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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클레오파트라의 한숨 (306/326)

  < [외전] 클레오파트라의 한숨 >

  로마에 머물 때의 클레오파트라의 하루 일과는 비교적 단순했다.

  파라오로서 정무를 볼 필요가 없으니 여유 시간이 굉장히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마르쿠스가 시간이 날 때는 아침에 여유롭게 그와 커피를 한잔하며 국내외의 정사를 논한다.

  그다음에는 동생 아르시노에와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을 즐겼다.

  로마는 외국이기는 해도 하도 오래 살았더니 이제 제2의 고향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파라오라는 자각은 있었다.

  아르시노에처럼 아예 로마에 눌러앉아서 로마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이집트의 여왕인 까닭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느낌이었다.

  마르쿠스와 로마에 관해 토론을 할 때면 그런 생각이 점점 더 진해졌다.

  이집트보다도 로마에 대해 더욱 빠삭해져 가는 자신을 자각할 때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표정이 왜 그래? 혹시 고민거리라도 있어?"

  클레오파트라의 마음을 꿰뚫어 본 마르쿠스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유심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성이 넘치면서도 자상한, 이상적인 남편의 상이다.

  예전에는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며 어느 정도 선을 긋는 느낌이었으나 요새는 그런 태도도 사라졌다.

  로마의 위대한 아우구스투스이니 더 이상 이집트의 여왕에게 말을 높여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둘 사이에 존재하던 어떤 벽이 사라진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아르시노에도 마르쿠스 말투의 변화에 굉장히 흡족해하는 기색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새삼 자신이 이 남자의 첫 번째가 아니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만약 그가 로마인이 아니라 이집트의 왕족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만의 남자로 만들었을 것을.

  "아니요.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집중을 못 했네요. 그런데 당신은 기분이 꽤 좋아 보이네요?"

  "당신도 듣지 않았어? 카토가 은퇴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는 말."

  "아, 그랬죠. 그런데 당신은 꽤나 진지한 얼굴로 카토도 이만하면 많이 버텼지. 물러날 때가 됐어. 라면서 은퇴를 예측하지 않으셨었나요?"

  "안 그래도 그 말 때문에 율리아에게 놀림 좀 받았다고. 솔직히 비슷한 나잇대의 의원들은 계속해서 은퇴하고 있고, 카토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별다른 이유가 없다고 봤었는데 의외였지. 덕분에 교수 자리도 알아보고 은퇴 선물로 자그마한 별장도 구해놓은 게 전부 쓸모없게 됐다니까."

  카토와는 클레오파트라도 몇 번 이야기를 한 경험이 있었다.

  뿌리 깊은 공화주의자인 그는 여왕이라는 존재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예의는 지키는 느낌이었으나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 받은 인상은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꼰대였다.

  금방 도태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마르쿠스만이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의 예상도 틀린 셈이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예상이 빗나갔다면서 그렇게 흐뭇한 표정이에요? 원래 당신의 예상은 절대 빗나가는 법이 없잖아요."

  "나도 일단은 사람인데 왜 예상이 빗나가지 않겠어. 미래의 사실을 예언하는 것과 그냥 예상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고. 그리고 이 정도는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 되는 상황이니 오히려 좋지. 카토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좋은 의미로 기대가 되거든."

  "그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의 적이 되긴 불가능하니···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다는 뜻이군요."

  "가능하면 좋은 친구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지금까지의 그는 솔직히 말해서 별로 신경쓸 가치가 없었으니까."

  적으로서도 동지로서도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저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예 사라진다면 곤란하니 남겨두었을 뿐.

  클레오파트라로서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의문이었으나 마르쿠스의 생각은 좀 다른 듯했다.

  어차피 로마의 내정 문제야 그녀와는 크게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녀는 자식들의 교육에 관한 일로 화제를 바꾸었다.

  딸들의 사랑이 극진한 마르쿠스는 기꺼이 클레오파트라의 의도대로 따라주었다.

  사실 이 문제야말로 클레오파트라의 머리를 가장 아프게 하는 주원인이었으나, 지금 이 장소에서는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

  아침의 담소 시간이 끝난 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는 일부러 타지 않았다.

  아침에 먹은 걸 소화 시킬 겸 천천히 걷는 게 습관이 된 까닭이다.

  이제 그녀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기에 완벽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몸을 많이 움직여야 했다.

  산책을 하면서는 여러 주제로 사색에 잠길 수도 있으니 별로 지루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혼자 산책하는 이 시간에 굉장히 깊은 상념에 잠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 전에 마르쿠스와 나누었던 이야기 때문인지 그녀의 생각은 단 한 가지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쓸 수밖에 없는 딸 아이에 관한 문제였다.

  그녀는 한 아이의 엄마일 뿐만 아니라 일국을 책임지는 여왕이기도 했다.

  딸 아이 역시 자신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될 신분이다.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교육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단순히 지식만 많아서는 안 된다.

  국제정세를 꿰뚫어 보는 안목과 적절한 균형감각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심혈을 기울여 딸에게 어렸을 때부터 영재교육을 시켜왔다.

  다행히도 그녀의 아이는 굉장히 총명한 편이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마르쿠스의 피까지 받았으니 멍청한 아이가 나올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학습의 성취도 역시 아르시노에의 딸보다도 조금 더 앞서는 게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점이 클레오파트라를 은근히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대로만 자란다면 자신의 뒤를 이어 훌륭한 이집트의 파라오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지금 그녀의 신경을 사정없이 긁어대는 건 결코 딸의 지식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클레오파트라 세레네! 또 이런 웃기지도 않은 조각상을 정원에 장식해두려는 거니? 당장 치우지 못해!"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꽤나 무거워 보이는 조각상을 안고 뒤뚱뒤뚱 걸어가던 여자 아이가 펄쩍 놀라 뒤로 넘어졌다.

  "깜짝 놀랐잖아요.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내가 분명히 말했지. 저 조각상을 집으로 가지고 오는 건 금지라고."

  "정원에 놔두는 게 아니라 제 방안에 놔두려고 한 건데요. 제 방을 어떻게 꾸미든 제 마음이잖아요. 아빠는 로마의 국익에 해가 되거나 반인륜적인 행동만 아니라면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마르쿠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이에서 나온 딸 아이는 이집트의 전통대로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을 받았다.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필로파토르와 구분하기 위해서 그녀는 클레오파트라 세레네라 불렸지만, 딸은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얼마 전 조각상 문제로 클레오파트라에게 혼쭐이 난 딸은 그대로 마르쿠스에게 달려가 아양을 떨었다.

  보아하니 딸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마르쿠스가 그대로 애교에 함락되어 버린 듯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이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를 용인해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얘야, 너는 내 뒤를 이어서 이집트의 파라오가 될 몸이란다. 알고 있지?"

  "네, 네. 당연히 알죠. 어렸을 때부터 하루에 열 번은 듣고 자란 말인데요."

  "그래. 그런데 그런 네가 이런···웃기지도 않은 행동을 하면 이집트의 신민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별로 아무 생각도 없지 않을까요? 전 오히려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우리 오라버니의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데요."

  "오라버니는 무슨 얼어 죽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인 클레오파트라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집트까지 저 말도 안 되는 조각상들을 들고 가겠다는 소리인가.

  말도 안 된다.

  그것만은 절대로 허용해줄 수 없었다.

  "나는 대체 네가 그 사람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도무지, 먼지만큼도, 이해를 할 수가 없구나. 게다가 그는 이미 아내도 있는 몸이란다. 그런데 네가 뭐 어쩌려는 생각이니? 설마 누이의 남편을 유혹하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엄마는 이해를 못 하시네. 제가 오라버니를 사모하긴 하지만 그건 성적으로 어떻게 하고 싶단 마음이 아니라고요. 그걸 다아니까 소피아 언니도 제 행동을 묵인해주는 거라고요."

  "묵인해주는 게 아니라 널 감금할 명분이 없기때문에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는 걸로 보이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뼈있는 한 마디에도 딸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조각상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조각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옥타비아누스.

  소피아의 남편이 되는 로마 최고의 행운을 부여받은 남성의 이름이었다.

  딸은 대체 무슨 바람이 든 것인지 몇 년 전부터 옥타비아누스에게 완전히 푹 빠져 있었다.

  아니, 그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검투사에 열광하는 남자들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장인들을 불러서 옥타비아누스의 조각상을 주문 제작하지를 않나 자신의 방에는 옥타비아누스의 그림을 잔뜩 장식해두었다.

  심지어 침상에 누우면 옥타비아누스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천장에 그의 모습을 새겨두기까지 했다.

  딸의 방에 들어갔을 때 받은 경악은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르쿠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혼잣말로 빠순이 어쩌고 하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긍정적인 의미는 아닌 게 확실하다.

  게다가 딸 아이의 문제는 이걸 조직적으로 한다는 데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분명 여자가 보기에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미청년인 건 맞았다.

  그래서 그를 남몰래 흠모하는 귀족가의 여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딸 아이는 이런 여성들을 하나로 규합해 옥타비아누스 오라버니 후원회라는 해괴한 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조각상과 그림들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원로원 의사당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옥타비아누스의 모습이 보이면 꺅꺅거리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자신의 딸이 저러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지어 이 사실을 처음 말해준 게 다름 아닌 옥타비아누스 본인이라는 점이 수치심을 몇 배로 끌어 올렸다.

  '솔직히 말해서 최근에는 조금 무서울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따님을 조금만 자제시켜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정중하게 요청을 하는 옥타비아누스 앞에서 그녀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다.

  이야기해 보면 대화도 잘 통하고 자신에게 예의도 깍듯하게 차렸는데 이상하게 뭔가가 꺼려졌다.

  인간적인 상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부분이 좀처럼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딸은 오히려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툴툴거렸다.

  "옥타비아누스 오라버니의 멋짐을 모르다니 어머니가 참 안타깝네요."

  "그놈의 오라버니 소리는 내가 들으면 두드러기가 나려고 하니 입 밖에 꺼내지도 말거라."

  "그럼 오라버니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나요? 이제 언니와 결혼했으니 저에게도 진짜 오라버니나 마찬가지인데."

  "너 설마···최근에도 원로원 의사당 앞에서 다른 여자애들과 같이 추태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추태라니요. 건전한 응원인데. 저는 구별이 확실한 사람이라 절대로 선을 넘지는 않는다고요. 육체적인 접촉은 절대 금지가 원칙이에요."

  이 이상 이야기를 나누면 혈압이 올라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클레오파트라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도로 저택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떻게 자신의 배에서 저런 아이가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하소연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에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았다.

  이럴 때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건 역시 동생밖에 없다.

  아르시노에의 저택에 당도한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고충을 토로했다.

  위로든 비웃음이든 어떤 말이라도 좋다.

  그냥 이 사태의 부조리함을 공감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괜찮았다.

  그런데 동생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을 들었다.

  "아···그쪽 집도 별다를 게 없구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쓴웃음을 짓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는 클레오파트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 [외전] 클레오파트라의 한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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