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황가의 신들 >
291.
로마의 귀족들은 연회와 만찬을 사랑한다.
그들은 축하할 무언가가 있다면 습관적으로 연회를 열고 호화로운 식사를 제공했다.
가문의 경사를 두고도 인색하게 굴면 쪼잔하다는 시선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관습이었기에 옥타비아누스도 성대한 연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이 그를 온순하다고 여기는 건 바라는 바였지만, 격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건 금물이다.
저녁 만찬에 나오는 요리들은 로마의 귀족들조차 쉽게 보지 못했던 초고급 요리들로 구성됐다.
마르쿠스의 호텔에서 주방을 총괄하는 총요리장이 직접 식사를 주관했기 때문이다.
초대된 가문의 면면만 보더라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했다.
코르넬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발레리우스, 리비우스 등등 로마에서 힘 꽤나 쓴다는 명문 씨족들의 유력인사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연회를 주최한 옥타비아누스는 주홍색 비단으로 꾸민 멋들어진 토가를 입고 손님들을 맞았다.
"훌륭한 비단이로군요. 한나라에서 들여온 겁니까?"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데 일가견이 있는 레피두스가 옥타비아누스와 악수를 나누며 물었다.
"아니요. 이건 동방에서 생산된 비단입니다."
"대단하군요. 이제 이 정도 품질의 비단을 만들 수 있다니 저도 몇 벌 구해봐야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실력 있는 장인들에게서 직접 받아다 드리겠습니다."
"그래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레피두스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귀빈석은 다해서 열 두 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식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 정도란 뜻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귀빈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사르의 총애를 받으며 무섭게 떠오르고 있는 정치가 청년 브루투스, 카이사르의 장인인 피소, 카토의 저격수로 명성을 다시 떨치고 있는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카토는 부르지 않았나?"
"자리를 빛내주시라는 초대를 보냈으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정중히 거절하셨습니다."
"고지식한 자라 이런 자리는 그리 달갑지 않았겠지. 사람이 조금이라도 융통성이 있어야 하거늘."
옥타비아누스는 별다른 대꾸없이 예의바른 미소로 키케로를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어차피 옥타비아누스도 카토가 초대에 응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카토 역시 옥타비아누스가 진짜로 자신이 올 거라 기대하고 초대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눈치 좋게 적당히 빠져준 것이다.
만약 진짜로 카토가 여기에 왔다면 키케로와 한바탕 논쟁을 하며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놓았을 게 뻔하다.
옥타비아누스는 포도주를 더 내오라고 하인들에게 이르고는 슬슬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의자는 전체적으로 U자를 이루는 형태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 중 가운데에 해당하는 자리에 바로 오른쪽에 앉자 브루투스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상석을 비워두셨네요. 혹시 카이사르 님이 오시기로 하신 겁니까?"
"아니요. 애석하지만 카이사르 님은 공무가 너무 바쁜 관계로 함께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대신 그분께서 제 취임을 축하하는 시문을 써서 보내주셨지요."
"그러면 저 자리는 누구의 자리입니까?"
"카이사르 님을 대신해서 소피아 님이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대답에 납득한 사람들은 다시 태연히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술맛에 칭찬을 늘어놓았다.
얼마 뒤 소피아가 자신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자리에서 직접 일어난 옥타비아누스가 그녀를 상석으로 인도하자 중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흐뭇한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연하겠지만 소피아를 부르고 그녀를 옥타비아누스의 바로 옆 상석에 앉힌 건 전부 계산된 행동이었다.
소피아는 자신이 직접 연 행사가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타 귀족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직접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그만큼 옥타비아누스와 관계가 친밀하다는 걸 은연중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모두 참석하신 듯 하니 이제 식사를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신호를 보내자 하인들이 귀족들조차 처음보는 요리들을 그릇에 담아 내왔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트레보니우스 주방장의 회심의 신작들입니까? 벌써부터 군침이 돕니다."
음식들이 상 위로 차려지자 레피두스가 자연스럽게 의자에 기대어 누웠다.
로마에서도 알아주는 부를 가진 그는 틈만 나면 호텔에서 최고급 만찬을 즐기는 걸로 유명했다.
팔레르눔 백포도주와 함께 첫 번째 코스로 나온 장어 요리를 맛 본 돌라벨라가 입을 떡 벌렸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맛입니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은데 입안에 감칠맛이 싹 도는 것이······."
사람들의 감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메인 요리인 육류요리를 맛본 브루투스는 아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지금까지 제가 먹어온 고기들은 가짜 고기였나 봅니다. 이런 요리법은 처음 보는데 대체 어떻게 만든 걸까요?"
이 시대에는 있을 리가 없었던 소뼈를 고아만든 소스를 끼얹은 티본 스테이크다.
굽기 전에 후추와 소금을 뿌리고 각종 향신료로 맛과 향을 한층 더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온갖 고급 요리를 접해왔던 귀족들이라고 해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소피아가 최상의 키오스산 적포도주로 입을 행구며 짤막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상당수의 조리법은 아버지께서 주방장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트레보니우스 주방장이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맛을 완성해내는 거죠. 이 요리도 마찬가지고요."
"허허···마르쿠스 님은 요리에도 능통하신 겁니까?"
"아버지가 못하시는 걸 찾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군요.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하하."
마르쿠스가 이제와서 로마에 존재하지 않았던 다양한 요리법을 알고 있다고 놀라는 이는 없었다.
이어서 지금까지는 한 번도 맛본적이 없던 다양한 후식을 만끽한 귀족들은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제가 마치 올림포스에 올라 신들의 만찬에 참여한 기분입니다."
레피두스가 크림이 들어간 마카롱 비스무리한 디저트를 입으로 가져가며 행복에 겨운 신음을 흘렸다.
키케로조차 음식들에 대한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
"진정한 암브로시아라는 건 이런 요리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군."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풀어지자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대화도 유쾌해졌다.
귀족들은 주로 옥타비아누스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할 것인지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 옥타비아누스 님은 지금 당장 원로원을 감찰할 마음은 없다는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젊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바로 올랐다고 권한을 휘두르는 건 좀 꼴사납게 보이지 않습니까. 건방지다는 느낌도 풀풀 풍기고요."
"음···역시 옥타비아누스 님은 생각이 깊으십니다. 처음에는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역시 기우였나 봅니다."
코르넬리우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브루투스가 흡족하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르쿠스 님과 카이사르 님께서 추천하신 인재입니다. 아무렴 두분께서 그런 걸 고려 안하셨으려고요."
"내심 걱정했던 제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하하하!"
"사실 뭐든지 적정선을 지키는 게 중요하죠. 현명한 옥타비아누스 님이라면 너무 고지식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풀어지지도 않게 적절히 선을 잡아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정치인과 돈은 사실 절대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다.
아무리 청렴하게 살아온 이들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돈을 챙기는게 보통이었다.
로마의 현 정치구조상 어느 정도의 일탈은 눈감아주는 편이기도 했다.
사실상 돈을 챙기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이 새로운 감사조직이 어느 선까지 사람들을 단속하느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귀빈석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막대한 돈을 굴리는 거부였으니 더욱 신경이 쓰였으리라.
당연히 옥타비아누스도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상세한 감찰규정은 다음 달 내로 모든 의원들에게 전달될 예정입니다. 말씀대로 너무 엄격하게 의원님들을 단속할 마음은 없습니다. 저도 어쨌거나 원로원 의원이니까요."
옥타비아누스가 확실히 보장을 해주자 귀빈들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서렸다.
그들의 반응을 확인한 옥타비아누스가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용인해준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차후 규정을 보시면 아실 테지만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하되, 대놓고 뇌물을 받거나 자영농들을 착취하는 행위는 절대 엄금할 겁니다. 그런 분들은 의원직 박탈까지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으음···그 정도야 뭐."
"어쨌든 감찰권을 무기로 휘두르지 않겠다는 결정만으로도 한 시름 놓은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건 규정에 입각해 처리할 예정이니까요."
민감한 이야기가 일단락 되자 옥타비아누스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베르길리우스를 안으로 들였다.
최근 로마에서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그다.
로마와 원로원을 드높이는 시문은 귀빈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분위기가 다시 풀어지고 술이 들어가자 의원들의 얼굴도 조금씩 더 들뜬 것처럼 보였다.
포도주를 좋은 물로 희석해서 마셔도 술은 술이다.
많이 마시면 결국에는 취하는 법인지라 연회의 끝무렵에는 꼭 취기가 오르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오늘은 살짝 긴장된 마음을 품고 왔던 의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긴장이 풀어지자 역으로 술을 마음껏 들이키는 사람들이 나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이 들어간 사람은 평소보다 더 용감해지기 마련이다.
원래 소피아에게 내심 마음이 있었던 필리푸스가 그녀에게 농을 던졌다.
"소피아 님도 이제 혼기가 차셨는데 혹시 마르쿠스 님께 들은 말씀은 없습니까?"
"글쎄요. 아버지께서는 제 의사를 존중해줄 거라고 하셨는지라."
"그렇다면 소피아 님이 마음에 품은 사람이 곧 리키니우스 가문의 사위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이로군요."
자리에 둘러앉은 귀빈들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어느 정도 눈치가 있는 자라면 옥타비아누스가 리키니우스 가문의 사위에 가장 가깝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필리푸스도 그 점을 알고 있긴 했으나 순순히 물러날 마음이 없었을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모자란 것 하나 없이 자란 명문 귀족 태생인 자신이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밀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아직 로마에는 소수나마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가능하다면 혹시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필리푸스의 말은 그런 욕망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소피아는 필리푸스의 속내를 전부 읽었음에도 전혀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술기운으로 살짝 붉어진 필리푸스의 얼굴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감미로우면서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흥미로운 질문을 하시네요. 혹시 입후보하실 마음이라도 있으신가요?"
"······!"
옥타비아누스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화기애애했던 조금 전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서늘한 긴장감이 모두의 주변을 팽팽하게 휘감기 시작했다.
< 291. 황가의 신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