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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황가의 신들 (302/326)

  < 301. 황가의 신들 >

  301.

  흔히들 시간의 흐름을 흐르는 물에 비유한다.

  잠깐 눈 깜빡할 사이에 붙잡을 수조차 없이 저 멀리 흘러가버린다는 점에서 확실히 시간은 흘러가는 물과 같다.

  마르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은 지도 벌써 몇 년,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는 이제 옛기억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 시대를 구시대, 로마가 한걸음 더 발전하기 위해 웅크리고 있었던 과도기라고 불렀다.

  근래 수 년 동안 로마인들의 삶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졌다.

  나이가 어느정도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혼란스러워 하기도 했으나,젊은 사람들의 인식은 또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교육제도와 발전된 삶에 익숙해진 이들은 윗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원로원 체제에 대한 미련도, 애착도 없었으며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로마를 이끌어나간다는 데에 어떠한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원래부터 복잡한 정치 문제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누가 지도자가 되든 자신들을 잘 살 수 있게만 해준다면 그게 바로 위대한 정치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르쿠스와 카이사르는 시민들에게 있어서 로마 역사상 최고의 영웅들이었다.

  이 둘의 입지를 더욱 공공히 만든 건 인쇄기술의 발달이었다.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의 북방 전기와 자신의 동방 정벌을 책으로 펴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 책들을 아예 새롭게 만든 교육시설의 교재로 활용하였다.

  이로서 두 사람이 전쟁으로 쌓아올린 업적들은 영웅서사시처럼 계속 로마인들에게 회자되었다.

  여기에 마르쿠스가 전면에 등장하기 전과 후의 로마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설명하는 책들도 우후죽순 쏟아졌다.

  식량의 생산량과 세수가 얼마나 크게 증가했는지 전부 기록으로 남아 있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새롭게 교육을 받고 있는 젊은 세대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마르쿠스의 신봉자로 자랐다.

  굳이 허위 정보로 선동이나 세뇌를 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확실히 박아넣어 줘도 충분했다.

  시민들은 이제 조금이라도 위대한 두 지도자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참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마르쿠스는 이미 로마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꾸준한 신격화 작업 덕분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사건은 카이사르의 암살 미수 사건이 터졌던 해에 일어난 이집트의 화산 폭발 사건이었다.

  마르쿠스는 이미 나일강의 범람 주기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맞췄던 선례가 있었다.

  그러나 화산 폭발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나일강이 범람한다, 안한다는 사실상 이지선다에 가깝기 때문에 정말 극한까지 운이 좋다면 맞출 수도 있는 문제였다.

  반면 화산이 터진다는 건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마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었다.

  그래도 마르쿠스는 무조건 자신의 말대로 될 거라고 확언했다.

  결과는 당연히 예언대로 됐다.

  화산은 폭발했고 일시적으로 이집트에는 가뭄이 찾아왔다.

  마르쿠스는 이미 그걸 완벽히 예상하고 이집트에 식량 비축을 지시했으며, 이집트에서 당분간 밀 수입량이 줄어들 테니 다른 곡창지대에서 수급량을 늘렸다.

  다행히 방대한 흑토평야를 손에 넣었고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생산량도 폭증하고 있어 로마는 식량부족 사태를 겪지 않아도 됐다.

  로마 자체의 생산량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증가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진 뒤로 로마에서 마르쿠스의 인식은 더 이상 상승할 수 없는 곳까지 치솟았다.

  화산 폭발의 시기를 정확히 맞추고 그에 대응해 선제적으로 대비책을 마련해두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지혜가 뛰어나다거나 박식하다거나 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원로원에서조차 마르쿠스에게는 신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정도였다.

  동방에서 열린 학자들의 국제 학술대회 이후로 학자들마저 마르쿠스를 지식의 신이라고 공표했다.

  율리우스-리키니우스 가문의 신성성은 이제 확고부동한 정설로 굳어졌다.

  지배자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살아 있는 신을 자처하는 게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마르쿠스가 살아있는 신으로 대우를 받기 시작하자 다른 왕조들의 정통성은 내려가기 시작했다.

  특히 본의 아니게 큰 피해를 본 건 이집트의 파라오였다.

  지금까지 파라오들은 살아있는 신의 화신이라고 했으나 마르쿠스 정도의 권능을 보여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신의 핏줄이라고 칭한 다른 부족장들이나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신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는 미래를 볼 수 있다는데 왜 과거 우리의 왕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지?"

  라고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의 말이 공공연히 거리를 떠돌았다.

  로마 시민권을 얻은 이들은 코웃음을 치며 과거 자신들의 위에 군림했던 왕들을 비웃었다.

  "이유가 뭐겠어. 그들은 진짜 신이 아니었던 거지. 오히려 신의 이름을 참칭하면서 거짓으로 사람들을 현혹했기 때문에 진정한 신이 다스리는 국가에 편입된 거 아니겠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제일 난감해진 건 클레오파트라였다.

  어차피 다른 지역의 왕조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몰락한 왕조의 왕들이 조롱을 받든 말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엄연히 아직 존재하고 있는 왕가였단 점이다.

  이집트에서 역대 파라오들에 대한 불신이 솟구치는 건 로마에겐 몰라도 그녀에겐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르시노에야 이집트의 파라오 자리를 그냥 적당한 감투 정도로만 생각했으니 별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클레오파트라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머리를 굴려서 지혜를 짜낸 그녀는 한 가지 미봉책을 떠올렸다.

  어차피 자신 다음대의 파라오들은 전부 마르쿠스의 핏줄이 될 것이다.

  우선 마르쿠스의 정식 후계자가 파라오의 명칭을 겸한다.

  그 아래에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의 자식들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부여받는 식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의 자식 대부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중요한 건 지금 상황을 얼버무리는 것이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의 신관들은 마르쿠스를 살아있는 아문-라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지금까지의 파라오들은 아문-라의 화신이지만 마르쿠스는 아문-라 그 자체이기에 더 격이 높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니 다른 파라오들이 마르쿠스만큼의 권능을 보이지 못한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이집트에만 얽매이는 게 아니라 온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직접 현신한 아문-라였다.

  그 때문에 현 파라오들인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를 취한 것이며, 그 핏줄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다스릴 이집트는 앞으로도 번영을 이어갈 것이다.

  이런 그럴싸한 선전문구를 대대적으로 알렉산드리아와 멤피스에  홍보했다.

  "이건 꽤나 좋은 생각이로군."

  마르쿠스 역시 클레오파트라의 선전책을 꽤나 높게 평가하고 적절히 힘을 실어주었다.

  단순히 두 사람의 정당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게 효과적인 동화정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는 자연스럽게 중앙집권으로 흘러갔다.

  원로원 내부의 정치판도도 급격하게 변했다.

  그동안 원로원의 터주대감으로 활약한 키케로가 집정관과 총독의 임기를 끝마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해 버린 것이다.

  그동안 파란만장한 정치생활을 보내온 키케로는 이제 조금 쉬면서 자신의 특기인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싶다고 밝혔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키케로는 이전부터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대량생산 되는 것에 엄청난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써낸 책을 수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전부 읽을 수 있게 됐단 사실이 그의 창작욕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키케로가 책을 낸다면 당연히 앞장서서 인쇄를 해주겠노라 마르쿠스의 약속도 있었다.

  마르쿠스의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키케로 님의 그간 노고를 기리는 의미에서 약속대로 법률자문단이라는 조직을 새롭게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직접적인 실권은 없는 명예직이긴 해도 키케로님께서 이곳의 초대 위원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여기에 키케로를 위해 대대적으로 은퇴식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그가 지금까지 펴낸 서적 중 학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들을 대대적으로 인쇄해 소개하는 자리도 가졌다.

  로마의 살아있는 신인 마르쿠스가 키케로의 은퇴식에서 직접 지금까지 그가 이룬 업적을 칭송했다.

  "키케로는 위대한 법률가이자 웅변가, 그리고 최고의 문학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로마 역사상 이만큼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던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키케로는 저의 가장 소중한 친우이자 정치적인 이해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이 위대한 정치가가 로마를 위해 헌신한 일들을 어떻게 다 일일이 열거할 수 있을까요. 로마 시민의 대표로서, 그리고 원로원의 최고 의원으로서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

  그 뒤로도 한참이나 더 이어진 연설을 끝내고 마르쿠스는 키케로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훈장을 수여해주었다.

  독수리 문양의 훈장이긴 했으나 전쟁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자들이 받는 게 훈장과는 바라보는 방향이 달랐다.

  무로 로마에 이바지한 이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로마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의미가 담긴 형태였다.

  이 훈장의 최초 수여자가 된 키케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펑펑 눈물을 흘린 그는 마르쿠스의 배려에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해서 건넸다.

  평소 그가 사용하는 유려한 표현이나 고풍스러운 수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성대하게 은퇴식을 마친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카이사르의 장인인 피소도 정계를 떠났다.

  그는 키케로처럼 대우를 받으며 떠나진 못했지만, 그래도 원로원의 중진으로서 충분한 예우를 누리며 자리를 내려놓았다.

  나이가 지긋한 의원들이 하나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떠난 셈이다.

  아직도 쟁쟁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의원은 카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의원들이 하나둘 정치판을 떠나자 씁쓸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지금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로마에서 과거의 원로들이 핵심요직을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도 많았다.

  카토는 나이 자체는 카이사르보다도 어렸기에 아직 괜찮았지만, 대다수의 나이든 의원들은 알게 모르게 압박을 받기도 했다.

  의외로 원로원을 떠난 의원들이 더욱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즐겁게 노년을 보냈기에 혹하는 마음도 들었다.

  마르쿠스는 은퇴한 의원들은 충분한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배려해주었다.

  심지어는 너무 청렴하게 살아 재산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의원들에게는 따로 별장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나이든 의원들이 하나 둘 원로원에서 떠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젊고 유망한 정치인들이 꿰찼다.

  이건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차근차근 줄어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새롭게 원로원에 들어온 이들은 마르쿠스의 신봉자였으며 옥타비아누스와 소피아를 떠받드는 이들이었다.

  개중에는 당연히 아직 자리에 버티고 있는 나이든 원로들과 사상적으로 충돌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미 주도권을 잃어버린 중진들은 새롭게 들어오고 있는 시대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의원님께서는 로마 은행에서 새롭게 발행될 채권이 금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계십니까?"

  "음···그게······."

  "모르고 계시군요. 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기초적인 경제적 소양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 정책과 말씀은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이미 너무 달라져 버린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중진들은 갈수록 젊은 청년들의 공세를 감당하기 버거워했다.

  은퇴하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만 갔고, 새롭게 충원되는 의원들의 평균 연령을 점점 내려갔다.

  로마는 이제 완벽하게 구시대로부터 작별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이 흐름에 완벽히 쐐기를 박는 사건이 터졌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인 카이사르가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 301. 황가의 신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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