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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황가의 신들 (291/326)

  < 290. 황가의 신들 >

  290.

  로마의 감찰관은 실질적인 권력은 집정관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감찰관에 취임하는 건 보통 집정관을 경험한 이였으며, 안팎으로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집정관에 오르는 것보다도 더 명예로운 일이 바로 감찰관에 취임하는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맡게 된 감사조직의 수장은 사실 감찰관보다도 더 큰 실권을 지닌 자리였다.

  명목상 감찰관의 권한을 쪼개 놓았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각 부서에 국한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부서를 총괄하는 옥타비아누스는 마음만 먹으면 종래의 감찰관이 하던 일을 모두 혼자서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종래의 감찰관은 복수의 인원이 맡았지만 지금은 옥타비아누스가 홀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집정관과 원로원도 딱히 그를 견제할 수단이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롯이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두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토록 강력한 권한을 손에 쥔 옥타비아누스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게 될지 기대 반, 불안함 반으로 지켜보았다.

  현명한 옥타비아누스는 강력한 권한을 얻었다고 바로 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거만한 모습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키케로나 피소 같은 나이 지긋한 원로들을 방문해 조언을 구하기도 하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심지어 자신의 취임에 그토록 반대한 카토를 찾아가 인사를 올리기도 했다.

  세간에서 보기에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공식 행사에서 언제나 소피아의 뒤에 찰싹 붙어다니는 그를 유약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소문의 당사자 본인은 그런 평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그저 언제나처럼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공연을 보거나 학자들과 교류를 가지며 토론회를 즐겼다.

  그리고 공무를 보는 시간대가 아닌 대부분의 시간은 언제나 소피아가 그의 옆에 있었다.

  "보면 볼수록 교묘해."

  "뭐가 말입니까?"

  소피아가 체스판 위에 딱 소리가 나도록 기물을 올려놓았다.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원로원의 겁쟁이 의원님들이 널 순한 양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있잖아."

  "그렇게 하라고 조언하신 분은 지금 제 앞에 앉아 계신 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그랬을 거면서."

  "그건 그렇죠. 덕분에 제 유약한 인상이 한층 더 강해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기물을 판 위에 전부 올려놓고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원로원의 의원들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미소였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업무를 보긴 해야 하잖아."

  "제 권한은 어차피 마르쿠스 님과 카이사르 님이 대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인사가 아닌 감찰 쪽에만 신경을 쓰려고 합니다."

  "감찰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위치인 건 알지?"

  "그러니까 제가 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인식을 최소로 하기 위해 지금 이렇게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고요."

  "하여간 아버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뒤에서 암약하는 데는 도가 텄다니까. 차라리 할아버지가 더 알기 쉽게 보일 정도야."

  소피아가 여왕 앞의 폰을 두 칸 앞으로 전진 시키며 말했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자신의 여왕 앞의 폰을 마주 두 칸 전진 시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르쿠스 님과 가장 닮은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사람들은 나와 어머니를 자애의 여신이라고 부르는데."

  "율리아 님이 그렇게 불리시는 건 저도 백 번 납득이 갑니다만."

  "뭐, 서로 이런 말을 해봐야 자기 얼굴에 침 뱉기밖에 안 되긴 하지."

  소피아가 여왕 옆 비숍의 앞에 있는 폰을 다시 두칸 전진 시켰다.

  체스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오프닝이었다.

  자신의 폰을 공짜로 주는 듯 보이지만 상대가 어떻게 응수하냐에 따라서 자신의 선택의 폭도 그만큼 넓어진다.

  옥타비아누스가 상대방의 의도를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 이렇게 시작하는 구도 말이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소피아 님께서 즐겨 쓰는 전법이지 않습니까. 처음 연구를 한 것도 소피아 님으로 아는데 본인이 이름을 지으신 게 아닙니까?"

  "아니. 저번에 아버지랑 한 판 뒀었는데 이걸 이미 알고 계시더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릴 들었거든. 퀸즈 갬빗? 그런 발음으로 들렸는데 무슨 의미를 지닌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폰을 움직여 소피아의 폰을 따낸 옥타비아누스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이 게임을 만드신 분도 마르쿠스 님이니까 같은 전략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죠."

  "하지만 아버지는 이걸 즐겨 쓰시지는 않는다고 하더라, 닮긴 했지만 나와는 확실히 달라. 자식이 부모의 분신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다른 사람이니까."

  "그건 좀 흥미가 가는군요. 제가 볼 때도 이게 꽤 재미있고 효율적인 전법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나도 이유는 잘 몰라. 굳이 추론해 보자면 이건 지금처럼 내 말 하나를 하나 던져주면서 이후 중앙을 쉽게 가져가는데 중점을 두고 있잖아. 말을 하나 꽁으로 주는 듯한 느낌이 싫으신가 보지. 나는 체스판이 군사나 정치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거든.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기 보다는 대국적인 면을 더 바라봐야 한다는 점에서."

  군사든 정치든 실시간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체스와 조금 다르다.

  그러나 아무리 실시간으로 흘러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무언가를 행동할 때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상대방의 수를 예측하지 않고 자신이 할 것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승리를 거둘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체스는 이제 로마 상류층들이 가장 즐기는 놀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비우고 무언가를 즐기고 싶을 때는 콜로세움에 가서 경기를 관람하고, 두뇌 노동을 하고 싶을 때는 체스를 즐기는 것이다.

  "제 친우 중 한 명은 체스보다는 카드가 더 실제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더군요."

  "누구? 마이케나스? 카드는 운에 너무 심하게 좌우되잖아."

  "현실은 오히려 카드처럼 다양한 변수로 가득차 있으니까요. 주어진 패로 최선의 전략을 펼쳐서 다양한 변수를 끌어안고도 이기는 게 위대한 정치가의 소양 아니겠습니까."

  "그건 또 일리가 있는 말이네. 하지만 카드는 운빨을 너무 심하게 타."

  말은 그렇게 해도 소피아가 카드 게임을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옥타비아누스가 혀를 차며 웃었다.

  "얼마 전에 트라야누스 님께 지셔서 그런가 보군요."

  "그건 무효야. 내가 말도 안 될 정도로 패가 안나와서 그렇게 된 거라고."

  "원래 자기가 지면 쓰레기 같은 운빨 게임이고 자기가 이기면 실력 게임이 되는 법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즐기는 겁니다. 져도 자신의 실력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운만 따라주면 실제로 또 제법 이기기도 하고요. 반면 체스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실력 차이가 나버리면 어지간해서는 이길 수가 없죠. 상대방이 실수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결국 정치판은 이 체스판이랑 똑같은 거야. 일정 이상의 세력 차이가 나면 절대로 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소피아와 옥타비아누스는 그 뒤로는 지금까지의 활발하게 주고받은 대화가 무색할 정도로 말없이 체스판에 집중했다.

  몇 판만 이렇게 둬봐도 대략적인 상대방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하물며 거의 매일 같이 어울리는 소피아와 옥타비아누스는 서로의 성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사고방식과 상이한 행동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전략을 짜더라도 그걸 행동으로 옮길 때 방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카이사르나 마르쿠스보다도 훨씬 더 냉혹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이였다.

  필요하다면 원로원 의원이든 귀족이든 기사계급이든, 그 누구라도 고민하지 않고 목을 쳐버릴 수 있었다.

  반대로 소피아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온건한 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보완하는 게 가능했다.

  원 역사에서도 옥타비아누스는 옆에 우수한 조언자들을 끼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태반이 마르쿠스의 옆에 있었다.

  그나마 마이케나스 정도만이 원 역사에서처럼 그의 옆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마이케나스조차 마르쿠스가 붙여준 것이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토론할 수 있는 최적의 상대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던 소피아였다.

  물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길 어언 한 시간 뒤.

  국면이 거의 종반에 달한 뒤에야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마이케나스가 베르길리우스에게 부탁해 카이사르 님과 마르쿠스 님을 칭송하는 시문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한 번 읽어봤는데 아주 필력이 좋더군요. 낯뜨겁다는 생각보다 먼저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이 드는 노래였습니다."

  "예술가들까지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건가······."

  "사실 이전부터 둘은 뗼래야 뗄 수 없는 사이였죠. 마이케나스는 그걸 더 체계적으로 다듬으려는 것뿐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옥타비아누스의 목소리가 집중하지 않으면 듣기 힘들 정도로 낮아졌다.

  "이미 짐작하고 계실 테지만 모든 건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밑준비는 철저히 해둘수록 좋으니까요."

  "···어쩔 수 없나. 나나 너는 아버지랑은 위치가 다르니까."

  "들으셨겠지만 다음 달 중으로 마르쿠스 님에게는 한 가지 직위가 더 추가됩니다."

  "알아. 네가 건의한 사항이라며?"

  현재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지니고 있는 권한과 칭호는 일일이 열거하는 게 곤란할 정도로 많았다.

  마르쿠스의 경우 원로원 제일인자와 영속 집정관과 호민관의 특권, 그리고 감찰관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따라붙는 총독의 권한과 모든 것에 우선하는 최우선 임페리움까지 있었다.

  카이사르는 저기에서 폰티펙스 막시무스, 즉 최고 제사장의 지위까지 지니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로마의 모든 식량 공급을 책임지는 프라이펙투스 안노나이를 마르쿠스에게 수여하는 걸로 결정됐다.

  사실 이건 마르쿠스가 이미 행사하고 있는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일에 가까웠다.

  식량 공급을 책임진다는 건 곧 시민들의 목숨줄을 움켜잡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시민들은 이를 반겼다.

  다른 분야라고 그러지 않겠냐만은 농업에 있어서 마르쿠스의 위상은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몰락해 가고 있던 자영농들이나  배를 곯고 있던 빈민층에게 마르쿠스는 문자 그대로 구세주였다.

  어떻게 보면 집정관보다도 훨씬 더 엄청난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였음에도 반대의 의견이 나오지 않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그 카토조차 이건 그냥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는 마이케나스를 통해 이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만들었다.

  이런 대대적인 홍보에 한 가지 가려진 사실이 있었는데 마르쿠스와 카이사르에게 부여된 권한은 임시적인 게 아니었다.

  이건 그들에게 부여된 일종의 개인재산으로 취급됐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은근슬쩍 이걸 법으로 명문화 시켜버리자는 의견을 냈다.

  여기에는 율리아와 소피아는 로마에서 가장 존엄한 여인들이기 때문에 로마의 여인들 중 가장 많은 권한을 누려야 한다는 법도 포함됐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로마의 베스타 신녀들에게 부여된 권한들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됐다는 뜻이었다.

  물론 신녀들처럼 은퇴 전까지 처녀성을 지켜야 한다는 제약 따위는 없었다.

  이로서 율리우스-리키니우스 가문의 여인들은 베스타 신녀들처럼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있고, 가부장의 권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됐다.

  이로서 마르쿠스와 카이사르는 후계자에게 자신들이 지닌 권한을 합법적으로 상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왕위 세습과는 형태가 조금 달랐다.

  왕은 어디까지나 왕이라는 지위를 물려주는 것이지만, 로마의 상속법은 지위가 아닌 권한을 물려주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말장난에 불과했으나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은 천지 차이였다.

  옥타비아누스가 게임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소피아의 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무대에 오르시지요. 제가 옆자리를 지키겠습니다."

  < 290. 황가의 신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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