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 그건 로마의 것이다 >
268.
"로마의 최근 교역 현황에 대해 소문을 듣고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카샤프의 어조는 묵직하면서도 신중함이 느껴졌다.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을 미루면서도 가문의 수장인 그가 직접 로마까지 온 것이다.
여기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간다면 앞으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절박한 상황이긴 했으나 그런 표정이 결코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이름난 상인은 거의 예외없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얻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로마에서 손에 꼽히는 거상이라면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사소한 표정변화나 말투에서마저 상대방의 약점이나 심리를 읽어낼 수 있는 자라 봐야 했다.
그런 카샤파의 심리와는 반대로 타디우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자못 흥미롭다는 기색을 띠고 있었지만 저게 진심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일단 계속 말해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카샤파는 최대한 담담히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저희는 지금까지 로마의 물품을 한나라를 통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너무 비쌌죠."
"사타바하나의 지리상 한나라와 교역을 해도 필히 다른 여러 나라를 거쳐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로마와 직접 무역을 하길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게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알아봐도 비밀리에 하는 밀무역이 아니면 그럴 방법이 없더군요.
상인들은 로마와 한나라와의 계약을 지켜야 한다는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상황이 변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됐습니다. 한나라와의 관계가 틀어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한나라와만 교역을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된 정보를 들은 겁니까?
"
"딱히 극비사항도 아니니 말해드리는 건 상관없겠지요. 잘못 아신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샤한샤께서는 가장 먼저 우호를 맺은 한에게 우호의 증표로 독점무역을 약속하셨었습니다. 그러나 저번 전쟁에서 한이 보였던 태도는 저희 쪽에서 의구심을 갖게 할 수밖에 없었죠."
흉노와의 전쟁은 카샤파도 익히 알고 있었던 이야기다.
사실 전쟁의 멀리 있는 인도까지는 전쟁의 상세한 사항들이 전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거금을 쏟아부어 직접 조사를 한 한과는 달리 사타바하나 왕조는 그럴만한 이유도 별로 없었던 까닭이다.
그들이 아는 거라고는 흉노가 초반에 잠깐 선전하는 듯 했으나, 샤한샤가 나선 뒤로는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는 점 정도였다.
한이 무슨 짓을 해서 미운털이 박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카샤파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로마가 여러 국가와 교역을 한다면 대상이 어디겠는가.
인도-그리스나 인도-스키타이는 이미 나라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상태다.
그보다 더 북방은 이미 흉노에게 쓸려나갔기에 마땅한 나라를 찾을 수도 없었다.
한나라보다 동북방에 있는 국가는 거리가 말도 안 되게 떨어져 있으니 논외다.
그럼 자연히 대상은 인도에 있는 국가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사타바하나는 현재 남부 인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왕조였으니 이곳이 우선적인 고려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면 인도에 로마의 상인들이 오는 건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로마와 사타바하나는 무역을 하기에 최적의 입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나라와의 무역은 비단길이라고 좋게 포장해봐야 사실 그냥 육로로 힘들게 가는 거니까요. 위험부담도 크고 시간도 더 많이 소모하지요. 하지만 로마와 저희는 해로로 바로 교역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한과 교역하는 것보다 훨씬 더 편할 겁니다."
"인도에 로마의 특산품을 파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사오는 건 딱히 불법이 아니라 지금도 상인들이 왕래하고 있어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물건을 구매하고 경로를 잘 따라오기만 하면 한 번에 여기 크테시폰까지 당도할 수 있지요. 늪지대가 많아서 좀 거치적 거리긴 하지만 육로보다 훨씬 편한 건 사실입니다."
카샤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예상대로 로마는 이미 인도와 교역할 마음을 굳힌 상태다.
로마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건 이미 지금까지의 사례로 입증된 사실이었다.
이 천금 같은 기회에 가장 먼저 뛰어든 이가 돈을 쓸어담을 것이다.
"혹시 촐라나 아누라다푸라와도 교역을 하실 겁니까?"
"그 두 곳은 인도 최남부에 위치한 곳이었나요? 생각은 해보곤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잡지 못했습니다."
"배를 타고 가더라도 촐라로 가려면 상당한 거리를 돌아가야 합니다. 서쪽 유역은 이미 사타바하나가 전부 차지하고 있고 촐라는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죠. 아누라다푸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카샤파가 노리는 건 사타바하나,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로마와의 교역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까지 한나라가 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로마의 물건들을 비싸게 판매하는 게 가능한 까닭이다.
아무리 로마가 해상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도의 동쪽에 있는 여러 군소 국가들과 직교역을 하는 건 무리다.
이 점을 잘만 이용한다면 카샤파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놈들도 나를 타국에서 편입된 가문이라고 무시하지 못하겠지. 오히려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이다.'
카샤파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타디우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사실 거래라는 게 상호간의 신뢰 위에서 이뤄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사타바하나와는 관계를 튼 적이 없어서 저도 곤란해 하던 참이었습니다.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상인들이 왔다 갔다 했던 게 전부니까요. 본격적으로 저희가 진출하면 그쪽의 권력자분들과도 줄을 대야 할 것이고, 문화도 따로 공부해야 할 텐데······."
"말씀대로입니다. 사실 제 입으로 말하기 좀 뭐하지만 개방적인 로마의 분들은 사타바하나에 오면 충격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 충격 받는다는 건 좀 완곡한 표현이고 분노를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로마의 상인분들 중에 귀족이신 분은 거의 없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로마의 명문 귀족들은 대부분 원로원에 들어가고자 하는데 원로원 의원은 직접적으로 상업에 종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보통 대리인을 세우게 되고 이 대리인들은 해방 노예거나 기사계급에 속한 이들이 될 수밖에요."
"로마에서는 그게 당연한 사실이지만 저희 쪽에서는 당연하지 않으니까요. 아마 대부분의 콧대 높은 크샤트리아들은 타국에서 온 상인들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금 심한 이들은 귀족이 아니라면 얼굴을 보려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조금 답답하실 수도 있습니다. 교역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될 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카스트라는 신분 제도에 대해서는 타디우스도 가텀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카샤파가 던진 질문에는 딱히 생각해본 바가 없었다.
"상인들이 하는 말이라고 해봐야 이 가격에 팔면 남는 게 없다는 뻔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도 들으시겠지만 저희 쪽에 오신다면 '아무런 문제없다.' 라는 말을 계속 듣게 되실 겁니다."
"사타바하나 사람들은 꽤나 긍정적인가 보군요."
"네, 뭐···그런 면도 있긴 하겠습니다만···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이걸 정확히 해석하자면 문제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문제거리가 아니니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뜻에 가깝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귀족과 상인들은 확실히 저런 의미로 더 많이 말할 겁니다."
타디우스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까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큰일 날수도 있다는 거로군요."
"말만이 아니라 계약도 그렇습니다. 엄청나게 꼼꼼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말을 바꾸는 게 일상다반사입니다. 뭐라고 항의해봐야 문제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죠."
"그건 조금 곤란하겠는데요."
로마는 계약과 약속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불문율의 관습이 있었다.
약속을 해놓고 나몰라라 하는 건 로마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행위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사타바하나의 그런 경향은 타디우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이득이 될지도 몰랐다.
마르쿠스에게 받은 명령을 고려해 본다면 그렇게 분란의 소지를 제공해주는 게 오히려 더 좋기 때문이다.
"일단 귀족이나 상인이 단정적으로 말하는 걸 믿으면 무조건 낭패를 봅니다. 일주일 안에 끝난다고 하면 최소 열흘은 더 걸린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무조건 가능하다고 하면 반반 정도···가능할 수도 있다라고 하면 사실상 안 된다고 이해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을 잡으려고 한다면 진짜로 만나고 싶은 시간보다 훨씬 더 앞서서 잡아야 합니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야겠군요. 역시 현지의 문화를 잘 알면서도 높은 지위에 계신 분과 안면을 터놓길 잘했습니다."
타디우스가 원하는 대로의 반응을 보이자 카샤파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는 좋아하는 기색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애쓰며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곳입니다. 어찌나 편견이 심한지 타국에서 편입된 제 가문도 현지에 동화되는데 몇 년이나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만약 타디우스 님께서 인도와 교역을 하시려고 한다면 믿을 만한 조력자의 존재가 필수일 것입니다. 만약 저를 믿어주신다면 제가 여러 가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가텀의 친우분이시니 카샤파 님이야 당연히 믿을 수 있겠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일이 쉽게 성사되자 카샤파는 더 이상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환하게 미소 지은 그에게 타디우스가 마주 웃어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좋은 인연을 만난 기념으로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가텀, 자네도 함께 가겠나?"
"저야 영광입니다. 카샤파, 기대해도 좋을 걸세. 오늘 자네에게 로마의 유흥이란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지."
"나야 언제라도 좋지. 그럼 지금 바로 움직이는 겁니까?"
카샤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타디우스가 깜빡하고 있었다는 듯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행진이 시작됩니다. 외국에서 오셨다면 필시 진귀한 구경거리일 테니 유흥을 즐기기 전에 한 번 관람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군대의 행진 같은 것입니까? 출병식 같은 건가요?"
"아뇨. 훈련의 일환이지만 동시에 좋은 선전거리도 되기 때문에 가끔 이런 일이 있습니다. 로마의 최정예 기병대인 아퀼라누스는 모든 신민들의 동경의 대상이거든요. 그들이 한 번씩 행진할 때마다 거리에는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로마의 최정예 기병대라······."
로마가 무찌른 흉노만 하더라도 압도적인 기병 전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로 유명했다.
실제로 과거 카샤파가 몸담고 있었었던 인도-스키타이만 하더라도 꽤 준수한 기병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맥없이 쓸려나가지 않았는가.
그런 흉노를 짓밟은 강자들이라고 하니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봐도 괜찮은 거라면 꼭 한 번 구경해보고 싶습니다."
"안 될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 가시죠."
타디우스와 가텀은 카샤파를 안내해 호텔을 나와 넓은 대로변으로 향했다.
거리는 이미 행진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꽉꽉 차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타디우스를 알아본 사람들이 공간을 양보해줘 행렬이 가장 잘 보이는 명당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참고로 아퀼라누스는 독수리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에서 독수리는 곧 군단을 상징할 정도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그렇다면 아퀼라누스는 로마의 군단이 그대로 형상화 된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얼마나 위엄이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잔뜩 기대를 담은 눈으로 이쪽저쪽을 살피고 있던 카샤파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됐다.
저 멀리서부터 엄청난 환호 소리와 함께 말을 탄 일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이 로마의 최정예 기병인가······.'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카사퍄의 눈으로도 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휘황찬란한 갑주에 등에서 펄럭이는 날개 장식이 자연스레 눈길을 잡아끌었다.
처음에는 통짜 같았던 판금갑옷도 더욱 개량을 거쳐 지금은 날렵하면서도 독수리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개선된 상태였다.
아퀼라누스의 이 웅장한 자태는 카샤파에게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엄청난 위용이라는 말 외에는 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째서 시민들이 저렇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는지도 대충 이해가 갔다.
저들이 바로 로마의 강대한 힘을 보여주는 상징인 것이다.
또 한 가지 그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아퀼라누스들의 최전방에서 나아가고 있는 이였다.
딱 봐도 크테시폰의 사람들은 그에게 가장 큰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수레나스 님이다!"
"동방의 독수리 수레나스!"
"위대한 샤한샤의 왼팔!"
딱 봐도 로마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외모임에도 다른 모든 이들이 그에게 극도의 공손함을 표하고 있었다.
이 광경은 외부에서 편입 된 귀족이라고 상당한 차별을 받고 있는 카샤파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저 앞에 가고 있는 분은 누굽니까? 수레나스? 딱봐도 로마인이 아닌 거 같은데요."
"로마 시민권자시니 로마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옛 파르티아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였던 분입니다. 지금은 마르쿠스 님의 심복이며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기까지 하시죠."
"원로원이라면 로마 권력의 중추라고 알고 있는데···혹시 누구보다 빠르게 파르티아에서 로마로 갈아타신 겁니까? 그 공로를 인정받아 로마의 귀족이 됐다거나······."
"제가 알기로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어찌······."
경악에 찬 카샤파와는 달리 타디우스는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게 바로 위대한 사햔샤 마르쿠스 님의 방식입니다."
"샤한샤의 관용······."
카샤파의 시선은 현지 사람들은 물론 뒤를 따르는 로마인들에게도 경의와 존경을 받는 수레나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상상도 못한 이국의 풍경을 가득 담은 그의 두 눈동자가 동경과 부러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268. 그건 로마의 것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