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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그건 로마의 것이다 (273/326)

  < 272. 그건 로마의 것이다 >

  272.

  수레나스가 이끄는 선봉대 7만은 사타바하나가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해로를 통해 상륙했다.

  선전포고가 떨어지고 사절이 로마로 돌아간 지 사흘 만에 로마군의 배가 해안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건 선전포고를 위한 사절을 보냄과 거의 동시에 군대를 출병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기습이나 다름없는 비열한 짓이라고 성토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디에 하소연을 할 것인가.

  이미 적의 군대는 왕국 내부로 들어와 있었고 대응할 만한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적군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정확한 수는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10만은 되지 않을 거라는 게 목격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그 말은 곧 최소 5만 이상이라 봐야 한다는 이야기로군. 우리 병사들의 준비는 아직인가?"

  "최선을 다해 빠르게 편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허둥대는 신하의 한심한 모습에 미가스바티 왕이 혀를 찼다.

  현재 인도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타바하나의 저력은 분명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전력을 총동원한다면 무려 10만이 훌쩍 넘어가는 보병과 수천의 기병, 그리고 수백의 코끼리 군단을 유지할 수 있는 저력이 있는 국가였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혹시 몰라서 배치해둔 방어군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대부분은 북방의 경계에 집결해 있었다.

  지금 한창 밀어붙이고 있는 칸바 왕국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사타바하나는 서쪽의 바다를 통해 외적에게 침입당한 적이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적은 언제나 북쪽에서 내려왔고, 가끔씩 남쪽에서 올라왔던 게 전부였다.

  그러니 오만만이나 아라비아해를 통해 적이 쳐들어왔을 경우의 대응전략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딴 일로 선전포고하는 것조차 말이 안 되는데 이 침공 속도는 도대체 뭔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밀고 들어오는 거야."

  짜증스러운 왕의 혼잣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추가 보고는 아직인가?"

  "카르니 장군께서 수비군의 편성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게 끝날 때까지 남서부는 방어가 불가능할 것으로······."

  "그래도 거기서 시간을 끌긴 해야 할 것 아니냐. 방어병력이 소수라 해도 지형지물을 이용하면 대군의 발목 정도는 잡고 늘어지는 게 가능한 것을!"

  "그, 그것이 적의 군대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그럴 틈을 잡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마치 이쪽에 여러번 와보기라도 한 것처럼 일대의 지리에 환한 것으로 보인다고······."

  연이어서 올라오는 암울한 보고에 미가스바티 왕의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역시 로마 개자식들은 처음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마르쿠스가 이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밀한 지도를 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왕으로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상인들을 보내서 교역을 하는 척하면서 지도를 만들게 한 거야. 별 쓸모도 없는 자원을 캐겠다고 땅을 산 것부터가 우리의 눈을 속이기 위한 속임수였던 거지. 자원을 캐는 척하면서 일대에 사람들을 풀어 침공할 때의 경로를 살핀 게 확실하다.'

  이 얼마나 효율적이면서도 악랄한 방식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지금 상황에서는 효율적인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칸바 왕국과 싸우고 있는 군대가 내려와서 카니스 장군이 편성한 수비군과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벌 방법이 전무했다.

  "어쩔 수 없지. 카니스에게 말해라. 수비군 편성이 제 때에 끝날 것 같지 않으면 소수의 병사들이라도 보내 시간을 벌게 하라고."

  "예!"

  명을 받은 신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부리나케 왕궁을 나섰다.

  그라고 이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반격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으니 대신 희생될 사람들을 추려서 그 목숨으로 시간을 벌라는 의미다.

  냉혹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판단이다.

  많은 이들이 죽겠지만 그래도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사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수비군 몇 만을 보낸다고 로마의 진격을 막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타바하나는 로마가 강하다는 사실만 알지 그들과 간접적으로 힘을 비교해볼 기회가 없었다.

  사타바하나는 로마가 무찌른 파르티아나 흉노와 싸워본 적이 전무했다.

  그나마 인도-스키타이가 흉노에게 쓸려나갔다는 사실 정도만을 알 뿐이었다.

  그런 흉노를 로마가 무찔렀다고 하니 로마도 강하겠구나 하는 인식 정도만이 있을 뿐이었다.

  로마의 기병대가 차원이 다르게 강하다는 말도 듣긴 했다.

  하지만 기병이 강해봐야 사타바하나가 자랑하는 코끼리 병단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아무리 강한 갑옷과 무기로 무장했어도 코끼리가 밟고 지나가면 모두 평등하게 납작한 피떡이 될 뿐이다.

  제대로 된 병력을 편성해 정면에서 승부한다면 자신들이 질 리가 없다.

  이게 로마군을 맞이하는 대다수 사타바하나 지휘층의 생각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게 얼마나 느슨한 판단이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싸우게 된 적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는 로마군은 순식간에 해안가를 넘어와 데칸고원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마르쿠스가 만들어준 지도 덕분에 이동 경로를 짜는 데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역시 마르쿠스 님이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으나 이제 와서 그런 걸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고작 이런 걸로 일일이 감탄하는 것 자체가 주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거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레나스가 진지 내에서 다른 군단장들과 함께 전략을 논의하고 있을 때 천막 밖에서 전령이 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적의 움직임에 변화가 있었나?"

  "예. 정찰병으로부터 올라온 보고입니다.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적군의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규모는?"

  "3만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코끼리라는 생물도 상당수가 포착되었습니다."

  수레나스의 선봉대는 7만이 전부 한꺼번에 뭉쳐서 행동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이끄는 부대는 기동성을 중시하는 3만의 기병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5천의 기병과 3만 5천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스파르타쿠스가 지휘하며 인근의 거점들을 함락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숫자가 비슷하니 싸워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나 보군. 아마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가 안전을 기하기 위해 후방의 부대와 합류해 공격해 올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조사에 따르면 사타바하나의 군대가 현재 북쪽에서 급하게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는 부대가 시간을 끌고, 그 사이에 추가로 끌어모은 병력과 북부의 본대를 합류시켜 싸워보겠단 심산이겠지요."

  "그래 정확한 분석이다. 실로 정석적인 움직임··· 그래서 흥이 더 식어버리는군."

  동수면 시간을 끌어볼 수 있다는 판단 자체가 저들이 얼마나 로마에 대해 무지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로마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저런 판단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터.

  반면 로마는 이미 사타바하나의 군 수준과 전략, 전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조사해놓은 뒤였다.

  정확히 말하면 조사라기 보다는 마르쿠스의 방침에 따라 훈련이 된 것이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마르쿠스 님께서는 보름 뒤에 상륙하실 계획이시다. 그분께서 당도하시기 전에 적의 군대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걸로 방침을 변경하도록 하지. 아퀼라누스의 출전을 허가할 테니 적들을 모조리 분쇄하도록. 그분께서 사타바하나의 왕도로 입성하는데 걸리적거리는 자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군단장들의 대답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 뒤, 시간을 벌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나섰던 사타바하나의 군세는 절망적인 살육의 현장에 던져지게 됐다.

  ※※※

  별동대가 일주일만이라도 시간을 벌어주길 바라는 미가스바티 왕의 간절한 바람은 최악의 대답으로 돌아왔다.

  "폐하! 폐하!"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황급이 달려오는 신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왕의 바람과는 반대로 비보를 가져온 신하는 바닥에 엎드려 비분에 가득 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카르니 장군이 보낸 3만의 별동대가 전··· 전멸했다고 하옵니다."

  "뭐라고 전멸? 패배가 아니라 전멸했다고?"

  왕의 입이 떡 벌어지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대를 보낸지 대체 며칠이나 지났다고 전멸당했다는 말이 올라온다는 말인가.

  "적은 분명 두 패로 나뉘어서 북상하고 있다고 했을 텐데? 설마 우리 움직임을 읽고 적들이 하나로 뭉쳐 있다가 기습을 가하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옵니다. 보고에 의하면 적의 3만 기병대의 괴물 같은 위력에 아군의 군대가 대패를 겪었다고 하옵니다."

  "적의 기병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해도 코끼리 부대와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었을 텐데······."

  "그, 그것이···적들은 이상하게도 코끼리 부대에 대한 대책을 이미 전부 세워두고 있었던 듯 합니다. 가까스로 도망친 병사의 말에 의하면 너무나도 쉽게 코끼리의 돌진 경로를 비워두고 활로 코끼리의 신경을 긁거나 기수를 노려 코끼리의 폭주를 유도하기도 하고, 코끼리의 돌진 경로에 압정을 뿌려두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적의 기마도 코끼리에게 겁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미 훈련이 되어 있었던 게 아닐지······."

  망치로 쎄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왕의 전신을 내달렸다.

  그렇다.

  이토록 치밀하게 계획하고 쳐들어온 이들이라면 코끼리에 대한 대책도 생각을 해뒀다고 추측했어야 했다.

  실제로 마르쿠스는 인도의 코끼리 부대를 의식해 아프리카에서 코끼리들을 공수해와서 줄곧 기병들을 훈련시켜 두었다.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았다면 사타바하나 군대도 조금은 더 잘 싸울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가뜩이나 기초적인 전력조차 압도적으로 밀리는데 정보의 비대칭마저 두드러졌으니 더 무엇을 해보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코끼리를 무력화했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우리 군이 무력화될 수 있는 것인가? 로마군과 우리 군의 전력 차이가 그 정도로 벌어져 있었나? 아니면 적의 지휘관의 전술에 휘말린 것인가?"

  "양쪽 다가 아닐까 하옵니다. 일단 로마군의 기병은 생전 처음 보는 희귀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아군의 그 어떤 공격도 적들의 갑옷을 뚫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적의 기병의 돌진 공격에는 방패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고 한 번의 돌격에 아군 3, 4명이 단숨에 꿰뚫렸을 정도로 전투력의 차이가 컸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 기병들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더욱 공포와 혼란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적들이 달려오는 모습도 마치 날개를 펴고 사냥감을 낚아채기 위해 내려오는 독수리처럼 위압적이었다고··· 가까스로 도망친 병사들마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다시 전장으로 나가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전에는 암울함만이 감돌았다.

  이번 패배는 단순히 시간을 끌지 못했다는 의미만 가지는 게 아니었다.

  믿었던 코끼리 군단의 무력화.

  그리고 적군과 아군의 절망적인 전투력 차이.

  뒤늦게 깨달은 두 가지 현실이 모두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정도로 짓눌러 오기 시작한 것이다.

  미가스바티 왕은 수레나스가 보냈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서신을 다시 펼쳐 보았다.

  <샤한샤의 비호를 받는 상인을 건드린 무도한 이들이여! 이것은 로마의 시민을 모욕함과 동시에 그의 파트로네스인 샤한샤에 대한 모독이다. 당장 로마 시민들의 재산을 돌려주고 피해액의 열배 보상과 전쟁배상금을 지불한 뒤에 사타바하나의 왕이 직접 사죄하라.

  그렇지 않으면 샤한샤의 군대를 맡은 나 수레나스가 왕조의 종언을 몰고 올 것이다.>

  정신나간 광인의 헛소리라고 여겼으나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게 허풍이 아닐 거라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전면전을 포기하고 도시의 문을 걸어 잠그면 어찌어찌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상당한 병력을 잃은 시점에서 로마가 여러 도시들을 약탈하고 돌아가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로마야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일 테니 별 피해가 없겠지만, 사타바하나는 왕조의 위신이 추락함은 물론이요 한창 뻗어나가고 있던 성장세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로마군의 보급이라도 끊을 수 있으면 뭔가를 해볼 수 있겠는데 제해권이 완전히 적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여기서 계속 싸워 봐야 손해가 누적되는 건 사타바하나라는 소리다.

  "적의 조건을 수락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폐하! 어찌 그런 굴욕을 감내하시려 합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우리는 로마에 대해 너무 몰랐다. 일단 이렇게 몸을 숙여서 위기를 피한 뒤, 후일을 도모하는 게 최선이다. 다소 속쓰리는 결과가 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충성심이 강한 신하들이 피눈물을 흘릴 기세로 통곡했다.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기반이 있다면 언젠가는 로마에 한 방 먹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조건을 모두 수락하겠다는 서신을 쓴 미가스바티 왕은 일단 한시름 놓았다며 진한 한숨을 토해냈다.

  "굴욕적이기는 하나 저들이 내건 명분에 대해서 모두 몇 배로 보상해주겠다고 했으니 이제 곧 강화사절단이 올 것이다. 모두 준비를 소홀히 하지 말도록."

  며칠후.

  허겁지겁 달려온 신하가 숨을 몰아쉬며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폐, 폐하!"

  "뭐냐? 사절단의 도착이 늦어진다고 하더냐?"

  "저, 적들이··· 강화교섭에 응하지를 않습니다!"

  황당함과 분노로 얼룩진 왕의 표정이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졌다.

  "으아아아아! 이 개자식들이 대체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이냐!"

  < 272. 그건 로마의 것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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