 동관에 머무르던 어린 오드리가 거의 매일 서관을 찾아와 분위기를 밝혔지만, 병자가 있는 건물 특유의 음침함이 있었다. 이제 이곳엔 아픈 사람도 없는데 기이한 압박감이 돌았다.
발소리를 죽이고 별관을 돌아다니던 하녀와 하인들이 알신다를 알아보고 소리 없는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알신다가 특별히 관리하는 몇몇 하녀들이 서관 내에서 보이질 않았다. 하녀 휴게실에도, 숙소에도. 서관에 들어선 순간부터 불안하게 삐걱대던 심장이 펄떡대며 요란한 경종을 울렸다.
“릴리! 이리 와보렴.”
한숨 쉬러 왔다가 알신다를 발견하고 몰래 도망치려던 젊은 하녀는, 심장이 덜걱덜걱하는 소리를 들으며 알신다의 앞에 섰다. 그녀는 오드리의 응접실과 서재 청소를 담당하는 하녀였다.
“부르셨어요.”
“네 동료들이 보이질 않는구나. 다들 제 일은 안 하고 어딜 갔는지 말해봐라.”
“아가씨 심부름 갔어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요.”
알신다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델의 채근을 이기지 못하고 말 많던 하녀들을 내보내면서 하녀 여럿을 새로 뽑았는데, 릴리는 그중 한 명이었다. 소개소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하녀들이라며, 이번에는 절대 입버릇 문제가 없을 거라고 자신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알신다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같이 딱 자기 일만 챙기는 차가운 인사들이었다.
“같은 방을 쓰면서 친해졌을 텐데, 그런 대답밖에 못 해?”
“모르는 걸 어떡해요. 아가씨 심부름이라는데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잖아요.”
“릴리!”
그중에서도 릴리는 꽤 오래전에 알신다의 눈 밖에 난 하녀였다. 본래도 일만 잘하지 다른 면은 영 마음에 들지 않던 하녀였는데, 알신다가 뭔가 따로 일을 시키려는 기미만 보이면 쪼르르 오드리에게 달려가곤 했다. 그걸 오드리가 감싸고돌고, 오드리를 하델이 감쌌다.
스스로 나가길 바라며 손재주 좋고 영리하다는 평이 있는 아이를 일부러 청소 같은 잡일에 처넣었는데도 릴리의 건방진 태도는 여전했다. 오히려 저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하녀들과 어울려 다니며 무리를 형성하기까지 했으니, 어떻게 예뻐할 수가 있을까.
“제 할 일도 못 하는 녀석이 뻔뻔하기도 하구나. 보잘것없는 청소일도 제대로 못 한 지가 꽤 됐지?”
“베텔 경께서 문을 지키고 계셔서 들어갈 수가 없는걸요. 대신 다른 일들을 열심히 돕고 있어요. 받는 월급만큼은 일하는데 왜 그리 야단이세요?”
“보자보자 하니까……! 됐다! 너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나가!”
결국,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알신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릴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잽싸게 자리를 떴다. 그게 또 복장이 터지는 일이라, 알신다는 숨이 턱턱 막히는 가슴을 두드리며 방을 나왔다. 릴리와의 다툼이 바깥까지 새어나가기라도 했는지, 어두침침한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하여간 요즘 것들이란!”
빈 복도를 걷는 동안 꼭 하녀들을 갈아치워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오드리를 아끼는 하델의 눈치를 보느라 이제껏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본래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 헨젤가의 살림을 맡아 하는 메너트는 알신다에게 고용인과 관련된 모든 일을 일임했으니까.
“그놈의 소개소, 정말 불을 질러 버리든가 해야지.”
원망의 화살은 소개소로 향했다. 좋은 하녀들을 소개해 주겠다더니, 이게 뭔가!
소개소가 들었다면 억울해서 펄쩍 뛸 원망이었다. 비록 하위 계급에 한정되는 얘기기는 해도, 여자들이 일할 곳이 하녀 자리만으로 한정되지 않는 시대였다. 이전처럼 목숨을 걸고 주인집에 충성하며 하녀장 자리에 목을 매는 사람은 구하기 어려웠다. 볼 붉은 소녀 시절부터 헨젤가에 평생을 바쳐온 알신다는 이해하기 힘든 시대변화였다.
알신다는 자박자박 발소리까지 내며 오드리의 방을 향해 직진했다. 더 없이 기사다운 카프러스에게 잔뜩 날을 세운 알신다는 당혹스러운 상대였다. 그는 문을 몸으로 막으며 알신다의 출입을 저지했다.
“안 됩니다.”
“베텔 경, 난 아가씨를 뵈어야겠어요. 따로 살림을 보는 것도 아니신 분께서, 서재에 처박혀 나오지 않으신 지가 벌써 며칠입니다.”
“아가씨께서 알아서 할 테니, 사람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돌아가신 마님께서는 몸이 약한 분이셨는데, 어떻게 아가씨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이렇게 방에 박혀만 계시다간 없던 병도 생깁니다. 비키세요. 억지로라도 모시고 나가서 햇볕을 쬐시도록 해야겠어요.”
알신다의 말 하나하나가 다 맞는 말이지만, 안에 들였다가는 큰일 난다. 지금 오드리의 서재는 나랍과 로렐라이에 관련된 서류로 가득 차 있었다. 아가씨는 왜 내게 이런 일을 맡기셨을까! 카프러스는 진땀을 흘리며 알신다를 막았다.
“어차피 나가실 땐 저와 함께 가셔야 하는데,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쁘신 하녀장께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끔 하죠.”
“요 앞 정원만 산책할 테니 경이 따라올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 하델 도련님께서 경의 지도를 받지 못해서 서운해하시는데, 그쪽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게 어떨까요? 이렇게 방문이나 지키고 있지 말고요.”
말 속에 채 숨기지 못한 가시가 삐죽이 튀어나와 카프러스를 찔렀다. 오드리가 옆에 있었다면 그녀에게 맡겨야 해서 입 한 번 떼지 못했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카프러스 혼자였다. 그래서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다다다 말을 쏟아내며 카프러스를 압박하던 알신다는 갑자기 눈앞의 카프러스가 두 배는 커진 느낌에 덜컥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곤란한 기색을 띠며 쩔쩔매던 사내는 어디로 가고, 부리부리한 눈에서 감당키 힘든 기세를 줄줄 흘리는 기사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갑자기 등이 뻣뻣하게 굳고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커다랗게 귀를 울렸다. 현기증이 몰려왔다.
“하녀장. 나는 에스코트 기사입니다.”
“……아가씨께서 사교 모임을 안 가시는데, 에스코트 기사가 대체 뭔 필요랍니까? 이렇게 문이나 지키고 서 계시는데. 아가씨는 제가 돌볼 테니, 경께서는 도련님이나 신경 쓰세요.”
“에스코트 기사는 본래 호위 기사에서 출발했습니다. 아가씨를 지킬 기사는 저 혼자이나 도련님을 지도할 기사는 저 말고도 여럿이니, 알신다의 그 담대함은 그쪽에 가서 발휘하시지요.”
그걸로 끝이었다. 카프러스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예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팔짱까지 끼고 알신다를 노려보았다. 그의 분위기가 어찌나 험악한지, 안 그래도 조금 주눅이 들었던 알신다의 기세가 한풀 더 꺾였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말을 더 붙여보려는데, 문 안쪽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똑 똑똑 똑 똑
문이 열리고, 오드리가 나왔다. 안색이 좀 창백하고 약간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엿보이긴 하지만, 딱히 어딘가 아파 보이거나 하는 상태는 아니다. 그녀는 조금 전의 대화는 없었던 일인 척, 황급히 자세를 갖춘 알신다를 쓱 지나쳐서 카프러스의 곁에 섰다.
“점심 식사는 나가서 할까 하는데, 경도 같이 가시겠어요?”
“지금 나가실 겁니까?”
“그래요.”
카프러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서재에 박혀 있을 것처럼 굴어 걱정했었는데, 스스로 나가서 식사를 하겠다니 말릴 이유가 없다. 그가 외출 준비를 하겠다며 먼저 자리를 뜨자, 복도엔 오드리와 알신다만이 남았다.
“알신다. 외출 준비를 도와주겠어? 실내복을 입고 나갈 수는 없잖아.”
“……물론이죠, 아가씨.”
알신다는 빈 문을 흘끔거리며 아쉬움을 삼켰다. 하녀장쯤 되면 몸단장 같은 작은 일에 일일이 손을 대지 않지만, 아가씨가 꼬집어 불렀는데 뚜렷한 이유도 없이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문지기가 사라진 서재를 앞에 두고 돌아섰다.
알신다가 오드리의 드레스룸에 들어온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오드리가 오기 전에 준비가 잘 되었는지 확인하느라 들른 것이었으니, 제대로 옷을 꺼낼 목적으로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쯧, 무슨 옷장이 이 모양이람.”
알신다는 당연히 최신 유행의 옷을 고르려 했으나, 오드리의 옷장엔 그런 게 없었다. 모래시계처럼 허리를 졸라매는 중부식 드레스는 오드리에게 맞지 않았으니까. 메너트가 보냈던 옷들은 받자마자 팔아치웠기에,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평소 오드리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골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디케조차 쉽게 포기하지 못했던 코르셋이다. 오드리의 요구대로 옷을 입히는 알신다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아가씨, 이왕 그 피부색에 맞는 옷을 맞출 거면 좀 유행에 맞는 스타일로 하는 게 어떠세요?”
“브란젤의 유행대로 허리를 졸라매려면 난 갈비뼈를 뽑아야 할걸.”
“어린 시절부터 졸라매야 했는걸, 이렇게 나중에 하려니까 고생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 비법을 쓸 수 있는 의사가 있다면 꼭 모셔오고 싶군요.”
끔찍한 소리에 오드리가 질색했지만, 알신다는 그런 오드리의 반응이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지금의 오드리처럼 악평을 주렁주렁 달고서는 아무리 헨젤의 이름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결혼을 할 수 없게 될 게 뻔하지 않은가. 결혼하지 못한 여자란 수확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썩어가는 과일에 불과한 것이다.
그녀는 철없는 소리를 하는 어린애를 달래듯 간지러운 시선으로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제 머리 위에서 놀겠다 깔짝이는 게 얄밉고 거슬리지만, 일단은 몸 바쳐 일하는 가문의 아가씨였다.
“한 살이라도 젊고 어릴 때 몸값을 올리셔야죠. 어느 가문과 혼인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요.”
“내가 암소도 아니고, 몸값은 무슨. 젊은 시절의 고모님께서 뭐 아름답지 않고 교양이 없어서 그웬에 시집가셨던가? 그때 그웬은 작위와 수도 저택 말고는 가진 게 없는 곳이었잖아. 하향결혼도 그런 하향결혼이 없었다고 다들 말이 많던데.”
“아가씨! 어떻게, 어떻게 그런……! 가문을 위해 희생하신 분께!”
알신다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메너트의 하향결혼은 일종의 금기와 같은 이야기였다. 최소한 이 헨젤가에서만은 누구도 입 밖으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나 오드리는 말을 주워 담는 대신 희게 질린 알신다를 향해 조소를 지을 뿐이었다.
“날 곱게 치장시켜서 비싸게 팔아치우고 싶은 네 마음은 잘 알고 있어. 내가 이렇게 미적대다가 혹 네가 아끼는 도련님에게 흠집이라도 날까 싶어 안달하는 것도 알아. 하델의 검 선생이었던 베텔 경이 내 에스코트를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겠지.”
“아닙니다, 저는 그런 불경한 생각은…….”
“알신다. 집사는 네가 충성스럽고 영리한 데다 마음까지 곧은 사람이라고 내게 칭찬을 했어. 하지만 네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다면 당장 네가 갖고 있던 고용인 명부부터 내게 바쳤어야지. 그 알량한 권력을 움켜쥐고 내 주변에 사람을 심을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위협적인 기세를 내비치던 카프러스 앞에서도 어떻게든 말을 꺼냈던 알신다이건만, 어째 지금은 입술에 풀이라도 발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똑바로 부딪치는 초록색 시선이 거미줄처럼 그녀를 옭아맸다.
“오늘의 네 실수는 세 번째로 치지 않겠다. 네가 예뻐서도 아니고, 널 아껴서도 아니야. 오로지 네가 어린 하델을 정성으로 돌보았기에, 그 공과 수고를 생각해 한 번을 감해주는 것이다.”
알신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아니고, 위협적인 표정을 짓는 것도 아닌데, 뭔가가 어깨와 등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낯익은 압박감이 그녀를 찍어 눌렀다.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하녀장의 권한 이상으로 휘둘러 왔던 권력을 내려놓아라.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고용인 명부가 내 책상에 있으리라 믿는다.”
“……설마 아가씨께서 살림을 맡아 하실 생각이신가요?”
“어째서 설마가 붙는지 모르겠군. 데뷔탕트를 치렀으니 응당 나의 몫으로 생각하고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하겠다는 건데.”
알신다는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알싸한 통증이 몹시 반가웠다.
“이유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서재에 며칠이나 처박혀 일정을 모조리 미루시는 분을 어떻게 믿고 살림을 맡기란 말씀이십니까?”
“나 참. 방금 말은 마치 내가 살림을 하려거든 너에게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런 게 아니라…….”
“난 오드리 헨젤이고, 너에게 내 자격을 증명할 이유 따위는 없다.”
쉬이 긍정의 대답을 하지 않는 알신다와, 구태여 말을 더 보태지 않는 오드리 사이에서 찬바람이 불었다. 좁지도 않은 드레스룸에 소름끼치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곧 깨지고 말았다. 서재 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다이앤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드레스룸의 문을 열어젖혔기 때문이었다.
“어? 아가씨, 벌써 옷 다 입으셨네요?”
“알신다가 도와줬지. 다이앤, 이리 와서 머리 손질 좀 해주겠어?”
“그럼요. 그게 제 일인데요.”
다이앤은 날듯이 달려와 오드리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목을 간질이지 않도록 깔끔하게 틀어 올려 머리 장식으로 고정하는 손길이 빠르고 정확하다. 머리 손질을 마친 그녀가 이것저것 장신구를 꺼내 고르기 시작할 무렵, 오드리는 그때까지도 가만히 서 있던 알신다를 손짓으로 내보냈다.
문이 소리도 나지 않고 닫히자마자 두통이 몰려왔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도 한번 찾아든 고통은 좀체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알신다…….”
“알신다가 좀 꽉 막혔긴 하죠. ……아가씨, 알신다가 며칠 앓아누우면 딱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일도 꽤 쉬워질 것 같은데.”
“하지 마.”
“아야! 힝…….”
귓가에 속닥거렸다가 오드리에게 코를 맞은 다이앤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다이앤은 솜씨 좋은 약사였고, 약만큼이나 독도 잘 다뤘다. 본래 약과 독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것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독은 내가 허락할 때만 쓰는 거라고 했지? 네 멋대로 판단하지 마.”
“죄송해요…….”
“됐어. 생각이야 할 수 있지. 다만 입 밖으로 내지는 마.”
다이앤의 얼굴이 곧바로 활짝 펴졌다.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반응에 오드리는 그저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오드리는 카프러스와 함께 외출했다. 하늘이 회색 구름으로 뒤덮이고 기분 나쁠 정도의 습기가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어서 그런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건물을 장식한 천사상 조각조차 짙은 음영에 가려져 지독히 음침했다. 삐딱하게 덮인 가로등의 덮개 아래로 흘러나온 빛이 드문드문 도시를 밝혔다.
“저녁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오드리는 마차 창문으로 음울한 도시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정오를 약간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나 우울하다니, 같이 어깨가 처지는 느낌이었다. 영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앞에 두고 보던 카프러스가 피식 웃었다.
“일은 전부 끝내신 겁니까?”
“설마요. 그랬으면 이디케나 다이앤이 함께 왔겠죠. 그 둘은 지금 내가 남겨둔 일의 마무리를 하느라 제정신이 아닐걸요.”
“그럼 왜…….”
“꼭 나와야 할 일이 있었죠. 아, 다 왔다. 칼! 이만 내려주게!”
“예, 아가씨!”
오드리가 마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마부는 냉큼 마차를 멈췄다. 오드리의 명령은 들은 체 만 체 하던 과거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카프러스는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해하며 오드리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무슨 재주를 부리신 겁니까?”
“별거 있나요. 이거지, 이거.”
오드리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눈을 찡긋거렸다.
얼마 전, 헨젤가의 마차를 모는 마부 중 한 명인 칼은 넷째를 얻었다.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미숙아였고, 난산에 시달린 부인은 앓아누웠다. 빠듯한 살림에 다이앤이 지어주는 약과 오드리가 보태주는 지원금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카프러스는 그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몰랐으나, 오드리가 어떤 재주를 부렸어도 부렸겠구나 싶어 그저 웃었다. 여전히 바닥을 기는 평판 때문에 오드리를 믿지도 못하면서, 홀린 듯 그녀의 심부름을 하며 정보를 실어 나르는 하녀들을 이미 본 바가 있었다. 그게 어찌나 신기한 광경이었는지, 마치 전설에서나 나오는 사람 꾀는 요정이라도 한 마리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카프러스의 감상을 알 리 없는 오드리는 휙휙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살폈다. 우울한 날씨 때문에 오가는 사람 없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가게마다 덮개 벗긴 마법등을 내걸기 시작했기에, 음울한 길 여기저기에 창백한 달들이 떠오르고 있다는 게 달랐다.
“어디 보자……. 나올 때가 됐는데.”
“약속이 있으셨습니까?”
“일방적인 약속도 약속이라면요.”
알쏭달쏭한 말로 카프러스를 궁금하게 만들던 오드리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박혔다. 내내 오드리의 옆모습을 훔쳐보고 있던 카프러스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영광의 길 뒤편이라지만 금싸라기 땅이긴 마찬가지라, 제법 넓은 길은 정비가 잘 되어 깔끔했다. 가운데에 마차가 다니는 널따란 도로가 있고 양옆으로 인도가 있으며, 가로등 늘어선 인도 옆에 건물들이 빼곡했다. 한데 두 사람이 서 있는 인도의 맞은편에서 이상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초여름. 기온은 높아지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얇아지는 이때, 머리카락과 얼굴을 스카프로 가린 여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손목까지 감싼 옷과 꼼꼼하게 낀 장갑까지, 계절과 날씨에 맞지 않는 옷차림이 하 수상하다. 한 명이면 어디 아픈 사람인가 하겠는데, 무려 넷이나 되니 저절로 시선이 간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도로가에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축 늘어진 어깨에서는 어떤 생기도 찾아볼 수 없어서, 뭔가 이상한 약이라도 먹은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때, 가만히 서서도 휘청거리던 여자 한 명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어찌 된 일인지 팔만 허우적댈 뿐 좀체 일어서질 못했다.
카프러스의 팔다리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곤란에 빠진 여성과 약자를 돕는 게 완전히 몸에 밴 그다운 반응이었다. 그녀를 도와주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거리는 텅 비었고 가게의 주인들도 소 닭 보듯 하는 데다 곁에 있는 다른 여자들도 도움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가씨, 잠시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오래 곁을 비우지는 않을 것이고, 저 숙녀분이 일어나는 것만 도와주고 오겠습니다.”
오드리는 잠시 갈등했다. 애초 예정대로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인지, 아니면 카프러스가 저들과 접촉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이득인지. 그러나 카프러스가 저 가엾은 숙녀를 도와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거듭 청하였기에, 마음에 망설임을 남기고서도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카프러스는 널따란 길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주저앉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데, 허공을 휘젓는 것도 포기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던 여자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팩 고개를 돌려 거절하는 것이다. 카프러스에게는 그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저, 아가씨. 나쁜 마음으로 온 게 아닙니다. 그냥 일으켜 세워드리려고 한 거니, 제 손을 잡으시죠.”
여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답답해진 카프러스가 한 걸음 더 다가가자 몸을 떨며 어떻게든 피하려고까지 했다. 그 지경까지 이르자 그도 더는 강권할 수 없어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카프러스가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는 여자와 그녀 주변을 둘러싼 다른 여자들을 안타까이 바라만 보고 있는데, 뒤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났다. 두꺼운 굽에 징을 박은 부츠가 돌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았던 카프러스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그가 반갑지 않은 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베텔 경이 여기 왜 있습니까?”
“내가 못 올 곳에 왔습니까? 보티안 씨야말로 여기서 뭐 합니까?”
“뭐하기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고 와 있는 겁니까?”
피올이 황당해하며 제 뒤에 자리 잡은 치안대 사무실 건물을 가리켰다. 마침 사무실을 나오던 치안대원 유렌이 안면이 있는 카프러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카프러스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흠, 흠……. 미안합니다.”
“미안해하실 것까진 없고, 비켜만 주시면 됩니다. 치안대에서 보호하고 있다가 돌려보내는 분들이라서.”
피올은 머쓱해진 카프러스를 밀어내고는 쓰러진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여자는 피올의 손에도 몸을 움츠렸지만 아까처럼 뚜렷하게 거절 의사를 표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피올은 무기력하게 서 있는 여자들을 인도해 동그랗게 뭉쳐 서도록 했다.
“나란히 서시죠.”
여자들은 순순히 모여 섰다. 그들은 머리카락과 얼굴을 가린 스카프를 몇 번이나 매만지며 맵시를 확인했다. 그러나 카프러스의 눈에는 그 손길들이 영 맵시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대체 왜 피올이 그들을 인솔하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거 참 이상한 일이었다.
팔짱을 낀 채 발끝으로 연신 바닥을 두드려 대던 피올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유렌을 향해 신경질을 부렸다.
“마차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말을 길러서 데려오나?”
“뭘 그렇게 급하게 굴어? 갑자기 설사라도 할 거 같아서 그래? 급해도 조금만 참아봐.”
“너는 말을 해도 꼭…….”
“난 너랑 달라서 애초 출신부터 길바닥이거든. 고상하게 돌려 말하는 건 못하겠으니 네가 이해해. 씨발, 마려우면 마려운 거고 싸고 싶으면 싸는 거지, 그걸 꼭 조카 새끼 생일선물처럼 둘둘 싸고 포장해서……. 아, 왔다, 왔다.”
백합에 감긴 검 문장을 단 검은 마차가 빈 거리를 달려와 그들의 앞에 멈춰 섰다. 유독 덩치가 큰 말들이 멈춘 것이 불만스럽다는 듯 투레질을 했다. 치안대의 문장이 아니었다면 꿈에 나올까 겁날 정도로 불길해 보이는 마차였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치안대원이 턱짓하자 피올이 얼른 마차의 문을 열었고, 유렌이 여자들의 등을 떠밀어 마차에 태웠다. 여자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발을 질질 끌며 마차에 올랐다. 그러던 중, 아까 제자리에서 주저앉았던 여자가 쉬이 마차에 오르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크윽!”
짧은 신음소리였지만, 성대를 사포에 마구 비빈 듯 거친 목소리의 소유자라는 걸 알기엔 충분했다. 체구도 몸짓도 골격도 여자인데, 목소리는 사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옆에 비켜서서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카프러스의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는 저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분명 사형대에서 목이 매달리는 걸 봤는데?’
말브레 극장을 습격했던 괴한들은 브란젤 중앙광장에 마련된 사형대에서 목이 매달려 죽었다. 오드리는 그런 흉한 걸 뭐 하러 보러 가냐며 안 갔지만, 카프러스는 보러 갔었다. 사형대에 오른 자들은 뺨에 흰 튤립을 새긴 건장한 사내 넷. 매달기 전에 유언을 듣는 절차를 생략하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문초를 오죽했으면 말도 못 하는가 보다 싶어 흘려 넘겼다.
“빨리, 빨리, 늦었어.”
“아, 진짜……. 조카 새끼 사탕 조르듯 보채네. 간다, 가! 베텔 경, 나중에 봅시다! 술 한잔해요!”
피올은 서둘러 여자를 일으켜 세워 마차에 밀어 넣었고, 독촉에 못 이긴 유렌은 카프러스에게 다음을 기약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피올이 문을 닫고 마부석의 치안대원에게 신호하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시커멓게 하늘을 뒤덮은 구름 아래, 음침하게 그늘진 텅 빈 도로를 검게 칠한 마차가 내달리는 모습은 마치 죽음의 신 칼레이의 행진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검은 개가 아니라 갈색 준마가 마차를 끌고 있다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요소였다.
카프러스는 마차 뒤꽁무니가 시야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피올의 어깨를 잡아챘다. 난데없이 어깨를 잡힌 피올이 짜증을 내며 손을 쳐내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항상 웃음기가 남아 있던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짙은 피로와 신경질이 보다 뚜렷했다.
“보티안 씨, 나랑 얘기 좀 합시다.”
“내가 좀 바빠서 그건 어렵겠는데요.”
“잠깐이면 됩니다.”
“경이야 모시는 아가씨가 방에 처박혀 있어서 여유가 있겠지만, 나는 일거리가 쌓였습니다. 그러니까…… 맙소사.”
피올은 카프러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오드리를 발견하고 그만 탄식하고 말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어찌나 미운지, 유렌이 얄밉다 노래를 부르는 조카 새끼보다 더 짜증났다.
그는 좀체 떨어지지 않는 발을 질질 끌며 오드리에게 다가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나다니는 길이 끔찍하리만치 넓었다. 그런 와중에도 손끝에 입을 맞추는 인사는 우아하기 그지없으니, 몸에 밴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아직 정신없이 바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바쁘답니다. 그래도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다 끝난 일, 뭐가 그렇게 궁금하셔서 절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십니까?”
피올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탄했다. 그는 하늘에 맹세코, 오늘의 일을 어디에도 말한 적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드리는 미안함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말브레 극장을 습격한 괴한들이 여자이고, 매달린 놈들은 가짜라더라. 치안대가 그 여자들을 보호하고 있다가 돌려보낼 거라더라. 이 괴상쩍은 정보가 들어온 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워낙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얘기라 처음엔 믿지 않았고, 사실은 여기 이 자리에 나올 때까지도 믿지 않았다.
만약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카프러스가 피올의 어깨를 잡아채는 일이 없었더라면, 끝끝내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나랍인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높아진 때라 험한 꼴을 당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린 나랍인 여자들이라고만 믿었을 테다.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조용히 구경만 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하필 베텔 경과 나오셔서 저 꼴을 다 보게 만드셔 놓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퍽이나 믿겠습니다.”
“못 믿겠으면 믿지 말든가요. 눈으로 본 나도 안 믿기는데, 누가 내 말을 믿을까 생각이나 좀 해 보셨으면 좋겠네요.”
“하아……. 이해했습니다. 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피올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드리의 형편없는 평판과 낮은 신뢰도에 대해서는 그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목 매달린 습격자들이 실은 가짜였고 진짜는 여자였는데 치안대에서 보호하다가 멀쩡히 나랍으로 돌려보냈다…… 라니. 사교계의 보석이라는 타우레드 후작 영애가 말한대도 믿지 않을 내용이지 않은가 말이다.
하나 그건 피올과 오드리만의 납득일 뿐, 카프러스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는 말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죽은 네 명의 사내, 그들의 시커멓게 죽은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전혀 납득할 수 없지만, 저들이 멀쩡히 돌아가는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랍과의 거래가 있었든, 수사에 협조했든. 거기에 대해선 불만 없습니다. 아무렴, 치안대인데 오죽 잘 처리했을까. 한데, 그럼 그들은 왜 죽은 겁니까?”
“그들?”
“말브레 극장을 습격했다는 죄목으로 목 매달린 자들 말입니다. 설마 누명이었습니까?”
피올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앞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여자에게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거나 믿을 수 없어 하는 대신, 누명을 쓰고 죽었을지도 모르는 죄인들을 위해 화내는 기사.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올곧음과 고지식함이 새삼 거슬렸다. 누구는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혼자서만 세상 깨끗하게 사는 것처럼 구는 꼴에 짜증이 솟구쳤다.
“정말이지……. 그 여자들을 국내에 들이고 신분 보증을 해준 것도 모자라 돈까지 대줬던 놈들입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좀 유용하게 썼을 뿐이니 그러려니 하시죠.”
“아하. 그래서 유언도 할 수 없게 목을 다 망가뜨려 놨습니까? 설마하니 밧줄을 앞에 두고 딴소리를 할까 봐서? 하긴 억울하기도 했을 겁니다. 더한 죄를 지은 자들은 살아서 돌아가는데, 자신들만 목 매달리는 꼴이니 뭔 말을 못했을까.”
“그만해요.”
“왜 그렇게 표정이 사납습니까? 내가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설마 그 여자들을 그렇게 길바닥에 세워둔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까?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잔당들을 꾀어내려고? 그러기엔 너무 위험한 시도가 아니었습니까?”
“베텔 경!”
보다 못한 오드리가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을 쏟아낸 카프러스나 폭언을 참고 견딘 피올이나 기세가 험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목소리만 높이지 않았다 뿐이지, 지금 당장이라도 장갑을 벗어 뺨을 친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베텔 경, 자꾸 날 곤란하게 만들 거예요?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 보티안 씨, 미안해요. 정말 구경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제 사과를 받으시고, 오늘의 무례를 잊어주시길 부탁합니다.”
“레이디 헨젤께서 무슨 죄가 있으셔서 제게 그런 사과를 다 하십니까? 다 저 에스코트 기사가 모자란 탓인데.”
“지금 뭐라고 지껄였습니까?”
“귓구멍이 막혔습니까, 아니면 머리에 돌이 들어서 생각이란 걸 못 하는 겁니까? 모시는 레이디께서 기사를 대신해 사과하게 만들다니, 그 처신이 아주 적절해서 박수가 나옵니다.”
휘익! 피올이 휘파람을 불면서 박수를 치는 순간, 오드리는 자신이 끼어들 수 있었던 손톱만큼의 틈도 싹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카프러스의 기세가 아까보다 훨씬 험악해진 것이다.
‘정말이지, 사내들이란!’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생물인 것처럼 구는 주제에,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자그마한 생채기도 견디지를 못한다. 눈앞에서 부딪치지 않게 틀어막아 봤자 미봉책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부딪칠 테니, 차라리 싸워라 실컷 싸워라 멍석을 깔아주는 편이 나을 테다.
오드리는 살금살금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그리고 아까부터 카프러스와 피올을 흘끔대느라 가재미눈이 되게 생긴 부채 가게 주인에게 마차를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 주인이 허둥지둥 마차를 수배하는 동안에도 두 남자는 서로를 견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분은 계속 그렇게 계세요. 자리를 옮기시든, 여기서 난리를 부리시든 상관 안 할게요.”
“예?”
“아가씨!”
애써 말리는 시늉을 할 땐 본 체 만 체 하더니,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발을 빼자 둘 다 휙 고개를 돌린다. 오드리는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강조했다.
“알아서 하시라고요. 나는 본래 나온 목적대로 점심식사를 하러 가야겠으니까.”
카프러스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면, 오드리는 늦은 식사를 하려고 저택을 나온 참이었다. 한데 그녀의 호위 기사를 자처한 자신이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발을 잡고 있는 꼴이니, 한심할 따름이었다.
“마차를 불러오겠습니다.”
“아뇨, 필요 없어요. 저기 부채 가게의 주인이 벌써 부르러 갔으니까.”
“……죄송합니다.”
“죄송은 나중에 실컷 하세요. 사내들의 자존심 싸움을 내가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지금 억지로 끌어내 봤자 나중에 계속 부딪칠 거 뻔히 아는데 경을 달고 식당에 갈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두 분 일을 확실히 해결하고 오세요.”
카프러스는 물론이고 피올까지도 당황했다. 카프러스가 거듭 동행을 청했으나 오드리는 그 청을 모조리 거절했다. 그녀는 잔뜩 기분이 상한 사람을 앞에 두고 꾸역꾸역 밥을 먹을 생각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행히 카페 로열을 예약해 뒀고, 혼자서 식사하는 데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애써서 따라오려 하실 필요 없어요. 두 분 다.”
카프러스가 안 된다면 자신은 어떠냐 나섰던 피올이 머쓱하게 턱을 긁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데, 참아 넘겼으면 될 것을 괜히 맞받아치는 바람에 면구한 상황이 됐다. 솔직히 말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카프러스는 몹시 고소하지만! 그렇다고 레이디를 혼자 식당에 보낼 수야 있나.
“레이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괜찮은 사람이 있습니다.”
“난 혼자서도 괜찮다니까요.”
“금방이면 됩니다.”
그 말을 남기고 피올은 치안대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오드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에 있는 대로 미간을 모았지만, 마차가 아직 오지 않은 상황에서 뭐 뚜렷하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팔짱을 끼고 서서 가로등에 기댈까 말까 고민하는데, 카프러스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가씨……. 제가 잘못했습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하는 겁니까?”
“베텔 경. 나는 아까 그 여자들을 찾아내서, 밥도 먹이고 약도 지어줄 셈이에요. 필요하다면 돈도 줄 거고, 가족이 있다면 가족도 건사해 줄 겁니다. 뭐, 대놓고 할 건 아니지만.”
“……예?”
“멜브란트인에게는 끔찍한 범죄자일 뿐이지만, 나랍인들에게는 다를 거예요. 대놓고 말할 수 없으니 쉬쉬하긴 하겠지만, 어쩌면 영웅 대접을 받을지도 모르죠. 진실이 어떻던, 그들이 저지른 짓 때문에 멜브란트의 태도가 바뀐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카프러스는 제 앞의 오드리가 낯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끔찍한 꼴로 죽어 나자빠진 시체들을 같이 봤으면서, 어떻게 저런 말을 태연히 할 수가 있는가.
“로렐라이가 나랍에 제대로 파고들려면 그들의 마음이 필요해요. 편리성, 아름다움, 그 이상으로 로렐라이의 제품을 구매해야만 하는 이유가.”
아연해진 카프러스를 앞에 두고 오드리가 빙긋 웃었다.
“솔직히 말할까요? 난 그들이 살아 돌아가서 기뻐요. 경이 그렇게 안쓰러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만약 그들이 공범이 아니라 그냥 뒷골목을 떠돌던 비렁뱅이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런 내가 끔찍한가요? 내게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비난을 퍼부을 셈인가요?”
“아가씨, 저는…….”
카프러스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경의 칭호를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그러면 안 된다 말해야 할 것인데 혓바닥이 돌이라도 된 것 같이 말이 안 나왔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상대를 가려가며 주장할 정의라면 가슴 안에 넣어두고 꺼내지 마세요.”
오드리의 시선이 카프러스를 꿰뚫었다. 그는 가슴에 구멍이 난 것만 같은 착각에 숨을 멈췄다. 기껏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타인의 사정까지 고려하기엔, 내가 딛고 선 바닥이 너무 허술하죠. 나는 지금 내 목숨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차요.”
카프러스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끝없이 부푸는 악평, 헨젤 백작에게서의 홀대, 끊임없는 무시와 폄하. 아무리 의도한 일이라지만 오드리의 입지는 지나치게 좁았다. 지금도 봐라, 본래부터 그녀의 몫이었어야 하는 것들을 손에 쥐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지 않나.
“아가씨는 대체 왜…….”
대체 왜 누구도 권하지 않은 가시밭길을 걷고 계시는 건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편안히 살 수도 있을 텐데. 카프러스가 그런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 직전, 피올이 치안대 사무실에서 키가 껑충한 남자를 끌고 뛰어나오며 손을 흔들었다.
남자는 마법사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로브 바깥으로 출렁이는 긴 은발이 몹시 낯익었다.
“다행이다, 아직 마차 안 왔네.”
“셰비언?”
“아, 아가씨?”
협력도 끝났는데 셰비언이 왜 치안대 사무실에서 나오는가. 물색 모르는 피올은 당황해서 말을 잊은 오드리의 앞에 셰비언을 데려다 세웠다. 셰비언 역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라, 푸른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사방으로 굴러다녔다.
“셰비언이 치안대에서 한번 써보는 게 어떠냐며 웬 구속구를 만들어왔는데, 아 그거 성능 괜찮더라고요. 아직 시험작이긴 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보이니까, 식사 한 끼 하면서 천천히 얘기 나눠보시죠!”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바로 그때,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영업 마차가 도착했다. 피올은 거의 밀어넣다시피 오드리와 셰비언을 마차에 태웠다. 도착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꽉 누르고는 마부에게 손짓했다.
“카페 로열로 가주게!”
“예엡!”
날씨가 엉망이라 하루를 통째로 공칠까 두려웠던 마부는 지체 없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치안대원이 행선지를 정해줬는데 뭐가 무서우랴. 어두침침한 거리를 신난 마차가 뒤뚱거리며 달려 나갔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카프러스는 어어 하다가 쉬이 오드리를 내준 꼴이 되었다. 당황해서는 마차를 잡을 수 있는 대로로 가려는 그를 피올이 잡아 세웠다.
“베텔 경, 아까는 내가 미안했습니다.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잠깐 참으면 되는 걸 그걸 못 참아서…….”
“됐습니다. 잘못은 나도 했는데 사과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나저나 이것 좀 놔주시죠. 빨리 아가씨를 쫓아가야 합니다.”
“왜 쫓아갑니까?”
눈을 멀뚱멀뚱 뜨고 묻는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카프러스는 이 사람이 미쳤나 노골적인 시선으로 위아래를 훑었다. 한데 그 동작의 의미를 모르지도 않을 피올이 오히려 의아해하는 게 아닌가.
“경도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뭘 그렇게 빼요? 레이디 헨젤은 사업가고, 셰비언 녀석은 꽤 괜찮은 발명품을 내놨습니다. 억지로라도 둘이 만날 자리를 만들어줘야 좋은 부하죠.”
“뭔 소립니까, 그게.”
“그분이 마냥 보호해야 할 귀족 영애로만 보여요?”
“……그럼 아닙니까?”
머뭇대며 반문하는 말투에서 망설임이 묻어났다. 세상에, 그 뱀 같은 헨젤 백작을 속여가며 돈 버는 꼴을 보면서도 그저 보호할 대상으로만 여길 수 있다니 그것참 놀라운 콩깍지다. 피올은 고지식한 기사님을 딱하게 바라보다가, 와락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딸자식에게는 관심도 없는 백작님 슬하에서 고생하는 아가씨가 안타깝거들랑, 나랑 잠깐 얘기 좀 합시다. 경은 그분을 너무 몰라.”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팔 내려요!”
“사과도 내가 먼저하고, 레이디 헨젤의 속내도 알려주고, 아, 이거 너무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아 놓으라니까!”
“내가 왜요? 경, 우리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져 봅시다~”
피올은 검술도 뛰어났지만 체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카프러스의 반항을 제압하고는 즐겁게 걷기 시작했다. 어디가서 실력 떨어진단 말을 들어본 적 없던 카프러스는 난데없는 상황에 미치고 팔딱 뛸 거 같은데, 피올은 짤랑짤랑, 돈 떨어지는 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아 입이 귀에 걸렸다.
그렇게 카프러스가 피올에게 질질 끌려가는 동안, 오드리와 셰비언이 탄 마차는 숨 막힐 듯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긴, 마지막 만남을 그렇게 사납게 마무리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갑자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영 어색한 일이다.
오드리나 셰비언이나 남들 눈치 보며 산 인생들이 아니건만, 둘 다 지금은 좁은 마차에 서로 마주 앉아서는 갈 곳 잃은 시선을 엉뚱한 곳에 던지느라 애를 쓴다. 그러나 영업 마차가 크면 얼마나 크고, 서로 신경 쓰고 있는 주제에 얼마나 마주침을 피할 수 있을까. 실밥 터진 좌석 귀퉁이, 때 낀 창문틀, 촌스러운 무늬의 커튼 등을 헤매던 시선이 딱 부딪쳐 버렸다.
“저…….”
“생선 좋아하나?”
다시 침묵. 그래도 어색함은 꽤 누그러졌지만, 눈을 마주 보는 건 여전히 부담스러워, 오드리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워낙 날씨가 좋지 않아 마차 안이 꽤 어두컴컴한데도 셰비언의 은발은 신기할 정도로 반짝거렸다.
“카페 로열에 자리를 예약해 뒀는데, 거긴 생선 요리가 유명해.”
“뭐, 생선 나쁘지 않죠.”
“그대의 위가 큰 편이길 바라. 본래는 베텔 경과 함께 갈 예정이었기에 꽤 많이 시켜두었거든.”
“제가 그 기사님보다는 더 먹을 겁니다. 확실해요.”
셰비언은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나 카페 로열에 도착해서 연회에나 나올 법한 큰 접시를 세 개나 받았을 땐, 그조차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몇 인분입니까?”
“글쎄. 이 계절에 나는 생선 중 맛있는 거 세 마리만 골라서 솜씨 좀 부려보라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지.”
오드리는 화려하게 치장된 생선 대가리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격리된 테이블과 메인 요리 숫자로만 예약을 받는 카페 로열에서도 겨우 두 명이 올 줄은 몰랐을 테다. 어쩐지, 전채요리를 내오던 급사가 정말 두 명이 맞냐며 연신 확인하더라니.
“괜찮아요. 저, 이거 다 먹을 수 있어요. 저 배 큽니다.”
“어차피 이미 시킨 음식이라 무를 수도 없어.”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양이 많아도 음식은 맛있었다. 보들보들하게 찐 흰 살점은 입에서 흔적도 없이 녹고, 향기 나는 장작에 구워낸 생선살은 적당히 탄력이 있어 식감이 좋았다. 특제 소스는 향긋하고 와인은 달콤했다. 오가는 대화는 그리 달짝지근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연구는 잘되어가나?”
“뭐, 그럭저럭? 사실 이론 자체는 간단해요. 문제는 저만 알아본다는 거죠……. 남들도 알아보고 기존 수식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요.”
“겨우 닷새가 지났을 뿐인데 대단한 걸. 아까 보티안 씨가 말했던 쓸 만한 구속구라는 게 그거야?”
“어……. 맞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본래 원안대로 마법사가 아니어도 특정 인물이 마력을 주입하면 풀리게 한 건 맞지만……. 정작 치안대에서 만족스러워한 건 그게 아니라서요.”
셰비언은 장식용으로 나온 생선 대가리를 계속 노려보았다. 타지도 않고 덜 익지도 않게 적당히 구워진 눈알이 몹시 먹음직스럽다. 평소라면 같이 먹는 사람이 징그러워하거나 말거나 냉큼 눈알을 빼먹었을 텐데, 어째 지금은 감히 포크질을 할 생각이 안 들었다.
안 그래도 상식 없단 소리를 여기저기에서 수시로 듣는데, 오드리에게까지 그런 말을 들으면 몹시 슬퍼질 것 같았다. 그는 눈알 대신 생선살을 한 움큼 떼서 입에 구겨 넣었다.
“구속구를 차면 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능을 추가해 봤어요. 근력, 체력, 악력, 전부 평소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마력의 운용 능력도 줄어들어요.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 보니 죄인들의 의욕이나 이런 것도 확 떨어져서……. 치안대원들이 힘도 덜 들고 수월하다며 좋아하더라고요.”
“마법으로 그런 게 가능하다고?”
“안 될 건 또 뭔데요? 어차피 인간도 마력이 흐르는 동물 중 하나인데.”
오드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똑같은 생물종 중 하나로 표현하는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게다가 셰비언의 어조에서는 미묘하게 인간에 대한 경멸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대는 인간이 싫은가 보지?”
“글쎄요.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좋아하기 어려운 동물이기도 하죠. 거짓말, 욕심, 질투, 시기……. 그런데 아주 가끔, 모래사장에서 작은 보석을 발견하는 것 같은 확률로 눈부신 사람을 만날 때가 있어요. 그래서 희망을 버리기가 어렵더라고요.”
셰비언이 오드리와 눈을 마주치며 방긋 웃었다. 말하는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아주 아름다운 미소였다. 얼굴 생김도 생김이지만, 땋아 늘어뜨린 은발이 카페 로열의 높은 천장에 매달린 조명 때문에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거리며 눈을 홀렸다.
“그럼 나는 어떤가?”
오드리는 제가 꺼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마치 짝사랑에 빠진 소녀나 꺼낼 법한 말이지 않으냔 말이다. 어떻게 주워 담을 수 없을까 겉으론 태연한 채 속으로만 발을 동동 구르는데, 셰비언이 굉장히 서운해하는 표정을 짓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가씨 권유가 아니었으면 로렐라이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대의 성향과 흥미에 맞아 떨어져서 들어간 거면서 왜 나한테서 이유를 찾아?”
“그러니까, 그 성향과 흥미 이전에 아가씨의 권유가 더 영향력이 컸다고요. 뭐랄까……. 이상한 인연 같은 게 느껴졌거든요. 뭔가가 발을 붙들어 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셰비언은 오드리와 만났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신경을 거스르던 기차의 소음. 그걸 잊게 만든 것은 강렬한 초록색의 눈동자였다. 한여름을 뚝 잘라 넣은 것처럼 싱그러운 눈빛 속에 웃음과 흥미가 어렸을 때, 셰비언은 가라앉았던 마음이 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피올에게 마구 휘둘려 앉은 자리이지만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드리는 여전히 혼자서만 선명하게 반짝거렸고, 그런 그녀를 보는 동안 기분이 계속 들뜨는 통에 이러다 정말 발이 땅에서 떨어질까 겁날 지경이었다.
“아가씨는 제가 가명을 댄다고 자꾸 뭐라고 하시지만, 그거 진짜 이름이에요. 혹시 아나요? 이 브란젤 내에도 이름이 브란젤인 아이가 있을지.”
“이런,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문장까지 걸고 말했는데 믿질 않으셔서 제가 얼마나 서러운지 아가씨는 모르실걸요.”
셰비언이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오드리는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마법사의 문장이란 서명 대용으로 쓰일 정도로 유일무이한 것이긴 해도, 그게 어떻게 진실을 보장하는가. 그녀는 어설픈 하급 마법사가 문장을 이용해 사기 친 사례를 열 건도 넘게 댈 수 있었다.
“지금도 봐. 전혀 믿질 않으시잖아요.”
“문장은 그저 문장일 뿐이야. 그저 서명일 뿐인 게 어떻게 진실을 말한다는 보장이 된다는 거지? 그대의 말대로라면 계약서에 문장 박아놓고 기한 못 지키는 마법사들은 벌써 예전에 맛이 갔어야 했어.”
“아하……. 그랬구나. 하지만 아가씨, 제가 쓰는 마법은 이 시대의 다른 마법사들과는 다른 거 알고 계시잖아요?”
셰비언이 손바닥 위로 문장을 띄웠다. 크기는 좀 작지만, 일전에 워커가 보았던 화려한 문장이 그대로 떠올랐다.
울창한 숲에 쏟아지는 눈보라와, 그 속을 뚫고 날아와 위협적으로 입을 벌리는 용.
오드리는 선명한 그림을 그려내던 문장이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가득 찬 작은 문장으로 변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저 문장만으로 마법사의 실력을 평가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홀릴 것만 같이 아름답다.
“제 마법은 진실할수록 위력이 높아져요. 거짓은 마법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나무를 파먹는 벌레처럼 나를 갉아먹죠. 그러니, 제가 문장을 걸고 하는 말은 언제나 진실입니다. 맹세해도 좋아요.”
오드리는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올리고 깍지를 낀 뒤 그 위에 턱을 올린 채 문장에 집중했다. 웬만해서는 그의 말을 믿어주고 싶긴 한데, 역시 덜컥 믿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난 하티의 신관이 아니라서 거짓을 가려낼 재주가 없어. 덜컥 믿기에는 좀 그러네.”
“역시 그냥은 안 넘어오시네요……. 그럼, 잠깐만 손을 주시겠어요?”
셰비언이 오드리의 손을 살짝 감아쥐었다. 평소 그의 체온은 살짝 서늘한 편이었는데, 어째 이번만은 흡사 냉혈동물에게 잡힌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웠다. 오드리는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대, 인간이긴 한 건가? 뭐 이렇게 차가워?”
“요즘 세상에 인간 말고 다른 지적 종족이 있긴 해요? 자, 집중해 주세요.”
셰비언의 다른 손 위에 있던 문장이 다시금 빛을 뿌렸다. 그는 마치 과일이라도 옮기는 것처럼 허공에 나타난 문장을 들어 오드리의 손등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무슨…….”
오드리는 마법사 고유의 문장이 타인의 손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유독 차게 느껴지는 셰비언의 체온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신기한 현상이었다.
두근.
두근두근.
갑자기 낯선 맥동이 느껴졌다. 손등 조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문장에서부터 시작된 박동이 손을 타고 팔을 지나 심장에까지 전해졌다. 마법사가 아닌지라 평소엔 몸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마력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고 존재감을 과시했다.
눈앞의 풍경이 두 겹, 세 겹의 그림으로 바뀌어 보였다. 눈앞에 앉아 있는 셰비언의 몸을 내달리는 마력들이 문장과 연결되어 맥동하는 게 뚜렷하게 보였다. 점점 감각이 예민해지며 주변을 채운 마법망의 존재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느껴지죠?”
셰비언이 말을 하자 그의 안에 차 있던 마력이 차르르 흔들렸다. 문장이 뿜어내는 빛이 일순 강해졌다가 도로 잠잠해졌다. 문장과 연결되어 있던 마법망이 뒤늦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오드리는 본능처럼 깨달았다.
이 문장을 꺼내놓은 채로 거짓말을 했다간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아셨을 테니까, 이제 그만…….”
“잠깐만.”
오드리가 셰비언의 손을 잡아챘다. 손의 위치가 바뀌자 문장은 크게 흔들렸지만 다행히 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오드리는 안심했고, 셰비언은 놀랐다.
‘이게 왜 유지되는 거지?’
마력을 공급하는 주체가 바뀌었는데도 문장이 유지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셰비언은 다급히 문장을 회수하려고 했지만 이미 문장의 주인은 그가 아니라 오드리였다. 마법사도 뭣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 그의 문장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마법사가 아닌 오드리가 상황파악을 정확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심술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니, 혼란에 빠진 셰비언의 내심을 알 리가 있겠나. 그녀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문장을 띄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아직 그대를 믿을 수가 없어.”
오드리가 말을 할 때마다 문장의 빛이 출렁거리고, 그녀 안을 휘감아 도는 마력도 함께 깜빡였다. 셰비언은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문장에 대고 맹세해 줘.”
“무슨 맹세를 시키시려고…….”
“내가 허락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그대가 보석 경매장에서 들었던 이야기 전부에 대해 침묵하겠노라고.”
“…….”
“그대가 내 비밀을 떠들어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도록 고삐가 채워진 것도 아니고, 꼭 비밀을 지켜야 할 당위도 없으니, 어떻게 앞날을 장담할 수가 있을까.”
오드리의 말이 끝났음에도 문장은 여전히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셰비언은 오드리 몰래 문장을 도로 집어넣으려고 시도했지만, 이미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이라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째서……. 내 문장인데!’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야속한 문장은 그런 그를 비웃듯 선명하기만 한데, 문장을 걸고 하는 맹세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 리 없는 오드리는 자꾸만 대답을 보챈다. 셰비언은 되도록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래, 길어봤자 백 년이야. 잠깐인데 뭐.’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고민하는 사이 얼굴이 부쩍 까칠해졌다.
“안 그래도 워커에게 한참 혼났습니다. 함부로 생각하지 말라고요. ……말씀하신 대로 하죠. 대신, 아가씨께서도 절 제대로 이름으로 불러주셔야 합니다.”
“그쯤이야 뭐 어렵다고.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지.”
그 순간, 내내 은빛으로 빛나던 문장에 다른 색이 끼어들었다. 오드리의 눈동자 색과 꼭 닮은 초록빛이 문장 속으로 스며들더니, 기하학적인 도형 일부에 색을 입혔다.
오드리는 문장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보다 연결이 훨씬 강해진 느낌이 들고, 박동소리 또한 강렬해졌다. 당황해 셰비언의 손을 놓았음에도 문장은 여전히 그녀의 손등 위에 뜬 채 빛을 뿌렸다. 그녀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며 제 손등을 따라오는 문장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색이 변했어.”
“저 혼자서만 맹세한 게 아니니까요. 아무튼 그만 돌려주세요.”
“이건 그대의 문장이잖아. 내가 돌려줄 게 있던가?”
셰비언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문장을 따라 눈을 굴렸다. 오드리가 장난을 치며 문장을 건드릴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저 가느다란 손목을 붙들고 문장을 빼앗아 오고 싶지만, 자칫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거나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가 약점을 잡히는 건 사양이었다. 연구비 급한 워커가 걸레 짜이듯 쥐어 짜이는 걸 이미 실컷 보지 않았던가.
“제가 아가씨의 손등 위에 올려드렸었잖아요? 이제 제 손에 넘겨주세요.”
오드리는 문장에서 눈을 못 떼는 셰비언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제법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나비를 쫓는 고양이처럼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는데 어떻게 모를까. 돌려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등에서 반짝이는 문장이 내심 아쉬웠다.
“한때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어.”
“남의 문장 갖고 있어봐야 마법사 못 되거든요? 마법사는 재능으로 되는 거예요.”
“알아. 그리고 그 재능은 핏줄로 이어지지. 헨젤이고 랄리우스고 마법사에 대한 재능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서운했는지……. 워커 같은 경우는 흔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웠어.”
셰비언의 손을 잡은 오드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마치 냉혈동물처럼 차갑게 느껴졌던 게 거짓말인 양, 그의 손이 이전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살짝 서늘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과 엇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는 셰비언이 따뜻해진 게 아니라 오드리가 서늘해진 것이지만, 그녀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셰비언이 아까보단 나아졌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가씨는 지금도 넘치도록 많은 재능을 갖고 있잖아요?”
“많은 재능이라…….”
오드리 손등 위의 문장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셰비언 쪽으로 굴러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마음이 급해진 셰비언이 잡힌 손을 흔들었다.
“그럼요. 워커 녀석이 대단한 천재긴 하지만, 오죽 괴팍해야지.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길바닥을 떠돌고 있을걸요. 그런 녀석을 알아보고 주워 쓴 것도 재능이고, 누구의 도움을 받았든 로렐라이를 그만큼 키운 것도 재능이죠.”
“…….”
“게다가 아가씨는 말도 잘 타잖아요. 보티안 씨가 신입 치안대원들 훈련시키면서 아가씨를 예로 드는 거 알아요? 다들 칭찬 한 번 받아보겠다고 기를 쓰는데, 보티안 씨의 눈에는 영 안 차나 보더라고요. 지금 치안대 신입 중에는 아가씨보다 낫다는 소리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문장이 데구루루 굴러 셰비언 쪽으로 옮겨갔다. 셰비언은 반색을 하고 문장을 제 손끝으로 옮겨 띄우고 어디 상한 곳 없나 꼼꼼하게 살폈다.
한데 기하학적인 문양 자체는 그대로인데, 아까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색이 바뀐 것 말고도 문장에서 느껴지는 마력이 변한 걸 알겠다. 차디찬 얼음물 같던 마력에 숲의 향기가 엷게나마 배어 있었다.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셰비언은 일단 태연한 척하며 문장을 갈무리했다. 화려한 식탁이 무색하도록 반짝이던 은빛이 훅 사라졌다.
한편 오드리는 다시 평소로 돌아온 시야에 적응하느라 연신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몇 겹으로 겹쳐 보이던 사람이 다시 하나로 보이고, 피부를 간질이던 마법망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잔뜩 몸을 일으켜 제 존재감을 과시하던 몸 안의 마력도 그저 조용해졌다.
“그런데도 마법사의 재능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어릴 적의 얘기야.”
오드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선살을 헤집었다. 잠시 맛보았다가 잃어버린 감각이 몹시 아쉬웠다. 아예 몰랐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사실,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 해도 별 도움은 안 됐을 테다. 귀족 영애 마법사를 받아줄 상단 따위는 없고,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왕궁마법사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하나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한때는 꿈을 꿨지. 조금 전의 그대처럼 멋진 문장을 만들어내는 꿈.”
“글쎄요. 아가씨는 제 것과 다를 바 없는 문장을 이미 갖고 계시면서. 아, 어쩌면 더 나을지도?”
“음? 무슨 소리야?”
셰비언은 품을 뒤져 얇은 금속 명함을 찾아 꺼냈다. 어쩌다보니 부적처럼 갖고 다니는 로렐라이의 명함을 오드리의 눈앞에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명함에 새겨진 용과 꽃이 조명에 따라 언뜻언뜻 드러났다 사라졌다 했다.
“이게 아가씨의 문장이잖아요. 이름도 있네요. 로렐라이라고.”
“하하, 하하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말이 왜 안 돼요? 워커만 해도 아가씨 밑에서가 아니면 일 안 하겠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워커 밑에 있는 마법사들은 오로지 워커만 보고 따라다니고요. 결국 로렐라이의 마법사 인력 전부가 아가씨만 바라보는 거랑 다를 바 없는데 그게 어떻게 마법이 아니에요?”
“끼워 맞춘 말이 듣기는 좋네.”
“진짜라니까요. 이것도 문장에 대고 말해야 해요?”
셰비언이 접시를 땅땅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아홉 살 꼬마도 저지르지 않을 무례이건만, 오드리는 그저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억지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기분이 좋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큰 눈을 반으로 접고 웃는 얼굴이 몹시 어여뻐, 셰비언은 잠깐 넋을 놓았다. 들키기 전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수습했지만, 여름을 잘라 담아둔 듯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에서 눈을 떼기란 여전히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그저 인간일 뿐인데…….’
잠든 오드리에게 치유 마법을 썼을 때도, 방금 오드리의 손을 잡았을 때도 딱히 위화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주변에 널린 다른 인간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한데 워커를 만났을 때보다도 더한 끌림을 느끼니, 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가씨, 잠시 손 좀 주시겠어요?”
“왜? 문장 구경 한 번 더 시켜주게?”
“아뇨, 그게 아니라…….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전이었다면 어림도 없다 하고 내준 손도 빼냈을 것을, 기분이 좋은 오드리는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셰비언은 오드리의 손을 쥐고 그녀의 안으로 제 마력을 약간, 아주 약간 흘려보냈다.
“앗, 차거!”
오드리는 서늘한 한기에 놀라 황급히 손을 빼냈다. 잠깐의 접촉이었는데도 손끝에서부터 퍼진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체면불구하고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정신없이 손을 녹였다.
“셰비언, 네 마력이 차가운 성질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이게 뭐하는 짓이지?”
모처럼 둥글어졌던 오드리의 어조가 다시 뾰족해졌지만, 셰비언은 그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어야 할 마력이 죄다 튕겨 나오다니,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아가씨. 혹시 조상 중에 용이 있었어요? 아니면, 요정이나?”
“……뭔 소리야?”
“어, 아니지. 마법사의 재능이 없는 걸 보면 용은 아니고……. 나무요정이나, 땅요정 계열이라든가?”
횡설수설하는 셰비언은 어딘지 무섭기까지 했다. 오드리는 손에 입김 불던 것도 그만두고 셰비언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셰비언, 용은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종족이고, 요정은 이미 멸족했어. 한때는 열 손가락을 넘어가는 종족들이 어울려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 남은 건 인간뿐이야. 마법사면 당연히 제일 처음 배우는 것일 텐데, 갑자기 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아……. 그랬지, 참.”
셰비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마치 혼이 빠지기라도 한 양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제 손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마법사면 제일 처음 배운다고 하셨죠?”
“그랬지.”
“실례하겠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셰비언은 어떤 해명도 없이 그 말만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상식이 부족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남겨진 오드리는 황당한 상황에 입맛마저 뚝 떨어진 채로 몇 잔의 와인을 연거푸 들이켜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드리는 카페 로열에 마차를 불러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미 마중 나온 마차가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대체 누군가 하고 봤더니, 입이 한 뼘은 튀어나온 카프러스가 칼과 함께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경, 보티안 씨와 문제는 잘 풀었어요?”
“애초 문제랄 것도 없었습니다. 어서 타시죠.”
입은 튀어나왔어도 행동만은 정중하다. 오드리는 뒤늦게 취기가 도는 통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카프러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마차에 올랐다.
“몇 잔이나 드신 겁니까?”
“별로……. 얼마 안 마셨는데요.”
“그게 얼마 안 마신 거면 저는 보티안 씨와 다정한 우정의 대화를 나눈 거겠습니다.”
“베텔 경이 그렇게 비꼬는 걸 들으니 신선하네요.”
카프러스는 입을 꾹 다물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칼의 마차 모는 솜씨는 늘 그렇듯 괜찮아서, 오드리는 마차의 흔들림에 느긋하게 몸을 맡긴 채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셰비언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는커녕, 왜 그랬는지 이유를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용이니, 요정이니…….
어린 시절 보았던 그림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떠올랐다. 잔혹한 종족전쟁이 벌어지기 전, 열이 넘어가는 종족들이 어울려 살던 옛날을 배경으로 한 환상적인 이야기들도.
“저, 아가씨.”
“네, 말씀하세요.”
“그웬 백작 영애께는 아직 약혼자가 없습니까?”
오드리는 기억 속을 헤매던 정신을 서둘러 현실로 끌어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끙끙대더니, 웬 약혼자 타령인가.
“왜요, 네이기스가 마음에 들어요? 경은 제법 실력 있는 기사지만, 고모님의 마음에는 영 안 찰 텐데요. 웬만하면 마음 접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요?”
“그웬 백작 영애께서 보티안 씨에게서 회중시계를 받아 가는 걸 봤습니다. 제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말하는 태도나 표정이나 이런 게, 꼭…… 보티안 씨를 연모하는 것만 같아 보여서.”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곧 예상했던 두통이 엄습했다. 네이기스가 피올을 보며 눈을 빛내는 걸 보며 위험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워낙에 귀족 영애의 표본처럼 자란 아이라 알아서 마음 접을 거라고 여겼었는데.
“첫사랑을 어쩌겠어요……. 두세요, 보티안 씨가 알아서 쳐 내겠죠.”
내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도 바쁜데, 사촌동생 첫사랑까지 챙겨줄 정신이 있을까 보냐. 오드리는 머리를 젖히고 지끈대는 두통을 견뎠다.
꾸물대던 하늘에서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도시의 정적은 순식간에 깨지고 대신 빗소리가 사방을 채웠다. 그 외출의 끝에서, 오드리는 고용인 명부를 기어이 손에 넣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