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로마의 역습 >
222.
환호에 휩싸인 로마군의 진영과 달리 흉노의 진지는 갑작스레 들려온 비보에 사기가 뚝 떨어져 있었다.
"테살로니카가 로마 놈들의 손에 들어갔다!"
바야투르는 부하들에게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이런 소문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삽시간에 퍼져나간 소문에 수하들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바로 후방의 도시가 적의 손에 있다면 언제 앞뒤에서 협공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시로 세워놓은 총사령관의 간이 게르 안에서 바야투르는 머리를 싸매고 현 상황을 분석해보았다.
그가 그리고 있는 대전략에서 테살로니카는 단순한 거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리스와 트라키아의 중간 지대에 해당하는 전략의 요충지가 바로 테살로니카였다.
여기만 손에 쥐고 있어도 로마는 함부로 트라키아 지역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즉 흑해 전역을 로마의 손에서 뺏어올 수 있다는 뜻이다.
흉노가 흑해의 제해권을 완벽히 활용할 능력은 없었으나, 로마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하는 데만 해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테살로니카가 적의 손에 들어간 이상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바다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흉노는 이제 해상에 인접해 있는 트라키아의 대도시를 지킬 능력을 상실했다고 봐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군을 뒤로 물려야겠어."
"예?"
상상도 못한 발언에 여러 부족장들이 경악으로 눈을 치떴다.
"테살로니카가 함락당했으니 트라키아로 귀환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제 트라키아는 지킬 수 없다. 지키는 시늉이야 할 수 있겠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무조건 놈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어. 하지도 못하는 수성전을 하면서 병력을 갉아 먹히느니 달마티아에 있는 다른 병력과 합류하는 게 최선이다."
"어떻게 손에 넣은 지역인데 또다시 포기라니······."
비통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갈리아 때도 순조롭게 손에 넣은 지역을 포기했는데,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게 됐다.
게다가 두 번 다 전투에서 패하지도 않았는데 지역을 헌납하게 됐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그리스 지역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을 거두며 차지한 곳이었다.
이런 곳을 몇 달도 채 지키지 못하고 고스란히 다시 헌납하게 됐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태의 주범이 된 알탄은 찍 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바야투르는 그런 알탄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수성을 포기하고 모든 병력을 한곳에 집중해 로마 놈들과 일전을 벌였어야 했다. 내 판단 착오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알탄의 판단이 아쉽기는 했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수성전을 해보지 않았으니 그런 판단을 내려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부하들의 허물을 탓해봐야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바야투르는 애초에 자신이 유목민족의 특성과는 이질적인 전략을 구상한 탓이라 여기기로 했다.
특히 알탄에게는 더 상세히 설명을 해줬어야 했었다.
처분까지 각오하고 있던 알탄은 바야투르의 위로에 더욱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에 대한 분노와 수치, 그리고 동포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에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으나 다른 부족장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일부러 못 본 채 해주었다.
바야투르는 마지막으로 로마군과 일전을 벌이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으나 곧 무리일 거란 결론을 내렸다.
테살로니카를 손에 넣은 이상 로마군이 흉노와 회전을 벌여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로마군의 진지는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 해안가를 등지고 있었다.
적이 작정하고 방어를 굳히고 있으면 억지로 뚫으려고 해봐야 자신들만 손해를 볼 뿐이다.
'이번 원정은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겠군. 이런 결과로 끝날 줄이야··· 내가 동제를 너무 무시했던 것인가.'
실질적으로 따지면 흉노는 이번에 피해를 본 게 딱히 없었다.
섹스투스와 마르쿠스와 연이어 회전을 벌이긴 했어도 피해는 로마군에 비하면 미미하다고 해도 좋았다.
어쨌든 흉노는 적의 전력 20만을 거의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주요 도시들에서 신전을 약탈하고 물자도 손에 넣었다.
이것만 놓고 보면 그리스를 잃는다고 해도 그리 큰 손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병력 손실이나 피해 규모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부하들에게 침투해 있는 기묘한 패배감이 문제였다.
신나게 몰아쳐도 마지막에는 결국 적에게 밀려난다는 인상이 박힌 게 뼈아팠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 있는 회전에서도 적을 압도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물론 바야투르의 군대는 총병력의 절반도 되지 않는 7만으로 마르쿠스의 15만 대군과 맞선 것이었다.
하지만 마르쿠스 역시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전부 쏟아부은 건 아니었다.
여러 가지로 계산을 해봐도 앞으로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압도하긴 쉽지 않아 보였다.
특히 앞으로 그리스 지역 전체가 마르쿠스의 손에 들어갈 테니 이전처럼 쉽게 그리스를 넘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흉노에게 큰 소득이 없는 원정이라 말할 수 있다.
바야투르는 솔직하게 상황이 어렵게 됐다는 걸 인정했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결국 파멸의 구렁텅이로 스스로 들어가게 될 뿐이다.
'동제 마르쿠스라··· 어떤 이인지 실제로 한번 봐두고 싶은데.'
바야투르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로마에게 협상을 제의해 보았다.
진짜로 조약을 맺을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마르쿠스를 직접 보고 그의 성향을 제대로 가늠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의도도 읽혔는지 로마군에서 돌아온 대답은 '헛소리하지 마라'였다.
덤으로 흉노가 로마에 끼친 피해를 고스란히 되갚아주기 전까지 협상은 없으니 협상을 하고 싶다면 그 이후에 찾아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실상 흉노군이 전멸하기 전까지는 대화를 해줄 마음이 없다는 의사표명이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수확은 있었다.
마르쿠스의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일체 타협의 의사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예상보다 더 호전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성향이 그런 것인가······.'
아직 확실치는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흉노가 그리스에서 물러가더라도 이번에는 로마 쪽에서 움직일 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설프게 대처한다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지도 모른다.
바야투르는 본대와 합류하기 전에 앞으로 어떤 전략을 펴야 할지 미리 구상을 끝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
한 번 결정을 내린 흉노는 언제나 그렇듯 신속하게 군대를 물렸다.
로마군은 작정하고 빠지는 흉노를 추격하기엔 기동력이 부족했다.
휘하의 5만 기병으로 추격을 한다고 해도 무리였다.
도리어 적의 매복에 걸려 역으로 공격을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마르쿠스는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흉노군에게 섣불리 손을 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트라키아 쪽을 지키고 있던 소수의 흉노 기병을 끊어 먹기 위해 바로 북서쪽으로 올라갔다.
아쉽게도 흑해 연안을 지키고 있던 흉노 감시병들은 로마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북쪽으로 쭉 올라가 트라키아를 벗어난 뒤였다.
적의 병력을 실질적으로 깎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처음의 목표는 완벽하게 달성했다.
마르쿠스는 테살로니카를 기점으로 서쪽의 해안가를 순회하며 흉노의 손에 떨어졌던 모든 도시를 되찾았다.
테살로니카가 해방됐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스 서쪽의 도시들도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이때다 싶어서 흉노에게 붙었던 반로마파 세력들은 시민들에게 몰매를 맞고 죽거나 추방당했다.
마르쿠스가 방문하는 도시마다 저절로 성문이 활짝 열리고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와 찬사가 쏟아졌다.
그리스의 사람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을 다시 해방시켜군 영웅의 방문을 기뻐하고 환영했다.
그리고 그 열광적인 성원은 그리스,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전역을 수복한 마르쿠스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마르쿠스! 마르쿠스!"
"위대한 메소포타미쿠스께 신들의 영광을!"
거의 아테네의 모든 시민들이 성문 밖까지 달려 나와 목이 쉬도록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아이들마저 마르쿠스의 군단 모양을 조악하게 본뜬 깃발을 흔들며 영웅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려고 애썼다.
아테네에서 이 정도로 많은 환영 인파가 모인 적은 손에 꼽았다.
올림픽이 열릴 때조차 사람들이 이렇게 모이지는 않았다.
거의 해적을 뿌리째 뽑은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를 방문했을 때를 방불케 하는 인파였다.
로마군이 지나가는 곳을 제외한 거리는 북적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그 정도로 그리스가 흉노에게 품은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던 것이다.
흉노는 그리스가 맞이했던 지금까지 침략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어떠한 존중도 보이지 않았고, 수틀리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리개로 삼았다.
해적들조차 신전의 재물을 약탈하기만 했는데 흉노는 말을 듣지 않는 도시는 신전을 부수고 신녀들을 겁간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말조차 통하지 않고, 생김새도 완전히 이질적이었으니 그리스인들이 느끼는 공포는 몇 배로 더 배가되었다.
현대로 치면 거의 외계인의 침략을 받은 지구인의 심정이라 할 수 있었다.
믿었던 섹스투스의 로마군을 간단히 전멸시켜버렸다는 점까지 합쳐지니 저항할 의지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런 자들을 마르쿠스는 간단히 다시 쫓아내 버리고 자신들을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리스인들에게는 마르쿠스가 마치 신처럼 보인 게 당연하다.
게다가 그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친숙한 인물이기도 했다.
바로 아직까지도 그리스에서 전설로 회자되는 그 폼페이우스의 밑에서 함께 해적 토벌을 수행한 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가 다시금 퍼져나가자 그리스인들은 사실상 마르쿠스를 폼페이우스의 후계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 옛날 폼페이우스의 위광을 기억하고 있는 나이든 이들은 마르쿠스 군단의 행진을 보며 옛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들이 목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높였다.
"마르쿠스 총독 만세!"
누군가의 외침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그때부터 사람들은 모두가 깃발을 흔들며 총독 만세를 외쳤다.
엄밀히 말해서 마르쿠스는 그리스의 총독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스 시민들의 마음속에서 마르쿠스는 이미 그리스 전역의 총독이었으니까.
"마르쿠스 총독님 만세! 만세!"
귀가 멎을 것처럼 뜨거운 갈채 속으로 마르쿠스가 당당히 들어섰다.
하얀 백마를 타고 부하들을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시킨 그의 행렬은 마치 개선식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보다도 더 열렬한 환호를 받은 그는 아테네의 신전으로 갔다.
위대한 신들에게 승리를 보고하고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그리스의 민심을 완전히 사로잡은 마르쿠스는 한동안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속주에 머물며 전쟁의 뒷수습을 해나갔다.
로마 원로원에도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보고와 함께 자신에게 그리스 재건을 맡겨 달라는 요구를 보냈다.
물론 대답은 기다리지 않았다.
흉노의 재침공을 예방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1년 안에 그리스를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리겠습니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안심하시고 다시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이제 어두운 밤은 전부 지나갔습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너진 그리스의 신전과 문화재들을 최우선적으로 다시 재건했다.
불타버린 공공시설도 다시 수리했으며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다시 정착할 수 있을 때까지 식량지원도 해주었다.
그리스 전역이 다시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건 이제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마르쿠스가 그리스를 떠나 다시 소아시아로 돌아가 버리는 것.
로마에서 도착하는 배를 기다리는 시민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날카로워졌다.
만약 원로원에서 허튼 대답을 보내온다면 즉각 그리스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날 기세였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흉노가 무서웠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로마에서 보내온 대답은 그리스인들이 바라는 그대로였다.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에게 그리스, 마케도니아, 에페이로스. 트라키아의 4개 속주를 추가로 관할하게 한다. 총독은 흉노의 침공을 대비하고 그리스가 이전처럼 상업에 종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도록 한다. 임기는 흉노의 위협이 사라지고 그리스가 안정되는 시기까지 무제한으로 연장할 수 있다.>
흉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임시조치라는 티를 팍팍 내긴 했으나, 결국 무기한 임기의 총독직을 수여했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바라는 결과를 받아든 그리스는 환호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신관들을 비롯해 그리스권에서 활동하는 거상들과 지역유지들이 줄지어 마르쿠스와 조금이라도 연줄을 대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이런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차분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
마음이 급하다고 서두르거나 느긋하다고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흉노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은 고작 잃었던 지역을 수복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이대로 끝내기엔 이쪽이 흘린 피가 너무나 많아 수지가 맞지 않는다.
'적어도 이쪽이 당한 만큼은 그대로 돌려줘야지. 그래도 서두르면 안 된다. 티가 나면 자칫 놓칠 수도 있으니까.'
차갑게 빛나는 마르쿠스의 눈동자.
그의 귀에는 사람들의 아부나 환호 섞인 갈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카이사르에게 보낸 제안에 대한 답변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길고 길었던 이 전쟁에 종지부가 찍히는 순간이 되리라.
< 222. 로마의 역습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