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알룬드의 목걸이 (6/62)

chapter 5. 알룬드의 목걸이

「“실렌다 사막에는 지금은 멸망하고 없는 고대종족들 간의 전쟁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그게 그렇게 볼만하대.”

“자기야, 그래서 거기로 여행 가자고? 리가 항구의 축제도 아니고, 달튼 섬의 불쇼도 아니고, 사막에 남은 전쟁 흔적 같은 거 보러 여름휴가를 쓰자고?”

“아, 아니……. 그냥 말만 해 본 거야.” - 어느 연인의 대화」

치안대의 사무실은 영광의 거리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금싸라기 땅인데 치안대까지 있으니 그 부근의 치안은 브란젤에서도 손에 꼽히도록 좋았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나가 놀고 싶을 때는 치안대 사무실 부근에서 놀아라, 하고 당부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역시 귀족 영애가 스스럼없이 찾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장소였다. 해서, 오드리의 말을 전할 겸 치안대 사무실에 찾아갔던 다이앤은 뜻밖의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서둘러 치안대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몹시 익숙했다.

“레이디 그웬……?”

워낙 빨리 스쳐 지나간 거라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그렇게 자주 본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눈이 나쁘진 않았다. 무심결에 제대로 확인하려는데, 억센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돌려세웠다.

“몰리 양? 여긴 무슨 일입니까?”

“아, 보티안 씨. 다른 게 아니라, 방금 나가신 분이 제가 아는 분 같아서…….”

다이앤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머리가 한참 위에 있는 피올이 어쩐지 무섭게 느껴졌다. 피올이 그 넓은 어깨로 문을 막다시피 하고 있자, 사무실 안쪽에서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아, 누구는 여자들에게 인기 많아서 좋겠네!”

“그게 아니라니까!”

“피올! 과자 잘 먹을게!”

“아, 진짜……!”

낄낄대는 소리로 미루어 짐작해 보니, 방금 나간 아가씨가 피올을 위해 과자를 가져온 모양이다. 피올은 얌전한 얼굴로 귀를 활짝 열고 있는 다이앤을 끌어내다시피 데리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자꾸 뒤를 돌아보던 피올이 겨우 안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즈음, 다이앤이 히죽 웃었다. 피올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보티안 씨, 봄인가 봐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입니까, 그거…….”

“아니, 요즘 꽃피고 바람 불고 하는 게 봄이라고요. 내가 뭐 못할 말을 했나? 표정 무섭네요. 잘하면 한 대 맞겠어요.”

히죽대며 말하는 꼴이 제법 얄밉다. 피올은 제 덩치의 반밖에 안 될 가녀린 여자를 앞에 두고 한숨을 푹푹 내쉬다 마구 얼굴을 문질렀다. 그웬 영애가 자꾸만 치안대 사무실에 들락거릴 때부터 언젠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정말 암담했다.

“네, 봄입니다. 겨우 며칠 전에 봄 무도회가 열렸었으니, 봄이라는 걸 모르기도 어렵겠죠. 그래서 몰리 양은 여기 왜 왔습니까?”

“아가씨께서 찾으세요. 카페 로열에서요.”

“아, 일이 많은데……. 갑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카페 로열은 브란젤에서 손꼽히는 고급 식당이었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철저하게 개인적인 공간을 보장하는 식당 구조가 카페 로열을 유명하게 했다. 비록 개인공간을 보장해 주는 자리는 다른 자리보다 두 배 이상의 값을 치러야 했지만 말이다.

피올은 호화롭게 장식된 파티션을 보며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만끽했다. 마침 식사시간이니 사람들이 꽤 있을 텐데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고, 악단의 연주에 묻혀 소곤거림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런 곳의 가격은 대체 얼마나 할까.

“카페 로열이라니, 제가 여기 와보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앞으론 자주 생각하도록 하세요. 마침 점심시간인데, 생선구이 좋아하세요? 카페 로열은 생선구이가 유명하다는데.”

“굳이 따지자면, 가리는 게 없는 편에 속합니다만…….”

“잘됐네요. 미리 시켜두었거든요.”

오드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요리가 나왔다. 제스본강에서 잡은 커다란 민물고기를 양념하여 굽고 레몬을 뿌린 생선구이와 그에 어울리는 상큼한 화이트 와인, 그리고 잘 구워 특제 소스를 뿌린 두툼한 소고기였다.

생선구이는 피올의 앞에, 소고기 구이는 오드리의 앞에 놓였다. 먹음직스럽게 잘 구운 고기를 구경만 하게 생긴 피올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전채요리가 없는 건 둘째치고라도, 메뉴 차이가 너무하지 않은가.

“아니, 어제까지 누워 계셨다던 분께서 웬 고기입니까? 저랑 접시가 바뀐 것 같은데요?”

“먹을 수 있으면 먹는 거죠. 뭐, 와인은 안 시켰잖아요?”

“하여간……. 레이디께서 왜 그렇게 코르셋을 느슨하게 매고 다니시는지 알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코르셋을 차서, 성인이 되었을 땐 갈비뼈 모양이 바뀔 정도로 허리를 졸라매는 게 브란젤의 숙녀들이다. 브란젤의 숙녀들 중에서도 최고라는 타우레드 후작가의 영애는 그 허리 둘레가 가늘기 그지없어 남자의 팔 하나로 충분히 감고도 남을 정도라 했다.

하나 오드리는 그런 문화와는 상관없는 남쪽 도시에서 자랐다. 이디케는 어떻게든 브란젤의 레이디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코르셋을 졸라보려다가 끝내 포기했다. 오드리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작정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으니까.

화를 낸다면 낼 수도 있는 말이지만, 오드리에게는 그저 그런 흔해빠진 속닥거림 중 하나였다. 대놓고 말한다는 점에서는 좀 나아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작게 자른 고기를 우물대며 물을 마셨다. 와인이면 좋았을 테지만, 술까지 마셨다간 이디케가 불을 뿜을지도 모른다.

“보티안 씨가 브란젤 출신, 혹은 브란젤의 영향을 받은 중부 출신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브란젤의 숙녀들처럼 죽도록 허리를 조이는 문화는 남쪽도, 북쪽도 없으니까요. 아, 서쪽에도 없군요. 동쪽에서는 가느다란 허리가 아니라 작은 손과 발을 선호한다는데, 들어보셨는지?”

“…….”

“네이기스와는 잘되어가요?”

“풉! 쿨럭쿨럭! 컥!”

마침 와인을 마시고 있던 피올이 사레가 들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요란하게 기침을 했지만, 오드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 몫의 음식부터 챙겼다.

“겨울보리가 무르익었다면서요. 그웬 백작가의 문장이 겨울보리에서 따왔다는 거 알고 보낸 메시지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알아요, 농담이에요. 한데 보티안 씨의 반응이 너무 격해서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진짜 잘되어가요?”

제 사촌동생을 정보원으로 쓰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왜 자꾸 있지도 않은 감정을 찾으려 애쓰는가. 농이라면 농이라서 기분 나쁘고, 진짜로 묻는 거라면 그것참 악질이다. 피올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피올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화를 내려는데, 내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그를 놀리던 오드리가 표정을 싹 바꾸었다. 한없이 가볍기만 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피올은 내심 혀를 차고 말았다. 이래서야 화를 낼 수가 없잖은가.

“메시지 잘 받았어요. 그런데 정말 궁금해졌지 뭐예요. 만년필값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서 말이에요. 보티안 씨, 뭘 바라고 내게 그런 정보를 넘겨요? 내 평판이 어떤지 뻔히 아는 사람이?”

“……처음에는 깔짝깔짝 시험이나 해 볼까 했습니다만……. 뭐,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 않습니까. 그런 거죠. 레이디 헨젤, 저는 산트렘 기사단 출신에다 현직 치안대원입니다. 쓸 만하지 않습니까? 실력보다 자존심이 높은 에스코트 기사보다는 나을 텐데요.”

“나 참……. 보티안 씨,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나 알아요? 방금 한 말, 내가 치안대에 찌르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 쓸 만하다는 치안대 망토를 바로 벗는 걸로 모자라 국경지대로 쫓겨 가지 않으면 다행일걸요.”

“에이. 레이디께 제가 필요하다는 걸 아는데, 왜 그런 걱정을 합니까?”

생선살을 파헤치던 포크가 똑바로 오드리를 겨누었다. 오드리는 그 포크에 꿰뚫린 것처럼 가슴이 선뜩해지는 느낌에 그만 숨을 멈췄다.

“베일에 가려져 다들 궁금해하는 로렐라이의 단주가 이런 작은 여자일 줄, 누가 알겠습니까.”

“보티안 씨, 혹시 그 생선 상했나요? 종업원을 부를까요?”

“말하는 저도 잘 안 믿기긴 합니다만……. 레이디의 나이와 신분, 성별만 걷어내고 보면 의외로 선명하거든요. 그 엉망진창인 평판도 일부러 유지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오드리는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피올은 너무나 쉽게 말하고 있지만, 편견이라는 게 어디 그리 쉽게 걷히는 것이던가.

괜히 망아지 같단 소문을 부추기고, 사치에 빠져 제 하녀들의 일탈도 못 알아보는 멍청한 여자라는 소문을 방치한 게 아니다. 그런 소문에 어린 귀족 영애라는 선입견이 더해지면, 눈앞에서 무슨 짓을 해도 제대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거기에 더해 들키지 않으려고 온갖 재주를 다 부렸으니.

지금 당장 오드리가 누군가를 붙들고 내가 로렐라이의 주인이요, 말을 해도 믿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아, 어쩌면 헨젤 백작은 믿어줄지 모른다. 그는 제 딸의 재주를 일찍이 알아보고 만탈락에 처박은 장본인이니까. 그러나 그런 그조차 편견에 눈이 가려져 있었다.

“정말 종업원을 불러야겠네요.”

오드리의 부정에도 피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한 번에 인정했다면 더 놀랐을 테다. 그만큼 오드리의 수작은 교묘했다. 그에게 산트렘 기사단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대답하기 싫으면 듣기만 하시죠. 겨울보리는 곧 추수될 겁니다. 빈 땅에는 새 작물을 심는 게 순리니, 로렐라이에게는 그만한 기회도 없을 테죠. 아무리 기발하고 뛰어난 마법도구를 만든다고 한들, 그것만으로는 곧 한계가 찾아올 테니까.”

“…….”

“저는 레이디께서 계속 이대로 계실 거란 생각은 안 합니다. 본래 야망 있는 사람에게서는 멀리멀리 도망치는 게 제 신조긴 합니다만……. 어째 이번엔 도박을 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오드리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제 앞의 접시를 노려보았다. 잘린 고깃덩이에서 흘러나온 육즙이 소스를 묽게 만들고 있었다.

“……서로 어느 정도 정보 교환을 하는 거야 그렇다 쳐요. 하지만 만약 내가 당신이 짐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제안이야말로 해서는 안 될 일 아닌가요? 망토 벗고 싶어요? 치안대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검이잖아요.”

“레이디께서 제 짐작대로의 사람이시면 제 이름이 밖으로 나갈 일 없고, 제가 틀렸다면 누구도 레이디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피올은 손해 보는 바가 없었다. 이 아슬아슬한 관계에서 위험부담을 짊어지는 건 오로지 오드리뿐이었다. 그녀는 고깃덩이를 작게 잘라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피올을 입에 넣고 씹는 것처럼, 잘근잘근.

그나마 피올의 필체로 쓰인 편지들 중 일부가 수중에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혼자 거꾸러질 일은 없을 테니까. 자필로 편지를 쓴 피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거를 지운 검께서 도박을 다 하시고, 욕심이 아주 대단하시네요. 그렇게 미련이 많으셔서 어떻게 다 버리고 평민이 될 생각을 하셨을까?”

“글쎄요……. 그렇게 욕심이 많은 건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피올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선살을 헤집었다. 부족한 것 없이 태어났고, 깔린 길을 걷기만 하면 순탄하고 부유한 삶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게 얼마나 혜택 받은 환경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상을 좇아 길에서 뛰쳐나왔다. 그랬으면 끝까지 버텼어야 했는데 중도에 탈락했고, 그런 주제에 이제는…….

어쩐지 갑자기 비린내가 올라오는 것 같아 생선살에 레몬을 더 뿌렸다. 레몬 뿌린 생선살을 한 조각 입에 넣자 시큼한 맛이 혓바닥을 찔렀다. 그는 몇 입 더 먹다가 끝내 포크를 내려놓았다.

“레이디의 신용을 얻으려면 좀 더 주머니를 풀어야 하는 모양이죠? 그럼 이건 어떨까요. 알룬드의 목걸이라고, 아십니까?”

알룬드의 목걸이라면 오래된 전설 속에 등장하는 물건이었다. 홍수가 나면 물을 담아뒀다가 가뭄이 나면 그 물을 꺼내 비로 뿌릴 수 있다는 용의 목걸이. 하지만 그건 그냥 전설일 뿐이다. 도둑 로렐라이가 용에게서 마법을 훔쳐다 인간에게 뿌렸다는 수준에 불과한 허황된 이야기.

“알룬드의 목걸이라. 설마하니 전설 속의 목걸이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아마도 별명일 것 같은데, 대상은…… 사람? 보석? 예술품?”

“잘 아시는군요. 얼마 전 브란젤의 보석 경매장에서 입수한 블루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그런 별명을 가졌죠. 살론의 유명한 보석 장인이 디자인한 거라고 했습니다.”

오드리는 보석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예술품으로써의 보석보다는 재산 가치가 있는 보석을 선호했다. 보석 경매장에 대한 소식은 오드리보다 다이앤이 훨씬 빠삭하게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요?”

“도둑맞았습니다.”

오드리는 막 입에 넣으려던 고기를 그만 내려놓았다. 너무 엄청난 말을 들어서 입맛이 뚝 떨어졌다.

브란젤의 보석 경매장이라면, 취급하는 보석의 몸값만큼이나 도도하게 구는 곳으로 유명했다. 어찌나 콧대가 높은지, 신규 사업자인 로렐라이는 경비 관련 마법도구를 아무것도 팔지 못했다. 나중에 경매장의 마법도구를 확인한 워커가 생각보다 수준 차이도 안 나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며 이를 갈며 써낸 보고서를 읽은 기억이 났다.

“놀라운 얘기로군요. 어떤 사교 모임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내가 누워 있었던 동안에 일어난 일인가요?”

“아니요. 놀랍게도, 봄 무도회가 열리기 바로 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덕분에 지금 치안대원들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갈리고 있죠. 수습에서 정식대원이 된 게 잘된 일인지 가늠이 어려울 정도라니까요.”

“이런……. 저 없는 사이에 사교계에서 아주 화제였겠어요.”

“아실 만한 분께서 그렇게 말을 돌리시면 됩니까? 당연히 비밀입니다. 경매장은 치안대가 완벽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최대한 빨리 찾아내기를 바랍니다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치안대에 마법사가 몇이나 있다고? 왕궁마법사들에게 협조를 요청해도 모자를 판에!”

말을 하다 보니 속이 터졌다. 피올은 손도 대지 않고 두었던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 단번에 잔을 비웠다. 오드리는 줄어드는 와인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고생하시네요. 한데, 그 얘길 저한테 해서 뭐가 달라지나요?”

“레이디께서는 로렐라이의 마법사를 움직일 수 있잖습니까. 그, 워커라고 했나. 그렇게 실력이 좋다면서요? 좀 도와주시죠.”

“나 참……. 언제는 신용을 얻으려면 주머니를 풀어야 한다더니, 대뜸 도움 요청부터 하시는군요. 제가 로렐라이의 마법사와 영 모르는 사이면 어쩌시려고 이러실까?”

“그만 버티고 인정하시죠. 적절한 순간에 오가는 도움이야말로 인맥을 다지는 지름길이 아니겠습니까?”

“보티안 씨의 놀라운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드리죠. 어쨌거나 정보는 고마워요. 로렐라이의 특급 고객으로서 그곳의 마법사와 친분이 있는 건 사실이니, 말은 전해두겠어요.”

피올의 얼굴에 실망감이 깃드는 와중에, 오드리는 그의 앞에 놓인 와인병을 향해 손짓했다. 속이 타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혼자서만 마시지 말고 나한테도 좀 나눠줘요.”

“병석에서 일어난 지 아직 하루도 안 지난 거 아닙니까?”

“산트렘만큼은 못해도 만탈락의 포도도 달고 맛있어요. 그 포도로 빚어내는 와인은 천국의 음료수죠. 한 잔만 줘요.”

오드리는 방금까지 물이 담겨 있던 잔을 내밀며 재촉했다. 피올은 미심쩍어하면서도 그 잔에 와인을 따랐다. 향긋한 황금빛 술은 순식간에 오드리의 목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잔을 내밀었지만, 피올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 어제까지 병석에 계셨잖습니까. 일어나자마자 와주신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요. 레이디께서 도로 침대에 드러눕는 일이 생기면 제가 락시 양에게 멱살이 잡힐지도 모릅니다.”

“어머.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어요? 이디케는 의외로 제법 사람을 가리는데요.”

피올이 다소 과장된 몸짓을 가미해 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드리의 병문안을 가면서 이디케와 마주할 일이 몇 번이나 있었는데, 어찌나 눈빛이 무섭던지 차 한 잔 얻어 마시는 시간이 가시방석 같았다나 뭐라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 집사 할아범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하하, 하하하. 이디케가 내 수석하녀인 건 아시죠? 그 말 꼭 전해드릴게요.”

내내 표정이 굳어 있던 오드리가 옷음을 터뜨렸다. 피올은 그런 그녀를 따라 함께 웃었다. 매번 화가 나 있거나, 비아냥대거나 하는 얼굴만 보다가 웃는 얼굴을 보니 꽤 보기 좋았다. 어느 정도냐면,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리던 초록색 머리칼도 제법 괜찮아 보일 정도였다.

“레이디께서는 좋아하는 꽃이 있으십니까?”

“음……. 딱히 없는 줄 알았는데, 최근에 보니까 있더라고요. 체리꽃. 체리나무에서 피는 꽃이 그렇게 예쁘던걸요.”

“이런. 일이 무사히 해결되면 선물하려고 했는데 난이도가 너무 높군요. 나무에서 피는 꽃이라니요.”

피올이 제법 애석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드리의 병문안을 갈 때에도 먹을 것을 사가면 사갔지, 꽃을 사간 적은 없으면서 입에 발린 소리를 잘도 한다. 하긴, 그 귀한 마법사님에게 말을 전해줄 상대인 것이다.

그의 그런 노력 덕분인지, 식사 시간은 내내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오드리도 피올도 접시를 다 비우지 못했고 디저트엔 겨우 손만 대고 말았지만 일단 겉으로는 그랬다.

식대는 두 사람이 정확히 반을 갈라 계산했다. 덕택에 피올은 졸지에 숙녀에게 음식값을 계산하게 하는 무뢰한이 되었다. 카페 로열의 식대가 비싸긴 해도 치안대 월급으로 지불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자존심에 살짝 금이 갔다.

“제가 사야 하는데, 왜 레이디께서 돈을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티안 씨. 우리가 친구인가요?”

피올은 조금 당황했다. 친구냐고? 그럴 리가. 자신과 오드리는 친구라고 부르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걸 따져야 하나? 본래 숙녀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건 신사의 몫이었다.

“난 신세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숙녀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돈 많아요.”

피올의 표정이 더욱 알쏭달쏭해졌다. 오드리는 그저 웃었다. 어차피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신사가 숙녀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건 어쩌면 그냥 관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식사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숙녀에게 자신의 경제력을 과시하는 신사들의 수법 중 하나라는 걸 알고 난 뒤로는 도저히 그 식사 대접을 즐길 수가 없었다.

오드리에게 겨우 식사 한 끼를 대접하고는 아주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양 거들먹거리던 치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만탈락에서조차 그랬는데 브란젤에서도 같은 일을 겪고 싶진 않았다.

멜브란트 왕국에서 태어난 여자들의 삶은 대체로 비슷했다.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곳에서, 정해진 교육과정을 밟고, 정해준 상대와 결혼했다. 결혼 전에는 부모님에게 기대어 살고,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기대어 살았다. 혹 남편이 유산을 남기지 않고 일찍 죽어버렸는데 친정의 도움을 바랄 수 없다면, 비참한 가난만이 남겨진 여자를 기다렸다.

특히 보수적인 상류계급은 신분이 낮은 여자들보다 이 굴레가 더 단단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여자는 남자에게 평생을 기대 살아야 했다.

오드리가 부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상단을 택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마음대로 살고 싶다면 스스로를 건사할 돈과 힘이 있어야 했다. 돈을 벌고 나니 나이가 걸렸고, 나이가 해결되고 나니 사회적인 시선이 자꾸 거치적거리긴 하지만 말이다.

“그냥 성격 까다로운 여자 하나가 변덕을 부리는구나 하세요.”

“거 참, 희한한 변덕이 다 있군요. 혹 정답을 맞히면 친구 해주시는 겁니까?”

“퍽이나 자신만만하시네요.”

피올이 혀를 찼다. 하나 그 홀로 고민해 봐야 무슨 답이 나오겠는가. 게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일은 고민할 여유도 빼앗아 버렸다. 그는 책상에 쌓여갈 서류가 무서워 감히 오드리를 저택에 데려다주겠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마차 앞에서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자마자 다시 치안대 사무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오드리는 피올이 멀리 사라지자마자 귀찮게 거치적대는 치마를 한손에 휘어잡고 벌컥 문을 열었다.

“다이앤! 당장 워커에게 갈 거야. 그 게으름뱅이 자식……. 어머나.”

“거기 그렇게 서 계시지만 마시고 오르시지요.”

마차 안에 있던 카프러스가 손을 뻗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해석하기도 전에 손이 잡혔다. 오드리는 어어, 하는 사이 마차로 홱 끌어올려졌다. 카프러스의 옆에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던 다이앤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베텔 경……. 왜 여기 있어요? 휴가 간 거 아니었어요?”

“아가씨께서 누워 계시는데 휴가라고 제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금방 왔습니다. 게다가 동행도 없이 그놈을 만나러 가셨다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카프러스가 있는 대로 미간을 구겼다. 그는 피올을 싫어했다. 처음 만남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귀찮게 달라붙어 되먹지 못한 질문을 해대는 행태를 경험한 뒤에는 호감도가 그야말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오드리가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에 멋대로 난입하는 꼴을 본 게 결정적이었다.

“그나저나 워커라니, 또 누군가를 만나러 가시는 모양입니다. 제가 따라가지요.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아뇨.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오늘 안 가셔도 언젠가는 만나러 가실 거 아닙니까. 언제가 되든 저는 또 따라붙을 텐데요.”

“식사하면서 와인을 좀 마셨어요.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조금 무리를 한 모양이에요. 지금은 쉬어야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카프러스가 더 끼어들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그는 다음에 또 빌어먹을 치안대원이 만나자고 하거든 꼭 자신을 데려가라고 신신당부하는 수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무 절 빼놓고 다니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가씨께서 영리하고 상황 대처 능력도 좋으신 걸 잘 압니다만, 때로는 검이 필요할 때도 있을 거 아닙니까.”

“검이라…….”

달이 뜨면 귀족 저택에서 피가 흐르고 해가 뜨면 누군가의 시체를 수습하던 시대는 끝났다. 왕실은 강력한 군권과 금권으로 권력을 움켜쥐고 철도를 깔고 배를 띄우며 치안을 관리했다. 과거의 영화를 잃은 귀족들은 손톱만한 영지를 부여잡고 돈을 벌었다.

시대에 뒤처진 가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오드리의 외가인 랄리우스도 그들 중 하나였다. 몇 십 년씩 이어지던 전쟁이 끝나고 소소한 충돌만 이어지는 지금, 검은 서서히 낡아가는 낭만이었다.

지난번 말브레 극장에서 벌어진 사건에서야 카프러스의 검이 그 효용을 다하였으나, 그건 그야말로 예외 중의 예외. 그걸 알면서도 카프러스는 자신의 검을 두드려 보였다.

“요즘 시대라도. 혹시 말브레 극장에서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어쩝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오드리는 말브레 극장의 괴한들이 어쩌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올의 말대로 겨울보리가 쓸려나가더라도 그들의 분노가 완전히 가시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카프러스는 알고 한 말이 아니겠지만, 오드리가 내심 불안해하던 곳을 정확히 찌른 셈이었다.

그녀는 카프러스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의 말이 맞다, 긍정했다. 안전도 안전이거니와, 공식적인 일정 하나하나에 다 따라붙는 사람이 카프러스인 만큼 괜한 의심을 사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늦었다. 카프러스의 의심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오드리가 아파 누워있느라 주어진 강제적인 휴가 동안, 개인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오드리에 대한 소문을 다시, 제대로 접한 게 의심의 시작이었다.

아침마다 승마복차림으로 말 타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사교 모임에서 어리석은 꼴을 보이진 않았으니 슬슬 나아졌겠지 싶어 확인해 봤다가 어찌나 놀랐었는지. 없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멋대로 몸집을 부풀려 오드리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정말 이상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남의 뒷말하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했다.

게다가 카프러스는 오드리가 소문과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용인에게 터무니없는 일을 시키지 않으며, 과한 요구로 괴롭히지도 않았다. 하녀들과의 유대는 매우 돈독했고 하델을 가르치는 걸 보면 지식수준도 높았다.

그가 실제와 소문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다가 깨달은 건, 오드리가 딱히 소문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은 행보를 보인다는 거였다. 아니, 오히려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문제가 되기 전에 소문을 방패삼아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 버린다.

‘역시 뭔가가 있으신데……. 잘 모르겠단 말이야. 뭐, 그래도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카프러스는 장기전을 각오했다. 비밀이 많은 아가씨는 그 나름대로 모시는 재미가 있을 것이고, 워커라는 자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알게 될 터였다. 그는 그렇게 속을 달래고 발치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오드리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 딱 좋을 크기였다.

“이게 뭔가요?”

“모처럼의 휴가였으니 선물을 사왔습니다. 풀어보시죠.”

오드리는 엉겁결에 상자를 받아들었다. 의외로 세심하게 묶어놓은 리본을 풀며 흘끔 눈치를 보니, 언제나 속내를 알 수 없이 무뚝뚝하던 카프러스의 얼굴에 옅은 기대감이 흘렀다.

“대체 뭘 사왔기에…… 어머나.”

뚜껑을 열어본 오드리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흰 체리꽃이 다닥다닥 달린 나뭇가지가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조심조심 건드려 보니 생화 특유의 촉촉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달라붙었다.

“추운 지방은 꽃도 늦게 피니까요. 북쪽 지방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마침 체리꽃이 예쁘게 피었기에 얻어왔습니다. 과실수 가지를 꺾어온 거라 설득하는 데 애먹었습니다.”

체리꽃을 확인한 순간부터 오드리의 얼굴엔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우아하게 입꼬리만 올려 웃는 사교용 웃음이 아니라, 흰 이가 다 드러나도록 웃는 웃음이었다. 꽃가지가 시들까 걱정되어 정신없이 말을 달린 카프러스에게는 최고의 보상이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아, 조심하십시오. 상자 아래에 흙이 깔려 있습니다. 흙에 꽂아주면 좀 더 오래간다기에.”

“세심하시네요.”

보내는 줄도 모르고 보내버린 봄이 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짜증이 나서 와인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는데…… 흰 꽃 달린 가지 몇 개가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카페 로열에서 저택으로 가는 길이 짧기만 했다.

카프러스가 선물한 꽃가지는 이디케에게도 꽤 깊은 인상을 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꽃가지를 허무하게 시들게 할 순 없다며, 성공하든 실패하든 꺾꽂이를 해보겠다고 선언했다.

“그 무뚝뚝하고 꽉 막힌 원칙주의자가 이렇게나 섬세한 배려를 할 줄 알았다니…….”

“이디케, 그게 다가 아냐. 그 꽃가지를 아가씨께 드릴 때, 그 기사님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아니?”

“……글쎄?”

“이렇게, 이렇게 웃으셨다니까? 있지,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마침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피었기에 얻어 왔다는 거 거짓말 같아. 북쪽 지방이라고 다 꽃이 피어 있었을 리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정이 좋았을 수가 있겠어? 휴가래 봐야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숨을 죽이고 카프러스를 지켜보았던 다이앤이 손짓발짓을 동원해 마차 안에서의 상황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이디케도 점차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기색을 보였다. 오드리는 황당해하며 다이앤의 이야기를 끊었다.

“지금 내 앞에서 헛소문 만드는 연습하니? 그것보다 더 급한 얘기가 있어. 다들 이리 와 봐.”

보석 경매장의 도난 소식을 들은 이디케와 다이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들도 보석 경매장의 경비 마법도구가 로렐라이의 것과 수준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곳이 뚫렸다는 건 로렐라이의 경비 마법도구를 사용한 다른 곳도 뚫릴 수 있다는 뜻이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죠……?”

“그렇게 큰 건이면 업계 내에서 알음알음 말이라도 퍼졌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세상에, 그게 어떤 건데……. 얼마짜린데…….”

오드리가 누워 있는 동안에도 로렐라이 상단을 들락거렸던 이디케는 특히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그 경비 마법도구의 수준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다이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수준 높은 마법도구가 뚫렸다는 것도 놀라운데, 경매장 쪽에서 거래했던 상단에 최소한의 압력조차 넣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평소 보석에 관심이 많던 다이앤이 뭔가 생각난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 보석 말이에요. 알룬드의 목걸이라는 건 들어본 적 없지만 그런 별명이 붙을 만한 블루다이아몬드라면 들어본 적이 있어요.”

멜브란트 왕국의 북쪽 첨단에는 하늘을 향해 치솟은 절벽이 있다. 세상의 끝처럼 펼쳐진 셰비언 성벽. 일 년의 절반 이상이 겨울이라 사람이 살기엔 지독하게 혹독한 곳이지만, 거기엔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었다. 멜브란트 왕국의 왕실 예산은 그 광산에서 다 나왔다.

질 좋고 큰 다이아가 자주 나오는 그 광산에서 아기 주먹만 한 블루 다이아몬드가 나왔다는 소문이 돈 건 작년 봄이었다. 당연히 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과 귀는 전부 셰비언 성벽으로 몰려들었다.

“그게 그 알룬드의 목걸이가 된 거라고?”

“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하는데……. 문제는, 곧이어 다른 유색 다이아몬드들이 채굴됐다는 거예요. 그것도 핑크다이아몬드와 옐로다이아몬드가 같이 나왔죠.”

“그게 왜 문제가 돼?”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같은 색의 유색 다이아몬드가 연달아 나오는 것도 놀라 뒤집어질 일인데요. 많이 봐줘서 두 가지 색까지도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세 가지 색이요? 누가 여기는 노란 다이아, 저기는 분홍 다이아가 되라고 물감이라도 뿌렸대요?”

아기 주먹만 한 블루다이아몬드, 핑크다이아몬드, 옐로다이아몬드. 이 셋이 같은 광산에서 거의 연달아 채굴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다이앤은 거기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조작이라는 것 말고는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보석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오드리는 다이앤의 결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무색의 다이아몬드보다 유색 다이아몬드가 훨씬 귀하다는 것 정도가 그녀가 아는 보석 상식의 전부였다. 이디케 역시 감정하는 눈은 높으나 그게 전부이니, 갑갑한 건 다이앤뿐이었다.

“아이참. 같은 광산에서 세 가지 색의 대형 유색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는 말은요, 워커가 하루아침에 비마법 비행도구를 완성해서 시험 비행까지 완벽하게 해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오드리는 물론이고 이디케까지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비유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구나. 하지만 알룬드의 목걸이라는 결과물이 있지 않은가. 오드리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살론의 유명한 보석 장인이 목걸이로 만들었다잖아. 진짜일 수도 있지.”

“그래서 더 혼란스러워요. 그만한 크기의 블루다이아라면 그거 말곤 없는데, 그럼 자동으로 다른 핑크와 옐로다이아까지 진짜라는 얘기가 되잖아요. 말도 안 된다고요.”

아무리 말이 안 돼도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일단 이디케는 마법사들 사이에 도는 소문을 확인하러 워커를 만나러 갔고, 오드리는 다이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렸다.

온갖 추측을 다 꺼낸 끝에는 혹시 그 보석들이 전부 가짜가 아닐까, 그래서 경매장이 도둑맞은 척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살론의 보석장인은 눈 뜬 장님이냐는 반박이 바로 이어졌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추측을 아무리 해 본들 답이 나오겠나. 오드리는 다이앤이 타주는 약차를 앞에 두고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누워 쉬지 않는 모습에 다이앤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지만, 오드리는 도저히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침만 흘렸다 뿐이지, 건드려 보지도 못했던 시장의 개척이 눈앞에 있었다. 겨울보리가 치워진 땅을 탐내는 게 어디 로렐라이뿐이겠는가? 심지어 상대는 헨젤 백작이었다. 그는 상대를 모르겠지만.

이디케는 오드리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게 돌아왔다. 워커는 물론이고 지점도 들렀다 오느라 늦었단다.

“어땠어? 정말로 마법사들 사이에서 따로 돌고 있는 소문 없어?”

“네, 없었어요. 있어봐야 뭐, 로렐라이의 워커가 또 추가 예산을 타냈다는데 거기 단주가 미쳤나 보다 이런 소문들뿐이던데요.”

만년필이 잘되면서 방수 잉크의 판매량도 훌쩍 뛰었다. 만년필 전용잉크로 판매한 보람이 있었다. 워커는 수익금으로 받은 돈을 죄다 비마법 비행도구에 쏟아 부었는데, 그게 추가 예산으로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근데 이상한 일은 있었어요. 갑자기 경매장 쪽에서 점검을 해달라고 요청했다더라고요.”

속이 타는지, 이디케가 물을 찾았다. 오드리는 저 먹으라고 다이앤이 타준 차를 냉큼 이디케에게 넘겼다. 무심결에 벌컥벌컥 넘긴 이디케가 지독한 쓴맛에 켁, 소리를 냈다. 다이앤이 집사와 우격다짐을 해서 받아낸 약초로 우려낸 차는 맛이 끔찍했다.

“아으, 써. 아무튼, 정기 점검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왜 그러는지 설명도 안 해주고 무조건 해달라고 했다나 봐요.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이나. 딱히 이상도 없는데 매번 들어오는 마법사를 바꿔서 해달라고 까탈을 부려서 아주 골치를 썩었다는 얘길 들었어요. 더 캐묻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 적당히 둘러대고 왔어요.”

“잘했어.”

예정에도 없던 점검을, 그것도 사람을 바꿔가며 해달라고 했다는 걸 보면 장치 이상을 의심하긴 했던 모양인데, 결과가 아주 깨끗했나 보다. 물론 자기들이 손을 대놓고 점검을 부탁한 것일 수도 있고.

“가능성은 두 가지야. 첫째, 경매장이 목걸이를 빼돌리고 모른 척하고 있다. 이건 가짜일 경우에나 해당되는 거지만……. 이게 가장 좋은 거긴 하지. 로렐라이의 제품도 문제 없을 거란 뜻이니까. 문제는 둘째, 도둑맞은 게 사실일 경우야.”

오드리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다른 상단보다 인지도는 떨어져도, 로렐라이 상단 역시 경비 마법도구를 팔았다. 성능과 가격은 비슷한데 다른 곳보다 보기 좋게 만든다고 슬슬 입소문이 나고 있는데, 그 망할 도둑놈이 로렐라이의 제품을 쓴 곳을 털기라도 하면? 상상만 해도 눈앞이 어찔해졌다.

“제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운용하는 건 사람이야. 하지만 내부자를 의심하기도 어려운 게, 마법도구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면 마법사가 필요하고, 경매장에는 항상 상단의 마법사가 상주하지……. 일부러 사람을 바꿔가며 여러 번 점검을 했는데도 나오는 게 없었으면 전부 다 한통속이란 뜻인데 그게 되겠어? 이름이 붙을 정도의 보석은 구매처가 한정되어 있어서 함부로 처분하지도 못해서 장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데, 한 상단에 속한 마법사들을 전부 구슬릴 정도로 돈을 쓰느니 그냥 사는 게 나아. 결국 외부인일 가능성이 큰데……. 그놈이 정말 도둑질을 한 번만 하고 끝낼까?”

오드리는 방 안을 뱅글뱅글 돌며 생각에 잠겼다. 쉴 새 없이 손가락을 튕기고 손톱을 괴롭히는 동안 두 하녀의 기대감이 설탕과자처럼 부풀어 올랐다. 오드리는 그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베텔 경에게 사실을 밝혀야겠어.”

“네? 뭔 사실이요?”

“로렐라이 상단.”

쓴 입을 물로 헹구고 있던 이디케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조금 전까지 카프러스에게 호의적이었던 다이앤도 표정이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거랑 베텔 경에게 말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세요? 아까 실수한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내 운신폭 때문에 그래.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 좀 더 자유로워지려면 내 편이 필요해. 에스코트 기사인 베텔 경이 도와주면 경매장 창고에도 들어가 볼 수 있을걸? 어차피 이번 일 아니어도 날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어. 너희도 알잖아.”

위험부담이 커서 꺼려지긴 해도 맞는 말이긴 했다. 언제까지 사교 모임에 목맨 귀족 영애 흉내를 내며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당장 여름이 되면 브란젤의 사교계는 텅 비다시피 할 텐데, 그땐 무슨 핑계를 대느냔 말이다. 어떤 소모임에서도 오드리를 부르지 않는데.

기침을 하느라 눈에 고인 눈물을 닦은 이디케가 톡 쏘아붙였다.

“하여간, 아가씨는 술이 들어가면 묘하게 입이 가벼워져요. 당분간 술은 금지예요.”

“미안.”

“베텔 경께서 백작님께 알리겠다고 하면 어쩌실 건데요?”

오드리는 방 한구석에 놓아둔 상자를 바라보았다. 카프러스가 흙까지 담아 정성스럽게 꽃가지를 담아온 그 상자였다. 오랫동안 함께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짧은 사이 쌓인 믿음이 생각보다 깊은지, 어쩐지 생각만으로도 입이 썼다.

“……알리라고 하고 꼬리 잘라야지. 베텔 경이 거짓말쟁이가 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입이 쓴 것과 결정하는 건 다른 일이다. 오드리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아까부터 입을 삐죽이고 있던 다이앤이 오드리에게 새 약차를 내밀었다. 따끈따끈하게 피어오르는 쓴 향내에 이디케도 오드리도 표정이 굳었다.

“치안대에 보낼 사람은 누구로 하실 거예요?”

“셰비언을 보낼 거야.”

“워커는 안 보내고요? 보티안 씨가 워커를 딱 짚어서 지목했는데.”

이디케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지만 오드리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하고 꼼짝없이 약차를 받아 마셨다.

“으……. 돈 받아서 지금 한참 신났을 텐데 뭐가 들리기나 하겠어? 지금 워커의 머릿속에는 그놈의 강철새로 가득 차 있을걸. 그리고 셰비언은 뭐 연구 중이라고 하더니만 아직까지 기획서 하나 안 올렸지. 그런데 다이앤, 나 이거 진짜 다 마셔야 해?”

“네. 전부 마시고 주무세요. 남은 서류는 이디케가 처리할 거예요.”

다이앤은 당당하게 일을 이디케에게 떠넘겼다. 난데없이 지목당한 이디케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다이앤은 제 눈 아래에 생긴 새카만 그늘을 가리킴으로써 입을 막았다. 그녀는 지난 저녁부터 지금까지 내내 깨어 있었다.

결국 오드리는 약차를 한 방울도 남기지 못하고 다 마신 뒤 얌전히 침대에 들어갔고, 이디케는 잔뜩 쌓인 서류 속에 파묻혔다.

셰비언이 찾아온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어제와 같이 옷감이 든 상자를 가지고 온 셰비언은 당연히 오드리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를 맞이하러 나온 건 하델도 아닌 다이앤이었다. 다이앤은 자꾸만 문가를 향하는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몸으로 막았다.

“병문안 와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지금 아가씨께서는 피곤하셔서 쉬고 계세요.”

“어, 잠깐이면 되는데…….”

“죄송하지만, 쉬고 계신 아가씨를 방해하진 말아주시길 부탁드려요. 가져오신 병문안 선물은 잘 챙겼다가 전해드릴게요.”

다이앤이 상자를 받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셰비언은 바로 몸을 뒤로 빼고 거절했다.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병문안 선물이 아닌가 봐요?”

“네…….”

셰비언은 당연히 오드리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기에, 따로 병문안 선물을 챙겨오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에야 몰랐으니 그랬다 쳐도, 두 번째엔 당연히 챙겨오는 게 예의인데 말이다.

‘멀쩡하게 생겨서, 상식은 다 어디다 팔아먹었대.’

다이앤은 애써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고 방긋 웃었다.

“그래도 아가씨께 드릴 물건이긴 한 거죠? 그걸 병문안 선물로 하시지 그러세요?”

“…….”

“설마 아픈 아가씨 병문안을 빈손으로 오신 건 아니죠?”

셰비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병문안은 무슨, 당연히 안 아픈 걸 알고 왔다. 하지만 그 말을 하려면 지난밤에 몰래 이 집에 들어왔다 나간 것부터 설명해야 한다. 치료하러 왔었다는 변명이 통할 리가 없다는 걸 안다. 결국 그는 소중하게 안고 있던 상자를 내주었다.

“저번에 몰리 양이 절 그렇게 괴롭히셨던 그 옷감입니다. 아가씨 드리려고 굳이 수고해서 만든 거니까 잘 써주시죠.”

“어마! 진짜 그 옷감이에요? 와, 셰비언 씨, 정말 고생하셨어요. 아가씨께서 엄청 기뻐하실 거예요.”

다이앤의 얼굴에 활짝 꽃이 피었다. 발갛게 열 오른 뺨,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단번에 훅 뛰어오른 목소리 톤. 셰비언은 다이언의 표정에 무심코 오드리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가 얼른 지워 버렸다. 계속 생각했다간 또 야밤에 창문을 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오드리도 못 보고, 선물도 직접 전해주지 못 하고 빈손으로 헨젤가를 나오는 셰비언의 어깨는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셰비언은 그대로 연구실로 직행했다. 로렐라이가 그에게 연구실 겸 주거 공간으로 제공한 곳은 워커의 살림집 2층이었는데, 1층의 혼란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른 공간이었다.

로렐라이의 지난 연구 기록이 꽂힌 책장이 방의 한 면을 가득 채우고, 바닥엔 폭신하고 화사한 색상의 카펫을 깔았다. 연두색 커튼을 단 창문가엔 재스민을 심은 화분 몇 개가 옹기종기 어깨를 맞댔다. 적당히 기울어진 책상엔 이것저것 휘갈긴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청량감마저 도는 이 연구실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곤, 멀쩡한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누군가의 존재였다. 검은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특이한 머리색의 소유자는 흰 피부 곳곳에 검댕을 묻히고 드르렁,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나 참……. 또 이러고 있네.”

세비언이 한숨을 내쉬며 워커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지만, 워커는 옆구리를 조금 긁적대는 걸로 그쳤다. 잠에서 깰 기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워커가 이렇게 셰비언의 공간에 침입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연구에 쏟아 붓는 젊은 마법사는, 제가 쓰던 2층이 이제 다른 사람의 몫이라는 걸 지나칠 정도로 잘 까먹곤 했다.

안 그래도 워커에게는 묘한 호감을 갖고 있던 세비언이었다. 평소라면 그래, 가망도 없는 연구에 매달리느라 고생했구나. 쯧쯧. 하고 넘어가 줬을 테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도 인내심도 없었다. 그는 인정사정없이 워커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퍽! 깨지지 않은 게 다행인 소리가 났다.

“헉! 아으으! 아으으으으!”

“일어나!”

워커는 머리를 끌어안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좌우로 구르다가 그만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셰비언은 그런 워커를 발로 대충 굴려서 침대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그만 구르고 당장 일어나서 나가. 다섯을 셀 때까지도 안 나가면, 네가 못 들어오게 문에다 출입금지마법을 걸겠어. 하나.”

“으으으으……. 세상에 그런 마법이 어디 있다고!”

“무려 로렐라이의 수석 마법사가 이미 있는 마법만을 찾는 거야? 그거 실망인데. 둘.”

워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았는지 오만상을 하고서도 눈이 반짝반짝했다. 얻어맞고 발에 채여 구른 것은 이미 까맣게 잊은 것 같다.

“그런 마법을 만든다고? 나도 참관할 수 있을까? 내 연구실 한쪽 내줄 테니까!”

“이 답도 없는 놈……. 정신 차렸으면 나가, 나가! 여기까지 오려면 계단도 올라와야 하는데 왜 자꾸 오는 거야? 셋!”

셰비언이 워커의 등짝을 발로 밀어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 마법사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힘이라, 워커는 바닥에 버티고 앉은 자세 그대로 쭉쭉 밀려났다. 이대로라면 앉은 채로 문 밖으로 쫓겨나게 생겼다.

“어, 그냥 온 거 아니야!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라고. 네가 없는 데다 침대가 푹신해 보여서 잠깐 쉰다는 게 그냥, 잠이 들어버리긴 했지만……!”

“그 변명을 내가 몇 번이나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넷.”

워커는 문틀을 붙들고 버텼다. 평소에 온갖 변명을 해가며 셰비언의 방을 들락거린 건 사실이지만, 이번만은 진짜로 용무가 있어서 온 거였다.

“보석 경매장에서 보석을 도둑맞은 것 같아!”

등을 꾹꾹 눌러대던 발이 사라졌다. 워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셰비언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보석 경매장에 도둑이 든 게 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거기 경비 마법도구 수준이 우리 거랑 그다지 다를 게 없거든. 거기가 뚫렸다면 우리 것도 뚫릴 수 있어. 그랬다간 큰일 난단 말이야. 판매한 물품들 확인하고, 보완책을 강구해야 돼.”

“네가 만든 마법일 텐데, 고작해야 남들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었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추가로 일을 해야 한다니, 제 발을 찧었군. 나한테 와서 이러지 말고 당장 가서 일해.”

셰비언의 말이 어찌나 매몰찬지, 워커는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로렐라이가 경비 마법에 손을 댈 당시, 워커는 경비 마법에는 그야말로 문외한이었다. 워커뿐만이 아니고 로렐라이의 마법사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연구해 가며 해낸 일인데 남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욕을 먹다니.

“이봐, 셰비언. 내가 아무리 천재라도, 거들떠도 안 보던 분야를 하루아침에 모조리 터득할 수는 없거든! 그땐 그 정도로도 대단한 거였어!”

“그때는 그랬겠지.”

셰비언은 워커의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지만, 검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특이한 머리칼은 그가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의 혈통을 타고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남들이 이십 년을 걸쳐 익혀야 할 것도 고작해야 일 년이면 충분할 천재일 것이다.

‘재능 낭비도 이만저만이어야지…….’

비마법 비행도구에 쏟는 정성의 절반만 새로운 마법 개발에 쏟아도 지금의 배는 성장할 텐데. 그렇다고 친절히 성장을 도와줄 마음은 없어서, 셰비언은 못되게 워커를 비꼬았다.

“남들과 비슷한 수준에 만족해서 연구를 그만두었다는 게 퍽 자랑인 모양이야?”

“내 몸은 하나뿐인 걸 어쩌겠어? 그리고, 이런 천재인 나조차 보석 경매장의 그 많은 마법도구들을 모조리 속이고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물건을 훔칠 자신은 없어. 그런데 뚫렸다니, 단서가 없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단 말이야.”

워커는 분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존심이 상했다.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을 게 분명하다는 예감이 들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이디케가 자신을 보며 ‘워커, 못해요?’하고 반문하는 상상을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자존심은 부릴 때 부려야지.’

그는 아직 제 곁에 서 있는 셰비언의 바지자락을 덥석 움켜쥐었다. 셰비언이 질색을 하고 다리를 털었지만 끝끝내 매달렸다.

“셰비언! 너도 로렐라이에 속해 있잖아! 그 빌어먹을 도둑놈, 같이 잡자! 그리고 보석 경매장 것보다 세 배는 더 좋은 마법도구를 만들어서 파는 거야! 아까 말한 출입금지마법! 그거 너라면 대상 특정이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거지? 그거 팔자!”

“이거 안 놔?”

“못 놔! 너는 모르겠지만, 로렐라이가 경비 마법 사업에 들이는 돈은 정말로 어마어마하다고! 여기에 타격이 가면 너한테 가는 연구비가 무사할 것 같아?”

로렐라이는 셰비언에게 대단한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아직 기획서 하나 내지 않았음에도 그가 요청하는 대로 계속 돈이 나왔다. 그를 직접 스카웃한 게 워커가 아니었다면 말이 나와도 진즉 나왔을 터다.

백날 연구비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워커로서는 나름 최대한의 협박을 한 것이지만, 셰비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돈이 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그가 오드리와 마주친 곳만 해도 기차의 1등칸 손님들만 출입할 수 있는 식당칸이었다.

“난 돈 안 부족해. 그보다 말을 확실히 해. 도둑을 맞은 거야, 맞은 것 같은 거야? 애초에 전제가 이상하잖아?”

“아까 간부가 와서는 이상한 것들을 묻고 갔단 말이야. 내가 로렐라이 창립 때부터 있었는데, 딱하면 척이지! 방수 잉크 개발도 끝났겠다, 분명 나한테 일하라고 할 거라고. 같이 하자!”

“이…… 혼자 해!”

“으악!”

워커는 끝내 쫓겨났다. 나동그라진 그의 눈앞에서 문이 매정하게 닫혔다. 야, 이 치사한 놈아! 닫힌 문 앞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타이밍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문이 벌컥 열렸다. 워커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너, 로렐라이 창립 때부터 있었다고 했지?”

“응. 그건 왜?”

“그럼 단주가 누군지도 알겠네?”

“아니, 그건 모르는데!”

이거 너무 해맑게 대답하는 거 아닌가. 셰비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워커를 노려보았지만, 워커는 평소 그답지 않게 뻔뻔한 낯으로 사실을 부정했다.

자식의 것은 부모의 것. 오드리가 로렐라이를 빼앗기고 장악력을 잃게 되는 건 워커가 절대 바라지 않는 사태였다. 칼 같고 뱀 같은 성정으로 유명한 헨젤 백작이 비마법 비행도구 연구를 지원할 리 있겠느냔 말이다. 오드리에게 진 마음의 빚도 빚이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게 컸다. 해서,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워커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을 할 자신이 있었다.

“워커, 너는 로렐라이에 속한 마법사들의 수장이잖아. 게다가 창립 때부터 있었던 마법사이면서 단주를 모른다고? 그게 말이 돼?”

“왜 말이 안 돼? 대리인 쓰잖아. 도시의 지점마다 대리인이 오는데, 어떨 땐 한 지점에 다섯 명까지 올 때도 있다더라. 아무튼 그런 게 왜 궁금한데? 역시 너도 연구비 끊길까 봐 겁나는 거지? 그러니까 나랑 도둑 잡자!”

“하여간 너는 모든 사고의 끝이 다 연구비냐……. 모르면 됐어.”

워커의 눈앞에서 문이 또 닫혔다. 그렇게나 애절한 눈빛을 모른 체 하기도 쉽지 않으련만, 매정도 하다.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방문에서 번쩍 빛이 나더니, 동그랗게 모여들어 복잡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냉기를 뿜을 듯 새하얀 색의 빛이 완벽한 동그라미를 이중으로 그려 넣고 그 안에 복잡한 문양들을 쌓아 나갔다. 하늘을 찌를 듯 커다란 나무들이 솟아나고 그 위로 눈이 쏟아졌다. 나무에 쌓인 눈이 바닥에 떨어지자 밑동에 섰던 순록이 놀라 뛰었다. 거세진 눈보라가 숲을 커튼처럼 가리는 가운데 저 멀리에서 거대한 은룡이 날아와 날개를 접었다. 위협적인 발톱이 당장이라도 문양에서 튀어나올 듯 테두리를 움켜쥐었다.

용이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옅은 하늘색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 워커를 바라보았다. 워커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섰다. 용은 그런 그를 비웃듯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이다가, 끝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문을 전부 뒤덮을 정도로 커다랗던 문양은 점점 작아졌고, 원 속에 잠들어 있던 용은 구체적인 형태를 잃고 기하학적인 도형이 되었다. 마침내 문양이 빛을 잃었을 때, 남은 거라곤 고작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작은 문장이었다.

워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추슬러 일어나 문에 새겨진 문장을 더듬었다. 그러나 문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어찌나 서늘한지, 계속 손을 대고 있다간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아 후다닥 손을 떼고 말았다.

“뭐야, 벌써 만들어놓은 마법이었어? 그나저나 간단하게 마무리할 수도 있는 걸 굳이 이 정도로 드러내다니……. 지금 나한테 자기 수준을 과시한 건가?”

마법사가 생애 최초로 마법을 쓰면 자연히 생겨나는 문장은, 사람마다 문양과 크기가 다 달라 마법사가 자신을 증명하는 날인으로 쓰기도 했다. 그 정교함이 마법사의 재능과 성취를 드러낸다 해서, 마법사들끼리는 묘하게 자존심 대결을 하기도 하는 게 문장이었다.

스스로를 천재로 자처하는 워커이니만큼, 그의 문장도 대단히 화려했다. 샛노란 꽃이 가득 피어난 들판 위로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 그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새 떼. 하늘에서 검은 깃털이 휘날리며 떨어지는 문장을 본 마법사들은 그에게 차마 감출 수 없는 질투를 드러내곤 했다.

이런 재능을 가지고 대체 뭘 하는 거냐고.

문장 속의 용과 눈을 마주친 순간, 워커는 그 부족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말았다. 동시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승부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놈의 용이 좀 멋지긴 하지만, 내 새도 만만치 않지.

워커는 더 셰비언을 조르지 않고 우당탕탕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보석 경매장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한편, 본의 아니게 워커에게 승부욕을 불러일으킨 셰비언은 점차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입술을 두드렸다.

그는 은근히 세상 물정에 어두운 편이었지만, 레이디 헨젤이 상상 이상의 사치를 한다더라 하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뭐라더라, 만탈락의 돈이 아니었다면 진즉 비렁뱅이가 되어 거적으로 옷을 해 입고 나귀를 타고 다녔어야 할 거라나.

오드리에게 따라다니는 소문치고 좋은 게 없어 다 무시하는 중이긴 한데, 이것만은 그도 신경이 쓰였다. 멀쩡한 백작가의 영애가 비렁뱅이가 될 일은 없겠지만, 그녀가 만탈락에서 거두는 돈에 로렐라이가 큰 역할을 하는 것만은 사실이지 않나. 로렐라이가 타격을 입는다면, 그녀에게도 영향이 갈 것이다.

‘경매장에서 보석 하나 잃어버린 게 그렇게 큰일인가?’

당연히 큰일이다. 새끼손톱만 한 오팔 하나가 없어져도 뒤집힐 일인데, 하물며 그 값이 웬만한 성 한 채 값은 나올 법한 보석이다!

‘뭐,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 보면 큰일인가 보지.’

보석의 가치에 대해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셰비언은 책상에 앉아 이제껏 써놓은 것들을 서랍 속으로 치웠다. 그리고 새 종이를 꺼내 끼적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 문짝에 즉흥적으로 걸어놓은 마법을 제대로 만들어볼 셈이었다.

그러나 그가 출입금지마법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로렐라이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로렐라이의 마법사 셰비언은 치안대에서 이루어지는 조사에 마법사로서 협조하라고.

당연히 자신에게 일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워커는 내심 충격을 받았고, 셰비언은 채 마무리하지 못한 수식을 대충 둘둘 말아 서랍에 던져 넣고 치안대로 갔다. 치안대에서는 때마침 나타난 마법사 인력을 매우 환영했다. 딱 한 명만 빼고.

피올은 겨울 요정처럼 아름다운 마법사를 앞에 두고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고민했다. 워커를 보내 달랬더니, 엉뚱한 사람이 왔다.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헛다리를 짚은 건지, 가늠이 어렵다.

마법사는 다과로 내온 과자를 아작아작 갉아먹고 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피올과 눈이 마주치자 벙긋 웃었다. 피올은 얼결에 따라 웃으며 심란한 마음을 다스렸다. 워커의 이름으로 실력을 보증한단 소개장이 왔으니, 믿어야 하겠지.

“어……. 셰비언 씨? 이게 이름 맞습니까?”

“네.”

“이것 참. 뭐, 본인이 이름이라고 하시니까……. 치안대에는 왜 왔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치안대에 마법사로서 협조하라는 말 외에는 들은 게 없어서.”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어떨 땐 상식을 저어기 길바닥에 흘린 듯이 구는 셰비언이지만, 워커의 당부도 있어 나름 무난한 대답을 했다. 피올은 그제야 의심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 비슷한 걸 짓는 데에 성공했다.

“이건 대외비인데, 보석 경매장의 보석이 도난당했습니다.”

“아…….”

“경비 마법도구 점검 기록을 드리겠습니다. 이미 세 차례의 점검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이 확인한 것이다 보니 신뢰도가 떨어져서요.”

“양이 좀…… 많습니다?”

“그럼 적겠습니까? 그거 다 확인하고 나면 여기 배치도 보고 사각지대 좀 찾아봐 주시죠. 경매장에 마법도구를 판 망할 놈들은 죽어도 사각지대 없다고 했다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죠.”

셰비언의 낯이 우중충하게 가라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왜 자기가 아니냐며 입이 한 대접이나 나왔던 워커를 보낼 걸 그랬다.

“그거 다 보고 나면 현장에 한번 갑시다. 역시 마법사가 있어야 제대로 확인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남겨둔 일이 꽤 됩니다.”

피올은 셰비언의 어깨가 축 처지는 걸 무시하고 접시에 과자를 더 쌓았다. 먹고 힘내서 일하라고.

그렇게 치안대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며 갈려 나가는 동안, 브란젤의 사교계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나랍에서 수입되는 설탕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이 수없이 죽어 나가는데, 그게 다 설탕 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멜브란트의 상단들 때문이라고.

시작은 누가 그렸는지 모르는 그림 한 장이었다.

성인 남자의 키보다 큰 커다란 솥에 눈이 퀭한 사람들이 들어앉아 있고, 그 옆에서 멜브란트 귀족 차림을 한 남자가 불붙은 횃불을 들고 있는데, 그의 뒤로 설탕 포대가 가득 쌓여 있는 그림.

노골적인 풍자에 받은 충격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이 계속 튀어나왔다. 사탕수수즙을 짜는 도구에 사탕수수 대신 사람이 들어가 쥐어 짜이는 그림, 설탕 포대에 설탕 대신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들어 있는 그림…….

이제껏 알음알음 말로만 퍼지던 소문이 그림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순간, 사람들은 극렬한 불쾌감을 느꼈다. 특히 설탕의 소비량이 많은 상류계급의 여성들은 더욱 그랬다. 그들은 집안의 살림을 책임지는 책임자이기도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설탕의 소비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차에 설탕을 넣지 않는 게 유행이 되었고, 담백하고 고소한 과자가 인기를 끌었다.

나랍에서 악랄한 방법으로 설탕을 만들어 판매하던 상단들은 치안대가 고삐를 죄기도 전인데 벌써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혈안이 되어 그림을 퍼뜨린 사람을 찾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자그마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오드리가 보석 경매장에 방문 요청을 한 건 그 무렵이었다.

‘보석 경매장의 창고를 구경하고 싶다.’

경매장 측에서는 오드리의 요청에 난색을 보였다. 경매장의 특급 고객에게 한해 종종 창고 개방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드리가 그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남부의 명문가인 헨젤 백작가의 이름값이 있는 데다 로렐라이 상단에서 오드리의 지불 능력을 보장하고, 에스코트 기사인 카프러스의 동행 등의 조건을 내세우자 결국 한 발짝 물러섰다.

대신 몇 가지 조건을 달았다. 첫째, 경매장의 직원을 대동할 것. 둘째, 경매장이 문을 닫는 한밤중에 방문하고 방문 사실에 대해 함구할 것. 셋째, 간단한 몸수색에 동의할 것.

고객이라기보다 예비 도둑 취급이나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대단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차라리 가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지만, 오드리는 둘째와 셋째 조건에 동의하는 대신 첫째 조건을 삭제하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그래도 몸수색이라니.”

“베텔 경, 포기해요. 내가 여기서 뭐 하나 산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겠어요. 열어준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헨젤 백작가 이름값 좋네요.”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귀족 영애를 몸수색하겠다니요. 아가씨는 왜 그런 웃기는 조건에 동의하신 겁니까?”

정작 오드리는 별 신경 안 쓰는데, 카프러스가 더 짜증을 낸다. 그는 오드리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간단히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로렐라이의 단주든 아니든, 그녀가 레이디 헨젤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데, 뭐가 문제냐며.

‘헨젤의 기사로서, 비밀 많은 아가씨를 모시는 것도 한 가지 즐거움이겠지요. 알려주셨다는 사실을 기쁘고 무겁게 여기겠습니다.’

카프러스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얼굴에 시원스러운 미소를 짓고서 오드리의 충실한 손발이 되어줄 것을 약속했다. 이디케는 그를 거의 믿지 못하고 가재미눈을 했으나, 다이앤은 역시 기사님이라며 좋아했다. 그리고 오드리는 자신의 운과 눈을 믿어보기로 했다. 들을 때마다 우습기는 해도, 다들 그녀의 등에 행운의 여신 포모스가 업혀 있다고들 했으니.

오드리는 환하게 조명이 밝혀진 창고 내부를 천천히 걸으며 보석들을 구경했다. 다이앤이 이번 시즌의 유행은 사파이어라더니, 과연 사파이어 장신구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다이아몬드의 비중은 생각보다 적었다.

“말했잖아요, 난 지금 만탈락에서 거두는 돈에 취해 사치에 빠진 눈먼 돈주머니 행세를 하고 있다고.”

“꼭 그래야 하십니까? 안 좋은 소문이 자꾸 늘지 않습니까.”

“그런 소문이 없었으면 내가 여기 들어올 수 있었겠어요? 머리가 텅텅 비어서 아무 생각도 없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도난 문제로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들어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그나마 귀족은 귀족이라고 약속은 지킬 거라고 믿어준 게 더 용하네요.”

맞는 말이지만 듣기에 괴롭다. 오드리를 향해 비웃는 듯한 눈길을 보내던 직원을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카프러스는 앞으로의 날들이 계속 이럴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러다 위에 구멍이라도 나는 건 아닐까 몰라.

“아가씨, 정말 그 소문 내버려 두실 겁니까?”

“네에. 말했잖아요. 내가 멍청한 레이디로 소문이 나야 아버지가 안심하신다고. 그분이 안심하셔야 내가 로렐라이의 단주라는 걸 안 들키죠. 자식의 것은 부모의 것, 몰라요? 들켰다가 뺏기기라도 하면 그때야말로 쓰러져서 못 일어날지도 몰라요.”

“백작님께서 설마 그러시겠습니까…….”

“아버님을 몰라서 그래요. 분명 여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하실 거예요. 좋게 끝나봐야 나는 조용히 물러나고 하델에게 단주 자리를 넘기는 거겠죠. 헨젤 백작께서 만들고 운영하다 정식으로 아들에게 물려주는 거라며, 새로운 단주의 등장을 축하하는 파티가 벌어질 거예요. 물론 내 이름은 머리글자도 나오지 않겠죠. 여의치 않으면 상단을 조각내서 팔아치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실 분이에요. 내가 왜 그림자 노릇을 했는데요.”

로렐라이의 단주는 베일에 싸여 있다. 외부에도, 내부에도. 그건 처음 만들어질 때에도 그랬고, 상단이 크게 성장한 지금도 그랬다.

“내가 똑똑하고 영리하면 이디케가 의심받아요. 아, 저거 높네요.”

“저기 사다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 언제까지나 그렇게 사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데뷔탕트도 하셨고 사교 활동도 하시니 혼담이 들어올 수도 있는데요.”

“그야 그렇죠. 평판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혼담 따위 받지 않는 것도 곧 한계가 오겠죠. 그래도 미룰 수 있을 때까지는 미룰 거예요. 아버지는 자존심이 있으셔서 어중이떠중이가 헨젤 백작가에 머리를 들이미는 걸 봐주실 분은 아니니까 한동안은 괜찮겠죠.”

카프러스는 조만간 약국 문을 두드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분명 위장 문제일 것이다. 어째 벌써부터 속이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참, 내가 까먹고 말 안 한 게 있는데……. 치안대원인 보티안 씨 말이에요. 그 사람, 내가 로렐라이 단주라는 걸 알아챈 것 같아요.”

사다리를 잡아주던 카프러스의 얼굴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드리는 긴 치마를 모아잡고 성큼성큼 사다리를 올랐다.

“말브레 극장에서 난리가 났을 때, 변장을 하고 밖에 있다가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았었다고 얘기했죠? 정말 잠깐 마주쳤던 것뿐인데, 내가 로렐라이의 단주라고 확신하는 눈치예요.”

“……아가씨의 눈동자에 잊기 힘든 매력이 있긴 합니다만, 쓸데없이 눈썰미가 좋은 작자로군요.”

“어머, 아부 고마워요.”

“진심입니다. 처음 뵈었을 때, 어떤 보석도 당해내기 힘든 눈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카프러스는 한 점의 거짓 없는 진심만 말한 것이지만, 오드리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녀는 달콤한 칭찬을 그저 웃음으로 때우고 흘려 버렸다. 모시는 아가씨가 사교계에서 외모로 온갖 말을 듣고 있으니, 어떻게든 칭찬할 거리를 찾은 거라고 생각했기에.

대신 오드리는 피올이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을까 생각하다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피올은 눈동자 색이 똑같아 바로 알았다고 했지만, 세상에 초록색 눈동자야 흔해빠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피올에게 보여주었던 자료의 영향이 컸을 테다. 이용할 마음으로 준 것이긴 하다만, 그가 편견을 벗어버릴 기회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하나 기회는 기회일 뿐이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낸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이다. 오드리는 피올을 높이 샀다.

“앞으로 종종 마주칠 일이 있을 거예요. 그가 싫어도 너무 티내지 마세요.”

“그냥 둬도 되겠습니까? 나중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닙니까?”

“그냥 안 두면, 뭐요. 몰래 가서 죽이기라도 하게요?”

카프러스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 촉새 같은 치안대원의 목을 훌렁 따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불행히도 실력 차이가 났다. 지금은 그냥 치안대원이라도, 전직 산트렘 기사단원이라는 경력은 괜한 게 아니었다.

“그냥 두세요. 서로 적당히 이용할 수 있는 관계는 될 것 같으니까. 난 여자들의 세계에서 도는 가십과 정보를 가르쳐 주고, 보티안 씨는 치안대에서 입수할 수 있는 정보를 주고. 여기 경매장에서 보석이 사라졌다는 걸 가르쳐 준 것도 보티안 씨인걸요.”

오드리는 몹시 불편해하는 카프러스의 심사를 모른 척하며 보석 진열장에 신경을 쏟았다. 이 창고에 적용된 마법의 종류에 대해서는 셰비언을 통해 이미 보고를 받았다. 이렇게 직접 와서 확인하는 건, 셰비언이 보고서의 말미에 덧붙인 내용 때문이었다.

“역시……. 치안대에 전부 공개한 게 아니었어요. 핵심 중에서도 몇몇 개는 빼놨었네요. 엄청 잘 감춰놨는데……. 이걸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은 걸까요, 아니면 경매장 쪽에서도 몰랐던 걸까요?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후자 같은데. 흐음.”

“그걸 알아보시겠습니까?”

“로렐라이는 경비 마법도구 사업도 하고 있어요. 난 마법사의 재능은 없지만 수식은 제법 잘 읽고, 개발 과정에도 열심히 참여했었답니다. 마력량도 꽤 돼요.”

경비 마법도구는 워낙에 보안이 심한 분야라, 타 상단의 마법사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로렐라이는 피올의 요청 덕에 뜻하지 않은 노하우를 습득한 셈이었다. 오드리는 조금이라도 더 알아갈게 있을까 매섭게 훑으며 그 촘촘함과 꼼꼼함에 감탄했다. 내부인의 도움이 아니라면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어떤 능력자가 이 장치들을 다 뚫었을까요……. 정말 탐나는 인재네요.”

“도둑을 영입해서 어디다 쓰시려고요?”

“당연히 도둑은 도둑 나름대로 쓸모가 있죠. 도둑의 눈으로 보는 경비 마법도구는 또 다를 거니까요. 로렐라이는 아직 그쪽으로는 명성이 부족해서 이런 대형 거래처는 잡기가 어렵거든요. 아무래도 심미적인 요소를 강조하다 보니까……. 이미지 때문인지 좀 밀려요.”

로렐라이가 아무리 무섭게 성장한들, 역시 시간이 쌓은 신뢰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로렐라이의 강점은 심미성에 있지 실용성에 있지 않다는 세간의 인식은 드높은 벽이었다.

만탈락의 저택조차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경비 마법도구 전부를 로렐라이로 교체하지 못했으니 말 다했다. 이번에 내놓은 만년필이 로렐라이 최초로 심미성보다 실용성을 강조한 상품이라고 보면 됐다.

그렇게 꼼꼼하게 보는 사이 넓은 창고를 몇 바퀴나 돌고 제한된 시간을 거의 다 썼다.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해 보니 곧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오드리가 혀를 차며 시계를 갈무리하는데, 카프러스에게는 그 광경이 참 신기하게 다가왔다.

회중시계는 신사들의 장식품이었다. 사교 활동을 하는 귀족 영애로 있을 때에는 한 번도 꺼내지 않더니, 이렇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렇지 않게 꺼내 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꽃 대신 다른 걸 선물할 걸 그랬습니다.”

“왜요? 그 체리꽃 난 참 좋았는데.”

“시곗줄을 사드려도 좋았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달고 계신 건 너무 기본 아닙니까.”

카프러스의 지적은 오드리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문득 회중시계를 확인해보니 정말 그렇다. 회중시계를 사면서 가게에서 달아준 시곗줄을 그대로 달고 있었다.

“맞아요. 뭐든 예쁘면 좋죠. 나중에 같이 가게에 갈까요? 경이 고르면, 내가 사는 걸로.”

“그건 선물이 아니잖습니까.”

“선물이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적해 줬는데 그게 왜 선물이 아니겠어요. 이왕이면 굉장히 여성스러운 걸로 사죠. 없으면 따로 주문해야겠지만……. 꽃도 달고, 새도 달고, 나비도 달죠. 시계 뚜껑에도 장식을 좀 더 하면 여성용 시계처럼 보이겠죠? 사교 모임에서도 꺼낼 수 있게 만들어야겠어요.”

오드리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참석해서도 시계를 볼 셈인 게다. 카프러스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차라리 시계 뚜껑에 거울을 달지 그러십니까? 시간도 볼 겸, 화장 확인도 할 겸.”

카프러스는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오드리의 반응이 아주 열렬했다. 뺨이 온통 붉어지도록 흥분해서는 당장 개발에 착수하겠다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는 건 좋지만 투박하고 무겁다는 이유로 회중시계를 싫어하는 여자들에게 거울이 달리고 장식성이 강한 회중시계는 아주 잘 팔릴 거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진짜로 장사꾼 맞으시군요.”

“그럼 가짜로 장사꾼이라고 했겠어요?”

타 상단의 노하우도 훔쳐봤겠다, 새로운 상품에 대한 힌트도 얻었겠다, 오드리는 퍽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석 진열장에 듬성듬성 이 빠진 공간이 그렇게 신경 쓰이더니, 지금은 다 괜찮아 보였다. 행복한 기분에 회중시계를 꺼내 태엽을 돌렸다.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태엽이 돌아갔다.

그리고 조명이 꺼졌다.

창문 하나 없는 창고는 순식간에 암흑으로 물들었다. 당장 시계를 쥐고 있는 손조차 보이지 않는다. 놀란 심장이 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고 거칠어진 숨이 귓가를 울렸다. 오드리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는데, 긴 치맛자락이 다리에 감겼다. 넘어질 듯 휘청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잡아 바로 세웠다.

“경?”

당연히 카프러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베텔 경?”

드러난 팔뚝에 닿은 손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검을 쥐느라 온통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인 카프러스의 손이 아니었다. 게다가 체온이 뜨거운 편에 속하는 카프러스와는 달리 살짝 차갑기까지 했다.

“당신, 베텔 경이 아니군요. 누구죠?”

손은 금방 떨어졌다. 대신 몹시 차가운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온몸의 솜털이 삐죽 곤두섰다. 오드리는 더 견디지 못하고 돌아섰다가 눈앞의 광경에 숨을 집어삼켰다.

‘알룬드의 목걸이.’

여름 호수만큼 새파랗게 빛나는 블루다이아몬드를 박은 목걸이가 어둠 속에서 혼자 떠 있었다. 블루다이아몬드의 색이 어찌나 강렬한지, 보석 위에 물을 부으면 새파란 물이 들어 흘러내릴 것만 같다. 왜 알룬드의 목걸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만 했다. 주변을 장식한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들을 무색하게 할 만한 존재감이었다.

빛을 뿌리는 목걸이가 미치도록 유혹적이다. 오드리는 무심코 손을 뻗다가 쥐고 있던 회중시계의 무게를 인식하고 겨우 손을 거둬들였다. 자꾸 움찔대는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팔짱을 끼고 버텼다. 그녀가 가만히 있으니 목걸이가 살랑살랑 흔들리며 나 잡아보라는 듯 빛을 흘려댔다.

“안 잡아.”

누구 좋으라고 저걸 잡아. 몸수색이 예정되어 있는데 가지고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두고 나갈 수도 없는 걸. 목걸이가 다시 한 번 흔들리더니 조금 더 다가왔다.

“안 잡는다니까. 나 이용하지 마. 너 누구야?”

- 잘 어울리니까, 선물이에요.

“장물은 안 받아.”

- 이건 본래 내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한 거라고요.

“시끄러워. 선물을 줄 때는 받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하는 게 기본이야. 다들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이 나한테 와 있으면 어떡해. 내가 도둑밖에 더 돼?”

태연한 척 말하는 오드리의 등에서 땀이 흘렀다.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엔 묵직한 무게감이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흔들거리는 목걸이가 무서웠다. 저렇게나 빛을 뿌리는데 왜 목걸이를 잡고 있는 손이 보이지 않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일부러 고른 거였는데……. 뭐, 입장은 알겠어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일부러 골랐다고? 당신, 나를 알아? 다급하게 입을 떼려는데 갑자기 목걸이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오드리는 질끈 눈을 감았다. 쩔그렁! 회중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가씨?”

카프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드리는 간신히 손을 치우고 주변을 확인했다. 창고는 환하게 불이 밝혀진 그대로였고 그녀의 곁을 지키고 선 카프러스 역시 그대로였다. 둥둥 떠 있던 목걸이도, 차가운 숨결도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카프러스가 의아해하며 오드리를 불렀다. 즐거운 얼굴로 회중시계의 태엽을 감던 오드리가 갑자기 눈을 가리고 시계를 떨어뜨리니, 그저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오드리는 그의 의문을 해결해 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카프러스가 주워준 회중시계를 받는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돌아가죠. 지금, 당장.”

핏기가 가셔 창백해진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카프러스는 허둥지둥 창고를 나가는 오드리를 따라 걸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교 모임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웃으며 넘기던 오드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는지, 그는 도저히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돌아가는 내내 마차 안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꾸벅꾸벅 졸며 기다리던 이디케가 카프러스의 옆구리를 연신 찔러댔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다.

한편 오드리는 마주앉은 두 사람의 기분까지 생각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알룬드의 목걸이와 도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이아는 진짜야. 그게 가짜일 수가 없어.’

오드리가 아무리 보석에 관심이 없어도 이제껏 쌓은 경험이라는 게 있다. 경매장 측이 가짜 목걸이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게 미안해질 정도의 보석이었다. 그리고 경매장이 왜 입을 다물고 있는지도 알 법했다.

내부인의 도움이 아니라면 저 경비를 흔적 없이 뚫고 들어와 흔적 없이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한데 아무리 뒤져도 흔적이 나오지 않고, 내부인을 아무리 족쳐도 동조자가 나오지 않으니, 지금 경매장은 미치고 팔딱 뛸 심정이란 게 뭔지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방금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고 돌아온 오드리는 그 도둑이 대단한 수준의 마법사일 것을 확신했다. 사람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가 돌려보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은 그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문헌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래된, 이제는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 그런 마법.

‘이 세상에 잊혀진 마법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셰비언과의 첫 만남이 되살아났다. 빛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고, 바람을 휘둘러 꽃잎을 모으는, 이제는 문헌으로만 남은 옛 마법을 숨 쉬는 것처럼 사용하는 마법사. 그녀의 마법사.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보티안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알룬드의 목걸이에서 손 떼자. 로렐라이는 아무 상관없는 거고, 그냥 요청이 있어서 사람을 파견했었던 거야.”

“네?”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디케와 카프러스가 황당해하건 말건, 오드리의 결심은 확고했다. 도둑이 그녀의 짐작대로 셰비언이건 아니건, 그만한 마법사가 목걸이를 원해서 가져갔다면 그건 그대로 끝이었다. 흔적 따위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있다 해도 발견할 수도 없을 테다. 괜히 발끝에도 못 미치는 실력으로 깔짝대다가 화를 입을 수는 없었다.

“내가 마법사의 공간에 꿀꺽 삼켜졌다가 나왔어. 카프러스 경이 옆에 있었는데도 나만. 거기에 알룬드의 목걸이가 있었지. 어떤 상황인지 짐작가지?”

“그럴 리가요. 아가씨는 내내 제 옆에 계셨습니다.”

카프러스의 반박이 이어졌지만 이디케의 안색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오드리와 함께 역사 깊은 만탈락 저택의 도서관을 양껏 들락거린 데다 워커와 알고 지낸 기간이 긴 이디케는 이젠 기록으로만 남은 옛 마법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경. 마법사들은 그걸 두고 ‘의식 분리’라고 불러요. 현실의 육신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의식만 분리해 자유자재로 다루는 거죠. 그나저나 공간을 다루는 마법이 정말로 있다니, 세상에. 그건 그냥 기록으로만 남은, 마법사들의 흰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가씨께서 들어갔다 나오셨다니 안 믿을 수도 없고.”

“흔적이 전혀 없을 거야. 내부인 소행도 아닐 거고. 치안대 쪽에서 추가 지원을 요청하거든 단박에 잘라. 하지만 경매장 쪽에서 교차 검증이니 뭐니 접촉을 시도하거든……. 그래, 그땐 받아. 다소 불똥이 튀더라도 공식적으로 노하우를 빼낼 기회니까 놓칠 수 없어.”

“네, 알겠어요. 이것 참, 전설에나 나올 법한 대마법사가 나타나기라도 했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워커와 셰비언에게 새 경비 마법을 주문해 놔. 조만간 대대적인 교체가 시작될 거야……. 그땐 지금 것보다 더 비싸고 좋은 마법을 팔아야 해. 이제껏 공을 들였으니 추수할 준비를 해야지.”

이디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조만간 교체가 있을 거란 것도, 그때를 잡아야 한다는 것도 알겠다. 납득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도둑이 있는데 경비 마법도구 사업을 함부로 넓히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아가씨, 우리 제품이 설치된 뒤에 또 도둑맞으면 어쩌시려고요? 조금 늦추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음 도둑질은 없어.”

오드리가 입술을 꾹 다물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디케는 반발하려는 마음을 억지로 눌러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아가씨가 저렇게 말할 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카프러스가 옆에 있으니, 나중에 단둘이 되었을 때 물으면 그만이었다.

카프러스는 일사천리로 일을 지시하는 오드리와 진지하게 경청하는 이디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옆에 찰싹 붙어 다녔는데 이런 얼굴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문득 아쉬워졌다. 매양 검에 빠져 사는 하델이 아니라 오드리가 헨젤가의 장남이었다면, 둘 모두 행복하지 않았을까.

“아가씨께서 남자로 태어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떠오르는 대로 뱉은 칭찬인데, 오드리와 이디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카프러스는 몹시 당황해 자신이 한 말이 뭐가 잘못됐나 생각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드리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을 거라는 게 솔직한 그의 마음이었다.

“저기, 왜 그런 표정으로 보시는지…….”

“……아아, 너무 오랜만에 듣는 말이라. 어린 시절 날 가르치던 선생이 그 말을 해줬는데…… 바로 잘렸죠. 경, 부디 입을 조심하세요.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경의 목도 장담할 수 없답니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어딘가 서글펐다. 카프러스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훌륭한 귀족이자 주인인 헨젤 백작이지만, 그는 딸에게는 지독히도 못난 아비였다. 오드리와 하델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부터가 차이나는 걸 카프러스조차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침울해진 마차의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듯 이디케가 나섰다. 괜히 발랄하게 목소리를 띄운다.

“아, 그런데요 아가씨. 왜 아가씨만 공간에 끌어들였을까요?”

“나한테 선물하고 싶었대.”

“……네?”

“그 보석은 본래 자기 거라면서, 나한테 잘 어울리니까 선물로 주고 싶었대. 누굴 장물아비로 만들 셈인가? 하도 어이없어서 거절했어. 보석 예쁘긴 하더라. 그거 진품 맞아. 풋, 다이앤이 들으면 기절하겠네.”

“전 아가씨가 너무 태연하셔서 기절할 것 같아요…….”

“태연하기는 무슨. 나 손 떨리는 거 안 보여? 좀 주물러 줘.”

이디케는 오드리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길게 늘어진 코트 소매를 걷어 올리고 오드리의 손을 주물렀다. 제법 따뜻한 편에 속하는 체온이 차갑게 식어있는 게 그녀가 받은 충격을 짐작케 했다.

그때 어미 품에 파고드는 강아지처럼 오드리가 이디케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디케가 난데없는 애교에 의아해하면서도 오드리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는데, 오드리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 망토랑 목걸이랑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

“네? 망토요?”

“응, 그 따뜻한 흰 망토 있잖아. 아주 딱일 것 같더라.”

겨우 그 말만으로도 오드리의 말뜻을 알아들은 이디케의 손에 힘이 확 들어갔다. 오드리가 셰비언을 만나던 때의 이야기는 당연히 그녀도 들어 알고 있었다. 옛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재주를 선보인 마법사와 문헌에나 기록된 잊혀진 마법을 부린 마법사. 서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게 더 어려운 수준이다.

“설마하니 그 목걸이만 어울리겠어요? 제가 다이앤이랑 잘 찾아볼게요.”

“응, 부탁해.”

두 여자의 대화를 알아들을 리 없는 카프러스는 그저 장신구 얘기려니, 하고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뿐이었다.

오드리는 영업 마차를 몰던 마부에게 후한 팁을 주어 보내고 슬그머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저택은 온통 컴컴한 어둠에 싸여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코트를 어서 벗어버리고 싶어 걸음을 재촉하는데, 오드리의 방문 앞에 웬 까만 형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뭔가 싶어 놀랐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하델이 그녀의 방문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지난번에 그렇게 쫓아낸 이후로는 처음 보는 것이다. 화가 난 것도 난 것이지만, 워낙에 신경 쓸 일이 많아 찾아가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는 몰라요. 아가씨 알아서 하세요. 아가씨 동생이시잖아요.”

“이디케에…….”

이디케는 발 빠르게 도망쳤다. 홀로 남은 오드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하델 앞에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어미 쫓는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던 모습에 익숙해지기라도 했는지,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며칠이나 되었다고 눈감은 얼굴이 낯설었다.

기름이 다 떨어진 램프가 주변에서 구르고 있는 걸 보니, 램프까지 가지고 와서 쪼그려 있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가씨는 늦게 오실 거라고 하녀들이 극구 만류했을 텐데도 대단한 고집이었다.

‘누가 어머니 아들 아니랄까 봐…….’

슬쩍 손을 뻗어 흰 이마를 가린 고수머리를 쓸어보았다. 매끄럽고 보드라운 감촉이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이 남은 뺨이 말랑말랑했다.

“하델.”

“……우응…….”

“네 방으로 가서 자렴.”

살살 어깨를 흔들며 깨워보았지만, 하델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델이 비켜주지 않으면 오드리도 방문을 열 수가 없는데, 퍽 곤란한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고용인이 적은 헨젤 백작가는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이런 밤에 본관도 아닌 별관에 따로 깨어 있는 하녀나 시종을 두지 않았으니. 이를 어찌한다.

망설이던 오드리는 하델의 무릎 아래와 등 뒤에 손을 두르고는 끙차, 힘을 주었다. 안아 올리려는 것이지만 그게 어디 쉽나. 고작 열두 살이라지만 하델은 제 또래에게 뒤지지 않는 체격을 갖고 있었고, 오드리가 암만 힘이 세다지만 병석에서 일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높이와 몸의 반동을 이용해 말에 태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한참을 끙끙대도 꿈쩍을 하지 않으니 결국 오드리도 포기 상태가 되었다. 치마를 갈무리해 아예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봄 코트를 벗어 하델에게도 덮어주고 자신도 덮었다. 아이 특유의 따뜻한 체온이 오드리의 피곤을 부채질했다. 하암……. 하품이 저절로 나왔다.

“……누나, 일어나요. 누나.”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오드리는 몸이 자꾸만 흔들리는 통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볐다. 딱히 사교 모임에 가는 것도 아니라 화장을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일어났니…….”

“네. 누나, 침대에서 자요.”

벌떡 일어났더니 아찔한 현기증이 찾아들었다. 이마에 손을 얹고 어지럼증을 삭이는 오드리의 앞에서 하델이 어쩔 줄을 모르고 발을 굴렀다. 누나가 올 때까지 깨어 있으려고 했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잠든 것도 모자라 문을 막고 있기까지 했다. 병석에서 일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누나가 차가운 복도에 앉아 자고 있는 걸 보았을 때의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안해요.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만…….”

“괜찮아. 본래 잠이 많은 때지. 내가 늦은 거야. 그래, 거기 의자에 앉으렴. 그런데 왜 기다렸니?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오드리가 마법등을 가려놓은 덮개를 벗겨내자 은은한 빛이 따스하게 주변을 밝혔다. 본래 조명기구라고는 양초밖에 없던 방이지만, 그녀는 이 방 곳곳을 전부 마법도구로 꾸몄다. 허구한 날 로렐라이에 쇼핑을 가는데 사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수업 들으면서 선생님들한테 물어봤어요. 누나가 왜 화를 냈는지 모르겠어서요.”

“그래? 그래서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니?”

“선생님들은……. 누나가 뭘 몰라서 그런다고 했어요. 귀족 영양은, 아니, 여자는 어릴 땐 아버지가 지켜주고 결혼하면 남편이 지켜주는 거라고요. 아버지가 누나를 지켜주지 않는데 그걸 몰라서 동생의 호의를 걷어찼다고 했어요.”

“그래서?”

“누나는 내가 지켜주는 게 싫어요?”

하델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머리 장식만 하나씩 빼고 있던 오드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왜요? 여자는 당연히 보호받고 사랑받고…….”

“하델.”

오드리의 목소리가 몹시 찼다. 하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오드리는 마법등의 빛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었는데도 그녀의 시선이 무섭도록 날카롭다는 걸 알 것 같았다.

“난 너보다 말을 잘 타. 너보다 살론어도 잘해. 모르긴 몰라도 역사도, 경제도, 수학도, 고전도, 다 너보다 나을 거야. 최소한 네 나이 때 나는 놀지 않았으니까. 혹 기본도 못하는 귀족 영양이 엉뚱한 것만 배워서 으스댄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자수도 배우고, 춤도 익히고, 악기 연주도 배우고, 예법까지도 익혔어.”

“…….”

“그런데 나는 오로지 ‘여자’라서 네 보호를 받아야 하는구나.”

하델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모두가 여자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했다. 한없이 가냘프고 연약하니 강하고 힘센 남자가 최선을 다해 보호해야 한다고, 그게 남자의 의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하델의 눈에 오드리는 굉장히 큰 사람으로 보였다. 자신은 듣기 싫어 매일같이 도망만 다녔던 수업을 모조리 듣는 것도 모자라 귀족 영양이 갖춰야 할 소양까지도 익혔다지 않은가. 굉장했다. 정말 감탄스럽고 존경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누나가 아니라 형이었다면, 감히 아버지 대신 자신이 지켜주겠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가서 왜 형을 차별하느냐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아직 어린 소년은 어설프게 두르고 있던 편견을 벗었다.

“……알겠어요.”

“뭘 알겠는데?”

“누나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인 거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나서서 지켜준다고 하는 게 필요 없는 거예요. 그저 내가 남자고 누나는 여자니까 내가 누나를 지키겠다고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죠?”

오드리는 애써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만히 있다간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누나, 아버지가 누나를 이상하게 미워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나는 그래도 예쁨을 받으니까, 아버지한테서 누나를 지킬 거예요. 무섭고 차가운 말도 못 하게 하고, 저번처럼 알신다가 누나를 무시하도록 두지도 않을 거예요.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오드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였던 눈물이 순식간에 말랐다. 제대로 된 내막은 알지도 못하면서, 하델은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나이가 어리다고 왜 그걸 모를까. 그게 바로 권력의 속성이고 사람에게 길러지는 네발짐승도 서열을 아는데.

그런데도 동생이 사랑스럽다. 태양처럼 웃는 얼굴이 밉고 미운데 이렇게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또 예쁘고 사랑스러워,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어,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왜 나를 예뻐하실까요……? 나는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데.”

하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드리는 머리 장식을 마저 빼는 것을 그만두고 하델을 끌어안았다. 하델이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오드리를 마주 안았다.

“누나가 미안해.”

“뭐가요?”

“누나가 질투를 했어. 아버지에게 너만 귀염받는 게 부러워서,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닌데, 넌 아직 어려서 잘 몰랐던 것뿐인데, 가르쳐 주기보다 먼저 화를 냈어. 미안해.”

“흥. 그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어요. 누나가 아는 것보다 난 훨씬 마음이 넓으니까, 괜찮아요.”

정작 혼난 그날 밤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울었던 주제에, 어깨를 으쓱이며 허세를 부린다. 귀여운 허세에 오드리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마음이 넓고 사랑스러운 아들이니 아버지가 널 예뻐하시는 거겠지. 잘하는 게 없다고? 그럴 리 없어, 아직 못 찾은 거야. 그뿐이야.”

“……그런데 누나,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 얘기했을까요? 역시 누나를 몰라서 그런 거겠죠?”

“그럴 거야. 하지만 그들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긴 해…….”

보통 여자들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거든. 오로지 남들에게 기대어 살아가도록 배우고, 그렇게 기대 받으며 자라. 하지만 하델, 넌 꼭 알아줬으면 해. 남자든 여자든 타고나길 약하게 태어난 사람은 없고, 강하게 태어난 사람도 없어.

하델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오드리는 무척 행복해졌다. 오드리가 만탈락을 떠나온 뒤, 그날에서야 오누이는 처음으로 맨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몹시 닮아있었다.

* * *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로렐라이는 보석 경매장의 공식적인 요청을 받아 마법도구의 교차 검증을 했고, 그 때문에 업계의 반발을 샀다. 하지만 치안대의 비호가 있어 대놓고 욕을 먹지는 않았다. 물색 모르는 사람들은 로렐라이의 뒤에 왕실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오드리는 셰비언을 의심했으나 그를 부르지는 않았다. 그가 도둑이라는 걸 확인해서 뭘 어쩐단 말인가? 그가 도둑이 아니라면 뛰어난 마법사를 애꿎게 의심한 꼴이고, 도둑이라면 불씨에 장작을 넣는 꼴이 될 텐데. 웬만하면 세간의 상식을 더 익히는 게 좋겠다고 에둘러 메시지를 보낸 게 고작이었다.

이디케는 망토를 둘둘 말아 옷장 구석에 처넣고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다. 뒤늦게 사정을 알게 된 다이앤은 기껏 그린 옷본을 끌어안고 허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그 옷본도 옷장행이 되고 말았다.

한편 오드리는 또 다른 고민에 시달렸다. 카프러스와 단둘이 있다고 안심하고 지껄였던 대화를 그가 어디까지 들었을까, 하는 것.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을 돌리려고 해 봐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들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밀이 햇볕 아래로 드러나는 날은 언제일까? 그동안 일궈온 모든 걸 손쓸 도리도 없이 빼앗기게 되는 날은?

하루해가 떠오를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를 한 번씩 치를 때마다 희망과 불안이 번갈아가며 그녀를 찾아와 피를 바짝바짝 말렸다. 이디케의 위로조차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눈 밑이 꺼멓게 죽은 피올이 웬일로 헨젤가에 찾아왔다. 약속하고 온 건 아니지만 이왕 찾아온 손님인데 차 한 잔 내주지 않을 수 없다. 피올은 뜨거운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한입에 차를 죄다 털어넣었다.

“큭, 여기도 차가 쓰군요. 설탕 없습니까?”

“요즘엔 차에 설탕 안 넣는 게 유행이라서요.”

“그놈의 유행……. 아무튼, 사건 끝났습니다.”

“네?”

“보석 경매장이 사건 종료를 요청했습니다. 알룬드의 목걸이가 밤사이 돌아왔다나 뭐라나. 어떤 개새끼가 저지른 장난인지 몰라도 엔간히 실력 좋은 개새끼겠지요. 아가씨께서 그렇게 발을 쏙 뺀 걸 보면 꽤 하는 마법사인가 본데, 잡히면 죽여 버릴 겁니다. 장난으로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켜? 인성 쓰레기 같으니.”

몇 날 며칠 야근을 했는데 그게 다 헛수고가 되었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오드리는 그가 며칠 내도록 같이 돌아다녔던 셰비언을 의심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길 바라며 과자 몇 개를 밀어주었다. 피올은 오드리가 밀어준 과자가 그 도둑이라도 되는 것처럼 악착같이 씹어 삼켰다.

“하아……. 사정은 알겠는데, 여긴 왜 온 거예요?”

“심부름 왔습니다. 꼭 저더러 갖다 주라더군요.”

피올이 그때까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고급스런 포장지에 보석 경매장의 직인이 몇 개나 찍혀 있었다. 오드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포장지를 풀었다. 새카맣게 칠해진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가 드러났다. 생각 없이 뚜껑을 열었던 오드리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게 왜 여기에…….”

알룬드의 목걸이. 그녀가 마법사의 공간에 끌려들어가 보았던 그 새파란 블루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상자 속에서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카드도 있었다.

<아름다운 물건은 응당 어울리는 주인에게 가야 합니다.>

“이게 뭐람.”

“저라고 뭐 아는 게 있겠습니까. 그냥 심부름꾼인데요. 어떤 놈인지 아주 악취미입니다. 보석을 훔쳤다가 거금과 함께 돌려놓고는 수취인을 지정하다니. 돈에 눈이 먼 경매장 놈들은 어쨌건 돌아왔고 대금도 받았다니 됐다며 좋아하더군요. 병신 새끼들.”

감정이 격해진 피올이 욕지거리를 줄줄이 쏟아내든 말든 오드리는 알룬드의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 도둑놈은 비밀을 지켜줄 모양이었다. 겨우 마음이 놓이고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뚜껑을 닫았다.

어쩐지, 조만간 다이앤이 좋아할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 그리고 조만간 다른 일도 끝날 겁니다.”

“다른 일?”

“설마 잊고 계셨습니까? 흰 튤립을 새긴 미친놈들 일 말입니다.”

“아, 그거…….”

솔직히, 거의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동안 워낙에 바빴어야지. 생각해 보면 바로 그제에도 대체 왜 손절을 했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항의 문건을 받았다. 사정 설명을 할 의사가 없어 그냥 흘려버려서 그렇지.

“사흘 내로 끝납니다. 빈 땅을 차지할 준비해 두시죠. 책임자가 바로 이 집의 주인이시니, 별로 걱정은 안 됩니다만…….”

오드리는 그저 웃었다. 책임자가 헨젤 백작이라는 건 마이너스면 마이너스였지, 결코 플러스가 될 수는 없는 요소였다. 만탈락의 돈을 마음껏 쓰며 돌아다니는 망나니 딸에게 고삐를 채우지 못해 아쉬운 분께서, 로렐라이에게 힘을 더 실어주려고 하실까?

“그래요. 유능한 치안대원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서 무사히 일 마칠 준비를 하시죠.”

“……그러죠.”

피올은 어딘지 꺼림칙한 느낌에 연신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 뒤, 다이앤이 자유 시간을 얻어 저택을 나왔다. 그녀는 시엘라 거리의 어느 카페에 앉아 차를 마셨고, 차를 다 마실 무렵 어떤 남자를 만났다. 그는 다이앤과 제법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그녀에게 몇 가지 약초를 팔았다. 다이앤은 왕립 은행의 수표로 약초의 값을 치렀다. 어딘지 부실한 수표였지만 남자는 아예 확인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다이앤과 헤어진 남자는 시엘라 거리를 나와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영업 마차를 타고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거리로 갔다. 그는 거리를 빙빙 돌다 어느 저택의 후문을 지키는 보초에게 손 인사를 했다. 보초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남자는 거침없이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타우레드 후작가였다.

다음 날, 산더미 같은 일의 막바지에서 숨이 꼴딱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헨젤 백작은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았다. 백합을 목에 감은 사자, 클로드 란시 타우레드 후작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헨젤이 멜브란트 왕실의 금고지기라면, 타우레드는 왕실의 검이었다. 가장 격렬한 전장마다 빠지지 않고 휘날렸던 사자의 문장은 검을 든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뒤로는 다들 황금에 빠진 사자라고들 했지만.

현 타우레드 후작은 제법 눈이 좋은 자였다. 산트렘 지역 출신의 부인을 맞아들여 산트렘 기사단과 관계가 좋은 데다 여기저기 투자하는 상단마다 성공을 거듭했다. 사람들은 그가 포모스를 업고 있다 떠들어댔지만 헨젤 백작에게는 그저 지긋지긋한 악우에 불과했다. 하필 나이가 엇비슷한 동년배인지라, 어릴 적부터 얼굴을 부대끼며 교우관계를 쌓아온 것이다.

헨젤 백작은 정신이 번쩍 들도록 쓴 차를 들이켜며 의자가 있을 법한 곳을 향해 대충 손짓했다.

“클로드, 자네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웬일이긴. 서류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벗의 얼굴을 구경하러 왔지.”

“또, 또……. 사략해적 문제나 좀 해결하지 그러나? 허구한 날 나한테 읍소가 오잖나.”

기차가 왕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며 주요한 물자 유통로를 맡고 있긴 하나, 타국과의 무역 대부분은 뱃길을 이용했다. 브란젤을 휘감아 도는 제스본강과 세피아 항구는 대단히 중요한 수출입 통로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략해적에게 입는 피해가 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예산을 쥐어짜 함대를 운영하고 있긴 한데, 무역 규모가 커지는 속도를 따라잡질 못했다. 해군의 보호를 받지 못한 소규모 상선이 습격당하는 일이 잦았다.

해군을 위한 예산 확보는 헨젤 백작의 몫이라도, 해군의 운용은 타우레드 후작의 몫일진대, 그는 너무나 태연히 웃어 보였다. 갈수록 피골이 상접해져 가는 헨젤 백작과는 얼굴의 광채부터 달랐다.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대는 손짓이 징그러울 정도로 능글맞다.

“그거 알아? 얼마 전에 왕궁마법사들이 새 무기 설계도를 올렸어. 격렬한 폭파 마법을 저장해 뒀다가 충격을 받으면 발동하게 하는 거였는데, 꼭 새총처럼 쏘아 보낼 수 있게 설계했더라. 그걸 싣고 다니게 하면 해적 문제 따위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걸.”

헨젤 백작의 미간에 와락 주름이 잡혔다. 그는 쓴 차를 마저 털어 마셨다.

“안 돼.”

“왜? 충분히 가능성 있는 무기였어. 예산만 좀 줘봐. 그 무기를 실으면 개 같은 사략해적 놈들, 다 수장시켜 버릴 수 있어.”

“예산도 예산이지만, 그 무기를 대체 누가 다룰 건가?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는 왕궁마법사? 고가의 몸값을 자랑하는 상단의 마법사들? 아니면, 마법사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한 허접쓰레기들에게 그런 무기를 쥐여줄 건가? 클로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마법 무기를 이용한 전투는 매력적이었지만, 그 운용에 반드시 마법사를 동반해야 한다는 점에서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전투 중에 마법사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남은 마법 무기는 어쩌나? 동작 정지도 못 하는 짐 덩이를 싣고 다녀야 하나? 그러다 다급해지면 바다에 수장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사를 해적선에 태우는 살론 놈들이 미친 것이다.

“안 그래도 왕궁마법사들 일 많은데 들볶지 말게. 어차피 전투에는 거의 쓰이지도 못하는데 왜 그리 미련을 가지나?”

“하, 뉴터 네 녀석 입에서 긍정이 나올 거라곤 기대도 안 했어. 그럼 비마법 무기 개발 쪽에 예산이라도 좀 더 주지 그래? 예산이 없어서 만날 빌빌거리니까 쓸 만한 게 안 나오잖아.”

“…….”

“그게 싫으면 소규모 상선도 자체적으로 무장을 하고 용병을 고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려주든가. 그럼 다들 자기 상품과 배가 아까워서라도 비마법 무기 개발에 돈을 퍼붓겠지. 왜, 우리의 국왕 전하께서는 빌어먹을 상선 반란이 끝난 지 이미 삼십 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배라면 경기를 하시나?”

“입을 조심하지 그래. 내 부관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잖나.”

“손발을 묶어놓고 싸우라 하시니 화가 나서 그러지. 저쪽은 죽을 각오로 덤비는데 우린……. 됐다, 내가 뭔 말을 하겠어.”

결국 헨젤 백작은 안절부절못하고 손을 떠는 부관 일랑을 집무실 바깥으로 쫓아냈다. 아예 귀를 틀어막고 있던 일랑은 쫓아내 주어 고맙다는 얼굴을 하고 냉큼 밖으로 도망갔다. 단둘이 남은 집무실의 공기는 그저 무거웠다.

클로드는 의자에 몸을 묻고 팔짱을 낀 채 헨젤 백작 앞에 쌓인 서류를 셌다. 일개 금고지기에게 주어지는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일감들. 그는 저 일감들이 그저 재정에 관련된 서류만이 아니라는 것에 가문의 보검을 걸 수도 있었다.

“……왕께서는 늙으셨어. 몸뚱이만 늙은 게 아니라, 정신까지도. 조짐도 보이지 않는 반란이 무서워 해결책을 앞에 두고도 배를 잃고 계시지. 안 그래도 살론에 비하면 해군이 약한데 이래서야 언제쯤 따라잡겠나? 상선이 줄줄이 당하는 걸 보고 있으면 내 속이 다 터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불경한 발언이야. 그리고 줄줄이는 무슨 줄줄이인가? 과장하지 말게.”

“지지난달에는 상단 하나가 휘청거렸고, 지난달에는 아예 남작가 하나가 쓰러졌어. 이만하면 줄줄이지. 뉴터, 이런 상황인데 왕실 재정은 무사한가? 셰비언 성벽의 광산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밑 빠진 그릇에 물을 무한정 부을 수는 없어. 너도 알잖아?”

“사자가 돈맛을 보더니 백합을 끊으려 한다고 진언하길 바라고 하는 말인가?”

헨젤 백작의 경고에 클로드가 쳇, 소리를 내며 미간을 구겼다. 중년의 나이에도 전혀 쇠하지 않은 몸뚱이인지라 의자가 좁아 보일 지경인데, 그런 표정을 지으니 꼭 열대엿 살 먹은 어린애 같았다.

“벗이라곤 덜렁 하나 있는 게 투덜거림도 못 들어주는군. 아이고, 서러워서 원.”

헨젤 백작은 악우의 툴툴거림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까부터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서류를 끝내 내려놓았다. 클로드가 마음먹고 방해를 시작하면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쫓아내는 쪽이 훨씬 빠를 터이다.

“대체 왜 이러나? 할 말 있으면 빙글빙글 돌리지 말고 당장 하게. 나는 바빠.”

“나랍의 설탕 무역을 맡아 할 새 상단이 필요하지? 거기 로렐라이를 넣어줘.”

클로드의 요청은 갑작스러웠다. 왕실을 기만한 귀족과 상단들의 처분에 있어 치안대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거야 타우레드 후작으로서 당연한 일이니 그렇다 쳐도, 웬 로렐라이란 말인가. 헨젤 백작은 산처럼 쌓인 서류 중 몇 장을 추려내 확인했다. 치안대의 수사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상단 중에 로렐라이가 있긴 했다.

“뭐 하러 왔나 했더니……. 청탁인가? 자네가 로렐라이 상단에 상당한 투자를 한 건 알고 있지만, 거긴 마법도구 전문 상단이야. 갑자기 웬 설탕을 맡기겠다는 건가?”

“지금 사교계의 부인들과 영애들 사이에서 설탕을 쓰지 않는 유행이 도는 건 알아? 설탕을 만드는 데 드는 노동력이 너무 커서, 설탕을 한 스푼 먹을 때마다 사람을 잡아먹는 기분이 든다는데. 다른 곳에 맡겨봤자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겠지만 로렐라이라면 마법도구를 써서 설탕을 만들 거야. 유통은 내가 도울 테니 문제없고. 고가의 부정관세도 사라지고 현지 농민들에게 지급하는 금액도 늘어날 테니 겸사겸사 나랍과의 관계도 좋아질 수 있을걸. 로렐라이는 꽤 공정한 곳이니까 기대할 만해.”

“자네가 설탕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내 딸이 좋아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헨젤 백작은 끝내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의 팔불출은 어째 해가 갈수록 더 심해지기만 하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가. 저렇게 자식을 아끼는데 가문을 나가 버린 자식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왜 하필 로렐라이인가? 꼭 거기여야 하는 이유가 뭔지 날 납득시켜 보게. 마법도구 따위는 사서 쓰면 되는 거니 그 핑계는 빼고.”

“간단해. 최근의 멜브란트에서 로렐라이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상단이 없으니까. 난 로렐라이의 가능성을 매우 크게 보고 있어. 그들이 더 커져서 많은 세금을 내면, 내가 오매불망 바라마지않는 비마법 무기 부문에도 뉴터 네가 예산을 배정해 줄지 모르잖아. 겸사겸사 나도 돈 좀 벌고.”

“그건 너무 불확실한 대답인데. 그거론 자네가 유통까지 맡아 하겠다며 청탁하는 이유가 안 돼. 어느 상단이 들어가도 이득을 낼 자리고, 어느 상단이 이득을 내든 자네는 돈을 벌 텐데.”

헨젤 백작은 고집스럽게 버텼다. 그런 그를 향해 클로드가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듣기 싫은 말을 굳이 자청해 듣겠다면 못 해줄 것도 없지. 너는 로렐라이 상단을 싫어하니까, 정당한 경쟁에서도 마이너스 점수를 줄 게 뻔하잖아. 나라도 붙어서 힘을 실어줘야 그나마 공정하지 않겠어?”

“…….”

“고작해야 삼 년 남았어. 잠깐의 사치인데, 그 애라고 그걸 모르겠어? 다른 곳에선 칼 같고 뱀 같은 헨젤이 랄리우스만 얽히면 미치도록 감정적이 된단 말이지. 그래도 자식인데, 좀 억울하더라도 예뻐하려고 노력 좀 하지그래.”

“……충고 고맙군. 벗이라고 하나 있는 게, 아주 속을 닥닥 긁어.”

클로드는 끝내 고려해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헨젤 백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헨젤 백작의 개인적인 감정만 제외하면 로렐라이가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쑤셔놓고 왔으니, 칼 같고 뱀 같은 헨젤은 결국 로렐라이에게 일감을 주게 될 터다.

“나 참……. 나라면 업고 다닐 자식인데.”

“예?”

마침 안으로 들어가려던 일랑이 난데없는 혼잣말에 의문을 표했지만, 클로드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오드리 타우레드, 라는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굴려보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을 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 이틀 뒤, 대대적인 ‘청소’가 이뤄졌다. 말브레 극장을 습격했던 괴한들을 처형한 것으로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잠잠하게 엎드려 있는 것 같았던 치안대는 불시에 검을 뽑아 들고 죄지은 자들과 그들과 손잡은 자들 모두를 베었다.

왕국의 법을 어기고 국왕의 위엄을 더럽힌 자들은 모두 지은 죄에 걸맞은 끝을 맺었다. 처형, 작위 박탈, 유배, 영지 몰수, 재산 압류……. 기존에 관련 업무를 보고 있던 자들이 죄다 풍비박산이 났지만, 그들의 자리는 미리 준비된 것처럼 빠르게 채워지며 충격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나랍과의 무역에서 장난질을 치던 상단들이 일시에 내쳐지며 발생한 공백은 꽤 컸다. 몹시 매력적인 공백이긴 해도 죄지은 자들이 워낙 빠르고 잔혹하게 내쳐진 터라 상단마다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왕실은 앞으로 나랍과의 무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상단 몇 곳을 선정해서 발표했다.

단지 발표일 뿐이고 무역에 참여하는 것 자체는 자율이라지만, 그게 어디 자율이겠는가. 지목당한 상단들은 그 속내야 어떠하든 우선으로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무역 정상화를 서둘렀다.

그런 상단 중에 로렐라이도 있었다. 그들은 남들보다 배는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설탕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리 앞날을 내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진행되는 일처리가 놀라울 정도로 신속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시 로렐라이의 단주는 이름을 감춘 왕족인 게 분명하다고 쑥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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