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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이해할 수 없는 (5/62)

chapter 4. 이해할 수 없는

「백 가지 보석을 원하면 북쪽으로 가고, 천 가지 약초를 원하면 남쪽으로 가라. - 출처 모를 속담」

오드리가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치안대가 속 시원하게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뭉그적대는 중에도 말브레 극장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서서히 식어갔다. 봄 사교철의 최대 행사라고 할 수 있는 봄 무도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멜브란트의 사교철은 봄, 가을이었다. 뜨거운 여름에는 피서를 가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에는 영지의 일을 처리하니 자연히 그리되었다. 소소한 모임과 파티는 계절에 상관없이 열리지만 어쨌거나 공식적인 사교철은 그 두 계절이었고, 왕궁에서 열리는 계절 무도회는 신분과 계층에 상관없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

헨젤 백작가는 남부의 이름 있는 명가였기에, 오드리 역시 엉망진창인 평판에도 불구하고 초대장을 받았다.

오드리는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초대장을 팔락팔락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사교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는 선언 같은 건 사자와 수사슴, 백합의 문장 앞에선 하등 소용이 없었다.

“드레스 준비를 해야겠는데.”

“겨우 살도 좀 오르고 낯빛도 밝아지셨는데.”

“언젠 살 빼야 하니까 먹지도 말라더니?”

“잊어주세요. 실언이었어요. 설마 브란젤의 귀족 영애들 허리가 그 모양일 줄은 몰랐죠. 그렇게 야위실 정도로 살을 빼고 코르셋을 졸라도 반도 못 따라가는데, 그냥 마음 편히 드세요.”

이디케의 항복 선언에 오드리가 키득키득 웃었다. 한편 다이앤은 오드리가 치장 예산으로 떼어준 액수를 살피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댔다.

“아가씨, 액수가 너무 적은 거 아니에요? 이래서야 새 보석은커녕 드레스나 간신히 맞추겠는데요.”

“어쩔 수 없어, 감내해.”

로렐라이는 긴축재정에 돌입했다. 피올이 넘겨준 정보를 무시할 수도, 신용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자금 유동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보니 만탈락의 주인으로서 오드리 몫으로 떨어지는 수익금이라고 마구 쓸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다이앤은 부족한 돈이 그저 아쉬웠다. 짙은 피부색과 독특한 머리 색, 유행을 따르지 않는 드레스만으로도 오드리는 충분히 혓바닥 위의 장난감이었다. 거기에 돈이 없어 비루해 보인다는 말까지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백작님께서 예산을 좀 주시면 좋을 텐데요.”

“퍽이나. 안 그래도 만탈락의 돈 일부를 내가 받아가는 게 아깝고 아쉬운 분이야. 고모님께서 내게 드레스를 보내는 걸 막지 않는 것만으로도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하실걸.”

메너트는 이번에도 오드리에게 드레스를 보냈다. 화사한 색의 천으로 지어진 깜찍한 드레스들이었다. 이전에는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어울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보낸 것이다. 드레스 상자를 열었을 때의 분노를 다시금 되새긴 다이앤의 눈동자에 열기가 어렸다.

“아가씨께 로렐라이 상단이 없었다면 이 정도 예산도 어림없었겠죠?”

“다이앤 너는 알면서 뭘 묻니?”

이디케가 다이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로렐라이 상단의 이익금에서 제 몫으로 돌아올 금액 중 일부를 예산에 추가해 적어냈다. 안 그래도 오드리를 홀대하는 헨젤 백작에 대한 반감이 하루하루 쌓여가는 나날인데 거기에 기름을 들이부을 필요까진 없겠다 싶었다.

“상단에서 빼낼 돈은 없어도 어느 정도 보탤 정도의 돈은 나도 있어.”

“……치사해.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난…….”

“너보고 돈 보태란 소리 안 해. 보탤 생각도 하지 마.”

이디케는 풀죽은 다이앤을 앞에 두고 매정하게 말을 잘랐다. 멀쩡한 부모님이 계시고 형제자매도 있는 자신과 달리, 다이앤은 이미 오래전에 혈육과 인연을 끊은 상태였다. 그녀에겐 돈이 절실했다.

‘귀엽기는.’

오드리는 하녀들의 공방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초대장을 대충 책상 위에 던져 놓고 또 상단의 서류를 만지작대는 중이었다. 이디케는 그런 주인을 못마땅하게 흘겨보았다.

“좀 쉬엄쉬엄 일하시라니까.”

“지금 쉬었다간 나중에 일에 깔려 죽어. 미리 해둬야지.”

“저나 다이앤은 뒀다 어디다 쓰세요? 자꾸 이런 식으로 구시면 서류 다 뺏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다이앤이 부리나케 고개를 끄덕이며 이디케의 옆에 나란히 섰다. 다이앤은 놀라울 정도로 촉이 좋은 데다 상품 기획에 재능이 있었고, 이디케는 회계에 있어선 따라갈 사람이 없는 인재였다. 상단의 운영 방향을 결정하고 제시하는 건 오롯이 오드리의 몫이지만, 단순한 서류 작업만이라면 둘이 마음먹고 덤벼서 못할 것이 없을 테다.

이디케와 다이앤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드리가 만탈락에 두고 온 하녀들 역시 로렐라이 상단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나름의 재주를 이용해 상단에 기여했다. 세간의 사람들이 하녀라고, 여자라고 무시하는 그들이야말로 로렐라이의 진짜 수뇌부였고 오드리의 힘이었다.

“알겠어, 알겠다니까.”

제 손을 거치지 않은 서류들이 나가는 걸 보며 안달복달하느니 잠깐 참는 게 나았다. 오드리는 둘의 공격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물러섰다.

안타깝게도 카프러스는 아무것도 몰랐다. 오드리의 에스코트 기사가 되어 그녀의 외출을 졸졸 따라다니면서도 아는 거라곤 오드리가 유독 로렐라이 상단에 자주 들른다는 것 정도였다. 하긴 오드리의 변장한 모습을 보았던 피올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추측만 했었는데, 전형적인 기사인 카프러스가 알아채지 못했다고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다.

여하간 본인의 의사야 어찌됐든 칩거를 풀어야만 할 상황이 됐다. 오드리는 이런 상황에 놓이고도 계속 집에 박혀 있어봐야 나쁜 소문만 부푸는 법이라며, 활발하게 사교 모임에 참석함으로써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그래봤자 오드리의 평판이 좋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타고난 기질이 자유로운 몇몇 귀족 영애들 중에는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있기도 했다.

봄 무도회가 열리기 직전, 로렐라이 상단의 신제품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이번에 개발한 신제품은 마법 잉크가 들어간 만년필이었다. 깃펜에 잉크를 찍어 글을 쓰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그런 번거로움이 사라진 펜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로렐라이 상단의 제품답게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서 말이다.

워커를 쥐어짜 방수 기능이 있는 마법잉크를 만들어낸 게 바로 이 만년필을 위해서였다. 장인들은 생전 처음 요구받은 구조를 구현하느라 오만고생을 해놓고도 설마 이게 팔리겠느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오드리의 생각은 달랐다.

온종일 깃펜과 씨름을 하다가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들어본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급하게 글을 쓸 일이 생겼는데 펜이나 잉크 중 하나가 없는 당혹스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건 혹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일정 작위 이상의 귀족가와 각계각층의 명망가, 유력인사들에게 모두 돌아가는 게 봄 무도회의 초대장이니만큼, 참석자들 모두가 만년필의 잠재적 고객층이었다. 펜과 잉크에 대한 개념을 바꿔놓을 신제품을 홍보하기에 이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다. 오드리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봄 무도회에 참석했다.

“어때요? 아름답죠? 만년을 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졌다고 해서 이름이 만년필이래요. 굉장해요. 저는 깃펜을 자주 부러뜨리는데, 이 펜을 선물 받은 이후로는 그런 걱정이 싹 사라졌답니다.”

“아름다운 것도 그렇지만, 정말로 신기하네요. 진짜로 잉크에 펜을 찍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그렇다니까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마법 종이가 아니라 일반 종이에 써도 물에 번지지 않아요. 낙서를 했던 종이에 실수로 차를 엎었는데, 종이는 울었지만 글씨는 깨끗하지 뭐예요.”

“어머나, 세상에. 그게 정말이라면 그 잉크만이라도 좀 사고 싶네요. 레이디 헨젤께서는 로렐라이 상단에서 선물받은 거라고 하셨죠? 판매는 언제부터 하는지 혹시 아시나요?”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그 아름다운 자태에 한 번 감탄하고 잉크를 찍지 않아도 되는 편리성에 두 번 감탄했다. 잉크를 다 쓰면 새로운 잉크를 사다가 채워 넣기만 하면 된다는 실용성은 그 다음이었다. 방수 잉크라는 새 제품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오드리는 넓디넓은 무도회장을 휘젓고 다니며 만년필을 자랑했다. 엉망진창인 오드리의 평판이 이럴 때 참 도움이 되었다. 선물 받은 물건을 철딱서니 없이 내보이고 다니며 자랑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니 말이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헨젤 백작은 오드리가 제 딸이 아닌 것처럼 아예 오드리를 외면했고, 메너트는 오드리 주변이 한산해지자마자 팔을 붙들고 구석으로 끌어냈다.

사람 없는 발코니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다급하기도 하다. 고모님, 그토록 강조하시던 우아한 몸가짐은 어디에 팔아 드셨나요? 오드리는 소리 내어 빈정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먼지 하나 없이 매끈하게 관리된 왕궁 바닥은 지독하게 미끄러웠다.

“오드리! 대체…… 그 천박한 태도는 뭐니? 장사꾼도 아니고, 멀쩡한 귀족 영애가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메너트의 분노는 대단했다. 곱게 화장한 얼굴에 붉은 핏기가 돌고, 꽉 틀어쥔 고급 부채가 살이 어긋나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만약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이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발코니가 아니었다면,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면 오드리는 느긋했다. 부채를 팔랑이며 웃는, 하염없이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그 얼굴이 메너트에게 오래된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죽은 밀리나를 다시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숨이 막혔다. 가진 거라곤 다 망해가는 작은 소도시 하나밖에 없는 주제에, 마지막까지 턱을 치켜들고 자신을 비웃던 밀리나.

‘누가 그 여자 딸 아니랄까 봐…….’

메너트는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고 등을 폈다. 어린 계집애일 뿐이라고, 남쪽의 시골구석에서 칠 년을 혼자 있었다고 마냥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그렇다, 그 밀리나의 딸인데 오죽하겠느냔 말이다.

“묻고 있지 않니,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고모님. 로렐라이 상단은 만탈락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제가 로렐라이를 아껴야 할 이유가 모두 설명되지 않나요?”

오드리가 마치 보란 듯 제 목덜미를 두드렸다. 깊은 바다처럼 푸른 사파이어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번 시즌에 유행하는 색상의 사파이어지만, 메너트가 보낸 적 없는 보석이었다.

“이번 시즌에도 로렐라이의 단주는 초대를 거절했다지? 네가 있으니 올 필요도 없었겠구나.”

메너트의 빈정거림은 오드리에게 눈곱만큼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어머……. 고모님, 로렐라이의 단주 얼굴을 아는 사람이 이 무도회장에 있던가요?”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던 메너트의 낯이 시퍼렇게 굳었다.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로렐라이의 단주가 사실은 왕족 중 한 명일 거라는 소문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오드리는 샐샐 웃으며 메너트의 약을 올렸다.

“그보다 고모님, 이 조카는 대체 언제 곳간 열쇠를 돌려주실 건지가 더 궁금하답니다. 헨젤이 데뷔탕트를 멀쩡히 치렀으니 이제 그웬은 손을 떼어야 하지 않겠어요?”

“누가 들으면 그웬이 도둑질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겠구나. 어린 헨젤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살림이라 기꺼이 손을 보태고 있는 것을.”

“만탈락에서 로렐라이가 일어났을 때, 저는 고작 열셋이었답니다.”

만탈락의 살림도 감당해 냈는데, 헨젤가의 살림이라고 못할 것 없다. 오드리에게서 흘러넘치는 자신감이 메너트의 심기를 건드렸다. 밀리나가 죽고 자신이 살림을 맡은 지가 무려 팔 년. 그동안 잡음 하나 나오지 않게 두 살림을 맡아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는가.

“만탈락의 번영에 대해서는 나도 익히 들었단다. 열셋에 그만한 일을 하다니 대단도 하지. 한데 이제 이렇게 멀리 떨어지게 되었으니, 어쩌니? 이전보다 더 많이 신경 써야 하겠구나. 오드리, 힘들지? 고모가 도와주마.”

“아뇨, 괜찮아요. 문제없어요.”

“사양할 것 없단다. 만탈락의 살림에서 돈을 빼 써야 할 정도로 이 고모가 보내주는 옷이 싫다는데, 다른 도움이라도 줘야지.”

메너트는 오드리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세세하게 훑었다. 짙은 남색 비단리본에 분홍색 꽃으로 장식한 머리 장식과, 재단은 특이해도 척 봐도 고급인 천으로 지은 드레스 자락, 새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괜찮다 평가받을 만한 사파이어 보석 세트. 오드리가 만탈락에서 거두는 돈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쯧……. 로렐라이인지 뭔지, 거 참 쓸데없구나. 멋모르는 어린 귀족 영애가 이렇게나 사치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라니. 하긴 그러니 네가 내 성의를 무시한 거겠지만.”

오드리는 노력했다. 자신을 평가하는 시선에 분노하지 않기 위해, 함부로 재단하는 어조에 화내지 않기 위해, 정당한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돌려받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인내했다. 방긋 웃는 얼굴 안쪽으로 새파란 불꽃들이 어른어른 피어올랐다가 잿더미에 묻혀 모습을 감췄다.

“바로 그 드레스가 문제랍니다. 정말로 제게 그런 밝은 핑크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고모님의 안목을 믿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네가 피부색을 예전으로 돌려놓는다면 어울리고도 남지. 그 괴상한 염색을 빼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어릴 적의 너는 고집쟁이긴 해도 생긴 것만은 사랑스러웠어.”

“지난 일에 집착해서 현재를 잊어서야 안 될 말이죠. 고모님께서는 그웬의 성장에 좀 더 기뻐하시는 게 어떨까요?”

메너트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그웬 백작가로 시집갈 때, 그웬은 다 쓰러져 가는 수도 저택과 작위 말곤 가진 게 없는 볼 것 없는 혼처였다. 그웬이 헨젤의 발닦개가 되기로 맹세하며 주고받은 상징물 같은 혼인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웬은 제대로 된 백작가가 되었고, 이제는 하향결혼을 했다는 수군거림도 들을 일 없건만, 오드리가 찌른 창은 메너트를 관통하고 그녀를 비틀대게 했다.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열등감이 다시 솟아올라 목이 메었다.

오드리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메너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선대의 사정은 오드리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게다가 귀족 영애로 태어나 정략결혼을 숙명으로 알고 자랐을 메너트가 자신의 결혼에 불만을 가졌으리라는 생각은 해 본 일이 없었다.

어쨌거나 상대가 전의를 잃었으니 얼른 빠져야 할 때다. 오드리는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는 재빠르게 발코니에서 벗어났다. 짙은 향수로 물든 공기가 옷자락을 적시고, 들으라는 듯 속닥대는 목소리들이 무의미하게 그녀를 스쳤다.

“선물 받은 물건을 대놓고 자랑하다니……. 역시 브란젤에서 자라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그래도 빼먹은 것 없이 제대로 차려입었네요. 행동거지가 귀족 영애가 아니라 장사꾼 같기는 해도 말이죠!”

귀족 영애기도 하지만 장사꾼인 것도 맞다.

“로렐라이 단주는 비싼 돈을 주고 홍보요원을 고용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참석하지도 않은 무도회에서 저렇게 열정적으로 일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로렐라이 단주는 무도회에 참석해서 신제품 홍보를 하느라 아주 바빴다.

“깃펜에 잉크 좀 찍는 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저런 물건을 쓰죠? 물에 번지지 않으려면 마법 종이를 쓰면 되잖아요. 예쁘다고 하지만 제 눈에는 깃펜이 훨씬 멋스러워요.”

신제품의 유용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서류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뒤에서 쑥덕대는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오드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며칠 뒤면 로렐라이 상단에 연락해서 만년필 재고가 있는지 알아볼 사람들이었다. 그저 체면이 있어 소문이 나쁜 그녀에게 말을 붙이기 싫은 것뿐이었다.

‘피곤한데.’

홍보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하자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쉴 새 없이 떠드느라 목이 따가웠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던 발이 지독한 통증을 호소했다. 휴게실에 갈까, 생각했지만 거기에 모여 있을 부인들과 영애들을 생각하면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메너트를 상대하면서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진 뒤였다.

“오드리 언니!”

어차피 목표했던 홍보도 거의 다 한 것 같은데 이대로 도망을 칠까, 하고 고민 하던 중 귀에 익은 목소리가 오드리를 불렀다. 네이기스였다. 사람이 많을 땐 저 멀리서 쭈뼛대기만 하더니, 말 걸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로 도망가기는 글렀다. 오드리는 해탈한 미소를 지었다.

“네이기스, 반가워요. 오늘도 아주 예쁘네요. 드레스도 아주 잘 어울려요. 어느 의상실에서 맞춘 건가요?”

“시엘라 거리에 새로 문 연 의상실이 있거든요. 거기 옷이 아주 귀엽고 예뻐요. 언제 언니도 같이 가요.”

“그래요. 가게 되면 연락해요.”

오드리는 그렇게 적당히 맞장구치고 상대해 주다 도망을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네이기스가 오드리의 팔을 잡아끌고 무도회장 바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나 뭐라나.

두 사람은 곧 왕궁정원에 발을 디뎠다.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오드리가 휴식을 핑계로 들어갔던 그 정원이었다. 눈을 얹어놓은 것처럼 흰 꽃이 화려하던 나무를 떠올린 오드리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네이기스, 혹시 보여주겠다는 게…….”

“다 왔어요! 여기예요!”

오드리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네이기스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흰 달빛을 베일처럼 둘러쓴 천사상 앞이었다. 아름답긴 했다. 살짝 눈을 내려뜬 얼굴은 세상에 모르는 게 없을 것처럼 지혜로워 보였고 등에 달린 날개는 돌로 만들어졌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늦은 밤에 만난 천사상은 낮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오드리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멋진 조각상이네요.”

“그렇죠? 오드리 언니, 옆에 서보세요.”

“네?”

“아이 참. 옆에 서보라니까요. 그래요, 그렇게. 손도 모으고, 눈도 살짝 내리깔고……. 아, 역시. 생각했던 대로예요.”

네이기스는 오드리를 천사상 옆에 세우고 똑같은 포즈를 취하게 만들어놓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하지 않게 치장해 돌돌 말아 늘어뜨린 머리 스타일, 많은 장식을 달기보다는 몸매를 살리는 우아한 라인의 드레스,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이마와 그 아래로 깊은 그늘을 드리우는 그윽한 눈매. 네이기스는 이 천사상을 처음 보자마자 오드리를 떠올렸더란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걸 언니도 똑같이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둘이 아주 똑같아요. 이 천사상을 조각한 조각가가 언니를 본다면 깜짝 놀랄 거예요. 내가 생각했던 천사가 여기에 강림해 있다니! 하고 말이에요.”

네이기스의 칭찬은 진심이었지만, 오드리는 그걸 진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가무잡잡한 피부도, 초록색으로 물들인 머리칼도 미인의 조건에서는 한참 떨어진 것이니까. 남부식 드레스에 익숙한 몸은 브란젤에서 미인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개미허리 같은 허리를 만들지도 못했고 말이다.

자신이 미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미인이 되려고 애쓸 생각도 없지만, 지금도 예쁘다 눈부시다 해주는 사촌동생이 귀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요.”

“아니에요, 진짜예요. 아, 왜 저는 그림을 못 그릴까요. 언니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은데. 정말, 정말 아쉬워요.”

네이기스의 목소리에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녀는 부모님 말씀에 거역하지 않는 착한 딸이었고, 멜브란트 왕국 귀족 영애의 교육과정에 그림 감상은 있어도 그림 그리기는 없었다. 예술가의 육성은 귀부인의 영역이었지만 화가는 남자들에게나 허락된 직업이었다. 요즘은 중류계급의 여자들 중 일부가 붓을 들고 나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류계급의 이야기였다.

“네이기스,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아니요! 아니에요! 설마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있나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다. 네이기스는 저도 모르게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가 곧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남몰래 품어왔던 소망을 들킨다는 건, 벌거벗은 알몸을 들킨 것만큼이나 창피했다.

“저, 정말 아니에요. 그림은 그냥…… 보는 것만 좋아해요. 진짜예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던 그녀는 변명만 늘어놓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괜히 속을 떠봤다가 덜렁 혼자 남게 된 오드리는 어쩐지 굉장히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입맛을 다셨다.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마음은 착한 사촌 동생은 아무래도 그림이 그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쯧. 그웬 백작부인이 허락해 줄 리도 없는데 안타까운 아가씨예요.”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오드리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은 것 같은 말이었다. 깜짝 놀란 오드리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상대를 알아보고 타박을 놓았다.

잘 차려입은 옷 여기저기에 나뭇잎을 단 피올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새로 치안대에 입단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봄 무도회의 초대장을 받았다. 하나 말이 축하지 실상은 처벌대상인 자들을 지근거리에서 살펴보라는 뜻이었다. 비록 자꾸만 자신을 흘끔대는 시선들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뛰쳐나왔지만 말이다.

“놀란 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기껏 사람 없는 곳을 골라서 잘 자고 있었는데 방해를 받았단 말입니다. 잘 자다가 깨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인데요.”

“어쩐지, 초반에 잠깐 얼굴을 비추곤 내내 없다 했어요. 이렇게 정원 구석에서 잠이나 잘 거면 얼른 돌아가 버리는 게 어때요?”

“맘대로 돌아갔다간 대장한테 맞아 죽습니다.”

“나한테 중간보고서 유출한 건 안 맞아 죽고요?”

“매정한 분이시네. 나만큼 쓸데 있는 정보원이 어디 있다고 자꾸 죽으라 하실까.”

피올이 너스레를 떨며 자신의 유용함을 강조했다. 그가 오드리에게 중간 보고서를 보낸 건 한 번이 아니었다. 그때처럼 두툼한 서류를 건넨 적은 없어도, 종종 다이앤과 이디케를 통해 정보를 전했다.

오드리는 그 정보를 받을 때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기밀일 정보를 상세히 알려주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좋다고 덥석 물었다가 낚시 바늘에 꿰인 물고기 꼴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정보원은 입이 무거워야 쓸모가 있죠. 나는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계속 뭔가를 가져다 나르니, 어떻게 그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요구하지 않았다뇨. 치안대 사무실에 레이디 그웬을 몇 번이고 보내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느냐 확인한 게 누구…….”

“레이디 그웬?”

“……레이디 헨젤께서 보내신 거 아니었습니까?”

“네이기스가 심부름꾼도 아니고, 내가 그 애를 거기 왜 보내요? 아하, 자신만만하게 정보를 줬는데 결과물이 늦게 나오는 거 같아서 제발 저렸어요?”

피올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제 착각이 민망하긴 한가 본데, 망할 주둥이는 여전했다.

“아니, 그럼 레이디 그웬은 왜 자꾸 치안대 사무실에 왔던 겁니까? 그것도 올 때마다 격려랍시고 과자니, 빵이니, 하는 걸 들고 오니까 다들 내쫓지도 못하고…….”

“격려하러 갔나 보죠.”

“…….”

“어쩌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피올이 약속을 깨자 서운한 기색으로 목을 빼던 네이기스였다. 오드리는 네이기스가 피올을 보러 치안대 사무실에 들락거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치안대의 수사에 협조하는 건 시민의 의무라는 핑계를 대면서. 오드리의 초록빛 눈동자가 장난스런 빛으로 반짝거렸다.

하지만 피올은 오드리의 말과 시선에 질색을 했다.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홰홰 저으며 혀를 찼다.

“귀족 영애랑 애정관계로 엮이면 피곤해집니다. 말이 존경받는 치안대, 백합에 감긴 검이지 결국엔 다 평민인데요. 신분 차이 나는 연인? 그런 건 소설에나 나오는 겁니다.”

“어디 데인 경험이라도 있나 보죠.”

“데인 적은 없어도 본 적은 많습니다.”

단번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대던 피올이 금세 표정을 바꾸고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제 생각이지만 레이디 그웬은 꽤 그림에 소질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하도 흥미를 보이시기에 몽타주 담당 대원이 몇 가지 요령을 가르쳐 준 것만으로도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내더군요. 모르긴 몰라도 정식으로 배우면 실력이 금방 쌓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고모님께서 허락하실 리 없죠.”

“그렇겠죠. 중류계급도 아니고 상류계급의 아가씨 아닙니까. 레이디 헨젤처럼 막 사는 분은 모르겠지만 본래 상류계급의 아가씨들이란 지켜야 할 게 많은 법이죠.”

오드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막 살아보자, 가 인생 목표이긴 하지만 그걸 남의 입으로 들으니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게다가 피올의 어조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빈정대는 말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존경받는 치안대의 일원께서 말을 아주 막 하시네요? 조각난 정보 모아서 드렸을 땐 세상에서 가장 정중한 신사가 되어 인사도 하셨으면서? 정보 다 얻었으니 이젠 뭐 볼 거 없다 이거에요?”

“그때 심정은 진짜였죠.”

피올이 얼굴 가득 덕지덕지 묻은 피곤을 떼어내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봤자 피곤은 안 떨어지고 옷자락에 붙어 있던 나뭇잎 몇 개만 떨어졌지만 말이다.

“수습 딱지도 뗐겠다, 어떻게든 실적 낼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던 시기니까요. 그런 때에 조져야 할 놈들 명단이 죄목까지 적혀서 들어왔는데 어떻게 흥분을 안 합니까? 그때 그 순간에는 레이디의 등에 날개라도 달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데 정작 일이 진행되기 시작하니까 이건…….”

“……음.”

“그거 아십니까? 산트렘 지역에서는 사람을 포도즙 짜듯 짠다는 표현이 있다는 거. 요즘 제가 바로 그 포도가 된 것 같습니다. 하도 쥐어 짜여서 더 나올 즙이라곤 한 방울도 없는데 또 즙 짜는 도구에 들어간 기분이에요. 오늘도 낮 내내 한참 시달렸는데 이런 무도회 따위에나 불려오고 말입니다. 신입이 죄지, 죄야. 사람 잠이나 좀 자게 해줄 것이지.”

오드리는 월급은 올랐는데 오른 월급 쓸 시간도 없다며 투덜대는 피올을 제법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마, 자고 싶은데 못 자고 버티는 마음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거 받아요.”

피올은 고급스럽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받아들고 당황해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 이거 설마 만년필입니까? 레이디께서 오늘 무도회에 오자마자 내내 홍보하고 다니느라 정신없으시던 그거?”

“맞아요. 사실, 아까 타박을 하긴 했어도 지속적으로 진행 상황을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처음에는 보티안 씨가 날 놀려먹느라 이런 걸 보냈다고 생각해서 좀 곤두서 있었던 거니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이거 비쌀 텐데……. 됐습니다. 우는 소리를 좀 하긴 했어도 원래 치안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정보 빼드린 것에도 큰 의미는 없습니다. 최초 신고자여서 편의를 봐드린 거니까.”

퍽이나 의미가 없겠다. 오드리는 피올의 허세에 거절로 답했다.

“일단 드린 건 다시 돌려받지 않아요. 보티안 씨야말로 이 만년필에 그리 큰 의미는 두지 마세요. 누가 이런 걸 어디서 났느냐 묻거든, 치안대 사무실에서 열심히 쓰시라고 로렐라이에서 준 거라고 하시고요.”

오드리로서는 크게 인심을 쓴 것이다. 피올도 그쯤은 알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애써도 눈앞의 여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나 영리하면서, 왜 남들 눈에 엇나가는 짓만 골라 하는가.

생각해 보면, 그녀는 형편없는 평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평판을 이용해 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기 전과 후가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을 찾기도 힘을 터였다.

“레이디께서 만년필 홍보를 하고 다니실 때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로렐라이를 아끼는 이유가 그들이 그저 만탈락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입니까? 단지 그것뿐이라서 이렇게까지 살뜰히 살피십니까? 혹시 그 상단에 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글쎄요? 그걸 내가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요? 난 그냥 호의를 베푸는 것뿐이에요. 네이기스가 격려 차원에서 과자와 빵을 가져다 줬듯이 나는 만년필을 준 거죠. 보티안 씨는 마침 내 앞에 있는 유일한 치안대원이고요. 무슨 의미라도 있길 바라시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상관할 건 전혀 없는데 어째 그렇게 됩니다. 직업병인 모양이죠. 만년필은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동료들이 부러워 죽으려고 하겠군요.”

“그래요. 그럼 저는 이만 자리를 피해드릴 테니 마저 주무세요. 무도회가 끝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답니다.”

오드리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휙 돌아섰다. 이왕 정원에 오게 된 거, 그때의 그 눈꽃 같은 꽃송이를 매단 나무를 보러 갈 셈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오드리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피올이 목청 높여 그녀를 불렀다.

“레이디 헨젤! 나중에 다시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풋! 봐서요.”

피올은 오드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웃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는 만년필이 든 상자를 옷 안에 챙겨 넣고 다시 수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아까처럼 정원석을 베고 드러누웠지만 어쩐지 조금 전에 오드리가 한 말이 귓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어쩌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말인데, 이상하게 가슴 안쪽이 소란스러웠다. 달빛에 비친 나뭇잎에 마음이 쓰였다. 가을도 아닌데 붉게 물든 나뭇잎이 괜히 얄미웠다. 이상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피올을 혼란스럽게 한 것도 모르고, 오드리는 제 갈 길을 갔다. 나뭇가지에 걸려 쪼개진 달빛이 비추는 정원은 기억하던 그대로 여전히 아름다웠다. 가끔 정원에서 밀회를 즐기던 커플이 낯선 기척에 기겁하며 숨는 것만 빼면 더 좋았을 테지만 말이다.

제아무리 막 살기로 마음먹은 오드리라도 보는 눈이 있는 이상 이전처럼 구두를 벗고 맨발로 걸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발을 죄어드는 구두를 참고 또 참아가며 걸었는데, 정작 나무 앞에 도착했을 땐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기대했던 꽃이 다 지고 없었다.

“뭐야…….”

흰 꽃은 다 지고, 푸릇푸릇하게 돋아난 이파리만이 가지를 채우고 있었다. 이래서야 그저 크기만 한 나무에 지나지 않느냔 말이다. 괜한 심통에 나무를 퍽퍽 때려보았으나 손만 아플 뿐이다. 어디 손만 아픈가? 발도 아팠다.

오드리는 구두를 벗어던지고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보드라운 풀이 덮인 바닥도,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나무기둥도 그대로인데 올려다보는 풍경만 바뀌었다. 흰 달빛을 뒤집어쓰고 눈처럼 빛나던 꽃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는 서러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깟 꽃이 뭐라고, 겨우 꽃 좀 못 보았다고 이렇게 서럽다니. 남쪽 도시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고 엉엉 울던 어린아이도 아닌데 참 우스운 일이었다.

오드리는 열심히 눈을 깜빡였다.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한 방울이라도 떨어졌다간 화장을 망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그녀는 결국 화장을 망치고 말았다.

오드리가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카프러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귀족 영애들끼리 나가는 걸 따라갈 수가 없어 기다렸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엉망진창인 얼굴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것도 혼자.

“도대체 왜 우신 겁니까? 레이디 그웬과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베텔 경. 애인 없죠?”

“…….”

“숙녀가 눈물자국을 남기고 왔을 땐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게 훌륭한 신사의 덕목이에요. 암만 물어봐봤자 솔직한 대답을 듣기는 그른 일이기도 하고요.”

언제부터 숙녀인 척을 했다고 그러시는지. 카프러스가 차마 뱉지 못하고 삼키는 말을 뻔히 알면서도, 오드리는 더 대꾸하고 싶지 않아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무도회 중간에 나와 수도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 하염없이 길고 험했다. 덜걱대는 마차의 진동이 어찌나 걸리는지, 화장을 고쳐주는 이디케의 손길마저 짜증스러웠다.

“이디케.”

“네, 아가씨.”

“눈처럼 흰 꽃이 피는 나무를 알아?”

“글쎄요. 그저 흰 꽃이 피는 나무는 여럿 알지만, 굳이 눈처럼 희다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어떻게 피는 꽃인데요?”

“아주 작고 둥근 꽃잎이 여러 장 겹쳐 있는 꽃이야. 꽃송이는 내 새끼손톱만큼 작아. 나뭇가지가 무겁도록 뭉쳐 피어서 마치 나무에 눈이 앉은 것만 같아. 바람이 불면 그 꽃잎이 와르르 흩날려서 눈보라가 치는 것처럼 보여. 나무는 아주 크게 자라는 수종인가 본데, 내가 본 건 수도 저택 정원에서 제일 큰 나무만큼 컸어.”

이디케는 이제껏 그녀가 보았던 나무들을 죄다 떠올려 보았지만 비슷한 나무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신분이 신분이라 아무래도 다니는 곳에 제약이 있는 오드리를 대신해서 사방팔방 빨빨대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그녀의 행동범위도 그리 넓은 건 아니었던 탓이다.

반면 오드리의 설명을 들은 카프러스는 떠오르는 게 있었다. 헨젤 백작가에 의탁하기 전까지, 그는 제법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저 동쪽에 있는 리가 항구에서부터 북쪽에 있는 셰비언 성벽까지도.

“체리나무로군요. 크다는 게 좀 걸리긴 한데……. 아마 과실수로 키우는 게 아니라서 그렇게 자랐나 봅니다.”

“체리나무?”

“새콤달콤하고 작은 과일 있잖습니까. 그 체리가 열리는 나무입니다. 아마 만탈락에도 있었을 텐데……. 분명 도시 바깥 외곽지역에서 길렀을 거고 과실수로 키웠을 테니 작게 키웠을 겁니다. 그래서 알아보지 못하셨겠지요.”

“아아……. 체리나무. 그렇구나.”

과실수라는 말을 들으니 아득하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만탈락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어린 시절, 락시 부인이 오드리를 데리고 외출을 했었다.

어린 소녀의 손에도 충분히 닿을 정도로 키가 작은 나무들이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꽃비를 내렸었다. 그 풍경이 어찌나 환상적이었는지, 내년에 또 보러 오겠노라, 락시 부인의 치마폭을 붙들고 다짐도 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해에 오드리는 워커를 만났고 로렐라이를 만들 결심을 했으니, 그녀가 하얗게 흩날리는 꽃비를 본 건 열 살 때가 마지막이었다.

어린 오드리가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걱정을 하면서도 주머니 쌈짓돈 탈탈 털어 투자해 준 만탈락의 고용인들은 이제 다들 한재산하는 부자가 되었다. 돌아가신 마님을 생각해서 투자하는 거라며 날려도 상관없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들이지만, 정작 돈이 들어오면 입이 헤벌쭉 벌어지곤 했었다.

아버지에게 쫓겨 온 어린 아가씨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사람들 생각이 나자 오드리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세상이 다 밉고 뭐든 다 억울해 삐뚤어질랑말랑하던 그녀를 칭찬과 사랑으로 키워낸 사람들이었다.

“이디케, 체리가 나올 때가 되면 또 케이크 만들어줘.”

“얼마든지요.”

오랜만에 그리운 날들을 떠올려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터지기라도 한 것일까. 오드리는 봄 무도회에서 돌아온 그날로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감기 증상 정도로 취급했던 몸살이 점점 심해져 나흘이 지났을 즈음에는 하루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하델의 걱정은 대단했다. 어린 시절부터 워낙에 튼튼해 흔한 감기 한번 걸려본 적 없던 소년은 그저 피곤한 것만으로 앓아눕는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마다 말을 타고 강변의 산책로를 내달리던 누나가 눈을 꾹 감고 누워 있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 자신을 낳고 매일 누워만 있다가 돌아가셨다던 어머니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아버지, 의사는요? 의사는 언제 와요?”

“벌써 다녀갔잖느냐.”

“그렇지만, 누나가 못 일어나잖아요. 그 의사가 돌팔이면 어떡해요. 다른 의사 불러주세요. 네?”

누나가 걱정된 소년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버지를 졸랐다. 한창 재미를 붙여가던 승마도, 이젠 제법 칭찬을 받는 살론어도 모두 팽개친 채였다. 보다 못한 알렉스가 오드리 아가씨가 깨어나서 속상해하면 어쩌느냐는 소리까지 하고서야 겨우 수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헨젤 백작을 화나게 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빌어먹을 몇몇 놈들이 쳐 놓은 사고 뒤처리를 하느라 집에는 겨우 잠자고 씻으러 오는 게 전부인 수준으로 과로를 하고 있는데 올 때마다 싫은 소릴 듣고 있으니.

“쓸데없는 소리. 몸 관리를 못 해 앓아누운 것을 누굴 탓해. 내버려 둬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일어날 거란 진단은 못 들었느냐? 넌 할 필요도 없는 걱정은 그만두고 썩 가서 수업이나 들어라. 하여간, 겨우 계집아이 하나 때문에 몇 명이 수선을 떠는 건지…….”

헨젤 백작의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하델은 똑똑히 들었다. 자신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싸늘하고 무정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와 누나는 사이가 나빠 보이긴 했다. 아버지는 누나를 볼 때마다 싫은 소리를 했고, 누나는 아버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하델은 더 조르지 못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던 알렉스가 반색을 했다.

“주인님께서 뭐라세요?”

“알렉스.”

“네?”

“누나는 내가 지켜야겠어.”

알렉스는 황당해졌다. 다른 의사를 불러달라고 할 거라더니, 이게 웬 흰소리인가. 알렉스가 허우적대며 따라오거나 말거나, 하델은 집사에게 직행했다. 한창 바쁜 집사를 붙들고 제 몫의 재산 중 당장 쓸 수 있는 돈에 대해 물으니, 머리가 희끗한 집사가 당황해 물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누나에게 의사를 보낼 거야.”

“그건 이미 주인님께서 하셨습니다. 바로 그제 의사가 다녀갔잖습니까.”

“단순히 피곤해서 저렇게 드러누워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의사가 돌팔이인 거야!”

몹시 난처해진 집사가 알렉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넌 도련님 안 말리고 뭐했어! 알렉스가 필사적인 손짓으로 대답했다.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는데 어떡해요! 하델이 두 조손의 몸짓대화를 눈치채고 이를 갈았다.

“두고 봐.”

“아이고, 도련님…….”

집사가 우는 소리를 했지만 이미 글렀다. 하델은 이디케를 생각했다. 누나의 수석하녀이며 젖형제인 그녀라면, 어떻게든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까. 단순히 하녀 신분이라 마음껏 의사를 부르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자신이 나서겠다고 하면 더 좋은 의사를 부르는 방법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하델로서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거였지만, 아픈 오드리의 병수발을 들다가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은 이디케의 심기를 단단히 거슬렀다. 이디케는 일그러진 표정을 숨길 생각도 않은 채 젖은 수건을 비틀어 짰다.

“도련님, 걱정은 고마운데요. 의사 부를 필요 없어요.”

“왜?”

“본래 아가씨는 환절기에 이렇게 한 번씩 앓으세요. 만탈락에 계실 때도 이러셨어요. 이번엔 브란젤에 와서 여기저기 다니시느라 더 심하게 앓으시는 거예요. 며칠만 지나면 털고 일어나실 테니, 그만 돌아가 주세요.”

제법 그럴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하델도 눈이 있고 귀가 있었다. 오드리의 하녀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디케 네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넌 할 일이 많잖아. 게다가 어디 너뿐이야? 다이앤도 종일 땀을 닦는다, 부채질을 해준다, 난리를 떨잖아.”

“……하녀들 이름은 또 언제 다 외우셨대…….”

“그걸 왜 몰라? 이디케 너는 누나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수석하녀고, 다이앤은 누나의 치장을 도맡아 하면서도 온갖 심부름을 다 하잖아. 내가 바본 줄 알아? 너네, 나는 싫어도 누나는 좋잖아. 의사 정말로 필요 없어?”

어휴, 이를 어쩐담. 이디케는 눈앞의 도련님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직 어리고 멍청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누가 아가씨의 동생 아니랄까 봐 눈빛이 아주 총명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오드리는 지금의 하델 나이에 로렐라이를 만들기 시작했었다.

“의사는 정말로 필요 없어요. 하지만 굳이 도와주고 싶으시면 손님 대응 좀 해주실래요? 아가씨를 찾아오는 분들이 계신데, 백작가에 안주인이 계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희가 계속 대응하기도 좀 곤란해서요.”

“집사는 뭐하고?”

“바쁘시잖아요.”

설마하니 집사가 아무리 바빠도 집안의 아가씨를 찾아오는 손님 대응을 못 할까. 하지만 이디케는 그렇게 말했고, 하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누나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가득 찬 하델은 그날로 서관의 응접실을 차지했다. 거품을 물고 반대했던 알렉스조차 하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오드리를 찾아오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평판이 워낙 엉망이라 모임 초대장도 가문의 이름값 때문에 보내는 판국이니 애써 병문안까지 올 사람은 거의 없었던 탓이다. 그나마 오드리의 제멋대로인 행보를 동경하던 몇몇 영애들이 꽃과 과자를 싸들고 찾아왔다가 돌아갔고, 네이기스 역시 선물을 들고 찾아오며 걱정을 드러냈다.

하델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집사까지 갈 것도 없이 하녀들만으로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디케는 왜 대응이 곤란하다고 했을까 싶었던 와중, 드디어 문제의 인물이 찾아왔다.

백합에 감긴 검의 문장을 망토에 새긴 치안대원, 피올이 찾아온 것이다. 산트렘 기사단만큼은 아니어도 치안대의 명성도 눈부셨다. 정쟁의 시대를 끝낸 자들, 낮은 곳에서 모두를 위해 봉사하는 무력 집단……. 출신이 어떻든 치안대에 배속되는 순간부터 무조건 평민이 된다지만, 귀족에게조차 존댓말을 듣는 게 치안대원이었다.

역사와 살론어 수업은 빼먹어도 검술 수업은 빼먹지 않던 하델이니, 느닷없는 치안대의 등장에 가슴 뛰지 말라는 게 무리인 주문이렷다. 정작 피올은 오드리가 아직도 누워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이것 참……. 레이디께서는 굉장히 건강해 보이셨는데요.”

“금방 일어나실 겁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이렇게 든든한 동생분께서 걱정하고 계신데 말입니다.”

안 그래도 흘끔흘끔 쳐다보고 싶은 것을 꾹 누르고 애써 점잖은 척을 하고 있던 하델이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귓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피올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어린 소년의 마음을 모른 척하며 손님접대로 나온 차를 마셨다. 퍽 고급인 차인데도 입이 썼다.

‘웬만하면 직접 전달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왕국의 법을 어기고 국왕의 위엄을 더럽힌 자들에 대한 처벌이 결정되었다. 작위를 휘둘렀던 자들은 작위를 빼앗길 것이고, 재산으로 핍박했던 자들은 재산을 뺏길 것이다. 그로도 갚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들은 목숨으로 죄를 씻게 될 테다. 머지않은 일이었다.

피올은 오드리가 왜 그들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알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았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으되 제대로 들은 바 없으니 앞으로도 모르고 살 작정이었다. 웬만하면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충실한 정보원인 것으로 만족하고 싶었다. 야망 넘치는 사람의 곁에 있다가 어어, 하는 사이 휘말리는 건 질색이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생각대로 되는가? 아프다는 말에 산뜻하게 일어나서 레이디의 상태가 좋아지거들랑 연락 주십시오, 했던 처음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렇게 헨젤가를 들락거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누가 보면 반했다 하겠네…….’

피올은 빈 찻잔의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다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모른 척할 셈이었으면, 야금야금 정보를 전하며 오드리를 시험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왕 칼을 뽑았으니 끝을 보아야 할 테다. 안 그래도 꼭 그녀의 도움을 받고 싶을 정도로 골치 아픈 일이 있기도 했다.

“하델 도련님. 제가 메시지를 남길 테니, 레이디 헨젤께서 일어나시면 전해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그럼…….”

피올은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테이블에 있던 냅킨에 간단한 메모를 했다. 만년필을 처음 본 하델이 잉크를 찍을 필요 없는 펜의 존재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지만, 피올에게는 영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드리가 누워 있는 며칠 사이 만년필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겨울보리가 무르익었습니다. - 피올 보티안>

메시지가 남겨진 냅킨을 받아든 하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시기상으로 겨울보리가 익을 때가 맞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메시지까지 남기는가.

“이게 뭔가요?”

“도련님께서는 아가씨께 전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신사의 명예를 걸고 꼭 전해주셔야 합니다.”

피올은 하델에게 몇 번이나 잘 전해 달라 신신당부를 하며 돌아갔고, 하델은 본의 아니게 시험에 빠지고 말았다. 치안대원의 친필이 담긴 냅킨이다. 이걸 누나에게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델의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냅킨을 두고 시작한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마법사의 로브를 차려입고 긴 은발을 늘어뜨린 셰비언이었다. 꽤 전에 오드리에게 약속했던 흰 옷감을 갖고 왔던 그는, 오드리가 아프다는 말에 꽤 당혹한 기색이었다.

“아프시다고요?”

“그렇다. 누님은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손님을 거절하고 있어. 로렐라이의 마법사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셰비언이 들고 온 커다란 상자만 봐도 대충 방문 목적이 짐작이 되건만, 하델은 괜히 턱을 치켜들고 고압적으로 굴었다. 전설 속의 얼음요정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누나를 찾는다는 상황 자체가 어쩐지 못마땅했다. 마법사에 대한 존중 같은 건 애저녁에 방석으로 썼다.

“혹시 그게 누님의 주문품이라면 두고 가도록. 내가 전해드릴 테니까.”

하나 소년의 미묘한 마음은 셰비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는 탁자에 내려놓았던 상자를 도로 챙기며 다음을 기약했다.

“아니요. 워낙 갖고 싶어 하셨던 물품이니까요. 이왕이면 직접 드리고 싶네요.”

“그게 뭔데 꼭 직접 드려야 한다는 거지?”

“레이디의 개인적인 주문품인데,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그렇게 캐물으시면 레이디께서 싫어하지 않으실까요?”

하델의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 어렸다. 겨우 첫 번째 만남인데, 어째 자신의 약점이 누나인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굴다니. 하지만 더 억울하고 분한 건 정말 저 말 그대로일까 봐 더 추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누님에게서 직접 듣겠어.”

“예, 그러셔야죠.”

분기에 찬 소년에게 쏟을 정신 같은 건 셰비언에게 있지도 않았다. 그는 옷감 상자를 끌어안은 채 저택의 문을 나섰다. 나날이 온기를 더해가는 햇살이 은발에 부딪쳐 미끄러졌다. 정원에 피어난 꽃들이 그의 걸음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향기를 바쳤다.

“이것 참…….”

매끈한 손가락이 괜히 모양 좋은 입술을 괴롭혔다. 셰비언은 잘 뻗은 아미를 꿈틀대다 홱 고개를 돌려 저택을 바라보았다. 본관, 동관, 서관으로 나눠진 저택은 헨젤가의 위세만큼이나 당당했다. 셰비언은 살짝 끄트머리만 보이는 서관을 계속 노려보다 그를 수상하게 여긴 고용인에게 끝내 쫓겨나고 말았다.

그날 밤, 다이앤은 오드리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낮 내내 오드리의 곁을 지켰던 이디케가 쓰러져 잠든 탓에 밤의 수발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땀에 젖은 이마를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주고, 너무 열이 오르지 않도록 살랑살랑 부채를 부쳤다.

“언제 일어나시려나…….”

이부자리를 챙기는 다이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매번 계절이 바뀔 때마다 겪는 일이긴 하지만, 앓느라 창백해진 오드리를 보고 있으면 괜한 불안감에 가슴이 선뜩해지곤 했다. 게다가 이번에 겪는 몸살은 유독 심했다.

‘여기가 브란젤만 아니었어도, 뭐라도 해 봤을 텐데…….’

다이앤은 대대로 약제사를 하는 집에서 태어났고, 어린아이 손도 손이라는 부모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일을 배웠다. 어찌나 손재주가 좋았는지, 부모가 데릴사위를 고민할 정도였다.

끝내 오라버니가 가게를 물려받으면서 집안과 연을 끊긴 했지만, 만탈락에 있을 때는 그런 사정을 다 아는 약재상들이 다이앤에게 약초를 팔길 주저하지 않았었다. 비록 브란젤에 있는 지금은 흔한 감기약을 만들 약초 한 포기 살 수 없지만 말이다. 갑갑한 일이었다.

‘……이상하게 덥네.’

어쩐지 가슴이 갑갑하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다이앤은 부채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나뭇가지에 숨어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품은 바람이 방으로 몰려들었다. 환자의 더운 숨으로 텁텁해져 있던 공기가 대번에 상쾌해졌다.

“어……?”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시원한 밤바람을 깊숙이 들이마시던 다이앤은 갑자기 밀려드는 현기증에 휘청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대체 왜 다리에서 힘이 풀린 건지, 스스로가 더 놀라 허우적대며 창틀을 짚었지만 곧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당혹스러워하던 회색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다이앤은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그림처럼 동작을 멈췄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목덜미를 간질이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얀 손이 창문턱을 짚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운 손의 주인은 그다지 애쓰는 기색도 없이 단번에 몸을 끌어올렸다. 침입자의 외모는 몹시 특징적이었다.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은발, 얼음 언 강처럼 푸른 눈동자…….

셰비언은 창문 아래에서 석상처럼 굳은 다이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마법사의 로브가 무색하리만치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카펫 한 조각 깔려 있지 않은데도 그의 발걸음에서는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길게 땋아 내린 머리채를 꼬랑지처럼 흔들며 방을 가로질렀다. 길게 늘어진 천개를 젖히고 침대에 누운 오드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오드리의 얼굴은 어딜 보아도 환자였다. 열에 들뜬 입술은 까칠하게 부르텄고 안색은 창백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안쓰러웠다. 나비의 날개라도 만지는 양 조심스러운 손길이 오드리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가 후다닥 떨어졌다.

“음…….”

셰비언은 오드리에게 닿았던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녀의 체온이 손가락에 닿고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가 실감이 났다. 도둑도 아니면서 한밤에 몰래 침입해 자는 얼굴을 훔쳐보다니.

“내가 왜…….”

어찌나 놀랐는지, 떨리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얼음 낀 강처럼 차갑기만 하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는 얼음동상처럼 서서 자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를 되짚었다.

일전에 부탁받았던 옷감을 완성해서 가져왔다가 만남을 거절당했던 게 속상하긴 했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힐 땐 언제고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는가 해서. 하지만 일방적으로 내쫓긴 것도 아니고 아파서 만나지 못했던 건데 왜 그리 서운했던가.

‘서운했나?’

불현듯 든 깨달음이 셰비언의 가슴 언저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래, 서운했다. 아쉬웠다. 의뢰받은 옷감을 전해준다는 핑계 없이는 찾아갈 수도 없는 처지인데 얼굴도 못 보고 돌아나와야 해서 서운했다. 이름 없는 마법사와 귀족 영애 사이의 거리는 생각 이상으로 멀었다.

그래서 허락 없이 창틀을 넘은 것이다. 저택을 지키는 자들의 눈이나 창문의 잠금장치 같은 건 제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나 정작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울컥 후회가 됐다. 무슨 짓을 저질렀나 싶었다.

셰비언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아파 침대에 누운 가녀린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이상했다. 자는 얼굴을 몰래 보러 온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고동이 귓가를 울리는 가운데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으음…….”

죽은 듯 누워 있던 오드리가 신음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단지 잠투정일 뿐인데,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가만 서 있다가, 오드리가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하고서야 겨우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셰비언은 다시 뒷걸음질을 치려다 말고 덜컥 걸음을 멈췄다. 이대로 떠나면 정말 파렴치한이었다. 자신에게 상식이 부족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상식 이전의 문제였다. 그는 다시 침대 곁으로 다가가 섰다.

오드리는 모로 몸을 기울이고 잠들어 있었고, 조금 전의 잠투정 때문인지 덮고 있던 이불이 죄다 내려가 땀에 젖은 잠옷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셰비언은 허둥지둥 내려간 이불을 끌어다 오드리의 어깨까지 꼼꼼하게 덮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목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규칙적으로 뛰는 맥이 손끝에 잡혔다. 금빛의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그의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반짝이는 실들이 본래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오드리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버겁게 쌕쌕거리던 오드리의 숨소리가 편해졌다. 저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펴지고, 이마에 잔뜩 맺혀 있던 땀방울이 사라졌다. 까칠해졌던 입술은 본래의 윤기를 되찾았으며, 잔뜩 달아올랐던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갔다.

치유 마법이었다. 워커가 보았다면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을 테지만, 마법의 수혜자인 오드리조차 사실을 몰랐다.

‘이왕 왔으니까……. 아냐, 이러려고 온 거였어. 그래, 아프다고 하니까 걱정이 됐던 거야.’

셰비언은 오드리의 상태가 좋아진 걸 확인하고서야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수준 이하의 짓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겨웠고, 더불어 조금 전에 찾아낸 변명거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좋은 꿈 꾸기를.”

검지 끄트머리에 아직 남아 있던 금빛 실이 오드리의 이마에 스며들었다. 셰비언은 오드리가 방긋방긋 웃기 시작한 걸 확인하고서야 그 자리를 벗어났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서였다.

셰비언이 사라지고 조금 뒤, 다이앤의 회색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창턱에 올렸던 손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고 시도했고, 조금 전과는 달리 너무나 수월하게 일어서는 자신의 몸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에 자신이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는 건 전혀 모르는 것이다.

“뭐 잘못 먹었나?”

다이앤은 아까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다리와 팔을 주무르며 고개를 갸웃댔지만, 끝내 이유를 짐작하지는 못했다. 그저, 침대가로 돌아갔다가 한결 편안해진 것처럼 보이는 오드리를 보고 매우 안심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오드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벼운 몸살일 뿐이다, 걱정할 것 없다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내심 불안해하던 이디케도 적잖이 안심했다. 워낙에 긴 몸살이었다. 호되게 앓는 동안 뺨이 쑥 들어간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오드리에게 뭐라도 먹이고 살을 찌우고 싶어 했다.

“이디케, 이러다 나 돼지 되겠어. 요즘은 승마도 못가는데.”

“말 타면 살 쭉쭉 빠진다면서요. 실컷 먹고 나중에 말 타러 가세요.”

“아니, 이디케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봄이 아니라 가을에 아플걸 그랬어. 봄엔 먹을 게 얼마 없잖아.”

오드리는 농담으로 말했지만, 이디케에게는 농담이 아니었다. 식기를 정리하던 손이 허공에 멎고 새파란 시선이 오드리를 꿰뚫었다.

“미안. 안 아플게.”

“저 속상한 줄 알면 그런 말씀은 꺼내지도 마세요.”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을 훤히 아는 사이다. 오드리는 더 빼지 않고 아기새처럼 얌전히 식사를 받아먹었다. 고영양식을 한참 퍼먹고 배가 빵빵하게 불러올 때쯤이 되자 겨우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자마자 좋은 냄새가 난다 했더니 침대 주변이 온통 꽃밭이었다. 오드리는 침실을 꽃으로 치장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웬 꽃이야?”

“병문안 오신 분들이 놓고 가셨죠.”

“나한테 병문안을 오는 사람이 있었어?”

“있더라고요. 오신 분들 명단은 따로 작성해 뒀으니 나중에 답례 편지를 보내세요. 아, 그리고 도련님 말인데요…….”

언제나 청산유수로 말을 잘 하던 이디케가 잠시 머뭇거렸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고 망설이는 모습에 오드리가 의아해하는데, 마치 그 순간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델이 들이닥쳤다.

“누나!”

오드리를 부르는 얼굴에서 빛이 난다. 하델은 오드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듣던 수업도 팽개치고 달려온 참이었다. 오드리가 누워 있는 내내 그녀의 방은 출입 금지였기에, 이렇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게 몹시 감격스러웠다. 오랜만에 보는 누나의 얼굴은 까칠하게 말라 있어서 소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델, 이리 오렴. 걱정 많이 했니?”

“……누나도 어머니처럼…… 누워만 있어서…….”

“이런.”

오드리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침대 곁에 주저앉은 하델은 제 나이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너무 어려 기억도 없을 텐데 그런 걱정을 했다니,

미워하는 마음은 손톱만큼 줄고 안쓰럽고 예뻐하는 마음이 비누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기에 귀여워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감춘다. 오누이로서 참 오랜만에 갖는 다정한 한때였다.

“누나는 튼튼해. 알잖아, 누나가 너보다 말도 훨씬 잘 타는걸?”

“말만 잘 타면 뭐해요. 이렇게 앓아눕기나 하고.”

하델의 입이 오리주둥이처럼 튀어나왔다. 오드리는 깔깔 웃으며 하델의 입술을 잡아당기다가, 세상 시름 다 짊어진 표정의 알렉스를 발견했다. 차마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애만 태우는 꼴이 무슨 상황인지 바로 알겠다. 오드리의 표정이 바로 딱딱해졌다.

“하델, 또 수업을 빼먹었니?”

“누나가 일어났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수업을 듣고 있어요?”

“내가 뭐 크게 다쳤던 것도 아닌데 이러면 안 되지. 수업 마치고 다시 오렴.”

“아버지는 누나를 지켜주지 않잖아요.”

오드리는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녀가 가만히 있는 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하델은 제법 의젓하게 등을 펴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숙녀를 지키고 보호하는 게 신사의 의무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가 누나를 지킬 거예요.”

“너…….”

하델을 볼 때면 억지로라도 누그러뜨리고 있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상냥하게 반짝이던 초록빛 눈동자가 서늘한 기운을 품고 하델을 쏘아보았다. 하델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오드리의 반응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도련님, 아가씨 일어난 거 보셨으니 이만 가세요. 아가씨는 쉬셔야 해요.”

이디케가 즉각 반응했다. 그녀는 오드리의 손을 붙들고 있는 하델을 떼어내 억지로 문밖으로 밀어내고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당황한 하델이 화내는 소리가 문을 뚫고 들려왔다. 그리고 그런 하델을 달래는 알렉스의 목소리도.

‘내가 못 살아.’

방 안의 공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웃는 얼굴이었던 다이앤은 방구석에 숨어 가구 행세를 하기 시작했고, 이디케는 문을 몸으로 막고 선 채 오드리의 눈치를 살폈다.

오드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운데 이게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회복이 덜 돼서 그런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하지만 심호흡을 다섯 번도 넘게 했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으니,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바로 알겠다.

‘누가 누굴 지킨다고?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어린 게, 벌써부터 숙녀와 신사를 운운해?’

무겁게 몸을 누르고 있던 이불을 걷어버리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몇 발짝 걷다가 휘청, 몸이 기우니 구석에 숨어 있던 다이앤이 달려들어 오드리를 부축했다. 오드리는 다이앤에게 기대어 한발, 한발 문가로 다가갔다.

이디케가 다이앤을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다이앤은 그녀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다이앤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무조건 오드리였다.

“이디케, 비켜.”

“아가씨.”

“비키라니까!”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 이디케는 결국 포기하고 문을 열었다. 알렉스와 입씨름을 하고 있던 하델은 벌컥 열리는 문에 반색을 하고 돌아섰다가 바짝 얼어버렸다. 요즘 들어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던 누나가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히끅, 알렉스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하델.”

“네, 네?”

“누가 누굴 지키지?”

누누이 말하지만, 하델도 눈치가 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누나가 화난 줄은 알아 냉큼 입을 다물고 눈만 데굴데굴 굴린다. 그런 하델을 보면서 오드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일렀다.

저 애는 아직 어리다. 어려서 주변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뿐이다. 그러니 크게 화 내지 말아야 한다. 그 말이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체 진정이 되지 않았다. 명령받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대로 살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막 산다는 욕을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이제껏 실천해 온 인생이었다. 부친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아직 어린 하델은 이제부터라도 가르치면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어찌나 속에서 천불이 이는지, 지금 소리를 지르면 불이라도 뿜을 수 있을 것 같다. 꾸역꾸역 자신을 달래며 이를 악물고 다시 물었다.

“하델. 하나만 확인할게. 네가 날 지키겠다 나선 건 나는 연약한 여자고 너는 강인한 남성이기 때문이니?”

“그런 걸 왜 확인해요? 남자가 여자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의무잖아요.”

오드리는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돌덩이의 무게를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타고난 성별을 바꿀 수도 없는데, 단지 그것만으로 듣는 말이 너무나 많았다. 뭘 얼마나 배우든,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이든, 사람들은 그녀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았다. 기껏 듣는 칭찬이라고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것이었다.

겨우 열두 살인 하델조차, 제 누이를 그저 여자로 본다. 그맘때의 오드리와 비교해도 현저히 차이 나는 성취 수준으로, 나이 먹어 차이가 더 벌어진 지금에, 고작해야 저가 사내라는 이유만으로 저리 당당하게 지켜준다 말한다.

내가 만약 누나가 아니라 형이었다면, 그래도 너는 날 지켜주겠다고 했을까? 그래, 어쩌면 너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엔, 화를 내는 나를 향해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은 하지 않겠지.

오드리는 제 동생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부친을 꼭 닮은 검은 머리칼이, 자신과 비슷한 연두색 눈동자가, 햇볕에 그을려 뺨에 다닥다닥한 주근깨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사랑스럽던 모든 것들이 다 그 빛을 잃었다.

“……네가, 동생으로서 누이를 지키겠다 나선 거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거다. 아직 어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녀석이, 고작 사내라는 것만으로 감히, 누가 누굴 지킨다고…….”

“…….”

“나는 내가 지켜. 이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저가 뱉은 말이 어떤 뜻인지도 모르는 녀석에게는 보호받지 않아.”

하델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자신이 누나에게 뭔가 큰 실망을 안겨줬다는 사실만은 명확하게 인식했다.

소년이 꺼낼 말을 고르는 그때, 저 복도 끄트머리에서부터 다가오던 알신다가 오누이의 다툼을 목격했다. 나이 차이만큼이나 키 차이가 큰 오누이인지라, 언뜻 보면 오드리가 하델을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도련님!”

항상 단정하던 옷자락이 요란하게 펄럭거렸다. 알신다는 뛰다시피 다가와 하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가슴이 커다랗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이전의 알신다답지 않게 뚜렷한 적의가 담긴 시선이 오드리를 향했다.

“아가씨,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 무슨 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알신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급하게 내 앞을 가로막은 건지 설명해 보겠어?”

“그야…….”

“그야, 뭐?”

알신다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앞서 대뜸 하델의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멍청한 짓이었다.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네가 말을 피하는구나.”

“아가씨께서 깨어나는 대로 데려오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이거 참, 자신이 아무리 힘없는 아가씨라지만 버르장머리 없는 작태가 아닌가. 오드리는 손짓으로 알신다를 비키게 하고 하델을 불렀다. 알신다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건 오드리만이 아니어서, 하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알신다를 보고 있었다.

“하델, 들었니? 널 아끼는 하녀가 제 주인을 핑계 삼아 나를 무시하는구나. 어떻게 생각하니? 이게 내가 연약한 여자라 당하는 일이고, 그러니 강인한 남자에게 보호받는 것으로 해결될 일로 보이니?”

하델은 말없이 조용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절 끓던 복도는 이제 한겨울의 삭풍이라도 부는 듯 싸늘했다. 오드리는 다이앤이 가져온 실내용 코트를 걸치고 알신다를 따라 몇 걸음 걷다 말고 홱 고개를 돌렸다.

“당분간은 얼굴 보지 말자. 돌아가렴.”

하델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오드리가 계단이 있는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도 끝내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런 하델의 곁을 지키던 알렉스가 울상을 짓고 하델의 팔을 잡아당겼다.

“도련님…….”

“알아, 갈 거야. 그렇게 안 보채도 돼.”

“네……. 저, 오드리 아가씨께서 저렇게 무서우신 건 처음 봅니다…….”

이디케는 오드리를 따라갔지만, 다이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알렉스는 혹 다이앤의 귀에 들릴까 겁난다는 듯 작게 속삭였다. 평소라면 맞장구를 치든, 야단을 하든 대답하지 않을 하델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헨젤 백작의 집무실은 본관 3층에 있었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서관에서 본관까지 걸어가야 했던 오드리의 기분은 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서관과 본관은 구름다리 따위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계단을 고스란히 다 올라야 했기에 더욱 그랬다.

꾸역꾸역 계단을 올라가 만난 집무실은 꽤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우아한 아이보리색과 고동색을 적절히 섞어 위엄 있으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은 분위기가 났다. 큰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호화로운 카펫에 빛으로 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집무실에서 가장 인상적인 가구는 책상이었다. 마호가니 나무로 짠 아름다운 책상 가득히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헨젤 백작은 파리하니 피곤한 낯으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오드리를 보자마자 혀를 차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표정이 나쁘구나.”

“막 일어난 환자를 부르셔놓고 방긋방긋 웃기를 바라셨던 건 아니시죠?”

“서관에서 본관까지 올 정도면 다 회복한 게지.”

부르는데 거절했으면 건방지네 뭐네 나무랐을 게 뻔한 인사가 거 참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오드리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하녀가 내온 의자에 앉았다. 평소라면 앉으라 하지도 않았는데 앉았다며 뭐라 할 헨젤 백작이었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번에는 차마 나무랄 수 없을 정도로 오드리의 안색이 창백했다.

“사교 활동을 하겠다는 녀석이, 참석하는 모임이 얼마나 된다고 제 건강 하나 챙기질 못하고 그리 쓰러지느냐?”

“본디 환절기에는 잘 앓아요.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사교 모임에서도 그따위로 구느냐?”

아직 채 열 마디도 나누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오드리는 하녀가 따라주는 차에 정신을 집중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꽤 따뜻해 보였다.

“제가 아버지 앞에서도 사교 모임에서처럼 굴기를 바라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됐다. 이런 말싸움을 하자고 부른 게 아니니.”

헨젤 백작의 말투는 어쩐지 포기에 가까웠다. 오드리는 하마터면 고개를 돌릴 뻔했으나, 꿋꿋하게 참아냈다. 고개를 돌려 부친의 얼굴을 마주보면, 또 칭찬을 기다리는 아홉 살 아이가 되어 가슴 졸이게 될 것 같았다. 다행히 헨젤 백작은 오드리가 얼굴을 보여주거나 말거나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네 고모가 네게 옷과 보석을 보내고 있는데, 전혀 쓰지 않는다면서.”

“어울리지가 않아서요.”

“만탈락에서 나오는 돈으로 따로 치장을 한다고 들었다.”

“있는 돈을 안 쓸 이유는 없잖아요.”

“네가 치장에 쓰는 돈의 규모를 확인해 봤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더구나. 만탈락에서 네 몫으로 거두는 돈의 절반 이상을 치장에 쓰면 어쩌자는 거냐?”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오드리가 로렐라이의 특급 고객인 것에만 주목했지만, 그녀는 로렐라이의 최대 투자자이기도 했다. 만탈락에서 나오는 돈뿐만 아니라 로렐라이 상단의 수익금 중 상당 부분이 그녀의 몫이니, 쓰는 돈의 규모가 달라질 밖에. 게다가 딱지만 치장 비용 붙이고 다르게 쓰는 돈도 있었다. 오드리는 자신이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짐작했다.

“하델의 몫은 건드리지 않고 있어요.”

“당연한 말을! 네가 동생의 몫까지 손을 댔으면, 네 어미의 유언이고 뭐고 다 무시했을 거다.”

“어쨌거나 제 치장 비용은 제 몫에서 쓰고 있고, 하델의 몫은 무사히 잘 있어요. 고모님께서 보내주시는 옷은 악의적일 정도로 제게 어울리지 않아요. 분홍 드레스를 뒤집어쓴 초록 개구리 꼴을 하고 사교 모임에 나갈 수는 없잖아요. 명색이 왕실의 금고지기인 헨젤가의 여식인데, 그렇게 엉망인 꼴로 나다녔다간 무슨 말을 듣겠어요?”

“그렇게 평판에 신경을 쓰는 녀석이 날뛰는 망아지 같은 레이디라는 말은 내버려 두느냐? 내가 아무리 틀어막아도 한계라는 게 있다.”

헨젤 백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교 활동을 하겠다더니, 온갖 악평을 몰고 다니는 딸 덕분에 요즘의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굴 내밀기가 부끄러울 지경이 되었다.

왕궁의 집무실로 출근할 때마다 망아지 같은 딸을 두어 고생이라는 위로 아닌 위로가 쏟아졌다. 서류를 나르는 말단 직원조차 종종 혀를 차며 헨젤가는 아가씨의 혼처를 어쩌면 좋으냐는 걱정을 했다. 그 무뚝뚝하던 사람들이 결혼 적령기의 귀족 영애에게 이렇게나 관심이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그런 와중에 메너트에게서 오드리가 지나치게 사치를 하고 있으니 확인해 보라는 말까지 들어왔다. 알신다를 통해 어림짐작한 것만으로도 그 값이 엄청나다나 어쨌다나.

웬만하면 혼자만 알고 있으려 했는데, 연기보다 가두기 어려운 게 소문이라더니 벌써 한바탕 얘기가 돈 모양이었다. 만탈락의 세금이 오드리의 지참금이 될 거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크게 실망했는지, 그나마 간간이 들어오던 혼담이 쏙 들어갔다.

덕분에 가문의 격이 맞으면서 행실도 바른 상대를 찾는 건 다 그른 얘기가 되었다.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탕진하는 여자를 가문의 안주인으로 삼고 싶어 하는 이가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가문의 위상이 있는데 소문난 망나니와 짝지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라면 축하한다.”

“당분간은 베텔 경의 신세를 더 져야겠군요.”

“그게 정말 당분간이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오드리의 태평한 대꾸가 헨젤 백작의 의심에 확신을 주었다. 그는 메너트의 편지를 한숨과 함께 접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오드리, 목적을 이뤘으면 이제부터라도 평판에 신경을 써라. 언제까지 만탈락에서 거두는 돈으로 흥청망청 즐기며 살 셈인 거냐? 겨우 삼 년 남았다. 그 뒤엔 네가 만탈락에서 거두는 세금은 끝이야.”

삼 년 뒤의 오드리는 스물이고, 스무 살이면 성년이다. 밀리나는 딸에게 만탈락의 조세권을 물려주었지만, 완벽하게 주지는 못했다. 오드리는 랄리우스가 아니라 헨젤이었으므로. 오드리가 성년이 되면, 오드리의 몫으로 들어오던 만탈락의 세금은 헨젤 백작가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네게 들어오는 돈으로 충분히 사치할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 그 돈이 끊기면 어쩔 거냐? 내가 언제까지나 네 보호자 노릇을 해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보호자. 그 말이 너무나 우스워서, 오드리는 하마터면 큰소리로 웃을 뻔했다. 하긴, 이름뿐인 보호자라도 없는 것보다 낫긴 하겠지.

“걱정마세요. 거적으로 옷을 해 입는 한이 있어도 하델 몫에는 손 안 대요.”

“말귀 잘 알아듣는 그 영리한 머리로 보호자 없이 늙은 처녀가 무슨 말을 들으며 살게 될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해라. 골칫덩이가 돼서 동생에게 짐이 될 생각도 말고.”

“하고 싶은 말씀 다 하셨으면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아시다시피 일어나자마자 불려온 몸인지라, 조금만 더 무리했다간 쓰러질 것 같거든요.”

오드리가 이마에 손을 짚고 쓰러질 듯 연약한 연기를 했다. 원체 안색이 나빴기 때문에, 겨우 그것만으로도 한 떨기 꽃처럼 가녀린 귀족 영애처럼 보였다.

헨젤 백작은 딸의 가증스러운 연기를 노려보다 끝내 손을 휘저었다. 어차피 할 말은 다 했고, 계속 앉혀놔 봐야 제 두통만 더해질 뿐이니.

“가봐라.”

“감사합니다, 아버님.”

인사를 하다 눈이 마주쳤다. 찌푸린 회색 눈에는 어떤 애정의 조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델을 바라볼 때와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 뭔가 기대했던 것도 아니면서, 오드리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말이 길다. 갈 거면 얼른 나가.”

오드리는 제 속에서 뭔가가 또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슴을 치고, 목을 치고, 머리를 때리는 무언가.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인사를 마무리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문밖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던 이디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아가씨, 백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별거 아니야. 하나뿐인 딸에게 혼담이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스러우셨던 모양이지.”

퍽이나 그게 전부이겠다. 이디케는 차마 소리 내지 못하는 불평을 입안에서 뭉개며 입술을 삐죽댔다. 오드리는 그런 이디케를 모르는 척했다. 그렇게 걸어 서관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오드리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 더 자고 싶지만, 쌓인 일들을 해결해야 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찻잔 대신 서류가 올라왔다. 이디케와 다이앤이 틈틈이 최선을 다해 해치웠다지만 양이 만만치 않다.

“이놈의 서류……. 차도 한 잔 안 주고 대뜸 서류부터 내미는 거 너무한 거 아냐?”

“아, 맞다. 아가씨, 이거 받으세요.”

서류를 채 한 장도 못 넘겼는데, 다이앤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냅킨을 꺼냈다. 조금 전, 하델이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굳이 들러서 그녀에게 주고 간 것이다.

“보티안 씨가 꼭 전해달라고 하셨대요.”

“그래? 냅킨에라도 써서 전해야 할 말이 뭐가 있다고…….”

<겨울보리가 무르익었습니다. - 피올 보티안>

접힌 냅킨을 무심히 펴던 손길이 그대로 멎었다. 딱딱하게 굳은 오드리의 표정에 곁에 서 있던 이디케와 다이앤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렇지, 보리가 무르익었으면 수확을 해야지……. 어쩐지 별 웃기지도 않는 핑계로 봄 무도회에 나왔다 했어. 이디케, 손절 시작해. 다이앤, 넌 나랑 외출 좀 하자.”

“네에?”

“안 돼요! 외출은 조금 더 쉬고, 며칠 뒤에 해주세요!”

두 하녀가 기함했지만 오드리는 단호했다. 수북이 쌓인 서류를 밀어버리고 바로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니, 다이앤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녀의 환복을 도왔다.

“시끄러워, 이런 일은 시기가 중요해. 보티안 씨가 언제 왔다 갔는지 알아?”

“며칠을 내리 왔었고, 이 냅킨을 준 건 어제래요.”

“미치겠군.”

이디케와 다이앤은 그만 울상이 되었다. 평소 쓰지 않던 말까지 나왔으니, 설득하기는 글러먹었다. 그렇게 두 하녀는 순순히 포기하고 오드리의 명령을 따랐지만, 저택 고용인들의 심정은 좀 달랐다.

평소 오드리를 제대로 아가씨 대접해 주지 않는 고용인들이라도,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외출하겠다고 나서는 꼴을 그냥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법 큰 소란이 일었으나, 알신다가 나서서 그들을 죄다 물렸다. 오드리를 에워싸고 안 된다 떽떽거리던 치들은 알신다의 말 몇 마디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무사히 마차를 탈 수 있었지만, 오드리에게는 퍽 꼴같잖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 눈만 내리깔았지 목뼈와 허리뼈는 제법 빳빳해 보이는 알신다에게 말을 걸었다.

“나보다 네가 더 윗사람 같구나.”

“그렇게 일일이 지적하지 않으시면 더 윗사람다우실 테지요. 뭣 때문에 그리 급히 나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연약한 몸에 무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너야말로 네 목이 이 저택에 무사히 붙어 있길 바라야 할 거다. 네가 나를 아무리 싫어해도 나는 헨젤이고, 고모님은 그웬이야. 그웬에 기대어 헨젤을 팔지 마라. 이전의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오늘 너를 두 번 눈감아줬어.”

첫째는 감히 오드리를 의심하여 그녀의 앞을 막아섰을 때 화내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오드리의 씀씀이를 궁금해하는 메너트에게 정보를 넘긴 것도 모자라 그녀의 입이 되어 헨젤 백작에게 고자질한 짓을 트집 잡지 않은 것이다.

“세 번째는 없다.”

오드리의 어조가 지독히 서늘함에도, 알신다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 전과 똑같은 낯으로 잘 다녀오시라,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오드리는 끝내 확답을 듣지 못하고 마차에 탔다.

“아가씨, 어디로 갈까요?”

“카페 로열로 가자.”

“예, 금방 가겠습니다.”

멀어져가는 마차를 물끄러미 보고 섰던 알신다가 픽, 비웃음을 지었다.

“검은 머리가 싫어 초록색으로 물들이고 흰 피부가 싫어 까맣게 태웠으면서, 헨젤은 무슨. 필요할 때만 헨젤을 들먹이지.”

제법 큰 목소리였다. 분주히 주변을 정리하던 고용인들 중 한 둘은 분명히 들었을 법도 한데, 다들 귀가 먹은 사람처럼 제 할 일만 한다.

알신다는 그만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집사와 마주쳤다. 허연 머리칼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집사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알신다는 그의 참견을 받아주지 않았다.

“알신다, 자네…….”

“이 집에 남을 헨젤은 도련님 한 분뿐이에요.”

아, 이를 어쩌나. 가문에 충성스런 집사는 아가씨와 하녀장 사이의 미묘한 알력다툼에 끼어들어야 하는 건가 고민했지만, 곧 방관자의 자세로 돌아갔다. 그의 경험상, 여자들의 다툼이란 언제나 시간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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