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쇼핑과 사교는 귀족 영애의 덕목 (4/62)

chapter 3. 쇼핑과 사교는 귀족 영애의 덕목

「왕궁마법사 모집공고

성별 불문, 나이 불문, 경력 불문, 숙식 제공 가능

배당 업무 : 브란젤 상 하수도 관리 도로 및 가로등 관리 왕궁 온실 온도 관리, 브란젤역사 관리, 배당된 연구의제 연구, 등록 마법사의 개인연구 성과 기록 업무, 그 외 기타 등등

급여 :

“빌어먹을 상단 놈들. 뭔 월급을 그렇게 많이 주는 거야? 제발 우리도 인력 보충 좀 해 보자…….”

왕궁마법사장은 공고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펜을 내던졌다. 왕궁마법사의 인력난은 고질병이었다.」

이른 아침에는 승마, 오전에는 상단의 서류 처리, 오후에는 두 하녀를 대동하고 필리아 거리의 상점을 돌며 쇼핑하고 저녁엔 사교 모임을 갔다. 빡빡하기 이를 데 없는 일정이었다. 오드리는 물론이고 종일 그녀의 일정을 따라다니는 이디케까지 주종이 나란히 수척해졌다.

오드리가 승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뻔히 아는 카프러스가 아침 승마는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 조심스레 권유할 정도였다.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것마저 안 하면 쌓인 화를 못 풀고 집 안 집기를 다 때려 부술지도 몰라요.”

“음……. 승마를 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거봐요. 경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부척 수척해진 얼굴에 꽃이 활짝 피었다. 최근에는 보기 힘들었던 밝은 웃음이었다. 곧 죽어도 승마를 할 거면 승마 드레스를 입으라고 말하려던 카프러스는 끝내 말을 삼켰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렇게 힘들다는데, 그 위풍당당한 말을 타고 얌전히 산책이나 하라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한 말이 될 것 같았다.

카프러스는 사교 모임에서 오드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오드리가 감당해야 하는 질문들은 꽃으로 치장한 칼날이었고 훑어보는 시선들은 예의로 포장한 평가였다. 가무잡잡한 피부색, 초록색으로 염색한 머리칼, 느슨하게 차는 흉내만 내는 것으로는 모자라 이제는 벗어버린 코르셋, 유행보다 편의성을 우선한 드레스 재단까지, 모든 게 다 트집거리였다.

게다가 이른 아침이면 승마복을 입고 제스본강 옆의 산책로를 내달린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면서,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은 무리가 자꾸만 추근대기까지 했다. 헨젤 백작도 고삐 쥐기를 힘들어하는 말괄량이를 휘어잡는 걸 제 자랑으로 삼고 싶어 하는 놈들이었다.

오드리는 카프러스가 나설 필요도 없이 능숙하게 그들을 상대했다. 때로는 헨젤가의 이름을 방패 삼고, 때로는 만탈락의 재산을 들먹이면서. 로렐라이 상단에서 온갖 진상을 부렸던 것과는 달리 아주 세련된 대응이었다. 카프러스는 어느 쪽이 오드리의 진짜 얼굴일까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까지 나진 않았다.

“아가씨께서 하신다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경도 이제 슬슬 나한테 적응이 됐나 보네요.”

“글쎄요. 적응보다는 포기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후. 내가 쉬는 동안 경도 쉬어요. 큰 부상이었는데 나 때문에 쉬지도 못했잖아요.”

“딱히 큰 부상은 아니지만, 배려 감사합니다.”

만약 오드리가 승마를 하고 돌아와 쉬는 게 아니라 서류를 붙들고 일에 치이고 있다는 걸 카프러스가 알았다면 이렇게 쉬이 물러나질 않았을 것이나, 공식적으로 그녀는 오전에 하는 일이 없었다. 아직 살림을 넘겨받지도 못한 상태이니 오전에 모자란 잠을 자는 거라 여겼다.

이런 무리한 일정은 오드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다. 범인이 현장에서 잡혔겠다, 며칠만 고생하고 나면 일이 모두 마무리되어 휴식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브란젤의 사교계는 오드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시달리던 어느 날, 그날도 오드리는 로렐라이 상단의 브란젤 지점 별실에서 세상 무료한 표정을 짓고 카탈로그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카탈로그를 보고 종업원에게 괜한 시비를 걸며 시간을 죽이는 동안, 이디케는 상단주의 대리인 중 한 명으로서 일을 처리했다.

자식의 것은 곧 부모의 것.

오드리는 자신이 로렐라이 상단의 주인이라는 걸 헨젤 백작에게 절대 들킬 수 없었고, 때문에 하녀가 두 명의 주인을 섬기는 것도 모르고 휘둘려 다니는 멍청이라는 평가를 수용했다. 그녀의 평이 바닥으로 추락할수록 이디케는 안전해졌다.

“아, 재미없다 정말…….”

카탈로그를 어찌나 자주 읽었는지, 이제는 달달 외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드리는 카탈로그를 내던지고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묵직한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는 거로도 모자라 눈꺼풀에 매달렸다. 잠이 부족했다. 정말, 너무 부족했다.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눈꺼풀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꺼풀은 굳게 닫혔고, 고른 숨소리가 조용한 별실을 채웠다. 유리창을 넘어 들어온 햇살이 가무잡잡한 뺨에 아롱졌다.

“……씨. 아가씨.”

낯선 손길이 달콤한 낮잠에 빠져 있던 오드리를 깨웠다. 푹신한 이불처럼 휘감아오는 잠기운에 파묻혀 있던 그녀였지만,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이디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상단의 별실이라지만, 혼자 있었다지만, 지점의 직원들이 자신을 반푼이로 여기는 걸 뻔히 알면서 태평히 잠을 잤단 말인가.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들여보내.”

지점에서 일하는 하녀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굳이 소리로 바꾼다면 어디 여자가 칠칠하지 못하게 바깥에서 낮잠을 자나, 쯤이 될 것이다. 오드리의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무잡잡한 피부색 덕에 그다지 티는 나지 않았지만.

하녀가 나가자마자 오드리를 찾아온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같지 않은 광채를 발하는 긴 은발과 얼음 낀 강 같은 푸른 눈동자의 소유자, 셰비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숨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다듬는 오드리를 향해 셰비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목 부근에서 단정히 묶어 늘어뜨린 은빛 머리칼에 햇살이 부딪쳐 반짝거렸다. 늘 얼음요정처럼 비현실적인 인상을 주던 그였지만, 햇살 아래의 그는 특히 그런 인상이 두드러졌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오드리 못지않게 초췌해진 안색만 아니었더라면, 오드리는 자신이 여직 잠에 빠져 요정을 만난 건 아닐까 의심했을 것이다.

“봄날의 햇살이 잠을 부르긴 하지요.”

“그 햇살은 나뿐만 아니라 셰비언 그대에게도 꽤 필요해 보이는데. 그대가 여긴 웬일이지? 로렐라이의 마법사가 그리 한가한 자리였나?”

오드리의 어투는 뾰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렐라이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셰비언은 이제껏 상단에서 판매했던 마법 도구들의 수식들을 익히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마법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라지만, 예상했던 시간에 못 미쳐 망가지는 것들이 반드시 나왔다. 워커가 짜내는 마법 수식이 타 상단의 마법 수식보다 훨씬 오랫동안 작동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상단에서 판매하는 마법도구들은 마법 수리를 위한 보상 기간이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수식 제작에 참여하는 일부 마법사를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은 전부 마법 도구 제작과 수리에 동원되는 게 보통이었다. 셰비언은 수식 제작을 위해 스카우트됐지만, 그렇다고 이전에 있었던 성과들을 무시하고 지나갈 순 없었다.

“아아……. 그렇지요. 생각 이상으로 일이 많긴 했습니다.”

셰비언이 짓고 있던 미소를 거뒀다. 단지 그것만으로 눈보라라도 몰아치는 것처럼 차가운 분위기가 그를 둘렀지만, 눈 밑을 꾹꾹 누르는 손짓이 그런 분위기를 단박에 일소했다. 그 역시 피로한 것이다.

“한데, 요즘 들어 어느 레이디의 하녀분께서 저를 무던히도 괴롭히고 계셔서요. 그놈의 옷감이 뭐라고.”

“음…….”

오드리는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마법사를 찾아가 조르겠다던 다이앤의 다짐이야 들었어도 그게 말로만 그럴 줄 알았지, 정말 실천에 옮길 줄은 몰랐다.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한 걸 보면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인데, 마음대로 하라고 풀어주었던 장본인이다 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대량 제작을 할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 거라며 어찌나 설득하던지…….”

“…….”

“제가 내켜 하질 않으니 이젠 모시는 아가씨께서 추위를 많이 탄다며, 그 가볍고 따뜻한 데다 예쁘기까지 한 옷감을 꼭 얻고 싶다고 하더군요. 드레스는 됐으니 코트라도 만들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그래서 그걸 왜 내게 와서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건 그대가 정할 문제야. 만들어줄 거면 시달리지 말고 얼른 만들어주고, 싫으면 딱 잘라 거절해. 여지가 보이니까 다이앤이 매달리고 있는 거겠지.”

“아가씨께서 시키신 거 아닙니까?”

“다이앤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난 그 애가 하고 싶은 대로 두고 있는 거고.”

셰비언은 긴 속눈썹을 느긋하게 팔랑거리며 오드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초록색 머리칼과, 그보다 더 인상적인 초록빛 눈동자를. 꼼꼼하게 틀어 올린 머리칼 덕에 가느다란 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좁은 어깨가 어쩐지 신경 쓰였다.

“추위를 많이 타십니까?”

“조금 타는 편이지. 아무래도 따뜻한 도시에서 자랐다 보니……. 요즘의 브란젤도 좀 춥게 느껴질 정도야. 그러고 보니 그대는 북쪽 출신이지? 이름도, 생김새도 딱 그래 보여. 그대에겐 브란젤이 좀 덥겠어.”

“글쎄요. 저는 그다지 날씨를 타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거 부러운데.”

셰비언은 어쩐지 호탕하게까지 보이는 미소를 보며 오드리가 자신이 준 흰 옷감으로 만든 코트를 입고 다니는 것을 상상했다. 가느다란 어깨에 흰 코트를 걸치고 눈길을 사뿐히 걷는 그녀를.

피곤한 나머지 바닥까지 내려앉아 있던 기분이 살짝 들떴다. 옷감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수고가 많든 적든,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대량 생산은 힘듭니다. 재료가 워낙 구하기 힘든 것이라. 하지만 아가씨 한 분께서 입을 코트 정도는 가능할 것도 같네요.”

“재료? 재료의 문제였나? 난 분명 마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어……. 마법적 처리가 반드시 필요한 재료긴 하죠. 어쨌거나 대량 생산은 싫습니다. 안 그래도 피곤해요.”

오드리는 셰비언이 아직도 서 있는 채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앉으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앉으라 손짓했지만 셰비언은 고개를 저어 거절하더니, 대신 오드리 앞에 놓여 있던 차를 홀랑 마셔 버렸다.

오드리의 낯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앉으라고 안 했다고 내내 서 있던 예의는 어디로 가고, 남의 찻잔에 든 차를 마시는가 말이다. 셰비언은 자신이 한 행동이 무례라는 것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여간 이상한 곳에서 상식이 없는 자였다.

“다이앤이라고 했나요? 이제 그 하녀는 옷감에는 신경 쓰지 말고 아가씨의 식사나 잘 좀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아가씨는 안 그래도 마르셨는데, 이러다 반쪽이 되시겠어요.”

“일정이 바빠서 그런 것뿐이야. 그대야말로 식사는 챙기는 건가? 곧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다이앤만 찾아오지 않으면 이런 그늘 따위 금방 걷힐 테니까요.”

서로를 걱정하는 대화가 몇 마디 더 오갔다. 별것 아닌 잡담인데 오드리의 어깨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오후의 황금빛 햇살,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 조금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들 전부가 커다란 풍경화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피로와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짜증이 해를 맞은 안개처럼 흐려졌다.

‘이상해. 왜 이렇게 편하지?’

오드리는 자신의 이상을 감지했다. 이디케도 다이앤도 아닌 타인의 앞에서 이렇게 긴장이 흐려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너무나도 편해서 빠져나오기가 싫었다. 그게 너무 이상하고 이상해서, 마음 안쪽에서부터 불같은 성질머리가 솟아올랐다.

“볼일 다 봤다면 어서 나가.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바쁘다고 하신 건 아가씨죠. 저는 일이 많은 거지 바쁘진 않습니다.”

“말장난하는 걸 보니 살 만한가 보지. 저 카탈로그는 이제 질렸는데, 다음 시즌 카탈로그를 기대하겠어. 그대라면 분명 사람들을 죄다 놀라게 할 만한 수식을 발명할 테지?”

셰비언은 그저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만들어진 가면처럼 정형화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도는 게 재미있었다. 좀 더 놀려주고 싶긴 한데, 그러기엔 일전에 보았을 때보다 눈에 띄게 바짝 마른 몸이 안쓰러웠다.

“전 수식보다 비마법 쪽에 관심이 있어서요. 아가씨께서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 보죠.”

“난 그대에게 꽤 큰 기대를 걸고 있어. 그대라면 이런 지루한 카탈로그를 내던지게 해줄 수 있을 테지.”

“생각해 둔 건 있는데, 아가씨의 기대에 어긋날 것 같아 겁나네요.”

오드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비마법에 관심이 많은 재능 있는 마법사가 대체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지, 호기심이 뭉게뭉게 일어났다. 셰비언은 아직까지 어떤 기획서도 제출하지 않았으나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일 테다.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들킬까, 무릎 위에 올려만 두었던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겁내지 말고 뭐든 내놓아. 마법사가 만들어내는 비마법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걸.”

“정확히는 비마법과 마법의 결합이에요.”

비마법과 마법의 결합! 가까이로는 기차가 있고, 멀리는 워커의 비마법 비행도구가 있다. 기차는 이미 세상을 한 번 뒤집어엎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비마법 비행도구 역시 아직 갈 길이 멀긴 해도 성공만 한다면 기차 못지않은 파란을 일으키리라. 기차와 비마법 비행도구를 모두 알고 있는 마법사가 만들어낼 결합은 대체 무엇일까?

호기심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셰비언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아직 이론 단계에 불과하지만……. 완성되면 반드시 초대해 드릴게요.”

“기대하지.”

“그 기대를 충족하시려면 아가씨는 좀 쉬셔야 할 것 같네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제가 연구를 끝내고 초대했을 때 병석에 누워 계실 것 같은데요.”

“별 소리를 다 하는군.”

오드리는 어처구니없어하는 심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와병 중이 아니라면 안색 운운하는 건 실례였다. 게다가 그 다이앤이 오늘도 온 힘을 기울여서 해준 화장을 하고 왔는데 말이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보다 그대는 예의범절을 좀 더 익히는 게 좋겠어.”

“하하하……. 그것 또한, 노력하지요. 그럼 아가씨,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북쪽의 겨울 요정처럼 아름다운 사내는 미덥지 않은 대답을 남기고 별실을 빠져나갔다. 오드리는 종전보다 두 배는 더 넓게 느껴지는 별실에 홀로 남아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 얼굴이 어때서.”

하도 야위어서 광대뼈 아래가 푹 들어갈 정도라는 건 알고는 있지만, 일정을 줄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오드리였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오드리는 결국 포기 선언을 했다. 마를리언 남작 영애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가 진이 다 빠지는 경험을 한 게 결정적이었다. 다들 제 사정은 입 밖으로 벙긋하지도 않는 주제에 오드리를 붙들고는 이미 퍼진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싶어 했다. 오드리는 완전히 질려 버렸고, 사건이 마무리되기 전까진 밖에 나가지 않겠다며 모든 초대장에 거절 답장을 보내 버렸다.

이런 결정에 가장 기뻐한 건 하델이었다. 사교 모임이 없을 적에는 오후에 함께 차를 마셨던 누나였는데, 바빠지면서 하루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어진 터라 속이 상해 끙끙 앓고 있던 참이었다.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건 귀족 영애로서 당연한 일이라 말릴 수도 없어 더 그랬다. 그런 와중에 오드리가 당분간 집에만 있겠다고 하니 얼마나 좋았을까.

하델은 하녀가 깨우러 오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시키지도 않은 단장을 마치고 오드리의 방을 향해 뛰어갔다. 바쁜 아침에 어린 도련님의 뜀박질을 본 고용인들이 웃음을 참으며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누나!”

“오늘은 일찍 일어났구나. 하델, 좋은 아침.”

이른 아침에 일어나 승마를 하러 나갈 준비를 하던 오드리는 이번에야말로 늦지 않고 찾아온 하델을 기꺼이 맞아주었다. 매번 늦잠을 자다가 누나의 아침 인사를 받지 못해 서운하던 소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누나도 좋은 아침이에요! 저 오늘은 하녀가 오기도 전에 일어났어요.”

“잘했다. 보아하니 세수도 했고, 옷도 잘 꿰입었고. 많이 발전했는데?”

“그럼 오늘은 같이 아침을 먹을 수 있을까요?”

그놈의 아침 식사가 뭐라고. 오드리는 쓸데없이 눈을 반짝거리는 하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늘도 소년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남겼다.

“누나는 벌써 먹었어. 난 말 좀 타고 올 테니 그동안 아침 먹으렴.”

하델의 얼굴에 억울함이 차올랐다. 일찍 일어나면 같이 먹겠다고 해놓고 이게 뭐람. 하지만 다시 살펴본 오드리는 완벽한 승마복 차림을 하고 머리 손질까지 마친 상태였으니, 이미 먹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닐 터다.

“나도 갈래요. 나도 말 잘 타요.”

“망아지를 타는 거겠지. 다 들었어. 아직 한참 멀었다던데.”

“으…… 그건…….”

“같이 승마를 하는 건 네가 망아지에서 벗어난 뒤에 하자꾸나. 누나를 방해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제 그만 비켜주겠니?”

오드리가 처음 수도 저택에 도착했던 날, 거대한 말을 능숙하게 다루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나름 열심히 노력했던 하델이었다. 하지만 승마 수업은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열 살 때 선물 받았던 망아지가 다 크도록 등에 올라타 본 일이 손에 꼽히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하델은 일찍 일어난 보람도 없이 오드리의 곁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누나의 등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에서 억울함이 뚝뚝 떨어지건만, 다이앤은 속상한 도련님을 위로하는 대신 어서 가서 아침 드시라며 에둘러 쫓아냈을 뿐이었다.

오드리는 이를 악물고 말을 달렸다. 들판이 아닌 산책로라 지나치게 속도를 내는 건 자제해야 하건만, 속에 쌓인 것들이 그녀를 부추겼다. 부채 뒤에 감춘 웃음, 장갑으로 감싼 손가락질, 칼보다 아픈 말, 말, 말.

잊어버리자, 잊어버리자. 안고 있어봐야 도움 될 것 없다. 막 살기로 했으니, 귀족 영애답게 사는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이니, 휘둘리지 말자.

순식간에 산책로를 관통해 끝에 다다랐다. 탁 트인 강변에 서서 들썩이는 가슴을 추슬렀다. 새파란 강바람이 귀밑을 쓸고 지나가며 가슴 안쪽에 고여 있던 것들을 퍼냈다.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괜찮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나니 정말로 괜찮은 거 같았다. 하긴, 괜찮지 않으면 어쩔 건가. 한껏 허리를 졸라매고 방긋방긋 웃으며,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삶 같은 건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푸르릉!

주인의 심사가 뒤틀린 걸 알았는지, 윈디가 투레질을 하며 오드리를 상념에서 건져 올렸다. 오드리는 충실한 말의 목을 두드려 주고 뒤돌아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던 숲의 전경이 겨우 눈에 들어왔다.

봄을 맞아 한창 피어나는 여린 꽃들, 코끝을 스치는 젖은 흙의 냄새, 가지 사이를 부지런하게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

그 사이를 거닐던 오드리는 햇살에 투명하고 연한 초록빛으로 빛나는 나뭇잎에서 하델을 떠올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번에야말로 누나와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 예쁜 눈동자 말이다. 오드리의 눈동자는 신록의 숲처럼 짙은 초록색이지만, 하델의 눈동자는 여린 봄처럼 다정한 연둣빛이었다.

“……칫.”

겨우 덜어냈다고 생각했던 속이 다시 뭔가로 뿌듯하게 차올랐다. 오드리는 다시금 괜찮다, 속삭이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이번엔 도저히 그게 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고삐를 움켜쥐고 박차를 가했다.

산책로의 입구, 실컷 달리고 돌아올 오드리를 위해 간식을 준비하고 기다리던 이디케는 어깨에서 훈김을 피워 올리는 오드리를 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이앤이 기껏 신경 써서 올려줬던 머리는 다 헝클어지고 잘 차려입은 승마복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드리는 땀을 닦아준다는 것도 사양하고 준비된 마른 과일을 잘근잘근 씹었다. 미간에 패인 고랑이 저어기 셰비언 성벽의 계곡만큼이나 깊었다.

“내가 속이 좁은걸까?”

“네?”

“그깟 아침 한 번 같이 먹는 거, 별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저 편지만 오갈 때는 차라리 괜찮았다. 자신이 힘들었던 만큼 동생도 힘들 거라고, 유모조차 붙여주지 않는 아버지라니 너무한 거 아니냐며 동질감과 동정심을 함께 가졌다.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던 글씨가 점점 나아지는 걸 보며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공부가 어렵다는 말도, 말이 무서워 큰일이라는 말도, 그저 귀엽고 안쓰러워 응원하기 바빴다. 아무렴, 그 서늘한 부친과 함께 있는데 뭐든 어렵지 않고 힘들지 않을까. 부친이 바라는 합격선이 하늘 끝에 닿아 있다는 걸 아는데 말이다.

하지만 직접 수도 저택에 와서 만난 하델은 오드리의 어린 시절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랑을 퍼부어주는 부친, 친절하기만 한 고용인들, 질책보다 칭찬으로 가르치는 선생들. 어리광 한 번 제대로 부려보지 못했던 오드리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이게 바로 질투인가, 싶기도 하고.”

부친이 자신을 반가워하지 않으리라는 건 일찍이 예상하였다. 서늘한 냉대도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안 좋은 소문에 혀를 차며 외면하는 것도 괜찮았다. 부친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다정한 눈길을 받는 건 포기했다.

하나 가끔. 아주 가끔. 하델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친의 모습이 환상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마다 자신은 아버지의 손길을 안달 내며 기다리는 아홉 살 소녀가 되어 말할 수 없이 서러워지곤 했다. 온 힘을 다해 겨우 서러움을 몰아내고 나면 짜증이 솟구쳤다.

‘너는 대체 나와 무엇이 달라서, 나는 이리 냉대받는데 너는 사랑받니?’

입이 찢어져도 꺼낼 수 없는 질문이 차곡차곡 가슴에 쌓였다. 쌓인 서러움과 짜증이 뒤섞이면서, 오드리는 하델에게 자꾸만 못되게 굴었다. 하델이 아침에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걸 알고 일부러 일찍 일어나 함께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하나뿐인 동생인데 괜히 밉단 말이지. 으.”

“저도 어머니가 막냇동생 예뻐하시는 걸 보면 괜히 화나서 머리 쥐어박을 때가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요, 뭘. 그러실 수도 있죠. 정 마음에 걸리시면 내일은 같이 드세요.”

“그럴까.”

그래, 내일은 같이 먹자.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좀 편해졌다. 오드리는 전투적으로 남은 과일을 마저 씹고 한 번 더 말을 달려야겠다며 일어섰다. 그때, 낯선 남자가 오드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어차피 누가 먼저 왔다 선점하는 게 의미 없는 공용 산책로였다. 하지만 사교용 승마 모임이 아닌 이상 서로 모른 척하는 게 예의이기도 했다. 이디케가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서려는데, 오드리가 그런 그녀를 말렸다. 백합에 감긴 검의 문장이 낯선 남자의 소지품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었다. 존경받는 검, 치안대였다.

“실례합니다, 레이디. 저는 치안대원인 피올 보티안이라고 합니다. 헨젤 백작가의 영애이신 오드리 양이 맞으시죠?”

“저는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에 극장 내부에 있지 않았다고 이미 말을 전했습니다. 뭔가 새로운 증언이 필요하신 거라면 헛걸음을 하셨습니다.”

오드리는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태도로 돌아섰다. 치안대의 증언 요구가 어찌나 집요했는지, 백합에 감긴 검의 문장만 보아도 치가 떨렸다. 한 번 더 말을 달릴 생각은 싹 사라져 버렸고, 얼른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녀는 서둘러 고삐를 쥐었지만 피올이 좀 더 빨랐다.

“레이디가 아니라 베텔 경에게 볼일이 있는데, 좀체 만나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실례를 했습니다.”

막 등자에 발을 얹으려던 오드리가 동작을 멈췄다. 피올은 훌쩍 말에서 내려와 뒤늦은 인사를 청했고, 오드리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깜짝 놀랄 정도로 정중한 태도로 그녀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브란젤의 신사들이 숙녀에게 하는 흔한 인사이지만, 그 동작이 오드리의 눈길을 끌만큼 몹시 귀족적이었다.

몸에 익은 인사가 오드리의 의심을 샀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피올은 서글서글하니 잘생긴 눈매를 휘며 말을 건넸다.

“베텔 경께서 말브레 극장을 습격했던 괴한 놈들을 제압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그랬다고 들었어요. 그 때문에 큰 상처를 입으셨죠.”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이거야 원. 오드리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고운 아미를 찌푸리고 턱을 치켜들었다. 카프러스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별개로, 그는 헨젤가의 기사였고 그녀의 에스코트 기사였으며 일단은 그녀의 울타리 안에 있는 존재였다.

“마치 심문이라도 하는 것 같군요. 그는 헨젤가의 기사입니다.”

“레이디, 그게 모든 의심을 거두게 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제때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더라면 베텔 경은 귀중한 증인을 죽여 버리고 말았을 테니까요. 베텔 경께서는 거기에 대해 소명할 의무가 있습니다.”

증인, 소명할 의무. 오드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범인을 잡아놓고도 수사가 지지부진해서 아무것도 나오질 않는다더니, 다 거짓이었던가. 그녀는 한껏 빈정대고 싶은 자신의 심사가 잘 전해지길 바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진정 그리 믿으시면 이렇게 무뢰한처럼 접근하지 말고 헨젤가로 직접 찾아오세요, 피올 보티안.”

“그래도 되겠습니까?”

“다만 분명히 기억하셔야 할 거예요. 헨젤은 가문의 사람을 함부로 건드린 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이전 신분에 기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어차피 당신은 과거가 지워진 검. 타고난 신분 따위는 다 헛것이 되었으니, 헨젤가의 기사를 그냥 찔러보려거든 보복을 각오하라는 말이었다.

피올이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대는 동안, 오드리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훌쩍 자리를 떴다. 피올은 탐날 정도로 매력적인 말 엉덩이를 바라보다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치안대에 과거가 지워진 검이 있다는 게 그리 큰 비밀은 아니지만, 비밀은 비밀이었다. 설마 알겠느냐 싶어 쉽게 보았던 상대에게 단박에 들키다니 마음이 심란했다. 설령 그냥 찔러보는 거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오드리 헨젤은 쇼핑과 사교 모임에 정신을 놓은 남부의 촌뜨기 레이디라고 들었는데.

“이것 참……. 그때는 영락없이 하녀인 줄 알았는데. 그냥 말괄량이는 아니라 이건가.”

오드리와 이디케가 극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곤란을 겪을 적에,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남자. 청록색 안감에 산트렘 기사단의 문장을 새기고 깃털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렸던 남자가 바로 피올이었다. 더불어 카프러스가 괴한을 죽이려는 걸 말린 사람도 그였다.

“변장을 해도 눈동자 색이 저리 튀어서야 원.”

피올은 제 예리한 눈썰미는 생각지도 않고 혀를 찼다. 어쨌거나 출입 허락을 받아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그는 뿌듯한 미소를 입에 걸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 곧 출근 시간이라, 강물에 부서진 아침 햇살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아, 치안대 너무 박봉이야. 이 사건 끝내면 보너스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는 단정하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삐뚜름하게 고쳐 쓰며 경쾌하게 말에 올랐다. 산트렘 기사단을 뛰쳐나온 지 이미 이 년도 더 지났다. 치안대에서 무급으로 부려먹히다가 이제 겨우 수습 딱지를 뗀 그에게 브란젤의 방세는 지나치게 살인적이었다.

피올이 헨젤가의 수도 저택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날 오후부터였다. 그는 부상자를 오라 가라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찾아왔는데, 카프러스가 차라리 자신이 치안대 사무실에 가겠노라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부상자는 쉬어야죠. 제가 오는 게 맞습니다.”

“보티안 씨. 당신의 얼굴을 보면 나는 나아가던 상처도 덧나는 기분이 듭니다.”

“하하, 그런 기분이 든다니 역시 제가 오길 잘했군요. 사무실에 오셔도 제 얼굴을 보실 텐데, 어차피 볼 얼굴이면 몸이라도 편하게 봐야죠.”

카프러스는 그 집요함이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묻는 말에 성실하게 모두 답변을 했음에도 피올은 계속해서 찾아와 주변을 얼쩡거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체력훈련을 하고 의사를 만나고 식사를 하고 다시 훈련하는 내내, 자신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헨젤가의 다른 기사들이 슬슬 주변을 피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며칠을 시달리다 보니, 카프러스는 화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다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지경이 되었다. 피올과 닮은 갈색 머리칼만 봐도 괜히 흠칫흠칫 놀라는 자신이 짜증스러웠다. 설마 저택의 고용인 중 갈색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고 있게 될 줄 알았겠느냔 말이다.

“어라, 베텔 경. 붕대를 갈으셨군요. 상처는 좀 나아지고 있습니까?”

“보티안 씨…….”

카프러스는 먹던 빵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웬일로 점심 식사 때까지도 오질 않아 드디어 떨어져 나간 줄 알았는데, 다 헛된 기대였나 보다. 모처럼 식당이 아닌 나무 그늘에서 끼니를 챙기고 있었는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요즘 보면 보티안 씨는 내가 그 괴한들의 배후이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에이, 설마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정을 다 설명했는데도 이렇게 계속 따라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제가 그 괴한들을 사주해 놓고 일이 커지기 전에 죽여 없애려고 했다고 의심해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의심이 어떻게 한 조각도 없었겠느냐마는, 피올은 그늘 한 점 없는 해맑은 낯으로 웃으며 산뜻하게 부정했다. 며칠간 따라다니며 지켜본 결과, 이 고지식한 기사님은 본인이 나서면 나섰지 뒤에서 누군가를 시키고 조종할 위인은 못됐다.

“사람 기름이라는 말을 들은 건 베텔 경 한 분이시니,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궁금했을 뿐입니다. 경의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싶어서요.”

“내가 압니까.”

더는 이런 무의미한 질문에 응해주는 것도 넌더리가 났다. 카프러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마음 편한 점심은 이미 글렀으니 숙소에 처박혀 낮잠이라도 잘 셈이었다.

그때, 저택의 정문 쪽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났다. 두 사람의 고개가 자동적으로 돌아갔다. 봄의 산들바람이 희미한 대화를 잡아내 실어왔다. 아가씨, 방문, 위로, 사촌……. 피올이 제 입술을 싹 핥으며 웃었다.

“드디어 행차하셨군……. 베텔 경, 그동안 협조 감사했습니다.”

“……그웬 백작 영양을 기다리셨던 겁니까?”

그런 거면 진즉 그렇다 할 것이지, 왜 나를 괴롭혔습니까? 입 밖으로 꺼낸 것도 아닌 말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피올은 웃는 얼굴 그대로 슬금슬금 발을 뺐다.

“하, 하하하……. 베텔 경, 진료 잘 받으시고 빨리 나으시죠. 그래야 같이 한 판 붙어보고 그러죠.”

“됐습니다. 나는 뭐 눈도 없는 줄 압니까? 모처럼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썩 꺼져 주시죠.”

피올은 더한 말을 뒤집어쓰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고, 카프러스는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피올이 왜 헨젤가에 들락거리며 기회를 노렸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문제의 사건을 직접 목격한 건 네이기스지 오드리가 아닌데,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네이기스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리 그웬 백작부인의 압력이 있다 해도 너무한 처사였다. 그래도 치안대에 증언은 했을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 하지 않았단 말인가.

‘분명 그웬 백작부인이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오드리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치안대 사무실에 불려가 증언했고 이후에도 온갖 사교 모임에서 같은 말을 수십 번은 족히 반복해야 했었다. 만약 그웬 백작부인이 제 딸을 감싸듯 조카를 싸고돌았다면, 증언은 둘째 치고라도 사교 모임에서 그리 시달리진 않았을 터이다.

카프러스는 씁쓸한 심정으로 남은 빵을 마저 뜯었다. 오드리는 재산도 넉넉하고 몸도 건강한 명문가의 영애였다. 자신은 그저 오드리의 에스코트 기사일 뿐,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그걸 빤히 알면서도 반듯하게 펴진 작은 등과 어깨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쓰렸다.

“미쳤군.”

스스로를 비웃어봐도 가슴에 얹힌 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무기둥에 등을 대고 문득 고개를 드니, 꽤 커진 잎사귀들이 짙은 초록색으로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카프러스는 그 잎사귀를 오래, 아주 오래 바라보았다.

네이기스는 발랄하고 마음 씀씀이가 고왔다. 조금 눈치 없이 맹한 면이 있어 사람의 속을 홀랑 뒤집는 때가 종종 있었지만, 봄바람처럼 미소 짓는 얼굴을 앞에 두면 좀처럼 미운 마음을 먹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그랬다. 오드리가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한동안 사교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렇게 다급하게 찾아와 조잘조잘 말을 붙이지 않나. 살가운 사이가 아니니 반갑지 않고, 사교 모임에 목매지 않으니 고맙지 않지만, 저에게 중요한 일이니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할 거라 여기는 순진함이 귀엽기는 했다.

“오드리 언니, 여기 이거 요즘 유행하는 자수의 도안이에요. 작년에는 과일 테마가 유행했는데 올해는 꽃이더라고요.”

“장미를 좋아하나 봐요.”

“어마. 티가 나요? 네, 전 장미를 좋아해요. 색도 알록달록하고 꽃 형태도 다양하고……. 보통은 이렇게 꽃만 수놓지만, 저는 여기에 하늘이랑, 구름이랑, 작은 새도 수놓아서 한 폭의 그림처럼 만드는 게 좋아요.”

오드리는 네이기스가 자신의 작품이라며 내민 자수를 살짝 만져 보았다. 자수 솜씨는 그냥 그런데 꽃과 풍경의 배치가 절묘했다. 너무 난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순하지도 않으면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놀라운 센스였다.

“훌륭하네요. 솜씨도 나쁘지 않지만 배치와 구도가 특히 마음에 들어요. 이 도안은 누구의 작품인가요?”

“그, 그게…….”

네이기스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동글동글하게 말아 올린 머리칼이 곤란해하며 흔들렸다. 오드리는 마치 귀여운 새의 재롱을 보는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바로 그때, 피올이 둘 사이에 난입했다. 새로운 손님이 오셨다는 알림조차 없었으니, 난데없이 등장한 낯선 사람에게 놀란 네이기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망할 하녀들 같으니…….’

오드리는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아무리 본관의 응접실이 아니라 서관의 작은 응접실이라지만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손님을 들이다니. 알신다는 문제가 됐던 하녀들에게 주의를 주긴 했을망정 자르진 않았다. 입이야 다물었으니 됐고,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가 싶어 내버려 두었더니 갈수록 가관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마음에 안 차는 하녀들보다 피올이 더 거슬렸다. 오드리에게는 슬쩍 인사하는 척만 해놓고 네이기스에게 과하게 관심을 표출하는 저 사내 말이다.

‘베텔 경을 너무 괴롭힌다 싶더니, 목적이 따로 있었군.’

오드리가 사나운 시선을 보냈지만 피올은 낯짝이 몹시 두꺼웠다. 그는 바로 며칠 전 오드리에게 의심을 샀던 그 정중한 인사를 선보이며 빙긋 웃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네이기스에게 꽂혀 있었다.

“눈부신 날씨죠? 그보다 더 눈부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저는 피올 보티안입니다. 보시다시피 치안대원이죠.”

서글서글하니 잘생긴 얼굴, 몸에 완전히 배어 있는 귀족적인 예의, 백합에 감긴 검의 문장. 이제 막 집이라는 새장에서 나온 소녀가 달뜬 꿈을 꾸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조건이었다. 과연 네이기스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허리는 반듯하게 펴고 있었지만, 조금 전 피올이 입 맞췄던 손을 감싸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네이기스 그웬이에요. 저어, 치안대원께서 헨젤가엔 무슨 일로 오신 거지요?”

“말브레 극장을 습격한 괴한 중 두 명을 헨젤가의 기사이신 베텔 경께서 잡아주셨습니다. 그 용기와 무용에 대한 감사를 표하러 왔습니다.”

오드리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피올을 보며 그만 살짝 질린 표정을 짓고 말았다. 피올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카프러스가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던 게 바로 어제 일인데 저런 발언이라니.

그러나 사정 모르는 네이기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대답이었다. 치안대는 밤마다 피와 비명이 멈추지 않던 정쟁의 시대를 끝낸 주역으로 평가받는 조직이었고, 그만한 존경을 받았다. 피올이 치안대원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젖은 비누조각처럼 물렁해져 있던 네이기스의 경계심은 그의 대답을 들은 이후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 명은 남배우의 등을 찔렀고, 한 명은 여배우를 인질로 잡았어요. 남은 둘은 칼을 빼들고 사람들을 위협했죠.”

“말리려고 무대에 올라왔던 사람이 죽었는데, 그건 누가 저지른 짓입니까?”

“남배우를 찌른 사람이요. 그러고 보니, 나중에 객석으로 뛰어든 사람도 배우를 살해한 그 둘이로군요…….”

“레이디 그웬, 창백해지셨군요. 제가 기억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들춘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사과하지 마세요. 치안대에 협조하는 건 당연한 의무인걸요.”

“정말로 용감하고 대담하십니다.”

네이기스의 귀뿐만 아니라 뺨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오드리는 피올의 감언이설에 대책 없이 넘어가는 네이기스를 보며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고모님은 대체 딸을 어떻게 키웠기에 저렇게 하얀 양 같은 딸이 나왔나 싶다가도, 저 온통 꽃으로 가득 찬 것 같은 머리통으로 어떻게 앞날을 살아가려는 건가 싶어 짜증이 밀려왔다.

네이기스가 민망해할 걸 알면서도 끼어들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 빌어먹을 치안대원의 다리를 몰래 걷어차기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네이기스와 내가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던가? 오드리가 망설이는 사이, 피올이 서둘러 대화를 끝냈다.

“혹시 다음에 또 이곳에서 뵐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저는 매일 오드리 언니를 만나러 올 작정이거든요.”

누구 마음대로? 누가 여기서 만나게 해준대? 뜨악해진 오드리는 보이지도 않는지, 피올과 네이기스가 제멋대로 다음 약속을 잡았다. 한 걸음 빠져 있던 오드리가 나서려는 순간, 네이기스는 마치 노리기라도 한 듯 벌떡 일어나 오드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언니,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내일 또 만나요.

오드리는 말 붙일 틈도 주지 않고 돌아가는 네이기스의 뒷모습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그녀의 에스코트를 전담하는 사촌이 함께 왔었다면 이런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을, 친척집이라고 혼자 와서는 자신에게 부담감을 왕창 지워주고 간다.

“눈치가 없는 건지,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저는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만.”

“나중에 고모님에게 불벼락을 맞는 건 나입니다. 순진한 어린애 구슬려서 듣고 싶은 말 들으니까 좋은가요?”

오드리의 눈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피올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그웬 백작부인이 딸을 싸고도느라 정신이 없어서 조카를 챙기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헨젤 백작이 딸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 역시 유명했다.

보호자의 적극적인 보호가 없는 귀족 영애란 연약한 꽃과 같아서, 이리저리 흔들리다 쉬이 꺾이고 마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오드리는 열 살에 만탈락으로 쫓겨났던 그날 이후로 자신이 꽃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매섭게 피올을 꿰뚫었다.

“보티안 씨, 당신이 베텔 경이 아니라 네이기스의 증언을 원했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증언들이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네요. 살해에 가담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꼭 분리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레이디 헨젤께서 아실 필요 없는 일입니다.”

피올은 나름 신경 쓴다고 한 말이지만은, 오드리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고 말았다. 제 에스코트 기사를 방패로 쓰고 자신을 핑계로 삼으면서, 정작 자신은 알 필요 없는 일이라. 안 그래도 멀쩡한 사람을 자꾸만 의심하는 것 같은 행태를 보여 거슬리던 참이었다.

“치안대 사무실에 연락하겠어요.”

“네?”

“물론 고모님께서도 아셔야겠죠.”

“레이디…….”

“베텔 경을 내버려 두고 이렇게 오신 걸 보면 본래 제게 요청하셨던 일이 끝난 거라고 여겨도 되겠죠. 치안대에 대한 예의는 충분히 지켰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고, 이만 돌아가 주세요.”

오드리는 먼저 일어섰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꾸 주변을 얼쩡거리는지 토설한다면 좋겠지만, 이대로 꺼져서 다시 오지 않는다면 그것도 좋을 테다. 그녀는 어느 쪽이든 아쉬울 게 없었다.

피올은 저를 꿰뚫는 초록빛 시선이 무척 불쾌했다. 만탈락이니 뭐니 신흥도시라고 해 봐야 결국은 왕국 구석의 작은 도시가 아닌가. 보호자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시골뜨기 귀족 영애가, 저가 대체 무어라고 이렇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가 말이다. 그는 방만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발을 까닥거렸다.

“변장 솜씨가 꽤 좋으시던데, 헨젤 백작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걸음걸이, 말투, 선 자세까지 전부 바꾸셨더군요. 웬만한 배우는 근처에도 못 따라올 실력입니다. 그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저도 모르고 넘어갔을 테고요.”

오드리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삼켰다. 말브레 극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 남자, 망토 안쪽에 산트렘 기사단의 문장을 새기고 있던 남자가 피올이라는 건 다시 만난 그날에 바로 알아보았다. 하여 이전부터 그의 처지를 알고 있었던 척, 스스로 버린 옛 신분에 기대지 말라는 으름장을 놓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오드리 본인은 피올에게 변장을 들킬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차림새를 약간만 바꿔도 사람들의 눈이 옹이구멍이 되는 경험을 숱하게 해보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제 그 경험에 최초의 실패가 기록되었으니, 오드리는 치안대원을 쉽게 여긴 제 안이함을 반성했다.

하지만 변장을 들켰다고 한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증거 한 조각 없는 일인데. 오드리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피올을 탓했다.

“보티안 씨, 계속 그런 뜻 모를 말씀을 하신다면 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헨젤가의 아가씨께서 공연 중에 하녀로 변장까지 해가며 밖에 나갔어야 할 일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시작했죠.”

“이디케, 편지지와 필기구를 가져 오렴.”

오드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장소가 응접실이라, 편지지와 필기구는 빠르게 준비됐다. 매끈한 손가락이 편지지를 펼치고 펜에 잉크를 묻혔다. 피올은 말을 고르는 것처럼 편지지 위에서 잠시 멈춰 선 펜촉을 응시하며 계속 입을 놀렸다.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로렐라이 상단의 마법수식 제작을 책임지는 마법사의 연구실이 말브레 극장의 지하에 있고, 그 입구는 아가씨께서 나왔던 골목에 있더군요. 터무니없이 능숙한 변장은 둘째 치고, 귀족의 영애가 상단의 마법사를 남몰래 만나야 할 이유가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냉수가 한 잔 있으면 좋겠구나.”

“그 연구실은 최근에 생긴 거라더군요. 바로 몇 달 전까지는 만탈락에서 연구를 했는데, 갑자기 옮겨온 거라고요. 참 공교롭지 않습니까? 쭉 만탈락에 계시던 레이디께서 브란젤로 옮겨 오신 것도 바로 얼마 전인데요.”

잉크를 머금은 펜이 사각사각 종이 위를 내달렸다. 피올은 그 내용이 몹시 궁금했지만, 차마 탁자 위로 몸을 기울이는 꼴사나운 짓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짐짓 여유로운 척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올렸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지 뭡니까. 로렐라이의 단주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단주의 대리인입네 하는 자들만이 사방팔방 돌아다닌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혹시 그 베일에 가려진 상단주가 레이디 헨젤인 것은 아닐까.”

“……풋! 상상력이 뛰어나시군요.”

“포도송이의 문장을 달고 산트렘의 사내로 살다 보면 상상 이상의 꼴을 종종…… 아니, 꽤 자주 마주하게 되거든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는 게 버릇이 되었습니다. 레이디 헨젤, 정말로 로렐라이의 주인이 아니십니까? 그들이 만탈락에서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 레이디의 묵인과 비호가 없었다면 이만큼 크지도 못했을 겁니다. 만탈락은 랄리우스의 도시였고, 레이디께서는 랄리우스의 마지막 후손이 남긴 핏줄이니까요.”

“로렐라이는 훌륭한 마법 도구를 만들어내는 좋은 상단이죠. 만탈락이 부유해지면 나도 부유해지는데, 새로운 상단을 반기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요? 열세 살 계집아이도 그 정도 계산은 할 줄 안답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보티안 씨, 당신의 상상은 아주 흥미로워요. 그 정도로 나를 높게 쳐 주었다니 고맙습니다.”

오드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맙소사, 머리가 트이다 못해 어딘가 돌아버린 작자가 아닌가. 아무리 비약이라지만 열일곱 살 귀족 영애가 상단의 주인이라는 상상을 하다니. 당사자인 자신조차 가끔은 꿈이 아닐까 뺨을 꼬집어보는데.

그녀는 이 엉뚱한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하여 쓰던 편지글에 쭉쭉 줄을 치고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드리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피올은 나름 비장의 수를 던졌다. 그가 아는 오드리는 쇼핑과 사교 모임에 열광하는 시골뜨기 귀족 영애였다.

“레이디께서는 그렇게 웃고 계시지만, 헨젤 백작께서도 제 말에 웃으실까요? 헨젤과 랄리우스의 결합은 대단한 스캔들이었죠. 분명 이런 의심조차 싫어하실 게 분명합니다.”

“내가 입만 벙긋하면 헨젤 백작께서 귀찮은 딸을 만탈락으로 돌려보낼지도 모르니, 브란젤에 붙어 있고 싶으면 얌전히 협조해라, 뭐 이런 뜻인가요?”

거침없이 종이 위를 내달리던 펜이 테이블 위에 드러누웠다. 오드리는 편지지를 반으로 접어 피올의 앞으로 퉁겨 보냈다.

“내 아버지는 말하는 본인도 믿지 않고 나불대는 말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분이 아닙니다. 보티안 씨, 당신의 흥미로운 상상을 내게 꺼내놓으면 내가 지레 겁을 먹고 하라는 대로 할 줄 알았나 본데……. 상상력은 당신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멈칫거리며 종이를 편 피올의 낯이 무섭게 굳어졌다. 오드리는 느긋하게 손가락을 튕기기 시작했다.

“당신은 오늘 네이기스의 증언을 통해 살인을 저지른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려고 시도했죠. 대체 왜? 어차피 함께 일을 저지른 일당들인데.”

“레이디, 이건…….”

“서로 노선이 다른 자들이라고 본 거죠. 평민들을 해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흰 튤립을 뿌리며 무분별한 증오를 표출한 무리와, 2층에 있을 귀족을 인질로 삼아 불공정한 무역관행 개선을 요구하고 싶어 했던 무리.”

수사가 늦어지면서 신문은 온통 추측성 기사들로 가득 찼다. 평소의 신문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될 텐데, 요즘은 사흘마다 새 신문을 찍고 있었다. 단독보도랍시고 뿌리는 호외의 양도 엄청났다.

그만큼 정보는 멋대로 뒤섞였다. 나랍 왕국과의 불공정무역에 대한 얘기는 이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괴한들이 뺨에 흰 튤립을 새기고 죽음의 신 칼레이의 가호를 바랐더라는 말이 퍼진 뒤로는 더했다. 기삿거리가 떨어진 기자들은 기사가 아니라 소설을 쓰고 있었다.

피올은 자꾸만 손이 떨리는 걸 어떻게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펼친 종이엔 나랍과의 무역에 발을 걸친 몇몇 귀족과 상단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엔 그들이 나랍에서 돈을 위해 저지른 부정과 잔혹한 처사들이 간략하게나마 개괄돼 있었다.

피올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오드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디케가 그녀의 빈 잔에 새 차를 따랐다. 나랍에서 수입한 노란 꽃차에서 하얗게 김이 피어올랐다.

“노선도, 방법도 다른 자들이 서로 손을 잡다니 큰일이죠. 전자는 브란젤에 혼란을 부추길 것이고, 후자는 끊임없이 신념을 가진 자들을 불러들일 테니. 자칫 둘이 합쳐지기라도 해서 신념을 가진 미친놈이 나타나면 그땐 막기가 더 힘들 테죠.”

“이건 어디서 났습니까?”

“당신은 그전에 후자의 무리와 접촉해서 설득하고 싶은 거예요. 전자의 미친놈들과 계속 손을 잡아봐야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니, 전자를 소탕하는 데에 힘을 빌려주고 원하는 걸 얻으라고. 치안대는 그들을 뭉뚱그려 처리하고 싶어 하는데, 신입이 당돌하기도 하지. 그 배짱은 과연 한때나마 산트렘 기사단에 몸담았던 사람답네요.”

“이건 대체 뭐냐고 하지 않습니까!”

피올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지고 그의 몫으로 나왔던 찻잔이 엎어졌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디케가 번쩍 고개를 들고 무섭게 피올을 노려보았다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지금 피올에게는 하녀의 무례를 지적할 만한 정신이 없었다.

그것 참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피올이 저 하는 짓은 생각도 않고 이디케의 꼬투리를 잡았다면, 오드리는 당장 그를 헨젤가에서 내쫓아버렸을 테니까.

“보티안 씨, 앉아요.”

“레이디 헨젤, 그러니까 이건……!”

“난 앉으라고 했어요. 설마 귀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요? 말로 하지 말고 글로 써줘요? 내가 치안대에 연락해서 보티안 씨의 귀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오드리의 어조는 전에 없이 신경질적이었다. 피올은 이를 악물고 한참이나 제 속을 다스린 뒤에야 겨우 의자를 일으켜 앉았다. 엎어진 찻물이 테이블을 흥건하게 적시고도 모자라 그의 허벅지로 뚝뚝 떨어졌다.

오드리의 뒤에 선 이디케도, 문가를 지키고 선 다이앤도 찻물을 닦으러 달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피올은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망토자락으로 대강 찻물을 닦아내고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레이디, 제발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십시오.”

“알고 있겠지만 여자들의 모든 모임에 에스코트가 필요한 건 아니에요.”

갑자기 웬 에스코트 얘기인가 싶었지만, 피올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의 사교 모임에 따라다니며 가문의 의사를 대변하는 게 에스코트하는 남성의 의무이지만, 여성들끼리만 모이는 사교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는 게 예의였다.

그런 모임의 종류는 몹시 다양했다. 귀부인과 영애들이 여는 소소한 티파티, 독서 모임, 자수 모임……. 이런 사소한 사교 모임은 오로지 여자들만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작은 모임일수록 정보의 교환은 더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연했다, 눈치 봐야 할 사람이 없으니 거리낄 게 없는 것이다.

“여자들의 모임이라고 만날 옷 얘기, 보석 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에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깥일 하는 남자들이 집에서 털어놓는 얘기들이 그 안에서 돈다는 말이에요.”

피올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사교계가 물 위의 첩보전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긴 그는 이른 나이에 가문을 뛰쳐나왔기에 자세한 속사정을 들을 기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지나치게 놀라는데?’

오드리는 장식으로 들고만 있던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일그러지는 입가를 숨겼다. 피올이 못 미덥긴 해도 이미 칼을 뽑았으니 무를 수 없다.

이제까지 로렐라이는 나랍 진출을 위해 온갖 곳을 다 찔러보았지만, 들이는 수고와 돈에 비해 성과가 지나치게 낮았다. 죄로 얽힌 카르텔은 단단히 얽힌 나무뿌리와 같아 풀어내기도 어렵고 끼어들기는 더 어려웠다. 포기하기엔 너무 매력적인 시장이라 전전긍긍하던 와중에 이런 사건이 터졌다.

배경의 비참함과 사건의 잔혹함은 차치하고, 이건 매력적인 기회였다. 게다가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치안대원이 제 앞에 앉아 있으니, 이 또한 기회였다. 행운의 여신 포모스가 이렇게나 판을 깔아줬는데, 놓쳐서는 안 된다.

“보티안 씨가 베텔 경의 앞을 막아섰을 때, 산트렘 기사단의 문장을 두르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 긍지 높은 문장에 대고 청원하노니, 이들의 죄를 눈 감지 말아주세요.”

산트렘 기사단은 그 명예와 용맹으로 멜브란트를 울리는 기사단. 기사 중의 기사라 손꼽히는 이들이니, 기사의 위상이 떨어져 가는 요즘이라도 분명 칼을 뽑을 것이다. 국왕의 제일가는 검이라는 평을 받는 이들이, 왕국의 법을 어기고 국왕의 위엄을 훼손한 죄인들을 용서할 리 없다. 과거를 지운 검이라도 본질은 다르지 않겠지.

“농민을 속여서 거액의 빚을 지워 노예처럼 부리며 농장을 운영합니다. 노동력을 한계까지 쥐어짜는 통에 죽어 나가는 사람이 속출하는데, 빚을 갚지 못하고 죽으면 가족까지 데려다 써요. 얼마 전엔 어린 소녀가 죽은 아비 대신 설탕을 만들다가 수수즙 짜는 도구에 빨려 들어가 죽었다는군요. 워낙 큰 도구라 뒤늦게 알고 멈췄을 땐 이미 머리가 으깨진 다음이었다고요.”

섬뜩한 이야기였다. 피올은 수수즙 짜는 도구를 도중에 멈춘 거면 옆에 마법사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사고가 난 거냐 물었다가, 그게 마법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도구였단 말을 듣고 기함했다.

“어떻게, 그런. 그깟 마법도구 얼마나 한다고. 아니면, 마법사 구하기가 그리 힘들답니까?”

“나랍과 멜브란트 사이의 무역에서 관행으로 요구하는 수수료가 엄청난 수준이랍니다. 중간에 착복하는 자들도 많고요. 그 요구들을 충족하면서 이익을 내려면 사람을 쥐어짜야 해요. 보티안 씨도 알다시피, 그렇게 큰 마법도구를 운용하려면 꼭 마법사가 필요한데, 마법사의 몸값이 어디 한두 푼이던가요? 마법도구를 쓰고 싶어도 쓸 여력이 없을 거예요.”

“그런…….”

“멜브란트인이 개입하는 농장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에요. 착취하지 않으면 수익을 낼 수 없으니 나랍인이 운영하는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져요. 부모가 숲에서 약초를 따다가 짐승에게 당해 죽었는데 자식은 부모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바로 농장으로 끌려갔다는 얘기, 빌린 돈보다 갚은 이자가 더 많다는 얘기는 하도 흔해서 화젯거리도 못되죠.”

“……사람 기름이라는 게 이런 얘기였군. 하나 멜브란트의 법률은 강력합니다. 그런 짓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벌금 정도로 끝날 리가 없을 텐데, 어떻게…….”

“다 한통속이니까요. 그 구조가 정착된 지가 이미 한참인데, 대체 누가 그걸 고발하죠? 단속하러 간 자들도 금세 그들이 제공하는 편의에 빠져들어요.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아서, 입들도 대단히 무겁죠. 그나마 집에서 무심코 흘린 얘기들 한두 조각이 사교 모임에서 도는 거예요.”

피올은 종이를 만지작대며 생각에 잠겼다. 오드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짐작이 갔다. 저들은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고도 안 되어서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이니, 임시방편으로 상처를 덮어봤자 같은 일이 반복될 거란 뜻이었다. 뿌리를 뽑으라는 뜻이겠지.

“이거…… 일이 커질 것 같습니다.”

“의리 빼면 시체인 게 산트렘의 사내들이라면서요? 그쪽에 찔러봐요. 가장 명예로운 기사단으로서 나섰다고 하면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걸요.”

피올의 얼굴이 밀랍인형처럼 굳었다. 하나 그건 정말로 잠깐일 뿐, 그는 곧 평소와 같은 얼굴로 빙긋 웃었다.

“과거가 지워진 검이니 과거에 기대지 말라고 하실 땐 언제고 그러십니까. 치안대 내에서 해결할 겁니다. ……저, 레이디. 손을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웬 손인가. 오드리는 의아해하면서도 선선히 손을 내주었다. 피올이 자리에서 일어나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본래 날 때부터 배어 있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기품이 오롯이 오드리를 위해 바쳐졌다.

“감사합니다.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알려주신 걸 압니다. 어떤 경우에도 레이디께 해가 되지 않도록,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는 평생 함구하겠습니다.”

“먼저 이야기하실 줄은 몰랐는데……. 내가 보티안 씨의 입을 믿어도 되겠어요?”

“당연한 말씀을.”

“앞으로도? 쭉?”

초록빛 눈동자가 피올을 집어삼켰다.

피올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가 그려낸 그림이 한 번에 완성됐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작은 조각 같은 단서들을 긁어모아 이만큼 그려내기까지, 얼마만 한 주의가 필요했을까. 쇼핑과 사교에 눈먼 시골뜨기 귀족 영애라고? 정말 그런 평가를 받고 있다면 그 또한 의도한 것이리라. 그는 자신의 섣부른 단정을 뼈아프게 반성했다.

“……저야말로 레이디께서 이후에 절 모른 척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과거가 지워진 검이긴 해도 치안대의 일원이니, 분명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오드리는 여자들의 정보를, 피올은 치안대로서 줄 수 있는 도움을. 잠깐의 눈빛 교환만으로 서로의 속내를 비쳐 낸 둘이 서로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웬 백작가에 연락해 둘 테니 네이기스를 정보원으로 쓰는 건 그만두세요.”

“치안대에 협력하는 건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웬 백작부인께서 도를 넘고 계시는 거죠. 아무리 딸이 예뻐도 그렇지, 증언도 못 하게 막는 게 어디 정상이랍니까?”

“그럼 이렇게 따로 만나려 들지 말고 제대로 소환장을 날려요. 평민들에겐 잘만 날리면서 왜 귀족가에는 못 날려요? 존경받는 치안대의 위상 어디로 갔어요? 내가 당신에게 존대를 해주는 이유는 당신이 치안대원이기 때문이라는 거 딱 하나인 건 알죠?”

피올은 저도 모르게 딴청을 부렸다. 소환장을 작성해서 올리면 위에서 까이는 걸 어쩌란 말인가. 한때는 백작이라는 작위도 아깝다는 평을 듣던 그웬가가 이렇게 세를 불리고 오만하게 굴 줄을 누가 알았을까.

“노력하겠습니다.”

“보티안 씨는 한동안 헨젤가에 출입 금지예요.”

“안 그래도 바쁠 겁니다. 여기에 꿀 발라놓은 것도 아닌데 안 옵니다.”

피올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돌아가고 난 뒤, 오드리는 다시 필기구를 찾았다. 테이블에 누워있던 펜이 경쾌하게 종이 위를 내달렸다.

“이디케, 나랍 쪽에 줄 대고 있던 상단들에게서 투자금 회수 시작해. 이상하단 말 들을 정도까진 하지 말고, 언제든 손절매할 수 있을 정도는 남겨놔. 여유자금 끌어 모아서 자리 나자마자 바로 끼어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해 두고. 다이앤은 예전에 작성했던 서류 좀 찾아와. 나랍에서 팔릴 만한 거 정리해 둔 목록 있지?”

“네. 아, 가공물 생산방식 관련해서는 시제품까지 만들었던 게 있어요. 예를 들면, 각설탕이라든가.”

“좋아. 즉각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것들 위주로 목록 작성해서 올려.”

다이앤은 오드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부리나케 나갔지만, 돈을 움직여야 하는 이디케는 상단주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가 필요했다. 오드리의 곁에 선 이디케의 얼굴에 구름이 꼈다.

“아가씨……. 저 사람이 정말 제대로 일을 할까요?”

“할 거야.”

“그놈들이 돈을 오죽 잘 써요? 저 사람도 카르텔 안으로 편입돼 버릴 수 있잖아요. 그럼 우리가 뒤통수를 아주 크게 맞는 건데.”

“산트렘 기사단이었잖아. 전직이라지만 산트렘 기사단에, 지금은 치안대원이야. 그런 자를 믿지 못하면 멜브란트에서 장사할 생각 말아야지. 차라리 살론에 넘어가서 새로 상단을 꾸리는 편이 나을 거야.”

“하긴 그렇겠네요…….”

“응. 그러니까 일단 믿자. 정보 줬다고 여자인 나한테 대뜸 무릎 꿇는 거 보면 수단방법 가리는 자가 아니야. 이번에야말로 기대할 만하겠어.”

이디케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긴 그랬다. 산트렘 기사단과 치안대를 믿지 못하면 도대체 누굴 믿는단 말인가. 하물며 브란젤의 치안대였다. 현 왕, 펠른 3세의 동생인 카즈네 공작에게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이들이었다.

카즈네 공작이 제 이득을 위해 법을 어기며 왕실의 권위를 무시한 이들에 대해 몰랐다면 모를까, 일단 알기만 하면 매섭게 칼을 휘두를 건 보지 않아도 뻔했다. 변수라면 피올 정도인데, 먼 미래엔 어찌 될지 몰라도 적어도 이번은 믿어도 괜찮을 듯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나랍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겠네요. 이제껏 돌벽에 맨머리 박는 기분이었는데.”

“잘됐지. 드디어 물건 판매 루트가 열린 거니까. 빌어먹을 놈들, 저들 끼리 똘똘 뭉쳐서 신규 사업자 배척하더니, 뒷구멍으로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고 있었지. 그놈들이 치안대에 박살 날 생각하니까 엄청 기분 좋네.”

“아가씨, 지금은 드레스 입고 계시거든요.”

“알겠어, 알겠어. 바르고 고운 말. 고운 말!”

이디케에게서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오드리는 자꾸만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즉석에서 작성한 서류를 넘겨받은 이디케가 그만 나가려는데, 오드리가 그녀를 불러 세우곤 작게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사자에게 전해주고 와. ‘그토록 원하던 핑곗거리를 만들어 드렸으니 또 도망치면 가죽 벗겨버린다’고 해.”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죠? 제가 거기다 대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

“그럼 게으름 그만 피우고 일어나라고 그래.”

“와, 너무 많은 걸 바라신다.”

서류에 새로운 종이까지 얹은 이디케가 입술을 삐죽였다.

피올은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지켰다. 그는 다음 날부터 헨젤가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카프러스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 시원한 낯으로 돌아다녔지만, 일방적으로 약속이 깨진 네이기스는 꽤 서운한 기색이었다. 한데 피올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꼬박꼬박 헨젤가에 찾아와서는 속이 다 보이는 얼굴로 목을 빼니, 오드리는 그저 기가 찼다.

“네이기스.”

“네, 네?”

“요즘 고모님께서 아주 바쁘신가 봐요. 제가 아무리 연락을 넣어도 대답이 없으시고, 만남을 청해도 거절만 돌아오네요.”

네이기스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다. 웬만하면 좋은 대답을 해주고 싶긴 한데,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네. 에이쉬 오라버니도 돌아오셨고, 저도 이젠 데뷔탕트를 했으니까요. 어머니 마음에 차는 혼처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가 봐요.”

“그렇군요. 그럼 네이기스가 내 말을 좀 전해주겠어요? 귀애하시는 따님만큼 조카딸도 좀 예뻐해 달라고요.”

“아, 그, 네…….”

네이기스의 대답엔 힘이 없었다. 좋은 딸, 착한 딸로 자란 그녀에게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는 건 지나치게 두려운 일이었다.

오드리는 차마 네이기스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열 살, 만탈락으로 쫓겨 가기 전까지의 자신 역시 그랬으니까. 가끔이나마 돌아봐 주는 시선, 차가울망정 안부를 확인하는 목소리. 고작 그런 것에도 목이 말라서 아등바등 노력했다. 눈앞에 앉은 사촌동생은 자신과 닮은 곳이 하나도 없는데, 칭찬받고 싶어 매일매일 책에 빠져 있던 어린 날의 자신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감상을 부르는 사촌이라니까…….’

오드리는 따로 네이기스를 탓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침묵이 네이기스를 견딜 수 없게 했다. 네이기스는 변명인지 핑계인지 모를 말을 주워섬기며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꽁무니를 빼듯 도망쳤고, 더는 헨젤가에 방문하지 않았다.

미묘하게 네이기스가 거슬리던 오드리는 그런 사실을 아쉽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도망친 사촌에게 관심을 쏟기보다 동생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했다.

덕분에 요즘 하델은 하루하루 살맛이 났다. 이전에 비해 요즘의 오드리는 놀라울 정도로 상냥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함께 아침을 들고 승마를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오드리는 아직 망아지에 타는 것도 버거운 하델을 제 앞에 태우고 시원스레 산책로를 내달리곤 했다. 덕분에 하델은 승마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새로이 가지는 중이었다. 말을 달릴 때 뺨을 스치는 바람과 빠르게 지나쳐가는 풍경들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오후의 티타임에는 함께 살론어로 끝말잇기 게임을 했다. 단어를 틀리거나 버벅대면 쓰고 맛없는 차를 마셔야 했다. 매번 티타임 때마다 하델은 맛없는 차를 한 주전자도 넘게 마시는데, 오드리는 마지막까지 맛있는 차 한 잔을 깨끗하게 비우곤 했다. 하델은 누나를 이겨볼 욕심에 살론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아가씨는 정말 천사세요.”

“……어, 고맙구나.”

“뭘요. 도련님을 모시게 된 이후로 요즘만큼 좋은 적이 없는걸요. 오늘은 역사 수업도 얌전히 잘 듣고 계세요.”

알렉스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오드리를 바라보았다. 하델이 수업을 빼먹거나 성취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주인님께 불려가 대신 혼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하델은 놀고 싶다 떼를 쓰다가도 알렉스가 오드리 아가씨, 하고 이름자의 운만 떼면 고개를 끄덕이고 수업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아가씨께서는 몇 마디 말로 도련님을 바꿔놓으셨어요! 도련님이 훌륭한 신사로 성장하신다면 그건 다 아가씨 덕일 거예요.”

어린 동생을 질투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어 부러 잘해주고, 자신은 원해도 가질 수 없었던 귀한 수업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 보기 싫어 공부하라 독촉한 오드리로서는 조금 민망한 칭찬이었다. 칩거가 길어지면서 다시 날아들기 시작한 사교 모임 초대장을 거절하기 위한 핑계로 하델을 팔고 있으니만큼 더더욱.

“부끄러운 칭찬이구나. 그게 어떻게 내 덕이니? 노력한 하델의 덕이지.”

“그래도요.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도련님은 족히 몇 년은 더 공부를 미루셨을걸요.”

“열넷이면 사교계에 나가야 하는데 설마 그랬을 리가 있겠니.”

“진짜예요. 암만 큰일이 있어도 벼락치기를 하셨을걸요.”

“그것참, 재밌는 말을.”

오드리는 웃어넘겼지만, 알렉스는 꽤 진심이었다. 앞으로도 요즘처럼만 평탄하다면 도련님 시중도 꽤 할 만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알렉스가 이전의 하델이 어땠는지를 성토하려는데, 오드리의 심부름을 나갔었던 다이앤이 붉어진 얼굴로 돌아와 단둘이 이야기하기를 청했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눈치 빠른 알렉스는 대번에 꽁무니를 뺐고, 오드리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넘겨졌다.

“이게 무어야?”

“보티안 씨에게서 받았어요.”

“한창 바쁠 사람이 왜…….”

서류를 열어본 오드리의 낯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건 한없이 최종 결론에 가까운 중간 보고서였다. 왕국의 법을 어기고 국왕의 위엄을 더럽힌 자들이 받을 처벌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처분 방침, 그에 더해 갑작스레 발생할 무역 공백을 메우기 위한 행정조치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치안대가 이렇게까지 힘 있는 조직이었나? 일이 커질 것 같다고 할 땐 언제고 이렇게 빨리 해치우다니……. 어쩌면 사자가 제대로 나섰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주 거침이 없네.’

아직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정보가 자신의 손에 먼저 들어왔다. 눈앞이 어찔해지고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귓가를 울렸다. 이 보고서를 활용할 구석은 무궁무진했다.

오드리는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질끈 눈을 감았다.

‘신중해야 해.’

이건 그저 오드리 헨젤에게 들어간 정보일 뿐이니, 로렐라이가 알 리 없는 얘기였다.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로렐라이와 오드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다. 아무리 달콤한 과실이라 한들 치사량의 독이 들어 있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게 진짜로 적용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이디케…… 이디케를 불러와.”

목소리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나왔다. 다이앤이 다급히 뛰어나가고, 홀로 남은 오드리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민을 시작했다.

이 정보가 피올의 호의인지, 아니면 시험인지 가늠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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