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황가의 신들 >
289. 황가의 신들
역사상 최초의 국제학술교류전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수많은 분야에서 마르쿠스의 이론들이 적용되었고 학자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덕분에 행사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대학의 발표도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교수직에 지원하려는 학자들이 너무 많아서 따로 심사를 거쳐야 할 정도였다.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총명하고 재능이 있는 수재라면 국가에서 작정하고 키워준다고 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느 시대이든지 부모는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법이다.
시험이나 학문으로 성공하는 제도가 있는 곳에서는 이를 개천에서 용나는 수단으로 인식하곤 했다.
"샤한샤께서는 정말 수수께끼 같은 분일세."
그리스로 돌아가는 배편 위에서 에우소스가 중얼거렸다.
"무엇이 말인가?"
"그 많은 지식들을 대체 어떻게 얻으신 걸까?"
"아직도 의심하는 건가?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야. 진짜로 있는 걸세. 인간의 몸을 빌려 세상에 태어난 신이라는 존재가. 신화에서도 수많은 신의 자손들이 언급되지 않았던가."
"신화는 신화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더군."
에우소스는 천문학 토론회에서 받았던 충격을 아직까지 다 떨쳐내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진리가 부정당한 충격은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절망이나 회한만 느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이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간결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공식을 접했을 때는 일종의 쾌감마저 느꼈다.
앞으로 연구할 과제들도 산더미처럼 생겼다.
마치 처음 천문학을 접했을 때와 같은 신선함이 가슴 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사실 받은 충격으로만 치자면 에우소스보다는 테오스토스 쪽이 더 컸다.
"자네는 천문학만 참가했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된 실감을 못 느끼는 거라네. 나는 3개 분야의 토론회에 들어갔는데 정말 세상에 대한 내 인식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네."
"그 정도였나? 하긴···천문학만 해도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다른 쪽도 비슷했다면 대충 상상이 가는군."
"우리는 지금까지 먼지 같은 지식으로 학자랍시고 거들먹거린 것에 불과했네."
"아테네와 로도스가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지금까지 수백년에 걸쳐 굳어졌던 정설들을 모조리 폐하게 생겼으니."
"아테네와 로도스만 그러겠는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도 한바탕 뒤집어질 거야.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이건 난리가 아니라 혁명이지."
테오스토스가 흥분기가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런 대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걸 감사해야 하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상식이 무너지고 새로운 진리가 들어서는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군.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 마르쿠스 님이 나타나신 이유가 있을 텐데."
"분명 신들께서도 답답하셨겠지. 인간들이 발전 없이 이상한 학설로 서로가 옳다고 싸우는 모습이. 그래서 진리를 전하기 위해 나타나신 게 아니겠나. 난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네."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는지라 에우소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친우의 말대로 지식인으로서 이런 시대에 태어난 건 다시없는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신에게 몇 번이나 감사인사를 올려도 부족할 정도의 과분한 천운이었다.
에우소스는 조금 뜬금없지만 돌아가면 건강의 관리에도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부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 다가오는 시대의 변화를 끝까지 지켜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학자들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그해의 끝자락이 지나갈 무렵, 로마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마르쿠스의 의견대로 종래의 비대한 감찰관의 권한을 분할하는 안을 통과시키도록 하겠네."
카이사르의 제안이 끝나기 무섭게 자동 거수기가 다름없는 의원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빗발쳤다.
"찬성입니다. 감찰관은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에야 소수의 인원으로도 저 일을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힘에 붙일 수밖에 없죠."
"여러 개의 조직으로 권한을 나누고 조직의 장이 전체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안은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거의 충성경쟁처럼 보이는 이 모습을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오직 카토뿐이었다.
한 번 숨을 가다듬은 그는 언제나처럼 소신있게 반대표를 던졌다.
"저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찰관은 무려 3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직책입니다. 이런 직책을 하루 아침에 없애버리는 건 더 많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원래라면 카토의 말에 다른 의원들의 반론이 쏟아졌을 테지만 요새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반박을 해줄 사람이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언제나처럼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키케로에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원로원에 복귀한 그는 카토와는 서로 물어뜯는 게 일상인 사이가 돼버렸다.
반면 그가 다시 원로원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준 카이사르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절대 권력을 얻으면 대놓고 왕이 될 거라는 우려도 기우로 밝혀졌으니 꺼릴 것도 없었다.
영속 집정관이라는 직책은 조금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는 없다고 받아들였다.
사실 물러나려는 사람을 원로원이 억지로 잡고 추대한 형식이었으니 이제와서 왈가왈부하는 게 추한 것이었다.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는 카토의 말은 보수주의자로서는 약간은 공감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전통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뿐입니다. 그저 오래 되었으니 전통을 지켜야 한다. 이런 생각은 자연히 사회를 경직시키는 법입니다.
우리 로마가 어떻게 세계를 제패하게 됐습니까. 한때 강성했던 그리스와 이집트는 어째서 우리의 밑으로 들어오게 됐습니까. 로마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했지만 그 둘은 정체했기 때문입니다.
"
"옳소!"
"카토의 의견은 너무 구시대적인 발상이오."
키케로는 박수 갈채를 쏟아내는 동료 의원들을 둘러보고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 로마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최근의 경제 상황을 알기 위해서 따로 시간을 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저같은 의원들을 배려해 친절하게도 마르쿠스가 그 먼 동방에서 서책을 보내주기도 했지요.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의원들의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카토도 지금까지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중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하면 당연히 제도도 그에 맞게 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로마도 언제 그리스나 이집트처럼 될지 모릅니다.
당장 저번에 벌어진 무궁화 파동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교묘하게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려고 했던 상인들이 주가를 폭등시켜서 이익을 취하려 했던 적도 있었고요. 감찰관들은 그때 원로원 의원들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들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니까요.
"
당시 원로원의 감찰관직을 맡고 있었던 두 의원이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이라고 일을 하지 않고 싶어서 하지 않은 게 아니다.
키케로의 말대로 얽히고설킨 법과 제도가 너무 복잡해져서 판단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었다.
그래서 카이사르도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감찰관들을 처벌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도 감찰 조직이 전문성을 띠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키케로는 이런 점을 짚어 카토에게 재반박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로마에 반드시 무조건 지켜야만 할 전통은 없습니다. 즉, 낡은 전통을 개혁하는 것이야말로 로마의 전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정신이야말로 우리 로마가 앞으로도 수천년 동안 번성을 이어나갈 원동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전의 키케로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카토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절반은 섞여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진심이기도 했다.
그의 열정적인 연설에 의원들은 물론 카이사르까지 박수로 지지의뜻을 밝혔다.
적어도 개혁안에는 반박거리가 없어진 카토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다른 쪽을 공격해 나갔다.
"키케로의 고견은 잘 들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던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확실히 지금 로마의 발전은 너무나도 빠릅니다.
저처럼 과거의 로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쳐진 이들로 취급받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바꾸는 게 맞습니다. 인정하지요. 하지만 너무 급격한 변화는 혼란을 더 가속시킬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조직의 수장 같은 중책에는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의원이 들어가야하지 않겠습니까.
"
카토는 카이사르가 나눠준 개혁안의 한 부분을 짚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안건을 보면 아주 세밀하고 효율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대로 가는 건 저도 불만이 없어요. 하지만 조직의 수장을 옥타비아누스라는 젊은이로 세우는 건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의 나이가 몇입니까? 제 기억으로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습니다. 옛날이었다면 원로원의 의원으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나이에요. 그런 젊은이가 단순히 우리 영속 집정관들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중책에 임용되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그건······."
이번에도 키케로가 즉각 반론을 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먼저 카이사르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시켰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내가 직접 설명을 하는 게 낫겠군. 옥타비아누스는 단순히 나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에 내정된 게 아닐세. 지금까지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사적인 관계를 우선해 누군가에게 중임을 맡긴 적이 있다면 알려주게."
"···물론 그런 적은 없지만 이번이 그 시작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옥타비아누스를 감찰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한 건 전적으로 그의 능력을 고려해서일세.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그와 함께 일을 해본 의원들은 알 걸세. 현재 원로원에서 그보다 더 지혜롭고 깊은 식견이 있는 의원이 있다면 누구라도 추천을 해주게. 내 기꺼이 중용하도록 하지."
당연히 그 누구도 입을 뻥긋하지못했다.
옥타비아누스의 능력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입증된 바 있었다.
카이사르보다도 더욱 치밀하고 냉철한 성품의 소유자인 그는 다른 의원들과의 관계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키케로 같은 사람들마저 옥타비우스가 쓰고 있는 가면의 내부를 꿰뚫어 보지 못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여러번 만나보긴 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정말 뛰어난 젊은이입니다. 무엇보다 겸손하고 원로원을 존중하고 선배 의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게 자연스럽게 몸에 밴 청년입니다.
학식은 또 얼마나 깊은지 저조차 대화를 하면서 많은 걸 배울 때가 있습니다. 마치 젊었을 적의 마르쿠스를 떠올리게 한다고나 할까요? 전 이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
옥타비아누스가 마르쿠스의 사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이미 권력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소문이었다.
그런데도 언제나 예의바른 태도를 유지하는 그를 향한 원로원의 신뢰는 두터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권한으로 강제로 안을 통과시킬 수도 있지만 일부러 이 안건을 투표에 부쳤다.
무기명으로 한 투표임에도 압도적인 찬성표로 옥타비아누스를 새로 신설한 감사원의 수장으로 임명한다는 표는 통과되었다.
반대표는 단 한 표.
사실상 반대표 실명제였다.
< 289. 황가의 신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