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로마의 역습 >
220.
서로간의 탐색전 따위는 없었다.
"하압!"
바야투르의 입에서 거센 포효가 터져 나왔다.
초원의 모두를 공포에 떨게 맞들었던 그 매서운 일격이 평원의 공기를 갈랐다.
쩌엉!
스파르타쿠스는 바야투르의 만곡도를 피하지 않았다.
정수리를 노린 일격에 정면으로 검을 부딪치며 역으로 상대를 압박해 나갔다.
콰앙 카카각 양측의 검이 충돌하면서 격한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두 사람의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지 못한 경험이 없었던 두 전사의 눈이 동시에 이채를 발했다.
격렬하게 싸움을 이어가던 주변의 기병들도 어느새 무기를 멈추고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는 속도로 이어지는 공방.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바야투르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
미세하지만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힘과 기술의 수준은 비슷했다.
차이가 있어도 서로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다.
바야투르가 밀리는 건 입고 있는 방어구의 차이 때문이었다.
판금갑옷을 입고 있는 스파르타쿠스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은 갑옷의 강도를 믿고 별다른 방비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흘려내는데 바야투르쪽이 필연적으로 집중력을 더 소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쩌정!
이번에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바야투르가 뒤쪽으로 밀려났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진해 오는 스파르타쿠스를 향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번 건 위험하다!'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공격으로는 스파르타쿠스의 갑옷을 뚫지 못한다.
예상대로 스파르타쿠스는 검을 피하지 않고 검을 쥔 반대 손으로 바야투르의 만곡도를 쳐냈다.
한 발 빠르게 위험을 감지한 바야투르는 자신의 검이 튕겨나가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 아슬아슬하게 스파르타쿠스의 검을 비껴냈다.
정수리 위로 느껴지는 거센 풍압이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방어구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던 게 실수였군.'
검이 제대로 박히지 않는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나마 무기는 로마군에게서 손에 넣은 장비들을 이용해 균형을 맞추고 있었지만, 방어구는 그렇지 못했다.
기존의 철보다 훨씬 더 단단한 로마군의 무기로 후려쳐도 저 괴물 같은 갑옷은 좀처럼 파손되지 않았던 것이다.
거칠 것 없이 마음껏 검을 휘두르는 스파르타쿠스의 앞에서 바야투르는 좀처럼 반격의 기회를 찾아내지 못했다.
거리를 두고 대결을 지켜보던 흉노 기병들도 바야투르가 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이 보기에도 점점 바야투르가 위험해 보였다.
처음에 둘이 싸울 때만 해도 천태선우의 드높은 자존심을 고려해 1대 1로 겨루도록 방관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이 영 꺼림칙했다.
사실 이 대결은 사전에 1대1로 겨루도록 약속한 것도 아니고, 끼어들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다.
게다가 여기서 바야투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흉노가 입을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천태선우님을 모셔라!"
결국 참다못한 전사들이 몸을 날렸다.
스파르타쿠스는 기병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무리를 해서 바야투르의 목숨을 노려볼 것인가 아니면 물러날 것인가.
결론은 곧바로 나왔다.
대결에서 우세하긴 했어도 바야투르는 곧바로 숨통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괜히 머뭇거리면 몰려오는 기병들에게 포위당할 우려가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로마 기병들도 오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먼저 움직인 흉노가 한발 빠를 수밖에 없다.
스파르타쿠스는 아쉬움으로 입맛을 슬쩍 다시고 뒤로 물러났다.
바야투르 역시 짜증이 한가득 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오는 수하들과 합류했다.
"천태선우님! 괜찮으십니까?"
"누가 내 대결에 끼어들라고 했더냐."
"어차피 이건 처음부터 공정한 대결도 아니었습니다. 저쪽이 방어구가 압도적으로 좋지 않았습니까."
제대로 된 대결이 아니니 끼어들어도 상관이 없다는 논리였다.
바야투르는 짜증이 확 솟구쳤지만, 여기서 부하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사실 공정한 대결이라 할 수 없었던 건 사실이고, 부하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던 까닭이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대결이 불완전 연소로 끝나버린 건 아쉬웠으나, 그대로 계속 갔다면 자신이 패했을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모두의 시선을 끌던 대결이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리자 안 그래도 고착 상태이던 전장의 분위기에도 찬물이 끼얹어졌다.
완전히 소강상태가 되자 양측의 군대는 조금 거리를 둔 채 잠시 싸움을 멈추었다.
당장이라도 다시 전투를 개시할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오고갔으나, 곧바로 전투가 재개되지는 않았다.
양쪽 지휘관들은 이 틈에 흐트러졌던 전열을 가다듬고 병력을 추스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황을 유심히 살피는 마르쿠스의 안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적을 절멸시킬 수 있다면 최상일 테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지금 이대로만 가도 마르쿠스의 계획은 절반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적에게 심대한 피해는 주지 못한 것 같았지만 아군의 피해 역시 크지 않다는 게 고무적이었다.
기병의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보병들도 건재했다.
적과 제대로 부딪쳐 보지 못한 중무장 기병들은 연신 짜증을 토로했으나 그 정도면 감지덕지다.
마르쿠스가 군단장들을 돌아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마음을 풀지 말고 요령껏 체력을 회복하라! 곧 전투를 재개할 것이다!"
병사들이 선 채로 잠시간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스파르타쿠스가 잠시 대열을 벗어나 마르쿠스를 찾았다.
아까 전 대결이 흐지부지 된 데에 못내 아쉬움을 느끼던 그는 한 가지 수단을 제안했다.
"적의 대장과 확실한 1대 1 대결로 결착을 짓겠습니다."
"저들이 받아들여줄까? 아까 결투를 보아하니 대놓고 밀렸는데."
"그건 방어구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일반적인 갑옷으로 환복하고 대결을 신청한다면 결코 피하지 않을 겁니다."
스파르타쿠스는 바야투르가 물러나면서 보였던 아쉽다는 눈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동등한 조건에서 겨룬다면 충분히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 거라 여기고 있을 터.
도발에 가까운 결투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아까 보니까 적장의 수준도 만만치 않던데? 완전히 대등한 조건이라면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개입할 수도 있어.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곤란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전 스파르타쿠스입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단호한 대답에 마르쿠스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이득인 상황이다.
결판을 서두르지 않고 대결로 일관한다면 아군의 피해도 줄일 수 있고, 시간도 효율적으로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스파르타쿠스가 적장을 꺾어준다면 여기서 적을 전멸시키는 것도 한 번 노려볼 수 있다.
패배했을 시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상당했으나 스파르타쿠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적이 없었다.
부하를 신뢰해줘야 할 때는 과감하게 신뢰를 보이는 게 마르쿠스의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이토록 전의를 불사르는 스파르타쿠스의 모습은 크릭수스 때 이후로 본적이 없었다.
아마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호적수의 등장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리라.
"좋아. 네 뜻을 존중해주도록 하지. 대신 패배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도록."
"감사합니다. 가진 모든 힘을 다해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마르쿠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스파르타쿠스는 비슷한 체구를 지닌 병사와 갑옷을 바꿔 입었다.
그리고 통역 역할을 자처하며 항복한 스키타이 포로를 대동한 채 전선의 가장 앞으로 나가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였다.
"적의 수괴는 들어라! 로마의 장수 스파르타쿠스가 서로간의 긍지를 건 일대일 결투를 제안한다! 만약 싸움이 두렵거나 자신이 없다면 응하지 않아도 좋다."
쩌렁쩌렁 울리는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통역병이 재빠르게 흉노어로 옮겼다.
다소 오만하기까지 한 그 발언에 흉노 전사들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재대결을 염원하던 바야투르로서는 박수를 치며 반길만한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로마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 이후의 전술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설령 이기더라도 아군 역시 이후의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을 우려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스파르타쿠스를 꺾고 그 기세를 살려 몰아친다면 적을 일거에 토벌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건 다 총사령광인 자신이 직접 결투에 나가는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작업에 불과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냥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이 황홀한 결투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하하하! 그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든다! 좋다! 자신의 기량을 다 파악하지 못한 자만을 뼈저리게 후화하게 만들어주마!"
바야투르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소리를 높이고는 대결을 수락하겠다는 의미로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은 서로의 병사들을 뒤로한 채 천천히 앞으로 나와 검을 겨누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완전히 대등한 조건 일대일의 대결.
누구의 방해도 불허하는 이 순간 두 장수의 눈가에는 묘한 희열이 어렸다.
두 사람은 이미 어설픈 문답은 의미가 없다는 듯 곧바로 검을 마주쳐갔다.
카앙! 콰가각 확실히 조금 전의 대결과는 양상이 달랐다.
스파르타쿠스와 바야투르, 양쪽 모두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검을 주고 받았다.
준비동작조차 없이 검을 쳐내는 데도 검에 실린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겁다.
평범한 투사였다면 일격조차 받아내기 힘든 검을 삽시간에 수십합이나 교환했다.
슈각!
스파르타쿠스는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대처하려고 하면 이미 늦는다.
검을 움직이는 건 한계까지 달한 반응과 예지의 영역까지 갈고 닦은 경험의 소산이다.
그리고 그건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파르타쿠스는 검을 나눌수록 바야투르가 자신과 같은 수준의 검사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크릭수스 이후로 이 정도로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상대는 결단코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바야투르는 크릭수스와 다르게 스파르타쿠스와 정면에서 맞서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힘대힘의 대결에서 대등한 상대를 만난 것이다.
무인으로서 특별한 감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콰아앙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양측의 병사들도 손에 땀을 쥐고 두 무인의 공방을 지켜보았다.
바야투르의 강함을 잘 알고 있는 흉노 전사들의 얼굴에는 차츰 경악이 서렸다.
그들은 조금 전 바야투르가 밀렸던 이유는 오롯이 장비의 차이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등한 대결이 된다면 초원의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했던 천태선우의 검이 로마 장수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로마군 역시 별반 다르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스파르타쿠스가 적과의 대결에서 고전하는 모습 자체를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언제나 그랬듯 적장의 목을 취해 당당히 개선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분이 지나도록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원 없이 칼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살짝 거리를 둔 채 서로를 가늠했다.
지금까지의 격돌로 피차 서로의 수준은 충분히 파악했다.
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바로 패배로 직행할 만큼 양측의 기량은 대등했다.
힘은 거의 대동소이하고 체력은 바야투르가, 기술은 스파르타쿠스 쪽이 미세하게 더 높다.
이대로 대결이 흘러간다면 양쪽 모두 피를 뿜으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결을 지켜보는 이들조차 그 사실을 직감한 듯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 와중에도 스파르타쿠스를 향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이고 있는 자.
마르쿠스의 눈이 동쪽 하늘 저편을 향했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됐겠지.'
초원의 기상을 머금고 있던 공기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불어오고 있는 바람이 그의 물음에 답하고 있었다.
※※※
테살로니카의 수비를 명받은 알탄은 1만 5천의 병사를 이끌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현지의 분위기는 결코 흉노 쪽으로 웃어주고 있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트라키아라면 몰라도 테살로니카에는 이미 마르쿠스의 북상 소식이 전부 전해졌기 때문이다.
흉노에게 항복을 하긴 했으나 테살로니카의 주민들은 마르쿠스가 흉노군을 무찌르고 자신들을 구해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기대와 열망을 느끼지 못할 알탄이 아니었다.
그는 휘하의 부대를 총동원해 시내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항구 쪽을 향하고 있는 감시의 눈길은 상대적으로 많이 옅어졌다.
그리고 마치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5만의 대군을 태운 함대가 위풍당당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파르타쿠스와 바야투르가 역사에 남을만한 장대한 대결을 펼치고 있던 바로 그때.
테살로니카의 항구에 들이닥친 로마의 대군이 상륙을 개시했다.
"위대한 로마와 마르쿠스의 이름으로 나 안토니우스가 명한다! 들어라, 그리스여. 일어나라 테살로니카여. 지금이 바로 약속의 때다!"
시내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알탄은 갑작스레 바다에 적의 대군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 순간 혼란에 빠졌다.
대관절 어디에서 갑자기 5만의 병력이 튀어나왔다는 말인가.
'저 놈들이 아테네를 수비하는 척 병력을 남겨두고 그걸 몰래 이쪽으로 보냈었나 보구나.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어!'
마르쿠스의 본대가 느릿느릿 북상했던 건 바야투르의 군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배를 타고 돌아간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테살로니카까지 도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런 제길···항구 쪽에 전 병력을 배치해 상륙을 막았어야 했는데.'
로마군이 상륙하기 시작한 이상 테살로니카의 주민들은 당연히 로마군의 편에 붙어 함께 봉기할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철저하게 항전할 것인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 알탄의 눈에 전에 없던 다급함이 스쳐지나갔다.
< 220. 로마의 역습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