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말브레 극장 습격 사건 (3/62)

chapter 2. 말브레 극장 습격 사건

「……본 마법도구에 걸린 마법이 3개월 이내에 사라질 시엔 같은 물건으로 보상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일 년 이상 경과한 마법이 사라지는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고객 여러분, 마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 어느 마법도구 포장 상자에 동봉된 안내문 中」

카프러스는 헨젤 백작가에 적을 둔 몇 안 되는 청년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대대로 왕실의 금고지기 역할을 해 온 헨젤 백작가는 그가 생각해 왔던 직장의 조건에 아주 잘 부합하는 곳이었다.

문관 집안이라 할 일이라고는 수도 저택 경비서는 정도지, 가문의 이름값이 있어 무시하는 놈 없지, 꼬박꼬박 날짜 지켜 봉급 나오지. 게다가 단련을 위한 시설도 완벽하고 시간도 넉넉했다. 가문의 어린 도련님을 가르치는 약간의 번거로움 쯤이야 감수할 만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햇볕 아래 고양이처럼 나른해져 가던 카프러스에게 새로운 일이 주어졌으니, 바로 오드리를 에스코트하는 일이었다.

‘제가 말입니까?’

‘자네가 아니라면, 누굴 시켜야 하지?’

‘전 이 가문에 오랫동안 봉사한 것도 아니고…….’

‘산트렘 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한 경력을 쌓으려고 들어왔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네. 하지만, 최근 들어 검 끝이 꽤 무뎌진 것 같은데 말이야. 본인도 느끼고 있을 텐데? 지킬 게 있으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지.’

‘에스코트 기사는 호위 기사가 아닐 텐데요. 요즘은 옛날같이 정쟁이 치열한 때도 아니고…….’

‘그러니까 시키는 거지. 호위 기사 따위를 하다간 단련할 시간 따위 없을 게 분명하잖나. 적당히 바쁘게 지내보란 얘기야. 오래 할 것도 없어. 그 애가 성년이 될 때까지, 한 삼 년만 고생하면 돼. 더 짧아질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에스코트 기사, 상류계급 영애를 보호하며 가문의 견해를 대변하는 자.

가문의 남성이거나 약혼자라면 모를까, 가문의 기사에 불과한 자가 맡으면 사교 모임과 외출에 따라다니는 일이 거의 전부인 일이었다. 바쁜 경우에는 입에 칼이라도 물고 고꾸라지고 싶을 정도로 바쁘다지만, 오드리는 험한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태인지라 초대하는 곳이 적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드리는 이상할 정도로 저택에서 나가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덩달아 카프러스도 저택에서 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오드리 자신의 입으로 로렐라이 상단의 특급 고객이라고 밝혔으니만큼 질릴 정도로 쇼핑에 끌려 다닐 거라고 각오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오드리의 쇼핑 대부분은 그녀가 만탈락에서 데려온 두 하녀, 이디케와 다이앤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자유시간이 늘어난 건 기쁜 일이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단련에 쓸 수 있다는 뜻이니까.

사실 카프러스는 자신이 오드리의 에스코트 기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이도 적절하고, 신분도 적절하고, 기차역에 마중까지 나갔었으니 상황이 다 맞아떨어지는데 왜 상상을 못 했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궁색하지만, 정말 그랬다. 오드리의 팔짱을 끼고 그녀와 함께 사교 행사를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승마복을 입고 브란젤의 대로 한가운데를 내달리던 모습이 뇌리에 각인돼서인 것 같았다. 남자들의 승마복 차림이야 지겹도록 보았지만, 여성인 오드리가 달라붙는 승마복 바지를 입은 걸 봤을 때의 충격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가 로렐라이 브란젤 지점에서 부리던 진상마저 새카맣게 잊힐 정도였다. 당황한 사이 달라붙는 바지 차림을 하고 대로에 나갔다는 걸 깨닫자마자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이디케와 다이앤을 무슨 정신으로 챙겼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였다.

그때의 기억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카프러스는 어쩌다 오드리를 에스코트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신발을 확인하곤 했다. 남부식의 낮은 굽이 아닌 보석으로 치장된 브란젤식 굽 높은 여성용 구두를 확인하고 나면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래, 결혼이 가능한 여성으로서 데뷔탕트도 치르셨는데 또 그런 일을 하시진 않을 거야. 브란젤식의 구두는 갈아 신기도 힘들다고 들었으니, 드레스에서 승마복으로 갈아입는 걸 미리 막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오드리는 그런 그의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렸다.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 단련을 위해 연무장으로 향하던 카프러스는 승마복을 입고 외출하는 오드리를 맞닥뜨렸다. 늘씬한 다리 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검은 바지를 본 순간, 그는 벼락을 맞은 짐승처럼 멈춰 서고 말았다.

“……이런.”

카프러스와 눈이 마주친 오드리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웃었다. 최고급 에메랄드처럼 선명한 초록빛 눈동자가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그, 그 옷…….”

“베텔 경, 이른 시간부터 부지런하시군요. 단련하러 가시나 보죠? 오늘 오후에는 제게 일정이 있으니, 점심 이후엔 시간을 비우세요. 그럼 이만.”

“그런 차림으로, 어딜 가십니까!”

카프러스는 성큼성큼 오드리에게 다가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오드리의 어깨에 둘렀다. 워낙 덩치 차이가 있다 보니 그에겐 적당한 길이였던 겉옷이 오드리의 엉덩이를 죄다 가릴 정도로 길게 내려왔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몇 개 되지도 않는 단추를 채우는 동안 자꾸만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데뷔탕트도 치르신 분께서 이게 무슨 망측한 차림입니까. 바지라니, 다리를 다 내놓은 것과 다름없는 짓 아닙…… 아니, 왜 웃으십니까?”

“락시 부인 같은 말을 하는구나, 싶어서요. 그녀도 내게 경과 똑같은 잔소리를 퍼붓곤 했죠.”

“어느 현명하신 부인인지는 모르나, 아가씨께 그 조언이 먹히지 않았다는 게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아무튼, 이 끔찍한 꼴을 하고 어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오드리는 제 몸에 걸쳐진 큰 옷을 어색하게 만지작대며 한쪽을 바라보았다. 두 마리의 말을 함께 끌고 오던 이디케가 혀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가씨…….”

“들킬 줄 몰랐어.”

이디케가 오드리를 향해 무서울 정도로 불경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나 오드리는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이디케의 전의를 꺾었다. 이디케는 고삐를 쥔 채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짓다가, 끝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아, 내 인생…….”

한편, 카프러스의 관심은 오로지 오드리의 말에 가 있었다. 브란젤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상태가 좋았다.

길쭉한 다리는 언뜻 봐도 튼튼해 보였고, 다부진 근육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짜인 데다 새카만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반지르르 윤이 나는 검은 털이 마치 달을 잃은 밤하늘 같았다. 카프러스조차 순간 탐이 났을 만큼 훌륭한 말이었다.

“……확실히 이 녀석을 타려면 승마 드레스로는 어림도 없겠습니다…….”

“그렇죠. 윈디는 다리를 옆으로 모으고 얌전하게 산책하는 정도로는 절대 만족 못 할 녀석이거든요.”

오드리가 윈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윈디는 주인이 원하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손에 코를 부볐다. 말과 주인 간의 다정한 교감을 보던 카프러스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 이디케를 향해 부탁했다.

“마구간에 가서 다른 말을 한 필 더 끌어다 주겠습니까. 따로 내 말이라고 할 만한 녀석은 없으니, 기사단 말 중 한 마리를 끌고 오면 됩니다.”

“제발 백작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주시…… 네?”

“아가씨, 에스코트 기사 뒀다 어디다 쓰십니까. 아가씨의 차림이 그…… 모양이라도, 제가 따라가면 사람들의 입이 조금은 무거워지겠지요. 그래서, 생각해 두신 승마 장소는 어디입니까? 설마 브란젤 성내의 공원들은 아니실 테고.”

뜻밖의 말에 오드리도 이디케도 놀라 서로를 마주 보았다. 기껏해야 입을 다물어주는 정도로 끝날 거라 여겼는데, 의외였다. 이디케가 서둘러 말을 가지러 간 덕에 단둘이 남은 오드리와 카프러스 사이엔 굉장히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브란젤 밖으로 나갈 거예요. 성문을 지나면 말을 달릴 만한 공간이 있다고 들었어요.”

“곧 성문이 열릴 때이긴 합니다만…….”

그 차림으로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될 셈입니까. 카프러스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브란젤 밖으로 나가려면 대로를 지나야 했다. 이전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슬슬 새벽시장이 파할 때였다. 그는 최대한 시선을 피할 수 있을 법한 길을 찾아 머릿속을 뒤졌다.

“길 안내는 제가 하겠습니다.”

카프러스는 반발을 예상하고 한 말이었으나, 오드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안내를 따랐다. 카프러스가 안내하는 길은 브란젤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카프러스의 얼굴을 알아본 성문의 병사가 신분확인마저 생략해 준 덕에, 오드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쉽게 성을 빠져나왔다.

“브란젤의 경비가 부실하군요.”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킥! 그래요, 덕분에 편하게 통과했어요. 혼자였다면 한참 실랑이를 했겠죠. 고마워요, 베텔 경.”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말을 달리시려면 저를 따라오시죠.”

카프러스는 브란젤을 감싸고 흐르는 제스본강 부근의 산책로로 오드리를 안내했다. 잘 정돈된 길은 시간이 시간이라 텅 비어 있었다. 젖은 흙과 물오른 풀잎의 냄새가 오드리의 코끝을 간질였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나무의 그림자가 길쭉했다. 바다에서부터 강을 타고 달려온 바람이 그녀의 뺨을 문질러 빨간 홍조를 입혔다.

“이디케!”

오드리는 그때까지도 얌전히 걸치고 있던 카프러스의 겉옷을 벗어 휙 내던졌다. 입을 삐죽 내밀고 바로 뒤를 따르고 있던 이디케가 날렵하게 겉옷을 낚아챘다.

“적당히 하고 오세요!”

“아아, 윈디의 마음이 풀릴 정도로만 달리고 올게!”

“제대로 된 승마는 오랜만이니, 이해는 하지만……. 내가 못 살아.”

이디케의 한탄은 오드리의 귓가에 닿지도 못했다. 그녀는 단숨에 박차를 가하더니 초록빛으로 가득한 산책로로 뛰어들어 버렸으니까. 당혹한 카프러스가 따라가려 했지만, 이디케의 방해를 받았다. 이디케는 카프러스의 진로를 가로막은 채 한가롭게 머리칼을 넘겼다.

“경께서 아무리 애쓰셔도 헛수고입니다. 그냥 기다리시지요.”

“레이디께서 혼자 가셨는데 내버려 두란 말입니까? 난 기사입니다!”

“누가 경께서 기사인 걸 몰라서 이럽니까. 윈디의 다리는 만탈락에서도 알아주는 것이고, 아가씨의 승마 실력은 웬만한 기사들을 웃도십니다. 애초에 그 정도 실력이 없었다면 윈디를 길들일 수도 없으셨을 테고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카프러스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이디케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그를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순종적이고 얌전하던 하녀의 얼굴은 강바람이 훔쳐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새벽 추위에 핏기 잃은 입술이 삐죽 기울어졌다.

“여기, 브란젤에서요? 국왕 전하의 도시인 브란젤의 성벽 코앞에서, 누가 봐도 상류계급을 위해 정돈된 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디케!”

“어마, 제 이름을 알고 계셨군요. 놀라워라. 경, 그리 걱정하지 마세요. 치안대가 무시할 정도의 좀도둑들은 윈디의 말발굽에 죄다 짓밟히고 말 거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카프러스는 그렇게 판단하고 이디케를 피해 나아가려 했다. 하나 이디케의 승마 실력은 오드리를 따라다니며 단련된 것이다. 그녀는 교묘하게 카프러스의 진로를 방해했다.

“호위 기사 노릇은 바란 적도, 부탁한 적도 없습니다. 에스코트 기사답게 행동하시죠. 아가씨의 파트너 역할, 딱 그 정도만 해주시면 됩니다. 선을 넘지 마세요.”

“선? 선을 지키라고? 맙소사, 하녀 주제에 이렇게 오만방자해도 되는 겁니까? 만탈락에선 그렇게 가르칩니까?”

“설마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전 그래도 됩니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허락하셨으니까요.”

“어이가 없습니다.”

“젖형제의 특권이란 거죠.”

팽팽한 눈싸움이 이어졌다. 이디케는 꿋꿋하게 버텼지만, 기사인 카프러스를 당할 수는 없었다. 눈을 마주친 시간이 길어지면서 고삐를 움켜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식은땀으로 등이 젖었다. 그녀를 태운 말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카프러스는 대번에 이디케를 지나쳐 산책로를 향해 말을 달렸다. 정신없이 박차를 가하는 뒷모습이 다급해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이디케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혀를 찼다. 기사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아내어 그런지, 심장 뛰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하여간……. 아가씨 편 해줄 것도 아니면서 괜한 기대만 하게 만든다니까.”

이디케는 말을 매어놓고 적당한 자리를 골라 먹을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을 달리고 돌아오자마자 배고프단 소리를 할 오드리를 위해 준비한 간단한 아침 식사였다. 카프러스를 위한 몫은 없었지만, 그거야 갑작스럽게 따라붙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굶든지 말든지. 내 몫 주나 봐라. 누가 따라오래?’

그녀는 야물게도 자신의 몫을 따로 챙겼다. 카프러스가 나중에 무슨 말을 하든, 빵조각 하나도 주지 않을 셈이었다.

카프러스는 오드리의 아침 승마가 끝날 때까지 옆에 붙어 있었다. 오드리가 식사하는 동안 이디케가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눈치를 줬는데도 꿋꿋했다. 눈치가 없는 건지,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거예요. 분명해요.”

이디케가 이를 박박 갈았다. 그녀는 카프러스의 얼굴 가죽이 그의 손바닥보다 더 두꺼울 거라고 자신할 수도 있었다.

“에이, 설마. 이디케 눈치가 얼마나 살벌한데 알면서 그걸 어떻게 그냥 받아넘겨? 아가씨, 제가 들어보니까요, 종일 연무장에서 안 나올 때도 많았던 기사님이래요. 검에는 예민해도, 다른 쪽에는 영 둔한가 보지요.”

다이앤이 명랑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잘 파고들었고, 동시에 귀가 아주 밝았다. 또한 그 살벌하다고 몸을 떠는 이디케의 눈치를 유연하게 흘려내는 요령도 있었다. 그녀가 주섬주섬 하얀 망토를 꺼내 들자 서류에 박혀 있던 오드리의 신경이 그쪽으로 죄 쏠렸다.

“아가씨, 말씀하신 대로 브란젤의 포목점과 의상실을 전부 돌았지만, 이런 재질의 천은 본 적이 없다 하더라고요.”

“천이 아니면, 가죽인 거니?”

“아니요. 포목점도 의상실도 이렇게 하얗고, 얇고, 부드러운 데다 가볍기까지 한 망토는 본 적도 없다면서 오히려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서 곤란했어요. 천도 가죽도 아닌 묘한 재질이라며 흥미로워하던걸요.”

“이런…….”

오드리는 손가락을 튕기며 침음성을 흘렸다. 어쩌다 얻은 망토이지만 그 재질만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해서 눈이 밝은 다이앤을 시켜 알아보게 한 거였는데, 왕국 제1의 도시라는 브란젤의 상인들이 모른다 하다니. 뜻밖의 사태였다.

“어쩔 수 없지. 옷장에 넣어두렴.”

“네? 포기하시는 거예요? 이렇게나 좋은 옷감인데요!”

다이앤이 망토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이 망토의 재질을 꼭 알아내고 싶었다. 추위를 잘 타는 오드리에게 이렇게까지 안성맞춤인 옷감은 없었다. 오드리의 심부름을 다니며 수십, 수백 가지의 천과 가죽을 만져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이 옷감으로 아가씨의 겨울 드레스를, 아니 드레스가 안 되면 겨울 코트라도 만들고 싶어요! 얇지, 가볍지, 따뜻하지!”

“아 그건 저도 찬성이에요. 아가씨는 추위를 너무 타세요.”

잠자코 있던 이디케가 끼어들었다. 다이앤이 뒤에서 소리 없이 손뼉을 치며 이디케를 응원했다.

“됐어. 이 옷감이 마음에 드는 건 알겠는데, 너희가 그렇게까지 열의를 불태울 만한 일은 아니야. 정 만들고 싶거든 그 망토를 잘라 만들렴. 워낙 커서 숄 정도는 나오겠으니.”

“하지만 아가씨, 대량으로 공수할 수만 있으면 분명 대박이 날 옷감인걸요! 작은 마을의 특산품이라도 되니까, 꼭 찾아야 해요!”

오드리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고질병인 두통이 다시 도졌는지, 관자놀이가 쿡쿡 쑤셨다. 고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로렐라이에서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본 너희들마저 이렇게 눈이 벌게져서 찾는 옷감이, 왜 여태 브란젤에 유통이 안 됐을까?”

“…….”

“셰비언은 마법사야. 그것도 매우 뛰어난 마법사. 게다가 이제까지 보아온 방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마법을 쓰지. 그 옷감이 특별하다기보다는, 그가 옷감에 무슨 마법을 건 게 아닐까 확인해 보는 게 빠르지 않겠니? 그리고 너희도 알다시피, 물건에 걸린 마법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고장이 나. 그건 피할 수 없는 결말이야. 마법 걸린 옷감으로 옷을 만들었다가 무도회 입장 직전에 마법이 풀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 같니?”

이디케는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물었고, 다이앤은 입을 삐죽대며 오드리의 찻잔에 차를 채웠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치만 저는 아직 포기 안 했어요. 셰비언인지 사비언인지 하는 그 마법사, 아가씨한테 자기가 로렐라이에 들어갔다고 얘기했다면서요? 그럼 제가 로렐라이에 쫓아가 그 마법사를 찾아도 이상하지 않겠죠?”

“다이앤이 다녀가고 나면 제가 단주의 대리인 자격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정식으로 보고서를 꾸며 올릴게요. 그 뒤에 옷감에 거는 마법에 관해 연구하라고 명령을 내려주세요.”

“하, 참……. 평소엔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굴면서 이럴 때만 아주 손발이 척척 맞지.”

오드리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녀라고 저 옷감의 가치를 모르겠는가. 구하기 힘들고 관리가 까다로울수록 값이 뛰는 게 사치품의 속성인데. 로렐라이가 독점적으로 유통하기 시작하면 한동안 제자리걸음이었던 매출이 껑충 뛰어오를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걸 다 알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욕심이 났다. 저 흰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떨어지는 꽃잎 사이에 서 있던 그 남자. 저 셰비언 성벽 근처에서 전설로 전해진다는 눈의 요정 같던 그 자태를 홀로 간직하고 싶은 욕심.

‘그냥 옷감일 뿐인데…….’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또 손가락을 튕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나눠주고 싶지 않은 독점욕이 고작 옷감 따위에 일어난다는 게 우스웠다. 옷감, 그저 옷감일 뿐인데. 망설이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 뜻 모를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는 자꾸 망토로 향하는 눈길을 애써 떼어냈다.

“정말이지,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구나. 너희 마음대로 해.”

뱉듯이 말을 꺼내놓고 다시 서류를 집으려는데, 이디케가 냉큼 서류를 치워 버렸다. 이 녀석이 왜 이러나, 말을 꺼내려다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혀를 찼다. 그놈의 오후 일정.

오늘 오후, 오드리는 취향도 아닌 연극 관람을 하러 갈 예정이었다. 워커 때문이었다. 사실이야 어쨌건 간에 오드리는 그저 왈가닥 귀족 영애일 뿐이고 워커는 로렐라이 상단에 속한 괴팍한 마법사일 뿐이니, 서로 간에 접점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볼일이 있어도 드러내 놓고 만나거나 물건을 받아볼 수가 없었다. 나중이라면 몰라 지금은 안 된다.

만탈락에서야 그런 통념 따위 죄다 무시하고 다녔지만 여긴 브란젤이었다. 떼어 낼 수도 없는 귀찮은 혹이 붙어 있기도 하고.

“겨우 연극 관람이야. 게다가 만나서 얘기할 사람이라곤 워커밖에 없어.”

“연극 관람이든 뭐든, 대충은 안 돼요. 아가씨를 이렇게 꾸밀 기회가 몇 번이나 된다고 기회를 놓치겠어요? 그렇지, 다이앤?”

“당연하지. 아가씨, 얌전히 계세요.”

오드리는 자신의 두 하녀가 사실은 매우 사이가 좋은 건 아닐까, 의심했다.

이디케와 다이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오후, 오드리는 카프러스를 동행하고 연극을 보러 갔다.

리즈비아 거리 외곽에 자리 잡은 오래되고 전통 있는 극장, 말브레 극장의 로비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연극을 보러 온 사람, 마중 나온 사람, 극장을 약속 장소로 잡은 사람, 잡화를 팔러 온 장사꾼, 다른 극장을 홍보하는 호객꾼과 그를 내쫓으려는 경비원…….

나는 호위 기사가 아니다, 계속 되뇌면서도 카프러스의 신경은 올올이 곤두섰다. 오드리를 흘끔대는 시선들이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아가씨, 그 머리색 어찌 안 됩니까?”

“아니, 왜요? 잘 어울리지 않아요? 난 아주 마음에 드는데.”

“어울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드리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깜찍하리만치 작은 모자에 달린 그물 장식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흘끔대는 시선이 더 늘어났다. 카프러스는 오드리를 얼른 자리로 데려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계속 이렇게 로비에 있다간 위에 구멍이 날 것 같았다.

“……아가씨께서 좋으시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잊어주십시오.”

“싱겁긴.”

카프러스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예약해 둔 자리가 박스석이라는 게 그저 다행일 따름이었다.

이번 봄 시즌 말브레 극장의 레퍼토리는 <멜브란트의 새벽>이었다. 멜브란트의 건국왕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 하도 유명하고 오래된 연극이라 동네 꼬맹이도 명대사 하나쯤은 안다는 그런 연극이었다. 계속 상연된다는 건 그만큼 인기 있다는 말이기도 해서, 극장 안은 로비와 견줄 수 없이 많은 사람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오드리는 널찍한 박스석에 퍽 여유로운 자태로 앉아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 살짝 앞으로 숙인 상체는 정말로 연극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난간 너머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고, 오드리의 뒤에 서 있던 카프러스에겐 그녀가 쉴 새 없이 손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는 꼴이 훤히 보였다.

“아가씨.”

“아, 깜짝이야. 한창 재미있는 장면인데 놀랐잖아요.”

“손이나 얌전히 하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오드리의 귓불이 붉게 물들었다. 지루함과 짜증이 극에 달하면 나오는 버릇이 도졌는지도 모르고 앉아 있었다니,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잠깐 나갔다 오시지요.”

“그래야겠네요. 이디케, 가자.”

박스석 커튼 옆에서 손가락을 꼼질대던 이디케가 얼른 오드리의 뒤에 따라붙었다. 카프러스도 따라가려 했으나, 돌아온 건 정중한 거절의 말이었다. 잠깐 바람만 쐬고 올 거니 필요 없다나.

“에스코트 기사에게 호위까지 부탁할 정도로 염치없진 않아요.”

부드럽게 밀어내는 말이 카프러스를 찔렀다. 그는 차마 따라가겠다 더 우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았다. 내내 위에 구멍이 뚫릴 것처럼 신경 쓰이던 아가씨가 자리를 비웠으니 마음이 편하고 좋아야 하는데, 뭔가 잘못 먹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제 속의 돌을 털어냈다.

‘그래, 호위 기사도 아닌데……. 한 번쯤은 앉아보고 싶던 자리에 왔는데, 무슨 딴생각이야.’

카프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대에 집중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그는 연극 관람을 썩 좋아했다. 상류계급에게만 개방되는 박스석에서 연극을 보는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었다.

마침 무대 위의 건국왕은 한창 로맨스를 불태우고 있는 중이었다. 달빛이 비치는 숲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절절한 사랑 고백을 읊었다.

-그대에게는 내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소. 내 숨결도, 심장도, 뜨거운 체온까지도 전부 그대의 것이오. 난 그대에게 사로잡힌 가련한 짐승이니, 내게 자비로운 손길을 내려주시오.

-오, 멜브란트. 그렇게 자신을 낮추지 말아요. 당신처럼 큰 사람을 받아줄 수가 없어요. 바다 같은 그대에 비하면 난 작은 연못인걸요.

-그럴 리가! 그대가 연못이라면, 난 작은 옹달샘일 거요.

달짝지근하다 못해 설탕물에 절인 대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다양하게 재해석되는 <멜브란트의 새벽>의 이번 연출자의 취향은 아무래도 로맨스인 듯했다. 카프러스가 기억하는 것보다 로맨스의 비중이 대폭 늘어나 있었다.

‘뭐, 이것도 나름 재밌네.’

문득 바라본 반대편 박스석에는 카프러스에게도 낯이 익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그웬 백작가의 영애, 네이기스다. 그녀는 로맨스를 아주 좋아하는지, 두 손을 가슴 앞에 꼭 모아 쥔 채 눈을 반짝이는 중이었다.

‘저분은 또 보는군. 공교로운데. 어쩐지 자꾸 마주치는 것 같……. 응?’

네이기스의 곁을 지키던 남자가 카프러스와 눈을 마주치고 슬쩍 모자를 들어 인사를 했다. 그웬 백작가의 장자, 에이쉬였다. 백작가의 장자에게 엉겁결에 인사를 받은 카프러스가 마주 인사를 하려는데, 네이기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그레하던 뺨의 핏기가 싹 사라지고,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뒤로 홱 젖히더니 다급히 에이쉬의 옷자락을 찾아 움켜쥐었다. 평민들이 몰려 있는 1층에서부터 비명이 파도처럼 겹쳐져 올라왔다.

“꺄아아아아아아!”

“치, 치안대……. 치안대!”

“닥쳐! 조용히 해!”

카프러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 멀쩡히 구애하던 남배우는 배에서 피를 쏟으며 무대에 나자빠져 있고, 여배우는 웬 괴한에게 사로잡혀 위협받고 있었다. 벌써 살짝 베였는지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옷자락을 붉게 적셨다.

무대를 점령한 괴한은 한 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네 명이었고, 하나같이 연극에 등장하는 조연들의 옷을 입고 있었다. 하필 건국왕의 적이 등장해 여주인공을 위협하는 장면이었는지라 연극용 가짜 칼을 진짜로 바꿔 들어온 것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얼굴을 전부 가린 복면도 한몫했을 테고.

“지, 진정하시고, 배우는 좀 놔주…… 컥!”

“으아아아악!”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무대 위로 뛰어올랐던 남자의 앞가슴에서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괴한들의 손속은 자비가 없었고, 남자는 무모한 행동의 대가를 치렀다. 쿵! 무대 밑이 텅 비어 있음을 증명하듯, 쓰러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무대 가까이에 있다가 핏줄기를 뒤집어쓴 1층의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괴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품에서 흰 튤립을 꺼내 던지는 자도 있었다.

“나랍의 영광을 위하여!”

“저주받아라, 멜브란트!”

“칼레이의 가호가 있을지어다!”

괴한에게 잡혀 이리저리 흔들리던 여배우의 복부를 뚫고 칼이 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괴한은 비명조차 못 지르고 배를 끌어안은 여배우를 쓰레기처럼 내던지고 관객석으로 난입했다. 괴한과 눈이 마주친 운 나쁜 관객이 목을 베여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관객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개에 불과한 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미친놈들……. 멀쩡한 제 나라를 두고 왜 여기서!”

좀체 욕을 하지 않는 카프러스의 잇새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는 무대 아래로 뛰어내린 괴한이 단 두 명에 불과한 것을 확인했다. 남은 둘은 어디 있지? 이 극장은 경비원도 없나? 치안대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밟고 밟히며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를 훑는 동안 뜻 모를 초조함이 발끝에서부터 차올라 목을 메웠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의 박스석이 보였다. 어느새 두꺼운 커튼으로 자리를 가려 버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웬 백작가의 장자는 검을 쓰는 자가 아니라 들었으니, 박스석의 문을 잠그고 바깥 커튼을 친 채 동생과 함께 숨어 있는 것이리라.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있어 옆을 돌아보았다. 빈 의자. 그리고 무대에서 사라진 두 명의 괴한.

‘아가씨께서는?’

목구멍까지 밀려 올라와 있던 불안의 정체를 그제야 알겠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버릇대로 차고 온 장검의 칼자루가 손에 잡혔다.

카프러스는 박스석의 문을 열어젖히고 끔찍한 혼란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창 연극이 상연 중인 극장의 2층은 놀라우리만치 조용했다. 오드리는 박스석을 나오자마자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루해 죽을 것 같은 연극에서 벗어난 게 얼마나 기뻤는지 얼굴에서 빛이 났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아.”

“저도 살 것 같아요. 대체 왜 그렇게 손을 가만 못 두시는 거예요? 베텔 경 보기에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음, 나도 그건 좀 민망하네. 그래도 명색이 가문의 기사인데 떠들고 다니지는 않겠지……?”

“베텔 경은 검에 빠진 외톨이라 친구도 없는 모양이던데요, 뭐. 그리고 아가씨 소문에 뭐 더 나빠질 여지가 있긴 해요?”

이디케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오드리는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하긴, 데뷔탕트도 전에 달렸던 악평들이 초저녁 그림자처럼 긴데 거기에 하나 더 붙어봐야 뭐가 달라지겠는가.

오드리는 테라스로 나가려는 것처럼 여유롭게 걷다 슬쩍 여성용 휴게실로 들어갔다. 칸칸이 나뉜 작은 1인용 방에서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고 있던 다이앤이 오드리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겼다.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금방 할 테니까…….”

“괜찮으니 확실하게 하렴.”

허리를 졸라매고 목을 돋보이게 하는 드레스가 순식간에 벗겨졌다. 낙낙하고 색이 칙칙한 원피스를 입고, 긴 앞치마를 둘렀다. 눈에 확 띄는 초록색 머리칼은 평범한 갈색 가발로 가렸다. 마지막으로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얼굴을 반쯤 가리자, 심부름 다니는 평범한 하녀 같은 차림이 완성되었다. 벗어놓은 옷은 다이앤이 갈무리했다.

“빨리 다녀오세요.”

“걱정 마.”

이디케가 길잡이가 되어 오드리를 안내했다. 둘은 말브레 극장을 나서서 복잡한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극장 뒤편으로 이어진 작은 골목을 따라 걷다 말브레 극장의 뒤편에 자리한 집의 문을 열었다.

“워커 녀석, 내가 오는 걸 알고 있겠지?”

“말이야 했죠.”

“집은 좀 치웠을까?”

“차라리 푸른 장미를 키워내라 하시죠. 자, 조심해서 들어오세요, 엉망이거든요.”

이디케가 진저리를 치며 주의를 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집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거대한 쓰레기장 같았다. 시커먼 먼지, 곳곳에 눌어붙은 기름, 온갖 잡동사니와 구겨진 종이 쪼가리들. 뭔가를 태우기라도 했는지, 은은한 탄내가 집안 전체에 배어 있었다. 오드리는 놀라지 않았다.

“워커의 생활 습관은 여전히 충격적이야.”

“하녀를 구하고 싶어도 다들 현관문만 열면 도망을 가버리니……. 아, 그거 조심하세요. 신발 밑창에 달라붙더라고요.”

마침 검은 얼룩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밟기 직전이었던 오드리가 흠칫 발을 치웠다.

“하여간……. 잠자는 것만이 집의 기능 전부는 아닐 텐데, 어떻게 이러고 사나 모르겠어!”

“워커 그 녀석은 그 마법 실력이 아니었으면 예전에 죽었을 거예요. 밥벌이 못 해서 굶어 죽든가, 하도 지저분하게 살다가 병에 걸려 죽든가.”

이디케가 악담을 퍼부었다. 오드리도 내심 동의했다. 워커는 로렐라이의 마법 상품 대부분을 책임질 정도로 재능이 눈부셨으나, 그 재능만큼 취향이 독특하고 성격이 괴팍했다. 어떤 상단에서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덕분에 앞날이 불투명했던 어린 오드리가 그를 거둘 수 있었던 거지만 말이다.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는 어두컴컴하고 서늘했다. 마치 사람을 잡아먹으려 크게 입을 벌린 뱀의 아가리 같았다. 이디케가 미리 준비해 둔 램프에 불을 붙였다. 가파른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정말…….”

“어쩌겠어요. 계단이 움직여서 아가씨를 실어날라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거 마음에 드는데. 그런 마법을 연구해 보라고 할까?”

“도전은 좋지만, 그런 과제를 주었다간 로렐라이의 신상품 개발이 족히 몇 년은 멈추고야 말걸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안 길어요.”

이디케의 장담은 사실이었다. 가파른 계단은 생각보다 짧았고, 그 뒤엔 완만한 경사길이 이어졌다. 쓸데없이 꼬불거리는 데다 쓰지 않고 폐쇄된 문이 여기저기에 달린 음산한 길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계단보단 나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모퉁이를 연달아 몇 개 돌자마자 빛으로 가득 찬 새하얀 공간이 나타났다. 웬만한 소극장의 내부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큰 마법등을 매달아놓을 수 있을 정도로 천장이 높은 곳. 말브레 극장의 지하 무대였다.

과거 말브레 극장이 한창 흥할 적에는 여분의 무대로 쓰였다던 지하 무대는 극장이 쇠해가며 폐쇄된 지 오래였으나, 로렐라이 상단이 임대해서 워커에게 연구실로 내준 것이다. 오드리와 이디케가 들어온 집은 그 지하 무대에 딸려 있었던 부대시설 중 하나였다.

좌석을 떼어내어 넓고 탁 트인 공간 가운데에서 날개를 펼치고 쉬고 있는 거대한 강철새가 방문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느다랗지만 가볍고 튼튼한 뼈대 위에 특별히 제작한 천이 덧씌워져 있다. 놀라울 정도로 우아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 새가 바로 ‘비마법 비행도구’. 워커가 온 평생을 걸어 연구 중인 물건이었다.

지금은 시험비행에서 채 오 분을 채우지 못하고 떨어지는 신세지만, 그래도 인형도 못 태우던 때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만약 이 연구가 완성을 보는 날이 온다면 그땐 정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 잡아먹는 귀신이 여기 있군.”

비록 오드리의 눈에는 상단의 돈을 다 퍼먹는 괴물 새로만 보였지만 말이다. 워커가 로렐라이 상단에서 일하는 조건이 비마법 비행도구의 연구 개발 비용을 대는 것이었으니, 그녀에게 이 강철새는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었다.

“이놈의 강철새는 언제 완성되는 거지?”

“아가씨, 본래 새 시대를 여는 위대한 발명품은 그렇게 한 번에 나오지 않는 겁니다. 이 비마법 비행도구의 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을 정복하게 해줄 위대한 첫걸음 그 자체라고요.”

오드리가 오거나 말거나 강철새의 배 아래에 드러누워 뭔가를 만지고 있던 워커가 냉큼 튀어나와 그녀의 말을 받았다. 평소에는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어벙하면서, 비마법 비행도구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빠릿빠릿해진다. 하도 햇볕을 쬐지 못해 창백한 얼굴에 검은 기름이 콧수염처럼 묻어 있었다.

“하도 들어서 이젠 외우겠다, 외우겠어. 그래서 그 첫걸음은 대체 언제 떼는 거지?”

“어, 음. 시간과 비용을 좀 더 주시면…….”

“그놈의 시간과 비용. 비마법 비행도구에 들어가는 고정투자금이 상단 순이익의 절반을 넘어서는 순간 이 강철새는 끝이야, 끝. 알지? 그땐 네가 드러눕든 뭘 하든 어쩔 수 없어.”

왜 모르겠는가. 워커가 열과 성을 다해 오드리의 요구에 응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데. 워커는 자신이 온 대륙을 돌아다닌다 해도 오드리만한 고용주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 그녀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고, 계산 또한 정확했다. 그러니 어쩌나, 평생의 꿈을 위해서라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마법잉크 수식 완성했다고 했지. 시제품 좀 보여 봐.”

“네! 말씀하신 대로 부패 방지와 변색 방지, 보존 기간 증가에 총력을 기울였고 방수 기능도 훌륭합니다. 마르기 전에 물에 젖으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종이에 스며들면 절대 안 번집니다.”

“방수잖아. 스미기 전에도 안 번질 순 없어?”

“잉크가 아니라 목탄을 원하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여전히 대꾸는 잘해. 그 말솜씨가 집 안 청소에도 발휘되면 좋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연구실만 반짝반짝해?”

워커는 대답 없이 딴청만 피웠다. 오드리라고 뭐 먹힐 걸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어서, 그녀는 시제품을 시험해 보는 것에 집중했다. 제품은 기대만큼 훌륭했다. 상단과 계약한 장인들에게 주문해 놓은 물건과 합치면 꽤 괜찮은 상품이 나올 것 같았다.

시험을 마친 시제품은 이디케에게 넘기고, 오드리는 마법 수식을 암호화해 정리한 종이를 챙겼다. 수식을 만든 건 워커라도 각 지점에 내려보낼 땐 상단주의 서명이 필요했다.

이런저런 확인을 하는 동안 시간이 꽤 지체됐다. 잠깐 쉬겠다고 하고 나온 거니, 얼른 돌아가야 했다. 옷자락을 정리하던 오드리는 문득 고개를 들어 연구실을 훑었다. 분명 지하 무대를 빌렸다고 보고 받았는데, 눈에 보이는 구조는 공연장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

“여기 구조 변경까지 허락받은 거 맞지?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까지 뜯어도 되나?”

“에이, 알면서 물으신다. 허락이야 받았지만 이렇게까지 변경해서 쓸 줄은 몰랐겠죠. 아마 제가 연구실로 쓰는 줄도 모를걸요? 그렇지 않고서야 마법사의 연구실로 지하를 줄 리가 있나요.”

“……내가 말을 말지. 연구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저번처럼 폭발 사고는 일으키지 마. 브란젤에서는 수습이 힘들어. 위험한 건 지하 말고 지상에서 하고.”

“예! 단주님! 명심하겠습니다!”

오드리의 경고에 워커가 장난스레 경례를 올렸다. 창백한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검은색과 금색이 섞인 독특한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긴 젊은 마법사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오드리의 속을 뒤집었다.

“내가 어쩌다 널 만나서……. 됐다, 됐어. 이디케, 돌아가는 대로 여기 임대 계약서 썼던 거 가져와. 나중에 워커 녀석이 사고치고 나서 검토하면 늦어.”

워커가 사고 칠 걸 기정사실로 여기는 말투였다. 기분이 상한 워커가 입을 삐죽댔지만 오드리도 이디케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지상으로 이어지는 길에 두 사람이 막 발을 들여놓으려는데, 워커가 그녀들의 등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저기, 아가씨! 근데 그 잉크는 어디다 쓰시게요? 어차피 중요한 문서는 다들 마법 종이를 쓰는데요!”

그때까지도 잘 참고 있던 이디케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꼼꼼하고 계획적인 이디케와 즉흥적이면서도 한 곳만 바라보는 워커는 앙숙 중의 앙숙이었다. 워커를 향해 홱 돌아선 이디케의 얼굴에 한심해하는 기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마법 종이보다는 마법 잉크가 싸요.”

“아, 그렇구나.”

대번에 납득한 워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디케는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흥, 하는 코웃음만 남기고 연구실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먼저 나가 있던 오드리는 이디케와 워커를 두고 몇 마디 농을 하다 주종관계도 잊어버린 듯 사나운 눈길을 받고서야 그만두었다.

“알았어, 다신 안 놀릴게. 그래도 말이야, 네가 워커 앞에서만 그렇게 자제력을 잃고 심통을 부린다는 걸 이제 좀 인정하는 게 어떨까? 내 착각이 아니라 진짜……. 이게 무슨 일이지?”

“그, 그러게요. 연극이 끝나서 나온 사람들은 아닌 것 같죠?”

조잘대며 말브레 극장 앞 도로에까지 다다른 오드리와 이디케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맞닥뜨렸다.

극장에서 사람들이 쏟아졌다. 가파른 계단을 뛰어내려다가 구르는 사람이 있는데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극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는 것만이 목표인 것만 같았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간헐적인 비명이 극장 앞 거리를 가득 메웠다.

폭풍을 만난 바다처럼 쓸려가는 사람들의 물결은 지극히 사나웠다. 자칫했다간 뛰어들자마자 그대로 쓸려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두렵다고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워커의 연구실이 본관과 연결되어 있을 것 같은데?”

“안 돼요. 미리 정해놓은 날짜에만 통로가 개방되도록 계약되어 있어요.”

“그럼 어쩔 수 없네.”

오드리는 모자를 단단히 눌러쓰고 뛸 준비를 했다. 금세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이디케가 입술을 깨물며 앞장섰다.

“쓸려가지 마세요.”

“아아. 너만 믿을게.”

“그거 참 믿음직하네요.”

이디케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앞으로 돌진했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건 쉽지 않았다.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나간 보람이 있어서, 어떻게든 극장 입구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그게 한계였다. 오드리도 이디케도 등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문 옆 벽에 기대섰다. 거리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거였다. 한꺼번에 문으로 몰린 사람들 때문에 극장의 출입구는 꽉 막혀 있었고, 안쪽에서는 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이게, 헉, 대체 무슨, 일, 이죠?”

“난들, 알겠어? 그나저나, 피 냄새가 나는 걸……. 치안대는, 흐, 언제 오는 거지?”

“치안대가 와도 문제예요.”

오드리가 미간을 왈칵 구겼다. 치안대가 오면 사태가 수습되는 대로 신원 확인을 할 텐데, 이런 옷을 입은 모습을 들켰다간 일이 커진다. 승마복을 입고 대로를 달렸을 땐 데뷔탕트를 하기 전인 데다 에스코트 기사가 없다는 변명이라도 있었지만…….

“자칫하다간 집에 갇히겠는데. 빌어먹을 헨젤!”

“……그 옷 입고 계시니까 봐드릴게요.”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줘서 그런 건 아니고? 어디, 지금은……. 윽!”

출입구 쪽을 확인하려 몸을 내밀었던 오드리가 누군가의 팔꿈치에 배를 얻어맞고 신음을 흘렸다. 이디케는 허둥대며 오드리를 부축했다. 오드리를 친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사람들 속에 섞여 소용이 없었다.

“괜찮으세요?”

“으…… 괜찮지 않으면 어쩔 거야. 괜찮아야지……. 들어가자. 아까보단 나은 거 같아.”

“제 눈엔 똑같은데요?”

“이 난리가 났는데 베텔 경이 아직도 자리에 뭉개고 있을 거 같아? 다이앤이 막는 것도 한계가 있어.”

“으으……. 그분은 왜 그렇게 기사다워서! 조금쯤은 게으름을 피워도 될 텐데!”

이디케는 괜한 불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막막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뚫어보려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무사히 돌아가면 반드시 급여를 올려달라고 해야지. 크게 심호흡을 한 이디케가 막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웬 사내가 그녀의 앞에 끼어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실 겁니까?”

아무 문장도 들어가지 않은 장식용 망토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깃털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 그의 허리엔 기사를 상징하는 장검이 걸려 있었다. 이디케는 검을 확인하자마자 오드리를 감싸며 뒷걸음질을 쳤다.

기사의 위상이 추락하는 시대였다. 한때는 기사였으나 경의 칭호를 버리고 상단의 경비원이 된 자, 혹은 범죄자로 전락한 치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신문에 실렸다. 문장 없는 기사, 주인 없는 기사는 칼 찬 난봉꾼이고 약탈자며 허가받은 살인자에 불과했다.

뒷걸음질 치는 이디케를 보며 사내가 웃었다. 모자에 가려지지 않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망토 자락을 뒤집어 그 안쪽에 새겨진 탐스러운 포도송이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멜브란트 제일의 기사단으로 꼽히는 산트렘 기사단의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게 이디케의 경계심을 늦추지는 못했다.

“안쪽에 새긴 문장은 믿을 수 없어요. 그것도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을.”

“좋은 자세입니다. 현명한 아가씨로군요.”

사내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단단한 팔로 사람들을 밀어내며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뚫었다. 오드리와 이디케가 봤을 땐 틈 하나 없이 꽉꽉 밀려 있던 출입구에 공간이 생겼다. 사내가 손짓했다.

두 여자는 대번에 그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사내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까지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놀라울 정도의 친절이었다. 텅 빈 계단을 앞에 두고 겨우 안심한 두 사람이 감사 인사를 하려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게 무슨……. 귀신에 홀린 기분인걸.”

“이런 귀신이면 열 번도 더 만날 수 있어요. 아가씨, 빨리 빨리요.”

한시가 급했다. 둘은 빈 복도를 달려 여성용 휴게실로 뛰어들었다. 애간장을 녹이며 기다리고 있던 다이앤이 정신없이 오드리의 옷을 갈아입혔다. 순식간에 코르셋을 조이고 새 드레스를 입히는 손놀림이 대단히 신속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웬 미친놈들이 나타나서 사람을 죽였대요.”

“뭐?”

“나랍의 영광을 위하여, 어쩌고 하면서 무대 위에 올라와선 주연 배우 둘을 죽여 버렸대요. 그리고 관객석으로 뛰어 내려와서 사람들을 마구 베었다는데……. 조연인 습격자 차림을 하고 올라와서 아무도 몰랐다나 봐요.”

오드리는 황당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랍은 멜브란트와 활발하게 교역하는 작은 왕국이었다. 최근 무역 조약 개정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말브레 극장과 무슨 상관이라 여기까지 와서 칼부림을 한단 말인가.

“베텔 경은?”

“모르겠어요…….”

다이앤의 회색 눈동자에 짙은 불안이 차올랐다. 이만한 난리가 났으니 금방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조용하던 문밖이 소란으로 가득 차는 동안에도 소식이 없었다.

“아가씨, 계속 여기에 있어도 될까요? 그놈들이 여길 오면…….”

“아무리 정신 나간 놈들이라도 2층이 귀족들이 쓰는 공간이라는 건 알고 있을 거야. 나랍의 영광 운운하는 놈들이 설마 뒷일은 생각도 않고 이곳까지 들이닥칠까.”

“무대에서 사람을 죽인 놈들인걸요.”

여긴 그저 극장의 여성용 휴게실일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무도한 놈들이 얄팍한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처음엔 끔찍할 정도로 소란스럽더니, 지금은 그저 조용하기만 한 것이 더욱 다이앤의 불안을 부추겼다.

“아가씨, 우리도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네?”

“다이앤, 진정해. 베텔 경이 곧 오실 거야. 너도 알잖아, 그분이 얼마나 기사다운지.”

“아냐, 이디케……. 그분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냐. 혹시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모르고 다른 곳으로 가신 게 아닐까 싶어서 그래. 다른 귀족분들은 고용인들까지 챙겨서 벌써 다 도망쳤단 말이야.”

다이앤을 달래는 이디케의 표정도, 둘을 바라보는 오드리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은 그저 에스코트 기사일 뿐이니 호위 기사처럼 굴지 말라고 한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의 도움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상황이 참 얄궂지 않은가.

그 시각, 카프러스는 잊지 않고 챙겨온 장검의 덕을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극장의 고용인들이 쓰는 좁은 계단에서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거추장스러운 무대의상을 입은 두 명의 괴한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으니.

“이거 정말…… 이해가 안 되는데.”

카프러스는 숨을 몰아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작해야 네 명인 괴한 중 둘은 관객석으로 뛰어들고 둘은 무대 옆쪽으로 빠지는 걸 보고 쫓아왔는데, 죽을 각오를 하고 꼬리를 잡은 것치고는 상대가 수월했다. 장소의 유리함을 부정한 생각은 없지만, 정말로 그랬다. 아직까지 큰 부상 하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덤벼드는 자의 칼을 걷어낸 뒤, 그에 멈추지 않고 어깨를 찔렀다. 피가 카프러스의 얼굴에까지 튀었는데 상대는 비명마저 삼켰다. 조금 전에 팔을 걷어차였던 자는 그 틈을 노려 배를 찌르려 시도했다가, 카프러스가 피하자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초반보다 한결 예리함이 떨어졌다.

“벌써부터 체력이 모자라나? 나랍 놈들은 영 부실하군.”

도발은 먹히지 않았다. 찔린 자는 뒤로 물러나고, 다른 자는 침착하게 숨을 가다듬으며 틈을 노렸다. 카프러스에게도 소중한 재정비의 시간이었다. 좁은 계단에서 격렬하게 날뛰느라 펄떡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굳은 어깨를 풀었다.

“여긴 브란젤이야. 겨우 네 명 주제에…… 아니, 그래. 뭐 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네 명이서 무슨 배짱으로 이런 미친 짓을 감행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당신들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은 거지?”

“…….”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하는 시늉이라도 좀 할 것이지!”

다시 한번 맞부딪쳤다. 카프러스는 하필 아래쪽이었고, 곧 맹렬하게 짓쳐 드는 검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졌다. 어깨에 상처를 입은 자가 투지를 잃지 않고 기회를 노리고 있어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카프러스 쪽이 미묘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일단 그가 훨씬 더 체격이 좋았고, 체력도 월등했다. 그는 틈을 노려 정강이를 걷어찼고, 상대가 휘청거리는 사이 단번에 계단을 뛰어올라 후위를 점하고 오금을 베어냈다. 마침 계단 모서리를 딛고 서 있던 차라, 괴한은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윽!”

잔뜩 억눌린 비명을 듣는 순간, 카프러스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까지 숨을 죽일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까부터 기회를 보던 자가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까앙!

귓가가 쭈뼛 서는 소리가 좁은 계단을 메웠다. 구멍 난 어깨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덤비는 것은 놀라울 정도의 근성이고 집념이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단지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때론 그게 실력 이상의 효과를 낼 때가 있다.

악착같은 발악에 카프러스의 망토자락이 쭉 찢겨나간 걸로 모자라 팔뚝에 큰 상처가 났다. 화끈한 통증이 신경을 태우고 머리를 꿰뚫었으나, 그는 오히려 통증을 양분 삼아 상대를 압박했다.

“큭……!”

“포기해.”

“…….”

“내가 있는 이상 2층엔 못 올라가. 1층은 치안대가 와서 진압할 거다. 뭘 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큭! 자수하는 쪽이 그나마 형량을 줄일 기회가 될 거다.”

검이 맞부딪치며 눈이 마주쳤다. 무저갱처럼 깊은 검은 눈동자가 수없이 많은 말을 담고 일렁거렸다. 그 눈이 카프러스의 속을 건드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주친 시신들,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은 허망한 눈동자들이 그를 때렸다.

“실패하기를 작정한 사람처럼 굴지 마라. 죄 없는 사람을 죽여가며 이런 소란을 피웠으면, 뭣 때문에 그랬는지라도 똑똑히 밝히란 말이야!”

“……너희는, 사람 기름을 마셔.”

사포에 성대를 갈아버린 듯 거친 목소리인 데다 발음은 어눌하지만, 처음으로 꺼내놓는 말이었다. 하나 사람 기름이라니, 그 무슨 섬뜩한 말인가. 당혹한 카프러스더러 들으라는 듯, 습격자는 한결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계집아이의 머리칼로 천을 짜고, 노인의 가죽을 벗겨 식탁을 꾸미고, 농민의 기름을 차에 타 마시지. 몰랐다는 건 그저 핑계야. 개 같은 자식들, 칼레이의 가호를 받을 가치도 없는 것들!”

말이 점점 빨라지면서 마지막 부분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되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증오와 분노만은 지독하리만치 뚜렷했다. 새카만 악의가 선뜩하게 목덜미를 적셨다.

“불에 빠져 죽을 멜브란트 놈들.”

카프러스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려서, 어떻게든 살려서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와 배후를 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겉으로 드러난 네 명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가진 증오를 정면에서 뒤집어쓴 순간, 그는 전에 없이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죽여 버릴까…….’

죽으라고 내몰린 거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은 걸 보면 뭐 아는 게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섬뜩한 말을 해대는 걸 보면 제정신인 것 같지도 않다. 거기에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사죄할 것 같지도 않으니, 여기서 자신이 끝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쉬는 동안 돌아온 여력을 죄다 끌어올려 종전보다 더한 힘으로 몰아붙였다. 괴한은 불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요령껏 힘을 흘리며 카프러스를 받아쳤다. 오히려 둘이 덤빌 때보다 더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게, 아까 좁은 공간에서 동료를 신경 쓰는 게 꽤 방해가 됐던 모양이었다.

“큭…….”

카프러스의 잇새에서 신음이 샜다. 팔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해치우고 가야 하는데, 야속한 몸은 점점 삐걱대며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다. 그가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걸 눈치챈 상대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역시 멜브란트 놈들은 죄다 엄살쟁이라니까.”

아까 당한 도발이 마음에 남아 있었나 본데, 빈정거림을 돌려주느라 틈이 생겼다. 카프러스는 검으로 다리를 베어 넘기려는 척, 하단을 쓸어가다 단번에 괴한의 턱을 움켜쥐고 냅다 벽에 박아버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박았는지라, 괴한은 단번에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괴한이 미끄러지는 궤적을 따라 시뻘건 핏자국이 화가의 붓질처럼 이어졌다. 이미 죽이려고 마음먹은 이상, 숨을 확인하거나 하는 행위는 사치다. 단숨에 가슴을 꿰뚫을 요량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잠깐!”

다급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지만, 이미 늦었다. 카프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을 내리찍었다.

깡!

중간에 끼어든 자가 카프러스의 검을 쳐 냈다. 그 탓에 궤도가 바뀌었고, 가슴을 찔렀어야 할 검은 애꿎은 바닥에 깊은 흠집을 냈다.

그 순간 낯선 목소리는 카프러스에게 적이 되었다. 계단 아래로 떨어뜨릴 셈으로 발길질을 했으나, 상대는 카프러스의 어깨를 가볍게 짚은 것만으로 그를 훌쩍 넘어 그보다 높은 곳을 차지했다. 고양이처럼 날렵한 몸놀림에 무늬 없는 장식용 망토가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시야를 가리고 펄럭거렸다.

“성질도 급하시긴.”

망토를 수습한 남자가 깃털 달린 모자를 벗으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길쭉한 눈매가 아래로 처지며 사뭇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 되었다. 하지만 카프러스는 도무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는데, 그의 미소가 이빨을 감춘 맹수의 미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너, 정체가 뭐지?”

“수습 치안대원입니다. 괴한을 잡아주신 건 참 감사한데, 심문도 못 해 본 놈을 눈앞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어서 말입니다.”

“치안대엔 수습 대원 따위가 없고, 그들은 그런 장식용 망토를 두르지 않아.”

“당신이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닙니다.”

“믿을 수 없다.”

“이것 참…….”

어쩐지 곤란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리던 남자는 제 망토를 들어 올려 안감을 보여주었다. 청록색 안감에 포도송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멜브란트에서 가장 용맹하고 가장 명예롭기로 이름난 기사단의 표식이 왜 이런 곳에서 나타나는가. 카프러스의 불신은 더 깊어졌다.

“포도송이의 문장을 왜 안감에 새겼지? 사칭이 아니라는 증거는? 정말로 산트렘 기사단원이 맞나?”

“한때는 산트렘의 사내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아직 치안대에 완전히 소속되지 못해서 두르고 다니는 것뿐이죠. 관객석에 난입한 두 놈은 잡아놨지만 여기 두 놈을 놓치면 수습 딱지도 못 떼고 쫓겨날 겁니다. 좀 넘겨주시죠.”

“전직 산트렘 기사단 출신 신입이라니, 치안대에서 퍽이나 감당하겠군 그래. 나는 헨젤 백작가의 기사, 카프러스 베텔이다. 당신, 이름이 뭐지?”

“…….”

“아, 그렇군. 치안대에는 과거를 지우고 새 이름을 얻는 이들이 있다던데, 혹시 당신이 그런 경우인가? 수습이라니, 아직 이름을 못 얻었나 보군. 망토 안감에 옛 소속을 새겨 이름 대신 들이밀어야 한다니.”

존경받는 치안대, 백합에 휘감긴 검 가운데에 과거를 지운 자들이 있다더라. 이름도 출신도 모두 지우고,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처럼 그렇게 산다더라. 암암리에 도는 얘기를 굳이 언급한 것은, 그 명성 높은 기사단 출신인 사내에 대한 질투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게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긴 했는지, 예의 바른 미소에서 예의가 조금 깎여 나갔다. 단지 그것뿐인데 사람 좋아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변의 공기가 서늘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카프러스의 뒷목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알고 계시면 그 입을 조심하시죠, 베텔 경. 제가 어느 날씨 좋은 날에 갑자기 결투가 하고 싶어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칼부림이 하고 싶거든 같이 놀아줄 동료를 구해보는 게 어때. 원하는 대로 이자들은 넘겨줄 테니, 이만 비켜라.”

“베텔 경, 도망치는 게 아니라면 저와 함께 가시죠. 여쭤보고 싶은 게 좀 많은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괴한들이 2층에 올라가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제압한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나는 당장 갈 곳이 있으니, 나중에라도 협조가 필요하다면 헨젤 백작가에 연락해라.”

헨젤 백작가의 이름은 여기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사내는 단정한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차다 끝내 길을 열어주었다. 나중에 꽤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지금 카프러스에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드리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마음이 급해 뛰다시피 계단을 오르는 카프러스의 발자국을 따라 핏방울이 점점이 흔적을 남겼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실력 차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자존심이 아주 그냥 하늘을 찌르네, 찔러. 이놈의 수습 딱지, 빨리 떼든가 해야지. 이름도 못 대고 반말이나 듣고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사내는 연신 투덜대며 쓰러진 괴한의 멱살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아래로 내려가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 것처럼 멈춰 섰다.

“수습까지 뛰쳐나오게 만든 놈, 낯짝이나 좀 보자.”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목 아래까지 완전히 가리고 있는 복면을 홱 벗겼다. 삭발에 가까울 만큼 짧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꿀색 피부는 확실히 독특했지만, 매끈한 뺨에 피어오른 하얀 튤립만큼 인상적이진 않았다. 손으로 쓸어보았지만 번지지 않았다. 문신이었다.

“웬……. 뭐야, 칼레이의 사도라도 돼? 뭐 이런 불길한 꽃을 얼굴에 새기고 다녀? 돌았나?”

장례식에나 쓰는 꽃을 얼굴에 새기고 다니는 자들이라니, 터무니없지 않은가. 사내는 다급히 계단 아래에 쓰러진 자의 복면도 벗겼다. 역시 꿀색 피부에 하얀 튤립이 피어 있었다. 그제야 이들이 무대에서 외쳤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랍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했던가.

꿀색 피부는 나랍인의 특징이었고 튤립은 나랍 왕국의 대표적인 특산품이었다. 지금이야 그럭저럭 잘 지낸다지만, 멜브란트와 나랍 사이의 무역 분쟁이 얼마나 심했었나. 전쟁 직전까지 갔던 일도 수없이 많았다.

“그냥 미친놈들이 아니라 진짜 나랍 놈들인가……. 염병할, 수습 딱지는 떼겠는데 그게 좋아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네.”

문득 괴한들의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부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머뭇거리면서도 괴한들의 옷을 잡아 내리고 손을 집어넣어 목의 울대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손에 걸리지 않았다.

“포모스까진 바라지도 않는데……. 내 등엔 뭐 불행의 신이라도 업혀 있나? 뭐 이런 빌어먹을…….”

사내는 야근을 예감했다. 당분간은 집에 들어가기 힘들 것이다.

카프러스는 망토로 대충 팔을 싸매고 2층의 복도로 뛰어들었다. 복도는 썰렁했다. 귀족에게 제공되는 장소이니만큼 경비원도, 고용인도 많았을 텐데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아마 사건 초기에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어쩌면 길이 엇갈렸을지도 모른다.’

사정을 모르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에게 휩쓸렸을지도 모른다고, 단지 가능성을 생각한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해졌다. 심장이 초조하게 펄떡거렸다. 가까운 문부터 벌컥벌컥 열어보며 사람을 확인했다. 다급하게 빠져나간 흔적들이 그의 불안에 불을 붙였다.

“……가씨! 오드리 아가씨!”

소리를 지를 때마다 가슴께가 뻐근해지며 숨이 차올랐다. 모든 방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그냥 지나친 방에 있으면 어쩌느냐는 불합리한 가정이 그의 폐를 쥐어짰다.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긴 복도 끝까지 고함이 닿았다.

“계십니까! 카프러스입니다! 아가씨!”

“……경?”

너무나 작은 목소리라,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정신없이 걷던 걸음도 멈추고 숨마저 죽인 채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가 시끄러웠다.

겨우 대엿 걸음 떨어진 문이 열렸다. 손바닥만 한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고 사방을 살피던 이디케가 카프러스를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베텔 경!”

“락시 양, 아가씨는 무사하십니까?”

“그 팔, 팔! 팔 왜 그래요? 어쩌다 다친 거예요?”

“별것 아닙니다. 작은 충돌이 있었지만, 제압하고 왔으니까.”

이디케는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툼한 망토가 피로 흠뻑 젖었는데 그게 별게 아니라니. 저 남자의 기준에서 별것이 되려면 팔이 하나 잘려 나갈 정도는 되어야 하는 모양이다.

“아가씨는 무사하세요. 바깥이 소란스러워서 아예 나가지 않았거든요. 상황은 정리됐나요?”

“치안대가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다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사람이 한꺼번에 몰렸을 텐데요. 그 팔로 길을 낼 수 있겠어요?”

“뒷길이 있습니다. 잡일꾼과 배우들이 들락거리는 문은 아직 썰렁할 겁니다.”

“아, 그럼 괜찮겠네요. 그런데 경은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한때 일한 적이 있습니다. 락시 양, 이런 수다를 언제까지 떨어야 합니까? 얼른 모시고 나오시죠.”

카프러스는 장담대로 말브레 극장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 하나 없는 길로 오드리를 편하게 안내했고, 마차 보관소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마부도 데려왔다. 오드리는 물론이고 이디케와 다이앤까지 살뜰하게 챙겨 넣고 문을 닫으려는 것을, 오드리가 억지로 문을 잡아 막았다.

“베텔 경도 타셔야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저는 바깥에 있겠습니다. 말 타고 가면 됩니다.”

“지금 그 팔로 말을 타겠다고요? 여차하면 검도 휘두를 거고?”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을 짓는 카프러스 때문에, 오드리는 꽉 메인 듯 갑갑해져 오는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치안대가 온 덕분에 얼추 정리되어 가는 도로가 그의 눈에는 영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경. 도움받은 주제에 이런 말 하기 좀 민망한 거 아는데,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네요. 에스코트 기사 노릇만 하라는 거, 빈말 아니었어요. 경께서 2층에 와주시지 않고 돌아갔어도 절대 탓하지 않았을 거란 얘기예요.”

“저는 기사입니다.”

“누가 그걸 모른대요? 경이 맡은 건 에스코트 기사지, 호위 기사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날 지키겠다고 무리하다가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어쩌죠? 난 그 여파 감당할 자신 없습니다. 타세요.”

다다다 이어지던 말은 강요로 끝났다. 오드리의 말투가 어찌나 고압적이었는지, 죄지은 것 없는 이디케와 다이앤이 어깨를 움츠리고 숨을 죽였다. 하나 기사는 기사라, 카프러스는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도 낯빛에 변화가 없었다. 아, 하도 피를 흘려서 평소보다 창백하긴 했다.

“애초에 기사가 에스코트를 했던 이유가 뭡니까?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라고 기사더러 시켰던 거 아닙니까? 지금이야 정쟁하느라 티타임에서 칼부림 나던 때가 아니니 그저 이름만 에스코트 기사입니다만 저는 제 일을 해야겠으니, 가만히 계시지요. 이만 문 닫겠습니다.”

제 할 말을 마친 카프러스는 덜컥 문을 닫고 걸쇠까지 걸어버렸다. 오드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를 내는 게 보였지만, 알 게 뭐냐. 어깨를 움츠리고 웃전들의 눈치를 보던 마부가 카프러스의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얼른 마차를 출발시켰다.

말브레 극장 사건은 사안의 중대성만큼이나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치안대에 사로잡힌 범인들은, 모든 것은 멜브란트가 불공정한 무역으로 나랍을 착취하고 있기 때문에 저지른 일이라며, 원인은 멜브란트에 있다고 주장했다.

멜브란트는 나랍의 왕실이 그들을 지원하지 않았나 의심했고, 나랍의 왕실은 그럴 리 있느냐며 그들을 부정했다. 원한다면 나랍에 와서 조사해 봐도 된다며 펄쩍 뛰었다. 조사는 쉽게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그 얘기를 했다. 목격자도 희생자도 많은 사건인지라 그 뒤의 처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신문이며 잡지며 이런저런 추측을 하느라 지면을 썼다.

“이렇게 길어지는 걸 보면 나랍 왕실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게 틀림없어.”

“에이, 설마 나랍의 왕실에서 지원했겠어? 그놈들이 얼마나 흉악했는데!”

“그럴 수도 있지. 저 먼바다에서 날뛰는 사략해적 놈들을 보라고.”

“어, 그 말 들으니까 그럴듯하네.”

“그렇지? 그런 게 틀림없다니까! 나랍의 영광 어쩌고 하는 놈들이잖아.”

“그나저나 얼굴에 흰 튤립을 새기고 있었다며? 미친놈들 아냐?”

이 비슷한 대화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맥주를 마시러 모여 앉은 펍에서, 차를 마시는 카페에서, 거리 곳곳의 음식점에서.

말로만 끝나면 다행이었을 테다. 치안대는 브란젤 시민들의 분노에 정면으로 노출됐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치안대의 사무실에 쫓아가 난동을 부렸다. 범인을 잡아놓고도 신중하게 움직이는 게 마음에 차지 않는지, 가끔 썩은 과일을 던지고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오드리 역시 시달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상류계급의 사람들이 심했다. 호기심을 충족하려 대놓고 1층에 있던 평민들을 부르기에는 체면이 깎인다 생각하는 자들이 자꾸만 오드리를 찾았다. 사건이 일어났던 순간에는 자리를 비웠노라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껏 오드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파티와 모임의 초대장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아예 아무 곳에도 나가지 말고 칩거할까 고민도 해 보았지만, 로렐라이 상단에 수시로 드나드는 이디케와 다이앤을 감추기에는 사교와 쇼핑에 미친 아가씨 흉내만큼 좋은 게 없었다. 안 그래도 왈가닥 아가씨라는 핑계의 약발이 슬슬 떨어져 가는 참이었다.

오드리는 카드덱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초대장을 펼쳐 놓고 미간을 모았다. 어떻게든 쳐낸다고 쳐 냈는데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초대가 너무 많았다. 가봤자 희귀한 동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는 시선을 받으며 모른다, 아는 게 없다,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베텔 경이 그냥 드러누워서 안 일어났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는 내가 싫다.”

“저도 그래요……. 그렇게 다치셨으면 좀 쉬시지, 왜……. 어휴.”

안 그래도 일이 많은 이디케가 눈 아래를 문지르며 한탄했다. 성실한 카프러스는 오드리에게 초대장이 밀려들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누워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뷔탕트를 치르고서도 집에만 있던 아가씨에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게 만들 순 없다나. 팔 한 짝 다친 정도는 별것 아니라며 웃는 얼굴은 선량한 호의로 가득 차 있어 오드리는 희미한 짜증조차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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