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 종결 (232/326)

  < 231. 종결 >

  231.

  '멀다.'

  바야투르는 저 멀리 보이는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베고 베고 또 베었다.

  바야투르의 만곡도가 한 번 휘둘릴 때마다 어김없이 길이 만들어졌다.

  가히 압도적인 신위였다.

  그러나 그렇게 나아가는 바야투르의 돌파도 점점 끝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내 이상은.'

  돌파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애마 텡그리와 본인의 체력 모두 슬슬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뒤를 따르는 전사들의 함성소리도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한 명 또 한 명.

  낙마하며 스러져 간다.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북제와 동제의 깃발을 본 뒤 뒤로 고개를 돌렸다.

  "커억!"

  "아아악!"

  자신을 따르던 전사들이 몰살을 당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바야투르의 돌파를 유도한 뒤 그의 뒤를 따르는 흉노의 주전력을 치는 전술을 전개하였다.

  장창병과 그물을 그러쥔 보조병들이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바야투르가 돌파하며 선두에서 수십 명을 베는 사이 뒤따르는 흉노의 주전력은 낙마하거나 창에 꿰뚫려 수백 명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

  "끄아악!"

  "이··· 이런 괴물 같은 자식이!"

  그럼에도 계속해서 막아서는 로마군을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바야투르였다.

  이 나아가는 길 끝에 초원의 길도 끝나리라.

  예정되어 있는 파멸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처, 천태선우님! 커억!"

  바로 뒤를 따르는 마지막 전사의 비명이 시리도록 귓가를 파고들었다.

  자신의 호위대장 티라운의 목소리였다.

  바야투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유목민의 대제국을 이룩하는 게 헛된 야망이었던 걸까.

  통일된 흉노의 힘이라면 세상에 하지 못할 게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 힘을 가지고 이전의 대선우들처럼 한나라와 싸우는 길을 택했다면.

  '아니, 그랬다면 처음부터 이 정도의 힘을 결집할 수 없었겠지.'

  파르티아에서 보았던 로마의 마력에 휩쓸려 원대한 꿈을 꾸었다.

  언젠가는 로마를 무릎 꿇리겠다는 야망이 없었다면 흉노의 재통합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으리라.

  비록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헛된 꿈일지라도.

  '한 명이라도 더 죽인다.'

  바야투르에게는 책임이 있다.

  그의 야망에 호응해 모이고, 목숨을 바친 전사들이 그에게 등을 보이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한순간도 멈춰설 수 없다.

  그것이 이곳에 스러져 간 전사들의 넋을 달래는 길이리라.

  "와라! 내가 바로 대초원의 천태선우다!"

  촤악

  "커어억!"

  "이··· 이런 괴물같은 놈!"

  "모두 그물을 던져라! 이제 남은 건 이놈 하나다!"

  셀 수 없이 많은 그물과 창이 날아온다. 바야투르의 신위도 마침내 끝을 보이고 있었다.

  애마 텡그리가 한 백인대장의 투창에 목을 찔려 쓰러졌다.

  낙마한 바야투르의 위로 수십 겹의 그물이 날아들었다.

  "끝났군."

  카이사르의 한 마디가 이 대전쟁의 끝을 알렸다.

  ※※※

  로마는 본래 적장을 사로잡더라도 처형하지 않는다.

  로마가  자비롭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적장을 개선식에 세워 개선장군의 위엄을 드높일 필요가 있었던 까닭이다.

  개선식이 끝나도 적장을 처형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예외는 있었다.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자들은 개선식이 끝난 뒤 즉결 처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원 역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했던 베르킨게토릭스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살아있다면 갈리아의 로마화에 지장이 될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으리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쿠스는 바야투르를 살려둘 마음이 없었다.

  단순히 명예를 빛내줄 트로피로 쓰기엔 그는 너무 위험한 자였다.

  게다가 바야투르가 포로로 잡혀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흉노 측에서 추가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다.

  이미 반쯤 궤멸된 이들이라고 해도 괜히 골치 아픈 일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도 처형 전에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마르쿠스의 존재가 불러온 가장 큰 나비효과가 실체를 가지고 나타난 게 바로 바야투르였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스파르타쿠스와 통역만을 대동한 채 바야투르와 독대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쇠사슬에 칭칭 묶이고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팔다리가 묶여 있음에도 두 눈만은 죽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비범한 인물이라는 게 체감이 됐다.

  바야투르 역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상에 휩싸였다.

  그가 초원을 통일한다는 야망을 품게 된 계가기 된 인물이자, 그 야망을 짓밟아버린 자가 바로 눈앞에 있다.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처음이군. 초원의 천태선우, 바야투르라고 했나?"

  "그렇다. 내가 바로 바야투르다."

  로마군들의 앞에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는 그가 의외로 선선히 말문을 열었다.

  바야투르의 얼굴에는 어쩐지 홀가분해 보이는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반응이 다르군. 좀 더 공격적인 태도로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모든 게 끝났는데 이제 와서 그런 반응을 보여 봐야 추해질 뿐이지. 패자는 패자답게 승자를 인정하고 떠날 뿐이다."

  "그래도 미련 같은 게 남지 않나? 여기서 이렇게 했다면, 저렇게 했다면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바야투르가 한숨을 쉬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내 다시 눈을 뜬 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전부 부질없는 가정. 딱 한 가지 미련이 남는 거라면 당신의 옆에 있는 자와 끝까지 승부를 내지 못한 점이라고 할까··· 그마저도 사실 내 패배라고 봐야겠지. 전성기가 한참 지났을 전사를 상대로 결착을 내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그렇군. 그럼 더 이상 생에 미련은 없다 이 말인가?"

  바야투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의 모든 걸 불태우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전쟁에 임했다.

  그러고도 패했으니 죽음 외에 어떤 마무리를 바랄까.

  마르쿠스는 바야투르의 얼굴에서 일말의 불안감도 읽어낼 수 없었다.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도 초연한 표정을 보니 역시 뛰어난 인물은 뛰어난 인물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바야투르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그 어떤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로마의 대적인 바야투르의 목숨을 구명해줄 수는 없다.

  물론 마르쿠스 역시 처음부터 그를 살려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처형을 하긴 해야겠지만··· 사실 지금도 고민 중이다. 널 여기서 죽여줄지 아니면 로마까지 끌고 가 갖은 굴욕을 준 뒤 목숨을 거둘지."

  "뭐가 됐든 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나갈 마음은 없다. 하지만 되도록 여기서 처형을 해줬으면 하는데. 굴욕을 주지 않고 깔끔하게 처형해 준다면 나도 보답으로 한 가지 정보를 알려주도록 하지."

  "정보라니 무슨?"

  바야투르는 마르쿠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쏟아냈다.

  마르쿠스가 이야기를 전부 듣고도 입을 씻을 성격은 아니라는 걸 꿰뚫어 본 술수였다.

  "···그런가. 지금 당장 극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아니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군. 네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지. 처형은 바로 내일. 나의 모든 군단이 보는 앞에서 치러질 거다. 불만 없겠지?"

  "그래도 불만 없다. 아,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자. 회전을 벌이기 전에 지속적으로 후방을 헤집은 건 네놈의 머릿속에서 나온 전략이 맞겠지?"

  "그런데 뭐가 문제라도?"

  바야투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냥 마지막으로 야비하기 이를 데 없는 그놈에게 한마디 퍼부어주고 싶어서 물어본 것뿐이다. 해도 괜찮겠지?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당한 전략 중에 가장 기분이 더러웠거든."

  "그래. 마지막이니 들어주마. 해봐."

  "그렇게 살지 마라, 이 개새끼야!"

  "······."

  "······."

  잠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남길 말은 그게 끝인가?"

  "끝이다."

  "고맙다.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마르쿠스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파르타쿠스는 그저 아쉽다는 듯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마르쿠스의 뒤를 따라 나갔다.

  완벽한 승리로 전쟁이 끝났지만, 아직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바야투르는 마르쿠스의 말대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형당했다.

  카이사르도 바야투르를 처형하는 데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거둔 승리는 로마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대승이었다.

  굳이 적장을 포로로 잡아가지 않아도 개선식에 쓸 선전거리는 차고 넘쳤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깔끔히 목을 치고 전쟁의 승리를 선포하는 게 더 낫겠다는 데 동의했다.

  바야투르는 그렇게 수십만의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대에 올랐다.

  그는 초원의 천태선우답게 목이 잘리는 그 순간까지도 초연함을 잃지 않았다.

  로마군들의 분노에 찬 함성과 야유에도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죽어간 모든 로마인들의 울분을 풀어내는 역할은 마르쿠스가 직접 담당했다.

  깔끔하게 바야투르의 목을 친 마르쿠스가 하늘 높이 검을 들어 올리자 수십만의 장병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소리를 내질렀다.

  "우오오오! 전쟁이 끝났다!"

  "우리의 승리다! 로마 인빅타!"

  병사들의 열광 어린 환호가 잦아들고 상황이 정리되자 카이사르는 전쟁의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여기서 바야투르는 치열했던 자신의 생애와 어울리지 않는 굴욕을 당했다.

  부패되지 않도록 보존된 그의 목이 로마로 보내졌다.

  사실상 효수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바람대로 살아서 수모를 겪는 건 피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스파르타쿠스는 조금이나마 연민을 보이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영웅이었다고 해도 로마의 입장에서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였다.

  로마는 대대적으로 그의 최후를 알리고 전쟁의 승리를 자축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무리 작업에는 당연히 배신자의 처벌도 포함되어야 한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즉시 흑해를 가로질러 보스포루스 왕국으로 넘어갔다.

  이미 그들의 뒷배가 되어줄 흉노가 패주한 이상 그들이 저항할 여력 따윈 없었다.

  마르쿠스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도시와 함께 전부 죽거나 스스로 문을 열어서 노예가 돼라. 너희들에게 허락된 길은 단 둘뿐이다."

  처음에는 그 어떤 도시도 성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쿠스와 로마군의 분노는 진심이었다.

  본보기로 선택된 도시 하나가 로마군의 공세에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성문이 뚫렸다.

  그 뒤 배신자의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다른 도시들이 항복의 뜻을 전해왔다.

  마르쿠스는 약속대로 이들을 모조리 노예로 만들어 팔아버렸다.

  로마는 자신들을 배신한 동맹국에게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이 절대적인 원칙을 다시 한번 관철한 마르쿠스는 수십만이 훌쩍 넘어가는 노예들을 확보해 귀환길에 올랐다.

  바야투르의 죽음이 전쟁의 끝을 알리는 상징적인 신호였다면, 보스포루스의 함락은 실질적으로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

  길고 긴 전쟁의 끝을 맞이한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와 로마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각자의 속주로 돌아갔다.

  모든 걸 마무리하고 귀환하는 길.

  뱃머리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싹을 티웠다.

  전쟁 중에는 생각하려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공화정의 역사상 가장 큰 권한과 힘을 쥔 두 사람이 탄생했으니 로마의 정계는 이제 대격변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피바람은 멈추지 않고 불어올 것이다.

  마르쿠스의 눈에는 잔잔히 흘러가는 흑해의 물결이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 231. 종결 > 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