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변혁의 파도 >
182.
"그러면 식량배급 문제는 카토의 안을 채택하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집정관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피우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새로 증축된 의사당에 울려 퍼졌다.
마르쿠스가 원로원의 기를 살려줄 목적으로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이전보다 더욱 웅장하고 포로 로마눔 전체를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보수적인 원로들의 성향을 고려해 조각상도 최소 100년 이상이 된 예술품들을 비치해 두었다.
마르쿠스가 원로원 의사당을 새롭게 꾸민 이유는 로마가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같은 도시보다 더욱 훌륭해 보여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세계의 중심인 로마, 그리고 그 로마를 이끌어가는 원로원의 의사당은 그에 걸맞은 위엄을 갖춰야 한다.
마르쿠스의 주장은 보수적인 원로들에게도 많은 호응을 받았다.
새로운 의사당 건물은 기존보다 훨씬 넓은 만큼 더 많은 인원수가 들어올 수 있었다.
의원들은 단순히 공간을 더 쾌적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좋아했지만, 이건 나중에 원로원의 정원이 더 늘어날 것까지 고려한 설계였다.
마르쿠스는 이왕 돈을 쓰는 김에 의사당 너머의 포룸도 대대적으로 개선했다.
공터에 대리석을 깔고, 사면에는 눈길을 잡아끄는 조각상과 기둥을 세웠다.
중앙의 분수에는 이름난 예술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님프 조각상을 가져다 두었다.
처음에는 미심쩍은 반응을 보이던 원로원 의원들조차 새롭게 완성된 의사당의 위용에 커다란 만족을 보였다.
사실 갈수록 부유한 동방에서 로마로 오는 여행객과 상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이들이 원로원 의사당을 보고 초라한 곳이라고 비웃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로마가 힘만 강한 야만인들이라고 여겨지는 건 자존심 높은 원로들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에 새로 완성된 의사당은 콧대 높은 알렉산드리아의 부호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웅장한 위엄이 넘쳤다.
마르쿠스는 이런 소소한 곳에서 원로원의 위신을 세워주며 다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좌석 뒤쪽에서 느긋하게 회의의 진행상황을 살피는 그의 옆에 섹스투스가 슬쩍 다가와 앉았다.
"이번 회의에서는 의견을 내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원로원의 회의는 어디까지나 집정관이 주도해야 하는 법일세. 이전에 내가 너무 과도하게 나섰으니 잠깐은 이렇게 냉각기간을 가지는 게 좋네. 이런 식으로 거리감을 유지해 줘야 다른 귀족들도 날 의심하지 않을 거거든."
"하지만 식량 배급 확대나 도서관 신설 같은 건 마르쿠스 님이 초기 구상을 제안하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의원들이 공을 낼름 채가는 모습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더 좋은 거라네. 대중이나 귀족들은 바보가 아니야. 법의 이름이 뭐라고 붙든 진짜로 저런 사업을 주도하는 게 누구인지는 다 알고 있단 말일세."
섹스투스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르쿠스는 그런 섹스투스의 반응에 내심 한숨을 쉬었다.
폼페이우스의 부탁대로 그는 2년 동안 섹스투스의 뒤를 봐주기로 했다.
마르쿠스가 섹스투스를 폼페이우스의 후계자로 인정했다는 소문의 파급력은 굉장히 컸다.
당장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그리스와 북아프리카의 유지들이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겠다고 섹스투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섹스투스는 현실의 냉엄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이 아무리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 봐도 말을 빙빙 돌리던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마르쿠스가 자신의 편을 드는 분위기가 되자마자 태도를 확실히 밝힌 것이다.
더 이상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섹스투스는 지금은 바짝 엎드려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마르쿠스의 옆에 붙어 다니며 거의 모든 사안에 그의 조언을 구했다.
진짜로 도움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마르쿠스와 자신의 친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마르쿠스도 이 점을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성심성의껏 가르침을 주었다.
하지만 옆에 붙어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섹스투스의 그릇이 얼마나 되는지 견적이 나왔다.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는 옥타비우스와 비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당장 그렇다.
옥타비우스였다면 마르쿠스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전부 이해하고, 더 심화된 질문이나 토론거리를 던졌을 것이다.
섹스투스에게는 그 정도까지 번뜩이는 재기를 바랄 수 없었다.
물론 섹스투스가 결코 능력이 없거나 덜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능력 있는 젊은이였고, 장차 충분한 요직을 맡을만한 인물인 건 확실했다.
다만 폼페이우스의 후임을 맡을 만한 그릇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확답할 수는 없었다.
머리도 제법 잘 굴러가고, 추진력도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폼페이우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정치력을 만회하고도 남을 군사적 재능이 있었으나, 섹스투스는 그 점에서도 조금 어중간했다.
안 그래도 이미 카이사르의 게르마니아 원정도 거의 다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만약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와 섹스투스와 마주한다면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이 갔다.
'아무래도 안전장치를 몇 가지 더 마련해둬야겠는데.'
마르쿠스가 앞으로 닥쳐올 여러 문제에 골머리를 썩는 와중, 아이밀리우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 도서관에 비치될 새로운 책의 형태에 대해 원로들에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마르쿠스는 오늘 회의에서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권을 행사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즐겨 쓰던 두루마리와는 다른 형태의 책을 견본으로 보여주었다.
낱장을 한데 모아 엮어서 차례차례 넘겨 가며 볼 수 있게 만든 코덱스 형태의 책이었다.
이건 딱히 마르쿠스가 창조한 물건은 아니었다.
본래 역사적으로도 코덱스는 기원 1세기경부터 로마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손에 익숙한 두루마리를 즐겨 사용했고, 코덱스가 주류가 되기까지는 수백 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마르쿠스는 도서관 건립을 기회로 기존의 책의 표준을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로 완전히 바꿀 계획이었다.
그는 의원들을 둘러보며 어째서 이 새로운 형태의 책으로 도서관을 채워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나갔다.
"우선 많은 의원분들께서 이 코덱스 형태의 책을 이미 접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쭉 두루마리를 사용해 왔지만, 두루마리는 코덱스와 비교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건 물론 필요한 정보를 찾는 데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우리 로마의 원로들이 궁상맞게 책의 낱장을 이리저리 펄럭이는 건 너무 모양이 빠지지 않소?"
비불루스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로마의 귀족들이 두루마리를 선호하는 건 사실 실용적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두루마리를 쭉 펼치면서 읽는 것에 비해서 코덱스를 팔락이며 보는 건 너무 채신머리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우스운 이유 같아 보였으나 이런 겉보기는 위엄을 중시하는 고대 사회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이 점을 잘 아는 마르쿠스는 실용적인 면만을 강조해 다른 의원들의 의견을 찍어 누르지 않았다.
"그 의견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저도 사실 보고서라면 몰라도 일반적인 책은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번에 새롭게 지어지는 마르쿠스 대도서관은 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보다도 더 많은 수의 장서가 들어가게 될 겁니다.
제가 개발한 종이와 인쇄기 덕분에 책의 가격이 싸졌지만, 그래도 경제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코덱스는 양면에 문자를 기록할 수 있어서 두루마리보다 훨씬 단가가 싸게 들고, 다른 문서와 구분하는 것도 더 쉽습니다. 자연히 보관도 더 용이하죠.
"
"음···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군."
마르쿠스는 그 외에도 도서관 건립과 관련된 수많은 사항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전원이 로마에도 커다란 도서관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공감했다.
특히 키케로나 카토 같은 학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반대하는 자가 있을까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르쿠스는 이 도서관 건립과 연관 지어서 여러 가지 공공정책을 한꺼번에 묶어서 통과시켰다.
우선 도서관 유지의 가장 큰 적은 당연히 화재였다.
안 그래도 로마 시내는 무리하게 쌓아올린 고층 건물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인술라 주택의 특성상 화재가 굉장히 빈번하게 일어났다.
소방수들이 있긴 했으나 당시의 소방수는 공무원 같은 게 아니라 돈을 받고 불을 꺼주는 사기업에 가까웠다.
당장 크라수스 가문만 해도 사설 소방수들을 상당히 많이 거느리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많은 부를 쌓은 전력이 있었다.
마르쿠스는 시민들의 편익과 진보된 사회구조를 위해서는 치안과 화재는 공적 영역에서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이라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으나, 지금의 로마는 그걸 감당할만한 충분한 예산이 있었다.
이 외에도 법무관의 수를 늘려 더욱 신속하게 재판을 수행할 수 있게 했고, 법의 적용범위를 확실히 하여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피해 가는 행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 대부분의 사안은 마르쿠스가 앞서 말했듯, 그가 주도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원로원의 회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됐다.
마르쿠스는 반드시 필요할 때에만 직접 의제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로마의 정국은 별다른 소란 없이 평화로운 한때를 맞이했다.
시민들은 엄청난 규모로 신설되고 있는 도서관의 위용에 감탄하며 완공되는 그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당분간은 이렇게 분위기를 관망하려 했으나, 의외로 마르쿠스가 나서야 할 시기는 빠르게 찾아왔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날아든 한 장의 서신을 받고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단상 위 고관석에 앉아있는 마르쿠스를 본 의원들은 오늘 상당히 중요한 일이 논의될 거라는 예감을 받았다.
마르쿠스는 정족수 이상의 인원이 참여했음을 확인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테니 회의를 소집한 이유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마르쿠스는 회의 시작 전에 낭송하는 기도를 최대한 짧게 끝마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전에 교류를 트기로 했던 한나라에서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시리아 속주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로마를 둘러보길 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환영식의 규모와 일정, 그리고 이들의 대우를 어떻게 할지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의원들은 서로를 둘러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들 중 한나라가 정확히 어떤 나라이고, 어디에 붙어있는지 아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까닭이다.
마르쿠스가 관련된 보고서를 몇 번인가 올린 적이 있지만 당연히 진지하게 논의된 적은 없었다.
"작년에 이쪽에서 사절단을 파견하는 건으로 보고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재량으로 처리하라는 답을 받은 적이 있고요."
"아, 인도보다 더 동쪽에 있다는 대국 말인가?"
"그때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그냥 마르쿠스에게 다 맡기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던 것 같은데······."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한 의원들의 반응에 마르쿠스가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한나라는 저 먼 동방에서 현재 최강의 국력을 지닌 국가입니다. 인구와 기술, 그리고 문화도 로마와 비견되는 강대국이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양국의 거리를 고려하면 직접 충돌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키케로가 대표로 일어나 질문을 던졌다.
"최근 유행하는 그 비단이라는 옷감의 생산지도 저 한나라라는 곳 아닙니까?"
"맞습니다. 저희는 주로 한나라에서 비단을 들여오고 그쪽은 포도주와 설탕을 수입해 가지요."
"그러면 사절단이 여기까지 오려는 이유는 단순히 친교를 나누려는 목적보다는 설탕의 제조법을 캐내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마 그런 목적도 있을 겁니다. 당장 제조법을 캐내려는 속 보이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실마리라도 얻어 보자는 생각은 있겠지요."
카토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오히려 잘된 거 아닌가? 로마에 설탕의 제조법 따위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아니, 한 명밖에 없을 테니까."
의원들 사이에서 한바탕 박장대소가 터졌다.
카토의 말대로 설탕 제조는 사실상 마르쿠스가 독점하고 있었다.
한나라가 정말로 설탕 제조법을 빼내고 싶었다면 동방을 뒤지는 게 오히려 더 나았을 테지만, 그들이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건 한나라의 무지함을 비웃을 일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어떤 국가든 간에 보통은 수도에 가장 많은 정보가 집중되어 있는 법이다.
마르쿠스가 한나라에 보낸 사절단 역시 수도인 장안으로 가지 않았던가.
"그러면 걱정할 필요 따위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최고의 국빈으로 대우해주고 그들이 데려가 달라는 곳으로 데려다주죠. 우리는 그저 그들이 마음껏 로마의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키케로가 쓴웃음을 흘리더니 한쪽 눈썹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유출하고 싶어도 유출할 기밀을 알지 못하는데 무얼 염려하겠습니까. 우리가 역으로 무얼 캐낼 수 있을지, 그 점을 집중적으로 논의해 보는 게 좋겠군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피소가 키케로의 말에 흔쾌히 동의하고 나섰다.
마지막으로 카토가 머리를 긁적이며 마르쿠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한나라에 보냈다는 사절단은 누가 책임자라고 했었지요? 믿을 만한 자입니까?"
"제 동생인 푸블리우스를 보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만족해할 만한 성과를 지니고 돌아올 테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 182. 변혁의 파도 > 끝