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 황가의 신들 >
300.
마르쿠스는 남아도는 시간을 그저 휴식과 가족 간의 교류만으로 다 보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여유가 있을 때가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구상으로만 그쳤던 이탈리아 반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수도 로마나 다른 대도시가 아닌 지역의 사람들은 정말로 만족할만한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시간만 따라준다면 이탈리아 반도만이 아니라 갈리아와 히스파니아까지 직접 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는 그럴 틈이 없었다.
기껏해야 로마나 브룬디시움의 시내를 돌아보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런 대도시권의 발전은 이미 몇 번이나 눈으로 확인했다.
물론 다른 변두리 마을의 동향도 아예 파악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생산량이 대략 몇 할이나 증가했는지, 자영농들의 비율은 어느 정도로 올라왔는지, 그런 세부적인 데이터는 전부 보고서로 확인 가능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한 번쯤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사람들의 삶을 보고 싶었다.
안 그래도 날을 한 번 잡아보려고 했는데 얼마 전 다나에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마음을 굳혔다.
결심을 했으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마르쿠스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곧바로 일정을 수정한 그는 옥타비아누스와 소피아를 대동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쭉 돌아보는 여정에 나섰다.
로마의 현 최고 권력자가 움직이는 것이다 보니 상당한 수의 행렬이 뒤를 따랐다.
원래 호위병력 몇몇만 대동하려고 했으나 위치가 위치다 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당초 계획보다 조금 더 많은 무장병력이 뒤를 따르는 형태가 됐지만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마르쿠스는 우선 부유한 전원 지역으로 이름이 높은 캄파니아 지역부터 들렸다.
폼페이같이 유명한 도시들이 있는 지역이었으나 그런 곳에서는 하루 정도만 체류하는 걸로 일정을 잡았다.
대신 국유지를 임대받고 농업에 종사하는 자영농들이나 새롭게 생긴 촌락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로마 내에서도 상세한 보고를 들을 수 있을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직접 오실 필요가 있을까요?"
제대로 닦여있지 않은 길 위로 말을 몰고 가는 도중 옥타비아누스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야외 활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는 지금이라도 폼페이의 아늑한 저택에서 피로를 풀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마르쿠스가 같이 가자고 해서 오긴 했지만, 앞으로 캄파니아만이 아니라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서 이탈리아 반도를 빙빙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띵해 오는 느낌이었다.
마르쿠스가 가볍게 웃으며 옥타비아누스의 옆에 나란히 말을 몰고 있는 소피아 쪽을 돌아보았다.
"너도 같은 생각이니?"
"저야 아버지랑 같이 여행 온다고 생각하고 그냥 따라온 거라 아무런 불만 없어요."
"아니, 소피아 님. 저도 불만이 있다고 말한 건 아닙니다. 그냥 이런 것들은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간접적으로 다 알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사소한 의문을 제기했을 뿐······."
"그러니까 결국 오지 않아도 되는 곳을 굳이 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 아니야?"
소피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장난스럽게 쏘아붙이자 옥타비아누스는 푹 한숨을 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마르쿠스가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옥타비아누스 말이 맞긴 하다. 사실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한지는 굳이 내가 와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캄파니아 지방의 현황을 상세히 알고 싶었다면 폼페이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어도 됐을 테고."
"그럼 굳이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뭔데요?"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비슷하지만 다르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마르쿠스는 품속에서 캄파니아 지방의 마을들을 표시된 지도를 꺼내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보아라. 여기 표시된 지역의 마을은 약 20년 전에 새로 만들어진 곳이다. 국유지를 농민들에게 임대해 주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곳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워낙 토양이 좋아 사람들이 계속 이주해왔지. 지금은 아예 수백이 훌쩍 넘는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이게 그 마을에 관한 상세한 자료다."
소피아와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에게 건네받은 종이를 세심하게 살폈다.
구성원들의 성비는 물론 대략적인 연령 분포대까지 적혀 있는 상세한 보고서였다.
"4년 단위로 마을의 생산량까지 조사해 뒀네요? 이 정도면 이 마을의 모든 게 다 적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는데요."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도 위로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법이지."
"······?"
소피아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르쿠스가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먼 훗날이 되겠지만 너희 둘은 내 다음으로 이 제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는 게 중요하지 않겠니?"
현명한 두 사람은 마르쿠스가 하고자 하는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너무 자료와 수치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말씀이로군요."
"그래. 물론 지도자가 너무 감성적인 영역에 치중하면 암군이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인간미가 없어도 안 돼.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지."
"명심하겠습니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을 직접 본다면 보다 현실적인 정책을 입안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 그리고 잘난 듯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 아무래도 너무 서류 더미에만 파묻혀 있다 보면 초심이란 게 흐트러지는 법이니까. 한 번쯤 이렇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있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은 이전부터 했었어."
정치인들은 일을 오래 하면 할수록 점점 대국적인 면만 바라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지도와 지표만을 보게 되고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시기가 온다면 소름 돋을 정도로 태연하게 잔혹한 결정을 내릴 때도 있게 된다.
적어도 자신의 결정에 변하는 게 단순한 국가의 지표가 아니라 실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라는 걸 실감할 수만 있다면, 보다 큰 책임감을 지니고 정무에 임할 수 있다.
마르쿠스가 마을의 입구에 도착하자 아담한 규모의 목초지가 눈에 들어왔다.
가축들을 돌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르쿠스의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냥 딱 봐도 신분이 높은 사람이 방문했다고 여긴 사람들이 다수였으나, 몇몇은 마르쿠스의 얼굴을 알아본 듯 보였다.
건장한 중년 남성이 허겁지겁 달려와 이마를 땅에 박았다.
"호, 혹시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 님 아니십니까?"
"지금은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라고 한다네. 그런데 용케도 내 얼굴을 알아보는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마르쿠스 님과 카이사르 님이 개정한 농지법 덕분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요. 그 전까지는 로마에서 빈민가를 전전하며 무료배급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버티던 무산자였습니다."
"아, 그랬나?"
마르쿠스는 연신 고개를 숙이는 중년 남성을 보고 있자니 묘한 감상이 들었다.
그가 농지법을 통과시켰던 건 거의 20년이 지난 과거였다.
과거에 뿌렸던 씨앗들이 훌륭하게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었다.
감사를 표하는 건 중년 남성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이라며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데려왔다.
아내 역시 마르쿠스의 발에 입을 맞출 기세로 머리를 조아리며 연거푸 감사의 말을 입에 담았다.
"언제고 꼭 로마로 가서 저희들이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전하고 싶었습니다."
"너무 그러지들 말게. 난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그때까지는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기도 했죠. 마르쿠스 님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로마의 빈민가에서 희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아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고 자식들도 태어날 수 없었겠죠."
"나는 그저 계기만 주었을 뿐 이만큼 가정을 일군 건 전적으로 자네가 노력해 얻은 결과 아니겠는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년 남성은 이곳의 설립부터 함께 해온 마을의 대표격이라고 했다.
그는 로마나 동방에서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마르쿠스를 대하는 태도에서 존경심이 묻어나왔다.
급기야는 자신이 직접 마을을 안내해주고 싶다고 나서더니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까지 속속들이 설명해주었다.
"이곳의 구성원들은 사실 대부분이 로마에 있던 빈민계층이었습니다. 저처럼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기 데시무스도 그렇고 반대쪽 집에 살고있는 누메리우스 가족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자네들 같은 사람들을 구제해주기 위해 통과된 법안이었네. 자네들도 처음부터 빈민계층이었던 건 아니지 않나?"
"예. 원래 할아버지 대까지는 저희도 땅이 있는 농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재산이 될만한 것들은 다 팔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땅마저 잃어버리게 된 거죠. 그래도 지금은 그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는 마르쿠스 님에게 삶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르쿠스는 흐뭇하게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마을을 쭉 둘러보았다.
뒤를 따르는 소피아와 옥타비아누스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사람들의 엄청난 환영을 뒤로한 채 마을을 벗어난 마르쿠스는 소피아와 옥타비우누스를 돌아보았다.
"방금 거기서 무엇을 보고 느꼈느냐?"
"예! 역시 실제로 사람들의 생생한 감사를 접하는 건 로마의 저택에서만 있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한 아버지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저도 그렇게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어요."
"그게 전부라면 50점인데······."
"예?"
천천히 말에 오른 마르쿠스는 뒤를 따라오는 소피아에게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말해주었다.
"물론 그들에게 감사를 받은 건 나 역시 기뻤다. 보람차기도 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해야겠다는 책임감도 들었지. 그리고 동시에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희열도 느꼈다."
"희열이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수없이 많은 계산을 거쳐 통과된 법안이 이렇게 실제로 효과를 내지 않았느냐. 게다가 그걸 내 눈으로 확인했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된다고 상상하면 오죽 재미있겠느냐."
"그··· 분명 아까 전까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더욱 강한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소피아는 재미라는 단어가 그리 마음에 들지만은 않는 듯 보였다.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오히려 마르쿠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가지는 절대 모순이 아니란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말로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내 개인적인 지론이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내 백성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겠지만, 거기에서 참을 수 없는 재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 또한 군주의 숙명이다."
"으음···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도 같은데······."
"그래. 단순히 백성들을 위한다는 마음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그 누군들 성군이 되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그런 이상주의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한계가 오게 되어 있다.
사람의 인내심은 무한하지 않고, 능력은 유한한 법이니. 올바른 가치관과 그걸 뒷받침해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나라를 움직이는 걸 즐길 수 있는 담력을 갖춰야 한단다. 너희 둘은 충분히 그럴 자질이 있어.
"
소피아와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의 조언을 되새기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먼 훗날, 설령 그 날이 오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새겨둬야 할 제왕의 마음가짐이다.
마르쿠스는 믿음직한 두 사람을 향해 웃어주고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앞으로 돌아봐야 할 지역이 많으니 뒤처지지 말고 따라오거라."
소피아와 옥타비아누스가 눈을 빛내며 한목소리로 답했다.
"예. 어디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 300. 황가의 신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