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 천조질서의 균열 >
255.
한나라는 표면상으로는 이번 흉노 전쟁에서 아무런 손해를 본 게 없었다.
서역도호부가 잿더미가 되긴 했어도 이곳을 점거하고 있던 흉노군은 챙길 것만 챙기고 바로 로마를 향해 떠났다.
처음에 통일된 흉노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한나라는 과거에 겪었던 악몽을 떠올리고 부랴부랴 군사를 끌어 모으려 했다.
하지만 효선황제 유순이 죽고 장남인 유석이 황위에 오르는 민감한 시기라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흉노군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으니 망정이지 만약 한나라를 쳤다면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으리라.
그러나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한나라는 이미 재정파탄의 조짐이 이전부터 보이고 있었다.
선대 황제인 유순은 유능한 황제였기 때문에 그렇게 큰 티가 나지 않았지만, 환관을 중용하고 있었던 것도 후대에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
유학의 신봉자였던 유석은 즉위하고 젊은 유생들을 등용해 보았지만, 이미 공고한 환관들의 아성을 넘보긴 무리였다.
당연히 환관들의 공세에 밀려 유생들이 실각하며 정계는 환관 중심의 체제로 확고히 굳어졌다.
유석은 재정이라도 확보해보고자 너무 과도한 세금은 줄이고, 대규모 연회와 사치를 금지했지만 나아지는 게 딱히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방팔방으로 새어나가고 있는 돈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는데 이를 제대로 잡지 못한 까닭이다.
오히려 전매 제도를 폐지하면서 재정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악영향만 초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흉노의 침략에 대비한답시고 부랴부랴 방어군을 편성하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국가가 휘청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한나라의 방비를 비웃기라도 하듯 흉노는 로마와 싸우러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애먼 돈만 쓴 꼴이 됐지만 그래도 흉노가 쳐들어오진 않았으니 그나마 한숨 돌릴 순 있었다.
"흉노가 로마와 싸운다면 어찌 되겠나?"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유가적이긴 해도 유석이 아예 무능력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어쨌든 현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는 중이었다.
"흉노가 로마에게 지는 경우, 반대로 로마가 패하는 경우,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세 가지 경우를 고려해 대책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영명하신 판단이옵니다, 폐하."
선제 때부터 황제의 최측근으로 중용되고 있던 환관 홍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흉노의 동태를 살피라 일러두었습니다."
"그럼 장수들은 전쟁의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나?"
"그것이···아무래도 흉노가 이길 거라는 주장이 더 많긴 하지만 의견이 쉽게 통일되진 않고 있사옵니다."
홍공의 높고 앵앵거리는 목소리에 유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전에 늘어서 있는 신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럴듯한 의견이 있는 자들은 고하거라. 짐이 직접 들어보고 향후의 방침을 정하겠노라."
홍공과 함께 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또 다른 환관 석현이 나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거기장군 이청의 말에 의하면 흉노 기병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 힘은 고조께서 간신히 막아낼 정도였으며 무제께서 국력을 총동원해야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다. 야만인들이기는 하나 언제나 살육과 투쟁에 굶주린 이들이라 기세가 실로 무섭기 그지없다는 게 기병을 통솔하는 장군들의 공통된 견해였사옵니다."
한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밀려 굴욕적인 강화조건을 맺은 건 한나라에서 애써 외면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승리를 해봐야 과거 흉노의 최고 전성기 때 한이 그들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쯤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거기장군은 흉노가 로마를 능히 찍어 누를 만하다라고 보는 것인가?"
유석의 지목을 받은 거기장군 이청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의견은 석대공께서 말한 대로입니다. 흉노가 이전보다 쇠퇴했을 때조차 군부는 그들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로 다시 합쳐진 이상 필시 옛날에 악명 높았던 과거의 힘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서쪽으로 진군하며 수많은 야만족들을 통합해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그 어느 국가라 해도 흉노의 공격을 막기 힘을 것이옵니다.
"
"그들이 방향를 틀어 이쪽으로 몰려온다면 우리도 위험할 수 있다 그 뜻인가?"
"송구하지만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우리는 정면에서 그들과 싸우지 않고 우수한 축조기술을 활용해 성벽 안에서 그들과 맞설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유석이 신중한 표정으로 재차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그건 로마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예.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흉노와 많이 싸우며 그들의 기병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최적의 전략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이 큽니다. 로마는 흉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지요. 그들도 서방에서 패배를 모르며 대제국을 건설한 이상 흉노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것입니다."
"확실히 설득력 있는 의견이로다."
유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표기장군은 어떻게 생각하나?"
대장군의 바로 다음가는 서열로 여겨지는 표기장군의 의견은 군의 전반적인 인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 절도 있는 태도로 한걸음 나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신 표기장군 곽도군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청의 말대로 정면으로 붙는다면 흉노가 유리하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일 것입니다. 그래도 로마는 상인들과 사신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저희 이상의 국토를 지니고 병사들의 수도 수십만을 징병할 수 있는 대국이옵니다.
그들이 지더라도 단시간 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
"전쟁이 길어질 수 있다···이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피해가 적을 수는 없을 거라는 게 저희가 내린 결론입니다."
어느 쪽 의견을 들어봐도 일단 흉노가 이길 거라고 보는 의견이 더 많았다.
그리고 이런 의견을 뒷받침하는 보고가 몇 달에 걸쳐서 올라왔다.
"흉노의 기병대가 로마의 북부 경계를 뚫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로마의 반격으로 흉노군이 일시 후퇴했지만 곧바로 회전을 벌여 무려 20만에 달하는 로마군이 전멸했다는 보고입니다."
"20만이 전멸?"
"끝났군. 역시 정면 대결로는 그 야만족 놈들을 이길 수 없나보군."
한의 관료들은 로마의 패전을 기정사실로 두고 이후의 방침을 마련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한의 움직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절이 바뀌자 완전히 뒤바뀐 보고가 들어왔다.
"흉노가 로마군의 반격에 밀려 대대적인 철수를 했다고 합니다."
"평야에서 벌어진 대회전에서 흉노가 로마군에게 참패를 했다는 소문이 상인들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보고를 받은 유석이 눈을 크케 떴다.
몇 달 전만 해도 분명 로마의 20만 대군이 전멸했다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홍공과 석현 역시 눈에 띄게 당황한 눈치였다.
"흉노가 평야에서 로마군에게 패했다고? 그럴 리가 없지. 이미 20만이나 병력을 손실한 측이 대체 어떻게?
"그, 그것이 아직 소문에 불과한지라 정확한 확인은 되지 않았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최소한 반 년 이상은 지나야 이쪽에서 확실히 사태를 파악할 수 있사옵니다."
"반년은 너무 길다. 세 달 안에 끝내도록!"
이미 흉노의 승리를 전제로 방침을 짜놨는데 잘못하면 이 모든 걸 다시 백지로 돌려야 하는 사태였다.
홍공의 귀에 유석이 옥좌에 등을 파묻으며 혼잣말이 들려왔다.
"모두가 입을 모아 흉노와의 전면전은 승산이 없다 말했는데 로마가 그들을 격퇴한다면···로마가 이쪽보다 군사력이 훨씬 우월한 것인가? 그렇다고 봐야 하는 건가?"
홍공의 노안에 깊어진 주름이 한층 더 진해졌다.
그는 권력을 사랑하는 환관이긴 했어도 결코 무능한 이는 아니었다.
만약 로마가 흉노를 정면에서 찍어누른다면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좋지 않은 신호다. 자칫 잘못하면 중원이 로마에 비해 열등하다는 인식이 퍼질 수도 있겠어.'
홍공은 그 즉시 석현과 함께 모든 여력을 총동원해 전쟁의 정확한 추이를 알아내라는 황명을 받아냈다.
홍공은 너무 늙었기에 주로 석현이 이 일을 진두지휘했다.
한의 입장에서는 흉노와 로마가 서로 치고받고 함께 망해주는 게 최선의 결과였지만, 들려오는 보고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 게 확실합니다. 흉노의 지배자 묵돌(바야투르)은 로마의 동제 마르쿠스가 직접 처형했다고 합니다. 간신히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로마의 기병들이 흉노의 기병들을 완전히 압도해서 박살내 버렸다고 합니다."
주요 신하들을 모두 불러 모은 회의에서 이와 같은 최종보고가 올라오자 대전에는 그저 침묵만이 감돌았다.
유석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신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흉노의 기병이 상상이상으로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
"표기장군, 거기장군. 말을 해보아라. 예측이 완전히 빗나가지 않았더냐."
"···송구하옵니다."
흉노가 얼마나 강한지 입에 침을 튀겨가며 말했던 신하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존의 예측에 근거해 수립한 모든 방침과 전략을 완전히 폐기할 수밖에 없게 돼버린 것이다.
유석은 그토록 확신어린 어조로 장담을 늘어놓던 장군들의 능력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흉노의 기병이 쳐들어오면 성안에 틀어박혀 싸우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로마는 평야에서 정면으로 그들을 완전히 찍어 눌렀다더군. 우리와 로마의 전력 차이가 그 정도로 난다는 말인가?"
"···과거 무제께서도 원정군을 파견해 흉노를 축출한 바 있사옵니다."
"지금의 흉노는 그때와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을 거라고 한 이들은 자네들이 아닌가?"
"···듣기로 로마의 동제는 최근까지도 계속 정복전쟁을 하며 영토를 넓혔다고 합니다. 아마 최근까지 계속 전쟁을 했으니 전투 쪽에 한해서는 많은 발전이 있었을 수도 있다 사료됩니다."
기어들어가는 신하들의 목소리에 유석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결국 로마의 현 전력이 한보다 월등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무리 대국이라고 해도 로마 역시 따지고 보면 근본은 서양의 오랑캐들이다.
그들이 천하의 중심인 중원의 천자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 한나라의 권력층은 로마에서 들여온 설탕과 포도주에 완전히 중독되다 시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커피라는 정체불명의 검은 물도 들어왔는데 유석조차 이 검은 물을 좀처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신문물을 계속해서 만들 수 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천자의 위엄이 손상되는 법이다.
유석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걸 직감한 석현이 재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폐하, 서역의 로마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봐야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원과 비교될 수가 없사옵니다. 당장 로마의 상류층들은 저희가 넘겨준 비단이 없다면 변변한 옷조차 걸치지 못하는 야만인들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홍공도 석현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하옵니다. 우리가 로마의 물건을 수입하는 만큼 로마도 우리의 우월한 문물들을 가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무역의 추도 우리 쪽으로 기울 것이 확실합니다."
별다른 근거가 없는 장밋빛 예상이었으나 유석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관리 하나가 허둥지둥 대전으로 들어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리며 외쳤다.
"폐하! 로마의 사신이 앞으로 가져가는 비단의 양을 1할로 줄이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한순간 지극히 얼빠진 공기가 대전을 휘감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비단 수출로 얻는 이익을 근거로 열심히 유석의 마음을 달래주던 석현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비단 수입을 1할 늘리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1할로 줄이겠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그, 그것이···아마도 로마에서 비단을 직접 생산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창졸간에 이해하지 못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홍공의 입이 떡 벌어지며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어, 어찌···설마 누에가 유출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대체 언제?"
< 255. 천조질서의 균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