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한나라에게 전해 >
277.
인도 정벌.
이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제 이후부터 서방의 지배자들에게는 꿈과도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지금껏 서방의 어떤 대국도, 어떤 용맹한 장수도 해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마케도니아 제국의 뒤를 이은 위대한 제국들 역시 인도까지 간다는 발상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일생에서 패배를 몰랐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조차 인도 국가들과 싸우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걸 알아서였다.
마케도니아의 13만 병력이 강가리다이 제국의 2만 2천 군대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사실은 고대의 전략가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인도 본토로 가면 그 병력의 10배가 넘는 대군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충격적이었다.
그러니 알렉산드로스도 인도를 넘어서면 세상의 끝을 볼 수 있다는 꿈을 품었던 것이리라.
알렉산드로스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로마의 손에 의해 그 유업이 이루어졌다.
마르쿠스의 보고서가 로마와 동방에 미친 파장은 파르티아 정벌 이상으로 엄청났다.
사실 파르티아 때와 달리 인도는 완전히 정벌했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사타바하나는 기습에 무릎을 꿇었을 뿐 아직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다.
급하게 끌어모았던 수비 병력이 전멸하긴 했어도 칸바 왕국을 치던 본대 자체는 멀쩡하다.
게다가 인도의 엄청난 인구수를 활용하면 얼마든지 추가 병력을 짜낼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인도를 완전히 무릎 꿇렸다기보다는 국지적인 승리를 얻어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러나 그 정도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서방의 역사에서는 전례가 없는 쾌거였다.
특히 로마보다는 동방 속주에서 반향이 더욱 거셌다.
아무래도 과거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동방은 인도에 대한 감상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크테시폰으로 귀환한 마르쿠스의 개선 행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웅장하고 호화롭게 치러졌다.
수도 로마에서 개선식을 치르기엔 너무 멀었고 왕복하는 것도 고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다.
물론 본래 개선식은 로마에서 거행하는 게 관례였기 때문에 개선식이라는 명칭은 쓰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마르쿠스의 승리를 기념해 20일의 감사제를 열고 동방 속주에서는 개선 행사를 여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이루어졌다.
개선 행사가 열리는 곳은 바그다드 지역에 건설되고 있는 신도시 마르코 폴리스였다.
아직 대규모로 사람이 이주해서 살 정도의 환경은 아니었지만, 수년에 걸친 대규모 공사로 최소한의 틀은 잡힌 상태였다.
이번 개선 행사와 신도시의 출범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일종의 선전이라 할 수 있으리라.
"어마어마하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응집해 있는 거리를 내려다본 수레나스가 혀를 내둘렀다.
"이제 막 형태만 잡힌 도시인데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거주 시설이나 식량은 충분히 마련해두라고 일러두길 잘했군요."
"내 생각보다도 더 인파가 쏠리긴 했군. 그래도 앞으로 동방의 중심이 될 도시이니 이렇게 화려한 데뷔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마르코 폴리스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계된 계획 도시였기 때문에 기존의 대도시들과는 달랐다.
역사상에서도 바그다드는 근대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번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압바스 왕조의 수도일 때는 인구가 200만에 달했을 정도다.
그러니 도로를 놓고 거리를 정비할 때부터 로마 이상으로 도시가 커질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둔 채 설계를 했다.
"장차 이곳이 세계의 중심이 되겠지요. 사실 마르쿠스 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겁니다."
"그 정도인가?"
"당연하지요. 이름은 어느 시대에서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상징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신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을 의미하는 것. 제가 볼 때는 거액의 돈을 받고 입주권을 판다고 해도 아마 물량이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가 될 겁니다."
실제로 안티오키아나 크테시폰에 거주하는 귀족들이나 상인들은 거점을 옮기기 위해 도시가 완성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일이 술술 풀리니 도리어 찝찝하단 생각도 드는군. 혹시 내가 보고받지 못한 다른 사항은 없나?"
"오늘 같은 날에도 업무 관련 생각이십니까?"
질렸다는 듯한 반응에 마르쿠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이제 그냥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거야. 슬프게도. 그리고 이제 슬슬 우리 파라오 님들에게도 신경을 써줘야 하거든. 그동안 너무 챙겨주지 못했으니까."
"율리아 님과 다나에 님이 로마에 남아 계시니 파라오들께서도 지금이 좋은 기회라 여기실 거고요."
"기회라··· 이제 나도 체력이 조금 달리는 게 느껴져서 무서운데 이거."
"아··· 그 기분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요샌 집에 들어가는 게 무섭다니까요. 그래서 그냥 마르쿠스 님께서 일을 맡기셨다는 핑계를 대고 안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네 아내가 애꿎은 나를 원망할 게 아닌가. 나도 집에 아예 들어가지 않을 정도는 아닌데 혹시 자네 안사람과 문제라도 있나?"
수레나스의 현 아내는 마르쿠스의 파벌에 속하는 로마 귀족 가문의 장녀였다.
집정관과 법무관을 연달아서 배출한 명문 가문이고 재산도 많아 꽤나 중요한 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관계가 순탄치 않은 거라면 마르쿠스가 개입해 중재를 해줄 필요가 있다.
그의 의도를 이해한 수레나스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아니요. 아내에게 불만은 없습니다. 젊고, 아름답고, 헌신적이기도 하고 이상적인 아내라 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다만?"
정말로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어딘가 곤혹스러워 보이는 느낌이었다.
수레나스는 잠깐 망설이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엿듣는 이가 없는 걸 확인한 뒤에도 그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 다 좋은데··· 너무 과하게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한창때는 다 들어줄 수 있었는데 마르쿠스 님도 그러셨다시피 저희가 예전 체력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번에는 너무 과하게 시달려서 거의 이틀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아··· 그런 이야기였군."
결국 마르쿠스가 앞서 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의 호소였다.
현대에서 말하는 의무 방어전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거나 힘들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냥 피하기만 해서는 결국 부부 관계에 불화를 가져오기만 할 뿐이다.
로마는 가부장적이긴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여자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가 영 부실해서 못 쓰겠다는 건 이혼 사유 중 가장 흔하게 인용되는 사례였던 것이다.
"잘 이야기해서 합리적인 절충안을 마련해 보게. 이런 이유로 이혼당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이건 자네만이 아니라 내 얼굴에도 먹칠을 하는 거야."
"하아··· 젊었을 때는 이런 걱정 따윈 할 필요가 없었는데 세월이 무상할 따름입니다."
"원래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나. 적응하면서 살아야지."
"그렇긴 한데···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요. 한나라에서 서신이 하나 도착했었습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수레나스가 돌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티가 날 정도로 뻔한 화제 전환이었지만 마르쿠스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한나라에서 서신이 왔다고? 그런 걸 왜 진즉 말하지 않았지?"
"별 시답지 않은 내용이라 이번 행사가 끝난 뒤에 보고가 올라가도 무방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지금 검토해 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전문을 확인할 테니 지금은 일단 뭐라고 썼는지 요약해서 말해보도록."
"예. 그러니까 한의 황제는 로마가 사타바하나를 공격한 데에 우려를 표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영역이 동쪽으로 더 넓어지는 걸 경계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한이 개발한 고유의 물건들을 로마가 자신들의 것이라 우기는 데에도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길길이 날뛰는 상대방의 반응을 상상해본 마르쿠스가 피식 웃었다.
"불쾌하면 자기네가 뭐 어쩔 도리라도 있나? 정말 시답지 않은 내용이었군."
"예. 그쪽이 아무리 화를 내봐야 정작 실질적인 조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이미 그쪽에서 뽑아먹을 기술은 별로 없다는 게 저희 측 기술자들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비단이나 차가 원래 로마의 것이라는 말은 솔직히 좀 너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놈들은 그렇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니 이 정도가 딱 좋아."
"샤한샤께서는 혹시 한나라에 개인적인 감정이라도 가지고 계신지요? 어째 다른 나라를 대할 때와 살짝 분위기가 다르신 것 같은데요."
"개인적인 감정이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마르쿠스의 모호한 대답에 수레나스의 눈에 한층 더 의문이 깊어졌다.
마르쿠스가 타국을 공략할 때를 보면 언제나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하는 전략을 펼쳤다.
반면 마르쿠스가 한나라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 달랐다.
물론 실리를 취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상대방을 열 받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우기는 것만 봐도 딱 그랬다.
천자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빙빙 말을 돌려서 살살 긁는 게 딱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어법이었다.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저희가 한나라보다 훨씬 강하긴 해도 그들을 정벌하는 건 무리입니다. 사타바하나 때와도 경우가 다릅니다. 그쪽은 우리가 인근 해역을 장악하고 있으니 배로 군대와 보급을 끊임없이 보낼 수 있었지만, 한으로 가는 길은 전부 육로입니다."
"나도 알아. 보급로가 끝도 없이 길어질 게 너무 뻔하지. 만약 쳐들어간다고 해도 가장 서쪽의 일부분만을 공격하는 정도가 최선일 터. 고작 그 정도 하려고 군대를 일으키는 건 수지가 안 맞아."
흉노처럼 유목민족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로마군이 강해도 한으로 밀고 들어가는 건 너무 큰 무리수였다.
"우리 쪽만 그런 게 아니라 저쪽도 그럴 테니 사실상 한은 로마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샤한샤께서 한나라를 약화시키는 데 이토록 큰 공을 들이시는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해. 하지만 잘하면 내가 죽기 전에···아니면 내 다음 대만 되어도 대충 성과를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마르쿠스는 저 멀리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인도 너머로 가면 세상의 끝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라. 이제 너도 대충은 알고 있겠지? 인도보다도 더 동쪽으로 가도 아직 많은 나라가 남아 있다는 걸. 심지어 한나라도 이 세상의 끝이 아니야. 아직 로마의 발길이 닿지 않은 많은 땅이 남아 있다고."
"저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 아직까진 전체 세계 지도를 보여준 적이 없구나. 나중에 너에게도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마.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사람들이 얼마나 이 세계를 좁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다."
※※※
야심 차게 준비했던 개선 행사와 신도시의 출범은 전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뿌듯한 마음을 안고 침실로 돌아온 마르쿠스를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가 반겨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이제 드디어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겠네요."
두 여인의 환한 미소를 본 마르쿠스는 순간 낮에 보았던 수레나스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잘난 듯이 충고를 하긴 했지만 결국 생각해 보니 자신도 같은 처지가 아닐까.
"허어··· 시간이 늦었는데 잠을 자지 않고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그럼요. 부군께서 그토록 커다란 영광을 이룩하고 돌아오시는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 정도로 경우가 없진 않답니다."
"아니, 졸리면 자도 됩니다. 무리해서 잠을 참으면 건강에도 나빠지니······."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마르쿠스를 뒤로하고 아르시노에가 후 하고 바람을 불어 촛불을 절반 정도 꺼트렸다.
"아무래도 먼저 씻고 오시는 게 좋으시겠죠? 저희가 시중을 들어드릴게요."
"어찌 고귀한 파라오들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혼자서 씻을······."
"에이, 진짜로 시중이나 들어드리려고 그러는 게 아닌 걸 다 아시면서."
"하하··· 하하하하."
더 이상 빠져나갈 데가 없음을 직감한 마르쿠스는 모든 걸 체념하고 욕실로 향했다.
여기서 힘들다고 뒤로 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이후 무슨 말이 뒤에서 들려올지 너무 뻔하게 예상이 됐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내일은 침상에서 일어날 수가 없겠군. 업무는 넉넉잡고 사흘 뒤에 재개하는 걸로 하자.'
벌써부터 허리가 뻐근해지는 듯한 느낌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슬픈 중년, 마르쿠스였다.
< 277. 한나라에게 전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