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특이점이 온다 >
279.
이후로도 폭음이 두 번 가량 더 울려퍼졌다.
잠시 뒤 쿵, 쿵, 쿵 하며 세 번 짧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폭음이 아니라 두꺼운 철문을 무언가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게 일종의 신호였던 모양인지 연구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마침내 육중한 철문이 연이어 개방되고 마르쿠스가 안으로 들어섰다.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내부에 뿌옇게 쌓여 있는 게 느껴졌다.
"위대한 샤한샤이시여 이렇게 왕림해주시다니 크나큰 영광이옵니다."
얼굴과 옷이 숯검댕이가 된 필리트리오스가 머리를 조아리자 다른 화학자들도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래. 꽤나 흥미로운 실험을 하고 있었나 보군."
"마르쿠스 님, 이건 대체······."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수레나스가 입을 떡 벌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이 안에서 터진 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르쿠스와 달리 수레나스는 대체 뭐가 뭔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번개라도 친 건가요?"
"아니. 우리 화학자들의 실험의 결과물이라고 하더군."
"연금···아니, 이제 화학자라고 했던가요. 그런데 대체 무슨 화학 실험을 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건 이제 저들이 설명을 해주겠지."
두 사람의 상반된 반응에 필리트리오스의 눈동자가 의문스러운 빛을 띄었다.
"샤한샤께서는 혹시 이 초석이라는 물질이 이런 반응을 일으킨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초석? 혹시 사타바하나에서 대량으로 날라왔던 그 천연거름이 이런 작용을 일으키는 겁니까?"
수레나스의 눈이 저 멀리 부자연스럽게 파여 있는 웅덩이로 향했다.
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뭔가가 폭발한다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기껏 떠올릴 수 있는 거라고 해봐야 번개가 친다거나 대규모의 산불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화학자들의 폭발의 위력을 실험하기 위해 놔둔 강철판에 새겨진 흔적도 놀라웠다.
어떤 무기로 쳐도 흠집도 내기 힘들었던 강철판이 여기저기 찢겨 나가 있거나 조각조각 부서져 있는 게 보였다.
신화속에 등장하는 용이라도 나왔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초석을 가지고 이 정도로 빠르게 폭발이라는 반응을 끌어냈단 건 확실히 놀라워. 난 몇 년 정도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일단 이게 산화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역시 샤한샤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과연 신의 지혜를 가지고 계신 분···저희가 샤한샤를 놀라게 할 수도 있다고 잠시나마 생각했던 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니. 이미 말했지만 상당히 놀라는 중이라네. 초석에 숯과 황을 일정 비율로 섞었겠지? 어떻게 그런 생각에 도달했나?"
"아, 예. 우선 처음에는 이 초석과 설탕을 배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열을 살짝 가해보니 이게 엄청난 속도로 타오르더군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저온에서도 쉽게 발화하는 황이나 열을 만들어내는 숯과도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 해서 비율을 조합해서 실험하던 중 갑자기 폭발을···덕분에 크게 다친 연구원이 나왔습니다."
"그 자의 치료는 어떻게 했나?"
필리트리오스가 저 뒤에서 목발을 짚고 있는 한 남성을 가리켰다.
"다행히 제때 치료를 받아 지금 순조롭게 회복 중입니다. 일단 그런 사고가 있은 뒤로는 실험할 때 혹여 다치는 사람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이렇게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임하는 중입니다."
자세히 보니 필리트리오스의 몸도 여기저기 잔 상처가 나 있었고, 수염도 좀 탄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세기에 남을 만한 역사적 대발명을 했다는 확신이 두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희대의 전략가인 수레나스는 이 폭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데서 폭발의 흔적을 관찰하고 싶어 몸이 달아 올랐다.
"추가로 폭발할 위험 같은 게 있나? 직접 가서 좀 살펴보고 싶은데."
"이미 사전에 혼합해둔 물질은 전부 폭발했습니다. 안전하니 가서 마음껏 보셔도 됩니다."
필리트리오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레나스는 빠른 걸음으로 폭발이 일어난 장소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이 현상을 어떻게 전쟁에 써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이 폭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그야말로 전장의 판도가 바뀔 겁니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폭발하는 물건인만큼 취급에 많은 주의가 필요하겠군요.
원하는 방식으로 제어하는 것도 힘들 것 같고···좀 더 생각해 보니 회전보다는 공성전에서 조금 더 유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걸 잘 다룰 수만 있다면 해전에서도 무적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고······.
"
"예. 하지만 그 정도의 위력을 내는 폭발을 일으키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연구를 좀 더 하면 다른 방법이 생길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수레나스는 연구자 한 명을 붙잡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며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마르쿠스는 그런 수레나스와는 달리 차분한 어조로 현재 화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정확히 확인해 나갔다.
"자네들은 저 폭발물질을 뭐라고 부르고 있나?"
"예. 일단 저희들끼리는 로마에서 섬기는 군신의 이름을 따서 마르스의 분노라고 있사옵니다."
"꽤나 선전효과가 좋을 것 같은 이름이로군. 그럼 자네들의 연구 성과를 알고 있는 자들은 또 누가 있지? 이건 정말로 중요한 사항이니 절대로 누구 하나 빼먹지 말고 고하도록."
지금 시대에서 화약의 제조법은 억만금을 주고도 팔아서는 안 되는 극비 중의 극비 정보였다.
혹시라도 이게 새어나가는 일이 있다면 엄청난 사고로 번질 수도 있다.
특히 지금 이들이 만든 흑색 화약 같은 경우 일정 비율의 초석에 숯과 황을 섞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 제조도 손쉬웠다.
만드는 방법이 이토록 쉬우니 언젠가는 유출될 수밖에 없겠지만, 최대한 그 시점을 늦출 필요가 있다.
타국에 누출이 되어 그들이 화약 병기 개발에 막 착수했을 때쯤이면 로마는 이미 다음 세대의 병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 정도의 차이만 유지한다면 이미 초석을 독점하고 있으니 힘의 균형이 무너질 리는 없을 터.
결정적으로 화약병기는 화약만 있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화포의 발전은 족히 수백년을 아우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고작해봐야 비폭발성의 포탄을 던지는 형태에 불과할 것이다.
당장 초기 단계의 화포의 등장과 곡사포가 개발되는 시기의 텀만 하더라도 거의 300년에 이른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을 해보면 현대의 기술 개발 속도만 따라가도 서기 5세기쯤이면 암스트롱포 비스무리한 물건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정보와 기술의 독점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커져만 갔다.
"자네들의 공은 확실히 크지만 이게 외부로 유출되었을 때의 파장은 세계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네. 그러니 아무리 사소한 관련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빼놓지 말고 보고하라."
마르쿠스의 서슬퍼런 목소리에 압도당한 필리트리오스가 머리를 땅에 박을 기세로 숙였다.
"제가 알기로는 여기 있는 연구원들이 전부입니다."
"자네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 가능성이 높지. 이번 건은 전수조사를 해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해야 하니 이해를 좀 해주게. 물론 이번 공로에 대한 보상은 섭섭지 않게 내려줄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서운해 하다니요. 마땅히 거쳐야 할 절차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고맙군."
마르쿠스는 모든 화학자 연구원들을 한데 모은 뒤 철저하게 이번 일에 관한 사항을 조사했다.
다행히 그들도 화약의 개발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사전에 이 연구에서 얻은 성과는 가족을 포함한 그 누구에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이 다행이었다.
일단 화약 개발이 성공한 이후로 연구원들은 모두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연구에만 매진했다는 사실도 확인을 마쳤다.
당분간은 화약의 존재가 외부로 유출될 일은 없어 보였다.
'자, 그럼 이제 선택지는 두 개인데······.'
마르쿠스는 어떠한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는 필리트리오스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지금 저 표정은 또다시 무언가 가르침을 내려주기를 원하는 얼굴이다.
수레나스도 이 폭발을 어떻게든 전쟁에 이용할 수단이 없을까 맹렬히 머리를 굴리는 중으로 보였다.
그럼 마르쿠스는 여기서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할까.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건 그냥 화학자들에게 비밀을 엄수하라 명령하고 자신들끼리만 연구를 하게 놔두는 것이다.
감시를 붙여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다면 충분히 보안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기술의 유출과 발전 속도를 늦출 뿐 막상 제대로 된 이점은 한 가지도 없다.
사실 화약을 응용하는 방법의 개발은 군사적인 면에만 쓰이는 건 아니었다.
군사적인 용도가 너무 압도적으로 두드러지기 때문에 가려져 있을 뿐 화약은 여러 가지 분야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물질이다.
당장 니트로글리세린만 안정적으로 합성할 수 있게 되면 규조토를 이용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 수도 있다.
다이너마이트를 공사에 쓰기 시작하면 발파와 토목에서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당장 이집트에 운하를 파버리는 것도 가능할 테고, 동방 속주에 저수지를 만드는 것도 손쉬워질 것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를 해보면 이미 화약이 개발되어 버린 이상 이걸 모른척 해버린다는 건 수지가 맞지 않았다.
두 번째 선택지인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면서 이익을 뽑아내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리라.
'문제는 이걸 어디까지 개발하면서 써먹을 거냐는 건데······.'
사실 육군의 경우 굳이 화포가 없어도 로마군은 지금 무적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급선무는 군함에 장착할 수 있는 화포를 먼저 개발하는 것이었다.
갤러선을 대체할 수 있는 범선의 개발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달했으니 마침 시기가 적절하긴 했다.
어차피 이제 로마의 주무대는 점점 지중해 바깥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갤리선의 효용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 전투선으로서의 수명도 이제 거의 끝나가니 이쯤에서 세대 교체를 해주는 게 좋을 것이다.
범선의 제작이 완료되고 항해술도 더 완숙해지면 신대륙까지 항해하는 것도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다면 역시 화포를 개발해 해군과 육군의 힘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게 맞는 것도 같았다.
'아···머리가 깨질 거 같네. 고려해야 할 게 뭐 이리 많은지.'
속으로는 투덜거리고 있었으나 그래도 긍정적인 측면도 없는 건 아니었다.
기술의 발전이 예상보다도 더 빠르게 진행된다면 마르쿠스가 살아있는 동안 신대륙에 당도하는 이도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다양한 신문물이 로마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
'잠깐. 그렇게 생각하면 역사에서 유럽이 했던 행위를 그대로 로마가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물론 마르쿠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이익이었다.
전쟁과 약탈, 지배가 당연한 이 시대에서 현대의 사상을 설파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정복 전쟁을 한 것이다.
신대륙이든 인도든 한나라든 필요하다면 쳐서 무릎 꿇리는데 주저함은 없었다.
다만 마르쿠스의 행동 방침은 어디까지 필요에 의한 만큼만 하는 것이지 아예 원주민들의 씨를 말리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신대륙에 묻혀 있는 엄청난 자원을 고려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양상으로 일이 흘러갈 가능성도 높았다.
그쪽에서 문명을 이루고 있는 지배자들이 너네 자원 좀 털어가겠다는데 그러십시오 하고 환영할리는 없을 것이다.
꼭 신대륙이 대상이 아니더라도 어느 쪽으로든 지금 이상으로 전쟁은 벌어질 테고, 학살하는 쪽은 십중팔구는 로마가 될 터.
'뭐가 됐든 간에 적당히 필요한 만큼만 하면 상관없겠지만······.'
자신의 후손이 훗날 원주민의 씨를 말려버린 대량 학살자로 역사에 남는 정도만 아니면 된다.
아직까지는 발전 속도나 시대의 흐름도 전부 통제 범위 안에 있으니 과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틈에 유럽의 제국들이 결국엔 실패를 맛봤던 식민지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도록 더욱 발전된 지배 체제를 구상해 놓아야 한다.
시대의 특이점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 방침은 후계자에게 전승되도록 해둘 것이다.
< 279. 특이점이 온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