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개선 >
232.
마르쿠스의 귀환은 소아시아 전체를 흥분시켰다.
그의 군단을 태운 배가 아나톨리아 반도에 내린 순간부터 환영인파가 몰려들었다.
병력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귀환시키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만족스러운 보상을 책정해야 하고, 가깝게는 시리아부터 멀리는 북아프리카까지 병사들을 돌려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스포루스에서 끌고 오는 수십만에 달하는 노예들까지 있었다.
노예들이 늘어난다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단 노예들은 아무런 세금을 내지 않아 세수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노예들은 자유민들보다 훨씬 가성비가 싸게 먹힌다는 점도 문제였다.
비용이 적게 들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뭐든지 적당한 게 좋은 법이다.
노예들이 너무 대량으로 풀리게 되면 도리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좋은 예가 노예에 의존하는 라티푼디움 체제에 밀려 자영농들이 몰락한 걸 들 수 있다.
이제야 그걸 안정화 시켜 놓았는데 또다시 비슷한 문제를 떠안고 싶지는 않았다.
수십 년 뒤의 미래까지 내다보고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골치 아픈 일들보다는 승리의 영광을 만끽하는 게 먼저다.
마르쿠스가 안티오키아로 귀환하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자 시리아 속주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 번이라도 그를 보고 환영의 함성을 질러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침내 마르쿠스를 선두로 한 로마 군단이 안티오키아의 성문 앞에 섰다.
문 밖부터 궁까지 이어진 환영인파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 따라가지 못한 걸 분하게 생각하는 젊은 청년들부터 아낙네들과 어린아이들, 그리고 온갖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모조리 몰려들어 마르쿠스의 귀환을 반겼다.
마르쿠스는 말 위에서 그들을 한 번 돌아보았다.
모두가 함성을 지를 시기만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이미 아시아와 시리아 속주에서 마르쿠스를 단순한 총독이라 여기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가 부임한 이후 속주는 전에 없을 정도로 놀라운 번영을 맞이했다.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식량생산량 덕분에 배를 곯는 이들이 현격히 줄어들었고, 연이은 전쟁의 승리로 외적에 대한 위험이 완전히 사라졌다.
언제나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던 이곳 주민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마르쿠스는 살아있는 신과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한나라와 교역까지 트며 막대한 부가 집중되기까지 했다.
사실상 세계의 중심은 현재 시리아 속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대들이 믿고 따라준 덕분에 이번 전쟁도 우리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마르쿠스의 말에 모두가 주의를 집중했다.
혹시라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싶어 숨소리조차 조심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릇 이 시대의 백성들은 사람을 신격화하는데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비범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의 위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위광을 불려나갈 때 더욱 큰 권 권위를 얻게 되는 법이다.
마르쿠스는 속주를 비울 때마다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했고, 그때마다 그의 전설은 거대한 산맥처럼 커져나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흉노의 침입이 얼마나 로마를 시끄럽게 만들었는지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저 남부의 이집트와 쿠시 왕조까지 흉노의 소문이 퍼졌겠는가.
게르마니아와 갈리아가 초토화 됐다는 소문, 그리고 그리스에서 로마군이 대패하고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모두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
그러나 그런 흉노족도 자신들의 총독이 나서자마자 꼼짝도 하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들이 두려워 한 건 딱 한 가지였다.
전쟁에서 패배하는 게 아니다.
그럴 가능성 따위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리스의 총독직까지 손에 넣은 마르쿠스가 안티오키아로 돌아오지 않는 것.
시리아와 아시아 속주민들은 그 점을 가장 염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마르쿠스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오랜만에 돌아오니 고향에 온 기분이로군. 이번에 거둔 위대한 승리로 그대들의 삶도 훨씬 나아질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오오오오오!"
신의 신탁을 받은 것처럼 기쁨의 함성이 번져 나갔다.
성문에서부터 시작된 함성이 거리로 번져나가 이내 왕궁의 앞까지 도달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아직 도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왜 함성을 지르는지 이유를 모르면서 그냥 냅다 소리를 지르고 환호를 터트렸다.
"메소포타미쿠스 만세!"
"안티오키아에 영광을!"
기쁨의 함성은 한참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이 경이로운 광경에 뒤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이 도리어 벙찐 표정을 지었다.
특히 나바테아로 돌아갈 예정인 동맹군 병사들은 좀처럼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혼란스러운 심정을 달랬다.
"마르쿠스 총독이 로마의 왕이었나?"
"로마는 왕이라는 게 없지 않나?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내 눈에는 왕의 행차로밖엔 보이지 않는데."
나바테아 병사들은 이 정도의 환영을 받으며 귀환하는 장수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왕이 왕림할 때도 이렇게 인파가 모이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광경에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짜릿한 전율이 몸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이윽고 동맹군 병사들마저 홀린 듯 로마 병사들과 함께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안티오키아의 궁으로 돌아온 마르쿠스는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을 보았다.
사랑하는 아내 율리아와 이집트의 두 파라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였다.
다나에는 아이들의 복장과 장식을 점검해주고 있는 중이라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혹시 어디 아프신 곳 없죠?"
율리아가 살갑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아무것도 걱정할 거 없어."
그녀를 한 번 안아준 마르쿠스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두 파라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제 슬슬 이집트로 돌아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텐데요."
"문제없어요. 오히려 시민들의 지지는 날이 갈수록 오르고 있다고 하니까요."
"다행이군요. 범람 주기를 맞추는 게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아예 안티오키아에 정착할 생각인지 자신들의 살림을 잔뜩 실어 나르고 있었다.
가끔씩 알렉산드리아로 번갈아가며 돌아가긴 했으나 그래도 금방 다시 돌아왔다.
일단 딸들을 조금이라도 더 마르쿠스와 함께 지내게 해서 그의 총애를 얻고자 함이 첫 번째였고, 그들 역시 이곳에서 머물고 싶다는 것이 둘째였다.
보통의 파라오가 알렉산드리아를 계속 비웠다면 마르쿠스의 말대로 불만이 나왔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문제가 없었다.
마르쿠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머물 때 클레오파트라에게 알려준 나일강의 풍년과 흉년 주기 덕분이었다.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이 나일 강의 범람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 문제에 비하면 사실상 곁가지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만약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는다면 이집트의 생산력은 문자 그대로 반토막 나버린다.
미리 예상할 수 있다면 대비라도 해보겠지만 이 시대의 기술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마르쿠스는 이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해주었다.
나일강의 수위는 이집트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에 연구 자료등을 뒤지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자세한 수치는 몰라도 아예 범람이 안 된 시기 정도는 특정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집트 시민들은 반신반의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은근슬쩍 마르쿠스 역시 살아 있는 신의 화신이라고 선전하며 이 말을 전했지만, 믿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파라오께서 혹시 연정에 시야가 좁아지신 건 아닐까?"
걸리면 즉시 경을 칠 불경한 말을 흘리는 이들도 나왔다.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나일강의 범람 주기를 맞추겠다며 가짜 예언을 한 이들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제대로 된 예언을 내놓진 못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에는 달랐다.
마르쿠스는 구체적으로 정확한 시기를 짚어 이집트의 기근이 찾아올 거라 말해주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그 말을 근거로 소비를 줄이고 예비 식량을 비축해 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이 예언은 당연히 그대로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대체 언제 불안해했냐는 듯 입을 모아 파라오의 덕을 칭송하고 찬양을 늘어놓았다.
고대 시대에서 날씨를 예언하고 맞추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신성의 증거였다.
마르쿠스는 흉노와 싸우고 있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이집트에서 살아있는 신 중 한명으로 등극한 것이다.
아르시노에가 기대를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마르쿠스에게 안기며 물어왔다.
"마르쿠스 님,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좀 여유로워지시겠죠? 이번에야말로 가족들끼리 다 함께 나일 강 유람을 떠나시는 건 어떨까요?"
마르쿠스가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를 돌아보았다.
말은 안 했어도 클레오파트라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율리아도 가족들끼리 함께 간다면 흔쾌히 따라갈 듯 보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마르쿠스도 두발 쭉 뻗고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흉노와의 전쟁은 지금까지 그가 치른 그 어떤 전쟁보다도 더 심력을 많이 소모했다.
결과는 대승으로 끝났어도 그 승리를 끌어내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었던가.
상황만 받쳐준다면 만사를 내팽개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조금 쉬다가 로마로 돌아가 봐야 할 겁니다. 이집트까지 내려갈 시간은 없을 듯 합니다."
"예?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로마로 돌아가신다고요?"
아르시노에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율리아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개선식을 하시려는 건가요? 딱히 문제가 있어서 가시는 건 아니죠?"
"문제라고 하면 문제고 아니면 아닌데···아직 구체적으로 결정 난 사안은 아니니 뭐라고 말해줄 수는 없어. 하지만 내가 가기 싫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어. 원로원에서 와달라고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올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쉬더라도 안티오키아에서 피로를 풀어야겠지."
마르쿠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맺었다.
율리아가 살짝 실망했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시다니 그럼 오늘은 가족끼리 만찬을 즐기기만 하고 내일부터 다시 일정에 복귀하시는 걸로 해야겠네요. 저희들의 방에 오시는 것도 내일부터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응? 그게 무슨 말······."
"전장터에서 오랜 시간 고생한 남편을 위로해주는 건 당연히 부인이 해야 할 일이죠. 저한테 맡겨주세요."
"아, 그래. 든든하네···잘 부탁해."
순간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주일 넘게 시달리다가 침대 위에서 기절했던 악몽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마르쿠스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마르쿠스가 바라는 평온한 일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락한 삶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안티오키아로 귀환한지 꼬박 한 달을 들여 군단을 해산하고, 그들에게 적정한 보상과 노예들을 배분했다.
땅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새롭게 손에 넣은 보스포루스를 개간해 나눠주고, 다키아와 흑토 평야 지대를 새로 로마의 영역으로 편입할 구상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려 20만 이상의 장병들에게 보상을 책정해줘야 하는 일이다.
눈이 핑 돌 정도로 처리해야 할 문건이 많았다.
아마 카이사르도 지금쯤 책상 앞에서 자신과 똑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병사들에 대한 보상안이 대충 마련되자 이제는 또 개선식에 관한 사항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번에 그들이 거둔 승리는 개선식을 열지 않으면 이상한 위업이었다.
아니, 원로원은 로마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해 반드시 개선식을 열길 원했다.
하지만 문제는 개선식의 규모였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이끈 병사들을 전부 합치면 40만이 훌쩍 넘어갔다.
지금까지 로마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수의 병사들과 함께 개선식을 치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싸움에서 공을 세운 용사들을 로마로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개선식을 하긴 해야겠지만, 개선식을 치른 뒤의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뻔히 내다보인다는 점이었다.
이제 원로원이 견제하기에는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존재가 너무 커져버렸다.
이제 자존심 높은 귀족파마저 이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르쿠스는 표면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귀족파를 대우해주니 그나마 참을만 했다.
문제는 카이사르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그 누구도 쉽사리 예상할 수가 없었다.
카토마저 숨을 죽이고 카이사르를 비방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지금 로마의 분위기는 카이사르나 마르쿠스를 조금이라도 나쁘게 말하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섣부른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불에 기름을 붓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만 한다.
귀족파는 이참에 이번 개선식을 기회삼아 카이사르의 안에 어떤 야심이 도사리고 있는지 철저히 캐내보기로 했다.
귀족파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선을 넘을 마음이 없었다.
키케로와 카토는 자신들에게 힘을 빌려달라는 바람을 담아 안티오키아로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불씨를 퍼트릴 도화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로마를 흉노에게서 구한 두 영웅의 귀환을 앞두고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집단이 눈에 띄었다.
브루투스가 새롭게 이끄는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한 모임.
그 오랜 이름과의 재회가 마르쿠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 232. 개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