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 >
"천자를 칭하지 말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우영은 사신으로 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버럭 소리를 높였다.
명백한 외교적 결례였으나 우영은 지금 그런 걸 고려할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동석한 통역조차 당황해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낸 반면, 당사자인 소피아는 여전히 여유롭기만 했다.
"어째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나는 나름 합당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천자라는 칭호를 없애라는 건 경우에 따라서는 선전포고로 여겨질 수도 있는 무례라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그렇군. 그런데 천하의 중심이고 하늘의 아들이 다스리는 국가라는 자부심이 있다면 이렇게 타국의 힘을 빌리려는 행위 자체를 수치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고 기울면 다시 차게 되는 법. 국가라고 이런 음양의 이치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제 아무리 천자의 나라라고 해도 잠깐 열세에 처하는 상황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 잘했군. 그럼 이것도 잠깐의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니 알아서 잘 견뎌보게. 자네 말대로 진짜 한의 황제가 하늘의 아들이라면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나? 하늘이라는 존재가 아들을 죽게 놔두는 무심한 부모라면 몰라도."
거의 조롱처럼 들리는 말임에도 우영은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이 해놓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은 절대 불가한 것입니까?"
"생각을 해보아라. 힘의 열세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는 국가와 도움을 주는 국가가 대등할 수 있다고 보느냐? 한이 그럴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몰라도 현재 천하의 중심은 오직 로마뿐이다.
왕 위에 군림하는 황제는 왕중왕이자 로마의 임페라토르인 아우구스투스 외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까 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건 엄청난 무례라고 했느냐? 우리에게는 너희가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부리며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하늘의 아들을 칭하는 게 도발로 느껴진다. 그러니 양심이 있다면 우리의 힘을 빌리는 조건으로 그 분에 넘치는 이름은 내려놔야지.
"
협상의 여지는 없다.
우영은 감당하기 힘든 모욕감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상 이런 굴욕을 감내하며 여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저 정신 나간 로마의 황태녀가 하는 소리는 진짜로 한을 무릎 꿇릴 수 있다고 믿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단지 파병을 하기 싫어서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거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치졸하기 그지없는 방법이다.
과거 흉노와 전쟁을 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으니 자신들이 직접 나서기는 꺼려질 터.
한과 흉노가 치고받고 싸우다가 둘 다 약화되기를 기대하는 심리일 게 뻔하다.
우영은 로마의 속 좁음을 비웃는 것으로 흔들리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을 수 있었다.
"협상은 결렬이라고 봐야겠군요."
"그런가? 아쉽군. 내 조건만 들어준다면 당장이라도 흉노를 초원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었는데."
"오랑캐들을 징벌하는 건 저희의 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중원의 저력을 확실하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보고를 기다리고 있지."
소피아는 지금까지의 회담 중 가장 환하게 웃으며 우영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남자의 심금을 울릴 정도의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우영은 더 이상 그녀가 단순히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양국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먼 길 조심해서 가게. 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보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겠지. 선물을 준비해 놨으니 가져가게."
"···황송하오나 많은 짐을 가져갈 여력이 없사옵니다. 천자님과 태사님에게 바칠 물건들만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담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주제에 자기 몫만 산더미처럼 챙겨오면 어떤 모양새로 비칠지는 훤하다.
평상시라면 별로 논란이 되지 않을 테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만약 왕망이 트집을 잡을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걸로도 충분히 엮여 들어갈 소지가 있었다.
"그래? 그러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만약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라도 다시 사신을 보내게. 우리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
"···송구하오나 조건이 바뀌지 않는다면 영원히 평행선일 것입니다."
화를 억누르는 우영의 얼굴을 소피아는 그저 즐겁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 일부러 화나게 하려고 살살 긁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계속 있어 봐야 얻는 건 없이 화만 솟구칠 뿐이다.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물러가려는 우영의 등 뒤로 소피아의 마지막 인사가 날아들었다.
"여기까지 온 그대들의 정성을 봐서 내가 한 가지는 약속해주지. 흉노가 비단길을 차지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도록."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일까.
걱정하고 있었던 가능성 중 하나를 배제할 수 있다면 한나라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었다.
'아니.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 이놈들에게 뭔가를 바라서는 안 돼.'
우영은 하루도 더 낭비하지 않고 그대로 마르코 폴리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결국 문명국인 척하고 있어도 서양 오랑캐들은 오랑캐일 뿐.
오늘 받았던 굴욕은 절대로 잊지 않고 갚아주리라.
우영은 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문명국은 오직 한왕조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이를 갈았다.
※※※
북방의 3개 주를 유린한 흉노는 왕망의 예상과는 다르게 더 이상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올테면 니가 와'라고 말하는 듯한 그들의 움직임은 지금까지의 흉노와는 달랐다.
흉노의 선우들 중에도 천태선우의 심중을 완벽히 헤아리고 있는 이는 적었다.
그래도 의심을 품는 이는 없었다.
"어째서 여기서 계속 몰아치지 않느냐고?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하물며 한나라 정도의 저력을 지닌 국가는 어떻겠느냐. 지금만 하더라도 놈들이 꾸역꾸역 모아놓은 병사의 수가 30만을 넘어간다고 하지 않느냐."
"예. 하지만 저희가 총력을 기울이면 이기지 못할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초원에 흩어져 있는 모든 전사를 전부 불러 모아서 일대 결전을 벌인다면야 당연히 이길 수 있겠지. 하지만 그리 좋은 전략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쪽의 피해가 너무 커질 우려가 있어."
한이 진짜로 작정하고 모든 전력을 총동원하면 30만이 아니라 그 이상도 가능하다.
30만과 싸워 이겨도 10에서 20만 정도는 얼마든지 더 보충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회생의 여지가 없이 망하게 되겠지만 흉노의 피해도 상당히 커질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상대방이 성에 틀어박혀서 문을 닫아걸면 시간이 더욱 지지부진 끌릴 수도 있다.
이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어떻게 이기느냐는 승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군요.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서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거로군요. 이대로 동북방에서 중원놈들에게 압력을 넣고, 나머지 전사들은 서쪽 유역에서 계속 압박을 지속하면 되겠습니까?"
"놈들이 초조해져서 먼저 나와주면 더 바랄 게 없고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엔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들면 된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릴 리가 없지만 지금 한은 그 정상적인 나라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으니."
망해가는 나라는 적절한 환경만 조성해주면 망조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지금의 한은 어디까지나 망해가는 나라지 이미 망한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전투를 벌여서 손해를 자초할 필요는 없고, 그냥 천천히 시간을 들인 뒤, 과실을 수확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저쪽도 슬슬 움직일 때가 됐으니까.'
흉노의 천태선우, 아킬레스는 무기들과 함께 넘겨받았던 아버지의 조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하지만 중원을 점령하더라도 천자라는 칭호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
중원의 문화에 역으로 흡수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만 철저하게 지킨다면 원하는 모든 걸 마음대로 해도 좋았다.
아킬레스는 마르쿠스의 서신만으로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대강 짐작했다.
그 이후로도 아킬레스는 누나 소피아와 여러 번 서신을 주고받았다.
덕분에 지금처럼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중원을 공략하는 작전을 구상할 수 있었다.
연이은 승리로 부하들의 사기도 계속해서 높아져 가는 중이다.
이미 승리의 공식은 착착 완성되어가는 중이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남쪽에 틀어박혀 우왕좌왕하는 적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기주와 청주에 있는 선우들을 소집하라. 이제 슬슬 작전의 개요를 알려주겠다."
병주에 흩어져 있던 한의 잔당들을 이제 막 완전히 청소한 참이다.
드디어 다시 움직일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말에 부하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수확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이 개자식들이!"
왕망은 연이어서 올라오는 서신들을 읽자마자 갈가리 찢어 발밑에 내동댕이쳤다.
"머릿속에 든 거라고는 술과 여자밖에 없는 쓰레기들! 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로마의 힘을 빌리지 못하게 된 이상 이제 진짜로 한의 힘만으로 흉노를 토벌해야 했다.
하지만 30만의 병력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한 감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서쪽과 북쪽에서 지속적으로 유목민 오랑캐들의 움직임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북방으로 진입한 자들은 미끼일지도 모른다.
군대를 전부 이끌고 병주로 간 사이에 서쪽으로 적들이 밀고 들어오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안정적으로 수비를 하려면 최소 10만 이상의 방어 병력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여러 제후와 유력자들은 더 이상의 재산과 병력 내놓기를 꺼리는 중이었다.
왕망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한 이들의 태도에 머리가 아파져 왔다.
흉노가 3개 주를 차지하고 있는 게 얼마나 큰 위협인지 와닿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면 3개 주나 퍼먹었으니 만족하고 돌아갈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라도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천자라는 인간은 한술 더 떴다.
로마에서 천자라는 칭호를 버리고 일개 왕으로 내려오라는 말을 했다고 듣자마자 길길이 날뛰었다.
아예 흉노와 강화를 맺고 로마와 전쟁을 하겠다는 정신이 나간 소리까지 해댔다.
이 미친 소리를 잠재우느라 엄청나게 진땀을 뺐다.
심지어 아직도 그 마음을 다 버리지 않았는지 흉노와 정전협정을 체결하자며 끊임없이 간을 보는 중이었다.
'진짜로 갈아버릴까······.'
왕망은 요새 천자를 알현할 때마다 일어나는 충동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 왕조의 종말이 머지않았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날로 불안해져 가는 천자의 정신상태에 화룡점정을 찍는 서신이 날아든 건 바로 그때였다.
놀랍게도 로마의 황태녀가 보내온 친서였다.
왕망은 무엄하게도 천자에게 올려야 할 서신을 자신이 먼저 검열해 보았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였으나 알게 뭔가.
여기서 천자가 분노로 날뛴다면 그때는 진짜 폐위해 버리면 그만이다.
"어디 어떤 소리를 씨부려놨는지 볼까."
의외로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종이 한 장도 다 쓰지 않았을 정도로 짤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중원의 왕은 들으라. 유목민들의 반란으로 비단길의 통제가 힘에 부친다는 말을 들었다. 나 역시 비단길을 동방의 왕 한 명이 관리하기엔 무리가 크다고 판단하였다.
해서 왕중왕이자 세상의 주인인 로마의 황제가 직접 손을 쓰기로 하였다. 물론 우리가 직접 관리하면 좋겠으나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적절한 부족들을 물색해 관리를 맡기기로 하였다. 그러니 흉노가 비단길을 점령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 알고 안심하도록.>
"이런 미친······!"
왕망은 이번에도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다가 이게 천자에게 가야 할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손에 힘을 풀었다.
"이런 쓰레기들이······. 흉노가 비단길을 차지하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게 이걸 말한 거였나?"
앞으로 비단길은 자신들이 꿀꺽하겠으니 너넨 신경 끄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로마 대신 저곳을 통제하는 무리들이 통행세를 얼마나 받아먹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그야말로 나는 거짓말은 안 했다. 라고 볼 수밖에 없는 후안무치한 짓거리였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이걸 천자에게 가져다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너무나 쉽게 예상이 간다는 점이었다.
그냥 편지를 불태워버리고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다.
구겨진 편지를 들고 천자를 알현하기 위해 가는 왕망의 발길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기만 했다.
< [외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뜰 수 없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